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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들의 한국 이야기1/ 따루 살미넨(핀란드)-핀란드의 夏至/ 야마구치 히데코(일본) - 한국의 택시, 때론 당황스럽고 때론 서럽고/ 이라(몽골) - 으악! 내가 맛있게 먹은 음식이 쥐라고?

상림은내고향 2022. 3. 19. 20:37

이주민들의 한국 이야기1/ 

● 따루 살미넨·작가 겸 방송인 핀란드 - 조선일보  김도원 화백

2015.05.28  핀란드의 夏至

한국에 살면서 핀란드가 그리울 때가 거의 없다. 친구도 다 한국에 있지, 음식도 여기가 맛있지, 일거리도 다 한국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6월 이때쯤 되면 핀란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백야(白夜)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백야란 말 그대로 해가 24시간 떠 있어서 대낮같이 환한 밤을 말한다. 핀란드 북부의 라플란드에는 새벽 2시가 돼도 해가 동동주에 둥둥 떠 있는 밥알처럼 계속 하늘에 떠 있다. 라플란드에서 백야는 5월 중순부터 7월 말까지 계속된다.

 

햇빛은 긴 겨울을 버텨야 하는 핀란드인들에게 너무나 귀중해서 그런지 6월 셋째 주 주말에 크리스마스 다음으로 가장 큰 명절인 '유한누스(Juhannus·하지절)'가 있다. 세례자 요한을 기리는 날이라는 뜻이다. 헬싱키 같은 도시 사람이 대부분 시골로 간다. 명절 귀성길처럼 교통 정체가 심하고 도시는 텅 빈다. 관광객은 대부분의 가게와 식당이 문을 닫아 유령도시가 된 거리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다닌다. 매년 신문에서 굶어 죽을 뻔했다는 외국인 관광객 인터뷰가 나온다.

 

 

하지절은 원래 핀란드 신화 속 하늘의 신인 '우꼬(Ukko)'를 찬미하는 축제였다. 빛을 기리고 풍년을 기원했다. 하지 전날 악귀를 쫓아낸다는 뜻에서 큰 모닥불을 피우는 전통 풍속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동짓날 달집을 태우는 한국의 전통과 비슷하다.

최근 핀란드인 사이에선 하지절이 찾아오면 호숫가 오두막집에서 사우나와 수영을 하고 구운 소시지와 함께 술을 마시는 게 인기다. 술을 먹고 소란스럽게 노는 것은 예로부터 있던 하지절의 모습이라고 한다. 술을 많이 마실수록 풍작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음주 관련 안전사고가 많아 하지가 지나면 사람이 얼마나 목숨을 잃었는지 보도가 꼭 나온다. 핀란드인은 여름에는 해가 길어서 술을 먹고, 겨울에는 해가 짧아서 술을 먹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비가 오면 막걸리를 마신다. 결국 술을 마시기 위한 핑계는 항상 있다.

 

2016.03.02  막걸리 마니아가 된 이유

나는 막걸리 마니아다. 첫 대접을 언제 마셨는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장소는 기억난다. 아마 서울 고려대 앞의 어떤 허름한 주점이었을 것이다. 사실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술을 입에 대 본 적이 없었다. 1998년 한국에 온 후엔 소주와 맥주도 마셔보았지만 갈증을 풀어주는 데 막걸리만 한 게 없었다. 시원하면서도 꿀맛 같은 그 '목 넘김'이 좋았다. 틈만 나면 지방 여행을 가서 여러 지역의 막걸리를 마셔보는 것이 어느새 취미가 됐다. 그러다 보니 막걸리 학교도 다니게 되고 마침내 '주막'까지 열게 되었다.

 

막걸리를 오랫동안 사랑해 왔던 사람으로서 2009년부터 막걸리의 인기가 치솟자 정말 기쁘고 뿌듯했다. 외국인인 내가 '드디어 한국인들도 막걸리의 가치를 알아주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2012년부터 막걸리의 판매량이 다시 줄어들었고 지금도 하락세다. 싼 술이란 이미지, 플라스틱병, 수입쌀 사용(물론 좋은 재료로 만든 막걸리도 많지만 시장을 장악하는 막걸리 중 상당수는 수입쌀로 제조된다)과 순한 소주 열풍 등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내가 살던 핀란드나 유럽에 비하면 한국은 유행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지금 유행하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소비하고 다음 유행이 등장하면 그것으로 갈아타는 것 같다. 다양한 주류를 즐기는 것은 좋다. 나도 기분에 따라 와인도 마시고 맥주도 들이켜고 보드카도 찾는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한국 고유의 전통술인 막걸리에 대해 여전히 너무 모르는 것 같아 슬프다.

 

막걸리는 단백질, 유산균, 아미노산 등 영양도 풍부하고 하루하루 갈수록 맛이 변해가는 살아있는 발효주다. 시큼한 것도 있고, 텁텁한 것도 있고, 상쾌한 것도 있고, 달달한 것도 있다. 어떤 기분이든 거기에 맞는 막걸리가 있어서 좋다. 이것이 바로 막걸리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막걸리는 소박하다. 그리고 경쾌하다. 막걸리는 사람 사이의 닫힌 마음을 터놓게 하는 신묘함을 가졌다. 외국인인 내가 한국 사람들에게 막걸리를 홍보할 필요 없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다려본다.

 

2016.03.22  도다리야, 기다려라

봄이 되면 개나리도 피고 벚꽃도 피어서 좋지만 한국의 사계절 중에 봄을 제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도다리다. 쫄깃쫄깃하면서 달콤한 도다리 '세코시(뼈회)'를 입에 넣는 순간 고단한 겨울을 잊고 향긋한 봄을 온몸으로 들이마시는 기분이 든다. 여린 뼈를 씹으면 뼛속 지방이 스며 나온다. 한국의 봄은 고소하다. 여기에 술이 빠질 수 없다. 숙취도 도다리가 달래준다. 시원함의 극치, 도다리 쑥국이 등장하면 봄 '먹방'은 완성이다.

 

봄이라고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은 간자미다. 작은 홍어처럼 귀엽게 생긴 이 녀석은 막걸리에 씻어서 회무침이나 술찜으로 먹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간자미가 봄에 맛있는 이유는 산란하려고 살을 찌우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의 제주산 도다리회. /조선일보 DB

 

한번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서 간자미를 사는데 아주머니가 말했다. "불알 달린 놈 말고 암놈으로 해라." "? , 불알요?" "그럼!" 그리고 아주머니는 꼬리가 곱게 뻗어 있는 암컷과 기다란 생식기가 둘 달린 수컷을 구별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원래 홍어도 암놈이 더 비싸고 육질이 차진데, 간자미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봄 제철 음식이라고 하면 끝이 없다. '바다의 홍삼'이라는 붉은 해삼, 알배기 주꾸미 등 해산물과 냉이, 달래, 돌나물, 취나물, 곰취 등 봄나물, 그리고 무엇보다 내 사랑 두릅! 그 쌉싸래한 맛을 느끼고자 겨우내 기다리면서 버틴다. 막걸리 안주로 두릅만 한 게 없다. 막걸리는 배가 부르기 때문에 가벼운 안주가 딱이다. 두릅의 향긋함은 막걸리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

 

 

나는 봄철 두릅을 먹으며 한 나라에 적응하는 데 음식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실감한다. 음식이 입에 안 맞았다면 과연 한국에 계속 살았을까? 예전에는 외국 여행 갈 때 김치와 라면을 들고 가는 한국 사람들을 이해 못 했지만 이제는 100% 공감한다. 느끼한 음식을 먹은 다음 입안을 개운하게 하는 데 잘 익은 김치만 한 게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요즘 이 맛있는 것들이 유난히 많이 생각나는 이유가 있다. 지금 핀란드에 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무엇을 가질 수 없을 때 더 간절하게 원하는 법이다. 도다리들아, 조금만 기다려라. 곧 너희를 만나러 간다.

 

2016.04.08  한국 엄마와 핀란드 엄마

핀란드인인 나는 이제 생각도 한국말로 하고, 잠꼬대도 한국말로 한다. 하지만 문학작품을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읽는 건 아직 어렵다. 한국 소설을 많이 읽어보지 못한 이유다. 그러다가 2년 전 처음으로 한국 소설을 핀란드어로 번역하게 됐다.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였다. 처음엔 부담스럽고 망설여졌다. 전문 번역가가 아닌 데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품 주제가 전 인류가 공감할 수 있는 '엄마'이고, 핀란드에 한국 문학을 소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도전하기로 했다.

 

소설을 한 번 쭉 읽고 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멸치속젓, 조개젓갈 같은 표현을 어떻게 번역하지? 앞이 막막했다. 또 한국어 표현이 굉장히 함축적이어서 그 느낌을 어떻게 살릴지 고민을 많이 했다. 다행히 핀란드어는 한국어처럼 교착어이고 다양한 어미와 조사를 사용하는 언어다. 주격, 목적격, 소유격과 같은 격을 쓰는 것도 두 언어 간의 공통점이다. 어순(語順)도 비교적 자유로워서 번역하기가 그나마 수월해졌던 것 같다.

 

몇 달에 걸쳐 번역을 해나가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 청국장이나 황석어젓을 담그는 한국 엄마는 베리 잼, 베리 주스도 만들고 빵도 굽는 핀란드 엄마, 즉 우리 엄마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자식을 위해 먹을 것을 잔뜩 하시는 엄마의 모습은 모든 인류가 공감할 수 있는 공통점이라는 것을. 멸치속젓이란 단어보다 그것에 녹아 있는 엄마의 의미가 통하리라는 것을. 그 작품 속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표현처럼,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소설 번역에 이어 작년에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조국 핀란드가 한국인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멀지 않고, 춥지 않고, 비싸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 한국문학 번역과 반대 방향의 작업인 셈이다. 이 역시 번역 못지않게 어려웠다. 외국어로, 그것도 글로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내가 번역하고 직접 쓴 글이 한국과 핀란드를 더 가깝게 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6.06.21  한국어 가르치는 외국인

설렌다. 어제 한국어교원자격증 2급 과정의 마지막 시험을 쳤다. 국립국어원에 자격증 신청할 일만 남았다. 곧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재작년 한국어 교사 원격평생교육원 홍보대사가 되면서 한국어 교원 자격 공부에 몰두했다. 지금까지 몰랐던 한국어로의 여행이었다. 수업을 들으면서 한국어에 대한 새로운 지식도 많이 알게 됐다. 예를 들어 '비싸다'는 원래 싸지 않다는 뜻이 아니었는데 현재의 뜻으로 의미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

 

공부하면서 한 언어를 할 줄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임을 실감했다. 한국어를 공부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어떻게 공부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나고, 한국말을 아무 노력 없이 내뱉기 시작한 지도 오래되어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표현을 왜 써야 하는지 설명하기도 어렵다. 다음 예문에 있는 종속적 연결어미 '~는데'를 보자. '어제는 비가 왔는데 오늘은 날씨가 맑다.' '비가 오는데 등산하지 맙시다.' 어제 명동에 갔는데 연희를 우연히 만났다.' 똑같은 '~는데'인데 뜻이 다 다르다.

 

 

감으로는 알겠는데 학생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학생이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설명하려면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정답은 1. 대조 관계 2. 인과 관계 3. 배경·상황). 이를 한꺼번에 설명하면 학습자가 혼란스럽기 때문에 하나씩 따로 가르쳐줘야 한다고도 배웠다.


외국인이 한국어를 가르친다니까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한국어를 외국어로 공부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게 쉽고 어려운지 잘 안다. 그래서 외국인 학생 입장에서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작 나도 모국어인 핀란드어를 외국인에게 그냥 가르치지는 못한다. 감으로야 맞고 틀린 것을 알지만 이를 설명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교수 방법을 따로 배워야 한다. 언어를 잘하기도 어렵지만 잘 가르치기는 더 어려운 것 같다. 따발총처럼 말을 빨리하는 버릇부터 고쳐야겠다.

 

2016.07.05  핀란드式 짝 구하기

주변에 나이가 꽉 찬, 30대 후반~40대 초반의 미혼 한국 친구가 많다. 성격도 좋고 직장도 열심히 다니는 괜찮은 사람들인데, 소개팅을 아무리 시켜줘도 성사가 잘 안 된다. 핀란드도 한국처럼 짝을 못 찾는 사람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핀란드 통계청에 따르면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42%이다. 그중 35세 미만 1인 가구가 25%를 차지한다. 도시에 혼자 사는 여자가 많고, 농촌에 혼자 사는 남자가 많은 점도 역시 한국과 비슷하다.

 

나는 한때 방송에서 '마담 뚜'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소개팅 시켜주는 것을 좋아하는데, 사실 핀란드에는 소개팅 문화가 없다시피 하다. 짝을 찾으려면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bar)나 클럽, 직장, 취미 활동 등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이성을 만나는 고전적 방법이 있지만 요즘은 스마트폰 앱도 많이 이용한다. 핀란드 전 총리도, 국회의원도, 미스 핀란드 출신 여성도 데이트 앱을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남자가 없다고 하소연하는 한국인 친구에게 이 방법을 추천했다. 그러자 한국에서는 데이트 앱은 위험하니 하지 말라고 말린다고 했다. 핀란드에서도 물론 이상한 사람을 만날 가능성은 있지만, 짝을 진심으로 찾고 싶어 하는 사람이 더 많으니 앱 사용이 괜찮다고 보는 편이다. 특히 무뚝뚝하거나 쑥스러움이 많은 일부 핀란드 남자는 온라인으로 먼저 이야기 나누기를 더 편하게 느끼기도 한다.

 

 

핀란드 남녀는 반려동물, 특히 개를 키우다 눈이 맞기도 한다. 핀란드 모든 도시에는 개를 위한 공원이 곳곳에 마련돼 있어 개와 함께 수시로 산책을 즐긴다. 지나가던 개끼리 인사하고 노는 동안 견주(犬主)들은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간다. 핀란드 여자들은 예쁜 강아지를 보면 먼저 말을 잘 건다. 그래서 남자가 개를 키우면 여자를 훨씬 더 쉽게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아직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면 한국에서도 개를 키우며 열심히 산책을 다녀보면 좋지 않을까.

 

2016.07.12  복날의 추어탕

달력을 보니 곧 초복이란다. 복날이면 다들 삼계탕을 찾는데, 나는 체력이 떨어지면 특별히 챙겨 먹는 음식이 따로 있다. 바로 추어탕이다.

 

추어탕을 먹기 시작한 지는 채 10년이 되지 않았다. '미꾸라지'라는 희한하게 생긴 생선을 갈아서 만든 음식이 있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는데 친구들 중에 추어탕을 즐기는 사람이 없어서 먹을 기회가 없었다. 8~9년 전쯤 아는 분이 밥을 먹자며 추어탕집에 데리고 갔다.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다. 한국의 모든 음식을 한 번씩은 먹어보고 싶었기에 도전해봤다. 잔가시가 많으면 먹기가 불편할 것 같다는 꺼림칙한 마음을 안고서.

 

추어탕 두 개, 미꾸라지 튀김 하나를 주문했다. 부엌에서 기계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미꾸라지를 가는 소리였다. 10분 후에 주인아줌마가 펄펄 끓는 돌솥 뚝배기 두 개를 갖다 줬다. 진득해 보이는 국물에 들깻가루를 조금 더 넣었다. 탕을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는데 생선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부추와 쑥갓이 조금 들어가 있었고 그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한 숟갈 떠먹어보았다. 부드러운 수프 같았다. 향긋한 들깨 향이 났고 향신료 덕분인지 혀가 조금 아릿했다. 두려워했던 생선 가시는 없었다. 튀김도 바삭바삭하고 맛있었다. 그날의 추어탕 한 입에 미꾸라지 광팬이 되었다.

 

 

그때부터 다양한 추어탕을 먹어보았다. 식당마다 맛이 조금씩 달랐다. 어떤 식당은 국물이 맑고 초피 향이 강했고 어떤 식당은 콩 맛이 나는 뽀얀 국물 추어탕을 냈다. 매운맛은 전라도식이고, 경상도식은 그리 맵지 않다. 나는 들깻가루를 듬뿍 넣어서 밥을 말아 먹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깍두기와 김치도 빠져서는 안 된다.

 

추어탕을 못 먹는 한국 사람도 꽤 있다. 복날 메뉴를 고를 때 아무거나 다 잘 먹는 내가 추어탕을 포기하고 다른 음식을 먹을 때가 많다. 닭발을 잘 먹는 한 친구는 추어탕을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 여름 목표는 그 친구가 미꾸라지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다.

 

2016.07.19  한 달짜리 여름휴가

요즘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이가 많을 것 같다. 바닷가로 갈지, 계곡으로 갈지, 외국으로 갈지 고민할 때다. 한국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8월 초에 휴가를 가기 때문에 휴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다. 어디를 가든 사람이 많고 차도 밀리고 바가지도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다. 한국에 와서 가장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여름휴가의 길이다. 1주일 정도다. 주말을 끼고 9일이라고 이야기하는 이가 많지만 주말은 원래 쉬는 거라서 그것은 휴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핀란드 사람들은 이미 휴가를 즐기고 있다. 날씨가 가장 좋은 7월 한 달을 통째로 쉰다. 물론 유급 휴가다. 핀란드 전체가 7월 한 달은 문을 닫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쉰다.

 

이 이야기를 하면 한국 사람들은 "한 달이나 쉬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냐?"고 묻는다. 잘 돌아간다. 우선 핀란드 회사원들은 자기 업무에 대한 책임과 결정권이 있다. 모든 업무를 상사에게 보고하고 진행할 필요가 없다. 한국 조직 문화 중 가장 답답한 면 중 하나는 부하 직원이 보고를 하고, 상사가 승인해야 일이 진행되는 것이다.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핀란드 대학 여름방학은 5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다. 휴가 간 직원들의 빈자리를 대학생이 채운다. 학생은 경력을 쌓으며 돈을 벌고, 회사들은 미래 인력을 확보한다. 일거양득이다. 핀란드에서는 인턴 직원이 커피, 복사 심부름만 하는 게 아니고 실질적인 업무 를 대신한다. 방학에 일을 배우고 적성에 맞으면 졸업 후 정규직으로 계속 일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한국도 앞으로 더 긴 여름휴가를 떠나는 게 가능하다고 본다. 사회적 대화와 합의가 중요하다. 핀란드에선 휴가에 대한 첫 법률이 1922년에 제정됐지만, 4주 여름휴가는 노사와 정부 간의 대화, 협상과 때로는 싸움 끝에 50여년이 지난 1973년에야 가능해졌다.

