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 이야기11/ 황광해의 역사 속 한식2
2016-05-04 위어
‘사옹원(司饔院)이 위어(葦魚)를 잡아 궁중으로 올리는데, 승정원 승지들은 자기들이 먹으려 졸곡제(卒哭祭) 전에 위어로 젓갈을 담갔습니다. 승지들이 이런 일을 했다니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승지들을 모두 갈아 치우소서.’
중종 10년(1515년) 윤4월 17일의 기록이다(‘조선왕조실록’). 얼핏 보기엔 사소한 일이다. 승지들이 사옹원이 관리하는 위어를 졸곡제 전에 구해서 썼다는 것이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그해 3월 2일, 스물다섯 살의 안타까운 나이로 죽었다. 졸곡제는, 항시 곡(哭)을 하는 일을 멈추는 시점의 제사다. 왕후의 졸곡제 이전에 승지들이 자신들의 먹을거리를 준비했음은 엄중한 잘못이다. 기사에는 ‘일곱 번 탄핵했으나 (중종이 승지들을) 갈아 치우지 않았다’고 했다. 장경왕후는 중종반정 공신 박원종의 조카다. 계비로 중전이 된 것은 궁궐 내 권력투쟁의 결과였다. 장경왕후 사망 후 폐비 신씨(단경왕후)의 복위 문제, 문정왕후 윤씨의 등장으로 조정은 한바탕 혼란을 겪는다. ‘승정원 위어 새치기’와 탄핵 상소는 그런 사건 중 하나였다.
이날 기록에는 도승지 손중돈을 비롯하여 승정원 승지 6명 전원이 죄를 인정하고 스스로 ‘업무 정지’를 청하는 내용도 있다. 관례를 따랐지만 졸곡제 전에 면포로 위어를 산 것은 잘못이니 사실 관계가 밝혀질 때까지 업무를 보지 않겠다는 ‘일시 사임’의 의사 표시였다. 중종은 ‘일시 사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위어는 조기(석수어), 멸치(멸어), 북어, 청어, 밴댕이 등과 함께 세금으로 바치는 물고기로 임금님 진상품이었다. 고종 5년(1868년) 5월의 기록에는 ‘연이은 장마로 위어잡이 계절을 놓쳤다. 원래 바치기로 한 위어 1358마리 대신 소금에 절인 밴댕이 1358마리를 바치기로 한다’는 사옹원의 보고에 고종이 허락하는 내용도 있다.
조정에서는 다른 생선과는 달리 위어와 소어(蘇魚·밴댕이)의 공급을 위하여 사옹원 아래 위어소(葦魚所)와 소어소(蘇魚所)를 경기 서해안 일대에 두었다. 위어소는 행주산성 부근의 것이 가장 번창했다.
위어의 ‘위(葦)’는 갈대다. 위어는 갈대를 닮은 물고기 혹은 강의 갈대숲 아래 노는 물고기다. 다산 정약용은 ‘아언각비’에서 ‘제어(C魚)가 곧 위어’라고 했다. 위어는 ‘웅어’ ‘웅에’ 등으로도 부른다. 바다에서 살다가 양력 5월경부터 알을 낳기 위해 행주산성, 교하, 양천 부근으로 몰려온다. 한양도성 가까운 곳이니 궁중에서는 위어를 구해서 횟감 혹은 젓갈용으로 사용했다.
위어잡이는 쉽지 않았다. 위어를 잡는 일은 위어소 소속의 어민들이 맡았다. 이들에게는 병역과 각종 부역을 면제해주고 토지를 지급했다. 광해군 10년(1618년) 4월 ‘광해군일기’에는 임진왜란 후 위어소 어부들의 곤궁한 삶이 드러난다. ‘임진왜란 전에는 위어잡이 어부가 300호 정도 되었다. 이들은 위어를 잡는 대신 토지 8결(結)씩을 받고 다른 부역에는 동원되지 않았다. 임란 후 위어잡이 가구는 100호밖에 되지 않으며 이들이 받는 토지는 2결 정도다. 위어잡이 외에 땔감이나 집 짓는 재목감 부역에도 동원되니 힘들다. 다른 부역에는 동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광해군은 이 내용을 받아들인다.
궁중에서만 위어를 먹었던 것은 아니다. 전원생활을 한 옥담 이응희(1579∼1651)는 위어를 두고 ‘가는 꼬리는 은장도를 뽑은 듯하고/긴 허리는 옥척처럼 번득인다/칼로 저며 흰 서리 같은 회로 만들어도 좋고/석쇠에 놓고 구워도 좋다’고 했다(‘옥담사집’). 위어는 민간에서도 널리 먹었던 것이다.
겸재 정선(1676∼1759)은 1740년부터 5년간 양천현령을 지내며 한양 인근의 경치를 담은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을 남겼다. 그중에 행주산성 부근 행호(幸湖)의 풍경과 위어잡이 배를 그린 ‘행호관어(杏湖觀漁)’가 있다. 이 그림에는 겸재의 오랜 벗 사천 이병연(1671∼1751)의 시가 붙어 있다. ‘늦봄의 복어 국이요/초여름의 위어 회라/복사꽃 넘실넘실 떠내려 오니/그물을 행호 밖으로 던진다.’ 지금도 5, 6월에는 김포, 강화 일대에서 위어를 만날 수 있다.
2016-05-11 고구마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구마 이야기다.
조선후기 문신 서영보(1759∼1816)는 호남위유사로 호남 남쪽 해안의 사정을 살피고, 보고서를 올린다. 정조 18년(1794년) 12월의 일이다. 내용 중에 엉뚱하게도 “왜 고구마가 널리 퍼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해답이 있다.
‘고구마 종자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백성들이 다투어 심어서 생활에 보탬이 되는 경우가 왕왕 많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지방 관리의 가렴주구가 이어졌습니다. 관아와 아전들이 심하게 세금을 빼앗아가니 고구마를 심은 자는 곤란을 당하고 아직 심지 않은 자는 두려워합니다. 부지런히 심고 가꾸는 일이 처음보다 못하다가, 이젠 희귀하게 되었습니다.’(‘조선왕조실록’)
조선후기 조정의 관리들은 고구마가 훌륭한 구황작물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호남 남해안을 둘러본 서영보 역시 ‘구황작물 고구마’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현지 관리들의 ‘세금을 빙자한’ 엉뚱한 탐욕 탓에 고구마가 널리 퍼지지 않았음을 조정에 보고한 것이다. 지방 관리들의 탐학이 없었다면 고구마는 좀 더 널리, 빨리 퍼졌을 것이다.
조선의 학자, 정치인들은 고구마의 존재에 대해 일찍부터 알았다. 문신 남용익(1628∼1692)은 효종 6년(1655년), 조선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갔다. 그는 ‘큰 도시라 하더라도 솥을 걸고 밥을 해먹는 일은 드물고 왜인들 중 서민들은 주로 군고구마(燒芋·소우)를 먹는다’고 적었다(‘문견별록’). ‘우(芋)’는 토란 감자 고구마 등 넝쿨줄기식물을 통칭한다. 예전에는 고구마가 땅속에서 자라니 마치 토란 같다고 표현한 것이다.
고구마가 한반도로 건너온 것은 훨씬 뒤다. 영조 때 문인 칠탄 이광려(1720∼1783)는 중국을 통하여 구황식물로서의 고구마 존재를 알고 몇 차례 고구마 재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노력은 조엄에 의해 빛을 본다. 조엄은 영조 40년(1764년) 6월 18일 일기에 고구마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해사일기’).
‘이 섬(쓰시마)에 먹을 수 있는 뿌리가 있는데 ‘감저(甘藷)’ 또는 ‘효자마(孝子麻)’라 부른다. (효자마는) 일본 발음으로 ‘고귀마(古貴麻)’라 한다. 생김새는 산약(山藥·마를 칭함)과 같고 무 뿌리(菁根·청근)와도 같으며 오이나 토란과도 같아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진득진득하고 반쯤 구운 밤 맛과도 같다. 날로 혹은 굽거나 삶아서 먹어도 된다. 곡식과 섞어 죽을 쑤어도 되고 썰어서 정과(正果)로 써도 된다. 떡을 만들거나 밥에 섞거나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흉년을 지낼 밑천으로 좋을 듯하였다. 남경(南京)에서 일본으로 들어와 일본의 육지와 여러 섬에 많이 있다는데, 그중에서도 대마도가 더욱 많다.’
조엄은 조선통신사 정사로 일본에 가서 두 차례 고구마 종자를 동래 일대로 보낸다. 1763년 일본에 도착한 후 바로 보낸 것은 재배에 실패했지만 이듬해 귀국 길에 보낸 종자는 재배에 성공한다.
고구마의 원래 이름은 ‘감저(甘藷)’였으나 북방에서 건너온 감자에게 그 이름을 주었다. 오늘날 우리는 ‘감저’를 ‘고구마’로 부르고 있다. “강진 고금도에서 널리 퍼졌기 때문에 ‘고금이’가 되고, ‘고구마’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다수설은 일본의 ‘효자마(孝子麻)’의 일본 발음 ‘고귀마(古貴麻 혹은 古貴爲麻)’에서 고구마가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고구마의 상품성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서도(황해도)의 담배밭, 평안도의 삼밭, 한산 모시밭, 전주 생강밭, 강진의 고구마밭은 아주 좋은 논에 비해서 그 이익이 열 곱절이 된다.’ 오주 이규경(1788∼1856)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고구마는) 필리핀(呂宋國·여송국)에서 중국으로 전했고 영조 때 조선으로 건너왔다. 영남의 동래, 부산 등 해안가와 호남의 태인, 강진의 고금도 등에서 널리 재배한다. 전주(부)의 시장에 내다 판다”고 했다. 이규경의 시대는 고구마의 전래 시점부터 1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이 사이 고구마는 시장에 내다 파는 환금작물이 된 것이다.
고구마 소주를 일본 특산물로 여기지만 그렇지는 않다. 우리도 일찍부터 고구마 소주를 만들었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고구마 소주 제조법을 상세히 설명한다. ‘고구마를 썰어서 반건조 시킨 다음 술로 만든다. 소주 제조법은 쌀로 소주 만드는 법과 동일하다’고 했다.
2016-05-25 육개장과 개장국
(1777년) 7월 28일(음력) 밤에 대궐 밖의 개 잡는 집에 이르러 강용휘가 전흥문에게 3문의 돈을 주어 개장국(狗醬)을 함께 사 먹고 대궐 안으로 숨어 들어가 별감 강계창과 나인(內人) 월혜를 불러 귀에 대고 한참 동안 속삭였다.’(‘명의록’)
‘명의록’은 정조 암살미수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영화 ‘역린’의 소재다. 이야기는 이어진다.
‘암살 시도가 실패한 후, 범인 전흥문은 흥원문(경희궁)으로 빠져나와 달아났고, 강용휘는 금천교(창덕궁) 방향으로 달아난 후, 이튿날 공범 홍상범 등과 개 잡는 집에 다시 모였다.’
앞의 ‘대궐 밖 개 잡는 집’과 이튿날 모인 ‘개 잡는 집’은 다른 곳이다. 18세기 후반 한양에는 군데군데 개 잡는 집과 밤늦게 문을 여는 개장국 파는 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고기는 일상적으로 먹는 상식(常食)이었다. ‘개고기=복날 보양식’은 엉터리다. 한식에는 보양식이 없다. 개, 장어, 민어, 삼계탕 등이 보양식이라는 기록도 없다.
중국과 한반도에서는 육축(六畜)을 먹었다. 육축은 집에서 기르는 6가지 짐승으로 소, 말, 양, 돼지, 개, 닭이다. 개의 식용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도 말이 많았다. 조선 말기 이유원의 ‘임하필기’에도 개고기 식용을 둘러싼 찬반 사례가 나타난다.
‘연경(지금의 베이징)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뿐더러 개가 죽으면 땅에 묻어준다. 심상규(1756∼1838)가 연경에 갔을 때 경일(庚日·복날)을 맞아 개고기를 삶아 올리도록 하였다. 연경 사람들이 크게 놀라면서 이상히 여기고 팔지 않았다. 심상규가 그릇을 빌려 삶았는데 그 그릇을 모조리 내다버렸다. (황해도) 장단의 이종성(1692∼1759)은 잔치에 갔다가 개장국을 보고 먹지 않고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이 아니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달랐다.’
심상규가 성절사로 연경에 간 것은 1812년, 청나라 때다. 중국도 개고기를 제사에 사용했지만 청나라 이후, 중국인들은 개고기를 피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기마민족이다. 사냥이 주업인 기마민족에게 개는 수렵의 동반자이자 목숨을 지켜주는 동료다. 농경민족의 개와는 지위가 다르다. 남쪽의 광둥 성, 광시 성 등에서는 지금도 개고기를 먹는 반면 북쪽 지역에서는 먹지 않는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개가 청 태조 누르하치의 생명을 구했다는 설화 때문이다. 누르하치가 깊은 산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때 개가 불길에서 누르하치를 구했다. 청을 건국한 만주족이 개를 먹지 않자 중원의 한족도 따른다.
조선 후기에는 개고기 식용파와 비식용파가 나뉜다. 1791년 사은사 일행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문인 김정중은 ‘연행록’에서 ‘중국인들은 비둘기, 오리, 거위 등을 먹지만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고 했고, 1712년 청나라를 다녀온 김창업은 ‘연행일기’에서 ‘평안도 가산의 가평관에서 이민족(오랑캐)에게 개고기와 소주를 대접받았다’고 했다.
육개장은 개장국(狗醬羹·구장갱)을 대신한다. 일제강점기 초기, 경부철도 건설로 대구에 사람들이 모이고 시장이 선다. 이미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이 많다. 대구 명물 육개장이 나타난다. 대구탕(大邱湯)이라 부르기도 한다. 육개장은 ‘쇠고기+개장국’이다. 개장국 스타일로 끓인 쇠고깃국으로 시장통 등에서 팔던 주막 음식이었다. 육개장 끓이는 법을 설명하는 칼럼(1939년 7월 8일자 동아일보) 제목은 ‘오늘 저녁엔 이런 반찬을’이다. 필자는 한식연구가 조자호 씨. 육개장은 길거리 식당 음식에서 가정으로 확산된다. 쇠고기 부위를 한정하지는 않고 ‘여러 종류의 국거리’라고 표현했다. 고기는 삶은 후, 반드시 손으로 찢고 양(내장)은 칼로 썬다. 대파를 많이 사용한다. 고기와 고춧가루, 고추장으로 양념한 채소를 버무려 다시 한소끔 끓여서 낸다. 한 번 삶아낸 밀국수를 넣어서 먹으면 맛이 희한하다고 기록했다.
‘동국세시기’의 기록을 들고 ‘여름철 보양식은 개고기’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여름철엔 휴식, 수면, 운동, 균형 잡힌 식사가 필요하다. 여름철 보양식은 없다.
2016-06-01 조기
1794년(정조 18년) 3월, 황해도 강령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증인은 현장에 있었던 함조이.
“임성채의 처와 제가 앉아서 물고기를 썰고 있는데 객상 오흥부가 들어와서, 임성채의 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화가 난 임성채의 처가 ‘석어(石魚)’를 던지며 ‘어찌 이 아이가 네 아이인가?’라고 다투는데 임성채가 들어와서 오흥부와 몸싸움을 했습니다.”(‘일성록’)
이 글의 석어는 ‘석수어(石首魚)’, 곧 조기다. 강령은 해주 인근 바닷가 마을이다. 지금도 인근 연평도에서 조기가 곧잘 잡힌다. 내용을 살펴보면 등장인물들이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다. 조기는 지금과 달리 흔하디흔한 생선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연평 바다에 석수어 우는 소리가 우레처럼 은은하게 한양까지 들리면, 모든 이들이 입맛을 다시며 석어를 생각한다’고 했다. 조기가 많이 잡혔고, 누구나 좋아했으며 또 널리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도 “법성진(법성포) 동대(東臺) 위에서 멀리 칠산도를 바라본다. 매번 석수어가 올라올 때가 되면 이를 잡으려는 배들이 바다 위에 늘어선다. 마치 파리 떼가 벽에 달라붙은 것과 같아서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이유원은 분명히 잡아 올리는 조기는 많은데 조정에 올라오는 보고는 늘 ‘조기가 흉작’이라고 하고, 걷히는 세금도 적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한탄한다(‘임하필기’).
조기는 고려시대에도 이미 흔한 생선이었다. 목은 이색은 고려 말의 관리 민안인(1343∼1398)이 보낸 술과 말린 조기를 선물로 받고 “잔비늘의 물고기, 석수(조기)라 하는데, 말린 고기의 맛이 저절로 깊다”고 했다(‘목은시고’). 조선 초기의 문신 김종직(1431∼1492)은 “봄꽃 비단같이 아름다울 때 돌아와, 반드시 몽산(蒙山)의 석수어를 보리라”고 했다. 조선 초기에 이미 “매년 3, 4월(음력)이면 전국에서 상선이 몰려와 몽산포 부근에서 석수어를 잡아 말리는데 서봉 밑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중국인들은 우리와 달리 조기를 널리 먹지 않았다. 고종 10년(1873년) 5월, ‘중국 배들의 서해 불법 어로작업’이 문제가 된다. 고종이 신하들에게 묻는다. “물고기는 어디서 잡히며 중국 배(唐船·당선)들은 어디서 작업을 하는가?” 신하들이 답한다. “청어는 장연, 풍천, 옹진 등 5곳에서 많이 나고 석어(조기)는 해주와 연평 바다에서 나는데 당선은 오로지 장연 등 5곳에서 물고기를 잡습니다. 석어를 잡으러 연평에 오는 일은 없습니다.”(‘승정원일기’)
조기는 많이 잡혀 흔하니 가난한 선비들도 널리 먹었다. 실학자로 호남 순천에서 여생을 보낸 위백규는 1791년(정조 15년) 늦봄, 벗 12명과 전남 장흥 사자산으로 나들이를 떠난다. 이때 마련한 음식이 ‘존재집’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술(삼해주)과 안줏거리로 석수어를 구웠으며, 쌀밥과 청태(靑苔·김)를 싸들고 나란히 함께 산에 올랐다.’
조선 초기의 문신 남효온도 ‘추강집’에서 ‘(박연폭포를 보러 갔다) 길을 잃고 배가 고파 석수어를 먹고, 적멸암에 올라 무 뿌리를 먹었다’고 했다.
조기와 민어는 사촌쯤 되는 물고기로 둘 다 민어과의 생선이다. ‘정자통’ ‘해동역사’ 등에서 밝히는 민어, 조기 이름에 대한 유래는 비슷하다. 석수어는 ‘면어(면魚)’다. ‘면(면)’과 ‘민(民)’의 중국 발음이 비슷하니 민어라고 불렀다. 큰 것과 작은 것이 있는데 큰 것은 민어라 하고 작은 것은 조기라 한다고 했다. ‘민어(民魚)’의 ‘백성 민(民)’을 두고 “온 백성이 널리 먹었던 생선이어서 민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고, 조기를 ‘助氣’라고 쓰고 “기운을 북돋워주는 생선”이라고 말하는 것도 엉터리다.
‘산림경제’에서는 ‘조기는 서해에서 나는데 입맛을 돋워주고 기운을 높인다. 말린 것은 몸속의 묵은 음식물을 내보낸다. 순채와 더불어 국을 끓이면 좋다’고 했다. 음식은 약이 아니다. 조기가 기운을 높여주듯이 다른 생선, 먹을거리도 마찬가지로 몸의 기운을 북돋운다. 잘 지은 밥이 몸의 기운을 북돋우지만 약은 아니다.
