지구촌 여행/국가별7/ 라오스 - 러시아1
■ 라오스
정식 명칭은 라오인민민주주의공화국(Lao People’s Democratic Republic)으로, 면적은 23만 6800㎢, 인구는 691만 1544명(2015년 현재), 수도는 비엔티엔(Vientiane)이다.
Laos , (프)Reublique Democratique Populaire Lao라오인민민주주의공화국, Lao People's Democratic Republic
종족구성은 라오족이 인구의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랴오퉁 22%, 랴오숭 9%, 베트남계 1%이다. 공용어는 라오어이며, 종교는 전체 인구의 약 95%가 소승불교를 믿고 있고 나머지는 토착종교를 신봉한다.
기후는 온난동기과우기후로서 국민의 90%가 농민이고, 자원은 주석·목재·커피 등을 수출하고 있다. 성급하게 시행한 농업집단화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1979년 12월에 시장유통을 자유화하고 개인경영을 인정하는 자유경제정책을 채택하였다.
2014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117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1,697달러이다.
라오스는 1당독재체제의 사회주의 공화제로서, 의회는 임기 5년의 단원제(115석)이다. 정당으로는 인민혁명당이 유일하다.

▲라오스 국기 - 다음백과
2015-04-27 “라오스에는 있고 한국에는 없는 것”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라오스 역사도시 루앙프라방에서 불교 승려들이 탁발을 하고 있다. photo 연합
경적 소리 없는 거리, 우는 사람 없는 장례식장, 화내지 않는 직장상사. 한국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라가 있다. 인도차이나반도에 위치한 라오스다. 라오스의 코라오그룹 부회장으로 있는 한명규(56)씨의 말을 빌리자면 라오스에는 아직 ‘오래된 행복’이 존재한다고 한다. 오세영 회장이 설립한 코라오그룹은 계열사 11개를 둔 라오스 최대 민간기업으로 현대기아차를 수입해 팔고 소형 트럭, 오토바이, 가구 등을 생산한다.
한 부회장은 매일경제신문에서 20년 이상 언론인으로 일한 베테랑 언론인이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매일경제신문 편집국장과 논설실장을 지냈고,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전라북도 정무부지사로 재직하다 코라오그룹 부회장직을 맡았다. 2004년 가족과 처음 라오스를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 가난하지만 행복해 하던 라오스 사람들이 한 부회장의 뇌리 속에 깊이 남았다.
그는 오세영 코라오그룹 회장과의 인연을 바탕으로 코라오그룹 부회장직을 맡으면서 라오스 최초의 민간 신문 ‘라오경제신문’도 창간했다. 현지어로 출간돼 하루 1만부가량 팔리는 ‘라오경제신문’ 대표도 3년째 맡고 있다. 한 부회장은 신문 창간을 준비하면서 줄곧 라오스에 머물렀다. 그는 지난 4월 5일 라오스에서의 6년 여정을 ‘비밀의 라오스’라는 이름의 책을 통해 한국 독자들에게 공개했다.
라오스? 처음엔 생소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의 태국과 비슷한 나라쯤으로만 알고 있던 내게 한 부회장은 라오스를 ‘가보고 싶은 나라’ 리스트의 1순위로 만들어 버렸다. 인터뷰 중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밤문화는 없지만 소소한 축제가 늘 있다는 것이었다. 한 부회장에 따르면 라오스의 기업들은 회사 자체적으로 직원들의 사기를 위해 축제를 열어줘야 한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해 주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만큼 라오스인에게는 축제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작은 축제라도 지인들에게 일일이 초대장을 보내 축제를 준비한다. 축제라고 해봐야 모여서 먹고 마시고 서로에게 물을 뿌리는 게 대부분이지만 낙천적인 라오스인들은 축제 때마다 들뜬 마음으로 참여한다고 한다.
한 부회장은 4월 8일 국제 전화를 통해 “무엇인가 없기 때문에 좋은 나라가 바로 라오스”라고 말했다. 그는 저서 ‘비밀의 라오스’에서 라오스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라오스는 겉모습만 보고 지나가서는 참맛을 모른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같은 거대 유적도 없다. 바다가 없기 때문에 태국처럼 그럴싸한 휴양지도 찾기 어렵다. 하지만 라오스에는 없기 때문에 더 좋은 것들이 있다. 산속에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사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도시와 그 주변에서는 40년 전 한국인의 생활과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집안에서는 숯불을 피워 밥을 지으면서도 손에서는 스마트폰을 놓지 않는 광경을 본다. 한 세기의 문명이 공존한다.”
한 부회장은 내게 단 한 번도 라오스가 한국인이 여행하기 좋은 곳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과 잘 맞는 여행지를 찾으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는 “저술을 통한 라오스 소개도 라오스를 띄우기보다는 제대로 알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한 부회장은 ‘라오스에는 없어서 더 좋은 것들’에 대해 설명을 이어나갔다. 한 부회장은 “한국처럼 1차, 2차, 3차까지 이어지는 밤문화는 없다. 하지만 작은 기쁨도 축제를 통해 나누는 게 라오스 사람들”이라며 “낮부터 시작해서 자정까지 마시고 노는 ‘행복’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사회적 계급에 따라 격식을 따지고 갑질하는 문화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웃어른을 공경하는 미덕은 존재하는 곳이 또 라오스”라고 했다. 아직 라오스가 개발도상국이라 거지가 많을 것 같지만 실제론 거의 없다는 것도 특이하다. 그 이유는 사람이 있는 곳 5㎞ 이내에는 언제나 자연으로부터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들의 낙천성과 여유는 이런 환경으로부터 나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 부회장이 책에서 소개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라오스인의 민족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라오스인은 신발을 신고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재밌다. 돈이 없거나 날씨가 더워서가 아니다. 땅 위의 미물이라도 발에 밟혀 죽지 않도록 하는 라오스 승려의 ‘탁발’ 풍습의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바시(baci)라는 풍습도 있다. 하얀 실을 손목에 감아 주며 정감 어린 목소리로 건강과 행운을 빌어주는데 결혼을 하거나, 아이가 태어나거나, 병이 들었거나, 새로 집을 지었거나, 멀리 떠나는 이를 전송하는 등 뭔가를 기원할 때 바시를 행한다고 한다. 한 부회장의 말에 따르면 바시는 라오스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던 풍습이라고 한다.
바시에 대해 한 부회장은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라오스인은 사람의 몸에는 32가지의 기관이 있고 이 기관들은 콴(Khwan)이라고 불리는 영혼으로 이뤄져 있다고 믿는다. 바시는 이 콴을 불러들인다는 뜻에서 ‘수콴(Su Khwan)’이라고도 불린다. 자신의 나약한 영혼을 가족과 이웃, 사회와의 연대를 통해 균형을 찾고 조화롭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주변과의 유대관계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라오스에서는 소리를 내 싸우는 사람도 없다는 설명이다. 라오스에서는 화를 내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그만큼 ‘인격수양이 덜 된 사람’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한국과 정반대의 문화를 가졌지만 한국인과 궁합이 잘 맞는 매력적인 요소도 상당하다. 우선 음식이 채소와 생선 같은 웰빙식에다 매콤해 한국인의 입맛에 맞다. 발효된 소스의 종류도 많다. 게다가 가격까지 저렴하다. ‘만원의 행복’이 아닌 ‘천원의 행복’이 가능한 곳이 라오스다. 한 부회장 말에 따르면 한끼 식대가 한국 돈으로 1000~2000원에 불과하다. 한 부회장은 “고급 요리를 즐기고 싶다면 3000원을 내도 된다”며 웃었다.
한국인에게는 라오스 입국 절차도 간소하다. 라오스는 한국인이 비자를 발급받지 않고도 갈 수 있는 국가다.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나라가 많은 미국인도 라오스에 들어갈 때는 비자를 받아야 하는 점을 감안하면 라오스는 한국에 꽤 우호적인 편이다. 최근 라오스에도 K팝 등 한류바람이 불어 한국 방송이 라오스 TV에 그대로 방영된다고 한다. 대부분 한국에 대한 동경이 있어 경제적 여유가 뒷받침된다면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젊은 라오스인이 늘고 있다고 한다.
한 부회장과의 전화 인터뷰가 끝날 무렵 라오스라는 나라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라오스라는 나라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맨발의 순수함이 존재하는 곳, 싸우는 모습 없이 축제가 가득한 곳, 한국의 ‘정(情)’이 존재하는 나라, 하지만 현대화된 ‘정’이 아닌 오래전 한국이 잃어버린 ‘진짜 정’을 간직하고 있는 곳. 한 부회장이 전해준 라오스의 정취는 이야기로 전해들었을 뿐인데도 힐링 효과가 있었다. 한국이 잃어버린 정을 확인해 보기 위해 지금이라도 비행기 표를 알아봐야겠다.
김정현 주간조선 기자
■볼거리
□ 라오스 루앙프라방의 3대 절경...세폭포, 쾅시폭포, 팍우동굴
Waterfalls of Luang Prabang, Hidden Natural Beauty in Laos
수천 갈래 물줄기 세폭포, 몽환적 자태의 쾅시폭포…
▲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루앙프라방의 대표적인 불교사원.
라오스의 루앙프라방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불교사원이 자리한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예기치 못한 비밀스러운 자연 절경이 숨어 있다. 수천 갈래로 나뉘어 흐르는 세폭포(Tat Se)와 몽환적 자태를 지닌 쾅시폭포(Tat Kuang Si)는 보는 이들의 눈을 압도한다. 팍우동굴(Pak Ou Caves)은 잔잔한 산수 절경을 보여 주는 메콩강 위에 숨어 있는 오래된 동굴사원이다.
인도차이나반도에 위치한 라오스는 23만7,000평방킬로미터의 면적에 인구 680만 명이 사는 나라다. 우리나라 두 배가 넘는 땅에 서울보다 적은 인구가 살고 있어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드물게 인구밀도가 낮은 나라이다.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은둔의 나라로 소개되어 이 나라에 대한 것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근래 외국여행자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여 신비 속에 감추어진 이 나라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 콜로니얼 스타일의 건축물이 가득한 루앙프라방 시가지.
▲ 팍우동굴을 찾아가는 길에 방문한 한 마을에서 서양여행자가 전갈이 든 술병을 들고 있다
▲ 세폭포로 찾아가기 위한 교통수단인 남칸 강가의 나룻배.
메콩강이 어우러진 불교사원의 보고
루앙프라방은 라오스의 대표적인 여행지이다. 이곳의 몇몇 불교사원들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라오스는 국민의 70%가량이 불교신자이기에 각 도시나 마을마다 사찰이 한두 군데씩 꼭 있다. 루앙프라방만 해도 사찰이 여러 곳 있다. 이곳 불교신자들이 어렵게 정성껏 모아 바친 돈과 재물을 사원 내부와 외관을 화려하게 만드는 데 사용하고 있다. 눈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금색 불상과 금띠를 두른 사원의 지붕이 태양보다 밝게 빛나고 있기도 하다.
루앙프라방에는 메콩강의 지류인 남우강이 흐른다. 이 강은 루앙프라방 인근에서 메콩강과 합류한다. 메콩강은 인도차이나반도의 젖줄로 불리고 있다. 인도차이나반도의 다른 두 나라인 베트남, 캄보디아와는 다르게 라오스는 바다에 접해 있지 않다. 어느 나라든지 바다에 접해 있지 않으면 외국으로부터 물건을 수출하거나 수입할 때 선박을 이용할 수 없어 불편을 겪는다. 기차나 비행기를 이용하게 되면 운송비용이 더 많이 들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메콩강은 라오스 사람들에게 이웃나라로부터 물건들을 들여오고 내보내는 운반로로 사용되어 왔다. 또한 메콩강을 비롯해 크고 작은 강들은 예전부터 이곳 사람들에게 주요 교통로로 사용되고 있다. 아직도 라오스에는 잘 닦인 아스팔트도로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강물을 달리는 배가 도로를 달리는 차보다 빠를 때가 많다. 강에서 잡힌 물고기는 사람들의 주된 음식이 된다. 이 때문에 먹을 것을 제공하고 교통로로 사용되는 메콩강은 이곳 사람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 쾅시폭포가 형성되는 고산 지점으로부터 물이 흘러내리는 몽환적인 풍경
▲ 숨은 절경의 미학을 보여 주는 쾅시폭포
▲ 강줄기같이 흐르는 세폭포의 물줄기.
루앙프라방 여행에서 식도락의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라오스에 오기 전까지 쌀국수는 베트남 음식인줄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곳 라오스 사람들도 쌀국수를 거의 주식처럼 먹고 있었다. 라오스에서 쌀국수는 저렴한 음식이다. 루앙프라방 중심가에 자리한 재래시장을 들락거리며 쌀국수로 허기진 배를 달래곤 했다. 시장의 간이식당에서 먹으면 한 그릇에 500원 정도니. 이거야말로 초등학교시절 동네 자장면 값과 거의 비슷한 가격이다. 값싼 쌀국수를 매일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좋았고, 국수가게 아주머니가 야채를 듬뿍 얹어 주니 이곳 시장사람들의 순박한 정도 함께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밧줄에 매달려 폭포수 아래로 뛰어들다
언제부턴가 나는 폭포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폭포의 매력에 빠지게 된 이유는 단순히 폭포를 감상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바로 폭포수가 만들어 놓은 폭포 아래의 천연 풀장에 들어가 대자연이 주는 청량감을 마음껏 맛보는 것이다. 루앙프라방 인근에 위치한 세폭포와 쾅시폭포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한국에서 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수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형태의 폭포가 신비로운 자태로 펼쳐 있었는데, 마치 동양 산수화에서나 볼 법한 신선놀음의 장소를 연상케 했다.
▲ 남칸강 위의 나룻배에 탄 현지 소녀들의 해맑은 웃음이 인상적이다.
▲ 1 절벽 아래의 암석동굴 안에 위치한 팍우동굴 사원. 2 팍우동굴 사원에서 내려다본 선착장과 메콩강 주변 풍광.
