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춘식 기자의 사진으로 보는 삶
중앙일보 포토데스크 부국장 kim.choonsik@joongang.co.k 2016 - 2017
10.27 진실이란 무엇인가
사무라이가 부인과 산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 격투를 벌이다 포박당하고 면전에서 부인이 겁탈을 당한다. 격분한 사무라이는 다시 산적과 목숨을 건 한 판 승부를 벌였지만 결국 산적의 칼에 목숨을 잃는다.이 사건을 두고 사건 당사자인 산적, 겁탈당한 사무라이의 부인, 무당에 빙의된 사무라이, 그리고 나무하러 갔다가 우연히 이 사건을 목격한 농부 등 4인의 진술이 엇갈린다. 1915년 일본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원작을 1950년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영화로 옮긴 ‘라쇼몽’의 내용이다.
1.사무라이가 부인과 산길을 가다 산적을 만났다.
2.부인이 겁탈을 당하고 사무라이는 산적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이 단순하고 명확한 사실이-진짜 사실인 진실이-사건 당사자 각자의 기억과 입장에 따라 재구성된다. 무엇이 진실인지 아무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모두 진실을 보았다고 생각한다(본 것이 아니다. 보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그러나 인간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할 뿐이다. 사실을 바라보는 시선과 기억의 재구성만이 남아 나와 다른 타인의 해석과 시선들과 경쟁한다. 웃기는 일이지만 사실규명에서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입장이 사실이다. 사실이 입장이다. 패러독스가 인간세상을 지배한다.
이른바 ‘라쇼몽 효과’다.
노무현 대통령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이었던 송민순은 회고록에서 2007년 11월 정부의 유엔북한인권결의안 기권과 관련하여 노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결의안의 대응방향을 놓고 “북한의 의견을 확인해 보자”고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문 전 대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핵심 쟁점을 비켜가면서 “북풍과 색깔론에 매달릴 뿐 남북관계에 철학이 없는 사람들”이라며 반발했다. 김만복 전 국정원장과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백종천 전 대통령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 등 당시 관련 인사들은 회고록 내용을 부인했다. 문 전 대표의 측근인 김경수 의원도 “정부가 기권을 결정한 뒤 이를 북한에 전달한 것”이라며 부인했다. 이에 대해 송민순 전 장관은 “회고록 그 자체가 사실”이라고 회고록에서 밝힌 입장을 고수했다.
새누리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진영의 시선은 온통 ‘문재인 전 대표가 북한에 물어 봤느냐’는 사실 여부에 가있다. 더민주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은 송민순 회고록으로 촉발된 이 사안을 이념논쟁으로 몰고 가려는 보수의 음모에 주목한다. 사실규명의 깃발 뒤에 숨은 보수의 의도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것이다. 이 사안은 이미 사실 차원에서의 다툼을 넘어갔다. 우리사회를 구성하는 30%의 진보 진영과 30%의 보수 진영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입장(이념)과 시선(처지)에 따라 이미 나름대로의 결론을 냈을 것이 분명하다. 나머지 40%의 중간지대는 시간을 가지고 지켜보다가 입장을 정해 1~2% 차이로 양 진영에 합류할 것이다. 이 차이는 다음 대선 득표율과 일치한다. 무엇이 사실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국 누가 더 많은 동조자를 이끌어 내느냐에 달려있다. 우리는 진실이 (동의하는 사람의)숫자에 불구한 사회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순실의 국정농단 스캔들과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 이후 우울증을 호소하는 국민들이 늘고 있다. 이 나라 백성으로 산다는 게 참으로 부끄럽게 됐다. 박 대통령과 최순실은 선의에서 했다고 한다. 선의가 부끄럽다. 말이 부끄럽다. 나의 선의는 타인에게도 선의인가. 지옥으로 가는 길도 선의로 포장돼있다.
최순실은 독일에서의 인터뷰에서 언론을 통해 밝혀진 사실 대부분을 부인하면서 국정개입의 증거가 된 태블릿 PC도 자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럴 줄 알았다. 우리는 각오해야 한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라쇼몽의 진술처럼, 송민순 회고록 공방처럼, 최순실 파문 역시 주장과 사실이 뒤엉켜 엉망진창이 될 게 분명하다.
11.29 곤충 대통령과 연가시
사마귀는 제왕적 곤충이다. 어떤 곤충이든 전투머신 사마귀의 앞발에 걸리는 순간 산채로 뜯어 먹히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비슷한 체급의 어떤 곤충도 사마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번식을 앞 둔 암컷 사마귀는 교미중인 수컷마저 잡아먹는다. 풀 숲 최강의 곤충 사마귀는 약육강식이라는 단순하고도 자명한 자연의 법칙이 지배하는 곤충세계의 대통령이다.
연가시는 성체로 성장하기 전까지, 숙주의 몸속에서, 숙주가 섭취하는 영양분을 가로채 기생한다. 체구에 비해 거대한 앞발로 곤충을 잡아 아귀아귀 뜯어먹는, 연가시가 침투한 사마귀의 전투능력은 사마귀의 생존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사마귀를 인질로 잡은 연가시를 위한 전투능력이라고 봐야 한다. 사마귀의 먹이가 되는 곤충의 입장에서 보면 몸속에서 기생하는 연가시의 몫까지 챙겨야 하는 사마귀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탐욕 덩어리다. 그러나 사마귀의 입장에서 보면 이 탐욕조차 지극히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사마귀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감정이 있어 다른 곤충을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모두 종족번식이라는 선의에서 비롯된 일이다. 심지어 연가시에게도 종족보존이라는 선의가 있다.
숙주의 몸속에서 영양분을 수탈하던 연가시가 마침내 성체가 되어 번식할 시기가 되면 연가시는 숙주의 뇌에 작용하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하여 물에 뛰어 들게 해 익사시킨다. 연가시는 숙주의 몸에서 기어 나와 물속에서 배우자를 찾고 자손을 퍼뜨린다. 연가시의 자손들은 제 어미처럼, 또 다른 숙주의 몸속으로 잠입한다. 귀뚜라미나 여치를 숙주로 선택한 연가시보다 사마귀를 선택한연가시는 행운아다. 모든 곤충이 두려워하는 곤충 대통령 사마귀의 파워와 전투능력은 연가시에게 만큼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자신의 생존확률을 높이는 효율적인 수단이자 믿음직한 보험이다.
사람이 희망이라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사람은 희망이면서 절망이다. 향기이면서 악취다. 인간은 다른 무엇이다. 사람은 규정되지 않는다. 인간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천사같은 사람도 악마같은 사람도 모두 인간이다.
어떤 인간에게 자신 이외의 인간은 모두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다.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한없이 상냥하다가 음식을 가져온 종업원에게는 안면을 바꿔 함부로 대하는 인간은 신뢰하기 어렵다. 태도가 이력서다. 가정부나 운전사 등 주변의 약자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얼굴 뒤에 감춰진 마음이 어떨지 짐작이 간다. 그런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능력있는 부모를 만나는 것도 실력’이라고 떠들고 다닌다.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키운다. 연가시는 연가시고 연가시 자식도 연가시다.
한 인간의 행위를 지켜보면서 그 행위를 이끈 전제가 이상한 종교적 신념 또는 샤머니즘적 주술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면 그건 이미 정상적인 감정교류가 가능한 단계를 넘어갔다고 봐야 한다. 보통사람들의 관계에서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예측하고 해석할 수 있다. 그게 상식적이다. 예를 들어 태반주사 200개, 감초주사 100개, 마늘주사50개, 백옥주사 60개, 타미플주 등 비타민 주사제 9종 1080개 등의 목록이 지도자의 통치행위와 어떻게 연결되야 하는지 알지 못해 여전히 당황스럽다. 예측 불가능한 행동 패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거나 잘못된 행위가 교정되지 않는 인간과 교류를 지속할 수는 없다. 상황이 상식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수용하는 태도까지 상식적이지 않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절대권력자가 꼭두각시에 불과한 핫바지였다는 사실은 그를 믿었던 국민 모두에게 치유되기 어려운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퇴임 후 안락을 위해 본인의 두뇌활동으로 부정을 저지르다 발각되었다 해도 이렇게 치욕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칼에 베인 상처보다 종이에 베인 상처가 훨씬 더 아프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드는 행위는 내면에 가득 고인 수치심을 흘려보내려는 자기치유의 몸짓이다. 고통스럽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상처는 아물 것이다. 그러나 정말 아무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치밀한 검증 절차 없이 소통무능력자를 지도자로 선택하면 반드시 국가 차원의 재앙이 일어나 국민들에게 복수를 한다는 교훈은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2016.12.27 괴물들의 공간,지하철
‘싸가지 없는 애들’과 ‘추접스런 중년’과 ‘나잇값 못하는 늙은이들’(노명우 아주대교수 ‘배운 괴물들의 사회’)이 지하철과 버스 등 사회공유공간을 불쾌한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이 땅에서 머리가 굵은 뒤 오랫동안 외국에 머물다 귀국한 교포들 상당수는 그들을 맞이하는 사회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아 한국 생활이 생각처럼 편하지만은 않다고 호소한다. 워낙 급속하게 변하는 시대여서 어느 정도 변화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고 특히 사람들의 태도가 이상할 정도로 거만하게 보여 말 한마디 붙이기조차 꺼려진다고 한다.
