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국가별6/ 덴마크 -
■ 덴마크
유럽의 국가. 유틀란트 반도와 동쪽 해상의 군도로 이루어져 있고, 자치령으로 그린란드와 페로 제도가 있다.국민 대다수는 덴마크인이고, 공용어는 덴마크어이다. 국교는 복음주의 루터교이며, 화폐단위는 덴마크크로네이다. 서비스업과 제조업에 기반을 둔 혼합 경제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생활수준이 높고 사회복지제도가 잘 갖춰져 있으며, 입헌군주국가로 국가원수는 덴마크 국왕이고 정부수반은 총리이다. 면적 43,098㎢, 인구 5,834,950(2022 추계).
483개의 섬을 포함해 7,400km에 이르는 해안선은 서쪽으로 북해, 북쪽으로 스카게라크 해협, 동쪽으로 발트 해와 카테가트 해협을 따라 뻗어 있다. 덴마크 영토에는 덴마크 왕국의 자치령들인 그린란드와 페로 제도가 포함된다. 기후는 대개 온습하다.
국민의 대다수는 덴마크인이고, 공용어는 덴마크어이다. 국교는 복음주의 루터교로, 거의 모든 국민이 믿고 있지만, 이스람교도도 있다. 화폐단위는 덴마크크로네(Danish Krone/DKK; plural kroner)이다.
덴마크의 서비스업과 제조업에 기반을 둔 혼합 경제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광범위한 사회복지제도를 가진 나라 중 하나이며, 생활 수준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이기도 하다. 덴마크는 입헌군주제이다. 국가원수는 덴마크 국왕이고 정부수반은 총리이다.
BC 12000년 무렵 덴마크에 인류가 살고 있었다. 바이킹 시대에 데인족은 그들의 영토를 확장했고, 덴마크 왕국은 11세기까지 현재의 스웨덴, 잉글랜드, 노르웨이의 영역을 지배했다. 스칸디나비아는 1397~1523년에 덴마크의 지배 아래 통합되었고, 1523년에 스웨덴이 독립했다. 덴마크인들은 17세기에 스웨덴과 연이은 소모전을 벌이다가, 1660년 코펜하겐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현재의 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 간의 국경선이 정해졌다.
덴마크는 19세기와 20세기에 노르웨이를 비롯한 여러 지역들을 얻었다가 잃었다. 1849~1915년에 3차례 헌법을 개정했고, 1940~45년에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다.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립 회원국 중의 하나가 된 덴마크는 1953년 현재의 헌법을 채택했다. 1973년 유럽 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EEC)의 회원국이 되었고, 1993년 유럽 연합(European Union/EU)의 회원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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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건축문화
▲덴마크. 벨라스카이호텔
▲주거빌딩
▲코펜하겐
▲코펜하겐 주거지역
▲코펜하겐 북쪽 세익스피어의 헴릿 배경이된 ,크론보르성
○풍경
▲그린랜드 빙하. 북미 북동부에 있는 덴마크의 자치령
▲바다와 호수
▲절벽 위 마을과 폭포 - 아이슬란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 있는 덴마크 자치령
■ 독일
독일의 역사는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이후 프랑크족에 의해 여러 부족이 통합되어 프랑크왕국이 건립되는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족통합의 제반 과정을 완결한 칼 대제가 사망한 뒤 동·서프랑크로 분열되었으나, 오토 1세에 이르면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여 이후 13세기 전반까지 ‘황제시대’가 계속된다.
그러나 제후의 세력이 커지면서 대공위시대(大公位時代)를 거쳐 다시금 15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가(家)에 의해 제위가 세습되었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독일사회는 심대한 충격을 받아, 기사전쟁(騎士戰爭)·농민전쟁·종교전쟁 등을 거치면서 1555년에는 아우크스부르크종교화의(Augsburg 宗敎和議)에 의해 신·구교가 분리되게 된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종교적 평화는 달성되었으나, 연방체제가 성립됨으로써 독일은 정치적·경제적으로 분산화·무력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유럽지배는 분열된 독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통일운동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빈회의를 거쳐 독일의 민족운동은 독일연방으로 성과를 보았으나, 완전한 통일은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으로 대표되는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뒤 독일은 바이마르공화국과 나치스의 제3제국을 경험하였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함으로써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개 연합국의 점령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지만 냉전이라는 동서대립의 세계정세 속에서, 1949년에 이르자 미국·영국·프랑스 관리지역에는 서독이, 소련 관리지역에는 동독이 성립되어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서독은 1949년 5월 23일 통일까지의 잠정헌법으로서 기본법을 제정, 공포하고, 그 해 9월 21일에 국가를 수립하였다.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이며, 의회는 양원제를 취하였다.
사회주의 국가인 동독은 1949년 10월 7일, 인민회의를 열고 독일민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의회는 단원제이며 인민회의가 형식상의 국가최고권력기관이었다.
1969년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설치된 국가평의회는 의회해산·총선거실시·법령공포 등의 권한을 행사하였다. 내각에 해당하는 각료평의회는 통일전선을 구성하는 5개 정당의 연립정권의 형태를 취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주의통일당(SED)의 단독정권이었다.
1955년 서독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맹하자, 동독도 같은 해 바르샤바조약기구(WTO)에 가맹하여 ‘두 개의 독일’을 굳히는 길로 나아갔다.
이어 1961년 9월에는 동·서독의 긴장관계를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이 동독에 의해 구축되었으나, 1969년 서독에 브란트 정권(Brandt,W. 政權)이 등장하여 이른바 ‘동방정책(Ostpolitik)’의 기치 아래 ‘1민족 2국가’라는 현실정책을 추구하면서 화해의 길로 들어섰다.
