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1/ 1 - 5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사진 : 김용호 사진가
2021. 월간조선 10월 호
① 꼬부랑 할머니는 한국인과 인류 이야기의 原型… 창조의 힘이자 생명자본
⊙ 이어령은 한국인 속에서 인류의 씨앗을 찾고 한국인의 原型 길어 올려
⊙ ‘한국인 이야기’를 피시스(자연계)와 노모스(법·제도), 세미오시스(상징계)라는 ‘三太極’의 방법론으로 풀어
⊙ 낳고 産育하는 ‘꼬부랑 할머니’는 谷神不死이자 玄牝… “생명의 원천, 인류 역사의 근원”
⊙ 한국인 문화 유전자 탐사한 《한국인 이야기》 12권 완간 계획… 지금까지 1권 출간
⊙ “BTS(방탄소년단)의 몸짓도 정형화되지 않은 막춤의 전통과 관련 있지 않을까”
⊙ “내 머리와 마음속 ‘전복’이 있는지 몰라도 이미 그려놓은 글의 ‘보물지도’ 따라 모험 길에 오르세요”
李御寧
1933년생. 서울대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
《초사(楚辭)》 굴원편에 나오는 〈어부사〉의 노랫말이다. 이어령(李御寧) 선생(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은 ‘창랑의 물’로 비유되는 풍파의 세월을 돌아보며 요즘 부쩍 ‘물이 맑았던 시절이 언제였나?’ 더듬어 본다.
늘 그렇듯 세상은 제 살 궁리에 제 원한에 충실했지만, 선생은 상앗대를 쥐고 갓끈을 죄며 정신적 지층(地層) 탐사를 떠났었다. 세월이 흘러 갓이 다 해어졌다. 때로 물이 탁해도 갓끈을 씻었고 물이 맑아도 발을 씻었다.
생의 어두워져 가는 저녁, 선생은 상앗대를 다잡고 마음에 두었던 ‘보물지도’ 하나를 만들고 싶다고 다짐한다.
불과 한 달 전이었다. 선생에게 전화가 왔다. 취재차 지인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혹시나 외로웠거나 말 상대가 없어서일까’
“김 기자,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좀 만나줄 수 없어?”
서울 주변 도심인데도 흙 실은 트럭이 쉴 새 없이 달리는 도로 옆길에서 전화를 받았다. 먼지 사이로 발걸음을 멈췄다. 선생은 늘 그랬다. 불쑥 전화를 걸어와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여서 전화로 말하기 그러니까 바빠도 날 좀 봐” 하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영인문학관이 있는 서울 평창동으로 가려면 높은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차나 택시를 타기도 했고 걸어가기도 했다.
왜 만나자는지 알 수 없으나 혹시나 외로웠거나 말 상대가 없어서일까? 그렇지 않으면 세상 돌아가는 꼴에 체증이 나 속말을 하고 싶어서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싸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박수 소리 같기도 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올려다본 낮은 건물 창문으로 얼핏 하늘이 보였다. 구름이 변덕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 주는 비 예보가 많았는데 날이 개었다. 말을 걸어오지 않았는데도 건물 앞 녹슨 청동 조형물 곁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를 질러야 해서 늘 목이 쉬어”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 한쪽에 새겨진 이어령 선생의 시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들었다/ 대지를 향해서 나뭇잎은 떨어진다/ 어둡고 거친 흙 속으로 향하는 나뭇잎들을 본다// 거부하지 말라/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대지는 더 무거워진다/ 피가 뜨거워질 때 잘 있거라 잘가라/ 인사말을 잘하고 떠나야 한다’.
문득 선생과의 인연이 떠올랐다. 생과 사, 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선생은 기자가 듣지 못했던 전혀 다른 모국어(母國語)로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는 세상에 드문 기호학자였다. 언어라는 상징체계 속에 내재된 문화적 기호를 찾아 그만의 독특한 해석으로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한국인 속에서 인류의 씨앗을 찾고, 그 씨앗 속에서 한국인의 원형(原型)을 길어 올렸다. 그럴 때면 신이 난 듯 목소리가 고음이었다.
그러나 언젠가 선생의 고백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목에서 소리가 안 나와 소리를 질러. 그러면 남들은 열정이 있다고 하는데, 아냐. 보통사람처럼 얘기하고 싶지만, 소리가 안 나와. 소리를 질러야 해서 늘 목이 쉬어.”
그럴 때면 선생은 “유리벽 사이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듯한, 절대로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느껴져 답답하다”고 고백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론 선생의 목소리가 커지면 기자는 불안함을 느꼈다.
지난 8월 25일 서울 평창동으로 찾아갔다. 누웠다가 일어난 듯 머리가 흩어져 있었다. 선생은 웃으면 그렇게나 인자해 보이지만 웃지 않으면 날카로워 보였다.
“어디서도 하기 싫은 말인데, 돈 많은 사람 있잖아…. 돈 아까워 어떻게 죽나, 하는 사람들도 죽고 나면 그 돈 누군가가 써. 조바심 안 내도 안 없어져.
권력이 있는 사람, 죽으면 어떻게 돼? 황제가 죽으면 다른 황제가 그 자리를 메워. 그 권력, 안 없어져.
마찬가지로 은행에 넣어둔 돈도 안 없어져. 자기가 안 쓰면 누군가가 대신 써.”
여기서 잠깐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예외가 있어. 머릿속에 있고 마음에 있는 건 다 사라져.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고.
내가 가끔 ‘전복’ 이야기를 하잖아? 해녀들이 전복을 숨겨놓고 ‘내일 좋은 사람이 오면 따다 줘야지’ 해. 전복은 점점 크는데, 이제는 전복에게 갈 수 있는 힘이 없어. 늙어서. 마지막에는 보물지도밖에 못 그려주지. 내가 요즘 하는 이야기들이 바로 보물지도를 그리는 작업이여.
김 기자, 나한테 시간이 없어요. 집에 내 컴퓨터가 일곱 대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이제 아무 소용이 없어. 마지막 남은 게 이거야.”
하더니 몽당연필을 꺼내 들었다.
피시스·노모스·세미오시스, 세 가지 틀

▲이어령 선생이 백지 위에 연필을 쥐고 있다.
몽당연필로 종이 위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소리를 안 지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일곱 대의 컴퓨터는) 이제 나한테 아무 소용이 없어. 마지막 남는 게 봐, 이거야. 몽당연필이거든. 이 연필로 어렸을 때부터 글을 썼잖아. 연필은 말이야 언제든 깎으면 되잖아.”
그러더니 쓱쓱 종이 위에 삼각형과 원을 그렸다. 사각사각 연필심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어. 피시스(Physis)와 노모스(Nomos), 세미오시스(Semiosis)인데 ‘한국인 이야기’를 이 도구로 정리하고 싶은 거야.”
선생이 몽당연필을 쥐고 웅크린 모습을 보니 마치 카드에 열중한 사람 같아 보였다. 끝까지 움켜쥔 패(牌)가 선생의 기호학이란 생각이 들었다.
연필로 삼각형의 한쪽 끝을 세미오시스라고 적더니 “이건 상징·기호계고…”, 두 번째 꼭짓점에 피시스라고 적고 동그라미를 치더니 “이건 자연계”, 다시 세 번째 꼭짓점을 노모스라고 적고 “법과 제도”라고 했다.
“삼각형으로 표현하지만, 우선순위가 없어. 순수한 상징계도, 순수한 생물계도 없으니 원으로 동그랗게 그려도 돼.
한국인 이야기… 한국인이 뭐야? 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난 조선인이었어. 좀 더 옛날에 태어났다면 신라인, 고구려인이었을 테지. 조선, 고려, 백제는 바로 노모스야. 제도와 법의 영역이지.
그런데 피시스로 가봐. 거기 한국인이 어딨어? 과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36억 년 전 수프 같은 열탕(熱湯)의 바다가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최초의 단세포 생명체가 하나 생겼대. 그게 생겨나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겠지. 이것이 나의 생물학적(피시스) 아이덴티티야.”
“한국 신화로 보면 단군의 자손, 곰의 후손이거든”
▲태극이 국가를 상징할 때 ‘노모스(법·제도)’로서 태극기가 된다. 지난 2월 28일 102주년 3·1절을 하루 앞두고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시민들이 대형 태극기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기침을 한 뒤 목을 가다듬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과학이 사실이라면 피시스의 나는 한국인이 아니라 그 세포야. 생물학적인 나, 생명이 이 지구에서 최초로 탄생한 그 순간이 바로 나야. 나의 조상이지.
그런데 세미오시스로 가봐. 거기는 신화의 세계야. 기독교 상징으로 보면 아담이지. 중국 신화에서 말하자면 두 마리 뱀이 한 몸으로 꼬여 있는 여와씨(女媧氏)의 후손들이지. 물론 한국 신화로 보면 단군(檀君)의 자손, 곰의 후손이거든.”
몽당연필을 쥐고 무언가를 열심히 쓰는 모습이 마치 ‘생각하는 사람(The Thinker)’처럼 보였다.
“태극(太極)에 비유해볼까? 자연계에는 음지와 양지, 다시 말해 빛과 어둠이 있어. 그것을 음양(陰陽)이라 하잖아. 그게 상징계로 오면 태극 무늬가 되지. 음양이 태극 무늬의 아이콘이 되는 거여. 그런데 그것을 구한말(舊韓末) 우리가 국기의 법과 제도로 태극 문양을 사용하는 순간, 노모스의 태극기가 되는 거지.
만약 한국이라는 나라가 없어지고 새 나라가 건국되면 태극기 대신 다른 아이콘이 국기로 제정되겠지.
그러나 기호(상징계)로서의 태극 문양은 없어지지 않아. 중국, 일본 그리고 몽골 깃발에도 태극 마크의 상징적 도형이 남아 있으니까.
이렇게 노모스는 변해도 기호계(말·문자)는 쉽게 변하지 않아. 그런데 태극 도형을 모르는 외국인들에게도 음지와 양지라는 빛과 어둠은 똑같이 작용해. 피시스는 인간이 사라져도, 제도가 없어져도 그대로 남아 있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렇게 자연계상징계-법(제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 어느 한쪽만 인식하며 그것이 우리 현실이라 생각한단 말이지.”
닐스 보어와 太極 문양
▲서울 종묘 정전 남문 문설주 아래에 새겨져 있는 삼태극 문양.
선생의 이야기가 태극→태극기→태극 문양으로 사유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덩달아 말도 빨라졌다. 중간에 끼어들 말을 못 찾아 옴짝달싹 못 했다.
“태극 문양에서 양자물리학의 출구를 발견한 사람이 1922년 노벨상을 탄 닐스 보어(Niels Bohr·1885~1962)야. 그는 양자론의 해석을 거의 완성하고도 입증할 방법이 없었어. 1937년 방문한 중국에서 태극 도형을 보고서 ‘바로 저거다!’ 한 거지. 아르키메데스가 외쳤다는 ‘유레카!’처럼.
동그란 원을 직선으로 잘라봐. 원이 반으로 분리되지만 태극은 반원 두 개가 얽혀 있잖아. 그걸 보고서 입자이며 동시에 파장인 세계, 양자의 그 미스터리한 세계를 태극 무늬에서 확인한 거지.”
보어는 과학 분야의 공적이 인정되어 덴마크 귀족원에 입회하게 되었다. 예복에 문장을 달아야 하는데 평민이었던 그에게 가문의 문장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계속된 선생의 말이다.
“궁리 끝에 우리 태극 전사들이 국제경기 나갈 때 달고 다니는 바로 그런 마크를 만들어 붙여. 그러고 근엄하게 라틴어로 ‘콘트라리아 순트 콤프리멘타(Contraria Sunt Complementa)’, 즉 ‘대립은 보완이다’는 문장을 삽입했지.
아인슈타인도 미처 몰랐던 양자의 새로운 이론을 바로 그 태극 문양을 보고 완성했으니 놀랍지 않아?”
기자는 선생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 인류문명사라는 서사적(敍事的) 분위기에 젖어 들었다.
“이 세 가지 틀로 생물학적 자연인으로서 한국인(피시스), 그리고 상징계의 기호적 존재로서 한국인(세미오시스), 그리고 헌법과 법・제도로서 한국인(노모스) 등 세 차원에서 작년에 펴낸 책이 《한국인 이야기: 너 어디에서 왔니》야.
저마다 학자들이 ‘한국인론(論)’을 써왔지만 적어도 이 세 영역을 아우르는 복합적 시각에서 쓴 한국인 이야기는 처음이라 자부해요. 우리는 물고기이기도 하고, 최초로 등뼈를 세우고 일어선 척추동물(피시스)이기도 하지. 단군의 후손(세미오시스)이며 대한민국 국민(노모스)이야.
그런데 누구도, 언론 서평조차 이 방법론을 분석하거나 평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난파선에서 S.O.S를 김 기자에게 친 거야.”
《국화와 칼》과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선생이 지난해 2월 펴낸 《한국인 이야기: 너 어디에서 왔니》(탄생 편).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 비견되는 책이다.
선생은 작년 2월 《한국인 이야기: 너 어디에서 왔니》(탄생 편)를 펴냈다. 평생을 두고 연구한 ‘한국인 문화 유전자’를 해독한 책이다. 기자는 그 책을 읽고 입이 쩍 벌어졌다. ‘일본인론’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만 해도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만 바라본 책이다. 자연계·상징계 그리고 법·제도의 삼(三)태극적 방법론으로 쓴 글이 아니다.
몇 해 전 선생은 KBS1 TV 〈이어령의 백년서재〉 프로그램 등을 통해 시작한 ‘한국인 이야기’에 혼을 불어넣어 향후 12권의 책을 완성할 계획이었다. 착수하고 얼마 뒤 암 선고를 받고 말았다. 지금까지 겨우 1권을 출간하고 4권은 90%만 마무리한 상태다. 나머지는 손을 놓고 말았다.
“내가 완성하지 못한 걸 내 방법론을 최대한 이용해, 용인지 미꾸라지인지는 몰라도 그 점정(點睛) 역할을 맡아주시오.”
이 말을 하는 선생의 표정에 유배지에서 고단하고 외로운 날을 보냈던 추사(秋史 金正喜·1786~1856)의 얼굴이 오버랩됐다. 〈세한도〉 송백의 결기처럼….
꼬부랑 할머니와 생명자본, 바이오 필리아, 코라
선생은 자문자답하듯 “우리 이야기, ‘한국인 이야기’의 원형이 꼬부랑 할머니”라며 이렇게 말했다.
“영화 〈미나리〉를 봐봐. 할머니가 이민 간 이(異)문화 속에서 어린 손주를 살려내잖아. 할머니의 ‘파워’지. 〈미나리〉 할머니가 바로 우리 꼬부랑 할머니야.
어릴 때 할머니한테 들었던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 기억나?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고개를 넘다가 꼬부랑 강아지를 만나…. 끝도 없는 이야기 말이야.
그런데 김 기자, 이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가 실은 요즘 문화인류학자 사이에서 새로운 학설로 등장한 ‘그랜마더 하이포테시스(Grandmother hypothesis·할머니의 힘 가설)’와 통하는 것이었어. 꼬부랑 할머니는 한국인만이 아니라 인류 이야기의 원형이기도 한 거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선생은 이 대목부터 한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류만이 할머니가 있어요. 침팬지에게 할머니라는 존재가 있나요? 인간만이 폐경기가 되어도 존재하는 게 할머니지.
그래서 코끼리를 제외하면 인간만이 유일하게 할머니가 아이 낳고 손주 기르는 걸 도와주는 역할을 해. 엄마는 일상으로 빨리 돌아갈 수 있게 되어 연년생을 둘 수 있게 되었고 인구가 급속히 불어날 수 있었어. 모두 우리 할머니 덕이지. 침팬지는 애미(어미)가 4년간 애를 껴안고 살아야 하니까 생식 주기도 오래 걸려.
그게 바로 늘 내가 이야기하는 ‘생명자본’이고 바이오 필리아야. 젊어서 출산하고 늙으면 애를 받아 산육(産育)을 돕는 할머니의 자랑스러운 생명 파워! 이것이 인간을 오늘의 존재로 진화(進化)시킨 힘이라는 것이지.”
바이오 필리아(Biophilia)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다.
“늙고 병들고 생산도 못 하고 지팡이를 짚어야 겨우 다니는 그 꼬부랑 할머니도 우주의 창조를 낳는 공간, 그 거대한 상징을 가졌던 거야. 그걸 플라톤은 신비한 ‘코라(Chroa·우주의 자궁)’라 불렀어요.
코라는 여자의 자궁인데 텅 비어 있어. 아무 힘도 없어. 그런데 여기에 창조자(남성)의 힘이 접합하는 순간, 엄청난 창조의 힘을 발휘하는 거야.”
꼬부랑 할머니가 헤라클래스를 이기는 이유
▲찰스 재롯이 감독한 〈천일의 앤〉(1969) 포스터. 앤 왕비는 재위 기간이 1000일에 불과하지만, 영국 튜더 왕조의 명맥을 이었다.
선생은 등에 이고 있던 보따리를 차근차근 풀듯 말을 이었다. 그러나 목이 쉬어가고 있었다.
“헤라클래스의 몽둥이는 부수고 달리고 죽이는 것은 돼. 그런데 새끼를 못 놔, 이놈은.
죽으면 그만이여. 아무리 영웅적 힘을 가지고 있어도 꼬부랑 할머니가 넘는 고개를 넘을 수가 없거든.”
왜 헤라클래스는 할머니가 넘는 그 고개를 못 넘는 걸까.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자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선생이 말했다.
“왜냐고? 열두 고개는 생명의 고개잖아. 헤라클래스가 아기를 낳을 수 있어요? 죽일 수는 있어도 생명을 낳고 기를 수는 없어. 늙고 꼬부라진 할머니는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손자를 낳고, 손자가 또 손자를 낳는 생명의 열두 고개를 넘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 ‘열두 고개’라는 것은 열두 세대, 그러니까 무한 세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찰스 재롯이 감독한 〈천일의 앤(Anne of the Thousand Days)〉(1969)이란 영화가 있잖아. 봤어요? 16세기 영국 튜더 왕조의 국왕인 헨리 8세는 자신의 왕후인 앤 볼린과 결혼하지만 앤은 딸 하나만 낳고 쫓겨나게 됩니다.
불과 1000일밖에 왕비 노릇을 못 했지만 그래도 딸을 낳았어. 그게 엘리자베스 1세지. 권세는 ‘1000일의 앤’이었지만 생식력의 앤은 튜더 왕조의 명맥을 이어간 100년의 앤, 200년의 앤이 된 것이잖어?
그게 노자가 말한 곡신불사(谷神不死·세상이 모두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곳)이고 현빈(玄牝)이야. 여자의 암컷 자궁이라는 것이거든.”
이상하게도 이 대목에서 기자는 박하사탕을 먹은 듯한 통쾌함이 느껴졌다.
“김 기자, 시골 사는 꼬부랑 할머니 입안을 들여다봐요. 이는 다 빠졌는데 혀는 그대로야.
이가 혀를 무는 일은 있어도 혀가 이를 물었다는 얘기 들어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부드러운 혀가 강한 이를 이겨요. 노자가 말하는 ‘이유극강(以柔克剛)’과 닿아 있어요.”
꼬부랑 똥과 막문화, 막사발, 막말…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를 담은 동화집들. 한국인만이 아니라 인류 이야기의 원형이다.
선생이 말하는 인류 역사의 원형이, 그 시작이 꼬부랑 할머니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기가 즐겁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옛날 옛적 고리짝 옛말에’와 같은 인류 최초의 할머니인 꼬부랑 할머니는 21세기 이야기 속에서, 그것도 한국에서,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선생의 계속된 말이다.
“꼬부랑 할머니라는 것은 아담과 이브의 미토콘드리아 같은 최초의 할머니야. 그 시원(始原)의 형상이 남아 있는 게 우리의 상징계 속에서는, 딴 동요 다 잊어버려도, 지금도 아이들이 부르는 ‘꼬부랑길 이야기’란 거지.
그런데 그 할머니가 뭘 해? 꼬부랑 똥을 눠. 배설한다고…. 인공지능 로봇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러니까 인조인간을 만든 시조(始祖) 보캉송(Jacques de Vaucanson·1709~1782)이 아무리 사람처럼, 근육이나 호흡까지 닮은 ‘피리 부는 사람’을 만들어도 마지막 배설하는 오리를 만들다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 똥 누는 ‘로봇 오리’는 못 만들어. 생명이 뭐야? 먹고 싸는 거야. AI나 기계는 생명이 없어.
하지만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고 점점 자연에서 멀어지면서 똥이니 욕이니 나쁜 것처럼 여기잖아. 그래도 그 욕이 꼬부랑 할머니의 세계로 들어서면 욕쟁이 할머니가 되고, 금기(禁忌)가 현실공간에서 시민권 대접을 받잖아.
또 막문화로 막사발, 막걸리, 막말…. 정사(正射)에서 벗어난 ‘막이야기’가 우리 토박이 문화에서는 생명력과 독창성을 지니고 있어요. 어쩌면 세계가 열광하는 BTS(방탄소년단)의 몸짓도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막춤의 전통과 관련 있지 않을까.”
“꼬부랑 고개를 꼬부랑꼬부랑 넘는데…”
선생은 꼬부랑 할머니의 찬가인 ‘꼬부랑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노래는 끝이 없는 ‘네버 엔딩 스토리’였다.
“많은 버전이 있지만 우리의 상징계의 원형을 이루는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
꼬부랑 할머니와 꼬부랑 지팡이랑,
꼬부랑 강아지랑, 꼬부랑 토끼랑,
꼬부랑 다람쥐랑, 꼬부랑 황새랑,
꼬부랑 나무랑, 꼬부랑 여우랑,
꼬부랑 칡덩굴이랑 모두 모여
꼬부랑 노래를 꼬부랑꼬부랑 부르며,
꼬부랑 춤을 꼬부랑꼬부랑 추고,
꼬부랑 떡을 꼬부랑꼬부랑
아!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바로 이것이 자연계와 상징계와 법·제도의 사회가 오늘까지 이르게 한 핵심적인 키워드가 되는 것이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고 숨을 돌린 뒤 웃으며 말했다.
“아리고 쓰린 고개도 ‘랑’자로 결합하면 ‘아리랑’ ‘쓰리랑’이 되잖아.
꼬부랑 할머니 노래는 뭐든지 갖다 붙이면 되는 거야. ‘꼬부랑 참나무를 만나서, 꼬부랑 다람쥐를 만나서, 꼬부랑 돌멩이를 던졌더니 꼬부랑깽 꼬부랑깽….’ 얼마든지 만들고 쓸 수 있는 ‘코라’의 공간인 거지. 받아들여서 생성할 수 있는 생성론이야. 존재론이 아니고.”
그런데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는 왜 모든 것이 꼬부라져 있을까? 길도 고개도 나무도 심지어 똥도 꼬부라져 있다.
“‘이 세상 살아 있는 모든 게 곡선으로 돼 있다’고 임어당(林語堂·1895~1976)이 말했잖아?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1852~1926)는 ‘직선은 인간에, 곡선은 신(神)에 속해 있다’고 하지 않았겠어? 신이라는 말을 생명의 원천인 자연으로 바꿔놓으면 되는 거여.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보면 인공물은 모두 직선이지만 자연물은 모두가 꼬부라져 있지. 그리고 꼬부랑 고갯길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야. ‘자연=신’이 만든 길이지.”
선생은 20대에서 80대에 이르는 60년 동안 1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어마어마한 저작이다. 그러나 앞으로 간행될 《한국인 이야기》는 선생의 생애 중요한 마침표이자, 후학들에게 새로운 출발점이 되리라.
이제야 그날 오후 선생의 전화가 기자에게 하나의 소명이었음을 알았다. 심호흡을 해보았다. 평창동 선생의 집을 나설 때 마지막 당부의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아시겠어요? 자연·생물계(Physis)-상징·기호계(Semiosis)-법·제도계(Nomos)가 둥그런 원을 그리고 있는 나의 숨겨둔 비밀 병기 P·S·N을 가지고, 내가 쓰다 만 《한국인 이야기》를 완성하세요.”
얼어 죽은 ‘성냥팔이 소녀’의 미소
▲안데르센 동화 〈성냥팔이 소녀〉에 나오는 그림이다. 소녀는 북구의 추위와 냉혹한 도시에서 죽었지만 할머니의 환영을 보고 미소지을 수 있었다.
선생은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 속에서 꼬부랑 할머니를 찾았다.
“그 《한국인 이야기》 속에는 추운 겨울, 길바닥에서 얼어 죽은 ‘성냥팔이 소녀’가 따뜻하고 평화로운 가족의 환상으로 보았던 서양의 꼬부랑 할머니도 존재하지요.
오래전에 읽었던 〈성냥팔이 소녀〉 기억나나요? 팔리지 않는 성냥을 벽에 긋고 그 빛으로 환상과 따뜻한 사랑을 느꼈던 소녀는 이튿날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어요. 그런데 얼어 죽은 소녀 입술에 미소가 떠올라 있었어요.
자연계(피시스) 속에서는 얼어 죽은 성냥팔이 소녀였지만, (성냥은 당시 산업주의의 첨단기술의 상징이었지요.) 몸이 식어가던 소녀가 마지막에 본 것은 뭣이었나요?
어머니도, 더더구나 폭력적인 아버지도 아니었지. 할머니의 얼굴과 그 품이었어요. 자연계 속에서 소녀는 분명 동사했지만, 할머니의 환상·상징계 이야기 속에서는 행복한 미소가 되었어요. 꼬부랑 할머니는 동서 가릴 것 없이 현대에 살아 있어요. 가혹한 북구라파의 겨울바람(피시스)과 냉혹한 도시(노모스) 속에서도 말입니다.
이 ‘미소’를 남기고 싶어요. 절망하다가도 《한국인 이야기》를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생각도 그 때문이지요. 그리고 정말 ‘전복’이 있는지 몰라도 내가 이미 그려놓은 글의 ‘보물지도’를 따라 모험 길에 오르세요. 그리고 그 ‘전복’과 ‘보물’이 없더라도 밑질 게 없어요. 이미 대중가요가 된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동력과 상징의 힘
“꼬부랑 할머니 속에서 창출되는 우리 이야기는 법·제도가 만들어낸 역사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힘이 될 수 있어요. 나는 확신합니다. 단순한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소녀의 운명을 바꿔놓을 생명의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단단한 자연계와 제도화한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순환관계를 지니고 있는 상징의 힘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의 단순한 동화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무한 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섭씨 1도가 모자라 끓지 못하고 있는 내 라면 그릇…, 힘이 없어 끝내지 못한 《한국인 이야기》에 성냥불 한 개비의 에너지를 보태주면 되는 거지요.”
기자는 자신도 모르게 “해보겠다”고 답했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기꺼이 동행자가 되어줄 젊은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1월 호
② 젓가락의 始原
인류 최초의 요리사와 戰士의 도구, ‘부지깽이’와 ‘작대기’
⊙ 젓가락 안에 한국인의 문화적 밈(Meme), 민족의 아이덴티티(정체성) 담겨
⊙ 무리서 쫓겨난 나무를 못 타는 원숭이… 맹수에 맞서 작대기 든 인류 최초의 戰士
⊙ 부지깽이 들고 불을 다루는 여자가 인류 최초의 요리사… 火食으로 뇌가 발달
⊙ 불 앞에 모여 허구, 상상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사람, ‘호모 나란스(Homo Narrans)’
⊙ ‘세미오시스(기호상징계)’ 관점에서 부지깽이와 작대기는 꼬부랑 할머니의 지팡이