세폭포를 가기 위해서는 남칸강(Nam Khan River)을 따라 보트로 10분 정도 올라가야 했다. 강물은 누렇지만 주변 산세는 마치 정글로 둘러싸인 듯 온통 푸르렀다. 세폭포의 경관이 인상적인 이유는 바로 무성한 나무로 이루어진 숲의 경사면을 따라 거센 물줄기가 석회암 바위 위로 수천 갈래로 흘러내리는 장관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나무를 휘감아 도는 물줄기의 모습이 마치 먼지를 일으키며 빙빙 도는 사막의 소용돌이 바람과 같았다. 시리고 매서운 물살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고 서 있는 키 큰 나무들의 모습 또한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세폭포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의 폭포 모습과 다른 형상을 띤다. 세폭포는 층층이 이어진 경사면을 힘차게 흐르는 강줄기처럼 보이는데, 그 모습이 하나의 줄기가 아니라 수천 갈래로 나뉘어 흐르기 때문에 기상천외한 계단식 폭포의 파노라마를 보여 주었다.
세폭포는 보는 즐거움뿐 아니라 천연 풀장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한다. 내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현지 젊은이들이 폭포 아래에서 수영을 하거나 나무 위에 매단 밧줄을 이용해 타잔처럼 다이빙을 즐기고 있었다. 나 역시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터키옥처럼 청록빛을 발하는 물속에 몸을 담갔다. 루소의 말처럼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거부할 수 없는 욕구에 이끌린 것이다.
▲ 쾅시폭포를 방문한 뒤 루앙프라방으로 돌아오기 전에 잠시 들른 몽족 마을에서 만난 어린이들. 방문객들에게 수공예품을 팔고 있다.
▲ 루앙프라방의 새벽시장. 길가에 야채 따위를 파는 상인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처음에는 차갑지만 이내 폭포수의 따스함이 전율이 그러하듯 온 몸에 퍼져 나갔다. 현지 젊은이들이 신나게 다이빙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나 역시 용기를 내어 높은 곳에서 밧줄을 잡은 채 허공을 날다가 3~4m 아래의 물속으로 다이빙을 해보았다. 첨벙거리는 거대한 물소리와 함께 벌거벗은 내 몸이 차디찬 물속에 잠기면서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을 느꼈다. 그 청량감과 개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 이것이 바로 루앙프라방 여행의 묘미구나’ 하는 탄식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다음날 또 다른 숨은 비경을 지닌 쾅시폭포를 찾아갔다. 쾅시 폭포는 루앙프라방에서 남쪽으로 32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투어 차량을 통해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방문했다(별도의 가이드는 없었다). 비록 세폭포처럼 물속에 들어가거나 다이빙을 할 수 있는 공간은 없었지만 규모만큼은 세폭포를 압도했다. 또한 짧은 트레킹 코스가 있어 폭포수가 떨어지는 언덕 위까지 오를 수 있었다.
오르는 길은 다소 험난했다. 지면이 젖어 있어 하이킹 슈즈를 신고도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가지런한 나무판자로 계단을 만들어 놓은 곳도 있었는데, 계단 양 옆으로 거대한 물줄기가 흘러내려가는 모습이 실로 장대한 광경이었다. 오르는 동안 폭포의 옆모습은 철저히 감춰져 있었다. 낙하하는 폭포수의 우렁찬 함성만 들릴 뿐이었다. 무엇보다 곳곳마다 크고 작은 물줄기들이 계단식 형태의 석회암 지대와 그 주변을 덮고 있는 나무숲 사이로 흘러내려 멋진 경관을 이루었다. 유리구슬처럼 투명하게 흘러내리는 그 모습 한가운데에 나 홀로 서 있자니 마치 꿈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신비의 물줄기를 만나 길을 안내 받고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 팍우동굴 안에 놓인 수많은 불상들.
라오스적 산수절경, 팍우동굴
루앙프라방에 머무는 동안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팍우라고 불리는 동굴이었다. 이곳은 동굴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잔잔히 흐르는 메콩강을 따라 찾아가는 길이 더 매력적인 곳이다. 마음속에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을 만한 여정을 선사하기에 그렇다. 강을 따라 가다 보면 산수절경을 보여 주는 준봉의 낮은 산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기도 하다.
팍우동굴은 루앙프라방에서 북쪽으로 메콩강을 따라 4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팍우동굴은 메콩강과 남우(Nam Ou)강의 합류 지점에 위치해 있다. 동굴 자체는 기대했던 것보다 매우 작았다. 동굴 안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크고 작은 불상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사람 많이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적한 이곳에 동굴 사원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오가는 데 두 시간가량 걸린 메콩강 위에서의 보트 트립은 강가에 사는 이곳 주민들의 생활상을 잠시나마 엿보게 해주었다. 함께 배에 오른 일행들과 강가의 한 작은 마을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전통 베틀로 짠 다양한 직물류를 방문객들에게 선보이고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코브라, 전갈 따위를 술병에 넣은 전통주였다. 어릴 적 시골에서 보았던 뱀을 넣은 술병이 기억 났다. 몸보신으로 뱀술을 마시는 풍습은 한국이나 라오스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 한 여행자가 팍우동굴로 찾아가는 길에 사진을 찍고 있다.
출처 | 월간 산 - 글·사진 | 김후영 사진여행가
▲꽝시폭포
은둔의 나라
▲골프장
▲루앙프라방
■ 라이베리아 Liberia
서아프리카의 공화국. 북서쪽은 시에라리온, 북쪽은 기니, 동쪽은 코트디부아르, 남서 해안은 대서양과 접해 있다. 건국과 가장 관계가 깊은 사람들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온 흑인 자유민들로, 19세기에 이주해왔다. 라이베리아 경제는 개발도상의 시장경제로 농업 및 철광석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한편 1980년대초의 연료비 상승과 내전 및 기타 문제들로 인해 특히 철광산업 부분의 경제성장이 꾸준히 감소추세에 있다. 보건 및 주택환경은 보다 나은 보건시설 마련에 힘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비한 상태이며, 생활수준 역시 낮아 임금이 서구에 비해 크게 낮은 실정이다.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으로 원래 미국식민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1816 설립)의 도움을 받아 미국의 해방노예들을 위한 근거지로 세워진 곳이다. 이 단체는 1821~22년 메수라도 곶에 작은 식민지를 세웠으며, 1822년말 감리교 목사 제후디 아시문이 이 식민지의 지도자이자 실질적인 라이베리아의 창설자가 되었다.
1824년 이 식민지를 라이베리아라고 이름지었으며 중심 거주지를 몬로비아라 불렀다. 라이베리아 최초의 흑인 총독 조지프 젱킨스 로버츠는 1847년 라이베리아의 독립을 선포하고 국경을 확장했으며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불법 노예거래를 근절시키기 위해 힘썼다(→ 노예제). 프랑스, 영국과의 국경분쟁은 1892년 라이베리아 국경을 명시한 마지막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프랑스는 계속 국경을 넘어 침입해 들어왔으며, 1919년 라이베리아가 통치할 수 없는 오지 5,180㎢를 프랑스에 넘겨주는 조약을 맺었다.
라이베리아의 경제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계속 악화상태에 놓여 있다. 차관을 상환할 능력이 없는 라이베리아는 1926년 파이어스톤타이어고무회사(Firestone Tire and Rubber Company)에 40만㏊를 양도하고 외채를 갚기 위해 500만 달러를 빌렸다. 이 차관으로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으며, 라이베리아는 강제노동 및 노예매매에 관계했다는 혐의를 받아 국제연맹의 조사(1931)를 받기도 했다. 경제는 집권정부가 물러나고 파이어스톤사(社)와 새로운 협정안이 체결되면서 회복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 라이베리아 고무가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미국은 이 나라와 방위조약을 맺어 몬로비아에 도로, 국제공항, 심해항구를 건설해주었다.
1944∼71년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은 윌리엄 V.S. 터브먼이었는데 1980년 쿠데타로 그 후계자가 축출되면서 1세기 이상 계속되었던 트루휘그당(黨) 통치가 막을 내렸고, 동시에 내륙에 사는 토착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의 오랜 정치적 지배도 끝났다. 경제악화가 쿠데타를 일으킨 한 원인이었으나 이 쿠데타를 승리로 이끈 인민구제평의회(People's Redemption Council)도 그에 대한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1985년에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 선거에서 1980년 쿠데타를 이끌었던 라이베리아 전군 사령관 새뮤얼 K. 도우 장군(쿠데타 전에는 특무상사)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1986년 취임했다. 1989년 도우 대통령의 이전 동지들이 일으킨 반란이 1990년 내란으로 발전해 라이베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그 와중에서 도우가 암살되었으며, 첨예한 민족적·정치적 대결이 벌어졌다. 서아프리카의 다국적 군대인,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ECOWAS) 소속의 감시단이 파견되어 치안유지에 나섰으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집단간의 대립으로 혼란은 계속되었다.
1990년대 중반을 거치는 동안 여러 과도정부가 세워졌다. 내전은 1996년 8월의 휴전협정을 거쳐 1997년 대통령선거와 총선에서 찰스 테일러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마침내 종식되었다.
출처 다음백과
2017.12.30 빈민촌 출신 축구 영웅, 2顚3起 끝에 대통령 당선
1990년대 활약한 스타 조지 웨아, 아프리카 라이베리아 대선 승리
젊은이와 서민 희망으로 떠올라… 73년 만에 민주적 정권교체 성공
'흑표범'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아프리카의 축구 영웅 조지 웨아(51)가 대선 결선투표에서 젊은 층과 서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승리해 라이베리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아프리카 대륙 중서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해 있는 라이베리아는 면적은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인구는 468만명 남짓하다.
라이베리아 선거관리위원회는 최근 실시된 결선투표의 개표를 98.1% 마무리한 결과, 웨아가 61.5%의 득표율을 기록해 조셉 보아카이(73) 현 부통령(38.5%)을 큰 표차로 이긴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지난 28일(현지시각) 발표했다.
조지 웨아는 다음 달 정권을 넘겨받아 73년 만에 민주적 정권 교체를 이루게 된다.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 가운데 하나지만, 1989년부터 14년에 걸친 내전(內戰)으로 수십만 명이 사망하는 등 정치적 불안정을 겪어왔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결선투표 다음 날 공식성명을 내고 라이베리아 정부와 정당, 국민들을 격려했다.
▲왼쪽은 1996년 이탈리아 AC밀란 소속으로 발롱도르를 받은 조지 웨아. 오른쪽은 지난해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에서 지지자들을 바라보는 모습. /AFP 연합뉴스
웨아는 아프리카에서 전형적인 '흙수저 신화'의 주인공으로 통한다. 1966년 라이베리아의 수도인 몬로비아의 극빈촌에서 태어난 그는 뛰어난 재능으로 10대부터 클럽 팀에서 축구를 했다. 이어 라이베리아 국가대표 공격수로 뛰던 중, 22세 때인 1988년 프랑스 리그 AS모나코의 아르센 벵거 감독(현 아스널 감독) 눈에 띄어 유럽 리그에 진출했다.
AC밀란, 첼시, 맨체스터시티 등 유럽 최고 프로팀에서 활약한 웨아는 강한 킥과 빠른 스피드로 '흑표범'이란 애칭을 얻었다. 1994~1995시즌 유럽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1995년에는 국제축구연맹(FIFA) '올해의 선수상'과 세계 최고 선수에게 주는'발롱도르'를 모두 받았다. 아프리카 출신 선수로는 지금까지 유일한 기록이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그를 가리켜 "아프리카의 자존심"이라고 말했다.
2003년 은퇴한 웨아는 축구 스타로서의 고공(高空) 인기를 발판으로 2005년 대선에 출마해 엘런 존슨설리프(79)와 맞붙었다. 1차 투표에선 승리했으나 결선투표에서 패했다. 웨아는 2011년 부통령 선거에서도 고배를 마셨지만 2014년 상원의원이 됐다.
'2전(顚) 3기(起)' 끝에 대통령 당선이 사실상 확정된 웨아는 자신이 이끄는 정당 '민주적 변화를 위한 의회' 중앙당 건물 발코니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지지자들에게 인사했다. 거리에선 수백 명의 젊은이가 나와 춤추고 노래하며 그의 승리를 축하했다. 웨아는 트위터에 "책임감과 엄중함을 느낀다. 변화는 시작됐다"고 밝혔다.
영국의 정치분석가 이브라힘 알바크리네이는 "라이베리아 서민들은 웨아를 그들의 일상과 가까운 존재라고 느끼고 동일시한다"고 했다. 이번 대선에서 교육, 일자리 창출, 기반 시설 확충을 핵심 국정 과제로 내건 웨아는 빈곤 퇴치와 교육에 적극 나설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 김승현 기자
■ 러시아 1 Russia , (러)Rossiya
▲국기
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의 하나로 현재 독립국가연합(CIS)을 주도하는 연방공화국. 다당제로 최고 권력자는 대통령이다. 수도는 모스크바로 국민의 80%는 러시아인이다. 화폐는 러시아 루블을 사용하며 주요 경제산업은 기계제조업, 화학산업, 경공업이다. 전문 의료의 부족으로 의료의 질은 떨어지고 있다. 약 8년간의 무상의무교육을 실시한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국가가 되었다. 소련의 체제하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Russian Soviet Federated Socialist Republic)으로 불렸던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로 면적이 미국이나 중국의 2배이다.
인구는 중국·인도·미국·브라질·인도네시아의 뒤를 이어 세계 6위이며, 국민의 대부분이 러시아인이지만 소수민족 집단도 약 70개에 달한다. 인구의 대부분이 러시아의 서부인 유럽의 거대한 삼각지대에 집중되어 있지만 지난 3세기에 걸쳐서, 특히 20세기 동안 인구가 동쪽의 아시아권(시베리아)으로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다.
북쪽은 북극해, 동쪽은 태평양에 접해 있으며, 서쪽은 노르웨이·핀란드·폴란드(한때는 동프로이센의 일부였다가 1945년 러시아에 합병된 후 현재는 다시 분리된 주로, 예전에는 쾨니히스베르크라 불렸던 칼리닌그라드 주와 접해 있음)를 비롯해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칼리닌그라드와도 접해 있음)·벨라루스 등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은 중국·몽골·북한을 비롯해 우크라이나·조지아·아제르바이잔·카자흐스탄 등과 경계를 이룬다. 아시아 북부 전체와 동부 유럽, 북동부 유럽의 많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는 북극권을 따라 동서길이가 최고 7,700km에 이르며 너비는 남북으로 2,000~2,880km에 달한다.
