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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3]/ [21] 금융 명문 로스차일드 <중> 영국 시장을 장악하다 - [30]한 러시아계 유대인이 우크라이나 운명을 바꾸고 있다

상림은내고향 2022. 3. 8. 19:10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3]/ 2021 조선일보  전 세종대 교수 조선일보

10.19

[21] 금융 명문 로스차일드 <중> 영국 시장을 장악하다

정보가 곧 돈... 워털루 승전보 먼저 입수, 주식·채권 20배 차익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아들 5형제 중 가장 두뇌가 비상했던 셋째 네이선은 21세에 영국 맨체스터로 건너가 면직물을 사서 독일 게토의 본가로 보냈다. 당시 영국 직물업은 석 달 외상 거래가 관례였으나 네이선은 현찰로 가장 좋은 물품을 가장 싼 가격에 사 가격과 품질로 시장 점유율을 높였다. 네이선은 무역업만으로는 한계를 느끼자 면직물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원단을 구입해 이를 염색업자들에게 보내 예쁘게 물감을 입힌 후 다시 봉제업자들에게 보내 원하는 스타일의 제품을 만들었다. 이렇게 중간 마진을 절약해 이윤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방식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경쟁이 치열해지며 네이선이 거두는 이윤도 점점 박해졌다.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유럽이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을 때, 로스차일드 가문은 시시각각 변하는 전황 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입수하는 정보력으로 채권 거래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워털루 전투 때는 영국 왕실보다 이틀 먼저 승전보를 입수해 채권 투자에 활용, ‘로스차일드가 영국을 샀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본격적 국제 유대 자본이 태동한 것이 이 시기다. 프랑스 전쟁 화가 앙리 펠릭스 에마뉘엘 필리포토의 1874년작 ‘워털루 전투: 진영을 짜고 프랑스 중기병의 진격에 맞서는 영국군’, 영국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 소장. /게티이미지코리아

 

제조업 1년 벌 돈, 금융은 석달만에

네이선은 제조업보다는 이를 지원하는 금융업이 더 많은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100만 파운드의 대형 주문을 받아 1년 동안 수백 명의 기술자들이 땀 흘려 수출하면 5만 파운드 정도 남는 데 비해, 금융기관은 직조 자금 100만 파운드를 석 달간 빌려주고 단번에 비슷한 금액을 버는 걸 보고 크게 깨달았다. 큰돈을 벌려면 제조업이 아니라 금융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금융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이윤이 큰 전시(戰時) 공채를 취급하기 위해 1803년 맨체스터와 런던을 오가며 무역업과 금융업을 병행했다. 이때 의외의 기회가 찾아왔다. 나폴레옹의 침략을 걱정한 헤센-카셀 공국의 군주 빌헬름 9세가 마이어에게 자신의 재산을 해외에 은닉하도록 부탁한 것이다. 마이어는 이 돈의 관리를 셋째 네이선에게 맡겼다. 네이선은 1804년 아예 주 무대를 런던으로 옮겨 은행을 설립했다.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의 가장 영민한 자식이었던 셋째 아들 네이선 마이어(1777~1836). 영국을 기반으로 채권 거래 등 금융업과 전쟁통의 혼란을 이용한 상품 수출입으로 큰돈을 벌었다. /위키피디아

 

네이선은 채권 거래를 하면서 정보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영국이 유럽 대륙에서 잘 싸우면 영국 국공채 가격이 올랐고, 그렇지 않으면 내렸다. 네이선은 시시각각 변하는 전세(戰勢) 관련 정보를 빨리 얻기 위해 전용 ‘고속 정보망’을 구축했다. 고대로부터 유대인들은 정보 교환에 비둘기를 사용했다. 비둘기는 귀소 본능과 방향감각이 탁월해 시속 70㎞로 곧장 날아가 메시지를 전했다. 훈련된 비둘기는 너비 33.3㎞에 불과한 도버 해협의 경우 30분이면 건널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네이선은 쾌속선 5척과 우편마차들을 사들였다. 그리고 똑똑한 정보원들을 대거 고용해 유럽 각지의 정치, 군사, 통상 정보 등을 수집하게 했다. 그는 이렇게 수집된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전문 연락원까지 양성했고, 환시세와 채권, 증권 등락 등 최신 정보를 빠르게 입수할 수 있었다. 당시 로스차일드 집안은 다른 사람보다 빨리 정보를 가져오는 연락원에게 수고비를 듬뿍 주었다. 그래서 로스차일드 집안 전용 파발마는 마부와 마차를 바꾸어 가며 밤새워 달려 남들이 닷새 걸릴 길을 나흘 만에 가곤 했다. 이 하루 차이가 금융에서의 승패를 잔혹하게 갈랐다. 예를 들어 혁명 소식을 하루 먼저 접한 로스차일드는 그 나라 채권을 팔아 치우고 다음 날 소식을 접하고 폭락한 채권을 헐값에 다시 사들여 큰돈을 벌었다. 또 그들은 보안을 위해 중동부 유럽 유대인 언어인 이디시어와 암호를 섞어 사용했다. 로스차일드 집안은 정보가 곧 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 로스차일드의 ‘정보망과 수송 네트워크’는 오늘날 인터넷만큼이나 획기적인 시스템이었다.

 

1809년 빌헬름은 마이어를 통해 3남 네이선에게 15만 파운드를 보내 만기가 없는 영구 공채인 콘솔채를 사도록 했다. 네이선은 석 달 정도 기다리면 공채를 더 싸게 살 수 있을 것이라며 우선 이 돈으로 무명 천을 사들여 이를 유럽에 밀수로 팔아 40만 파운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3개월 후 액면가 100파운드, 이율 3%짜리 콘솔채를 73.5파운드에 사들였다.

 

이후 네이선은 콘솔채를 73.5파운드 이하에 구매하도록 위탁받았지만 그 금액에 사지 않았다. 영국이 전쟁 자금 확보를 위해 콘솔채 발행을 계속 늘리고 있어 공급이 수요보다 많아지니 채권 가격은 당연히 내려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네이선은 그 돈으로 밀수 사업과 금에 투자했다. 전쟁 중이라 금값이 꽤 올랐다. 이외에도 정보망을 활용해 얻은 정보를 종합해 시의적절하게 여러 채권을 사고팔았다. 정확한 정보 덕에 단기 투자를 반복하여 66만 파운드를 200만 파운드로 불렸다. 그 뒤 네이선은 빌헬름이 요청한 금액보다 10파운드 이상이나 싼 62파운드에 콘솔채를 사주었다. 네이선은 빌헬름 9세에게 큰 이익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을 내려 영국을 고립시키려 했지만, 해군력이 우위였던 영국은 중립국 선박들이 영국 항구를 경유하게 하는 대응으로 봉쇄령을 피해 갔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때도 밀수로 큰 돈을 벌었다. 오히려 생필품 가격 급등을 겪게 된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반대로 여전히 풍성한 영국인의 식탁을 묘사한 당시의 풍자화. /위키피디아

 

영국왕 정보망보다 이틀이나 빨라

1815년 3월 유배되었던 나폴레옹이 돌아오자 온 유럽이 긴장했다. 영국·프로이센 동맹군과 나폴레옹 군은 워털루 전투에 명운을 걸었다. 1815년 6월 18일 결전의 날, 오후까지 전황은 프랑스군이 우세했다. 그러나 오후 4시쯤 프로이센 지원군 3만명이 도착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결국 브뤼셀 근교의 워털루에서 영국의 웰링턴 장군이 승리했다. 정식 승전 공문은 전쟁이 끝난 뒤 그 결과를 세밀히 조사하여 정확하게 작성한 웰링턴의 부관이 직접 가지고 런던으로 향했다. 하지만 로스차일드 집안은 그보다 30시간 전에 먼저 출발한 비둘기와 전용 쾌속선을 이용한 네트워크를 통해 영국 왕실보다 무려 이틀 먼저 이 정보를 입수했다.

 

네이선은 곧장 증권시장으로 직행했다. 정보통으로 알려진 그에게 전쟁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네이선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단지 그의 눈빛 지시에 따라 네이선의 사람들은 국채를 내다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영국이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라고 지레짐작하고 갖고 있던 국채를 팔기 시작했다. 증권시장에는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에게 패배했다’는 루머가 돌았다. 증권시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충격과 공포로 국채와 주식 가격은 폭락에 폭락을 거듭해 마감 시간이 가까워오자 액면가의 5%도 안 되는 휴지 조각으로 전락했다.

 

네이선의 사람들은 95% 이상 폭락한 채권과 주식을 다시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패닉 상태로 이성을 잃은 투자자들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 날 나폴레옹이 대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채와 주식은 다시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로스차일드는 단 하루 사이에 20배의 차익을 거두었다. 이로써 로스차일드는 영국 채권 총량의 62%를 거머쥐었다. 이때 사람들은 ‘로스차일드가 영국을 샀다’고 평했다. 그 뒤 네이선은 영란은행 주식의 대부분을 사들여 세계 금융업의 정점에 올랐다. 이때가 본격적인 국제 유대 자본의 태동기이다.

 

한편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설(說)도 있다. 당시 워털루 전투 직후의 로스차일드 이야기는 나치가 로스차일드를 음해하기 위해 윤색한 일화라는 것이다. 로스차일드는 워털루 전쟁 직후 떼돈을 번 것이 아니라 전쟁 기간 내내 군수 사업과 금괴 밀수 등으로 지속적으로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설득력이 약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그간 무수한 채권과 환거래를 하면서 한시라도 더 빠른 정보 획득을 위해 모든 정보망 시스템을 가동했었다. 그랬던 네이선이 그 귀한 정보를 48시간 이전에 획득했음에도 이를 활용치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네이선이 증권 객장에서 속임수를 썼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정보를 활용해 돈을 번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 (계속)

 

정보와 수송의 귀재 네이선

영국-대륙 밀수품 수송작전... 감시 심한 항구 대신 갯벌로 나폴레옹 대륙봉쇄령 뚫어내

 

프랑스 해군이 1805년 넬슨에게 완패당하며 영국 상륙작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를 스페인과 나폴리 국왕에,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국왕에 앉히고 자신은 라인동맹을 발족시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려고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이때 로스차일드 가문의 ‘정보 및 수송 네트워크’가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당시 영국에서는 판로를 잃고 재고가 쌓인 수출 상품 가격이 폭락한 반면 유럽 대륙에서는 영국 제품들이 안 들어오자 생필품 가격이 치솟았다. 로스차일드가의 셋째 아들 네이선은 가격이 폭락한 영국 제품을 대량 구입해 밀수루트를 통해 유럽 대륙으로 공수해 떼돈을 벌었다.

 

그가 선호하는 밀수루트는 덴마크 해안으로, 중간거점은 독일 해안에서 65㎞ 떨어진 영국령 헬골란트 섬이었다. 덴마크 해안은 세계 5대 갯벌로 꼽히는 바덴(아덴) 갯벌로, 배 밑바닥이 뾰족한 유선형 배 ‘첨저선’들은 접안시설이 있는 항구가 없어 접근이 힘들었다. 바덴 갯벌은 네덜란드, 독일, 덴마크 3개국에 걸쳐 펼쳐진 큰 갯벌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이런 큰 갯벌은 우리 서해안 갯벌과 바덴 갯벌뿐이었다.

