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24/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21-30/
<21> 세종시 나성동 유적 발굴한 이홍종 고려대 교수
1600년 전에도 호수공원이… 백제 유일의 지방도시 찾았다
▲24일 세종시 나성동에서 이홍종 고려대 교수가 백제 도시유적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의 등 뒤로 5세기 백제 도시의 기반이었던 금강이 보인다 세종=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600년 전에 거대한 호수공원이라니….”
2010년 10월 초 충남 연기군 나성리(현 세종시 나성동) 발굴 현장. 밤새 내린 가을비로 유적이 물에 잠겼다는 보고를 듣고 부랴부랴 현장을 찾은 이홍종(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58)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백제시대 도시 유적 한가운데 U자형의 거대한 호수가 주변 언덕 위 집터와 더불어 장관을 이뤘다. 비가 내리기 전에는 한낱 구덩이로밖에 보이지 않던 유구였다. 1.5m 깊이의 호수는 최대 너비 70m, 길이 300m에 이르렀다.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은 꼴이 마치 현재의 경기 고양시 일산호수공원을 연상시켰다.
▲고지형 분석 결과 나성리 도시유적 내 토성을 둘러싼 옛 물길과 금강 제천이 일종의 해자로 활용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홍종 교수 제공
출토 양상도 이 구덩이가 도심의 경관용 호수라는 판단을 굳히게 했다. 당초 그는 이곳을 강물 근처 단구(段丘)에 있는 저습지로 보고 목간 같은 쓰레기가 잔뜩 쌓였을 걸로 봤다. 그래서 발굴조사원들에게 “유기물질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지시했는데 정작 구덩이 속에서는 토기 조각 몇 점만 나왔다. 이홍종은 “도시의 핵심 경관인 만큼 호수를 깨끗하게 관리한 것 같다”고 말했다.
24일 그와 함께 답사한 나성리 발굴 현장은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일부로 변한 지 오래였다. 상가건물들이 대거 들어선 가운데 도시유적 위로 아파트를 짓고 있었다. 지금껏 발굴된 백제 유일의 지방도시 유적은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 도로, 빙고(氷庫) 등 도시 기반시설 즐비
나성리 유적은 백제의 지방 거점도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로마의 경우 폼페이나 헤르쿨라네움 등 여러 지방 도시가 발굴됐지만 우리나라는 발굴로 전모가 드러난 고대 도시유적이 별로 없다. 고고학자들이 지방도시 유적에 관심을 갖는 것은 도성-거점도시-농경취락으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이해하고 수도 이외 지역 귀족, 서민들의 생활상을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성리 유적이 흥미를 끄는 건 넓은 부지에 도로망을 먼저 설치한 뒤 건물을 지은 계획도시라는 점이다. 실제로 도로 유구 안에서 건물터가 깔려 있거나 중복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나성리에서는 너비 2.5m(측구 제외)의 도로뿐만 아니라 귀족 저택, 토성, 고분, 중앙호수, 창고, 가마터, 빙고, 선착장 등 각종 도시 기반시설이 한꺼번에 발견됐다.
이 거대한 도시유적을 지은 주체가 백제 중앙정부인지 혹은 지방 유력층인지를 놓고 학계 의견은 엇갈린다. 박순발(충남대 교수)은 나성리가 풍납토성의 구조와 흡사한 점을 들어 백제 중앙정부가 건설을 주도한 걸로 본다. 예를 들어 고지형(古地形) 분석 결과 풍납토성과 나성리 모두 토성 주변 수로와 옛 물길을 끌어들여 해자(垓字)를 판 흔적이 발견됐다.
반면 이홍종은 “출토 유물이나 묘제가 백제 중앙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어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은 지방 유력층이 주도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5세기 백제 중앙의 통치력이 영산강 유역까지 온전히 미치지 못했다는 임영진(전남대 교수)의 주장과 비슷한 맥락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백제 중앙정부에 점차 복속됐으나, 일정 기간 지방 수장들이 반(半)자치를 누렸다는 것이다.
▲나성리 유적에서 출토된 각종 백제 토기. 이홍종 교수 제공
○ 첨단 ‘고지형 분석’으로 도시유적 찾아내
사실 나성리 도시유적의 존재는 발굴 5년 전인 2005년 9월 고지형 분석에서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다. 고지형 분석이란 항공사진과 고지도 등을 통해 유적 조성 당시 옛 지형을 추정해 지하에 묻힌 유적 양상을 파악하는 기법이다. 연사된 항공사진들의 낱장을 비교하면 겹친 부분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를 3차원(3D)으로 재연하면 세부 지형의 높낮이를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오랜 침식, 퇴적으로 사라진 옛 물길(구하도·舊河道)이나 구릉의 위치를 알아내 주거지 유적의 존재 혹은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이홍종은 고지형 분석을 통해 나성리뿐만 아니라 공주, 논산, 청주에도 백제 도시유적이 묻혀 있을 걸로 예상한다.
재밌는 건 고지형 분석을 통해 규명한 옛 물길을 따라 지진이나 싱크홀이 빈발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물길은 암반층이 상대적으로 얇아 지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고베 지진 당시 사망자의 97%가 구하도와 습지에 몰려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학계는 5세기에 건립된 나성리 도시유적이 약 100년가량 존속한 뒤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6세기 중반 이후 유물이나 유적이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 쇠락의 원인으로는 고구려 남진과 자연재해 등이 거론된다. 이홍종은 “인근 곡창지대인 대평리 유적에서 강물이 범람한 흔적이 발견됐다”며 “홍수로 도시의 식량 기반이 사라진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세종=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22> 광주 월계동 ‘장고분’ 발굴 임영진 전남대 교수
열쇠구멍 닮은 ‘장고분’… 고대 韓日교류 비밀의 문 열까
▲9일 광주 월계동 ‘장고분’ 1호분 앞에서 임영진 전남대 교수가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의 뒤로 보이는 직사각형 모양의 구멍이 석실 입구다.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9일 광주 광산구 월계동 ‘장고분’. 사진기자가 띄운 드론이 1호분 위로 날아오르자 열쇠구멍 모양의 봉분이 모니터에 잡혔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난 봉토가 연결된 일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과 닮았다. 무덤 길이가 45m에 이르다 보니 지상에서는 모양을 가늠하기 힘들다. 장고분은 5세기 말∼6세기 초 축조된 무덤으로 추정된다. 장고분을 발굴한 임영진 전남대 교수(61)는 “20여 년 전 처음 왔을 때 이곳은 농가와 논밭으로 둘러싸여 주민들도 무덤의 실체를 잘 몰랐다”고 회고했다.
○ 장구마을의 비밀
광주 첨단과학산업단지 개발이 진행되던 1992년 12월. 지표조사에서 무덤 석실이 발견된 ‘장구촌(杖鼓村)’으로 임영진과 제자들이 현장조사를 나갔다. 전통악기 장구처럼 생긴 언덕이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도 장구촌이었고, 임영진도 고분 이름을 한자 발음대로 ‘장고분’으로 지었다. 그가 목격한 장고분의 파괴 상태는 심각했다.
