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14/ 한국의 산성
■ 한국의 산성, 언제부터, 누가, 왜 쌓았을까?
BC 1,000년쯤 부족국가 시절 산성 쌓아 외적 침입 막아… 약 2,100여개 될 듯
한국의 산성기록은 언제부터 시작될까? 중국 역사서 <사기(史記)>에 한국의 산성에 대한 첫 기록이 나온다. BC 108년 한(漢)나라 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할 때 위만조선의 마지막의 왕이자 위만의 손자인 우거(右渠)가 왕검성에서 1년 가까이 저항하게 된다. 이를 ‘우거는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가 끊어지게 됐다’고 했다. BC 108년에 이미 견고한 산성이 축조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이후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는 산을 의지하여 성을 축조하였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다’고 나와 있고, <고려사>에서는 ‘당감에는 고려에서 산을 이용하여 성을 축조하는 것을 상책이라 하였으니, 외방의 평지에 성을 축조하는 것을 마땅히 정파시켜야 한다’고 기록하며, 산성축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만큼 한반도에서 산성의 역사는 오래됐다. 그리고 그 수도 엄청나게 많다.
한국에 산성이 과연 몇 개나 될까? 그 산성을 누가, 왜 축성했을까? 우리나라 산에는 산성이 왜 그리 많을까?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산에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자극받아 북한산성과 충북지역의 상당산성 등 충청권의 산성을 묶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의 산성은 산정상 부위에 쌓은 산정식과 산줄기와 계곡을 같이 아우른 포곡식으로 나뉘며, 산지가 험할수록 포곡식의 형태를 많이 띤다. 남한산성은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으로 꼽힌다
한국의 산성은 한민족의 역사를 보면 어느 정도 파악된다. 한반도에는 약 BC 1,000년쯤부터 부족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 아직 국가로 통일이 되지 않은 상태의 부족국가는 다른 부족으로부터 침범을 막기 위해 산을 중심으로 성벽을 쌓았다. 일종의 방어망이었다. 이것이 한국의 산성의 출발점이다. 한반도 산성의 역사가 대략 3,000년 전쯤 된다는 얘기다.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에 해당한다. 한반도에 부족국가는 무수히 많았다. 삼국시대의 일종의 지방 호족적 성격을 띤 부족국가였다. 마한․진한․변한으로 대표되는 삼한과 이들을 구성하는 부족국가, 그리고 가야와 가야를 둘러싸고 있는 부족국가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들이 쌓은 산성은 지금까지 대략 2,000여개쯤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5~1997년에 걸쳐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한 결과를 담은 <문화유적총람>에 따르면 남한에 있는 성곽은 총 2,137개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후 확인된 산성을 합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조선 세조 대의 집현전 학자인 양성지(梁誠之)가 올린 상소문에는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입니다”라고 밝힌 내용도 설득력 있는 기록이다.
한국의 산성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는 1,000여년의 기간 동안 산성은 통치자들의 피난처이자, 지역도시와 거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구조물, 접경지역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벽의 역할을 수행했다.
평상시의 산성은 무기와 식량을 저장하고 전시에는 피난처로 사용됐다. 산성이 산악지형의 지리적 이점을 효과적으로 잘 활용했다. 한국의 산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축성되어 불규칙한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멀리서 보면, 전체 구조물이 자연환경에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성곽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확인하기 어렵게 축성돼 있다. 이러한 인상적인 성벽이 산과 절벽을 따라 축성됐고, 우월한 방어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한국 성곽의 근본적 강점은 자연 지형을 최대한 유리하게 활용하고 자연환경을 고려하여 산악지형에 맞게 성벽을 축성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침략군들은 산을 오르면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해야 했고, 이들이 도착했을 때 돌과 화살의 공격을 맞닥뜨려야 했다.
산성은 시대별로, 국가별로 조금씩 다른 형태를 보인다. 산성 축성 초기는 토성의 형태를 많이 보인다. 고구려의 국내성, 개경의 대부분이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백제의 풍납토성․몽촌토성․공산성․사비성, 신라의 월성 등도 토성으로 축성했다. 석축산성의 시원은 확실치 않지만 오녀산성이 석축으로 이뤄져 주목 받은 적이 있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비교적 지표조사가 잘 이뤄진 대전․충남의 경우 산성 307개소 중 토축산성 116개소, 석축산성 169개소, 토석혼축 15개소 등으로 석축산성이 훨씬 많은 수를 보였다. 또 서울․경기․인천 지역의 성곽 현황에 따르면 299개소의 성곽 중 석성이 136개소, 토성이 73개소, 토석혼축성이 29개소, 미확인 59개소로 석축산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사실을 확인했다. 한양도성의 경우도 세종대에 이르러 68%에 달했던 토축성벽을 모두 석축화했다.