▲사진=김용호
이어령(李御寧) 선생(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의 두 번째 한국인 이야기는 젓가락이다. ‘하찮게’ 여기는 젓가락이지만, 젓가락 안에 “한국인의 문화적 밈(Meme), 우리 민족의 아이덴티티(정체성), 신분증이 들어 있다”는 게 선생의 생각이다.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동양 문화권에서 수천 년을 이어온 젓가락은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사람의 손가락을 완벽하게 대신하는 도구다. 그런데 한 짝으론 아무 구실을 못 한다. 오로지 두 짝이어야 한다.
이유식을 뗀 아이가 밥을 먹으면서 배우는 것이 젓가락질이다. 숟가락과 달리 젓가락은 평균 이상의 악력이 필요하다. 아이는 점차 성장하면서 젓가락으로 콩자반을 집거나 깻잎장아찌를 떼는 과업을 차근차근 달성하며 밥상 대열에 안착한다.
때로 메추리알, 방울토마토, 매실절임 같은 난도(難度)가 높은 음식과 성실히 맞서는데, 면(麵)을 돌돌 말거나 쌀밥을 한 톨씩 집는 극강(極强)의 젓가락질은 마치 성장통처럼 청소년기를 거치며 습득할 수 있었다.
그 시절, 젓가락질이 서툴면 혀 차는 소리를 듣거나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때로 굶을 각오까지 해야 하는 비정한 밥상머리 교육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다. 선생의 말이다.
“요즘 초등학생 가운데 젓가락질을 할 줄 아는 아이가 열 명 가운데 한두 명밖에 안 된대요. 하지만 정말 하찮은 것이라면 백제 무령왕(통치 기간 501~523) 능에서 금관 장식과 함께 청동 수저가 발굴되었겠습니까. 백제인의 피와 몸은 사라졌어도 그 하찮은 젓가락은 그 짝을 잃지 않고 나란히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1500년 전 모든 것은 모두 다 변하고 사라졌는데도 어떻게 그 젓가락만은 지금까지 전해져 끼니마다 변함없이 사용되니 신기하지 않습니까.”
― 젓가락도 우리 문화의 일부군요.
“그럼요. 젓가락을 떠올려봐요. 자연의 나뭇가지를 손으로 집는 순간, 문화가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그냥 나뭇가지가 아니라 자신의 손가락을 닮은 가지를 꺾고 다듬는 단순하지만 최초의 공정, 도구를 만드는 과정이 문화예요.
손으로 잡기 쉽게, 처음에는 꼬챙이처럼 한 가닥이 있던 것이 두 개로 짝을 만들어 음식을 집는 순간 자연과는 다른 문화의 세계, 그 문이 열리는 것이지요.”
中日과 다른 한국의 젓가락 문화 ‘수저’

▲한국인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어령 선생이 빈 종이에 글과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진=김용호
선생은 또 “동북아 한중일(韓中日)이 같이 공유하면서도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 유전자를 젓가락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우리는 젓가락만이 아닌 ‘수저’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중국·일본과 달라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숟가락과 젓가락을 합친 수저를 한 쌍으로 사용해요. 중국, 일본에는 그런 개념이 없어요. 연암 박지원이 《혹정필담(鵠汀筆談)》에서 이야기했듯 중국과 우리나라의 젓가락 문화는 수저에서 확연하게 달라요.”
선생에 따르면, 숟가락은 주로 국물을 떠먹는 것으로 음(陰)에 속한다. 양(陽)에 속하는 젓가락은 고체 형태의 음식을 집는 데 용이하다. “젓가락은 양, 숟가락은 음, 건더기는 양, 국물은 음이다. 양으로 양을 집고, 음으로 음을 뜨면서 음양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같은 젓가락 문화권인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한국 문화는 수저를 같이 쓴다는 점에서 일체형의 음양 조화 문화를 가장 철저하게 생활화한다고 할 수 있어요.”
듣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런데 보세요. 한중일 3국 중에 유일하게 쇠젓가락을 가진 민족이 우리입니다. 쇠젓가락은 밥상을 두드려도 소리가 나고, 소주병을 잡고 즉석 연주도 가능하죠. 나무젓가락은 밋밋하고 소리가 안 나.”
“쇠젓가락은 가락을 좋아하던 우리 민족에게 훌륭한 악기였다. 젓가락 장단으로 ‘니나노~’ 하잖아”라는 말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선생은 다시 ‘진지’ 모드로 돌아갔다.
“한국인의 정체성이 담긴 젓가락이 어디까지 올라가느냐 하면 인류 최초의 전사(戰士), 최초의 요리사까지 올라갈 수 있어요. 다시 말해 ‘작대기’와 ‘부지깽이’로 연결됩니다.”
기자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짓자 선생은 혀를 차듯이 덧붙였다.
“김 기자! 시작부터 황당하다는 눈빛인데, 들어봐요.
헤라클레스가 사자를 때려죽일 때 쓴 도구가 뭐예요? 곤봉이거든요. 다시 말해 작대기입니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자기 마음대로 늘였다 줄였다 하던 작대기가 여의봉이잖아요. 유럽의 군주들에게 권력을 상징하던 지휘봉이 왕홀(王笏)입니다. SF의 명작으로 꼽히는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를 떠올려 보자고요.”
火의 발견과 부지깽이

▲SF의 명작으로 꼽히는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 원숭이가 뼈다귀를 높이 들어 내려치려 하고 있다.
젓가락에서 ‘작대기’ ‘부지깽이’로 이야기가 옮겨가던 선생의 사유(思惟)가 갑자기 SF영화로 종횡무진 시공간을 넘나들었다. 기자의 뇌 이쪽저쪽이 동시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영화 속 인류의 진화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장면이 뭐예요? 그렇지. 원숭이 한 마리가 자신이 쥐고 있던 뼈다귀를 하늘 높이 드는 거라고. 이 뼈다귀가 바로 ‘작대기’의 원형이고 꼬부랑 할머니의 ‘지팡이’야. 권력과 파워(힘)의 상징인 거죠.”
영화 속 묵직한 정강이뼈로 다른 무리를 제압하는 원숭이의 모습이 얼핏 떠올랐다.
“원숭이가 하늘 높이 던진 뼈다귀가 천천히 내려오면서 화면이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잖아요. 넓디넓은 은하계, 우주 비행선이 날아가고 푸른 지구가 나오는 장면입니다. 우리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상징하는 거잖아요.
이 뼈다귀를 쥔, 저 작대기, 곤봉을 쥔 이가 바로 인류 최초의 전사인 거지.”
선생은 영화 속 유인원에 집중했다.
“원래 원숭이는 네 발을 사용해 자유자재로 나무를 타잖아요. 나무를 못 타는 원숭이는 무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진화론 관점에서 그 쫓겨난 원숭이가 인간으로 발달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결핍의 존재일 수밖에 없어.”
기후의 변화로 열대 우림이 점점 줄어들고 사바나 지형이 형성되었다. 나무를 잘 타지 못하는 원숭이는 나무 열매에만 의존할 수 없어 평지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수렵 채집의 시작, 채집문명의 도래다.
“원숭이는 살아남기 위해 고개를 높이 치켜들고 두 발로 서게 됩니다. 두 손은 자연히 자유로워지게 된 거지. 그때 저쪽에서 하이에나가 막 몰려옵니다.
어떻게 하겠어요. 막 도망치다가 발에 차이는 돌을 집어 던지고(호모 훈디토르·Homo Funditor·投石人), 나무 작대기를 찾지 않겠어요?”
젓가락의 시원(始原)을 파고들던 선생은 작대기에서 ‘불의 발견’으로 이야기 방향을 조금 틀었다.
“인류학자인 하버드대 리처드 랭엄 교수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날달걀을 먹으면 영양이 근육으로 가고, 삶은 달걀을 먹으면 뇌로 간다’고 말이죠.
화식(火食)으로 인간의 뇌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어요. 뒤집어 생각하면, 최초의 인간은 작대기를 든 사람이 아니라 불을 이용하는, ‘부지깽이를 든’ 사람이라 말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古代 문헌에 부지깽이가 없는 이유

▲전기 없는 마을’인 경북 청송군 주왕산 기슭 내원마을에서 한 할머니가 부뚜막에 불을 지피며 부지깽이를 들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리처드 랭엄 교수는 인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바로 ‘불의 발견’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이 이룩해낸 가장 중요한 것이 불로 음식을 요리하는 ‘화식’의 발견이며, 이 화식이 인간의 모든 것을 바꿨다는 ‘요리 본능 학설’을 주장한다.
“그런데 잘 보라고. 사냥한 짐승을 익혀 먹을 때 불을 어떻게 다뤘을까요. 손으로 했겠냐고. 부지깽이로 했겠지요.
우리가 캠핑을 가봐도 알 수 있어요. 나뭇가지를 모아 불 피우려면 불쏘시개가 필요하고 부지깽이가 있어야 해요.”
― 시골에서 자라 부지깽이가 뭔지는 알지만, 고대(古代) 유적에서 부지깽이가 발굴됐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학자는 부지깽이 흔적이 인류사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 같은 학자도 부지깽이의 존재를 모릅니다. 생각해보세요. 왕의 무덤 속에 상아(象牙)나 금, 청동, 옥으로 만든 젓가락은 넣어도 부지깽이를 넣겠어요?
시골 부뚜막에서 불을 피워본 사람은 공감하겠지만 부지깽이 역할을 한 ‘불쏘시개 작대기’는 마지막에 다 태워버리잖아요. 그러니 화석(化石)으로 안 남죠.”
고대 문헌에 부지깽이 사용법이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부지깽이는 일상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접목되었기 때문이다. 불을 이용하는 데 없어선 안 되는, 그러니까 요리를 하는 여자에게 단순한 도구를 뛰어넘는 생활의 편리함을 가져다주었다. 역사적 기술(記述)이 대개 남성의 시각에서 정리됐다는 점도 배제할 수 없다.
“문화인류학자들은 화석으로 남지 않으면 역사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문자로 인간 생활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시대를 ‘역사 시대’라고 부르고, 문자 이전을 ‘선사(先史) 시대’로 명명하잖아요.”
선생이 목소리를 높이며 성토하기 시작했다.
“김 기자! 생각해보세요. 인간 역사가 문자로 시작한다? 웃기는 놈들이야. 말이 없이 글(문자)이 어떻게 나와? 글보다 말이 먼저잖아. 인간의 ‘인지(認知) 혁명’은 글보다 말에서 먼저 시작되는 거야. 그렇지 않아? 문자 발명은 아무것도 아니야. 말의 발명이 더 위대해.
말이 애비(아비)고 글은 자식인데, 자식에게 역사가 생기고 애비는 역사에서 제외한다? 이게 가능하냐고. 문자를 쓴 1만 년의 세월로 문자 이전의 350만 년을 다 지워버렸어, 이놈들이.”
선생은 두 손을 불끈 쥐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언제 예수님이 글을 쓰셨어? 제자들이 써 신약(新約)이 됐는데, 성경 이전에 기독교가 없었겠네. 정말이지 웃기는 거여.”
부지깽이를 든 여자, 인류 최초의 요리사
세계적 고고학 저널리스트인 후베르트 필저가 쓴 《최초의 것(Das Erste Mal)》(지식트리 刊, 2012)을 보니, 인간 손으로 불을 붙인 최초의 실제 증거들이 이스라엘 북부 요르단 계곡의 고갈된 호수 주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79만 년 전에 모닥불이 타올랐다는 증거가 나왔다. 까맣게 탄 낟알, 나무껍질, 나뭇조각, 부싯돌, 그리고 사용되지 않은 목재들이 발견된 것이다.
불을 땔 때 불을 헤치거나 끌어낼 때 쓰는 도구가 부지깽이다. 인류학자들은 불을 길들이던 시점을 약 80만 년 전쯤으로 본다. 선생의 설명이다.
“불을 일상적으로 이용하게 된 인간은 극심한 추위를 이겨냈고 수렵 채집의 한계를 극복했으며 으르렁대는 호랑이, 사자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자연의 열매로는 소화가 어려운 밀, 쌀, 감자가 인간의 주식(主食)으로 등장하게 된 것도 불 덕분이었어요.”
“불에 익히면 음식을 오염시키는 세균과 기생충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심지어 죽은 동물도 구워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흔히 ‘잠자는 사자’라고 하잖아요. 사자는 먹으면 온종일 자. 왜? 소화시키느라 자는 겁니다. 다 소화시킨 뒤 배가 고파야 다시 어슬렁거립니다. 그런데 불로 익혀 먹으면 소화하는 시간이 날것으로 먹는 것에 비해 1/10이면 돼요. 그러니 인간은 짐승보다 활동하는 시간이 더 많게 되고, 화식으로 뇌가 발달한 덕에 정교한 사냥이 가능해진 거야.”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짐승은 참을성이 없거든. 그 자리에서 다 먹어. 인간은 불로 익히고 요리를 해서 먹으려면 참아야 해요. 요리는 기다림이잖아. 또 여럿이서 공식(共食)을 합니다. 그것을 콘비비알러티(conviviality·향연 혹은 연회)라고 합니다. 기독교 성찬식에서 예수님의 성체인 빵과 포도주를 나눠 먹는 것과 다 연결이 됩니다.
인간만이 참고 기다리며 공식합니다. 음식을 나눠 먹는 결속이 마을을 이루고 국가를 형성시킬 수 있었던 거지. 저 거대한 매머드를 혼자서는 잡을 수 없어요. 그러나 집단을 이루면 인간보다 몇 배나 큰 동물도 사냥할 수 있어요.
집단주의는 개인을 죽이는 게 아니야. 개인의 힘을 확장시키는 것이야. 개인(의 능력)이 개인 이상을 발휘하기 위해 집단을 형성하는 거라고. 그러나 오늘날의 집단주의는 개인을, 개인의 개성을 죽이잖아.”
인류 최초의 요리사, 꼬부랑 할머니, 미토콘드리아 이브
선생의 말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인류 최초의 요리사’, 꼬부랑 할머니로 이어졌다.
“불을 다루는, 부지깽이를 든 여자가 바로 인류 최초의 요리사입니다. 남자들은 보통 사냥을 나가잖아요. 사냥해온 짐승을 누가 요리해요? 여자는 애 낳고 키우면서 자연히 집에 있게 되잖아요.
헤겔은 ‘최초의 전사(남성)’가 역사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 아니야. 최초의 역사를 만든 이는 싸움꾼이 아니라 ‘이야기꾼’입니다. 그 이야기 속 가장 큰 상징이 부지깽이를 든 여성입니다. 그게 우리나라에 오면 꼬부랑 할머니죠.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아닙니다. 영화 〈쥬라기 공원〉처럼 DNA를 복제해 공룡을 만들듯 ‘인류 유전학’에서 미토콘드리아 DNA 변이를 거슬러 올라갈 때 상정할 수 있는 인류 최초의 모계 공통 조상을 ‘미토콘드리아 이브(Mitochondrial Eve)’라고 부르잖아요.
그게 바로 다름 아닌 꼬부랑 할머니여.”
― ‘최초의 역사를 만든 이는 싸움꾼이 아니라 이야기꾼’이라고 했는데 풀어서 설명해주세요.
“개인이든 집단이든 파이어 플레이스(fire place) 곁에 옹기종기 모여 음식을 익혀 먹게 됩니다.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상상력의 꽃을 피우는 거야. 바로 그 자리에서 ‘스토리텔러’로서의 인류가 시작하는 겁니다. 그게 호모 나란스(Homo Narrans), 이야기꾼이야.”
라틴어 ‘나란스’는 영어로 내러티브(narrative), 즉 허구 또는 실제 사건들의 연속된 이야기를 말한다.
“지식과 지혜가 있다고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르고, 도구를 만들어 쓸 줄 안다고 해서 ‘호모 파베르’라고 불러요.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 호모 아카데미쿠스(공부하는 인간), 호모 쿨투라(문화적 인간), 호모 폴리티쿠스(정치적 인간) 등 인간의 학명(學名)이 수백 가지나 됩니다. 다 하위 개념이야. 상위 개념은 딱 하나입니다. 바로 호모 나란스!”
― 왜 그런가요.
“‘인지 혁명’으로 인간만이 ‘창조적 상상’을 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만이 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밤하늘을 바라보며 무수한 별 이야기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거짓말과 허구, 상상의 세계를 원숭이나 침팬지가 꾸며낼 순 없었어요. 호모 나란스는 ‘호모 작대기’ ‘호모 부지깽이’ ‘호모 젓가락’으로 연결됩니다.”
일꾼보다 이야기꾼!
선생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네발짐승이 두 발로 일어섰을 때를 상상해보세요. 저 멀리 땅끝 지평선이 보였을 것이고 하늘이 보였을 겁니다. 밤하늘, 수많은 별이 눈동자에 추락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거야.
직립보행 하는 인간의 눈에 그제야 대자연의 넓고 큰 땅[大地]이 들어오고 잠재된 상상력이, 신화(神話)의 세계가 분출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선생은 초대 문화부 장관(재임 1989년 12월~91년 12월) 시절을 떠올렸다.
“클래식 발레의 ‘육법전서’라는 소련 볼쇼이 발레단이 방한했어요. 그들 앞에서 이런 환영사를 했습니다.
‘인간 역사 가운데 가장 가슴 설레고 가장 놀라운 이벤트 두 가지가 무엇이겠느냐. 바로 두 발로 딛고서 땅끝을 처음 보았을 때가 아니었을까. 그제야 하늘의 별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두 발로 선 인간이 높이 솟구쳐 오르려 할 때가 아니었을까. 시몬 베유(Simone Weil)가 말하는, 아래로 떨어지는 중력의 비극(悲劇)에 맞서 끝없이 위로 올라가려 하는 인간의 상승 욕구와 같다. 하늘로 솟구치려는 고양(高揚)! 고양! 날개 없이 횃불처럼 솟구치려는, 높이 뛰는 자가 바로 당신들’이라고 하니 발레단 단장이 흥분해서 나를 5분 동안이나 껴안았어. 하하하.”
선생의 회고를 듣자니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일꾼’을 대단히 여기지만 일꾼보다 이야기꾼이야.”
― 왜 그런가요.
“사냥꾼보다 사냥한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더 대단해. 왜? 수렵은 짐승도 하니까. 하지만 이야기꾼은 짐승을 잡고서 ‘야, 이놈 뛰어가는데 잡으려다 죽을 뻔했어’라고 허풍을 보태면서 경험담을 늘어놓을 수 있잖아. 그러니 일꾼보다 이야기꾼이 먼저가 아니겠어? 그게 바로 문화고 ‘세미오시스(Semiosis)’라고 부르는 상징이지.”
꼬부랑 할머니의 지팡이와 세미오시스
기호학자인 선생은 세미오시스라고 부르는 언어와 기호의 상징체계를 오랫동안 연구해왔다. 기존의 피시스(Physis·자연계)와 노모스(Nomos·법과 제도)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상징계를 통해 풀이해온 것이다.
“내가 안데르센 동화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를 자주 하잖아요. 차가운 길바닥에서 얼어 죽은 소녀의 얼굴에 왜 ‘미소’가 가득했을까요? 사람들은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추운 겨울(피시스), 비정한 도시 문명(노모스)의 시각에선 그 ‘미소’를 해석할 수 없어요. 오직 상징(세미오시스)으로만 이해할 수 있어요.
그 상징이 일종의 픽션(fiction)의 세계입니다. 어원인 라틴어 ‘픽티오(fictio)’는 꾸며내거나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현실이라는 뜻인데 바로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입니다.”
은유와 상징으로서의 작대기, 부지깽이 이야기가 절묘하게도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로 연결되었다. 선생의 시각에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부지깽이와 작대기가 꼬부랑 할머니 지팡이의 상징인 겁니다.
서양에서는 인류 역사를 대개 이항(二項) 대립으로 보잖아요. 남자 대(對) 여자, 지배 대 피지배자, 주인과 노예라는 식으로 말이죠. 대개 ‘노모스’와 ‘피시스’의 관점에서 대립과 전쟁을 변증법으로 정리한 거야.
그러나 세미오시스의 눈으로 전쟁과 요리의 기원을 더듬다 보면 부지깽이와 작대기로 연결됩니다. 어때요, 기가 막힌 상징 아니에요? 하하하.”
― 아무도 선생님처럼 생각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작대기는 곤봉을 든 전사들이고 남성 원리가 지배하지. 결과적으로 전쟁과 폭력을 의미합니다.
반면 부지깽이는 요리사들이고 여성 원리를 담지. 전쟁과 평화의 상징입니다. 남자는 생명을 죽이고 여자는 생명을 낳아요. 생명을 기르는 어머니의 젖이 요리입니다. 하늘이 주신 요리여. 아이가 젖을 떼면 그때부터 엄마의 요리를 먹어요.”
부젓가락, 젓가락의 등장
잠시 숨을 돌린 선생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최초의 요리사, 최초의 전사가 우리의 여자고 남자가 되는 겁니다. 바로 인류의 조상인 꼬부랑 할머니인 셈이죠. 부지깽이와 작대기는 자연 그대로 꼬부랑 할머니의 지팡이지요.”
― 불의 이용과 화식, 뇌의 질적 변화, 부지깽이가 다 연결이 돼 있네요.
“불을 이용해 요리하려면 부지깽이가 반드시 필요하죠. 그런데 두 개가 있어야 효율성을 높일 수 있어요. 이렇게 등장한 것이 부젓가락이고 젓가락이 된 것입니다. 젓가락은 하드웨어 개념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개념이죠.”
젓가락 기원을 따라가면 처음부터 음식을 먹는 도구로만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의 분석처럼 젓가락은 불씨를 옮기는 부젓가락의 운명을 타고났다가 점점 요리할 때, 또는 식사할 때, 아니면 두 경우 모두에 쓰였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도 가정에는 요리용 (긴) 젓가락이 있다. 뜨거운 음식을 옮기고 뒤집거나, 혹은 달걀 같은 액체를 저을 때 젓가락이 쓰인다.
선생은 불을 이용하기 위해 부지깽이와 부젓가락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브레이크가 없으면 자동차가 존재할 수 있나요? 멈출 수 있어야 출발할 수 있지. 같은 이유로 불을 끌 수 있어야 불을 이용할 수 있어요. 끌 수 있는 도구가 부지깽이고 부젓가락입니다.
인류의 발명품은 대개 네거티브를 통해 증명할 수 있어야 해요. 불을 켜는 만큼 끄는 역할이 중요하죠. 발화(發火)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욕망을 이해하려면 섹스를 참을 줄 알아야 하죠. 욕망만으로 섹스가 존재할 수 있겠어요? 성적 억압과 금기의 역사도 존재하잖아.
너무 한 방향으로 죄다 보면 독재가 되고, 금욕이 되고,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가 되는 겁니다. 자동차를 발명한 이유는 움직이기 위해 만든 것이지 정지하려고 만든 것은 아니니까요.
문명의 시작은 항상 리스크(위험)를 각오하고 앞으로 나가는 거잖아요. (자동차의) 브레이크 장치가 약간 서툴지만 한번 가보는 거야. 이런 불안과 긴장이 사회를 만드는 겁니다.”
꼬부랑 할머니가 한국에 온다면…
― 역설이네요.
“역설이죠. 움직이게 하려면 그 반동력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기술이 필요해. 이것이 바로 문명을 만드는 슬기고 지혜인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왜 두려우냐. 제어가 안 되기 때문이지. 불이 귀하지만 끌 줄 몰라봐요. (불을) 옮길 줄 모르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부지깽이가 필요하다고요. 끄고 불붙이고 옮기고… 컨트롤(관리)할 수 있는 도구가 부지깽이인 거지.”
심각했던 얼굴을 푼 선생은 열두 고개를 넘듯 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인류 모계 공통 조상인 미토콘드리아 이브가 살아 돌아왔다고 칩시다. 아니면, 진화론적 관점에서 나무 못 타는 원숭이, 사바나 초원의 벌거숭이(원숭이), 그러니까 최초로 불을 쓰기 시작한 인류의 조상이 지금 한국에 왔다고 칩시다.”
그 미토콘드리아 이브가 바로 ‘꼬부랑 할머니’란 사실을 《월간조선》 독자들이라면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조상이 한국의 어디를 가겠어요? 서울의 고층 건물과 수많은 자동차 사이에서 길을 잃을 겁니다. 사람들마다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을 보고 그 쓰임새를 눈치챌 수 있을까요? 짐작조차 못 할 겁니다.
옷 입고 돌아다니는 강아지를 보고서 무슨 이런 세상이 있나 할 테고 물이 채워진 변기를 보고는 신식 대야라 생각하고 세수를 할 수도 있어요. 비데 물줄기라도 경험하게 되면 혼비백산 소스라치지 않을까요.”
선생은 말을 긴장감 있게 몰고 가면서도 기발한 비유로 미소를 끌어낼 줄 안다.
“거의 유일하게 한눈에 용도를 알아보고 당장이라도 익숙하게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부지깽이입니다.
우리의 꼬부랑 할머니는 서울을 벗어나 시골 초가집 부뚜막에 가지 않겠어요? 그 부뚜막 앞에 쭈그리고 앉아 불을 피우곤 부지깽이를 손에 쥐지 않겠어요? 이글이글 타는 불길을 바라보며 350만 년 전처럼 환하게 웃지 않겠어요? 김 기자! 경이롭지 않아요?”
생명의 작대기에서 젓가락이 나와
▲지난 1996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전라북도 참가팀이 ‘익산 지게목발놀이’를 공연하고 있다.
인간이 도구(무기)를 이용해 집단 내 경쟁자나 맹수를 제거한다는 가정은 뇌의 발달을 전제한다. 화식으로 말미암아 뇌가 커지면서 의식적으로 ‘살인 무기’를 사용하려는 저열한 동기(動機)들이 생겨났을 것으로 짐작한다.
“인간이 작대기를 가지면 대개 폭력적인 상황과 관련이 있어요. 사람(짐승)을 때리거나 싸워서 심지어 죽일 수 있는 무기인 셈이죠. 인류의 조상 때부터 작대기(곤봉, 방망이, 몽둥이)는 동물을 위협하거나 쫓아내기 위해 사용되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대기를 평화롭게 쓴 것이 한국인과 아시아 문화권입니다.”
― 어떤 면에서 그런가요.
“빨랫방망이를 생각해보세요. 원 없이 두들겨도 그게 누굴 해치거나 무언가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빨래를 더 깨끗하게 만들잖아요. 다듬이는 어떤가요. 구겨진 옷을 말끔히 펴는 데에 쓰이잖아요. 이 작대기로 죽은(더러운) 옷을 다시 살립니다.”
선생은 “작대기는 파괴하고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살리고 돌려놓는 ‘생명’의 도구”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똑같은 작대기로 남들은 죽이고 폭력을 휘두르는데 그것으로 빨래를 빨고 다듬고 작은 것으로 만들어 식사를 해온 겁니다. 젓가락의 발명은 대단한 것이고 그냥 넘길 수 없는 이유죠.
그렇지만 한국인은 이상적 평화주의자는 아니야. 전쟁 위협을 느끼면 남자는 작대기를 들고 용감한 전사로 돌변하지. 부엌에서 음식 하던 여자는 부지깽이를 들고 뛰어나오는 겁니다.”
선생은 작대기의 다른 예로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서 전해져 오는 ‘익산(益山) 목발노래’를 이야기했다. 목발노래란 지게 작대기로 목발을 두드리며 부르는 노동요(勞動謠). 나무로 된 두 개의 지게 다리를 일컬어 목발이라 부른다.
“‘익산 목발노래’는 일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올 때, 혹은 나뭇짐 지고 신바람이 날 때 지게 목발을 작대기로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등짐이 무거울 때, 가벼울 때, 빈 지게로 나갈 때 등 상황에 따라 곡조의 장단이 다 달라요.
인생사의 회포를 풀 때는 긴육자배기 가락으로, 신명 나게 부를 때는 엇모리장단, 흥을 돋울 때는 시나위 조의 굿거리장단으로 부릅니다. 심지어 패랭이에다 계화를 꽂고서 매호래기춤을 추며 고된 노동을 잊었어.
작대기로 노래 장단을 맞추는 것이 처음엔 우연히 시작됐을지라도 노동에 생기를 불어넣은 ‘생명’의 악기가 된 겁니다.
시골 부뚜막의 부지깽이에 인류의 원형이 남아 있다면 우리 농촌의 지게 작대기가 그 원형인 것이죠. 이것이 바로 문화고, 한국의 지게 문화인 거지. 무궁무진한 거여.”⊙
韓中日 젓가락 비교論
술 먹고 신나면 젓가락 두드리는 나라, 한국
▲충북 청주시가 지역 작가 등을 통해 개발한 분디나무 젓가락. 사진=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다음은 이어령 선생의 한중일 3국의 젓가락 비교론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중일 3국의 젓가락 중 제일 짧은 것이 일본 젓가락이고 제일 긴 것은 중국 젓가락이다. 한국 젓가락은 두 나라의 중간 길이다. 젓가락 끝부분의 굵기도 세 나라의 것이 다 다르다. 일본의 것이 제일 뾰족하고, 중국의 것이 가장 뭉툭하다. 이번에도 한국의 젓가락은 일본과 중국 젓가락의 중간 정도 굵기다. 참 절묘하지 않나? 대륙인 중국과 열도인 일본 사이에 한국 반도가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젓가락 또한 길이와 굵기 모두 중국과 일본의 중간이다.
우리의 젓가락은 적당히 길고 적당히 뾰족하다. 우리는 젓가락만 단독으로 얘기할 수 없다. 젓가락과 숟가락을 합쳐 ‘수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항상 같이 다닌다. 젓가락과 숟가락은 완전한 한 쌍으로, 밥은 숟가락, 반찬은 젓가락을 이용해서 먹는다. 신라 시대 때 청동의 젓가락과 숟가락을 처음 쓰기 시작한 이후 은, 백동, 놋쇠로 만든 젓가락을 사용하는데 현재는 은이나 스테인리스제가 많다.
여성들은 시집을 갈 때 부부용 ‘은수저’ 2벌을 가지고 간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친가에서 손자의 이름을 새긴 작은 은수저를 보내준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 술 먹고 신가락 나면 젓가락 두드린다. 세계 많은 곳을 돌아다녀 봐도 내 경험상 젓가락 두드리며 장단 맞추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그게 신가락에서 나온 거다. 노랫가락이라고도 한다. 눈으로 보는 ‘젓+가락’을 두드리니 귀로 듣는 ‘노래+가락’이 된다. 그리고 귀로 듣는 가락은 다시 마음을 움직이는 ‘신가락’이 된다.
일본의 젓가락은 전나무를 많이 사용한다. 딱딱한 나무는 치아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부드러운 목재를 사용한 게다. 또한 젓가락의 시초는 대나무 가지를, 이쑤시개로는 버드나무 가지를 사용했다는 것이 통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다.
중국 젓가락은 뭉툭하고 길다. 중국 젓가락은 크게 분류하자면 화저(火箸), 채저(菜箸), 식저(食箸) 등 3가지 종류가 있다. 화저는 불을 집는 젓가락이고 요리하는 요리 젓가락은 채저, 먹을 때는 식저를 사용한다.”
2021. 12월 호
③ 식민지人
기구한 운명처럼 國土와 國語 잃은 식민지人으로 태어나다
⊙ “왜 하늘이 검나요? 내가 보기엔 파란데요?”
⊙ 2字, 4字식 한자의 병렬구조가 한국인의 사고에 덫을 놓아
⊙ 한자 말놀이 유행… 票퓰리즘, 多주세요, 대략난감, 내찍먹부먹
⊙ 식민지 아이들의 근대 체험… 유리창, 고무지우개, 필통의 세계
⊙ 다시 식민지 시절로 돌아간다면 안네 프랑크처럼 일기 쓰고 싶어
⊙ 한국인의 빗장을 푼 것은 일본식 난방장치 아닌 서양식 ‘스토브’
기자는 매주 한두 차례 이어령(李御寧)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를 찾고 있다.
뵐 때마다 지적인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과정이 즐거우면서 때로 밀교(密敎)와 같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한국인의 뿌리를 찾아 먼 길을 따라나선 보람이 《월간조선》 독자들에게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어머니의 태(胎)내에서 단 10개월 만에 35억 년 전부터의 기나긴 생물 계통의 진화 과정을 거친다는 이야기를 《한국인 이야기:탄생-너 어디에서 왔니》(2020)에서 이야기했지요?
한번 되짚어봐요. 뜨거운 바다, 어머니의 양수에서 떠돌던 진핵 세포가 아가미와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 모양으로 변하더니 그 지느러미에서 손과 발이 나오고 등뼈의 가시에서 척추가 나오는 긴 출생의 비밀 말이죠. 그런 변화를 생각하면 우리의 겨드랑이가 근질근질하지 않나요?”

