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하와 그의 시대1
[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 동아일보
‘7개월만의 재회’ 김지하 시인
기자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를 쓰면서 김 시인으로부터 딱 두 번의 ‘가벼운’ 항의 전화를 받았다. 첫 번째 항의 기사는 22회 ‘법정에 선 오적’편이었다. 시 ‘오적’을 써 당대 스타로 떠오른 그가 짧은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와 술집을 차린 에피소드를 그린 ‘술집 주인 된 김지하, 공짜 술로 문 닫다’라는 제목으로 나간 글이다. 김 시인은 “내가 완전히 술주정뱅이로 그려진 것 같다”고 했다.
두 번째 전화는 중앙정보부 근무 시절 김지하와 교류해 온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만나 김 시인이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내용이 담긴 35회 ‘인연 1’편 때문이었다. 당시 기사는 오적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김 시인이 이 전 원장과 몰래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박정희 정권을 엎자”고 했다는 이 전 원장의 증언을 소개한 것이었다. 김 시인은 “나는 절대 폭력주의자가 아닌데 쿠데타를 운운하며 폭력을 찬양하는 것처럼 비쳤다”고 언짢아했다.
당초 김 시인의 회고록으로 출발한 기획이 ‘시대사’로 넓어지면서 우려됐던 대목은 김 시인이 얼마나 기자를 믿고 맡겨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사자의 증언을 충실하게 전달하긴 하겠지만 생존해 있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기사를 쓴다는 것은 당사자의 절대적인 양해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연재가 가능했던 밑바탕에는 전적으로 기자를 신뢰해준 김 시인의 대인적 풍모에 있다. 그는 “나 말고 여러 사람을 부각하는 쪽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큰 틀에서만 기획 방향을 주문했을 뿐 이렇게 써 달라, 저렇게 써 달라 구체적으로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앞에 소개한 두 번의 전화 말고는 연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아예 연락이 없었다. 간간이 기자가 부인 김영주 토지문화관 이사장을 통해 근황을 전해 듣는 정도였다.
끊이지 않는 정쟁… 민주당이 더 문제
이달 16일 강원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다시 만난 김 시인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추웠던 2월 원주에서의 여러 날에 걸친 장시간 인터뷰 후 7개월 만에 다시 보는, 오랜만의 재회였다. 기자의 마음도 그동안 그의 마음에 놓였던 무거운 돌덩어리가 이제는 사라진 것이 아닐까 생각되어 덩달아 밝아졌다. 김 시인은 소회를 묻는 기자에게 “수고했다”는 말로 입을 떼며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지난 몇십 년 동안 한국 사회를 갈라놓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융합하기 어려운 갈래 길이 파쟁(派爭)의 역사 안에서 ‘중심 모리’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원수 관계를 묶어놓은 것이다. 그동안 아무도 누가 그것을 집어 올리지 못했다… 사실 민주화와 산업화라는 것이 쉽게 합의가 안 된다. 이번 기획은 그걸 찾자고 한 거다. 그리고 딱 찾았다! 도달했다! 나는 미학자이다. 우리나라는 문화 민족이고 문화가 핵심인 나라다. 민주화와 산업화라는 모순되는 가치 사이에 (이번 연재를 계기로) 적분(積分)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게는 이제부터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일, 내 역할, 사명감을 주었다. 또 과거 산업화와 민주화 중간에 융합할 수 있는 논리를 발견하지 못한 50, 60대에게 방향을 주었다. 새로운 가치관이 발견되고 가능성이 움직이는 시작을 했으니 실로 의미가 크다. 동아일보가 큰일을 했다.”
그는 특히 육영수 여사나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 같은 여성들을 부각한 데 대해 큰 의미 부여를 했다.
“그야말로 음(陰)의 시대, 여성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독자들이 느끼게 해주었으리라 본다. 지금의 시대정신을 잘 반영한 것이다. 역사가 해(태양) 중심에서 달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불보다 물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는 시기다. 내가 너무 꿈을 크게 꾸는지 모르지만 박근혜 대통령 다음이 어떻게 되느냐가 중요하다. 향후 15년은 여성들이 더 발전해서 남성들이 보조하고 그랬으면 좋겠다.”
그가 달의 시대, 음의 시대, 여성의 시대를 이야기해 온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올 초 인터뷰할 때에도 기자에게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게 된 밑바탕에 그런 철학이 강하게 깔려 있음을 몇 번이나 말하곤 했었다. 김 시인은 “이미 국민은 여성의 시대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고 여자가 뭘 할 수 있겠느냐 하는 의식이 없어졌는데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심하다”고 했다. 내친김에 정치 이야기를 꺼냈다. “여야 간에 정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며 기자가 한숨을 쉬자 그는 “민주당이 더 문제”라고 했다.
“사사건건 대통령에게 책임지라고 내몰고 있는데 국민 눈에는 트집으로 보인다. 혹시 대통령이 여자라고 무시하는 건 아닌가. 일이 터질 때마다 대통령보고 책임지라 하면 어떻게 하나.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에게 그런 법은 없었다. 야당이 자꾸 이런 식으로 하면 오히려 대통령한테 이득이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정치를 잘하고 있다”고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하고 있다. 야당이 거세게 야단스럽게 해도 담담하게 대하는 모습이 대단하다. 대통령 지지율이 높은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도 20대에서 지지율이 올라가는 것 봐라. 간단하지 않다.” 그는 “특히 개성공단 문제를 잘 풀었다”고 했다.
“북한은 굉장한 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손을 든 거다. 개성공단 처리하는 것을 보고 대통령이 정치를 잘하는구나 생각했다.” 이어 “늘 그렇듯 태풍의 시작은 미풍”이라면서 북한의 변화에도 주목하고 있었다.
“14일 북한에서 열린 아시아역도대회에서 분단 후 최초로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연주됐다. 이것은 어떤 징조다. 평양신문들이 눈이 둥그레졌다. 한번 지켜보자.”
이 대목에서 ‘이석기’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옆에 앉아 있던 김영주 이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로서는 너무 자연스러운 사건이다. 터질 게 터진 거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면 80년대에 주사파 아들딸을 데리고 있는 부모들이 (모친) 박경리 선생을 찾아와서 힘들게 공부시킨 애들이 설악산이나 지리산 가서 ‘훈련’ 같은 것을 받고 오더니 이상해졌다며 미치겠다고 통곡을 했다. 그리고 91년 학생들의 분신이 이어질 때 박홍 신부가 학생들을 돌봐주지 않았나. 그때 학생들이 고해성사하면서 주사파의 실체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지금도 우리는 그들이 움직이는 판이 다 보인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그때보다 더 나쁜 것은 가난한 시대에 투쟁할 때는 청신(淸新)한 기운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돈맛, 권력맛을 알아서 부패의 기운이 흐른다. 한마디로 ‘더럽게’ 움직인다.”
지금은 아우라지 미학에 몰두중
김 시인이 말을 받았다.
“내가 대학 다닐 적에 나이 든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를 여러 명 만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마르크스를 읽으면서도 제대로 공부를 하고 조국의 운명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들이다. 이 들은 사람을 대하는 기본자세가 된 사람들이었다. 저렇게 경망스럽지 않았다. 80년 말 감옥에서 나온 뒤 나는 정치하고는 손을 끊었다. 후배들에게 ‘너희들이 잘해라. 쉬운 쪽만 가지 말고 어렵더라도 공부를 좀 하라’고 했지만 내 말을 따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가 웃음을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이석기가 잡혀갈 때 ‘야 이 도둑놈아!’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걸 본 누리꾼들이 ‘경찰관이 이석기 지갑을 빼가서 소리친 것’이라고 놀리더라는 대목을 전해 들었다. 그야말로 놀림감이라는 거지. 이정희는 또 뭔가. 총 얘기가 농담이라고? 총이 사람을 죽이는 건데 농담이라고? 이 사람들은 도무지 뭐가 뭔지 제멋대로 떠들어댄다. 이게 그들의 결말이다. 국민들은 다 알고 있다.”
마침 그가 올가을부터 건국대에서 석좌교수를 맡았다는 소식이 떠올랐다. “무슨 강의를 하실 거냐”고 물었다.
“내 전공이 미학이니까. 요즘 난 공부밖에 안 한다. 정치는 절대 손 안 댄다. 강원 정선에 아우라지가 있다. 내가 지금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우라지 미학’이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아우른다는 뜻이다. 아우라지가 있는 행정구역 이름이 정선군 여량면 여량리이다. ‘여량(餘糧)!’ 여기서부터 출발이다.”
지난 30여 년 동학, 기독교, 불교를 넘나들며 한국의 사상을 융합하는 노력을 해온 그는 한번 말문이 터지면 종횡무진 주제를 넘나들어 때로 따라잡기가 힘이 들 정도다.
“여량으로부터 출발하겠다”는 말의 의미를 묻자 대뜸 “마르크스의 잉여론이 뭔 줄 아느냐” 되물으며 입을 뗐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잉여에서 발생한다. 노동에서부터 농산물의 생산과정 전체에서 남는 이익이 잉여, 나머지가 자본이 돼서 돌아오는 과정, 그 과정에서 노동의 주체인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거냐 아니면 중간에서 누가 빼 먹느냐 이 문제뿐이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물질적인 기초는 잉여다. 잉여가 바로 미의 시작이다. 창조경제라는 것도 다 똑같다. 여량이 뭐냐, 남는 곡식이란 뜻 아니냐. 그런데 단지 남기는 게 아니라 애당초부터 떼어놓은 것이다. 밥 먹고 남은 곡식이 아니라 밥 먹기 전부터 조상이나 하느님에게 바치기 위해서 떼어 놓은 곡식, 바로 이 여량의 정신이 미의 정신이다. 다시 말해 ‘나머지’로 아름다움이나 문화를 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그는 “나는 미학자로서 여량을 찾을 것”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연재를 계기로 조국 더 사랑하게 돼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냐?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을 두고 ‘성배의 민족’이라고 말한 루돌프 슈타이너(인지학의 창시자인 독일계 오스트리아 학자)의 말을 전하고 싶다. ‘성배의 민족’이란 문명의 큰 변동기에 작은 민족이 나와서 가는 길을 제시하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로마라는 큰 체제 밑에 바로 그 작은 민족이 이스라엘이었다. 지금 미국이라는 큰 체제 밑에 있는 한반도가 바로 ‘성배의 민족’이다. 우리는 비록 강대국은 아니지만 내적(內的)인 민족이다. 세계가 지금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민족인 것이다. 백범 김구가 해방된 뒤 들어와서 ‘지금 이 나라 형편에서 어떤 힘이 가장 중요한가?’라는 물음에 뭐라고 했는 줄 아나. 군사력, 경제력이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문화력’이라고 했다. 나는 세월이 갈수록 그 말의 의미가 심장해짐을 느낀다. 최근에 중앙아시아에 가서 실크로드 탐사를 하고 온 교수 한 사람 말이 지금 중앙아시아는 한류로 난리라고 하더라. (드라마) ‘대장금’에서부터 (싸이의) ‘말춤’까지 휩쓸고 있다면서 말이다. 앞으로는 문화가 밥을 먹여줄 것이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인터뷰는 두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는 이렇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이번 연재를 계기로 나는 조국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민주화와 산업화의 합의가 이뤄지면서 내가 하던 일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하던 일하고 같은 가치관 위에 서기 시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두 ‘시대’가 한 것이라고 본다. 나는 이제 죽을 때까지 조선의 사상을 연구하다 갈 것이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며 치열하게 ‘그의 시대’를 살아온 이 민주화의 영웅은 다시 또 새로운 생각으로 자신의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민족이나 애국심 같은 단어들은 여느 곳에서 느낄 수 없는 무게감이 있다. 세속은 돈과 싸움으로 정신이 없는데 순수한 열정으로 애국심을 말하는 그를 만나고 오면 늘 내 정신도 다시 무장이 되는 느낌이다.
―원주에서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2013-04-08
<1>1974년 민청학련 사형선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주모자로 법정에 선 김지하. 동아일보DB
‘이철 사형! 유인태 사형! 김병곤 사형! 나병식 사형! 여정남 사형! 김지하 사형! 이현배 사형!’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깊은 늪과 같이 적막하던 법정에 검찰관의 긴장된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방청석에서 낮은 비명이 새나왔다.
1974년 7월 9일 서울 용산구 육군본부 건너편 비상군법회의 법정.
유신시절 최대 반독재투쟁사건이라 할 만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검찰의 구형이 내려지고 있었다. 재판은 6월 15일부터 진행됐지만 엄격한 보도통제가 취해지고 있었다. 법정은 바깥세상과는 유리되어 밀폐된 진공의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중앙 정면 단상에는 붉게 상기된 얼굴의 재판부가 앉았다. 복도는 물론이요, 법정 안까지 총을 든 헌병들이 늘어섰다. 흉가(凶家) 같은 막사를 개조해 만든 서른 평 남짓 법정 안은 30도가 넘는 바깥의 찌는 듯한 폭염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상한 한기(寒氣)가 감싸고 있었다. 칼날이 선 것처럼 날카로운 재판정은 살기(殺氣)까지 느끼게 했다. 열어젖힌 창문으로 매미 울음소리만 쏟아져 들어왔다.
흰 죄수복을 입은 피고인들은 오랏줄에 묶이고 두 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 나란히 앉았다. 지난 2개월간 조사를 받으며 몽둥이 고문, 잠 안 재우기 고문, 전기 고문 등 온갖 고문을 다 당해 거의 초주검이 된 모습이었다. 피고인 1인당 가족 1명으로만 제한된 법정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가족들도 모두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날 재판은 재판이라기보다 사법을 빙자한 ‘살인’이자 군사 작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재판의 피고인들이 민간인이었기 때문에 서울형사지법에서 해야 했으나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 8일 발표한 긴급조치 2호에서 긴급조치를 위반한 사람에 대해서는 무조건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한다고 적시했다. 죄형법정주의나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깡그리 무시한 처사였다. 군사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돼 적법 절차가 보장되지 않았다.
가족 면회는 일절 허용되지 않았으며 현장 검증은 물론 변호인의 증인 채택 요구도 거부됐다. 법정심리나 변호인의 반대신문 같은 것도 없었다. 변호인들은 변론요지서조차 작성할 수 없었다. 피고인의 이름 주소 직업 등 인정신문만 진행됐다. 검찰이 내놓은 증거물이란 것은 트랜지스터라디오, 시중에서 파는 일본책 몇 권, 김지하의 오적(五賊) 시, 학생선언문 같은 것들이 고작이었다. 유일한 증거라고 하는 것이 수사관들이 부르는 대로 받아썼거나 각본에 따라 써 넣은 ‘피의자 심문조서’였다.
이날 법정에 선 피고인은 모두 32명. 공소장은 549쪽, 판결문은 423쪽에 달했다. 죄목은 긴급조치 1호 및 4호,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내란 선동 등이었다. ‘(유신) 헌법을 고치자’고 입만 뻥긋해도 잡아 가둔다는 긴급조치 1호만으로는 국민의 저항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박정희 정권은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 김지하 “법 없애고 군인으로 민주주의 할거냐” ▼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 사건’이라는 특정 사건 하나만을 겨냥해 만든 법률이라는 점에서 초유의 법령이었다. 우선 수사 대상자가 엄청났다. 중앙정보부는 총 1024명(자수 266명)을 조사했고 이 중 745명을 훈방하고 253명을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송치했다. 그 가운데 기소된 사람은 180명이다.
비상군법회의는 초스피드로 재판을 진행해 첫 공판을 연 지 불과 24일 만인 7월 9일 1심 공판에서 7명에게 사형, 7명에게 무기징역, 12명에게 징역 20년과 15년, 6명에게 징역 15년 등의 초중형을 구형했다(인권변론자료집).
엄청난 형량에 변호인들이 당황하고 흥분했다. 세 번째로 나선 강신옥 변호사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과연, 법은 정치나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하고 느낀다. 지금 검찰관들은 나랏일을 걱정하는 애국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고 사형이니 무기니 하는 형을 구형하고 있다. 이는 사법 살인 행위가 될 수가 있고….”
그의 폭탄 발언에 법정 안의 긴장은 최고조로 높아졌다. “본 변호인은 기성세대이기 때문에, 그리고 직업상 이 자리에서 변호를 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피고인들과 뜻을 같이하여 피고인석에 앉아 있겠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변론은 중지당했고 재판장은 휴정을 선언했다. 결국 강 변호사는 일주일 뒤 법정모욕죄로 구속된다. 변호사가 변론 때문에 구속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실은 당시 국내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74년 7월 19일자 뉴욕타임스가 1면 기사로 보도한 뒤 8월 8일 정기국회에서 법무부 장관의 답변을 통해서야 국민에게 알려진다. 강 변호사는 14년 뒤인 1988년 3월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사형을 구형받은 피고인들의 최후 진술이 시작됐다. 모두 비장한 각오가 되어 있었다. 김지하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참새도 죽을 때 짹 하는 법이다. 사람이라고 짹 소리 못 할까 보냐. 법을 이렇게 끌고 가면 앞으로 어느 미친놈이 법을 지키겠느냐. 법이 없어지면 뭘로 민주주의를 할 거냐. 군인들이 다 할 거냐.”
이날 압권은 김병곤이었다. 그는 1971년 서울대 상대에 입학해 3학년 때에 민청학련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석방됐고 민주화 투쟁을 계속하다 1990년 위암으로 숨진다.
김병곤은 최후진술 순서가 되자 재판정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런데 모두 놀라고 말았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던 것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저에게까지 이렇게 사형이라는 영광스러운 구형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민생(民生)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그의 눈길과 자태에서 속된 삶의 욕구를 훌쩍 뛰어넘은 ‘무념의 경지’가 느껴졌다. 김지하는 훗날 동아일보에 연재한 ‘고행’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당시의 목격담을 이렇게 전한다.
“영광입니다!” 아아, 이게 무슨 말인가? 사형을 구형받자마자 “영광입니다”가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나는 엄청난 충격 속에 휘말려 들기 시작했다. 분명히 사형은 죽인다는 말이다. 죽인다는데, 죽는다는데, 목숨이 끝난다는데 일체의 것이 종말이라는데…. 모든 것이 갑자기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데, 그런데 “영광입니다”? 우리가 성자(聖者)인가? … 그렇다. 확실히 그렇다. 우리는 드디어 죽음을 이긴 것이다. 그 지옥의 나날, 피투성이로 몸부림치며 순간순간을 내내 죽음과 싸워 드디어 그것의 공포를 이겨 내 버린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죽음을 이겼고, 죽음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영생(永生)을 얻은 것이다. 그렇다. 그 순간은 무어라고 차마 이름 붙일 수조차 없는, 모든 인간적인 가치와 모든 고상한 것들이 통일되는 빛나는 절정이었다. …엄청난, 엄청난 순간이었다. 나는 그때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감사하나이다.” 그리고 또한 말할 수 없이 “영광입니다.”
<2>1960년 4·19 혁명
김지하는 59학번이다.
그는 본래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환쟁이는 가난하다’는 말을 청소년 시절부터 이골이 나게 들어 그림과 학문의 길을 병행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고민하다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의 꿈은 장차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다.
“그때 미학과는 지금처럼 인문대학 소속이 아니라 미술대학 소속이었다. 집에서는 공대나 의대를 원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가 좋았다. 부모님은 화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대학교수가 되면 안정된 밥벌이도 되고 취미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원 원주)중학교 다닐 땐 여러 번 도(道) 미술전람회 같은 데서 입상도 하고 특선도 했다. 어느 전람회에선가 ‘미학개론’(김태오 저)이라는 책을 부상으로 받았는데 중학교 땐 어려워서 읽을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서울 중동)고등학교 때 우연히 집어 들었다. 그때도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파 보면 재미있는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3 때이던 어느 날, 고교 1년 선배가 학교로 찾아와 만난 적이 있다. 그가 서울대 미학과를 다니고 있었다. 선배 말이 ‘미학 공부가 재미있다’면서 나더러 ‘관심이 있으면 미학과에 들어오라’고 적극 권했다. 그날로 서점에 가서 미학 책을 여러 권 사다 읽었다. 번역서도 별로 없던 시절이라 원서로 읽어야 했다. 점점 공부에 재미가 붙었다.”
그러나 김지하는 “대학 생활이 별로 재미가 없었다”고 했다. 당시 서울대 미학과는 미술대에서 떨어져 나와 문리대로 편입하는 문제 때문에 시끄러웠다.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어려운 서양철학들만이 난무하는 커리큘럼도 신입생인 그에겐 별로 매력이 없어 보였다. 집안의 기대를 온몸에 안고 최고 명문대학에 들어갔지만 학교생활에 별로 희망을 갖지 못하며 부초(浮草)처럼 떠돌던 그가 본격적으로 학생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생긴다. 2학년 때 4·19가 터진 것이다.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지금으로부터 53년 전인 그날은, 요즘처럼 봄이 오긴 했지만 봄기운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쌀쌀했다.
그날 김지하는 새벽 기차를 타고 원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길이었다. 모처럼 주머니에 돈도 두둑해서 서울에 오면 늘 그랬듯 당시 광화문에 있던 범문사로 직행해 책 몇 권을 사들고 외가(外家)로 향했다. 외가는 흑석동 국립묘지 근처에 있었는데 이날이 마침 그가 외가 더부살이를 청산하고 학교 근처인 성북동에 얻어둔 자취방으로 짐을 옮기는 날이었다. 그는 흑석동에서 이불 보따리를 들쳐 메고 버스를 탔다.
버스가 중앙대 입구에 멈췄을 때였다. 갑자기 무수한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물결쳐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김지하는 놀라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실정, 부패, 부정선거에 저항하는 학생 시위가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달 전인 2월 28일 경북고 대구고 경북여고 학생 1200여 명이 교내에서 시위를 하다 도청 앞까지 진출한 것(2·28대구학생의거)이 도화선이 된 학생 시위는 3월 15일 대통령·부통령 선거가 있던 날, 폭발하고 말았다. 개표 결과는 이승만 대통령 후보가 963만3376표로, 이기붕 부통령 후보가 833만7059표로 당선(국회보)이 확정되지만 투표소마다 사전투표, 기권자 대리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부정선거가 횡행했다. 표의 95∼99%까지 조작되어 나온 곳도 속출했다.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조차 최인규 내무장관에게 “득표수를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이처럼 노골적인 선거부정에 항의하는 규탄시위가 선거 날인 3월 15일 저녁, 경남 마산에서 시작됐다. 경찰이 발포까지 해 사상자가 속출했다. 급기야 4월 11일엔 마산 시위 때 행방불명됐던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실종 27일 만에 바다에서 인양됐다. 뒷머리에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국민의 분노는 4월 19일 크게 폭발했다. 서울 시내 2만여 명의 대학생, 고등학생, 시민들이 현역 정치인들의 불신임과 재선거를 요구하면서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청와대의 옛 명칭)를 향해 행진했다. 고향에서 올라와 성북동 자취방으로 이불 보따리를 옮기던 김지하는 바로 이 시위대와 마주친 것이다. 그는 당시 상황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짐을 내팽개치고 시위대에 합류할까 하는 마음이 잠시 들긴 했지만 나는 버스에서 내리지 않았다. 나는 4·19를 ‘이념도 지도노선도 없는 (단순한) 폭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위대를 뒤로하고 달리던 버스가 시청 앞까지 왔다. 시청 앞에도 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청사 앞 연단 위에는 학생회장단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올라가 선동적인 연설을 하고 있었다. 김지하의 회고다.
“‘더이상 못 간다’는 버스 운전사 말을 듣고 이불 짐을 메고 내렸다. 성북동 집까지 걸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시위대들이 보건 말건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안국동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시위대 중에 내 얼굴을 알아보고 손짓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미술대학 친구들이었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인사도 받지 않고 지나쳤다. ‘그냥 너희들이나 (데모)해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다 김지하는 어느 길목에서 미술대학 회화과 친구와 마주친다. 그는 김지하를 보더니 반갑다며 달려와 알은체를 하면서 대뜸 “넌 왜 데모 안 하느냐”고 물었다. 김지하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런 단순한 폭발은 혁명이라고 할 수 없어. 폭도에 불과해. 이러다 반동이라도 오면 어떻게 할 거냐?”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답하는 것 아닌가. “반동이 오면 또 싸워야지.”
김지하는 “‘반동이 오면 또 싸운다’는 그 친구의 말이 훗날 내 삶을 평생 따라다닌 화두가 될 줄 그땐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아버지 얼굴이 스쳤다.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 혁명에 실패했던 아버지, 국군에 자수하고 굴욕감에 양잿물을 마시고 허연 거품을 뿜으며 헛소리를 하던 아버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가슴속에만 묻어 두었던 그 아버지의 얼굴이 그날 김지하를 짓눌렀다. 4·19와 맞닥뜨린 그날이 김지하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순간이었는지 기자는 물어보지 않고도 잘 알 것 같았다.
시위대의 함성을 뒤로하고 착잡한 심경으로 자취방에 도착한 것은 어둠이 내린 저녁이었다. 김지하는 구멍가게에서 사온 빵을 씹어 먹는 것으로 저녁을 대신하고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당시 몰입해있던 월터 페이터(1839∼1894·근대 영국의 위대한 비평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문학가 및 평론가. 평생 옥스퍼드대 교수를 지냄)의 ‘르네상스’ ‘규범 미학’ 같은 책을 집어 들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긴, 마음이 편했을 리 없다. 시위대를 폄하하면서 행동에 나서지 않은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긴 했지만 어찌 심적 갈등이 없었겠는가. 밤새 뒤척이다 겨우 잠든 밤, 운명의 폭풍이 빠른 속도로 그의 인생을 향해 덮쳐 오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53년 전인 1960년 4월 19일 경무대(현 청와대) 앞 모습이다. 부상당한 시위대를 동료들이 옮기고 있다. 동아일보DB
<3> 피의 화요일
이승만 정부는 1960년 4월 19일 오후 3시 전국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성균관대 3학년생으로 시위에 참가했던 김승균 전 사상계 편집장(75)은 이날을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렀다.
“대학생, 중고교생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몰려가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고 김주열의 죽음과 관련해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 발포가 시작되면서 시위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학생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다.”
이제는 잊었을 법도 할 텐데 당시를 전하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다.
“가까운 후배가 총에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서울역 앞에 있던 세브란스병원으로 달려갔다. 며칠 밤을 새워 병상을 지키다 옷을 갈아입으러 명륜동 자취방으로 가려고 나왔는데 시위대가 동대문경찰서에 불을 질렀다는 소리가 들려와 달려갔다. 경찰서 앞에 전매청이 있었는데 경찰 총격으로 담벼락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담 아래에는 시체들이 거적으로 덮여 있었다.”
시신들 중에는 일반 시민도 있었다. 시민들이 학생들과 함께 “(정부를) 갈아엎어야 한다”는 결의로 한덩어리가 되었던 것이다. 4·19는 이처럼 학생들의 데모에서 시민혁명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실제로 3, 4월 항쟁 기간을 통해 전국적으로 186명이 목숨을 잃었다. 부상자는 6026명이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최 전국 학술토론회 자료집). 4·19는 한마디로 피의 항쟁이었다. 김지하도 이것을 곧 깨달았다고 한다.
