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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와 그의 시대3/ <71> 유신헌법안 통과 - <111·끝> 영웅들

상림은내고향 2022. 3. 22. 20:08

■ 김지하와 그의 시대3

[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 동아일보

<71>  유신헌법안 통과

박정희 대통령의 돌연한 유신헌법 찬반투표 안은 재야는 물론이고 1974년 하반기 야당인 신민당의 움직임에 영향받은 바 컸다.

육영수 여사 서거 일주일 뒤인 8 22일 서울 명동 예술극장에서는 4 28일 결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유진산 총재 이후 당권을 겨루는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회에서는 유신 치하에서 무능력한 ‘불임(不姙)’ 야당 이미지를 벗고 진정한 야당으로 키우겠다는 선명성 경쟁이 불이 붙었다. 당시 학원 종교계 재야의 반유신 입김이 신민당에 거센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승자는 김영삼이었다. 최연소(47) 야당 총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선명 야당을 내걸고 당권을 차지한 그가 제일 먼저 뛰어든 일은 유신헌법 개헌 투쟁이었다. 11월에는 ‘개헌 대강(大綱)’을 마련했으며 “개헌 추진 원외투쟁도 하겠다”고 나섰다.

74
년 말까지만 해도 수출의 날(11 30), 검사장 회의(12 13) 등에서 쉴 새 없이 “유신헌법을 수호하겠다”고 불퇴전의 의지를 밝혔던 박 대통령은 75년으로 접어들면서 입장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새해 벽두부터 김영삼 총재가 개헌 추진 지부 현판식을 다니며 바람을 일으키자 김종필 국무총리가 나선다. ‘남산의 부장들’(김충식)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김종필은 정면 돌파밖에 길이 없다고 박 대통령에게 은밀히 건의했다. “드골처럼 국민투표를 해서 국민들이 유신체제가 나쁘다고 하면 고쳐야지요. 그러나 우리가 투표하면 이깁니다.” “총리가 그런 식으로 물러서니 이 놈 저 놈 다 덤비는 거야. JP는 박 대통령이 겉으로는 그렇게 펄쩍 뛰면서도 뭔가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며칠 뒤 박 대통령이 말했다. “날짜는 언제가 좋을까. 국민투표에서 지지가 안 나오면 내가 그만두지.”…청와대 비서실과 정보부는 국민투표 완승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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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반대가 많아 투표에서 지면 하야(下野)하겠다”는 대통령의 특별담화와 함께 국민투표일이 2 12일로 공고됐다. 불과 20일 뒤였으니 전광석화 같은 작전 수행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침 미국을 방문 중이던 김영삼 총재는 ‘대통령의 기습’에 깜짝 놀라 서둘러 귀국한다. 김 총재는 대통령의 발표가 투표 형식을 빌려 모처럼 달아오르고 있던 개헌 열기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작전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현지에서 성명을 내고 “기만적인 정치 쇼다. 신민당의 당력을 집결해 투표 거부운동을 하겠다”고 밝혔다. 귀국 중에 잠깐 들른 일본 도쿄에서까지 “귀국 즉시 대통령을 만나 투표 중지를 요청하겠다”고 했다. 김대중도 김영삼과 긴급 회동하고 공동회견을 통해 국민투표 거부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비롯한 14개 단체도 투표거부 공동성명을 내자 ‘투표 보이콧’ 운동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는 강경책으로 맞섰다.

헌법에 대한 찬반토론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내무부는 투표 거부를 선동하는 행위를 엄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투표 이틀 전인 2 10일에는 전국에 비상계엄령까지 내려졌다. 드디어 투표 당일인 2 12일이 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7시 이희호 여사와 함께 명동성당에 도착해 금식기도를 한 뒤 정각 9시 성당 안에 종이 울리자 “이번 투표 결과는 군부독재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을 견디지 못해 실시하는 것이며 미리 계획된 것을 발표할 것이므로 그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한다.

그리고 다음 날인 2 13일 정부는 유신헌법 찬반투표안이 79.8% 투표율에 73.1% 찬성으로 통과됐다고 발표했다.

박 대통령은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신은 나에게 또다시 중책을 맡기시다. 신명을 다해 중책 완수에 헌신할 것을 서약하다.

국민투표가 끝나고 3일 뒤인 2 15일 박 대통령은 다시 특별 담화를 발표한다. 민청학련 사건 및 기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던 민주인사 학생들을 일괄 석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른바 2·15조치였다.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현행 헌법 질서의 역사적 당위성과 국민적 정당성이 주권자인 국민의 총의로 재확인된 이 시점에서 이들을 석방함으로써 이들에 대해서도 국민 총화를 더욱 굳게 다지며 민족 중흥의 역사적 과업 수행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따라 이미 형이 확정된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 중 유인태 이현배 이강철 등과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만 제외하고 대다수가 형 집행정지로 석방된다. 김지하도 2 15일 김동길 박형규 등 56명과 함께 석방된다.

그가 풀려 나온 날, 서울 영등포 교도소 문 앞에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거의 모든 내외신이 집결해 있었다. 이미 한참 어둠이 내리고 영하의 온도가 기자들을 얼어붙게 한 밤 9. 드디어 머리를 박박 깎인 김지하가 나오자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졌다. 김지하는 곧장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 의해 공중으로 높이 헹가래 쳐졌다. 그리고 그의 발이 땅에 닿자마자 질문들이 홍수처럼 터져 나왔다.

“소감은?

“느낌은?

“얼굴이 수척하다. 갑자기 밖으로 나온 느낌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현 정부에 대해서는?

“유신철폐운동을 계속할 것인가?

“고문을 당했는가?
“이번에 태어난 아들에 대해서는?

“솔직한 지금 심경은?

쏟아지는 질문 세례가 끝나자 김지하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미쳤든지, 세월이 미쳤든지, 둘 다 미쳤든지 하여간 알 수 없다. 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10개월 만에 석방하는 건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다. 누군가? 미친 쪽은. 이제부터 서서히 어둠 속에 갇혔던 잔혹한 사실들이 모두 다 터져 나올 것이다. 그 터져 나오는 순서에 따라 현 정권도 서서히 붕괴해가기 시작할 것이다.

한편 당시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 중에는 훗날 한국 문단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사람도 있었으니 바로 ‘칼의 노래’를 쓴 소설가 김훈이었다.

 

 <72>   모성

(김지하가 풀려난) 1975 2 15일은 낮 최고 기온이 영하 7도였다. 며칠째 퍼붓던 눈이 멈추고, 날은 흐렸다. 흐린 날이 저물자 기온은 영하 12도 아래로 떨어졌다. 얼어붙은 거리에 북서풍이 불었고, 그날 밤 서울 영등포구 고척동 영등포 교도소 앞 거리에는 라면 껍질과 연탄재가 북서풍 속에서 회오리치면서 솟구치고 있었다.

1973
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한 김훈은 75년 그날 교도소 정문 앞에서 김지하의 출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그의 경험은 산문집 ‘바다의 기별’(생각의 나무)에 수록돼 있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김지하가 얼마나 당대 미디어로부터 주목받던 인물인지가 느껴진다.

‘교도소 앞에는 대낮부터 기자들이 몰려들었는데 교도소 쪽은 김지하의 석방 시간을 예고하지 않았다. 예고했다 하더라도 정치범의 석방 시간에 관한 약속을 법무 당국이 번번이 지키지 않았고, 기자들을 따돌리기 위하여 출소자들은 새벽이나 심야에 교도소 뒷문으로 내보내는 경우가 허다해 기자들은 하루 종일 교도소 문을 지키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은 나무토막이나 종이상자를 주워 모닥불을 때거나 인근 음식점에서 내다버린 구공탄 재에 남아 있는 불기 주변에 모여 언 발을 녹여가면서 교도소 정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언제 문이 열려 김지하가 나올지 알 수 없어 저녁을 먹으러 갈 수도 없었다. 마감시간이 임박해오자 기자들 사이의 분위기는 험악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김훈의 눈에 띈 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장모 박경리였다. 그러나 박경리가 있던 곳은 교도소 정문이 아니라 교도소를 바라보고 멀찍이 선 언덕 위였다. 다시 김훈의 글이다.

‘오후 다섯 시 삼십 분쯤 아니었을까.…교도소 정문 맞은편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웬 허름한 여인네가 포대기로 아기를 업은 채, 추위 속에서 웅크리고, 저물어가는 교도소 정문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여인네 옆에는 영업용 포니 택시가 한 대 정차해 있었는데, 그 여인네가 출소자를 마중하기 위하여 대절한 택시였다. 아마도 운전기사가 연료를 아끼느라고 택시 안의 히터를 꺼버린 모양이었다. 아이 업은 여인네는 자동차 밖에서 떨고 있었다. 그 여인네는 자꾸만 허리춤을 들어 올려 미끄러져 내리려는 아이를 등의 한복판 쪽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박경리가 맞는지 긴가민가 하던 김훈은 기자들의 무리를 떠나 여인네 쪽으로 접근했다. 가까이 가보니 과연 박경리 선생이었고 등에 업힌 아이는 김지하의 갓 태어난 아들인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선생이 알아보지 못하게 위치를 잡은 김훈은 선생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당대 최고의 문학가인 박 선생에게서 예술가 이전에 한 사람의 여성, 어머니로서의 질긴 모성의 힘을 느낀다.

‘그분은 담요로 만든 방한화에 버선을 신고 있었다. 발이 몹시 시려왔던지 이따금씩 방한화를 벗고 손으로 언 발을 주물렀다. 등에 업은 아이는 머리끝까지 온통 포대기로 감싸고 그 포대기 위를 다시 두꺼운 숄로 덮어서 아이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아이가 칭얼거릴 때마다 그 여인네는 몸을 흔들어서 아이를 얼렀다.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그 여인네는 고개를 뒤로 돌려서 무어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그 말은 나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여인네가 그때 아이에게 한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답답했다. “울지 마라, 아비 곧 나온다.” 아마 이런 말이었을까. 그 여인네가 아기를 업은 포대기는 매우 낡아 있었다. 포대기는 누빈 포대기였는데 허리 부분을 넓게 접어서 아이의 등에 힘이 걸리게 바싹 조였으며 아이의 엉덩이 밑으로 포대기 끈을 여려 겹 둘렀다. 그래도 그 여인네의 야윈 몸으로부터 아이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것이어서 여인네는 자꾸만 몸을 추슬러 아이를 끌어올렸다.…그때 그 여자는 길섶에 돋아난 풀 한 포기보다도 더 무명(無名)해 보였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일 아무런 이유가 없는, 어떤 자연현상처럼 보였다. 다만 사위의 옥바라지를 나온 한 장모였으며, 감옥에 간 사위의 핏덩이 아들을 키우는 팔자 사나운, 무력한 할머니의 모습만으로, 오직 그런 풀포기의 모습만으로 그 교도소 앞 언덕에서 북서풍에 시달리며 등에서 칭얼대는 아기를 어르고 있었다. 그런 그 여인네의 모습을 훔쳐보면서, 나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기로 했다. 시대도, 긴급조치도, 국가보안법도, 무슨무슨 혐의도, 성명서들도, 군법회의도, 김지하도,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밤 9. 교도소 문이 열리고 김지하가 나왔지만 그는 지지자들의 목말을 타고 ‘우린 승리하리라’를 부르며 사라졌다.

그제서야 박경리가 교도소 앞 사람들 속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사위때문이 아니라 백기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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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유신개헌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수감된 백기완도 그날 나오기로 돼있었다. 하지만 김지하가 나오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기자들이 교도소에 물어보니 ‘긴급조치 위반 부분은 형 집행 정지가 되었으나, 6년 전에 국민투표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전과가 있어서 벌금 십만 원을 납부하지 않으면 석방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김훈이 전하는 현장 모습이다.

‘즉각 백기완 석방을 위한 모금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미 대부분의 기자와 학생들이 김지하를 뒤쫓아 빠져나간 다음이어서 영 신통치 않았다. 그때 사람들 속으로 나타난 사람이 바로 박경리 선생이었다. 선생은 어느새 언덕에서 내려와 교도소 정문 앞 광장에 있었다. 그분은 아이를 감싼 포대기의 앞섶을 뒤적거리더니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냈다. 그러더니 가까이 있던 웬 대학생을 불렀다. “학생, 이 돈을 좀 보태시오”라고, 다만 그렇게 그분은 말했다. 그러고는 대절해온 택시에 몸을 실었다. 택시 안에서 등에 업었던 아이를 풀어서 무릎 위에서 재우고 있었다. 시간은 밤 열두 시에 임박하고 있었다. 만 원짜리 몇 장을 내놓고 그분은 다만 잠든 어린애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도 그분을 뒤쫓아 가는 사람은 없었다.…춥고 또 추운 겨울이었다.


▲정릉 집에서 손자를 업고 있는 작가 박경리를 김일주 씨가 찍은 것이다. 1982년 가을경이다. 동아일보DB

 

<73>  인혁당

김지하는 출옥 직후 제일 먼저 천주교 서울교구청 김수환 추기경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당시를 회고하는 그의 말이다.

“방에 들어서자 추기경께서 한 잔의 위스키를 주셨다. 그것을 마시니 머리 속과 온몸이 후끈하게 달아오르며 한결 개운해졌다. 나는 조금 들떠 있었다. 가라앉히지 않으면 실수할 것 같아서 인사만 드리고 재빨리 정릉에 있는 처가로 돌아갔다.

그의 말을 들으며 기자는 칼날처럼 서슬 퍼런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온 김지하에게 위스키를 권했던 추기경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듯했다.

김지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날 며칠을 까무러친 것처럼, 마치 죽은 듯이 내리 잠만 잤다. 오래간만에 맛보는 따뜻함, 아내, 장모, 그리고 아들. 모든 것이 낯설었고 모든 것이 새로웠다.

비록 몸은 풀렸으나 그의 내면은 행복하지 않았다. 다름 아닌 인혁당(인민혁명당) 때문이었다.

그가 풀려나오고 두 달이 채 안 된 75 4 9일 인혁당 사건으로 8명에게 사형이 집행된다.

피고들은 전날 대법원 판결에 따라 재심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재판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법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훗날 인혁당 사형집행은 유신정권 당시 정치권력에 종속된 수사 기관의 불법과 사법부의 굴종이 빚어낸 대표적 ‘사법 살인’으로 꼽힌다.

느닷없는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몰려온 가족들은 모두들 넋이 빠진 사람들처럼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시신들은 각각 시차를 두고 한 구씩 인도되었다. 집이 지방에 있는 가족들은 미사라도 드리고 장례를 치르고 싶다고 했으나 이마저도 거부됐다. 8구의 시신을 각각 경찰들이 설정한 장지로 견인해갔다.

인혁당 사건은 발생시기에 따라 1(1964) 2차 재건위 사건(1974)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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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사건은 한일회담과 대일 굴욕외교 반대 시위가 거셌던 1964 8 14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제1차 인혁당 사건’. 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혁당을 적발해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이듬해 1 20 1심에선 기소된 13명 가운데 2명은 징역형, 다른 11명은 무죄가 선고됐다. 그러나 5개월여 뒤인 1965 6 29 2심은 전원에 대해 유죄 판결했고, 9 21일 대법원은 항소심 형량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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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꼭 10년 뒤인 1974 4월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한 사건이다. 민청학련 주동자들이 1969년 이래 남한에서 지하 조직으로 암약한 인혁당과 연계를 맺어왔고 궁극적으로 공산 혁명을 기도했다는 것이었다. 8명에 대해 사형이, 15명에 대해 징역 15년에서 무기징역이 떨어졌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03년에 낸 ‘기억과 전망’ 봄호에 실린 ‘인민혁명당 사건을 통해서 본 인권의 문제’라는 제목의 글에는 당시 사건 관련자들이 얼마나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지 기술되어 있다.

‘고문은 주로 중정 6국 지하실에서 이뤄졌다. 수사관들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일삼았고, 지하실 사무실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몽둥이질을 했으며, 피의자들에게 일주일 이상 잠을 안 재우기도 했다. 하재완은 폐농양증에 걸려 입에서 피를 토했고, 장이 항문으로 빠져나와 똑바로 앉거나 걷지 못했다. 박중기는 전기고문을 받는 도중 실신했다. 이수병은 소나 돼지도 그렇게 맞으면 죽을 정도로 몽둥이질을 당했다고 한다. 당시 피의자들 대부분은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반 실신되는 경험을 했고, 몽둥이질 후유증으로 부축을 받으면서야 겨우 계단을 올라 다닐 수 있었다. 서울구치소 안에서도 철장을 붙잡고 몸을 뒤척이면서 겨우 교도관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남편과 아빠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수감되자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모, 형제, 부인들은 시장 목욕탕까지 따라다니는 경찰들의 철저한 감시와 미행을 받았다. 이웃들에게 ‘빨갱이 가족’으로 찍힌 어린 자녀들은 학교 친구와 선생님에게 왕따를 당했다. 이사를 가도 경찰들이 ‘빨갱이가 이사를 왔다’고 이웃에 소문을 내 사생활을 보장받지 못했다고 가족들은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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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와 유족들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 등을 바탕으로 재심을 청구해 2007, 2008년 모두 법원으로부터 “유신정권 때 불법 행위로 인한 희생자들”이라며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의 선고에 국가가 항소하지 않아 선고 8일 뒤 모두 무죄가 확정됐다.

그런데 당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데에 결정적 증언을 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김지하다.

김지하는 감옥에서 인혁당 관계자들을 우연히 만나 “사건이 조작됐으며 그 과정에서 말로 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는 것을 듣는다. 그리하여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수감 된 뒤 출감하자마자 1975 2 25일자부터 27일자 동아일보에 ‘苦行(고행) 1974’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글을 연재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다시 감옥에 끌려 들어가 갖은 고초를 겪게 된다.

기자는 그에게 “그 힘든 감옥생활이 끝난 지 바로 얼마 안 된 상태에서 어떻게 다시 글을 쓸 용기가 생겼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되물었다. “감옥에서 인혁당이 조작됐다는 것을 안 이상 어떻게 가만있을 수가 있겠나.

‘고행’에 실은 시는 당시 이런 그의 심경이 잘 나와 있다. 육신은 비록 해방되었으나 넋은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 그게 김지하의 내면이었다.

어둠 속에서
누가 나를 부른다
건너편 옥사 철창 너머에 녹슨
시뻘건 어둠
어둠 속에 웅크린 부릅뜬 두 눈
아 저 침묵이 부른다
(
중략)
철창에 걸린 피 묻은
낡은 속옷이,
숱한 밤 지하실의
몸부림치던 하얀 넋
찢어진 육신의 모든 외침이,
(
중략)
내 피를 부른다
거절하라고
그 어떤 거짓도 거절하라고
어둠 속에서
잿빛하늘 나직이 비 뿌리는 날
저 시뻘건 시뻘건 육신의 어둠 속에서
부릅뜬 저 두 눈

 

<74>  고행

그의 ‘고행’ 시가 말하는 대로 ‘잿빛 하늘 나직히 비 뿌리던 어느 날’ 김지하는 감방 밖에서 누군가 가래 끓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김지하는 ‘뺑끼통(감방 속 화장실을 뜻하는 은어)’으로 들어가 창에 붙어 서서 “나를 부르는 사람이 누구냐”고 큰 소리로 묻는다. 그랬더니 “하재완입니더”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상(舍上) 15()에 있던 김지하와 사하(舍下) 17()에 있던 하재완 사이에 통방(通房·재소자들이 창을 통해서 큰 소리로 교도관 몰래 대화하는 것)이 시작된 것이었다.

김지하가 “하재완이 누굽니까?” 물었더니 “인혁당입니더”라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다음은 ‘고행’에 소개된 문답이다.

―인혁당 그것 진짜입니까?
“물론 가짜입니더.

―그런데 왜 거기 갇혀 계슈?
“고문 때문이지러.

―고문을 많이 당했습니까?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버리고 부서져버리고 엉망진창입니더.

김지하가 “저런 쯧쯧” 하고 혀를 차는데 “즈그들도 나보고 정치 문제니께로 쬐끔만 참아달라고 합디더”라는 말이 돌아왔다.

며칠 뒤 김지하는 하재완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구치소 내 의무과에서 하는 재소자들의 진찰을 위해 차례를 기다리며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근처 딴 줄에 앉아 있던 ‘키가 작고 양다리 사이가 벌어지고 약간 고수머리에 얼굴에 칼자국이 나 있고, 왕년에 주먹깨나 썼을 것 같은 사람’이 그를 툭 치며 “김지하 씨지예?” 묻는 것 아닌가. 그가 바로 하재완이었다. 그는 인혁당 사건으로 얼마 후 사형에 처해진다.

그날 하재완은 교도관 눈치를 열심히 봐가며 지난번 통방 때와 똑같은 내용의 얘기를 낮고 빠른 소리로 김지하에게 전했다. ‘마치 지옥에서 백년지기를 만난 듯이 김지하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 한()이 맺힌 귀곡성(鬼哭聲)처럼 무시무시하게 들리는 가래 끓는 숨소리와 함께 열심히 열심히’ 자신이 당한 고통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며칠 뒤 어느 날에는 재소자들과 운동을 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사람이 김지하한테 다가오더니 “김지하 씨지요?” 물었다. 역시 얼마 후 사형을 당하는 이수병이었다. 그는 “어떻게 된 거냐”는 김지하의 물음에 “나라 위해 아무 일도 해보지도 못한 채 이리 끌려 들어와 슬기로운 학생운동 똥칠하는 데에 어거지 부역이나 하고 있어 정말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김지하가 한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민청학련 사건으로 재판을 받을 때 법정에서 인혁당 사건으로 잡혀 들어온 경북대학교 학생 이강철로부터 ‘인혁당의 ‘인’자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잘 아는 것으로 시인하지 않는다고 검사가 보는 앞에서 전기고문을 수차례나 받았다’는 말을 들었던 차였다. 그게 머릿속에 꽉 박혀 있는데 감옥에서 하재완 이수병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으니 인혁당이란 것이 틀림없이 조작극이며 고문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는 것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하는 감방 벽에 기대앉아 괴로움과 분노로 몸을 떤다. 그리고 수없이 자신에게 이렇게 묻고 대답한다. ‘내 피를 부르고 있는데 거절하라고 그 어떤 거짓도 거절하라고? 거짓을 거절하라고?

결국 김지하는 감옥에서 나온 직후 옥중수기‘고행’을 통해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었다는 것을 증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지하는 동아일보에 ‘고행’ 연재를 끝낸 1975 3 12일 서울 청진동 한 제과점에서 함세웅 신부로부터 ‘민주회복국민회의’ 대변인을 맡아 달라는 청을 받고 수락했다. 함 신부는 “내일부터 대변인 이름으로 회의의 공식적인 결정들을 발표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바로 이튿날인 3 13일 아침 집으로 들이닥친 경찰관들에게 붙잡혀 간다. 그의 말이다.

“경찰차 안에서 왜 다시 잡혀가는지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들었다. 국민회의 대변인을 맡아서일까, 아니면 동아일보에 발표한 인혁당 관계자 발언들 때문일까.

이유는 후자였다.

1975
3 14일자 동아일보 보도다.

13일 서울성북경찰서에 연행된 시인 김지하 씨(34) 일가족 중 김씨는 이날 오후 중앙정보부로 넘겨져 조사를 받고 있으며 처 김영주(30)와 어머니 정금성(53)씨는 귀가했다. 김영주씨에 따르면 13일 오후 4시반경 중앙정보부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가택수색영장을 제시하고 집을 뒤져 책과 편지들을 압수해갔다. 영장에는 ①최근의 동아일보 사태(‘고행’ 연재)에 관한 조사를 위해서 ②김씨가 석방된 후 인혁당 사건이 고문에 의한 것이라는 허위사실을 유포 선동했기 때문에 가택수색을 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는 것이다.

김지하는 중앙정보부 제7국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수배와 구속 도피를 반복해 온 그였지만 이후 그토록 긴 세월을, 그렇게 혹독하게 감옥에서 보내리라고는 그때만해도 예감하지 못했다.

다시 그의 말이다.

“내게 가해진 고문은 잠 안 재우기였다. 입안이 다 헤지고 입술이 부르텄다. 눈알이 뜨거워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잠이 들면 깨우고 잠이 들면 또 깨우고… 눈을 뜨면 눈알 빠진 아버지의 환영이 오갔다. 그리고 환청까지 들렸다. 옆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울음소리는 이어졌다 끊겼다 들려왔다. 어느 날은 또 흐린 전등 불빛 아래 허공 위에 눈알 빠진 아버지의 검푸른 얼굴이 보였다. 아버지가 옆방에 끌려와 고문을 받고 있는 것인가?

취조는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똑같은 질문이 끝없이 반복되다가 대답이 전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바로 그 다른 지점부터 파고들어 다시 시작하는, 이른바 악명 높은 ‘양파 까기’였다.

“네가 인혁당 대변인이냐?

정보부 요원들은 ‘인혁당이 날조된 사건이라 선전하는 북괴의 활동에 동조해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며 그를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또 강원도 원주 집을 수색해 나온 ‘장일담’ ‘말뚝’이라는 제목으로 써놓았던 희곡 구상메모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제로 한 작품을 쓰려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이적표현물 제작을 위한 예비행위’라고 주장했다. 다시 김지하의 말이다.

“그들은 끝없이 내 손가락에 인주를 발라 조서에 지장을 찍으면서 일주일 동안 잠 안 재우기를 계속했다. 결국 나는 잠을 재워준다는 조건으로 ‘가톨릭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라는 그들의 주장에 반쯤 동의하는 형식으로 어물어물 취조를 끝냈다.


<75> 베트남 패망

중앙정보부는 1975 3 19일 김지하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구속 송치한다. 2·15조치로 석방된 관련자 중 재구속된 첫 사례였다.

김지하가 다시 감옥에 들어가고 얼마 후인 4 9일 인혁당 8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이뤄진다. 그리고 이틀 뒤 서울대 농과대 교정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유신헌법 철폐와 박 정권 퇴진” 등의 구호가 터져 나오며 집회가 열리던 중 이 대학 축산과 4학년 김상진이 선언문을 읽고 난 후 20cm가량 길이의 등산용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른 것이었다. 그는 재학 중 입대해 군 복무를 마치고 4학년에 복학한 26세의 청년이었다.

그는 할복 직전 선언문에서 이렇게 외쳤다.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대학은 휴강의 노예가 되고 교수들은 정부의 대변자가 되어가고 우리들은 어미 닭을 잃은 병아리마냥 반응 없는 울부짖음만 토하고 있다.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가고 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했다. …들으라!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를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김상진은 병원으로 옮겨지는 차 안에서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애원하다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았지만 다음 날 아침 눈을 감는다.

그의 할복자살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널리 알려졌다. 3일 뒤인 4 12일 서울대 농대는 휴교령을 발표했고 15일 민주회복국민회의도 추도성명을 냈다. 18일에는 명동성당에서 추도미사가 열렸다. 24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도 추모기도회를 열고 ‘김상진 군의 죽음에 답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지하가 재구속되고 인혁당 관련자들이 사형집행되고 김상진의 할복자살까지 이어지자 대대적인 민주화 시위를 촉발시킬 수 있는 뇌관이 될 것이 뻔했다. 그러나 1975 4월 한국 사회는 격동하는 국제정세로 다시 공산화의 공포에 휘말리니 바로 베트남과 캄보디아 공산화에 따른 것이었다.

캄보디아는 1975 4 17일 급진 공산주의 운동단체인 크메르루주가 수도 프놈펜을 함락하며 공산군에 장악된다. 70 3월 론 놀 장군이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친미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바로 크메르루주군과의 내전에 돌입해 전체 국민의 10%에 가까운 70여만 명이 숨지는 피의 전쟁을 벌인 것. 하지만 결국 정부군이 백기를 들고 론 놀은 하와이로 망명하면서 공산화됐다.

캄보디아 공산화 소식이 알려진 직후 이보다 더 큰 충격적인 소식이 알려지니 바로 4 30일 베트남의 공산화였다. 이곳에 군대를 파병한 한국으로서는 남의 일 같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베트남이 미군 철수 이후 내부 분열로 망해가는 과정이 언론을 통해 매일 생중계되면서 국민들은 대한민국도 어느 날 갑자기 적화통일되지 않을까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줄을 이어 피란을 가는 베트남 국민들의 참혹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 국민들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6·25를 떠올렸다. 신문들은 연일 대문짝만 하게 혼란에 빠진 베트남 상황을 전했다.

1975
4 30일 밤, 베트남 공산군 탱크가 사이공의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 철문을 부수고 들어가 깃발을 올리고 있었던 시간에 박정희 대통령은 비장한 심정으로 이렇게 일기를 쓴다.

‘참으로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우리 젊은이 30만 명이 파병해 8년간이나 싸워서 월남 국민들을 도왔다. 이제 그 나라는 멸망하고 월남공화국이란 이름은 지도상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자기 나라를 자기들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와 힘이 없는 나라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엄연하고도 냉혹한 현실과 진리를 보았다. 남이 도와주려니 믿고 나라 지키겠다는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망국의 비애를 겪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 눈으로 보았다. …이 강산은 조상들이 과거 수천 년 동안 영고성쇠를 다 겪으면서 지켜오며 이룩한 조상의 나라다. 영원히, 영원히 이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켜가야 한다.

이 같은 정세 속에서 김일성의 공세는 날이 갈수록 기고만장해졌다.

그는 75 4 18 14년 만에 중국 당과 정부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해 덩샤오핑을 만나 국제사회를 떠들썩하게 한다.

김일성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이 공산군에 함락된 직후인 4 19일 베이징에서 열린 환영 연설에서 “만일 남조선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단일민족이면서 같은 민족으로서 팔짱을 끼고 있지 않고 남조선 인민을 적극 돕겠다. 만일 적들이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키면 단호하게 전쟁으로 대답하겠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이요, 얻을 것은 조국의 통일”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한 달 전 2차 땅굴 발견으로 북한의 기습을 현실로 느끼게 된 국민들로서는 그의 말이 단순한 엄포로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김일성은 처음엔 ‘4 16일 방중’으로 발표했다가 ‘18일 방중’으로 바꿨는데 일부러 프놈펜 함락에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풀이됐다.

어떻든 75년 상반기 한국 사회에는 서울을 사수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대대적인 반공 분위기가 지배했다. 정부는 전국에서 안보궐기대회를 열어 학생과 시민을 동원했다. 전국 주요 거리와 관공서 건물에는 ‘총력안보’ 구호가 내걸렸다.

마침내 박 대통령은 김일성의 엄포 한 달이 채 안 된 5 13일 긴급조치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다. 긴급조치 9호는 79 10·26까지 4 6개월간이나 지속되면서 총 800여 명이라는 구속자를 낳은 대기록(?)을 세운다.

김지하 본인은 물론이요, 가족들까지 “이번에는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

▲1975 4 30일 조국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5 13일 부산에 상륙한 피란민들. 동아일보DB

 

<76> 민주교도관

기자는 이번 시리즈를 위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는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일을 하면서 민주 인사들을 도와준 ‘보석’ 같은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중에서도 ‘민주 교도관’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이들은 서슬 퍼런 독재시절, 공무원 신분으로 정권유지 수단이었던 교도소에서 ‘죄수’들을 감시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수시로 감옥을 드나드는 민주 투사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물심양면으로 돌봐주었다. 이들 중에는 민주 인사들을 도운 게 발각되어, 혹은 그들이 수배되었을 때 숨겨주었던 게 발각이 되어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도 있고 심지어 감옥까지 갔다 온 사람도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국의 민주화는 몇몇 운동가의 헌신이 아니라 두터운 민중의 지지에서 가능했다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1967
년부터 1979년까지 13년간 서울구치소에서 일한 전병용 교도관은 ‘민주 교도관’들의 좌장 격이다. 87 5·3 인천항쟁 때에는 장기표 등을 숨겨준 혐의로 구속 수감되기도 했다. 홍성우 변호사도 “70년대에 감옥에 간 민주인사들 중에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말한다(‘인권변론 한 시대’).

