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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17/ 한국의 능과 묘/ 숨쉬는 조선왕릉 - 조선왕릉을 가다 - 국립묘지

상림은내고향 2022. 1. 25. 20:19

문화17/ 한국의 능과 묘

■ 가락국

▲가야 시조 김수로왕릉

 

▲대가야 왕족들의 무덤 - 고령군 지산동 주산 능선에는  대가야  왕과 왕족들의 무덤 200여 개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구형왕릉 - 가락국 마지막 왕 산청 왕산 자락에 있으며 한국 유일의 피라미드식 돌로 만든 무덤

 

▲구형왕릉 입구

 

▲묘비 가락국 양왕릉 이라 새김

 

 

▲구형왕릉 仇衡王陵 - 가락국 10대 마지막 왕인 구형왕릉

 

 

■ 삼국 고려시대

▲대릉원 - 미추왕릉 등 왕릉급 무덤이 있는 곳

 

 

 

 

▲황금 목련 - 대릉원

 

 

▲공양왕릉 - 궁촌

 

▲문무대왕 수중릉 - 신라 30대 왕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릉 - 경기 연천 남방한계선 아래

 

■ 숨쉬는 조선왕릉

2008-07-23  동아일보 윤완준 기자

<1>자연과 인공의 완벽한 조화

 

자연 위에 내려앉은 듯…

유럽도 놀란 ‘神의 정원’ 

 

《조선 왕릉은 단순히 왕의 주검이 묻혀 있는 무덤이 아니다. 조선의 역사부터 당대의 건축양식과  미의식, 생태관과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의 결정체다. 서울 인근에 있는 조선 왕릉은  40여 기. 얼핏 비슷하게 보이지만 각 왕릉은 저마다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오랜 세월 오롯이 숨쉬고 있는 조선 왕릉의 문화를 10회에 걸쳐 들여다본다.

인위적 구획 없이 숲이 곧 담장 

봉분도 지형훼손 최대한 피해 

聖과 俗 어우러진 신비의 공간 

 

“이곳이 바로 신()의 정원이군요! 

최근 경기 남양주시 광릉(세조의 능) 등 조선의 왕릉을 둘러본 유럽 정원건축가들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들은 “유럽의 ‘풍경식 정원(landscape garden)’의 이상인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조선 왕릉에 이미 실현돼 있다”며 놀라워했다.

 

‘풍경식 정원’은 화려하나 인공적인 느낌이 짙은 ‘정형식 정원(formal garden)’ 이후 등장한 유럽의 정원 양식이다.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의 정원처럼 정교하지만 자연과 분리된 정형식 정원에 질린 유럽인들은 인공미를 최대한 감추고 자연미를 가미한 풍경식 정원으로 눈을 돌렸다. 정원 중심의 저택이나 교회, 잔디와 수풀이 펼쳐지는 정원, 산과 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광….  

 

유럽인들은 건축물 정원 풍광 등 삼박자를 갖춘 ‘통합된 시계(視界) 구조’를 이상으로 꼽았다. 하지만 풍경식 정원에도 건축물과 정원을 구분하는 담장, 곧게 닦인 길과 구획된 화단 등 인공적인 느낌은 가시지 않는다.  

 

조선의 왕릉은 ‘통합된 시계 구조’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인공적 요소가 거의 보이지 않는 게 특징이다. 최종희(조경학) 배재대 교수는 이를 두고 “자연 위에 정원이 살짝 내려앉은 것 같다”고 표현했다.

 

이런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왕릉으로는 조선 17대 왕 효종의 영릉(경기 여주군)이 꼽힌다.  

 

영릉의 봉분 뒤에는 주산(主山)이라 부르는 산이 있다. 이 산비탈 중허리에 봉분이 자리 잡고 있다. 영릉뿐 아니라 조선 왕릉 봉분의 평균 높이는 해발 53m. 왜 봉분을 이렇게 산비탈에 만든 걸까? 풍수지리에 따라 산의 기운이 봉분 자리에 머무르게 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봉분 주변 풍경에 있다.

 

봉분은 유럽으로 치면 풍경식 정원의 중심인 저택이나 교회에 해당한다. 하지만 유럽의 정원과 달리 왕릉 구역을 구분하는 담장 따위는 없다. 그 대신 봉분 좌우로 겹겹이 에워싼 산림이 왕릉을 호위하듯 산등성이를 따라 뻗어간다. ‘자연 담’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녹색 파도가 출렁거리는 듯해 ‘녹해(綠海)’라 부른다.

 

봉분 뒤에서 보면 이 자연 담은 봉분 앞 왕릉 구역에 있는 정자각, 홍살문까지 양팔로 감싸 안 듯 뻗어나간다. 뒤에 주산 외에도 봉분 앞으로는 자연 담 사이로 먼 산이 탁 트인 시야에 들어온다. 풍수지리의 조산(朝山·명당 터를 호위하는 여러 겹의 먼 산)이다. 보통 봉분에서 조산까지의 평균 거리는 2.6km나 된다. 유럽인들이 꿈꿨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풍광이다. ‘통합된 시계 구조’의 완결판인 셈.

 

그러면 왜 ‘신’의 정원일까. 이창환(조경학) 상지영서대 교수는 “자연 담 속 정원(왕릉 구역)은 속(), ()+, 성으로 나뉜다”고 말했다.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에서 왕릉 입구인 홍살문에 이르는 공간은 속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성+속이다. 제향공간이다. 정자각부터 봉분까지는 죽은 자만의 정원, 성의 공간이다.

 

상상해보자. 18대 조선 왕 현종이 선대왕 효종의 제향을 지내러 왔다. 재실을 떠나는 현종의 곁을 효종의 영혼이 함께한다. 재실에서 홍살문에 이르는 길에 풍경식 정원처럼 잘 닦인 직선은 없다. ‘갈 지( ), ‘검을 현()’ 자 모양으로 구불구불하다. 수목이 우거져 왕릉이 보이지 않는다. 정원에 이르는 신비롭고 성스러운 분위기가 고조된다. 그리고 제향. 선대왕의 영혼만이 정자각을 넘어 봉분 주위를 노닌다.

 

왕과 왕비의 능을 나란히 만드는 쌍릉이 조선 왕릉의 기본. 그런데 효종의 영릉은 효종 능 밑에 왕비 인선왕후의 능을 만들었다. 이창환 교수는 “봉분을 만들 면적이 좁았지만 구태여 자연 지형을 변화시키지 않고 언덕 줄기를 따라 내려온 또 다른 명당에 왕비의 무덤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왕릉 조성을 위해 자연을 개조하는 대신 왕릉에 맞는 곳을 찾아 왕릉을 ‘삽입’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 왕릉은 본래 풍광을 해치지 않고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추구했던 조선의 자연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동양적 자연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중국 황릉과 비교하면 조선 특유의 자연친화적 생태관이 더 두드러진다. 중국 명, 청 시대의 황릉은 평지에 웅장한 건축물을 강조했고 건축물마다 높은 담장을 쌓았다. 인공적인 위용을 자랑하지만 자연미를 엿볼 수 없다. 

 

<2>홍릉-유릉에 정자각이 없는 이유

황제가 된 고종, 왕릉도 中 황제처럼

‘丁’자 모양 정자각 대신 

‘一’자 모양의 침전 세워 

 

국내에 있는 조선 왕릉 40곳 중 38곳 왕릉에는 있는데 홍릉(洪陵·고종 능)과 유릉(裕陵·순종 능)에만 없는 것은 뭘까? 답은 정자각(丁字閣)이다.

 

정자각은 조선 왕릉의 표본인 태조 건원릉(健元陵·경기 구리시)부터 25대 왕인 철종 예릉(睿陵·경기 고양시)까지, 조선의 마지막 두 왕인 26대 고종과 27대 순종 능을 제외한 모든 왕릉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건축물. 왕릉 입구인 홍살문과 봉분 사이에 위치한다. 

 

선대 왕의 제사를 모시던 정자각은 조선 왕릉의 핵심 구조로 꼽힌다. 평면이 ‘丁()’자 모양이라 ‘정자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홍릉과 유릉에는 정자각 대신 ‘一’자 모양의 침전(寢殿)이 있다. 왜 그럴까. 비밀은 1897년에 있다. 대한제국의 선포. 고종은 조선이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선포하고 황제가 됐다. 이후 왕릉 형식도 ‘一’자 모양의 침전이 있는 중국 황제릉과 비슷해졌다. 

 

그러면 고종 이전까지 조선 왕릉에 세워진 정자각은 ‘감히’ 중국식 침전을 따라할 수 없어 만든 건축물인 걸까? 그렇지 않다. 조선 왕릉 전문가인 이창환 상지영서대 교수는 “정자각이야말로 중국과 다른 우리 고유의 왕릉관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능 옆에 세운 침전은 임금의 숙소라는 뜻이다. 중국은 능이 황제가 죽어서도 영원히 나라를 통치할 지하 궁전이라고 믿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의 왕릉관은 달랐다. “…우리 제도는 이와 같지 않아 정자각을 능 곁에 세우고 신()을 인도해 제사하니 신은 늘 능에 계시고 정자각은 신을 제사하는 곳이다.(성종실록)  

 

왕의 죽음을 인정해, 왕릉을 왕이 죽어서도 통치하는 위압적 공간으로 규정하지 않은 것이다. ‘一’자 형의 정전(正殿) 앞에 ‘궐’자 모양의 배전(拜殿·절하는 공간)을 돌출시킨 정자각은 봉분 아래 잠든 옛 통치자와 현세의 통치자가 만나는 성스러운 제향 공간으로 거듭났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폭 3m 남짓한 길인 참도(參道)가 뻗어 있다. 참도는 좌우로 나뉘는데 왼쪽이 신도(神道·신이 다니는 길), 오른쪽이 어도(御道·왕이 다니는 길). 신도와 어도는 높낮이가 다르다. 신도가 더 높고 폭도 넓다. 신도의 평균 폭은 1.68m, 어도는 1.13m.  