“다음 날인 20일 점심 무렵이 되어 동숭동 문리대 앞, 당시 문리대생들에게 유명했던 ‘별장다방’으로 갔다. 착잡한 마음으로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놀랄 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일군의 사람들이 트럭을 타고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지나가는 것 아닌가. 어제 길에서 만났던 대학생들이 아니었다. 구두닦이나 행상들로 보이는 일반 시민들이었다. 10대 청소년도 있었다. 멀리서 ‘따다닥 따닥’ 총소리까지 들렸다. 전날까지만 해도 학생들의 단순 폭발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달라지고 있었다. 이건 완전히 혁명이 아닌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장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귓전에서 맴도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발목을 잡았다. “영일아(김지하의 본명),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
가난한 집 외아들을 최고의 대학교에까지 보냈으니 부친이 그에게 거는 기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버거운 기대였다. 전라도(목포) 출신에다 가난뱅이에, 학연도 없고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 그가 집안을 일으킨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노을이 질 무렵 나왔다. 발걸음은 집을 향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성북동 간송미술관 앞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래. 아직은 나설 때가 아니다. 그러나… 참가해야 하지 않을까. 조직을 통해서가 아니라 혼자서 ‘천천히 조금씩’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를 슬프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살아야 한다. 냉정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조직과는 거리를 두고 참가해야 한다. ‘조금씩 천천히’, 그리고 지혜롭게 시작해야 한다.”
그의 귓전에선 “만세! 만세!”를 부르는 시민들의 외침소리가 울리고 눈에서는 태극기 물결이 아른거렸다. 김지하는 그날 밤 고등학교 때부터 써 왔던 철학노트들을 불태워 버렸다. 술 섹스 마약과 자살을 찬미하는 어두운 구절들로 가득했던 노트였다.
계엄령에 잠시 주춤했던 시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번져갔다. 급기야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이 먼저 사임을 발표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도 물러나야 한다고 촉구했다. 기자회견에서 밝힌 사퇴의 변은 이랬다.
“3·15 부정선거로 3000만 동포의 울분은 드디어 절정에 달하고 마침내 민족의 정화인 청소년 남녀들이 총탄에 쓰러져 그 고귀한 피가 이 강산을 물들이게 됨을 볼 때 하루라도 이 자리에 머무를 수 없는 비통한 심경에 다다른 것이다. 이 대통령은 3·15 부정선거의 불법과 무효를 솔직히 시인하고 12년간 누적된 비정(秕政)에 책임을 지고 물러서야 한다.”
장면 부통령은 3·15 선거에 출마해 낙선했지만 3대 부통령 임기는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 대통령이 물러나고 선거가 무효 처리되면 자연스럽게 대통령 직을 승계하게 되어 있었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부통령으로서 당연히 져야 할 책임이기도 했지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내기 위해 사퇴했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따르자면, 대통령이 하야하더라도 그 혼란을 틈타 자신이 정권을 잇지 않겠다는 것을 이 대통령에게 보장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승만은 당시 장면과 노기남 대주교를 4·19 배후로 지목하고 있었다. 1999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 연재되어 책으로 묶인 ‘제2공화국과 장면’(이용원)에는 “정부기록보존소에 소장된, 훗날 공개된 기밀문서를 보면 이승만은 4월 21일 경무대를 방문한 월터 매카너기 주한 미국대사에게 ‘이 모든 사태는 장 부통령과 노 대주교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가톨릭 세력을 선동해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어떻든 장면 부통령 사퇴 여파는 컸다.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들까지 시위에 나섰다. 지식인 계층으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법무부 장관 권승렬, 신임 외무부 장관 허정도 이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했다. 매카너기 대사도 이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하야를 권했다. 이 대통령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었다. 버틸 수 있는 힘이 다하고 있었다. 결국 26일 오후 1시 라디오 연설을 통해 하야를 발표하고 한 달 뒤인 5월 29일 프란체스카 여사와 미국 하와이로 망명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고작 50달러였던 세계 최빈국의 나라, 36년간 남의 나라 식민지로 살았던 나라를 이어받았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해방되자마자 바로 혹독한 내전(6·25전쟁)을 치르며 전쟁이 끝난 후에야 겨우 정부다운 정부를 꾸릴 수 있었던 비참한 상황에서 12년을 집권했던 그의 마지막은 비극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북한과 일촉즉발로 대치하며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좌지우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뛰어난 국제 감각과 안목, 인적 네트워크를 갖춘 외교 대통령이었다. 또 6·25 직후 한국의 재건을 돕기 위해 유엔한국위원단 단장으로 방한했던 메논이 “한국에서 경제 발전을 이루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앞이 캄캄한 상황에서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며 자본주의의 기초를 닦았다. 반면, 자신을 무지렁이 민중을 개화시켜야 하는 ‘계몽 군주’라고 생각하고 민주주의를 무시했다. 그래서 독재를 했다.
한편, 우리는 이 대목에서 4·19가 시민혁명으로 발전하게 된 사회경제적 배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시민들이 목숨까지 내놓고 “못 살겠다, 갈아보자”고 혁명을 할 때에는 반독재 민주화라는 정치적 요인보다는 더 절박한 이유가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당시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다름 아닌 ‘가난’이었다. 그때 우리는 못살아도 너무 못살았다.
<4>자유의 범람
4·19 직후인 1960년 12월 동아일보는 ‘세모비정(歲暮非情)’이란 제목의 12회에 걸친 시리즈물에서 1년 중 가장 살기 힘든 겨울을 힘겹게 이어가는 서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소개하고 있다. ‘염소장수’ ‘품팔이군’ ‘군밤장수’ ‘빈민굴’ ‘바가지장수’ ‘구두닦이’ ‘노점음식점’ ‘생선장수’ ‘고아’ ‘양로원’ ‘모자원’ ‘지지미 장수’라는 제목의 각각의 글을 읽다보면 ‘못살아도 이렇게 못살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산다는 것 자체가 무서워’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품팔이군’의 삶은 이렇다.
‘오직 나무로 깎아 엮은 지게와 좀 낫다면 ‘구루마’가 그들에겐 생명선이다. 생활근거지는 주로 시장주변. …시커멓게 때가 오른 두툼한 방한모. 농사에 지친 나머지 서울 가면 주먹만 갖고도 끼니는 때울 수 있다는 바람에 뛰어올라 왔으나 역시 서울도 바람은 모질다.…허리가 부러지도록 짐을 지고 십리 길을 가도 잘해야 단돈 사, 오백환…공(허탕)치고 빈 손을 힘없이 걸머쥔 채 허기진 배를 안고 처자식들이 쓰러져 있는 다리 밑 거적대기집으로 돌아갈 때는 산다는 그 자체에 몸서리가 치고 무서워만 진다.’
그때 우리는 너무 헐벗고 굶주려 지금 기준으로 가늠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정도다. 식민통치에 이은 미 군정, 여기에 3년이나 혹독한 전쟁을 치렀으니 다들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다. 오죽했으면 겨우내 묵은 곡식이 다 없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매년 음력 4월을 ‘보릿고개’라고 했을까. 마치 큰 고개를 넘는 것처럼 힘들어 농민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서민들은 굶어죽는데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3·15부정선거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갈아엎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다는 분노가 극에 달하자 시민들까지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4·19는 미완의 혁명이었다. 대통령을 하야시키기는 했지만 준비된 민주정부 플랜도 없었고 비전은 전무했다. 그 결과, 오히려 대통령의 하야는 민주국가의 건설이 아닌 한층 복잡한 혼란을 불러왔다.
승리의 영광은 기존 정치권으로 고스란히 돌아갔다. 외무부 장관이었던 허정이 정권을 이어받았다. 허정 과도내각은 7월 29일 총선을 통해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다. 8월 12일 대통령에 윤보선(1897∼1990), 19일 초대 국무총리에 장면이 당선됐다. 의원내각제이다 보니 대통령은 실권이 없는 명목상 대통령이었다. 진정한 정치권력은 장면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쥐었다. 이들은 기존 부패 정치인들에게 단호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국민들의 입장이 아닌 자신들만의 권력과 사리사욕을 위해 일하면서 파벌 싸움에만 몰두했다.
기자는 당시 한국 상황을 생각하며 지난해 5월 취재차 방문했던 ‘혁명 후 이집트’가 떠올랐다. 무바라크 독재시대가 끝난 이집트가 혼란스러울 것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실제 현장에 가보니 혼란의 정도가 생각보다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규칙과 질서는 무너져 있었고 경제는 악화됐으며 시민들의 삶은 더 피폐해지고 있었다. 국가재정은 바닥나고 관광객의 발길도 끊긴 지 오래였다. 시민들 중에는 “무바라크 시절이 더 나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집트의 혼란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 이집트를 보며 파괴보다 건설이 더 힘들다는 것, 준비 없는 혁명은 혼돈을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끝 모를 혼란과 무질서의 소용돌이… 4·19 직후 대한민국이 바로 그랬다.
학생과 시민들은 승리감에 도취됐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민중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날이면 날마다 시위를 벌였다. 오죽했으면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진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책 ‘제2공화국과 장면’에는 당시 상황이 자세히 나와 있다.
‘남자나 여자, 노인과 아이 가릴 것 없이 모두들 나서 목청을 높였다.…초등학생들이 ‘교사전근반대’ ‘어른들은 이제 데모를 그만하라’고 요구하며 데모를 했는가 하면 경찰관들은 ‘국회의원이 경찰관 따귀를 때렸다’고 시위를 했다. 군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논산훈련소에서는 정훈부 사병들이 ‘송모 중령이 우리를 머슴처럼 부려먹는다’고 항의데모를 벌이려고 해 장교들이 가까스로 저지한 일도 있었다.’
책에 따르면 실제로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 10개월 동안 일어난 가두데모 건수는 총 2000건이었으며 데모에 참가한 연인원만 100만 명이었다. 서울에서는 하루평균 7.3건, 3867명이 거리로 나왔다. 노조 활동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4·19 직전만 해도 전국에 621곳이던 노동조합은 4·19 직후인 60년 9월 1일 현재 821곳으로 급증했다. 노동쟁의도 58년에 50건, 59년 109건에서 60년 218건으로 급증했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4·19 이듬해인 61년 3월 31일 국무원 사무처에 등록된 정기간행물 숫자는 그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간신문은 4·19 전 41종에서 112종으로, 일간 통신은 14가지에서 274가지로, 주간 신문은 136종에서 476종으로 급격히 늘었다. 사무실 한 평에 등사판 하나만 갖추면 통신사 간판을, 실업자 서너 명만 모으면 신문사 간판을 내걸 수 있었다.
대학가도 수업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소설 ‘무진기행’으로 한국문학의 감수성을 혁신시켰다는 평을 듣는 소설가 김승옥(서울대 불문학과 60학번)이 2004년 펴낸 산문집 ‘내가 만난 하나님’에서 밝힌 당시 회고다.
‘4·19 후 학교가 다시 문을 연 것은 1960년 5월 1일부터였는데, 수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열광적인 분위기는 여름방학이 될 때까지 학교 안을 지배했다. 특히 서울대 문리대가 가장 심했다. 정치과, 외교과, 사회학과 고(高)학년생들이 주동이 되어 대강당에서 거의 매일 외부 인사, 주로 정치인들을 초청하여 시국 강연회를 열었다. 학생들은 강당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교수들은 아주 겨우 학생 몇 명만을 앉혀놓고 강의하거나 그나마도 학생들이 ‘휴강합시다’ 하면 휴강할 수밖에 없었다. ‘어용 교수’ 축출 운동을 벌임으로써 실제로 몇몇 교수를 쫓아내기도 했고, 일부 노(老)교수들은 (학생들이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
지식인들도 제2공화국의 상황이 ‘무정부 상태’라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정치학자 서석순은 4·19 1주년을 맞아 사상계에 쓴 글(이병국 ‘대통령과 언론’에서 재인용)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국민들 사이에는 배반당한 4·19 자유혁명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만연되고 있다. 잃었던 자유만 도로 찾으면 만사가 해결되고 이 땅에 하루아침에 지상천국이 출현하리라고 국민들은 기대하였다. 자유로이 행사된 투표권에 의해 선출된 정부는 최단시일 내에 혁명과업을 완수하고 현명하고 과감한 지도력으로 국민들이 더 잘살 수 있는 새 질서를 확립해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와 실현 사이에는 너무나 먼 거리가 있다. 자유? 그렇다. 이 땅에 자유가 범람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국민들이 (당초) 기대했던 어떤 질서 내에서의 자유가 아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횡행하는 자유는 ‘배고픈 자유’ ‘실업의 자유’ ‘생명과 재산에 위협을 받는 자유’ 그리고 ‘데모하는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는 국민들이 기대했던 자유가 아니다.”
▲1961년 12월 가난한 거지들의 삶을 조명한 동아일보 사회면에 실린 사진. 아기를 업고 구걸하는 엄마 거지와 그 옆을 지나는 거적때기 거지의 모습에서 비참한 생활상이 느껴진다. 당시는 도심 길거리에 이런 모습이 흔했다. 동아일보DB
<5>4·19 이후 김지하
4·19는 해방 이후 시민들이 무력을 행사하는 공권력에 맞서 정부를 바꾼 ‘피플 파워’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 최초의 시민혁명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산업화가 먼저이고 다음에 민주화가 이뤄졌다고 생각하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어떤 의미에서는 민주화가 먼저 진행되고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시민의 힘으로 정부를 바꿨다는 자신감,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결연함 등은 이후 국민들의 유전자에 박혀 한국 사회를 변혁시키는 동력이 된다. 4·19세대의 주역은 이후 6·3한일회담반대운동, 유신반대운동의 주역으로 이어졌으며 이 힘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까지 이어진다.
서울대 불문학과 60학번으로 4·19가 나던 해 대학에 들어갔던 4·19세대라 할 수 있는 소설가 김승옥의 평가다.(‘내가 만난 하나님’)
“한 개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첫 20년의 기간을 고스란히 동질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는 4·19세대 이전에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4·19세대는 행복한 세대이다. 또 그들이 받았던 교육을 4·19로 구현시켜 볼 수도 있었던 점에서도 행복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모든 사람이 민주주의를 당연하게 여기지만 ‘자유민주주의’를 학교에서 배우기 시작한 것은 불과 50여 년 전 일이다. 김승옥의 말대로 4·19세대는 주권재민(主權在民), 삼권분립(三權分立), 정당정치(政黨政治), 페어플레이 정신 같은 것을 학교에서 배운 첫 세대였던 것이다.
자유의 바람이 불어닥친 대학가에 생기가 돌았다. 서울에서는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학생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대학가에는 이른바 ‘농촌계몽운동’ 바람이 불고 있었다.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농촌을 계몽해 시민의식을 높이자는 움직임이 일었던 것이다. 대학마다 학기말 시험이 끝나자 농촌에 가서 농사일도 돕고 농민들에게 정치의식을 불어넣자는 운동이 퍼졌다.
1960년 7월 서울대 학생들은 ‘새생활운동반’ 결대식을 갖고 국민계몽대 7000여 명을 전국에 파견해 4월 혁명 정신을 보급하고 주권의식을 고양시키자고 결의했다. 이후 전국 대학마다 같은 이름의 계몽대가 만들어졌다(사월혁명회·2005년)
이들은 밀짚모자를 쓰고 가슴에 향토 계몽대 마크를 하나씩 달고 학교에서 발행해 준 학생 할인권으로 기차표를 싸게 사서 지방으로 흩어졌다. 도시에서는 수입상품 배격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양담배 피우지 않기, 커피 마시지 않기 등을 내세우며 ‘민족기업 일으키자’ ‘민족산업 일으키자’ 같은 글귀가 씌어진 완장을 두르고 술집이나 가게를 돌아다녔다.
미제 물건을 팔면 압수해 모아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종로 네거리 한복판 같은 곳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뒤 행인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웠다. 자신들은 민족주의 운동이라고 했지만 상인들의 반발이 컸다. 자신들이 주도해서 정부를 바꿨다는 운동권들의 엘리트 의식이 반영된 행동이었다.
서울대 미술대학도 시끄럽긴 마찬가지였다. 미술대학 학장을 맡고 있던 장발 교수 퇴진과 미학과의 문리대 이전을 요구하는 학생데모, 그 후 문리대에서 심리학과 종교학과 미학과를 철학과로 통폐합하려는 문교 당국의 정책에 항의하며 농성이 벌어졌다.
김지하도 어느새 농성에 가담하고 있었다. 데모는 성공했다. 문제 교수 몇 사람이 사퇴했고 미학과는 문리대로 옮겨왔으며 학생과 업무와 커리큘럼 개혁을 시도한다는 내용이 발표됐다. 하지만 농성을 주도했던 선배 예닐곱 명이 퇴학 처분됐다. 김지하는 선배들의 퇴학 처분에 심기가 뒤틀려 1960년 2학년 2학기 등록을 포기하고 휴학했다. 그리고 서울과 원주를 왔다 갔다 하며 구름처럼 떠돌기 시작했다.
그가 당시 마음을 기댔던 것은 연극이었다. 처음으로 참여한 연극작품은 프랑스 티에리 모니에 작 ‘암야의 집’이었다. 수준 높은 반공(反共)작품이었는데 그는 이 연극에서 주인공을 잡으러 가는 보안관 역을 맡았다. 단역이었다.
두 번째 출연 작품은 이철향 작 ‘달빛 있는 생신’이었다. 달빛이 비치는 날, 양담배 양주 등 외래 물품을 쓰지 말자는 각오를 새롭게 하는 부자(父子)지간의 갈등을 다룬 것이다. 김지하는 “당시 대학가에 불어닥쳤던 새생활운동의 일환으로 기획된 연극이었다. 지금은 모두 유명해진 탤런트 최불암 박근형 씨도 함께 출연했다. 나는 잠깐 무대에 등장하는 젊은 대학생 역을 맡았었다”고 전했다.
그의 세 번째 출연작은 정부와 동아일보가 지원한 ‘인촌 김성수’였다. 중앙고 출신 김기팔 씨(1937∼1991·서울대 철학과 63학번·‘해바라기 가족’ ‘정계야화’ 등으로 1970년대 유명했던 극작가)가 각본을 쓰고 동아방송 출신으로 한국방송공사 사장을 지낸 최창봉 선생(88·전 한국방송진흥원 이사장)이 연출을 맡았다. 최불암 이로미 씨 등이 출연했다. 김지하는 단역이었지만 독립운동가로 중앙학교 교장, 동아일보 사장 고문 주필을 역임한 고하 송진우(1889∼1945) 역을 맡았다. 김지하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중앙학교에서 연습을 하고 인근 동네에서 민박을 하며 합숙을 했는데 매일 술이었다. 나는 그때 잊지 못할 세 가지 기억을 갖게 되었다. 연습이 끝나고 회식을 하면서 당시 동아일보 김상만 회장으로부터 고하 송진우 선생의 기행들, 알려지지 않은 사적인 이야기들과 인촌을 비롯한 한민당의 정치사적 의미, 또 인촌의 민족주의 정신과 고하와 설산 장덕수(1895∼1947·1920년 동아일보 초대주간을 지낸 독립운동가, 사상가)의 삶에 대해 전해 들었다. 내게 역사인식을 가져다준 소중한 체험이었다.”
한편, 그는 당시 연극 작업을 통해 자신의 성격이 집단예술에 맞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고 한다.
“연극의 핵심은 ‘팀워크’인데 게으름을 부리거나 대사를 까먹거나 동작 선(線)을 지키지 못하는 팀원들이 몹시 못마땅했다. 화가 나기 일쑤였다. 오죽했으면 ‘인촌 김성수’ 연출을 맡았던 최창봉 선생이 나더러 ‘미스터 김은 연극과 안 맞아, 개인예술을 해야지 집단예술에는 안 맞아’라고 했을까.” 김지하는 이 지적이 정확한 것이었다고 나중에 두고두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떻든, 4·19혁명으로 무엇이든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지식인사회에서도 금기가 모두 무너졌다. 그중에 가장 뜨거웠던 이슈가 통일논쟁이었다. 철저한 반공과 북진통일을 외치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평화통일론’이 고개를 들었다. 평화통일론은 1959년 7월 진보당 당수였던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이 사형당하면서 폐기되어 이후 논의 자체가 금기시됐었다. 잠시, 이 대목에서 짚어야 할 사람이 있다. 바로 죽산이다. 죽산은 누구이며 우리 정치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인물인가.
<6>죽산 조봉암
▲간첩죄 등으로 검거된 죽산 조봉암(오른쪽)이 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환갑을 맞는 해인 1959년 7월 31일 사형에 처해져 8월 2일 서울 중랑구 망우리묘지에 안장됐다. 동아일보DB
죽산은 한국에서 ‘진보’라는 말을 처음 쓴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56년 11월 진보당 창당대회 개회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잘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1899년 인천 강화에서 태어난 죽산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일제 때에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KUTV)을 2년 수료하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는 등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 1946년 3월 조선공산당의 실질적 지도자인 박헌영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공산당과의 결별을 통보했다. 같은 해 6월 22일 인천 도림동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미·소 공위 촉진시민대회’에서 “조선 민중은 공산당을 원치 않는다. 비(非)공산정부를 세우자”는 성명서를 뿌리며 공개적인 전향 선언을 한다. 1955년엔 인촌 김성수의 권유로 공산당과 절연(絶緣)했음을 천명하는 성명도 발표했다. 이듬해 3월 진보당 대표자회의를 통해 대통령 후보로 뽑히자 4월 13일자 동아일보에 ‘평화통일론’을 기반으로 하는 자신의 정견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해방 이후 현실 정치의 중심부에서 활동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법을 통해 한국은 단군 이래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소작제를 철폐했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에 대한 평가는 아직까지도 분분하지만… 한국의 개혁이 대만과 함께 국제적으로 매우 드물게 성공한 사례라는 점에서 이승만 정부의 최대 치적이라는 데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만약 (남한에서) 농지개혁이 이뤄지지 않은 채 6·25를 맞았다면 점령군 북한에 대한 남한 농민들의 지지가 훨씬 적극적이었을 테고 전쟁은 북한의 조기 승리로 끝났을지 모른다. (이는) 미국 정부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장규 ‘대통령의 경제학’)
실제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은 재임 시절인 2004년 8월 당시 중앙일보 이장규 대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과거 50년대에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브라질로서는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11월 19일 남미 순방 중 칠레 산티아고에서 가진 동포와의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승만이 이끌던) 자유당 시대를 완전히 독재시대, 암흑시대, 어두컴컴한 시대로 생각했다. 그런데 토지개혁, 농지분배를 했다. 지나고 보면 정말 획기적인 정책이고 역사를 바꾼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다시 죽산 조봉암으로 돌아가자.
죽산은 1949년 2월 농림부 장관직을 사임했다가 1950년 5월 무소속으로 2대 총선에 당선되어 6월 국회부의장에 올랐지만 바로 6·25전쟁을 맞는다. 전쟁 중인 1952년 8월 2대 대통령선거에서는 80여만 표를 얻지만 3년 뒤인 1956년 5월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이승만이 얻은 500만 표의 절반에 가까운 216만 표나 얻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그해 11월 진보당을 창당한다.
죽산은 이승만 정부가 지향하고 있었던 자유민주주의, 자유경제, 친(親)서구주의, 북진통일론에 대항해 ‘책임정치 수립, 수탈 없는 경제 실현, 평화통일 성취’를 내세웠다. 이승만 정부에는 정면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때 이승만을 도왔던 그였지만 어느덧 ‘실재하는 위협’이 된 것이다.
대가는 컸다. 그는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간부 전원과 함께 간첩죄 등의 혐의로 검거되어 이듬해 사형에 처해진다.
죽산은 마지막까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사형수로 형이 확정된 뒤 유일하게 접근이 허용된 김춘봉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판결은 잘됐어요. 무죄가 안 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요. 환갑이 다 된 사람이 징역을 살고 나면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정치란 다 그런 거지요. 이념이 다른 사람이 서로 대립할 때에는 한쪽이 없어져야 승리가 있는 거고 그럼으로써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거지요. 정치를 하자면 그런 각오를 해야 해요.” (이원규 ‘조봉암 평전’)
사형 집행 전날 찾아온 진보당 관계자들에게는 이렇게 유언한다.
“내가 비록 법에 의해 죽음의 몸이 되었다 해도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은 스스로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여러분은 절대 내 구명운동 같은 것은 하지 마세요. 길 가던 사람도 차에 치여 죽고, 자다가도 죽는 사람이 있는데 상심하지 마세요.”
죽산은 망우리에 묻혔으나 한동안 비석도 세우지 못하고 매년 기일에는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사를 지내야 했다. ‘간첩의 자식’이 된 자녀들의 고통도 컸다.
‘외아들은…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집 외부가 네 군데 말뚝 박히고 새끼줄이 쳐져 직방형 울타리가 세워져 있었다. 새끼줄 밖에는 경찰관 두 명이 앉아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간첩으로 처형된 자의 집’이라 하여 경찰이 다른 사람의 출입을 막은 것이었다.’(‘조봉암 평전’)
망자(亡者)와 가족의 한이 풀린 것은 처형 52년 만이었다. 대법원은 2011년 1월 20일 죽산이 받았던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내리며 이렇게 판결했다.
“조봉암 선생은 독립운동가로서 건국에 참여했고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우리 경제 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임에도 잘못된 판결로 사형이 집행됐다. 재심 판결로 잘못을 바로잡는다.”
그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것은 공산주의라는 이념 때문이 아니라 이승만을 위협했던 최대 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진보’라는 말도 너무 흔해졌지만 죽산은 말과 행동이 다른 요즘 진보와 달랐다. 그는 자신이 믿었던 가치(공산주의)가 틀렸다고 생각했을 때 과감하게 ‘전향’을 선언했다.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던 점에서 진정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현실 정치를 부정하거나 냉소하지 않고 직접 뛰어들어 큰 업적을 냈으며 대안세력으로서의 실험을 하려고 했다는 점에서도 개혁적이었다. 그리고 억울한 죽음 앞에서도 삶을 구걸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이른바 ‘진보주의자’들이 ‘입 진보’ ‘생계형 진보’ 또는 ‘종북’으로 종종 비난을 받는 중이다. 조봉암 선생의 삶이 이 시점에서 재조명되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7>가난했던 청춘들
지금 청춘들도 아프다고 아우성이지만 1960년대 청춘들은 더했다. 늘 돈이 없어 끼니를 굶을 때도 많았다.
김지하도 대학교 때 ‘거지’였다고 한다. 집에서 돈이 오지 않을 때, 술은 마시고 싶은데 물주가 없을 때 마음씨 좋고 여유가 있어 보이는 친구들에게 손을 벌리곤 했다는 것이다. 당시 캠퍼스엔 이런 거지(?)들이 흔했다. 김지하의 2년 후배인 송철원 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서울대 정치학과 61학번) 말이다.
