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25/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31-39/
<31> 부산 복천동 고분
▲부산 복천동 53호 고분(1989년 발굴)을 보존한 야외전시관에서 김두철 부산대 교수가 내부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무덤 바닥 한가운데 일렬로 놓인 덩이쇠(철정)들이 보인다. 부산=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빼곡히 밀집된 주택가 한복판 풀 떼를 입은 거대한 구릉이 나타났다. 거북이 등처럼 야트막한 언덕들 사이로 직사각형 모양의 무덤들이 펼쳐져 있다. 정상부에 있는 대형 무덤은 길이가 7, 8m에 이른다. 21일 답사한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과 더불어 금관가야 지배층이 묻힌 공동묘역으로 추정된다. 1980년 10월∼1981년 2월 이곳을 발굴한 김두철 부산대 교수(59)는 “6·25전쟁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판잣집을 짓고 살던 동네에 금관가야의 거대한 고분이 잠들어 있으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1600년 묵은 ‘처녀분’ 열리다
“철도레일 같은 게 바닥에 쭉 깔려 있다!”
1980년 11월 말 야심한 밤 복천동 22호 고분 발굴 현장. 무덤의 뚜껑돌(개석·蓋石)들 사이에 박힌 돌멩이 하나를 조심스레 빼낸 뒤 손전등을 비춰 보던 김두철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동행한 신경철 당시 부산대 조교(현 부산대 명예교수)와 조영제 부산대박물관 학예연구원(현 경상대 교수)도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멍 아래로 가야의 대표적 교역품이자 화폐였던 덩이쇠(철정·鐵鋌)가 마치 레일처럼 무덤 바닥에 줄지어 깔려 있었다. 굽다리 접시(고배·高杯)와 그릇받침(기대·器臺) 등 각종 제의용 토기들도 잔뜩 쌓여 있었다. 김두철의 회고. “어둠 속에서 아릿하게 보이던 가야무덤은 그저 신비하단 말밖에는…. 잔영이 오래 남았는지 그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날 낮 발굴팀은 내부를 아주 잠깐 볼 수 있었다. 무덤 뚜껑돌을 덮고 있는 진흙을 꽃삽으로 긁어낼 때 돌멩이 하나가 툭 떨어지면서 살짝 구멍이 난 것. 주변 인부들을 의식해 발견 사실을 비밀로 해두고 조사원들만 야간에 따로 모인 것이다.
복천동 22호분과 11호분은 1600년 동안 한 번도 사람 손을 타지 않아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이른바 ‘처녀분’임이 분명했다. 고고학자들에게 처녀분 발굴은 일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다. 가야고분 특성상 무덤 깊이가 5m나 되는 데다 그 위에 주거지가 형성돼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 발굴팀이 더 놀란 건 무덤 내부에 물이나 흙이 차지 않아 매장 당시 상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고고학에서 무덤 부장품의 정확한 위치는 출토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 두근두근 ‘덮개돌’ 들어낸 순간
▲1980년 복천동 고분 발굴현장에서 작업자들이 3t 무게의 무덤 덮개돌을 도르래로 들어올리고 있다.
부산대박물관 제공
본격적인 유물 출토에 앞서 발굴팀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무덤을 덮고 있는 거대한 덮개돌 4개를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만 들어내야 했다. 너비 1.4m, 길이 2.7m의 덮개돌 한 개는 무게가 3t에 달했지만 유구와 유물을 훼손하지 않으려면 중장비를 동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심 끝에 현장에 밝은 한병삼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에게 SOS를 쳤다. 그의 소개로 경주에서 활동하는 석탑 드잡이공들을 불러들였다. 드잡이공은 인력용 도르래를 이용해 석탑을 해체, 조립하는 이들이다.
▲복천동 11호분 안에서 발견된 ‘금동관’.
드디어 1980년 12월 4일 삼불 김원룡 서울대 교수 등 고고학계 원로들과 언론사 취재진이 모인 가운데 뚜껑돌을 조금씩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거대한 뚜껑돌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아래 있는 고대 가야 유물들은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조영제의 회고. “하루 종일 뚜껑돌 4개를 서서히 들어내는 동안 얼마나 긴장했던지…. 불상사라도 생기면 우리 발굴팀은 ‘민족의 죄인’이 되는 거였어요. 다행히 드잡이공들이 무게중심을 잘 잡아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뚜껑돌이 제거된 11호분 안에는 치아가 남아 있는 인골과 더불어 가야 금동관이 놓여 있었다. 11호분 바로 옆 부곽(10호분)에서는 판갑(板甲·상반신을 보호하는 쇠 갑옷)과 말투구(마주·馬胄)가 출토됐다. 말투구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었다.
○ 임나일본부설 역사왜곡 극복
▲복천동 11호 고분 옆 부곽(10호분)에서 출토된 ‘말투구(마주)’.
사람이 쓰는 판갑과 더불어 말투구가 함께 발견된 건 의미가 적지 않다. 왜가 4세기 가야를 점령했다는 일본 학계의 임나일본부설이 깨지는 근거가 됐기 때문이다. 5세기 초반 이전 일본 고분에선 갑옷만 발견될 뿐 말갖춤(마구·馬具)이 나오지 않는다. 당시 일본에 보병만 있었고 기병은 없었다는 얘기다. 반면 4세기 말∼5세기 초 복천동 고분에서는 말투구와 마갑 등 각종 말갖춤이 출토됐다. 임나일본부설에 따르면 왜가 보병만으로 가야의 기병대를 제압했다는 얘기인데 이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조영제는 “복천동 고분 발굴은 가야를 둘러싼 역사왜곡을 바로잡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32> 경주 월지(안압지) 발굴
신라 왕궁 연못에서 건진 목제 남근…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1975년 4월 16일 경주 월지(안압지) 발굴 현장에서 통일신라시대 나무배를 끌어올리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여긴 사방 어디서도 전체를 볼 수 없는 무한(無限)의 공간이오.”
8일 경북 경주시 ‘동궁(東宮)과 월지(月池·안압지)’를 함께 찾은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70)이 건넨 선문답 같은 말이다. 과연 그러했다. 천년왕성 월성(月城) 동문 터와 맞보고 있는 월지 남쪽에 들어서자, 연못을 중심으로 복원된 건물들과 인공섬 대도(大島), 소도(小島)가 한눈에 들어왔다. 월지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는 지점이다. 그러나 연못의 북서쪽 방면에 자리 잡은 중도(中島) 일대는 볼 수 없었다.
42년 전 윤 전 소장과 함께 월지를 발굴한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안압지 발굴조사와 복원’ 글에서 “월지는 무한한 바다를 좁은 공간에 표현했다”고 썼다. 월지는 경복궁 경회루처럼 통일신라시대 연회를 베풀던 경치 좋은 연못과 정원이다. 삼국사기는 월지에 대해 “서기 674년(문무왕 14년)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기록했다. 삼국통일 직후 왕경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문무왕이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월지에 집약한 게 아닐까. 나중에 그가 바닷속 수중왕릉에 묻힌 사실도 예사롭지 않다.
○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경주 월지(안압지)에서 출토된 목제 남근. 귀두 부위에 튀어나온 돌기가 보인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선생님, 방금 이런 게 나왔는데 뭔지 아시겠어요?”
“음, 모양이 딱 그건데….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1975년 5월 29일 월지 북쪽 기슭 발굴현장. 최정혜 당시 조사원이 바닥 개흙층에서 발견한 17.5cm 길이의 기다란 나무 조각을 한 남성 조사원에게 내밀었다. 조각을 뒤덮은 진흙을 닦아낸 남성은 그 정체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챘지만 대답을 머뭇거렸다. 남녀유별이 남아 있던 1970년대엔 그럴 만도 했다. 그것은 전형적인 남성의 심벌 모양이었다.
왕궁 연못에서 느닷없이 남근(男根)이라니.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 이쪽으로 쏠렸다. 윤근일의 회고. “최규하 총리를 비롯해 많은 저명인사가 현장에 와서 목제(木製) 남근을 만져보고 신기해하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찾다보니 최태환 당시 작업반장이 남근에 실을 살짝 묶어놓았어요. 약품 보존처리 중이던 목제 유물들에 둘러싸인 남근을 손쉽게 찾으려고 한 거죠.”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남근의 용도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학계에서는 예부터 바닷가 해신당(海神堂)에서 남근을 세워놓고 제사를 지낸 것처럼 제의용이라는 견해가 일찍부터 제기됐다. 이와 관련해 고대 로마 폼페이 유적에서도 도시 곳곳에서 남근 조각과 그림들이 발견됐다. 일각에서는 월지에서 출토된 남근의 표면이 매끈하게 다듬어진 데다 돌기까지 붙어 있어 여성의 자위 기구라는 설도 제기된다.