2016-06-08 달단족의 쇠고기
그들은 ‘달단족(韃靼族)’이다. 달단은 ‘타타르(TATAR)’다. 뜻도 재미있다. ‘단(靼)’은 ‘부드러운 가죽’이다. 달단은 고기, 가죽 등을 잘 만지는, 북방의 수렵, 기마 민족이다. 중국이나 한반도 모두 이들의 침략, 약탈로 속을 썩인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달단족은, 농경보다는 수렵이 친근하다. 주식도 고기다. 우리 민족과도 관련이 깊다. 한반도의 고기 문화는 달단족이 전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세조 2년(1456년) 3월,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상소한다.
“백정은 화척 혹은 재인, 달단입니다. 그들이 이 땅에 산 지 이미 500년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민족입니다.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모여 살면서 소를 도살하거나 동냥질, 도둑질을 합니다.”(조선왕조실록)
‘달단’은 터키 북쪽, 중앙아시아의 타타르족과 뿌리가 같다. 역시 유목 민족으로 고기를 잘 만진다. 서양의 ‘타타르 스테이크’는 우리의 육회와 닮은 면이 있다.
고려, 조선 조정이 달단족을 천시한 것은 그들이 농경의 도구인 소를 도축하는 일로 생계를 삼았기 때문이다. 소의 도축은 식량 생산 감소로 연결된다. 농경국가로서는 소 도축을 인정하기 어렵다. 이 민족은 평소 버들고리(柳器)를 짜거나 밀도살로 살다가 형편이 어려워지면 소를 훔치거나 동냥질, 도둑질을 일삼았다.
세조 13년(1467년) 양성지(대사헌)의 거듭되는 상소다.
“예전에는 백정(白丁)과 화척(禾尺)이 소를 잡았으나, 지금은 양민들도 도축합니다. 예전에는 잔치 준비를 위해 소를 잡았으나, 지금은 팔기 위하여 소를 잡고, 예전에는 남의 소를 훔쳐서 잡았으나, 지금은 소를 사서 잡습니다.”(조선왕조실록)
이 민족의 소 밀도살이 조선 양민들에게까지 확대된다. 잔치 등 대소사에 쓰던 쇠고기가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쇠고기 판매도 버젓이 이루어진다. 양성지는 소 밀도살이 농경국가 조선에 치명적임을 잘 알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막는다.
양성지는 “달단족은 500년 전부터 한반도에 살았다”고 했다. 993년, 거란의 1차 고려 침략 시기다. 양성지는, 이때 이 민족이 거란군의 길 안내(향도)를 맡았다고 했다. 일부는 한반도에 머물렀을 것이다. 10세기 후반 이 민족이 고려에 왔지만 고려의 고기 만지는 솜씨는 여전히 수준 이하였다.
100여 년 뒤인 1123년(고려 인종 1년)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의 고기 만지는 솜씨가 형편없다. 돼지를 불속에 던져서 그슬어 도축한다. 냄새가 심해서 먹을 수 없다”고 했다(선화봉사고려도경). 여전히 한반도의 고기 문화는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말선초, 소 밀도살 및 고기 식용은 확대되고 사회적 문제가 된다. 중심에 달단족이 있다. ‘고려도경’에서 서툴다고 했던 한반도의 고기 문화는 이 민족 덕분에 급속히 발전한 것이다. 13, 14세기에는 몽골이 한반도를 침략, 지배한다. 달단족은 몽골의 한 부족이다. 몽골의 원나라 멸망 후 더 많은 수의 달단족이 한반도에 남는다.
태종 6년(1406년) 4월의 왕조실록에는 ‘달단 화척에게 소와 말 잡는 것을 금하도록 거듭 밝혔다’는 문구가 나타난다. 달단족의 소 밀도살이 상습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 밀도살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태종 11년(1411년)에는 신백정(新白丁)을 조사 색출해 도성으로부터 3사(舍·1사는 30리) 밖으로 내쫓는다. 세종 7년(1425년)에는 도성 서쪽 무악산 아래의 신백정을 도성 밖으로 내쫓는다. 세종 29년(1447년) 3월의 기록에는 ‘농사짓는 소를 달단 화척에게 팔기만 해도 재산 몰수, 수군 편입, 소를 훔쳐서 도살하면 장 100대에 얼굴에 문신을 새기고, 재산 몰수, 수군에 편입시킨다’는 내용도 나타난다.
한반도의 오래된 고기 문화로 ‘맥적(貊炙)’을 든다. 맥적은 ‘맥족(貊族)의 구운 고기’다. 맥족은 북방의 기마, 수렵 민족이다. 맥적이 어떤 것인지 뚜렷하게 전해지는 바는 없다.
‘달단 화척’은 조선후기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백정’이 나타난다. 달단족은 서서히 우리 민족으로 편입되었다. 달단족은 한반도에 고기 문화를 전하거나 발전시킨 이들이다. ‘소 잡는 도적(宰牛賊·재우적)’은 ‘거골장(去骨匠)’으로 바뀐다. 한반도의 고기 문화는 맥적이 아니라 ‘밀도살을 일삼던 달단 화척’에서 찾아야 한다.
2016-06-15 상추
한치윤(1765∼1814)의 ‘해동역사’에 상추의 역사가 등장한다.
“고려국의 사신이 오면 수(隋)나라 사람들이 채소의 종자를 구하면서 대가를 몹시 후하게 주었다. 그래서 이름을 천금채(千金菜)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상추다. 살펴보건대, 와거(와거)는 지금 속명이 ‘부로’이다.”
‘와거’는 상추의 옛 이름이다. 민간에서는 ‘부로’ 혹은 ‘부루’라 불렀다. ‘부루’라는 이름은 지금도 사용한다.
한치윤은 청나라 문신 고사기(1645∼1703)가 쓴 ‘천록지여(天祿識餘)’를 인용하여 상추를 설명한다. 어색한 부분도 있다. 수나라와 거래를 한 나라면 고려가 아니라 고구려였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흔히 고려, 고구려, 구려 등을 혼동한다.
그 이전의 중국 측 기록에도 상추는 등장한다. 송나라 팽승(985∼1049)의 ‘묵객휘서(墨客揮犀)’에서는 “와채(와菜)는 와국(와國)에서 왔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라고 했다. ‘상추 와(와)’는 ‘고(高)’와 비슷하다. 혼동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와국’이라는 나라는 없다. 북송 때 사람인 도곡(?∼970)이 쓴 ‘청이록(淸異錄)’에는 상추를 두고, “고국(高國)으로부터 왔다”고 분명히 적었다. ‘와국’은 ‘고국’이고 바로 고구려다.
어느 설이 맞든 고구려에서 상추가 시작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고구려 시절부터 우리는 상추를 먹었다, 고구려의 상추가 좋았다, 그 씨앗을 중국인들이 높은 값을 주고 샀다는 뜻이다. 상추는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어 유럽,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반도의 채소류 중 더러 중국인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 있다. 고구려 시절에는 상추가 그러했다는 뜻이다.
폭군 연산군은 폐위 1년 전인 연산군 11년(1505년) 3월, 가당찮은 명령을 내린다. “궁궐로 올리는 채소들은 모두 뿌리째 싱싱하게 가져오라. 뿌리에 흙을 얹어 마르지 않도록 하라.” 교통이 불편한 시절에 채소를 싱싱한 채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한양 도성에 도달하면 대부분 말라 죽으니, 돈을 주고 도성에서 사는 수밖에 없다. 더하여, 경기감사에게는 특별히 “순채, 파, 마늘, 상추를 올리라”고 명한다. 신선한 채소와 생선 등은 주로 한양 근교 경기도에서 구했다. 콕 집어서 상추를 이야기했다. 연산군은 상추를 비롯한 ‘채소 마니아’였던 모양이다.
연산군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상추를 즐겨 먹었다. 대표적인 음식이 상추쌈이었다.
조선말기 양명학자 이건승(1858∼1924)은 “상추 잎은 손바닥 같고, 된 고추장은 엿과 비슷하네. 여기에 현미밥 쌈을 싸 급하게 열 몇 쌈을 삼키니, 이미 그릇이 다 비었네. 이것은 입을 속이는 법. 부른 배를 만지고 누웠으니,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고 했다. ‘입을 속인다’는 표현은 ‘나이가 들면서 고기를 먹고 싶으나 채소로 입을 속여 맛있다고 여긴다’는 뜻이다. 비슷한 시기의 김윤식(1835∼1922)도 ‘운양집’에서 “중국에서는 4월에 상추로 밥을 싸먹는 것을 타채포(打菜包)라고 한다. 우리나라 풍속에도 상추쌈을 싸먹는 일이 있다”고 했다.
‘상추를 먹으면 잠이 온다’는 사실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에서 “상추는, 먹으면 잠을 부르지만 빼놓지 않고 먹어야 할 채소”라고 했다. 거꾸로 상추 때문에 잠을 줄이는 일도 있었다. 옥담 이응희(1579∼1651)는 ‘옥담사집’에서 “상추는 들밥을 내갈 때나 손님 대접할 때 늘 준비한다. 상추 때문에 잠을 줄일 수 있는데, 이른 새벽에 파종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상추를 약용으로도 사용했다. ‘산림경제’에서는 뼈가 부러지거나 힘줄이 끊어졌을 때에는 상추 씨앗을 살짝 볶은 다음 가루를 내서 술에 타 먹으면 힘줄, 뼈 등을 쉽게 붙일 수 있고, 궤짝 안의 옷을 좀벌레가 먹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단오일의 상추 잎을 궤 속에 넣는다고 했다.
성종 때 호조참의를 지낸 신수근은 어린 시절 귀 뒤에 생긴 종기를 평생 달고 살았다. 성종이 내약방(內藥房)을 불러 신수근의 종기를 치료한다. 내용은 ‘황국사(黃菊沙), 임하부인(林下婦人), 와거경(와거莖)을 고운 가루로 만들어 꿀에 타서 종기 부분에 붙이라’는 것이다. 임하부인은 으름이고 와거경은 상추 줄기다. 황국사가 무엇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조선시대 치료법을 믿고 따르기는 힘들다. 품종도 전혀 다르다.
2016-06-29 장어
장어는 ‘만리(鰻려)’ 혹은 ‘만리어’다. 속명이 장어(長魚)다. 몸이 길다. 그래서 장어다. 다산 정약용은 ‘아언각비’에서 ‘만리는 장어다. 생긴 것은 뱀과 같다’고 했다. ‘해만리(海鰻려)’는 바다의 장어, 바닷장어 즉 뱀장어다.
‘큰놈은 길이가 1장(丈)에 이르며, 모양은 뱀을 닮았다. 덩치는 크지만 몸이 작달막한 편이고 빛깔은 거무스름하다. 대체로 물고기는 물에서 나오면 달리지 못하지만, 해만리만은 유독 뱀과 같이 잘 달린다.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제대로 다룰 수가 없다. 맛이 달콤하고 짙으며 사람에게 이롭다. 오랫동안 설사를 하는 사람은 이 물고기로 죽을 끓여 먹으면 낫는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전(1758∼1816)의 ‘자산어보’에 나오는 뱀장어, 바닷장어에 대한 설명이다.
뱀장어는 미끈미끈하다. 조선시대 선조들은 뱀장어, 장어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문을 가졌다. 장어, 뱀장어는 아무리 살펴보고 되짚어 봐도, 자꾸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알 수 없는 존재였다.
모습은 뱀같이 길었다. 뱀같이 긴 모습이니 ‘배암장어’ 곧 뱀장어다. 바다에서 발견했으니 바닷장어였다. 민물장어가 바다에서도 나타나니 혼란스러웠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민물장어인 뱀장어와 갯장어 그리고 붕장어를 분명하게 구분했다. 갯장어는 ‘견아리(犬牙려)’ 혹은 ‘개장어(介長魚)’다. 이빨이 마치 개의 이빨같이 날카롭고 무는 힘이 강하다. 여수에서 ‘하모’ ‘참장어’로 부르는 것이다. 모양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입이 툭 튀어나온 것이 돼지와 같다. 또 이는 개와 같아서 고르지 못하다. 가시가 매우 단단하여 사람을 잘 문다.’ 개 이빨을 가진 장어가 ‘개장어’가 되고 한자 표기로 ‘介長魚(개장어)’ 그리고 오늘날의 갯장어가 된 것이다.
붕장어(O長魚)는 ‘해대리(海大려)’다. ‘바다의 큰 장어’라는 뜻이다. ‘자산어보’에서는 ‘눈이 크고 배 안이 먹빛이다. 맛이 매우 좋다’고 했다. 뱀장어, 갯장어, 붕장어를 정확히 구분하면서 장어를 혼란스럽게 여겼던 것은 바로 장어 출생의 비밀 때문이었다.
뱀장어는 바다에서 태어나 민물에서 살다가 산란기에는 다시 깊은 바다로 돌아간다. 다른 회귀성 어류와는 정반대다. 뱀장어는 사람들이 관찰하기 힘든 해저 2000∼3000m 깊은 바다에서 알을 낳고 죽는다.
뱀장어는 산란장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육안으로 암수의 구별이 불가능하다. 암컷의 배 속에도 알은 없다. 뱀장어는 산란장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알을 제대로 가진다. “뱀장어는 그믐밤에 자신의 그림자를 가물치의 지느러미에 비추고 그곳에 알을 낳는다. 그믐밤에 뱀장어는 가물치와 교미하여 알을 낳고 수정한다. 뱀과 가물치가 교미하여 새끼를 낳는다”는 식의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떠돌았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알 가진 뱀장어’를 본 적이 없었다. 깊은 바다에 산란한 알들은 ‘댓잎장어’의 형태를 거쳐 ‘실치’가 된다. 장어 양식은 실치 상태의 작고 가는 뱀장어 새끼를 채집하여 양식장에서 기르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일찍부터 뱀장어를 귀히 여겼다. 조선 중기의 문신 남용익(1628∼1692)이 조선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갔다. 그는 “(일본인들은) 구이(炙)는 생선이나 새(鳥)로 하는데 뱀장어를 제일로 친다”고 했다(‘문견별록’). 우리도 뱀장어를 먹었다. 매천 황현(1855∼1910)의 ‘매천속집’에는 ‘밀양 효자 박기재’와 뱀장어에 얽힌 이야기가 실려 있다. 박기재의 할머니가 풍진을 앓았는데 의원이 뱀장어가 좋다고 했다. 한겨울에 뱀장어를 구할 도리가 없어 박기재가 얼음을 손으로 긁고 있는데 갑자기 얼음이 갈라져 뱀장어가 나타났다. 그 뱀장어를 올리니 할머니의 병이 나았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다.
장어가 긍정적인 이미지만 가진 것은 아니었다. 송암 이로(1544∼1598)는 오리 이원익에게 올리는 편지에서 ‘용이 없으면 미꾸라지와 뱀장어가 춤을 추고, 호랑이가 떠나면 여우와 살쾡이가 날뛴다’고 했다(‘송암집’). 조선시대 기록 중에는 ‘용 대신 뱀장어’로, 뱀장어를 비하한 표현이 많다.
뱀장어를 귀한 음식으로 여기는 것은 일본 풍습을 따른 것이다. 조선 8대 국왕 예종이 족질(足疾) 발병 치료차 뱀장어를 먹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 뱀장어를 보양식 혹은 궁중보양식으로 부르는 것도 물론 엉터리다.
2016-07-06 중국 배에 약탈당한 해산물
▲조선시대 중국의 약탈 대상이었던 해삼.
황당선(荒唐船)은 황당(荒唐)하다. 당황(唐慌)스럽다. ‘당(唐)’은 중국이다. 황당선은 황당한 중국 배다. 한반도 해안에 와서 해산물을 약탈한다. 잠깐 사이 내륙으로 상륙한다. 방풍나물 등을 채취하고 민가의 채소, 곡식, 가축을 약탈한다. 아녀자를 희롱, 겁간하기도 한다. 황당하다. 조선 중기 이후 기록에는 황당한 ‘황당선’이 자주 나타난다. 오늘날의 불법조업 중국 어선이다.
영조 10년(1734년) 5월, 황해 병사 민사연이 파직되었다. 병사(병마절도사)는 종2품 무관, 고위직이다. 그 전해 6월, 황당선이 황해도 옹진반도 경계에 정박했다. 병사가 군대를 보내 그들을 쫓으려 했지만 오히려 우리 측 군인들이 중국 뱃사람들에게 맞고 무기를 빼앗겼다. 병사의 지휘 책임이 있다. 민사연은 내용을 숨기고 거짓으로 보고한다. 관찰사가 이 내용을 조정에 보고, 민사연은 파직된다(‘조선왕조실록’). 중국 배의 흉포함은 역사가 깊다.
황당선이 우리 바다에 적극 진출하고 약탈한 것은 숙종 23년(1697년) 이후다. 그해 조선이 흉년을 당해 중국 측에서 곡식을 보내준 적이 있었다. 이때 중국인들이 황해도 앞바다의 해로를 익혔고, 그 이후 해삼 등을 채취하기 위하여 여름과 가을 등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해서(海西·황해도)’ 일대에 나타나 불법 조업, 약탈을 했다. 황당선이 수백 척이나 되니 조선의 지방 수령들과 군인들은 감당치 못했다. 일부는 몰래 술과 양식을 주면서 그들을 달래어 떠나게 했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영조 18년(1742년) 황해도 수군절도사 이의익의 보고다. “해삼(海蔘) 채취 황당선이 우리 바다에 자주 나타나 정박합니다. 바닷가의 백성들이 그들과 낯이 익어 불법 거래를 하는 일도 잦습니다. 해안 방위가 위태로우니 엄격하게 막아야 합니다.”
18세기 무렵에는 주 약탈 대상이 해삼이었지만 황당선은 시기별로 여러 가지 해산물을 약탈했다. 조선 후기에는 청어가 약탈 대상이었고, 조선 전기에는 소금을 빼앗아 가기도 했다.
중종 39년(1544년) 7월, 전라도 병마절도사 한기의 보고 내용이다. “군산도(群山島)를 수색하다 정체불명의 우리나라 사람 넷을 잡아서 조사했다. 이들은 ‘우리는 한산(韓山)의 염간(鹽干)이다. 여덟 사람이 소금을 싣고 황해(黃海)지방으로 가던 중, 마량(馬梁·서천 부근) 앞에서 수상한 배를 만났다. 이들에게 소금을 약탈당했다. 일행 중 네 명은 물에 뛰어들어 생사를 모르겠고 도적들이 우리 넷을 횡간도(완도 부근)에 버려두고 떠났다’고 한다.”(‘조선왕조실록’)
염간(鹽干)은 소금 굽는 이들이다. 황당선은 서해 일대에 출몰해 소금, 해산물 등을 가리지 않고 채취하거나 약탈했다. 숙종 43년(1717년)의 기록에는 ‘황당선이 오늘날같이 많이 나타난 적이 없다. 한꺼번에 32척이 나타났다’는 내용도 있다. 조선 정부는 이때도 중국 측에 외교문서를 보내는 등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조선왕조실록’)
영조 13년(1737년) 9월에는, ‘황당선이 고기를 잡는 핑계로 우리 측 내륙 가까이에 온 다음, 등산진(황해도 옹진반도)에 상륙, 부녀자를 겁간하는 일’도 발생했다. 조선 정부도 황당선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대처하기는 힘들었다. 예전에도 중국과의 ‘외교 분쟁’이 문제였다.