1970년 동·서독은 관계정상화를 위한 기본조약에 조인하여 현 국경선을 상호 승인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1974년 6월에는 동·서독이 함께 국제연합에 가입하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동서냉전체제의 해빙과 구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힘입어 독일민족은 재빨리 통일을 성취하였다. 1990년 3월 18일 구 동독 인민의회의 결정으로 동독지역이 1990년 10월 3일에 흡수통합되어 독일연방공화국으로 통합되었다. 이로써 독일은 16개 주로 구성된 연방국가가 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1949년 5월 23일에 제정된 기본법(Grundgesetz)에 기초하여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으로 법치주의에 의한 자유주위적 사회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연방대통령을 둔 내각책임제인데, 대통령은 연방대통령선출 특별위원회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한다. 이 위원회는 연방위원과 주(州)의 국민대표 동수로 구성된다.
연방수상은 연방의회에서 선출되며, 자신의 책임 아래 각 부처 장관을 제청하고 정책을 수행하여 나간다. 사법부는 연방제의 특성에 맞도록 각 주의 법원제도를 갖추어, 5개 연방차원의 법원, 즉 연방대법원·연방행정법원·연방재정법원·연방사회법원·연방노동법원 등이 있다.
연방헌법재판소(Bundes Verfassungsgericht)는 모든 헌법기관에서 독립적인 최고의 법원으로 헌법의 수호자 역할을 하고 있다.
1998년 9월 27일, 이제까지 연립정부를 이루던 기민당(CDU/CSU)과 자민당(FDP)이 총선거에서 패배하여 16년간 집권해 온 ‘통일수상’ 콜(Helmut Kohl)이 물러나고 사민당(SPD)의 슈뢰더(Gerhard Schröder)가 새 수상이 되어, 통일 이후의 실업문제와 사회연대, 환경 및 조세정책을 새롭게 실천하고 있다. 통일 이후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경제적 힘을 발휘하고 있는 주도적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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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유럽을 맨 처음 통일한 샤를마뉴 大帝가 잠든 아헨 성당 이야기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조선일보
42명의 독일 왕과 왕비가 여기서 대관식을 가졌다.
아헨(Aachen)은 독일의 서쪽 끝에 있으면서 벨기에, 네덜란드와 접경한 도시이다. 인구는 약 25만 명이다. 아헨 공대는 학생이 약 3만 명이다. 다른 대학까지 합치면 이 도시에 약 5만 명이 학생이다. 작은 도시이지만 역사와 문화의 무게는 엄청 크다. 아헨은 독일사람들에겐 정신적 고향이 되는 몇 도시 중 하나이다. 이 도시의 역사적인 意義(의의)는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大帝(대제)에서 온다. 샤를마뉴 大帝는 프랑스 표기이다. 영어로는 찰스, 독일어로는 칼 大帝로 불린다. 서기 768년에 왕이 되어 서기 814년에 죽었고, 아헨 성당에 묻혔다.
이 기간 그는 지금의 프랑스, 베네룩스 3국,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의 서쪽, 이탈리아 북쪽을 통일했다. 프랑크 왕국이라 불렸다. 西로마가 망한 5세기 이후 처음으로 통일제국이 西유럽에 나타난 것이다. 그의 손자代(대)에 와서 프랑크 왕국은 다시 분열되지만 통일된 유럽의 꿈을 심어준 사람이다.
10여 년 전 유럽공동체(EU)가 유로라는 공통적인 통화를 쓰고 출입국을 자유롭게 하기 시작한 이후 샤를마뉴 大帝는 유럽공동체의 이상을 맨 처음 구현했던 인물로 재평가 받는다. 아헨市는 샤를마뉴 賞(상)을 만들어 유럽통합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상을 준다. 지스카르 데스텡 전 프랑스 대통령, 지금은 故人(고인)이 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이 이 상을 받았다.
아헨이란 말의 語源(어원)은 라틴어의 Aquis로서 물, 목욕이라는 뜻이다. 로마가 이곳을 지배할 때 온천이 발견되었다. 지금도 수온이 섭씨 70도를 넘는다. 로마 사람들은 목욕을 즐겼다. 독일인들도 그러하다. 1981년에 서울 올림픽을 결정했던 독일 남부의 바덴 바덴이 대표적인 溫泉鄕(온천향)이다. 샤를마뉴 大帝도 목욕을 좋아했다. 그는 주로 겨울에 아헨에 머물기 시작했다. 자연히 궁정 건물이 들어서고 首都(수도)처럼 되었다.
샤를마뉴가 성당의 건축을 명령한 것은 서기 792년이다. 805년에 성당 건물이 거의 완성되어 로마교황 레오3세에 의해서 聖母(성모) 마리아에게 獻堂(헌당)되었다.
이 성당은 둥근 천장 위에 돔 같은 8각형의 둥근 지붕이 솟아 있다. 알프스 북쪽에서는 수백년 동안 이 성당이 가장 컸다고 한다. 천장과 지붕은 벽돌로 되어 있다. 천장과 지붕이 벽에 너무 무거운 힘을 주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벽 안에 쇠로 만든 일종의 닻을 여러 개 달아 무게를 분산시키는 방식을 도입했다.
샤를마뉴 大帝는 서기 800년에 로마로 가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西로마 제국 황제’라는 칭호를 받았다. 5세기에 서로마가 망한 이후 황제라는 칭호가 처음으로 쓰여졌다(샤를마뉴 大帝는 그런 호칭을 쓰지 않았으나 그는 나중에 나타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첫번째 황제로 간주된다). 힘이 빠진 교황은 샤를마뉴 大帝에게 황제의 권위를 부여하고 그의 보호를 받으려 했다. 지금의 터키 수도 이스탄불은 당시 콘스탄티노플로 불리면서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수도가 되어 있었다. 기독교계가 동서로 분열되어 대립하던 시절이었다.
독일어로 황제의 성당(Kaiserdom)이라고 불리는 아헨성당은 크기도 하지만 오래된 멋과 권위가 넘친다. 유럽에서 서기 800년 전후하여 만들어진 성당, 시청 같은 건축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시기는 암흑기로 불리던 中世(중세)였다. 로마제국을 무너뜨린 야만의 게르만족은 곧 기독교인이 되지만 로마의 문명은 잊어버렸다. 로마가 자랑하던 토목 건축 기술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 5~11세기의 중세 건축물은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다. 다만 스페인을 점령한 아랍인들이 그라나다, 코르도바, 세빌리아, 톨레도 등지에 거대한 건축물을 세웠을 뿐이다.