이 같은 사실은 <산성으로 보는 5000년 한국사>를 쓴 이덕일․김병기씨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고조선에서 시작된 우리의 산성은 고구려․백제와 신라, 고려,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차이를 보입니다. 물론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점은 똑 같으나 백제는 토성이 더 발달했고, 고구려는 석축성이 더 많이 보입니다. 반면 신라는 지역에 따라 석성과 토성이 혼재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대체적으로 초기의 산성은 토성, 후기는 석성으로 된 형태가 많이 보입니다.”
산성은 축성형식에 따라 명칭도 다르다. 산성이 위치한 입지조건과 성벽의 통과선이 지나가는 지형을 기준으로 산정식(山頂式 또는 테뫼식)과 포곡식(包谷式)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눈다. 이 두 가지 형식을 복합한 복합식도 있다.
산정식은 평탄하게 생긴 산정상부를 둘러서 성을 구축한 경우를 말하며, 산봉우리를 둘러싸서 마치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처럼 원형으로 성벽을 구축한 것을 테뫼식이라고 한다. 또 산정상부에서 시작하여 한쪽 산에 걸쳐 원만하게 경사된 지형을 이용해서 비교적 넓은 면적을 포함해서 구촉된 것을 산복식(山腹式)이라 부른다. 포곡식 산성은 성내에 한 개 또는 그 이상의 계곡을 두고 그 주위를 둘러싼 산줄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한 경우를 말한다. 성벽의 통과선은 능선으로부터 평지에 이르러 다시 평지에서 능선으로 올라, 기복에 있어 변화가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눈앞에 둔 남한산성도 포곡식에 해당한다. 내부에 넓은 계곡이나 수원(水源)을 포괄한 만큼 산정식보다 훨씬 광대한 규모를 이루고 있다. 특히 산악지형이 험한 고구려 산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복합식 산성은 산정식과 포곡식이 결합해서 축성된 경우를 말한다. 이들은 규모에 있어 협소할 수밖에 없는 산정식 산성에, 그것을 확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접한 지형에 포곡식 산성을 접속해서 개축한 새로운 형태를 산성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산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나라를 세우기 전에 이미 무수히 많았던 부족국가들이 자국의 방어와 대피를 위해 산에 축성하기 시작한 것이 삼국시대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고, 이후 석축으로 개조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고구려 성 - 연천
▲분산성 - 김해, 가야 시조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 알에서 태어난 자리라고 전해지는 구지봉의 거북현상이 뚜렷하다
▲온달산성 - 충북 단양 조망이 가장 좋다는 평가
▲해미읍성 - 조선시대의 3대 읍성 - 서산
●고소산성
▲고소산성(섬진강)
●공산성
▲공산성 금서루 = 공주 백제의 향취가 깃든 곳
▲공산성 = 해발 110m
▲고마는 곰의 옛말 고마나루는 공주의 옛지명으로 한자는 웅진이다
●금정산성
금정산성은 사적 제215호(1971년 2월 9일 지정)로 길이 18,845m, 성벽 높이 1.5∼3m, 총면적은 약 2,512천평(8.2㎢)의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다. 행정 구역상 금정구, 북구, 동래구, 경남 양산시와 성벽을 기점으로 경계(境界)하고 있으며 산 능선을 따라 성을 쌓았다.
▲금정산성이 금정산 능선을 따라 길게 뻗어 있다. 국내에서 가장 긴 산성이다.
금정산성은 임진왜란의 혹독한 피해를 입은 동래부민(東萊府民)이 난(亂)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피난 겸 항전성(抗戰城)이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남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왜구의 침입이 심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신라 때부터 이미 성(城)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문과 주변 성곽을 완전 복원하느라 한창 공사 중이다.
성문 4개와 망루4개가 있는 산성은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에 의하여 숙종29년(1703)에 동래부사 박태항 등이 성을 쌓았고, 숙종33년(1707)에 동래부사 한배하가 중성을 새로 쌓았으며, 순조8년(1808) 동래부사 오한원이 무너지고 없어진 성을 고쳐 쌓았다.
