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13/ 조선의 궁궐3/
■ 창덕궁
○창덕궁의 봄
가을
겨울
▲향나무 - 천연기념물
▲고궁의 설경(창덕궁) - 박효섭
야경
○부속 건물
▲낙선재
▲보춘정
▲성정각
▲연경당 - 보물지정
▲의두합
▲청의정
▲관람정 - 창덕궁 후원
▲창덕궁 성정각
▲인정전
▲인정전 설경
▲인정전 - 박효섭
▲주합루 -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로 지정
▲창덕궁 희정당
■ 한양도성 의 門
○한양도성 八門(4대문, 4소문)
서울의 사대문(四大門)은 東-흥인지문, 西-돈의문(敦義門), 南-숭례문, 北-숙청문(肅淸門. 숙정문)이고 사소문(四小門)은 동북-홍화문(弘化門. 혜화문), 동남-광희문(光熙門. 수구문), 서북-창의문(彰義門. 자하문), 서남-소덕문(昭德門. 소의문)이다. 서울성곽도 윗부분이 숙정문이고 시게방향으로 혜화문, 흥인지문, 광희문, 숭례문, 소의문, 돈의문, 창의문의 순서이다.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국보 제1호로 정면 5칸, 측면 2칸, 2층의 우진각지붕 다포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다. 1395년(태조 4) 서울 성곽과 성문을 만드는 계획에 의해 짓기 시작했는데, 지금의 건물은 1447년(세종 29)에 다시 고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1~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숭례문은 중앙부에 홍예문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우리나라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女墻)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을 열었고, 건물의 외주 바닥에는 판석을 깔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 윗면인 중앙간만을 우물마루로 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머리(龍頭), 그리고 용마루에는 독수리머리(鷲頭)를 올렸다.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언제 변경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처음에는 팔작지붕이었다고 한다. 기단의 양측에는 원래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1908년 길을 내기 위하여 헐어내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숭례문은 전형적인 다포양식의 건물로 창건연대를 알 수 있으며 견실한 목조건축물의 수법을 보이고 있는 건축상 중요한 건물의 하나이다. 편액은 세로로 쓰여져 있는데 이는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함이라고 한다.
공장에서 많이 생기는 황과 자동차에서 많이 생기는 질소 등은 물과 만나면 황산같은 강한 산성 물질로 변한다. 산성비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부식시키고 있다. 흥인지문이나 숭례문은 공해와 산성비에 고스란히 드러나 단청이 그을리거나 껍질이 벗겨져 나간다. 숭례문을 예전에는 멀리서만 봐야했는데 요즈음에는 이렇게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조지 클레이턴 포크가 1884년 촬영한 숭례문.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불타기 전 모습
○복원 과정
▲ 2013.02.14일 오전 문화재청이 숭례문 복구 마무리 현장설명회를 개최하고 언론에 숭례문 복구 현장을 공개하고 있다. 숭례문은 지난해 12월 말 완공될 예정이었으나,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은 겨울 날씨로 가설덧집 해체와 관리동 건립이 예정보다 지연되면서 완공이 늦어져 현재 전체공정의 약 96% 진행한 상태이며 4월에 준공식을 가질 예정이다. /뉴시스
○돌아온 숭례문
○숭례문 파수의식 8년 만에 재개 16. 6 23 숭례문 광장 교대의식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흥인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에 우진각지붕의 건물이다. 서울도성에 딸린 8문 중의 하나로서 동쪽에 위치하였다. 1396년(태조 5)에 완성되고, 1453년에 다시 고쳤으며, 이것이 조선 말기까지 계속 존속되다가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고쳐 지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화강암의 무사석으로 홍예문(虹蜺門)을 만들고 그 위에 2층의 누각(문루)을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을 돌리고 있으나 이것도 고종 6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 때문에 숭례문은 조선 초기의 양식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흥인지문은 조선 말기의 건축 양식을 각제 된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판문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를 일렬로 배치하였는데 위아래층의 대량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하고 있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아래층이 내삼출목 외이출목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인데 쇠서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말기의 쇠퇴된 수법을 보인다. 보물 제 1호이다. 다른 사대문은 모두 세 글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흥인지문만 네 글자인 것은 서울의 동쪽이 지세가 약하기 때문에 지(之) 자를 넣어 기를 보충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엘리자베스 키스가 1920년에 그린 달빛 아래 동대문의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흥인지문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터
태조 이성계가 서울 도성을 만들 때 사대문의 하나로 지금의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세웠던 문이다. 처음에는 돈의문이라고 이름지었는데 1413년(태종 13)에 풍수학생 최양선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를 폐쇄하고 새로 문을 내어 서전문(西箭門)이라 하였다.(옛 서울고등학교 본관 서쪽) 그 뒤 1422년(세종 4) 도성을 새로 고칠 때 서전문을 헐어 버리고 지금의 서대문 마루턱에 새 문을 세워 이름을 옛날의 돈의문으로 고쳤으며 거기에 연유하여 세종 이후 서대문 안이 새문안으로 불리었고 지금의 신문로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1711년(숙종 37)에 예조판서 민진원의 건의로 광희문을 고칠 때, 목재를 준비하여 돈의문의 문루를 개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돈의문은 철거되어버렸다.