전 교도관은 김지하와도 인연이 깊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되었을 때 만났던 그는 김지하가 출감한 지 27일 만에 다시 붙잡혀오자 못내 가슴 아파한다. 그는 당시 김지하의 모습을 1990년에 펴낸 ‘감방별곡-어느 민주 교도관이 본 서울구치소’란 제목의 책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동안 세 번째 투옥 경험이 있는 김지하는 다른 지식인들처럼 징역을 고달프게 살지는 않았다. 타고난 ‘광대기질, 건달기질’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누구와도 쉽게 친했고 징역을 크게 힘들어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무엇보다 (김지하 입장에서) 그전까지와는 다른 처우를 몸으로 확연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선 글자가 씌어 있는 책이란 책은 차입이 금지됐다. 교도소 당국이 넣어주는 성경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다. 변호인 접견 외에는 가족 면회조차 차단당했다. (여기에) 그를 감시하는 눈들은 곳곳에 수도 없이 배치됐다. …그래서 그랬는지 종전과 다르게 심각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깊은 고뇌에 빠져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줄 때가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김지하가 감옥에 있는 동안 검사의 공소장은 형이 가중되는 것으로 슬그머니 바뀐다. 변호를 맡았던 홍성우 변호사는 ‘인권변론 한 시대’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처음 죄목은 반공법상 이적표현물 제작 예비죄, 이적표현물 제작, 선전활동에 동조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반공법은 법정형이 7년 이하다. 징역을 아무리 주려 해도 7년이 상한이었다. 그러자 검사가 누범 가중 조항을 추가해 기소를 하는 식으로 슬그머니 공소장을 바꾼다. 김지하는 오적 사건 등으로 이미 반공법·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이 있어 누범이었는데 누범의 경우 최고 사형까지 처형할 수 있다는 법조문을 공소장 변경 형식으로 들이댄 것이었다. 더구나 1차 공판 기일이 인혁당 관련자들의 사형 집행이 이뤄진 직후인 5 19일이어서 김지하가 바로 재판을 받으면 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홍 변호사는 “법정에 드나든 지 20년이 넘었지만 그때처럼 마음을 졸였던 때가 없었다”고 회고한다.

변호인단이 찾아낸 묘수는 재판부 기피신청이었다. 이 제도는 피고인에게 불리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명백한 사람이 재판을 맡은 경우 그것을 기피할 수 있는 제도였다. 마침 김지하 담당 재판장이 인혁당 사건을 재판한 판사였다.

5
19일 재판이 시작되고 인정 신문이 끝나자마자 김지하가 입을 열었다.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재판장이 인혁당을 재판한 판사다.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내 발언이 문제가 된 이번 사건에서 사건에 대한 예단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한 만큼 재판부 기피신청을 한다.

재판부는 허를 찔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피신청을 받아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때까지 재판을 연기하는 식으로 1차 공판이 끝났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도 잠깐, 정작 사람들을 경악하게 한 일은 따로 있었으니 그즈음 중앙정보부가 ‘김지하 반공법위반 사건의 진상’이라는 제목으로 노란색 표지의 괴문서를 찍어 국내외에 대량으로 배포한 것이다. 다름아닌, 김지하가 정보부에서 작성한 자필 진술서였다. 여기에는 그가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라 고백한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을 읽다 보면 누구라도 ‘김지하는 틀림없이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게 되어 있었다. 정보부의 강압에 따른 자백이었는데도 정보부는 이 문건을 5개 언어로 번역해 외국에까지 돌렸다. 김지하를 국내외적으로 완전히 매장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재판부 기피신청으로 가까스로 당장의 위기는 벗어날 수는 있었으나 정보부가 돌린 괴문서는 앞으로 다가올 위험의 실체를 피부로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필시 무슨 일을 당하고야 말 것 같았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동료와 친지들이 대책을 숙의하기 시작했다. 접견이 허용된 변호사와 성직자들을 통해 ‘김지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진실을 세상 밖으로 전할 수 있는 구체적 활로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논의됐다. 그래서 나온 것이 ‘양심선언’이었다.

김지하가 옥중에서 자신의 결백을 담은 양심선언을 쓰고 이것을 교도소 밖으로 반출해 국내외에서 광범위한 구명 운동을 벌이자는 계획이었다. 이때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전 교도관이다.

전 교도관이 책 ‘감방별곡’에서 털어놓은 회고다.

‘내 역할은 김지하와 밖에 있는 사람들의 각종 서신 연락을 통해 양심선언을 보완하고 완성하는 작업을 돕는 것이었다. 또 작성 경위와 감옥 밖으로의 반출 경로를 조작해 나중에 선언이 공개됐을 때 정보기관이 그 과정을 알 수 없도록 알리바이를 세우는 일까지 포함됐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것이었지만 내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상당한 위험도 수반되는 것이었다.

전 교도관은 ‘단순한 것’이라고 했지만 감시가 철벽같은 상황에서 김지하를 돕는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졸이는 일이고 위험한 일이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전 교도관은 자신의 야간근무가 돌아올 때마다 수감자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 종이와 필기구를 김지하에게 건넸다. 그리고 김지하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A4 크기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로 자신의 억울한 심경과 박정희 정권을 향한 비판을 쏟아내면 그 문건을 넘겨받아 다음 날 퇴근할 때 몸에 숨겨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이 일은 수차례 반복됐다
.

<77> 반출

전병용 교도관이 들고 나온 문건들은 그날로 김지하 측근들에게 넘겨졌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조영래가 문건을 건네받아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조영래의 손이 닿은 원고가 다시 김지하 손에 들어가면 김지하가 이를 다시 검토해 되돌려 보내는 식이었다.

다시 전 교도관의 회고다.

‘나중에 발각될 것을 대비해 종이와 필기구 출처를 확실히 해놓는 일은 김지하 옆방에 수감되어 있던 한 학생이 동의해 어렵지 않게 끝낼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국사범이나 요시찰인에 한해 항소이유서 등을 방 안에서 작성하도록 했는데 그 과정에서 교도관들이 종이와 연필 등을 주었다가 회수하곤 했다. 나는 그 학생이 쓰다 남은 종이와 연필을 김지하에게 전했다.

양심선언을 바깥으로 반출하는 일도 큰일이었지만 세상에 공개되었을 경우 작성과 유출 경로를 어떻게 밝힐 것인지, 이른바 알리바이를 허위로 만드는 일도 중요했다. 그래야 피해자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 교도관이 궁리 끝에 꾀를 냈다. 마침 김지하가 수감되어 있던 사동의 청소(소제)를 담당하고 있던 소년수 한 명이 만기 출소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제’라는 것은 행형 성적이 우수하거나 만기 출소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재소자 중에서 선발하는데 각 사동의 청소나 기타 잡일을 시키면서 얼마간 자유로운 구금 생활을 허용해 주는, 말하자면 수감자 중에서 선발된 자치대원의 일종이었다.

전 교도관이 눈여겨본 그 소년수도 착실하고 순박해서 여러 사람의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그는 이 소년수에게 양심선언 최종본을 맡겨 만기 출소하는 날 내보내기로 한다. 물론 소년수는 이 문건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말이다. 이러다 보니 김지하 양심선언 반출일은 소년수의 만기 출소일인 1975 5 22일로 잡혔다.

이렇게 일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 전 교도관이 출근길 구치소 앞 버스정류장에 내려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불러 세웠다. 김지하 모친이었다. 전 교도관은 아들의 면회를 다니던 모친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모친은 전 교도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내가 어떤 사람을 찾아가 의논해 봤는데 그분 말이 양심선언을 하면 오히려 화를 입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는 거야.

자식 걱정 때문에 애를 끓고 있는 어머니 입장에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다시 전 교도관의 회고다.

‘우리도 그런 걱정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어머니 입장이라는 것이 어디 그럴 것인가. 당시 모친은 외아들이 빨갱이로 몰리는 상황에서 갖은 고초를 함께 겪으며 아들 옥바라지를 위해 동가식서가숙하면서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모친께 확실한 대답을 드리지 못하고 헤어지고 난 후 그 문제를 골똘히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다는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김지하 본인이 결단을 내리고 추진하는 일이니만큼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마침내 5 22일이 왔다.

김지하가 미리 전 교도관에게 소개받은 소년수를 불러 종이 뭉치를 쥐여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집에 보내는 안부편지이니 밖으로 나가거든 명동성당으로 가서 윤형중 신부라는 사람을 찾아 전해 달라.

사실 양심선언문은 이미 며칠 전에 완성을 끝내고 발표 시점만 기다리고 있었기에 당시 김지하가 전해준 종치 뭉치는 사실은 빈 뭉치였다. 어떻든 영문을 모르는 소년수는 종이 뭉치를 품속에 갈무리해 서울구치소 정문을 통과했다.

공개는 8월에 일본에서 이뤄진다. 조영래 등에 의해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된 문건을 8 4일 ‘가톨릭 정의와 평화협의회’ 소마 노부오 주교가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공표한 것이다. 소마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양심선언은 금년 5월에 쓰여 만기 출감자를 통해 서울 명동대성당의 윤형중 신부님께 전해졌습니다. 그것이 윤 신부님을 방문한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미국의 시노트 신부님께 원문이 전달되었고 시노트 신부님으로부터 그 사본이 7월 상순 일본 ‘가톨릭 정의와 평화 협의회’에 송부되어 가급적 빠른 시일에 전 세계에 일제히 공표하여 달라는 의뢰가 온 것 입니다.

김지하의 옥중 양심선언은 곧 주요 외신으로 타전됐다.

당시 공개된 양심선언문 전문은 김지하의 책 ‘남조선과 뱃노래’에 수록되어 있다. 김지하는 1985년 책을 통해 선언문을 재공개하며 “오늘 이 글이 재출간되는 것을 계기로 해서 분명히 밝혀두건대 일부에서 마치 내가 쓴 글인 양 주장하는데 나 혼자 쓴 것이 아니라 철저히 나와 고() 조영래 씨의 글이다. 내가 감옥 안에서 중요한 ‘스킴(scheme·계획)’을 다 작성했고 조영래 씨가 풀어서 쓴 것이 바로 이 글”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을 보낸다’로 시작하는 글은 본문과 추신, ‘사제단 신부님들께 보내는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책에 수록된 쪽수만 24쪽인 매우 긴 글이다. 김지하는 글에서 ‘내가 공산주의자인가’ ‘민주주의와 혁명과 폭력에 관하여’ ‘혁명적 종교에의 꿈-‘장일담’의 세계’ ‘나는 반공법을 위반했는가’를 소제목으로 해 힘과 열정을 다해 자신을 변호한다.

그의 양심선언문은 훗날 문학적 가치를 평가받는데 이는 개인적 한을 풀기 위한 항변이라기보다 독재에 대한 지성의 항의요, 탄압받고 있는 정치범들을 위한 집단적 변론의 성격이 짙었기 때문이다. 홍성우 변호사의 말이다(‘인권변론 한 시대’).

“한마디로 한 시대의 기념비적 명문이라 생각한다. 피고인의 절박한 사정이 절절히 들어 있고 거기다 해박한 지식과 감동을 자아내는 이끌림을 갖고 있다. 언제 읽어도 가슴이 뛰게 하는…. 그걸로 싸움은 일단 승부가 난 거나 마찬가지다 할 정도로 아주 쾌거였다. 선언문은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다.

김지하 사건은 재판 기피 신청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가리는 재판이 일단 재항고까지 해서 대법원에서 다 기각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분위기도 반전되고 우리 쪽으로 주도권이 넘어왔다고 할 수 있었다. 일단 1975 5월 분위기라는 예봉을 피하고 일방적 수세를 벗어나 시간을 벌면서 이제 재판 한번 붙자 이런 분위기가 되어 갔던 것이다.

마침내 양심선언이 발표되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서울구치소는 말할 것도 없었다
.

 

<78>  환각

서울구치소에서는 대대적인 색출작전이 벌어졌다. 구치소 내 거의 모든 교도관이 정보부로 끌려갔다. 다시 전병용 교도관의 회고다.

‘예상했던 대로 정보부에서는 양심선언 반출 경위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었지만 아무것도 눈치 채지는 못했다. 그들은 사건 경위를 우리가 짜놓은 각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고 누구에게도 형사상 책임을 물을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그 일로 인해 (감시를 소홀히 했다며) 동료 교도관들이 파면되고 좌천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지금도 미안하고도 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선언문 반출 심부름을 맡았던 소년수도 정보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으며 고초를 겪긴 했지만 “편지 뭉치 같은 것을 김지하가 갖다 주라고 해서 그렇게 한 것뿐”이라는 말에 정보부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정보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고 다시 구치소로 돌아온 김지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혹독한 감시에 놓인다. 그는 바로 얼마 전까지 문세광이 갇혔던 독방으로 옮겨져 수감됐다. 그가 있던 층의 모든 방은 비워졌다. 다른 사람과 ‘통방’을 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접견과 물건 차입도 일절 금지됐다. TV 카메라까지 설치돼 24시간 행동을 감시당했다. 심지어 ‘종이’라고 생긴 것들은 어떤 것이든 공급이 중단됐다. 용변에 쓸 화장지조차 반입이 금지됐다. 박정희 정권의 모진 보복이 시작된 것이다.

김지하는 24시간 불이 켜진, ‘절대 침묵’의 방에서 사방으로부터 감시를 받으며 지옥 같은 시간을 경험해야 했다. 무려 일 년 반 넘게 성경을 비롯해 모든 ‘종이’가 금지됐고 접견도 금지, 통방도 금지, 운동도 금지, 금지였다. 김지하는 결국 공상만으로 시간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이다.

“낮 시간에는 3부로 나눠 시간을 죽였다. 1부는 아침부터 열두 시까지 ‘민족통일 문제 구상’, 2부는 열두 시부터 네 시까지 20대에 ‘청맥’ 부탁으로 쓰려다가 중단한 동학혁명 서사시를 구상하고 잊기 쉬운 뼈대들을 나만 아는 암호로 흰 벽 위에 젓가락을 갈아 만든 대꼬챙이로 긁어서 표시하는 집필 시간으로 보냈다. 그리고 3부는 저녁밥 먹고 나서 취침 때까지 서정시와 현대 한국의 ‘반골열전(反骨列傳)’을 머릿속으로 쓰거나, 아니면 추억하거나, 아니면 비판하거나, 아니면 그냥 멍청히 앉아 있거나, 아니면 귀를 기울여 창밖에서 오가는 도둑님들 통방 내용으로 미루어 도둑님들의 삶에 관한 내 스타일의 서사시를 구상하거나, 아니면 그것도 하지 않거나…. , 그랬다. 이것들이 나의 근 일 년 반 동안 대강의 일과였다.

그가 환각을 경험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어느 날 꿈에는 박정희를 만났다. 그가 배를 타고 멀리 도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곁에 있던 사람이 칼을 던져 돛 줄을 끊어버렸다. 배는 돛들이 제멋대로 놀며 뱅뱅뱅 돌다가 마침내 구름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감방문 바로 위에는 텔레비전 모니터가 달려 있고 문 바로 옆에는 흰 벽이 깎이고 그 안에 아마도 녹음기로 보이는 무슨 시커먼 기계가 하나 들어앉아 있었다…. 문세광이 있던 방이라서 그랬을까. 한번은 일본 적군파에 속하는 키가 후리후리한, 검은 옷과 검은 복면의 닌자 두 명이 창살 사이로 슬며시 들어오더니 나를 프랑스로 데려가겠다고 말하는 환각도 나타났다. 또 그 다음 어느 날 한밤중에는 노 젓는 소리가 내내 들려와 창살 밖으로 내다봤더니 ‘보물섬’에 나오는 외다리 선장 실버가 조각배에 술과 담배를 잔뜩 싣고 창문가에 다가와 배를 대는 것이 아닌가! 우선 반가워서 술 한 모금에 담배 한 대를 맛있게 먹고 나서 가만 생각하니 이것은 체통 문제라 실버에게 고맙지만 사양하겠다고 극구 사정하여 보낸 일도 있었다.

이런 환각은 대체로 밤에 일어났다.

그는 안에서 이토록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바깥에서는 국제적인 인물이 되었다. 1975 6 29일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는 제3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로터스 특별상’을 그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하면서 ‘김지하 석방요구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기도 했다.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구명운동이 이어졌다. ‘김지하의 사상과 신앙을 보증한다’는 성명서에 독일의 신학자 요한 메츠와 위르겐 몰트만을 비롯한 제3세계 15개국의 신학자들과 사르트르, 보부아르, 촘스키, 카를 라너, 하버마스와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 오다 마코토, 와다 하루키 등 국제적으로 저명한 인사들이 서명했다.

마침내 김지하는 미국 일본 유럽 등의 작가들과 지식인들에 의해 1975년도 노벨 문학상, 노벨 평화상 후보로까지 추천된다. 이와 관련해 박정희 정권 때 스웨덴 대사관 해외공보관으로 일했던 최규장은 책 ‘언론인의 사계’(을유문화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은밀한 미션이 떨어져 있었다. 담시 오적을 쓴 김지하 시인의 노벨상 추천을 저지하라는 것이었다. ‘쳇, 노벨상을 타면 겨레의 영광인데 로비는 못할망정 저지는 또 무슨 저지란 말인가’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설적이긴 해도 그를 세계적인 시인으로 만드는 것은 시인 자신이 아니라 박정희가 아닌가 싶었다.

양심선언이 발표되면서 재판은 맥이 빠졌고 재판부도 김지하가 세계적인 인물로 주목받자 난처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재판은 지체되고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1심 구속기간이 만료되자 재판부는 형 집행정지를 결정했다가 다시 이를 취소하는 형식으로 그를 재수감하는 편법을 쓴다.

그때 서른넷이던 1975 3월에 다시 감옥에 들어간 김지하는 서른아홉이던 1980 12 11일에야 풀려난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30대 청년 시절을 감옥에서 ‘지옥’ 같은 구금 생활로 보낸 것이다
.

 

<79>  중동 특수

1975년부터 한국경제는 미증유의 호황을 맛보게 된다. 19731974년에 기름값이 4배로 오르는 1차 오일쇼크를 경험하면서 한국 경제의 허약함에 너나없이 절망하는 목소리가 팽배해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뜻하지 않은 ‘달러 박스’가 등장하니 바로 ‘중동 특수’였다.

1960
년대 서독으로 진출한 광부 간호사들이 순수하게 노동력만 갖고 진출했다면 70년대 중동 진출은 인력과 기업(건설업 용역업)이 동반된 노동력 수출이라는 점에서 달랐다. 비록 외국회사의 하청이긴 했지만 한국 건설업체가 주 계약자가 되어 공사를 따낸 것은 큰 발전이었다.

중동 진출 첫해인 1974년 해외 수주액은 26000만 달러였으나 이듬해 1975년에는 226.3%나 늘어난 85000만 달러나 됐다. 75년 해외진출 건설업체 수는 현대건설, 대림산업, 동아건설 등 32개사에 달했다.

해외진출 기능사에게는 군복무 면제, 기능사 자격증 부여, 최고 연봉 등의 특전이 주어졌다. 한국 근로자들은 특유의 성실함과 끈기로 해외 업체 및 중동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국 업체는 공기(工期)를 맞추는 데 만족하지 않고 완공 일정을 단축해 신뢰를 쌓았다.

중동 인력 수출은 오일쇼크를 타개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벌인 정책이었다. 이를 강력하게 추진한 사람은 중화학공업화 등 중요한 경제 정책의 브레인 역할을 한 오원철 경제수석이었다. 그는 회고록 ‘한국형 경제건설’의 ‘중동 진출’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오일쇼크로 1974년 국제수지적자폭이 171390만 달러였다. 적자를 어떤 식으로든 메우지 못하면 나라가 부도날 판이었다.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찾아오는 외국 손님들마다 붙잡고 “석유파동 대책을 어떻게 세우고 있느냐” 물으니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원유값이 올라 중동 산유국에 달러가 흘러넘치고 있다. 그 나라들이 지금 이 돈을 갖고 경제 건설을 한다고 한다. 여러 나라가 뛰어들고 있지만 특히 일본은 6·25전쟁 때나 월남전 때 돈을 벌어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중동에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옳다, 바로 이거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74 1 30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중동 진출 전략을 보고하며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에게는 세 가지 비교우위가 있습니다. 우선 중동은 고온이고 사막지대로 작업환경이 지구상에서 가장 나쁩니다. 그러나 한국은 우수한 인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쁜 조건은 지극히 유리한 조건이 됩니다. 둘째, 선진국 기술자들은 아무리 돈을 준다 해도 갈 사람이 없지만 우리는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수십만 명의 제대 장병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경제는 어린 여자 근로자가 수출을 해서 지탱해왔지만 이번에는 남자들이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남자 기능공 인건비는 선진국보다 훨씬 싸고 기술 수준은 후진국보다 월등히 높습니다. 셋째, 우리 건설업체는 이미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통해 공기 단축 기법을 익혔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빨리 공사를 할 수 있습니다.

보고를 다 들은 박 대통령이 “오 수석, 소신이 있어 좋구먼” 하고 웃자 그는 내친 김에 한마디를 덧붙인다.

“각하! 중동에 진출하자면 뒷거래가 꼭 필요합니다. 우리가 또 이 방면에는 소질이 있지 않습니까.

박 대통령이 파안대소를 했다.

박 대통령은 74 4 25일 중동에 첫 번째 각료급 사절단을 파견한 데 이어 9 18일 “오일쇼크로 인한 외환위기는 오일쇼크로 부자가 된 중동에서 처방책을 찾아야 한다”며 중동건설 진출 진흥책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어 건설부와 중앙정보부에도 “중동 진출 업체들을 철저히 감독해서 부실공사가 나오지 않도록 하고 한국 업자끼리 부당한 덤핑 입찰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정부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중동건설 수주액은 1975 75000만 달러에서 1980 82억 달러로 크게 늘었다. 19751979년의 GNP 증가율 7.2%와 수출증가율 25.0%를 훨씬 뛰어넘는 연평균 76.1%의 성장률이었다.

오일쇼크로 신음하던 한국 경제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1977년 대망의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하고 경상수지 흑자까지 기록하면서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 것은 중동 건설 붐에 따른 달러 수입에 힘입은 바 컸다. 실제로 76년과 77년 사이에 국내 투자율은 15%에서 27%, 경제성장률은 각각 14%, 13%를 기록했다. 냉장고 판매증가율은 89%에서 148%, 흑백텔레비전은 31%에서 46%, 자동차는 65%에서 111%로 늘어났다.

중동 특수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기업이 바로 현대다.

현대는 1975 10월 바레인 아랍수리조선소 건설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12월 사우디 해군기지 해상공사를 따냈다. 1975년 중동 진출 이후 1979년까지 현대가 벌어들인 외화 수입은 6400만 달러에 달했으며 이는 회사 총 매출 수익 가운데 60%나 됐다. 76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공사를 93000만 달러에 수주하는 개가를 올렸다. 경쟁사가 써낸 152000만 달러보다 6억 달러나 낮은 액수로 공사를 따내고도 훌륭한 성과를 냈다.

이런 비약적 성장에 힘입어 현대는 1976년 미 경제전문지 ‘포천’이 뽑은 세계 500대 기업에 들어가는 기염을 토한다. 79년엔 78위로까지 등재된다.

하지만 75년부터 시작된 대호황기는 짧았다. 곧 인플레에 신음하기 시작한 한국경제는 중동건설경기의 급속한 냉각으로 건축업체 중에 부실기업이 속출하기 시작하고 79 1차때보다 더 큰 ‘2차 오일쇼크’까지 닥쳐 휘청인다. ‘대통령의 경제학’을 쓴 이장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돈이 시중에 흘러넘치고 여기저기서 새 공장을 짓고 고층 빌딩이 올라갔다. 당연히 물가가 올랐다. 정부가 발표한 1977년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10%였으나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멘트 공장도 가격은 포대에 810, 대리점 고시가격은 900원이었으나 시장에서는 19002000원을 주고도 사기가 어려워 줄을 서야 했다… 호황의 끝이 코앞인 줄도 모르고 기업은 과잉 투자에 열을 올렸고 79 2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수출은 급속히 추락했다. 국내 기업들의 도산이 줄을 이었다. 정부와 대기업이 주도한 부동산 투기 열풍에 국민들이 분노하기 시작했고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한 조세저항으로 민심이 흉흉하게 돌아갔다. 정치는 차치하고 경제 쪽에서도 시커먼 먹구름이 밀려오면서 박 정권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 위기는 쓰나미가 되어 박정희 정권을 향해 덮쳐오고 있었다.


 <80>  버스안내양

1975년부터 시작된 반짝 경제호황으로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향락 산업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룸살롱’ 접대문화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도시 뒷골목에는 사창가가 늘어났다. 급격한 산업화와 농촌공동체 붕괴가 이루어지면서 ‘무작정 상경’의 시대 그 틈바구니 속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약자인 여성들이었다.

그 무렵, 서울 제일의 환락가는 무교동이었다. 현대 삼성 대우 같은 대기업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샐러리맨’이라는 용어가 나오기 시작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접대, 회식 문화가 생기면서 옛 노래나 부르며 막걸리를 팔던 술집은 도시 변두리로 물러나고 맥주를 팔고 근사한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들이 접대를 하는 새로운 종류의 술집들이 생겨났다. 이름 대신 번호로, 저녁에 출근해 아침에 퇴근하는 새로운 형태의 직업을 가진 여자들 ‘호스티스’가 생겨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들을 주목한 것이 ‘영화’였다. 예술작품에 대한 통제와 검열이 극에 달했던 1974년과 75년에는 역설적이게도 7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영화와 주제가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74년과 75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별들의 고향’과 ‘영자의 전성시대’ 모두 호스티스가 주인공이었다.

최인호 원작의 ‘별들의 고향’(1973)은 이듬해 영화로 만들어져 4 26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105일간 장기상영을 하며 서울에서만 46만 명 동원이라는 기염을 토한다. 고등학교 때 이미 신춘문예에 입선한 ‘천재작가’ 최인호는 일약 스타덤에 오르지만 훗날 그는 한 인터뷰에서 “체제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에게는 상업주의라는 비난을 받았고, 체제를 수호하려는 이들로부터는 퇴폐주의라는 양날의 협공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별들의 고향’은 ‘오경아’라는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멋진 육체를 가진 처녀’가 각양각색의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지만 매번 버림을 받고 결국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비명횡사하는 슬픈 이야기다.

작가의 말대로 ‘경아는 우리들이 함부로 소유했다가 함부로 버리는, 도시가 죽이는 여자’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상경해 영등포 근처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한 경아는 아버지가 죽으면서 불행이 시작된다. 음대 성악과에 들어가지만 가난 때문에 6개월 만에 대학을 포기한다. 생계를 위해 작은 무역회사에 취직해 ‘영석’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뜻하지 않게 아이를 갖게 되어 낙태를 하고 버림받는다. 과거를 숨기고 전처와 사별한 중소기업 사장과 한 결혼도 과거가 탄로나 또다시 버림받고 호스티스로 전락한다. 이후 미술학도 ‘문오’를 만나 동거하지만 그 역시 경아를 버린다. 경아는 결국 술집에서 만난 이동혁에 의해 철저히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다.

영화 ‘별들의 고향’은 당대 톱스타 신성일과 아역배우 출신 안인숙을 주인공으로 “경아, 오랜만에 함께 누워보는군” “아저씨, 추워요. 안아 주세요”처럼 아직도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회자되는 명대사를 남겼다. 또 ‘쎄시봉’의 멤버였던 이장희가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와 ‘한잔의 추억’ 등을 담은 OST를 만들어 영화 음악의 새 장을 열기도 했다. 영화가 히트하자 전국에 술집 여급들이 ‘경아’로 이름을 바꿔 부르고 남자들은 ‘경아가 불쌍하다’며 술잔을 기울이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별들의 고향’ 개봉 이듬해인 1975년 개봉한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는 조선작의 소설(1973)을 원작으로 김호선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것으로 그해 총 398000명의 관객을 동원한다. ‘별들의 고향’에 버금가는 히트였다. 개봉 당시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우리가 만난 여자, 우리가 사랑한 여자, 우리가 버린 여자.

주인공 영자의 삶은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무작정 대도시로 온 시골 처녀들의 인생행로를 흡사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부잣집 식모가 된 영자는 주인집 철공소에서 심부름하는 직공 창수와 사랑하게 되지만 창수는 군에 입대해 베트남으로 떠난다. 이후 영자는 주인집 아들에게 욕을 당한 뒤 쫓겨나 봉제공장 여공, 버스안내양 등을 전전하다 만원 버스에서의 사고로 한쪽 팔을 잃고 ‘창녀’로 전락한다.

그렇게 3년이 흐르고 베트남에서 돌아온 창수는 목욕탕 때밀이로 일하게 된다. 그는 우연히 경찰서 보호실에서 영자를 발견하고 하루 빨리 돈을 벌어 함께 살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당시 여주인공 염복순의 ‘(등 전면) 노출 연기’가 화제를 모았는데, 영자의 등을 창수가 눈물을 흘리면서 밀어주는 장면은 한국 에로티시즘 영화에서 보기 드문 가슴 뭉클한 장면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영자는 창수의 장래를 위해 그의 곁을 떠난 뒤 사창가 화재로 숨지고 만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당시 우리나라 교통문화의 중요한 축이었던 버스 여차장의 삶을 다뤄 주목받았다. 두 갈래로 머리를 묶고 앞에는 돈주머니를 찬 소녀들이 가녀린 팔로 억세게 사람들을 버스 안으로 밀어 넣고 첫차부터 막차까지 ‘오라이’를 외치던 모습을 그 시절을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1961 6 17일 처음 도입된 ‘여차장제’는 1978년 여차장이 1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성하지만 ‘삥땅’ ‘알몸수색’ 등 인권유린도 수없이 도마에 올랐다.

1974
5 25일자 동아일보에는 ‘人間以下(인간 이하) 대우 받는 버스안내원’이라는 제목으로 버스안내원 근로환경 개선을 위한 심포지엄에서 연사로 나온 김선례 양의 사연이 소개된다.

‘보성운수 소속 시청 앞∼구로동 버스안내양 김 양은 4년 동안 안내양으로 종사, 한 달에 최고 15000원의 월급을 받으면서 하루 18시간 이상 중노동을 해야 한다고 털어놓았다. 이틀 근무 하루 휴무로 새벽 4시에 일어나 (기숙사) 방청소를 하고 뛰어나와 종점을 떠나 다시 종점으로 돌아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23시간. 중간에 35분 쉬는 동안 입금도 해야 하고 화장실도 다녀와야 하고 식사도 해치워야 한다. 화장실에도 스피커 장치가 되어 있어 빨리 나오라고 독촉받는다. 생리(生理) 때에는 처리할 여유마저 없다. 1112시에 종점으로 돌아오지만 자동차 청소를 마치고 나면 새벽 1시∼1시 반. 이때부터 잠을 자는데 다시 새벽 4시가 되면 사감이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야 한다.

당시에는 안내양이 직접 버스비를 받기 때문에 돈을 숨겼다며 알몸수색을 당하고 도둑 취급을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기사에 소개된 김 양은 “하루 일과가 끝나면 의례적으로 감독에 의해 검신(檢身)을 당해왔다. 수입금이 적을 때는 검신은 더욱 엄격해지고 이 문제로 교도소에 가야 했던 동료가 줄잡아 4050명은 되었다”고 밝혔다. 1976 1 5일에는 회사의 ‘삥땅’ 추궁에 이영복 양이 할복자살을 시도하는 등 당시 신문에는 수치심을 못 이겨 자살한 안내양들의 기사가 심심찮게 등장했다.

어쨌든 1974년과 75년 대중문화의 중요한 사건인 영화 속 ‘경아’나 ‘영자’는 대한민국 산업화 과정에서 이를 악물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혹은 오빠나 남동생을 대학에 보내기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우리들의 ‘누이’를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

 

<81> 유신의 추억

유신 때 학교를 다녔던 지금의 50대 이상은 70년대 학교와 사회 분위기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혼식) 도시락 검사에서부터 국민교육헌장 외우기, 반공 웅변대회, 학도호국단 등 나라 전체가 ‘병영’처럼 답답했던 시절이었다. 지금 젊은이들은 기막혀하겠지만 부모세대 때에는 남자들은 머리가 길다고 바리캉으로 깎이고 여자들은 치마 길이가 짧다고 경찰서에 붙들려 가던 시절이 있었다. 인기곡들이 금지곡으로 묶였던 시절이니 좋아하는 노래도 마음대로 부르지 못했던 때였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재미있는 글이 있어 인용한다. 유신이 선포된 1972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는 김학규 씨가 2012 8 12일 인터넷잡지 ‘레디앙’에 연재한 유신의 추억은 이렇다.

74, 75년도쯤이니까 초등학교 3, 4학년 때였을 것이다.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오신 아버지께서는 북한 방송을 자주 듣는 편이었다. 당시는 무시무시한 유신시대였다. ‘새벽에 산에서 내려오는 자, 담뱃값을 물어보는 자’ 등 간첩 식별법 10가지를 외우면서 ‘반공 민주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으로’ 무장해 있던 나에게는 아버지의 그런 행동은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간첩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배운 간첩 식별법 10가지 중 하나인 ‘이불을 뒤집어쓰고 북한 방송을 듣는 자’에 해당한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는 이불을 뒤집어쓰기보다는 당당히 방에서 그냥 듣곤 하셨다. (그 후 어른이 되어) 아버지에게 “그때 왜 그렇게 북한 방송을 들으셨어요?” 물은 적이 있다. 아버지의 대답은 복잡하지 않았다. “당시에 우리나라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알고 싶은데, 우리나라 방송에서는 강도, 도둑, 교통사고 이야기밖에 나오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하냐. 북한 방송을 들으면 남한 소식이 생생하게 나오니 남한 사정을 알게 되는 거지!” 정부의 언론통제로 유신에 대한 비판이 금지되어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필자는 또 형형색색 ‘애향단’ 깃발 아래 친구들과 함께 행진하며 등교를 했던 추억도 전한다.