 

2016.07.26  쉬며 돈 버는 핀란드로

국의 푹푹 찌는 날씨를 피해 핀란드로 도망 왔다. 핀란드라는 피신처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찜통더위를 어쩔 도리 없이 견디는 한국 친구들한테는 미안한 마음이다. 요즘은 동네방네 파란 카펫처럼 깔린 블루베리를 따러 다닌다. 핀란드는 땅 주인과 상관없이 누구든 야생 블루베리를 딸 수 있다. '만인의 권리(jokamiehenoikeus·요카미에헤노이케우스)'가 있기 때문이다. 법률에는 없지만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관례가 관습법처럼 정착한 사례다.

 

누구나 자연 속 각종 베리, 버섯과 꽃 등을 자유롭게 딸 수 있고, 땅에 텐트를 치고 먹어도 된다는 말이다. 한국 사람이 핀란드로 여행을 와도 똑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다. 직접 딴 베리나 버섯을 시장에 내다 팔아도 된다. 세금도 없다. 실제로 많은 외국인이 핀란드에서 이렇게 돈(?)을 벌어간다. 우리 엄마도 요즘 블루베리를 따느라 바쁘다. 한국인들이 김장하는 것처럼 핀란드에서는 이맘때 1년 동안 먹을 베리를 따서 원액과 잼도 만들어 냉동 보관한다.

 

 

한국에서도 요즘 블루베리를 많이 먹는데, 핀란드 것과는 맛도 생긴 것도 많이 다르다. 핀란드 야생 블루베리는 상대적으로 작고, 속살이 진한 보라색을 띠며, 새콤달콤한 맛이 강하다. 한 번 먹으면 입이 온통 새까맣게 변하고, 옷에 묻으면 포도주처럼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한국의 블루베리는 더 크고, 속 모양이나 맛이 포도를 닮았다. 영양에도 차이가 있다. 핀란드 야생 블루베리에는 눈 건강에 좋은 항산화 물질인 안토시아닌이 양식 블루베리보다 2.5배 많다고 한다. 단점은 따는 게 꽤 힘들다는 것이다. 야생 블루베리는 땅바닥에 깔려 자라서 한참을 쪼그 려 따야 한다. '' 소리가 절로 난다. 한국에서 흔히 쓰이는 농사 방석이 왜 핀란드에는 없는 걸까. 다음에 우리 엄마에게도 선물해야겠다.

 

여름이면 쟁반만큼 넓은 도우에 야생 블루베리를 잔뜩 얹은 블루베리 파이가 제철 별미다. 한국의 여름에 지쳤다면, 피서도 하고 야생 블루베리와 버섯들도 마음껏 즐기고, 부지런한 만큼 돈도 벌 수 있는 핀란드로 "고고싱!"

 

2016.08.04  한국의 '나 먼저' 운전

작년에 한국을 찾은 부모님은 "운전 문화 빼면 다 좋았다"고 하셨다. 서울이 인구 1000만명이 넘는 도시라서 어쩔 수 없다고 했더니, 그래도 난폭 운전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고 되물으셨다. 차가 많고 밀리고, 빵빵거리고, 끼어들고, 양보 안 하는 모습에 놀랐던 것이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나 먼저' 운전 문화 때문에 서울에서 운전하면서 힘들 때가 잦다. 자동차끼리도 문제인데 보행자는 더 위험하다. 핀란드 운전자는 보행자가 길을 건너려고 하면 항상 차를 세운다. 한국에서는 '차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탓인지 그런 일이 드물다. 신호등 없는 건널목에서 거의 매번 차가 우선권을 가진다.

 

한국은 운전면허 따기 쉬운 나라로 잘 알려졌다. 면허 시험장에서 짧은 안전 교육을 받고 학과 시험을 치고, 장내 기능 시험만 합격하면 바로 도로에 나가 6시간 연습하고, 도로 주행 시험을 치른다. 시험만 잘 보면 된다는 한국식 교육 방식일까. 학과 시험과 기능 시험 같은 지식도 중요하지만, 도로 주행 시간을 늘리고 보행자나 다른 운전자를 배려하는 법을 배울 기회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핀란드에서는 안전·교통 교육 19시간, 도로 주행 교육 18시간을 받아야 면허시험 응시 자격이 생긴다. 교육 기간에 보행자, 자전거, 다른 자동차를 배려하는 운전 습관과 안전 운전 요령을 배운다. 학과 시험은 실제 교통 상황을 사진으로 제시하고 어떻게 행동할지를 묻는 실전형 질문 위주다. 기능 연습은 실제 도로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낮에 도로에는 저속 차량 표시를 단 운전학원 차가 많이 돌아다닐 정도다.


실제 도로에선 숙련자들이 초보자를 배려 하며 안전 운전을 한다. 시험에 합격하면 임시 면허증을 받고 실전 연습을 한다. 진짜 운전면허증은 임시 면허증을 받고 약 2년 동안 도로 주행 과정을 추가 이수하고 교통 법규를 준수해야 발급받는다.


한국이든 핀란드든 면허를 막 따면 초보 운전자인 것은 마찬가지. 한국의 운전 문화가 개선되려면 운전 교육에서부터 양보 운전과 안전 운전을 강조해야 할 것 같다.

 

2016.08.11  여름 보양식의 왕, 민어

8월의 숨막히는 더위는 너무나 싫지만 매년 기다려지는 이유가 있다. '여름 보양식의 왕' 민어 철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민어는 예전부터 양반 음식이라고 했다는데 알고 보니 옛날에는 흔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서해 남부는 물론이고 인천 앞바다에서까지 많이 잡혔다. 즉 옛날에는 흔히 먹는 여름 음식이었다. 내가 민어의 매력에 빠진 것은 몇 년 전 막걸리학교를 다녔을 때였다. 그때 목포에서 10㎏ 정도 되는 놈(?)을 산지 직송으로 주문해서 막걸리와 같이 먹었는데 그 이후로는 여름이 가기 전이면 꼭 민어 만찬을 벌이게 됐다.

 

민어 만찬은 민어 껍질튀김으로 시작한다. 바삭바삭한 껍질이 훌륭한 안줏거리가 된다. 그다음은 민어회를 음미할 차례다. 바로 잡아서 회를 쳐 먹으면 살이 물컹하고 밋밋한 맛이 나는데, 며칠 숙성을 잘 시키면 감칠맛이 깊어지고 조직감이 좋아진다. 민어뱃살회는 별미 중 별미다.

 

민어라면 부레를 빼놓을 수 없다. 민어 부레를 기름장에 찍어서 씹으면 처음에는 질기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나도 민어 부레를 처음 입에 넣었을 때는 이런 게 왜 맛있다고 난리인지 이해를 못 했다. 그런데 계속 씹다 보니 부레의 고소함이 입안으로 펴지면서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라게 되었다. 초록색 민어 쓸개를 소주에 넣어서 먹어본 적도 있는데, 이건 맛보다는 재미 삼아 한번 먹어보기를 권한다.


민어회와 부레를 먹고 나면 민어전을 먹을 차례다. 부드러운 민어 살을 씹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온다. 민어 만찬의 마무리는 당연히 민어탕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나리를 듬뿍 넣은 민어 지리를 좋아한다. 전날 소주 3병을 먹었어도 민어탕 한 숟갈이면 바로 해장이 될 정도로 힘이 팍팍 난다. 민어의 단점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그런데 1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민어인데 그 정도 가격이야 무슨 문제랴. 몸에 좋고 맛있는 걸 먹는 게 삶의 가장 큰 낙이 아닐까 생각한다.

 

2016.08.18  요즘 한국이 부러운 이유

요즘 들어 한국이 너무 부럽다. 이 칼럼을 쓰는 17일 현재 한국은 리우 올림픽에서 이미 금메달 6, 은메달 3, 동메달 5개나 따서 종합 11위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핀란드는 겨우 메달 하나를 확보했다. 여자 권투에서 두 아이 엄마인 35세 미라 포트코넨 선수가 런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아일랜드의 케이티 테일러 선수를 이겨 준결승에 진출하면서 최소 동메달을 확정했기 때문이다. 권투는 동메달 결정전 없이 준결승에서 패배한 두 사람에게 모두 동메달을 준다. 색깔에 상관없이 정말 값진 메달이다. 핀란드에서는 올림픽 메달을 따면, 그 선수가 살고 있는 지자체(地自體)에서 집 지을 땅을 선물로 준다.

 

핀란드도 이렇듯 한국처럼 스포츠에 열광한다. 한국이 축구라면 핀란드는 아이스하키, 한국이 양궁이라면 핀란드는 투창(창던지기)이다. 스포츠는 나라를 알리고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효과가 있다. 특히 아무도 핀란드라는 나라를 몰랐을 때 나라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스포츠였다. 한국은 '한강의 기적'으로도 유명해졌지만, 스포츠도 한몫을 했다고 본다. 김연아나 박지성 같은 스포츠 스타들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면서 한국의 위상도 높아졌다. 핀란드 사람들도 88올림픽은 잘 기억하고 있다. 새벽에 창 던지기 경기를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핀란드 선수가 금메달을 따서 영웅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수상한 손기정 선수와 동메달을 딴 남승룡 선수는 한국의 영웅이다. 핀란드에도 그런 영웅이 있다. 핀란드 육상선수 한네스 콜레흐마이넨(Hannes Kolehmainen)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5000m, 1m, 크로스컨트리 등 3종목에서 금메달 3개를 땄다. '핀란드를 세계지도에 새겼다'는 평까지 들었다. 하지만 당시 핀란드는 러시아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시상식에는 러시아 국기가 게양됐다. 그는 '차라리 이기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손기정 선수도 일장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니 강대국에 나라를 빼앗긴 두 선수의 감정은 비슷했던 것 같다.

2016.08.25  숙취 유감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숙취로 고생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대학생 때는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셔도 멀쩡했는데 해가 가면 갈수록 다음 날이 두려워진다. 나이는 못 속인다는 것을 실감한다. 이제 술 약속이 있으면 배를 채우고 가거나 안주를 열심히 먹는다. 술도 줄이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거하게 마신 다음 날에는 '내가 다시 술을 먹으면 성을 간다'라고 다짐하는데, 해장하고 저녁이 다가오면 '어디 불러주는 데 없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마실 술, 숙취 해소보다는 숙취가 덜 생기도록 마시는 게 더 중요하다. 재미난 건 숙취 예방 관련 연구의 상당수를 핀란드 학자들이 진행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술을 좋아하는 민족이기 때문인 것 같다. 숙취를 예방하려면 우선 술 마시기 한두 시간 전에 식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삼겹살과 같은 기름진 음식이 더 효과가 좋다. 기름기가 알코올 흡수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술을 마실 때는 화장실을 자주 찾게 되고 몸 밖으로 수분과 전해질이 평소보다 많이 빠져나온다고 한다. 술자리에서 충분한 물과 미네랄을 섭취하는 게 필요한 이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술을 많이 마셔야 하는 자리에서는 술 한 잔, 물 한 잔을 반복해서 마신다. 확실히 효과가 있다.

 

 

불순물이 적은 무색무취 보드카를 마시는 것도 도움이 된다. 확 취했다가 확 깬다. 그래도 결국 숙취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마시는 술의 양이다. 뭘 마시더라도 과음하면 숙취를 피하기 어렵다. 아침에 괴로우면 우유, 특히 무지방 우유가 통증을 덜어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헛개나무의 숙취 해소 효과도 핀란드까지 알려져 있다. 그래도 나는 개인적으로 삼천포 항구에서 먹는 졸복국이 최고다.

 

진정한 술꾼은 숙취를 걱정하며 술을 마시지 않는다. 가끔 술이 술을 마실 때가 있는데 핀란드나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한국을 이렇게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2016.09.01  아버지의 수술

오늘 아침 아버지가 큰 수술을 받았다. 늘 나무도 베고 사냥도 하고 힘이 넘치는 아빠의 모습만 봐왔는데 힘없이 튜브들이 연결된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아빠가 처음으로 약해 보였다.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수퍼맨의 모습도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제는 나이 든 한 인간으로서 아빠가 보이는 듯했다. 아빠가 없으면 집에 따뜻한 물도 안 나오고 어디 고장이 나면 고칠 사람도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큰 집에 둘만 사시는 우리 부모님은 앞으로 10~20년 지나면 어떤 삶을 어디서 살고 계실까. 자식들은 일 따라 도시로 떠난 지 오랜데. 엄마가 안 계시면 우리 집의 사과나무, 자두나무는 누가 돌보고, 꽃밭의 잡초는 누가 뽑을까. 많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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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에 접어들면서 친구들과의 이야깃거리도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이제는 부모님의 건강이 화제다. 누구는 어머니가 암에 걸렸고, 누구는 아버지가 당뇨병을 앓고, 다들 부모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느 날 부모님이 이 세상을 떠날 거란 생각을 하면 정말 무섭다. 나는 성인이 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대학생 같다. 밥을 할 때마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블루베리 파이 어떻게 만들었지?" 물어보기도 하고 집이나 차에 문제가 생기면 아빠한테 전화해서 "어떻게 하면 돼?" 물으며 의지했다.


핀란드의 한 정신과 의사는 "자식과 부모의 역할이 바뀌는 단계는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자식은 늘 믿고 의지했던 부모를 잃어가고, 부모는 자기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면서 모두 불안감이 커진다. 부모는 끝까지 독립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갈수록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고 한다.

 

 

부모는 자식이 크면서 조금씩 관계의 끈을 놓을 줄 알아야 하고, 자식은 부모가 나이가 들고 약해지면 조금씩 그 끈을 팽팽하게 잡아당겨야 하는 것 같다. 아빠는 이제 회복할 일만 남았다. 예전처럼 여러 세대가 같이 지내는 세상은 돌아오기 힘들겠지만, 내 꿈은 부모님 가까이서 함께 사는 것이다.

 

9월의 일사일언 필자는 따루 살미넨씨를 비롯, 김은경 한국전통조경학회 상임연구원, 황지원 음악 칼럼니스트, 배우 강석우씨, 배우 길해연씨입니다.

 

2016.09.08  핀란드 독서율이 높은 이유

너무 무더워서 올해는 안 올 것만 같던 가을, 독서의 계절이 왔다. 어릴 때부터 책에 관심이 많았다. 네 살부터 만화와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들어가서는 매주 동네 도서관을 찾았다. 혼자서는 들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빌려 집에 돌아왔다. 다음 주에는 그 책들을 반납하고 다시 그만큼을 더 빌렸다. 독서 습관을 형성하는 데는 가정의 독서 문화가 중요한 것 같다. 우리 집은 지역 신문을 매일 받아 봤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신문과 책을 읽는 모습을 많이 봐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책읽기에 관심이 생겼다. 가족 중에 나만 유일하게 안경을 쓴다. 엄마는 "책을 너무 열심히 봐서 그렇게 됐다"고 말씀하시고는 한다.

 

한국에 오자 책 이야기를 같이 할 친구가 많지 않아 아쉬웠다. 책 읽을 시간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이 많고, 책을 읽어도 문학보다는 자기계발서, 경영 관련 서적을 많이 보는 것 같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를 모르는 사람도 있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작품을 읽어 본 적은 없어도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장 아닌가.

 

 

핀란드는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책과 신문을 가장 많이 보는 나라 중 하나다. OECD에 따르면 2013년 핀란드 연평균 독서율( 15세 이상 국민 중 1년에 1권 이상의 책을 읽은 사람의 비율) 83.4%(한국 74.4%)였고, 공공도서관 이용률은 66%(한국 32%)였다.

 

핀란드 독서율이 높은 이유는 도서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핀란드에서는 대학도서관을 포함해 대다수 도서관에서 누구든 무료로 책을 빌려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갈 도서관도 마땅치 않고 이용법도 복잡해 답답함을 느낀다 . 전문 서적을 찾아보려면 대학도서관에 가야 하는데, 학교 재학생이나 교직원이 아니면 이용하지 못하는 곳이 많다. 그나마 서울에는 국회도서관이 있어서 다행이다. 사전에 인터넷으로 얼굴 사진을 등록하고 현장에서 출입증을 발급 받아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하고, 대출은 안 되고 열람만 가능한 자료도 많아 불편하다. 그래도 필요한 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어딘가.

 

2016.09.18  개불 닮은 송편

꿀 같은 연휴가 끝날 때가 됐다. 다들 사랑하는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푹 쉬다 왔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도 꽤 많은 것 같다. 명절마다 쏟아지는 '명절증후군' 기사만 봐도 그렇다. 젊은이들은 "결혼 언제 하냐" "취업은 어떻게 됐냐"는 어르신들의 질문 때문에, 여자들은 끝없는 음식 준비로 지친다. 명절만 되면 가사 분담 문제로 부부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핀란드의 명절 풍경도 비슷하다. 핀란드에서 추석만큼 큰 명절이 크리스마스다. 한국에서 크리스마스는 연인들의 날이다. 하지만 핀란드에서는 추석이나 설날처럼 최소 사흘간 온 가족이 모여서 '명절 음식'을 먹는다. 우리 어머니는 한 달 전부터 크리스마스 준비를 한다. 찬장과 옷장부터 집 안 곳곳 안 보이는 구석까지 청소하고, 음식 준비를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한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이브 아침만 되면 연례행사처럼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툼을 벌였다. 아무래도 가장 많은 일을 어머니가 전담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런 것 같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는 어머니가 처음으로 상에서 빠지지 않는 전통 감자 요리를 손수 만드는 대신에 구입해서 상에 올렸다. 어머니가 직접 만든 것과 맛이 거의 흡사해서 올해도 그럴 거라고 한다. 최근 한국에서도 추석에 시장에서 모둠 전과 송편을 구입하는 사람이 늘었다는데, 명절 음식을 손수 만드는 것도 좋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이렇게 가사 부담을 줄이는 것도 요령일 듯싶다.


나는 추석 음식 중에서 송편을 최고로 꼽는다. 콩이나 밤 소가 들어간 송편도 좋지만 꿀맛 나는 흑설탕이 듬뿍 들어간 송편을 제일 좋아한다. 워낙 '떡보'라서 해마다 송편을 직접 빚는다. 초콜릿도 넣어봤고, 치즈도 넣어봤는데 맛이 의외로 괜찮았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손재주가 없어서 그런지 내가 만든 송편은 다 개불처럼 생겼다. 송편을 예쁘게 빚는 사람이 예쁜 딸을 낳는다는데 큰일이다.

