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박정훈 칼럼(조선일보) 2021/ 01.15 나라 안에선 제왕, 밖에 나가면 왕따 - 12.17 吳 시장은 왜 세운상가에 올라 ‘분노의 눈물’ 흘렸나

상림은내고향 2022. 1. 3. 14:15

박정훈 칼럼  조선알보 논설실장  2021

01.15  나라 안에선 제왕, 밖에 나가면 왕따

제왕처럼 군림하며
밖을 보지 않는
운동권 정권의
자폐적 세계관이
대한민국 진로를
고립의 방향으로
역주행시키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 대응에서 최대 의문점은 백신 미스터리다. 모든 선진국, 동남아 국가들까지 백신 조기 확보에 성공했는데 왜 우리는 늦었을까. 세금 낭비를 두려워 않는 문정부가 백신 선구매엔 왜 그토록 인색했을까. 따져 묻는 야당 의원들에게 정세균 총리는 “(백신 확보한) 그 나라에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남의 나라 하는 게 뭐가 중요하냐”며 격하게 반응했다.

 

정 총리 말에 힌트가 담겨 있었다. 다른 나라 동향이 중요하지 않다니, 결국 이것 때문이었다. 문 정부는 바깥 돌아가는 상황에 눈감고 있었다. 백신 확보전이 다른 나라와의 ‘정부 간 경쟁' 임을 몰랐던 모양이다. 한정된 백신 물량을 선점하려면 남보다 빨리, 더 전략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미국·유럽이 총력전을 벌이고 이스라엘이 정보기관까지 동원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 정부만 손놓고 있었다. 늘 하던 습관대로 기업 팔을 비틀면 백신을 내줄 거라 착각했을지 모른다.

 

문 정권의 4년 국정은 ‘내강외약(內强外弱)’으로 요약될 만하다. 나라 안에선 제왕처럼 군림하면서, 바깥 세상과는 ‘왕따’처럼 따로 돌고 있다. 근로자 사망 때 사실상 과실이 없어도 CEO를 1년 이상 징역에 처한다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예다. 이 법을 강행한 정치권이 설명 못 하는 사실이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런 법이 없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영국에 비슷한 규정이 있다 하지만, 영국도 법인에만 벌금형을 때릴 뿐이다. 구체적인 과실 유무와 무관하게 경영자 개인을, 그것도 징역형의 하한선까지 못 박아 처벌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산업사(史)에 남을 세계 최초의 입법례가 탄생했다.

 

다른 나라는 왜 ‘중대재해법’을 만들지 않을까. 엄중 처벌만으로 산업재해가 예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은 산업 안전 형량이 충분히 높은 나라다. 안전·보건·환경 규정 미준수나 사고를 이유로 사업주를 처벌하는 법률이 63개, 벌칙 규정은 2555개에 달한다. 24세 비정규직 김용균 씨 사고를 계기로 산업안전법 처벌도 대폭 강화했다. 하지만 ‘김용균법’ 시행 후에도 안전사고는 줄지 않았다. 현장에서 제대로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센 처벌을 때리고 강력한 규정을 만들어도 일선 현장의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소용이 없다. 경영자를 감옥 보낸다고 해결될 일이었다면 그런 법은 이미 글로벌 표준이 돼있었을 것이다.

 

문 정부 국정은 전 세계와 따로 가는 ‘우리 식대로’가 특징이다. ‘소득 주도 성장’은 문 정부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초유의 실험이다. 만약 이것이 성공한다면 경제학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판이다. ‘마차가 말을 끄는’ 기적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규제만 퍼붓는 부동산 정책은 그 자체로도 세계적 화젯거리가 될 만하다. 공급 없이 집값 잡겠다는 정부는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뭐든지 돈으로 해결하려는 세금 만능주의, 관(官) 주도의 ‘큰 정부’ 노선, 민간 아닌 공공 위주 일자리 정책 등등이 모두 글로벌 트렌드와 역주행한다.

 

모든 정부가 자국 기업이 경쟁에 이기도록 돕는 정책을 편다. 문 정부는 거꾸로다. 처절한 생존 경쟁을 벌이는 기업들 뒤에서 정부가 태클을 걸고 있다. 문 정부는 ‘기업 규제 3법’으로 다른 나라엔 없거나 지나치게 과격한 경영권 공격 수단을 도입했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전 세계에서 가장 경직적이고 비탄력적인 구조로 설계했다. 정부가 앞장서 기업들을 외국 자본의 공격에 노출시키고, 저녁만 되면 연구소 불이 꺼지게 했다. 글로벌 경쟁에서 낙오시키려 작정이라도 한 듯하다.

 

국내 정치에 관한 한 문 정권은 탁월한 수완을 보여왔다.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권력기관을 사유화하고 대기업 군기를 잡고 선거에서 연전연승 했다. 그렇게 안에서 펄펄 나는 정권이 나라 밖에선 무능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이 정부가 저지른 일련의 외교 참사는 알려진 대로다. 한·미 동맹에 금이 가고 우방국 관계가 파탄 났다. 대북 전단법이 미 의회 청문회에 오르고, 북 인권 문제로 국제 수모를 당하고 있다. 미 국무장관이 일본까지 오면서 한국은 패싱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중국·북한 비위를 맞췄는데 대통령은 중국 가서 ‘혼밥’ 냉대를 당하고, 북한에서 “삶은 소대가리” 소리를 들었다. 국제회의가 열릴 때마다 각국 정상들 틈에서 외톨이로 겉도는 문 대통령 모습은 보기에도 안타까울 지경이다. 글로벌 흐름에서 고립돼가는 국정 운영을 상징하는 듯 하다.

 

운동권의 두뇌엔 ‘자폐 DNA’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중국에 문화혁명 피바람이 불어도, 소련이 붕괴해도 한사코 눈감던 이들이 정권 핵심부에 포진해있다. “남의 나라 하는 게 왜 중요하냐”는 말은 ‘우리 식대로’ 노선을 실토한 것에 다름 아니다. 밖을 보지 않는 운동권 정권의 자폐적 세계관이 국가 진로를 역주행시키고 대한민국을 고립으로 몰아넣고 있다.

 

02.05 ‘문재인 보유국’의 “죽을래” 주인들

5년 시한부 대리인이 대한민국의 진로를 영원히 바꾸려 한다
지금도 국정 어딘가에선 주인 행세하는 선출 권력의 “너 죽을래” 협박이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민주당 정권은 민주적이지 않다. 북한 원전 의혹에 저렇게 고압적일 수 있는 것도 이 정권의 골수에 박힌 ‘비(非)민주 DNA’ 때문이다. 남북 정상이 만난 며칠 뒤, 북한에 원전을 지어주는 보고서가 작성됐다. 탈원전에 토를 달면 “너 죽을래” 소리를 듣던 때였다. 그 서슬 퍼런 분위기에서 산업부 말단 간부가 자기 판단으로 탈원전에 역행하는 보고서를 썼다니 누가 믿겠나. 윗선이 개입됐다는 추론이 합리적이고, 의혹을 품는 게 당연하다. 그런 당연한 의문 제기를 향해 “구시대적 유물”이라 몰아붙이고 “책임지라”며 법적 대응 운운한다. 의심 갈 짓을 해놓고 이렇게 큰소리치는 정권은 보다 보다 처음이다.

 

 문재인 국정은 힘으로 찍어 누르는 스타일이다. 소통과 타협의 민주적 절차 대신 완력과 세몰이로 권력 의지를 관철하고 있다. 말 안 듣는 공직자를 내쫓고 저항하는 관료 집단을 난타해 제압했다. 검찰이 정권 비리를 수사하자 수사팀을 해체하고 총장의 손발을 잘라냈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감사원장에겐 정치 프레임을 덮어 고립시켰다. 급기야 법관 탄핵이라는 폭압적 카드까지 꺼내 들었다. 판사들을 향해 수틀리면 가만 안 놔둔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조폭식 협박과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 뻔하고도 당연한 질문에 대한 문정권의 ‘당연하지 않은’ 생각을 드러낸 것이 임종석 전 비서실장이었다. 감사원이 탈원전의 절차적 위법성을 감사하자 임종석은 “집 지키라 했더니 안방 차지하려 한다”고 일갈했다. 감사원을 향해 “주인 행세를 한다”고 몰아세웠다. 이게 뭔 소리인가. 감사원은 국가 정책의 잘잘못을 따지라고 국민이 위임해준 헌법 기관이다. 정책 결함을 감사하지 않으면 그것이 국민에 대한 배임이다. 이 당연한 책무를 수행하려는 감사원에게 “주인 행세 말라”고 한다. 자기들이 주인이라는 소리다. 감사원은 권력의 개인데, 왜 주인을 무냐는 것이다.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가 ‘민주적 통제론’이다. ‘선출된 권력’이 상위에 군림하면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제어해야 한다고 한다. 그 꼭대기엔 물론 문 대통령이 있다. 대통령 한마디에 국가 노선이 뒤집히고 국정 방향이 뒤틀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반핵 영화에 눈물 흘렸다는 문 대통령의 지시에 수십 년 쌓아 올린 원전 생태계가 무너졌다. 제대로 된 검토도, 토론도 없었다. 대통령의 한마디는 국가부채 비율 40%의 마지노선도 무너트렸다. 문 대통령이 “40%의 근거가 뭐냐”고 따져 묻자 혼비백산한 기재부가 재정 건전성의 댐을 열어젖혔다.

대통령의 대일 강경 발언에 죽창가를 불러대던 사람들이, 대통령의 정반대 발언이 나오자 갑자기 일본과 화해하자고 돌변한다. 무리한 최저임금 인상도, 세계에서 가장 경직적인 주 52시간제도, 세금 퍼붓는 가짜 일자리 정책도 대통령 지시가 출발점이었다.

 

대통령이 원하면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기도 한다. 문 대통령이 “(소득 주도 성장) 정책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언급하자 경제 부처들은 이를 뒷받침하려 사실 왜곡을 서슴지 않았다. 앞 정권 탓, 인구구조 탓, 날씨 탓으로 물타기 하며 통계 수치를 입맛대로 짜깁기했다. 집값이 급등하는데 뜬금없게도 문 대통령이 “부동산만큼은 자신 있다”고 했다. 그러자 국토부는 서울 집값 상승률이 3년간 11%에 불과하다느니 엉뚱한 수치를 들이대며 집값이 “안정세”라고 우겼다. 선출된 권력의 서슬 퍼런 호통 앞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관료 집단의 ‘영혼’마저 탈탈 털려버렸다.