 

정자각이 없는 홍릉과 유릉도 홍살문에서 침전까지 참도가 나 있다. 하지만 이 두 능은 특이하게 신도를 가운데에 두고 어도가 둘이다. 그 이유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모든 왕릉에서 박석 깔린 참도의 표면을 일부러 울퉁불퉁하게 해 놓은 이유도 재미있다. 참도에서 넘어지지 않고 걸으려면 자연스레 고개를 숙여야 한다. 봉분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게 하려는 뜻이 담겼다.  

의친왕의 손자 이혜원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은 말한다.

 

“많은 관람객이 신도의 의미를 모른 채 그냥 걸어간다. 신도는 임금도 디디지 못하던 신성한 길인데…. 어도로만 걸으며 선대 왕의 영혼과 함께 걸었을 조선 왕의 엄숙한 기분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3>봉분 주변의 石人

▲조선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의 봉분을 지키는 문석인(왼쪽)과 무석인. 미소 짓지도, 그렇다고 무섭지도 않은 중용의 표정 미학을 보여준다. 고양=윤완준 기자

 

 웃지도 화내지도 않는 ‘중용’의 정수

조선 왕릉에는 봉분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주변에는 왕릉의 장엄함을 더하는 사람과 동물 조각상 16개가 능을 지킨다.

 

봉분 앞은 높낮이에 따라 3단계로 나뉜다. 가장 높은 상계(上階)가 봉분이 있는 곳. 병풍석과 난간석이 봉분을 에워싸고 수호의 상징인 호랑이와 양 조각이 2쌍씩 8마리가 봉분을 둘러싸고 있다. 그 아래 중계(中階)에는 문관을 조각한 문석인(文石人) 1쌍과 말 1, 그 아래 하계(下階)에는 무관을 표현한 무석인(武石人) 1쌍과 말 1쌍이 있다.

 

조선 11대 중종 능 정릉(서울 강남구 삼성동)과 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 능 희릉(경기 고양시)에서는 왕의 권위를 보여주는 격조 높은 문·무석인이 눈길을 끈다. 현대 조각미로는 이해되지 않는, 머리가 과장된 3등신의 신체 비례가 낯설다. 그보다 더 낯선 것은 문·무석인들의 표정이다. 국보 84호 서산마애삼존불과 국보 78,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자랑하는 우리 조각 미술 특유의 그윽한 미소를 찾아볼 수 없다.

 

미소 짓지 않는다. 그렇다고 화나거나 무서운 표정도 아니다. 근엄하게 다문 입에서 왕의 영혼을 변함없이 지키는 충정이 느껴진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변함없는 상태, ‘중용(中庸)의 표정’ 미학의 정수다.  

왜 이렇게 무표정한 모습으로 조각했을까. 단순히 왕 앞에 도열한 신하 차원을 넘어 영혼을 보호하는 신인(神人)의 경지로 보았기 때문이다.

 

문·무석인을 사람 키보다 크게(최대 약 330cm·희릉) 조각한 것도, 인체 곡선을 따르지 않고 사각기둥 형태로 조각한 것도, 목 없이 얼굴을 가슴에 묻은 비현실적 기법도 경건하게 왕을 지키는 영속적 신성(神性)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문·무석인의 행동은 왕 앞에 한껏 숙인 듯 존경을 나타내고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절제됐다. 

 

중국 진시황릉 병마용갱에서 발견된 도용(무덤에 함께 묻는 허수아비)과 비교할 때 그 차이는 또렷이 드러난다. 수많은 기병과 보병 도용은 사실적이지만 키와 몸집이 실제 사람 크기에 불과하다. 도용들은 결국 황제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인간 군상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조선 왕릉에는 문·무석인이 있지만, 표정이 조금씩 다르다. 김이순 홍익대(미술사) 교수는 “문·무석인의 얼굴에서는 시대별 미의식, 정치 사회상까지 읽을 수 있어 고유하고도 다채로운 예술적 성취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진경(眞景)과 사실주의 기법이 등장한 18세기부터는 표정 있는 문·무인도 등장한다. 영조 원릉(경기 구리시)의 문·무석인은 ‘사람처럼’ 미소를 띤다.

 

원릉은 중계, 하계 구분 없이 문·무석인을 같은 높이에 뒀다. 영조가 계급에 상관없이 인재를 추천하도록 하는 개혁 정책을 추진하면서 문·무관 사이의 차별이 완화된 당대 정치상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4>봉분 앞 ‘혼유석’의 비밀

7~8t 화강암 매끈하게 다듬어

석실 입구 지키는 ‘명품 자물쇠’ 

조선 왕릉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봉분 앞 돌상 하나.

 

가로 약 3m, 세로 2m, 높이 50cm의 거대한 직육면체. 얼핏 무덤 앞에 제사 음식 놓는 상처럼 보인다. 왕의 영혼을 지키는 문석인(文石人) 무석인(武石人) 조각의 장엄한 표정도, 봉분을 수호하는 호랑이와 양 조각의 상징성도 찾기 어렵다.

 

본래 명칭은 석상(石床)이다. 여기서 제사를 지냈을까. 그렇지 않다. 조선 왕릉의 제향 공간은 봉분 아래 정자각(丁字閣)이다. 봉분은 왕조차 발을 들이지 못한 곳이다.

 

그렇다면 이 멋없는 돌상이 왜 봉분 바로 앞에 있을까.

 

돌상은 임진왜란 이후 혼유석(魂遊石)이라고 불렸다. 봉분 아래 잠든 영혼이 나와 노니는 돌이라는 뜻이다. 혼유석은 둥근 북을 닮은 고석(鼓石·높이 50cm) 4개가 받치고 있어 무거운 돌을 공중에 띄운 듯한 느낌이다. 고석마다 잡귀를 막는 귀면(鬼面)을 새겼다. 태조 능인 건원릉(경기 구리시), 16대 왕 인조 계비 장렬왕후의 능 휘릉(구리시)은 고석이 5개다. 

 

혼유석은 조선 왕릉만의 독창적 조각이다. 봉분 주변 조각 중 가장 귀하게 여겨졌다. “혼유석은 몸체가 크고 품질이 좋아야 하니 어찌 인물석(人物石)과 쉽게 비교하여 논할 수 있겠는가.(22대 왕 정조 글을 엮은 전집 ‘홍재전서’ 중)

 

어떤 점에서 독창적일까. 빛이 나는 듯 매끈한 표면의 광택이 혼유석의 가치를 대변한다. 효종 능인 영릉(경기 여주군), 정조 능인 건릉(경기 화성시) 등의 혼유석은 표면이 요즘 현대 기계로 다듬은 듯 매끄럽다. 

 

혼유석의 석재는 화강암인데 그 표면을 다듬어 광택을 내는 것은 현대 기술로도 힘들다는 게 석장들의 전언이다. 김이순(미술사) 홍익대 교수는 “조선 6대 단종 비 정순왕후의 능인 사릉(경기 남양주시) 조성 과정에서 석장 40명이 열흘간 혼유석에만 매달렸다”고 말했다.  

 

혼유석은 무게가 7, 8t에 이른다. 조선 왕릉 봉분의 평균 높이는 해발 53m. 표면에 흠이 생기지 않게 봉분 앞으로 옮겨오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건릉 조성 당시 혼유석을 옮기는 데 1000명이나 동원됐다. 

 

이처럼 혼유석은 조선시대 명품 중의 명품이다. 이 최고급 명품이 봉분 앞에 자리 잡은 비밀은 혼유석 아래에 있다.  

 

혼유석 밑에는 박석이 있고 그 아래에 왕의 시신이 안치된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이 통로는 모래 자갈 석회를 섞은 반죽으로 채웠다. 엄청난 무게의 혼유석을 들어내지 않고서는 석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셈.

 

이 덕분에 조선 왕릉은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9대 성종 능인 선릉(서울 강남구 삼성동) 11대 중종 능인 정릉(삼성동)을 훼손했을 뿐이다.

 

혼유석은 왕의 주검을 묻은 지하 밀실을 영원히 봉인한 ‘명품 자물쇠’였던 것이다.

 

<5>--道사상의 결정체

부속 사찰 세워 극락왕생 기원

봉분 주변 조각에도 불교 사상 

경기 화성시 용주사는 특이하다 

 

사찰 입구인 일주문을 들어서면 붉은색 칠을 한 홍살문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훼손됐다가 올해 6월 약 100년 만에 복원됐다. 그런데 홍살문은 조선 왕릉 입구를 나타내는 문이다. 궁궐, 관아에서도 볼 수 있지만 사찰 홍살문은 용주사가 유일하다.

 

홍살문을 지나면 삼문(三門)이다. 중앙의 대문 좌우에 문이 하나씩 더 있다. 전형적인 궁궐 건축 양식. 삼문 앞에는 화마를 물리친다는 해태 한 쌍이 있는데 해태 역시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조각. 대웅보전 앞마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소맷돌(난간) 형태와 소맷돌에 새긴 구름은 조선 왕릉의 제향공간 정자각(丁字閣) 계단을 꼭 닮았다.

 

비밀은 용주사에서 800 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에 있다. 용주사는 융릉에 딸린 사찰이다 

 

○ ‘숭유억불’ 정책과 다르게 내세관은 불교적 

조선 왕릉마다 능에 묻힌 왕의 극락영생을 비는 사찰을 둔 것이다. 왕릉 사찰은 조포사(造泡寺)라고도 불렸다. 선대왕에게 제사 지낼 때 올릴 두부를 만드는 절이라는 뜻이다. 500년 내내 숭유억불의 조선 시대에 선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찰을 세웠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내세관은 불교적이었던 것이다. 서울 강남 복판의 봉은사도 성종 능 선릉(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딸린 사찰이다. 세종 능 영릉(경기 여주시)의 신륵사, 세조 능 광릉(경기 남양주시)의 봉선사도 왕릉 사찰이다.

 

조선 왕릉의 봉분 주변 조각에도 불교 사상이 녹아 있다.

 봉분 앞 장명등은 사실 사찰의 석등과 다를 바 없다. 조선 시대 내내 사찰 창건을 억제해 석등 건조는 드물었다지만 석등은 장명등 형태로 이어졌던 것이다. 세종실록에 태종 능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장명등에 불 켜는 일을 논의한 기록이 있어 조선 초기에는 실제로 기름등잔을 놓아 왕릉을 밝혔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태조 능 건원릉(경기 구리시), 헌릉 등 봉분을 둘러싼 병풍석에는 낯선 형상이 새겨져 있다. 불교에서 부처를 경각시키거나 기쁘게 할 때 쓰이는 방울인 금강령(영탁), 번뇌를 깨뜨리고 불도를 닦을 때 쓰는 도구인 금강저(영저). 융릉 봉분은 불교의 상징인 연꽃 봉우리 조각으로 둘러싸였다. 왕의 영혼이 잠든 곳을 불심(佛心)이 지키고 있는 셈이다. 

