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 영웅 백선엽 장군2/ 2021
07.08 ‘백선엽 1주기 추모’ 전현직 한미연합사령관 8명 나섰다

▲6.25전쟁 때 만 33세의 나이로 한국군 첫 대장이 됐던 백선엽 장군.
9일 6·25전쟁 영웅이자 창군(創軍) 원로인 고(故) 백선엽(1920~2020) 장군 1주기 추모행사를 앞두고 전직 한미연합사령관(주한미군사령관) 7명이 영상 등 추모 메시지를 보내온 것으로 확인됐다. 전직 주한미군 최고 수뇌부가 7명이나 한국군 전쟁 영웅을 직접 추모한 것은 처음이다. 폴 라케머러 신임 한미연합사령관도 9일 백장군 1주기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어서 백장군 추모에 나서는 전현직 한미연합사령관은 8명이 된다.
백선엽 장군 서거1주기 행사를 주최하는 한미동맹재단 관계자는 8일 “백선엽 장군 1주기 행사에 맞춰 모두 7명의 전직 한미연합사령관(주한미군사령관)이 추모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밝혔다. 백 장군 1주기 행사는 한미동맹재단(회장 정승조 전 합참의장)과 주한미군전우회(회장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 공동 주최로 9일 6·25전쟁 최대 격전 중 하나인 다부동 전투가 있었던 경북 칠곡에서 개최된다.
◇ 전현직 주한미군 최고 수뇌부 8명의 한국군 전쟁영웅 추모는 처음
백 장군 추모 메시지를 보내온 전직 한미연합사령관들은 주한미군전우회장인 빈센트 브룩스를 비롯, 존 틸럴리, 토머스 슈워츠, 버웰 벨, 제임스 서먼, 월터 샤프, 커티스 스캐패로티 예비역 대장 등이다. 전현직 한미연합사령관들의 유례 없는 추모 메시지는 백 장군이 생전에 미군들에게 다부동 전투 승리 등 ‘살아 있는 전설이자 신화’로 통했고 한미 안보동맹의 상징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기 때문인 것으로 평가된다.

▲2017년3월 빈센트 브룩스 한미연합사령관(오른쪽)이 헬기를 타고 비무장지대(DMZ) ‘캠프 보니파스'에 도착한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왼쪽)을 안내하고 있다. /AP연합
빈센트 브룩스 전 사령관은 미리 배포된 환영사를 통해 “다부동 전투에서 가장 명성을 떨친 지휘관은 고 백선엽 대장님이셨다”며 “다부동에서 그의 용맹한 저항과 적과 기꺼이 맞서는 투지는 모든 미 8군 전원에게 결의를 불어넣었고 결국 이를 통해 전세를 바꿀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이 다부동 전투에서 공적을 남기고 작년 별세하시기까지 한미동맹과 대한민국을 위해 일생 동안 수훈을 남겼던 백선엽 대장님을 기억할 것”이라고 추모했다.
지난 1998년부터 2001년까지 한미연합사령관을 지낸 토머스 슈워츠 예비역 대장은 “제가 군에서 복무했던 35년 동안 위대한 지도자들을 많이 만났는데 백 장군님은 제가 만난 가장 위대한 지도자중 한 명”이라며 “그는 국가적 영웅이었고 나라를 구했고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슈워츠 전 사령관은 “백 장군님과 포옹했을 때의 사진을 갖고 있는데 제 최고의 경험이며 절대 잊을 수 없는 포옹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 버웰 벨 “백장군을 항상 미국 조지워싱턴에 비유해와”
존 틸럴리 전 사령관은 “백 장군의 뜻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것은 ‘조국이 없이 나는 존재할 수 없다’고 쓴 그의 마지막 책이라고 생각한다”며 “백 장군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애국자였다”고 말했다. 그는 “백 장군은 이 위대한 나라와 위대한 사람들의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절대적인 애국자였다”고 강조했다.

▲버웰 벨 한미연합사령관이 2008년3월 서울 용산 미군기지 사령관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한국인 손녀딸 입양과 한·미 간 현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버웰 벨 전 사령관은 서한을 통해 “저는 항상 백선엽 대장을 미국의 조지 워싱턴 장군에 비유해왔다”며 “워싱턴 장군은 미국이 자유를 찾는 데 기여하신 존경받는 고위 군사 지도자이였고, 백 장군이 대한민국과 국민을 지켜낸 것과 같다”고 했다. 그는 “백 장군은 개인적 용기와 전략적 비전, 그리고 역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는 데 국민들을 결속시켰다”고 밝혔다.
제임스 서먼 전 사령관은 “백 장군은 진정한 영웅이었고 한미동맹을 지난 70여년 동안 강력하게 흔들림 없도록 굳건히 지켜온 접착제”였다며 “그는 자유의 대가와 희생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한국 국민들뿐 아니라 미국 군인들에게도 큰 유산을 남겼다”고 추모했다.