때는 전쟁과 파괴의 시절이었다. 이 시절, 기독교 신부들과 유태인들이 겨우 글을 알고 그리스-로마 문명의 불씨를 지켜갔다.
아헨 성당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강력한 王權(왕권)이 뒷받침하니 로마의 전통을 이은 건축물이 탄생한 것이다. 샤를마뉴 大帝는 정복사업을 펴면서도 민중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열심이었다. 그는 특히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다. 중세 유럽에는 서민들을 위한 교육기관이 없었다.
서기 936년부터 1531년까지 이 성당은 30명의 독일왕과 12명의 왕비가 대관식을 올리는 聖地(성지)가 되었다. 독일왕은 神聖(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했다.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느슨한 연방국가였다. 여러 제후들이 선거를 통해서 황제 겸 독일왕을 뽑았다.
샤를마뉴 대제는 서기 814년에 죽자 이 성당에 묻혔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오토 3세는 서기 1000년에 샤를마뉴의 棺(관)을 열게 했다. 그때까지도 大帝의 屍身(시신)은 부패하지 않았다. 오토 3세는 샤를마뉴의 이빨 하나를 뽑아 내고 棺을 다시 닫았다. 샤를마뉴의 음덕을 보려는 생각이었다.
1165년 이번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바로사 1세가 샤를마뉴의 시신을 발굴하여 그를 聖人으로 만들고 새로운 관으로 옮겼다. 샬레마뉴의 聖殿(성전)으로 불리는 이 관은 1215년에 완성되었다. 호화를 극한 금세공으로 만든 집 모양의 관이 이 성당 안에 있다.
聖人으로 만들 권한은 교황만이 가졌다. 바바로사 황제는 교황의 간섭을 받기 싫어했다. 오로지 권력의 힘으로 교황청의 公認(공인) 없이 샬레마뉴를 聖人으로 조작한 셈이다. 棺의 표면에는 예수, 교황, 제자, 샬레마뉴, 聖母 마리아 등이 새겨져 있다. 예수를 중심으로 그린 구도가 아니라 샤를마뉴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아헨성당은 중세에 중부 유럽의 가장 중요한 巡禮聖地(순례성지)가 되었다. 1496년에 약 14만 명이 이 성당을 다녀갔다. 나치 시절이던 1937년에도 약 80만 명이 참배했다. 특히 헝가리 사람들이 많이 참배한다. 샤를마뉴가 지었던 궁정터에는 지금 14세기에 세운 아름다운 市廳舍(시청사)가 있다. 아헨 성당의 보물은 유럽에서 가장 호화로운 것으로 꼽힌다. 여기서 대관식을 올린 황제들이 선물을 많이 한 덕분이다. 1349년 이후 7년에 한번씩 공개하는 4대 보물이 유명하다.
성모 마리아의 외투, 세례요한의 옷, 아기 예수의 襁褓(강보)와 허리를 두르는 옷. 과연 眞品(진품)인가 하는 의문을 굳이 가질 필요가 있을까? 종교로 과학을 누르고 과학으로 종교를 해체하고 나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1978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 제도를 만들었을 때 맨 처음 12개를 지정했다. 3개가 유럽에 있었다. 그중 하나가 아헨 성당이었다. 게르만족의 정신, 신성로마제국의 권위, 유럽공동체의 이상이 스며 있는 건물이란 점에서 특별히 優待(우대)한 것이다.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1945년 10월 일본에서 났다가 이듬해 고향인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수산대학(현재의 釜慶大)에 들어가 2학년을 마친 뒤 군에 입대, 제대 후 1971년 부산의 국제신보 수습기자로 입사해 언론생활을 시작했다.
문화부,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경찰, 공해, 석유분야를 다루었는데 1974년 중금속 오염에 대한 추적 보도로 제7회 한국기자상(취재보도부문·한국기자협회 제정)을 받았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 취재를 했다. 1980년 6월 신문사를 그만둔 뒤 월간잡지 <마당> 편집장을 거쳐 1983년 조선일보에 입사,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일했다.
저자가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月刊朝鮮>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보도로 1994년 관훈언론상(관훈클럽 제정)을 수상했고 ‘6·29 선언의 진실’ ‘12·12 사건-장군들의 육성 녹음 테이프’ 등 많은 특종을 했다. 1996년부터 1년 간 국제 중견 언론인 연수기관인 하버드대학 부설 니만재단에서 연수를 했다.
2001년 <月刊朝鮮>이 조선일보사에서 分社하면서 (주)月刊朝鮮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지금은 <조갑제닷컴>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석유사정 훤히 압시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有故》 《국가안전기획부》 《軍部》 《이제 우리도 무기를 들자》 《朴正熙 傳記》(全13권) 등을 출간했다.
○비스마르크는 어떻게 프랑스를 격파했나?
1871년 1월 29일, 4개월 동안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파리정부는 독일에게 항복한다.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굶어죽은 유아들만 4800명에 달했다. 프랑스는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과 알토란같은 알자스ㆍ로렌지역을 독일에게 할양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승리 후 비스마르크는 본격적인 부국강병 정책추진과 대외 식민지 확보에 눈을 돌린다. 그는 더 이상 전쟁을 통해 국익을 확충하려고 하지 않았다. 노련한 외교로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영국러시아와의 돈독한 관계로 세력균형을 도모한다
보불전쟁! 프랑스 비스마르크에게 무릎꿇다
▲1870년 보불전쟁의 격전장 세당성 전경
▶치밀한 비스마르크의 전쟁준비
말만 앞세우는 프랑스 정부와 군대
비스마르크는 한반도에서 대륙세력인 당나라를 몰아내고 역사상 처음으로 한민족 통일 을 이룩한 신라의 김유신 장군과 비슷한 인물이다. 특히 비스마르크 기념관은 독일통일 과정, 프랑스ㆍ오스트리아와의 전쟁사 등을 잘 소개하고 있다. 유럽 강국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독일과는 보불전쟁, 1ㆍ2차 대전 등 대규모의 전쟁을 수차례 치른다. 기념관내에는 보불전쟁의 상세한 경과와 관련 지도 등이 흥미롭게 전시되어 있다.
