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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2/ 국보2/ 국보탐방1/ [1] 국보 제1호 서울 숭례문 - [10] 국보 제10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상림은내고향 2022. 1. 11. 21:22

문화2/ 국보2/ 국보탐방1/

[국보 탐방]  2014.08.06  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조선일보

 [1] 국보 제1호 서울 숭례문

문화재청 자료

- 공식명칭 숭례문 (한자 명칭 : 서울 崇禮門) - 지정일 1962. 12. 20 - 테마 유적건조물,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 시대 조선시대 -주소 서울 중구 세종대로 40 (남대문로4가)

 

문화재청 설명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숭례문 전경.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 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숭례문 방화 화재(2008.2.10)

 

▲숭례문 입구. 放火의 교훈으로 울타리와 출입문, 경비원이 배치되었다.

 

2008년 숭례문 방화사건(崇禮門放火事件)은 2008년 2월 10일~2월 11일 숭례문 건물이 방화로 타 무너진 사건이다. 화재는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에 발생하여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오전 0시 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5분쯤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붕괴되었으며, 5년간의 복구공사를 거쳐 2013년 5월 4일, 박근혜 대통령 주관 하에 복구 기념식을 갖고 다시 공개되었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한양을 도읍지로 정한 후 먼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도읍을 방어하기 위하여 서울 주위로 성곽을 쌓도록 하고 동서남북에 사대문을 두고, 그 사이사이에 사소문을 두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 남쪽에 있는 큰 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 하였으며, 남쪽 문은 한 나라의 도성을 출입하는 상징적인 正門(정문)으로, 남쪽에 있다 하여 속칭 '남대문'이라 불렀다.

 

▲안으로 들어서자 숭례문의 정면 모습.

 

숭례문은 개성의 남대문, 평양의 보통문과 함께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성문 중 하나로 그 가치가 인정되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숭례문은 크게 石築(석축), 또는 陸築(육축)과 門樓(문루)로 구성되어 있다. 석축은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두고 남쪽에 면하여 큰 문을 달았다. 문루는 2층으로 된 목조건물로 동서 양쪽으로 작은 문을 두어 문루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2층은 바닥 전체가 마루로 되어있고, 사방에 두터운 나무판으로 된 창문을 달았으며, 문루 2층 중앙 남쪽에는 崇禮門(숭례문) 세 글자를 세로로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숭례문은 도성인 한양의 정문으로서 지니는 일상적인 기능 외에 도성의 정문이라는 상징성과 연관하여 몇 가지 흥미로운 기능이 있었음을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숭례문은 鐘樓(종루)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세종 7년 4월 흥천사의 종을 옮겨와 숭례문에 건다는 기록이 있는데 숭례문의 종은 성문의 종과 함께 성문의 개폐를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일출 일몰의 시차 관계로 계절에 따라 달랐으나 대개 밤 10시가 되면 28번의 종을 울려 문을 닫고 외부와의 통행을 막는 한편, 성내에서는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새벽 4시경이 되면 33번의 종을 쳐서 통금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숭례문 현판 글씨부터 살펴본다. 참 잘 썼다.

 

또한 숭례문은 풍수 지리적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태종 8년 7월 23일에 오랜 비로 인해 한양의 사대문에서 기청제를 지낸 이래 숭례문은 조선 시대 내내 기우제와 기청제를 지내는 용도로 자주 활용되었다. 이 밖에도 숭례문은 백성에게 국가의 시책을 보여주는 공개적인 장소로도 활용되었고, 임금이 직접 참관하여 반역자를 비롯한 국가적인 중죄인을 재판하고 참수 또는 효시하는 장소로 활용하였으며, 외국으로 가는 사신을 전송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접견하는 등 주요한 국가행사가 열렸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역사 속의 숭례문

▲양녕대군 사당 지덕사에 보존중인 숭례문 현판 탁본. 표시된 부분이 숭례문 현판과 일치한다.

 

일제 강점기 직전인 1907년에 좌우 성벽이 헐리기 시작하여 1910년에 주변 석축 등이 완성되었고,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이 성벽 철거는 명목상으로는 교통통행량이 많은 숭례문 주변 도로를 확장 정비하는 것이었으나, 숭례문의 원형이 파괴되는 결정적 사건으로, 이후 주변의 전철과 교통통행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진동에 의해 지속적인 피해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물산공진회 장소로도 사용되었고, 1930년대 중반부터는 홍예 내부로의 출입마저도 금지되어 숭례문은 주변 도로에 의하여 섬처럼 고립되게 되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숭례문 석축 전면과 문루 등이 피해를 입어 1952년에 긴급 보수가 진행되었고, 1961~1963년에 석축 일부와 문루 전체에 대한 해체 수리가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몇 번에 걸친 지붕 기와 교체공사와 단청 공사 등이 진행되었고, 2006년 3월 주변 공원 조성사업 후 일반인에게 개방하였으나 그로부터 2년 후인 2008년 2월 10일, 숭례문은 방화에 의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月刊 종로문화 62호 인용]

 

▲복구 공사 과정에서 숭례문 좌우측 성벽을 조금씩 연장하여 살려놓았다. 새로 쌓은 돌이 표시가 난다.

세로로 쓰인 숭례문 현판

 

도성 문의 현판은 모두 가로로 쓰여 있지만, 숭례문만은 세로로 쓰여 있다. 이것은 ‘불의 산’이라 일컬어지는 한양 남쪽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관악산의 화기가 강해 경복궁에 화재가 나기 쉬운데, 현판 글씨를 세로로 길게 늘어뜨리면 성문 밑을 막고 누르는 셈이 되어 화기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숭례문 현판의 글씨는 누가 썼을까?

조선조 제일의 명필로 일컫는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는 늘 과천에서 서울에 올라올 때면 숭례문 현판 앞에 서서 해저무는 줄도 모르고 현판을 올려 보았다고 한다. 그가 천하의 명필이라고 칭송하는 현판의 글씨가 과연 누구의 필적이냐에 대한 논란이 많았지만 그 주인공은 태종의 맏아들로 왕세자에 책봉되기도 했던 양녕대군의 작품이라는 것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 천장에는 앞 쪽(바깥쪽)으로 황룡, 뒤쪽(안쪽)으로 청룡이 그려져 있다.

 

태종실록에 기록하기를 경복궁 안에 경회루를 새로 꾸미고 현판을 당시의 왕세자인 양녕으로 하여금 쓰게 했다는 기록이 있듯이 그는 당대의 명필이었다. 지금 상도동에 있는 양녕대군의 사당(祠堂)인 지덕사(至德祠)에 그의 유묵인 숭례문 현판 탁본이 보존되어 있어서 양녕대군의 작품으로 증명되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도 양녕대군을 지목하고 있다.

 

▲홍예문을 지나 성문을 들어서면 도성을 들어온 셈이다. 뒤돌아본 숭례문 모습.

 

숭례문 액자는 임진왜란 때 없어져서 조정에서 새로 써서 달았으나 다는 족족 떨어지곤 하였다. 사람들이 이것을 괴상히 여기던 중에 밤이 되면 남대문 밖 청파(靑坡) 배다리 근처 웅덩이 속에서 서광(瑞光)이 남대문 쪽으로 뻗치는 지라 그 웅덩이를 파내어 보니 원래의 현판이 묻혀 있었으므로 남대문에 다시 달아놓게 되었다고 한다.

 

▲안쪽의 숭례문 좌우 石築(석축). 몇몇 돌은 새로 박아 넣은 듯 하다.

 

숭례문은 무료로 개방되어 누구나 들어가 볼 수 있다. 2층 문루는 토, 일요일에 한하여 정해진 시간에 제한된 인원(신청, 접수순)만 올라가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국보 제1호답다.

 

▲반지하로 관리사무실도 지었다.

 

덧붙이는 글

문화재 명칭을 기술할 때는 지역명+문화재명=서울 숭례문. 이런 방식으로 쓴다. 문화재청에서 그렇게 적기로 하였다. 일부 지역을 명기하기 어려운 문화재는 그냥 명칭만을 쓰지만 해당 지역에 위치하거나 명확하게 지명이 확실한 문화재는 앞머리에 반드시 지역명을 쓴다.

 

예를 들어 충남 아산에 있는 맹사성의 고택인 '맹씨행단'의 정식명칭은 '아산 맹씨행단'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맹사성의 맹 씨를 아산 맹 씨로 잘못 알게 되는 폐단이 있어서 맹 씨 문중에서는 문화재 이름 쓰는 법이 지역명을 앞에 쓰게 되어 있어 그렇다고 설명하면서 원래는 신창 맹 씨임을 따로 적어놓았다.

