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2022-02 중앙일보
02.03(목) 온전한 역사
독일 고슬라르(Goslar) 지역에는 ‘천 년의 채굴’ 역사를 간직한 람멜스베르크(Rammelsberg) 광산이 있다. 로마 시대부터 광산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은·구리·납·금 등이 났으며 문헌에서 확인되는 최초 채굴 기록은 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산은 1988년 천 년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고 폐광된 후 박물관으로 개조됐다. 1992년엔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오랜 역사만이 이곳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우크라이나인 등을 이곳에 강제동원했다. 천 년 중 극히 일부였지만, 전쟁의 광기와 폭력이 광산을 지배했던 셈이다. 독일은 이 역사를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올릴 때, 전체의 20%를 강제노동 역사를 설명하는 시설로 꾸몄다. 방문객은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생생히 담긴 인터뷰 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1일 사도(佐渡)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올려달라며 유네스코 사무국에 추천서를 냈다. 사도 광산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다수가 강제 동원된 역사의 현장이다. 일본판 람멜스베르크 광산인 셈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대상 기간을 에도 시대(1603∼1867년)로 한정해 일제강점기 역사를 쏙 빼고 사도 광산을 ‘자랑의 역사’로만 세계유산에 올리려고 한다.
가위질로 역사의 일부를 오려낼 수 있다는 일본의 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일본은 2015년 7월 군함도(端島) 등 강제징용 시설을 세계유산으로 올리면서 피해자를 기억하는 전시시설을 마련하겠다고 국제 사회에 약속했었다. 하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현장조사 후인 지난해 7월 ‘온전한 역사를 보여주는 내용이 없다. 희생자를 적절히 기리기 위한 전시물은 없다’며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온전한 역사(full history)’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등재 원칙이다. 밝은 면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면도 숨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명백한 증거와 증인이 있는 폭력과 가해의 역사는 더더욱 지워선 안 된다. 부끄러운 역사는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것이 온전한 역사에 가까워지는 길이다. 독일은 그리로 갔다. 일본은 반대로 가고 있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2.04 중대재해법 1호
1호는 어디서나 주목받는다. 그러나 피하고 싶은 1호도 있다. 지금 산업계에선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1호 기업’이 그렇다. 단순히 불명예뿐만 아니라 일벌백계 본보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법 시행 사흘 만인 지난달 29일 경기 양주시 삼표산업 양주사업소에서 인부 세 명이 매몰돼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중대재해법 대상은 상시근로자 수 50명 이상인 사업장이다. 국내 1위 골재업체인 삼표산업은 상시근로자 수가 930여 명에 달하는 중견기업이다. 아울러 이미 사망자가 나와 법 적용을 피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고용노동부는 중대재해법 위반 혐의로 삼표산업을 처벌할 수 있을지 조사에 착수했다.
중대재해법이 기업에 위력적인 이유는 현장책임자가 아니라 원청의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에게 징역형 또는 벌금형의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사 압수수색은 물론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소환조사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회사 대표가 이리저리 불려 다니면 경영상 손실이 불가피하다.
중대재해법 시행을 앞두고 고용부와 경찰이 주도권 싸움을 벌였던 배경 중 하나로 윗선에 대한 강제수사가 가능해졌다는 점이 원인으로 꼽힌다. 고용부는 근로기준법상 노동관계 법령에 대한 근로감독관의 전속수사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검경수사권 조정으로 검찰의 직접 수사 범위가 줄어든 만큼 경찰의 보완적 수사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고용부 전담수사로 정리됐지만 ‘중대재해법 적용 1호 사고’에 대한 처분이 나오기까지는 시일이 걸릴 전망이다. 첫 적용 사례인 데다 이번 사고를 막기 위해 인력과 예산 투입, 점검 조치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하나씩 따져봐야 한다. 고용부도 신중한 입장이다. 중대재해법 위반 1호 기업으로 검찰에 넘겼다가 재판에서 무죄로 판결 나면 역풍이 불 수 있다. “본보기로 때려야 한다”는 의견과 “있으나 마나 한 법”이라는 야유가 교차하는 대목이다.
문제는 1호 위반 기업이 아니다. 수일 또는 수개월 내에 2호, 3호 사고가 연이을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산업재해로 828명이 숨졌다. 하루 평균 두 명꼴이다. ‘뭣이 중헌디’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법이 문제라면 판례를 축적해 보완하면 된다. 그러나 안전에 관해선 아무리 당부해도 지나치지 않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2.07(월) RE100
RE100. 2050년까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석탄 같은 석유화석연료가 아닌 태양광·풍력·수력 같은 재생에너지로 바꾸자는 캠페인을 뜻하는 단어다. ‘Renewable Energy 100%’의 줄임말로, ‘재생 가능 에너지 100%’로 해석할 수 있다. 영국 런던에 있는 다국적 비영리 기구인 더 클라이빗 그룹이 2014년 시작했다. 애플·구글·인텔 등 340여 개 기업이 동참, 국내에선 2020년 12월 SK를 시작으로 10여 개 업체가 참여하고 있다.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캠페인이지만, 가입 조건이 꽤 까다롭다. 미국 포천이 선정한 1000대 기업 수준이어야 하고 연간 전력 사용량(100GWh 이상) 등을 만족해야 한다. 그간 국내선 RE100에 동참하기 어려웠다. 재생에너지 공급자와 직접 계약해야 하는데 한국전력공사를 통해서만 전기를 구매하는 구조여서다. 지난해 4월 공급자와 직접 계약할 수 있도록 전기사업법이 개정되면서 길이 열렸다.