수도는 모스크바이며, 이전에는 소련의 수도였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신력은 11월)이 발발하자마자 러시아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1922년 12월 17일(신력은 12월 30일) 소련에 속한 연방공화국이 되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소련을 구성했던 다른 공화국들과 연합하여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CIS)을 수립했다.
역사적으로 유럽권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의 중심이 되었으며 13세기 몽골족 침입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의 침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외세의 공격을 받아왔다. 이같은 역사적인 특성과 함께 대규모의 산업경제의 발전을 가능하게 해준 광활한 영토와 풍부한 천연자원으로 러시아는 소련의 여러 공화국 가운데서도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사색하기에 적합한 자연환경과 혁명전 사회가 안고 있던 복합성이 정신적 자극제가 되어 문학과 음악에 있어 안톤 체호프, 알렉산드르 푸슈킨, 레프 톨스토이,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세계적인 거장이 탄생했다.
1917년의 10월혁명과 혁명이 몰고온 광범위한 사회변혁은 소설가 막심 고리키, 미하일 숄로호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비롯해,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 유명한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민족구성
러시아는 약 185개의 다양한 민족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민족은 대부분 극소수로서 어떤 민족은 수천명에 불과하다. 러시아인을 포함해 100만 명이 넘는 민족은 타타르족·우크라이나인·추바슈족·바슈키르인·벨라루스인·모르도바인 등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중 러시아인은 전체인구의 4/5를 차지한다.

▲타타르족(Tatar)말을 타고 있는 타타르족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
러시아는 85개의 연방주체로 구성된다. 이는 다시 22개의 공화국, 46개의 주, 9개의 지방, 1개 자치주, 4개 자치구, 3개 연방시로 구분된다. 이들 행정구역에서는 시조의 이름을 자기민족의 명칭으로 하는 민족집단보다 러시아인이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1990년대 초부터 민족 내부와 민족 사이에 갈등이 나타났는데 많은 민족들이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했으며, 그중 몇몇은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다. 자치령을 이루고 있지 못한 소수민족공화국들이 6개 지구와 49개 주를 이루고 있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러시아에서는 인도유럽어족(동슬라브어·이란어 포함)·알타이어족(터키어·몽골어·만주퉁구스어)·우랄어족(핀우고르어·사모예드어)·카프카스어족(아브하즈아디기아어·나호다게스탄어)에 속하는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① 슬라브어족 : 러시아인이 대부분이지만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도 일부 포함하고 있는 동슬라브족은 러시아 전체인구의 85%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 국토에 걸쳐 넓게 분산되어 거주하고 있다.
슬라브족은 3~8세기에 유럽의 동부 지역에서 타민족과 구별되는 민족으로 부상했고 9세기에는 최초의 슬라브족 국가인 키예프루시를 건국했다. 몽골의 침입 이후에 권력의 중심은 모스크바로 이전되었고, 러시아 제국은 발트 해, 븍극해, 태평양까지 확장되어 많은 소수민족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러시아어는 광활한 지역에 걸쳐 사용되고 있지만 상당한 정도로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인도이란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으로는 카프카스 지방의 오세트족이 있다.

▲슬라브족(Slav) 6세기 슬라브족의 영토
② 알타이어족 : 튀르크 제어는 알타이어족 가운데 가장 넓게 쓰이는 언어로 주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지배적이며, 알타이족·하카스족·쇼르족·투비니아족·토팔라르족 등 시베리아 남부에 거주하는 민족들도 쓰고 있다.
볼가 강 중류와 우랄 산맥 남부도 중요한 튀르크어 사용지역으로 바슈키르인·추바슈인·타타르인이 거주하고 있다. 또한 타타르인은 서시베리아 평원의 수목이 무성한 스텝지대에도 거주하며, 야쿠트족은 주로 레나 강 중류유역에, 돌간족은 북극해에 거주하고 있다.
북부 카프카스 지방에 거주하는 튀르크어 사용 종족은 쿠미크족·노가이족·카라차이족·발카르족 등이며 시베리아의 대부분 지역과 동부 해안에 거주하는 에벤크인과 에벤인은 만주퉁구스어를 사용한다. 한편 바이칼 호 동쪽 연안의 부랴트족과 카스피 해 북서부 연안의 칼미크족은 몽골어를 사용한다.
③ 우랄어족 : 유라시아의 삼림지대와 툰드라에 넓게 흩어져 있는 우랄어족은 매우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핀어군(語群)은 유럽지역에 거주하는 몰도바족·마리족·우드무르트족·코미족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볼가 강 상류유역 주변과 우랄 산맥에 거주하는 코미페르먀크족도 이 언어를 사용한다. 한편 카렐리야족과 핀란드인, 베프족은 북서부에 거주하고 있다. 만시인과 한티족은 오브 강 하류에 드문드문 분포되어 있다.
④ 카프카스어족 : 카프카스어족을 구성하는 주요민족들은 카프카스 산맥의 남쪽에 거주하고 있지만, 러시아 내의 북카프카스 지방에도 소규모의 민족들이 많이 퍼져 있다.
아바자족·아디게족·카바르디니아족들도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은 나흐어군(체첸인·잉구슈인)이나 다게스탄어군(아르바인·레즈긴인·다르긴인·라크인·타바사란인과 그밖의 10여 민족)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⑤ 기타 어족 : 시베리아의 동쪽 끝 지역에는 생활양식은 같지만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몇 개의 구 아시아 제어가 있다.
추크치족·코랴크족·캄차달족 등은 루오라웨틀란어족이라 불리는 어족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것은 에스키모알류트어족과는 별개의 어족이다. 아무르 강 하류와 사할린에 거주하고 니프크족과 콜리마 강 유역의 유카기르인, 그리고 예니세이 강 중류에 거주하는 케트인들은 완전히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출처 다음백과
□러시아 황제 이야기
무능한 남편 죽이고 왕위 오른 예카테리나 2세… 이미지 정치에도 능해
초상화로 '유능한 리더상' 구축… 흑해 점령해 강한 러시아 만들어
▲드미트리 레비츠키의 1783년 작 ‘정의의 여신 사원의 입법자, 예카테리나 2세의 초상화’. / 이진숙 제공
역대 러시아의 왕 중 '대제' 칭호를 받은 사람은 딱 두 명이다. 러시아 근대화와 서구화를 추진했던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2세(1729~1796·재위 1762~1796)이다. 두 대제는 경제 문화의 발전에 큰 힘을 쏟았다.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대제의 외손주 며느리였다. 여제(女帝)의 집권기는 러시아 귀족들의 황금시대였다. 네바 강가에는 화려한 바로크풍의 겨울 궁전(지금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들어섰다. 프랑스의 베르사유를 능가하고 싶은 욕망의 발로였다.
예카테리나 2세는 남편의 죽음에 깊이 관여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녀는 남편인 표트르 3세가 왕위에 오른 지 180일 만에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무능력하고 소심한 표트르 3세는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살려만 달라고 애걸했으나 쿠데타가 일어난 지 8일 만에 결국 시체로 발견되었다.
프로이센의 몰락한 귀족 집안 출신인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사람도 아닌 데다가, '남편을 죽인 음탕한 여자'라는 소문으로 집권 초기 뒷말이 많았다. 러시아의 어떤 왕보다 문화예술의 효용성에 대한 이해가 뛰어났던 그녀는 후의 나폴레옹만큼이나 '이미지 정치'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많은 초상화와 초상 조각을 남겨서 유능한 통치자로서의 정치적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축해 나갔다.
1783년 집권 20년차에 접어든 여왕은 자신의 업적과 정치철학을 하나의 초상화로 요약했다. 여제의 왼편에 보이는 거대한 선박은 그녀의 군사적 야망을 보여준다. 여제는 서구로 진출할 부동항 확보라는 표트르 대제의 뜻을 이어 흑해를 장악하기 위해 크림전쟁을 일으켰다.
여제는 확실히 대외적인 부분에서는 '강한 러시아'를 만들었고, 차르의 절대적인 권위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 반면 그만큼 큰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했다.
그림 속 그녀의 옆에 계몽주의 철학 서적이 쌓여 있다. 스스로 계몽군주임을 자처하던 여제는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디드로를 러시아로 초청해 토론회를 갖기도 하였다. 그러나 만인의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계몽주의 철학서는 여제의 지적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1767년 황제칙령을 통해 여제는 귀족 특권은 더욱 옹호하고 농노제를 강화했다. 결국 1773년 푸가초프의 난이 일어나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었다.
그림에서 여제는 정의의 여신에게 장미향을 피워 경배를 바치는 여성 입법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그림이 완성되고 나서 2년 뒤인 1785년, 그녀가 발표한 것은 정의와 거리가 먼 '러시아 귀족의 권리와 자유, 특권에 관한 조서'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계몽주의 서적은 금지되었고, 자유와 평등은 책 속에서 현실로 나오지 못했다. 귀족 권한의 편파적인 강화는 결국 사회를 극단적 불평등 상태로 몰고 갔으며, 결국 러시아는 19세기 중반까지 완고한 농노제가 존재하는 후진국이 되고 말았다.
이진숙 '러시아 미술사' 저자
□ 2017.09.09 '스탈린 공포통치' 진실 폭로 - 지도자의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2017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 … 흐루쇼프의 1956년 비밀연설
▲미국 대통령 케네디(왼쪽)·재클린(오른쪽) 부부와 소련 공산당 제1서기 흐루쇼프(오른쪽 둘째)· 니나(왼쪽 둘째) 부부(1961년 6월 오스트리아 빈).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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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은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다. 1917년 레닌의 혁명은 세상을 뒤집었다.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등장했다. 1991년 12월 소련은 붕괴됐다. 1917~91년까지 그 역사는 격동과 격랑이다. 소용돌이의 비극적 절정은 스탈린의 공포 독재다. 그 속은 고문과 숙청, 음모와 학살, 증오와 유혈로 차 있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숨졌다. 권력 계승의 승자는 니키타 흐루쇼프(옛 표기는 흐루시초프)였다. 그는 스탈린 시대를 응징했다. 그 무대가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 전당대회 연설이다. 스탈린의 잔혹한 폭정이 폭로됐다. 연설 장면은 러시아 혁명 이후 가장 비장하고 긴박한 순간이었다. 흐루쇼프는 진실의 힘을 알았다. 진실은 역사를 바꾼다. 진실은 리더십의 용기로 드러난다.
올해 5월 나는 러시아(옛소련) 수도 모스크바에 갔다. 흐루쇼프(1894~1971)는 잊혀진 인물이다. 러시아 지방언론 보도에 단서가 있었다. “2015년 6월 흐루쇼프 기념판 제막식이 있었다. 그가 권력 하야부터 죽을 때까지(1965~71년) 살던 모스크바의 스타로코니우쉐니 19번지 아파트 벽에 붙여졌다.” 아파트는 8층 석조의 고급이다. 나는 그곳에서 주민 빅토르 살렌코를 소개받았다. 그는 은퇴한 미술가다. 빅토르는 내게 관련 기사를 보여줬다.
▲1990년 11월 모스크바 붉은 광장.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오른쪽 둘째)가 옐친(오른쪽)등 당 간부와 레닌 묘소로 걸어가고 있다. 굼 백화점에 레닌의 초상화가 걸렸다. [중앙포토]
“기념판 제막식은 차분했고 150여 명이 참석했다.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1991년 미국 귀화)도 있었다. 모스크바시의 부(副)시장(페차트니코프)은 축사에서 ‘이 기념물은 역사적 정의의 부활’이라고 했다.” 그 기사엔 다른 참석자의 발언도 게재되었다. “흐루쇼프의 삶은 모순투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그의 집권 때 강제수용소(굴락)가 열리고 억압이 풀리면서 수만 명이 목숨을 구했다.”
▲흐루쇼프 동판이 걸린 아파트와 박보균 대기자.
나는 아파트 벽에 붙은 기념판을 살펴보았다. 정장 차림의 흐루쇼프 표정은 단호하면서 여유 있다. 그 옆은 그의 시대 상징물로 장식했다. 그것은 우주와 해빙(解氷·оттепель·오테펠)이다.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 크렘린과 그 앞 모스크바 강의 갈라진 얼음, 새싹이 돋는 나뭇가지를 새겼다. 흐루쇼프는 아파트 은둔 생활을 했다. 그는 회고록을 썼다. 구술 녹음을 서방에 밀반출했다. 빅토르는 이렇게 추억했다. “노년기의 우리 아버지는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흐루쇼프를 기억하곤 하셨다. 해빙 덕분에 젊은 시절 아버지는 시낭송회에 다니셨고 그때 들었던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시를 외우셨다.” 흐루쇼프가 다짐한 ‘역사적 정의’는 무엇인가. 그는 왜 ‘모순적’인가. 나는 소련 역사가 깃든 붉은 광장에 갔다. 그곳에서 비밀연설문을 다시 읽었다. 연설 제목은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О культе личности и его последствиях).
▲흐루쇼프의 기념 동판. 권력 퇴장 뒤 그가 살았던 모스크바의 아파트 돌벽에 2015년 붙여졌다. 동판에 ‘저명한 국가적·정치적 인물’이라고 써 있다.
1956년 2월 14일 모스크바 크렘린궁 대회의장. 공산당 제20차 대회가 개막됐다. 회의장에는 레닌 조각상만 보였다. 스탈린 상징물은 없었다. 마지막 날인 2월 25일, 외국 초청인사는 출입 금지됐다. ‘비밀연설’이 됐다.
자정 무렵 당 제1서기 흐루쇼프가 연단에 섰다. 그는 “동무들! 지금 이야기는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라고 입을 열었다. 연설은 처음부터 대담한 직설이었다. “혁명의 천재 레닌은 개인숭배 현상을 가차 없이 비난했다.
