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父 李承晩 대통령 이야기10/ 2021
下野 후 하와이에서 보낸 마지막 5년 2개월
"한국땅 밟고 죽는게 소원"… 歸國 여비 모으려 5달러 이발비도 아껴
옷 등 넣은 가방 4개만 들고 2~3주 쉴 생각에 하와이行
교민들이 생활비 보탰지만 독립운동 시절만큼 곤궁
정부 不許로 귀국 좌절되자 급격히 건강 나빠져 입원
병실 창문 밖 태평양 보며 "저쪽이 우리 韓人들 사는 곳"
이승만이 윌버트 최에게 이화장 소유권을 넘긴다는 위임장을 써준 때는 1962년 9월 11일. 하야 후 하와이에 온 지 2년 3개월이 지난 때였다. 하와이 생활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다. 1960년 5월 29일 서울을 떠날 때는 그저 2~3주 쉬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부인 프란체스카(1900~1992) 여사가 "쉬고 오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 짐이라곤 옷가지가 든 트렁크 2개, 평소 쓰던 타자기와 약품 등을 넣은 가방 2개가 전부였다. 여러 차례 돌아가려 했지만 한국 정부가 귀국을 막았다. 언제 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생활비를 대주는 윌버트 최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1962년 하와이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던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의 모습. 프란체스카 여사가 죽는 날까지 고국으로 돌아갈 꿈만 꾸던 남편의 곁을 지켰다.
"아버지는 순수한 마음에서 이승만 박사를 도왔습니다. 위임장 얘기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들은 적이 없어요." 윌버트 최의 아들 세드릭 최(67)씨는 지난 15일(현지 시각) 하와이 마키키 스트리트 2033번지 목조 주택 앞에서 "이곳이 이 박사 내외가 살던 집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한두 번 온 적이 있다"며 회상에 젖었다. 호놀룰루공항에서 H1 도로를 타고 남동쪽 시내 방향으로 20분 거리에 있다. 한적한 주택가 언덕에 있는 집은 한쪽에서 보면 단층, 다른 쪽에서 보면 2층 집이다.
이민 2세인 윌버트 최는 조경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는 이승만이 하와이에 올 수 있도록 항공편도 마련했다. 1960년 5월 마지막 주 어느 날 밤이었다. 전화 벨이 울렸다. 이승만이었다. 하와이에서 잠시 머물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윌버트 최는 미국 민간 항공사 팬암(Pan Am) 하와이 지점장인 어니스트 올브라이트(Ernest Albright)에게 연락해 괌에 있는 CAT항공 DC-4 여객기를 서울 김포공항으로 가도록 주선했다. 하와이 동지회장 최백렬 등 교민들과 함께 비용을 마련했다.
이승만 내외는 당초 오아후섬 동북부 카할루 지역 미오미오 루프 47-259번지 윌버트 최의 바닷가 별장에 머물렀다. 16일 찾아간 집은 지금도 50여년 전 모습과 같았다. 정문에서 벨을 눌렀다. 한 미국인 남성이 문을 열었다. "플로리다에서 왔다"는 그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예약하고 며칠 휴가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여행객 상대 임대주택이 된 셈이다. 양해를 구하고 집에 들어서니 미국 방향 태평양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승만은 이 집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주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외신은 "이승만 박사는 기자들의 방문을 사절하고 바다를 바라보기만 했다"고 전했다.
마키키 주택으로 옮긴 때는 여섯 달 후인 1960년 12월이었다. 바닷가 별장은 시내에서 너무 멀었다. 직접 자동차로 달려보니 약 40분 거리. H1과 리케리케 고속도로를 지나 병풍처럼 생긴 높은 산을 넘어야 갈 수 있다. 매주 시내에 있는 교회(한인기독교회)에 나가기도 쉽지 않았다. 하와이 체류가 예기치 않게 길어지자 가까운 곳으로 옮긴 것이다. 마당 화초에 물을 주고 나무 손질을 하거나 집 부엌에서 10m쯤 떨어진 방까지 10차례 왕복운동을 하는 생활이 대부분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생전 회고록에서 '우리 생활은 단조로웠다. 나는 워싱턴에서의 독립운동 시절과 같이 살림을 꾸려 나갔다. 우리는 이런 생활이나마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썼다. 하와이 교민 단체인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숭모회' 김창원(87) 회장은 "마키키 집에 가끔 인사드리러 가면 프란체스카 여사가 과일가루를 물에 탄 주스와 오레오 과자 몇 개를 내주셨다. 모두 싼 것들이었다. 부부의 살림이 무척 곤궁했다"고 회고했다. 이승만은 "고국으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해야 한다'며 5달러 이발비도 아꼈다.
