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전쟁사] 2021 동아일보 역사학자
2021-10-05
〈181〉그리스인의 분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갑작스레 사망한 뒤에 부하들은 왕궁에서 잘 정리된 문건 하나를 발견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준비 중이던 다음 원정 계획서였다. 이 참을 수 없었던 정복자의 칼은 시칠리아, 이탈리아반도,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 도시와 이베리아반도까지 향하고 있었다. 서쪽으로 나가 전 지중해를 석권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10년을 더 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 사람은 로마 제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당시 로마는 막 이탈리아 중부를 석권하고 남부의 여러 민족, 지역과 전투를 벌이던 중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군대가 침공해 왔더라면 배겨 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답은 영원히 알 수 없지만, 당시 이탈리아에는 이미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인들이 침투해 있었다.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에는 그리스인들이 세운 식민도시들이 정착해 있었다. 이들 외에도 로마인, 에트루리아인, 삼니움인, 켈트인들이 난립해서 이탈리아는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훌륭한 기회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머니 올림피아의 동생인 알렉산드로스 1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촌 피로스가 그리스인의 이탈리아 정복을 이루고자 연이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둘 다 정복에 실패한다. 결정적 이유는 그리스인들의 분열이었다. 그리스인 연합 같은 시도는 있었지만, 도시국가 의식이 너무 강했던 이들은 한 번도 자신들이 하나의 국가라는 생각을 해 보지 못했던 듯하다. 알고 보면 비록 승리했지만,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때도, 마케도니아가 그리스를 정복할 때도 그리스는 한 번도 제대로 단합한 적이 없다. 고향을 떠나 이탈리아까지 와서 손을 잡을 일은 더더욱 없었다. 이때를 마지막으로 그리스는 이탈리아 정복의 기회, 유럽의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상실한다.
〈182〉 선전포고

6·25전쟁에서 우리가 늘 강조하는 사실이 선전포고가 없는 기습공격이었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벌인 전쟁에서 일본은 약간의 꼼수를 제외하고는 항상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으로 일관했다. 가끔 이런 질문을 하는 분이 있다. 손자도 전쟁에서 술수와 거짓말을 용인했다. 국가와 국민의 목숨이 걸린 전쟁에서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선전포고가 국제법으로 성문화된 것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였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기습적인 침공에 수모를 겪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강력히 주장한 덕분이었다.
선전포고 자체는 고대부터 등장했다. 도시국가 시절 로마 역사에도 주변 도시에 선전포고하는 사례가 있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에서도 사례가 있다. 선전포고는 동양보다는 서양 전쟁사에서 더 많이 등장한다.
서구가 더 신사적이어서 그럴까? 선전포고는 정정당당, 기사도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은 외교의 폭력적 형태이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국익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선전포고는 잘못되면 상대에게 전쟁을 대비하는 기회를 주지만, 전쟁 없이 결과를 얻으려는 마지막 노력이기도 하다. 자국민에게는 전쟁의 명분을 준다. 여러 나라가 국경을 마주하고 있을 때는 전쟁의 이해관계도 복잡해서 국제적인 지지, 각국의 처신도 중요하다.
상대가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하루 이틀 전에 전쟁을 통보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 유럽 국가도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해 선전포고가 득보다 실이 많다고 생각하면 생략하곤 했다.
주요기사
이제 우리가 현명해지려면 선전포고를 했느냐 안 했느냐를 따지기 전에 전쟁과 국익, 국제적 이해관계에 대한 현명한 시각을 키울 필요가 있다. 우리 교육에는 이런 것이 너무 부족하다. 국제 문제에 대해 감정적이 되는 것은 우리 국민이 감성적이어서, 과거에 당한 한이 많아서가 아니라 국제 문제를 보는 자세와 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183〉 테러와 21세기

미군의 철수 작업이 한창이던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에서 테러가 발생하고, 한 달 뒤 북부 쿤두즈주 이슬람 사원에서 이슬람국가(IS) 호라산의 자폭 테러가 발생해 1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살면서 체험한 경험적 진리에 의하면 근거 없는 낙관은 실현되는 법이 없는데, 이유 없는 불길함은 꼭 현실이 된다. 현재 상태에서 아프가니스탄 사태의 가장 긍정적인 진행은 탈레반 정권이 이전과 달리 유연성을 발휘해 국제 원조와 요구에 호응하고 내정에서 개방적이고 융통성 있는 태도를 발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소망은 소설에 가깝다. 최악의 가정은 탈레반 정권이 분열하고 그 와중에 IS가 최대 세력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심술궂은 악담 같지만, 첫 번째 가정보다는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지난달부터 서방 국가들과 일본은 갑자기 아프가니스탄에 수억 달러의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주민들의 삶이 최악의 상태로 빠져드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일 수 있지만, 사회 안전망 붕괴가 탈레반 정권 분열과 IS 세력 확장의 토양이 돼 가고 있다는 위기감을 포착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산 넘어 산인 아프간 사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IS는 왜 이토록 무자비한 테러에 열중하는 걸까? 첨단 무기와 강력한 군대를 지닌 강대국을 상대하기 위한 약한 자의 유일한 저항 수단이라는 주장도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어떤 이들은 종교적 열정, 광신 때문이라고 한다. 글쎄 가끔 소수의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열정적인 신도들도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신앙 하나로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할 정도로 숭고하지 않다. 좌절된 꿈과 욕망이 분노와 선동으로 가공돼 극단적 행동으로 분출되는 것일까. 후자의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 문제는 IS와 같은 극단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현재 전 지구를 덮고 있는 21세기의 기저 현상이다. 이제 모두가 이 문제를 더 진지하고 간절하게 직시해야 할 시대가 됐다.