 

[2] 국보 제2호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문화재청 자료

- 공식명칭: 원각사지 십층석탑 (한자 명칭 : 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 - 지정일: 1962.12.20 - 테마: 유적건조물, 종교신앙, 불교, 탑  - 시대: 조선 시대 - 주소: 서울 종로구 종로 99 (종로2가) (탑골공원 內)

 

문화재청 설명

이 탑은 조선 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 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폐허에 10층 탑만 남아있는 사진.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 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 시대의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원각사(圓覺寺) 터

원각사는 현재의 탑골공원 자리에 세조 11년(1465)에 흥복사 터를 확장하여 세운 사찰로 조선 시대 도성 안의 3대 사찰로 손꼽혔다. 원래는 고려 때부터 흥복사(興福寺)라는 절이 있었으나, 태종의 억불정책으로 없어졌다가 세조가 다시 원각사를 창건한 것이며 당시 원각사는 구리 5만 근으로 주조한 대종(大鐘. 現 보신각종)과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번역한 원각경(圓覺經), 그리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나누어 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십층석탑 등이 유명하였는데 그 십층석탑이 지금의 국보 2호이다.

 

▲현재 탑골공원. 앞에 출입문인 삼일문이 보이고 마당 뒤쪽에 팔각정과 네모진 보호각이 보이는데 보호각 안에 10층 탑이 있다.

 

조카인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피부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병을 고치기 위해 금강산 진주담에 갔다가 그곳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게 되었다. 세조는 문수보살로부터 “조카에 대한 죄를 갚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사찰을 지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한양으로 돌아와 원각사를 창건하였으며 이후 세조의 피부병도 호전되고 나라도 안정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보호각이 세워지기 전의 십층탑 사진(출처 문화재청).

 

조선 시대 숭유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보호 속에 원찰로서 오랫동안 번성하였으나 성종대부터 강화된 억불정책으로 쇠락의 길을 걷다가 연산군 10년(1504) 마침내 폐사되고 마는데 연산군은 이곳에 궁중음악과 무용을 담당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옮겼다가 그마저도 이름을 연방원(聯芳院)으로 고쳐 전국에서 뽑아 올린 기생과 악사들을 관리하도록 했으니, 사찰이 임금의 유흥을 위한 기생방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연산군이 반정으로 축출된 뒤에는 3년쯤 한성부 청사의 일부로 사용되었으며 중종 9년(1514)에는 건물의 재목을 여러 공용건물 보수에 사용해버림으로써 원각사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고 그 자리에는 탑과 비만 남게 되었다.    

 

탑골공원  

탑골공원은 원각사가 폐사되고 탑과 비만 남았던 자리에 들어선 서울에서의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사바틴 설계로 세워진 인천 자유공원보다 약 9년쯤 늦은 1897년에 총세무사로 근무하던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로 세워졌으며, 이때 팔각정도 함께 지었는데 초기에는 황실 공원으로 제실, 음악 연주 장소 등으로 사용하였으나, 1913년부터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으며 1919년 삼일운동 당시 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 학생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시위행진을 벌였던 곳이다.  

 

그런데 왜 탑골공원이라 부르는가? 탑(塔)이란 산스크리트어 stupa, 팔리어 thupa의 음사인 탑파(塔婆)의 준말로, 공양하고 예배하기 위해 일정한 형식에 따라 흙, 벽돌, 나무, 돌 등을 높게 쌓은 구조물을 말하는데 원래는 부처의 유골을 안치한 그 구조물을 탑이라 하고, 그것을 안치하지 않은 것을 지제(산스크리트어 caitya)라고 하였으나, 보통 구별하지 않고 모두 탑이라고 한다.

 

▲구한말 주한 미국공사 알렌의 메모. 아래 중앙 Public Park라고 쓴 곳이 탑골공원이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시아 등에서는 탑파(塔婆)나 탑 모양으로 높이 지은 불교 사원을 pagoda(파고다)라고 부르는데 그래서 원각사 10층 석탑이 있는 이 공원을 파고다 공원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1992년에 이곳 옛 지명을 따라 탑골공원으로 바꿔 부르게 된 것이다.  

 

삼일문 현판

▲떼었다 붙였다 파란 많았던 파고다 공원 출입문의 '삼일문' 현판.

 

원래 탑골공원 삼일문에는 광복 직후 서예가 김충현 씨가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가 196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을 달았다. 그러나 2001년 '3·1 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에 일본군 장교 출신이 쓴 현판을 걸 수 없다'며 뜯어냈으며, 이에 서울시 종로구는 그동안 서울시 및 문화재청과 현판 재설치에 관해 협의하여 2003년 2월 가로 1.2m, 세로 0.9m로 기존 것과 동일한 크기의 현판을 새로 제작하여 달았다. 현판의 글씨체는 '삼'자와 '일'자는 독립 선언서의 글자를 그대로 사용했고 선언서에 없는 '문'자는 다른 글자의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만들었다.    

 

십층석탑 (국보 제2호)

우리나라 석탑 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탑이다. 1348년에 세워진 경천사 터 십층석탑(現 중앙박물관 1층 실내에 세워져 있음)과 층수, 형태, 크기, 재료, 세부조각에 이르기까지 매우 흡사하여 아마도 이 탑을 범본으로 만들어진 듯하며, 재료는 흔히 쓰이는 화강암이 아니라 회백색 대리석이다. 탑의 상륜부는 사라져 없는 상태이며, 사실 위로부터 3개 층도 언젠가부터 땅에 놓여 있었는데 1946년 미군 공병대에 의하여 지금 상태로 복구된 것이라고 한다.  

 

높이 12m의 탑은 흔히 보는 이중기단이 아닌 삼중기단이며 각 단의 폭과 높이가 동일하다. 평면 또한 큰 십자형의 한가운데 작은 정사각형을 겹쳐놓은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각 단의 면석에는 온갖 동식물과 인물상을 빈틈없이 현란하게 조각하였으며 갑석에도 아래위로 연꽃 받침을 돌리고 당초무늬를 빠짐없이 수놓았다. 제일 위층 기단부는 난간 무늬를 돌려 아래 두 층의 기단과 구분하면서 탑신부를 받도록 한 점이 눈에 띈다.

 

▲유리 보호각 속의 원각사 터 십층석탑. 보기도 불편하고 어른거리고 비치는 현상으로 사진찍기도 힘들다.

 

▲유리 보호각 속의 원각사 터 십층석탑. 보기도 불편하고 어른거리고 비치는 현상으로 사진찍기도 힘들다.

 

탑신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1층부터 3층까지는 평면이 기단과 동일한 아(亞)자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4층부터 10층까지는 평면이 정사각형으로 일반 석탑의 경우와 같다. 3층까지는 몸돌과 지붕돌의 폭이 일정한 비율로 체감하다가 4층에서 급격하게 줄어든 후 다시 밋밋한 체감을 보인다. 몸돌 가장 넓은 면마다 부처님이 여러 보살과 제자를 거느리고 설법하는 장면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돼 있으며, 면이 꺾이는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을 조각하였다.

 

▲판박이처럼 닮은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국보 제86호이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 실내에 있어 살펴보기 용이하다.

 

지붕들은 목조건축의 지붕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어서 기왓골이나 마루, 추녀는 물론 공포의 작은 부재들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원각사 터 십층석탑은 아마도 조선은 물론 우리나라를 통틀어서 가장 우수한 석탑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는 대형 철골조에 유리 보호각을 씌워놓아서 자세히 살필 수 없는 상태이다.

 

[3] 국보 제3호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문화재청 자료

공식명칭 :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한자명칭 : 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 - 지정일 : 1962.12.20 - 테마 : 기록유산, 서각류, 금석각류, 비 - 시대 : 신라시대 - 주소 :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內)  

 

문화재청 설명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북한산 순수비 진품.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 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순수비의 글자를 판독하여 적어놓았다. 윗부분 일부는 마모가 심하여 읽을 수 없고, 군데군데 글자 판독도 어렵다.