▲이어령 선생이 펜으로 글씨를 쓰고 있다. 세미오시스(상징계)와 노모스(법·제도), 피시스(자연계)라는 세 관점으로 한국인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고 있다. 사진=김용호
이 대목에서 선생이 강조하는 피시스(Physis·자연계)와 노모스(Nomos·법과 제도), 세미오시스(Semiosis·상징·기호계)라는 도구를 떠올려본다. 이 자(尺)를 통해 우리는 ‘한국인 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에서 경험한다.
“생물학적 진화론(피시스) 대신 세미오시스라는 신화(神話)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인은 단군의 자손, 곰의 후손입니다. 반면 법과 제도(노모스)로서 한국인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는 존재할 수 없어요. 이전에는 조선인, 고려인, 신라인으로 불렸던 거지요.”
《천자문》 다시 보기

▲천자문. 이미지 출처=www.baidu.com
선생의 음성이 오늘은 유난히 떨리고 나지막하다.
“나는 기구한 운명처럼 나라 잃은 식민지에서 태어났어요. 국토(國土)를 잃었고 내 나라의 말, 국어(國語)를 쓸 수 없는 기막힌 상황이었습니다.
상징·기호계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투성이였어요. 왜 한자(漢字)로 된 성씨는 김·이·박처럼 거의 한 글자이고, 이름은 두 글자인지 말이죠.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어요.
지명(地名)도 구룡포·노량진·삼랑진·조치원·의정부 같은 일부를 빼고 다 두 자입니다. 중국과 일본 역시 예외 없이 두 자입니다. 들쑥날쑥하지 않게 아예 법으로 막아버렸어요.
우리말로 된 아름다운 지명을 호명해봅니다. 골짜기를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인 ‘고라데이’, 마을이 호리병을 닮아 붙여진 ‘호려울’, 둔전으로 부치던 밭이 있다는 ‘둔지미’, 가락처럼 좁은 골짜기에 있다고 해서 ‘가락골’, 마을이 누운 범과 닮아 ‘범지기’, 황소의 뚜레처럼 생겼다고 ‘도램말’ 같은 마을 이름이 두 자 한자로 잊히고 말았어요.”
학교에 입학하기 전 어린 이어령은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면서 우물의 도르래 장치가 끊어진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고 한다.
“《천자문》은 4자씩 사언고시(四言古詩)로 되어 있어요. 왜 2자와 4자의 틀로 세상을 봐야 하는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소학교에 입학하기 전 형을 따라 서당에 갔어요. 그때만 해도 시골에 서당이 있었습니다. 만발한 살구나무 옆 허물어진 초가…. 도무지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았어요.”
서당과 훈장 선생님
형의 손에 이끌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망태는 찌그러지고 귀밑머리가 하얀 중늙은이가 좌정해 있었다.
“순간, 오금이 저려 옴짝달싹할 수 없었죠. 컴컴한 방 안, 믿기지 않을 정적 속에 위엄을 가진 선비가 앉아 있었어요. 그가 바로 훈장 선생이었어요.
꼭 훈장이 아니더라도 시골에는 그런 낙탁(落魄)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조로서도(鳥路鼠道) 같은 채소밭 한 이랑 없는, 쓰디쓴 씀바귀나물을 엿처럼 달다고 여기는 정신의 승리자들이죠.
마을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굳이 맡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선비를 존경하는 뜻에서 콩도 갖다주고 고추도 따다 주면서 ‘우리 아이에게 글 좀 가르쳐주세요’ 해서 생겨난 게 서당입니다. 그게 선비의 나라이고 한국인 이야기입니다.”
굶을지언정 나라 걱정이 태산인 사람들, 버드나무 가지처럼 흔들리며 살 것 같지만 빳빳한 옥양목처럼 투명한 이가 조선의 선비들이자 마을의 훈장이었다.
어린 이어령은 《천자문》 첫 수업부터 눈앞이 캄캄했다.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 즉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는 문장을 보며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왜 하늘이 검나요? 내가 보기엔 파란데요?”라고 물으면 훈장 선생은 화부터 냈다.
거대한 의식의 덫, 4字의 竝列 문장
“이놈아 밤에 보면 하늘이 검잖아.”
“그러면 땅도 검어야지 왜 누렇다고 해요? 밤에 보면 다 까만데요?”
훈장은 “이 쥐방울만 한 녀석이 어딜 와서 따져? 옛 선현들이 다 그렇게 말씀하신 걸 가지고”라고 나무랐다. 하지만 다그친다고 의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늘이 까맣고 땅은 누렇다’는 4자가 왜 우리말 어순처럼 ‘천현지황’이 아니고 ‘천지현황’인지 궁금했어요.
그게 바로 중국 시(詩)문학, 동양문학의 특징인 병렬(竝列)구조라는 것을 훗날 알게 됐습니다.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R. Jakobson)이 동양철학과 동양시학의 기본을 ‘패럴리즘(parallelism·對句法)’으로 설명한다는 것도 나중 이해하게 됐어요.
하지만 당시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죠. 이 병렬구조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하게 됐습니다. 좋든 나쁘든 간에 말이죠.”
선생은 《용비어천가》를 예로 들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뮐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칠새’라는 구절이 대구로 이어집니다. ‘나무가 바람에 안 흔들린다’고 써놓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샘이 가뭄에 안 그친다’고 씁니다. 서양의 문장처럼 전진(forwarding)하는 직렬구조라면 알아듣기 쉬운데 문장 흐름이 갔다 왔다 하니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아요.”
다시 선생은 〈춘향가〉의 비유를 들었다.
“〈춘향가〉를 보세요. 이별 대목에 ‘(님이) 달만큼 별만큼, 나비만큼 불티만큼 망종고개 넘어 아주 깜박 넘어가니’라는 구절이 있어요. 사랑하는 님의 얼굴이 달처럼 보이다가 별처럼 사라진다 했다가, 님 몸짓이 나비처럼 움직이다 불티처럼 가물가물해진다고 다시 반복합니다.”
선생은 “병렬식 한자구조가 한국인의 사고(思考)에 덫을 놓았다”고 말했다.
“2자와 4자의 답답한 획일주의 문화를 통해 모든 사람이 똑같은 책을 읽고, 똑같은 생각을 하며, 똑같은 (형식의) 문장으로 표현했어요. 양반 관료 사회에 획일주의보다 편한 건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저처럼 《천자문》을 읽고 ‘왜 하늘이 까매요?’라고 묻는 이가 없었을까요? 그럼 제가 천재인가요? 아니죠. 저처럼 묻는 게 너무 당연합니다. 《천자문》을 살펴보세요. 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봄 춘(春)자가 빠져 있고 ‘일(一)’부터 ‘십(十)’까지 숫자도 다 갖추지 않았어요. 심지어 동서남북의 ‘북(北)’도 없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실용적인 학습서가 아니었어요. 《천자문》 뗐다고 만세를 부르고 시루떡을 돌렸지만 그 아이는 사계(四季)의 봄도, 방향의 북쪽도 모르는 아이입니다.”
― 《천자문》은 누가 어떻게 만든 겁니까.
“중국 남북조 시대 양무제 때의 학자인 주흥사(周興嗣·470~521년)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1000자 중 한 글자도 같은 글자를 안 쓰려고 신경을 쓰다 보니 하룻밤 새에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지만 자기만족을 위한 4자 창작이지 아이들을 위한 교육용이 아닙니다.”
한자에서 도망치기

▲6세 무렵 이어령. 가족사진 속 자전거를 타고 있는 꼬마가 이어령이다. 사진=영인문학관
한자가 까다롭고 배우기 어렵다지만 요즘 젊은이들의 일상에는 한자가 녹아 있다. ‘한자 말놀이’가 그것이다. 인터넷 댓글이나 휴대전화 문자, 채팅에서 등장하더니 광고나 TV 드라마 등 제도권 안으로 흡수되고 있다.
“대중영합주의라는 뜻의 외래어 ‘포퓰리즘’에 한자를 넣어 ‘票퓰리즘’이라 써보세요. 한층 의미가 명확합니다. ‘다 주세요’라는 말도 ‘多주세요’ ‘이 사람’을 ‘李사람’이라 써보세요. ‘많이 달라’는 의미와 연결되고, ‘이 사람’이 자연스레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을 지칭합니다.”
사자성어(四字成語)도 시대에 맞게 변신하고 있다.
“‘대략난감’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지요? 이 말을 듣고 한자 사전을 뒤진다면 구세대나 쉰세대 소리를 들을지 모릅니다. ‘내로남불, 대략낭패, 완전열공, 찍먹부먹, 낄끼빠빠, 할많하않…’ 등 수없이 많지요. 좀 더 예를 들어볼까요?”
선생은 자료 조사한 것을 보여주었다.
“호구지책(호구는 지 스스로 책망한다), 고진감래(고생을 진탕 하고 나면 감기몸살 온다), 삼고초려(쓰리고 할 때는 초단 조심) 등 ‘짝퉁 사자성어’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단순한 말장난을 넘어 한글과 한자의 어울림이 재미와 함께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 소통의 도구로 보입니다.”
학교의 근대문명에서 만난 물건들