화난 듯한 표정, 일상화된 무질서 등도 그렇지만 지하철과 버스 등에서 주위 사람들의 불편을 아랑곳하지 않는 통화 소음에 대책없이 시달리고 나면 거만한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모욕을 당한 듯해 불쾌하다고 했다. 맞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소음의 칼을 휘두르며 서로가 서로에게 무례를 저지르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
언제 어디서든 대책없이 작동하는 휴대폰이 절제와 배려라는 공존의 전제를 밀어내고 적개심에 가까운 타인혐오의 원인을 제공한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휴대폰이 아니라 휴대폰 통화를 무슨 특권인 양 오해하는 사람이 문제의 원인이다. 내 돈 내고 탔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니 남이야 불편하든 말든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심리가 작동되는 한 지하철과 버스는 만인이 만인에게 늑대인 야만의 공간으로 전락한다. 안 그래도 혼잡한 출퇴근 시간 전동차 출입구 부근에서 휴대폰에 빠져 장애물이 되어버린 몇 사람 때문에 내릴 곳을 놓칠 번한 경험을 하고 나면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내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 든다. 지금 서있는 곳이 세상이고 지금 내 옆에 서있는 사람이 세상 사람이다. 어떤 세상을 찾든 바로 옆 세상을 외면하고 오로지 조그만 기계 속에서 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어불성설이다.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동네 유리창이 하나 둘씩 깨지게 되고 이윽고 마을 전체가 황폐화된다. 낡았어도 멀쩡한 자동차는 오랫동안 주차되어 있어도 아무도 손대지 않지만 유리창이 깨진 자동차는 모조리 뜯겨 나가게 돼있다. 그게 세상 이치다. 지하철에서 다른 승객의 불편을 외면하고 휴대폰으로 떠드는 자는 깨진 유리창이다. 이제라도 절제와 배려라는 비용을 투입해 깨진 유리창을 갈아 끼우지 않으면 지하철과 버스는, 할 수 없이 타지만 아무도 타고 싶지 않은 혐오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만다. 힘없는 사람끼리 서로 물어뜯으며 멀쩡한 공간을 지옥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사진=유투브)
2017.01.11 소녀상,군국주의 그리고 아베
소녀상, 군국주의 그리고 아베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 문제로 한일 외교가 뒤엉키고 있다. 아베 일본 총리는 소녀상 설치에 항의하여 주한 일본대사를 본국으로 불러들였다. 대사 소환은 단교 바로 아래 등급의 강력한 외교 조치다. 한편으로는 ‘12·28 위안부 합의’는 정권이 바뀌어도 지켜져야 한다고 압박한다. 대통령 리더십이 공백상태인 한국 외교부는 일본의 공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위안부 합의 이후 “10억 엔을 줬다”는 아베는 위안부 피해자에게 일본 측의 사죄 메시지를 전달하자는 방안에 대해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일축했다. 이미 합의를 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는 것이다. 해방 이후 72년이 지났지만 위안부 문제는 아직도 미해결 상태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다.
우리가 일본에 요구하는 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솔한 시인과 진정성 있는 사과다. 아베를 비롯한 일본의 우익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 자체가 우리의 인식과 상이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일본의 일반인조차 이제 더 이상 무엇을 또 사과해야 하느냐며 지겨워한다. 일본사회에 일상화한 혐한감정은 그 증거의 하나다.
사드 배치 계획 이후 노골적으로 한국을 무시하는 시진핑의 중국. 미국 우선의 기치를 들고 한미관계의 모든 것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는 트럼프의 미국. 여전히 멀기만 한 푸틴의 러시아. 일로매진 핵 개발에 올인하는 김정은의 북한. 이 와중에 한일관계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향후 아베의 선택은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대비해야 하는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4월 1일, 미 해군 5함대 사령부 예하 주력 전투부대인 58기동부대가 오키나와에 상륙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개시했다. 항공모함 16척, 전함 18척, 구축함 200척, 기타 수송선, 보급선 등 1,320여척의 초대형 선단을 꾸린 미군은 19만여 명의 병력으로 1개월 이내에 오키나와를 점령하여 일본 본토 공격의 발판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미 정보국은 오키나와에 6만 명가량의 일본군이 200 문의 대포로 무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는 오판이었다.
양국 군대는 미군의 예상을 넘어 81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오키나와 전투는 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가 대거 출현했다는 점과 오키나와 주민의 3분의 1이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을 받는다. 약 11만 명의 일본군은 대부분 전사했지만 압도적인 화력에도 불구하고 미군 역시 1만2,500명이 전사하고 3만6,00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희생이 적지 않았다.
단기전을 예상했던 전투가 장기전이 된 이유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오키나와를 사수하라는 일본 군국주의의 본산 최고사령부의 명령 때문이었다. 미군은 진주만 피습 이후 이미 미드웨이, 솔로몬, 과달카날, 사이판, 괌, 필리핀, 유황도 등에서 일본군을 전멸시킨 경험을 가지고 있었지만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이상한 전투 행태를 보이는 일본군에 대해 일종의 두려움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전쟁을 벌이다 한쪽의 전력이 너무 우세해 패색이 짙어지면 패배를 받아들이고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보통의 인간들이 보여주는 일반적 행동양식이다. 30여 년 전 제1차세계대전에서 그랬고 같은 시기 유럽에서 연합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독일군이나 이탈리아 군대가 승패를 받아들이는 양식도 대개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누가 봐도 분명한 눈앞의 패배조차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가미카제로 대항했다.
이 기간 일본군은 1,100여 대의 항공기를 잃었지만 결국 미군의 오키나와 점령을 막지 못했다. 그마저도 안 되는 육상에서는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최악의 상황까지 몰리다가 생존자 전체가 스스로 목숨을 끓는 옥쇄를 감행했다. 미군은 죽지 않기 위해 싸웠으나 일본군은 죽을 자리를 찾아 싸웠다. 그들에겐 패배보다 죽음이 쉬워보였다. 미군들은 일본군의 무모함에 치를 떨었다.
2001년 민간 여객기를 납치해 세계무역센터를 들이 받은 9.11테러의 모티브는 사실 일본군의 가미카제가 제공했다. 일본군은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 할 인간생명을 수단화했고 이는 현재 광신적 극단주의자들이 애용하는 전투의 한 유형으로 고착화되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노골적으로 생명 자체를 모독했다. 죽음에 대한 일본군의 이 같은 태도 때문에 본토 상륙 시 100만 명에 이르는 미군의 대규모 인명피해가 우려되자 트루먼 대통령은 미일 양국 간 더 많은 인명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원자폭탄 사용을 결심하게 된다. 현재 일본은 한국과 중국 등 무고한 아시아 국가 국민들에게 끼친 가해의 역사는 외면하고 자신들이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원폭 피해자로 코스프레하지만 따지고 보면 원폭피해는 그들이 자초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가미카제와 옥쇄는 일본 군국주의정신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형태다. 전쟁을 주도한 군부 강경파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2발의 원자폭탄을 맞은 뒤에도 항복을 거부하고 대미결사항전을 주장했을 정도로 광신적 정신상태를 보였다.당시 육군대신 아나미 고래치카는 “죽음으로써 활로를 찾는 전법으로 나간다면 완패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황을 호전시킬 공산이 있다”, “우리는 미군의 본토상륙을 기다렸다가 일대 타격을 가한 뒤 개선된 조건을 가지고 교섭에 임해야 한다”며 항복을 거부했다. 8월14일 밤 아나미는 “죽음으로써 대죄의 용서를 구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할복자살했다. 아나미의 대죄는 무모한 침략이 아니라 전쟁의 패배였을 것이다.
아베의 외조부는 일본의 침략전쟁의 주연 도조 히데키의 내각에서 상공대신을 지내기도 한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다. 핏줄만으로 인간을 평가하는게 합당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아베의 육체엔 군국주의 일본을 이끈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일본의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는 아베를 ‘국가주의자’로 평가한다. 국가주의가 무엇인가. 개인의 권리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우선한다는 생각이 아닌가. 국가주의에 의하면 국가는 합법적인 동시에 정당하므로 절대적이다.
20세기 군국주의 일본군이 절대적 존재 천황을 상징으로 한 가치체계를 가졌다면 21세기 아베는 천황 대신 국가의 이익을 중심으로 한 가치체계를 가졌다고 봐야 한다. 아베는 총리가 된 이후 재임 중 야스쿠니 참배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전범들의 위패가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아베가 핏줄 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서도 제2차세계대전의 전범들과 연결돼 있다는 증거다.
위안부 문제는 전범의 문제고 결국 일본이라는 국가의 문제다. 아베는 절대로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사과를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사과는 아베의 태생적·정신적 정체성과 가치체계에 대립한다.
추운 겨울 소녀상에 목도리를 둘러주는 한국인의 행위에는 지난 역사에 대한 회한과 다시는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아야한다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다. 그러나 회한과 염원이 아무리 절절하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감정일 뿐이다.
사과할 의사가 없는 이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행위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그대신 우리의 대통령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아 무릎을 꿇고 “나라가 잘못해 힘없는 당신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잘못은 다른 사람들이 저질렀는데 애꿎은 당신들이 험한 꼴을 당했다.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고, 우리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으면 좋겠다.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더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 반드시 그런 나라를 만들겠다”는 다짐과 함께.
