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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림은내고향 2022. 1. 16. 17:00

■한민족의 구성 

2020년 06월 04일  “한국인은 단일민족 아닌 동남아서 올라온 복잡한 혼혈”

박종화 UNIST 교수, 158명 현대인-115개 고대인 게놈 분석

“한국인은 수만년동안의 혼혈로 진화된 다인족민족"


한국인은 단일민족이 아니라 수만 년 동안 동남아시아에서 여러차례 올라온 사람들의 자손으로 이뤄진 복잡한 혼혈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박종화 울산과학기술원(UNIST) 생명과학부 교수가 대표로 있는 ㈜클리노믹스는 (재)게놈연구재단과 공동 연구를 통해 158명의 현대인과, 115개의 고대인 게놈을 분석해 ‘한국인이 수만년간의 혼혈로 진화된 다 인족(ethnic group) 민족으로 볼수 있다’는 분석결과를 3일 공개했다.

이번 연구는 지난 4만년간의 한국인의 기원과 유전적 혼합과정에 관한 정밀한 게놈분석의 연구결과다.

연구진에 따르면 한국인에게서 일어난 가장 최근의 혼혈화는 석기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선남방계(북아시아 지역)의 인족과 4000년 전 청동기/철기시대에 급격하게 팽창한 후남방계(남중국지역) 인족이 3대7 정도로 혼합되면서 지리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확인했다.

이는 총 273개의 게놈을 생정보학(bioinformatics) 기술을 이용해 수퍼컴퓨터로 분석됐다. 결론적으로 ‘한국인은 수 만 년 동안 동남아시아에서 여러 차례 올라온 사람들의 자손들의 복잡한 혼혈’이라는 것이다.

이번 연구는 수십년간 논쟁의 대상이었던, 까발리 스포자 박사의 중앙아시아 쪽에서 동쪽으로 대륙을 건너온 북방계와 남쪽에서 온 중국계 남방계가 혼합돼 한국인이 형성되었다는 설이 맞지 않음도 재증명했다.

2017년 같은 연구진은 8000년전 신석기 동굴인(선남방계)과 현대의 베트남계 동남아인 (후남방계)을 융합했을 때 한국인이 가장 잘 표현됨을 밝혔었는데, 이번에는 추가로 4만년에서 수천 년 전의 동아시아와 동남아 고대인 게놈 데이터 115개를 분석하여, 선남방계(북아시아지역인)와 후남방계(남중국지역인)의 혼합이 수천 년 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보였다.

동아시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고대인 게놈은, 40,000년 전에 북경 근처의 동굴에서 발굴된 티안유안(Tianyuan)인의 게놈이다.

연구진은 티안유안인이, 고대 아시아 다른 모든 게놈들과 및 현생 아시아인과의 유전적 유사성을 보임으로써, 티안유안인은 아시아 전반에 매우 넓게 분포하고 있었을 것으로 예측했다.

특히, 티안유안 고대인의 유전자는 현대인의 유전정보보다도, 신석기~철기시대의 동남아 고대인의 유전정보와 더 높은 유사성을 보였다.

이것은 최근의 신석기 시대 사람들에게까지도, 티안유안인의 자손들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다가, 청동기, 철기 시대를 지나면서 티안유안인의 영향이 급히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것은 청동기 철기 시대에 중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부족이 신기술로 통합 및 정복이 확장되면서 동아시아 인족 전체에 대규모 유전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남성의 Y-염색체의 거의 60%이상이 O형 하나로 되어 있는데, 이 Y-염색체는 현재의 양쯔강 유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다.

반면, 8000년 전 극동지역의 두만강 위쪽의 악마문동굴(Devil’s Gate)의 신석기 고대인의 게놈의 경우, 티안뉴안과 현대인 둘 다에 유사한 유전적 거리를 보였고, 동남아의 고유골 게놈들 보다는 현재의 동북아 인족의 유전적 요소와 더 큰 유사성을 보였다. 이는 8000년 전까지는, 청동기/신석기의 남중국계(후남방계) 인족이 한반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었음을 뜻한다.

또 현재의 한국인은 악마문동굴(Devil’s Gate) 신석기 고대인의 게놈(8,000년전)과 약 3,500년 전의 동남아 철기 시대의 밧 콤노우(Vat Komnou, 캄보디아) 고대인의 게놈을 융합했을 때, 가장 설명이 잘된다. 따라서, 한국인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신기술의 등장에 의한 고대인들의 확장과 정복에 의해 교잡된 혼혈화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박종화 교수는 “한국인은 생물학적으로 아프리카에서 출발하여, 수만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계속해서 확장, 이동, 혼혈을 거쳐 진화된 혼합 민족이며, 사회적으론, 단일민족이란 통념보다는,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아시아의 많은 인족들과 밀접하게 엉켜있는 친족체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고 말한다.

 

㈜클리노믹스는 게놈해독과 고급 생명정보분석을 전문적으로 하며, 앞으로 이런 고급 분석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클리노믹스의 연구진은 8000년 동북아 고대인, 최초의 고래게놈, 호랑이 게놈 및 한국인 표준게놈 사업 등에 수년간 지원과 참여를 해오고 있다.

 

이 연구는 옥스포드대 출판사 게놈 생물학과 진화(Genome Biology and Evolution)에 지난달 28일자 온라인에 발표됐다.
<뉴시스>

 

 2020.10.03 외국인이 보는 한국의 여성

독일 여자가 비난한 한국 여자

독일 여자들은 정치,경제,사회 문화 분야에 골고루 관심을 넓혀 가는데 한국 여자들은 오로지 결혼, 명품, 성형, 연예인, 사생활, 화장 등 경제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산다.

 

개인주의, 자기 이익만 추구하고 남을 돕고자하는 마음이 별로 없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만 사는 건 너무나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여자들은 도대체 왜 사는지 이해가 안 된다.

 

한국여자들은 내면은 빈 깡통인데, 외모만 가꾸고, 남자가 다 챙겨주길 바란다.

 

외모가 이쁠수록 자기는 높은 사람이라 여기고, 능력 있는 배우자와  결혼하기만을 바란다. 못생긴 여자도 성형하고 자신감 쩔어서 골빈 마냥 설치는 것들이 많다.

 

독일 여자들은 자립심이 강해서 남자한테 의존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한국여자들은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는게 전무하다.

 

20~30대 한국여자들은 할 줄 아는게 무엇인가?

 

●미국 여자가 비난한 한국 여자

한국여성은 성형에 눈이 멀어있다. 세계 유일하게 대출까지 하면서 성형하는 여자는 한국여자 밖에 없을 것이다.

 

대출까지 하면서 성형을 고집하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고 이해하기가 힘들다. 서울거리의 한국여자들 얼굴을 볼때면, 공장에서 찍어놓은 듯? 전부다 똑같아 보인다.

 

한국여성은 돈이면 사죽을 못쓴다. 돈에 굴복하며 Loser (루저) 인생을 살고 있다.

 

미국 남자들한테는 한국여자가 Easy Girl 로 소문나서 아주 쉽게 본다.왜냐면, 돈만주면 잘 굴러오고 잠자리도 손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모르고 한국여자는 외국남자 환상에 빠진다.)

 

세계 성형 1위에 매춘부까지 1위 한국여자 때문에 한국이 또 욕먹는 이유 중 하나,,, 대출, 매춘까지 하면서 그런 돈으로 성형에 투자하는 한국여성

 

인생은 너무 비참하다.

 

●스페인 여자가 비난한 한국 여자

한국 여대생들은 명품 가방에 환장한 여자들이다.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가?

명품 가방을 사기 위해 밤에는 술집 다니고, 낮에는 대학생인 척하는 한국 여자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정신차려라.

 

현실은 시궁창인데, 겉치장에만 들어가는 돈은 그에 맞지 않게 지나치다.

 

명품 가방을 들고 있으면 마치 자기가 그 정도 되는 레벨인줄 크게 착각한다. 명품 가방이라도 들고 다니지 않으면 무슨 패배감 같은 기분이라도 드는걸까?

 

물론 스페인 여자들도 명품 가방을 좋아하지만 한국여자처럼 심하지는 않다. 유행에 무조건 따라야하고 남에 열등의식에 의존하며 사는 한국여자가 불쌍하다.

 

우크라이나 여자가 비난한 한국 여자

한국 여자 평균키는 160 정도 밖에 안 되면서 남자들 키는 180 이상이어야 한다고 우겨댄다. 세계 유일의 남자 키 따지는 한심한 종족이 바로 한국여자들이다.

 

키 작은 한국 여자는 발 아파하면서 높은 힐 신고 다니고 가슴 작으면 뽕까지 착용하면서 그러면서 한국 남자 깔창? 그거 하나 신으면 그것을 지적하고 있다.

 

세계에서 유독 한국 여자만 자신의 키 + 하이힐 높이 = 자신의 키로 착각한다. 화장하는데 오만 걸 다 바르고선 그걸 자기얼굴이라고 말한다. 가면을 쓴 꼴인데 말이다. 진짜 한국 여자 얼굴을 보고 있으면 화장을 덮어 놓았다. 우크라이나 여자는 높은 힐, 화장에 대한 신경을 별로 쓰질 않는다.

 

●영국 여자가 비난한 한국 여자

한국 여자들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는 이유가 맛을 즐기기 위함이 아닌 내가 이런 곳에 다니면서 이런 커피를 즐기며 사는 여자임을 증명하고 자랑하기 위해서 비싼 돈을 주고 허세부리며, 한국말로 일명 된장 짓거리를 하며 커피를 마신다.

 

한국 여대생들은 왜 명품 백만 들고 다니는가? (젊은 교수로 착각할때도 종종 있음.)

 

책도 안 들어가는 명품 백을 왜 굳이 선호하는 것인가? (멍청한데다 허영심만 가득함)

 

한국 여자는 더치 페이에 매우 민감하다. 특히 남녀 사이 더치 페이를 최악이라 여김;;;

 

영국과 다른 나라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 (남자가 비용을 전부 지불 한다는 건 여성을 무시한다는 것으로 간주함.) 이건 한국 여자가 비 정상인거지 다른 나라가 좋은게 아니다. 더치 페이 가지고 따지고 논의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일본 여자가 비난한 한국 여자

일본 여자는 평소 애인이 어디 가자고 할때, 대부분 따르거나 장소를 추천하는 편인데 한국 여자는 다 싫다하며 때를 쓰고 짜증을 부린다. 남자가 사준 음식이 맛이 없더라도 오이시~ 오이시~ 하면서 맛있게 먹는게 예의인데, 한국 여자들은 계산도 안하고 얻어 먹기만 해놓고 맛없으면 투정만 부린다.

 

일본 여자들은 애인사이에서도 더치 페이가 일반화 되어있다. 남자가 돈을 내는 것은 여자로서 자존심을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한국 여자들은 너무 남자들한테만 뜯어 먹을  생각만 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자들끼리 모이면 더치 페이하고;;;

 

일본 여자들은 내조 정신이 있어서 남자한테 깍듯이 잘하려고 애를 쓰는 편인데, 한국 여자들은 마치 자기가 신데렐라라도 되는 듯 떠받들려고만 하고 있다.

 

한국 남자를 만나보면 세심한 배려와 매너가 너무 좋아서  감동을 많이 받았었는데, 그런 매너를 한국 여자들은 고맙게 생각은 안하고 당연한 듯 여긴다.

 

일본 남자들은 대체로 무뚝뚝하고, 자기위주다. 한국 남자만큼 친절하지는 않다.

 

한국 여자는 한국 남자가 정말 좋은 걸 깨달았으면 좋겠다. 한국 여자들이 부럽다.

 

일본에서는 소형차에 대한 편견이 별로 없으며, 많이 애용하는 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남자가 소형차를 타고 다니면 바보 취급을 하던데 이해 안 된다.

 

일본 여자는 가방을 명품보단 패션을 더 선호하는데 한국여자 가방은 그냥 전부 명품들이다. 한국사람 전부 스마트폰이다. 폴더폰을 쓰면 이상하게 본다.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다. 한국 여자들은 키가 크고 성격이 급하다. 기가 너무 쎄다. 그래서 때론 무섭기도 하다.

 

●이스라엘 여자가 비난한 한국 여자

이스라엘 여자들은 남자와 똑같이 군대 입대를 한다 한국 남자와 대화중에 알게 되었는데, 한국 헌법에는 대한민국민은 국방 의무를 갖는다 라고 명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한국 여성은 전혀 하는 것이 없음. 심지어 독일 등의 타 국가의 여성들은 세금을 더 내고 있으나 한국 여성들은 이마저하고 있지 않음.

 

그러면서 그나마 있던 쥐꼬리만한 혜택인 군 가산점 폐지하자고 나선다는데 자기들이 군대 안가니까, 군대 가면 얼마나 고생하는 줄 전혀 모르는 듯 하다.

 

화장 떡칠에, 향수 냄새 때문에 같이 밥먹을 때 매우 불쾌하다. 대학생답게 다니질 않고 가방을 보면 전부다 명품이다. 그 가방엔 책도 안 들어간다. 그래서 아예 따로 들고다닌다. 가방의 실용성은 무시하고 비싼 돈으로 산 명품 가방은 그저 허새에 불과했다.

 

지나친 다이어트에 삐쩍 마른 몸, 자기들은 날씬한 줄 안다. 한 대 때리면 부셔질 것 같다. 돈 씀씀이가 완전 최악이다. 오로지 남자가 돈을 다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에 대한 관념이 개판이라서 어딜가서 당당하지도 못하다. 경제력 없다고 티내는 줄도 모르고 쪽팔린 줄도 모른다.

 

●한국 여자가 보는 한국 여자

여자들에게 불리한 차별과 폐습이 횡행한 대한민국 땅에서 견디고 버티고 싸우며 본인들의 입지를 다졌다. 세계 어느 나라 여자들보다 따뜻하고 인정 많다.

 

길거리에서 예쁘거나 스타일 좋은 여자는 자주 보지만 멋진 남자는 보기 드물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전교 상위권 늘 여자가 더 많았다. 각종 고시와 시험에서 여자들의 합격률이 50% 를 넘어가는 것은 물론 수석, 차석도 여자가 휩쓴다.

 

학교 선생님들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 "지금이야 정 재계 힘 쓰시는 분들 다 남자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여자들이 치고 올라갈 거 불보듯 뻔하다.

 

남학생들 지금 옆자리 앉아있는 여학생들한테 잘해라." 안 들어본 사람 없잖아? 대출? 가끔 외모라는 능력에 과하게 투자하는 여자들 얘긴 들었으나 나는 살면서 그렇게까지 하려는 애들 못 봤다. 명품백? 우리 대학엔 백팩 멘 여자애들 밖에 안 보이던데.

 

2021.05.17 상투 틀고 끌어안은 맥주병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신미양요 150주년 학술대회

“서양인이 이땅에서 찍은 첫 조선인”

▲1871년 5월 30일 신미양요 당시 미국 군함에 오른 하급 관리 김진성을 촬영한 사진. /미국 폴게티 박물관

 

상투를 튼 조선인이 맥주병을 한아름 끌어안고 미소 짓는다. 두 팔 아래로는 미국 주간지를 낀 채, 그 위로 담뱃대를 가로질러 들었다. 1871년 미군 함대가 강화도를 무력 침략한 신미양요 당시 미국 군함에 동승한 종군 사진가 펠리체 베아토(1832~1909)가 찍은 사진. 이경민 사진아카이브연구소 대표는 “서양인이 이 땅에서 촬영한 최초의 한국인 사진”이라고 했다.

 

촬영 일자는 1871년 5월 30일. 베아토는 군함에 오른 조선인 관리들을 찍었는데, 사진 속 남자는 하급 관리인 인천부 아전 김진성이다. 1882년 윌리엄 그리피스가 펴낸 ‘은자의 나라, 한국’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몇몇 조선 사람들이 주저함 없이 갑판에 올랐다. (중략) 그들은 사진을 찍기 위해 갑판 위에 섰는데, 그중 하나는 다 마신 맥주병 10여개를 보스턴 발행 신문에 싸서 안고 있는 것으로, 사진 설명문에 ‘얼마나 흡족한 표정인가, 이 사진을 보라’ 하였다.”

 

이에 대해 이경민 대표는 “베아토가 서구인이 원하는 시각에 맞춰 의도적으로 연출한 사진”이라고 주장했다. 신미양요 150주년을 기념해 전쟁기념관과 어재연 장군 추모 및 신미양요 기념사업회 공동 주최로 14일 열린 학술 회의에서다.