 

2016.09.22  가을밤 전어의 유혹

한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서 그런지 생선구이 종류가 참 많다. 도루묵, 우럭, 꽁치, 삼치, 볼락, 고등어, 서대, 조기, 가자미, 금태…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가을 별미, 전어구이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 아버지 병구완을 하러 핀란드에 와 있는데 친구들이 SNS에 하루가 멀다 하고 전어 사진을 올려대는 통에 한국에 돌아와 전어를 먹고 싶은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괴로울 정도다.

 

사실 어릴 때 연어를 먹다가 가시가 목에 걸려서 죽을 뻔했던 기억 때문에 전어를 오랫동안 잘 먹지 못했다. 잔가시가 많고, 그 가시를 모두 발라내면 먹을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국 친구들은 전어를 뼈째 먹어야 한다고 했다. ? 통째로 먹으라고? 나는 죽기 싫었다. 한동안 한국 사람들이 전어를 오독오독 씹어 먹는 모습은 마냥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그러던 어느 늦은 가을밤, 마지막으로 딱 한잔만 하자며 찾은 술집에서 전어구이를 주문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은빛 전어가 그날따라 너무나 맛깔스럽게 보였다. 술기운을 빌려 없던 용기를 냈다. 한 마리 집어 들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대가리부터 씹기 시작했다. 이게 웬일. 잔가시를 발라먹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고소함을 전어에서 느꼈다. 바삭바삭한 느낌도 좋았고, 전어 뼈에서 나오는 단맛도 입안에 오래 남았다. 구이를 다 먹고 나서는 내친김에 전어회까지 주문했다. 감칠맛에 반해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전어는 날로 먹든, 구워서 먹든 맛이 항상 기가 막힌다. 가을까지 기다리기 어려우면 7월 말에 열리는 삼천포항 자연산 전어 축제에 가는 것도 좋다. 구수한 사투 리를 들으면서 조금 빨리 고소한 전어를 맛볼 기회다.

 

아직도 큰 놈은 통째로 먹기가 조금 어려워 손바닥만 한 작은 전어를 찾는다. 내 손바닥보다 작은 전어는 만나기 어려운데 운 좋게 하남 미사리 수산 시장에서 찾아 먹었던 전어의 맛과 향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전어 굽는 냄새는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말에 100% 공감한다. 나 같아도 돌아가겠다.

 

2016.09.29  한국의 情, 할머니

방송에 출연하면서 한국 구석구석을 많이 돌아다녔다. 깊은 산골짜기, 외딴섬, 안 가본 곳이 없지만 아름다운 경치보다도 그곳에서 만난 시골 할머니들부터 떠오른다.

 

할머니들의 인생사를 듣다 보면 온갖 힘든 일을 겪었어도 긍정적인 사고를 잃지 않고 버텨내셨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산골짜기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어릴 때 바닷가에 살았는데, 아버지가 술 마시다가 만난 친구에게 고작 16살이던 할머니를 시집보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기 싫었지만 결국 가족의 뜻에 따라 깊은 산속으로 왔다. 막상 도착해보니 남편은 초혼이 아니라 재혼이었고, 가정 폭력에 시달리며 탈출도 시도했다. 그렇지만 어두운 산길을 잘 몰라 다시 잡혀왔다. 남편은 세상을 떠나고 할머니는 이제 혼자 깊은 산속에 살고 계신다.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눈시울을 붉히시면서도 "이제는 괜찮다, 괜찮다"고 하셨다.

 

비슷한 형편이었던 할머니들을 많이 뵈었다. 밤낮으로 일하고, 술 취한 남편에게 맞기도 하고,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음에도 남은 인생을 밝게 살아가는 모습이 대단하다.

 

 

시골 할머니들이 차려주시는 밥상도 빼놓을 수 없다. 집에서 담근 고추장, 된장에 텃밭에서 키운 고추를 찍어먹고 산에서 손수 캐오신 나물 반찬을 먹다 보면 왜 장수하시는지 알 것 같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시골 밥상의 나물 내음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의 정()이 뭐냐고 내게 물어오면 스스럼없이 '할머니'라고 대답한다. 할머니들은 남을 먼저 생각해주고, 만 난 지 몇 시간도 안 됐는데도 딸처럼 대해주신다. 지혜와 정이 넘치는 분들이다.

 

나이가 들면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 할머니들처럼 힘들게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어려움에 처해도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향하는 생활 철학을 본받고 싶다. 그분들을 보면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것은 태연히 받아들이는 자세가 행복한 삶의 열쇠라는 생각이 든다.

 

따루 살미넨·작가 겸 방송인

김도원 화백

 

 

■ 야마구치 히데코 일본 출신 - 이주여성공동체 ‘미래 길’ 공동대표  동아일보

 

2016-05-03  감정에 솔직한 한국인, 싫은 기색 못하는 일본인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사람마다 표현에 차이가 있는데, 한국인들이 일본인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하다는 것을 느낀다. 일본에는 ‘얼굴은 웃고 마음에서는 울고’라는 속담이 있다. 화가 나도 얼굴에는 나타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기도 하다


한국에선 처음 만난 사람끼리 서로 소개할 때 면전에서 “잘생겼다”고 외모부터 평가하는 것도 내겐 놀라웠다. 어떤 사람은 내 얼굴을 쳐다보며 “눈, 눈썹, 입 하나하나는 예쁜데…”라고 해줬는데 ‘이 말은 곧 안 예쁘다는 뜻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우리 남편도 마찬가지다. 바닥 난방이 안 돼 있는 일본은 겨울이면 실내 온도가 낮아 스웨터를 즐겨 입는다. 그래서 선물로 손수 만든 머플러나 장갑, 스웨터를 주곤 한다. 남편에게 스웨터를 처음 선물했을 때 남편의 표현은 암울했다. 선물을 본 순간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두 손에 선물을 들고는 인상을 쓰며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침묵의 시간이 3, 4분가량 흘렀다. 나는 속으로 ‘마음에 안 드나 봐’ 생각하며 너무 슬퍼 화장실에 가선 눈물을 흘렸다 


일본인이라면 아무리 선물이 마음에 안 들어도 상대의 기분을 생각해 기쁜 척한다. 나도 진짜 내 스타일이 아닌 물건을 일본인에게서 선물 받았을 때 “와∼, 들고 다니기 편하겠다” “생각해줘서 고맙네” 하고 말한다. 마음에 안 들었어도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덕분에 상대와 기분 좋게 헤어진다. 


그래서인지 일본인들은 가식적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래도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진짜 반가워서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뭐든지 말로 확인하는 문화가 있다. “화장실 빌려도 되느냐” 하는 식으로 ‘빌린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행동에 옮기기 전에 우선 한마디라도 말을 하고 한다. 일본인 유학생이 기숙사 공동 냉장고에 주스를 넣으면 다른 한국인 친구들이 물어보지 않고 마음대로 마셔버리니까 자기 이름을 주스 병에 썼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일본인들은 ‘내 것’과 ‘네 것’을 분명히 하고 규칙을 지키는 것을 좋아한다. 반면 한국에선 규칙보다 정을 나누는 것을 중요시한다.

 

 나는 한국에 시집와 작은 실수를 할 때마다 “죄송하다”는 인사를 연발했다. 그런데 “한국에선 가족 간엔 마음이 통하니 미안하다, 고맙다는 인사는 안 해도 된다”라는 시아버지 말을 듣고 한국인의 깊은 정을 느꼈다. 


한국에 거주하는 기간이 늘어날수록 대인관계에서 솔직한 것이 편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일본인끼리 통화를 하면 결론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설명하느라 시간이 길어진다. 오해가 없도록 과정을 하나하나 말해야 상대가 순조롭게 받아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감정 표현을 말에 의존하지 않고 서로의 포용력에 맡겨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말을 굳이 안 해도 내 마음을 알겠지’ 하는 암묵적 이해가 존재한다


일본인들은 비즈니스로 거래를 할 때에도 확실하게 거절하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검토해 보겠다”고 말하는데, 비즈니스 파트너들은 그 말이 ‘거절한다’는 뜻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아듣는다. 애매하게 표현했다는 사실에 불편해하기도 한다.


여담인데 그때 남편에게 줬던 스웨터는 속상해서 바로 내 친구에게 팔아버렸다. 한국에선 스웨터 선물이 반갑지 않았나 보다 하고 이해하려 했다. 그런데 시누이가 남편에게 스웨터를 선물했을 때 남편은 엄청 고맙게 받고는 그걸 자주 입었다. 웬일인가 했더니 그것은 좋은 브랜드 상품이었다. 남편은 스웨터를 싫어했던 게 아니고 고급 옷을 선호했던 것이었다


일본 사회에서는 상대방에게 충격을 주지 않으려고 뭐든 부드럽게 말을 골라서 하는 편이다. 배려를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속을 알 수 없다”는 말을 한국인에게 종종 듣곤 한다.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주는 것도 배려고, 마음이 상하지 않게 부드럽게 말하는 것도 배려다. 나와 타인 사이를 나쁘지 않게 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때와 장소, 상황에 따라 한국 스타일과 일본 스타일을 가려서 사용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2016.05.10   한국의 택시, 때론 당황스럽고 때론 서럽고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외국인이 한국에서 겪는 난감한 일 중 하나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다. 요즘엔 그렇지 않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버스 두 대가 정류장에 나란히 도착하면 세 번째 온 버스는 서지 않고 가버리기 일쑤였다.

지난해 한 대학의 일본어과 학생들이 외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불편한 일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사람이 타자마자 버스가 출발해 넘어질 뻔했다”는 답이 가장 많았다. 승객들이 앉거나 손잡이를 잡는 것을 확인하고 출발하는 기사들이 요즘엔 많아졌지만, 여전히 지키지 않는 경우도 많다

서울 지하철은 이용하기에 큰 불편함이 없었다. 일본 지하철보다 나은 점도 있다. 일본은 전철 안에 주간, 월간잡지 광고가 많고 내용이 스캔들 중심이어서 어지러운 느낌이 든다. 한국 차내 광고는 공익성을 담은 내용이 많고, 문화 혜택을 주는 광고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지나가다가도 광고를 휴대전화로 사진 찍고 갈 때가 많다. 플랫폼에 시가 적혀 있는 것도 차를 기다리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하고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즐거움이다

다만 시설적인 면에선 아쉬운 점도 있다. 1호선이나 3호선처럼 오래전에 만들어진 역에는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플랫폼도 있다. 교통 약자를 위한 편의 시설이 완비됐으면 좋겠다

교통수단 중 제일 당황스러웠던 건 택시였다. 택시를 잡을 때 손을 올리고 크게 흔드는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손을 앞으로 쑥 내밀고 잡는다. 그걸 모르고 택시가 올 때마다 손을 올려 크게 흔드니 다 가버렸다. 겨우 정차하는 택시가 있다 해도 일본처럼 자동문인 줄 알고 가만히 서 있었더니 금방 떠나는 통에 택시 잡기가 참 어려웠다

 

 택시를 무사히 잡아탔다 해도 황당한 일은 생겼다. 한 택시기사는 20분 동안 휴대전화를 들고 부인인지 애인인지 모를 상대에게 같은 욕을 무한 반복했다. 돈을 내고 서비스를 받을 자격이 있는 손님이 왜 20분 동안이나 일방적으로 욕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하나 다행이었던 건 내가 외국인이었다는 것이다. 기사가 하는 욕이 한국말로 얼마나 강도가 센 것인지 와 닿진 않았다. 외국인으로서 서러웠던 적이 또 있다. 수업에 늦을 것 같아 택시를 타고 급히 가는 중이었다. 나는 목적지가 다가오자 “왼쪽! 왼쪽!” 하고 외쳤는데 기사 아저씨가 갑자기 “왜 갑자기 반말을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난 일본사람인데 명사만 말하는 것이 반말이 될 줄은 몰랐다”고 답했다. 일본에서는 반말이라는 개념이 없고 급할 때 단어만으로도 말하곤 한다. 기사 아저씨는 “왼쪽은 명사가 아니라 지시대명사잖아요. 아는 척하기는…” 하고 흥분된 목소리로 항의했다. 외국인으로서 이해받지 못한 것이 불쾌하고 황당했다. 


물론 친절한 기사 아저씨도 많다. 그래서 즐겁게 대화할 때도 있다. 그래도 항상 조심해야겠다는 걸 느낀다. 먼 시골에 가 택시를 탔던 날이었다. 기사 아저씨와의 대화가 너무 재밌어서 잠시 정신줄을 놓아버리곤 내릴 때 여행 가방을 트렁크에서 꺼내는 걸 깜빡했던 것이다. 내가 명함도 건네줬던 기사였기에 금방 연락이 될 줄 알았는데, 결국 가방을 찾을 수 없었다. 아저씨 탓만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영 기분이 찜찜했다. 그 이후론 택시 탈 때 항상 기사님의 관상을 본다. 내가 외국인이라는 걸 알면 멀리 돌아갈까 봐 나는 되도록 일본인 티가 나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한국인처럼 말한다

그래도 요즘 버스에서 승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승하차 때마다 인사해주는 기사를 종종 보게 돼 기분이 좋다. 택시를 탈 때 나도 먼저 기사 아저씨에게 인사하고 내릴 때도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하고 말한다. 택시기사를 평가하는 제도가 시행된다는 소식이 들려 반가웠다. 대중교통 종사자들은 국가 이미지를 좌우하는 중요한 직업이다. 그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친절한 얼굴이 되길 바란다. 

 

2016-07-05  ‘저녁시간’ 몰라 울어버린 일본 새댁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남편의 고향은 전북 순창군 금과면이다. 1년에 두세 번 산소에 가는데 옛날에는 자동차로 6시간 정도 걸렸다. 가도 가도 도착하지 않아 남편에게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라고 물었다. 남편은 “다 왔다”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고 거의 다 도착했나 싶어 안도했지만 좀처럼 목적지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또 물었다. “언제 도착하는데?” 남편은 역시 “다 왔다”라고 말했다. 그런 대화가 몇 차례 오고간 뒤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 후 나는 남편의 “다 왔다”라는 말을 들으면 ‘30분은 더 가야 하겠구나’라고 판단하게 됐다. 처음에는 남편이 정확히 대답해 주지 않아 답답했지만 한국에서 살며 “멀지 않다”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저녁’이라는 개념도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저녁노을’이라는 표현이 있는 만큼 저녁은 해가 지기 전인 오후 5, 6시쯤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결혼 전 남편이 “저녁에 만나러 갈게”라고 하면 나는 남편이 오후 5시쯤 오는 줄 알고 오후 4시부터 마중하러 나가려고 4층에서 1층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기다렸다. 그런데 남편은 오후 8시가 다 돼서야 왔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저녁에 온다는 남편의 말만 믿고 몇 시간이나 기다리다가 오후 8시에 온 남편의 얼굴을 보고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지금도 한국에서 ‘저녁’이라는 단어가 좀 막연하게 쓰인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조금씩 한국말을 알아 가며 “이따가 만나자”고 하면 그날 몇 시간 뒤, “나중에 만나자”고 하면 그날이 아닌 다른 날 만나자는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됐다. 모호한 약속에 관한 말들로 혼란스러웠다 

 

어느 날 버스 여행을 가는데 아침에 어떤 사람이 “갑자기 친척이 시골에서 오게 돼 못 간다”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 출발 시간이 다 돼서야 “몸살 나서 못 간다”라고 했다. 더 심한 경우는 “비가 오니 나가기 싫어졌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갑자기 생기는 일이 일본보다 많은 것 같다 

누굴 보고 싶으면 바로 행동에 옮기는 게 한국의 문화이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몸살’은 일본에 없는 단어지만 여자들의 노동량이 많은 한국이니까 역시 이해한다. 하지만 “비가 와서 나가기 싫다”고 약속을 어기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일본은 비가 자주 내려서인지 비가 온다는 이유로 약속을 취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일들을 겪고 나서 누군가와 약속할 때 “아침이 돼 봐야 알겠다”, “뚜껑을 열어 봐야 알겠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됐다. 오히려 일본인과 약속할 때 더 어색한 경우가 많다. 한국에 사는 일본인과 한 달 전에 약속을 하고 그 이후 한 번도 연락하지 않다가 한 달 뒤 약속 장소에서 딱 만나니 좀 무섭게 느껴졌다. 그간 서로에게 뭔가 사정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한 달 전 약속만 믿고 나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제일 소화하기 어려웠던 말은 “알아서 하라”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능력대로 스스로 하는 것을 좋게 보지만 일본에서는 지시받은 대로 확실히 하는 게 더 좋다. 지시받은 이상을 하면 혼날 때도 있다. 팀플레이를 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당돌한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은 잘하거나 못하거나 개인의 생각이나 기량 자체를 평가하지만 일본은 각자 맡은 영역을 제대로 처리해 넘기는 게 중요하다. 회사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상사에게 물어보며 일을 진행해야 하고 개인의 생각이 개입되면 안 된다. 한편으로는 “알아서 하라”라는 말이 “당신 생각대로 마음대로 하라”라는 뜻으로 쓰일 때도 있어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다

지금은 “알아서 하라”라는 말이 창조성을 최대한 높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장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정도까지 양심껏 일을 처리하면 자신감이 높아지고 본인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내게는 모호한 말이었지만 “신념대로 하라”라는 격려가 느껴지는 이 말의 개념을 정확히 알고 실천하면 누구나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경험을 토대로 말의 깊이를 알게 되고 모국 문화와 비교해 보며 다른 문화를 소화해 나가는 것은 행운이다.

 

2016.10.04  韓의 고기 선물과 日의 손수건 선물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한국과 일본의 선물 문화에도 차이가 있다. 일본에서는 선물을 받으면 바로 답례를 하는 것이 예의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도 받은 값의 반 정도를 답례해야 한다든가 하는 규칙이 존재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선물을 받고 바로 답례를 하면 정이 떨어진다”고 말하고, 바로 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한다.


 일본에서는 상대가 답례할 때 부담이 될까 봐 일부러 값이 많이 안 나가는 물건을 고른다. 그래서 일본인이라면 매일 가지고 다니는 손수건 선물이 무난하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손수건은 눈물을 닦는 물건이라고 선물에는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당황했다.


 생활 필수품이고 값도 안 나가고 예쁘고 기념이 될 만한 선물인데 슬플 때 사용하는 물건이라고 선물하면 안 된다니…. 손수건은 화장실에서 손을 닦는 물건이지 눈물을 닦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었다.


 한국에서는 연인에게 하는 선물 중에 내의 선물이 흔하다고 들었는데 일본에서는 내의를 선물하지 않는다. 한국 남자와 사귄 일본 여자가 남자에게서 내의 선물을 받고 남자 친구는 변태적인 면이 있지 않은지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문화 차이를 모르면 오해가 생긴다.