◇ 백선엽, ‘한국판 300′으로 불리는 다부동 전투 승리의 주역
고 백선엽 대장이 6·25전쟁 당시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다부동 전투는 스파르타의 300 용사가 마케도니아 해안의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막다가 전원 옥쇄한 역사에 비견된다. 테르모빌레는 영화 ’300′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부동이 돌파되면 임시수도 대구가 적 포화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고 부산까지 밀려 남한 전역이 적화될 가능성이 컸다.

▲2018년 11월 서울 용산구 국방컨벤션에서 주한미군이 주관하는 백선엽 예비역 대장 생일파티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정경두 국방부장관과 로버트 에이브럼스 한미연합사령관, 박한기 합참의장, 해리해리스 주한미국대사 등이 참석했다. 특히 해리스 미대사는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해 눈길을 끌었다. /남강호 기자
당시 30세 청년 장군으로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은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후퇴하는 한국군을 가로막았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은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장병들을 독려, 결국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백 장군은 1952년 7월 최연소(32세)로 제7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엔 만 33세의 나이에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회담 때는 한국군 대표로 참가했다. 백 장군은 1959년 합참의장을 지낸 뒤 이듬해 5월 예편했다. 한국군 최고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두 차례나 받았고 지난해 7월10일 별세했다.
◇ 다부동 전적지서 백장군 장녀 9일 특별강연 행사
한미동맹재단과 주한미군전우회는 9일 오전 11시부터 고 백선엽 대장 서거 1주기를 추모하는 헌화 행사 및 제10회 한미동맹포럼을 경북 칠곡군 다부동에서 개최한다. 헌화 행사는 서욱 국방장관, 민홍철 국회 국방위원장과 국회의원, 이철우 경북도지사, 폴 라케머러 신임 한미연합사령관, 김승겸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다부동 구국용사충혼비에서 개최된다.

▲지난 6월25일 오후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열린 6.25전쟁 71주년 기념식과 백선엽 장군 서거 1주기 추모식에서 참석 인사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신현종 기자
한미동맹 포럼은 미국에 거주하는 백장군의 장녀 백남희 여사를 초청, 칠곡 호국평화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과 한미동맹’을 주제로 특별강연을 연다. 다부동 헌화행사 및 제10회 한미동맹포럼은 유튜브 채널인 ‘한미동맹재단tv’를 통해 실시간 방송될 예정이다.
한편 국방부와 육군, 국가보훈처 등 정부나 군(軍) 차원의 공식 추모행사는 열리지 않아 “백 장군에 대한 현 정권 일각의 불편한 시각을 반영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조건일보 유용원 군사전문기자
07.08 백선엽 장군 뒤에 박정희가...미공개 사진으로 본 전쟁 영웅

▲1951년 7월 한국 첫 휴전회담 대표로 나선 백선엽 1군단장이 판문점 캠프를 찾아온 요인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 무렵 휴전에 반대한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회담 대표로 나선 백 소장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밀지를 내렸다. [고 백선엽 장군 소장 앨범]
고 백선엽 예비역 대장(1920~2020)은 그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일선에 섰던 미군들로부터 ‘진정한 전쟁 영웅’이라는 평가를 더 받는다. 그는 다부동 전투로 대한민국을 바람 앞 등불의 위기에서 구했고, 평양 최초 점령, 중공군 참전 직후 성공적인 후퇴, 1⋅4후퇴로 뺏긴 서울 재탈환, 중공군 1951년 춘계 공세 방어, 동부 휴전선 북상 등의 숱한 작전을 지휘한 명장으로 유명하다.
그 뒤 미군과의 물 샐 틈 없는 협력으로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빨치산 토벌, 국군 2군단 재창설로 시도한 한국군 현대화, 휴전 직후 병력 40만명의 1야전군 창설과 휴전선 단독 방어 능력 확보 등 수많은 전공과 수훈을 세웠다.

▲한국군 2군단 재창설은 포병전력의 획기적 현대화의 첫 걸음을 뗀 작업이다. 이 때 무기 현대화와 함께 고급 포병장교를 대거 육성했다. 2군단 재창설 직후로 추정하는 사진 속 뒷줄 가운데 박정희 전 대통령(붉은선 안)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이 무렵 병과를 포병병과로 옮겨 곧 장군으로 진급한다. 박 대통령은 해방 직후 남로당 군사책으로 활동했다가 1948년 숙군작업에 걸려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당시 숙군 책임자였던 백선엽 정보국장(앞줄 오른쪽 3번째)에 의해 사형 집행 10여일 전 극적으로 구명됐다. 여러 모로 백선엽 장군과는 기묘한 인연을 맺은 사이다. [고 백선엽 장군 소장 앨범]
7월 10일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본지는 고 백선엽 장군이 소장하던 전쟁 기간 앨범을 받아 그 중에서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면모를 담은 사진들을 공개한다. 장군으로 진급하기 전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이나 휴전 회담 때 이기붕 당시 국방장관이 와서 밀지를 전달하는 듯한 모습,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아들 실종 소식을 알리는 장면을 비롯해 6·25 전쟁 전장을 누비는 백 장군 활동을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다.