지난 3일 제20대 대통령 후보 첫 TV 토론회에 RE100이 등장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게 “알이 백(RE100)에 어떻게 대응할 생각”이라고 물었고, 윤 후보는 “그게 뭐죠”라고 답했다. 한쪽은 “알이 백도 모르다니 대통령 자질이 없다”고 공격하고, 다른 쪽은 “정작 읽는 법도 제대로 모르며 잘난 척”이라고 응수한다.
RE100을 읽는 법이 정해지진 않았다. 영국에선 RE100을 ‘알이 원 헌드레드’라고 읽는다. CNN 등 주요 외신은 ‘리뉴어블 에너지 원 헌드레드’로 풀어서 보도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10월 11일 보도자료에 ‘리 백’이라고 표기했고 하루 뒤인 12일 보도자료에는 ‘알이 백’이라 썼다.
비슷한 상황이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도 있었다.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3D(3차원) 프린터를 ‘삼디’ 프린터, 5G(5세대 이동 통신)를 ‘오지’라고 발음했다. 상대 후보들은 “기본적 단어도 읽을 줄 모르다니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공격했다.
국민은 영어 약자의 발음이나 뜻이 궁금한 게 아니다. RE100의 존재 이유인 기후 위기라는 인류 공동 현안에 대한 후보자의 식견을 보고 싶을 뿐이다. 대통령 후보자 토론회를 보면서 경제 용어 발음까지 검색해야 하는 국민은 피곤하다.
02.08 보이지 않는 고릴라
https://youtu.be/IGQmdoK_ZfY
미국의 인지심리학자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는 1999년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을 했다. 참가자들에게 흰옷과 검은 옷을 입은 팀이 농구공을 패스하는 1분짜리 영상을 보여주고 흰옷 팀의 패스 횟수만 세라고 했다. 영상에는 고릴라 옷을 입은 여학생이 9초간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와 카메라를 향해 가슴을 두드리는 장면이 있었다. 그러나 참가자 절반은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인간에겐 자신의 기대와 일치하는 것, 즉 보고 싶은 것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선택적 인지’를 입증한 대표적인 실험이다.
이 연구진은 또 다른 흥미로운 실험도 했다. 체스 대회 참가 선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무려 75%가 자신이 진짜 실력보다 과소평가 받고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공식 점수가 실력보다 평균 99점 낮게 나왔다고 답했다. 그러나 1년 뒤에도 이들의 점수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고, 5년 뒤에도 ‘진짜 자기 실력’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른바 ‘자신감 착각’이다. 각종 오디션에 ‘저 사람은 뭘 믿고 출전했지’ 싶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도전하는 이유다.
인간은 이렇듯 수많은 인지 편향과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리더를 정하는 과정에서도 이를 피할 수 없다. 미국 버클리대 하스 비즈니스 스쿨의 캐머런 앤더슨과 개빈 킬더프는 처음 만난 학생들을 넷씩 묶어 어려운 수학 문제를 함께 풀도록 했다. 실험이 끝난 뒤 누가 리더십이 가장 뛰어났는지 물었다. 그룹원들이 지목한 리더는 수학 능력이 가장 뛰어난 학생이 아니었다. 정답 여부와 관계없이 가장 먼저 단호하게 의견을 제시한 사람을 리더로 인식하고 지목했다. 우리는 자신감이 넘치는 상대를 보면 뭔가를 잘 알고 있어서 그러리라 지레짐작한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은 자신감을 너무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 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타고난 성격이 허세 넘쳐서일 수 있어서다.
대선후보 TV토론 이후 각 커뮤니티의 반응이 흥미롭다. 누군가는 잘했다고 칭찬하는 지점이 누군가에겐 자질이 부족한 결점으로 해석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거나 근거 없는 자신감에 휘둘리는 일상의 착각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더 좋은 리더를 선택하려면 성급하게 결정하기 전에 자신의 직관과 본능에 따른 판단이 정당한지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2.09 올림픽과 정치
‘스포츠와 정치를 엮지 말라’는 금언은 올림픽 헌장(50조 2항)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떠한 형태의 시위나 정치적·종교적·인종적 선전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규정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올림픽은 수시로 국제정치의 바람을 탔다.
1933년 집권한 아돌프 히틀러는 민족주의 고양과 나치 체제 선전을 목적으로 1936년 베를린올림픽 개최를 밀어붙였다. 거액을 들여 베를린 교외에 10만 명을 수용하는 웅장한 스타디움을 건설해 국력을 과시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는 남자 육상 200m에서 1위와 3위를 차지한 미국인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의 시상식 퍼포먼스가 유명하다. 시상대에 오른 그들은 성조기를 바라보는 대신, 검은 장갑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올렸다. 그해 4월 암살당한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한 추모, 인종 차별에 대한 항의의 뜻을 담았다.
1972년 뮌헨올림픽은 테러로 얼룩졌다. 팔레스타인 테러단체인 검은 9월단이 비밀리에 이스라엘 선수촌에 난입해 선수 5명, 코칭 스태프 4명, 심판 2명 등 11명을 인질로 잡았다. 이들은 이스라엘에 구금된 팔레스타인 포로 234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결국 인질 전원과 경찰 1명이 사망하는 참사로 역사에 남았다.
이후에는 정치적 보이콧이 빈발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인종차별 국가인 남아공과 친선럭비경기를 개최한 뉴질랜드에 대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제재를 않는다는 이유로, 아프리카 26개국이 집단 보이콧을 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는 미국과 서방국가들이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문제 삼으며 집단 불참했고,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공산권 국가들이 참가하지 않았다.
