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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51] 7월 혁명과 언론 자유 - [60] 영국의 폭군 리처드 3세

상림은내고향 2022. 2. 25. 21:24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조선일보 2021- 2022

2021.10.12 

[51] 7월 혁명과 언론 자유

프랑스대혁명 후 30년… 파리, 언론 자유를 위해 다시 봉기하다

언론 탄압에 봉기한 파리 시민들 - 23년간 망명한 끝에 왕위를 되찾은 루이 18세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자유의 남용을 방지하는 법령에 따르는 한에서’라는 단서 조항을 붙였다. 언제든 언론 자유를 억압할 구실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혁명 이전’으로 돌아가길 원했던 왕실과 귀족은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들에 재갈을 물리려 했다. 자유주의 세력이 의회 다수를 차지하자 국왕은 “정기 간행물의 자유를 중단시킨다”고 선포하기까지 했다. 1830년, 신문기자들의 저항을 시작으로 시민들이 일제히 투쟁에 나섰다.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려 했던 왕조는 결국 권력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림은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을 담은 프랑스 화가 이폴리트 르콩트의 ‘1830년 7월 29일, 로한 거리 전투’. 카르나발레 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1830년 7월 27일에서 29일까지 소위 ‘영광의 사흘(Trois Glorieuses)’ 동안 파리 시민들의 봉기로 부르봉 왕정이 무너졌다. 국왕 샤를 10세는 가족들과 함께 도망치듯 영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의 불똥이 주변 국가들로 튀어 이해에 유럽 각지에서 ‘자유 만세!’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1789~1799년의 프랑스 대혁명 이후 30년 만에 파리는 다시 한번 ‘혁명의 수도’가 되었다. 자유를 얻기 위한 뜨거운 투쟁의 제일선에는 언론인들이 있었다.

 

부르봉 가문이 왕위를 되찾은 것은 나폴레옹 체제가 몰락한 1814년의 일이다. 프랑스혁명 와중에 기요틴으로 처형당한 루이 16세의 동생이 23년의 해외 망명 끝에 루이 18세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차지했다. 그는 예전의 절대왕정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국민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래서 국민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내용의 ‘헌장(Charte)’을 준수하겠다고 스스로 선언했다. 헌장에서 특기할 사항 중 하나가 언론의 자유다.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출판하고 인쇄할 권리가 있다.” 다만 여기에는 단서 조항이 붙어 있었다. “자유의 남용을 방지하는 법령에 따르는 한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부는 ‘남용’을 막는다는 구실로 언제든지 언론 자유를 억압할 근거를 만들어 둔 셈이다.

 

‘남용 방지’ 구실로 언론 자유 억압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권력을 잡고 마지막 일전을 치른 소위 백일천하 당시 국외로 도주했다가 1815년 다시 귀국한 루이 18세 정부는 훨씬 더 보수·반동적이 되었다. 게다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시기에 피신했다가 돌아온 망명귀족(émigré)들은 시대의 변화를 깡그리 무시하고 혁명 이전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무모한 생각에 젖어 있었다. 이들의 뇌리에는 자신들을 핍박했던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복수뿐이었다. 울트라(ultra)라 불리는 이 세력은 말하자면 국왕보다도 훨씬 더 강경한 왕당파였다. 전국에서 고작 10만명에 불과한 귀족·부유층 유권자들이 강경한 울트라들을 의원으로 뽑아 파리로 보냈고, 이렇게 구성된 의회는 당연히 언론 자유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들은 검열과 사전 신고(신문사를 설립하기 전에 정부의 심사와 인가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선동적인 기사’의 출판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언론 문제는 의회 내에서 뜨거운 이슈로서 계속 공방이 이어졌다. 1819년 자유주의 세력이 의회의 다수를 차지했을 때 검열, 사전 신고, 사상 범죄 등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1820년 루이 18세의 조카인 베리 공의 암살 사건 이후 분위기가 급변하여 권력을 잡은 울트라가 검열과 사전 신고를 다시 부활시켰다.

 

아돌프 티에르, 루이 18세, 샤를 10세

 

언론 문제가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은 그만큼 언론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의 신문 발행 부수는 모두 합쳐서 6만부에 불과했다. 대신 카페나 독서실에서 많은 사람이 돌려가며 읽거나, 혹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가 큰소리로 신문을 읽어주었으므로 발행 부수에 비하면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특히 중간층 이하 사람들이 신문을 접하는 기회가 갈수록 더 늘었다. 파리를 방문한 한 독일인은 시민들이 신문을 읽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모든 사람이 신문을 읽고 있다. 마부는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부석에서, 과일 장수는 시장에서, 문지기는 수위실에서 신문을 본다. 아침에 팔레루아얄 광장에는 천 명이 손에 신문을 들고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걸어간다.” 파리 시민들은 분명 언론을 통해 정치 문제와 사회 변화에 눈떠 갔다. ‘콩스티튀시오넬’이나 ‘피가로’ 같은 정부에 비판적인 자유주의 신문들이 ‘코티디엔’ 같은 친정부 신문들에 비해 구독자가 3배나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감을 느낀 정부가 비판적 언론에 재갈을 씌우려 했다.

 

1824년 루이 18세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인 아르투아 공이 샤를 10세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선왕만큼의 정치적 감각도 없었고, 구태의연한 반동적 정책을 힘으로 밀어붙이려 했다. 예컨대 신성모독죄를 두어서 성당의 제기(祭器)를 훔친 자는 사지 절단 혹은 참수형에 처했고, 장자 상속권을 부활시켰으며, 프랑스혁명 시기에 토지를 몰수당한 지주에게 20배의 보상을 주려 했다. 보수적 문인·정치가인 샤토브리앙마저 천년 전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냐며 항의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왕실의 과도한 조치들이 역풍을 일으켜 선거에서 자유주의 세력이 다수를 차지했다. 샤를 10세는 고루하고 유치한 왕정주의자 폴리냐크를 등용해서 이 흐름에 맞서려 했다. 의회는 소집되자 곧 현 정세에 대해 국왕에게 항의하는 결의문을 전달했고, 그러자 국왕은 지체 없이 의회를 해산했다. 그러나 선거를 다시 한 결과 역시 현 국왕에게 비판적인 의원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직장 잃은 식자공들 가장 먼저 봉기

이 정도라면 사태를 파악하고 현명하게 대처했어야 하지만 국왕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왕정은 자살의 길로 들어섰다. 폴리냐크는 헌장 14조에 따라 입법 절차를 밟지 않은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고 선포했다. 그것이 1830년 7월 25일의 4개 칙령이었다. 의회를 다시 해산하고, 아예 정권에 유리한 방식으로 투표 방식을 개변하려 했으며, 언론 자유를 억압했다. 현재 신문들은 ‘질서의 모든 기반을 흔들고 있고’ ‘증오를 부추기며’ ‘사람들에게 권력에 대한 도전과 적대의 정신을 불어넣으려’ 한다고 비난하며, “정기 간행물의 자유를 중단시킨다”고 선포했다.

 

‘나시오날’지의 편집인이었던 아돌프 티에르가 저널리스트 44명의 서명을 받아 항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가 처한 이 상황에서 복종은 더 이상 우리의 의무가 아니다. 신문기자들이 권력에 대한 저항의 첫 번째 모범을 보여야 한다.”

 

경찰이 신문사들에 들이닥쳤다. 인쇄 기계를 빼앗고 사무실을 폐쇄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성명서가 실린 신문들은 널리 퍼져갔고 기자들이 시내에서 시민들에게 큰소리로 성명서를 읽고 설명해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의회 내 투쟁을 관망하던 시민들이 무도한 조치를 일삼는 부르봉 왕조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며 투쟁에 돌입했다. 신문사가 폐쇄되면 일자리를 잃을까 우려한 식자공들이 제일 먼저 경찰들과 충돌했고, 곧이어 장인(匠人)들과 점포 주인들, 학생들이 가담했다. 시내 각지에 바리케이드가 만들어지고 봉기의 상징인 삼색기가 휘날리더니 시민들이 ‘부르봉 왕조 타도’를 외쳐댔다. 사흘 동안의 거리 투쟁 중 시민 700명이 사망하고 2000명이 부상했고, 진압 경찰 또한 150명이 사망하고 600명이 부상했다. 결국 봉기 세력이 루브르궁과 튀일리궁을 접수했고, 샤를 10세는 권력을 내려놓아야 했다.

 

시민들이 폭압적인 정권을 타도하고 자유를 쟁취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의미의 자유를 원했던 것일까? ‘영광의 사흘’을 증언하는 들라크루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는 연미복을 입은 중산층 시민, 노동자, 학생들이 함께 무장한 채 시가전을 벌이는 모습이 보인다. 지난 정권을 부술 때까지는 분명 상이한 계층 사람들이 함께 싸웠으나 혁명의 성과는 노동자나 학생이 아니라 ‘연미복 신사’가 차지했다. 혁명으로 공석이 된 대권의 향방은 소수 세력의 기획·공모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루이 필리프라는 의외의 인물이 권력을 잡은 후 부유한 계층의 이해를 대변하게 된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프랑스대혁명이 아니라 7월 혁명 묘사한 작품… 손에는 1816년식 육군 소총

 

▲1830년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부분). 들라크루아의 1830년 작. /위키피디아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흔히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나타낸 그림으로 오해하곤 하지만 실은 1830년 7월 혁명을 그린 것이다. 해방의 상징인 프리지아 모자를 쓰고 삼색기를 손에 잡은 채 맨발로 거리를 누비며 민중을 인도하는 ‘자유의 여신’은 이후 혁명의 아이콘이 되었다. 주인공은 상반신 누드에 그리스 조각과 같은 얼굴 모습을 한 ‘여신’의 풍모를 보이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여인의 모습도 띠고 있다. 깨끗한 피부로 표현해야 하는 고전적인 여신과는 달리 더럽혀진 피부에 땀이 흐르고 겨드랑이 털도 고스란히 그려져 있으며, 총검이 끼워진 실제의 무기(1816년 모델 육군 소총)를 잡고 있다. 비평가들이 ‘거리의 여인’ 앞에서 혐오감을 드러내서 이 그림은 오랫동안 창고에 보존되었다가 1860년에 가서야 다시 일반 관객들에게 공개되었고 20세기가 되어서야 걸작으로 재평가되었다.

 

여신의 지휘를 받으며 최후의 돌격에 참여한 인물 중 후일 혁명의 성과를 누린 사람은 노동자도, 가브로슈(Gavroche, 위고의 작품에 등장하는 파리의 소년)도 아닌 연미복을 입은 신사였다.

 

[52] ‘쇼통’ 국왕, 7월혁명으로 왕위에 오르고 2월혁명으로 쫓겨나다

프랑스의 마지막 왕 ‘우산왕’ 루이 필리프

프랑스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린 ‘7월 혁명’ 뒤 혁명 주도 세력은 혁명의 대의를 계승하면서 두려움은 막아줄 중립적 인물을 내세우길 원했다. 부르봉 왕실의 방계인 오를레앙 가문 출신 루이 필리프는 딱 알맞은 선택이었다. 그는 의회에서 왕정과 공화정의 타협안으로 통과시킨 ‘1830년 헌장’을 준수하겠다고 선서한 뒤,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 ‘프랑스인의 왕’으로 취임했다. ‘7월 왕정’의 시작이었다. 그림은 1830년 8월 9일 의회에서 선서하는 루이 필리프 1세의 모습. 낭만주의 역사화가 외젠 드베리아 작, 베르사유궁 프랑스 역사박물관 소장. /게티이미지코리아

 

1830년 ‘7월 혁명’으로 부르봉 왕조가 무너졌다.<본지 10월 12일 자 A34면 ‘7월 혁명과 언론 자유’ 편 참조> 이제 이 나라의 정체(政體)는 어찌 될 것이며, 권력은 누가 쥘 것인가? 길거리에서 피 흘리며 싸운 민초들의 바람과는 달리 권력은 엘리트가 탈취해 가져갔다. 여전히 부와 권력을 누리는 귀족들과 성장해 가는 부르주아들은 공포정치의 추억이 서린 공화정보다 계몽된 자유주의 왕정을 선호했다. 이런 일을 맡기기에 딱 맞아 보이는 인물이 오를레앙가의 루이 필리프였다.