다짐이 현실이 되면 사과는 절차적인 것이 된다. 미군의 압도적인 위력앞에 일본은 결국 무릎을 꿇었다. 힘은 중력을 갖는다. 사과는 현실이라는 땅을 향해 사과처럼 떨어질 것이다. 그런 역사를 보고 싶다.
01.25 잘사는 이유. 민족성인가, 리더십인가?
왜 어떤 민족은 잘살고 어떤 민족은 가난하게 살까.한때 잘살았던 민족이 가난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며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민족이 주변의 예상을 깨고 잘살게 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덩샤오핑 이후 최고의 절대 권력자 반열에 오른 시진핑은 한국정부의 사드 배치 결정 이후 한한령을 발동해 노골적으로 한류와 한국산 제품 등에 대해 불이익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일본사회를 국수주의 쪽으로 돌려 세우려는 의도를 노골화하고 있는 아베는 전쟁을 금지하고 있는 평화헌법의 개정을 노리며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에서 함께 피를 흘렸던 동맹국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이후 미국의 이익 우선이라는 기치아래 예측 불가능하고 불확실한 상태로 돌진해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러시아의 푸틴에게 한국은 여전히 관심 밖의 나라로 보인다. 뭉친지 오래면 헤어지고, 흩어졌다가 시간이 흐르면 뭉치는 게 세상 이치다. 바야흐로 동맹의 시대가 저물고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말이 좋아 각자도생이지 힘센 놈은 살고 약한 놈은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이 상황이 어딘가 눈에 익다. 100여 년 전 망해가는 조선을 가지고 놀던 제국주의 세력의 아귀다툼 속에서 결국 속수무책으로 나라를 잃은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좋지 않은데 이 와중에 앞장서서 길을 제시하고 민족의 단결을 촉구할 리더십마저 실종돼 있는 상태라 기분은 더욱 우울하기만 하다.
▲트럼프 미 신임대통령이 취인임식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연설하고 있다.AP=뉴시스
신년 초 청와대에서 기습적으로 열린 박근혜 대통령의 간담회에서 박 대통령이 구사한 언어는 사실여부를 떠나 대통령의 언어, 리더의 언어, 시대의 언어가 아니었다. 말이 인격이다. 우리는 말을 통해 상대방의 인격을 평가한다. 달변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의전이 배제된 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원고없이 들려준 말의 민낯은 우리가 사람을 몰랐어도 너무 몰랐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대한민국은 박근혜를 과대평가했고 박근혜는 대한민국을 과소평가했다.
각각의 시대는 나름의 시대적 대의를 갖는다. 공간적으로 내재적 접근이 가능하다면 시간적 차원에서의 내재적 접근 역시 안 된다는 법이 없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후진적 농업사회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남한 사회는 전통적 농업생산 만으로는 도저히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공유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아래 산업화의 여정에 돌입한다. 박정희의 리더십은 다해봐야 한 줌도 안 되는 궁핍한 국가 에너지를 모조리 끌어 모아 선택과 집중이라는 발전전략으로 밀어붙인 특화된 형태의 리더십이다. 자원이 부족한 후진 국가가 선택한 불가피한 경제발전전략이었고 결과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볼록렌즈는 햇빛을 모아 불을 일으킨다. 박정희 리더십은 말하자면 60~70년대 대한민국이라는 헐벗은 땅에 흩어지던 햇빛을 모아 민족부흥의 장작불을 일으킨 볼록렌즈였다. 어떤 장작을, 어디에, 얼마큼 쌓을 것인지 선택하는 과정에 민의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고, 장작의 열기와 빛이 온 국민에게 골고루 분배되지 않은 부분은 압축적 산업화의 그림자다.
▲1977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사진 중앙포토>
한때 중국 동북부 전 지역을 점령했던 광개토대왕의 후예이면서, 전세계 GDP의 40% 이상을 차지하던 7세기 세계최강국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도 했던 전사들의 후손이 현재 북한 지역의 한국인이다. 조선 상인의 대명사 개성상인의 경제적 재능은 19세기에 이미 현대적 복식부기를 사용할 만큼 선진적이었다. 일제 36년 동안 일본은 산업시설의 대부분을 북한 지역에 건설했다. 한반도 지하자원의 대부분은 북한지역에 매장되어 있다. 1948년 이후 한 민족 두 체제의 경쟁이 한반도에서 벌어졌다. 누가 봐도 승부는 뻔해 보였다. 예상을 뒤엎은 결과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3대 세습의 결과 정치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국제적으로 북한사회는 거의 재앙의 수준까지 추락했다. 같은 민족, 다른 리더십의 결과가 오늘 남북한의 차이다.
▲김일성,김정일 동상에 헌화하고 나오는 북한 주민들.<사진 중앙포토>
1775년 독립전쟁 전까지 영국의 식민지였던 후진국 미국은 19세기 거미줄처럼 도시를 연결한 철도의 규격화와 동서횡단철도의 건설 이후 대서양과 태평양이 육로로 연결되면서 드디어 세계최강국가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이 초석을 링컨 대통령이 깔았다. 산업화시대 철도와 도로와 공장이 국가발전의 혈관이라면 21세기 정보통신시대의 혈관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을 이어주는 IT다. 산업화 시대의 화두가 독점과 배제였다면 정보화시대의 화두는 개방과 공유다. 박근혜 대통령은 황무지에서 산업화를 이끈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독점과 배제, 선택과 집중이라는 통치술을 견학했지만 아버지 사후 급변하는 사회, 산업인류에서 정보인류로 진화하는 인간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다. 박정희 향수가 박근혜 대통령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권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물려준 발전지향의 DNA가 박근혜 대통령을 통해 현실에서 다시 재연되는 성취를 보고자했지만 불행히도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 DNA는 산업화시대에 고정되어 진화를 멈춘 상태였다. 우린 박근혜라는 인물을 몰랐고, 박근혜 대통령은 진화한 대한민국을 몰랐다. 이게 비극이다.
▲링컨 대통령 동상 앞에서 환담하고 있는 오바마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사진 중앙포토>
리더십이 절실한 시기에 리더십이 통째로 허공에 뜬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고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나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각 다르다’는 톨스토이의 지적은 가정뿐만 아니라 국가차원에서도 유효하다. 좋은 가장이 좋은 가정을 만드는 것처럼 좋은 리더가 좋은 나라를 만드는 건 분명하다. 역사적으로도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시기엔 반드시 성군이 있었다.
운명적으로 잘사는 사회는 없다. 그런 사회는 정의롭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운명적으로 못살아야 할 사회 역시 없다. 운명은 불확실성이 본질이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사회이든 구성원 각자의 노력에 따라 운명이 정해진다. 모두 열심히 하는 것은 공동체가 강해지기 위한 기본이다. 그러나 분산된 노력은 허약하다. 개인 차원의 노력과 노력을 한 방향으로 이어주는 게 리더의 역할이다. 배제와 독점, 힘과 고집이 아닌 개방과 공유, 소통과 설득의 리더십이 요구되는 시대에 과연 박근혜 리더십과는 다른 어떤 리더십이 탄핵 이후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02.14 지렁이,세르파,공작새 그리고 대통령
18세기 세계 구리 생산량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던 영국 데본의 구리 광산은 매장된 구리가 바닥을 보이자 비소 광산으로 변신했다. 비소는 독약인 비상을 구성하는 원소로 예로부터 동서양 모두에서 사람을 독살하는데 사용됐다. 비소 광산 주변의 토양은 정상 토질에 비해 100배에서 1,000배 까지 비소에 오염되어 다른 지역의 어떤 지렁이를 옮겨 놓아도 바로 죽어버릴 지경이 되었다.
이 토양에서 살아남은 지렁이가 있다. 기존의 다른 지렁이와 비교해 크기는 형편없이 작아지고 몸통 끝부분의 색은 누렇게 변색됐다. 그러나 어찌됐든 광산이 폐쇄된 지 170여 년 동안 이 지렁이는 그 어떤 지렁이도 살 수 없는 지역에서 살아남아 자손을 번식하고 자신의 DNA를 물려주고 있다.
이 지역 지렁이의 DNA와 다른 지역 지렁이의 DNA의 차이는 지렁이와 여우의 DNA의 차이보다 크다고 한다. 그저 형태가 같아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일 뿐, 데본 지역의 지렁이와 다른 지역의 지렁이는 전혀 다른 변종으로 각각 진화하는 중이다.
▲지렁이.중앙포토
히말라야 세르파족의 평균 혈중 헤모글로빈 수치는 16 정도로 저고도 지역에서 살다가 한 달 정도 고산에서 적응한 산악인들의 헤모글로빈 수치인 17~18보다 낮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보통의 인간보다 낮은 세르파족의 고산적응의 비밀은 일반인들의 예상처럼 헤모글로빈이 아니라 모세혈관에 있다. 그들의 모세혈관은 저고도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의 그것보다 훨씬 촘촘할 뿐더러 혈관이 넓고 두껍다.
촘촘하고 넓은 혈관을 통해 역동적으로 환류하는 혈류의 흐름 덕분에 세르파족은 고산병에 걸리지 않도록 진화했다. 인간이 거주하기 적합하지 않은 지역에서 4세기를 버틴 인간 신체가 찾아낸 자연선택이다.