조선일보 이위재 기자

11.27 ‘호국 영웅’ 백선엽 기억해준 것은 한국 아닌 유엔사
▲1951년 3월 서울 탈환 작전을 앞두고 백선엽 장군과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이 대화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한국 사람 중 11월 23일이 고 백선엽 장군 탄생 101주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국 군인 중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유엔군사령부는 페이스북 계정에 “오늘(11월 23일)은 백선엽 장군이 태어난 지 101주년 되는 날”이라며 추모 글을 올렸다. “6·25전쟁 당시 보여주신 리더십, 조국을 위한 일생의 헌신과 끝없는 전우애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백 장군과 유엔군 지휘부가 찍은 사진도 올렸다. 북한과 중공의 침략에서 맞서 대한민국을 함께 지켜낸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것이다.
71년 전 백 장군이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지켜내지 못했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다. 겁먹은 병사들이 달아나려 하자 “내가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쏘라”며 선두에서 독려했다. 병력 8000명으로 북한군 2만 여명의 총공세를 한 달 이상 기적적으로 막아낸 덕분에 유엔군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후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했고, 1·4 후퇴 뒤엔 서울을 최선봉에서 탈환했다. 새로 온 주한미군 사령관들이 백 장군을 찾아 전입 신고를 한 것은 같이 피 흘린 ‘구국 영웅’에 대한 예우를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지난해 백 장군이 100세로 별세했을 때 청와대와 민주당은 애도 논평 한 줄 내지 않았다. 국군 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도 조문하지 않았다. 집권 세력은 그가 일제강점기 20대 초반 나이에 간도특설대에 배치됐다는 이유만으로 ‘친일 반역자’로 몰고 갔다. 백악관과 국무부, 전 주한미군 사령관들은 모두 애도 성명을 냈다. ‘한국의 조지 워싱턴’ ‘위대한 군사 지도자’라는 최고의 헌사를 바쳤다. 마땅히 우리 정부가 해야 할 말을 외국이 대신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백 장군의 101번째 생일도 유엔사가 대신 챙겨주었다.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이 올해 처음으로 ‘국군 포로’ 문제를 포함했다. 반면 문 대통령이 김정은을 세 번이나 만났지만 ‘국군 포로’를 언급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보훈처는 6·25 영웅 포스터에 국군 아닌 중공군 모습을 그려 넣기도 했다. 이 정권은 6·25 전사자의 유해까지 이벤트 소품처럼 이용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누구의 희생 덕분인가. 부끄러울 뿐이다.
조선일보 사설
2022.
06.23 “6·25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 빛나는 용기는 평상을 초월한 것”
서거 2주기 학술포럼 열려
6·25전쟁 영웅인 고(故) 백선엽(1920~2020) 장군의 서거 2주기를 기념해 ‘백선엽 장군 서거 2주기 학술 포럼’이 23일 개최됐다.

▲23일 오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백선엽 장군 서거 2주기 학술포럼'에서 대학교수 및 군 관계자들이 토론을 하고 있다. /백선엽 장군 기념사업회
이날 오전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포럼은 백선엽 장군 기념사업회(공동대표 송영근ㆍ한규성)와 ROTC 중앙회(회장 박식순)가 공동 주최했으며, 군 관계자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백 장군의 공로와 군사적 업적에 대한 평가 및 논의가 진행됐다.
6·25전쟁 영웅으로 불리는 백 장군은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로 꼽히는 다부동 전투에서 1사단장으로 병사들을 지휘했다. 그는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미군은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장병들을 독려했고,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패퇴 직전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후 백 장군은 1952년 7월 최연소(32세)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정전회담 때는 한국군 대표로 참가했다. 한국군 최고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두 차례 받았다. 하지만 이 같은 공적에도 문재인 정부 당시 일부 인사들은 백 장군의 일제강점기 일본군 복무 기록을 부각하며 그를 ‘독립군 토벌 친일파’로 폄훼·매도해왔다.
송영근 백선엽 장군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는 이날 포럼에서 “극도로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전승을 이끌어낸 30대 초반의 장군님의 판단력과 지휘력, 그리고 빛나는 용기는 평상을 초월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직도 장군님의 업적을 외면하고 친일반역자, 매국노라는 프레임 씌우기가 걷혀지지 않고 있다”며 “우리 모두 새롭게 힘을 합쳐 영웅이 영웅으로서 올바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각종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포럼에서 토론자로 참여한 유재갑 전 경기대 대학원장은 “백선엽 대장은 전쟁 직전 부산지역 연대장을 할 때부터 미군부대와 함께 근무해 (미군과) 협조하는 방법을 잘 알게 됐다”며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에서도 서편 인접부대가 미 기병연대였고 북진할 때에도 밀번 장군의 군단에 배속돼 미군의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조선일보 김승현 기자
06.25 확 달라진 백선엽 장군 추모식…軍에선 군악대·의장병까지 지원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서 열려
작년보다 3배 많은 800여명 참석
▲25일 오후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열린 6.25전쟁 72주년 기념식과 백선엽 장군 서거 2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백선엽장군기념사업회.