“봉분은 이미 절반쯤 사라졌고 그 자리에 민가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다행히 석실은 남아 있었는데 오른쪽 벽 일부가 뚫려 있더군요.”
석실 내부에는 집주인이 가져다 놓은 감자 등이 저장돼 있었다. 여름에 석실 안이 시원해 농산물 창고로 주로 활용했던 것. 당시 집주인은 “이미 일제강점기 때 도굴이 돼 내가 살기 시작했을 때 석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미 도굴된 폐고분이었지만 학술적 가치는 높았다. 당시 한반도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임영진은 발굴보다 보존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산업단지 시행자인 당시 한국토지공사 부사장이 이전 복원을 요구했지만 그는 “1600년 전 조성된 장고분의 역사적 가치를 지키려면 현지 보존이 원칙”이라며 버텼다. 결국 보존으로 결정돼 이듬해 5월 3일부터 발굴이 시작됐다.
○ 저습지에서 건진 보물
보존구역을 설정하려면 정확한 유구 범위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발굴팀은 봉분부터 파지 않고 주변에 트렌치(시굴갱)부터 팠다. 그런데 이것이 의외의 ‘대박’으로 이어졌다. 봉분으로부터 7∼15m 떨어진 외곽에서 무덤 주위를 둘러싼 구덩이가 발견된 것. 고대 무덤에서 종종 보이는 주구(周溝·고분 주위를 두르는 도랑)였다.
▲9일 드론을 띄워 공중에서 촬영한 광주 광산구 월계동 고분(위 사진). 열쇠구멍 모양의 전형적인 전방후원분이다. 오른쪽에 있는 큰 고분이 1호분이다. 고분을 둘러싼 주구에서는 원통 모양의 분주토기(아래 사진)와 분주목기가 발견됐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임영진 교수 제공
주구 주변은 개흙투성이여서 발굴이 쉽지 않았는데 이것이 오히려 축복이었다. 개흙이 외부 공기를 차단해주는 역할을 해 나무 같은 유기물질이 썩지 않았던 것. 1.5m 깊이의 주구에서 다양한 목기(木器)들이 발견됐다.
발굴팀은 토기와 목기의 형태, 색, 무늬 모두 독특해 또 한번 놀랐다. 특히 바닥이 뚫린 원통형 토기는 당시 출토 사례가 극히 드물었다. 일본 전방후원분에서 출토된 하니와(埴輪·봉분 주변을 장식하는 토기)와 거의 같았다.
"이 토기와 목기들은 일본 하니와를 한반도에서 재현한 겁니다. 장고분의 독특한 구조와 더불어 무덤 주인이 왜인(倭人)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죠.”
○ 장고분 주인은 한민족인가 왜인인가
학계는 장고분 주인을 놓고 왜와 교류한 토착세력, 왜에서 파견된 유력층, 백제에 파견된 왜인 관료 등 다양한 학설을 제기했다. 임영진은 일본 내 정치 변동으로 인해 한반도로 망명한 왜인으로 본다.
그는 장고분을 비롯한 한반도 전방후원형 고분의 입지와 구조를 주목하고 있다. 5∼6세기 당시 영산강 유역의 중심은 나주 반남 고분 일대인데, 왜계 전방후원형 고분은 이곳에서 떨어진 외곽에 여기저기 흩어진 단독분 형태로 존재한다. 입지나 규모로 봤을 때 이 지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지배층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 고분은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어 교역 목적으로 일본에서 파견한 왜인으로 보기도 부자연스럽다.
임영진은 이 무렵 일본에서 야마토(大和) 정권과 이와이(磐井) 세력이 각축을 벌이던 과정에서 북규슈 일대를 장악하던 세력이 떠밀려 한반도로 망명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월계동 고분 등이 북규슈 무덤의 석실 구조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영산강 유역을 차지한 마한은 북규슈 세력과 오랜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망명을 받아들였을 것”이라며 “다만 왜인들의 세력화를 막기 위해 각지로 분산시킨 것 같다”고 분석했다
<23> 경주 손곡동 유적 발굴한 이상준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장
경주 경마장 부지에서 신라 숯-토기가마 무더기로 쏟아져
▲23일 경북 경주시 손곡동 유적에서 이상준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장이 가마터 발굴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64기의 숯가마와 토기가마가 무더기로 나왔다.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23일 경북 경주시 손곡동 유적. 경작 행위를 금지한다는 마사회 표지판 너머로 대나무와 억새가 수북이 자란 구릉이 보였다. 마치 거대한 가마처럼 완만한 경사였다. 주변은 온통 황량한 겨울 벌판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답사에 나선 이상준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장(56)이 손가락으로 구릉을 가리켰다. “저기서 신라시대 숯가마와 토기가마가 무더기로 나왔습니다.”
당초 경마장 용지였던 이곳은 우리나라 발굴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가마터(요지·窯址)가 발견돼 2001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됐다. 이로써 1992년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던 경주 경마장 건설 계획은 취소됐고 유적은 보존됐다.
○ 미묘한 ‘흙색 변화’ 놓치지 않아
1997년 8월 초 손곡동 발굴 현장. 경주 토박이로 현장 책임자였던 이상준이 꽃삽과 대칼을 잡았다. 지표로부터 30cm 아래서 노랗게 변색된 흙이 동그란 형태로 발견된 것. 그는 순간 굴뚝임을 직감했다. 통상 가마 내부 벽체는 불에 닿은 정도에 따라 회흑색→노란색→빨간색 순으로 색깔이 바뀐다. 발화가 일어나는 가마입구(화구·火口)는 회흑색이 나타나는 반면에 연기가 나가는 연도(煙道)나 굴뚝은 불에 직접 닿지 않아 노랗거나 붉게 변색되기 마련이다.
▲경북 경주시 손곡동 유적에서 발견된 ‘숯가마’(위 사진). 나무 장작을 넣는 측구가 길게 늘어서 있어 피리를 닮은 구조다. 근처 토기 폐기장에서는 동물 혹은 춤추는 사람 모양의 토우(아래 사진)들이 출토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지하식 가마는 굴뚝과 화구의 위치를 정확히 잡아내는 게 관건이다. 자칫하면 굴뚝과 화구를 잇는 중간 몸체(요체·窯體)를 발굴 과정에서 훼손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는 굴뚝 크기와 형태를 감안해 2주에 걸쳐 주변 흙을 조심스레 파낸 끝에 검게 그을린 화구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화구와 굴뚝을 중심으로 요체까지 신라 토기가마 1기의 전모를 드러내는 데 한 달이 걸렸다.
이 가마(47호 토기가마)는 손곡동에서 발견된 47기의 토기가마 중 유일하게 땅 밑에 만들어졌다. 나머지는 반(半)지하식 가마들이다. 이상준은 “47호는 이례적으로 가마 지붕이 붕괴되지 않은 채 발굴돼 내부 구조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며 최고의 유구로 꼽았다.