 

로스차일드 형제들은 갯벌 해안에 상륙 가능한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을 타고 깜깜한 밤에 밀수품을 날랐다. 밀수를 단속해야 할 당국도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일반 배들은 접근이 불가능한 갯벌을 통해 밀수품이 들어오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네이선은 밀수 루트로 금과 화폐도 보냈다. 암암리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상품과 자금의 빠른 수송으로 유명해졌다. 그 뒤 영국군은 네이선에게 군자금 수송을 맡겼다. 대륙봉쇄령 때 금 밀수를 해본 사람이 네이선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22] 금융 명문 로스차일드 [하] 세계가 그들 손에

미국 움직여 1차대전 참전시키고… 이스라엘 세울 땅 80%를 샀다

궁전 같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국 여름별장 -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의 전쟁통에 한발 앞선 정보력으로 영국 정부에 대한 최고 채권자이자 영란은행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이후 유럽 각국의 공채 발행을 맡으면서 국제 채권시장을 창출했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토대를 만들었다. 영국 버킹엄셔의 워데스던 저택(Waddesdon Manor·사진)은 세계 금융을 호령하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위세를 보여주는 유산으로, 지금도 매년 40만명 안팎의 관광객이 찾는다. 내부엔 냉·온수 수도와 전기 등 당대 최고 기술이 적용됐는데, 1890년 저택을 방문한 빅토리아 여왕이 전구 샹들리에에 감명받아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면서 10여 분을 보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위키피디아

 

1815년 워털루전쟁 이후 로스차일드 가문의 셋째 아들 네이선은 영국 정부에 대한 최고 채권자이자 영란은행의 최대 주주가 되어 공채 발행 실권을 장악했다. 이는 곧 영국의 통화 공급량과 채권 금리를 로스차일드가 좌우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1817년 프로이센은 런던 로스차일드가 프로이센 공채 발행의 주간사 은행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유럽 각국이 로스차일드에게 공채 발행을 의뢰했다. 이로써 런던 채권시장이 글로벌화에 성공했다. 그 무렵 프랑스 혁명 이후 폐위됐던 왕들이 복귀하는 과정에서 많은 전쟁이 일어나 각국에서 전쟁 채권이 대량 발행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런던의 유대 금융인들이 이를 사들이며 채권 가격이 오르자 시중금리는 떨어졌다. 이렇게 채권시장이 활성화되어 유럽 전역과 러시아가 하나의 채권시장이 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경제사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업적이 국제 채권시장의 창출이다. 이는 저금리 환경으로 이어져 영국의 산업혁명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토대가 되었다.

 

▲투자자로 가득한 19세기 런던 주식시장 - 19세기 초 런던 증시를 묘사한 판화. ‘로스차일드가 영국을 사들였다’는 말을 듣게 되는 시기다. /위키피디아

 

◇ 세계 자본시장을 금본위제로 견인

유럽 주요국에 진출한 로스차일드 다섯 형제는 한 몸처럼 움직였다. 이 점이 유럽 전체를 묶는 글로벌은행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금융의 역사를 보면, 워털루 전쟁이 끝난 1815년부터 금융시장이 세계화되었고 주식시장이 확대됐다. 이 과정에서 로스차일드 상사의 글로벌화는 많은 것을 바꾸기 시작했다. 유대인 정치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로스차일드가 아예 게임의 룰을 바꿨다고 했다. 금융 중개 업무 수준의 은행이 아니라 외환시장의 국가 간 장벽을 허물어 금융시장의 성격을 글로벌하게 바꿔버렸다는 것이다.

 

이후 로스차일드는 세계의 금광들을 사들여 국제 금 가격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영국을 1819년 세계 최초의 금본위제 국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서구 전체를 금본위제로 끌어들였다. 1872년 독일을 필두로 1878년 프랑스, 1879년 미국, 1881년 이탈리아, 1897년 러시아를 금본위제에 합류시켜 세계 주요국들을 모두 금본위제 국가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화폐 발행과 금 가격 등 중요 결정권을 그들이 주도했다. 이후 로스차일드 가문은 각국 통화를 상품으로 보고 형제들 간 네트워크를 활용해 무위험 차익거래로 꾸준히 수익을 올렸을 뿐 아니라 외환 시세를 주물러 환차익을 얻는 투기에도 열을 올렸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막대한 자금력과 정보력, 그리고 각국 정치 권력과의 밀접한 관계를 활용해 산업혁명 전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후 10년간 전후 복구 사업과 산업혁명에 필요한 자본 조달을 위해 이전 100년 동안의 유가증권보다도 더 많은 양의 유가증권이 발행됐다. 자본시장이 발달하자 저금리가 정착됐고, 투자가 활발해지며 산업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다. 이후 그들은 대규모 자금이 드는 철도의 유럽 대륙 전파에 앞장섰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로스차일드가 유럽 대륙 최초의 철도를 깔았다.

 

◇ J P 모건 가문과 美 연준 설립 참여

미국이 산업혁명 초기에 빨리 진입할 수 있었던 데에도 유럽 자본, 특히 로스차일드 자본의 덕이 컸다. 당시 미 정부 국공채는 물론 제2 미합중국은행 주식의 많은 양을 그들이 샀다. 이렇게 많은 양의 미국 채권과 주식을 사들이자 1837년 미국 피바디 은행이 미국 상업은행 최초로 런던에 문을 열고 거래를 중개했다. 훗날 이 은행의 공동 경영자로 참여했다가 런던 피바디 은행을 인수한 사람이 J P 모건의 아버지 주니어스 모건이다. 이렇게 로스차일드 가문과 JP 모건 가문의 관계가 시작됐다. 그 뒤 런 던 로스차일드가 JP 모건과 합작 설립한 지주회사 노던증권이 미국 산업과 금융의 돈줄이 되었다. 1913년 JP 모건이 주도한 미국 연준 설립에도 로스차일드계 은행들이 대거 참여했다.

건국의 주역, 에드몽과 라이어널 -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이 정착할 토지를 대량으로 사들인 에드몽 로스차일드(왼쪽)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국을 약속한 ‘벨푸어 선언’을 이끌어낸 라이어널 로스차일드(오른쪽). /위키피디아

 

1881년 러시아 국왕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다. 조사 결과 암살범이 유대인 처녀의 집에서 집회를 가졌음이 알려지자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때 23만 명의 유대인이 서유럽으로 망명했다. 이후에도 유대인 학살은 계속되었다.

 

1882년 프랑스의 대랍비 사독 칸은 러시아 랍비 사무엘 모히레버를 데리고 에드몽 로스차일드를 찾아와 러시아의 참상을 전하며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해달라고 요청했다. 에드몽은 두말 않고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마이어 암셸의 아들 중 프랑스를 맡았던 막내 제임스의 아들이었다. 그 뒤 그는 은행 일은 형들에게 맡기고 본격적으로 시오니즘 운동에 뛰어들어, 팔레스타인에 모여든 유대인들을 뒤에서 도왔다. 그는 이스라엘 건국 66년 전인 1882년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주하는 유대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농장용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콜롬비아대학 사이먼 샤머 교수가 쓴 ‘두 명의 로스차일드와 이스라엘’에 따르면, 이스라엘 영토의 80% 이상이 에드몽이 사준 땅이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 벤구리온은 에드몽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유대인이 유랑민으로 지낸 2000년의 세월 동안, 에드몽 로스차일드에 버금가는, 또는 그와 견줄 만한 인물을 발견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의 카이사레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는 에드몽의 무덤에는 이런 묘비명이 쓰여 있다. “이 땅의 아버지 에드몽 로스차일드 남작과 그의 부인, 하느님을 높이 받든 여인 아델하이드 남작 부인 여기 잠들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항복을 고려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유일한 해결책은 미국의 참전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워싱턴 정가를 움직이는 미국 내 유대인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영국 내각은 1916년 10월 ‘세계시온주의자연맹’ 대표 라이어널 로스차일드와 비밀리에 회동, 전후 팔레스타인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줄 것을 약속했다. 그 결과 1917년 4월 2일 미국 윌슨 대통령은 의회에서 “미국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기에 이르고, 그로부터 불과 4일 만에 특별한 사유도 없이 미국은 1차 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그 뒤 11월,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가 월터 로스차일드 경에게 편지를 보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정착지를 마련할 것을 호의적으로 숙고하며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이른바 ‘벨푸어 선언’이다. 하지만 이는 다급한 영국의 상충된 약속이었다. 영국은 1차 대전이 끝나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맥마흔 서한’을 이미 1915년 아랍권에 전달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이로부터 잉태되었다.

 

◇ 은행·본사 외부엔 명패도 안 달아

히틀러의 정치적 부상은 로스차일드 일가에 치명적이었다. 히틀러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빈의 로스차일드는 감옥에 갇혔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전 재산을 몰수당한 채 추방되었다. 프랑스 로스차일드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에드몽, 로벨, 앙리 로스차일드는 프랑스 국적을 박탈당하고 맨몸으로 추방당했다. 희생자도 나왔다. 프랑스 로스차일드 어머니 쪽 가문은 대부분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았고, 필립 남작의 아내는 유대인이 아님에도 수용소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 이렇게 나치에게 혼이 났던 로스차일드 가문은 2차 대전 이후 철저히 베일 뒤로 숨었다. 그들의 은행과 본사 건물 외부에는 명패조차 달지 않는다. 이후 가문의 자산은 비밀주의에 가려져 아무도 그 실체를 모른다.

 

로스차일드 5형제의 대활약

장남은 통일독일 재무장관

차남은 오스트리아 고위직

셋째는 세계 금융계 거물로

넷째는 이탈리아 금융 접수

막내는 프랑스 돈줄 흔들어

 

마이어는 헤센-카셀 공국 군주 빌헬름 9세의 재산을 관리하게 되자 다섯 아들들을 활용해 다국적 금융업을 운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다섯 아들을 유럽의 중요한 다섯 도시에 단계적으로 파견했다. 첫째 암셸은 프랑크푸르트 본가에 남겨두고 둘째 솔로몬을 빌헬름 9세의 재정자문관으로 궁정에 집어넣었다. 셋째 네이선은 섬유 비즈니스를 위해 영국 맨체스터로 보내졌다. 다섯째 제임스는 파리로 보냈다. 그리고 로스차일드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 빌헬름 9세의 재정자문관이었던 차남은 빈, 넷째 칼만은 나폴리로 가서 은행을 개설했다. 이것이 로스차일드 가문이 다국적 금융기업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다.

 

큰아들 암셸은 나중에 통일 독일의 초대 재무장관이 되었다. 차남 솔로몬은 빈에서 최고의 직위에 올랐고, 셋째 네이선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금융인이 되었다. 넷째 칼만은 이탈리아 금융을 장악했고 막내 제임스는 프랑스에서 공화정과 왕정에 걸쳐 금융계에 군림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좌우명은 ‘화합(Condordia), 진실(Integritas), 근면(Industria)’이었다. 이는 유대교 경전 ‘토라’와 ‘탈무드’가 디아스포라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가르치는 핵심 내용이었다.

 

[23] 국방력 강화와 과학자 육성 두 토끼 잡아낸 이스라엘군

軍이 창업 요람... 나스닥 상장된 이스라엘 기업, 유럽보다 많다

이스라엘군은 ‘시모네 메타임’ ‘탈피오트’ 같은 엘리트 부대를 통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한 학생들을 최정예 요원으로 길러내고 있다. 군대에서 수년간 창의력과 유연성, 문제 해결력을 키운 이들은 실전에서 신속하게 문제점을 파악하고 최선의 해결 방안을 찾아낸다. 또 제대 후에도 끊임없이 신기술을 개발하며 이스라엘 벤처 산업을 이끈다. 군대가 ‘창업 인큐베이터’ 역할까지 하는 셈이다. 사진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전투 훈련을 하는 모습. /이스라엘방위군(IDF) 홈페이지

 

이스라엘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군 복무를 한다. 남자는 2년 8개월, 여자는 2년 복무 뒤 대학에 진학한다. 이스라엘군은 국방력 강화라는 본연의 임무 이외에 과학기술 인력 양성이라는 두 토끼를 한꺼번에 잡고 있다.

 

이스라엘군에는 컴퓨터에 특화된 ‘맘람’이 있다. 맘람은 ‘중앙 컴퓨터 처리 부대’를 지칭하는 히브리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정보 부대인 ‘시모네 메타임’의 교육을 강화했다. 시모네 메타임은 히브리어로 숫자 ‘8-200′을 일컫는다. 그래서 8200부대라고도 부른다. 8200부대 복무자들은 군 복무 기간에 군 지정 대학에서 4년간 교육받은 뒤 군에서도 동일한 전공 분야에서 4년간 연구 개발을 하게 된다. 이 기간에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경우 특허를 출원할 수 있다. 이 부대 출신들이 1000개가 넘는 벤처기업을 세워 신기술 개발로 엄청난 돈을 버는 사례가 속출하면서 학생들은 너나없이 정보 부대를 지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천재 자폐증 병사로 구성된 9900부대도 있다. 평상시에는 다른 사람과 눈도 마주치기 힘들어하는 이들이 위성사진의 미묘한 변화 판독에는 귀신 같은 능력을 발휘한다.