6·25전쟁 영웅이자 창군(創軍) 원로인 고(故) 백선엽(1920~2020) 장군을 기리는 추모식이 25일 오후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열렸다.
‘잊지 말자 6·25, 지키자 대한민국!’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는 사단법인 국가원로회의와 백선엽장군기념사업회로 구성된 추모위원회가 준비했다. 이원종(68) 국가원로회의 사무총장은 “백 장군의 영혼이 머물고 있는 칠곡 다부동에서 장군과 6·25전쟁을 잊지 말고 상기하자는 취지로 마련한 행사”라고 말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좌석 300개가 마련됐지만 800여명이 참석했다. 지난해 행사보다 3배 가까운 인파가 몰렸다. 올해 행사에는 군에서 처음으로 군악대와 의장병 등을 지원하고 조화도 보냈다. 지난해 정부와 군의 무관심 속에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백 장군을 기리는 자리가 1년 만에 달라진 것이다.
추모식은 헌화 및 분향, 추도사와 추모사, 추모영상 시청, 결의문 낭독 등으로 진행됐다. 행사에는 이철우 경북도지사를 비롯해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와 안철수 국회의원 등이 참석했다.
▲25일 오후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열린 6.25전쟁 72주년 기념식과 백선엽 장군 서거 2주기 추모식에서 진행자가 만세삼창을 제시하고 있다. /백선엽장군기념사업회.
국가원로회의 상임의장인 이상훈(89) 전 국방부 장관은 추도사에서 “다부동 전투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나라를 살리는 반격의 시발점이 됐다”며 “과거 정부는 이러한 정체성을 홀대했지만 앞으로 백 장군 업적을 통해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드는 발판이 되야 한다”고 했다.
추모사에서 권영해(84) 전 국방부 장관이 “한국전쟁사에서 백 장군의 업적은 국가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라도 정부와 민간차원에서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자,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민간사회단체와 협의해 내년엔 다부동전적기념관에 백 장군 등 전쟁 영웅들의 동상을 세우고 다부동전적지를 성역화하겠다”고 화답했다.
칠곡 다부동은 백 장군을 상징하는 곳이다. 1950년 8월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그가 지휘한 육군 1사단이 승리하면서 낙동강 전선 방어에 성공했다. 당시 백 장군은 “내가 앞장설 테니,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쏘라”고 말하며 북한 인민군이 점령한 고지로 돌격해 패퇴 직전의 전세를 뒤집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 계기가 마련되자 백 장군과 1사단은 그해 10월 평양으로 진격했다. 그는 1952년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돼 이듬해 군 최초로 4성 장군이 됐다. 1959년 합참의장을 지냈고 이듬해 예편했다.
백 장군은 2020년 7월 별세 전 “전사한 전우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뜻에 따라 전투복을 수의(壽衣)로 입고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관 위에는 다부동 등 8대 격전지에서 모은 흙도 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과 당시 여당 지도부는 그의 영결식에 불참했다. 일부 단체는 안장식 때 반대 집회도 했다. 보훈처는 지난 2월 백 장군 묘 안내 표지판을 철거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권광순 기자
07.07 백선엽 장군 마지막 유언 “워커 장군 동상서 한미동맹 강화 메시지 남겨라”
장녀 백남희씨, 아버지 유언 공개
▲2017년 4월 25일 서울 용산구 용산미군기지 미8군사령부에서 열린 워커장군 기념물 이전행사에서 백선엽 장군과 토머스 밴달 주한 미 8군사령관등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토머스 밴달 주한 미 8군사령관, 브룩스 사령관, 백선엽 예비역 대장./미8군사령부 제공
6·25 전쟁 영웅이자 창군(創軍) 원로인 고(故) 백선엽(1920~2020) 장군의 마지막 유언이 최초로 공개됐다. 백 장군의 서거 2주기를 앞두고 장녀 백남희(74)씨가 ‘호국의 고장’ 경북 칠곡군을 찾아 부친의 마지막 말을 전한 것이다. 칠곡군은 6·25 전쟁 당시 백 장군이 지휘한 육군 1사단이 낙동강 전선 방어에 성공한 다부동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서, 8일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백 장군의 2주기 추모식이 열린다.
7일 칠곡군에 따르면 백 여사는 “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두 가지 유언을 남기셨다”면서 “한 가지는 유해를 바로 묻지 말고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들러 전우에게 인사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백씨는 또 “다른 한 가지는 경기도 평택의 미군 부대를 찾아 부대 내 워커 장군 동상 앞에서 한미동맹 강화를 위한 메시지를 남겨달라는 것”이라고 전했다. 워커 장군은 6·25 전쟁 당시 백 장군과 함께 낙동강 전선 방어선인 ‘워커라인’을 사수해 승리를 이끈 전우였다.