○ 삼국시대 배 최초로 발견
둘레 1005m, 면적 1만5658m²에 이르는 월지를 제대로 즐기려면 유람선을 띄우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1975년 4월 16일 연못 한가운데에서 통일신라시대 나무배 한 척이 발견됐다. 그때까지 최초로 확인된 삼국시대 선박이었다.
문제는 엎어진 채 모습을 드러낸 나무배를 안전하게 들어내는 것이었다. 부식이 쉽게 일어나는 유기물 특성상 1300년 묵은 나무는 스펀지처럼 취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1960∼90년대 경주 발굴현장을 지킨 고 김기출 작업반장과 상의한 끝에 윤근일은 나무장대 여러 개를 나무배 아래로 밀어 넣은 뒤 마치 상여를 메듯 들어 올렸다. 길이 6.2m, 너비 1.1m의 나무배에 인부 30명이 달라붙었다. 경사로에서 나무배를 끌어 올리는 과정에서 균형이 맞지 않아 살짝 금이 갔지만, 거의 완형을 유지한 채 무사히 수습을 마칠 수 있었다. 발굴팀은 나무배를 즉시 약품에 담가 7년 동안 보존 처리를 진행했다.
○ 예상보다 훨씬 넓었던 동궁 영역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과 장은혜 학예연구사, 박윤정 학예연구실장(왼쪽부터)이 8일 경북 경주시 ‘동궁과 월지’를 둘러보고 있다. 윤 전 소장은 1975∼76년 발굴에 참여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로프에 몸을 묶고 7m 깊이의 캄캄한 우물 안으로 들어간 기억이 생생하네요.”
이날 ‘동궁과 월지’ 동편지구 발굴현장에서 만난 장은혜 학예연구사(29)는 2년 전 통일신라시대 우물을 발굴한 경험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동궁과 월지 발굴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지 동편지구에 대한 발굴조사를 2007년부터 이어가고 있다.
당초 동편지구는 별도의 왕경 유적으로 추정됐지만, 막상 땅을 파보니 이곳에서 확인된 건물 터와 유물은 월지에서 출토된 것들과 유사했다. 신라시대 동궁 영역이 현재 사적지로 지정된 범위보다 훨씬 넓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백전노장과 청년 고고학자 두 사람이 한목소리로 말한다. “동궁과 인근 월성 발굴은 시간을 갖고 체계적으로 해야 합니다. 1970년대 발굴에서 확인하지 못한 월지 동편과 북편 경계를 파악하는 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33> 합천군 옥전 고분군
가야의 위엄 서린 황금칼, 전설의 왕국 ‘다라국’의 실 체 밝히다
M1호분서 발굴된 로만글라스… 서역과의 문물 교류 알 수 있어
다라국 전성기 대표하는 M3호분… 정교한 장식의 둥근고리자루큰칼… 금귀고리-갑옷 등 유물 쏟아져
“가야연맹 소속됐던 다라국… 6세기 후반 백제와 동맹 맺어”
▲조영제 경상대 교수가 경남 합천군 옥전 고분군에서 1985년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합천=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9일 경남 합천군 옥전서원(玉田書院) 옆 야산에 들어서자 사람 키를 넘는 거대한 무덤들이 나타났다. 능선을 따라 위아래로 길게 늘어선 20여 기의 봉분은 멀리서 보면 마치 낙타 혹 같다. ‘어딘가 눈에 익은 풍경인데….’ 지난 시리즈에서 취재한 발굴 유적 32곳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야트막한 구릉에 고총(高塚)들이 빽빽이 자리 잡은 모습이 부산 동래구 복천동이나 경남 김해시 대성동의 금관가야 고분을 닮았다.
답사에 나선 조영제 경상대 교수(64)가 심중을 읽은 듯 한마디 거들었다. “이곳 합천 옥전 고분군에 묻힌 다라국(多羅國) 지배층은 순수 토착세력이 아닙니다.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한반도 남부를 공략하자 김해 금관가야에서 넘어온 사람들이죠.”
○ 지중해산 로만글라스 발견
▲경남 합천군 옥전 고분군에서 출토된 로만글라스. 국립중앙박물관·국립김해박물관 제공
“이건 금관보다 더 귀한 거요….”
1991년 9월 옥전 고분군 M1호분(M은 봉분(Mound)을 뜻함) 발굴 현장. 발굴 지도위원으로 현장을 찾은 김원룡 서울대 교수가 로만글라스(Roman glass·로마와 속주에서 제작된 유리그릇) 출토품을 손에 쥐고 읊조렸다. 한국 고고학의 대가는 감격에 젖어 손마저 가늘게 떨었다. 혹여나 귀한 유물을 떨어뜨릴까 봐 한병삼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로만글라스 아래로 손을 뻗었다.
현재는 고인이 된 고고학계 원로들이 당시 흥분했던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고대 한반도에는 투명한 유리 재질의 로만글라스를 만드는 제조 기술이 없었다. 따라서 멀리 지중해로부터 광활한 실크로드를 거쳐 들어온 로만글라스는 서역과의 문물 교류를 보여주는 핵심 증거다. 당시 로만글라스는 경주 신라고분에서만 나왔는데, 경주 이외 지역에서 발견된 건 이것이 유일했다.
로만글라스의 출토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출토 1년여 전 인근 옥전서원 문중에서 “안산을 함부로 파헤칠 순 없다”며 발굴을 막았다. “국가사적으로 지정되면 오히려 제대로 보존할 수 있다”고 설득해 1989년 4월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갔지만 그새 주곽(主槨) 일부가 도굴됐다. 크게 낙심했던 발굴팀이 시신 발치 쪽에 깔려 있던 갑옷을 노출하던 도중 로만글라스 조각을 찾아냈다. 다행히 마구 밑에서 나머지 조각들이 나와 로만글라스를 완전체로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경남 합천군 옥전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귀고리. 국립중앙박물관·국립김해박물관 제공
학계는 M1호분이 조성된 5세기 3분기(451∼475년)부터 옥전 고분에서 로만글라스와 창녕계 토기 등 신라 계통 유물이 나타나고, 거대한 봉분 무덤이 출현하는 데 주목한다. 5세기 신라에서도 높은 봉분의 적석목곽분이 유행했다. 다라국이 신라와 교역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분석된다. M1호분보다 시기가 앞서는 5세기 초 무덤에서 갑옷과 투구, 금장식품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목곽묘 규모가 갑자기 커지는 양상도 눈길을 끈다. 조영제는 “이때 부장품은 김해 지역의 가야고분과 연관성이 깊다”며 “5세기 초 광개토대왕 남정을 계기로 금관가야 세력이 합천으로 옮겨온 사실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 황금빛 용과 봉황 함께 날다
▲경남 합천군 옥전 고분군에서 출토된 ‘용봉무늬 둥근고리자루큰칼(용봉문 환두대도)’ 손잡이. 5∼6세기 다라국의 정교한 금속공예 기법을 알 수 있는 유물이다. 국립중앙박물관·국립김해박물관 제공
‘용띠 해에 합천에서 용이 승천했다.’
1988년 초 옥전 고분군 M3호분에서 용봉무늬 둥근고리자루큰칼(龍鳳文環頭大刀·용봉문 환두대도) 4점이 한꺼번에 출토되자, 국내 언론들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한껏 들뜬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언론 보도가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다. 용이나 봉황 문양을 새긴 둥근고리자루큰칼이 한 무덤에서 4점이나 나온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화려한 장식의 둥근고리자루큰칼이 출토된 곳은 무령왕릉과 천마총밖에 없었다. 더구나 옥전 고분 둥근고리자루큰칼은 금·은 장식이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지름이 21m에 이르는 M3호분은 다라국 전성기를 대표하는 거대 무덤이다. 이곳에서는 둥근고리자루큰칼뿐만 아니라 금귀고리, 금동장식 투구, 갑옷, 말 투구(馬胄), 쇠도끼 등 각종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제강점기 때 도굴 시도가 있었지만 다행히 석곽 가운데가 아닌 측면의 돌무더기를 뚫는 바람에 대부분의 유물이 온전할 수 있었다.