▲1940년대 만들어진 조선 영화 〈수업료〉에 나오는 국민학교 교실 모습이다. 〈수업료〉는 1940년 4월 30일 명치좌와 대륙극장에서 개봉됐다. 사진=한국영상자료원
《천자문》을 깨친 소년 이어령은 근대문명의 공간인 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는 그에게 어떤 공간이었을까?
“학교와 병원, 극장, 열차 같은 근대의 공간은 새로운 문물을 넘어 이전에 보지 못한 세상을 경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시골 아이들은 격자 창문에서 보던 문살과 창호지 대신 반짝반짝 빛나는 학교 유리창과 만나게 됩니다.
투명한 창을 통해 바다 건너 문명을 체험하게 되었죠. 물론 개화기 이전에도 유리는 있었지요. 그 유리는 근대 이전의 비단길이라고 불리던 실크로드를 따라 대륙을 건너온 것이라면, 근대 이후의 유리는 양선(洋船)을 타고 바다 건너에서 왔습니다. 유리 대신 ‘글라스’로 불렀고 컵도 ‘글라스’라고 하였지요. 일본어 발음은 ‘가라스’입니다.
학교에 간다는 것은 문자를 배우고 교육을 받는 것을 넘어 교실을 투명하게 둘러싼 유리와 만난다는 것이었어요. 유리는 경이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열쇠였습니다.
제가 온양명륜심상소학교(溫陽明倫尋常小學校)에 입학하자 아버지는 서울의 백화점에서 플라스틱 필통을 사다 주셨습니다. 그때는 플라스틱이라는 단어 대신 셀룰로이드로 불렀죠. 나무빛깔이나 누런 종이 같은 바랜 색이 아니라 보석처럼 빛나는 무지개색이었습니다. 필통을 열면 색색의 연필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고 고무지우개가 들어 있었죠.”
잠시 침묵하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앞선 세대들은 남포등 아래 석유 냄새까지는 맡았지만, 고무 냄새는 맡지 못했습니다. 향이 풍기는 지우개는 먹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켰어요. 손에 쥐면 그 말랑말랑한 촉감은 또 어떻고요. 그런 소재를 평생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었어요. 필통을 열면 감각이 확장되고 낯선 공간으로 여행을 떠나온 느낌이었죠. 1930년대 어린아이의 학교 체험이 바로 거대한 문명 체험이었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 최고의 과일은 바나나였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뒷동산에서 열리는 과일이 아니었으니까요. 바나나는 야자수가 연상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스콜을 떠올리게 합니다. 컴컴한 밤의 북두칠성이 아니라 남극성, 남태평양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열대 과일이었죠.
그렇게 우리는 문풍지, 남포등, 메주 냄새에서 벗어나 학교에서 유리와 고무지우개, 셀룰로이드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소년 이어령에게 근대는 등에 멘 ‘란도셀’과 같았다. 란도셀은 유럽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군용 가죽가방이었지만 학생들의 통학용 가방으로 이용되었다.
분명, ‘보자기(혹은 책보)’를 옆구리에 끼고 통학하는 아이들은 시골뜨기였고, 란도셀을 멘 아이들은 서울내기였다.
“서울에 다녀오신 아버지가 란도셀을 사다 주셨습니다. 무명천으로 만든 친구들의 책보는 김칫국물이 줄줄 새는 것이었지만 저는 보자기가 아닌 란도셀을 메고 다녔던 것입니다. 란도셀의 빛깔은 대개 검정, 빨강이었고 가죽 냄새가 물씬 풍겼습니다. 교실에서의 근대화, 서구화란 가죽 냄새 풍기는 란도셀에서 발견할 수 있었죠.”
근대문명의 그늘
“란도셀을 메고 학교에 가는 상상만 해도 즐거웠는데, 마치 하루하루가 잔칫날처럼 느껴졌습니다. 친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란도셀은 그야말로 꿈을 담은 가방이었습니다.
그러나 란도셀은 자랑스럽고 편리한 것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물건을 빼앗고 구속하고 말았어요. 친구들은 부러워했지만 저에겐 큰 짐과 같았어요.
책보는 교실에 들어가 교과서와 필통을 꺼내고 나면 한 장의 넓적한 평면으로 변합니다. 접으면 흔적을 찾을 수 없죠. 그러나 란도셀은 교실 밖이든 안이든, 내용물을 넣건 꺼내건 그 형태와 크기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의자 한쪽에 걸어두면 친구들이 뛰어다니다 제 란도셀을 건드는 겁니다. 행여 다칠까 봐 가슴에 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란도셀이 책과 학용품을 넣어 옮기는 목적 이외 아무것도 포용할 수 없는 물건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죠.
하굣길, 친구 아버지가 ‘아무개야. 참외 가져가라’고 하면 책보 멘 친구들은 보자기에다 참외를 쌀 수 있었지만, 란도셀은 그런 공간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친구 책보는 덩치 큰 수박까지 쌀 수 있어 마법의 양탄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란도셀에는 예쁜 꽃 한 송이, 못생긴 개구리참외조차 넣을 수 없었어요.”
학교교육과 서당교육의 차이
선생은 “그때부터 학교 시스템이, 그러니까 근대교육의 시스템 속에 어둠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신시대 여명을 경험하자마자 문명의 석양, 그 폐부가 불길하게 어른거렸던” 것이다.
“빛나던 학교 유리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난을 치다 행여 유리창을 깨면 그 아이는 죄책감이 들었어요. 금지된 장난이자 문명의 반역, 최초의 범죄로 비칠 수 있었죠. 지우개도 그랬어요. 지우개를 반쯤 쓰면 색이 시커멓게 변하고 모양도 이지러졌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제일 먼저 지우개가 사라졌습니다. 남양(南洋)에서 만든 고무가 한반도까지 오지 않았던 겁니다. 죄다 장병들의 군화로, 전쟁물자로 쓰이면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근대 초기에는 서양의 기술문명을 받아들여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는 것이 근대화라 여겼다. 개화파들은 국가 존망이 자강(自强)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교육과 산업발전을 통한 실력양성을 자강으로 여겼다.
일찍이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배우기 위해 시찰단(영선사, 신사유람단)을 파견했다. 외국어에 능한 사람을 양성하기 위해 동문학(同文學·1883년), 육영공원(育英公院·1886년) 같은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처럼 근대교육이 제도적으로 정비된 것은 갑오개혁(1894년) 때였다. ‘교육조서’가 반포되고 6년 연한의 관공립소학교가 건립되었으며 각종 교과서 편찬이 그즈음에 이뤄졌다.
“돌이켜보면 개화기 중심의 문명은 공급자 중심이었습니다. 학생이 가르칠 교(敎)가 들어가는 ‘교실’에 가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왜 배울 학(學)을 붙여서 ‘학실’이라 이름 짓지 않았을까요? 학생이 배우는 책도 ‘교과서’라고 불렀습니다. 학습자 위주의 ‘학습서’ ‘학과서’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 위주로,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 중심으로 학교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南冥 선생과 공자의 가르침

▲김홍도 작 〈서당도〉. 18세기 후반 교육 현장을 보여준다. 그림=국립중앙박물관
어쩌면 일제의 식민지 교육 때문일지 모른다.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기조 위에 교육목표를 조선인의 황민화에 두었다. ‘충량(忠良)한 국민양성’이란 목표는 일본 군국주의 교육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교실 풍경은 어떤가요? 교탁이 교실 가운데 우뚝 서 있고 교단은 학생들을 내려다볼 수 있게 높습니다. 과거 서당은 달랐습니다. 훈장 선생은 보료에 앉을 뿐입니다. 동양에서 학문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 주체였어요. 《논어》의 첫 구절은 ‘학이시습 불역열호(學而時習 不亦說乎)’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근대 이전에 많이 쓰이던 ‘학당’ ‘학원’이란 이름은 모두 배우는 사람을 주체로 한 말입니다.
교육 주체가 배우는 쪽에서 가르치는 쪽으로 바뀐 것은 근대 이후입니다. ‘수우미양가’ ‘갑을병정’으로 매기는 평가와 서열도 그때 생겨난 것입니다.”
― 옛날 서당의 평가방식이 궁금합니다.
“서당에서는 평가를 ‘문자’로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재주가 뛰어나 과민한 자에게는 ‘우(愚)’라는 문자를 나눠주었죠. 반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독선가에게는 ‘인(仁)’, 효행심이 부족한 자에게는 어미 새에게 은혜를 갚은 반포지효(反哺之孝)의 ‘오(烏)’, 그리고 성급한 자에게는 느리게 걷는 ‘우(牛)’를 써주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 선조 때 명상(名相) 정탁(鄭琢·1526~1605년)이 출사(出仕)하게 되어 하직 인사차 스승인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년)을 찾아갔습니다. 스승이 ‘뒤뜰에 매어 둔 소 한 마리를 몰고 가게나’라고 하였습니다. 정탁이 매어 놓은 소가 없어 어리둥절해 하자 남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언어와 의기가 너무 민첩하고 날카로우니 날랜 말[馬]과 같다. 말은 넘어지기 쉬운지라 더디고 순한 것을 터득해야만이 능히 멀리 갈 수 있으므로 소를 준다고 하였네.’ 마음의 소를 주겠다는 말이었어요. 이후 정탁은 항상 마음의 소와 더불어 우보(牛步) 처세를 게을리하지 않아 정승에 올랐습니다.
공자(孔子)는 똑같은 질문을 던진 두 제자에게 정반대의 대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언제 실천해야 합니까’ 하고 제자 자로가 묻자, 공자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은 후에 행해야 한다’고 했고, 이튿날 제자 염유가 같은 질문을 하자 ‘망설일 것 없다. 바로 행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가 ‘왜 어제와 오늘의 대답이 다릅니까’ 하고 물었는데 공자의 답은 이러했습니다.
‘자로는 조금 성급한 면이 있으므로 신중함을, 염유는 우유부단하므로 행동력을 강조한 것’이라는 답이었습니다.
이처럼 근대 이전 교육은 획일적인 기준 대신 한 사람씩 맞춤교육을 하였습니다. 서당이란 작은 공간에서 여섯 살과 스무 살이 함께 배울 수 있었죠. 때로 낡은 것이 새롭고 새로운 것이 낡을 수 있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와 줄탁동시
이 대목에서 선생은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89)를 떠올렸다.
“키팅 선생님은 자신을 부를 때 ‘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이라고 부르도록 하고, 시론(詩論)을 강의하며 교과서의 ‘시의 개론’ 부분을 찢어버리라고 지시합니다. 키팅이 학부모의 압력으로 학교를 떠나는 마지막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학생들이 차례차례 책상 위에 올라서는데 ‘의자에 앉았을 때와 책상 위에 올라섰을 때 세상은 달라 보인다’는 그의 가르침을 잊지 않겠다는 시위였어요. 눈물 나는 장면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전근대에서 근대로 바뀌는 체험은 얼마나 놀랍고 설레는 일입니까? 그러나 그때의 가르침은 줄탁동시(啐啄同時·병아리가 알을 깨기 위해서는 어미와 새끼가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의 교육이 아니라 식민지배와 전쟁으로 내몰기 위한 교육이었습니다. 《천자문》을 뗀 아이가 입학해 일본 교과서의 ‘붉은 일장기’를 배우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보급대로 정신대로 징병으로 끌려가던 형과 누나를 바라보면서 얼마나 슬프고 혼란스러웠을까요? 식민지 아이들은 묵비사염(墨悲絲染)의 모습이었습니다. 붉은색을 칠하면 붉은 실이 되고 노란색을 칠하면 노란 실이 되듯이 말이죠.
안타깝게도 어느 교육학자들도 당시 아이들의 심리를 연구하지 않았어요. 만약 식민지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치 점령하의 안네 프랑크처럼 그 순간순간을 일기로 기록하고 싶습니다.
지금의 우리 교육도 되짚어봐야 합니다. 미리 결론 내리고 정해진 해답을 만들어 틀을 씌우는… 누구도 만행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방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일제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소학교에 입학하자 느닷없이 교명이 바뀌었다. ‘온양국민학교’가 된 것이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은 일제가 태평양전쟁 등 침략전쟁을 본격화한 1941년 2월 28일 일왕 히로히토의 칙령 제148호에서 처음 발견된다. 창씨개명을 강요하기 시작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국민을 위해, 나라를 위해 가르치는 것이 교육입니까?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인격체로 성장해 꿈꿀 수 있는 주인공이 되고, 가장이 되며, 국민이 될 토대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교육입니다. 붕어빵처럼 국가가 요구하는 인간을 만드는 의무교육이어선 안 됩니다.
학교에서 신체검사를 하고 머릿니를 잡으려 DDT를 뿌리며 회충약을 주었어요. 내 몸이 국가의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체력은 국력이라며 체육을 가르쳤어요. 체육은 체조교육의 줄임말입니다. 덴마크에서 가져온 체조를 통해 식민지인을 근대인으로 개조하려 한 것입니다.
남만주철도 초대 총재와 내무·외무 대신을 지낸 고토 신페이(後藤新平)는 ‘폭력이 아닌 의술과 인프라로 식민지를 다스려 자청해서 따라오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죠. 소위 위생(衛生)을 가르쳤던 겁니다. 이게 바로 푸코(Michel Paul Foucault)가 말하는 생정치(Biopolitics)입니다. 무서운 헌병의 채찍이 아니라 구충제 주고 때를 씻겨 ‘이게 너의 행복이고, 이 행복을 국가가 준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일본이 가져온 근대화 세례들은 자기네 것이 아니라 서양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일제를 통해 근대화를 이뤘어도 동화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국인의 빗장을 풀고 무장을 해제시킨 것은 일본식 난방장치 ‘고타쓰’가 아니라 서양식 ‘스토브’였던 겁니다.”
《세계문학전집》과 東道西器
선생은 “추운 겨울, 강이 얼어도 그 얼음장 밑으로는 따뜻한 물이 흐르는 법”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저는 36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을 읽었습니다. 일본문학을 읽은 것이 아니라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발자크, 호메로스를 읽었습니다. 저는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자가 아니었어요. 일제 구군신(九軍神)에게 세뇌당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웃기는 놈들이라고 생각했죠. 도스토옙스키가 구군신,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처럼 자폭하는 것을 찬성하겠습니까?
파 뿌리 하나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고, 그리스·로마 신화를 달달 외웠습니다. 문학을 통해 서구 교양을 익혔고 전체주의적 군국주의 사상에 전염되지 않았습니다. 그 교양이 마음속 자유공화국을 세울 수 있었고, 그 ‘영토’를 지금껏 유지하고 있죠.”
― 한·중·일(韓中日) 세 나라의 근대화 과정이 어떻게 다른가요.
“중국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의 관점에서 서구문물을 받았습니다. 중국 본래의 유학(儒學)을 중심으로 하되 부국강병(富國强兵)하기 위해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었죠.
근대화 시기의 일본 구호는 화혼양재(和魂洋才)입니다. 일본이 지닌 전통을 중시하면서(和魂), 서양서 배운 학문·지식·기술을 발전시키자(洋才)는 뜻입니다.
한국의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은 동양의 도덕·윤리를 유지한 채 서양의 기술·문명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한다는 사상입니다. 중체서용에선 한국·일본이, 화혼양재에선 한국·중국이 빠져 있지만 동도서기에는 한·중·일이 모두 포함돼 있어요. 다시 말해 중국과 일본은 자국 중심으로 서양을 받아들였지만 우리는 동양인으로서 문물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클래스가 다르고 논리가 다르지요.”
〈오징어 게임〉에 숨어 있는 인류의 미래

▲대전 유성구 남선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오징어 게임’ 놀이를 하고 있다.
넷플릭스의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에게 오징어 게임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서려 있다. 이 게임은 지역마다 오징어가이상, 오징어다방구, 오징어가생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일본 기원설이 회자된다.
오징어포에서 기인한 가이산(海産·かいさん), 바깥 선을 뜻하는 가이센(外線·がいせん), 양쪽이 어울려 싸운다는 가이센(會戰·かいせん)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있다.
선을 긋고 몸싸움을 벌이는 형태의 놀이는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과 정확하게 대응된다고 할 만한 놀이는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 이번에는 유년 시절 놀이 문화에 대해 들려주십시오.
“집단 놀이는 근대 문화의 산물입니다. 일본의 놀이 문화가 한반도로 유입됐다는 설이 있는데 기원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일본 봉건시대인 에도(1603~1867) 때에도 놀이 문화라는 게 없었습니다.
오징어 게임이 일본에서 왔다는 주장이 있던데 그게 왜 문제가 됩니까? 〈오징어 게임〉 같은 TV 시리즈를 일본이 못 만든 게 문제지요. 일본에서 화려하게 꽃피운 문물 모두 서구에서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일본이 자랑하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도 모두 서구에서 들여온 장르입니다.”
― 어린 시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오징어 게임 같은 놀이를 직접 하였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는 그런 놀이가 없었어요. 해방 이후 생겨나지 않았나 유추해봅니다.
어른이 되면 알게 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즐거운 것은 어린 시절 놀이 경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죠. 그때는 어머니가 ‘밥 먹으러 오라’는 소리가 싫고 원망스러웠습니다. 이겨도 즐겁고 져도 즐거웠습니다.
비록 몸은 이미 어른이지만 기억을 되돌려 어린 시절로 돌아가 놀고 싶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살아남기 위해 기꺼이 남을 해치고 죽여야 합니다. 그런 비정한 현실을 〈오징어 게임〉이 보여주고 있어요.”
엄마의 ‘밥 먹으러 오라’는 소리가 싫었던 기억
선생은 잠시 숨을 돌린 뒤 말을 이어갔다.
“조폭이 나오고 빚쟁이, 목사, 은행 지점장, 장기밀매 의사, 외국인 노동자, 유리 기능공 등 다양한 인간 군상(群像)이 캐릭터로 나옵니다. 완력으로 누르고 배신하며 별의별 꾀를 써서 속아 넘겨도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이는 ‘착한 사람’입니다. 지성을 상징하는 조상우(박해수 분)가 휴머니티를 상징하는 성기훈(이정재 분)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기훈은 상우를 죽여야만 게임에서 이길 수 있었죠. 하지만 막상 죽음과 맞닥뜨리니 죽일 수 없었습니다. 상우는 그런 기훈에게 자기 어머니를 부탁하며 자결하면서 게임은 끝이 납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을 죽여도 된다고 여기지만, 그게 인간 본성이라 여기지만, 아닙니다. 본성에는 착함이 있어요. 인간은 인간을 믿을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에 인류가 여기까지 온 겁니다.
구슬치기에서 극중 지영(이유미 분)이 강새벽(정호연 분)을 위해 일부러 져줍니다. 남을 위한 희생은 약육강식이 난무하고 살기 위해 배신하는 리얼리즘 세계를 간단히 뛰어넘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믿을 만하고 아직 사랑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난폭한 현실의 오징어 게임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방식은 사랑과 희생에 있다고 말이죠. 저는 극중 성기훈의 ‘성’이 세인트(聖)를 뜻한다고 봅니다.”
팽이치기 추억과 겨울털모자

▲빙판 위 팽이 놀이를 하는 아이들. 사진=조선일보DB
― 어린 시절 놀이를 떠올려주세요.
“추운 겨울이면 팽이치기를 하였죠. 겨울 풍경을 떠올려봅니다. 긴 정적처럼 산도 들도 강도 꽁꽁 어는데 딱 하나, 팽이만 팽팽 돌아갑니다. 팽이만이 날개 달린 곤충처럼 얼음판 위를 미끄러집니다.
팽이는 장난감 가게에서 사지 않고 나무를 깎아 만들었습니다. 팔뚝만 한 박달나무 가지를 잘라서 배추 밑동 깎듯이 낫으로 깎아 원추형으로 만듭니다. 뾰족한 팽이의 끝은 자전거에서 빼낸 쇠구슬을 박았죠. 그것을 구할 수 없으면 못을 박기도 하였어요.
이렇게 해서 만든 팽이가 아이들의 손때가 묻으며 점점 길이 들면 무슨 신경을 가진 곤충처럼 부드러운 날개 소리를 내며 돌아갑니다. 가장 오래 돌고 가장 힘이 세며 또 가장 윤이 잘 나는 팽이를 가진 아이는 마을 아이들의 영웅이 됩니다.”
선생의 회고다.
“친척에게 양자로 간 형이 있어요. 형은 아버지에게 값비싼 털모자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 모자가 에스키모인들이 쓰는 것 같은 수달피 가죽의 털모자였는지, 하얀 방울술이 달린 스키 모자였는지, 또 그렇지 않으면 셀룰로이드의 안경이 달린 파일럿 모자였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서울의 백화점에서 산 겨울털모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가 어느 겨울, 이 모자를 자랑하려고 바깥에 나갔다가 일생을 지배하는 그 사건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털모자를 쓴 형은 그 마을에서 제일 잘 도는 팽이를 갖고 싶었습니다. 형은 그 귀한 털모자와 팽이를 맞바꾸고 말았습니다. 형이 생각하기에 털모자가 아무리 값비싸도 팽이만큼 겨울의 추위를 잊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 모자 값으로 팽이 수백 개를 사고도 남았지만 겨울 햇살에 번쩍거리는 빙판 위를 돌아가는 팽이만이 즐겁고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자치기와 구슬치기, 딱지치기, 단추놀이

▲구슬치기 놀이는 유년 시절 소중한 추억이다. 사진=조선일보DB
자치기는 길고 짧은 두 개의 막대로 치며 노는 아이들 놀이를 말한다. 구슬치기는 구슬을 땅에 놓고 떨어진 곳에서 다른 구슬을 맞혀서 구슬을 빼앗는 놀이다.
“20~30cm 되는 긴 막대로 10cm 안 되는 작은 막대를 쳐서 공중에 튀어 오른 것을 다시 쳐서 멀리 보내는 놀이입니다. 요즘의 야구 식으로 멀리 날아가게 만듭니다. 긴 막대는 작대기이자 부지깽이, 부젓가락 같은 것이죠. 어린 시절 제 양 호주머니에 나무토막이 가득했습니다.
그땐 유리구슬을 소구(小球)라고 불렀는데 동그랗고 매끄러웠어요. 수정처럼 투명하게 속까지 다 비치는 장난감은 유리구슬밖에 없습니다. 작은 우주와 같았죠. 마법처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어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한 아이가 장난치다가 문지방과 미닫이 문틈으로 소구를 빠뜨리고 말았어요. 늘 잃어버린 구슬이 마음에 걸렸지만 찾을 수 없었죠.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아이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도시를 떠돌다 낙향하면서 그 소구를 찾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문을 뜯어 결국 찾습니다. 그러나 큰 충격을 받아요. 보잘것없는 싸구려 구슬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기억 속에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영롱한 수정처럼 반짝이고 있습니다.
딱지 한 장을 땅바닥에 놓고 다른 딱지로 쳐서 뒤집는 딱지치기도 신나는 놀이였지요. 보통 문방구에서 파는 딱지는 일제 군국주의의 산물인 군대 계급장이 인쇄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책이나 공책의 두꺼운 겉표지, 혹은 신문을 접어 딱지로 만들었어요.”
어린 시절 놀이가 재미있는 이유

▲무언가를 응시하는 이어령 선생의 모습이다. 사진=김용호
― 우리는 저마다 유년의 놀이 체험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왜 놀이가 재미있을까요? 놀이는 절대 실력만으로 안 됩니다. 운이 있어야 합니다. 가위바위보처럼 백번 지다가도 한번은 반드시 이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덩치 큰 놈과 싸우면 절대 이길 수 없지만 아무리 약골이라도 가위바위보로는 이길 수 있습니다.
게임에서 운은 승자의 기쁨을 주기보다 패자의 구실을 만들어준다는 것에서 우리 인생과 같습니다. 아무리 약한 놈도, 강한 놈도 운에 따라 이기고 질 수 있습니다.”
그 시절, 시골 아이들은 한복에 옷고름을 맸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교복이라는 것을 입어야 했다. 형편이 어려우면 무명을 검게 물들여 제복(교복)으로 입었다. 교복에는 5개 단추를 달아야 했다.
“단추가 대개 볼록 나와 있었어요. 단추놀이라는 게 있었는데 교복 단추를 눌러서 찌그러지면 지는 겁니다. 안 찌그러진 단추는 자랑스런 훈장과 같았죠.
남자의 훈장, 남자의 액세서리가 바로 단추입니다. 적장(敵將)을 모욕할 때 단추부터 떼잖아요. 왜 제복(교복)의 단추가 5개냐? 오행 사상을 담고 있어요. 아무리 제복, 교복이 서구의 산물이라지만 동양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겁니다. 5음절로 된 궁상각치우, 인의예지신, 도개걸윷모처럼 말이죠.”
아름다운 도시락 도둑 이야기

▲난로 위에 올려진 양은 도시락. 옛 교실을 재현한 남이섬의 한 카페 모습이다. 사진=조선일보DB
40대 이상 기성세대들에게 도시락 하면 조개탄을 넣은 겨울 난로가 먼저 떠오른다. 난로에 간단한 구조물을 만들어 그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아 데워 먹었다. 선생의 도시락 추억이다.
“등교하면 난로에 층층이 도시락을 쌓습니다. 난로 가까이 먼저 데워진 도시락은 시간이 지날수록 뒤로 옮겨집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맨 위에 있던 차갑던 도시락이 난로와 가장 가까이 있게 되죠. 이렇게 해서 모든 도시락이 다 훈훈하게 데워집니다. 문제는 밥과 함께 반찬을 난로 위에 올려놓아 가끔 김치 끓는 냄새가 나기도 합니다. 온 교실이 김치 냄새로 가득했지요.”
선생은 천부적인 이야기꾼답게 도시락에 얽힌 감동 사연을 풀어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부잣집 엄마가 아이의 학교로 찾아갔어요. 아이 도시락이 매번 바뀌어서 온다며 담임 선생님께 항의를 했죠. 아이의 선생님은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엄마는 ‘맛있는 반찬을 담아 도시락을 싸주었는데 하교한 아이가 건넨 도시락에는 먹다 만 무짠지가 가득하더라’는 겁니다. 누군가 자기 아이의 도시락을 빼앗아 먹었다고 확신한 것이었죠.
담임 선생님은 교실로 돌아가 탐문을 했고 결국 도시락 도둑을 찾아냈습니다. 사연은 이랬습니다. 부잣집 아이는 난로 위에 층층이 쌓은 도시락 중에서 가난한 친구의 도시락을 가져갔던 것입니다. 가난한 친구는 마지막에 하나 남은 도시락을 택할 수밖에 없었죠. 그 도시락에는 맛있는 반찬이 가득했습니다. ‘아름다운 도둑은 바로 당신 아이’라는 선생님 말씀에 부잣집 엄마는 큰 감동을 받았지요.”⊙
④ 맛과 멋, K-푸드
“한식의 특성은 생성의 美學, 융합의 味學”
⊙ ‘진지 드셨나요?’ 인사하는 민족… 동남아 국가도 ‘식사 인사’
⊙ ‘먹는다’는 시대의 문화와 사랑 담아… ‘한 골 먹었다’ ‘살맛 난다’ ‘죽을 맛’ ‘싱거운 놈’
⊙ 동물과 구별된 인간의 속성… ‘함께 사는 것’ ‘함께 밥을 나눠 먹는 것’(conviviality)
⊙ “화합과 함께 살아가는 우주적 메시지를 담은 음식이 탕평채(蕩平菜)”
⊙ “한국 음식은 대개 삭히고 끓이고 무치고 섞는 방법으로 요리”