 

▲옆면의 3줄 새김 중 오른쪽에는 병자년(1816년) 7월 김정희(추사), 김경연이 와서 비문을 읽었다고 씌어있고 왼쪽에는 정축년(1817년) 김정희, 조인영이 함께 남아있는 글자 68자를 심정하였다고 새겼다. 가운데 줄에는 기미년(1859년) 8월 20일 용인 사람 이제현이라고 새겨 있는데 추사 김정희의 판독과는 무관한 낙서로 보인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眞興王 巡狩碑(진흥왕 순수비)

 

신라 진흥왕이 새로 넓힌 영토를 직접 돌아보고 세운 비석을 말한다. '巡狩(순수)'란 천자가 제후의 封地(봉지)를 직접 순회하면서 현지의 통치 상황을 보고받는 의례로 巡行(순행)이라고도 하며 이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을 순수비라고 하는데, 진흥왕 순수비의 비문 속에 나타나는 巡狩管境(순수관경)이란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뒷면에는 6.25전쟁 중 상흔으로 보이는 총탄 자국이 선명하다.

 

신라 진흥왕은 가야 소국의 완전 병합, 한강 유역의 확보, 함경도 해안 지방 진출 등 활발한 대외 정복 사업을 수행하여 광범한 지역을 새로 영토에 편입한 뒤 拓境(척경)과 순수를 기념하여 비석을 세웠다.  

 

북한산비는 신라의 한강 하류 진출을 밝혀 주는 비문이며, 561년에 세워진 창녕비는 신라의 대가야 정복 사실을 증명하는 순수비이다. 568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황초령비, 마운령비는 신라의 함흥지방 진출을 밝혀 주는 비문으로 알려졌다.  

 

▲북한산 비봉에는 문화재청에서 모의 비석을 세웠다. 진흥왕 순수비가 있어 비봉이라고 부른다.

 

▲북한산 비봉에는 문화재청에서 모의 비석을 세웠다. 진흥왕 순수비가 있어 비봉이라고 부른다.

 

현재 남아있는 진흥왕 순수비는 이번에 소개하는 북한산비와 함께 창녕비(국보 제33호), 그리고 북한 지역에 위치한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모두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었음)가 있으며, 그동안 고려 태조 왕건이나 무학대사의 비로 알려졌던 북한산 순수비는 조선 후기 금석학자 추사 김정희에 의하여 진흥왕 순수비임이 밝혀졌다.

 

 [4] 국보 제4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

문화재청 자료

공식명칭 : 여주 고달사지 승탑 (한자 명칭 : 驪州 高達寺址 僧塔)
지정일 : 1962.12.20
테마 : 유적건조물, 종교신앙, 불교,
시대 : 고려시대
주소 경기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1-1

 

문화재청 설명  

고달사터에 남아 있는 고려 시대의 승탑이다. 고달사는 통일신라 시대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된 절로, 고려 광종 이후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언제 문을 닫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특히 가운데 돌에 새겨진 조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 돌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각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다.

 

▲고달사터 전경. 나름대로 발굴작업을 거쳐 구획정리를 해놓았으며 일부 복원작업 중이다.

 

돌에 꽉 차게 새겨진 무늬들이 과장되지 않고 세련되어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힘이 느껴진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사리를 모셔둔 탑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는데,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 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 효과는 떨어진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 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고달사터(高達寺址)  

여주와 양평의 중간쯤, 그중에서도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거기에 갈 일이 없을 만큼 제법 외진 곳에 고달사가 있었다. 못미처에 블루헤런 골프장이 있어 동코스와 서코스 중간을 가로지르는 길을 혹시 잘못 온 건 아닌가 하면서 지난 후 오르막 고갯마루를 넘어 반대쪽 내리막의 왼편에 고달사 절터가 있다.  

 

약간 경사진 지형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담하고 포근한 그곳에는 지금 소개할 국보 제4호 <고달사지 승탑>외에도 보물 제6호 <원종대사 부도비>와 보물 제7호 <원종대사 부도>, 보물 제8호 <석불대좌>가 있으며,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 중인 보물 제282호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도 원래는 이곳 고달사지의 석불 대좌 아래 있었으나 1959년에 박물관으로 옮겨감으로써 빈자리만 남았다.

 

▲고달사 절터의 국보와 보물 위치.

 

원래 고달사는 전성기인 고려 시대에는 사방 30리가 모두 절 땅이었으며, 수백 명의 스님들이 머물렀다는 대찰(大刹)이었다고 하지만 언제 어떻게 폐사되었는지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옛날에는 인근 남한강 수로(水路)를 따라 문물의 왕래가 빈번하였고 따라서 이 근처는 많은 인구가 거주하거나 재물이 모여드는 등 번화한 곳이었다고 짐작할 따름이다. 멀지않은 곳에 법천사나 거돈사 등의 또 다른 큰 절터가 아직 남아있음이 이를 말해준다.  

 

한동안 폐사지 특유의 쓸쓸함이 가득 배어있는 황량한 벌판의 느낌이었으나 최근 들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정비하고 복원 및 보호활동에 힘입어 이제는 제법 깔끔하고 정돈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반갑다. 2014년 8월 현재 보물 제6호 <원종대사 부도비>의 비신 복원설치 작업이 진행 중에 있어 9월 이후에 이곳을 다시 찾아본다면 감회가 새로우리라.

 

국보 제4호 고달사지 승탑(高達寺址 僧塔)

국보 제4호 고달사지 승탑은 절터 안에 있지 않고 뒤쪽 산기슭에 있으며, 근처에는 보물 제7호 원종대사 탑이 있다. 이는 스님들을 모신 승탑은 절 주변의 한적한 곳에 안치하는 관례에 따라 그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요즘 대부분의 절은 여러 스님의 승탑들을 모신 부도밭을 사찰 입구 길가에 조성하여 나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절터 뒤편으로 잠시 올라가면 국보 제4호 고달사지 승탑이 보인다.

 

또한, 최근에는 '부도'라 부르지 않고 '승탑'으로 부르고 있다. 다만 보물 제7호 <원종대사 탑>처럼 국보 제4호의 경우 누구의 승탑인지를 밝히지 않는 것은 어느 스님을 모신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원감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나 이들을 기록해놓은 탑비도 발견되지 않는 등 아쉬운 부분이다.

 

▲고달사지 승탑 정면. 신라 시대 각원당형의 부도양식을 따랐으며 현재 남아있는 부도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장중하다. 승탑 앞쪽으로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보물 제282호 쌍사자 석등이 세워져 있던 팔각 지대석과 배례석이 보인다.

 

▲측면에서 빗각으로 보면 중대석 둥근 몸돌에 새긴 거북 머리가 밖으로 돌출되어 보인다.

 

▲승탑 주변을 둘러싼 축대 뒤에 올라 낮은 시각으로 내려다 본 승탑. 지붕돌과 상륜부를 볼 수 있는 위치이다.

 

▲국보 제4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

 

국보 제4호라는 격(格 )에 걸맞게 이 승탑은 우선 그 앞에 서면 그 장중함과 유려한 모습에 압도당하고 만다. 과연 국보감이다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국보 제4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

 

전체적으로 팔각원당형 승탑이며 바닥에는 지대석부터 팔각으로 깔고 그 위에 굄돌을 얹은 후 한 면에 2개씩의 안 상을 새겼다. 중대석은 팔각모양보다 오히려 둥근 원통 모양을 보이면서 커다란 거북을 중심으로 좌우 2마리씩, 4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정교하게 새겨놓았다. 특히 정면을 바라보는 거북 머리는 크게 돌출되어 조각적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다.

 

▲국보 제4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

 

그 위에 얹혀진 팔각 몸돌은 앞뒤로는 자물통을 걸어놓은 문짝이, 좌우로는 문창살이 새겨져 있으며 그사이 4면에는 사천왕상을 새겨 안에 모셔진 스님(사리)을 보호하고 지킨다는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국보 제4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

 

커다란 지붕돌은 묵직한 무게감으로 얹혀있으며 팔각의 여덟 각마다 귀 꽃을 올려세워 화려함을 더하였으며 지붕 위에는 상륜부를 꾸몄을 것이나 현재는 복련위에 보개가 얹혀져 있고 기타 부분은 보이지 않아 마치 2층 형태의 지붕인 듯 보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지붕돌의 처마 밑을 자세히 올려다보면 긴 옷자락을 날리며 날아가는 천인(天人)을 새겨놓았는데 매우 아름답다.  

 

이처럼 대단한 승탑 옆에는 당연히 탑비가 남아서 어느 스님인지, 그 스님의 행적은 어땠는지를 소상히 적어놓아야 하지만 아쉽게도 이 국보급 승탑에는 탑비가 없어서 명확한 기록을 구하지 못한 채 다만 원감국사의 승탑으로 추정할 뿐이다. 승탑의 설명 판에도 이러한 탑비가 없다는 설명을 상세히 기술해야 할 것이다.

 

▲석등과 배례석 앞쪽에는 좌우로 낮은 크기의 석주(石柱)가 2개 보이는데 명확한 용도를 알 수 없다.