···스탈린의 개인숭배는 소름 끼칠 정도다.” 스탈린은 레닌의 배신자로 바꿨다. 흐루쇼프는 고문과 처형의 섬뜩한 내막을 폭로했다. “스탈린은 ‘인민의 적(敵)’(브라크 나로다·враг народа)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국가보안기관의 베리야 일당은 자백을 증거로 삼으려고 했다. 사람이 짓지도 않은 죄를 어떻게 지었다고 시인할 수 있는가. 방법은 한 가지다. 물리적 압박, 고문, 무의식 상태, 판단력 상실, 인간적 존엄성의 파괴다. ···1934년 17차 대회에서 선출된 당 중앙위원 139명 중 98명이 체포 총살되었다.” 분노가 넘쳐났다. 참석자들은 경악했다. 놀라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폭로는 절정에 이른다. “의사 음모 사건 때 스탈린은 조사 방법을 지시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비티 비티 이 비티’(бить, бить и бить·때리고 때리고 또 때려라)였다. 흐루쇼프는 ‘대 조국 전쟁’(제2차 세계대전)을 거론했다. "스탈린은 전선의 어떤 곳도 가보지 않았다. 승리 주역은 스탈린이 아니다. 당과 영웅적 군대, 뛰어난 지휘관, 용감한 병사가 승리를 가져왔다.” 열렬한 박수가 터졌다.
연설은 4시간에 걸쳤다. 연설 직전까지 스탈린은 우상(偶像)이었다. 거역할 수 없는 지도자, 신과 같은 존재였다. 연설 뒤 스탈린 신화는 망가졌다. 스탈린은 철권 통치자, 피의 독재자로 규정됐다. 대의원들은 망치에 맞은 듯했다. "우리는 발코니에서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부끄럼인지, 충격인지, 뜻밖의 사태 때문인지 서로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윌리엄 타우브먼 『흐루쇼프: 인간과 그의 시대』)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정리했다. "연설은 스탈린이 남긴 전체주의 체제에 결정타를 날렸다.”(가디언지 2007년 4월 26일) 2017년 캐슬린 스미스 교수(조지타운대)는 "그 연설은 35년 후 소련의 붕괴를 이끈 연속된 사건의 출발점이었다”고 했다.(『모스크바 1956: 침묵당한 봄』)
▲1951년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식 뒤. 왼쪽부터 흐루쇼프, 스탈린, 말렌코프, 베리야, 몰로토프. 스탈린 사망 뒤 흐루쇼프는 사진 속 인물을 단계적으로 퇴진시키고 권력 정상에 오른다. [중앙포토]
고르바초프는 "1985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는 1956년 당 대회에서 시작한 것들을 계속한 것”이라고 자평했다. 그 말은 흐루쇼프의 유산 상속자를 자처한 것이다. 비밀연설은 젊은 시절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감수성에 자극을 주었다.
흐루쇼프는 자수성가했다. 그는 러시아 남부 쿠르스크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금속노동자였고 정규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다. 1918년 그는 볼셰비키가 되었다. 현장 경험을 통해 세상살이를 단련했다. 그는 어깨가 벌어진 작은 키에 투박한 인상이다. 그는 영리했다. 말이 많았지만 격식을 싫어했다.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권력 공백을 낳았다. 유력 후계자는 말렌코프, 베리야, 흐루쇼프 3인이었다. 흐루쇼프는 경쟁자를 물리쳤다. 스탈린 사후 3개월 뒤 비밀경찰 두목 베리야는 체포됐다. 그리고 처형됐다.
▲흐루쇼프(왼쪽 둘째)는 우주과학의 성취를 자랑했다. 최초 우주 비행사 가가린(왼쪽), 흐루쇼프 하야를 주도했던 브레즈네프(오른쪽), 1961년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오른쪽 둘째)의 소련 방문 때다. [중앙포토]
흐루쇼프는 집단지도체제의 1인자가 됐다. 그는 진정한 공산주의 시대의 개막을 결심했다. 그 조건은 스탈린 공포정치와 결별하는 것이다. 포스펠로프 조사위원회는 대숙청기(1934~38년)의 참상을 보고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지도자로서의 파탄상이 드러났다. 우리는 진실을 증언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스탈린주의 수구파의 원로 보로실로프가 반박했다. "스탈린 치하의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당과 국가의 체면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았느냐. 사람들은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흐루쇼프는 집요했다. "우리가 침묵을 지키면 미래 언젠가 인민들에 의해 우리가 진실을 말하게끔 심판대에 올라갈 것이다.”(『흐루쇼프 회고록』)
스탈린 격하 연설은 거대한 모험이었다. 퇴로가 없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 결단은 권력 장악의 요소를 갖는다. 하지만 그런 동기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는 과거와 타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면승부를 택했다. 그는 스탈린 폭정의 공모자이기도 했다. 그는 죄의식을 가졌다. 그의 팔꿈치에도 숙청의 피가 묻혀 있다. 20차 전당대회는 체제의 정화(淨化), 흐루쇼프 자신의 정화의 제단이었다. "비밀연설은 참회의 행동이다.”(타우브먼, 뉴욕타임스 2006년 2월 25일) 그것은 진실을 향한 의지의 장엄한 폭발이기도 했다. "(연설 결심은) 인간성의 미스터리다. 악을 누른 선(善), 노예보다 자유, 거짓 대신 진실을 선택하려는 거부할 수 없는 인간 성향에 불을 지른 ‘소멸하지 않는 불꽃’(inextinguishable spark)이다.”(레온 아론, 뉴욕타임스 2003년 3월 16일)
▲1956년 2월 크렘린 궁에서 열린 20차 공산당 대회, 앞쪽 연단에 흐루쇼프, 레닌의 조각상이 보인다. [중앙포토]
1957년 6월 스탈린주의 수구파의 반격이 있었다. 당 중앙위 상임위(정치국)에서 흐루쇼프 퇴진 요구가 나왔다. 주도자는 말렌코프·카가노비치·몰로토프였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재역전에 성공했다. 그것으로 주동 3인은 반당(反黨)분자로 밀려났다. 흐루쇼프는 1958년 각료회의 의장(총리) 자리를 차지한다. 전임 총리 불가닌은 퇴진했다
타우브먼 교수(애머스트대)는 "흐루쇼프는 20세기 지도자 중 가장 복잡하고 중요한 인물이다. 소련과 전 세계에 모순되는 흔적(contradictory stamp)을 남겼다”(저서 『흐루쇼프』)고 했다. 그의 집권 때 변혁의 흐름은 격렬했다. 하지만 불연속선이었다. 전진과 후퇴, 반전과 역전, 해빙과 결빙이 교차했다. 비밀연설은 예술에 활력을 넣었다. 영화 『학(鶴)이 난다』(감독 칼라토조프),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나왔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는 출판이 금지됐다. 해빙의 한계다. 흐루쇼프의 소련은 우주 경쟁에서 미국을 압도했다. 1957년 스푸트니크가 발사됐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이다. 1961년 가가린은 우주를 여행했다
비밀연설은 동유럽에 파문을 던졌다. 1956년 10월 헝가리에서 자유 봉기가 일어났다. 소련은 탱크로 유혈진압했다. 흐루쇼프의 평판은 험악해졌다. 그는 냉전의 거친 흐름을 완화하려 했다. 하지만 외교 도발을 강행했다. 베를린 봉쇄, 쿠바 미사일 위기(1962년 10월)다. 소련은 쿠바에 설치한 미사일을 철수했다.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승리인 듯했다. 공산권 여론은 흐루쇼프의 양보를 비난했다. 내막은 달랐다. 빅딜이 있었다. 미국도 터키에서 미사일을 비밀리에 빼갔다.
▲흐루쇼프의 묘비석.
나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역에 갔다. 모스크바 강변의 그 공동묘지에는 흐루쇼프의 무덤이 있다. 그의 추모비석은 독특하다. 조형미는 논란투성이의 그의 시대를 드러낸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는 기습을 당했다. 당 중앙위는 그를 권좌에서 몰아냈다. 권력 패배의 뿌리는 비밀연설이었다. 타우브먼 교수는 정리한다.(『흐루쇼프』) "그 연설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용감하면서 가장 무모한 행동이었다.”
모스크바=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 그 무섭던 스탈린은 이렇게 죽어갔다!
비밀경찰 두목 베리아가 고의로 치료 방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은 아마도 순환기 계통에 문제가 많은 체질을 타고 난 듯하다. 김정일은 자신을 '난쟁이 똥자루'라고 불렀다. 독재자는 충고가 먹히지 않아 건강 유지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출근 시간을 의식하지 않는 독재자는 또 늦잠을 자는 경우가 많다. 이 또한 건강을 해친다. 결정적 순간에 독재자는 방치되는 수가 있다.
북한 전문가들과 탈북자 사이에선 김정일이 김일성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오래 전부터 떠 돌았다. 1994년 7월 김영삼(金泳三)-김일성 회담을 앞두고 부자간에 갈등이 깊어졌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북한주민들의 참상을 비로소 알고는 아들을 불신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김일성이 묘향산에서 회담 준비를 지휘하던 중 심장마비를 일으켰을 때 응급조치가 늦은 것도 김정일이 함정을 팠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사를 태운 헬리콥터가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가던 중 추락한 사건도 음모로 본다. 황장엽 선생은 이런 음모설을 부정하였다.
1953년 3월5일에 죽은 스탈린을 둘러싼 미스터리도 많다. 비밀경찰 총수 베리아가 독살하였다는 說은 상당한 근거가 있다. 스탈린은 5일간 의사의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거의 방치된 상태에서 극심한 고통을 치르면서 죽어갔다.
2월28일 스탈린은 측근들과 함께 크렘린 宮에서 영화를 보았다. 그 뒤 모스크바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자신의 별장으로 옮겨 다음날 새벽 4시까지 먹고 마셨다. 베리아, 말렌코프, 불가닌, 흐루시초프가 동석하였다. 흐루시초프 회고록에 의하면 헤어질 때 스탈린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흐루시초프의 배를 쿡쿡 찌르면서 장난도 쳤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늦잠을 자도 오전 10시에 일어나서 경호원을 부르곤 하였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오후가 되어도 기척이 없었다. 경호원들은 부르지 않으면 내실로 들어갈 수 없었다. 저녁 6시30분에 방에서 전등이 켜졌다. 경호원들은 부르기를 기다렸지만 밤10시가 되어도 소식이 없자 겁이 난 경호원이 우편물을 전하는 척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스탈린은 침대에서 밑으로 떨어진 채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부서진 시계는 저녁 6시30분에 멈춰 있었다. 스탈린은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소리를 냈다. 경호원들은 직접 의사를 부를 수 없었다. 당시 스탈린을 담당하던 의사들중 상당수는 붙들려가 '요인 독살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경호원은 국가안전부로 연락을 하였다. 국가안전부 장관은 책임을 면하려고 "말렌코프와 베리아에게 알려라"고 했다.
말렌코프는 전화를 받았으나 베리아에게 연락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베리아는 여자들과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베리아는 경호원들에게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 베리아가 곧 별장에 도착하였다. 스탈린은 그때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베리아는 의사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술에 취해 있었는데 경호원들에게 "스탈린 동지가 잘 자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는가. 모두 여기서 나가! 잠을 방해하지 말아!"라고 명령하였다.
의사가 온 것은 스탈린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시각(오후 6시30분)을 기준으로 하여 12시간 뒤였다. 베리아는 나중에 몰로토프에게 "내가 그를 처치하였어. 내가 당신들 모두를 살린 거야"라고 말하였다('몰로토프 회고록').
당시 스탈린은 공안기관을 장악한 베리아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베리아가 너무 강해져 그 자신도 위협을 느낄 지경이었다. 스탈린은 별장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5일간을 지냈다. 베리아는 여러 정치국원이 병상을 지키고 있는 자리에서 스탈린에게 험담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스탈린의 의식이 돌아오는 듯하면 달려가 무릎을 꿇고는 스탈린의 손에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3월3일 의사들은 스탈린의 사망이 시간문제라고 진단하였다. 베리아는 실권자가 된 것처럼 행동하였고 정치국원들도 묵묵히 따랐다. 말렌코프와 베리아는 긴급 정치국 회의를 주도하고, 후임 수상에 말렌코프, 제1부수상에 베리아를 임명하기로 결의하였다. 베리아는 내무부에 대한 통제권도 행사하기로 하였다. 비밀경찰 등 여러 공안기관을 통합조정하는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스탈린의 죽음을 지켜본 그의 딸은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얼굴 모양이 변하고 검은 색이 되었다. 입술이 검게 되었다. 갑자기 눈을 떴다.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무서운 눈길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분노한 눈초리였다. 아버지는 갑자기 손을 올리더니 누군가를 가리키면서 저주하려는 듯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숨이 끊어졌다."
이 순간 베리아는 방을 뛰쳐나가면서 운전사를 불렀다. 그 목소리는 환희에 차 있었다. 석 달 뒤 베리아를 거세하게 되는 흐루시초프는 "그의 얼굴은 빛났다"고 기억하였다.
몇년 전 러시아 역사가 에드바드 라진스키는 스탈린이 죽을 때 경호원으로 일했던 사람을 찾아내 인터뷰를 하였다. 경호원 로가체프는 의외의 사실을 털어놓았다.
스탈린이 그날 "내가 부르기 전에는 방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한 것이 아니고 그런 지시를 내린 이는 수석 경호원 흐루스탈레프였다는 것이다. 라진스키는 베리아의 명령을 받은 흐루스탈레프가 스탈린에게 毒(독) 주사를 놓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베리아는 그래 놓고는 의사들의 응급처치도 고의로 방해한 것이란 주장이었다.
조갑제(趙甲濟) 대표
■ [러시아 혁명 100주년] - 중앙일보
2017.10.25 세상을 뒤흔든 혁명, 흔적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았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하늘은 붉게 물들고 있었다. 1917년 11월 7일 당시 페트로그라드로 불리며 러시아제국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폭력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동계급 전위론, 민주집중제를 앞세운 볼셰비키(러시아공산당 및 소련공산당의 전신)가 10월혁명으로 정권을 탈취했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 인류 비극 야기한 거대한 실험
계급혁명과 일당독재 내세운 공산정권 탄생
사유재산 부정하고 국유화, 계획경제 시도해
평등과 완전고용 추구-물자부족, 희생만 불러
대량숙청과 처형-인권 무시한 감시사회,공포정치
중국, 베트남 민족해방혁명 지원-혁명의 세계화
냉전시대 공산세계 축 이루다 경제 실패 속 몰락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100년 전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공산정권을 탄생시킨 10월혁명의 현장을 찾았다. 러시아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자랑하는 국립 에르미타시 미술관을 이루는 5개의 거물 중 하나인 겨울궁전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황궁으로 사용됐던 로코코 양식의 격조 있는 모습이었다. 이제 흔적은 사라지고 혁명의 기억만이 남았다.