역사학계는 옥전 고분군이 일본서기에 몇 줄만 언급된 다라국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열쇠라고 평가한다. 조영제의 설명. “5세기 말, 6세기 초 옥전 고분에서 대가야계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다가 6세기 후반 백제계 유물이 주로 나옵니다. 이는 다라국이 대가야를 주축으로 한 가야연맹에 소속됐으며, 6세기 후반 신라에 맞서 백제와 동맹을 맺은 사실을 보여줍니다.”
<34> 공주 공산성 발굴
백제시대 최고급 옻칠 갑옷, 왜 저수지 한가운데 묻혔을까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와 이훈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이 지난달 31일 충남 공주시 공산성 공산정 앞에서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이 위원이 손으로 가리키는 공북루 안쪽 공터가 백제시대 건물터가 발굴된 성안마을이다. 공주=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발아래 금강은 유유히 흐르는데 백제 700년 역사는 온데간데없었다.
지난달 31일 충남 공주시 공산성(公山城) 꼭대기 정자(亭子)에 오르자, 공북루(拱北樓)로 뻗어 내린 성벽 옆으로 금강이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서기 660년 이곳에서 당나라와 최후 결전을 벌인 의자왕도 저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을까…. 475년 한성(현 서울)에서 천도한 이후 64년 동안 백제 도읍이었던 웅진(공주)은 백제 부활과 멸망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다.
공북루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최근 발굴을 마친 공터가 보였다. 1990년대 후반까지 민가 7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성안마을’이다. 여기서 백제시대 건물 터를 비롯해 ‘옻칠 갑옷’ 등 각종 백제 유물이 출토됐다. 발굴단은 당초 견해를 바꿔 백제 왕궁 정전(正殿) 터가 성안마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故) 이남석 공주대 교수(발굴단장)와 함께 오랫동안 공산성 발굴에 참여한 이훈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과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스승을 회고했다. “사람이 세상 떠날 때를 택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30년 넘게 공산성 발굴에 매달린 분답게 마지막 9차 발굴까지 모두 마친 직후에 돌아가셨어요.”
○ 당나라 연호 적힌 옻칠 갑옷 출토
▲○○行貞觀十九年四月卄一日’(○○행 정관 19년 4월 21일)이라는 명문이 적힌 백제시대 ‘옻칠 갑옷’. 공주 공산성 성안마을에서 발견됐다.
“아 행정관(行貞觀) 명문이다!”
2011년 10월 중순 성안마을 내 저수지 발굴현장. 지표로부터 6.5m 깊이 바닥에 깔린 풀을 대나무 칼로 조심스레 떼어내던 이현숙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행여나 유물을 밟을까 오랜 시간 쪼그린 자세로 까치발을 한 탓에 그의 탄성엔 고통이 배어 있었다. 햇볕에 노출된 직후 감청색 빛깔을 드러낸 옻칠 갑옷 조각 위로 빨간색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행정관’ 뒤로 ‘十九年四月卄一日’(19년 4월 21일) 글자도 있었다. 행정관이 무슨 뜻인가.
전화로 보고를 받은 이남석이 급하게 현장으로 뛰어왔다. 명문을 유심히 들여다본 스승이 제자를 슬쩍 나무랐다. “역사 공부하는 사람이 정관(貞觀)으로 읽어야지. 당나라 연호 아닌가.” 백제시대 유물에서 당나라 연호가 처음 발견된 순간이었다. 정관은 백제를 멸망시킨 당 태종의 연호로, 정관 19년은 서기 645년(의자왕 5년)에 해당한다. 문헌 기록이 절대 부족한 고대사에서 연대가 적힌 명문은 역사 해석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핵심 자료다.
명문도 명문이지만 옻칠 갑옷 발굴도 대단한 성과였다. 가죽에 10여 차례 이상 옻을 덧바르는 갑옷은 삼국시대 최고 사치품으로 통한다. 더구나 옻칠 갑옷과 함께 쇠 갑옷, 마갑(馬甲), 대도(大刀), 장식칼 등 기마병의 화려한 말갖춤이 한 세트로 묻혀 있었다. 백제시대 공산성의 위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1급 유물들이다.
주변 발굴을 끝낸 직후 발굴단은 갑옷 발견을 하늘의 뜻으로 여기게 됐다. 이현숙의 기억. “성안마을 주민들이 저수지에만 우물 5개를 팠습니다. 그런데 이 중 관정(管井) 하나가 옻칠 갑옷과 불과 20cm 떨어진 곳에 설치됐더라고요. 조금만 옆쪽으로 뚫고 지나갔다면 갑옷은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 누가 왜 최고급 갑옷을 저수지에 묻었나
▲옻칠 갑옷과 함께 공산성 성안마을 안 저수지에서 발견된 ‘쇠 갑옷’. 공주대박물관 제공
고고 유물은 발굴 못지않게 해석이 중요하다. 관련 역사 기록과 연관성은 기본이고 때론 문헌을 뛰어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공산성 발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옻칠 갑옷 등이 불탄 기와와 화살촉이 가득한 지층 바로 아래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말 탄 기병을 연상시키듯 갑옷, 무기, 마갑 순으로 유물들이 층위를 이루며, 물건을 감추듯 1m 두께의 풀을 갑옷 위에 덮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나당 연합군에 포위된 긴급 상황에서 옻칠 갑옷 등을 저수지 한가운데 놓았다는 얘기인데 왜 그랬는지가 미스터리다.
이를 놓고 학계에서는 여러 주장이 제기된다. 우선 “백제는 간지(干支)를 사용했다”는 중국 역사서 한원(翰苑) 기록을 토대로 당나라 연호가 적힌 옻칠 갑옷은 중국에서 만든 거라는 견해가 있다. 당군이 웅진도독부에서 철수하면서 버린 갑옷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에 중국 연호가 새겨진 사실이 있으므로 백제가 외교용으로 갑옷을 만들었다는 반론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에 “645년 5월 당군이 요동성을 함락했을 때 백제가 금색 칠을 한 갑옷과 검은 쇠로 무늬를 놓은 갑옷을 만들어 바쳤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옻칠 갑옷에 적힌 645년 4월과 시기도 비슷하다. 발굴단의 해석을 이현숙이 정리했다.
“백제가 당나라에 외교용으로 갑옷을 보내면서 국가기록물 차원에서 추가로 제작한 게 출토품인 걸로 보입니다. 당나라와 최후 결전을 앞두고 갑옷을 저수지 아래 묻으며 승전을 기원한 의례를 올린 게 아닐까요.”
<35> 경주 나정 발굴
神話, 역사가 되다… 박혁거세 탄생의 비밀 깃든 ‘나정’
▲발굴 당시 나정 전경. 주변 탑동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사진제공 중앙문화재연구원
경주 도심 남천(南川)을 건너 남산(南山) 방향으로 차를 몰자 너른 들판이 펼쳐졌다. 물 댄 논 사이로 황구가 어슬렁거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탑동이다. 그런데 마을 입구를 지키는 육중한 조선시대 기와 건물이 범상치 않은 포스를 내뿜는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6부 촌장(村長)의 위패를 봉안한 양산재(楊山齋)다. 그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가니 소나무 숲 속에 감춰진 공터가 나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기록된 나정(蘿井)이다. 나정과 불과 500m 떨어진 거리에 경애왕이 살해당한 곳이자, 신라 멸망을 상징하는 포석정이 있다. 월성과 황룡사지 등 경주 중심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 천년왕국 신라의 시작과 끝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런 걸까.
2002∼2005년 윤세영 당시 중앙문화재연구원 원장(현 고려대 명예교수)과 함께 나정을 발굴한 이문형 책임조사원(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기획실장)과 이지균 조사원(현 천년문화재연구원 단장)이 살짝 성토된 땅을 손으로 가리켰다. “신라시대 ‘팔각 건물터’가 발견된 곳입니다. 신화가 역사로 바뀐 순간이죠.”
○ 작은 호기심에서 비롯된 역사적 발견
▲2002∼2005년 경북 경주시 나정 발굴 당시 발견된 신라시대 ‘팔각 건물터’. 기단 석렬 내부에 둥근 초석들이 보인다. 아래쪽 비석은 일제강점기 때 박희동(신원 미상)이 세운 것으로, 현재는 사적지 내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중앙문화재연구원 제공
“아니, 이게 왜 이런 각도로 꺾이지?”
