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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4
[41] 국보 제41호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공식명칭 :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淸州 龍頭寺址 鐵幢竿)
지정일 : 1962.12.20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당간
수량/면적 : 1기
시대 : 고려시대
주소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48-19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현재 청주 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다.
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이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온전히 남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두 기둥은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도드라지게 선을 새겨 단조로운 표면에 변화를 주었다. 그 사이로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하였고, 돌기둥의 맨 위쪽에는 빗장과 같은 고정장치를 두어 당간을 단단히 잡아매고 있다. 특히 세 번째 철통 표면에는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간을 세운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 하는 고려 광종 13년(962)으로,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우리 문화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과 함께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의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예로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의 피해가 컸는데, 어느 점술가가 이르기를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곳에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이름 하였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문화재청
당간지주(幢竿支柱)
국내 각지 사찰을 찾아 가보면 절집 밖 멀리, 또는 가까이는 일주문 근처, 그러니까 절집으로 들어서기 전쯤에 이제 이곳부터 사찰영역이다 싶은 곳에서 늘 만나던 당간지주(幢竿支柱). 그저 2개의 석재 돌기둥이 서 있었고 그 이름이 당간지주라고 쉽게 지나쳤다. 그런데 막상 당간지주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아마도 온전하게 '당(幢)을 붙들어 맨 간(杆)을 세운 지주(支柱)'의 완성체를 본 적이 없고 늘 지주 2개가 서 있는 것만을 보아서가 아닐까?
▲우리가 흔히 만나는 당간지주, 대개가 돌기둥 2개가 서 있는 모습이다. 사진은 충남 서산 보원사터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정확히 표현하면 '당간지주'는 '불화를 그린 기(旗)인 당(幢)을 붙들어 맨' '간(杆)'을 세우기 위한 '지주(支柱)'이다.
즉 ‘불·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표시하고 벽사적인 목적으로 만든 당(幢)이라는 깃발'을 사찰을 찾는 사람들이 잘 보이도록 들머리 어딘가에 높이 매달아야겠는데 그러려니 높다란 장대와 같은 깃대가 필요한바 이 깃대가 곧 간(杆)이다. 그런데 이 장대처럼 긴 간(杆)을 높이 세워서 단단하게 고정하려니 받침대 역할을 하는 시설이 필요한데 바로 그 받침대이자 지지대 역할을 하는 것이 당간지주(幢竿支柱)인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당(幢)이나 간(杆)은 사라지고 지주(支柱)만 남아 있으니 흔히 만나는 돌기둥 2개가 그것이다.
▲당간지주 구조별 명칭.
용두사터(龍頭寺址) 철당간(鐵幢竿)
지금은 청주시내 번화가로 변해버린 이곳에 용두사와 관련된 어떤 것도 찾기 힘들다. 다만 철당간에 새겨진 기록과 다른 역사기록들을 살펴보면 고려시대에 세워져 번성하다가 조선시대에 이르기 전 고려 말쯤 폐사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다행스럽게도 철당간만은 잘 보존되어 국보 41호로 지정되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청주 시내 한가운데 번화가 건물들 사이에 손바닥만 한 공간을 확보하고 선 국보 제41호 '용두사지 철당간'. 옹색해 보인다.
▲지름 40cm, 높이 63cm의 철제 원통 스무 개를 이어서 전체 길이 12m에 달하는 높이로 우뚝 선 철당간(鐵幢竿). 원래는 서른 개였는데 대원군 때 경복궁 중건공사에 쓴다고 열 개는 떼어 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몇 개의 철당간중 가장 상태가 좋고 건립연대와 그 내력을 상세히 적은 명문이 철통에 적혀 있다.
▲아래에서 3번째 철통에 쓰인 용두사철당기(龍頭寺鐵幢記), 모두 393자의 글자가 돋을새김으로 양각되어 있는데 청주 호족 김예종이가 병에 걸려 사촌 형과 함께 철당간 30단을 세워 바친다는 것과 그때가 고려 광종 13년(962년)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준다.
당간(幢杆) 장식
게양대처럼 높다랗게 세워진 당간(幢杆)에 어떤 그림의 당(幢)을 어떻게 매달았는지도 궁금하다.
불교적인 그림이라고만 하기에는 당(幢)에 대한 상상이 부족하다. 아무튼, 어떤 형태의 깃발일지라도 간(杆)에 단단하게 매달아서 바람에 펄럭이더라도 문제가 없어야 할 것이며 수십 m에 이르는 높이까지 깃발을 올리고 내리는 방법도 궁금하던 차에 국립대구박물관에 있는 용두(龍頭) 당간장식의 발견은 놀라운 일이며 이러한 궁금증을 쉽게 해소해주는 열쇠가 된다.
▲국립대구박물관의 높이 68cm의 용두 당간장식(보물 제1410호). 입안에 물고 있는 커다란 여의주 뒤로 도르래가 있고 턱 아래에도 구멍이 뚫려 있어 줄을 걸어 깃발을 쉽게 오르내리도록 고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철통은 스무 개, 약 12m쯤이나 원래는 서른 개였다고 하니 18~9m쯤일 것이며 그 위에 이 용두 당간장식을 얹었다면 최종 20m는 족히 넘는 크고 높고 멋스러운 당간이었을 것이다. 그 당간에 화려한 불화(佛畵)가 그려진 비단 깃발 당(幢)이 매달려 펄럭이는 모습, 당(幢)과 간(竿)과 지주(支柱) 전체가 연결된 멋진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이러한 철당간은 계룡산 갑사, 속리산 법주사, 안성 칠장사 등에서도 볼 수 있으나 깃발까지 휘날리는 완전한 모습은 보기 어려우므로 불국사나 해인사, 통도사, 조계사 등 대표적인 사찰에는 완전한 모습을 재현하여 세워놓는 것도 검토 추진하기를 기대해본다.
당간과 전통 민간신앙
당간은 사찰이라는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인바, 이는 불교적인 장엄기구일 뿐 아니라 민간신앙에서 선사시대의 ‘솟대’나 일본의 신궁이나 신사 앞에 있는 ‘도리이(鳥居)’와도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 즉, 불교가 수용되기 이전에도 민간에서는 전통적인 천신 사상의 산물인 솟대를 세워 성역화를 표시하였으니 일본의 도리이도 이와 비슷하게 보이며, 이후 불교가 수용되고 난 후에도 사찰 영역을 성역화하는 역할로 당간을 세우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뿐만아니라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이 사찰의 성역공간 표시 외에 청주 지형이 무심천 위에 떠 있는 배(舟)와 같아서 청주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돛대를 상징하는 철당간을 세웠다는 민가의 전설을 보더라도 이러한 민간사상과의 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자료제공·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http://cafe.daum.net/sm-academy
2017.11.09
[42] 국보 제42호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
공식명칭 :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 (順天 松廣寺 木彫三尊佛龕)
지정일 : 1962.12.20
분류 : 유물 / 불교 공예/ 장엄구/ 장엄구
수량/면적 : 1좌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전남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 송광사 (신평리)
불상을 모시기 위해 나무나 돌, 쇠 등을 깎아 일반적인 건축물보다 작은 규모로 만든 것을 불감(佛龕)이라 한다.
불감은 그 안에 모신 불상의 양식뿐만 아니라, 당시의 건축 양식을 함께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목조삼존불감은 보조국사 지눌이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불감은 모두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운데의 방을 중심으로 양쪽에 작은 방이 문짝처럼 달려 있다. 문을 닫으면 윗부분이 둥근 팔각기둥 모양이 되는데, 전체 높이는 13㎝이고, 문을 열었을 때 너비 17㎝가 되는 작은 크기이다.
가운데 큰 방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이 조각되어 있고, 양쪽의 작은 방에는 각각 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본존불은 양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으며, 옷 주름은 2줄로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어깨높이로 들었고, 무릎 위에 올리고 있는 왼손에는 물건을 들고 있다. 오른쪽 방에는 실천을 통해 자비를 나타낸다는 보현보살을 배치하였는데, 코끼리가 새겨진 대좌 위에 앉아 있다. 보살의 왼쪽에는 동자상이, 오른쪽에는 사자상이 서 있다. 왼쪽 방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연꽃가지를 들고 서 있다. 문수보살은 사자가 새겨져 있는 대좌 위에 서 있으며, 보살의 좌우에는 동자상이 1구씩 서 있다.