▲소년시절의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와 부인 요한나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유럽의 강국으로 새롭게 부상한다. 그 후 스페인의 왕 책봉문제로 인하여 프랑스와 외교적 갈등이 일어난다. 전통적으로 유럽의 맹주 자리를 지켜왔던 프랑스의 프로이센에 대한 오만불손한 외교자세와 오래전부터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비해 온 비스마르크의 책략이 충돌하면서 결국 1870년 7월 보불전쟁이 발발한다.
▶프로이센 군대에 포위된 파리
내부 분란으로 결국 무릎 꿇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보름 동안에 40만의 병력을 국경까지 동원할 수 있다고 장담했으나 막상 전쟁이 터지자 겨우 25만의 병력을 집결시킨다. 프로이센군은 병력ㆍ훈련ㆍ장비ㆍ기동성 면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했다. 연이은 프랑스의 패배 소식에 1870년 8월, 파리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고, 9월에는 세당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황제 나폴레옹 3세와 약 9만여 명이 포로로 잡힌다.
▲세당시내를 관통하는 다뉴브강(이도시는 보불전쟁.제1/2차세계대전 간 독.프랑스 간 격전지였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고 10월경 프로이센군은 파리를 완벽하게 포위한다. 고립된 시민들의 생활은 추위와 식량부족 등으로 처참했다. 물가는 매일같이 치솟았고 개ㆍ고양이ㆍ쥐까지 양식으로 매매되었다. 국민 총동원을 위해 내무장관 강베타는 열기구를 타고 필사적으로 파리를 탈출한다. 그러나 사분오열된 프랑스 국민들은 무력하기만 하였다.
12월부터 프로이센군은 매일 3000-4000 발의 포탄을 파리로 퍼부었다. 프랑스 각료들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누어져 매일같이 소모적인 논쟁으로 시간을 보낸다. 흡사 1636년 병자호란 시 남한산성에서 청군에 포위된 조선의 인조와 신하들이 과감한 반격작전 한번 시도해 보지 못하고 쓸데없는 말싸움으로만 시간을 보내다 결국 항복했던 행태와 너무나 닮은 모습이다.
▲프랑스의 항복을 받고 파리로 입성한 비스마르크
1871년 1월 29일, 4개월 동안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파리정부는 독일에게 항복한다.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굶어죽은 유아들만 4800명에 달했다. 프랑스는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과 알토란같은 알자스ㆍ로렌지역을 독일에게 할양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승리 후 비스마르크는 본격적인 부국강병 정책추진과 대외 식민지 확보에 눈을 돌린다. 그는 더 이상 전쟁을 통해 국익을 확충하려고 하지 않았다. 노련한 외교로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영국러시아와의 돈독한 관계로 세력균형을 도모한다.
▲1800년대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
그러나 1888년 9월, 빌헬름 2세 즉위 이후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는 비스마르크는 황제와의 충돌로 1890년 총리직을 사직한다. 결국 빌헬름 2세의 서투른 외교로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고 처참한 패전국의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모든 공직을 떠난 말년의 비스마르크
▶한반도 평화통일을 주도할
의식있는 한국청년들이 가 볼만한 곳
기념관 출구 근처에 비스마르크가 사용하던 책상과 의자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자기 조국의 번영과 평화를 꿈꾸는 많은 관람객들은 그 곳에 앉아 자유롭게 사진 촬영도 할 수 있다. 70년 가까운 분단의 아픔을 지니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통일의 웅대한 꿈을 꾸는 의식 있는 한국청년들이 방문해 볼만한 사적지다. 그리고 통일 독일의 초석이 된 비스마르크의 민족을 위한 비전과 지혜를 배웠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 | 신종태 전쟁과 평화연구소 교수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이야기
크지 않은 체구에 코밑에 난 쪽수염, 빳빳이 빗어 올린 머리카락과 긴 군화를 신고 대중들 앞에서 열띤 연설을 하는 20세기가 낳은 최후의 악인 아돌프 히틀러. 그는 전쟁터에서는 누구보다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수천만 명의 유대 인을 학살했던 잔혹함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오스트리아의 브라우나우에서 태어났다. 하급 세무 관리였던 아버지가 열세 살에 죽고 나서 그는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빈의 미술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른다. 그러나 1907년과 1908년 두 번이나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그는 화가의 꿈을 포기한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극심한 민족 문제를 겪고 있었다. 권력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독점하고 있었고, 관료층과 군인, 지주, 자본가, 지식인 계층은 거의 독일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이 되자 폴란드 인, 남슬라브 인, 체코슬로바키아 인 등의 세력이 커지면서 민족의 자치권을 요구했고, 독일인들의 권력 독점에 대한 불만 역시 팽배해졌다. 결국 20세기 초, 독일인과 체코슬로바키아 인들 사이에 민족적 갈등이 불거졌다.