이승만은 늘 고국에 돌아가려고 했다. "내가 한국 땅을 밟고 죽기가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라며 눈시울을 붉힌 때도 있었다. "걸어서라도 가겠다"며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서기도 했다. 귀국 기회도 있었다. 1962년 3월 17일 비행기 티켓을 마련해 한국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우리 서울에서 만나세." 전날 교민들과 작별 인사도 나눴다. 그러나 출발 당일 오전 9시 30분 정부 훈령을 받은 김세원 하와이 총영사가 마키키 집에 와서 귀국 불허 방침을 전했다. 이승만은 조용히 듣더니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내가 가는 것이 나라를 위해 나쁘다면 내가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참아야지. 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잘 하기 바라오…."
이승만은 귀국이 좌절된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그날 저녁 트리플러 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29일 마우나라니 요양 병원으로 옮긴다. 마우나라니병원 측은 이승만을 무료로 모시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1950년 개원한 마우나라니병원은 그때 모습 그대로 있다. 한국에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했던 이승만은 이곳 202호실에서 마지막 날을 맞는다.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한국 시각 오후 7시 35분)이었다. 병실에서 창밖을 보니 한국 방향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승만은 생전 바다를 가리키며 "저쪽이 서편이야. 바로 저쪽이 우리 한인(韓人)들이 사는 데야"라며 고국을 그리워했다.
2014-11-22 세계사적으로 봐야 '겨우' 윤곽이 보이는 리더, 이승만
독재자 이승만, 미국 괴뢰 도당을 태평양 깊은 물에 장사 지냅시다!"
6·25전쟁의 좌익 치하에서 당시 열 살짜리 초등학생이었던 인보길 소년이 어른들의 꼬임에 빠져 목 놓아 외쳤던 웅변의 마지막 대목이다. 십년 후 서울대 문리대생이 된 인보길 청년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채 독재 타도를 외치며 경무대로 돌격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로부터 오십 년이 흐른 지금 인보길 선생은 이승만 연구소를 창립하여 이승만의 업적과 사상을 연구하고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원래 죄가 커야 은혜도 깊은 법이다. 인보길 선생은 타락한 것일까. 아니다. 인보길 선생은 죄가 없다. 죄는 차라리 이승만에게 있다. 이승만이라는 인물의 사이즈가 너무 커서 스무 살의 지성으로는 헤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소련의 북한단독정부 지원, 미국의 좌우합작 종용, 국내의 덜 떨어진 정치 세력을 격파하며 이뤄낸 이승만의 나라 세우기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한 한 개인의 승리였다. KBS 이인호 이사장은 "이승만은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다"라는 말로 사정을 요약한다. 과하다고? 1904년 청년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을 읽어 보면 이 평가에 군말 없이 동의하게 된다(솔직히 나는 '독립정신'이 백 년 전에 쓰인 글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독립 정신'보다 소생이 더욱 경이롭게 생각하는 이승만의 발언은 따로 있다. 6·25 전쟁이 끝날 무렵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특사를 파견해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합의를 약속했다. 이승만은 아예 대못을 박기 위해 휴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았고 휴전 당사자로 서명도 하지 않았다. 이후의 한국 문제를 미국이 책임지도록 엮어두겠다는 노련한 외교적 발상이었다.
조약이 체결된 뒤 이승만은 "이것이 우리 민족을 편하고 잘살게 할 것이다"라는 예언 같은 말을 남겼다. 당시 대체 누가 이 발언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국제 정세를 손바닥 보듯 읽는 안목과 공산주의의 본질을 꿰뚫는 투시력이 있었던 이승만이었기에 가능한 발언이었다(이것은 살짝 초능력의 영역이다). 그의 말대로 남한은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고 이는 북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국방비 지출에 힘입은 바 크다.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 이승만의 이 발언에 필적할 만한 것은 딱 하나뿐이다.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였던 미제스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잠시 머릿속에서 전개 과정을 그려본 후 이렇게 말했다. "저건 망해."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서기도 전에 내린 진단이었다. 신기(神氣)는 통(通)한다.
얼마 전 연세대 이승만 연구원에서 있었던 추모 행사에서 박정희 대통령도 기념관이 있고 김대중 대통령도 기념관이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만 없다는 한탄이 나왔다. 다들 맞아 맞아 하며 끄덕이는데 한 분이 딴죽을 거셨다. 대한민국 전체가 이승만 기념관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듣고 보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이승만의 건국 기념 연설을 들어보면 그가 꿈꾸고 설계했던 나라에서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세계사적으로' 보아야 '겨우' 윤곽이 보이는 두 명의 리더를 가졌던 우리는 참 운이 좋은 민족이다. 뭐 그 운도 이제 다한 것 같기는 하지만.