 

 저항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경제부총리는 여당의 포퓰리즘에 8번 대들었지만 번번이 굴복했다. 여당이 “개혁 저항 세력”이라며 난타하자 매번 백기 들며 8전8패 했다. 고용 정책을 비판했던 경총 부회장은 청와대에서 “반성하라”는 질타를 받고 수사까지 받았다. 정권 비위를 거스르면 보복과 협박이 가해진다. 감사원의 탈원전 감사를 통해 이 정권이 대드는 공직자를 어떻게 군기 잡는지 약간의 실상이 드러났다. 산업부 원전 과장이 월성 1호기를 더 가동하겠다고 하자 청와대 지침을 받은 장관이 “너 죽을래”라고 윽박질렀다고 한다. 조폭 집단에서나 나올 소리다. 그러면서도 ‘민주적 통제’라고 한다.

 

 급기야 여당의 서울시장 후보가 “대한민국은 문재인 보유국”이라고 ‘용비어천가’를 불렀다. 아부도 이쯤 되면 조선 왕조 수준이지만 놀랄 일은 아니다. 이들에겐 선출된 권력이 나라의 주인이고, 그 정점은 문 대통령이니까.

 

국민으로선 선출 권력의 폭주에 공포심을 느낄 지경이 됐다. 곧 퇴임할 월급 사장이 마치 오너라도 되는 양 전횡하고 있다. 5년간 위임해준 시한부 대리인이 제 맘대로 국가 진로를 바꾸려 하고 있다. 지금도 국정 한구석 어딘가에선 주인 행세하는 선출 권력자들의 “죽을래” 협박이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02.26  한번도 경험 못한 ‘신체제 자본가’들이 출현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4세 승계는 없다고 공식 선언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재벌 총수들이 자본주의 구체제의 마지막 세대일 수 있다

'▲배달의민족'을 만든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대표

 

한국 자본주의사(史)에서 2021년은 기념비적 해[年]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전혀 새로운 유형의 자본가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카카오의 김범수, ‘배달의민족’의 김봉진 두 창업자가 재산 절반을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업으로 번 돈을 교육 불평등 같은 ‘사회문제’ 해결에 쓰겠다고 했다. 이는 곧 자녀에게 기업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각각 50대, 40대의 한창 나이다. 기업가로서 절정기에 부(富)의 세습을 끊고 사회 환원에 나선 것이다. 지금껏 한국에 이런 기업인은 없었다.

 

한국에서 기업의 역사는 곧 재벌의 역사였다. 총수로 통칭되는 대기업 오너들이 ‘확장 지상주의’와 ‘혈통 승계’라는 한국형 기업 문화를 확립시켰다. 자장면에서 미사일까지, 돈만 된다면 분야와 업종을 가리지 않는 것이 재벌의 법칙이었다. 그렇게 문어발 식으로 확장시킨 거대 기업군을 2세, 3세로 넘겨 확대 재생산을 거듭했다. 명(明)도, 암(暗)도, 재벌은 한국 경제 그 자체였다.

 

그리고 2021년, 김범수·김봉진으로 대표되는 신흥 기업가들이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을 제시했다. 편의상 이를 ’2021년 체제'라고 하자. 신체제의 키워드는 ‘네트워크’와 ‘사회 지향’이다. 신흥 자본가들은 대개 IT 사업가다. 디지털 플랫폼으로 대중과 개방적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부를 축적했다. 업종을 넘나드는 이(異)분야 확장은 이들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자신이 창업한 회사라도 영원히 자기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분신과도 같은 기업을 팔아 치우고 삶의 경로를 바꾸는 데 주저함이 없다. 유목민 같은 기업관이다.

 

신체제 자본가들은 세습의 성채를 쌓지 않는다. 성공한 스타트업 기업인치고 자식에게 물려줄 궁리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게 그 바닥 상식이다. 구체제 재벌가(家)에선 가업 상속을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잦았다. 신흥 자본가들에겐 상속이 관심거리가 아니다. 그러니 일감 몰아주기 같은 편법의 유혹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2021년 체제’의 자본가들은 ‘혈통’보다 ‘사회’를 중시한다. 김범수도, 김봉진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 영감 주는 것”이 꿈이라 했다. 두 사람뿐 아니다. 넥슨 창업주 김정주는 1000억원을 내놓아 전국에 아동 재활병원을 짓고 있다. ‘배틀 그라운드’ 게임을 히트시킨 크래프톤의 장병규는 100억원을 카이스트에 기부했다. 재벌 중심의 구체제에선 기업인의 자발적 기부가 드물었다. 설사 하더라도 은퇴 후거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때 수동적 헌납이 주류였다. 반면 신흥 자본가들은 선제적으로 돈을 쓴다. 김범수 말대로 “내가 태어나기 전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다.

 

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도덕적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신체제 자본가들은 사업을 통해 사회 친화적 기업관을 학습했다. 비즈니스 자체가 사회와 연결된 쌍방향 네트워크 모델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사업 성패는 플랫폼에 대중을 얼마나 참여시키느냐에 달려있다. 카카오는 4000만 가입자, 배달의민족은 월 1500만명 이용자 덕분에 돈을 번다. 자신의 성공이 ‘사회적 호응’ 덕분이란 사실을 신흥 자본가들은 잘 안다. 그래서 사회에 빚을 졌다는 부채 의식이 있다. 반면 구체제 자본가들은 네트워크 아닌 생산요소 투입으로 돈을 번다. 자본을 투자하고 공장 지어 제품 만들어 파는 일방향 사업 모델이다. 사회적 관계에 덜 민감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재벌 시스템이 무조건 악(惡)인 것은 아닐 것이다. 이건희와 정몽구의 강력한 오너십이 아니었다면 삼성과 현대차의 성공은 없었다. 한국이 ‘반도체 치킨게임’의 최종 승자가 된 것도 다른 계열사에서 번 돈으로 손실을 메워넣는 ‘문어발 경영’의 힘이었다. 지금도 제조업 분야에선 오너 주도의 재벌 시스템이 강점을 발휘하고 있다. 그 가치를 폄훼해선 안 된다.

 

그러나 시대 상황은 결코 재벌 체제에 우호적이지 않다. 산업 패러다임이 디지털 기반의 네트워크 경제로 옮아가고 있다. 대중과 소통이 서툴고, 사회 친화적이지 못한 구체제 자본가에게 불리한 장(場)이 펼쳐졌다. 능력과 무관하게 경영권을 물려받는 승계 경영은 3세, 4세로 갈수록 경쟁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건희·정몽구 같은 인물이 나올 확률이 줄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회적 환경이 절대 불리하다. 기업에 대한 감시가 깐깐해지고 윤리적 요구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재벌 체제가 금방 소멸하진 않겠지만 방향은 정해져 있다. 멀지 않은 시일에 신체제 자본가들이 재벌을 대체해 한국 자본주의의 주류를 차지할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막대한 상속세 부담 때문에 물려주고 싶어도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재벌 총수들이 구체제 자본가의 마지막 세대일 수 있다. ‘재벌의 종언'은 이미 시작됐는지 모른다.

 

03.19  문 정권이 불러낸 ‘지연된’ 시대정신

윤석열은 法的 정의
이재명은 분배 정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대중이 지지하는 것은
윤·이 개인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선점한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이다

모든 시대엔 시대를 관통하는 지배적 가치가 존재한다. 동시대인(人) 대다수의 염원이 투영된, 그리하여 한 시대를 견인해가는 보편적 정신 체계 말이다. 헤겔을 위시한 독일 관념 철학자들은 이를 ‘시대정신(Zeitgeist)’이라 이름 붙였다. 시대정신의 발현을 통해 역사가 진보한다. 그러나 정작 시대의 한복판에선 시대정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헤겔은 설파했다. 숲을 벗어나야 숲이 보이듯 “시대가 끝날 때 비로소 시대정신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지난 5일 차기 대선 후보 적합도 조사에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32.4%, 이재명 경기지사가 24.1%로 각각 1, 2위에 올랐다. /뉴시스

 

문재인 정권이 끝나가는 지금, 우리가 간절히 염원하는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뚜렷해졌다. 그것은 공정과 정의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기회의 공정함, 결과의 정의로움이다. 빅데이터 분석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 빅데이터 기업이 2019년 한 해 동안 온라인에서 언급된 정치 분야 키워드를 분석했더니 ‘공정’과 ‘정의’의 비율이 57%에 달했다. 2019년은 조국 사태가 불거진 해다. ‘흑석 선생’ 김의겸을 필두로 고위 공직자 부동산 의혹도 잇따랐다. 지난해엔 두 키워드 비율이 67%로 더 높아졌다. 검찰 해체, 윤미향 의혹, 집값 대란 등이 꼬리 물고 이어진 결과일 것이다. 대중 분노가 폭발하면서 공정과 정의는 사회적 관심을 태풍처럼 집어 삼키고 있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지배적 이슈가 됐다.

 

시대정신은 그 시대가 열광하는 사람을 통해 투영된다. 대권 양강 구도를 형성한 윤석열과 이재명에서 우리 시대가 원하는 시대정신의 얼개를 추론해낼 수 있다. 왜 두 사람에게 지지가 몰릴까. 윤석열은 법적 정의, 이재명은 분배 정의를 각각 상징하는 인물이다. 윤석열은 살아있는 권력 수사로 법치의 아이콘이 됐고, 이재명은 ‘기본 시리즈’로 평등의 가치를 선점했다. 리더십의 진짜 실체가 어떤지를 떠나 두 사람은 공정·정의의 대변자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사람들이 지지하는 것은 윤·이 개인이 아니라 그들로 표현되는 시대정신이다. 대중이 염원하는 시대적 가치에 두 사람이 올라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정과 정의를 시대정신으로 불러낸 장본인이 문 정권이다. 기가 막힌 역설이지만, 세상을 더 불공정하고 더 불평등하게 만듦으로써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했다. 문재인 국정 4년은 불공정의 에피소드로 가득 찬 세월이었다. ‘정의 담당’ 법무장관에 ‘아빠 찬스’의 조국, ‘엄마 찬스’의 추미애를 앉혀 정의의 가치를 웃음거리로 희화화했다. ‘위안부 장사’ 의혹의 윤미향, 부도덕한 기업인의 전형인 이상직에게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주고, 온갖 자리에 자기편을 갖다 앉혔다. 끊임없이 반칙과 특혜 논란이 불거져도 단지 우리 진영이란 이유만으로 비호했다. 반칙의 대명사가 된 조국을 ‘미안하다”며 감싸는 대통령을 보며 사람들은 공정의 가치마저 내로남불이 된 세상을 목격하게 됐다.