이 가마가 제공한 정보는 다양했다. 우선 가마 내부 온도가 높아도 바닥이 굳지 않고 무른 이유를 알게 됐다. 가마에 들어간 토기들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 뿌린 모래가 화염이 바닥에 닿는 걸 차단한 것. 또 토기들이 가마 안에서 서로 엉겨 붙는 걸 방지하기 위해 토기 받침을 넣은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 가마 변천사 종합전시장
경주 손곡동 유적은 숯가마(탄요·炭窯)를 규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발굴 당시 전국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숯가마는 울산 검단리와 경주 천군동 등에서 발견된 4기뿐이었다. 이들은 토기가마와 달리 평평한 데다 내부에서 토기가 발견되지 않아 숯가마로 추정됐을 뿐 결정적 증거가 없었다. 그런데 손곡동 숯가마 안에서 숯이 발견된 것이다.
학계는 신라시대 손곡동에서 생산된 숯이 인근 경주 황성동 제철유적에 공급됐을 걸로 본다. 손곡동에서 발견된 숯은 백탄(白炭)으로, 흑탄(黑炭)에 비해 화력이 떨어지지만 연소 시간이 길어 제철작업에 주로 쓰이기 때문이다.
손곡동에서는 숯가마와 토기가마뿐만 아니라 채토장, 공방, 토기 폐기장, 건조장, 도공 주거지 등이 한꺼번에 확인돼 고대 생산기술사 복원에 핵심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폐기장에서 출토된 100여 점의 토우(土偶)가 눈길을 끈다. 두 손이 뒤로 묶인 죄수 토우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까지 표현돼 있다. 또 같은 얼굴에 동작만 다른 10여 점의 토우는 춤추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경주 노서동 고분에서 출토된 국보 제195호 ‘토우장식항아리(장경호)’에 달린 토우와 비슷한 것들이 손곡동에서 발견된 것도 주목된다. 이상준은 “토우장식항아리는 손곡동 가마에서 생산됐을 가능성이 높다”며 “격이 높은 기와건물터가 발견된 걸 봐도 이곳은 국가가 관리한 대규모 가마터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곡동 토기가마는 5∼7세기에 운영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약 200년에 걸친 시대별 토기가마 양식의 변천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일본 나가노 현에서 손곡동의 7세기 중반 토기가마와 유사한 게 발견됐다. 이상준은 “신라 장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토기 제작 기술을 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24> 익산 왕궁리 유적 발굴한 최맹식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 전용호 학예연구사
수세식 공중화장실-화려한 정원… 절터 아래 펼쳐진 백제 왕궁
▲최맹식 국립문화재연구소장(가운데)과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오른쪽), 전용호 학예연구사가 9일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 내 백제시대 ‘왕궁 정원 터’를 둘러보고 있다. 이들 발아래에 있는 직사각형 돌이 석축 수조로, 조경용 괴석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이곳에 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번째 사진은 당시 정원을 상상 복원한 그림. 익산=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9일 찾은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은 이름에 걸맞은 위용을 자랑했다. 축구장 20배 크기(21만 m²)의 부지에 홀로 우뚝 솟은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이 멀리서도 보였다. 석탑 주변엔 1400년 전 궁궐터와 절터 흔적을 보여주는 초석과 적심(積心·기둥을 올리기 위해 밑바닥에 까는 돌)이 숱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곳을 발굴한 최맹식 국립문화재연구소장(60),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54), 전용호 학예연구사(43)와 함께 석탑과 금당, 강당을 거쳐 후원(後苑)으로 들어갔다. 사찰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옛 백제의 화려한 왕궁 정원이 펼쳐졌다. 얕은 구릉의 정원 터에서는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괴석(怪石)들이 눈길을 끌었다. 물길을 따라가자 직사각형 모양의 석축 수조가 나온다. 졸졸 흐르는 물이 괴석을 지나 수조에 넘쳐흐르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운치를 더했다. 최맹식은 “1992년 3월 왕궁리 유적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만 해도 왕궁 정원은 상상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 백제시대 ‘수세식 공중화장실’ 발견
▲왕궁리 유적 북서쪽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공중화장실 유구.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곡식이 썩었더라도 이 정돈 아닐 텐데… 희한하게 구린 냄새가 참 심합니다.”
2003년 여름 발굴팀은 왕궁리 유적 북서쪽에서 길이 10.8m, 폭 1.8m, 깊이 3.4m의 기다란 구덩이를 발견했다. 구덩이 밑 유기물 층에서 나무막대와 씨앗, 방망이 등이 출토됐는데 유독 냄새가 심했다. 발굴팀은 곡식이나 과일을 저장한 구덩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자문위원으로 현장을 찾은 이홍종 고려대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유구 양상이 일본 고대 화장실 터와 비슷하다”며 유기물 층에서 흙을 채취해 생물학 분석을 의뢰했다. 조사 결과 다량의 기생충 알이 확인됐다. 삼국시대 공중화장실 유구가 국내에서 최초로 발굴된 것이다.
조사 결과 발을 올릴 수 있도록 구덩이에 나무기둥을 박고, 내부 벽을 점토로 발라 오물이 새지 않도록 했다는 게 확인됐다. 특히 왕궁리 화장실은 첨단(?) 수세식이었던 걸로 드러났다. 화장실 서쪽 벽에 수로를 뚫어 경사를 이용해 오물을 석축 배수로로 빠지도록 한 것.
이와 관련해 ‘자’로 추정된 나무막대기가 실은 대변을 본 뒤 뒤처리용이라는 사실이 이주헌에 의해 밝혀졌다. 이른바 ‘측주((치,칙)籌)’라고 불리는 나무막대기로 고대 중국과 일본에서도 사용된 도구였다. 왕궁리 화장실 터는 백제인들의 식생활을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다. 육식성 기생충인 조충이 검출되지 않은 반면, 채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주로 감염되는 회충이나 편충이 집중적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2004∼2007년 발굴된 정원도 왕궁리 유적 중 백미로 꼽힌다. 특히 2006년 11월 발견된 어린석(魚鱗石) 2점은 이름처럼 물고기 비늘을 닮아 신비한 느낌마저 주는 조경석으로 유명하다. 어린석을 발굴한 전용호는 “무르고 연해서 처음에는 흙을 뭉친 걸로 착각했다”며 “각력암 계통인데 워낙 희귀해 백제 왕실이 중국에서 수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사찰 들어서기 전 백제 왕궁 있었다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
익산=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왕궁리는 1989년부터 현재까지 28년 동안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우리나라 최장 발굴 유적이다. 그만큼 규모가 큰 데다 백제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도 지대하다. 오랫동안 발굴된 곳답게 유적에 대한 해석은 시대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발굴 초기엔 유일하게 남은 지상건조물인 오층석탑의 영향으로 사찰을 중심으로 조사가 진행됐다. 왕궁리가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遷都)를 단행한 증거라는 시각도 있었지만 소수설에 불과했다. 오히려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익산에 세운 보덕국 터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왕궁리에 사찰이 들어서기 전 백제 왕궁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결정적인 계기는 1993년 8월 최맹식의 목탑 터 발견이었다. 그는 당시 오층석탑 동쪽, 지표로부터 1m 깊이에서 목탑을 올리기 위해 목봉(木棒)으로 땅을 다진 흔적을 찾아냈다. 이어 목탑 터 아래서 백제시대 왕궁 건물 터를 추가로 발견했다. 왕궁을 지은 뒤 어느 순간 이를 폐기하고 목탑을 올렸다가 또다시 이를 허물고 석탑을 지었다는 얘기였다. 최맹식은 “왕궁 건물 터를 파괴하고 중심부에 목탑과 금당이 들어선 걸 감안하면 통일신라 이후 사찰이 조성된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왕궁리에서 궁장(宮墻·궁궐을 둘러싼 담장)과 더불어 2000년대 이후 대형 정전(正殿) 터와 정원, 공방, 수세식 화장실 등이 잇달아 발굴됨에 따라 백제 왕궁이 조성된 사실은 확실히 굳어지게 됐다.
