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10/ 문화재3/
■ 2016.08.25 이야기가 있는 옛 도읍 문화재 야간 기행
지지난 19일 경주 대원릉 내 황남대총이 반월처럼 따뜻하게 빛나고 있다. 심야의 하늘은 심해처럼 푸르고, 한 관광객이 등불을 들고 이 사이를 거닐고 있다. 이날 황남대총 맞은 편에 떠 있던 달이 사진에 보이지 않아 따로 찍어 붙였다.
경주 월지 위에 누각 한 채가 도렷이 떠 있다.
지지난 20일 부여 궁남지에 밤이 내려앉았다. 포룡정이 물 위로 뜨거운 여의주를 뱉어내는 것 같다. 산발한 버드나무가 전설이 어울리는 푸른 빛깔을 입은 채 흔들린다. 달밤이었으나, 역시 한 사진에 모두 담기지 않아 따로 찍어 붙였다.
정읍사지 5층 석탑이 은(銀)처럼 빛난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경주 유적지의 옛 모습들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 1910년대 복원하기 전 청운교 백운교의 돌계단이 어스러진 상태.
뒤로 다보탑, 석가탑이 보인다.
첨성대 - 1920년대 첨성대 뒷길을 오고가는 사람들...
포석정 - 1910년대
포석정과 바지, 저고리 입은 아이들
성덕대왕신종(에밀레 종) 이전 - 1915년대
봉황대에 있던 종을 경주고적보존회 (현 경주문화원)로 옮기고 있다
봉황대의 오솔길 - 1950년대
노동. 노서동 일대의 전경. 봉황대에는 오솔길이 나 있다
태종 무열왕릉비
비석은 없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삼존불 - 1930년대
남산 삼불사에 있는 불상으로 지금은 보호각을 설치했다.
석조약사여래좌상 - 연대미상
경주남산 용장계곡에 있던 불상 지금은 머리와 광배가 복원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석조여래입상 - 1920년대
왕정곡 제2사지 석조여래입상으로 하반신이 땅에 묻혀 있다. 지금은 경주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감은사 - 1950년대
북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안압지 - 1950년대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뒷산은 소금강산.
일제때 세운 임해정은1977년에 황성공원으로 옮겼으며, 지금의 호림정이다
황남동 고분 - 1920년대.
갓 쓰고 한복 입고 나귀 몰고 간다
황남동 고분 - 1920년대.
죽은 아이를 넣은 옹기를 지게에 지고 묻으러 가는데 일본 순사가 검문한다
삼 릉.
아이들이 지게 지고 나무하러 가다가 삼릉에서 놀고 있는 모습
경주 집경전 - 1922년대.
조선 태조의 영정을 모셨던 곳으로 1960년대 초까지 건물 일부가 남아 있었다.
사진은 집경전의 비각으로 추정되며 현재 경주여중 교정 동편에는 집경전 옛터라는 비석만 서 있다.
솥전 - 1910년대.
경주 읍성 밖에 장이 열리고 솥 가게에 손님이 많다.
경주 중심가 - 1930년대.
지금의 중앙로에서 대릉원 쪽으로 바라본 모습
경주 기생 - 1914년 4월
경주고적보존회(현 경주문화원)의 온고각 앞에서 기념촬영
스웨덴 쿠스타프 황태자 - 1926년대.
서봉총 발굴 현장을 찾은 스웨덴 황태자 쿠스타프(왼쪽에 안경 쓰고 무릎 꿇은 사람)와 일행. 스웨덴의 한문 표기인 서전(瑞典)과 출토된 금관에 새겨진 봉황(鳳凰)에서 한 자 씩 따서 서봉총(瑞鳳塚)이란 이름이 명명되었다.
■ 훼손되기 전의 조선시대 궁궐 모습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1927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을 때 건춘문 동쪽으로 이건되기 전 모습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식민지시대 유리건판 사진으로 이를 확대하면 '光化門'이란 현액 글씨가 뚜렷하다.나아가 그 전면 월대를 포함한 광화문 전경이 비교적 잘 드러난다.