4일 개막한 베이징 겨울올림픽도 여러 정치적 파장을 낳고 있다. 우선 미국·영국 등 10개국 이상이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했다. 인권 문제를 명분 삼았지만, 미·중 패권전쟁의 연장선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웃 국가에서도 올림픽을 계기로 반중정서가 커지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쇼트트랙과 스키점프 판정이 논란이다. 대만에서는 시진핑 주석의 정상급 외빈 초청 연회를 두고 ‘황제식’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번 올림픽의 슬로건인 ‘함께하는 미래(Together for a shared future)’와 거리가 먼 풍경이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2.10 산소포화도
애플이 지난 2020년 9월 스마트워치인 애플워치6를 내놓으면서 먼저 내세운 기능은 혈중 산소포화도 측정이다. 손목 부위 센서를 통해 15초면 산소포화도를 간편하게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애플뿐 아니다. 삼성전자와 화웨이 등 웬만한 업체가 출시한 스마트워치에도 산소포화도 측정 기능이 들어간다. 고령화와 수명 증가로 커지는 헬스케어 시장을 겨냥한 것이다.
업체들의 대대적 홍보에도 불구하고 초기 반응은 시큰둥했다. 의료계에서는 일상생활에서 굳이 매일같이 산소포화도를 측정할 필요나 이유가 없다고 했다. 스마트기기를 전문적으로 리뷰하는 유튜버들 역시 신기하지만 처음 샀을 때 몇 번 해보면 나중엔 관심을 가지지 않을 기능이라며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었다.
산소포화도는 우리 몸속 혈액이 운반하는 산소의 양을 나타낸다. 보통 95% 이상이면 정상으로 본다. 심장 및 폐 건강문제, 수면무호흡 등이 산소포화도를 낮추는 요인이다. 이런 문제가 아니라면 산소포화도를 꼭 챙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이 산소포화도를 측정할 일은 별로 없었다. 동네병원 진료 시에도 대부분 체온이나 혈압을 재는 경우는 있어도, 산소포화도를 재자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상황이 바뀌었다. 코로나 중증인 경우 나타나는 주요 현상 중 하나가 산소포화도 저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확진을 받은 후 숨이 차는(호흡곤란) 증상이 나타날 경우 산소포화도도 확인해보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오미크론 변이는 주로 상기도 감염이지만 중증인 경우 산소포화도가 내려갈 수 있어서다. 확진자의 산소포화도가 94% 미만으로 내려간다면 입원이 필요할 수 있다.
10일부터 60세 이상, 팍스로비드 처방자가 아니면 확진자도 ‘셀프치료’ 방식이 적용된다. 오미크론 변이가 빠르게 확산하면서 재택치료 대상자가 급증하면서다. 셀프치료 대상자는 체온기나 산소포화도 측정기 등 재택치료 키트를 지급받지 못한다. 각자도생이란 말까지 나온다. 이러니 약국과 쇼핑몰에서 미리 산소포화도 측정기를 구매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웃돈까지 붙는다. 구매 행렬에 동참하기 전에 본인 혹은 가족이 가진 스마트워치를 먼저 확인하면 어떨까. 거들떠보지 않던 산소포화도 측정 기능이 숨어있을지 모른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2.11 소주
소주(燒酒)의 소(燒)자는 ‘불사를 소’다. 소주가 불을 때서 끓여 만드는 증류법을 활용한 술이어서다.
무엇을 불사를까. 전통방식의 증류식 소주는 누룩과 찹쌀로 고두밥을 지어 밑술부터 담가야 한다. 그렇게 담근 술이 알맞게 익으면 항아리 안에 용수를 박아 걸러 뜬다. 이 술을 소줏고리에 넣고 불을 때 한 방울씩 모은 것이 소주다. 경북 안동에서는 청주를 소줏고리에 넣고 끓여 소주를 만든다. ‘어부가’를 지은 농암 이현보(1467~1555) 선생의 종택에서 만드는 ‘일엽편주’는 소주 1병을 만들기 위해 청주 5병이 들어간다.
소주를 발효해 증류하는 과정에 곡식이 들어가다 보니 조선시대에는 종종 금주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영조 재위 52년간 40년이 금주령 시대였다고 한다.
1965년 처음 등장한 희석식 소주는 전분이나 당분이 함유된 물료를 발효시킨 ‘주정’을 불사른다. 6·25 전쟁으로 식량이 부족해지자 정부가 그해 양곡관리법에 따라 순곡주 제조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희석식 소주는 대량생산이 용이해 소주가 대중화하는 계기가 됐다. KBS 다큐멘터리 ‘한국인의 술상’에 출연한 배우 최불암은 ‘소(燒)’자를 이렇게 해석한다. “아픈 사연이 좀 많아. 연기하고 나오면 술집으로 달려갔지. 가슴이 탔던 뜨거움이 쉬익하고 불 꺼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어” 그가 수사드라마의 전설인 MBC ‘수사반장’(1971~1989)에 출연하던 시절이다.
‘소주=서민술’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다 보니 주류업계에선 가격 인상 대신 도수를 낮춰 원가를 절감하는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희석식 소주는 물을 첨가해 알코올 농도를 조정한다. 소주의 원료인 주정 대비 물의 양이 늘어나면 원가가 절감되는 식이다. 주류업계에 따르면 대한주정판매는 지난 4일부터 주정 가격을 7.8% 인상했다. 2012년 이후 10년 만이다. 주정 값이 오르면서 소주 가격 인상이 시간문제라는 전망도 나온다. 저도주 바람이 다시 불지도 모를 일이다.