▲고(故) 백선엽 장군의 2주기를 하루 앞둔 7일 고인의 딸 백금희씨가 아버지의 유언을 뒤늦게 공개했다. 백 장군은 “유해를 바로 묻지 말고 평택 미군 부대에 있는 워커 장군 동상 앞에서 한미동행 강화 메시지를 남겨달라”고 했다고 한다. 사진은 2020년 7월 열린 백 장군의 영결식 모습./조선일보 DB
백씨는 부친의 유언을 지키지 못한 안타까운 상황도 전했다. 백씨는 “당시 미군 부대에서 아버지를 맞을 준비를 했지만 반대 목소리가 있어 소원을 이뤄드릴 수 없었다”면서 “저는 아버지의 유언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불효녀이자 죄인”이라고 말했다. 이를 들은 김재욱 칠곡군수는 다부동의 흙을 담은 올리브 나무 화분을 백씨에게 선물했다. 김 군수는 “올리브 나무는 백 장군이 평소 사랑하셨던 평화를 상징한다”면서 “다부동 흙에서 자란 올리브 나무처럼 장군의 헌신이 한반도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백 장군과 칠곡군은 인연이 깊다. 칠곡 다부동은 백 장군을 상징하는 곳으로, 1950년 8월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그가 이끈 육군 1사단이 승리하면서 낙동강 전선 방어에 성공했다. 당시 백 장군은 “내가 앞장설 테니,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쏘라”면서 북한군이 점령한 고지로 돌격해 전세를 뒤집었다. 백 장군은 32세이던 1952년 최연소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 우리 군 최초 4성 장군이 됐다. 1959년 합참의장을 지냈고, 이듬해 예편했다. 지난 2020년 7월 10일 향년 100세로 타계해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백씨는 오는 8일 칠곡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한미동맹재단 등이 주최한 ‘故 백선엽 장군 추모 2주기’ 행사에 참석해 이 같은 부친의 유언과 소회를 전달할 계획이다. 이날 행사에는 이종섭 국방부 장관,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폴 러캐머라 한미연합사령관, 박정환 육군참모총장 등도 참석해 백 장군을 기릴 예정이다. 지난달 25일 백선엽장군기념사업회 등으로 구성된 추모위원회가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연 백 장군 2주기 추모식에도 시민 800여 명이 참석했다.
조선일보 이승규 기자
07.16 “내 아버지 백선엽, 정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충성했다”
백선엽 장군 2주기 맞아 한국 온
장녀 백남희의 못다한 이야기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들어선 백남희씨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아버지가 막판까지 출퇴근하던 사무실이 있던 곳이라 내게도 남다른 장소”라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1991년 백선엽 장군이 미국 코네티컷에 사는 큰딸 집을 찾았다. 당시 백 장군의 나이 71세. 그는 다짜고짜 딸에게 “내일 당장 플로리다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으라”고 했다. “밴 플리트 장군이 벌써 99세인데 누워 계신다고 하니 지금 찾아봬야 한다.”
‘6·25전쟁 영웅’인 백 장군은 다부동 전투 등 전쟁의 국면을 좌우했던 주요 전투마다 승리를 거뒀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에 나서 가장 처음 평양에 발을 들여놨고, 빨치산 토벌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쟁이 터졌을 때 대령이었던 그는 1950년 7월 준장이 됐고, 초고속 진급을 거듭해 1953년 1월 대한민국 군 역사상 최초로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이때 백 장군의 왼쪽 어깨에 별 넷 계급장을 달아준 사람이 제임스 밴 플리트(1892~1992) 미 8군 사령관이다. 미군의 시스템과 정신을 알려준 밴 플리트는 이승만 전(前) 대통령으로부터 ‘한국군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았다. 밴 플리트는 백 장군을 각별히 아꼈고, 훗날 회고록에서 백 장군에 대해 “아주 특별하고 존경할 만한 최고의 사령관”이라고 썼다.
그런 밴 플리트 장군이 곧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미국행에 나섰던 것. 주소도 전화번호도 몰랐지만, 부녀(父女)는 무작정 밴 플리트의 고향인 플로리다 포크 시티에 가서 집을 찾아냈다. 밴 플리트 장군은 40년 전 한국 전선에서 동고동락했던 젊은 한국군 지휘관을 한눈에 알아봤다. “아버지가 경례를 하자마자 두 분이 아무 말 없이 서로 끌어안고 울었어요. 잘 지냈냐, 오랜만이다, 이런 말도 없이 부둥켜안고 한참 울기만 했어요. 저는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그때 처음 봤어요.”
고(故) 백선엽(1920~2020) 장군의 장녀 백남희(74)씨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나눈 두 전우에게 말은 필요 없었다”며 “아버지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자 한미 동맹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고 했다. “사실 제겐 죄송하고 후회스러운 기억이에요. 밴 플리트 장군님이 점심에 스테이크를 먹고 가라고 하셨는데, 장군님 건강이 안 좋으시니까 제가 아버지한테 빨리 가자고 재촉했거든요. 두 분이 좀 더 같이 보낼 시간을 드렸어야 했는데…. 지금 와서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파요.”