▲히말라랴 로체를 오르는 등반대원과 세르파들.김춘식 기자
2017년 우리 사회의 정치 토양은 한때 한강의 기적을 일군 세대를 품었던 그 토양이 아니다. 열심히 하면 누구라도 흙수저를 면하고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사회·경제적 신뢰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나도 잘 살 수 있다는 희망과 지도자가 이 사회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신뢰가 무너진 한국사회는 비소로 오염된 데본 광산의 토양처럼 한국인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우리는 아직 고산을 견디는 세르파족의 모세혈관 같은 오염된 정치에 대한 면역기능이 없다. 오늘날 반으로 갈라진 광장의 군중은 국적만 같은 한국인일 뿐, 데본 광산과 데본 광산 이외의 지역에서 서식하는 지렁이의 DNA 만큼 정치적으로 완전히 다른 인종으로 갈라졌다.
벚꽃 대선이 되든 눈보라 대선이 되든 우리는 또 누군가에게 표를 던질 것이다. 지금 실패한 리더십의 대가를 국민 모두가 혹독하게 치르고 있지만 선거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하면 지역, 이념, 진영 논리에 정신을 빼앗겨 지금의 이 쓰라린 교훈이 투표소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시청앞 태극기 집회.강정현 기자
▲촛불집회.뉴시스
번식을 앞둔 공작새 암컷은 꼬리가 화려한 숫컷 공작새를 선택한다. 숫컷의 화려한 꼬리는 사실 번식 능력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그 불편한 꼬리를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면 생존능력 또한 남다를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암컷이 선호한다고 짐작된다. 자신의 DNA를 후손에게 남기는 것이 지상과제인 숫컷은 암컷에게 선택받기 위해 결사적으로 꼬리를 키운다. 공작 암컷의 배우자 선택 취향이 바뀌지 않는 한 공작 숫컷의 화려한 꼬리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천적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걱정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꼬리를 활짝 편 공작 숫컷.중앙포토
무슨 바보같은 선택인가 비웃을 수 있지만 유감스럽게 인간사회에서도 공작새의 성선택 원리가 유사하게 작동된다. 유권자의 관심이 후보의 인간적 자질이나 공약의 현실성 대신 내 편 네 편이 기준이 되고, 듣기 좋은 공약과 이념적 성향 따위에 몰입하는 한, 후보자는 지금까지의 행태를 굳이 바꿀 이유가 없고 우리는 또 심각한 대가를 치러야 할 지 모른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대통령 리스크 역시 절대로 소멸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자연이나 인간 사회는 옳은 방향으로만 진화하지 않는다. 로마도 망했다. 우리는 지금 기로에 서있다.
02.20 국가와 개인, 테러리스트의 최후
1983년 10월9일 동남아시아 5개국 등 6개국 공식 순방에 나선 전두환 대통령의 첫 방문지 버마(현 미얀마)의 수도 랑군(현 양곤)의 국립묘지 아웅산 묘역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나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는 테러가 발행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사건 발생 후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한다.
범인 추적에 나선 버마 정부는 이틀 후인 10월 11일과 12일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 소속 강민철 상위와 진용진 소좌(소령) 등 2명을 체포하고 신기철 상위를 사살했다. 진용진은 바다를 헤엄치다가 주민의 신고로 체포되었고 강민철과 신기철은 경찰에 연행되는 과정에서 수류탄을 터트리며 반항하다가 강민철은 부상을 당한 채 생포되고 신기철은 사살됐다. 수사당국은 10월 17일 이 사건이 북한의 특수공작원에 의해 자행된 것임을 공식발표했고, 11월 6일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모든 북한 외교관을 추방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테러 용의자 진용진 소좌는 진술을 거부하다 1985년 양곤 현지에서 처형됐다. 강민철은 북한의 테러를 시인하고 수사에 적극 협조한 점이 참작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집행이 유예되어 무기징역을 살다 2008년 5월 18일 53세를 일기로 수감중이던 양곤 인세인 교도소에서 중증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강민철.중앙포토
북한 공작원 강민철은 2008년 타향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간절하게 남한행을 바랬다고 버마의 유력 언론인이자 정치범 수감자인 윈틴씨가 2012년 1월 26일 증언했다. 윈틴씨는 "약 20년 간 같은 곳에서 수감생활을 하며 알게 된 강씨가 말년에 한국행을 간절히 바랐지만, 북한과 남한 어느 곳에서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감옥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고 자유아시아방송(RFA)의 한 프로그램에서 말했다. 아웅산 테러 이후 북한은 강씨가 자국민이 아니라며 테러에 개입된 사실을 부인했고 남한의 전두환 정부는 그가 대통령을 살해하려 했다는 이유로 강씨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 최고 권력자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암살됐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19일 지금까지 여성용의자 2명, 말레이시아 남성용의자 1명, 북한 남성 용의자 1명, 택시기사 등 5명을 체포했으며 이 사건의 배후에 북한 비밀공작원들이 있다는 유력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2010년 6월4일 마카오 알티라호텔 10층 엘리베이터에서 중앙선데이 기자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김정남.신인섭 기자
북한 공작원으로 추정되는 나머지 4명의 테러 용의자가 체포될 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그들의 체포 여부에 관계없이 북한 당국은 테러 개입에 대해 전면 부인할 것이 분명하다. 북한은 지금까지 1976년 판문점에서 북한군 정규군에 의해 저질러진 '8·18 도끼만행' 외에 그 어떤 테러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한 전례가 없다.
이번 김정남 암살범 역시 북한 복귀에 실패할 경우 북한 당국의 철저한 외면속에 비참한 말로를 걸을 것이 분명하다.
▲1987년12월15일 김포공항에 모습을 드러낸 KAL858기 폭파범 김현희.중앙포토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호모 사피엔스의 속성이 오늘날 인간이 이룩한 진화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인지혁명을 통해 새로운 사고방식과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으로 무리의 결속을 불러왔고 대규모 협력을 위해 종교나 국가 등 보이지 않는 가상의 존재를 실재로 믿게 되었다고 한다. 하라리의 지적 이상으로 (종교라면 몰라도) 현실세계에서 국가 없는 개인은 상상하기 어렵다. 국가와 종교는 더 이상 가상의 존재가 아니라 실존하는 실체다. 종교나 국가는 이제 스스로의 존재의의를 설명할 필요조차 없으며 개인위에 군림하고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종교나 국가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주장은 거대권력의 바람 앞에 허무한 구호로 분해되고 있다. 국가는 절대선인가. 종교는 무오류인가. 개인은 어떤 선택을 통해 폭력과 오류에 저항할 수 있는가.우리는 과연 그런 수단을 가지고 있는가. 아직 중요한 질문 하나가 남았다. 우리, 개인은 그럴 의사나 가지고 있는가.
03.10 한미중 사드 3국지
북한이 새벽 시간에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에서 스커드-ER 등 4발의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6일 밤 주한미군은 사드 체계의 인터셉터 미사일 발사대 2대 를 오산 공군기지에 내려놨다. 소식을 들은 중국은 “사드 배치로 인한 모든 뒷감당은 한·미의 책임”이라며 강력 반발하면서 한국 정부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쏟아냈지만 또 다른 당사자인 미국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C-17 수송기가 오산 공군기지에 사드 장비를 내리고 있다.<사진 주한미군>
사드 부지를 제공한 롯데에 대해서는 물론 한층 강력한 보복조치를 예고했다. 믿고 싶지 않지만 건달들이 설치는 뒷골목 세계나, 문명국을 자처하는 여러 나라들 간의 국제관계나 동일하게 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별 문제가 없다면 몰라도 일단 상황이 벌어지고 나면 가면같은 체면을 내던지고 누가 강자고 누가 약자인지 분명하게 드러내게 돼있다.
한반도에 사드 무기체계를 공수한 미국은 하루 다음 날인 7일 대북 제재를 어긴 중국 최대의 통신장비업체 ZTE에 대해 11억9200만 달러(약 1조3700억 원)의 벌금을 부과함으로써 중국에 연타를 날렸다. ZTE가 미국 업체에서 통신장비를 사들여 이란에 되팔고 북한에도 280여 차례에 걸쳐 수출했다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이 한반도에 전격적으로 사드 장비를 들여온 바로 다음날 미국 정부가 중국의 대표적 기업에 대해 감당하기 벅찬 벌금을 부과했다는 사실은 그 시점을 놓고 볼 때 시사하는 바가 가볍지 않다. ‘한국내 사드 배치에 관심을 끄고 북한의 핵 개발을 막든지, 아니면 미국에서 장사하는 것을 접든지’ 선택하라는 강자의 의도가 읽히는 것이다.
▲국방부앞에서 벌어진 사드 반대 시위.뉴시스
한국에 대해서는 온갖 협박을 주저하지 않던 중국은 2일 간 2차례에 걸친 미국의 도발에 대해 이렇다 할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고작 중국 외교부가 “중국 기업에 대한 일방적 제재를 반대한다. 중국 기업이 해외에서 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라는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사드와 관련해 한국의 어떤 설명도, 어떤 해명도 들으려 하지 않고 중국의 논리만 강요하던 그 중국의 오만방자하던 외교부가 맞는지 의아해지는 대목이다.