남정욱 |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2015.06.04 언더우드 "이승만에게 美유학 도움 준다면 제겐 큰 기쁨"
이승만 英文일기서 나온 추천서 원본 111년 만에 첫 공개]"
조국서 투옥됐던 한국 기독교인… 그 덕분에 감옥 예배 허가 받아"
언더우드, 美 인사들에게 소개
"이승만은 그의 조국에서 위험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수년간 정치범으로 복역했던 한국의 기독교인입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지난해 저도 감옥에서 수감자들과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습니다.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설립자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1859~1916)는 1904년 11월 이승만(1875~1965) 초대 대통령이 미국 유학을 떠난다는 소식에 이 같은 추천서를 써줬다. 이승만은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한 뒤부터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났으며 1899년 박영효의 쿠데타 음모 사건에 연루돼 사형 선고를 받고 5년 7개월간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당시의 이승만(오른쪽 위). 언더우드(오른쪽 아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가 1904년 11월 미국 유학을 떠나는 이승만을 위해 써준 추천서. 작성일자는 제물포항 출발일인 11월 4일로 적혀 있다(왼쪽).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제공
1904년 8월 이승만이 고종의 사면령으로 출옥한 뒤 미국 유학을 결심하자, 언더우드는 워싱턴·뉴욕·시카고의 교회 지도자와 주요 인사들에게 보내는 추천서를 8통 작성했다. 추천서는 "그(이승만)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미국에 갔으며, 그에게 진학에 도움이 될 만한 기회나 조언을 주신다면 제게는 더없는 기쁨이겠습니다"는 문구로 끝나고 있다.
언더우드가 이승만을 위해 써줬던 추천서들이 111년 만에 빛을 본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원장 류석춘)은 이 대통령이 31년간 작성했던 영문(英文) 일기 속에 보관하고 있던 언더우드의 추천서 8통을 3일 공개했다. 이 대통령은 언더우드가 타이프로 작성한 이 추천서를 들고 1904년 11월 제물포항을 떠났으며 이듬해 조지워싱턴대에 입학했다. 그 뒤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언더우드의 추천서는 이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씨가 1997년 연세대에 기증한 자료 가운데 하나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은 이 대통령의 영문 일기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언더우드의 추천서 원본을 찾았다. 이 대통령이 한국에서 활동하던 외국 선교사들에게 추천서를 받아서 미국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지만, 추천서 원본이 공개되는 건 처음이다. 이 대통령 영문 일기와 언더우드 추천서는 다음 달 한국어판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언더우드의 추천서와 함께, 연동교회 초대 담임 목사인 제임스 게일(1863~1937)이 워싱턴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 전 대통령을 소개하는 추천서도 공개됐다. 게일은 2쪽에 걸쳐 타이프로 작성한 이 추천서에서 "그는 한국의 독립뿐 아니라 한국 국민이 무기력함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 추천서에서 게일은 이 대통령의 투옥 생활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기술했다. "7개월 동안 20파운드(9㎏)가 넘는 나무 칼을 썼고 양쪽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어깨에는 무거운 쇠사슬이 묶이고 등에는 자물쇠가 채워진 채 죄수들과 함께 걸어 다녀야 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이 감옥 안에서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주미 공사관 서기관(훗날 신간회 회장), 김정식 경무관, 이원긍 법부협판 등 40여명을 개종시켰다는 내용도 이 추천서에 포함되어 있다. 류석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은 "이 전 대통령이 구한말 급진 개화파에서 미 유학 생활을 통해 독립운동 지도자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중한 1차 자료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엄보운 기자
2015.09.16 우남과 백범은 가장 치열했던 '反共 지도자'였다
한국 근현대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게 되면 우남 이승만(1875~1965)과 백범 김구(1876~1949)는 호불호에 상관없이 마주치게 되는 인물이다. 산길을 헤맬 때, 높은 산봉우리들을 표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듯이 두 인물은 모두 험난했던 한국 근현대사의 준봉(峻峯)들이다. 이 두 인물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비단 과거에 대한 회고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소원인 통일 노선과도 직결된다. 이 대작은 왜 한국인들이 우남과 백범 모두를 기억해야 하고, 두 인물이 모두 기억되는 통일만이 올바른 통일인가를 일깨워준다.
저자는 1970년 일조각에서 같은 제목의 단행본을 출간한 바 있다. 45년 만에 새로 출간된 이 책은 총 3부 전 7권, 200자 원고지 2만3000여장에 달하는 대작이다.