이 목조삼존불감은 매우 작으면서도 세부묘사가 정확하고 정교하여 우수한 조각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세부의 장식과 얼굴 표현 등에서는 인도의 영향을 받은 듯 이국적인 면이 보이며, 불감의 양식이나 구조에서는 중국 당나라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국내에 남아 있는 불감류 가운데 매우 희귀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불감(佛龕)
감실(龕室), 또는 감(龕)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건물보다는 작은 규모의 공간을 말하는데, 벽면에 작은 공간을 마련하여 조각, 부조 또는 등잔 같은 공예품을 안치하는 벽감(壁龕)과 작은 규모의 건물 모양을 본떠 만드는 감실(龕室), 그리고 공예 수준의 신불(神佛)을 봉안하여 이동하기 쉽도록 하는 공예적 감이 있는데 작은 불상을 봉안하면 불감(佛龕)이라 한다.
국보 제42호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松廣寺 木彫三尊佛龕)
송광사 목조삼존불감은 송광사 16국사중에서 1대국사인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중국에서 가져왔다고 전하는데 아마도 먼 길 다닐 때에 호신 또는 약식예불 등에 필요하여 휴대용으로 제작한 듯하며, 둥근 모양을 반으로 잘라 본존불을 새겼고 나머지 반쪽을 다시 반으로 잘라 좌우로 열리게끔 하여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 입시보살로 새김으로써 삼존불이 되었다.
▲목조삼존불감을 펼친 모습, 보는 입장에서 좌측에 문수보살, 중앙에 석가모니불, 우측에 보현보살을 새겼다.
▲목조삼존불감을 닫아서 접은 모습이 포탄(砲彈) 모양이다(좌). 삼존불감이 보이게 펼친 상태에서의 뒷모습(우).
▲중앙의 석가모니불, 좌우로 2명씩이 시립해 서 있는 모습이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은 광배를 배경으로 감긴 모양의 나발(螺髮)이 뚜렷하고 입술은 붉은색이 보이며 연꽃대좌 위에 가부좌로 앉았는데 두 어깨를 덮은 법의(法衣)가 무릎 위로 늘어져 좌대를 덮으니 이러한 형태를 상현좌(裳懸座)라고 한다. 삼국시대에 크게 유행한 모습이기 때문에 통일신라 이후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법의 주름을 2겹으로 표현한 것도 특이한데 인도나 서역풍 옷주름 표현기법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오른손을 들어 무서움을 없애준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놓아 옷 주름을 잡고 있는 것인지 다른 물건을 쥐고 있는 것인지 잘 알 수 없다.
석가모니 좌우로는 2명이 2줄로 시립하였는데 (보는 사람 입장에서) 뒷줄에는 좌측에는 가섭존자가 서 있으며, 오른쪽에는 아난존자가 합장을 하고 서 있다. 일부 설명에는 왼쪽 가섭존자가 보주(寶珠)를 들고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공수(拱手)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가섭과 아난존자 아래로는 좌우 협시보살을 세웠는데 마치 횃불을 들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은 연화(蓮花)를 들고 있는 것이다. 두 보살은 가는 허리에 묶은 옷 주름과 옷자락 밑으로 도드라져 보이는 두 다리의 윤곽이 뚜렷하다.
▲중앙의 석가모니불 앞쪽으로는 나뭇가지를 새기고 여러 사람이 복잡하게 새겨져 있는 장엄부를 난간처럼 붙여 넣었다.
석가모니불 아래 앞쪽으로 추가한 장엄부(莊嚴部)는 아마도 좌우 대칭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사리 모양의 초문(草紋)을 새긴 위에 보면 가운데 향로를 두고 좌우에 공양을 바치는 사람을 새겼다. 왼쪽으로는 사자가 앉아 있고 나뭇가지 위로 한 사람을 더 새겼는데 오른쪽에도 대칭으로 새겼을 사자와 나뭇가지 위 한 사람, 그리고 키 큰 나뭇가지가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왼쪽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을, 오른쪽에는 실천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을 새겼다.
왼쪽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앉았는데 왼손에는 연꽃 가지를 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아쉽게도 파손되어 없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목걸이와 X자 형태의 영락(瓔珞 :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으로 치장하였으며, 사자의 왼쪽에는 마부가 말고삐를 잡듯 사자를 잡은 시자(侍者)가 두 다리를 굽힌 모습인데 거의 벌거벗은 듯 보인다. 사자의 오른쪽으로는 솟아오른 연꽃좌 위에 연봉오리를 쥔 보살상이 서 있는데 보살상과 문수보살의 입술에 붉은빛이 보인다.
오른쪽 보현보살은 낯설어 보이는 코끼리를 타고 앉았는데 오른발을 구부려 왼쪽 발로 향하는 반가(半跏)의 자세를 취하였다. 이 반가의 자세를 취한 보현보살은 우리나라에서는 보이지 않고 중국 당(唐)에서 만들어 전했다는 일본 절집의 불상이나 당나라 불상도 등에서 보인다고 하니 보조국사가 중국에서 가져왔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보현보살도 왼손에는 연꽃을 든 채 오른손은 위로 들었지만, 손가락을 앞으로 구부린 모습 역시 낯설어 보인다.
보현보살 왼쪽 아래에도 문수보살 옆에서처럼 연꽃좌 위에 연봉오리를 쥔 보살상을 대칭으로 세웠는데 X자 형태의 영락(瓔珞)을 묘사했다. 코끼리 옆 시자(侍者) 역시 두 다리를 굽힌 모습으로 마부처럼 코끼리를 잡으면서도 코끼리를 타고 앉은 보현보살의 왼발 받침을 떠받드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코끼리 위 보현보살 앞에는 왼쪽 문수보살의 사자 위에는 보이지 않는 보살(?) 한 구를 새겨 태웠다.
뛰어난 조각기법과 사실감
높이가 불과 13cm, 너비는 중앙이 8cm 남짓하고 좌우는 각각 4cm 남짓한 크기에 새긴 조각 솜씨가 실로 놀라워서 부조(浮彫)가 아니라 원형의 환조(丸彫)에 가깝게 느껴진다. 삼존불과 보살, 시자 등을 하나하나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입체감이 풍부하고 세밀하다. 특히 좌우의 상단에는 각각 3인의 비천상을 새겼으며, 중앙 상단에는 천개(天蓋)에 장막이 둘러쳐져 있고 그 위에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어 또한 감탄을 자아낸다.
왼쪽 문수보살의 오른팔과 중앙의 석가모니 앞 장엄부의 오른쪽 대칭부가 없어져 아쉬쉽다. 부분적으로 조금씩 흠집이 관찰되어 아쉽지만, 이 국보 제42호 목조삼존불이 1974년에 도난당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문화재이다.
아쉬움
금년 4월에 현대식 성보박물관을 재개관한 송광사 측에서 이 목조삼존불감을 상시전시하지 않고 수장고에 보관하다가 매년 사월초파일 전후에만 짧은 기간 특별전시를 한다니 과거 분실사건의 트라우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훌륭한 건물을 지어 놓고도 그에 걸맞은 전시가 되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가장 의미 있는 문화재가 탐방객들과 만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성보박물관 중앙에 가장 잘 보이게 전시하고 안내원이나 해설사를 배치하고 필요한 보안시설을 설치하면 될 일이다.
뿐만아니라 차제에 아침, 저녁 예불도 참석하기 위하여 송광사 종무소 측에 문의하니 예불 여부에 관계없이 입장료(3,000원)를 내고 들어오라는 답변에 아연실색이다. 종교기관에 예불하러 가겠다는데 (미리 전화로 문의하는 것도 우습거니와) 돈을 내고 들어오라는 것은 지나친 처사로 보여 답답한 마음이다. 종무소 얘기는 조계종 신도증이 있는 사람 외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입장료를 내야 한다는 것인데 조계종이 아닌 불교 신자도 있을 것이고, 현재 신자는 아니지만 관심자로 불교 예불행사에 참석하고 싶어 먼 거리 절집을 찾았는데 막무가내로 입장료를 요구하는 것은 종교기관으로서 적절한 처사는 아닌 듯하다.
자료 제공·내 나라 문화유산 답사회(http://band.us/@4560dapsa)
[43] 국보 제43호 혜심고신제서
공식명칭 : 혜심고신제서(慧諶告身制書)
지정일 : 1962.12.20
분류 : 기록유산
수량/면적 : 1축
시대 : 고려 시대
주소 : 전남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 송광사 (신평리)
이 문서는 고려 고종 3년(1216)에 조계산 송광사 제2세 진각국사 혜심에게 대선사의 호를 내릴 것을 제가(制可) 한 것이다. 이것은 능형화문의 무늬가 있는 홍, 황, 백색 등의 비단 7장을 이어서 만든 두루마리에 묵서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3.6m, 세로 33㎝이다. 이것은 고려 시대 승려에게 하사한 제서 중 몇 점 되지 않는 귀중한 자료이다. -문화재청
송광사 16국사 (國師)
불교에서는 참으로 귀하고 값진 보배 세 가지를 들고 있는데 불(佛), 법(法), 승(僧) 즉, 부처님(佛), 가르침(法), 제자, 승가(僧)를 말하며 이 3가지 삼보(三寶) 중 불보(佛寶)사찰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 법보(法寶)사찰은 부처님 말씀을 새긴 팔만대장경판을 보유한 해인사이며, 승보(僧寶)사찰은 역대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를 말한다.