 

머리는 왕당파, 엉덩이는 공화파

오를레앙 가문은 프랑스 왕실 부르봉 가문의 방계다. 루이 13세의 차남, 다시 말해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후손으로서, 왕권 승계 문제가 생기면 촌수를 따져 왕위를 차지할 수도 있는 집안이지만, 실제로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터지자 루이 필리프의 아버지는 왕족이면서도 혁명에 적극 동참하여 이름도 스스로 에갈리테(Egalité·'평등’)로 바꿨고, 심지어 루이 16세의 처형에도 찬성표를 던졌다. 그렇지만 그 자신이 쿠데타에 참여했다는 혐의를 받아 반혁명 분자로 몰려 처형당했다. 아들 루이 필리프는 스위스⋅영국⋅시칠리아를 떠돌며 망명 생활을 하다가 나폴레옹 몰락 이후 왕정 복고 시기에 귀국했고, 자기 가문의 지위와 재산도 되찾았다. 그렇지만 왕권을 차지한 부르봉 왕실과는 거리를 두고 겸손한 자세로 잘 처신하고 있었다. 7월 혁명 후에 부르주아와 자유주의 귀족들이 보기에 이런 사람이야말로 자신들의 계획에 어울리는 인사였다. 혁명의 대의를 어느 정도 계승하면서도 혁명의 공포를 막아줄 중립적 인물로 보았던 것이다. 다만 공화정을 바라고 혁명을 일으킨 군중이 과연 그를 받아들일 것인가가 문제였다.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 인물이 라파예트다.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대혁명에 모두 참여해서 ‘두 세계(구대륙과 신대륙)의 영웅’이라 불리며 높은 인기를 누리던 혁명의 베테랑 라파예트가 루이 필리프가 권력을 잡는 데 보증인 역할을 했다. 민중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를 루이 필리프에게 들려주고 파리 시청 발코니로 데리고 나와 포옹했고, 이를 지켜본 군중이 모두 환호했다. 이 한 번의 쇼로 사실상 모든 게 결정되었다. 이후 그는 의회에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프랑스 왕’이 아니라 ‘프랑스인의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샤토브리앙 같은 전통주의자가 볼 때에는 ‘길거리 권력’과 전통적 국왕 권위를 합친 이 체제는 ‘잡종 사생아’였다. 코미디 같은 퍼포먼스를 통해 권력을 잡아 정당성이 의심스러운 데다가, 혁명과 보수 사이에 중립을 지킨다는 태도도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이편저편 없이 ‘정중앙(juste-milieu)’의 정책을 편다고 하지만, 머리는 왕당파, 엉덩이는 공화파라고 놀림을 받았다.

 

7월 왕정은 결코 중립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명사층(notables), 다시 말해 토지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연합 계층이 지배하되, 갈수록 부르주아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국왕 자신은 토지 귀족 신분이면서 돈 많은 부르주아를 대변했지만 겉으로만 민중을 위하는 척했을 뿐이다. 그는 제대로 된 정책을 펼치는 대신 허위의 치장에 몰두했다. ‘시민왕’은 실제로 시민들에게 다가가기보다는 그러한 ‘인상’을 주는 데 골몰했다. 소박한 마차를 타고 순시하는 모습을 연출하곤 했고, 파리 혹은 공식 방문한 지방 도시들의 시청 발코니에 나와서 군중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했다. 평소에는 부르주아 의상을 입고 우산을 든 채 혼자 파리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상점 앞에서 진열된 상품들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에게 중요한 소품은 우산이었다. 늘 우산을 들고 있어서 그는 ‘페팽(M. Pépin·’우산’)’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어느 날 비가 억수같이 내리데 우산 없는 한 여성 노동자를 만났다. 국왕은 우산을 함께 쓰고 공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So sweet~! 얼마나 부드러운 지도자인가! 루이 14세가 태양왕이라면 그는 우산 왕으로 통했다.

 

‘두 세계의 영웅’ 라파예트가 보증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기회에 자신의 애민 정신을 더욱 멋있게 연출할 기회를 얻었다. 이번에는 비를 피하는 게 아니라 늠름하게 비를 맞는 게 핵심이다. 1831년 6월 12일, 국왕이 메스(Metz)에서 열병식을 하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부가 망토를 건네주려 하자 국왕은 도로 가져가라는 손짓을 했다. 병사들이 망토를 입고 있지 않았으니, 국왕이 홀로 비를 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비에게 쓴 편지에서 루이 필리프는 그때 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총명한 국민이 내 생각을 번개같이 알아채고는 ‘브라보!’ ‘국왕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소. 이 일화는 순방 여정 내내 각지로 퍼져 나갔소.”

 

루이 필리프가 프랑스의 마지막 왕이 되는 데는 프랑스혁명과 미국 독립전쟁에서 모두 전공을 세워 ‘두 세계의 영웅’으로 불렸던 라파예트의 지지가 큰 힘이 됐다. 파리 시청 발코니에서 혁명의 상징 삼색기를 함께 들고 있는 루이 필리프와 라파예트. 작자 미상. /위키피디아

 

함께 비를 맞겠다는 표시는 특권의 종식과 평등을 상징했다. 국왕은 얼마 후 브장송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나는 프랑스 국민이 왕을 위해 비를 맞고 있다면 왕 또한 망토를 내던지고 그들과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비는 국민의 정서를 끌어모으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루이 필리프는 망토를 내던지고 군중과 함께 비를 맞았다. 브장송⋅캉⋅툴루즈⋅낭시⋅스트라스부르⋅루앙에서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 1833년 바이외에서는 한 여성이 왕에게 자신의 우산을 내주려 했고 어떤 남성은 마차에 머무를 것을 권유했다. 국왕은 단호하게 답했다. “당신들과 함께하겠소.” 그러자 “만세 소리와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고 신문 기사는 전한다. 이제 날씨가 화창해서 비를 맞지 않는 날이면 그는 불행했다. 이후 통치자가 국민과 함께 비를 맞는 일은 프랑스의 전통이 되었다. 비가 자주 오는 가을날, 예컨대 1차대전 승전 기념일인 11월 11일 행사에서 프랑스 대통령들은 흔히 루이 필리프처럼 비를 맞곤 했다. 특히 드골 대통령이 군모를 쓰고 의연하게 비를 맞는 모습이 강한 인상을 주었다.

 

통치자가 국민과 비 맞는 게 전통으로

비를 맞던 바람을 맞던 ‘쇼통’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1840년대에 심각한 경제 재정 위기가 터졌다. 밀과 감자 흉작으로 식량 위기가 발생한 데다가, 산업계의 불황과 임금 투쟁, 신용 위기가 겹쳤다. 이런 마당에 정부가 더 많은 세금을 걷기 위해 문과 창을 조사하자(당시 대문과 창문의 개수는 과세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주민들이 거칠게 저항했다. 민중의 투표권 확대 운동에 대해서는 노동과 검약에 의해 부자가 되면 투표할 수 있다고 시니컬하게 비난하면서, 정작 정권의 부패와 타락이 극심했고, 독직과 횡령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선거 때 유권자들에 대한 매표 행위도 공공연하게 일어났다. 루이 필리프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과 저항이 거세졌다. 국왕 암살 시도도 수차례 있었는데, 그중 대포알 20발을 묶어 거리에서 터뜨린 1835년 사건 당시에는 19명이 사망했고, 국왕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사람들은 국왕을 대놓고 비판했다. 이제 우산은 왕에 대한 비판에 동원되었다. 왕을 비난하고 싶으면 우산에 대고 욕하면 된다. 184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사람들은 부르주아의 이해만 지키려 하는 백만장자 국왕은 왕도 아니라고 서슴지 않고 말했다. 다시 혁명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대부분 사람은 감을 못 잡고 지나갔지만 일부 인사는 거대한 격변을 예감했다. 토크빌은 “우리는 화산 위에서 잠자고 있다”고 말했다. 1848년, 막상 혁명이 터지자 그토록 빠르고 광범위하게 격변이 일어난 데 대해 사람들은 경악했다. 우산으로 마그마를 막을 수야 없지 않은가.

 

[혁명과 비]

바스티유 함락 1주년 축제

시민들 쏟아지는 폭우에도 함께 춤추면서 결속 다져

 

▲1790년 7월 14일 파리 샹드마르스 광장에서 열린 연맹 축제에서 춤추는 사람들(부분). 샤를 테브냉의 1792년 작. 소나기 속에서도 군중은 춤추기를 멈추지 않았고, 오후 늦게 날이 개면서 축제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위키피디아

 

1790년 7월 14일, 바스티유 함락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의 샹드마르스 광장에서 연맹 축제를 개최하기로 했다. 프랑스 전역에서 수만 인파가 운집하여 시민들의 단합을 과시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하필 이런 날에 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혁명에 반대하는 귀족들은 하늘도 혁명에 반대한다는 징조라며 ‘대홍수’를 느긋하게 지켜보며 즐거워했다. 무질서 속에 떠밀리는 인파,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몸의 윤곽이 드러난 여인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신나게 묘사했다. 운집한 시민들과 병사들은 참담한 상태로 나쁜 날씨를 원망하며 침묵을 지켰다. 그러던 중 돌연 분위기가 바뀌었다. 소나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병사들과 시민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수만 명이 취우(驟雨) 속에 열광적으로 춤을 추는 행위는 악천후가 혁명의 열정을 누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오후 늦게 드디어 해가 났을 때, 축제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날 일은 앞으로 두고두고 반복될 정치 현상을 예고했다. 함께 비에 젖음으로써 굳게 결속을 다진다는 특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군중은 감성의 공동체 속에 하나가 되는 강렬한 경험을 했다.

 

[53] 8개월간 쏟아진 포탄 6000만발… 병사 70만명이 참호서 죽어갔다

[1차 세계대전] 佛베르됭 전투

1918년 11월 11일, 휴전 조약이 발효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전례 없이 처참했던 4년 동안의 전쟁은 큰 상처를 남겼다. 세계는 대전(大戰) 이전과 이후로 갈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살의 공포를 모르던 호시절(Belle Epoque)은 영영 지나갔다. 지옥 같았던 이 전쟁은 현대 세계를 향한 불가역적 변화의 시발점이었다.

 

프랑스 북동부 베르됭에서 벌어진 전투는 세계 1차대전 최악의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독일군은 처음부터 베르됭을 차지하기 위해 대량 살상을 계획하고 엄청난 포격으로 프랑스군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프랑스군도 전력을 다해 저항했다. 사상자만 60만~70만명이 나왔다. 역사가들은 이런 엄청난 비극이 왜,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해 아직까지도 완전한 답을 구하지 못한다. 그림은 1916년 베르됭 전투 당시 참호를 파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군인들의 모습. /AFP

 

전쟁이 발발할 때만 하더라도 각국 지도자와 국민은 19세기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쟁은 단기간에 끝날 국지전에 불과할 것으로 예측했다. 젊은이들은 남자답게 용감하게 싸워 명예를 안고 오겠다는 순진한 감정으로 어깨동무하고 웃으며 전장으로 떠났다. 이들의 환상은 얼마 안 가 무참히 깨졌다. 순진무구한 젊은이들은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졌다. 지옥을 만든 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복지 증대를 위해 부단히 발전해 온 과학기술과 산업의 힘이었다. 무엇보다 기관총이 ‘전투의 여왕’이 되었다. 철조망을 두른 높은 진지에서 산등성이를 기어 올라오는 적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면 한 번에 수십 명, 심지어 수백 명씩 사살이 가능해졌다. 참호 안에 몸을 웅크린 병사들 위로 대포와 박격포탄이 떨어졌고, 독가스까지 사용하자 짐승보다 못한 죽음에 내몰렸다.

 

1차대전 최악 전투 중 하나로 베르됭(Verdun) 전투를 들 수 있다. 파리를 향해 돌진하려던 독일의 슐리펜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후 1915년부터 전선이 교착되었다. 북해에서 스위스까지 이어진 긴 전선에서 양측 병사들은 참호를 파고 땅속으로 들어가 대치했다. 독일군은 러시아와 싸우는 동부 전선에서는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나, 프랑스·영국과 맞선 서부 전선에서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방어 태세를 취했다.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계획이 베르됭 공격이었다.