 

이상으로 국보 제4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 둘러보았다. 그밖에 고달사 절터에 있는 보물들을 소개한다.

 

고달사 절터의 기타 보물들  

고달사지 승탑의 오른쪽 약간 아래편에는 보물 제7호 <원종대사 탑>이 있다. 국보 제4호 부도에 모신 스님이 원감국사로 추정된다 하였는데 원종대사는 원감국사의 제자 진경대사의 법통을 이어받았으니 고달사의 제3대 지주가 되는 셈이다. 원종대사는 국사의 자리에 올라 이곳 고달선원을 전국 제일의 선찰로 가꾸었고 이 무렵 고달선원은 희양원, 도봉원과 함께 전국 3대선원으로 불리었다. 대사 입적 후 광종이 '원종대사 혜진'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원종대사 승탑은 국보 제4호 승탑을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이며 서로 비교하면 작품성이나 공력이 다소 부족해 보인다. 국보 제4호 승탑은 팔각인 데 비하여 원종대사 혜진탑은 하대석이 사각이며, 중대석의 거북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여러 가지 미흡하면서도 거북이 고개를 왼쪽으로 꼬아 조각한 것은 높이 살만하다.

 

또한, 국보 제4호 승탑의 몸돌에는 자물쇠 문양이 뚜렷하게 앞뒤로 새겨졌지만 원종대사 승탑은 자물쇠 없이 문(門)만 새겨 놓았다. 반면에 원종대사 승탑은 상륜부가 비교적 온전한 장점이 있어 가까이 있는 양쪽을 서로 비교하여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연코 국보 제4호 승탑이 뛰어나고 우월하다. 게다가 원종대사 승탑은 지반 앞부분이 침하되는 듯 보여 불안하다.

 

▲보물 제7호 원종대사 탑.

 

또한 원종대사 탑비는 고달사 절터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현재는 귀부와 이수만 있고 비신은 1915년에 넘어져 깨어진 상태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라하며, 올해 8월 말까지 복원작업을 추진 중에 있으니 9월 이후에는 복원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원감국사(추정) 승탑은 있으나 탑비가 없어 아쉬웠는데 원종대사는 승탑과 탑비가 모두 남아있어 다행이다. 원종대사 부도비가 하도 크고 포스가 느껴져서 혹시 국보 제4호가 원종대사 승탑이고 이 탑비와 한 쌍이 아닐까 생각을 해봤다.

 

▲보물 제6호 원종대사 부도비. 귀부와 이수만 있는데 현존하는 귀부와 이수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2014년 8월 현재 비신을 새로이 제작하여 복구작업 중이다.

 

고달사터의 중앙 아래쯤에는 커다란 석불대좌가 하나 있다. 불상은 없는 채 대좌만 자리 잡고 있는데 역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크기로 알려졌으니 위에서 예를 든 승탑이나 탑비 등과 더불어 고달사의 사세(寺勢)를 짐작게 해준다. 이렇게 해서 한자리에서 국보 하나, 보물 4개를 보았다.

 

▲보물 제8호 석불대좌.

 

▲보물 제282호 쌍사자 석등. 쌍사자 2마리가 서있 지(立) 않고 앉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져 빈자리만 남아있는 쌍사자 석등은 보물 제282호이다. 그동안 옥개석(지붕)이 없이 놓여 있었으나 최근에 빈자리 근처에서 옥개석을 발견하여 제 짝임을 확인 후 씌워주었다고 한다. 문화재는 원래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고, 여기에 쌍사자 석등이 함께 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5] 국보 제5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문화재청 자료 

공식명칭: 법주사 쌍사자 석등 (한자 명칭 : 報恩 法住寺 雙獅子 石燈
지정일: 1962.12.20테마: 유적건조물, 종교 신앙, 불교, 석등시대: 통일신라 시대주소: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379, 법주사 (사내리)

 

문화재청 설명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특수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널따란 8각의 바닥 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랫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예스러운 멋을 풍긴다.  

 

사자는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 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보호각 속에 모셔진 국보 제5호 법주사 쌍사자 석등.

 

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써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석등(石燈)

석등(石燈)은 불전 앞에서 불을 밝히기 위함이다. 불교에서 등불을 밝히는 공양을 으뜸으로 여겼기 때문에 등불을 안치하는 공양구로 만든 듯하며 석등의 기본형태는 하대석과 중대석(간주석)에 상대석을 기대로 삼고, 그 위에 등불을 직접 넣는 화사석과 옥개석을 얹고 보주로 장식한다. 가장 중요한 화사석은 평면이 8각이고, 네 면에 화창을 낸 형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보호각 속에 모셔진 국보 제5호 법주사 쌍사자 석등.

 

대부분의 석등은 팔각을 기본 모양으로 하여 받침부터 화사석, 지붕돌까지 일관된 모양으로 만들고 있으나 국보 제5호 법주사 쌍사자 석등은 특이하게도 사자 두 마리가 일어선(立) 자세로 화사석을 받치는 중대석으로 조각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석등을 받치는 부분은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중대석을 2마리의 사자를 세워 조각한 것이다.  

 

뒷발을 딛고 일어서서 가슴을 맞댄 두 마리의 사자는 앞발과 머리를 젖힌 상태의 주둥이 부분이 상대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한 마리는 입을 다물고 있다. 금강역사 둘이 하나는 입을 벌리고 하나는 입을 다물어 아(阿), 흠(欠)이라고 하는데 그와는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흥미로운 일이다.

 

사자(獅子)와 불교

상식적으로 불교가 크게 번성한 중국, 한국 등에는 사자가 없다. 오히려 호랑이가 번식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런데 왜 석등이나 석탑에 사자를 새겨 넣었을까? 사실 호랑이는 도교, 사자는 불교와 인연이 깊다. 큰스님들이 법문을 설(說)하며 토해내는 말씀을 사자후(獅子吼)라고 하거나 부처님을 모시는 자리를 사자좌(獅子座)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그렇고 곳곳에 세워진 석탑이나 석등에서 사자 조각을 볼 수 있다거나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있는 것이 그렇다.

 

▲팔각지대석이 바닥에 깔리고 그 위에 연꽃무늬 하대석과 쌍사자 기둥, 다시 연꽃무늬 상대석까지가 하나의 돌로 되어있다. 왼쪽 사자가 입을 벌리고 있고 오른쪽 사자는 입을 다물고 있으며 서로 가슴 부분이 맞닿아 있다. 버티고 선 뒷다리 근육이 힘차다.

 

또한, 인체의 기혈(氣穴)을 인도 요가에서는 Chakra(차크라)라고 하며 모두 7개가 있다고 하는데 바로 척추 끝 물라다라, 배꼽 밑 스바디스타나, 배꼽 근처 마니프라, 심장 근처 아나하타, 목젖 부근 비슈다, 양미간 사이 아즈나, 정수리 사하스라라이다.  

 

이중 양미간 사이의 아즈나 차크라는 개발되면 천안통(天眼通)이 열린다고 하며 티베트나 네팔 불교에서 말하는 제3의 눈(Third Eye)이 아즈나 차크라라고 한다. 이를 속성으로 개발하기 위하여 외과적 수술로 송곳으로 뚫고 침을 박아 넣기도 한다는데 이 차크라를 뚫을 때 내면에서 응축된 기가 천안을 열리게 하는 것이며, 천안이 열릴 때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가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와 비슷하다는 것인데 이 사자 소리를 들어야 Ego(아상)이 완전히 소멸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설(說)이 있다. 불상의 양미간 사이에 박힌 보석이 그것이다.

 

▲그 위에 불을 켜는 화사석이 따로 하나의 돌이며, 위에 얹혀진 지붕돌이 또 하나의 다른 돌로 모두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화사석에는 네 곳에 창을 만들었는데 창틀 군데군데 못 자국을 보면 창문을 만들었던 듯하다. 지붕 위에는 보주가 얹혀있다.

 

또 다른 설(說)중에는 사실은 사자가 아니라 용이라는 것이다. 즉, 위에서 들은 대로 불교가 발생하고 전파되고 융성한 나라에는 사자가 없어서 사자를 모델로 조각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동양 전체를 지배하는 용(龍)의 사상에 그 기원이 있다는 것이며, 용에게는 아홉 아들이 있다는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에 따르면 아홉 아들은 각각 그 이름을 비희(贔屭), 이문(螭吻), 포뢰(浦牢), 폐안(狴犴), 도철(饕餮), 공하(蚣蝦), 애자(睚眦), 산예(狻猊), 초도(椒圖)라고 하는데 그중 여덟째 산예(狻猊)는 모습이 사자를 닮았으며 이름부터가 ‘사자산(狻)’에 ‘사자 예(猊)’이다.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사자가 바로 이 산예라고 하며, 앉는 것을 좋아하고 등에 태우는 것도 좋아하여 절의 석탑이나 불화를 보면 석탑이나 부처, 보살을 태우고 있는 산예를 볼 수 있다. 특히 불상의 대좌에 새겨지는 경우에는 금예(金猊)라고 부른다.  