▲1953년 봄, 백선엽(왼쪽) 장군이 한복을 입은 딸 백남희씨와 찍은 사진. / 백남희씨
남희씨는 백 장군이 생전 “복덩이”라며 총애한 딸이다. 외부에 나서길 꺼려 한 아내를 대신해 각종 행사에도 대동했고, 남희씨도 매니저 역할을 자처했다. 2남2녀 중 맏딸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유족 대표로서 추모 활동을 펼치고 있다. 백 장군 2주기를 앞두고 지난달 귀국한 그는 경북 포항에서 열린 백 장군 흉상 제막식에 참석했고, 한미동맹재단 조찬기도회, 다부동 참전용사 위로 만찬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지난 8일 경북 칠곡군에서 열린 추모 행사에는 국방부 장관, 국가보훈처장, 육군참모총장, 한미연합사령관 등 180여 명이 참석했다. 작년보다 2배 많은 인원이다. 백 장군이 2년 전 별세했을 때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애도 논평도, 조문도 하지 않아 논란이 됐다. 지난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만난 백씨에게 이 질문부터 던졌다.
◇“文정권이 홀대했다고 섭섭해할 분 아냐”
-많이 서운했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안 아팠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렇지만 아버지는 평생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켰고, 한미 동맹을 굳건히 해서 전쟁 없는 환경에서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데만 집중하셨어요. 역대 대통령 중 한 분이 섭섭하게 했다고 해서 서운해하실 분이 결코 아닙니다. 저 역시 담담했고요.”
-나라 지킨 영웅을 대하는 태도가 정권에 따라 달라지는 건 문제 아닌가요?
“아버지는 생전 어떤 정권이나 대통령이 아니라 오직 대한민국에 충성했어요. 정치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으셨고요. 세상 순리는 저울과 같다고 하셨지요. 왼쪽, 오른쪽으로 무게가 움직이지만, 결국은 치우치지 않게 중심을 잡기 마련이라고요.”
-일제강점기 20대 초반 나이에 만주군 간도특설대에 배치됐다는 이유만으로 백 장군을 ‘친일반역자’로 매도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아버님은 1920년생이에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없었던, 조국이 없었던 땅에서 태어나신 분입니다. 나라를 뺏긴 뒤 태어난 식민지 조선인이었고, 일본의 힘이 무엇이고 단점이 무엇인지를 주시하며 일본을 극복하려 했던 세대입니다. 그들이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와 은행, 기업을 세우고 군대를 만들었어요. 지금의 시각으로 그 시절을 재단하면 안 됩니다. 아버지는 목숨 걸고 6·25전쟁을 지휘하며 나라를 지킨 분이에요. 늘 자살 총을 지니고 다니신 걸 저는 기억합니다. 나라가 없으면 본인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을 지킨 분이 저희 아버지 백선엽 장군이에요.”
-일각에선 백 장군이 만주군 간도특설대에 몸담고 우리 독립군을 ‘학살’했다는 주장을 합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아버지께 여쭸더니 ‘1943년부터 간도특설대에 복무했지만 독립군과 전투 행위를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하셨어요. 그럼 왜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항변하지 않으시냐 했더니, 그건 내가 밝히지 않아도 역사가 밝힐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백 장군은 생전 회고록에서 “내가 간도특설대로 발령받아 부임한 1943년 초 간도 지역은 항일 독립군도, 김일성 부대도 1930년대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밀려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고 없을 때였다”고 말했다.
◇다정다감한 내 아버지, 백선엽
세상을 떠난 백 장군이 조국에서 받은 대접은 참담했지만, 미 백악관과 국무부, 전 주한미군 사령관들은 일제히 애도 성명을 냈다. 전·현직 주한미군 최고 수뇌부 8명이 전례 없이 한국군 전쟁 영웅을 기렸다. 백 장군 생전 그를 한미 동맹의 상징이자 ‘살아있는 전설’로 예우해온 미군은 ‘한국의 조지 워싱턴’ ‘위대한 군사 지도자’라는 최고의 헌사를 바쳤다.
-백 장군은 어떤 아버지였습니까.
“다른 분들에겐 무서운 장군일지 몰라도, 제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는 자애로운 분이었어요. 현역 장군일 땐 퇴근하면 대문에서부터 ‘남희야!’ 하고 들어오셨죠. 원래 제 위로 언니, 오빠가 있었는데 둘 다 아기 때 세상을 떠났어요. 그래선지 아버지는 늘 저를 복덩이라 부르고, 첫사랑이라고 하셨어요. ‘널 사랑하는 건 무조건의 사랑이야’라고 하셨죠. 다만 어딜 가자는 약속은 단 한 번도 지킨 적이 없었어요. 워낙 바쁘시니까 아버지가 그런 약속을 해도 기대는 안 했어요.(웃음)”
▲백남희씨가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조형물을 배경으로 섰다. 백씨는 “6·25전쟁 50주년을 기념해 지난 2003년 아버지 백선엽 장군 주도로 3년 만에 완성한 작품”이라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어릴 땐 원망도 했겠네요.
“한 번도 원망해본 적 없어요. 아버지는 늘 자랑스러운 존재였죠.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행사가 있으면 저를 꼭 데리고 다니셨어요. 밤에 미군 장군들이 오면 비행장 나갈 때도 자는 저를 깨워서 데리고 나가셨으니까요.”