2002년 5월 하순 경주 나정 발굴 현장. 조선시대 건립된 비각(碑閣) 주변을 시굴하는 과정에서 건물 기단 석렬(石列)을 발견한 이문형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당연히 사각형 모양의 평면을 머리에 그리고 가장자리를 팠는데, 위로 꺾인 석렬의 각도는 수직이 아닌 둔각을 이루고 있었다. 서둘러 반대편 가장자리를 파보니 마찬가지였다. 석렬 주변에서는 신라시대 기와들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며칠 뒤 이문형은 후배 조사원들을 조용히 주말에 불러냈다. 경주시가 본래 요청한 발굴조사 내용에서 벗어나 기와 건물의 정체를 밝혀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앞서 경주시는 낙수 피해를 막기 위해 담장 이설 공사를 추진하면서 연구원에 주변 발굴을 요청한 터였다. 갑자기 발견된 기와 건물터에 대한 성격 규명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주말 이틀 동안 쉴 새 없이 노출시킨 기단 석렬은 상상을 뛰어넘는 독특한 구조였다. 경주에서 지금껏 한 번도 발굴된 적이 없는 팔각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 더구나 팔각 건물터에서 ‘義鳳四年(의봉 4년·679년)’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됨에 따라 문무왕의 삼국통일 직후 증축이 이뤄진 사실을 알 수 있게 됐다. 석렬 내부에서는 3열에 걸쳐 초석(礎石) 40개가 발견됐다. 지표가 지속적으로 깎인 탓에 초석은 불과 20cm 깊이에 묻혀 있었다. 팔각 건물터 외곽을 둘러싼 담장도 발견됐다.
○ 나정인가 신궁(神宮)인가
▲나정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연꽃무늬 막새. 사진제공 중앙문화재연구원
“고허촌(高虛村) 촌장이 양산 밑 나정 우물가에 무릎을 꿇고 우는 흰말을 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말은 사라지고 커다란 붉은 알만 있었다. 알을 깨고 나온 사내아이를 촌장이 데려와 길렀다. 아이는 이미 13세에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매 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그가 바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 탄생 신화에 등장하는 나정은 조선시대부터 진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한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역사가 아닌 허구로만 여겼다. 그러나 신라시대 팔각 건물이 발굴되면서 나정은 역사적 실재라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나정에서 추정 우물터를 중심으로 한 초기철기시대 ‘제의용 환호(環濠·마을이나 제단을 둘러싼 도랑)’가 발견돼 눈길을 끌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박혁거세의 건국 연대(기원전 57년)와 비슷한 시점에 나정이 신성시됐음을 보여주는 근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발굴단이 우물터로 지목한 유구가 사실은 기둥구멍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청동기시대 소도(蘇塗)처럼 환호 중앙에 커다란 나무장대를 꽂은 흔적이라는 것이다. 단, 통일신라시대 팔각 건물이 국가 제의시설이라는 발굴팀 의견에 대해선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고학·학술원 회원)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나정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박혁거세를 기리는 시조묘 혹은 김씨 시조를 기리는 신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경주 나정을 둘러보고 있는 이문형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기획실장(왼쪽)과 이지균 천년문화재연구원 단장. 경주=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36> 함안 말이산 고분 - 신문배달 소년, 아라가야 왕국의 1500년 잠을 깨우다
아파트 공사장서 ‘요상한’ 물건 발견… 신고 받은 발굴팀 ‘말 갑옷’ 확신
열흘간 이쑤시개로 흙 긁어내자 2.3m 원형 그대로 모습 드러내
강국 틈바구니서 고유 문화 지킨 아라가야의 실체 생생하게 보여줘
▲3일 경남 함안군 말이산 고분군에서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이 발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등 뒤로 아라가야 최고 지배층의 무덤 봉분들이 능선을 따라 늘어서 있다. 함안=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야트막한 구릉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봉긋하게 솟아오른 거대한 봉분들이 지평선까지 죽 이어져 있다. 그 뒤로 펑퍼짐한 능선에 자리 잡은 성산산성(城山山城)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1400여 년 전 아라가야를 점령한 신라군의 위세가 멀리서도 느껴진다.
3일 찾은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은 고령 대가야와 더불어 위세를 떨친 아라가야의 왕릉답게 5∼10m 높이의 고총들이 장관을 이뤘다. 신라, 왜(倭)로 가는 길목에 있던 아라가야는 주변 강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고유 문화를 지키며 수백 년 동안 생존했다. 1992∼1996년 말이산 고분을 발굴한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54)은 “함안군 주민들 덕분에 아라가야 고분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 신문배달 소년이 살린 가야 무덤
▲1992년 6월 발굴된 함안 말이산 고분군 내 마갑총(위 사진). 실선으로 표시된 건 말 갑옷으로, 아래는 보존 처리를 마친 뒤 모습이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국립김해박물관 제공
“박 선생, 이리 빨리 좀 와주이소.”
1992년 6월 6일 오전. 함안 성산산성을 한창 발굴 중이던 박종익 당시 학예연구사(현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장)가 평소 친분이 있던 한 일간지 지국장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데리고 있는 배달소년이 인근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요상한’ 물건을 주워 왔다는 것이다. “암만 봐도 문화재 같다”는 사학과 출신 지국장의 말에 박종익은 꽃삽을 내려놓고 한달음에 현장으로 달려갔다.
소년이 주워서 신문지에 둘둘 말아 넣은 쇳조각을 본 순간 그는 ‘말 갑옷(馬甲·마갑)’임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조영제 경상대 교수와 경남 합천군 옥전 고분을 발굴할 당시 비슷하게 생긴 말 갑옷 조각을 본 적이 있었다. 소년이 발견한 조각은 황갈색 녹이 두껍게 낀 상태였고, 말에 두른 갑옷답게 길이는 10cm가 넘었다.
갑옷 조각은 굴착기로 배수로를 판 구덩이에서 발견됐는데 다른 조각들도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박종익은 즉시 도청에 전화해 공사를 중단시킨 뒤 성산산성 발굴현장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갑옷 수습 임무를 맡은 이주헌이 현장에 급파됐다.
1주일에 걸쳐 흙을 조심스레 제거하자 길이 8.9m, 너비 2.8m의 거대한 덧널무덤(목곽묘)과 함께 말 갑옷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갑옷을 모두 노출시키는 데 열흘이 더 걸렸다. 1500년이 흘러 부식이 심한 갑옷 표면을 손상시키지 않고 무사히 들어내기 위해 6명이 달라붙어 오직 이쑤시개로 흙을 긁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길이 2.3m, 너비 48cm의 말 갑옷은 한 세트가 시신 좌우에 나란히 묻혀 있었다. 굴착기 삽날로 일부가 훼손된 걸 제외하면 거의 온전한 형태로 발견돼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앞서 부산 복천동과 경남 합천군에서 말 갑옷이 출토됐지만 완형이 아닌 조각들이라 전체 윤곽을 파악할 수 없었다. 당시 암 투병 중이던 고고학 대가 김원룡 서울대 교수가 직접 현장을 방문해 유물을 본 뒤 감탄사를 연발할 정도였다. 5세기 중엽 아라가야 때 조성된 이 무덤은 출토 유물의 이름을 따서 ‘마갑총(馬甲塚)’으로 명명됐다. 말 갑옷은 7년의 보존처리를 거쳐 현재 국립김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고구려·백제와 교류 흔적
▲말이산 고분에서 출토된 아라가야의 ‘화염(불꽃)무늬 투창 굽다리접시’.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고고학계는 말이산 고분이 아라가야와 주변국의 문물 교류를 생생히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마갑총 출토 말 갑옷은 고구려 쌍영총이나 동수묘 벽화에 묘사된 기마병의 말 갑옷과 매우 흡사한 형태다. 이에 따라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한반도 남부를 공략할 때 가야로 유입된 고구려 갑옷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마갑총 조성 시점을 430년 이후로 보면 쇠를 다루는 데 능했던 가야인들이 고구려 갑옷의 영향을 받아 자체 생산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무엇보다 말이산 고분의 묘제가 시대에 따라 널무덤(목관묘)과 덧널무덤,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으로 다양하게 변화된 것도 주변국 영향이 컸다. 이 중 6세기 전반에 나타난 굴식돌방무덤은 백제의 무덤양식을 들여온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강성해진 신라의 서진(西進)에 위협을 느낀 아라가야는 백제, 대가야와 연맹을 맺은 상태였다. 이주헌은 “마갑총에서 나온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도 백제 중앙과 아라가야의 긴밀한 교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라고 말했다
<37> 경기 하남시 '이성산성'
백제 왕도인 풍납-몽촌토성과 인접… 목간 발굴 전 백제 성곽설에 무게
이성산성 저수지에서 나온 목간… 해서체 달필로 쓴 무진년 간지
남한성 지명-도사 관직 적혀있어… 축성시기와 주체 알 수 있는 증거
▲지난달 25일 경기 하남시 이성산성 동문 터에서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이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안쪽에 놓인 사각형의 커다란 돌 2개는 기둥을 고정시키는 문지공석으로 신라 때 만들어졌다.