▲중국 관광객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경복궁.뉴시스
정의가 승리한다는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정의는 승리한 자의 전리품이라고 믿고 싶다. 그래야 승부에 진지해지고 인생이 진지해지기 때문이다. 개인간의 싸움이든 국가적 차원의 분쟁이든 승리의 의미는 별반 다르지 않다. 오늘 한·미·중 3국 간에 사드를 두고 벌어지는 역학관계는 생생한 증거다. 나의 정의와 너의 정의가 같지 않다. ‘우리의 정의’는 형용 모순의 언어이다.
▲국회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사드배치 찬성 집회.뉴시스
우리는 지금 기로에 서있다. 약자이면서 약자인지 모르고, 약자이면서 감히 내부 단결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내부의 상대방조차 설득하지 못하는 논리로 외부의 적을 향해 동의를 구걸하고 있다. 힘을 지향하는 자, 이념을 지향하는 자, 보편적 정의를 믿는 자, 세상의 변화를 모르는 자들이 뒤엉켜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다. 밖의 적들이 웃고 있는 가운데. 기시감이 있다. 임진왜란 직전에, 병자호란 직전에, 한일강제병합 직전에 겪은 상황이 아니던가.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희극으로. 한번은 비극으로. 대체 우리는 지금 어떤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것일까.
04.21 대통령을 그만두면 참을 수 없는 세가지
만인지상의 절대권력 대통령직을 물러난 전임 대통령은 퇴임 후 모든 것이 불편하지만 특히 다음 세 가지의 변화가 견디기 어렵다고 한다.
첫째, 길이 막혀 울화통이 치미는 일이 많아진다. 현직에 있을 때는 경찰의 철저한 통제로 신호 한번 걸리는 일이 없었지만 퇴임한 대통령에게까지 그런 특혜가 계속 제공되지는 않는다. 현직 대통령을 위한 차량 통제야 그러려니 할 수 있어도 전직에게까지 동일한 특권을 유지시키는 것은 영문도 모른 채 도로위에서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일반 시민들에게 끼치는 민폐가 너무 엄청나다.
다른 모든 차량이 멈춰 서 있는 가운데 자신을 태운 차량행렬만 무인지경의 도로를 질주하는 쾌감을 경험한 전직 권력자는 차량의 물결 속에 파묻혀 오도 가도 못하는 교통정체를 참을 수 없는 수모 내지 불편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둘째, 낮은 천장이 머리를 누르는 듯해서 하루 종일 두통이 가시지를 않는다. 보통 3m 안쪽인 일반 가정집의 천장 높이와 비교해서 대통령이 머무는 공간들의 천정 높이는 그보다 훨씬 높다. 머리위 공간이 확 트인 곳에서 지내다가 자택으로 돌아 오면 마치 움막에 들어앉은 듯 답답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천정 높이는 권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궁궐이나 종교 시설의 천정 높이가 남다른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엔 아무 불편 없이 지냈던 자신의 집이지만 임기 내내 높은 천장 아래에서 살다온 경험이 독이 되어 퇴임 이후 일반인의 정서로 복귀하는 과정에 장애물로 작동하는 것이다.
셋째, 도무지 말발이 서지 않는다. 말을 해도 무시당한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모든 행사는 대통령의 말씀으로 행사의 정점을 찍는다. 주요 현안에 대한 대통령의 말씀은 그대로 국가시책이다. 대통령의 발언은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한다. 당연히 모든 국민에게도 초미의 관심사다.
나름대로 한가락 한다는 국무총리나 장관들이 국무회의에서 머리를 박고 말씀을 받아 적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현직 대통령의 말이 가지는 무게감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직에 있을 때의 이야기다. 퇴임한 대통령은 말을 할 기회가 없을 뿐더러 말한다 해도 받아쓰는 사람이 없다.
말이야 말로 현재의 권력관계를 가장 명쾌하게 보여주는 기준이다.
처음 접한 집단에서 구성원간의 서열관계가 애매할 때, 결정적인 순간 누가 말하고 누가 듣는 지 주목해보면 간단하게 위아래가 정리된다. ‘입’이 갑이고 ‘귀’가 을이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다. 이른바 ‘장미대선’의 근원적 원인을 제공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현재 3평 남짓한 독방에 수감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온갖 특권의 울타리에서 살다가 지금은 특권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인간적 자유마저 박탈된 채 구치소 담장 안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했다.
대통령이 누리는 모든 특권은 권한을 위임한 국민의 양해 안에서만 가능하다. 대통령의 그 어느 권한도 천부적이고 신성불가침한 것이 아니다. 이 단순하고 엄중한 사실을 박 전 대통령은 몰랐거나 무시했다. 무능이든 무시이든, 그 결과는 오늘의 현실이다.
자신이 누리는 특권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자 아무도 관여할 수 없는 불가침의 성역이라 오해한 대가로 그녀는 국민이 위임한 특권은 물론이고 최소한의 기본적 권리마저 모조리 박탈당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 더 절실하듯 빼앗긴 권력의 기억은 두고두고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만시지탄에 불과할 것이지만 그래도 이 경험을 통해 그녀도, 19일 후에 탄생할 차기 대통령도, 자신의 모든 권한은 오로지 임기 동안만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권력은 교도소 담장위를 걷는다. 자칫하면 나락으로 떨어지기 일쑤다.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청와대를 들어오는 박근혜 대통령<중앙포토>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서울 구치소로 이송되는 박 전 대통령.화장을 지웠고 올림머리도 풀었다.
▲박전 대통령이 수갇된 서울 구치소 독방의 구조
05.15 스승의 날,다시 세월호 선생님을 생각한다
모든 죽음이 숙연한 것이긴 해도 ‘배우는 자’의 죽음과 ‘가르치는 자’의 죽음의 의미가 같지 않다. 죽기 이전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책임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배우는 자의 죽음이 희생에 연결돼 있다면 가르치는 자의 죽음은 책임과 연결돼 있다. 사실과 동의 여부를 떠나 많은 이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그것이 가르치는 자에 대한 우리 의식의 일단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날 그 배에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위치는 다르지 않았다. 책임을 내던지고 너절한 모습으로 저 먼저 살고자 도주를 감행한 자를 만난 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는 모두 같은 승객이자 불행과 마주한 동지였고, (현재 영원을 나누고 있는) 동반자였다.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은 살았다는 자책감에 밀려 목숨을 던진 교감 선생님과, 그 날, 그 자리에서 아이들과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선생님들 모두 ‘가르치는 자’ 이전에 누군가의 자식이고 어버이였다. 그들 역시 배우는 자였다
그들이 떠나고 세 번 째 맞는 5월15일 스승의 날. 왜 그들이 그렇게 가야 했는지 다시 하늘에 묻는다. 예상하지 않은 죽음은 그 자체가 질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물어도 하늘은 대답하지 않는다. 하늘은 원래 대답을 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하늘은 대답하는 자가 아니다. 이 참담한 희생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하늘도 묻고 있다. 하늘은 대답하는 자가 아니다. 하늘도 묻는 자다. 왜 이런 비극이 벌어졌는지 대답해야 할 자는 하늘이 아니고 인간이다
세월호 매듭은 이미 하나의 상징이 됐다. 오늘 이 상징의 위치는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머리에 매고, 누군가는 목에 매며, 누군가는 가슴에 맨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픈 자와, 생각할수록 목이 조여지는 자와, 생각하지 않아도 언제나 가슴이 미어지는 자로 우리 사회는 갈라져 있다. 인간 사회는 원래 그런 것이라 해도, 적어도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사회의 리더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리더 개인의 불행일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불행이기도 하다. 우리가 인간임이 분명하다면, 굳이 인도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생명의 기쁨에 동의하는 인간이라면, 어떤 죽음도, 죽음 이외의 다른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별 것 아니지만 그 별 것 아닌 차이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누구는 인간이 되고 누구는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 된다
스승의 날이자 세월호 참사일로부터 3년29일째가 되는 15일 오전. 세월호 기억 교실 한 켠에 마련된 교무실이 고즈넉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금 전 스승의 날을 맞아 3년 전 세월호 참사로 사망한 기간제 교사에 대한 순직 인정 절차를 지시했다. 이에 따라 당시 배 안에서 학생들을 구조하다 사망했지만 각종 규정과 법의 벽에 막혀 죽음의 무게조차 차별당하고 있던 김초원 · 이지혜 선생님은 마침내 순직 절차를 밟게 됐다. 김초원 교사는 2학년 3반, 이지혜 교사는 2학년 7반 담임이었다.
이들은 당시 마음만 먹었다면 세월호 5층 탈출이 용이한 곳에 있었지만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히기 위해 4층으로 내려갔고, 결국 빠져나오지 못했다. 마음이 이들을 데려 갔고 우리는 이 마음을 잊지 못한다글·사진=김춘식 중앙일보 포토데스크 부국장 kimcs962@joongang.co.kr
▲15일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순직 절차에 들어간 고 이지혜 선생님
▲고 이지혜 선생님
▲고 김초원 선생님의 책상
▲김초원 선생님을 기리는 글
▲세월호 사고 당시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김초원 선생님에게 남긴 글.하늘 나라에서도 아이를 부탁한다는 당부를 하고 있다.