 

애국심 투철한 과학자로 키운다

이스라엘 항공 산업체(IAI)는 전투기뿐 아니라 민간 항공기, 미사일 시스템, 인공위성 그리고 레이더 기반의 전투 시스템 같은 다양한 첨단 설비를 제작하고 있다. 이스라엘 최대 하이테크 업체로, 이스라엘 방산품 수출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1988년에 인공위성 발사를 단 한 번에 성공시킬 만큼 첨단 기술을 지녔다. 그 뒤 군사 첩보위성과 상업용 위성 시리즈를 연속 발사하여 이스라엘을 세계적 위성 강국으로 만들었다. 병기개발청도 1959년 최초의 공대공 미사일을 개발한 이후 미사일 전문 제조 수출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스라엘은 현재 무인 항공기와 드론 분야에서 세계적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무인 항공기란 사람이 타지 않는 타격기로, 고성능 탄두를 내장하고 목표 지점으로 돌진하는 자폭형 비행체다. 미국의 대테러 전쟁 과정에서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가장 주목받는 수출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가자지구에서 날아오는 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해 발사된 이스라엘군의 ‘아이언 돔’ 미사일. 적의 단거리 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하는 아이언 돔은 이스라엘 최정예 부대 ‘탈피오트’의 여름방학 과제에서 시작된 결과물이다. /위키피디아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미사일 방어 시스템이 아이언 돔이다. 전천후 이동식 방공 시스템인 아이언 돔은 미니 레이더의 정보 분석과 컴퓨터 통제에 따르는 적외선 유도 기기를 장착한 요격미사일로, 단거리 로켓과 포탄을 차단한다. 아이언 돔은 다층 미사일 방어 체계의 일부다.

 

이스라엘에서는 징병 연령이 되기 1년 전, 곧 고등학교 2학년부터 남녀 모두 적성, 능력, 심리, 신체검사를 받는다. 검사가 끝나면 신체 점수와 심리 점수에 등급이 매겨지며, 개인 인터뷰에서 어느 부대에 지원할 수 있는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이 가운데 모든 면에서 요구 조건을 충족하는 후보들에게는 엘리트 부대에 들어갈 수 있는 응시 자격을 준다. 8200부대(시모네 메타임)는 보통 10대 1의 경쟁을 거쳐 400명으로 압축된다. 이후 또다시 6개월간 간헐적 테스트를 통해 소수의 최종 선발 인원이 정해진다. 이 부대는 20개월 훈련을 마치고 최고의 과학기술 교육을 통해 전문가로 육성된다.

 

8200부대는 ‘웜 바이러스(컴퓨터 시스템을 파괴하는 악성 프로그램)’를 통해 이란의 핵 개발을 저지했다. 2007년에는 8200부대 주도로 시리아의 핵 의혹 시설을 이스라엘 공군이 공습했다. 이스라엘 인터넷 구직란에서는 ‘8200부대 출신 원함’이란 문구를 자주 볼 수 있다. 이들은 정보 부대 출신의 특성상 인터넷 보안과 암호 해독 분야에 특히 강하다.

 

그런데 이보다 한 차원 높은 부대가 ‘탈피오트’다. 히브리어로 ‘최고 중의 최고’를 의미한다. 이 부대는 들어가기가 가장 어렵고 훈련 기간 또한 가장 길다. 매년 영재급 고교 졸업 예정자 1만명 중에서 수차례 테스트를 거쳐 50명이 엄선된다.

 

이스라엘군 정보 부대인 8200부대(시모네 메타임) 요원들이 복무하는 모습. 20개월간 훈련을 통해 최고의 과학기술 전문가로 육성되는 이들은 인터넷 보안, 암호 해독 분야에서 특출 난 성과를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방위군(IDF) 홈페이지

 

군대가 국가 벤처사업의 핵심으로

탈피오트 창시자는 히브리대학의 사울 야치브와 펠렉스 도탄 교수다. 창의력이 왕성한 젊은이들에게 위기관리를 할 수 있는 정신력 함양과 첨단 교육을 병행해 과학 영재 지휘관을 양성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탈피오트 신병 교육은 6개월 동안 밤 10시까지 강도 높게 진행된다. 이 기간 중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전략적, 전술적 요구 사항을 끊임없이 스스로 해결토록 하는 훈련을 받는다. 목숨을 건 전투 상황에서 냉정하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직된 사고보다 창의력과 유연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마치 스타트업에서 하듯 수평적 방식으로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으며 협동하여 맡은 문제를 해결해낸다. 이 훈련을 마칠 때쯤이면 모든 것이 부족한 군대 환경 속에서도 신속하게 현장의 기술적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 방안을 찾아내는 우수한 인력으로 재탄생한다. 이후 이들은 히브리대학에서 숙식하며, 수학과 물리와 컴퓨터공학을 복수 전공한다. 적의 단거리 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하는 아이언 돔은 탈피오트의 여름방학 과제에서 시작된 결과물이었다. 보통 2년 반 내지 3년 안에 복수 전공 과정을 수료해야 한다. 탈피오트 수료생들은 주로 공군 산하 컴퓨터 센터인 ‘맘다스’로 많이 간다. 이곳은 세계 최고 수준의 군사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곳이다. 이들은 총 9년 이상을 복무한다.

 

이러한 초 엘리트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탈피온’이라는 명예를 부여받는다. 제대 후 민간인 사회에서도 초엘리트로 인정된다. 지금까지 배출된 탈피온 1000여 명은 이스라엘 최고 인재로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벤처기업가 80%가 탈피오트 출신

역대 이스라엘 총리 대부분과 이스라엘 주요 기업의 CEO 상당수를 포함해 이스라엘 벤처기업가 80%가 탈피오트 출신이다.

 

당초에 탈피오트는 군 현대화 전략의 하나로 추진됐다가 지금은 벤처기업 육성 정책의 핵심 국가 프로젝트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군대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역할도 한다. 이들의 인적 유대가 이스라엘 비즈니스 인맥의 중요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이스라엘 고등학생들은 어떤 대학을 진학하느냐 하는 것보다 어떤 군부대를 갈 것인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재능을 군대에서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스라엘의 창업 정신이 군대에서 형성되고, 이스라엘 벤처기술 대부분이 군사 기술을 민간 부문에 응용하는 과정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군대가 하이테크 벤처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학생들이 군 복무 기간 혹독한 자기 개발 훈련을 받고, 스타트업 분위기에서 복무하며 이미 자기 또래의 세계인들보다 몇 배 많은 경험을 쌓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스스로 판단하고 알아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도록 훈련받았다. 이스라엘 벤처가 강한 이유는 이런 토양에서 훈련받은 인재들이 창업의 길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나스닥에 상장된 이스라엘 벤처기업 수가 전 유럽의 상장 벤처기업보다 더 많은 이유다.

 

일찌감치 컴퓨터 전략에 눈떠

73년 4차 중동전쟁 후 “탱크도 폭격기도 아니다, 미래는 사이버 전쟁이다”

 

1973년 4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긴 했지만, 이스라엘군은 이제 더 이상 야전에서 지상군과 전차, 심지어는 폭격기조차 쓸모없음을 깨닫는다. 앞으로 있을 전쟁은 사이버 전쟁이라고 판단했다. 인공위성과 컴퓨터로 원격 조종하는 미사일과 미사일 방어 시스템이 승패를 가르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후 이스라엘군은 궤도를 전격 수정해, 재래식 무기가 아닌 컴퓨터로 제어하는 첨단 무기 개발에 주력했다. 이를 위해서는 소프트웨어 경쟁력이 필수였다. 이후 소프트웨어 개발과 이를 위한 인재 양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스라엘군이 택한 전략은 군의 교육 기능을 대폭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군은 대학들과 손잡고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벤구리온 대학이다. 벤구리온 대학은 국방 과학기술 캠퍼스를 별도로 지어 군 교육을 맡았다. 이곳에서는 정보·컴퓨터 부대 병력 수천 명이 학부와 대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다. 군이 국가의 컴퓨터 산업 인력 양성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24] “실패는 성공 위한 디딤돌” 스타트업 강국이 된 비결

실패하면 지원금 20% 더 준다… 창업가 부활의 땅, 이스라엘

 

유대인은 하느님이 누구에게나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재능과 능력을 주셨다고 믿는다. 그들은 하느님이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면서 코에 당신의 생기, 곧 당신의 영혼을 인간에게 불어넣어 주셨으며, 그 영혼이 세상에서 거룩히 살 수 있도록 그에 걸맞은 달란트를 같이 주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유대인은 하느님이 나누어 주신 달란트를 찾아내어 이를 갈고닦아 그 분야에 우뚝 서서 세상을 발전시키는 데 일조하는 것이 하느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유대인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달란트, 곧 재능을 찾아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는다.

 

중요한 점은 유대인 부모는 자녀가 무엇을 하든 가능한 한 친구와 함께하도록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서로 돕는 공동체 의식을 어려서부터 키워주기 위함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공부도 재능 계발도 친구와 함께하며, 졸업 후 창업도 친구와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 유대인은 친구의 성공이 자신의 성공이라고 생각해 친구를 헌신적으로 돕는다. 이러한 서로 돕는 공동체 정신이 스타트업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15세기 유대인의 윤리서 ‘오르호트 차디킴(Orchot Tzadikim)’에도 이런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항상 동료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그들의 부담과 괴로움을 덜어주며… 너는 토라를 공부하는 데 도움을 줄 충실한 형제와 친구들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네 마음이 그들에게 온전히 진실하면, 그들은 너를 사랑할 것이고, 너의 행복을 위해 일해 줄 것이다.”(19:27)

 

나의 실패를 공유하고 남의 실패에서 배우는 모임 ‘퍽업나이트’ - 유대인 공동체에는 실패한 창업자가 재기할 수 있도록 세 번까지 무이자 대부를 해주는 전통이 있었다. 두 번 정도 망하면 세 번째는 성공 확률이 가장 높다고 보았기 때문. 공교롭게도, 실리콘밸리 창업자들의 평균 창업 횟수도 2.8회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민족성을 강점으로 이스라엘은 세계 최고 수준의 벤처 창업률을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이런 전통은 ‘페일콘(failcon)’이나 ‘퍽업나이트(FuckUp Nights)’ 등 대규모 모임을 통해 창업자들이 실패의 교훈을 서로 공유하는 실리콘밸리 문화와도 통한다. 사진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퍽업나이트’의 실패 경험 발표 장면. /퍽업나이트

 

약점 인정하고 장점을 찾아 키운다

이스라엘 창업 생태계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이 있다.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방랑하며 살아온 유대인은 서로 돕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다. 유대인들이 유달리 공동체 의식이 강한 이유이다. 특히 성공한 유대인은 가난한 동포가 자리 잡을 수 있게 기금을 조성해왔다.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어야 하며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지 않는다’는 유대 율법을 따른 것이다. 18세기부터 유대인 공동체에는 ‘무이자 대부 협회’가 있어 실패한 창업자에게 세 번까지 무이자 대부를 해주었다. 보통 두 번 정도 망하고 세 번째 창업에서 성공할 확률이 가장 높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사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창업자들의 평균 창업 횟수도 2.8회라고 한다. 오늘날의 이스라엘 창업 생태계는 이런 전통 위에서 만들어졌다. 그들에게 실패란 성공으로 가기 위한 성장통의 하나이다.

 

유대인의 또 다른 특징은 자신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약점에 개의치 않고 강점을 찾아 키운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간 각자에게 다른 달란트(재능)를 주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약점에 개의치 않듯 실패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다 보니 이스라엘의 벤처 창업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매년 창업 되는 스타트업이 3800개 이상으로 인구당 스타트업 비율도 세계에서 첫손에 꼽힌다. 그 결과 나스닥 상장 기업이 98개에 달해 미국과 중국 다음으로 많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첨단 기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KOTRA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인공지능(AI) 산업 점유율은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이며, 자율 주행 기술도 최강국 중 하나다.

 

유대인이 주도하는 실리콘밸리에는 실패를 공유하는 문화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페일콘(failcon)’과 ‘퍽업나이트(FuckUp Nights)’이다. 주로 스타트업 대표들이 자신이 실패한 원인을 분석하고 그 실패로 배운 교훈을 공유한다. 유대인은 전통적으로 역경이나 실패를 성공을 위한 디딤돌 또는 스프링보드라고 생각한다.

