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 2022-03/ 문화일보
03월 02일(수) 사전투표 명암

이도운 논설위원
사전투표 제도가 처음 도입된 나라는 미국이다. 행정 전산시스템을 갖춘 2000년부터 일부 주(州)에서 유권자 편의를 위해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점점 늘어나 50개 주 가운데 34개 주가 채택하고 있다. 주에 따라 선거 50∼1일 전 사이에 운영된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민주주의 확산을 상징하기 위해 우주 정거장에 투표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일본도 선거일 6∼2일 전 조기투표가 가능하며, 유럽연합과 캐나다 등 대부분의 민주 국가에서 사전투표가 이뤄진다.
우리나라에서는 201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때 처음으로 기존의 부재자 투표를 대체하는 사전투표가 도입됐다. 전국 단위로는 2014년 제6회 지방선거가 처음이다. 당시 투표율은 11.49%로 처음부터 높은 호응을 받았다. 이후 지난 2016년 총선 12.19%, 2017년 대선 20.06%, 2018년 지방선거 20.14%, 2020년 총선 26.69% 등으로 계속 상승하는 중이다.
사전투표의 장점은 편리하다는 것.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투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해석이 엇갈리기는 하지만, 사전투표가 투표율 상승에 기여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투표율이 높을수록 선출된 공직자의 정통성과 정당성도 커진다고 정치학자들은 평가한다. 반면, 사전투표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우선, 사전투표 뒤에 커다란 정치적 사건이 터질 경우 유권자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바꿔도 투표에 반영할 수 없는 것. 또 법정 선거운동 기간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사전투표를 하면 실제로 후보자들이 유권자를 상대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지게 된다. 특히, 인지도가 낮은 정당이나 무소속 후보는 더 불리해진다.
그동안 사전투표는 상대적으로 젊은 층이 선호해왔다. 일찍 투표하고, 본투표 당일에는 여행을 가거나 취미 활동을 즐기는 패턴을 보였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청년층 지지가 높았던 더불어민주당 계열은 사전투표에서, 장년층 이상 지지를 많이 받는 국민의힘 계열은 본투표에서 강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번 대선 들어 상황에 변화가 오고 있다. 2030 세대의 보수화, 코로나로 인한 본투표 기회 박탈 우려 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 사전투표율은 30%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어느 정당 후보에게 유리할까.
03월 03일 뒤죽박죽 전기차 보조금

문희수 논설위원
세계 전기차 시장은 본격적인 무한경쟁이다. 현대차와 기아차를 비롯, 폭스바겐·GM·토요타·벤츠·아우디 등 글로벌 업체들이 올해 100종이 넘는 새 모델을 쏟아내며 치열한 경쟁을 예고했다. 롤스로이스·벤틀리·페라리 등 초일류 차들까지 전기차 전환을 선언하고 나섰다. 지난해 한국 전기차 신규등록 대수는 처음으로 10만 대를 넘었다. 중국·미국·독일·프랑스·영국·노르웨이와 함께 ‘10만 클럽’ 국가다. 전기차는 총 23만1000대로 늘었다. 테슬라와 현대·기아차가 양분해온 국내 시장에 벤츠·아우디·BMW 등 독일 3사와 볼보 등이 본격 도전할 태세다.
이런 판에 환경부는 올해 국고 보조금을 줄였다. 1대당 최고 800만 원이던 것을 700만 원으로, 보조금 100%를 주는 차값 상한선은 6000만 원에서 5500만 원으로 각각 내렸다. 지방자치단체들이 별도로 주는 지원금도 줄었다. 환경부는 가격 인하를 유도하겠다고 하지만, 미국·일본·독일 등이 보조금을 늘리는 것과는 정반대다.
더구나 중국을 필두로 미국·일본까지 한국과 배터리 경쟁이다. 특히 중국은 배터리값을 절반으로 낮춰 시장을 장악하겠다고 호언한다. 한국 배터리는 중국의 리튬 등 필수 소재 독점에 발목이 잡혀 고전 중이다. 세계 원자재 가격 자체가 크게 올라 올해 배터리값은 급등이 불가피하다. 배터리값이 40%나 차지하는 전기차 가격에 인상 압력이 커질 게 뻔하다.
최근 자동차연구원은 국가 보조금에 따라 전기차 판매량이 좌우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지역별로 최대 650만 원이나 차이 나는 지방 보조금조차 방치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전기차 탄소 배출량이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 ‘보조금 때문에 이사 가라는 말이냐’는 등 불만이 쏟아진다. 중국은 자국산 전기차를 대놓고 차별 우대하면서까지 시장을 장악하려 든다. 문 정부는 전기차가 미래 동력이라면서 자원 개발·확보는 외면한 채 지원 확대는커녕 보조금 축소·가격 부담 전가 등 역주행이다. 선심성 예산은 펑펑 쓰면서 충전소 설치 등 인프라는 아직도 태부족이다. 소비자들은 예약하고도 긴 줄을 서며 1년까지 대기해야 해 보조금이 소진될까 봐 전전긍긍한다. 자칫 중국만 좋은 일 시킬 수 있다.
03월 04일 변심 가능 표심 26%

박민 논설위원
유권자는 언제 투표할 후보를 결정할까. 20대 대선을 6일 앞두고 발표된 문화일보 여론조사(3월 1∼2일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43.7%,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41.9%, 국민의당 안철수 6.0%, 정의당 심상정 2.2%의 지지율을 보였다. 응답자 93.8%가 지지 후보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 지지 후보를 바꿀 수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22.2%, ‘모름·무응답’이 3.8%였다. 26%가 지지 후보를 확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지난 1월 24∼25일 조사의 39.6%보다 감소한 수치지만 선거를 1주일 남겨둔 시점에서는 높은 비율이다. 특히 윤석열·안철수 단일화로 안 후보 지지층, 부동층, 충성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윤·이 후보 지지층 일부가 선택을 바꿀 수 있다.
투표 관련 연구는 예상보다 많은 유권자가 선거가 임박해 표심을 결정하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0대 총선에서 투표한 유권자 1158명을 대상으로 표심 결정 시점을 조사한 결과, 선거일 3주 전 30.7%, 1∼2주 전 20.6%, 투표일 1주일 이내가 48.7%에 달했다. 특히 응답자 중 6.9%는 고의적으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응답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연령대는 표심 결정 시기에 중요 변수다. 서울신문 조사(2월 25∼26일)에 따르면 지지 후보를 바꾸겠느냐는 질문에 20대 42.3%, 30대 34.3%가 ‘그럴 수 있다’(전체 평균 21.4%)고 답했다. 50대가 13.6%, 60세 이상이 10.2%인 것과 대비된다.
컬럼비아대 폴 라자스펠트 교수는 저서 ‘국민의 선택’에서 ‘지지 정당을 바꾼 유권자는 선거 막바지까지 최종 결정을 유보하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이들은 선거 이슈에 영향을 받는 합리적이고 사려 깊은 유권자가 아니라 선거 당일 마지막에 만난 사람에 의해 지지 후보를 결정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이번 대선에서는 정권교체를 지지하는 유권자 중 일부가 지지 정당을 바꿀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선거 결과를 분석해 보면 후보자 자질·공약 평가 등 이성적 기준보다는 인물 등 외모, 호감도, 후보자와의 공감 등 감성적인 요소가 표심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투표용지의 맨 위에 올라 있는 후보가 실제 지지율보다 높은 득표를 하며, 스윙보터일수록 투표용지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03월 07일(월) 오페라 ‘오네긴’의 비극