▲금정산성의 제4망루.
금정산성을 지키는 일은 동래부사가 맡았으며, 유사시에는 동래, 양산, 기장 삼읍(三邑)의 군인과 승려들이 차출되어 방어토록 되어 있었고, 평상시에도 산성내에 있는 국청사, 해월사(현재는 존재하지 않음)의 승려 100여명과 범어사 승려 300여명으로 성을 지키도록 했다.
▲남문은 이미 복원 정비를 끝냈다.
산성의 보수정비는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인 1972년 동문과 남문, 1973년 서문, 1986년 북문을 복원하였고, 1976년∼1979년 제1망루, 제2망루, 제3망루, 제4망루를 복원하였으며, 붕괴·훼손된 성곽보수 등 금정산성 정비계획에 의거 연차적 사업으로 지속적으로 보수 정비하고 있다.
▲금정산성 제2망루.
금정산성은 금정산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천년고찰인 범어사와 더불어 우리고장의 문화유적지이며 관광명소이자 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이 깃 든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동문 성벽 위의 모습.
▲금정산성
●남한산성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cIw7Gaf6jn4
2014.6.22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확정된 남한산성은 최근까지 서울과 가까운 등산 명소이자 야유회 갔다가 닭볶음탕을 먹는 유원지 이미지가 강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의 군대를 피해 47일간 항전을 벌이다 성을 내려와 항복한 치욕의 장소로도 각인돼 있다.
◇닭볶음탕 팔던 유원지에서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하지만 남한산성은 세계유산 목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영광의 문화유산이 됐다. 남한산성은 ▲동아시아에서 도시계획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증거로서의 군사 유산이면서 ▲지형을 이용한 축성술과 방어 전술의 시대별 층위가 결집된 초대형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라는 점 등이 높이 평가됐다. '포곡식 산성'은 계곡을 감싸고 쌓은 산성을 말한다. 세계유산위원회는 남한산성이 "특정 기간과 문화권 내 건축이나 기술 발전, 도시계획 등에서 인류 가치의 중요한 교류 증거"가 되고, "인류 역사의 중요 단계를 보여주는 건물·건축·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탁월한 사례" 등으로 세계유산 조건을 충족시켰다고 했다.
남한산성은 임진왜란(1592~1598)과 정묘호란(1627)·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국가 유사시에 방어력을 갖춘 임시수도의 필요성을 절감함에 따라 등장한 산성도시로서 새로운 화포와 무기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성곽을 증·개축했다. 남한산성은 그 자체로 독특한 유산이면서 당시 동아시아 사회와 교류한 흔적이기 때문에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더 크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은 또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 단계와 무기 체제의 변화상을 잘 나타내며, 지금까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어 '살아있는 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았다.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위원장인 이혜은 동국대 교수는 "남한산성은 일상적인 왕궁과는 별개 산성이면서도 병자호란 때는 왕이 일상적으로 거주한 왕궁이라는 '비상 왕궁'(Emergency Palace)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면서 "이런 산성은 세계적으로 남한산성밖에 없다"고 말했다.
▲남한산성의 지하문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남한산성 5개 옹성중 연주봉 옹성
●동래읍성
▲북장대
▲북문
○읍성내에 있는 장영실과학관
▲동래역사관
▲서장대
▲동장대
▲고분지
●모양성 - 고창
●북한산성
북한산성엔 축성 당시 모두 14개의 성문이 있었다. 수문 1개소와 북문․대동문․보국문(소동문)․대서문․대동문․대남문(소남문) 등 성문 6개소, 서암문․백운봉암문(위문)․용암봉암문․가사동암문․부왕동암문․청수동암문(국녕문) 등 암문 6개소와 중성문 등 14개 성문이 북한산성을 둘러싸고 있다.
대개의 성문들은 등산로를 따라 있어 등산객들이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그러나 북한산성 축성 당시의 성문들은 각각의 역할과 기능이 있었다. 방향을 가리키는 동, 서, 남, 북문에 방어를 더욱 튼튼히 하기 위해 중간 중간에 다시 성문을 만들었다. 북문은 시구문으로, 시체를 나르던 문이었고, 수문은 물이 흘러나가는 문이었다.
▲북한산성 전경.