“4월이면 황당선(荒唐船)이 와서 해삼(海蔘)을 딴다. 대부분 각화도(요동반도 앞의 섬) 등에서 온다. 10여 척의 배들이 몰려오는데 배 1척에는 70∼80명, 큰 배에는 100여 명까지 탄다. 중국인들은 ‘어만자(魚蠻子)’라 부른다.”(‘청장관전서’)
‘만(蠻)’은 무지막지한, 벌레 같은 자들이다. ‘어만자’는 물일 하는 무지막지한 자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만자’들은 막가파다. 중국인들이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막가파’ 황당선에 대처하는 우리 측의 희생이 너무 안타깝다.
3026-07-13 부추
흔하다. 우리 땅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가난한 선비의 밥상, 술상에 흔하게 올랐다. 귀하다. 궁중의 제사상에도 오른다. 이른 봄, 가장 먼저 종묘에 천신한다. 부추 이야기다. 부추는 ‘구(구)’ ‘구(구)’ 혹은 ‘구채(구菜)’라고 불렀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다산시문집’ 5권에는 ‘누가 알겠는가, 유랑의 부엌에서/날마다 삼구반찬 마련하는 것을’이라는 시구절이 있다. 유랑은 중국 남제(南齊)의 선비 유고지(441∼491)다.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다.
삼구(3×9)는 27이다. ‘삼구반찬’은 27가지의 반찬이다. ‘누가 유랑더러 가난하다고 하는가. 밥상에 반찬(어채·魚菜)이 27가지나 되는걸’이라는 시구도 있다. 27가지 반찬은 당연히 화려하다. 가난한 선비 밥상의 반찬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유고지는 가난했다. 밥상에는 부추로 만든 반찬 세 가지가 올랐다. 날부추, 삶은 부추, 부추김치다. 세 가지 부추반찬은 삼구(三구)다. 구(구)는 구(九)와 음이 같다. ‘3×9=27’로 말장난을 한 것이다. 고려나 조선의 선비, 사대부들은 ‘유고지의 부추 반찬 3가지’를 늘 기억했고 자주 글에 인용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조선 초기 문신 서거정(1420∼1488)은 ‘그대 보지 못했는가? 주옹(周옹·?∼?)의 이른 봄 부추와 늦가을 배추를’이란 시구를 남겼다(‘속동문선’). 주옹도 중국 남제 사람이다. 그가 산중에 있을 때 문혜태자가 “산중의 채소 중에는 무엇이 가장 맛있는가?”라고 물었다. 주옹은 “이른 봄 부추와 늦가을 배추가 가장 맛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조선시대 기록 여기저기에 ‘이른 봄의 부추와 늦가을의 배추’가 자주 등장한다.
고려 말의 문신 목은 이색(1328∼1396)은 ‘시경’을 인용해 ‘이월 초하루 이른 아침엔, 양 잡고 부추나물로 제사한다’고 했고, 시집 ‘목은시고’에서 ‘부추 나물은 푸르고 또 푸르며, 떡은 색깔이 노란데/조석으로 잘게 씹어 먹으니 맛이 좋다’고 했다. 부추는 제사에 쓸 만큼 귀한 식재료이면서 한편으로는 떡을 먹을 때도 곁들여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궁중에서도 초봄의 제사에 부추를 소중하게 사용했다. 제사 절차 등을 기록한 ‘사직서의궤’에서는 제사 음식으로 청저(무김치), 근저(미나리김치)와 더불어 구저(구菹·부추김치)를 사용한다고 적었고, ‘세종오례의’에서도 ‘(제사상의) 첫째 줄에 부추김치를 놓고 무김치가 그 다음이며, 둘째 줄에 미나리김치를 놓는다’고 했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장생(1548∼1631)도 ‘사계전서’에서 ‘봄에는 부추를 천신하고 여름에는 보리, 가을에는 기장, 겨울에는 벼를 천신한다. 부추는 알(卵·란)과 더불어 천신한다’고 했다.
흔히 궁중에서는 귀한 궁중음식을 마음껏 먹었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다. 흔하지만 제철에 나는 부추도 늘 귀하게 여겼다. 부추든 다른 채소든 계절별로 가장 먼저 나오는 식재료 중 으뜸인 것을 가장 먼저 제사상에 올리거나 천신했을 뿐이다. 조선 후기 문신 심조(1694∼1756)는 문집 ‘정좌와집’에서 ‘봄에는 (제사상에) 부추를 올린다. 그 의미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부추를) 곡식 대신으로 사용한다. 옛사람들이 부추를 얼마나 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라고 적었다. 부추는 귀한 곡물만큼 귀한 존재였다.
정약용은 유배지인 전남 강진에서 아들 학연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추 베는 법’을 자상하게 이른다. ‘(부추 등 채소를) 뜯는다(Q·도)는 것은 줄기를 절단하는 것을 이른다. (부추를 낮에 베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한낮에 부추(구)를 자르면 칼날이 닿은 곳이 마른다. 부추를 기르는 데 해로우니 텃밭을 일구는 사람들이 꺼릴 따름이지 먹는 사람에게 해가 있어서가 아니다’(‘다산시문집’).
부추는 환자의 건강식, 혹은 치유식으로도 사용하였다. 인조 24년(1646년) 5월 19일의 기록에는 중환인 중전에 대한 음식, 약물 처방 내용이 실려 있다. ‘술시에 저녁 수라를 조금 올렸는데 연근채(蓮根菜)와 구채(구菜)도 약간 올렸습니다’라는 내용이다. 이틀 후인 5월 21일의 기록에도 ‘오늘 이른 아침에 구채죽(구菜粥) 한 종지를 다시 올렸습니다’라는 내용이 있다(‘승정원일기’). 부추는 궁중에서 제사에 사용하거나 죽, 채소반찬 등으로도 널리 사용했다.
도교, 불교의 ‘오신채’는 조금씩 그 내용이 다르지만 부추는 늘 포함되었다. 제사를 모시기 전에는 냄새가 심하게 나는 부추는 금기 식품이었다. 물론 제사상에는 부추가 있었을 터이다.
2016-07-20 메밀
영조 48년(1772년) 9월 7일, 충청감사 송재경이 파직된다. 죄목은 ‘목맥가분(木麥加分)’이다(‘조선왕조실록’). ‘목맥’은 메밀이다. 메밀의 원래 이름은 교맥(蕎麥). ‘교맥은 숙맥(菽麥)이라고 하고, 화교(花蕎)라고도 한다. 세속에서는 목맥(木麥)이라 한다’고 했다(‘임하필기’).
‘가분’은 관청에서, 정해진 규정 이상의 비율로 환곡을 대출하는 것을 말한다. 규정은, 지방 관아 보유 곡식의 반을 보관하고 나머지 반은 민간에 빌려주도록 했다. 문제는 환곡, 빌려준 곡식에 대한 이자다. 이자를 탐낸 지방 관리들이 반 이상의 곡식을 빌려주곤 했다. ‘가분’이 범법 행위는 아니었다. 정조 6년(1782년) 5월의 기록에는 강원감사 김희가 조정에 ‘메밀가분’을 요청하고, 조정에서 허락하는 내용도 있다(‘일성록’).
‘메밀가분’으로 처벌된 것은 메밀을 소중한 구황곡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중종 7년(1512년) 8월, 함경도구황경차관(咸鏡道救荒敬差官)의 보고다. 가뭄, 홍수 등으로 흉년의 조짐이 보이면 중앙정부에서는 지방에 관리를 파견한다. 구황경차관이다. ‘늦은 비로 콩, 팥은 더러 무성하게 익은 데가 많았고, 벼도 또한 조금씩 익어 가을에는 먹고살 수 있었습니다. 상수리(도토리)도 많습니다. 아직 서리가 내리지 아니하여 메밀도 장차 먹을 수 있으며, 유민이나 동냥 다니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조선왕조실록’)
메밀은 구황곡물의 범위를 넘어선다. 메밀은 식량이 없을 때만 먹었던 곡식이 아니다. 식량은 늘 부족했다. 메밀도 늘 미리 준비해 두었던 곡물이었다. 구황곡물을 넘어서 주요 식량이었다.
메밀은 파종 시기를 놓쳤을 때 진가를 발휘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냈던 선비 정경운(1556∼?)이 1603년 5월 25일(음력) ‘고대일록’에 남긴 내용이다. ‘순찰사가 가뭄으로 장계를 올려 강원도의 메밀 종자를 경상도로 옮겨, 백성들이 내년 봄 구황의 먹을거리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청하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음력 5월 25일이면 모내기가 끝났을 무렵이다. 이해 경상도 일대의 가뭄이 심해서 ‘뿌린 씨앗이 모두 시드는’ 지경이 되었다. 가뭄으로 들판 전체가 시들어갈 때 중앙정부에서는 급히 ‘메밀 대파(代播)’를 지시했다. 말라죽은 곡식 대신 메밀을 심도록 하는 것이다.
정조는 메밀 대파를 적극 권유한다. 정조 22년(1798년) 6월, 경기도 화성부(華城府) 일대에 비가 내렸다. 가뭄 끝의 단비니 조정에서는 어떤 작물을 심을 것인가에 대한 의논이 있었을 법하다. 정조는, “메밀은 맨 나중에 심고 맨 먼저 익는다. 열매를 맺을 때까지의 기간이 짧다”고 말한다(‘조선왕조실록’). 메밀 대파마저 간단치는 않았다. 메밀 종자가 귀했다. 중앙정부에서는 메밀 대파를 적극 권했지만 현지에서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다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에서 ‘조정에서는 메밀 종자를 나누어 주도록 명령하지만 지방 수령 등이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메밀이 귀해지니 시장에서도 살 수가 없다. 종자도 주지 않고 메밀을 파종하라는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진다’고 했다.
메밀은 오래전부터 널리 사용되었다. 고려 말의 문신 목은 이색은 “대나무 꼬챙이에 메밀떡을 꿰어/간장 발라 불에 굽는다”고 했으며 강원도 정선의 풍광을 그리며 “메밀죽은 어찌 이리 매끄러운지/송화꿀은 참으로 향기롭구나”라고 했다. 산이 깊은 강원도 일대에서는 애당초 곡식 대신 메밀을 심었다. 추사 김정희도 “메밀꽃 희끗희끗하고 은조(좁쌀)는 희다/온 산을 뒤덮은 것이 모두 만두의 재료”라고 했다(‘완당전집’). 메밀은 떡, 수제비, 국수, 죽, 만두, 차 등으로 널리 먹었다.
메밀 대파를 적극 권장했던 정조는 승하 며칠 전, 종기 치료에 메밀로 지은 밥을 이용했다. 정조는 즉위 24년(1800년) 6월 28일(음력) 승하했다. 며칠 전인 6월 20, 21일에 종기 치료를 위하여 약재와 더불어 메밀밥을 지어 들였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6월 21일의 또 다른 기록에는 ‘(종기에) 메밀밥을 붙인 것이 오늘 여섯 차례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정도로는 효과를 볼 수 없다’는 의관의 보고도 남아 있다.
2016-07-27 수박
그럴듯하지만 아리송하다. ‘수박의 한반도 전래’에 대한 이야기다. 교산 허균(1569∼1618)은 ‘성소부부고’에서 수박의 한반도 전래를 알린다. “수박은 고려 때 홍다구(洪茶丘)가 처음 개성에 심었다. 연대를 따져보면 아마 홍호(洪皓)가 강남(江南)에 돌아왔을 때보다 먼저일 것이다. 충주에서 나는 것이 상품인데 모양이 동과(冬瓜·동아)처럼 생긴 것이 좋다. 원주 것이 그 다음이다.”
홍호(1088∼1155)는 중국 남송시대의 관리다. 홍다구(1244∼1291)는 원나라가 고려를 지배할 때 앞잡이 노릇을 했던 이다. “홍다구가 개성에 수박 씨앗을 심은 것이 홍호가 강남에 돌아왔을 때보다 앞선다”는 허균의 말은 틀렸다. 홍호는 홍다구보다 1세기 이상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홍호가 수박을 봤을 리도 없다. 수박은 열대성 과일이다. 홍호는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고 15년 후 남송으로 돌아왔다. 금나라는 북쪽에 있던 유목민족의 국가다. ‘홍호의 수박 전래설’도 믿기 어렵다. 수박은 12세기경 서역에서 비단길을 통해 중국에 전해졌다고 추정된다. 고려에 전해진 것은 13세기, 홍다구에 의해서일 가능성은 있다.
수박은 ‘서과(西瓜)’라고 불렀다. 서쪽에서 온 오이 혹은 참외라는 뜻이다. 서쪽은, 중국을 중심으로 셈한 것이다. 오늘날 우루무치 일대와 그 서쪽, 서역을 가리킨다. 옥담 이응희(1579∼1651)는 수박을 두고 ‘서역에서 온 특이한 품종/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던가/녹색 껍질은 하늘빛에 가깝고/둥근 몸은 부처의 머리와 같다’(‘옥담사집’)고 했다.
‘과(瓜)’는 오이류를 총칭하는 단어다. 위의 ‘동과’는 동아다. 지금은 많이 사용하지 않는 채소다. 박처럼 생겼으며 길쭉하다. 참외는 ‘진과(眞瓜)’ 혹은 맛이 달다고 ‘첨과(甛瓜)’로 불렀다. 한치윤(1765∼1814)의 ‘해동역사’는 ‘고려도경’을 인용해 “고려에는 능금, 복숭아, 배, 대추 등과 더불어 ‘과’가 있다”고 했다. ‘고려도경’의 ‘과’가 서과 즉, 수박일 가능성도 희박하다. ‘고려도경’을 지은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에 온 것은 1123년이다. 홍다구의 시대는 그 이후다.
수박의 전래에 대해서는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이유원(1814∼1888)의 말이 믿을 만하다. “수박은 원나라 초기 이미 중국 절강성 등에 있었다. 송나라 말기의 기록에도 서과가 나타난다. 송나라 사람 호교(胡嶠)가 ‘함로기(陷虜記)’에서 ‘우루무치(회흘)에서 서과 종자를 구했다’고 했으니 송나라 때 서과는 천하에 널리 퍼졌다. 우리나라는 경기의 석산(石山)과 호남의 무등산, 평안도의 능라도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씨가 검은색이다”(‘임하필기’). 여기서 한반도 전래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없지만 ‘우루무치-중국 전래설’은 믿을 만하다.
수박은 고려 말기에 한반도에도 널리 전파되었다. 목은 이색(1328∼1396)은 ‘수박을 먹다’라는 시에서 ‘마지막 여름이 곧 다해 가니/이제 수박(西瓜)을 먹을 때가 되었다/…/하얀 속살은 마치 얼음 같고/푸른 껍질은 빛나는 옥 같다’(‘목은시고’)고 했다.
조선 초기인 세종 때는 연이어 ‘수박 도둑 사건’이 일어난다. 세종 5년(1423년) 10월, 궁궐의 주방을 담당하던 내시 한문직이 수박을 훔쳤다. 그는 곤장 100대를 맞고 영해로 귀양을 떠났다. 세종 12년(1430년) 5월에는 궁궐 내섬시 소속 종(奴) 소근동이 주방에 들어가 수박을 훔쳤다. 목숨을 잃을 죄다. 다만 상한 수박을 훔쳤으니 곤장 80대만 맞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조선왕조실록’).
조선 후기 북학파의 선구자 홍대용(1731∼1783)은 수박을 이용한 수학 문제를 내놓는다. ‘자른 자리가 원이 되도록 수박을 잘랐더니 그 원의 지름이 5촌이고, 수박의 중심까지의 거리인 심후(心厚)는 5푼이다. 이 수박의 지름을 구하라.’ 정답은 ‘1척 3촌’이라고 나와 있다(‘담헌서’).
수박은 귀하게 사용되었다. 여름철 종묘에 천신하는 물품으로 앵두, 보리, 수박, 참외 등이 등장한다. 성균관 유생들에게도 여름철에는 각별히 수박을 지급했다. 조선 후기 문신 윤기(1741∼1826)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초복에는 개고기 한 접시, 중복에는 참외 두 개, 말복에는 수박 한 개를 준다’고 했다(‘무명자집’).
당뇨로 고생하는 이들도 수박을 귀하게 여기며 먹었다. 조선 초기 문신 서거정(1420∼1488)은 ‘10년 묵은 소갈병이 수박을 먹으면서 시원하게 낫는 듯하다. 약재보다 수박이 오히려 낫다’고 했다(‘사가시집’).
2016-08-03 오이
성종 10년(1479년) 12월, 창덕궁 선정전의 어전회의다. 도승지 김승경(1430∼1493)이 말한다. “만약 명나라 사신이 오게 된다면 반드시 3, 4월 무렵일 것입니다. 그들은 여름을 지나고 돌아갈 것입니다.” 성종이 대답한다. “어찌 그 정도이겠는가? 지난번에도 오이(瓜) 심었다가 익기를 기다려 돌아간 일이 있었다.”(조선왕조실록)
명나라 사신들의 폐해는 심각했다. 뇌물로 대량의 은(銀)을 요구하고 뇌물을 받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았다. 원하는 만큼 뇌물을 받지 않으면 ‘오이를 심어서 그 오이가 익을 때까지 돌아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오이는 ‘과(瓜)’다. 벼슬아치의 임기를 ‘과=오이’로 표기했다. 공직자의 임기는 ‘과기(瓜期)’ ‘과한(瓜限)’ ‘과만(瓜滿)’이다. ‘오이=벼슬아치의 임기’는 중국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춘추시대 제나라 양공이 오이가 익을 무렵 변방(葵丘·규구)으로 병사를 보내면서 “이듬해 오이가 익을 때 후임자를 보내 교체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사달이 났다. 이때부터 ‘오이=관리들의 임기’가 시작되었다.
오이는 한반도, 중국의 여러 문헌에 나타난다. 시경에는 “밭두둑에 오이가 열렸다. 오이지 담기 좋다”는 내용이 있다. 한나라 때 기록에도 “고아가 수레에 오이를 싣고 가는데 수레가 엎어졌다. 도와주는 자는 적고 오이를 먹는 자는 많다”고 한탄하는 내용이 있다. 조선 말기 영의정을 지냈던 이유원은 ‘신라시대의 오이’를 말한다. 최응(898∼932)의 ‘정원의 오이(園瓜生)’ 이야기다. 최응이 태어날 때 누런 오이 넝쿨에 참외가 열리는 이변이 있었다. 그는 왕건의 신임을 얻어 고려 초기의 높은 관리가 되었다(임하필기). 송나라 사신 서긍도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청자를 묘사하며 “술그릇의 형상이 마치 오이 같다”고 했다.
오이는 여러 식재료의 바탕이다. 참외는 ‘진과(眞瓜)’ 혹은 ‘감과(甘瓜)’다. 참 오이, 맛이 단 오이라는 뜻이다. 수박은 ‘서쪽(서역)에서 온 오이(西瓜)’고 박은 ‘포과(匏瓜)’다. 성호 이익(1681∼1763)이 말하는 호과(胡瓜)는 혼란스럽다. “빛은 푸르고 생긴 모양은 둥글며 익으면 누렇게 된다. 큰 것은 길이가 한 자쯤 되고 맛은 약간 달콤하다. 우리나라에는 옛날엔 없었는데 지금은 있다”고 했다.
칡넝쿨과 더불어 ‘오이 넝쿨’이라는 표현도 자주 사용되었다. ‘과갈(瓜葛)’은 칡과 오이다. 가지와 잎이 마치 넝쿨같이 서로 엉클어진 친인척 관계를 뜻한다. ‘과질(瓜V)’은 오이 넝쿨이 끝없이 뻗어나가, 자손이 널리 번성함을 뜻한다.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 등이 왕건을 찾아 ‘개국 혁명’을 이야기하는 자리. 왕건은 부인 유 씨에게 내용을 숨기려, “동산에 애오이가 열렸을 테니 따오라”고 시킨다. 유 씨는 문을 나가는 척, 되돌아와 머뭇거리는 왕건의 등을 떠민다(고려사절요). 조조의 아들 조식은 “군자는 모든 일을 미연에 방지하여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지 않으니, 오이 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않고 오얏나무 아래에서 머리의 관을 만지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군자행).