“‘대학다방’과 ‘학림다방’이 우리의 쉼터였다. 찻값이 없으면 엽차를 홀짝거리면 그만이었다. 계란 노른자를 퐁당 넣은 ‘모닝 커피’나 홍차에 ‘도라지 위스키’ 몇 방울을 떨어뜨린 이른바 ‘위티(위스키 티)’를 시킬 때가 드물게 있었는데 호주머니가 넉넉해져 뭔가 폼 잡을 일이 생겼을 때였다. 문리대와 성균관대 사이에 있던 ‘명륜시장’에는 펄펄 끓는 맹물에 밀가루 반죽을 떼어 넣고 참기름 한 방울과 간장으로 간을 한 ‘엉터리 수제비’를 팔았다. 그것도 없어서 못 먹었다. 종로6가엔 동대문극장이 있었는데 ‘꿀꿀이죽’(미군들이 먹다 버린 찌꺼기들을 모아 끓여낸 잡탕 죽)을 팔았다. 단돈 10환이면 철철 넘게 한 그릇을 주는데 미군들 잇자국이 난 소시지도 맛있는 먹을거리였다. 가끔 담배꽁초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과 사무실 앞 게시판에 집에서 하숙비를 보냈다는 등기 우편이 왔다는 방이 붙으면 그날은 그 친구를 앞세워 술과 밥을 원 없이 먹을 수 있었다. 하루는 자취하는 친구가 저녁을 해 준다길래 갔더니 반찬이 ‘샘표 간장’ 하나였다. 당시 우리는 벽에다 군대, 취직, 결혼 이렇게 걱정거리를 써놓고 한숨 쉬고 앉아 있다가 시골에서 돈 올라오면 우르르 몰려가 술 먹고 그랬다.”
그래도 부모들은 기를 쓰고 자식들을 대학에 보냈다. 소 팔고 논 팔아 대학에 보내다 보니 대학을 소뼈로 만든 것이라 해 ‘우골탑’이란 말도 유행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해봐야 갈 곳이 없었다. 기업이 없었으니 기껏 은행이나 전매청 등 몇 안 되는 국영기업이 전부였다. 대졸 후 취직이 결정된 사람이 10%가 채 안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경제성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 고등실업자들이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해외 투자자들이 “다른 후진국에서는 공장을 지을 때 대졸 기술자가 없어 애를 먹는데 한국엔 좋은 기술자가 넘친다. 매우 우수해서 설계도만 주면 알아서 한다”고 만족스러워했다.
김지하는 취직 같은 것엔 관심도 없었다. 서울대 미학과가 문리대로 편입되면서 김지하와 어울리게 된 송 이사장은 신입생 시절 김지하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때 우리 옷차림이란 게 남대문시장에서 산 검정 물 들인 군복에 검은색 군화였는데 김지하는 달랐다. 넥타이를 매고 반짝반짝 빨간 구두를 신고 연극한다고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은 우리 눈에는 영락없는 부르주아에 날라리였다(웃음). 그러던 사람이 문리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더니 급기야 한일회담 반대데모가 시작된 1964년엔 맹렬한 투사로 변신하고 박정희 독재 타도의 정신적 선봉장 역할을 하게 된다.”
김지하도 “만약 미학과가 문리대로 편입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다시 송 이사장의 회고다.
“서울대가 1975년 2월 동숭동에서 관악으로 캠퍼스를 옮기기 전까지, 문리과대학(文理科大學)에 속하는 인문대와 사회과학대는 문리대라는 하나의 단과대로 묶였었다. 나 같은 정치학과생들도 20학점 이상의 외국어 과목을 이수해야 졸업이 되었으니 문리대 체제에서는 그야말로 요즘 유행하는 ‘통섭’과 ‘융합’이 가능했다. 나도 정치학도이긴 했지만 눈동냥 귀동냥으로 문사철(文社哲) 지식을 얻어들었다. 전공에 상관없이 어울려 토론하고 뒹굴었다. 다른 학과 학생과도 잘 어울렸고 한두 해 학번 차이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불문과에 다니던 김승옥(소설가)이나 하길종(영화감독), 미학과에 다니던 김지하와 어울릴 수가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김지하는 또 이렇게 말한다.
“문리대 시절엔 저마다 개성이 다른 온갖 낭만주의자들이 붐볐다. 서로 목청 높여 떠들어대는 토론으로 밤낮이 시끄러웠다. 마르크스 레닌에서부터 동학 창시자 최제우, 실학자 최한기는 물론이요, 단군 석가 공자 노자 장자 예수까지, 또 시인 정지용에서부터 김기림 서정주 임화, 그뿐인가, 마티스·피카소 샹송 재즈 민요·판소리·무가(巫歌)와 정악(正樂)까지 없는 게 없었다. 돌이켜보면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들은 바로 친구들이었다. 대학교 때 친구들과의 토론이 나를 지적으로 가장 성장시켰다.”
그의 말을 듣다보면 고등학교 때에는 입시교육에 찌들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취업준비로 바쁜 요즘 젊은이들에 비하면 그때는 가난했지만 대학 다닐 맛이 나던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지하는 휴학과 재등록을 반복하며 대학을 다니는 바람에 입학한 지 7년 반 만에 졸업한다.
“1959년 입학하고 1966년 가을에 졸업했다. 그때 학칙에 따르면 총 재학기간 8년까지는 재입학이 가능했고 복학도 가능했다. 꼭 학교를 오래 다녀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내키는 대로 등록했다 안 했다 그랬다. 휴학을 하고 밖으로 돌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등록하고, 등록 안 하고도 한 학기 계속 수강한 적도 있고.”
대학을 다니면서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거나 술집에서, 밥집에서 친구들과 먹고 마시며 떠들어대는 게 일상이었던 그가 자칫(?) 당시 대학가에 불어닥친 통일운동의 리더가 될 뻔한 일이 생긴다. 절친 조동일(74·문학평론가·전 서울대 국문과 교수·현 서울대 명예교수)로부터의 제안 때문이었다. 조동일은 불문과를 졸업하고 다시 국문과에 학사 편입할 정도로 민족문화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김지하는 “조 형은 ‘우리문화연구회’를 비롯해 나를 민요, 무속, 판소리, 탈춤의 세계로, 민족과 민중의 전통예술과 문화의 큰 바다로 이끈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그가 ‘곧 있을 판문점 남북 학생회담에 민족예술과 민족미학 분야에서 나와 함께 남한 학생 대표로 참가하자’고 하는 게 아닌가. 북한에서는 김일성대학에서 역시 두 사람이 나온다면서 의제는 ‘민족예술 및 미의식의 역사적 발견과 외래 식민주의적 예술미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승낙했다. 조직이 아닌 개인이 참가하는 것이라는 게 맘에 들었다.”
그런데, 그날은 1961년 5월 15일이었다. 바로 다음 날 한국 현대사는 물론이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대사건이 일어날 줄을 그때는 까맣게 몰랐다.
(8) 5·16
“땅 땅 따땅”
1961년 5월 16일 새벽, 김지하는 자취방에서 자고 있다가 때 아닌 총소리를 듣고 깼다. 1년 전 4·19 이후 처음 듣는 총소리였다. 불안한 마음으로 뒤척이다 동 트자마자 학교로 달려갔다. 교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시내에는 이미 군(軍)이 진주해 있었다. 5·16이 일어난 것이다.
이날을 국민들은 어떻게 맞았을까. 마침 당일자 경향신문에 ‘쿠데타 겪은 전국 치안은 평온, 기자가 본 혁명군 입성’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서병현 기자의 특종기사였다. 야근을 마치고 회사 지프차를 몰고 집(동작구 흑석동)으로 돌아가던 서 기자는 5월 16일 새벽 2시 50분에 김포 방면에서부터 서울로 입성한 ‘혁명군’과 이를 저지하려던 헌병들 간에 벌어진 총격전을 목격하게 된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강 인도교에 다다르자 북한강파출소 남방 5m 지점에 무슨 공사를 하는지 땅이 패어 있고 군인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갑자기 십여 명의 헌병이 뛰어나와 통행을 막으며 “사고가 났으니 되돌아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차를 돌리는 순간 ‘팡! 팡!… 팡!’ 인도교 남쪽에서 수십 발인지 수백 발인지 총탄이 날아왔다. 헌병들은 이내 몸을 피했다. 나는 다시 속력을 내어 삼각지에까지 다다랐다. 총성은 뒤에서 계속 들렸다. 삼각지파출소에 들어가 무슨 일인지 물었으나 순경들은 자신들도 모른다고 했다. 경비전화로 용산경찰서와 시경 및 북한강파출소에 물었으나 그들도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약 10분 후 200여 명의 해병대원이 헌병들과 충돌한 것이라는 ‘뉴스’를 경비전화로 입수했다. 잇달아 서울역 쪽에서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10여 대 트럭에 분승하여 육군본부 쪽으로 들어갔다. 총성은 남쪽에서 계속 울렸다.’
서 기자는 “군부 ‘쿠데타’란 것은 염두에도 못 둔 나는 그때까지도 단지 군인들끼리의 싸움을 헌병이 막으려고 시도하는 줄 알았다. 심상치 않은 동태에 놀라 신문사에 조간 개판(改版) 준비를 부탁하는 한편 ‘데스크’에 연락한 후 곧 용산 경찰서로 차를 몰았다”고 한다. 그러고 용산경찰서에서 ‘쿠데타군’과 맞닥뜨린다.
‘새벽 4시 30분경이 되자 총성이 또 울렸다. 수대의 트럭이 용산서 쪽으로 진격해오는 것 같았다. 이후 급작스런 고함소리와 함께 1개 중대의 해병대원들이 경찰서를 포위하고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군인들이 총을 겨누며 몰려왔고 나는 중대장(대위)에게 인도되었다. …그는 나의 웃옷 ‘포케트’에서 신분증을 꺼내보더니 신문기자임을 알자 “안심하시오. 이젠 다 끝났소. 우리의 행동을 잘 보도해주시오”라고 당부했다.’
서 기자는 ‘이때서야 쿠데타라는 걸 알았다’며 중대장에게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하자 그가 쾌히 승낙했다고 전한다. 서 기자는 곧 이 중대장과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이렇게 썼다.
‘이제 30을 갓 넘었을 중대장은 경찰서 내에 있던 모든 인원을 정문 앞에 앉히고 부하들에게 폭행을 하지 말도록 명령했다. 지나가던 차량을 징발하여 경찰서 앞에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이어 자신들이 취한 행동을 “어떤 정당이나 단체의 조종에 의한 것이 아니고 불안정한 이 나라 정세를 바로잡자는 구국의 일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 후 “우리가 일선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겨우) 35분 걸렸다. (북한) 괴뢰가 휴전선을 넘어 서울까지 오는 데 30분이면 충분하다. 그런데도 저 썩어빠진 정치인들은 정쟁에만 여념이 없으니 이 나라를 그냥 둘 수 있느냐”고 열변을 토했다. 그러면서 “이 일에 가담, 아니 상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지만 군부가 정권을 잡아 이 나라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중대장과 서 기자의 문답.
―이 일은 해병대 단독인가. 딴 군에서도 가담했는가.
“딴 데서도 가담하고 있다. 조금 후에 항공기가 서울 상공을 날 것이며 오늘 낮에는 인천 앞바다에 함정이 도착할 것이다.”(이는 3군이 합동한 것을 뜻한다.)
―3군의 고급장성도 이 일을 아는가.
“알고 있다.”
―한강에서 사상자가 났는가.
“헌병들이 저항해 내 부하가 한 명 사망하고 나는 발뒤꿈치에 총탄을 맞았다.”
서 기자의 기사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그는 병원에 가자는 부하들의 권고를 그럴 시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물리쳤다. …헤어질 때 그 중대장은 부상으로 쩔뚝거리는 다리를 끌며 굳게 악수한 후 “우리의 의도를 국민에게 잘 알려 달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16일 새벽 3시 반을 전후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 및 항만지구 접수를 완료한 ‘군사혁명위원회’는 16일 새벽 5시 방송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어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고 유엔헌장을 중시하며 구악을 일소하고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고 경제재건에 주력한다는 ‘혁명공약’이 발표됐다. ‘과업이 성취되면 언제든 군 본연의 임무에 복귀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하지만 훗날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계엄령이 선포된 대한민국에는 불안과 긴장 그리고 기대가 엇갈렸다. 1961년 5월 17일자 동아일보는 5·16 첫날을 맞은 전국 곳곳의 표정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무장 군들이 요소마다 교통차단을 했다. ‘작전’이란 딱지를 붙인 군 트럭들이 수없이 늘어섰고 ‘받들어 총’ 자세로 총총히 늘어선 군인들에게 이따금 시민들이 ‘누구 명령이냐’ 묻는 말에도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도심은 물론 변두리까지 파출소가 일제히 문을 닫았다. 16일부터 서울시내 은행과 일부 상점들은 문을 닫고 각급 학교들도 오후부터는 수업을 중단했다. 그러나 명동은 여전히 인파가 들끓고 긴박한 정세에 아랑곳없는 ‘호사’를 구가하고 있다. 시장 시세는 쌀, 콩 등이 조금 올랐다.’
지방 표정을 전하는 기사들에는 쿠데타를 적극 환영하는 시민들의 모습도 보여 주목된다.
‘광주 시내 숭의고등학교 학생 1000여 명은 ‘쿠데타’를 환영하는 데모를 했는데 이로 인해 교장이 ‘옥외집회위반’ 혐의로 계엄사령부에 구금되었다. 전주 시민들은 모두 거리로 뛰어나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으며 이제는 모두 잘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잠겨있고 부패한 장면 정권은 잘 넘어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 어수선하다.’
동아일보는 5·16 직후 시민들의 심경을 한마디로 “어리둥절…불안 반 기대 반이었다”고 전한다. 다음은 기사의 일부다
‘광화문네거리에서 직업이 없다는 40대 한 신사는 “좌우간 이 무위 무능한 (장면) 정권 아래서 굶어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며 결과야 어떻든 군대의 행동이 시원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한국은행 앞에 모인 군중 가운데 한 사람(운전수)은 “뭔가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는 태도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격변의 소용돌이가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었다.
▲1961년5월 16일 낮계엄사무소가 설치된 서울시청 앞에서시민들에게 모습을보인혁명군 지도부.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왼쪽)과 육군제2군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이 나란히 서있다.동아일보DB
<9>얼어붙는 정국
5·16 다음 날인 1961년 5월 17일 동아일보는 ‘당면중대국면(當面重大局面)을 수습(收拾)하는 길’이란 제목으로 긴 사설을 싣는다. 5·16을 ‘쿠데타’라고 적시하면서 무엇보다 이런 사태가 일어난 배경으로 장면 정권의 무능을 질타하고 있다. 당시 민심을 반영한 것으로 보여 문장을 약간 현대식으로 바꿔 요약 인용해본다.
‘미명을 기해 난데없이 일어난 요란스러운 총성에 전 시민은 4·19를 연상할 정도로 불안과 공포에 빠졌었다. 이것이 곧 군의 ‘쿠데타’에 의한 장면 정권 타도의 신호였으니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4·19 학생혁명의 산물인 장면 정권은 집권 아홉 달을 넘도록 그 빈곤하고 우유부단한 정치역량이 이승만 시대에 못지않게 부패성을 내포(內包), 국민의 혐기(嫌忌·싫어서 꺼림)와 반발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그때그때 민의(民意)의 동향을 살피면서 지금 이 순간과 같은 초비상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를 만일의 경우를 경고해 오지 않았던가.’
사설은 이어 ‘사월혁명 그때처럼 인명의 희생자를 냈더라면 어찌 됐을까, 무엇보다도 피를 보지 않은 그것이 불행 중 다행한 일’이라고 안도하면서 ‘혁명위원회가 내건 혁명공약 중 (반공체제를 정비하고 구악을 일소하며 민생고를 해결하겠다는) 첫째 셋째 넷째 조목에 있어서는 이론(異論)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는 말로 ‘쿠데타’에 기대를 표시한다.
동아일보 사설뿐 아니라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도 초반에는 5·16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며 기대를 나타냈다. 훗날 ‘박정희의 천적’으로까지 불리며 반(反)유신 반독재를 기치로 박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한 장준하(1918∼1975·언론인 겸 정치가·사상계 초대 사장)조차 사상계 1961년 6월호 권두언에 ‘5·16혁명과 민족의 진로’라는 제목의 글에서 5·16을 군사혁명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두둔했다. 잡지의 경우 매달 마감일이 발행 전달 중순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5·16 바로 며칠 뒤에 쓴 글로 보인다.
‘절정에 달한 국정의 문란, 고질화한 부패, 마비상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 등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5·16 군사혁명이다. 4·19 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이어 ‘(비록) 5·16 혁명이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라며 혁명세력에 이렇게 주문한다. ‘단지 정치권력이 국민의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넘어갔다는 데서 그친다면 무의미한 것이다. 혁명공약이 암암리에 천명하고 있듯이 집권당과 정부가 수행하지 못한 4·19 혁명의 과업을 새로운 혁명세력이 수행한다는 점에서 …5·16 혁명은 4·19 혁명의 부정(否定)이 아니라 그의 계승, 연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5·16 이후 발족한 군사혁명위원회는 장면 내각이 총사퇴한 뒤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됐다. 7월 3일 위원회 부의장을 맡았던 박정희 소장이 최고회의 의장에 올랐다.
그렇다면, 5·16에 대한 학생운동권의 생각은 어땠을까. 성균관대 학생운동권을 이끌던 김승균 전 사상계 편집장(75)의 말을 들어보면 ‘기대 반 걱정 반’이라는 당시 민심과 비슷했다. 그의 말이다.
“5월 18일 아침 ‘학림다방’에 학생운동 간부들이 모여 논쟁을 벌였는데 박정희가 군인이지만 서민의 입장을 이해할 사람이니 민주적 입장에서 정치를 잘할 것이라고 기대를 갖는 사람도 있었고 5·16은 민주화에 대한 군부의 반동이니 앞으로 운동권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예상되므로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6일 당일부터 포고령을 쏟아내면서 정국은 살얼음판처럼 얼어붙는다. 포고령에는 출국 금지, 공항 항만 폐쇄, 집회 금지, 언론 검열, 직장 이탈 금지, 통금 시간 연장, 영장 없는 구금과 극형을 규정한 조항 등이 있었다. 예금 인출 사태를 막기 위해 금융거래도 동결됐다가 1회에 10만 환, 한 달에 50만 환으로 제한됐으며 물가동결은 물론이고 매점 매석자를 극형에 처하겠다는 조항도 있었다. 구호 학술 종교단체와 기타 최고회의에서 허가하는 단체를 제외한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되고, 정치활동도 금지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서울시장을 포함해 각 시도지사, 각 도 경찰국장 등 행정 및 치안 요직들도 군인들로 채워졌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한다는 혁명공약에 따라 검거 선풍이 불어 닥쳤다. 5월 22일까지 전국에서 약 2000명이 용공분자 혐의로 붙잡혔다. 7월 3일엔 반공법이 공포됐다.
세상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사람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까지도 모두 숨을 죽인 듯했다. 검거를 피하기 위해 학생 운동가들은 학교를 떠나 순식간에 도피했다. 김지하도 서울을 떠났다.
6월 10일에는 중앙정보부법 공포와 함께 중앙정보부가 창설된다. 중정은 이후 정부 위에 군림하는 비밀정부로 군림하게 된다. ‘남산의 부장들’(김충식)에 소개된 3대 중정부장 김형욱의 증언이다.
“중정에 소속된 직업수사관들의 전직은 사찰계 형사, 방첩부대 문관, 헌병 하사관 심지어 일제치하에서 실시된 조선인 헌병과 밀정 등 형형색색이었다. 그중 어떤 사람은 일제치하 일본 순사로서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다가 한때 공산당이 서울을 점령했던 시절에는 우익 민주인사를 때려잡다가 나중에는 공산당 간첩을 때려잡은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도 있었다. 그들에게 소위 이데올로기란 하나의 겉치레에 불과했다. 그들은 어떤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도 사람들을 때리고 고문할 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무정부주의자였다. 누구든지 증오할 수 있고 어떤 고문 기술도 개발할 수 있으며 피의자를 학대함으로써 자신을 확인하는 (남을 학대함으로써 희열을 느끼는) 사디스트들이었다.”
정치활동도 얼어붙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5·16 이듬해인 1962년 3월 16일 정치활동정화법(일명 정정법·政淨法)을 만들어 정치인 4374명의 발을 묶었다. 법안이 통과된 직후인 3월 22일 윤보선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그의 하야가 최고회의에서 통과된 3월 24일,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다.
▲1961년 5월 16일 아침 서울시청 앞 광장에 진주한 혁명군 소속 공수부대. 전국을 일시에 장악한 군사혁명위원회가 각종 포고령을 쏟아내자 세상이 숨을 죽였다. 동아일보DB
<10>화폐개혁
김지하는 1962년 새해가 되면서 1년을 다시 휴학하고 그가 태어난 고향 목포로 내려가 버린다. 그에게 고향 목포는 어떤 곳일까.
“중학교 1학년 때인 열세 살에 목포를 떠나 5·16 나고 처음으로 갔으니 10여 년 만에 가본 것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놀던 영산강가라든가 황톳길을 혼자 돌아다녔다. 대(竹)밭도 돌아다니고 귀신이 나온다는 벽돌 섬이라는 이상한 섬도 가보고 바닷가도 며칠씩 서성거렸다…. 내 문학에서 뿌리를 더듬는다고 할 때 첫 번째 떠오르는 생각이 고향 전라남도 목포이다. 목포에서도 변두리 달동네이지만 반(半)은 도시고 반은 농촌이고, 반은 어촌이고, 황량하기 그지없고 사람이 산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렵고 가난하고, 그러면서도 인간과 인간, 이웃끼리의 관계는 정답고 친밀하고. 어떻게 보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얘기하는 룸펜 프롤레타리아, 건달 민중이랄까?(웃음) 산업 노동자도 아니고 농민도 아니고 그저 먹고살기 위해 허덕허덕하면서도 정(情)에 끌려 사는 사람들, 바로 이런 곳이 내가 태어난 곳이다.”
그는 당시 스물한 살 푸르디푸른 청춘이었건만 내면은 결핍, 외로움, 절망으로 가득했다. 제정신으로 살기가 힘들어 술에 기대는 날이 많았다. 이런 생활은 그의 몸에 깊은 상처를 내고 있었으니 훗날 그를 괴롭힌 폐결핵이었다.
군사정부는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몰아 쥐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정점으로 모든 개혁 작업을 신속히 밀어붙였다. 무능한 전 정권과 차별화해 과감한 결단과 실천력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혁명공약’에서 약속한 대로 하루빨리 민생고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5·16 직후인 1961년 7월 경제기획원을 발족시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제를 계획하고 싶어도 ‘돈’이 없었다. 게다가 군인들이 경제를 제대로 알 리 없었다.
박정희도 처음부터 잘한 것은 아니었다. 생각과 의욕만 앞서다 보니 시행착오와 졸속이 많았다. 박 의장이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은 3개월 뒤인 1962년 6월 9일 단행한 화폐개혁이 대표적이었다. 이것은 장롱 밑에 잠자고 있는 음성 자금을 끌어내 투자재원으로 삼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전격적인 화폐개혁으로 지난 9년여 동안 사용되던 ‘환’이 ‘원’으로 바뀌었고 10환은 1원으로 평가 절하됐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돈이 나오질 않았다. 국민들이 돈을 내놓고 싶어도 내놓을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도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마당에 화폐개혁 같은 비상조치를 한마디 상의 없이 밀어붙였다”며 “즉각 철회하지 않으면 식량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화폐개혁은 엄청난 부작용만 초래하고 한 달여를 버티다가 동결예금을 해제하는 식으로 전면 백지화된다. ‘혁명 정부’의 첫 번째 대작(代作)이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국내에서 돈을 마련하는 일이 무망해지자 이제 돈 구할 곳은 외국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 한국에 돈을 빌려줄 나라는 없었다. 미국은 “무상원조를 주는 나라에 따로 차관을 줄 수 없다”고 했고 일본도 “국교가 없는 나라에 어떻게 돈을 빌려주느냐”고 했다. 결국 서독으로부터 3000만 달러를 빌리는 데 성공한다. 당시 이야기는 본보 4월 1일자 1, 3면에 자세히 소개된 바 있다.
화폐개혁 실패라는 쓴잔을 맛본 군사정권이 민간 정부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겪었던 또 하나의 시련이 있었다. 정권을 민간에 넘기고 군에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이었다. 1963년 8월 13일 박정희 의장은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는 것으로 그해 10월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발표한다. 군정 종식을 기대해온 정치인과 지식인은 물론이고 미국까지 충격에 빠졌다.
그렇다면 당시 민심은 ‘혁명정부 2년’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을까. 경향신문이 1963년 7월 초 ‘물가’ ‘여당’ ‘야당’ ‘선거’ ‘행정’ 등의 키워드로 14회에 걸쳐 연재한 ‘민심(民心)’이란 기획 기사에는 당시 있었을 언론 검열에도 불구하고 솔직한 백성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백성들은 무엇보다 민생고에 절규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정치 불신이 극에 달했다.
‘쌀값이 오르니 만물(萬物)이 비례해서 뛴다. 옛날에는 50환짜리 칼국수가 있었고 100환짜리 해장국이면 먹을 만했는데…‘못살겠다 갈아보자’ 구호가 ‘죽겠으니 살려 달라’는 아우성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세끼를 밀가루 죽으로 연명하고 밀가루마저 없어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무슨 선거니 정당이니 나팔을 부느냐 말이다…군부정치는 그렇다 치고 야당 측에나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더니만 아직도 멀었다. 갈기갈기 찢기어서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별수 없다는 것이었다.’
화폐개혁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도 많았다.
‘신화(新貨·새 돈) 100원짜리가 구화(舊貨·헌 돈) 100환짜리 가치와 큰 차이가 없으니 결국 혁명 정부의 화폐개혁은 화폐가치를 10분의 1로 절하한 것밖에 안 된다.’
구악을 일소하겠다 해놓고 신악을 만들어갔다는 원성도 높았다.
‘이제는 좀 살게 되나 보다 학(鶴) 모가지처럼 길고 애처롭게 고대했던 국민 앞에 혁명정부의 참신하고 양심 있는 책임행정이 가져다준 결과는 무엇인가? …그래도 썩어빠진 구 정치인보다는 낫겠지 이런 희망을 걸어보기도 했다. 한번도 정부의 따뜻한 정을 느껴보지 못했던 복 없는 우민의 애소(哀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요즘엔) “진작 군에 들어갔어야 하는 건데. 그래야 국회의원이나 대사라도 한번 해보지” 하는 뼈 있는 농담이 오간다…혁명 초기 행정력의 위력과 서슬은 대단했다. “잘한다” “시원하다”는 찬사가 빗발쳤다. 그러나 얼마 후 시정(市井)에는 새로운 여론이 조성되어 갔다. “액수가 (전보다) 더 커졌다네, 관청 주변의 이권거래 흥정에는 액수만 크면 승부는 전보다 빠르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번져갔다. (이런 말도 나돈다) 나도 혁명바람이나 탈걸∼동네마다 고기 근이나 사 나르고 ‘텔레비 안테나’에 화초(花草)그릇이 늘어나는 신흥귀족의 집들이 보인다네.”’