(184) 없음
〈185〉 기록이 역사의 승자 만든다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지만, 그 의미는 개연성이 있다. 전쟁사에서 대부분 기록은 승리자 측의 기록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틀렸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승자의 기록이란 승자, 승리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다. 기록을 남긴 자가 역사의 승리자가 된다.
과거 역사학에서 그런 경향이 있기는 했는데, 기록이 없다고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방법이다. 예를 들면 구석기인들이 석기만 사용했을까? 아니다. 나무 도구도 사용했을 것이다. 동굴이 아니라 나무와 가죽을 이용해서 야지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무나 가죽은 썩어서 그런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한때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던 시대도 있었다. ‘증거주의’의 오용이다.
나도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나무와 텐트를 사용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정도는 역사책에 서술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생긴 나무 도구를 사용했을 것이다, 나무칼을 깎아서 전쟁을 했을 것이다’라고 서술한다면 이건 선을 넘는 것이다. 심증이 간다고 해도 증거 없이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전쟁사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어제 90세 넘은 6·25전쟁 참전용사를 만났다. 기관총 사수였다고 한다. 멀지도 않은 20세기 중반에 벌어진 한국전쟁, 그분의 증언을 광범위하고 상세하게 전문적으로 채록해야 했는데 그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하면 꽤 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렇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았다. 아무리 늦어도 1990년대에 이 작업을 시작했어야 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늦었다. 90년대에 나는 개인적으로는 여력이 없었고, 도움을 요청할 능력도 없었다. 지금이라도 이런 말을 하는 건 우리 사회가 기록에 대한 투자의 가치를 알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186〉 크세르크세스의 리더십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자는 키루스 2세이다.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은 다리우스 1세이다. 그리스를 침공해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했던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리우스의 아들이자 키루스의 외손자이다. 페르시아 제국사에서는 가장 위대하고 완벽한 황금 혈통이었다.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공을 다룬 영화 ‘300’에서 크세르크세스를 컬트적인 기괴한 모습으로 꾸미는 바람에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데 복장도 그렇지 않았고, 용모도 혈통에 걸맞게 키도 크고 잘생긴 군주였다. 그러면 매너는 어땠을까? 그는 훌륭한 매너를 지닌 군주였다.
신하들이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제시할 때도, 신하의 간언이나 충고를 거절할 때도 화를 내거나 상대를 모욕하지 않았다. 훌륭한 의견이라고 경의를 표하고, 신하들에게 비록 지금 내가 그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그가 우리의 훌륭한 친구이고 진심으로 좋은 의견을 제시했음을 기억하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리더십에서 이런 배려는 정말로 중요하다. 권력자 앞에 있는 사람들은 권력자가 누구의 의견, 어떤 의견을 좋아하는지 눈여겨본다.
조금 지나면 모두가 군주의 취향에 맞춰 한결같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제안을 거절당했던 신하를 ‘왕따’시키고, 구박하고, 심하면 ‘저자는 왕의 눈 밖에 났다’고 지레짐작하고, 타깃으로 삼아 모략을 꾸민다.
이렇게 해서 위대했던 제왕은 아첨꾼들, 바보들에게 둘러싸인 초라한 군주가 되어 간다. 크세르크세스는 적어도 이런 부분에서는 괜찮았다. 하지만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이런 훌륭한 매너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 침공 때 항상 잘못된 전략을 택했다.
훌륭한 매너도 중요하지만 결국 전쟁의 승부를 가르는 것은 지도자의 올바른 결정이다. 매너도 열린 언론도 올바른 결정을 선택할 가능성을 높이기에 미덕인 것이다. 많은 리더들이 이 부분을 착각한다. 용모와 매너 모두 완벽했던 크세르크세스는 신하들에게 쫓겨나 살해됐다.