이 책의 제1부('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1·2권)는 우남이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그리고 백범이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여 1919년 3·1운동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치지도자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저자는 이 시기 두 인물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했던 경험을 투옥생활이었다고 본다. 우남은 25세부터 30세까지 5년 7개월 동안, 백범은 20대 초반에 1년 10개월, 30대 중반에 4년 반 이상을 옥중에서 생활했다. 전제군주시대의 감옥은 군부독재시대의 감옥보다도 열악했다. 한국 근현대정치사에서 많은 정치지도자는 옥중생활을 통해 탄생했다. 우남과 백범은 그들의 대선배들이었다.
제2부('임시정부를 짊어지고' 3·4·5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주로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위해 노력했던 우남,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에서 시작하여 임시정부 주석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주로 아시아 대륙에서 활동했던 백범의 오랜 광복운동에 관해 상술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압도적인 힘을 가진 일제와 맞서는 과정에서도 소련의 국제적 후원을 마다하고, 공산주의 노선을 채택하지 않았던 데는 우남과 백범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대한민국 건국의 두 거인 이승만(왼쪽)과 김구. 1945년 12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국 환영식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제3부('어떤 나라를 세울까' 6·7권)는 1945년 10월과 11월 오랜 해외 망명 투쟁의 길에서 돌아온 우남과 백범이 어떻게 반탁, 반공노선을 위해 협력했으며, 대륙 공산화와 미·소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장덕수 암살 사건과 평양과 관계 설정을 놓고 갈등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총 10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대작의 마지막 장은 '경교장의 총성'이라는 제목 아래 백범 암살 사건의 내막과 정치적 의미를 다루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이 대작에는 저자의 저널리즘, 마키아벨리즘, 그리고 아카데미즘이 혼융되어 있다. 첫째, 저널리즘. 오랜 기자 생활을 통해 단련된 저자의 날카로운 눈은 역사적 장면을 노련한 사회부 기자처럼 파고든다. 예를 들어 김구가 참가했던 동학농민봉기에 관해 서술하면서 저자는 참혹했던 당시의 현장을 사건기자의 눈으로 냉철하게 분석한다. 일본군이 사용한 스나이더 소총의 최대 사정거리는 1800m였지만 동학농민군이 사용한 화승총의 사정거리는 100보밖에 되지 않았음을 고증한다. 이러한 저자의 분석은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개화파 계열의 지식인들과 동학농민이 결합했다면 당시의 역사는 바뀔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소박한 희망에 의문표를 달게 한다.
둘째, 마키아벨리즘.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마키아벨리즘적 분석의 깊이는 저자가 3선 국회의원(11·14·15대)으로서 겪었던 정치 현장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저자는 두 인물에 대한 단순한 현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으로서의 두 인물을 둘러싼 권력투쟁, 그리고 두 인물 간의 권력투쟁을 차갑게 분석하고 있다. 두 인물이 참여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닌 정신사적 의의를 중시하는 동시에 현실적 권력 기반이 없었고, 국제적 승인도 받지 못했던 사실을 직시한다.
아울러 평양은 물론 워싱턴과 베이징, 그리고 타이베이를 아우르는 국제정치적 규정력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승만의 반공노선은 미·소 냉전이 필연적으로 격화됨에 따라 워싱턴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이에 비해 김구의 반공노선은 대륙에서 그의 후원자였던 장제스가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에 패배함에 따라 후원자를 잃고 만다.
셋째, 아카데미즘. 저자는 한때 정계에 몸담기도 했지만, 최대한 학문적 중립성을 지키면서 두 정치지도자를 비교 분석하고 있다. 과거 영웅사관에 대한 반동으로 구조에 주목했다가 다시 개인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는 세계 학계의 흐름도 잘 반영하고 있다. 평자는 2009년 '한국정치학회보'에 게재한 '김구와 이승만의 지정인식'이라는 논문에서 1970년 처음 두 인물에 대한 비교 평전을 출판했던 저자에 대해 경의를 표한 바 있다. 1970년 이후 45년 만에 7권으로 출판된 이 대작은 과거 프랑스에서 박사학위 이후 높은 학문적 업적을 낸 학자에게 수여하는 국가박사학위에 해당하는 저술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은 1949년 백범 서거 시점에서 마침표를 찍고 있다. 6·25전쟁 발발 이후 4·19혁명까지, 그리고 1965년 하와이에서 서거할 때까지 우남이 대한민국에 남긴 빛과 그림자가 정면으로 다루어지지는 않고 있다. 이것은 이 대작이 두 인물에 대한 비교 연구임을 감안하더라도 미완성 교향곡과 같은 느낌을 남긴다. 저자의 건필이 1949년 백범의 서거 이후 1965년 우남의 서거까지 아우르는 4부작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를 기원한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21.01.19 이승만은 어떻게 정권을 잡았나?