북한산성을 쌓을 때에는 전국의 승려들이 동원되어 승군대장 성능의 감독아래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성이 완공된 후에도 승군으로 하여금 성을 수비하도록 했다. 그만큼 조선시대에도 승군의 역할이 꽤 중요했다. 승군이 수비하는 관아를 치영(緇營)이라고 했다. 치영의 승군들은 낮에는 무술을 익히고, 아침․저녁으로 불경을 공부하면서 유사시 대비했다.
당시 병영으로 사용하던 사찰이 지금 북한산에 가면 있는 그 절들이다. 승군대장이 머물던 중흥사를 비롯하여 태고사․서암사․용암사․보국사․보광사․부왕사․원각사․국녕사․진국사․상운사 등 11개 사찰과 원효암․봉성암 등 2개의 암자 등이 그 역할을 맡았다. 이들 사찰들은 대부분 성문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함으로써 산성 수비가 주된 건립 목적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산성 수비와 무술을 닦는 생활로 도성의 북쪽 요지를 지켜오던 승도들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강제 해산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대성문
●수원화성
조선시대의 성. 조선 22대 임금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과 왕권 강화를 위한 수도 이전을 목적으로 쌓은 성이다.
실학자 정약용과 유형원이 설계를 하고, 좌의정 채제공의 주관 아래, 화성유수 조심태 등이 공사를 진행하여 성을 쌓은 후,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등의 건물을 지었다. 성곽을 석재와 벽돌을 섞어 쌓은 점, 거중기와 녹로 등 새로운 기기를 사용한 점, 화살과 창검, 총포 등을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 등에서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당대 최고의 건축물로 평가 받고 있는 동시에 우리나라 성곽 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송충이도 씹어 먹은 정조의 효심”
정조는 화성으로 아버지의 묘를 옮긴 후 그 전보다 더욱 자주 찾아가 인사를 드리곤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융건릉을 찾은 정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묘 주변 소나무들이 송충이 때문에 다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어허, 이럴 수가. 내 땅에 사는 송충이가 어찌 임금의 아버지 앞에 있는 소나무 잎을 갉아먹는단 말이냐. 내 아버지가 비명에 가신 것도 가슴 아픈데 너희들까지 이리 괴롭혀서야 되겠느냐. 차라리 내 오장육부를 갉아 먹어라”라고 한탄하며, 송충이 한 마리를 잡아 입안에 넣고 깨물어 먹어버렸다. 그 일이 있은 후, 어디선가 새들이 날아와서 송충이를 다 잡아 먹어, 소나무에는 송충이가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상세설명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왕조의 부흥을 꿈꾸던 정조의 수원 화성
▲수원 화성에서 가장 조형미가 빼어난 곳이 왼쪽의 방화수류정과 오른쪽의 화홍문이다
정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왕조(王朝)는 석양(夕陽)과 같았다. 정조는 한양이 싫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와 할아버지 영조와 음모를 일삼는 신하로 가득한 복마전을 떠나고 싶었다. 1789년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 융건릉으로 옮긴 것은 왕이 꿈꾸던 역사(役事)의 첫걸음이었다.
정조는 1796년 10월 화성(華城)을 완공했다. 당초 10년이 걸릴 것이라던 예측을 뒤엎고 34개월 만에 낙성연을 치렀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에는 정조의 야심이 담겨 있다. 그것은 왕조의 부흥(復興), 부국강병이라는 조선의 마지막 르네상스가 그의 목표였다.
▲정조는 수원 화성에 왕조의 부흥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실학의 선구자 반계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팔달산 아래의 신읍(지금의 수원시)은 구읍(화성시)보다 지형상 규모가 크며 낮고 평평한 구릉만 있을 뿐 대부분 평야지대로 이곳에 축성해 읍치로 삼는다면 실로 대도회지로 발전할 수 있다.” 실학자답게 그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했다.
즉 1만 호를 수용할 적지(適地)라고 한 것인데 실제 수원은 지형상 서울과 삼남(충청·경상·전라도)에 가까운 요충지였다. 훗날 이 글을 본 정조는 “반계야말로 오늘의 국사와 현실에 유용한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대학자”라고 격찬했다고 한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며 한양의 방비도 생각했다.
▲북쪽으로 한양을 바라보는 문이 장안문이다.
즉 한양을 중심으로 북쪽의 북한산성과 개성 대흥산성, 서쪽 강화도성과 문수산성, 동쪽 남한산성에 남쪽의 수원 화성을 더하면 한양의 외곽방비 체제가 완벽하게 확립된다고 본 것이다. 이를 위해 정조는 중국 한당(漢唐) 시대의 수도 장안(長安)을 모델로 삼았으며 몇몇 건물의 이름도 차용했다
▲화성 안에는 군사들을 조련할 수 있는 연무대가 있다.