 

○ 태극문양-산신석 등 도교와 전통신앙도 어우러져

 그런데 영탁과 영저 중간에는 음양(陰陽)의 이기(二氣)가 생성된 근원인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다. 정자각 계단 소맷돌 아래에도 태극무늬가 있다. 불교뿐 아니라 음양의 조화를 중시한 도교 사상이 함께 녹아 든 것이다. 정자각에서 봉분을 바라봤을 때 정자각 오른편에 있는 돌도 눈여겨봐야 한다. 평균 가로 1.4m, 세로 0.9m의 돌 산신석이다. 왕릉 조성 이전 산을 지키던 산신에게 왕릉으로 산을 해친 미안한 마음을 제사지낸 곳. 산신 사상이라는 우리 고유의 민간 신앙까지 조선 왕릉에 어우려져 있다. 조선 왕릉은 선조를 기리는 유교의 효 사상과 불교, 도교, 민간 신앙 등 수천 년 전통 사상과 철학이 한데 집적된 결정체인 것이다. 

 

<6>숨어 있는 봉분

▲조선 24대 헌종의 능인 경릉(경기 구리시) 전경. 왕릉 입구인 홍살문()에 선 참배자는 정자각()에 가린 봉분()을 볼 수 없다. 조선 왕릉은 참배자가 올려다보며 느끼는 존경심과 죽은 자가 사방을 굽어 살피는 듯한 시선을 절묘하게 조화시켰다. 사진 제공 국립문화재연구소

 

 

홍살문 뒤 정자각이 시선 차단

王의 영혼에 신비-경외감 심어 

 

조선 왕릉은 산등성 끝자락의 완만한 언덕에 있다. 죽은 자의 성스러운 영역인 봉분은 제향 공간인 정자각에서 왕릉 입구인 홍살문에 이르는 산 자의 영역보다 높은 곳에 있다. 홍살문에 들어선 참배자가 봉분을 올려다보며 자연스럽게 존경과 위엄을 느끼도록 조성된 것. 

 

그런데 이상하다. 11대 왕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서울 노원구 공릉동)은 홍살문에 서서 이리저리 올려다봐도 참배 대상인 봉분이 보이지 않는다. 봉분과 홍살문 사이에 있는 정자각이 시선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은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했기 때문에 조성 원칙은 일정하지 않다. 봉분 높이도 해발 27260m로 다양하고 정자각과 봉분의 높이 차도 939m에 이른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길인 참도(參道)는 평평하기도 하고 경사지기도 한다.

 

하지만 조선 왕릉 어디서나 홍살문에서 정자각이 봉분을 가리는 양상은 같다.

 

홍살문에 선 참배자의 눈높이(150cm)에서 정자각 지붕을 향해 일직선을 그어 생기는 수직각 안에도, 홍살문 중앙에서 정자각의 양끝을 향해 그어 생기는 수평각 안에도 봉분은 어김없이 숨는다. 

 

이창환(조경학) 상지영서대 교수가 조선 왕릉 40기를 실측한 결과 수직각은 5.316.2, 수평각은 6.518도로 나타났다. 수직각과 수평각은 조선 후기에 이를수록 커지는데, 봉분에서 정자각까지 거리가 짧아지는 것과 상관관계를 보인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거리만 300( 90m)으로 정한 뒤 그리 크지 않은 1층짜리 목조건축물인 정자각의 높이와 폭을 자연 본래의 지형에 따라 절묘하게 조절해 ‘시선의 폐쇄성’을 유도한 것이다. 

 

이런 폐쇄성은 신()의 정원인 왕릉의 성역화와 신비감을 배가한다. 유교문화권인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왕릉과 중국 황릉에서 봉분 주위에 여러 채의 건물이나 높은 벽을 세워 인위적으로 시선 차단 효과를 노린 것에 비해 간결하고도 탁월한 장치다.

 

정자각을 지나도 봉분은 쉬이 자태를 보여주지 않는다. 정자각 뒤편에는 푸른 잔디가 덮인 또 다른 언덕인 사초지(莎草地)가 조성돼 시선을 가로막는다. 사초지 너머로 봉분의 봉긋한 윗부분과 문석인, 무석인, 장명등 등 봉분 주변 조각들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사초지를 통해 봉분에 올라가려면 가파른 경사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다. 능을 지키는 참봉이 봉분에 올라가며 왕의 영혼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왕의 영혼이 잠든 봉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의 느낌은 정반대다.

 

봉분 좌우와 뒤를 감싼 곡장(曲墻)은 눈높이보다 낮다. 곡장은 봉분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먼 산까지 시야에 들어오도록 트여 있다. 정자각은 시선을 방해하지 않는다.

 

조선 왕릉은 이처럼 참배자 입장에서는 폐쇄적이지만 죽은 자의 시각에서는 사방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구조로 돼 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존경을 느끼는 앙감(仰感)과 위에서 내려다보며 굽어 살피는 느낌의 부감(俯感)을 조화시켜 시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7>‘그린벨트’의 원조

▲성종 능 선릉과 중종 능 정릉(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은 도심 속 쾌적한 녹지를 제공한다. 조선의 ‘그린벨트’ 정책이 준 선물이다. 사진 제공 문화재청

 

도성 밖 10리∼100(440km) 사이에 조성

후대에 선물로 준 ‘1935만㎡ 녹지’ 

 

조선 왕릉은 ‘자연과 어우러진 인공 정원’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숲도 울창하다. 이 숲은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1790(정조 14) 융릉(경기 화성시) 일대에 심은 소나무가 453300여 그루에 달했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의 능인 건원릉(경기 구리시) 주변의 잡풀을 베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으라고 명했다. 영조는 효종 능 영릉(寧陵·경기 여주군)에 직접 잣나무를 심었다. 

 

이뿐 아니다. 왕릉에 나무가 적을 때는 나무를 보충하고, 나무가 제대로 뿌리를 내렸는지를 왕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했다. 왕릉에 심은 나무의 수도 기록했고 함부로 벌목한 자는 엄하게 처벌했다. 

 

왕릉에 계획적으로 나무를 심은 뒤 집중 관리한 것이다. 왕릉은 도성에서 10( 4km) , 100( 40km) 안에 조성하라는 기준에 따라 대부분 수도권에 자리 잡았다.

 

도심의 녹지를 보존하는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정책이 1971년에 시행됐으나 수백 년 전 조선 시대에 이미 정착된 셈이다. 

 

나무의 종류와 위치도 계획적이다. 봉분 뒤에서 ‘신()의 정원’의 배경이 되는 숲은 소나무 숲이다. 봉분을 중심으로 죽은 자의 공간에는 소나무 젓나무 갈참나무 떡갈나무를, 왕릉 입구 홍살문에서 제향 공간 정자각에 이르는 곳에는 소나무 오리나무를,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에서 홍살문에 이르는 진입 공간은 소나무 떡갈나무 젓나무를 심었다 

 

이는 나무마다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세조 때 문신 강희안이 지은 원예 책 ‘양화소록’에 따르면 소나무는 명당의 기둥이요, 나무 중의 나무로, 제왕을 상징했다. 십장생의 하나로 왕조의 지속적 번영을 뜻한다.

 

생태학적으로도 소나무 숲에는 지표를 낮게 덮는 지피식물이 자라지 못해 곤충이 없다. 곤충이 없으니 개구리가 없고 불길한 징조로 여겨진 뱀도 살지 못했다.

 

봉분 주변의 떡갈나무는 껍질이 두꺼워 산불에 강하고 줄기가 곧게 자라기 때문에 왕릉의 ‘방호수(防護樹)’ 역할을 했다. 정자각 앞에는 5월경 흰색 꽃이 피는 때죽나무도 심었는데, 밤에 정자각 앞을 환하게 밝히는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홍살문 주변의 오리나무는 습지에 강하고 뿌리가 많이 뻗는다. 이 공간이 지대가 낮은 습지여서 많은 비에 토양 유실을 막기 위한 기능을 고려한 것이다.

 

정자각 뒤에서 봉분 앞까지 펼쳐진 언덕인 사초지(莎草地)의 푸른 잔디까지 종자가 관리된 점도 놀랍다. 현 독립문(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터에 있었던 ‘모화관(慕華館)’에서 잎이 가늘고 짧은 ‘한국형 들잔디’만 왕릉에 공급한 것이다.

 

이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졌다. 6대 단종 비 정순왕후의 능 사릉(경기 남양주시) 등 왕릉 5곳 인근의 문화재청 양묘장에서 왕릉 나무의 혈통을 키워 왕릉에 공급하고 있다. 왕릉 나무는 모두 ‘족보 있는 나무’인 셈이다. 

 

인근 도로변에 줄지은 젓나무 군락이 유명한 세조 능 광릉(경기 남양주시)의 울창한 숲은 국립수목원의 기반을 마련했다. 900여 종 수목이 어우러진 이곳은 현재 유네스코 지정 생물권 보전 지역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 태종 능 헌릉, 순조 능 인릉(이상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오리나무 숲은 서울시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수도권 일대 조선 왕릉의 녹지를 모두 합친 면적은 19353067m²에 이른다. 조선의 철저한 녹지 보존 정책이 후대에 건네준 선물이다. 