 

▲1차대전 격전지였던 프랑스 북동부 베르됭의 핵심 요새 두오몽 지역에 세워진 묘지와 납골당, 기념 건조물의 모습. 1만6142명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1차대전 전사자 묘지 중 최대 규모다. /Jean-Pol GRANDMONT

 

독일군의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 장군은 한 지점에 집중 공격을 가하여 프랑스군이 맹렬하게 반격해오도록 유도한 후 상대방의 병사와 물자를 소진시켜 버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장소로 베르됭을 선택한 것이다. 팔켄하인은 프랑스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베르됭은 프랑스 역사에서 늘 급소 지점이었다. 프랑스혁명 전쟁 당시 프로이센군이 베르됭을 차지한 후 파리로 진격하는 길이 열렸던 것처럼(1792년 8월) 프랑스로서는 베르됭을 빼앗기면 치명적 피해를 당하게 된다. 팔켄하인은 카이저 빌헬름 2세에게 베르됭을 공격하면 프랑스 지휘 본부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가진 모든 병사를 투입할 것이며, 이들을 꺾어놓으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보고했다. 말하자면 이번 전투는 애초에 진격보다는 대량 살상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엄청난 포격을 시작으로 독일군이 베르됭을 공격하자 프랑스군은 예상했던 대로 반응했다. 페탱 장군은 이곳으로 프랑스군 주력을 끌어와서 전력을 다해 저항했다. 2월에 시작한 독일군의 공격은 끔찍한 희생을 치러가며 조금씩 전진해 갔고, 베르됭 전면의 두오몽(Douaumont) 요새도 빼앗았다. 5월부터는 완벽한 소모전 양상을 띠었다. 포탄이 쏟아지면 병사들은 동물처럼 최대한 몸을 구부리고 땅에 바짝 붙어서 버텼다. 그런데 프랑스군의 저항이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사상자가 수십만 명 나오자 독일군으로서는 더 이상 공격이 힘들어졌고, 6월 말부터는 오히려 프랑스군이 잃었던 곳을 되찾으며 서서히 반격해 갔다. 연말이 되자 프랑스군은 이전에 빼앗겼던 곳을 거의 회복했다. 결국 여덟 달 동안 포탄을 6천만 발 쏟아부으며 사상자를 60만~70만명 낸 끝에 원래 상태로 되돌아간 셈이다. 만일 외계인이 하늘에서 이 꼴을 지켜보았다면 지구인들은 왜 저런 한심한 방식으로 서로 죽이는지 의아했을 것이다.

 

▲프랑스 베르됭

 

격전지였던 두오몽 지역에는 전사자 묘지와 납골당 및 기념 건조물이 세워져 있다. 1만6142명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묘지는 1차대전 전사자 묘지 중 최대 규모다. 여기 묻힌 병사들은 그나마 신원이 밝혀진 사람들이다. 적군인지 아군인지 구별할 수도 없이 뒤엉켜 죽은 13만명의 유해는 그대로 납골당에 보존하고 그 위에 기념물을 지었다. 백년 전 지옥 불구덩이에서 비참하게 죽은 두 나라 20대 초반 젊은이들의 뼈가 무더기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들여다보노라면 가슴이 아려온다.

 

1차대전 희생자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유럽 전체적으로 사망자만 1000만명 수준이다. 독일 200만명, 러시아 180만명, 프랑스 140만명, 오스트리아-헝가리 110만명, 영국 75만명, 그리고 1917년에 참전한 미국도 75만명이 희생되었다. 희생자 대부분 한창 일할 젊은 남자여서 전후에도 악영향이 지속되었다. 프랑스를 보면 사망자 140만명에 부상자 280만명을 더하면 사상자가 420만명에 달하여, 징집된 사람 2명 중 1명꼴이다. 그중 20만명은 수족이 잘리거나 얼굴에 끔찍한 상처를 입은 ‘안면 부상병(gueules cassées)’이었다. 특히 1915년에 20세였던 세대(’classe 1915′)는 사망자만 27%이고 부상자가 그 두 배이므로 결국 4명 중 3명이 죽거나 부상한 불운한 세대다. 프랑스의 명문 대학 에콜노르말은 1914학번 211명 중 107명(51%)이 사망하여 장래 교수와 연구진이 될 핵심 인력을 잃었다. 40~45세까지 징병 대상이었기 때문에 중견 인사 중에서도 희생자가 나왔다. 1873년생 작가인 샤를 페기(Charles Peguy)가 그런 사례로서, 일선으로 나가겠다고 자원했다가 1914년 9월 41세에 이마에 총을 맞고 사망했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스스로 ‘불의 세대’라 칭했다. 참호에서 불지옥을 경험한 이 세대는 공통적으로 고뇌, 불안, 심리적 상처를 안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느낀 전사자들에 대한 부채 의식은 간전기(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 시기) 사회의 심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해 각국은 전쟁으로 청년 없는 나라, 엘리트가 사라진 국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회가 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엄청난 비극이 어떻게 해서 시작했는지, 과연 전쟁 발발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완전한 답을 구하지 못한 실정이다. 19세기 말 이래 강대국 간 격렬한 갈등이 쌓였고, 발칸 지역 정세 변화에 따른 강렬한 민족주의 분출 등이 대폭발을 일으킨 요소라는 점은 대개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요소가 마련되었다고 해서 유럽의 모든 국가와 식민지가 필연적으로 전쟁으로 치달을 이유는 없었다. 세르비아 청년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사건이 방아쇠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때 세계 공멸의 대비극을 막을 방도가 전혀 없었을까?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구조적 요인으로 세계대전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지난날 주장보다는, 국제적 상황을 제어하지 못하고 호전적 민족주의 분위기에 편승하려던 정치 지도자들의 과오를 부각한다. 세계대전은 저절로 일어난 게 아니라 결국 이들이 일으켰기 때문이다.

 

백년이 지난 오늘날, 분위기는 극적으로 변했다. 지난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고별 방문을 맞이하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부르고뉴의 포도주 생산 중심지인 본(Beaune)의 고성에서 따뜻하게 영접하며 그동안의 협력에 감사를 표했다. 양국 지도자들은 지난날의 비극적 역사와는 다른 평화와 번영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1차대전 휴전 조약]

콩피에뉴(Compiègne)는 파리에서 북쪽으로 65㎞ 떨어진 소도시다. 이 근처 숲속에서 11월 11일 새벽 5시 15분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1918년 11월, 연합국과 독일 제국이 1차 세계대전 휴전 협정을 맺은 프랑스 콩피에뉴의 숲에서 자신의 특별 객차 앞에 서 있는 당시 연합군 대원수 페르디낭 포슈(가운데)와 그의 참모로 활약한 막심 베강(왼쪽에서 둘째). /독일 연방기록물 보관소

 

1918년 9월 이후 독일군으로서는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했다. 미군이 물밀듯 밀려오는 상황에서 독일 내부에서 킬 군항(軍港)의 수병(水兵) 폭동이 터지고 독일 혁명이 일어났다. 독일 임시정부는 11월 7일부터 휴전을 모색했다. 프랑스 측 포슈 장군은 콩피에뉴-수아송 철도 노선이 지나는 콩피에뉴 숲속에 열차 차량을 대놓고 이곳에서 독일 전권 대사를 만나 휴전 조건을 논의했다. 양측은 휴전 조약에 서명하고 ‘11월 11일 11시부터 모든 전선에서 적대 행위를 중단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22년 뒤인 1940년 6월 21일, 2차대전 초기 프랑스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같은 장소에 같은 차량을 옮겨놓고 프랑스가 가혹한 조건의 휴전 조약 문서에 서명하게 만들어서 지난날의 모욕을 되갚았다. 그 후 히틀러는 이 차량을 베를린으로 옮기고 그 자리는 없애버리라고 지시했다. 1945년 2차대전 종전 이후 그 장소는 복원했지만 차량은 사라졌다. 소련군이 베를린에 거의 근접하여 나치의 패망이 가까워진 순간, 히틀러가 차량을 파괴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에게 1918년 패배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어서, 죽기 전에 그 흔적을 영원히 없애려 했던 것 같다. 현재는 1950년에 그곳에 갖다 놓은 같은 종류의 차량을 볼 수 있다.

 

[54] [1차 세계대전] [下] 슈맹데담 전투

무모한 돌격명령에 프랑스군 12만명 죽어… 대규모 반란 터졌다

 

1918년 5월 슈맹데담에서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는 독일 보병부대의 모습. 파리 북동쪽으로 약 110㎞ 떨어진 슈맹데담은 30㎞ 정도 길이 산등성이로, 고대부터 전략 요충지였다. 1차 대전 중인 1917년 프랑스는 이곳에서 독일을 상대로 총공세를 폈지만, 약 20일간 3㎞를 전진하는 동안 12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급격히 사기가 떨어진 프랑스군 내에선 명령 불복종과 반란 사태가 이어졌다. 작자 미상 사진. /위키피디아

 

제1차 세계대전 중 1917년은 결정적인 전환의 해였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나 러시아가 동부전선에서 이탈하게 되고, 대신 미국이 참전을 결정했다. 프랑스로서는 미국의 강력한 군사 개입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실제로 미군이 전선에 투입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이미 기력이 쇠진한 프랑스군으로서는 미군 도착을 기다리며 버티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군 지휘부는 다르게 판단했다. 니벨(Robert G. Nivelle) 장군은 4월 16일 슈맹데담(Chemin-des-Dames) 지역에서 총공세를 펼치기로 결정했다.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110㎞ 떨어져 있는 슈맹데담은 길이 30㎞에 폭 8㎞의 산등성이로, 고대부터 북유럽 방향의 전략 요충지였다.

 

슈맹데담, 길이 30㎞ 폭 8㎞ 능선

니벨 장군의 작전은 우선 일제 포격을 가하여 독일군의 1차 방어선을 무력화한 다음, 집중사격으로 탄막(彈幕)을 형성하면서 전군이 일시에 돌격한다는 것이었다. 니벨 장군은 그전 해의 베르됭 전투에서 유사한 작전으로 효과를 보았고, 그 덕분에 프랑스군 지휘를 맡게 되었다. 여세를 몰아 다시 한번 같은 작전을 시도했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다. 베르됭에서 상대한 독일군은 기진맥진한 상태였으나, 이번에는 강력하게 반격해 왔다. 무엇보다 산꼭대기에서 아래를 항해 기관총 세례를 퍼붓는 적을 향해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며 돌격하라는 명령은 어리석음과 광기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아침 6시에 공격을 시작하고 두 시간 정도 지나자 벌써 이 작전이 실패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니벨 장군에게는 ‘플랜 B’가 없었다. 무모한 작전을 강행하다 보니 약 20일에 걸쳐 3㎞를 전진하는 동안 12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프랑스군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고, 명령 불복종과 반란 사태가 폭발했다. 집합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술에 취한 채 무기 없이 나타났고, 돌격하라고 지시하면 참호로 돌아가 버렸다. 탈영한 병사만 3만명에 육박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1917년 4월 29일부터 9월 5일 사이 113건의 반란이 일어났고, 연루된 군인은 4만명에서 8만명 사이로 추정된다. 이는 병사 15~20명 중 한 명꼴이었다.

 

▲니벨, 페탱

 

사실 반란은 예전부터 없지 않았다. 베르됭 전투 당시 이미 조짐이 보였다. 1916년 5월, 완전히 탈진한 2개 중대 약 200명의 군인에게 당장 최전선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바로 전날 밤 힘들게 전선에서 내려온 상태였다. 당시 전선은 최전선과 2선, 3선으로 나뉘어 있어서 병사들이 교대하는 방식이었고, 대개 최전선에서 근무하다가 후방의 3선으로 오면 며칠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들은 3선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최전선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실수가 아닌가 생각하고 지휘관들이 상부에 항의했는데도 다시 같은 명령이 돌아오자 병사들이 명령을 거부했다. 결국 35명이 군사재판에 넘겨져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이 소문은 곧 전역으로 퍼져갔다.

 

슈맹데담 전투 이후에는 이런 정도가 아니라 집단적인 항거가 발생했다는 것이 문제다. 왜 이런 일들이 터져 나왔을까? 병사들이 이유 없이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평화주의자나 패배주의자가 아니다. 병사들은 지난 시절 보불전쟁(1870~1871년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 패배의 쓰라린 경험을 잘 인식하고 있고, 그만큼 프랑스의 승리를 염원했다. 다만 무능한 군 지휘부의 잘못된 작전과 무책임한 지시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무의미하게 목숨을 잃는 사태에 진저리를 쳤다. 병사들은 슈맹데담 총공세가 승리를 향한 최후 결전이 되리라는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전투에 돌입했다가 참담한 실패로 끝나자 절망감에 휩싸였다. 이런 분위기가 곧 집단적인 반란으로 이어진 것이다.

 

니벨 좌천되고 페탱이 후임으로

군 지휘부는 엄격하게 대응했다. 반란에 가담한 병사들에 대한 대규모 체포가 이뤄졌고 군사재판이 시작되었다. 500명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그러나 흔히 이야기하는 바와는 달리 실제 엄청난 총살 사태가 실행되지는 않았다. 곧 분위기가 바뀌었다. 프랑스 정부는 니벨 장군을 좌천시키고 페탱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페탱은 최대한 부하들의 목숨을 살리며 미군과 그들의 전차를 기다리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처벌도 많이 완화했다. 대부분 병사에게 사면이 내려졌고, 처형된 사람은 26명으로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전시 대규모 반란 사건의 충격은 지대했다.

 

다른 나라 사정은 어땠을까? 독일은 관련 문서보관소가 불타서 자세한 연구가 안 되었으나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동부전선의 러시아군도 마찬가지여서, 심지어 병사들이 장교에게 총을 들이대며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탈리아도 전투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서 30만명이 포로가 되고 30만명이 탈주했다. 모든 참전국 병사들이 똑같이 지옥 같은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반란 참가자들을 어떻게 역사에 기록할 것인가?