▲1948년 7월 24일 중앙청 광장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 [중앙포토]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면서 극적인 과정들을 접하곤 한다. 그중 하나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이다. 지금까지 이 과정은 지극히 단순하게 해석됐다. 한쪽에서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를 반공을 축으로 하는 미국의 세계전략 하에서 미 군정의 지원으로 생각하였다. 다른 한쪽에서는 이승만이 냉전의 상황을 가장 잘 이해했던 지도자였기 때문에 한반도의 한쪽에서나마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전략의 성공이었다고 해석했다.
‘김규식·여운형 중심’ 미군정과 갈등
같은 반탁·반공주의 김구와 다른 길
서울 비운채 방미 감행, 비행기 귀국
운 좋게 미 정책 변화와 맞아떨어져
두 인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실상 미국의 정책에 대응하는 방식에 의해서 결국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결론에는 차이가 없었다. 한쪽은 미국의 정책이 한국의 민족주의를 무시했다는 비판 하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미국의 정책에 순응한 것을 결국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본 것이다.
역사를 이렇게 단순하게 평가하는 것이 가능한가?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힘을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기에 외세의 힘으로 역사과정을 평가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랬던가? 삼국 통일에는 당나라의 힘이, 조선의 건국에는 명나라의 힘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데는 일본의 힘이 절대적으로 작동했다고만 평가하면 되는 건가?
역사가 인문학이면서 사회과학인 데에는 그 이유가 있다. 냉전이라는 구조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승만이 이를 이해하고 편승한 유일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1947년까지 김구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반공주의자였다. 그런데 왜 이승만이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선택을 주목해야 하는 인문학 관점이 필요하다.
이 문제에 해답을 얻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 1947년 3월과 4월의 미 군정 관계자의 메모였다. 제목에 ‘이승만’이 붙어 있는 1947년 3월 5일 자 문서에는 “이승만은 군정과 라이벌의 포지션으로 스스로를 위치시킬 것이다. 그가 이러한 역할로 한국에 돌아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 ‘김규식과의 만남’이라는 제하의 4월 9일자 문서에는 “미 국무성이 이승만에게 항공편을 제공한 것은 유감”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두 메모에 따르면 미 군정이 미국에 있던 이승만의 귀국을 막고자 했으며, 이승만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두 문서만 보더라도 미 군정이 이승만을 지지했거나, 이승만이 미 군정의 정책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다는 기존의 주장은 모두 잘못된 해석이었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실상 이 문서들뿐만 아니라 당시 미 군정의 문서 속에는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문서들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승만이 미 군정과의 갈등 속에서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비법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비밀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이승만의 정치적 행보 속에서 잘 드러난다. 첫째로 1946년 5월부터 진행된 지방 순회였다. 당시 미 군정은 이승만과 김구를 배제하고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향후 정국을 이끌어나가려 했다. 이에 이승만은 바로 지방 순회를 떠났다. 과거 임시정부 세력과 함께 서울에서 반탁운동에 몰두했던 김구의 움직임과는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여기에는 1945년 이전 이승만과 김구의 서로 다른 경험이 중요하게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일제강점기 내내 미국에 거주했다. 그는 미국의 정치 시스템이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김구는 중국에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를 통해서 한국의 독립을 추진하였으며, 그 결과 1943년 12월 장개석이 참여한 카이로 선언에서 단일국가로는 유일하게 독립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구는 현대 정치가 돌아가는 시스템을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이승만의 지방 순회는 단독정부 수립을 최초로 언급한 ‘정읍 발언’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 순회를 통해 이승만은 지방에서 자신의 명성과 조직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어떤 과정을 거치든 미 군정의 주도 하에 새로운 정부가 수립될 경우 전국에서 선거가 실시되는 미국식 정치구조가 자리 잡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당시 전체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던 지방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승만이 읽었던 것은 미국의 정책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시스템이었다.