 

다이빙 선수가 높이 솟구치려고 점프대를 박차듯이, 실패를 통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스타트업의 성공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그래서 기업 가치가 10억달러 이상인 스타트업은 상상 속의 동물인 ‘유니콘’이라 불린다. 사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기업엔 당연히 실패가 따를 수밖에 없다. 일론 머스크도 “실패는 옵션”이라 했고, 제프 베이조스도 “실패와 혁신은 쌍둥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실패했다는 것은 도전했다는 의미이고, 도전해야만 혁신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스닥 상장기업 수, 이스라엘이 세계 3위 - 미국 나스닥 증시에 상장한 이스라엘 스타트업 ‘먼데이닷컴’이 지난 6월 주식 거래를 시작하는 모습. 먼데이닷컴은 상장으로 5억7400만달러를 조달했으며, 당시 기업 가치는 68억 달러로 추산됐다. 이스라엘은 미국, 중국에 이어 셋째로 많은 나스닥 상장 기업을 보유한 나라다. /나스닥

 

“실패와 도전에서 혁신이 나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패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실패를 비난하면 실패를 숨기게 되고, 결국 더 큰 문제를 만든다. 실리콘밸리에서 실패는 끝이 아니다. 실패를 통해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 긍정적인 마인드가 그들을 성공으로 이끈다. 유대교의 3대 절기는 모두 조상들의 역경을 되새기는 기념일이다. 유대인은 조상의 역경을 기억하며, 자신들도 인생 고비마다 만나는 역경을 디딤돌 삼아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믿고 있다.

 

벤처기업(스타트업)은 이미 세계경제의 활력소로 떠올랐다. 벤처 투자 열풍도 거세다. 올 상반기 미국 내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액은 1500억달러에 달했다. 이는 지난해 연간 총투자액 1643억달러의 91.3%에 해당하는 수치이자 이전 어느 해보다 많은 투자액이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벤처기업에 투자가 몰리고 있다. 올 3분기에 전 세계 벤처기업에 1582억달러가 투자되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벤처기업에 돈이 몰리는 이유가 뭘까? 한마디로 돈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산업군보다 수익률이 높다. 미국의 일부 대학 기금이 대규모 벤처 투자로 연간 50% 안팎의 수익률을 올렸다.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의 ‘미국 스타트업 생태계에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 보고서를 보면, 벤처캐피털이 아닌 ‘비전통적 투자자’들인 국부펀드, 뮤추얼펀드, 연기금, 헤지펀드 등이 벤처 투자를 주도하고 있다. 올 상반기 이들이 참여한 거래는 전체 거래액의 약 77%인 1233억달러에 달했다. ‘큰손’들이 기술 기반 스타트업(tech startup) 투자로 눈을 돌렸다는 이야기이다. 이들은 벤처캐피털과 달리, 마지막 투자 단계의 큰 규모 투자를 선호하며, 경영에 깊게 관여하지 않고, 절차를 줄여 신속하게 투자하는 것이 특징이다.

 

성공과 실패가 엇갈리는 스타트업 생태계에서도 이스라엘 정부의 원칙은 흥미롭다. 실패한 창업자가 다시 도전할 경우, 이스라엘 정부는 첫 창업 때보다 20%나 더 많은 지원을 해준다는 사실이다. 실패를 경험한 창업자의 성공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청년들이 마음껏 도전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이 기성세대의 역할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실패하더라도 책임을 묻거나 비난하지 않는 ‘다브카(Davca)’ 문화가 창업 국가의 기반이 됐다. 다브카는 히브리어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의미로, 실패해도 괜찮다는 뜻이다. 이런 환경 덕분에 어릴 때부터 역경을 극복하는 힘을 길러온 유대인 청년들은 실패를 딛고 다시 시작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교육법]

실패 두려워하게 되면 창의력까지 잃게 된다... 어릴 때부터 부모가 교육

엘리트 정보부대 출신 벤처 경영인·저술가 인발 아리엘리. /후츠파센터

 

이스라엘의 첨단 기술 산업을 이끄는 100인에 꼽힌 인발 아리엘리는 엘리트 정보 부대 8200에서 장교로 복무한 경험이 있는 경영인으로, 세계를 돌며 이스라엘의 혁신과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그녀는 저서 ‘후츠파’에서 이스라엘이 혁신을 이뤄낸 원동력 중 하나로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아이들을 양육하는 방식에 주목했다. 실패를 경험해야 곤란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으며, 실패를 두려워하면 창의력까지 잃게 되므로 심지어 실패를 즐기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또한 이스라엘 군대 문화의 예찬자이다. “혁신적 사고를 배운 최정예 부대 출신이라는 자부심, 사회를 이끄는 네트워킹 주역이라는 긍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가 정신을 배운 곳이 바로 이스라엘 군대”라고 했다.

 

미국 투자 회사 아크(ARK)의 슬로건은 “우리는 파괴적 혁신에만 투자합니다(We Invest Solely In Disruptive Innovation)”이다. 실제로 ‘파괴적 혁신’ 기술을 가진 회사들만 엄선한 ‘아크 혁신 상장지수펀드’는 2020년에 171%의 수익률을 거두었다. 이 회사 창립자 캐서린 우드는 테슬라에 일찍부터 투자하는 등 남다른 안목으로 투자업계에 돌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국에서는 캐서린(캐시) 우드를 ‘돈나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캐시+우드=돈나무) 그런데 이 회사가 만든 펀드 8개 중 하나가 이스라엘의 혁신적 기술에만 투자하는 ‘이스라엘 혁신 기술 상장지수펀드’다. 그 정도로 이스라엘에 혁신 기업이 많다. 이 펀드는 올해에만 50% 이상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실패에 굴복하지 않는 도전 정신이 유대인 젊은이들을 혁신적인 벤처기업가로 탄생시키고 있다.

 

[25] 투자의 전설 조지 소로스

세계금융 주무른 유대 난민… 시작은 철학공부 위한 종잣돈 모으기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1998년 새해 첫 공식 행사로 조지 소로스를 만났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월가의 대형 금융기관 총수도 아닌 1992년 영란은행을 무너트린 외환 투기꾼을 만나야 했던 까닭은 국제 금융시장에 대한 그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1997년 말에 발발한 외환 위기 사태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급히 구제금융을 빌려야 하는 어려운 처지였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 금융계 큰손들을 초청해 한국에 대한 투자와 외환 위기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는데 바로 그 첫 번째 인물이 조지 소로스였다.

 

1930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소로스는 어린 시절 독일군과 소련군의 부다페스트 시가전을 목격하며 컸다. 공습이 잦고, 전기가 끊기고,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전쟁 통에 그는 변호사였던 아버지를 도와 암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삼촌의 담배 장사도 거들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유대인임이 발각되면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처지였다.

 

그는 야반 탈주를 감행해 런던으로 탈출했다. 런던에서 접시 닦기, 페인트공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철도 짐꾼으로 일하다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9년간의 영국 생활은 배고픔과 고난의 나날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그런 어려운 시기에도 아리스토텔레스, 에라스뮈스, 홉스 같은 철학자의 책들을 온 마음으로 읽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1949년 수영장 안내원으로 일하면서 읽은 책이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었다. 이 책은 그를 충격에 빠트릴 만큼 날카로운 통찰로 가득했다.

 

그가 입학한 런던정경대학에 세계적 석학 칼 포퍼(Karl Popper) 교수가 있었다. 이 유명한 유대인 철학 교수가 소로스의 논문 지도교수였다. 포퍼 교수는 반전체주의, 반마르크스 성향의 우익 사상가이자, 양자역학 등 물리학을 철학적 분석 틀로 즐겨 사용했던 ‘과학 철학자’였다. 칼 포퍼의 사상은 소로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칼 포퍼는 “영원히 올바른 것은 없다”며 모든 기존 관념을 거부했다. 그에게 진리란 이성에 의해 비판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모든 사상은 불확실하고 인간은 반드시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므로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수정해 가는 열린사회(Open Society)야말로 이상적인 사회다’로 요약된다. 포퍼에 따르면 열린사회와 반대편에 있는 것이 전제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다.

 

포퍼는 “모든 삶은 근본적으로 문제 해결이다”라고 인간의 삶을 정의했다. 이러한 스승의 사상에 적극 공감한 소로스는 그 뒤 포퍼의 사상에 자신의 생각을 더해 ‘오류성’과 ‘상호 작용성’을 토대로 자신의 투자 개념 ‘재귀성이론’을 완성했다. ‘오류성’이란 인간은 불완전하여 세상을 인지하는 데 있어 항상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되며 전체가 아닌 부분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지식은 틀리기 쉬우며 다음의 전개를 예측해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곧 남은 물론 자신의 판단도 틀릴 수 있음을 항상 인정하고 투자에 임하라는 것이다. ‘상호 작용성’이란 기대와 현실 속에서 사람과 사람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행동한다는 것이다.

 

“가격은 수요·공급 그리고 심리 따라 결정돼”

소로스는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서만이 아니라 판매자와 구매자의 기대에 따라서 좌우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경제학에 심리학을 접목한 ‘행동경제학’은 고전학파 이론의 가정 자체가 틀렸다고 보았다. 인간은 부분적으로만 합리적이라,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판단과 행동을 가정하는 게 더 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 그 뒤 그는 고학으로 런던정경대학에서 철학을,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1952년에 조기 졸업했다.

 

힘들게 명문 런던경제대학을 졸업했어도 그는 취직 자리를 구하지 못해 핸드백 세일즈 영업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는 헝가리 이민자가 설립한 투자회사에 취직해 증권 재정 거래(Arbitrage Transaction)를 맡았다. 원래 ‘재정 거래’란 어떤 상품의 가격이 시장 간에 서로 다를 경우 가격이 싼 시장에서 사서 비싼 시장에 팔아 매매 차익을 얻는 거래 행위를 말한다. 이를 ‘차익 거래’라고도 한다. 이는 리스크 없는 무위험 수익 거래다.

 

스승과 같은 철학자의 삶이 소로스의 꿈이었다. 그러려면 먼저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런던 금융시장보다는 뉴욕에서 일하는 게 돈 버는 시간을 단축할 것으로 보았다. 1956년 소로스는 “최단 시간 내에 50만달러를 벌어 그 돈으로 철학자가 된다”는 극히 이상주의적 목표를 가지고 월스트리트로 향했다. 월가에서 맡은 일도 차액 거래였다. 당시만 해도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통신 인프라가 빈약해 이른바 정보의 비대칭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런던과 뉴욕에서 거래되는 유럽 증권의 가격 차이를 이용해 그 차익을 챙기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는 유럽의 증권 사정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런던 증권회사에서 일했던 그는 자신의 지식을 살려 점차 이름을 알리고 신용을 구축해 갔다. 이후 그는 월스트리트의 가장 유능한 종목 발굴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철학 공부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근무시간에도 틈만 나면 철학 서적을 읽었다. 주말에는 철학과 대학원생의 개인 지도를 받았다. 이미 50만달러 이상을 모은 그는 배움에 대한 갈증으로 아예 학교로 되돌아가 3년 동안 철학 공부를 더 했다.

 

인문고전을 읽는 천재들의 공통점은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안다는 점이다. 일반인들은 보통 보이는 것(sight)에 주목한다. 그러나 천재들은 보이지 않는 것(insight)에 주목한다. 통찰력을 의미하는 “insight”는 “sight”에 “in”이라는 접두어가 붙어 있다. 통찰력이란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소로스는 일반 군중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려고 노력했다. 특히 해외로 눈을 돌렸다

 

조지 소로스는 2013년 41세 연하의 부인 타미코 볼턴(오른쪽)과의 결혼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사진은 2017년 6월 독일 베를린에서, 그의 ‘열린 사회 기금’ 협력으로 세워진 ‘유러피언 로마 예술문화 연구소’(ERIAC) 개소식에 참석한 소로스 부부. /게티이미지코리아

 

소로스 펀드, 연평균 32% 경이적인 수익률

그가 철학 공부를 더 하러 월스트리트를 떠나기에는 그 자신이 너무나 주식을 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결국 떠나지 못했다. 소로스는 1969년부터 역외펀드를 개설했고, 1971년부터 일본 주식에 투자했을 정도로 글로벌 투자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그는 헤지펀드 업계 최초로 세계시장 개척에 도전해 글로벌 투자의 원조가 되었다.