 

향로 등 문화재 중에서 사자 모습을 한 경우가 오히려 이 여덟째 산예인 경우가 많은데 그 비밀은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쌍사자 석탑이나 사사자 석탑 등에 조각된 모습을 사자가 아니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다만 관련된 이야기 중에 재미있는 것들이 있어 잠깐 소개해 보았다.  

 

사천왕 석등

▲대웅보전 앞의 사천왕 석등, 보물 제15호.

 

위 문화재청 설명 중에서 같은 법주사 경내에 있어 신라 시대의 석탑을 대표한다는 사천왕 석탑은 보물 제15호이다. 석등의 기본형으로 하대석과 기둥 돌, 상대석, 화사석, 지붕돌이 모두 팔각을 이룬 팔각석등의 대표작이다. 화사석의 여덟 면은 네 곳에 화창이 뚫려있고, 네 곳에는 사천왕이 새겨져 있어 사천왕 석등이라 부른다.  

 

지붕 위 보주는 잃어버려 새로 만든 것이며, 지금은 대웅보전 앞에 있으나 원래는 용화보전 앞에 있어 석등 앞에는 향로를 머리에 인 희견보살상이, 뒤에는 석연지가 있어 최상의 공양인 향과 등, 차를 용화보전에 계신 미륵불에게 올린다는 표현이었다고 한다.

 

[6] 국보 제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문화재청 자료

공식명칭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한자명칭 :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지정일 : 1962.12.20
테마 : 유적건조물, 종교신앙, 불교,
시대 : 통일신라시대
주소 :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가금면) 탑평리 11

 

문화재청 설명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평리 칠층석탑 전경. 높다란 단 위에 자리 잡아 더 높아 보인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섬약해져 있어 당시의 경향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탑(中央塔)

▲탑이 워낙 높고 크다보니 기단부부터 여러 개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지붕돌도 5층까지는 여러 개로 짜맞추었다. 몸돌도 6, 7층만 단일석재이며 나머지 층 몸돌은 모두 여러장의 판석을 세우는 방식으로 맞추었다.

 

"탑평리 칠층석탑?"

막상 충주에 가서 물어보면 잘 모른다. 중앙탑이 어디냐고 물어야 금방 알아듣고 알려준다. 심지어 2014. 2. 1일부로 기존의 가금면을 중앙탑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만큼 중앙탑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는 얘기다.  

 

중앙탑이라 부르는 연유는 이곳이 이 나라의 중앙이라는 것이다. 옛날 통일신라 때 남쪽 끝과 북쪽 끝에서 한날 한시에 출발한 두 사람이 이곳에서 딱 마주쳤으니 다시 해 보아도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이 나라의 중앙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커다란 탑을 세웠고 그랬으니 그 이름이 중앙탑이다. 남한강변에 자리 잡고 있는 중앙탑 주변은 수변공원으로 잘꾸며놓았으며 '중앙탑공원'이라고 부른다.

 

▲기단부는 여러 장의 넓고 긴 돌로 바닥에 지대석을 깔고 그 위에 2층의 기단을 쌓았는데 1층은 낮고 2층은 몸돌만큼 크고 높다.1층과 2층 기단의 면석에는 여러개의 기둥을 새겨넣었다. 높은 탑신을 지탱하기에 충분한 크기로 보인다. 남쪽으로 연꽃무늬 석재가 하나 놓여있는데 탑 앞에 세워졌던 석등의 하대석인듯하다.

 

탑평리 칠층석탑은 높다란 단위에 올라앉아 그 크기가 더 크고 높아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석탑 가운데 유일한 칠층석탑이며 높이도 14.5m로 가장 높다. 건립 시기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으나 대체로 8세기 후반 ~ 9세기 초로 파악되고 있으며, 10여 개의 크고 긴 돌로 지대석을 마련하고 2층기단을 쌓아 올렸다. 탑 높이에 비하여 너비가 좁아서 가늘게 치솟은 상승감이 안정감보다 두드러지는 탑이다.  

 

1917년 해체 복원시 6층 몸돌에서 훼손된 고서류 일부와 동경(銅鏡 : 구리거울) 2점, 목제칠합과 은제사리함이 나왔고 기단부에서는 청동함이 발견되었는데, 구리거울은 고려 때의 것으로 이때에도 보수, 복원이 있었던 듯 하다. 여러 차례 해체, 복원 등으로 원형과 달라진 부분이 많을것으로 보인다.

 

▲7층탑 위에는 2개의 노반이 이중으로 얹혔으며, 그 위로 복발과 앙화를 올렸는데 이중 노반은 보기 드문 형식이다. 상륜부도 제법 화려했겠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칠층석탑 주변은 옛 절터였으나 그동안 여러 차례의 큰물이 휩쓸고 지나가 변변한 유물이 남아 있지 않다. 그때만 해도 남한강을 오르내리는 배들이 이 석탑을 등대 삼아 이정표 삼아 오갔다고 한다.

 

[7] 국보 제7호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문화재청 자료

공식명칭 :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한자명칭 : 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
지정일 : 1962.12.20
테마 : 기록유산, 서각류, 금석각류,  
시대 : 고려시대
주소 :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대홍3 77-48 (대홍리)

 

문화재청 설명 봉선홍경사는 고려 현종 12년(1021)에 창건된 절이다. 절이름 앞의 ‘봉선(奉先)’은 불교의 교리를 전하고자 절을 짓기 시작한 고려 안종(安宗)이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자, 아들인 현종(顯宗)이 절을 완성한 후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현재 절터에는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은 이 갈비(碣碑)만이 남아 있다.

 

▲평택을 지나 천안으로 내려가는 1번 국도변에 국보 제7호가 있다. 보호비각을 세워 놓았다.

 

▲갈기비 모습. 거북이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려 보는 모습이 매우 역동적이다. 실제로 앞에 서면 포스가 느껴진다.

 

갈비는 일반적인 석비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하는데, 대개는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의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다.하지만 이 비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석비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 거북모습의 받침돌은 양식상의 변화로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었고, 물고기의 지느러미 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새겨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비몸돌 앞면 윗쪽에는 ‘봉선홍경사갈기’라는 비의 제목이 가로로 새겨져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을 새겼는데 그 모양이 자못 도식적이다. 이 비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절을 세운 지 5년이 지난 고려 현종 17년(102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문은 ‘해동공자’로 불리던 고려시대 최고의 유학자 최충이 짓고, 백현례가 글씨를 썼다. 弘慶寺(홍경사)

 

▲물고기 지느러미 같은 갈기를 조각하여 漁龍(어룡)을 표현한 듯하다. 현존하는 사적비 중 특이한 모양이다.

 

▲시선을 마주치면 조금 무섭다.

 

(碑에 적힌바에 따르면) 이곳 성환 일대는 삼남으로부터 한양이나 고려 때 서울인 개경까지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하는 교통상 매우 중요한 곳이면서도 부근에는 마을도 주막도 없었으며 갈대가 우거지고 강도들이 출몰하여 사람의 통행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고려 顯宗(현종)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여덟째 아들로 왕위에는 오르지 못하였다가 추후 安宗(안종)으로 추대되었는데 왕자의 신분으로 불법을 독실히 받들면서 대중들을 위하 불사를 펼치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아들 顯宗(현종)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이곳에 큰 절을 지어 불법을 널리 펼치도록 하였으며, 또한 여관을 함께 세워 여행자들의 편의를 제공토록 하였다.

 

▲왼쪽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꺾은 목덜미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거북 등 위에는 커다란 연꽃이 비신을 받치고 또한 거북 등을 덮어 감싸고 있다.

 

절이름을 奉先弘慶寺(봉선홍경사)라 함은 奉先(봉선 : 선친의 뜻을 받들어) 지은 弘慶寺(홍경사)라는 뜻이다. 지금 절은 남아있지 않고 절을 지은 내력을 적어놓은 碑(비)만 남아 있다. 碣記碑(갈기비) 碣(갈)이라 하면 비석의 끝이 네모지지 않고 둥근 것을 말하며 네모난 것은 그냥 碑(비)라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모양에 따라 구분하여 부르지 않게 되었으며 더구나 이 비는 둥글지도 않은데 碣(갈)이라고 하니 이상하다. 아마도 전액에 '奉先弘慶寺碣記(봉선홍경사갈기)'라고 새겨있어 그냥 [奉先弘慶寺碣記碑(봉선홍경사 갈기비]라고 부르는듯 하다. 그러니까 奉先弘慶寺碣記(봉선홍경사갈기)라고 쓰여 진 碑(비)라고 해석하면 될 듯하다.