이렇게 각 민족들 간의 민족감정이 고조될 대로 고조된 상황에서 히틀러 역시 독일 민족주의, 반유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와 오스트리아 내 독일인 거주 지역을 독일에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게오르크 폰 쇠네러의 독일 민족지상주의와 반가톨릭 교회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히틀러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 자원 입대했고, 바이에른 보병 16예비연대 소속으로 플랑드르에서 영국군과의 교전에 참전했다. 이때 히틀러는 군생활이야말로 자신이 생각했던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혁혁한 공을 세웠고, 2개의 철십자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중도에 귀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비참한 패배로 끝나자 그는 독일의 11월 혁명과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격렬한 반대 입장에서 '독일노동당'이라는 작은 우익정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 정당은 열렬한 민족주의 이념을 내세우고 있었으며 동시에 반민주(反民主), 반자본(反資本), 반공산(反共産), 반유대의 노선을 표방하고 있었다. 얼마 후 이 당은 '민족사회주의자 독일노동당'이라고 명칭을 바꾸었는데, 앞부분의 민족사회주의자(Nationalsozialist)의 머릿글자를 따 '나치(Nazi)'라고 불렸다. 나치의 중심에는 히틀러가 있었다. 그는 군대 동료들을 입당시키고 그때까지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던 당의 노선을 친대중적으로 바꾸었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을 본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융합한 민족사회주의 노선을 띠어갔다.
히틀러는 각종 상징과 선전물을 통해 국민에게 자신과 나치를 각인시켰다.
나치당의 당세는 급속하게 신장되기 시작했다. 이는 히틀러의 연설 실력 덕분이기도 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과도기적인 형태로 들어선 바이마르 정부의 실정에 실망한 군중들이 나치당을 지지한 까닭도 있었다.
1923년, 프랑스와 벨기에의 군대가 전쟁 배상금 문제를 빌미로 루르 지방을 점령했을 때 마르크화의 가치는 천문학적으로 폭락하여 차라리 연료를 사느니 마르크화로 불을 때는 편이 낫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오랜 노력으로 마르크화를 저축했던 독일 국민들의 분노와 정부에 대한 실망은 실로 엄청났다. 당시 독일투쟁동맹을 이끌던 히틀러 역시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격렬하게 비판하며 공화정 타도를 외쳤다. 히틀러를 위시한 독일투쟁동맹의 주장은 바이에른 우익정부가 베를린으로 진격하고, 전 독일의 우익 독재정부 수립이 주요 골자였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나치당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이에른 정부가 나치당을 전 독일 우익 독재정권의 수뇌부에서 배재할 의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1923년 11월 3일 히틀러와 독일투쟁동맹은 뮌헨의 한 맥주 주점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이 '비어홀' 폭동 사건이다. 이들은 전 독일 우익 독재정권이 수립될 때 수뇌부에 나치당을 포함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바이에른 정부 수뇌에게 접근하여 포섭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폭동은 실패했고, 히틀러는 체포되었다.
히틀러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게 된 것은 비어홀 폭동과 관련한 재판에서였다. 히틀러는 재판정에서 자신이 이 폭동의 단독 주모자이며, 봉기의 목적 역시 당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독일 민족을 위한 것임을 결연히 주장했다. 그의 단호한 카리스마에 대중은 매료되었다. 5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복역하는 동안 그는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이제 전 세계는 위대한 인종 아리아 인, 그중에서도 특히 독일인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기술했다. 그리고 역사가 가장 증오해야 할 인종으로 유대 인을 지목했다. 그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배척했으며 전쟁과 무력이야말로 강자가 행사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서술했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풀려난 히틀러는 자신의 부재 기간 동안 흐트러져 있던 나치당을 재정비했다. 그러나 나치당은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하고 침체한 가운데 몇 년을 보내야 했다. 1925년부터 1929년 사이 독일은 경제적 부흥기를 맞았으므로 누구도 나치당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때 독일에서는 대규모의 공공 토목사업이 진행되었다. 독일은 한때 세계 제2의 산업국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전 세계를 가혹하게 휩쓸기 시작한 대공황이 독일에도 그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종전 후 갈수록 늘어나는 실업률과 생활고, 거기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든 대공황으로 독일 시민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히틀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군중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뛰어난 연설 능력으로 정부의 무능함을 조목조목 지적함으로써 시민들의 답답한 심정을 대변했고, 곧 그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1930년 총선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은 600만 표를 얻으면서 일약 제2당으로 급성장했다. 히틀러의 자신감은 최고조에 달했고, 결국 193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바이마르 정부의 영수이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힌덴부르크와 경쟁하게 된다. 히틀러는 1932년 3월 13일 31.3퍼센트, 4월 11일 36.8퍼센트의 지지율을 기록했으나 총선 결과 1,130만 표를 득표하여 1,870만 표를 득표한 힌덴부르크에게 패했다.
그러나 히틀러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는 매우 높았고, 힌덴부르크는 1933년 1월 30일 그를 독일 수상을 임명했다. 히틀러의 행보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독일 육군과 해군 수뇌부를 자기 편으로 만든 것은 물론 경제계 거물들까지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해 2월 27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이용하여 공산당을 탄압하고, 대대적인 정적 제거 작업에 착수했다. 이런 상황에서 실시된 1933년 3월 5일 총선에서 나치당은 43.9퍼센트의 지지를 얻었고, 7월 무렵 히틀러는 보수파와 군부를 장악하여 나치당에 의한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이때부터 학살자 히틀러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관직에 있던 모든 유대 인들을 강제로 쫓아냈으며, 군사조직을 자신의 친위대 형식으로 재편하면서 방해가 되거나 반항의 기미를 보이는 무리들을 즉결처분했다.
1934년, 히틀러는 총통에 올랐다. 이로써 그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을 모두 아우르는 막강한 권력자가 되었다. 총통이 된 히틀러는 전쟁 배상금과 대공황으로 휘청거리고 있던 독일의 경제 회복에 총력을 기울였다. 아울러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였다. 유명한 '아우토반'도 이때 건설된 고속도로다. 경제회복과 실업률 감소는 독일 국민들에게 하나의 희망이었다. 히틀러의 인기는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1935년, 히틀러는 전 세계를 상대로 아주 중요한 성명 하나를 발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채택된 "독일은 영원히 무장하지 못한다"라는 결정을 철회하겠다는 것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소유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새로운 독일군을 모집하는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1936년, 히틀러는 독일의 무장선언 이후 처음으로 라인란트 비무장지역으로 진군해 요새화시켰다. 일종의 시험이자 전쟁의 시작이었다. 라인란트의 군사화는 프랑스의 안보체제에 절대적인 위협을 가했다.