●숙청문(肅淸門. 숙정문. 북대문)
숙청문(肅:엄숙할 숙 淸:맑을 청 門:문 문)은 서울성곽의 북쪽 문으로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白岳山) 동령에 위치하였다. 1395년(태조 4)에 건립되었으나 1413년(태종 13)에 풍수학생 최양선이 왕에게 백악산 동령과 서령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되다고 주장하고 두 문을 막을 것을 청하므로 마침내 창의문(자하문)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매우 험하며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막아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동소문을 거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리하므로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문을 폐쇄하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두었다.
다만 한재(旱:가물 한 災:재앙 재)가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이고 남은 양인 까닭에 한재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1416년(태종 16)에 처음 시작하였다. 숙청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도 전하는데, 그것은 숙청문이 여자의 방위에 있기 때문이다. 숙청문은 1504년(연산군 10)에 조금 동쪽으로 옮겨 세웠는데 이때 석문만 세우고 문루는 건축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어느 때부터 무슨 이유로 숙청문을 숙정문(肅靖:편안할 정 門)으로 이름 바꾸었는지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중종 이후부터는 숙정문으로 불렀다.
숙청문은 다락 없는 암문으로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창의문을 이와 대신하여 흔히 북문이라고 하였다. 1976년 대통령의 특명으로 백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할 때 태조 창건 당시의 제도에 의하여 문루를 건축하고 숙정문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홍화문(弘化門. 혜화문)
태조 이성계의 도성계획에 따라 1396년(태조 5) 9월 처음으로 만들어졌는데 당시의 이름은 홍화문이었다. 동소문인 홍화문은 창경궁이 만들어지고 정문의 이름이 홍화문이 됨에 따라 1511년(중종 6)에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744년(영조 20)에는 문루를 만들었다. 북대문에 해당하는 숙정문이 대개 닫혀 있으므로 동소문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도시계획이라는 명분으로 문루를 헐었고 1939년에는 석문마저 없애 버렸다. 1992년부터 3년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광희문(光熙門.. 수구문)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 혹은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과 함께 시체를 내보내던 문이다. 광희문은 1396년(조선 태조 5)에 도성을 만들 때 동남쪽의 문으로 다른 문과 같이 홍예와 문루를 건설하였다.
1422년 도성을 고칠 때 이 문을 고쳤다는 기록은 없지만 당시 도성을 돌로 된 석성으로 개축하였으므로 광희문도 함께 고쳤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1711년에 광희문을 고치고, 문루는 나무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중에 고치기로 하였다고 한다. 1719년에 문루를 세워 광희문이란 현판을 걸었다. 1915년경 문루가 자연 붕괴된 후 홍예만 남아 있게 되었다. 또 1966년에 문 북쪽의 성곽 일부를 철거하고 도로를 확장하였다.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는 등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자하문고개 혹은 창의문고개라 하였다. 고개 마루턱에 자하문(紫霞門)이 있으므로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자하문의 정식 이름은 창의문(彰義門)으로서 도성의 북문인 숙청문(肅淸門)에서 서쪽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있다. 창의문을 속칭 자하문이라 한 것은 창의문이 자핫골(지금의 청운동)에 있으므로 해서 생긴 속칭이다.청운동 일대는 골이 깊고 수석이 맑고 아름다워서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고 하여 자핫골이라 하였다. 그리고 창의문을 장의문(莊義門 혹은 藏義門)이라고도 하였는데, 그로 해서 청운동·적선동 일대를 장의동(莊義洞), 줄여서 장동(莊洞)이라 칭하였다. 또 성밖 신영동에 있던 장의사(藏義寺)의 이름에 연유하여 일명 장의문(藏義門)이라고도 하였다.