1920~1930년대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이들을 영웅화했다. 이들이야말로 제국주의 전쟁을 거부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들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극단적 주장을 믿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대신 이들의 과장된 주장 중 일부가 전설처럼 널리 퍼졌다. 슈맹데담 전투 이후 군 지휘부의 잘못을 가리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자로 만들어 처형했다는 것이다. 10명 중 1명씩 임의로 골라서 ‘본보기 사형(fusillade pour l’exemple)’을 했다는 주장이 그중 하나다. 다만 본보기 사형은 오히려 이전에 빈발해서, 1914~1915년의 18개월 동안 약 500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시에 억울하게 희생된 병사가 적지 않았다.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혹은 군 내부의 오판을 숨기기 위해 재판 없이 혹은 약식 재판으로 사형에 처한 병사들 사례도 많이 알려져 있다. 전후에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 운동이 일어났고, 1935년 관련 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희생자들의 가족은 고인들을 두고 배신자 혹은 겁쟁이 운운하는 비난을 들으며 엄청난 불명예 속에 살아야 했다. 억울하게 죽은 참전 용사는 역사에서도 잊힌 상태였다.

 

재판없이 처형된 병사들도

프랑스의 거의 모든 마을에는 1차 대전 참전 사망자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대개 탑 모양의 비석에 프랑스를 상징하는 수탉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 죽은 병사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명단 위에는 대개 ‘우리의 영웅들에게(A nos héros)’ 혹은 ‘우리의 순교자들에게(A nos martyrs)’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그런데 1차대전 당시 독일 영토였다가 그 후 다시 프랑스 영토로 바뀐 알자스 지역에서는 병사들이 독일군으로 참전해서 싸우다가 죽었으니 미묘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마을들의 비석에는 간략히 ‘죽은 자들에게(A nos morts)’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반란에 가담했다는 죄로 혹은 본보기로 처형당한 사람들은 이 명단에도 끼지 못했다. 죽어서도 차별받았던 것이다. 최근에는 많은 마을에서 이런 병사들 사례를 발굴하여 수백명의 병사 이름을 새로 새겨 넣었다. 늦게나마 죽은 용사들의 영혼과 가족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묘지를 선택하지 않았다]

“반란에 가담한 군인이나 도망병도 전쟁 희생자” 1998년 기념조각물 제작

 

1998년 슈맹데담 전투가 벌어졌던 크란(Craonne)에서 그동안 누구도 기억하지 않았던 참전 용사들을 기리는 기념 조각물 ‘그들은 자기 묘지를 선택하지 않았다(Ils n’ont pas choisi leur sépulture)’라는 작품의 제막식이 있었다. 제막식에 참여한 리오넬 조스팽 프랑스 총리는 본보기 총살 희생자 같은 이들도 프랑스 역사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아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란 참가자나 도망병 같은 사람들을 왜 기려야 하느냐는 반대 의견 또한 상당히 많았던 것 같다. 두 차례에 걸쳐 조각물에 대한 심각한 훼손 사태가 벌어지더니 2014년에는 아예 작품이 도난당했다. 조각가 케른(Haïm Kern)은 다시 작품을 제작했고, 2017년 4월 16일 슈맹데담 전투 100주년 기념일에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다시 제막식을 개최했다.

 

슈맹데담 전투를 기념하는 박물관에 세워진 프랑스 조각가 케른의 참전용사 추모 조각 ‘그들은 자기 묘지를 선택하지 않았다’(부분). /AFP

 

4m 높이 청동 조각품은 거대한 그물 모양으로, 사이사이에 23개의 얼굴들이 그물코에 사로잡혀 있다. 이는 역사의 그물 혹은 운명의 그물을 상징한다고 한다. 두 번째로 작품을 설치하면서 작가는 “희생자들이 역사의 그물코 속에서 일어나 땅으로부터 빛을 향해, 그리고 우리를 향해 더 가까이 오기를 염원한다”고 설명한다.

 

[55] 小빙하기 : 1708~1709년의 혹한

혹한에도 왕들은 전쟁에 몰두… 병사들 코와 귀까지 사라졌다

▲얼어붙은 런던 템스강 위에 열린 장터… 축구·볼링·썰매 경기도 벌여 - 1600년부터 1814년까지, 겨울이면 영국 런던 템스강이 자주 얼어붙었다. 런던 사람들은 두꺼운 얼음 위에 온갖 상점이며 주점 등을 세워 ‘템스강 얼음 장(Thames Frost Fairs)’을 열고, 축구와 볼링, 썰매와 스케이트 경기도 벌였다. ‘소빙하기’ 중에서도 가장 기온이 낮았던 이 시기, 사람들은 얼어붙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걸어서 건넜고, 스웨덴군은 발트해의 얼음 위를 건너 덴마크 코펜하겐을 공격했으며, 이탈리아인들은 베네치아의 꽁꽁 언 호수 위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잉글랜드에서 활동했던 화가 얀 그리피어가 그린 1683년 겨울 템스강 얼음 장 풍경. /게티이미지코리아

 

루이 14세 시대의 궁정인으로서 흥미로운 회고록을 남긴 생시몽 공작(Duc de Saint-Simon)은 1709년 겨울 추위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그해 겨울은 참혹했다. 극심한 혹한 때문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향수, 증류주, 알코올 도수가 높은 독주 병들이 깨졌고, 빌루아 공작의 저택에서 식사를 하는데 잔 속에 얼음 덩어리들이 떨어졌다.” 왕궁이나 대귀족 저택도 얼어붙는 추위에 시달렸던 것이다.

 

1708년 가을부터 벌써 추위의 조짐이 보였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1708년 10월부터 1709년 3월까지 모두 7번의 혹한이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이미 온도계가 발명되고 널리 보급되어서 당시 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비교적 믿을 만한 수치 자료를 구할 수 있다. 예컨대 의사이자 식물학자로서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회원인 루이 모랭(Louis Morin)은 1655년부터 1712년까지 거의 매일 온도를 측정한 기록을 남겼다. 이런 자료들을 보면 1709년 1월에는 파리의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진 날이 19일이나 되었고, 특히 1월 20일에는 영하 20.5도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날은 파리 역사상 지난 500년 중 가장 추운 날로 기록될 것이다. 남쪽의 마르세유도 1월 11일에 영하 17도를 기록했다.

 

6개월 동안 7번의 혹한 닥쳐

이상저온 현상은 전국적으로 큰 피해를 가져왔다. 루아르 지역 부지(Vougy) 마을의 사제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1월 6일부터 추위가 시작되었고, 이후 5~6일 동안 지속된 추위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정도다. 1월부터 밀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6월까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빈곤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절도 행위에 나섰다…. 기근이 너무 심해서 길거리에서 동냥하다 굶어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개와 늑대가 뜯어 먹은 시체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우리 교구 사람 절반이 죽었고, 아이들은 거의 볼 수 없다.”

 

사실 이상저온 현상은 이전과 이후 시기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피해 규모로만 본다면 1693~1694년이 훨씬 더 심했다. 이 시기에는 겨울 추위뿐 아니라 여름 홍수와 냉해가 커서 2년 연속 심각한 흉작을 겪었다. 식량 부족으로 사람들이 잘 못 먹으면 몸이 약해져서 질병 피해도 극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 기간에 프랑스에서 죽은 사람들 수에 대해 연구자들은 최소 160만명부터 최대 284만명까지 제시한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전사자에 맞먹는 수치인데, 20세기에 비해 인구가 절반 수준이고 단 2년 동안 일어난 사태임을 고려하면 실로 끔찍한 피해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이상저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기후사라는 새로운 분야의 개척자들은 ‘소빙하기(Little Ice Ag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원래 이 말은 지질학적으로 수천 년에 달하는 긴 기간을 포괄하지만 역사학에서는 대체로 중세 말부터 19세기까지 기간을 가리킨다. 특히 17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가 소빙하기 중에서도 가장 기온이 낮았던 때이다. 1600년부터 1814년까지 겨울에 템스강이 얼어붙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런던 사람들은 ‘템스강 얼음 장(Thames Frost Fairs)’을 열었는데, 온갖 상점들과 맥줏집(pub)이 들어서고 축구와 볼링, 스케이팅 경기가 벌어졌다. 1620년에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결빙하여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걸어서 건너갈 수 있었다. 1658년 발트해가 결빙하자 스웨덴군은 얼음을 건너 코펜하겐을 향해 공격해 갔다. 1709년에는 베네치아의 석호(潟湖)가 얼어붙어 이탈리아인들도 스케이트를 탈 수 있었다.

 

▲카를 12세, 표트르 대제

 
 

이런 심각한 기후 이변 시기에도 국왕들은 여전히 전쟁에만 몰두하여 사태를 악화시켰다. 72년에 이르는 루이 14세의 긴 치세의 거의 절반이 전시였다. 1701년부터는 에스파냐 왕위를 손자에게 물려주고 더 나아가서 에스파냐를 사실상 합병하려 시도했다가 거의 전 유럽을 상대로 한 전쟁에 들어갔다. 흉작과 전염병으로 국민이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전쟁이 지속되니 거의 망국의 위험에 직면했다. 1708년 7월 11일 아우데나르드(Audenarde) 패전 이후 적군의 침공 위협이 커지자 한때 국왕이 루아르 이남으로 피신하려 했을 정도다. 바로 그 이후 시기에 앞서 언급한 끔찍한 추위를 겪은 것이다. 동유럽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스웨덴 국왕 카를 12세는 발트해의 패권을 놓고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와 결전을 벌이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동유럽 각지를 휘젓고 다녔다. 1708~1709년 겨울, 그의 군대는 최악의 한파에 시달렸다. 종군 목사의 기록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잊을 수 없는 추위였다. 침을 뱉으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얼음이 된다. 어떤 병사는 손이 없어졌고, 어떤 병사는 발이, 또 어떤 병사는 손가락, 얼굴, 코, 귀가 없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네발짐승처럼 기어다닌다.” 참혹한 겨울을 나니 병력이 절반으로 줄었다. 그 후 5~6월에 오늘날 우크라이나에 위치한 폴타바라는 작은 요새에서 러시아군에 패배하여 스웨덴은 북유럽의 최강자 지위를 잃었다.

 

침을 뱉으면 얼어서 땅에 떨어져

전쟁에만 신경 쓰다 보면 당연히 민생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다. 가공할 혹한이 지나 1709년 봄이 되니 프랑스의 농촌에서는 냉해로 인해 지난가을에 파종한 작물을 모두 잃을 위험이 커졌다. 정확한 사태 파악과 현명한 결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파종을 모두 갈아엎고 새로운 봄 작물로 대체 파종해야 하는지 아닌지 정해야 할 터인데,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약 100년 전 앙리 4세 시대에 겨울 추위가 심각했을 때 수확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의 지사들은 현지의 급박한 사정에 대해 보고서를 올리는데, 궁정에서는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들은 농민들의 주장을 무식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무시하거나 혹은 일부러 루머를 퍼뜨려서 가격 인상을 유도하는 투기꾼의 농간일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지사들에게 사정을 너무 과장하지 말고 또 지방민들을 공공연히 자극하지 말라는 답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다가 4월 말이 되어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했다. 이제는 재파종이 불가피하다는 게 분명해졌다. 이런 결론에 이르기까지 중앙정부는 혼란을 가중시켰다.

 

농민봉기 200여 차례 일어나

그나마 늦게라도 대처 방안을 긴급히 마련한 게 다행이었다. 비축 식량의 양을 확인하기 위해 곡물을 보유한 사람들의 신고를 의무화했다. 이때에도 우선순위는 군사물자 확보에 두었다. 여유가 있는 지역에서 식량을 확보해 군비를 채우고자 한 것이다. 보리 재파종을 독려하기 위해 보리를 보유한 사람들은 시장에 내놓을 것을 명령했고, 맥주 제조를 금지했다. 북유럽과 지중해 지역에서 곡물 수입을 추진하려 했지만 자금이 부족했다. 그래서 대상인들에게 높은 이자를 약속하고 돈을 빌렸다. 무엇보다 파종용 밀 종자 확보 방안을 찾고자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음 해에는 더 큰 파국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여러 특단의 조치가 나왔다. 예컨대 땅 소유주가 죽은 경우 그 밭을 놀리게 되는데, 이때 누구든지 그런 땅에 파종하여 농사를 지으면 수확은 그 사람 것이 된다고 포고했다. 가을 수확 후에는 수확량을 먼저 보고한 후 탈곡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는 역효과를 냈다. 보고를 위해 한 달을 지체하는 통에 기근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처럼 우왕좌왕하느라 위기 사태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1709년에 농민들의 봉기가 200차례 가까이 일어났다.

 

대개 그러하듯 천재지변은 동시에 인재(人災)의 양상을 띤다.