 

1973년 마흔셋이 된 그는 독립을 결심하고 방 두 칸짜리 소형 사무실을 얻어 창업했다. 직원은 그를 포함해 3명이 전부였다. 그의 재귀성 이론은 이른바 효율적 시장가설을 주장하는 주류 경제학파들에게는 “논할 가치도 없는 해괴한 담론”이라는 혹평을 받았지만, 소로스는 1969년 펀드 운용을 시작한 이래 연평균 32%라는 경이적인 성과를 냈다.

 

그는 1982년에 만든 자선기금에 ‘열린사회 기금’(Open Society Fund)이라는 이름을 헌사하여 스승에 대한 예를 표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자란 동구의 민주화를 위해 매년 3억달러 이상을 기부하고 있다. 그가 이제까지 기부한 돈만 430억달러가 넘는다. 자기가 번 돈의 86%를 사회적 약자들과 동구의 민주화를 위해 내놓았다. 그의 실체가 투기꾼인지 철학자인지 박애주의자인지는 보는 사람 각자의 몫이다.

 

[소로스의 투자 철학은]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존재... 투자 출발점은 겸손한 마음

 

세계 경제가 출렁이고 있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새로운 바이러스의 창궐 우려도 나온다. 그간의 유동성 장세가 만든 버블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투자를 되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다.

 

사람은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다. 곧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특성이 있다. 이를 ‘확증편향’이라 한다. 그런데 투자시장에서는 이러한 자기 확신이 큰 걸림돌이 되어 크게 손해 보는 경우가 많다.

 

소로스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중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쓴 지도교수 칼 포퍼(Karl Popper)의 이론에 심취했다. 그리고 사회나 개인의 발전은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열려 있을 때 비로소 외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소로스는 이 깨달음을 투자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그는 투자에 대한 자기 확신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오류성’과 시장과 상호 교류에 의해 자신의 틀린 생각을 교정해 나가는 ‘상호 작용성’을 토대로 ‘시장은 극한 상황까지 가서야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재귀성 이론(theory of reflexivity)’을 완성한다. 소로스는 이 ‘재귀성 이론’을 투자에 적용해 큰돈을 벌었다. 자기 판단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이야말로 그의 투자의 출발점이었다.

 

 

2021.12.28 

[26] 2000년간 내려온 인간관

사람 판별법… 동양은 신·언·서·판, 유대인은 재·주·성

 

탈무드에서 랍비 일라이는 “사람의 성격은 지갑, 술잔, 분노의 세 가지 방식으로 분별한다”고 말했다. 이를 풀이하면 사람이 지갑(키소), 술(코소), 분노(카소)를 다루는 방식으로 그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탈무드에서 말하는 지갑은 돈 쓰는 태도뿐 아니라 재물을 다루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탈무드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유형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 한다.

 

▲“탈무드에선 말이야…” 논쟁하는 유대 랍비들 - 유대인들은 탈무드에서 돈을 쓰는 태도, 쾌락을 다루는 방법, 분노 조절 정도를 눈여겨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다고 배운다. 예컨대 술을 제어하지 못하는 이는 작은 유혹에도 넘어가 죄를 지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런 사람을 곁에 두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림은 유대 랍비들이 탈무드 내용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장면을 묘사한 19세기 오스트리아 화가 카를 슐라이허의 작품이다. /위키피디아

 

사람은 재물을 대하는 4가지 유형

①“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는 보통 사람이다. 어떤 이는 이것을 소돔인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②“내 것은 네 것이고, 네 것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는 무지한 사람이다.

③“내 것은 네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는 경건한 사람이다.

④“네 것은 내 것이고, 내 것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는 사악한 사람이다.

 

그런데 유대인 선조는 왜 재산의 소유권에 대한 인식을 기준으로 사람의 종류를 나누었을까? 재산의 정도를 기준으로 나누어도 되는데 말이다. 유대교의 인간관은 재산의 소유권을 포함해 사람의 행동과 태도가 바로 그 사람의 가치관,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본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근본적인 생각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첫 문장인 ‘내 재산은 내 것이고 네 재산은 네 것이다’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소돔에 사는 사람의 언급이다. 탈무드에 따르면, 소돔은 부유한 도시였다. 근처의 도시들은 환경이 척박하고 가난해서 그 도시의 사람들은 소돔에 와서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돔 사람들은 다른 도시 사람들이 와서 구걸하는 것을 싫어했다. 어쩔 수 없이 돈을 주긴 했지만, 다른 도시 사람들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았다. 결국 물건을 팔지 않으니 다른 도시 사람들은 돈이 있어도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소돔 사람들은 시신에서 그 돈을 다시 빼앗았다. 소돔 사람들은 ‘내 재산은 내 것이고 네 재산은 네 것이다’라는 재산법상의 이치는 지켰으나 결과적으로는 남을 돕지 않았다. 이로써 하느님의 계명을 범하고 말았다.

 

▲불타는 소돔 - 부유한 소돔 사람들은 “내 재산은 내 것이고 네 재산은 네 것”이라며 가난한 이웃 도시를 돕는 것을 꺼렸다. 또 굶어 죽은 이들의 시신에서 돈을 다시 빼앗았다. 신의 분노를 산 소돔은 불에 타 사라진다. 소돔의 멸망을 그린 16세기 화가 헤리 멧 드 블레의 작품. /위키피디아

 

두 번째 문장인 ‘내 것은 네 것이고, 네 것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의 소유권 개념이 전혀 없다. 무지한 사람이다. 세 번째 문장인 ‘내 것은 네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다. 남으로부터 단 하나도 빼앗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가진 것을 주려 하니 말이다. 그런데 자신의 것도 지키지 못하고 남에게 이유 없이 다 주는 사람은 실제로는 호구 아닐까? 여기서 말하는 경건한 사람은 비즈니스를 잘해서 고객이 낸 비용 이상으로 가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수익으로 이웃을 돕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고객 감동으로 얻는 수익을 자선 사업에 쓰는 기업인이 여기에 해당될 듯하다. 마지막으로 ‘네 것은 내 것이고, 내 것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극도로 탐욕스러운 사람이라 논할 가치가 없다. 무조건 멀리해야 할 유형이다.

 

술잔은 그 사람이 쾌락을 대하는 방법을 뜻한다. 세상에는 쾌락이 주는 자극을 끝없이 찾아 방황하면서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는 이가 많다. 이런 사람은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할뿐더러, 자신의 본능을 제어하지 못해 작은 유혹에 넘어가고 결국 죄까지 지을 가능성이 높다.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덩달아 피곤해질 수 있으므로 역시 멀리해야 할 유형이다. 우리가 함께 일하고 상호 교류해야 할 사람은 술잔을 잘 다룰 수 있는 사람, 곧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다.

 

지갑과 술잔을 다루는 방식을 살펴보았으니, 이번에는 탈무드에서 분노를 다루는 방식을 알아보자.

 

분노하는 방식에 따른 4가지 유형

①쉽게 화내고, 쉽게 화를 푸는 자는 그의 미덕이 그의 결점을 상쇄한다.

②쉽게 화내지 않지만, 쉽게 화를 풀지도 않는 자는 그의 결점이 그의 미덕을 상쇄한다.

③쉽게 화내지도 않고, 쉽게 화를 푸는 자는 경건하다.

④쉽게 화내고, 쉽게 화를 풀지도 않는 자는 사악하다.

 

분노에 대한 태도는 지갑에 대한 태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분노는 악의를 분출하는 분화구다. 욕설과 혐오와 증오를 다 발산하는 감정이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면 교만하게 된다. 자신의 감정만을 중심에 놓기에 하느님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좋은 기회를 끌어당기려면 화를 내는 습관과 성향을 반드시 다듬어야 한다. 사람은 화가 나면 판단력이 흐려져 잃는 것이 많아진다. 사소한 것에 화를 내게 되면 큰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쉽게 화내는 사람은 화가 식더라도 이미 많은 것을 잃은 후다. 첫째 유형처럼 비록 화를 빨리 진정시키더라도 앞서 화를 낸 것으로 인해 어떠한 이득도 얻을 수 없다. 둘째 유형처럼 쉽게 화를 내지는 않지만 일단 화가 나면 멈추지 않는 사람도 결국 이득을 얻지 못한다. 오래 곪은 분노가 터졌을 때는 파급력이 더욱 크다. 이런 분노는 본인에게 손실을 입히는 데다가, 쉽게 화를 내지 않으면서 쌓아 올린 신뢰까지도 무너뜨린다. 이와 달리 셋째 유형처럼 화를 거의 내지 않고 또 화를 내더라도 빨리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발전할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다. 넷째 사악한 유형은 언제나 화를 다스리지 못한다.

 

키소(지갑), 코소(술잔), 카소(분노)와 마주하는 자신의 됨됨이를 헤아려 보게 되는 연말이다.

 

[살아가는 지혜 담았다, 탈무드는 63권에 달하는 학문]

십계명·율법에 따른 삶의 지침서

 

서기 210년경 구전율법 편찬 착수, 이후 수백년에 거쳐 설명 추가 돼

 

유대인의 경전은 ‘토라’와 ‘탈무드’ 2개이다. 구약성경의 도입부 첫 다섯 권. 곧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가 썼다고 하여 이를 모세오경이라 부르며, 바로 이것이 토라다. 오늘날 구약을 경전으로 삼고 있는 종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경을 ‘구약’이라 부르는 걸 싫어한다. 그들은 그들의 성경을 ‘타나크(TANAKH)’라 부른다. 총 2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대교는 히브리 원문이 남아 있지 않으면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가톨릭의 구약성경보다 권수가 적다. 타나크는 토라 말고도 19권이 더 있다. 유대인들은 나머지 부분은 토라를 보조하거나 해설하는 보조 경전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토라만을 양피지에 손으로 필사하여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어 이를 갖고 예배를 본다.

 

▲스위스 유대인 박물관의 탈무드 - 탈무드는 이스라엘의 구전(口傳) 율법과 이에 관한 보충 설명과 해석을 한데 모은 책이다. 사진은 스위스 유대인 박물관에 있는 탈무드. /위키피디아

 

그럼 탈무드는 무엇일까? 하느님이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그의 백성들이 앞으로 지킬 십계명과 율법을 내려주며 삶의 작은 부분까지 아주 자세히 알려주셨다. 여기서 중요한 율법은 토라에 기록되었고 율법을 지키기 위한 자세한 설명은 장로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하나는 글로 쓰여 ‘토라’로 남겨졌고 또 다른 방대한 내용은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율법은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글로 쓰여진 ‘성문율법’이요 또 다른 하나는 말로 전해져 내려온 ‘구전율법’이다.

 

구전율법은 오랜 시간이 지나자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선대의 설명을 그대로 후대에 전하기가 힘들었다. 기원전 6세기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왔을 때, 선지자 에스라는 더 늦기 전에 구전율법들을 모아 책으로 편찬하기로 했다. 이후 작업은 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져 방대한 저작을 낳게 된다.

 

서기 210년경 랍비 ‘유다 하 나지’는 사람들을 모아 그간 선배 랍비들이 모아 오던 구전율법의 본격적인 편찬에 착수해 6부(농업, 종교 절기, 결혼, 민법과 형법, 제물, 제식) 63편 520장으로 완성했다. 이로써 탄생한 것이 탈무드의 전신 ‘미시나’이다.

 

그런데 미시나는 원론적 내용만 담고 있어,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랍비들은 그 뒤 300여 년 동안 미시나에 대한 보충 설명과 해석을 더 했다. 이 해석들을 모은 것이 ‘게마라’다. 이렇게 미시나와 그 주해 게마라를 한데 모은 것이 ‘탈무드’다. 탈무드는 한 권의 책이 아니라 63권의 방대한 책이다. 그 무게가 75㎏이나 나가는 엄청난 분량이다. 탈무드는 책이라기보다는 위대한 ‘학문’이다.

 

[27] 더 나은 세상 만든다, 민족 사상 ‘티쿤 올람’

오지에 인터넷 지원하는 구글·페북 … 유대인 철학이 원동력

 

유대인 아이들이 열세 살(여자는 열두 살)에 치르는 성인식 때 랍비가 “사람은 왜 사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면 대부분 “티쿤 올람”이라고 대답한다. 유대교 신앙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파트너로 지금도 계속되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도와 이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 선두에 자기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로 ‘티쿤 올람’ 사상은 평생에 걸쳐 유대인의 사고방식을 지배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세상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이상세계(理想世界)로 건설하는 데 필요한 자기의 몫을 찾아내어 그 책임을 다하려 한다. 그것이 바로 신의 뜻이자 인간의 의무라고 그들은 믿는다. 이를 위해 유대인들은 평생 끊임없이 공부한다. 이렇듯 유대인에게 삶이란 신의 뜻에 대한 헌신이자 신에 대한 충성이다.