열린 우협문 안으로 보이는 흰색 가건물 지붕 일부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건물로 추정된다.
이로써 보건대 조선총독부 청사 착공 직후에 촬영했다고 판단된다.
▲조선총독부서 찍은 경복궁 근정전 주변 사진. 전각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원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1867년 조대비(趙大妃)를 위해 지은 경복궁 자경전.
이곳은 이후 두 차례 화재를 만났다가 1888년(고종 15) 재건됐다. 꽃담으로 유명한 이곳 서측 담장에는
꽃 문양이 베풀어져 있다.
문양은 꽃 아홉 개와 문자 아홉 개가 서로 짝을 이루고,나머지 한 개는 꽃과 나비 등을 조합한 것이다. 현재의 자경전 꽃담에는 아홉 개가 아닌 여덟 개 꽃 문양이 남아 있다. 윗쪽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식민지시대 유리건판 사진이며 아래쪽은 그 현재 모습.
▲경복궁 자경전 꽃문양
▲앙부일구는 조선 1434년(세종 16)에 장영실이 만든 해시계로 창덕궁 소장품으로 현재 여주영릉전시관과
창덕궁에 전시중이다.
현재 이 앙부일구는 다리를 포함한 몸체가 받침돌 위에 노출돼 있으나 (오른쪽) 일제강점기 때 유리건판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는 받침돌에 몸체가 감입돼 앉힌 모습이다.
나아가 대석 옆쪽으로 빗물이 빠져나오게 하는 구멍이 뚫려 있음이 확인된다.(왼쪽과 가운데) 앙부일구 원래 모습을 고증할 수 있는 사진이다.
▲창덕궁 원래 위치 보루각에 있을 당시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다.
이들 유리건판 사진에서 자격루는 청동으로 만든 파수호 하나, 수수호 둘, 그리고 수수통 둘만 남아 있으며
부표는 없어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수수통 양 옆에는 측우기와 석조대와 위치한다.
▲자동 시보장치 물시계인 자격루는 현존품은 1536년(중종 31)에 제작한 작품으로 현재 덕수궁에 옮겨져 있다
▲조선국왕 용상 뒤에 설치한 그림병풍인 일월오봉병으로 식민지시대 유리건판에 촬영된 경복궁 근정전(윗쪽)과 덕수궁 중화전 (가운데)작품.
이에는 한결같이 해와 달 부분에 금속판이 붙어 있으나 현재의 일월오봉병(아래쪽)에는 이 금속판이 없다.
▲1935년 경복궁 건청궁 터에 조선총독부종합박물관을 짓기 위한 지진제를 지내고 있다.
일본 신도(神道) 방식으로 식장이 차려지고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조선총독이 절하고 있다.
건청궁은 명성황후 민비가 시해당한 현장으로 총독부는 이를 모두 철거하고 종합박물관을 지으려고 했다가 전시체제가 확산됨에 따라 총독부미술관을 짓는 데 그쳤다
▲1929년 지금의 경복궁 건춘문 일대로 옮긴 광화문 문루에서 본 경복궁 동쪽 궁성과 건춘문, 동십자각 일대 전경. 왼편에 중학천이 흐르고 그 동편에는 민가들이 밀집해 있다.1929년 박람회로 궁성이 파괴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붕괴사고 현장.
궁장 대부분은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지만 그 바로 옆은 무너져 있다. 이 붕괴사고는 1926년 4월27일 오전 10시에 일어났으며 그 원인은 영추문 바로 옆을 종점으로 해서 운행된 전차의 진동 때문이라고 매일신문 4월29일자 기사에서 확인된다
▲동경에 거주하던 이왕세자와 그 왕비 등 일행이 1922년 일시 귀국했을 때 희정당에 도착하는 장면.
자동차에서 내리는 여인은 이왕세자비 이방자.
