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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국보 제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
국보 제11호
공식 명칭 : 익산 미륵사지 석탑 (한자 명칭 : 益山 彌勒寺址 石塔)
지정일 : 1962.12.20
테마 : 유적 건조물, 종교 신앙, 불교, 탑
시대 : 백제 시대
주소 :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
문화재청 설명
백제 최대의 절이었던 익산 미륵사 터에 있는 탑으로,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여 아쉽게도 반쪽 탑의 형태만 남아 있다. 6층까지만 남아 있으며, 정확한 층 수는 알 수 없다. 기단(基壇)은 목탑과 같이 낮은 1단을 이루었다. 탑신(塔身)은 1층 몸돌에 각 면마다 3칸씩을 나누고 가운데 칸에 문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내부가 통하게 만들었으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웠다.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서석탑, 해체되기 전의 모습으로 6층 일부가 남아있으며 뒤쪽은 1915년 일제가 붕괴를 방지하는 보수공사라는 명목으로 시멘트로 채워버려 흉한 모습이 되었다. /문화재청 자료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 기둥을 세웠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목조건축의 배흘림 기법을 따르고 있다. 기둥 위에도 목조건축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재료인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본떠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살짝 치켜 올려 있다. 2층부터는 탑신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화되며, 지붕돌도 1층보다 너비가 줄어들 뿐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백제 말 무왕(재위 600∼641)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반쯤 무너진 곳을 시멘트로 발라놓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으나,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탑으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사리장엄구의 발견
2009년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 보수하는 중에 석탑 1층에서 사리공과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공에서는 사리를 담은 금제 사리호와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 백제 특유의 머리꽂 장식인 은제 관식 등 각종 유물 500여 점이 수습됐다.
이 중 금제 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에 글자를 음각하고 주칠로 쓴 것으로, 백제 무왕의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창건하고 사리를 봉안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 금판이 발굴됨으로써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 석탑의 건립 연대 등이 정확하게 드러났고, 아울러 문헌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것은 물론 이 시대 백제의 서체를 연구하는 데도 커다란 획을 긋게 됐다고 말했다.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금제 사리호는 사리공 중앙에서 발견됐는데, X선 내부 투시 결과 내함과 외함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고, 사리호 표면의 다양한 문양과 세공 기법으로 보아 당시 백제 금속 공예가 절정에 달했음이 입증되었다.
한국 최초의 석탑이며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탑으로 최고 수준의 석조건축술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특히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작품이다. 1998년 구조 안전 진단을 거쳐 해체 및 발굴 조사까지 완료하였으며 2016년까지 복원할 계획으로 보수정비 중에 있다.
彌勒寺(미륵사) 창건 설화
백제 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璋(장)이다. 어머니는 과부로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았다. 장은 마를 캐어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의 이름은 薯童(서동)이었다.
▲현재 서탑 지역은 가건물을 짓고 석탑을 해체 후 복원을 위한 공사 중에 있어 2016년 이후에나 볼 수 있다. 물론 방문객들은 건물 내부로 들어가 공사 현장을 둘러볼 수 있다.
新羅(신라) 眞平王(진평왕)의 공주 선화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로 가서 아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쳐 주며 부르게 하였다. 이 동요가 궁중에까지 알려지자 결국 善花公主(선화공주)는 왕후가 준 황금 한 말을 노자로 하여 귀양을 가게 된다. 이 때 서동은 선화공주를 취하여 百濟(백제)로 돌아온다.
선화가 모후가 준 황금을 내어 생계를 도모하려 하자 그때야 서동은 황금이 보배임을 알게 되고, 마를 캐던 곳에 흙더미 같이 쌓여 있던 금을 師子寺(사자사) 知命法師(지명법사)의 神力(신력)을 빌어 신라 왕실에 보내게 된다. 이후 인심을 얻은 서동은 왕위에 오른 후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가던 중 용화산 아래 큰 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배하였다.
이에 부인은 못을 메우고 여기에 큰 절을 세울 것을 소원하므로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못을 메울 방법을 물으니 법사는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평지를 만들었다. 그곳에 彌勒三會(미륵삼회)의 殿(전)·塔(탑)·廊 (낭무)를 세곳에 두고 미륵사라 하였는데 진평왕도 百工(백공)을 보내 도왔다고 한다. (「三國遺事(삼국유사)」武王條(무왕조) 편)
彌勒寺(미륵사) 터
현재 미륵사 터에는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이 세워져 미륵사와 관련된 내용들을 상세하게 전시하고 있으며 석탑 해체 시 발견된 사리 등 관련 문화재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입장료 무료)
▲내부 공사 현장 모습. 해체 전 모습으로 복원한다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인 미륵사터에는 현재 해체 후 복원 공사 중인 서탑 외에도 1993년 복원해 놓은 동탑과 동, 서탑 앞쪽에 각각 1기씩 세워진 당간지주 2기, 중앙의 목탑 터와 금당 터 3곳, 기타 남문과 중문, 회랑, 강당, 승방 등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석탑 해체 중 1층 통로와 중앙의 심주석이 드러난 모습.
석탑은 1층 4면마다 가운데 문이 있고 중앙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어 서로 만나는데 가운데 심주석이 전체를 받치고 있는 구조이다. 심주석 중앙에는 네모형 사리공(한 변 25cm, 깊이 27cm)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 사리호 등 19종 684점의 국보급 유물이 발견되었다. 또한, 탑을 받치고 있던 석축을 해체하던 중 두상과 몸체가 거의 훼손되지 않은 석인상이 남서편에서 발견되었다.
▲심주석의 사리공에서 발견된 유물 모습.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된 남서측 석인상.
▲반면 1993년에 복원했다는 동석탑은 너무 기계적으로 깎아 세워서인지 생뚱맞기 이를데 없어보인다.
▲동탑과 서탑 앞에 각각 1기씩 세워진 총 2기의 당간지주가 있다. 보물 제236호.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 있는 미륵사 모형. 3금당 3탑인데 중앙이 목탑, 서쪽이 현재 공사 중이고 동쪽이 복원해 놓은 것이다.
미륵사지에는 이밖에도 석등 받침이나 금당 터, 계단과 여러 석재들이 남아 있어 찬찬이 둘러볼 것이 많다. 또한, 멀지 않은 곳에 무왕과 왕비 선화공주의 능으로 보이는 쌍릉이 있어 둘러보았다.
▲익산 쌍릉, 대왕릉과 소왕릉으로 불리는데 무왕과 선화공주릉으로 추측된다. 발굴조사 전 이미 도굴되었다.
2016년 이후, 서탑이 복원 완료되었을 때 다시 한 번 가보련다. 제발 동탑처럼 생뚱맞게 지금의 기계 재단으로 돌을 잘라 붙이지말고 옛탑 그대로만 복원했으면 한다.
[12] 국보 제12호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공식명칭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한자명칭 : 求禮 華嚴寺 覺皇殿 앞 石燈)
지정일 : 1962.12.20
테마 : 유적건조물, 종교신앙, 불교, 석등
시대 : 통일신라 시대
주소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 화엄사 (황전리)
통일신라 시대의 석등이다. 조성 시기는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인 함통(咸通, 당나라 연호) 전후로 보고 있다. 높이 6.4m. 기단부, 화사석(등불을 밝히는 부분), 상륜부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안상(코끼리 눈을 본떠 만든 장식 문양)이 새겨진 팔각형의 아랫돌을 두고 그 위에 연꽃잎을 새긴 돌을 얹었다.
그리고 구름무늬의 괴임돌을 받치고 장고 모양의 사이 기둥(간석)을 세운 다음 연꽃임을 새긴 윗돌을 올렸다. 화사석은 팔각형이고 네 면에 창이 나 있으며 팔각의 모서리마다 귀꽃을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고졸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이 있다. 우리나라 석등 중 가장 크다.
화엄사(華嚴寺)
6세기 중엽(544년), 인도에서 온 연기(緣起) 조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신라의 자장 율사와 의상 대사, 고려의 대각 국사 의천 등 여러 고승에 의해 중창되어 조선 세종 6년(1424)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5,000여 칸의 건물이 전소하고 주지였던 설홍 대사는 300여 명의 승려를 이끌고 왜군에 대항하다 전사하는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석조물을 제외하고 현재 남아있는 전각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화엄사에는 국보 제12호 각황전 앞 석등외에도 국보 제35호 사사자삼층석탑, 국보 제67호 각황전, 국보 제301호 영산회괘불탱 등이 있는데 대개 한 지역 국보는 지정 번호가 이어져 있으나 이곳은 각각 떨어져 있어 국보 탐방기를 이어 쓸 수 없으니 아쉽다. 국보 하나 갖지 못한 곳도 많은데 하나의 사찰에 국보급 문화재가 이렇게 많기도 쉽지 않다. 과연 큰절이다.
각황전(覺皇殿) 앞 석등(石燈)
석등 뒤의 거대한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전(佛殿) 각황전(覺皇殿)이다. 각황전(覺皇殿) 역시 국보(제67호)이기에 해당 국보 소개할 때에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석등만 설명한다. 국보 제12호로 지정된 각황전 앞 석등은 높이 6.4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등이며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도 이야기한다. 전체적인 모양은 신라 시대 석등의 기본인 팔각형이나 아래 받침돌의 중간 간주석(竿柱石)이 장고 모양으로 생긴 특징이 있다.