박 의장이 약속했던 민정 이양에 대해서는 의외로 의견이 엇갈렸다. 기사는 이렇게 전한다.
‘일부 국민은 무조건 연내 민정이양이란 (군부의) 약속을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또 일부 국민은 대안 없는 민정이양을 불안해하고 있다…박 의장에 대한 대중의 민심은 역시 빵 문제가 저울질하는 것 같았다. 배불리 먹여만 준다면 박 의장은 민족의 태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상인의 말이다. “굶은 사람들에게 보리 한 말씩만 나누어 주어도 선거는 이기는 거다.”’
▲1962년 6월 9일 화폐개혁이 전격 실시되자 구권을 신권으로 바꾸기 위해 은행 앞에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다. 동아일보DB
2013-04-22
<11> 6·3의 시작
5·16 직후인 1961년 11월 12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방미(訪美)에 앞서 일본에 들러 이케다 총리 등 일본 고위 정객들을 만난다. 총리관저에서 열린 만찬 자리에서 박 의장은 일본인들에게 깍듯이 머리를 숙이고 “선배님들”이라고 불러 그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선배님들, 우릴 좀 도와주십시오. 일본은 분명 우리보다 앞섰으니 형님으로 모시겠소. 그러니 형 같은 기분으로 우릴 키워 주시오. 그리고 청구권 같은 문제 신경 쓰지 마시오. 그까짓 것 없어도 그만이오. 우린 우리 힘으로 경제를 일으키겠소. 하지만 한국이란 자동차가 발동할 때 뒤에서 조금만 밀어주면 고맙겠소.”
당시 자리에 참석했던 기시 전 총리는 물론 이케다 총리까지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고 박 의장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야 얘기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 쿠데타의 주역이라 호골(虎骨)인줄 알았더니 겸손하고 상식적이다.” “명치유신 때의 의사(義士)를 보는 것 같다. (박 의장은) 겉은 예의바르지만 속은 알찬 무서운 지도자다.”
위의 일화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이동원 전 외무장관이 펴낸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전 장관은 당시 만남이 이승만 대통령 때까지만 해도 지지부진해 꺼져가던 한일회담이란 장작에 다시 불을 지핀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한다.
박정희 의장은 1963년 10월 15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 후보를 15만 표라는 아슬아슬한 차로 간신히 이기며 당선된다. 호남평야를 휩쓴 대가뭄에다 “군에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며 미국이 농산물 원조까지 중단해버리는 바람에 백성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며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던 해에 치른, 박 의장으로서는 참으로 힘든 선거였다.
박 의장은 결국 비상수단으로 일본에 밀사를 보내 일본종합상사를 통해 캐나다로부터 소맥 10만 t을 긴급 도입해 밀가루로 만들어 수재민 구호 명분으로 남부 지방 수재민과 도시 서민들에게 무상 배포했다. 이 때문에 5대 대통령 임기 내내 야당으로부터 ‘밀가루 대통령’이라는 공격을 받는다.
박 의장은 1963년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가장 시급한 것이 ‘경제’였지만 돈이 없었다. 그는 한일 국교 정상화만이 살길이란 것을 통감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도와주고 있다고는 해도 원조 액수를 배로 늘려줄 리도 없고 또 언제까지 원조를 해줄지도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일본한테는 우리가 당당히 받아 낼 돈이 있지 않은가. 그것을 반일(反日)감정이니 굴욕이니 하며 망가뜨리는 일은 대단한 국가적 손실이다. 너무 감정만 앞세우면 안 된다. 일본이 미국에 머리 숙이고 배웠듯 우리도 그런 자세로 배워야 한다. 게다가 가장 가까운 이웃이 으르렁거리기만 하면 둘 다 손해다. 아무튼 빈곤 추방이란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선 한일회담이란 역사의 틀에 순응해야 한다.”
박 대통령의 이런 생각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지식인이고 일반 시민들이고 할 것 없이 일본이라면 치를 떨었던 시절이다. 모두들 식민지 시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1964년 2월 28일부터 3월 4일까지 연달아 기자회견과 대변인 발표를 통해 그동안 비밀리에 추진해 오던 한일회담을 3∼5월 중에 타결, 조인, 비준을 한꺼번에 마치겠다고 발표했다. 각계 원로들은 물론 야당과 학생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64년과 65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한일회담’ 이슈가 드디어 폭발한 것이다. 64년 4월 잡지 사상계에 실린 지식인들의 반응이다.(괄호 안은 당시 직함)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나는 현 정권 담당자들의 양심을 믿고 싶다.”(김옥길·이화여대 총장)
“일본 지도자들은 우리에게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다. 한국에 대한 그들의 ‘우호적인 태도’를 믿을 수 없다.”(김준엽·당시 고려대 교수·훗날 고려대 총장)
“일인(日人)들의 경제침략이 과거 우리가 경험했던 그런 쓰라린 것이 되지 않을까 매우 우려된다.”(유치진·극작가·한국연극연구소 소장)
3월 6일 야당, 사회 종교 문화단체 대표 200여 명은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한편, 이동원 전 장관은 시위가 확대된 배경에는 한일회담의 진행 과정에서 보여준 일본의 오만이 국민감정을 건드렸던 측면도 크다고 말한다. 다시 그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박 대통령의 ‘고개 숙임’이 ‘굴욕외교’라는 학생데모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지만 거기엔 이후 협상 과정에서 격을 무시한 일본의 외교 행각도 일조했음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 측은 외무장관급 이상이 일본까지 날아가 테이블에 앉았지만 일본 측은 외무성 아시아국장이 나오는 등 불평등은 시정되지 않았다. 그러니 학생들로서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공개가 아닌 비밀리에 추진해 왔다는 것도 빌미였다. 뭔가 납득 못할 꿀리는 게 있으니 ‘김종필-오히라 메모’(62년) 같은 게 나왔다는 것이었다. 이후 이런 요인들이 얽히고설켜 ‘6·3사태’까지 발전했다.”
김지하는 1963년 2월 다시 휴학을 하고 원주에서 두문불출했다. 당시 유일하게 그를 구원해 주었던 것은 그림과 종교(가톨릭)였다. 그는 원주의 한 다방에서 시화전을 열고 가톨릭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밤을 새워 우주의 기원과 인간의 구원에 대해. 그리고 사회의 변혁과 영혼의 구원에 대해 토론하고 토론했다. 그의 말이다.
“그때 사람들로부터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가톨릭에 귀의할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만큼 나는 영성에 관심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김지하는 유물론자가 아니다. 젊은 나이에 우주나 영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절대 유물론자가 될 수 없다. 그러니 괴로움이 많을 것이다. 일찌감치 신에게 귀의하는 길을 찾으라.’”
세상과 잠시 절연하여 꼼짝하지 않았던 그 시기를 김지하는 “돌이켜보니, 인생에서 몇 번 경험해 보지 않았던 긴 휴가와도 같았던 시간”이라고 회고한다.
하지만 그의 생에 잠시 찾아온 휴식은 길지 않았다. 3월이 되자 정치투쟁이라는 큰 물결 한가운데 서게 되니 바로 제3공화국을 출발부터 뒤흔든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였다.
마침내 1964년 3월 24일 서울 시내 대학가에서는 4·19 이후 가장 조직적인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다. 그로부터 2개월여를 넘긴 6월 3일, 서울 시내에 4개 사단 병력이 투입된 계엄령이 내려져 시위대가 무력 진압되는 ‘(1차) 6·3’의 시작이었다.
<12> 한일회담 반대
22일 오전 독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70대 중반의 은퇴한 사업가라고 소개한 독자는 “대학생 때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해본 사람으로서 ‘일본 정객들에게 고개 숙인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가 실린 22일자를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고 전했다. 그의 비유가 재미있어 옮겨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박 대통령은 배곯는 처자식들 먹여 살리기 위해 무일푼으로 상경한 가장(家長) 신세였다. 먹고살려면 장사라도 해야겠는데 돈 구할 방법은 없고, 빌릴 데도 없어 궁리 끝에 대대로 원수였던 집안을 찾아가 고개 숙이고 피해 보상금이라도 달라고 사정한 거다. 처자식들을 위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린 거다. 그런데 정작 어렵게 구한 돈을 가져왔더니 처자식들은 ‘원수의 돈을 왜 받아왔느냐’며 오히려 가장을 탓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오도가도 못 하는 가장의 심정, 그게 아마 당시 박 대통령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의 말이 잠시 끊기다 이어졌다.
“하지만 그땐 반일감정이 워낙 컸다. 우리보다 미개했던 나라가 좀 개화됐다고 형 같은 나라를 침략해서 온갖 몹쓸 짓을 다한 원수의 나라, 아무리 우리가 가난해도 그렇지 불과 수억 달러로 식민 지배를 청산한다니 굴욕 외교의 극치로 받아들여졌다. 당시만 해도 한국이 일본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20년이 채 못 된 시점이어서 일본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처지는 나라였다. 박 대통령도 이런 국민감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회담을 비밀리에 진행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
박 대통령이 1962년부터 진행해온 한일회담을 64년 초 공개하자 정국은 들끓었다. 1964년 3월 20일자 동아일보 사설도 돈의 문제 이전에 자존심의 문제라며 일본과 박정희 정부를 비판한다.
‘일본이 도대체 대한(對韓) 정책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데 대해 우리는 다대(多大)한 의념(疑念·의심과 염려)을 금치 못하고 있다. … 일본으로부터 돈이나 물자가 들어온다고 그것이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되리라고 안이하게 기대할 수는 없다. 미국으로부터 오는 돈이 줄고 있으니 일본으로부터 받아야 살지 않겠는가 하는 사고방식이나 중공(중국)에 먹히느니 일본에 기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사고방식에 우리는 반대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상한 의지와 용기와 노력이다.’
당시 한일 국교정상화 문제는 언론 지식인은 물론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널리 퍼져있는 반일 감정을 자극했다. 그러다보니 학생시위에서 출발했지만 대중들까지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커진 것이다.
한국 사회에 ‘4·19세대’에 이어 ‘6·3세대’라는 말을 만들어낸 6·3 학생운동은 1964년 6·3데모를 정점으로 연인원 350만 명이 참여해 1년 6개월여를 끌었다. 그 과정에서 3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할 정도로 격렬했다. 1차례의 계엄령과 1차례의 위수령이 발동되는 동안 수백 명의 학생들이 구속 제적되었고 수십 명의 교수들이 강제퇴직당했다.(6·3동지회 ‘6·3 학생운동사’)
한편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반발이 심했다.
2008년 4월 16일 일본 아사히신문이 마련한 한일 국교정상화 기획기사에서 대학생 시절 일한회담 반대운동을 했다는 규슈대학 이시카와 쇼지 교수(법학)의 말이다.
“당시 일본 내 양심적 지식인과 학생들은 또다시 일본 자본이 식민지였던 이웃 나라에 마수를 뻗친다고 생각했다.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은 전혀 인식하지 않는 일본 지배층이 미국과의 종속적인 동맹관계하에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을 특별히 지원함으로써 스스로의 연명을 꾀하고자 한다고 판단한 거다. 여기에 일본이 남쪽하고만 손을 잡아도 되는가 하는 의문도 있었다. 이건 당시 나뿐 아니라 많은 학생들의 생각이었다. 개중에는 한국의 남쪽 정부에는 더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으로 건너간 재일(在日) 조선인 학생도 있었다. 독재로 민중을 괴롭히는 남쪽보다는 비록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고 할지언정 북쪽에 자주성과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본 내에서는 “우리가 합병 후 한국에 얼마나 잘해줬는데…. 그 덕에 한국은 우리 때문에 개화되고 발전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걸 또 사과하고 돈까지 달라고 하는가” 하는 (한국 비판) 여론이 지배적이었다.(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
경제개발의 종잣돈을 마련해 보겠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한일회담 추진은 이처럼 국내외에 우군이 전무한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한국 산업화는 출발부터 참으로 힘들고 어려웠다. 정권의 존립 자체가 힘들 정도로 심각한 국민적 반대와 함께 시작해야 했으니 말이다.
6·3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서울대 3·24데모는 당시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완용과 이케다(池田) 일본 총리를 화형시키는 시위였다.
1964년 3월 24일 그날 시위현장에 김지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도서관 아래 숲 속에 앉아 고장 난 책상 다리로 만든 이완용과 이케다 허수아비를 발로 짓밟고 불태우는 친구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떤 조직에도 가담하지 않고 혼자 이리저리 방황을 하던 때였다. 하지만 관심이 없었을 리가 없었다. 김지하의 말이다.
“여기저기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이마에 흰 띠를 두른 학생들은 땅바닥에 앉아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뒤 허수아비들을 불태운 뒤 교문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나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그날 저녁 원주로 떠나버렸다.”
3·24데모 이후 대학가는 연일 데모였다. 야당과 언론도 거의 매일 학생 데모를 지지하며 정부를 공격했다. 대학로, 종로5가에는 거의 매일 최루탄이 터져 눈물과 재채기 바다였다. 시위대 진압용으로 최루탄이 처음 등장했던 시기다. 다시 김지하의 말이다.
“조동일로부터 빨리 서울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최루탄 문학회’를 만들어 시화전을 하자는 것이었다. 모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긴 것 같아 신이 났다. 풍자시 정치시를 담아 시화전을 열었는데 대성황이었다.”
반(反)한일회담 시위는 점점 반박정희, 반정부 시위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서울대 성균관대 동국대 등은 5·16 3주년 4일 뒤인 1964년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대규모 연합시위를 하기로 한다. 그리고 ‘황소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 이름 붙였다. ‘황소식(式)’은 당시 박정희가 이끄는 공화당의 상징물인 황소를 의미한 것이다. 군사정권과 박정희가 표방한 구호들이 허구로 가득 찼다는 것을 알려 박 정권을 장례 치르겠다는 의미였다. 박 정권에 정면도전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13> 5.·20 장례식
1964년 5월 20일 오후 1시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 때 아닌 조사(弔辭)가 울려 퍼졌다. 4000여 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축(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고 쓰인 만장을 드리우고 결연하게 섰다. 곧이어 5·16을 맹비난하는 성토문이 낭독됐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총성과 함께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은 일군의 청년 장교들에게 장악되었다… 그로부터 3년, 무(無)비판의 뒷장막에서 온갖 화려한 계획과 공약 뒤에 도사리고,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권력기관의 모골이 송연한 공포정치와 수도방위사령부 등의 총칼의 보호를 받으면서 너무나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 ‘역사적 퇴보’를 이 나라 민족사에 강요하였다… 피로서 되찾은 한국을 일본 의존적 예속의 쇠사슬에 묶는 것이 근대화요, 자립이라고 거짓말하는 자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를 장사 지내자! 영원히 잠들게 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64년 취임 후 내세웠던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구호를 장사 지내 5·16을 역사적 퇴보로 규정짓고 이를 부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조사는 더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단어들로 채워졌다. 성토문 낭독이 끝나자 송철원(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이 조사를 낭독했다.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 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시체여! 죽어서까지도 개악과 조어와 전언과 번의와 난동과 불안과 탄압의
명수요 천재요 거장이었다,
5월 16일만의 민족적 민주주의여! 백의민족이 너에게 내리는 마지막의
이 새 하얀 수의를 감고 훌훌히 떠나가거라! 너의 고향 그곳으로 돌아가거라.
안개 속으로 가거라!
이제 안개가 걷히면 맑고 찬란한 아침이 오리니
일찍 죽어 복되었던 네 운명에 감사하리라!
그러나 시체여!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로 지금 거기서 네 옆 사람과 후딱 주고받은 그 입가의 웃음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대량 검거의 군호인가? 최루탄 발사의 신호인가? 그러나 시체여! 우리는 믿는다.
그것은 목 메이도록, 뜨거운 조국과 너의 최초의 악수인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죽은 이의 입술 가에 변함없이 서리는 행복의 미소인 것을.
시체여!
이 조사를 쓴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다름 아닌 김지하였다. 어떻게 그가 이것을 쓰게 되었을까. 송철원의 말이다.
“당시에도 김지하 문장 실력은 학교 내에 소문이 자자했다. 시위를 기획하면서 조사는 김지하더러 쓰게 하자고 다들 합의했다.”
이날 5·20시위는 김지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사실 그는 그전까지만 해도 학생운동권 내에서 존재감이 별로 없었다. 미학과가 문리대로 편입되면서 문리대 학생들과 교류하긴 했지만 문화 쪽 감수성을 살려 시화전을 열고 연극을 하며 문화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그가 비록 익명이긴 해도 5·20시위를 통해 학생운동권에 정식으로 데뷔한 셈이 된 것이다.
5·20시위는 최루탄 대 투석(投石)의 대결이 계속되어 오후 7시가 지나서야 끝이 났다. 100여 명이 다치고 200여 명이 연행됐다. 언론은 ‘5·16 이후 민주 세력의 최대반격’으로 표현했다.
집회 주동자들에 대해 검거 열풍이 불어닥쳤다. 친구 집에 숨어 있다가 이튿날인 21일 새벽 붙잡힌 뒤 모진 고문을 당한 송철원은 당시를 어제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네 명의 괴한들이 대기 중인 검은색 지프차에 태우더니 전속력으로 새벽을 달렸다. 이들은 나를 중부경찰서 2층 정보계로 끌고 올라갔다가 퇴계로 대한항공 건물 앞에 대기 중이던 새나라 자동차에 있던 운전사 포함 5인조에게 인계했다… ‘남산’같이 여겨지는 곳에 차를 세우고는 창고 같은 곳으로 가서 깜깜한 방 벽에 기대놓고 주먹과 발길질로 때리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당하고 또 당했다. (그들이) 술 냄새를 풍기며 폭행과 고문을 하며 끈질기게 물었던 것은 ‘5·20 장례식’을 주도한 문리대 지도부의 행방이었다. 나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자 이들은 ‘네가 유관순이냐? 네깐 놈 파묻어 버리면 누가 알겠냐?’며 협박했다. 정말 나를 때려죽여 파묻어 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기절한 척했다. 그런데 담뱃불로 내 손을 지지는 것이 아닌가?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리자 ‘엄살 부린다. 우린 경찰과는 달라!’ 라며 또 때리고 지지고 했다. 나는 결국 시멘트 바닥에 실신했다. 이때 입은 화상은 지금도 오른손에 남아있다. 실신한 내 몸에 찬물을 끼얹어 잠시 정신이 들었지만 이후의 일은 전혀 기억이 없다… 깨어나니 병원 침대 위였다, 벽시계는 새벽 3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 고문당할까 두려워 눈을 감고 있는데 ‘이 새끼 죽지는 않겠지’ 하며 자기들끼리 염려하는 소리가 들렸다. 의사가 들어와 주사를 놓아주며 ‘이제 눈을 뜨세요’ 하길래 나는 작은 목소리로 ‘학생입니다. 고문을 당했습니다’라며 집에 연락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의사는 ‘우리는 정치를 모릅니다’며 병실을 나가버렸다. 그곳은 경찰병원이었다.”
송철원은 1964년 5월 22일 경찰병원에서 동대문경찰서로 이송되었다가 갑자기 석방된다. 구속영장이 기각됐기 때문이었다. 송철원뿐만 아니었다. ‘5·20데모’ 학생들에 대해 경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은 총 107건이었는데 13건만 영장이 발부됐다.
사법부의 ‘엄정한’ 법 집행에 군인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5·20시위가 있던 다음 날인 21일 오후 4시 반에 황길수 대위가 육군 공수부대 13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서울형사지법 청사에 난입한 것. 이들은 “구속영장을 기각한 판사가 누구냐” “담당 검사를 불러라”며 1시간 이상 행패를 부렸다. 이어 담당 판사인 양헌 판사 집으로까지 몰려가 “왜 영장을 기각했느냐”고 따졌다. 무장군인들의 항의에 다들 공포에 질렸다. 언론들은 이 사건을 ‘무장군인 법원 난입사건’이란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그러고 이틀 뒤엔 경찰에서 풀려난 송철원이 정보부에서 당한 고문 사실을 폭로해 버리자 정국은 또다시 발칵 뒤집힌다. 정부로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신문과 방송은 연일 두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질타를 퍼부어 댔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까지 나서 ‘엄격 조치’ 지시를 내린다. 5월 29일 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사표를 제출하지만 반려된다.
5월 30일 저녁엔 ‘송철원 군 린치사건’의 범인이라는 중앙정보부원 세 명이 자진 출두해 구속 수감된다. 이들은 1심에서 징역 6개월, 항소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아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현역 중앙정보부원이 피의자를 고문한 이유로 구속되어 실형이 확정된 것은 1961년 6월 중앙정보부가 창설된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4> 단식농성
연일 계속되는 시위로 민주화운동세력과 박정희 정권이 정면충돌했다. 박 대통령은 1964년 4월 22일 최두선 국무총리에게 보낸 훈령을 통해 “정부는 더욱 비상한 각오로 불법 데모로 치안을 교란하는 자들을 철저히 단속해 법질서 유지에 힘쓰라”고 강력하게 지시한다. 그러면서 “학생 데모가 국기(國基)의 대본(大本)을 흔들리게 할 우려가 있다”며 그 책임으로 ‘몰지각한 일부 학생들’ ‘태만한 학교 책임자들’ ‘무책임한 언론’ ‘정부의 우유부단함’을 꼽았다.
이런 대통령에게 정면 도전을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장준하였다. 그는 조선일보 5월 26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대통령을 ‘박정희 씨’라고 부르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대통령 박정희 씨! 당신이 그렇게도 거짓말과 실정을 거듭하였으면서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 당신들 집권자들의 부정과 부패가 그렇게 창일하였으면서도 계속 집권할 수 있는 것, 민생이 이렇게까지 파탄에 빠졌는데도 아직 큰소리칠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한국 언론이 당신들을 길러준 덕이 아닌가요. 당신들과 정사를 할 것 같던 한국 언론은 소용돌이치는 국민의 원성과 압력에 못 이겨 이제서야 깊은 악몽에서 깨어나고 있습니다. 여보시오, …고마운 줄이나 아시오! 그 청렴하다고 소문이 높던, 그 강직하다고 정평이 있던, 그 육군 소장 박정희 씨라면 오늘의 이 사태를 정시(正視)하며 무엇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요.’
언론들은 당시 학생들의 시위가 비록 ‘대일굴욕외교’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그 뿌리에는 그동안 쌓이고 쌓인 정부에 대한 불신이 있다고 지적했다. 1964년 4월 23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불신의 원인들을 조목조목 짚고 있다. 첫째, 5·16이 비록 동기는 선(善)이었다 해도 태생적으로 비헌법적인 ‘쿠데타’였다는 것, 둘째 민간에 정권을 넘기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 셋째 부정부패 일소에 실패했다는 것, 넷째 공화당의 부패와 다섯째 민생고, 여섯째 학원사찰, 일곱째 중앙정보부 등이었다.
마침내 5월 27일 오전 전남대 학생들은 ‘박 정권의 하야를 권한다’는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5·16 후 최초로 ‘하야(下野)’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이다. 같은 날 지식인들도 나섰다. 서울대 교수협의회가 5·16 후 최초로 ‘시국수습결의문’을 채택하는 집단적 의사표현을 한다.
당시 김지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의 말이다.
“(고문당하고 풀려난) 송철원 집에서 이틀째 밤을 새우며 모임을 가졌다. (그동안 운동의) 제일선에 섰던 리더들이 모두 수배되어 몸을 감춘 상황에서 제2선들이 나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장기적인 단식농성을 계획했다. 장소는 문리대 캠퍼스 4·19 학생혁명기념탑 아래였다. 김덕룡 형이 이끄는 문리대 학생회를 끌어들이기로 하고 총책임을 손정박이 맡았다. 나는 ‘방송선전반’을 맡았다.”
바야흐로 김지하가 학생운동권에 공식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이 온 것이다. 당시만 해도 그는 노출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5·20 장례식 조사(弔辭)도 당시 현장에서 낭독한 송철원이 쓴 것으로 알려졌었기 때문에 경찰 수배망에서도 비켜가 있었다. 김지하는 문리대 후배인 사학과 이현배와 함께 단식농성을 주도한다. 5월 30일 단식농성의 막이 오른다. 다음은 신동호의 책 ‘오늘의 한국정치와 6·3세대’ 중 일부다.
‘이날 오후부터 시작된 단식농성은 우리나라 학생운동사상 최초로 채택된 새로운 투쟁 형태였다. 당시 학생시위는 선언문이나 읽고 곧바로 가두로 진출하는 단순한 방식이었다. 데모가도 애국가나 교가, 삼일절 노래, 민족해방가 따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김지하가 농성을 주도하면서 한 차원 격상됐다. 춥고 배고프고 을씨년스러운 단식의 밤, 비에 젖어 축축한 거적 위에서 새로운 시위문화가 꽃피고 있었다. 선동가, 선동시, 풍자연극 화형식, 매장식, 모의투표 등은 삭막한 농성장을 흥겨운 마당으로 만든 활력소였다.’
이때 만들어진 ‘최루탄가’는 김지하가 ‘새야새야 파랑새야’ 곡조에 가사를 붙인 것으로 1970년대 애창된 데모가가 되었다.
탄아 탄아 최루탄아
팔군으로 돌아가라
우리 눈에 눈물지면
박가분(朴家紛)이 지워질라.
꾸라 꾸라 사꾸라야
일본으로 돌아가라
네가 피어 붉어지면
샤미센(三味線·일본의 대표적인 현악기)이 들려올라.
단식농성에서 김지하는 ‘각본, 감독, 주연’의 3역을 맡았다. 5월 31일 밤에는 김지하 작 ‘위대한 독재자’라는 현장 연극도 상연됐다. 단식으로 지친 학생들과 교문 밖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100여 명의 시민이 즐거워했다. 농성장에 담배, 우유 상자, 설탕물이 답지하는 등 시민들의 지지도 잇따랐다. 김지하의 회고다.
“매일 하루 종일 마이크를 붙잡고 농성 상황을 방송으로 계속 알렸다. 목이 완전히 쉬어 친구들이 말릴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피를 뱉으면서 나오는 쉰 목청이 오히려 선전성을 갖는다’고 고집하면서 계속 농성을 이끌었다.”
교내 방송을 통해 단식농성 상황이 실시간으로 알려지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합류하고 여학생들까지 가세하기에 이르렀다.
<15> 짧은 감옥 생활
마침내 1964년 6월 3일 날이 밝았다. 검은 구름이 무겁게 내리깔린 서울 일원에는 간간이 비까지 뿌렸다. 이날은 그동안 산발적으로 이뤄지던 학생 시위가 가장 대규모로 이뤄진 날이었다. 서울지역 대학생 1만2500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하다 중앙청 앞까지 진출한 것. 동아방송은 당시 상황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했다.
저녁 6시경, 데모대는 청와대 바로 앞까지 진출했다. 청와대 앞 길목에는 대형 널빤지로 겹겹이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그 뒤를 군용 트럭이 받치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다. 마이크를 들고 시위대를 이끌던 김지하의 말이다.