<25> 공주 석장리 유적 발굴한 박희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남한 최초 발굴된 구석기시대 집자리… 日 식민사관 잠재우다
▲박희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가 18일 충남 공주시 석장리 유적에서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의 등 뒤로 깃발이 꽂힌 장소가 한국 구석기 첫 발굴지로 1964년 1호 구덩이가 있던 곳이다.
공주=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이달 18일 충남 공주시 석장리 유적. 나뭇가지로 엮은 막집 뒤로 수려한 능선과 강줄기가 뻗어 있다. 멀리 강가 공터에 ‘한국 구석기 첫 발굴지’가 적힌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렇다. 이곳은 남한 최초 구석기 유적(1964년 발굴)으로 국사 교과서와 공무원시험에 단골로 등장하는 석장리 유적이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시리즈 기획취지에 따른다면 석장리 발굴을 주도한 파른 손보기 선생(1922∼2010)을 인터뷰해야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이미 고인이 됐다. 그 대신 파른의 제자로 1969년(당시 연세대 3년생)부터 5년 동안 발굴에 참여한 박희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와 현장을 찾았다.
48년 전을 회상하던 그가 강가 나루터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지금이야 번듯한 박물관까지 들어섰지만 그땐 도로조차 없어서 발굴 장비랑 식자재를 매일 배로 실어 날랐어요.”
○ 3만 년 전 구석기 집자리 발굴
▲공주 석장리 유적에서 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는 파른 손보기 선생의 생전 모습(위 사진).
아래는 이곳에서 1968년 남한 최초로 출토된 주먹도끼. 석장리박물관 제공
1970년 4월 석장리 발굴현장 1지구 51번 구덩이. 삽으로 흙을 파내려 가던 연세대 박물관 발굴팀이 갑자기 긴장했다. 주변 흙과 색깔이 다른 토층이 발견된 것. 변색된 흙은 범상치 않은 동그란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기둥자리 흔적이었다. 현장을 지키던 파른의 지휘 아래 박희현 등 조사원들이 달라붙어 주변을 파자 총 5개의 기둥자리가 드러났다. 불을 뗀 자리도 같이 나왔다. 남한에서 구석기시대 집자리(막집)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막집에 살던 구석기인들이 사용한 긁개와 밀개, 새기개 등도 한꺼번에 발견됐다. 북한에서는 이보다 1년 앞서 굴포리 유적에서 구석기 집자리가 발견됐다.
집자리는 수렵 이동생활을 영위한 구석기인들이 머문 공간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석기만 발견되는 것보다 의미가 크다. 집자리 위치와 내부 유물의 출토 양상을 통해 구석기인들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석장리 1호 집자리 안에서 발견된 오리나무 재질 ‘숯 조각(목탄·木炭)’이 특히 중요했다. 파른은 국내 고고학계에서 처음으로 목탄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실시했다. 한국원자력연구소 측정 결과, 후기구석기에 해당하는 ‘3만690년 전’ 유물로 나타났다. 이로써 1960년대 석장리가 구석기 유적이 맞느냐를 놓고 벌어진 논란은 일단락됐다.
앞서 석장리 유적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고고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인 1962∼1963년 이곳을 답사한 앨버트 모어 부부였다. 이들은 마침 홍수로 무너진 금강 주변토층에서 뗀석기를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연세대 방문교수였던 앨버트 모어는 1964년 봄 파른과 함께 석장리를 답사했다.
○ 식민사관 극복한 ‘한국 고고학 선구자’
“일본인의 식민사관에 의한 선사(先史) 편년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연세춘추 1964년 12월 7일자 기고문)
파른은 1964년 석장리 1차 발굴을 마친 직후 연세대 학보에 실은 기고문에서 식민사학 극복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일제강점기 대학교육을 받은 파른은 민족의식이 강한 역사학자였다. ‘한반도엔 구석기시대가 없다’는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등 일본 학자들의 주장에 그는 동의할 수 없었다. 사실 이미 1934년 함북 종성군 동관진 유적에서 구석기 유물(흑요석 석기, 동물 뼈)이 발견돼 1941년 나오라 노부오(直良信夫)가 논문까지 발표했지만, 일본 학계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의 선사시대 역사 왜곡은 비단 1930, 40년대에만 그치지 않았다. 2000년 전모가 드러난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의 구석기 유물 조작사건이 대표적이다. 후지무라는 1981년 미야기(宮城) 현에서 4만 년 전 구석기 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했지만 거짓으로 밝혀졌다.
일본식 학술용어에서 벗어나 뗀석기 용어들을 한글화한 것도 파른의 공이다.
“발굴 기간 내내 한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조사에 몰두할 정도로 열정이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1974년 석장리 발굴에 참여한 한창균 연세대 교수가 기억하는 파른이다. 파른은 본래 조선사를 전공했지만 석장리와 인연을 맺고 나서 선사 고고학자로 거듭났다. 영어와 일본어,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파른은 초인적인 노력으로 해외 고고학 원서들을 섭렵했다. 목탄 수종(樹種) 분석과 꽃가루 분석, 토양 산도 측정, 방사성탄소연대측정 등 다양한 자연과학 분석을 국내 발굴 현장에 최초로 적용한 것도 그의 중요한 업적이다.
<26> 부여 왕흥사 목탑 터 발굴
1500년 전 백제 청동사리합, 아들 잃은 위덕왕 슬픔 고스란히
▲1일 충남 부여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이규훈 문화재청 학예연구관과 김용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 안보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왼쪽부터)가 왕흥사 목탑 터에서 발굴된 돌 뚜껑과 금, 은 사리병(복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아래는 왕흥사 터를 공중에서 찍은 사진. 하단의 길쭉한 석축은 왕이 행차하던 어도로 추정된다. 부여=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1일 충남 부여군 왕흥사 터. 백마강 너머로 백제 멸망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낙화암이 멀리 보였다. 백제 위덕왕은 자신이 지은 화려한 왕실 사찰을 드나들며 보았을 낙화암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나 했을까. 도도히 흐르는 저 강을 사이에 두고 백제의 흥망성쇠가 오롯이 펼쳐진 셈이다.