‘일요일이면 동네에 모여 동네 청소도 하고 화단 가꾸기도 해야 했다. 우리는 화단에 칸나도 심고, 코스모스 길을 단장하기도 했다. 만약 참석하지 않으면 명단이 작성되어 불이익을 당했다. 애향단 단장이 되면 팔뚝에 완장을 차고 동네별로 대오를 이끌 수 있었기 때문에 꽤나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는 자리였다.

실제로 72 4 4일자 동아일보는 ‘문교부가 새마을운동 지원을 위해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15000개의 애향단을 조직하라고 각 시도교육위원회에 시달했다’고 전하고 있다.

‘유신 헌법’에 대해 고치자는 말은 물론이고 문제가 있다는 발언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헌법에 대해 입만 뻥긋하면 잡아가던 시절, 국민들의 자유를 옭아맨 대표적 사례가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이었다. 지금 보면 코미디에나 나올까 싶을 정도로 웃음이 나오지만 치안을 담당해야 할 경찰이 남자들의 머리카락 길이와 여자들의 치마 길이를 단속하기 위해 바리캉과 자를 들고 다니는 광경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73
3 10일부터 개정 경범죄처벌법이 발표되면서 신문에는 심심하면 ‘장발 일제단속으로 15000명 적발’ ‘장발 가수 방송 출연 금지’ ‘가두 삭발 않고 자진조발(自進調髮) 권장’ 등의 기사들이 등장한다. 그래도 장발자가 속출하자 76 5 14일 치안본부(현 경찰청)는 전국 경찰에 일제 추방령을 내리고 ①남녀의 성별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긴 머리 ②옆머리가 귀를 덮고 뒷머리카락이 옷깃을 덮는 머리 ③파마 또는 여자의 단발 형태 머리를 하는 남자들에 대해 ‘뒷머리 하단은 이발기로 깎고 면도를 하며 옆머리카락 길이가 귀 윗부분에 닿지 않도록 짧게 올려 깎으라’는 구체적 지시를 내린다. 서울에서는 툭하면 일제단속이라는 걸 하면서 시내에 임시 이발소까지 설치하여 즉석에서 머리를 강제로 깎아버리기도 했다.

두발 단속 전통은 80년대 5공 시절에도 변형된 형태로 지속되었는데, 87 6월 민주항쟁에 이어 터진 노동자대투쟁 당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며 내건 요구 중 하나가 ‘두발 자유화’였다고 한다.

여자들의 미니스커트 단속도 이뤄졌다. 치마 끝이 무릎에서 17cm 이상 올라가면 단속 대상이 됐다. 1973 3 10일자 동아일보 보도다.

10일 오전 9시경 서울 명동 N다방 ‘레지’ 강모 양(23)이 무릎에서 한 뼘 이상 올라간 초미니 스커트차림으로 다방근처 빌딩에 커피 배달을 나갔다가 경찰에 적발돼 경범죄처벌법의 취지와 벌칙을 설명 받고 훈방됐는데 강 양은 “맞춰놓은 옷이라 버릴 수도 없고 새 옷을 해 입을 돈도 없어 고민”이라고 울상을 지었다.

73
4월에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길을 걷던 김모 양이 즉결에 넘겨져 이틀간 구류를 살았다’(28일자 동아일보)는 기사도 보인다. 이러다 보니 아가씨들이 미니스커트 길이가 괜찮은지 파출소에 물어보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유신의 추억’에서 ‘금지곡’을 빼놓을 수 없다. 1975 6 21일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는 공연물 정화대책에 따라 ‘잘 있거라 부산항’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 대중가요 43곡을 1차 ‘금지곡’으로 결정하고 방송 및 판매보급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어 발표된(7 12) 2차 금지곡엔 이장희의 ‘그건 너’ ‘한잔의 추억’, 김성근의 ‘생일 없는 소년’ 등 당시 대중이 애창하는 인기곡이 대거 포함됐다. ‘그건 너’와 ‘한잔의 추억’은 곡과 가사가 퇴폐 저속하고 ‘생일 없는 소년’은 지나친 비정과 비탄조라는 것이 이유였다. 74년 레코드가 100만 장이나 팔리는 당시로선 놀라운 대기록을 세운 신중현의 ‘미인’도 금지곡으로 묶였다. 가사나 곡 자체에는 문제점이 없으나 사회적으로 파급되는 영향이 좋지 못하다는 점이 이유였다.

김민기의 ‘아침이슬’도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의 ‘붉은 태양’이 북()의 어떤 인물을 상징한다는 이유로 금지됐다. 75년 최고 인기가요로 꼽힌 송창식의 ‘왜 불러’도 금지곡에 묶였다. 이렇게 묶인 노래들은 75년 한 해에만 225곡에 달했다.

 

<82>  민주구국선언

김지하 옥중 양심선언의 충격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1975 8 17일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터지니 장준하 선생의 추락사였다. 그는 재야를 중심으로 유신헌법 개정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해 1974 4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지병인 협심증과 간경화 악화로 12월 형 집행정지로 출옥한 상태였다.

출옥 후에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해 정권과 맞섰다. 그러던 중 1975 8 17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산악회원 40여 명과 함께 경기 포천시 이동면 약사봉에 올랐다가 절벽 아래에서 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그의 최후는 의문투성이였다.

그는 황폐하고 절망적이던 지적 풍토에서 ‘사상계’를 발간해 지식인들의 영혼과 정신을 울렸던 지성의 보루였으며 한일회담 반대운동, 민족통일운동, 반유신 반독재 투쟁을 이끌던 ‘재야의 대통령’이었다. ‘박정희 천적’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대통령에게 모욕감을 주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1966년 삼성 계열의 한국비료가 대량의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박 대통령을 ‘밀수왕초’라 불렀고 1967 4월 대통령선거에서는 베트남전 참전을 주도했다며 박 대통령을 ‘매혈자’라고 비난해 국가원수모독죄로 3개월 옥살이를 한다.

일제 때 반일민족주의를 표방한 그의 사상적 경향은 반공 반북을 견지한 자유민주주의였다. 독재에는 반대했지만 대북한 문제, 민족통일 문제에서는 적어도 이승만 노선이나 박정희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박 정권을 향해 날 선 비판을 쏟아내면서도 7·4남북공동성명이 나오자 “모든 통일은 선()”이라는 환영 성명을 내기도 했다.

생전에 청빈한 생활로 가족들이 큰 고통을 겪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상중(喪中)에 대접할 쌀이 없어 문상객들이 각자 먹을 쌀을 가져갔다는 일화도 있고 셋집을 전전해 가족들이 장 선생 부의금에 약간의 돈을 보태 겨우 전셋집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인에게는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인 1991 8 15일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1999 11 1일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13 1 2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는 그의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장 선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재야의 구심점이 느닷없이 사라졌지만 반독재, 반유신헌법 투쟁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1976
년으로 접어들면서는 전직 대통령과 정치권, 재야 명망가들이 총망라되는 ‘3·1민주구국선언’이 나온다. 국민들이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기념일인 3·1절에 맞춰 시국선언을 내야 한다는 여론은 여러 갈래에서 일었다. 한 갈래는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와 정일형 의원 등 정치권이었고 다른 한 갈래는 개신교 쪽이었다. 이들은 윤보선 전 대통령을 구심점으로 통합이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성명서 발표 현장이던 1976 3 1일 명동성당 모습을 이렇게 기억한다.

‘아내와 기도회에 참석했다. 미사가 끝나고 문익환 목사의 동생인 문동환 목사가 설교를 했다.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민족의 지도권을 여호수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랬기에 가장 위대한 예언자라고 높이 찬양을 받았습니다. 박 대통령도 이 시점에서 물러선다면 한국 역사에서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 될 것입니다.” 신도들 낯이 변했다. 놀라는 빛이 역력했다. 이어서 키 작은 여인이 앞으로 나왔다. 이우정 교수였다. 그는 차분하지만 또렷한 어조로 우리가 준비한 성명서를 읽었다. 선언문이 낭독되는 동안 장내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기도회는 조용히 끝났지만 이튿날부터 이 사람, 저 사람이 연행되기 시작했다. 이어 3 10일 서울지검 서정각 검사장이 ‘3·1구국선언’을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 전복 선동 사건’으로 규정하면서 관련자 20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서 검사장은 “일부 재야인사들이 반정부 분자를 규합해 계열별로 민주회복국민회의 또는 갈릴리교회 등 종교단체 또는 사회단체를 만들어 종교 행사를 빙자해 수시로 회합, 모의하면서 긴급조치 철폐, 정권 퇴진 요구 등 불법적 구호를 내세워 정부 전복을 선동했다”고 했다.

하지만 눈엣가시로 여겨온 사람들을 한꺼번에 옭아매겠다는 의도가 뻔한 것이었다. 선언문 서명자는 10명이었는데 기소된 사람은 18명이나 되었고 3 1일 행사뿐 아니라 1 23일 원주 원동성당 신구 교회 연합기도회와 원주선언 사건 관련자들까지 함께 연루시켰기 때문이었다.

3·1구국선언’은 긴급조치 9호 선포로 세상이 숨을 죽이고 있는 가운데 전직 대통령과 제1야당의 유력한 대권 후보, 현역 정치인, 재야 원로와 교수, 신구 교회의 중심인물이 총망라되어 반유신 선언을 했다는 점에서 국내외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3
19일 미 국무부 대변인은 한국의 인권 문제에 강한 우려를 표명했고 라이샤워, 코언 교수 등은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미국 정계 지도자들에게 “한국의 인권탄압 정책에 반대하라”고 촉구했다. 또 미 하원의원 102명과 상원의원 17명은 박 대통령에게 “이런 상태에서는 미국의 유권자들에게 남한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정당화하기 어렵다”는 서한을 보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3 8일 새벽에 끌려갔다. 자서전 중 한 대목이다.

‘나는 곧바로 서대문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푸른색 수의를 입고 독방에 갇혔다. 감옥 안은 무척 추웠다. (교통사고 후유증인) 고관절 변형으로 바닥에 앉아 있기가 무척 불편했다. 어떤 자세를 취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떤 날은 너무 아파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럴 때면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그러면 정말 통증이 멎는 것 같았다. 무릎을 굽힐 수 없으니 식사할 때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나는 최소한의 의자와 식탁을 요구했으나 그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1
9개월가량의 옥고를 마치고 1977 12 18일 전주교도소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 김 전 대통령의 연금 생활은 1년 뒤인 1978 12 27일 박정희 대통령의 제9대 대통령 취임을 기해 특별사면으로 석방되면서 2 10개월 만에 풀린다.

7 3일 서울고법 형사8(부장판사 이규진)는 ‘민주구국선언’이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혐의에 대해 36년 만에 무죄 판결했다. 김 전 대통령뿐 아니라 선언에 참여했던 고 문익환 목사, 고 윤보선 전 대통령, 고 정일형 전 의원, 고 함석헌 선생 등 16명이 모두 뒤늦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83> 최후진술

 김지하는 재판부 기피신청을 한 75 5 19일부터 1년 반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김지하의 말이다.

“나는 이미 목을 떼서 감방에 두고 왔기 때문에 두려움은 별로 없었다. 다만 불쌍한 사람은 아내였다. 재판하는 날은 그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가족들 만나는 접견일이기도 했다. 아내 얼굴은 늘 반쪽이고 어린 아들 얼굴도 샛노랬다. 나중에 전해 들으니 재판이 열릴 때만 되면 아버지 보러 간다고 긴장해서 잠을 못 자곤 했다고 한다.

드디어 마지막 공판이 다가왔다. 76년이 다 저물어가는 12 23일이었다.

이날 김지하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12시간이나 이어진 재판에서 약 3시간 15분에 걸친 최후진술을 한다. 그의 최후진술은 나중에 모두 기록으로 남겨지는데 변호를 맡았던 홍성우 변호사의 말(‘인권변론 한 시대’)이다.

“재판을 시작할 때 형사소송법상 등사·녹취할 수 있다는 규정을 들어 사건의 중요성이나 성질에 비추어 재판 전 과정을 그대로 기록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랏돈이 없으면 피고인 쪽에서 비용을 대서 속기사를 대겠다고 했다. 이를 재판부에서 받아들였다. 그날 최후진술이 정확히 기록된 것은 우리나라 형사재판 사상 처음이었다.

김지하는 이날 원고도 없이 투옥과 투쟁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과 철학을 쏟아냈다. 다시 홍 변호사의 증언이다.

“재판정을 최고의 무대로 삼아 마음껏 자신의 생각을 펼쳤다. 어찌나 감동적이었는지 어떤 면에서는 한마디로 ‘참 대단한 배우’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김지하가 연극 연출도 하고 마당극도 하고 희곡도 썼다는데 정말 배우로서도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날 한 최후진술은 그 몇 달 전인 8월에 발표한 옥중 양심선언과 함께 빼어난 문학적 성취이자 시대적 증언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20여 쪽에 달하는 전문이 그의 책 ‘남조선 뱃노래’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이날 최후진술을 통해 먼저 중앙정보부가 자신에게 했던 회유공작을 고발하면서 정권에 날 선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정보부의 고급 요원 둘이 내게 오더니 베트남 패망 이전에는 ‘당신의 석방 여부는 당신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으니 협조적으로 나올 수 없느냐’고 했고, ‘양심선언’ 직후에는 ‘장관 될 의사가 없느냐. 고집만 부리지 말고 협조적으로 나오면 빛도 보고 출세도 할 텐데 무엇 때문에 모두가 손을 들고 있는 판에 당신만 끝까지 버티고 있느냐’고 했다. 나는 ‘안 나간다. 현 정권 마음대로 휘두르는 꼬락서니 보기 싫어서 안 나간다’고 그랬다. 10년이고 20년이고 징역 살겠다고 했다…나는 징역 살 각오는 돼 있다. 그런데 중()죄수인 내가 장관도 되고 말만 잘하면 석방도 될 수 있다는데 도대체 죄가 있다는 것인지 아닌지, 또 공산주의자라는 것인지 아닌지, 인혁당이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인지 아닌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 자신이 걸어온 삶의 정체성은 “‘시인의 삶’이었다”고 했다.

“현 정부는 내가 가난뱅이로 자라나 생래적으로 부자와 자본주의를 증오하는 악랄한 공산주의자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 나라는 국민의 8할 이상이 가난한 민중이다.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산주의 우범으로 몰아세우는 정부라면 어떻게 국민의 정부라고 할 수 있겠나…나는 시인이다. 시인이란 본래부터 가난한 이웃들의 저주받은 생()의 한복판에 서서 똑같이 고통 받고 신음하며 그것을 표현하고 고통과 신음의 원인들을 찾아 방황하고 그 고통을 없애며 미래의 축복받은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고 희망과 결합시켜 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시인을 민중의 꽃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에게 처해진 잔인한 수감생활도 공개됐다.

“저들은 나를 특수 감시 상태 속에 집어넣고 접견, 통신, 독서, 운동, 세면 일체를 금지한 위에 심지어 6개월 이상 일체의 물품 구매를 금지시켰다. 하루 밥 세 끼밖에는 주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휴지 구매마저도 금지했다. 밥을 먹으면 배설을 해야 되고 배설을 하려면 휴지가 필요한데 손가락으로 닦으라는 얘기인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나는 나’이다. 나는 이 나라가 허리가 동강나고 가난하고 초라하기 때문에 더욱더 사랑한다. 이곳밖에는 살 데가 없다. 내가 쓰는 시도 모국어로밖에는 표현될 수 없는 예술 장르이다… 이 사회에는 양도론(兩刀論), 결정론, 흑백 논리만이 지배한다. 죽일 놈 아니면 살릴 놈이고, 빨갱이 아니면 파랭이()이다. 이러한 양도론이 우리 생활 전체와 가치 체계와 우리의 정신 내부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이것이 모든 고통의 장본인이다.

지금으로부터 37년 전 우리 사회의 분열을 질타하는 그의 목소리는 지금 들어도 울림이 크다. 다시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계층과 계층 사이에 압박과 착취와 상호 불신이 가득 차 있다. 이것은 일종의 정신병리이며, 또한 분열이다. 독재 권력과 국민 전체 사이에 화기어린 친교와 협동적 공동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반독재 투쟁이 불가피하다. 현 정권의 제거 없이는 통일은 불가능하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감옥에 던져질 것이다. 통일로 가는 길은 일차적으로는 그러므로 (내가) 서대문감옥으로 가는 길이다. 나는 감옥에서 행복해지는 비결을 안다. 영생과 부활에 대한 다소곳한 소망만이 나를 구원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에게 무죄가 아닌 어떤 형벌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행복하게 이 길을, 내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 하느님의 은총이 이 불행한 민족 위에 폭포수처럼 쏟아져서 다시는 샛별 같은 이 나라의 청년들이 이 더러운 분단의 비극 때문에 법정에 끌려와 청춘을 시들게 하는 일이 없도록 끝없이 기원하겠다.

법정 안 사람들 사이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날 최후진술의 압권은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내일 성탄절을 맞이하여 여러분에게 모두 축복이 내리고 나를 박해하고 나를 미워하는 현 정부 최고 지도자 박정희 선생과 중앙정보부의 모든 고급 요원들의 가슴과 머리 위에도 흰 눈처럼 은총이 폭폭 쏟아지기를 빈다. 자비로운 은총이. 그래도 용서하시고, 모두 다 축복 받기를 빌겠다.

재판부는 1976년의 마지막 날인 12 31일 김지하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한다.

 

<84> 생명

재판이 끝나자 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김지하는 미친 듯이 책을 읽어댔다. 그는 “현재 내가 가진 지식의 거의가 그 무렵 수많은 독서의 결과”라고 말한다.

당시 주로 몰두한 책들은 생태학, 선불교, 테야르 드 샤르댕(프랑스의 가톨릭 사제이자 고생물학자였으나 진화론을 주장했다)의 사상 그리고 동학이었다. 자유로운 삶을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해방을 꿈꾸었던 그는 감옥이라는 갇힌 공간에서 인간과 삶의 본질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그의 말이다.

“처음에는 생태학을 파고들었는데 그것만 가지고서는 세계와 삶의 진화를 이해하기에 인간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심오한 것이었다. 나는 그 생태학 입문에서 자극을 받아 도리어 선()과 불교에 관한 깊은 내면적 지식과 무의식적 지혜를 갈구하게 되었다. 선불교야말로 인간의 영적 깨달음과 영성적 소통의 철학으로 느껴졌다. ‘금강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읽었고 외웠다. 고승들의 게송과 법어도 이백 수가량을 달달 외우게 되었다. 그러다 동학을 만나게 된다. 내 머릿속은 며칠 동안 반은 정신이 나간 듯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동학의 모심() 한 자로 꽉 차버렸다.

하지만 침묵과 절대고독이 지배하는 오랜 독방생활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가져다준다. 어느 날부터 벽면증을 앓기 시작한 것이다.

“대낮에 갑자기 네 벽이 좁혀 들어오고 천장이 내려오고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서 꽥 소리 지르고 싶은 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정신을 차리자 싶어 아무리 고개를 흔들어 대고 허벅지를 꼬집어봐도 마찬가지였다. 큰일이었다. 내 등 뒤 위쪽에는 텔레비전 모니터가 붙어 있어 중앙정보부와 보안과에서 일거수일투족을 스물네 시간 내내 지켜보고 있으니, 조금만 이상한 행동이나 못 견디겠다는 흉내라도 냈다 하면 곧바로 소위 ‘구월산’ ‘면도날’(김지하가 자신을 수사하던 수사관들에게 붙인 별명)이 득달같이 달려와 ‘김 선생! 이제 그만하고 나가시지! 각서 하나만 쓰면 되는 걸 뭘 그리 고집일까?’하고 꼬드길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각서를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슨 (생각의) 결말이 나든 결말이 나야만 나의 태도에 전환이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것은 그 증세(벽면증)가 네댓새 간격을 두고 주기적으로 온다는 점이었다. 오는 시기를 예측할 수 있으니 그 고비만 잘 넘기면 네댓새는 괜찮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무슨 방도를 내야지, 큰일 났다 싶어 매일 궁리를 해봤으나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침 봄날이었다.

아침나절 쇠창살 사이로 투명한 햇살이 비쳐들자 밖에서 날아 들어온 새하얀 민들레 꽃씨들이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며 하늘하늘 춤추는 게 보였다. 쇠창살과 시멘트 받침 사이가 빗발에 홈이 파여 그 홈에 흙먼지가 날아와 쌓이고 거기에 멀리서 풀씨가 날아와 앉았다. 그리고 또 비가 오면 그 빗방울을 빨아들여 ‘개가죽나무’가 자랐다.

그날따라 그 개가죽나무가 유난히 푸르고 키가 크고 신기하게 보였다.

그날 김지하는 운동을 나갔다가 붉은 벽돌담 위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담 위에 점. . . . . 점들이 찍혀 있어 자세히 보니 풀들이었다. 풀마다 조그맣고 노란 꽃망울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달려 있는 게 아닌가.

김지하는 곧 방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어떤 큰 덩어리가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엉엉 울기 시작했다. 두세 시간은 족히 울었을까, 우는 동안 내내 허공에서는 ‘생명! 생명! 생명!’ 하는 에코음이 계속 들려왔다고 한다. 당시를 회상하는 그의 말이다.

“순간, 이런 깨달음이 왔다. 저런 미물들도 생명이다. 그런데 ‘무소부재(無所不在)’라! 못 가는 곳 없고 없는 데가 없으며 봄이 되어서는 자라고 꽃까지 피우는데, 하물며 고등 생명인 인간이 벽돌담과 시멘트 벽 하나의 안팎을 초월 못해서 쪼잔하게 발만 동동 구른대서야 말이 되는가. 생명의 이치를 깨닫고 몸에 익힌다면 감옥 속이 곧 감옥 바깥이요, 여기가 바로 친구들과 가족이 있는 저기가 아니던가!

그는 감옥이라는 환경이 아니었다면 생명에 대한 본질적 천착은 없었다고 말한다. 출옥 후 5년이 지난 1985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당시 경험을 토대로 자신이 생명 사상의 씨앗을 갖게 된 배경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인터뷰 내용은 그의 책 ‘남조선 뱃노래’에도 수록되어 있다. 다음은 책에 나오는 대목이다.

“내가 본래 생동하는 것, 역동하는 것, 뜀뛰는 것, 흐르는 것에 대한 추구가 강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생각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것이 감방생활, 옥중생활의 경험이었다. 갇혀 있다는 것, 묶여 있다는 것, 그래서 자꾸 생각이 굳어지고 분해되어 버리는 것, 이런 것들은 실제로 한 인간의 파괴 과정이다. 감옥이란 게 괜히 있는 게 아니다. 20세기 문명과 문화를 자랑하는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이 시대에도 어째서 감옥이 위세를 떨치는지 한번 생각해볼 만하다. (감옥이란 것이) 수천 년 동안 있어 왔으면서도 아직도 대단한 위력을 갖는 이유는 그만큼 감옥이 사람에게 고통을 주면서 도둑놈이면 도둑질하고 싶어지는 그런 동기, 사상범이라면 자기의 일관된 신념, 자기 생명의 중심적 정신을 계속 유지하고 실현시키려는 그런 지향을 억제하고 파괴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감방 안에서는 무언가 막혀 있는 것, 제한돼 있는 것, 부서져 나가는 것, 해체되는 것을 느끼는 그 무엇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남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들, 평소에는 허투루 지나치는 모든 것들에 주목하면서 예민한 촉수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그의 말이다.

“예를 들어 봄날 철창 밖을 보면 민들레 씨가 씨를 퍼뜨리기 위해 하얗게 날아다니는 게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괜히 날아다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생명의 일정한 법칙에 따라 씨를 퍼뜨려 종자를 번식시키고 생명을 확대하기 위해 날아다는 것 아닌가. 이렇게 보면 내가 밖에 있는 사람들과 만나지 못하는 것, 원래 만나서 이야기하고 함께 생활하도록 되어 있는데 갇혀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는 것, 그것은 생명에 반()하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자유라는 말까지도 속임수의 말로 전락하고 정의라는 말조차도 이데올로기 수단이 되어 오히려 생명의 근원적인 활동을 제약하는 도구로 전락했는데 그런 것보다도 더 근원적인 그런 가치는 무엇이냐, 인간은 무엇 때문에 고통받는가. 그 고통을 넘어 무엇을 해방시켜야 하는가, 감옥에 오래 있다 보면 이런 근본적인 생각에 집중하게 된다.


<85> 한미갈등

 1976년 말 김지하에 대해 ‘징역 7년’이라는 법원의 최종 선고가 내려지고 본격적으로 그가 감옥생활을 보낸 77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79년까지는 독자들도 주지하다시피 긴급조치 9호가 지배했던 시대였다. ‘긴조 시대’가 장기화되면서 한국 사회에는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이 쌓여갔다. 민심은 서서히 강한 비판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여기에 중앙정보부와 경호실로 대표되는 정권 내부 권력투쟁과 ‘불통’은 심해져 갔다.

유신체제의 위기는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1977 120명이던 정치적 양심수는 1979 1239명으로 급증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이전 민주화 시위가 대학생이나 지식인 중심이었다면 77년부터는 여공들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 농민 같은 기층 민중이 생존권을 주장하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동일방직 여공 똥물투척사건이나 함평 고구마사건이 대표적이다. 경제는 외형적으로 10%가 넘는 대호황을 기록했지만 살인적인 물가고와 오일쇼크에 따른 충격파는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고 중산층을 붕괴시켜 경제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이제 ‘김지하와 그의 시대’를 마무리할 시점이 가까워오고 있다. 기자는 이 대목에서 김지하가 박 대통령 서거소식을 감옥에서 전해 듣는 79 10월 이전까지 유신체제의 마지막 과정을 대형사건 위주로 거시적으로 들여다보려 한다. 우선 짚어야 할 것이 70년대 후반 두드러졌던 미국의 압박이다.

김지하가 최종 선고를 받기 두 달 전인 76 11 3일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으로 민주당 대통령후보였던 지미 카터가 당선되었다. 미 대선은 외적으로는 베트남전쟁 패배와 국가재정 악화, 내적으로는 닉슨의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 후유증으로 진실성과 도덕성이 이슈로 등장하는 가운데 치러졌다. 카터는 도덕성 회복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며 현직 대통령으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제럴드 포드에게 미세한 차이로 승리했다. 카터는 또 ‘인권 외교’를 전면에 내세우며 주한미군 철수를 대선 공약으로 제시했다.

박정희 정부는 워싱턴 정가에서 존재감이 별로 없던 카터의 당선 가능성을 낮게 봤다. 설사 당선된다 해도 주한미군 철수가 현실화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마’는 현실이 됐다.

카터는 77 1 26일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국가안보회의 내 정책검토위원회에 주한미군 병력 삭감 문제를 3 7일까지 검토 완료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5 5일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점진적 철수’ 의견을 낸 다수 참석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즉각 철수를 공식 확정한다. 그는 왜 이처럼 철수정책에 단호했을까?

박정희 정부 시절,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지낸 김성진은 ‘한국 정치 100년을 말한다’에서 이렇게 추정한다.

“카터는 한마디로 ‘정치에서의 목사(牧師)’ 역할을 자임했다. 이런 그로서는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월남전의 재판(再版)을 피하고 군비 절감을 한다는 정책구상에 인권문제를 결합시킨다는 착상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게다가 기존 미국 정치를 부정(不淨)한 것으로 보고 있었던 그에게 (철수는) 정치 목사로서의 정의구현이라는 책무를 완수한다는 일종의 사명감마저 갖게 했을 것이다.

카터는 실제로도 독실한 침례교 목사의 아들이었다.

어떻든 ‘인권’을 중시하는 카터 행정부가 들어서자 미국 내 언론과 의회에서도 한국의 인권 시비가 자주 다루어졌다. 이미 카터 정부 출범 직전인 76 9 15일에 상원의원 맥거번은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는 사기극이었으며 박 대통령은 북의 위협을 국내 정치 억압에 이용하고 개인 권력을 강화시키는 데 주력해왔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아예 박 대통령을 “악명 높은 폭군에다 (한국 내) 유일한 판사이자 결정권자”라면서 “(미 정부가) 군사 원조와 신무기 제공으로 남한의 북한 침략 계획에 휘말려 들고 있다. 주한미군은 박 정권의 인질이 아니다”라고 몰아붙였다.

바로 이어 미 하원 국제관계소위도 프레이저 의원이 낸 ‘3·1 민주구국선언사건’ 피고인 윤보선, 김대중 등에 대한 형량 경감을 요구하는 대한(對韓) 결의안을 본회의에 상정했다.

10
월에 접어들어서는 미국 정치계를 뒤집어 놓은 ‘코리아게이트’가 터진다. 76 10 25일자 워싱턴포스트지에 ‘한국인 실업가 박동선과 정보부 기관원들이 미 의회 의원들의 한국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의원들에게 매년 50만∼100만 달러를 뇌물로 주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사건의 배후에는 한국의 박 대통령이 있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미 언론들은 닉슨 정권하 불법 도청 사건이었던 ‘워터게이트’에 빗대 ‘코리아게이트’라 이름 붙였다. 코리아게이트는 2 6개월을 끌다가 양국 정부가 공동성명까지 발표하는 우여곡절 끝에 1979년 중반에 가서야 겨우 봉합을 했다. 그러나 한미 간의 신뢰관계는 치명적으로 깨졌다.

코리아게이트가 터지고 한 달 뒤인 76 11 24일에는 미국 주재 중앙정보부원 김상근(주미대사관 참사관)이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그는 미국 내 한국 정보부원 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미 정부에 공개했다.

이 일로 76 12 4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해임되고 후임에 건설부 장관이던 김재규가 임명된다. 3년 뒤 박 대통령을 권총으로 시해한 바로 그 김재규가 이때 정보부장이 되는 것이다.

77
년으로 접어들면서는 또 다른 뇌관이 터지니 ‘김형욱 사건’이었다. 73년 미국으로 소리없이 망명한 김 전 중앙정보부장은 망명 4 2개월 만인 77 6 22일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한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지시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따위의 그의 증언들은 미국 내에서 박 대통령에 대한 반대여론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한미갈등이 최고점으로 치닫자 북한의 김일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카터가 취임하자마자 외무장관 허담 명의로 파키스탄 미 대사관을 통해 국무장관 밴스에게 “한국을 빼고 미-북 간 직접 협상을 원하며 미국과의 대결을 원치 않는다”는 친서를 보냈다. 카터 역시 북한에 대한 여행 제한 규제를 풀고 미국과 남북한 간 3자 회담을 시도하는 등 대북 유화책을 펴나갔다.

이에 대한 박 대통령의 입장은 확고했다. “국내 실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나라 국정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다. 아무리 경제적 어려움이 크더라도 일절 미 의회에 매달려 애걸복걸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미갈등의 골은 나날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

<86> 정상회담

카터 대통령이 추진한 주한 미군 철수는 이뤄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미국 내 반대가 갈수록 커졌기 때문이다. (당시 김용식 주미대사는 86년 동아일보에 ‘외교 33년 회고록’을 연재했는데 여기에는 70년대 후반 한미 갈등이 생생하게 소개돼 있다. 이하 내용은 당시 신문기사들과 그의 회고록을 축약 정리하는 것임을 밝힌다.)

미국 내 철군 반대 여론을 이끈 신호탄은 77 5월 중순 주한미군사령부 참모장 존 싱글러브 장군이었다. 그는 워싱턴포스트 기자에게 “철군은 곧 전쟁 발발을 의미한다. 카터 대통령의 철군 정책은 북한의 군사력에 대한 ‘과거 정보’에 입각한 것”이라고 폭탄 발언을 한다. 비보도를 전제로 한 것이었지만 신문은 장군과의 약속을 어기고 대서특필했다.

격분한 카터 대통령은 그를 워싱턴으로 소환한 뒤 좌천시킨다. 결국 싱글러브 장군은 78 5 25일 퇴역하는데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서도 “미군과 한국군 고급장교 가운데 지상 전투 부대를 카터 대통령이 표명한 스케줄대로 철수하는 데 동의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소신 증언을 했다. 그의 좌천 이후 철군 반대를 주장하는 미 군부 내 목소리는 잦아들지만 의회 내 목소리는 갈수록 커졌다.