“우리는 바리케이드 앞에 주저앉아 연좌에 들어갔다. 나는 시위대 앞에서 앞으로의 행동 방향을 설명하다 실신해버렸다. 서울대 의대 앰뷸런스에 실려 응급조치를 받고 다시 돌아와 쉰 목소리로 계속 외쳤다. ‘이 자리에서 죽읍시다. 어떤 경우에도 자리를 뜨지 맙시다. 우리의 각오에 따라 상황은 결판날 것입니다.’”
해가 점점 기울고 있었다.
갑자기 시위대가 술렁거렸다. 곧 진압이 시작될 것이고 계엄령이 떨어진다는 소문이 번졌다. 아니나 다를까, 서울대 농대의 선언문과 결의문 낭독이 끝나고 구호와 노래가 이어지려던 순간,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폭음과 불빛이 터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최루탄이 시위대 머리 위에 우박처럼 쏟아졌다. 놀란 군중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일시에 무너졌다.
“움직이지 말라”는 지도부의 외침도 소용없었다. 김지하는 “물러서더라도 당당하게 퇴각하자고 쉼 없이 시위대를 향해 외쳤다. 잠시 후 대오가 다시 정비됐다. 우리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방향을 동숭동으로 잡았다”고 말했다. 밤이 되어 문리대 단식농성장으로 다시 도착한 그는 시위대에 이렇게 말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오늘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제부터 장기적인 싸움이 시작됩니다. 모두들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운동장 스타디움 끝 야구장 펜스 철망을 넘어 피신했다.
그날 밤 9시 40분.
정부는 1시간 40분을 소급한 오후 8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발효됐다고 선포했다. 계엄군은 6월 4일 서울로 진입하여 수도경비사령부 병력과 함께 시내의 요소를 장악했다. 학생 시위는 간단하게 진압되었다. 72일간 지속된 한일회담 반대투쟁의 대단원이 내려지는 순간이자 박정희 정권 최초의 계엄령이었다.
당시 한일 국교정상화 문제는 박 대통령으로서도 정치 생명을 건 일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1권)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일회담 당시) 박 대통령은 정권을 내놓고 대통령 직에서 하야할 결심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6월 3일 미국의 버거 대사와 유엔군 사령관이 헬기를 타고 청와대를 방문했다. (헬기를 탄 것은 당시) 데모대에 길이 막혀 차를 타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의기소침해 있던 박 대통령을 격려하고 사태수습을 함께 논의했다. 그리고 오후 8시, 드디어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사령부는 6월 3∼17일 계엄사범으로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언론인 7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이 중 언론인 7명이 눈에 띈다. 1명은 경향신문 정치부 윤상철 기자이고 나머지 6명은 최창봉 이윤하 조동화(이들 세 명은 7월 14일 보석으로 석방됨) 김영효 이종구 고재언 등으로 모두 ‘동아방송’ 관계자들이었다. 이들은 ‘앵무새’ 프로 때문에 구속 기소된다. ‘앵무새 사건’은 방송 최초의 설화사건이었다.
‘앵무새’는 매일 밤 9시 45분부터 5분간 방송되었던 프로였다. ‘아니 어째서 나라가 이렇게 되고 말았나’ ‘도대체 현 정부가 얼마나 무기력하고 때 묻은 짓을 했기에’ 등의 표현을 썼는데 이게 ‘내란 선동 선전’ 혐의를 받았다. 동아방송은 6·3시위를 실시간으로 생중계하는 등 시위 소식을 국민들에게 소상하게 알렸다. 가뜩이나 동아방송을 불편하게 생각했던 정권이 ‘앵무새’ 프로를 트집 잡아 6명을 한꺼번에 구속한 것이다.
김지하는 서울 성북동 자취방에서 하룻밤을 잔 뒤 이튿날 바로 원주로 내려간다. 학생운동권에 대규모 검거령이 떨어졌으니 빨리 몸을 숨길 작정이었다. 인적 드문 강가 같은 곳에 가서 텐트를 치고 혼자 숨어 있을 작정이었다. 원주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6월 5일 아침 짐을 챙겨 집을 나서려던 순간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서울 동대문경찰서로 끌려간 그는 “혐의를 연신 부인했지만 수도 없이 쏟아지는 시위 현장사진 때문에 아무 소리 못하고 기소됐다”고 한다. 김지하는 서대문구치소로 넘겨졌다. 생애 첫 감옥 체험이었다. 그의 나이 스물 셋이었다. 6월 13일 대학은 그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내린다. 다시 그의 회고다.
“감옥에서 보낸 그해 여름은 정말 더웠다.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중죄인이 아니어서 일반 잡범과 한방에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역사의 엄중함을 알았다고나 할까… 접견 대기실에서 뭐라고 따따부따 하는 교도관들에게 ‘이래봬도 나는 대통령과 싸운 사람이야, 함부로 하지 말라고’라며 대드는 친구들을 보며 속으로 대단하다고 느꼈다. 애당초 나는 정치나 권력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감옥에 갇혔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김지하는 생애 처음 감방 체험을 하면서 ‘서대문 101번지’(서대문구치소를 말함)를 비롯해 교도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감방생활을 표현한 ‘삼천리 독보권(獨步權)’, 전과 20범인 마약중독자 안씨와의 대화를 통해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삶의 밑바닥과 만난 심경을 드러낸 ‘여름 감방에서’ 등의 시를 썼다.
정부는 비상계엄을 내린 지 두 달이 채 안 되는 7월 29일 계엄을 해제했다. 이어 9월 15일 구속 학생들을 석방한다고 발표했다. 김지하도 9월 20일 석방된다. 석방 며칠 뒤 무기정학도 풀렸다.
김지하가 짧은 감옥생활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1964년 가을 국제정세는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문화혁명의 폭풍이 거세게 불고 있었고, 미국에서는 흑인들의 인권운동과 베트남 전 반대운동, 히피 운동이 불고 있었다. 베트남에서는 독재에 항의하는 스님들의 분신이 잇따랐다. 김지하는 “책에 파고들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가치를 갖고 살아야 할지 그야말로 사상의 탐색기였다”고 말한다.
계엄령 해제로 이제 숨 좀 쉬고 살만해졌나 싶었는데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의 돌연한 발표로 정국은 다시 긴장국면으로 들어선다. ‘1차 인혁당 사건’이었다.
<16> 6·3의 끝
6·3을 주도한 혐의로 수감된 김지하가 서대문구치소에 있던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는 돌연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북괴(北傀)의 지령을 받은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국가변란을 일으키려던 인민혁명당을 적발,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했다”는 것이었다. 정보부는 이어 “3월 24일 한일굴욕외교를 반대하는 순수한 학생데모가 일어나자 인혁당이 주동 학생들을 포섭해 전국 학생 조직에 지령을 내리고 현 정권이 타도될 때까지 데모를 계속 조종함으로써 북괴의 지령에 따라 암약해왔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사건을 배당받은 공안부 검사들조차 공소장에 서명하기를 거부할 정도로 조사내용이 허술했다. 한국인권옹호위원회 박한상 의원은 구속된 도예종 등 26명 대부분이 중앙정보부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1964년이 저물고 있었지만 6·3은 끝난 게 아니었다.
1965년 1월 9일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박정희 대통령은 취임 1주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되든, 안 되든 금년에는 (한일회담을) 매듭짓겠다”고 했다. 2월 17일 시나(椎名) 일본 외상이 내한하자 전국 각 대학에 ‘학원방위군’이 조직되는 등 학원가는 다시 출렁였다. 하지만 학생운동권은 거의 지리멸렬 상태였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운동 주도 세력들도 대부분 구속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거나 수배상태에 있었다. 이들에게는 정학, 제적조치까지 내려져 있었다.
1964년 가을, 석 달여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온 김지하는 낮에는 책을 읽고 밤에는 가깝고 오랜 선후배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그중에서도 함께 연극을 하며 김지하를 아껴주었던 김기팔(1937∼1991·서울대 철학과·1970년대 유명했던 극작가)과의 인연이 많이 생각난다고 했다.
“출옥 후 가족 말고 처음 만난 사람이 김기팔 형이었다. 형은 술자리 내내 내게 ‘야 빨갱이 술 먹어’라고 놀렸다. 나는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형의 본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참 술이 오르고 나자 형이 ‘야 이 빨갱이! 이젠 다시 감옥에 가지 마라’ 하며 엉엉 울었다. ‘빨갱이’라고 나를 놀렸지만 내게 앞으로 닥칠 운명 같은 것을 예감했는지 다시는 감옥에 가지 말라고 통곡한 것이었다.… 그런데 운명이란 참 묘한 것이다. 죽을 것 같던 나는 살고 죽지 말라던 그는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너무나 억울하고 너무나 허망했다. 요즘도 살다가 외로울 때면 혼자 입속으로 가끔 ‘기팔 형’하고 불러본다. 그러면 어디선가 허공에서 덧니를 드러내고 킬킬 웃으며 평안도 사투리로 ‘왜 그래? 이 빨갱이야’ 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지금은 나도 술을 끊었지만 가끔 기팔 형이 생각나면 허름한 주점에 혼자 앉아 그를 생각하며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1964년에서 65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을 서울에서 칩거하며 지내던 김지하는 깊은 ‘허무’에 빠진다. “청춘이 너무 무거워 어서 빨리 늙기만을 바랐다”는 그는 러시아의 자살한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1895∼1925)에게 빠져들었다. 예세닌은 서정시를 주로 쓰다가 러시아 혁명을 열렬히 환영하는 등 혁명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나 내면적 소외와 고독감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했다. 김지하는 그 무렵 예세닌의 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도입부를 읽으며 전율했다고 한다.
‘폭풍은 지났다/소수의 사람만이 무사하였다/이젠 소리 높여 서로를/이름 부르는 사람마저도 드물어졌다’는 대목이 6·3이라는 폭풍이 지나가고 선후배들이 모두 사라진 뒤의 쓸쓸함에 사로잡혀 있던 김지하의 마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새 학기가 되자 친구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대학가에도 봄기운이 돌았다. 김지하는 운동권 후배들과도 계속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후배들로부터 1차 6·3의 시작이었던 1964년 3·24데모 1주년 때 읽을 선언문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1965년 3월 22일 김지하는 송철원 박재일 최혜성과 함께 우학명(지리학과·2007년 작고) 집에 모인다. 다음은 송철원의 회고다.
“선언문 초안을 김지하가 썼다. 한참 글을 쓰고 있던 김지하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박재일이 가지고 있던 ‘말똥종이 책’(마분지로 된 책. 물자가 없던 시절이라 뚜꺼운 재생지를 썼다) ‘코민테른 선언·강령·규약’이었다. 김지하가 한 대목을 짚었다. ‘아메리카 자본은 신용이란 굳센 쇠사슬로 구라파 제국(諸國)과 남아메리카 제국을 자기 몸에 얽매어 놓은 뒤, 이들 제국이 감히 자기의 신성한 의지에 저항이라도 하려고 하는 날이면’…이라는 대목이었다. 김지하가 우리에게 ‘이 대목을 선언문에 빌리면 어떻겠느냐’고 물어서 우리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 김지하는 선언문에 이렇게 썼다. ‘새로운 동남아 공영권의 시대착오적 망상에 사로잡힌 제국주의 일본 해적배들은 또한 저들대로 선린외교라는 굳센 쇠사슬로 일련의 동남아를 자기 몸에 얽매어 놓은 뒤, 이들 제국이 감히 자기의 신성한 의지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저들 비전(秘傳)의 예리한 일본도를 갈고 있다.’”
일행은 이렇게 완성된 ‘3·24 선언문’ 초안과 송철원이 쓴 ‘격문’ 초안을 함께 검토한 후 최종 확정했다. 다시 송철원의 말이다.
“다음 날 오후 인쇄소에서 400부 정도를 인쇄해 준비를 모두 마쳤는데 후배들로부터 우리가 만든 문건들을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는 기별이 왔다. 우리는 소식을 듣자마자 인쇄물을 친구 집 아궁이에 넣고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이 문건은 어찌된 영문인지 검찰 손에 들어가 9월에 송철원 등이 끌려가고 김지하가 또다시 수배되는 증거로 활용된다. 검찰은 코민테른 선언·강령·규약에서 따온 선언문 문장이 “북괴 및 국외 공산계열의 활동에 동조함으로써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1965년 6월 22일 오후 5시 도쿄 일본 수상관저에서 양국 외무장관 이동원과 시나가 서명함으로써 한일교섭이 종지부를 찍었다. 국교 정상화를 골자로 하는 한일 기본조약과 4개 협정이 조인된 것이다.
국회비준 절차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대학가 시위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8월 중순 이후 각급학교가 개학을 하면서 시위가 다시 격화될 조짐을 보이자 당국은 8월 26일 계엄선포나 다름없는 위수령을 발동한다. 1차 6·3에 비해(1964년 3월 24일∼6월 3일) 길었던 제2차 6·3(1965년 2월 18일 파고다 공원 ‘이등박문 망령 성토 학생대회’에서부터 8월 26일 계엄 선포까지)이 막을 내린 순간이다.
<17> 자살생각
1965년 9월 4일 고려대 연세대에 무기한 휴업령이 내려진 날이었다. 김중태 최혜성 박재일 이숭용 진치남 송철원 등 6명은 중앙정보부 서울분실로 끌려가 젖은 멍석에 둘둘 말려 야구방망이로 매타작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곧 내란음모 및 선동, 반공법 위반 등으로 구속 기소된다. 김지하는 시골에 내려가 있었다. 전국에 김지하 수배령이 떨어졌다.
경찰은 김지하의 친척, 친구 등 그와 연관 있는 모든 곳, 모든 사람들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그의 모친을 지프차에 태워 앞세우고 다니며 아들의 행방을 대라고 하기도 했다. 김지하의 말이다.
“전국에 수배령이 떨어졌다고 하길래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을 했다. 한번은 서울 성북구 장위동 작은 이모네 골방에 숨어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정보부원들이 들이닥쳤다. 나는 캐비닛 안에 숨어 있다가 겨우 살았다. 나중에 정보부원들이 그 사실을 알아챈 바람에 작은 이모만 혼이 났다. 더 기가 막혔던 것은 부모님이 겪었던 고초였다. 정보부가 아버지를 잡아다 ‘아들 놈 숨은 곳을 대라’고 전기고문을 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졸도하고 고혈압이 터져 반병신이 돼버렸다. 나는 도망 다니던 와중에 친구에게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눈이 뒤집혔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박정희를 무너뜨리겠다’고 맹세했다.”
김지하는 서울 답십리 친구 집에 숨어 겨울을 넘기고 이듬해 66년 봄까지 지낸다. 그 사이 답십리 시장 근처에서 모친도 몰래 만났다. 아들 걱정에 많이 늙어버린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돌아오는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어느 날은 서대문구치소 뒤쪽 담 너머에 있는 지인의 집 마당에서 바로 마주 보이는 감방 창문을 통해 감옥에 들어간 박재일과 손짓 발짓으로 안부를 주고받기도 했다. 다시 김지하의 말이다.
“박재일은 나더러 나타나지 말라고, 붙들리면 크게 고생한다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나는 오른팔을 들어 그가 볼 수 있게 큼지막하게 ‘건강’ ‘신념’ ‘낙관’이라고 써주었다. 말은 나누지 못하고 몸짓으로만 했던 통방(교도소나 유치장에서 수감자끼리 암호로 의사를 통하는 것)이었다… 그 긴 수배기간 동안 친구 집에 있던 책도 다 읽고 찾아온 선후배들과 운동에 대해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그러면서 내가 앞으로 해나갈 일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다.”
봄이 오면서 정국 상황도 좀 누그러졌다. 학생운동권에 대한 수배도 풀렸다.
김지하는 학교 선배가 백방으로 알아본 끝에 수배가 풀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미 사건이 종결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6개월에 걸친 긴 도피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지막 학기 등록을 마쳤다.
졸업을 앞두고는 있었지만 몸과 마음은 피폐했다. 걸핏하면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해골처럼 마른 몸에 끊임없이 기침을 하며 피가래를 뱉어냈다. 어떤 때는 호흡장애까지 왔다. 그러나 병원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당시 그에게는 살겠다는 의지가 별로 없었다. 폭음(暴飮)도 계속했다. 안주라고 해봐야 소금이나 사과 반쪽이 전부였다.
마침내 66년 8월 김지하는 7년 반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하지만 그는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꿈도 잃고 건강도 잃었다. 희망이 없었다. 생래적으로 조직을 싫어했던 그는 늘 혼자였다. 그는 언젠가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20대에는 정말 살기가 싫었다. 술이 아니면 살 수가 없었다. 술도 무슨 좋은 술인가? 막소주, 순 화학주에 안주는 소금이었다. 그래서 내가 몸이 망가졌다. 이제 술은 완전히 끊었지만 왜 그때 그렇게 술을 먹었을까 생각해본다. 고민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무슨 고민? 그땐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느냐고? 예를 하나 들까. 그때 통일벼가 나왔다. 수확량이 많으니까 그걸로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품질은 엉망이야, 못 먹어. 그래서 그것을 아는 농민이 술에 잔뜩 취해서 농촌지도소 직원 앞에서 “제기랄, 통일벼도 벼냐?” 했다. 그러자 덜커덕 잡혀갔다. 감히 대통령의 지도노선을 비판하느냐? 그것은 북괴를 이롭게 하는 발언이다 해 가지고 반공법 4조 1항인가, 5항인가로 들어가게 한 거다. 택시 안에서 체제에 대해서 불평을 털어놓아도 그 길로 잡혀갔다. 이런 세상이 어디 있나? 그런 세상에서,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철학을 공부하고 미학을 공부할 마음이 나겠나.”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급기야 자살을 시도한다. 다시 그의 말이다.
“어느 날이었다. 길을 가는데 심한 피비린내와 함께 목구멍에서 핏덩이가 꿀꺽하고 넘어왔다. 길바닥에 흩어진 피가 시커멓게 보였다. 나는 담배를 꺼내 피웠다. 또 기침이 터졌다. 핏덩이가 또 넘어왔다. 숨이 찼지만 담배를 더 깊숙이 빨아 마셨다. 그러면서 오늘 밤이 새기 전에 살 건지, 죽을 건지 ‘빨리 결정하자’고 생각했다. 나는 농약을 사다 놓고 소주를 퍼마셨다. 인사불성이 된 상태에서 그래도 마지막이니 내 인생에 점을 한번 쳐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왼손바닥에 침을 탁 뱉고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침을 탁 때려서 침이 오른쪽으로 튀면 요양원에 들어가 몇 년이든 각오하고 병을 고칠 것이며 왼쪽으로 튀면 시골 아무데나 내려가 농약을 마시고 죽어버리겠다는 거였다. 처음엔 침이 잘 안 나와 두 번 세 번 그렇게 했다. 네 번째에야 제대로 튀었다. 오른쪽이었다.”
며칠 뒤 그는 송철원의 부친 송상근(당시 용산철도병원장)의 주선으로 서대문시립병원 폐결핵 요양원에 입원했다.
진단은 ‘기흉’이었다. 기관지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김지하의 폐 상태는 심각했다. 엑스레이는 거의 하얗고 검은 부분도 흰 선과 점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의사는 수술 대신 약물로 치료하겠다고 결정했다. 약을 듬뿍듬뿍 먹어대니 기침도 차츰 줄고 피가래도 그치고 숨도 덜 찼다. 다시 그의 말이다.
“하루 종일 침대를 지고 있어야 했다. 라디오가 유일한 친구였다. 병이 다 힘들지만 폐결핵은 참으로 힘든 병이다. 밥맛은 없는데 고기반찬 밥 과일을 배터지게 먹어야 하고 온갖 생각이 출몰하는데 잠은 잘 자야 하는 병이었다. 먹으면 토하는데도 꼬박꼬박 그 많은 약을 다 먹어야 하고 소화도 안 되는데 밥을 많이 먹어야 하며 우울증이 깊은 데도 명랑해야 한다. 약값도 비쌌다. 여자 생각이나 술 생각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을 멀리할 수 있는 철학적이고 심각한 책은 또 읽지 말아야 했다. 장기 입원 환자인 내게 폐결핵은 일종의 정신병이었다. 잡념이 많고 종일 누워 있으니 낮에는 자고 밤에는 말똥말똥해져 불면증도 심했다.”
김지하는 침대 머리맡에 ‘무조건 먹자’라고 써 붙였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무려 2년 반을 요양한다. 세상은 그를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
<18> 월남 파병
김지하가 병원에 있던 1967년은 제6대 대통령선거(5월 3일)가 있는 해였다. 여당 공화당은 “박 대통령 다시 뽑아 경제건설 계속하자”를 구호로 내세웠고 야당 신민당은 “빈익빈이 근대화냐, 썩은 정치 갈아치자”로 맞섰다.
판도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일협정에 따른 외화가 종잣돈이 되어 경제개발의 성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5년 외환보유액이 1억4600만 달러였던 상황에서 일본으로부터 공짜로 3억 달러를 10년에 걸쳐 나눠 받고, 경제협력 명목으로 2억 달러를, 무역차관 명목으로 1억 달러를 빌리기로 한 것은 경이적인 액수였다.
한국의 경제개발은 초기엔 실적이 저조하다가 1965년부터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66년부터는 10% 이상 고도성장 시대가 열렸다. 한국은행은 1966년 12월 공식 발표를 통해 1966년 경제성장률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치인 11.9%(1인당 국민소득 131달러)라고 밝혔다. 1966년의 경제성장률은 1960년대 전반기(60∼64년) 성장률 5.5%의 두 배가 넘는 것이었다. 훗날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7∼71년)을 결산해 보니 연평균 성장률이 8.5%나 됐다.
한편 이처럼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끌게 해준 또 다른 견인차로 ‘월남 파병’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은 사망자 5099명, 부상자 1만962명(국방부 공식 발표), 8만9708명의 고엽제 피해자(2세 64명. 국가보훈처·2012년 기준)라는 큰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월남 파병이 한국 경제에 일본 경제를 부흥시킨 6·25전쟁 같은 것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국은 1964년 9월 12일 의료진과 태권도 교관 파병을 시작으로 1965년 10월 14일 제2해병대여단(청룡부대)을 필두로 한 전투부대가 잇따라 파병된다. 이어 1973년 3월 23일까지 총 32만5517명(국방부)의 병력이 파병된다(베트남전은 1975년 4월 30일 미국의 중단 선언으로 끝난다).
한국군 파병은 원래는 박정희 대통령이 먼저 제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과 워싱턴에서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미국 원조를 받는 입장에서 무조건 도와달라는 게 아니라 한국처럼 자립 의지가 있는 나라에 우선적으로 해 달라”고 역설하면서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월남 파병을 제안한다. 당시엔 베트남 상황이 심각하지 않아 케네디 대통령은 “당장 필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이후 ‘더 많은 국가(More Flags)’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존슨 대통령이 한국에 정식으로 파병을 요청한다.
파병에 따른 파월 장병들의 수당 지급액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총 23억5500만 달러(국방부)에 달했다. 여기에 덧붙여 2005년 8월 외교부가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한국은 9년간의 참전으로 미국 군사원조 증가분 10억 달러+파병에 따른 미국의 경비지출 10억 달러+전쟁특수에 따른 외화수입 10억 달러+기술 이전과 수출진흥지원금 20억 달러 등 총 50억 달러의 외화 수입 효과를 거두었다. 이에 따라 외환보유액도 1964년 1억2900만 달러에서 1970년 5억8400만 달러, 1973년엔 10억9400만 달러로 급증했다. 한국의 국제신인도도 올라가 수출도 잘됐으며 외국에서 돈을 빌리는 것도 쉬워졌다. 1967년 한 해만 해도 상업차관이 2억3000만 달러에 달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베트남 파병은 이처럼 경제개발의 종잣돈 역할을 했다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선 남의 나라에 일자리를 얻어 집단적으로 한국인들이 움직였다는 점에서 최초의 국제화였다. 베트남으로의 인력 진출이 최고에 달했던 1969년에는 1만5500명이 넘었고, 진출 기업도 최고 79개 업체에 달했다. 수송업 진출 등으로 한밑천을 잡은 한진그룹은 이후 항공산업에 뛰어들어서 오늘의 대한항공으로 발전한다.
훗날 중동으로 뻗어 나갔던 해외건설 진출의 기초도 베트남 전쟁터에서 닦았다.
또 하나 중요한 성과는 군(軍)의 현대화였다. 파병 전까지만 해도 국방예산을 미국에 크게 의존해 오던 한국군의 무기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 수준의 구식이었으며 화력도 북한에 크게 뒤지고 있었다.
하지만 봉급 군복 무기 병참 등 모든 비용을 미국 정부가 부담한다는 조건은 참전군인은 물론이고 휴전선을 지키는 한국군에도 적용됐다. 여기에 파병 30여만 명이 실전 경험을 쌓았다. 실제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는 한 현역 장군은 기자에게 “당시 미국의 최첨단 무기들을 몰래 빼내 한국으로 가져와 모두 분해한 뒤 다시 만들어보기도 했다. 베트남전은 한국군 무기의 현대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전한다.
껄끄러웠던 미국과의 관계도 대폭 개선됐다. 주한미군 병력을 베트남 전선으로 빼려는 미국의 구상을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어떻든 경이적인 경제성장에 힘입어 1967년 대선 결과는 박정희 568만8666표(51.5%), 윤보선 452만6541표(40.9%)였다. 압도적 승리였다.
이제 박정희가 넘어야 할 산은 총선이었다.
집권 여당으로선 모든 총선이 다 중요하지만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선거는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또 다른 의미로 중요한 선거였다. 1967년 선출된 박 대통령의 임기는 1971년까지였다. 그런데 이미 1966년부터 측근들을 중심으로 “나라를 제대로 만들려면 박 대통령이 세 번은 해야 한다”는 논리가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려면 헌법에서 규정한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풀어야 하는 개헌을 해야 해 총선에서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므로 총 175석 가운데 최소 117석 이상이 필요했다.
실제로 공화당과 정부는 전쟁을 한다는 심정으로 국회의원선거에 돌입했다. 결과는 129석을 얻은 공화당의 압승이었다. 신민당은 개헌 저지선(59석)에 14석이나 모자란 45석을 얻는 데 그쳤다. 하지만 ‘(공화당) 선거자금이 통반(統班)조직, 상대방 선거참모 매수자금, 군소정당 후보자 사퇴자금으로 흘러 다니며 (선거) 타락이 판을 쳤다.’(1967년 6월 8일자 동아일보)
대학가에 6·8 총선 부정선거 규탄 데모가 벌어졌다. 6월 13일 서울 21개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진다. 그리고 7월 8일엔 동백림(東伯林·당시 동독의 수도였던 동베를린을 한자로 음차) 사건이 발표된다. 대학교수, 의사, 예술인 및 공무원 등이 동독 주재 북괴대사관을 왕래하면서 간첩 활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가 밝힌 명단에는 작곡가 고 윤이상, 화가 고 이응로, 고 천상병 시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법원 최종심에서 간첩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당시 박 정권이 6·8 부정 총선 규탄 시위를 무력화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사건을 부풀려 발표했다”고 발표했다. 고 천상병 시인의 경우 모진 고문을 받아 동베를린에 다녀온 친구가 간첩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허위자백을 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1966년 10월 베트남을 방문해 참전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파병에 따른 외화 수입은 1960년대 후반 한국의 성장을 이끈 견인차였다. 동아일보DB
<19> 북한의 도발
1968년 1월 21일이었다.