올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봉안하는 기구)가 이곳에서 출토된 지 10주년을 맞는 해다. 당시 왕흥사 목탑 터에서 사리기를 건져 올린 김용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과 이규훈 문화재청 학예연구관, 안보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를 현장에서 만났다.
○ 우리나라 最古 사리장엄구, 모습을 드러내다
“뭔가 대칼(대나무 칼) 끝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 목탑 터 발굴 현장. 장마가 끝나고 심초석(心礎石·목탑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의 주춧돌) 귀퉁이를 조사하던 강환구 연구원이 이규훈을 다급하게 불렀다. 조심스레 개흙을 제거하자 지붕 모양의 뚜껑돌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탑에 사리기를 종종 묻어놓지만 심초석에 구멍을 내고 뚜껑돌을 놓은 건 처음이었다. 장기간 작업으로 지쳐 있던 발굴팀의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공간이 좁아 손끝이 야무진 허진아 연구원이 들어가 서서히 돌을 들어올렸다. 모두 숨죽인 가운데 뚜껑돌을 올리자마자 탄식이 흘러나왔다. 기대와 달리 내부는 진흙과 물만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실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흙탕물 속을 대칼로 찔러 보니 걸리는 게 다시 느껴졌다. 30분간 물을 빼내고 진흙을 제거하자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원통형 그릇이 나왔다. 1500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백제시대 청동 사리합이었다.
사리합 표면을 닦아내자 ‘정유(丁酉)년’으로 시작되는 한자 명문이 드러났다. 발굴팀의 심장은 다시 고동치기 시작했다. 1차 사료가 없는 삼국시대의 명문은 역사 해석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보존과학실 직원들을 긴급 소집하고 명문 해석에 돌입했다. 이때 안보연은 촬영한 명문 이미지를 바탕으로 글씨를 컴퓨터그래픽(CG)으로 복원했다. 그는 “세상에서 제일 먼저 이 명문을 보는 호사를 누려 행복했다”고 말했다.
▲왕흥사 목탑 터에서 출토된 청동사리합과 은, 금 사리병(왼쪽부터). 청동사리합 내부에서 금 사리병이 들어 있는 은 사리병이 발견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 아버지와 아들 모두 잃은 왕의 슬픔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사리 두 개를 묻었는데 신묘한 조화로 세 개가 되었다.’
청동사리합 명문은 지금껏 알지 못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했다. 우선 왕흥사 창건 연대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600년(법왕 2년)보다 23년이나 앞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 적힌 연대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용민은 “고고학자로서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횡재를 누린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명문이 얘기하는 왕흥사의 조성 경위도 흥미롭다. 위덕왕은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아버지 성왕을 여읜 인물이다. 부친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한때 승려로 출가하려고 했던 그가 이젠 아들마저 잃은 것이다.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사찰을 세운 아버지의 슬픔이 사리기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백제왕의 가계에 대한 새로운 사실도 확인됐다.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아좌태자 이외에 위덕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왕자가 별도로 존재했음이 사리기를 통해 증명됐다.
○ 홈쇼핑 만능렌치의 비밀
청동사리합을 발견한 것 못지않게 이를 여는 것도 만만치 않은 난관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로 보내 사리합 뚜껑을 열려고 1주일 동안 씨름했지만 청동 녹이 달라붙어 번번이 실패했다. 발굴팀은 내부를 찍은 X레이 사진만 언론에 공개하려 했지만,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은 열어볼 것을 지시했다. 발굴단원들이 골머리를 앓던 상황이었는데 답은 전혀 뜻밖의 곳에서 나왔다. 홈쇼핑 광고를 본 전산 담당 직원이 이른바 ‘만능렌치’로 열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것. 철물점에서 구입한 7000원짜리 렌치로 아무 흠 없이 사리합 뚜껑을 열 수 있었다.
청동사리합 안에선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조그마한 금 사리병이 들어있는 은 사리병이 나왔다. 금 사리병 내부는 명문에 적힌 사리는 찾아볼 수 없었고 물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발굴팀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분 분석을 했지만 순수한 물로 조사됐다. 이규훈은 “사리공으로 물이 샜다면 청동사리합이나 은 사리병에도 물이 들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며 “사리기에 적힌 신묘함이 여기서도 드러났다”고 말했다.
<27>경주 사천왕사터 발굴 - 조각 한쪽 한쪽 맞추자… ‘신라의 미켈란젤로’ 걸작이 생생
▲20일 경북 경주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최장미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윤형원
국립부여박물관장, 윤근일 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왼쪽부터)이 사천왕사 녹유신장벽전을 배경으로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주 낭산(狼山)은 예부터 신들이 노닌다는 신유림(神遊林)이 있던 상서로운 곳이다. 20일 문무왕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을 거쳐 선덕왕릉에 다다르자, 낭산 아래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펼쳐졌다. 숲길을 10분쯤 내려갔을까. 철길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폐사지 한 곳이 보였다. 통일신라시대 으뜸가는 호국사찰이던 사천왕사(四天王寺) 터다.
2006∼2012년 7년에 걸쳐 발굴이 이뤄진 사천왕사에는 금당과 목탑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주춧돌과 귀부(龜趺·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당간지주(幢竿支柱)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이곳에서 동아시아 최강국 당나라와의 전쟁을 목전에 둔 문무왕이 온 백성의 염원을 담아 부처의 도움을 갈구했다.
○ 신라의 미켈란젤로가 남긴 걸작
▲사천왕사터에서 출토된 녹유신장벽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갑옷을 입고 칼을 쥔 채 악귀를 엉덩이로 깔고 앉은 신장의 위세가 당당하다. 커다란 코에 부리부리한 눈은 언뜻 봐도 위협적이다. 얼굴만 봐도 악귀들이 감히 불법(佛法)을 넘보지 못할 것 같다.
사천왕사에서 출토된 녹유신장벽전(綠釉神將벽塼·녹색 유약을 칠한 신장 조각 벽돌)은 승려 양지가 남긴 수작으로 손꼽힌다. 영묘사 장육삼존상과 천왕상을 제작하기도 한 양지는 ‘신라의 미켈란젤로’로 통한다. 녹유신장벽전은 조각가 이름과 제작 시기(679년)가 모두 확인되는 신라 불교조각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2009년 5월 국립경주박물관 사천왕사 특별전에서 공개한 녹유신장벽전 복원품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제강점기에 수습된 벽전 조각과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조각이 90여 년 만에 결합돼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 일대 사건이었다.