 

▲거북 꼬리도 두 번을 꺾어 애교스럽게 처리하였다.

 

이런 비석이나 돌에 새겨진 글씨들을 모두 읽거나 이해하기가 어려워 늘 아쉬웠는데 이곳에는 그 해석을 적어놓은 동판이 있어 도움이 된다. 참고로 적어본다.

 

奉先弘慶寺碣(봉선홍경사갈)

이곳은 稷山顯(직산현) 成歡驛(성환역)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이다. 처음 이 부근에는 마을도 주막도 없었으며 갈대가 우거지고 강도들이 출몰하여 교통상 중요한 지점이면서도 사람의 통행이 매우 어려웠다. 고려 顯宗(현종)이 左右兩街都僧統(좌우양가도승통) '逈兢(형긍)'을 불러서 '나의 아버지인 安宗(안종)께서 왕자의 신분으로 불법을 독실히 받들었으며, 대중을 위한 사업을 성취하려 하시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는 그 뜻을 받들어 이곳에 사찰을 지어서 한편으로 여행자의 고통을 제거하고 또 한편으로 불법을 선양하고자 하는 바이니 대사는 내 뜻을 이루어 달라'라고 하셨다. 형긍은 명을 받고 곧 大師(대사) 得聰(득총) 大德(대덕) 藏林(장림)과 함께 금품을 모집하여 공사를 시작하였고 임금은 다시 병부상서지중추원사 강민첨과 중추부사 김맹등을 別監使(별감사)에 임명하여 함께 일을 보게 하였다.

 

▲碑는 높이 2.8m로 매우 크며 당대의 유학자 최충이 짓고 백현례가 썼다.

 

▲碑의 옆면은 당초무늬를 조각하여 섬세하다. 비 머리인 이수는 네모진 모습이다.

 

관가의 물자를 소비하지도 않았고 농민들의 바쁜 일손을 빼앗은 일도 없이 이 모든 역군들이 힘과 정성을 다하여 현종 7년(1016) 가을에 시작하여 현종 12년(1021)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법당의 본 건물과 행랑대문 등 모두 200여간에 달하여 불상과 여러 보살의 탱화鍾(종)과 磬(경)을 비롯한 모든 기구가 완비되었다.

 

나라에서는 절 이름을 奉先弘慶寺(봉선홍경사)라고 내려주셨다. 또 절 서쪽에다가 여관 한 채를 세웠는데 크기가 80간이다. 이것은 명칭을 廣緣通化院(광연통화원)이라 하였다. 겨울에 사용할 온돌방과 여름에 거처할 마루방을 갖추었고 여기에 식량 마초 등이 충분히 비축되어 일반여행자들의 편의를 제공할 뿐 아니라 의지할 곳이 없는 무리들에게 도중의 휴식처가 되게 하였다.

 

▲비신의 첫머리에는 奉先弘慶寺碣記(봉선홍경사갈기)라고 쓰여 있다.

 

이는 安宗(안종)대왕께서 생존 시의 염원을 실현시킨 것이며 금상폐하의 자비로우신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다. 문신 인나에게 이 사실을 기록하라 하시므로 이상과 같이 그 시말을 적어 역사의 자료에 이바지하려 한다. 원비 고려 현종 18년 글 翰林學士(한림학사) 內士舍人(내사사인) 崔沖(최충) 글씨 國子丞(국자승) 白玄禮(백현례) 1981년 10월 임창순 역술 남계 조중국 쓰다.

 

[8] 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문화재청 자료

공식 명칭: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한자 명칭 : 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지정일 : 1962.12.20 - 테마: 기록유산, 서각류, 금석각류,
시대 : 통일신라 시대 
주소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4

 

문화재청 설명

성주사 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년(821)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어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성주사터 전경. 앞쪽으로 5층 탑과 석등, 뒤쪽으로 3층 석탑 세 개가 나란히 서 있으며 왼편 뒤쪽 보호각이 탑비이다.

 

얼굴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 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기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 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 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본다.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 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 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는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이다. 사산비명(四山碑銘)이란 '네 군데 산(山)에 남긴 비석의 글'이라는 뜻인데 신라말 최치원이 남긴 네 곳의 비명(碑銘)을 말한다.

 

▲낭혜화상 탑비는 노천에 있었으나 얼마 전 이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세웠다.

 

통일신라 말기 대문장가 최치원(857~?)은 뛰어난 문장을 많이 남겼는데 그가 남긴 비문 중에서 `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聖住寺郎慧和尙白月光塔碑(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雙磎寺 眞鑑禪師大空塔碑(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大崇福寺碑(대숭복사비)`를 일컬어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부르는데 '사산비명'은 최치원이 당대 고승의 행적이나 신라왕가의 능원(陵園)과 사찰에 관해 기록한 것이다.

 

사산비명은 그 시기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앞설 뿐 아니라 다른 전적에서 볼 수 없는 역사 사실이 많아 한국학 연구의 필수적인 금석문이다. 4개의 비문 모두 사륙변려문(중국 육조 시대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한문 문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반 탐방객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아 예로부터 많은 해설서가 나와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은 다음과 같으며 현재 비석이 남아있지 않은 경주 초월산 대수복사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국보이다.

 

보령 만수산 성주사 낭혜화상비(국보 제8호), 하동 지리산 쌍계사 진감국사비(국보 제47호),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비(국립경주박물관, 실물은 파손, 문장만 전함). 문경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비(국보 제315호).

 

최치원의 사산비명은 네 곳 모두 별도의 답사기를 통해 이미 소개한 바 있으나 국보순례에 포함하여 한 번 더 소개하기로 한다.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국보 제8호

충남 보령에는 신라하대 구산선문의 한 중심지였던 성주산문의 성주사 옛터가 남아 있는데 이 황량한 폐사지에 승탑은 없이 탑비만이 보호비각 안에 서 있으니 이것이 바로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하나인 낭혜화상(郎慧和尙)부도비이다.

 

▲보호각이 없이 노천에 세워진 상태의 탑비. /문화재청 사진

 

성주사 터는 최근 어느 정도 정리되고 울타리도 쌓아 나름대로 차분해 보이지만 관리인도 안 보이고 입장료도 받지 않는 넓고 평평한 옛터에 5층 석탑과 석등 하나, 나란히 선 3층 석탑 세개, 그리고 금당이 들어선 흔적이 있을뿐,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저 황량해보이는데 이래뵈도 전성기 때는 불전이 50칸, 행랑이 800칸, 고사(庫舍)가 50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의 전각과 탑, 불상들이 모두 재현된다고 하여도 저 뒤쪽 한켠에 서 있는 보호비각 안의 탑비 하나만은 못할 터이니 바로 국보 제8호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 郎慧和尙 白月葆光塔碑) 때문일 것이다.

 

낭혜화상(郎慧和尙, 801~888년)

신라 후기의 승려. 속성은 김씨(金氏), 호는 무량(無量), 또는 무주(無住)이고, 법명이 무염(無染)이며 태종무열왕의 8대손이다.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으로 불렸다. 12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서 출가하였으며 그 뒤 부석사의 석징(釋澄)을 찾아가 '화엄경'을 공부하였고, 821년(헌덕 13)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보통 승탑(부도)과 탑비(부도비)가 한 쌍으로 세워져야 하나 아쉽게도 탑비만 홀로 서 있고 승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 당나라에서는 이미 화엄학보다 선종(禪宗)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그도 선 수행에 몰두하였으며,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하여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렸다. 45년(문성왕 7년), 25년 만에 귀국하여 보령 성주사(聖住寺)를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삼아 40여 년 동안 주석하였다.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도를 구하므로 그들을 피하여 상주(尙州) 심묘사(深妙寺)에서 지내기도 하였으며 888년 89세로 입적하였다.

 

열반한 지 2년 뒤에 부도와 비를 세웠으니 진성여왕 4년인 890년이다. 진성여왕은 당대의 명문장가인 최치원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도록 하였으며 시호를 大郎慧(대낭혜), 사리탑을 白月葆光(백월보광)이라 하사하였다.