▲가을날의 화성.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팔달문.
이 문은 수원성의 남쪽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화성 곳곳에 설치된 돈대는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정조의 사후(死後) 조선은 어린 순조가 외척들의 세도정치에 휘둘리면서 세계사에서 뒤처지게 됐고 정조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76년 만에 일본과 강화도 수호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맺으면서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다시 34년 만에 일본에 병합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우리의 역사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월간조선 12월호)
사진 : 이서현
○호주인 매혜란이 수원 화성의 폐허를 찍은 뜻
호주인 아버지와 두 딸… 세 부녀 한국식 이름 짓고
日帝 강점기부터 70년간 부산서 代 이어 의료 봉사
맏딸 매혜란, 사진가 활동도… 戰禍 입은 수원 화성 찍어
수원시가 자랑하는 대표적 문화유산이 화성(華城)이다. 화성은 조선조 정조대왕이 뒤주에서 불운하게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墓)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성한 효성(孝誠)이 깃든 성(城)이다.
이런 역사적, 철학적 가치를 지닌 수원 화성과 관련해 6·25 전쟁 발발 67주년을 앞두고 모든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싶은 사진이 두 장 있다. 바로 6·25 전쟁 당시 두 차례 점령당한 수원시의 화성이 참혹하게 파손된 역사적 사진이다. 한 장은 화성 안에서 촬영한 장안문(長安門)이고, 나머지 한 장은 화성 밖에서 바라본 장안문의 모습이다. 장안문 옹성 앞에는 소련제 T-34 전차가 을씨년스럽게 버려져 있다. 1950년 7월 4일 북한 인민군에 의해 처음으로 수원시가 점령당했고 1952년 1월에는 중공군에 의해 두 번째로 점령당했는데, 두 사진을 촬영한 시기는 미군 25사단이 중공군을 물리치고 수원시를 재탈환한 1952년 봄으로 확인됐다.
수원 화성이 6·25 전쟁 중 포격으로 대부분 파손된 시점이 북한군의 1차 수원 점령 때인지 중공군의 2차 수원 점령 때인지 불분명하지만, 북한군에 의한 1차 점령 때인 개전 초기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군사전문가들은 "북한군이 남침하면서 앞세웠던 가공할 만한 소련제 T-34 탱크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낙동강까지 밀렸지만, 미군이 3.5 인치 로켓포를 긴급히 공수해 옴으로써 전차방어 수단이 확보되면서 반격이 가능했다"면서, 이때 북한군이 파손된 탱크를 화성 바로 앞에 그대로 버리고 퇴각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사 전문가들은 6·25 전쟁 관련 사진 가운데, 수원 화성의 참상을 이처럼 생생하게 담은 사진은 흔치 않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두 장의 사진은 전쟁 중에 누가 촬영한 것일까? 그 해답은 현재 수원에 자리 잡은 경기대학교 박물관에 전시 중인 '호주 매씨 가족의 한국 소풍 이야기'라는 사진전에서 찾을 수 있다.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파괴된 수원 화성 장안문의 모습과 소련제 T-34 전차(사진 위). 아래는 성 안쪽에서 본 장안문의 당시 모습.
1910년 일제 강점기에 호주 선교사인 제임스 노블 매켄지(James Noble Mackenzie·1865~1956)가 선교활동 차 한국으로 파송되어 매견시(梅見施)라는 한국이름으로 '부산 나병원'을 28년간 운영하며 나환자들을 돌봤다. 그가 부산에서 환자들을 돌볼 때 태어난 두 딸 헬렌(Helen· 1913~2009·한국명 매혜란)과 캐서린(Catherine·1915~2005·한국명 매혜영)은 호주에서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을 졸업한 뒤 1952년 전쟁 중인 한국에 돌아와 부산에서 '일신부인병원(현재 일신기독병원)'을 설립하고 대를 이어 의료봉사활동을 펼쳤다.