 

<8>정자각 건축에 숨은 원리

▲조선 왕릉 입구 홍살문에서 바라본 정자각. 영조 원비 정성왕후의 능 홍릉(경기 고양시)이다. 입구를 바라보고 있으니 당연히 건축물의 정면이어야 하지만 시야에 들어온 모습은 측면이다. 고양=윤완준 기자


“신성한 봉분, 홍살문서 보이지 않게”

정면 입구를 오른쪽 90도 방향 배치 

 

왕릉의 정면은 어디일까 

 

조선 영조 원비 정성왕후의 홍릉(경기 고양시)에 들어서는 순간, 잠시 헷갈린다. 조선 왕릉 입구인 홍살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丁’자 형태의 건축물인 정자각(丁字閣). 정자각의 방향이 입구를 향해 있으니 정면이 분명한데,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의 모습은 전형적인 측면이기 때문이다. 건축물 정면에 응당 있어야 할 계단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측면이 정면 행세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정자각은 조선 왕릉 어디서나 신주를 모신 ‘一’자 형의 정전(正殿) 앞에 붙은 ‘궐’ 자 모양의 절하는 공간 배전(拜殿)의 맞배지붕(지붕의 앞면과 뒷면이 맞닿아 있는 지붕 양식) 옆면이 정면처럼 앞을 보고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참도(參道)의 방향은 정자각 앞에서 오른쪽으로 90도 꺾였다가 정자각을 따라 왼쪽으로 다시 90도 꺾인다. 건축물 오른쪽에 이르러서야 정자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그렇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의 ‘측면’이라고 생각한 면이 실제로는 ‘정면’인 셈. 정자각은 ‘시각적 정면’과 ‘행위적 정면’이 다른 건축물이다.

 

정자각은 참배자가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오도록 설계됐다. 이는 참배자가 정자각 뒤 봉분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도록 해 왕릉의 위엄과 권위를 배가하는 효과를 낸다. 또 해가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지듯 동쪽은 시작과 탄생, 즉 양()을 뜻하고 서쪽은 끝과 죽음, ()을 뜻한다. 자연의 섭리를 인공적 건축물에 구현한 것이다. 

 

‘행위적 정면’에는 두 개의 계단이 있다. 하나는 수려한 구름무늬를 새긴 소맷돌(난간)과 삼태극 무늬의 고석(鼓石·북 모양의 둥근 돌)을 꾸민 화려한 계단이다. 다른 하나는 소박한 계단만 갖췄다 

 

여기에도 신성한 세계와 세속 세계를 구분하는 원리가 숨어 있다. 화려한 계단은 선대 임금의 영혼이 땅을 떠나 구름을 밟고 하늘로 올라가는 상징이다. 왕릉 입구 홍살문의 삼태극과 상통하는 고석의 삼태극은 참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기호이기도 하다. 그 옆 간소한 계단은 임금이 이용한다. 

 

복잡한 원리는 끝이 없다. 동쪽의 올라가는 계단이 2개인 반면 서쪽의 내려오는 계단은 하나밖에 없다. 누군가는 올라갈 수만 있고 내려올 수 없다는 뜻. 서쪽 계단은 임금이 제향을 마치고 내려오는 계단이다. 

 

내려오지 못하는 선대왕의 영혼은 어디로 갈까? 같은 제향 공간이지만 조선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 정전과 정자각의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 종묘 정전의 뒤에는 문이 없다. 신위에 혼백이 담겼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자각 뒤에는 문이 나 있다. 동쪽 계단으로 올라온 왕의 영혼이 이 문을 통해 봉분으로 홀연히 올라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문은 정자각에서 봉분 앞까지 펼쳐진 언덕인 푸른 사초지(莎草地)와 그 위 봉분 및 문·무석인, 장명등 같은 조각을 어렴풋이 보여주면서 정전의 어두운 공간 뒤로 펼쳐진 또 하나의 신비로운 경관을 창조한다. 태조 능인 건원릉(경기 구리시), 인조 능인 장릉(경기 파주시), 중종 제2계비 문정왕후 능인 태릉(서울 노원구 공릉동) 등의 풍경이 일품이다 

 

또 정자각 기둥은 주춧돌에서 70cm 높이까지는 하얀색으로 칠해져 멀리서 보면 마치 기둥이 공중에 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구름 위 천계의 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한 것”(이영 경원대 건축학과 교수)이다.

 

<9>봉분 밑 금단의 성역 ‘석실’

 

화강암 짜맞춰 만든 ‘완벽한 밀실’

도굴 원천봉쇄… 발굴조사도 안해 

 

조선 왕릉의 봉분 밑 지하에는 ‘비밀의 방’이 있다. 왕과 왕비의 시신이 잠든 석실(石室)이다. 석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 실체가 드러난 적 없다. 한 번도 발굴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석실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현재로선 국가 의례의 예법과 절차를 기록한 ‘국조오례의’와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석실의 비밀에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

 

세종대왕과 왕비 소헌왕후가 함께 묻힌 조선 최초의 합장릉인 영릉(경기 여주군). 지하 3m에 석실이 있다. 조선시대 국법에 따르면 시신은 지하 1.5m 깊이에 묻어야 했다. 하지만 왕과 왕비는 지하 3m 깊이로 묻었는데 당시 극비사항이었다. 도굴을 막기 위해서였다. 영릉의 석실은 길이 3.80m, 너비 6m, 높이 1.70m에 이르렀다. 화강암으로 벽과 문, 천장을 만들어 이었는데, 석실 좌우 벽으로 쓰인 화강암 하나의 길이가 3.80m, 높이는 1.70m, 두께는 0.76m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다.

 

이 거대하고 무거운 돌 부재(구조물의 뼈대를 이루는 재료)들을 잇는 데는 못을 사용하지 않고 부재를 서로 견고하게 짜 맞추는 목조 건축 방식이 도입됐다. 돌 부재 사이의 이음매는 인정(引釘)이라 불리는 대형 철제 연결고리로 고정시켰다. 조선 왕릉 석실의 구조를 연구한 김상협(명지대) 박사에 따르면 “이런 석조 건축 방식은 유례없는 첨단 기술”이다 

 

화강암 부재의 이음매 사이 틈은 석회와 모래, 흙을 섞은 삼물(三物)로 채우고 느릅나무 껍질을 삶은 물에 이겨 만든 방수재를 발랐다. 느릅나무 껍질의 코르크층은 물을 거의 통과시키지 않는 성질이 있는데 선조들이 이를 알았던 것이다.

 

석실 입구는 미닫이 형식의 돌문으로 막았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시신을 안치한 뒤 마지막으로 이 돌문 앞에 문의석(門倚石)이라 불리는 넓이 2m, 높이 1.5m의 돌을 설치해 ‘이중 돌 빗장’을 채웠다. 도굴범이 이렇게 탄탄한 석실의 방어 구조를 뚫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석실은커녕 석실 입구까지 오기도 힘들다. 석실 사방은 삼물 반죽을 1.20m 두께로 채우고 다진 잡석을 또 그만큼의 두께로 채웠다. 삼물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는다. 석실 외부도 이중 방어막이 구축돼 있는 셈. 조선 왕릉의 석실은 한 번도 도굴된 적이 없다. 

 

석실 바닥 관이 놓이는 부분에는 돌을 깔지 않았다. 돌은 시신을 차갑게 할 뿐 아니라 땅의 기운을 막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닥에는 구리로 만든 촘촘한 그물망인 동망(銅網)을 깔았다. 물길을 만들어 빗물을 내보내고 뱀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다. 왕과 왕비의 시신 사이에는 두께 1.20m의 돌벽을 설치하고 벽의 중간에는 0.50m² 크기의 창혈(窓穴)이라는 구멍을 뚫었다. 그 틈 사이에 부장품을 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영혼이 서로 오갈 수 있도록 뚫은 통로라는 낭만적인 해석도 있다. 부장품은 나무로 만들어 금칠한 옥쇄와 왕이 평상시 좋아했던 글이나 그림을 넣었다.

 

조선 왕릉의 석실에도 고구려 고분이나 고려 왕릉처럼 벽화가 있었다. 석회를 바른 뒤 기름먹으로 천장에는 해, , , 은하를 그려 천상을 나타내고 사방에는 청룡(동쪽) 백호(서쪽) 주작(남쪽), 현무(북쪽)를 그렸다. 고구려 고분벽화가 조선시대에 어떻게 계승됐는지 보여 주는 단서가 조선 왕릉의 석실에 숨어 있는 것이다.

 

<10·끝>과거와 현재의 만남

왕릉 40기서 해마다 제사

-무형 유산 ‘귀중한 소통’ 

 

조선 왕릉의 정자각 서쪽 앞. 봉분으로 이어지는 푸른 언덕인 사초지(莎草地)가 시작되는 곳에 있는 낯선 석조물. 땅 위에 평균 1m의 기다란 화강암을 정사각형 모양으로 이어 놓았다. 정사각형 내부는 땅을 파 깊숙하다.

 

조선 왕릉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예감(예坎)이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묻는 구덩이’. 무엇을 묻었을까. 예감의 또 다른 이름인 망료위(望燎位)로 그 쓰임새를 추적해 보자.

 

망료는 제사 때 선대왕의 평안을 기원하며 읽은 축문(祝文)을 제사가 끝난 뒤 태우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을 뜻한다. 예감은 정자각 서쪽에 위치해 있다. 제향 공간인 정자각은 동쪽 방향이 정면인데 제향은 정자각 동쪽에서 시작해 서쪽에서 끝났을 것이다. 예감은 제사가 끝난 뒤 축문을 태우고 땅에 묻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예감 위에 소나무로 만든 뚜껑을 덮어 놓았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예감의 진짜 가치는 과거에 축문을 ‘태워 묻었던’ 곳이 아니라 지금도 축문을 ‘태우고 묻는’ 곳이라는 데 있다. 왕과 왕비가 합장된 경우 등을 포함해 조선 왕릉 40기에서 모두 제향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 600년의 127대 모든 왕과 왕비를 위한 제향 의식이 기일마다 열리고 있다. 건원릉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다른 곳은 왕릉마다 봉향회가 제향을 주관한다. 매년 6 27일 열리는 건원릉 제향에는 1500여 명이, 다른 왕릉에는 300500여 명씩 참가한다. 이렇듯 해마다 수십 차례씩 소프트웨어(무형유산)와 하드웨어(유형유산)가 만나 조선 왕릉의 가치를 완성하고 있는 셈이다. 