▲사색에 잠긴 이어령 선생. 사진=김용호 작가
연초 이어령(李御寧)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를 만나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영감이 가득한 짐보따리 하나씩을 풀어냈다. 잊었던 옛 시문(詩文)에서 만나듯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우리는 지난 1월 7일과 10일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만났다. 선생은 육체적 난항(難航)을 헤쳐나가며 혼신을 다해 영적(靈的)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말 마디마디는 기울기의 변곡점처럼 살아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식구(食口)라는 말은 가족을 뜻합니다. 직역하면 먹는 입이죠. 가족이 많다란 말은 곧 먹는 입이 많다는 의미가 돼요.
‘너희 집 식구가 몇이냐’고 물으면 우리 집 식구 수를 손꼽아 대답하는데 전혀 이상하지 않죠. 도시 내 사는 사람, 나라 전체의 국민들도 사람의 입, 인구(人口)라고 하고, 호구(戶口) 조사라고 합니다.
사람을 셀 때 뇌가 있는 머릿수(頭)로 계산하여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라고 하면 이상합니다. 그러나 한 입, 두 입이라고 하면 어색은 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지요.
한자문화권에서는 포로나 노비 그리고 소와 같은 가축도 식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입으로 수를 따져 생구(生口)라고 불렀어요. 광개토대왕비에는 396년 백제가 고구려에 대패해 생구를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런데 가축 가운데 소만 생구라고 불렀지, 먹고 자기만 하는 돼지나 개는 생구라고 하지 않았어요. 땀으로 함께 일하고 한솥밥 먹는 대상에게만 ‘입 구(口)’를 썼던 겁니다.
중국 《한서(漢書)》에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民以食爲天)’는 맹자의 말이 나옵니다. 먹는 것으로 지고한 하늘의 뜻을 배우고 섬긴다는 말이지요. 먹는 것은 물질이 아니고, 경제도 생리도 아닌 것으로 여겼습니다.”
‘진지 잡수셨습니까’ 하고 인사하는 민족
▲동남아 국가의 다양한 ‘진지 드셨습니까’ 인사들.
이 대목에서 잠시 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먹는 입을 ‘생명의 문’으로 여겨서인지 먼 옛날 우리나라엔 밥집이 없었습니다. 밥이나 물, 공기 같은 생명을 사고파는 장사를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여겼어요. 대신 술집[酒幕]이라고 해놓고 밥을 팔았던 겁니다. 밥은 남에게 팔 수가 없어요. 거저주는 것이니까요.”
곧이어 인사말에 담긴 ‘먹는 것’의 의미를 분석했다.“
우리는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 먹었니?’ 하고 인사하는 민족입니다. 얼마나 가난하고 배가 고팠으면 남들이 ‘굿모닝’ ‘좋은 아침’이라 인사할 때 그렇게 인사했을까요?
고학하던 대학 시절, 뭘 제대로 먹었겠어요. 아침밥 안 먹고 학교 가는 일이 많은데 친구가 ‘야, 밥 먹었냐’ 그러면 기분이 나빴어요. 어떻게 나 밥 굶은 거 알고…. ‘먹었다 왜?’ 하고 싸움이 나는 겁니다. (웃음)
그런데 ‘진지 드셨냐’는 인사말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캄보디아 같은 동남아에서도 이런 인사를 한다고 해요.
우리 민요에 이런 노래가 있었어요. ‘황새야 황새야 뭘 먹고 사니/ 이웃집에서 쌀 한 됫박 꿔다 먹고 산다/ 언제 언제 갚니/ 내일 모레 장 보아 갚지.’
”지도에 없는 ‘고개’와 ‘섬’ 하나
이야기꾼인 선생은 유머를 잃지 않았다.“
지금은 잊혔지만 지지리 가난하던 시절, 자신의 처지를 황새에게 비유했지만 요즘 생각해보면 굶주림에 굴복하지 않고 먹는 것을 미학적, 철학적 단계로까지 끌어올린 민족이 우리 말고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웃음)
우리나라에 지도에 없는 ‘고개’와 ‘섬’ 하나가 있었다고 하지요. 하나는 ‘보릿고개’, 다른 하나는 ‘그래도’라는 섬. 한국인은 춘궁기 보릿고개를 넘기 어려웠지만 굶주림에 손들고 항복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정신으로, 쓰러지다가도 다시 일어나 앞을 향해 걸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섬 3348개에 없는 ‘그래도’라는 섬 덕택에 시련을 이겨온 한국인이지요.”
선생의 유머에는 통찰이 담겨 있었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우리나라만큼 ‘먹는 맛’의 표현이 많은 나라도 없어요. 한국인에게 ‘먹는다’는 단순히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시대 문화와 사랑을 담았습니다. 또 한국 미학의 근본으로 꼽고 있는 ‘멋’이란 말이 먹는 ‘맛’에서 나온 말이라고 학자들이 말해요. 그러고 보면 미각언어가 발달한 것도 다 그런 데에 있어요. 아무리 언어가 풍부한 나라도 ‘쓰고’ ‘씁쓸하고’ ‘쓰디쓰고’ 또 ‘달고’ ‘달콤하고’ ‘달짝지근하고’를 구별하긴 어려울 거예요.
세상을 살아가는 생사고락을 ‘쓴맛, 단맛 다 봤다’고 하잖아요. 슬픔도 기쁨도 어금니로 씹어 먹고 미각으로 맛보는 한국인에게 ‘먹는다’는 것은 짐승처럼 단순히 먹는 것을 넘어 깊은 뜻을 담았던 겁니다. 신바람이 나면 ‘살맛 난다’, 고통스러우면 ‘죽을 맛이다’고 하지요. 살고 죽는 철학적, 종교적 의미를 우리는 먹는 맛으로 표현했어요.”
3대 불가사의 ‘먹는다’
▲2002 월드컵 한국-독일 4강전을 광화문에서 응원하던 시민들이 경기가 끝난 후 태극기를 펴들고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
음성은 낮았으나 말은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사람의 성격을 맛으로 표현하는데 ‘싱거운 놈’ ‘짠 놈’ ‘매운 놈’이라고 하잖아요
어디 그뿐인가요?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세계를 놀라게 한 3대 불가사의가 있었다고 하지요. ‘대~한민국’ 하고 손뼉치는 것, 새벽부터 전광판 앞에 앉아 있는 길거리 응원,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뭔지 알아요? ‘한 골 먹었다’는 표현이래요. 영어로는 ‘로스(loss)’인데 우리는 굳이 ‘먹었다’고 합니다.
한국인처럼 ‘먹는다’는 말을 이렇게 다양하게 쓰고 있는 나라는 없을 것 같아요. 홍수환 선수의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란 말도 유명하지 않나요.”
‘먹다’라는 표현은 그야말로 부지기수다.
‘밥을 먹었다’는 기본이고, 남의 재물을 부당하게 빼앗을 때 ‘곗돈을 먹고 달아났다’, 뇌물을 받았을 때 ‘뇌물을 먹다’, 수익이나 이문을 가지라는 뜻으로 ‘나머지 이익은 네가 다 먹어라’, 꾸지람을 듣고 ‘호되게 욕을 먹다’, 어떤 마음이나 감정을 품을 때 ‘마음을 굳게 먹다’, 공포나 위협을 느끼면 ‘겁을 먹다’, 해가 바뀌어 나이 한 살을 더할 때 ‘나이 먹다’, 일사병에 걸릴 때 ‘더위 먹다’, 봉록 따위를 받을 때 ‘녹(祿)을 먹다’ 등등이 있다.
선생은 먹는 행위에 사회적, 철학적 의미를 투여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초등학교 1학년 산수 시간에 선생님이 한 학생에게 문제를 냈어요. ‘사과 열 개 가운데 3개를 먹었다. 몇 개가 남았느냐’고. 한 학생이 계속 ‘세 개가 남았다’고 하자 선생님이 ‘세 개를 먹었다는데 왜 세 개가 남느냐’고 화를 내자 학생이 그러는 거예요.
‘우리 엄마가 그러시는데 먹는 게 남는 거래요.’
‘먹는 게 남는 것’은 배고파서 먹는 게 아니에요. ‘먹는다’는 것은 내 안에 들어와 없어진다,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오감(五感)을 거리로 따지면, 시각이 제일 멀리 있고 그다음으로 청각, 후각, 촉각인데 미각은 (내 안으로 들어온) 상대가 없어지는 겁니다.
지금도 시골 잔치를 하면 온 동네 사람이 다 옵니다. 지나가던 거지도 한술 뜨고 가게 해요. 먹는 것에 우열이 있을 수 없고 다 평등하니까요.
”선생은 미국의 심리학자 케네스 케이(Kenneth Kaye·1946~2021)의 이론을 소개하며 “먹는 것 이상의 사랑을 구하는 지구상 유일한 포유류가 인간”이라고 말했다.“
‘먹는다’는 표현은 단순히 신진대사를 위한 생물학적 욕망을 의미하지 않아요. 미국의 심리학자 케네스 케이에 따르면 젖을 빠는 포유동물 가운데 젖꼭지를 문 채 잠시 멈췄다가 다시 빠는 것은 사람밖에 없다고 합니다. 왜 젖을 먹다 말고 멈추는 걸까요?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고 해요. 가볍게 흔들어 달라는 신호라는 것이지요. 그것도 태어난 지 이틀도 안 된 아기가 말이지요.”
共食
― 놀랍네요.
“그러면 산모도 무의식적으로 아기를 가볍게 흔드는데 그러면 아기가 다시 젖을 빨아요. 이렇게 주기적으로 젖을 빨다 말고 멈추면, 엄마가 흔들고, 다시 빠는 독자적인 리듬을 만들면서 대화를 하는 것이지요.
전문가들은 이것을 ‘엄마와 아기의 발레’라고 아주 멋지게 표현하는데 아기를 가볍게 흔들어주는 동작은 엄마와 아기만의 독자적인 리듬이 있는 발레 동작인 셈이죠. 먹는 것, 젖을 빠는 것을 통해 상대와 일체화하는 유대를 형성하는 겁니다. 먹는 것을 통해, 먹는 것 이상의 사랑을 구하는 지구상 유일한 포유류가 인간이지요.
인간은 여타 동물과 달리 수렵과 채집을 통해 획득한 음식을 혼자 독식(獨食)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대개 가족과 함께 먹습니다.
말하자면 ‘공식(共食·common meal)’이었던 셈입니다. 공식은 ‘가족·친족, 지역공동체의 성원이 모여 같은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일’을 의미하는데, 이때 음식은 사회적 단결과 친목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어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제례나 축제 등 공동사회의 다양한 행사에 음식과 술이 빠지지 않았던 이유지요.”
콘비비알리티와 聖餐式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속성을 연구한 이반 일리치 교수
선생에 따르면 미국 예일대 교수를 지낸 이반 일리치(Ivan Illich·1926~2002)는 콘비비알리티(conviviality·향연 혹은 연회)라는 키워드로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속성을 연구했다고 한다. ‘함께 사는 것’ ‘함께 밥을 나눠 먹는 것’이 콘비비알리티다.
“상생하는 것, 같이 먹는 것, 그게 인간의 목적이고 사회의 궁극적인 목표죠. ‘먹는다’는 인간의 가치문제고 소통의 문제고,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거예요.
그런데 함께 모여 같이 먹는 동물은 고릴라밖에 없어요. 짐승들은 같이 사냥은 해도 먹을 때는 서로 먹겠다고 싸웁니다. 인간이 왜 평화로운 짐승이냐? 함께 나눠 먹는 존재니까요. 나눠 먹고 함께 먹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해요.
라틴어 코뮤니스(communis)에서 유래한 말로 코뮤니타스(communitas)라는 말이 있는데, 무상의 나눔을 서로 가질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가진 생활 공동체를 뜻합니다.
또 커뮤니온(communion)은 어떤 일을 함께하는 친교 활동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성체인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는 가톨릭의 성찬식(聖餐式)을 ‘The Holy Communion’이라고 하죠.
가톨릭 미사에서 예수님의 성체를 신자들에게 나눠주고 먹게 합니다. 신자들은 그 성병(聖餠), 혹은 성체성사 때 쓰는 누룩 없이 만든, 얇고 동그란 제병(祭餠)을 입에 넣고 녹여 먹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초대(初代) 교회 때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성체는 효모를 쓰지 않은 딱딱한 보리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빈자와 약자 편인 예수님이 효모를 넣은 하얀 밀가루(小麥)빵을 먹었을 리 없었다는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은 모든 제사에 효모를 쓰지 않는 딱딱한 빵을 썼다. 그러니 초기 교회 신자들은 미사 때 딱딱한 빵(성병)을 씹어 먹었지, 요즘처럼 녹여 먹지 않았을 것이다. (조종건 목사의 ‘성체(聖體)로서의 빵’ 참조)
“어찌 보면 딱딱한 빵을 입안에 넣어 녹여 먹기 쉽게 만들면서 교회가, 우리 신앙이 말랑말랑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요즘 먹거리 대부분이 먹기 쉬운 유동식(流動食)입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날 문명사회가 과거의 거친 빵처럼 딱딱한 것, 어려운 것, 힘든 것에 어금니를 깨물고 도전하는 정신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지 고잉(easy going)’ 하고, 쉽게 살려는 유동식 문화에 젖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 제자들과 가진 ‘최후의 성찬식’ 모습이다.
다시 예수님의 성찬식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제가 기독교를 믿게 된 동기 중의 하나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마지막에 한 게 제자들과 나눈 ‘최후의 만찬’이었죠. 바로 먹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며 ‘받아라. 이는 내 몸’이라고 하셨죠.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몸이 빵이고, 포도주가 피인 셈이지요. 예수님의 마지막이 먹는 것이라면, 인류의 시작도 먹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에덴동산에 있던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말이죠. 성경이 선악과로 시작해 성찬식으로 끝난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음악학교〉와 새까만 음표
▲존 업다이크의 소설 〈음악 학교〉와 카프카의 소설 〈단식 광대〉 표지.
선생은 이 대목에서 두 편의 단편소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매우 흥미로웠다.
“미국 소설가 존 업다이크가 쓴 〈음악학교(The Music School)〉라는 소설이 있어요. 이 소설은 부드러운 것을 녹여 먹는 성병(성체), 지금은 잊어버린 초대 교회를 떠올리게 합니다. 교회가 씹어 먹지 않고, 입에 넣어 녹여 먹으면서 삶의 고난을 망각하고, 예수님의 수난을 잊어버리게 됐다는 의미지요.
소설 속 주인공 알프레드 슈바이겐(Alfred Schweigen)은 음악학교에서 피아노 레슨을 시작한 8세짜리 딸을 기다리며 생각에 잠깁니다. 어젯밤 성찬식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태도 변화가 떠올랐던 겁니다. 미사 때 먹는 하얀 성체를 입에 넣어 녹을 때까지 물고 있으면 안 되고, 한 번에 씹고 삼켜야 한다는 의미를 되새긴 것이죠.
어느 날 슈바이겐이 피아노를 치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서 상기된 얼굴을 한 딸이 음표로 새까만 악보, 도저히 눈으로 읽을 수 없는 어려운 악보를 치며 황홀경에 빠졌던 겁니다. 새까만 악보가 딱딱한 빵, 씹어 먹는 성체를 연상시키죠.
사실, 먹는다는 것은 지상의 것, 세속적인 것일지 몰라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에서는 단식 주간이 있고 때로 금식을 합니다. 먹는 것은 육체의 것이니까 단식은 영적인 것에 가까운 행위지요.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고 부처님도 깨달음을 위해 단식하셨어요.”
〈단식 광대〉와 표범
선생의 계속된 이야기다.
“왜 단식을 하셨을까요? 육체는 소멸되니까…. 오감 중에 후각이나 시각, 청각을 고등 감각이라 여기고, 촉각이나 미각은 하등 감각이라 여겼어요.
카프카의 단편소설 〈단식 광대〉를 보면 배우 한 사람이 우리에 들어가 아무것도 먹지 않습니다. 앙상한 갈비뼈, 두 눈을 내리깐 단식 광대에게 사람들은 하루에 한 번씩 구경하러 올 정도로 열광합니다. 광대는 때로 짐승처럼 우리의 창살을 마구 흔들어대기도 했어요. 단식 광대가 40일 동안 단식쇼를 마치면 매니저는 단식의 성공을 자축하는 행사를 열고 음식을 먹입니다. 그리고 며칠 휴식 기간을 가진 뒤 다시 40일간의 단식 공연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전처럼 단식에 열광하지 않습니다. 자극적인 볼거리 앞으로 사람들이 점점 떠나갑니다. 그래도 광대는 예전대로 단식을 계속했고, 별 어려움 없이 단식에 성공했지만, 누구도 단식 일수를 함께 세지 않았어요. 결국 단식 광대는 굶어 죽고 맙니다.그러자 서커스 단장은 광대가 지내던 우리에 젊은 표범 한 마리를 집어넣어요. 오랫동안 적막했던 우리에서 맹수가 날뛰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환호하지요.”
‘먹는다’와 밥의 의미
▲한국의 멋과 정이 느껴지는 넉넉한 고봉밥. 사진=국제교류재단 제공
왜 사람들은 단식 광대를 떠나갔을까? 세속적이고 자극적인 것에 빠져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선생의 답이다.
“사람들은 광대가 단식하는 이유에 점점 흥미를 잃었고 단식 자체를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외면 속에서 단식 광대는 고립돼 스스로 굶어 죽었죠. 어쩌면 소설 〈단식 광대〉는 오늘날의 영적인 패배, 금욕적 이상의 소멸을 상징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선생은 ‘먹는다’의 깊은 행간, 콘비비알리티, 성찬식을 지나 ‘밥’ 이야기로 나아갔다.
“원래 빵은 덩어리라 사람의 마음을 담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밥은 퍼주는 거잖아요. 밥을 퍼주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어요. 따뜻한 밥, 고봉으로 퍼주는 밥을 떠올려봐요. ‘찬밥 신세’라는 말도 있잖아요. 밥의 온도와 퍼주는 그 모양에서 음식을 주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밥은 그때그때 먹을 사람을 위해 지어야 합니다. 먹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밥을 안칠 수 있나요? 어머니의 온기이며 기다림이 밥입니다.
뜸을 들여야 비로소 먹을 수 있는 밥은 아무 때나 잘라 먹을 수 있는 싸늘한 빵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햇반’이란 상품도 나왔지만, 밥은 본질적으로 반(反)인스턴트 식품이지요.”
고봉문화, 우주적 메시지
▲김치에는 오색(청·황·적·백·흑), 오미(신맛·쓴맛·짠맛·매운맛·단맛)가 들어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선생은 “우리 조상들이 고봉문화, 나눔의 문화, 융합의 문화를 음식 속에 담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고 말했다.“
밥 한 그릇에 담긴 한국인의 마음이 21세기의 식문화를 만드는 자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왠지 아세요? 우리는 음식에 화합과 함께 살아가는 우주적 메시지를 담았죠. 이게 탕평채(蕩平菜)라는 거예요. 조선 정조 때 사색(四色) 당쟁을 없애고 고루고루 인재를 등원했던 탕평책에서 따온 말인데 검은색(북인-석이나 김 가루), 푸른색(동인-미나리), 붉은색(남인-고기), 흰색(서인-청포)의 사색이 다 있어요. 먹으면서 당쟁을 넘어서는 조화로움을 꿈꾸었어요.
사실은 이미 정조 때만이 아니라 한국 음식 자체가 오방색, 우주의 색을 담고 있어요. 김치를 보세요. 김치에도 오색(청·황·적·백·흑), 오미(신맛·쓴맛·짠맛·매운맛·단맛)가 들어 있어요. 신선로, 비빔밥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의 이야기는 한층 무르익었다.
“이제 본격적인 한국 음식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사람들은 음식을 요리의 결과인 명사로만 생각하지만 저는 요리하는 과정인 동사를 유심히 살폈어요. 예컨대 우리 민족은 나물을 많이 먹는 민족이기에 ‘무치다’ ‘데치다’ ‘비비다’ ‘캐다’ ‘뜯다’ 등과 같은 낱말이 많아요. 외국에선 그런 말이 없잖아요.”
선생은 “음식이라는 결과에는 요리라는 과정이 따른다”며 “과정 없는 결과가 없듯 각 나라의 고유한 음식은 고유한 요리 방법에 의해 탄생한다”고 했다. “서양 음식이 굽고 볶고 튀기는 게 기본이라면, 한국 음식은 대개 삭히고 끓이고 무치고 섞는 방법으로 요리한다”고 강조하며 “한국적 맛의 비밀 또한 한국인의 이 고유한 요리 방식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선생은 기자에게 최근 간행된 《K FOOD: 한식의 비밀》(디자인하우스 刊)을 건넸다. 이 책에 실린 선생의 말을 일부 요약해 소개한다. -선생의 당부이기도 하다- 한국인의 맛에 대한 깊은 통찰을 느낄 수 있었다.
밍밍하고 슴슴한 無味의 맛
〈①한식의 첫 번째 비밀 : 밍밍하다 무미(無味)가 만드는 순환과 역설의 문화=한식의 맛은 짜고 달고 시고 맵고 쓴 오미가 끝이 아니다. 밍밍하고 슴슴한 무미의 맛이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밥맛이다. 밥은 맛이 아주 싱거워서 무(無)이며, 텅 빈 공허다. 그래서 빵처럼 밥 하나만 먹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짜고 매운 여러 반찬과 어울리면 밥은 새로운 맛을 띠게 된다.
밥은 국물 음식, 마른 음식, 매운 것과 짠 것, 딱딱한 것과 약한 것 등 온갖 반찬의 맛을 차별화하면서 동시에 융합한다. 말하자면 밥을 먹는 것은 입을 씻어 맛을 지우는 지우개 같은 역할을 한다.
매운 음식을 먹었어도 일단 밥이 들어가면 입안에는 언제든지 새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백지(白紙)가 마련되고, 그 백지 속에서 모든 음식이 제맛과 제 표정을 갖게 된다. 그리고 밥은 동시에 그 맛을 합산한다. 반찬은 밥의 텅 빈 맛 덕분에, 그리고 밥은 반찬의 맵고 짠 맛 덕분에 싱싱하게 살아난다. 한국의 음식은 이 관계의 틈새에서 존재한다.
포용하고 통합하는 맛의 문화
②두 번째 비밀 : 싸다 비비다 - 입안에서 완성되는 융합 문화=서양의 음식문화는 분리가 핵심이다. 그들은 고기에는 고기만, 채소에는 채소만 먹는다. 절대 섞어 먹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 음식은 먹는 사람의 입안에서 하나의 음식으로 완성된다. 매끼 밥과 국, 채소, 고기, 생선, 심지어 후식으로 먹는 떡과 식혜까지 동시에 한상 위에 차린다. 이들은 홀로 있는 음식도, 독자적인 맛을 지닌 음식도 아니다. 김치든 국물이든 나물이든 반드시 밥과 함께 먹기 때문이다. 다른 음식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맛으로서 존재 이유를 갖는다. 그 병렬적 동시 구조의 상차림 앞에서 한국인은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능동적으로 입안에 넣는다. 밥 한 숟갈에 김치 한 조각을 얹어 먹었다가, 갈비 국물에 밥을 비벼 먹는가 하면, 남은 밥을 국에 말아먹기도 한다. 먹는 사람이 음식 맛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음식 문화는 ‘되다’ ‘becoming’의 상태이며, 생성론의 개념이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통합하는, 즉 ‘포함적(inclusive)’ 문화다.
삭힌 맛, 기다리고 용해하고 변화하는 시간의 지속
③세 번째 비밀 : 담그다 삭히다 - 뭐든 삭혀야 제맛인 발효 문화=어떤 형태의 요리든 맛의 근원적 의미는 날것과 익힌 것, 즉 생식(生食)과 화식(火食)의 대립 항에 의해 구분된다.
그러나 한국의 요리 코드는 화식과 생식의 대립 코드에서 일탈해 그것을 융합하거나 매개하는 제3항의 체계를 만들어낸다. 날것도 익힌 것도 아닌 삭힌 것의 맛, 바로 발효식이다.
김치, 된장·간장·고추장, 젓갈 등 발효 음식은 한국 음식의 기저(基底)에 해당한다.
배추를 날것으로 요리하면 샐러드가 되고, 불에 익히면 수프가 된다. 그러나 그것을 삭히면 김치가 된다. 그 ‘삭힌 맛’은 샐러드 같은 자연의 맛이나 채소 수프 같은 문명의 맛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제3의 새로운 미각이다.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뛰어넘는 ‘통합(integral)’의 맛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대표적 발효 음식인 장(醬. 된장·간장·고추장)은 기다리고 용해하고 변화하는 시간의 지속 속에서 이루어진다.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말려 간장과 된장을 담그기까지, 그리고 독에 담아둔 간장과 된장이 발효돼 제맛이 들기까지, 대개 수개월 혹은 수년의 시간이 걸린다.
한국 대표 음식 중 하나인 김치야말로 삭힌 맛의 전형이다. 특히 김장 김치는 겨우내 쉽게 무르거나 상하는 일 없이 시원한 맛과 아삭한 식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땅을 깊이 파고 그 안에 독을 묻어 보관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과 김치로 대변되는 한국 음식 문화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콩이나 배추, 무가 아니라 시간일지도 모른다.
채집 시대의 전설이 숨 쉬다
▲삼색 나물. 무치는 나물 요리 외에 나물죽, 나물국, 나물찜, 숙채, 생채, 강회, 나물장아찌까지 조리법이 다양하다. 사진=조선일보DB
④네 번째 비밀 : 캐다 따다 뜯다 - 나물 민족의 식생활, 채집 문화=옛날 한국의 여인네들이 집 밖을 나설 때 바구니를 낀 채 봄에는 나물을 캐고, 여름에는 뽕잎을 따고, 가을에는 빈 밭에서 이삭을 주워 담았다. 캐고, 따고, 줍고…. 그 기능의 메타언어는 ‘채집’이다. 바구니 속에는 인간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조차 모르던 채집 시대, 혈거민의 전설이 숨 쉬고 있다.
한국어 사전에서 ‘나물’이 들어 있는 한국말을 검색하면 ‘가는갈퀴나물’부터 ‘흰바디나물’에 이르기까지 무려 250가지나 나온다. 달래·냉이·도라지처럼 뿌리를 캐 먹는 나물, 시금치나 취나물처럼 잎을 먹는 나물, 콩나물이나 숙주나물처럼 열매의 싹을 틔워 먹는 나물까지 식물의 잎·열매·줄기·뿌리·껍질·새순 등 거의 모든 부분을 음식으로 만들어 먹는다.
무엇보다 한국인은 이 나물들을 생으로 먹기도 하지만, 살짝 데쳐서 참기름·깨소금 등 갖은양념을 넣어 무쳐 먹기도 한다. 나물은 덩이와 입자형의 음식물과는 달라 금세 다른 것과 뒤엉겨 결합될 수 있다. 그래서 나물의 요리법은 무치는 것이고, 나물의 맛은 맵고 달고 시고 짜고 쓴 오미가 된다. 무치는 것 외에도 나물죽, 나물국, 나물찜, 숙채, 생채, 강회, 나물장아찌까지 한국인의 나물 조리법은 매우 다양하다.
찌고 고고 끓이는 게 한국의 물맛
▲한식에서 국물은 수단이자 목적이다. 사진은 냉이달래된장찌개. 사진=조선일보DB
⑤다섯 번째 비밀 : 끓이다 삶다 찌다 - 국물 맛이 일품, 습식 문화=국물은 한국의 맛을 해독하는 중요한 코드 중 하나다.
서양의 요리 코드가 ‘고체-액체’ ‘건식-습식’의 대립 항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한국의 요리 코드는 이 대립의 경계를 없애고 음식의 건더기(고체)와 국물(액체)을 함께 먹는 혼합 체계로 이뤄져 있다.서양 요리에선 (수프처럼 정식으로 국물 요리를 만들 때를 제외하면) 조리 시 생기는 국물은 음식을 익히는 수단으로, 일종의 노이즈(noise)로 생각해 없애버린다. 반면 한식에서 국물은 수단이자 목적이다. 면을 끓이기 위해 부은 물도 버리지 않고 국수와 함께 요리 속으로 끌어들인다. 칼국수나 라면 그리고 한식화한 국물 스파게티 등이 좋은 예다. 김치는 어떠한가. 김치의 발효 과정에서 생기는 국물을 버리는 법 없이 함께 먹는다.
한국의 음식 문화는 ‘물’이 핵심이다. 이에 비해 서양은 ‘불’이 더 중요하다. 한국에선 물을 이용해 시루에 떡을 찌지만, 서양에선 물 없이 오븐에서 빵을 굽는다. 물맛과 불맛, ‘시루’와 ‘오븐’, ‘떡’과 ‘빵’, ‘찌다’와 ‘굽다’가 대립 항을 이루는 것이다. 찌고 고고 끓이는 게 한국의 물맛이라면, 굽고 볶고 기름에 튀기는 것이 서양의 불맛이다.〉
“진화하고 발전하는 현재진행형의 맛”
▲이어령 선생이 손짓을 하며 말하고 있다. 사진=김용호 작가
선생은 《K FOOD: 한식의 비밀》에 나오는 한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한국의 식문화가 기다림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렇게 삭히고 끓이고 무치고 섞어서 완성한 한식은 발효 문화와 국물 문화, 나물 문화와 융합 문화를 대변하죠. 그리고 이 모두는 순환과 역설의 원리를 품은 채 조화롭게 어우러집니다. ‘배제’하지 않고 ‘포함’하며,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고 화합합니다.”
한식은 결코 과거의 기억이나 전통의 맛만을 고수하지 않는다. 현재의 맛과 이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진화하고 발전한다.
“이탈리아의 대표 음식인 파스타에 국물을 더해 국물 파스타를 만들고,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햄버거에 밥과 불고기 등 한국의 대표 음식을 결합해 새로운 맛을 창조해냅니다. 또한 서양의 맥주와 한국의 치킨을 결합한 ‘치맥’ 문화로 많은 해외의 젊은이를 한국으로 불러들이죠.
이처럼 한식의 경쟁력은 이미 완성돼 끝난 맛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하는 현재진행형의 맛 속에 숨어 있습니다. Being(존재)이 아니라 Becoming(생성)의 미학(美學), 융합의 미학(味學)이야말로 K-푸드로 세계에서 각광받고 있는 한식의 특성이라 할 수 있어요.”⊙
03월 호
⑤ 眞善美와 가위바위보
“眞善美를 합치고, 뛰어넘어 포용의 시대로…”
⊙ “속담 ‘참꽃에 볼때기 덴 년’… 김소월 시인, 저리 가”
⊙ 어질 인(仁)은 ‘두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둘 사이’라는 뜻
⊙ 동양이 가위바위보를 할 때 서양은 ‘앞면이냐 뒷면이냐’의 동전 던지기 승부
⊙ 서구식 二項대립의 사고에서 가위바위보의 三項순환으로
⊙ 眞善美… 인지론·행위론·판단론 vs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이성비판
⊙ “AI윤리학을 하는 사람, 진선미 제대로 아는 사람 필요한 시대”
“김 기자! 참기름을 영어로 뭐라는 줄 알아? 내추럴 오일(Natural Oil)이라고 불러요. 우리에게 ‘참’은 진(眞)인데, 번역하면 내추럴이야.”
새해를 맞아 지난 1월 7・18일, 2월 4일 이어령(李御寧)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를 찾았다.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 주변의 하늘빛이 ‘자선 주일’의 어느 하루처럼 포근하였다. 선생은 진선미(眞善美) 이야기를 꺼내면서 참기름을 화두로 던졌다.
“참기름은 참깨를 짠 기름이고 진유(眞油)라고 하지. ‘참’은 ‘진짜’나 ‘진실하고 올바른’의 뜻이 있고, 동식물 이름 앞에 붙어 기본적인 품종을 나타내는 말로 쓰여요. 참가자미, 참깨가 그렇지.
또 참꽃은 진달래라고 합니다. ‘들에 피는 달래보다 더 좋은 꽃’이 ‘진달래’입니다. 진에 대립하는 말이 ‘개’인데 ‘개꽃’이라고 하잖아. 접두사 ‘개’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참된 것이나 좋은 것이 아닌’ 혹은 ‘함부로 된 것’이라는 뜻이야. 개꽃은 먹지 못하는 철쭉을 뜻해요. 반면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진달래는 참꽃이지.
봄바람이 들어 들뜬 아가씨를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참꽃에 볼때기 덴 년’이라는 속담이 있어요. 진달래가 뻘겋잖아? 만산홍(滿山紅)의 진달래로 두 볼에 화상을 입었다고 하니 얼마나 감각적이야? ‘볼 덴 년’이라니. 김소월 시인, 저리 가라야. 대단한 거야.”
그러더니 이내 이야기 흐름이 선(善)으로 이어졌다.
“선은 착하다, 어질다는 뜻인데 어질다를 쓰는 나라가 세계 어디에 있어? 있으면 가져와 봐. 나한테 가지고 와 보라고. 중국에서도 어질 인(仁)은 사람 인(人)과 같은 뜻이야. 일본에서도 어질 인은 번역이 불가능해. 우리만 해석할 수 있다고.”
善과 仁에 대하여