 

문 정권은 민주주의의 기본 중 기본인 법치(法治)를 진영 논리의 하위 개념으로 전락시켰다. 대통령의 30년 지기를 당선시키려 청와대가 총출동해 선거에 개입한 혐의가 드러났다. 대통령 지시를 받은 산업부가 원전 폐쇄를 위해 수치를 조작하고 말 안 듣는 공무원에게 “너 죽을래” 협박한 사실도 밝혀졌다. 일련의 권력 범죄에 대해 검찰이 칼을 대자 수사팀을 해체하고 검찰총장 수족을 잘라냈다. 그래도 검찰이 저항하자 아예 수사권을 떼어내 공수처와 경찰에 넘겨 버렸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언(法諺)은 말짱 헛소리가 됐다. 권력이 법 위에 군림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기회는 공정하지 못했고 결과는 더욱 불평등해졌다. 저소득층 일자리가 사라지고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지면서 빈부 격차가 사상 최악으로 벌어졌다. 유례없는 집값 급등은 청년과 서민층을 영원한 무주택자로 전락시켰다. 좋은 일자리의 희망도, 내 집 마련 꿈도 사라진 서민들은 빠져나올 기약 없는 빈곤의 감옥에 갇혀 절망하고 있다. 이 정권은 국민을 향해 “모두가 용이 될 필요는 없다”며 ‘가붕개(가재·붕어·개구리)’의 삶을 권유했다. 그래 놓고 정작 자기들은 반칙을 서슴지 않으며 특혜의 사다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상실된 공정과 무너진 정의에 대한 분노가 쌓이고 쌓여 폭발한 것이 LH 사태다.

 

지금 우리가 갈망하는 공정과 정의는 ‘지연된’ 시대정신이라 할 만하다. 5년 전 많은 국민을 광장에 나가게 한 시대정신이 바로 공정과 정의였으니까. 그것은 촛불 혁명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문 정권에 맡겨진 시대적 숙제였다. 문 정권이 그 과제를 풀고 미래를 향한 다음 시대를 열었어야 했다. 바깥 세상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문명의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과거형 문제에서 졸업하고 미래형 시대정신으로 넘어갔어야 할 나라가 아직도 못다한 공정·정의의 과제에 매달려 있다.

 

시대정신에 역행한 문 정권이 공정과 정의라는 지연된 시대정신을 불러냈다. 불공정과 불평등의 국정으로 새로운 시대의 출현을 막은 문 정권은 시대정신의 배신자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04.09 ‘파리가 앞발 비빈’ 선거, 분노를 멈춰선 안된다

친문 좌장은 보궐선거에 져도
대선 승리엔 지장없다 했다
국민 분노가 대수롭지 않다는 게
본심일지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4·7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권위 있게' 짚어낸 것이 선관위였다. 친여 편향 논란을 빚은 선관위가 ‘무능·위선·내로남불’ 문구를 못 쓰게 금지하자 왜 투표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졌다. 그랬다. 유권자들은 정권의 무능과 위선과 내로남불에 화가 나 투표장에 나갔다. 쌓이고 쌓인 끝에 폭발한 분노가 문 정권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국민앞에 고개 숙이게 만들었다.

 

▲김태년 대표 직무대행 등 민주당 지도부가 8일 4·7 재보궐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면서 고개를 숙였다./국회사진기자단

 

고용 참사에도. 서민 경제 붕괴에도, 빈부 격차 확대에도 “정책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며 우기던 대통령이었다. 최악의 집값 급등 앞에서도 “부동산은 자신 있다”더니 선거가 다가오자 허리를 굽혔다. 그토록 오류 인정에 인색하던 문 대통령이 “분노와 질책을 엄중하게 받아들인다”며 사과했다. 4년간 거들떠보지도 않던 ‘서해의 날’ 행사며 ‘상공인의 날’ 기념식에도 참석했다. 이 정권 들어 처음으로 국민 대접 받는다는 기분이 들게 했다.

 

민주당 수뇌부는 더욱 납작 엎드렸다. 선대위원장은 “국민의 화가 풀릴 때까지 반성하겠다”며 “잘못했습니다”를 연발했다. “부족했다” “염치없다”는 말이 쏟아지고 당 대표 대행은 “내로남불 자세 혁파”를 언급했다. “문재인 보유국” 운운하던 서울시장 후보는 어느 순간부터 대통령 얘기는 뻥긋도 않았다. 틈만 나면 ‘문비어천가’를 불러대던 사람들이 대통령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부동산 정책이 잘못됐다는 말도 공공연히 했다. 교육부 장관은 1년 이상 깔아뭉개던 조국 전 장관 딸의 입학 취소 가능성을 언급하고 나섰다. 오만의 극치를 달리던 권력의 돌연한 변신에 보는 국민이 아연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반성 모드가 진정성 없는 전술적 후퇴 임이 드러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동산 실패를 반성한다더니 청와대 정책실장은 “(집값 급등이)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라며 실패를 인정하길 거부했다. 정책 수정을 공언했던 민주당은 정작 임대차3법의 수정 검토는 없다며 입장을 뒤집었다. 천안함 사건을 재조사한다느니, 민주화 유공자 특혜법을 만든다느니 이념의 몽니를 부리는 습관도 도져 나왔다. 민주당 대표를 지낸 친문 좌장은 보궐선거에 지더라도 “내년 대선이 어려워지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국민 분노가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다.

 

선거에 이기겠다고 기를 쓰는 모습부터 반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들이 보궐선거의 원인을 제공해놓고는 기어코 이기겠다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성추문에 대한 반성은커녕 ‘생태탕·백바지·페라가모’를 들고 나와 네거티브 공세로 날밤 새웠다. 돈으로 표를 사는 매표(買票) 본능도 여전했다. 4차 재난지원금으로 20조원을 뿌리고, 교사·경찰·군인 상여금을 선거 일주일 전에 앞당겨 지급했다. 당선시켜주면 1인당 10만원씩 준다는 공약도 내걸었다. 판세가 불리해지자 “중대 결심” 운운하며 판을 깰 듯 협박하는 일까지 벌였다. 반성과 사죄는 애당초 말뿐임을 자백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 이중적 자세가 또다시 ‘조국 어록’을 소환해냈다. 11년 전 조국은 이명박 정권을 겨냥해 “파리가 앞발을 싹싹 비빌 때 사과한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일갈했다. 파리는 잘못을 비는 게 아니라 빨아 먹을 준비를 할 뿐이란 것이다. 선거 기간 중 온갖 죽는 소리를 다 한 여당의 ‘눈물 코스프레’가 바로 그 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거 패배가 굳어지자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민주당이 의석 93%를 장악한 서울시 의회는 내곡동 조사 특위를 추진하겠다 한다. 오세훈 당선인의 손발을 묶어 식물 시장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언론 개혁 프레임도 들고 나왔다. 포털과 언론이 ‘생태탕’을 제대로 써주지 않아 선거에서 졌다고 한다. 김어준과 관제(官製) 방송으로도 모자라 비판 언론의 입까지 완전 틀어막겠다는 것이다. 무얼 반성하고 무얼 사죄한다는 건가.

 

이제 선거는 끝났고 쇼도 막을 내렸다. 청와대와 여당은 “국민 질책을 엄중히 받아들인다”고 했다. “국민이 든 회초리를 맞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무엇을 반성하고 어떻게 고친다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았다. 무얼 잘못했는지조차 잘 모르는 듯하다. ‘무능·위선·내로남불’이 문제라고 선관위가 콕 집어 주었는데도 여전히 “부동산 부패” 운운하며 마이웨이를 고수하겠다고 한다.

 

그나마 이 정권이 반성하는 시늉이라도 한 것은 국민이 화를 냈기 때문이다. 분노를 표출시켰기 때문에 겁을 내는 척이라도 했다. 그러나 ‘반성 쇼’에 넘어가는 순간 정권의 본색은 다시 기어 나올 것이다. 벌써 그런 기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정성 없이 ‘앞발 비비는 파리’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11년 전의 조국이 가르쳐주었다. 그는 “우리는 이 놈을 때려잡아야 할 때이다. 퍽~’이라고 썼다. 조국이 옳다. 위기만 모면할 생각으로 또다시 정치공학적 주판알을 굴리는 정권에서 분노의 채찍을 거둬들여선 안 된다.

 

04.30 두뇌가 고장난 ‘치매 국가’가 되고 있다

국가 경영에도
지능의 격차가 있다
백신 접종률이
세계 꼴찌권인
한국의 국가 지능은
얼마나 될까

문재인 대통령의 말을 듣다 보면 판단력이 정상인가 싶어 조마조마해지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지난주 외신 인터뷰에서 문 대통령은 바이든 미 대통령을 향해 ‘트럼프식’ 대북 접근을 따를 것을 촉구했다. 전임자 흔적 지우기에 올인하는 바이든에게 ‘트럼프처럼 하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중국몽(夢)의 선전장인 보아오 포럼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미국 동맹국 정상 중 유일하게 참가해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를 때리고 시진핑을 치켜세웠다. 지금 우리는 전 세계 백신 물량을 틀어쥔 미국의 협조에 목을 매고 있다. 백신 한 통이 아쉬운 상황에서 문 대통령은 미국을 자극할 언행을 계속했다. 마치 바이든의 심기를 건드리려 작정이라도 한 듯했다. 이런 자해가 어디 있는가.