오이는 청렴한 삶의 상징이기도 했다. 진나라 소평은 ‘동릉후’의 벼슬을 지냈다. 진나라가 망하자 소평은 장안성 동쪽에 오이를 심고 청렴하게 살았다. 그가 심은 오이가 아름다워서 당시 사람들이 동릉후의 오이, 즉 ‘동릉과’라고 불렀다(사기 소상국세가). 조선시대 문헌에는 동릉과가 자주 등장한다. ‘정과정곡(鄭瓜亭曲)’도 ‘동릉과’에 비길 만하다. 고려 인종 때 내시낭중 정서(생몰년 미상)는 모함을 받아 동래로 귀양을 떠난다. 그는 오이를 기르는 정자(瓜亭·과정)를 짓고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이때 남긴 노래가 바로 슬픈 곡조의 ‘정과정곡’이다. 과정은 정서의 호이기도 하다.
계곡 장유(1587∼1638)는 ‘박 삶고 오이 썰어 새우도 듬뿍 올려놓고/낡은 뚝배기엔 기장 빚은 막걸리 찰랑찰랑’이라고 노래했다(계곡선생집). 다산 정약용도 ‘배춧잎 피니 파초 잎같이 크고/오이를 쪼개니 닷 섬들이 박만 하다’고 했다(다산시문집).
엄황과(淹黃瓜)는 오이김치다. 오이를 뜨거운 물에 데친 후 말린다. 소금, 단맛, 천초, 회향, 식초 등을 푼 물에 담근다. 오늘날의 오이지나 피클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16-08-10 천렵
다산 정약용의 ‘유천진암기(游天眞菴記)’ 일부다. 천진암에서 즐겁게 놀았던 이야기다. 다산은 조선조 최고의 경세가 중 하나이자, 근엄하기 이를 데 없는 실학자다. 그가 남긴 ‘땡땡이 기록’이다. 배경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의 개울가다.
‘정사년(1797년, 정조 21년) 여름, 나는 명례방에 살고 있었다. 석류가 막 꽃을 피우고, 보슬비는 갓 개었다. 초천(苕川)에서 물고기를 잡기에 가장 알맞은 때라고 생각했다. 대부(大夫)는, 휴가를 청하여 윤허를 얻지 않고는 도성 문을 나서지 못한다. 그러나 아뢴다고 휴가를 얻을 리 없다. 그대로 출발하여 초천에 닿았다. 다음 날 강에 그물(截江網·절강망)을 쳐서 고기를 잡았다. 크고 작은 고기가 모두 50여 마리나 되었다. 조그만 거룻배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물 위에 뜬 부분이 겨우 몇 치 남짓했다. 배를 옮겨 남자주에 정박시키고 즐겁게 한바탕 배불리 먹었다….’
당시 다산의 벼슬은 정3품 동부승지(同副承旨), 대부(大夫)다.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장쯤 된다. 명례방(明禮坊)은 명동 무렵이다. 초천(苕川)은 지금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언저리다. 남한강, 북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곳이다. 다산이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귀양살이를 끝내고 돌아와서 살았던 고향 ‘마현’이 있다. 이곳이 ‘소내(苕川)마을’이다.
이날의 ‘땡땡이’ 주제는 천렵이다. ‘배가 기울도록 물고기를 잡아서 즐겁게 먹었다.’ 이 ‘즐거움’은 참 쓸쓸하다. 불과 3년 후인 정조 24년(1800년) 6월 28일 정조 승하, 다산은 18년간의 유배생활을 시작한다. 몇몇 형제가 마지막으로 모였던 즐겁지만, 참 쓸쓸했던 천렵. 천렵은 여름철 최고의 ‘놀이’였다.
조선 태종 7년(1407년) 2월 ‘조선왕조실록’에는 ‘완산부윤(完山府尹)에게 전지(傳旨)하여 회안대군(懷安大君)이 성 밑 근처에서 천렵하는 것을 허락하고, 또 관가의 작은 말(馬)을 내주어 타게 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회안대군 이방간(1364∼1421)은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로 태종 이방원(정안대군)의 바로 위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두 사람은 힘을 합쳐 권력을 손에 넣었다. 회안대군은 정안대군을 상대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무참하게 패배한 회안대군은 귀양살이를 떠난다. 궁중이 시끄럽다. 죽여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험한 곳으로 유배 보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태종의 손에는 이미 많은 피가 묻었다. 회안대군은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바로 위의 형이다. 여기저기 유배지를 옮기다가 완산으로 보냈다. 오늘날의 전주다. 집권 7년 차의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군주. 형이 유배지에서 천렵하는 것을 허락한다.
민간에서도 천렵을 즐겼다. 정경운은 조선 중기 선비이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경상 지역 왜병 격퇴에 공을 세웠다. 그는 임진왜란 때 진주 지역의 상황을 ‘고대일록’이라는 일기로 남겼다. 이 기록 군데군데 천렵이 등장한다. ‘최 별감과 함께 혈계(血溪·지금의 남계천)에서 천렵을 하였다(1594년 7월 29일)’, ‘작은 배를 띄우고 작대기로 크게 소리를 내니 눌어(訥魚·누치)가 여울을 거슬러 올라왔다. 시내 한가운데에 그물을 쳐서 89마리를 잡았다. 평생에 좋은 일이 이보다 더하겠는가(1595년 4월 8일).’ 점잖은 선비이자 의병장이 천렵으로 누치 잡은 일을 ‘평생에 더없이 좋을 일’로 손꼽았다. ‘혈계 여울에서 고기를 잡았는데 하루 종일 몇 마리밖에 잡지 못했다. 저녁에는 여울을 가로질러 그물을 놓았지만 고기를 겨우 십여 마리 정도 잡았다. 한탄스러웠다(8월 12일)’는 심정도 남겼다.
다산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조선 후기 문신 윤기(1741∼1826)는 ‘천렵을 구경하며’라는 시를 남겼다. ‘어량에 통발 치고 돌을 물에 던지고/아이들이 앞다투어 물고기를 몰아간다/잠깐 사이 통발 가득 물고기가 팔딱이니/이번이 제일 많다 웃으며 말들 하네’(‘무명자집’).
천렵을 경계하는 이도 있었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인 한강 정구(1543∼1620)는 후배 최은에게 천렵은 ‘헛된 작업’이라는 편지를 보낸다. ‘한 번 가면 다시 얻기 어려운 세월을, 집 짓고 천렵하는 헛된 작업으로 오랫동안 보내게 되니 어찌 진정으로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한강집’)
2016-08-17 비빔밥
비빔밥? 혼란스럽다. 비빔밥의 다른 이름은 ‘혼돈반(混沌飯)’이다. ‘혼돈스러운 밥’이다.
‘한 대접에다가 생선과 채소를 섞어 세상에서 말하는 이른바 ‘혼돈반’과 같이 만들어 내놓으니, 전임이 두어 숟갈에 그 밥을 다 먹어 치웠다.’
조선 중기 문신 박동량(1569∼1635)이 쓴 ‘기재잡기’의 내용이다. 엄청난 양의 ‘밥=혼돈반’을 먹어 치운 주인공은 조선 전기의 무관 전임(?∼1509)이다. 그가 먹은 것은 밥에 생선과 채소를 넣은 것이다. ‘혼돈반=비빔밥’이다. ‘혼돈’은 뒤섞여 어지러운 상태다. 혼란, ‘골동(骨董)’과도 비슷하다. ‘혼돈반’이란 표현은 ‘기재잡기’의 시대인 17세기 초반에 사용했다. 비빔밥은 그 이전인 전임의 시대, 15세기에도 있었다.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은 ‘성호전집’에서 “골동은 내가 싫어하지 않지만, 배를 불리기는 국밥이 최고”라고 했다. 이 시의 제목이 ‘국밥’인 걸 보면 내용 중 ‘골동’은 골동반(骨董飯), 즉 비빔밥이다. 비빔밥을 ‘혼돈반’이 아니라 ‘골동(반)’이라고 표현했다. 1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비빔밥은 ‘혼돈반’에서 ‘골동반’으로 바뀐다.
비빔밥을 두고 혼란스럽다고 하는 것은 ‘골동’ 혹은 ‘골동반’이라는 표현 때문이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기록에 나타나는 비빔밥의 공식적인 이름은 ‘골동반’이다. 19세기 말 기록물로 추정하는 ‘시의전서’에서 ‘골동반=부Z밥’이라고 표기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기록에 골동반만 나타난다.
“골동반은 중국 음식이고 우리 비빔밥과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중국식 골동반은 그릇에 미리 쌀 등 곡물과 채소, 어육 등을 넣고 밥을 짓는다. 비빔밥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밥을 지은 다음 밥 위에 조리한 채소, 고기, 해물 등을 얹고 비벼 먹는다. 비빔밥은 먹기 전, 각종 고명을 마음대로 빼거나 더할 수 있다. 중국식 골동반은 일본식 솥밥인 ‘가마메시(釜飯· 부반)’ 혹은 우리의 무밥, 콩나물밥과 닮았다. 다만 일본식 솥밥을 우리 콩나물밥처럼 비벼 먹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골동’ ‘골동반’이란 표현은 중국에서 건너왔다. 명나라 초기인 1414년에 완성된 ‘성리대전’에 이미 ‘골동반’이 나타난다. ‘골동(汨董)은 골동(骨董)과 같은 말로, 잡되다는 뜻이다. (중국) 강남 사람들이 물고기, 채소 등을 함께 넣고 끓인다. 즉, 골동갱(骨董羹)이다.’
중국 명청시대 속어사전인 ‘이언해’에서는 ‘물고기, 고기 등을 밥에 넣고 만든 것이 곧 골동반’이라고 했다. 뒤섞어 혼란스럽다는 뜻인 ‘골동’은 그 뿌리가 깊다. 중국 송나라의 소동파도 이미 ‘골동’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실학자 이규경(1788∼?)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어떤 사람은 (골동이란 단어가) 소동파의 골동갱에 근원하고 있는 것이라 하지만, 소동파의 골동이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소동파는 문집 ‘구지필기’에서 ‘라부돈의 노인이 음식을 여러 가지 모아서 함께 끓였다. 곧 골동갱이다’라고 했다. ‘골동’의 시작이다.
조선 초기에도 민간의 자연발생적인 비빔밥은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 안에서, 제사 후에, 혹은 일터인 들판에서 밥과 나물을 비벼 먹었을 터이다. 조선 후기부터 중국에서 받아들인 ‘골동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이다. 비빔밥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비빔밥, 혼돈반, 골동반 등 다른 이름으로 불렀을 뿐이다.
조선 후기에도 ‘골동’이란 표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정조 7년(1783년) 7월, 공조판서 정민시의 상소문에 ‘(나라가) 어둡고 어지러워져 허위가 판을 치는 골동(骨董)과 같은 세상’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조선왕조실록). 골동은 여전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조선 후기부터는 ‘시의전서’의 표현대로 ‘골동반=부Z밥=비빔밥’이 된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오늘날 우리도 쉽게 만나기 힘든 여러 가지 비빔밥(골동반)이 나타난다. ‘비빔밥, 채소비빔밥, 평양 것을 으뜸으로 친다. 다른 비빔밥으로는 갈치, 준치, 숭어 등에 겨자 장을 넣은 비빔밥, 구운 새끼 전어를 넣은 비빔밥, 큰 새우 말린 것, 작은 새우, 쌀새우를 넣은 비빔밥, 황주(황해도)의 작은 새우젓갈 비빔밥, 새우 알 비빔밥, 게장 비빔밥, 달래 비빔밥, 생호과 비빔밥, 기름 발라 구운 김 가루 비빔밥, 미초장 비빔밥, 볶은 콩 비빔밥 등이 있다. 사람들 모두 좋아하고 진미로 여긴다.’
2016-08-24 홍어와 가오리
“곽박이 강부(江賦)에서, ‘분어(분魚)는 꼬리는 돼지꼬리처럼 생겼으며 몸통은 부채와 같이 둥글다’고 했으니 이는 우리나라 홍어다. 두 마리가 쌍을 지어 다니며, 두 눈은 위쪽에 있고 입은 아래에 있다. ‘생김새가 둥근 소반과 같고 입은 배 밑에 있으며 꼬리 끝에는 독이 있다’고 했으니 바로 우리나라의 가올어(嘉兀魚)다.”(성호사설)
곽박(郭璞·276∼324)은 중국 동진 사람이다. 박학다식하여 많은 자료를 남겼다. 그가 남긴 자료 중에 ‘홍어’는 ‘분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1400년 후 조선의 선비 성호 이익(1682∼1763)은 ‘분어=홍어=속칭 가올어=가오리’라고 설명한다.
성호 이익도 홍어와 가올어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뒤에 바로 ‘가올어’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가올어는 생김새가 홍어와 비슷하나 맛은 훨씬 못하다. 꼬리 끝에 침이 있어 사람을 잘 쏘는데 독이 아주 심하다. 꼬리를 잘라서 나무뿌리에 꽂아 두면 나무가 저절로 말라 죽는다. 본초(本草)에는 꼬리로 독을 뿌리는 것은 홍어라고 하였으나, 가올어다. 세속에서 부르는 이름이 다를 뿐이다”
‘본초’는 명나라 이시진(1518∼1593)의 ‘본초강목’이다. 이익은 이시진보다 약 170년 후의 사람이다. 이익의 “홍어는 가오리와 다르다. 이름을 다르게 부르지만 ‘본초강목’의 홍어는 가오리다”라는 기술이 정확하다. 다산 정약용은 ‘아언각비’에서 “분어는 곧 홍어다. 이시진이 (홍어의 모습이) 마치 연잎같이 생겼다고 했다”고 밝혔다.
홍어와 가오리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청장관전서’에서 중국 양나라의 고전 ‘문선’을 들어 홍어를 설명한다. “장거홍어(章巨]魚)란 것은 생김새가 둥그런 부채 같으면서 비늘이 없고 빛깔이 검붉으며 입은 배 아래에 있고 꼬리는 몸보다 길다. 홍(])은 혹 공(공)자로도 쓰이며, ‘문선(文選)’에서 이야기하는 분어(분魚)다. 상고하건대 … 홍어는 곧 가오리(加五里)다.”
홍어는 ‘洪魚’로 표기하지만 예전에는 ‘]魚(홍어)’ ‘공魚(공어)’로도 표기했다. 홍어는 둥글고 큰 물고기다. 인평대군 이요(1622∼1658)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코끼리를 보고 “다리는 큰 기둥만 하고 귀는 홍어(洪魚)와 같다”고 표현했다.
조선 후기까지도 홍어와 가오리를 혼동하는 일이 잦았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정조 5년(1780년) 사절단 일행으로 중국을 다녀온 후 ‘열하일기’를 남겼다. 그는 중국 어린아이들이 조선사절단을 보고 ‘가오리(高麗)’라고 부르자 농으로 “우리를 보고 ‘가오리(哥吾里)’라고 부르니 우리가 곧 홍어”라는 글을 남겼다.
조선후기 문인 김려(1766∼1822)는 “귀홍(鬼공·귀공)은 일명 가짜 홍어(공魚)다. 모습이 홍어와 아주 닮았다. 색깔은 누렇고 큰 놈은 수레에 가득 실을 만큼 크다. 비린내가 심하고 독이 있어서 먹지는 못한다”고 했다. 독을 강조하니, 가오리로 추론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홍어를 즐겨 먹었다. 경기도 안산에서 전원생활을 했던 옥담 이응희(1579∼1651)는 ‘옥담사집’에서 “몸이 넙적하니 움직이기 어렵고/몸체가 무거우니 잘 다니지 못하네/부드러운 뼈는 씹기 좋고/넉넉한 살은 국끓이기 좋아라”라고 노래했다.
전라도 화순, 경상도 김해 등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이학규(1770∼1835)는 “홍어를 잘라놓으니 그 모습이 마치 꽃뱀을 잘라놓은 듯하다”고 했다(낙하생집). 홍어의 붉은빛이 꽃뱀처럼 아름답다는 뜻이다.
전라도 고부에서 태어나 잠깐의 벼슬살이 후 낙향해 여생을 향리에서 보냈던 권극중(1585∼1659)도 홍어에 대한 시를 남겼다. “남국의 아름다운 모습/광주리에 담긴 최고의 맛/홍어는 바다의 신선한 맛이고/시골의 술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네/대나무 숲에서 따뜻한 겨울을 보내니/어제 내린 눈이 갠 후 매화가 아름답다”(청하집).
철종 3년(1852년) 9월 중국 상선이 표류해 조선의 관리들이 배를 수색하던 중 홍어를 발견한다. 중국 상인들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홍어, 대구 등을 싣고 여기저기서 판매한 후 금주로 향하던 중 표류하게 되었다”고 기술한다(각사등록). 중국인들도 홍어를 먹었다.
2016-08-31 신선로
깊은 밤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창에는 하얀 달빛이 가득하다. 밤을 지새워도 이 즐거움은 이어지리라. 신선로(神仙爐)가 있으니.’
조선 전기 문신 나식(1498∼1546)의 문집 ‘장음정유고’의 시 ‘여우음화(與友飮話)’다. ‘벗과 더불어 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라는 뜻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신선로’는 음식이나 안주가 아니다. 지금 신선로는 고기, 생선, 각종 채소 등을 넣고 끓인 ‘음식’ 혹은 술안주이지만 출발은 다르다. 신선로는 찻물을 끓이거나 술을 덥히는 그릇에서 시작되었다. 신선로는 간편하고 휴대하기 좋은 ‘주방기구’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여행길에도 신선로를 가지고 가고, 가난한 방에도 신선로를 두었다. 나식이 직접 썼는지 혹은 추후 누가 적어 넣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시의 끝에는 ‘(신선로는) 술을 덥히는 새로운 모양의 기구로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적혀 있다. 술꾼들이라면 부러워할 만하다. 나식의 벼슬은 종9품, 참봉이었다. 말단 벼슬이다. 가난한 벼슬아치도 중국에서 들여온 술 덥히는 도구, 신선로를 가지고 있었다. 신선로는 우리 고유, 전통의 음식은 아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그릇 이름이다.
조선 전기의 청백리 눌재 박상(1474∼1530)도 칠언율시 ‘제육봉편’에서 ‘신선로의 술이 맑은 가을의 서늘함을 잊게 한다’고 했다. 향촌에서도 신선로를 술 덥히는 도구로 사용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감곡 이여빈(1556∼1631)은 짧은 벼슬살이를 거치고 영주로 낙향해 후학을 기르는 선비로 여생을 보냈다. ‘짚방석 위에 대충 자리하니, 먼저 아전이 가지고 온 술을 꺼낸다. 신선로로 술을 데우고 말린 산닭을 갈라서 먹고 마신다’(취사문집)고 했다. 이여빈은 무척 가난했다. 기록에는 ‘나물과 밥으로 끼니를 잇기도 힘들었고, 보다 못한 주변 사람들이 향교의 관리자로 천거했다’고 적혀 있을 정도였다. 시를 지은 시기는 광해군 10년(1618년) 2월 상순이다. 장소는 안동. 17세기, 신선로는 시골 선비가 술을 덥히는 데 사용한 소박한 도구였다.
신선로는 차를 끓이기에도 좋은 도구였다.