워싱턴포스트지 보도 직후인 77 5월 하순 미 상원 본회의는 철군 지지는 물론 철군 비난 결의안까지 부결시켰다. 이듬해인 78년으로 접어들자 ‘미국의 철군 계획은 한국의 정치적 안전에 좋지 않은 심리적 충격을 줄 염려가 있다’는 일본 방위백서가 공개된다. 워싱턴으로서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워싱턴에서 미묘한 입장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

78
2월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은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서 “예상외로 북한 군사력이 한국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되고 북한이 침략 징후를 보이면 철군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고 발언한 것이다. 이어 4월 초 하원 군사위 조사소위도 “카터 대통령의 철군 계획은 국방부와 합참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극동의 안전에 파급되는 영향을 고려함 없이 내려진 결론”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한다. 이런 상황에서 78 11월 한미연합사가 창설되는데 이는 ‘미국이 한국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결의를 분명히 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79
년으로 접어들면서 철군 분위기는 확실히 반전됐다. 1 8일 미국 내 신문들은 ‘북한이 40개 사단과 2600대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29개 사단과 2000대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다는 카터 대통령의 철군 결정 당시 상황 판단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북한의 지상군 전투력이 남한보다 우세하다는 것이었다.

카터 대통령은 갈수록 고립됐다. 마침내 하원 군사 위원들이 대통령에게 “철군 계획을 중지하라”고 요구한 데 이어 상원의 유력 의원들까지 미 제2사단을 계속 한국에 주둔시킬 것과 한국군 현대화 촉진이 필요하다는 연구보고서를 낸다. 결국 카터 대통령은 79 2 9일 상원의 권고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빌려 “철군을 보류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는 넉 달 뒤인 79 6 29일∼7 1 2 3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는다. 미군 철수와는 별도로 한미연합사 창설 때 한미 양국의 협력을 위해 방한하고 싶다는 뜻을 친서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냈는데 이를 박 대통령이 받아들여 이뤄진 방한이었다.

하지만 당시 한미 정상회담은 역대 최악의 정상회담으로 기록됐다.

카터 대통령 입국 첫날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도쿄에서 경제 정상회담을 마치고 안개 낀 우중충한 6 29일 오후 9 30분 김포공항에 도착해 영접 나온 박 대통령과 처음 대면했다. 그러고는 박 대통령과 악수만 나눈 뒤 미 해병대 헬리콥터를 타고 동두천 미군 부대로 가버렸다. 공식 행사는 이튿날에야 여의도 광장에서 있었고, 정상회담은 행사 직후 청와대에서 이뤄졌다.

문제는 사전에 철수 문제를 재론하지 말아 달라는 카터 대통령 측 요구에 아랑곳없이 박 대통령이 장장 45분이나 철군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안보 강의’를 하면서 터졌다. 회담장에 배석했던 김 전 주미대사의 회고다.

“카터 대통령의 기색은 좋지 않아 보였다. 그는 펜을 들고 메모지에 무엇인가 쓰는 자세를 취했는데 박 대통령의 얘기를 경청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카터 대통령이 이 자리를 얼마나 불유쾌하게 생각했던가는 당시 동석했던 밴스 국무장관 회고록에도 잘 나타나 있다. ‘박 대통령이 통역을 통해 말하는 동안 실내 분위기가 급격히 냉각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대통령과 브라운 국방장관 사이에 앉았던 나는 카터 대통령이 노기(怒氣)를 참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어 김 전 대사는 “카터 대통령은 한마디의 코멘트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철군과 관계없는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의견이 교환되었을 뿐이고 그것으로 회담은 끝났다”고 말한다.

결국 정상회담은 이날 저녁 카터 대통령이 박 대통령에게 제시한 한국의 국방비 지출을 국내총생산(GDP) 6%까지 올리는 안을 박 대통령이 받아들이고, 인권 문제와 관련해서는 “긴급조치 9호는 치안에 관한 문제인 만큼 맡겨 달라”는 박 대통령의 발언을 카터 대통령이 받아들이는 식으로 ‘막판에 웃은 정상회담’으로 마무리되긴 한다.

당시 회담에는 작은 에피소드도 있었다. 바쁜 일정 중에도 여의도교회에서 예배를 볼 정도로 신심이 두터웠던 카터 대통령이 떠나는 날 김포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박 대통령에게 선교를 했다는 것이다. 김 전 대사는 박 대통령으로부터 들었다며 차 안에서 나눈 두 사람의 대화를 전하며 이렇게 회고한다.

“카터 대통령이 ‘각하의 종교는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박 대통령이 ‘집사람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습니다. 아이들 중에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도 있습니다. 나는 특별히 종교가 없습니다’ 말했다. 카터 대통령은 박 대통령에게 선교를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이날 저녁 박 대통령은 관계관들을 청와대에 불러 비공식 만찬을 베풀었다. 그리고 차 안에서 카터 대통령과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그 친구 참∼’이라고 중얼거리며 다소 의외였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그런대로 당시 대화 분위기가 친밀한 분위기였음을 주변에 느끼게 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카터 대통령은 20일 뒤인 7 20일 주한미군 철수론자였던 안보담당특별보좌관 브레진스키를 통해 “주한 미군 철수를 81년까지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2년 반 동안 한미관계를 냉각시켰던 미군 철수 문제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것으로서 박 대통령의 오랜 스트레스는 해소되었으나, 사실은 더한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

▲카터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청와대 만찬 모습. 표정은 웃고 있지만 역대 최악의 정상회담으로 기록됐다. 동아일보DB

 

<87> 인플레이션

중동특수 효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76년부터 79년까지 한국 경제는 사상 최대 호황을 기록한다. 성장률은 1976 10.6%, 77 10.0%, 78 9.3%였다. 78년에는 1인당 GNP 1000달러를 넘어 당초 계획보다 2년이나 앞선다.

하지만 ‘수치로만 배부른 고도성장’(79 4 9일자 동아일보)이었다. 살인적인 물가고로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쪼그라들었다. 경기 과열로 물자가 부족해지자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부동산 투기도 극성을 부렸다. 신규 아파트 값은 분양 즉시 폭등했다. ‘복부인’ ‘프리미엄’이란 신조어가 이때 등장했다.

78
5 29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이렇게 전한다.

“모자라는 것은 시멘트뿐이 아니다. 합판 철근 타일 등 건축자재 부족은 오래전부터 일어났고 요즘에는 중간 원자재와 내구 소비재 심지어 청량음료에까지 엄청난 수요가 일고 있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연말께 가서 국내 경기는 당초 10.5%로 책정했던 경제성장률을 훨씬 앞질러 15% 선에 이르지 않겠느냐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정책 당국은 하루빨리 장기 계획에 입각해서 전면적으로 주요 물자의 수급 계획을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조순 전 서울시장도 동아일보를 통해 “(한국은) 고도성장에 대한 반성이라는 합리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마침내 국민경제의 성장잠재력 자체를 잠식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그렇지 않아도 비명을 지르고 있던 서민들에게 선거 직후인 78 12월 제2차 오일쇼크까지 덮쳤다. 중동 산유국들이 이때부터 이듬해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원유가를 올린 것이다.

호황을 노래해오던 유신정권의 경제기조는 삽시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모든 물가를 통제하던 정부는 79 3월에 국내 석유제품 가격을 9.5% 인상한 데 이어 7월에 다시 59%나 올렸고, 전력요금도 35%나 인상했다. 최종적으로 1979년 소비자물가 인상률은 21%나 됐다.

79
4 9일자 동아일보는 ‘과() 성장 16년 황() 신호 걸린 한국경제’라는 제목으로 시리즈물을 연재하는데 기사에 소개된 중견 섬유업체 기능사원 M (36)의 사연은 당시 중산층의 대표적인 삶으로 여겨진다.

“공고 졸업인 M 씨 봉급은 세금 등을 빼고 나면 월 15만 원. 이것으로 노모와 어린 두 자녀, 아내 그리고 고교생인 남동생 등 6식구 생계를 꾸려가면서 작년 봄까지만 해도 월 2만 원씩을 저축했으나 올해에는 저축은커녕 다달이 생계를 잇기조차 어렵다. 경제는 해마다 고도성장을 한다는데 어째서 물가는 엄청나게 오르기만 하는지, 왜 갈수록 살기가 어려워지는지 의문에 잠기게 된다. 고도성장에 회의를 품는 사람은 M 씨뿐이 아니다. 작년 이래 엄청난 물가고와 유례없는 투기 붐, 걸핏하면 빚어지는 생필품 파동에 시달려온 저소득 서민들은 누구나 과연 고도성장이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인가라는 의문에 잠겨 있다.

자고나면 물가가 오르니 사재기도 판을 쳤다. 79 7 11일자 동아일보 보도다.

“유류 값 및 전기요금 인상에 이어 관련 제품 값도 최고 48%까지 인상 발표되자 아파트 등 고급 주택가 수퍼마켓 상가 등에서는 비누 화장지 설탕 식용유 등 생필품을 리어카와 용달차로 한 차씩 사들이는 ‘사재기’가 또다시 극성이고 버스요금 인상설에 자극돼 미리 쇠표(토큰)를 사두려는 시민들이 판매소에 줄을 이었다.

무엇보다 성장의 열매가 골고루 퍼지지 않고 있다는 노동자들의 항변이 갈수록 뜨거워져 기폭점(起爆點)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노동삼권이 제한된 엄혹한 환경이었지만 1972 346건이던 노동쟁의는 1973 666, 1975 1045, 1976 754, 1977 1864, 1979 1697건으로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한국노총 산하 조합원 수도 1970 49만 명에서 1979 109만 명으로 늘었다.

안팎으로 정권을 흔드는 위기의 그림자가 짙어지던 78 7 6일 박정희 대통령은 ‘체육관 선거’로 불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대의원 2578명 중에 반대표는 단 한 표도 없었고 무효표만 한 표가 나왔다. 하지만 5개월 뒤인 12 12일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달랐다. 득표율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31.7%, 야당인 신민당이 32.8%를 얻어 야당이 1.1%포인트 앞서는 헌정사상 처음 이변이 일어났다. 전국 154개 지역구 중 민주공화당이 68명 당선되었는데 야당인 신민당도 61명이나 당선됐다. 특히 무소속 득표율이 28.1%나 돼 제2야당이었던 통일당(7.38%)과 합치면 오히려 공화당이나 신민당을 앞서는 진기록이 연출된다. 민심은 이미 박 정권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 명백히 확인된 셈이었다.

시민들의 정치의식도 높아졌다. 투표율이 77.1% 9대 때보다 4.2%포인트나 높았다. 서울의 경우에는 9대 때 62.0%보다 6%포인트나 높은 68.1%에 달했다. 78 12 13일자 동아일보 보도다.

“과거에는 대도시에서 야당이 우세하고 지방에서 여당이 우세했는데 이번 결과를 보면 야당이 지방에서도 우세하여 소위 ‘여촌야도(與村野都)’ 경향이 현저하게 변한 사실을 보여준다. 국토개발과 텔레비전 보급 확대로 지방의 정치의식이 상당히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떻든 78년 말 10대 총선은 집권 여당인 공화당의 명백한 패배였다.

“선거에 진 요인에 대해 김재규 정보부장이 이끄는 정보부와 당, 그리고 경찰에서 보고가 올라왔는데 김정렴 남덕우 김용환 장덕진의 경제 정책이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부가가치세 실시, 물가상승, 그리고 노풍(魯豊)이라는 새 품종 벼가 멸종되어 국민 불만이 커져 패배했다는 것이었다.(김정렴 회고록)

결국 김정렴 남덕우 김용환 경제팀이 경질되고 신현확 신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이 지휘봉을 잡는다. 하지만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총선에서 힘을 받은 야당은 기고만장해지며 전투태세로 돌입했다. 76년 ‘3·1민주구국선언’으로 구속 수감되어 서울대병원에서 연금생활을 하던 김대중도 박 대통령의 9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78 12 27일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면서 제일성으로 “민주회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여기에 당 총재직에서 물러나 권토중래를 꿈꾸던 김영삼도 박 대통령과의 전면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

 

<88> 영수회담

 YS와 박정희 대통령 간의 감정의 골은 이미 1975년부터 깊어져 있었다. 시계를 그때로 잠시 돌려보자.

베트남 패망(75 4 30)이 임박한 4 23일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박 대통령과의 회담을 제의한다. 총재 취임 후 8개월 만이었다. 베트남이 공산화될 경우 국제 정세가 국내 정치에 미칠 파급효과를 생각한 그는 “박 대통령과 흉금을 터놓고 의견을 나누려 한다”며 여야 영수회담을 취임 후 처음 제안한 것이다.

회담이 성사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가까이나 지난 5 21일이었다. 장소는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는 일제 총독 관저, 당시 대통령 집무실이었다.

김 총재는 박 대통령과 단둘이 앉았다. 김 총재가 먼저 1년 전에 타계한 육영수 여사에 조의를 표하는 말로 입을 열었다. 김 총재는 2000년 펴낸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서 이날의 대화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박정희는 나의 위로 인사를 받자 망연한 표정을 짓더니 창밖의 새를 가리키면서 “김 총재, 내 신세가 저 새 같습니다”라고 하고는 앞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것이었다. 느닷없는 행동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인간적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대통령은 울적해진 마음을 이내 추스른 듯 아시아지도를 꺼내놓고 김 총재에게 한반도와 주변 정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설명이 끝나자 김 총재가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어조로 “민주주의 합시다. 대통령 직접선거를 합시다”라며 “유신헌법을 빨리 철폐하여 멋진 민주주의를 하자” 거듭 말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김 총재” 불러놓고는 한동안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김 총재, 나 욕심 없습니다. 집사람은 공산당에 총 맞아 죽고 이런 절간 같은 데서 죽기 살기로 오래 할 생각 없습니다. 민주주의 하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다시 김 총재의 회고다.

‘박정희가 울지만 않았다면 나는 “그럼 언제 (민주주의) 할 거냐”고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물 때문에 그를 추궁하려던 나의 마음은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꼭 민주주의를 하겠습니다”라는 그의 말은 “이번 임기를 마지막으로 꼭 물러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때의 분위기가 그랬다. 비명에 타계한 아내를 들먹이며 눈물을 보이고 인생의 허망함을 털어놓은 뒤라서, 나는 그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박 대통령은 뒤이어 YS에게 “이 이야기는 절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합시다”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도 한다.

“조선 놈들은 문제가 있어요. 내가 정권을 내놓는다고 미리 알려지면 금방 이상한 놈들이 생겨날 겁니다. 대통령으로 일하는 데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다시 김 총재의 회고다.

‘권력 누수를 우려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유신헌법으로 선출된 박정희의 임기는 당시(75) 23년 정도 남아 있었다. 나는 오랜 고통에 시달려온 우리 국민이지만 민주주의만 된다면 그 정도는 희망을 갖고 참을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다. 그래서 “비밀을 지켜주마”고 약속했다.

김 총재는 이튿날 5 22일 중앙당사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국정 전반의 모든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격의 없는 충분한 의견교환을 했다”고만 밝히고 “대통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서 다 털어놓고 얘기하지 못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당장 당내 비주류를 중심으로 총재를 향해 ‘밀약’이니 ‘야합’이니 하는 비난이 나왔다. 다시 김 총재의 말이다.

79 10·26이 날 때까지 나는 당시 회담 내용에 대해 함구했다. 세간에는 밀약설이 나돌았지만 나는 약속을 지켰다.…하지만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하겠다”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때 (내 앞에서) 흘린 눈물이며 말()은 지금 생각하면 처음부터 나를 속이려고 꾸며낸 거짓이었다.

“영수회담 때 보여준 박 대통령 모습이 진실이기를 기대했었다”는 김 총재의 기대는 이내 배신감으로 무너진다.

빌미는 영수회담 석 달 뒤인 75 8 23일 총재 취임 1주년에서 한 김 총재의 기자회견 발언이었다. 이날 김 총재는 “개헌 논의를 금하고 있는 긴급조치 제9호를 해제하라”고 촉구했다. 그런데 검찰이 몇 시간 뒤 “발언 일부가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으니 불구속 입건하겠다”고 밝히며 이튿날 바로 출두요구서를 발부한 것. 이어 9 10일에는 비서실장 김덕룡까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한다. 1야당 총재에 대한 소환장 발부와 비서실장 구속은 당시 분위기로서는 누가 봐도 청와대와 사전 협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김 총재의 회고다.

‘검찰은 내게 몇 차례나 소환장을 더 보내왔지만 나는 무시했다. 그러자 하루는 유치송 사무총장이 집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중앙정보부 국장이 하는 말인데 한 번만 검찰에 자진 출두해 체면만 세워 주면 김덕룡을 내놓겠다”는 것이었다.

연말 성탄을 맞아 김덕룡을 면회하고 온 뒤 마음이 약해진 김 총재는 유 총장에게 “정말 틀림없나” 확인하고는 75 12 30일 검찰총장실로 자진 출두했다. 하지만 검찰은 김덕룡을 내보내기는커녕 오히려 김 총재를 이듬해인 76 1 21일 불구속 기소해 버린다.

김 총재는 이즈음 최대의 정치적 위기 상황으로 몰린다. 영수회담 이후 반유신 투쟁의 날이 약해졌다며 비판을 받아오다 76 9 16일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빼앗기고 총재직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2년 전 악전고투 속에서 쟁취한 당권을 허무하게 빼앗긴 그는 이후 당직이 없는 전 총재에다 소수파로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후 당 운영 문제에 대해 일절 함구하며 깊은 침잠의 세월을 보낸다.

그러나 그동안 공고해 보이던 유신독재 체제는 서서히 균열이 가고 있었고 민심은 폭발 직전의 비등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YS
에게 78 12월 총선에서 신민당이 공화당을 사실상 이겼다는 소식은 새로운 결의를 다지게 했다. 그는 “이제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79
년 새해가 밝았다. 그의 예감대로 ‘때’가 오고 있었다. 박 대통령과의 재결전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쉽게 물러설 YS가 아니었다
.

 

<89> 백두진 파동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서거한 1979년은 격동의 70년대를 마감하는 해이기도 하면서 한국사의 중요한 대전환점이 되는 해이다. 집권층에 대한 민심의 불신은 이미 그 전해 말 총선에서도 드러났지만 유신 정권은 이를 정치적 위기로 받아들이기에 너무 경직됐고 오만했다. 하지만 여당인 공화당 안에서조차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경고들이 공개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78
년 국회의원 총선거로 국회에 재등원하게 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회고록 ‘나의 정치인생 반세기’에서 “헌정 사상 처음이었던 78년 말 공화당의 패배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며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부는 결정적 실책을 범했다. 안정적인 세원 확보를 명분으로 갑자기 부가가치세를 도입하기로 하고 증권거래에 대해서도 거래세를 매기기로 한 것이다. 국민들의 거부감은 대단했다. 부가세에 대한 인식과 홍보가 부족해 세무서 직원들조차 빗발치는 납세자들 문의에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답할 정도였다. 물가도 30% 이상 뛰어버렸다. 증권시장도 거래세가 신설되면서 주가가 폭락하고 말았다. 증세(增稅) 조치들은 그렇잖아도 바닥까지 인기가 떨어진 공화당이 자기 발등을 도끼로 찍은 격이 되었다…(나는) 79 3 10대 국회가 공식 출범했는데도 신명이 나질 않았다. 오랜만에 국회에 들어갔는데도 정권은 동맥경화증에 걸려 우울하기만 했다. 당시 여당은 (78 10월 총선에서) 야당에 득표율 1.1% 진 것을 쉬쉬하던 판이었다. 천하가 다 아는 일을 말이다. 나는 본회의에 나가 “정부 여당이 야당에 졌음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마구 떠들었다. 야당 의석에서 “옳소” “잘한다” 소리가 터져 나왔다.

3
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정가(政街)를 뒤흔드는 때아닌 신호탄이 터지니 바로 ‘백두진 파동’이었다. ‘백두진 파동’이란 박정희 대통령이 총선에서 기염을 토한 야당에 밀리지 않으려고 국회를 장악하기 위해 자신의 심복이었던 유정회(維政會) 의원 백두진을 국회의장에 내정한 것에서 발단이 됐다. 유정회가 무엇인가, 통일주체국민회의라고 하는 관선 조직이 ‘체육관 선거’를 통해 의석 3분의 1을 뽑는 국회의원 모임 아닌가.

신민당은 “지역구도 아닌 국회의원을, 더군다나 간접선거로 뽑힌 국회의원을 국회의장에 내정하는 것은 야당과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의장 선출 때 아예 본회의장을 퇴장하기로 한다. 여권은 “유신체제에 대한 정면도전”이라며 야당을 향해 “(만약 반대를 하고 싶다면) 퇴장 대신 본회의장에 출석해 반대하라”며 반대의 방법까지 제시한다.

어처구니없게도 신민당은 여당에 굴복한다. 의사진행발언으로 백두진의 의장선출 반대이유를 밝히고 투표에는 참여한 뒤 투표 후 전원 퇴장이 아닌 일부 퇴장하고, 이를 여당도 양해한다는 암수(暗數·속임수)식 절충안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민심의 동향은 폭풍전야의 긴장감으로 팽팽했지만 야당도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박 대통령은 당시 차지철 경호실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백두진 국회의장안’을 밀어붙였다. 이 일은 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처음으로 갈등을 빚은 일이기도 한데 이런 점에서 ‘백두진 파동’은 곧 있을 두 사람의 치열한 권력 투쟁과 10·26사태까지 이어지는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남산의 부장들’(김충식)에 나오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비서였던 C 씨 말이다.

‘정치 전반을 떠맡은 정보부로서는 국회가 잘 풀리려면 의장이 야당의 인망(人望)을 사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초장부터 배척 운동을 받는 백 의원이 국회를 잘 끌어갈 리 만무한 게 아닌가. 그런데 차 실장은 막무가내로 ‘(백 의장이) 충성하니 밀어준다’는 식으로 갔다. 79년의 파탄은 그런 데서 시작되었다. 기구가 있고 인원, 장비가 방대한 정보부는 공작도 하지만 그 결과와 책임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에 김 부장으로선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차 실장은 공()만 있고 책임은 없는 처지니까 마구 들쑤시고…김 부장보다 선수를 쳐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건수(件數)에만 신경을 썼다. 망조가 든 건지 총명하시던 박 대통령도 자꾸 차 실장에게 기울어져 갔다.

어떻든 이틀간의 공전 끝에 3 19일 여야 절충으로 본회의가 열렸다. 신민당 의원들은 모두 퇴장했고 이철승 등 6명의 최고위원과 원내총무만 참석한 가운데 백두진이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 비당권파 의원 16명을 규합한 YS는 “백두진의 지명은 국민을 능멸하는 처사”라고 비난하며 국회 본회의에 불참한다(백 의장은 몇 달 뒤 YS의 의원직 제명 과정에서 주도적인 힘을 행사한다).

YS
의 강경 발언에 박정희 대통령의 감정이 폭발했다. 그것도 다름 아닌 기자들 앞에서였다.

백두진이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이틀 뒤인 79 3 21, 청와대 안 상춘재(常春齋)에서는 박 대통령과 청와대 출입 기자들과의 만찬이 있었다. 당시 청와대를 출입했던 동아일보 강성재 기자(전 민자당 성북을지구당 위원장)는 ‘김영삼과 운명의 대권’이란 책에서 그날의 만찬을 생생하게 묘사해 놓고 있다.

이날 만찬장에서는 YS에 대한 거친 언사를 포함해 오간 대화들도 흥미진진하지만 박 대통령이 말년에 갖고 있던 속내와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 자리이기도 했다. 강 기자의 글을 읽다보면 박 대통령 역시 오랜 집권에 대한 피로감으로 심신이 지쳐 있다는 게 느껴진다. 다음은 만찬 첫머리를 묘사한 강 기자의 회고다.

‘영애인 근혜 씨를 대동하고 방으로 들어선 박 대통령은 미리 대기 중이던 30명 가까운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았다. 4명씩 앉을 수 있는 7, 8개의 교자상에는 6, 7가지 안줏감이 차려져 있었고, 술 주전자도 놓여 있었다. 나중에 대통령의 설명으로 알게 됐지만, 이 술 주전자에는 김포 어느 술도가에서 특별히 만들어 배달한 김포 막걸리에 맥주를 섞은 혼합주가 들어 있었다. 마실 때는 부담이 적은 농주(農酒)지만, 한두 사발만 들이켜도 금방 취기가 오르는 술이었다.

이날 저녁 상춘재 온돌방은 불을 너무 많이 지핀 탓이었는지, 방바닥이 뜨거운 편이었다. 방안이 더운 데다 다들 빈속에 독한 술이 들어가니 20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대부분 거나해진 얼굴이 되었다
.

 

<90> 취기(醉氣)

이날 만찬은 박정희 대통령이 소탈하고 편안한 대화로 분위기를 주도했다. 다시 강성재 기자의 회고다.

‘대부분의 기자들을 볼 수 있는 중앙의 교자상 한가운데 자리 잡은 박 대통령은 기자들이 피운 담배 연기가 자욱한 것을 보고는 금연(禁煙)을 화제로 말문을 열었다. 당시 목감기 기운이 있던 대통령은 “하루 3, 4갑을 태우던 담배를 최근 끊어가고 있다. 어제는 두 대를 피웠다”면서 담배를 끊을 자신이 있다고 했다. 담배를 많이 피울 적에도 집에 와서는 피우지 않았다면서 “TV 연속극에서 담배를 멋있게 태우는 탤런트들을 보면 피우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기자들은 상춘재 방안에서 새로 도배한 장판지 냄새를 맡으며 바로 전날, 같은 자리에서 차지철 경호실장이 신임 여당 간부와 신임 국회 상임위원장들을 불러 축하 만찬을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경호 책임자에 불과한 사람이 여당과 국회 간부들을 초대해 만찬을 베풀었다는 것은 차 실장의 파워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기자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이런 기자들의 마음을 읽었는지 박 대통령이 먼저 “이 별채를 지은 뒤 집들이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들이 많았는데, 마침 며칠 전 국회 간부들이 새로 뽑혀 (차 실장에게) ‘여당 신임 간부들까지 합쳐서 네가 한잔 내라’고 얘기해 어젯밤에 축하만찬이 있었다”고 했다.

정작 기자들이 놀란 대목은 대통령이 차 실장을 향해 ‘너’라고 호칭하는 부분이었다. 마치 부자(父子)처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차 실장에 대한 언급이 끝나고 바로 박 대통령은 작심한 듯 내놓고 YS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다시 강 기자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취기(醉氣)가 상승작용을 했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은 거산(YS의 호)이 백두진 의원의 국회의장 취임을 반대했던 것을 겨냥해, “백 의장이 유정회 의원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면, 유정회 의원을 뽑는 통대(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도 선출된 만큼, 나에 대해서도 반대하겠다는 뜻이 아니냐”며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거산을 정면 공격하기 시작했다. “김영삼이가 유신체제를 뒤엎겠다고 나선다면 우리는 ‘예, 예’ 손놓고 있겠느냐. 지금까지 (그가) (긴급조치)을 위반한 게 7건이나 되지만 야당 탄압이라는 오해를 받기 싫어 신민당 전당대회(5월 말) 전엔 절대 안 잡아넣는다. 김영삼이는 절대로 신민당 총재로 당선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물러나고 김영삼이든 누구든 집권해서 국민이 행복하게 된다면 언론이 밀어주어도 좋다.

당시 강 기자는 대통령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조금 뒤 난처한 상황이 벌어진다. 박 대통령이 여과되지 않은 언어로 YS를 비난하다 화제를 갑자기 언론으로 돌린 것이다. 강 기자는 당시 정부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신문이 동아일보였기 때문에 불똥이 옮겨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대통령이 “동아일보 강 기자! 강 기자 어딨어” 찾는 게 아닌가.

(나는) 몸을 조금 움직이면서 “예, 여기 있습니다” 대답했다. 대통령은 약간 언성을 높여 “김영삼이가 동아일보 같은 신문에서 가세해 주니까 힘을 얻어, 무슨 영웅처럼 정치적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내가 물러나고 김영삼이가 (정권을) 잡으면 동아일보가 행복하게 될 거 같애! 동아일보가 그러면 안 돼!”라고 말했다. 방안 분위기가 딱딱해졌다. 타 신문사 기자가 분위기를 바꿔보겠다는 요량으로 “이제 웬만큼 치안도 정착돼 있으니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시킬 의향은 없으십니까” 묻자 대통령은 지체 없이 “(아예 자정 이후 야간 금지를) 10시로 앞당기겠다”고 했다. 좌중에는 어색한 웃음이 번졌다. 농담인지 진담인지가 헛갈렸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언론에 대한 질타(?)가 끝나자 몇 개월 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 ‘민족중흥의 길’ 인세 문제를 화제로 삼았다. “인세가 1900만 원이나 되었는데, 모두 새마을 성금으로 기탁했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냉정을 되찾은 대통령은 자신이 너무 말을 헤프게 했음을 의식한 듯, “이건 모두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라고 못을 박고는, 근혜 씨에게 “아버지가 취해서 다 털어 놓기 전에 사인(신호)을 보내라”고 했다.

이날 저녁 박 대통령의 말들은 깊숙한 정치 얘기에서부터 술 깨는 비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고 한다. 모두 자리를 파하고 일어선 시각은 만찬 시작 1시간 반가량이 지난 저녁 7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결코 늦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술을 못하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취기를 느낀 상태였다.

모두들 밖으로 나왔는데 또다시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박 대통령이 청와대 정원 잔디밭에 서서 만찬을 마치고 나오는 기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강 기자의 회고다.

‘대통령이 배웅할 태세를 취하자, 기자들은 자연스레 일렬로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평소 술에 약간 취해도 일어날 때는 당당한 자세로 사람들을 대하는 대통령이었는데 이날은 어쩐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그날 밤 대통령이 마신 주량은 알 수 없지만, 막걸리 세 사발 이상은 마신 것 같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날따라 다변(多辯)이어서 음주 시간이 짧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대통령의 심신이 피곤해진 탓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네 번째인가로 몇 걸음 나아가 대통령 앞에 섰다. (그런데) 임방현 청와대 대변인이 무슨 생각에선지 “아, 동아일보 강성재 기잡니다”라고 새삼스러운 소개를 했다. 그러자 다소 흔들렸던 박 대통령은 순간적으로 중심을 잡더니 “뭐! 강 기자라고?” 하더니, 갑자기 머리로 내 앞이마를 들이받았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다시 강 기자의 말이다.

‘내가 어리둥절한 채 서 있는데, 대통령은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만지면서 “얼얼한데” 했다. 나 역시 대통령 표현대로 얼얼했지만, 취기 때문인지 아프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통령의 취기를 알아차린 대변인과 근혜 씨가 대통령의 양팔을 부축하고는 어두워진 본관 쪽을 향해 걸어갔다.

멀어지는 대통령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 기자는 ‘한 나라 명운과 절대 무관하지 않은 국가원수가 저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다니,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동아일보 기자와 박치기를 했다”는 소식은 다음 날 언론계에 쫙 퍼졌다. 그것이 정보 관계자들을 통해 부풀려지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동아일보 기자를 청와대 출입 금지시킬 것이라는 말까지 돌았다.

 

<91> YS 당선

 박치기’ 사건이 있고 난 10여 일 후 다시 청와대 기자단이 상춘재 아래 잔디밭에서 대통령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출입 기자들이 모두 여기저기 의자에 앉아 자리를 잡자 대통령이 엄숙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지난번에 내가 실수를 한 모양인데, 이 자리를 빌려 강 기자에게 정식으로 사과합니다.

대통령의 진지한 모습에 오히려 놀란 것은 기자들이었다. 사건 당사자인 강성재 기자도 “그 정도 일 가지고 정식 사과까지 하다니 나는 오히려 좌불안석이 되었다”고 말한다. 다시 강 기자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처음부터 분위기가 딱딱해지자 기자 한 사람이 와이셔츠 위에 걸쳐 입은 대통령의 스웨터를 가리키며 “각하, 입고 계시는 스웨터가 보기 좋은데요. 혹시 외제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대통령은 머쓱한 표정으로 오른손으로 목 뒤 스웨터를 뒤집어 상표까지 꺼내 보여주면서 “아니야, 보다시피 국산품이야, 요새는 국산도 잘 나와”라고 말했다.

강 기자 말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박치기’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가 만찬이 끝난 며칠 뒤 ‘동아일보 출입기자가 교체될 것이라는 말들이 정가에 나돌고 있다’는 정보 보고를 보고 그날 밤 자초지종을 물어 알게 됐다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당시 가까이에서 본 박 대통령의 모습을 함께 언급한다.

‘장기 집권(물론 이것이 치명적인 정치적 과오였지만)과 이에 따른 인권유린 및 정적(政敵)에 대한 가혹한 탄압, 그리고 만년의 여성 스캔들 등에 대한 평가는 극히 부정적인 것이지만, 대통령의 생활태도는 질박, 검소하기 짝이 없었다. 수십 년 매고 있다는 혁대, 매년 더운 여름철이면 꺼내 신던 백구두, 몇 벌 되지 않는 양복, 김치 깍두기 등 너덧 가지 반찬과 함께 내놓던 설렁탕, 그리고 화장지 하나라도 아껴 쓰려던 절약정신 등은 극히 인상적인 것이었다.