 

제향날에 왕은 홍살문에서 참도를 통해 정자각까지 걸어간다. 평소 정자각은 기둥마다 신렴(神簾)이라 불리는 일종의 ‘커튼’을 쳐놓았다가 제향날 걷어 올렸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신렴은 2006년 원종(인조의 아버지) 능인 장릉(경기 김포시)에서 발견된 것으로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왕은 선대왕에게 첫 잔을 올리는 초헌관(初獻官) 역할을 맡는다.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관(亞獻官)은 영의정이, 마지막 잔을 올리는 종헌관(終獻官)은 좌의정이 한다. 올해 건원릉 제향에서는 태조 600주기를 맞아 의친왕의 손자인 이원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총재가 직접 초헌관을 맡았다. 

 

초헌관이 정자각 동쪽의 계단을 오른다. 정자각의 절하는 공간 배전(拜殿)에서 헌관(제사에서 잔을 올리는 사람)들은 항상 서쪽을 봐야 한다. 제상(祭床)을 차린 정전(正殿)에는 문이 3개 있는데, 출입문처럼 보이는 중앙 문은 제향 때 쓰이지 않는다. 헌관은 동쪽 문으로 들어가 서쪽 문으로 나온다. 시작을 뜻하는 동쪽과 끝을 뜻하는 서쪽의 원리를 간직한 동입서출(東入西出)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다.

 

왕릉 제향은 왕이 승하한 지 3년 뒤 올리기 시작했다. 왕이 세상을 떠나고 왕릉이 조성되려면 5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창덕궁에 임시 건축물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했는데, 부패를 막기 위해 동빙고에서 가져온 얼음으로 ‘침대’를 만들었다. 시신은 왕릉 석실에 자리할 때까지도 세상을 떠날 때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의친왕의 손자인 이혜원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은 말한다. “중국은 명, 청 시대 황릉의 웅장함을 자랑하지만 제향의 전통을 상실한 ‘옛 유적’일 뿐이다. 조선 왕릉은 애초의 기능을 잃은 박제된 문화유산이 아니라 현재적 공간이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 살아 숨쉬게 만든 유산은 조선 왕릉뿐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연재에 도움말 주신 분들 

김기덕 건국대 교수, 김두규 우석대 교수, 김상협 박사, 김이순 홍익대 교수, 목을수 전 융건릉관리소장, 박동석 문화재청 사무관, 은광준 조선왕릉연구소장, 이선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이영 경원대 교수, 이창환 상지영서대 교수, 이혜원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 최종희 배재대 교수, 각 왕릉관리소장(가나다순)

 

■ 조선왕릉을 가다 (수도권)

남편이 왕이 된 지 8일 만에 쫓겨난 조강지처

 

2015.10.08 11:41 조선일보 

 

조선왕릉은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가 있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가을이 무르익는 요즘,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보존되어 있는 조선왕릉을 찾아 떠나보면 어떨까.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삼전도 굴욕을 겪은 인조의 '장릉'

 

조선 제16대왕 인조와 그의 비 인열왕후 한씨의 능이다.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의 맏아들로 1595년 11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출한 뒤 즉위했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1637년 세자를 비롯한 500여 명의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 의식으로 청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리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주소 경기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 90 (비공개 왕릉)

▲한명회의 셋째 딸 장순왕후의 '공릉'

 

조선 8대 예종의 세자비인 장순왕후 한씨는 1445년(세종 27) 1월 16일 당대 절대 권력을 행사했던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딸로 태어났다. 명문가의 딸이면서 아름답고 정숙하여 1460년 4월 11일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책봉된 지 1년 7개월만인 1461년(세조 7) 11월 30일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인해 그해 12월 5일 안기의 집에서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승하하였다.

 

한명회의 넷째 딸 공혜왕후의 '순릉'

1467년(세조 13) 1월 12일 12세의 나이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잘산군과 가례를 올려 천안군부인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왔으나 예의 바르고 효성이 지극해 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왕비의 자리에 오른 지 5년 만인 1474년(성종 5) 4월 1일 열아홉의 나이로 소생 없이 창덕궁 구현전에서 승하하였다. "죽고 사는 데는 천명이 있으니, 세 왕후를 모시고 끝내 효도를 다 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9세 때 요절한 추존왕 진종의 '영릉'

영릉(永陵)은 영조의 큰아들 진종과 비 효순왕후의 능이다. 진종은 1719년(숙종 45) 2월 15일 영조의 맏아들로 태어났지만, 세자의 신분으로 9세에 요절하였다. 동생인 사도세자의 맏아들이 진종의 양자로 입적해 왕통을 잇게 되면서 추존왕이 됐다.

주소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ㅣ 전화 : (031) 941-4208

▲왕비 책봉 8일 만에 폐출된 단경왕후의 '온릉'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조강지처 단경왕후 신씨의 능이다. 단경왕후 신씨는 1506년 반정으로 중종이 등위 하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신씨의 아버지를 죽인 반정공신들의 반대로 중종 즉위 8일 만에 폐서인이 되었다. 후에 1739년(영조 15)에 복위되면서 묘호를 단경, 능호를 온릉으로 하였다.

주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 19 (비공개, 서오릉 관리사무소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 답사 가능)

▲인종을 낳고 엿새 만에 숨진 장경왕후의 '희릉'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 윤씨의 능이다. 1491년(성종 22) 7월에 태어나 고모인 월산대군의 부인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1506년에 대궐에 들어가 처음 숙의에 봉하여지고 1507년(중종 2)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의 손위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1515년 25세에 세자(인종)를 낳고, 엿새 만에 산후병으로 사망했다.

 

효심이 깊고 우애가 돈독했던 인조의 '효릉'

조선 제12대 왕 인종과 인종의 비 인성왕후 박씨의 능이다. 인종은 1520년(중종 15)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후 25년간 세자의 자리에 있다가 1544년 즉위하였다. 이듬해 기묘사화로 파방된 현량과를 복구하였고, 조광조 등의 기묘명현을 신원해 주었다. 성품이 조용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깊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였다.

 

농사짓다가 갑자기 왕이 된 철종의 '예릉'

조선 제25대 왕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능이다. 철종은 전계대원군 광의 셋째 아들로 조부는 장조의 아들인 은언군이다. 1844년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헌종 15)에 덕완군에 피봉,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1850년 19세로 즉위하였다. 철종은 정치를 모르는 농군의 아들로 즉위하여 세도의 농간으로 국정을 잡지 못하고 후사도 없이 33세(재위 14년)에 요절하였다. 예릉은 조선시대 『국조오례의』, 『국조속오례의』,『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한 상설제도로서는 마지막 능이다.

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 ㅣ 전화 (031)-962-6009

▲효성이 지극했던 예종의 '창릉'

 

예종은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이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이 지은 야사모음집『연려실기술』에는 예종이 부왕 세조가 세상을 떠난 것에 충격을 받아 건강을 해쳤다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환이 생기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한잠도 못 잔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 세조가 돌아가매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건강을 해치게 되어 이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창릉은 서오릉의 영역 내의 왕릉으로 조영된 최초의 능으로, 병풍석을 세우지는 않았으나 봉분 주위에 난간석을 두르고 있다.

 

20세의 나이에 요절한 추존왕 덕종의 '경릉'

의경세자는 1438년(세종 20) 9월 15일 수양대군의 맏아들로 태어나 20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의경세자의 죽음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세조가 영월에 귀양 보낸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마음먹고 잠이 든 날 밤,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났다. "너는 흉악하고 표독스럽게도 내 아들의 왕위를 빼앗고, 목숨까지 끊으려고 하는구나! 네가 나의 아들을 죽이니, 나 역시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 꿈에서 깬 세조가 뒤척이고 있는데, 동궁의 내시가 급히 달려와 세자가 위독하다는 말을 전한다. 세조는 급히 동궁으로 달려갔지만, 의경세자는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고 한다.

 

숙종과 그의 두 계비가 묻힌 '명릉'

명릉은 19대 숙종과 그의 첫 번째 계비인 인현왕후, 두 번째 계비인 인원왕후 세 사람을 모신 능이다. 오른쪽 언덕을 왕이 차지하는 일반적인 왕릉과 달리 명릉에서 가장 낮은 서열의 인원왕후의 능이 가장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인원왕후가 1757년(영조 33) 71세로 승하하였을 때, 국고와 인력의 문제로 원래 정해두었던 자리에 묻히지 못하고 숙종의 오른쪽 언덕에 잠들게 되었다.

 

천연두 발병 8일 만에 숨진 인경왕후의 '익릉'

인경왕후는 20세 때인 1680년(숙종 6) 10월에 천연두 증세를 보이며 앓기 시작했다. 전염을 우려한 숙종은 경덕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였으며, 인경왕후는 발병 8일 만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영조의 비 정성왕후의 '홍릉'

영조는 한 평생을 함께 했던 부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정성왕후의 행장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왕궁 생활 43년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양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 제전에 기울였던 정성을 고맙게 여겨 기록한다.

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 ㅣ 전화 : (02) 359-0090

▲인조반정으로 추존된 추존왕 원종의 '장릉(김포)'

 

인조의 아버지로 추존된 원종과 그의 비인 인헌왕후의 능이다. 추존왕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1587년 정원군에 봉해졌으며,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 아들인 능양군이 반정 세력의 추대를 받아 조선 16대 왕 인조로 즉위하자 정원대원군에 추존, 9년 후인 1632년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주소 경기도 김포시 장릉로 79 ㅣ 전화 : (031) 984-2897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광릉'

 

세조는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1417년(태종 17) 9월 29일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문종이 승하하고 나이 어린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측근인 권람,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1453년(단종 1)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선 7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고 두 능의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同原異岡)릉으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는 최초로 조영되었다.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 ㅣ 전화 : (031) 527-7105

▲불운한 삶을 살다간 정순왕후의 '사릉'

 

정순왕후는 15세에 왕비가 되었다가 18세에 단종과 이별하고, 부인으로 강등되어 평생을 혼자 살아갔다. 궁궐을 나온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의 동망봉 기슭에 초가집을 짓고 시녀들이 해오는 동냥으로 끼니를 잇다가, 염색업을 하며 평생을 살았다. 1521년(중종 16) 6월 4일을 일기로 장장 7대 왕대에 걸친 삶을 마감하였으니, 이때 춘추 82세였다.