곳곳마다 섬세한 새김과 조각으로 미적 감각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크기 면에서 압도적인 스케일로 그 앞에 서면 위엄이 느껴진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되며 불을 밝혀 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은 상륜부까지 전체적으로 잘 보존되고 있어 국보에 손색이 없는 거대 석등이다.
▲화엄사 각황전(覺皇殿),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을 갖춘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불전이다.(국보 제67호) 화엄사로 들어서면 높은 축대 전면에 대웅전이 있고, 그 왼쪽에 직각으로 각황전이 있다. 각황전 앞에 석등이 보인다.
▲각황전(覺皇殿) 앞 석등(石燈). 국보 제12호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화사석과 지붕장식이 크고 우람한 데 비하여 이들을 받치는 간주석과 아랫부분이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 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복련 : 伏蓮)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다.
아래받침돌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간주석 : 竿柱石)을 세웠으며, 그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앙련 : 仰蓮)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 형태는 통일신라 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석등의 본체라 할 수 있는 화사석은 8각 모양으로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화엄사는 지리산 권역에 으뜸가는 대찰(大刹)이며 그 위치가 좋아서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어느 사찰이나 그럴 테지만, 이런 번잡함을 피하고 조용히 사색하며 문화재를 탐방하고 할 때는 이른 아침에 방문하면 참 좋다.
가능하다면 새벽 예불부터 참배하는 것도 한 방법이며, 아니더라도 방문객을 받기 시작하는 첫 시간쯤에 절집에 찾아가 새벽에 정갈하게 비질해놓은 마당을 거닐면서 인기척 없는 이곳저곳을 조용히 답(踏)해볼 것을 권하는 바이다.
화엄사는 아직 몇 개의 국보가 남아있어 추가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14] 국보 제14호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13 없음)
공식명칭 :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한자명칭 : 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지정일 : 1962.12.20
테마 : 유적건조물, 종교 신앙, 불교, 불전
시대 : 조선시대
주소 : 경북 영천시 청통면 거조길 400-67, 은해사 거조암 (신원리)
문화재청 설명
은해사는 통일 신라 헌덕왕 1년(809) 혜철국사가 지은 절로 처음에는 해안사라 하였다고 하며 여러 차례 있었던 화재로 많은 건물을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들의 대부분은 근래에 세운 것들이다. 거조사는 은해사보다 먼저 지었지만, 근래에 와서 은해사에 속하는 암자가 되어 거조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돌계단을 오르는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은 영산전은 거조암의 중심 건물이다. 고려 우왕 원년(1375)에 처음 지었으며, 석가모니불상과 526분의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앞면 7칸, 옆면 3칸 크기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를 기둥 위부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영산전은 고려 말, 조선 초 주심포 양식의 형태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어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은해사(銀海寺)와 거조암(居祖庵)
경상북도 달구벌 북방의 거산(巨山) 팔공산(八公山) 대구, 칠곡, 군위, 영천, 경산 등을 아우르는 큰 산이지만 덩치만 큰 것이 아니라 그 산이 품고 있는 신성(神聖) 숭배가 지대함은 물론 줄기줄기 굽이굽이 마루마다 부처님을 모신 영산(靈山)인데, 그중 동쪽 방향 영천 쪽에 있는 은해사는 일제강점기 조선팔도 31본산 중 하나이자 경상북도 5대 본산이었으며, 지금은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자리를 지키는 경북지방의 대표적 사찰이다. 산하에 말사 39개소와 부속암자 8개소가 있는데 국보 14호 '영산전'이 있는 거조암도 은해사의 산내암자이다.
▲거조암 입구, 최근에 세운 듯 보이는 일주문에는 '팔공산거조사' 현판이 걸려 있고, 단청불사를 기원중이다.
▲거조암은 평지 사찰이지만 축대를 높다랗게 쌓아올리고 담을 둘러친 형태라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는 잘 안 보인다.
▲사천왕이나 다른 문 없이 대문 역할을 하는 영산루(靈山樓)로 바로 들어서게 되어 있는데 이마저도 최근 지은듯하다.
▲여느 절처럼 누각 아래를 통해 계단을 올라서면 절집 마당으로 이어지는 구조이다. 영산전 지붕이 보인다.
▲영산루는 1층은 공양구 등을 파는 곳이며, 올라서서 보면 단층처럼 보이는 2층은 종, 북, 운판, 목어의 사물(四物)이 걸린 종루이다.
거조암은 은해사와는 약 10Km 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본래 거조사로 불리던 큰 사찰이었으며,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이곳에 머물면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은 역사 깊은 곳이다. '동국여지승람'에도 거조사로 실려 있는데 아마도 은해사가 사세를 크게 키우고 주변 암자들을 산하 암자로 품게 되자 거조사도 은해사의 산내암자가 된 듯하다. 그러나 요즘 들어 거조암은 오백나한상을 모신 영험함을 앞세워 나름대로 사세(寺勢)를 확장하는 듯 보이며, 절 앞에는 거조암이 아니라 거조사(居祖寺)라는 현판을 걸어놓고 있다.
영산전(靈山殿)
영산루 아래 계단을 통해 거조암 마당에 올라서니 국보 14호 영산전이 정면에 길게 보이고 좌, 우로는 종무소와 요사채 건물 2동이 있을 뿐, 단출한 구조였다. 그러나 수십 수백의 당우(堂宇)가 있으면 무얼하랴? 영산전 한 채면 족한 것을….
국보 제14호 거조암 영산전을 처음 본 순간, 전혀 낯설지 않다. 익숙하다. 사진을 익히 보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해 수덕사 대웅전과 부석사 무량수전 등이 줄줄이 떠오른다.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긴 건물인데 흙벽 그대로인 채 단청을 하지 않고 있어 검소하고 소박한 느낌이며, 영산전 아래를 받치는 높지 않게 쌓은 기단은 적당한 크기의 자연석을 오밀조밀하게 모아 붙여 직선으로 쌓은 인조석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영산전 모습. 방풍을 위해 살창에 비닐을 막아 아쉽지만 전체적인 모습이 소박하면서도 의젓하다.
▲측면과 후면 모습. 이것 저것 쌓아놓거나 방치하지 않아 깔끔하다. 인위적인 가꿈보다 훨씬 편안하다.
▲측면은 앞서 살펴본 무위전 극락보전에서처럼 기둥과 들보 등을 그대로 노출시키면서 면분할 모양이 나타나니 역시 간결하다.
▲영산전 앞마당에는 삼층석탑 하나가 주목받지 못한 채 서 있으며, 현판 글씨는 설현신(薛玄愼)이 썼다고 한다.
단정한 맞배지붕이 좌우로 건물보다 충분히 나와 있어 넉넉하고 안정되어 보이며 정면중앙에만 출입문을 냈을뿐, 정면 4칸과 측면 중앙에 아래위로 2개씩의 살창이 지극히 단순하게 자리 잡아 더욱 편해 보이는 건물이다. 해체 수리 때 나온 묵서(墨書)에 의해 고려 우왕 원년(1375)에 건립된 고려 말기 건물임이 확인되었고 국보로서 인정받은 셈이다.
▲영산전 앞뒤 처마 아래를 보면 기둥 위에만 포를 얹은 주심포 건물이며 출목도리가 기둥 위 주심도리와 함께 길게 이어진다.
▲내부 역시 천장 없이 서까래가 그대로 보이는 구조이며 건물을 지탱하는 주기둥(고주)을 가로지르는 대들보가 보인다.
건물의 구조나 명칭, 특히 절집 한옥 건물의 경우 용어나 역할 등이 어려워 다 알 수는 없지만 영산전은 기둥을 따라 건물을 가로지르는 도리가 7개인데, 보통은 9~11개임에 비추어 간단하게, 그만큼 대담하게 지은 건물이다. 앞뒤 처마 밑을 보면 밖으로 나온 출목도리(외목도리)가 다른 건물보다 확연하게 노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존 석가삼존불과 후불탱화
▲석가삼존불과 후불탱화 영산탱(靈山幀), 실내조명의 반사를 막을 길이 없어 사진에 반사광이 생겼다.
출입문 정면에는 주존의 자리에 석가삼존불을 모셨고 그 뒤에는 붉은빛 위주로 채색된 후불탱화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후불탱화인 영산탱(靈山幀)인데 유난히 붉은 채색 위주인 점이 그렇다. 석가여래 주위로 모두 좌우 5명씩 10명이 보이는데 이들은 사대제자와 사대보살, 그리고 양천왕(天王)이며, 화기(畵記)에 건륭 50년, 즉 정조9년이라고 씌어 있는 홍탱화(紅幀畵)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이 그림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며 특히나 붉은 색조위주로 그린 비범한 기품이 깃든 것이라면서 문화재에 등재되어야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고 있다 한다.
오백나한상
거조암은 영산전이 국보라 유명한 것이 아니라 인근 주민들이나 신도들에게는 오백나한상으로 더 유명한 절이다. 모두 526개라는 나한들은 돌을 깎아서 만든 후 색을 칠하고 옷이나 표정 등을 입혔는데 하나같이 다른 표정과 다른 자세, 다른 의복 등을 표현하여 둘러보는 동안 웃음이 절로 나며 친숙하게 느껴진다.