 

인간이 하느님 사업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유대인은 하느님의 섭리를 배우는 것을 의무로 여긴다. 유대교의 오랜 전통에 의하면 하느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배운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곧 배운다는 것은 기도를 올리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유대인에게 배움은 곧 신의 뜻을 살피며 신을 찬미하는 일이다. 배움이 곧 신앙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시너고그(회당)의 주된 역할도 배움의 장소를 제공함에 있다. 유대인이 배움의 민족이라 일컬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곧 유대인들에게 배움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하느님께 다가가는 신앙생활인 것이다.

 

배움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유대인들은 자녀가 어릴 때부터 배움의 중요성과 티쿤 올람 사상을 가르친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자신이 태어났을 때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그들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이자 과제가 되는 것이다. 이 사상이 바로 현대판 메시아 사상이다. 메시아란 어느 날 세상을 구하기 위해 홀연히 나타나는 게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협력하여 미완성 상태인 세상을 완성시키는 집단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이 창조성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러한 티쿤 올람 사상과 집단 메시아 사상이 그들의 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 기업가들이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이상세계로 만들기 위한 비전에 강한 이유 역시 티쿤 올람 사상과 집단 메시아 사상 때문이다. (집단 메시아 사상은 개혁파 유대인들 사상이고 정통파 유대인들은 지금도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어느 날 홀연히 올 것으로 믿고 있다.)

 

▲위성과 위성을 촘촘하게 연결… 구글, 지구 전역에 초고속 인터넷망 추진 유대교 신앙에 의하면, 인간은 지금도 계속되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도와 이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를 ‘티쿤 올람’이라고 하며 세상을 개선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에 따라 유대인들은 이 세상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이상세계(理想世界)로 건설하는 데 필요한 자기의 몫을 다하려 노력한다. 예컨대 구글은 온 세계를 하나의 정보 공유 동아리로 묶는다는 비전을 세우고 저궤도 소형 위성을 쏘아올려 지구 전역에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망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지구를 감싼 위성 네트워크를 구현한 이미지. /게티이미지코리아

 

당장 돈이 되지 않아도 투자한다

팬데믹 사태 이후,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었다. 재택근무와 온라인 강의가 활성화되어 세계적으로 비대면 정보통신 기술이 더욱 중요해졌다. 이제 인터넷 접근성의 유무는 사회 전체의 존망을 가르는 요소가 되었다.

 

구글의 비전은 세계 전체를 하나의 정보 공유 동아리로 묶는 것이다. 정보의 공개와 공유가 자유의 쟁취와 시민정신을 함양시킬 뿐 아니라 경제 활성화와도 직결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글은 그동안 인터넷망이 없는 곳에 인터넷 사용을 지원하는 다양한 방안을 고민해왔다. 이를 위해 자체적으로 100여 개의 소형 인공위성들을 발사했을 뿐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테니스 코트 면적의 열기구에 통신 중계기를 설치하여 성층권에 쏘아 올리는 ‘룬’ 프로젝트도 시행했다. 그리고 2015년 일론 머스크의 인공위성 ‘스타링크’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스페이스X’에 10억달러를 투자한 것도 인공위성 기반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세계 전역에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의 하나였다. 스타링크 프로젝트는 2020년대 중반까지 저궤도 소형 위성 1만2000개, 장기적으로는 4만여 개를 쏘아 올려 지구 전역에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망을 구축하는 사업이다. 인터넷 인프라가 받쳐주지 않아 속수무책이던 저개발 국가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 계획들은 단순히 인터넷 보급뿐 아니라 우주 IT 시장을 내다보는 원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메타(페이스북)의 비전도 인류를 하나의 정보 교류 동아리로 묶는 것이다. 이를 위해 메타 역시 인터넷 보급을 위한 노력을 펼쳐왔다. 2020년 5월 메타는 ‘투 아프리카’(2Africa)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무려 3만7000㎞에 달하는 해저 광케이블을 설치해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인터넷 접속 환경을 개선시키겠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인터넷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메타의 시도는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기존에도 태양광 전열판을 날개에 설치한 거대한 드론을 사용해 인터넷을 제공하려는 아퀼라 프로젝트를 추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새롭게 해저 광케이블 설치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아프리카가 돈이 되는 시장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이들에게는 모두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티쿤 올람’ 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 인터넷을 보급하겠다는 구글의 공동 창업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유대인이다. 스탠퍼드대학원에서 만난 그들은 1998년 함께 구글을 창업했다. 해저터널을 뚫어 아프리카에 인터넷을 보급하겠다는 메타(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도 유대인이다. 그는 기업만이 목적을 가지는 것에 멈추지 않고 인류 개개인 모두가 삶의 목적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2017년 하버드대학교 졸업 연설에서 “모든 사람이 목적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의 과제”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목적이란 “우리가 위대한 가치의 한 부분이며, 필요한 존재이며,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페북은 아프리카 해안 따라 인터넷 구축 - 해저 광케이블을 설치해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인터넷 접속 환경을 개선하는 ‘투 아프리카’(2Africa) 프로젝트. /2Africacable

 

홍익인간과 비슷한 티쿤 올람

유대인의 티쿤 올람과 비슷한 사상이 우리 한민족에게도 있다. 바로 단군왕검의 건국이념 ‘홍익인간’(弘益人間) 사상으로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 민족만 이롭게 하자는 이념이 아니다. 우리가 주도하여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그 뒤 자손 대대로 한민족을 규율하는 생활 철학이 됐다. 고조선이 주변 유목민족들을 아우르며 2000년 이상의 강대국을 이룬 힘의 원천이었다. 그 뒤 부여와 고구려, 백제, 신라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을 이끄는 근본 사상이 됐다.

 

홍익(弘益)이란 천지의 웅대한 뜻과 이상을 삶과 역사 속에 구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홍익인간이란 하늘이 원하는 ‘이상세계’를 건설하는 데 일조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게 ‘재세이화’(在世理化)이다. 삼국유사에는 홍익인간과 함께 재세이화의 통치 이념이 등장한다. ‘재세이화’란 “세상을 하늘의 이치로 교화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치는 하늘의 섭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재세이화는 하늘의 섭리에 부합되는 세상을 말한다. 곧 하늘의 뜻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도록 앞장서는 사람이 홍익인간이다.

 

세상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 민족의 기원력을 쓰는 민족은 한민족과 유대민족뿐이다. 올해가 단기(檀紀) 4355년이다. 단기는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알려진 기원전 2333년을 단기 1년으로 헤아리는 연호다. 한편 유대력으로 올해는 5782년이다. 유대인의 새해인 나팔절(2022년 9월 26일) 때 다시 변경되어 5783년이 된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 기원전 3761년에 세상과 아담을 창조하셨다고 믿어 이를 시발(始發)로 유대력을 헤아린다.

 

[티쿤 올람 사상은]

기독교 “하느님이 창조” 유대교는 “창조했지만 세상은 미완성인 상태”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종교가 3개 있다. 바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이다. 이 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세상은 하느님이 창조했으며, 자신들의 종교적 뿌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기독교와 유대교가 서로 다르다. 신이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했다고 보는 기독교와 달리, 유대교는 신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아직 미완성의 상태로 하느님은 지금도 창조 사업을 계속하고 계신다고 믿고 있다. 이를 ‘티쿤 올람’이라 한다. 티쿤은 ‘고친다’는 뜻이고, 올람은 ‘세상’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티쿤 올람’은 세상을 개선한다는 뜻이다.

 

19세기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면서 종교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기독교도들은 다윈이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원숭이의 이미지로 격하시켰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유대교에서는 진화를 단계별로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창조로 해석한다. 그들은 하느님이 지금도 창조사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듯 티쿤 올람은 창조론과 진화론을 함께 아우르는 사상이다.

 

[28] ‘생명연장의 꿈’을 전한 현대 면역학의 아버지

불가사리 연구하다가… 메치니코프, 전염병 맞설 면역세포 찾았다

 

메치니코프는 1845년 러시아 남부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대단한 독서광으로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었다. 그리고 8살 때 이미 자신이 학자라고 생각했다. 자연 속에서 뛰놀며 생물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메치니코프는 무언가를 발견하면 또래들에게 자신이 아는 신기한 지식을 가르치는 ‘애 선생님’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이미 지질학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1등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의사가 되려 했다. 그러나 의사보다는 연구자가 되어 인류를 위해 위대한 업적을 남기라는 어머니의 충고를 받아들여 크라코프 대학 자연과학부로 진학했다. 메치니코프는 거의 시험 날에만 나타나 벼락치기 공부로 언제나 1등을 하며, 불과 2년 만에 4년 대학 과정을 마쳤다. 어머니의 소망대로 하루빨리 인류를 구하고자 했던 그는 대학생 때 이미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한 천재였다.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그는 논리적인 연상 작용으로 글재주도 뛰어났다. 그가 쓴 논문은 소설처럼 재미있었다.

 

전염병의 공포와 싸워온 인류 - 일리야 메치니코프는 1881년 러시아에서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이탈리아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그는 장미 가시가 꽂힌 불가사리에서 아메바처럼 생긴 세포들이 가시 끝에 모여 붙는 현상을 발견했다. 사람에게도 같은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가설을 세운 그는 식세포에 의한 세균 탐식설을 정립해 면역학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사진은 예방접종을 묘사한 프랑스 화가 루이 레오폴드 부아이(1761~1845)의 유화. /게티이미지코리아

 

꼬마 독서광, 8세 때 이미 “나는 학자”

대학 졸업 후 메치니코프는 국가 장학금을 받아 독일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받아 이탈리아로 옮겨가 불과 스물두 살 때 박사를 땄고, 3년 뒤엔 러시아 오데사대학 동물학과 부교수가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열렬한 사랑에 빠져 결혼했는데, 아내가 결핵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5년 후 세상을 떠났다. 메치니코프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며 죽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모르핀 알약을 한꺼번에 먹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토해 목숨을 건졌다. 이후 삶의 의욕을 되찾은 뒤 연구에 몰두하여 유명한 상을 연속 3회나 수상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재혼한 두 번째 아내 올가마저 장티푸스에 걸려 심하게 앓았다. 이번에도 메치니코프는 다시 자살을 생각했다. “그래, 죽더라도 의학 발전에 도움이나 주고 떠나자. 장티푸스란 병이 피를 통해 전염되는지 내가 확인해 주지.” 그는 일부러 장티푸스 병에 걸린 환자의 혈액을 자신의 몸에 주입해 죽음 직전까지 갔으나 신기하게도 다시 살아났다. 이후 그는 삶에 무한한 애정을 품게 된다.

 

연구실의 메치니코프 - 메치니코프가 68세였던 1913년 연구실에서 찍은 사진. /위키피디아

 

1881년 러시아의 알렉산더 2세가 암살당하자 유대인 박해가 본격화되었다. 메치니코프 역시 극단분자로 몰려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메시나로 이주했다. 그곳에 개인연구실을 꾸민 그는 동물의 발생 과정을 탐구하는 ‘발생학’을 연구 주제로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투명 불가사리의 먹이 소화 과정을 관찰하다 체내를 자유롭게 옮겨 다니는 방랑 세포들이 침투한 이물질들을 에워싼 뒤 잡아먹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어 불가사리 유생(幼生)에 장미 가시를 찔러 놓았다. 다음날 그는 자신의 추측이 옳았음을 알았다. 사람 손에 가시가 박히면 고름이 생기듯 방랑 세포들이 가시 둘레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이 세포들을 ‘식세포’라고 명명했다.