폐결핵에 걸린 김지하가 입원해 있던 서울 은평구 역촌동 시립병원 안이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워졌다. 총검을 든 군인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북(北)에서 게릴라가 침투했다며 병원 안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총소리가 북한산과 불광동 쪽, 구파발 쪽에서 계속 들려왔다.
1월 23일자 각 신문 1면에는 ‘서울에 무장간첩단’이라는 제목으로 사살당한 무장공비와 무기들이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그중에는 생포당한 ‘게릴라’ 김신조가 기자회견한 기사도 있었다. 김지하는 병원에서 그것을 읽었다. 다음은 조선일보 1면에 보도된 문답 중 일부이다.
―성명과 나이는?
“김신조, 이십칠세입니다.”
―소속과 계급은?
“조선인민군 제124군 부대 소위입니다.”
―이번 임무는?
“박정희의 ×××(모가지라는 뜻)를 따고 수하간부들을 총살하는 것입니다.”
―성공할 줄 알았는가?
“실패는 생각지도 않았고 만약의 경우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자하문에서 충돌하기 전까지 군경 수색대를 보았나?
“아무도 만나지 못했고 간첩작전을 벌이고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막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김지하는 “김신조의 말이 마치 사람 같지 않은 기계나 인조인간이 내뱉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기억한다.
1960, 70년대 박정희 정부가 중앙정보부나 보안사령부 등을 중심으로 반공(反共)을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는 독재의 도구로 자주 활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정권의 의도와 관계없이 당시 북한의 위협은 엄연히 존재했다. 북한의 도발은 1960년대 후반부터 부쩍 심해졌다.
게다가 1960년대까지만 해도 공업화 측면에서나 국민소득 면에서 남한은 북한보다 훨씬 뒤졌기 때문에 북한의 도발은 국민들에게 실체적 공포였다. 남북 간 경제격차는 일제강점기 때부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어서 남한으로서는 단숨에 북한 경제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통일연구원의 ‘남북한 경제력 비교연구’에 따르면 1964년만 해도 북한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94달러였지만 남한은 107달러였다. 군사력도 북한의 절반 수준이었다.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과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된 것은 10월 유신이 있던 1972년에 이르러서였다. 그해 남북한의 1인당 GNP가 316달러로 같아진 것을 시작으로 74년에 이르러서야 남 535달러, 북 461달러로 남한이 북한을 앞지른다.
1960년대만 해도 남한보다 잘살던 북한은 남한보다 앞선 경제력 군사력을 바탕으로 각종 도발과 대남 선전공세를 계속했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안으로는 경제개발을 위해 박차를 가해야 했고 밖으로는 북한과 힘든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런 점에서 68년은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해다. 새해 벽두부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북한의 도발이 잇달아 터졌기 때문이다.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이었다.
1·21사태는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려 한 사건이다. 하마터면 전쟁이 촉발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미국이 남한의 보복조치를 막는 바람에 넘어간다.(박정희 대통령 암살 기도는 6년 뒤 또 한 차례 있었는데 74년 육영수 여사 살해 사건이 그것이다)
1·21사태에 따른 국민적 공포가 채 가시지 않은 이틀 뒤인 1월 23일에는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에 납치되는 일이 벌어져 국제사회를 흔들어 놓는다. 푸에블로호는 승무원 83명을 태우고 북한 해안에서 40km 떨어진 동해상에서 정보 업무를 수행하다가 북한의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을 받고 나포된다. 북한은 사건 발생 후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 68년 12월 23일 판문점을 통해 승무원 82명과 유해 1구를 송환했다.
반공과 안보는 우리의 생존을 지키는 지상과제가 되었다. 박 대통령은 1968년 2월 1일 오후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이라는 역사적 행사에 참석한 자리에서 “싸우면서 건설하자”며 이렇게 말했다.
“은인자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엄숙히 북괴에게 경고한다. 대한민국 성장에 가장 위협을 느끼고 배 아파하는 자들이 김일성 도당들이다. 입으로는 평화통일을 주장하지만 목표와 전략은 해방부터 지금까지 적화통일이라는 데에 변함이 없다. (…) 우리 국민들은 한쪽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 투쟁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건설을 하는, 싸우면서 건설해 나가는 그런 국민이 되어야 한다.”
바로 며칠 뒤인 2월 7일에는 “그놈(북한)들이 뭐 대단한 것을 가지고 내려오는 게 아니라 기껏 소총하고 수류탄 몇 발 들고 오는데, 지금처럼 공비 20∼30명을 섬멸하려고 몇 개 사단을 동원하다 보면 전방은 누가 지키나. 예비역들 한 200만 명 정도만 무장시켜 대항하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며 향토예비군 구상도 밝힌다.
박 대통령은 미국에도 쓴소리를 서슴지 않았다. 2월 12일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 기자와 청와대 단독 회견을 가진 자리에서 “북괴가 오만해지는 이유는 그들의 도발 행위에 얼굴을 돌리는 미국 정책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어 “한국의 방위가 유엔군사령관의 책임하에 있고 한국군이 유엔군사령관 작전 지휘하에 있기 때문에 무장 간첩 침투사건(1·21사태)과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해 응징 조처를 취하지 말라는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대한 유엔군사령관의 처사는 예의 주시하겠다”는 경고성 발언까지 했다. 앤더슨 기자는 이 회견기를 이틀 뒤 ‘워싱턴포스트’에 실었다.
공비 출몰의 불안 속에서 4월 1일 250만 향토예비군이 창설됐다.
하지만 북한의 도발은 끊이지 않아 10월 30일엔 경북 울진 삼척에 130여 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무장공비들은 1·21사태 때 남쪽의 민간인들이 공비들을 신고해 일망타진되었다며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11월 21일부터는 18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일련번호를 부여하는 주민등록증제도가 실시됐다. 12월 5일엔 대통령 이름으로 국민교육헌장이 발표된다.
박 대통령은 1968년 11월 30일 수출의 날 치사에서 울진 삼척 무장 공비 사건을 언급하며 결국 경제성장만이 북한 동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연설했다.
“공산주의로 경제 건설에 성공한 나라는 이 지구상에 하나도 없다. … 북한 경제가 성장이 되고 수출이 많이 늘고 북한 동포들의 생활수준이 올라가 번영을 누리게 되면 북한 동포들 머릿속에 좀더 자유롭게 잘살아보겠다는 욕구가 생길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북한의 도발은 이듬해인 69년에도 계속됐다. 4월 7일 중서부 전선에 300여 발의 포격을 했으며 4월 15일엔 미 해군정보기(EC―121)를 동해상에서 격추시켜 31명이나 되는 사망자를 냈다.
이런 상황에서 69년 7월 25일 미국 대통령 닉슨은 괌에서 이른바 ‘닉슨 독트린’(괌 독트린이라고도 불림)을 발표한다. “아시아 국가들은 미국 의존도를 줄이고 안보 문제를 독자적으로 해결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한국에서의 미군 철수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20> 아침이슬
1969년 6월 김지하는 2년 반 만에 퇴원한다. 그리고 2개월 뒤 취직을 한다.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폐결핵으로 몸이 엉망이 된 상태에서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그도 생활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생겼다. 게다가 아버지의 벌이도 시원치 않아 외아들인 그로서는 돈을 벌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는 지인의 소개로 한 마케팅 회사 카피라이터로 들어간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마케팅에 관해 책도 읽고 토론도 했다. 당시 김지하를 거쳐 간 카피는 담배인삼공사에서 수입한 버지니아 잎담배 광고와 “당신은 대한항공에서 언제나 양반 대접을 받습니다”라는 큰 제목 아래 한국의 ‘양반’에 대한 개념 설명과 서양인이 통영갓을 쓰고 앉아 있는 기내 사진이 크게 확대된 광고였다고 한다. 그의 회고다.
“당시 일하면서 미국광고협회 회장의 연설문을 읽은 게 기억난다. 그 회장은 ‘오늘날의 광고와 마케팅에서는 콘텐츠와 관련해 밥 딜런(미국 포크록의 거장·반전 가수) 같은 청춘의 상징과 그 메시지를 깊이 검토해야 한다’고 썼다. 그 글을 읽으며 앞으로 기업들이 문화운동까지 잠식해 문화 속 미학적 영향력을 상품 판매에 깊이 연결시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김지하는 입사 후 석 달을 채우지 못하고 사표를 쓰고 나와 버린다. 출퇴근하는 직장생활이 도무지 자신에게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얼 하며 먹고살아야 하나,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고민들이 밀려왔다.
그는 본래 대학을 졸업하고 ‘거리의 미학자’가 되려고 했었다고 한다. 이런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미학과의 김정록(金正祿) 교수였다. 김지하는 김정록 선생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감고 옛 생각에 잠겼다. 스승을 회고하는 그의 얼굴에 추억이 서렸다.
“지난 시절 살아오면서 내 삶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어른들이라기보다 친구들이다. 하지만 유일한 스승이 있다면 바로 김정록 선생이다. 대학 1, 2학년 때 만날 술만 퍼먹고 자살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던 시절, 선생은 내 마음을 어루만지며 길을 열어주려고 애쓰셨던 스승이었다. 선생은 김홍집(1842∼1896·갑오개혁을 주도한 조선 후기 문신)의 손자로 북경대학에서 곽말약(1892∼1978·중국의 시인 겸 극작가) 밑에서 공부한 사람이다. 곽말약은 모택동도 떨던 사람 아니었나. 어느 날 선생이 곽말약이 해준 말이라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서양의 예술, 과학사상은 완벽하지 않다. 앞으로 세계정세를 볼 때 서양과학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동양사상을 공부해야 한다. 그렇다고 동양사상도 완벽한 것은 아니니 동서양 둘 다 받아들여야 한다. 머지않아 동양이 서양을 앞서는 날이 온다.’”
그러면서 스승은 김지하에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대학원을 안 가도 좋고 대학 선생이 안 되어도 좋으니 공부는 계속해라. 네가 하는 판소리, 탈춤도 좋고 서양 것도 좋으니 공부해서 다 섞어라. 비록 크게 되지 않을지라도 그게 시작이 될 것이다. 너는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니까 (강단에 얽매이지 않는) ‘거리의 미학자’가 되어라.”
거리의 미학자가 되라는 스승의 말은 평생을 살면서 어느 조직에도 사람에도 휘둘리지 말고 혼자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으라는 삶의 지침을 제시한 것처럼 들렸다.
한 번은 김지하가 어느 겨울, 원주 집에서 며칠 불면의 밤을 지내다 스승께 편지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내용인즉 ‘괴롭다’는 것이었고 어찌하면 ‘벗어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말도 안 되는 내용의 편지에 선생은 긴 답장을 보내주셨다.”
스승의 답장은 이랬다.
‘체관(諦觀·사물의 본체를 꿰뚫는 일)만이 해결의 길일세. 체관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 용기가 필요하다네. 용기 또한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니 어른들이나 옛 사람들의 가르침이 그래서 필요한 것일세. 노자(老子)로부터 배우게. 허(虛)라는 것은 그냥 ‘허무’가 아닐세. 그것은 참다운 용기의 근원이요, 체관의 문(門)이라네. 체관이 곧 삶의 문이니, 지금 곧 서점에 가서 ‘노자’를 사다가 읽고 또 읽도록!’
김지하는 당장 노자를 사다가 통독했다고 한다.
기자는 이 대목을 들으며 방황하는 제자에게 이런 따뜻한 답장을 쓰는 스승이 있었던 그 시절이 문득 부러워졌다.
3개월 만에 직장에서 뛰쳐나온 김지하는 문화운동을 하며 살기로 한다. 그러면서 떠오른 것이 각 대학교 연극반을 상대로 학생극을 전업으로 하는 연출가로 사는 것이었다. 부업으로 전국 대학교에서 이뤄지는 연극공연들을 정기적으로 알리는 일도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생계는 연극 연출료로 해결하고 대학생 연극을 민족문화운동의 중심으로 만들어 문화운동도 자연스럽게 하겠다는 취지였다.
서울 동숭동 학림다방에서 문리대 연극반 후배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지하가 이런 구상을 이야기하자 후배들은 “당장 한 편을 해보자”고 했다. 이때 고른 작품이 김영수(1911∼1977·극작가)의 ‘혈맥’(1946년 발표된 3막4장의 희곡. 일제 때 방공호에서 살아가는 하층 인간들의 삶을 그렸다)이었다. ‘혈맥’은 이듬해 서울대 문리대 연극반 봄 학기 공연작품으로 선정되었다.
그 무렵 김지하는 후배 김민기(학전 대표)와도 인연을 맺는다. 배우 신성일의 친동생이기도 한 미대 회화과 강명희(66·화가) 집에서 판화가 오윤(1946∼1986) 임세택(66·화가·전 서울미술관장) 등과 김민기의 노래를 듣게 된 것이다. 김지하의 말이다.
“민기는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갓 들어온 신입생이었다. 찢기고 헤진 청바지에 잠바를 걸치고 기타를 치면서 세 곡을 연거푸 불렀다. 두 곡은 ‘길’ ‘혼혈아’라는게 기억이 나는데 나머지 하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깊고 애잔한 저음이 듣는 사람을 우울하고 슬프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판화가 오윤이 민기에게 ‘한국의 밥 딜런이 나왔다’고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몇 년 뒤 어느 한여름 날, 김지하는 서울대 의대 함춘원(조선 성종 때 창경궁 후원·현 서울대병원 안에 위치)에 무료하게 앉아 있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김지하는 이 노래를 들으며 이 노래가 곧 금지곡이 될 것이고 자신의 삶 역시 거친 광야로 나서게 될 것임을 예감했다고 한다. 그의 예감은 모두 맞았다
<21> 오적
시 ‘오적’은 사상계 1970년 5월호에 실린 직후 다양한 유인물로 만들어져 배포되기도 했다. 오적 전문을 실은 이 책자에는 김지하가 시를 넘길 당시 ‘오적’ 5개 집단을 구체적으로 직접 그린 삽화도 함께 담겼다. 김지하 제공
1970년 새해가 밝았지만 정국 상황은 날이 갈수록 뒤숭숭해지고 있었다.
3월 17일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승용차 안에서 고급 요정 마담이었던 정인숙(1945∼1970)이 권총으로 살해되어 변사체로 발견된 것. 함께 발견된 옷가방에서는 당대 저명인사 26명의 명단이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박정희 정권의 도덕성에 상처를 입히는 정치적 사건으로까지 비화된다.
그로부터 한 달도 채 안된 4월 8일 오전 6시 40분에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중턱에 세워진 와우아파트 15동 콘크리트 5층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미처 잠에서 깨지도 못한 시민 33명이 숨지고 38명이 다쳤다.
당시 김현옥 시장은 9만여 채의 무허가건물을 철거해 거주자들을 경기 광주(현 성남시) 대단지에 이주시키고 나머지 가구들을 위해 시민아파트를 건립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문제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1969년 한 해에만 서울 32개 지구에 406동 1만5840가구의 아파트가 지어졌다. 단기간에 짓다 보니 부실은 당연했다.
와우아파트도 여섯 달 만에 준공된 것이었다. 건설업자가 무면허였다는 것도 드러났고 뇌물을 주기 위해 공사비를 줄이려고 철근 70개를 넣어야 할 기둥에 5개만 넣었다는 것도 드러났다. 기둥도 시멘트 대신 모래를 넣은 모래기둥이었다. 와우아파트 사건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을 두고 ‘와우식 근대화’라는 말도 생겼다.
김지하는 이 즈음 ‘그의 운명’을 바꿀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잡지 사상계 편집장 김승균으로부터 ‘동빙고동에 오적촌이라는 곳이 있다더라. 여기에 대한 장시(長詩)를 하나 써 달라’는 청탁을 받은 것. 김승균의 회고다.
“당시 사상계는 매달 테마를 정해 외부 필자에게 원고를 청탁했다. 사상계 사무실이 종로구 청진동 백조다방 건물 4층에 있었는데 야당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1970년 5월호를 5·16쿠데타 9주년 특집호로 내기로 하고 4월 기획회의를 하는데 당시 부촌(富村)이었던 동빙고동이 화제가 됐다. 혁명공약에서 부정부패를 일소하겠다고 한 (쿠데타) 세력이 오히려 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실망과 비난이 드셌다. 집에 에스컬레이터를 달아 놓고 사는 ‘오적촌’이 있다는 소문이 시중에 파다하다는 거였다. 오적촌을 주제로 장시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해 김지하를 떠올렸다. 다들 찬성했다. 김지하는 대중에게 알려진 유명 인사는 아니었지만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특히 그런 시를 쓰려면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어야 했으니 그가 적격이었다. 나는 김지하에게 동빙고동 오적촌 이야기를 전하며 장시를 청탁했다. 그런데 5일 만에 300행이나 되는 긴 담시(譚詩·이야기 시)가 왔다. 그것도 삽화까지 그려서 말이다. 사흘 만에 썼다고 하기에 ‘역시 김지하’라고 생각했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볼기를 맞은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내 별별 이상한 도둑 이야길 하나 쓰것다./옛날도 먼 옛날 상달 초사흗날 백두산 아래 나라선 뒷날(…).’(오적의 첫머리)
김지하는 재벌(財閥), 국회의원(國會議員), 고급공무원(高級公務員), 장성(將星), 장차관(長次官) 다섯을 나라 팔아먹은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빗대 ‘오적(五賊)’이라 칭했다. ‘정인숙 피살’을 정치적 사건으로,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을 고위 공직자의 부패에서 기인한 것으로 묘사해 시사성을 살렸다.
김지하는 ‘오적’을 쓰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담시 같은 판소리 형태로 시를 써야겠다고 느낀 것은 대학생활 때부터 판소리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대학교 때 조동일 심우성 등과 함께 ‘우리문화연구회’를 했는데 당시는 소수이긴 했지만 민요 판소리 탈춤 무속 같은 것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였다. 마당굿을 하는 ‘말뚝’이라는 극회(劇會)도 만들었는데 연암의 ‘호질’ 같은 것을 각색해 공연하기도 했다.”
오적은 200자 원고지 40장 분량으로 사상계 18페이지에 걸쳐 실렸다. 김지하에게 “어떻게 그렇게 긴 시를 빨리 쓸 수 있었느냐”고 물으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청탁받고 쓰기 시작했으니 쓰는 데만 한 사흘 걸렸다. 이렇게 말하면 다들 놀라거나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진짜 꼭 사흘 걸렸다. 돌이켜보면 사흘 동안 어떤 영적 흥분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 고위 공직자들의 부패, 도둑질 방법, 호화판 저택의 내부 같은 것들은 전혀 본 적도 없고 고작 시중에 떠도는 소문들 몇 개를 들은 것뿐이었는데 막상 시를 쓰려고 앉으니 단박에 떠올랐다. 시를 쓰면서 긴장, 피로, 권태감을 느꼈다거나 착상 변경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도 아무리 이성적으로 따져보아야 알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을 ‘신명’이라고 생각한다. 신명이 내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다시 김승균의 말이다.
“‘오적’ 원고를 받아들고 걱정도 없지 않았다. 사상계가 광고 탄압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오적’이 나가면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원고를 받자마자 사장실 책상 위에 슬그머니 올려놓고 나왔다. 돌아와 보니 부완혁 사장(사상계 2대 사장)이 껄껄 웃어가며 읽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괜찮겠죠” 하면서 OK 사인을 해 주었다. 어려운 한자가 많아 활자를 새로 만드느라 편집이 늦어져 사상계는 4월 말에야 출간됐다. 책은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초판 3000부가 삽시간에 매진됐고 재판(再版) 요구가 빗발쳤다. 요샛말로 대박이 난 거였다. 정부에서도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
오적 필화 사건은 5월 중순 국회에서 신민당 의원이 대정부 비판 발언을 하며 시 ‘오적’을 낭독하는 일이 있었고, 이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상계를 가져오라 해서 읽고는 “이게 애국이야” 하며 집어던졌다는 이야기가 돌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넘어가는 것 같았다. 마침 1970년 국제펜클럽 서울대회를 앞두고 있었던 터여서 문제삼을 경우 국제적으로 시인을 탄압하는 국가라는 망신살을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서 터졌다.
<22> 법정에 선 오적
당시 사상계에 재정후원을 했던 민주당 김세영 재정위원장(함태탄광 대표)은 당보 ‘민주전선’도 관리하고 있었다. 그는 1970년 6월 1일자에 시 ‘오적’을 당보에 게재해 평소 발행부수의 2배인 20만 부를 찍어 배포해버렸다. 오적 가운데 군 장성 대목은 빼 사실상 ‘사적(四賊)’이 되었지만 시 ‘오적’이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는 순간이었다.
김승균 전 사상계 편집장의 회고다.
“5월호가 발행되고 20여 일이 지난 뒤에 갑자기 김지하가 붙들려 갔다. 어디로 갔는지 확인이 안 돼 애를 태웠다. 그러다 다시 20여 일이 지났는데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보부에 붙들려 갔었는데 그의 신병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 그가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병원에 가두려고 잠시 집에 다녀오라고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이 틈에 김지하가 도망쳤다는 거다.”
김지하는 함석헌 선생 집으로 피신했다가 신세를 오래 지기가 곤란해 여관방으로 옮긴 뒤 김 전 편집장에게 전화를 한 거였다. 김 전 편집장은 사상계 부완혁 사장에게 바로 보고를 했고 김 민주당 재정위원장의 도움을 받아 김지하를 서울대병원에 입원시켰다. 다시 김 전 편집장의 말이다.
“김지하를 입원시키고 사무실로 돌아가 장부 정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정보부가 들이닥쳤다. 어디론가 끌려가 매질을 당하는데 재킷 속에 넣어둔 환자 보호자증이 내내 신경 쓰였다. 발각되면 김지하 소재가 파악될까봐 화장실로 가서 그것을 침으로 삼키느라 고생한 기억이 난다.”
김지하는 다시 붙들려 간다. 부완혁, 김승균, 민주전선 주간 김용성도 함께였다. 사상계는 폐간됐다.
오적 재판은 100일간이나 이어지면서 전 국민적 관심을 끌었다. 법정은 늘 만원이었다. 신문에도 대서특필되면서 미국 유럽 일본에까지 알려졌다. 오적은 당시만 해도 무명 시인이었던 김지하를 당대 최고 스타로 만들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 씨는 1999년 8월 12일자 서울신문에 게재한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69년 갓 시인이 된 김지하를 알고 있었던 사람은 서울대 출신을 비롯한 극소수였다. 하지만 ‘오적’ 사건으로 그는 분단 이후 최대 저항시인으로 급부상했다. 막상 공판이 열리고 보니 … 탁월한 이론가에다 말솜씨까지 갖춰 변호인이 질문만 해주면 되었다. … 당대 민권 변호인이었던 태륜기 홍영기 한승헌을 비롯한 여러 변호사가 법정을 뜨겁게 달궜고, 방청석에는 함석헌 장준하 안병욱 등을 비롯한 문인, 민주인사, 운동권 출신들이 총집결했다. 대법정에서 열렸던 ‘오적’ 공판은 김지하의 익살과 달변으로 마치 만담장이라도 된 듯한 분위기 때문에 언제나 초만원이었다.”
한승헌 변호사도 한국일보 2009년 1월 29일자에서 당시 법정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검찰이 오적에 대해 ‘남한 사회의 빈부격차를 부각시켜 계급의식을 고취한 용공작품’이라고 하자 김 시인은 ‘오적이 있으니까 오적을 썼을 뿐’이라는 명답을 앞세우고 이렇게 반론했다. ‘내 시를 자꾸 용공이라고 하는데, 부정부패 그 자체가 이적이 될지는 몰라도 그것을 비판하는 소리가 이적이 될 수는 없다.’”
투옥은 길지 않았다. 김지하를 비롯한 피고인 4명은 모두 보석으로 9월 8일 석방된다.
김지하가 교도소 문을 나서는 날, 교도소 앞은 그를 보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러 사람들이 자기 차에 타라고 김지하를 끌었다. 그는 “장준하 선생의 차를 탔다”고 한다. 장준하가 누구인가. 사상계 발행인으로 이미 8년 전인 62년 막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을 수상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극언을 서슴지 않아 지성과 용기를 가진 지식인으로 추앙받던 인물 아닌가. “눈을 떠보니 스타가 되어 있었다”는 말은 당시 김지하에게 해당된 말이었다.
당시를 회고하는 김지하의 말이다.
“그날 이후 ‘곁길로 가지 말자! 똑바로 가자! 들뜨지 말자!’를 명심하고 또 명심했다. 하지만 매스컴도 톱스타로 대접했고 가는 곳마다 ‘왕자’ 대접을 받았다(웃음). 심지어 택시 운전사나 찻집 주인들까지 나를 알아보았다. 장안의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직간접으로 연락해 만나자 했고, 밥과 술을 원 없이 사주었다. 나는 그때 서울 바닥에 ‘상류’라고 부르기도 뭣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로는 과분한, 어떤 장소, 어떤 집단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속에 나 같은 촌놈을 끼워주다니, 서울이 이제야 나를 허용하는 구나…. 솔직히 나는 당시만 해도 칭찬에 굶주리고 명예에 굶주렸던 청년이었다.”
김지하는 매일 사람들에 이끌려 세상 밖으로 나왔고 번번이 술에 취했다. 마침 출판사 한얼문고에서는 그의 첫 시집 ‘황토’가 간행됐다. 70년 겨울 출판기념회가 열린 신문회관(현 한국프레스센터)에는 명사들이 줄지어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여기서 잠깐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전하자. 김지하가 당시 명성을 이용해 술집 얼굴마담을 하게 된 사연이다. 송철원 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의 회고다.
“무교동에서 식당을 하던 경기고 선배가 운영이 신통치 않자 영업상담을 해 왔다. 그래서 내가 김지하에게 ‘우리 주변에 술 먹을 사람은 무지 많은데 돈은 없으니 유명해진 네가 얼굴마담을 하면 여럿이 공짜로 술도 실컷 먹고 (운동) 자금도 마련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김지하도 쾌히 승낙했다. 우리는 선배의 식당을 술집으로 바꾸고 인테리어도 독특하게 꾸몄다. 구들장으로 식탁을 만들고 대나무 통으로 술통을 삼고 내부를 동굴 분위기로 만든 뒤 술집 이름을 ‘석기시대’라 붙였다. 잡지 ‘썬데이서울’에 김지하 얼굴까지 실은 광고도 냈다. 모친이 ‘외아들을 함부로 돌린다’고 우리에게 욕을 바가지로 했던 기억이 난다(웃음). 어떻든 ‘석기시대’는 대박을 쳤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다시 송철원의 말이다.