송광사는 이처럼 16국사를 배출하여 한국불교의 승맥(僧脈)을 잇고 있다는데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며 칭송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조계종의 중천조(中闡祖)로 추앙받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스님이 바로 이곳 송광사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통해 고려말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16국사의 1세 큰스님이며 그 뒤를 이어 열다섯 국사들이 출현하였으니 승보종찰(僧寶宗刹)로 불려도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송광사(松廣寺)의 이름을 풀어보면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니 아직 2명의 큰스님이 나오지 않았다는 뜻으로 언젠가 다시금 혼탁해져 가는 이 세상을 맑고 향기로움으로 가득 채울 큰 스님이 오실 것으로 기대해 본다.
혜심고신제서(慧諶告身制書)
국보 탐방 중 처음으로 기록유산이다. 물론 국보 제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이 있었지만, 이는 기록유산임과 동시에 목판에 새긴 서각류임을 고려하면 비단에 글씨를 쓴 기록유산은 혜심고신제서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혜심(慧諶)은 보조국사 지눌에 이어 2세가 된 진각국사를 말하며, 고신제서(告身制書)란 스님을 대선사(大禪師)에 임명하는 고신(告身 ;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을 예부(禮部)에서 작성한 문서를 말하며 다른 말로 ‘고려고종제서’라고 한다.
1210년 보조국사 지눌이 입적하자 수선사(修禪社 ; 지금의 송광사)의 제2세 사주(社主)가 되었으며 1216년(고종 3년)에는 스님을 대선사(大禪師)에 임명하는 고신(告身)을 예부(禮部)에서 작성하여 발급하였다. 그 절차를 보면 먼저 왕명에 의하여 지제고(知制誥) 이득근(李得根)이 제사(制詞)를 찬술하고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 최홍윤(崔洪胤)이 검토하여 국왕에게 올렸다. 이것을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보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와 급사중(給事中) 현군체(玄君涕)가 심의하여 정식으로 시행을 요청하였다. 이에 국왕은 ‘가(可)’하다고 결재하였다. 이에 원본은 중서문하성에 보관하고 다시 사본을 만들어 국왕이 결재한 ‘可’의 부분을 ‘제가(制可)’로 고쳤다. 이후 상서성(尙書省)에 보내져 예부 상서(禮部尙書)·상서좌승(尙書左丞) 등이 기록한 다음, 예부낭중(禮部郞中)을 중심으로 하는 하급실무자가 2차 사본을 만들어 서명하고 날짜를 기록하여 스님에게 발급한 것이다.
문서의 내용은 주로 혜심의 학문과 덕망이 찬양되어 있다. 즉 문서의 끝 부분에 ‘참된 이를 숭상함은 나라를 위하려는 것이고, 상(賞)을 보이는 것은 선(善)을 권장하려는 것이다. 행동을 존경하고 도(道)를 사모하여 짐(朕)이 예를 다해 사(師)에 명령하노니, 불법을 넓혀서 인간을 이롭게 하여 사(師)는 힘을 다하여 짐(朕)을 보호하라’라고 되어 있어 스님의 덕망을 확인할 수 있다. -송광사
▲국보 제43호 혜심고신제서. 혜심 스님을 대선사에 임명하는 문서로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송광사 홈페이지에는 복제본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현장에는 사본(모조) 표시가 없어 문화재 전시의 기본을 지키지 않은듯하다.
문서의 크기는 길이가 352㎝ 정도이고, 폭은 35㎝이다. 문서의 재질은 비단인데 꽃무늬를 놓은 황·청색 일곱 장을 가로로 이어서 만든 것이다. 서체는 행서를 썼다. 문서의 끝에는 대선사의 시행 연월일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고려 시대 선사·대선사 제도의 일면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또 이 문서는 고신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원문서로 승정체제연구는 물론 국가행정체제를 파악하는데 긴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송광사에는 이 밖에도 노비첩(奴婢帖) 등 고려 시대 문서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어 관심을 끈다.
진각국사(眞覺國師)
진각국사는 사후 추증된 시호이며 스님의 휘는 혜심(慧諶),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이다.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스님은 본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유학자였으나 출가하여 스승 보조국사를 보좌하였고 저술서를 정리하여 후대에 전했을 뿐 아니라, 이를 발전시켰다. 또 고종 13년(1226)에는 선문염송(禪門拈頌) 30권을 집대성하셨다. 스님께서는 많은 문도를 양성하였고 그들의 활동은 고려 후기 불교계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1210년 지눌이 입적하자 왕명에 의해 조계종의 2세가 되었으며 그의 문하에는 최우(崔瑀)를 비롯해 당시 무인집권자들의 가족과 무인정권에 참여했던 수많은 문무 관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혜심은 1213년(고종 즉위)에 선사(禪師)를 제수받고 다시 1216년에는 대선사로 올려졌다. 1219년 왕이 단속사(斷俗寺)의 주지로 명하자 여러 번 사양하다가 이듬해 부임했다. 1234년 6월 26일 문인인 마곡(麻谷)에게 "이 늙은이가 오늘은 너무 바쁘다"라고 말하고 가부좌한 채 앉아서 입적했다. 이때 나이 56세, 법랍 32세였다. 왕은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승탑의 이름을 원조지탑(圓炤之塔)이라 사액(賜額)했다.
▲송광사 16국사 진영. 윗줄 왼쪽에서 5번째가 1세 보조국사 지눌, 그 왼쪽(4번째)이 2세 진각국사 혜심이다.
승탑은 광원암(廣遠庵) 북쪽 탑비 진각국사비는 강진군 월남산 월남사(月南寺)에 각각 세워졌다. 그의 비명에는 "승과(僧科)를 거치지 아니하고 승직에 오른 것은 사(師)가 처음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그의 문하에는 청진몽여(淸眞夢如)·진훈(眞訓)·각운(覺雲)·마곡 등이 있으며 청진몽여는 그의 뒤를 이어 수선사 제3세 법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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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8
[44] 국보 제44호 장흥 보림사 남‧북삼층석탑 및 석등
공식명칭 : 장흥 보림사 남ㆍ북 삼층석탑 및 석등 (長興 寶林寺 南ㆍ北 三層石塔 및 石燈)
지정일 : 1962.12.20
분류 :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수량/면적 : 3기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45번지 보림사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보림사는 통일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체징(體澄)이 터를 잡아 헌안왕 4년(860)에 창건하였다. 그 뒤 계속 번창하여 20여 동의 부속 건물을 갖추었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다. 절 앞뜰에는 2기의 석탑과 1기의 석등이 나란히 놓여 있다. 남북으로 세워진 두 탑은 구조와 크기가 같으며, 2단으로 쌓은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기단은 위층이 큰 데 비해 아래층은 작으며, 위층 기단의 맨 윗돌은 매우 얇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쌓았으며, 각 층 몸돌에 모서리 기둥을 새겼는데, 2·3층은 희미하게 나타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계단형으로 5단씩이고, 처마는 기단의 맨 윗돌과 같이 얇고 평평하며, 네 귀퉁이는 심하게 들려있어 윗면의 경사가 급해 보인다.
▲대적광전 앞에 서 있는 삼층석탑 2기와 석등, 국보급 문화재의 위용이 느껴진다.
탑의 꼭대기에는 여러 개의 머리장식들을 차례대로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석등 역시 신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네모꼴의 바닥돌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8각의 아래받침돌을 얹고, 그 위에 가늘고 긴 기둥을 세운 후, 다시 윗받침돌을 얹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받쳐주도록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창을 뚫어 놓았고, 그 위로 넓은 지붕돌을 얹었는데 각 모서리 끝부분에 꽃장식을 하였다.
석등의 지붕 위에는 여러 장식이 놓여 있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모두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예가 드물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탑 속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석탑은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석탑과 더불어 석등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재청
가지산문(迦智山門)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
전남 장흥 유치면 가지산 아래 평탄한 지형에 자리 잡고 있는 보림사는 구산선문의 효시가 되는 가지산문 도량이며 한국 선불교의 종찰(宗刹)로서 자부심과 자존심을 가진 절집이다.
▲왼쪽은 남탑 상륜부로 보륜이 3개이며 윗쪽 보개도 일부 손상되었다. 오른쪽 북탑은 보륜 5개와 보개가 온전하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로 창건 이래 끊임없는 중창과 중수를 거쳐 6·25전쟁 때 소실되기 전까지는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찰이었으나 공비들이 퇴각하면서 불을 질러 국보 204호였던 2층 법당 대웅전 등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리고, 단지 천왕문(天王門)과 사천왕(四天王)·외호문(外護門)만 남았다. 그래도 국보인 삼층석탑, 석등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인 보조선사의 승탑과 탑비, 동부도, 서부도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역사 속 무게를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준다.