마치 1992년 등소평에 의한 남순강화를 보는 듯하다. 1978년 개혁개방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는 듯했던 등소평은 1989년 천안문 사건으로 위기를 맞이했다. 개혁개방정책을 둘러싼 논란과 함께 모택동 시대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움직임마저 나타나고 있었다. 등소평은 과감하게 중국 남부의 우한·선전·주하이·상하이로 떠났다. 북경에서 급변 사태가 발생하면 권좌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등소평이 주목한 것은 중국인들이 북경에만 살고 있지 않으며, 북경보다도 더 개혁개방의 성과가 있는 지역을 방문함으로써 중국인들의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고, 그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둘째로 1946년 12월 이승만의 미국 방문이었다. 미 군정과 갈등을 빚고 있었던 상황에서 서울을 비운다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또한 김구와의 정치적 주도권 경쟁 역시 중요한 변수였다. 서울에서의 조직적 힘으로 본다면, 오히려 반탁운동을 주도했던 김구의 세력이 더 강한 상황이었다. 이 순간 서울을 비운다면,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한국에만 있어서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미 군정과의 불편한 관계를 돌파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자신이 주도권을 장악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승만의 선택은 무모한 것이었다. 그가 미국에 간다고 해서 미국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 의회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승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답장을 기약할 수 없는 편지를 보내는 것, 그리고 미 군정의 정책을 친공정책으로 비난하는 몇몇 연설의 기회뿐이었다.
하늘이 기회를 내린 것인가? 이승만이 방문하던 기간 동안 미국의 정책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소련과의 협력을 통한 세계체제의 개편보다는 소련을 봉쇄하는 정책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은 이러한 정책 변화를 자신의 성과로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위에서 인용한 미 군정 요원의 메모에서 이승만의 귀국을 막고자 한 데에는 이승만이 미국의 정책 변화를 자기의 성과인 양 선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가짜뉴스가 정국에 파란을 몰고 올 것이라는 점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미 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귀국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 미 군정과의 갈등이 계속되었지만, 미국의 정책 변화와 함께 그가 쌓아올린 전국적인 명성과 조직은 1948년의 결정적 순간 빛을 발하였다. 물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의 권력은 그가 원했던 완전한 모습이 아니었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거하고,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의 임명에도 입법부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등 그 권력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헌법 하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그렇기에 그는 1952년 발췌개헌과 1954년 사사오입이라는 무리수를 두어야 했다.
이렇게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어가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그가 정확하게 읽었던 미래의 시스템이 큰 도움이 되기도 했고, 무모하다고 평가될 수 있는 정치적 결단도 있었다. 어쩌면 시쳇말로 운칠기삼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가? 만약 지방순회를 할 때 서울에서 좌우합작위원회가 성공했다면? 만약 이승만이 미국에 갔을 때 미국의 정책 변화가 없었다면? 이승만이 그런 상황 변화를 미리 알고 미국에 갔다고 한다면, 이는 거의 ‘신공’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백단’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할까? 그때와 같은 현재의 세계적 대전환기에 무모할 정도의 모험을 하면서 운칠기삼을 기다려야 하는가? 분명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체제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행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1948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역사는 과학적 방법만으로 분석할 수 없다. 물론 그의 정치활동이 결국 분단과 전쟁에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는 역사적 평가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중앙일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생명의 길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gk1b4BN2DOY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함세웅, 소장 임헌영)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100년 전쟁'이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했다는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100년 전쟁' 제작진에 대한 고소장이 접수되고, 역사왜곡을 바로잡는 동영상이 제작됐다.
지난 2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아들인 이인수 박사를 비롯한 유족들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은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00년 전쟁' 제작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 대한 인격살인은 대한민국의 국격을 짓밟는 행위"라며 "이 저질 동영상이 청년층과 청소년층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를 생각하면, 현기증이 나고 식음을 폐할 정도로 참담하다"며 고소 배경을 밝혔다.
또 '100년 전쟁'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역사를 부정하기 위해 자행한 심각한 국사왜곡과 이승만 전 대통령을 친일파와 파렴치한 바람둥이로 매도한 데 대한 박박 동영상도 제작됐다.
이승만연구원 원장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와 박성현 뉴데일리 주필, 김효선 건국이념보급회 사무총장은 『생명의 길: 제1편 이승만 시대, 인격살인은 국사가 아니다』를 통해 '100년 전쟁'의 역사왜곡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잘못된 사실관계를 바로 잡아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영상은 현재 유튜브에도 공개되어 '100년 전쟁'의 잘못된 정보 전달과 일방적인 역사왜곡에 경종을 울리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https://youtu.be/caKmd0hKkZk 1942.06.13 이승만의 육성
https://youtu.be/08oWmM930lc - 1942.06.13 미국의 방송 이승만의 육성 연설
2021.08.11 조선일보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 백범 직접 맞고, 南鮮 순회 함께… ‘참모 푸랜시스카’의 내조
정치학자 김명섭 연세대 교수 ‘프란체스카’ 희귀 사진 공개
▲1949년4월27일~29일 호남 지방의 황량한 들판을 이승만 대통령에 앞서 씩씩하게 걸어나가는 푸랜시스카.