▲소련 감독 세르게이 아이젠스타인 감독의 영화 '10월'에서 재현된 10월 혁명 당시 적위대가 겨울궁전을 급습하는 장면.
볼셰비키, '성공한 쿠데타'로 혁명 권력 장악하다.
러시아에선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그해 3월, 식량을 비롯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러시아 민중이 봉기해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렸다. 2월혁명이다. 이후 들어선 임시정부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온건파인 멘셰비키가 주도했다. 중심인물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1881~1970)가 임정 수반을 맡았다. 사회민주노동당의 급진파인 볼세비키는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이 그해 4월 망명 중이던 스위스에서 독일제국이 제공한 봉인열차를 타고 귀국하면서 세력을 불렸다. 결국 레닌은 귀국 6개월 만에 10월혁명을 일으켜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차지했다. 볼셰비키 군사위원장 레프 트로츠키(1879~1940)는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1000명의 적위대가 11월 7일 새벽 2시 임시정부 거점이던 겨울궁전을 점령했다. 이 성공한 '군사쿠데타'로 혁명 권력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외치며 급진 계급혁명을 주장하던 볼셰비키에 넘어갔다.
11월 7일은 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 쓰는 그레고리우스력 기준의 날짜이고 당시 러시아가 쓰던 구력(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 25일이라 10월 혁명으로 불린다. 2월혁명도 마찬가지로 구력 2월23일, 그레고리우스력 3월8일에 발생했다.
▲1917년 러시아 2월혁명 당시 병사들이 거리를 순찰하고 있다.
자본주의 미성숙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다
러시아혁명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역사발전의 단계에 따라 공산주의로 이행한다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에서 비교적 자본주의 발달이 느린 후발국가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은 이런 아이러니로 출발했지만 필연성도 담고 있다. 당시 러시아제국은 가난과 열악한 노동조건, 빈부격차로 사회통합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로마노프 왕조는 개혁을 거부하고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전제 군주제를 유지하려고 인권과 언론·사상·결사의 자유를 억압했다. 여기에 극심한 희생이 요구되는 세계대전이라는 국난을 겪는 과정에서 지도층의 탐욕과 무능함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1868~1918, 재위 1894~1917)는 국민의 불만을 제대로 어루만지지 못하고 권위와 종교, 그리고 무력에 의존한 가혹한 통치로 민심을 잃고 분노만 촉발했다. 독일 아이히슈타트-잉골슈타트 가톨릭대학의 중동유럽사 담당 레오니트 루크스 교수는 역사잡지인 차이트게시히테에 “2월혁명 당시 당시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빵을 달라’ 외쳤다”라고 지적했다. 러시아혁명은 국민이 기본적인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 정부의 무능과 전제체제의 모순이 빚은 필연적인 결과라는 평가다
▲1917년 4월16일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당시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에 도착하고 있다.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레닌은 독일제국이 제공한 봉이열차를 타고 귀국했다.
피해의식과 강박관념의 '소비에트 제국' 탄생하다
볼셰비키는 10월혁명 이듬해인 1918년 3월3일 1차대전에서 이탈했다. 독일 등 동맹국에 상당한 서부 영토를 넘겨주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고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과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내전 결과 볼셰비키의 적군 121만 명, 백군 150만 명 정도의 사상자를 냈다 수많은 사람이 집을 잃었으며 일부는 해외로 망명했다. 내전 과정에서 벌어진 잔혹한 상호 살상극과 보복행위, 그리고 이산가족 발생은 러시아를 비극으로 이끌었다. 러시아 역사학자 드미트리 볼코고로프는 당시의 잔학상이 “제정 러시아 시대의 비극조차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이게 했을 정도로 지극히 비인간적이었다”라고 기술했다.
내전은 소련 지도층으로 하여금 자국이 서구 국가에 포위당해 있다는 피해의식을 낳았다. 이는 경제는 물론 군사 분야에서도 서구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낳았다. 이에 따라 소련은 군수산업 중심의 중공업에 집중 투자하고 소비재는 뒷전으로 밀렸다. 아울러 군대를 앞세우는 군사국가의 특성도 갖게 됐다.
▲1917년 11월 페트로그라드의 거리를 병사들이 장갑차를 타고 순찰하고 있다.
그해 11월 1차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군은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백군을 지원해 내전은 국제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미국, 영국(캐나다, 호주,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포함),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일본,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루마니아, 세르비아, 중화민국 등 연합국 지원군이 백군과 함께 볼셰비키와 싸웠다. 이 과정에서 볼셰비키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에 맞서 싸워 혁명을 수호했다는 인상을 남겼다. 이는 당시 식민지이거나 제국주의의 침탈을 받던 수많은 약소국가에 ‘민족해방’의 꿈을 심어줬다. 10월혁명은 러시아를 넘어 세계를 뒤흔들었다.
볼셰비키는 1922년 내전에서 승리하고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소련·USSR)을 세웠다. 소련은 러시아 소비에트공화국을 주축으로 옛 러시아제국에서 일시 독립했던 유럽 지역의 우크라이나, 벨로루시와 카프카스와 중앙아시아의 모든 나라를 통합했다. 옛 러시아제국 영역에서 발트3국과 폴란드·핀란드는 제외됐지만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이 나라들을 공격해 핀란드를 제외하고 모두 점령했다. 끊임없는 영토적 야욕을 드러내는 건 제국주의 국가나 나름없었다. 무력을 앞세운 소련의 대외정책은 혁명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를 두고 러시아제국의 팽창주의를 계승한 ‘소비에트 제국주의’로 평가하는 이유다.
▲볼세비키를 이끌고 10월혁명에 성공해 세계 최초의 공산정권을 수립한 소련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
소련의 풍경이 된 상점 앞의 긴 줄-인간욕망과 경제원리 무시한 계획경제
볼셰비키는 10월혁명 직후 사회주의 경제의 실험에 들어갔다. 모든 토지와 은행을 국유화했으며 모든 공장의 운영은 노동자로 구성된 소비에트에 넘겼다. 개인 금융계좌와 교회 재산은 전액 국가가 몰수했다. 대외부채는 갚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며 노동자 임금을 인상하고 노동시간은 8시간으로 줄였다. 소련은 사적소유를 없애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한 뒤 중앙계획경제체제를 가동했다.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대신 모든 사람을 고용하고 평등 분배를 하겠다는 볼셰비키의 공약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자발성을 억눌러 경제를 망치는 요인이 됐다. 집중적인 투자와 노력동원 등으로 소련 경제는 1920년대 상당한 성장세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경제를 연구한 헝가리 경제학자 코르나이 야노스에 따르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는 경제원리를 무시하고 무리한 전시성 중공업 투자와 양적 팽창에 대한 집착, 그리고 과도한 군비 지출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소비재를 중심으로 하는 물자부족과 경제 파탄을 불러 74년 뒤인 1991년 소련이 무너진 핵심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한다. 코르나이는 가격통제, 공금자 중심의 경제 등 시장원리를 무시한 중앙계획경제라는 사회주의 경제방식은 그 구조적인 모순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상점 앞에 선 긴 줄은 소련을 상징하는 풍경이 됐다.
미국과 대결한다던 소련이었지만 국내적으로는 심각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옛 소련 시절 모스크바 한복판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상점 앞의 긴 줄은 계획경제의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수요가 공급이 지배하는 시장원리를 무시하고 가격을 정부 통제에 맡기는 바람에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서슬 퍼런 소련의 통제사회도 시장을 이기지는 못했다.
▲10월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1920년 모스크바의 스베르틀로프 광장에서 대중 연설을 하고 있다. 연단 오른쪽 아래는 볼셰비키의 군사지도자 레프 트로츠키.
소련, 잔혹과 동의어가 되다-전체주의적 인권 말살과 공포정치
소련은 공포정치와 동의어가 됐다. 혁명 직후인 1917년 12월 레닌은 체제수호를 위해 비밀경찰인 체카를 창설했다. 시민을 영장 없이 체포, 구금, 고문, 즉결처형 하는 공안통치와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이는 소련 통치의 특징으로 굳어졌다. 이 조직은 국가정치총국(GPU, 22~53)과 내무인민위원회(NKVD, 34~46)를 거쳐 국가보안위원회(KGB, 54~91)로 간판을 바꾸면서 공산체제 유지의 선봉을 맡았다.
NKVD는 스탈린 시절인 37~38년의 대숙청 당시 일부 공산당원과 군대, 농민, 소수민족에 대한 대대적인 정치적 탄압과 박해, 학살을 벌였다. 공식 통계는 68만 명을 총살한 것으로 기록됐지만 실제로는 2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된다. 이 과정에서 군인들까지 대거 숙청해 전력이 심각하게 약화했다. 39년 11월 겨울전쟁(소련군의 핀란드 침공) 당시 소련군은 148만 병력과 6500대의 전차를 동원하고도 33만 병력에 30여 대의 전차를 가동한 핀란드군에 12만 6000명의 병력을 잃는 대참사를 겪어야 했다.
스탈린이 37년 10월 극동 지방에 거주하는 한인의 대부분인 17만1781명을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강제 이주시켜 2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은 것도 대숙청의 일부다. 2000~2009년 레닌과 스탈린, 트로츠키의 전기를 연이어 출간한 로버트 서비스 영국 옥스퍼드대 명예교수는 “레닌은 공포정치의 잔혹상과 혁명의 비윤리성을 보여준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소련 붕괴 뒤 KGB의 상당수 기능이 러시아연방보안국(FSB)으로 넘어갔다.
소련, 민족해방 지원하다-의도적인 혁명수출과 대립의 냉전시대
중요한 건 10월혁명이 러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수출됐다는 점이다. 혁명 지도자 트로츠키는 “러시아혁명의 목적은 세계혁명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라며 세계혁명·영구혁명을 주장했다. 10월혁명의 파장은 전 세계로 번졌다. 혁명 직후 독일과 헝가리 등에서 소비에트국가 건설이 시도됐지만 성공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독일에선 1919년 1월 공산주의자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스파르타쿠스단이란 조직을 이끌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가 진압됐다. 헝가리에선 1919년 3월 볼셰비키를 모델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내세운 헝가리 공산당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외치며 헝가리 민주공화국을 무너뜨리고 헝가리 사회주의연방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5개월 뒤 무너졌다.
소련은 국제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을 통해 조직적으로 10월혁명을 수출했다. 무엇보다 중국 혁명에 영향을 끼쳤다. 베이징대에선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회’란 단체가 결성돼 1919년 5월4일 일제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 반정부,반일 운동인 5.4운동을 벌일 당시 참가했다. 그 뒤 1921년 7월 이 단체를 이끌던 베이징대의 문과장(학장) 첸두슈(陳独秀, 1879~1942), 도서관장 리다자오(李大釗, 1888~1927), 전 도서관 사서 마오쩌둥(毛澤東) 등이 코민테른의 지도로 제1차 당대회를 열고 중국공산당을 창당했다.
▲소련의 국제공산당조직인 코민테른이 혁명수출을 위해 운영한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학생들 사진. 주세죽을 비롯한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뒷줄 맨왼쪽)의 모습이 보인다.
소련, 한국 공산주의자들을 양성하다
베트남의 호치민(胡志明, 1890~1969)은 1930년 2월3일 중국에서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당했으며 소련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모스크바 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이 대학은 코민테른이 피지배국 혁명가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운영했다.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 류사오치(劉少奇, 1898~1969)와 함께 조봉암(1898~1959), 주세죽(1901~1953), 허정숙(1902~1991) 등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을 양성했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 6사단장으로 남침해 호남과 진주마산까지 남하했던 방호산(1916~?)도 이 학교 출신이다. 박헌영(1900~1956)과 김단야(1899~1938)는 당시 국제레닌학교에서 혁명을 배웠다. 이 학교는 유고슬라비아의 공산 독재자 브로즈 티토(1892~1980), 동독의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1912~94)도 배출했다. 코민테른은 ‘중국 노력자를 위한 중산 공산당 대학(모스크바 손중산 대학)’을 운영하며 중국 혁명가를 양성했다. 보구(博古, 1907~46)를 비롯한 이 학교 유학파들은 30년대 초반 '28인의 볼셰비키'로 불리며 중국공산당을 이끌었다. 이 학교 총장인 소련인 파벨 미프(1901~1938)는 코민테른극동대표를 맡아 중국 공산당의 혁명노선을 좌지우지했다. 김일성은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서 대위 계급으로 교육과 훈련을 받다가 해방 뒤 귀국해 북한 정권을 세웠다.
▲낫과 망치로 이뤄진 소련 공산당 휘장.
소련이 무너진 지금,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는 4개국 뿐이다
10월혁명이 유럽에 수출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점령한 동유럽과 중유럽 지역에 공산위성정권을 강제로 수립하면서다. 이는 현지 민중의 반발을 불러 56년 폴란드 포즈난 봉기, 헝가리 반소반공 봉기, 68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의 봄’ 등이 벌어졌으며 소련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10월혁명은 중남미와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에도 수출됐다. 쿠바에선 피델 카스트로(1926~2016)와 체 게바라(1928~1967) 등이 오랜 게릴라 활동 끝에 1959년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공산정권을 세웠다. 중동·아프리카·동남아의 민족해방운동가들도 10월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소련은 2차대전에서 나치의 침략을 물리친 뒤 승전국이자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그 뒤 냉전시대에는 미국과 대립하며 공산권을 대표하는 패권국가로 군림했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종주국인 러시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는 사라지고 현재 중국·쿠바·베트남·라오스 4개국만 헌법에 이를 명문화하고 있을 뿐이다. 일당독재에 세습독재까지 하고 있는 북한은 2009년 헌법에서 '공산주의'를 빼고 김일성·김정은의 사상을 강조해 '유사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로 분류된다.