▲이어령 선생은 인문학에서 3가지 사이(間)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인간(人間), 시간(時間) 공간(空間)을 뜻한다.
선생은 선과 어질 인을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를 풀어갔다.
“어린 시절 자주 들었던 ‘사이좋게 놀아라’의 ‘사이’가 바로 어질 인입니다. 그런데 어질 인이 뭔지 우린 잘 몰라요. 사전 찾아보면 우습게 써놨어요. 슬기롭고, 너그럽고, 덕행이 높고…. 어질 인 찾아보면 전부 ‘어질다’ 나오고, ‘어질다’ 찾아보면 전부 인(仁)이에요.
공자님도 그랬어요. 다른 건 다 정의 내렸으면서 어질 인자만은 이게 무엇이라고 딱 말씀하지 않으신 거죠. 백 가지, 천 가지 해석이 다 나오는 겁니다. 그럼, 공자님은 왜 어질 인자를 풀이하지 않았을까요?
정의했다간 큰일 납니다. 왜? 인은 곧 ‘사이’인데, 사이의 경우가 얼마나 많겠어요? 수천, 수만 가지가 넘어요.
그런데 이 ‘사이’가 중요해요. 사이에 낀 것이 잘못되면 큰일 나요. 인간(人間), 시간(時間), 공간(空間), 다 사이 간(間)자가 들어가 있죠? 즉 사이가 문제라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없으면 관계는 끝나는 거고, 자연과 인간 사이가 없으면 공해를 비롯해 각종 기상이변이 생기는 거예요.”
어질 인에서 사이 간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사랑 애(愛)를 자세히 봐요. 사람 뒤통수를 형상화한 거야. 애매하다는 뜻의 희미할 ‘애(曖)’도 거기서 나왔어요. 상대방이 사라질 때 느끼는 것이 사랑이라는 거야. 떠난 다음에야 비로소 ‘아,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사랑했구나’ 하는 거야. 사랑은 주는 것도 아니고 받는 것도 아니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터페이스(Interface·서로 다른 두 시스템이나 소프트웨어를 이어주는 접속장치)가 막 생기거나 없어질 때 아니면 못 느끼는 거야.”
사이와 인터페이스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 전시된 이어령 선생의 책상. 이곳에서 수많은 저작이 완성됐다.
━떠난 다음에 느끼는 게 사랑이라고요?
“그렇지. 사랑이 도대체 어디 있어요? 나한테 있는 건가, 너한테 있는 건가? 사랑이 주는 거냐, 받는 거냐 하면서 인류의 고민이 시작됐어요.
사랑이 마치 물건과 같은 것이어서 교환과 증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을지 몰라.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물건 같은 것이면 짝사랑을 해도 즐거워야 해요. 나한테 사랑이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실제로 그런가요? 아니잖아. 사랑은 둘 ‘사이’에 있는 거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터페이스’에 있다는 이야기야.”
선생의 인터페이스론(論)에선, 오랜 사색이 만든 아날로그적 힘이 느껴졌다.
“어질 인(仁)은, 사람 인(人)에다가 두 이(二)자를 씁니다. 두 이(二)라는 건 ‘두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둘 사이’라는 뜻이지요. 사람 사이를 말하는 겁니다.
제일 중요한 게 인터페이스입니다. 아날로그의 입자와 디지털의 파동을 연결해주는 인터페이스! 앞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은 그 ‘사이’를 고민하는 자여야 해요. 머리(디지털)와 가슴(아날로그)을 연결하는 목. 우리는 생명을 ‘목숨’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목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길목, 손목, 나들목…. 어른들이 ‘사이좋게 놀아라’ 하듯이 현실과 가상, 로봇과 인간의 인터페이스를 ‘사이좋게’ 만드는 게 관건이죠.”
또 이런 말도 했다.
“산업사회는 독립된 ‘원자’를 끝까지 추적하는 것이었다면, 정보사회는 항상 ‘나’와 ‘너’ 사이의 관계를 전제로 해요.
사실, 서양은 ‘개인’으로 살아왔지만 우리는 ‘사이’로 살아왔습니다. 서양의 비극은 어디에서 왔느냐? 서양은 밤낮 이항대립을 한 겁니다. ‘나에게 아내 혹은 남편이 있어도 둘이서 사는 건 아니다. 나는 반드시 개인으로, 아톰[原子]으로 있어야겠어!’라고 생각한 겁니다. 즉 인디바이드(Individ),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개체, 개인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아니에요. 혼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뭐도 짝이 있어야 한다’고 해요? 짚신짝도 짝이 있다고 하잖아요. 처음부터 짚신은 하나만 있을 수 없어요. 2개여야지만 돼. 눈이 두 개인 것처럼 말이죠.”
선생은 이번 대화의 작은 결론이라도 지으려는 듯 이런 말을 빠르게 쏟아냈다.
“무엇보다 진과 선, 미를 모두 합치고, 뛰어넘으며,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처럼 입자와 파동까지 포용하는 소위 전자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전자는 입자하고 파장하고 떨어져 있지 않고 포개어져 있거든.”
서구식 二項대립의 사고
▲이어령 선생의 서울 평창동 자택 거실 탁자에 놓인 물건들. 안경과 큰 돋보기가 보인다.
선생의 의식 흐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는 배제식 이항대립의 서양식 사고가 아니라 삼항순환의 ‘이것도 저것도’의 포함적 사고로 가야 한다”며 ‘가위바위보’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의 말을 종합하면, 한국 아이들은 가위바위보, 중국 아이들은 차이차이차이(猜猜猜), 일본 아이들은 장켄폰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동북아의 가위바위보 사전에 문명의 충돌이란 말은 없다. 가위바위보를 부르는 방법에 있어 일본·중국은 바위-가위-보의 순서인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가위-바위-보라고 한다. 중국·일본이 순서대로 바위-가위-보를 내고, 한국이 가위-바위-보를 내면 승부가 나지 않고 계속 회전, 순환한다. “어느 한쪽이 이겼다고 우월감을 갖거나 졌다고 열등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위바위보는 확률적으로도 우연성을 바탕으로 한 겨루기여서 절대 승자는 없다. 승부가 거의 균등하다.
“누구도 피라미드의 정점에 오르지 못하고, 동시에 누구도 맨 밑에 깔리지 않습니다. 경쟁은 있으나 절대 승자도 절대 패자도 없죠. 상대적인 대전(對戰)에 따라 A는 B를 이기고, B는 C를 이기고, C는 A를 이기는 끝없는 승패의 순환입니다.
가위바위보는 ‘패권’이 아닙니다. ‘바위’와 ‘보’만 있다면 승자와 패자밖에 없습니다. ‘바위’는 ‘보’에 먹혀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그 중간에 절반은 열리고 절반은 닫혀 있는 ‘가위’가 출현하면 바위에게도 보에게도 ‘패권’은 생기지 않습니다. 금, 은, 동의 올림픽 형태가 아니라 삼자견제의 역학으로 둥글게 회전합니다.
그러나 동양이 가위바위보를 할 때 서양은 동전 던지기로 운명을 가릅니다. ‘앞면이냐 뒷면이냐’의 승부죠. 한 방향으로 이어진 서양식 일직선의 사고입니다.”
가위바위보의 동양은 니체의 ‘영원회귀’와 인도의 ‘윤회(輪廻)’처럼 순환한다는 말이었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가위바위보와 三項순환
▲가위바위보는 확률적으로도 우연성을 바탕으로 한 겨루기여서 승부가 거의 균등하다고 한다. 일러스트=조선일보DB
다시 선생의 말이다.
“삼항순환을 이야기하자면 피시스(Physis), 노모스(Nomos), 세미오시스(Semiosis)를 이야기 안 할 수 없네요. 각각을 자연계, 법칙계, 기호계라고 설명할 수 있는데 세계 어디든 물은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이 피시스입니다.
그러나 법률이나 제도의 노모스는 국가와 시대에 따라 다르고 바뀝니다. 중간에 있는 세미오시스는 언어와 같이 하룻밤 사이에 바뀌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영구불변의 자연법칙도 아닙니다. 세미오시스는 상상력의 세계, 예술의 세계를 뜻해요.
피시스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은 대륙, 일본은 섬, 한국은 반도의 나라입니다. 대륙(중국)은 개체를 초월하는 생명력을 갖고 세계를 감싸 안는다는 점에서 가위바위보의 ‘보’에 가깝죠.
일본은 무사가 지배하는 나라여서 주먹은 힘을 상징합니다. ‘바위’와 비교할 수 있어요. 대륙과 비교해 여유보다는 긴장, 확대보다는 축소 지향인 것이죠.
한반도의 ‘가위’가 있어야 비로소 다이내믹한 순환운동이 일어납니다. 바위도 섬도 아닌, 또는 대륙이기도 하고 바다의 섬이기도 한 독특한 다양성과 통합성이 반도 문화를 이루었다고 봐요.”
선생의 한반도 가위론(論)을 정리하면 이렇다.
가위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면 동아시아는 선형적인 이항대립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원형적인 순환과 생성의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비유로 이야기하자면, 대립하는 물과 불 사이에 가마솥이 있으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 한국이 가마솥 역할을 수행하던 시기에는 동아시아에 평화가 찾아오고 아름다운 문화의 꽃이 피어났다. 가위가 제 역할을 못 하면 동북아는 불행했다.
분단된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선생에 따르면 북한은 중국의 대륙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어 대륙의 나라로 변했고, 남한은 인공적인 섬나라가 되어 해양문화의 영역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분단은 한민족만의 비극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체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문득 선생이 예전에 쓴 시가 생각나 옮겨 적어 본다.
우리는 모두가
사이에서 태어나
사이에서 살다가
사이에서 죽는다
하늘과 땅 사이
육지와 바다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얘들아 사이좋게 놀아라.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
그런데도
문자 메시지의 그 많은 이모티콘
가운데 어질 인(仁)자가 없었다.
언젠가 남과 북 사이도
거짓말처럼 좋아지는 때가 오겠지
오늘 내가 너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듯이
-이어령의 ‘사이’
진선미와 칸트의 3가지 비판
▲지난 2008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모습. 미인들을 진선미로 가려 선발한다. 사진=조선일보DB
다시 이야기는 처음으로, 진선미로 귀환했다.
“진선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고요. 진(眞)의 세계에 들어가면 인간은 착한가, 착하지 않은가 하는 선악(善惡)과 다른 차원으로 진짜, 가짜로 갈라집니다. 참이냐 거짓이냐의 물음은 인지론이고, 선악의 물음은 행위론이죠. 선악은 행위를 통해서만 드러나거든.
그런데 미(美)의 영역은 또 달라요. 아름다움은 윤리와 관계없고 진리 추구와도 상관없어요. 미추 개념은 참을 다루는 진도, 행위를 다루는 선도 아니고 오감에 따라 각자가 판단하는 표현의 영역입니다.”
선생은 “생각을 다루는 인지론, 실천을 다루는 행위론, 표현을 다루는 판단론을 구분할 줄 알아야 인간으로서 풍부하게 누리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칸트 이야기를 꺼냈다.
“진선미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이성비판과도 다 연결된다고….
예컨대 순수이성으로 보면 자연계에 신은 존재하지 않아요. 일상에서 신의 존재 유무를 어떻게 확인하나요? 존재의 유무를 따지는 인지론으로 보면 (신은) 없는 거지요. 순수이성이지.
그런데 살다 보면 신이 필요해요. 있어야 해요. 그래야 질서가 잡히고 선악의 기준도 생기잖아요. 그러면 행위론이 되는 거야. 실천이성이지.
칸트가 어느 날 산책을 하는데 뒤에서 쫓아오던 종이 울면서 말해요. ‘주인님, 하나님을 여태 믿고 살았는데, 없다시니 너무 슬퍼요’ ‘그래? 그럼 있다고 해줄게’ 하고 쓴 게 《실천이성비판》이에요.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이 사랑한다면 신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선생은 판단이성을 설명하기 위해 시인의 존재를 끌어냈다.
“산업 중심의 물질사회에서 시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을지 몰라. 직접 빵을 만드는 존재가 아니거든. 그러나 이 세상은 시인의 따스한 손길이 필요해요. 명징하고 때로 오금이 저려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문장이, 시어가 필요하다고. 그게 표현론, 판단이성이지요. 판단이성은 ‘제 눈에 안경’으로 누군가를 보고 반하는 것, 저마다의 미적 판단이거든….”
━ 진선미에 대한 동서양의 기준이 다를까요?
“서양은 진선미, 의식주를 서로 다른 기준으로 말하지만 동양은 진이 선이고, 선이 미이고, 미가 선인 듯 두루뭉술해요. 심지어 (미스코리아 선발하듯) 진선미로 등수를 가려요.”
선생은 “세상이 의식주의 시대에서 진선미의 시대로, 의식주를 추구하는 삶에서 진선미를 추구하는 삶으로 바뀌고 있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과거 산업주의는 의식주 해결을 위한 것이었어요. 먹고살기 위해 일하고, 의식주를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던 겁니다. 반면 진선미의 추구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인생관이 필요해요. 진짜 인간이 되는 것이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삶인지 따지는 ‘진’의 직업, 어떤 행동이 착한 것인지 규명하는 ‘선’의 직업과 생각, 무엇이 아름다움인지 생각하는 ‘미’의 직업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생은 ‘노동’하고 ‘작업’하는 삶에서 ‘활동(봉사)’하는 삶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했다.
“딥러닝하는 AI가 시험을 대신 치고, AI가 시도 쓰고 소설도 쓰는 시대에 옛날 방식의 암기식 노작(勞作)교육이 무슨 소용이 될까요?”
AI시대의 眞善美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 전시된 이어령 선생의 그림들.
초대문화부 장관(1989년 12월~91년 12월 재임) 시절, ‘진선미를 추구하는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대통령과 관료들을 설득해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만든 것도 선생이다.
“제가 늘 하는 말인데, ‘먹고 노는 사회가 아니라, 놀고먹는 사회’를 만들어야 해요. 희랍시대 시민들이 진선미를 논할 수 있었던 것은 의식주를 대신 해결해주던 노예와 아내와 자식이 있어서 가능했어요. 이들 덕에 지식인 시민들은 의식주의 ‘노동’에서 벗어나 진선미를 탐구할 수 있었지. 그래서 철학은 희랍시대 딱 한 번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AI가 나왔어. 우리가 먹고살기 위한 일을 AI가 해주면 모든 사람이 진선미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선생은 AI시대에 새로운 윤리학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자율주행차의 AI라면 출발 전 스캔을 해서 차량에 인화물질이나 폭탄이 있는지 확인부터 하지 않겠어요? 만약 지나가는 어린아이를 피하기 위해 차량이 굴러서 폭발할 수도 있지만 아이를 치는 선에서 사고를 막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는 정의, 윤리 개념이 다 뒤죽박죽 되는 골치 아픈 상황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어요.
머잖아 AI시대에 맞는 윤리가 필요하고 AI를 만들고 운영하는 기업윤리도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미국 기업들도 윤리학 전공자를 뽑고 있다고 해요. 이제 AI 윤리학을 하는 사람, 진선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합니다.”
“미국 기업들도 윤리학 전공자 뽑아”
끝으로 선생은 “AI가 직면할, 아시모프의 3원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이작 아시모프(Issac Asimov)가 자신의 소설 《런어라운드(Runaround)》에서 언급한 로봇공학(Robotics) 3원칙은 이렇다.
▲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2원칙: 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 명령을 따라야 한다. ▲3원칙: 1과 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자신을 지켜야 한다.⊙
월간조선 04월 호
이어령의 마지막 나날들
“걱정 마! 너 두고 나 절대로 안 죽어”
⊙ 무엇을 보았는가. 메멘토 모리. 훗날에야 알았네. 메멘토 모리
⊙ “쓰이지 않은 역사를 푸는 방법을 가져야 해. 그게 피시스와 노모스, 세미오시스지”
⊙ “난 그걸 쓰고 죽고 싶은데… (병이 들어) 그걸 못 한다는 거예요”
⊙ “어차피 죽을 것, 갈가리 찢어놔서 너희 기쁨이 뭐냐는 거야”
⊙ “애통해하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만이 천국을 보는 거야”