이는 2006년부터 발굴을 맡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윤근일 당시 소장(70·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과 윤형원 학예연구실장(51·현 국립부여박물관장), 최장미 학예연구사(38·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차순철 전문위원(49·현 서라벌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단장)의 노력 덕에 가능했다.
○ 목탑 ‘면석 장식’ 역할 밝혀져
▲목탑 기단부 상상 복원도. 면석으로 쓰인 녹유신장벽전이 보인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당초(唐草·덩굴) 무늬가 살짝 보인다!”
2006년 10월 12일 사천왕사 서쪽 목탑 터 발굴 현장. 계단 돌이 쓰러져 생긴 틈 사이로 차순철이 조각상을 발견했다. 목탑의 기단 면석을 장식한 당초 무늬 벽전과 녹유신장벽전 조각이었다. 파괴된 계단 돌이 벽전 쪽으로 쓰러진 건 발굴팀엔 행운이었다. 흙더미 속에서 계단돌이 감싸준 덕에 녹유신장벽전이 토압에 휩쓸리지 않고 제 위치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에서 유구 조성 당시 유물의 본래 위치를 파악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유물의 성격을 규정짓는 핵심 단서가 될 수 있어서다.
▲한 발굴조사원이 목탑터에서 녹유신장벽전을 노출시키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사천왕사 발굴도 예외는 아니었다. 발굴 전 녹유신장벽전은 탑 안에 봉안돼 있었을 거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006년 발굴에서 목탑 기단의 계단 옆에 녹유신장벽전이 서 있던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이것은 탑 면석(面石)이었음이 밝혀지게 됐다. 조사 결과 목탑 기단부 네 면에 걸쳐 24개의 신장벽전이 화려하게 장식돼 있었다.
○ 신장상…사천왕 vs 팔부중 논쟁
▲경주 낭산과 사천왕사지 발굴현장 전경.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녹유신장벽전에 조각된 험상궂은 신장들의 정체는 뭘까. 사실 이 부분은 고고미술사학계의 오랜 논쟁거리 중 하나다. 학계 일각에서는 사천왕사의 명칭과 관련지어 신장상은 사천왕(四天王·수미산 중턱 사왕천에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을 묘사한 걸로 봤다. 그러나 ‘사천왕사 탑 밑에 팔부신장이 새겨져 있다’는 삼국유사 기록을 근거로 팔부중(八部衆·육욕천 등에 머물며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으로 보는 주장도 제기됐다.
▲사천왕사지 가람배치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이와 관련해 2008년 7월 3일 사천왕사 동쪽 목탑 터 발굴 성과가 주목된다. 이곳 기단부 계단 옆으로 세 종류의 녹유신장벽전이 나란히 발견됐기 때문이다. 서쪽 목탑에서 나온 녹유신장벽전도 이 세 가지(A, B, C) 유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더구나 이들의 출토 위치도 조성 당시 그대로여서 신장벽전의 배치 순서도 파악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당시 목탑 기단은 ‘A-B-C-계단-A-B-C’ 순으로 구성됐던 것이다.
이에 따라 녹유신장벽전 3개가 한 세트임을 감안할 때 신장상의 정체는 사천왕이나 팔부중이 아닌 제3의 존재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불교조각 연구자인 임영애 경주대 교수는 “탑의 가장 아래인 기단에는 신격(神格)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신왕상(神王像)이 조각됐을 걸로 본다”며 “그보다 위인 사천왕상은 목탑 안에 봉안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28> 공주 수촌리 고분 발굴 - 금빛 봉황이 날아오를 듯… 현존 最古 백제 금동관의 자태
▲촌리 4호 석실분 출토 금동관으로 높이는 19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하는 한 마리 ‘금빛 봉황’을 보았다. 6일 국립공주박물관 전시실에서 본 수촌리 고분 출토 금동관은 신라 금관과 또 다른 아취를 담고 있었다. 온몸에 달개를 매단 세 줄기 입식(立飾)은 정면에서 보면 꼿꼿이 세운 봉황 머리와 양옆으로 활짝 편 날개를 연상시켰다. 나뭇가지를 닮은 신라 금관의 입식과 확연히 다른 형태다. 특히 머리에 닿는 관테까지 날렵하게 이어진 곡선은 우아함을 더한다. 수촌리 고분에서 함께 나온 금동신발과 금귀고리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삼국시대 장신구 연구 권위자인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수촌리 금귀고리는 현미경으로 200배를 확대해 봐도 만듦새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며 “백제 왕실에 소속된 최고 장인의 솜씨”라고 말했다. 그러나 4∼5세기 한성백제시대 수촌리는 백제 영토였지만 중앙과 멀리 떨어진 지방이었다. 이 1급 유물들이 왜 한성이 아닌 이곳에 묻혀 있을까.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2003∼2013년 수촌리를 발굴한 이훈 당시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발굴단장(55·현 공주대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과 현장을 찾았다.
○ 묘제(墓制) 세 번이나 바뀐 사연
충남 공주시 수촌리 야트막한 구릉에 오르자 정상에 봉분 6기가 원형을 이루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래로도 고분 10여 기가 늘어서 있는데 절벽 끄트머리에 제단(祭壇)을 이루는 돌무더기가 깔려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이 중 나란히 조성된 무덤 세 쌍은 부부 관계임이 확인됐다.
▲수촌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공주 수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구슬과 대롱옥. 구슬 지름은 0.2-1.05cm 정도 된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한쪽 무덤에서 남성 수장이 죽을 때 몸에 씌우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이 나온 반면 다른 쪽에서는 여성 시신에 걸치는 구슬 장식, 굵은고리 금귀고리 등이 나온 것. 이훈은 “수촌리는 4세기 말∼5세기 중엽까지 약 60년에 걸쳐 4세대가 묻힌 지방 지배층의 가족묘”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건 무덤들이 조성된 양식이 빠르게 변한 흔적이다. 시대순에 따라 덧널무덤(토광목곽묘)과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 앞트기식 돌덧널무덤(횡구식 석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이 모두 발견됐다. 유물로 보면 분명 같은 집단인데 불과 60년 동안 묘제가 세 번이나 바뀐 셈이다.
▲중국 동진에서 만들어진 흑유닭모양항아리. 당시로선 최고급품에 속한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이훈은 “수촌리 지배집단이 백제 중앙과 교류하면서 돌무덤을 들여온 것”이라며 “최고 수준의 금동관, 금동신발, 중국 자기들이 부장된 걸 보면 이들이 백제 왕실과 돈독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백제가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배경일 수도 있다. 학계는 4∼5세기 백제 왕실이 지방 유력자들을 통해 간접지배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에게 금동관 등을 사여한 걸로 보고 있다.