시인 안도현은 1997년 ‘퇴근길’이라는 단 두 줄짜리 시에 팍팍한 삶으로부터 위로받고 싶은 심정을 집어넣었다.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없다면. 아, 이것마저 없다면.’ 아무리 주머니 사정이 답답해도 불타는 속을 달래줄 소주 한 잔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 수 있을까.
위문희 사회2팀 기자
12.14(월) 법카
신용카드는 1920년대 미국에서 태동했다. 주유소·백화점에서 한 달간 외상으로 거래한 대금을 월말에 한꺼번에 갚는 형태의 후불카드가 시초다. 요즘 같은 형태의 신용카드는 1950년대 등장한 ‘다이너스클럽’이다. 창립자인 프랭크 맥나마라가 음식점에서 식사 후 지갑이 없어 곤경에 처했던 경험을 토대로 만들었다.
국내선 1970년대 말부터 신용카드를 쓰기 시작했는데 현재 연간 신용카드 결제액이 977조1000억원(지난해 말 기준)이다. 이 중 17.7%가 법인카드 결제액이다. 법카는 회사를 대상으로 발급되는 신용카드다. 국내에선 2001년부터 법카 사용이 크게 늘었다. 세법에서 법카 지출금액을 손비로 인정, 과세 대상에서 제외하면서다. 사무용품은 물론 보험·차량 비용, 접대비, 교육비, 광고비까지 법카로 결제, 손비 처리된다.
법카를 업무가 아닌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면 처벌 대상이다. 기업은 법인세를 추징당하고 법카를 유용한 직원은 업무상 횡령·배임죄에 해당, 형법 제356조에 따라 10년 이하의 징역형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법카의 사적 유용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공기업 대표가 재임(3년) 동안 내연녀로 추정되는 여성이 거주하는 동네에서 300회 이상 법카를 사용하기도 하고 목사가 목회활동비 명목으로 한 해 수억원씩 법카를 유용하다가 기소됐다. 전 보건복지부 고위 공무원은 4년간 한 대형병원의 법카 8개를 유흥업소·골프장 등에서 내 것처럼 사용하다가 징역살이를 하고 있다.
나름의 예방 장치도 있다. 2005년 본격 도입한 클린카드제다. 업종·이용시간·금액 제한을 뒀다. 그런데 꼼수가 난무한다. 유흥업소에선 일반 업종 명의의 카드 단말기를 따로 비치한다. 결제 금액 한도를 넘어가면 할부로 나눠서 전표를 발급한다. 사용제한 시간이 되기 전에 미리 선결제하거나 개인 카드로 결제 후 낮에 법카로 재결제하기도 한다.
결국 법카의 온당한 사용 여부는 개인 윤리에 달렸다. 대통령 후보자 배우자에 대한 법카 유용 논란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다. 높은 윤리 의식을 갖춰야 하는 영부인 후보자뿐 아니라 공무원의 법카 유용 잣대는 더 엄격해야 한다. 단순 회삿돈이 아니라 세금을 유용한 것이라서다. 국민 세금으로 결제하는 법카는 고기 사 먹는 ‘쌈짓돈’이 아니다.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02.15 자기 몸 긍정주의
자기 몸 긍정주의(Body Positive)란 획일적인 미의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몸을 사랑한다는 의미다. 44사이즈의 마른 모델만 허용하던 패션계에서 플러스 사이즈 모델, 휠체어 모델 등 다양한 이들이 활약하게 만든 움직임이다.
비누 브랜드로 유명한 도브는 2004년 ‘리얼 뷰티 캠페인’을 시작했다. 전형적인 모델보다 몸집이 크고 피부색이 다양한 여성들이 흰 속옷만 입고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대형 광고판을 뉴욕 타임스퀘어 등에 내걸었다. 도브는 모든 여성에겐 아름다운 부분이 있다는 메시지를 퍼뜨렸다. 그해 도브 매출은 전년 대비 2배로 뛰었다. 도브는 리얼 뷰티 캠페인을 이어왔고, 2020년까지 소녀 200만명에게 자기 긍정 교육을 진행했다.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가 최근 여성 25명의 맨가슴 사진을 트위터에 공개했다. 다양한 크기와 모양, 피부색은 물론 좌우 비대칭, 백반증, 유방암 수술 흔적이 남은 가슴까지 포함했다. 아디다스는 사진과 함께 “우리는 여성들의 모든 모양과 크기의 가슴이 지지받고 편안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고 남겼다.
자기 몸 긍정주의’ 캠페인의 일환이지만 우리나라에선 선정성 논란으로 소비되는 모양새다. 남초 커뮤니티 유저들은 “원본을 절대 찾아보지 말라”고 경고한다. 성적 매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할머니 가슴만 모아놨다고 조롱하면서다.
아디다스는 몇 년 전 영국에서 ‘자기 몸 긍정주의’ 캠페인을 시도했다가 역풍을 맞은 적 있다. “당신의 몸을 받아들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내세운 화보 모델이 가슴 풍만한 TV 진행자, 유명 휘트니스 강사, 플러스 사이즈 모델 등 각 부문에선 전형적인 이상형이라 볼 수 있어서다. 이에 비하면 새 캠페인은 ‘자기 몸 긍정주의’의 본질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간 셈이다.