주소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 ㅣ 전화 : (031) 573-8124

▲임진왜란 후 부국강병의 기틀을 다진 광해군의 '광해군묘'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과 그 부인 문화 유씨의 묘소다.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1575년 6월 4일 태어났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국가 안위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1608년 왕위에 올랐다가, 1623년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됐다.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 59

▲고종과 명성황후가 함께 묻힌 '홍릉'

 

1895년(고종 32) 일본 정부의 사주로 낭인에 의해 경복궁 옥호루에서 시해당한 명성황후는 궁궐 밖에서 시신이 소각되었다.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복호되고, 1897년(광무 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춘추 67세로 고종이 승하하자 그해 3월 4일 현재의 위치에 조성하면서 천장론이 일던 명성황후의 능도 옮겨와 합장으로 예장하였다. 홍릉은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능역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영하였다.

 

황제에서 이왕으로 강등된 순종의 '유릉'

종은 1874년(고종 11) 2월 8일 창덕궁 관물헌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7년(광무 1)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순종은 황제위에서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1926년 4월 25일 53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유릉은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며, 조선 왕릉 중 한 능침에 세 명의 수장자를 합장한 유일한 동봉삼실형이다.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ㅣ 전화 : (031) 591-7043

 

②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의 왕

 

▲조선을 세운 1대 태조의 '건원릉'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이다.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고, 그다음해에는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명나라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사대정책을 썼고, 숭유배불 정책을 내세웠으며 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하였다. 건원릉은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 능제는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따르고 있으나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차이가 있다.

 

조선의 왕 중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왕 문종의 '현릉'

조선의 5대 왕인 문종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맏아들이다. 1421년(세종 3) 8세의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1450년(세종 32) 3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는 조선이 건국된 이래 적장승계의 원칙에 따라 등극한 최초의 임금이었다. 1450년 왕위에 올랐지만, 몸이 약하여 재위 2년 4개월 만에 병사하였다. 현릉의 예처럼, 같은 능의 이름 아래 있지만, 왕과 왕비의 능을 각각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능을 동원이강릉이라고 한다.

 

방계 출신의 왕족 선조의 '목릉'

선조는 선왕 명종의 조카이다. 명종은 어린 나이의 순회세자를 잃고 자식 잃은 슬픔을 달래려고 여러 왕손을 궁궐에 자주 불렀다. 하루는 명종이 익선관을 벗어 왕손들에게 주며 써보라고 하였다. 다른 왕손들은 돌아가면서 익선관을 써보았지만, 제일 나이가 어린 선조는 머리를 숙여 사양하였다. “이것을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겠습니까?” 선조는 이렇게 아뢴 뒤 어전에 도로 가져다 놓았다. 이를 본 명종은 매우 기특하게 여기며, 그에게 왕위를 전해줄 뜻을 정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왕조서 최장 기간 재위한 영조의 '원릉'

영조는 무수리에게서 태어난 숙종의 서자이다. 비록 왕자이긴 하였으나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궁궐 외곽의 초라한 집에서 천시받으며 어렵게 성장하였다. 경종이 즉위한 1721년에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고 아들이 없는 것을 이유로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즉위 후 과감하고 개혁적인 조치들을 단행하여 조선 후기 나라의 기틀을 재차 다지는데 큰 공을 세웠다. 1776년(영조 52) 3월 5일 춘추 83세로 경희궁 집경당에서 승하하였다.

 

왕실의 어른으로 천수를 누린 장렬왕후의 '휘릉'

1624년(인조 2) 인천부사이던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로 태어났으며, 15세의 나이로 1638년(인조 16) 12월 2일 인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리고 왕비로 책봉되었다. 어린 나이에 인조의 계비로 궁에 들어와 남편을 일찍 여읜 장렬왕후는 효종, 현종, 숙종 3대의 왕이 인조의 뒤를 잇는 동안 자의대비라는 이름 아래 왕실의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현종과 명성왕후가 나란히 잠들어있는 '숭릉'

현종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아들로, 효종이 세자의 몸으로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1641년(인조 19) 2월 4일 그곳에서 태어났다. 조선 역대 왕 중에 유일하게 외국에서 출생한 왕이다. 왕비인 명성왕후는 지능이 뛰어나고 성격이 과격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서 거친 처사가 많았고 숙종 즉위 초에는 한 때 수렴청정하기도 했다.

 

의젓하고 총명했던 단의왕후의 '혜릉'

단의왕후는 1696년(숙종 22) 11세의 어린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의젓함과 총명함으로 궁궐의 어른들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고 전하는데,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인 1718년(숙종 44) 2월 7일 병을 앓다가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추봉했다.

 

22세에 요절한 추존왕 문조의 '수릉'

추존 황제 효명세자 문조(文祖)는 24대 왕 헌종의 아버지다. 1812년(순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돼 1827년(순조 27)에는 19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다. 어린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였을 시기에 대리청정을 통해 강인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원래 몸이 약했던 그는 아들을 얻은 이후 1830년(순조 30) 5월 6일 22세의 젊은 나이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요절하였다. 수릉 이전의 왕릉은 일반적으로 봉분 앞이 상·중·하계 3단의 높이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수릉에서는 중계와 하계가 합쳐졌다. 이는 신분제도의 변화에 의한 것이다. (왕의 영혼이 깃든 공간이 상계, 문인의 공간이 중계, 무인의 공간이 하계다)

 

헌종과 두 왕비가 나란히 묻힌 '경릉'

헌종은 4세 때인 1830년(순조 30) 5월에 아버지 효명세자를 여의고, 그해 9월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834년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15세부터 친정을 펼쳤지만, 혼란스러운 정국을 뒤로하고 1849년(헌종 15) 6월 6일 23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경릉(景陵)은 세 개의 봉분이 나란히 있는 조선 왕릉 중 유일한 삼연릉 형태이다. 제일 우측의 능침이 헌종의 것이고, 가운데가 효현왕후 능침이며, 좌측이 계비 효정왕후 능침이다.

주소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조선 최초의 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의 '연산군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과 부인 신씨(愼氏)의 능이다. 연산군은 실정이 극심하여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고 1506년(중종 1) 연산군으로 강봉되어 같은 해 9월 강화군 교동에 유배되었다. 그해 11월 유배지에서 죽어 강화에 장사지냈다가 1512년 12월 폐비 신씨의 진언으로 그 이듬해 현재의 위치로 천장하였다.

주소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77

 

▲수렴청정의 권력자 문정왕후의 '태릉'

 

문정왕후는 1501년(연산군 7) 10월 22일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로 태어났다.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가 1515년(중종 10) 인종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7일 만에 승하하자, 2년 뒤인 17세 때 왕비로 책봉되었다. 1545년 아들인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문정왕후는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면서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다. 태릉은 왕이 아닌 왕비의 단릉(單陵)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느낌을 준다.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명종의 '강릉'

조선 13대 임금인 명종과 왕비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다. 명종은 12세의 나이로 즉위해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20세가 되던 해인 1553년(명종 8)에는 친정을 하게 되었다. 명종은 외척을 견제하고 고른 인재 등용을 하려 했으나, 당쟁과 파당의 문란한 정치를 막을 길이 없었다. 명종은 나라가 어지러운 가운데 1567년(명종 14) 6월 28일 경복궁 양심당에서 3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주소 서울시 노원구 화랑로 681 ㅣ 전화 (02) 972-0370 , (02)948-5668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묻힌 '의릉'

 

20대 왕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의 능이다. 경종은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왕궁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나인 출신의 희빈 장씨이다. 경종은 1720년 6월 13일 33세의 나이로 즉위했지만, 4년간의 재위 시절에도 신하들의 당쟁에 시달려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병약했던 경종은 1724년 마음의 병을 이기지 못하고 승하하였다.

주소 서울 성북구 화랑로 32길 146-20 ㅣ 전화 : (02) 964-0579

 

▲사랑하는 계비 신덕왕후를 위해 만든 '정릉'

 

태조는 계비 신덕왕후를 매우 사랑하여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궁에서 가까운 곳인 황화방(현재의 정동)에 웅장하게 능을 조영하였다. 하지만 태종이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르는 절차를 밟은 뒤 계모인 신덕왕후의 능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이에 태조는 애써 조성한 사랑하는 아내의 능이 초토화되는 것을 보고 남몰래 눈물지었다고 한다.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아리랑로 19길 116 ㅣ 전화 : (02) 914-5133

 

▲조선 정치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성종의 '선릉'

 

성종은 1457년(세조 3년) 7월 태어났다. 삼촌인 예종이 즉위 14개월 만에 승하하고, 1469년 11월 그 뒤를 이어 임금으로 즉위했다. 성종은 유교적 통치의 전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등 재위 25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세조의 유교에 따라 세조의 광릉 이후 조영된 왕릉에는 세우지 않았던 병풍석을 성종의 봉분에는 다시 세웠다.

 

반정(反正)으로 왕이 된 중종의 '정릉'

정릉은 조선 11대 왕 중종의 능이다. 중종은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1488년(성종 19년) 3월 5일 태어났다. 1494년(성종 25년) 진성대군에 봉해졌다가 1506년에 중종반정에 의해 조선 11대 왕으로 추대되었다. 중종에게는 3명의 왕후와 7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사후에는 어느 왕비와도 함께 있지 못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능인 선릉 옆에 홀로 묻혔다.

주소 서울 강남구 선릉로 100길 1 ㅣ 전화 : (02) 568-1291

 

▲조선의 왕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태종의 '헌릉'

 

헌릉은 3대 태종과 원비 원경왕후의 쌍릉이다. 태종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1367년(고려 공민왕 16) 5월 16일 태어났다. 1383년(고려 우왕 9)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이 되었는데, 조선의 왕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이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와 정도전 등과 대립하여 세자 책봉에서 탈락하였다. 결국, 2번의 왕자의 난을 일으켜 1400년 11월 왕위에 올랐다. 헌릉은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이다. 병풍석의 규모와 확트인 전경, 정자각 중심의 제향공간과 능침공간 사이의 높이 차이 등 초기 조선 왕릉의 위엄성을 잘 드러내주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세도정치에 시달린 순조의 '인릉'

인릉은 조선 23대 순조와 비 순원왕후의 합장릉이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형 문효세자가 1786년 요절하자, 1800년(정조 24) 7월 11세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804년(순조 4)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돼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수해와 전염병 등으로 사회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순조는 34년의 재위 동안 세도정치에 밀려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했다.