▲416기억교실 앞에 붙은 희생 학생들의 사진
▲스승의 날을 맞아 기억 교실 교무실을 방문한 단원고 학생들
▲사망한 선생님들의 사진이 모셔진 기억 교실 교무실
▲고 김초원 선생님
05.22 개를 보니 인간 문재인을 알겠다
21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에 취임한 지 11일 만에 경남 양산 사저를 방문했다. 대통령 선거 유세 기간과 겹쳐 상당히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문 대통령을 맞아 마당을 지키던 개가 벌렁 뒤집어졌고 문 대통령이 웃으며 뒤집어진 개를 쓰다듬는 사진이 청와대 제공으로 들어왔다
사람들끼리야 대통령이 되기 전과 된 후의 대접이 다를 수 있겠으나 그건 인간 세상의 이야기다. 마당을 지키는 개의 입장에선 그저 오랜만에 보는 주인일 뿐이다.
한 인간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평가는 참고할 수는 있지만,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 인간은 몇 마디 말이나 글로 정의되지 않는 존재다. 솔직히 나는 지금도 나를 잘 모른다.
정치인 문재인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개에게 제 주인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존재다. 좋거나 싫거나 둘 중 하나다. 손톱만큼의 의구심이 있어도 개는 주인 아니라 그 어떤 존재에게도 제 배를 보이지 않는다.
갈비뼈로 보호받는 등이나 옆구리와 달리 신체적으로 아무런 보호장치가 없는 복부는 만에 하나 공격이라도 당하면 쉽게 장기가 파손되고 이 경우 바로 생명이 위태롭게 되기 때문이다. 서열상 자신보다 우위에 있고, 절대로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서는 대상에게만 개는 제 배를 뒤집어 보인다. 사실 개는 목숨을 걸고 제 배를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을 때 개는 바닥에 드러누워 제 배를 보여주는 것이다
개를 키워본 사람은 안다. 저렇게 벌렁 뒤집어져도 되는 사람은( 정치적으론 몰라도) 인간적으로는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다. 개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는 일마다 풀리는 게 없어서, 중요한 승부에서 패했다고, 사는 게 피곤해서, 이유는 없지만 괜히 심심해서 개한테 화풀이를 하거나 거칠게 대한 적이 단 한번만 있어도 개는 주인에 대한 존경심을 거둔다. 먹이를 받아먹고 꼬리를 흔들긴 해도 저런 식으로 제 주인을 맞이하지는 않는다
그러고보니 유기견 토리를 청와대에 퍼스트 도그로 입양한다는 발표가 기억난다. ‘박혀있던 개’든 ‘굴러온 개’든 모두 차별없이 대통령 곁에서 행복하게 지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나는 어떤 인간인가. 갑자기 우리집 대박이가 보고 싶어졌다.
글=김춘식 중앙일보 포토데스크 부국장 kim.choonsik@joongang.co.kr
▲퍼스트 도그로 입양된 토리.동물보호단체 케어 제공
▲대박이(오른쪽)와 새끼 겨울이
06.19 물이 없으면 대한민국도 없다
물처럼 흔한 게 없던 세상은 끝났다. 물에 관한 한 이제 그런 호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3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땅이고 때만 되면 장마네, 태풍이네 물을 뿌려주는 하늘의 축복에 취해 ‘물 쓰듯’ 물을 소비해 왔지만 올해를 포함해 4~5년 계속된 가뭄에 저수지마다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 이젠 농업용수는 고사하고 식수 공급조차 비상이 걸리기 직전이다
▲바닥이 드러나다 못해 갈라지기까지 한 저수지.중앙포토
지구엔 엄청나게 많은 물이 존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 지구상 물의97.5%는 인간을 포함한 거의 모든 생물이 단 한모금도 마실 수 없는 바닷물의 형태로 존재한다. 지구의 물 가운데 오직 2.5%만이 담수다. 이 담수도 3분의 2는 얼음이나 빙하의 형태로 존재해 인간이 사용하기 어렵고 나머지 3분의 1도 대부분 지하 암반층에 갇힌 대수층에 있어 이용이 어렵다. 결국 전체 담수의 0.003%만 지표면에 존재하며 이 적은 담수에 인간 문명의 명운이 걸려있다
6천 년 전 대규모 수리시설을 건설해 거대한 곡창지대를 개척했던 고대 수메르문명은 물 부족 현상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문명 자체가 서서히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기원전 1800년 경 제작된 메소포타미아의 한 석판에는 ‘검은 땅이 하얗게 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담수 부족으로 인한 토양의 염분화 때문에 곡물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했고 이게 결국 문명의 붕괴로 이어진 것이다.
현재 요르단에 위치한 바위 도시 페트라는 와디(건조지역의 간헐하천)농업과 대상무역에 의존하다가 363년 대규모 지진이 발생해 집수 시스템과 물 배분을 위한 수로가 파괴되면서 순식간에 몰락해 버렸다.
서기 100년경부터 근대까지 미국 애리조나·뉴멕시코·콜로라도·유타 접경에서 발달했던 아나사지 문명은 협곡과 벼랑을 따라 오늘날의 고층 아파트식 가옥이 밀집할 만큼 번성을 누렸으나 인구 과밀과 이들을 위한 담수 자원이 고갈되면서 역시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물 때문에 사라진 문명이 한 둘이 아니다. 모든 문명의 융성과 쇠락의 이면엔 물이 개입돼 있다.
지구온난화로 북극의 찬 공기가 온대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늦봄과 초여름 한반도까지 북상하던 장마전선이 일본 남부나 중국 중남부 부근에 머물다가 한반도엔 오지도 못하고 소멸하는 현상이 몇 년째 계속되고 있다. 이로 인해 며칠 전에도 중국 난징 지역에는 홍수를 일으킬 정도로 큰 비가 내렸지만 한반도는 금년 봄 비다운 비가 한 번도 내리지 않았다. 장마는 이제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되고 있다.
북극발 찬 공기의 위세는 태평양에서 발원한 태풍의 진로마저 바꾸고 있다. 동해와 서해 등 한반도 주변의 바람골을 따라 매년 여름 국토 여기저기에 비와 바람을 몰고 오던 태풍은 몇 년째 그 횟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장마와 태풍을 잊은 저수지는 말라가고 강은 바닥을 드러낸다. 정말 걱정되는 점은 이런 현상이 일회성이 아니라 매년 반복되는 패턴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녹조가 발생한 낙동강.중앙포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여 년 간 대한민국은 변변한 댐이나 저수지 하나 건설하지 않았다. 현재 강수량이 비교적 양호한 남부 지방의 논을 제외하고 수도권의 모내기를 마친 논에 가두어 둔 물은 모두 바짝 마른 하천을 쥐어짜거나 양수기를 동원해 퍼낸 지하수다. 말이 물이지 사실은 전부 농부들의 돈과 땀이 논에 고여 있는 것이다. 이나마도 앞으로 지금 같은 불볕더위가 일주일만 계속된다면 모두 증발해 허공으로 사라질 위기다.
▲양수기를 동원해 겨우 모내기를 마친 강화도 교동도의 논.중앙포토
인간은 결국 물이다. IT 산업이 아무리 발전하고 인공지능으로 무장한 사회가 펼쳐진다고 해도 한 잔의 물이 절실한 환경이라면 모두 허공에 지은 모래성일 뿐이다. 강은 흘러야 한다지만 그것도 흐를 물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다. 국토가 말라가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정치 논리의 위세에 눌려 우리 사회에서 강물과 관련된 이야기는 여전히 금기어 수준이다.
좌든 우든 물은 마셔야 한다. 물이 없으면 대한민국도 없다. 머리를 맞대고 물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하지만 누구도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기상청은 이번 주도 비를 보기 어렵다고 예보했다. 이래저래 뜨거워지는 시절이다.
06.26 굽은 나무가 굽은 나무를 부른다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이 궁궐의 마구간을 관리하는 관리에게 무엇이 가장 어려운 일인지 물었다. 관리는 마구간 우리를 짓는 일이 가장 힘든 일이라고 대답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곡목구곡목(曲木求曲木) 때문입니다”
우리를 만들 때 처음에 굽은 나무를 쓰면 다음에 이어서 붙일 나무도 굽은 나무를 쓸 수밖에 없게 되고 그러다보면 의도하지 않게 우리 전체가 구부러진다는 것이다.
오늘부터 고위공직자 6명의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줄줄이 이어지는 수퍼위크가 시작된다. 26일 한승희 국세청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시작으로 28일 송영무 국방부·김영록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후보자, 29일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조명균 통일부 장관 후보자, 30일 조대엽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열린다. 자유한국당·국민의당·바른정당 등 야 3당은 이들 중 김상곤·송영무·조대엽 후보자 3인을 반드시 낙마시키겠다고 벼르고 있다.