▲이훈 공주대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이 6일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된 수촌리 고분 금동관을 살펴보고 있다. 뒤쪽 금동관이 이 연구위원이 4호분에서 발굴한 것으로, 앞쪽은 원형을 복원한 복제품이다. 공주=원대연 기자yeon72@donga.com
○ 1600년간 제자리 지킨 목관 꺾쇠·관못
▲수촌리 1호분 토광묘에서 출토된 금동관으로 높이는 약 18.7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2003년 11월 3일 발굴팀은 광복 이후 처음으로 백제 금동관을 발견했다. 지금껏 발견된 백제 금동관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덧널무덤인 1호분 내부를 十자형으로 팠는데 바닥에서 금동관과 환두대도가 함께 나왔다. 이훈은 직접 만든 대나무칼로 푸르스름한 청동녹이 낀 금동관을 조금씩 땅 위에 노출시켰다.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자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도움을 요청했다. 바깥 공기에 취약한 청동유물 특성상 보존과학 전문가들이 흙과 함께 통째로 수습하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길이 35cm의 재갈.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말을 탈 때 쓰는 등자로 길이 25.0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쇠창으로 길이는 29.2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유물도 화려했지만 사실 학문적으로 더 중요했던 건 조성 당시 위치를 간직한 목관 꺾쇠와 관못이었다. 발굴팀은 3열에 걸쳐 목관을 두른 총 90여 개의 꺾쇠를 지표 20cm 아래서 찾아냈다. 통상 오랜 세월이 흘러 목관이 썩으면 물이 흘러들어가 꺾쇠나 관못의 위치가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운 좋게도 1호분은 물 대신 모래흙이 목관 안으로 조금씩 흘러들어가 부속품이 고정될 수 있었다. 덕분에 발굴팀은 백제 지방 지배층이 사용한 목관의 형태와 크기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공주 수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첫번째 사진), 금동관(두번쨰 사진)과 대롱옥.
부부가 묻힌 4호분과 5호분에 각각 부장된 대롱옥을 맞춰보니 아귀가 딱 맞았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 내세에도 다시 만나리
“야, 이게 정말로 딱 붙습니다!”
2004년 7월 발굴팀에서 사진을 담당한 이형주 연구원이 흥분한 목소리로 갑자기 외쳤다. 수촌리 고분 출토 유물들을 늘어놓고 촬영하던 이형주가 4호분과 5호분에서 각각 나온 대롱옥(관옥) 2점을 우연히 맞춰봤는데 거짓말처럼 아귀가 맞았다. 원래 하나였던 대롱옥을 두 개로 부러뜨린 뒤 남편과 아내 무덤에 각각 부장한 것이었다. 생전에 금실 좋던 부부가 내세에 가서도 다시 만나자는 의미로 쪼갠 게 아닐까.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떠올리는 역사의 내러티브는 때론 소설보다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
<29> 동삼동 패총의 재발견 하인수 부산근대역사관장
‘반구대 암각화’ 미스터리 푼 열쇠, 5천년 전 토기에 새겨져 있었다
▲동삼동 패총 토기조각(첫번째 사진)과 반구대 암각화(두번째 사진)에 새겨진 사슴 그림.
사다리꼴모양의 몸통과 선으로 간략히 묘사된 뿔, 얼굴, 다리 등이 서로 유사하다. 반구대 암각화를 신석기인이 처음 그렸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하인수 관장 제공
《 한적한 어항(漁港), 배를 수리하는 어부들이 보인다. 8000여 년 전에도 고래와 물고기, 조개를 잡아 올린 어부들이 여기 있었다. 시대를 초월한 데자뷔인가. 27일 부산 동삼동 패총(貝塚·조개무지) 유적에서니 코앞에 너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선사(先史)인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무더기를 이룰 만한 장소였다. 그러나 이곳은 단순한 음식물 쓰레기장이 아니었다. 1999년 하인수 당시 부산 복천박물관학예연구실장(57·현 부산근대역사관장)의 손을 통해 집터와 무덤(옹관)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이다. 기원전 6000년∼기원전 2000년 약 4000년에 걸쳐 신석기인들이 먹고 자고 버린 생활 흔적이 패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
○ ‘반구대 암각화’ 미스터리 풀 열쇠
“이기 뭐꼬? 그림 아이가?”
2004년 2월 초 부산박물관 연구실. 5년 전 동삼동 패총에서 손수 발굴한 토기조각들을 정리하던 하인수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토기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음각선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토기 표면은 붉은색이 완연했다. 대충 만든 게 아니라 채색까지 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는 뜻이었다.
▲27일 부산 동삼동 패총 전시관에서 하인수 부산근대역사관장이 사슴 그림이 새겨진 토기조각을 살펴보고 있다. 하 관장은 2004년 유물 정리 과정 에서 사슴 그림을 우연히 발견했다. 부산=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철로 만든 핀으로 토기에 묻은 흙을 조심스레 긁어내자 사다리꼴을 그리던 음각선은 다시 위아래로 이어졌다. 그의 눈은 점점 커졌다. 처음 눈에 들어온 사다리꼴은 몸통, 윗선은 머리, 아랫선은 다리가 분명했다. 그것은 신석기인들이 그린 한 마리 사슴이었다. 하인수의 회고. “다른 토기에서 흔히 보이는 조잡한 선이 아니었어요. 보는 순간 조형미가 느껴졌습니다. 사슴 그림이란 걸 알고서 온몸에 전율이 흐릅디다.”
그때까지 신석기시대 그림은 이것이 유일했다. 선사시대 그림은 매우 희귀한 데다 선사인들의 가치관과 정신세계를 유추할 수 있는 핵심 자료라는 점에서 귀중하다. 총 2만여 개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의 토기조각에서 그림을 찾아낸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같았다. 1차 조사에서 무늬가 없는 걸로 분류된 토기들을 모아 최종 확인하는 과정에서 건져낸 월척이었다.
무엇보다 동삼동 사슴 그림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 미스터리를 풀 열쇠였다. 당시 학계는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잡이 그림 등을 근거로 청동기시대 후기 유물로 봤다. 석기로 고래를 잡는 건 불가능하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하인수의 생각은 달랐다. 암각화와 동삼동 패총 토기에 새겨진 사슴 그림은 전체적으로 간략하고 몸통을 사다리꼴로 표현했으며 몸통에서 이어진 선으로 다리를 표현하는 방식 등이 서로 유사했다. 더구나 뼈로 만든 화살촉이 박힌 고래 뼈가 울산 황성동에서 발견돼 신석기인들의 고래 사냥이 증명됐다. 이에 따라 반구대 암각화는 신석기인들이 처음 그렸다는 하인수의 주장은 통설로 받아들여졌다.
○ ‘신석기인은 원시적’ 편견 깨다
1930년대 일본 학자를 비롯해 1960, 70년대 미국 학자 A 모아와 서울대, 국립박물관이 동삼동 패총을 잇달아 발굴했지만 누구도 집터와 무덤을 찾지 못했다. 조개무지라는 선입견에 갇혀 내부에 다른 유구가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인수는 속단하지 않고 토층 조사를 치밀하게 진행해 신석기시대 집터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옹관을 동시에 발견했다.