〈187〉 독재는 ‘선동의 기술’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기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절친이며, 야심가였던 아테네의 알키비아데스는 주적인 스파르타를 버려두고 뜬금없이 시라쿠사 침공을 주장한다. 아테네는 사상 최대의 함대를 시라쿠사로 파견한다. 원정은 참패로 끝났고, 아테네 몰락의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이 원정은 시라쿠사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처음에 시라쿠사는 아테네 함대의 위용에 놀라 항복하려고 했는데, 헤르모크라테스의 반대로 항전을 결정했다.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영웅이 되었다. 당연히 권력이 따라왔다. 아테네의 침공을 물리친 대가로 시라쿠사는 독재의 길을 걷게 된다. 헤르모크라테스의 사위였던 디오니시우스 1세는 장인의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을 늘렸다. 그도 역시 장군으로서 카르타고의 침공을 막아내어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마침내 참주를 거쳐 왕이 된다.
시라쿠사에 가면 디오니시우스의 귀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다. 디오니시우스가 정적을 가두고 고문한 감옥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대단한 독재자였지만 유능하고 정치력이 뛰어났다. 문인 군주, 철인 군주의 흉내를 내던 그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를 품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모색하던 플라톤을 시라쿠사로 불러들인 적도 있다. 플라톤은 디오니시우스의 아들을 교육하며 철인군주의 이상을 꿈꿨지만, 음모꾼이자 현실정치의 달인이었던 디오니시우스는 플라톤의 철인군주론에 기겁을 하고 그를 노예로 팔아버린다.
디오니시우스의 일생을 보면 두 가지 생각이 든다. 전쟁은 패하면 적의 노예가 되고 승리하면 영웅의 노예가 된다. 그렇지 않은 훌륭한 사례도 많지만, 전쟁영웅이 위험한 권력자로 변신한 경우는 꽤 흔하다. 이건 전쟁이나 군인 탓이 아니라 대중들의 ‘영웅대망론’, 초월적인 권력이 단숨에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 조급증 탓도 있다. 그래서 독재는 본질적으로는 ‘선동의 기술’이다.
〈188〉 ‘명궁 DNA’의 한계

이성계는 명궁에다 강궁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고려 말 황상이란 장수가 있었다. 원나라는 몽골인이 세운 나라라 명궁이 많았다. 황상은 원에 가서 벼슬을 하면서 원나라 궁수들과 경기했는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황제가 어떻게 그렇게 활을 잘 쏘느냐며 황상의 팔을 만져보기까지 했다고 한다.
노년에 이성계와 경기를 했다. 50발을 쏠 때까지는 서로 빗나가는 화살 한 발 없이 팽팽한 승부를 벌였는데, 50발이 넘어가니 황상의 체력이 달리면서 빗나가는 화살이 나왔다고 한다. 이건 실력 차이라기보다는 나이로 인한 체력 차이로 봐야 하니 황상의 패배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몽골군이 말과 활로 세계를 제패했다고 하지만, 고려 궁수들의 실력은 몽골군을 놀라게 했다. 세월이 지나 활이 조총으로 바뀐 뒤에는 조선 포수들의 실력이 뛰어났다.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흥기하자 명나라가 토벌전을 벌이면서 조선에 병력을 요청했다. 비록 패했지만, 이때의 전투에서도 조선 포수들의 실력은 탁월했다. 명군도 그것을 알고 조선 포수를 적극적으로 요청했었다. 17세기 후반 연해주에서 청과 러시아 사이에 국경분쟁이 발생했다.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하면서 조선군에게 지원 요청을 했다. 조선은 중대 규모 병력의 포수를 파견했다. 이것이 나선정벌이다. 이때 조선군과 청군이 사격훈련 내지는 경기를 했는데, 조선군 포수의 실력이 월등히 좋았다.
현재도 양궁은 자타 공인 세계 최강이고 사격도 세계 대회에서 메달이 끊이지 않는다. 물론 선수들의 피땀 어린 노력의 결과이지만, 역사를 보면 훈련과 노력을 넘어선 선천적인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19세기 말이 되면 이 놀라운 사격 솜씨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나라를 방어할 능력이 없었다. 그때까지도 주력 무기가 조총이었다. 소프트웨어는 탁월한데 하드웨어에서 몇 세대가 뒤처졌던 거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불균형이 이렇게 무섭다.