 

[소빙하기 원인은]

베수비오·후지산 등 4개 큰 화산 일시에 폭발… 당시 태양 흑점 이상설도

 

▲1707~1708년 사이 엄청난 분진을 대기 중에 뿜어낸 이탈리아 베수비오 등 큰 화산 네 개의 폭발도 소빙하기 혹한의 원인을 설명하는 가설 중 하나다. 17세기 나폴리 화가 도메니코 가르줄로가 그린 1631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 /위키피디아

 

17~18세기에 유독 기온이 내려간 이유에 대해 연구자들은 아직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한 채 다양한 가설을 검토하는 중이다. 1707~1708년 중 이탈리아의 베수비오, 그리스의 산토리니, 레위니옹 섬의 푸르네즈, 일본의 후지산(1707년 11월 11일과 12월 16일에 폭발했다) 등 4개의 큰 화산이 일시에 폭발한 것이 원인이 아닐까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이때 분출된 분진들이 광범위한 지역에 햇빛을 가려서 온도가 내려갔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양 활동의 불규칙성에서 원인을 찾아보려는 소위 몬더 미니멈(Maunder minimum) 가설도 있다. 갈릴레이 등 여러 사람들의 천문 관찰 기록을 보면 1645~1715년 태양 흑점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태양왕 루이 14세 시대는 오히려 태양에 이상이 발생한 때였다. 일부 연구자는 남북 아메리카에 유럽인들이 들어와서 현지 주민들을 몰살한 이후 숲이 엄청나게 확대된 것이 원인이 아닐까 하는 과감한 가설을 제시하기도 한다. 오늘날 숲의 남벌로 인한 기후온난화와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났으리라는 주장이다.

 

이런 가설들 중 어느 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무엇보다 지구 모든 곳에서 똑같은 기후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았다는 데에 설명의 어려움이 있다. 유럽에서 혹심한 추위를 겪었던 1708~1709년은 숙종 34~35년에 해당하는데, 가뭄과 가을장마 현상이 발생했을 뿐 혹한 이야기는 없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이런 문제를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갈수록 환경의 역사가 중요해지리라는 것이다.

 

[56] ‘신성한 가난’에서 ‘깨끗한 부’로

이윤 추구를 정당화한 스콜라 철학… 초기 자본주의 문을 열다

▲빈민에게 외투를 나눠주는 마르탱 성인 - 헝가리 출신의 마르탱은 로마 군인이 되어 프랑스의 아미앵 지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벌거벗고 덜덜 떠는 걸인을 본 마르탱은 군복 외투의 반을 잘라 걸인에게 주었다. 고대와 중세 종교는 빈(貧)을 긍정적 가치로, 부(富)는 부정적 가치로 봤다. 투르의 마르탱(316~397) 성인의 일화를 성화로 표현한 엘 그레코의 작품. 외투 일부를 건네는 마르탱이 걸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위키피디아

 

부(富)와 빈(貧). 이 중 어느 것이 더 높은 가치인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빈보다 부를 높이 칠 테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빈이 긍정적 가치, 더 나아가서 신성한 가치이고, 부는 지극히 부정적 가치였다.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는 반면 빈민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라는 위로를 받았다. 예수와 성인들은 이 세상에 있을 때 하나같이 가난한 걸인들이었다. 투르의 마르탱 성인(316~397)의 일화를 보자. 헝가리 출신의 마르탱은 로마 군인이 되어 프랑스의 아미앵 지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벌거벗고 덜덜 떠는 걸인을 본 마르탱은 군복 외투의 반을 잘라 걸인에게 주었다. 그날 밤 꿈에 예수가 나타나 천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라, 마르탱이 나에게 이 옷을 입혀주었노라.

 

대저 고대와 중세 종교는 빈의 종교다. 교회는 부자들에게 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라고 가르쳤다. 돈을 버는 행위는 위험한 일이다. 10세기 말, 어느 수도사가 신학자 페트루스 다미아누스에게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지 물었을 때 그의 답은 “무엇보다 먼저 돈을 버려라” 하는 것이었다. “돈에 대한 사랑이 모든 악의 근원”(디모데전서 6:10)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태도가 지속되었다면 근대 사회는 열리지 못했을 것이다. 상인, 금융업자, 기업인 등이 모두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으리라고 비난한다면 어떻게 자본주의가 발전하겠는가. 가난한 걸인이 찬양받는다면 어떻게 노동계급이 등장할 수 있겠는가. 분명 중세 말과 근대 초 사이에 부와 빈을 보는 시각, 인간과 재물 간의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어떤 과정을 거쳐 청빈이 이상인 사회에서 부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사회로 진화해 갔을까?

 

우선 빈민과 걸인에 대한 태도가 바뀌어 갔다. 성스러운 빈곤이란 단지 영적인 덕목일 뿐, 현실의 빈민들은 경멸을 피하지 못했다. 사지가 멀쩡한데 일하지 않고 노는 ‘사악한 빈민’들은 결코 성스럽지 않으니, 이런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면 받은 사람뿐 아니라 베푼 사람도 죄인이 된다. 몸이 성치 않아 일하기 힘든 ‘정직한 빈민’만 도움을 받을 가치가 있다. 부자들은 이처럼 선별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죄를 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선은 죄를 씻어주는 수단이 되었다. 빈민은 물질적 도움을 받고, 부자는 자선을 통해 죄를 갚는 일종의 계약 행위인 셈이다. 이렇게 하여 부자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 부를 추구하는 행위가 정당하다는 신학적 해석이 필요하다. 상인들이 어떤 물품을 원래 가치보다 더 비싸게 파는 것이 합당한가? 아퀴나스는 이렇게 답한다. ‘정당한 가격(just price)’보다 비싸게 파는 것은 전적으로 죄에 해당한다. 이웃을 속여 해를 끼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원칙을 곧이곧대로 적용한다면 이 세상에 상인은 아예 존립할 수 없다. 물건을 산 가격 그대로 되팔기만 할 뿐, 이윤을 남기면 이웃을 해치는 죄인이 된다고 하면 도대체 누가 장사를 하려 하겠는가?

 

그렇지만 아퀴나스는 곧이어 상인들에 대한 비난을 완화하는 논리를 제시한다. 우선 자기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작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대체 상인이 왜 그런 수고를 하겠는가. 또 자기 나라에 필요한 물품이 부족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공공의 이익을 창출하면서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도 합당하다.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 죽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이웃 나라에서 곡물을 들여오는 사람이 어떻게 죄인인가? 결국 아퀴나스는 원론적으로는 이윤을 남기는 상업 행위가 죄라고 선언했지만, 각론에 들어가서는 상업 행위가 ‘효용’을 지니며 공공선에 이바지하므로 상인이 사회에 필요한 존재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을 인정한 셈이다. 그에 따르면 부에 대한 모든 욕망이 죄가 되는 게 아니라 부에 대한 ‘부적절한’ 욕망이 죄가 된다. 다시 말해 합당한 정도의 욕망은 지옥에 떨어질 죄악이 아니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돈을 빌리려면 살을 담보로 내야 한다고 요구한다. 중세 스콜라 철학은 고리대금업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댔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상품 거래보다 훨씬 정당화하기 어려운 것은 고리대금업, 오늘날로 치면 금융업이다. 고리대금을 비난하는 대표적인 논리는 돈 자체가 생산력이 없다는 것이다. 돈은 돈을 낳지 않는다(Nummus non parit nummos). 그런데 무슨 근거로 돈을 빌려준 다음 이자를 받는가? 고리대금업자가 급전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준 것은 결국 시간적 여유를 갖도록 해준 것이다. 그렇다면 돈을 빌려준 시점과 이자를 붙여서 되돌려 받는 시점 사이에 시간이 흘러간 점 말고는 돈놀이꾼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결국 고리대금업자는 시간을 팔아먹은 셈이다. 오직 하느님에게만 속한 시간을 팔아먹은 고리대금업자는 하느님의 재산을 훔친 것이다. 그렇기에 개념적으로 고리대금업자는 도둑이다.

 

만일 이런 논리가 극단적으로 적용되면 금융업이라는 게 발전할 수 없다. 이자를 부정하고 그 결과 돈이 돌지 않으면 경제가 망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럴 때 다시 신학자의 정당화가 필요하다. 아퀴나스는 우선 대금업이 적법하지는 않으나 실제로는 유용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한다. 다만 이자 수취가 과하지 않아야 한다. 중세 유럽 각국에서는 대체로 연 33.5%가 허용된 최대치다. 이 이하의 이자율을 적용하는 경우 최소한 고리대금업자라는 오명은 면한다. 그렇다 해도 어쨌든 이자를 받으면 하느님의 시간을 훔쳐 팔아먹는 죄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자를 받는 행위가 죄가 되지 않는다는 정당성이 필요하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는 몇 가지 근거를 댄다. 빌려준 돈으로 더 유리한 투자를 했을 때 벌어들일 수 있었던 합법적인 이득을 포기했다는 점(lucrum cessans, 곧 기회비용을 가리킨다), 빌려준 돈은 과거에 힘들게 번 결과물이므로 이자는 그때의 노동에 대한 보수라는 점(stipendium laboris), 위험을 안고 불확실성을 헤쳐 나가는 복잡한 계산을 하는 행위가 아무나 할 수 없는 힘든 일이라는 점(ratio incertitudinis)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렇게 해서 고리대금업자까지도 구원의 길이 열렸으니, 부의 추구는 확실한 승인을 받았다.

 

신학자의 해석은 현실의 변화를 반영한다. 근대 초 경제 성장 과정에서 부자들은 더욱 부유해지고 빈민은 더 심한 가난에 몰렸다. 고향에서 땅을 빼앗긴 농민들이 유랑민이 되어 도시로 몰려왔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사회 문제에 직면한 상황에서 ‘빈자와 걸인은 하느님이 보낸 사자’라는 식의 고상한 담론은 설 자리가 없어졌고, 반대로 부는 정당화되었다. 어쩌면 그와 같은 장기적 흐름의 정점에 우리가 서 있는지도 모른다. 선진 17국 시민을 대상으로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 물어본 미국 퓨리서치센터의 설문조사 결과는 뜻밖이다. 다른 나라들은 대개 ‘가족’과 ‘직업’을 먼저 꼽은 반면 ‘물질적 풍요’를 1순위로 꼽은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K낙타’는 능히 바늘귀를 뚫고 천국에 오를 기세다.

 

이제 와서 중세에 그러했듯 가난을 신성한 가치로 높이 칠 수는 없다. 프루동(프랑스의 무정부주의 사상가)처럼 ‘모든 재산은 도둑질한 물건’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사리에 안 맞아 보인다. 차라리 당당하고 깨끗한 경제적 노력을 인정하고,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도움의 손을 내미는 자세를 갖도록 방향을 잡아가는 게 온당해 보인다.

[근대 서구, 빈민을 억압하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선 빈민과 유랑민들 구금… 강제로 중노동시켜

‘신성한 가난’이라는 종교적 이념을 벗어던진 후 근대 서구 사회는 빈민들에 대해 가혹한 태도를 취했다. 17세기 네덜란드에는 빈민과 유랑민들을 구금하여 노역을 시키는 라습하위스(rasphuis)라는 기관이 만들어졌다. 이곳에서는 재소자들에게 브라질나무(brazilwood)를 대패로 깎는 일을 시켰다. 선명한 붉은색 염료의 재료가 되는 이 나무는 재질이 너무 단단해서 대패질이 극심한 중노동이므로 누구도 하지 않으려 했다. 결국 빈민들에게 이 일이 돌아갔다. 이곳에서는 하루 종일 대패질을 하도록 시킨 다음 저녁에 결과물의 양을 재서 기준량을 채운 사람에게는 식사를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식사량을 줄이든지 아예 굶겼다. 붉은 먼지가 몸에 붙어 마치 온몸에서 피가 나오는 듯한 모습을 한 채 재소자들은 오직 저녁 한 끼 얻어먹기 위해 하루 종일 중노동을 해야 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수용소 ‘라습하위스’에서는 빈민과 유랑민들이 브라질나무(brazilwood)를 대패로 깎는 일을 비롯해 각종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위키피디아

 

이런 기관에서 교정이 안 되는 빈민은 물이 차오르는 지하 감옥으로 보냈다. 이곳에 갇힌 사람은 간단한 펌프 하나를 주어서, 익사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펌프질을 해야 했다. 잠시 눈을 붙였다가도 다시 일어나 펌프를 움직여야 한다. 게을러서 가난하게 되었으니 노동의 소중함을 교육시킨다는 것이 이 감옥의 명분이었다. 근대 초입에 빈민은 성인은커녕 구금과 강제노동을 강요당하는 일종의 범죄자 취급을 당했다.