하남=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기술은 시간을 절대 추월할 수 없어요. 기술이란 때가 되어야 나타나는 겁니다.”
‘구루(Guru)’의 말은 짧고 단정적이지만 그 속에 힘이 있다. 단순한 교과서 지식이 아니라 수십 년 세월 자신이 경험한 산지식이 응축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5일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경기 하남시 이성산성(二聖山城) 동문(東門) 터. 멀리 한강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구릉 가장자리로 6m 너비의 바닥과 벽면을 감싼 석축이 보였다. 동행한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56)이 안쪽 바닥 면에 솟아있는 두 개의 문지공석(門址孔石·기둥이 무너지지 않게 고정시키는 돌)을 조용히 가리켰다. 사각형의 큼지막한 돌에 원형의 구멍이 이중으로 파여 있다. 1500년 전 이 돌에 고정된 커다란 나무문을 신라 병사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켰을 것이다. 그는 “이런 모양의 돌구멍은 전형적인 신라 석성에서나 볼 수 있다”며 “산성 쌓기는 건축과 토목 기술이 융합된 당대의 원천기술로 축성 방식을 들여다보면 누가 쌓았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1990년 7월 이성산성 내 1차 저수지에서 출토된 목간. ‘무진년’ 간지와 함께 신라 관직명인 ‘도사’가 적혀 있다. 한양대박물관 제공
○ 신라 관직명 적힌 목간(木簡) 출토
1990년 7월 초순 이성산성 1차 저수지 발굴 현장. 장마로 습한 현장은 자욱한 안개까지 깔려 시종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3개월 동안 이어진 강행군으로 지친 연구원과 인부들은 말없이 땅만 팠다. 당시 50대 후반의 베테랑 작업반장(발굴 현장의 인력을 감독하는 사람) 임철웅이 깊은 침묵을 깼다. 지표로부터 2m 깊이에서 한자가 적힌 나무 쪼가리(목간)를 발견한 것이다.
소리를 듣고 뛰어온 당시 한양대박물관 책임조사원 심광주가 숨죽인 채 목간 글씨를 하나씩 확인했다. 해서체 달필로 쓴 간지(干支·연대)와 관직명이 뚜렷하게 보였다. 심광주의 회고. “3년 내내 학수고대하던 명문 자료를 처음 출토한 순간이었습니다. 산성 축성 시기와 주체를 파악할 수 있는 강력한 증거를 얻은 겁니다.”
목간에는 무진년(戊辰年) 간지와 남한성(南漢城) 지명, 도사(道使) 관직이 한꺼번에 적혀 있었다. 저수지에서 고구려나 백제 유물은 없었고 신라 것만 나온 걸 감안하면 무진년은 신라가 한강 일대에 진출한 이후인 608, 668, 728, 788년 중 하나라는 게 그의 견해다. 특히 도사는 신라 관직명으로 6, 7세기 자료에 주로 나타나기 때문에 함께 출토된 토기 양식을 고려하면 608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신라 진흥왕이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은 지 5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삼국통일로 나가는 길목에 있던 신라는 아마도 남한강을 지척에 둔 이성산성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을 것이다.
목간의 출토 위치도 매우 중요했다. 1차 저수지는 지층상 성벽을 처음 쌓을 때 함께 조성된 사실이 확인됐는데, 목간은 저수지 바닥에서 불과 1m 높이에서 발견됐다. 이는 목간이 가리키는 연대가 이성산성이 축조된 시기와 근접해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근거였다.
○ “삼국 중 누가 쌓았나” 논란
발굴 전 학계는 이성산성을 백제 성곽으로 봤다. 지금도 학계 일각에선 백제로 보는 시각이 여전하다. 백제 왕도인 풍납토성, 몽촌토성이 이성산성에서 불과 5km 거리에 있는 데다 근처 미사리에서 백제 마을 유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도 이곳을 백제 하남위례성으로 추정했다. 2000년에는 고구려 관직명 ‘욕살(褥薩)’이 적힌 것으로 추정되는 목간과 고구려 자가 출토돼 고구려가 이성산성을 처음 쌓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강을 둘러싼 삼국의 경합을 재현하듯, 이성산성을 처음 축조한 주체를 둘러싸고 학계가 셋으로 갈린 셈이다.
그러나 유물과 유적이 가리키는 결론은 명확하다는 게 심광주의 견해다. 토성(土城) 중심의 백제 산성과 달리 전형적인 석성(石城)이고, 수직으로 쌓아올린 성벽이 무너질 것에 대비해 삼각형 단면의 석축을 성벽 하단에 덧대 쌓는 보축(補築)이 발견된 것도 이성산성이 신라 산성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30년을 발굴했는데도 백제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아요. 신념처럼 믿는 것과 명확한 고고학 증거가 서로 다를 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성산성 발굴은 성곽을 볼 때 위치나 역사적인 배경보다 기술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제게 줬습니다.”
<38> 청주 신봉동 유적
둥근고리칼-쇠갑옷… 재갈… 백제 전사들의 魂을 만나다
조사된 300여기 무덤들 중 무기-마구 묻힌 비율 20% 달해… 지금의 현충원 군인묘역에 해당
신라-가야-일본계 토기도 출토, 문화교류 흔적 오롯이 남아있어
▲1990년대 충북 청주시 신봉동 유적 발굴 당시 각종 토기가 출토된 토광묘들. 이곳에서는 재갈(작은 사진), 발걸이 등 백제 마구가 당시로선 최초로 발견됐다. 국립청주박물관 제공
《지난달 31일 충북 오송역에서 차로 30분. 청주 북서쪽 외곽에 이르자 야트막한 봉분들이 이어진 능선이 보였다. 동네 뒷산 같은 아늑한 분위기랄까. 왕릉급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본 시리즈 20회) 같은 웅장한 스케일은 아니다. 국내 최초로 백제 재갈과 발걸이가 출토돼 고고학계로부터 크게 주목받은 ‘청주 신봉동 유적’이다.》
▲지난달 31일 차용걸 충북대 명예교수가 청주백제유물전시관에 전시된 ‘손잡이잔(파수배)’ 출토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학계는 이 잔이 곡식 양을 측정하는데 쓰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청주=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동행한 차용걸 충북대 명예교수(67)가 한마디 거든다. “여기엔 백제 장수도 있지만 지름이 1m도 안 되는 조그마한 무덤에 묻힌 서민들도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왕릉 부장품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백제 전사들의 생생한 흔적이 담긴 현장이죠.”
○ 삼국시대 격전지 전사들의 무덤
1992년 7월 중순 무더운 여름날. 충북대 박물관 발굴팀은 도굴로 인해 처참한 몰골을 드러낸 무덤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매의 눈으로 지표를 샅샅이 훑던 조사원들의 시야에 살짝 드러난 고분 일부가 들어왔다. 상당한 크기의 목곽 무덤이었다. 이미 도굴 갱이 뚫려 있어 큰 기대를 접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벌 통을 제거하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20∼30cm를 파들어 갔을까. 길쭉한 모양의 금속 물체가 윤곽을 드러냈다. 당시 박물관 학예부장이던 차용걸이 손잡이 부분의 까만 녹을 긁어내자 순간 하얀 빛이 번쩍했다. 고대 지배층이 애용한 둥근고리칼(환두대도)의 ‘은장식’이 분명했다. 붉은색 점토층에 칼이 단단히 박혀 있는 바람에 발굴팀은 대도를 흙과 함께 통째로 파냈다.
흥미로운 것은 칼의 끝이 ㄱ자로 휘어 있었다는 점이다. 차용걸의 회고. “이런 형태의 칼은 처음이었습니다. 어떤 연유에서 끝이 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부장 당시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이 있어요. 청동기시대에도 주술적 의미에서 동기를 일부러 부러뜨려 묻은 게 많은데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을까요.”
신봉동 유적이 독특한 건 조사된 300여 기의 무덤 가운데 무기나 마구(馬具)가 묻힌 비율이 거의 20%에 육박한다는 점이다. 쇠 갑옷과 투구, 둥근고리큰칼, 손칼, 화살촉, 창, 발걸이, 재갈 등 총 1300여 점의 철기 유물이 쏟아졌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곳을 “백제 전사들의 공동묘지”라고 부른다. 요즘으로 치면 현충원 군인묘역과 비슷할까. 학계는 전사들이 4, 5세기 한반도 중부지역을 둘러싼 삼국의 치열한 전투에서 희생된 걸로 추정한다. 이곳은 한강 유역에 왕성을 둔 백제가 남쪽의 신라를 공략하기 위한 길목이자 중요한 군사거점이었다.