〈189〉 복종하는 리더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는 스파르타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동시에 스파르타의 몰락을 지켜보아야 했던 왕이다. 그는 평생을 스파르타의 영광을 위해 전장을 누볐다. 아게실라오스는 특별한 스파르타인이었다. 그는 체격도 왜소하고 어쩌면 선천적인 이유로 다리를 절었다. 건장한 아이가 아니면 키우지 않았던 스파르타에서는 올바로 자라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왕자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복형이 왕으로 즉위해 왕위와 왕자라는 지위까지도 포기했기 때문인지 스파르타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 평민이라고 말하고, 왕손은 입학하지 않았던 학교 아고게에 입학했다. 신체적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노력과 투지로 그는 최고의 전사가 되었다. 동급생 중에서 그를 이기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노년이 돼서도 스파르타군의 맨 앞에서 창을 들고 싸웠다. 아게실라오스는 탁월한 전사이며 뛰어난 전술가였고, 전장에서는 최고의 지휘관이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은 아게실라오스가 다른 왕자와 달리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유명한 아고게를 졸업한 게 그에게 복종심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크세노폰의 이 지적은 꽤 의미가 있다. 훌륭한 리더가 되려면 부하들, 백성들, 부림 받는 사람들의 고충을 이해해야 한다고들 한다. 여기서 이해라는 게 어떤 행동을 말하는 것일까? 선거철이 되면 모든 출마자들은 앞장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 한 맺힌 사람들을 찾아가 당신들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큰절을 하며 섬기겠다고 한다. 본인들은 정말로 자신들이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은 리더십에 관심이 많았고 리더십에 관한 훌륭한 저술을 여러 편 남겼다. 그가 칭찬한 리더로서 아게실라오스의 덕목은 이해심에 대한 게 아니었다. 크네노폰이 꼽은 리더의 자격요건은 복종심이었다. 복종할 줄 아는 자가 다른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이해 못하는 리더는 없는데, 복종하는 리더는 보기 힘들다. 복종은커녕 역사, 민생, 사명, 온갖 이유를 들어 당당하게 복종을 거부하고 그것을 리더의 능력으로 내세운다. 크네노폰은 복종하는 왕을 보았는데, 우리는 언제 쯤 보게 될까?
〈190〉 승리의 진짜 요인

유럽의 근대사, 세력지도를 바꾼 전쟁이 보오전쟁(1866년)과 보불전쟁(1870∼1871년)이다. 프로이센이 강국으로 떠오르고 독일 통일을 목전에 두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방해를 시도했다.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에 이어 프랑스까지 격파했다. 유럽의 강자가 바뀌었고, 프로이센은 거침없이 내달려 독일 통일을 완성함으로써 더 강한 국가가 되었다.
동시에 독일은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했던 국가적 수치를 지우고 멋지게 복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프랑스의 왕은 나폴레옹의 조카라는 루이 나폴레옹이었다. 독일은 그 후 너무 강해져서 1차,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2차 세계대전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현재 경제력에서는 유럽의 최강자로 복귀했다.
독일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신형 드라이제 소총이다. 이전까지 소총은 총알을 총구에서 삽입해야 했다. 이를 전장식 소총이라고 한다. 전장식 소총은 발사 속도가 느릴 뿐 아니라 서서 장전하고 사격해야 한다. 잘해야 ‘앉아 쏴’가 가능한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강선이 들어간 소총이 발명되면서 소총의 위력과 명중률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자 병사들이 서서 전진하며 사격하는 라인배틀 방식은 말 그대로 죽음의 대형이 되었다. 노리쇠를 당겨 탄환을 삽입하는 후장식 소총은 발사 속도를 비약적으로 증가시키고, 엎드려 쏘기를 가능하게 했다. 여전히 서서 싸우는 방식을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지만, 전투 방식에서 비약적인 변화를 준 건 분명하다.
후장식 소총의 역할이 과장됐다는 설도 있다. 강국 간 전쟁에서 약간의 무기 성능 차이, 비교우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진 못한다. 승리의 진짜 요인은 인간이다. 그들의 전술, 역량, 용기, 의지였다. 이 믿음이 진정한 위기를 맞는 순간이 드디어 왔다. 아직은 아니지만, 드론, 인공지능(AI), 로봇, 우주전쟁은 정말로 인간의 시대가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를 던져주고 있다. 전쟁만 그런가. 인류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정한 시험대에 섰다.
〈191〉책임과 희생

한 병사가 햄버거 가게에 들렀다. 어떤 시민이 그의 식사비를 대신 내고 나갔다. 귀향하는 병사가 비행기에 탔다. 비즈니스석에 있던 사업가가 자기 자리를 양보했다. 이런 이야기가 잊어버릴 만하면 보도된다. 미군은 모병제를 시행한다. 병사는 모두 직업군인이다. 자신이 자원해서 직업으로 택한 병사인데 그렇게까지 감사를 표시할 필요가 있을까? 어떤 이는 이렇게 해석한다.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고 군대 덕에 얻는 게 많으니 당연히 감사해야지.
백번 양보해서 그런 시각과 해석이 맞다고 치자. 그렇다면 기업 직원, 변호사, 컴퓨터 프로그래머, 파이프 수리공은 제국주의에 기여하지 않고 있나? 그들에겐 시민들이 감사를 표시하지 않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군인들이 특별한 직업인 것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선 생명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다시 반론을 하자면 생명의 위험에 노출된 직업은 상당히 많다. 아니 그렇지 않은 직업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인, 소방수, 구조대, 경찰 같은 직업이 특별한 이유는 직업적 책임과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생명의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페르시아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멸한 스파르타의 300 전사를 기리는 테르모필레의 비명은 불굴의 용기로 용감하게 싸웠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나라)의 명령을 이행하고 여기에 누워 있다”라고 쓰여 있다. 그렇기에 지금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해준다.