 

2022.01.04 

[57] 유토피아 (상)

양모산업으로 농지 줄어 쫓겨난 농민들… 이상국가를 꿈꾸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상향을 뜻하는 ‘유토피아’는 16세기 영국 정치가이며 작가인 토머스 모어(Thomas More·1478~1535)가 만들어낸 말이다. 1516년에 출판한 ‘유토피아’에서 이 말이 유래했는데, 고대 그리스어 ‘u(없는)’와 ‘topos(땅·나라)’를 합친 ‘존재하지 않는 나라’인 동시에 ‘eu(좋은)’와 ‘topos’를 합친 ‘행복한 나라’라는 두 가지 의미다. 그러니까 세상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언젠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는 이상적인 나라를 말한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상향을 뜻하는‘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인 동시에 행복한 나라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유토피아가 이상적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데 그치고 성급하게 잘못된 답으로 이끌면, 그 길은 자칫 디스토피아(암울한 미래 사회)로 가는 급행 루트가 될 우려가 크다. 오늘날에는 구태의연한 이데올로기 옹호자와 대중 영합주의자가 불안한 사회에 대해 잘못된 답을 제시하는 두 부류로 꼽힌다. 그림은 오스트리아 화가 마키스 월라미스의 작품‘유토피아 04′. /위키피디아

 
 

이상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현재 사회가 행복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느 날 런던 시내에 설치된 교수대에서 빈민 20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도둑 창궐을 막기 위해 당국이 절도범을 한꺼번에 처형하고는, 시민들에게 교훈을 주겠다며 시체들을 그 자리에 매달아 두어 썩도록 한 것이다. 어쩌다 이런 지옥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까?

 

이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바로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이야기다.

 

\“양은 언제나 온순하고 아주 적게 먹는 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양들이 너무나도 욕심 많고 난폭해져서 사람까지 잡아먹는다고 들었습니다. … 만족을 모르고 탐욕을 부리는 한 사람이 수천 에이커를 울타리로 둘러막고 있습니다. 소작농들은 쫓겨나서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결국 도둑질 끝에 교수대에 매달리든지 유랑하며 구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경작과 수확을 위해 많은 일꾼이 필요했던 그 땅에 가축을 풀어놓은 뒤에는 양치기 하나면 충분하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이 뜻하는 바는 이렇다. 원래 시골에서는 많은 사람이 농사지으며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직물업이 발전하여 양모 수요가 늘고 가격이 급등하자 지주 귀족들로서는 농사보다는 양을 쳐서 양모를 파는 것이 훨씬 큰 이익이 되었다. 그래서 농민들을 내쫓아 버리고 넓은 땅에 울타리를 쳐서 목장을 만들었다. 그 넓은 땅에 양만 가득하고, 원래 농사짓던 사람들은 쫓겨나 도시로 가서 흔히 범죄자가 되었고 심지어 사형을 당한 것이다. 이 사람들이 원래 사악한 범죄자인 건 결코 아니다. 다만 더 큰 이익을 탐하는 지주 귀족들 때문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소수가 부자가 되는 대신 다수가 빈곤에 빠지다 못해 죽음으로 내몰린다면, 이곳이 과연 정의로운 사회란 말인가?

 

▲토머스 모어는 자신이 쓴‘유토피아’에 불행한 현실 문제에 대한 이상적 해결 방안이 부조리하고 위험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담았다. /게티이미지 코리아

 

근대사회의 핵심 문제는 불평등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은 없을까? ‘유토피아’에서 모어는 가상의 이상 국가 유토피아를 직접 보고 왔다는 주인공 히슬로다에우스(Hythlodaeus·‘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입을 빌려 속 시원한 답을 제시한다. “사유재산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돈이 모든 것의 척도로 남아있는 한, 어떤 나라든 정의롭게 또 행복하게 통치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정의가 살아 있고 누구나 복된 삶을 살아가는 사회가 되려면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화폐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바탕에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나누어 가지면 누구나 공평하게 부를 누리고 수준 높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유토피아는 정말로 극단적인 평등 국가다. 이 나라에는 54도시가 존재하는데, 모두 같은 계획에 따라 건설되었기에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각 도시 안의 집들 또한 같은 구조를 하고 있고, 집의 문은 항시 열려 있어서 누구든 밀고 들어갈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나라에는 사유재산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사생활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식사도 각자 자기 집에서 하는 게 아니라 마을 회관에 모여서 함께 먹는다. 그뿐 아니라 국민 모두 건국 이래 수백 년 세월 동안 변치 않는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

 

이 나라의 핵심 원칙은 모든 국민이 하루 6시간씩 일하는 것이다. 전 국민이 함께 노동하여 일단 먹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아이디어다. 또 오직 생필품만 생산한다는 점도 중요한 요소다. 예컨대 곡물로 막걸리나 맥주 같은 불요불급하고 백해무익한 상품을 만드는 일은 없다. 혹시 누가 술 마시고 싶다는 허튼소리를 하면 ‘술에 취하면 그 순간 너는 행복하다고 믿겠지만 사실은 착각에 불과하며, 실제로 진정한 행복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훈계만 들을 것이다. 결국 이 나라 시민들은 절제하는 미덕을 갖추고 반듯한 삶을 살아간다. 흔히 간과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요소는 이 나라 사람들은 하루 6시간만 일하기 때문에 그 후 남는 시간을 이용해 지적·종교적·예술적 교양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다. 현실 사회에서는 기본적 생존 문제부터 위협받지만, 이 나라에서는 시민들이 다 함께 노력하여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 그에 더해 고상한 덕을 연마하며 살 수 있다.

 

▲토머스 모어가 1516년 출간한‘유토피아’초판본에 담긴 유토피아 지도. /마자랭 도서관

 

모어는 이런 아이디어를 정말로 현실적 안이라고 생각한 걸까? 그의 책에서 하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많은 독자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책 말미에서 극적 반전이 일어난다. 주인공 히슬로다에우스가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를 마쳤을 때 저자인 모어 자신이 다시 등장하는데, 놀랍게도 히슬로다에우스의 주장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비판적 논평을 한다. 유토피아라는 나라의 법과 제도 가운데서 많은 것이 부조리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적 소유 없는 공동체 생활과 화폐 없는 경제가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때까지 개진했던 핵심 내용을 일거에 뒤집는다.

 

도대체 모어의 진의는 무엇일까? 작품 속 모어와 히슬로다에우스 중 어느 편이 진짜 저자의 뜻일까? 분명 히슬로다에우스가 설명하는 유토피아도 모어의 생각이고, 그것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위험한가 하는 비판 목소리도 모어의 생각이다. 모어는 불행한 현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상적이지만 극단적인’ 해결책으로서 유토피아라는 모델을 먼저 제시하고는 다음에 현실 관점에서 반박한다. 현실을 대변하는 ‘자아’가 실험적 사고를 하는 ‘또 다른 자아’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 대해 토론하고 논쟁하는 식이다.

 

‘유토피아’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그냥 이상적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게 아니라 그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촉구한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고 긴급한 방안을 요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더라도 성급하게 ‘단순 무식한’ 답을 내놓으면 안 된다. 잘못된 답은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 자칫 디스토피아(dystopia·암울한 미래 사회)로 가는 급행 루트가 될 수 있다. 모어가 자기 책에서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극단적 정의는 바로 부정의(不正義)이기 때문이다.

 

폴 콜리어가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말하듯 오늘날의 불안한 사회에 대해 잘못된 답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구태의연한 이데올로기 옹호자와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대중 영합주의자(포퓰리스트) 두 부류다. 이런 사람들은 단지 현 사회의 불안과 분노를 능숙하게 활용할 뿐 그에 대처할 능력은 없다.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지만, 우리 사회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과 그에 기반한 원숙한 비전을 제시하는 후보를 아직까지는 보지 못했다.

 

[유토피아 계획이 실현된 나라]

아마도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와 가장 가까운 현실 국가로 크메르 루주가 만들어낸 혁명 캄보디아를 들 수 있다. 당시 프랑스의 한 언론사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거대한 헛간에 모여 먹는 식사부터 아이들 교육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활이 공동체적이다. 돈도 없고 월급도 없다. 각자 하루에 쌀 1㎏과 1년에 소금 600g, 옷 한 벌, 즉 검은 바지와 블라우스를 받는다. 밥을 먹기 위해서는 일해야 한다. 화폐가 없기 때문에 공동체 바깥에서는 생존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 그들은 하루 8시간 일하고 이론상으로는 한 달에 사흘 쉬는데, 쉬는 시간 대부분은 정치 교양 훈육에 바쳐진다. 라디오에서는 당이 주관하는 전달 사항과 혁명 가요를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쏟아붓는다.”

 

사유재산과 화폐제 철폐, 공동 식사, 공동 거주, 공동 노동, 똑같은 옷, 자유 시간에 이루어지는 덕성 함양 등 ‘유토피아’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지만, 실제로는 4년 집권 기간 중 전 국민의 4분의 1인 100만명 이상을 살해한 인류 역사상 최악에 속하는 체제 중 하나였다. 유토피아 이상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면 끔찍한 디스토피아 세계가 구현될 수 있다.

 

[58] 생명 연장하는 물, 인공 눈·비… 400년전 예측한 ‘과학 유토피아’

[유토피아] [중] 베이컨 ‘뉴 아틀란티스’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굳이 억제할 것이 아니라 충분히 충족하는 길을 찾자고 주장했다. 베이컨이 쓴 유토피아 소설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과학기술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가능케 할 뿐 아니라 신의 창조를 이어받아 제2 창조 작업을 이어갈 수 있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진은 1910년 프랑스 화가가 2000년 파리 모습을 상상해 그린 작품. 비행기가 교통 수단으로 자리 잡은 이 그림은 1910년대 카드 등에 사용됐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행복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제시한 답은 우리의 욕망을 절제하여 물질적 필요를 최소한으로 충족하는 대신 고차원의 정신적 수양을 추구하는 쪽에 가깝다<1월 4일 자 A34면 유토피아(상)>. 약 한 세기 뒤에 베이컨은 일견 매우 다른 답을 제시한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굳이 억제할 것이 아니라 충분히 충족시키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과학의 힘이다. 그런데 이때 과학은 물질적 측면뿐 아니라 강한 종교성을 동시에 띠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소설 형식으로 구상화한 작품이 ‘새로운 아틀란티스’(1626)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은 1561년 런던에서 대법관 니컬러스 베이컨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 두 국왕의 시대에 걸쳐 국회의원, 검찰총장, 대법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고위 정치인이면서 동시에 최고 수준의 학자라는 점은 모어와 유사하다. 하지만 고상한 기품의 소유자인 모어와 달리 베이컨은 권모술수에 능하고 자신의 야욕을 위해 배신 행위도 불사하는 저열한 정치꾼이었다. 결국 뇌물 수수 혐의로 의회에서 탄핵당하여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막대한 벌금까지 물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내몰렸다. 그의 연구와 저술은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저급한 성품의 소유자가 근대 과학 방법론의 효시가 되는 위대한 철학자가 된 사실을 보면, 말하기 불편하지만 꼭 선한 사람만 사회에 기여하는 건 아닌 듯하다.

 

\1620년에 출간된 주저(主著) ‘신기관(Novum Organum)’은 인류의 모든 지식 체계를 정리하고 앞으로 어떤 지식을 어떻게 보충해야 하는지 밝힌다는 야심 찬 기획이었다. 그의 생각에 일반적인 명제에서 출발하여 다음 명제로 나아가는 지난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연역법은 새로운 지식을 창출해 나가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그보다는 실험과 관찰로 개별 사례들에 대한 지식을 쌓아나가면서 점차 일반적인 명제를 이끌어내는 귀납법이야말로 새로운 앎을 열어가는 최선의 방식이다.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이런 철학적 내용을 쉽게 풀어서 표현하고자 한 작품이다.

 

소설의 스토리는 매우 단순하다. 중국과 일본을 향해 페루에서 출항한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조난당했다가 인근 섬에 상륙하게 된다. 벤살렘이라 부르는 이 섬나라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이 세상의 진리를 밝히는 작업에 매진하는 곳이다. 신세계와 구세계 모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른 어느 나라도 이곳을 알지 못하는 곳이니, 이 섬은 유토피아 문학의 무대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Nowhere)’의 한 변형이다. 이 나라를 통치하는 최고 기구는 솔로몬학술원이라는 학술 기관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과 귀납법으로 유명한 프랜시스 베이컨. /위키피디아

 

주인공 일행은 학술원 회원 한 명의 도움을 받아 이 나라에서 진행 중인 연구 분야들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그 내용을 보면 400년 전 저자의 상상력이 너무나 풍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다. 예컨대 ‘천국의 물’이라 불리는 음료수를 마시면 건강이 증진되고 생명이 연장된다. 유성 체계를 모방하고 그 운동을 보여주는 거대한 건물에서는 눈과 우박, 비를 인공적으로 내리게 할 수 있으며, 천둥이 일고 번개가 치도록 만들 수 있다. 한번 먹고 나면 다음에 오랫동안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고기나 빵, 음료수도 개발했다. 모든 종류의 빛과 색채를 실험하고 설명할 수 있는 연구실도 있다. 미세한 물체를 잘 볼 수 있는 현미경을 이용하여 세포도 정밀하게 관찰한다. 심지어 오늘날 진행 중인 유전자 클로닝(복제)을 연상케 하는 연구도 보인다. 이 기관의 연구 활동은 농학, 의학, 생물학, 식품학, 약학, 재료공학, 기계공학, 광학, 수학 등 실로 거의 모든 과학 및 공학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 덕분에 이 섬 주민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한다.