 지갑은 두 나라 다 환영하는 선물인데 한국에서는 새 지갑에 만 원짜리라도 한 장 넣어 선물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일본에서는 동전 지갑에 5엔짜리나 도자기 개구리 인형을 넣어 선물한다. 5엔짜리는 일본어로 ‘고엔’이라고 말하고 인연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지갑을 받고 좋은 인연이 생기길 비는 마음으로 5엔짜리를 넣는다. 개구리는 일본어로 ‘가에루’라고 읽는데, ‘돌아오다’라는 단어와 동음이의어가 된다. 지갑에서 나간 돈이 다시 돌아오길 빌어 주기 위해 개구리 인형을 넣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동음이의어로 웃겨 주거나 복을 비는 문화가 있어서 사소한 일인데도 그런 것에 신경을 많이 쓴다.

 

 나가사키 현에 ‘하우스텐보스’라는 곳이 있다. 17세기 네덜란드를 모방한 관광지다. 7, 8년 전에 거기에 갔을 때 입구에서 찾아온 손님 모두에게 작은 봉투에 5엔짜리를 넣어 선물하고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아마 신년 인사였던 것 같다.


 일본에서는 5엔짜리의 의미를 생각하고 상대가 나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는 것을 기쁘게 느끼는 건데 한국인이라면 단돈 50원을 작은 봉투에 넣고 선물로 주면 엄청 기분이 나쁠 것이다. 그 시설의 입장료는 한국 돈으로 8만 원 정도 되는데 50원 돌려준 것을 놓고 사람을 무시하느냐라는 소리가 들려올 법도 하다. 여담이지만, 일본에서 개똥을 밟으면 운이 붙었다고 농담한다. 일본어로 똥을 의미하는 단어에 운과 비슷한 음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한다. 별로 쓸데없는 이야기지만, 사소한 것에서 웃음을 찾는 순수한 면이 있다.


 그런데 요즈음 일본에서 이런 농담이 너무 지나치다는 지적이 많이 나온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과한 말을 밥 먹듯 했던 코미디 프로그램들이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그 같은 소식을 듣고 일본 사람들 사이에 점점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크고 좋은 물건을 선물하려고 한다. 이에 비해 일본인들은 상대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작은 것을 선물하는 경우가 많다. 두 나라의 선물 문화의 차이일 것이다.

 

 만약 집에 초대 받았을 때, 한국인이라면 고기를 사 가지고 가는 경우도 많다. 일본에서는 가볍게 과일이나 과자 등 비닐봉지에 담아서 손에 들고 가는 선물을 ‘손 선물’이라고 부른다. 그런 선물을 준비해 가면 가족끼리 드시라고 말하고 드릴 때도 있다. 그 과자를 내놓을 경우엔 “가지고 오신 것을 드리게 돼 죄송하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금 생각하니, ‘가지고 간 것을 왜 나누어 먹으려고 하지 않는 걸까’ 의문이 생긴다. 나 같은 경우는 “맛있어 보여서 같이 먹으려고 사 가지고 왔다”고 말하고 드리기도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일본에서는 내가 먹고 싶어서 사간 물건인데 맛도 보지 못한 채 그 집을 나와야 한다. 한국과 일본의 선물 문화의 차이임에 틀림없다. 사소하지만 그 차이 때문에 선물 문화가 더 흥미롭다는 생각이 든다.

 

2016-11-22  결혼까지 부모에 의존하는 韓 젊은이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한국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는데 일본에서도 비슷한 속담이 있다. ‘세살의 영혼이 100세까지도’라는 속담이다. 둘 다 어릴 때 습관은 평생 동안 바꾸기 어렵다는 내용이다.  


 일본에서 어릴 때 듣는 말 중 하나는 “자기 일은 자기가 스스로 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것인데 그런 말들은 평생 귓가를 맴돌아서 일본인의 삶을 좌우한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자기가 스스로 하라”는 말은 당연한 말이지만 독립심을 기르기 위한 준비 단계가 있다. 자녀 수가 한두 명인 일본에서는 남매일 경우 무조건 초등학교 중고학년이 되면 독방을 쓰고 자매들도 각자 쓸 확률이 높다.
 

 

 엄마를 부르는 호칭도 초등학교 1, 2학년 때 ‘오카짱’에서 ‘오카상’으로 고쳐 주기도 한다. 한국에서 말하자면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 하나로 의식적으로 긴장감을 주기도 한다.


 한국의 학부모는 힘들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매일 준비물을 챙기는 일은 엄마의 숙제가 되고 알림장을 들고 매일 아침 문방구를 찾아가야 한다. 오래전부터 맞벌이 부부가 대다수인 일본에서는 가정마다 준비물을 챙기는 일은 거의 없다. 시켜도 학생이 할 수 있는 일만 시킨다.


 나는 초등학교 숙제도 1학년부터 컴퓨터를 사용해야 하는 과제가 나와 당황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아이들의 숙제가 아니고 엄마의 숙제다. 한국에서는 엄마가 아이를 잘 관리해야 하고 대학입시에서도 엄마의 정보력이 중요하다. 다른 나라는 그렇지 않다. 부모가 아이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본인 스스로 길을 찾아 선생님이나 친구, 선배에게 묻고 자기의 길은 자기가 그린다


 성인식에도 큰 차이가 있다. 일본의 성인식 날은 공휴일이고 관공서에서 크게 축하행사를 열어 준다. 그날은 여자아이를 위해서 부모가 기모노를 준비한다. ‘후리소데’라고 불리는, 소매가 땅 가까이까지 가는 전통 옷인데 엄청 비싸다. 손작업으로 자수를 놓는 것은 한국 돈으로 1억 원까지 가는 것도 있다. 성인식 때 모두 그렇게 비싼 것을 사 입지는 않는다. 대여 서비스도 많아졌다.

 

 여자들은 성인식 때 미용실에서 머리도 올려 장식하고 화려한 기모노를 입고 파티 주인공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행사에 임한다. 행사는 거의 100% 참석하고 선물도 받는다. 성인이 되는 설렘과 자각심을 갖게 해주는 행사이기에 많은 사람이 성인식을 즐긴다.


 한국에서는 성인식 날이 공휴일이 아니라서 행사에 참석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미 18세 때 주민등록증이 나오다 보니 그것이 성인식보다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성인이 되고 사회인으로서 책임감을 자각하기 위해 성인식을 국가 차원의 행사로 승격시키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떤 면에서 한국은 부모와 자식 간의 밀접한 관계가 평생 지속되고 결혼, 집 장만 등에서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한국에서 산 지 얼마 안 됐을 때 드라마에서 부모가 신분 차이 등의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는 장면을 수 없이 보고 깜짝 놀랐다.


 일본에서는 직장 생활이 시작되면 부모에게 생활비도 드리고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직접 부모에게 소개한다. 부모는 자식의 의사를 존중하고 일방적으로 반대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일본 문화는 서양의 영향을 많아 받아 독립심과 개인 책임의 비중이 크다. 어렸을 때부터 독립심을 기르고 혼자 해나가는데, 부모와는 성인 대 성인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전통이 있는 가문이라든가 대기업 경영자 가정이 아니면 결혼 준비도 당사자끼리 해결한다. 결혼식도 당사자가 아는 사람에게만 엽서를 보내고 출결 표시를 해서 다시 회신하고 확정된 참석자 이름을 탁상에 올려놓는다. 초대받은 사람만 참석할 수 있다. 


 거기에 비해 한국에서는 결혼식도 장례식도 당사자가 모르는 사람들(가족들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까지 모두 찾아온다. 그래서 행사를 치르는 데 큰 힘이 되어 주는 느낌이 든다. 이럴 때는 한국의 부모 자식 간의 밀접한 관계가 돋보인다. 독립심도 중요하지만 서로의 도움이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가 바람직하지 않을까.

 

2016-12-20  韓시어머니 자리양보 없는 일본에 가더니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내가 한국에 왔을 때에는 다문화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외국인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국제결혼의 이혼율이 높아지게 된 2006년부터 법무부에서 결혼이민자 네트워크라는 단체를 만들어줬다. 한국인 남자와 결혼한 외국인 부인 가운데 먼저 한국에 거주한 사람들이 늦게 입국한 사람들의 멘토가 되어 한국문화에 잘 적응하도록 커뮤니티를 만들어준 것이다

 나도 2007년부터 참여해서 810개국에서 온 이주여성들과 같이 활동하게 되었다. 매달 ‘해피 스타트’라는, 새로 입국한 이주여성들에게 행정적인 의무교육을 할 때 선배들이 앞에 나가서 경험담도 말해주고 환영의 합창도 했다. 이주여성들이 한국어로 통하기 때문에 항상 웃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밝고 상냥한 분위기였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민원봉사도 하고, 보육원이나 양로원에 위문방문도 했었다 

 솔직히 그 전에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이 없었는데 자주 만나게 되니 인간으로서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 확인도 되고, 반면 나라마다 얼마나 다양한 풍습이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이 결혼식 때 순백의 드레스를 입는다고 생각하는데 중국에서는 빨간 드레스를 입고 축의금 봉투도 빨간색이란다. 바다가 없는 몽골에서 온 사람은 생선을 먹는 방법을 몰라 뼈까지 같이 먹고 아파서 울었다고 했다. 베트남에서는 다리로 걸레를 움직여 바닥 청소를 하고 시부모님 밥상에서는 제일 안에 있는 밥이 따뜻하니까 맨 나중에 어른에게 밥을 드린다. 먼저 어른에게 밥을 드리는 한국과는 정반대다. 한국의 어르신들은 맨 나중에 밥을 드리면 화를 내실지 모르겠다. 베트남 여성들은 한국에서는 왜 자주 집 안에서도 인사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본인인 나도 한국에서 연장자에 대한 예의가 남다른 것을 봐서 놀라운 일이 자주 있었다. 일본에서는 길 안내는 정말로 친절하게 거의 목적지 가까이까지 안내하는 경우가 많고 거기에 감동받은 외국인 관광객도 많았다. 그렇지만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자리 양보는 거의 안 한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일본에 갔을 때 다리가 아프셔서 힘들어하셨는데 아무도 양보를 안 했다. 그 이야기를 친정어머니에게 하니 “요즘은 젊은 사람들도 피곤하니까”라는 말이 돌아와서 놀랐다. 일본에서는 나이 들면 약자로 생각하고 “늙으면 자식 따라가라”는 속담이 있듯 집안에서의 권력도 줄어든다.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가정 내에 질서가 잘 잡혀 있다. 

 

 나는 외국에서 온 결혼이민자들이 궁금해서 다문화뉴스의 기자를 하면서 ‘지구촌 이웃’이라는 코너를 만들고 취재를 시작했다. 모국에서의 생활과 모국 문화 소개, 그리고 한국 생활에 대한 인터뷰를 하면서 결혼한 이민자들의 감정을 느끼게 됐다. 베트남에서 온 사람은 처음에 남편이 출근하면 혼자 나가기가 무서워서 3개월 동안 집 안에만 있었는데 눈이 내리는 것을 생전 처음으로 보고 신기한 나머지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고 했다. 베트남에서 남편과 연애 시절 오토바이 타고 데이트하고 강가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라 진한 베트남 커피향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사람은 모국에서는 좋은 직장에서 근무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공장에선 월급을 안 주는 경우가 많아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분노가 폭발해 노동부에 찾아가 합법적인 대우를 요구했다고 전했다. 그러곤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 다문화 관련 직장에 다니게 되었다고 했다.

 이주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느 순간 분노를 느끼고 오기가 생겨서 분발하게 될 때가 있다. 피부색 때문에 차별받다 지금은 다문화 단체의 대표가 되어 라디오 프로에서 활약 중인 스리랑카 이주여성, 악착같이 일해 남편의 빚을 갚고 지금은 방송통신대를 다니고 있는 베트남 여성…. 타지에서 자아가 싹트고 자신의 생활을 개척해나가는 이주여성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 그들의 삶의 연장선에 한국의 밝은 미래가 있길 기대한다. 

야마구치 히데코 일본 출신 서울 외국인주민대표자회의 소속

 

■ 이라의 한국 블로그

몽골 다문화여성연합 대표  동아일보

이라

2015-03-12   으악! 내가 맛있게 먹은 음식이 쥐라고?

한국 남편을 따라 한국에 온 지 12년째다. 초원의 나라 몽골에서 태어났지만 이제는 두 번째 고향이 되어버린 한국에 더 익숙해진 스스로에게 놀랄 때가 있다. 생활방식도 바뀌었지만, 즐겨 먹는 음식도 많이 달라졌다. 한국에 와서 왜 먹나 제일 의아했던 음식은 누룽지와 청국장찌개였다. 밥을 조금 태워 아무 양념도 없이 물에 끓인 누룽지를 시원하다면서 먹는 것을 이해하는 데 몇 년이 필요했다. 청국장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냄새가 강해 맛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이제 감기가 오려나 싶고 입맛이 없으면 남편과 나란히 앉아 누룽지를 먹곤 한다. 청국장은 신사동 ○○순두부집의 ‘멸치 뺀’ 청국장찌개가 서울에서 제일 맛있다.

 

인간은 정말 사회 환경에 따라 변화하면서 사는 존재인 모양이다. 몽골은 바다에 전혀 접하지 않은 내륙 국가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도 민간 목축업이 몽골 국내총생산(GDP)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개 소와 양을 키우며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유목민이다. 주식은 밀가루와 양념을 제외하면 흔히 ‘붉은 음식’과 ‘하얀 음식’으로 나뉜다. 붉은 음식이란 육류 즉 가축의 고기이다. 가을이면 통통하게 살찐 가축을 잡아 추운 겨울에 대비해 말리거나 얼려 저장한다. 하얀 음식은 가축에서 나오는 젖 그리고 그 젖으로 만드는 치즈, 요구르트 등의 유제품이다.

 

오래전 몽골인들은 야채를 거의 먹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그때에는 식용 야채가 거의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를 궁금해한 외국 사신에게 칭기즈칸이 한 대답이다.

 

“소와 양은 무엇을 먹느냐? 야채 아니더냐? 우리가 그 소와 양을 먹는데 왜 야채를 또 먹어야 되는가?

 

칭기즈칸의 군대가 외국 원정을 떠날 때면 음식을 나르는 보급부대가 따로 있기보다는 군인들이 소와 양을 끌고 다녔다고 한다. 쇠고기는 육포로 만들어 안장에 넣어 이동하면서도 먹을 수 있어서 뛰어난 기동력을 지닐 수 있었다고 한다. 양고기는 얇게 썰어 안장 밑에 깔고 다니며 숙성을 시켜 먹었다.

 

몽골은 한국보다 많이 북쪽에 있어 겨울에 추운 날은 영하 40도 이하가 되기도 한다. 고기가 들어가는 음식이 많은데, 추운 날씨에서 생활하다 보니 열량이 높은 음식을 먹어야 했을 것이다. 몽골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즐겨 먹는 음식은 ‘허르헉’이다. 양고기를 양념해 불에 달군 돌과 섞어 두어 익혀 먹는 음식이다. 뜨거운 돌로 익힌 양고기의 맛이 일품이다. 서울 동대문에 가면 몽골타운이 있다. 몽골 음식점부터 몽골인과 관련된 사업체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가면 허르헉을 먹을 수 있다.

 

한국 음식 중에서 허르헉과 비슷한 맛을 내는 음식은 갈비찜이다. 한국의 음식 중 ‘대부분’은 몽골 음식보다는 양념이 강하다. 여기서 ‘모두’라고 쓰지 않은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동치미 때문이다. 살짝 언 얼음이 동동 뜬 동치미의 맛은 그야말로 발군인데 정확한 설명이 쉽지 않다. 한국의 요리학원에서 처음 배운 음식인 구절판도 양념은 거의 하지 않지만 화려한 멋과 함께 아름다운 맛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에 비해 닭발은 참 매운 음식이다. 외국에서 손님들이 오면 대개 한국의 바비큐라고 설명하고 고깃집에 가서 등심이나 갈빗살, 차돌박이 그리고 삼겹살과 돼지갈비 등 4, 5가지 고기를 대접한다. 세 번째나 네 번째 고기가 나오면 또 다른 메뉴가 있냐고 하고, 여기에 마지막에 냉면을 시켜 준다고 하면 모두가 놀라고 만다. 한번은 중국에서 온 학교 교장들이 한국인들이 일상에서 먹는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고 해서 강남역 쪽에 데리고 가 ‘불타는 닭발’을 대접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맛있게 먹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던 기억이 난다. 한국 음식문화는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국토의 삼면이 바다라서 그런가 싶다. 바다로 둘러싸여 해산물도 많고 음식문화도 다양해 지역에 따라 독특한 먹을거리가 많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연히 쥐포를 먹게 되었는데, 아주 독특한 냄새와 함께 맛이 있는 간식이었다. 하루는 쥐포를 먹고 있는 나에게 남편이 그게 뭐로 만든 것인지 아냐고 묻더니, 쥐의 껍데기라고 해서 기겁을 했다. 아무리 맛있어도 내가 쥐를 먹었다니? 나중에는 쥐치라는 고기라고 설명을 해주는데도 믿어지지 않아 결국 인터넷에서 쥐치를 검색해 확인해주는 과정까지 필요했지만 쥐치를 포함해 참 다양한 음식이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이라 씨(38)는 몽골 출신으로 2003년부터 한국에서 살고 있다. 2010년부터 4년간 새누리당 경기도의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다문화여성연합 대표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15-05-07  미역국과 양고깃국

한국에서 도시계획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남동생이 재작년에 결혼했다. 그 올케가 한국 병원에서 출산을 하겠다고 한국에 왔다.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가 같이 오신 게 아니라서 내가 옆에서 많이 도와줘야 했다. 그런데 나도 아이를 낳은 지 20년이 되어가는 데다가 한국에서 생활한 지 만 11년이 되다 보니 몽골식, 한국식이 혼동되기도 해서 잘 할 수 있을지 제법 걱정이 되었다.

 

올케가 산통을 시작하자 병원에 입원하면서 친정 가족들에게 연락을 했다. 그랬더니 양가 가족 및 친척들의 전화, 문자 수십 통이 왔다. 그러고 보니 몽골 사람들의 친척들 간 교류가 아직 한국보다 긴밀하다는 점을 잠깐 잊고 있었다. 멀리서 걱정하시는 마음은 이해하는데 일일이 답을 보낼 틈이 없다 보니 그분들은 더욱 답답했나 보다. 산통 시작 후 아홉 시간이 넘어가자 올케의 친정어머니가 급하게 연락해 왔다. 라마교 스님한테 가서 상황 설명을 하고 점을 봤더니 아이를 빨리 낳으려면 산모를 동쪽을 보고 누워 있게 하란다. 처음 들었을 때는 동쪽이 어느 쪽인지 찾아서 침대를 돌려놓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가 그냥 웃고 말았다. 산통을 겪는 올케도 그 얘기를 듣더니 힘든 상황에도 하하 웃었다. 그래도 당황한 나머지 스님께 점을 보러 가신 그분의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 내 마음에 따뜻하게 남아 있다.