한편, 상춘재 만찬 자리에서 YS에 대한 노골적인 감정을 표현한 일에 대해서도 박 대통령 스스로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일이 있고 2주일이나 지난, 1979 4 5일 식목일 행사장 오찬자리에서 자신이 먼저 “실언을 했다”며 고백한 것이다. 이날 대통령은 성남시에서 나무를 심은 뒤 막걸리를 곁들여 점심을 했는데 술을 마시다 말고 동석한 기자들을 가리키면서 내무부 장관과 산림청장에게 이렇게 웃으면서 농()을 했다.

“기자들에게 술을 많이 따라 주도록 하시오. 그래야만 술에 취해 내가 설사 실언(失言)을 하더라도 못 쓸 것 아니오.

어떻든, “김영삼은 절대 안 된다”는 박 대통령의 본심을 ‘정확히’ 간파한 정보부는 곧 있을 신민당 전당대회(5 30)에서 어떻게 해서든 YS를 떨어뜨리기 위해 갖가지 정치공작에 들어간다. YS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2000)에는 이렇게 나온다.

‘무엇보다 경선을 진행할 자금원이 완전히 봉쇄되었다. 20여 년간의 국회의원 생활로 지면(知面)이 상당히 넓었던 나로서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만큼 철저하게 봉쇄당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동영 의원이 선뜻 나서 자신의 집을 저당잡히고 빌린 돈을 내놓아 겨우 경선을 준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정보부는 아예 YS 본인에게 직접 압력을 가해 후보 사퇴를 강권하는 수법까지 썼다. 김재규 정보부장이 직접 나섰다. 다시 YS의 회고다.

5·30 전당대회 며칠 전 밤중에 롯데호텔 객실에서 김재규 정보부장과 몇 시간 동안 단독 면담을 했다. 면담을 주선한 사람은 나와 본()이 같은 김녕(金寧) 김씨 문중 사람이었다. 김재규는 나에게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고 말했다. 자신도 같은 김녕 김씨임을 강조한 말이었다. 그러면서 총재 후보 사퇴를 끈질기게 부탁했다. “대통령 각하의 생각이 확고합니다. 김 총재도 생각해 보십시오. 정권에 도전하는 사람을 그분이 가만두겠습니까?” 그러면서 “총재 경선을 강행하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며 위협하기도 했고, 총재 출마를 포기하고 그들이 지원하는 모()씨를 지지하라 하기도 했다…나는 “박정희가 보통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총재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온다고 해도 선거가 끝나면 100% 구속합니다” 하는 말까지 들었다.

YS
는 그의 제안을 앉은 자리에서 일축했다. 그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입후보해 반드시 총재로 당선되겠다”고 말했다.

정보부의 공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당대회를 목전에 둔 5 18일 경찰은 YS가 대의원들에게 배포하려고 준비하던 문건을 빼앗아간 데 이어 측근들을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상도동 집까지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한다.

YS
는 동교동 자택을 찾아 DJ에게 지지를 부탁한다. 그때까지 줄곧 정당 바깥에서 반정부 운동을 하던 윤보선 전 대통령과 DJ도 침묵을 깨고 YS를 밀게 된다. DJ는 전당대회 D1 5 29일 열린 YS 지지 대의원 단합대회 장소에 나타나 열변을 토한다. 유신 이후 매스컴에서 사라졌던 그의 얼굴을 본 대의원들은 함성과 흥분으로 그를 맞았다.

마침내 79년 신민당 5·30 전당대회장. 이날 행사는 정치가 쓸려나간 폐허 위에 정치 열기를 불사르기 시작한 행사라고 할 수 있다. 야당과 재야, 정보부나 경호실만의 관심이 아니라 전 국민의 눈과 귀가 쏠린 정치행사였다.

정보부의 갖은 공작에도 불구하고 이날 서울 마포 새 당사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YS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재석 과반수인 376표보다 아슬아슬하게 2표 많은 378표를 얻어 이철승 후보를 누르고 총재에 재선된다. 대역전 드라마였다.

2
8개월 전에 당권을 잃고 절치부심하던 YS 47세라는 젊은 나이로 제1야당 당수 직에 복귀했다. 그의 가슴 속엔 박정희 정권을 향한 ‘칼’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두 달여 뒤 이 칼끝은 박 대통령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

 

<92> YH사건

 ‘와이에이치(YH) 무역회사’ 노동자들은 79 3 30일 회사가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폐업해버리자 넉 달 동안 노동청을 비롯해 관계 기관을 찾아다니며 필사적으로 대책을 호소했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재야인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지금으로부터 꼭 34년 전인 79, 한여름이었던 8 9일 아침, 몇몇 재야인사들이 상도동 김영삼 총재의 집을 찾는다. YH무역이라는 회사가 문을 닫고 오늘 아침 기숙사에서 여공들을 쫓아냈다. 마지막으로 신민당사로 찾아가는 중이니 호소를 들어보고 당국에 해결책도 촉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김 총재는 선뜻 “야당 당사(黨舍)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찾아오면 이야기를 듣고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말했다. YS의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2000)에 나오는 대목이다.

‘사실 당시 신민당의 처지로서는 당사를 농성장소로 내준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불쌍한 여공들을 내몰면 더이상 갈 데가 없고 극단적인 사태도 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어려운 사람들을 내가 보호해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흔히 ‘감()의 정치인’으로 불린다. 민심을 읽는 본능적인 정치 감각을 타고났다는 이야기다. 일반 사람들에게 낯선 중소가발업체인 YH사 여공들의 농성은 사건 그 자체로 보면 중소기업 노사 문제에 불과했다. 그러나 YS는 뭔가 정국의 대격변이 오고 있음을 직감한 듯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선뜻 야당 당사를 농성장소로 내줄 리 없었을 것이다.

YH
농성 사건을 통해 그는 의원직에서 제명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79년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종식시키는 정국의 중심이 되면서 국민들에게 ‘정치적 영웅’으로 부각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여공들은 8 9일 오전 9시 반, 당사 문이 열리자마자 일제히 안으로 들이닥쳤다. 이미 총재의 전화를 받은 직원이 여공들을 4층 강당으로 안내했다. 모두 187명이었다. 오전 10시쯤 당사로 나온 김 총재가 총재단 회의에서 농성을 받아들이게 된 경위를 간단하게 언급한 뒤 4층으로 올라갔다. 충혈된 눈으로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20대 앳된 여공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감정이 북받쳐왔다. 김 총재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이야말로 산업발전의 역군이며 애국자인데 이렇게 푸대접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경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신민당사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합니다. 신민당은 억울하고 약한 사람의 편에 서서 끝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강당 안에 커다란 박수 소리가 퍼졌다. TV에서나 보던 야당 총재가 자신들에게 힘을 실어주다니, 때마침 배달된 석간신문에는 농성장 사진과 기사가 크게 실렸다. 라디오 뉴스로도 크게 다뤄지고 있었다. 여공들은 ‘배고파 못 살겠다’라고 적힌 머리띠를 동여매고 농성에 들어갔다.

다시 김 총재의 회고다.

‘강당에서 자게 하고 모포 등을 사 주고 당사 앞 식당에서 설렁탕 비빔밥 등을 시켜 끼니를 해결해주었다…나는 보사부 장관과 노동청장에게 해결책을 강구토록 했으나 아무런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튿날 10일 낮 여야 총무회담을 열어 국회에서 논의할 것을 제의토록 했으나 여당 측은 거부했다.

YH 여공들 신민당사 농성’ 소식은 정국을 강타했다.

유신 체제에 대한 불만이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음이 78년 말 총선 결과에 이미 반영된 후였지만 비로소 기층 민중들의 집단적 저항이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79
1학기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학생데모도 일어나지 못했다. 겉으로 볼 때 시국은 평온했다. 하지만 폭풍전야의 상황이었다. YH 여공들은 감히 아무도 깨지 못했던 강요된 평온을 제일 먼저 깨고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충격파를 흡수하기엔 유신체제는 너무 경직되어 있었다. 정부는 여공들이 농성에 들어간 바로 다음 날인 10일 오전에 강제해산을 결정한다. 일부 신중론도 있었지만 압도적인 강경론의 위력에 묻혀버렸다. 경찰의 작전명은 ‘101작전’이라고 붙여졌다.

8
10일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경찰이 곧 강제진압을 할 것이라는 소식이 신민당사에 퍼진 것은 밤 10 40분경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긴급 총회를 열고 “경찰이 들어오면 모두 투신자살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일부 흥분한 노동자들은 창틀에 매달려 “뛰어내리겠다”고 울부짖었다. 일부는 실신해 병원에 실려가기까지 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결의문을 낭독하던 노조 조직부 차장 김경숙도 실신했다가 깨어나 다시 농성 대열에 합류했다.

11 20분경 2층 총재실에서 당원들과 함께 있던 김 총재는 농성장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흥분한 노동자들을 달랬다.

“결코 두려워 마십시오.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희를 붙들리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여태껏 경찰이 야당 당사를 습격한 적은 없었습니다. 나와 의원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그의 말에 노동자들이 안심이 되는지 하나둘 잠자리에 들기 시작했다.

자정을 넘기고 11일 새벽으로 접어들었다. 그러자 당사 주변에 경찰 병력이 눈에 띄게 늘기 시작했다. 대략 1000명 이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마침내 정·사복 경찰관들이 당사 주변 땅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기 시작했다. 소방차 헤드라이트가 당사를 비췄다. 그리고 새벽 1 55. 이순구 서울시경국장이 박한상 신민당 사무총장에게 “여공들을 내보내라”는 최후통첩을 하고 5분 뒤인 새벽 2. 자동차 경적소리가 길게 세 번 울리더니 경찰 1000여 명이 한꺼번에 당사 담을 넘어 들이닥쳤다.

 

<93> 김경숙

1979 8 11일 새벽 신민당사는 ‘생지옥’으로 변했다.

당원들은 현관 셔터를 내려 경찰 진입을 막으려 했으나 정·사복 경찰 1000여 명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 무리의 경찰들이 2층 유리창을 부수고 복도로 뛰어 들어와 청년당원들과 난투극을 벌였다. 그 사이 다른 경찰들이 셔터를 부수고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당원들은 경찰관들의 곤봉 세례에 쓰러져 ‘닭장차’에 실렸다.

진입에 성공한 경찰들은 2개 조로 나뉘어 한 패는 4층 농성장으로, 다른 한 패는 2층 총재실로 몰려갔다. 총재실에는 김영삼 총재와 국회의원, 당원, 기자 등 50여 명이 있었다. 경찰은 벽을 부순 뒤 벽돌을 던져대기 시작했다. 이윽고 “총재는 때리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키 작고 안경 쓴 놈이 황낙주다” 외침이 나오더니 원내총무 황낙주가 구둣발 밑에 깔렸다. 잠시 후 누군가 “저놈이 박권흠이다” 외치자 대변인 박권흠 손이 뒤로 꺾이면서 얼굴이 피범벅이 되도록 난타당했다. 그는 이날 갈비뼈가 부러졌다.

당 청년국장도 실신할 때까지 두들겨 맞았다. 기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분증을 내보였으나 “기자고 지랄이고 입 닥쳐!” “신문기자 좋아 하네” 욕설과 함께 곤봉,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카메라도 박살이 나고 필름도 빼앗겼다. 벽돌에 맞아 팔다리가 부러지는 사람이 속출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 나갔다. 김 총재도 끌려 나와 경찰 승용차에 실려 상도동 집으로 옮겨졌다.

농성장이던 4층 강당은 여성 노동자들의 비명소리와 연막 가스탄으로 뒤덮였다. 경찰들은 이들을 한 명 한 명 끌어냈다. 곤히 잠들었다 놀라 깨어 일어난 여공들은 사이다병 등을 깨어 들고 울부짖으며 반항했다. 일부는 창문을 주먹으로 깨고 뛰어내리려다 제지하는 경찰에 붙들렸다. 농성자들은 진압 시작 불과 10여 분 만에 모두 당사 밖으로 끌려나와 ‘닭장차’에 쑤셔 넣어졌다. 진압작전은 총 23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야당 당사가 이렇게 노골적이고도 야만적으로 짓밟힌 것은 헌정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전 2시 반경. 마치 폭격을 맞은 듯 당사가 폐허로 변했다. 경찰의 진압작전은 성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작전을 마치고 현장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참혹한 죽음이 발견되니 바로 김경숙이었다. 그는 당사 뒤편 지하실 입구 쓰레기통 옆에서 왼팔 동맥이 끊기고 정수리 부분에 길이 3cm가 파인 상처를 입은 채 발견된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진다. 경찰은 사망 원인에 대해 세 차례나 말을 바꿨다. 처음에는 “4층에서 떨어지는 것을 경찰이 받았다”고 했다가 “동맥을 끊은 뒤 투신해 병원으로 옮기던 중 사망했다”고 했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동맥 절단 뒤 4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김경숙의 시신은 경찰과 몇몇 유족만이 입회한 가운데 화장터에서 재로 변했다.

2008
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부검 보고서와 시신 사진을 근거로 “손목에는 동맥을 끊은 흔적이 없고, 손등에는 곤봉 같은 둥근 물체로 가격당한 상처가 발견되었다. 사인은 투신자살이 아닌 경찰의 강제 폭력진압 과정에서 추락사한 것”이라면서 “김경숙이 진압 직전 투신자살했다고 밝힌 당시 경찰 발표는 모두 조작된 것”이라고 했다.

2012
7월 서울중앙지법은 고인의 어머니 등 24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위자료 25000여만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가해자가 돼 위헌적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김경숙의 비극적인 삶은 그 시절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 계층으로 ‘공순이’라 불리며 멸시받고 조롱받던 전형적인 ‘여성 노동자’의 삶이었다.

그녀는 빈농의 딸이었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빚보증을 잘못 서 그나마 있던 땅을 날려 버리고 행상을 하다 그녀가 8세 때 세상을 등졌다. 김경숙은 어머니가 날품을 파느라 집을 비우면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을 돌보며 자랐다. 그리고 15세가 되던 해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김경숙은 생전 일기에서 “내가 배우지 못한 공부를 가르쳐서 동생만은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라고 적었다.

기대했던 서울 생활은 ‘꿈’에 불과했다. 그녀는 일기에 “혼탁한 먼지 속에 윙윙거리는 기계 소리를 들으며 어언 8년 동안 남은 것은 병밖에 없다”고 적었다.

한편 김경숙 죽음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며칠 뒤, 농성하던 YH 여공들의 식사를 날라주던 당사 인근 식당 여종업원이 자살하는 사건까지 일어난다. YS는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서 ‘K형에게’라는 글을 통해 그 처녀의 죽음을 이렇게 애도했다.

‘음식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그 처녀는 음식을 나르면서 보게 된 여공들의 참상과 끝내는 밤중에 경찰에 의해 개처럼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이 세상을 더이상 보기가 싫어 몸을 던진 것이오. 이것은 비록 한 이름 없는 사람의 일이지만 이 세상에 이렇듯 이름 없이 자기의 뜻을 밝히는 사람이 어디 하나둘이겠소? 지금도 그 처녀의 일을 애처롭게 느끼는 것은 나 한 사람만 아닐 것이오.

YH
여공들의 농성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당원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기자들까지 무차별 구타한 일은 전 국민의 공분을 샀다. 여기에 꽃다운 여성 노동자까지 숨지자 이제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94> 가처분신청

YH 사건 이후 김영삼 총재 체제가 이끄는 신민당과 박정희 정권은 정면 대결을 시작한다.

신민당 의원들이 마포 당사에서 농성을 벌인 지 3일째 되던 79 8 13일 의외의 일이 터진다.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전당대회에서 김 총재 당선은 무효라며 직무집행 가처분신청을 제출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당원과 대의원 자격이 없는데도 전당대회에 참석해 투표했다며 자신들처럼 무자격 대의원들이 투표에 참가해 이루어진 YS의 총재 당선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누가 봐도 ‘정치 공작’의 냄새가 짙은 행위였다.

신민당은 발끈했다. “이 같은 작태가 과연 누구에 의한 것인지 국민은 알고 있다”며 18일 열린 당기위원회에서 가처분신청을 낸 3명을 해당(害黨) 행위자로 제명했다. 사건은 당내 갈등으로까지 이어졌다. 5·30 전당대회에서 김 총재와 맞붙었던 이철승계 사람들이 전당대회 결과가 무효라며 법원에 제소한 것이다.

그런데 ‘설마’했던 법원이 전격적으로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이면서 YS는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서울민사지법이 9 8일 가처분신청이 이유가 있다고 판결하면서 김 총재와 김 총재가 임명한 부총재단에 대해 직무집행 정지 조치를 내린 것이다. 정당 대표가 법원의 결정으로 직무집행이 정지된 것은 정당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법원은 아예 정운갑 전당대회 의장을 총재 직무대행자로 선임하기까지 했다. 사법부가 직접 나서서 야당 총재 대행자까지 선임한 것은 스스로 정권의 하수인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추태라는 비난 여론이 드셌다.

신민당은 “민주주의와 사법부 독립의 마지막 조종(弔鐘)이 울린 것이다. 정치 재판에 승복하지 않겠다”며 정권과의 정면대결을 선언했다. 김 총재도 법원 판결 이틀 뒤인 9 10일 기자회견을 갖고 “박 대통령의 하야”를 거론하며 정권 타도를 선언하는 성명을 낸다. 이 성명은 이후 YS의 행보에 뚜렷한 분기점을 긋는 유명한 성명이 된다. 그동안 정권에 비판적 메시지를 많이 발표하긴 했어도 ‘하야’를 공언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다음은 성명 내용 중 일부다.

“나는 지난 총선에서 1.1%를 이겨 신임을 얻은 야당의 총재로서, 또 그동안의 투쟁으로 국민 절대 다수의 지지를 받는 공당의 총재로서 민주 회복을 바라는 모든 계층의 국민의 힘을 집결하여 범국민적 항쟁을 할 것이며, 박 정권 타도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언한다. 나는 박정희 씨의 하야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리고 국립경찰을 폭도로 전락시켜 심야에 신민당사를 습격하여 잠자던 여공들을 강제로 끌어내다가 김경숙 양을 죽이고 현역 국회의원과 취재 기자들에게 폭행을 가하여 중상을 입혔는데도 국민 앞에 사과 한마디 없고 폭력경찰을 한 사람도 잡아내지 않는 불법 무법 정권이 박 정권임을 다시 한 번 지적한다.

이어 국민에게도 “깨어 일어날 것”을 주문한다.

“국민들은 1인 체제하에서 18년을 살기에도 지쳤는데 일당 독재하에서 살기를 강요당하는 오늘의 중대한 국면에 처해서도 궐기하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가 함께 역사의 죄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명 발표 후 이뤄진 기자회견에서는 아예 4·19혁명을 거론하며 정권을 압박했다.

“나는 이 땅에 다시는 4·19와 같은 비극적인 사태가 없어야 되며, 정치 보복 없는 사회가 뿌리박아야 된다는 차원에서 박 대통령 스스로 평화적인 정권이양 준비를 갖추라고 거듭 권고한다.” 대통령이 물러나지 않을 경우 4·19혁명 같은 유혈사태가 날지 모른다는 초강수 경고였다.

정부 여당 역시 김 총재의 날 선 공격에 격앙됐다. 정부 대변인 김성진 문공장관은 같은 날 아예 법원 결정을 기정사실화하며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는 이 시간부터 총재가 아니므로 의원으로 호칭한다. 정부는 김영삼 씨 발언을 지금부터 신민당의 전체 의지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언명했다. 당이 도맡았던 대야(對野) 성명을 청와대 대변인이 발표했다는 것은 그만큼 박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읽혔다.

여야의 칼날 대치로 정국 긴장은 최고조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서서히 학생들을 비롯해 종교계도 들고 일어났다. 김 총재가 기자회견을 한 날 서울대생 15000여 명이 교내에서 반정부 데모를 벌였고 전북 전주 중앙성당 기도회에서는 김재덕 주교가 “(YS가 아니라) 박 정권에 대한 직무집행 정지 가처분”을 주장하면서 참석자들과 함께 침묵시위와 철야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문제는 ‘YS 죽이기’가 총재직을 빼앗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예 국회에서 그를 제명해 정계로부터 완전히 추방하겠다는 계획이 선 것이다. 정권이 빌미로 삼은 것은 9 16일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도쿄특파원 스톡스 기자가 쓴 YS 인터뷰 기사였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한국 정부에 대한 거리낌 없는 반대로 체포 직전에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한국 야당의 지도자 김영삼 씨는 집에서 가진 회견에서 “미국은 국민과 끊임없이 유리되고 있는 정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둘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분명히 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기사 내용 중 정치 문제로 비화된 것은 다음 대목이었다.

‘김 총재는 “이란은 미국의 크나큰 외교적 불행이었다”고 논평하면서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의 실책(失策)을 언급했다. 이어 미대사관이 작년 팔레비 정부의 약점을 국무성에 경고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면서 “나는 미대사관이 한국에서 이란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 총재는 “내가 (그동안) 미국 관리들에게 ‘미국은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서만이 박 대통령을 제어할 수 있다’고 말할 때마다 그들은 ‘한국의 국내정치 문제에 간여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것은 납득이 안 가는 논리다. 미국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3만 명의 지상군을 파견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국내 문제에 대한 간여가 아니란 말인가” 반문했다.

민중 혁명이나 다름없는 이슬람교도들의 반정부 투쟁으로 실각한 이란의 팔레비 왕을 예로 들면서 미국이 당장 ‘직접적으로’ 개입해 박 대통령을 제어해 달라는 주문은 미국의 내정간섭을 용인하라는 발언으로 해석됐고 이는 대통령과 정부 여당을 자극했다
.

<95> 제명전야

 YS의 인터뷰 내용이 뉴욕타임스지에 실린 것은 79 9 16일이었는데 그 전문(全文)이 국내 석간신문에 실린 것은 3일이나 지난 후인 19일이었다. 정부가 강경 방침을 결정하면서 신문 게재를 허용한 때문이었다.

정부와 여당은 YS의 인터뷰 내용이 “용공적인 이적행위이며 미국에 ‘민주화 압력’이라는 내정간섭을 요청하는 ‘사대발언(事大發言)’”이라며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했다. 사과와 해명을 하지 않을 경우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신민당은 “한국의 현실 정치 상황에서 마땅히 주장해야 할 발언을 한 것이며, 충정어린 애국적 발언이었다”고 맞섰다.

1야당 총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으로 불이 붙은 여야 대치 정국은 이제 ‘총재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되어 폭발 일보 직전으로 간다.

마침내 공화당과 유정회는 9 22 160명 전체 여당 의원 연명으로 ‘김영삼 의원 징계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외국 여행 중인 여당 의원들에게는 귀국 명령이 떨어졌고 출국 예정 의원들은 일정을 바꿔야 했다. 10 1일 여권은 고위 전략회의를 열고 제명방침을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이날은 연례적으로 대통령 담화가 발표되는 ‘국군의 날’이었다. 다들 현 시국과 관련해 대통령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시종일관 국가안보와 남북관계가 주를 이루었다.

“과거 23년간 북한 공산집단의 군비가 급격히 증가하여 한국에 대한 기습공격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휴전선 곳곳에서 남침용 땅굴을 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최근 우리 사회의 일각에 이러한 현실을 잊고 비생산적인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민심을 선동하고 사회 혼란을 조성하려 하고 있으니 그 구태의연한 작태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다가오는 80년대 우리 대한민국이 명실공히 막강한 고도 산업 복지사회로 등장하는 날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승산 없는 도박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대화의 자리로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최고조를 향해 치닫고 있던 정국 긴장과 관련해 몇 달 만에 처음 나온 대통령의 견해 표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헌 문제나 긴급조치 문제 등 시국을 풀어나가겠다는 의지는 찾아볼 수 없는, 강경한 입장 개진이었다.

물론 안보 문제가 여전히 심각하긴 했다.

국군의 날 다음 날인 10 2일 미 하원 군사소위원회는 ‘북한군 규모가 세계 5위로 남한보다 강하다’는 골자의 군사력 보고서를 낸 것이다. 이는 박 대통령의 ‘남침 위협’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여야 극한 대치가 이어지고 국내 정세가 혼미한 상태에서 이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을 듣고 싶었던 국민들로서는 강경 입장만을 고수하는 대통령에게서 답답함을 느꼈다.

대통령의 강경 기조는 이틀 뒤인 10 3일 개천절 경축사에서도 이어졌다. “부질없이 국론 분열과 사회 혼란을 조장하거나 국법을 어기고 공익을 해치는 등 지각없는 일부의 언동은 건전한 다수 국민의 지탄을 받을 것”이라며 반정부 세력과 반체제 세력에 대해 “긴급조치를 포함한 국법 준수를 하라”고 쐐기를 박은 것이었다.

그해 추석이 10 5일이었는데, 여당은 추석 전에 전격적으로 YS의원직 제명을 처리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런데 10 3일 개천절 아침, YS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YS 회고록(‘나의 결단’)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한다.

‘도청이 극성을 부리던 시절이라 나는 누군가가 내게 전화를 걸 때면 미리 정해놓은 암호를 대도록 약속해 놓았다. 가령 전화를 건 사람이 “가회동 김 사장입니다” 신분을 밝히면 비서가 나를 바꾸는 식이었다. 그날도 “가회동 김 사장”이라고 해서 전화를 받았더니 “저, 김 부장입니다”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김 부장이라니, 누구냐”는 말에 “중앙정보부의 김재규입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답이 흘러나왔다. (중앙정보부가) 내 전화를 완전히 도청해왔다는 방증이었다. 나는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터라 “김 부장이 무슨 일로 내게 전화를 하는가?” 쌀쌀하게 대꾸했다. 김재규는 (내가) 전화를 받게 하려고 자기 신분을 속인 게 계면쩍었음인지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면서 “총재님을 급하게 좀 뵈었으면 합니다. 시간을 내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대단히 급한 일이니까 곧 집으로 찾아가겠습니다” 말했다. “아니, 지금이 어느 판국인데 이렇게 사람이 많은 우리 집을 공개적으로 찾아온단 말이오, 할 말이 있으면 지금 전화로 하시오.” 내가 전화로 용건을 말하라고 재촉하자 그는 “낮이라도 좋으니 꼭 만나서 할 얘기가 있습니다. 호텔이 어떻습니까?” 물었다. 나는 “당신을 만날 이유가 없소. 설혹 있다 해도 호텔 같은 곳은 세상이 다 아는 곳인데 당신 만나는 것을 광고하러 다닐 생각은 전혀 없소”라고 거절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끈질기게 요청했다. 결국 YS도 마음이 흔들렸다.

‘굳이 그를 피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를 만나도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저녁식사 약속이 있으니 저녁 8시 이후에나 만날 수가 있다고 했다. 장소는 내 집이나 호텔은 피하고 어느 곳이라도 좋다고 했다. 김재규는 자기가 잘 안 쓰는 공관이 있으니 그리로 나와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러자 김은 저녁 8 30분까지 장충체육관 앞으로 나오면 사람을 내보내 안내하겠다고 했다. 나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떠나기 직전에 아내에게만 “김재규를 만나러 간다”고 말했다. “이 무시무시한 판에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데 왜 단둘이서 만나느냐”고 아내는 걱정을 했다.

 

 <96> 제명

 1979 10 3일 밤 9시경 YS는 장충체육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요원의 안내를 받아 승용차로 채 1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한 양옥집에 도착했다. 김재규 부장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단둘이 앉았다. YS가 먼저 “무슨 얘긴지 말을 해보시오” 하고 말을 꺼냈다. 다음은 이날 대화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 그의 회고록 ‘나의 결단’에 나오는 부분이다.

‘김 부장은 “어제 (제가) 박 대통령과 만나 늦게까지 술을 마시면서 약 2시간 동안 총재님의 제명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제 공화당에도 제명 명령이 내려갔습니다. 내일 오전 10시면 다 처리됩니다. 저는 대통령에게 제가 마지막으로 김 총재를 만나볼 테니 시간을 달라고 청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마지못해 승낙하더라는 것이었다. 김재규는 나에 대한 박정희의 감정이 극에 달해 있다면서 박정희가 (나를) 제명·구속할 것은 물론 죽이려 들 것이라고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총재님도 불행해집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합니다.” 그는 시종일관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나보다 박정희가 먼저 죽을 거요. 김 부장도 조심하시오”라고 말했다.

YS
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했지만 김재규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김재규는 나라와 나를 위하는 것이라면서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에 국회에 나갈 때 잠깐만 기자실에 들렀다가 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기자들과 우연히 환담하는 척하면서 뉴욕타임스 회견 내용이 와전되었다고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다음은 언론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중앙정보부의 몫이 될 것이었다. 나는 “절대 그럴 수는 없다. 뉴욕타임스 기사는 분명히 내가 한 말이고 사실인데, 왜 취소를 하나. (나는) 제명을 택하겠다. (이 정권이 나를) 구속한다 해도 전혀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재규는 “현재 우리나라의 모든 정세나 정보를 나만큼 많이 아는 사람은 없다, 박 대통령은 김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구속까지 하려는 후속조치도 세우고 있다”고 했다. 이어 우리나라가 처한 국가적 상황과 국제적 움직임 등에 관해 길게 설명을 한 뒤 “결국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파멸입니다. 우리는 파국을 막을 책임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도 양보를 해야 할 것이고 김 총재도 조금 참아 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거듭 “기자회견 내용이 와전되었다거나 과장해서 보도된 것 같다고만 해주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렇게만 해주시면 제가 제명 안 하는 방법으로 해보겠습니다”라고 했다.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나는 김에게 “김 부장이 나를 잘못 본 것 같소. 당신이 지금 나에게 한 말은 결국 나의 발언을 해명하라는 말인데, 나는 결코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나는 제명을 당하든 감옥엘 가든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소. (감옥에 가면) 내가 일시 죽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영원히 사는 길이오. 김 부장이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이번에 나를 제명하는 것이 이 정권의 종말을 재촉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오. 나는 지금도 박정희 씨가 불행해지는 것을 원치 않소. 지금 박정희 씨를 구하는 길은 민주주의를 하는 길 이외에는 달리 길이 없소.

YS
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약 한 시간가량 지난 뒤였다. 김재규는 바깥까지 따라 나오면서 그에게 “한 번 더 재고해 주십시오. 일이 악화되면 김 총재나 각하나 다같이 불행해집니다”를 거듭 반복했다.

본래 회고록이란 것은 자기 입장에서 서술되게 마련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YS가 이날 대화에서 전하는 김재규의 말들에서는 단순히 정보부의 공작 차원을 넘어 어떻든 최악의 사태를 피해보려는 노력이 읽혀진다. 일각에서는 전통적 씨족관념이 강했던 김재규가 YS와 동성동본인 김녕 김씨라는 것도 YS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일단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어떻든 “대통령이 당신을 구속하려 한다” “이러면 대통령도 불행해진다” 같은 말들에서는 불행한 사태를 막아보려는 진심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자료들이나 증언들을 종합해볼 때 김재규의 속내는 극소수의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노출됐을 뿐 겉으로 볼 때는 어디까지나 박 대통령의 충직한 보필자였다는 게 중론이다. 김재규는 이 만남 뒤 꼭 23일 만인 10 26일 박 대통령을 시해한다.

79
10 4일 공화당과 유정회는 여당 의원 총회실로 본회의 장소를 옮겨 여당 의원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YS 의원직 제명 처리안’을 상정했다. 국회는 이날 백두진 국회의장이 신청한 경호권 발동에 따라 본회의장 출입구와 복도를 300여 명의 사복 경찰과 50여 명의 국회 경위들을 동원해 차단시키고 야당 의원들의 접근을 막은 가운데 18분 만에 통과시켰다. 159표 전원 찬성이었다. 의정사상 첫 국회의원 제명 처리였다.

이에 대해 미국 정부까지 나서 유감을 표명하며 주한 미 대사를 불러들인다. 미 국무부는 4일 “우리는 한국 국회가 야당지도자 김영삼 씨를 제명한 것을 깊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논평했다. 경향신문 79 10 6일자는 이렇게 전한다.

‘사이러스 밴스 미 국무장관은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를 워싱턴으로 소환했으며 이에 따라 글라이스틴 대사는 6일 서울을 출발한다고 호딩 카터 미 국무부 대변인이 5일 밝혔다. 대변인은 미국 정부가 한국 국회의 김영삼 의원 제명사태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음을 4일 분명히 밝힌다고 말하고 국무부가 4일의 이 사태 논평에 뒤이어 5일 주한 대사에게 귀국을 요청했음을 지적해둔다고 말했다.

신민당 의원들은 국회 등원을 무기한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10 13일엔 소속 의원 66명 전원이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통일당 의원 3명도 동조했다.

YS
국회의원직 제명은 그의 정치적 근거지 부산을 흔들었다. 제명이 전격적으로 처리되고 꼭 12일 만인 10 16일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니 유신체제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는 ‘부마 민중항쟁’이었다
.

 

<97> 부산항쟁

 1979 10 15일 오전 부산대 도서관.