창의문은 도성 4소문의 하나로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의 서쪽 날개부분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다. 태조 5년(1396) 서울성곽과 4대문 4소문이 건설될 때 함께 건립되었다. 그런데 창의문은 건립된지 18년 만에 한때 폐쇄되기도 하였다. 태종 13년(1413)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백악산 동령(東嶺)과 서령(西嶺)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아니 된다 하여 동령에 있는 숙청문과 서령에 있는 창의문을 막을 것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두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원래 이 두 문은 높은 산중턱에 위치하여 길이 매우 험하고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으므로 숙청문에서는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 밖 경원가도로 나가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고, 창의문에서는 서쪽으로 세검정 골짜기로 빠져 나와 홍제원의 경의가도로 나가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또한 경원가도와 경의가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데에는 각기 동소문과 서소문을 이용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하므로 두 문을 폐쇄하여도 별반 지장이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후 세종 28년(1446)에 창의문에 대한 출입통제가 완화되어 왕명을 받아 출입하는 외에는 항상 닫고 열지 않도록 하였으나,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 9월 2일에 혜화문과 창의문을 닫으라는 명을 내린 것을 보면 항상 닫아 두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도성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창의문은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은 양식의 축대를 조그만 규격으로 쌓고 그 위에 단층 문루를 세웠다. 정면 4간, 측면 2간,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구성된 이 목재 문루는 견실하고 정교하며 홍예(虹霓: 석조로 된 무지개 모양의 문틀) 또한 아담하다. 지금도 성벽의 일부가 연속되어 있다.
○소의문(昭義門. 소덕문. 서소문)터
서소문이라 불렸던 사소문의 하나로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 서소문동 큰길에 있었는데 일반적인 통행로가 되었고 광희문과 함께 시체를 성밖으로 운반하던 통로 구실을 하였다. 이 문의 창건 당시인 1396년(태조 5) 9월에 다른 성문과 함께 지어졌을 때는 소덕문(昭德門)이라 하였다. 이 부근은 지대가 낮아서 태조 때 토성을 쌓았던 곳이며 1422년(세종 4)에 이것을 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미루어 소덕문으로 고쳐서 지었으리라 생각되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다. 소덕에서 소의로 문의 이름을 바꾼 것은 1472년(성종 3)에 예종의 비인 한씨의 시호를 소덕왕후(昭德王后)라고 했기 때문에 이것을 피하여 문 이름을 소의로 고쳤다고도 하고, 1738년(영조 14)에 문을 고치면서 문의 이름도 바꾸라는 왕명에 의하여 1744년에 이름을 소의로 고쳤다고도 한다. 소의문은 1914년 일제에 의한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었다. 문의 형태는 광희문과 비슷해서 성보다 약간 높게 석축을 쌓고 가운데 홍예문 하나를 내어 통로를 마련하였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집이었다.
▲사진 출처:큰 사이즈 사진=머털 그림은 겸재 정선의 작품.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인 한양 도성. 조선 건국 초기 도시를 방어하고 치안을 유지할 목적으로 쌓았기 때문에 여느 산성보다 문이 많다. 도성의 성문이라면 으레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남대문)과 보물 1호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등 사대문만 떠올리지만, 중요한 보조 역할을 하던 네 개의 소문(小門)도 있었다.
도성 동북 방향에는 홍화문(弘化門·뒤에 혜화문·惠化門으로 고침), 동남에는 광희문(光熙門), 서남은 소덕문(昭德門·뒤에 소의문·昭義門으로 고침), 서북에는 창의문(彰義門)이 있었다. 소의문을 제외하고 모두 남아 사적 10호로 관리되고 있다.
도성 성문의 원형을 보고 싶으면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는 창의문으로 가야 한다. 흥인지문은 1869년 새로 고쳐 지었고, 숭례문도 불탔다가 올해 다시 복구되면서 영조 때인 1741년 복구한 창의문이 가장 오래된 성문이 됐다.
창의문은 1396년 세워졌으나 ‘문을 열어 놓으면 왕기가 빠져 나간다’는 풍수사들의 주장에 따라 200년 넘게 문을 걸어 잠갔다. 하지만 이 문은 한 번은 뚫렸고 한 번은 뚫릴 뻔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을 거쳐 이 문을 도끼로 부수고 궁내로 진격했다. 지금도 반정공신들의 이름이 현판에 남아 있다. 1968년 1·21사태 때는 무장공비의 청와대 침투가 창의문 인근에서 분쇄됐다. 이때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 동상과 정종수 경사 순국비가 남아 있다.