 

라마교는 원 제국 때 티베트로부터 받아들인 불교가 몽골에 정착한 형태이며 수백 년 동안 몽골의 국교였던 관계로 아직도 제법 많은 몽골 사람들이 라마교를 믿고 있고 문화와 일상생활에 그 영향이 남아 있다. 역사 자료에 따르면 1937년 기준 몽골 성인 남자인구의 30%가 라마 승려였다고 한다. 당시 소련 군대가 주둔하면서 이들 모두가 해산 유배 또는 처형되어 이후 50여 년 동안 몽골에 사원과 승려가 존재하지 않았다.

 

출산을 마치고 신생아 사진을 찍어서 몽골에 보내주고 집에 잠깐 왔더니 몇 시간도 안 되어 올케에게서 전화가 왔다. 병원에서 미역국을 계속 주는데 더 이상 먹을 수가 없단다. ‘아 그렇지’ 하고 몽골식 고깃국을 준비했다. 출산 후 산모가 먹는 음식이 다른 것이다.

 

몽골에서는 출산한 산모에게 양을 한 마리 잡아서 신신한 양고기로 국을 끓여 준다. 힘들게 아이를 낳았으니 영양이 풍부한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고깃국에 송이버섯을 넣어서 먹기도 한다. 물론 양송이가 아니고 자연 송이버섯이다. 여기에 우유차를 곁들여 출산 후 첫 식사를 하게 된다. 버섯 양고깃국과 우유차가 영양이 풍부하고 모유가 잘 나오게 하고 아이를 낳느라 늘어난 배를 수축시켜 주는 등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번에는 나의 한국 시어머님이 병원에 오셔서 양고깃국을 보시더니 옛날에 어머님이 출산하셨을 때는 한 달 정도 고기를 못 먹게 했는데 몽골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바로 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참 이해가 안 된다고 하신다. 두 나라에서 다 살아본 나로서는 어느 쪽이 옳다고 손을 들어줄 수가 없다.

 

그래도 유목문화가 바탕에 깔린 문화 속에서 더운 여름과 함께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겨울을 나야 하는 몽골에서는 출산 후 고깃국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남편도 “아이가 퇴원해 집에 오면 ‘모빌’을 사다가 천장에 걸어줘야겠다”고 한마디 거들었다. 몽골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아빠가 두꺼운 종이를 여우 모양으로 잘라 애기 머리 가까운 곳에 걸어 놓는 관습이 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울려고 얼굴을 찡그리는 건 여우가 아이한테 와서 “엄마가 밖에 나갔다”라고 애기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우가 “아니야 거짓말이야”라고 하면 다시 웃는다고 생각한다. 몽골 사람들은 여우한테 아이를 놀리지 말라는 의미에서 가짜 여우를 아기의 첫 장난감으로 만들어 달아 주는 것이다.

 

부모 고향은 몽골이지만 한국에서 태어난 조카에게는 한국이 제2의 고향이 된다. 어쨌든 바로 앞에서 배냇짓을 하며 잠을 자는 조카를 보면 저절로 얼굴에 미소를 짓게 된다. 세상의 모든 아기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길 마음 깊이 빌어 본다.


※이라 씨(38)는 몽골 출신으로 2003년부터 한국에서 살고 있다. 2010년부터 4년간 새누리당 경기도의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다문화여성연합 대표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라 씨(38)는 몽골 출신으로 2003년부터 한국에서 살고 있다. 2010년부터 4년간 새누리당 경기도의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다문화여성연합 대표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15-07-02  몽골의 독립과 나담 축제

매년 7 11일부터 3일간 진행되는 몽골의 나담 축제는 2010년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전통 축제다. 나담 축제는 유목 생활이나 군사훈련과 관계가 깊은 말타기, 활쏘기, 씨름의 세 가지 경기로 구성된다. 나담은 놀이, 경기라는 뜻으로 몽골에서 수백 년간 이어져 왔다. 옛날엔 부족들 간에 불화가 생기면 “나담 한번 할까?”라는 메시지를 보내곤 했단다. 답이 “그러자”면 두 부족이 나담을 같이 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고 만약 “아니다”라고 하면 거의 전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7월이 되면 이 축제를 보러 전 세계에서 약 65000명의 여행객이 몽골을 찾는다. 특히 개막식이나 폐막식 때는 선수들과 관람객, 여행객들이 몰려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나담 축제가 7 11일로 정해진 것은 1368년 원나라 멸망 이후 북쪽 몽골 초원에서 명맥을 잇던 북원(北元) 1696년 청나라 강희제에 의해 중국에 복속된 이후 1921 7 11 225년 만에 독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독립 이후 공산화 과정에서 몽골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중국에서 독립한 뒤 소련의 영향으로 공산 위성국 중 하나가 되었다. 사회주의식 정권은 소련의 지시를 따르는 사람들로 채워졌고 부유층과 사원의 재산은 몰수됐으며 모든 재산이 국유화됐다. 사회주의 도입 후 1929년부터 3년간 처형된 몽골 남성은 당시 전체 성인 남성의 15% 3만 명에 달했다. 당시 성인 남자 인구의 30%를 차지하던 승려들도 해산, 유배, 처형을 당했고 승려 외에 부유한 유목민, 지식인, 관리 그리고 죄 없는 많은 민간인들도 부르주아와 과거의 악폐로 몰려 처형당했다. 나라는 점차 본격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변해 갔으며 경제 부문도 쉽지 않았다. 한국의 16배에 이르는 국토에 200만 명 정도가 흩어져 민간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이 민간 목축업이 몽골 국내총생산(GDP) 90%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몽골의 경제, 특히 공업 생산은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에 대부분 의존해야 했다.

 

1980년대 후반 소련과 동유럽의 개혁·개방 정책이 실시되자 이들 국가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몽골 경제는 파탄 국면으로 치달았다. 물자 부족이 발생했고 국민총생산의 80%가 사라져 버렸다. 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몰리고 시민들의 불만이 가중되자, 자본주의 체제가 불가피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커지는 불만과 민주화 요구에 1991년 몽골 정부는 드디어 공산주의를 접고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체제로 빠른 속도로 전환해 오늘날과 같은 민주국가에 이른다.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 오래 살아 온 몽골인들에게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란 개념은 낯설었고 적응하기도 어려웠다. 그때는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판매하는 사람을 보면 ‘이윤을 남길 나쁜 마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판즈칭’이라고 낮춰 부르곤 했다. 그 전에는 자유에 약간의 제한은 있었지만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도 어쨌든 직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직장도 각자의 능력에 맞게 찾아야 하고 모든 것을 내가 번 돈으로 사야 했다. 경쟁이 생겨났고 이에 따른 패배자도 생겼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임금을 현실화하는 움직임도 일어났지만, 이를 적용하는 시점에 간극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불공정과 불균형이 필연적으로 따라왔다. 생전 처음 보는 새로운 제도와 삶의 방식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던 몽골인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몽골 인구의 절반 이상이 30세 이하이다. 요즘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가 보면 세 가지가 많다. 홀짝수제를 도입했는데도 여전히 차가 많고, 대학이 많고 그리고 젊은이가 많다. 올해 1 300만 명에 도달한 몽골 인구 중 30% 이상이 사는 작은 도시 울란바토르에 차가 많다는 것은 ‘공기가 좋지 않다’는 뜻이지만 밝은 몽골의 미래를 의미하는 것 같다고 여기는 많은 젊은이가 흐뭇한 마음으로 이곳에 온다. 1990년대 초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처음 경험한 지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지금, 몽골인들은 자본주의 공부를 마치고 날로 발전하는 세계 경제 질서 속에서 의미 있는 구성원이 될 준비를 마친 듯싶다.

 

외국에 거주하는 몽골인이 12만 명이다. 그중 20% 이상이 한국에 거주한다. 한국은 일제강점기 35, 이후 6·25전쟁 등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쳤음에도 온 국민이 단결하고 노력한 끝에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섰다. 한국과 몽골은 1990년 수교를 맺어 올해 25주년이 된다. 한국은 몽골이 민주화된 후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존재해 온 국가다. 몽골의 사회와 경제 그리고 정치가 더욱 발전할수록 양국 관계가 더욱 발전하고 성숙해 갈 수 있길 바란다.


2015-09-03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2003년 가을

계속 그렇게 더울 것 같더니, 이제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가을을 알리는 것 같다. 한국에 처음 온 그때도 가을이었다. 낯선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설렘과 함께 약간의 불안함이 깃든 표정도 감출 수 없던 때였다. 혹시 길을 잃어버릴까 걱정이 된 남편이 챙겨준 휴대전화와 비상금, 집 주소가 한글과 영어로 쓰인 메모를 들고 내가 사는 동네 탐험을 시작했다. 처음 며칠 동안 아침이면 운동화를 신고 집 옆의 도로를 따라 한 방향으로 두 시간, 돌아오는 데 두 시간, 그 다음 날은 다른 방향으로 걸어보고 나만의 지도를 만들어가면서 동네를 익혀갔다. 첫째 날, 혹시나 시장이나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상가라도 볼까 싶었는데 한 시간 두 시간을 걸어 봐도 트럭들이 다니는 황무지 같은 풍경만 연속된다. 실망감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과 함께 외출할 때는 예쁜 간판들로 치장된 건물이 많이 보이던데, 잘못된 방향이었나 보다. 발에 물집은 생겼지만 그러고도 며칠 동안 도보여행은 계속 됐다.

 

한국에 와서 처음 겪어보는 일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일도 많았다. 하루는 집 근처 대형 마트에 들러 물건을 사고 집에 가고 있는데 남편이 마트 들렀다 집에 가는 길이냐며 길 건널 때 조심하라고 휴대전화를 했다. 깜짝 놀라 주변을 살펴봐도 남편은 없었다. 내가 마트에서 집에 가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일찍 퇴근해 나를 따라오고 있나 싶어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어봐도 대답은 “회사”. 카드회사에서 남편 휴대전화로 결제 메시지를 보내준 것을 몰랐다. 카드회사가 그런 서비스도 하나? 백화점에 갔을 때는 현관 앞에서 예쁜 유니폼을 입고 손을 흔들며 미소로 반갑게 인사하는 젊은 여직원들을 처음 보고 뭐하는 사람들인가, 또 왜 그러나 싶기도 했다. 몽골에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이다. 우선 물건을 살지 말지 아직 모르는데 반갑게 인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건 값을 물어보는데 잘 대답을 안 하는 가게도 많다. 물론 예외는 있다. 옷차림새가 반드시 물건을 살 것처럼 보이는 손님이나 외국인한테는 말투가 약간 달라진다. 백화점을 가 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처럼 입구에서 인사하는 직원이나 주차요원을 별도로 고용하는 친절함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육류를 파는 곳에서는 고기 종류가 왜 그리도 많은지. 다양한 부위별로 고기를 파는데, 육류가 주식인 몽골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이다. 시식 코너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수박을 삼각뿔 형태로 조금 잘라 미리 보여주는 것은 봤어도, 고기를 구워서 먹게 해주는 발상은 그때는 참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몽골식으로 얘기하면, 살지 안 살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왜 고기를 먹어볼 수 있도록 해주는가 말이다.

 

시식코너가 당연하게 보이고 백화점에서 옷을 입어보고도 사지 않고 돌아설 수 있게 되자, 머리가 하고 싶어졌다. 당시 울란바토르에서 제일 유명한 미용실 중 하나가 한국인이 운영하는 ‘서울미용실’이었다. 한국에서는 더 잘할 것 아닌가. 몇 년 더 젊어 보이고 예뻐질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아파트 옆의 미용실에 갔다. 두 시간에 걸친 작업의 결과를 거울에서 확인한 순간, 커다란 배움을 얻었다. 한국에서도 잘하는 미용실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곳에 가라고 한 남편의 말을 믿은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뭐든지 설명하고 가르치는 데 발군의 관심과 능력을 가진 남편이 많은 도움이 되지만 때로는 여자가 결정해야 할 일도 있다는 사실을.

 

운동화를 신고 하루에 몇 시간씩 나만의 지도를 만들어가던 그 동네에서 나는 여전히 살고 있다.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언어의 장벽을 호기심으로 넘어낸 2003년 가을이 지나고, 이제 한국에서 열세 번째 가을을 맞는다. 전 세계 최고 수준의 서비스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살다 보니 그 친절함에 익숙해져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도 있지만, 동양이든 서양이든 외국에 나가 보면 내가 어떤 사람들, 어떤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지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한국에서의 지난 12년을 돌이켜보면 행복하고도 좋은 추억이 많다. 그 모두가 가족과 주변의 따뜻한 분들 덕분인데, 그동안 잊고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올 추석 명절에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안부인사라도 전해야겠다.

 

2015-09-24  한국생활 12, 아직도 어려운 한국말

한국에 사는 이주민들에게 한국어는 평생의 과제다. 특히 각종 증명서를 발급받을 때나 전자제품 서비스센터를 방문할 때,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볼 때 등 여러 순간 언어 장벽을 느낀다.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얼마나 더 배워야 그에 가까운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몽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배운 러시아어, 상하이에 어학연수를 가서 배운 중국어, 그리고 이래저래 조금 할 줄 아는 영어까지 포함해 한국어는 내가 접한 외국어 중에서 제일 어려웠다. 가장 늦게 배운 외국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글이 아니라 남편과의 대화를 통해 말로 처음 배워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특히 존댓말은 가장 헷갈리는 것 중 하나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 처음 시어머니와 장을 보러 갔다가 “엄마, 감자 살까?” 하고 여쭤봤는데 어머님이 눈을 크게 뜨시면서 “알아서 사” 하시더니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앞장서 가셨다. 며느리한테 반말을 들은 어머니가 얼마나 놀라셨을까. 집에 돌아와 가족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시어머니한테 반말하는 용감한 며느리”라며 웃었다. ‘아, 존댓말을 썼어야 했는데’ 생각하고 식사가 끝난 후 어머니께 “제가 드시고 나서 설거지 하겠습니다, 어머니 쉬세요”라고 했다. 그러자 “그래, 자네가 먼저 드시게” 하며 또 웃으셨다.

 

어려운 것은 존댓말뿐이 아니었다. 왜 그렇게 비슷한 발음이 많던지. 한국어에 서툴렀던 처음 몇 달간 한국어와 영어 단어를 섞어 쓰며 남편과 대화를 하던 때였다. 배가 불편해 식탁 한편에 있던 소화제를 찾았는데 없어졌기에 남편에게 물어봤다. “여보, 까스활명수 당신이 먹었어요?” 돌아오는 대답은 황당했다. “뭐라고? (car) 설명서를 어떻게 먹어요?

 

황당했던 사례는 하나 더 있다. 한국에서 운전을 하기 위해 도로연수를 받을 때였다. 교차로에서 선생님이 “파란불, 출발”이라고 했다. 출발은 했지만 파란불은 보이지 않았고, 운전 중 계속 파란색이 어디 있나 찾아보았지만 결국 파란불은 못 찾고 파란색으로 된 교통표지판에 불이 들어오나 봤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영어로는 ‘그린(green)’이라고 부르는 신호등을 한국에서는 ‘파란색’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날 연수가 끝날 때쯤에야 알았다. 같은 사물이지만 나라별로 다르게 인식하고 명명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한국인에게는 익숙한 이 인식의 문화가 외국인에겐 자주 어렵다. 한국인이라면 절대로 혼란스럽지 않을 표현에 혼동을 겪기도 한다. 주유소 세차장에 ‘하부세차’라고 쓰여 있는 글을 보고 ‘할부세차’로 잘못 읽어서 ‘세차비가 얼마나 비싸기에 할부로 나눠 낼 정도인가, 절대 오지 말아야지’ 하며 남편한테 얘기를 했더니 황당해했다. 남편은 “만약 어느 세차장에 ‘할부세차’라고 쓰여 있더라도 한국인이라면 ‘하부세차’를 잘못 쓴 거라고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앱’이나 ‘워밍업’ ‘디카’ 같은 외래어는 급변하는 기술과 사회에 맞춰 따라갈 수 있다 해도 요즘 한참 유행하는 ‘꿍꼬또(꿈꿨어)’ 같은 유행어에 익숙해지려면 TV를 좀 더 많이 봐야 하겠다. 언어라는 것이 같은 나라에 살고 있더라도 직업, 사는 곳, 세대, 시대별 트렌드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쓰던 말이 없어지고 모르는 단어가 새로 생기고 하며 항상 변하는 것 같다.

 

지방의회에서 함께 근무하던 분 중 미국에서 10여 년을 살다 오신 분이 있다. 타국에서 이주민으로 살아가는 어려움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이었다. 그분께 외국에 살면서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이었는지 물었더니 “아침에 눈뜨고 영어를 써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고 했다. 본사가 외국에 있는 내 남편도 하루는 이메일을 쓰다가 “내가 한국말로 쓰면 이것보단 아주 잘 쓸 수 있는데 답답하네”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웃음이 났다. ‘난 매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데’ 하고 말이다.

 

한국 생활을 한 지 12년이 지난 요즘도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어제도 TV에서 바다낚시를 하는 장면이 나오자 남편에게 물어봤다. “당신도 이렇게 낚시 다녔어요?” “응, 많이 다닐 때는 거의 매주 다녔지요.” “뭐라고? 마닐라 다닐 때는 매주 다녔어요? 당신 비행기 타는 거 싫어하잖아요?” 대화의 맥이 잠시 끊기는 순간이었다.

 

2015-10-22  이라, 외자 이름의 미학

한국에 온 지 5년째 되던 해, 국적을 한국으로 바꾼 후 지금의 한국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본래의 몽골식 이름을 유지할까 생각도 해 봤지만 한국에서 생활하려면 한국식 이름이 더 편리할 것 같았다. 우선 성씨를 정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제일 많아 보이는 이() 씨로 결정했다. 본적은 시를 기준으로 정해야 한다고 해서 성남 이씨로 했다. 이름은 발음도 쉽고 듣기에도 예쁜 이름으로 짓고 싶었다. 한국 여자 이름에 흔히 보이는 ‘희’자는 복모음이 어렵고, ‘은’자는 모음 ‘ㅡ’가 외국인이 발음하기에 제법 어렵다. 이틀 동안 고민해 고른 이름들은 ‘이미라’ ‘이유라’ ‘이아라’ ‘이소라’ 등이었다. 다 마음에 들어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자, 남편이 옆에서 지켜보다가 한마디 거든다.