 

최치원이 지은 비문은 5천여 자에 이르는데 사촌 동생 최인곤이 글을 썼고, 이 지방 특산물인 높이 2.63m의 남포 오석의 비신에 또박또박 새긴 글씨는 누구의 솜씨인지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아쉽다. 이 비는 통일신라 탑비 중에서 가장 크고,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에서도 가장 당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보령 성주사(聖住寺)

성주사는 본래 백제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절로 그때 이름은 오합사(烏合寺)라고 했다. 오합사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도 언급되었고 또 발굴조사 때 나온 기왓조각에 오합사 글자가 있어 확실하다.

 

▲보호각 주변에는 승탑의 일부로 보이는 좌대 등 석재들이 흩어져 있지만 정작 제 짝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오합사가 백제가 멸망한 후에 어찌 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위세가 약해지고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다가 어느 지방호족이 또한 어느 고승을 만나 크게 중창하면서 되살아 난 것이라면 이곳 보령지역의 호족 김양과 낭혜화상 무염 국사에 의하여 중창되었을 것이며 무염국사를 성인(聖人)으로 보고 성인이 주석한 절이니 성주사(聖住寺)라 이름 붙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임진왜란 때 모조리 불타버리고 오늘날 폐사지만 남아있다.

 

9천여 평에 달하는 넓고 평평한 성주사 터에는 금당 터 앞에 5층 석탑과 석등이 남아있고, 그 뒤쪽으로는 3개의 삼층석탑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어 그동안 3탑을 세운 절집이 없었으나 어떤 형태 어떤 의미인지 설명이 쉽지 않다.

 

▲보호각 안의 탑비 모습. 하필 관람객 눈높이에 굵직한 보호각 가로막대를 질러놓았다. 참 무감각하다.

 

▲탑비의 귀부. 바라볼 때 오른쪽의 머리와 몸 일부가 아쉽게도 파손되었다.

 

▲왼쪽에서 보는 귀부의 머리부분은 다소 괜찮아 보인다. 비석을 꽂는 거북 등위의 좌대(碑坐 : 비좌)는 뭉글뭉글 구름 모양으로 떠받치고 아랫부분에는 안상과 꽃무늬를 새겨 화려하다.

 

▲뒤에서 보니 등판에는 겹 육각형 무늬가 뚜렷하고 등줄기를 타고 긴 띠를 두른 끝에 꼬리가 한번 흔든 모습으로 보인다.

 

▲오석에 새긴 글씨가 5천 자가 넘는다는 비신. 기계로 한 듯 또박또박 정확하게 새겼다.

 

▲이수에는 제목을 써넣는 제액(題額)부분이 평평하게 남겨져 있고 그 주위로 구름과 용이 뒤엉켜 있다.

 

이러한 부도비나 각종 비석을 둘러볼 때마다 금석문에 관한 지식이 모자람이 안타깝다. 비석에 쓰인 상태로 한자를 읽고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대부분이 그렇지 못한 현실이므로 가능하다면 한자 원본과 해석본을 비치해서 볼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또한, 관련된 서적을 폭넓게 읽어서 사전에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도 탐방객들의 도리라고 본다. 아직 더 견문을 넓히고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탑비에서 바라본 성주사 터. 뒤에는 3층 석탑 세 개가 나란히, 그 앞에는 금당 터, 맨 앞에는 5층 석탑과 석등이 보인다.

 

▲왼쪽 석탑은 보물 제47호, 중앙은 보물 제20호, 오른쪽은 충남유형문화재 제26호이다. 왜 이렇게 다른지는 알 수 없다.

 

▲1층 몸돌에는 자물쇠 모양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어 사리를 보관하고 굳게 잠궜다는 표현인듯하다.

 

▲삼층석탑 앞에는 금당터가 축대 위로 솟아 있고, 그 가운데에는 꽤 큰 규모의 불상좌대가 보인다. 애초 뒤쪽의 3층석탑 세개는 제자리가 아닌듯하다니 앞쪽의 5층탑과 함께 일탑일금당 형식인듯 하다. 소문에는 거대한 철불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사람들이 가져갔다고 한다.

 

▲금당에 오르는 계단. 좌·우측의 돌사자 상은 1986년에 도난당하여 새롭게 깎아 세웠다고 한다.

 

▲통일신라 시대의 5층 석탑. 보물 제19호이다. 그 앞의 석등까지 제대로 갖추었다.

 

▲삼층석탑 오른쪽 뒤편의 민불 하나. 여러 곳이 없어지고 파손된 후 어색하게 보수한 석불 입상이다.

 

비문(碑文)이라 하지 않고 비명(碑銘)이라고 하는 이유

옛 비문을 銘(명)이라고 하면, 비문 끝에 그분의 삶을 기리는 시구를 附記(부기)하는 것인데, 글쓴이가 銘(명)을 썼으면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고, 없으면 그저 부탁에 의한 것이라고 하니 碑文(비문)과 碑銘(비명)의 차이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9] 국보 제 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문화재청 자료

공식명칭: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한자 명칭: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지정일: 1962.12.20
테마: 유적건조물, 종교 신앙, 불교,
시대: 백제시대
주소: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문화재청 설명

백제 시대의 석탑이다.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6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나, 이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정림사 이름이 들어간 고려 시대 기와가 출토됨에 따라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린다. 좁고 낮은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상륜부는 복발을 제외하고는 모두 없어졌다. 높이 8.33m. 탑의 모서리에 세운 배흘림기둥이나 넓은 지붕돌, 들려진 처마선 등은 목조건축의 구조를 모방한 것으로 익산사지 미륵 석탑과 함께 백제 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림사지 전경. 중문을 들어서서 탑까지 가는 중간에 연못을 파고 다리를 놓아 건너가게 하였다. 5층 탑 뒤에는 금당 터가 자리만 남아있고 그 뒤편 건물은 강당 자리인데 현재 석불좌상 보호각 노릇을 하고 있다.

 

전체가 장중하고 세련된 조형미를 갖춘 이 탑을 모방한 백제식 형식의 탑들이 많이 세워졌다. 이 탑은 목조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석탑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층 몸돌(옥신석)에는 백제를 멸한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을 새겨 넣어,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되고 있다.

 

정림사지(定林寺址) 사적 제301호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대표적인 절터이다. 1942년 발굴조사 때 강당 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 선이 남북으로 일직선 상에 놓이고, 건물을 회랑으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났던 중문 앞의 연못을 되살렸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 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 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 제9호

▲백제 석탑의 완성된 형태로 칭송받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백제 시대의 탑으로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이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다. 그중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은 동, 서탑 중 서탑만 남아있는데 이마저 반쪽은 무너져 시멘트로 채운 무리한 보수를 오랫동안 방치하다가 최근 해체, 보수 후 조립 중에 있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유일한 탑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다. 언젠가 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답사했을 때 어느 지인이 느낌을 물었을 때 내 대답은 유구무언이었다. 무어라 보태고 뺄 말없이 있는 그대로가 걸작이었다. 국보였다. 완벽이었다.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석재를 택했다. 석탑을 표현함에 있어 목조탑을 재현하기에 그쳤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석재의 가공적 용이함을 위해 규모를 축소하고 세부형식을 간략화하였고, 정림사지 석탑이 축조되었다.

 

세부 구성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 석탑에 비하여 정림사지 석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된 완숙미를 보여준다. 목탑적인 기법을 보이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한 석탑양식의 시원(始原)이다.

 

정림사의 창건연대는 사비 천도 이후부터 백제 멸망 전까지인 538~660년에 석탑으로 건립되었는지, 혹은 목탑 이후에 석탑이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탑의 양식으로 보아 미륵사지 석탑에서 진일보한 석탑으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미륵사지 석탑보다는 다소 늦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비례.

 

탑은 낮은 단층기단으로 1층 지붕돌보다 좁고, 각층의 탑신은 우주와 탱주를 세웠는데 1층 탑신의 네 귀퉁이에 세운 우주는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배흘림(엔타시스) 기법으로 세워 목조건축물 느낌을 살렸으며, 각층의 지붕돌은 얇고 넓은데 처마를 살짝 들어 올림으로써 아름다운 지붕을 구현하였고 지붕 받침돌은 사각형의 석재를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서 간략한 공포를 구현하였다.