중간고사를 앞두고 공부에 열중하던 학생들에게 난데없이 유인물이 배포됐다. ‘현 독재 집권층은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물러날 것을 요구한다’라고 적힌 ‘민주선언문’이었다. 이어 ‘도서관 앞으로 모이라’는 유인물이 뿌려졌지만 모인 학생들은 없었다.

이튿날 16일 오전 10시 정광민(상대 2학년)은 인문사회관 306호 강의실로 뛰어 들어갔다. 40여 명이 공부하고 있던 강의실 뒤쪽에서부터 유인물을 나눠주며 이렇게 외쳤다. “학우 여러분!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저 유신독재 정권에 맞서 우리 모두 피 흘려 투쟁합시다!

분위기는 어제와 딴판이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학생들은 의자를 박차고 밖으로 몰려 나갔다. 전날부터 이상한 낌새를 채고 잠복하고 있던 사복형사들이 덮쳤으나 이내 학생들의 뭇매를 맞고 도망쳤다. 인문사회관 앞에는 순식간에 100여 명이 모였다. 자연스럽게 “독재타도” 구호가 터져 나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날 학생시위가 그날 저녁에 무려 5만 군중이 참여하는 격렬한 가두시위로 발전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캠퍼스 내 시위대는 500여 명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어깨를 걸고 “독재타도! 유신철폐!” “학원사찰 중지하라!” “구속 학생 석방하라!”를 외치며 본관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위대가 정문이 바로 보이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올 때는 무려 700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오전 11, 시위대는 페퍼포그를 앞세우고 저지하는 경찰까지 뚫고 거리로, 시내 중심가로 진출했다. 오후 2시 부산 남포동 부영극장 앞 시위는 ‘부산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200300명씩 스크럼을 짠 학생들이 남포동과 광복동을 오가며 구호를 외치자 오후 3시경 국제시장에는 2만∼3만 명이나 되는 군중이 모여 구호를 따라 외쳤다. 시위대에 김밥, 우유, 달걀, 박카스, 담배가 줄을 이어 건네졌다. 시민들은 시위대가 쫓겨 가게로 들어가면 셔터를 내려 숨겨주었고 건물 위에서 연탄재, 화분, 재떨이, 병 등을 경찰에게 던지며 진압을 방해했다.

저녁 8시가 넘어서자 시위대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이윽고 남포동 파출소가 불타고 경찰 순찰차가 불태워졌다. 3만∼5만 인파가 남포동 일대를 가득 메웠다. “밤 10시부터 통행금지를 실시한다”는 당국의 발표가 있었지만 시위는 새벽 1시까지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파출소 11곳이 불태워졌다. 명실상부 4·19 6·3항쟁 이후 시민들이 참여한 대규모 시민항쟁이었다.

다음은 부산민중항쟁 자료집에 있는 부산 시민들의 증언이다.

16일 저녁 78시경이 되자 고등학생, 퇴근하던 노동자, 국제시장 주변 주민 등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늘었고 시청 앞은 해방 공간이 됐다. 이날 마지막까지 투쟁한 사람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룸펜, 빈민, 노동자들이었고 학생들은 맨 먼저 이탈했다. …다방 아가씨와 술집의 호스티스까지 나와 박수치고 고함을 질렀다. 세상은 이미 달라지고 있었다.

이날 저녁 8, 부산대는 긴급 교수회의를 열고 무기한 휴교를 결정한다.

다음 날인 10 17일은 유신이 선포된 지 만 7년이 되는 날이었다. 전날 부산대 학생들에 이어 동아대 학생들까지 시내 곳곳에서 합세했다. 오후 4시경부터 부산 시청 앞 남포동과 광복동에 몰리기 시작한 학생들은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 7시경부터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시위의 주도권은 어제처럼 시민들이었다. 넥타이를 맨 퇴근길 회사원들부터 노동자, 상인, 식당 종업원, 재수생, 교복 입은 고교생들까지 나섰다. 시위 양상도 훨씬 격렬해졌다.

경찰은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저녁 7 25분경 충무파출소를 불태운 시위대는 ‘언론자유’ 구호를 외치면서 밤 9시에는 KBS부산방송국을 공격했으며 세금인상에 반대한다며 서구청 부산세무서, 서대신 3동사무소 건물을 파괴했다. 시민들은 파출소를 점거해도 무기고에는 손대지 않았고 흉기도 지니지 않았다. 민간인의 재산이나 병원 같은 공공시설은 훼손하지 않았으며 상점에서 물건을 약탈하지도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8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다음은 10 18일자 동아일보 보도다.

‘유신체제 출범 후 7년 만에 첫 계엄선포를 의결한 이날 국무회의는 자정이 임박한 밤 11 30분에 열려 50분간 계속됐다. 당초 총무처가 밤 10 30분경 국무회의 소집을 지시받고 국무위원들 자택으로 비상연락을 했으나 때마침 이날 밤 유신 7주년 기념 청와대 만찬과 방한 중인 이광요 싱가포르 수상 환영 만찬에 참석하고 늦게 귀가했다가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는 바람에 밤 11 30분이 돼서야 (국무회의) 성원이 됐다.

박 대통령은 18일 오전 대변인을 통해 발표한 특별담화문에서 “오로지 악랄한 선동과 폭력으로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국리민복을 해치며 헌정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불순분자들의 일체의 경거망동과 불법행위를 발본색원하자는 데 계엄선포의 목적이 있다”며 “안정과 번영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들의 사회활동과 생활에는 추호의 불편이나 위축을 주지 않도록 할 것이며 모든 국민이 안심하고 생업에 열중하여 국력배양에 계속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궂은비가 내리고 어둠이 깔려 스산했던 18일 저녁 7 55분쯤 남포동 동명극장 앞에 모여든 2000여 명의 시위대가 계엄군이 지키는 시청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대검을 꽂은 M16을 휘두르며 최루탄을 쏘아대는 공수부대의 진압에 시위대는 흩어졌고 무수한 시민들이 부상을 당하면서 부산 시내는 다시 ‘강요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흘에 걸친 부산 민중항쟁은 이렇게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이 불길은 마산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1979 10 20일 계엄령이 내려진 부산 시내. 동아일보DB

<98> 마산항쟁

동아일보 1979 10 18일자는 계엄령이 내려진 부산 시가지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18일 오전 부산시청 경남도청 전화국 등 34개 관공서와 신문 방송 등 언론기관 정문 앞에는 착검한 M16을 집총한 완전 무장 군인들이 삼엄한 경비에 임하고 있다. 학생들의 소란이 가장 심했던 남포동 광복동 진입로 등지에도 무장을 하고 투석을 막는 방석모를 쓴 경찰관들이 배치돼 있다. 시민들은 이날 오전 7시와 8시 방송뉴스와 신문을 통해 계엄선포 사실을 알고 평상시처럼 출근하고 가게 문을 열었다. … 군인들은 철모에 수통을 지닌 무장 차림으로 장갑차에 탑승해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 부산시경 앞에도 장갑차가 동원돼 있고 영도다리 쪽으로 난 육교 위에는 전투 경찰관들이 올라가 경비에 임하고 있으며 중심가 골목마다 경찰관이 510명 단위로 순찰하고 있다. 16, 17일 학생 소요가 가장 심했던 광복동 거리 양쪽에는 무장군인 1명씩이 경비에 임하고 있었다. 국제시장 주변에는 군인들의 경비 속에 상인들이 점포에 들어가려다 저지당하기도 했다.

부산이 숨을 죽인 18일 오전, 마산의 경남대는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에 술렁였다. 도서관 앞 나무와 게시판에는 “청년 학도여, 거리마다 우리의 맑은 피를 뿌리자!”는 격문이 붙었다. “지금 부산에서는 우리 학우들이 유신독재에 의해 피를 흘리고 있다. (1960 4·19를 부른 3·15 부정선거 항의 시위인) 3·15 의거정신을 잊었는가, 나가자!” 외침을 신호로 삽시간에 시위대 1000여 명이 모였다.

경찰 저지선을 가볍게 뚫고 도심까지 진출한 경남대생 대열에 마산대생들까지 합세했다. 마산항쟁 역시 부산 때와 마찬가지로 밤이 되자 점점 시민항쟁으로 번졌다. 식당 종업원, 영세상인, 일용노동자, 무직자, 구두닦이, 상점 종업원, 고교생 등이 시위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마산시위는 부산보다 더 격렬했다. 여당인 공화당 당사가 부서졌고 시내 여러 곳의 파출소가 습격당했다. 곳곳에서 박 대통령 사진이 떼어내어져 짓밟혔다.

결국 박 대통령은 18일 부산 계엄령에 이어 20 0시를 기해 마산 창원에 위수령을 선포한다.

부산에서는 총 1058명이 연행되어 66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마산에서는 505명이 연행되고 59명이 군사재판에 넘겨진다.

‘부마 민중항쟁’은 누구도 그렇게 큰 시위로 발전할 줄 몰랐다는 점에서 비조직적 항쟁이었다. 하지만 대학생이나 소수 명망가들에 국한되어 있던 1970년대 그 어떤 반독재 민주화 운동보다도 정권에 치명타를 입혔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항쟁의 원인을 좀 더 심층적으로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선은 이 지역을 정치 기반으로 하고 있던 YS의 의원직 제명이 도화선이 된 듯했지만 시민들까지 참여하게 된 데에는 생존이 위협당하는 경제적 위기가 있었다.

‘부산과 마산은 YS의 정치적 기반이어서 1979년 여름과 초가을의 정치 사태에 다른 지역 사람보다 더 예민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고, YS의 의원직 제명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러할 수 있었다. 당시 앰네스티 부산지방 간사였던 허진수도 18일에 (부산에서) “김영삼 제명 철회!” 구호가 많이 나왔다고 증언했다. 그렇지만 항쟁 첫날 밤 10시쯤에 광복동에서 “김영삼” 연호가 터져 나오자 다른 한쪽에서 “여기서 김영삼이가 왜 나와? 우리가 김영삼 위해 데모했나?”라는 핀잔 섞인 반론이 나온 데서도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김영삼 제명에 분노해 항쟁에 참여한 시민도 있었지만 제명을 계기로 유신정권에 쌓인 불만이나 분노가 폭발한 시민도 적지 않았다.(2009년 부마민중항쟁 3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당시 부산계엄사령부 합동수사반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부마항쟁의 1차 원인은 경제 침체에 의한 서민 상인층의 불만이었고 YS 의원직 제명은 두 번째였다.

부산 민심이 유신체제에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것은 1978 12월 총선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10명의 국회의원 중 5명이 야당인 신민당 소속이었고, 한 명은 유신헌법에 반대하며 공화당을 탈당했던 무소속 예춘호였다. 당선된 의원 6명이 모두 야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분노의 밑바닥에는 바로 ‘경제’가 있었다. 부산 마산 두 곳은 1970년대 후반 불어 닥친 경기 불황의 직격탄을 맞았다. 2009년 학술 심포지엄 논문에는 당시 부산의 경제상황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부산 주민의 총생산 증가율은 1976, 1978년만 해도 각각 30.5%, 16.7%로 전국 국민총생산량의 증가율보다 월등히 높았는데, 1979년에는 5.6%로 급격히 떨어져 불황의 체감이 컸다. 지역별 임금 격차도 부산이 대도시인데도 1979년에 서울을 100.0으로 할 경우, 74.3으로 전북의 67.6을 제외하면 최하위였다. … 부도율도 아주 높아 1979년에 전국의 2.4, 서울의 3.0배였다. 부산은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인데도 1979년 수출증가율이 10.2%로 역시 전국 증가율 18.4%에 훨씬 못 미쳤다.

1979
8월 현재 부산 사상공단 내 휴·폐업한 중소기업은 모두 77개사, 4100여 명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마산도 마찬가지였다. 마산수출공업단지는 1979 9월 현재 24개 업체가 휴·폐업에 들어갔고, 이에 따라 50006000명이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었다. 일본 닛케이신문은 1979 8 4일자에서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진출한 일본 기업의 반 이상이 한국에서 철수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8 8일 마산수출자유지역기업협회 조사에 따르면 ‘입주업체 102개사 중 10개 업체가 폐업했으며 나머지 92개사 중 46개 업체가 적자 경영을 이유로 동남아 등 타 지역으로 이동할 움직임에 있다’고 보고했다. 최대 규모의 중화학공업단지의 하나였던 창원공업지대에도 불황이 심했다.

민중들은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나 절규하고 있었지만 정권은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있었다. 정작 박 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내부의 적’이었다
.

<99> 강경책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산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인 10 18일 이른 새벽에 부산계엄사령부에 도착한다. 현장을 둘러본 그는 깜짝 놀란다. 며칠 뒤 10·26으로 체포된 후 제출한 ‘항소이유보충서’에 따르면 그는 부마항쟁의 성격과 민심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부마사태는…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민중 봉기로서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주고 피신처를 제공하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 대 경찰차와 수십 개소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바로 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렸지만 질책만 들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이 동석하여 저녁식사를 막 끝낸 식당에서였습니다. 부산 사태는 체제 저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라는 것과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는 것 등 본인이 직접 시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시더니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4·19)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해 사형을 당했지만 내가 직접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던 차 실장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같은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어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압니다. 그는 절대로 말()만에 그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며 이렇게 덧붙인다.

‘박 대통령은 군인 출신이고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모르는 분입니다. 더구나 10월 유신 이후 집권욕이 애국심보다 훨씬 강하여져서 국가 안보조차도 집권욕 아래에 두고 있던 분입니다. (제가 속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여러모로 비교도 하여 보았지만 박 대통령은 이 박사와는 달라서 물러설 줄을 모르고 어떠한 저항이 있더라도 기필코 방어해내고 말 분입니다. 4·19와 같은 사태가 오면 국민과 정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4·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부마민중항쟁이 진행되는 동안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하에 열린 비상대책회의에서는 강경론이 우세했다는 증언이 있다. 1978년 말부터 79 10·26 전까지 박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한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회고록(‘하나님의 은혜’·2013)에서 밝힌 내용이다.

‘군() 계통과 중앙정보부의 현지 상황 보고 내용은 “폭동화된 (부마)시위는…현 정치 판도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불만이 팽배한 원인”이라고 했다. 이에 비해 경호실, 공화당, 경찰 치안 계통은 “야당의 선동 책략에 밀려 현지에 투입된 진압 부대의 소극적인 진압 태도로 더욱 불안한 형국이 만들어지고 있다. 계엄을 선포한 이상 강력한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엄중하게 시위대를 진압 해산시키고 YS의 국회의원직 박탈을 강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강경 분위기를 주도한 사람이 바로 차지철 경호실장이었다. 다시 김 실장의 말이다.

‘차 실장의 주장에 누구도 반대하지 못했다. 온건적 자세를 견지한 그룹은 계엄사령관, 중앙정보부장, 공수특전단장 정병주 장군 등이었으나 안하무인인 차 실장에 의해 끌려가는 판이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위기가 발생했을 때, 전후 양상에 연연하지 않고 매사 강경한 처리를 바라는 것이 대통령 성향이라서 (결국) 강경 일변으로 회의 결론이 내려지고 말았다.

한편, 동아일보 기자를 하다 71년부터 10·26이 날 때까지 만 9년간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일한 유혁인(1999년 작고)은 “그 당시 내가 본,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누구 하나 대통령 앞에서 소위 직언(直言)을 할 수 있는, 그리고 실제로 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다”(유고집 ‘만월홍안·滿月紅顔’)고 말한다. 그의 말이다.

‘현실적인 애로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절대적인 소신을 갖고 있는 대통령을 어떻게 설득하느냐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과연 그 실체랄까 내용을 어떤 방향으로 정립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을 설득한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바로 (유신 헌법) 개헌을 의미하기 때문에 더더욱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이어서 “당시 박 대통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헌법은 손대지 않는다는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면서 74년 유신헌법을 만들 당시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헌법 제정 당시 시한을 설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 ‘1980년까지’로 정하는 자구를 넣었으나 내부심의 과정에서 기각되었다. (나 역시) 대통령의 논리에 수긍이 안 되는 면이 있어서 시무룩하게 있었으나 그 뒤 (내가) 정치를 실제 운용하는 과정에 있어 보면서 그분(대통령)의 뼈저린 체험에서 나온 것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헌법을 고치고 체제를 고치고 하는 것이 필요하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국내 여건을 극복하기 위한 비상체제로 유신헌법을 만들지 않았는가, 이것을 언제 끝내고 내가 언제 그만둔다는 것을 내외에 선포하면 그날부터 내 말 듣는 사람은 없어지고 다음 차례가 누구인가, 또 그 다음 차례 사람한테 모든 것이 몰려가 결국 유신체제라는 것이 기껏 한 6, 대통령 더 해먹기 위해 만든 결과밖에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유혁인은 “헌법에 손을 댄다는 것은 아예 입에 올릴 수 없는, 금기시되어 온 당시 분위기에서 내부적으로 ‘개헌’을 거론하고 제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지금의 잣대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이렇게 덧붙인다.

‘초기에는 다소 방관 내지 비판적이던 여권 인사들도 밖으로는 어떤 자세를 취했는지 모르겠고, 10·26 이후에는 완전히 딴소리들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대통령 앞에서는 강경론을 펴거나 (강경론을 주장하는 대통령에) 동조했다.


<100> 갈등

 이즈음 박정희 대통령의 고민도 깊었다는 것은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통해 확인된다. 1970년 겨울 청와대에 들어가 79 10·26사태 때까지 사회담당특보와 대변인으로 일한 임방현 씨의 증언(구술 ‘내가 겪은 박정희 정부’ 한국정신문화연구원+2011년 조찬강연)이다.

78년 유신헌법에 의해 두 번째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통일주체국민회의 사무총장으로부터 당선통지서를 받아든 박 대통령은 독백처럼 ‘혼자 나가서(출마해서) 1등하니까 쑥스럽구먼’ 하시더니 방 모퉁이 테이블로 모두 앉게 했다. 그러면서 “80년대에 들어가면 바로 개헌을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대통령의 말은) “첫째, 유신 정우회를 3분의 2 이하로 축소하겠다. 직능대표인데 원내 안정 세력 운운하니까 대폭 감축하겠다는 것이다. 둘째, 대통령 후보는 정당 공천 없이 자연인으로 등록하게 되어 있는데 정당 공천을 하고 등록하도록 (헌법을 개정)하겠다. 셋째, 토론 없이 찬반투표만 하게 돼 있는 것도 상호 토론하고 연설할 수 있게 하겠다. (나는) 이미 (박 대통령도) 유신체제가 갖고 있었던 민주 원칙상의 한계를 자인하고 있구나 여겨졌다.

임 전 대변인은 “단순히 툭 나온 말이 아니라 흉중에 깊이 들어 있던 생각이었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이 밖에도 대통령은 말년에 혼잣말처럼 ‘6·3사태 때 어떻게 그걸 이겨냈는지 모르겠어. 지금 같으면 못할 거야’ 하던 적도 있었고 또 어떤 때는 ‘그래, 강하면 부러지는 거지’ 말씀도 하셨다. ‘은퇴하면 가끔 새마을 강연을 하면서 돌아다니면 좋겠어’ 소회를 피력한 적도 있었다”고 전한다.

10
·26 현장에서 총상까지 입었으나 살아난 박상범 당시 경호실 수행계장도 2011 10월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비슷한 증언을 했다. 10·26 한 해 전인 1978 3월 박 대통령이 경북도 순시를 하고 구미 관광호텔에 하루 묵은 다음 날이었다고 한다.

“여느 날처럼 새벽 6시에 일어나 산책을 나가셨어요. 그날은 ‘박 군만 오라’ 하셔서 저만 따라 나갔습니다. 한참 걷다가 벤치에 앉았는데 ‘앉으라’ 하시고는 ‘집은 샀느냐’ ‘가족들은 건강하냐’ 물으셨죠.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내가 (집권이) 18년 됐지? 지금 정리를 하고 있는데…. 20년 되는 해에 전격 하야하고 떠나야겠다. 어때? 그러는 게 좋겠지?’ 하시는 거예요. 생각난 김에 툭 던진 말이 아니라는 게 표정에서 다 느껴졌습니다.

79
1월 대통령 경제담당특별보좌관으로 발령받은 고 남덕우 총리도 “정국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대통령의 의중을 물어본 적이 있는데 대통령이 개헌과 은퇴를 언급해 놀랐다”고 회고록(‘경제개발의 길목에서’)에서 밝히고 있다.

‘특보들은 대통령이 내려주는 각종 정보 보고를 읽는 것이 일과였다. 나는 비로소 정국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생각 끝에…어느 날 특보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정국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런데 대통령이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방법은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겠어? 헌법을 개정하고 나는 물러날 거야.” 나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박 대통령이 시해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개헌과 하야에 대한 생각을 과연 실행에 옮겼을까? 매우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건 약간 다른 이야기이지만, 김계원 비서실장의 회고록에 보면 김 실장이 79년 대통령의 ‘재혼’을 제안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김 실장은 ‘변화 없는 무미건조한 생활’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던 대통령에게 휴가를 권하고 79 4월 경남 진해 대통령 별장에 동행한다. 이 자리에서 “영부인께서도 돌아가신 지 상당 세월이 지났고 모시는 저희들도 이제는 각하의 재혼이 논의될 때가 되었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국민들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대통령인 나를 국민들이 용인할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더니 불쑥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 실장! 근혜가 시집을 가주었으면 좋겠는데 엄마 대신 나를 돕는다고 절대로 시집은 안 가겠다고 저러고 있으니 어떻게 하오?…집안 친척 중에 혹시 자신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질색을 하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청와대에 들어오는 것조차도 싫어하니 어찌 하오.

김 실장은 87 10월호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는 “당시 박 대통령의 (사람) 접촉 범위는 상당히 좁혀져 있었다. 옛날에는 학교 동창 등 부담 없는 사람들과도 자주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곤 했던 모양인데 말년에는 주로 차지철 경호실장이 일과 후의 상대역이었다”고 전했다.

문제는 차 실장의 전횡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김 실장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차 실장은 (대통령 앞에서) 김 부장에게 “그렇게 정보부가 약해 빠져서 어떡하겠냐”며 노골적으로 빈정댔다. …그의 과도한 세()를 부풀리는 처신은 대통령의 묵인에서 나온 것임을 아는 이상 설혹 내가 심사가 뒤틀리는 상황이 되어도 외면하는 것이 정도(正道)임을 알았다.

나중에는 정보부장인 김재규조차도 긴급 보고할 일이 있으면 차 실장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다시 김 실장의 말이다.

‘국가 안녕에 직결되는 문제는 언제 어느 때든지 대통령에게 즉각 보고를 드려야 한다.…이러한 엄연한 규정이 있음에도 내가 비서실에 들어간 무렵에는 놀랍게도 김재규가 긴급하게 보고 드리는 일조차도 경호실장 승인이 떨어져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김 부장이 나에게 전화를 직접 걸어와 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차 실장 저 개자식이 내가 각하를 만나 긴급 보고를 드릴 게 있다고 면담 요청을 했는데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청와대 출입을 지연시키고 있으니 실장님이 저를 좀 불러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1979년 추석 이틀 후였던 10 6일 경북 구미 선영을 찾아 성묘한 뒤 생가를 찾아 주민들과 풋고추와 김치를 안주로 막걸리를 나누는 박정희 대통령. 생전 마지막 생가 방문이 되고 말았다. 동아일보DB

 

<101> 10월 26일 오전

1979 10 26일은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청명한 날이었다. 박 대통령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갈 예정이었다. 비서진은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준비사항을 점검했다. 삽교천 방조제는 삽교천 하구를 가로막은 인공 담수호로 충청남도 4개의 시군 지역을 대단위 전천후농지로 개발하기 위한 농업종합개발사업(19751983)의 일환이었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늘 그랬듯 오전 8시에 시작하는 수석비서관 회의를 마치고 오전 9시 대통령 집무실로 가서 주요 업무보고와 결재를 마쳤다. 행사장까지 가는 길은 경호실에서 3대의 헬리콥터를 준비했다. 탑승 인원을 점검해 보니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빠져 있었다.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안전운항을 위해 중량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는 답이 왔다. 어쩐지 찜찜했다.

세간에는 이날 대통령 공식일정으로 삽교천 준공식만 알려져 있는데 또 다른 공식행사도 있었다. KBS 당진 송신소에 들르는 일이었다. 최서영 전 코리아헤럴드·내외경제 사장은 관훈저널 2012 9월호에 ‘큰 기폭제가 된 작은 불씨’라는 제목으로 당시 행사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의 이야기다.

‘나는 KBS 방송담당 이사로 있었다. … 박 대통령의 그날 일정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이었지만 바로 서울로 온 것이 아니라 당진(唐津)에 있는 KBS 단파방송 송신소를 찾아 기념식수를 하고 대북(對北)방송 현황을 보고받는 행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 이 행사가 (공식) 발표되지 않은 이유는 KBS 당진송신소가 공산권에 대한 심리전 방송의 기간시설이었기 때문에 국가보안상 밝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물론이고 시베리아와 먼 중앙아시아 공산국가(몽골,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까지 방송 청취가 가능하도록 단파출력을 강화한 송신소 보강공사는 KBS와 중앙정보부 관계자들이 몇 달 동안 철야작업을 해가면서 애써온 사업이었다. 나도 몇 번 현장을 가본 일이 있다.

그런데 행사 전날인 10 25, 돌연 경호실로부터 연락이 온다. 최 전 사장은 “대통령은 예정대로 참석하지만 정보부장이 빠지게 되었으니 방송사 측도 참석인원을 줄이라는 통보였다”고 회고한다. 다시 그의 말이다.

‘그래서 KBS에서는 사장과 기술담당 이사만 참석하고 나는 빠지게 되었다. 중앙정보부가 주동이 되어 만든 시설 준공 행사에, 그것도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 정보부장이 빠진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 내가 듣기로는 김 부장이 당진송신소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온갖 준비를 다 해놓고 있었는데 갑자기 “참석하지 말고 부마사태에 대비하라”는 연락을 받자 책상을 내리치며 분개했다는 것이다. …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지만, 만약 그날 김 부장이 행사에 참석해 대통령으로부터 “수고 많이 했네”라는 칭찬과 격려의 말이라도 한마디 들었더라면 (그날 저녁) 궁정동 안가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헬기에 대통령과 함께 동승한 김계원 비서실장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이날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그의 회고록에 나오는 대목이다.

‘비행 중에 대통령은 쌍안경으로 관심이 가는 지상 시설물을 일일이 살폈다. 반월공단 위로 날아가는 도중에 준비한 지도를 펼치고 각 공단 시설물 위치를 확인하시며 아산만의 굴뚝에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화력발전소를 일일이 가리키며 나에게 변천된 국토의 모습을 감회 깊게 설명해주셨다. “각하! 아직도 초가집이 드문드문 보이는군요.” 대만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나는(그는 중국 대사 8년 임기를 마치고 78 12월 비서실장이 되었다) 농촌의 놀랍게 변화된 모습을 오랜만에 직접 보면서 대통령께 화제를 돌리기 위해 이런 질문을 드렸다. (그랬더니 대통령은) “우선 큰길가 쪽 집부터 하고 있소. 김 실장! 이렇게 농촌의 지붕 하나 고치는 것도 참으로 어려워…” 했다. 대통령은 아산만 곡창지대 위를 지나며 상공에서 내려다 본 추수가 끝난 넓은 평야를 보고 흡족해하셨다.

헬기가 방조제 기념식장인 당진군 신평면 운정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 2. 대통령은 주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세찬 바람 속에 50m가량을 걸어서 단상 위에 올라 이렇게 치사했다. “국토개발이 곧 국력의 원천입니다. 삽교천 방조제의 준공으로 농업종합개발사업이 끝나는 1983년부터는 홍수와 가뭄이 없는 살기 좋은 농촌이 될 것입니다.

테이프커팅을 위해 자리를 옮기던 대통령은 행사석 맨 앞줄에 갓 쓴 노인들을 보고 다가가더니 “연세가 제일 높으신 분은 나오셔서 저와 함께 테이프를 끊으시죠”라고 청한다. 함덕읍에 산다는 한 노인이 테이프커팅에 참석했다. 대통령은 노인의 등을 어루만지며 안부를 묻고 배수갑문을 여는 버튼도 같이 누르자고 이끌었다.

오전 11 40, 대통령을 실은 헬기는 KBS 당진송신소 준공식장으로 향했다. 김재규가 모습을 보인 것은 이때였다. 육로로 천안을 거쳐 허겁지겁 달려온 것이었다. 김 실장 말에 따르면 “김재규는 그때부터 이미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 일행은 온천이 있는 도고호텔에서 가볍게 점심식사를 한 뒤, 오후 1 50분 귀로(歸路)에 올랐다. 그런데 헬기 이륙을 위해 운항을 시작하는 기장에게 박 대통령이 돌연 “서울로 가기 전에 아산만 쪽으로 가서 현충사 상공을 한 바퀴 돌아주게”라고 말한다. 국사(國事)의 어려운 고비가 있을 때마다 충무공 영정에 헌화하며 무언(無言)의 대화를 나누었던 대통령의 평소 생활을 잘 알고 있던 일행들은 별다른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지시라고 생각했다.

오후 2 30. 청와대에 도착한 박 대통령은 2호기를 타고 먼저 도착해 대기 중이던 수행 비서관들의 영접을 받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시 김계원 비서실장의 회고다.

‘근간의 부마사태(부마민주항쟁) 등 국내의 소요로 인해 대통령의 무겁고 어두운 표정이 오랜만에 밝은 모습이 된 것 같아 모시는 나의 입장에서도 청명한 날씨처럼 그동안의 피곤이 해소된 것 같아 기뻤다. 훗날 혹자들은 이날 행사 이동 중에 불미스러운 일종의 사건들(KBS 당진송신소 기념식이 끝나고 이륙 중 2호기 헬기가 갑작스러운 엔진 고장으로 30분 정비 끝에 먼저 청와대로 올라온 것과 점심을 위해 도고 호텔에 도착했을 때 착륙장에 인접해 있던 사슴 사육장에서 새끼 밴 사슴이 헬기 소리에 놀라 벽에 머리를 박고 죽은 일)이 이날 저녁 비극의 만찬을 예고한 것이 아닌가 했지만 (대통령을 태운) 1호기 헬기에 타고 있던 일행들은 전혀 알지 못한 내용들이었다.

 

▲1979 10 26일 박 대통령이 삽교호 준공식에 참석해 배수갑문 스위치를 누르는 모습. 고인의 생애 마지막 공식행사 사진이다. 동아일보DB

 

 <102> 10월 26일 오후

김계원 비서실장은 1979 10 26일 오후 공식 일정을 모두 마친 대통령이 1층 집무실에서 2층 사저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최영희 장군(당시 유정회 국회의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막역한 사이였다. 최 장군이 “저녁을 사겠다”고 제안하지만 김 실장은 “각하께서 찾으실지 모르니 오후 4시가 지나야 알겠다”고 말한다. 그때 차지철 경호실장으로부터 “각하께서 저녁을 같이하자고 하신다. 6시까지 궁정동 김재규 부장 안집(안가)으로 오라”는 인터폰이 온다.

김 실장은 15분 전인 5 45분경 도착했다. 김재규가 현관에서 뛰어나오며 “각하께서 피곤하셔서 그대로 쉬실 줄 알았는데 어인 일입니까?”라고 묻더니 이렇게 말했다. “정승화 장군이 참모총장으로 부임한 후 한 번도 식사를 같이하지 못해 다른 행사가 없으려니 생각하고 저녁 초대를 해놓았는데 (차 실장 연락을 받고) 미루기도 미안해서 김(정섭) 차장보(정보부 국내담당)를 불러 같이 식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2002년 작고)은 이 저녁 자리 때문에 훗날 12·12 쿠데타세력으로부터 “시해를 사전에 같이 모의했다”며 체포 구속되어 면직과 함께 예편 당했다(그는 97년 사면복권 된다).

이 대목에서 정 총장의 증언을 들어보자(회고록 ‘대한민국 군인’).

“그날 낮 뉴스에서 대통령이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무리 부분 계엄이지만 비상계엄 상태라서 대통령이 지방출장을 갈 경우에는 나도 일정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차지철은 자기 혼자 모신다는 핑계를 대며 그런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뉴스를 접하고 나는 그날 약속되었던 예편한 군 장성 송별연을 무기 연기하라고 부관에게 지시했다. 대통령이 서울을 비운 때에 술자리를 갖는다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퇴근시간 전에 김재규로부터 저녁을 함께하자는 전화가 왔다.

그가 저녁 약속을 수락한 배경은 이랬다.

“그와 나는 고향이 가까운 사이이고 군에서의 계급도 비슷한 선배라 깊이 있게 사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기)이름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성향이라서(내가 3군단장으로 갔을 때 전임 군단장이었던 그는 도처에 자기 이름을 넣은 비석을 세워 두었다) 왠지 잘 맞지 않는 느낌이어서 의례적인 선() 이상으로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하지만) 얼마 전에도 김재규의 초대를 받아 3군 참모총장과 연희동 술집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어 (이날도)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그러자고 했다.