이미숙 논설위원
러시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은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이다.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그의 작품은 대개 오페라로 작곡돼 인기를 끌었는데 미하일 글린카의 ‘루슬란과 루드밀라’,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오네긴’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오페라로 세계 각지에서 자주 공연되면서 차이콥스키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가 됐다. 지난 2월 베이징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올림픽위원회 선수들이 금메달을 땄을 때 국가 대신 연주된 곡도 차이콥스키의 피아노협주곡 1번 도입부 멜로디였다.
세계 최대 오페라 극장인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피터 겔브 총감독은 블라디미르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우크라이나와의 연대를 위해 푸틴을 지지하는 예술가, 푸틴이 후원한 예술가는 배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출신 소프라노 안네 네트렙코 등이 공연에서 배제됐지만, 예정됐던 오페라 ‘오네긴’ 공연은 25일부터 시작한다. 러시아가 낳은 불후의 명작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네긴’은 푸시킨과 차이콥스키가 우크라이나에 머물 때 탄생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푸시킨은 체제 저항시 때문에 페테르부르크에서 카미얀카(러시아명 카멘카)로 추방됐을 때 이 작품을 썼다. 차이콥스키는 결혼한 누이동생이 살던 카미얀카에서 해마다 휴양을 했는데 오페라 ‘오네긴’도 이때 작곡됐다.
우크라이나주재 일본 대사를 지낸 구로카와 유지가 쓴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에 따르면 오네긴이 탄생한 곳은 카미얀카의 귀족 바실리 다비도프의 영지다. 카미얀카는 키이우(키예프) 남쪽으로 100㎞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다비도프 영지에는 푸시킨과 차이콥스키 기념 박물관도 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주변은 러시아 예술혼의 산실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위대한 러시아 재건 망상에 사로잡힌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키이우 장악을 위해 연일 폭격을 하고 있다. 차이콥스키가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라고 극찬했던 카미얀카의 ‘오네긴’ 산실이 탈레반에 폭파된 바미얀 석불처럼 될까 걱정이다.
03월 08일 lT 강국의 원시적 투표함

이현종 논설위원
지난 5일 실시한 코로나 확진·격리자 사전투표 과정에서 선거사무원이 확진자가 기표한 투표용지를 비닐봉지나 라면 상자, 소쿠리 등에 담아 운반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선관위가 직접·비밀 투표를 보장하지 못한 것은 위헌·불법의 문제이지만, 그에 앞서 유권자의 소중한 한 표가 그렇게 취급됐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다.
선관위가 별도의 투표함만 만들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1948년 건국부터 1962년까지는 목재로 만든 투표함이 사용됐다. 열쇠로 여닫을 수 있도록 했는데 나무와 나무 사이에 틈이 있어 투표지를 넣을 수 있는 등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3·15 부정선거 이후 1963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철제 투표함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무게가 20㎏에 달해 옮길 때 장정 2∼3명이 들어야 할 정도였다. 1991년 이후에는 조립식 알루미늄 투표함으로 바뀌었다. 무게는 절반 이하로 줄었고 귀퉁이 안쪽에 요철 막대기를 대어 투표용지를 끼워 넣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인구 급증으로 유권자가 많아지면서 비용이 증가하자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골판지 투표함이 등장했다. 일회용 조립식인 이 투표함은 실제로 제작과 보관·관리 부담이 줄어들긴 했지만 눈·비가 오면 투표지가 젖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게다가 2012년 제19대 총선 당시 서울 강남을 선거구에서는 투표함 바닥에 테이프가 붙어 있지 않은 등 봉인에 문제가 발생했다. 투표함이 찌그러지거나 틈새로 표를 넣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2012년 제18대 대선부터 지금 쓰고 있는 불투명 강화 플라스틱 투표함으로 교체했다. 강화 플라스틱 투표함 제작 비용은 약 6만 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투표함에는 고유번호가 내장된 전자칩을 부착했다.
프랑스는 투명한 플라스틱 재질로 만든 투표함을 쓰고 있다. 유권자들이 투표함에 얼마나 많은 투표용지가 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할 수 있다. 투표용지는 봉투에 넣어 투표함에 넣기 때문에 비밀성은 유지된다. 투표함 위에 달린 작은 레버를 당기면 틈이 열리고 이곳에 투표용지를 넣는데 레버를 당길 때마다 투표자 수가 자동 집계된다. 더 이상 부정선거 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정비가 시급하다.
03월 10일 푸틴의 ‘선군정치’