 

전체 높이는 약 8.3m로 1층 몸돌은 크게 솟았으나 2층부터는 몸돌의 높이를 크게 줄여서 안정감 있는 체감률을 나타내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그다지 크다는 느낌이 없으나 가까이 다가가면 제법 큰 탑임을 알게 되지만 넓은 지붕돌이 경쾌해 보여 목조 건물을 보는듯한 부드러움과 함께 석탑의 장중함이 무거운 위엄을 느끼게 해주는 완벽한 탑이다. 탑과 탑을 둘러싼 건물들의 배치와 구성은 매우 정교한 수치에 의하여 구성되었다. 탑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수리적 원리가 작용한 때문이다. 탑의 건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대석의 크기이다. 지대석의 크기에 의하여 모든 탑은 높이와 너비가 결정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지대석의 넓이가 14척(그 당시에 주로 사용하던 단위 '고려척')이며, 그 절반인 7척이 이 탑의 건립 기본단위가 되었다.

 

▲1층 탑신 한쪽에 새겨진 글씨, 희미해져서 식별이 어렵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1층 탑신부 한쪽 면에는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쓴 것이다. 그런데 한동안 이 글씨 때문에 이 탑을 소정방이 세운 탑이라고 잘못 알기도 하였다.  

 

석불좌상(보물 제108호)

정림사지는 금당은 미복원상태이며, 그 뒤편 강당 자리에 1993년 건물을 지어 석불좌상을 실내에 안치하여 보호하고 있다. 즉, 백제 시대 때부터 이곳에 절이 있었으나 그때 이름도 정림사였는지는 알 수 없으며, 고려 시대에는 같은 자리에 절을 다시 지으면서 강당 자리에 금당을 세우고 이 석불좌상을 주불로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석불은 오른쪽 팔과 왼쪽 무릎 등이 마멸되어 겨우 형체만 남아 있다. 불상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 안에 모셔진 석불좌상.

 

머리와 갓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 얹은 것이다. 불상에 비해 팔각 대좌는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데, 세련되면서도 균형 있는 조각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상대는 연꽃이 활짝 핀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중대는 커다란 눈 모양이 새겨져 있으며, 하대는 8개의 연꽃이 엎어진 모습과 안 상을 세련된 솜씨로 새겨놓고 있다. 절터에서 나온 명문 기와로 보아 1025년 절을 중창할 때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정림사 건물들과 오층석탑을 재현해놓은 모형으로 당시를 상상해볼 수 있다.

 

충청도 지방을 답사하다 보면 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닮은 탑을 많이 보게 된다. 대부분이 이 탑을 모방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정림사지 석탑은 이 지역 석탑들의 표본이자 모범이었다. 백제를 대표하는 탑이었다.

 

 [10] 국보 제10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문화재청 자료

공식명칭: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한자 명칭 : 南原 實相寺 百丈庵 三層石塔)
지정일:1962.12.20
테마: 유적건조물, 종교신앙, 불교,
시대: 통일신라 시대
주소: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5

 

문화재청 설명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이다. 낮은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 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 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기단과 탑신괴임에는 난간 모양을 새겨 멋을 내었고,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菩薩像)과 신장상(神將像)을,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을, 3층에는 천인좌상(天人坐像)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만은 삼존상(三尊像)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 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갖가지 모습들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조가 돋보이고 있어, 당시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신라 석탑 중 가장 장식이 많은 탑이다. 9세기 이후 화려하게 장식된 탑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 탑은 장식 탑의 절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실상사(實相寺)

▲실상사에서 산내면을 지나 인월면으로 가다보면 백장휴게소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 산길로 1Km 쯤 올라가면 백장암이다.

 

민족의 영산 지리산 북쪽 들판에 자리하고 있는 천 년 고찰 실상사는 선(禪)의 가르침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곳이다. 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증각대사(洪陟證覺大師)가 당나라에 유학하며 마조도일선사의 제자인 서당지장선사의 선맥을 이어받고 돌아와 구산선문 중 처음으로 실상선문을 열었고, 2대조 수철 화상이 법맥을 이어서 고려까지 선종의 근본 도량으로 자리를 잡아왔다. 신라 구산선문 중 가장 먼저 문을 연 사찰이라는 점이 눈에 띄며 부속암자들을 포함하여 국보 1점, 보물 11점 등 단일사찰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백장암(百丈庵)

실상사에 딸린 소박한 암자로, 백장이라는 이름은 백장선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백장암의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나 원래 명칭은 백장사였다고 한다. 백장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실상사 터에 몇 칸의 작은 건물을 지어 백장암이라 했는데, 이후 또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고종 때 운월대사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상하 교행이 불안한 산길을 올라 간신히 주차하고 들어서니 백장암이 한눈에 보인다. 대웅전 앞에 석등과 석탑, 몇개의 부도가 보이고 산신각과 요사채가 전부인 아담한 절집이다.

 

백장암에는 백장암삼층석탑(국보 10호)을 비롯하여 백장암석등(보물 제40호)과 청동은입사향로(보물 제420호) 등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있다. 실상사에서 인월방향으로 국도를 따라 3Km 가다보면 백장휴게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우측 산도로를 따라 1Km를 올라간다. 현재는 백장선원이 개설되어 10여명의 스님들이 참선 수행에 정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예전에는 석등과 석탑, 부도가 얕은 담으로 둘러져 있었고 지금의 건물은 없었던듯하다. 당시의 문화재청 사진.

 

▲국보 10호, 백장암 삼층석탑. 한눈에도 많은 조각과 장식이 되어있고 상륜부가 온전하게 남아있음을 알수 있다. 좌우 모습.

 

우리가 흔히 보는 석탑의 경우 그 대부분이 상륜부가 온전한 모습이 아니다. 화강암등으로 견고하게 조각되고 얹혀진 몸돌이나 지붕돌에 비하여 상륜부는 그 중심에 철심(찰주)을 박은후 아래부터 위로 여러개의 다양한 장식물을 화려하게 붙이곤 하였는데 세월속에 떨어져나가거나 망실되어 제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심지어 다 없어지고 철심만 남은 경우를 보곤 탑에도 피뢰침을 세웠다고 하는 웃지못할 경우도 있다. 또한 각 층의 지붕돌에도 귀마다 장식을 매달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없어지고 처마 끝에 뚫린 구멍만 남아 있다.

 

▲석탑의 온전한 모습과 명칭, 백장암과 실상사 석탑이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복원시 참고하는 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국보 제10호, 백장암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석탑양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조성한 이형탑(異形塔)이다. 바닥에 놓인 지대석위에 기단없이 몸돌받침을 얹고 바로 1층 몸돌이 놓였으며, 각 층마다 매우 섬세한 조각들이 화려하고 복잡하게 새겨져있어 일반적인 석탑에서는 볼수없는 모습이며 석질(石質)도 보통의 화강암과는 다른 느낌이다.

 

▲2층과 3층은 1층에 비하여 너비가 줄지않은채 비슷하게 올려졌으며 몸돌 높이는 1층보다는 줄였지만 2, 3층높이는 비슷하다.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이 2구씩, 3층에는 천인좌상(天人坐像)을 하나씩 새겼다. 2층 지붕돌 밑면에는 1층과 같이 연꽃무늬를 새긴 받침돌인데 3층만은 받침돌 없이 지붕돌 하단에 경사를 살려 삼존상(三尊像)이 새겨져 있는데 식별이 어렵다. 부분적으로 조금씩 깨지거나 부식되어 보여 안타깝다.

 

▲지대석위에 얹은 몸돌받침에는 난간을 조각하였다. 2, 3층에도 몸돌 아랫부분에는 난간을 둘렀다. 참 특이한 모습이다. 1층 몸돌에는 대부분 석탑에 새기던 우주와 탱주는 없고 정면에는 門 형태를 중앙에 두고 좌우로 인물상을 새겼으며 나머지 삼면에는 돌아가면서 보살상(菩薩像)과 신장상(神將像) 등을 돋음새김하였다. 지붕돌 받침석은 앙련을 새긴 듬직한 모습이며 그위에 얹힌 지붕돌은 경쾌한 들림은 없지만 안전하고 묵직한 모습이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 보개, 보륜, 수연 등이 가지런히 꽂혀있다. 신라 석탑 중 가장 장식이 많은 탑으로 장식 탑의 절정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말해주듯 새로이 탑을 세우거나 옛 탑을 복원하고자 할 때 이 탑을 많이 참고 한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곳 백장암에는 보물 제40호 석등과 제420호 청동 은입사 향로가 있다고 하는데 석등은 석탑 앞에 서 있어 살펴볼 수 있었지만, 향로는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일설에는 실상사에 있다거나, 어디 박물관에 있다고도 한다. 그리고 탑 앞에는 몇 기의 조선 시대 부도군이 횡으로 늘어서 있었다.

 

▲대웅전 앞에 선 석탑과 그 사이의 석등, 그리고 앞쪽에 횡으로 선 부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