구산선문(九山禪門)
선종(禪宗) 불교는 삼국시대에 들어와 왕조들로부터 공인되고 왕실로부터 귀족, 서민들의 신앙으로 그 범위를 넓혀가던 중 중국에 유학하여 선(禪)을 배운 다수의 유학승들이 일시에 귀국하면서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신라후기에 이르러 불안했던 국내정세 탓으로 급속히 전파되고 지방호족들의 후원을 받다가 고려에 들어와서는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보다 안정되고 지방세력과 왕족을 연결, 사회적 통합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이후 명망 있는 선사들이 배출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유력한 산문들이 생겨나니 후대에 이를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부르게 된다.
구산선문은 실상산문(실상사), 가지산문(보림사), 희양산문(봉암사), 동리산문(대안사), 봉림산문(봉림사), 성주산문(성주사), 사굴산문(굴산사), 사자산문(흥령선원), 수미산문(광조사) 등인데 이들은 선(禪) 사상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한 종파였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 들어와 구산선문은 조계종(曹溪宗)이라는 선종으로 자연스럽게 결집되었으며 이후 선종과 교종의 통합운동과 단일 종단으로의 결집과정을 거쳐 오늘날 조계종(曹溪宗)이라는 선종으로 자연스레 이어져 왔다.
▲탑신 3층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이며, 층마다 우주(모서리 기둥)를 새겼는데 2, 3층은 다소 희미하다.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5단으로 크고 뚜렷하며 지붕의 네 귀퉁이가 바짝 들려져 반전이 큰 모습이다.
한국 선종의 법맥
도의국사는 우리나라에 선법을 최초로 들여온 선종의 종조(宗祖)로 추앙을 받는다. 선덕왕 원년(784)에 사신 김양공을 따라 당나라로 건너가서 37년간 치열한 수행을 하였는데, 이때 중국은 달마대사 이후 선종의 5조 홍인(弘忍)대사 문하가 북종선의 신수대사와 남종선의 혜능(후에 6조로 인가 받음)대사로 나뉘어 활동하던 시기였다. 도의국사는 육조대사의 법통을 이어 인가를 받고 도의라는 이름도 얻어 신라로 귀국하였지만, 당시 교종이 우세하던 상황에서 선종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양양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들어가 40년 동안 선정을 닦으며 염거화상에게 법을 전하고 열반에 든다.
도의선사의 법통을 이어받은 염거화상은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주석하며 선정을 닦았지만 선문을 개설하지는 못했다. 그의 제자 중에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나타나 도의선사처럼 중국으로 건너가 선종의 인가를 받고자 하였으나 중국 여기저기를 다녀도 고국의 도의선사 법지식과 다를 바 없다는 깨달음으로 3년 만에 귀국한다. 이후 20여 년간 염거화상의 억성사와 진전사, 태안 일대 등을 다니다 청양 장곡사를 개창하였다. 신라 헌안왕대에 이르러 장흥 지역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헌안왕은 체징을 왕사로 초빙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100여 년 전 원표대덕이 세운 가지산사로 옮길 것을 청하니 마침내 보조선사 체징이 가지산사로 이주하였다.
▲석탑의 앞에는 큼직한 배례석이 하나씩 놓여 있는데 안상 무늬를 조각하여 아름답다. 석탑은 흙바닥에 지대석을 깔고 그 위에 2층 기단을 놓았는데 1층기단은 높이가 낮은데 비하여 2층기단은 매우 크고 우람하여 튼튼해 보인다. 1층 기단에는 좌우로 우주(모서리 기둥)를 새겼고 탱주(가운데 기둥)는 2개를 새겼으며, 2층 기단에는 좌우로 우주(모서리 기둥)는 같으나 탱주(가운데 기둥)는 1개만 새겼다.
국왕은 왕명으로 장생표주를 세워 사찰구역을 확정해주고 금과 곡식 등 시주를 부어주었다. 수행제자와 신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보조선사 체징의 주석으로 대찰(大刹)로 변신하게 되고, 이것이 바로 구산선문의 효시가 되는 가지산문의 개창이다.
즉, 가지산문은 우리나라 선종의 효시이며 도의국사를 초조로, 염거화상을 2조, 보조선사를 3조로 하여 개산 되었다. 헌강왕 6년(880)에 보조선사가 세수 77세, 승랍 52세로 열반에 들자 3년 뒤에 헌강왕은 시호를 보조선사(普照禪師), 탑호를 창성탑(彰聖塔), 절 이름을 보림사로 내려주며 이곳이 선종의 총본산임을 인정한 것이다.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3보림이라 일컫는다.
보림사 남ㆍ북 삼층석탑 및 석등
보림사는 고흥군 깊숙한 산속이기는 하지만 평지에 지어진 절집이다. 최근 초입에 거대한 산문(山門)을 세워 일주문이라 부르는데, 예전에 출입문처럼 일주문 역할을 하던 외호문(外護門)을 지나면 일직선상에서 조금 비켜난 각도로 사천왕상과 인왕상에 모셔진 사천문이 있다. 그 뒤편으로 너른마당에 철조비로자나불이 모셔진 대적광전이 있고, 그 대적광전 앞마당에 일금당(一金堂)쌍탑(雙塔) 형식으로 두 개의 석탑이 세워져 있으니 바로 국보 제44호 보림사 남ㆍ북 삼층석탑으로 두 개의 석탑 사이에 석등 한 기가 있으니 이를 포함한 3기를 묶어서 국보로 지정하였다.
▲높이 3.12m의 석등, 아래받침돌(하대석)이 두 겹으로 높아서 중간받침대(간주석)이 짧은 편이다. 그래도 화창위로 지붕과 상륜부를 치장하다보니 전체적으로 높아 보인다. 완전하게 보존된 석등으로 손꼽힌다.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하고 다가갔다. 대적광전이 동향(東向)인지라 쌍탑은 바라볼 때 오른쪽을 북탑, 왼쪽을 남탑이라 부른다. 북탑이 5.9m, 남탑이 5.4m로 높이가 비슷하며 생김새는 똑같다. 받침돌 위에 2층 기단과 3층 몸돌을 얹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으로 상륜부에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가 그대로 남아있다. 북탑은 보륜이 5개인데 반하여 남탑은 3개로 2개가 없어졌다.
비록 그 위쪽으로 수연과 용차, 보주 등은 안보이지만 이 정도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석탑이 별로 없으니 매우 귀한 것이다. 원래 상륜부 장식들은 쇠로 된 찰주에 끼워서 세우는데 쇠가 삭아서 없어지면서 소재들이 흩어져버리니 남아있기 어렵다. 반면 이곳은 찰주가 쇠가 아니라 돌로 되었기에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이라 한다.
이 탑은 1932년에 도굴꾼들이 사리장치를 훔치려고 넘어뜨렸던 것을 그다음 해에 복원했다. 이때 1층 탑신부 사리구멍에서 사리와 함께 조성내용이 기록된 탑지(塔誌)가 나왔는데, 신라 경문왕 10년(870)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이렇게 건립연대가 확실히 기록된 석탑은 거의 없어서 보림사 삼층석탑은 우리나라 석탑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다.
▲대찰(大刹)의 위용을 자랑하려는 듯 세운 산문(山門)이 웅장하다.
석등 역시 전형적인 신라 석등으로, 네모꼴의 바닥돌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8각의 아래받침돌을 얹고, 그 위에 가늘고 긴 기둥을 세운 후, 다시 위받침돌을 얹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받쳤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창을 뚫어 놓았고, 그 위로 넓은 지붕돌을 얹었는데 각 모서리 끝부분에 꽃장식을 하였다. 석등의 지붕 위에는 보개와 보주 등 여러 장식들이 얹혀 있다.