영산전 넓은 내부를 좌우로 나누어 ㄷ자 형태의 단을 겹으로 둘러놓은 후에 5백 개가 넘은 나한들을 작은 보료위에 정성껏 모신 후에 각 나한마다 그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놓았다. 바닥에 화살표를 그려놓아 그 방향으로 따라가면 중복 없이 모두를 배알할 수 있다. 도대체 이 오백나한은 누가 구상하여 누가 만들고 누가 칠했으며 누가 이렇게 조밀조밀 배열하였는지?
한단 낮은 곳에는 나한마다 접시 하나씩을 놓아 돈과 사탕이나 음식 등을 공양하며 기도하도록 하였는데 100원 동전 하나씩만 놓아도 5만 원이 넘고, 사탕 하나씩만 놓아도 큰 봉지 몇 개를 뜯어야 한다. 거조암은 이 오백나한상에게 기도를 올리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소문, 즉 기도발이 세다는 소문이 자자하다고 한다.
▲영산전 실내에 겹으로 둘러놓은 오백나한. 저마다 이름이 붙어있는데 흥미롭다.
거조암의 본절인 은해사는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과 주련이 많아 유명하며, 절집보다 추사글씨를 보러오는 사람이 많은 곳인데 마침 서울 조계사에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에서 12월 14일까지 전시중이라니 한번쯤 가볼 만하다.
또한 은해사의 또 다른 산내 암자인 백흥암도 거조암만큼이나 비밀스러운(?) 유명세를 타는 곳이며, 특히나 백흥암의 극락전 불단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절집 중 가장 아름다운 불단으로 극락전이 보물 제790호인데 비하여 내부 불단은 별도로 보물 제486호라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백흥암은 아무 때나 가볼 수가 없다. 일 년에 단 한번 초파일에만 개방한다니 내년을 기약해본다.
2015.01.15
[15] 국보 제15호 안동 봉정사 극락전
공식명칭 : 안동 봉정사 극락전 (한자 명칭 : 安東 鳳停寺 極樂殿)
지정일 : 1962.12.20
테마 : 유적건조물, 종교신앙, 불교, 불전
시대 : 고려 시대
주소 : 경북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길 222, 봉정사 (태장리)
문화재청 설명
극락전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2년 보수공사 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을 발견하였는데, 우리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 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로 추정할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4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배흘림 형태이며, 처마 내밀기를 길게 하기 위해 기둥 위에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가운데에는 불상을 모셔놓고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 봉정사 극락전은 통일신라 시대 건축양식을 본받고 있다.
천등산(天登山) 봉정사(鳳停寺)
신라 문무왕 12년(672), 의상 대사의 제자인 능인 스님이 창건하였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 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 더욱 수행하던 능인 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러 산문을 개산하고, 봉황이 머물렀다 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 명명하였다.
대한 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 중 하나인 봉정사의 최초 창건은 의상 대사 창건설과 능인 대덕의 창건설 중 대체로 능인 대덕의 창건으로 보고 있으며, 창건 이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 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 전쟁 때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사찰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誌) 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다.
고려 태조와 공민왕께서 다녀갔으며 ‘가장 한국적인 것을 보고 싶다’는 요청에 따라 영국 여왕을 안내한 아름다운 사찰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극락전(국보 제15호)을 비롯해 대웅전(국보 제311호),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고금당(보물 제449호), 대웅전 후불탱화(보물 제1614호),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620호), 영상회 괘불도(보물 제1642호), 아미타설법도(보물 제1643호)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우리는 한동안 부석사 무량수전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배웠고 누구나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72년에 봉정사 극락전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상량문에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극락전의 옥개부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한 건물을 지은 후 중수하게 되는 시기는 대개 150~200년쯤 뒤이니 그렇다면 1363년에서 그만큼 앞에 지었다는 얘기가 되고, 1376년에 중수한 기록을 갖고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을 앞선 것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기록으로 중수한 연도를 확인한 것이지, 처음 지은 날짜가 확인된 것은 아니므로 확실히 먼저 지었다고 하기에는 어쩐지 자신 없는 측면도 있어서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봉정사 극락전 모두 최고의 목조 건물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기록으로 실제 건축시기를 확실히 아는 최고(最古) 절집은 수덕사 대웅전이다. (1308년 창건)
뿐만 아니라 지난 2000년 2월에는 극락전 옆에 있는 대웅전의 지붕 보수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宣德十年乙卯八月初一日書’ (선덕 10년 : 1435년, 세종 17년)이라고 적혀있고 新羅代五百之余年至 乙卯年分法堂重倉(신라 시대 창건 이후 500여 년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하다)라고 되어있어 대웅전 창건이 1435년 중창 당시보다 500여 년이나 앞섰다는 말이니, 현존 최고의 건물이 극락전에서 다시 대웅전으로 바뀔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는 여론이다. 그리하여 봉정사 대웅전은 2009년 6월 30일 국보 제311호로 승격되었다.
이와 함께 대웅전 내 불단 바닥 우측에서 辛丑支正二十一年 鳳亭寺 啄子造成 上壇有覺澄 化主戒珠 朴宰巨 (지정 21년 : 1361년, 공민왕 10년)에 탁자를 제작, 시주. 시주자 박재거)라고 적힌 묵서명도 확인되어 대웅전 불단이 현존 최고의 목조건물임이 판명되었다.
그 밖에도 발견된 상량문에는 2층 누각 신축, 단청을 한 시기,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 사찰규모 등을 알려주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 초 당시 봉정사는 팔만대장경을 보유하고 500여 결(1만여 평)의 논밭에다 안거 스님 100여 명에 75칸의 대찰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하기야 국내 곳곳에 천년고찰이 한두 곳이 아니니 어느 날 어느 절집 상량문이나 묵서명이 발견되어 또 다른 최고(最古)의 기록을 갱신할지 알 수 없으니 내심 기대해 본다. 아무튼, 2015년 현재 공식 국내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은 지금 소개하려는 국보 제15호 '봉정사 극락전'이다.
극락전(極樂殿) 영역
봉정사는 일주문을 지나 조금 걸어 올라가면 경사진 길에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누문(樓門) 만세루(萬世樓)를 지나 주불전인 대웅전 앞에 서게 되는데 극락전은 그 대웅전의 왼쪽에 있다. 대웅전과 극락전, 주전(主殿)을 2개 모신 특이한 구조이다. 대웅전은 만세루와 마주 보며 왼쪽에 화엄강당(華嚴講堂), 오른쪽에 무량해회(無量海會)가 있고 극락전은 왼쪽에 고금당(古金堂), 오른쪽에 무량해회(無量海會)가 있으며 대웅전 앞에 만세루가 있듯이 극락전 앞에 우화루가 있었는데 영산암으로 옮겨 갔다.
대웅전과 마주 보는 곳에는 중문 격인 진여문(眞如門)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철거되어 없으며 오른쪽 무량해회 앞으로 돌아나가는 협문에 진여문(眞如門)이라고 씌어 있다. 대웅전 앞마당은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으나 극락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하나 서 있다.
▲봉정사는 주전(主殿)이 2개가 되는 특이한 구조이다. 사진에서 왼쪽 팔작지붕이 대웅전, 오른쪽 맞배지붕이 극락전이다.
▲극락전 전경. 낮은 축대 위로 왼쪽이 고금당, 오른쪽이 무량해회인데 무량해회는 대웅전 쪽이 앞이고 극락전 쪽은 뒷면이다.
▲단정한 맞배지붕에 정면 3칸인 극락전은 가운데 칸에만 단순한 출입문이 있을 뿐 좌우 양 칸에는 살창을 달았다. 벽면은 전체를 흙벽으로 발랐는데 배흘림기둥이며, 기둥 위에만 포를 올린 주심포식으로 아주 간결해 보인다.
▲옆면을 보면 4칸의 면 분할이 뚜렷하고 9개의 도리가 돌출되어 9량 집임을 알 수 있다. 지붕이 충분히 나와서 안정되어 보인다.
▲뒷면은 중앙에만 앞면과 비슷한 모양의 문을 내었는데 사용하지는 않는 듯하다.
▲극락전 앞마당의 왼쪽은 대웅전과 경계 상에 서있는 화엄강당(華嚴講堂)의 뒷면이다.
▲극락전 앞마당에는 경북유형문화재 제182호 삼층석탑이 서 있고, 오른쪽은 고금당(古金堂)이다.
▲극락전 현판, 1386년 병인년(丙寅) 6월에 송파동몽(松坡童蒙)이 썼다고 되어있는데 이는 안동 권씨 권행의 15세손 송파(松坡) 권인(權靷)을 말하며 동몽(童蒙)은 자신을 낮춰 부른 말이다. 그 옆에는 광서(光緖), 즉 청나라 덕종 광서 8년이므로 1882년 임오년(壬午) 4월에 채색하였다고 쓰여 있으니, 극락전 못지않게 현판도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극락전 내부에는 뒷벽 중앙에 나무로 불단을 만들어 주불인 아미타불을 모셨는데 위쪽 닫집이 섬세하지만 화려하지는 않다.