인왕산 자락 청계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펼쳐져 세검정과 함께 풍류객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창의문 주변은 지금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급수 지표종인 도롱뇽이 무리지어 사는 백사실 계곡이 가깝다. 윤동주문학관과 부암동 카페촌 등 볼거리가 많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버스 1020, 7212, 7022번을 타고 ‘자하문고개·윤동주문학관’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동남쪽의 광희문은 청계천(오간수문)·이간수문이 가까워 수구문(水口門)이라 했고, 도성의 장례 행렬이 통과하던 문이어서 시구문(屍口門)으로도 불렸다. 아무리 지독한 병마라도 수많은 원귀에 단련된 수구문에는 못 당할 것이라 하여, 광희문의 돌을 갈아 만든 돌가루가 ‘수구문 돌가루’라는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다. 일제강점기에 문루가 망가졌다가 1975년 문을 남쪽으로 옮겨 문루와 함께 복구했다. 지하철 2·4·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 출구로 나오면 찾을 수 있다.
혜화문은 원래 홍화문이었으나 창경궁 정문을 홍화문으로 정하자 이름을 고쳤다. 1928년 일제가 문루를 헐어냈고, 1939년에는 돈암동행 전차 선로를 부설하면서 성문마저 철거했다. 1994년 복원된 혜화문은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로 나와 혜화동 방향 고갯길로 오르면 보인다. 도성 내에서 서쪽으로 시체를 내보냈던 소의문은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으로 철거돼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중구 서소문동에 소의문 터 표석만 남아 있다.
30일까지 열리는 ‘2013 한양 도성 주간’에 참여하면 사대문과 사소문을 비롯한 한양 도성을 만날 수 있다. 28∼30일 오후 6시 30분부터 오후 9시까지 ‘한양 도성 달빛기행’이 진행된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출발해 돈의문 터∼월암공원∼홍난파 가옥∼국사당 전망대∼황학정∼사직단을 거쳐 사직공원까지 돌아오는 코스다. 서울스토리(www.seoulstory.org) 참조.
고종때 약한기운 보강 ‘之’자 넣어 한양도성 사대문과 사소문의 이름은 모두 세 글자인데 유독 동대문만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네 글자일까. 사대문을 축성할 때 유독 ‘흥인문’ 때문에 속을 썩였다. 도성 물이 빠져 나가는 동쪽의 지반이 약해 석축이 기울어 대대적인 보강공사를 해야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동대문을 통해 도성으로 입성하자 ‘좌청룡(낙산)의 기세가 약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나왔다.
이 때문에 1869년 고종 때 ‘흥인문’을 다시 지으면서 이름에 산맥을 뜻하는 ‘갈 지(之)’ 자를 넣어 좌청룡의 약한 기운을 보강했다고 한다. 도성 문의 현판 가운데 숭례문만 세로로 씌어 있는 것 역시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풍수지리학적 조치였다. 이 때문인지 임진왜란과 6·25전쟁도 무사히 넘겼지만 2008년 2월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 광화문
2018.02.15 대원군의 光化門, 박정희의 광화문
원형 찾는다는 광화문 현판 교체, 결국 박정희 흔적 지우기 태조·대원군·박정희의 광화문… 시대별로 나름의 역사이고 문화 문화재 原形 강박 벗어나 당대 재료·기법 과감히 활용해야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광화문 현판이 내년 상반기에 다시 바뀐다. 이유는 현판 색상의 오류다.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되어 있는 지금 현판은 1902년과 1916년에 각각 촬영된 도쿄대 및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 건판 사진을 근거로 제작됐다. 그런데 작년 초 1893년 무렵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광화문 고사진이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서 발견됐다. 이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문화재청은 광화문 현판이 본래 검은색 바탕에 금박 글씨라고 결론 내렸다.
이로써 우리는 2010년 경복궁 복원 이후 10년 가까이 엉뚱한 현판을 쳐다본 꼴이 되었다. 그렇다면 내년에 등장할 검정 바탕, 금박 글씨는 과연 원형일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광화문 현판에 대한 새로운 물증이 언제, 어디서 또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조선 왕조 정궁의 정문 현판을 반신반의하며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다. 광화문 현판이 '뜨거운 감자'로 처음 부상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다. 그때까지 걸려 있던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을 광화문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격 교체하려던 시도가 발단이었다. 대원군의 지시로 광화문 중건(重建)을 지휘했던 임태영의 글씨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2006년에 시작된 광화문 복원 사업이 일단락되면서였다. 지금의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 한문 '門化光'(문화광)이 그것이다. 훈련대장이었던 그는 천주교 박해에 앞장선 인물이다.