보림사는 장흥읍에서 탐진강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거대한 장흥댐 수면 옆으로 돌아 들어가는데 풍광이 수려하고 조용한 곳이다. 가지산(510m) 아래 평지에 자리 잡고 있으나 도로와 절집 사이 앞마당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아 어수선해 보이고 차량이나 사람의 진출입이 구분이 없다. 사하촌(寺下村)도 없고 절 앞에 그 흔한 식당 하나 기념품점 하나 없다. 입장료도 없고, 주차를 여기 해라 저기 해라 따지는 사람도 없는데 다행히 최근에는 문화유산 해설사가 고정 배치되어 상세한 설명을 청하여 들을 수 있다. 그런 절집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보니 절집 못미처 동구 밖쯤에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거대한 산문이 세워져 있고, '구산선문종찰 가지산 보림사'라고 어마어마한 현판을 걸었다. 자랑하고 싶어 세운 듯한데 과하다 싶었다. 유서 깊은 절집에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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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국보 제45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 공식명칭 :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
- 지정일 : 1962.12.20
- 분류 : 유물/불교조각/소조/불상
- 수량/면적 : 1구
- 시대 : 고려시대
- 주소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아미타불이 모셔진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이 건물은 국보 제18호이며 앞서 국보 탐방에서 소개 한 바 있다.(국보 제18호 : http://senior.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2/06/2015020602729.html) 부석사는 무량수전 앞 석등이 국보 제17호, 무량수전이 국보 제18호, 무량수전 안에 모셔진 아미타불(소조여래좌상)이 국보 제45호, 역대 조사를 모신 조사당 건물이 국보 제19호, 조사당의 벽화가 국보 제46호로 자그마치 5개의 국보를 보유한 대단한 절집이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지금의 손모양은 조선시대에 불상의 파손된 부분을 고치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무량수전 안으로 들어서면 부처님은 왼쪽, 즉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는 동향(東向)으로 모셔졌다. 그래서 정면으로 다가간 참배객은 부처님의 오른쪽 옆모습을 보게 되는데 뒤쪽으로 광배(光背)를 따로 만들어 세운 모습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로서 죽음의 고통에서 중생을 구제하고자 오시는 분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아미타바 붓다(Amitabha Buddha)' 혹은 ’아미타유스 붓다(Amitayus Buddha)' 로도 불리는데 아미타바는 한량없는 빛을, 아미타유스는 한량없는 수명을 의미하기에 전자를 무량광불(無量光佛), 후자를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 한다.
즉, 아미타불이라고 하면 범어가 중국을 거치면서 한자로 음사(音寫)된 것이며,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 하면 이를 의역(意譯)한 것이다. 그래서 아미타불이 모셔진 전각을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 하고 그 외에도 극락전, 미타전이라고도 부른다. 좌우 협시보살은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가장 보편적이나 고려 시대부터는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로도 한다.
▲무량수전 안에서 오른쪽(동쪽)으로 이동하여 바라본 아미타불, 비로소 정면 모습이다. 부처님 위쪽으로는 별도의 닫집 지붕을 장엄물로 세웠지만, 그 밖에 실내 전체모습이나 천장부분은 특별히 꾸미지 않아 각각의 목재 결구와 서까래 등이 드러나 개방된 모습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아미타불이 머물면서 설법을 하고 있다는 서방정토 극락은 고통이 전혀 없고 즐거움만 있다는 이상적인 세계로, 뭇 생명 있는 자들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통해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전한다. 우리가 통상 부르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은 아미타불 앞에 남무(南無)를 붙인 것이다. 원래는 "귀의한다. 귀명(歸命)한다. 몸과 마음으로 의지한다"는 뜻의 namas를 한자로 옮길 때 南無(남무)라고 옮긴바, 그 음이 "남"보다 "나"가 원음에 가까우므로 "나무"라 읽어 그 의미는 아미타불에 귀의하는 것이라고 한다.
동쪽(東向)으로 앉으신 부처님
대부분 절집은 어느 전각을 열어봐도 그 안에 모셔진 부처님은 중앙에 앉아서 정면을 바라보고 계신다. 그러나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셔진 국보 제45호 아미타부처님은 전각 안 왼쪽, 즉 서쪽으로 치우치게 앉아서 정면이 되는 동쪽을 바라보고(東向) 계시는데, 이는 아미타여래가 서방정토에 계심을 뜻하여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부처님들처럼 좌우에 협시보살 없이 독존(獨尊)으로만 계시는데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모시고는 있으나, 건물 내부와 천정을 막지 않아 각양각색의 목재 부재들의 결구 모습이 노출된 채 보이는 것이 오히려 시원한 개방감과 함께 보기 좋다.
▲좌우 협시보살 없이 아미타불 혼자 모셨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두 손이 취하고 있는 수인(手印)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을 때 취했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설명에 보면 조선 시대에 불상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손 모양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하는 데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모셔진 전각이 극락전(무량수전)이며, 원융국사탑비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어 (비록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지만) 아미타불이 확실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때 당시 스님들이나 불상을 만드는 사람은 그걸 몰랐다는 말인지? 아무튼 가까이 다가가 살펴본 불상의 수인(手印)은 아미타불의 구품인(九品印)이 아닌 석가모니의 항마촉지인이 분명하다. 참고로 작은 사진은 충남 서산 문수사의 아미타여래 좌상이 중품하생인 수인을 취한 모습이다.
무량수전 앞 석등도 국보, 무량수전 자체도 국보, 그 안에 모셔진 소조여래좌상 즉 아미타불도 국보... 답사 탐방객들에게는 연거푸 만나는 국보를 둘러보기에 숨이 가뿐 곳이다. 저 아래 일주문부터 안양루까지 9품 만다라를 상징하는 축대가 제법 높은 오르막으로, 헉헉거리며 올라 서방정토 극락의 주인을 만나기까지 나름대로 흥분도 되고 기대감에 부풀어 무량수전을 벌컥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십중팔구 전각을 지키는 법당 보살의 싸늘한 눈총을 맞고 움츠러들어 위축되고 만다.
밖에 있는 석등이나 무량수전 건물은 별 애로 없이 사진 찍고 둘러 볼 수 있지만, 전각 안으로 들어서 3m 가까운 높이의 아미타불을 만나는 순간 일이 생긴다. 국내 최대 소조불이라는 희소성과 함께 정면도 아니고 우측을 향한 모습과 좌우 주변에 아무런 장식도 없이 홀로 계시는 장면을 본능적으로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 찍지 말라"는 법당 보살의 단호한 경고에 깜짝 놀라 둘러보니, '사진 촬영금지'표시가 곳곳에 붙어 있다.
▲이렇게 서방 극락정토에 계신 모습을 구현하려 아미타불을 서쪽(왼쪽)으로 모시다 보니, 대부분의 절집이 법당 앞에 탑을 세우는 것과 달리, 이곳 부석사 무량수전의 석탑은 아미타불이 바라보는 정면이 되는 무량수전 밖 동쪽, 조사전으로 올라가는 약간은 솟아오른 지형에 세워져 있다. 이 또한 전례가 드물어 답사객들에게는 희귀한 경험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세계 유수 박물관의 국보, 보물들도 카메라 플래시나 삼각대 사용금지 등의 조건만 지키면 사진 촬영이 허락되는 것이 작금의 추세인데, 유독 절집에서 법당 내부 촬영은 금단(禁斷)의 성역이다. 물론 예불이나 어떤 행사가 진행 중이거나 스님이 독경 중이라면 피해야 하겠으나,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조건 사진 찍지 말라는 금지 통보에는 할 말을 잃는다.
이쯤 되면 탐방객은 불청객이요, 절집에서 별로 환영하지 않는 이단아이자 말썽꾸러기일 뿐이다. 물론 상황에 안 맞고 경우 없이 결례를 하는 경우가 없잖아 있었기에 그럴 줄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래도 상세히 안내해주고 설명해주고 사진 찍게 배려해주는 절집 보살상을 그려보는 건 꿈에 불과한 일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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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국보 제46호 부석사 조사당 벽화
- 공식명칭 : 부석사 조사당 벽화 (浮石寺 祖師堂 壁畵)
- 지정일 : 1962.12.20
- 분류 : 유물/불교회화/벽화/토벽화
- 수량/면적 : 6면
- 시대 : 고려시대
- 주소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조사당(국보 제19호)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현재는 일제강점기에 해체 분리된 벽화를 별도로 보관하고 있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백색·금색 등으로 채색하였으며, 각각의 크기는 길이 205㎝, 폭 75㎝ 가량이다. 양쪽의 두 천부상은 우아한 귀족풍으로 양감이 풍만하며,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 보는 건장한 모습이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건물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 3년(1377)임을 알게 되었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재청
국보 다섯 점을 품은 부석사(浮石寺)
부석사는 전체적으로 오르막 지형에 자리 잡았다. 산 아래 일주문과 당간지주를 지나 천왕문부터 범종루, 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까지 거대한 석축 몇 개를 허위단심 올라서서 국보 제17호 석등, 제18호 무량수전과 그 안에 모셔진 제45호 아미타부처님 등 국보 세 점을 만나다 보면 정신없이 살펴보며 놀라고 감탄하다가 이제는 다 본 줄 알고 그냥 하산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조금 더 인내를 갖고 무량수전 동쪽에 서 있는 석탑을 지나 산길을 잠시 오르면 갑자기 속세를 벗어나듯 절집조차 번거롭다는 느낌으로 지금까지의 복잡함이 사라지면서 차라리 절집은 이래야 하지 않나 싶을 만큼 조용하고 차분하다 못해 오롯한 모습으로 서 있는 작은 건물이 나타난다. 바로 의상대사를 모신 부석사 조사당(祖師堂)이다. 이 조사당 건물이 또한 국보 제19호이고, 이제 소개하려는 국보 제46호 조사당 벽화는 이 조사당 내부 좌우에 그려져 있던 벽화였다. 지금은 벽째 따로 떼어내어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어서, 국보 제46호 조사당 벽화를 보려면 조사당이 아니라 성보박물관으로 가야 한다.