정 총장은 김재규가 오라고 한 궁정동 안가로 수행부관과 함께 나선다. 다시 그의 말이다.

“대통령도 안 계신데 술집이 아니라 사무실이라고 하니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서울에 오래 살았지만 난 그때까지 궁정동이라는 동네가 있는지도 몰랐다.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데 뒤따라 승용차에서 사람이 내리더니 ‘김 부장이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부름을 받아 저녁을 하고 있다’면서 ‘곧 올 터이니 그때까지 대신 접대하겠다’고 했다. (자신을) 국내 담당 차장보 김정섭이라고 소개했다.

한편 김계원 비서실장은 “이날의 만찬은 대통령을 제외한 참석자 세 사람(김계원, 김재규, 차지철) 모두 사전에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며 “육군참모총장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부마사태가 터지고 그 지역이 계엄이 내려진 뒤라 정승화 총장도 매우 어려운 시간을 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안가에 도착한 김 실장은 최영희 장군의 모처럼 저녁 초청에 응하지 못한 것을 김재규에게 들려주며 대통령의 돌연한 저녁 행사를 의아해했다. 김재규는 김 실장과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정보부 박선호 의전과장을 불러 ‘대행사’의 준비 상황을 물어보며 소홀한 점이 없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여기서 말하는 ‘대행사’라는 것은 소위 ‘연회’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는 박선호의 10·26 결심공판 최후진술에서 언급된다(책 ‘10·26과 김재규’).

“대통령이 희생된 연회장소라는 것은 오로지 대통령이 여인들과의 유락장소로 이용하던 장소로서…보안에 철저를 기하였기 때문에 비밀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은 김재규 피고인, 박선호 차지철 등과 남효주 사무관(관리인) 및 몇 사람의 심부름꾼이었다. 대통령이 이곳을 찾아오는 빈도는 월 10회 정도이고 상대하는 여자는 주로 TV 탤런트 연극배우 모델 등 연예계에 종사하는 처녀들로서…10·26 그날 밤과 같이 여자 두 사람과 남자 3인 또는 4인이 모이는 행사를 ‘대행사’라 했다.

한편 김재규는 이날 “차지철의 연락을 받자마자 ‘대통령 시해’를 계획했다”고 항소이유서에 밝힌다.

“오후 4 30분 남산 집무실에 있는데 차 실장으로부터 만찬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오늘이야말로 대통령을 제거할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해 궁정동에 도착해 권총을 준비한 뒤 그곳 침대에 드러 누워 혁명과업 수행을 생각했다.

안가에 도착한 김 실장을 앞마당 정원의 평평한 조경석으로 안내한 김재규는 부산과 마산에서의 시위를 화제로 삼아 현장을 지휘한 공수특전부대장 정병주 장군의 부대 운용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김계원 회고록).

“공화당의 실정(失政)과 시국을 강경하게 몰고 가려는 자들 때문에 각하의 판단이 더 흐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차 실장이 문제입니다. 모든 시국의 불안과 사태 악화가 그로부터 기인한 것이 많으며 그가 무서워 당 간부들도 바른 말로 대통령께 진언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장님, 부마사태는 단순히 야당의 선동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폭동 진압방식으로 제압을 하면 부산시민 전체가 일어나 봉기할 것입니다.

김재규의 얼굴은 상기되고 말투는 격했다고 한다. 이어 “실장님! 차지철 저놈 오늘 해치울까요?”라고 하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다.

“대위밖에 안 지낸 자식이 장군, 장관 알기를 우습게 여겨! 내가 하는 일을 모조리 사사건건 방해하며 각하께 바르게 보고하지도 않고 내게 무조건 불리하게만 말씀을 드리니 각하께서 중정이 올리는 보고를 통 믿으셔야지요.

대통령이 도착할 시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김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 “김 부장, 너무 격하지 말고 나도 생각이 있어. 내일 각하께 보고드리는 자리에서 말씀드릴 것이고, 또 민정수석도 내일 나와 같은 뜻의 보고를 올릴 테니 어디 좀 지켜봅시다.

훗날 법정에 선 김 실장은 김재규가 “차지철을 해치울까요” 묻는 대목에서 가타부타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 시해계획을 알고도 묵인한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이에 대해 그는 “김재규가 차 실장의 월권에 심한 불만이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터에 그의 말을 새겨들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경 쓰지도 않았고 동의한 것도 아니었다”고 부인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김재규가 왜 나를 죽이지 않았는지 원망스럽다”며 자신에게 씌워진 내란미수 등의 혐의가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김 실장은 10·26 직후인 1979 10 29일 구속되어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김재규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은 뒤 82 5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으며 88년 사면 복권된다
.

 

<103> 10월 26일 저녁

 79 10 26일 저녁 6 5. 궁정동 안가 구관으로 박 대통령이 도착했다. 대통령을 수행한 경호팀은 안가에 도착함과 동시에 경호업무를 중앙정보부에 넘기게 되어 있었다. 중정 사무관의 안내를 받아 차지철 실장과 함께 방으로 들어선 박 대통령을 김계원 비서실장과 김재규가 일어나 맞이했다. 실내는 반조명으로 좀 어두웠다. 상대방 얼굴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온돌방 중앙에 놓인 직사각형 식탁 한쪽에 대통령과 차 실장이 앉고 맞은 편에 김 실장과 김재규가 앉았다. 김 실장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차 실장과 같이 입장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오는 차 안에서 나누던 이야기의 연속인 듯 김영삼 의원을 향한 불만과 부산사태에 대한 불쾌한 심정을 계속 피력했다. 대통령의 노()한 심기에 차 실장이 옆에서 가세해 만찬 초반 분위기는 실내의 조명처럼 어둡고 무겁게 시작되었다. 대통령이 마주보는 앞에 앉은 나는 화제를 오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행사로 초점을 맞추어 가급적 정치문제는 피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좀처럼 야당과 김영삼 의원에 대한 대통령의 비난은 수그러들지 않고 중앙정보부의 실책에 대해서도 연관하여 말씀을 하니, 차 실장은 내심 신이 난 것처럼 대통령의 말씀을 받아 첨언으로 질타를 더해 김 부장은 입장이 (점점) 난처해져갔다.

다음은 김재규의 항소이유서에 있는 대목이다.

‘박 대통령은 그날 저녁에도 “부산 사태는 신민당이 개입해서 하는 일인데 괜히들 놀라가지고 야단이야. 오늘 삽교천 행사에 가보았더니 대다수 국민들은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부산 데모만 하더라도 식당 뽀이나 똘마니들이 많지 않아. 그놈들이 어떻게 국회의원의 사표를 선별 수리하느니 뭐니 알겠는가. 신민당에서 계획한 일인데도 괜히 개각이니 뭐니 국회의장을 사퇴시켜야 한다느니 하면서. 중앙정보부는 수고는 많이 하는 줄 알지만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야겠어”라고 말할 정도로 피고인의 정보보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대화가 오가고 있는데 박선호 중정 의전과장이 들어와 기척으로 김 부장에게 표시를 했다. 그러자 김 부장이 잠시 나갔다 다시 들어왔다. 다시 김 실장의 회고다.

(다시 방으로 들어온 김 부장이) “각하, 오늘 술시중을 들 여인들이 왔으니 들어오게 하겠습니다” 하더니 여인들을 대통령의 양쪽에 앉게 했다. 한 여인은 “인기 가수”라며 심수봉을 가리켰고 다른 한 여인은 모 대학에 재학 중인 모델 지망생이라며 신재순 양을 소개했다. 각하의 권유로 심수봉 양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시작했다. 대통령은 평소에 술을 가리지는 않으나 경호실에서는 각하의 취향에 따라 최근에는 시바스리갈을 선호함으로 이날도 주전자에 시바스리갈과 물을 적절히 배합하여 드셨다. (대통령이) “김 부장이 술은 잘 마시지 못하면서도 술은 잘 만들거든”(했다). 술을 배합하는 것은 김 부장이, 대통령의 대작 상대는 나였다. 김 부장과 차 실장은 술을 거의 못했다. 잠시 화제는 여인들을 향하여 요즘 연예계 동향 등을 물으며 바꿔지는 듯하였으나 나누던 이야기가 조금 단절되면 대통령은 다시 정치문제로 돌렸다. “지금 정부가 이렇게 국민들을 보다 더 잘살게 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는데, 그 놈(YS) YH사건 그리고 부산 학생들을 선동해 가지고는 이 나라를 뒤엎을 궁리만 하고 있어.”’

대통령의 목소리는 조금 격앙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계를 보며 자주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7시 뉴스를 기다리는 듯했다. 이날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소식이 궁금했던 것이었다.

“각하, 삽교천방조제 소식이 곧 나옵니다.

김 부장이 텔레비전을 가져와 틀었더니 뉴스가 시작됐다. 다시 김 실장의 회고다.

‘대통령은 TV에 나오는 자신의 기념식 모습을 보며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우째, 저렇게 나를 못생기게 찍었노.” 좌중에 한바탕 웃음이 번졌다. 대통령이 상의를 벗자 우리도 함께 양복 상의를 벗었다. 뉴스 시청이 끝나고 몇 곡의 노래가 연주되는 도중에도 정치문제 이야기는 다시 나왔다.

문제는 중앙정보부의 능력 부족이라는 등의 말이 대통령과 차 실장의 입에서 계속 나온 것. 김 실장도 “옆에서 듣는 김 부장은 유구무언 침묵으로 일관하여서 내가 민망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다시 그의 말이다.

‘어떻게 해서든 화제를 바꾸어보려고 가수 심수봉의 경력과 가요계 소식을 물어보고 박 대통령이 애창하는 ‘대지의 항구’를 (그녀에게) 부르게도 하였으나 노기에 찬 대통령의 심기는 여간해서 가라앉지 않았다. 이 사이 김 부장은 자신이 앉은 자리가 바늘방석인 듯 두서너 번 중정 직원들에게 무엇을 지시하는 것처럼 예전과 같이 방을 들락거렸다. 건강이 안 좋아 술을 삼가던 김 부장도 이날은 몇 순배 잔을 비웠다.

방을 들락거린 김 부장은 밖에서 무얼 했을까. 10·26 사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수사발표는 이렇다.

‘김재규는 7 10분경 두 번째로 식당을 나와 별채인 본관으로 가서 이미 6 35분경에 도착하여 식사 중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김정섭 차장보에게 “내가 각하와 식사 중이니 식사가 끝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동 건물 2층 집무실로 가서 보관하고 있던 서독제 웰터 7연발 32구경 권총 1정을 양복 하의 뒷주머니에 넣고 만찬 자리로 다시 돌아오면서 수행 중이던 의전과장 박선호와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에게 뒷주머니 권총을 꺼내 보이고 오른쪽 허리춤에 꽂으면서 “오늘 내가 해치우겠으니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경호원을 처치하라. 각오가 되어있겠지” 하니 다소 주저하는 태도를 취하자 김재규는 “여기 참모총장과 2차장보도 와 있다”고 용기를 줌에 따라 박선호가 “각오되어 있습니다. 각하도 해치울 겁니까? 경호원이 7명이나 되는데요.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이 어떻습니까?” 되묻자 김재규는 “아니야, 오늘 하지 않으면 보안누설 때문에 안돼. 똑똑한 놈 3명만 골라 나를 지원하라, 다 해치운다” 하므로 박선호가 “그러면 30분만 더 여유를 주십시오” 말하자 “알겠다”면서 식당(만찬장)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이때 좌석은 부드러운 분위기로 전환되어 있었다. 7 35분경 식당 주방장 남효주가 김재규에게 와 “과장님이 좀 뵙잡니다” 하자 김재규는 세 번째로 자리를 떠나 옆방으로 가서 박선호로부터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받는다.

▲10·26 당시 만찬을 가졌던 궁정동 안가의 ‘그때 그 자리’. 동아일보DB

 

 <104> 10월 26일 밤

다시 정승화 육참총장의 회고다.

‘김정섭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김재규가 와이셔츠 바람으로 불쑥 나타났다. 7 10분께였다. “정 총장, 정말 미안합니다.” 나는 그가 이미 대통령 만찬에 가고 없는 줄 알았던 터라 적잖이 놀랐다. 김재규가 이제야 (만찬장에) 가는구나 생각하면서 그의 사과에 “개의치 말라”고 대답해 주었다. “김영삼이도 내가 다 손을 들게 만들어 놓았는데 제 말을 안 들어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정치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김재규는 호들갑을 떨어가며 억지로 너털웃음을 웃고는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다시 김정섭과 얘기를 나누다가 자리를 식당으로 옮겨 저녁을 했다.

이어서는 김계원 실장의 회고록을 토대로 한 것이다(그의 증언은 수사발표 자료와 대동소이하지만 그때 그 현장에 있었던 마지막 생존자여서 그런지 대화가 더 구체적이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김재규의 옆얼굴 표정은 무겁고 고통스러운 듯했다. 취중에도 대통령은 계속 부마사태를 김영삼이 자신의 고향 사람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시위라며 불만을 토로하는데 차지철이 중정의 판단 미숙으로 방관하며 사태를 점점 악화시킨 것에 원인이 있다고 맞장구를 치며 침묵하는 김 부장을 더욱 심한 곤경에 빠지게 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브라운 국방장관이 오기 전에 김영삼을 구속 기소하려고 했는데 유혁인(정무수석비서관)이 말려서 취소했더니 역시 혼란만 커졌어. 한미국방회의고 뭐고 볼 것 없이 법대로 하는데 무엇이 잘못이라는 말이야. 미국 놈은 법을 어기면 처벌 안 하나.

그러자 김재규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끼어들었다. “김영삼은 사법조치만 안 했을 뿐이지 이미 국회에서 제명된 것만으로도 처벌했다고 국민들은 봅니다.

이 말을 대통령이 다시 받았다. “중앙정보부가 좀 매섭게 해야지. 야당 의원들의 비행(非行) 사실만 움켜쥐고 있으면 무엇 해. 딱딱 입건해 잡아들여야 될 것 아냐.

대통령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김재규가 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정치는 대국적으로 상대방에게 구실을 주고 나오라고 해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차지철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끼어들었다. “신민당 놈들 그만두고 싶은 놈은 한 명도 없습니다. 언론을 등에 업고 반정부 선동해서 그렇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그 자식들, 신민당이고 뭐고 뛰쳐나오면 전차로 싹 깔아 뭉개버리고 말겠어요.

이때 별안간 김재규가 오른손으로 김 실장의 왼쪽 허리를 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 “실장님! 각하를 똑바로 모십시오!

김 실장의 증언이다.

‘그의 얼굴은 어두운 조명에서도 창백함을 넘어 엽기적이고 실성한 표정이었는데 앉은 자세에서 불쑥 오른손에 권총을 꺼내 들고 차 실장을 겨냥했다. “차지철 이놈아! 각하! 이런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무슨 정치를 하신다고 그러십니까!” 청천벽력으로 살기(殺氣)에 찬 김재규의 권총이 자신을 겨냥한 것에 당황한 차지철은 이렇게 외쳤다. “김 부장, 왜 이래! ! 김 부장, 왜 그래!” 차 실장이 소리치며 총구를 손으로 내치려는 순간, 권총 방아쇠가 당겨졌다. 1발은 그의 오른팔 손목을 관통하였다. 차 실장은 계속 소리를 지르며 대통령 오른쪽에 있던 화장실로 피신했다. “각하 앞에서 이게 무슨 짓들이야!(김 실장) “뭣들 하는 거야!(박 대통령) 나의 고함과 대통령의 고성(高聲)에 이미 이성을 상실한 김재규는 잠시 자신의 모든 행동을 멈추는 듯하였으나 돌연 작정한 듯 외쳤다. “각하도 죽어 주십시오!” 그는 이렇게 절규하면서 대통령을 향해 제2탄을 발사했다. 대통령은 식탁 밑에 만들어 놓은 발판 아래로 상반신을 왼쪽으로 기울이며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다음은 계엄사 수사발표 자료다.

‘대통령 각하가 앉은 자세로 흉부에 관통상을 입고 왼쪽으로 쓰러지자 동석했던 심 양, 신 양은 쓰러지는 각하를 부축하고 유혈이 낭자한 가슴과 등을 손바닥으로 막아 지혈시키면서 “각하 괜찮으십니까?” 묻자 각하께서는 “나는 괜찮아” 하시면서 상반신을 숙이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동석했던 가수 심수봉은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의 참고인 진술조서에서 “차 실장이 화장실을 갔다 나오면서 ‘각하 괜찮으십니까’ 물었을 때 각하께서는 ‘나는 괜찮아’ 하셨는데 본인이 옆에서 보니 호흡이 이상한 것 같아 ‘괜찮으시냐’ 다시 물으니 ‘괜찮다’고 하셨는데 곧 앞으로 쓰러지셨습니다”라고 증언했다. 또 신재순은 조갑제 월간조선 대표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최후’를 이렇게 말한다.

“그날 밤 대통령께서는 좀 취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말이 헛나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인자한 아버지 같았어요. 피를 쏟으면서도 ‘난 괜찮아’라는 말을 또박또박 했으니까요. 그 말은 ‘난 괜찮으니 자네들은 어서 피하게’라는 뜻이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이시니까 역시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를 더 생각해 주시는구나 생각했었죠. 그분의 마지막은 체념한 모습이었는데 허무적이라기보다는 해탈한 모습 같았다고 할까요. 총을 맞기 전에는 ‘뭣들 하는 거야’ 화를 내셨지만 총을 맞고서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였어요. 어차피 일은 벌어졌으니까요.

다시 김계원 비서실장의 회고다.

‘나는 갑작스러운 차지철을 향한 총격에 처음에는 대통령이 그 밑으로 들어가서 피신한 줄 알았다. 근래에 대통령에 대한 원망과 주연(酒宴)에서의 꾸지람은 인내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이었다 하여도 설마 김재규 자신의 충성의 본체인 각하를 향해 총구를 겨눌 줄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안 돼! (나는) 김 부장이 대통령을 향하여 겨누는 모습을 보고 순간 그의 총을 손으로 밀쳤다. 그러나 이미 권총은 격발되었고 대통령은 쓰러지셨다. 김 부장은 계속 쏘려고 하였으나 권총이 장전되지 않자 당황했다. 계속 노리쇠를 후퇴시키고 반복하여도 되지 않자 현관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곧 다른 권총을 들고 다시 다가서며 3번째 총격을 가했다. 순간 전기가 끊긴 듯 실내조명이 전부 꺼져버렸다. 두 달 전 이곳에서 각하를 모시고 행사를 할 때에 대통령이 실내등을 끄라 해서, 내가 연회장의 전등 스위치를 내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스위치 위치를 기억하고 문 밖 왼쪽에 있는 스위치를 향해 달려갔다.


<105> 유고1

다음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의 수사결과 발표다.

‘김계원은 (전기 스위치를 찾겠다고) 현장을 피신하여 밖으로 나왔으며 방 안에서의 총성을 신호로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는 응접실에 대기 중이던 경호처장 정인형과 경호부처장 안재송을 사살했으며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 경비원 이기주, 운전사 유성옥 등은 주방에서 대기 중이던 경호실 특수차량계장 김용태, 경호관 김용섭을 사살하고 경호관 박상범에게 중상을 입혔다. 김재규는 화장실로 피신하는 차지철 실장에게 재차 쏘려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이 되자 쏘던 총을 버리고 다시 권총을 구하려고 정원까지 나와 박흥주 대령에게 총을 달라고 하였으나 실탄을 다 소모했다는 말에 다시 방으로 되돌아가다 마침 대기실에서 나오는 박선호를 복도에서 만나 박선호가 가지고 있던 38구경 리볼버 권총을 빼앗아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이때 화장실로 피신했던 차지철은 “경호원! 경호원!” 부르면서 나오다 김재규와 바로 마주치자 방구석에 있는 문갑을 잡고 피하는 자세를 취할 뿐이었다.

다시 김계원 비서실장의 회고다.

‘“각하가 계신다! 불을 켜!” 어두운 복도에 스위치를 더듬거려 찾는 중에 불이 다시 들어왔다. 연회장 밖에서도 계속된 총성이 들렸다. 다시 돌아 들어온 연회장 안에서는 차 실장이 구석에 놓여있던 사방탁자 문갑을 잡아들고 다시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김 부장을 향해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김 부장….” 차 실장의 목소리는 애원하는 듯했다. 김재규의 총에 불이 붙으며 차 실장이 가슴을 맞고 쓰러졌다. 김재규는 다시 식탁을 돌아 신재순 양이 안고 있는 대통령 옆으로 다가와 대통령의 머리를 향해 1발을 발사하였다. 순간 대통령을 부축하고 있던 두 여인도 비명을 지르며 뒤로 일어나 물러섰다. 모든 것이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꿈처럼 미몽 가운데 순식간에 일어났다. 방구석에 쓰러져 있는 차 실장이 신음소리를 내자 누군가 들어와서 그에게 확인 사살을 했다. 밖에 요란하던 총소리도 그치고 김재규는 연회장 각 방을 들락거리며 총을 쏘아댄 자신이 도리어 공포에 떨며 당황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얼굴은 새파랗게 질리고 눈은 완전히 정신이 나간 듯 초점이 없었다.

김재규는 현관 밖에서 김 실장과 마주친다. 그러더니 “실장님! 각하 돌아가신 것을 최소 3일간은 절대 비밀로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김 실장의 증언이다.

‘김재규는 맨발로 아직 총을 쥔 채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뱉었다. (시신을) 이곳에서 절대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김 부장, 어떻게 각하까지 그렇게 했소?” 나무라는 조로 내가 말을 하였으나 그 소리는 작았고 무기를 쥔 그의 다음 동작을 알 수 없는 나로서는 참담하기까지 했다. “실장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 보안만 잘 부탁합니다. (나는) 각하를 빨리 병원으로 모시려면 시급히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김 부장, 알았으니 빨리 가봐.” 누가 경호실 요원인지, 중정 요원인지 알 수 없었으나 사건 현장 부근 사람들은 대부분 중정 요원인 것 같았다. 경호실 요원은 그들에게 전부 사살된 듯했다. 만찬장에 쓰러져 계시는 대통령에게 다가가 보니 아직 호흡이 계셨다. “각하! 각하! 조금만 참으십시오. 얘들아! 이리 빨리 들어와, 어서 들어와!” 안가에 있던 중정 요원들에게는 각하에 대한 저격까지는 차마 미리 지시가 안 내려졌는지 내 목소리에 놀란 요원들이 뛰어 들어왔다. 그중 가까이 다가선 한 명에게 각하를 업게 하고 대통령이 타고 온 전용차로 모시게 해 대통령 전담 의료시설이 있는 육군병원으로 향하게 했다.

김 실장이 병원으로 나선 그때, 김재규는 별채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정승화 참모총장에게로 갔다.

수사 발표 내용은 이렇다.

7 43분경 김재규는 맨발에 와이셔츠 차림으로…황급한 모습으로 땀을 흘리며 별채 안으로 들어와 경비원으로부터 물 한 컵을 받아 마시고 나서 정 총장의 팔을 잡고 “총장, 총장, 큰일 났습니다” 현관 쪽으로 끌고 나가면서 “빨리 차를 타시오” 하는 말에 정 총장은 김재규에게 “무슨 일입니까” 묻자 김재규는 “차를 타고 가면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이때 정 총장은 김재규가 어떤 기습을 받아 도망 나온 것으로 생각하고 승용차 뒷좌석 중앙부위에 탔는데…차중(車中)에서 정 총장이 “무슨 일입니까?” 다그쳐 묻자 “큰일 났습니다. 정보부로 갑시다” 하여 다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묻자 대답은 하지 않고 각하를 뜻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면서 저격당했다는 표시를 하였으며 (이를 본) 총장이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까?” 묻자 김재규는 “돌아가신 것은 확실하다” 대답했다. 김재규는 경호차가 따라오는지 수차 초조하게 확인하더니 “보안 유지를 해야 됩니다. 적이 알면 큰일 납니다” 말만 되풀이 강조할 뿐 “외부 침입이냐, 내부 일이냐?”는 정 총장의 물음에 “나도 잘 모르겠다” 대답하면서 보안 유지만을 거듭 강조했다. 승용차가 삼일고가도로를 향하고 있음을 의식한 정 총장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묻자 김재규는 “정보부로 가는 것”이라고 하므로 정 총장은 만일에 작전의 필요 시 지휘에 용이하고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육본으로 갑시다” 하자 김재규가 갈까 말까 망설이자 앞자리에 앉은 박흥주 대령이 “육본으로 가지요” 하여 방향을 육본으로 향했다.

이 대목에서 정승화 총장 본인의 증언(회고록)은 다음과 같다.

(안가에 도착해 김재규를 기다리며) 포도주를 마시며 시국 이야기를 했다. 주로 김정섭이 이야기를 하고 나는 듣기만 했다. 그때 몇 발의 총성이 들렸다. 먼 것 같기도 하고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거 총소리 아니오?” “글쎄요. 총소리 같기도 하고…. (나는) 총소리가 아닌 걸 잘못 들었다 생각했고 설사 총소리였다 하더라도 오발된 걸로 생각했지 다른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김정섭도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알아보겠다며 직원을 부르더니 근처 파출소에 가서 오발사고가 있었는지 알아보라 시켰다. 그리고 다시 아까 하던 시국 이야기를 계속하는데 갑자기 김재규 목소리가 들렸다. “정 총장! 정 총장!” 다급한 목소리였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는 사각(死角)이라 김재규가 보이지 않아 (나는) 밖으로 나갔다. “큰일 났습니다! 빨리 갑시다!” 주전자 꼭지를 입에 대고 벌컥벌컥 물을 마시던 김재규가 허둥대며 고함을 질렀다. 나는 만찬 중에 대통령이 급히 나를 부르는 줄로만 알았다. 인민군이 기습해온 것 같지는 않고, 정치적인 이유로 파출소가 습격당했다거나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대기 중인 김재규의 차를 탔다.

그의 증언은 수사발표와 일치한다. 다만 정 총장은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김재규의 말에 “내부 소행이라면 차지철 말고는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없었다”고 증언한다. 그러면서 “육본으로 가자”는 자신의 말에 김재규의 부관인 박흥주 대령이 찬성한 이유를 이렇게 추정한다.

‘나중에 추측건대, 그 부관(박흥주)은 남산으로 갔다가 충성심 강한 경호실 요원들이 중앙정보부에서 대통령을 죽인 걸 알고 몰려 들어오면 고스란히 앉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군 병력이 있는 육군본부로 가는 게 안전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을 터이고 게다가 내가 김재규와 함께 사건 현장 가까이에서 저녁 약속을 하고 함께 있었으니 모든 일을 나와 공모한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106> 유고2

김계원 비서실장은 총에 맞은 대통령의 시신을 업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안가에서 멀지 않은 병원으로 가는 그 시간이 왜 그리 길게 느껴졌는지 도중에 각하의 생사의 촌각이 달려 있었다. 내 무릎에 기대 누운 각하의 숨결이 약해져 가는 것을 느끼지 못하리만치 서둘렀다. 병원 입구 검문에서 각하의 신분을 감추고 비서실장의 위급한 용무인 것으로 통과했다. 대통령인 것을 숨긴 채 각하의 전용 입원실에 강압적으로 명령하여 들여보냈다. 그리고 수행하여 온 2명에게 각하의 병실 밖을 경비하게 하고 일절 사람의 출입 및 접근을 못하게 지시하였다. 비상연락을 받고 출두한 책임 군의관에게도 각하의 신상은 밝히지 않고 상태를 물으니 병원에 도착 직전에 이미 운명하셨다는 진단이었다. 재차 환자의 신원을 묻는 병원 관계자에게 ‘각하’라는 사실을 고지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들도 당시에 사망 진단을 내리고 하얀 천이 얼굴에 덮어진 후라 그 시신이 아직은 대통령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엄중히 보안을 유지할 것을 지시하고 병원 밖으로 걸어 나와 마침 지나던 택시를 잡아타고 청와대로 갔다. 청와대 정문에서 경비 중이던 경호실 요원이 거수로 나에게 경례를 하며, 나의 상의(上衣)에 붉은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더니 흠칫 놀란 기색의 눈빛을 보였다. 정문을 통과하여 급히 청와대 나의 사무실로 뛰어 올라갔다. 쓰러진 각하를 안가에 그대로 두라던 김 부장의 부탁이 있었는데 내가 이미 병원에 옮긴 뒤라 이것을 안 그가 다음 어떠한 행동을 취할지 몰라 책상서랍에서 권총을 꺼내 실탄을 확인해 보니 장전되어 있지 않았다. 마침 옆의 경호실 경호5계장 전경환(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의 친동생)이 보이길래 실탄 6발을 가져오게 해 장전하여 허리춤에 꽂았다. (호흡)을 의도적으로 여러 번 내쉬어 보고 머리를 도리질 쳐보니 몽롱한 상태에서 겪은 이 대참변이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하자, 오한이 나며 가슴이 막히고 나도 모를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김 실장은 ‘제일 먼저 누구에게 이를 알려야 되나?’ 생각하다 대통령 유고시에 헌법상 국가수반의 대리가 국무총리라는 것을 떠올리고 조심스레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유는 묻지 마시고 지금 급히 청와대로 들어오십시오.

20
분가량 지나자 최 총리가 도착했다. 김 실장은 그에게 “오늘 저녁 궁정동 안가의 ‘대행사’에서 차지철과 김재규가 싸우던 중 김재규의 총탄에 잘못되어 각하가 운명하셨습니다”라고 보고하고 곧바로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을 비상소집했다.

이어 총리의 부름을 받은 김치열 법무장관이 들어오고 청와대 경호실 차장인 이재전 장군이 들어섰다. 다시 김 실장의 말이다.

‘이때 나의 가장 큰 염려는 청와대의 안전문제와 북괴의 도발이었다. 만일 대통령의 서거소식이 아무런 준비 없이 알려지면 국가 대내외적으로 엄청난 불의의 사태가 발생될지 모르고 더욱이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경호실 양측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각하의 신변과 차지철 실장 행방을 묻는 최 총리의 질문에 나는 완고하게 ‘보안’이라 하였다. … 오리무중,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상태였다. 김재규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정동 안가에서 신발도 안 신은 맨발로 이성을 잃은 채 허둥지둥 권총을 들고 뛰쳐나간 그가 지금 무엇을 획책하고 있는지 불안하였다. 비상으로 소집된 수석비서관들이 청와대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김재규로부터 김 실장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실장님! 제가 지금 육군본부 상황실에 있습니다. 여기에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 장군과 노재현 국방장관(그는 정 총장의 연락을 받고 왔다)도 함께 있으니 여기로 건너오십시오.

김 실장은 이렇게 말한다.

“김 부장! 이곳에 총리께서 와 계시니 먼저 노 장관과 함께 이곳으로 와요.

그러자 김재규는 “아이고, 실장님 내가 어떻게 거기로 갑니까? 이곳으로 총리를 모시고 서둘러 오십시오” 재차 말한다. 기분이 언짢은 목소리였다.

김 실장은 전화를 끊고 최 총리에게 통화내용을 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각하께서 유고이시니 지금부터는 헌법이 보장한 대로 총리께서 대통령 대행이십니다.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비서실장으로서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는 국방부 장관을 비롯하여 각 군의 총장을 장악하고 향후 사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하려 할 것이며, 만일 여기서 남산의 중정과 경호실 간에 충돌이 생기면 내란으로 확전될 수 있습니다. 우선은 김재규의 체포가 제일 급선무이니 그를 체포하는 것에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고 (우리가) 사태의 진상을 모른다는 듯이 국방부로 가서 사태 수습을 강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 실장은 결국 총리와 함께 청와대에서 나와 육군본부로 향했다. 그리고 육군본부 지하 벙커로 갔다. 김재규도 거기 있었다. 다시 김 실장의 회고다.

‘벙커 안은 완전히 전시(戰時)를 방불케 했다. … 국방부 장관 노재현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최규하 총리와 정부 관계자 일행을 모시고 지상에 있는 국방부장관실로 향했다. 나는 김재규를 데리고 가까운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 사람아! 각하를 왜 그랬어?” “….” 내가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이자 (김재규는) 묵묵부답, 이제 다 끝난 일 가지고 왜 그러냐는 식의 몸짓이다. “이제는 보안이 중요해요. 각하의 서거를 절대 발표하면 안 됩니다. 먼저 혁명위를 조직하고 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는 아직도 대통령의 유해가 궁정동 안가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물론 이때까지도 대통령 시해를 아는 사람은 총리를 비롯한 극히 몇 사람뿐이었고 벙커에 모인 나머지 모두는 각하의 서거만 알지 시해를 당하였다는 그 이상의 사실은 모르는 듯했다.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되었다. 국방장관 대회의실 옆의 대기실에 모인 장관들이 심야 회의에 몹시 불안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끝내 각하의 서거를 전해들은 국무위원들은 비보에 침통해하며 몇몇 장관은 눈물을 흘렸다. 김재규는 나와 같이 대기실에 들어가 앉아 있는 동안 내 주위를 계속 맴돌며 살기 서린 눈빛으로 나를 감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회의가 개시되기 전부터 김재규는 국가안보상 시급히 전국에 계엄선포를 내릴 것과 대통령 서거 소식을 유보할 것을 주장했다. 이 주장에 다른 국무위원이 반대를 표명하자 비장한 각오인 듯 큰 목소리로 강변을 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대통령의 유고시에 일주일 아니 보름 동안 발표를 유보하는 나라들도 있는데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이 말을 들은 국무위원들은 말문을 닫아 버렸다.