▲야 3당이 벼르고 있는 후보자 3인.왼쪽부터 김상곤 송영무 조대엽 후보자.연합뉴스
▲지난달 26일 청와대에서 인사논란에 대해 해명하는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중앙포토
김상곤 후보자는 석·박사 논문 표절 의혹, 교수 시절 주한미군 철수 주장, 한·미 동맹 폐기 주장과 사회주의 경도 강연 경력, 교육감시절 비서실장 뇌물수수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
송영무 후보자는 군 예편 후 법무법인 율촌 등으로부터 10억원이 넘는 자문료를 받았고, 방산업체 LIG넥스윈과의 유착 의혹이 있으며, 4번의 위장전입 전력, 해군참모총장 시절 해군비리 수사 방해 의혹 등이 논란이다
조대엽 후보자는 음주운전 경력 및 거짓 해명, 대학총장 허가없이 사외이사로 등재한 경력과 사외이사로 등재한 사업장의 임금체불, 교수 시절 학생들에게 한 부적절한 언행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
야 3당은 이들 세 후보자를 ‘부적격 신3종 세트’ ‘국민기만 3종 세트’라고 부르며 자진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어느 정부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문재인 정부 역시 국정인사의 첫 인사는 곧은 인사를 임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첫번째 인사가 잘못되면 다음 인사도 잘못되고 이는 결국 정권 실패와 국가적 불행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통능력이 부족하고 인재관리에 실패한 지도자가 국정을 파탄내는 과정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80%가 넘는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초반 국정지지도는 이런 전임자의 실패가 기저효과로 작동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곧은 나무, 구부러진 나무는 누가 봐도 한 눈에 알 터이니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사람이다. 같은 인물을 두고도 진영에 따라, 이해관계에 따라 인품의 곡직(曲直)이 달라진다. 누구를 편들거나 비난하고 싶지 않다. 평생 이슬만 먹고 산 인재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형편이 변했다고 말이 달라지는 상황만은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과거 남을 비난했던 그 기준을 그대로 자신에게 적용하면 된다.
지난 달 26일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빵 한 조각, 닭 한 마리에 얽힌 사연이 다 다르듯 관련 사실에 대한 내용 또한 들여다보면 성격이 아주 다르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5대 인사 배제 원칙’ 위배 논란이 확산되자 내놓은 해명이다. 해명 이후 한 달이 지났지만 후보자가 지명될 때 마다 해명이 필요한 상황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사연있는 빵, 곡절있는 닭 한마리 이야기의 변종들이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
거울에 비치지 말고 사람에 비치라고 했다. 말이 쌓여 사람이 된다. 어떤 사람이 곧은지 굽었는지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이 과거에 했던 말에 비쳐보면 된다. 그것 말고는 모두 구차하고, 믿을 것도 못된다.
07.21 더러운 인간, 더러운 종교, 더러운 전쟁
#1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대원인 21살 알리 사크르는 2016년 초 IS의 주력이 주둔하던 시리아 락카의 우체국 건물 앞에서 수백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어머니 45살 레나 알 카셈을 총으로 쏴 죽였다. 사크르는 “달아나자”고 설득하던 어머니를 상부에 보고했고, 보고를 받은 IS 지도부는 어머니를 공개 사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아들은 지도부의 명령대로 공개된 자리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처형했다
▲2016년 11월7일 모술 인근 타흐리르에 연합군의 공습이 가해지자 주민들이 혼비백산하고 있다.중앙포토
#2 2016년 12월 16일 시리아 일간지 알와탄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미단 구역의 경찰서를 찾아와 “화장실이 어디 있냐” 고 묻던 7살 여자 어린아이의 몸이 갑자기 터지는 자살폭탄테러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이 사건은 테러 자체도 뉴스였지만, 7살 어린 아이가 테러범이라는 점에서 전 세계에 충격을 던졌다.
▲2017년3월4일 모술 민간인 거주지역에서 이라크 특수부대와 IS 의 교전이 벌어지자 아이를 안은 아버지가 울부짖으며 도망가고 있다.IS는 마지막까지 민간인들을 인질삼아 이라크군에 저항했다.중앙포토
사건 직후 시리아 극단 조직의 소셜미디어엔 범행에 동원된 아이와 아이의 부모가 등장하는 영상이 공개됐다. 7살과 8살 두 아이와, 아이들의 부모가 작별하는 장면을 찍던 촬영자가 왜 어린 딸을 지하드에 동원하느냐고 묻자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대답했다.
“모든 무슬림은 지하드에 동참하게 돼있다. 어린 나이지만 지하드에 뛰어들 수 있다”
두 소녀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신은 위대하다” 고 외쳤다.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두 소녀를 양팔에 안고 “천국에 가니까 무서워하지 않을 거지? 그렇지?”라고 대답을 다그치자 아이는 간단하게 “네”라고 대답했다.
영상에서 들리는 해설은 7살 소녀가 폭탄 허리띠를 차고 경찰서로 들어갔고, 부모가 원격으로 폭탄을 터트렸다고 설명했다.
(테러 감시단체 테러모니터는 같은 달 26일 이 동영상에서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로 등장한 남성이 반군 조직의 손에 살해됐고, 시신 사진이 인터넷에 공개됐다고 전했다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이고,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인 까닭은 어머니, 아버지라는 호칭이 결코 이런 부류의 인간들을 위해 만들어진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2017년7월11일 모술 IS 진지에서 연합군의 공습으로 인한 포연이 솟구치고 있다.이 공격 직후 이라크의 하이데르 알-아바디 총리는 모술에서 IS를 완전히 몰아냈다고 선언했다.중앙포토
#3 IS와 전투를 벌이던 이라크군이 2016년 11월13일 이라크의 고대도시 님루드를 탈환했다. 님루드는 티그리스 강변 고대 아시리아 왕국의 도시다. 아시리아 왕국은 전성기인 기원전 7세기 현재의 중동 지역 대부분은 물론 서아시아 내륙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던 강력한 국가였고 님루드는 이 왕국의 주요 거점이었다.
2014년 6월 IS가 점령하기 전까지 님루드엔 동상과 비석, 왕의 무덤 등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보여주는 유적이 산재해 있었다. IS는 2년이 넘는 점령기간 동안 고대 인류문명을 증거하는 유적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 망치와 드릴, 군용 자동차를 동원해 고대 인류가 남긴 유적을 파괴하는 동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해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유적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이슬람 교리에 위배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님루드 유적은 5,000여 년 전부터 만들어진 것이고, 이슬람교는 이보다 4,400여 년 후인 서기 610 년이 되서야 창시된 종교다
▲2016년 11월 16일 이라크군이 님루드를 탈환한 뒤 공개된 파괴된 메소포타미아 유적.중앙포토
야만은 패주하고 문명은 폐허가 되었다. 훼손된 문명의 흔적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만회할 길이 없다. 님루드 메소포타미아 유적의 파괴 사진은 오염된 종교가 인간 문명에 어떤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이다.
▲IS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 공습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돌고 있지만 확인되지 않고 있는 상태다.중앙포토
#4 2017년 7월 외신은 IS가 주요 영토 기반인 이라크 모술을 잃었다고 타전했다. 이제 IS에게 남은 핵심 근거지는 자칭 IS의 수도인 시리아 락카뿐이다. 락카는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한 야만의 도시다.
▲2017년7월11일 이슬람 사원의 첨탑만 제외하고 모든 것이 파괸된 모술로 돌아가고 있는 주민들.중앙포토
▲2017년7월3일.모술 함락 이후 시리아 락카는 이제 IS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도시지만 그 끝도 멀지 않아 보인다.IS와 교전중인 쿠르드 전사들이 락카 시내를 질주하고 있다.중앙포토
모술을 잃은 IS는 영토 없는 국가로 추락했다. 국제사회 연합군은 최근 락카에서도 IS 격퇴전을 본격화하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락카가 함락돼도 IS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뱀의 아가리에 자신의 영혼을 밀어 넣은 IS 추종 무리들은 아프가니스탄과 러시아, 나이지리아, 이집트 등 지금까지 비교적 노출이 덜된 지역과 인터넷 그리고 증오와 어둠속에서 자라고 있는 외로운 늑대들에게 스며들어 테러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릴 게 분명하다.
신념, 가치관, 국가, 종교 등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인간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이러한 인간 속성이 문명을 일으킨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일부 맞는 주장이다. 다만, 인간은 그렇게 간단하게 일방적인 방향에서 설명이 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인간 사회의 지독하게 어두운 측면을 감안하면 인간의 어리석음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오해로부터 비롯되고 그 오해에 기초한 믿음이 인류 문명을 파괴하기도 한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믿음의 극단에서 부모를 부정하고, 자식을 부정하며, 자기 정체성의 고향인 문명을 부정하는 자기부정의 모순이 잉태된다.
무엇을 믿든 자유다. 그렇더라도 인간이라는 존재 양식을 유지하는 한 다음 한 가지는 군말 없이 동의해야 한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생명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목적을 위해 희생되도록 예정된 생명은 없다. 그런 시도나 회유는 생명에 대한 모독을 넘어 자기 자신, 나아가 인류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너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태어난 수단이다’라는 주장이나 맹신을 허용하면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며, 나아가 문명의 뿌리를 짓밟는 야만이 정당화되는 빌미를 제공한다.
종교나 신념의 안경을 끼고 죽음을 바라보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의 안경을 끼고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죽음은 물론이고 생명에 대한 태도가 인간적인 형태로 회귀하게 된다. 삶과 죽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생명 아닌 다른 가치를 위해 무고한 생명을 죽여도 된다고 세뇌하는 종교는 두말할 것도 없이 더러운 종교다.
세뇌에 넘어가 무고한 생명을 살해하는 인간은 더러운 인간이다.
더러운 인간, 더러운 종교가 일으키는 전쟁은 더러운 전쟁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신념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이런 야만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이런 야만이 판을 치는가.
08.08 이 불평등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이유
미국 샌프란시스코 부근 실리콘밸리 일대에는 구글, 인텔, 애플, 삼성전자 미국지사, 테슬라, 페이스 북, 넷플릭스 등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쟁쟁한 IT 기업이 밀집해 있다. 수많은 IT 기업이 실리콘밸리로 몰려들면서 오피스와 주거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자 자기 집 없이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길거리로 내몰렸다. 마치 가로수길이나 경리단길이 젠트리피케이션된 후 원래 장사하던 분들이 단숨에 2~3배 인상된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동네를 떠나야 했던 것처럼.