 

국가 경영에도 지능의 격차가 존재한다. 만약 나라별로 지능지수(IQ)를 매길 수 있다면 이스라엘이 단연 1~2등을 다툴 것이다. 강소국(强小國)의 모델인 이스라엘은 코로나 사태에서도 전광석화 같은 작전을 펼쳐 집단면역 1호국이 됐다. 일본은 반대 사례다. 백신 물량을 확보해놓고도 자체 임상을 해야 한다며 접종 승인을 안 내주는 바보짓을 벌이고 있다. 코로나 국면에서 국가의 지능은 대체로 백신 접종률에 비례하는 듯하다. 전략적 두뇌 기능이 활성화된 나라일수록 접종률이 높고, 안 그럴수록 고전한다. 우리는 잘못된 초기 판단과 빈약한 전략으로 백신 조기 확보에 실패했다. 세계 꼴찌권 접종률에 허덕이는 대한민국의 국가 지능은 어떤 수준일까. 왜 이런 바보 같은 나라가 됐나.

 

국가의 지능이란 곧 전략적 문제 해결 능력을 뜻한다. 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은 머리 잘 쓰는 ‘두뇌형 국가’의 전형으로 꼽혔다. 이승만은 글로벌 지정학의 향배를 꿰뚫어 보고 한·미 동맹이란 ‘신(神)의 한 수’를 현실화했다. 박정희는 수출 주도 경제개발이란 탁월한 전략으로 민족 역량을 활화산처럼 분출시켰다. 광복 후 70여 년, 시대의 고비마다 시대를 따라잡으려는 우리 나름의 국가 전략이 있었다. 정권에 따라 실수도 나오고 오점도 남겼지만 세계사의 큰 흐름에 역행하는 판단 미스는 범하지 않았다. 가진 것 없는 나라가 오로지 머리 하나 잘 쓴 덕에 기적 같은 발전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우리가 자랑하던 국가 경영의 두뇌 기능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백신 조기 확보 실패는 국정 최고위층의 잘못된 판단이 낳은 참사였다. 오로지 백신만이 코로나 종결자가 될 수 있다는 당연한 상식을 문 정권만 무시했다. 코로나 사태 초기, 청와대는 백신 대신 기이할 정도로 치료약에 집착해 세간의 해석이 분분했다. 알고 보니 치료제를 개발하는 제약사 S 회장의 과장된 마케팅에 넘어간 탓이었다고 한다. 청와대 비서실장과 친구라는 S 회장 말만 믿고 백신의 중요성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비선(祕線)에 기댄 기형적 의사 결정이 나라를 ‘백신 거지’로 만들었다.

 

국가 경영은 사실을 사실대로 직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문 대통령의 상황 인식은 ‘가짜 뉴스’를 방불케 할 정도로 현실과 동떨어진 경우가 잦다. “코로나가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 벌써 1년도 전의 일이었다. 백신이 없는데도 “긴 터널의 끝이 보인다”거나 “다른 나라보다 집단면역이 빠를 것”이라고 뜬금없는 낙관론을 펼쳤다. 경제 인식은 더 황당했다. ‘마차가 말을 끄는’ 소득 주도 성장 정책으로 온갖 부작용이 속출하는데도 “정책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집값이 폭등해도 “부동산은 자신 있다” 하고 서민 경제가 망가져도 “경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우기며 4년을 보냈다. 도대체 어느 우주에 살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국가 운명을 좌우할 주요 대목마다 자해와 다를 것 없는 의사 결정이 잇따르고 있다. 세계 최강의 한국형 원전을 죽이는 탈원전, 서민층을 영원한 무주택자로 전락시키는 부동산 역주행, 청년들에게 ‘가붕개(가재·붕어·개구리)’로 살 것을 강요하는 사다리 걷어차기, 기업 전사들을 교도소 담장 위에서 걷게 하는 가혹한 규제, 연금·재정 파산이라는 예정된 미래 방치하기, 동맹 관계를 흔드는 맹목적 북한·중국 추종 등등이 그 예다. 제정신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국정이 펼쳐지고 있다. 전략가들이 맡아야 할 국가 경영의 운전석을 운동권 이념가들이 차고 앉았기 때문이다.

 

두뇌가 고장 난 나라가 어떤 길을 걷는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말해주었다. 일본이 장기 침체의 함정에 빠졌던 2000년대 초, 일본 지식인들은 나라를 ‘알츠하이머병 환자’에 비유했다. 지력(智力)이 쇠진한 무뇌(無腦) 정치인, 생각 없는 생계형 관료들이 일본을 국가적 치매에 빠트렸다고 한탄했다. 우리가 그 꼴이 됐다. 통치 엘리트들이 전략 대신 이념, 과학 대신 맹신, 미래 대신 과거에 빠진 나라가 제대로 갈 수는 없다. 이대로면 우리 앞에도 ‘잃어버린 20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05.21 폭탄 돌리기의 끝, ‘코인 재앙’이 임박했다

폭탄 돌리기 끝에 어떤 재앙이 올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데
청와대도, 금융위도 못 본 척 눈감고 있다
이토록 무책임한 정부를 본 적이 없다

암호 화폐 사태의 불편한 진실은 이 문제가 세대 논쟁의 함정에 빠져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꼰대’ 프레임이다. 코인 열풍에 올라탄 2030세대는 기성세대의 이해력 부족이 문제라고 한다. 위험성을 경고하는 지적엔 기술 진보에 무지한 ‘꼰대’ 딱지가 붙기 십상이다. 정치 공학도 작용한다. 정부와 정치권은 암호 화폐 이슈의 정치적 폭발성에 긴장하고 있다. 

 

500여만명의 거대한 투자자 집단을 잘못 건드렸다가 역풍 맞을 것을 두려워한다. 문 정권이 암호 화폐를 투명인간 취급해온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의 암호 화폐 시장은 언제 파국이 와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고도 기이한 시장이 됐다.

 

▲서울 한 암호화폐 거래소의 시세 표시판. 중국 정부의 암호화폐 사용 단속등의 영향으로 비트코인 가격이 20일 하루새 30% 가까이 급락했다. /뉴시스

 

기자는 암호 화폐 찬성론자다. 블록체인 신기술로 무장한 암호 화폐들이 4차 산업혁명의 금융 엔진 역할을 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거리가 멀다. 디지털 화폐 혁명의 꿈은 어디로 가고 탐욕과 광기와 방종이 판치는 거대한 투전판이 됐다. 묻지 마 투기 열풍이 불어닥친 암호 화폐의 대부분은 말 그대로 ‘쓰레기’와 다름없다. 9700여종에 달한다는 암호 화폐 중 신뢰할 만한 우량 코인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비트코인·이더리움 딱 두 개 정도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극단적 비관론마저 있다. 대다수는 실체도 가치도 없는 쓰레기 잡코인이란 것이다.

 

문제는 어떤 것이 쓰레기인지, 투자가로선 가려 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금융 당국이 어떠한 공적 기준도 제시하지 않은 채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4년 전 암호 화폐를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주식처럼 공인된 투자 시스템을 만들었다. 엄격한 기준에 따라 거래소를 승인해주고, 거래소가 제대로 된 코인만 상장시키도록 했다. 한국 정부는 아직도 암호 화폐를 금융 상품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법적으론 화장지, 볼펜 같은 일반 공산품과 똑같이 취급받는다. 아무나 5만원만 내고 구청에 통신 판매업자로 등록하면 코인 거래소를 차릴 수 있다. 거래소들이 엉터리 코인을 상장해 유통시켜도 걸러낼 방법이 없다.

 

‘없는 자식’ 취급하니 정확한 실태 파악부터 불가능하다. 온갖 허접한 코인들이 난무해도 정부는 눈먼 깜깜이 신세다. 거래소가 몇 개나 있는지조차 정확하게 모른다. 사기가 판치고 범죄가 벌어져도 속수무책이다. 시세 조종을 해도, 허위 공시를 해도, 있지도 않은 유령 코인을 거래시켜도 변변히 처벌조차 못한다. ‘금융 상품’이 아니어서 단속할 법령이 없기 때문이다. 시골 할머니들이 단골 미용실 권유로 단체 투자했다가 날리고, 퇴직금이며 전세 자금을 털어 넣었다는 식의 피해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개입할 수 없다고 한다. 금융 상품이 아니란 이유다. 이게 정부인가.

 

코인 광풍은 ‘다단계 판매’에 다름 아니다. 먼저 산 투자자가 뒤에 온 투자자에게 계속 떠넘기며 손실을 눈덩이처럼 부풀리는 구조다. 폭탄 돌리기는 매수자가 나올 동안만 가능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계속될 수는 없다. 가격 상승에 대한 믿음이 깨지는 순간 붕괴할 수밖에 없다.

 

오는 9월 24일은 코인 폭탄에 불을 댕기는 날이 될 것이다. 이날부터 거래소 신고 제도가 실시되기 때문이다. 은행에서 실명 확인 계좌를 발급받는 등의 요건을 못 갖추는 거래소는 문을 닫아야 한다. 그토록 손 놓고 있던 정부가 자금 세탁 방지를 이유로 마지못해 제도를 도입하며 은행들에 심사 책임을 떠넘겼다. 그런데 자격 요건을 충족할 거래소는 몇 곳 되지 않는다. 227개로 추정되는 국내 거래소 대부분은 문을 닫아야 한다. 이들 거래소에 상장된 많은 잡코인들이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된다는 뜻이다.

 

폭탄 돌리기가 멈추는 순간,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9월 24일이 가까워지면서 인출 러시가 빚어지고, 못 빠져나간 투자자들이 아비규환에 빠질 것이다. 폭탄을 떠안은 피해자는 수만 명을 넘어 몇 십만, 몇 백만 단위에 이를 수도 있다. 가정 파탄이며 청년 파산 등의 사건들이 이어질 것이다. 비관 자살자가 속출할지도 모른다. 2000년대 초 닷컴버블 붕괴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사회적 재앙이 벌어질 것이 틀림없다.

 

이 재앙의 시나리오는 예정된 미래다. 얼마나 세게 터지느냐의 문제일 뿐 피할 도리가 없다. 오랫동안 문제를 방치한 정부의 무책임함이 코인 사태를 탈출구 없는 벼랑으로 몰아넣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분명하게 파국을 경고하는 사람이 없다. 전문가들은 ‘꼰대’로 공격당할까 봐 주저하고, 정부는 정치 논리에 함몰돼 못 본 시늉을 하고 있다.