조사당(祖師堂) -국보 제19호
비록 국보 제46호인 내부벽화는 뜯겨 성보박물관에 별도로 보관중이지만, 그 벽화가 들어차 있던 조사당 건물 자체도 국보 제19호다. 국보탐방에서 이미 소개한 적이 있는데 조사당이나 무량수전이나 국보가 국보를 품고 있는 것이다. (국보 제19호 탐방기 : http://senior.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2/17/2015021701806.html)
조사당은 조사(祖師)스님을 모신 곳을 말하는데, 여기서 조사(祖師)는 불교의 한 종(宗)이나 파(派)의 선덕(先德), 후세 사람의 귀의(歸依)와 존경을 받을 만한 승려 또는 한 종(宗)이나 파(派)를 세워서 그 종지(宗旨)를 열어 주장한 승려에게 붙여지는 칭호이다. 즉, 불교의 한 종파를 처음 개창한 승려를 이어 법통(法統)을 계승한 후대 승려들이 우리들이 조상을 모시듯이 창시조 승려를 모시고 기리며 받드는 것을 말한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구산선문이 개산하면서 산문별 개산조를 기리는 일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따라서 부석사의 조사당(祖師堂)은 부석사를 처음 창건한 의상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초상화를 모시거나 그와 관련된 불교적인 상징물 등을 모신 전각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신앙은 선종(禪宗)에서의 신앙형태이지 의상의 화엄사상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형태였으니, 부석사에 의상을 기리는 조사당이 있다는 것이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아마도 의상 직후에는 없었으나 선종이 유행하던 시기를 지나면서 부석사에도 화엄종에는 맞지 않지만, 유행에 따라 이를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부석사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조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소박한 건물이다. 발견된 묵서(墨書)에 따르면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워졌다고 하니, 내부 벽화도 그때쯤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 정면에 보호 철망은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자랐다는 선비화(仙扉花)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벽화 여섯 점 -국보 제46호
조사당에서 벽화를 떼어낸 것은 해체 후 수리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제 강점기 시절이었다고 한다. 이후 조사당 내부에는 비슷한 성격의 그림을 그려놓고, 벽째 떼어낸 진품 벽화 여섯 점은 하나하나 따로따로 액자에 넣어 보관했다.
나름대로 손질했겠지만, 완전 복원한 것은 아닌지라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전체 윤곽은 물론 세부적인 모습을 살펴보기 어려운 상태이며, 유리 액자 형태로 보관하다 보니 빛이 반사되고 번들거려서 질감이나 색채 식별이 쉽지 않아 매우 아쉬웠다.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인 국보 제46호 조사당 벽화 여섯 점. 여섯 개의 대형 액자 형식으로 보관 전시 중이다.
여섯 점의 벽화는 조사(祖師)스님인 의상을 모셔놓은 조사당 내부 벽화였으니 의상대사를 모시고 수호하는 그림이었을 터, 수호신 성격의 사천왕상 네 점과 범천과 제석천 두 점으로 식별이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하단에 명칭을 써놓았다.
▲왼쪽부터 제석천,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 범천 순으로 진열되어 있다.
사천왕상(四天王像)은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며, 두 발로 악귀를 밟고 서 있는 그 표정과 자태가 각양각색이다. 사악한 것으로부터 신성한 것을 보호하고 침략자로부터 수호하는 역할인데 조사당에서는 의천을 극진히 지키고 있던 듯하다.
▲절집에 들어설 때 일주문을 지나면 만나는 사천왕상. 속세의 잡귀가 불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수호신인데, 부석사는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조사당 벽화로 사천왕상을 세웠다. 그래서 절 입구에 사천왕문이 없나?
사천왕상 외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이 있다. 이들은 인도의 신이었으나 석가여래를 수호하는 최고의 수호신이 되었다. 둘은 불법수호의 쌍벽을 이루며 제석천은 오른손에 불자(佛子) 왼손에는 금강저를 들고 있으며, 범천 역시 불자를 들고 있으나 왼손에는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
▲벽화에서는 사천왕은 물론 범천과 제석천을 식별하기 어렵다. 참고로 석굴암에 새겨진 범천과 제석천과 비교해 보기 바란다. 왼쪽이 대범천, 오른쪽이 제석천이다.
사대부 양반들이나 스님들이나 조상을 극진히 섬기는 마음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뼈대 있는 양반들은 집안에 사당을 모셔 조상을 섬기는데 정성을 다한다. 특히, 중시조나 파조를 모심에 그 지극함이 실로 국법을 지킴과 다를 바가 없는데, 절집의 스님들도 자신들의 종조(宗祖)나 파조(派祖)를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화엄종의 종찰(宗刹)인 부석사에서 선종의 산문에서 개산조를 섬기는 방식으로 조사 스님을 섬기고 모시는 것을 넘어 조사당 안의 벽면에 부처님을 수호한다는 사천왕상과 범천, 제석천의 벽화를 그려 붙인 것은 조사(祖師)에 대한 공경심이 부처님에 못지않은 것임을 나타내는 증표라 할 수 있다.
다만, 채색화로 남겨진 6점의 벽화 국보의 상태가 많이 손상되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원본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모본(模本)이라도 하나 더 만들어 원형에 가깝게 복원 전시한다면 원작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47] 국보 제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공식명칭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지정일 : 1962.12.20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수량/면적 : 1기
- 시대 : 통일신라
- 소재지 : 경남 하동군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인 진감선사의 탑비이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몸돌에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 등 중앙에는 비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옆의 4면마다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직사각형의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는 등 많이 손상된 상태이다. 머릿돌에는 구슬을 두고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솟은 연꽃무늬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진성여왕 원년(887)에 세워진 것으로, 진감선사가 도를 닦던 옥천사를 ‘쌍계사’로 이름을 고친 후에 이 비를 세웠다 한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붓의 자연스런 흐름을 살려 생동감 있게 표현한 글씨는 최치원의 명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할 만큼 뛰어나다. -문화재청
하동 쌍계사(雙磎寺)
입춘(立春)이 지났다. 봄이 멀지 않았음인데, 아마도 곧 남쪽으로부터 꽃소식이 올라올테고 첫 소식은 매화(梅花)일 것이다. 그 매화를 보기위하여 해마다 3월초면 아직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섬진강 하류 전라도땅 광양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섬진강 건너편은 경상도 하동땅,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그 유명한 화개장터이다.
하동에서 화개장터까지 섬진강변을 따라 벚꽃길 80리라 통칭한다. 다시 화개장터에서 골짜기로 꺾어 들어가 화개천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있다. 천변 왼쪽은 오래된 십리벚꽃길로 남녀가 함께 걸어가면 혼인하게 된다는 일명 혼인길이며, 천변 오른쪽 더 늦게 생긴 도로변에도 심어놓은 벚꽃이 이미 무성해져 해마다 봄이면 이 화개천변을 따라 화려한 꽃대궐이 펼쳐진다. 바로 이 화개천변 십리벚꽃길이 끝날 즈음에 있는 절이 쌍계사(雙磎寺)로 국보 제47호 진감선사 탑비(眞鑑禪師塔碑)가 있는 곳이다.
쌍계사는 신라 진성왕 21년(722) 大悲(대비), 三法(삼법) 두 화상이 禪宗(선종)의 六祖(육조) 慧能(혜능)의 정상(頂相)을 모시고 귀국, '지리산 雪裏葛花處(눈 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 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지금 이곳에 절을 지었다. 그 뒤 당나라에 유학하던 진감선사가 귀국하여 퇴락한 삼법스님 절터에 玉泉寺(옥천사)라는 대가람을 중창하였고, 그 후 정강왕 때 쌍계사로 바뀌었으며,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버린 것을 벽암(碧巖)이 인조 10년(1632)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선 수행을 하는 선원(禪院),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는 강원(講院), 부처의 계율을 익히는 율원(律院)을 갖추어야 총림이라 부른다. 그동안 가야총림 해인사, 조계총림 송광사. 영축총림 통도사, 덕숭총림 수덕사. 고불총림 백양사를 일컬어 5대 총림이라 하였지만, 최근에 동화사, 쌍계사, 범어사를 추가하여 8대 총림으로 부르니 쌍계사로서는 경사스러운 일이다.