극락전은 1972년에 완전 해체, 수리하면서 단청까지도 새로 칠하였다고 하는데 예전 단청을 그대로 살렸는지는 모르지만, 그 옛날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을 왔을 때 이 극락전의 중수에도 관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는 임금에 대한 칭송 문구가 단청무늬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주상전하(主上殿下), 성수만세(聖壽萬歲)가 쓰여 있다. 아마도 불사에 힘을 실어준 공민왕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남겨둔 것이 아닐까?
또한, 극락전은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면서도 매우 소박하고 간결해 보이는데 이는 전체적인 건물의 구조나 목재들의 결구처리 방식이 단순한데서도 느낄 수 있다. 특히 기둥 위에 올린 공포를 보면 옆에 있는 대웅전의 공포와 비교하여 극락전 공포는 꼭 필요한 구성만 갖추었을 뿐 장식적인 부분이 아예 없음을 알 수 있다.
▲극락전은 처마 아랫부분과 외목도리, 공포, 그리고 보가 지나는 목제 부분에만 가볍게 단청을 하였는데 기둥 위에만 위치하여 몇 개 되지 않는 공포의 모양이 비교적 단순 간결하다.
봉정암은 극락전만으로도 그 무게가 가늠하기 쉽지 않은 절집이다. 국보 제15호 봉정사 극락전이 그만큼 크고 무겁다는 뜻이다. 물론 최근 들어 대웅전 건물에서 역사적인 기록들이 추가로 발견되어 최고(最古)의 영예를 넘겨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고려 때 법당건물의 고건축물로서의 값어치는 불변일 것이다.
또한, 봉정암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빛날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년 배용균 감독),’ ‘동승(2003년 주경중 감독)’이 영산암에서 촬영되어 그 유명세를 보탰으니, 그 이후 찾는 발길이 계속 이어진다고 하며, 문화재청, 대한불교조계종, 안동시 등이 나서서 2018년까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고 한다. 부디 좋은 성과를 거두어 모범적인 문화유산으로 길이 보전되기 바란다.
[16] 국보 제16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공식명칭 : 안동 법흥사지 칠 층 전탑 (한자 명칭 : 安東 法興寺址 七層塼塔)
지정일 : 1962.12.20
테마 : 유적건조물 / 종교 신앙/ 불교/ 탑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안동시 법흥동 8-1번지
문화재청 설명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에 속해있던 탑으로 추정된다. 탑은 1단의 기단(基壇) 위로 7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8부 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세워놓았고, 기단 남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여 1층 몸돌에 만들어진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향하도록 하였다. 탑신은 진한 회색의 무늬 없는 벽돌로 쌓아 올렸으며,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계단 모양의 층단을 이루는 일반적인 전탑 양식과는 달리, 윗면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의 윗면을 시멘트로 발라 놓아 아쉬움을 남기는 이 탑은 7층이나 되는 높은 층수에 높이 17m, 기단너비 7.75m의 거대한 탑임에도 매우 안정된 자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국내에 남아있는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에 속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또한, 지붕에 기와를 얹었던 자취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목탑을 모방하여 전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전탑(塼塔)
전탑(塼塔)은 흙으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탑을 말한다. 탑은 크게 그 재질에 따라 목탑, 석탑, 전탑으로 나뉘며 우리나라에서는 ‘탑’이라고 하면 대개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처럼 돌을 다듬어 쌓은 석탑(石塔)을 떠올리지만, 세계 모든 탑이 재료나 모양에서 똑같지는 않다.
탑은 원래 인도 고유의 무덤 형식에 석가모니 사리를 모신 축조물에서 비롯되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가 돌아가자(열반:涅槃) 유해를 화장(다비:茶毘)하여 여덟 나라에 나누어주고 탑을 세우게 하였으니 그것을 근본 팔탑(根本 八塔)이라고 하는데 지금 남아있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인도 산치에 있는 거대한 탑으로 기원전 1세기경에 축조된 것이다. 반구를 엎은 모양인 무덤 자체에는 맨 위에 우산 같은 덮개처럼 산개(傘蓋)를 얹었을 뿐 다른 장식이 없으나, 둘레에 돌난간을 두르고 동서남북에 석가모니의 생애를 조각한 문을 세운 구조이며 주로 돌과 흙을 사용하였다.
▲인도 산치대탑.
그 후 불교가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이러한 인도 탑의 형태를 그대로 따른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고유한 건축물에 부처의 사리를 모시게 되었으니, 중국에서는 초기에는 다층 누각 형태의 탑이었다가 뒤에 벽돌을 쌓아 올린 전탑(塼塔)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을 통해 불교가 전해진 우리나라도 처음에는 다층누각을 지었지만, 벽돌보다는 목탑으로 지었으며, 이후 각종 전란을 겪거나 화재로 인하여 불에 타버리곤 하였으니 이러한 취약점 때문에 나무 재료가 돌(石)로 바뀌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나라마다 구하기 쉬운 재료를 이용하여 탑을 세웠는데 중국에서는 풍부한 모래를 이용한 벽돌집이 이미 발달했던 터라 벽돌탑(전탑)을 많이 쌓았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을 본따기는 하였으나 벽돌 생산이 쉬운 일이 아니었던 듯, 그 대신 풍부한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잘라 탑을 쌓기도 하였으니 이를 벽돌을 모방하여 쌓은 탑이라고 모전탑(模塼塔)이라 한다. 경주의 분황사 탑이 그것이다.
즉, 벽돌로 쌓은 탑을 전탑(塼塔)이라고 하며, 벽돌처럼 돌을 잘라서 쌓은 탑을 모전탑(模塼塔)이라고 하는데 이번에 살펴볼 국보 제17호는 벽돌로 쌓은 전탑(塼塔)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전탑이다. 전탑은 경북 북부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신세동 전탑
이 탑은 한동안 신세동 칠 층 전탑이라고 불렀다. 국보를 지정할 때 동네이름을 잘못 붙여서 그렇다고 하는데, 탑의 이름은 대개 그 탑이 있거나 옮기기 전에 있던 자리, 층수, 재질에 따라 붙였으며 그래서 안동 신세동 칠 층 전탑이라고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또 그것이 더 친숙한 이름처럼 들린다. 그러나 최근 문화재 명칭부여의 원칙을 정하고 일관성을 지키기로 하면서 정식명칭은 '안동 법흥사지 칠 층 전탑'이라 하였다. 지금 흔적은 없지만, 그 자리에 법흥사가 있었다고 하며, 지명도 법흥동이다.
탑의 위치
이 탑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면 바로 옆을 지나도 알 수 없다. 안동 시내에서 안동댐으로 올라가는 도로변에 중앙선이 나란히 붙어서 지나는데 그 철로 변 너머에 있으니 사전지식이 없으면 까마득하게 모른 체 지날 수밖에 없다. 기차를 타고 지나간다 해도 높다란 플라스틱 방음벽이 솟아있어 블라인드를 쳐놓은 셈이다.
그 너머 철도와 고성이씨 종택 사이 주먹만 한 공터에 우리의 국보 제16호는 옹색하게 서 있다. 매일 수 없이 지나가는 철도의 진동에 흔들리면서 그래도 어찌어찌 알고 도로 옆 기찻길 아래 토끼굴을 지나 고물고물 찾아와주는 탐방객이나 지나가던 길손들을 반기며 거기에 서 있다. 국보에 참 많이 미안하다. 철도 밖 어디쯤 시야가 탁 트인 곳에 모셔내었으면 좋겠다. 죄송합니다.
▲옛 이름 '신세동 칠 층 전탑'으로 표기되어있다. 안동댐 옆 도로와 중앙선철도 안쪽에 있어 토끼굴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일설에는 고성이씨 종택이 아흔아홉 칸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이들의 독립운동에 분노한 일제가 중앙선 철도를 놓으면서 일부러 절반쯤을 철거해야 하는 위치로 건설하였다는 것이며, 그때 행랑채와 부속 채가 철거되어 지금은 50여 칸만 남았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임청각(臨淸閣)은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었으니 자동차도로와 철도 안쪽에 국보 1점과 보물 1점이 갇혀있는 것이니 참 안타깝다.
문화재 답사를 계속 할수록 일제의 만행에 분노할 때가 많은데 이번이 또 그런 경우이며, 광복 7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그 옹색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관계기관들의 무감각에 두 번 화가 난다. 고택은 그렇다 치더라도 국보 전탑은 옮기기를 희망해 본다.
▲법흥사지 칠 층 전탑 전경. 오른쪽 높은 방벽이 중앙선 방음벽이며 왼쪽 고성이씨 소종택과의 좁은 공간에 옹색하게 서 있다.
▲탑의 2층과 3층 지붕 부분에 기와를 얹었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2층부터 6층까지 확대한 모습. 벽돌을 층층이 어긋나게 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벽돌은 하나가 길이 28cm, 폭 14cm, 두께 6cm쯤이라고 한다.
▲1층에는 남면 중앙에 감실 문이 있었던 듯하며 지금은 목판으로 막아놓았다. 일제 강점기 때 탑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다는데 그때 기단부를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시멘트로 발라버렸다. 아마 깔끔하게(?) 마감한다고 한듯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경사면 아래의 단층 평면기단 외벽 중 북면과 서면에는 팔부신중과 사천왕상을 새긴 판석들이 세워져 있다.