최역(1522∼1550)은 가난한 선비였다. 벼슬살이도 하지 않았다. ‘국조인물고’에 실린 묘갈명에는 ‘최역이 거처하는 방 좌우에 항상 책을 진열해놓고 신선로에다 차를 끓였다’고 기록했다. 오늘날과 달리 차를 끓이는 일은 번거로웠다. 불을 피우거나 보관하는 일은 번거롭고 불편했다. 신선로는 차를 끓이거나 술을 덥히기 편한 도구였을 것이다.
일본도 마찬가지. 조선 후기 문신 신유한(1681∼1752)은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간다. ‘해유록’에는 숙종 45년(1719년) 9월 무렵, 일본 교토 길거리 풍경이 잘 드러나 있다. ‘가게에서 차를 파는 여인들은 옥 같은 얼굴에 까마귀 같은 귀밑을 하였고 신선로를 안고 앉아 차를 달여 놓고 기다리는 모습이 완연히 그림 속의 사람 같았다. ‘신선로 선물’도 있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신선로 선물’을 받았다. ‘이충무공전서’에는 ‘(명나라) 주 천총수가 술잔 6개, 붉은 종이, 작은 그릇 등과 더불어 찻잎 한 봉지, 신선로 1개 등을 선물로 주었다’고 적혀 있다. 광해군 9년(1617년) 석문 이경직(1577∼1640)은 조선사신단(회답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간다. 전쟁이 끝난 지 채 20년이 되지 않았다. 조선사신단의 감정이 좋을 리 없다. 돌아오는 길, 일본에서 사신단과 동행했던 쓰시마 섬 관리 다치바나 도모마사(橘智正)가 사신에게 선물을 건넨다. ‘조총 각 2자루, 신선로 각 2벌, 손거울 각 2개를 세 사신에게 보내왔는데, 모두 굳이 사양해서 물리쳤다’(부상록). 사신단이 선물을 물리치자 다치바나는 “대단치 않은 물건으로 작은 정성을 표시했는데, 물리치니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18세기부터 신선로는 모습을 달리한다. 19세기 초반 김해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낙하생 이학규(1770∼1835)는 고깃국과 더불어 신선로를 언급한다. 19세기 중반의 ‘동국세시기’에도 고기국물, ‘열구자탕 신선로’가 나타난다. 신선로는 차 끓이고 술 덥히는 소박한 도구에서 고기, 생선, 채소 등을 넣고 끓인 화려한 음식으로 바뀐다.
2016-09-07 울금과 강황
▲대표적인 약용식물의 하나로 꼽혀 온 울금.
기구하다. 울금 이야기다. 울금, 강황을 혼동한다. 오래 묵은 혼동이다. 조선시대에도 울금과 강황을 혼동했다. 지금도 여전하다. 이토록 오래 묵은 혼동은 드물다.
‘귀한 울금’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선조 36년(1603년) 1월 3일(음력), 당상관과 종6품 낭청이 동시에 파직된다. 죄목은 간단하다. 제사 지내는 일을 불경스럽게 처리했다는 것이다. 사헌부의 보고다.
‘평상시의 제사용품을 대용하는 것도 미안한데, 더구나 신명을 처음 모시는 울창주(鬱창酒)이겠습니까? 지난해 울금(鬱金)이 부족하여 보고하였더니, 해당 부서에서 심황(深黃)으로 대용하라고 했습니다. 제사에 대해 불경한 죄가 큽니다. 해당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파직하도록 하소서.’(조선왕조실록)
선조는 보고 내용대로 파직을 결정한다. 울창주는 각별한 술이다. 검은 기장으로 술을 빚고 울금을 달여 넣어 색깔을 낸다. 울창주는 붉은 호박(琥珀)과 같이 아름다운 색깔이다. 울창주는 궁중의 제사에 사용했다. ‘심황’은 울금과는 다르다. 심황은 강황으로 추정된다.
실학자 홍만선(1643∼1715)은 ‘산림경제’에서 ‘(울금은) 매우 향기롭지는 않으나 기운이 가벼워 술기운을 높은 데까지 이르게 하므로 신을 내려오게(降神) 할 수 있다. 물에 씻은 후 불에 쬐어 말려서 사용한다’고 설명한다. ‘산림경제’의 원본에는 한자로 ‘鬱金’이라고 쓰고 곁에 한글로 ‘심황’이라고 작게 적었다. ‘울금=심황’이다. 불과 50여 년 전에는 울금 대신 심황을 사용하다가 고위 공직자가 파면되었는데 ‘산림경제’에서는 버젓이 ‘울금=심황’이라고 표기했다. 혼란스럽다.
문신 이수광(1563∼1628)은 더 엉뚱한 기록을 남겼다. ‘본초도경에 따르면 강황은 3년을 넘긴, 오래 묵은 생강이다. 속언에 생강이 3년을 넘기면 꽃을 피운다고 했다’고 적었다(지봉유설). 생강과 강황은 전혀 다르다. 이수광이 근거로 삼은 ‘본초도경’은 중국 송나라 때인 1061년에 간행된 의서다. 이수광의 시대보다 500년 앞선다. 울금, 강황, 심황, 생강에 대한 혼동은 오래 묵었다.
조선시대 내내 ‘울금’은 귀하게 사용했다. 울금은 ‘음(陰)’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여겼고 음의 성질을 지닌 귀신을 부르는 데 적합하다고 믿었다. ‘상변통고’에서는 “제사를 모시기 전에 울창주를 땅에 붓는 것은 울창주에 담긴 울금의 냄새를 이용하여 신, 귀신을 부르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울창주는 주로 왕실의 귀한 제사에 사용했으나 울금을 넣어 색깔을 낸 울금주는 왕실이나 민간 모두 귀하지만 널리 사용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사를 모신 과정을 기록한 ‘경모궁의궤’에도 “(제사상에) 울금주 1병, 청주 4병 반을 올렸다”고 했다.
척화파 대신 청음 김상헌(1570∼1652)은 전쟁 후 청나라로 압송되어 심양의 감옥에 유배된다. 고국에서 온 사신이 그에게 술을 선물하자 김상헌은 시를 남겼다. ‘이태백이 시에서 울금주를 노래했느니, 난릉의 좋은 맛 몇 번이나 마음 기울였던가.’(청음선생집)
난릉은 지금의 중국 장쑤(江蘇) 성 창저우(常州)로 울금주의 명산지다. 이태백(701∼762)의 울금주는 시 ‘객중행(客中行)’에 나온다. ‘난릉 지방 좋은 술엔 울금이 향기롭고, 옥잔에 가득 담아내니 호박색이 빛나느니.’
울창주, 울금주가 귀하니, 울금도 귀하게 여겼다.
조선 초기 문신 서거정(1420∼1488)도 울금을 노래한다. ‘늦은 봄 황폐한 정원 울금을 심었나니/죽죽 자라 오월에 산발처럼 더부룩해지기를/가을 오면 장차 천 길이나 높이 자라/비바람 소리 속 봉황의 노래를 들으리…뒤뜰에 일찍이 울금향을 심었더니/잎은 파초만큼 크고 열매는 생강만 하네.’(사가시집)
울금, 강황, 심황은 염료로도 귀하게 사용했다. ‘울금포(鬱金袍)’는 울금을 이용하여 황색으로 물들인 옷이다. 황색은 중국 황제의 색깔이다. 울금포는 제왕의 도포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1417년) 5월의 기록이다. ‘예조에서 왜의 사신이 바치는 심황을 받아들이지 말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황색의 사용을 금한 때문이었다.’ 태종은 민간에서 황제의 색깔인 황색을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여러 차례 금지해도 끝내 지켜지지 않자 황색 염료 재료인 심황을 왜에서 가져오는 것부터 막은 것이다.
울금은 덩이뿌리이고 강황은 뿌리줄기다. 모두 카레의 재료로 쓴다. 사람들이 혼동하지만 둘은 서로 다르다.
2016-09-19 열구자탕
우리 음식 열구자탕(悅口子湯)과 일본 음식 ‘스기야키’. 비슷하지만 다르다.
조선후기 문신 서유문(1762∼1822)은 정조 22년(1798년) 겨울 동지사 서장관으로 연경(지금의 베이징)에 간다. 가는 날이 장날. 이듬해 음력 1월 초, 건륭제가 죽었다. 느닷없이 조문사절단이 되었다. ‘무오연행록’ 1월 6일의 기록이다. “이날 오시(午時) 곡반(哭班)에서 물러나온 후 사슴 고기 세 근을 ‘황제가 내리는 것’이라 하고 주었다.”
상중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소선(素膳)이다. 그런데 고기라니. 하인이 전하는 바깥 분위기는 더 기가 막힌다. “열구자탕을 놓고 화로에 둘러앉아 어지러이 먹고 있으며 술장수와 열구자탕 장수가 무수히 많습니다.” 상중에 고기 먹는 일을 꺼리지 않는 중국인들의 풍습이 놀라웠다.
1월 21일의 기록. “중국인들 밥 먹는 것을 보니, 밥은 작은 보시기에 고르게 담았고 무슨 고기 한 접시, 나물 한 접시요, 열구자탕을 받친 그릇이 없이 땅에 놓고”라고 했다. 우리의 열구자탕과 비슷한 것을 쉽게 열구자탕이라고 표기했다.
그보다 약 50년 전인 1748년 2월 조선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갔던 조명채(1700∼1764)는 한 달 뒤 이키시마(壹岐島·나가사키 현)에서 ‘스기야키’를 대접받는다. “영접관이 와서 역관에게 말하기를, ‘도주(島主)가 사신단에게 승기악(勝妓樂)을 보낼 터이니, 점심은 잠시 천천히 드십시오’ 하더라 한다. 승기악이라는 것은 저들의 가장 맛 좋은 음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윽고 사자가 왜인을 데려와 손수 만들어 바친다고 하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이른바 열구자잡탕(悅口資雜湯)과 같은 것이며, 그 빛이 희고 탁하며 장맛이 몹시 달지만 그리 별미인지도 모르겠다.”(봉사일본시견문록)
비슷한 시기에 조선통신사 정사 조엄(1719∼1777)도 이키시마에서 ‘스기야키’를 먹는다. 1763년 11월 29일의 기록. “도주가 승기악을 바쳤다. 승기악이란 이른바 ‘삼자(杉煮)’인데 생선과 나물을 뒤섞어 끓인 것으로, 저들의 일미라 하여 승기악이라고 이름한 것이나, 그 맛이 어찌 감히 우리나라의 열구자탕을 당하겠는가?”(해사록)
문신 남유용(1698∼1773)의 기록에 따르면 ‘열구자’도 신선로와 마찬가지로 그릇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열구자는 작은 냄비의 이름이다. 고기, 어육 등을 넣고 푹 익힌다. 맛이 뛰어나고 맑으며 부드럽다. 예전부터 ‘열구(悅口)’라 했다”라고 했다(뇌연집). ‘열구’는 ‘입을 즐겁게 한다’는 뜻이다.
이명환(1718∼1764) 역시 “납과 구리를 녹여 그릇을 만든다. 중간에 불을 굴처럼 길게 둔다. 여러 가지 어육, 채소 등을 그 사이(테두리)에 둔다. 푹 끓인 다음 모여서 즐겁게 먹는다. 열구자라 한다”(해악집)고 했다.
18세기 이후, 경남 남부 지역에는 일본 왜관을 중심으로 일본식 ‘스기야키’가 널리 퍼졌다. 19세기 초반 김해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낙하생 이학규(1770∼1835)는 “승가기(勝歌妓)는 맛있는 고기 국물의 이름이다. 만드는 법은 대마도에서 왔다”(낙하생집)고 했다.
‘승가기(勝歌妓)’ ‘승기악(勝妓樂)’ 등은 일본 ‘스기야키’를 표현하기 위한 차음이다. 열구자, 열구자탕은 ‘고기+생선+채소’이나 일본 ‘스기야키’는 ‘생선+채소’다. 이학규는 ‘승가기’를 맛있는 ‘고기’ 국물이라고 했다. 열구자탕, ‘스기야키’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신선로는 열구자탕과 ‘스기야키’ 등이 섞여 발전한 것이다. 열구자탕은 고종 39년(1902년)의 기록에도 나타난다(조선왕조실록, 진연의궤). 열구자탕 대신 신선로를 ‘우리 고유의 전통적인 음식’이라 하기는 힘들다.
2016-09-28 막걸리
‘세상 사람들은 (무릉)도원이 좋다지만/세상사 잊을 만한 도원은 만나지 못했네/산촌 막걸리(山(료,요))에 취해 세상사 잊을 수만 있다면/사람 사는 곳 어딘들 도원이 아니랴.’
조선 중기 문신 조임도(1585∼1664)의 시다(간송집). ‘요((료,요))’는 막걸리다. ‘산료(山(료,요))’는 산촌, 산골의 막걸리다. 거칠고 험한 막걸리다. 거친 술에라도 취할 수 있다면 사람 사는 곳이 모두 무릉도원이라는 뜻이다.
막걸리는 이름이 많다. 탁한 술이라서 탁주(濁酒)다. 순조 즉위년(1800년) 9월, 경상감사 김이영과 안핵사 이서구가 인동부(경북 구미)에서 일어난 ‘장시경의 역모사건’을 보고한다. 내용 중에 ‘장시경이 (사람들을 모은 후) 막걸리(탁주)를 내어주면서 나누어 마시게 했다’는 구절이 있다(조선왕조실록). 막걸리를 탁주라고 표현한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 최립(1539∼1612)도 ‘예쁜 꽃이 집 모퉁이에 활짝 핀 때에/담 너머로 건네받는 탁주’라고 노래했다(간이집).
청주는 맑고 탁주는 흐리다. 탁주는 흰 색깔을 띤다. 막걸리의 또 다른 이름이 백주(白酒)였던 까닭이다. 중국인들은 증류주를 백주라고 부르지만,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1168∼1241)의 ‘백주시(白酒詩)’를 보면 우리의 백주는 막걸리다. ‘예전 젊었을 때 백주 마시기를 좋아했다. 맑은 술을 만나기 힘들었으니 흐린(濁) 술을 마셨다. 높은 벼슬에 오른 후, 늘 맑은 술을 마시게 되었으니 다시 흐린 술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버릇이 되었기 때문인가?’ 이규보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 녹봉이 줄어들고 쉬이 맑은 술을 구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백주를 마시게 되었다”고 자탄한다. 이 시에는 중국의 두보가 ‘막걸리에는 묘미가 있다’고 했다는 내용이 덧붙어 있다. 두보는 막걸리를 ‘탁한 막걸리(濁(료,요)·탁료)’라고 표현했다.
막걸리의 등급(?)은 어떻게 정했을까? 뚜렷한 기준은 없었으나 좋은 막걸리와 거친 막걸리는 분명히 나뉜다. 좋은 막걸리는 정성껏 빚은 후, 잘 걸러서 물을 타지 않은 것이다. 물 타지 않은 원액을 순료(醇(료,요))라 불렀다. ‘순(醇)’은 물을 타지 않은 무회주(無灰酒)다. 순료는, 진하고 짙은 술, 즉 농주(濃酒)였다.
성종 2년(1471년) 6월, 대사헌 한치형이 상소문을 올린다. 내용은 환관들을 조심하라는 것. 환관들은 영리하고 말솜씨가 유창하다. 입속의 혀 같다. 군주 가까이서 비위를 맞추며 아첨한다. 한치형은 “(환관에게 빠져들면) 순료를 마시면서 미처 취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상소한다. 환관의 감언이설을 경계하지 않으면 마치 진국 막걸리(순료)를 마신 것같이 취해서 여러 가지 일을 망친다는 뜻이다.
세종 15년(1433년) 10월, 조정에서 술의 폐해를 경계하는 내용을 반포한다. 내용 중에 중국 후위(後魏)의 모주꾼 하후사의 이야기가 있다. ‘하후사는 술을 좋아했다. 상을 당해서도 슬퍼하기는커녕 순료를 입에서 떼지 않았다. 아우와 누이는 굶주림과 추위를 피하지 못했고 결국 하후사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고 죽었다.’(조선왕조실록)
고려시대 대학자 가정 이곡(1298∼1351)은 후한 말 오나라 주유의 인품을 두고, “마치 순료를 마신 듯,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오나라 장군 정보는 “주유와 사귀면 마치 순료를 마신 듯, 마침내 스스로 취한 줄을 모른다”고 했다(삼국지 오서 주유전). 이곡의 아들 목은 이색(1328∼1396)도 “맛있는 음식과 순료는 입에 매끄럽고 향기로우니/마치 보약처럼 술술 장에 들어간다”(목은시고)고 했다. 선조 때의 문장가 차천로(1556∼1615)는 약포 정탁(1526∼1605)에게 순료를 접대하고 시를 남겼다. ‘하룻밤 잘 묵힌 순료를 앙금도 거르지 않으니/석청처럼 달고 우유처럼 깔끔하다.’(오산집)
좋은 술, 순료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하다. 조선 후기 문신 서하 이민서(1633∼1688)는 “산으로 놀러 다니는 일과 술 마시는 일은 같은데, 여럿이는 시끄럽고 번잡스러우며 혼자는 무료하다”고 했다. 금강산에 갔을 때 미처 동행이 없어 쓸쓸했는데 다행히 산속에서 사람을 만났으니 ‘마치 순료를 만난 것같이 기쁘다’고 했다(임하필기). 오주 이규경은 중국 기록을 인용해 나이든 이의 겨울철 섭생법으로 ‘새벽에 일어나 순료를 마시고 양지쪽에 앉아 머리를 빗는다’고 했다(오주연문장전산고). 좋은 술은 때로는 약이 된다.
2016-10-05 문어
문제는 ‘문어 두 마리’였다. 세종 14년(1432년) 6월, 강원도 고성 수령 최치의 미곡 횡령 사건으로 조정이 시끄럽다. 횡령과 뇌물 상납은 세트 메뉴다. 최치도 권문세가에 뇌물을 주었다. 여러 차례 조사를 거쳐 진상이 드러났다. 죄인들에 대한 처분만 남았다. 최치는 절차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 이 와중에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튄다. 최치의 자백 중에 “문어 두 마리를 대사헌 신개에게 주었다”는 내용이 나온 것이다. 신개는 “받지 않았다”고 주장.
문어 두 마리가 대단한 뇌물은 아니다. 더 많이 받은 사람도 있었다. 문제는 받은 사람의 직책이다. 신개(1374∼1446)는 대사헌(종2품)이다. 지금의 감사원장쯤 된다. 하필이면 그 사이에 사면령도 있었다. 문어 두 마리보다 더한 죄도 사면 받았다. ‘신개의 문어 두 마리’ 쯤이야 슬쩍 지나가도 될 일이다.