 

“그렇게 고르기 어려우면 그 네 가지 중에서 공통되는 걸로 하지.

 

“그럼 뭐가 되는데요?

 

“이라!

 

“그럼 두 자밖에 안 되는데?

 

“외자 이름도 많아요.


그렇게 나는 ‘이라’가 되었다. 지방법원에 가서 개명을 신청하고 얼마 후 ‘성남 이씨’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눈에 띄는 통지서가 도착했다. ‘그럼 이제 내가 초대 성남 이씨가 되었나’ 싶어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이미 한 분이 계셨다. 성남일화 축구단의 러시아 출신 라티노프 데니스가 2003년 귀화하면서 ‘이성남’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개명해 성남 이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인터넷에서 ‘이라’를 찾아보면 우선 보이는 것은 ‘자음으로 끝나는 체언의 뒤에 붙어, 앞 말을 특별히 강조하여 가리키면서 그것이 일이나 행동의 주체임을 나타내는 주격 조사’라거나 ‘작은 천불동이라 불리는 익근리계곡’ ‘서울여행이라 쓰고 방문이라 읽는다’ 등의 설명이었다. 병원 같은 곳에 가면 처음 듣는 말이 “성함?”인데, 내 이름을 얘기하면 반드시 두 번 이상 묻는다. “이라요?” 아니면 “외자요?” 하고. 이름을 결정하던 날 남편과 조금 더 얘길 했어야 했다.

 

몽골 친구들에게 개명한 새 이름을 알려주자 ‘李’가 남편 성인지부터 물어본다. 나는 “한국에서는 이름이 다 김 씨나 이 씨”라고 농담 삼아 얘기하곤 한다. 이제는 나도 그 많은 이 씨 중 한 명이다. 몽골에선 평상시 주로 이름만 사용한다. 성은 아버지의 성과 이름 중 이름 부분을 물려받아 성으로 쓴다. 내 아버지의 성은 울지후(Ulzihuu), 이름은 네르귀(Nergui)이고, 나는 성이 네르귀, 이름은 게렐(Gerel)이 되었다. 남편이 아직도 신기하게 생각하는 몽골 문화가 이 부분이다. 한국으로 귀화하고 호적 등록을 할 때 몽골 출생증명서를 내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내 ‘성’이 되는 것을 한참 설명해야 했다. 미국처럼 여자가 결혼하면 남편을 따라 성이 바뀌는 문화도 있지 않은가.

 

몽골은 한국처럼 형제들끼리는 대부분 돌림자를 쓰는데, 여자 아이들 이름에도 돌림자를 쓴다. 예를 들어 울란바토르에 있는 친구 에르덴투야(Erdenetuya)는 형제가 다섯 명이고 다들 이름이 에르덴(Erdene)으로 시작한다. 에르덴은 보석, 귀한 것을 의미한다. 큰언니는 에르덴치멕(Erdenechimeg), 큰오빠는 에르덴볼드(Erdenebold), 작은오빠는 에르덴바타르(Erdenebaatar)이다. 그 대신 한국처럼 돌림자로 항렬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몽골 이름들은 대개 뜻을 담고 있다. 내 이름 게렐은 빛()이라는 뜻이다. 가끔 불교의 영향을 받은 티베트어 이름도 있는데, 일반인은 몰라도 승려들은 그 뜻을 안다. 딸이 많은 집에 아들이 태어나면 소중한 아이를 귀신이나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숨기기 위해 이름을 여자 이름으로 짓는 일도 있다. 내 성이자 아버지의 이름 ‘네르귀’도 같은 이유로 ‘무명(無名)’이라는 뜻이다.

 

이름을 짓는 유행은 점차 달라졌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몽골에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나타샤, 유라, 안드레 같은 러시아식 이름은 더이상 쓰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옛날 친러시아 정권 아래서는 아예 쓸 수 없던 칭기즈, 테무친이나 옛날의 왕, 왕비 이름을 많이 썼다. 이런 이름이 너무 많아지자 요즘엔 유명한 인물들이나 소설가, 학자 이름을 쓰는 추세다.

 

고등학생인 아들이 재채기를 하더니 내게 옮긴 것 같다. 병원에 가서 이름을 말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부른다. “라님∼!” 독특한 간호사다.

 

내 독특한 이름 때문에 한 번 만난 사람들도 나를 쉽게 잊지 않는다. 러시아 친구들은 러시아에서 ‘이리나’를 ‘이라’로 줄여 부르는 습관 때문에 이름이 ‘이리나’냐고 묻고, 몽골 친구들은 러시아식 이름으로 개명했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선 아직도 가끔 ‘아라’로 바꿔 부르거나 ‘이이라’로 쓰시는 분들이 있긴 해도 나는 이제 내 이름이 좋다.

 

2015-11-19  몽골 학교, 한국 학교

얼마 전 2016년 대입수학능력시험이 있었다. 둘째인 아들이 한국 초등학교로 전학 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내년이면 나도 고3 엄마가 된다. 아들은 어느 날은 역사학자가 되고 싶다고 하다가, 또 스포츠 매니지먼트를 공부하고 싶다고 하더니 이제는 어느 대학에 갈 수 있는지가 더 걱정인 모양이다.

 

아이 전학 때문에 처음 한국 학교를 방문하고 신기했던 것은 학년이 바뀔 때마다 반 배정을 새로 하고 담임교사도 새로운 분이 온다는 사실이었다. 매년 담임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바뀌면 아이들이 매번 새롭게 적응해야 하지 않나 싶었다. 몽골에서는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한 건물에 있는 일이 많다. 한 번 어느 반에 배정되면 이사를 가게 돼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지 않는 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 같은 반, 같은 친구들과 공부하게 된다. 담임선생님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한 분이 죽 같은 반을 맡는다.

 

그래서 몽골에선 학교 친구들끼리 매우 가깝고, 졸업 후에도 친하게 지낸다. 이전에 몽골 초중고교 전 과정이 10년제였을 시절(지금은 12년제로 바뀌었다), 고등학교 친구라면 대부분 10년을 함께 같은 반에서 공부하고 지내온 친구들이다. 새 학기는 매해 9 1일 시작하는데 학교 말고는 재밌는 일이 별로 없던 몽골에서는 친구들이 보고 싶어 여름방학 내내 개학을 기다렸던 것 같다.

 

겨울방학은 일주일 정도로 짧은 편이지만 여름방학은 길어 그땐 방학 과제가 많다. 겨울 기온이 영하 30도인 때가 보통인 몽골에서 왜 겨울방학이 여름방학보다 짧은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겨울엔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학교에 가려면 두꺼운 옷을 여러 벌 입어야 해서 옷 입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양말 두세 켤레에, 바지를 속에 입고 위에 니트 바지를 더 입는다. 위에도 잔뜩 껴입고 마지막으로 원피스 교복을 입어야 집을 나설 수 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는 아직 몽골이 소비에트연방의 영향을 받는 사회주의 국가였다. 초등학생들도 교복을 입었고, 여학생들은 선생님이 정해준 색의 리본을 머리에 달고 다녔다. 학교에 들어가면 우리가 몰래 ‘대머리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레닌, 그리고 ‘수염 아저씨’라고 부른 마르크스, 엥겔스 사진들이 걸려 있는 복도를 지나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에는 몽골의 독립 영웅 수흐바타르 사진이 칠판 위 중앙에 걸려 있었다.

 

피아노, 태권도, 미술, 영어학원을 다녀야 하는 한국과는 달리 당시 몽골에는 사교육이 없어서 학교에서 옷이나 음식을 만들거나 악기, 노래 등을 배우는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 외에는 과외나 학원 같은 개념이 없었다.

 

한국에서 아이를 키워 보니 몽골과는 매우 다르다. 다녀야 하는 학원은 왜 그리 많은지, 영어는 왜 모든 학생이 학원을 다니며 추가로 공부해야 하는지 이해가 잘 안 갔다. 아이가 고3이 되어 가는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인지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에 대한 압박이 늘어만 가는 아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는 얘기를 그리 많이 하진 않았다. 모든 학생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부하지만 모두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서 아들을 보면 걱정이 들 때가 많다.

 

3이 되는 아이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요즘은 나의 학창시절 재밌었던 기억에 대해 얘기해주곤 한다. 몽골은 5월에도 눈이 오곤 하지만 눈 밑에서 피어 올라오는 ‘야르구이’라는 봄꽃이 3월쯤 보이기 시작하면 ‘봄’이라고들 한다. 방과 후 꽃들이 가득 핀 들판을 걸어 집으로 오는 길에 보이던 수채화 같은 장면을 설명해주기도 하고, 엄마 몰래 친구들과 저녁에 영화관을 갔다가 혼났던 이야기, 여학생들이 교복을 짧게 줄여 입다가 학교에서 벌서던 이야기, 껌을 씹고 싶은데 미국 달러만 받는 상점에서만 껌을 팔아서 소나무 송진을 모아다 아이들이 껌처럼 씹던 이야기들을 해준다. 그러면 아들은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재밌게 듣는다. 얘기를 하다 보면 내가 아이를 위해 얘기를 해주는 건지 아이가 나를 위해서 들어주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싶을 때도 있다. 그래도 이게 내가 아이와 소통하는 방법이고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작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얘기를 아이가 재밌게 듣는 걸 보고 가끔 남편이 자기 얘기도 한 번 들어보라고 끼어든다. 시간이 늦어 아이가 하품을 해도 본래 설명이 끝없이 긴 남편은 콩 서리하다가 들킨 얘기, 낚시 가서 넓적다리만 한 잉어를 잡은 얘기, 방학 때 시골에 가서 개구리 잡으러 다니던 얘기들을 꼭 끝내야 한다. 아버지의 긴 설명에도 아이는 참을성 있게 듣는 편이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곤 하지만.

 

2015-12.17  김장과 ‘이디시’

장을 볼 때 여유가 있으면 재래시장이나 전통시장을 가곤 한다. 볼거리도 많을뿐더러 내가 좋아하는 튀김, 어묵, 옛날 호떡, 족발, 순대 등 먹거리를 보면 마음까지 흐뭇해진다. 한국에 처음 와서 즐겨 먹던 것도 길거리 음식이다. 저녁때면 지하철역 앞에서 아주머니가 바쁘게 구워 팔던 붕어빵, 호떡이나 포장마차에서 파는 우동, 돼지껍데기도 모두 정겨운 음식이다.

 

한국과 달리 몽골은 길거리 음식이 발달하지 않았다. 남부지역 3분의 1이 고비 사막이고 또 대부분이 초원이라 건조하고 먼지가 많다. 특히 기온이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가는 겨울에는 길에서 뭔가를 먹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집 안에서도 서서 먹는 것은 몽골식 문화가 아니다.

 

TV에서 매일 방송되는 한국 드라마를 본 몽골 사람들은 길거리 음식을 사먹거나, 포장마차에서 안주와 함께 소주를 마신 후 한강에 가서 소리를 한번 질러보거나 아니면 연인과 함께 한강에서 데이트를 하는 게 한국에 가면 꼭 한번 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다. 한국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이 나오면 다음 날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의 한국식당들이 몽골사람들로 붐비는 것도 한류의 힘인가 싶다. 몽골 내 한국식당이 100개가 넘어섰다고 한다.

 

몽골 간식은 대개 우유나 밀가루로 만들어진 제품이다. ‘아룰’이라 부르는 우유과자나 치즈 등 유제품, 그리고 빵과 과자가 대부분이다. 한국의 먹자골목이나 지역별 맛집이란 개념은 몽골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시장도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은 있지만 즉석에서 즐길 수 있는 간편한 먹거리들이 없어 아쉽고 심심하다.

 

울란바토르에는 종합시장 자동차시장 가축시장 등 큰 시장이 몇 곳 있는데 그중 가장 큰 시장은 ‘나란툴’이라는 종합시장이다. 몽골을 찾는 외국인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전통 옷, 특히 여우 털로 만든 겨울 모자다. 신학기를 앞둔 8월에는 지방에서 오는 대학생들이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져온 캐시미어와 양털, 가죽이 많다.

 

연말이나 설 대목이면 시장이 물건으로 가득하고 사람들로 붐빈다. 설에는 주로 양고기를 먹는다. 몽골에서는 양고기를 넣은 만두를 즐겨 먹는다. 한국과는 달리 양념한 고기만 넣어서 만든다. 음식을 만들기 위한 육류 외에 가족들과 찾아오는 친척 친구 손님들에게 줄 선물을 시장에서 산다. 몽골에서는 집에 설 인사차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만 선물을 준다. 집에 찾아오지 않은 친지들에게 설 선물을 보내는 한국의 문화가 처음에는 꽤 낯설었다. 남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니 답이 의외로 간단했다. “다들 바쁘니까.

 

겨울철인 요즘은 몽골의 시장에 소, , 염소 등 고기가 많을 때다. 요즘에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직거래를 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겨울에 먹을 김장을 하듯이 몽골에서는 겨울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겨울 내내 먹을 고기를 대량으로 사다가 준비한다. 대가족이면 소 한 마리에 양이나 염소를 몇 마리 더 준비하지만, 도시 가족들은 대개 어린 소 한 마리를 산다.

 

이렇게 겨울에 대비해 고기를 준비하는 것을 ‘이디시’라고 한다. 시골에서는 이디시 준비하는 날 고기와 내장 등을 양념해 삶아 동네 사람들끼리 나눠 먹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소와 송아지, 둘로 나누어 부르는 데 비해 몽골에서는 우헤르(큰 소), 슈드렌(아직 덜 자란 소), 비야로(어린 소), 토갈(송아지) 네 가지로 나눠 부른다. 슈드렌이나 비야로는 고기가 부드럽고 양고기보다 지방이 적어 많이들 산다. 어린 소 한 마리는 50만 투그리크( 30만 원) 정도 한다. 우헤르도 가격은 거의 같다. 한국에는 한우도 있고, 비육우도 있고, 수입 쇠고기도 있는데 몽골에서는 한 종류의 쇠고기만 판다. 몽골은 쇠고기 수출국이다. 한국 소는 한우라고 부르니 몽골 소는 ‘몽우’라고 불러야 하나. 이렇게 겨울을 대비해 준비한 고기는 추운 겨울날 밖에 보관하기도 하고 아파트에서는 베란다에 두기도 한다. 16일 울란바토르 기온이 최저 영하 21, 최고 영하 9도니 몽골은 겨울엔 냉동실이 필요 없다.

 

가끔 큰 마트에서 양갈비를 팔 때가 있는데, 그걸 보면 반갑다. 그래도 한국에 오래 살다 보니 양고기는 있어도 별식으로나 먹게 된다. 연말이 돼 가는데 만약 한국에서 이디시를 준비해야 한다면 예산을 따져서는 수입 쇠고기를, 그리고 입맛을 따져서는 한우를 준비하지 않을까. 친정어머니께 전화해 무슨 고기로 준비하셨느냐고 여쭤보니 비야로 뒷다리 그리고 갈비를 포함한 앞다리로 사 놓으셨다고 한다.

 

“작년에는 슈드렌 사지 않았어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부드러운 비야로가 더 입에 맞네.

 

2016-01-14  빨리빨리 대한민국, 느리게도 살고 싶다

새로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의견과 조언을 주고받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이다. 나의 대화 상대는 다문화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젊은 대학생들, 국내 이주민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은퇴한 어르신들, 한국 생활이 궁금한 이주민 등 다양하다. 사람에 관련된 일이라 모든 질문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들어주고 의견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곤 한다.

 

지난해 만났던 50대 후반의 한 부인이 생각난다. 어느 날 모르는 분한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한국어는 모국어가 된 느낌이지만, 한국 생활이 아직 낯설다고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중국에서 귀국한 교포인가 싶었다. 청바지에 하늘색 셔츠를 입고 찾아 오셨다. 젊었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30년 가까이 미국에 살았던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귀국한 지 두 달 됐는데, 사람들은 그대로지만 문물이 너무 많이 바뀌어 마치 낯선 외국에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이분께 편리하면서도 벅차고 숨찬 문화는 바로 한국 사회의 ‘속도’였다.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지 빠르게 해야 하는 것. 그녀는 처음 한국에 와서 전화와 인터넷을 설치하려고 연락했더니 그날 바로 와서 TV를 무상으로 주면서까지 설치해준 것에 놀랐고, 신속하게 24시간 음식 배달을 해주는 세상이 있는가 싶었고, 동네 마트에서 장본 걸 집까지 배달해주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했다고 한다. 자정이 다 된 시간임에도 도심 지하철역 앞이 젊은이들로 가득한 것은 아직도 신기하다고 하면서, 그중 반 이상은 앞을 보고 걷는 게 아니라 휴대전화를 보면서 걷더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나도 긍정의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나온 인생의 길이가 나보다 워낙 길어서 그랬는지 설명을 길게 하셨다.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해 온 것들이 많을 테니, 하실 말씀도 많았을 것이다.

 

세 시간 동안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의 결론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 좋은데, 그런데, 어딜 가든 효율적으로 빠르게 돌아가야 하는 사회가 편리하긴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세대들에겐 점점 숨찬 일이겠다 싶어 부담이 된다는 말이었다. 모르거나 게을러서 숨찬 것이 아니고, 조금 더 느끼고 생각해보고 싶은데 바삐 움직이는 시스템이 이를 존중해주거나 용인해주지 않는다는 뜻 같았다.

 

연말에 자선모금을 위한 일일찻집 행사에 참여했더니 이분과 비슷한 나이의 어느 분이 거의 비슷한 말을 했다. 사회의 모든 부분이 효율적이고 빠른 게 때론 피곤하다는 설명이었다. ‘유럽완전정복’이란 패키지 여행을 갔는데 열흘쯤 되는 기간에 7개국의 관광지를 ‘빨리빨리’ 보고 지나가야 하는 그런 느낌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면서 천천히 느긋하게 살고 싶은 사람도 꽤 많은데, 그런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없다는 얘기였다.

 

옆에 계신 한 분이 거들었다. 서남아시아 국가에서 사업을 하는데 그 나라에서는 관청에 서류를 발급받으러 가면 가끔 인터넷이 안 된다고 했다. ‘언제 되느냐’고 물어보면 자기네들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오후에 가서 다시 허탕을 치고, 다음 날 오전에 갔더니 “이제 인터넷은 되는데 프린터 잉크가 떨어져 서류 발급이 안 된다”고 했다. 결국 미안하다고 말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들어야 하는 민원인들도 아무 불평 없이 되돌아 나갔다는 얘기다. 한두 번 큰소리로 불평을 했더니, 이런 얘기가 들려왔다고 한다. “저 사람 한국인이래.