주소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34 ㅣ 전화 : (02) 445-0347, (02) 3412-0118

 

▲뒤주에서 숨진 추존왕 장조의 '융릉'

 

장조는 조선 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22대 정조의 생부이다. 어려서부터 왕세자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갖춰 부왕인 영조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1749년(영조 25) 1월 23일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 후, 노론 및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모함으로 영조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영조가 내린 자결의 명을 따르지 않다가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숨졌다.

 

조선후기 개혁과 대통합을 실현한 정조의 '건릉'

정조는 장헌(사도)세자(추존 장조)와 혜경궁 홍씨(추존 현경의왕후)의 둘째 아들로, 1759년(영조 35) 8세의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775년(영조 51)부터는 대리청정을 시작하였으며, 다음 해 3월 즉위하였다.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 일당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는 한편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또 실학을 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의 문예 부흥기를 가져왔다. 19세기 왕릉 석물 제도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융릉과 건릉은 정조 때의 문운이 융성하던 기운과 양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소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 ㅣ 전화 : (031) 222-0142

 

③숙부에게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한 왕

 

▲역대 군왕 중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긴 세종의 '영릉(英陵)'

 

조선 제4대 왕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이다. 세종대왕은 1397년(태조 6) 음력 4월 10일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스물두살 되던 1418년(태종 18) 양녕대군이 폐세자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그해 9월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종이 맏형인 양녕대군을 두고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여러 왕자 중에서 가장 총민하고 현명하였기 때문이었으며, 우리나라 역대 군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영릉은 조선 왕릉 중 최초로 하나의 봉분에 왕과 왕비를 합장한 능이자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를 따랐다. 

 

북벌을 국시로 내세운 효종의 '영릉(寧陵)'

17대 효종과 부인 인선왕후의 능이다. 효종은 1619년(광해군 11) 5월 22일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636년의 병자호란으로 이듬해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간 있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와 1645년 갑자기 변사하자 세자에 책봉되어 1649년 왕위에 올랐다. 효종은 청나라에 대한 원한을 품고 북벌을 추진하였으나, 1659년 5월 4일 효종이 급서하며 북벌정책도 소멸하였다. 영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배치한 것이 아니라 아래위로 배치한 쌍릉 형식이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 왕릉 중 최초의 형태인데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도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

주소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산83-1 ㅣ 전화 (031) 885-3123

▲정치적 야심에 희생된 단종의 '장릉(영월)'

 

단종은 1441년(세종 23) 7월 23일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승하하면서 1452년 11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1453년 그를 보필하던 황보 인 ·김종서 등이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제거당한 뒤, 1455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1456년 단종의 복위 시도가 실패하며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하다가 1457년(세조 3) 10월에 영월에서 사사됐다.

주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ㅣ 전화 (033) 370-2619

▲즉위 2년 만에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준 정조의 '후릉'

 

조선 제2대 왕 정종과 정안왕후의 쌍릉이다. 정종은 성품이 인자하고 용기와 지략이 뛰어나, 고려 때 아버지를 따라 많은 전공을 세웠다. 조선 개국 뒤 영안군에 책봉되었고, 제1차 왕자의 난이 수습된 뒤 1398년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즉위한 지 2년 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인덕궁에 거주하면서 사냥과 격구, 연회, 온천여행 등으로 세월을 보내다 1419년 6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능인 공민왕릉을 모방하여 만든 능으로, 조선시대 왕릉의 특징도 두루 갖추고 있는데 특히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릉인 헌릉과 아주 유사하다.

주소 개성시 판문군 영정리 (북한)

▲조선 태조의 첫 아내 신의왕후의 '제릉'

 

조선 태조 이성계의 비 신의왕후 한씨의 능이다. 1351년 한씨 나이 15세때 당시 신분이 비슷한 17세의 이성계와 가례를 올리고 방우, 방과(정종), 방의, 방간, 방원(태종), 방연과 경신, 경선의 6남 2녀를 낳았다. 이성계가 정계의 1인자로 부상하기까지 고향에서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하는 등 내조가 지대하였다. 신의왕후는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기 1년 전인 1391년 9월 12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소 황해북도 개풍군 대련기 (북한)

 

■ 朝鮮王陵의 10가지 秘密

1. 조선왕릉은 왜 서울 경기에 몰려 있을까?

강원 영월로 유배돼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장릉(영월군)을 제외한 조선왕릉 39 기는 서울 경기 일대에 모여 있다.
왕릉을 한양의 궁궐에서 10리(4km)∼100리(40km) 떨어진 곳에 조성했기 때문이다.
왕이 왕릉에서 제례를 올리기 위한 행차를 하루 만 에 다녀올 수 있도록 거리를 고려한 결과이기도 하다.
 

2. 어느 쪽 봉분이 왕이고 어느 쪽이 왕비일까?

태종과 비 원경왕후가 나란히 묻힌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태종 능 위치는 봉분 뒤에서 봤을 때 오른쪽이다.
조선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 원칙으로 왕이 오른쪽에 묻혔다.
덕종의 경릉(경기 고양시)만은 덕종이 왼쪽에, 비인 소혜왕후가 오른쪽에 묻 혔다.
덕종은 왕세자로 죽었고 소혜왕후는 아들 성종이 즉위해 왕대비로 세상을 떠났 기 때문이다.


3. 조선왕릉 은 왜 거의 도굴이 안 됐을까?

임진왜란 때 훼손된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서울 강남구 삼성동)을 빼고 도굴된 적 이 없다.
세종의 영릉(경기 여주군) 석실 부재들의 이음매는 대형 철제 고리로 고정했 고 입구에 '이중 돌 빗장'을 채웠다.
석실 사방은 석회 모래 자갈 반죽을 두껍게 채웠 다. 부장품을 의궤에 상세히 남겼는데 부장품으로 모조품을 넣은 것도 도굴을 막은 한 요인이다.


4. 왕과 왕비가 항상 함께 묻히지 못한 까닭은?

왕릉은 당대 정치권력의 향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성됐다.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로 명종을 수렴청정한 '여걸'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고 싶어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고양시) 옆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삼성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문정왕 후 사후 정릉에 물이 찬다는 이유로 결국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외로이 묻혔다. 태릉 이다.


5. 봉분 앞 혼유석의 정체는?

봉분 앞 돌상인 혼유석(魂遊石)은 영혼이 노니는 돌이라는 뜻.
북을 닮은 고석(鼓石) 4개가 혼유석을 받치고 있다.
이 큰 돌은 제사 지내는 상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혼유석 밑에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 숨어 있다 혼유석은 '지하의 밀실'을 봉인한 문 인 셈. 실제로 고석에 새겨진 귀면(鬼面)은 문고리를 물었다.


6. 최장신 문·무석인은 어디에 있을까?

문석인(문관)과 무석인(무관)은 대체로 사람 키를 훌쩍 넘어 권위를 뽐낸다.
가장 큰 문·무석인은 철종의 예릉(고양시), 장경왕후의 희릉에 있다. 3m 이상이다.
중종 시대 (16세기)는 석물의 장엄미가 최고조였던 때다. 철종은 19세기의 왕이 아닌가.
전문가 들은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꿈꾸며 예릉을 위엄 있게 꾸몄다고 말한다.


7. 정자각의 계단은 왜 측면에 있을까?

참배자가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오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해 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 한 것. 동쪽 계단은 2개,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것.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뒤 문을 통해 봉분 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8. 봉분 뒤에는 왜 소나무가 많을까?

왕릉에 우거진 숲을 계획적으로 조성했다.
봉분 뒤 소나무는 나무 중의 나무로 으뜸 을 뜻했다. 봉분 주변에 심은 떡갈나무는 산불을 막는 역할을 했다.
낮은 홍살문(왕릉 입구) 주변에는 습지에 강한 오리나무를 심었다.
태조의 건원릉(경기 구리시) 봉분에 는 억새풀을 심었는데 고향인 함흥을 그리워한 태조를 위해 태종이 함흥에서 가져왔 다고 한다.


9.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은 황제릉?

고종은 1897년 조선이 중국과 대등한 나라(대한제국)라고 선포했다.
경기 남양주시 홍 릉과 유릉은 황제릉으로 조성됐다.
홍·유릉은 정자각(평면이 '丁'자 모양) 대신 중국 의 황제릉처럼 '一'자 모양의 침전(寢殿)을 세웠다.
능의 석물도 코끼리, 낙타 같은 낯 선 동물을 배치했다.
왕릉의 석물이 왕을 호위하는 상징인 반면 홍·유릉의 석물은 황 제의 위용을 드러낸다.


10. 서삼릉에는 왕족의 공동묘지가 있다?

세 왕릉이 있는 서삼릉(고양시)에는 왕자, 공주, 후궁의 작은 묘 46기가 모여 있어 공 동묘지를 연상시킨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뒤 도시화 과정에서 자리를 잃은 묘와 원(왕 세자와 왕세자비의 무덤)들이 서삼릉으로 쫓겨 왔다.
'공동묘지' 옆에는 왕족의 탯줄 을 보관하는 태실 54기도 있다.
원래 태실은 전국의 명소에 묻었는데 일제가 서삼릉으 로 몰아넣었다.