 

재앙을 피할 수 없다면 차선은 피해를 최소화하는 일일 것이다. 정부가 솔직해져야 한다. 폭탄 돌리기의 끝이 다가왔음을 인정하고 공적(公的) 권위를 담아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 시한폭탄의 초침이 째깍째깍 굴러가는데 청와대도, 금융 당국도, 눈 감고 앉아 재앙을 맞겠다는 투다. 이렇게 무책임한 정부를 본 적이 없다.

 

06.11 왜 재벌 총수는 대통령 앞에서 비굴해져야 하나

총수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할 것은
정권의 엄포가 아니다
순응하는 처세술보다
경영자로서 유능함을
못 보여주는 것이
재벌 경영의 진짜 위기다

지난주 각 신문에 실린 사진 한 장이 참으로 ‘한국적’이었다. 문 정부 들어 처음 열린 대통령과 4대 그룹 총수(삼성은 대리 참석) 간담회였다. 원탁을 앞에 두고 대통령과 총수들이 둘러서 있다. 대통령은 손 제스처를 써가며 무언가 말하고 총수들은 듣고 있다. 총수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두 손을 가지런히 배꼽 위에 모았다. 마치 선생에게 훈시 듣는 학생들 같다. 권력과 기업 간에 일상화된 갑·을 관계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민주국가 치고 이런 광경은 지구상에 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적’이다.

 

간담회가 열린 경위부터 한국적이었다. 세상에 어떤 대통령이 자기 나라 기업인 만나기를 꺼리겠는가. 그러나 문 대통령은 이날까지 4대 그룹 총수만 따로 만난 일이 없었다. 대기업에 적개심을 감추지 않던 정권이었다. 큰 기업일수록 찍어 누른다는 ‘적대적 견제’가 문 정권의 기본 스탠스였다. 4대 그룹이 주도하는 전경련은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 취임 후 첫 재계 상견례에 15대 그룹 총수를 부르면서 100위권에도 못 드는 오뚜기 회장을 끼워넣기도 했다. ‘작지만 착한’ 오뚜기에서 배우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의도된 모욕 주기였다.

 

그랬던 문 대통령이 미국에 다녀온 뒤 돌변했다. 미국에 가보니 재벌의 가치가 실감 났기 때문일 것이다. 반도체·배터리·5G 등의 글로벌 공급망을 주도하는 대기업은 한국의 전략 무기다. 미국을 상대로 우리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위력적 카드가 대기업의 경쟁력이었다. 한국 정부에 고압적인 바이든 행정부도 한국 기업의 투자엔 안달하며 매달렸다. 회견장에서 바이든이 삼성·현대차·SK·LG를 일일이 거명하는 걸 보고 문 대통령도 가만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총수들을 초대하긴 했는데 뼛속 깊은 ‘갑(甲)’의 본능까지 감출 순 없었다. 총수 쪽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유튜브에서 조회 수 130만을 기록한 ‘이재용의 활짝 웃음’ 동영상이 있다. 2019년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전자 화성 공장에서 문 대통령을 안내하는 장면을 편집한 것이다. 동영상에서 이 부회장은 연방 고개를 숙이며 대통령 뒤를 따른다. 얼굴엔 함박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코믹한 표정으로 문 대통령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도 나온다. 그런데 자연스럽지가 않다. 일부러 웃는 억지 웃음, 과장된 겸손함임이 누구 눈에도 분명해 보인다. 동영상엔 ‘재벌 총수가 사회생활 참 잘한다’는 등의 댓글이 5000여 건이나 달렸다. 그중에서도 촌철살인은 ‘웃어야 산다’는 댓글이었다.

 

당시 이 부회장은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최순실 사건’으로 1년간 투옥됐다 풀려나 대법원 선고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판결이 뒤집히면 다시 감옥에 가야 했던 이 부회장으로선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대통령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웃어야 산다’였다. 얼굴론 웃지만 사실 처절한 얘기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헛수고로 끝났다. 비굴하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안간힘 썼지만 결국 재구속을 피하지 못했다.

 

문 정권 재벌 정책의 요체는 ‘군기 잡기’다. 반기업 규제로 겹겹이 옭아매고 때로는 공권력을 휘둘러 재벌을 다스렸다. 여럿 건드릴 필요도 없었다. 1등 하나만 때리면 다 알아서 길 테니까. 채찍질은 삼성에 집중됐다. 청와대가 이 부회장을 잡아넣으려 작심했었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다. 이 부회장에게 불리한 청와대 캐비닛 문건을 공개하고 카메라 불러 TV 생중계까지 했다. 온갖 혐의로 삼성과 이 부회장을 쉼 없이 몰아붙였다. 그걸 본 총수들이 얼어붙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총수들이 원래 그런 것은 아니다. 이건희 회장은 “정치는 4류”라며 천둥 같은 죽비를 날렸고, IMF 사태 때 김우중 회장은 관료들과 싸워가며 대통령에게 직언했다. 최종현 회장은 통화 정책에 정면 도전한 일화로 유명하다. 앞 세대 총수들은 기개가 있었다. 기업 차원을 넘어 국가 전체를 생각했고 시대에 대한 소명 의식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권력도 함부로 못 했다. 이건희나 정주영이었다면 아무리 서슬 퍼런 권력자 앞이라도 할 말은 다 했을 것이다. 3세, 4세로 내려가면서 총수들의 ‘그릇’이 작아지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8·15 특사로 석방될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다. 국익을 위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설사 풀려나더라도 정권에 감읍할 일은 아니다. 권력의 시혜가 아니라 국민적 요구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 절대 다수가 ‘이재용 석방’을 원하고 있다. 동정해서가 아닐 것이다. 국가 경제를 위해 이 부회장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이 진정으로 두려워할 것은 국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지, 정권의 엄포가 아니다. 권력에 순응하는 처세술보다 경영자로서 유능함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것이 그의 진짜 위기다. 다른 총수들도 마찬가지다.

 

07.02 ‘不通의 장막’ 둘러친 청와대부터 CCTV 달라

정권의 현실 인식은 비상식을 치닫고국정 운영은 갈수록 불가사의해지는데대통령과 참모들은 정보의 차단막을 치고 구중궁궐에 틀어박혔다

▲정보의 차단막이 둘러쳐진 청와대에서 비상식적이고 기이한 일들이 꼬리 물고 있다. 사진은 청와대 전경./조선DB

 

나는 병원 수술실에 CCTV 설치를 의무화하자는 법안에 반대한다. 의료진의 일탈을 감시한다는 긍정적 효과보다 그로 인해 벌어질 위험 요인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소극적 치료에 나설 것이라는 의료적 부작용은 차라리 부차적 문제에 불과하다. 나는 언젠가 수술대에 놓일지 모를 내 몸이 마취 상태로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녹화된 동영상이 유출되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일이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CCTV로 감시해야 할 만큼 의료진의 윤리 의식을 불신하면서 동영상을 악용할 의사·간호사, 병원 직원이 단 한 명도 없을 것임은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그래도 꼭 해야 한다면 좋다. 이왕 하는 김에 평소 걱정스러웠던 다른 곳에도 카메라 설치를 고려하기를 바란다. 우선 음식점이다. 반찬 재활용이며 위생 불량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내가 다니는 식당들은 괜찮은지 불안해진다. 배달시켜 먹는 치킨·피자·족발도 제대로 된 조리 과정을 거치는지 걱정이다. 수술실 카메라와 똑같은 이유로 모든 음식점 주방에도 CCTV를 의무화해야 마땅하다.

 

어떤 특급 호텔에서 객실 변기 닦은 수세미로 물컵 세척하는 장면이 뉴스에 나왔다. 내가 여행 가서 묵는 호텔 방은 괜찮은지 겁난다. 객실 청소 과정을 CCTV로 녹화해놓고 투숙 고객이 동영상을 확인할 수 있게 하면 어떨까. 중국산 김치의 알몸 세척 영상을 본 이후로는 국산 김치도 불안해졌다. 전국의 김치 공장, 각종 반찬·식재료 공장에도 CCTV 설치가 요망된다. 개인 정보가 샐까 걱정되는 휴대전화 수리 센터, 제대로 된 부품을 쓰는지 궁금한 카센터도 마찬가지다. 나는 대다수 음식점과 호텔과 김치 공장들의 양심을 믿는다. 그러나 세상 어느 직종보다 철저하게 훈련받는 의사들의 직업 윤리를 불신하면서 다른 누구를 신뢰할 수 있단 말인가.

 

그중에서도 가장 시급하게 카메라를 달아야 할 곳이 있다. 청와대다. 불통(不通)의 커튼을 치고 첩첩산중에 들어앉은 청와대에서 기이하고 괴상한 일들이 꼬리 물고 있다. 문 대통령은 외신 인터뷰에서 김정은을 “솔직하고 열정적이며 결단력 있다”고 했다. 독재자 폭군을 성군(聖君)처럼 묘사하는 판단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천하가 다 아는데 문 대통령은 비핵화 의지가 확고한 양 말해왔다. 문 대통령은 허황된 대북 정보를 어떤 경로로 입력받았을까. 이 국가적 수수께끼를 풀려면 청와대 집무실에 CCTV를 다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도대체 누구를 만나 무슨 얘기를 듣는지 스크린하자는 것이다.

 

대통령의 현실 인식은 비상식을 넘어 황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참담한 일자리 참사에도 “고용의 양과 질 모두 개선”이라 하고, 서민 경제가 죽어 가는데 “정책 성과가 나고 있다”고 했다. 최악의 집값 급등 앞에서도 “부동산은 자신 있다”고 했다. 이런 말들을 대통령 혼자 상상으로 지어냈을 리 없다. 참모나 보좌진 누군가가 그렇게 보고했을 것이다. 누가 대통령 귀를 붙잡고 어떤 헛소리를 하고 있는지 감시해야 마땅하다.

 

인사는 코미디를 방불케 한다. 정의 담당 장관에 ‘아빠 찬스’의 조국, ‘엄마 찬스’의 추미애를 기용했고, 투기 의혹을 받는 90억원대 부동산 보유자를 반부패 비서관에 앉혔다. ‘위안부 장사’의 윤미향, 악덕 기업인의 전형인 이상직에게 의원 배지를 달아주었다. 국정 운영은 갈수록 불가사의해지고 있다. 북한·중국에 대한 끝없는 굴종, 한국형 원전을 죽이는 탈원전, 서민을 영원한 무주택자로 만드는 부동산 역주행, 못 사는 사람을 더 못살게 하는 소득 주도 성장 등등 국익과 민생을 해치는 정책이 계속되고 있다.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자해(自害)의 정책 결정을 하고 있단 말인가.