『페미니즘을 팝니다』의 저자 앤디 자이슬러는 성공한 ‘도브’ 캠페인에도 결국 ‘문제 부위’를 교정하기 위해 돈을 더 쓰라는 숨은 의도가 담겨있다고 지적한다. 아디다스가 트위터에 남긴 ‘SupportIsEverything’ 해시태그가 “(다양성을) 지지하는 게 전부”라는 의미에 가까운지, “(가슴을) 받쳐주는 게 전부”라는 의도에 더 가까운지는 실제 소비자 경험이 어떻게 이어질지에 달렸을 듯하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2.16 매너
매너(manner)는 라틴어(Manusarius)에서 유래한 말이다. 마누스(Manus·손)와 아리우스(Arius·방법)의 합성어다. 오래된 조어인 만큼, 현세에 통용되는 예의범절이라기 보단 겉으로 나타나는 습관, 몸가짐을 일컫는 말로 추정된다.
고대 그리스 남성들 사이에선 손바닥을 보이거나 팔을 들어 올리는 게 유약함의 증거로 여겨졌다. 매너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반면 19세기 유럽에서는 정반대로 ‘나는 무기를 숨기고 있지 않다’고 증명하는 제스처, 악수가 인사의 상징이 됐다. 문명이 진화할수록 통용되는 매너의 종류가 변화해온 것이다.
현재 서양식 식사 예절의 한 축을 차지하는 포크 역시 중세 유럽에서는 금기시됐다. ‘악마의 삼지창’을 닮았다는 종교적 이유에서였다. 그리스와 중동에서 애용되던 포크가 알음알음 유럽에 전해졌을 때도 사람들은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근대화가 시작된 18세기 이후에야 포크는 유럽 식탁을 점령했다.
이후 매너에는 공적 의미도 부여됐다. 20세기 독일 사회학자 노버트 엘리아스는 저서 『매너의 역사』에서 “매너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사회적 불평등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정의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는 영화 ‘킹스맨’의 유명 대사 역시 사회적 의미에 무게 중심이 실려 있다.
그래서일까. 근·현대사에서 정치 지도자들의 매너가 결정적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1941년 백악관을 방문한 처칠은 목욕한 뒤 나체로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루스벨트가 매너 없이 불쑥 들어왔다가 알몸을 보고 “실례했다”며 나가려 했지만, 처칠은 “보다시피 나는 당신에게 숨기는 것이 없소”라며 상대가 무안하지 않게 응대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참전이 절실했던 영국 입장에서는 처칠의 순발력 있는 대화 매너가 외교적 역할을 한 셈이 됐다.
대선을 코앞에 둔 한국에서도 매너 논쟁이 벌어졌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기차 좌석에 구둣발을 올린 걸 두고 여당이 공격하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8년 전 식당에서 흡연한 사진을 끄집어내 야당은 역공에 나섰다. 유권자들로선 한숨 나오는 장면이다. 80년 전 처칠의 위트 있는 대화 매너를 기대하는 건 무리겠지만, 국민에 대한 매너는 지켜야 하는 것 아닐까.
02-17 회색 코뿔소
세계정책연구소(WPI) 소장인 미셸 부커는 2013년 다보스포럼에서 ‘회색 코뿔소(gray rhino)’란 개념을 제시했다. 위험의 징조가 지속해서 나타나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음에도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을 빗댄 것이다. 코뿔소는 3m가 넘는 길이에 2t이 넘는 육중한 무게를 자랑한다. 그러니 코뿔소가 다가온다면 누구나 땅의 울림을 듣고 느낄 수 있다. 부커는 회색 코뿔소의 대표 사례로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들었다.
한국의 연금개혁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국민연금이 현 제도를 유지할 경우 2039년이면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적자로 돌아선다. 740조원 기금마저 2055년이면 바닥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지난 13일 “2055년에 수령자격이 생기는 1990년생부터는 연금을 한 푼도 못 받을 수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정부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전망이지만, 그만큼 연금개혁이 필요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렇듯 절박한 상황이지만 연금개혁은 속도를 못 내고 있다. 정권이 시작할 때 ‘해보겠다’고 했다가 ‘해봤는데 안 되더라’로 끝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2007년 노무현 정부 당시 소득대체율을 2028년까지 40%까지 줄인 이후 국민연금 개혁은 15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이해관계가 첨예해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미래세대에 부담을 떠넘기지 않으려면 연금개혁은 가야만 하는 길이다.
지난 3일 대선후보 TV토론회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국민연금 개혁은 누가 돼도 하겠다, 공동선언을 하는 게 어떤가”라고 제안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좋은 의견”이라고 했고,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안 할 수가 없으니까 약속을 하자”고 답했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도 웃음으로 동의했다. 즉석 합의에 가까웠지만, 표에 도움되는 퍼주기 공약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더 내고 덜 받는’ 연금개혁을 약속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후속 조치로 각 후보가 방법과 시기 등 연금개혁의 구체적 실행 방안을 내놓길 기대한다. 연금개혁은 ‘그렇게 하십시다’는 선언적 합의로 어물쩍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대지를 흔드는 진동이 느껴진 지 오래다. 맹렬히 돌진해오는 회색 코뿔소와 만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2.18 스토킹처벌법
스토킹(stalking)은 ‘몰래 다가가다(stalk)’라는 뜻에서 파생했다. 상대방 의사에 반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해 공포와 불안감을 조성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외국에선 그룹 비틀스 멤버였던 존 레넌(1940~1980)과 디자이너 잔니 베르사체(1946~1997)가 스토커에 의하여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면서 스토킹이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한국에서도 스토커에 시달리는 유명인 사례를 통해 스토킹이 범죄 행위로 알려지게 됐다. 1998년 가수 김창완씨가 11년 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한 남성 팬을 고소한 것이 시작이다. 김씨가 세 차례 집을 옮기고 10여 차례 전화번호를 바꿨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시에는 미국처럼 ‘접근금지 조치’ 같은 법규가 없어 이 남성은 폭행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스토킹은 집착 정도가 심해지면 폭행·상해·살인 등 강력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경미한 수준으로나마 스토킹을 처벌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은 2013년 경범죄처벌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부터다. 신설된 ‘지속적 괴롭힘’ 조항을 위반할 경우 1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할 수 있게 됐다. 스토킹이 그 자체로 처벌과 제재 대상으로 명문화된 것은 지난해 3월 ‘스토킹처벌법’ 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다. 1999년 제15대 국회에서 스토킹을 독자적인 범죄로 처벌하기 위한 스토킹 법안이 처음 발의된 지 22년 만이었다.