요즘 우리 사회는 병에 걸렸다. 타인에게는 책임을 강요하면서 자신은 수고하고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한 타인의 고통과 수고에는 냉담하고, 자신의 고통에는 분노한다. 결과적으로 억울한 사람들만 넘쳐난다. 이것을 설득하고 조정하고 진실한 해법을 찾아야 하는 사람들은 분노만 부채질하고, 분노만이 유일한 해법인 것처럼 가르친다. 그런 분들에게 말하고 싶다. 목숨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터럭만큼 남아 있는 양심의 명령에라도 순종해 보라고.
〈192〉 희망의 땅에 도달하기

한때 우리 사회에도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라는 구호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우리에겐 고향을 찾는 명절이 추석이지만, 서구 문화에선 크리스마스다. 그래서인지 서구 전쟁에서는 전황이 유리해지면 꼭 “올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이 끝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연합군 병사 사이에서도 이런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눈이 내리고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자 미군 전사에 충격을 안긴 벌지 전투가 시작됐다. 병사들은 집에 가는 대신 눈과 추위 속에서 동상, 죽음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보내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싸워야 했다.
6·25전쟁에서도 인천상륙작전 후 승승장구해 북진하자 크리스마스가 희망의 날이 됐고, 사령부도 축제를 위해 서둘렀다. 1950년 장진호 전투 참전자들은 따뜻한 곳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을 수는 있었다. 크리스마스 전 연합군은 흥남철수 작전을 통해 북한을 빠져나왔다. 정원 60명이던 민간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피란민 1만4000명을 태우고 거제도에 도착한 날이 12월 25일이었다. 주력 병력은 대부분 24일 이전 부산항에 도착했다. 엄청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긴 했지만, 영하 30도의 혹한과 눈 속에서 벌인 장진호 전투에서 병사들은 살인적인 고난을 겪었다. 주력이었던 미 해병1사단에서 전사자와 부상자를 빼고, 걸어서 흥남을 떠난 병사는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중공군은 4만∼10만 명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
희망에 대한 상반된 이론이 있다. 개개인의 성공담에서는 늘 이렇게 말한다. “희망은 절대 여러분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전사에서는 반대다. 최악의 상황 이면에는 늘 ‘근거 없는 낙관’이 자리 잡고 있다. 희망은 감정의 영역이고 낙관은 실천의 영역이다. 냉정하고 정확히, 이상과 현실을 혼동하지 않는 현명함을 지녀야 희망의 땅에 도달할 수 있다.
〈193〉부끄러운 신년맞이

조선 시대에는 신년이면 망궐례라는 행사를 했다. 말 그대로 궁을 바라보고 예를 올린다는 의미다. 이슬람교도들이 시간마다 메카를 향해 기도하듯이 지방에 있는 관원들은 서울 궁궐을 향해 절을 했다. 망궐례를 하는 절기는 왕과 왕비의 생일, 한식, 단오, 추석 같은 명절, 과거 보는 날 등 꽤 여러 가지였지만 제일 중요한 절기는 역시 신년이었다.
신년에는 서울의 궁에서도 임금이 참석하는 망궐례가 시행되었다. 이 의식에서 바라보는 궁궐은 중국에 있는 황제의 거처이다. 이것이 신년맞이 행사의 절정이었다. 조선 역대 망궐례 중 가장 우울했던 망궐례는 1637년 행사였을 것이다. 음력 기준이지만, 이날 망궐례는 차가운 남한산성에서 거행되었다. 병자호란으로 청군이 산성을 포위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명나라는 전쟁이 나기 훨씬 전부터 청이 조선을 침공하면 자신들을 도울 힘이 없다고 고백했었다. 청 태종은 산서성을 휘젓고 명군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조선에 알려 왔다. 조선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중국과 조선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 배신할 수 없다고 우겼다. 12월 20일에서 29일 사이에 산성으로 오던 근왕군은 거의 다 패해서 무너졌다. 통합작전 계획도 없이 그저 왕을 구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인접 부대와 연합작전도 거부하고 제각각 나 홀로 진군하다가 모조리 각개격파를 당했다.
세상에 이런 전쟁이 있을까? 국제관계는 현실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념으로 대처한다. 전쟁은 군사이론과 병법을 무시하고, 감정으로 시행한다. 제일 어이없는 것은 그렇게 무참한 곤경을 겪고 나라가 망할 뻔했음에도 반성은 않고, 책임도 지지 않았다는 거다. 청군이 돌아가자마자 지식인들은 “우리가 이길 수 있었는데”라고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때만 그런 게 아니다. 지금도 그런 주장이 횡행한다. 1637년의 정신은 2021년에도 살아 있다.
〈194〉왕과 백성들의 현실인식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몽진하자 전국의 백성들이 충격을 받았다. 정확한 통계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사대부 중에도 선조의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이 꽤 있었거나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당시 선조에 대한 평가는 어땠을까? 사대부였던 오희문은 “선조는 큰 잘못이 없는 열심히 일한 임금이었는데, 왜 이런 재난이 생겼을까?”라고 반문한다. 그만의 생각이었을까?