 

이 대표는 ‘제국의 렌즈로 본 신미양요-펠리체 베아토의 종군 사진을 중심으로’라는 발표에서 “아무리 하급 관리라 해도 의관(갓과 두루마기)을 제대로 갖추고 갑판에 올랐을 테지만, 상투를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갓을 벗긴 채 촬영한 것”이라며 “조선의 상투는 중국의 변발, 일본의 존마게(일본식 상투)와 함께 동양의 비위생을 대표하는 코드였다.

 

담뱃대 역시 서양인들에게는 게으름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이 사진을 소비할 서구인들에게 문명과 야만, 근대와 전근대의 대비가 일어나면서 문명화에 대한 사명감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배어 있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비위생적이고 게으른 조선인이 미 해군이 버린 빈 맥주병과 영자 신문을 주워 들고 좋아하는 모습을 대비해 서양이 우위에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인 사진이라는 것이다. 이 대표는 “베아토가 발견한 상투와 긴 담뱃대는 개항기를 거쳐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인 남성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반복 표상되었다”고 덧붙였다.

 

▲신미양요 당시 종군 사진가로 미국 군함에 동승했던 펠리체 베아토가 1871년 5월 30일 촬영한 의주 통사 문정관 3인. /미국 폴게티 박물관

 

베아토는 신미양요의 전 과정을 사진으로 담았고, 시간대별로 편집해 47장의 사진첩으로 펴냈다. 이 대표는 “사진이라는 근대적 매체가 제국주의에 어떻게 봉사해 왔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

조선일보 허윤희 기자

 

06.11 9세기 아랍 지리학자 “중국 맨 끝 너머에 신라가 있다”

한반도와의 오랜 인연

불과 한 세기 반 전만 해도 서양에선 우리나라를 ‘고요한 아침의 나라’ 혹은 ‘은자의 나라’라고 불렀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해 온갖 나라와 교역하고 있는 오늘날과 비교하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과연 한반도는 고대 이래로 유라시아 대륙을 이어준 실크로드와 단절된 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왔던 것일까.    

삼국시대부터 지속적 문물 교류
서역 유리·금세공 기술 받아들여
몽골은 고려를 ‘솔랑가’로도 표기
마테오리치 지도에 ‘조선’ 첫 등장

       ▲중세 아랍 지리학자 이드리시가 만든 ‘이드리시 세계지도’(1154). 왼쪽 상단에 신라로 추정되는 나라가 표기돼 있다. [사진 미국 의회도서관]

 
 

실크로드 역사를 살펴보면 한반도는 유라시아 교류 네트워크에서 결코 고립된 지역이 아니었다. 실크로드 동쪽 끝에 있었다는 지리적 한계는 분명했지만, 서방으로부터 흘러들어온 문물이 부단히 한반도를 적셔왔다. 유럽이나 서아시아에서도 중국이라는 제국 너머에 있는 한반도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고, 우리도 중국 너머 서방 세계와 미약하나마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섬 6곳에 신라로 보이는 ‘(min) al-Sila’가 적혀 있다.

 
 

신라 도읍 경주에서 출토된 유물은 이런 사실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예를 들어 4~6세기 지배층 무덤에서 많은 유리 제품이 나왔는데, 재료나 제작기법 혹은 양식으로 볼 때 그 상당수는 지중해 동부 연안이나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진 ‘로만 글래스’가 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식 보검·금팔찌·금관 등 장신구의 금세공 기술과 모티프 역시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 전래한 것이다.

     
신라 처용은 서아시아 무슬림의 후예?

통일신라 시대에 들어서면 서구와의 접촉을 시사하는 문헌 기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삼국유사』에는 8세기 후반 하서국(河西國) 사람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현재 중국 간쑤성(甘肅省)에서 신장성(新疆省)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연변의 어느 지역으로 추정된다. 최치원은 ‘향약잡영(鄕樂雜詠)’이라는 글에서 ‘속독(束毒)’의 무용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는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부근의 지방인 소그드(Soghd)를 가리킨다. 이용범·정수일 같은 학자는 신라 설화의 주인공인 처용(處容)에 대해서도 9세기 말 서아시아 무슬림이 바다를 거쳐 신라에 도래한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실제로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土俑)들은 얼굴 모양과 수염 모습이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인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곤여만국전도’(1602)에 등장한 조선.

 

서방에서도 신라를 알고 있었다. 9세기 무렵부터 아랍권 문헌에 신라에 대한 언급이 자주 보이기 시작한다. 아랍 지리학자인 이븐 후르다드비가 쓴 글에 “중국의 맨 끝 깐수라는 곳의 맞은편에 신라(al-Silla)가 있다”라는 대목이 나타난다. 그의 기록은 이후 많은 무슬림 지리학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됐는데, 흥미롭게도 신라는 중국 너머의 바다에 있는 섬으로 인식됐다. 알 이드리시(al-Idris)가 그린 세계지도에 신라가 여섯 개의 섬으로 표시돼 있다.
 
하지만 신라의 정확한 실체는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12세기 초 페르시아 지방의 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에 중국 연안에 있는 ‘바실라(Basila)’ 섬이 등장하는데, 이희수 교수는 이것이 신라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앞서 말했듯이 9세기 이래 신라를 섬이라고 여겼던 아랍인의 판단이 그대로 투영된 셈이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나온 유리병(국보 193호). 지중해 일대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아랍-페르시아인은 신라라는 나라를 주로 해로를 따라 중국을 왕래한 상인을 통해 전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는 육로를 통해서도 서방에 알려졌다. 북방 초원 유목민 돌궐인들은 8세기 전반에 자신들의 문자로 비문들을 새겨서 남겼는데, 거기에 ‘뵈클리(Bökli)’라는 명칭이 보인다. 돌궐의 군주가 사망했을 때 여러 나라에서 조문 사절단을 보냈는데, 그중에 동쪽 해가 뜨는 곳에 있는 뵈클리의 군주(카간)도 사신을 보냈다는 내용이다. 이 말의 어원은 논란이 많지만 대체로 고구려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한반도 주민들은 몽골 초원 너머 중앙아시아까지도 알려졌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도시 외곽에는 몽골인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구도시, 즉 아프라시압 언덕이 있다. 그곳에서 7세기 중반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궁전 벽화가 발견됐는데, 한반도에서 간 것으로 추정되는 두 명의 사신이 묘사돼 있다. 머리에 새 깃털이 꽂힌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허리에는 환두대도(環頭大刀)를 차고. 또 손을 소매 안에 가지런히 모아 넣은 모습이다. 여러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고구려에서 파견한 사신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10세기 한반도에는 고려 왕조가 들어섰다. ‘코리아(Korea)’의 기원이 된 고려가 서방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방 문헌에 고려가 확인된 것은 이보다 조금 뒤늦은 13세기 중반부터다.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대부분을 정복하게 되자 위협을 느낀 유럽이 사신들을 동방으로 파견했다. 1240~50년대에 몽골리아를 방문한 수도사 카르피니(Carpini)나 루브룩(Rubruck) 등이 여행기를 남겼는데, 거기에 처음으로 ‘카울레(Caule)’ 혹은 ‘카울리(Cauli)’가 등장한다. 이들보다 20~30년 늦게 중국에 온 마르코 폴로의 글에도 ‘카울리(Cauli)’ 지명이 보이지만 아쉽게도 별다른 설명을 찾아볼 수 없다.

     
‘코리아’가 서방에 알려진 건 13세기  

경주 용강동에 출토 된 토용. 얼굴과 수염 모습이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인을 닮았다.

 

몽골이 지배한 13세기에는 ‘고려’ 이외에 또 다른 명칭이 사용됐다. ‘솔랑가(Solanga)’, 혹은 ‘솔랑기(Solangi)’다. 오늘날 몽골에서 우리나라를 ‘솔롱고스(Solongos)’라고 부르는 것도 여기서 비롯했다. 현대 몽골어로 ‘무지개’를 뜻하지만 13세기에도 그런 뜻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명칭은 당시 몽골인이 남긴 『몽골비사』를 비롯해 카르피니와 루브룩의 여행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카르피니는 몽골 제국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러시아와 조르지아의 군주 및 수많은 술탄과 함께 ‘솔랑기의 수령’도 보았다고 썼는데, 이는 고려에서 파견한 왕족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몽골제국 시대에는 한반도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카울리’와 ‘솔랑기’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채 혼용되고 있었다. 페르시아 역사가 라시드 앗 딘(1247~1318)의 글에도 이 두 가지 명칭이 동시에 사용됐다.
 
이처럼 한반도는 실크로드와 끊임없는 관계를 유지해왔다. 예컨대 근대 세계지도의 효시로 꼽히는 이탈리아 마우로 신부(Fra Mauro·1400~64)가 1459년 만든 지도가 있다. 한반도 모습이 막연하게 표현돼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반도로서의 형태는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16세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사정은 급변했다. 1550~60년대에 제작된 유럽 지도에서 한반도는 역삼각형 모양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테오 리치가 그린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1602)’에 한반도의 정확한 모습과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이 기록됐다.
 
실크로드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는 결코 고립된 은둔의 존재가 아니었다. 동서 문물 교류가 끊임없이 진행됐다. 한반도 국가와 주민도 어렴풋하게나마 서방에 알려졌다. 다만 우리가 스스로 나서서 서방과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모색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반도를 ‘발견’하고 그것을 세계지도 속에 분명히 자리매김한 것은 대항해 시대를 주도한 유럽인들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12세기 이슬람 세계지도에 등장한 신라

 이드리시 세계지도(1154)라는 유명한 중세 지도가 있다. 북아프리카 모로코 출신의 아랍 지리학자 무함마드 알 이드리시(1100~65)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섬을 통치하던 로저왕(Roger II·재위 1130~54)의 부탁을 받고 완성한 지도다.

 
이 지도는 고도로 발달한 이슬람권의 지리 지식을 망라한 당시 최고 수준의 세계지도다. 지도에서 위쪽이 남방이고 아래쪽이 북방이다.  중세 이슬람 문명에선 성지 메카가 남쪽으로 처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방위를 반대로 정했다. 이드리시 지도 좌측 상단을 보면 중국 남부 연안에 섬 여러 개가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 6개에 신라로 추정되는 ‘(min) al-Sila’라는 이름이 표기돼 있다.

중앙일보 김호동 서울대 명예교수

 

07.31 130년 만에 부활한 ‘위안스카이 망령’...이번엔 대한민국 주권 뒤흔드나

한국에 꿈틀거리는 위안스카이의 후예들

 구한말 조선 조정을 10여년간 짓밟은 중국 관료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1859~1916). 그의 망령(亡靈)이 한반도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2021년 여름 한국인들에게 그는 불망(不忘)의 대상이다. 3가지 이유에서다.

1882년 23세에 조선으로 들어오기 직전 위안스카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진압을 주도한 그는 조선을 '근대적 식민지'로 만들려는 청나라 정책을 집행한 현장 책임자였다./조선일보D

 

 무엇보다 그는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철저하게 봉쇄했다. 1882년부터 1894년까지 12년 간의 마지막 ‘홀로서기’ 기회를 좌절시킨 장본인이다. 둘째로 그 과정에서 조선에 치욕을 안긴 그의 오만방자한 언동(言動)은 중국(청나라) 지도부의 한반도 전략과 가치판단을 거울처럼 반영한다. 세번째로 21세기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지금도 ‘제2, 제3의 위안스카이’를 한국에서 획책하고 있어서다.

 

서울 도봉구와 경기 의정부시에 걸친 도봉산 꼭대기에 있는 망월사(望月寺) 현판은, 지금부터 정확히 130년 전인 1891년 가을 위안스카이가 직접 쓴 것이다.

 

▲위안스카이가 쓴 도봉산 ‘望月寺(망월사)’의 현판. 양편 글귀는 ‘駐韓使者袁世凱(주한사자원세개), 光緖辛卯仲秋之月(광서신묘중추지월·1891년 가을)’/망월사 제공

 

◇대원군 납치, 갑신정변 진압의 주범

하지만 그와 한반도와의 인연은 1882년 6월 임오군란 직후 시작됐다. 청나라에서 급파된 군대 사령관(吳長慶)의 보좌관(정식 명칭은 行軍司馬)이라는 미관말직 신분이었다. 23세의 위안스카이는 임오군란의 주범으로 지목된 흥선대원군(고종임금의 아버지)을 중국 텐진으로 납치하는 일을 현장에서 결행했다.

 

2년 후 김옥균(金玉均) 주도의 개화당이 일으킨 갑신정변(1884년)때에는, 주저하는 두명의 청나라 장군과 달리 출병(出兵)을 강력 주창하며 1500여명의 청군을 이끌고 창덕궁 정문으로 들어가 200여명의 일본군을 꺾고 무력 진압했다. 그의 ‘내정 간섭’으로 개화당의 자주개혁 시도는 ‘삼일(三日) 천하’로 끝났다.

 

▲갑신정변 실패 후 1885년 망명지 일본에서 찍은 개화당 주역 4명.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조선일보DB

 

이후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직전 귀국할 때까지 위안스카이가 저지른 방자함과 조선 조정 유린(蹂躪) 사례는 일일이 꼽기 힘들 정도로 많다. 말이나 가마를 타고 궁궐 문을 무단출입했고, 조선 정부 공식행사에선 언제나 상석(上席)에 앉았다. 툭하면 군복 차림으로 궁궐 안까지 가마 타고 들어가 고종에게 삿대질했다.

 

◇조선의 마지막 자주적 근대화 기회 봉쇄

안스카이의 사실상 ‘식민지 총독’ 행세는 1885년 10월 시작됐다. 갑신정변에서 공을 세운 뒤 1884년 11월 일시 귀국했다가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조선에 다시 오면서부터다. ‘조선 주재 청나라 교섭·통상 대표’라는 직책은 도원 3품으로 지방정부 도지사에 해당한다(이양자 동의대 명예교수의 분석).

 

위안스카이는 상관인 리훙장(李鴻章·이홍장·1823~1901) 청나라 북양통상대신에게 보낸 전보(電報)에서 “조선에는 반드시 청나라에서 보낸 감국대신(監國大臣)이 필요하다”고 썼다. 그리고 9년간 조선에 머물며 그 역할을 했다. 위안스카이가 26세부터 35세까지이던 시절이다. 그의 전횡과 횡포를 보여주는 사례 두 개다.

 

▲리훙장 등 청국 대표단(그림 오른쪽)과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대표단이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벌인 청일전쟁 강화회담 장면을 그린 일본 전통회화 우키요에(浮世繪)/일조각 제공

 

#1886년 7월초, 고종과 민비가 러시아와 손잡고 청나라에 항거할 계획(제2차 조로[朝露] 밀약)을 세운 걸 탐지한 위안스카이는 날조한 전보를 가지고 고종과 대신들을 겁박했다. 그는 “이씨(李氏) 가운데 현명한 사람을 뽑아 새로운 왕으로 세우겠다” “병사 500명만 있으면 국왕(고종)을 폐하고 납치해 톈진에서 신문·조사케 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1887년 6월, 조선 조정이 박정양과 심상학을 주미공사와 주유럽공사로 임명하자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에 ·보고하지 않았다”며 파견 중지를 요구했다. 조선 외교관들에게는 ‘준칙3단(準則三端)’ 이행을 강요했다. ‘연회장에서 조선 공사는 항상 청나라 공사 뒤에 앉고, 조선 공사는 청나라 공사를 방문해 그를 대동해 외부에 가고, 중대 교섭 사건은 청나라 공사와 미리 상의하라’는 내용이다. 조선의 외교권 완전 박탈이다.

 

▲조선 정부의 초대 주미공사인 박정양(1841∼1905)이 미국 워싱턴DC에서 서울의 미국인 육군 군사교관 앞으로 1886년 6월 12일 보낸 편지. 그는 "조선 군인들을 정예 병사로 키워달라"고 당부했다./조선일보DB

 

◇“중국이 일본 보다 앞서 ‘조선 亡國’ 시켜”

조선 해관(海關·요즘 관세청)이 청나라 상인들의 조선 홍삼 밀수출을 적발·단속하자,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해관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위안스카이는 오히려 청나라 상인들을 비호했다. 나아가 청나라 병사들이 탄 배에는 조선 세관 당국의 검사는커녕 입선(入船)까지 금지시켰다. 청나라 군인, 상인, 외교관들의 밀수와 불법이 만연했다. 외국과의 차관 협정과 전신·통신 설치, 선박 운항도 위안스카이의 허가와 승인을 받도록 하며 ‘조선은 중국의 속국(屬國)’임을 각국에 알렸다.

 

<감국대신 위안스카이>라는 연구 단행본을 2019년에 낸 이양자 동의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1880년대는 조선이 자주적으로 근대화 개혁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자주적인 근대화 주체의 뿌리가 통째로 뽑혔다. 조선의 주권은 무력화됐고, 경제적 속국으로 전락했고, 구미 선진국과의 외교 교섭 기회는 차단됐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에 앞서 위안스카이가 조선의 망국(亡國)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열었다.”