지금껏 국보를 돌아보던 중 1호부터 15호까지는 나름대로 무난하게 둘러보았으며 그중 제3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가 관리 목적상 위치를 옮겨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는 것 외에 나머지는 다 그 자리에 있음을 보았다.
이제 16호를 맞이하여 안동에 가보니 그 자리가 법흥사 절터였고 (지금은 고성이씨 종택) 그래서 그 자리가 국보의 원래 자리가 맞는지는 모르지만, 그 후 중앙선 철도 건설과 1971년 안동댐 건설 후 도로 개설 등으로 지금은 고립무원에 빠져있고 철저하게 갇혀 있으며 뿐만 아니라 수시로 지나다니는 철도의 진동과 소음은 국보 문화재의 수명과 관리실태에 많은 문제가 된다는 지적이다.
다시 한 번 청컨대, 국보에 걸맞은 (멀지 않은) 자리로 옮겨 마구잡이로 해체 보수한 기단 부분도 되살리고 하여 모두가 자랑스러워하는 국보, 안동에 들르면 누구나 찾아보는 국보가 되었으면 한다. 높이 17m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대의 칠 층 전탑, 국보 제16호가 팔부신중과 사천왕상이 둘러싼 기단이 살아나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층마다 올려진 지붕을 상상하고 상륜부에 걸맞은 규모의 금동제 장식들이 솟았음을 추측해볼 때 꼭 그리되기를 기대해본다.
[17] 국보 제17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공식명칭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한자명칭 : 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앞 石燈)
지 정 일 : 1962.12.20
테마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석등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진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4각 바닥돌은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 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 기둥을 받치고 있다. 전형적인 8각 기둥 형태인 이 기둥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는데,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 받침돌을 얹어 놓았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지붕돌도 역시 8각인데,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해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의상대사(義湘大師)와 부석사(浮石寺)
부석사(浮石寺)의 부석(浮石)은 뜬 돌이다. 즉 공중에 뜬돌이 세운 절을 말한다.신라의 고승 의상대사(625~702)가 문무왕 16년(676)에 창건한 절이다.
의상(義湘)은 신라의 진골 귀족 출신으로 선덕여왕 13년(644) 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진덕여왕 4년(650) 8세 연상의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났으나 요동 근처에서 고구려군에게 잡혀 첩자의심도 받았으나 풀려났으며, 문무왕 1년(661)에 다시 두 사람은 유학길에 나섰으나 당항성 근처의 한 무덤에서 잠이 들었다가 원효는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아침에 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임을 알고 나서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는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으며, 의상은 결심한 대로 당나라로 넘어갔다.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智儼)의 제자가 되어 8년 동안 머무르며 화엄을 공부하고 당나라가 침략한다는 정보를 듣고 고국 걱정에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낙산사(洛山寺) 관음굴(觀音窟)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낙산사를 세웠으며 그 뒤 문무왕 16년(676) 부석사(浮石寺)를 세울 때 까지 화엄 사상을 펼 터전을 마련하고자 전국의 산천을 두루 편력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
의상 이전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화엄 사상이 알려졌지만, 화엄 사상이 크게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의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의상이 화엄의 큰 가르침을 전하기 위하여 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인 부석사, 미리사(美里寺), 화엄사(華嚴寺), 해인사(海印寺), 보원사(普願寺), 갑사(甲寺), 화산사(華山寺), 범어사(梵魚寺), 옥천사(玉泉寺), 국신사(國神寺)를 비롯하여 삼막사(三幕寺), 초암사(草庵寺), 홍련암(紅蓮庵), 대흥사(大興寺) 등을 세운 것으로 전하여 온다.
그중 부석사를 세울 때의 전설을 보면 당나라 유학시 머물렀던 등주의 신도 집 딸이었던 선묘 아가씨는 의상을 흠모하였으나 불교에 귀의한 처지임에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알고 그의 뜻을 펼치는데 신명을 바치리라 결심 후, 의상이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떠나는 날 부두로 달려갔지만 이미 배는 떠난 후인지라 그에게 주려고 정성껏 지은 옷 보따리를 바다에 던지니 풍랑이 배에 전하여 주었으며, 낭자 본인은 용이 되어 대사의 배(船)를 호위하리라고 서원 후 몸을 바다에 던지니 소원대로 용이 되어 무사귀환을 호위하였다.
▲부석사 무량수전 왼쪽 뒤편의 부석(浮石). 누군가 실을 풀어 밑으로 넣어보니 걸림이 없이 돌아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후 전국을 다니던 의상이 태백산 밑에 지금의 부석사를 지으려고 보니 오백이 넘는 떼강도 무리가 먼저 머물면서 물러나지 못하겠다고 버티니 선묘 낭자가 사방 십 리가 넘는 거대 바위로 변하여 하늘에 둥둥 떠다니며 떨어질 듯 말듯 위협하니 도적무리가 겁에 질려 물러나고 의상이 이곳에 무사히 절을 짓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그래서 부석(浮石), 뜬 돌이 지은 절이라고 전해오는 것이다.
실제로 부석사 무량수전 왼편 뒤쪽에는 지금도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진 거대한 바위가 떠있는 듯 얹혀진 듯 놓여 있다.
무량수전(無量壽殿) 앞 석등(石燈)
부석사는 비탈진 경사면에 절을 세워 거대한 석축을 여러 단으로 올려 쌓은 구조를 보인다.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불교의 교리에 입각한 구품 만다라를 구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가장 높은 곳에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부석사의 주전(主殿)인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있고 그 앞마당에 이번에 소개하는 국보 제16호 석등이 서 있다.
표를 끊고 초입의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당간지주가 서 있고 천왕문을 지나 종무소 앞마당의 삼 층 쌍탑 가운데 계단으로 올라서면 앞쪽은 팔작지붕, 뒤쪽은 맞배지붕 형태를 띤 범종루 아래를 지나게 되는데 이제 절반쯤 올라온 셈이다.
이어서 지금까지의 진입로에서 약간 동남쪽으로 빗각을 틀어앉은 안양루가 보이는데 안양루(安養樓)의 안양(安養)은 극락을 의미하니 이제 곧 최종 목적지 극락이라는 뜻인바, 안양루의 1층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선 후 다시 몇 개의 계단에 올라서야 한다.
▲범종루를 지나면 이승만 전 대통령 친필 부석사(浮石寺)현판과 안양문(安養門) 현판을 건 2층 누문(樓門) 안양루가 보인다.
▲안양루 아래로 들어서면 몇 개의 계단에 올라서서 빠져나오는 구조인데 머리를 들면 석등과 무량수전이 보이기 시작한다.
▲계단에 올라서면 아미타불을 모신 주전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석등(국보 제17호)이 보인다.
▲무량수전 앞마당에는 석등 하나만 서 있을 뿐, 다른 아무런 구성이 없다. 석등 하나만으로도 그 존재감이 묵직하다. 방형(네모꼴)의 배례석(拜禮石)을 앞에 둔 이 석등을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 석등으로 함에 부족함이 없다.
▲앞마당에 완전히 올라서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본 석등, 방금 머리를 숙이고 올라온 안양루 2층이 보인다.
석등은 높이가 3m쯤 되는 크기이며 네모난 받침돌에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을 갖추어 화사석을 받친 후 지붕돌이 온전히 남아있고 상륜부만이 일부 파손되어 간단한 장식이 남아있는 전형적인 신라 석등 모습이며 석등 앞에 놓인 배례석 또한 큼직하면서도 우직한 모습으로 석등을 배향하는 자리에 놓여 있어 완벽한 세트를 이룬 모습이다.
석등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화사석은 내부가 비어있고 팔각형 중 네 곳에 장방형의 창이 뚫렸으며, 나머지 네 곳에는 보살입상이 부조(浮彫) 되어 있는데 화창에는 주변에 구멍이 12개씩 뚫려있어(한쪽에만 14개) 개폐장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보살 조각들은 상의는 입지 않고 천의만 양어깨에 늘어뜨린 채 두 손을 모으거나 천의를 잡거나 연꽃과 보주를 들고 서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들이다.
팔각 옥개석은 삿갓형태로 짧고 경쾌한 처마와 상륜부에 장식은 없어진 채 노반과 보주가 솟아 올려진 모습이 꼭대기에 남아있다.
▲석등의 화사석과 옥개석. 팔각 중 네 곳은 화사창을 내고 네 곳은 보살상을 새겼다.
▲네 곳에 새겨진 보살상 모습(부석사 홈피 사진). (왼쪽부터)남동쪽, 남서쪽, 북동쪽, 북서쪽 순서이다.
네모난 지대석은 각 면에 안상이 2개씩 새겨진 역시 네모난 1층 하대석을 받치고 있으며, 그 위의 2층 하대석은 팔각 원구형의 연화대석으로 8각 끝마다 귀꽃을 장식하였다. 그 위의 팔각 중대석(간주석)은 아무런 장식이나 부풀린 모습 없이 담백하게 쭉 뻗어 올라 상대석을 받치는데 상대석은 앙련 연꽃잎이 피어올랐고 꽃잎마다 보상화 무늬를 새긴 채 화사석을 받치고 있다.