▲1922년에 고국을 방문한 이왕세자 일행이 동경으로 돌아가기 전 어느날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기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첫줄 왼쪽부터 정무총감 부인, 사이토 총독 부인, 의친왕비, 이방자여사, 순정효황후, 순종, 이왕세자, 의친왕, 사이토 총독, 정무총감 등의 순서다.
▲1922년 이왕세자 내외의 창덕궁 체류 중 후원 나들이를 촬영한 장면으로 보인다. 건물은 영화당이며, 맨 앞부터 뒤로 순정효황후, 이왕세자, 이방자, 덕혜옹주 등이 보인다
■ 한국의 석탑
2015-05-03 사진·글=양현모 동아일보
<1>경주 감은사지 3층 석탑 (신라시대·국보 제112호)
▶사진작가 양현모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찍은 ‘한국의 석탑’을 주 1회 연재합니다. 작가는 석탑 뒤에 검은 장막을 내려 탑이라는 피사체만 조명하는 독특한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만나는 석탑들은 단아함과 군더더기 없는 깨끗하고 완벽한 비례를 보여줘 한국 문화의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합니다.
<2>신복사지 3층 석탑
▲고려시대·강원 강릉시 내곡동·보물 87호
잘생긴 탑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석조상(석조보살좌상·보물 84호)이 이색적인 탑이다. 탑 앞에 공양을 드리고 있는 석조상 보살이 걸치고 있는 옷 모양까지 섬세하게 남아있고 무엇보다 살짝 미소 짓는 온화한 얼굴이 아직까지 잘 남아있다
<3>춘궁리 5층 석탑 (고려시대)
▲경기 하남시 춘궁동에 있는 높이 7.5m의 5층 석탑이다.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5층의 탑신(몸체)이 서 있다. 가장 꼭대기인 ‘상륜부’는 날아가고, 장식 부분인 ‘노반’만 남아있다. 안타깝게도 남쪽 면이 많이 부서져 내부가 보인다. 탑신 1층을 2단으로 구성하는 방식은 고려 때 시작됐다. 짜임새보다는 웅장한 느낌이 강하다.
<4>개심사지 5층석탑 (고려 현종)
▲경북 예천읍에 가면 절터도 거의 남지 않은 곳에 덜렁 탑 한 기가 서 있다. 고려 현종 때 건립된 개심사라는 절터다. 개심사지 5층 석탑은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몸체 구조로 이뤄져 있다. 하층 기단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는데, 모두 사람의 몸에 각 동물의 얼굴을 하고 있다. 새김이 굉장히 세밀하다. 전체적으로 힘이 넘치는 석탑이라 할 수 있다.
<5>낙산사 7층석탑(보물 제499호)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낙산사 안에 있었으나 몇 해 전 화재로 손상됐다. 길쭉한 비례감과 기단부에 새겨진 스물네 잎의 연꽃무늬가 포인트다.
<6>신륵사 다층석탑 (보물 제225호·조선시대)
▲경기 여주시 신륵사 다층석탑은 특이하게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기단부에는 연꽃무늬와 함께 상층 벽면에는 운룡문이, 하층 벽면에는 파도문이 새겨져 있다. 문양들이 정교하고 몸체에 대리석 특유의 마블이 드러나 탑의 수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상단부는 날아가고 7층까지만 남아 있다.
<7>진전사지 3층 석탑 (국보 제122호)
▲진전사지 3층 석탑의 높이는 5m에 달한다. 현재 절터에 이 거대한 탑만 남아 있다. 진전사는 8세기 후반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부와 1층 탑신에 새겨져 있는 부조가 눈에 띈다. 유려하게 천의자락을 날리는 ‘비천’과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부조물의 대비가 돋보인다.
<8>도갑사 5층 석탑
▲(보물 1433호·고려 초기로 추정)
전남 영암 월출산 도갑사에 있는 석탑이다. 탑의 전체 모습이 하늘을 향해 날개를 휘저으며 맹렬히 솟구쳐 오르는 한 마리의 매와 같아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눈이 오는 날 달려가 눈을 맞고 서 있는 석탑을 다시 찍고 싶다.