<107> 체포

육군본부 지하벙커에서 열린 국무회의가 시작되기 전 최규하 국무총리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임시국무회의 소집의 사유를 말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묻자 옆에서 듣고 있던 김재규가 반발했다.

“비서실장이 각의에 무엇 하러 들어갑니까?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해요.

김 실장의 회고다.

‘김재규의 반발에 총리는 말없이 회의실로 들어갔다. 김재규는 누가 내게 다가와 이야기하려는 기척이라도 보이면 신경질적으로 제지하며 그의 바지주머니 속에 숨겨진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회의실 문이 닫히고 대기실에 있던 나는 김재규가 잠시 화장실에 간 듯 자리를 비운 사이 국방장관 보좌관을 불러 회의실 가까운 곳 조용한 빈방을 주문했다. 보좌관은 바로 옆 조그만 자신의 사무실을 내주었다. 나는 문을 급히 닫고 그에게 말했다. “조용히 회의실에 가서 국방장관과 정승화 총장을 이 방으로 오라고 하시오. 급하다고….”’

이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정승화 총장의 회고는 이렇다(회고록).

‘국방부 회의실로 갔지만 밤 11시에 열기로 했던 각료회의는 성원이 되지 않아 열리지 않고 있었다. 국방부 장관실로 들어가려고 부속실을 지나가는데 김계원 비서실장이 장관실에서 나오다 나와 마주쳤다. 그가 “비어있는 조용한 방이 있으면 가서 얘기를 좀 하자”며 나를 끌었고 국방부 장관 보좌관 조약래 준장이 “자기 방이 조용하다”며 안내했다. 이어 노재현 국방장관도 함께 자리를 했다. 그 자리에서 김 비서실장이 이렇게 말했다. “김 부장과 차 실장이 다투다가 김 부장 총에 각하께서 돌아가셨어.” 나는 숨이 턱 막혔다. 김 비서실장은 내가 김재규와 공모한 줄로 알고 눈치만 보고 있다가 그게 아닌 걸 알고서는 은밀히 내게 얘기한 것이었다.

다시 김 실장의 회고다.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나의 말에 조약래 준장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나는 이들에게 “김재규를 체포하여야 할 텐데 그가 지금 권총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하여야 하오. 특히 이곳에 그를 따라온 정보부 인원이 많으니 주의하시오” 말했다. 나의 이 말이 끝나는 찰나에 방문이 열렸다. 창백한 안색의 김재규가 들어왔다. “이 좁은 방에서 무슨 이야기들입니까?” “으음, 계엄을 선포하면 이 밤에 먼저 서울에 주둔해야 할 부대에 관하여 말하고 있었소.” 나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을 하고는 정 총장과 국방장관에게 (마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듯) “내 의견이니 그냥 참조해요. 조용히 잘 처리해야 되오” 말했다.

범인이 김재규임을 들은 대목에서 정 총장의 회고는 이렇게 이어진다.

‘김계원 실장은 내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체포해야죠. (나의 말에) 국방부 장관도 동의했다. 나는 김진기 헌병감을 육군본부 벙커로 불러내어 김재규를 체포한 뒤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인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내가 좀 보잔다고 해서 복도로 유인한 다음 커브 지점에 미리 수사관을 대기시켜 놓았다가 불시에 체포하라는 구체적인 체포방법까지 일러주었다.

노 국방장관과 정 총장이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김재규와 둘이 남겨진 김 실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김재규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디 갔다 왔소?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우선 장관과 총장에게 계엄부대의 선별을 부탁했어.

김재규는 “참다가 참을 수 없어서 화장실에 갔었습니다” 했다. 다시 김 실장의 회고다.

‘그의 말투도 예전 같지 않고 퉁명스러웠다. 경계의 빛을 늦추지 않더니 조금은 안정이 되어 보였다. 방을 나간 정 총장은 지하 방공호의 총장지휘소로, 국방장관은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 김 부장은 자신이 불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면 오른쪽 바지주머니에 감추어 놓은 권총을 꺼내 나를 향해 쏠 것이었다. (나는) 표정은 태연히 하려 했지만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궁정동 안가에서 나를 살려준 것을 그는 지금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허리춤에 감춰진 권총이 있었지만 웬일인지 그것을 꺼내는 것조차 하기 싫었다. 잠시였겠지만 초조하고 몹시 긴 침묵이 흘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재규가 따라오지 않는다면 지하 지휘소에 있는 정 총장에게 내려가 보려 했다.

김 실장이 방을 나서자 김재규가 따라가며 이렇게 물었다.

“실장님, 어디 가시려고요?

“응, 각의가 시작되었나. 계엄선포를 빨리 하여야 할 텐데.

김 실장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시 그의 증언이다.

‘방을 나와 대회의실로 걸어 들어갔다. 김 부장이 내 뒤를 따라붙었다. 회의장은 아직도 회의 개시가 안 된 듯, 총무처 장관이 아직 도착하지 못한 국무위원들의 소재를 파악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고 다른 장관들은 충격에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나는 “비서실장은 각의에 참석하지 못하는구먼” 어색한 몸짓을 보이며 다시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김재규는 이제 나를 쏠 상황만 준비하고 있을 것이었다. 이때 내 뒤를 따라오는 김 부장에게 다가오는 다른 기척이 들렸다. “부장님! (정승화) 총장님께서 부장님을 잠깐 뵈옵고자 하십니다.” 나는 뒤로 돌아섰다. 그 말을 전해 들은 김 부장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는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을) 전달한 부관과 함께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대기실로 들어가 소파에 앉으니 큰 자괴감과 무기력함이 몰려왔다. (잠시 후) “실장님! 방금 무사히 김 부장을 체포하여 지금 헌병감이 헌병대로 이송 중입니다. 이제 안심하십시오.” 나에게 다가와 정 총장이 상황을 말해주었으나 그 목소리가 아른하게 들려왔다.

체포된 김재규가 보안사 자동차에 실린 시간은 10 27일 새벽 1시경이었다.

다시 김실장의 회고다.

‘김 부장의 체포를 (내게) 통보하는 정 총장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그도 마음이 몹시 아픈 듯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몸을 추스르며 대회의실로 들어가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김재규의 체포를 보고했다. 총리 또한 착잡한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까지 모여 있는 국무위원들을 향하여 최 국무총리는 상황을 발표했다. “박 대통령이 어제 서거하셨고 각하 저격범은 김재규로 그는 방금 체포되었습니다. 각하의 시신은 현재 군병원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총리의 발표에 회의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신현확 부총리의 제의로 국무위원들이 수도육군병원 분원으로 가 모두 비통한 심정으로 각하의 시신을 확인하였다.


<108> 시계(時計)

김재규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12 4일 첫 공판 후 18일 결심 공판까지 14일 동안 8명의 피고인에 9차례 공판이 진행됐다. 거기다 결심 후 이틀 만인 12 20일 사형이 선고됐다.

변호를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역사적인 재판이 역사상 유례없는 졸속이었다”며 “항소이유서 작성을 위해 원심기록과 수사기록을 복사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연필로 베끼는 것만 허용 받았다. 기록을 대충 읽어볼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항소이유서를 작성했다”(96년 ‘신동아’ 10월호)고 했다. 김재규의 사형 집행은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진(5 17) 직후인 80 5 24일 이뤄졌다. 당시 그의 구명운동에는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해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옹 등 재야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각본에 따른 정치재판’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김재규는 재판 과정을 통해 범행 배경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시종일관 10·26을 “민주회복을 위한 국민혁명”이라고 규정하고 스스로를 ‘혁명가’라 주장했지만 대통령을 시해한 후 나라의 판을 어떻게 다시 짜보겠다는 준비된 계획도, 대책도 없었다는 것이 재판과정에서 확인되었다. 김재규는 항소이유서에서 “유신헌법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72년 내가 3군단장 시절, 군단을 방문했던 박 대통령을 연금시켜 놓고 하야시킬 생각도 했었다. 79 4월에도 살해 계획을 세웠었다”고 했다.

그런데 2005 3월호 월간조선은 10·26 직전에 김재규가 박 대통령의 생일(11 14)에 맞춰 최고급 명품시계를 프랑스에 주문했던 비화를 소개하면서 이 같은 증언에 의문을 던진다.

기사에 소개된 증언자는 10·26이 일어났을 당시 주제네바 대표부에 근무하던 N 서기관으로 그는 798월 하순 중앙정보부 비서실 김모 행정비서관으로부터 “세계적인 명품시계 제작업체인 파텍 필립사에 의뢰해 ‘근축 탄신 1979’라는 문구를 새긴 회중시계를 한 달 내에 만들라. 김재규 부장의 각별한 관심사항이니 차질 없이 처리하라”는 전문을 받는다고 한다.

“기일에 맞추어 제작하기 어렵다”는 현지인들을 겨우 설득한 N 서기관이 10월 중순에 받아든 송장(화물을 받는 사람에게 보내는 명세서)에는 무려 19000달러( 2000만 원)가 찍혀 있었다. N 서기관이 이 송장을 발송한 시간은 현지 시간으로 10 26일 오전, 한국 시간으로는 10 26일 오후였으니 이미 궁정동 만찬이 잡힌 시간이었다. 월간조선은 ‘주인을 잃어버린 문제의 시계는 훗날 보안사를 통해 큰 영애(令愛)에게 전달됐다. (기사가 게재될)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표에게 “시계 사진을 찍었으면 좋겠다”고 하니 “흉물스러운 물건이라 잘 보관하지 않았고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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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관 말이 맞다면 생전에 시가 10만 원짜리 세이코 시계를 차고 다닐 정도로 소박했던 박 대통령이 과연 김재규가 준비한 값비싼 명품시계를 받았을지도 의문이지만 어떻든 김재규는 끝까지 대통령의 환심을 사려 했던 것 같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을 시해해 놓고 ‘민주혁명’ 운운하는 것은 월간조선의 지적대로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박 대통령은 김재규에게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육사 2기 동기생이긴 했지만 김재규는 소위 시절 면관까지 당한 일이 있어 진급이 늦었다. 박 대통령은 아홉 살 어린 그를 고향(경북 선산) 후배로 각별하게 챙겼다. 5·16이 성공하자 “이 나라 경제를 살리려면 농촌부터 살려야 한다”며 호남비료공장 건설 임무를 주면서 그를 사장에 임명했다. 이후 군의 요직인 6사단장(수도권 외곽 경비를 맡던 유일한 예비사단)과 보안사령관에 임명했고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을 거쳐 중앙정보부장에 발탁했다.

박 대통령이 김재규를 매우 아꼈다는 증언은 많다. 김계원 비서실장의 말(회고록)이다.

1965 4월 대통령이 제1군사령부 시찰차 원주에 오셨다. 서울 상경 길에 “김재규 사단이 여기서 멀지 않지? 오늘 저녁은 재규 사단에 가서 한잔 하지” 하셨다. …저녁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데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 “재규, 저 놈 참 괜찮아. 저 친구 내가 장군이라는 칭호로 불러줘야 되는데 버릇이 되어서 말이야. 꼭 고향집 집안 막냇동생 놈 같으니 말이야. 참 착한 자요.”’

생전에 박 대통령을 향한 김재규의 충성도 대단했다. 김재규가 1년간 대구 대륜중학교 교사를 할 때 스승과 제자로 만나 흉금을 터놓는 가까운 관계를 이어왔다는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김 부장은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 벌떡 일어나 차려 자세로 전화를 받았을 정도였다”며 이렇게 말한다.

‘그가 73년 예편해 9대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내다 정보부 차장으로 발령이 났는데 내가 “군단장까지 지낸 국회의원이 어떻게 정보부 차장으로 가느냐”고 하자 “각하 명령이라면 어디든 가야 한다”고 말했다. 더구나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신직수였는데 신 부장은 김재규가 5사단 참모장으로 있을 때 법무장교(소령)로 데리고 있었던 부하였다. 하지만 모든 자존심을 죽이고 부하였던 신 부장을 상관으로 깍듯이 모셨다.

한편 김재규는 70년대 말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상황 분석만 했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해 대통령의 신임을 잃었다는 말도 있다. 훗날 재판정에서 김계원은 그의 성격을 묻는 검찰관의 질문에 “저돌적이었다. 추진력과 박력이 있었지만 뒷정리를 제대로 못해 매듭을 짓지 못하는 결점이 있었다. 하지만 의협심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최서영 전 코리아헤럴드내외경제신문 사장은 관훈저널(2012 9) 기고에서 KBS 보도국장 시절인 75 9월 새마을지도자연수원에서 당시 건설부 장관이던 김재규와 일주일 동안 한방을 썼던 특이한 인연을 소개해 눈길을 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여서 지도급 인사들이 번갈아 새마을연수원에 입교해 합숙교육을 받았다…그때 김재규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내가 느낀 것으로는 그는 질서를 존중하는 전형적인 군인, 그것도 죽음의 미학을 찬양하는 일본 사무라이를 동경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일본특파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세지마 류조(瀨島龍三·전 이토추 종합상사 회장·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만주군으로 참전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직속상관이었다)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해 온 것이 생각난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김재규는 어릴 때부터 일본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대장을 존경해 왔다고 한다. 명치시대 군인인 노기 대장은 러일전쟁 때 뤼순(旅順)을 함락시킨 장군인데 명치천황이 죽자 아내와 함께 순사(殉死)한 일본 최후의 사무라이였다.


<109> 국장(國葬)

1975 3월 다시 감옥으로 들어간 김지하의 옥중 생활은 79 10월 만 4 8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해 여름부터 김지하는 100일 참선을 시작했다. 하루에 30분 운동하는 것 이외에는 깨어서는 물론이고 잘 때도 가부좌를 틀고 잤다. 얼굴은 거의 ‘해골바가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말라갔다. 가족과 변호사들이 번갈아 와서 건강을 걱정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100일이 흘렀다. 김지하는 “다른 건 다 잊었어도 날짜 가는 것만은 속으로 꼬박꼬박 세고 있었다”고 했다.

그날은 맑고 밝은 가을날이던 79 10 27일이었다. 그날도 김지하는 참선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 무렵 구치소 내 방송에서 무슨 말이 계속 흘러나오는데 그의 귀에 꽂히는 말이 있었다.

“고 대통령께서” “고 박 대통령께서” “고인께서”….

아니, 도대체 저것이 무슨 소리일까?

‘고’라니? ‘고 대통령’이라니? ‘고인’이라니?

김지하는 서서히 일어나 문 쪽으로 가서 문짝에 바짝 몸을 붙인 채(위에 있는 텔레비전 모니터의 시계·視界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짝에 몸을 바짝 붙이는 게 그의 버릇이 되었다) 교도관에게 물었다.

“저게 무슨 소리요?

교도관이 사방을 둘러보더니 오른손으로 자기 목을 탁 끊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탁!

그리고 또 목을 끊는 시늉을 하며 반복했다.

“탁!

“에엥? 누가?

교도관은 오른손 엄지를 높이 세웠다.

“엇! 박정희가?

김지하가 놀라 이렇게 말하자 교도관은 오른손을 얼른 입에 갖다 댔다.

“쉬잇!

김지하는 아주 낮은 소리로 또 물었다.

“누구야? 누가 그랬다는 이야기야?

교도관은 입을 꽉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것이었다. 순간, 김지하의 머릿속에는 세 마디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내 속에서, 내 속 저 밑바닥에서 꼭 허공 중에 애드벌룬 떠오르듯이 그렇게 세 마디 말이 줄지어 떠오르는 것이었다. 인생무상. 첫 번째 마디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두 번째 마디였다. 그리고 나도 곧 뒤따라가리다. 세 번째 마디였다. 이튿날 12시 추모방송에 나온 김수환 추기경의 첫마디도 인생무상이었다. 그렇게 소름끼치는 경험을 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가 말한 이튿날이란 79 11 3일이었다. 그날 서울에서는 건국 이후 최초로 국장(國葬)이 엄수됐다. 동아일보 3일자 1면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5·16 18 5개월 동안 이 나라를 통치했던 박 대통령은 모든 사람이 일손을 놓고 슬픔으로 근조(謹弔)하는 가운데 말없이 유택(幽宅)에 묻혀 역사(歷史) 속으로 사라졌다. 이날 국장은 청와대 발인제로부터 시작해…오전 9 26분 국향(菊香)에 뒤덮인 고인의 유해는 15 10개월 16일 동안 정들었던 청와대 본관을 하직했다.

영구차는 사관생도들이 도열한 가운데를 지나 오전 9 26분 대형 태극기가 교차 게양된 청와대 정문을 나섰다. 영구차가 나가는 동안 예순을 갓 넘긴 고인의 나이대로 62발의 조포(弔砲)가 울렸다.

오전 10시 전 국민이 1분간 묵념한 것을 시작으로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된 영결식은 TV로 생중계 됐다. 영식(令息)인 지만 육사 생도, 영애(令愛) 근혜 근영 양 등 유가족과 밴스 미 국무장관 등 41개국 조문 사절 및 각계 인사 등 3000여 명이 참석했다.

최규하 권한대행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흐레 전 천지(天地)가 진동하여 산천초목이 빛을 잃었고 경악과 비탄으로 온 국민의 가슴이 메었습니다. 아직도 나라와 겨레를 위해 하실 일이 많은데 각하 자신마저 가셨으니 이 얼마나 망극한 일입니까”라며 조사(弔辭)를 읽었다. 마지막으로 “이제 영부인 곁에서 고이 잠드소서” 하며 울먹이는 대목에서는 참석자들도 함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장내를 뒤덮었다고 언론들은 전했다.

7
분 동안의 조사 낭독이 끝난 뒤 불교 조계종 찬불가대의 합창과 윤고암 종정의 영가법어(靈駕法語), 윤월하 총무원장 등 10명 법사(法師)의 독경이 있었다. 뒤이어 김지하가 옥중에서 들었다는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가 시작됐다.

추기경은 “인생은 무상하며 주만이 영원하시니 주여 인자로이 주의 종 박대통령의 영혼을 받아 주시고 광명의 나라로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했다. 다음은 추기경 회고록 중 일부다.

‘나는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 선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했는데 참석자들이 모두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 시대를 호령한 절대 권력자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빌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박 대통령을 생각할 때마다 애석(哀惜)의 정을 감출 수 없다. 그분이 쌓은 업적을 보건대 제3기 집권야욕을 꺾고 정권을 이양했더라면 지금쯤 국민의 존경을 받는 국부(國父)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영결식이 끝나고 쇼팽의 ’장송 행진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낮 12 19분경 영구차가 중앙청 정문을 빠져나갔다. 그동안에도 조객들의 오열은 계속됐다. 영구차가 지나가는 중앙청∼세종로∼시청 앞∼서울역∼국립묘지 도로변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애도 인파가 몰렸다고 신문들은 전한다. 동아일보의 보도다.

‘이날 중앙청과 정부종합청사 주변에는 새벽 4시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시민들이 몰려나와 연도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며 오전 9시경에는 애도 인파로 빽빽이 들어찼다. 연도 요소요소에는 확성기가 설치돼 조가(弔歌)와 박 대통령의 육성이 수시로 흘러나왔는데 시민들은 아예 라디오까지 들고나와 고인의 육성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박 대통령 유해는 고 육영수 여사의 묘소 오른쪽에 안치됐다. 이날 서울 하늘은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해를 실은 영구차 행렬 모습. 이날 서울은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동아일보DB

 

<110> 석방

서울구치소 2층 맨 끝 한 귀퉁이에 김지하의 방이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면 인왕산과 무악재가 훤히 보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얼마 후 김지하는 김재규의 부관이었던 박선호(중정 의전과장)를 교도소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김지하는 “그와 운동시간에 만나 몇 마디 인사를 했는데 딱 한마디만 기억에 남는다. (김재규) 부장님이 그(10·26) 며칠 전 미 중앙정보국장을 만났습니다. 반드시 어떤 조치가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이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어떠한 조치’란 것은 없었고 얼마 후 김재규의 사형 집행 소식만 들려온다.

1979
년 겨울 서울구치소는 들떠 있었다. 함께 복역 중이던 민주화 인사들은 통방을 하면서 “곧 전격적인 사태 변화가 온다더라. 내각 명단까지 다 짜고 있다더라. 우리는 곧 석방된다”는 기대감이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지하의 머리와 마음속은 편치 않았다. 앞으로 이 정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김지하는 지축을 울리는 굉음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나중에 소식을 듣고 ‘12·12(전두환 노태우 등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정말 복잡한 시절이 왔구나. 앞으로는 진정 근본적인 데에 토대를 두고 일을 해야 한다. 전략을 바꿔야 한다. 내가 언제 감옥을 나갈지 알 수 없으나 이제 사상과 이념에서부터 전략까지 전체를 수정해야 한다.

그는 다시 책에 빠져들었다. 눈은 책을 읽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바깥세상이 진정 그리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새들을 보며 ‘나도 훨훨 날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자유와 해방의 물결 속에 정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긴급조치 9호는 해제(12 8 0)됐고 구속 학생들은 석방되어 학교로 돌아왔으며 해직 교수들도 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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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보궐선거를 통해 최규하 대통령이 당선됐다. 국무총리에 신현확 부총리가, 21명의 장관 중 19명이 바뀌는 대폭 개각도 이뤄졌다.

이듬해 80년으로 접어들자 ‘금단의 성역’으로 생각되던 유신 개헌 논의가 정국을 휩쓸었다. 국회에 헌법개정심의 특별위원회가 구성된 것을 시작으로 전국 대도시에서 개헌 공청회가 잇따라 열렸다.

추운 겨울이 가고 봄 기운이 완연해진 80 2월 마지막 날.

김대중 지학순 주교 등 총 687명의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복권 조치가 단행된다. 최규하 대통령은 특별담화에서 “국민 화합의 기반을 조성하고 국가 발전의 대열에 공동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결정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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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자 동아일보는 ‘새바람 복권정국(復權政局)’이라는 제목으로 ‘2·29 복권’의 의미를 이렇게 보도한다.

‘꽃 소식이 묻어오는 마파람과 더불어 ‘정치’가 풀렸다. 김대중 씨를 비롯한 민주인사들의 복권은 정치 계절의 개막을 의미한다. 다음 대통령 후보로 유력시되는 김종필 공화당 총재, 김영삼 신민당 총재, 그리고 재야의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 등이 지난 25일 저녁 인촌기념관에서 회동한 것이 정국 해빙을 예고한 것이라면 ‘2·29 복권’은 대권을 향한 경주의 신호라고도 볼 수 있다. 작게는 신민당 내에서의 대통령 후보 경쟁이 양성화되고 크게는 구체제와 신체제가 정권 다툼의 경쟁체제에 돌입하게 되며 정계는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서서히 재편 과정을 밟게 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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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대상자에서 김지하는 빠졌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자는 제외됐기 때문이다. 그는 실망과 서운함으로 좌절했다.

그나마 감옥살이가 좀 나아졌다는 게 위안이 됐다. 밥도 꼬박꼬박 들어왔고 운동 시간도 한 시간으로 늘었다. 책도 거의 모든 게 허용되었다. 사방벽이 몸을 옥죄는 듯한 환상인 ‘벽면증’도 씻은 듯 사라졌다. 그의 말이다.

“동학사상 생태학 등에 대한 관심과 독서로 나의 영혼은 참으로 바쁘고 바빴다. 감옥이 바로 ‘광장’이었다. 머릿속에서 문득문득 시를 지어 외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서 아내로부터 월간지가 들어왔다. 웬일인가 싶어 보니 지학순 주교 글이 실려 있었다. 신군부의 등장에 쐐기를 박고 ‘3김’에게 비판을 가하는 내용이었다. 지 주교는 또 학생들에게는 집단적 행동을 당분간 자제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그의 석방은 80년이 다 끝나가는 12 11일 이뤄진다. YMCA위장결혼사건의 박종태, 기독청년민주화사건의 송진섭,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유인호 등 8명과 함께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는 것이다. 오탁근 법무부 장관은 특별담화를 통해 “새 시대를 맞이하여 그동안 반공법 및 계엄법 위반으로 복역 중이던 사람 가운데 특히 개전의 정이 현저하다고 인정되는 8명을 석방키로 했다”고 밝혔다.

석방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만으로 서른아홉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74 4월 구속되어 10개월 만인 75 2월 석방되었다가 동아일보에 옥중수기 ‘고행’을 연재해 한 달 만에 다시 감옥에 들어온 지 5 9개월 만이었다.

대학교 때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며 7년 반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세 살 때인 1964 6·3항쟁을 주도한 혐의로 수배와 도피생활을 시작한 김지하, 70년 스물아홉 나이에 ‘오적’을 써서 당대 민중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김지하…. 하지만 그의 20대와 30대 청춘은 고스란히 수배 구속 사형선고 옥살이로 점철됐다.

그가 풀려난 시각은 캄캄한 밤이었다. 구치소 정문을 피해 뒷문과 뒷골목으로 해서 중앙정보부의 일종의 안가 형태인 한 호텔에 도착해 새벽까지 이것저것 당부의 말씀(?)을 들었다. 새벽 먼동이 터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 주교 승용차에 올라탔다. 김지하의 말이다.

“한 잔인지 두 잔인지 주교님이 사주시어 소주를 마시긴 마셨던 것 같다. 무슨 맛이었는지도 기억에 없다. 다만 씁쓸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마루 밑 댓돌과 벽에 쓰인 숫자와 글씨들을 보자 몸과 마음이 따뜻해졌던 일만이 기억에 환하다.


<111·끝> 영웅들

석방 후 김지하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선 감옥보다 더한 고행(苦行)의 시작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혹독한 감옥생활을 했지만 김지하는 초인적 의지로 버텨냅니다. 그러나 그는 바깥세상이 또 다른 감옥이라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됩니다.

그는 출옥 직후 숱한 지인들과 후배들로부터 “데모대 선두에 서 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그때마다 “이제 정치가 아닌 다른 일을 찾고 있다. 더이상 데모 안 한다”고 거절했습니다. 변절, 배신, 반동이라는 비난에서부터 ‘전열을 흩뜨리는 자’ ‘전선을 이탈한 자’라는 욕설이 쏟아졌습니다. 환경과 생명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자 ‘생명교 교주(敎主)’라는 비아냥이 거셌습니다. 시인(詩人)의 여린 감수성을 가진 그의 마음에 세상의 욕설과 비난은 그대로 화살이 되어 꽂혔습니다.

결국 심한 환청과 환영에 시달립니다. 그는 출옥 후 20여 년 동안을 정신분열증으로 고통 받아 10여 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방 안에 멍하니 있다가 환영에 이끌려 집을 나가 행방불명되어 버리는 가장(家長)을 바라보는 아내와 자식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가 오랜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 완치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입니다.

마음고생이 심한 생활 한가운데서도 그는 지식인으로서 나서서 말해야 할 때 과감하게 나섰습니다. 대학생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지던 91 5월 조선일보에 실렸던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제목의 글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있습니다. 시인은 이 글에서 “말끝마다 ‘민중’ ‘민중’ 하는 사람들”의 이중성을 강렬한 언어로 까발립니다. “민중을 지도하겠다는 사람들이 목숨을 경박하게 버리는 반민중적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으며 자기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 민중들을 선동하려 한다”고 말입니다.

당시만 해도 도덕적 우위를 내세웠던 운동권을 향해 “맥도널드 햄버거를 즐기며 반미를 외치고 전사(戰士)를 자처하면서 반파쇼를 역설”하는 ‘철부지’ ‘유령’ ‘자살특공대’ ‘테러리즘’ ‘파시즘’이라 맹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다시 그 글을 읽으니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의 결기가 느껴집니다. 글이 나간 직후 민족문화작가회의는 김지하 제명을 결정했고 그의 집에는 한 달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비난, 욕설, 협박 전화가 걸려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운동권으로부터 고립된 김지하는 그 일로 더 철저히 은둔합니다. 이후 ‘변절자’는 물론이요 ‘정신이상자’라는 말까지 들으며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지속했습니다.

그가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 대선 때 당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기 있는 결정”이라는 찬사도 많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운동권 일부에서는 그를 향해 ‘변절자’라는 낙인을 들이댔습니다.

이번에 되짚어본 김지하의 삶은 한 번도 민중에 대한 애정과 시대의 고통에서 피해간 적이 없습니다. 그는 타고난 문장가이며 혁명가이자 실천가였습니다. 민주화투쟁에 대한 대가로 권력이나 돈을 탐한 적도 없었습니다. 또 그는 민주주의 이념을 넘어 삶의 근본철학으로 동학 연구에 매진하는 지식인, 사상가의 길을 일관되게 걸어왔습니다. 이런 그에게 과연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이미 정치 세력화했으나 변질되어 버린 정치권 속 운동권들이 그를 향해 손가락질할 자격이 있을까요.

이번 연재는 올 1월 김 시인 인터뷰 기사를 계기로 그와 그의 시대를 더 상세히 알고 싶다는 독자들의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기자는 그와 100시간 이상 대화를 나누며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의 삶은 ‘개인사’가 아닌 ‘시대사’ 그 자체 였습니다. 김 시인도 자신을 부각시키기보다 그 시대를 같이 살았던 많은 사람들을 부각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김지하와 그의 시대’로 정했던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당초 길어야 60회로 예상했던 원고는 100회를 훌쩍 넘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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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자부터 시작한 연재를 이제 마무리하면서 기자는 새삼 대한민국이 많은 영웅들을 갖고 있음을 깨닫고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합니다. 취재하는 동안 기자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은 칭송을 들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고() 조영래 변호사(삽화 오른쪽)였습니다. 이른바 좌, 우 양쪽의 누구도 그를 비난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한결같이 그의 인품과 헌신적 삶에 경의를 표했고 요절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생전에 고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기자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보며 “민주화의 거룩한 영웅은 조영래였다”고 여러 번 강조했던 김지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독자들은 또 대한민국의 영웅 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회상과 추억, 존경심을 강렬하게 표현해주셨습니다. 저는 60, 70년대를 관통했던 시대에 박 대통령, 육영수 여사야말로 최고의 영웅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영웅 중의 영웅은 역시 우리 민중이었습니다. 박정희 육영수 같은 지도자도 민중을 보살피고 어떤 점에선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고 김지하 조영래도 민중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우리 국민은 지난 시절, 때로는 유신 독재 치하에서도 정부가 경제를 잘 풀어가고 있으면 독재를 용인했습니다. 하지만 중앙정보부나 정치 모리배들이 도를 넘어 폭정을 하고 전횡을 할 때는 가차 없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에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고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국민이었습니다. 우리 현대사는 영웅과 국민이 함께 끌어온 자랑스러운 승리의 역사였습니다. ‘이석기류()’가 우습게 볼 대한민국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민주화가 먼저냐 산업화가 먼저냐’ 논쟁은 한 측면만 강조한 역사관입니다. 산업화의 영웅도 우리의 영웅이고 민주화의 영웅도 우리의 영웅입니다. 그리고 민주화 산업화를 주도적으로 이뤄낸 것은 우리 민중,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연재를 시작하며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써 나갈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이념과 생각에 따라 호오(好惡)가 분명한 한국 사회에서 겁 없이 나섰다가 곤란을 겪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두 가지 기피해야 할 역사관’을 먼저 정했습니다. 첫째는 이념과 계급이 다르면 상대를 적으로 모는 ‘계급주의 역사관’이요, 둘째는 국가를 이끈 지도자만 영웅으로 보는 ‘지배자 역사관’입니다. 결국,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우리 민족이 처한 위치를 넓게 보고 국민을 중심에 놓는 역사관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한반도라는 거시적 민족 관점과 국제정세를 중요시해야 한다고도 생각했습니다.

한국사가 수능 필수로 정해진다고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오랜 시간 좌우대결 속에 ‘역사교육 없는 교육’을 하며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역사를 모르는 국민은 죽은 국민입니다. 역사가 바로 설 때 민족정기가 바로 서고 정치도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래야 정치인들도 국민 앞에 더 겸허해질 것입니다.

그나저나 대한민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하고 선진국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하는데 왜 요즘엔 영웅이 눈에 띄지 않을까요? 시대가 격동적이지 않아서 그런가요?

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

 

허문명 오피니언팀장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