▲쌍계사 일주문. 피안(彼岸)으로 넘어가는 다리를 건너면 '삼신산 쌍계사(三神山 雙磎寺)' 라고 쓰인 일주문이다. 삼신산(三神山)은 중국에서 발해만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을 가리키는 말로 한국에서는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지리산을 일컫는 말이니 '지리산 쌍계사'쯤으로 읽으면 될 듯하다.
진감선사(眞鑑禪師) (774~850년)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 속성은 최(崔)씨. 전주(全州) 금마(金馬) 사람으로 부모를 일찍 여의고, 불법을 구하려는 뜻이 간절하여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 창주(滄州)에 가서 신감(神鑑)에게 출가하니, 얼굴이 검다하여 흑두타(黑頭陀)라 불렸다. 810년 숭산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앞서 당나라에 가 있던 도의(道義)를 만나 함께 다니다가 도의는 먼저 귀국하고 스님은 종남산에서 3년 동안 지관을 닦은 뒤에 길거리에서 짚신을 삼아 3년 동안 오가는 사람들에게 보시했다. 흥덕왕 5년(830) 귀국하여서는 상주 노악산의 장백사에 있다가 지리산으로 가서 화개곡의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창건한 옥천사(玉泉寺)를 크게 중창하였다.
진감선사 혜소는 불교음악인 범패를 들여와 대중화 시켜 많은 대중을 교화하였으며,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았다. 문성왕 12년(850), 나이 77세, 법랍 41년에 이곳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헌강왕이 시호 眞鑑禪師(진감선사) 탑호 大空靈塔(대공영탑)이라 하였다. 정강왕 때 옥천사를 쌍계사라 고치고, 최치원(崔致遠)으로 하여금 글을 지어 碑(비)를 세우니 국보 제47호 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이다.
진감선사탑비(眞鑑禪師塔碑). 국보 제47호
쌍계사의 전신 玉泉寺(옥천사)를 크게 중창한 진감선사를 기리는 탑비로 헌강왕이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탑호를 내렸다. 진성여왕 1년(887)에 세워졌는데 귀부와 비신, 이수가 모두 남아있다. 현재 대웅전 앞마당에 있으며, 비신의 훼손상태가 심각하여 외곽을 철제 틀로 덧붙여 보존하고 있고 글씨도 마멸이 심하나 다행히 영조 1년(1725)에 전문을 목판에 옮겨 새긴 것이 보존되고 있다 한다.
탑비의 비문은 고운 최치원이 짓고 쓴 명문장으로 총 2,417자의 해서체 글씨가 신품(神品)이라고 칭송받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로 우리나라 금석문의 으뜸으로 꼽힌다.
▲쌍계사 대웅전 앞에 동쪽을 바라보고 직각으로 서 있는 진감선사 탑비, 구도상 정확한 정중앙에서 약간 벗어나 보이며 세월이 흐르면서 지표면이 높아져서인지 비석은 표면 아래로 내려가 있는 모습이다.
▲귀부, 비신, 이수가 모두 온전하게 남아있지만 비신 앞면은 부분적으로 깨어져 부득이 비신의 측면과 후면에 철판 틀을 짜서 외곽을 감싸듯 둘러서 보호하고 있다.
▲이수는 용틀임이 실감나게 비틀려 새겨졌고, 앙화 위에 보주가 올려져있다. 중앙 네모진 부분은 두전(頭篆)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비석의 제목인 제액(題額)을 쓴다. 대부분 전서체로 쓰기에 전액(篆額)이라고 한다. 진감선사탑비는 '해동고진감선사비(海東故眞鑑禪師碑)'라고 쓰여 있다.
▲귀부는 다른 탑비에 비해 발도 작고 용머리도 실감이 덜하다. 아쉬운 부분이다.
진감선사(眞鑑禪師) 승탑. 보물 제380호
원래 탑비는 고승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며, 고승을 다비(화장)하여 모신 승탑과 함께 2종 세트로 남아 있어야 제격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탑비와 승탑이 멀리 떨어져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쌍계사의 진감선사 역시 탑비는 국보로 지정되어 대웅전 앞에 모셔져 있으나, 정작 승탑은 어디에 있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쌍계사 북쪽 능선 불일폭포 가는 길 중간에 서 있는 승탑 하나를 진감선사의 승탑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아쉽게도 관련 기록이나 명문이 없는 탓이다. 게다가 이 승탑은 몸돌이 제짝이 아닌 듯 아무 장식이나 조각 없이 다른 부분과 제대로 어울리지 않는다.
▲진감선사 승탑으로 추정되는 팔각원당형 승탑, 그냥 쌍계사 승탑이라고 부른다. 부도를 받치는 기단부는 상대석은 앙련으로, 하대석은 복련으로 중대석을 포함하여 장구형태를 이룬다. 그 위에 얹힌 몸돌이 아무 장식 없이 팔각모양이며, 지붕돌이 얹혀있는데 팔각모서리 귀꽃의 일부가 깨어졌다.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사산비명(四山碑銘)이란 '네 군데 山에 남긴 비석의 글'이라는 뜻으로, 신라말 최치원이 남긴 네 곳의 비명(碑銘)을 말한다.
통일신라 말기 대문장가 최치원(857~?)은 뛰어난 문장을 많이 남겼다. 그가 남긴 비문 중에서 `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聖住寺郎慧和尙白月光塔碑(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雙磎寺 眞鑑禪師大空塔碑(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大崇福寺碑(대숭복사비)`를 일컬어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칭하니, 국보 제47호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가 그중 하나이다.
'사산비명'은 최치원이 당대 고승의 행적이나 신라왕가의 능원(陵園)과 사찰에 관해 기록한 것이다. 사산비명은 그 시기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앞설 뿐 아니라 다른 전적에서 볼 수 없는 역사사실이 많아 한국학 연구의 필수적인 금석문이다. 4개의 비문 모두 사륙변려문(중국 육조 시대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한문 문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이 쉽지 않아 예로부터 많은 해설서가 나왔다.
우리 같은 일반인, 아마추어 답사가가 사산비명을 찾아보고 그 비문을 읽는다거나 뜻을 이해하고 역사적 가치를 단숨에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실제 어느 정도 해독력이 있다하여도 파손되어 남아 있지 않거나 부분적인 훼손이나 풍화 등으로 인한 손상으로 식별이 쉽지 않으니, 그 문장을 옮겨 적고 쉽게 풀어서 해석을 첨부한 설명문을 볼 수 있게 해준다면 참 좋을 것이다.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03.16
[48] 국보 제48호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석조보살좌상
국보 제48-1호 -
공식명칭 :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平昌 月精寺 八角 九層石塔)
- 지정일 : 1962.12.20
- 분류 :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 수량/면적 : 1기
- 시대 : 고려시대
- 소재지 :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374-8, 월정사 (동산리)
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基壇) 위에 9층 탑신(塔身)을 올린 뒤,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을 새겨 놓았고, 아래·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받침돌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주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1층 탑신의 4면에 작은 규모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고,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고려시대가 되면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多層)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탑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청]
국보 제48-2호
- 공식명칭 :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 지정일 : 2017. 01. 02 - 분류 : 유물/불교조각/석조/보살상
- 수량/면적 : 1구 - 시대 : 고려시대
- 소재지 :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374-8, 월정사 (동산리)
월정사 석조보살상은 팔각구층석탑의 남쪽 전방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탑을 향해 무엇인가 공양을 올리는 자세를 갖추고 있는 점에서, 원래부터 탑과 공양보살상은 한 세트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이 보살상은 고려 후기민지(閔漬, 1248∼1326)가 찬한『오대산사적(五臺山事蹟)』의 「신효거사친견오류성중사적(信孝居士親見五類聖衆事跡)」에 “탑 앞에 약왕보살의 석상이 손에 향로를 들고 무릎을 괴고 앉아 있는데, 전해오기를 이 석상은 절 남쪽의 금강연에서 솟아나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의 모습과 꼭 일치한다. 이에 따라 이 보살상은 대체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권6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근거하여 조성된 ‘약왕보살’로 일컫는다. 석조보살상은 전체적으로 양감이 강조된 모습이며, 안정되고 균형 잡힌 자세와 알맞은 비례를 갖추고 있으며, 보관과 귀걸이, 팔찌, 가슴 영락 장식 등 세부표현도 화려하고 섬세하다. 이와 같은 탑전(塔前) 공양보살상은 이전에는 찾기 힘든 고려 전기적 특징인 동시에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창적인 도상과 구성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또한 강원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어 고려 불교조각의 지역성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보살상과 세트로 조성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국보 제48호로 지정되어 있고, 석조보살상은 보물 제139호로 별도로 지정되어 별개라는 느낌을 줄 수 있으므로, 이미 국보로 지정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함께 묶어 국보로 지정하는 것이 조성 당시의 조형적, 신앙적 의미를 모두 찾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문화재청]
국보 제48호는 보기 드문 팔각구층탑이다. 강원도 평창군 월정사 절집 마당에 우뚝 서 있는데 구층탑 앞에 무릎 꿇은 공양상이 따로 보물 제139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별도로 지정되기보다는 하나로 묶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여 지난해 초에 국보 제48-2호로 승격되었다. 자연스레 국보 제48-1호 팔각구층탑과 국보 제48-2호 석조보살좌상으로 구분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구례 화엄사에 있는 국보 제35호 사사자 삼층석탑도 석탑 앞에 공양상이 있지만, 국보 제35호로 단일지정하였듯이 굳이 48-1호, 48-2호로 부를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공양상이 추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 점이 다르다고 하겠지만, 그야 설명문에서 언급하면 될 일이라고 본다. 문화재 행정이 너무 복잡해서 하는 말이다.