<9>신륵사 삼층석탑
▲(경기 여주시·고려시대 추정) 선비를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부끄러움에 말도 못 하고 서 있는 여인의 모습 같다. 2004년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33호로 지정되었다. 고려시대 말의 고승 나옹 혜근을 다비(茶毘)한 후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10>실상사 백장암 3층석탑
▲(통일신라 시대·국보 제10호) 통일신라 말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받침부가 매우 낮은 반면 1층 몸체는 폭에 비해 높다. 층마다 보살, 천왕, 선녀 등 다양한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다. 가까이에서 층마다 새겨진 조각들을 천천히 뜯어보아야 하는 탑이다. 화가가 몰래 숨겨둔 화첩을 넘겨보는 것처럼 인물 선이 아름답고 부드럽다
<11>월정사 8각 9층 석탑
▲(국보 제48호) 강원 평창군 월정사에 있는 고려 초기 대표적인 석탑 중 하나다. 몇 차례 화재에도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왜 저 탑이 하늘을 향해 놓인 계단으로 보이는 걸까. 세월호 영령들이 저 계단을 밟고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며 천천히 셔터를 눌렀다.
<12>화엄사 4사자삼층석탑
▲(통일신라시대로 추정. 국보 제35호)
전남 구례군 화엄사 각황전 뒤편, 동백나무 숲을 끼고 있는 돌계단 위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는 탑이다. 삼층 기단 부분에 사자 네 마리가 기둥처럼 서서 탑을 받들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 합장을 한 승상 조각물이 서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13>당진 안국사지석탑
▲(고려 중기 추정, 보물 제101호) 세월 속에서 주름이 잡히고 숭숭 이빨이 빠진 시골길 할아버지의 모습. 충남 당진 안국사지석탑이 그런 이미지다. 세월의 억센 손에 무너져 탑신은 1층만 남았고 마치 길거리에 박혀 있는 큰 바윗돌 두 개를 대충 다듬어 놓은 듯한 장대석을 받침돌로 삼았다. 한때 결이 곱고 우람한 체격의 젊음을 뽐내고 서 있었을 것이다
<14>화엄사 서오층석탑
▲(신라 시대, 보물 제133호) 4사자삼층석탑과 함께 구례 화엄사를 대표하는 석탑이다. 이중 기단에 5층의 탑신을 지니고 있다. 십이지상(十二支像)을 비롯해 사천왕상, 인왕상, 팔부중상이 새겨져 있다. 탑의 아름다움에 젖어들면 세상의 시름이 잠시나마 잊힐까.
<15>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고려시대, 국보 제289호)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있는 고려의 백제계 오층석탑이다. 가벼운 새의 날개처럼 쫙 펼쳐진 지붕틀은 평평하고, 탑신부 1층의 지붕틀이 기단보다 넓은 점으로 보아 백제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이 석탑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국보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16>정림사지 5층 석탑
▲백제시대, 국보 9호)
충남 부여에 남아 있는 정림사지는 백제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낮은 기단에 5층의 탑신이 얹혀 있는 석탑은 균형 있는 비례감이 특징이다. 각 위치의 돌들은 서로 짜임새 있게 잘 맞추어져 있다. 1층의 탑신에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의 업적을 새긴 것이다. 백제의 깔끔한 조형미를 보여주는 대표적 유물이자 외부의 침략으로 상처 입은 국가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역사적 산물인 셈이다.