매견시는 취미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의 큰딸 매혜란도 아버지의 취미활동을 이어받아 사진작가로도 활동했다. 매혜란은 중공군이 퇴각한 후인 1952년 3월부터 5월까지 석 달 동안 거제도를 시작으로 공주, 전주, 수원, 서울 등지를 돌아다니며 6·25 전쟁의 참상을 촬영했는데, 수원 화성이 파괴된 이 역사적인 모습도 그때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6·25 전쟁으로 대부분이 파손되고 주요 뼈대만 남았던 수원 화성은 1975년부터 5년 동안 화성 축성의 상세한 기록물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의거해 원래 모습으로 생생하게 복원되었다. 그 결과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지금도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전 세계에 자랑하고 있다.
매견시 집안은 일제 강점에 이어 동족상잔의 엄청난 고통을 겪은 한국인들을 대를 이어 무려 70년 동안 묵묵히 보살피고, 수천 장에 달하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소중한 사진과 필름까지 남겨주고 모두 저세상으로 떠났다. 6월 25일을 목전에 두고 다시 한번 진심을 담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김인규 경기대 총장
○ 방화수류정
조선 정조 18년(1794) 건립되었으며, 화성의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은 전시용(戰時用)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고려해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조성된 건물이다. 수원 방화수류정은 송나라 정명도의 시(詩) “운담풍경오천(雲淡風經午天), 방화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으며, 편액은 조윤형(曺允亨1725~1799)의 글씨이다. 평면은 “ㄱ”자형을 기본으로 북측과 동측은 “凸”형으로 돌출되게 조영하여 사방을 볼 수 있도록 꾸몄으며, 조선 헌종 14년(1848)에 중수되었고,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되었다. 주변감시와 지휘라는 군사적 목적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조선시대 정자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고, 다른 정자에서 보이지 않는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의 특이성 등을 토대로 18세기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팔달문
세계문화유산인 경기도 수원화성(華城)의 팔달문(八達門)이 3년에 걸친 해체·보수공사를 마치고 최근 공개됐다. 수원화성의 남대문 격인 팔달문이 한양도성의 남대문인 숭례문과 비슷한 시기에 나란히 복원돼 일반에 개방된 것이다.
수원시 팔달로 2가에 있는 팔달문은 조선 정조 18년인 1794년에 지어졌다. 다산 정약용이 설계한 화성의 4대 문 중 남문에 해당하는 누각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누각과 옹성을 자랑하는 목조 문화재로 조선 후기 전형적인 성문 형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팔달은 ‘사통팔달로 막힌 데가 없다’는 의미다. 1964년 9월 가치를 인정받아 수원화성 화서문과 함께 보물(402호)로 지정됐다
▲수원화성 남수문 - 1848년과 1922년에 대홍수로 유실되었다가 90년만인 12. 6.9.복원
▲장안문
▲장안문
●순천왜성
임진왜란 때 고니시가 순천에 지었던 순천왜성(順天倭城)
"16세기 후반 오랜 세월의 전란을 제패하고 일본천하를 자신의 손에 넣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는 조선과 중국을 지배하려는 망상에 빠지게 된다...1590년에는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니 길을 내라' 즉, 향도정명(嚮導征明)을 내세운다. 동아시아의 정세를 잘못 판단한 '히데요시'는 조선이 거부하자 조선 침략을 위한 전쟁을 준비한다. 조선침략의 전진기지이자 총사령부의 본진이 자리하고 있었던 곳이 바로 규슈에 있는 나고야(名護屋) 성(城)이다."
▲돌담만 남아있는 규슈의 나고야성터-
일본인 '카도와키 마사토(門脇正人)'씨가 쓴 <조선인 가도(街道)를 가다>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이렇게 해서 나고야 성에 집결한 전국의 다이묘(大名)는 130명이 넘었다. 그들은 나고야 성을 중심으로 반경 3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구릉에 진영을 구축했다. '히데요시'는 이곳에서 조선 침략을 위한 야욕의 불을 지핀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제1군에서 제9군까지 15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5-1600)'가 맡은 제1군이 1592년 4월12일 백 여척의 배에 나눠 타고 쓰시마를 출발한 다음날 부산에 상륙했다. 그 후...