히틀러는 세계 열강들의 반응에 주목했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 독일의 비무장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이를 체결했던 열강들은 이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세계를 휩쓴 대공황의 폭풍우 속에 독일의 주변국 침략을 경고할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세계 정복 계획을 착착 진행시켜나가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같은 해 9월 체코슬로바키아에 관한 뮌헨 협정을 체결했다. 이로써 '불세출의 영웅', '전무후무한 위인'으로 독일인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끝없이 인기가 치솟았다.
이때부터 열강들은 독일에게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며 대응조치를 강구하기에 이른다. 영국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평시징집(平時徵集)이 시행되었고, 프랑스에서도 달라디에 수상에게 국가방위를 위한 비상권을 부여했다. 오직 미국만이 루스벨트의 고립주의 정책에 의해 중립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1939년 9월 1일, 러시아와 불가침조약을 맺어 러시아의 개입을 미연에 차단한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략했다. 영국은 히틀러에게 폴란드를 침략할 경우 영국은 즉시 폴란드를 지원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무시했다. 1939년 9월 3일, 영국은 독일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이어서 프랑스 역시 같은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의 검은 연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강대국들이 모두 참전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종전 직전 독일 포츠담에서 미·영·중 3국의 수뇌가 모였다. 이날 발표된 공동 선언에서는 일본의 사죄를 촉구했다.
폴란드를 가운데 두고 벌어진 독일과 영국·프랑스의 전쟁은 장기전의 양상을 띠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그 사이 덴마크와 노르웨이,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정복했다. 영국·프랑스군이 벨기에를 지원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함락으로 유명한 마지노선이 세당 지역에서부터 뚫리고 독일군은 이를 이용하여 프랑스로 진격했다. 5월 중순,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1941년에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를 침략했다. 이어 루마니아를 위성국가화하고 불가리아와 헝가리도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해 서로 불가침조약을 맺었던 러시아를 침공했다. 1941년 6월 21일, 독일의 대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조용히 소련 국경을 넘어 발트 해 연안과 흑해 연안에 걸쳐 러시아를 침공했다. 독일의 위성국가들이 진군하는 히틀러군에게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독일은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수도인 모스크바를 향해 진군했다.
그러나 물러나기만 했던 러시아는 혹한과 눈으로 보급로를 차단당한 독일군을 끈질기게 괴롭히며 반격을 가했고, 1942년 겨울, 혹한으로 침체돼 있는 독일군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러시아는 점점 더 기세를 높여갔고 독일군은 급격한 하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의 패배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북아프리카에서도 독일은 수십만 명의 사상자와 포로를 내고 패퇴하기 시작했다.
철저한 고립주의를 표명하던 미국의 자세도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었다. 프랑스의 몰락 이후 루스벨트는 영국으로 무기를 수송하는 한편, 징병제를 실시하여 유사시에 대비했다. 아울러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한 군수물자가 시베리아를 건너 러시아에 도착했다.
이렇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의 결속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마침내 히틀러에게도 종말을 고할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1944년 6월 6일, 일련의 군사들이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조용히 상륙하여 북프랑스 회복전쟁을 일으켰다. 독일군의 방어선은 무너졌으며, 8월에는 파리가 해방되었다. 그 사이 또 다른 연합군이 남프랑스에 상륙하여 북진했다. 히틀러는 흐트러진 전열을 가다듬어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1945년 히틀러는 정부였던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 후 함께 권총으로 자살했다. 1945년 5월 8일, 연합군은 독일의 최종적인 항복을 얻어냈다.
짧은 기간 동안 히틀러는 전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악행을 저질렀다. 철저한 유대 인 탄압정책으로 수많은 유대 인을 사살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인들이나 집시들도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종전 후 히틀러의 지휘하에 유대 인 탄압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재판을 통해 단죄를 받았다. 동시대의 독재자였던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시체가 밀라노 광장에 거꾸로 매달려 민중의 돌팔매질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자살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증오한 진짜 이유는?
이스라엘이 세계 여론의 지탄을 받고 있다. 팔레스타인 테러단체 하마스를 소탕한다는 이유로 인접 가자지구를 무차별 폭격해서 몇 주만에 어린이를 포함하여 민간인 1천6백명 이상을 죽게하자 이스라엘과 유태인 증오 분위기가 다시 고개를 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세계인들은 수없이 많은 holocaust(홀러코스트/유태인 대학살) 영화를 보아왔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우리는 히틀러와 나치스는 나쁘고 유태인은 불쌍하다는 생각만 했지, “유태인이 독일인의 미움을 살만한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닌가?”라고 생각해본 적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 이유를 다룬 영화를 본 일이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본 영화는 전부 히틀러와 나치스는 나쁘고 유태인은 억울한 피해자라고 생각하도록 영화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런 영화를 제작한 영화사들은 대개 유태인 돈줄과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Why did Hitler hate Jews so much? (히틀러는 왜 그렇게 유태인을 증오했는가?)라는 검색어로 Google에 들어가 보니 엄청나게 많은 답변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것은 독일의 역사학자 랄프 게오르게 로이트(Ralf-George Reuth)가 5년 전에 쓴 책이었다. 이 책의 독일어 타이틀을 영어로 번역한 것은 Jewish Hatred; Cliché and Reality인데 우리말로는 “유태인 증오: 통설과 실체”쯤 될 것이다. 이 책에 의하면 히틀러가 유태인을 증오한 진짜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영국 Daily Mail 신문이 소개했다.
지금까지는 1914년 1차 세계대전 이전 청소년 시절의 히틀러가 빈(Wien 지금의 오스트리아 수도)에서 살 때 여러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유태인을 증오하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히틀러 모친이 유태인 의사 실수로 죽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심지어 그 의사가 유방암환자인 히틀러 모친을 성폭행까지 했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히틀러가 빈에서 미술학교에 다닐 때 짝사랑한 독일 여자가 나중에 돈 많은 유태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보고 격분, 유태인을 증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감정적인 요소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경제적, 정치적 이유였다. 히틀러는 유태인 때문에 1차 세계대전 후 독일 경제가 붕괴했고 또 유태인들이 러시아 공산혁명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1차 세계대전에 하사관으로 참전한 히틀러는 패전 독일 경제를 재건하는데 유태인들이 도움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해를 끼쳤다고 보았다.