 

이양자 동의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2019년에 쓴,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위안스카이 연구 단행본/송의달 기자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의 ‘조선 현장 책임자’였을 뿐”

분명한 것은 조선에서 위안스카이의 폭압적 행태는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청나라의 대(對)조선 방략이란 큰 그림 아래 묵인되고 조장됐다는 사실이다. 그는 청나라의 방침을 현장에서 집행하는 책임자였을 따름이다.

고종 임금과 그의 외교고문 데니(O. N. Denny, 1838~1900) 등이 위안스카이를 면직(免職)시켜달라고 여러번 청나라에 청했지만, 그는 거꾸로 세차례 유임되며 9년간 조선의 ‘감국대신’으로 군림했다. 리훙장이 밝힌 그의 유임 근거는 “상국(上國)의 체통을 유지하고 조선을 조종해 조선이 배반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이홍장전집, 1889년 11월16일자).

 

조선 사정을 숙지한 위안스카이가 고종과 조정 신하들을 견제·조종해 대국(大國)을 비익(裨益·살찌움)하게 하는 유능한 인물이라는 이유에서다. 이는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으로 만들어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 대(對)조선 정책 목표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1880~90년대 청나라의 조선 정책을 총괄한 리훙장 북양통상대신/조선일보DB

 

1882년 11월 청나라와 조선이 맺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도 조선에 대한 야욕(野慾)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장정은 ‘조선은 청의 종속국’임을 명문화하고 청나라에 광범위한 영사재판권(치외법권) 인정과 조선 연안에서의 어채(魚採), 연해 운항 순시, 의주·회령의 육로 무역 허용 같은 경제·외교적 특권을 허용하도록 강제로 못박았다.

 

같은해 5월과 8월에 각각 체결된 ‘조미(朝美) 수호조약’, ‘조일(朝日)조약’ 보다 조선에 훨씬 불평등했다. 아편전쟁(1842년) 이래 동아시아에서 체결된 구미(歐美)의 불평등 조약 가운데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조선에 열악한 내용이라고 역사학자들은 평가한다.

 

박 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조선일보DB

 

◇“최악의 불평등 강요한 중국...급격한 ‘조선 속국화’ 추진”

박 훈 서울대 교수(동양사학과)는 당시 양국 관계와 의미를 이렇게 분석한다.

 

“병자호란(1637년) 이후 조선과 청나라는 명목상 조공(朝貢) 관계였다. 중국을 상국(上國)으로 대접하는 외교 의례만 지키면, 나머지는 거의 조선의 자유 의사가 존중되었다.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거나 청의 관리가 서울에 주재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1880년대 들어 청나라는 조선 속국화(屬國化) 정책을 급격하게 추진했다. 북양대신 리훙장과 그 부하인 마젠쭝(馬建忠), 위안스카이가 주도자였다. 청나라는 임오군란부터 청일전쟁 전까지 조선의 ‘자주’와 ‘개혁’을 방해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같은 매우 불평등한 무역관계를 강요했고, 위안스카이는 사실상 총독으로 군림했다.”

 

박 훈 교수는 “조선의 ‘자주권’을 무시하고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청의 야욕이 조선의 개혁을 가로막았다”며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불러들였다”고 했다. 위안스카이를 통해 구현된 청나라 정책이 조선의 망국을 촉발한 결정적 도화선(導火線)이 됐다는 지적이다.

 

◇한국에 또 등장한 ‘21세기 위안스카이’들

더 큰 문제는 그로부터 130여년쯤 지난 한반도에서 ‘위안스카이 망령’이 부활하고 있다는 점이다. 틈만 나면 되풀이되는 주한중국대사의 오만방자한 언동이 대표적이다.

 

2016년 2월 23일 추궈훙 주한 중국대사는 당시 제1야당 대표이던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만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가 한국에 배치되면 한·중관계가 파괴될 수 있다”고 공개 협박했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가 2021년 5월24일 서울 한 호텔에서 '중국공산당 100년' 기념 세미나에 참석해 축사하고 있다./연합뉴스

 

5년 5개월여가 지난 이달 16일,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는 “천하의 대세를 따라야 창성한다. 한중 관계는 한미 관계의 부속품이 아니다”며 대선 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언론 인터뷰를 대놓고 비판했다.

 

국제 외교가의 관례를 깬 이같은 행태는 한국을 하대(下待)하는 중국공산당의 ‘본심’에 근거한 의도적인 도발이다.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2017년 4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2017년 4월6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비공식 회동하고 있다/조선일보DB

 

“한국의 국력이 약해지면, 언제든지 한반도에서 130여년 전 위안스카이의 폭주(爆走)를 능가하는 망동(妄動)이 판을 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이다.

 

◇“중국이 통일과 경제에 중요하다는 생각은 환상일 뿐”

구한말부터 해방 정국까지 한국정치사(史)를 천착해온 신복룡 전 건국대 대학원장(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역임)은 “중국은 과거나 지금이나 우리를 ‘동맹’이나 ‘아픔을 나누는 형제’로 여기지 않는다. 절대로 베푸는 나라가 아니다. 2021년 지금도 한국을 속국으로, 자신은 종주국으로 여길 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 정치인과 리더들은, 중국이 한국 경제에 가장 중요한 나라라는 생각과 중국이 한반도 통일에서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두가지 헛된 환상에서 하루빨리 깨어나야 한다. 이런 생각은 민족에 해악(害惡)이 되는 중대한 오판(誤判)이다. 중국공산당의 본질과 속성을 꿰뚫고 강소국(强小國)으로서 당당하게 처신해야 한다.”

 

신복룡 전 건국대 대학원장/조선일보DB

 

2013년부터 3년간 외교부 정책기획관으로 근무한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도 비슷한 의견을 내놨다. 그는 “지난 20년간 중국이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 되면서 한국 외교의 근본 마저 흔들리고 있다”며 “중국과의 관계에서 경제 보다 주권(主權)과 독립을 최우선시하는 외교의 정상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신 센터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중국은 미국만 없다면, 한국 정부가 중국의 뜻에 반하는 외교정책을 절대 펼 수 없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위안스카이와 같은 중국의 횡포에 우리가 휘둘리지 않고 국가의 주권을 지키려면 한미(韓美) 동맹을 강화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도이다. 우리 국민과 지식인들도 중국(청나라)이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일본보다 앞서 처절하게 압살한 역사를 잊지 말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조선일보 송의달 선임기자

 

 

월간조선 08월 호

이강호의 이념과 정치

■소련군이 ‘해방군’? 함석헌의 기억

그는 그때 악마를 보았다

 ⊙ “소련군 사령관,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어떤 형태의 정부를 세워도 자유’…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소련 일색으로 기울어지는 것이었다”(함석헌)

⊙ 신의주학생사건으로 사망자 20~150명, 부상자 300~700여명, 학생·시민 1000여명 체포, 시베리아 200여명 유형
⊙ “북조선의 군수중공업 공장들은 戰利品… 일본이 소련에 끼친 엄청난 손해에 대한 배상으로 소련으로 이송돼야”
⊙ 미국의 점령은 일본을 대상으로 한 것…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 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한다”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해방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해방군’을 자처했지만 온갖 패악질을 저질렀다. 사진=조선DB

 

           〈소련군이 들어오자마자 온 시내는 공포 기분에 싸이게 됐다. 첫째로 한 것이 상점 약탈이었다. 시계, 만년필은 닥치는 대로 “와이(내라)”다. 그담은 여자 문제다. 어디서 여자가 끌려갔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소리가 날마다 들려왔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얼마 뒤인 9월 어느 무렵 북한의 평안북도 용천군에 있던 어떤 이의 회고다. 그는 당시 자신이 목격한 소련군과 그 패거리를 이렇게 묘사한다.
 
  〈한 손에 무수(無水) 알코올 병을 들고 한 손에 냉수컵을 들고 마셔대는 소련군, 인간으론 보이지 않고 짐승으로만 보이는 공산당 위원들.〉 

 
  소련군이 해방군이라고?

  광복회장이라는 이가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라고 하더니 여권(與圈)의 유력 대권(大權) 후보 중 한 사람도 같은 소리를 했다. 이 정권 사람들의 뒤틀린 언사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이 정권의 운동권 출신 586들이 그런 시각을 갖고 있음은 비밀도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 문제의 발언을 던진 두 인물은 운동권 출신도 아니다.
 
  김원웅은 586도 아니며 옛 공화당에서 통합민주당까지 당적(黨籍)을 여러 차례 바꾼 정치인이다. 이재명은 세대로는 586이지만 운동권 경력은 전혀 없다. 그런데 김원웅은 부모의 독립운동 경력 날조 의혹이 제기된 상태고, 이재명은 대선 후보 경선전(競選戰)에 돌입해 있다. 도발적 언사를 통해 586류의 역사의식이 주류(主流)인 여권 지지층을 움직여 정치적 이득을 꾀하려는 수작이 느껴진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다. 이 정권 패거리와 그 지지층이 그런 역사관을 옳은 것인 양 여기고 있다는 문제다. 뿌리가 깊다. 좌익사관이 짐짓 비장한 수식어를 동반하며 행세를 해왔다. 물론 얄팍할뿐더러 오도(誤導)된 작술(作述)이었다. 하지만 그에 물든 맹신자들이 그 맹신을 집요하게 재교육·재생산해왔다. 그러기를 한 세대의 세월을 넘기면서 간단치 않은 층을 형성했다. 586 패거리들은 그 위에 올라타 있다. 철딱서니 없던 시절 “해방 전후” 운운하는 책자 몇 쪼가리에서 주워 먹은 것을 경전 구절마냥 읊어대며 행세를 하고 있다.
 
  그러나 글머리에 인용한 어떤 이의 회고가 보여주듯, 해방 공간 그때 그 시절 바로 그곳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전혀 다른 기억을 전한다. 몇 대목을 더 들어보자.
 
  〈일일이 다 말할 수도 없지만 그날부터 일은 자꾸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것은 그저 하룻밤 새 생긴 공산당원의 횡포뿐이다. 정체 알 수 없는 특무대란 것이 생겼다. 그저 횡행천하했다.〉
 
  〈소련군 사령관이 오자마자 환영식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어떤 형태의 정부를 세워도 자유입니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소련 일색으로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벌써 거리마다 레닌·스탈린 초상이 나붙지, 거리 이름을 레닌가 스탈린 광장으로 고치지, 학교에서 소련말을 가르치기 시작하지.〉
 
  이런 소련군이 해방군인가? 물론 이 정권 586들을 비롯해 그 뒤틀린 역사관을 떠받드는 무리는 예의 회고담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극우적(極右的) 편견일 뿐이라 여길 것이다. 그런데 이 회고담의 주인공은 그들 진영으로서도 결코 그렇게 치부할 수 없는 인사다. 바로 함석헌(咸錫憲·1901~1989)의 회고이기 때문이다. 


  함석헌

▲함석헌. 사진=조선DB

 

 함석헌은 3·1운동에 참가한 이래 일제(日帝)시대 막바지까지 지속적으로 반일(反日) 저항운동을 이어간 사람이다. 그 때문에 그는 1940년대에 한 번은 평양의 대동경찰서 유치장에서 1년여, 또 한 번은 경성의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여를 모두 두 차례 투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독립운동 인사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내내 정권에 맞선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 인사였다. 그는 한일회담에 반대했으며, 3선 개헌에도 반대했으며, 10월유신 후에는 반유신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수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그리고 1970년 4월에는 《씨의 소리》라는 월간지를 창간해 1980년 1월 폐간될 때까지 1970년대 내내 매섭게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다.
 
  1974년에는 윤보선·김대중과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만들었으며, 1970년대 민주화운동 사건에 거의 빠짐없이 연루되곤 했다. 1974년 7월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에 서명하기도 했다. 그의 민주화운동은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계속되어 1984년에는 장기표·백기완 등이 만든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을 지냈다. 1987년 6월항쟁을 앞두고 만들어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의 고문도 맡았다.
 
  이쯤 되면 이른바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정도를 넘어선 태두(泰斗)급의 인사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단순히 정치적인 민주화운동가 수준을 넘어 철학적인 정신적 지도자로 받들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런 인물이 ‘소련군과 공산당원의 횡포’를 말한 것이다. 더욱이 이 회고는 다름 아닌 《씨의 소리》 1971년 11월호에 실린 글이었다. 제목은 ‘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 사건’이었다. 그랬다. 함석헌은 해방 후에는 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 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소련군과 공산당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1947년 3월 17일 월남(越南)하였다. 


 신의주학생사건

▲신의주 의거로 재판에 회부된 학생들(왼쪽)과 당시 살해된 신의주제일공업학교 4학년 박태근 학생의 어머니가 아들의 유골을 안고 서울로 왔다는 내용을 보도한 1945년 12월8일자 《동아일보》. 

 

 1945년 11월 23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중학교 학생들이 ‘공산당 타도’를 외친 반소(反蘇)·반공(反共) 시위 사건이 일어났다. 신의주학생사건(新義學生事件)이다. 11월 18일 용암포 제일교회에서 소련군과 조선공산당의 실정과 횡포를 비난하는 ‘인민위원회 지지대회’가 열렸을 때 소련군과 공산당이 습격한 게 발단이었다.
 
  당시 소련군과 공산당은 공장 노동자들을 동원해 대회장을 점거하고 간부들을 폭행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평안교회의 장로를 현장에서 죽이고 대회 참가 학생과 시민들에게 중상을 입혔다. 소련군 등의 이런 폭력에 격분한 신의주 학생 대표들은 공산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대규모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11월 23일부터 신의주의 6개 중학교와 부근의 5000여명 학생들이 함께 궐기해 시위를 했다. 학생들은 ‘공산당을 몰아내자!’ ‘소련군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가지를 행진했고, 공산당 본부와 인민위원회 본부, 보안서 등을 점거했다.
 
  소련군과 공산당은 무력(武力)으로 진압에 나섰다. 공산당 보안대와 소련군은 학생들을 무차별 사격했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희생자 수는 출처마다 다르지만 대략 사망자 20~150명, 부상자 300~7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학생과 시민 1000여명이 체포되어, 그중 200여명이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 점령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저항운동으로 기록됐다.
 
  신의주학생사건은 무엇보다도 소련군의 행패와 공산당의 횡포가 원인이 돼 발생한 것이었다. 소련은 사건을 계기로 점령통치 방식과 체계 정비에 나섰다. 그러나 이후에도 북한 주둔 소련군의 일탈행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현지 지휘부부터 엉망이었다. 사건 한 달 뒤인 1945년 12월 29일 자 소련군 보고서는 그 실상을 적나라(赤裸裸)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낮에도 길거리에서 술에 취한 군무원들을 볼 수 있다. 밤만 되면 모든 여관이며 공창(신의주에 70 곳이 넘는다)마다 술잔치가 벌어진다. 취한 군관들은 바로 거기서 순찰 중인 경무부대원(군사경찰·헌병-편집자 주)들의 묵인하에 병사들과 교대로 창녀를 찾는다. 신의주에 주둔하고 있는 비행사단의 개별성원(정치부장 추니크 중좌)도 이런 온갖 추태스런 품행을 보이고 있다. 소좌(소령-편집자 주) 데미도프가 지휘관으로 있는 현지 보병연대 군무원들 역시 이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데미도프는 토요일 아침부터 다음 날 저녁까지 이틀 동안(12월 8~9일) 그에게 별도로 제공된 경무사령부 여관방 두 개에서 계속 창녀들과 술잔치를 벌였다.
 
  (…) 회의 참석차 이틀 일정으로 평양으로 떠난 기르코 대신 자리를 지킨 부사령관 표도로프 소좌는 이틀 동안 술에 취해 사령부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령부에는 당직 사관만이 남아 있었고 심지어 군관조차 한명 없었다. 고주망태가 된 표도로프와 군관들을 우리는 이틀째 되는 날 집에서 발견했으며, 경무사령부의 나머지 군관들의 소재는 파악할 수 없었다. (…) 그런 상황은 바로 최근 신의주에서 있었던 조선 민족주의자들의 시위의 일부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글머리에 인용한 소련군의 난행(亂行)에 대한 함석헌의 얘기는 결코 과장된 게 아니었다. 더욱이 소련군과 공산당의 그 같은 작태는 당연히 신의주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북한 전역이 그런 상황이었다.  