▲석등의 하대석 부분. 안상과 연꽃잎, 귀꽃의 모습이 큼직하면서도 단순하게 새겨져 장식적이지 않아 보인다.
부석사에는 위 석등 외에도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소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등이 있어 계속 소개해야 한다. 한 절에 5개의 국보를 가진 경우도 드물거니와 이러한 국보나 보물의 개수나 보유 여부에 못지않게 무량수전의 목조건물로서의 값어치 또한 전 국민이 알고 있는 터, 부석사의 선묘낭자 전설이나 의상대사와 관련한 설화들만 나열해도 한 수레 분량의 책이 모자랄 판이다. 거기에 의상대사와 그 이후 부석사를 지켜온 고승 대덕 스님들의 화엄 사상이나 교리적 말씀과 불경들을 논하거나 청하여 들으려 하면 임시 출가하여 절집 생활을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부석사는 한두 가지 이야기로 이해되고 접수될 절집이 아니다. 그중 필자가 찾아낸 신기한 것 한 가지를 소개하면 현현불이다.
보이기도 하고, 안보이기도 한다 하여 현현불이라고 하는데, 앞서 이야기한 대로 구품만다라를 상징하는 대석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무량수전 공간으로 진입하는 안양루부터는 기존의 중심축보다 남동쪽으로 약간 틀어져 있다고 설명하였다.
▲부석사 중심축에서 동남향으로 비켜나면 그제야 무량수전과 안양루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방향임을 볼 수 있는데 이 방향에서 다포식 건물인 안양루의 포와 포사 이에 음영으로 생긴 여섯 부처님이 보인다.
▲위 사진에서 잘 안 보인다면 불심이 없다고 자책하지 말고 안양루에 좀 더 다가서서 누각 밑으로 보이는 2층의 뒷면 공포와 공포 사이 여백 부분, 이곳은 오히려 공포가 검게 보이고 여백이 밝게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역시 여섯 부처님 모습, 현현불이다.
학자들에 따라서 그 이유가 분분하지만 그중 기존의 중심축과 안양루, 무량수전 축이 바라보는 산봉우리 즉, 주산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무게를 받고 있다 하니 참고로 하고 종무소의 반대편, 성보박물관 쪽에서 안양루와 무량수전을 바라보면 두 건물이 정확하게 겹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그림에서 안양루 공포와 공포 사이, 그러니까 건축물의 여백의 그림자를 힘주어 바라보면 오히려 그 부분이 솟아오르면서 앉아있는 부처님 여섯 분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이를 현현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18] 국보 제18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공식명칭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한자 명칭: 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지정일 : 1962.12.20
테마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불전
시대 : 고려
주소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문화재청 설명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 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 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 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직전에 소개한 국보 제17호가 무량수전 앞 석등이다. 그때 의상대사와 선묘낭자 이야기, 그리고 부석사 전반을 이미 설명하였기에 여기에서는 무량수전 위주로 간략하게 적어본다.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국보 제15호로 이미 3회 앞서서 설명한 바 있다. 바로 그 봉정사 극락전과 지금 소개하려는 부석사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손꼽히는 건물들이다. 한동안 우리는 부석사 무량수전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배웠으며 심지어 장학퀴즈나 각종 상식 문답 등에서도 단골로 출제되던 것이었는데 이 만고불변(?)의 원칙이 얼마 전부터 봉정사 극락전으로 바뀌었으니 바로 봉정사 극락전 상량문에서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발견되면서부터이다.
즉, 부석사 무량수전은 1376년에 중수기록을 갖고 있었는데 봉정사 극락전이 이보다 43년이나 빠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이는 양쪽 모두 중간에 수리한 연도를 말하는 것이지 최초 건축한 날짜가 확인된 것은 아니므로 약 40년 안팎의 중수 연도 차이로 더 오래되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쩐지 조금 아쉬운 측면도 있다. 어쨌든 부석사 무량수전은 이렇게 하여 그동안 누려왔던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라는 영예를 봉정사 극락전에 내어주고 말았다.
하지만 건물의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이 봉정사 극락전보다 한 수 위라는 학계의 정설이고 보면 그만큼 의미 있고 중요한 건물이다. 참고로 학계에서는 건축을 처음 짓고 난 후 약 100~150년이 지나면 대규모 수리 보수하는 중수(重修)를 한다고 보아 중수기록이 발견되면 최초 건축연도를 추정해보는 것이니, 그렇게 보면 무량수전이나 극락전은 큰 차이 없이 비슷한 시기에 지었다고 보인다. 기록으로 실제 건축시기를 확실히 아는 최고(最古) 절집은 1308년 창건한 수덕사 대웅전이다.
고려 건축의 백미(白眉)
무량수전을 일컬어 고려 건축의 백미(白眉)라고 한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도리가 11개나 되는 11량 규모의 큰 건축물이면서도 전체적으로 간결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주심포 건축의 전형이며, 나아가 고려 건축의 백미라고 부르는 것이다.
특히 무량수전은 혜곡 최순우 선생의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문장으로 일약 유명해졌는데,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는 그의 명문장은 숱한 사람들로 하여금 무량수전에 찾아오면 정면 6개 기둥 하나하나를 쓰다듬고 만져보고 심지어 기둥에 기대어 무엇이 아름답다는 말이냐고 되뇌며 비벼보게 하기도 하였으니 잘 된 답사기 하나가 끼치는 영향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부석사 무량수전은 목조건축물 중 숨겨진 기법과 아름다움이 더해진 곳이니 앞서 말한 배흘림이란 기둥의 하단과 상단에 비하여 중간, 특히 아래의 1/3쯤이 불룩하게 불러 보이게 함으로써 큰 건물의 경우 긴 기둥의 중앙부가 얇아 보이는 착시현상을 교정하며,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더하기 위해서 사용된 수법이다.
서양의 그리스 신전 건축물에서도 석조의 기둥에 이러한 기둥을 사용하였는데, 엔타시스(entasis)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도 등장할 만큼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수법으로 고려 시대의 배흘림이 조선 시대보다 더 불룩하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건물 중 강릉 임영관지의 객사문(국보 제51호)이 가장 그러하다.
또한, 무량수전에는 몇 가지의 목조건축 기법이 더 숨겨져 있는데 정면 6개의 기둥이 좌우 모서리로 갈수록 조금씩 높아지는 귀솟음 수법과 그 기둥들 위에 얹힌 지붕이 밋밋한 직선이 아니라 좌우 처마 귀퉁이가 조금씩 더 튀어나오게 한 안허리곡 기법 등이 그것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기둥들은 수직으로 선 것이 아니라 조금씩 안쪽으로 기울어진 안쏠림으로 세운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건축적으로 튼튼하고 안정됨은 물론 시각적으로도 보기 좋을 뿐 아니라 건축의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으로 비쳐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케 하는 것이니 그래서 부석사 무량수전을 주심포 방식 목조건축의 교과서라거나 고려 건축의 백미라고 하는 것이다.
▲부석사의 9품 만다라를 본뜬 대석축의 가장 위에 위치한 무량수전, 안양루 뒤에 있다.
▲안양루 아래로 들어서서 계단을 오르노라면 무량수전과 앞마당 석등이 보이기 시작한다.
▲계단을 올라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본 모습. 석등(국보 제17호)과 무량수전(국보 제18호) 두 개의 국보가 한자리에 있다. 정확히는 무량수전 안에 있는 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45호)까지 한 마당에 국보 3개에 있는 것이니 놀라운 일이다.
▲고즈넉한 느낌의 무량수전, 안허리곡 기법의 지붕 처마가 살짝 들린 것이 전통적 한국의 아름다움이다. /문화재청 사진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로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건물로 간결하여 오히려 아름답다. 앞쪽 5칸 중 가운데 3칸은 칸마다 두 짝짜리 분합문과 두 짝의 창, 좌우 한 칸씩은 분합문 없이 두 칸 창으로만 되어 있다. 모든 창은 다시 위쪽으로 들어 올려 거는 방식인지라 필요시는 앞면 전체를 활짝 개방할 수 있는 구조이다.
▲다른 절집 전각처럼 좌우 측면으로는 출입문이 없다. 뒷벽에는 문틀에 널판문을 달았는데 사용하지는 않는듯하다.
▲앞쪽 기둥의 배흘림 모습이 뚜렷하다. 또한, 처마 아래로 보이는 공포가 간결하면서도 매우 탄탄해 보인다. 공포 위로는 11개의 도리 중 밖으로 노출된 외목도리가 보인다. 위 사진을 보면 뒤 처마 아래로도 외목도리가 나와 있다.
▲정면의 무량수전(無量壽殿) 현판은 공민왕 친필이다.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 와서 머무를 때 써주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현판 양식과 달리 네 글자를 세로 두 글자씩 두 줄로 썼으며, 검은색 바탕에 글씨에는 금칠했을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검은색도 바래지고 글씨의 금칠도 다 벗겨지고 없는데 자세히 보면 언뜻 금칠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관례로 임금 글씨는 낙관을 하지 않는다고 하며, 대신 뒷면에 공민왕이 썼다는 기록이 적혀있다고 한다.