▲지난 3월 2일 고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영결식이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치러지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지난 2월 26일 이어령(李御寧· 1933~2022년)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그 흔한 방사선 치료조차 마다하고 사실상 곡기를 끊고 오랜 시간을 버텼다. 기자는 선생이 세상과 이별한 그날,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잠시 잠이 들었는데 회사 선배가 전화를 걸어 선생의 죽음을 알려왔다. 곧이어 소설가 이인화(류철균, 전 이화여대 교수)씨에게 전화가 왔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떨리는 음성이었다.
가끔 우리는 이어령 선생을 만났다. 마지막 만남은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쯤이었다. 선생이 이인화 교수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전하는 것을 곁에서 들었다. 그 역시 마지막 당부가 될 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 몰라보게 야윈 선생을 보고 이 교수는 눈물을 흘렸다. 선생의 볼이 눈에 띄게 움푹 파였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생전 마지막으로 본 선생의 모습을 시(詩)처럼 표현했다.
“체중이 절반으로 줄어든, 불행과 지혜가 아로새겨진 야윈 얼굴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미소 짓는 우수였고 기도하는 달관이었다.”
용수철 같은 열정, 섬세하고 다양한 관심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 전시된 이어령 선생의 핸드 프린팅. ‘펴면 다섯 쥐면 하나’라는 글이 적혀 있다.
퇴원한 후 빈소를 찾았다. 2월 28일이었다. 고급 외투와 짙은 정장을 차려입은 구두들로 붐볐다. 눈부신 난(蘭)과 흰 국화, 검은 장례 리본이 빈소를 가득, 가득 메웠다. 하염없이 울거나 목멘 소리로 통곡하는 이는 다행히 없었다.
대개는 모르는 분들이었지만 기자와 안면이 있는 분이 있어서 반가웠다고 해야 할까. 조성관 《주간조선》 전 편집장,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휠체어를 탄 김남조 시인 등이 눈에 띄었다.
기자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2019년 무렵이었다. 취재로 만났지만, 감히 선생과 동시대를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의 이름을, 그의 말을 겨우 식별할 수 있다는 정도였다.
선생의 얘기를 들으며 기자는 늘 말문이 막히곤 했다. 무미건조하고 사무적인 음성이 아니라 용수철 같은 열정, 섬세하고 다양한 관심, 경계를 뛰어넘는 비유로 달려갔는데 논점을 엉뚱하게 비약하거나 고약하게 비꼬는 식의 잘록한 편견은 없었다. 갈피를 못 잡고 화제의 수미(首尾)가 충돌하는 일도 없었다. 대개는 당장의 일상과 거리가 먼 관념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불모의 관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살아 있었거나 잊힌 관념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우는 것들이었다.
깊이 있는 문장 역시 문학적 모조품이나 부자연스러운 진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천하의 이야기꾼이자 시인이었다.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로 만나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를 시작한 뒤로는 매달 3~4번씩은 만났다. 선생이 떠나기 두 달여 전인 작년 12월 13일을 기점으로 12월 20일(전화통화), 그리고 지난 1월 7일과 11·18일, 2월 4·10·17·23일 만났다.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을 때여서 기껏 20~30분 정도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하루가 다르게 살이 빠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슬픔이 북받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적이거나 느긋한 잡담을 나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선생은 고장이 나버린 생(生)의 시계를 곁눈질하며 초조했을지 모른다.
지난 2008년 선생이 펴낸 시집 《무신론자의 기도》에 ‘메멘토 모리’라는 시가 실려 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M자 3개가 겹쳐져 있는 아름다운 라틴어다.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뜻으로 ‘먹고 마셔라, 내일은 죽으니까’라는 향락적 찰나주의의 경구이기도 하고, 반대로 그러니 오만하지 말고 성실하고 경건하게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목숨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기저귀를 차고 나온다.
아무리 부드러운 포대기로 감싸도
수의(壽衣)의 까칠한 촉감은 감출 수가 없어.
잠투정을 하는 아이의 이유를 아는가.
한밤에 눈을 뜨면
어머니 숨소리를 엿듣던
긴 겨울밤
어머니 손 움켜잡던
내 작은 다섯 손가락.
애들은 미꾸라지 잡으러 냇가로 가고
애들은 새둥지 따러 산으로 가고
나 혼자 굴렁쇠를 굴리던 보리밭 길
여섯 살배기 아이의 뺨에 무슨 연유로
눈물이 흘렀는가.
너무 대낮이 눈부셨는가.
너무 조용해 귀가 멍멍했는가.
굴렁쇠를 굴리다 흐르던 눈물
무엇을 보았는가.
메멘토 모리
훗날에야 알았네.
메멘토 모리
-이어령의 ‘메멘토 모리’ 전문
이어령 선생은 말하곤 했다. “메멘토 모리는 일생의 좌우명”이라고. 기껏 여섯 살 코흘리개가 죽음이라는 말을 몸 전체로 느꼈다고 고백했다. 아이가 느꼈던 수의의 까칠한 촉감, 혹은 혼자 굴렁쇠를 굴리다 흘렸던 눈물의 기억이 바로 메멘토 모리이고, 그 기억을 평생 간직해왔다는 점이 놀라웠다. 이어령의 생전 마지막 저서가 또한 《메멘토 모리》였다.
“메멘토 모리는 일생의 좌우명”
기자는 선생이 생과 사투하던 마지막 나날들을 문장으로 옮기려 한다.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생전의 당부를 미화하거나 억지로 비단을 덧댈 생각은 없다. 연재를 기다리는 《월간조선》 독자들에게 선생의 음성을 글로 보여주는 것이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정리는 세월이 흘러야 가능할 것 같다. 사실, 선생의 음성이 낮아서 들리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선생은 말을 하다 보면 어느새 목소리 톤이 올라와 있기도 했다. 한번은 이런 말을 했다.
“목에서 소리가 안 나와 소리를 질러. 그러면 남들은 열정이 있다고 하는데, 아니야. 보통 사람처럼 얘기하고 싶지만, 소리가 안 나와. 소리를 질러야 해서 늘 목이 쉬어.”
그 말 속에 선생의 눈물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처럼 연달아 무언가를 쏟아낼 기력이 없었다. 하지만 와중에도 그동안 들어 올릴 수 없었던 버캐 같은 굵은 소금언어들이 들렸다.
2021년 12월 13일
▲이어령 선생과 소설가 이인화(왼쪽), 김태완 기자.
서울 평창동 이어령 선생의 서재를 찾았다. 평소에는 회의 탁자에 앉았지만 이날은 소파에 앉았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앉기보다 누워 있었다고 해야겠다.
“12월 27일이 89세 되는 생일이야. 그때 침대[의료 침대]가 들어오면 침대 생활을 하게 돼. 병원에서처럼 누워 지내게 된다고. 그러나 뭐가 가능하냐 그러면, 지금도 하고 있지만 녹음기를 매달아 놓고, 의식이 있는 동안 내 음성을 녹음하려고 해.”
그러더니 시간이 없다고 느꼈던지, 말의 방향을 틀어 이달에 기자가 썼던 기사[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③ 식민지인(人)]의 아쉬운 점을 이야기했다.
“‘패럴리즘(Parallelism)’을 대구법(對句法)이라고 하지만 병렬법이라고 반드시 해줘야 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뮐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칠새’라는 구절에서 보듯 (문장의 흐름이 갔다 왔다 하는) 대단히 어려운 이론이야. 자칫 (해석에) 오류가 생기기 마련이지.”
四角의 저주
선생은 동양의 사고를 지배한 중국의 한문 문장 구조, 의식을 지배한 한자(漢字) 언어의 틀을 지적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중국 나라들은 반드시 외 글자야. 진나라, 한나라 식으로. 그런데 변방의 나라는 반드시 두 자잖아. 한 자를 못 써. 신라, 고구려, 백제. 지명(地名)은 다 두 자야. 조치원, 삼랑진은 예외라고 얘기하면 안 되는 거지. 사각(四角)의 저주… 중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과 일본 사람들은 말이 안 되는 거야.”
사각의 저주는 사각형 글꼴의 한자 형태가 한중일(韓中日)의 사고를 지배했다는 의미였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를 두고 ‘나라가 망하니 산하가 있다’로밖에 안 읽혀. 나라가 망해도 산하는 있는 것인지, 나라가 망하니 남은 건 산하뿐인지…. 하나는 포지티브, 하나는 네거티브야. 하나님이 와도 못 풀어. 전체 문맥을 봐야 하는 거야.
도연명(陶淵明·365~427년)의 ‘귀거래사(歸去來辭)’도 보라고. 관직을 그만둔 거지 세상을 은퇴한 거 아니거든. ‘귀거래사’를 전부 은퇴하는 걸로 알아. 관직만 그만둔 거지 북쪽의 여산(廬山) 속으로 안 들어간 거예요. 여산 속으로 들어가야 은둔이지 끝내 안 들어가.
그리고 ‘귀거래사’는 죽어서 여산에 들어가는 것, 살아서 가는 것, 벼슬을 그만두고 여산 근처에서 사는 것 등 3가지 패러다임이 있어. 또 ‘귀거래사’에 등장하는 배[舟]도 실제로 배를 타고 간다, 꿈결에서 배를 탄다, 혹은 죽어서 배를 타고 간다는 해석이 다 가능한 거예요. 이런 해석은 바둑으로 치면 단수 중에서도 알파고 수준의 바둑을 두듯이 풀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해석을) 반절도 못 하는 거지. 쓰지 못하는 거예요.”
“한자는 이 땅에서 없어진 거야”
▲평창동 서재에서 컴퓨터로 작업 중인 이어령 선생.
“옛날에는 전부 문맥으로 해석했지만, 오늘날처럼 (문장 속) 단어가 제 몫을 하기 시작한 건 근대 개인주의가 시작되면서야. 이 문제로 들어가면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1857~1913년)로 들어가야 하는데 여기까지 누구도 못 올라가는 거야.
그리고 한자는 이미 표의문자가 아니고… 세상에 간자체가 무슨 한자야. 상형도 아니고 의미도 아니고 발음부호가 돼버린 거야. 한자는 이 땅에서 없어진 거야.”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까지 이걸 안 하면 의미가 없는 거야. 그냥 보통 에세이를 쓸 바에야 그걸 뭐하러 죽으면서까지 해.”
선생은 지금까지 탐사해온 ‘한국인 이야기’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고 싶어 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프리히스토리(prehistory·선사시대), 히스토리 이야기야. 한국인의 정체성이 담긴 ‘젓가락’이 어디까지 올라가느냐 하면 인류 최초의 전사(戰士), 최초의 요리사까지 올라간다는 것을 밝히려고 해. 사람들이 기록된 역사, 문자로 기록된 역사만을 인정하지만 쓰이지 않은 역사를 푸는 방법을 가져야 해. 그게 내가 얘기하는 피시스(Physis·자연계)와 노모스(Nomos·법과 제도), 세미오시스(Semiosis·기호상징계), 추리력, 유추, 메타포지.”
피시스, 노모스, 세미오시스
“그 프리히스토리 이야기만 써도 엄청난 거라고. (기록된 역사만 인정하는 이들은) 패륜아들이야. 350만 년 전 인간의 인지능력 혁명을 전혀 인정 안 하는 것들이야, 이것들은….
(선사시대 인간을) 뼈다귀나 던지는 줄 알고, 곤봉이나 휘두르는 침팬지인 줄 알았던 역사관을 여지없이 죽여버리려 하거든. (젓가락을 통한) 식사 공동체를 통해 말이지. 고릴라하고 인간만이 함께 나눠 먹어. 딴 짐승들은 음식을 두고 싸워. 다른 짐승하고 싸우고, 지들끼리 싸우고 그랬어. 그게 생존경쟁이야. 암컷 놓고 죽어라 싸우고.
우리 인간은 안 그래. 결혼제도라는 게 있어서 싸움을 안 하는 거야, 대놓고. 그리스 신화에, 그리고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드》에 신들의 대리전인 트로이 전쟁 이야기가 나오잖아. (제우스의 딸인) 헬렌을 두고 (트로이 왕자 파리스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가) 싸우는데 손님으로의 모럴을 (파리스가) 어겼던 거지.
그리스는 해양국가이자 도시국가이기 때문에 도시에서 도시로 가려면 참 힘이 들어. 그러니까 낯선 나그네들은 먹여줘야 해. 발을 닦아주고. ‘친절’이란 뜻의 독특한 단어가 있는데….
나그네한테 잘해줘야 자기도 길을 떠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지금도 몽골에서는 (어딘가로 떠날 때) 텐트에다 밥을 차려놓고 간다고 하잖아. 왜? 길 잃은 사람이 왔다가 먹으라고.”
“마지막 죽을 놈이 그걸 ‘라스트 강연’이라 하고 앉았어?”
▲생각에 잠긴 이어령 선생. 사진=김용호 작가
선생의 말 속에 날이 서 있었다.
“(나그네에게) 선심 쓰는 게 아니야. 그래야 자기도 살아. 그걸 어기면 질서가 무너지는 거야. 그런데 나그네로 환대받던 파리스가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헬렌을 빼앗아간 것이지.
포세이돈은 트로이를 지켜주는 신(神)이야. 말[馬]이 상징이지. 병사들이 숨어 있는 거대한 바퀴 달린 목마가 트로이 성 안으로 들어가잖아. 트로이 입장에선 자기들의 상징인 말인데 아무렇게나 두면 되겠어? 자기들의 신인데. ‘너희 신이다. 전쟁 안 하겠다’는 뜻인 줄 알고 (성 안으로) 목마를 끌고 들어간 것이지.
그런 이면을 모르고 목마를 가져갔겠어? 바보야? 그런데도 지금까지의 해석이라는 게, 우선 자료가 없어. 수박 겉핥기로 아는 것들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문학 시간에 배우고 있는 거예요. 나처럼 트로이 전쟁에 대한 얘기를 해봐. 납득이 갈 거야.
옆구리가 저려 말을 못 하겠는데, 그러니까 난 그런 걸 쓰고 죽고 싶은데… (병이 들어) 그걸 못 한다는 거예요.
그런 얘기를, 아무리 잘 전하려고 해도 엉뚱한 얘기로 돼서 나오면 안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안 하는 게 낫다는 거지. 이미 한 말을 다시 쓸 바에야, 하나도 새로운 말이 없을 바에야…. 마지막 죽을 놈이 그걸 ‘라스트 강연’이라 하고 앉았어?”
철봉대 앞 모래사장이 반짝이고, 눈부시던 교정…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어. ‘니들(너희)은 아무리 쉽게 말해도 하나님 말씀을 들을 줄 모르니 비유로밖에는 말할 수 없다’고. 플라톤도 그랬거든. ‘이데아가 뭡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으니 ‘내가 말 못 한다. 그걸 말로 옮길 수가 없다’고 했어. 자꾸 조르니까 ‘굳이 비유로 말하자면 태양 같은 것’이라고 했지.”
선생은 전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건강이 허락되지 않는 현실, 구어체가 문어체로 바뀌는 과정에서 잘못 전달되는 행간의 오류와 해석의 차이를 안타까워했다.
“어린 시절, 내 필통 속에 서양이 있었어. 셀룰로이드(합성수지)로 된 작은 필통 속에 서양의 문명이 들어 있던 것이지. 지우개가 풍기는 향내. 제삿날 향불에 익숙하던 내 후각에겐 경이로운 것이었어.
연필은 또 어떻고. 나무 속에 물질이 들어 있잖아. 광맥이 들어 있는 거야. 나이가 들어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상상력을 보면서 느꼈던 것과 같아.
텅 비어 있는 운동장이 마음을 끌었어. 햇빛으로 꽉 차 있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운동장. 학생들은 모두 교실로 가버리고 아무도 없는…, 비어 있는 운동장이 내게 강력한 학교의 이미지였어.
아이들이 없는, 그래서 쓸모없을 것 같은 텅 빈 운동장, 철봉대 앞 모래사장이 반짝이고, 꽃과 화단이 눈부시던 교정…. 기껏 집 툇마루 아래 작은 마당밖에 모르던 아이에겐 큰 충격이었어.
교실 안은 어둡지만, 바깥 운동장은 환한 햇살이 쏟아졌어. 센티멘털한 감상주의가 아니고 인간 존재의 생명에서 오는 것 같은….”
“김 기자가 못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도 못 하는 거예요”
“(김 기자가) 말랑말랑한 지우개를 미각적이고 촉각적인 부분까지 아주 섬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써주길 원하는데, 그거는 김 기자가 못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도 못 하는 거예요. 그거 하면 내 마음속에 들어가서 이어령처럼 해야지. 그러나 내가 한 말인데 왜곡되거나 잘못 전달된 말들 되어버리면 끝내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하는 게 되거든.
내 얘기들이 (바르게) 전해졌을 때 독자들이 ‘야, 읽을 만하다. 신문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이 어떻고 하는 데에 빠져 있지만 그래도 인간의 깊은 동굴의 울음소리가 있구나. 그래도 우리나라에 형이상학이 있구나. 이념적 사고가 아니라 관념적 사고가 있구나. 추상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있구나, 하지 않겠어?”
선생은 소변이 안 나온다고 했다. “대변이 나오면 소변이 안 나오고, 소변이 나오면 대변이 안 나온다”는 것이었다.
“빈혈에서 오는 거야. 거의 보름 가까이가 됐어. 암 환자들은 이런 증상들이 있거든.
내가 소변 안 나온다든지 해서 병원에 입원했으면 온갖 검사를 다 하고 죽을 사람의 몸을 째고 했을 거야. 그걸 안 하려고 재택의료로 바꾼 거지.
나, 안 하겠다는 거야. 그거 안 하겠다는 거야. 얼마 전 수혈받으러 병원에 가서 일곱 시간 있었는데 죽을 것 같더라고. 나 수혈 안 받겠다고 했어.
해서는 안 될 소리지만, 헤밍웨이(Ernest Hemingway·1899~1961년)도 그렇고, 가와바타(川端康成· 1899~1972년·소설 《설국》 작가)도 그랬고, 대개 지성인들이 죽을 때 보면 자살하거든.”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죽을까…”
▲인터뷰 도중 이어령 선생이 글을 쓰고 있다. 마지막까지 ‘한국인 이야기’의 지적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사진=김용호 작가
선생의 이 말에 기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도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죽을까 방법을 강구 중인데, 시각 잃고 청각 잃고 막 이런 데 붓고… 도저히 못 견뎌, 진짜…. 창피한 얘기지만, 자의식이 강해서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지만 밤중에 막 아프면, 아픈 거는 말하지 않고 욕을 한다고.
(의사들이) 병을 뭘 알아? 한 인간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난도질을 하느냐 이거야. 그렇게 해서 너희에게 무슨 이익이 있느냐 이거야. 한 인간이 어차피 죽을 것, 갈가리 찢어놔서 너희 기쁨이 뭐냐는 거야.
설령 내 죗값이라고 치자. 나, 죄가 많다. 그러나 (아픈 병이) 죄보다는 무거운 형벌일지도 모르지.
그래, 나 이렇게 살아왔다, 지금까지…. 위선자고 표리부동하고 그렇게 살아왔어. 그런데 (사람이) 다 그래. 그렇게 잘난 사람 없어. 인간이 완벽하다면 뭣 하러 예수님이 오셨겠어?
또 예수님도 그러셨어.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신 분 아니야?”
선생은 그러나 당신 생명의 소중함도 이야기했다.
“기독교에서는 자살을 죄로 생각하지만, 불교는 그렇지 않아. 다비(茶毘)한다고 불 속에 들어가는 거? 태워가지고 뭐 사리(舍利) 나오는 거? 기독교에서는 용납 못 하는 거야. 생명인데 지(자기) 생명인데 그걸 어떻게 불에다가 태워?”
“애통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천국을 알아?”
“기독교는 생명주의 종교거든. 다른 종교하고는 달라. 그리고 ‘고통…,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이니라’. 기독교를 안 믿어도 애통하는 자는 천국이 너희 것이야. 삼성 이병철 회장이 물었어. ‘기독교를 안 믿으면 천국에 못 갑니까?’ 하고.
애통하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만이 천국을 보는 거야. 애통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천국을 알아?
사람들은 천국을 어떻게 해석할까? 금은보화가 주렁주렁 달리고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그런 천국은 지루해서 못 살아. 전직 대통령 중 한 분이 말했다지. ‘청와대에 갇혀 바깥에도 못 나가고 감옥살이가 지겨웠다’고. 그랬는데 또 감옥에…. 결국 자기를 잃잖아.”
선생은 작년 10월 2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빈소를 찾았다. 그는 6공화국 초대 문화부 장관(재임 1989년 12월~1991년 12월)이었다.
“그 몸으로 어디 가느냐”며 주변이 다 만류했지만,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가서 유족들을 위로하며 양복 안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넸다. 노 대통령에게 바치는 헌시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 꽃 하나의 의미’였다.
선생은 “몸이 성치 않아 옛날같이 글을 쓰지 못하고 컴퓨터 입력도 어려워 음성 입력으로 쓰다 보니 부끄러운 글을 되풀이할 뿐”이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용서하세요. 질경이 꽃 하나 캐다 올리겠나이다
이 헌시는 대통령 유족들이 언론에 공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남들이 고인의 영전에
국화 한 송이 바칠 때에
용서하세요. 질경이 꽃 하나
캐다 올리겠나이다.
(…)
어느 맑게 개인 날 망각에서
깨어난 질경이 꽃 하나
남들이 모르는 참용기의 뜻,
참아라 용서하라 기다려라
낮은 음자리표 바람소리로
전하고 갈 것입니다.
-이어령의 ‘질경이 꽃’ 일부
시 끝자락에 ‘참용기’, 풀이하자면 ‘참아라 용서하라 기다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말은 생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장관 시절 선생에게 한 말이자 평소 대통령의 좌우명이었다.
선생은 이 시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언론의 관심에 흡족해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소리꾼 장사익이 붓글씨로 써서 액자에 담아왔다”며 거실 한쪽 눈에 띄는 자리에 세워놓았다. “시가 너무 좋아 직접 써서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편에 보내왔다”는 것이었다.
“조갑제 대표도 유튜브를 통해 이 시를 두 번이나 읽고 소개해줬어요.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주세요.”
그러더니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나는 죽어 누가 날 위해 시를 써줄까?”
2022년 1월 7일
이후 기자에게는 가족 상(喪)이 있었다. 한동안 선생을 만날 수 없었다. 전화통화는 그사이 한 번 했다.
선생은 목이 잠긴 채 쉬어 있었다. 누워서 일어서지 못했다. 의료 침대는 서재 안쪽 방에 놓여 있었다. 기자는 침대 곁으로 가 선생과 마주 앉았다.
선생은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미국 소설가 존 업다이크(John Updike·1932~2009년)가 쓴 소설 《음악학교(The Music School)》에 관해 쓴 글을 찾아준다며 일어섰는데 걷는 것이 거의 불편했다. 보행기로 겨우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컴퓨터를 켜고 한참을 뒤져도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음성 역시 낮고 가늘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선생의 마지막 저서인 《메멘토 모리》의 출판을 앞둔 때였다.
“이병철 회장이 가톨릭 사제에게 질문한 24가지 질문에 대한 책은 인문학자의 글이지 종교인의 글이 아니야.
(책에 담긴) 기독교적 관점, 가톨릭적 관점의 차이는 인간들이 만든 인스티튜션(Institution·제도 관습)이야. 대학교 같은 거야. 서울대, 연세대 같은….
교육이 대학이야? 웃기는 사람들이야. 무교(無敎), 그러니까 교회[교단]가 없어도 기독교가 되는 것이고,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지.
아니, 예수님이 계실 때 언제 무슨 가톨릭이고, 기독교가 어디 있었어?”
평소 선생의 생각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주기도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주기도문이 뭐야. 웃기는 거야. 왜들 그러지? 네임 오브 갓? 하나님이 이름을 안 가르쳐주니까 모세가 ‘당신은 누구시냐’고 묻자 ‘나는 있는 나다(라틴말로 Ego sum qui sum)’라고 하신 것이지.”
“교회[교단]가 없어도 기독교가 되는 것이고”
이어지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말끝마다 네임 오브 갓, 하나님의 이름으로라고 말해.