이신우 논설고문
우크라이나 정부가 얼마 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노리는 러시아 측 암살 부대의 작전을 저지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체첸의 독재 지도자 람잔 카디로프가 투입한 체첸의 엘리트 부대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대통령 암살단을 파견한다는 외신은 여러 차례 이어졌던 만큼 충격적인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그다음 발표 내용은 듣는 이를 경악하게 한다. “우리는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는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관계자들로부터 정보를 받았다”고 공개해 버린 것이다. FSB는 구소련 시절 국가보안위원회(KGB)의 후신이다. 그렇다면 러시아 내부에서 크렘린의 독단에 반기를 들었다는 말 아닌가.
하긴 크렘린 내부의 권력 부침을 추적해 왔다면 우크라 정부 측 해설도 마냥 허구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구소련 시절이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집권 중반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KGB와 FSB 등 정보 기구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였다. 푸틴은 KGB 출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1990년대 체첸 사태를 시작으로 2010년대 내내 FSB는 온갖 실책을 거듭해 왔다. 우크라이나 돈바스 분쟁, 시리아 내정 간섭 등의 심리전이나 정보전에서도 패배를 거듭했다. 그러자 푸틴은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이 이끄는 러시아 군부에 뒤처리를 떠맡겼고, 그때마다 쇼이구는 보란 듯이 작전을 성공시켰다. 크름(크림)반도 합병,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승리 모두 그 덕분이었다.
이를 계기로 푸틴은 FSB를 외면한 채 외골수 ‘선군정치’로 돌아서기 시작한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에 군부를 앞세운 것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성공 신화를 써 온 러시아 군부가 우크라이나에서 전례 없는 굴욕을 당하고 있다. 푸틴에겐 ‘종말의 시작’이라는 말까지 거론될 정도다. 이번 사태가 끝나면 푸틴이든 군부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만일 군부가 책임을 뒤집어쓴다면 이는 종국적으로 FSB의 승리일 수밖에 없다. 현재로써는 FSB로부터 정보를 받았다는 우크라이나 측의 발표를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이르다. 그러나 이게 사실이라면 크렘린 내에 심각한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03월 11일 싱어송라이터 박창근

김종호 논설고문
걸출한 싱어송라이터 이정선이 “발라드란 이런 것”이라며, 그 전범을 보여주기 위해 작사·작곡·노래한 곡을 담아 1988년 발표한 제8집 앨범의 명곡 중 하나는 ‘외로운 사람들’이다. 다른 유명 가수들이 끊임없이 리메이크해 부를 때마다, 새삼 감동을 불러일으켜 왔다. TV조선의 경연 프로그램 ‘내일은 국민가수’에서, 지난해 12월 23일 싱어송라이터 박창근(50)이 우승하는 과정에 불러 제작진까지 눈물바다를 이루게도 했다. ‘거리를 거닐고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얘기들을 나누다가/ 집에 돌아와 혼자 있으면/ 밀려오는 외로운 파도/ 우리는 서로가 외로운 사람들/ 어쩌다 어렵게 만나면/ 헤어지기 싫어/ 혼자 있기 싫어서/ 우린 사랑을 하네’ 하는 노래다.
심성도 맑은 박창근은 고(故) 김광석 키즈다. 대구대 재학 당시 김광석 콘서트에 가서 받은 감동이 계기였다. 1999년 자작곡으로 제1집 앨범을 내고, 뒤이어 ‘김광석 노래 따라 부르기’ 대회 심사위원도 맡았다. 김광석 노래들로 꾸민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 주연도 했다. 그래도 무명 가수였다. 음반을 낸 노래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만들어 놓고 발표하지 못한 노래가 300곡에 이르렀다. 그런 춥고 배고픈 상황도 버텨냈다. “주목받으며 생활하는 것도 필요 없고, 노래를 안 하면 안 되는 사람이 있더라. 죽을 때까지 그러다가 죽어도 되는.” 방송에 나와 노래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끝까지 믿고 응원한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해 드리려고 참여한 것이 ‘내일은 국민가수’ 경연이었다. 그런 이유로 결승에서 눈물을 억누르며 부른 자작곡이 ‘엄마’다. ‘찬바람이 무섭던 날/ 엄마 외투에 숨어/ 집으로 가던 그 밤/아직 생각이 나요/ 작은 창 하나 단칸방이었어도/ 엄마의 가슴속은/ 참 고요하고 따뜻했어요’ 하고 시작한다.
그의 자작 명곡은 이 밖에도, ‘춤추는 공허’ ‘깊게 더 깊게’ ‘별 되어 내리네’ ‘푸른 바다와 그대 꿈에 관한 이야기’ ‘무지개 내린 날개 위의 순간’ 등 많다. 그 노래들을 들으며, 그의 이런 말도 곱씹어 볼 만하다. “내가 구현하려는 음악의 주제는 존 레넌의 ‘이매진(Imagine)’처럼 ‘평화와 공존’이다. 나를 민중가수라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나는 대중가수다. 그 누구의 편도 아닌 노래 편이다.”
03월 14일(월) 대통령직 인수위 小史

이도운 논설위원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명칭대로 대통령제 국가에서만 존재하는 독특한 기구다.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선거가 끝난 뒤 총리가 상징적 국가원수인 국왕이나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즉시 임기가 시작된다. 내각제 국가는 입법부와 행정부가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인수인계 작업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내각제 국가의 주요 정당은 ‘예비내각’을 운영해 총리가 임명되면 새로운 내각이 사실상 자동적으로 구성되는 시스템이다.
1776년 독립 이후 줄곧 대통령제를 유지했던 미국에서도 인수위가 생긴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미국은 초기에 의회 중심으로 정치가 이뤄졌기 때문에 행정부가 상대적으로 작았고, 대통령실은 비서진 몇 명으로 구성된 단출한 조직이었다. 1912년 당선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취임 전 통신이 되지 않는 버뮤다로 휴가를 떠나 곧 출간할 저서의 서문을 썼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산업화와 두 차례 세계전쟁으로 미국의 국력이 커지면서 대통령이 국내는 물론 전 세계를 상대로 해야 할 업무가 크게 늘어나 미리 준비할 필요가 생겼다. 결국, 1952년 당선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후보가 처음으로 대통령직 인수팀을 만들었다. 1963년에는 대통령직인수법(The Presidential Transition Act)이 제정되면서 인수 조직 운영이 공식화됐다. 이 법의 제정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당선 직후 인수팀 운영에 개인 돈 30만 달러를 지출했던 데서 비롯됐다. 거부인 케네디에게는 큰 지출이 아니었지만, 국정 수행 비용은 정부가 법적 근거를 마련해 지출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87년 개헌 이후 실시된 12월 대선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된 뒤 ‘취임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전두환 대통령 측에서 정권 이양 등에 거부감을 보였기 때문이다. 1992년 김영삼 대통령 당선 뒤엔 당선인 측에서는 ‘정권인수위원회’, 퇴임하는 노 대통령 측에서는 취임준비위를 요구해 ‘대통령직인수위’로 절충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때까지는 대통령령에 근거를 두었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을 계기로 ‘대통령직 인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곧 출범하는 인수위는 국민의힘·국민의당 ‘공동 인수위’ 형식.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하다.
03월 15일 ‘일자리 통계’ 눈속임