<17>향성사지 3층석탑
▲(신라시대·보물 제443호) 신라 진덕여왕 7년, 지장율사가 창건한 향성사에 서 있는 삼층석탑이다. 향성사는 그 이름만 전해질 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서일까, 탑의 모습은 고아가 길가에서 오들오들 떨며 눈을 맞고 있는 것 같다. 아니, 그 아이가 수백 년 기다리다 탑이 되어버린 걸까. 설악산이 펼쳐진 속초시 설악동 동해안 가장 북쪽에 자리 잡은 신라시대 석탑이다
<18>실상사 서3층 석탑
▲탑은 기단과 탑신, 상륜으로 나뉜다. 오랜 세월을 견뎌 왔지만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보기 드문 탑이다. 탑신의 형태가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이다. 동서 양쪽에 탑이 세워졌는데, 그중 서탑이다. 청명한 가을, 가끔 낙엽이 떨어지는 날 하루를 잡아 동탑을 마저 찍을 것이다.
<19>묘적사 8각7층 석탑
▲(향토유적 제1호)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묘적사에 있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8각9층 석탑과 묘적사와 인접한 수종사의 8각5층 석탑과 함께 모양이 비슷해 한 어머니 배에서 나온 3형제를 보는 것 같다. 기단석 아래위로는 연꽃무늬가 배치되어 있고 8각의 탑신 면마다엔 기둥이 새겨져 있다. 3층과 4층 사이가 부자연스러워 본래 탑 높이는 9층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문경 봉암사 3층석탑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보물 169호)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탑은 아니다. 탑이 있는 봉암사가 1년에 사월 초파일 딱 하루만 개방되기 때문이다. 득도한 수도승인 양 힘차게 서 있는 탑의 특징은 기단이 단층이고 긴 세월 동안 탑의 머리 장식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각층의 비례가 매우 조화롭고, 단조로우면서도 세련미가 넘쳐 은은하게 눈길을 사로잡는다.
<21>사자빈신사터 4사자 구층 석탑
▲(충북 제천·고려시대·보물 94호) 때로 조용히 탑을 바라본다. 소란하고 바쁜 일상에서 나도 모르게 지은 죄는 아마도 탑 몇 기는 족히 세웠을 것이다…. 이 탑의 특징은 기단부에 있는 네 마리 사자상이다. 원형은 9층 석탑이지만 4층만 남았고 왕과 나라와 불법의 융성을 기리는 뜻에서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22>미륵리 3층석탑
▲(충북 충주시·고려 시도유형문화재 33호)
인간의 마음은 조변석개이지만 탑은 수천 년 수백 년 세월을 이기고 견고하게 서 있다. 이 석탑도 마찬가지다. 언뜻 별 특색 없이 밋밋하게 서 있는 것 같지만 묵묵히 우리 생을 품어주는 미륵불 같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다. 왜 미륵사 터 경내로부터 500m나 떨어진 곳에 서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었다.
<23>미륵리 오층석탑
▲충주 미륵리·고려시대 추정·보물 제95호
눈이 오고 찬바람 불어도 꼼짝 않고 임을 기다리다 탑이 되어버린 여인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탑 꼭대기 부분은 곱게 단장한 쪽머리 같다. 2층 기단과 5층 탑신으로 이뤄졌고 높이는 6m다. 위로 갈수록 지붕돌은 급경사이고 추녀는 아주 짧다. 최정상엔 탑의 머리장식을 단단히 잡아주기 위해 긴 깃대 같은 쇠를 꽂아두었다.
<24>제천신륵사 3층 석탑
▲고려 초기, 보물 1296호
균형감과 조형미를 두루 갖춘 아주 아름다운 탑이다. 특히 최상층 머리 장식의 화려함은 한 마리 공작새를 보는 듯하다. 충북 제천 신륵사에 세워진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에 의거한 고려시대 초기의 탑으로, 제천을 대표하는 보물이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놓았다.
<25>거돈사지 3층 석탑
▲신라·보물 제750호 강원 원주에 있는 신라 9세기의 석탑이다. 통일신라의 3층 정형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높이는 5.3m. 거돈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 절터로서는 보기 드물게 절에 탑이 하나인 ‘일탑’식 가람이다.