 

일탈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히 일탈행위에 있는 게 아니었다. ‘해방군’ 운운이 가증스러울 만큼 소련군의 추태와 행패가 극심했지만 그것뿐이기만 했다면 인간인 이상 언제 어느 곳에서든 나타나기 다반사인 방만함과 해이함의 문제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련군과 공산당의 진짜 문제는 그런 흐트러짐이 아니라 의도된 악행(惡行)의 자행이었다. 그들의 이념 자체가 야기한 악행이었다.
 
  〈당초에 공산당이 들어오면서부터 한 수법이 그렇다. 동리 안에서도 아무리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의 눈으로 봐도 ‘그건 사람이 아니’라는 쪽지가 붙은 사람들을 골라서 흡수해가지고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가진 악감정을 불어넣어가지고 소위 민청이니 여청이니 하는 것을 조직해서 평지풍파로 없는 계급적 감정을 일부러 만들어서 간 데마다 사회를 파괴시켰다. 그것이 그들의 소위 계급투쟁의 과학적 방법인 것을 내가 모르지 않았다.〉
 
  함석헌은 자신이 예전부터 알던 한 인물이 소련군의 그 같은 의도적 조장으로 어떻게 변모해갔는지를 말했다.
 
  〈소련군이 오기 전까지는 그렇지도 않았는데, 그 후부터 아주 사납게 굴기 시작했다.〉
 
  이념이 불러온 악마화(惡魔化)를 본 것이다. 

 
  그들의 해방이 말하는 것

▲해방 후 소련 군정 치하의 북한에서 열린 노동절 행사. 단상의 김일성과 소련군 장성들 뒤에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사진=조선DB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소련극동군 연해주군관구 제25군이 진주했다. 평양비행장에 도착한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자신들을 ‘해방군’으로 규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조선 인민들이여, 여러분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행복은 이제 여러분 손 안에 있다."

소련군이 그렇게 스스로 ‘해방군’이라 선언하고 그럴듯한 언사를 늘어놓았으니 “과연 그렇습니다” 해야 한다면 아예 생각이라는 게 없는 것이다. 내세우는 말을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은 사기(詐欺)를 자청(自請)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소련군은 북한에서만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 도처에 진주할 때도 ‘해방’을 앞세웠다. 그런데 소련은 볼셰비키 혁명 직후 우크라이나 침공(1917~1920년)부터 마지막 무렵의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1989년)에 이르기까지 언제 어디에서든 ‘해방군’을 자처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만행이 없은 때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그저 부분적 일탈(逸脫)일 뿐 그들의 이념적 기준에선 그런 행동은 아무튼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해방이란 바로 공산화였기 때문이다. 그랬다. 그들의 ‘해방’ 운운은 이념적 믿음이었고, 동시에 그에 입각한 강변(强辯)의 프로파간다였다.
 
  그들의 해방 개념은 애초 마르크스 때부터 언제나 공산화(共産化)였다. 나중에 레닌이 천명한 “약소민족 해방”이라는 것도 결국 공산화였다. 궁극적인 전 세계의 공산화를 위해 개개 국가들을 차례로 공산화하는 과정의 하나일 뿐이었다. 소련 입장에선 그들의 국익과 각국의 ‘해방=공산화’는 동일화돼 있었다. 북한에서의 해방군 운운도 당연히 그랬다. 소련군이 자신을 해방군이라 한 것은 북한의 공산화를 밀어붙이겠다는 적화(赤化) 추진의 선언과 다름 아니었다. 


  소련은 북한의 공업시설을 약탈해 갔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짚어봐야 할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바로 소련의 국가적 차원에서의 약탈행위다. 개별적인 약탈 문제가 아니다. 소련이 국가적 차원에서 조직적·체계적으로 자행했던 산업시설 약탈의 문제다. 이것은 그들의 위선(僞善)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 그들이 내세운 성취 이면의 허상도 보여준다.
 
  일제시대 만주에서 북한에 이르는 지역은 대단한 공업지대였다. 일제가 그렇게 강력하게 공업지대로 육성한 것은 대륙 침략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소련은 만주와 북한의 공업시설을 자신들의 전리품으로 간주했다. 


  1945년 12월 소련 외무부 극동 제2국 참사관 수즈달레프가 작성한 〈조선에서의 일본의 군비와 중공업에 관한 보고〉가 그것을 보여준다. “북조선의 군수중공업 공장들은 붉은 군대에 대항해 싸운 일본군을 위해 봉사했고, 또 붉은 군대의 엄청난 희생으로 쟁취(爭取)한 것이므로 전리품(戰利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는 그래서 “북조선의 군수중공업 공장들은 이번 전쟁에 대한 배상의 일부로, 또 소비에트 러시아가 출발한 이후 현재까지 일본이 소련에 끼친 엄청난 손해에 대한 배상으로 소련으로 이송돼야 한다”고 했다.
 
  소련은 당초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북한 지역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기획했던 것이다. 소련은 북한 진주와 동시에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금・은・구리 등 광물을 비롯한 갖은 물품들을 소련으로 가져갔으며 주민들의 생필 품목에 해당하는 쌀, 소·돼지 등까지 대량으로 공출해 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약과였다. 결정적인 것은 공업설비의 반출(搬出)이었다. 소련은 당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공업설비들을 가져갔다. 특히 중대한 것은 수풍댐 수력발전소 발전기 3대(5대라고도 한다)를 뜯어간 것이다. 이것은 당시 미소(美蘇) 간에 외교문제가 되기도 했다. 수풍 수력발전소는 북한만이 아니라 남한에도 전기를 공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45년 11월 미국이 항의각서를 전달했다. 하지만 소련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뿐만 아니라 소련은 공업설비 반출과 관련된 다른 모든 일도 다 잡아뗐다. 악의적(惡意的) 모략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조선공산당도 나섰다.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는 1945년 10월3일자 사설에서 “(소련이) 기계를 뜯어 간다느니… 하는 얘기는 허무맹랑한 소리이며 계급적으로 반동을 획책하려는 모략”이라고 했다. 적반하장이었다. 그러나 그 알리바이는 매우 허술했다. 미국뿐 아니라 중국과도 마찰을 빚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설적(逆說的)이게도 이후 소련의 경제성장 궤적이 말해주는 바도 있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급속한 공업 성장을 했다 
  

레닌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직후 이른바 전시공산주의라는 급속한 공산화 정책을 추진했다. 대소(對蘇) 간섭과 내전(內戰)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그렇잖아도 취약한 러시아의 공업 생산력을 무너뜨렸다. 레닌은 이에 1921년부터 네프(NEP)라는 신경제정책을 추진했다. 그 덕분에 소련 경제는 겨우 혁명 전 수준으로 회복이 되었다.
 
  소련의 공업화가 나름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1924년 레닌 사망 후 정권을 이은 스탈린에 의해서였다. 스탈린은 1928년 10월부터 5개년 계획을 골자로 한 급진적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 초기 10년 동안인 1928년부터 1937년까지 연(年)평균 경제성장률은 6.2%에 달했다. 대단한 성과를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1928년 이래 거의 20여 년에 가까운 세월에 걸쳐 공업화 정책을 추진했지만 소련은 여전히 농업국가였으며, 공업에 있어서도 여타 앞선 공업국들과는 비교할 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1945~1959년에 놀라운 공업 생산 증가가 이루어졌다. 1945~1950년 동안 소련의 공업 총생산은 두 배로 늘어났다. 1946~1950년의 4차 계획 동안 소련 경제는 매년 15%씩 성장했다. 소련에서 공업이 농업을 역전하여 명실공히 공업국가가 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거기에는 만주에서 철거・반출해 간 철강 및 전력 등 중공업 시설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물론 소련은 전후(戰後) 점령지인 독일에서도 많은 자원을 가져갔다. 특히 독일의 우수한 인적 자원은 소련의 전후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시설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단연 만주였다.
 
  독일은 다 파괴됐지만 만주에는 일본이 건설한 수많은 공업 인프라가 아무런 피해 없이 고스란히 남았다. 관동군은 철수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기반시설을 전혀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철수했다. 소련은 그렇게 만주에 남아 있던 공업시설의 거의 절반 이상을 뜯어 갔다.  

 

소련·중국의 공업화와 ‘만주의 유산’ 

  관동군 지배하 만주국의 공업 기반은 대단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까지 일본 본국을 제외한 아시아 최대의 공업 지대가 바로 만주였다. 소련은 바로 이것을 접수하여 전리품으로 챙겼다. 아직 중국이 공산화되기 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권은 소련의 그 같은 처사에 맹렬히 항의했다. 그러나 국공(國共) 내전의 와중에 있던 중국은 소련 행위에 제동을 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점에선 중공(中共)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소련이 막대한 공업설비를 뜯어 간 이후에 남은 것도 대단했다. 이른바 개혁개방으로 중공이 본격적인 경제발전이 시작되기 전 중국 공업생산력의 상당 정도를 담당했던 게 바로 만주의 남겨진 공업시설이었다.
 
  동북지방은 개혁개방 이전까지 중국 최대의 공업지대로서 산업을 이끌어 ‘공화국의 맏아들’이라는 별명을 갖기까지 했다. 동북 지역은 제조업 분야에서 1970년대까지 전국의 20%를 차지하며 상하이와 더불어 중국 경제의 대표적인 선진 지역으로 꼽혔다.
 
  소련은 만주뿐 아니라 북한에서도 공업시설들을 전리품으로 뜯어 갔다. 수풍댐 수력발전소 설비 반출은 특히 주목되는 것이다. 수풍댐 수력발전소는 1944년 준공 당시 미국의 후버댐에 비견되는 세계 최대급 수준의 수력발전소였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이후 소련의 공업 성장과 관련해 아무 역할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2004년 강진아 경북대 사학과 교수(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중국과 소련의 사회주의 공업화와 전후 만주의 유산〉 논문에서 이런 사실을 분석하고 있다.) 


  소련군은 약탈군이었다

▲1945년 9월 9일 서울 중앙청에 진주하는 미군. 그들은 ‘점령군’으로 왔지만, 그 점령은 일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사진=조선DB

 

어떻든 그런 일을 행한 소련군을 해방군이라 하는 것은, 그 말 자체를 우습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 해방이 곧 공산화를 뜻하는 것이라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본의에 비추어 말하자면 가증스러운 왜곡이다. 소련군은 ‘해방=적화’라는 의미에서도 점령군일 뿐만 아니라 변명의 여지없는 탐욕스러운 약탈군이었다.
 
  그럼에도 “소련은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이라는 주장을 하는 자들은 뻣뻣하다. 소련은 아무튼 ‘해방’을 말했는데, 어떻든 미군은 스스로 포고령을 통해 ‘점령’이라 하지 않았느냐고 한다. 바보가 아니라면 사특(邪慝)한 선동(煽動)이다. 그 포고령의 점령(occupation)은 항복한 일본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한반도는 아직 독립된 나라가 아니었다. 한반도는 아직은 항복한 일본의 옛 영토일 뿐이었다. 소련이 해방군을 운운한 것은 정치적 선전의 언사였으며, 미군의 ‘점령’은 행정적·법적 천명이었을 뿐이었다.
 
  미군의 포고령은 그러면서도 “점령의 목적은 (일본이 조인한)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조선 인민의) 그 인간적·종교적 권리를 확보함에 있다”면서,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 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한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 같은 미국의 논지에도 불구하고 ‘점령’이라는 용어 하나를 이유로 소련의 소위 ‘해방’ 운운에 대비시키는 게 옳은가? 불순한 의도의 말장난 이상이 아니다.
 
  내세우는 말을 그대로 믿어주자면 세상에 사기꾼은 없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사기꾼과 정직한 자를 구분하는 것은 의외로 쉽다. 달콤하고 그럴듯한 말을 앞세우는 자는 대개 사기꾼이다. 속일 의사나 딴마음이 없는 사람은 대개 말투가 무덤덤하고 건조하기 일쑤다. 소련과 미국의 경우에 비추어보면 과연 어떠한가?
 
  어떤 사기꾼도 “나는 사기꾼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기꾼은 언제나 선한 의도와 정직을 가장하고 감언이설을 읊조린다. “나는 악마다”라고 자백하면서 등장하는 악마는 없다. 악마는 언제나 선량한 모습으로 달콤한 소리를 지껄이며 등장한다. 아니 악마는 아예 천사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소련군이 읊조린 ‘해방군’ 운운도 그와 다르지 않다.
 
  공산주의와 그 일당은 내내 갖은 현란한 언사를 읊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 이념의 사기성과 악마성을 가리는 사술(邪術)의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사기꾼의 말에 속으면 결과는 망(亡)이며, 악마의 속삭임에 현혹되면 가는 곳은 지옥이다. 역사는 공산주의가 결국 그런 것임을 증명했다.


  바보들의 ‘역사의식’
 

교활한 정상배(政商輩)들이 세상을 농단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농단이 통하게 되는 것은 정상배의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허위의식에 젖은 쓸모 있는 바보들이 거기에 기름을 부어준다.
 
  이 바보들은 걸핏하면 ‘역사의식’을 들먹이며 행세를 한다. 하지만 그들이 떠드는 역사의식이란 지식의 수준에선 얄팍하기 짝이 없으며, 관점의 차원에선 철 지난 좌익적 감성 이상이 아니다. 그런데 이 정권의 안팎에는 그런 부류들이 득시글거린다. 그리고 교활한 정상배와 허위의식의 알량한 바보들이 달리 구분할 필요 없이 한 몸이 돼 있다.
 
  이들은 이미 철딱서니 없음과 불순함이 한 덩어리가 된 떼를 이루어 우롱과 기만으로 난장판을 만들어왔다. 그런데 이제 그 행패가 절정이다. 드디어 ‘해방’ ‘점령’을 운위하며 대한민국의 출발선 자체에 난도질하고 나섰다. 그 작태가 계속 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꺾고 제압하지 않으면 낙관할 수 없다. 나라의 운명이 결정적 상황을 향해 가고 있다.⊙
         

 

 

월간조선 09월 호

이기동의 《비극의 군인들》

기를 쓰고 인재를 죽인 조선, 自滅하다

⊙ 구한말과 日帝 시대를 살아낸 日 육사 출신 풍운아들의 이야기
⊙ 갑신정변 후 유학생들 핍박, 처형… 박유굉은 육사 졸업을 1년 앞두고 자살
⊙ 일본 육사 출신 청년 장교들, 혁명일심회 결성… 고종, 러일전쟁 발발하자 수감 중이던 7명 중 3명 서둘러 처형
⊙ 이갑, 유동열, 노백린, 김광서, 이청천, 이종혁, 이동훈, 조철호 등은 독립운동 투신
⊙ 고종, 통감 이토 히로부미 견제하겠다고 早期 합병 추진 세력이던 조슈 군벌에게 접근
⊙ “황제(고종)가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을 식별해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失政을 저지르게 된다”(주한 영국총영사)

 

 다시금 옥리(獄吏)가 소리쳤다.
 
  “장호익!”
 
  5명의 동지가 그에게 시선을 보내자 장호익은 “그럼 먼저…”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는 한칼에 죽지 않았다. 세 번째 칼을 내려칠 때까지 그는 “만세!”를 외쳤다.
 
  당시 한성감옥에 수감 중이던 이승만(李承晩)은 옥중 창문을 통해 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는 후일 자신의 홍보고문이었던 로버트 T. 올리버에게 이때의 일을 술회했다. 올리버는 자신의 저서 《이승만: 신화에 가린 인물》에서 장호익을 ‘위대한 애국자’라고 지칭했다.
  
  장호익(張浩翼·1871~1904년)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인물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11기(사관후보생) 출신으로 동기생들과 혁명일심회(革命一心會)를 조직, 정부를 전복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됐다.
 
  개화의 역군으로 기대를 모으면서 일본에 가서 신식 군사교육을 받고 왔지만 구한말(舊韓末)의 거듭되는 정변(政變)의 와중에서 비명(非命)에 간 사람은 장호익뿐이 아니었다. 장호익 같은 사람만 ‘비극의 군인’은 아니었다. 장호익의 일본 육사 동기생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노백린(盧伯麟·1875~1926년)처럼 독립운동에 투신, 풍찬노숙(風餐露宿)하다가 이역(異域) 땅에서 눈을 감은 이들도 ‘비극의 군인’이었다. 장호익·노백린의 일본 육사 동기생으로 젊은 시절 함께 부패한 나라를 바로잡아 보려 노력했지만, 나라가 망한 후에는 적국(敵國)인 일본 군복을 입어야 했던 어담(魚潭·1881~1943년) 같은 이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 ‘비극의 군인’이었다. 그리고 나라가 망하고 한참 후에 태어나 일본 육사에 진학했다는 것 때문에 두고두고 ‘친일파(親日派)’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 이들도 있다. 그들도 ‘비극의 군인’이었다.
 