 

그는 또 연상 작용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불가사리 체내의 방랑 세포들이 외부에서 침입한 먹이를 먹는다면 독성 미생물도 먹어 치울 것이다. 이는 해로운 미생물로부터 불가사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몸의 식세포(백혈구)도 틀림없이 세균들로부터 인간을 보호할 것이다.” 이렇게 그는 ‘식세포에 의한 세균 탐식설’을 정립하여 의학계에 보고했다. 현대 면역 이론이 최초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동물학자에서 느닷없이 병리학자가 된 그는 1888년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파리 파스퇴르연구소를 찾아갔다. 제너가 종두법을 시행하긴 했으나 병원체를 배양해 백신을 만든 건 파스퇴르가 처음이었다. 메치니코프는 무보수로 일할 자리가 있느냐고 물었고 파스퇴르는 즉각 그를 미생물 연구실 책임자로 앉혔다. 그는 식세포 연구에 몰입했다. 이후 건강이 나빠진 파스퇴르는 1895년 메치니코프에게 소장 자리를 물려주고 숨을 거뒀다. 1901년 메치니코프는 ‘감염성 질환과 면역’ 책에서 “식세포와 세균의 싸움이 면역의 기본이다”라는 ‘세포면역설’을 강하게 주장했다. 인체에 면역이라는 치유력이 내재되어 있다는 현대 의학의 개념을 처음 밝혀낸 것이다.

 

독일 면역학계와 선의의 경쟁

하지만 라이벌인 독일 코흐연구소는 세균에 대한 면역은 식세포가 아닌 혈청에 의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 선두에 ‘살바르산 606′ 매독치료제로 화학요법의 새 장을 연 유대인 생화학자 파울 에를리히가 있었다. 그는 항원항체반응 이론을 주장했다. 치열한 논쟁은 20년 넘게 계속됐다. 서로 간의 경쟁은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만들었다. 사실 프랑스는 식세포(백혈구) 작용에 의한 ‘선천면역’을, 독일은 항원항체반응에 의한 ‘획득면역’을 알아낸 것이었다. 이후 두 이론이 모두 옳다는 것이 밝혀져 오늘날 면역학의 기초를 이루었다. 이 공로로 메치니코프는 1908년 에를리히와 공동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이렇듯 면역학의 창시자는 의사나 의과학자가 아닌 동물학자와 생화학자였다. 인류의 ‘평균수명 연장’은 두 유대인 면역학자 덕분이었다.

 

이후 메치니코프는 동물학과 의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수많은 인명을 빼앗는 콜레라와 매독 백신 연구에 집중했다. 그는 콜레라 연구 중 장내 미생물의 역할에 주목했다. 콜레라균에 감염된 사람이 병에 걸릴지는 장내 미생물에 달려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를 임상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그는 콜레라균이 섞인 각종 오염된 물들을 직접 마시기도 했다.

 

요구르트의 세계화 이끌어

메치니코프는 매독을 연구하다 혈관을 뻣뻣하게 만드는 동맥경화가 노화를 촉진한다고 보았다. 이로써 노화방지 연구도 시작했다. 그는 장내 세균의 독소와 노화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발견하고 장내 부패가 인간 노화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00세 넘게 장수하는 불가리아인들이 평소 요구르트를 많이 마신다는 사실에 착안해 유산균 연구에 몰두했다.

 

메치니코프는 1907년 ‘생명연장’ 논문에서 독성 균이 장내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과 숙변 물질로 독소를 만들어 수명을 단축시킨다면서, 불가리아 유산균이 젖산을 만들어 장내 독성 균들을 쫓아버린다고 주장했다. 그의 노화 방지 이론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켜 연일 신문들이 대서특필했다. 현재 세계에서 판매되는 요구르트는 메치니코프의 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메치니코프는 1910년 매독 치료제인 염화제1수은 연고를 발견했다.

 

메치니코프와 에를리히처럼 학문 간 경계를 뛰어넘는 통섭형 과학자들 덕분에 각종 백신이 발명됐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년 전부터서야 인류가 전염병의 공포에서 해방되기 시작한 것이다.

 

18~19세기 대표적 의학자들 - 18·19세기 의학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그린 포르투갈 화가 벨로소 살가도의 작품(1905년). 가운데 흰색 가운을 입은 이가 루이 파스퇴르이고, 바로 왼쪽 검정 옷을 입은 인물이 일리야 메치니코프다. /위키미디어

 

[인간 수명 늘린 면역학]

공기 중의 독이라던 전염병, 파스퇴르 “병원균이 원인”… 평균 수명 150년새 2배로

 

인간의 수명은 최근 150년 사이에 2배로 늘어났다. 150년 전 미국인 평균수명이 35세에서 40세 사이였다.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더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1936년 42세 평균수명에서 2020년 기대수명은 83.5세로 불과 80여년 만에 두 배에 이를 정도로 급속하게 수명이 늘어나고 있다.

 

그간 인간 수명의 최대의 적은 전염병이었다. 선진국에서조차 20세기 초까지 사망 원인이 거의 전염병이었다.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전염병은 신이 내린 형벌 또는 공기 중의 독 때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만이 미생물이 병원균으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867년 프랑스 화학자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 이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당시 파스퇴르연구소에는 백신 개발에 기여한 유대인 연구원이 있었다. 바로 병원균을 잡아먹는 식세포를 최초로 발견해 면역학의 기초를 확립한 일리야 메치니코프였다.

 

이후 면역학 등 의학의 발달로 인류의 평균수명은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평균수명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국가가 우리나라이다. 유엔은 향후 세계 최장수국으로 한국을 꼽았다. 평균수명의 증가는 다양한 변화를 몰고 오고 있다. 과거에는 사람의 인생이 환갑을 전후해 끝났다면, 이제는 정년 이후 2막의 삶을 준비해야 하고, 앞으로 100세 시대에는 인생을 3막으로 나누어 설계해야 한다.

 

[29] 리바이의 청바지 혁명

馬車 덮개로 만든 광부 바지… 세계서 가장 사랑받는 옷 되다

 

미국의 행운은 1846~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 결과, 싼값에 할양받은 주 중 하나인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이 캘리포니아를 넘겨받은 해에 잭팟이 터졌다. 1848년 1월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근처 강에서 한 노동자가 사금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이를 비밀에 부쳤다. 그러나 결국 많은 금이 발견됐다는 기사가 그해 8월 ‘뉴욕 헤럴드’에 실렸다. 이재(理財)에 밝은 유대인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유대인 수천 명이 서부로 향했다. 당시 육로 대륙 횡단은 위험할 뿐 아니라 시간도 많이 걸렸다. 유대인들은 배편으로 파나마에 도착해 77㎞의 지협을 카누와 도보로 통과한 후 다시 배편으로 서부에 도착해 채광권을 선점하며, 금광 근처에 대지주로 자리 잡았다.

 

12월 5일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금 발견을 인정했다. 이듬해에 미국 전역에서 장정 8만명이 몰려들어 캘리포니아 인구는 순식간에 10만명을 돌파했다. 일개 촌이었던 샌프란시스코도 인구 2만의 도시가 되었다. 1852년에는 캘리포니아 인구가 25만명으로 불어났다. 금광은 주변 주에서도 잇달아 발견되어 대륙 철도 사업을 일으킬 정도로 대호황이었다.

 

1848년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캐낸 금이 화제가 되면서 미국 전역에서 수많은 이가 서부로 향하는 ‘골드 러시’가 시작됐다. 이는 서부 개척은 물론이고 우편과 송금 등 통신과 금융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일부 유대인은 미국 서부 채광권을 차지해 부를 축적했다.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금광을 선점하진 못했지만 청바지를 만들어내 큰돈을 벌었다. 그의 청바지는 오늘날에도 자유와 젊음, 시대를 초월한 실용의 상징으로 통한다. 그림은 1849년 캘리포니아로 금을 찾아나선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0대 때 아버지 여의고 독일서 美로

골드러시는 미국을 부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 서부 개발과 함께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호구역 설정으로 인디언의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역마차 제도가 생겼다. 이로써 우편 제도와 송금 제도가 발전했다. 역마차는 좌석 등급이 세 가지 있었는데, 진흙탕이나 언덕이 나오면 1등 요금 승객은 앉아 있고, 2등 요금 승객은 마차에서 내려 걷고, 나머지 승객은 마차를 밀었다.

 

남북전쟁 중인 1862년에는 홈스테드법이 도입되어 5년간 서부 개척에 종사한 사람들에게 토지 160에이커를 무상으로 주어 개척 활동을 촉진했다. 1867년 미국은 알래스카를 러시아에서 헐값에 사들였다. 1869년에는 대륙횡단철도가 개설되어 급속한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철도를 따라 전봇대가 세워져 전보가 등장하자, 금융 산업 등 정보 산업이 급속히 발전했다. 모두 골드러시의 영향이었다. 이후 캘리포니아는 가장 인구가 많은 주가 된다.

 

리바이스 창업주인 리바이 스트라우스. 독일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골드 러시 때 미국 서부에 자리 잡고 청바지를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골드러시 덕분에 돈 번 유대인이 있다.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다. 그는 1829년 독일의 한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리바이는 십대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행상에 나섰다.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며 그에게 당부했다. “아들아,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심판할 때 맨 먼저 물어보는 말이 뭔지 아니? ‘너는 진정 네 할 일을 다 하였는가?’라는 질문이란다.” 이 말이 평생 리바이의 화두가 되었다.

 

아버지를 잃고 살길이 막막해진 가족은 유대인도 평등한 대접을 받는 미국행을 결심했다. 작은아버지 가족이 먼저 뉴욕으로 이민 가서 자리 잡은 것도 한몫했다. 리바이가 18세가 되던 해인 1847년 일가는 뉴욕으로 건너갔다. 우선 사는 게 급해 리바이는 공부를 포기하고 작은아버지의 옷 가게에서 일을 배웠다. 그런데 고된 일에 비해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켄터키에서 천과 의류 행상도 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골드러시 시대라 리바이도 서부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크게 실망했다. 금광은 이미 먼저 온 사람들이 다 선점해 결국 그는 다시 천과 의류 행상을 해야만 했다. 행상이 제법 자리 잡을 무렵 사고가 터졌다. 마차 지붕으로 쓸 범포(帆布)를 사 간 광부가 천에서 물이 샌다며 환불을 요구했다. 원래 범포는 돛에 사용하는 튼튼하고 질긴 천이었다. 리바이는 당장 환불해줄 현금이 없었다. 그는 광부의 해진 바지를 보고 환불 대신 그 천으로 튼튼한 광산 작업용 바지를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후 범포로 만든 바지는 광부들에게 인기가 많아 잘 팔렸다. 리바이의 가게는 도매와 소매 모두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주머니 재봉 선이 자주 터졌다. 주머니에 넣은 연장과 광물 무게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질긴 바지가 필요했다. 그 무렵 양복점을 하던 유대인 재단사 제이컵(야곱) 데이비스가 리바이에게 동업을 제의해 왔다. 제이컵은 천을 단단하게 고정하는 구리로 만든 징 ‘리벳’(Rivet)을 바지 주머니에 박는 아이디어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머니 속의 작은 주머니는 당시 유행인 회중시계를 넣을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그는 일반 바지의 3배 값으로 바지를 팔고 있었지만 특허를 낼 돈은 없었다. 리바이에게도 특별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바지에 독사들이 싫어하는 인디고라는 자연 염료로 청색 물을 들였다. 광부들이 사막을 다닐 때 독사의 위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리바이는 인디고 청색이 독사를 물리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활력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리바이는 제이컵을 책임자로 고용하고 공동 명의로 특허를 신청했다. 하지만 특허 신청은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 번 거부되었다. 그러나 리바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1873년 5월 20일 리벳을 박아 넣은 남청색 바지의 특허가 승인됐다. 미국 최초의 의류 브랜드인 ‘리바이스 청바지’가 공식 탄생한 날이다. 이후 리바이스 청바지는 불티나게 팔렸다. 그런데 바지가 조금 무겁다는 소비자의 불만이 있었다. 그래서 리바이는 옷감을 가벼우면서도 질긴 데님으로 바꾸었다. 데님은 프랑스 남부 도시 님(Nîmes)의 특산물로 고급 면직물이다. 그리고 진(Jeans)이라는 이름은 데님 청바지를 이탈리아 제노바 선원들이 많이 입어, 제노바를 지칭하는 프랑스어(Gênes)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1890년 청바지의 특허 시효가 만료되자 다른 제조사들도 앞다퉈 진 바지를 만들었다. 첫사랑을 잊지 못해 독신으로 여생을 마친 리바이는 샌프란시스코 유대인 사회의 대부였다. 그는 버클리 대학에 장학 기금을 28개 조성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자선 활동을 펼쳤고, 재산을 고아원과 양로원 등에 기부하고 1902년 세상을 떠났다.