무량수전(無量壽殿)은 부석사의 주불전(主佛殿)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으로 들어가면 몇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우선 부처님을 정면 중앙에 모신 것이 아니라 왼쪽, 그러니까 서쪽에 모셔서 오른쪽, 즉 동쪽을 바라보고(동향:東向) 계신 점이다.
이는 아미타여래가 서방정토에 계심을 뜻하여 배치한 것으로 보이며 다른 부처님들처럼 좌우에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만 계시는데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모시고는 있으나 건물 내부와 천정을 막지 않아 각양각색의 목재 부재들의 결구 모습이 노출된 채 보이는 것이 또한 보기 좋다. 아미타여래좌상에 대하여는 다음 국보 소개 때 (국보 제45호) 하기로 하고 남겨 둔다.
▲무량수전 내부 모습, 아미타불은 서쪽에서 동향(東向)으로 앉아 계시고 내부 목재구조가 모두 노출되어 있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가장 난감할 때가 '촬영금지'이다. 이곳 부석사도 무량수전과 아미타불 모두 국보인지라 무량수전의 내부구조나 아미타불의 근접촬영을 해야 하는데 떡하니 지키고 있는 법당 보살님이 사진 찍으면 안 된다고 눈을 부라린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왔으니 어쩌고 하는 건 아니지만, 작금의 추세는 국립박물관이나 외국 어느 전시시설에도 사진을 못 찍게 하는 곳은 없다.
다만 플래시를 사용하여 문화재가 빛에 반응하고 퇴색할 우려가 있다든지, 삼각대 사용 등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고 위험할 수 있다든지, 또는 법회 등 종교행사 중일 때라면 모를까 이유를 불문하고 내부촬영금지라고 막아서는 데야 참 할 말이 없다. 문화재를 사랑하고 천년고찰을 아끼는 탐방객들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기를 기대해본다.
[19] 국보 제19호 영주 부석사 조사당
공식명칭 : 영주 부석사 조사당 (한자 명칭 : 榮州 浮石寺 祖師堂)
지정일 : 1962.12.20
테마 : 유적건조물 / 종교 신앙/ 불교/ 불전
시대 : 고려
주소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문화재청 설명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처마 내밀기를 길게 하려고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며, 건물 자체가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세부양식이 경내에 있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보다 간결하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이것들은 고려 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또한,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도 있다.
현재 소개 중인 국보 시리즈의 제17호(무량수전 앞 석등), 제18호(무량수전)에 이어서 제19호는 부석사 조사당이다. 17호부터 19호에 이르기까지 연거푸 3건의 국보가 부석사 문화재인데 무량수전에 모신 아미타여래와 조사당 벽화 역시 국보이다. 이 두 점의 국보는 제45호, 46호로 지정번호가 조금 떨어져 있어 나중에 따로 소개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조사당에 대하여 살펴본다.
조사(祖師)
조사(祖師)는 불교의 한 종(宗)이나 파(派)의 선덕(先德). 후세 사람의 귀의(歸依)와 존경을 받을 만한 승려, 또는 한 종이나 파를 세워서 그 종지(宗旨)를 열어 주장한 승려에게 붙여지는 칭호이다. 즉, 불교의 한 종파를 처음 개창한 승려를 이어 법통(法統)을 계승한 후대 승려들이 우리가 조상을 모시듯이 창시조 승려를 모시고 기리며 받드는 것을 말하는데 신라 하대에 이르러 구산선문이 개산하면서 산문별 개산조를 기리는 일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따라서 부석사의 조사당(祖師堂)은 부석사를 처음 창건한 의상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초상화를 모시거나 그와 관련된 불교적인 상징물 등을 모신 전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신앙은 선종(禪宗)에서의 신앙형태이지 의상의 화엄 사상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형태였으니 부석사에 의상을 기리는 조사당이 있다는 것이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아마도 의상 직후에는 없었으나 선종이 유행하던 시기를 지나면서 부석사에도 화엄종에는 맞지 않지만, 유행에 따라 이를 세운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조사당(祖師堂)
부석사에 들러 안양문에 올라서 무량수전과 앞마당의 석등, 무량수전 안에 있는 아미타여래좌상까지 국보 3점에 취하다 보면 그 위쪽에 또 다른 국보인 조사당과 그 안에 있는 벽화 등 국보 2점이 더 있음을 잊고 그냥 하산하기 쉽다.
그러나 조금 더 인내를 갖고 무량수전 동쪽에 서 있는 석탑을 지나 산길을 잠시 오르면 갑자기 속세를 벗어나듯 절집조차 번거롭다는 느낌으로 지금까지의 복잡함이 사라지면서 차라리 절집은 이래야 하지 않나 싶을 만큼 조용하고 차분하다 못해 오롯한 모습으로 서 있는 작은 건물이 나타난다. 바로 의상대사를 모신 부석사 조사당(祖師堂)이다.
▲무량수전 동쪽 언덕에 서 있는 삼층석탑과 그 앞의 석등, 석등은 화사창과 상대석이 없어진 채 중대석(간주석) 위에 옥개석이 올려 있어 언뜻 보면 마치 상원사 입구에 있는 관대걸이처럼 보인다. 이곳에 탑을 세운 연유는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이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와 마주하는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때마침 눈이 내려 천지가 새하얀데 조사당으로 오르는 산길에는 좌우로 나지막하게 산죽이 푸릇푸릇 보이고 있었으며 원래 흙길이었을 텐데 바닥에는 돌을 깔아놓아 그닥 미끄럽지 않게 오를 수 있었으니 부석사 조사((祖師) 스님을 뵈러 오르는 길이 매우 아름다웠다. 산길은 한번 살짝 굽이쳐 감돌아 오르는데 눈을 들어보니 조사당 건물이 보인다.
▲하얀 눈을 이고 선 조사당 건물,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아주 작은 건물이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봉정사 극락전은 중수기록으로 최고(最古)를 다투고 있지만, 조사전은 창건연도가 고려 우왕 3년(1377)으로 나와 있어 명확한 건축시기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고려 시대 건물로 아마 의상이 부석사를 세우고 수도하던 자리에 세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량수전 중수기 즈음에 세워진 건물인 셈인데 소박하고 간결한 맞배지붕 건물로 한 눈에도 목조건축의 미(美)를 느끼게 한다.
건물에 비하여 지붕이 전후좌우로 길게 나와서 지붕이 커 보여 엄숙함과 안정감을 주며, 기둥 위에만 포를 얹은 주심포 방식인데 포의 결구가 매우 간결하여 단순해 보이며 도리가 7개인 7량 규모의 아담한 규모로 조사당 건물로는 제격이다.
▲서까래가 길어 지붕이 크게 건물을 덮은 모양이다. 무거워 보이지만 그 때문에 엄숙 단정해 보이기도 한다.
▲측면에서 보면 7개의 도리가 모두 보이며 앞뒤로 외목도리가 나와 있음을 알 수 있다. 귀공포도 매우 간결하다. 가운데 기둥(고주) 없이 앞 뒷기둥으로만 세운 모습에 종도리 아래 중보와 대들보가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겹처마 아래 조사당 현판.
그러나 조사당을 둘러보는 가운데 이처럼 역사적이고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국보 제19호 고건축물에 철제 보호망을 둘러놓았는지 눈살이 찌푸려진다. 보호 철망 안에는 성장이 좋지 못한지 몇 년째 비리비리해 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보이는데 전설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평소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았다고 하는 선비화(仙扉花)나무라고 하며 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인듯하다.
그러다 보니 방문객들이 너도나도 만져보거나 조금씩 꺾고 가져가려는 시도가 있어 보호 목적으로 그랬나 싶지만 아무래도 적절한 조치는 아닌 듯싶다. 보호목적상 꼭 필요하면 나무를 옮겨 심어 잘 보호하고 성장케 관리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전설에 의지하여 국보 건물 앞 절반을 저렇게 쇠창살로 가두어 놓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적절해 보인다. 재검토를 했으면 한다.
▲전면 우측 칸에 보호 철망은 의상대사 지팡이가 자랐다는 선비화(仙扉花)나무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데 이해가 안 가는 일이다.
▲학명으로 골담초(骨曇草)라고 한다는 선비화(仙扉花)나무를 들여다보았다. 겨울이어서인지 보잘것없어 보인다. 바닥에는 동전이 제법 떨어져 있고, 하도 사람들이 조금씩 꺾어가거나 만져보려 해서 보호망을 씌웠다는 것인데 전설에 너무 인위적인 조치인 듯하여 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이 조사당의 내벽에는 모두 6면의 벽화(국보 제46호)가 있었는데 지금은 떼어내 별도로 보관하고 있으며 조사당을 세운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하여 우리나라 절집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임의로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이처럼 떼어내 별도 보관하는 벽화나 탱화, 괘불 등의 문화재는 원본을 쉽게 볼 수 없다면 사진으로 정리하여 설명을 곁들인 안내문을 탐방객들에게 나누어주면 좋으련만 아직 그런 절집을 못 보았으니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의상을 사모하여 용으로 변신 후 따라온 선묘 낭자는 무량수전 옆에 선묘각을 지어 모셔놓았는데 불교 교리에는 맞지 않는 일이다.