 

겹겹이 둘러친 장막을 비집고 권력의 틈새를 드러낸 것이 탈원전 감사였다. 대통령의 “월성 1호기 가동 중단” 질문이 탈원전 자해극의 시작이었음을 감사원이 밝혀냈다. 울산 시장 선거 때 대통령의 30년 지기를 당선시키려 청와대 조직 8개가 총동원된 사실도 드러났다. 이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권력의 심장부에서 짐작조차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국익을 해치고 나라를 망치는 권력의 폭주를 그냥 눈감고 있어야 하나.

 

‘1984’의 감시 지옥을 만들자는 말이 아니다. 온갖 곳에 CCTV를 달자니, 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될 일이다. ‘청와대 CCTV’ 아이디어가 불통 정권에 대한 풍자이자 냉소적 야유임을 권력자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국정은 이해 불가의 영역을 치닫는데 대통령과 참모들은 정보의 차단막을 치고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있다. 수술실 카메라가 꼭 필요하다면, 청와대에도 CCTV를 달아야 할 이유가 그보다 몇십 배, 몇백 배 더 설득력 있다.

 

07.23 그래도 기자가 진실에 가장 가까이 있다

폭발한 여당 대표의
‘XX자식’ 욕설에도
기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팩트 앞에서 후퇴 말라고
훈련받은 기자들로선
꼭 해야만 했던
질문이었을 것이다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가 2020년 7월 10일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나서며 한 기자의 질문에 화를 내며 노려보고 있다./고운호 기자

 

문 정권이 왜 ‘언론 징벌법’을 밀어붙이는지, 구속된 이상직 의원이 일찌감치 속내를 털어놓았다. 악덕 기업인의 전형이라 할 그는 구속 전 이 법을 가장 강력히 옹호한 인물이었다. 여당 내에서도 유독 이 의원이 총대 메고 법안 강행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가 저지른 비리 실태가 언론에 줄줄이 보도되던 시점이었다. 이 의원으로선 뒤를 캐는 언론이 증오스러웠을 것이다. 구린 곳을 감추려는 권력자가 밝히려는 언론을 손보겠다는 것이었다.

 

작년 한 해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총무로 일했다. 1년간 언론계에선 수많은 일이 벌어졌지만 그중에서도 관훈클럽 운영진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이 ‘이해찬 버럭 사건’이었다. 비극적 선택을 한 박원순 서울시장 빈소에 민주당 이 대표가 조문을 왔다. 진 치고 있던 기자들이 질문을 퍼부었고 한 기자가 “고인의 의혹에 대한 당 차원 대응 계획”을 물었다.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이 대표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언성을 높이며 기자를 노려보더니 “그런 걸 예의라고 하느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XX 자식”이란 욕설이 튀어나왔다. 둘러싼 민주당 지지자들은 “기레기는 물러가라”며 고함을 질러댔다.

 

그다음부터가 반전이었다. 여권 실세의 분노 폭발에 위축될 만도 할 텐데 기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험악한 분위기에서도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말진 기자들이었을 것이다. 그 젊은 기자들이 주눅 든 기색도, 주저하는 모습도 없이 흥분한 권력자를 물고 늘어졌다.

 

나는 기자들이 훈련받았던 대로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고 생각한다. 팩트 앞에서 물러서지 말라고 배웠을 그들로선 꼭 해야만 하는 질문들이었을 것이다. ‘XX 자식’ 욕설을 들은 기자는 그날의 취재 뒷얘기를 관훈클럽 회지(會誌)에 썼다. 제목은 ‘이 대표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였다.

 

그해 관훈클럽 언론상은 ‘N번방’ 사건을 탐사 보도한 국민일보·한겨레신문 취재팀에 돌아갔다. 라임·옵티머스펀드의 정·관계 유착을 파헤친 SBS팀, 산재 노동자의 비극을 추적한 경향신문팀도 상을 받았다. 오로지 언론만이 해낼 수 있는 진실의 기록들이었다. 수상작은 못 냈지만 조선일보 역시 울산 선거 개입, 탈원전 경제성 조작 등 수많은 보도를 통해 진실이 바로 서는 데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기자 말고 누가 이런 역할을 해낼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유튜버와 소셜미디어가 언론 행세를 하고 있다. 자칭 평론가며 선동가, 진영 정치꾼들이 온갖 주장을 사실인 양 포장하며 대중을 호도한다. 그러나 ‘대안 언론’은 언론이 될 수 없고, ‘대안적 진실’은 진실이 될 수 없다. 언론이 언론이고, 기자가 기자인 것은 오직 팩트라는 나침반에 의존해 진실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객관적 사실에 죽고 사는 팩트 지상주의야말로 언론의 정체성 그 자체다.

 

30여 년 기자로 일하며 특종도 해보고 숱하게 ‘물’(낙종)도 먹었다. 그중에서도 아팠던 것이 2011년 3월 중앙일보에 실린 천성산 르포 기사였다. 천성산 KTX 구간은 지율 스님 등 환경론자들이 도롱뇽을 원고로 내세워 소송을 벌인 상징적 장소다. 온갖 공사 방해 끝에 KTX 터널이 완공됐다. 그런데 천성산에 가보니 생태계 파괴는커녕 “물 웅덩이마다 도롱뇽 알 천지였다”는 것이다. 팩트는 힘이 세다. 이 르포 하나로 지율의 논리가 와르르 무너졌다. 왜 우리 취재팀은 현장에 갈 생각을 못 했단 말인가. 팩트 경쟁에서 졌다는 생각에 한동안 낭패감을 삭일 수 없었다. 기자라면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여권은 교통방송 진행자 김어준씨를 ‘언론인’이라 칭한다. 동의할 수 없다. 그는 숱한 가짜 뉴스를 시사 보도로 포장해 유포한 장본인이다. 소설과도 같은 ‘세월호 고의 침몰설’까지 퍼트렸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언론인의 ‘언’ 자도 붙일 자격이 없다. 팩트에 목숨 걸지 않는 사람은 언론인도, 기자도 아니다. 그런 사이비 언론인이 넘쳐난다.

 

기자도 실수를 하고 오보도 낸다. 그러나 팩트에 대한 집착만큼은 어느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잘나서가 아니다. 오로지 사실만 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훈련받는 직업이 기자이기 때문이다. 욕도 먹고 오점도 많지만 그래도 훈련받은 기자가 진실에 가장 가까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당은 언론 징벌법이 ‘가짜 뉴스’를 벌주는 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정작 ‘가짜 뉴스 제조원’은 법안에서 뺐다. 가짜 뉴스의 진원인 유튜브나 소셜미디어, 1인 미디어 등은 징벌적 손해배상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불편한 진실을 캐내는 비판 언론만 손보겠다는 것이다. 진실을 감추려는 권력이 진실을 밝히려는 언론에 재갈을 물리겠다고 한다. 이게 ‘언론 개혁’으로 포장한 언론 징벌법의 실체다.

 

09.03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

믿던 것들이
부정당하고
합의된 가치 체계가
무너지고 있다...
狂氣 가득 찬 시대
내가 보는 세상이 미쳤나
보는 내가 미쳤나

이낙연 전 총리와 김의겸 의원이 지난달 열린민주TV에 출연해 언론징벌법 통과를 주장하고 있다.

 

언론징벌법 파동은 권력의 광란극에 다름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괴한 장면은 기자 출신 정치인들이 총대 메고 앞장선 대목일 것이다. 동아일보 출신 이낙연 전 총리는 “현직 기자라면 이 법을 환영하고 자청했을 것”이라 했다. 한겨레신문 출신 김의겸 의원은 징벌법이 통과해야 “기자의 언론 자유가 보장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그들도 일선 기자 시절엔 언론 자유를 애타게 갈구했을 것이다. 거악(巨惡)을 파헤치고 양심껏 쓸 자유에 목말라 했을 이들이 이젠 권력 앞잡이가 되어 기자들 족쇄 채우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들의 돌변도 기가 막히지만 자기 변절을 합리화시키려 내세운 논리가 더 소름끼친다. 거액 손해배상을 때린다는데 이를 ‘환영’하고 ‘자청’할 기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이낙연·김의겸 같은 이들의 정신세계를 의심해야 마땅하다 생각한다. 아무리 권력 맛이 달콤해도 제정신이라면 이럴 수 없다. ‘환영’과 ‘자청’을 강요받는 현직 기자들도 돌아버릴 지경이다. ‘징벌이 곧 언론 자유’라는 무지막지한 궤변 앞에 기자로서의 신념 체계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는다. 모든 기자가 다 그런 심정일 것이다.

 

우리에겐 국민 다수가 동의한 절대적 가치 체계가 존재했다. 민주적 절차와 법치, 정의와 공정, 법 앞의 평등 등이 그것들이다. 언론 자유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믿음이 총체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민주화 이후 차곡차곡 쌓아온 국민적 합의를 권력과 그 주변의 홍위병 그룹들이 우왁스럽게 무너트렸다.

 

민주주의는 신종 독재에 밀려나고 있다. 민주화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운동권 정권이 ‘문(文)주주의’로 불리는 변형된 독재 체제를 탄생시켰다. 진영 가르기와 권력 독점, 다수 의석에 의한 입법 독주, 홍위병을 동원한 여론 횡포로 민주적 가치를 허물고 있다. 대통령은 법 위에 군림한다. 대통령과 참모들이 울산시장 선거, 원전 경제성 조작에 불법 개입한 의혹이 드러났다. 하나 하나가 탄핵 사유지만 이 정권은 도리어 불법을 파헤친 검찰총장·감사원장을 ‘배신자’로 찍어 몰아냈다. 우리가 알던 세상이 아니다.