○ 마한과 백제가 빚은 문화
답사를 마치고 고분군 바로 아래 들어선 청주백제유물전시관을 찾았다. 청주 출신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야인 시절 홍보 동영상에 나와 선보이는 ‘손잡이잔(파수배·把手杯)’이 단연 눈길을 끈다. 한쪽에만 손잡이가 달려 머그 컵처럼 생긴 이 잔은 4, 5세기 백제 중앙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봉동 고분에서는 여러 개가 발견돼 백제에 복속되기 전 마한 토착 지배층의 문화로 해석된다. 반면 다리가 세 개 달린 그릇인 삼족기(三足器)나 돌방무덤(석실분) 등은 한성백제의 영향이다. 차용걸은 “3, 4세기 조성된 인근 청주 송절동이나 봉명동 고분은 백제의 지배를 받기 전 마한 토착세력의 문화를 반영하는 반면에 신봉동 고분은 백제화가 진척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일본계 토기인 스에키와 가야, 신라 토기들이 신봉동에서 발견된 것도 의미가 작지 않다. “백제가 가야를 거쳐 일본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청주지역이 가교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전사들의 무덤에도 국제 문화교류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있는 거지요.”
<39·끝> 무령왕릉의 교훈
“무령왕릉” 한마디에 법석… 주위 독촉에 이틀만에 서둘러 발굴
▲1971년 7월 8일 충남 공주 무령왕릉을 열기 직전 아치 모양의 입구 앞에서 발굴단 관계자들이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벽돌을 쌓아올려 입구를 막은 모습이 보인다. 오른쪽 사진은 22일 무령왕릉 앞에서 발굴 당시를 떠올리고 있는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 지건길 이사장 제공·공주=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에서 다시는 되풀이돼선 안 될 역사적 과오였다.”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74·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자서전 ‘고고학과 박물관 그리고 나’(학연문화사)에서 무령왕릉 발굴을 회고하며 쓴 글이다. 그는 1971년 무령왕릉 발굴에 참여한 당사자다. 고고학자가 자신의 발굴 성과를 비판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법. 그만큼 무령왕릉 발굴이 한국 고고 역사학 연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22일 오랜만에 무령왕릉을 다시 찾은 노학자는 스마트폰으로 곳곳을 촬영하느라 바빴다. 그곳에 자신의 청춘 한 자락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벌써 46년이 흘렀소. 압도적인 광경에 모두들 넋이 나갔지….”
○ 희대의 발견과 폭우
1971년 7월 5일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 공사현장. 장마철 무덤에 물이 차는 걸 막기 위해 배수로를 놓는 작업 도중 6호분과 비슷한 재질의 벽돌이 드러났다. 뭔가 심상치 않은 유구가 새로 발견됐다는 보고에 김원룡 당시 국립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한 발굴단이 구성돼 이틀 뒤 현장으로 출동했다. 조사원은 이호관 문화재연구실(현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과 손병헌 조유전 지건길 학예연구사였다.
▲무령왕릉의 내부 전경.
7일 오후 시작된 발굴로 아치 모양의 무덤 입구가 드러나자 발굴단은 전인미답의 백제 왕릉이 나타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었다. 그때까지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백제 왕릉은 전무했다. 그런데 저녁에 쏟아진 폭우로 인해 발굴은 일시 중단됐다. 자칫 물이 고분 안으로 흘러넘칠 뻔했지만 발굴 구덩이에 배수로를 뚫어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죽은 이를 지키기 위해 무덤길에 놓인 ‘진묘수’. 문화재청 제공
○ 무덤 주인이 드러나다
어둠 속에서 뿔 달린 ‘그로테스크한 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다음 날 오후 4시경 발굴단은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벽돌 몇 장을 빼내고 왕릉의 속살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취재진과 주민들조차 숨을 죽였다.
▲무덤을 연 직후 촬영한 진묘수와 지석.
손전등으로 무덤길(연도)을 비추던 지건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입술이 붉게 물든 돌짐승, 진묘수(鎭墓獸·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였다. 이어 그 앞으로 동전 꾸러미가 놓인 돌판 2개가 보였다. 지건길의 회고. “무덤 벽이며 천장에서 나무뿌리가 삐져나와 길게 늘어져 있었어요. 마치 ‘유령의 집’ 같습디다. 으스스했지.”
▲무령왕 이름이 새겨진 지석.
막음벽돌을 무릎 높이까지 들어낸 뒤 김원룡과 김영배(당시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가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2개의 돌판이 죽은 이의 이름과 생몰연도를 기록한 지석(誌石)임을 알아보고 크게 놀랐다. 백제사에 조예가 깊은 김영배는 지석에 새겨진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문구를 보자마자 “이는 무령왕”이라고 외쳤다. 숱한 고대 왕릉 가운데 처음으로 무덤 주인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왕이 무덤으로 쓸 땅을 지신(地神)에게 사들인다는 내용도 담겼다. 지석 위에 동전(오수전)이 놓인 이유였다.
▲무령왕의 금제 관 장식(첫번째 사진)과 금 귀고리.
○ 광란의 도가니
“이 무덤은 백제 제25대 무령왕 부부가 묻힌 왕릉이며, 한 번도 도굴된 적이 없습니다.”
30분 뒤 왕릉 밖으로 나온 김원룡의 말 한마디에 발굴단과 취재진의 흥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기자들의 성화에 발굴단은 아직 실측도 끝나지 않은 무덤 촬영을 허용했다. 유구와 유물 규모로 볼 때 최소 수개월의 발굴이 필요했지만, 발굴단은 다음 날(9일) 오전 9시까지 철야 발굴을 강행했다.
▲명문이 새겨진 무령왕비의 은팔찌.
이에 따라 지석과 진묘수, 관재(棺材) 등 주요 유물들이 대략적인 실측과 촬영만 거친 뒤 무명천에 둘둘 말려 서둘러 옮겨졌다. 구슬과 장신구 등 바닥에 흩어진 자잘한 유물들은 실측도 없이 삽으로 퍼 담았다. 왜 이리 급했을까. “엄청난 광경에 발굴단장부터 경황이 없던 데다 주민들과 기자들 독촉에 마음이 더 급해진 거지요.”
비록 발굴은 졸속이었지만 무령왕릉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 4600여 점의 가치는 대단히 컸다. 이 중 17점이 국보로 지정될 정도로 수준 높은 백제 공예기술이 세상에 드러났다. 특히 무령왕의 생몰연대가 분명한 만큼 출토 유물은 지금도 백제 고고학 연구에 핵심 기준이 되고 있다.
일본학계에선 ‘무령왕릉계 유물’이라는 학술용어가 생겼을 정도. 중국 양나라 무덤 양식인 벽돌무덤으로 지어지고, 관재 성분이 일본산 금송으로 밝혀지는 등 백제의 활발한 대외 교류도 알 수 있게 됐다.
지난해 2월부터 연재된 본 시리즈를 마치며 노학자에게 제언을 부탁했다.
“무령왕릉에서의 잘못을 통해 발굴은 절대 서두르면 안 된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습니다. 긴급하게 이뤄지는 구제 발굴을 최소화하고, 공공기관이 발굴을 주도하는 ‘발굴 공영제’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시점입니다.”
동아일보 김상운 기자
■ 2016.10.08 "내가 한국의 인디애나 존스라고? 고고학자가 보물 사냥꾼인 줄 아나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10년 마친 정영호 前단국대 박물관장 인디애나 존스는 엉터리 고고학자… 고고학은 옛것을 연구하는 학문 古書에도 숨겨진 자료 무궁무진… 무덤 파헤쳐서 보물 찾는게 고고학의 전부 아니다
호불(豪佛) 정영호(82) 전 단국대 박물관장 겸 석좌교수는 한국 고고미술학계의 원로다. 교과서에 나오는 단양 신라 적성비(국보 198호), 중원 고구려비(국보 205호)를 찾아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유적·유물 수백여 점을 발굴·조사한 공로로 1979년 대한민국문화상 대통령상, 2001년 만해학술상을 수상했다. 정 교수는 2006년부터 작년까지 10년간 우리나라 교사들에게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유산을 확인시켜주고 역사를 가르치는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강사로 활동했다. 그가 그동안 가르친 교사는 5200여명, 일반인은 1900여명에 이른다. 그는 올해 '한민족사 탐방' 강사에서 은퇴했으나 학자로서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교수님은 한국의 인디애나 존스 같은 분이시군요"라고 했더니 정영호 교수가 '버럭' 했다. "어디서 그런 영화에나 나오는 엉터리 고고학자 얘기를 해? 그런 식의 발굴은 파괴 행위예요. 번쩍거리는 유물만 빼내고 무덤이나 다른 건 다 망가뜨리잖아. 고고학(考古學)이란 건 글자 그대로 옛것을 생각하고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고서(古書)에도 무궁무진한 자료가 숨어 있는데, 땅 파고 무덤 파헤쳐서 보물 찾는 게 고고학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안타까워."