1395년 조선조 개국 직후에 창건된 광화문은 자신의 원형을 스스로 기억하지 못한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소실된 광화문은 19세기 말까지 약 270년 동안 황폐화되어 있었다. 대원군이 광화문을 다시 세웠지만 60년 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건설하면서 경복궁 동문 쪽으로 위치를 옮겼다. 그나마 6·25전쟁 때는 2층 누각이 모두 불탔다. 광화문이 지금 자리에 그나마 형상을 회복한 것은 1968년 박정희 정부에 의해서이다. 박정희는 광화문의 원형을 완벽하게 복원하지 않았다. 창건 과정에 대한 실증적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에 대원군의 광화문 공사에도 한계가 많았다.
박정희는 '영구미제'(永久謎題)일 수밖에 없는 광화문의 원형에 집착하는 대신 1960년대 후반 근대화 시대의 한국사회 상황을 적극 반영했다. 대표적인 것이 콘크리트조(組) 복원과 친필 한글 '광화문' 현판이다. 이 대목이 훗날 박정희 정권의 문화적 '야만'과 정치적 '독재'를 비판하는 빌미가 됐다.
돌이켜보면 당시는 목조 문화재의 콘크리트 건축이 시대적 유행이었다. 비슷한 시기 일본 최초의 불교 사찰 시텐노지(四天王寺)도 시멘트 콘크리트로 복원되었다. 그 무렵 특히 우리나라는 산림 자원을 보호하느라 목재를 극도로 아꼈다. 이를테면 전신주나 침목이 콘크리트로 바뀌던 시대였다. 1968년은 한글 전용 5개년 계획의 원년이기도 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한글 현판 자체가 발상의 전환이었는데, 서예에 조예가 있던 당시의 무인 출신 대통령이 직접 붓을 든 것이다.
작금의 광화문 현판 논쟁은 겉으로 원형 타령이지 결과적으로는 박정희 흔적 지우기의 일환이다. 최근에는 현충사의 박정희 친필 현판 철거와 도산서원 내 '박정희 금송'(金松)' 이전 문제까지 불거져 있다. 물론 명분은 하나같이 문화재의 제 모습 찾기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문화재 복원과 관련하여 전통이나 원형을 유난히 앞세운다. 하지만 10년 전 화재로 전소된 숭례문 복구 과정이 보여준 것은 총체적 위선과 부실, 그리고 사기였다. 원형 복원이랍시고 제막식까지 거행한 현재의 광화문 현판조차도 두 달 만에 균열되었다.
문화재 보존에 관련된 국제적 규범, 베니스헌장에 의하면 '추정이 시작되는 순간 복원은 멈춰야 한다.' 선진국들이 원형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당대의 재료와 기법을 문화재 복원 과정에 과감히 활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루브르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나 오사카성의 엘리베이터도 언젠가는 역사가 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만큼 태조의 광화문, 대원군의 광화문에 이어 박정희의 광화문도 나름의 역사고 문화다. 그럼에도 박정희의 현판이 여전히 못마땅하다면 밑도 끝도 없는 원형을 쫓아다니는 대신 첨단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신소재 현판을 21세기 한류(韓流)의 힘으로 새로 만들면 어떨까. 걸핏하면 떼었다 붙였다 하느니 저간의 경과와 쟁점을 사실대로 밝힌 채 판단과 감동은 국민 각자에게 맡기면서 말이다.
▲광화문과 청와대
▲광화문의 빛나는 스크린 작품 13. 8. 12.밤'
▲광화문 빛 너울 - 13. 8.15. 미디어 파사드 영상작품으로 변한 광화문
■독립문의 역사
건립 122년만에 이방인의 사진을 통해 드러난 독립문에 얽힌 사실들
▲독립문 관련 사진을 제공한 정성길씨.