중국은 경제는 시장경제, 정치는 일당독재를 추구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이달 열린 19차 당대회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강조해 주목받았다. 일본의 러시아 문학자 가네야마 이쿠오(龜山邦夫)는 현대사상 10월호에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허망한 최후를 고려하면 10월혁명으로 세계가 왜 그렇게 엄청난 희생을 치렀는지 알 수 없다”고 평가했다.
서울=채인택 국제전문기자, 상트페테르부르크=이기준 기자 ciimccp@joongang.co.kr
11.01 거꾸로 읽는 러시아 혁명사
①체코군단, 피바다 뚫고 시베리아 횡단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징집된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 6만여 명
러시아군 포로된 뒤 별도 부대 조직해 싸웠으나
볼셰비키가 1차대전에서 빠지자 전투 계속 다짐
시베리아 횡단, 선박편으로 지구 돌아 서부전선행 추진
'설국열차' 느낌 긴 열차에서 병원,우체국에 신문사까지
피의 내전 속 러시아 횡단했지만 전쟁 끝나 조국으로 금의환향
연해주 머물며 한국 독립군에 무기 넘겼다는 정황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사용된 러시아 무기 제공 짐작도
러시아 혁명은 수많은 사건을 낳았다. 혁명의 파편들이다. 하나하나가 영화화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기막힌 사연으로 넘친다.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을 정리해 ‘러시아 혁명의 미시세계사’로 연재한다.
러시아 혁명이 낳은 숱한 사건 중에서 단연 백미는 ‘체코 군단’이라고 생각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소속이었으나 러시아군에 포로가 된 뒤 독립을 위해 총부리를 거꾸로 돌린 군인들이다. 6만 명이 넘는 체코 군단은 러시아혁명과 내전으로 더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맞서 싸울 수가 없자 철도를 이용해 내전이 벌어지는 시베리아를 횡단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이들의 드라마를 알아보자.
▲시베리아 철도 노선.
러시아에서 1917년 11월7일 볼셰비키가 적위대를 동원해 임시정부 청사인 겨울궁전을 점령하는 10월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자 이에 반발하는 반혁명군이 백군을 조직해 저항에 나섰다. 이렇게 발발한 러시아 내전은 1922년까지 계속됐다. 적군이 120만, 백군이 150만의 사상자를 낸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었다. 10월혁명 이듬해인 1918년 3월 볼셰비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맞서 싸우던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 오스만튀르크)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정을 맺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했다.
▲서부전선으로 가서 독립을 위한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에 나선 체코 군단 장병의 모습.
이 협정으로 가장 난처해진 측이 체코 군단이었다. 러시아군과 함께 싸우던 체코 출신 군인들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던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젊은이들은 군대에 징집돼 군사 훈련을 받고 세르비아나 러시아 같은 연합군과 싸우게 됐다. 일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동맹군이 아닌 연합군의 일원으로 싸우면서 전후 독립 국가를 건설할 꿈을 꾸었다. 일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19세기 말부터 고향을 떠나 러시아로 망명해 살았는데 이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러시아와 함께 싸우는 것이 자국 독립에 유리하다는 입장이었다. 징집돼 전선에 투입된 체코와 슬로바키아 청년들도 이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러시아군에 투항했다. 일부는 의도적으로 탈영해 러시아 쪽으로 집단 귀순하기도 했다.
▲보급을 위해 잠시 정차한 체코 군단 열차의 모습.
체코인들은 프랑스, 이탈리아, 세르비아 전선에서도 싸웠지만 러시아의 체코 군단이 가장 규모가 컸다. 이들을 러시아군의 지원을 받아 포로수용소가 아닌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독일군과 싸웠다. 1914년 8월 러시아 최고사령부는 전쟁포로를 포함해 자국에 사는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로 구성된 부대의 구성을 승인한 것이 시작이다.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던 러시아의 지향점과도 들어맞는 조치였다. 러시아 군복을 입고 러시아제 무기를 든 체코와 슬로바키아 출신 군인들은 그해 10월 러시아 제3군 산하로 배속돼 전선에 파견됐다. 당시 러시아제국 육군 제3군은 갈리시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갈리시아는 현재 폴란드 동남부와 우크라이나 서북부를 구성하는 지역으로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였다.
▲안락한 교수 자리를 버리고 체코 독립 운동에 뛰어든 마사리크가 1917년 2월혁명과 10월혁명 사이에 러시아를 방문해 체코 군단을 격려하고 있다. 내전에 개입하지 않고 귀국해 서부전선으로 가서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사워 독립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자신들을 후원하던 제정러시아가 무너지고 뒤를 이어 정권을 차지한 볼셰비키가 중·동 유럽 슬라브계 소수민족을 탄압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전투를 중지하자 체코 군단은 대안을 모색했다. 체코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토마스 마사리크는 이들에게 지침을 내렸다. “가급적 내란에 휘말리지 말고 목숨을 잘 보전해 서방으로 가라”는 내용이었다.체코군단은 무장력을 바탕으로 자력으로 서부전선으로 가서 계속 싸우려고 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러시아 북부 무르만스크나 아르한겔스크 등을 통해 이들을 서방으로 데려오려고 영국과 프랑스 등이 러시아 서부로 군대와 배를 보냈지만 여의치 않았다. 결국 이들은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배편으로 귀국하기로 했다. 서쪽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막혀 있었으니 서방으로 가서 프랑스나 이탈리아 전선에서 추축국과 싸우려면 시베리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지구를 돌아 유럽에 도착한 다음 서부전선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지구를 거진 한 바퀴 도는 긴 여정이다.
이들은 무기와 식량, 기차를 확보하고 러시아의 동쪽 끝, 태평양을 향해 이동했다. 수많은 열차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베리아 철도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했다. 내전 중인 나라를 가로 지르는 일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온갖 이유로 이동은 느렸다. 겨울철 얼어붙은 시베리아를 지날 때는 ‘설국열차’를 방불케 하는 풍경을 연출했을 것이다. 이 기나긴 열차 행렬에는 병영은 물론 병원과 우체국, 신문사, 은행까지 있었다. 의지와 시스템이 모두 필요한 여정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은 이 둘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체코 군단을 태우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열차의 모습.
체코 군단은 볼셰비키에 호의적이진 않았지만 서부전선으로 가는 일이 급했기에 내전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게 체코 군단의 원칙이었다. 필요하면 백군과 함께 이동하기도 했으며, 그 반대로 백군 지휘관과 열차에 싣고가던 러시아 정부 소유의 백금 등을 볼셰비키에 넘기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공받기도했다. 혁명에 반대하는 연합군은 체코 군단이 철수를 돕기 위해 무기 등을 지원했다. 당시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도 실제로는 영토적 욕심에서 이뤄졌지만 표면상 명분은 체코 군단의 철수 지원이었다. 1918년 7월17일 우랄 산맥 남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제정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가족을 서둘러 총살한 것도 체코 군단이 이 도시로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 때문에 초조해진 볼셰비키가 무리수를 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체코 군단의 시베리아 이동은 참으로 세계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체코 군단이 1918년 시베리아 횡단에 이용한 열차 위에서 경계를 펴고 있다.
이들은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와 제정러시아를 복구하려는 백군 사이의 내전이 한창이던 러시아와 시베리아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바다에 도착했다. 1918년 7월6일 체코군단이 극동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점령한 것이다. 연합군에 동조하는 체코군단은 지역의 적군을 몰아내고 이 항구를 연합군 항구로 선포해 모든 연합군 선박에 개방했다. 이들은 1920년까지 머물면서 배편을 수배해 유럽으로 차례차례 떠났다. 체코군단이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할 당시 발간한 신문 ‘덴니크’는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지 17일 만에 소식을 처음 전했다. 그 뒤에도 두 차례 더 기사화했다. 세계사적 사건의 주인공인 체코군단이 또 다른 세계사적인 사건인 3.1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시베리아 힝단열차에 탄 체코 군단 병사들의 모습.
독특한 것은 당시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군의 무기의 일부가 체코군단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실이다. 당시 체코 군단의 라돌라가이다 장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비교적 나중에 귀국했는데 그가 지휘하던 부대가 보유 무기의 일부를 한국독립군에게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체코 군단이 국내에 가져와 계속 보관했던 기념물 중에는 당시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은비녀와 반지 등도 있다. 독립군이 연해주와 만주에 이주한 우리 동포들로부터 이렇게 독립자금을 현물로 받아 이를 체코 군단 관계자들에게 주고 대신 무기를 구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체코 군단이 이용한 러시아제 무장열차. 대포와 기관총 진지까지 갖췄다.
독특한 것은 체코군단이 보유하던 무기는 미국산이라는 점이다. 산업시설이 부족했던 제정 러시아는 자국 육군의 기본무기인 모신나강 소총(M1891)을 충분히 생산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의 레밍턴사에 150만 정을, 웨스팅하우스사에 180만 정을 각각 주문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75만 정을 제작했는데 수송 문제로 47만 정만 납품했다. 혁명으로 납품을 못 하고 남은 28만 정은 미군이 인수했다. 일부는 러시아 혁명에 개입하기 위해 투입된 연합군에 공급됐다. 5만 정은 체코 군단에 제공됐다.
▲북로군정서군을 이끈 김좌진 장군
▲대한독립군을 이끈 홍범도 장군.
이 체코 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면서 일부 무기를 한국 독립군에게 넘긴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는 체코 무기라고 알려졌지만 이는 체코 군단이 보유하고 있던 '미국산 러시아 소총'이었다. 독립군은 이 무기를 바탕으로 화력을 강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홍범도 장군이 1920년 6월 6~7일 벌인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의 대한 독립군과 기좌진 장군이 이끈 북로군정서군을 비롯한 독립군 연합부대가 10월 21~26일 치른 청산리 전투에서 사용한 무기가 이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체코군단의 시베리아 횡단은 물론 한국의 독립운동은 이처럼 대단히 국제화된 환경 속에서 이뤄졌다.
▲체코 군단에 이용한 러시아제 무장열차의 모습. 대포와 기관총 진지가 달렸다.
이들이 귀국했더니 전쟁은 이미 끝나고 신생 체코슬로바키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체코 군단의 활약상과 지식인들의 외교활동은 독립을 얻어내는 소중한 밑거름이었다.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1920년 중반까지 6만7739명이 귀국했다.여기에는 그사이 생긴 체코 군단 병사들의 신부와 아이들도 포함됐다. 시베리아를 이동한 것은 열차와 군인이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의 혼이었던 셈이다.
▲체코 군단 차가자들의 세운 체코 군단 은행 본점 모습. 자금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오랫동안 의문이었다.
체코 군단 장병은 새로 생긴 조국의 수도 프라하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남은 군자금으로 ‘체코군단은행’을 설립해 운영했는데 볼셰비키에 전량 넘겨주기로 했던 러시아 제국의 국고인 백금을 일부 남겨 왔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확인된 것은 아무 것도없다. 이들은 불굴의 인간 의지가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1919년 1월 체코 군단 장병이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귀국 행진을 하고 있다. 프라하의 중심뷘 바츨라프 광장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짧은 역사>
슬라브족인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오랫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정체를 살펴보면 기가 막힌다. 1804년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지배하던 다양한 영지를 모아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언했다. 이름뿐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던 프란츠 2세는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1804년 프랑스 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자 이에 대응해 격을 맞추려고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1867년 산하 헝가리 왕국(국왕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겸임)에 별도 의회를 세워주고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면서 생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복잡한 민족 구성. 하늘색이 체코인, 갈색이 슬로바키아인이다.
이 제국에는 1910년 인구조사 기준 독일계(23.36%)와 헝가리계(19.57%)는 물론 체코어(12.54%)와 슬로바키아어(3.83%)를 쓰는 서슬라브계, 세르보크로아티아어(10.98%)와 슬로베니아어(2.4%)를 쓰는 남슬라브계, 폴란드계(9.68%), 우크라이나계(7.78%), 루마니아계(6.26%), 이탈리아계(1.50%) 등 수많은 소수 민족이 살고 있었다.
체코인들은 헝가리인처럼 자치를 인정받고 싶었다. 체코를 이루는 보헤미아왕국의 왕관을 차지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도 의회 설립과 자치권 부여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보헤미아 3중제국을 세울까 고민도 했지만 영내 다른 슬라브족을 자극할 가능성이 있는 데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터져 흐지부지됐다. 당시 체코를 이루는 보헤미아와 모라바 지역은 오스트리아 제국 직할령이었고 슬로바키아는 헝가리 왕국 소속이었다.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언어는 거의 같았지만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체성이 조금 다른 셈이다. 이들은 1차대전이 끝난 뒤 1919년 체코슬로바키아라는 한 나라를 이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침략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와 갈라졌던 이들은 종전 뒤 다시 한 나라가 됐다. 하지만 이들은 공산체제가 붕괴된 1992년 국민투표를 거쳐 1993년 두 나라로 갈라섰다.
<외교로 체코군단을 지원한 지식인 독립운동가 마사리크>
체코 지식인 독립운동가로 나중에 초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을 지낸 토마시가리크 마사리크(1850~1937)는 체코 군단의 구성과 시베리아 횡단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체코 군단을 지원하며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에 앞장섰던 토마시 마사리크(왼쪽)와 동료 에드바르트. 베네스. 각각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초대와 2대 대통령을 지냈다.
마사리크는 빈 대학 철학부를 마친 철학박사로 빈과 프라하의 대학에서 교수로 일했다. 그는 1890~1893년 청년체코당을, 1900~1918년 현실주의자당에서 정치 활동을 했다. 하지만 그는 처음에는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909년 남슬라브족인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들의 정치연맹 구성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가 반역 혐의를 뒤집어 씌워 기소한 사건을 변호하던 크로아티아인 변호사 힌코힌코비치(1854~1929)를 지원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소수민족 억압을 다시 한번 확인한 그는 압제에서 벗어나려면 독립이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해 12월 딸을 데리고 이탈리아 로마를 거쳐 스위스 제네바로 망명했다. 제네바에서 망명객으로 지내던 시절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를 떤 외국에서 거주하는 체코와 슬로바키아인을 규합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 스위스에서 시작했지만 차츰 범위를 프랑스, 영국, 러시아와 미국으로 넓혔다. 나중에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국제사회와의 접촉도 활발하게 진행했다. 전 세계를 돌며 강연과 기고 활동을 하고 각국 정부에 체코와 슬로바키아인의 입장을 전달하고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은 저절로 얻어지지 않았다.