종전 직후인 1919년 당시 독일의 민간은행의 약 절반이 유태인 소유였으며 증권시장도 유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 신문의 약 절반이 유태인 소유였으며 연쇄백화점의 80%도 유태인 소유였다.
▲ 나치 선전상 괴벨스가 뽑은 완벽한 독일어린이 사진의 주인공은 유태인이었다고 본인이 최근 밝혔다
한마디로 독일 경제와 언론은 유태인이 좌지우지했다고 볼수있다. 그래서 독일의 패전을 유태인 탓으로 돌리는 풍조가 팽배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주식시장이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자본주의를 싫어했다.
히틀러는 또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도 유태인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다고 보았다. 공산주의 이론 창시자 카알 마르크스(Karl Marx), 러시아혁명 지도자 레닌과 트로츠키가 유태계 러시아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의 정치적 초기 기반지였던 독일 뮌헨 시에서 1919년 공산주의 정권이 잠깐 등장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부터 히틀러는 공산주의자들을 증오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로이트는 나치시대 인물 연구에 권위자로 알려진 역사가인데, 선전과 선동의 귀재라는 요셉 괴벨스 선전상의 전기도 썼다. 유태계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노벨상수상자)도 러시아 혁명 주도 세력은 유태인이었다고 쓴 기록이 있다고 로이트는 말했다.
히틀러는 유태인들이 부자가 되면 독일 여성과 결혼하여 아리안(독일 민족)의 피를 흐려놓기 때문에 유태인 멸종을 기획했다는 설도 있다. 미국 영화 <25시>(앤소니 퀴인 주연)를 보면 나치 정권은 유태인의 특징으로 약간 가무잡잡한 얼굴색과 매부리 코를 꼽았다.
그런데 지난 7월 미국 대학에서 화학을 가르고 있는 85세 유태인 할머니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소재 홀러코스트 박물관에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기증했다. Hessy Taft라는 이 노교수는 그 사진의 내력을 이렇게 설명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사진은 자기가 여섯 살 때 독일 베를린의 한 사진관에서 찍은 것인데, 그 사진사가 당시 나치정권이 실시한 완벽한 독일민족 어린이 사진 공모에 출품했다. 이 공모전에서 괴벨스 선전상이 직접 그 사진을 당선작으로 뽑았다는 것이다. 사진사는 그 사진의 주인공이 유태인인줄 알면서도 끝내 비밀로 했다고 한다. 이 사진은 당시 유명한 한 독일 가정잡지의 표지를 장식했고 우편엽서에도 올려졌다고 한다.
워싱턴에서 조화유
○ "히틀러와 나치 '비밀 무기'는 마약"
▲필로폰 등 마약을 상습 복용했던 것으로 알려진 아돌프 히틀러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비밀 병기’였던 마약 퍼비틴. /위키피디아
"2차 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와 독일군은 집단 마약 중독 상태였다."
10일 독일에서 이런 주장을 담은 책 '완전한 환각(Der totale Rausch)'이 발간됐다. 독일의 언론인 출신 작가 노먼 올레는 5년간 2차 대전 관련 자료를 조사한 끝에 이 책을 출간했다. 364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그동안 세간에 조금씩 알려진 이야기들을 사료 연구를 통해 입증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책에 의하면, 히틀러 주치의 테오도어 모렐 박사는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던 히틀러에게 다양한 마약을 처방했다. 1941~1945년 히틀러는 필로폰 등이 들어간 주사를 최소 800여 차례 맞았다. 같은 기간에 마약 성분의 알약 1100여알도 복용했다. 하루에 28종류 82알까지 먹은 적도 있었다. 1945년 봄부터 부작용으로 이가 빠지기 시작하자 복용량을 줄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후 히틀러는 금단 증세를 이기기 위해 미친 듯이 단것을 먹어댔다.
히틀러 오른팔인 헤르만 괴링 공군 총사령관은 모르핀 중독이었다. 부상의 고통을 달래기 위해 모렐 박사에게서 모르핀 주사 처방을 받았고, 투여량이 늘면서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최고지도자들뿐 아니라 병사들도 마약에 취해 있었다. 1939~1945년 독일군은 '퍼비틴' 2억알을 보급했다. 필로폰 유사 성분이 든 퍼비틴은 독일군이 가진 '경이로운 무기'였다. 약 먹은 군인들은 잠도 안 자고 싸웠다. 장시간 대기하다 불시에 싸워야 하는 기습공격 때 특히 효력을 발휘했다.
오윤희 국제부 기자
○아돌프 히틀러의 저택 사진 최초로 공개
히틀러 저택 사진은 사진작가 후고 자에게르가 2차 세계대전 발발 전 2년 여 동안
베를린에 있는 히틀러의 사무실과 바이에른 사저를 찍은 것으로 60년 만에 세상에 공개된 것.
히틀러 저택 사진은 그의 호화스런 생활을 짐작케 하고 있다 화려한 외관과 고급스러운 내부로 구성된 히틀러 저택은 수려한 경관까지 자랑한다.
보도에 따르면 사진작가 후고 자에게르는 1945년 전쟁이 끝날 쯤 자신이 촬영한 히틀러 사진 2천여 장을
가죽 서류가방에 숨겼고 미군 병사들에게 가방을 수색 당했지만 사진은 들키지 않았다.
그는 히틀러 저택 사진을 포함한 히틀러 사진들을 12개의 유리 항아리에 넣어 뮌헨 근처 땅 속에 묻었다가
10년 뒤 발굴해 한 은행의 귀중품 보관소에 보관해왔다.