  이기동(李基東·78) 동국대 명예교수의 《비극의 군인들》(일조각, 2020년)은 바로 그런 이들의 이야기다. ‘이기동’이라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맞다. 신라사를 비롯해 고대사(古代史)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원로 국사학자 바로 그분이다. 원래 이 책의 초판은 1982년에 나왔다. 이기동 교수가 몇몇 잡지에 실은 글 7편을 모은 것이다. 그러다 작년에 초판이 나온 지 28년 만에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그러면서 당초 ‘일본 육사 출신의 역사’였던 부제(副題)를 ‘근대 한일 관계사의 비록(祕錄)’으로 바꾸었다. 


  박유굉의 자살

  이 책을 보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한국인의 일본 육사 진학이 무척 이른 시기에 시작됐다는 점이다. 이미 1883년 1월 박유굉(朴裕宏·1867~1888년)이라는 소년이 육사의 예비과정인 도야마 학교에 입교, 1886년 일본 육사에 진학한 것이다. 박유굉은 1883년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로 파견됐던 박영효(朴泳孝・1861~1939년)를 따라 도일(渡日)했다. 그해 5월에는 14명이 도야마 학교에 입교했다. 이때 입학한 사람 중 하나가 서재필(徐載弼·1864~1951년)이었다.
 
  하지만 지지리도 가난했던 조선 조정은 이들의 학비를 댈 수 없었다. 결국 박유굉을 제외한 나머지 14명은 1년 만에 귀국했다. 이들은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에 가담했다. 갑신정변이 사흘 만에 실패로 끝나자 서재필, 이재완, 신응희, 정난교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청군(淸軍)에게 피살되거나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갑신정변에 관한 기록에 보이는 ‘사관생도’가 이들이다.
 
  이제 개화파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몇 안 되는 유학생들은 조선 조정의 눈에는 ‘역적 예비군’이었다. 조선 조정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 정부에 유학생들의 본국 송환(送還)을 요구했다. 직접 유학생들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귀국을 종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1886년 5월 조선 조정으로부터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고 귀국한 유학생 6명은 귀국 즉시 처형됐다. 귀국을 거부한 유학생들의 경우, 그 가족이 처형되거나 구금됐다.
 
  이런 상황에서 박유굉은 1886년 정규 일본 육사 생도(생도 11기·사관후보생 11기와는 다름)가 됐다. 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일본인 동기생들은 “자네는 우리와 같이 학생으로서 수양할 때이다. 정변과 같은 것들로 고민해서는 안 된다. 졸업한 다음에 지위를 얻게 되면 결사적으로 나서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고 위로해주었지만, 그의 고뇌는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1888년 5월, 졸업을 1년 앞두고 권총으로 자신의 목을 쏘아 자결했다. 박유굉과 약간의 교분이 있었던 윤치호(尹致昊·1865~1945년)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일본 사관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여 내년에 졸업하게 된 박유굉이 6~7일 전 자살한 소식을 들으니 참혹하고 가련하다. 비록 그 사연은 자세히 모르겠으나 그 국가형세 한심한 일과 그 가사(家事) 창망한 것을 슬피 여겨 자살한 듯. 더욱 불쌍하며 이때까지 공부하여 일시에 무단히 버렸으니 아깝다. 이것도 또한 우리나라 국운(國運)인가.〉


  버림받은 장교들  

갑신정변 때 희생된 ‘사관생도’나 박유굉의 자살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진행 중이던 1895년 국비(國費) 장학생으로 일본에 건너와 1898년 육사 11기(사관후보생)로 입교한 21명의 운명도 기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유학을 떠날 때 내부(內部)대신이던 박영효는 “장차 조선을 개화시킬 역군은 그대들밖에는 달리 없다”고 격려하면서 “그대들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에는 틀림없이 중용(重用)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일개화정부가 전복되면서 이들의 운명은 고단해졌다. 본국의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어렵게 졸업했지만, 당장 숙식할 곳조차 없었다. 조정은 이들을 참위(參尉·현재의 소위)로 임관한다는 사령(辭令)을 냈지만, 귀국을 시켜 보직을 주지도, 봉급을 지급하지도 않았다. 견디다 못한 이들은 주일공사관의 행랑채로 들어가 자취를 시작했다. 이들은 주일공사 이하영(李夏榮)·조병식(趙秉式) 등에게 딱한 사정을 호소했다. 하지만 조정은 이들을 박영효의 당여(黨與)로 간주, 그냥 방치하기만 했다. 이를 보다 못해 나선 사람이 있었다. 일본군 참모본부의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소좌(소령)였다.
 
  그는 1900년 9월 조병식 공사를 만나 “전도양양한 청년 사관들을 이곳에서 썩히는 것은 귀국(貴國)의 손실”이라면서 그들을 구제해달라고 청했다. 특히 우쓰노미야는 이기옥과 권승록이 임관조차 하지 못한 이유를 따졌다. 이에 대해 조병식은 이기옥의 아버지, 권승록의 숙부가 전(前) 정권에서 관리로 봉직한 탓에 “현 정권이 본다면 역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우쓰노미야는 벌컥 화를 냈다.
 
  “그 무슨 폭정(暴政)이오? 무슨 만풍(蠻風)이란 말이오! 만약 한 사람의 죄가 그 일족(一族)에 대해서까지 이어진다면 한국은 자멸할 수밖에 없소.”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주일공사가 일개 육군 소좌에게 이런 질타를 받아야 했던 상황이 참담하다. 그러고 우쓰노미야의 말처럼 대한제국은 10년 후 망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9년 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조선군사령관이 우쓰노미야였다.


  ‘혁명일심회’의 쿠데타 음모

▲민영환

 

  조정으로부터 버림받은 11기생 가운데 15명은 1900년 10월 혁명일심회를 결성, 친러정부를 타도하고 ‘혁신정부를 수립’하자고 결의했다. 이들은 고종과 황태자(순종)를 폐위시키고 의친왕 이강을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 가운데 김형섭(1898~1929년) 등은 1901년 초 귀국, 군부 요인들을 만나 자신들을 구제해달라고 호소했다. 다행히 전 참정대신(參政大臣·총리)이자 당시 원수부(元帥府·대한제국의 최고 군통수기구) 회계국 총장 민영환(閔泳煥·1861~1905년)이 이들에게 귀를 기울였다. 민영환은 고종을 설득, 이들을 임용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노백린, 어담, 김형섭 등 5명이 무관학교 교관으로 발령받았다.
 
  한편 다른 일심회 회원들은 일본에 망명 중이던 전 내부대신 유길준(俞吉濬·1856~1914년)과 손잡고 쿠데타를 추진했다. 하지만 이 음모가 발각되면서 1902년 6월 장호익, 조택현, 김형섭 등 8명이 체포됐다. 용케 체포를 면한 이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체포된 일심회원들은 모진 고문을 받은 후 한성감옥에 갇혔다. 이들은 이때 박영효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1899년부터 수감 중이던 이승만과 교분을 나누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군대를 파병, 한성(서울)을 장악했다. 얼핏 보기에는 일본 육사 출신인 일심회 회원들에게는 살길이 열리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고종은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일본이 일심회 회원들의 구명을 요구해올 경우에 대비해 이들의 처형을 서두른 것이다.
 
  3월 9일 평리원(平理院·대법원)에서 유길준의 쿠데타 음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일심회원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그러고 나서 바로 그날 처형이 시작됐다. 먼저 조택현(1894~1904년)이 참수됐다. 이 글의 첫머리에 소개한 장호익이 그 뒤를 이었다. 이어 김홍진(1873~1904년)이 처형됐다. 권호선은 1903년 옥사(獄死)했다.
 
  같은 시각, 일심회원의 가족은 필사적으로 구명운동을 벌였다. 주한일본군 참모장 사이토 리키사부로(齊藤力三郞) 중좌(중령)가 나섰다. 그는 우쓰노미야 다로의 친구로 일심회원들을 동정하고 있었다. 사이토 중좌는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에게 일심회원들의 구명을 간청했다. 이지용은 급히 궁궐로 들어가 고종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던 고종은 나머지 4명을 사면했다.
 
  이들은 나중에 복권되어 대한제국 군대에서 복무하면서 한때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되고, 1910년에는 나라가 망한 것이다. 고종과 순종의 시종무관으로 근무하던 김형섭은 나라가 망한 후에는 일본 군복을 입고 대좌까지 승진했다. 김희선(1876~1950년)은 일제하에서 군수를 지내다가 3·1운동 후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에 추대되었으나,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귀국했다.
 

‘역적’들을 중용한 일본

▲에노모토 다케아키

 

  혁명일심회의 이야기를 길게 쓴 것은 그들의 사연이 너무 딱해서이다. ‘역적모의’를 했으니 극형(極刑)에 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의 운명을 일본의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1836~1908년)와 비교해보면 한숨이 나온다. 도쿠가와 막부의 해군 부총재(해군차관)였던 에노모토는 메이지유신에 반대해서 도쿠가와 막부의 잔당을 이끌고 홋카이도로 탈출, 하코다테에 에조(蝦夷)공화국을 세우고 총재(대통령)가 됐다. 이들의 반란은 1869년 5월에야 진압됐다.
 
  하지만 메이지정부는 역적의 수괴(首魁)인 에노모토를 사면했을 뿐 아니라, 국제법 등에 밝은 그의 식견을 높이 평가해 초대 주(駐)러시아공사, 체신·문부·외무·농상무대신으로 중용했다. 에노모토의 부하였던 하야시 다다스(林董)는 주영공사로 있으면서 영일(英日)동맹을 성사시켰고 이후 외무·체신대신을 지냈다. 갑오경장 당시 주한일본공사로 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도 에노모토와 함께 하코다테까지 달아나 메이지정부에 저항했던 ‘역당(逆黨)’ 출신이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역적의 수괴까지도 중용했다. 반면에 고종의 조선은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金玉均)을 기어이 암살했고,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서둘러 혁명일심회 회원들을 처형했다. 비록 정치적 입장은 달리했다 해도 언젠가는 나라를 위해 그들을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100년 전 일본과 조선의 운명이 그렇게 엇갈린 것은 인재를 대하는 태도가 이처럼 달랐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면 지나친 얘기일까. 

 
  8형제배

▲구한말 고급 장교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왼쪽부터) 노백린, 이갑, 유동열.

 

고종의 마지막 칼날을 피한 일본 육사 출신들에게는 일본군을 배경으로 잠깐이지만 ‘좋은 시절’이 왔다.
 
  구한말 무관(武官) 출신으로 1896년을 전후해 일본 육사 유학을 했던 이희두(1869~1925년), 이병무(1864~ 1926년) 같은 사람은 참령(參領·소령)-군부 과·국장급으로 있다가 불과 1~2년 사이에 장관(將官)으로 승진했다. 이희두는 후일 군부 협판(차관)을, 이병무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군부대신을 지냈다. 이들은 망국 후에는 각각 일본군 소장, 중장 대우를 받았다.
 
  반면에 대한제국군 정령(正領)으로 무관학교 교장을 지낸 노백린(일본 육사11기)은 군복을 벗은 후 독립운동에 투신,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군무총장,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 시기에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일본 육사 15기 출신 8명이었다. 러일전쟁 발발 당시 참위(소위)급이었던 이들은 1~2년 사이에 참령~부령(副領·중령)급으로 승진, 대한제국 군부의 요소요소에 포진했다. 당시 영관급 장교는 지금보다 훨씬 위상이 높았다. 이들은 ‘8형제배(八兄弟背)’라고 불렸는데, 김기원, 김응선, 남기창, 유동열(柳東說·1879~1950년), 박두영, 박영철, 이갑(李甲·1877~1917년), 전영헌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간섭 아래에서나마 군부를 개혁해보려 노력했지만, 군대 해산과 경술국치(庚戌國恥)를 겪으면서 길이 엇갈렸다. 김기원은 일본군 중좌, 김응선은 일본군 대좌가 됐다. 박두영과 박영철은 일제 시대 친일파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인 중추원 참의까지 올라갔다.
 
  반면에 이갑은 비밀결사 신민회 창설을 주도,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다가 망국 후에는 러시아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시베리아를 떠돌면서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다가 객사(客死)했다.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李應俊·1890~1985년) 장군이 그의 사위다. 유동열도 독립운동에 투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참모총장, 군무총장을 지냈다. 그는 해방 후 미군정(美軍政) 통위부장(統衛部長·국방장관 격)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초석을 놓았으나, 6·25 때 납북(拉北)됐다.


  대한제국 생도에서 일본군 소위로

▲망국 당시 일본 육사 재학생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왼쪽부터) 김광서, 이청청, 조철호.

 

대한제국의 유학생으로 일본 육사에 입교했다가, 재학 중 망국의 비운(悲運)을 맞은 이들도 있었다. 일본 육사 23기 김광서(金光瑞·1888~1942년)와 26기생 18명, 27기생 25명이 그들이다. 일본 육사 입학 당시에는 ‘대한제국의 유학생’이었던 이들은 임관할 때에는 ‘일본 육군 소위’가 되어야 했다.
 
  이들은 망국의 비보(悲報)를 접한 후 향후 나아갈 길을 의논했다. 당장 자퇴(自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학업을 마치고 임관한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자고 결의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그 약속을 지킨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김광서는 중위 시절이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됐다. 이때부터 김경천(金擎天)이라는 가명(假名)을 썼는데 신팔균(申八均·1882~1924년), 이청천(李靑天·1888~1957년)과 함께 ‘남만(南滿) 3천’이라고 일컬어졌다. 김광서는 이후 러시아로 무대를 옮겼다. 러시아혁명 후 그는 볼셰비키 적위군(赤軍) 편에 서서 빨치산을 이끌고 시베리아를 침공한 일본군 및 백군(白軍·반혁명군)과 싸웠다. 러시아내전이 끝난 후 김광서는 무장독립투쟁을 이어갈 방법을 모색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는 1935년 반혁명분자로 체포되어 1942년 강제수용소에서 아사(餓死)했다. 김광서가 ‘진짜 김일성 장군’이라는 설도 있다. 이기동 교수는 김광서에 대해 이 책의 한 장(章)을 할애했다.
 
  26기생 중에서는 이청천과 조철호(趙喆鎬·1890~1941년)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청천은 3·1운동 후 김광서와 함께 망명, 만주·시베리아·중국 등지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예하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건국 후 초대 내각에 무임소장관으로 입각했으나, 이후 야당으로 돌아서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조철호는 일본군 중위로 옷을 벗은 후 평북 오산학교・중앙고보 교사로 있으면서 3·1운동 및 6·10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22년 조선소년군을 창설, 보이스카우트운동의 선구자가 됐다.
 
  제27기생 가운데는 이종혁(李種赫·1892~1935년)과 이동훈(李東勛·1890~1920년)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종혁은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 마덕창이라는 가명으로 육군주만참의부 군사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5년간 복역한 후 석방됐으나, 옥고를 치르는 동안 얻은 병으로 사망했다. 선우휘 전 《조선일보》 주필은 그의 삶을 다룬 소설 〈마덕창대인〉을 썼다. 이동훈은 평양 광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을 이끌고 3·1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상하이로 탈출하려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끝에 사망했다.

 

홍사익

▲홍사익

 

  반면에 26기생 이응준, 김준원(1888~1969년), 박승훈(1890~1963년), 신태영(申泰英·1891~1959년), 안병범(1890~1950년), 유승렬(1893~1958년), 이대영(1892~1976년), 이응준 등은 일본군 소좌~대좌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은 후 국군 창설에 참여해 장군이 됐다. 신태영은 국방부 장관, 이응준은 육군참모총장·체신부 장관을 지냈다. 6·25 당시 육군 대령이던 안병범은 서울이 공산군에게 함락되자 인왕산에 올라가 할복 자결했다. 사후(死後)에 육군 준장으로 추서(追敍)됐다.
 
  26기생 가운데 특기(特記)할 인물은 홍사익(洪思翊·1889~1946년)이다. 그는 구한말 고급 장교나 왕공족(王公族)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의 엘리트 코스인 육군대학을 나와 일본군 육군 중장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조선인인 그에게 야전 지휘관 자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주로 후방의 교육기관이나 조사기관에 근무했던 그는 필리핀의 포로수용소장으로 패전을 맞았다. 전후(戰後) 그는 포로수용소에서의 포로 학대에 대한 책임자로 지목돼 전범(戰犯)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홍사익은 중국 근무 시절 임시정부로 탈출하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일본군 내에서 최고위직에 있는 자신이 탈출하면 일본군 내에 있는 조선인들의 처지가 곤란해질 것을 걱정해 이를 마다했다고 한다. 일본군 장성까지 올라갔던 그의 실력을 아까워한 국내 인사들은 존 하지 미군정사령관에게 그의 구명을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기동 교수는 홍사익에게도 이 책의 한 장을 할애했다.
 