 

그런데 이렇게 뭐든지 시간이 걸리는 그 나라 사람들에게 그게 불편하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얘기할까? 정답은 거의 “아니다”일 것이다.

 

이렇게 빠르고 효율적이어야 하는 일상이 내게는 이제 익숙한 생활이 돼 버렸다. 인터넷과 컴퓨터, 그리고 스마트폰이 인간의 의사소통 구조와 방식을 바꾸고 패러다임 자체도 바꿔 가고 있는 세상이다. 사회가 빠르게 글로벌화하면서 우리의 주변 사람들도 점차 다양한 배경과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로 바뀌어 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구분을 하고, 분류를 하고, 그리고 우열을 정해 등수를 매긴다. 나도 그런 사회의 ‘열성적으로 바쁜’ 구성원으로 살아오지 않았을까. 이젠 그런 다양함을 존중하면서도 다름과 느림을 인정하는 움직임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새해인 데다 아직 설날도 지나지 않았다. 한국 나이로 보면 내 두 자릿수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해다. 내일은 내 4G-LTE 스마트폰으로 ‘느리게 산다’를 검색해 책을 한 권 사 볼 예정이다.

 

2016.02.25  3·1절과 봄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얼마 전 장을 보고 집에 들어가는데 1층 경비 아저씨가 ‘立春大吉 建陽多慶(입춘대길 건양다경)’이라고 쓴 붓글씨 작품을 하나 주셨다. 24절기 중 입춘을 맞이해 큰 행운이 깃들고 봄의 따스한 기운과 함께 경사로운 일이 많기를 기원하면서 집 대문에 붙이는 ‘입춘방(立春榜)’이란다. 봄이 온다니 마음도 따뜻해지고 기분이 좋은데, 밖의 날씨는 아직 춥다고들 한다. 아직은 겨울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다.

 

몽골 속담에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얘기가 있다고 하니, 옆에 있던 남편이 빙긋 웃으며 “한국에도 똑같은 속담이 있다”고 한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머지않았다는 의미이고,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하지 않는가. 3월은 올 테고, 그리고 나는 한국에서의 열세 번째 삼일절을 맞는다.

 

지금은 바뀌었지만 3 1일은 몽골에선 독립과 함께 1921 3 1일 창립된 유일 정당인 인민혁명당의 기념일이었다. 독립에 연관된 기념일이라는 점에서는 유사점이 있다. 타국의 지배를 오래 경험하고 독립을 쟁취해냈기에 나는 한국 독립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다.

 

한국에 와서 본 한국인들의 기질은 근면성과 효율성, 그리고 독립성이었다. 혹자는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지나치다고 하지만, 특유의 부지런함과 맞물린 ‘빨리빨리’는 오늘의 한국을 만들어낸 원동력으로 보인다. 외국인들이 자주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그 짧은 시간에 한국이 어떻게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는지 정말 궁금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몽골에서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도입해 실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에 더해 외부세력의 어떠한 압제에도 굴하지 않는 한국인의 독립성은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것 같다. 그 오랜 시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을 이끌어온 원동력은 한국인의 특성에 잠재돼 있던 힘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장소는 따뜻한 나라 필리핀이다. 며칠 전 가족들과 다녀온 현충원의 충혼당과 높이가 비슷할 정도로 큰 망고나무 아래에서 현지 학교의 필리핀 선생님과 이 나라 역사에 대해 오래 얘기를 나눴다. 이 나라 사람들도 오랫동안 식민 지배를 겪다가 독립을 이루어낸 사람들이다. 스페인은 수차례 원정 끝에 1571년 필리핀을 정복했다. 식민지의 이름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 필리피나스로 칭했다. 이후 필리핀은 1898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괌, 푸에르토리코와 함께 미국에 넘겨질 때까지 약 330년간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그럼에도 필리핀은 스페인 지배 기간에 100여 차례의 민족 혁명을 일으키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으며 1946 7 4일 미국으로부터 정식 독립할 때까지 독립 열망을 굽히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 성장한 몽골은 옛 몽골제국이 명나라에 의해 실질적으로 멸망하고 1696년 청나라에 편입된 이후 200년 넘게 청나라에 예속됐다. 1912년에 1차 독립을 이루고, 1921년 러시아의 지원으로 다시 중국으로부터 2, 3차 독립을 달성했다가 1946년에야 중국이 동의하고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네 번째 독립이자 최종 독립을 이루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반드시 온다. 초목은 싹을 틔우고 온갖 색깔의 꽃들은 지난해에 피었던 모양을 고맙게도 잊지 않고 그대로 피어날 것이다. 매년 겨울 뒤에 만나는 봄이지만, 새로운 삶을 대면하는 반가운 연례행사다. 사람이 행복하게만 사는 것이 아닐 테니 살면서 만나는 어려움과 복잡함도 매듭을 지을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매년 만나는 봄도 겨우내 삶의 고단함을 털어 내거나 일단락 지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한국에서 삼일절은 봄이 문턱을 넘어서는 시기다. 한국 역사에서 어려웠던 과거 역사가 계절의 변동과 함께 매년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입춘방을 내게 건네준 경비 아저씨의 푸근한 마음을 담아 나도 한국이나 필리핀, 몽골처럼 오랜 피지배국의 고난에서 독립을 쟁취한 나라의 국민 모두가 진정 행복하기를 소망해본다.

 

2016-03-29  e메일에 얽매인 한국, 유목생활은 어떤가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지난해 한 TV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었다. 회사 생활하는 인턴, 직원, 중년 남자들, 우리 자식들의 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물론이고 현실의 직장인들도 매일 일터에서 경쟁을 하고,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내 만들어 판다. 쉼 없이 정신적 육체적 노동을 해가며 산다. 요즘은 사람들이 너무 똑똑해져서인지, 아니면 인터넷 등 정보를 접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너무 많아서인지 직장은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가 됐다.

 

내 남편도 30년이 넘도록 직장인으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중년남’이다. 아침마다 넥타이를 매고 출근해 늦게까지 일하고, 본사와 거래처가 외국에 있어 전화, e메일 등으로 밤새 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더니, 몇 년 전부턴 “일주일만 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그 쉬고 싶은 기간이 ‘석 달’이 되고 ‘반년’이 되더니 지난해부터는 대학에 있는 친구들의 안식년을 예로 들어가며 “그동안 수십 년을 일했으니 1년쯤 모든 것에서 놓여 편히 좀 쉬어 봤으면 좋겠다”고 한다. 아니면 “은퇴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얘기도 꺼낸다.

 

“은퇴하면 뭘 하고 싶으냐”고 물어 보니, 우선 e메일 계정을 없애고 휴대전화도 없애 30년 넘게 만들어온 모든 사회적 관계를 없애겠다고 한다. 가까운 친구들 몇 명과는 집 전화로 연락하거나 e메일을 써야 하면 PC방에 가겠다고 한다. 오랜 기간 남편이 해 온 일이 영업과 관련된 일이었던 걸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아침마다 신문을 읽으며 뉴스를 따라잡고 싶지도 않단다. 바위든 산이든 오랜 기간이 지나면 비바람에 닳고 닳아 뾰족한 것은 뭉툭해지고 직선은 곡선이 된다고 하는데, 일을 오래해 뇌와 몸을 너무 많이 써서 쉴 때가 다가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인정해줘야 하나 싶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은퇴자들을 위한 취업, 창업 교육과정들이 생겨나는 것을 보면 슬며시 걱정이 든다. 그동안 소득이 있었으니 몇 년이야 이제까지처럼 살 수 있겠지만, 많지 않은 국민연금이란 것도 10년 가까이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다.

 

요즘은 젊든, 나이가 들었든 관계없이 취업이 어렵고 직장인들도 40대에 명예퇴직, 권고사직으로 회사에서 밀려날까 봐 전전긍긍하는데 아직 회사를 다니는 소위 ‘오학년’인 남편도 걱정이 많은가 보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컴퓨터 앞에서 은퇴해 귀농을 할까, 식물원을 해볼까, 필리핀에서 생수사업을 해볼까 하고 이것저것을 들여다본다. 꽃과 나무에 관심이 많아 식물원 도면도 그리고 수종 공부도 오래 준비하더니, 어제는 한국다알리아협회 회원이 됐다.

 

나도 나이가 더 들면 언젠가 사회생활에서 은퇴를 하게 되겠지. 요리사나 목수 같이 평생직업을 가지고 사는 것도 좋겠다. 몽골에는 제법 훌륭한 평생직업이 하나 있다. 바로 ‘유목민’이다. 대부분 부모님에게서 이어받아 하는 사람이 많다. , , 말을 수백, 수천 마리 키워 가축에서 나오는 양털, 우유, 고기 등에서 생기는 수입으로 생활한다. 경마에 나가는 좋은 품종의 말을 키워 비싸게 거래하기도 한다. 이렇게 가축을 키우는 방법과 기술은 나름대로 전문적이어서 일반 도시인들에게는 어렵고 힘든 직업이다. 대학 공부가 아니라 현장에서 배워야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가축을 초원에 방목하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공부도 필요하다. 지역과 계절에 따른 온도, 눈과 비의 양뿐만 아니라 어떤 풀이 자라고, 어떤 계절이 방목에 더 적합한지 등을 알아야 한다. 계절별로 이동하면서 키우는 방식이라 한자리에서 오래 생활하는 도시생활과는 아주 다르다.

 

한국에서 생활한 지 어느덧 14년째다. 남편에게 몽골에서 같이 목장을 해보겠느냐고 물어볼까도 싶다. 남편이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지라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식물원이나 목장이나 거의 비슷하게 들려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방에 지평선을 보면서 사는 생활도 괜찮지 않을까.

 

2016-04-26  결혼식 하객에 깜짝 놀란 미국인 老부부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오래 알고 지내던 미국인 노부부가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 구경과 함께 며칠 동안 같이 다니면서 보여드리고 싶은 것들을 리스트에 적어 준비했다. 그중 재미있어 할 거라고 생각했던 일정은 고전미술관, 조카 결혼식, 전통시장, 탄천공원 방문이었고, 내가 직접 함께 다니며 소개해 주었다.

 

공원에서 보낸 시간은 그 나름으로 즐거웠다. 한쪽에서 흥겹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재미있는 행사를 하나 가 보니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 ‘버스킹’이라 불리는 1인 공연을 하는 분이 이웃돕기 모금 활동 삼아 노래를 하고 있었다. 외국인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고는 친절하게도 신청곡을 받고 ‘Sweet Caroline’이라는 신나는 팝송을 불러 주었다.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두 내외가 바로 일어나 손을 마주 잡고 흥겹게 춤을 추셨다.

 

고희가 지난 연세에 한 분은 인공관절 수술까지 받아 행동이 부자유스러웠지만 너무나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벤치에 둘러앉아 구경하던 관객들 중 한두 분이 일어나 같이 합류할 것 같더니 쑥스러운 듯 슬며시 다시 앉았다. 감정 표현이 빠르고 자연스러운 미국인들과 감정을 즉흥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한국인들이 갖는 문화 차이인가 싶었다. ‘남편이나 아이들과 서로 애정 표현을 자주 하며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들기도 했다. 가끔은 눈에 보이는 것이 마음속에 감춰져 있는 것보다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구나 싶었다.

 

장조카 결혼식에도 함께 갔다. 한국의 결혼식이 어떤지 보여주고 싶었다. 결혼식장 건너편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를 하던 중 꽃집 트럭에서 축하화환을 내리고 있었다. “무슨 꽃이냐”는 물음에 “각종 행사나 결혼식 때 축하하는 의미로 보내주는 화환”이라고 하니 아주 신기해했다. 미국에선 큰 사이즈의 화환보다는 대개 집 화병에 꽂아둘 수 있는 정도의 꽃다발을 많이 쓴단다.

 

3층 엘리베이터 문을 나서자 하객으로 가득한 로비가 나왔다. 또 하나의 경이로운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와∼, 이 사람들이 모두 결혼식을 축하해 주러 온 손님이야?” 그렇게 많은 사람이 참석한 결혼식을 처음 본다고 했다. “여러 커플이 같은 건물 내에서 결혼하는 날이라서 그렇다”는 설명에 흥분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았다. 자기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에 열심히 두리번거린다. 한복을 입은 시어머니랑 사진 여러 장도 찍고 신부대기실에 들어가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신부와 같이 사진도 찍었다. 조금 있다가 슬며시 오시더니 신부와 찍은 사진을 미국 가족에게 보냈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워낙 다양한 인종의 사람이 모여 살다 보니 그 나름의 문화나 종교, 관습들을 따라 여러 형태의 결혼식이 있지만 한국에서 보낸 이번 봄 여행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는 인사를 아끼지 않았다.

 

몽골에서는 결혼식을 주로 늦여름이나 가을에 많이 한다. 5월이 다 되어가는 며칠 전에도 눈이 내린 사진을 받을 정도로 몽골의 4, 5월은 아직 추운 계절이다. 몽골의 4월은 한국의 늦겨울 정도 날씨라 결혼식은 따뜻한 여름이 와서 초원이 초록색으로 변한 이후 7월부터나 시작된다. 도시의 결혼식 모습은 한국과 별 차이가 없지만 울란바토르 시내에 결혼식장이 하나밖에 없어서 이른바 ‘손이 없는 좋은 날’에는 오전 4시부터 저녁 늦게까지 결혼식이 이어진다. 결혼식장에서 식이 끝나면 바로 식당이나 별도로 준비한 곳에 가서 어른들 덕담을 듣는다. 그리고 식사와 함께 축하 공연, 친척과 친구들의 축하 노래, 선물 전달식 등 다양한 이벤트가 이어진다. 지방에서는 전통의상 차림으로, 그 지방의 격식에 맞게 전통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카자흐스탄 등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지역에서는 그들만의 특별한 결혼식이 열린다.

 

올해 만 스무 살이 된 아들이 여자친구와 식사를 한번 같이하자고 한다. 요즘은 ‘만난 지 1년도 안 된’ 아들 여자친구와도 밥을 같이 먹나 보다. 내가 너무 보수적인가 싶기도 하고. 이 아이가 더 커서 장래의 어느 날 예쁘고 참한 아가씨를 데리고 오면 4년 전 딸아이 결혼식에 이어 두 번째 결혼식을 치른다. 첫 번째는 한국식으로 치렀으니 둘째 아이 결혼식은 계획을 잘 세워 한국식, 미국식, 그리고 몽골식의 예쁜 부분만을 골라 ‘국제식’으로 치러 볼 생각이다.

 

2016-05-31  언 발에 짧은치마? 아직도 못말려

오후에 행사가 있어서 1시부터 나갈 준비를 한다. 옷장을 연다. 원피스에, 스커트에, 바지와 재킷…. 걸려 있는 옷은 많은데 막상 입고 나가려면 맞는 옷이 없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맞지 않는 옷이 점점 많아진다. 입고 싶은 옷과 숨기고 싶은 신체 부위가 여간해서는 서로 맞지 않는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에서 한의사 한 분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다이어트를 하면 빠져야 할 부위의 살이 아닌 다른 곳이 빠지고, 체중이 늘 때는 배부터 나온다”라고 한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젊을 때는 한두 주쯤 오이와 토마토만 먹어가면서 거의 굶어 살을 빼면 다시 맵시 나는 옷들을 입을 수 있었는데, 여자들이 소위 ‘39세’라고 대답하는 시기가 되면서부터는 다이어트로 날씬하게 되는 게 쉽지 않고, 또 예쁘게 살이 빠지지도 않는다. 운동도 하고 산책도 하고 요가도 해본다. 매일같이 체중계 눈금을 확인해 봐도 눈금은 여전히 아래쪽으로는 움직일 생각이 없다. 실망스러운 마음에 운동도 점점 띄엄띄엄 하게 되고, 산책을 가야 할 시간에는 책상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본다.

 

급기야 남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건다.

 

“운동을 조금씩만 하고, 요가는 다시 하고, 군것질은 그만하자.

 

“당신이 조금 더 살이 쪄도, 아니 아주 많이 쪄서 M타이어 광고에 나오는 ‘하얀 통통맨’이 되어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까지라도 똑같을 거야. 그런데 당신이 밖에 나갈 때 예쁜 옷 입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신만만하게 외출할 수 있으면 좋겠어.

 

반박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지나치게 친절한 권유다. 회사에서는 복잡한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집에서는 굉장히 단순한 사람이다.

 

날씬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여인네들의 열정은 한국이나 몽골이나 다 마찬가지다. 몽골에선 한국에서 봄꽃이 한창 피는 5월에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기도 하고 눈이 몇 차례씩 내리기도 한다. 춥고 바람이 불어도 일단 영하 30도를 오르락내리락하던 겨울이 조금이라도 고개를 숙이는 4, 5월이 되면 겨우내 억눌러 왔던 ‘스타일’이 중요해진다. 얇은 옷으로 추워서 죽더라도, 멋지게 입고 나가서 예쁜 ‘아가씨’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추위는 그 다음 생각할 문제다.

 

어린 시절 같이 살던 할머니께서 “미녀는 (추운 날씨에도 얇고 짧은 옷을 입고 다니고 싶어서) 봄가을에 자주 얼어 죽는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면서 “옷을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라고 자주 충고하셨다. 그 말을 수천 번 듣고 자랐지만, 추운 봄가을 날씨에도 아름다움을 위해 밖에서 하루 종일 덜덜 떨며 동상이 걸리더라도 짧은 치마에 얇은 옷으로 치장하고 다니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 9월에 새 학년이 시작되면 모든 학생은 긴 여름방학이 끝나고 오랜만에 만나는 날인지라 교복을 특별히 더 신경 써서 예쁘게 입고 간다. 9월이면 추위가 시작돼 아침에 서리가 하얗게 내릴 때라 얇은 스타킹에 원피스 교복 하나만 입고 나가기는 꽤 추운 날씨다. 그래도 예쁘게 보이려면 그 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겨울에 가장 고생한 것이 나의 귀다. 지금도 이해가 안 가지만, 옛날 몽골에서는 보온 귀마개라는 것이 없었다. 만들기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닐 테고, 지금은 있어도 옛날에는 없었던 물건이다. 털모자라도 쓰면 귀가 시리지는 않았을 텐데, 여학생들은 당시 앞머리를 위로 올려 세우는 헤어스타일이 유행이어서 머리가 눌릴까 봐 모자를 안 쓰고 손으로 귀를 감싸고 종종걸음으로 다녀야 했다.