그런데 막상 법을 만들어두니 스토킹 혐의가 얼마나 명백한지 아닌지를 따지다가 가·피해자 분리에 공백이 생기고 있다. 지난 14일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던 서울 구로구의 40대 여성이 전 남자친구인 50대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진 사건이 대표적이다. 경찰이 사건 발생 이틀 전 이 남성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검찰은 스토킹 혐의에 대한 보완 수사를 이유로 반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스토킹은 과거와 전혀 다른 새로운 치안 수요다. 무엇보다 행위 발생 초기 단계부터 저지해서 큰 범죄로 나아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해자의 유치장 입감에 대해 사전승인이 아닌 사후승인 등 전향적인 법 적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을 ‘노력하면 못 이룰 게 없다’는 원래 뜻보다 ‘몇 번 찍어도 안 넘어가면 그게 스토킹’이라는 재해석으로 경계하게 되는 요즘이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2.21(월) 슬세권
슬세권. 슬리퍼와 세권(勢圈)을 합친 말로, 슬리퍼 같은 편안한 복장으로 집 옆 카페나 편의점·마트·영화관·쇼핑몰 같은 생활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주거 권역을 말한다. ‘역에서 반경 500m 내외 지역’을 뜻하는 역세권에서 파생된 단어다. 스세권(스타벅스+세권), 맥세권(맥도날드+세권)으로도 불린다. 코로나19 여파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동이 편한 역세권보다 슬세권을 찾는 수요가 늘면서 등장한 신조어다.
이전에도 대형 쇼핑시설 건립 소식은 부동산 시장에서 ‘호재’로 불렸다. 이런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 사람이 몰리면 집값이 잘 오른다는 의미라서다. 지방선거 때마다 지자체장 후보들의 단골 공약으로 대형 쇼핑시설 건립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요즘 정치권이 ‘광주 복합쇼핑몰 건립’으로 시끌시끌하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가 지난 16일 더불어민주당의 텃밭인 광주 유세 현장에서 복합쇼핑몰 유치로 표심 몰이에 나서면서다. 윤 후보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광주 시민이 원한다’ ‘소상공인 죽이는 일’이라며 공방을 벌이고 있다.
광주에도 복합쇼핑몰이 들어설 뻔했다. 신세계가 2015년 광주 서구 화정동 일대 부지를 확보, 건립을 추진했지만 결국 무산됐다. 중소상인에게 타격을 주고 지역상권을 해친다는 이유였다. 이런 기조는 2010년 초 정점을 찍었다. 2012년 4월 한 달에 두 번 의무적으로 휴업하고 영업시간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이 시행됐다. 이 규제는 소비 중심이 ‘오프라인→온라인’으로 바뀐 지금도 시행 중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국내 소비시장에서 오프라인 비중은 2015년 70%에서 2020년 50%로 줄었다. 지난 2년간 전국 대형마트 매장은 406개에서 384개로 감소했다. 의무휴업이 지역상권 활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과도 많다. 2012년 이후 5년간 소상공인 매출은 되레 6.1% 감소했다. 오프라인 매장을 규제해서 지역상권에 도움이 될법한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도 국회엔 복합쇼핑몰·백화점으로 의무 휴업을 확대하는 유통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지방선거가 아닌 대통령 선거다. 일부 지역의 쇼핑몰 건립 여부가 아니라 유통법을 현실에 맞게 정비할 방안이 쟁점이어야 마땅치 않을까.
02.22 무속
고대국가의 왕호인 단군이나 차차웅은 ‘무당’이라는 뜻이다. 그 시절 지배자는 무속의 권위를 통해 정치권력을 정당화했다. 이후 불교와 유교가 차례로 지배적 종교 지위에 올랐고, 무속은 공공 및 정치 분야에서 힘을 잃어갔다. 조선시대에는 무속을 탄압할 목적으로 3년마다 한 번 무당 명부를 작성하고 이에 근거해 정식으로 세금을 거뒀다.
16세기 등장한 사림파는 무당 폐지론을 주장한다. 세금을 걷으면 나라가 정식 직업으로 인정하는 셈이니 불법화해 뿌리를 뽑자는 논리였다. 그러나 무세는 국방비, 관청 운영비, 지방관의 판공비 등으로 활용됐기에 1895년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야 폐지된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1915년 ‘포교규칙’에서 신도·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유사단체’로 규정해 단속 근거를 마련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함께 본격화한 미신타파 운동으로 수많은 굿당이 파괴됐고, 당산굿·풍어제 등의 마을굿도 사라졌다.
국가가 주도한 무속 타파의 역사는 이렇듯 길다. 그렇다고 아예 없애지는 못했다. 대표적인 마을 수호신인 산신을 모시는 신앙은 불교 사찰의 산신각으로 스며드는 등 민속신앙은 외래 종교에 융합되기도 했다. 한때는 국가와 공동체를 이끌어가던 민속신앙은 이제 운을 점치고 복을 비는 사적인 영역, 한국인의 무의식에 남아있는 듯하다.