신석기인들은 수렵·채집에만 의존했다는 편견을 버린 것도 중요한 연구 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패총 집터 안에서 기원전 3300년 무렵의 탄화된 조와 기장이 나왔고, 출토 토기에서 기원전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조의 압흔(壓痕·눌린 흔적)이 발견됐다. 하인수는 “이는 이미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한반도 전역에 걸쳐 조, 기장 등 밭농사가 보편화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조개 팔찌’들. 조개에 구멍을 뚫어 만든 장신구다. 부산박물관 제공
한발 더 나아가 동삼동 패총 신석기인들이 해외 교역까지 한 정황도 포착됐다. 조개 팔찌 1500여 점과 일본산 흑요석, 조몬(繩文) 토기가 함께 출토된 것이다. 조개에 구멍을 내 장신구로 만든 조개 팔찌는 워낙 가공이 힘들어 귀한데, 일본 규슈 사가(佐賀) 패총에서 한반도산 투박조개 팔찌가 90여 점이나 발견됐다. 동삼동 패총에서 나온 흑요석들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일본 규슈 고시다케(腰岳)가 산지(産地)인 걸로 조사됐다.
하인수의 설명.
“동삼동 패총에선 배 모양 토기가 나왔습니다. 아마도 이곳 신석기인들은 배를 타고 일본 열도까지 건너가 조개 팔찌와 흑요석을 교환한 걸로 보입니다. 한일 교류사는 멀리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죠.”
<30> 경남 함안 성산산성 발굴
▲10일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 성벽 위에서 박종익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장과 조희경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정인태 학예연구사(왼쪽부터)가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함안=박경모 기자momo@donga.com
가파른 경사를 헐떡이며 15분쯤 올라갔을까. 약 3∼5m 높이의 흙벽이 사방을 두른 넓은 풀밭이 펼쳐졌다. 고원에 자리 잡은 아늑한 분지를 연상시켰다. 풀때 입은 흙벽을 자세히 살펴보니 온통 돌무더기. 자연석이 아닌 축성을 위해 인위적으로 다듬은 돌들이었다.
10일 박종익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장(56), 조희경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연구원(58), 정인태 학예연구사(38)와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 북동쪽 성벽에 오르자 옆으로 길게 늘어선 원형 봉분 수십 기가 내려다보였다. 아라가야 왕릉인 ‘말이산 고분군’(사적 제515호)이었다. 발굴 전 학계에서 이곳을 아라가야의 산성으로 본 이유다. 하지만 26년 전 박종익이 이끈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발굴팀은 성산산성이 가야가 아닌 신라 석성임을 규명하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전체 목간의 절반에 육박하는 308점의 신라 목간이 성산산성에서 무더기로 출토됐다.
○ 밝혀진 석성의 정체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의 동쪽 성벽 발굴 현장. 저수지가 이곳에서 발견됐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성벽 옆에 또 다른 성벽이 있다!”
1991년 11월 말 성산산성 발굴 현장에 수수께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문 터 동쪽 성벽 아래 쌓인 돌무더기를 제거하자, 삼각형 단면의 석축이 나타난 것이다. 석축은 마치 성벽을 뒤에서 떠받치듯 외벽에 바싹 붙어 있었다. ‘이중 성벽인가? 아니면 다른 구조물?’ 박종익이 새로운 유구의 정체를 놓고 한참 고민할 때, 1970년대부터 경주 발굴 현장에서 산전수전 겪은 조희경의 입에서 결정적인 힌트가 흘러나왔다. “예전 경주 명활산성 발굴 때 본 거랑 비슷한데….”
부리나케 명활산성 발굴 자료를 찾아보니 돌 재질은 달랐지만 성산산성과 흡사한 삼각형 단면의 석축 사진이 있었다. 신라 석성에서만 보이는 이른바 ‘외벽(外壁) 보축(補築)’이 분명했다. 신라인들은 산성의 몸체에 해당하는 체성벽(體城壁)을 수직으로 쌓아올린 뒤 무너질 것을 대비해 옆에서 볼 때 이등변 삼각형 모양인 보축을 성벽 아래 붙여 세웠다. 이것은 신라식 귀면와, 막새기와 등과 더불어 성산산성이 신라 석성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학계는 출토된 신라목간 내용과 일본서기 기록 등을 감안해 6세기 중엽 신라가 성산산성을 세운 걸로 보고 있다.
다음은 박종익의 회고.
“1991년 발굴에서 외벽 보축의 시작점을 발견했습니다. 문지(門址)를 따라 시작되는 보축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건 우리가 처음이었어요.”
○ 목간의 보고(寶庫) 성산산성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각종 목간. 대부분 동문 터 근처 부엽층에서 발견됐다.
우리나라 출토 목간의 절반가량인 308점의 신라 목간이 나왔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이듬해인 1992년 6월 초 박종익은 진귀한 ‘첫 경험’을 했다. 발굴 인생에서 처음으로 묵서(墨書)가 적힌 목간을 발견한 것이다. 목간은 동문 터 부근 지하 2m에 깔린 부엽(敷葉·배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나뭇잎이나 가지를 깔고 흙을 쌓은 것)층에서 나왔다. 부엽층은 외부 공기가 차단된 채 습기를 머금고 있어 나뭇조각 같은 유기물질이 1000년 넘게 보존될 수 있는 특수한 환경을 제공한다.
박종익이 발견한 목간에는 한자로 ‘上彡者村(상삼자촌)’이라는 지명과 ‘波婁(파루)’라는 인명이 함께 적혀 있었다. 신라 지방민이 성산산성으로 물자를 보내면서 꼬리표로 붙인 것이었다. “물에 닿은 목간 묵서가 천년 세월에도 불구하고 선명해서 놀랐습니다. 성산산성 발굴에서 가장 흥분되는 순간이었죠. 당시엔 이곳에서 목간이 수백 점이나 쏟아져 나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묵서 판독을 위한 적외선 카메라가 연구소에 도입돼 출토 목간 26점을 분석한 발굴보고서가 1998년 발간되자 학계는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현존하는 1차 사료가 없는 삼국시대 연구에서 명문은 역사를 새로 쓸 수도 있는 핵심 자료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1999년 11월 한중일 3개국 학자들이 참여한 ‘목간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목간과 관련한 국제학술회의는 국내 최초였다. 학술회의에서 이성시 와세다대 교수(현 한국목간학회장) 등 일본 학계는 “성산산성 목간은 일본 고대 목간의 원류를 보여주고 있다”고 밝혔다. 한일 고대 교류사 연구에서도 성산산성 목간 발굴은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한일 학자들이 성산산성 목간을 지속적으로 연구한 결과 현재의 경남, 경북, 충북 지역에서 피와 보리, 쌀, 철 등 각종 물품을 산성으로 운송한 정황이 드러났다. 이 교수는 ‘한국 목간과 한국사 연구’ 논문에서 “성산산성 목간은 신라의 지방지배 체제와 역역(力役) 동원 체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