선조가 백성에게 내린 교서가 있다. 치열한 자기반성과 사죄로 가득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백성들을 탓한다. 물론 몇 가지 사소한 잘못은 인정을 한다. 그러나 더 크게 꾸짖는다. “외적이 들어와 강토를 휩쓰는데, 싸우지 않고 숨고 도망치는 게 말이 되느냐?”라는 식이다.
‘백성이 싸우지 않는 건 민심이 이반했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은 당시에도 했다. 그러나 민심 이반의 이유를 이렇게 진단한다. 근래에 성을 쌓고, 군사 훈련을 강화해서 백성들이 화가 나고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건 전쟁을 대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일본이 침공해 왔으니 정부는 당당하다. 우리가 옳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희들의 비겁한 행동을 반성하고 나와서 싸워라.
우리는 백성들의 생각도 들어보아야 한다. 그러나 기록이 전무해서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아는 건 전쟁 중에도 전쟁이 끝난 후에도 거대한 민심 이반이나 이런 주장에 대한 물리적 항거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정말 궁금하다. 양심이 부족했던 것일까? 지식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지금도 다르지 않다. 임진왜란 이야기가 나오면 한두 가지 제도만 바꾸면 쉽게 이길 수 있었다는 식의 무책임한 진단을 하거나 마녀사냥으로 해결한다. 아니면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더 셌다라는 식의 정신적 위안에 집착한다.
〈195〉의미 없는 희생일까

진주만 공습이 벌어진 직후인 1941년 12월 10일,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B-17 한 대가 일본 해군 함대를 습격했다. 일본군 ‘격추왕’ 사카이 사부로의 증언에 의하면 하늘에서 함대를 호위하고 있는데, 갑자기 3개의 파문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 함대에 대한 미군 최초의 공습이었다. 이 폭격기의 조종사는 미 육군 콜린 켈리 대위였다. 제로센 편대가 함대를 호위하고 있었지만, 그는 대담하게 제로센보다 높은 고도에서 접근해 탐지를 피했다. 사카이는 눈을 의심했다. 전투기의 호위도 없이 단독으로 뛰어드는 폭격기란 듣도 보도 못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콜린의 폭격기와 제로센 편대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사카이는 이 폭격기를 자신이 격추했다고 했지만, 사카이의 증언을 불신하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이날 공중전의 양상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10대의 제로센과 1대의 폭격기 간에 숨 막히는 공중전이 전개됐다. 양측 모두 실전은 처음이어서 기동, 전술, 사격 실력까지 다 형편없었다고 한다. 이때의 B-17에는 후방 총좌가 없었는데, 이것이 치명적이었다. 켈리 대위는 기체를 비틀고 방어기동을 해서 전투기의 공격을 피하면서 기관총으로 제로센을 공격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후방 기관총이 없어 결국 후미를 물리고 말았다.
켈리의 기체는 기지에 거의 도착해서 타격을 입었다. 켈리는 필사적으로 기체를 수평으로 유지하며 대원들이 낙하산으로 탈출할 수 있게 했다. 마지막으로 부조종사가 탈출할 때 기체가 폭발하고, 켈리는 전사했다.
켈리는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 전과로 따지면 무의미하고 무모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전쟁에서는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요인이 있다. 자기희생을 통해 모든 이에게 감동과 군인의 의무를 위한 용기와 감투정신을 불어넣는 행동이다. 그것 없이 이길 수 있는 전쟁은 없다.
〈196〉 진심보다 결과

1950년 12월 31일, 새해를 앞두고 중공군이 3차 공세를 감행했다. 유령군대라는 표현처럼 중공군은 30일 참호 안에 은신해서 공격을 준비했다. 볼일 보러 참호 밖에 나가는 것도 금지했다. 이 공세로 임진강 전선이 돌파당했고, 유엔군이 서울 남쪽으로 밀렸다. 우리 기억에 생생한 1·4후퇴가 이 공세의 결과물이다.
이틀 전인 12월 29일, 압록강을 목전에 두었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임진강까지 밀려 내려오자 미국 합참에서는 6·25전쟁은 가망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다. ‘유엔군은 중공군을 이겨낼 힘이 없다. 유엔 회원국에 더 이상의 병력 증원을 요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한국 지형은 우리에게 불리하다. 미국은 이 이상의 지상군을 파견할 수 없다. 미국은 세계대전이 날 수도 있는 도박을 한국 땅에서 벌일 수 없다.’
합참은 맥아더에게 일단 금강 방어선까지 후퇴해서 중공군을 막아 보라고 말한다. ‘금강 방어선까지 붕괴하면 우린 일본으로 철수한다.’