독립문은 그 동안 대한민국에서 홀대받아왔다. 우리의 무관심 탓이었다. 그러나 건립 122년만에, 한 이방인의 사진을 통해 독립문에 얽힌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30년이 넘는 필자의 사진 인생을 통해 발굴한 이 사진들은 1세기가 넘는 세월에 묻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 했던 사실을 직시하게 해 준다. 우리 문헌에도 없는 역사를 되찾을 수 있도록 사진을 제공해 준 독일인 마이어씨의 후손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독립문은 우리나라가 자주 독립한 나라임을 대내외에 알리고자 했던 선인들의 뜻에 기반해 건립되었음을 우선 알아야 한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1897년 독립문을 건립할 때는 무악재 고갯길이 독립문의 아치 사이로 보인다. 지금 옮겨진 독립문은 원형대로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아치 방향이 무악재가 아니라 서대문 형무소 터를 바라보도록 한 것은 본래의 건립 취지를 배재한 치명적 실수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더구나 아직 그 의미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수치다.
▲서대문 밖에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문이다. 우측 전신주는 조선정부가 1885년 서울~의주 간에 가설했던 전신주와 전선이 보인다.
사적 제32호인 독립문을 이런 식으로 해체해 이전한 것은 문화 파괴행위이다. 독립문에 담긴 중요한 사상과 취지를 알지못한 채, 어떤 명분도 없는 단순 조형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경복궁의 화재 예방 차원에서 풍수지리설에 근거해 광화문 앞에 세웠던 해태상을 지금 와서 다른 곳에 옮기고, 다른 쪽으로 보도록 한다면 해태상의 존재가 필요 없거나, 의미가 훼손되는 것과 같은 논리로 봐야 할 것이다
▲영은문과 독립문. 무악재를 일치되도록 촬영한 가장 정확한 전경이며 태극기 깃봉도 함께 볼 수 있다.
오늘 이 시점에서 관련 사진을 공개하는 것은 단순히 독립문의 변천사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독립문을 이전하면서 본래의 건립취지와 다르게 왜곡되어버린 ‘역사’를 되새김질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사진을 보면 분명히 독립문이 영은문보다 약 40~50m 앞쪽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라도 독립문 아치가 다시 무악재를 마주 보도록 해야 제대로 된 문화유산으로 후손에게 물려 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도로포장은 이미 시멘트 포장처럼 정비가 잘 되어있다. 우측갓길도 석축으로 쌓아 올려진 모습이 선명하다.(우측)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이다. 그래서 대륙에서 육로를 통해 조선에 들어 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무악재 고갯길이었다.
당시 무악재 고갯길은 일반인의 발길이 닿기 쉽지 않았다. 또한 이방인들도 각종 신식문물을 나귀에 싣고 한양으로 들어올 때면 산적들이 많아 며칠간 동행을 모아 고개를 넘어 간다고 해서 무악재(모아재)라는 속설이 생겨난 것이다
▲육중한 영은문 주초석 앞에서 민초들이 모여 고갯길을 넘어갈 동행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
명나라 때 청기와를 올려 연조문(延照門)이라 부르던 것을 이후 영은문으로 개칭해 중국 사신을 영접했다. 이런 위치를 감안해 볼 때 이곳은 북쪽지방에서 한양에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이방인들은 독립문에서 서대문 사이 ‘의주통’이라 불렀던 길목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이같은 사진을 촬영했을 것이다.
▲독립문 아치 사이로 무악재를 보도록 촬영 한 것이다. 영은문 주초석(기둥) 연결부분은 뜯지 않은 상태가 선명하게 보여진다.(채색된 컬러)
무악재길은 절개된 돌산이다. 가파른 고개다. 영은문의 주초석(기둥)은 이곳에서 제작되었다. 독립문의 1850개 석재들도 같은 재질이다 독립문이 영은문보다 한발이라도 앞쪽에 건립해 이방인을 더 가깝게 맞이하고 알리기 위해 세운 뜻을 이제서야 이 사진을 통해 규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은문을 헐고, 그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는 학설이 완전 왜곡 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주초석과 기반석.(1970년대) 한양을 떠날 때 보이는 현판은 우리말 ‘독립문’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본인은 그간 사진을 근거로 잘못된 문화재의 역사를 지적해왔다. 그러다보니 칭찬보다 욕먹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을 먼저 찾아 나선 것 뿐이다. 이렇게 역사를 밝히지 않으면 또다시 독립문은 개발 열풍 속에 훼손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영은문과 독립문 간의 거리를 예측할 수 있고 우측은 모화관 주변이다. 한양에 들어올 때 보이는 현판은 한문으로 된 ‘獨立門’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조건 철거하고 복원하는 것 보다 문화재가 세워진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원형대로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진솔하게 물려주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역사 앞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 紫霞門(자하문) - 彰義門(창의문)
■ 홍례문
▲홍례문을 찿은 이방인들
▲경복궁 홍례문
▲창덕궁 숙장문 - 이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