하지만 간단치 않았다. 세종은 “최치에게 뇌물 받은 자의 죄는 다 용서하겠다”고 하면서도 “신개의 일은 의심할 만하다. 보통 관원이라면 문제 삼을 것이 없겠지만 신개는 풍헌관(風憲官·대사헌)이다. 세상 여론이 어떻겠는가? 대사헌 직을 그만두게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조정의 의견은 나뉜다. 일부는 “명확한 증거는 없으나 신개가 남을 규찰하는 업무를 보고 있으니 업무를 바꾸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반대파도 있다. 이미 대사헌, 홍문관 대제학을 거친 맹사성(1360∼1438) 등이다. “증거도 확실치 않고, 본인이 극구 부인하고 있다. 요즘 고관 집 하인들이 주인 몰래 뇌물을 받는 경우가 잦다. 만약 사실이 아닌데 벼슬을 바꾼다면 지나치게 무거운 처분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때도 ‘배달사고’는 있었다. 세종은 맹사성 등의 의견을 따라 신개를 처벌하지 않는다(조선왕조실록). 신개는 이조판서를 거쳐 1445년 좌의정이 되었다. 신개가 죽었을 때 세종은 3일간 조회를 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를 아꼈다. 문어 두 마리로 낙마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문어가 대단한 식재료는 아니다. 우리나라 전 해안에서 잡았다. 동해안 북부에서 나오는 것을 상품으로 쳤다. 세조 4년(1458년) 10월, 명나라에 보낸 신정 하례 예물은 ‘문어 400마리, 대구 600마리, 사슴 육포 560장 등’이다(조선왕조실록). 문어나 대구 모두 한반도에서 흔한 물건들이었다. 크기 때문에 가격은 제법 비쌌다. 정조 20년(1796년) 정리소가 보고한 내용을 보면 마리당 큰 문어가 1냥 6전, 광어가 6전, 말린 대구가 3전 5푼이다. 광어의 3배, 대구의 5배쯤 비싸다.
우리는 일찍부터 문어를 먹었다. 고려시대 목은 이색(1328∼1396)은 경주의 반란을 수습한 장수가 현지에서 문어를 보내오자 “전쟁이 끝나고 생선을 보내오니, 이름도 ‘문(文)’”이라고 화답한다(목은시고). 문어(文魚)의 ‘문(文)’과 ‘무(武)’를 대비시킨 것이다.
문어는 ‘팔초어(八稍魚)’라고 불렀다. 다리가 8개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다리 8개에는 다리와 팔이 섞여 있다고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다리’라고 이른다. 문어는 크니 대팔초어, 낙지는 작으니 소팔초어다.
우리와 달리 중국인들은 문어, 낙지, 꼴뚜기 등을 혼란스럽게 생각했다. 혼란의 이유는 중국 남과 북의 식재료가 딴판이기 때문이다. 북쪽 사람들은 다양한 생선을 먹지 않는다. 허균은 “문어는 동해에서 난다. 중국인들이 좋아한다”고 했다(성소부부고).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 임진왜란 당시 구원병을 이끌고 왔던 중국의 이여송(1549∼1598) 등이 문엇국(文魚羹)을 보더니 얼굴에 난처한 빛을 띠고 먹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여송은 요동성 철령위 출신이다. 자라면서 문어를 보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허균이 말한 ‘중국인’은 남쪽 지방 출신이다. 이여송과는 식성이 전혀 달랐을 것이다. 이익은 중국 문헌을 인용해 “문어는 절강성의 망조어”라고 했다. 이 글도 부분적으로 틀렸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팔초어는 속명 문어이며, 소팔초어는 낙지(絡只), 망조어(望潮魚)는 골독이(骨篤伊)’라고 못 박았다.
2016-10-12 궁중요리에 대한 오해
▲궁중음식 중 하나인 ‘열구자탕’
무너진 왕조의 서글픈 인사 발표다. 순종 3년(1910년) 8월 19일(양력). ‘공식적인 망국’이 딱 열흘 남았다. ‘전선사 장선(典膳司 掌膳) 안순환(安淳煥) 등을 정3품으로 승서(승진)하였다’(조선왕조실록). 정3품은 당상관으로 고위직이다.
안순환(1871∼1942)에 대한 기록들은 오류투성이다. 오류를 문제 삼는 이유는 간단하다. 안순환을 ‘조선음식 전문가’라고 표기하고 그를 통하여 조선음식, 한식이 계승되었다는 말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순환은 음식전문가가 아니었다. “고종의 대령숙수 출신으로 궁내부가 해체되면서 실직한 후 조선 최초의 요릿집 ‘명월관’을 세우고 조선 궁중요리를 계승, 전파했다”는 말도 있다. 완벽한 엉터리다. ‘안순환의 궁중요리’는 한식의 잘못 채운 첫 단추다. 한식은 이때부터 어그러진다. 화려하고 천박한 술집의 안주상을 한식의 밥상으로 여기는 일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궁중에서는 호화로운 것을 먹었으리라는 지레짐작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안순환이 ‘명월루’(훗날 명월관)를 세운 것은 1903년. 전선사의 장선이 된 것은 1909년 1월(양력)이다. 전선사는 궁중음식, 연회 등을 맡아 보던 기구로 예전의 사옹원이다. 장선은 6품, 실무책임자다. 안순환은 오랫동안 술집을 운영하다가 궁중음식 관리자가 된 것이다.
그가 궁중에 처음 들어간 것은 고종 37년(1900년) 윤 8월 27일(음력)이다. ‘승정원일기’에는 ‘9품 안순환을 전환국 기수(技手)에 임용한다’는 내용이 있다. 안순환에 대한 첫 공식기록이다. 전환국은 화폐를 주조 및 관리하는 부서다. 서른 살에 조폐 관련 부서에 말단직으로 입사했다면 안순환이 요리사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로부터 안순환의 사망까지 음식 만지는 일을 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대령숙수도 요리사도 아니었다. 망국의 최후 2년여 동안 궁중 음식 관련 실무책임자이자 술집을 운영하는 장사꾼이었다. 그는 난세의 ‘투잡’족이었다.
안순환은 고종 38년(1901년) 10월(음력) 전환국 기수에서 물러난다. 1903년의 ‘명월루’ 설립으로 바빴을 것이다. 그는 일제와 친일파의 ‘낙하산’이다. 마음대로 오가고 승진한다. 그가 다시 등장하는 것도 엉뚱하다. 4년 후인 고종 42년(1905년) 12월(음력) 기록. ‘9품 안순환을 6품으로 올려주라(陞六·승륙)’는 것이다. 특진이다.
안순환은 ‘궁중’이라는 이름을 팔아먹었을 뿐이다. 명월관을 설립하면서 조선 궁중요리를 판다고 선전했다. 일제강점기 ‘식도원’ 등을 운영하면서 늘 조선 궁중요리와 기생을 들먹였다. 일본인들과 친일파, 졸부, 한량들은 “왕의 기생을 끼고 조선 궁중요리를 먹는다”며 조선과 조선왕조를 능멸했다. 조선에는 궁중에만 있는, 궁중 고유의 음식은 없었다. 궁중잡채는 코미디다. 당면은 한일병합 후 한반도에 등장한다. 신선로도 마찬가지. 우리의 열구자탕과 중국의 탕제자, 일본의 승기악탕(스키야키)이 뒤범벅된 것을 궁중신선로라고 강변하면 곤란하다. 열구자탕은 19세기 동래, 김해 일대 아전들도 먹었다(낙하생집). ‘궁중요리’는 장사치의 호객용 광고 문안일 뿐이다.
‘이왕 전하(순종)가 서거하시면서 유일관 국일관 등 시내 조선요릿집들이 모두 문을 닫고 애도를 표시하는데 유독 식도원만은 영업을 계속하고 있어 시민들이 분개한다. 주인 안순환은 고종 승하 시에도 장사를 계속했다‘(동아일보 1926년 4월 27일).
안순환은 순종 3년 1월(음력) ‘일본 황태자 전하에게 문안하러 가는’ 내부대신 송병준의 수행원이 된다(승정원일기). 송병준은 이완용급 친일매국노다. 안순환은 국치일 10일 전에 정3품으로 승진했다. 안순환이 조선 궁중과 한식을 계승했을까.
‘요리’는 일상의 음식이 아니다. 술집 안주다. 화려한 술안주를 ‘조선음식, 한식’이라고 우기면 곤란하다. “한식은 가짓수만 많고, 먹을 것 없는, 낭비하는 밥상”이란 오명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안순환은 조선 궁중의 잔치음식이란 미명 아래 기생들의 춤과 노래가 범벅된 비싼 술안주를 팔았다. 진귀한 식재료와 화려한 음식. “국왕은 일상적으로 9첩을 먹고, 잔치가 있으면 12첩을 먹었다”는 근거 없는 말도 이때 시작되었다. 조선의 군왕들이 화려하고 진귀한 것을 먹었을 것이라는 오해 역시 여기서 비롯되었다. 화려한 궁중요리는 허상이다. 안순환의 ‘명월관’에서 내놓았던 진귀한 술안주 수준을 탐했던 왕은 폭군 연산 정도였을 것이다.
2016-10-19 꿀
꿀은 달콤하다. 달콤한 꿀을 얻으려다 몸을 다치는 일도 잦았다. 세종 5년(1423년) 2월 사헌부의 건의. “사천병마사 김득상이 민간에서 부당하게 꿀(淸蜜·청밀)을 거둬들였다. 불법으로 백성의 재물을 탐했으니 죄를 주어야 한다”(조선왕조실록). 김득상으로서는 다행스럽게 사면령 혜택을 봤다. 벌은 주지 않고 물건만 돌려받는 선에서 끝난다.
세종 11년(1429년) 1월, 형조의 보고. 내이포(乃而浦·경남 창원시 진해구)의 천호 조안중이 크고 작은 죄를 저질렀다. 보고 중에 “선군(船軍) 2인의 역을 면제하여 주고 그 대신 청밀 4그릇을 거둬들였다”는 내용이 있다. 꿀 4그릇을 뇌물로 받고 배를 젓는 등 힘든 일에서 빼주었다는 것이다. 탐관오리 조안중은 곤장 80대를 맞았다.
꿀은 구하기 힘든 식재료였다. 한반도 여기저기에서 꿀 채취가 가능하니 꿀이 귀하지는 않았다. 다만 꿀을 모으는 데 공력이 많이 드니 귀했다. 꿀의 용도도 그리 넓지 않아 과자를 만드는 데 가장 요긴하게 사용했다. 제사, 잔치가 있으면 반드시 과자(菓子)를 만든다. 왕실이나 민간의 제사, 잔치, 외국 사신의 접대 등에 꿀을 사용하는 일이 잦았다. 그 외에는 약 혹은 귀한 밥상의 감미료로 사용할 정도였다.
선조 35년(1602년) 2월, 사헌부의 보고는 참혹하다. 아직 임진왜란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고 국가 재정도 엉망이다.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 우두머리들의 조반상에 조과를 놓는데 이 조과를 만들 때 반드시 꿀을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긴요치 않은데 꿀(청밀) 6석을 마련하니 낭비입니다”라는 내용이다. ‘조과(造果)’는 ‘인위적으로 만든, 과일 맛 나는 과자’다. 선조나 조선의 처지에서는 임진왜란 때 병력을 파견한 명나라의 사신은 잘 대접해야 할 대상이다. 국가 재정이 엉망이니 ‘꿀 6석’도 문제가 된다.
꿀은 귀하지만 민간에서도 사용했고 거래의 대상이기도 했다. 중종 24년(1529년) 5월, 홍문관 유여림의 보고에 꿀을 둘러싼 살인사건이 등장한다. 사건에 등장하는 떠돌이 꿀 장수는 계동이다. 계동을 꾀어 자기 집에 재운 사람은 어리금. 계동은 이미 꿀을 팔아 무명을 샀고 말도 가지고 있었다. 어리금은 계동의 무명과 말이 탐났다. 어리금은 계동을 자기 집에 재우면서 그를 죽이려 하지만 실패한다. 홍문관의 보고는, “사건 내용이 명확하지 않지만 민간에 떠돌고 있는 내용이라서 보고 드린다”고 했다. 꿀 장수에 대한 별도의 설명은 없다. 꿀 장수는 이미 흔하게 있었다.
중종 25년(1530년) 이행(1478∼1534), 윤은보(1468∼1544) 등이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편에 꿀을 파는 가게가 등장한다. ‘청밀전(淸蜜廛) 도가는 하피마병문(下避馬屛門) 동쪽 가에 있다’는 내용이다. ‘하피마’는 ‘아래 피맛골’로 오늘날 서울 종로구 장사동 일대다. 이곳에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꿀 전문 가게’가 있었다. 주 고객은 궁중과 세금을 대납하는 공납업자들이었을 것이다.
국가에서 꿀을 세금으로 받는 일에 담당 관리들의 부정행위가 개입하기도 한다. 중종 24년 5월, 대사간 어득강의 건의에는 부패 관리들의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궁중(봉상시)에서 꿀을 공물로 받는데 같은 품질의 꿀을 두고 때로는 그대로 받거나 때로는 퇴짜를 놓는다. 퇴짜 맞은 물건도 다음 날 감찰, 봉상시의 관원들에게 청탁하면 그대로 통과되기도 한다. 힘이 없는 사람들의 꿀은 퇴짜를 놓으니 폐단이 크다’는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7년(1639년) 9월 12일에는 생뚱맞은 내용이 등장한다. ‘심양(瀋陽)의 팔왕(八王)이 은밀히 은자(銀子) 500냥을 보내와 면포, 표피 등과 청밀, 백자(柏子) 등의 물품을 무역할 것을 요구하니 조정이 허락하였다’는 것이다. 면포, 표피 등은 옷감이고, 백자는 잣이다. 심양 팔왕은 청나라 누르하치의 열두째 아들로 소현세자 일행이 포로로 있었던 심양을 관리했다. 수렵, 기마민족인 청나라로서는 궁중의 사치물자마저도 귀하니 조선 측에 은밀하게 교역을 요구한 것이다.
2016-10-26 쌀
정조 20년(1796년) 3월, 우의정 윤시동의 ‘신임 제주목사 유사모의 근황’ 보고다. 상황이 복잡하게 얽혔다. 제주도는 척박하여 쌀 등 곡물이 잘 자라지 않는다. 늘 호남 일대에서 곡물을 실어 보냈다. 조정에서는 신임 제주목사에게 곡물을 전하도록 명했다. 유사모는 한양에서 베, 후추, 단목 등 6000냥쯤 되는 물건을 지니고 호남 해안으로 갔다. 그는 현지에서 돈 6000냥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으나 막상 곡물을 사기가 힘들었다. 현지에서는 그 돈이 백미 1000섬에 불과했다. 조정의 명은 ‘절미 2000섬의 곡물’을 지니고 제주에 부임하라는 것이었다. ‘절미(折米)’는 싸라기를 뜻하지만, ‘쌀로 환산할 때의 양’이라는 의미도 있다. 민간 사상(私商)에는 백미만 있을 뿐 다양한 곡물이 없었다. 백미는 비싸고 보관, 운반도 불편했다. 벼나 다른 곡물을 가져가서 제주 현지에서 도정하는 것이 낫다. 조정에서는, 호남 일대에 보관한 국가 소유 곡물 중 벼(租·조), 밀(牟·모) 등을 가져가는 걸로 결정한다.(일성록)
조선시대에는 오곡에 메밀(蕎麥·교맥), 밀 등을 더하여 식량으로 사용했다. 오곡은 쌀, 기장, 조, 보리, 콩이다. 이 가운데 기장은 황미(黃米)로, 조는 소미(小米)로 불렀다. 이에 비해 쌀은 대미(大米)로 부르기도 했다. 모두 주요한 식량으로 여겼다.
쌀은 다른 곡물에 비해 귀하고 비쌌다. 선조 10년(1577년) 1월, 충청도 천안에서 시작된 돌림병이 한양까지 전해진다. “보리밥을 먹어야 병을 면할 수 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기록에는 ‘온 도성이 소란스럽게 보리쌀을 구입하였으므로 보리쌀 값이 뛰어올라 겉보리 값이 백미 값과 같았다’(조선왕조실록)고 전한다. 원래 보리쌀은 쌀값의 반 이하였다.
우리는 쌀로 밥, 떡, 죽, 술을 만들어 먹었다. 고려시대에는 쌀로 죽을 끓여 도성의 회랑에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누구나 퍼 먹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전해진다.(고려도경) 목은 이색은 “흰쌀로 쪄낸 떡이 크고 두툼하여라/정결하고 맑으니 가히 신명에게 올릴 만하다”고 노래했다. 인조 2년(1624년) 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조선통신사 통신부사로 일본을 다녀온 강홍중(1577∼1642)은 ‘동사록’에서 “일본에는 백미로 누룩을 만들고 백미로 밥을 쪄서 담근 제백(諸白)이라는 명주가 있다”고 했다. 밀, 보리 등 잡곡으로 누룩을 만들고 지에밥을 지어 술을 빚는 조선과 달리 일본인들은 쌀로 밑술을 만든 다음 지에밥을 더하여 술을 빚었음을 알 수 있다.
쌀을 헤아리는 단위는 지금과 비슷했다. 10홉(合)은 한 되(升·승), 10되는 한 말(斗·두)이다. 다만 한 섬(石·석)은 15말이다. 정조 19년(1795년) 7월의 기록에, ‘북한산성 언저리 가난한 집 112호에 1호당 2말씩 도합 14섬 14말을 지급하였다’(일성록)는 내용이 있다. 224말이 14섬 14말이니 결국 한 섬은 15말이다. 중국 송나라의 제도를 따라 원래 10말이 한 섬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15말로 바뀌었다.
갱미(粳米)는 밥을 짓는 멥쌀이다. 한편으로 갱미는 잘 쓿은쌀을 이르기도 한다. 세조 4년(1458년) 6월, 세조가 말한다. “나는 스스로 검약하고자 한다. 음식을 특별히 가리지 않는다. 밥에 쓸 쌀이 특별히 정갈하거나 흰 색깔일 필요가 없다. 이제부터 제사 이외에는 세갱미(細粳米)를 쓸 필요가 없다. 중미(中米)가 좋겠다.” 도승지가 답한다. “중미는 지극히 거치니 밥상에 올리기 힘듭니다.” 세조가 최종적으로 답한다. “갱미를 올리라.” 갱미는 중미보다 좀 더 쓿은쌀이다. 세갱미는 세심하게 쓿은쌀이다. 중미는 현미보다 조금 더 부드럽다. 예나 지금이나 현미는 먹기 껄끄럽다.
태종 12년(1412년) 8월의 기록에는 ‘녹봉을 갱미에서 조미로 바꾼다. 임금이 (쌀을) 정밀하게 깎는 폐단을 염려하여 조미로 넉넉하게 주게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조미(造米·조米)는 벼의 외피만 벗겨낸 것을 말한다. 색깔이 희지 않으니 검다고 표현했다. 현미(玄米) 즉, 매조미쌀이다. 숙종 1년(1675년) 윤 5월의 기록에는 ‘송시열(1607∼1689)이 만년에는 청주 화양동에 살았는데 여반((랄,려,여)飯)과 해진 옷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는 내용이 있다.(조선왕조실록) ‘여반’은 매조미쌀, 현미로 지은 거친 밥이다. 세조 4년 윤 2월, 경상도 관찰사의 보고 내용 중에 ‘백미 5되는 면포 2필, 조미 5되는 면포 1필에 준한다’(조선왕조실록)는 문장이 있다. 도정하는 공임도 있겠지만 현미를 백미를 만들 때 양이 줄어들기 때문일 것이다.
2016-11-02 생강
문제의 발단은 자그마한 ‘생강 선물’이었다. 태종 14년(1414년) 4월, 사헌부가 청원군 심종을 탄핵한다. 심종(?∼1418)은 태조 이성계의 차녀 경선공주의 남편이다. 태조의 부마이자 현직 국왕 태종의 매제다. 기록에는 “심종이 지난해 가을, 임금의 행렬을 따라 남쪽으로 갔을 때 방간이 몰래 보낸 생강을 받았고, 그 내용을 임금에게 아뢰지 않았다”고 했다.
심종은 ‘제1차 왕자의 난’(1398년 8월) 때 방간, 방원의 편에 섰다. 이때 정도전, 남은 등이 제거된다. 정종이 즉위했다. 정종 2년(1400년) 1월,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방간과 방원의 싸움이다. 시쳇말로 ‘게임이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방간은 성질 급한 무인일 뿐 정략가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 같이 자란 동생이 실권자가 되니 어깃장을 놓아본 것일 뿐이다. 싸움은 간단히 끝난다.