 

겨울에도 두껍고 따뜻한 털신보다는 얇은 가죽신을 신고 나간다. 학교가 끝나고 버스를 기다리는 10분 남짓한 시간에 발가락이 얼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아프다가 나중에는 점점 느낌이 없어지고 걸음걸이마저 이상해질 정도다. 집에 들어가면 발이 얼어 잔뜩 부어 있기 일쑤다.

 

할머니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야단을 치시곤 했지만 지금은 그리운 기억들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오래된 옛날이야기를 한다고 신기하게 쳐다볼 만한 얘기다. 그렇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해 온 아름다움을 향한 동경을 확인할 수 있는 기억이기도 하다.

 

2016-06-28  한국의 몸살과 스트레스를 느끼기까지

 

한국 사람들은 찜질방에 들어가 땀을 흘리면서도 “시원하다”고 표현한다. 이걸 알아듣는 데 2, 3년쯤 걸렸다. 이보다 더 어려웠던 말은 ‘몸살’이었다. 한국에 와서 1년쯤 지나 이사를 하면서 들은 얘기다. 이삿짐센터에서 오신 아주머니가 “입주청소는 직접 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시켜야 한다”고 했다. 안 그러면 며칠 몸살이 난다고 하면서.

 

“몸살? 몸살이 뭐예요?

 

“아, 모르시나? 몸에 무리가 가서 며칠 쑤시고 아픈 거지.

 

“너무 피곤하면 하루 이틀 쉬면 되지, 왜 몸이 쑤시고 아파요?

 

몸살이라는 단어를 처음 듣고 남편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니 열심히 설명하는데, 여전히 피곤한 것과 몸살의 차이가 이해가 안 갔다. 내가 살던 나라 몽골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병명이다. 게다가 30대 초반의 젊은 사람이 이해하기에 쉬운 증상도 물론 아니었다. 옛날에 몽골 어르신들이 몸이 불편하다고 하시던 게 이런 증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몸살보다 더 어려웠던 말은 외래어 ‘스트레스(stress)’였다. 한국에선 주변 사람들한테서, 그리고 병원에서 의사한테서도 자주 듣게 되는 말이다. 사람이 살면서 힘들 때도 있고, 기쁠 때도 심심할 때도, 또 때로는 슬플 때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한국에선 인생이란 이름의 여행에서 당연히 겪는 조금의 힘듦, 피할 수 없는 작은 슬픔, 개인차가 있지만 각자가 느끼는 작고 큰 노여움 같은 감정들을 요즘은 ‘스트레스’라는 말로 뭉뚱그려 표현하는가 보다 싶었다. 몽골에서 온 지인들에게 물어봐도 한국에 오기 전에는 이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다고들 한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는 거의 전 국민이 완전 고용된 상태였고, 삶에도 변화가 거의 없었다. 정부가 존재하는 한 굶어 죽을 위험도 거의 없었고,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들 간의 생활수준 차이 또한 그리 크지 않았다. 어쩌면 빈부의 차이가 꽤 있었지만, 인터넷도 없고 민영 신문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 국민이 그걸 느끼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래도 무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학생들이 아침에 학교에 가면 다들 복도에 모여 “정직하게 살고, 공부 열심히 하고, 나라에 애국하고, 이웃을 도와주고” 등의 구호를 다 같이 외운 다음에야 수업을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살던 곳의 몽골 여름방학 숙제라는 것은 흔히 ‘서거르() 2kg, 땅다람쥐 가죽 10, 가축용 건초 두 묶음’을 모아오라는 식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주변에 흔하던 그 서거르풀 씨를 다 모아선 어디에 썼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다람쥐 가죽은 어디에 쓰려고 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다람쥐를 잡으러 가면 일단 양동이에 물을 담아 가서 땅에 난 다람쥐 굴 입구에 물을 부어선 다람쥐가 튀어나오게 하거나, 소똥을 모아 태워선 그 연기를 굴에 불어 넣곤 했다. 이런 학교생활을 하면 한국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스트레스’라는 개념이 형성될 수 없다.

 

이 얘기를 하면, 남편은 옆에서 자기네들도 ‘국민교육헌장’이란 걸 아침마다 외워야 조례가 끝나고 수업을 시작했다고 하면서 웃는다. 요즘의 한국 중고교 학생들이 옛 국민교육헌장을 모르듯이 지금의 몽골 학생들에게 ‘땅다람쥐 숙제’는 칭기즈칸 때의 옛날 얘기쯤으로 들릴 것이다.

 

한국에 와서 처음 해본 자원봉사, 지방의회 활동, 사회단체 활동, 그리고 고3 학부모 생활을 거치면서 이제 스트레스가 뭔지 설명할 수 있다. 어쩌면 ‘아주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몸살, 이것도 마흔 줄에 접어들며 체감했다. 학교 과제인 연구보고서를 쓰느라 늦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엄마가 안쓰러웠는지 아들이 방에 들어가면서 주스 한 컵을 슬며시 놓고 간다. 땅다람쥐 숙제를 하려고 온 들판을 쏘다니던 때도 즐거운 시절이고, 사회주의 시절은 요즘의 치열한 경쟁과 스트레스가 거의 없는 시절이었겠지. 하지만 지금의 바쁜 생활과 스트레스, 그리고 가끔씩 겪는 몸살도 그 나름의 재미가 있고 해볼 만한 생활이 아닐까. 아들의 주스 한 컵에 너무 감동을 받은 것일까.

 

2016-07-26  中에서 절단될 뻔한 다리, 韓 의술로 살려내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과학과 문화의 발달로 생활은 많이 편리해졌지만 운동 부족, 스트레스, 과도한 인스턴트 음식 등이 신경 쓰인다. 건강에 대한 걱정도 많아졌다. 짧은 거리는 걸어 다니고 요가도 다이어트도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규칙적으로 뭔가를 하는 것은 어지간한 각오가 아니면 쉽지 않다. 이를 위한 자기 보상으로 건강검진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듯하다.

 

최근 외국인들도 유학이나 관광 또는 직업을 찾아서뿐만 아니라 건강검진, 출산 또는 치료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 러시아, 중국, 그리고 중동 국가들에서도 많은 의료 관광객이 오고 있다. 크고 작은 종합병원과 성형외과 병원들은 원어민 직원을 고용해 전담팀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의 의료 수준이 높고 시설과 서비스가 좋다고 알려진 덕이다. 의료 관광 분야는 정부의 국가 기간 전략 사업으로 선정되었고, 보건복지부는 외국인 환자 유치와 의료 해외 진출을 전담하는 부서를 신설할 예정이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는 국제의료관광학과를 신설했다고 한다. 의료문화의 글로벌화 시대라 하겠다.

 

병원도 경쟁해야 하는 시대다. 우수한 전문의, 고가의 검진 및 치료 시설, 최신의 치료 방법 외에도 이제 쾌적한 시설도 중요한 때다. 나에겐 한국의 의사들이 고마운 사람들이다. 한국 병원의 의사들은 참 친절도 하다. 정반대로 얘기하시는 분도 많지만 내가 다니는 내과, 이비인후과, 치과 의사들은 한결같이 친절하다.

 

한국의 의료 수준에 감동받은 것은 우리 아버지께서 아프셨을 때다. 몽골에서 고관절의 가벼운 통증으로 병원을 방문한 결과, 뼈에 악성종양이 생겼다며 울란바토르의 병원보다는 중국의 큰 병원에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어머니가 아버지께는 베이징에 가서 진찰도 받고 톈안먼과 쯔진청, 만리장성도 보고 오래간만에 여행을 하자고 설득해 9시간 기차를 타고 베이징에 도착하셨다. 입원해 검사를 받고 이틀 후 의사가 고관절을 포함해 다리 전체를 절단해야 한다고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아버지로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였다. 허리 아래가 가끔씩 아파 베이징 큰 병원에서 진찰받아 보자고 왔는데, 시내에 있는 톈안먼도 아직 못 봤는데 다리를 자르자니…. 두 분이 오후 내내 붙잡고 우셨단다. 급히 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모셔 왔다. 골육종 담당 전문의가 있는 국립병원에 입원해 검사 받은 지 3일째, 의사가 면담을 하자고 했다. 잔뜩 긴장해서 설명을 듣는다. 긴장도 되고 정신이 없었다. 결국 방을 나와 남편한테 확인했다.

 

“그러니까 나으실 수 있다는 얘기죠? 다리는 절단하지 않아도 되고?

 

“맞아요, 수술 때 열어 봐야 최종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했지만 거의 확신한다고.

 

눈물이 났다. 병실에서 초조히 기다리고 계실 아버지께 뛰어갔다. 수술 후 한 달 만에 아버지는 웃으며 퇴원하셨다. 몇 년이 지난 현재 아버지는 몽골에서 고속도로 현장 소장으로 일하고 계신다. 지금도 뵐 때마다 한국 의사들 얘기를 하신다.

 

몇 년 전에는 남편이 입원했을 때 중국인들이 병원에 들렀다. 1층에 채혈실도 있고 영상조영실, 심장센터, 척추센터 등도 있지만, 반대쪽에는 넓고 잘 꾸며진 커피숍도 있고, 제과점도 있다. 가운데 로비에서는 한 달에 두어 번 그림 전시회가 열리기도 한다. 어떤 때는 하얀 예복을 입고 피아노 연주도 한다. 외국인 눈에는 신기한 장면이다.

 

금요일. 재활용 물품을 내놓는 날이다. 모은 종이와 플라스틱 등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베이지색 바지에 멋진 셔츠로 차려 입으신 어르신이 타고 계신다. 인사와 함께 어디 가시느냐고 여쭤 보니 근처 대학병원에 이발하러 가신단다.

 

“거기가 넓고 편해요. 머리 깎고 구내식당에서 밥도 먹고 올 수 있고. 거기 커피숍도 있어요.” 이 말을 듣고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생각했다.

 

2016-08-23  야생으로 돌아가는 몽골의 휴가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8월 중순이 지나 하순에 접어들었는데 아직도 폭염경보 문자가 오고 오늘도 서울의 기온은 35도를 넘어서고 있다. 도로 양편의 가로등 기둥도 뜨거울 텐데, 가서 그걸 안으면 전기통닭구이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우리 집은 산 옆이라 지난 2년간 에어컨을 몇 번 켜지도 않고 여름을 지냈다. 급기야 실외기가 산이 보이는 조망을 가린다는 이유로 봄에 에어컨을 떼냈는데, 이번 여름에 굴복해 다시 만만치 않은 비용을 지불하고 에어컨을 달았다.

 

광복절이 지나면 뜨거운 여름은 지나가리라는 주변의 예상과 위안이 무색하게 아직 사람들과의 인사는 더운 날씨에 대한 얘기로 시작한다. 여름휴가를 위해 일주일 넘게 콘도를 찾아보다 포기했다. 올해 따라 회사의 여름 출장도 9월까지는 계획이 없단다. 몽골은 벌써 기온이 1520도쯤 되는 초가을 날씨라는데, 문득 선선한 몽골의 가을이 그립기도 하다.

 

몽골의 근로자들은 1년에 15일 공식 휴가를 받을 수 있다. 여기에 6년 이상 근무하면 추가 휴가를 받을 수 있어 한국에 비해 휴가가 긴 편이다. 여름이 다가오는 6월 초, 아이들은 방학이 시작되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이때쯤 여름 별장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다. 여름 별장이 없으면 빌려서 사용해도 된다. 그렇게 여름이 시작된다. 7월 초쯤 되면 여름휴가를 떠나기 시작한다. 최근에는 몽골에서도 국내 여행이 유행이다. 국토가 한국의 15배쯤 되는데 고속도로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지 않기도 하고, 개발 관광지보다는 자연 그대로를 느끼고 즐기려는 경우가 많아 몽골 사람들은 한국보다 좀 더 사방팔방으로 국내 여행을 가는 것 같다.

 

올해 초 인구가 300만 명을 넘어선 울란바토르 시내를 제외하면 도로가 막히는 일도 거의 없다. , 도시를 벗어나면 가로등이 거의 없고 포장되지 않은 길이 대부분이라 길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밤에 가로등이 없는 깜깜한 시골길을 가는 것은 위험하다. 길을 한번 잘못 들면 다시 찾기가 쉽지 않다. 요즘은 내비게이션 쓰는 사람들도 있어서 상황이 나아졌지만 출발 전에 세심한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은 여전하다.

 

여행을 떠나면 여러 곳을 돌아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한 번에 모든 지역을 경험하기는 힘들어 동남쪽, 서북쪽 등 나눠서 가는 게 보통이다. 울란바토르에서 남쪽으로 550km 가면 고비 사막이 있다. 고비 사막은 길이가 1600km, 폭이 평균 600700km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몽골어로 고비는 ‘물이 없는 곳’ 또는 ‘거친 곳’이라는 뜻이다. 겨울에는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떨어지고, 여름에는 50도에 육박할 정도다. 사막에서 보름달이 뜨는 장면을 보면 평생 잊지 못할 낭만적인 추억으로 남는다고 한다. 보름달과 함께 별들이 쏟아질 듯한 은하수를 보며 끝을 알 수 없는 모래밭에 누워 있으면 마치 별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막에서 낙타를 타고 모래 슬라이딩, 캠핑 등을 경험해 보거나 ‘허르먹’ ‘아에륵’ 등 낙타 젖으로 만든 음료나 주류를 맛보고 싶으면 현지 여행사를 통해 가이드와 함께 출발할 수 있다.

 

몽골은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내륙 국가라 바다는 없지만 호수나 강에서 잡은 민물 생선을 먹는다. 북쪽으로 가면 훕스굴 호수가 있다. 훕스굴 호수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깊은 호수로, 지구상에 있는 모든 물의 0.4%가 들어 있다고 한다.

 

차를 타고 동쪽으로 가면, 몇 시간을 달려도 언제 끝이 나올까 싶은 초원을 볼 수 있다. 지평선을 보면서 자연에 몸을 맡기고 생활하다 보면 도시인에서 자연인으로 변한다. 바쁜 도시생활에서는 쓰지 않던 근육들과 내 마음속의 숨겨졌던 감정을 되살려 보는 소중한 휴가가 될 수 있다.

 

에어컨 켜는 게 부담이 되는 사람들이 아직 주변에 많다. 뜨거운 낮 시간이 되기 전에 집을 나서 하다못해 지하철역이나 은행, 도서관에 부지런히 가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이제 가을이 왔으면 한다.

 

2016-09-27  ‘행복’이란 말을 잊고 사는 한국인들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2년 만에 고향 몽골에 다녀왔다. 수도 울란바토르의 거리는 그 사이에도 많이 바뀐 듯 보였다. 여기저기 높은 건물들이 늘어났고 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은 다들 젊어 보였다. 시내 중심가에 가 보면 흡사 서울의 한 거리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몽골 인구 300만 명 중 한국에 와 있는 유학생, 근로자 등 몽골인이 34000명에 달하니 한국 문화의 영향이 클 수밖에 없다.


 1990년대 들어 급격한 민주화를 거치면서 몽골인들의 적극적인 해외 이주가 시작됐다. 우선 비자가 상호 면제됐던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건너가기 시작했고, 한국에는 2000년대 초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한국에서 몽골과 한국, 그리고 터키 사람들이 인종적으로 유사한 민족이라는 얘기를 가끔 듣는다. 또 터키인들은 한국인들과는 다 형제라는 얘기를 자주 꺼낸다.


 내가 근무하는 회사가 운영하는 필리핀 국제학교에서 한번은 터키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이 다퉈 부모들끼리도 관계가 불편해지고 학교도 꽤 난감한 입장에 처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학교의 남자 직원이 자기가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나섰다. 그는 터키인 학부모와 회의실에 들어가더니 30분도 안 돼 같이 웃으며 나왔다. 어떻게 해결했느냐고 물었더니, 6·25전쟁 때 터키 군인들이 제일 용감하게 싸워줬다는 얘기와 함께 그때의 고마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단다. 한국인과 터키인이 불화할 이유는 없다고 설명하니 아이들이 싸워서 생긴 오해들이 한순간에 해결됐다는 얘기다.

 빠른 세계화에 힘입어 다른 나라, 다른 문화 속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이제는 그리 새삼스럽거나 주목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닌 세상이다. 외국에서 사는 한국인들이 오래전부터 나라별로 ‘한인회’라는 단체를 운영하고 있듯이, 몽골인들도 나라별로 ‘몽골인협의회’라는 것을 한참 만들어가고 있다. 한국에도 있고 미국 일본에도 있다.


 해외 거주 몽골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외교부와 함께 주최한 포럼에 참가했다. 25개국 160여 명의 대표단이 참석해 해외 교포들과 고국 정부와의 협력 증진, 몽골어 및 문화 홍보 등을 주제로 3일간 토론 등의 행사를 진행했다. 포럼이 끝나고 참가자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데 미국, 유럽에 사는 교포들 모두 한국 식당을 가고 싶다고 한다. 몽골 속 한국 문화의 인기는 10여 년이 지나도 여전하다. 울란바토르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외식을 할 때 우선적으로 꼽는 곳이 한국 식당이다.

 

 몽골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의 60%가 중국인이고 한국인은 10% 정도지만, 드라마나 문화 등 한류에 힘입어서 몽골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해마다 늘고 있다.

 

 몽골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오랜만의 수다가 끝이 없다. 사춘기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대학 입학부터 군 입대까지 아이들 커가는 이야기, 남편 이야기 등이다. 한국 얘기가 나오다 보니 한국에서의 바쁜 생활, 직장, 경제활동, 문화 등 얘기가 길어진다. 배울 것도 많고 부러운 점도 많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행복하겠네?”라는 질문을 받고 선뜻 “물론”이라고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행복에 대한 정의는 개인별로 다르겠지만, 너무 바쁘게들 살고 있어서 충분히 행복해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세계에는 230개가 넘는 국가가 있고, 이 중 코카콜라가 판매되는 나라는 199개국이라고 한다. 한국은 경제규모 순위로 세계 10위권이다. 1960년대 초까지 아프리카 소말리아보다 어렵던 나라가 이제 경제지표로만 보면 당당한 선진국이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계속 하위권이란다. 행복으로 가는 문은 찾는 자에게 더 크게 보인다. 너무 바쁘면 행복이란 단어를 잊고 살게 되지 않을까.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근면과 역동성은 칭찬받아야 하지만 효율을 향한 끝없는 질주에서 벗어나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쉬어 보면 어떨까. 내가 찾고 지향하는 행복의 패러다임을 조금만 바꿔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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