★볼거리
▲백조의 성
▲독일에서 가장 높은 교회 = 해발 1838m에 위치한 벤델슈타인 산 웬달스타인 교회
▲드레스텐 구왕궁
▲엘츠 성
▲중부 튀링겐주 에르푸르트 성당
▲히틀러 별장
○ 풍경
▲겨울 풍경 = 오버스트도로프의 아름다운 눈길
▲파르트나호 계곡의 고드름
▲스키장 = 추크피체 산(2962m),독일 최고봉에 위치
▲하얀 서리옷 입은 나뭇잎 - 14.11.27 프랑크푸르트
▲그림 같은 거리의 나무 - 베를린
▲동양화 같은 겨울 호수 - 뮌헨
▲베를린의 노을
▲사계절의 공존
▲아름다운 슈베린 섬
▲프랑크푸르트 마인강 너머 도시의 겨울
▲하이델베르크
▲강 위에 강이 흐른다
▲라인강
▲독일 남부알프스 일부인 벤델슈타인산(해발1838m)에 안개가 장관을 이루고있다
▲독일에서 가장 높은산인 추크슈피체
▲그림처럼 아름다운 독일 추크슈피체 산 정상 해발 2,963m 13. 4. 3.
▲아름다운 등산로 - 펠호른 산, 2038m로 오스트리아 국경선에 있다
▲팰트베르크 산 정상의 설경 13. 3. 13
▲나일폭포
▲ 13. 5. 10. 베를린 리첸제 호수
●독일의 지성 괴테
▲괴테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괴테(왼쪽)와 실러의 동상
▲베출라 거리에 세워진 괴테 동상
▲소설의 배경이 되는 베출라
▲아름다운 전원도시인 베출라
▲프랑크푸르트 대성당과 중세시대 옛 건물
▲젊은이들이 사교무대로 이용되었던 오페라하우스
▲고색창연한 성당과 바로크식 건축물들이 자리한 프랑크푸르트 구시가지
▲세계 각국의 많은 문학인이 찿는 괴테의 집과 박물관
▲프랑크푸르트 괴테의 집 내부
▲괴테의 생가 4층 방
▲괴테의 집 내부
●루터를 찿아서
▲루터를 찾아 - 독일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밤베르크 래그니츠 강가
▲루터가 태어난 독일의 소도시 아이스레벤 시청앞 루터 동상
▲밤베르트는 인구 7만의 작은 도시
▲도시 안에 2400여 채의 중세 건물이 있다
▲중세시대 목조건물이 잘 보존 되고 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1483 - 1546)가 태어나고 숨을 거둔 아이스레벤과 그가 종교개혁을 주도한 비텐베르크는 독일 작센 안할트주에 있으며 구동독 지역으로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도시
▲도르트문트 - 한 공원 잔디에 도르트문트 축구팀의 유니폼을 노란꽃으로 수 놓다 13. 7. 5.
▲도르트문트 - 세계에서 가장 큰 크리스마스 트리라고 주장하는 트리 = 45m 높이에 1700가문비 나무가 소요,무게가 30톤.
▲열차 탈선 사고 - 12. 8.21 베를린
▲베를린의 폭설 - 13. 3. 10
▲베를린 중앙역 앞에 판다 조각상 1500개를 설치 13. 8. 5. 멸종위기에대한 경각심
▲ 13. 7. 28. 베를린 분수대
▲베를린의 크리스마스 12.11.28.
▲티어가르텐 공원
▲홀로코스트 기념비
▲프랑크푸루트의 도서전
▲유럽중앙은행의 반영
▲조명예술 작품들로 아름다운 야경
●독일인의 일상
▲그로나우 인근 고속도로에서 52대의 차량 연쇄추돌 = 11.11.18
▲독일 출신 피아니스트 스테판 아론이 12.8.12. 만리장성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
▲알프호른 부는 바이에른 전통 의상 남성들
▲알프호른 부는 사람들
▲놀이기구 = 대형 관람차의 야경 연출(2011.10.1. 에르푸르트)
▲회전 놀이기구가 만든 빛의 퀘적
▲놀이기구 탄 어른들 - 12.9.23. 뮌헨 테레진비제에서 열린 제179회 옥토버페스트 참가자들 (oktoberfest - 세계 최대 축제)
▲축제 - 끝없는 니콜라스 런 - 산타 복장의 달리기 대회
▲겐트
▲독일 킬른 대성당내 벽에 비친 화려한 조명 - 13. 6. 5.
▲로스툭 해변 13. 8. 4.
▲리찌의 집
▲미니어처 테마공원 ( 리히텐슈타인 미니벨트 자연공원내)
▲보훔 고속도로에서 13,2,6, 폭설로 살인적인 교통 체증
▲부활절 토끼
▲쇄빙선
▲신기한 길 바닥
▲자동차 공원= 볼프스부르크의 폴크그바겐에 위치한 딜리버리타워 앞
▲자전거 가게
▲자전거 택시 - 프라이부르크 13, 7. 17
▲크루즈선
●재해
2013
▲함부르크의 홍수 13.1.31
▲파사우 시내가 홍수에 잠기다 13. 6. 3.
▲홍수 바이에른 튀링겐 작센등 13. 6. 3.
▲마이센의 역사적인 도시가 홍수로 물에 잠기다 13. 6. 5.
▲물바다 6. 5. 작센주
▲물난리 뮌헨 파사우
▲파사우
▲다뉴브강 범람으로 데겐도르프 인근 고솟도로가 물에 잠기다 6.9.
▲마이센
▲모래주머니 공수작전 - 엘베강의 무너진 둑을 메우기 위하여 모래 주머니 공수 13. 6. 10.
▲다뉴브강 500년만의 최고 수위
▲터진 제방 - 작센 13. 6. 10.
▲물에 잠긴 도시
▲홍수 피해 복구하는 헬기 13. 6. 10
▲주민 대피 작전 13. 6. 11.독일
▲넘치는 엘베 강 13. 6.12.
2017 태풍
▲태풍 피해 2017.10.29 베를린
▲하브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