문희수 논설위원
문재인 정부에서 고용 통계는 집값 통계와 함께 늘 논란이다. 세금으로 단기 임시직 일자리를 만들어 고용 부족을 땜질하는 바람에 통계 착시를 부르는 탓이다. 문 정부가 ‘고용 서프라이즈’라고 호들갑을 떨 때마다 반론이 제기되는 이유다.
지난 1월 고용 통계도 마찬가지다. 취업자 수가 지난해 1월보다 113만 명이나 늘었으니 수치상으로는 말 그대로 깜짝 놀랄 만하다. 청와대와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여지없이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전혀 딴판이다. 비교 대상인 지난해 1월에 취업자가 100만 명이나 감소한 데 따른 기저효과 덕분이었다. 분자가 커져서가 아니라 분모가 작아서 생긴 통계 착시라는 얘기다. 2년 전인 2020년 1월과 비교하면 불과 15만 명(0.57%) 늘었을 뿐이다. 게다가 늘어난 취업자의 46%는 60세 이상 고령자다. 50대까지 포함하면 67%다. 반면 일자리가 절박한 20대는 7.8% 늘었고, 특히 2020년 1월에 비하면 고작 0.5%(1만8000명) 증가하는 데 그쳤다. 더구나 30대 취업자는 2020년 1월보다 25만1000명이나 적다. 사실 전체 취업자 수도 지난해 12월부터 두 달 연속 마이너스였다.
일하는 시간이 짧은 임시직도 상당수다. 통계청장 출신인 유경준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주당 1시간만 일해도 취업자로 잡는 통계청과 달리 주당 40시간인 전일제(FTE)로 환산해 일자리를 계산하면 1월 취업자 수는 통계청이 발표한 2435만 명이 아니라, 2426만 명으로 줄어든다. 코로나 확산 전인 2019년 1월보다 98만 명 적다. 한국경제연구원은 문 정부가 출범한 2017년부터 2021년까지 FTE 환산 일자리가 총 209만 개나 감소했다고 한다.
세금 일자리가 만드는 통계 착시가 혹세무민 수준이다. 고용 절벽이 20대를 넘어 30대로까지 확산하는 현실을 가리는 탓이다. 문 정부는 세금을 쏟아부어 알바 수준의 일자리, 1년도 못 가는 단기 일자리를 만들어 줄어드는 일자리를 땜질하며 눈속임을 해왔다. 이런 통계 착시·통계 분식은 실무 공직자들이야 꿰뚫어 보고 있겠지만, 외부에선 전문가가 아니면 알아채기 어렵다. 곧 나올 2월 고용 통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5월 10일 출범할 새 정부는 청년 일자리를 늘리려면 이런 고용 분식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03월 16일 人事가 가른 항우·유방 쟁패

박민 논설위원
새 정부 출범 때 으레 등장하는 말이 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다’. 인사는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리더의 핵심 자질이다. 인사는 인재를 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방은 항우에게 승리한 이유에 대해 “나는 전략에서는 장량을 따르지 못하고, 내정에서는 소하에 미치지 못하고, 군대 지휘에서는 한신에 따르지 못하지만, 이들을 쓸 줄 알았다. 항우는 인물이 많았지만, 한 사람도 제대로 쓸 줄 몰랐다”고 설명했다.
인사의 첫 단계는 인재를 보는 눈이다. 당나라 때 관리 임명 기준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용모·언변·문장력·판단력)’이 제시됐다. 그러나 공자도 못생겼다는 이유로 푸대접한 제자 자우가 명성을 얻자 크게 뉘우친 적이 있었다. 인재를 고를 때는 측근의 조언을 구하기 마련인데, 측근이 어리석거나 사심이 있으면 판단을 그르칠 수 있다. 그래서 제왕학에서는 원리 원칙을 가르쳐주는 스승, 직언을 해주는 측근, 대등한 위치에서 조언해주는 막빈 등을 주변에 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재를 구할 때는 전 정권이나 특정 정파 사람인지를 따져선 안 된다. 최근 리더십과 관련해 새롭게 주목받는 태종 이방원은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인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인재로 꼽히는 인물이면 이전 정권 사람(조준)이든, 고려 충신 이색의 제자(권근)든 가리지 않고 중용했다.
발탁한 인재는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한다. 우수한 인재가 하찮은 일을 하게 하고, 하찮은 인물에게 큰일을 맡기면 인재도 잃고 권력도 잃는다. 역량을 발휘할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커뮤니케이션은 기본이다. 문턱을 낮춰 자주 대화함으로써 긍지와 보람을 느끼게 해야 한다. 싫은 소리일수록 경청해야 한다. 그러나 ‘군주 자신이 현명하지 않으면 훌륭한 조언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커뮤니케이션도 결국 지도자의 자질에 달려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 13일 “대통령직인수위 구성 단계에서부터 여성 할당이나 지역 안배를 배제하고 각 분야 최고의 경륜과 실력 있는 사람을 모시겠다”고 밝혔다. 인사의 첫발은 제대로 내디뎠지만, 합당과 여소야대 정국 등으로 앞길은 첩첩산중이다.
03월 17일 영화 ‘대부’ 50년

이미숙 논설위원
말런 브랜도(1924∼2004)와 알 파치노(81)는 영화 ‘대부’(The Godfather)를 빛낸 주인공이다. 이탈리아계 마피아 가족의 서사를 다룬 마리오 푸조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이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치명적 매력을 발산한 두 배우의 명연기 덕분이다. 이 영화는 1972년 3월 중순 뉴욕에서 개봉된 후 미국 및 전 세계 각국에서 찬사를 받으며 흥행몰이를 했다. 당시 수익은 2억5000만 달러(약 3100억 원)로 기록되는데, 요즘 환율로 환산하면 16억 달러(약 2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제작진은 대부 첫 편이 성공하자 ‘대부2’(1974) ‘대부3’(1990)을 잇달아 내놨다.
대부는 브랜도와 파치노 덕분에 미국의 대표적 명화가 됐지만, 정작 영화제작사인 파라마운트는 이들을 캐스팅하는 데 막판까지 주저했다는 연구 서적이 최근 발표돼 관심을 끈다. 미 공영 라디오 npr에 따르면, 작가 마크 실은 ‘대부’ 제작 과정을 다룬 신작에서 “파라마운트사는 브랜도 캐스팅에 반대하며 찰스 브론슨, 버트 랭커스터, 오슨 웰스를 대안으로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원작자 푸조는 브랜도를 돈 콜레오네 역으로 끝까지 밀어붙여 영화사가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푸조는 브랜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은 돈 콜레오네의 내적 강인함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배우”라고 썼다. 콜레오네의 아들 마이클 역에 대해서도 파라마운트사는 당시 인기가 높았던 로버트 레드퍼드나 더스틴 호프먼, 라이언 오닐을 캐스팅하려 했는데, 이번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결사반대했다. 코폴라는 파치노가 출연한 뉴욕 브로드웨이의 연극을 본 뒤 “마이클에 딱 맞는 배우”라고 낙점했다는 것.
파치노는 뉴욕타임스와 가진 대부 5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마이클 역은 내게 복권 당첨과 같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대부 덕분에 뉴욕의 신인 연극배우에서 단숨에 할리우드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파치노는 이지적이고 냉철한 마이클이 폭력의 세계에서 절제력을 발휘하며 가문을 지켜내는 과정을 그렸다. ‘대부’는 마피아를 미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런데도 인간은 누구나 운명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절제력을 가진다면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명작이다.
03월 18일 대통령-당선인 관계 흑역사