지난달 25일 정 교수의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규모 5.8의 강진이 발생했던 경주에 막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문화재가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정영호 전 단국대 박물관장이 석주선 기념박물관 앞에 있는 조선시대 돌호랑이상 옆에서 호랑이 흉내를 내고 있다. 이 호랑이상은 서울 내곡동에 있다가 산사태로 유실됐다가 정 전 관장이 수습했다. 정 전 관장은 “어흥” 하더니 “어때, 호랑이랑 닮았지” 했다. / 김지호 기자
"고고학은 보물찾기가 아니야"
―경주 문화재는 괜찮던가요?
"제가 1950년대부터 경주 답사를 해왔던 사람이에요. 불국사, 다보탑, 석굴암 다 끄떡없었어요. 첨성대는 상부 모서리가 5㎝ 더 벌어졌다고 하는데, 괜찮겠더라고."
―기왓장은 많이 떨어졌던데요.
"수리하려고 예비로 지붕에 올려놨던 기와가 미끄러진 경우가 많았지요. 기와는 태풍 올 때가 더 많이 떨어져요."
― 지진 대비책은 필요하지 않나요?
"맞아요. 그런데 당장 무너질 것처럼 얘기하면 안 되잖아요."
―경주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됐는데요.
"쓸데없는 짓을 했어요. 나는 끝까지 반대했는데."
―왜요?
"경주에 공업단지가 있어요? 산업단지가 있어요? 관광으로 먹고사는 곳인데 재난 지역을 선포하니까 관광객 발길이 뚝 끊겼어. 방금 전화가 왔는데 호텔이고 식당이고 다 해약 천지래. 우리나라 국민이야 호들갑 떨다가 잠잠해지면 다시 찾겠지만, 일본과 중국에서는 재난 지역이라고 하면 진짜 큰일 난 줄 알아요. 지진 대비는 장기적으로 해야지, 당장 재난 지역 선포해서 국가에서 공짜로 돈 좀 얻어낼 생각만 한 거지요."
―경주시와 문화재청이 관광 활성화를 위해 2025년까지 9450억원을 들여 대대적으로 유적을 발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요.
"욕심부리는 거지요."
―가치 있는 유물을 발굴해서 사람들에게 선보이면 좋은 것 아닌가요.
"아니에요. 그거하고 똑같거나 비슷한 게 잔뜩 전시돼 있는데? 경주에선 고분 성격들이 다 비슷하거든요. 중국 진시황제 무덤을 보세요. 돈 벌려고 개발은 했지만, 진짜 무덤은 그대로 놔두고 그 앞에 병마용(兵馬俑)만 발굴했어요. 일본은 나라에 있는 평성궁을 50년 넘게 발굴하고 있어요. 그리고 땅을 파야만 관광 자원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지금 발굴해 놓은 문화재를 잘 관리해서 어떻게 활용할지 연구해야지. 문화재는 관광 차원에서만 접근하면 안 됩니다. 학술적 차원에서 연구하고 어떻게 잘 보존할 것인지도 생각을 해야지요."
별명은 칼, 쌍권총
정 교수는 1952년 서울대 사범대학 역사과에 입학하면서 고고미술학 길에 들어섰다.
"한 고고학 강의를 들었어요. 해방 직후인 1946년 경주에서 호우총 고분을 발굴할 때 우리 기술과 경험이 부족해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일했던 일본인 주임을 불러다가 그 사람 지휘를 받았다고 해요. '참 부끄러운 얘기구나. 우리 문화재를 우리 손으로 조사해서 발표해야겠다' 생각을 했지요."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숙명여고 역사 교사가 됐고 스승이자 미술사학의 거목인 초우(蕉雨) 황수영 선생 등이 주축이 된 고고미술동인회에서 활동했다.
―고고미술동인회 간사였다면서요.
"당시 아버지가 국민은행 종로지점장으로 있었는데 집에 전화기가 있었어요. 연락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간사가 됐죠. 10년 동안 고고미술동인회 본부 주소가 우리 집이었습니다."
―고교 교사로 활동하면서 어떻게 답사를 다녔나요?
"사진반과 사생반 지도 교사를 맡으면서 학생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녔죠. 뭐든지 보고 싶은 문화재는 가서 사진을 찍고 그날 밤 밤새워가면서 현상을 했습니다."
▲1979년 중원 고구려비 발굴 현장 정영호(모자 쓴 이) 전 단국대 박물관장이 1979년 충북 충주 중원 고구려비 발굴 현장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설명하는 모습 / 정영호 제공
―간송(澗松)미술관을 세운 간송 전형필 선생도 자주 뵈셨죠.
"황수영 선생님을 따라 전형필 선생 댁에 자주 갔었습니다. 그곳에서 소설가이신 월탄(月灘) 박종화 선생, 역사학자 동빈(東濱) 김상기 선생, 사회학자 상백(想白) 이상백 선생, 미술사학자 수묵(樹默)진홍섭 선생 등을 뵈었죠. 그분들께 많이 배웠습니다."
―1967년 단국대 사학과 교수 겸 박물관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재 발굴·조사를 하셨죠.
"1년이면 절반 가까이 현장에 있었죠."
―별명이 칼, 쌍권총이었다면서요.
"저는 모르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고희(古稀) 잔치를 열어주면서 얘기하더군요. 답사나 발굴 작업을 하면 아침 6시에 기상하자마자 시간표에 있는 대로 칼같이 하고, 양손 검지로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꼼꼼하게 지적을 하니까 그런 별명이 붙었대요. 고고학은 절터 기와 한 장이라도 놓치면 안 되니까요."
―당시 평소 신고 다니는 신발에 철판을 깔았다고요.
"문화재 답사를 할 때 꼭 군화를 신고 다니는데, 평소에도 답사 다니는 기분으로 다니려고 무게를 같게 한 겁니다. 그 덕분인지 답사를 가면 제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걸음이 빨랐습니다."
"요즘도 답사복만 입으면 힘이 나" 정 교수는 1976년 상처(喪妻)했다. "새벽에 지방 답사를 갔다가 그날 저녁 서울역에 도착했어요.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를 했는데 아내 대신 제 누이동생이 전화를 받더니 울어요. 심장마비였대요. 아침에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했는데…."
―당시 딸들이 어렸겠네요.
"아버지·어머니께서 저를 부르셔서 '아범은 앞으로 어쩌겠나' 그러시더군요. '저는 공부에만 전념하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랬더니 부모님께서 '딸 더 낳았다고 생각하고 손녀들을 키워줄 테니 염려 말고 공부해라'하시더라고요. 제가 8남매 중 맏이인데, 부모님께서 고생 많이 하셨죠."
―이후에 1978년 단양 신라 적성비, 1979년 중원 고구려비를 발굴했죠.
"주변에서 그러더군요. '형님께서 애를 쓰고 있으니까 지하에 계신 형수님께서 보살펴주시는 것 같다'고요."
현재 정 교수 곁에는 그가 '수석연구원'이라고 부르는 두 번째 부인이 있다. 그는 "제가 손이 아파서 보고서나 글을 오래 쓰지 못하는데, 내가 불러주면 아내가 대신 타이핑을 해 준다"면서 "30년쯤 저와 함께 지내니까 웬만한 박사보다 낫지요" 했다. 부인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아내가 고생 참 많이 했지요. 딸들 뒷바라지 다 해주고. 참 고마운 사람이에요" 했다.
―2014년 은퇴하셨는데, 여전히 답사를 다니시죠.
"그럼요. 몸이 좀 찌뿌둥하다가도 답사복 입고 군화를 딱 신으면 힘이 납니다."
―대마도를 자주 찾으신다고요.
"지금까지 195회 방문했는데, 내년이면 200회 될 겁니다."
―대마도에 비석도 10개 세우셨다던데.