 

그렇지만 과학기술의 발달이 오직 물질적 복리 증진만 목표로 하는 건 아니다. 솔로몬학술원이 스스로 천명한 핵심 임무는 “사물의 진정한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며, “피조물을 창조한 신의 영광을 더욱 밝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인간이 이 피조물들을 더욱 값지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이들이 수행하는 연구의 근본적 성격은 신의 창조 작업을 이어받아 피조물을 더욱 값지게 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신의 ‘창조(creation)’를 이어받아 제2의 창조 혹은 ‘재창조(re-creation)’ 작업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이 신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의무는 신의 뜻을 잘 살펴서 자연을 관리하고 나아가서 개선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합리적으로 만드셨고, 따라서 우주는 법칙적으로 돌아간다. 오늘 해가 동쪽에서 떴다가 돌연 내일 서쪽에서 뜨지는 않는다. 따라서 신의 뜻은 매번 계시를 통해 직접 알려주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성 자체도 하느님이 인간에게 심어준 능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은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는 힘이다.

 

▲베이컨 사후 출간된 ‘새로운 아틀란티스’. /위키피디아

 

이런 연유로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흔히 최초의 과학 유토피아 작품이라고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종교적·신화적 분위기가 물씬 난다. 베이컨에게 과학기술은 결코 종교의 대체물이 아니다. 베이컨의 학문을 신학적으로 해석한다면 원죄로 인한 타락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은 원래 하느님이 부여해 주었던 능력을 많이 잃었고 황폐화된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인간은 이런 황량한 상태 그대로 지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잃어버린 능력을 복원하고, 이 세상을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개선해 나가면서 하느님의 부름을 기다려야 한다. 과학기술은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신성한 힘이다.

 

오늘날에는 종교와 과학이 흔히 서로 충돌하곤 한다. 창조인가 진화인가 하는 식의 논쟁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지만 사실 근대 초 시점에서 과학은 본래 신앙과 대척되는 게 아니었다. 과학은 진리를 밝히면서 동시에 세상을 복되게 하는 것이며, 신의 은총과 계시를 더욱 값지게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근대 과학은 안심하고 종교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과학기술이 신앙을 돈독하게 하는 진정한 길이라는 ‘보장’을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종교에서 독립하여 활동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현대 과학은 스스로 독자적인 기반을 주장하며, 종교와는 무관한 분야로 성장했다. 바로 이와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서구 문명이 근대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앞으로 세계 문명을 근본적으로 틀 지우는 힘은 대개 과학기술에서 나올 것이다. 과학기술이 유토피아를 만들어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이 세상을 이해하고 개선하는 막강한 힘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점들을 놓고 볼 때 장차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는 편협한 정치 논리에 맞추어 과학기술을 왜곡하는 부류가 아니라 반대로 과학기술의 큰 흐름을 이해하고 북돋을 줄 아는 인물이어야 할 것이다.

 

[신의 형상]

아담이 맨눈으로 우주를 볼 수 있듯이 인간에겐 망원경 있어

 

창세기는 인간이 ‘신의 형상(imago dei)’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 1:27~28)

 

이 구절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순히 인간과 신의 ‘모습’이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마치 신과 유사한 정도로 신성하고 영원불멸한 존재라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우주 만물을 관리하려면 의당 그런 정도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겠는가. 중세와 근대 초의 한 신학적 해석에 따르면, 타락 이전에 인간은 아주 놀라운 능력을 보유했는데, 이는 영적으로 성스러울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영국의 작가이자 철학자 조셉 글랜빌(Joseph Glanvill·1636~1680)은 ‘아담은 망원경 없이 우주를 볼 수 있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은 그런 뛰어난 능력을 상실했다. 이제 인간은 무력한 상태에서 고통스럽고 힘들게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 해도 인간은 신이 부여한 특출한 능력인 이성을 부분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것으로 인간은 원래의 탁월한 능력을 조금씩 되찾을 수 있고, 황폐한 이 세상을 개선해 갈 수 있다. 그 힘이 곧 과학이고 그것을 세상에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이 기술이다. 아담이 맨눈으로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날 과학자는 망원경으로 그 비슷한 일을 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신의 형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59] 유토피아 (下) 벨러미가 쓴 ‘뒤를 돌아보면서’

19세기 ‘사회주의 낙원’ 그린 소설… 미국은 왜 열광했나

19세기말 자본주의 폐해를 그린 미국의 풍자화 - 에드워드 벨러미는 1888년 출간한 ‘뒤를 돌아보면서(Looking Backward 2000-1887)’를 통해 자본주의 발전은 국가 자본주의로 귀결돼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모든 책임을 지는 이상 사회를 그려냈다. 19세기 중산층은 노동자들의 참담한 상황이 개선되기를 바라면서도 파업을 일삼는 노동 계급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도 갖고 있었다. 사진은 소수의 자본가가 다수 노동자를 이용해 배를 불리는 자본주의 폐해를 묘사한 1883년 미국의 풍자만화. /미 의회도서관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은 부익부 빈익빈의 모순과 극심한 사회 갈등이다. 이런 문제를 말끔히 해소하여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회가 과연 가능할까? 에드워드 벨러미(Edward Bellamy·1850~1898)의 ‘뒤를 돌아보면서(Looking Backward 2000-1887)’는 그런 이상이 실현된 미래 사회를 그린 작품이다.

 

1888년 이 책을 출판할 때 작가는 자기 작품이 얼마나 엄청난 성공을 거둘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출판 첫해에만 이미 6만부가 팔렸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 세계적으로 600만부가 팔리면서 세계 각지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에서 그리는 미래 사회가 너무나 그럴듯해서, 저자의 뜻을 추종하는 ‘벨러미주의자(Bellamyite)’들이 전국적으로 클럽들을 결성하고는 이 책 내용을 현실에서 그대로 실천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이런 초유 사태가 벌어진 것일까?

 

불면증에 시달리던 주인공 줄리언 웨스트(Julian West)는 최면술을 이용한 특별 요법을 받고 지하실에서 잠이 들었는데,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그 상태 그대로 오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무려 113년이 지난 서기 2000년, 그리하여 19세기 인물이 21세기 미래 사회를 보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이때 미국은 사회주의 천국으로 변해 있었다. 주인공은 꿈이 실현된 미래 사회의 삶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의 자본이 온 세상을 장악

미국은 어떻게 해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을까? 벨러미의 상상에 따르면 그 과정은 자본주의 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무한 경쟁이 계속되면 자본가 중 누구는 승리하고 누구는 몰락하여 갈수록 소수만 남게 된다. 이후에도 거대 재벌들 간 극한 경쟁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다 보니 급기야 단 하나만 살아남아 나머지 모든 자본을 다 흡수한 최후의 독점이 된다. 이렇게 남은 유일 자본은 스스로 국가가 되었다. 한 국가, 한 자본, 한 고용주가 온 세상을 장악한 것이다.

 

폭력적 혁명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가 갈수록 강력해지다 보니 결과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로 전환한다는 전망이다. 그렇게 완성된 국가 자본주의에 대해 다른 사상가들이라면 파렴치한 국가기구의 옹호 아래서 사악한 자본가가 인민의 고혈을 쥐어짜는 지옥 같은 세상이 되리라고 예측했을 것이다. 그런데 벨러미는 최종 독점 단계가 오히려 이상적 사회가 되리라는 정반대 견해를 제시한다. 이때까지 경쟁이 인간 사회를 피폐하게 했는데, 마지막 단계에 이르니 더 이상 경쟁이 없어져서 거꾸로 사회적 연대가 강화되고, 그동안 극도로 발전한 과학기술과 산업의 힘으로 이루어낸 물질적 성과는 모든 사람이 골고루 누리게 된다는 설명이다.

 

벨러미와 그를 비판한 모리스 - 에드워드 벨러미(왼쪽)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사회주의 유토피아로 구현될 것이라는 구상을 소설에 담았다. 이를 ‘중산층 응석받이’라고 비판한 윌리엄 모리스(오른쪽)는 국가가 사라진 사회를 이상향으로 제시했다. /위키피디아

 

산업은 완전히 국유화되었다. 국가-자본에 고용된 사람들은 옛날처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 짧은 시간만 일한다. 엄청난 과학기술 발전으로 생산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노동 조직을 군대 방식으로 운영한다는 것이다. 이름도 산업군(産業軍·industrial army)이다. 모든 사람은 21세에 산업군에 들어가 24세까지 일을 배우면서 자기에게 맞는 일을 탐색하다가 취향에 맞는 직업을 최종 결정한 후 45세까지 근무한다. 그 후 은퇴하여 편안하게 인생 2부를 즐기며 살아간다. 누구나 동일한 임금을 받되, 다만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힘들거나 위험한 일을 하면 노동시간을 줄여주는 식으로 보상한다.

 

완벽한 계획경제하에 국가가 생산과 배급의 담당자로서 국민에게 필요한 물품을 충분히 공급한다. 시민 모두 똑같은 구매력을 가지고 있으니 부자들만을 위한 생산 같은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과도한 낭비나 과시 소비도 없어질 테고, 노후를 대비해 죽어라 일하며 저축할 필요도 없다. 국가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지기 때문이다. 평생 힘들게 모은 재산을 아들딸에게 물려주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므로 유산 상속도 사실상 없어진다. 돈을 빼앗으려는 절도와 강도가 없을 테니 범죄도 거의 사라지고, 따라서 교도소도 극소수 범죄자나 정신병자를 가두는 용도로만 일부 남아 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서기 2000년에 미국이 사회주의 천국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왜 예측이 틀렸냐고 저자에게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작가가 왜 이런 구상을 했는가, 작가의 전망이 우리에게 어떤 점을 일깨워주는가를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한편으로 19세기 중산층은 당시 노동자들의 참담한 상황을 보고 이들의 처우가 개선되기를 바라 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반복되는 파업과 봉기에 넌더리를 냈고, 노동 계급에 대한 공포와 혐오에 빠졌다. 중산층은 노동 계급의 혁명 운동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사실 노동 계급 자신도 자본주의 체제를 파괴하고 난 후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확실한 전망이 없었다.

 

개인의 행복은 국가 통제로 못 얻어

이런 상황에서 벨러미가 제시한 중간의 길이 엄청난 호응을 얻은 것이다. 생산 수단 국유화라는 점에서 사회주의자들과 목표를 공유하되, 파괴적 혁명을 피하고도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하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사회주의 천국의 이념이 미국 중산층의 꿈과 만난 것이다.

 

“우리는 행복하다” 소련 현실 꼬집은 그림 - 소련을 풍자한 프랑스 만평에서 남루한 옷차림의 해골이 ‘우리는 매우 행복해’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1935년 프랑스 신문에 실린 이 만평에는 ‘소비에트 천국’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뒤를 돌아보면서’는 철학자 존 듀이,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 여성주의 작가 샬럿 질먼 등 많은 지식인의 지지를 받았으나, 물론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과연 계획경제가 효율적으로 작동할 것인가? 그런 체제가 정말로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인가? 이런 의문에 대해 현실에서 확인할 기회가 찾아왔다. 역설적이지만 미국 중산층 작가의 상상과 매우 유사한 체제가 스탈린 시대 소련에서 실현된 것이다. 전권을 잡은 국가기구가 모든 경쟁을 억압하고 군사적 방식으로 통제하는 계획경제는 벨러미의 구상과 판박이로 같다. 이 체제는 결코 행복한 사회를 이루지 못했고, 정반대로 지극히 억압적 전제주의로 귀결되고 말았다.

 

왜 많은 지식인과 다수 시민이 드디어 찾아냈다고 열광했던 해결책이 현실에서는 최악의 억압 체제로 귀결되었을까? 아마도 인간 본성과 맞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원하는 종류의 행복을 우리 스스로 찾아내지 않고 국가에 의탁한 데서 원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우리에게 기본 소득과 용돈 나누어주고, 일자리 만들어서 고용하고, 부족한 물품 나누어준다고 해서 시민들은 만족하지 않는다. 내 소중한 삶을 왜 국가가 나서서 규정하고 명령을 내리려 하느냐는 반발이 불을 보듯 뻔하다.