맥아더는 극도로 분노했다. 강경한 어조로 미국은 한국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편지를 썼고, 극단적인 수단까지 언급하면서 중공군을 방어할 수 있고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지성계에는 지금도 6·25전쟁 참전은 잘못이었고, 미국의 젊은이들이 불필요한 전장에 가서 피를 흘렸다고 개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맥아더가 언급한 극단적인 수단을 조롱조로 비웃는다. 맥아더는 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통령병에 걸린 그가 패배라는 치욕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이런 말 안 되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합참의 인사들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유엔군은 3차 공세에 밀렸지만 버텨냈고, 4차 공세를 쳐서 밀어냈다. 전쟁 포기라는 주장이 한 달 만에 사라진다. 맥아더의 진심이 무엇이었든 간에 대한민국은 그 덕을 보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진심이 아니라 결과다. 그게 국제정치다.
〈197〉지평리 戰場에서 얻은 교훈

1951년 1월 28일 미군 2사단 23연대 소속 1개 소대가 지평리 남동쪽에 위치한 쌍굴터널 근처를 정찰하기 위해 출발했다. 다음 날 2차 정찰에서 이 소대는 중공군의 습격을 받아 고지에 고립된다. 미군은 사투 끝에 간신히 이들을 구출하지만, 이 전투는 벌집을 쑤신 격이 됐다. 당시 미국 정부는 6·25전쟁 포기를 고민하고 있었다. 1월 13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으로 이 논의는 중지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전투 결과로 증명해야 했다.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동부전선의 중공군이 취약하다고 보고 북진을 명령했다.
아직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미 2사단은 엉거주춤 횡성 쪽으로 진격하다가 중공군과 조우한 것이다. 이 작은 전투는 다음 날 연대 규모의 전투로 발전한다. 마침 6·25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대대가 선봉에 서고, 23연대 3대대가 참가해 쌍굴 근처 고지를 점령하고 이틀간 중공군 대군과 격전을 벌인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뒤 23연대는 지평리로 진입했고,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6·25전쟁의 판세를 바꾼 지평리 전투를 벌이게 된다.
지난 이틀간 쌍굴 지역과 지평리의 전적지 답사를 다녀왔다. 우연히 답사팀이 장군, 영관, 부사관, 사병에 종군기자 출신이라는 기막힌 구성이 되었다. 생존용사분 인터뷰도 하고, 지도와 전투기록을 들고, CSI(과학수사대)처럼 참호 흔적, 총탄 자국을 더듬으며 고지와 능선을 돌아다녔다.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 전투 위치를 찾고, 복원하고 생생하게 체험하는 일이 가능했다. 어떤 곳이 매복 지점인지, 왜 이들은 살고, 이들은 죽었는지, 어떤 부대가 훌륭한 부대이고, 승리하는 부대인지 현장이 말해주고 있었다. 두 번째는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이었다. 빼앗긴 고지는 원래 취약한 곳이었다.
돌파당한 지점은 충분한 대비를 못한 탓이었다. 임기응변의 지휘는 알고 보면 준비하고 대비한 결과였다. 세상의 진리도 그렇다. 개인을 탓하고, 집단을 탓하기 전에 사회의 구조와 세계의 변화와 시대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전장에서 살아남았거나 남을 살린 사람은 다 그런 사람들이더라.
〈198〉경제력과 군사력

한니발에 대한 글을 쓰다가 카르타고 유적지를 조사하게 되었다. 튀니지에 위치한 고대 카르타고시는 무척이나 가보고 싶은 유적이지만 갈 날이 올지 모르겠다. 지금의 모습으로 과거의 영화를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학자들이 추정한 복원도를 보면 엄청난 광경이 펼쳐진다.
방어용 군사설계이긴 하지만 외형만 보면 고급 요트 계류장보다 멋진 항구, 언덕 위에 올라서 있는 다층의 빌라들이 있었다. 내부는 보지 못했지만 로마의 도시들에서 보았던 내부구조를 대입해 보면 현대의 고급 별장에 견줘도 전혀 손색이 없음이 분명하다.
여기에 전기시설을 하고, 침대와 가구를 갖추면 지금 재현해도 1급 리조트를 지닌 아름다운 도시로 간주될 것이다. 티볼리, 폼페이, 에페수스, 페르가몬, 로마의 고대도시 유적들은 유명 관광지가 됐다. 그러나 카르타고시가 세워질 때 로마는 대리석의 도시가 아닌 나무로 지은 이층집이 다닥다닥한 볼품없는 도시였다. 우리가 보는 고대 로마 도시의 원조가 카르타고다.
경제력, 기술력, 진취성, 행정력 등 모든 면에서 카르타고는 로마보다 한참 위였다. 단 하나, 아니 두 가지가 미달했는데 군대와 군을 대하는 시민정신이다. 그 이유로 카르타고가 쌓은 모든 것을 로마에 양도하고 멸망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현대 전쟁은 경제력입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국내총생산(GDP)이라는 숫자가 그대로 전투력이나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정말 그렇다면 그게 카드게임이지 전쟁인가.