 

대통령은 신성 불가침의 숭배 대상이 됐다. 대통령을 ‘세종대왕’에 견주고 ‘문재인 보유국’ 운운하는 낯 뜨거운 아부가 쏟아진다. 군사 전문가들도 생각 못 했는데 문 대통령이 직접 청해부대에 공중 급유기를 보내는 아이디어를 냈다고도 한다. 이쯤 되면 거의 신격화 수준이다. ‘문비어천가’가 일상적으로 울려 퍼지는 나라가 됐다. 우리는 민주화와 동시에 독재는 영원히 소멸했다고 확신했다.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모두가 평등한 나라에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법 앞에 열외인 새로운 특권 신분층이 존재하고 있었다. 정권 편에 선 검찰 간부와 공무원은 범죄를 저질러도 승진 가도를 질주한다. 여당 의원과 도지사는 기소돼도 재판을 질질 끌어 임기를 다 채우고 있다. 반칙과 특혜의 상징인 조국 전 장관은 급기야 ‘예수’ 반열에 올랐다. 입시 서류 조작 등이 유죄로 판명 났는데도 여권은 그를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로 미화하고 있다. 지켜보는 국민이 실성할 지경이다.

 

이 정권은 세금을 아끼는 게 나쁜 것이란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거꾸로 펑펑 쓰는 게 미덕이라 한다. 선거만 다가오면 온갖 명분을 붙여 현금을 뿌리고, 경제성 없는 지역 민원을 대거 허가해주었다. 나라 빚을 5년 새 400조원 늘리고 건강보험·고용보험 적립금을 바닥냈다. 재정 건전성을 걱정하면 “곳간에 쌓아두면 썩는다”는 희한한 논리를 대며 더 펑펑 써야 한다고 한다. 나랏돈을 아껴 후대에 물려줘야 한다는 오래된 상식이 무너졌다.

 

우리는 정부의 거짓말은 범죄라고 여겼다. 이 정권은 ‘공적(公的) 거짓말’을 뉴 노멀로 만들었다. 집값이 급등해도 “부동산은 안정”이라 하고 서민 경제가 무너져도 “정책 성과가 나타났다”고 한다. 일자리 참사를 가리려 통계에 손을 대고, 가짜 일자리를 양산해 고용 수치를 분식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숨어서 쉬쉬 하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공개적으로 가짜 뉴스를 퍼트리고 있다. 명백한 거짓말도 반복하면 사실처럼 된다는 게 나치의 선전술이었다.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옳고 그름이 뒤집힌 가치 전복(顚覆)의 현실을 맞고 있다. 당연하다고 여긴 것, 맞는다고 믿었던 것들이 부정당하고, 정상이 비정상에, 상식이 비상식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믿었던 것과 현실이 다르면 인지 부조화의 착란에 빠진다고 한다. 어떤 언론법 기사에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댓글이 달렸다. 하도 희한하게 돌아가니 어느 쪽이 실성했는지조차 헷갈릴 지경이다. 내가 보는 세상이 미쳤나, 보는 내가 미쳤나. 이 광기(狂氣) 가득 찬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국민의 심정이 이럴 것이다.

 

09.24 죽음마저 내 편, 네 편 가르는 무서운 정권

먹고살려고
발버둥 친 죄뿐인
수백만 자영업자를
벼랑으로 몬 정부가
그것도 모자라
죽음까지 편 갈라
차별하고 있다

추석 연휴 전날 자영업자 합동 분향소에 조문을 갔다. 서울 마포에서, 여수에서, 원주·안양·평택 등에서 잇따라 숨져간 자영업자들 사연이 너무도 안타까워 가만있을 수 없었다. 지하철 국회의사당역 3번 출구 앞, 분향소는 흰 천을 깐 보도블록 위에 차려져 있었다. 비닐 봉투를 포개 쌓아 임시 제단을 만들고, 영정 대신 ‘근조(謹弔) 대한민국 소상공인·자영업자’라 쓰인 액자를 올려 놓았다. 초는 일회용 컵에 꽂고 그릇에 쌀을 담아 향꽂이를 대신했다. 경찰이 장례 물품 반입을 금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변을 폴리스 라인이 둘러싸고 경찰 버스가 차벽을 쌓았다. 처량하고도 삭막한 풍경이었다.

▲ 지난 17일, 잇따라 극단적 선택을 한 자영업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국회의사당역 3번 출구 앞에 차려진 길바닥 분향소에서 한 시민이 조문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햇볕조차 못 가리는 길바닥 추모 공간이지만 그마저 못 차릴 뻔했다. 경찰이 방역 수칙 위반을 이유로 자영업 비상대책위를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7시간의 대치 끝에 겨우 약식 분향소를 허락받았다. 그나마 한 번에 한 명씩 조문한다는 등의 조건이 달렸다. 고(故) 박원순 시장, 백기완 선생 때 서울 광장에 대형 분향소가 세워졌던 것과 딴판이었다. 여론이 나빠지자 경찰은 다음 날 봉쇄 조치를 철회했다. 애당초 방역 운운한 것이 핑계였다는 뜻이었다. 영업 제한 강제로 자영업자들을 생활고에 몰아넣은 정부가 그들의 마지막 순간까지 몽니를 부리고 있었다.

 

김포의 택배 대리점주가 노조의 집단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 민노총 강성 노조의 조직적 횡포가 40세 가장을 죽음으로 몰아간 충격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문 정권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청와대는 입을 닫았고 민주당은 그 흔한 애도 논평 하나 내지 않았다. 일만 터지면 숟가락부터 얹던 여당 대선 주자들도 누구 하나 조문 간 사람이 없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이례적인 침묵이었다. 마치 사건 자체가 없었던 양 무시하려는 듯했다.

 

문 정권은 ‘조문의 정치학’에 무지한 바보가 아니다. 무지하긴커녕 핑계만 생기면 감성팔이 하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다. 지난 5월 평택항 노동자가 산재 사고를 당하자 문 대통령은 평택까지 내려가 조문했다. 제천과 밀양 화재 때도 직접 빈소를 찾아 유족들에게 무릎 꿇었다.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 사고 때는 수석 비서관을 대신 보내기도 했다. 그랬던 문 대통령이 김포 택배점주, 마포 맥줏집 사장, 여수 치킨집 주인, 원주 노래방 업주의 잇단 비극에는 단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노동자만 소중하고 자영업자는 국민도 아니란 말인가.

 

문 정권이 자영업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4년 내내 자영업·소상공인을 못살게 구는 정책을 쏟아냈다. 소득 주도 성장 실험으로 골목 상권을 죽이고 길거리 경기를 냉각시켰다. 최저임금을 급속히 올려 근근이 버티는 영세 상인들을 폐업 위기로 몰아넣었다.

 

코로나가 터진 뒤엔 백신 확보에 실패해놓고 거리 두기 장기화에 따른 고통을 고스란히 자영업자들에게 전가시켰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자영업에게 2주일 거리 두기를 40여 회 연장한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점포를 4곳이나 운영하던 마포의 맥줏집 사장은 코로나 봉쇄 1년 반 만에 파산해 원룸 보증금으로 마지막 직원 월급을 준 뒤 세상을 떴다. 대부분 자영업자 사정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실질적 피해 보상을 거부한 채 정치 쇼만 벌였다. 전 국민 재난 지원금에 투입된 25조원이면 자영업자 100만명에게 2500만원씩 줄 수 있는 액수다. 이 돈만 제대로 썼어도 자영업자들 비극은 상당수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자영업을 무시하고 적대하는 정권은 이제껏 본 적이 없다.

 

그 근저엔 문 정권의 계급투쟁적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노동과 자본의 대결로 보는 운동권식 이분법이다. 이 정권에 노동은 선(善), 자본은 악(惡)이다. 자영업도 노동자를 부리는 소자본가이니 악의 진영에 속한다. 그 결과 노동자보다 나을 게 없는 다수의 자영업·소상공인들이 졸지에 기득권 착취 세력으로 규정되고 말았다. 알바 최저임금보다 못 번다는 편의점 업주, 보험 깨 임차료 내는 식당 주인, 대출받아 밀린 월급 주는 영세 업체 사장들을 힘들게 하는 정책들이 펼쳐졌다. 그렇게 수백만 자영업자를 벼랑 끝에 밀어 넣은 것도 모자라 죽음까지 편을 갈라 차별하고 있다.

 

모든 죽음은 똑같이 비극적일 것이다. 그 죽음의 보편적 비극성을 문 정권은 진영 논리로 상대화시키고 등급까지 매겼다. 천안함 유족들은 정부 행사 때마다 홀대당하고, 북한에 피살당한 해수부 공무원은 ‘월북자’로 몰렸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그토록 추모하던 여당은 그보다 몇 만 배는 더 국가에 공헌했을 백선엽 장군 별세 때는 애도 논평조차 생략했다.

 

문 정부에서 정권 편이 아닌 사람들은 죽어서도 서럽다. 급기야 먹고살려 발버둥 친 죄밖에 없는 자영업자들까지 ‘죽음의 편 가르기’ 대열에 밀어 넣고 있다. 기가 막히다 못해 무섭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참 무서운 정권이다.

 

10.15 ‘대장동, 큰 게 있다’ 느낌 확 온 순간들

감출 게 많을수록
과도하게 화내는 법,
설명 대신 겁 주고
뻔한 사실도 부인하며
‘의도’를 문제 삼거나
진영 싸움으로 몰아간다면
정말 뭔가 있는 것이다

대장동 의혹은 ‘경기경제신문’의 박종명 기자가 쓴 한 편의 기사에서 시작됐다. 제보를 토대로 쓴 ‘이재명 지사님, 화천대유는 누구 것입니까’란 칼럼이었다. 처음엔 박 기자도 사태가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화천대유는 기사가 나가자마자 삭제를 요구하더니 다음 날 박 기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뭐가 급한지 언론중재위 절차도 제쳐놓고 바로 형사 고소에 들어갔다. 닷새 뒤엔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냈다. 청구액이 무려 10억원이었다. 겁 먹고 입 다물라는 뜻이었다.

 

금액도 터무니없지만 고소장 내용이 예사롭지 않았다. 화천대유는 기사의 ‘정치적 의도’를 거론했다.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불순한 의도’와 ‘특정 후보자를 흠집 낼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재명 지사는 대장동과 관계없다는 점을 조목조목 적었다. 통상적인 고소라면 자기가 당한 피해 사실 위주로 따지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화천대유의 고소장은 마치 이 지사가 고소인의 한 사람인 양 작성돼 있었다. 이 지사와 관련없다면서도 이 지사 입장을 대변하는 듯했다. 이걸 보고 박 기자는 “더 큰 게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고 했다. “너무 큰 것을 건드렸구나 싶었다”는 것이었다.