이현종 논설위원
대통령과 당선인은 두 달여 불편한 동거를 한다. 법적 권한은 대통령이 갖고 있지만, 관심의 초점은 미래 권력인 당선인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1987년 이후 대통령과 당선인의 관계가 가장 좋았던 것은 김영삼(YS) 대통령과 김대중(DJ) 당선인의 경우다. 대선 기간 중 YS는 이회창 여당 후보보다 DJ를 암묵적으로 지원했다. 대표적으로 DJ 비자금에 대한 검찰 수사를 중단시켰다.
1997년 12월 20일 YS와 DJ는 청와대에서 배석자 없이 1시간 동안 오찬을 함께했다. 선거일 이틀 뒤였다. 회동 이후 양측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특별사면을 비롯한 6개 사항에 대한 합의문을 발표했다. 눈에 띄는 점은, 김영삼 대통령이 먼저 사면 의사를 밝힌 뒤 당선인의 동의를 구하는 형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회동 열흘 뒤 다시 부부 동반으로 만났고, DJ는 취임 때까지 YS와 매주 주례 회동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2년 12월 28일 박근혜 당선인을 청와대에서 배석자 없이 40분 동안 만났는데, 회동 후 양측은 “박 당선인이 민생예산 통과를 요청했고, 이 대통령은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다”는 한 줄 브리핑이 전부였다. 이후 최서원(최순실) 씨 국정농단 사건 때 최 씨가 가지고 있던 문건에서 당시 회동의 세부 시나리오와 대화 내용이 공개됐다. 박 당선인은 이 대통령에게 국채 발행을 요청했고, 북한 도발 등 안보 문제도 논의했다고 한다.
가장 껄끄러웠던 경우는 2007년 12월 28일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당선인의 만남. 이 당선인은 회동 서두에 “왜 제 뒷조사 같은 거 하고 그러십니까”라며 당시 국가정보원이 이 당선인과 가족의 뒤를 캔 문제를 지적했다. 이에 노 대통령이 화를 내며 “절대로 그런 짓 한 적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회담장 밖에도 다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청와대 기록물 반출, 박연차 게이트 수사 등으로 악연을 이어 오다 결국 수사와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졌다.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당선인의 16일 청와대 오찬 회동이 4시간 전에 취소됐다. 자신이 임명한 검찰총장이 야당의 대선 후보로 당선돼 만나게 된 문 대통령의 심경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회동’일 것이다. 두 사람의 악연(惡緣)이 여기서 끝날지는 의문이다.
03월 21일(월) 산업은행 일탈과 ‘부산행’

이신우 논설고문
“가자, 20년!”
지난 2020년 서울의 한 특급 호텔에서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전기(傳記) 만화책인 ‘나의 인생 국민에게’ 발간 축하연이 열렸다. 코로나19 사태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행되는 와중이라 축하연에는 45명만 초대됐다. 박병석 국회의장, 이낙연 민주당 대표 등 정치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속에 금융권 출신이 두 명 끼어 있었다.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과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이었다. 놀랍게도 건배사를 제안한 이는 이 산은 회장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저한테 가장 절실하게 다가온 말 중 하나는 (이해찬 전 대표의) 우리가 20년 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면서 “가자!”를 선창했다. 다른 참석자들도 “20년!”이라며 화답했다.
산업은행은 기업 금융을 주도하는 국책은행이다. 이런 국책기관이 특정 정당의 장기집권 플랜에 박수를 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경제 공약인 산업은행 부산 이전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나섰다. 차기 정부의 핵심 정책에 출범 전부터 반기를 들고일어난 데 대해 윤 당선인은 곧바로 “산업은행은 기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국가 전체의 균형발전이라는 큰 틀에서 사안에 접근하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라고 질타했다. 윤 당선인은 이미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국가 불균형 해소에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는 중이다. 산업은행의 바람은 실현되기 어려울 듯한 분위기다.
이동걸 회장으로서는 20년 장기집권 동참 발언까지 하며 충성을 표시했으니 국회 다수파인 민주당 측에서 원호사격이라도 해주기를 바라는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지역균형발전 캐치프레이즈야말로 민주당의 핵심 정강·정책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국토균형발전을 내세우며 혁신도시를 조성하고 공공기관을 대거 지방으로 이전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 정부는 노무현 정부보다 더 발전된 국가균형발전 정책을 더 강력하게 추진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런 민주당이 이 회장을 편들어 주기 위해 자기모순을 감행하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이야기다. 국토균형발전에 기여하는 산업은행의 몫이 작지 않을 것이다.
03월 22일 싱어송라이터 김종환