 

\벨러미가 노동 조직을 군대식으로 짠 점에서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시민들의 직업을 군대에서 보직 배정하듯 정하는데, 이러지 않고 자율적으로 맡겨서는 계획경제가 잘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작품에서는 시민들이 짧은 시간 일하면서도 풍족한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에 매우 만족하며 사는 것처럼 그리지만, 현실에서는 그와 같은 방식에 불만족인 사람이 차고 넘칠 것이다. 국가기구는 오직 보조적 도움을 주는 데 그쳐야 한다. 내 삶의 주체가 나 자신이 아닌 사회는 ‘천국’이 되기는 애초에 글렀다. 흔히 그러하듯 잘못된 유토피아 기획은 디스토피아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영국 모리스, 벨러미 비판]

“중산층 응석받이 소설… 혁명적 파괴 없이는 새로운 체제 조성 불가능”

 

영국의 미학자·사회주의운동가인 윌리엄 모리스(1834~1896)는 벨러미의 책에 대해 ‘중산층 응석받이(cockney) 사회주의’라며 비판했다. 우선 혁명적 파괴 없이 새로운 체제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모리스 자신의 유토피아 저작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온 소식’(News from Nowhere·우리나라에서는 ‘에코토피아 뉴스’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에서는 엄청난 유혈 투쟁의 결과 새로운 체제가 등장하는 것으로 그린다. 그렇게 하여 이루어낸 이상적 사회 체제 모습 역시 벨러미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벨러미는 국가가 모든 것을 챙겨주는 이상 사회를 그린 데 비해 모리스는 국가가 사라진 사회를 그렸다. 국가와 대자본이 사라지면 무엇이 남는가? ‘이웃’이라고 그는 답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시장에 내다 팔 저급한 쓰레기 상품을 대량으로 만들지 않고 나 자신이 쓰거나 내 이웃에게 선물할 물품을 수작업으로 정성껏 만든다. 공장이 사라지고 난 후 자연은 원래의 순수함을 되찾는다. 말하자면 그는 자본주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파괴한 다음 이전 시대인 중세로 역주행한 것이다. 아름답기는 하되 실현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순진한 그의 이상주의는 ‘거대한 바캉스 계획’ ‘영국판 디즈니랜드’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2022.02.22 

[60] 영국의 폭군 리처드 3세

권력 향한 광기… 가족까지 없애며 차지한 왕권, 2년만에 끝났다

장미전쟁(1455~1485)은 이름만큼 그렇게 낭만적인 사건이 아니다. 백년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전사 귀족들이 왕권을 놓고 다시 치열하게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다 자멸한 말세의 전투라는 평가가 실상에 가깝다. 그중에서도 특히 리처드 3세는 지옥 같은 막장 정치판에서 악마의 광대 노릇을 하다가 처참하게 몰락한 인물이다.

 

리처드 3세의 죽음으로 끝난 장미전쟁 - 리처드 3세는 수많은 정적들을 무참하게 죽인 폭군으로 꼽히지만 평민 보호 정책 등 합리적 개혁도 시도했다. 그가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전사해 장미전쟁은 끝났고, 헨리 7세가 새로운 튜더 왕조를 열었다. 일각에서는 튜더 왕조의 정통성을 위해 리처드 3세를 악인으로 낙인찍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림은 19세기 화가 제임스 에드먼드 윌리엄 도일이 보즈워스 전투를 묘사한 작품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왕권 쟁탈전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은 헨리 6세다. 백년전쟁이 끝난 1453년, 국왕의 정신병이 크게 악화되었다. 통치가 불가능해지자 국왕의 조카뻘인 요크 공작이 국왕을 보호하는 척하다가 그 자신이 왕위를 탐하면서 랭커스터 가문(붉은 장미)과 요크 가문(흰 장미) 간 전쟁이 시작되었다. 사실 30년 내내 전투가 지속된 건 아니고 군인 수천 명이 짧은 기간 무모하게 살육전을 벌이는 식이었다. 귀족들은 명예롭게 싸운다며 칼과 도끼를 들고 장궁(長弓) 사수를 향해 용맹하게 돌진하곤 했다. 이런 무지한 행태 덕분에(!) 백년전쟁에서 살아남은 소수 귀족이 마저 사라져가는 결과를 낳았다.

 

요크 가문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요크 공작 자신도 사망하였기에 그의 아들이 에드워드 4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 10년 후 제정신을 찾은 헨리 6세가 왕권을 되찾기 위해 도전해 왔으나 다시 패배하여 런던탑에 갇혔다가 사망했다. 그의 아들마저 전사하여 랭커스터가의 직계는 단절되었고, 요크가의 지배가 탄탄하게 굳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가문 내분이 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에드워드 4세가 죽었을 때 그가 남긴 두 아들은 12세와 9세의 어린아이였다. 장남이 에드워드 5세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대관식도 치르지 못한 상태에서 두 달 후 런던탑에 갇히고 동생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왕위는 선왕의 동생 리처드가 차지했다. 숙부가 어린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빼앗는 것은 역사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 이번 경우에도 리처드가 어린 왕 에드워드를 죽였을까? 역사가들은 정황상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지만, 결정적 사료가 없으므로 단정할 수는 없다.

 

때때로 중요한 문서가 뒤늦게 발견되기도 한다. 이탈리아 출신 학자이자 수도사인 도메니코 만치니(Domenico Mancini)가 1482~1483년에 잉글랜드를 방문하여 궁정에서 벌어진 사태를 직접 목도한 후 기록을 남겼다. 이 문서는 오랫동안 프랑스의 릴(Lille) 도서관에 묻혀 있다가 1934년에 가서야 발견되었는데, 역시나 리처드의 행적에 대해 부정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

 

리처드 3세 초상화. 사악한 왕으로 불리는 그는 막장 정치판에서 처참하게 몰락한 인물로 꼽힌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선왕의 장례식 후 왕실과 대귀족들은 보좌위원회를 만들어 공동으로 어린 왕을 보필하자는 의견이었으나, 리처드는 홀로 섭정(Lord Protector)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곧 반대파 인사들을 체포하여 살해하더니, 어린 국왕과 동생을 런던탑에 유폐했다. 그러고는 현왕의 정통성을 부인했다. 선왕 에드워드 4세가 다른 여성과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왕비와 결혼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태어난 현왕은 서자라서 정통성이 없으며, 결국 자신이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는 것이다. 그가 대관식을 치르고 리처드 3세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차지한 이후 어린 것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이 시기에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곧 국왕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사방에서 리처드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주도자 버킹엄공은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헨리 튜더에게 귀국하여 왕위를 물려받으라고 제안했다.

 

튜더 가문의 헨리는 혈통상으로 랭커스터 왕실에 제일 가까운 인물이다. 일찍이 프랑스에 피신해 있던 그는 무명의 존재였고 전투 경험도 없었으나, 프랑스의 지지를 받는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프랑스 전사들을 앞세우고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에 상륙한 헨리는 보스워스 벌판에서 리처드 군과 최후 결전을 벌였다. 귀족들의 지지를 잃은 리처드는 마지막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전사했다(영국사에서 마지막으로 전사한 국왕이다). 일설에 의하면, 리처드는 왕관을 머리에 쓰고 전투에 나가 싸웠는데, 그가 죽었을 때 관목 숲에 떨어진 왕관을 부하들이 찾아서 헨리 튜더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승리를 거둔 튜더는 요크가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원수 가문 간 갈등을 봉합하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새 왕조를 열었다. 이것이 영국사에서 통상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튜더 왕조의 시작이다.

 

리처드가 그토록 왕관을 차지하려 한 데에는 물론 개인의 야심이 발동한 면이 있겠으나, 자기가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더 통치를 잘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작용했던 것 같다. 사실 짧은 기간이기는 하나 그의 통치 행위를 보면 분명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 같다. 1484년, 그의 치세에 유일하게 열렸던 의회에서 리처드는 평민들을 보호하는 정책들을 내놓았다. 범죄 행위로 체포된 사람에게 보석을 허가하고,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재산 몰수를 금지했으며, 토지 관련 혹은 직물 교역에 관한 법 조항들을 정비하고, 지방의 불합리한 재판소들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는 분명 합리적 개혁을 시도하려 했던 것 같다. 역사상의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만일 보스워스 전투에서 그가 승리했다면 그는 유능한 영국 국왕의 반열에 올랐을 수도 있다.

 

물론 실제 일어난 일로 평가하면 그는 당대에 이미 폭군(tyrant) 소리를 들었다. 특히 다음 왕조에서 활약한 셰익스피어가 최악의 인간 말종으로 묘사했다. ‘리처드 3세’에 그려진 리처드는 발을 심하게 저는 꼽추로서, 친형 클래런스경을 모함하여 런던탑에 가두고 부하들을 시켜 포도주 통에 밀어 넣어 익사시키는 것을 비롯해 수많은 정적을 무참하게 죽이는 악인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악의 극단을 치달은 인물인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셰익스피어가 리처드를 지나치게 악마화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마치 조선시대 문인이 고려시대 마지막 왕을 사악하게 그리는 것처럼, 튜더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전 시대 최후의 왕을 나쁘게 그렸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리처드 3세 우호 협회(Society of Friends of King Richard III)’ 같은 모임이 지나친 역사 왜곡을 교정하겠다며 오랜 기간 노력해 왔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문학과 예술이 갖는 강력한 영향력을 이기기는 어렵다. 사람들의 뇌리에 강력히 박힌 이미지는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것이다.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도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품 중 하나인 ‘리처드 3세’에서 주인공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정적들과 싸우며, 최후의 권력을 잡기 위해 기꺼이 모략을 일삼는 악마의 배우 역할을 한다. 악이 횡행하는 어둠의 세계에서 절름거리는 몸짓으로 몸부림치며 권력을 향해 돌진하는 그의 모습은 실로 처참하다. “양심이란 비겁한 놈들의 변명이야! 평화와 정의란 가진 놈들이 못 가진 자를 위협하기 위해 꾸며낸 말이야. 이 팔의 힘이야말로 양심이고 칼이 곧 우리의 법이다. 닥치는 대로 해치워라! 천국에 못 갈 바에야 손에 손을 잡고 모두 지옥으로 가는 거다.”

영국의 대배우 로런스 올리비에 경이 연기하는 리처드 3세를 DVD로 보니 차라리 젠틀한 인상을 받는다. 최근 우리나라 무대에서 열연한 황정민의 ‘K-리처드 3세’가 훨씬 처참하고 잔혹하고 독하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판이 장미전쟁 시기 잉글랜드보다 더 악하게 싸움을 벌여서 그런가….

 

관도 없이 묻혀 있던 유골 500년만에 주차장서 발견… 두개골엔 칼자국이 11개

최근 역사학계의 놀라운 사건 중 하나는 그동안 잃어버렸던 리처드 3세의 유골이 발견된 일이다. 2012년 역사학자·고고학자들은 런던 북쪽 160㎞ 레스터시의 시내 주차장 바닥을 조사하여 유골을 찾아냈고,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과 DNA 테스트를 통해 이 유골이 리처드의 것임을 확인했다. 그가 전사한 후 작은 교회에 묻혔다가 이 교회가 무너져 사라지는 바람에 왕의 유골도 땅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유골조사 발표하는 연구진… 셰익스피어 묘사처럼 척추 휘어져 - 영국 레스터대 연구팀이 리처드 3세 유골 발굴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연구팀은 옛 교회 터에서 발굴한 유해가 리처드 3세 유골인 것을 DNA 조사 등을 통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유골을 보면 척추가 심하게 휘어져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유골을 살펴본 결과 전체적으로 셰익스피어의 묘사가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왕은 척추측만증으로 몸통이 크게 휘어 있었고, 해골을 스캐닝해서 만들어본 얼굴 모습은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에 있는 사악한 모습과 꽤 닮았다는 평을 듣는다. 무엇보다 그의 두개골에 나 있는 11곳의 칼자국, 특히 후두부의 두개골 일부를 깨뜨릴 정도의 강력한 칼자국은 마지막에 그가 죽을 때 주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관도 없이 묻혔다가 유골마저 유실되었던 이 불행한 국왕은 500여년이 지나서야 다시 정중하게 재매장되었다. 영국 성공회의 수장인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가 집전한 의식을 통해 레스터 대성당에 시신이 다시 묻힐 때 유명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영국 계관시인 캐럴 앤 더피의 시를 낭독했다. “이 유골을 축복하라. 끊어진 끈을 다시 잇고/ 내 죽었을 때 잘려나간 표상 십자가를/ 거기에 다시 꿰는 것을 상상하라….” 각고의 노력 끝에 영국 역사학자들은 시를 낭독한 컴버배치가 리처드 국왕의 먼 후손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