마사리크는 1915년에는 프랑스 파리를 거쳐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는 런던에 머물며 지금도 명성이 자자한 ‘슬라브와 동유럽 연구대학(School of Slavonic and East European Studies)’ 창설에 기여했다. 이 학교는 현재 런던의 명문대학인 UCL(University College London)의 일부가 됐다. 마사리크는 런던의 또 다른 명문대학인 킹스칼리지의 슬라브학 연구 교수로 강의를 맡기도 했다. 그는 1차대전 내내 체코 내 정보네트워크를 가동해 연합군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국제관계에서 공짜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뭔가 공적을 쌓으려고 노력했다.
1915년 10월 런던에서 강의를 시작한 그는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도 있었으나 이듬해 프랑스로 건너가 정부 관계자를 상대로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위해 필수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를 설득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2월혁명이 터져 차르 체제가 무너지고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그해 5월 런던을 떠나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체코 군단을 만나 격려하고 활동을 함께했다. 그는 체코군단의 귀국 작업이 한창이던 러시아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 도쿄로 거쳐 1918년 4월 미국에 도착했다.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동분서주 끝에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이 마무리됐다. 진정한 독립은 결코 거저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무력만으로도 얻을 수 없다. 힘과 외교 같은 실력에 국제사회에 대한 끊임 없는 설득과 노력이 합쳐져야 얻을 수 있음을 마사리크의 삶은 잘 보여준다.
<끝>
11-04 100주년 맞은 러시아혁명 전문가 스티브 스미스 교수
볼셰비키 혁명 이후 암울한 러시아 봤다면 마르크스 경악했을 것
▲스티브 스미스 교수는 ‘러시아혁명도 소련의 패망도 역사의 필연은 아니었다’는 입장이다.
한국전쟁을 흔히 ‘잊혀진 전쟁’이라고 부른다. 러시아혁명은 ‘잊혀진 혁명’ 혹은 ‘잊고 싶은 혁명’이다. 러시아혁명과 그 여파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혁명의 제단’에서 희생됐다. 올해 19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아 책이 많이 나왔다. 그중 주목할 만한 저자는 스티브 스미스 옥스퍼드대 교수다.
자본주의 착취 청산 표방했지만
노동자계급 승리와는 거리 멀어
빈곤하고 낙후된 나라의 레닌
마르크스 공산주의 실현에 한계
소련 붕괴는 혁명의 실패 아닌
과도한 관료체제 산업화 못한 탓
사회적 모순 일거에 폭발한 혁명
오늘날 정치변화 모델로는 부적합
▲『러시아혁명: 제국의 위기 1890~1928』(영문판).
그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러시아혁명 전공 역사학자다. 평생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을 연구했다. 『옥스퍼드 공산당사 핸드북』의 에디터다. 러시아혁명을 맞아 출간된 책들 중에서 그의 『러시아혁명: 제국의 위기 1890~1928(Russia in Revolution: An Empire in Crisis, 1890~1928)』이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우리말로는 출간되지 않았다.) 스미스 교수의 전작으로는 『러시아혁명: 1917년에서 네프까지』가 있다. 스미스 교수는 ‘다이하드(die hard)’ 사회주의자들도 인정하는 객관적인 사학자다. 러시아혁명의 명과 암, 21세기적 함의를 주제로 스미스 교수와 인터뷰했다.
질의 :러시아혁명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응답 :“러시아혁명을 다루는 책들은 제목에 ‘레닌’이 들어가는 경우가 꽤 된다. 볼셰비키를 비롯한 혁명가들의 혁명에 대한 생각을 중시하는 책들이다. 물론 혁명은 혁명가와 정당이 하는 것이다. 나 또한 레닌 없는 러시아혁명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구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요인도 중요하다. 다른 역사학자들의 저작들과 비교한다면, 나는 러시아혁명의 원인과 그 여파의 ‘보다 깊은 구조적인 힘들(deeper structural forces)’에 주목한다.”
질의 :러시아혁명은 왜 일어났는가.
응답 :“우선 제정러시아를 살펴야 한다. 제정러시아는 지정학적 경쟁, 국가적 고립과 경제 근대화의 필요성에 따른 사회적·정치적 긴장관계에 휩싸여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들을 배경으로 혁명이 일어났는데 볼셰비키 정권도 제정러시아의 문제들을 승계했다.”
질의 :러시아혁명을 배태한 가장 중요한 ‘구조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응답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라고 본다. 첫째, 차르의 제국은 쇠퇴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날로 부상하는 독일·영국·미국·프랑스와 경쟁 관계였다. 차르 당국은 국방 능력을 제고하기 위해 강력한 산업 기반을 건설해야 했다. 둘째, 신분제도의 경직성은 노동자 계급, 자유주의적인 중산층 전문가 계급, 자본가 계급(비록 소수기는 하더라도)의 등장을 흡수할 수 없었다. 제정러시아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권리를 주장하는 신흥 세력의 부상을 잠재적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1905년 혁명은 러시아 사회가 실제로 깊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입증했다. 하지만 정치적·사회적 권리를 요구하는 사회 세력의 요구가 분출한 1905년 혁명에도 불구하고 1917년 혁명이 필연은 아니었다는 게 내 주장이다. 니콜라이 2세는 ‘왕권신수설’ 입장에서 전통적인 통치체제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황제의 바람과 달리 새로운 정당과 자발적 결사체들이 결성되고 상당히 자유로운 언론활동이 전개됐다. 차르 체제에 결정타를 먹인 1917년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엘리트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 특히 도시 거주자들을 이반시킨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질의 :러시아혁명이 세계에 남긴 역사적 유산은 무엇인가.
응답 :“혁명의 여파는 엄청났다. 러시아혁명은 스스로를 자본주의의 착취를 뒤엎고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글로벌 혁명으로 자처했다. 러시아식 혁명이 자국에서 재연될 가능성을 두고 미국·독일·이탈리아 등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러시아혁명: 1917년에서 네프까지』(한글판)의 표지.'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러시아혁명은 자본주의에 일격을 가하지 못했다. 노동계급의 승리를 표방했지만 노동자들의 처지는 악화됐다. 소련은 ‘노동자들의 국가’가 아니었다. 혁명의 일차적인 목표는 성과가 없었다. 대신 러시아혁명이 남긴 유산은 볼셰비키가 부차적인 문제로 간주한 것들이다. 그중 하나는 식민지들로 하여금 반제국주의 투쟁에 나서게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여성해방운동이다. 러시아에서 여성의 지위는 서부 유럽보다 앞서 크게 신장했다. 이혼에 대한 제약이 사라졌다. 또한 스탈린 등장 이전에는 소련 내 소수민족들의 ‘민족건설(nation-building)’을 정책적으로 후원했다.”
질의 :마르크스의 『자본론』 『공산당선언』과 러시아혁명 사이의 연결고리는 의외로 약한 것인가.
응답 :“그렇다. 동의한다. 물론 볼셰비키는 진심으로 자신들이 마르크스를 충실히 따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사회관, 사회적·경제적 변화의 희구, 도덕적 비전, 착취 철폐, 정의와 같은 것들은 모두 마르크스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마르크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잔혹한 현실에 직면했다. 마르크스는 빈곤하고 낙후된 나라가 풍요롭고 근대화된 나라가 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필요한 아이디어를 다른 곳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승전을 위해 자원을 총동원하는 독일 전시경제 체제는 레닌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독일식 국가관이나 중앙집권적 경제 통제 같은 것들은 마르크스와 별 상관없다. 마르크스가 러시아혁명의 발발이나 대량 학살 같은 혁명의 전개 양상을 볼 수 있었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러시아혁명 발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전쟁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이 자본주의를 위기로 몰아넣는다고 생각한 마르크스는 전쟁이 혁명의 산파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볼셰비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자본주의의 ‘최종적 위기’라고 판단했다.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마르크스의 이론보다는 내전, 경제적 낙후성, 국제적인 고립, 공산당을 혁명 정당에서 통치 정당으로 전환할 필요성이 볼셰비키 정권의 변화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1917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혁명의 목표와 성격이 극심하게 바뀌었다는 점에서 러시아혁명은 마르크스주의 혁명이 아니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
질의 :소련·동구권 공산주의가 붕괴한 원인의 뿌리는 러시아혁명 자체에 내재됐는가.
응답 :“그렇다고 볼 수 없다. 강한 권위주의 국가와 계획경제로 구성된 스탈린식 혁명 모델은 1930년대에서 제2차 세계대전까지 성공을 거두었다. 1960년대까지도 소련은 글로벌사우스(Global South·제3세계)에서 대안적 근대화 모델로 인식됐다. 소련 모델이 지리멸렬하게 된 것은 산업의 중심이 점차로 중공업에서 정보기술(IT)로 바뀌는 제3차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다. 지나치게 관료화된 소련은 혁신을 구현할 수 없었다. 소련이 붕괴한 근본적인 원인은 경제다. 소련은 새로운 발전단계에 진입한 자본주의와 경쟁할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소련의 붕괴가 필연적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에 필연은 없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보다 깊은 구조적인 힘’이 역사에 작용하지만 정치인·정부·사회세력, 심지어는 한 개인의 결정과 선택이 역사적 결과에 중대한 공헌을 한다. 정책 결정, 리더십 같은 정치적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을 동시에 추진한 고르바초프의 결정은 패착이었다. 중국의 경우에는 자본주의의 여러 요소들을 수용했다.”
질의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낙후된 러시아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발달한 서부 유럽에서 발발했다면 우리는 오늘 매우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을 것인가.
응답 :“전적으로 그렇다. 볼셰비키보다는 그들의 적(敵)인 멘셰비키가 ‘낙후된 나라에서는 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에 훨씬 가까웠다. 말년의 마르크스는 러시아 농민 공동체를 공산주의의 기반으로 삼는 구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구상은 ‘사회주의가 가능하려면 자본주의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는 마르크스 자신의 이론과 충돌한다.”
질의 :근현대사는 미국혁명·프랑스혁명·러시아혁명 등 정치혁명의 산물이다. 앞으로는 어떤가. 우리 앞에 혁명이 계속 나타날 것인가.
응답 :“그렇지 않을 것이다. 축적의 논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는 지구라는 행성의 미래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정치는 세계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 불의가 판치는 세상이기 때문에 대규모 시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하지만 혁명이라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모순이 폭발하는 가운데 미래를 향한 경쟁적인 비전을 두고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지극히 농축된 시간’의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질의 :마지막으로 우리 독자들에게 강조할 게 있다면.
응답 :“올해 나온 내 책은 혁명이라는 관념을 의심하는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썼다. 혁명이라는 엄청나게 복잡하고 격동적인 사건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러시아혁명을 왜곡하는 좌파나 우파의 ‘단순화된(simplistic)’ 해석을 모두 거부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러시아혁명의 어둡고 끔찍한 면을 드러냈다. 러시아혁명은 결코 오늘의 세계에서 정치적 변화를 위한 모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러시아혁명에는 억압과 착취로부터 세상을 해방시키려는 선의의 욕구도 있었다고 믿는다. 러시아혁명은 다른 혁명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었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왜’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를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김환영 기자 kim.whanyung@joongang.co.kr
11.09 러시아혁명과 인간, 그리고 종교
레닌혁명 100년, 종교개혁 500년
더 나은 세상 원하는 인간의 바람
사회주의 죽어도 마르크스 안 죽어
영국 자본주의 비결은 청교도 정신
참된 인간 혁명은 사회주의 아니라
종교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7년 11월 7일,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다. 러시아 왕조를 전복시킨 임시정부를 다시 무너뜨리고 마르크스 사상에 기초한 소련을 세운 것이다. 이들은 공산주의에서는 인간의 이기심이 없어진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믿고 실천에 옮겼다, ‘신성한 노동을 시장에 팔게 만든 물신화(物神化)의 주범’인 화폐를 없애고 생산수단의 국유화에 나섰으며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인간성의 기적이 일어나기는커녕 1921년의 공업 생산량은 혁명 이전 수준의 3분의 1로 줄었으며 1920년대 초 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아사하는 대재앙이 발생했다.
1992년 여름, 필자는 연구를 위해 처음 러시아를 방문했다. 사회주의의 거대한 실험이 실패했음이 확연히 드러난 현장이었다. 모스크바 곳곳에 녹슨 자동차와 버스, 심지어 기차까지 너부러져 있었다. 국영상점은 물건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먹을 것을 찾아 아파트 쓰레기통을 뒤지는 노인도 있었고, 지하철역 주변에는 생계를 위해 집에 있는 온갖 것을 가지고 나와 팔려는 사람들로 큰 난전이 만들어졌다. 흑빵 한 덩어리로 며칠을 연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절망감과 당혹감에 눈물 흘리는 러시아인도 많았다.
사회주의는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체제였다. 문맹률을 단시일에 낮추고 남녀평등을 신속히 제도화한 것 이외에는 그 공을 찾기 어렵다. 중국에서는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이라는 소련 사회주의보다 더 거짓된 선동으로 20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잘못된 체제와 악한 권력 때문에 고귀한 인간의 생명과 소중한 자유가 사라졌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체제가 바뀌면 인간의 이기심이 용해된다는 주장은 결과적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해악을 끼친 거짓말이 됐다. 사회주의가 붕괴하느냐 아니면 붕괴 없이 자발적으로 이행하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그 후 모든 사회주의 경제는 예외 없이 자본주의로 전환했다. 북한도 이 길을 가지 않을 도리는 없다.