6·25전쟁 때와 비교하면 우리 경제와 군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젠 절대 약소국이 아니다. 그러나 전략적 기준에서 우리나라는 지형, 국제 정세 등 몇 가지 요인에 의해 심각한 취약점이 있다. 작은 실수에도 단기간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나라다.
군사정권 시대에 국방이 국민 협박용으로 오용되었던 적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국방에 대한 경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경제력도 힘과 강한 정신으로 연결돼야만 군사력이 된다.
〈199〉리더의 덕목

미 해병 1사단 5연대는 6·25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혈전을 벌인 연대다. 태평양전쟁에서는 과달카날, 펠렐리우, 오키나와에서 싸웠다. 5연대 소속으로 펠렐리우와 오키나와 전투에 종군했던 유진 슬레지는 ‘태평양전쟁’이란 귀중한 회고록을 남겼다.
이 회고록에 홀데인 대위라는 중대장이 등장한다. 모든 중대원들이 ‘선장’이라고 부르며 그를 존경했다. 슬레지는 중대본부에 갔다가 홀데인이 포병대에 중대 참호 앞으로 10여 발의 포격을 요청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포병장교는 왜 이유 없이 포격을 하느냐고 물었다. 홀데인은 “중대장이 항상 병사들의 안전에 지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싶다”라고 답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중대원들은 모두 감동한다. 바쁜 와중에도 중대원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가지고, 개개인의 사정을 듣고,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대장. 생존한 장교들도 그가 최고의 중대장이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안타깝게도 그는 펠렐리우 전투 종결을 코앞에 두고 전사했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 대대에는 한국군으로 구성된 중대가 있었는데, 그 중대장이 구필 대위였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종군한 그는 전투 경력 10년의 베테랑이었다. 프랑스 대대에서도 최고참 중대장으로 장교들도 그를 존경했다. 한국 병사들에겐 거의 신이었다고 한다.
중공군과 벌인 첫 전투에서 모두가 미심쩍어하는 한국 병사들을 훌륭한 병사들이라고 추천하여 전투에 투입하고, 이후로 프랑스 병사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싸울 수 있게 한 사람이 구필이었다. 구필은 단장의 능선에서 박격포에 전사했다. 생존한 부대원들이 모두 최고의 중대장이었다고 칭찬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병사들을 존중하고 친절하며, 그들을 자신의 출세나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고, 중대장으로서 자신이 대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실천한다. 우리에겐 이런 리더가 없을까? 아니다. 넘쳐난다. 신의 축복을 받았는지 정말 넘쳐난다. 선거 때만 되면 모두 이런 리더가 되더라.
2022-02-22
〈200〉행정과잉과 진주성의 비극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이순신 장군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 호남을 지켜낸 것이었다. 흔히 임진왜란의 3대첩으로 한산대첩, 진주대첩, 행주대첩을 꼽는데, 정작 행주대첩의 주인공인 권율은 행주대첩보다 이치 전투의 의미가 더 크다고 말했다. 행주를 이치 전투로 대체하면 3대첩 모두가 왜군의 호남행을 저지한 전투다.
왜군이 호남으로 달려들 것이라는 정도는 조선 정부도 충분히 예측했던 일이다. 정부는 육상에 방어 거점을 하나 육성하는데, 바로 진주성이었다. 진주성은 남쪽은 남강과 하안단구가 막아준다. 서쪽도 바위 절벽이다. 공격하기 쉬운 곳은 북쪽과 동쪽이다. 이곳에는 상당히 넓게 해자를 팠다. 우리나라 지형이 해자를 설치하기가 쉽지 않은데, 진주성의 해자는 특별했다.
약점이 있다면 성이 좁다는 것이었다. 확장을 하려니 가능한 곳이 동쪽뿐이었다. 정부는 동쪽으로 성벽을 확장하는데, 이게 치명적 실수가 된다. 면적만 넓혔을 뿐 해자를 약화시키고, 동쪽 지구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은 극적으로 승리했지만 2차 전투에선 결국 이 약점이 불행을 초래한다. 전후에야 조선은 진주성을 제대로 개조하는데, 그 뒤로 진주성은 싸울 기회가 없었다. 정말 궁금하다. 왜 이렇게 어이없는 짓을 했을까? 가능한 추정은 전형적인 탁상공론과 행정주의다.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병력을 늘린다. 병력이 느니 성을 넓힌다. 여기서 끝이다. 성의 구조적인 약화는 수치로 표현되지 않는다. 반면 성을 보강하는 시간과 자원, 인력은 수치로 정해져 있다. 수령은 제한된 시간 내에 문서상의 과제를 완수했다. 정부는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충분하지 않은가? 괜히 정부의 지침에 지적질을 하고, 불필요한 사업을 벌여서 책임 추궁을 당할 필요가 있을까? 백번을 고쳐 생각해 보려고 해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과잉행정주의 속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정의로운 정부를 요구하지만, 진짜 문제는 과잉정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보약도 과용하면 독약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