▲1948년8월15일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에 참석한 맥아더 장군 부인과 나란히 앉은 푸랜시스카.
환하게 웃는 김구 주석과 악수하고, 맥아더 일(日) 점령 최고사령관 부부를 한복 차림으로 맞는 아담한 갈색머리 여성. 흔히 볼 수 없는 사진의 주인공 푸랜시스카(프란체스카·1900~1992)는 한국 현대사에서 잊힌 인물이다. 1993년 4월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가장 좋아하는 영부인’ 항목에서 육영수는 72.2%인 데 반해, 푸랜시스카는 1.5%에 불과했다. 30여 년 세월의 더께가 쌓인 현재, 망각 정도는 더할 것이다.
중견 정치학자인 김명섭(58) 연세대 교수가 이번 주 출간한 ‘푸랜시스카 사진의 한국사1’(연세대 대학출판문화원)은 대한 독립운동에 참여한 유럽 여성이 대한민국 대통령 영부인으로 권력 중심에 서는 과정을 푸랜시스카가 소장했거나 관련된 사진들을 통해 보여주는 진귀한 작업이다. 김 교수는 “대한민국 국립 여성사 전시관 여성 독립운동가 DB에 박헌영 아내인 주세죽은 나와도 푸랜시스카는 없다”면서 “푸랜시스카는 이승만의 해외 독립운동을 측근에서 도운 참모이자 대한민국 첫 대통령 부인인데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느냐”고 했다. 푸랜시스카는 흔히 프란체스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 교수는 공식 호적명이 ‘푸랜시스카 또나’인 데다 본인 스스로 푸랜시스카로 썼다고 했다.
이승만은 1946년 12월 4일 정부 수립을 위한 도미(渡美) 외교를 떠났다가 5개월 만인 1947년 4월 21일 김포비행장으로 귀국했다.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과 함께였다. 국내에 남았던 푸랜시스카는 비행장에 나온 김구·김규식을 맞으며 안주인 역할을 했다. 1946년 8월 15일 중앙청 앞 광장에서 열린 8·15 시민 경축 대회에서 안중근 동생 안정근의 장녀이자 백범 큰며느리 겸 비서였던 안미생과 팔짱을 낀 채 다정하게 앉아있는 모습도 보인다. 푸랜시스카는 홀로 경교장에 찾아가기도 했다. 1947년 7월 24일 백범 왼쪽에 나란히 앉아 포즈를 잡았다. 윤봉길 의거 후 백범 일행을 한 달간 집에 숨겨주고 도피를 도운 미국 선교사 조지 A 피치 부부를 환영하는 자리였다.
▲1946년 8월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8.15경축대회에 참석한 푸랜시스카. 백범(가운데) 큰 며느리이자 비서인 안미생(안중군 동생 안정근 장녀)과 나란히 팔장을 낀 채 다정한 모습이다. 안미생은 홍콩과 호주에서 공부해 영어에 능통했다. 푸랜시스카가 이기붕 아내 박마리아가 아니라 안미생과 가깝게 지냈으면 현대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푸랜시스카 사진의 한국사1',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소장
▲1947년4월21일 김포비행장에서 백범과 악수하는 푸랜시스카. 이승만은 1946년12월부터 5개월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도미외교를 펼치고 이날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과 함께 귀국했다. 푸랜시스카는 홀로 국내에 머물렀다./'푸랜시스카 사진의 한국사1',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소장
▲1947년7월24일 경교장을 찾은 푸랜시스카가 백범 김구 주석 오른쪽에서 포즈를 취했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도운 조지 A 피치 목사 부부((앞줄 오른쪽)를 환영하는 자리였다./'푸랜시스카 사진의 한국사1',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1948년 10월16일 연희대 언더우드 동상 재건식에 참석한 백범 김구와 이승만 대통령 부부. 김규식, 백낙준, 이묘묵(연희동문회회장, 하지 중장 통역및 자문관 역임) 등도 참석했다. /연세대
이승만은 1946년 4월부터 6월까지 전국을 돌며 대중 유세를 다녔다. 부산 2만5000명~3만명, 대구 10만명, 전주 5만명, 정읍 6만명, 순천·목포 각 3만명 등 미 군정 추산 61만8000명(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550쪽)이 집회에 참석했을 만큼 열기는 뜨거웠다. 이승만의 정치적 위상을 확고히 다지고 반대 세력을 제압한 ‘남선(南鮮) 순회’다. 군중이 가득 들어찬 운동장 연단에서 두 손 번쩍 들고 미소 짓는 푸랜시스카의 얼굴이 보인다. 푸랜시스카는 이승만이 대중 정치가로 급부상하는 ‘남선 순회’ 때도 함께한 정치적 조력자였다.