 

1차 세계대전은 청바지가 미국을 넘어 세계 상품으로 발전한 계기가 되었다. 유럽 전선에 참전한 미군들이 진 바지를 즐겨 입었다. 이후 1934년에는 여성용 청바지가 처음 등장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여자들이 바지를 입으면 벌금형을 받았는데, 청바지를 입은 미국 여성들의 유럽 여행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폐지되었다.

 

청바지는 1950~60년대에 제임스 딘, 말런 브랜도, 엘비스 프레슬리, 매릴린 먼로 등 당대 스타들이 즐겨 입으면서 유명해졌다. 제임스 딘은 영화 ‘이유 없는 반항’에서 청바지를 입고 형언할 수 없는 깊고 슬픈 눈빛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이를 계기로 청바지는 일약 자유와 반항의 상징이 되었고, 청바지는 세계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배우 제임스 딘이 영화에서 선보인 청바지는 세계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사진은 1956년 영화 ‘자이언트’의 한 장면. /게티이미지코리아

 

1차대전 참전 미군 통해 유럽 전파

청바지는 흔하지만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다. 대중적이면서 독창적이고, 글로벌하다. 또 편하면서 강인한 복장이다. 심지어 청바지는 옷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상이요 주의(主義)를 대표한다. 청바지는 다섯 가지 없음(No)을 표현한다. 노 클래스(계급 초월), 노 에이지(연령 초월), 노 시즌(계절 초월), 노 섹스(성별 초월), 노 보더(국경 초월). 이렇듯 청바지는 평등사상을 대변하며 계급사회 철폐를 의미한다. 이렇듯 기득권층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외치는 세대의 평상복이 되었다. 게다가 입을 옷을 고르는 데 소비하는 시간조차 아까운 기업가들에게 청바지는 노 타임(골라 입을 시간이 필요 없음)을 더했다. 실용성과 멋을 모두 지닌 청바지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다.

 

[美 의류산업 장악한 유대인]

182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독일 지역에서 미국으로 유대인들이 몰려왔다. 특히 1848년 3월 혁명 실패에 실망한 유대인들이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왔다. 가난한 이민자들은 뉴욕의 봉제업에 종사했다. 그 뒤 러시아 황제가 암살된 1881년 이후 대박해(포그롬·pogrom)를 피해 온 동유럽 유대인 200만명은 뉴욕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맨해튼 이스트사이드 남쪽 봉제 공장으로 직행해 일자리와 숙식을 해결했다. 당시 미국 유대인 노동자의 60% 이상이 봉제업에 종사했다. 이들은 작은 방 하나에 12명이 모여 일주일에 70시간 이상 일했다. 하루 12~15시간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재봉 일을 하고도 일당은 형편없었다.

 

그 뒤 일부는 돈을 모아 천과 의류 행상을 시작했으며, 일부는 옷 가게를 열었고, 일부는 의류 공장 주인이 되었다. 1888년에는 뉴욕 의류 상회 240곳 거의 모두, 1890년에는 뉴욕 의류 공장의 95%를 유대인이 소유했다. 1913년에는 공장을 무려 1만7000곳 소유한 유대인 의류 산업이 뉴욕 최대 산업이었다. 20세기 초까지 철강, 석유와 함께 미국의 3대 산업이었던 의류 산업 종사자의 태반이 유대인이었다. 당시 철강은 JP모건의 ‘유에스스틸’이, 석유는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이 장악하고 있었으니 미국 3대 산업이 모두 유대인 수중에 있었다.

 

 

2022.03.08

[30]한 러시아계 유대인이 우크라이나 운명을 바꾸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44세 젤렌스키

 

젤렌스키는 1978년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홀로코스트 희생자다. 아버지는 컴퓨터공학 교수였고, 어머니도 공학자였다. 몽골에서 근무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몽골에서 살다 어머니 건강 문제로 4년 만에 귀국했다

 

 젤렌스키와 아내 올레나 - 2019년 대선 토론회에서 부인과 함께 포즈를 취한 젤렌스키. /게티이미지코리아

 

“친구에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사람이 친구에게 우유를 건네는 사람보다 낫다”고 탈무드는 강조한다. 랍비 샴마이는 “모든 사람을 쾌활하게 맞이하라”고 가르치며, 자신의 우울함과 침체된 분위기로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죄악’이라고 했다. 유대인의 인생관은 할 수만 있다면 “아낌없이 즐기라”는 것이다.

 

이런 교육 덕분에 젤렌스키는 어려서부터 밝고 긍정적인 기운으로 남을 웃기는 재주가 탁월했다. 10대 때는 운동을 좋아해 역도와 레슬링을 배웠다. 한편 예능에도 소질이 있어 춤도 잘 추고 학교 앙상블의 기타리스트로도 활동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TV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한 젤렌스키는 1997년 코미디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며 주목받는 코미디언이 되었다. 그는 19세에 ‘크바르탈95′라는 연예 기획사를 설립해 자신이 주연을 맡아 사회 풍자 드라마와 영화를 여러 편 제작했다. 그의 드라마는 모스크바를 비롯해 구소련 공화국들에서 공연되었다. 젤렌스키는 일과 공부도 병행해 명문 키이우(키예프) 국립경제대학에서 경제학 학사와 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6년에는 댄스 경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2015년부터 방영된 ‘국민의 종’이라는 51부 작 대하드라마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이 드라마는 부패한 우크라이나 사회를 풍자적으로 비판했다. 제작자 겸 주연인 젤렌스키는 드라마에서 고등학교 역사 교사 역할을 맡아 학생들 앞에서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를 성토했다. 이 장면을 한 학생이 몰래 촬영해 온라인에 올리는 바람에 역사 교사는 국민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되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된 그가 부패 정치인들을 몰아낸다는 게 드라마 줄거리다. 시청자 수가 국민의 절반에 가까운 2000만명에 이를 정도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이후 젤렌스키는 ‘국민의 종’ 출연진과 함께 같은 이름의 정당을 2018년 창당해 대권 주자로 부상했다.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이 높아, 젤렌스키는 새로운 인물이라는 점을 어필하여 현직 대통령을 3배 가까운 차이로 꺾으며 당선되었다. TV 드라마가 현실이 된 것이다. 2019년 41세의 최연소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나는 평생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해 왔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었다. 이제 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최소한 울지 않도록 모든 것을 다할 것이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피란민 구조하는 우크라이나軍 -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유모차를 들어 옮기며 피란민들을 돕고 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 인근 도시인 이르핀은 러시아군 공습으로 다리가 파괴되고 민간인 사상자들도 잇따르고 있다. /AP 연합뉴스

 

젤렌스키는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온건 중도파로 분류됐다. 친서방파와 친러파로 양분된 정치 구도에서 그는 러시아계 유대인이라는 혈통 문제까지 겹치며 양쪽에 포위당한 처지였다. 하지만 젤렌스키는 정파 문제에 연연하지 않고 안보 외교에 총력을 기울였다. 취임 후 첫 정상회담은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가지며, 돈바스 전쟁에 대한 문제를 의논했다. 다음으로 독일을 방문해 메르켈 총리와 러시아-독일을 잇는 가스관 문제 등을 논의했다. 이후 유엔 총회에 참석하는 길에 트럼프와도 만났다. 전반적으로 적극적 친서방 행보를 보여 러시아의 푸틴과 앙숙이 되었다.

 

올해 초부터 러시아가 18만 대군을 동원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지자 그는 서방에 도움을 요청했다. 2월 19일 뮌헨에서 열린 안보회의에 참석해 러시아와 맞서온 우크라이나의 희생, 유럽과 나토(NATO)의 이기적 태도를 비판하며 유럽 안보 구조의 재구축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에 대한 서방의 대응이 부족하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젤렌스키의 독일 방문은 그가 우크라이나를 벗어난 틈을 타 러시아가 공격할 수 있다는 미국 측 우려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것이다.

 

그는 “우방국들의 지지가 있든 없든 우리는 조국을 지킬 것”이라면서, 무기 등의 지원에 감사하지만, 이는 우크라이나가 구걸해야 하는 사안이 아님을 강조하고 “이는 우크라이나가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게 아니라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 합병 이후 8년간 유럽의 안보를 위해 방패 역할을 해온 기여”라고 주장했다.

 

2월 24일 드디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역에 미사일 폭격을 가하며 쳐들어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8세부터 60세까지 국민 총동원령을 내렸다. 같은 날 그는 EU 정상 회의에서 5분간 영상 연설을 통해 지지를 촉구했다. “오늘 제가 살아있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고 운을 뗀 그는 “우리는 지금 유럽의 이상(理想)을 위해 죽어가고 있다”고 호소했다. 같은 날 저녁에 올린 연설 영상에서 그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지 않으면 “내일 전쟁이 당신들의 문을 두드릴 것”이라며 서방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경고했다. 그의 호소와 경고는 즉시 효력을 발휘했다. 서방은 즉각 러시아 제재에 들어갔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각종 지원이 시작되었다.

 

전쟁 발발 후 러시아가 3차례 이상 젤렌스키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다. 그는 러시아의 최우선 목표가 자기 제거임을 알면서도 수도 키이우를 끝까지 사수하겠다고 밝히며 결사 항전을 다짐했다. 러시아가 “젤렌스키가 수도를 탈출했다”는 허위 보도를 하기 시작하자 그는 SNS를 통해 수시로 근황을 알리며 국민들을 단결시켰다. “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무기를 내려놓지 않을 겁니다. 조국을 지키겠습니다. 우리의 진실은 이곳이 우리 땅, 우리 조국, 우리 후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것을 지키겠습니다.” 그는 하루 3시간 정도만 자며 강인하고도 치밀한 모습으로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3월 1일 젤렌스키는 유럽 의회에 화상 연설을 했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웁니다. 자유와 생명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유럽의 동등한 일원이 되기 위해서도 싸우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걸 증명해 주십시오. 당신들이 우리를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걸 증명해 주십시오. 당신들이 실로 유럽인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시오. 그러면 삶이 죽음을 이기고, 빛이 어둠을 이길 것입니다.”

 

젤렌스키가 수도를 사수하기로 한 결정은 큰 영향을 끼쳤다. 개전 직후 사흘 이내에 함락될 것이라 여겨졌던 키이우는 최고 통수권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열흘이 지나도록 함락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우크라이나는 세계 각국의 지원을 받아 악조건 속에서 전쟁을 버텨내고 있다. 그의 용기와 외교술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끌어냈다.

 

3월 3일, 개전 이후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그는 죽는 게 두렵지 않으냐는 질문을 받자 “죽는 것을 겁내지 않는 사람은, 또 자식들이 죽는 것을 겁내지 않는 사람은 정상이 아니다. 그렇지만 대통령으로서 나는 죽음을 겁낼 권리가 없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 역사 흐름을 바꾼 유대인

한 유대인이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바꾸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이야기이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뉴욕타임스(NYT)는 코미디언 출신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옛 동료들을 중용하여 측근 정치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코미디언으로 채워진 우크라이나 정부가 많은 실책을 범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정치는 마치 코미디 호러 드라마 같다며, 전문가가 없는 정부, 외교관 없는 외교부, 장군 없는 군 지휘부가 언제 붕괴할지 모른다고 전했다. 한마디로 아마추어 정치가가 국가 대사를 망치고 있다는 요지였다.

 

하지만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그가 한 결연한 행동을 본 외국 언론들은 태도가 일변했다. 특히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3월 2일 ‘어떻게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수호하고 세계를 통합시켰나’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에서 그에 대한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타임은 “러시아의 암살 위협에도 수도에 남아 국민의 항전 의지를 북돋웠다. 찰리 채플린이 처칠로 변모했다. 어떤 의미에서 샤를 드골보다 용감하다. 전쟁 지도자로서 처칠과 동급이다”라고 극찬했다. 또 “일주일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계의 민주주의 국가들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러시아의 침공 후 미국은 암살 위협을 받는 젤렌스키 대통령을 보호하고자 망명을 제안했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여기가 (내) 싸움터다. 나는 (도피용) 탈것이 아니라 탄약이 필요하다”며 거절했다. 타임은 러시아군이 키이우 코앞까지 쳐들어왔음에도 도피하지 않고 수도를 지킨 그의 자세가 “역사의 흐름을 바꾼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평했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