회안대군 방간은 여기저기 유배지를 옮기다가 결국 완산(전주)에 머무른다. 심종은 방간과 가까웠지만 ‘2차 왕자의 난’ 때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줄을 잘 선 것이다. 심종은, 태종 이방원에게 미움을 받지 않고 벼슬을 유지한다. 사건은 심종이 태종을 따라서 호남 지방으로 갔을 때 일어난다.
태종은 1413년 9월 충청도, 전라도 일대를 돌아본다. 이때 완산에 유배 중이던 회안대군 방간이 심종에게 생강을 선물한다. 태종 이방원 밑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지만 심종은 방간과 친분이 깊었다. 심종은 방간이 보낸 생강 선물을 덥석 받았다. 이게 화근이었다. 문제는 몰래 받았다는 것이다. 더하여 내용을 임금에게 솔직히 털어놓지 않았다.
생강 선물 후 3년이 지났다. 태종 16년(1416년) 11월에는 ‘청원군 심종을 교하(경기도 파주)에 안치(安置)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조선왕조실록). 설명이 뒤따른다. ‘임금이 생강 선물을 알고 물었으나, 심종이 숨기고 고하지 않았다. 임금이 곧 죄를 가하지 않았는데, 심종이 일찍이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말하거나 웃기를 태연자약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동안 심종에 대한 탄핵이 빗발친다. 탄핵 이유는 간단하다. 권력자 태종에 대한 아부다. 오죽하면 태종이 직접 나서서 “심종의 죄가 있다고 하나 죽을 만큼 큰 죄는 아니다. 유배를 보내기는 하나 목숨에 손을 대지 마라”고 특별히 지시한다.
심종은 자원안치(自願安置)된다. 자원안치는 유배지를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유배형 중에서는 비교적 가볍다. 심종은 유배생활 끝에 태종 18년 3월, 토산현(황해도)에서 병으로 죽는다.
생강 선물은 빌미일 뿐이다. 생강이 국왕의 매제를 유배 보낼 정도로 대단한 물건은 아니었다. 영조 시대 학자이자 관리였던 유수원(1694∼1755)의 ‘우서’에는 전주의 생강 상인 이야기가 나온다. 전주 생강은 유명했다. 심종은 전주 특산물 생강을 조금 받았을 뿐이다. 심종의 구체적인 죄는 사통(私通)이다. 심종은 ‘잠재적 쿠데타 가능 인물’인 방간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 매개체가 생강이었을 뿐이다. 별일 아니지만 문제 삼으면 별일이 된다. 생강이 사통으로 연결되고 역모의 징조가 된 것이다.
생강은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었다. 양념으로 사용했지만 약용으로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 중종 39년(1544년) 5월의 기록에는 세자가 동궁의 관원들에게 생강을 내리고 직접 글을 써서 내렸다는 구절이 있다. ‘논어에 공자께서 생강을 끊지 않고 먹었다고 했다. 구복(口腹)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을 소통시키고 구취(口臭)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조선왕조실록) 논어 ‘향당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구복은 ‘입맛’이다. 입맛을 위해 생강을 먹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맑게 하고 입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먹는다는 내용이다.
강계(薑桂)는 생강과 계피다. 나이 든 이들이 보양제로 먹었다. 생강, 꿀, 귤껍질 등을 섞은 차도 등장한다. 젊은이들에게는 생강을 권하지 않았다. 어린 사람이 생강을 먹으면 몸의 진기가 마른다고 믿었다. 단종은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왕좌에 올랐다. 즉위년인 1452년 12월의 기록에는 단종에게 생강을 권하지 않는 내용이 있다. ‘건강(乾薑)은 맛이 쓰고, 따뜻하며 열을 많이 낸다. 50세 이후의 기력이 쇠한 사람은 복용할 만하지만, 전하는 춘추가 장성해 가고 혈기도 성해져 가니 오히려 몸에 좋지 않다’는 내용이다. 10대 소년인 단종에게는 마른 생강이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뜻이다.
2016-11-09 숙수(熟手)의 삶
제사상 음식. 조선시대 궁궐 제사상 음식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 숙수들이 만들었다
영조 42년(1766년) 8월의 기록. 영조가 영의정 홍봉한(1713∼1778)을 만난다. 홍봉한의 보고다.
“궁궐 안팎의 제사 등에 병, 면, 포탕을 마련합니다. 이때 여인들에게 음식을 준비하게 하는 일이 잦습니다. 도성의 여러 부서도 궁의 잘못된 전례를 따릅니다. 민폐도 심하고 폐단도 많습니다. 고귀한 일에 내력이 불분명하고 정결하지 못한 여인을 여러 숙수(熟手)들과 뒤섞이게 하는 것도 미안합니다. 봉상시의 숙수들은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 어찌 병, 면, 탕을 만들지 못하겠습니까? 앞으로 봉상시에서 특별히 신경을 써서 (여인들을 쓰지 말고) 숙수들이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른 길입니다. 민폐를 없애는 길이기도 합니다.”
영조의 대답도 간명하다. “몹시 해괴하다. 무례하다. 민폐도 심할 것이다. 엄금하라. 또 이런 일이 일어나면 봉상시 해당 관원들의 책임을 무겁게 물을 것이다”(조선왕조실록).
영조와 홍봉한은 사돈지간이다. 홍봉한의 딸이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 홍봉한은 세손(世孫)이었던 정조의 외할아버지다. 영의정, 현직 국왕의 사돈, 세손의 외할아버지가 국왕 독대 자리에서 꺼낸 이야기가 “여인들이 음식을 만지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봉상시는 제사를 도맡는 부서다. 제사 음식, 궁중의 일상적인 음식을 만드는 일은 유교의 법도에 따라 중요한 일이었다. 민간 반가나 상민의 집에서는 여자들이 음식을 만들었지만 궁중이나 관청의 음식은 철저히 남자들의 몫이었다.
음식 만드는 일이나 식재료 장만, 물 떠오는 일도 남자의 몫이었다. 음식은 숙수, 선부(膳夫), 재부(宰夫), 옹인(饔人), 수공(水工), 반공(飯工) 등이 만졌다. ‘부(夫)’는 사내, 남정네다. 선부는 반찬, 재부는 고기, 옹인, 반공은 밥 짓는 일을 맡았다. 한양과 지방의 관청도 마찬가지. 음식 만드는 일에 여자들이 끼어드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태종 13년(1413년) 7월의 기록. 사간원의 상소에 ‘뼈’가 있다. ‘예전부터 가뭄이 오면 국왕도 감선했다. 금주 명령이 있지만 여전히 술 취한 사람이 있으니 금주를 엄격히 시행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자면 “국왕인 당신이 술을 마시지 않느냐, 좋은 음식을 먹지 않느냐”는 뜻이다. 서슬 퍼런 국왕이다. 마음대로 보위에 올랐고, 살아 있으면서 하야(下野)했고 외교, 국방권을 가졌다. 재위 13년, 살아 있는 권력자가 변명한다. “감선하는 일이라면 나의 주방에 진실로 별미(別味)가 없는 것을 선부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조선왕조실록). 선부는 천민 남자다. 이름도 각색장노(各色掌奴), 숙수노(熟手奴)였다. ‘노비(奴婢)’의 ‘노’는 남자 종이다.
궁궐에서 음식 만드는 일은 힘들었다. 웬만하면 피하려 했다. 숙련된 숙수는 더 귀했다. 인조 3년(1625년) 3월, ‘숙수 사노(私奴) 천해남’을 두고 부처 간의 갈등이 일어난다. 중국에서 사신이 왔다. 사신 접대는 영접도감의 몫이다. 숙련된 숙수가 없다. 천해남은 숙련된 숙수다. 불행히도 사옹원 소속, 세자궁 파견이다. 영접도감에서 인조에게 건의한다.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까지라도 천해남을 영접도감에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인조는 허락한다. 나흘 뒤인 3월 27일, 사옹원이 들고 일어선다.
“사옹원 소속 숙수들의 업무가 힘듭니다. 교대로, 밤낮없이 궁궐주방에서 일합니다. 이번에 천해남이 영접도감의 숙수로 명령받았습니다. 왜 하필이면 궁궐에서 힘든 일을 하는 숙수들을 데려갑니까? 천해남과 사옹원 소속 다른 숙수들을 절대 데려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승정원일기).
사옹원은 식재료 관리, 음식 만드는 일 등을 하는 부서다. 숙수들은 사옹원 소속이었다. 대령숙수(待令熟手)도 잘못 알려졌다. 높은 직책이 아니다. 밤낮 없이 일하는 ‘궁궐주방 5분대기조’다. 역시 남자다.
궁중숙수들은 부업으로 그릇 빌려주는 일도 했다. 정조 14년(1790년), 궁중숙수들은 사기전(砂器廛)과 맞선다. 사기전 상인들은 ‘그릇 빌려주는 세기전(貰器廛)’을 만들고 궁중숙수들을 흡수, 일을 독점하려 한다. 자신들이 그릇 빌려주는 일을 도맡고 이익의 일부를 나눠주겠다는 것이다. 궁중숙수들은 반발한다. 영조 30년(1754년), 이미 세기전, 궁중숙수들이 각자 그릇 빌려주는 일을 나눠 하도록 결정했다. 이제 와서 세기전이 독점하는 것은 부당하다. 정조는 궁중숙수들의 의견을 따른다(일성록).
2016-11-16 배추
우리에게 익숙한 배추는 일본에서 개량된 품종이다. 조선시대 배추는 크기가 작고 봄동 같은 모양이었다.
어설픈 ‘밀무역 사건’이었다. 중종 28년(1533년) 2월 6일의 기록. 사노(私奴) 오십근과 청로대(淸路隊) 유천년이 중국과 밀무역을 했다고 자수한다. 청로대는 국왕 거둥 시 호종부대다. 천민이지만 군인이다. 이들의 주장은 자신들도 속았다는 것. “주범은 용산의 관노(官奴) 이산송이다. 우리는 그의 거짓말에 속아 사기그릇을 싣고 중국으로 가서 쌀, 콩, 조와 더불어 배추씨앗(白菜種·백채종) 등을 밀무역했다”고 자수한다. “제주도로 간다”는 이산송의 말을 믿고 가보니 중국이더라는 주장이다(조선왕조실록). 밀무역 품목에 배추씨앗이 들어 있음이 흥미롭다.
배추는 ‘백채’ ‘배초’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배추는 ‘숭(숭)’ ‘백숭(白숭)’ ‘백채(白菜)’ ‘숭채(숭菜)’ 등으로 표기했다. 민간에서는 ‘배초(拜草)’라고 불렀다. 다산 정약용은 “숭채는 방언으로 배초라고 하는데, 이것은 백채의 와전임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른다”고 했다(다산시문집). ‘배초’는 뜻이 없는 이두식 표현이다.
다산 정약용은 황해도 해주에서 고시관을 지냈을 때 서흥도호부사 임성운에게 시를 남겼다. ‘서관(西關)의 시월이면 눈이 한 자씩이나 쌓이니/겹겹 휘장에 푹신한 담요로 손님을 잡아두고/갓 모양 따뜻한 냄비에 노루고기는 붉은데/가지런히 당겨놓은 냉면에 배추김치는 푸르다(숭菹碧)’고 했다. 서관은 대중국 통로인 황해도, 평안도 일대를 말한다. 이때의 배추는 우거지같이 시퍼렜다. 결구배추는 조선 말기 한반도에 전래된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배추 품종은 여러 차례 개량되었다. 이름만 같을 뿐, 오늘날의 배추와 조선시대 배추는 전혀 다르다.
장다리는 배추 혹은 무의 꽃줄기이다. 장다리꽃이 피는 배추는 오늘날의 얼갈이배추 같은 것이다. 푸른빛이다. 노랗게 속이 찬 결구배추는 중국 북부지방이 원산지로 쉽게 꽃이 피지 않는다. 중국 동북부에서 중국과 교류했던 조선의 관리, 문인들은 배추에 대해서 많은 기록을 남겼다. 순조 3년(1803년) 12월의 기록에서는 ‘심양의 배추가 우리나라 것보다 배나 크다’(계산기정)고 했고 ‘숭채 씨앗이 우리나라 저잣거리의 되로 1되에 중국 돈 4냥인데 마침 돈이 없어서 사지 못했다’(왕환일기)고 했다. 중국 사신단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김경선(1788∼1853)은 ‘(중국) 배추는 한 포기에 수십 개의 잎사귀가 붙어 있어 우리나라 것보다 크기가 배는 되며, 살이 무척 연하다. 겨울에 지하실에 두었다가 먹으면 언제나 새로 뽑은 거와 같다’고 적었다(연원직지).
조선 전기에도 중국산 배추씨앗은 인기가 있었다. 문신 서거정(1420∼1488)과 강희맹(1424∼1483)은 비슷한 시기를 살았다. 강희맹이 중국 사신으로부터 열일곱 종류의 중국 채소 씨앗을 얻는다. 그중에 배추씨앗도 있었다. 강희맹이 나눠준 중국 채소(唐蔬·당소) 씨앗 일부를 받은 서거정이 시를 남겼다. ‘백발 되니 온몸에 각종 병이 실타래처럼 엉킬 터/채소 농사 배워 잘 해내면 만년의 기쁨일레라/열일곱 종류 채소가 눈앞에 가득하니/채소밭을 돌 때면 기뻐 미칠 것 같다네.’
한양 도성 밖 왕십리에는 배추밭이 널려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편찬)에는 ‘왕십리평(往十里坪)은 흥인문 밖 5리쯤에 있는데, 거주하는 백성들이 무와 배추 등 채소를 심어 생활한다’고 했다. 배추는 환금작물이었다. 실학자 유수원(1694∼1755)은 ‘왕십리에서 채소를 키우는 이들은 도성뿐만 아니라 시골에서도 채소를 판다. 시골 사람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각자 자기 본업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우서).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청파, 노원역은 토란이 잘되고, 동대문 밖 왕십리는 무, 순무, 배추 따위를 심는다’고 했다.
홍만선(1643∼1715)은 ‘산림경제’에서 배추 기르는 법을 상세히 정리했다. ‘3월에 비옥한 땅을 골라 이랑과 두둑을 친 후 듬성듬성 종자를 뿌린다. 40일이 되면 먹는다. 9, 10월에 심어도 된다’고 했다. 교산 허균(1569∼1618)은 ‘한정록’에서 ‘7, 8월에 심었다가 9월에 이랑을 내고 나눠 심는다’고 했다. 한겨울만 아니면 배추는 늘 재배할 수 있었다.
2016-11-23 여지
선조 40년(1607년) 4월, 비변사의 보고에 여지(4枝)가 등장한다. ‘여지가 당나라를 기울게 하였으니 미미한 물건 하나가 때로는 나라를 기울게 한다. 사소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으니 백성이 병든다. 세금이 증가하면 백성이 흩어지고 도적이 된다. 풀 한 포기가 나라를 망친다는 것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여지는 중국 남방에서 생산되는 과일 리치다. 당 현종의 애첩 양귀비가 리치를 좋아했다. 리치를 운반하기 위하여 현종은 운하를 뚫었고 무리한 운하 건설이 국가 재정 파탄으로 이어졌다고 알려졌다.
조선의 폭군 연산군도 여지를 좋아했다. 여지는 류큐(琉球·오키나와) 등 남방의 공물로 조선 조정에 공급됐다. 양이 적으니 그저 맛을 볼 정도였다. 연산군의 ‘여지 사랑’은 적극적이었다. 연산군 3년(1497년) 2월, 명나라로 가는 사신에게 “여지를 사 오라”라고 명령을 내린다. 공식 사절단에 사적인 심부름을 시킨 것이다. 연산군은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했다.
‘풀 한 포기’에 불과한 과일 여지는 연산군 2년(1496년) 9월에 이미 큰 문제를 일으켰다. 대간(臺諫)들이 몇몇 정치적인 문제와 더불어 ‘여지 수입 금지’를 상소한다. 연산군은 듣지 않는다. 대간은 사헌부와 사간원을 통틀어 부르는 명칭이다. 오늘날의 검찰, 감사원, 민정수석비서관실을 합친 기관이다. 대간들은 “명나라에 갈 때마다 여지를 사 옵니다. 여지는 기호품에 불과하니 수입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장한다. 연산군은 요지부동이다. “여지는 기호품이라고 하나 대단히 진귀한 새나 짐승이 아니니 무방하다.” 대간들이 물러서지 않으니 연산군의 대답이 옹색하다. “그럼 여지는 사들이지 말라. 대신 다른 상소는 들어주지 않겠다.” 군주가 엉뚱한 고집을 피우면 신하는 사직할 수밖에 없다. 대간들은 사직한다.
연산군 3년, 일개 지방 수령인 성천부사 민효증이 ‘임금이 실천해야 할 10가지 일’이라는 제목으로 상소를 올린다. 그중 일곱 번째에 여지가 등장한다. “재물은 낭비하면 결국 백성을 해롭게 합니다. 예전의 밝은 임금은 여지가 생각나도 백성에게 미칠 화를 생각해서 사들이지 않았습니다. 전하도 조금도 소홀함이 없게 하소서.” 연산군은 신하들의 말을 귀에 담지 않는다. 한술 더 떠 연산군 4년(1498년) 8월에는 승정원에 여지 한 덩어리를 내리고 승지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한다.
연산군 5년(1499년) 1월, 사간원의 정언(정6품) 윤은보가 원로대신 유자광을 탄핵한다. “당나라 현종이 무리하게 여지를 구했을 때, 정승 이임보가 방관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여 그의 살을 씹고자 했으며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의 죄를 묻습니다. 지금 유자광은 임금의 총애를 얻기 위하여 민간에 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유자광의 죄가 이임보의 죄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그를 국문해야 합니다.”
국왕의 사치 물품, 특히 여지의 수입은 국가 체면을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연산군 8년(1502년) 7월, 파평부원군 윤필상, 영의정 한치형 등이 간언한다. “지금 명나라에서 여지 등을 사 옵니다. 임금이 드시는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공작 깃, 큰 산호, 백옥 등은 그야말로 사치품입니다. 통사가 이런 물품을 중국에서 사들이면 명나라 조정에서 보고 듣게 되는데 과연 그들이 조선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신하들이 국가 품위를 걱정하지만 연산군은 요지부동이다.
연산군 10년(1504년) 윤 4월, “지난번 사온 여지 등이 좋지 못하니 성절사 편에 좋은 것으로 사 오라”라고 명한다. 연산군 12년(1506년) 4월에는, “맛이 단 여지는 연경에서 사들이고 후추는 왜인들에게서 사들이라”라고 명한다. 그해 9월 2일, 혼군(昏君) 연산은 폐위된다. 그의 ‘여지 사랑’은 강화 교동도로 쫓겨난 후에야 끝난다.
중종 1년(1506년), 우부승지 이우가 아뢴다. “여지는 폐주(연산군)가 좋아해서 지금까지 사 왔으나 앞으로 이같이 먼 지방의 색다른 물품은 사들이지 않겠습니다.” 중종은 “그리하라”고 답한다.
2016-11-30 곰탕과 대갱
별것 아닌 듯하지만, 간단치 않다. 어머니 상을 당한 상주가 상중에 고기를 먹었다. 유교에서 엄히 금하는 것이다. 조선 중기 문신 정경세(1563∼1633)의 ‘죄목’이다.