정유재란...'히데요시'의 재침략
1597년 2월 '히데요시'는 14만의 군대를 동원해서 조선을 재침략했다. 정유재란이 시작된 것이다. 정유재란은 당초부터 일본군이 불리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凊正, 1562-1611)'의 부대가 12월 말에서 1월 초까지 울산에 성을 쌓고 지구전을 폈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일본군은 '히데요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퇴각한다. 순천성에서 퇴각하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대와 이순신 장군이 일전을 벌인 전투가 '노량해전'이다. 11월 26일 '고니시(小西)'의 군대가 철퇴함으로써 7년간의 침략 전쟁은 막을 내린다. 안타깝게도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다.>
필자는 이런 전쟁의 역사를 더듬어보기 위해서 지난 주말 오후 전남 순천에 갔다. 이유도 있었다. '무안 공항'과 일본의 '기타규슈' 간 항로가 개설됨에 따라 일본 관광객 유치를 위한 자문을 위해서다. 필자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었으나 일본인 '오오야마 미요(大山美代·48)'씨가 동행했다.
순천왜성(順天倭城)-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 이 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장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구축한 것이어서 '왜성'이라 부른다.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
▲정왜기공도를 설명하는 장진배 해설사
필자는 성터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문화관광 해설사 '장진배'씨와 만났다. 봄을 재촉하려는 듯 그의 옷 색깔이 '봄의 전도사' 같았다. 장 해설사는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부터 설명했다.
"자, 이 그림부터 설명하겠습니다. 그림 속에 그 당시의 전투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그림은 1974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개리 레드야드(Gari Ledyard)' 교수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필자의 본능적인 궁금증.
"이 그림은 누가 그렸나요?"
"명나라 종군 화가가 그린 것입니다.“
"그림 밑에 쓰여 있는 일본인 '나카무라(中村仁實)'라는 사람은 어떤 역할을 했나요?"
"그는 필사본을 그린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록은 중요했다. 그림 한 장을 통해서 당시의 군대의 배치와 규모에 대한 이해를 완벽하게 할 수 있었다. 필자 일행은 해설사를 따라서 성터로 올라갔다. 성터에는 역사의 아픈 흔적들이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

▲문지(門址) 입구
이 문지는 본성과 외성을 연결하는 출입문이다. 문지 옆으로는 해자(垓字)를 만들고 바다 물을 끌어들여 방어에 치중했던 것이다.
장진배 해설사는 성(城)의 복원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이 성터는 2006년부터 일본의 기술자를 불러 복원하기 시작했고, 아직도 복원 작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성은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돌을 쌓습니다. 일본의 성은 기초없이 바로 쌓아 올립니다."
"입구에 있는 화장실의 물이 지하수입니다. 이 성안에서 물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던 것도 성을 세우는데 있어서 좋은 여건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해설사는 하나라도 놓지지 않으려는 듯 계속해서 말을 하면서 천수기단(天守基壇)에 올랐다.
▲천수기단
"이곳은 천수각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정왜기공도'를 보면 5층 규모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천수기단도 오랜 세월 석축이 흐트러지고 일부가 무너져서 보수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천수기단 위에 올라서 사방을 바라보았다. 제철소가 들어서고 집이 지어지는 등 '전쟁터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400년 세월이 흘렀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해설사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며 조선, 명나라, 왜군의 배치에 대해서 설명했다.
▲오오야마 미요씨
필자와 순천왜성을 돌아본 일본인 '미요(美代)'씨는 다음과 같이 소감을 피력했다.
"일본인의 입장으로서도 치욕(恥辱)의 역사를 복원한 순천시에 감사드립니다.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었던 그 당시의 상황을 제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에게도 많은 교훈이 될 것 같습니다. 침략은 욕심에서 비롯되니까요."
성터를 돌아본 필자 일행은 이순신 사당인 충무사로 갔다. 거기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의 비(碑)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석에 대한 글을 그대로 옮긴다.
▲소서행장비
<이 비석은 정유재란 당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순천왜성에 주둔했던 것을 기리기 위해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군이 성내 천수대에 설치하였으나, 광복이후 지역주민들이 넘어뜨려 주변 농경지에 있던 것을 해룡면 사무소에 보관해 오다가 이곳으로 옮겼다. 충무공의 얼이 깃들어 있는 이곳에 비를 옮긴 이유는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을 후손들이 다시는 겪지 않도록 교훈을 주기 위함이다.>
순천시의 고뇌의 흔적이 들어있는 글이었다. 이 비는 일제 강점기 시절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郎, 1937-1937)' 당시 육군 중장이 세웠다. 후일 그는 33대 일본 총리가 됐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 했던가.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글 |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조선일보
● 파사산성
▲파사산성 - 신라5대 임금 파사왕이 이 성을 점령 보축했다는 대서 유래, 전체 둘레 935.5m 높이 6.25m - 여주
▲破邪城 파사성
● 한양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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