  27기생 가운데는 김석원(金錫源· 1893~1978년), 백홍석(1889~1960년)이 일본군 중좌까지 올랐다가 해방 후 국군에 참여, 별을 달았다. 중일전쟁 당시 중국전선에서 무명(武名)을 떨쳤던 김석원은 6·25 때는 제1사단장, 3사단장, 수도사단장으로 활약했다. 성남중·고등학교의 설립자로 유명하다. 


  20여 년 만에 재개된 육사 입학

▲1930년대 일본 육사 진학의 물꼬를 튼 채병덕(왼쪽)과 이종찬.

 

 한일합병 후 한국인들의 일본 육사 진학은 한동안 중단됐다. 그러다가 1928년 일본 육사 44기로 입교한 이형석(1909~1991년)을 시작으로 다시 한국인이 육사에 입교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미 식민통치가 20년을 경과한데다가 대륙 침략으로 인적 자원이 더 필요해질 경우에 대비, 조선인 징병의 전 단계로 먼저 장교 임용을 시작한 것일 것이다. 이기동 교수는 1930년대 이후 육사에 입교한 이들의 이야기를 ‘계림회 시말기’라는 제목 아래 소개하고 있다. 계림회는 일본 육사 재학 시절 조선 출신 생도들의 친목 모임을 말한다.
 
  1933년에는 채병덕(蔡秉德· 1915~1950년)과 이종찬(李鍾贊· 1916~1983년)이 49기로 입교했다. 이들은 일본군 소좌로 해방을 맞았다. 건국 후 채병덕은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제2·4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지만 6·25 초기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해임됐다. 그는 그해 7월 하동전선에서 전사(戰死)했다. 이종찬은 제6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있던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군대를 동원하려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맞서다가 해임됐다. 4·19 후 허정 과도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낸 그는 ‘참군인’의 표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후에도 한국인들의 육사 진학은 계속됐다. 이들 가운데는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형근(李亨根· 1920~2002년), 공군참모총장·국방부 장관·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김정렬(金貞烈·1917~1992년), 국방부 장관을 지낸 유재흥(劉載興·1921~2011년) 등 수많은 장성이 배출됐다. 


  ‘친일파’  

 이들을 오늘날 일각에서는 ‘친일파’라고 부른다. 그들은 홍안(紅顔)의 소년으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했다가 군대가 해산되는 바람에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육사에 입교했다가 일제 35년간 일본 군복을 입고 인고(忍苦)의 나날을 보내야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초로(初老)의 나이에 해방을 맞은 후 신생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 6·25 때는 나라를 지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이형석·채병덕·이종찬 이후의 육사 출신자들이 태어났을 때에는 ‘조국’이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들에게 육사 진학의 길이 열렸다. 그리고 20대 중반 혹은 30대 초반이 되었을 때, 해방을 맞이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일본 육사 재학 중에도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正體性)을 고민했다. 육사 재학 시절 이들이 친목 모임의 이름을 ‘계림회’라고 했던 것은 그런 고민의 소산이었다. 해방 후에 이종찬 같은 이들은 일본군 경력을 가진 자신들이 신생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는 것은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해 군에 투신하는 것을 상당 기간 망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대한민국 국군으로 공산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켰고, 군복을 벗은 후에는 여러 자리에서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데 이바지했다.
 
  그들을 ‘친일파’라고 낙인찍는 것은 ‘후세에 태어난 행운’을 누리는 자들의 교만치고는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닐까? 그들이 김일성이나 김원봉보다 더 대한민국에 죄를 지었나? 젊어서 몇 년간 일본 군복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이후 대한민국을 지키고 일으키는 데 이바지했다면 전비(前非)는 상쇄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 그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 ‘비극의 군인들’ 아닐까?
 
  저자는 이들의 삶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삶과 시대적 배경을 담담하게 보여주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역사 속의 개인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고종의 誤

  원래 이 책의 초판 부제는 ‘일본 육사 출신의 역사’였지만, 개정증보판의 부제는 ‘근대 한일관계사의 비록’으로 바뀌었다. 이는 제3장 ‘고종 황제와 이토 통감의 확집’의 분량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초판에서는 일본 육사 11기 출신으로 고종과 순종의 시종무관을 지낸 어담의 회고록을 중심으로 을사늑약~경술국치 사이의 비화를 소개했었다. 이기동 교수는 개정증보판에서 고종과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치열한 줄다리기, 같은 친일파인 이완용과 송병준 및 일진회 간의 매국(賣國) 경쟁, 헤이그 밀사 사건의 내막 등을 크게 보완했다.
 
  이기동 교수는 이 책에서 고종을 망국으로 가는 길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쓴 것으로 묘사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고종이 얼마나 정세에 어두운 사람이었는지가 드러난다. 예컨대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후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가 탁지부(재무부) 고문으로 와서 ‘재정개혁’을 명분으로 황실재정을 압박하자, 고종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최고고문으로 초빙하려고 공작한다. 그러다가 을사늑약 후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 국정을 좌지우지하자 이번에는 그를 견제하려고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조선주차군 사령관,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郎) 참모총장 등 조슈(長州) 군벌에게 접근한다. 그 당시 상황에서 조슈 군벌의 조기(早期)합병론에 반대하고 있던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인데, 완전히 번지수를 거꾸로 짚은 것이다. 고종은 힘이 되어주겠다는 하세가와의 다짐에 희희낙락하고, 고다마는 고종이 보내온 밀서를 읽으면서 실소(失笑)를 머금는다. 


  ‘고종, 知的이지만 어리석어’

▲고종

 

  국사학계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고종을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했던 ‘계몽전제군주’라고 미화(美化)해왔다. 하지만 당대인들의 눈에 비친 고종의 모습은 다르다. 1907년 당시 주한 영국총영사였던 헨리 코번은 에드워드 그레이 영국 외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이렇게 썼다.
 
  “황제에 대한 수수께끼는 그처럼 지적(知的)인 사람이 어째서 그토록 어리석게 행동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황제를 잘 알고 있는 많은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꾸밈없는 정중함, 그리고 점잖은 태도 등은 의심할 바가 없다. … 황제가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을 식별해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실정(失政)을 저지르게 된다.”
 
  반면에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인 조지 케넌(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을 주장했던 외교관 조지 F. 케넌의 집안 아저씨)은 이렇게 말했다.
 
  “고종 황제가 한국인 특유의 음모성을 갖고 있는데다가 너무나도 무신경하며, 남아프리카의 보어인(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인의 후예-기자 주)처럼 집요하다. 또한 황제는 중국인처럼 몽매하고, 아프리카의 호텐토트인처럼 허영심에 가득 차 있다.”
 
  케넌이 일본에 포섭된 인물이었다고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다. 윤치호의 평도 인상적이다.
 
  “황제는 개인적으로는 온화했으나, 대중적으로는 신망을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 영국의 찰스1세를 닮았다.”
 
  “나쁜 성격과 좋은 자질을 함께 지니고 있는 전하는 역사에 잘 알려진 한 영국 국왕(찰스1세-기자 주)을 생각나게 한다.”


  조약 체결 일주일 후에 합병 발표한 이유

  한일병합조약은 1910년 8월 22일 체결됐지만 8월 29일에 정식으로 공표됐다. 조선의 망국 과정을 유심히 관찰했던 중국 지식인 량치차오(梁啓超)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기가 막히다. ‘한국 정부가 8월 27일로 예정된 순종 황제의 즉위 3주년 기념행사를 꼭 거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일본 측에 요청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량치차오는 조선이 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조선을 망하게 한 자는 최초에는 중국인이었고, 이어서 러시아인이었으며, 최종적으로는 일본인이었다. 그렇지만 중국·러시아·일본인이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 스스로 망한 것이다.”
 
  고종이 개화의 역군으로 키우겠다며 일본으로 유학 보냈던 청년 장교들을 그렇게 기를 쓰고 핍박하고 죽였던 것을 생각하면, 량치차오의 지적에 이의(異議)를 제기하기 어렵다.
 
  책을 덮으면서 가슴이 먹먹했다. ‘오늘날 우리는 100여 년 전의 못난 조상들보다 얼마나 나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람의 장점을 보기보다는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된다’는 식의 주장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 100여 년 전 고종을 탓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망국과 해방과 건국의 달 8월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09.07 세종 치세에 여진·일본·아랍인 귀화 행렬… 明도 조선을 경계했다

‘천하 인재 모은 강한 나라’ 꿈꾼 세종 “귀화인도 우리나라 백성”
경제·안보 이유 “쇄국” 주장 물리쳐… 倭·여진·남만 등서 귀화
明, 세종 이민족 포용 정책에 “여진족 조선에 기울면 큰일” 경계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지금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여진, 동쪽으로 일본과 연결돼 있어 왕래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족류(族類)가 아니어서 필시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 것입니다[非我族類 其心必異].”

 

1446년(세종 28년) 5월 이선로(李善老)가 세종에게 ‘쇄국’을 제안하면서 올린 말이다. 그에 따르면 야인(野人·여진인)과 왜노(倭奴·일본인)가 왕래하면서 우리나라 기밀을 탐지하는 바, 그들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말아서 틈을 주지 말아야 했다. “일찍이 한나라가 했던 것처럼 국경을 닫고[閉關] 수어(守禦)의 방비를 엄히”하는 게 상책이라고도 말했다.

 

이선로가 보기에 당시 조정의 개방 정책은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 하나는 경제적 손해다. “해마다 흉년이 들어 나라에 저축이 없는” 실정에서 그들을 접대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고, “한정이 있는 물건으로 끝없는 요구에 응할 수” 없었다. 다른 하나는 안보 문제다. 연이어 흉년이 들고 왕비까지 사망한 때를 틈타 외적이 침노할 우려가 있으니 “금년부터 야인과 왜노의 조공을 모두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선로의 주장이었다. 흥미롭게도 이선로의 주장에는 전형적인 ‘쇄국 논리’가 들어 있다. 경제적 이유와 안보상 이유는 17세기 병자호란, 그리고 19세기 개항기에도 똑같이 등장했던 논리다.

 

 

이선로의 주장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의정부 신하들이 모두 “남쪽 왜인과 북쪽 오랑캐 중에서 우리나라에 귀화한 자가 심히 많은데, 한나라처럼 국경을 닫아걸 수는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종 시대에 주변국 사람들이 귀화해 오는 일이 ‘심히 많았다.’ 세종 5년(1423년)을 전후해 “조선에서 살고 싶다”며 일본과 여진, 그리고 중국과 남만(南蠻) 지역 사람들이 떼를 지어 들어왔다. 어떻게 했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세종 시대 대외 정책은 ‘은혜와 위력의 병용[恩威竝用]’으로 요약된다. “은혜가 없으면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가 없으며, 위력이 없으면 그 뜻을 두렵게 할 수가 없다.”(세종실록 18년 11월 9일)는 말이 그것이다. 세종은 주변국에서 조공을 보내오면 받아들이고, 나라에 애경사가 있을 땐 예물을 주고받되, 국경을 넘어 약탈해 올 경우 ‘토벌’을 감행했다. 세종 초년의 ‘대마도정벌[東征]’이 그 예다. 세종 정부의 포용 정책은 주변국 사람들의 연이은 집단 귀화 현상을 초래했는데, 당시 명나라가 ‘조선이 장차 패권국이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할 정도였다. 1424년(세종 6년) 영락제 사망 소식과 함께 명나라 궁중이 조선을 경계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조선국은 임금이 어질어서 중국 다음갈 만하다” “요동(遼東)의 동쪽이 옛날에는 조선에 속했는데, 만일 요동 여진족이 조선에 ‘귀부’한다면 중국도 감히 항거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었다(세종실록 6년 10월 17일).

 

무엇이 이들을 물설고 말도 선 타국으로 위험을 무릅쓴 채로 떠나게 했을까? 세종은 첫째, 귀화한 사람들에게 집과 식량, 그리고 옷을 제공하는 한편 세금을 면제해 정착할 수 있게 했다. 귀화인은 정착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지원했다. 즉 생계 유지 단계, 우마를 기르는 단계, 그리고 “본국인과 같은 예로 대우”하는 단계가 그것이다.

 

둘째, 세종은 “귀화한 왜인들도 곧 우리나라 백성”이라며 귀화 외국인 차별을 금지했다. “오랑캐를 변화시켜 백성으로 만든다”는 정책 기조에 따라 세종은 귀화인들을 우리나라 사람들과 혼인해 살게 했을 뿐만 아니라, 벼슬을 주어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했다.

 

셋째, 연말연시에는 귀화인들을 위한 잔치를 열어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배려했다. 향수를 달래기 위해 귀화인 활쏘기 대회 및 모구(毛毬) 시합을 벌이기도 했으며, 정초의 조하(朝賀·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는 것) 때는 야인·왜인·아랍인[回回人] 등 귀화인들도 참석하게 했다. 귀화한 여러 인물, 예컨대 일본에서 귀화한 평도전이 매우 빠른 왜선(倭船)의 비밀을 전수하거나 왜구와 맞서 싸운 것은 그런 포용과 배려 때문이었다. 유명한 장영실 역시 중국에서 귀화한 집안의 후손이었다.

 

세종에게는 귀화인들을 포용하는 개방적인 정책으로 ‘작지만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비전이 있었다. 세종은 즉위교서에서 시인발정(施仁發政), 즉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일으키는” 임금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그 어짊의 대상은 조선 백성에 한정되지 않았다. 조선을 찾아온 이민족까지 포용할 때 비로소 “천하의 인재들이 모두 그의 조정에서 벼슬하려 하며, 농사짓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들판에서 경작하려 하며, 장사꾼들도 모두 왕의 시장에 물건을 쌓아놓으려 하는”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 세종의 판단이고 신념이었다.

 

몇 년 전 예멘에 이어 최근 한국을 찾아온 미얀마와 아프간 난민들을 보며 세종의 포용 정책을 떠올린다.

조선일보

 

09.17 “노비제는 천리에 어긋나도다, 커다란 변고로다”

조선은 노비제 사회인가

▲김홍도 『풍속도첩』중 ‘벼타작’. 보물 527호. 일꾼들은 나락을 터느라 바쁜데 자리 깔고 한잔하는 양반들은 분명 뒷담화에 오르지 않았을까. 정치적 자기의식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우리 동방의 노비법, 개벽 이래 이런 것 없었도다. 백 대, 천 대 이르러도, 대대로 남의 노비 되네. 귀천의 형세가 억지로 정해지니, 커다란 변고로다 천리에 어긋나도다!” 조선시대 학자의 시 일부이다. 지은이는 윤봉구(尹鳳九·1681~1767).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의 제자로, 송시열의 묘지문을 썼으며 충청도에 살던 성리학자였다.

 

이 말은 그의 사상의 표현이기도 하고, 현실의 반영이기도 했다. 조선은 노비 반란이 없었다. 그러나 잘 드러나지 않는 일상에서, 즉 논두렁이나 주막에서 억압적이고 부당한 현실에 대해 화도 내고 험담도 했을 것이다. 원래 이렇게 작은 영역에서 정치적 자의식이 싹트는 법이다. 점차 재산축적, 양인화 소송, 국가 정책이 어우러지면서 노비는 사회적 위상을 높여갔다. 아마 이것이 반란이 없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건국 초반 천민→양인 전환 많아양반 계층의 사노비 살상 금지돼노비-주인간의 절대적 관계 없어‘더 평등한 세상’ 향한 멀고 먼 길

 

소송, 재산축적 등으로 위상 높아져

조선 신분제는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하거나 양반·중인·평민·천인으로 나누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 반상(班常)의 차이도 강조되는데, 시대와 지역, 그리고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 편차가 있다. 오늘은 신분제 중에서 노비 정책의 흐름을 살펴본다. 노(奴)는 남자, 비(婢)는 여자를 가리킨다.

 

노비는 주인에게 예속된 존재였다. 양반이나 양인은 국가에 대한 의무 외에 사회적으로 타 신분에 예속돼 있지 않았다. 노비를 서구의 노예나 농노에 비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예속, 채찍질, 성노리개, 매매 등 노비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동정과 선정성이 어우러져 피상적으로 관찰된다. 연구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노비의 매매 자체가 드물었다. 물론 그것이 신분의 불평등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황해도 백천군에 거주한 노비들의 가계와 신분 정보를 기록한 한글 호적문서. [중앙포토]

 

 처음 조선시대를 공부할 때 조선 초기에 대략 30% 정도의 인구가 노비였다는 사실을 알고 의아했다. 이 수치를 근거로 누구는 “조선은 전 국민의 반 가까이를 종으로 부린 시대”라고 비난한다. 또 어떤 학자는 조선사회를 ‘노비제 사회’라고 주장한다.