하나님으로 하는 것[기도]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어떻게 달라? 대단한 신학자들이 많이 있지만, 킹덤, 왕이 다스리는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당신에게 있다?
악마가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당신을 지상의 왕이 되게 하겠다’고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노(No)! 하셨어.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지상의 왕으로 모시겠다고? 지상의 권력과 권세를 드린다고? 그건 지상의 왕에게나 하는 말이야. 내 말 반박해보라고. 반박해봐.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번에는 예수님이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수천 명을 먹였다는 신약(新約)의 오병이어(五餠二魚)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 오병이어, 그거 기적이 아니야. 모세와 나그네 살이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먹었다는 ‘만나(manna)’는 기적이 아니야. 먹으면 죽는 거요.
그거 먹은 사람들 다 죽었어. 오병이어 먹은 사람들 다 죽었어. 만나를 먹은 놈들, 다 죽었어.
(예수님은) 죽지 않는 빵을 주려고 왔는데 너희는 먹으면 죽는 빵을 가지고 기적이라고 그래? 오병이어라는 이름을 단 교회까지 있어. 성경을 어떻게 읽은 거야?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고 있는데 악마가 나타나 유혹하잖아.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 빵으로 바꿔보시오’라고.”
“五餠二魚 먹은 사람들 다 죽었어”
기자는 숨죽인 채 선생의 말을 경청했다.
“예수님이 돌을 빵으로 바꾸셨겠어? 생각해보라고. 세상의 모든 돌을 빵으로 바꾸면, 당장은 그 빵을 먹어 배가 부를지 몰라도 돌이 모두 사라지지 않겠어? 이후에는 배가 고파 죽지 않겠어? 그게 올바른 것이야?
예수님이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신 말씀은 하나도 틀린 말씀이 아니지.
그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생명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죽어. 죽는 생명이 뭐 그리 대단해. 가장 어려운 것은 영생이야.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기독교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생명을 통해 영생을 얻는 것이지.”
처음에는 자그마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어느새 원래 목소리처럼 커졌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힘이 납니다. 조금 전까지 녹다운되어 쓰러져 있었잖아. 이게 영(靈)이야. 육체보다 강한 영이야.”
그러더니 죽음을 앞둔 자신을 달래듯 덧붙였다.
“(하늘에서) 내가 이 책(《메멘토 모리》)을 통해 ‘올바른 소리를 했구나’ ‘착한 일을 했구나’ 해서 데려가려 하시는 건지, ‘너 어디서 망측한 소리, 니 멋대로 떠들어서’ (웃음) 데려가려고 하시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 그러나 난 내 나름대로 인간 예수의 입장에서 ‘네가 나를 이해했다’… (고 하시지 않을까.)”
1월 11일
선생의 침대 앞에 마주 앉아 20여 분간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는 《월간조선》 2월호에 실린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④ 맛과 멋, K-푸드’에 모두 녹였다.
선생이 설명하는 존 업다이크가 쓴 소설 《음악학교》와 카프카의 소설 《단식 광대》 이야기에 큰 감명을 받았다.
기자는 선생과 헤어진 뒤 도서관을 찾았다. 《단식 광대》는 빌려서 읽었지만 《음악학교》는 국내 소개되지 않은 듯 보였다. 인터넷 검색에도 나오지 않았다.
《월간조선》에 싣지 않은 존 업다이크의 《음악학교》에 관한 선생의 육성을 요약해 전한다.
“존 업다이크라는 소설가가 있는데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해. ‘오늘날 종교가 타락하는 이유가 있다’고.
진리라는 것은 딱딱하고 어려운 것이지. 딱딱한 음식을 어금니로 깨물어 먹듯 진리도 깨물어 먹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가톨릭의 성체성사를 보면 엄지손톱만 한 작고 얇은 밀떡을 신자들에게 나눠주거든. 초대교회 때는 아마 무척 딱딱한 빵이었을 거야.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유동식을 먹고 전부 소프트드링크, 전부 소프트푸드야. 딱딱한 걸 씹질 않아. 그래서인지 어려운 걸 이겨내고 노력하고 추구하고 진리에 부딪힐 마음을 잊어버렸어.”
아랫입술 꽉 깨물고…
“소설에는 한 소녀가 음표로 새까만 악보를 치는데 아름다운 음악이 나오지. 요즘은 음악을 들을 때도 편안하고 소프트한 음악만 선호하잖아. 그러나 소설 속 소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어려운 악보를 치면서 연주에 몰입하지. 음악은 단순히 귀로 감상하는 게 아니야.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들어야 해).
요즘 애들은 말이지, 씹질 않아가지고 옛날 석기시대보다 거의 4분의 1도 안 씹는다고 하잖아. 씹을 때마다 뇌에 산소가 공급되는데 말이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빵은 딱딱한 빵, 얇은 빵, 녹여 먹는 빵 별것이 다 있는데 그게 정신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어. 유동식 대신 인생을 씹듯이, 도전하면서 싸우듯이 딱딱한 것을 먹어야 해. 물론 상징적으로 하는 말이지. 인생을 안이하게 살지 말고 씹어서, 씹어 삼키듯이 살라는 것이야.”
1월 18일
▲부모님(가운데)과 5남 2녀의 가족 사진. 자전거 탄 꼬마가 여섯 살 이어령.
이날 자리에는 출판사 관계자도 함께했다. 출판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다. 선생이 별안간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슬픈 가정하에 앞으로 나올 《한국인 이야기》 후속편에 관한 당부가 이어졌다.
선생의 길고 길었던 지적 여정의 대미를 장식할 《한국인 이야기》는 현재 제1권 〈탄생 - 너 어디에서 왔니〉 편이 발간(2020년 2월)된 상태다. 앞으로 총 10권 발간이 목표다.
우선 《젓가락의 문화 유전자》(가제), 인공지능을 다룬 《알파고의 추억》(가제), 일제 강점기를 유년의 눈으로 들여다본 《회색 교실》(가제) 등을 차례로 출간할 계획이다.
기자는 선생이 쓴 글과 전집 라이브러리, 각종 자료들, 신문 스크랩, 간단한 메모, 육성 녹음파일, PPT 파일, 동영상 파일 등을 모두 넘겨받았다. 방대한 자료였다. 읽고 이해하고 선생의 숨결로 재생산하기 위해선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다행히 일부 원고는 선생의 생전에 여러 차례 수정과 첨삭의 지난한 퇴고의 과정을 거쳐 90% 이상 완성된 상태다.
다만, 선생이 기자에게 꼭 써달라고 당부한 ‘의·식·주(衣·食·住)’ ‘천·지·인(天·地·人)’ ‘진·선·미(眞·善·美)’와 관련된 주제의 ‘한국인 이야기’는 아직 날것 그대로다. 전혀 코딩이 안 된 빈 공책 같다.
기자 업무 외에 퇴근 후 별도 작업을 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어설프게 글을 만지다 보면 선생이 바랐던 의도와 달라질 수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선생이 구사하는 말의 밀도는 늘 상상을 초월했었다. 걱정이 태산이다. 선생은 “김 기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보태도 된다”고 허락은 했다.
앞으로 긴 호흡을 갖고 선생의 자료들을 다독(多讀)·다상량(多商量)할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월간조선》에 연재 형식으로 소개하는 방안도 고민해야겠다. 그렇게 되면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는 선생의 사후라도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2월 4일
▲이어령 선생은 췌장암의 고통을 겪으며 그 흔한 방사선 치료조차 거부했다. 사진=김용호 작가
이날 오후 선생을 찾았다. 거의 보름 만이었다. 선생은 거동을 못 하는 상태였다. 거실 창을 바라보고 소파에 누워 있었다. 식사를 못 하고 물만 마신다고 측근이 전했다. 혹시나 선생은 일부러 곡기를 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선생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맑아 보였다. 눈의 초점도 또렷해 보였다. 수수께끼 같은 비밀스러운 힘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 대소변은 잘 나오는 거죠?
“안 돼.”
말문이 막혔다. 손과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여기부터가 취재가 되는 건데, ‘데자뷔’ 현상이 있어.”
― 예?
“내가 처음 겪는 건데, 두 번째인 것처럼…, 그러니까 데자뷔처럼 계속 (사고가 반복적으로) 돌아가니까, 한 번 빠지면 수렁에 빠진 것처럼…. 사람이 수렁이나 사막에 떨어진 것처럼 계속 같은 일[생각]을 반복한다고. 내가 지금 그렇게 돼버렸어. 데자뷔 병에 걸렸어. 그러니까 김 기자하고 이렇게 ‘액션’이 될 때는 그 현상이 멈춰. 그게 끝나면 전부 데자뷔처럼 돌아간다는 거지.
그런 이상한 병에 내가 걸려 있는 거야. 그래도 김 기자와 만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어. 김 기자와 만나는 동안만은 데자뷔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정상으로 돌아오니까 좋고, 둘째는 어차피 해야 할 일(인터뷰)을 하게 되니까 좋고….”
― 저도 좋습니다. 다음 주에도 찾아뵐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데자뷔 병에 걸렸어”
심리학에서 말하는 데자뷔 현상은 최초의 경험임에도 이미 본 적이 있거나 경험한 적이 있다고 느끼는 이상한 기분이나 환상을 말한다. 선생이 말하는 동일한 패턴의 반복적 사고가 데자뷔 현상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의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 사실과는 다른 생각,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異常)심리 현상을 겪고 있었다. 임계점에 이른 육체적 고통이 정신까지 위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때마침 선생의 전화로 여러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개중에는 “3·9 대선 이후 향후 우리나라의 과제와 미래에 대해 생각을 듣고 싶다”는 방송사 기자의 전화도 있었다. 선생의 비서가 대신 전화를 받아 와병의 이유로 정중히 거절했다. 속으로 기자는 ‘선생이 건강하다면 얼마나 멋진 답을 할까’ 생각했다.
며칠 전 출간된 선생의 저서 《메멘토 모리》를 두고 대화를 이어갔다. 책 뒷면 표사(表辭)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어릴 적 신나게 놀다가도
불안한 아이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물었다.
“엄마, 죽지 마.”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걱정 마! 너 두고 나 절대로 안 죽어.”〉
그의 어머니는 선생이 겨우 열한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선생의 감성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선생의 저서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2010)에는 불안과 경계심이 가득한 열한 살 소년의 고백이 담겨 있다. 1943년, 어머니는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로 떠났다. 태평양전쟁이 한창 고비였던 시절, 어머니는 변변한 마취제도 없이 수술을 받았다. 그런 경황에도 예쁜 필통과 귤을 보내왔다. 병문안 손님들이 가지고 온 귤을 먹지 않고 머리맡에 놓고 보다가 아들에게 보낸 것이다.
어머니와 귤, 하얀 상자 속 유골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저서 《메멘토 모리》. 지난 1월 발간됐다.
그러고 얼마 후 어머니는 하얀 상자 속의 유골로 돌아왔다. 물론 그 귤은 어머니도 소년 이어령도 먹을 수 없는 열매였고 어머니와 함께 땅에 묻혔다. 선생은 《어머니를 위한…》에서 이렇게 썼다.
〈서울로 떠나시는 마지막 날 어머니는 나보고 다리를 주물러달라고 하셨다. 열한 살이었으니까 이젠 어머니의 다리를 주무를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성장한 것이다. 정말 다리가 아프셔서 그러셨는지 혹은 어린 것이라 늘 걸려 하셨는데 그만큼 자란 것을 확인하고 싶으셔서 그러셨는지 혹은 내 손을 가까이 느끼시며 마지막 작별을 하려고 하신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다리를 주물러달라고 하셨을 때의 어머니는 외로워 보이셨다.
왜 그랬던가, 어머니에게 나는 숙제를 해야 한다고 핑계를 대고는 제대로 다리를 주물러드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셨다. 나는 어머니의 신병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것이다. 그것이 정말 마지막인지 몰랐던 것이다.〉(24~25쪽)
어쩌면 “걱정 마! 너 두고 나 절대로 안 죽어”라는 선생의 말은 이별의 말조차 없이 떠난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담겨 있는 표현이 아닐까.
그래서일까. 선생은 책 제목 《메멘토 모리》를 마뜩잖게 여기는 듯했다. ‘너 두고 절대 나 안 죽어’가 제목이라 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하는 선생의 음성이 점점 거칠어졌다.
“책 제목이 ‘메멘토 모리’가 아니라고 몇 번이고 말했잖아. ‘너 두고 절대 나 안 죽어’라는 말은 예수님이 한 말이야. 그래서 부활한 것이야.
그리고 책 뒤표지에다 분명하게 썼잖아. 아이들이 신나게 놀다가도 불안해지면 어머니에게 가서 ‘엄마 죽지 마’, 그러면 엄마는 ‘너 두고 절대로 안 죽어’라고 말하잖아. 이게 책 제목이야.
그래야 ‘메멘토 모리’를 넘어서는 것이고,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야. 참 큰일이네.
그러니까, 내 얘기는… 메멘토 모리가 책 제목이 아니라니까….”
2월 10일
오늘은 이인화 교수와 함께 선생을 찾았다. 이 교수는 선생의 부탁으로 이어령 평전과 ‘디지로그’와 관련한 책 집필을 준비 중이었다. 이날 이 교수와 기자의 머리에 심어준 선생의 유언 같은 당부는 지면에 다 옮길 수 없다.
우리는 선생의 건강을 걱정했다. 2~3일 전쯤 한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고 측근이 전했다. 이후로 완전히 다리에 힘이 빠져서 지금은 스스로 일어서거나 몸을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측근은 “선생이 탈수 증상을 보이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거의 못 드세요. 알갱이 있는 것을 못 넘기시고 못 드시니까. 링거 일주일에 한 번 1000ml를 맞으시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물만 드신다고 보면 돼요. 못 드시니 배에서 항상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나시는 겁니다. 배고플 때 나는 그 소리….”
다소 그렁그렁해진 이인화 교수가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일곱 살 때 선생님을 처음 뵀으니 올해로 반세기가 됐어요. 대구 대명동 영남대에서, 지금은 영남공업전문대 건물에서 아버지 손을 잡고 뵈었습니다. 그때 《문학사상》을 창간하시고 1년 후인데 전국을 다니시면서 정기구독을 권하셨어요. 검은 뿔테 안경 때문에 얼굴에 하얀 철 가면을 쓴 것 같은 젊은 신사의 모습이… 그때 얼마나 젊으셨는지….”
이 교수는 여러 차례 선생과의 면담과 취재를 거쳐 200자 원고지 700장 분량의 평전을 최근 완성했다고 한다.
2월 17일
이날 오후 20여 분 정도 선생과 만났다. 여전히 소파에 누워 있었다. 일주일 전 이인화 교수와 왔을 때보다 몸이 더 나빠 보였다.
잠시 대화를 나누는데 목이 타는지 물을 찾았고 입술만 조금 축이는 정도로 마셨다. 젖은 거즈를 입에 대었다. 목이 쉬었으며 기력을 다해 말하는 듯했다.
답답한지 거실 창문을 열라고 했다. 햇살이 제법 따가웠지만 바람은 차가웠다. 멀리 북악산 능선이 긴 허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북악산 팔각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자주 평창동 언덕을 오르내렸지만 맞은편 산을 응시한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우리는 숲의 숙영지라도 찾으려는 듯 북악산을 응시했다. 어느새 눈을 감은 선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지난 세기 전쟁의 유혈과 통곡, 이념의 광기와 무지가 몰아치던 시대에 진지한 통찰의 목소리를 내며 살았다. 권위를 내세운 세력의 이끌림이나 억지로 강요된, 어리석고 거창한 호언(豪言) 대신 양심과 지성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생명과 평화를 존중하던 지성인이었다.
알맹이 없고 상투적인 글과 말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돌이킬 수 없는 운명적인 실수를 범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그런 경우가 없었고, 구설에 오른 적도 없었다. 대신 좌와 우, 어느 편에 몸을 담지 않아 양쪽 모두에게 배척을 당했다. 외로웠다.
‘아, 나만 섬처럼 남았구나.’
이런 일도 있었다. 지인이 10대 손자를 데리고 찾아왔다. 선생이 자신의 저서에다 사인을 해 줬는데 몇 장 들춰보다 말고 “할아버지, 글 잘 쓰시네요” 하더란다.
책도 방송도 안 보는 아이여서 선생이 누군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때 선생은 혼잣말처럼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아, 나만 섬처럼 남았구나.’
그랬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그만 남기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학계에서 이어령 사단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잠시 선생의 연대기적 흔적을 그려보았다.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논객으로 등장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으로 한국 지성사에 일찌감치 금자탑을 세웠다.
1967년 이화여대 강단에 선 후 학생들을 가르치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벽을 넘어서’를 기치로 88서울올림픽의 개폐회식을 기획했고 초대 문화부 장관,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슬로건으로 IT 강국의 정신적 기반을 제시했으며 ‘디지로그 선언’으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문명 융합을 이끌었다. 80대에 들어선 ‘한국인 이야기’로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를 분석했다.
그런 거인이 뉘엿뉘엿 해가 지는 서편을 향해 이제는 졸리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2월 23일
오후 2시쯤 선생의 자택을 찾았다. 측근에 따르면 전날 호흡이 잠시 정지되었다고 했다. 한바탕 소동을 벌인 뒤 기적적으로 다시 소생했다는 것이다. 기자는 선생에게 “고비를 잘 넘기셨다. 생명의 봄이 오면 몸이 반응하여 좋아지실 것”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엷은 미소를 띠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 달에 대통령 선거가 있는데 혹시 당선자에게 당부의 말씀이 있으신지 조금 궁금합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정치와 관련해 묻거나 화제로 꺼낸 적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선생이 조금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고 느껴졌다. 질문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 미국 대통령의 경우는 대개 변호사 출신들이야.”
― 맞습니다.
“변호사는 위임자가….”
― 위임된 총잡이라고 하지요.
“투표권자는 위임자야.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들의 옹호자야. 여(與)나 야(野)나.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리더를 선지자들이라 부르지.
그 차이가 뭔지 알아야 합니다. 선지자와 위임받은 리더는 달라요. 예를 들면 지금 총을 가졌어. 강도가. 아주 흉악범이야. 이 사람을 죽이면 많은 이가 살 수 있어. 그런데 총에 맞아 병원에 왔어. 의사는 어떻게 해야 돼?”
― 그래도 의사라는 직분에 충실해야….
“의사는 의사야. 수술을 해야 해. 환자는 고통받는 자야. 도와줘야 되느냐 안 도와줘야 되느냐? 도와주는 거야.”
파뿌리 하나의 의미
▲활짝 웃으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이어령 선생. 외출하기 위해 서울 평창동 자택을 나서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 그렇습니다.
“아무리 잘못했어도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는 살려야 해. 그게 크리스천의 정신이자 휴머니즘이고 다른 직업과 다른 거야. 내가 늘 얘기하는 파뿌리.… 파뿌리 하나야.”
선생의 ‘파뿌리’ 비유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소설 속 완벽한 성인이라 칭송받던 조시마 장로가 죽는다. 성자는 죽어도 썩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그의 시체가 썩어 들었다. 그를 따르던 수도사 알료샤는 큰 절망에 빠진다. 그때 그루센카가 ‘하나님은 성자뿐 아니라 악한 자도 버리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음은 《메멘토 모리》에 실린 선생의 육성이다.
〈“나쁜 짓만 하던 사람이 길 가다 목마른 사람에게 파뿌리 하나를 뽑아줍니다. 그리고 지옥에 가니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파뿌리 하나를 내려 지옥에서 구제해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자고 악인이고 다 포용하려고 해요. 인간이 끝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죠. 그런 깨달음을 얻고 알료샤가 다시 장로의 빈소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잠깐 졸게 되지요. 그때 꿈속에서 가나의 결혼식처럼 천국에 큰 잔치가 열린 겁니다. 보니까 조시마 장로도 있어서 “성자님, 그러면 그렇지 천국에 가셨네요!” 하고 기뻐하는데 장로가 “너도 빨리 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알료샤가 “저는 착한 일은 아무것도 한 일 없어 못 가요” 하고 말해요. 그걸 들은 장로가 뭐라고 했을까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파뿌리 하나야, 어서 와.”〉(30쪽)
선생이 말한 ‘파뿌리 하나’의 당부는 자기편 지지자들만의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들렸다. 위임된 변호사형 리더가 아닌 그리스도교의 선지자가 되어, 누구에게나 ‘파뿌리 하나’를 건넬 수 있는, 건넬 줄 아는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부탁이었다.
“잘 부탁할게. 기도 많이 부탁해”
― 앞으로 국가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념의 갈등이 사라질까요?
“(한반도가) 씨 파워[해양세력]와 랜드 파워[대륙세력]의 지정학적 ○○(목소리가 낮아 들리지 않았다.)인데 이게 코로나 때문에 더 심해졌어. 소셜라이즈화[사람들을 더 통제하게]됐다는 거지. 정부가 다 알아서 해야 한다든지 하는….”
이 대목에 이르러 선생은 지치는 듯했다. 낮은 목소리가 어느덧 날카로워졌다. 거의 들리지 않아 문장으로 옮기는 데 의역이 필요했다.
“이따만한 큰 나무 아래 사는 것은 좋은 게 아니야. 바람을 많이 타고…. 대나무가 웃어, 대나무가. ‘이 병신들아. 바람이 불면 난 휘어’. 이따만한 나무는 태풍에 쓰러져 버려. (덩치 큰) 주먹(나무)들을 보고 풀이 웃어. ‘덩치가 크면 뭘 해?’라고.
1년생 초목들을 보라. 장엄한 새 생명일세.”
선생이 말한 ‘큰 나무’가 정부의 방역독재를 비판하려는 의도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고쳐 물어볼 수 없었다. 이미 기력이 고갈한 상태였다. 기자가 듣기로는 ‘어린 초목’으로 상징되는 혹은 ‘파뿌리 하나’와 같은 생명, 다수 국민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말이 아닐까.
기자는 선생에게 인사하고 다시 찾아뵙겠다며 일어섰다. 선생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부탁할게. 기도 많이 부탁해.”
그 말이 기자가 들은 선생의 마지막 말이었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