다행히 실리콘밸리에 기업들이 밀집하면서 새로운 일자리가 많이 늘어났고 주정부 차원에서 지역 경제가 활성화됐다. 그러나 일자리가 아무리 늘고, 지역 경제가 아무리 흥청거려도, 살던 곳에서 쫓겨난 평범한 주민들에게는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첨단 IT 테크놀로지에 대부분 문외한인 기존 주민들이 실리콘밸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청소나 패스트 푸드 점의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IT 업체 직원들의 아이를 돌봐주는 일 등이 다였다.
▲최저 임금 1만원은 언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중앙포토
양극화와 주거 및 일자리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가끔 구글 통근버스 정류장에서 시위를 벌인다. 이들이 나눠준 유인물중 하나에는 다음과 같은 격정적인 내용이 실려 있다.
‘구글 버스 밖의 저들은 그동안 당신들을 위해 커피를 나르고, 아이를 돌봐주고, 음식을 만들어왔지만, 이제 이 동네에서 쫓겨나게 생겼다. 당신들이 무료 뷔페 직원식당에서 배불리 먹는 동안, 저들은 쓸모없어진 텅 빈 지갑만 바라보는 신세가 됐다.당신들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들이 아니었다면 집세가 저렇게 치솟을 일도, 우리가 쫓겨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당신들이 창조한 현실이다. 아마 당신들은 당신들이 창조한 기술 덕분에 온 인류가 더 나은 삶을 살게 됐다고 믿고 있겠지만, 수혜자는 오로지 부유층과 권력자와 미 국가안보국(NSA) 뿐이다.’
오늘날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어가고, 가난한 사람은 갈수록 가난해지며, 중산층은 무너져 빈곤 계층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중산층의 소득은 정체하거나 줄어들고, 중산층과 부유층의 격차는 날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도대체 이런 불평등은 왜 발생하는 것이고 이 불평등은 우리 사회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불안하기만 하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시장이 만능하다고 믿고 있지만, 현실은그렇지 않다. 시장이 안정을 이룬 상태에서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방치해 두면 심각한 불평등과 불공정을 초래된다. 이제 사람들은 경제 시스템과 정치 시스템이 공정하게 작동되지 않는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부유층의 소득을 보장하면 분수효과로 인해 중산층과 빈곤층으로 부가 이전된다는 주장은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투자와 일자리의 연관성도 믿을 만 한 게 못된 지 오래다.
▲편의점.최저임금 논란이 을과 을의 싸움으로 변질된 상징적 장소다.중앙포토
지난 대선의 화두는 ‘격차’였다. 대선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빈부 격차는 이제 용납할 수 없는 한계치에 접근하고 있다.민주주의와 시장 자본주의를 선택한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격차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지만 그 불가피한 측면을 받아들인다고해도 구성원 다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한계치가 존재한다.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기여한 가치에 따라 분배를 받는 게 원칙’이다. 여기에 불공정한 정치·경제 시스템에 끼어들어 ‘능력에 따라 생산하지만 기여한 가치가 평가절하되고 이 결과 분배가 왜곡되는 편법’이 동원되는 사회는 더 이상 존속 가능한 사회가 아니다. 일한 만큼 보상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화가 잔뜩 나있는 상태고 이 상태가 계속되면 억눌린 에너지가 어떤 식으로든 분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최저임금제 문제는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확인해 볼 수 좋은 기회다. 최저임금이 인상돼야 한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합의를 봤지만 인상의 속도엔 아직 이견이 있다. 파이를 키우면 내 몫이 자동적으로 커진다는 주장은 잠시 접었으면 좋겠다. 그 주장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주장만 믿고 기다리기엔 지금 당장 견뎌야하는 현실이 녹녹치 않다.
▲최저 임금이 가결된 직후 최저임금위원회 위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중앙포토
우선 한 쪽으로 지나치게 몰린 파이를 줄이는 게 급선무다. 최저임금 문제가 ‘을과 을’의 싸움으로 변질된 건 정책담당자의 무능이 한몫했다. 가진 것을 내놓는 행위는 본능에 반하는 행위다. 한쪽의 포기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과제지만 그렇기 때문에 새정부의 역할은 보다 정교해야 한다. 이익을 독점하고 있지만 이 문제에 관한 한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대기업을 당사자로 끌어들여 어떤 식으로든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건 정치시스템이 할 일이다. 사회적 동의를 이끌어 내는 것도 정치시스템의 과제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 이 사회가 더불어사는 사회가 맞고 그런 사회가 지속될 수 있도록 확인하는 것도 정치시스템의 과업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어깨가 무겁다.
09.22 당신 기자 맞아? 명함 한 장 줘봐!
▲경찰관이 청와대앞 분수대를 둘러싼 시위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모든 국민은 집회의 자유를 갖는다(헌법 제21조 1항). 그러나일반적인 자유권과 같이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법률로서 제한할 수 있으며(헌법 제37조 2항),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 있다. 이 법률은 집회 및 시위의 방해 금지, 금지되는 집회 및 시위, 옥외집회 및 시위의 신고 등을 규정하고 있다.헌법은 원칙적으로 집회에 대한 허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헌법이 원칙적으로 집회에 대한 허가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2003년 10월 30일 판결을 통해 '집회의 자유가 개인의 자기결정과 인격발현에 기여하는 기본권임과 동시에 표현의 자유와 더불어 민주적 공동체가 기능하기 위한 근본요소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판결했다. 정리하자면 집회 및 시위의 자유는 기본권이기 때문에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그 행사를 제한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무 이의가 없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으로 시작되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라는 선언을 통해 자유와 권리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무제한의 자유와 권리는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집회의 자유를 인간의 기본권으로 본 헌법재판소의 판결도 ‘헌법질서 내에서’라는 전제를 충족해야만 가능한 이야기다.
오늘 우리 사회는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갖는다” 는 헌법 제 21조 1항만 금과옥조로 여길 뿐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헌법전문)’나 타인의 권리행사로 인해 침해받지 않을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헌법 제34조 1항)’,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헌법 제 35조 1항)’,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서 제한할 수 있다(헌법 제37조 2항)’는 또 다른 조항에는 눈 감고 있다. 이 기본권은 자신과 타인의 권리 유지는 물론 우리 사회가 공동체로서 존속하게 하는 기본적 전제다. 사회 일부의 불만세력이 끊임없이 이 기본을 흔들어대고 정치적 이유 때문에, 진영 논리에 의해, 방어기제가 약화되면서 집회·시위에 대한 피로감이 폭발 직전까지 누적되고 마침내 공동체 의식이 균열하고 있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1인 시위. 이 시위자는 광화문 미국 대사관 앞에서도 시위를 한다.
▲'평통사' 회원의 1인 시위
▲수감중인 이석기를 석방하라는 1인 시위.
▲서대문 재개발 현장에서 수년째 계속되는 점거 시위.
헌법이 보장한 권리에 따라 시위를 하면서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에는 정부는 헌법재판소에 그 해산을 제소할 수 있고, 정당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의해해산된다’ 는 헌법 제8조 4항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시위가 백주대낮에, 그것도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기관인 청와대 앞에서 버젓이 벌어져도 지켜만 봐야하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대법원 확정 판결까지 나 수감중인 이석기의 즉각 석방을 요구할 정도로 이들 시위 세력의 의도는 집요하고 대담하다. 필요하면 헌법을 들먹이다가 자신의 이해와 어긋나는 순간 헌법을 부정하는 행태는 이제 익숙한 모습이 되었다.
노후 지역이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는 과정에서 소외됐다고 생각하는 세입자들과 이들과 연합한 철거민 단체의 점거 시위가 몇 년째 계속되고 있는 서울 서대문의 한 상가 주인에게 물었다.
-시위 때문에 손해가 클 것 같은데요?
“말도 못 할 지경입니다”
-경찰에 신고는 해보셨나요?
“했죠, 방법이 없다고 합디다.”
-경찰이 비겁하군요.
“아니요. 언론과 정치가 비겁한 겁니다. 그동안 언론과 정치가 특히, 언론이 얼마나 경찰의 힘을 빼놨습니까. 나는 무기력한 경찰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러나 신문에 내지도 않을 거면서 왜 묻습니까?
당신 기자 맞아? 명함이나 한 장 줘봐요!”
권력의 심장부 앞에서 권력을 조롱하는 시위가 벌어질 만큼 공권력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공권력도 시위에 무력한 판에 일반 시민의 권리는 그야말로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는 상황이 된지 오래다. 권력의 보호에서 소외된 국민들이 세금은 꼬박꼬박 내는 게 신기할 정도다. 오늘 이 상황은 단기간에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의 부작용에다가, 그 상인의 말대로 언론과 정치에도 일정 부분 책임을 물을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유가 어떻더라도 이제 집회와 시위에 대한 확고한 기준과 엄정한 적용이 예외 없이 관철되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죄 없는 일반 대중을 괴롭혀 요구 사항을 관철하려는 시도나, 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거부하는 시위는 마땅히 제지되어야 한다. 그게 기본이고, 그 기본이 지켜져야 나라가 유지된다.◎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