-전쟁 중 아버지에 대해 기억나는 일화가 있습니까.
“워낙 어릴 때라 전쟁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전선으로 뛰쳐나간 아버지가 10개월 만에 부산으로 찾아왔는데 처음엔 멀뚱거리면서 보다가 곧 달려들어 품에 안겼다고 해요. 아버지의 전쟁 중 업적은 대부분 책에서 읽거나 다른 분들의 전언으로 들었어요. 궁금한 게 있어서 그 내용에 대해 여쭤보면 늘 먼 하늘을 쳐다보시며 답을 해주셨지요.”
-일요일에도 새벽에 출근하셨다면서요.
“6·25전쟁이 일요일 새벽에 북한의 기습을 받아 시작됐잖아요. 만약 대한민국에 전쟁이 또 일어난다면 반드시 일요일에 터질 거라고, 일요일에도 새벽 6시 30분이면 출근하셨어요. 부하들에게도 일요일에 일은 안 하더라도 아침에 일단 사무실에 들렀다 가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유명한 명승고적보다 (나의) 발길을 끌어들였던 곳은 전쟁터’라고 회고록에 쓰셨지요. 1960년 이후 10년 동안 대만·프랑스·캐나다 등 해외 주재 대사 시절에도 외국 전쟁터를 다니셨다던데요.
“노르망디, 독일 라인강변, 워털루 등 쉬는 날마다 전쟁터를 찾아다녔어요. 저는 중·고등학생 때였는데 너무 재미없어서 투덜거리면서 따라다녔죠. 그런데도 아버지는 너무 신이 나셔서 라인강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유럽의 헤게모니를 다퉜던 중요한 전쟁터고, 노르망디는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승부가 갈렸던 곳이라고 세세하게 설명을 했어요. 덕분에 유럽의 모든 전쟁터를 다 가봤어요 제가(웃음).”
백 장군을 10여 년간 보좌했던 이왕우 예비역 대령은 “장군님은 바둑·화투·장기·포커 등 잡기를 전혀 못했다. 유일한 취미가 독서였다”며 “특히 전쟁사를 읽었고, 읽은 뒤엔 그 현장을 직접 가봐야 직성이 풀렸다. 천상 군인”이라고 했다.
◇“진짜 영웅은 내 손가락 따라 말없이 싸운 장병들”
2주기 추모 행사가 열린 경북 칠곡 다부동은 백 장군을 상징하는 곳이다. 당시 윌턴 워커 장군은 백 장군에게 “다부동에서 패해 전선이 후방으로 밀리면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한다”고 했다. 1950년 8월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30세였던 백선엽 1사단장은 후퇴하는 한국군을 가로막고 “미군은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며 장병들을 독려했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백 장군은 그의 저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에서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는 하천을 이뤘다. 시체가 풍기는 냄새로 숨을 쉴 수도 없었다”고 기록했다.
▲1950년 10월 평양 시가지 진입을 앞두고 작전을 논의하는 백선엽 장군(왼쪽). / 조선일보 DB
그가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지켜내지 못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다. 병력 8000명으로 북한군 2만여 명의 총공세를 한 달 이상 기적적으로 막아낸 덕분에 유엔군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후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했고, 1·4 후퇴 뒤엔 서울을 최선봉에서 탈환했다.
2020년 7월 “전사한 전우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장군의 유지에 따라 6·25전쟁 8대 격전지에서 퍼온 흙이 장군의 유해와 함께 매장됐다. 이때 참전 노병 등과 함께 격전지 흙을 뿌린 할머니가 있었다. 19세에 결혼하자마자 다부동 전투에서 남편을 잃은 김임선(92) 할머니. 백남희씨는 “2019년 아버지 모시고 다부동 행사에 갔다가 김 할머니를 처음 만났다”며 “사연을 여쭤보니 가슴이 너무 아파서 매년 한국 올 때마다 찾아뵙는다”고 했다.
-어떤 사연인가요.
“결혼 9개월 만에 남편이 징집돼 전장에 나갔는데, 수십 년 동안 전사자 통보도 못 받고 생사도 모르고 살았대요. 시어머님은 전쟁 중 이분 눈앞에서 공산당 총에 맞아 돌아가셨고, 아이도 없이 평생 시아버님을 모시고 살았답니다. 1998년 50년 만에 남편이 다부동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대성통곡하셨대요. 이분 손 붙잡고 저도 한참을 울었어요. 남편 시신은 못 찾았지만 백 장군 무덤에 다부동 흙을 뿌려주실 수 있겠냐고 부탁을 드렸지요.”
-백 장군에겐 그만큼 다부동이 의미 깊은 곳이었네요.