전해 듣기로는 큰 돌로 변하여 하늘에서 훼방꾼들을 위협하여 내쫓음으로써 의상대사가 절을 짓는 데 도움을 준 선묘 낭자는 그 커다란 돌을 무량수전 왼쪽에 내려놓고 다시 석룡(石龍)이 되어 머리를 무량수전 아미타불 불상 밑에 두고 앞마당 석등 아래에 꼬리를 둔 채 땅 아래 묻혀 있다고 하는데 일제 강점기 보수공사 때 땅을 파보니 과연 석룡이 있더라는 얘기가 전해 온다. 어느새 선묘 낭자 역시 부석사의 조사(祖師) 의상대사 못지않은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인가?
[20] 국보 제20호 경주 불국사 다보탑
공식명칭 : 경주 불국사 다보탑 (한자 명칭 : 慶州 佛國寺 多寶塔)
지정일 : 1962.12. 20
테마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탑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경주시 불국로 385, 불국사 (진현동)
문화재청 설명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 서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29m, 10.75m로 비슷하다. 그중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 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당하여,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현재 1마리의 돌사자만이 남아있다.
어느새 국보탐방이 20호에 이르렀다. 지난 17, 18, 19호 국보가 부석사 소재로 이어져 새삼 감탄하던 중 드디어 불국사로 넘어오니 이번에 소개할 국보 20호를 비롯하여 21, 22, 23, 24호까지가 불국사 소재 문화재들이며, 석굴암(25호)과 무열왕릉비(26호)를 거쳐 다시 27, 28호까지 6개의 국보가 불국사 품 안에 있다는 사실에 낮고 조용한 흥분이 인다. 그래 드디어 불국사다.
불국사(佛國寺)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사적(事蹟) 등 다른 기록을 보면 불국사는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는데 김대성에 이르러 크게 중창하였다거나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 부인의 발원에 의거 창건하였고 이후 여러 번의 중창을 거친 후 김대건에 이르러 가장 크게 수리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김대성에 이르러 불국사는 대웅전 25칸, 다보탑·석가탑·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던 장대한 가람의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오늘날에도 불국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내국인뿐 아니라 많은 외국인이 찾아오는 한국의 대표적 사찰이다. 사명(寺名)이 불국(佛國)임에야 더이상 절집에 대한 이야기를 보태는 것이 무의미하다 할 것이다. 향후 할 수만 있으면 한 사나흘 머무르면서 불국사 전체에 대한 세세한 답사기를 써보고 싶다.
다보탑(多寶塔)
▲다보탑이 새겨진 10원짜리 동전.
10원짜리를 주우면서 '다보탑,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고 노래한 시인이 있었다. 바로 이 다보탑이다.
석가여래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할 때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칠보탑이 땅에서 솟아나와 큰소리로 석가의 말이 진리라고 하였다는데서 비롯된 다보탑(多寶塔). 우리 문화유산 답사꾼들이 이형탑(異形塔)의 대표로 손꼽는 아름다운 탑이다.
이 다보탑은 우리들의 탑에 대한 생각을 여지없이 무색하게 만드는 화려한 탑이다. 옆에 있는 석가탑은 3층 석탑이라고 하지만 다보탑은 몇 층 탑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위 문화재 설명도 층수를 헤아리기 어렵다고 씌어 있다. 그만큼 설명이 어렵도록 복잡하고 화려하며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통상 말하는 '2층 기단에 삼층석탑'이라는 신라 시대 석탑의 상식을 무참히 깨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보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방으로 계단을 놓은 기단과 그 위에 4개의 기둥으로 받친 네모꼴의 사각이 1층, 네모지붕 위에 얹힌 사각 난간 안에 팔각으로 돌려진 2층,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작은 난간을 돌린 원형이 3층이며 버선발을 거꾸로 세운 듯한 모습들이 받치고 있는 개석 위에 상륜부가 있는 3층탑의 구조로 보인다. 그렇지만 굳이 다보탑을 3층탑이라고 할 것은 아니라고 보니 층수에 대하여는 그만하기로 한다.
▲다보탑 전경, 남쪽에서 찍은 모습이다.
다보탑의 기단은 높고 육중하게 세웠으며 사방으로 각 9층의 계단을 내고 계단마다 2개씩의 돌기둥을 세웠는데 실제 이 계단을 통하여 탑을 오르내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남원 실상사에 석등 앞 작은 계단은 보았으되 이처럼 탑의 몸돌에 오르는 정식 계단을 세운 것은 유일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사방으로 낸 계단이 안정적이며 마치 건축물을 연상케하는 구도가 된다.
▲다보탑의 기단 부분과 그 위에 세워진 우람한 돌기둥.
기단 위에는 평면적을 조금 줄인 모습으로 받침돌 위에 네 귀퉁이로 크고 묵직한 사각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사각의 지붕돌을 얹었는데 네 귀퉁이만 살짝 들어올렸을 뿐 평범한 네모지붕을 받치는 기둥 위 받침돌은 마치 목조건물의 결구 모습을 보는 듯하다. 즉, 석재를 목조건물처럼 깎고 다듬어 육중하지만 곡면으로 공굴려 모양을 낸 크고 작은 2단의 받침돌을 복잡하게 얹고 끼운 것이다. 그리고는 가운데에 목탑에 심초석을 세우듯 탑의 중심을 받치는 기둥을 하나 더 세웠다. 단단하고 야무지게 안정적인 모습이다. 필자는 이 부분을 다보탑의 1층이라고 보았다.
▲기단 위에 세워진 육중한 네모 기둥과 지붕돌 받침석의 우아한 모습.
1층의 네모지붕돌 위에는 다시 조금 작아진 모습의 네모 난간을 둘렀고 난간 안에는 지금까지의 사각형이 아닌 팔각의 구조를 쌓아 올렸는데 모서리마다 위 아래보다 중간이 좁고 가는 모습의 받침대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는 중심을 받치는 구조 위에 조금 넓어지는 모양의 8각 지붕돌을 올렸는데 이 8각 지붕돌은 다시 그 위에 있는 원형을 받치는 역할을 겸하는 듯하다.
팔각 위의 원형부분은 완전히 둥근 모습이라기보다는 8각을 뭉뚱그린 원형인 듯한데 각진 부분쯤에 대나무 마디 모양의 받침대를 세우고 중심석이 받치는 돌에는 둥글게 돌아가며 앙련을 새겼다. 이 8각진 부분이 2층, 원형부분을 3층으로 보았다.
▲사각형의 난간 안으로 8각형 구조를 얹었고, 그 위로는 다시 8각 난간을 두른 후에 원형을 얹은 모습이다.
▲사각과 팔각 난간의 근접 모습. 보수중 촬영.
16면에 2개씩의 앙련을 새긴 8각에 가까운 원형돌 위로는 다시 또 8각의 받침돌을 세우고 그 위로 버선을 거꾸로 세운 듯한 모습의 받침석을 8개 세운 후 얇고 평편하지만 귀끝을 살짝 들어올린 8각의 옥개석을 얹어 마무리하였는데 8각 귀퉁이마다 풍탁(風鐸)을 달았던 듯 구멍이 뚫린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그 위로는 높아서 잘 안 보이지만 사진으로 볼 때에 노반과 복발, 앙화, 보류, 보개가 나름대로 온전하게 남아 있다.
▲다보탑의 8각, 원형 부분과 상륜부.
참 복잡다난하고 화려하게 아름다운 다보탑이다. 그저 층수를 셀 수 없고 구조나 모양을 일일이 설명할 수 없다고 뭉뚱그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답사기라고 본대로 느낀 대로 적어보았다. 높이가 10m가 넘어 위로 갈수록 자세히 관찰하기가 어렵고 이형탑이라는 특징으로 해석과 생각이 다르더라도 양해를 구한다. 전문가의 상세한 설명이 어딘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다보탑은 일제 강점기인 1925년에 대대적인 해체, 수리하였으나 그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으며, 탑 내부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사리장엄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을 뿐 아니라, 탑 기단 위에 놓인 4마리의 돌사자 중 3마리도 이때 분실되었으며 지금은 아마도 그중 가장 못생겼을 한 마리만 남아있어 문화재를 답사할 때마다 쌓이는 일제에 대한 분노가 하나 더 늘었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사자의 위치가 지금처럼 한변의 중앙이 아니라 사각형의 각진 모서리 부분이었다는 주장도 있어 흥미로운데 또 다른 주장은 사자는 다보탑을 세울 때 함께 만든 것이 아니라 추후 따로 조각하여 위치시킨 것이라는 말도 있으니 참고 바란다.
그 후 우리 손으로 1972년과 지난 2009년에 대규모 수리, 보수하였으며 지금은 그 옆에 있는 석가탑을 수리 보수중이다. 60년대에 석가탑 보수때 옥개석을 떨어뜨려 깨어진 것도 있다 하니 수리, 보수도 함부로 할 것은 아닌 듯하며, 완벽하게 보수하여 우리 앞에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
이처럼 다보탑을 일컬어 참 화려하고 아름다운 탑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내공이 쌓이고 답사에 이력이 더해지면, 그 곁에 서 있는 무뚝뚝해 보이는 석가탑(삼층석탑)이 더 아름답다고 한다. 무어라 보탤 말이 없이 감탄하게 된다. 이후 우리나라 석탑의 표준이 된 석가탑 이야기는 바로 다음 편에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