사회주의가 실패했다고 해서 더 나은 세상을 원하는 인간의 바람이 죽은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환경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르크스는 죽지 않는다. 극소수의 귀족이 다수의 농민과 노동자를 압제했던 러시아가 바로 그랬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을 무르익게 한 현장인 영국에서는 그의 예견과 달리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 주된 이유는 높은 윤리의식으로 사회적 책무를 감당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검약과 성실, 위험을 감수하는 투자 정신으로 무장된 청교도의 후예들이 영국 자본주의를 낳았다고 분석한다. 존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에 영감을 받은 신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학교와 병원을 짓고 약자를 돌봤다. 중산층이 앞장섰고 귀족이 도왔으며 노동자 계층도 동참함으로써 나눔이 일상화됐고 배려가 생활이 됐다. 양심의 변화가 나라를 갈아엎었다. 참된 인간 혁명은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라 종교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 보여주는 좋은 본과 그들의 희생을 통해 배운다. 문제는 한국에선 그런 본과 희생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삶이 너무 고됐기 때문에 그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오로지 더 가지고자 하는 욕심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서 그렇다. 세계가치관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은 세계에서 물질주의가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이익을 위해 때로는 법을 ‘살짝’ 어기거나, 때로는 그 촘촘한 법망을 요리조리 잘 피하는 현란한 스킬의 사람들로 청문회장은 늘 소란하다. 국민은 본이 되는 사람을 찾고 싶은데 정치는 그 기회를 주지 않는다. 보수 정부에서 찢겨졌던 마음이 진보 정부에서도 무너진다.
올해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과 종교개혁 500주년이 겹치고 있다. 이 우연한 중첩이 한국 사회에는 범상치 않은 경고로 들린다. 최근 한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아들이 이어받게 한 결정은 한국에서 종교개혁의 정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종교가 현세의 이익을 초월하지 못하면 사회는 탐욕으로 부패한다. 종교의 초월성에서 나오는 본과 희생이 사회에서 사라지면 또 다른 혁명의 망령이 싹틀 수 있다. 그 망령은 러시아처럼 폭력적 혁명으로 나타나진 않겠지만 민주주의와 영혼 없는 자본주의의 위태로운 결합을 틈타 증오와 갈등, 포퓰리즘과 정치 불안으로 우리 주위를 배회하는 유령이 될 가능성은 상당하다.
김병연 서울대 교수·경제학부
11.10 레닌의 혁명열차 "역사는 미적거린 혁명가를 용서하지 않는다"
1917년 레닌 망명지에서 귀환하다
2월 혁명 뒤 10년 망명 생활 청산
러시아에서 거사의 방아쇠 당기려
"봉인열차" 타고 적대국 독일 종단
100년 전 4월 16일 밤 11시 기적 소리
환영 군중이 라 마르세예즈 노래
"사회주의 혁명 만세"로 응답
‘4월 테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레닌은 역사무대의 위대한 배우
기회를 잡는 신속성·열정 덕분"
2017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
볼셰비즘은 증오·선동의 정치학
소련 붕괴는 역사의 앙갚음이다
레닌은 혁명의 서사시다. 레닌은 세상을 뒤집어엎었다. 그것은 1917년 10월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이다. 그것은 20세기 역사에서 압도적인 드라마다. 그 속에 격렬함과 격정이 혼재한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레닌의 혁명열차다. 그해 4월 망명지에서의 귀국이다. 봉인(封印)열차가 등장한다. 8일간 3200㎞의 오디세이다. 나는 레닌의 열차 귀환을 나눠서 추적했다.
1917년 4월 9일(당시 러시아 율리시스력 3월 28일). 스위스의 취리히 중앙역은 긴장감이 흘렀다. 레닌과 망명자들의 집단 출현 때문이다. 그의 일행 32명은 열차에 올랐다. 그중에 레닌의 부인과 연인, 보좌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폴란드 사회주의자 칼 라데크가 있었다. 나머지 다수도 볼셰비키. 여행 비용은 각자 부담. 오후 3시 혁명으로 가는 열차가 출발했다. 그 전야는 이렇게 전개됐다.
스위스 취리히의 슈피겔가세 14번지. 레닌이 살았던 아파트에 기념판이 붙어 있다. “레닌은 1916년 2월 21일~1917년 4월 2일까지 살았다.” 1917년은 제1차 세계대전 3년째인 해다. 승전보는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거의 들리지 않았다. 식량 부족도 심각했다. 대규모 군중 시위가 결정타였다. 2월 혁명이 터졌다. 3월에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는 퇴위했다. 공화정의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핀란드역에 있는 293호 기관차. 1917년 세 차례 ‘혁명열차’로 가동했다.
레닌은 그해 1월 이렇게 낙심했다. “살아서 다가올 혁명의 결정적인 전투를 보지 못할 것 같다.” 그의 나이 47세. 한 달 뒤 사태가 반전했다. 투지가 살아났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것은 망명 생활의 청산이다. 그는 골몰했다. 터키로 통과, 비행기, 중립국 스웨덴 여권 위조. … 마땅치 않았다. 그는 적대국인 독일 통과의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레닌은 스위스 사회주의자 프리츠 플라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플라텐은 독일영사와 접촉했다. 레닌은 로드맵을 짰다. 스위스→독일→스웨덴→핀란드를 거치는 대장정이다.
독일 군부와 외무부는 레닌을 주목했다. 그는 ‘전쟁을 부르주아의 음모’라고 비판했다. 독일은 그를 활용키로 했다. 그것은 “전쟁반대론자 레닌의 귀국…임시정부 혼란…러시아군의 동부전선 이탈…독일은 서부전선에 집중”하려는 계산이었다. 독일은 안전 통과를 보장했다. 치외 법권과 급행열차 제공이다. 레닌은 적국의 친절을 역이용했다. “레닌은 끝없는 논쟁(endless polemics)을 벌였지만… 이론에 사로잡히기보다 지금의 실제 사건에 집중했다.”(에드먼드 윌슨 『핀란드역으로』)
▲핀란드역 광장의 레닌 동상.
혁명으로 가는 열차가 출발했다. 영국 BBC ‘마이클 포틸로의 유럽기차여행’은 이렇게 표현했다. “레닌의 여행은 열차 사상 가장 중대하고 긴박했다.” 일행은 독일 땅에 들어갔다. 망명객들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접경지 고트마딩겐역에서 열차를 바꿔 탔다. 레닌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그는 익숙한 가명, 레닌을 썼다. 독일은 ‘봉인열차(sealed train)’를 제공했다. 그 정체는 무엇인가. “그린 색 객차 한 량, 2등석 세 칸, 3등석 다섯 칸, 화장실 두 개. 출입문 4개 중 3개를 잠금.··· 독일군 장교가 통로에 분필로 선을 그었다. 객차 간 영토표시다.” (캐서린 메리데일 『열차 위 레닌』 2016년) 봉인의 낱말은 숨막힌다. 밀봉의 실상은 달랐다. 내 머릿속의 과장된 이미지는 허물어졌다.
▲레닌의 장갑차 이동. [중앙포토]
레닌은 독일 첩자라는 의심을 받았다. 처칠의 표현은 러시아로 침투하는 병원균(bacillus)이다. 봉인은 의심에서 벗어나려는 레닌의 의도와 맞았다. 하지만 완전 봉인은 아니었다. 정차하면 맥주와 신문을 사오기도 했다. 레닌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체포의 불안감 때문이다. 베를린역에서 20시간 머물렀다. 레닌과 독일 관리의 접촉설이 돌았다.
4월 12일 자스니츠역에 도착했다. 적국을 종단한 봉인열차는 정지했다. 그곳은 발트해 항구. 나는 봉인 객차의 실물이 궁금했다. 역사의 기묘한 소품이기 때문이다. 그곳 출신 친구인 한스 실러가 아쉬움을 표한다. “동독 시절 1977년 러시아 혁명 60주년 때 이곳에 레닌 기념관이 세워졌고 봉인 객차도 전시됐다. 독일 통일 뒤 객차는 다른 데로 옮겨졌다.” 이젠 여객선이다. 스웨덴 트렐레보리 항구까지 4시간 뱃길. 거의가 배멀미를 했다. 레닌은 달랐다. 고참 혁명가 파벨 악셀로트는 이렇게 말했다. “레닌은 하루 24시간 혁명에 몰두하고… 잠잘 때도 혁명을 꿈꾼다.”(버트램 울프 『혁명을 만든 세 사람』) 그 집념 속으로 배멀미는 침입하지 못한다.
▲2017년 혁명 100주년 기념,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전시된 장갑차. [중앙포토]
중립국 스웨덴의 분위기는 달랐다. 항구에서 말뫼로 이동했다. 사보이호텔에 스웨덴식 뷔페가 차려졌다. 일행은 걸신들린듯 음식을 해치웠다. 다음 여정은 스톡홀름. 시장과 좌파 사회주의 정당 대표들이 영접을 나왔다. 레닌은 백화점에서 옷과 구두를 샀다. 그들은 17시간 북행 열차를 탔다. 레닌은 자신의 권력 의지를 점검했다. 순교자의 여정이 아니다. 혁명의 방아쇠를 당기는 여정이다. 그는 "역사는 오늘 승리할 수 있을 때 미적거리는 혁명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마키아벨리식 ‘비르투’의 순간이다.
열차는 북쪽 하파란다에서 멈췄다. 마차 썰매를 탔다. 쌍둥이 마을인 핀란드의 토르니오역이다. 그 시절 핀란드는 러시아 자치령. 일행은 남행 열차에 올랐다.
나는 그 열차를 찾아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옛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 역무원은 친절했다. 기관차는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에 있다. 대형 유리관 안에서 늠름하게 버티고 있다. 동행한 무역상 이고르 예프세프(58)는 ‘혁명 100주년의 타임머신’이라고 했다. 그는 "293호 기관차는 1917년 세 차례 혁명열차로 작동했다. 레닌은 8월에 체포령을 피해 핀란드로 도피하고 10월 잠입 때 이 열차를 탔다. 4월에 탔던 기관차도 같은 기종”이라고 했다. 기념판이 붙어 있다. "1957년 핀란드 정부가 레닌의 여행을 기억하면서 기증한 선물.”
▲핀란드역에서 내리는 레닌을 볼셰비키 의장대가 도열해 환영하고 있다. 레닌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대다수 군중은 ‘레닌!’을 외쳤다.
100년 전 4월 16일 밤 11시. 열차는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에 도착했다. 기적소리가 울렸다. 적색 투쟁을 알리는 굉음(轟音)이다. "열차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힐긋 보였다. 기관차는 불뱀(fiery snake)처럼 구불구불하게 다가섰다. … 10년 해외 생활 뒤 레닌은 열차에서 러시아 땅 위로 내려왔다.”(로버트 서비스 『레닌』) ‘불뱀’은 묵시(黙示)론적 예언이다. 구질서는 저주받고 파괴될 운명이다.
플랫폼은 군인, 노동자, 군중들로 차 있었다. 그들은 ‘레닌!’을 외쳤다. 붉은 깃발이 펄럭였다. 군악대가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했다. 한쪽에서 ‘인터내셔널’노래도 불렀다. “우리의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리라.”- 역 앞 장갑차에 레닌이 올랐다. 그의 외침은 거침없다. “약탈적인 제국주의 전쟁은 전 유럽 내전의 시작이다. ··· 전 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 만세!” 장갑차가 이동했다. 깃발과 횃불이 뒤따랐다. 나는 핀란드역 앞 광장으로 갔다. 거대한 레닌 동상이 서 있다. 장갑차 포탑에서 포효하는 장면을 형상화했다. 레닌의 외침은 그곳 어디에 잔해로 남아 있는 듯하다.
▲1917년 레닌의 오디세이 8일간 3200㎞ 대장정
레닌은 볼셰비키 본부(크세신스카야 저택)에서 ‘4월 테제’를 내놓았다. 내용은 급진적인 기습이다. 부르주아적 영향력(멘셰비키) 제거, 임시정부 타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즉각 결행. 레닌은 선명한 언어로 설득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격랑이 계속됐다. 10월 25일(당시 러시아 달력, 11월 7일) 혁명이 완성됐다. “레닌이 역사무대의 위대한 배우가 된 것은 역사가 제공한 예상 밖의 기회를 잡는 신속성과 정력(quickness & energy) 덕분이다.”(폴 존슨 『모던 타임스』)
공산주의 소련은 레닌의 작품이다. 하지만 혁명은 타락했다. 거사의 수혜자는 극소수다. 대중은 탄압받는다. 레닌주의는 증오와 선동, 공포와 음모의 정치학이다. 레닌의 후계자 스탈린은 그것을 악성 변질시켰다. 스탈린은 혁명열차에 탔던 지노비예프와 라데크를 숙청했다. 볼셰비즘은 ‘역사의 신(神)’에 대한 거친 도전이었다. 역사는 앙갚음을 한다. 10월 혁명 74년 뒤인 1991년 12월. 소련은 붕괴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자스니츠=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S BOX] 혁명과 사랑, 레닌 열차에 부인·연인 동승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레닌의 열차는 ‘혁명과 사랑’을 압축한다. 탑승자 중에 레닌의 부인과 연인이 있었다. 나데즈다 크룹스카야(1869~1939·사진 위쪽)와 이네사 아르망(1874~1920).
두 사람 모두 레닌의 혁명 동지. 레닌과 크룹스카야는 마르크스 노동운동을 함께했다. 둘의 1895년 결혼(레닌이 한 살 적음) 장소는 레닌의 시베리아(슈셴스코) 유형지. 그해 크룹스카야도 다른 곳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하지만 레닌을 찾아간 것이다. 그는 평생 남편을 뒷받침했다. 이네사는 프랑스의 부르주아 출신이다.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네사 아르망
그 후 이네사는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배웠다. 1910년에 망명객 레닌을 파리에서 만났다. 이네사는 외국어에 능숙했다. 레닌의 저서 번역과 통역, 밀사를 맡았다. 레닌은 이네사를 사랑했다. 크룹스카야도 이 관계를 인정했다. 그것은 미묘한 삼각관계였다. 혁명열차의 도착 뒤 삼각관계는 대충 정리됐다. 다음 해 이네사는 콜레라로 숨졌다. 레닌의 상심은 컸다. 레닌 부부는 장례식에 참석했다.◎
서울=채인택 국제전문기자, 상트페테르부르크=이기준 기자 ciimccp@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