<26>경주 서악동 삼층석탑
▲통일신라·보물 65호
아버지는 무뚝뚝했다. 하지만 내가 필요할 때 늘 울타리가 되어 주셨다. 든든했다. 이 탑을 바라보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 옆에 계신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세찬 빗줄기 앞에서 꿋꿋하게 서 있는 아버지 말이다. 이 탑은 돌을 벽돌 형태로 만들어 쌓은 모전탑이다. 위로 갈수록 몸돌의 크기가 작아 어색해 마치 몸에 안 맞는 양복을 입으신 나의 아버지 같다.
<27>경주 기림사 삼층석탑
▲시도유형문화재 205호
이끼가 탑을 끌어안고 있는 걸까. 탑이 이끼를 끌어안고 있는 걸까. 서로 배려하고 밀어주고 어려울 땐 손잡아주며 더불어 살아가라고 탑이 나에게 말하는 것 같다. 비교적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탑으로 정상부의 화려한 머리 장식이 눈에 확 들어온다. 지붕 돌 받침이 4단인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28>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통일신라시대 전기·국보 제38호
원효 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고선사 터에 있었으나 댐 건설로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전한 탑이다. 그래서인지 실향민을 보듯 쓸쓸해 보인다. 하지만 지붕돌을 보면 달라진다. 윗면의 경사가 넉넉한 품으로 흐르고 네 귀퉁이 끝은 하늘을 향해 치켜뜬 눈빛처럼 빛난다. 모든 탑은 오래볼수록 천 개 얼굴을 갖고 다양하게 다가온다.
<29>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국보 제37호 통일신라 효소왕이 아버지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탑이라 전해진다. 두 손을 포개고 기도하는 효소왕이 서 있는 듯한 모습이다. 탑 속에는 효소왕을 이은 아들 성덕왕이 선대 두 왕의 명복을 빌고자 금동 사리와 금동 불상을 넣었다고 한다. 효심을 상징하는 탑이다. 우리도 마음속으로 어머니나 아버지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탑을 세우는 건 어떨까.
<30>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국보 제30호)
▲외아들로 자란 나는 가끔 듬직한 형이 있었으면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집이 텅 비어 있을 땐 그런 마음이 더 들었다. 만약 형이 있다면 바로 저 석탑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바위를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 쌓은 모전석탑이다.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3층만 남아있다. 자연석으로 된 기단 위에 네 마리의 석사자상이 앉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31>경주 효현동 삼층석탑
▲걱정의 대부분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우리 마음 한가운데로 탑 한 기를 옮겨와 보자. 그 탑은 우리를 꼭 잡아줄 것이다. 2단에 3층의 탑신으로 이뤄진 통일신라의 석탑이다. 기단이 탑신보다 커 묵직해 보인다. 특히 지붕돌은 심술이 난 사람처럼 하늘을 향해 삐쳐 있는 것이 살아 숨 쉬는 듯하다.
<32>경주 마동 삼층석탑 (통일신라시대로 추정· 보물 제912호)
▲유명한 불국사를 지척에 두고 있는 탑이다. 지붕돌에는 5단 받침이 있고 네 귀퉁이와 아래 면에는 방울을 매단 구멍이 뚫려 있다. 특징이라면 그 어떤 장식도 무늬도 조각도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꾸밈이 없는 탑이다. 다보탑과 석가탑에 매료된 후 이 소박한 탑을 바라보면 또 다른 미적 체험을 하게 된다
<33>각화사삼층석탑
▲비지정문화재 금은보화와 명성, 권력을 내려놓고 초야에 묻혀 살며 무명의 촌로가 되어 버린 고관대작을 보는 것 같다. 천년고찰인 봉화 각화사에 있다. 비지정문화재이지만 지대석 위에 하층, 상층 기단이 있고 기단 사이에 판석 1장이 끼워져 있는, 보기 드문 양식이다. 높이 2.9m의 고려시대 탑으로 추정된다.