한국민속신앙사전』(국립민속박물관)은 “무속은 현세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추구하는 현세 긍정의 종교”라서 오늘날에도 생존형 종교로서 일정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해석한다. 도덕적 가치보다 실존적 가치, 내세의 구원이나 고매한 이상의 실현 대신 현세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을 해결하는 게 보통 사람들에겐 더 시급한 일이라서다. 인생은 한 번뿐이니 현재를 즐기라는 오늘날의 ‘욜로(Yolo)’ 가치관과도 들어맞는 듯하다.
대선을 앞두고 무속 논란으로 시끄럽다. 몇몇 무속인은 후보 혹은 배우자의 관상을 봐주거나 점을 쳐줬다고 증언했다. 통계청 ‘서비스업조사’ 자료에 따르면 점술 및 유사 서비스업 종사자는 2019년 기준 1만745명, 1인당 연평균 매출이 1600만원대에 그친다. 대부분 혼자 운영하는 영세사업자다. 대선 후보라면 이들에게 자기 운명을 물을 게 아니라, 거꾸로 이들의 앞날을 고민해줘야 할 듯하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2.23 막말
한국 정치에선 막말 논란이 선거 막판 판세를 흔든 경우가 적지 않았다.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는 정동영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의 발언이 논란이 됐다.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다. 곧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들이니까 집에서 쉬셔도 되고…”란 말이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다. 정 의장은 비례대표 후보직을 내려놓고 백의종군해야 했다. 당 지지율도 하락했다.
2020년 21대 총선을 앞두고는 차명진 당시 미래통합당 후보(부천병)의 ‘세월호 텐트’ 발언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차 후보는 당시 방송토론에서 세월호 유가족이 광화문 세월호 텐트에서 부적절한 행위를 했다는 발언으로 당 윤리위로부터 ‘탈당 권유’ 조치까지 받았다. 하지만 차 후보는 징계 이후에도 “당장 세월호 텐트의 진실을 밝히라”는 주장을 이어갔다. 통합당은 대다수 수도권 격전지에서 패하며 의석수가 크게 쪼그라들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정태옥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의 이른바 ‘이부망천’(이혼하면 부천 가고 망하면 인천 간다) 발언이 선거 막판 크게 논란이 됐다. 탄핵 후폭풍으로 가뜩이나 열세였던 야당은 이 발언으로 더 위축됐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여야 지도부가 막말 경계령을 내렸다. 이낙연 민주당 총괄선대위원장은 지난 9일 선대위 지휘에 나선 직후 의원들에게 SNS 자제령을 내렸다. 민주당 선대위 역시 각 시도당에 공문을 보내 ‘실언·실화 주의’ 지침을 내리고 있다. 국민의힘에서는 권영세 선대본부장이 “국민정서상 빈축을 살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이 나오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 바란다”는 문자메시지를 당원들에게 보냈다.
지도부의 강력한 의지 때문인지, 다행히도 선거를 2주 앞둔 시점까지 양당에서 판세를 뒤엎을 만한 막말 설화는 없는 상태다. 대통령 선거 특성상 대중의 눈이 후보에 쏠리면서 다른 정치인들의 설화를 운 좋게 상쇄했을 가능성도 있다.
오히려 아슬아슬한 건 후보들이다. 지난 21일 열린 첫 법정 TV토론에서 이재명·윤석열 후보의 난타전은 인신공격을 방불케 했다. “이재명 게이트” “허위면 사퇴하나” “내가 가진 카드면 윤석열은 죽어” 등 노골적 비방이 후보들 입에서 나왔다. 자칫 막말 논란으로 비화할 가능성마저 엿보였다. 당원들에게 막말 경계령을 내리기 전에 후보들부터 평정심을 찾아야 한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2.24 깨알 글씨
자세히 봐야 보이는 것이 있다. 계약서에 인쇄된 큰 글씨와 달리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촘촘하게 박힌 깨알 글씨가 그렇다. 영어로는 파인 프린트(fine print)라고 하는데 케임브리지 사전은 이렇게 풀이한다. ‘경우에 따라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sometimes in the hope that it will not be noticed)으로 작게 인쇄된 계약서 본문의 글씨’라고.
몇 년 전까지 TV만 틀면 나왔던 ‘상담만 받아도 에어프라이어를 준다’는 보험 광고에서는 깨알 글씨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흘러나왔다. 깨알 글씨로 적힌 ‘가입 시 유의사항’을 매우 정확한 발음이지만 도저히 일반인이 말하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속도로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식이다. 소비자 불만이 커지면서 2018년 9월 금융위원회는 글씨를 키우고 낭독 속도를 느리게 하며, 어려운 용어를 쉽게 바꾸는 개선안을 내놓았다.
최근에는 ‘합격자수 1위’ ‘공무원 1위’라고 광고했던 교육 서비스업체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 철퇴를 맞았다. 유명 개그맨이 부른 중독성 있는 광고송 ‘공무원 시험 합격은 ○○○’로 유명한 업체다. 이 업체는 버스 외부에 ‘공무원 1위’라고 광고했는데, 합격자수가 아닌 여론조사기관의 선호도·인지도 설문 결과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을 깨알 글씨(광고의 4.8~11.8% 면적)로 안내하긴 했다. 매의 시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깨알 글씨를 읽기 위해서 달리는 버스를 멈춰 세워야 할 판이다.