 

노비 같은 예속민은 전쟁 포로나 대규모 약탈로 조달되는 것이 일반 역사의 경험이다. 로마시대의 노예 조달, 유럽과 미국의 아프리카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납치가 대표적이다. 종종 채무, 자발적 의탁에 의해 노비가 되기도 하지만, 비율은 높지 않다. 그런데 조선 초기에는 그런 전쟁이나 약탈이 발견되지 않는다. 자국 백성이 노비인 것이다. 자국 백성을 노비 같은 예속민으로 삼는 것은 중국·유럽·아프리카 등 어느 곳이나 보인다. 일본은 16세기에 자국 백성을 노예로 수출하기도 했다.

 

아무튼 조선 인구의 노비 비율은 디폴트로 접근하는 게 상식에 맞다. 고려 때 인구 비율을 넘겨받은 것이리라. 고려 후기, 지배층이 산과 강을 경계로 삼는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면서, 국가권력의 약화를 틈타고 불법적인 토지 침탈을 자행했다. 그 과정에서 일반 백성은 차라리 몸을 맡기는 예속민이 되거나, 압량위천(壓良爲賤)으로 노비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사료를 통해 충분히 확인된다.

 

공민왕 때 원나라 지배에서 벗어나고 친원 귀족 세력의 지지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추진한 개혁은 이런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였다. 전담 기구인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은 빼앗긴 토지와 노비가 된 양민의 원상회복을 위한 관청이었다. 하지만 고려 사회는 이 개혁을 감당하지 못했고, 조선 건국이라는 새로운 판을 기다려야 했다.

 

▲노비 출신 학자 송익필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삼현수간』. 보물 1415호. [사진 문화재청]

 

조선 정부는 건국 초부터 양인화 정책을 폈다. 태종 때 사찰에서 몰수한 노비는 공노비로 전환했는데, 이들은 독자적으로 살면서 공물을 바치고 양인과 다름없이 생활했다.

 

여진인 등을 양인으로 선포하고, 백정을 양인화했다. 정부에서 노비 소송을 지원해서 천민이 양인 신분을 얻게 했다. 주인의 사노비 살상도 금지했다. 양천의 교차 혼인을 금지하면서 고려시대 이래 ‘일천즉천(一賤則賤)’, 부모 중 한쪽이 천인이면 자식도 천인이 되는 길을 막고자 했다. 이런 양인화를 추구하는 조선 정부와, 노비가 재산인 소유주 사이의 대립이라는 밀고 당기는 역정이 조선 전기의 노비제를 둘러싼 상황이었다.

 

중엽에 접어들어 율곡 이이는 “종모법(從母法)이 양민 여자에게는 적용되지 않아 양민이 개인의 노비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했다. 율곡이 말하는 종모법은 양인 남자와 천인 여자가 혼인하면 자식이 어미의 신분을 따라 천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 종모법은 이중 잣대였다. 천인 남자와 양인 여자가 혼인할 때는 적용되지 않았다. 결국 당시 종모법은 어느 경우나 자식이 노비가 되는 불합리한 법이었다

 

▲노비 출신 학자 송익필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삼현수간』. 보물 1415호. [사진 문화재청] 

 

그러다 보면 양인의 숫자는 줄고 사노비가 많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이는 군역 확보 차원에서도, 사회 융화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이이는 부모 가운데 한쪽이라도 양인이라면 자식도 양인이 돼야 한다는 원칙에서, ‘노양처종모법(奴良妻從母法)’을 주장했다. (명칭이 비슷해서 앞의 종모법과 헷갈리기도 한다)

 

이후 두 차례의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인 효종·현종대에 노양처종모법이 입법됐다. 이경억이 충청 감사로 있을 때 주장한 것을 현종이 승인했다. 1669년(현종10)이었다. 재야의 유형원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 법은, 가까이 군역을 담당할 양정(良丁)을 확대하는 방법이기도 했고, 동시에 점차 노비제를 폐지하는 방향이기도 했다.

 

민생과 재정 안정되며 점차 사라져 

그러나 일이라는 게 그리 쉽게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2차 예송 이후, 1678년(숙종4) 형조판서 이원정은 “종(奴)이 양녀를 처로 삼은 자는 양역(良役)을 꺼리고, 노와 주인 사이에 소송이 더욱 번거롭다”며 개정을 요청했고, 영의정 허적도 자신은 10년 전 법안에 반대했다면서 “겨우 10년 만에 그 폐단이 이와 같다. 종과 주인 사이의 사송이 어지러워 윤기(倫紀)가 무너지게 되었다”며 폐지를 주장했고, 마침내 노양처종모법은 폐기됐다.

 

1684년(숙종10) 우의정 남구만의 발의로 노양처종모법이 부활했으나, 1689년(숙종15) 기사사화(己巳士禍)를 겪은 뒤 다시 사라졌다. 영의정 권대운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좌의정 목내선, 김덕원 등은 “노비와 주인은 임금과 신하와 같다”‘며 폐지를 주장했다. 그리고 숙종 연간에 다시는 노양처종모법은 회복하지 못했다. 경종이 즉위한 뒤에도 신임사화라는 혹독한 정변을 겪으면서 논의조차 되지 못하였다. 앞서 소개한 윤봉구의 시는 이 무렵 지은 것으로 보인다.

 

영조가 즉위한 뒤 조문명은 “노와 양처(良妻)에게 태어난 자식이 아비의 신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더욱 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꺼진 불씨를 되살렸다. 영조가 반대했으나, 양역 확보라는 정책 과제와 맞물려 1731(영조7) 법으로 확정돼 『속대전(續大典)』에 실렸다. 대동법·균역법으로 민생과 국가 재정이 안정되며 노비의 생활이 양인과 큰 차이가 없게 된 사회 현실이 바탕이 됐을 것이다. 그리하여 노비제에 대한 이런 사상의 기조와 정책은 1801년(순조1) 납공(納貢)하던 내수사와 각 관청 노비의 양인화, 1886년 노비세습제의 폐지, 1894년 노비제의 전면 폐지로 이어질 수 있었다.

 

노비와 주인은 신하와 임금의 관계?

 노비제를 두고 성리학을 탓하는 건 일제강점기 이래 여전하다. 이영훈은 “조선 유교는 노비-주인 관계를 추가하여 실은 육륜을 창출했으니 이 점은 유교의 본산인 중국에서 찾을 수 없는 조선 유교의 두드러진 특질의 하나”라고 했다. 삼강오륜에 더해 ‘6륜’이 됐다는 말이다. 본문에 언급한 ‘노비와 주인은 임금과 신하와 같다’는 주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앞서 살펴봤듯이 조선 사람들은 끝내 ‘노비와 주인의 관계’를 ‘6륜’에 넣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주인-노비의 명분론을 뚫고 노비의 사회적·정치적 위상이 높아가고 있었고, 생각 있는 성리학자들은 그 성장을 사상과 정책으로 받아들였다. 걸핏하면 성리학만 탓하는 게으름으로는 실상에 다가가기 어려울 뿐 아니라, 피지배 계층의 소곤거림, 인내와 억제 속에서 성장한 자기의식, 그것을 대변하는 지식층의 역할을 포착하기 어렵다.

중앙일보 오항녕 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0.15 노예보다 농민에 가까워…가족구성도 평민과 비슷

노비제, 사실과 편견 사이 

▲조선 후기 화가 김득신(1754~1822)의 ‘노상알현도(路上謁見圖)’. 길에서 우연히 만난 양반과 상민의 모습이 조선시대의 신분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진 평양조선미술박물관]

 

지난 칼럼(9월 17일자)에서 조선 노비제의 추이, 노비의 평민화 정책을 살펴보았다. 부모 중 한쪽이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되던 조선 전기의 정책 기조에서, 17세기가 되면서 아버지가 양인이면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가 양인이라도 자식이 양인이 되는 정책으로 바뀌었다고 서술했다.

 

약간의 논란은 예상했지만 실제 댓글은 더 흉흉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조선을 미화한다” “조선 유학자들은 대부분 수백 명 노비를 거느리고 착취했다”는 반론이었다. 내 말에 공감해주는 분은 거의 없었다. 

 

전쟁포로·약탈노예와 성격 판이
매매에 따른 가족해체 거의 없어
“노비 두느니 소작 주는 게 낫다”
양반층과 ‘상호보험적’ 관계 이뤄

먼저 내가 그 칼럼을 잘못 썼구나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일방적으로 비판을 받을 리 없기 때문이다. 댓글을 쓴 독자들도 그리 독해력이 좋은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 주제를 다시 논의해보자고 마음먹은 것은 그 댓글에서 중요한 함의를 읽었기 때문이다. 댓글 중 누구도 노비제가 바람직한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청산하고 극복해야 할 악습으로 본다는 점 말이다. 이보다 중요한 공감대가 어디 있는가.

 

 올해 초부터 시작된 이 칼럼의 취지는 ‘식민주의=근대주의’ 프리즘을 치우고 조선을 하나의 사회, 문명으로 설명해보자는 것이었다. 여전히 기존 프리즘이 강고해서 내 칼럼이 조선을 미화한다고 보는 이가 많은 듯하다. 그래도 미화라는 말은 과하다. 

 

“조선을 미화한다”는 댓글은 오해일 뿐

▲조선시대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 [사진 한양도성박물관]

 

조선 초, 정부는 일천즉천(一賤卽賤) 악법을 개선하지 못했다. 이는 성종 때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된 바다. 여기서 내가 놓친 것이 있다. 국민의 30% 이상으로 추정되는 노비 숫자를 나는 고려 후기의 연장에서 이해했는데, 그보다는 세조 때 보법(保法)으로 군역 부담이 늘고, 그 압박으로 양인이 감소한 것이 노비 증가의 원인이었다. 노비제는 이전 문명에서 넘겨받은 게 아니라 조선 정부의 정책이 만들어낸 인재(人災) 성격이 컸다.

 

이 악법을 깨는 시간도 적지 않게 걸렸다. 17세기 노(奴·남자)가 양인 아내를 얻어 자식을 낳으면 양인이 되는 법은 율곡의 제안 이후로 쳐도 150년이 걸렸고, 1669년(현종10) 첫 입법 이후에도 폐지와 부활을 거듭하다가 60년 뒤인 1731년(영조7)에 확정돼 『속대전(續大典)』에 실렸다. 그래서 18세기 이후 노비제는 쇠퇴한다. 이 사실을 근거로 나는 조선 사람들은 주-노 관계를 오륜에 더하여 육륜으로 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문명의 선진성을 판단하는 데 사회 구성원의 통합성, 즉 갈등의 감소가 주요 지표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 』의 속편 격인 『속대전』.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우리가 노비제를 살피는 이유는 생사여탈, 매매, 성노리개 등의 용어를 통해 묘사될 때 빠지기 쉬운 선정적 상상을 도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삶이 어떠했는지, 역사적 실상에 접근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비의 발생·거주·의무에 대한 자료를 검토해야 한다.

 

예컨대, 노비의 발생 과정은 존재 양태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다.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앵글로색슨 등 백인들은 당초 원주민인 인디언을 노예로 삼으려다 실패하고 아프리카 흑인을 약취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백인보다 아메리카 지리에도 밝았고 그곳 농작·수렵에도 익숙했다. 그러니 노예가 되지 않았다. 억지로 그들을 노예로 삼아 봐야 도망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인디언을 노예로 삼는 방법은 흑인 노예 경우처럼 잡아다 유럽에 파는 것이었다. 일종의 뿌리 뽑기. 같은 이유에서, 백인 노예주가 종종 오해하고 매도했던, 흑인 노예의 비굴하기까지 보였던 나약함은 천성이 아니라 뿌리 뽑힌 사회경제적 고립감 때문이었다.

 

조선의 노비는 전쟁 포로나 약탈 노예가 아니라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노비로 전락했다고 해서 노예처럼 부릴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노비의 거주와 주인에 대한 의무를 보면 노예보다 일반 농민에 가깝다. 평민인 농민이 국가에 지던 군역과 비슷한 부담을 주인에게 지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변화가 더뎠을 것으로 추정되는 18세기 경상도 안동의 의성 김씨 집안 문서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노비의 가족 구성은 평민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매매에 의한 해체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노비제는 이제 훨씬 인간적인 모습을 한 것이다. 물론 노비 주인이 이때 와서 착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안동 의성 김씨 집안 문서가 말하는 것

▲보물로 지정된 경북 안동 의성 김씨 종택의 대청마루. [사진 문화재청]

 

지난번 살펴보았듯이 백성의 삶을 대변하는 지식층, 즉 사류(士類)의 정책적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거기에는 노비들의 자기의식이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노동력이 중요했던 16세기와는 달리, 18세기에는 토지의 재화 가치가 높아졌다. 차라리 소작을 주는 게 낫지, 노비를 농사에 부리며 그 생계를 유지해주는 일이 소유주에게 부담스러운 일이 됐다. 그러니 노비가 도망을 쳐도 심각하기보다 시큰둥한 것이다. “막금이가 지난번 도망갔다가 오늘 돌아왔으니 괴이한 일이다” “덕삼이가 행랑채로 들어왔다. 덕삼이는 2일에 달아났다고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노(奴) 만세가 쌀 1말과 돼지 1마리를 보내 초하루 제사를 도왔다. 그 성의가 가상하지만 너무 지나치다.” 잘 사는 종 만세가 제수를 보태자 감사하는 말이다. “비(婢·여자) 분이를 석전으로 보냈다. 어머니의 명을 따른 것이지만 제사를 담당하는 비를 사사로운 일에 써 큰 실례이니 매우 마음이 편치 않다.” 제사 지내는 비를 심부름 보내는 것도 불편했던 것이다. 이런 모습에서 미국 남부의 노예-주인 관계를 읽어낼 수 있겠는가.

 

상호성 인식이 평등을 향한 첫걸음

그래서 연구자에 따라서는 ‘불완전하지만’ 노비와 주인의 관계를 ‘상호 보험적 또는 상호 호혜적 관계’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여기서 상호성을 평등성으로 혼동하지는 말자. 불완전한 상호성은 위계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분이든 계급이든 말이다. 그러나 상호성의 인식이야말로 평등을 향한 첫걸음이다.

 

언젠가 노비의 양인화 정책을 발표했더니, 그게 평등사상에 기초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을 들었다. 평등이 멀리 있는 무엇은 아닐 것이다. 노비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자각 속에 평등이 있는 것 아닐까. 그 자각의 제도화 속에서 구현되는 것 아닐까. 늘 미래는 도둑처럼 와 있을 때가 많다. 그렇게 점차 노비제를 없애 간 것은 조선 문명사의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상 노비제에 대한 논의는 정진영·이영훈·김건태·권내현·임상혁·이정수의 논문을 참고했다. 논문은 도서관에서 쉽게 내려받을 수 있다.

 

역사 공부의 끝에는 평가가 있다. 우리 일기가 반성으로 끝나듯이, 사마천도 그랬고, 조선실록의 서술도 그랬다. 그러나 역사가 곧 도덕은 아니다. 역사 공부는 세상이 어떻게 굴러갔는지 설명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런 다음 판단·평가한다. 그런데 “조선사에는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나는 그 이유가 조선사를 연구하고 설명하기 이전에 판단·평가부터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사학자 하위징아(J Huizinga)의 말마따나 역사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마디 한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심, 역사학계의 종사자로서 무척 고마운 일이다. 근데 고맙지만은 않은 이유도 있다. 공들인 연구 자체를 도대체 인정하지 않는 가벼운 영혼들 때문이다. 이건 미숙함과 구별된다. 미숙함은 얼마든지 일취월장할 수 있다. 그러나 가벼움은 언제나 가벼움일 뿐이다.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자신의 현실도 그렇게 가볍게 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노동, 자유일까 강제일까

▲에릭 홉스봄

 

노비제에 담긴 인간의 예속과 불평등에 대한 독자들의 문제의식에 부응하는 뜻에서 한 걸음 더 생각해보자. 지혜로운 역사가 에릭 홉스봄(E Hobsbawm·사진)조차도 『자본의 시대』에서 “농노제 폐지는 자유로운 노동력을 동원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전제조건이었다”고 서술할 정도로, 임노동은 늘 ‘자유로운’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언급된다.

 

 보유지와 공유지에서 쫓겨난 농민은 산업혁명 무렵 도시 빈민·노동자가 됐다. 공동체의 보호는 사라졌고, 내 몸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 수 있었다.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까지 휴일 없는 15시간 노동이 드물지 않았다. 그나마 도시의 일자리는 늘 모자랐다.