“장사가 잘되니까 주인이었던 선배의 태도가 달라졌다. 운동권 학생들에게는 돈을 안 받겠다고 해놓고 받질 않나, 이익금을 민주화 운동 자금으로 준다는 약속도 안 지켰다. 결국 문을 닫았다. 하지만 좀 미련이 남았다. 그래서 아예 술집 주인과 동업을 하기로 하고 김지하와 함께 ‘레지스탕스’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하지만 1년 만에 망했다”
이유는 ‘공짜 술’ 때문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하도 시도 때도 없이 퍼 마셨다(웃음). 어느 날은 ‘금일 휴업’이라고 써 붙여놓고 김민기(극단 학전 대표) 김지하 나 셋이서 이틀인가 사흘인가를 내리 마셨다(웃음). 외상도 많았다. 운동권 친구들이 돈이 떨어지면 밀어닥쳤다. 술집 이름부터가 저항적 냄새가 나는 데다 김지하가 하는 술집이라는 소문이 나자 정보부원들까지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옆 테이블 사람들이 무슨 말 하나 귀를 쫑긋 세우고 밤새 죽치고 있으니 손님들이 올 리가 있겠나.”
살얼음판 같았지만 그래도 ‘낭만’이란 게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들이다.
<23> 1970년이라는 해
오적 필화사건은 1970년 민주화투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부정부패를 고발한 ‘오적’은 이미 그때부터 조짐을 보인 압축성장의 그늘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4월 와우아파트 붕괴에 이어 12월 여객선 남영호가 적정 화물량의 3배가 넘는 짐을 싣고 가다 침몰해 무려 326명이 물에 빠져 숨진 사건은 빨리빨리 속도전이 낳은 대형 인재였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10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1970년대를 연 70년은 한국 산업화의 양대 축이 만들어지는 역사적인 해이다. 훗날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 치적으로 평가받는 포항제철이 4월 1일 첫 삽을 떴고 7월 7일엔 역사적인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었다. 대망의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한 해도 1970년이었다.
‘대통령의 경제학’을 쓴 이장규는 책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포철과 경부고속도로는 산업구조 면으로나 경제발전 단계 면에서나 가장 중요한 기초산업이요, 사회간접자본으로 한국경제의 제조업과 물류의 기본 틀을 완전히 바꿔놓았다.…전문가들이 등을 돌렸고 여론에서도 줄기차게 반대하고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박정희가 집념으로 초지일관해서 성공시켰다. 박정희는 말 그대로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역사에서 가정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만약 두 사업이 당시의 반대에 굴복해서 무산됐다면 지금의 한국경제는 어떻게 됐을까.’
철강업은 전후 식민지에서 해방된 개발도상국들이 ‘첫째가 독립, 두 번째가 항공로, 그 다음이 바로 제철공장 건설’이라고 말할 정도로 공통된 갈망이었다. 철강이야말로 공업화의 상징이며 정치적 독립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포철 착공식 후 닷새 뒤인 70년 4월 6일자 박창래 기자의 기사를 통해 ‘10년 곡절, 난산의 이력, 포항종합제철 기공까지’라는 제목으로 지난 10년의 역사를 자세히 싣는다.
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에 제철소를 만들자는 계획은 이미 자유당 말기 이승만 정부 때이던 1958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상공부는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전담부서 ICA(국제협조처) 자금 3000만 달러와 국내 자본 150억 원을 들여 강원도 양양에 연산 20만 t 규모의 철강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하지만 4·19로 이 계획은 유산되고 이후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잇는다. 박 의장은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면서 62년 5월 이정림 이양구 남궁연 설경동 등 유수의 재벌에게 명령(?)해 ‘종합제철민간투자공동체’를 구성한다. 외자 8000만 달러와 내자 30억 원으로 연산 32만 t의 공장을 짓고 미국 ‘부르녹스’사를 상대로 교섭을 벌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본조달과 합작조건이 맞지 않아 무산된다.
박정희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기술도 중요하지만 막대한 재원이 관건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1966년 12월 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5개국 7개사로 구성된 ‘대한종합제철차관단’(KISA)을 구성해 외자를 조달하기로 한다. 1억1000만 달러를 유치해 60만 t 규모의 공장을 짓겠다는 것이었다.
공장입지를 포항으로 정하고 KISA와 종합제철건설계약을 맺을 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69년으로 접어들면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다들 한국경제가 제철사업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나선 것이다. 차관을 주기로 했던 미국과 서독 정부가 거절한 데 이어 세계은행까지 나서서 “한국에 종합제철을 세우는 것은 시기상조요, 경제성도 의심된다”고 한 것. 세계은행 유진 블랙 총재는 연차총회 석상에서 “개발도상국들의 고속도로 건설이나 종합제철사업 추진은 국가원수의 기념비 건립이나 다름없다”고 비아냥조로 말하기까지 했다.
결국 돈은 일본에서 나왔다. 장기영 박충훈에 이어 바통을 이어받은 김학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이 일본을 오가며 설득해 우여곡절 끝에 일본이 주기로 한 청구권 자금 중 일부를 농업용수 개발이나 다리 건설 등에 쓰기로 약속했던 명목을 바꿔 총 1억1948만 달러를 제철사업으로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박정희는 포철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초기 자본금 140억 원은 정부와 대한중석이 3 대 1 비율로 했으며 정부는 공업단지를 조성하는 비용에서부터 공단 진입로, 철도, 항만, 공업용수 등 일체 사회간접자본을 모두 예산으로 대줬다. 또 시중은행이 빌려준 대출을 얼마 후 주식으로 전환해 이자부담을 탕감해줬으며 이자를 못 받게 된 주주인 은행들에 마땅히 줘야 할 배당금도 새 투자를 위해 1982년까지 한 푼도 주지 않도록 했다. 이장규의 말대로 ‘박정희는 포스코의 실질적인 창업자이자 CEO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도 곡절이 많았다. 야당은 “자가용족 부자들의 전용도로다. 혈세낭비”라고 비판했고 경제기획원조차 정부 총예산이 1500억 원인 상황에서 이 중 3분의 1이 드는 사업은 무리라고 비관적이었다. 건설부 내부에서조차 무리한 계획이라며 반대가 적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박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꼼수라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정부 예산안이 국회에 제출된 상태에서조차 “전 부처 예산을 일괄적으로 5%씩 깎아서 고속도로 예산을 지원하라”고 밀어붙였다. 언론들이 ‘날치기 통과’라고 일제히 비난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고속도로 공사는 현대건설을 비롯한 민간건설업체에 맡겼지만 현장 총괄 사무소장에 공병 출신 토목전문가 예비역 육군소장이 임명됐다. 마치 군사작전 같았다. 다시 이장규의 책을 인용한다.
‘포병 출신이라 독도법이 능한 박정희는 혼자 지도를 봐가면서 노선 결정을 비롯해 용지매입문제에까지 지휘봉을 잡았다. 심지어 시중은행장들을 비밀리에 소집해 수용할 용지의 시가감정을 보고받는가 하면 용지매입가격까지 지시했다. … 마침내 68년 2월 1일 착공에 들어간 경부고속도로는 70년 7월 7일 428km가 뚫린다. 누구도 이처럼 2년 5개월 만에 번개처럼 뚫릴 줄은 몰랐다.’
박 대통령은 대구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준공식에서 “가장 싼값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예술작품”이라고 자랑했다. 국민들도 자신감에 들떴다. 70년 7월 7일자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산을 뚫고 강을 건너 들을 누비면서 아스팔트대로가 한국의 중추를 관통시켰다. 이 어려운 작업이 우리 기술진에 의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것은 불굴의 의지와 땀과 국민 부담이 오늘의 개통식을 가져온 원동력이었다. 벅찬 것을 안 느낄 수가 없다’고 했다.
빨리빨리 개통을 서두르느라 “고속도로가 누워있길 망정이지 아파트처럼 세워졌더라면 벌써 무너져 내렸을 것”이란 야당의 주장대로 하자도 많았다. 하지만 한국의 놀라운 집중력과 실행력은 당초 차관을 거절했던 개도국 지원기구인 IBRD가 마음을 바꿔 전주∼순천 간 호남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 새말∼강릉 간 영동고속도로 건설에 적극적으로 차관을 제공하는 데 기여한다.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는 동안 노동자들의 고통도 깊어갔다. 마침내 뇌관이 폭발하니 전태일의 분신이었다.
▲1970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소 착공식에서 버튼을 누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오른쪽이 김학렬 부총리, 왼쪽이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이다. 동아일보
<24> 전태일 분신
1970년이 저물어가던 11월 13일이었다.
김지하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아우이자 그 전해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조영래가 급히 보자고 해서 명동성당 건너편 골목 입구 이층 찻집으로 들어섰다. 장기표 이종률 심재택도 함께 있었다. 다들 표정이 침통했다. 김지하가 눈빛으로 ‘무슨 일이냐’ 묻자 조영래가 입을 열었다.
“오늘 낮에 동대문 평화시장 앞길에서 전태일이라는 노동자가 분신자살했습니다. 시신이 지금 명동성당 구내 성모병원에 있는데 내일 서울대 법대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시신을 앞세워 평화시장을 거쳐 청와대까지 행진하려 합니다.”
훗날 조영래가 쓴 ‘전태일 평전’에는 전태일의 최후가 이렇게 그려져 있다.
‘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반경,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을 가슴에 품고 내려왔다. 갑자기 옷 위로 불길이 확 치솟았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 그는 까맣게 탄 얼굴 근육을 실룩거렸는데,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 어머니는 내내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태일은 목이 마르다면서 물을 달라고 수없이 졸라댔다. 그러나 어머니는 물을 마시면 화기(火氣)가 입속으로 들어가 영영 살릴 수 없게 된다는 생각에 줄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서 갈증이라도 면하게 해주려고 가제에 물을 적셔 입을 축여주었다. … 전태일은 한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듯하더니 눈을 떠 힘없는 소리로 “배가 고프다”고 했다. 평생을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보지 못했던 그였다. 배가 고프다는 한마디, 그의 스물두 해의 고통을 말해주는 이 한마디가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김지하는 조영래에게 “내가 할 일이 뭐냐”고 물었다. 조영래가 “조시(弔詩)를 써 달라”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김 선배는 ‘오적’ 때문에 중앙정보부와 검찰이 좌경 문인으로 몰고 있다. 이번에 조시까지 쓰면 틀림없이 빨갱이 시인으로 못 박힌다. 그러면 앞으로 할 합법 투쟁에서 선배가 일을 못 한다”는 거였다.
일행들이 논쟁을 벌이는 사이 김지하는 슬그머니 구석 자리로 옮겨갔다. 그리고 종이를 앞에 놓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제목을 ‘불꽃’이라 붙였다. 조시는 후배들이 대신 읽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11월 14일 서울대 법대에서 열려던 전태일 장례식은 11월 20일에야 법대 학생장으로 열린다. 조영래는 이날 김지하의 시 ‘오적’을 연상시키듯 ‘전태일을 죽인 박정희 정권, 기업주, 어용노총, 지식인, 모든 사회인 등 5대 살인자’를 고발하는 시국 선언문을 썼다.
그렇다면, 당시 전태일이 일했던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근로 상황은 어땠을까. ‘전태일 평전’은 이렇게 전한다.
‘보통 아침 8시 반 출근에 밤 11시 퇴근으로 하루 평균 14∼15시간 일했다. 야간작업을 하는 일도 허다하며, 심한 경우는 사흘씩 밤낮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다. 업주들이 어린 시다들에게 잠 안 오는 약을 먹이거나 주사를 놓아가며 밤일을 시키는 것도 이런 때이다.… 손목이 시어 견딜 수가 없고 심한 경우에는 점심 먹을 때 젓가락질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미싱사의 손가락 끝은 살갗이 닳고 닳아서 지문이 없다. … 손가락 끝이 빨개져 누르면 피가 솟아나온다. 하루 일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어지럼증이 나고, 장딴지가 띵띵 붓고 몸 구석구석이 쑥쑥 아리며, 힘이 빠져서 걸음을 걷기가 힘들다. 퇴근할 때 구두를 신으려면 부어 오른 발등이 구두에 들어가지 않아 억지로 구두끈을 졸라맨다. 미싱사들의 발등에는 거의 예외 없이 구두끈 자국이 남아 있다.’
1970년도에 전태일이 조사한 바로는 평화시장의 경우 1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건물에 환기시설이 하나도 없었다. 나쁜 작업환경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업주들이 다락에 설치한 공장이었다. 조영래는 ‘전태일 평전’에서 ‘이 다락방 작업장이야말로 한국의 저임금 경제가 딛고 선 냉혹한 인간 경시, 인간 비료화(肥料化)를 상징한다’고 썼다.
‘한창 발육기에 있는 어린 여공들이 더이상 작업을 할 수 없게 되면 기업주들은 게으름 부린다고 나무라기 일쑤였으며, 병이 깊어져 일도 못하게 되면 치료는커녕 사정없이 해고시켜버렸다. 몸이 아픈 여공들이 전태일에게 통증을 호소할 때 전태일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는 돈을 털어 약을 사주거나 여공이 할 일을 자신이 대신하거나, 그럴 형편도 못 되면 그저 참고 일하라고 달래는 것뿐이었다.’
조영래는 전태일 분신 소식을 듣고 법전을 덮었다. 조영래가 평전에 쓴 ‘전태일이 바라는 세상’은 조영래가 바라는 세상이기도 했다.
‘전태일에게는 참으로 바라는 것이 있었다. 인간의 나라였다. 약한 자도, 강한 자도,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도, 귀한 자도, 천한 자도, 모든 구별이 없는 평등한 인간들의 ‘서로 간의 사랑’이라는 참된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세상, 덩어리가 없기 때문에 부스러기가 존재할 수 없는 사회, 서로가 다 용해되어 있는 상태, 그것을 전태일은 바랐다. … 그가 항상 ‘나의 전체의 일부’라 불렀던 소외된 밑바닥 인간들, 저주받은 현실이 쓰다 버린 쪽박들, 불쌍한 현실의 패자들을 전태일은 너무나도 뜨겁게 사랑하였다.’
70년대 한국산업화의 그늘을 상징하는 전태일의 분신은 한국 사회운동에도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정치인, 명망가, 지식인의 전유물이던 민주화운동이 소외받는 사람과 서민들에게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분신 사흘째 되던 1970년 11월 16일 서울대 상과대학생 400여 명이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한 것을 시작으로 대학가가 달아올랐다. 11월 20일 서울대에 무기한 휴교령이 떨어졌다. 기독교계까지 들고 일어났다. 11월 25일 신구교 합동 추도 예배에서 김재준 목사는 “오늘 우리는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다”고 말했다.
전태일의 죽음은 빈사상태나 마찬가지였던 한국 노동운동이 일어나는 불쏘시개가 됐다. 신문, 방송, 잡지 등도 특집기사와 논설을 쏟아냈다. 조영래의 말대로 “마치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던 노동문제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생겨나기나 한 듯했다.”
<25> 유신의 서막, 3선 개헌
시계를 잠시 되돌려 1969년 5월 7일 청와대로 가보자.
당시 공화당 대변인이었던 김재순 의원이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로 들어갔다. 김 의원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는 (3선 개헌) 반대입니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나, 한 번만 더하고 그 이상은 안할 테야. 다음에 (김)종필이한테 넘겨줄 거야. (그러니) 도와줘.”
김 의원이 이에 지지 않고 “그러고 나서 또 하신다고 하면 어떡하시겠습니까?”라고 따지듯 말하자 박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그러면 내 성을 갈겠어.”
이상은 ‘정구영 평전’(예춘호 지음) 400쪽에 실려 있는 대목이다. 당시 헌법이 보장한 대통령의 임기는 71년까지였다. 임기는 4년으로 두 번까지 허용됐다. 세 번 연임을 하려면 헌법을 바꿔야 했다.
‘정구영 평전’에 따르면 3선 개헌 이야기는 1968년 10월 무렵부터 공화당 안팎에서 귀엣말로 오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9년 새해 벽두인 1월 7일 길재호 사무총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나라 실정에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리더십이 있어야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국민적 과업을 완수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대통령 연임 금지 조항을 포함해 현행 헌법에 문제가 있다면 검토할 수 있다. 나라를 위해 헌법이 있는 것이지 헌법을 위해 나라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발언이 각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림으로써 공식화된다.
이후 5월경부터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개헌안 찬성 서명을 각개격파 식으로 받기 시작했던 공화당 내 개헌추진 세력들은 박 대통령에게 “도저히 설득이 안 되는 사람들이 있으니 각하께서 직접 설득해 달라”고 청한다. 이에 따라 당 대변인이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 의원을 대통령이 직접 만난 것.
김 의원은 청와대 회동 이틀 뒤인 5월 9일 ‘개헌 문제에 관해 국민의 진지한 고려가 있기 바란다’고 성명을 발표한다. 공화당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적인 개헌 논의를 촉구한 것이다.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를 이슈로 내걸고 6·3시위를 했다가 궤멸 상태에 빠졌던 학생운동권이 ‘3선 개헌 반대’를 이슈로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개헌으로 가는 길은 공화당 안에서도 쉽지 않았다. 당 발기인이자 창당 준비위원이었으며 총재, 당의장까지 지낸 원로 정구영 의원(1978년 작고)이 극력 반대하고 나선 것.
청람 정구영은 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법조인이자 정치인으로 국민의 신망이 두터웠던 원로였다. 일제 때 검사를 거쳐 변호사가 되었는데 변론이 치밀하고 정곡을 찌르는 것으로 유명했다. 4·19의 도화선이 된 3·15 마산시위 때에는 대한변협 회장으로 진상조사단을 현지로 파견한 뒤 “민주주의의 비참한 도살행위”라고 규탄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재선거 실시를 요구하기도 했다.
5·16 후 박정희 정부는 6·3으로 위기를 맞자 민심 수습 차원에서 청람을 영입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청람은 현안이 있을 때마다 박 대통령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초반에는 그의 말을 경청하던 박 대통령도 청람이 청와대 비서실의 전횡을 비판하고 월남 파병을 반대하자 차츰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3선 개헌으로 정면충돌하게 된 것이다.
청람은 개헌에 찬성해달라고 자신을 설득하러 온 보안사령관 김재규 소장에게 이렇게 비감한 심정을 전한다.
“나는 내 나름대로 군정 연장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네.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정권교체네. 이건 지상명령이네. 장기집권은 부정부패를 수반하네. 권력이 1인체제로 되고 장기화되면 부패가 생겨나고 그리 되면 바로 그 부정부패 때문에 권력을 내놓지 못하게 된다네. 지금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있네. 나도 (박)대통령의 영도력을 신뢰하고 그분이 매우 훌륭하다는 점도 인정하지만 부정부패를 일소하지 못한 점에서는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네. 사리가 이러한데 어떻게 3선 개헌을 할 수 있는가? 이 나라의 헌법은 존중되어야 하네.”(‘정구영 평전’)
결국 청람은 3선 개헌안이 통과되고 1972년 유신헌법까지 등장하자 1974년 1월 공화당을 아예 탈당해 버린다. 원하기만 하면 집권 여당의 원로 대접을 받으며 편한 노년을 보낼 수도 있었건만 같은 해 12월 ‘민주회복국민회의’가 만들어지자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4년 뒤 세상을 떴다.
청람은 한마디로 ‘선비’였다. 생전 한승헌 변호사와의 대담에서 그가 말한 ‘지식인의 자세’는 요즘 들어도 울림이 크다.
“지식의 양(量)도 물론 중요한 시대다. 그러나 아는 지식을 얼마나 올바르게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무지의 폐해도 무섭지만 식자(識者)의 자세에 따라서는 유식(有識)의 해악이 더 크다는 걸 느낀다.”
다시 시계를 돌려 1969년 9월 14일 일요일 새벽 2시 반.
본회의장 길 건너편 국회 제3별관에 모인 공화당 의원들은 3선 개헌안 국민투표법안을 자신들만이 참가한 단독 국회에서 2분 만에 통과시켰다. 야당은 무효를 주장했고 학생들도 격렬한 시위를 벌였으나 개헌안은 10월 17일 국민투표에 부쳐져 65.1%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하지만 서울만 해도 40%가 투표에 참가하지 않았고 참가자 가운데 53%가 반대표를 던졌다.
이번에도 부정 불법선거 시비가 컸다. ‘행정기관 사업체 통해 대리투표’(1969년 10월 15일자 동아일보) ‘곳곳서 무더기 표 발견, 선관위원장 도장 없는 찬성표도’(10월 18일자 동아일보) ‘공무원 등 8명 사전대리 투표 혐의로 구속, 16명 입건’(10월 18일자 경향신문)
신민당의 유진오 총재는 국민투표 전 “3선 개헌은 민주주의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이며 이 다리를 넘어서는 날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되찾을 길이 영원히 막힐 것”이라고 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3선 개헌안을 국민투표로 승인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2년 뒤인 1971년 4월 세 번째 임기에 도전하는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쉽지 않은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26> 71년 4·27 대통령선거
1970년 9월 29일 서울시민회관(지금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 씨가 이듬해 4월에 치를 대통령 선거 후보로 지명됐다.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40대 후보 3명이 경합한 선거에서 1차에서는 김영삼 후보가 최다 득표를 했지만 과반수를 넘지 못해 2차 투표까지 가 김대중 후보가 역전하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언론들은 “보수야당의 전통과 체질을 감안할 때 40대의 김대중 씨를 대선후보로 지명한 것은 하나의 혁명”이라고 평가했다.
3선 개헌이라는 험난한 고비를 넘은 박정희 대통령(54)과 김대중 후보(47)가 맞붙은 71년 4월 27일 (7대)대통령 선거 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 살겠다 갈아보자’ ‘논도 갈고 밭도 갈고 대통령도 갈아보자’를 구호로 내건 김대중 후보는 바람을 일으켰다. 유세에 모인 인파가 보통 10만 명이 넘었고 서울 장충단 공원 유세에서는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그러자 중앙정보부까지 나섰다.
‘이후락 정보부의 또 다른 주요 임무는 김대중 연설 청중 숫자에 관한 보도통제였다. 차장보 등이 직접 동아일보를 드나들며 연일 김대중의 유창한 웅변에 쏠리는 인파가 보도에 부각되지 않도록 했다. 그 바람에 4·27선거를 열흘 앞두고 기자들의 불만이 폭발, ‘정보요원 신문사 출입금지’ ‘정보부 언론간섭 중지’를 결의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박 대통령도 열심히 전국을 돌아다니며 호소했다. 그런데 선거가 막바지로 갈수록 위기감이 감돌자 대통령 주변에서조차 “이번 선거를 끝으로 다시 입후보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않으면 표를 모을 수가 없다”고 직언했다. 박 대통령은 선거 이틀 전인 71년 4월 25일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가진 마지막 유세에서 “야당 사람들이 ‘이번에도 박 대통령을 뽑으면 총통제를 만들어 죽을 때까지 해먹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한 번 더 뽑아 달라’는 정치연설은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언론들은 이를 두고 ‘4선 불출마 선언’이라고 못 박았지만 이미 박 대통령 마음에는 72년 유신으로 상징되는 ‘헌정중단’이라는 일대결심을 그때부터 생각했을 거라는 분석도 있다.
71년 봄 대학가는 개학하자마자 교과목으로 교련과목을 신설하는 것에 반기를 든 ‘교련반대운동’으로 달궈지기 시작했다. 학생 운동가들은 ‘1971년 대선’을 박 정권의 영구집권 기도를 궤도에 올리느냐, 아니면 국민 저항에 직면해 퇴각시키느냐 하는 역사적 분수령이 되는 해로 규정했다.
다음은 장기표 씨가 2009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나의 꿈 나의 도전’이란 제목의 수기 중 일부다.
“71년 4월 8일이었다. 서울대 총장 시절 데모 학생들에 대한 중징계로 유명했던 유기천 교수가 형법학 강의시간에 ‘지금 박정희 정권이 군 고위 장교들을 대만에 보내 총통제를 연구시키고 있다’고 폭로했다. 그렇잖아도 박 정권이 영구집권을 획책하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터에 이처럼 상당히 구체적인 정황을 밝혔으니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유 교수는 그날 ‘정의가 실종된 나라에서 법률 강의를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더이상 강의를 하지 않았다. 유 교수의 총통제 발언은 학생들의 반독재투쟁을 크게 고무시켰다.”
4월 14일 서울대 상대에서는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전학련) 창립대회도 열린다. 위원장, 대변인, 중앙위원회만 있을 뿐 하부 조직은 없어 민주화투쟁을 체계적으로 지휘할 수는 없었으나 불법 부정선거를 감시하겠다며 전국적으로 선거참관인단을 조직해 각지로 내려 보냈다.
국제적인 관심을 끌기도 했던 4·27 선거 결과는 박 대통령의 ‘어려운 승리’였다. 표차는 불과 94만 표. 한 달 뒤(5월 25일)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여당은 고전을 면치 못해 113 대 91로 백중세를 보였다.
당시 김지하는 서울을 떠나 아예 원주에 정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71년 4월 10일 ‘명륜동 일기’라는 글에 이렇게 썼다.
‘나는 노예인가? 나는 자유로운가? 어디에 얽매여 있는가? 어디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가? 지금 내가 결단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떠나자, 떠나야 한다. 서울을 떠나고 내 마음 속의 이 들뜬 집념을 떠나야 한다. 모든 지난날은 잊어버리자.’
‘오적’ 필화 사건으로 가는 곳마다 ‘스타’ 대접을 받던 생활이 모두 헛되다는 것을 느끼면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결연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대통령 선거가 끝났지만 정국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후유증이 심했다. 무엇보다 한국 대선에서 최초로 불거져 나온 지역감정 때문이었다. 동아일보 4월 30일자 보도다.
‘이게 어디 투표야. 경상도 전라도 싸움이지, 이러다간 동한(東韓) 서한(西韓)으로 갈라지는 것 아냐. 마지막 득표상황을 지켜보던 유권자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이렇게 내뱉었다… 어쩌면 민족분열의 무서운 씨앗마저 잉태할지도 모를 말초적 지역감정이 우리의 선거사상 처음으로 심각하게 노출된 것이다. 공화당은 ‘전라도 대통령을 뽑으면 경상 푸대접 내지는 보복이 온다’고 했고 신민당은 ‘이번에는 반드시 전라도에서도 대통령을 내어 푸대접을 면해야 한다’고 했다.…선거는 끝났지만 우리 앞에 제기된 문제들은 너무도 무겁고 심각하다.
정권 입장에서는 지역감정이야 지역 간의 문제라고 넘겨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상 4·27 대선 후 가장 큰 문제는 비록 선거에서는 이겼지만 박 대통령이 향후 큰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됐다는 점에 있었다.
우선 대한민국 정치에 거대 야당과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정치 스타가 만들어지면서 집권기간 내내 그들과 싸워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내분과 무능으로 국민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야당은 70년 김대중 김영삼 같은 40대 리더들로 세대교체를 이뤄내면서 상당한 지지를 받게 된다. 4·27 대선 이전까지는 학생들만 상대하면 되었던 박 정권 입장에서는 이제 제도권 권력에 정면도전하는 거대 정치세력과 상대해야 하는 새로운 부담을 안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훨씬 더 중대한 반대와 도전을 헤쳐 나가야 하는 출발점에 서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집권층 내부의 균열까지 시작됐다. 집권층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판사들이 대거 들고일어나는 사상 초유의 ‘사법파동’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대선에서 이긴 지 불과 3개월 만인 71년 7월 한여름의 일이었다.