이렇듯 꼼수로 숨겨둔 깨알 글씨는 판매자에 유리한 정보만 노출하는 소비자 기망 행위다. 당연히 정부가 피해 예방과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법과 제도로 모든 광고와 계약서의 형식을 규격화·표준화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규제를 피해 기상천외한 변종 깨알 글씨가 계속 생겨날 가능성이 크기에, 소비자도 꼼꼼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대선이 2주 앞으로 다가왔다. ‘누구도 마음에 안 든다’는 지지 후보 없는 유권자라도, 후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는 있다.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희망의 메시지 뒤에,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고 조용하게 숨겨둔 깨알 글씨가 있을지 모른다. 눈과 귀를 활짝 열 시간이다.
02.25 문과 침공
전통적으로 대학 입학시험의 문과(文科) 톱은 서울대 법과대학을 지망했다. 2009년 서울대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이 개원하기 전까지는.
문과 출신 대입 전체 수석의 진학 경로를 한번 살펴보자. 예비고사(1969~1981년)와 학력고사(1982~1993년) 시절 서울대 법대에 6명, 서울대 경제학과에 5명이 진학했다. 전체가 아닌 인문계 수석까지 포함하면 서울대 법대가 다수다. 대학수학능력시험(1994년~) 개편 이후에도 문과 출신 전체 수석은 대부분 서울대 법대를 선택했다.
2008학번이 서울대 법대의 마지막 학번으로 남은 이후 문과 톱은 서울대 경영학과로 옮겨갔다. 고려대 행정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인 2022학년도 수능의 유일한 전 과목 만점자도 서울대 경영학과로 진학한다고 한다.
그런데 수능 만점자가 선택한 서울대 경영학과에서 올해 이변이 생겼다. 정시에서 서울대 경영대학(경영학과)에 최초 합격을 하고서도 8명이 등록하지 않은 것이다. 경영학과에 추가 합격자가 나온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원인은 2022학년도 수능이 지난해 처음 문·이과 통합으로 치러진 영향으로 풀이된다. 핵심은 수학이었다. 수험생들은 문·이과 구분 없이 1~22번까지 공통과목을 풀고, 나머지 선택과목 8문제를 해결한 뒤 한꺼번에 성적을 받았다. 이과생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초(超) 문과 영재’가 두각을 나타낼 수 없는 환경이다.
앞으로도 이과생들의 ‘문과 침공’은 두드러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대다수 대학이 정시모집에서 자연계열엔 수학 미적분·기하, 과학탐구 응시 등의 조건을 걸어놓고, 인문계열에는 별다른 제한을 두지 않은 탓도 있다. 서울대 경영학과에서 8명이 이탈한 것도 교차 지원한 이과생이 중복 합격한 타 대학 의약계열을 선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문과생들 사이에서 자조적으로 쓰이는 ‘문송(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은 그나마 취업철에나 하는 얘기였다. 앞으론 대입을 앞두고서부터 문송을 되뇌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벌써 미적분이나 기하로 수학 과목을 바꾸겠다는 문과생이 나온다고 한다. 수능 점수를 조금이라도 올리기 위해서다. 정부가 문·이과 칸막이를 허물기로 한 건 융합형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서였다. 통합수능의 취지가 ‘수리(數理) 전성시대’로 흘러가선 안 된다.
02.28(월) 셀프치료
1990년대만 해도 국내에서 셀프서비스(Self-service)는 낯선 용어였다. 음식점 벽에 붙은 ‘셀프’ 문구를 보고 “새 메뉴인가 봐”라며 쑥덕거렸고 종업원에게 “어디 손님한테 물을 떠다 먹으라고!”라며 소리치는 어르신도 종종 마주쳤다. 셀프서비스는 고객이 필요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스스로 해결하는 판매 방법을 말한다. 주유소에서 스스로 자동차에 주유하고 카페에서 주문한 음료를 직접 가져다 먹는 식이다.
셀프서비스의 역사는 기원전 215년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전에 있는 성수(聖水)대가 동전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성수가 흘러나오는 구조였다. 고객 스스로 계산을 하고 제품을 찾은 셈이다. 셀프서비스의 보편화 이유는 공감대 형성이다. 주인은 인건비를 줄이는 대신 제품을 싸게 제공하고 고객은 ‘그림자 노동’을 하는 대신 원하는 제품을 저렴하게 이용한다.
코로나19 발생 3년 만에 ‘셀프치료’ 시대를 맞았다. 지난 7일간 6세 아이와 함께 자가격리를 하며 겪은 K방역은 엄혹했다. 아이는 신속항원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지만, 확진을 위해 유전자 증폭검사(PCR)를 받아야 했다. 고열로 축 처진 아이를 업고 보건소 앞 대로변에서 3시간을 기다려 PCR을 했다.
39.6도의 고열에 시달리며 토하는 ‘일반관리군’인 아이는 아직 어려 어느 부위가 얼마나 아픈지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평소 자주 다니던 이비인후과에 연락하니 ‘지정 병원’에서 비대면 진료를 하라고 했다. 보건소는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고 집 근처 응급실에선 진료를 하려면 6시간을 기다리라고 했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약국에서 산 해열제를 먹이는 것뿐이었다. 지정 병원 목록 등 문자를 받은 것은 확진 통보 이틀 후였다.
제20대 대통령 후보들이 경쟁하듯 ‘방역패스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지금도 하루 확진자가 17만 명을 오가고 70만 명 이상이 셀프치료 중이다. 국민도 방역패스가 힘을 잃었고 현재 의료체계로 확진자를 모두 감당하기는 포화라는 걸 안다. 셀프치료에 대한 공감대는 형성됐지만, 문제는 시행 방식이다. 현재로는 ‘셀프치료=방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방역패스를 폐지하면 셀프치료자 수는 더 늘 수밖에 없다. 탄탄한 대비가 필요하다. 셀프치료가 ‘셀프생존’이 되어선 안 된다.◎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