 

 중세 농민이 부분적으로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토지에 묶여 있었다면, 현대 사회의 나는 부분적으로 경제적 강제에 의해 월급에 묶여 있다. 그러나 인간은 묶여 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놀고 즐기고 고뇌하며 삶을 가꾸어간다. 그 인간다움의 크기, 딱 그만큼 사회는 살만한 것이 된다.

중앙일보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1.11 한국어 기원은 9000년前 중국 동북부 요하의 농경민

[사이언스카페] 네이처에 투르크어·몽골어·일본어 포함하는 트랜스유라시아어 기원 발표

▲트랜스유라시아어의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지도. 한국어(분홍색)와 일본어(짙은 황색), 투르크어(노란색), 몽골어(연회색), 퉁구스어(진회색) 등 트랜스유라시 어족 언어들이 9000년 전 중국 요하(붉은색)에서 조상 언어를 쓰던 농경민이 각지로 이주하면서 생성됐다는 주장이 나왔다./네이처

 

 한국어가 투르크어, 몽골어, 일본어와 함께 9000년 전 신석기시대에 지금의 중국 동북부에 살던 농경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밝혀졌다. 지금까지는 그보다 훨씬 뒤에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전 세계로 이주하면서 비슷한 체계를 가진 언어들이 퍼졌다고 알려졌다.

 

독일 막스플랑크 인류사연구소의 마티너 로비츠 박사 연구진은 “언어학과 고고학, 유전학 연구 결과를 종합 분석한 결과 유럽에서 동아시아에 이르는 트랜스유라시아 어족(語族)이 신석기 시대에 중국 랴오강(遼河,요하) 일대에서 기장 농사를 짓던 농민들의 이주 결과임을 확인했다”고 11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밝혔다.

 

◇모음조화, 문장구조 유사한 트랜스유라시아어

이번 연구에는 독일과 한국·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10국 언어학자, 고고학자, 유전생물학자 41명이 참여했으며, 한국외국어대의 이성하 교수와 안규동 박사, 동아대의 김재현 교수, 서울대의 매튜 콘테 연구원 등 국내 연구진도 논문에 공저자로 등재됐다.

 

트랜스유라시아 어족은 알타이 어족이라고도 한다. 서쪽의 투르크어에서 중앙아시아의 몽골어와 시베리아의 퉁구스어, 동아시아의 한국어, 일본어로 구성된다. ‘보글보글, 부글부글’처럼 앞 음절의 모음과 뒷 음절의 모음이 같은 종류끼리 만나는 모음조화가 나타나고, ‘나는 밥을 먹는다’처럼 주어, 목적어, 서술어 순으로 말을 한다. ‘예쁜 꽃’처럼 수식어가 앞에 오는 것도 특징이다.

 

트랜스유라사이아 어족은 유라시아대륙을 가로지르는 방대한 언어집단임에도 불구하고 기원과 확산 과정이 불명확해 학계에서 논쟁의 대상이 됐다. 로비츠 교수 연구진은 고대의 농업과 축산 관련 어휘들을 분석하는 한편, 이 지역의 신석기, 청동기 시대 유적지 255곳의 고고학 연구 결과와 한국과 일본에 살았던 초기 농경민들의 유전자 분석 결과까지 비교했다.

 

연구진은 모든 정보를 종합 분석한 결과, 약 9000년 전 중국 요하 지역에서 기장을 재배하던 트랜스유라시아 조상 언어 사용자들이 신석기 초기부터 동북아 지역을 가로질러 이동한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기장은 벼과 기장속의 한해살이풀이다. 9000년 전 중국 요하 일대에서 기장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퍼지면서 그들이 쓰던 언어가 한국어, 일본어, 투르크어, 퉁구스어, 몽골어 등 트랜스유라시아 어족으로 발전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위키미디어

 

◇신석기시대 한국인과 일본인 유전자 일치

이번 ‘농경민 가설’에 따르면 트랜스유라시아 조상 언어는 북쪽과 서쪽으로는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로 확산됐고, 동쪽으로는 한국과 일본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3000~4000년 전 동부 초원지대에서 발원한 유목민이 이주하면서 트랜스유라시아어가 퍼졌다는 ‘유목민 가설’을 뒤집는 결과이다.

 

로비츠 교수는 “오늘날 국경을 넘어서는 언어와 문화의 기원을 받아들이면 정체성을 재정립할 수 있다”며 “인류사의 과학은 언어와 문화, 사람의 역사가 상호작용과 혼합의 확장의 하나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성하 한국외대 교수는 “각 분야의 연구 결과를 입체적으로 종합 분석해 트랜스유라시아어가 목축이 아닌 농업의 확산에 따른 결과임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라며 “우리나라 욕지도에서 나온 고대인의 DNA 분석을 통해 중기 신석기시대 한국인 조상의 유전자가 일본 토착민인 조몬인(繩文人)과 95% 일치한다는 사실도 처음 확인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12.12 일제강점기 독일로 건너가 ‘한류의 씨앗’ 뿌린 亡國의 유학생들

서구에 한국 문화 알린 선구자
이미륵·김재원·배운성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1933년 독일 잡지 ‘데어 벨트-슈피겔’에 실린 배운성의 ‘한국의 아기’. 돌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죽은 배운성의 조카 배정길을 그린 그림이다. /대전프랑스문화원 제공

 

한국 문화의 세계 진출이 연일 화제다. K팝, K영화, K드라마가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 등 서구 사회를 휩쓸고 있다. 지구상에 BTS, 기생충, 오징어 게임을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는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K미술도 조금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세계 유수 미술관이 한국 작가의 작품을 컬렉션 하는 것은 예삿일이 되었다. 내년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V&A) 미술관에서는 ‘한류(Hallyu)’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리고,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뮤지엄(LACMA)에서는 최고 블록버스터 전시로 ‘한국근대미술’전을 준비하고 있다. 한때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코리아’라는 나라 이름도 제대로 알릴 수 없었던 과거와 비교해보면, 격세지감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초라한 시대에도 꿋꿋하게 서구 사회에 진출해, 한국의 존재와 문화를 알린 초창기 선구자들이 있었다.

 

◇압록강 건너 뮌헨으로 간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 이미륵(본명 이의경·1899~1950)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닐까. 이 유명한 자전소설은 저자가 고향 황해도 해주에서 서당을 다니고, 동네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기까지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눈앞에 펼친 듯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이미륵은 많은 이의 기대를 저버린 채 경성의전을 중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1919년 삼일운동에 연루돼 수배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스무 살에 목숨을 걸고 압록강을 건넌 그는 중국으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 안중근의 사촌 안봉근의 도움을 받아 가짜 중국 여권을 만들어 독일로 갔다. 그리고 안봉근 소개로 독일인 신부를 만나 수도원 생활을 하며 독일어를 익혔다. 1925년 뮌헨에 정착, 뮌헨대 동물학과에서 플라나리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 최초의 동물학 박사학위였다.

 

전공은 동물학, 본업은 뮌헨대 동양학부의 한국학과 동양철학 강사였지만,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한 것은 1946년 독일어로 출간된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덕분이었다. 이 소설은 발표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려 그해 독일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2차 대전 직후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독일 사회의 웬만한 지식인들은 대부분 이 책을 읽었다. 한국의 존재도 몰랐던 이들이 이미륵을 통해 한국의 풍습과 문화, 그리고 아픈 역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은 나중에 독일 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렸다.

◇이미륵에게 독일어 배운 김재원

 

▲1937년 뮌헨 근교 그래펠핑의 이미륵 집에서 이미륵(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김재원(오른쪽). /이미륵기념사업회 제공

 

1929년 뮌헨에 이미륵보다 열 살 어린 한국인 유학생 김재원(1909~1990)이 찾아왔다. 김재원은 함경남도 함주 출신으로 베를린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친척이 서양 부인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후 자신도 일본보다는 독일에서 유학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정식 여권을 발급받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베를린에 당도했다. 그 또한 스무 살에 압록강을 넘은 것이다.

 

베를린이라는 대도시는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느낀 김재원은 조용한 도시 뮌헨에서 유학하기로 결심하고, 무작정 이미륵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서 독일어를 배웠다. 이들은 거의 매일 만나 독일어 공부를 하고, 밥을 먹고, 진로 상담도 하고, 무솔리니가 초청한 로마 여행도 같이 갔다. 1935년 뮌헨대에서 교육학 학위를 취득한 김재원은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중국 미술과 고고학을 전공하는 교수의 조교로 들어가 고고학 공부도 하게 된다.

 

김재원은 1940년 2차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귀국했고, 해방되자마자 국립박물관 초대관장이 되었다. 1945년 미군정이 들어서자 문교부장 로카드 대위를 찾아가 “내가 적임자이니 국립박물관장을 하겠다”고 나선 인물이다. 미국인 대위는 그의 박사학위 명함을 보고, “베리 굿 맨”을 연발하더니 바로 발령장을 보냈다. 36세에 불과한 나이였지만, 이 시대 독일어와 영어가 능통하며, 외국에서 관련 학위를 받아 온 ‘준비된 재원’은 김재원 박사뿐이었으리라.

 

▲독일 유학 시절 김재원 전 초대 국립박물관장.

 

그는, 한국전쟁이 터져 서울이 점령됐을 때 유물을 전부 북으로 실어 보내라는 인민군의 협박에 맞서 ‘지연작전’을 펼친 일화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유물을 겹겹이 포장하면서 시간을 끌고, 포장한 다음에는 또 핑계를 대서 포장을 푸는 식이었다. 그러고는 9·28 서울 수복이 되자 미군에게 유물을 운송할 기차를 내놓으라고 해서, 전부 부산으로 소개(疏開)한 주역이다. 우리가 지금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반가사유상을 한가로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 덕분이다. 현재 이건희 기증관 활용위원장을 맡은 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의 딸이다.

 

◇書生으로 베를린서 유학한 화가 배운성

▲배운성의 ‘노는 아이들(팽이치기)’, 1930년대. /베를린 인류학박물관 제공 , Ethnologisches Museum, Staatliche Museen zu Berlin (사진 Martin Franken)

1929년 김재원이 처음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만났던 한국인 유학생 그룹에 배운성(1900~1978)이라는 화가가 끼어 있었다. 배운성은 이미 1922년부터 베를린에 와 있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전주 출신 갑부 백인기의 눈에 들어 전폭적인 후원을 받았다.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이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독일로 갈 때, 백인기는 배운성에게 경제학을 공부하라며 같이 보냈다.

 

배운성은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여러 항구를 경유, 프랑스 마르세유에 내려 처음 유럽 땅을 밟았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나서 들른 미술관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보고 크게 감명받아, 돌연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배운성은 생존력 최강의 인물이었다. 그는 베를린 예술대학을 졸업했고,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에서 제공받은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1928년 유명한 판화가 케테 콜비츠가 교수로 와있던 이 학교에서, 그는 유화와 판화를 섭렵하고 혼자 수묵화도 익혔다.

 

 ▲배운성 ‘제기차기’(1930년대). /대전프랑스문화원 제공

 

배운성의 활약은 독보적이었다. 1927년 파리 살롱 도톤느 입선을 시작으로, 1933년 바르샤바 국제미전에서 1등 상을 받았다. 1930년대 함부르크, 프라하, 파리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독일 잡지 ‘데어 벨트-슈피겔(Der Welt-Spiegel)’, 주간지 ‘디 보헤(Die Woche)’, 프랑스 주간지 ‘일뤼스트라시옹(L’Illustration)’ 등에 작품 이미지와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그의 작품은 극동 아시아의 사정을 궁금해하는 유럽인들의 기호와 욕구에 영합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각종 미디어에 ‘한국의 아기’ ‘한국의 결혼식’ ‘제기차기’ ‘팽이치기’ 등 한국의 이미지를 소개했다. 그는 “독일 제국의 절반 크기인 한반도에 거주하는 2000만 명의 사람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만큼 자신들의 독자적인 근원과 고유한 역사, 그리고 독특한 민족성을 지닌다. 이들의 외양에서도 이 점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1931년 9월 5일 자 ‘디 보헤’에 썼다.

 

▲배운성 ‘가족도’(1935년 이전). 왼쪽 끝에 흰옷을 입고 가죽 구두를 신은 인물이 화가 자신이다. /대전프랑스문화원 제공

 

배운성이 그린 그림은 지금 봐도 매혹적이다.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가족도’는 1935년 함부르크박물관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으로, 배운성의 말대로 한국인의 ‘외양’이 어떻게 다른지를 성별, 연령별로 보여주는 표본과도 같다. 한국의 가옥, 의상, 인물의 골상, 신체적 특징 등이 서양인의 눈에는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 즉 배운성이 서생(書生)으로 있었던 백인기 가문의 가족은 하나같이 고요한 위엄과 고결함을 갖추고 있다. 작품 형식에서도 평평한 화면 처리, 윤곽선의 강조, 오방색 위주의 제한된 색채 선택을 통해 작가는 의도적으로 동양의 미학을 제시하고자 했다.

 

배운성은 종종 스스로 모델이 되기도 했다. ‘가족도’에서도 왼쪽 끝에 흰옷을 입고 가죽 구두를 신은 인물이 화가 자신이다. 자신을 박수무당처럼 표현한 자화상도 2점 있는데, 그중 한 점은 현재 베를린 인류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로마 신전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문명’을 배경으로, 한국의 박수 차림을 한 화가 자신이 주립(朱笠·붉은 칠을 한 갓)을 쓰고 전복(戰服)을 입은 채 수수께끼 같은 표정과 손짓을 하고 있다. 그는 서양과 동양 문화의 교접을 몸소 체험한 자신의 독특한 위치 자체를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배운성 ‘자화상’(1930년대). /베를린 인류학박물관 제공, Ethnologisches Museum, Staatliche Museen zu Berlin (사진 Martin Franken)

 

▲배운성 ‘모자를 쓴 자화상’(1930년대). 유럽의 카바레를 배경으로 자신을 박수무당으로 그린 자화상이다. /대전프랑스문화원 제공

 

1930년대 배운성도 이미륵을 찾아간 적이 있다. 이미륵의 절친 화가 브루노 구텐존과 함께 찍은 사진도 남아있다. 행복한 한때다. 그러나 배운성은 나치의 극단적인 예술정책을 피해, 독일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서 다시 자리를 잡아야 했다. 그러고는 1940년 2차 대전의 포화 속에서 빈손으로 파리를 빠져나와 귀국했다.

 

▲1930년대 뮌헨 근교 그래펠핑의 이미륵 집에서. 앞줄 왼쪽이 이미륵, 뒷줄 오른쪽이 배운성. /국립현대미술관 김복기컬렉션 제공

 

◇파리 벼룩시장에서 발견된 배운성 작품

배운성이 귀국한 후, 독일인 친구 쿠르트 룽게는 ‘배운성, 한국의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다’라는 제목의 책을 1950년 출간했다. 배운성이 들려주었던 한국의 민담과 설화를 독일어로 옮긴 책이다. 배운성의 독특한 판화 작품도 간간이 끼워 넣었다. ‘압록강은 흐른다’만큼의 파급력은 아니었지만, 이 책도 현재 독일의 여러 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책의 후기에서 룽게는 “세계적 관심의 중심”이 되어버린 한국의 전쟁 상황을 언급하며, 이제 배운성을 다시 만나리라는 생각을 포기해야겠다고 썼는데 실제로 이들은 재회하지 못했다. 배운성은 전쟁 통에 살아남기는 했지만, 전쟁 중 월북했고 다시는 유럽 땅을 밟지 못했다. 미술계 사람들은 다 아는 기적 같은 일이지만, 배운성이 파리에 놓고 온 작품들은 60년이 지난 2000년, 벼룩시장에 나와 한국인 소장가에게 입수되었다.

 

▲독일인 쿠르트 룽에가 1950년에 쓴 책 ‘배운성, 한국의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미륵, 김재원, 배운성! 이들은 태어난 배경도 다르고, 유럽을 가게 된 이유와 방법도 달랐지만, 망국(亡國)의 유학생으로 독일에서 공부하며 한국의 유산을 소개하고 지키는 일에 노력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노력이 현재 한류 스타와 같은 파장을 일으킬 수는 없었지만, 도전 정신과 의지력만큼은 세계 최강이 아닌가. 내년에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뮤지엄 전시를 위해 배운성의 ‘가족도’가 태평양을 건넌다. 그렇게, 압록강도 흐르고, 역사도 흐른다.

 

※ 베를린 인류학박물관 소장품 자료는 베를린 자유대학교 동양미술사학과 이정희 교수 팀의 협조를 받았다.

▲배운성 ‘성모자상’(1930년대). 서양 기독교의 전형적인 도상인 ‘성모자’의 한국식 버전이다. /대전프랑스문화원 제공◎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