또한, 문화재청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이처럼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는 경우 그냥 일련번호가 빠져 있는데 그보다는 일련번호는 그대로 놔두고 해당 번호에 언제 국보 몇 호로 승격되었다든지 보물에서 해제되었다는 등의 상세한 설명을 해 놓는 것이 문화재를 찾아보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듯하다. 지금은 그냥 건너뛰니까 그 번호들은 어찌 되었지? 하는 의문을 풀 수가 없어 답답하다.
▲예를 들어 아래 검색페이지에서 보물 제138호, 139호, 140호는 어째서 없는지 알 수가 없다. 마침 국보 48호를 검색하다 보니 보물 제139호가 국보 제48-2호로 승격되었음을 알았을 뿐 보물 제138호와 140호는 왜 없는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다.
월정사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을 두루 품은 깊은 산 속에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평지지형에 차분하게 자리 잡은 절집이다. 지금의 건물들은 6·25전쟁 때 소실되어 대부분 근래에 다시 지었는데 사실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역사가 깊은 절이다. 지금도 조계사 제4교구 본사로 강원도 일대의 사찰이 모두 월정사의 말사로 편성된 큰 절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중국으로 유학하여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의 사리와 가사를 전해 받은 자장율사는 이곳 오대산으로 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 했으나 뵙지는 못하였다.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 중 중대(中臺)에 진신사리를 모셔 적멸보궁이 되니 5대 적멸보궁 중 상원사 적멸보궁이 그것이다.
이후 나말여초(羅末麗初)에는 9산 선문 중 하나인 강릉 사굴산문의 영향권에 들어가지만, 고려말 나옹선사, 조선조 사명당이 주석하면서 월정사의 위상은 높아졌다. 이곳에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을 보관하는 오대산 사고(史庫)가 들어오면서 억불숭유의 조선에서도 국가적 지원과 배려를 받았다. 사세(寺勢)는 번성하였으며 사굴산문의 본산 굴산사가 오대산의 영향권으로 편성되게 된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방한암 스님과 탄허스님, 만화스님으로 이어지는 유명 선승들이 주석하면서 지금의 월정사로 거듭나게 되었다.
국보 제48호 팔각구층석탑
월정사의 본당인 적광전의 앞마당에 세워진 팔각구층석탑은 전체적으로 8각의 모양이면서 2층의 기단 위에 9층을 올린 석탑으로 특이한 금동장식의 상륜부도 나름대로 잘 보존하고 있는 모습이다. 8각은 불교의 실천수행에 기본이 되는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다는 해석이다.
▲적광전 앞에 세워진 팔각구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 일명 공양상이라 부르는 석조보살좌상은 복제품이며 진품은 월정사 성보박물관 안에 모셔져 있다. 석탑이 국보 제48-1호, 보살상이 국보 제48-2호이다.
월정사 창건이 자장율사에 의한 일이라면서 이 팔각구층석탑도 그때 세워졌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당시 석탑은 대부분 방향(네모) 삼층 또는 오층탑 형식이었음을 볼 때 팔각형으로 구층을 올린 석탑양식은 고려 시대일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같은 다각다층석탑은 만주를 비롯한 북방 고구려 양식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묘향산 보현사의 팔각십삼층탑 등이 남아있으나, 이 월정사 탑의 높이가 15.2m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탑이다.
4개의 돌로 된 지대석 위에 하층과 상층, 2층으로 이루어진 기단부는 하층의 경우 면마다 안상을 2개씩 새겼으며 연화무늬를 새긴 갑석을 덮어 마치 불상을 받치는 대좌의 느낌이다. 그 위로 굄돌을 하나 놓아 상층기단을 조심스레 받치는데 상층기단에는 면마다 기둥을 새긴 후에 갑석과 굄돌을 얹어 그 위로 9층의 탑신을 올렸다. 부처의 사리를 넣은 탑신이 부처의 진신이라면 부처님을 연화 대좌 위에 방석(굄돌)을 깔고 모신 셈이다.
▲팔각구층탑의 2층 구조 기단부 모습, 탑신과 비교하면 8각이 뚜렷하지 않으며 전체적으로 부처님 연화 대좌를 연상하는 모습이다.
9층의 탑신과 지붕돌은 각각 다른 석재를 이용하였다. 어떤 것은 하나로 어떤 것은 2~3개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층마다 오를수록 줄어드는 체감률이 크지 않지만 9층이라는 높이가 하늘로 솟아오른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특히 1층 몸돌에는 8면 중 네 곳에 감실을 조각하였다. 그중 남쪽 감실이 크고 문틀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2층 이상 몸돌에는 감실은 보이지 않고 9층 모든 몸돌마다 기둥조각(우주)을 새겼으며 지붕돌 모서리마다 풍탁이 달려있어 그 꾸민 정성이 대단해 보인다. 또 지붕돌 아래 층급받침은 모두 3단인데 직선과 곡선이 섞어서 새겼으며, 바깥쪽으로는 낙수홈을 파는 세심함을 볼 수 있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 보륜까지는 석재이나 그 위로는 금동으로 장식하여 화려하며 격조 높게 보일 뿐 아니라 마치 탑 위에 보관을 씌운듯한 엄숙한 완성미를 보인다.
이 팔각구층석탑은 여러 번 화재를 입어 지난 1970년에 해체 보수하며 1, 2, 6, 9층을 새로이 교체하였다. 내부에서 여러 점의 사리구 유물이 나와 보물로 일괄 지정되었으나 연대를 확인할 근거는 나오지 않았다.
국보 제48-2호 석조보살좌상
석탑 앞에 공양상을 세우는 유형은 국립춘천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124호 한송사터 석조보살이나 보물 제84호 신복사터 석조보살 등 강원도에서만 보이는 특이한 형태다. 이곳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앞 석조보살좌상은 너무 마멸이 심해서 원본은 성보박물관 안 실내에 보관 전시 중이다. 탑 앞에는 모조품을 만들어 놓았는데 어딘지 좀 생뚱맞아 보인다.
부처님을 의미하는 팔각구층탑을 향하여 오른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채 공양을 드리는 모습으로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상체가 하체보다 크고 정중앙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치우치게 한 것은 보는 사람들의 착시를 고려한 의도적인 배치로 보인다. 머리 위에는 큼직한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고, 관 아래로 나온 머리카락이 좌우 어깨 위로 단정하게 정리되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입고 있는 천의(天衣)는 영락등 장신구가 화려하다.
▲보물 제138호에서 국보 제48-2호 승격된 석조보살좌상, 위는 새로 만든 모조품, 아래는 성보박물관에 전시 중인 진품이다.
이 공양보살상은 법화경에 나오는 `약왕보살상(藥王菩薩)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모은 모습이 자신의 두 팔을 태우며 사리탑을 공양하는 모습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특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무튼, 월정사에서는 이 보살상이 약왕보살임은 법화경에 잘 나와 있다고 한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는 과거 일월정명덕日月淨明德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희견보살喜見菩薩이 부처님으로부터 법화경 설법을 듣고 현일체색신삼매炫一切色身三昧를 얻었다고 한다. 환희심에 가득한 보살은 여러 가지 공양을 올렸고, 마침내 천이백 년 동안 향을 먹고 몸에 바른 후 자신의 몸을 태우며 공양하였다. 그리고 다시 몸을 받아 일월정명덕국日月淨明德國의 왕자로 태어났을 때 일월정명덕여래는 그가 장차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주었다. 희견보살은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팔만사천의 사리탑을 세우고 탑마다 보배로 만든 깃발과 풍경을 매달아서 장엄하게 꾸몄다. 그것도 모자라 탑 앞에서 자신을 두 팔을 태우며 칠만 이천 세 동안 사리탑을 공양하였으니 이 분이 바로 약왕보살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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