▲1946년3월26일 이승만 생일을 맞아 돈암장에서 측근들과 함께 기념촬영한 이승만 부부. 푸랜시스카는 한복을 즐겨 입었다.푸랜시스카 왼쪽이 윤치영, 사진 왼쪽 넥타이를 매고 서있는 사람이 이기붕이다.
▲1946년4월29일 부산구덕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집회(왼쪽)에 참석한 푸랜시스카. 2만5000명에서 3만명이 모여 이승만을 환영했다. 이승만은 이해 4월~6월 남선순회를 통해 전국을 돌며 대중 정치가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했다.
▲1946년6월6일 군산서 촬영한 이승만과 푸랜시스카. 사흘전 정읍발언 직후 찍은 사진이다. 북의 정권 수립에 맞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한다는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그해 4월부터 시작한 '남선순회'의 피날레를 찍었다. 푸랜시스카는 이승만이 대중정치가로 입지를 다진 남선순회에 비서이자 조력자로 동행했다.
▲1952년 8월8일 강원도 양양 인근 수복지구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 부부. 푸랜시스카가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하는 주민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다.
▲1952년1월6일 광주를 찾은 푸랜시스카. 푸랜시스카는 6.25때도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군용기를 타고 전국을 찾아다니며 군 장병과 시민들을 위로했다.
▲1950년5월27일 전주 외곽 신복리 농가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 부부.
▲1951년4월3일 부산 부민동 대통령관저에서 기념촬영했다. 미국 퇴역군인 조직인 육해군연맹 아메리카니즘 위원회가 이 대통령의 독립운동과 반공투쟁의 공적을 기리는 훈장을 수여한 기념으로 자리를 함께 했다. 푸랜시스카 오른쪽으로 콜터 주한미8군부사령관, 신익희 국회의장, 김준연 법무장관, 김병로 대법원장, 조봉암 국회부의장, 장택상 국회부의장, 신성모 국방장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이 대통령 왼쪽으로 무초 대사, 장면 총리, 백낙준 문교장관 한 사람 건너 이윤영 무임소장관, 전규홍 총무처장, 한 사람 건너 장기영 체신장관, 백두진 재무장관 등이 보인다.
1952년 8월 8일 강원도 수복 지구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을 수행한 푸랜시스카는 태극기를 흔드는 주민들의 환호에 손을 번쩍 들어 화답한다. 김명섭 교수는 “푸랜시스카는 1946년 4~6월 이승만의 ‘남선 순회 등 주요 정치 일정마다 동행하면서 이승만이 정치 지도자로 부상하도록 도왔고, 정부 수립 이후, 특히 6·25 직후엔 기차나 군용기로 전국을 찾아다니며 국민을 위로했다”고 말했다.
푸랜시스카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간다. 이승만 평가와도 맞물려 있다. 이승만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푸랜시스카에게 인종적 낙인까지 덧붙였다. “이승만은 미국의 괴뢰”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는 KBS 강의로 논란을 빚은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는 “오지리(오스트리아)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난 웨이트레스, 후란체스카란 양갈보”(‘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244쪽)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승만 옹호론자 중에서도 푸랜시스카를 ‘훌륭한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은 영부인’으로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말에 서툰 푸랜시스카는 영어가 능통했던 이기붕 비서 아내 박마리아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다. 김명섭 교수는 “이 대통령의 최측근 비서였고, 대통령 면담 일정을 최종 확정한 ‘마담 푸랜시스카’에게 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만드는 논리로만 역사를 쓸 수는 없다”고 했다.
▲열여섯살의 푸랜시스카
▲1930년대 후반 하와이에서 애견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푸랜시스카. 개를 사랑한 푸랜시스카는 경무대에 애견을 들여와 키운 첫번째 영부인이었다.
▲1930년대 후반 하와이에서 자동차에 탄 애견과 함께 포즈를 취한 푸랜시스카.
▲1919년 유럽 어느 도시에서 찍은 열아홉살 푸랜시스카. 오스트리아 출신 이 소녀가 지구 반대쪽 대한민국 첫 영부인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1942년2월27일~3월1일 워싱턴 D.C. 라파예트 호텔에서 개최된 대한자유인대회. 앞줄 왼쪽 첫번째 미국인 여성은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운 조치 피치 목사 부인. 푸랜시스카는 두번째줄 왼쪽에서세번째
▲1944년8월29일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한미협회에 참석한 이승만 부부. 한미협회는 이승만의 대미독립외교를 돕기 위해 친한파 미국인들이 결성한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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