김종호 논설고문
‘생명의 근원’인 물은 천변만화(千變萬化)한다. 그중에서 안개는 가장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남한강이 흐르는 경기 양평군 양평읍 물안개공원길 ‘물안개공원’, 광주시 남종면 ‘팔당 물안개공원’을 찾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도 달리 없다. 양평군은 그 공원에 걸출한 싱어송라이터 김종환(56)의 ‘사랑을 위하여’ 노래비를 2009년 건립해,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오래 멈추게 한다. 무명 가수이던 김종환은 승용차를 몰고 이 강변을 새벽에 지나가다가, 너무 고단해서 잠시 길가에 정차해 눈을 붙인 뒤에 깨어나 바라본 새벽 물안개 풍경에 반했다. 그 자리에서 떠오른 가사와 멜로디로 노래를 만들어 불러, 1997년 제3집에 담았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물안개 피는 강가에 서서 작은 미소로 너를 부르리/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여도 우리 둘은 변하지 않아’ 하고 시작한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애창곡이기도 했던 그 노래 말고도 그가 작사·작곡해 부른 명곡이 많다. 다른 가수들이 끊임없이 리메이크해 재발표한다. ‘사랑의 시인’ ‘팝 발라드의 거장’ 등으로 불리는 배경이다. 음악다방 DJ이던 그는 1985년 자작곡 ‘쉴 곳 없는 나’로 데뷔했지만, 그의 작사·작곡인 ‘미니스커트’를 1990년 민해경이 불러 크게 히트한 뒤로도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진 못했다. 1995년 제2집 앨범 ‘바람 없는 나’를 냈을 때까지도 그랬다.
그의 출세작은 첫 제2집 버전이 주목받지 못해, 1996년 재편해 다시 내놓은 제2집에도 담았던 표제곡 ‘존재의 이유’다. ‘영원히 내 곁에’ ‘내가 가야 할 길’ ‘쉴 곳 없는 나’ 등도 수록된 그 앨범이 도시의 길거리 손수레에서 카세트테이프로 폭발적으로 팔리며, 그 노래는 ‘길보드 차트’부터 ‘점령’했다. 그해에 시작해 1997년 종영된 TV 주말연속극 ‘첫사랑’의 OST로도 사용됐고, 사랑을 노래한 대표적인 불후의 명곡 반열에 올랐다. 매년 3월 22일은 1992년 유엔이 지정한 ‘세계 물의 날(World Water Day)’이다. 천변만화하면서 절대 가치를 지닌 물과 함께, 김종환 음악의 주제이면서 다양한 차원에서 소중한 사랑의 영원성도 생각하게 하는 날일 성싶다.
03월 23일 돌아가는 삼각지와 이태원 클라쓰

이도운 논설위원
서울 용산구에는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대표적 마을이 두 곳 있다. 삼각지와 이태원. 이인선이 가사를 쓰고 배상태가 곡을 붙여 1967년 배호가 노래한 ‘돌아가는 삼각지’는 큰 인기를 얻어 나훈아를 비롯한 수많은 가수가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사모하는 여인을 삼각지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자 돌아가는 남자의 비련을 담은 노래다. 삼각지의 공식 주소는 용산구 한강로 1가로, 1906년 러일전쟁 후 건설된 경부선 철도와 한강로가 교차하면서 만들어낸 지형이 삼각형 모양이어서 붙은 별칭이라고 한다. 또 한강과 서울역, 이태원 세 곳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라는 뜻도 있다.
1961년 늘어난 교통량을 원활히 처리하기 위해 원형 입체 교차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빙빙 돌아가는 삼각지라는 말이 나왔다. 노래 속의 돌아간다는 가사는 같은 말 다른 의미다. 입체 교차로는 1994년 철거됐다. 삼각지는 교통 요지로 상업지역은 아니지만 차돌박이 등 고깃집을 비롯한 맛집이 즐비하고, 한편으로는 화랑, 미술학원, 표구점 등 미술가가 자리 잡고 있다.
‘돌아가는 삼각지’만큼 빅 히트를 기록한 노래는 없었지만, 이태원을 제목으로 단 노래는 훨씬 많다. 주현미의 ‘이태원 연가’, UV의 ‘이태원 프리덤’에 이어 2020년 박서준·김다미가 주연한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OST가 정점을 찍었다. 이태원은 고려 시대 때 양주(楊州)에 포함됐다는 기록부터 역사에 등장하고, 조선 시대 이태원(梨泰院)이라는 역원(驛院)이 설치되면서 마을 이름이 됐다. 해방 이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이태원은 미 8군의 배후지가 됐고, 6·25전쟁 당시 피란민들과 상경민들이 몰려 주택가로 발전했다. 이들이 세운 이태원 시장은 미군 PX에서 나온 각종 물자를 유통했는데, 그런 영향 등으로 서울의 외국인이 몰려 사는 ‘작은 지구촌’으로 발전했다.
윤석열 당선인의 새 집무실이 용산의 국방부 청사로 이전하기로 함에 따라 삼각지와 이태원도 제법 큰 변화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지도를 보면, 국방부 부지 서쪽이 삼각지, 동쪽이 이태원이다. 윤 당선인이 취임 이후 했던 ‘식사 정치’를 이어가면 두 지역에 더 많은 식당이 들어설 수도 있다. 또, 더 많은 노래가 만들어지고 불릴 수도 있을 것 같다.
03월 24일 삼성의 ‘AI 로봇’ 출사표

문희수 논설위원
로봇이 새삼 화두로 떠올랐다. 삼성전자가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 제시한 것이 계기다. 지난해 로봇·인공지능(AI) 등 미래 기술에 3년간 240조 원 투자 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공식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업계에선 삼성이 산업용 로봇보다는 가사·건강·교육 등 서비스형 로봇에 주력해 상점 카페 등의 서빙용·고객 응대용·노약자 돌봄용·가정용 등의 로봇을 곧 내놓을 것으로 예상한다.
로봇은 세계적으로 유망 산업이다. 국제로봇연맹에 따르면 세계 로봇 시장은 2017년 241억 달러에서 올해 756억 달러로 커지고, 2025년엔 2000억 달러에 육박할 것이란 전망이다. 1가구 1로봇 시대가 머지않았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미 AI 로봇 개발 경쟁이 치열하다. 올해 초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미국 CES에서 선보여 화제가 됐던 로봇 개가 대표적이다. 현대차가 지난 2020년 인수한 미국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네발 보행 로봇 개(스폿)는 뉴욕소방국이 인명구조 등 실전에 투입할 계획이다. 중국은 최대 160㎏의 짐을 지고 시속 10㎞로 달리는 군용 로봇 개(야크), 1500달러짜리 저가 로봇 개(사이버 도그) 등을 선보였다.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대의 로봇 개(애니말)는 해발 1098m 산 정상을 사람보다 빠른 31분 만에 오르는 기술 발전으로 주목받는다.
로봇 개발에선 인간의 뇌 격인 AI 등 소프트웨어와 초고속 5세대 이동통신 기술이 필수다.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인 한국은 이에 제격이다. 그렇지만 아직은 선진국들에 한참 뒤지는 게 현실이다. 예컨대 산업용 로봇에선 일본이 절대 강자다. 특히, 국내 서빙 로봇 시장은 저가 중국산이 문재인 정부의 방치 속에 70% 이상을 차지하며 휩쓸고 있다. 국내 개발 역량의 씨를 말리고 있어 제2의 드론이 될 판이라는 불만이 높다.
한국 기업의 잠재력은 크다. 삼성은 바이오 산업 진출이 늦었지만, 모더나의 코로나 백신을 위탁 생산하는 등 단기간에 세계적인 백신 생산기지로 급부상했다. 삼성의 로봇 진출은 네이버, KT 등의 분발도 자극할 것이다. 과거 ‘마이카 시대’처럼 앞으론 ‘마이 로봇’ 시대가 열릴 수 있다. 마침 오는 5월 출범할 윤석열 새 정부도 미래 신산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한다. 한국 로봇의 활약을 기대한다.
03월 25일 감사원 더 망칠 ‘알 박기’