"조선 말기 대마도에서 순국한 면암(勉庵) 최익현 선생 발자취를 찾으려고 1977년 처음 갔죠. 그런데 처음에는 대마도 사람 아무도 협조를 안 해요. 몇 년 후에 겨우 친해져서 1986년 최익현 순국비를 세웠어요. 그때 이후 신라 충신 박제상 순국비, 조선통신사비, 덕혜옹주비 등을 세웠죠."
―그것 때문에 연구실로 쓰던 오피스텔도 팔았다면서요.
"고고미술학자가 입에 풀칠하고 살 정도면 됐지요."
정 교수는 1974~79년 불교 조계종의 종조(宗祖)라 할 수 있는 강원 양양군 진전사지의 도의국사 사적도 발굴했다. 당시 발굴 작업을 위해 주변 땅 1만909㎡(약 3300평)을 사비로 매입했었다. 그는 이 땅을 10여년 전 진전사에 무상 기증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묻자 그가 답했다.
"세상에 절터 팔아먹는 놈이 어디 있소? 진전사 복원한다길래 그대로 등기 이전 시켜줬지요."
―앞으로 또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이 현재 3층만 남아 있는데 원래 9층 정도 됐을 것으로 추정해요. 주변에 석탑에서 깨진 벽돌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이걸 가지고 제대로 작업하면 5층까지 올릴 수 있을 겁니다. 또 10년 동안 중국을 다니면서 요나라 시절 불탑을 연구했는데 관련 책도 내야 하고 아직도 할 게 많아요. 아유, 내가 정말 10년만 젊었어도. 그래서 제가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다는 거 아닙니까."
정 교수는 문화재 답사 도중 비구니 5명과 한방에서 잔 이야기, 배우 윤정희가 영화 '무녀도' 촬영 도중 금강에서 벌거벗고 춤추는 모습을 본 이야기, 발굴하다가 간첩으로 몰린 이야기, 함께 발굴하던 교수와 둘이 맥주 102병을 마신 일화 등을 쉼없이 이야기했다. 6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의 집에는 60년간 국내외를 답사하며 찍은 사진 100만장과 슬라이드 20만장이 보관돼 있었다. 그 이야기를 다 들으려면 얼마나 걸릴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전현석 기자
■ 2017.01.31 90년 전 일본 학자가 찍은 경주 발굴 사진 700장 공개
1920~30년대 노세 우시조가 경주 일대 조사하며 촬영
황복사터·헌덕왕릉 등 담겨… 경주학硏이 찾아 첫 공개
황복사터 십이지상 발굴 과정, 원원사 석탑 발굴·복원 생생
노세, 1926년 서봉총 발굴현장서 스웨덴 황태자 안내했던 수행원
경주 문화재 매료돼 연구 시작 "신라유적 보면 감격해 '감격선생'"
일제시대 경북 경주시 구황동 황복사(皇福寺)터 삼층석탑(국보 제37호) 주변에 배치된 십이지상(十二支像·12간지 동물을 형상화한 상)이 어떻게 발굴 조사됐는지 보여주는 희귀 사진이 대거 공개됐다. 지금은 경관이 달라진 신라 왕릉의 1930년대 모습, 원원사(遠源寺)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인 삼층석탑(보물 제1429호)이 발굴·복원되는 과정도 생생히 담겼다.
▲1930년대 일본 건축·고고학자 노세 우시조가 경주 원원사터 삼층석탑을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금강역사상을 장정 셋이 지게에 나눠 지고 옮기고 있다. 오른쪽은 상반신, 가운데는 하반신, 왼쪽은 팔뚝 하나씩 나눠 실었다. /경주학연구원
▲왼쪽 사진은 1928년 노세 우시조가 경주 황복사터 십이지상을 발굴 조사하는 모습. 노세가 측량용 자를 잡고 앉아 있다. 노세 왼쪽부터 십이지상 중 축상(丑像·소), 자상(子像·쥐), 해상(亥像·돼지)이 드러나 있다. 오른쪽은 개성 고려왕릉 조사 사진. 표지석에‘고려왕 제3릉’이라고 써 있다. /경주학연구원
경주학연구원(원장 박임관)은 1920~1930년대 일본인 건축·고고학자 노세 우시조(能勢丑三·1889~1954)가 경주 황복사터, 헌덕왕릉, 원원사터 등 경주 일대를 발굴 조사하며 찍은 사진과 도면 700여장을 발굴, 30일 본지에 공개했다. 사진은 일본 나라시(奈良市)의 문화재 전문 사진회사인 아스카엔(飛鳥苑)에 유리건판 상태로 정리되지 않은 채 보관돼 있었다. 연구원은 경상북도와 사단법인 우리문화재찾기운동본부의 후원으로 지난해 11월 노세 사진의 전면 조사 및 국내 소개를 위한 계약을 체결했고 12월 아스카엔을 방문해 유리건판 필름을 일일이 재촬영했다. 박임관 원장은 "노세가 남긴 사진 3700여장의 전모가 공개되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경주 십이지상 등 한국 관련 사진이 700여장, 나머지는 일본·중국 문화재 사진들이다.
◇신라 십이지상을 사랑한 '감격 선생'
▲발굴 인부가 원원사터에서 출토된 십이지상을 줄자로 재고 있다. /경주학연구원
노세 우시조는 1926년 서봉총 발굴 현장을 찾은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의 수행단 일원으로 처음 경주에 왔다. 당시 서른일곱이던 그는 교토제국대학 공학부 건축학교실 조수였다. 이 짧은 경주 방문이 그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경주의 문화유산, 특히 십이지상에 매료된 그는 이후 10여 차례 경주 유적지를 찾았고 사비를 털어 발굴·복원까지 벌였다. 동료 학자 쓰노다 분에이(角田文衛) 고대학협회 이사장은 '고고학 교토학파'라는 글에서 "노세는 열정적으로 조선 고고학과 일본 석조공예사, 회화사를 연구했다. 신라 문화재만 보면 감격을 해서 당시 경주에서의 애칭이 '감격선생'이었다"고 소개했다.
◇직접 발굴한 황복사터 십이지상 생생
그가 찍은 사진은 주로 십이지상에 집중돼 있다. 특히 지금은 땅속에 묻혀 있는 황복사 건물지 기단 터 십이지상의 발굴 전 모습과 조사 과정, 조사 후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사진을 검토한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사찰 건물 주변을 한 면씩 파 들어가면서 십이지상이 한 변에 세 개씩 방형으로 노출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황복사는 경주 낭산(狼山) 동쪽에 있었던 신라 왕실 사찰로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신문왕이 죽자 아들인 효소왕이 692년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탑이다. 이 교수는 "보통 십이지상은 무덤 둘레에 세우거나 탑 표면에 새기는데 왜 사찰 건물 기단에 십이지상을 배치했는지 의문이 간다. 왕릉에 쓰였던 십이지상을 옮겨 사용했을 가능성,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특별한 의례 공간일 가능성도 있다"며 "향후 연구를 통해 밝혀야 할 부분"이라고 했다.
◇"십이지상 가치 처음 알아본 연구자"
▲1930년대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 日고고학자 발굴 사진 700장 첫 공개 - 1920~30년대 일본인 건축·고고학자 노세 우시조(能勢丑三)가 경주 일대를 조사하며 찍은 유리 건판 사진 700여장이 처음 공개됐다. 천년고도 경주 유적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1931년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을 조사 중인 모습. /경주학연구원
1928~1931년 원원사터에 완전히 붕괴된 채 방치돼 있던 삼층석탑을 발굴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복원하는 과정도 파노라마처럼 담겼다. 석탑 터를 실측하고 발굴한 각종 부재를 모아 놓은 사진, 석탑을 복원하기 위해 가조립한 장면, 노세가 직접 그린 평면도와 석탑 모형도까지 원원사터 관련 사진만 300여장에 달한다. 헌덕왕릉과 구정동 방형분도 발굴했고, 진평왕릉·흥덕왕릉·경덕왕릉·성덕왕릉 등 신라 왕릉을 비롯해 개성 고려왕릉에 대한 조사도 병행했다. 예천 개심사지 석탑, 구례 화엄사 석탑 등의 십이지상을 최초로 주목한 것도 노세였다. 박임관 원장은 "노세는 한국 십이지상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파악하고 그와 관련한 선구적 업적을 남긴 연구자"라며 "지금처럼 정비·복원되기 이전의 신라 왕릉 옛 모습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1920년대 말~1930년대 초 경주 유적 현황을 입증하는 기록이기 때문에 향후 연구가 진행되면 잘못된 복원·정비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을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연구원은 상반기 중 보고서를 내고 사진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허윤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