“다부동을 뺏기면 대한민국을 뺏긴다는 걸 알고 계셨어요. 6·25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가장 희생자가 많았던 곳입니다. 지프를 타고 사단본부를 나설 때, 아버지는 전우들의 시신을 보고 눈물을 감추려고 하늘을 보셨다고 했어요. ‘전쟁 영웅은 내가 아니다. 진짜 영웅들은 내가 가리키는 손가락 방향을 그저 말없이 따라 나가 싸웠던 장병들’이라고 누차 말씀하셨지요. 김 할머니처럼 절절한 사연을 품고 있는 한 분 한 분이 모두 전쟁 영웅이지요. 아버지는 스러져간 전우들과 함께 다부동에 묻히고 싶어 했어요. 여건이 안 돼 포기하셨지만요.”
-따님에게 별도로 남긴 유언이 있었나요.
“아버지가 입원하시고 5개월간 제가 같이 있었어요. 그때 당부하셨습니다. 유해를 바로 묻지 말고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먼저 들러 전우들이 묻힌 장소를 돌면서 인사하게 해달라고요. 그런 다음 경기도 평택의 미군 부대를 찾아서 한미 동맹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했어요. 두 곳을 꼭 먼저 갔다가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히고 싶다고 하셨는데, 주변 사람들 반대로 결국 들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저는 아버지 유언을 지키지 못한 불효자이자 죄인”이라며 인터뷰 중 눈물을 흘렸다.
▲백선엽 장군 2주기 추모식이 열린 8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비에서 백 장군의 딸 백남희씨가 추념사를 하고 있다. /김동환 기자
◇박정희 대통령 구명 과정 처음 밝힌 딸
백 장군은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군 내부 남로당 숙청 분위기 속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구명(救命)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남희씨는 이 과정에 대해서 새로운 얘기를 들려줬다. “본래 남로당 가담 혐의자 4000여 명 가운데 12명이 최종 사형판결을 받았고, 그중 한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12명 모두 1949년 총살당할 운명이었으나 박 전 대통령만 극적으로 살아남았지요. 아버지께 그 과정을 여쭤본 적이 있었어요.”
-왜 박 전 대통령만 구명한 건가요?
“아버지는 12명의 사형 집행 예정자들을 한꺼번에 불러서 면담하셨답니다. 당신들 중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 사람은 나를 찾아오라고 하셨고, 유일하게 아버지를 찾아온 분이 박정희 당시 소령이었어요.”
백 장군을 찾아온 그는 긴 침묵 끝에 ‘살려달라’고 했고, 백 장군은 “그렇게 해봅시다”라고 말했다. 육군 최고 지도부에 그의 감형을 요청했고, 결국 박정희 소령은 풀려나 목숨을 구했다. 백선엽은 군복을 벗게 된 그의 생계를 염려해 정보국 안에 민간인 신분으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백선엽 회고록을 쓴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은 “백 장군 인터뷰를 하면서 그에게 왜 박정희만 살려줬냐는 질문을 던졌지만 ‘나도 잘 몰라’ 하고 넘어갔다. 집요하게 물으면 내놓는 대답이 ‘내 이름에 착할 선(善)자가 있잖아’였다”며 “미세한 연결고리 하나가 빠져있어 궁금증이 남아있었는데 드디어 풀렸다. 우연이 아닌 노력에 의한 구명이었다는 것, 마지막 기회를 백 장군이 먼저 줬다는 것이 흥미롭다”고 했다.
▲1951년 3월 서울을 탈환한 국군 1사단 사령부로 도쿄 유엔군 맥아더 총사령관이 예고 없이 방문해 백선엽 사단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조선일보 DB
◇미군이 존경하는 한국군인
6·25전쟁 초기 한국군을 ‘민병대’ 취급했던 미군도 백 장군에게만큼은 존경심을 표했다.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들이 백 장군을 향해 ‘존경하는 백선엽 장군’이라는 경칭을 붙이는 게 전통이 됐다. 백 장군은 생전 “내 자신을 돌아볼 틈도 없이 분주하고 경황 없이 뛰어온 세월이었다”며 “가족을 돌보지 못했다는 점이 가슴에 아프게 와 닿는다. 아내와 아이 넷을 둔 가장으로서 후한 점수를 받지 못할 만큼 가정에 신경 쓰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남희씨 생각은 달랐다. “여섯 살 때 ‘너에게 물려줄 것은 없지만 네가 역경에 처했을 때 내 이름을 말하면 사람들이 너를 도와줄 수 있게 되길 바란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어요. 그땐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그 깊은 뜻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딸에게 자랑을 늘어놓으신 게 아니라, 훗날 국민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맹세를 저한테 하신 것 같아요. 책임과 명예를 지키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었던 거죠.”
-어릴 때 한국을 떠났는데요.
“아버지가 1961년 프랑스 대사로 가면서 경기여중을 3개월 다니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후 외국에서 10년 공부하고 미국에서 결혼했지만 한 번도 대한민국을 떠났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목숨 걸고 지킨 조국이고 제가 태어난 모국이니까요.”
-아버지가 후손들에게 어떤 인물로 기억되길 바랍니까.
“제가 바라는 건 없습니다. 진실 그대로만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역사가 밝혀줄 거라고 아버지 스스로 말씀하셨던 것처럼, 지금의 오해들도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믿습니다.”◎
조선일보 허윤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