박민 논설위원
신구(新舊) 권력의 대립이 좀처럼 해소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시작은 대통령 집무실 이전 문제에서 비롯됐지만, 며칠간의 경과를 되짚어 보면 갈등의 진원지는 애당초 인사 문제였다.
한국은행 총재의 경우, 인물에는 양측이 동의하는 분위기였으니 결국 초점은 공석인 감사원 감사위원 2명에 대한 인사권으로 귀결된다. 청와대는 1명의 인사권만을 요구하고 있지만, 윤석열 당선인으로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친문 성향 감사위원 1명을 추가로 임명, 감사위원회 의결정족수를 확보함으로써 현 정부에 대한 새 정부 감사를 최소화하는 안전장치를 마련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윤 당선인에게 감사원의 주도권 장악은 정권의 성패를 좌우하는 문제일 수 있다.
첫째, 여소야대 정국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 대선 과정에서 ‘검찰 공화국’ 논란에 시달려온 윤 당선인으로서는 전 정권 적폐 청산에 검찰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다. 감사원 감사를 거쳐 검찰에 고발하면 정치보복 비판도 비켜 갈 수 있다. 둘째, 코드 인사로 경도된 공직사회 장악에 반드시 필요하다. 윤 당선인은 대통령실의 사정 기능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또, 대통령실은 정책 조정과 비전 제시 기능에 집중하고 각 부처 장관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임기 내내 집요하게 코드·알박기 인사를 해 부처 요직에 친여 인사가 대거 포진해 있다. 정치적 압력을 행사해 사퇴를 강요했다가 사법 처리된 전례가 있어 대대적 물갈이를 할 수 없다. 이런 구조에서는 대통령의 지시가 공직사회에 제대로 먹히지 않을 수 있다.
여소야대 국회와 친여 성향의 사법부 사이에서 행정부마저 장악하지 못하면 윤석열 정부는 삼권분립이 아니라 사면초가 상황에 빠지게 된다. 6·1 지방선거마저 패하면 껍데기뿐인 권력이 될 수 있다. 보수 진영 일각에서는 ‘정권이 바뀌면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코드를 맞추는 것이 공무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나 실력과 평판보다 코드와 생계로 연결된 공무원들은 상식이나 관행을 무시하는 행태를 보일 수 있다. 특히, 5년 만에 진영 간의 정권교체가 이뤄진 만큼 5년만 복지부동하면 된다는 공직자들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03월 28일(월) 스페인 내전과 러-우크라 전쟁

이미숙 논설위원
스페인 내전은 1936년 파시스트 세력이 공화파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며 촉발된 전쟁이다. 당시 영국과 미국, 프랑스, 소련은 반파시즘 기치 아래 공화파를 지원했고, 각국의 지식인 및 청년들이 공화파를 돕기 위해 스페인으로 갔다. 반면,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프랑코파를 지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한 달여 지속되며 점점 스페인 내전과 비슷해지는 양상이다. 다른 점은 80여 년 전 소련은 반파시즘 편이었지만, 이번엔 러시아가 침략국이라는 게 차이다. 또 스페인에선 쿠데타를 일으킨 파시스트 세력이 권력을 잡았지만, 푸틴의 도박이 승리할지는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푸틴이 우크라이나의 반나치화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침공한 것에 대한 비판이 뜨거워지면서 반푸틴 기류도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국제영토방위군단 창설을 발표한 뒤 미국과 영국 의회 등에서의 감동적인 화상연설을 통해 각국 지원자들을 모으고 있다. 최근 워싱턴포스트는 우크라이나 외교부 통계를 인용해 “52개국에서 2만여 명이 입국했다”고 전했다. 자원자들은 각국의 우크라이나대사관과 접촉하고 있는데 미국 워싱턴의 우크라이나대사관에는 6000건의 자원서가 제출됐다고 한다. 육·해·공군 출신의 퇴역군인이 대부분이고, 자유 수호 시민운동가와 어린이·여성·인권운동가들도 있다고 한다.
미국기업연구소(AEI)의 코리 셰이크 국장에 따르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외국인 전사는 3만5000명이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엔 벌써 2만여 명의 외국인이 운집했다. 셰이크 국장은 “외국인의 참전을 볼 때 우크라이나 전쟁은 스페인 내전과 유사하다”고 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앙드레 말로의 ‘희망’은 스페인 내전이 낳은 3대 명작이다. 헤밍웨이는 내전 취재 경험을 소설에 담았고, 오웰은 카탈로니아의 내전을 기록했다. 말로는 공화파의 일원으로 국제비행대를 지휘한 경험을 소설에 담았다. 우크라이나 전쟁터에 뛰어든 자원자들도 후일 이런 명작을 낳을 수 있을까?
03월 29일 매일 죽는 연습하는 경호원

이현종 논설위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24일 대구 사저에 도착해 인사말을 하려는 순간 날아온 소주병을 한 여성 경호원이 몸으로 막아내는 영상이 SNS에 연일 화제다.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등 해외에서도 호평이 이어졌다.
이명박 대통령 때까지 새로 대통령이 취임하면 경호처에서는 경호시범행사를 열었다. 대통령 부부가 참가한 가운데 열리는 이 행사를 보면 누구나 감탄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2012년 열린 행사에서는 4대의 차량이 30㎝ 이내의 좁은 간격을 유지한 채 꼬리를 물고 고속주행하는 모습과 함께 차량 2대가 후진하다 180도 방향 전환, 바퀴 2개로 주행하기 등의 현란한 운전 기술들이 펼쳐졌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 직후 열린 행사에서는 총성이 울리자 대통령 주변에 있던 경호원들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통령을 향해 몸을 날렸다. 대통령을 향한 총탄을 맞기 위해 팔과 다리를 활짝 벌렸다. 노 대통령은 ‘매일 죽는 연습’을 하는 경호원들의 시범을 보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963년 창설된 대통령 경호실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차지철 경호실장이 있을 땐 권력의 핵심이었다. 차 실장이 매주 토요일 주재하는 국기 하강식 때 주요 인사들이 억지로 참석해야 했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후 경호실의 위상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현재 경호실은 600명 정도가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곽 경비는 경찰과 군에서 파견 나온 인원이 담당하고 있다. 청와대 경호 시스템은 꽤 정평이 나 있어 외국에서 방문과 위탁교육도 하고 있다. 일상적 경호와 행사 경호에 배치되지 않은 날은 교육과 훈련이 반복된다. 사격, 무도, 체력, 어학 등의 기본훈련은 물론 연간 법학, 행정학 등 14개 과목을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한다. 훈련 중에는 어떤 장면을 스치듯 보여주고 기억하도록 하는 시각훈련과 눈을 감고 각각 다른 소리를 구별하는 청각훈련도 있다고 한다.
예전엔 특수부대 출신이 유리했지만, 지금은 외국어는 기본이고 무술은 3단 이상 해야 한다. 경쟁률도 여성 경호원의 경우 100 대 1에 달할 만큼 치열하다. 시험에 통과한다고 해도 6개월간의 지옥훈련을 견뎌야 정식 경호원이 될 수 있다. 대통령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날리는 행동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03월 30일 셰일 에너지 부활과 文정부 퇴행