<34> 안동신세동칠층전탑 (국보 제16호)
▲높이 16.8m의 국내 최대 전탑이다. 일제강점기엔 탑 옆으로 철도(중앙선)가 놓였고, 개수·보수 과정에서 기단부의 모양이 왜곡되는, 수난의 역사를 이어온 탑이다. 원래 기와지붕을 얹고 화려한 금동상륜을 투구처럼 쓰고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35>선산죽장동오층석탑
▲국보 제130호 최초 탑을 낳은 건 사람이지만 탑을 가꾸고 기른 건 공기이고 바람이고 비이고 햇볕이다. 탑이 위대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10m가 넘는 장대한 오층석탑으로 사용된 석재만 수백 개다. 통일신라시대 최대의 석탑. 기단 바로 위에 불상을 모시는 감실이 딸려 있는 게 큰 특징이다
<36>춘천칠층석탑
▲보물 제77호
고려 중기에 세워진 것으로 춘천 시가지 중심에 터를 잡고 있는 석탑이다. 빼빼 말랐으나 키가 컸고 마음씨가 비단결 같던, 월남전에서 전사한 외삼촌과 흡사한 탑. 탑신은 위로 갈수록 크기가 줄어드는데 7층 높이라서 비례의 불균형이 보완돼 안정감을 준다.
<37>양평 용천리 삼층석탑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1호
빛으로 조성된 탑인 듯 눈이 부시다. 마치 수평선을 종잇장처럼 찢고 떠오르는 동해안의 일출을 보는 것 같다. 새해, 저 탑을 향해 소원을 빌어 보자. 탑신의 1층 몸돌을 다른 층에 비해 월등히 높게 만들어 놓은 게 특징인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38>홍천 괘석리 사(四)사자 삼층석탑
▲보물 제540호 유년 시절 어머니는 새참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밭길을 걸어오시곤 했다. 밭일을 하는 아버지와 나의 공복을 달래주기 위해서다. 탑신을 받치고 서 있는 저 네 마리 사자의 모습이 꼭 그 옛날 어머니의 모습 같다. 고려시대 석탑이다.
<39>다보탑
▲국보 제20호 감히 ‘탑들의 어머니’라 할 수 있겠다. 균형미와 세련미, 거기다 조형미까지 두루 갖춘, 한국을 대표하는 이 다보탑을 찍으려고 전국을 떠돌았는지도 모르겠다. 직선과 곡선을 마치 진흙 주무르듯 창출한 이 탑은 신라 8세기 중엽에 세워졌다. 목조 건축 기법을 도입한 아주 독창적인 석탑이다.
<40>김천 청암사 수도암 삼층석탑
▲보물 제297호 마음을 담지 않고 찍은 탑은 한낱 돌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어느 스님이 나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장인의 신심과 성심으로 차곡차곡 쌓여진 이 탑을 보며 흐트러진 초심을 다져본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1층 몸통 각 면에 조각된 여래좌상이 압권이다
<41>청량사 삼층석탑
▲봉화의 청량사가 아니라 경남 합천군 청량사 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고생 한 번 안 해 본 부티 나는 귀공자 같다고나 할까. 몸돌, 지붕돌 등 뭐 하나 흠이 없는 잘 균형 잡힌 몸매를 갖고 있다. 오래전 탑 맨 위층의 지붕돌에서 사리가 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42>춘천 서상리 삼층석탑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호 육체와 정신이 하나로 포개져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철학자의 모습을 한 석탑이다.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신라시대의 절 양화사의 옛 터라고 전하는 밭 가운데에 서 있다. 특별한 조각 무늬가 없는, 아담하면서도 짜임새가 있는 석탑이다.
<43·끝>월광사지삼층석탑(서탑)
▲보물 제129호 동과 서로 마주보고 있는 쌍탑으로, 이 중 서탑을 카메라에 담았다. 서탑은 기단의 중간 부분에 기둥 모양이 동탑보다 1개가 더 많은 2개이다. 2층 기단에 3층 탑신으로 구성된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무엇보다 안정감이 있어 보이는 게 큰 특징이다. 천하대장군처럼 매서운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