<27> 사법파동
1971년 7월 정국을 강타한 ‘사법파동’은 한마디로 검사가 정권에 밉보인 판사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판사들이 대거 집단사표를 낸 사건이다. 언론들은 ‘국가 중대 사건’이라고 연일 대문짝만 하게 보도했다.
사건의 발단은 1971년 7월 28일 서울지검 검사가 서울형사지법 3부 재판장 이범렬 부장판사, 최공웅 판사, 이남영 서기관 3명이 반공법 위반 항소사건을 심리하면서 출장길에 변호사로부터 왕복여비 숙식비 등 10만 원 상당의 향응을 제공받았다며 구속영장을 청구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 판사가 당시 정치적 분위기(?)와는 다른 판결을 내렸던 당사자였던 것.
이 판사는 1971년 1∼7월 유죄가 선고된 19건에 대해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으며 반공법 위반사건 5건에 대해서도 무죄 또는 일부 무죄를 선고했다. ‘사법파동’ 3개월 뒤 사표를 쓰고 변호사 개업을 한 인권변호사 홍성우는 서울대 한인섭 교수와의 대담집 ‘인권변론 한 시대’에서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며 이 판사의 행동이 정보부나 검찰에 미운털이 박혔을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나도 한번은) 집회를 주도한 학생 세 명을 선고유예로 풀어줬다. 그랬더니 검찰에서 난리가 났다. 한번은 또 독직사건에 연루된 청와대 직원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가 들어왔는데 박종규 경호실장이 사람을 보내 ‘구속 안 되게 해 달라’고 했다. 나는 더 심통이 나서 구속영장을 발부해 버렸다.”
당시 이 부장판사와 형제처럼 가까웠다는 홍 변호사는 “그는 아주 깔끔한 성품으로 동료 선후배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좋고 나쁜 것, 옳고 그른 것이 명백해 대충 타협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재판과 관련해서도 아주 강직하고 청렴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검사가 이 부장판사에게 미행까지 붙인 사실이 알려지자 판사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1차 구속영장이 기각되었지만 이 검사가 다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여론도 가만있지 않았다. 7월 29일자 동아일보는 ‘사법부의 위기’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판사들이 동료 판사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에 반발한 것이라고만 볼 일이 아니다. 무력한 법원의 행정부에 대한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불만이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 이번 기회에 사법부는 기필코 독립을 쟁취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 법조계의 지배적인 여론인 것 같다. … 검찰은 이 판사가 향응을 받았다는 것을 중시하는 것 같으나 사정을 알아보면 그렇게만 볼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 판사에게 접대를 했다는 변호사는 전직 판사 출신으로 얼마 전까지 동료 관계에 있었고 대학 동창생으로 개인적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고 한다. 따라서 뇌물수수라기보다는 우정의 표시라고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울지 모른다는 것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많은 법조인들의 해석이다.’ 사설은 이어 ‘백번 양보해 수뢰 혐의가 있다 하더라도 도주 우려가 없고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고 일단 영장을 기각했는데 동일한 구속영장을 다시 청구한 것은 법원에 대한 검찰의 감정적 태도’라고 했다.
2차 영장까지 다시 기각되고 재재청구가 들어오자 판사들이 일제히 들고일어섰다. 홍 변호사는 “다들 분에 차서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법원에 대한 아주 중대한 침해다, 차라리 우리가 쥐약 먹고 죽어버리자’고 했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마침내 7월 29일 서울형사지법 판사 39명의 집단사표를 시작으로 하루 만에 서울민사지법 40명, 대구지법 13명, 전주지법 군산지원 10명, 서울가정법원 4명을 포함, 총 150여 명의 판사가 사표를 냈다. 전국 법관 415명 중 3분의 1 이상이 사표를 낸 것이었다.
국회에서도 난리가 났다. 법무부 장관을 불러 밤늦게까지 질의를 했다.
판사들의 집단행동은 계속 이어졌다. 7월 30일 서울형사지법 유태흥 수석부장판사와 서울민사지법 박승호 수석부장판사가 공동 명의로 그동안 검찰이 사법권을 얼마나 침해했는지를 조목조목 나열하는 성명서를 내자 국민들도 충격을 받았다. 성명서 내용은 이랬다.
“그동안 검찰은 1.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해 검찰과 견해를 달리한 판사를 용공분자로 단정, 심리적 압력을 가했으며 2. 행정부에서 관심이 있는 사건을 맡은 검사가 담당 판사에게 자신의 명맥이 달려 있다며 판결 내용을 미리 알려 달라 하고, 말을 듣지 않을 경우 판사실에 도청장치까지 했으며 3. 무죄가 선고되면 판사를 공공연히 비난하고 (판사의) 예금통장까지 조사했으며 4. 도청, 미행, 사찰 등을 통해 판사들을 함정 수사했고 5.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직접 판사실에 찾아와 발부를 강요했으며 6. 법원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진상조사를 하기도 전에 판사를 피의자 취급해 모욕 협박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7. 이번 (이 판사) 사건에서도 미행, 함정수사, 피의사실 공표, 영장 계속 신청 등 기존에 해온 사법부에 대한 위협을 해왔다.”
8월 2일자 동아일보는 ‘사법부를 지키자’는 제목으로 검찰을 맹비난했다.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지 어느 개인, 어느 정당을 위한 봉사자가 아니다. 검찰의 공소권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국가권력이다 … 검사들은 애국심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나 진정한 애국심은 어느 개인이나 정당, 정부에 대한 것이 아니며 민주주의라는 제도 그 자체에 대한 신뢰와 충성이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이 나섰다.
8월 1일 법무부 장관을 불러 판사 등에 대한 수사 중지 지시를 내리는 한편 사법부는 민복기 대법원장이 수습하도록 통보한 것이다. 결국 8월 27일 대법원장 주재하에 열린 재경 전체 법관회의에서 판사들이 사표 철회를 결의하면서 1971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사법파동은 1개월 만에 자체 수습 형식으로 매듭지어진다.
그러나 박 정권은 파동의 주역이었던 판사들에게 가혹한 인사조치로 화답했다. 대부분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되거나 좌천되자 사표를 썼다. 반면 검사들은 지방으로 전출되었다가도 1년이 채 못 되어 요직으로 복귀했다. 사법파동의 당사자였던 이 부장판사도 파동 직후인 1971년 9월 변호사 개업을 한 뒤 인권옹호 운동과 집필 등 열정적으로 일하다 64세에 작고한다.
한국의 사법부는 이후 더욱더 암흑의 터널로 들어간다. 유신정권이 출범한 후에는 아예 내놓고 정보부원들이 법원에 드나들며 상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71년 7월 ‘사법파동’은 법원으로 대표되는 사법권과 검찰로 대변되는 정치권력 사이에서의 권력투쟁적 성격을 갖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집권층 내부 심장부에서 정권에 반기를 든 사건으로 기록된다. 결말은 흐지부지하게 마무리됨으로써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와중에 박 정권은 이번에는 최하층 민중들이 들고일어나는 또 다른 대형 사건과 맞닥뜨린다. 바로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최대 소요사태로 기록된 ‘광주대단지 사건’이었다.
<28> 8·10 광주대단지 사건
증조부가 노비였던 난쟁이는 서울 낙원구 행복동 무허가 주택에서 아내와 삼남매를 데리고 힘겹게 살아간다. 아내는 인쇄소 제본공장에 나가고 큰아들 영수는 인쇄소 공무부 조역으로 일했지만 차남 영호와 막내딸 영희는 학업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집을 철거하겠다는 철거통지서가 날아들고 며칠 후 쇠망치를 든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친다. 난쟁이 가족은 수대에 걸친 삶의 보금자리였던 집을 잃고 ‘아파트 딱지’를 손에 쥐지만 투기업자들 농간으로 입주권 값이 뛰어오르자 입주권을 팔아버린다. 하지만 전세금을 갚고 나니 남는 게 없다. 가출한 딸 영희는 투기업자에게 순결을 빼앗기고 어느 날 투기업자 가방 속 입주권과 돈을 갖고 행복동을 다시 찾는다. 그러나 난쟁이 아버지는 벽돌공장 굴뚝에서 떨어져 자살하고 난 뒤였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의 간략한 줄거리다. 1975년 처음 발표된 ‘난쏘공’은 지금까지 245쇄(2009년 현재)를 찍은 베스트셀러다. 박경리의 ‘토지’, 최인훈의 ‘광장’과 함께 20세기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난쏘공’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도시빈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난쏘공’이 나오기 4년 전인 71년 8월 10일 일어난 ‘광주대단지 사건’은 70년대 도시화의 곡절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언론들이 ‘민란’(동아일보 기사)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이 사건은 도시빈민들이 대거 들고 일어났다는 점에서 사회적 양극화를 전면에 드러낸 일이기도 했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동아일보 사회부 박기정 기자가 신동아 10월호에 쓴 ‘광주대단지’ 르포,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의 ‘8·10 광주대단지 주민 항거의 배경과 사회운동사적 의미’, 임미리 한국학중앙연구원의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의 재해석’ 논문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보릿고개’를 겪으며 기아에 허덕이던 농촌 주민들은 60년대 중반부터 너도나도 서울로 향한다. 1966∼1970년 무려 60여만 명이 이농(離農)해 서울에 정착했다고 한다. 서울에 거대한 판자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67∼1970년 총 14만598동의 판잣집이 세워졌다. 정부가 68년부터 용산역 인근 등 철도연변부터 철거를 시작하면서 70년까지 8만9692동이 강제 철거된다.
서울시는 철거 때마다 철거민들과의 잦은 충돌이 반복되자 아예 이들을 서울 외곽 수도권에 집단 이주시킬 계획을 세운다. 경기 광주군 중부면에 약 10만5000가구, 인구 50만∼60만 명이 살 수 있는 ‘광주대단지’를 만들기로 한 구상이 나오게 된 출발점이다.
초기 구상은 나름 거창했다.
단지 안에 학교는 물론 생활편의시설을 만들고 일자리를 해결해줄 공장까지 만들어 ‘자급자족 도시’를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용두동, 마장동, 청계천변 판자촌 주민 2만 가구가 시 청소차와 군용차에 의해 69년 5월부터 광주군 중부면 탄리, 단대리로 실어 날라진다. 이후 봉천동, 숭인동, 창신동, 상·하왕십리 빈민들도 집과 일자리를 갖는다는 희망에 부풀어 몰려들었다.
71년 8·10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광주대단지’에는 철거민 10만여 명(2만1372가구), 전매입주자 1만4000여 명(6344가구), 기타 전입자 1만3000여 명(2950여 가구)을 포함해 총 15만∼2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거대한 천막촌을 이루어 살았다고 한다. 그들의 생활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상하수도, 전기시설은 고사하고 택지조차 제대로 조성되어 있지 않아 언덕배기에 다닥다닥 붙은 천막들에서 나오는 오물로 악취가 넘쳤다. 빈곤과 범죄가 들끓는 그야말로 슬럼 중의 슬럼이었다.
김동춘 교수는 논문에서 “‘광주대단지 불하가격 시정대책위원회’ 위원장 전성천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하는 일의 중요한 부분은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치우는 일이었다.… 이 지역 71년 1∼6월 형사사범 4867건 가운데 폭력 1786건, 절도 927건, 사기가 543건이었다”고 전한다.
48개 공장을 유치해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서울시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주민들은 날품팔이라도 하려면 서울로 오갈 수밖에 없었다. 임미리의 논문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모란단지에 이주한 하동근의 부친은 원래 서울 쌀가게 점원이었으나 광주로 이주한 뒤에도 매일 서울로 출퇴근을 하다 결국 그만두었다. 그 뒤에는 가마니를 짜서 천호동 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가마니를 수레에 싣고 걸어서 갔다. 편도로 다섯 시간 이상 걸렸기 때문에 서울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서야 집에 올 수 있었다. 단지 내에 일자리는 거의 없었다.’
다음은 박기정 기자의 신동아 기사다.
‘“시내에서는 지게를 져서 입에 풀칠이라도 했지만, 여기서는 지게질거리도 없다”는 당시 주민들의 푸념처럼 일곱 식구가 국수 한 봉지를 서로 나누어 먹어야 할 정도로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 15세 딸이 허기에 지쳐 술집 접대부로 일하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소문에 집을 나가겠다는 것을 부모가 쓰린 가슴을 안고 지켜봐야 하는 실정이었다.’
주민들의 월수입도 5000원 미만이 37%, 5000∼1만 원이 43%, 1만 원 이상이 20% 등으로 형편없었다. 또 주민들의 68%가 중졸 이하 학력 소지자였다. 학교가 없다보니 아이들이 매일 서울로 등하교를 해야 했다. 서울에 거처를 따로 만든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 결국 학업을 중단하는 아이들이 속출했다. 1971년 여름 광주대단지는 점점 서울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그들만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임미리의 논문 중 한 대목이다.
‘급기야 ‘산모가 갓난아기를 삶아먹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신문사 지국에서 만 원 현상금을 걸고 ‘소스’를 캤는데 실패했다는 소리도 들렸다. 밤에 시장에 나가면 쓰레기통 뒤지는 사람도 많았다.’
비참한 생활을 참다못한 일부 주민들은 입주권(딱지)을 팔고 다시 서울 무허가 지역으로 들어갔고 입주권을 갖게 된 사람들도 집을 지을 돈이 없자 다시 브로커들에게 팔았다. 막상 개발과 건설이 시작되자 토지 브로커들이 날뛰기 시작해 복덕방들만 들어섰다. 여기에 때마침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와 5월 국회의원 선거 바람을 타고 개발붐, 토지붐은 절정에 달한다.
뇌관은 선거 직후 터졌다.
▲71년 광주대단지의 모습. 당초 자급자족 도시를 만든다는 계획이었으나 상하수도 전기시설은 고사하고 택지조차 제대로 조성되지 않아 총 15만∼2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거대한 천막촌을 이루어 살았다. 동아일보DB
<29> 무정부 도시
서울시는 1971년 4월 대통령선거, 5월 국회의원선거가 끝난 직후인 6월, 광주대단지 주민들에게 융자금을 일시불로 상환하고 6월 10일까지 집을 짓지 않을 경우 땅 불하를 무효화하며, 평당 8000∼1만6000원에 땅을 사라고 독촉했다. 설상가상으로 경기도는 취득세까지 부과했다. 날품팔이 일도 없어 끼니를 굶는 사람들에게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집 마련을 향한 주민들의 희망과 기대는 좌절과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마침내 광주대단지 주민들은 71년 7월 19일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땅값 인하, 세금 면제, 융자금 분할 상환 등을 요구하며 당국에 진정서를 넣었다. 하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주민들은 8월 3일 대책위를 투쟁위로 바꾸고 8월 10일을 ‘최후 결전의 날’로 잡았다.
9일 3만여 장의 전단이 뿌려지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서울시 성남출장소장이 서울시 본부에 있는 주택관리관에게 ‘긴급사태 발생. 현지에서 해결 불가능’이라는 SOS를 쳤을 정도였다.
1971년 8월 10일 화요일 오전 11시. 삼복의 열기를 씻어주는 여름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서울시내 일선 경찰서에 비상대기령이 떨어졌다. 서울에서 차로 불과 30분 거리인 ‘광주’에서 대낮에 관공서가 불에 타고 경찰차가 화염에 휩싸이고 있다는 보고가 속속 올라왔기 때문이다.
성남출장소 인근 공터에 모인 주민들은 광주대단지 15만(최대 20만) 명 중 3만(최소)∼6만여(최대) 명. 이들은 “또 속았다” “배고파 못 살겠다” “영세민을 더이상 착취하지 말라”고 외치며 성남출장소와 성남경찰서 지서로 몰려갔다. 열 살짜리 철부지에서부터 칠십 노인까지 있었다. 손에 식칼 곡괭이 몽둥이를 쥔 이들의 눈은 먹이를 찾아 날뛰는 야수처럼 살기가 서려 있었다. 동아일보 사회부 박기정 기자가 쓴 71년 10월호 신동아 ‘르뽀 광주대단지’ 기사 중 일부다.
‘“부숴라” “없애버려라”는 고함 소리가 들리면서 성남출장소 사무실 책상 전화기 캐비닛이 함부로 내동댕이쳐졌다. 잠시 후 “태워버려라”는 외침과 동시에 건물(100여 평)이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불을 보자 군중들의 흥분은 한층 가열됐다.…(주민들은) 출장소 앞 지프차를 불태우고, 지나가던 삼륜차 두 대와 서울 시영버스, 경기차 트럭을 뺏어 플래카드를 달고 고함을 지르며 대단지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취재하던 보도차량도 마찬가지였다. “굶어죽게 된 마당에 신문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덤벼들었다.’
도시는 무정부상태로 변했다. 다시 박 기자의 기사다.
‘경찰관들에게 뭇매를 맞아 뒷머리가 터졌다는 김정규 씨(21)는 피투성이가 된 채 “나를 때린 경찰관을 죽이겠다”고 식칼을 휘두르며 날뛰었다. (이 와중에) 때마침 참외를 가득 실은 삼륜차가 지나갔다. 군중들이 정신없이 차에 달려들어 흙탕에 떨어진 것까지 주워 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참외 한 차분이 없어지고 말았다. 김모 양(12)은 “배고파 죽겠어요” 울부짖으며 자기 키보다 훨씬 큰 몽둥이를 고사리손에 힘겹게 들고 발악이나 하듯 뛰고 있었다.’
빗속에서 서로 쫓고 쫓기던 경찰과 주민들의 대치가 계속되던 오후 5시경, 양택식 서울 시장이 주민들 요구조건을 무조건 수락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지자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6시간이나 지속된 박정희 정권 최초이자 최대의 도시빈민투쟁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광주대단지 거리는 폭격 맞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시커멓게 타 벌렁 나자빠져있는 차량들, 경찰이 던진 최루탄 조각, 주민들이 내던진 돌조각, 깨진 유리조각, 찢어진 플래카드와 피켓, 몽둥이 자루, 주인 잃은 고무신짝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폭풍이 할퀴고 지나간 항구도시처럼 어수선한 가운데 외면상의 고요함이 찾아온 것이다.’(신동아)
이 사건으로 주민과 경찰 100명이 부상했으며 22명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죄와 폭력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죄로 구속되었다. 구속된 사람은 대부분이 10대 말∼20대 초 청년들이었다. 직업은 일용직 노동자와 실업자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폭동은 우발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특정한 정치적 목표를 내걸었다기보다는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호소하거나 ‘대책을 세워 달라’며 청원하는 성격이 강했다. 한마디로 가진 자에 대한 막연한 분노, 행정당국의 속임수에 대한 분노 등이 주요 동기였다고 볼 수 있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한국사회에 깊이 자리하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양극화 문제를 더이상 외면할 수 없음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근대화 작업이 촉진됨에 따라 새로운 부자가 속출하는 한편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나타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단층을 가능한 한 줄여 국민으로 하여금 일체감을 갖게 해야 하는 것이 정치적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혹시 ‘없는 자’의 소리를 듣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신동아)
성남시는 날로 비대화되는 서울의 인구를 분산하고 서울의 외곽지역을 개발하는 최초의 신도시였다.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문제를 해결해보려 했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정책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후 분당 의왕 등 인근 지역에 신도시가 연속적으로 만들어지면서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철거민들이 땅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개발이익을 분점한 사람도 많았다.
어떻든 ‘광주대단지 사건’은 철거민들 요구사항을 정부가 모두 수용하며 집단이주가 연착륙되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정국이 ‘사법파동’과 ‘광주대단지’사건으로 시끌벅적한 가운데 김지하는 원주에서 지학순 주교(1921∼1993)와 함께 ‘또 다른 민주화 투쟁’을 도모하고 있었다. 지 주교는 가톨릭 원주교구장이었다. 한국에서 원주가 14번째(남한에서 11번째) 교구로 정해지면서 첫 교구장을 맡고 있었다.
지 주교는 김지하를 보자마자 “‘오적’을 쓴 시인이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다. 앞으로 같이 일하자. 우선 영세부터 받자”고 했다. 김지하는 71년 부활절, 영세를 받고 가톨릭에 입교한다. 영세명은 ‘아시시의 성(聖) 프란체스코’(1182∼1226·이탈리아 가톨릭교회의 성인·프란체스코 교단의 창시자)였다.
김지하는 가톨릭 원주교구 기획위원으로 들어갔다. 거처는 주교관이었다. 폐결핵이 여전히 그를 괴롭혔다. 독사나 살모사를 고아 만든 탕제로 약을 삼았다.
그러고 몇 달 후….
이번에는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 시위가 원주에서 일어나게 된다. 그 중심에 김지하가 있었다. 종교계 중 가장 보수적인 가톨릭 교단의 사회참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여름비가 내리던 1971년 8월 10일 화요일 무정부 상태로 변한 광주대단지. 성난 군중은 곡괭이 식칼 몽둥이를 들고 거리를 누볐다. 건물과 차량이 불탄 거리는 폭격을 맞은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다. 서울시 제공
2013-05-21
<30> 1971년 10·5원주시위
1971년 8월 23일 경기 옹진군 용유면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던 특수부대원들이 서울로 진입해 군경과 교전한 ‘실미도’ 사건이 터졌다. 요즘 신문과 방송에도 북파공작원들의 후일담들이 공개되고 있지만 실미도 사건은 북파공작원의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낸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정래혁 국방부 장관이 물러난다.
무덥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있었다. 김지하는 원주에서 가톨릭을 발판으로 한 장기적 사회운동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뜻밖의 일이 터진다. 원주문화방송의 방만 부실운영이었다.
원주문화방송은 1969년 원주교구가 1700만 원, 5·16장학회가 1300만 원을 출연해 출범했는데 운영권은 거꾸로 5·16장학회가 6 대 4로 원주교구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지학순 주교가 시정을 요구했지만 관계자들은 도리어 방송국 주식을 총회 의결조차 없이 팔아버린다. 지 주교는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부패했으며 얼마나 횡포를 부리고 있는지 뼈저리게 체험했다. 가톨릭 주교인 내가 이렇게 당하는데 서민들은 오죽하겠는가. 억울한 서민들을 대표해 교회가 일어서야 할 때가 왔다”고 했다. D데이는 1971년 추석날로 잡았다.
지 주교는 추석 미사를 집전하면서 원주문화방송 사례를 들며 “우리 사회가 썩어 있다”고 개탄했다. 1971년 가을을 떠들썩하게 만든 ‘원주시위’의 신호탄이었다. 김지하가 지휘부를 구성했다. 사제관에 틀어박혀 정보를 수집하고 중요한 판단이나 문건, 스케줄 변동이나 우발적인 일 등에 대처하는 통제탑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모든 일을 학생운동 사회운동 전반을 지휘하고 조율하던 조영래와 긴밀히 협의했다.
1969년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을 공부하는 와중에도 전태일 장례식 등 민주화투쟁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조영래는 마침내 1971년 3월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두어 차례 원주를 찾아 김지하 등과 의논하며 ‘원주시위’를 서울 학생운동과 기독교 신·구교 및 언론계, 재야 지도자층과 연결했던 것이다.
김지하의 말이다.
“시위 당일 읽을 선언문을 써놓고 좀 걱정이 되어 지 주교님에게 ‘종교 문건으로 너무 과격하지 않은가요’ 여쭈었다. 웬걸, 지 주교는 오히려 ‘옛날 예언자들이 모두 과격파들이야! 막 두들기라고! 그래야 정신이 번쩍 들지!’ 하는 것 아닌가(웃음).”
김지하의 원주시위 선언문은 조영래를 통해 동아일보 천관우 이사에게 전달되었고 이후 박형규 목사, 박홍 신부, 학생운동 지도부, 외신에까지 전달되었다.
마침내 1971년 10월 5일 2000여 신도들이 원주교구 성당 마당에 모였다. 보수적인 종교계 내에서, 그것도 가톨릭 신부들이 앞장서고 시골 할머니 2000∼3000명이 모여 정부의 실정(失政)과 반민주적 철권 정치, 부패 스캔들을 공격하고 나섰으니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동아일보는 바로 이튿날인 10월 6일자로 ‘원주시위’를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다시 김지하의 회고’다.
“시위가 벌어진 사흘 동안 한국의 종교계 민주화운동 세력, 학생운동 세력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밤마다 횃불이 켜졌고 사제관 전화통에 불이 났다. 그 열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정세의 큰 물줄기가 바뀌고 있음을 직감했다.”
원주시위 소식은 일본으로, 유럽으로, 미국으로 확산되었다. 원주문화방송이 사과함으로써 일단 마무리되지만 당시 투쟁을 계기로 원주교구는 10여 년에 걸쳐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메카 중 하나가 된다.
원주는 본래 저항의 도시였다. 동학운동,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전쟁에서부터 시작해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을 거쳐 1990년대 시민단체의 다방면에 걸친 운동까지 권력에 정면 대응한 도시였다. 연세대 대학언론사인 ‘연세춘추’ 2000년 6월 5일자는 원주를 소개하며 ‘해방되기 전까지 일제 36년 이 지역 역사를 살펴보면 유난히 의병 활동이라든지 반일 단체의 활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고 전한다(원주에는 연세대 원주캠퍼스가 있다).
민주인사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76년 1월에는 가톨릭계와 개신교가 함께 군사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원주선언’이 나와 그해 3월 명동성당에서 열린 ‘민주구국선언’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지학순 주교는 이 원주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다.
1965년 초대 교구장으로 부임한 그는 로마 유학 시절, 가톨릭의 사회참여를 선언한 역사적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운영을 통해 배운 점을 실현하기 위해 애썼다. 교구 내 광산노동자와 농민들의 참상에 주목하면서 이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신용협동조합 운동, 수재민구호활동 등도 열정적으로 벌였다. 지 주교는 민청학련(1974년)에 자금을 지원한 혐의로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는데 이는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단체인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결성으로 이어진다.
‘원주시위’가 벌어진 10월 5일, 서울에서는 불에 기름을 붓는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진다.
새벽 1시반 수도경비사령부 제5헌병대 소속 무장군인 30여 명이 군 트럭 3대와 지프 1대에 나눠 타고 고려대 정문 수위로부터 학생회관 열쇠를 빼앗아 4층 휴게실에 있던 학생 5명을 연행한 것이다. 이른바 ‘고려대 무장군인 난입사건’이었다.
7일 고려대생들이 들고일어났다. 학생들은 김상협 고려대 총장의 강력 항의로 풀려나지만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10월 8일 민관식 문교부 장관까지 나서 유재흥 국방부 장관에게 항의서를 전달하고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전국 모든 대학에서 규탄시위가 벌어졌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어떻게 번질지 모르는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마침내 10월 15일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이 떨어졌다.
무장 군인들이 각 대학에 투입됐고 두 차례에 걸쳐 대학가에 휴업령이 내려졌다.
시위 주동자들에 대한 연행과 수배가 시작됐다. 10월 20일 현재 23개 대학, 학생 177명이 제적됐다.
김지하도 더이상 원주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는 10월 어느 날, 수녀가 모는 지프 뒷자리에 숨어 성당을 몰래 빠져나왔다. 그리고 원주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