문희수 논설위원
미국에서 셰일 오일·가스 개발이 다시 활발하다고 한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해 미국이 원유 수입금지 조치를 취한 이후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이상으로 오르자 셰일 에너지가 급부상하고 있다. 셰일 오일은 유가가 40∼50달러는 돼야 수익을 내는데, 유가가 이를 크게 웃돌면서 개발 투자가 다시 몰리고 있다.
미국에서 셰일 에너지 개발은 환경 보호 강화 등의 여파로 지난 2014년을 정점으로 내리막이었다. 특히, 지난 2020년부터 코로나 충격에 유가가 급락하면서 더욱 위축돼 왔다. 셰일 유정을 시추하는 굴착기(리그)는 한창 붐이던 2014년 1840개까지 늘었다가 2020년 300개 이하로 급감했다. 그러다 경제 회복과 유가 상승을 타고 유정 개발이 다시 활기를 띠어 올 3월 현재 굴착기는 650개로 늘었다. 미국의 셰일 오일 생산량이 지난해 4분기 하루 770만 배럴에서 올 2분기엔 2019년과 비슷한 990만 배럴까지 급증할 것이란 전망이다. 에너지 확보가 비상인 조 바이든 정부가 비판적인 입장에서 우호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도 낙관론을 뒷받침한다.
셰일 에너지는 세계 정치·경제 판도를 뒤바꿨다. 이제 미국은 러시아(2위), 사우디아라비아(3위)를 제치고 세계 1위의 원유 생산국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원유 생산 단가가 배럴당 4달러 수준에 불과하지만, 원유 의존도가 너무 높아 저유가 시대엔 맥을 못 춘다. 중동 산유국의 위상이 떨어진 것은 셰일 오일의 여파였다. ‘석유 고갈론’이란 오랜 저주도 무너뜨렸다.
셰일 오일·가스는 지하에서 물을 고압으로 쏘는 수압파쇄공법으로 채굴한다. 지하수 등 환경 오염·파괴를 최소화하기 위해 굴착기 1개로 얼마나 많은 매장 장소를 찾느냐가 성패를 가른다. 미국은 이 기술 수준도 압도적이다. 자원이라면 기를 쓰고 덤비는 중국이지만, 이 분야에선 기술력이 뒤져 환경 오염 문제 등으로 역부족이다. 에너지 강국인 미국도 에너지 확보에 이처럼 부심한다. 미국이 셰일 에너지라는 든든한 대체 수단까지 있다는 게 에너지 빈국인 우리로선 부럽기만 하다. 이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5년 내내 망국적인 탈원전에 매달려 에너지 위기를 더 키워 버렸다. 해외 자원 개발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이런 어이없는 사태가 다시 벌어져서는 안 된다.
03월 31일(목) 경제 총리 vs 정치 총리

이도운 논설위원
한국의 국무총리는 일본·영국 등 의원내각제 국가의 총리와 연원이 다르다. 조선 시대 영의정이 갑오개혁 이후 총리대신으로 바뀐 데서 유래한다. 왕 또는 황제 아래 2인자였고, 지금은 행정부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실상 부통령이다. 의전 서열은 국회의장·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 다음이고 심지어 중앙선거관리위원장과도 다투지만, 대통령 유고 때 권한대행은 총리가 맡게 된다.
이승만 정부의 초대 총리 이범석 이래 47명의 총리가 임명됐다. 그 가운데 임기 1년을 넘긴 총리가 20명 남짓이고, 2년 이상은 정일권·김종필·최규하·노신영·강영훈·고건·이한동·김황식·이낙연 9명뿐이다. 총리가 정치 상황과 여러 가지 목적에 따라 임명됐기 때문이다. 연임을 1명으로 치면 43명인데, 의외로 경제 관료 출신이 많았다. 이승만 정부에서 백두진·김현철은 총리와 재무장관을 겸임했고, 산업화를 목표로 했던 박정희 정부에서는 경제 부총리를 지낸 신현확·남덕우·신병현(대행)이 총리로 올라섰다. 노무현 정부의 한덕수도 경제부총리 출신이고, 이명박 정부에서는 경제학자인 정운찬 서울대 총장이 발탁됐으며, 박근혜 정부에서도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총리대행을 했다. 경제부총리 가운데 이헌재는 2차례 총리 대행을 지냈고, 권오규·윤증현도 대행 경험이 있다. 총리는 대통령직과도 뗄 수 없는 자리다. 총리 가운데 허정·최규하·박충훈·고건·황교안이 대통령 유고나 탄핵 절차 등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냈다.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가 된 총리 출신은 허정·변영태·김종필·이수성·이회창·이한동 등이다. 실제로 총리에서 대통령이 된 인물은 최규하인데,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후 권한대행을 하다가 간선제 대선에서 선출됐다.
윤석열 정부 첫 총리 인선 과정에서 경제 관료 출신과 정치인이 경쟁하고 있다. 경제 쪽에서는 이미 총리와 대행을 경험한 한덕수·윤증현과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 등이 거론됐거나 거론 중이다. 박용만·진대제 등 기업인 등도 한때 물망에 올랐다. 한편으로는 정치인 출신도 경쟁 중이다. 김한길·박주선 전 의원, 김기현·권영세 의원 등이다. 누가 되든 개인적으론 영광이겠지만, 여소야대 정국에서 국회를 상대하는 매우 어려운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