■ 이미지

▲조선왕릉

 

 

▲건원릉 정자각 - 조선 1대 태조의 능

 

 

 

▲준경묘 = 조선 태조 5대조인 양무장군의 묘, 영경묘는 그의부인 이씨의 묘로 삼척시 이로면 활기리에있다

 

▲서오능 西五陵 = 고양시 용도동,도성의 서쪽에 5능이 있다하여지은 이름 - 1敬陵-덕종(세조의 장남 20세 요절). 2昌陵-8대 예종.3翼陵-19대 숙종.4明陵-인경황후(숙종의 첫부인 20세 요절).5弘陵-영조

 

▲영릉 - 조선 4대 세종대왕과 왕비 소현왕후 심씨의 능

 

▲숭릉 정자각 - 조선 현종과 비 명성왕후의 능

 

▲경기도 구리

 

▲단종의 묘

 

 

▲장릉 - 단종이 묻힌 곳

 

▲사릉 - 단종 비 정순왕후능

 

▲정순왕후

 

▲홍살문에서 바라본 전경

 

▲왕릉의 꽃

 

▲1890년대 경모궁 전경 (사도세자의 사당 )과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본관 뒤 흔적

 

▲강릉 - 강원도 강릉이 아닌 서울 노원구 태릉 곁에 있다

 

▲효종대왕능

 

▲효종대왕능

 

▲조선 제17대 효종과 부인 인선왕후 장씨의 능 - 경기  여주시 능서면

 

▲경주 대릉원

 

▲능지탑 - 경주 낭산자락 문무왕 주검이 열흘만에 여기로 옮겨져 화장됐을 것으로 추정

 

■ 선열지묘

▲최영 장군 사당 - 통영

 

 

▲성삼문 묘 - 논산

 

 

▲성삼문 사당

 

▲송강 정철의 묘 - 충북 진천 문백

 

▲신사임당 묘

 

▲안창호지묘 - 강남구 신사동

 

▲이준열사지묘- 강북구 수유동

 

▲한용운지묘 - 서울 중량구 망우동

 

■ 국립묘지 ‘제왕적 묘역

한국 대통령, 현충원 묘지 338㎡… 美 대통령 규정의 75

[토요기획]국립묘지 ‘제왕적 묘역’ 논란 왜? 
대통령 묘역도 제왕적인 한국

 

《살아있는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을 놓고 헌법 개정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과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힌 전직 대통령 5명의 묘역 총면적은 1690.5m²( 512), 대통령이 아닌 안장자 1명에게 허락된 면적(3.3m²·약 1)과 비교하면 무려 512 1의 격차다. 반면 미국과 영국 등은 대통령과 장군, 사병을 차별하지 않는다. 오직 국가에 헌신했는지만 따진다. 한국 대통령 묘소의 전말을 해부한다.

“산봉우리 하나, 물 한 방울도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은 곳이 없다.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형상’(渴形象)의 명당 중 명당”, “산()은 군인들이 아침 조회를 하는 듯하고, 땅 밑의 여러 갈래 물줄기()는 교류해 생기가 넘친다. 

서울 동작구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 홈페이지에 소개된 현충원의 풍수(風水). 앞으로는 한강이, 뒤로 관악산 공작봉이 병풍을 친 이 명당에 역대 대통령 4명이 잠들어 있다. 이 중 가장 높고 깊은 곳에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이 있고, 이어 이승만, 김대중(DJ), 김영삼(YS) 전 대통령 묘역이 차례로 나온다

서울과 대전 국립현충원에 잠든 역대 대통령 5명 묘역 총면적은 1690.5m²( 512). 대통령이 아닌 안장자 1명에게 허락된 면적(3.3m²·약 1)과 비교하면 512 1의 차이다. 이렇듯 사후에도 대통령과 일반인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다. 역사적으로 엄격한 정치적 위계를 보였던 한국 국립묘지의 단면이기도 하다. 혹자는 이를 ‘제왕(帝王)적 국립묘지’라 부른다. 


1곳 공사비 7억∼10, 관리비 45000만 원 

1965 7월 미국 하와이에서 병사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묘 크기에 대한 명시적 규정이 없던 당시 일반 군인 묘역보다 훨씬 큰 363m²( 109)로 꾸려졌다. 묘두름 돌, 상석, 향로대, 묘비, 추모비, 헌시비, 사자상 등이 갖춰졌다. 헌시비는 하와이 한인동지회가 하와이 근해에서 채취한 돌로 건립됐다. 1992 3월 서거한 프란체스카 도너 리 여사도 가족장으로 이곳에 합장됐다.  

서울현충원의 가장 높은 곳엔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묘소가 있다. 1979년 안장된 박 전 대통령의 묘소 면적은 580m²( 175). 역대 대통령 묘소 크기 중 압도적 1위다. 묘두름 돌, 상석, 향로대, 묘비, 추모비 등이 있다. , 박 전 대통령 묘역 공사비는 자료가 없어서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다. 


동지이자 숙명의 라이벌이던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각각 2009년과 2015년 안장됐다. 묘역 크기는 DJ(264m²·약 79.8) YS(258.5m²·약 78.1)보다 조금 더 크지만 공사비는 YS(98670만 원) 쪽이 DJ(77000만 원)보다 더 들었다. 두 전 대통령 묘역 면적이 다소 줄어든 것은 2006년 국립묘지법이 개정돼 국가원수 묘역이 264m²( 80) 이내로 제한된 결과다. 

묘역 관리비도 ‘억’ 소리가 난다. 서울현충원은 “전체 면적 관리비에서 국가원수 묘역 면적을 비교하면 연간 총 45000만 원(경비, 청소, 조경 관리)이 든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 관리비도 3742만 원(2016년 기준)이 든다.

전직 대통령은 대전보다는 서울에서 영면하길 원했다. 최규하 전 대통령만 2006년 유일하게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서울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이 가득 찼다는 이유로 유가족을 설득한 결과였다. DJ를 서울현충원에 안장하려는 장례 계획에 대한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상희 전 국방부 장관은 “서울현충원 국가원수 묘지가 만장돼 최 전 대통령 서거 때 유가족을 설득해 대전으로 모셨다. DJ가 서울현충원에 안장되면 예전 결정을 뒤집는 선례를 남기고, 추후 다른 대상자들이 계속 서울에 안장해 달라고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2015년 서거한 YS도 국가원수 묘역 인근의 터를 활용해 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반면 대전현충원은 국가원수 묘역 4곳을 조성했지만 3곳이 아직 ‘미분양’ 상태다 

국립묘지가 아닌 다른 곳에 안장된 전직 대통령은 윤보선,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윤 전 대통령은 국립묘지를 뿌리치고 충남 아산의 해평 윤씨 묘역에 잠들었다. 생전 조상들이 잡아놓은 유명한 명당으로 불린다. 노 전 대통령은 유서에 따라 화장한 뒤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 안장돼 있다 

국립묘지 밖에 안장됐다고 국가의 지원이 없는 건 아니다. 국회가 지난해 3월 국립묘지 외의 장소에 안장된 전직 대통령 묘지 관리 비용 등을 지원하는 전직대통령 예우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 국회예산정책처는 법이 통과되면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11800만 원(연평균 22150만 원)이 든다고 내다봤다.


○ 사후에도 유지되는 군() 계급 

한국 국립묘지는 죽어서도 계급 차이가 난다. 계급별로 묘역도 달라 장군-장교-사병이 다른 곳에 묻히고 있다. 게다가 장군 묘역과 사병 묘역은 멀리 떨어져 있다. 장군 묘역은 1인당 26.4m²( 8). 시신 안장과 봉분이 허용된다. 반면 사병 묘역은 3.3m²( 1)에 화장한 유골만 안장하며 봉분은 없다. 무공훈장을 받았거나 교전 중 사망했더라도 영관급 이하는 화장된다 

2006년 법 개정으로 장군 묘역의 화장 안치 및 1기 면적을 3.3m²로 했다. 그러나 부칙에 ‘장군 안장 묘역이 소진될 때까지는 시신 매장 및 26.4m²( 8) 허용’이라는 단서조항을 뒀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장군들의 시신 매장과 봉분 조성이 합법화됐다. 

서울현충원 내 장성 묘역은 만장된 지 오래다. 남은 것은 대전현충원의 장군 묘역 98. 현재 추세라면 2020 4월경 장군 묘역이 만장될 것으로 대전현충원은 전망했다


○ 계급, 지위 차별 않는 해외 국립묘지 

한국 국립묘지의 발원은 이승만 대통령 때 제정된 ‘군 묘지령’에서 출발했다. 국립묘지가 군인 묘지라는 뿌리로 출발하면서 장군, 사병 묘역이 구분됐다. 이후 안장 대상이 확장돼 국립묘지로 승격됐지만 면적에 계급 간 차별은 유지됐다. 국립묘지에서 국민 통합과 평등의 성격보다 신분과 위계질서가 부각되는 것은 이런 태생적 배경에서 비롯된 셈이다 

반면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된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과 부인 재클린 케네디의 묘에는 봉분과 묘비가 없다. 묘역 중앙에 케네디를 추모하는 ‘불멸의 불꽃’이 타고 있을 뿐이다. 또 미국 대통령 대부분은 사후 고향에 묻힌다. 대통령, 장군, 장교, 사병 등 안장 대상자에게 동일한 묘지 면적(4.49m²·약 1.3)이 제공되는 게 원칙이다. 신분에 따라 별도 매장 구역이 없고 사용 순서에 따라 지정된다. 무명용사의 비석에는 “여기 오직 신만이 알고 있는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미국 용사가 잠들어 있다”고 적혀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 조사 결과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의 국립묘지는 장성과 사병을 구분하지 않고 1인당 4.95m²( 1.5)로 일정했다. 프랑스 파리 팡테옹 국립묘지는 프랑스를 빛낸 위인들의 묘지지만, 신분에 따라 묘지 크기를 구분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 묘 크기가 예()인가 

국가에 대한 공헌 측면에서 국가원수는 그 자체로 역사성과 상징성이 있다. 그러나 묘역 크기가 수많은 무명의 헌신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조성돼 온 관행은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 퇴임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좋지만 왕조 국가의 왕릉처럼 크게 지을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장례 문화가 화장으로 급변하는 추세에 ‘크기’에 집중된 대통령 묘역 조성 기조를 고칠 때가 됐다는 것이다


국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바른미래당 김중로 의원은 미국과 동일하게 신분을 구분하지 않고 국립묘지의 1인당 묘지 면적을 정하는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발의한다고 밝혔다. 김 의원도 그 역시 육군 장성 출신이어서 사후 국립묘지 장성묘역(8)에 안장될 수 있다. 김 의원은 “나도 사후 병사들 묘역에 묻히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장군이 사병 묘역에 안장된 것은 2013 11월 별세한 채명신 예비역 육군 중장(초대 주월남 한국군 사령관)이 유일하다.  

김 의원은 “진정한 적폐 청산은 국민 생활에 스며든 잘못된 관행과 관습을 깨뜨리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도 이런 적폐를 청산해야 국민적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묘지 면적과 안장 방법을 놓고 신분과 계급에 따라 차별하는 것은 사후에도 갑질을 하는 것과 같다. 또 전직 대통령에게 제공되는 과도한 예우를 현실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관석 기자 jks@donga.com  2018-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