선조 35년(1602년) 3월, 대사헌 정인홍이 상소를 올린다. “예조참의 정경세는 거상(居喪)을 삼가지 않았으니 파직하고 다시는 기용하지 마소서.” 이유는 간단하다.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것과 “(정경세가) 거상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상 잘못’이 훨씬 크다. 같은 해 4월 사헌부가 다시 임금에게 아뢴다. “정경세는 난리 초기, 상중에 있으면서 음식을 먹을 때 남의 비난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파직하고 다시는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하소서.”
탄핵 이유가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상중에 음식을 법도대로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경세는 왜란 초기, 왜군의 칼에 어머니를 잃었다. 부모 잃은 상주는 3년 소식(素食)이 원칙이다. 맛있는 음식, 특히 고기는 엄히 금한다. 사건이 발생한 지 무려 약 20년 후인 광해군 3년(1611년) 8월, 사간원에서 더 엄히 탄핵한다. “전라감사 정경세는 어미가 칼날에 죽었는데 상복을 입은 몸으로 관가를 드나들며 고기를 먹었습니다. 인간의 도리를 제대로 지키지 않은 정경세를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제외해야 합니다.”
붕당, 당쟁이 심하던 시기다. 정경세는 20년 이상을 ‘상중에 고기 먹은 죄’로 고생한다. 숱하게 탄핵당한다. 자주 벼슬을 거두고 시골로 가거나 외직으로 떠돌았다.
정경세를 옹호하는 상소도 나타난다. 광해군 3년 11월, 상주의 진사 송광국 등이 연대 상소한다. “사간원은 정경세가 상중에 고기를 먹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란 중 정경세는 상중이므로 지극히 조심했습니다. 관가에도 들르지 않았습니다. 관청 음식에 혹시 고기가 들어 있을까, 염려해서입니다. 불행히도 공주 인근을 지나던 중 천연두에 걸렸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공주목사 나급과 지사 윤돈이 묽은 죽에 육즙(肉汁)을 조금 섞어 정경세를 살렸습니다. 정경세는 몰랐습니다. 병세가 호전되자 즉시 본진으로 돌아갔습니다.”
고기가 아니라 묽은 죽에 육즙을 섞었다고 했다. 육즙은 고기 국물이다. ‘소학’에서도 북송 사마광(1019∼1086)의 말을 빌려 ‘부모의 상을 당한 자라도 오랜 기간 몸이 허약해져 병이 걸릴 정도면 육즙이나 약간의 고기 등을 먹어도 좋다’고 했다. 정경세는 무죄다. 더욱이 모르고 먹었다.
육즙은 ‘고기 곤 물’이니 오늘날의 곰탕이다. 고기 끓인 국물이니 곰국이라고도 한다. 자육즙(煮肉汁)이란 표현도 있다. 고기 끓인 국물이니 결국 곰탕이다. 조선시대에는 국(羹·갱)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누었다. 대갱(大羹)과 화갱(和羹)이다. 아무것도 넣지 않고 육즙을 끓이면 대갱 혹은 태갱(太羹)이다. 최고의 국물이다. 소금, 채소 등을 넣고 육즙을 끓이면 화갱이다. 화갱은 조미료, 채소 등으로 조화로운 맛을 낸 것이다. 형갱(m羹)이라고도 한다. 화갱은 여러 재료로 육수를 내고, 나물, 고기 등을 넣고 끓인 오늘날의 탕, 찌개, 국물이다. 맛있지만 대갱보다 아래 등급이다.
‘예기(禮記)’에는 ‘대갱은 조미료를 섞지 않은 육즙이다. 제사에는 대갱을 올린다’고 했다. 유교적 율법 아래 최고의 음식은 돌아가신 조상을 모시는 제사 음식이다. 그중 왕실의 제사 음식은 으뜸 중 으뜸이다. 대갱은 최고의 음식이다.
한반도에서도 육즙, 대갱 등을 오래전부터 사용했다. 고려의 문인 이색(1328∼1396)은 사치가 심한 세태를 꾸짖으면서 ‘식례(食禮)의 시작은 대갱일 뿐인데, 여염집에 귀한 옷과 여자들 장신구가 그득하다’고 했다(목은시고). 음식 법도의 시작은 조미료, 소금, 채소 등을 넣지 않은, 맑고 소박한 국일 뿐인데 민간의 사치가 심하다는 뜻이다.
시를 평할 때도 대갱이 인용되었다. 조선시대 문신이자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박은(1479∼1504)은 갑자사화로 젊은 나이(25세)에 죽었다. 친구 이행(1478∼1534)이 그의 시를 모아 ‘읍취헌유고’를 냈다. 서문에서 이행은 ‘(박은의 시는) 자연스럽게 흘러서 쉬지 않는 것이 조미하지 않은 대갱과 같다’고 했다. ‘예기’에서 ‘대갱을 조미하지 않는 것은 그 바탕을 귀히 여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은의 시가 대갱처럼 자연스럽고 질박하다는 뜻이다.
2016-12-07 주막(酒幕)
▲조선시대 주막의 모습을 담은 신윤복 풍속화.
나라가 어수선하다. 1728년(영조 4년) 음력 3월,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영조가 이복형 경종을 게장으로 ‘독살’했다고 믿는 노론 세력의 반란이었다. 한 해 전 7월, 노론 일부가 실각한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반란은 충청도 청주를 기점으로 영남 일대로 번졌다. 반란군의 목표는 분명하다. 한양도성의 궁궐이다. 예나 지금이나 집권 세력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권력 핵심으로 향하는 유동인구 통제와 반란 세력의 집결지를 봉쇄하는 것이다.
난이 일어난 다음 달인 4월 2일, 경기감사 이정제가 보고한다. “(한강의) 송파나루부터 공암나루(서울 강서구 가양동)까지 모든 배들은 강의 북쪽으로 옮겨두고 사사로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지금의 이른바 주막(酒幕)은 옛날의 관정(關亭)으로서, 적도(賊徒)가 밤에는 주막에서 자고 낮에는 장터에서 모이니, 착실하게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란세력 혹은 수상쩍은 자들이 묵는 곳은 주막이다. 주막은 예전의 관정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관정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만든 역원(驛院)이다. 조선은 공식적으로 각 지역에 역(驛), 원(院), 참(站), 점(店) 등을 두었다. 공적 업무로 지방에 가는 관리들은 주로 지역 관아의 객사(客舍) 등에서 묵었다. 객사가 없는 곳에서는 역참에서 말을 갈아타거나 잠을 잤다. 역은 30리 간격으로 하나씩 세웠다. 역, 원, 참도 없는 산골이나 시골에서는 민가에서 하룻밤을 묵는 수밖에 없었다.
주막은 주점(酒店)과 다르다. 주점은 공식적이고 주막은 사설기관이다. ‘막(幕)’은 비바람을 가리려, 임시로 지은 가건물이다. 초기의 주막은 ‘가볍게 술 한잔 마시는 가건물’에서 시작되었다. ‘영업신고’를 하지 않으니 세금도 없다. 세금을 걷는 곳은 통제도 쉽다. 중국 한나라 이후부터 중앙정부는 술을 만들거나 파는 곳에 독점권을 주고 세금을 거두었다. ‘각고((각,교)])’제도다. ‘각’은 독점, ‘고’는 술, 술집을 뜻한다. 주점은 공식적이며 세금을 낸다. 초기 주막은 세금을 내지 않는 가건물로 시작하였다. 난전(亂廛)이다.
1574년 12월(선조 7년) 미암 유희춘(1513∼1577)은 선조와의 경연에서 “경기도의 탄막(炭幕)은 나그네가 숙박하는 곳인데 도둑들이 엄습하여 그 집을 불태웠다”고 보고한다(미암집). 탄막은 주막인데 숙박시설이다. 술도 마시고 잠도 잔다.
탄막은 땔나무와 숯을 보관하는 곳이다. 이덕무(1741∼1793)는 “점은 주막인데, 술(酒)과 숯(炭)의 발음이 비슷하여 ‘술막(酒幕)’이 숯막(炭幕)이 되었다. 관청의 문서에서도 탄막으로 쓰고 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주막은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점, 주점, 주막, 탄막 등 여러 이름으로 나타난다.
조선의 생산능력이 늘어난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유동 인구가 늘어난다. 역참을 이용할 수 없는 양민, 상인들은 주막을 이용한다. 전국에 주막이 급격히 늘어났다. ‘간편하게 술 한잔 마시는 공간’으로 시작한 주막은 점차 술 마시고, 식사하고, 잠도 자는 공간으로 발전한다.
정조 13년(1789년) 2월 ‘일성록’의 기록. 황해도 신계에 살던 한조이는 남편의 억울한 유배를 풀어줄 것을 호소한다. “남편 이귀복과 저는 길가에 살면서 탄막으로 업을 삼고 있었습니다. 재작년(1787년) 5월, 나그네가 저희 탄막에 와서 아침을 사먹고 있는데 (황해도) 곡산의 기찰 장교가 그를 잡아가고, 남편도 잡아가서 유배 보냈습니다.”
호남의 실학자 존재 위백규(1727∼1798)는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다. 젊은 시절 존재가 과거장에 다닐 때 “주막이나 여관(旅店·여점)을 제외하면 단연코 아는 사람 집에서 유숙하거나 남에게 부탁하거나 인정을 바라는 일이 없었다. 한양도성에 들어오면 반촌(泮村)에 세를 들었다. 시험이 끝나면 바로 말을 타고 왜고개(서울 한강로 부근)를 넘었다”고 했다. 존재는 주막과 여관 모두 ‘검소하게 잠자는 곳’으로 여겼다. 물가 비싼 한양에서는 허름한 곳에 세를 들었다. “술 마시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30리마다 큰 팻말을 세우고 나무를 심어 잘 가꾼 곳에 주막을 세우자. 나머지 작은 점포들은 술독을 두지 못하게 하자.”(존재집) 술을 막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줄이자는 뜻이다.
2016-12-21 미음과 죽
정국이 복잡하게 얽혔다. 정조 10년(1786년) 12월 1일, 왕대비 혜경궁 홍씨가 한글 하교문을 승정원 등에 내린다. “5월에 원자(元子)가 죽고 9월에 또 변고가 있었다. 가슴이 막히고 담이 떨려 일시라도 세상에 살 마음이 없었다. 그간 목숨을 연명,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속미음(粟米飮)을 마셨기 때문인데 이제는 이것도 들지 않고 죄다 봉해서 날짜를 표시해 두었다. 그간 미음을 든다고 대전(大殿·임금)에 말했으나 지금 병세는 실로 부지하기 힘들다.”
미음은 몸이 아플 때 먹는 것이다. 미음이나 물도 마시지 않는 것은 죽겠다는 시위다. 단식 투쟁이다. 속미음은 좁쌀로 끓인 미음 혹은 죽(粥)이다. 혜경궁 홍씨가 미음도 끊고 시위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해 5월에 홍역으로 문효세자가 죽었다(5세). ‘9월의 변고’는 문효세자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죽음이다. 의빈 성씨는 셋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이제 정조의 아들은 없다. 차기 대권 향방이 오리무중이다. 혜경궁으로서는 절박했을 것이다.
혜경궁이 문제 삼은 대상은 죽은 전임 도승지 홍국영(1748∼1781) 일파의 ‘그림자’다. 홍국영은 정조의 ‘문고리 권력’이었다. 비선이자 실선의 실세였다. 젊은 나이(29세)에 도승지가 되었다. 대통령비서실장이다. 자신의 여동생을 후궁(원빈)으로 밀어 넣어 외척이 되려 했으나 원빈의 죽음으로 실패했다. 정조의 이복 조카였던 상계군 담을 원빈의 양자로 받아들여 ‘정조 다음’을 꿈꾸었으나 역시 실패했다. 홍국영이 죽은 후 5년이 지났다. 혜경궁은 여전히 궁궐에 홍국영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홍국영은 정조 반대파인 노론 벽파와 손잡았고 그들이 궁궐에 남아 있었다. 혜경궁은 속미음도 거부하고 ‘홍국영의 그림자’를 걷어낼 것을 요구한 것이다.
영조도 속미음을 이용하여 한바탕 시위를 벌였다. 영조 32년(1756년) 2월 18일 한밤중, 영조가 느닷없이 진전(眞殿) 동쪽 뜰에 돗자리를 깔고 북향하여 엎드린다. 붕당, 당파 간의 심한 싸움에 대한 국왕의 항의다. 진전은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신 곳이다. “내가 신하들의 붕당하지 않겠다는 말을 믿고 선왕들에게 고했다. 이제 또다시 붕당과 싸움이 일어나니 내말이 거짓이 되었다. 선조들에게 사과하고자 한다.” 예순 살을 넘긴 국왕이 홑겹 돗자리를 깔고 한밤중 찬 바닥에 엎드렸다. 신하들로서는 큰일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여러 신하들이 속미음을 올렸으나 임금이 끝내 거부했다’고 기록했다. ‘미음도 먹지 않겠다’는 걸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진솔한 ‘미음 단식’도 있다. 영조 24년(1748년) 7월, 영조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딸’이라고 불렀던 화평옹주가 죽었다. 22세. 영조는 “미음 같은 음식도 잘 넘기지 못하여 매양 답답한 때가 많다”고 한탄한다.
몸이 허약한 경우는 함부로 “미음도 먹지 않는다”고 단식을 내세울 일은 아니다. 미음은 환자식이다. 경종은 원래 몸이 약했다. 세상 떠나기 하루 전인 경종 4년(1724년) 8월 23일, ‘설사 징후가 그치지 않아 혼미하고 피곤함이 특별히 심하니, 약방에서 입진, 탕약을 정지하고 잇따라 인삼속미음(人蔘粟米飮)을 올렸다’고 했다. 인삼속미음은 인삼과 좁쌀로 끓인 죽이다. 다음 날인 8월 24일의 기록. ‘도제조와 제조가 미음(粥飮·죽음) 드시기를 권하였으나 응답하지 않았다. 세제(世弟·영조)가 청하니 임금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고, 미음을 올렸다’고 했다.
정조도 마찬가지. 조선왕조실록 정조 24년(1800년) 6월 22일의 기사. 정조가 위독하다. 세상을 떠나기 불과 6일 전. 화성유수 서유린이 “수라는 드셨느냐?”고 여쭙는다. 정조는 “미음을 조금 마셨을 뿐”이라고 답한다. 6월 26일에는 좌의정 심환지가 “음식은 드셨습니까?”라고 묻자 “조금 전, 흰 도라지 미음을 조금 마셨다”고 답한다.
죽은 되다. 미음은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묽다. 그 차이를 정확하게 가르기는 힘들다. 죽과 미음은 혼용했다. 영조가 세상을 떠난 직후, 신하들이 세손 정조에게 ‘죽음(粥飮)을 바쳤다’는 내용도 있다. 죽과 미음을 혼용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중국 사신은 미음을 즐겨 찾으니 큰 쟁반에 사발을 두고 미음을 담는데 잣죽(果松粥·과송죽)이든 깨죽(胡麻粥·호마죽)이든 모두 좋다’고 했다(목민심서 예전). 미음과 죽을 혼용한 것이다.
2016-12-28 곶감
곶감이야 죄가 없다. 굳이 따지자면 강한 단맛이 죄다. 성종 10년(1479년) 6월 2일, 중전 윤씨가 폐출되었다. 폐비 윤씨다. 불과 사흘 후인 6월 5일 조선왕조실록 기록이다. 성종은 창덕궁 선정전에서 윤씨를 폐하여 사가로 내보낸 이유를 신하들에게 장황하게 설명한다.
“경(卿) 등은 내가 폐비한 연유를 알지 못하고 모두 다 이를 의심하니, 내가 일일이 면대하여 말하겠다. 지난 정유년(1477년)에 윤씨가 몰래 독약을 품고 사람을 해치고자 하여, 곶감(乾*·건시)과 비상(砒p)을 주머니에 같이 넣어 두었으니, 이것이 나에게 먹이고자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지 않는가?”
성종 독살 시도는 물론 미수였고 시도에 대한 확실한 증거도 없었다. 이때도 성종은 ‘중전 폐출’을 주장했으나 신하들의 완강한 반대로 폐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윤씨를 모시던 하녀들 몇몇이 벌을 받는 선에서 끝났다.
성종은 폐비 윤씨에 대한 고삐를 더 죈다. 문제는 차기 대권 주자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윤씨의 아들이 왕이 될 판이다. 어머니를 박대한 아버지를 어떻게 볼지 불안하다. 폐비에 찬성하거나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던 이들의 안위도 문제가 된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다. 아들 연산군은, 어머니를 박대하고 죽음으로 내몬 신하들을 처절하게 숙청한다.
성종 13년(1482년) 8월 11일, 성종은 다시 ‘비상 섞은 곶감’을 들먹인다. “차고 다니는 작은 주머니에 항상 비상을 가지고 다녔으며, 또 곶감에 비상을 섞어서 상자 속에 넣어 두었으니, 무엇에 쓰려는 것이겠는가? 만일 비복에게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나에게 쓰려는 것일 텐데, 종묘와 사직이 어찌 편안하였겠는가?”
‘곶감과 독약 비상’에 대한 서술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나에게 독약 묻은 곶감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에서 “반드시 나에게 사용하려 했다”고 업그레이드시킨다. 갑자기 종묘사직도 들고나온다.
닷새 뒤인 8월 16일, 윤씨는 사사된다. 곶감이 궁중 권력투쟁에 이용된 경우다. 곶감은 달다. 곶감 싫어하는 사람이 없으니 민간이나 궁중 모두 곶감을 널리 사용했다. 단맛이 가장 강한 것은 꿀이다. 꿀은 귀했다. 귀한 과자를 만들 때나 사용했다. 생산량이 많지 않으니 민간에서는 약재로나 사용할 정도였다. 사탕수수 등에서 단맛을 뽑아낸 사탕도 있었다. 류큐(琉球·지금의 오키나와)에서 오는 사신들이 공물로 가져왔지만 먼 나라의 수입품이니 민간에서는 먹기 힘들었다.
곶감은 비교적 쉽게 만들고, 구할 수 있었다. 단맛이 강하니 정과(正果) 혹은 수정과(水正果)로 만들기도 하고 노인이나 아이들의 간식으로도 이용했다.
곶감은 사대부의 소박한 선물로도 이용되었다. 미암 유희춘(1513∼1577)은 선조 9년(1576년) 1월 5일의 일기에서, “편지와 함께 곶감 1접을 멀리 오겸에게 보냈다. 옛날 내가 귀양 가 있을 때 처자를 돌봐주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자신이 고난을 겪을 때 가족을 챙겨준 고관 우찬성 오겸(1496∼1582)에게 보낸 선물이 곶감 1접이었다.
시상(*霜)은 곶감 표면에 생기는 흰 가루다. 단맛이 특히 강하다. 효종은 인선 왕후 장씨와의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다. 인조 26년(1648년) 1월, 동궁의 막내 숙경 공주가 태어났다. 산후조리 과정의 인선 왕후(당시 동궁 빈)에게 식초 넣은 국을 마시게 하고 그 사이사이에 시상을 먹게 한다는 기록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은풍(경상도 풍기) 준시(준*)에 서리가 뽀얗게 앉았다”고 했다. 서리는 역시 곶감 표면의 흰 가루다. 준시는 나무 꼬챙이 등에 꿰어서 말리는 곶감과 달리 꿰지 않고 납작하게 말린 곶감이다. 상품으로 쳤다. 허균은 “지리산에서 나는 먹감(烏*·오시)이 검푸른 색에 끝이 뾰족하며 곶감으로 만들어 먹으면 더욱 좋다”고 했다.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영남의 여러 고을에서는 감나무를 재배해 곶감을 만들어 판다”고 했다. 조선 후기에는 이미 곶감이 상품화되었다. ◎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