 

대장동 의혹이 이토록 거대할 줄 몰랐던 것은 취재 기자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필자도 그랬다. 생각이 바뀐 건 이재명 지사가 조선일보만 콕 찍어 공격하는 걸 보고서였다. 경기경제신문의 첫 보도 후 조선일보가 본격적인 의혹 파헤치기에 나서자 이 지사는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선거 방해” “헌법 파괴” “중대 범죄”라며 온갖 독설을 퍼부었다. 며칠도 안돼 대부분 언론이 따라왔지만 이 지사는 오로지 조선일보만 찍어 맹공을 이어갔다. 정치 고수가 구사한다는 ‘한 놈만 패기’ 전술이었다.

 

이 지사의 공격은 논리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이었다. 기사 내용에 대한 사실 차원의 반박 대신 “견강부회” “허위 조작” “마타도어” 같은 험한 말을 쏟아내며 ‘무조건 가짜 뉴스’로 몰았다. 조선일보로 상징되는 주류 언론과 전선을 형성해 지지층을 결집하겠다는 선거 전략으로 보였다. 이 지사는 사실 대신 정치 공학과 진영 논리로 싸우려 하고 있었다. 팩트에 약한 자가 팩트 논쟁을 피하는 법이다. 그의 대응은 대장동 논란의 팩트 싸움에 자신 없다는 실토로 들렸다.

 

예정된 절차처럼 이 지사는 조선일보에 대한 무더기 법적 공격에 나섰다. 어제까지만 선관위에 이의 신청을 17건 내고, 1건은 형사 고발했다. 그 대부분이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 보도여서 정정(訂正)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대장동 개발 핵심, 경기관광공사 사장 영전’ ‘이재명 인터뷰한 언론인, 7개월 뒤 화천대유 설립’ ‘사명(社名)에 주역 64괘가 들어간 까닭은’ 등등 사실 다툼 여지가 없고 선거와 무관한 기사를 문제 삼고 나선 것이었다. 실제로 선관위는 지금까지 결론 낸 13건 중 11건에 대해 “이유 없다”며 기각·각하 판정을 내리고, 2건에는 ‘공정 보도 협조 요청’을 했다. 예상된 결과였지만 이 지사 측으로선 아무래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기자들을 겁주어 위축시키는 것이 목적일 테니까

 

사건을 취재하다 보면 찌릿하고 ‘감’이 오는 때가 있다. 낚싯줄로 전달되는 손맛처럼 ‘아, 뭐가 있구나’ 싶은 확신의 순간을 종종 경험하곤 한다. 그것은 당사자 반응을 보면 안다. 뒤가 구리고 감출 게 많은 사람일수록 과도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화내며 협박하거나 기사의 ‘의도’를 거론하며 편파성 프레임을 덮어씌우는 경우, 뻔한 사실마저 무조건 부인하며 진흙탕 공방으로 몰고 가는 경우라면 거의 100%다. 드러내선 안 될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대장동 의혹의 핵심은 설계 오류다. 왜 공공의 몫이어야 할 수천억 원이 업자들에게 가도록 사업 구조를 짰는가. 이 본질적 질문에 이 지사는 사실로서 답하지 않는다. 설명 대신 버럭 화부터 내거나 “단군 이래 최대 공익 환수” “노벨이 9·11 테러를 했다는 거냐”는 식의 말장난으로 과녁을 흩트리고 있다. 명백한 사실도 부정한다. 유동규가 오랜 측근이란 증거가 차고 넘치는데 아니라고 한다. ‘돼지’ ‘마귀’ ‘악마’ ‘도둑’처럼 멱살잡이 다툼에서나 나올 만한 말도 서슴지 않는다. 팩트 논쟁을 말싸움, 감정 대결로 몰아가겠다는 뜻이다. 진실을 숨기려는 사람들의 전형적 수법이다.

 

“1원도 받은 게 없다”는 이 지사 말을 믿는다. 그러나 ‘뭔가 있다’는 심증을 키운 것이 이 지사 본인이다. 사실 대신 ‘정치’로 싸우려는 그의 대응이 의혹을 더욱 부풀리고 있다. 과거의 무능을 덮으려다 희대의 의혹을 자초하는 꼴이다. 객관적 팩트로 결백을 입증하지 않는 한 대장동 꼬리표는 끝까지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버럭 화낸다고 겁먹을 기자도 없고, 현란한 궤변에 넘어갈 국민도 없다.

 

11.05 이재명의 ‘짝퉁 박정희’ 마케팅

국가 주도로
밀어붙이기만 한다고
‘박정희’가 될 순 없다
이념적 도그마와
포퓰리즘에 젖어 있는 한
‘소득 주도 성장’의
시즌2일 뿐이다

민주당 대선 출정식에서 이재명 후보가 내세운 1호 공약은 ‘성장 회복’이었다. 보수·우파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성장 어젠다를 끌어다 자기 것으로 포장했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이재명다운 선택이다. 중도·보수를 겨냥한 득표 전략이겠지만 성장의 가치를 말한 것 자체가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성장 담론이 실종된 지 오래다. 성장을 말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듯 취급받는 분위기에서 이 후보가 경제 파이 키우기를 들고나온 것을 환영한다.

 

이 후보의 성장론엔 형용사가 붙는다. ‘전환적 성장’과 ‘공정 성장’이다. 멋진 표현이다. 그런데 말장난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어떤 도그마에 의해 제약되거나 구속받는 이념형 성장론의 진정성을 믿지 않는 편이다. 과거에도 온갖 미사여구가 달린 변종 성장론이 숱하게 있었다. 누구는 ‘포용적’ 성장을 말했고, 누구는 ‘따뜻한’ 시장경제를 외쳤다. 참으로 아름다운 구호였지만 결국 성장을 포용·따뜻함 같은 사회적 가치의 하위 개념으로 두는 짝퉁 성장론에 불과했다. 성장의 외피를 쓴 분배·평등·공정의 담론이었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도 형용사 달린 성장을 내세웠다. ‘소득이 주도하는’ 성장 말이다. 문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론은 그러나 가짜 정책이었다. 성장이 목적이라면서도 실제론 노동의 몫을 키우는 분배에 방점이 찍혔으니까 말이다. 경제 원리로도 인과관계를 뒤집은 논리 모순이었다. 성공했다면 노벨상감이었지만 결국 부작용만 낸 채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구체적 실행안은 안 나왔지만 이 후보의 ‘전환적 공정 성장’ 또한 비슷한 골격으로 보인다. 위기를 기회로 뒤집는다는 ‘전환적 성장’은 신재생 에너지 전환에 무게가 실려있다. 문 정부가 추진한 탈원전·탄소 중립 도그마의 연장에 가깝다. ‘공정 성장’은 약자 보호를 위한 규제 강화로 내용이 채워져 있다. 사회적 가치가 우선이고 경제 파이 키우기는 그에 따른 부차적 결과로 밀려있다. 이 후보는 2호 공약인 기본소득마저 성장과 엮었다. 기본소득을 지급해 소비를 늘림으로써 경제를 성장시킨다는 논리인데, 이것 역시 ‘마차가 말을 끄는’ 식의 본말 전도나 다름없다.

 

이재명식 성장론의 핵심은 ‘국가 주도’다. 민간·기업·시장 대신 정부가 정점에 서서 주도권을 쥐고 국가 자원을 배분하겠다고 한다. 이 후보는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 국가 투자”를 공약했다. 1970년대식 개발 독재를 연상케 하는 개념이다. 그는 박정희의 개발 어젠다까지 들고 나왔다. 박 대통령의 경부고속도로가 산업화를 이뤘듯 자신은 ‘에너지 고속도로’로 탈탄소 시대를 열겠다고 했다. 좌파 진영이 치를 떠는 박정희까지 끌어들인 것이 변신 자유자재의 이재명답다. 보수층의 박정희 향수에 편승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이 후보가 은연중 ‘박정희 마케팅’을 구사한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그는 박정희의 경제 성과에 대해 긍정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이 후보는 강력한 행정력과 추진력을 자신의 주특기로 내세우는데 이 역시 박정희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그는 코로나 대응이나 계곡 불법시설물 철거 때 현장에서 진두 지휘하는 모습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박정희의 야전 사령관 스타일을 벤치마킹 했다는 말들이 나온다.

 

일만 잘하면 되지, 보수·진보를 왜 따지냐는 이 후보의 실용론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와 박정희 사이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첫째, 박정희의 국가 주도론은 민간 경쟁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경제 주체들을 경쟁시켜 잘하는 곳에 국가 자원을 집중 투입했다. 새마을 운동도 성과있는 마을에 더 지원하고, 무역진흥 행사에선 무조건 수출 잘하는 기업인을 옆에 앉혀 우대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기본소득’을 뿌리자는 이 후보와는 발상부터 다르다.

 

둘째, 박정희는 밖을 내다 본 글로벌 전략가였다. 세계 시장을 먹겠다는 대외 지향적 성장론을 펼쳤다. 이 후보의 전환적·공정 성장은 철저히 국내용이다. 글로벌 경쟁이란 관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박정희는 대중 영합을 배격했다. 이 후보는 자타 공인의 포퓰리스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후보가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며 인기 없는 정책을 밀고 나갈 것 같진 않다.

 

이 후보는 “저성장에 따른 기회총량 부족과 불평등”이 사회 갈등의 본질이라고 했다. 그의 문제 의식에 100% 동의한다. 그러나 국가 주도로 밀어 붙인다고 박정희가 될 순 없고, 입으로만 성장 운운한다고 경제가 성장하진 않는다. 이념과 평등 도그마, 무엇보다 이 후보의 정체성과도 같은 포퓰리즘을 버리지 않는다면 짝퉁 박정희, 가짜 성장론에 불과하다. ‘소득주도 성장’의 시즌2일 뿐이다.

 

11.26 무너지는 ‘포퓰리즘 좌파 장기 집권론’

정치권의 퍼주기를 즐기는 듯하던 국민이 ‘No’라 하기 시작했다
유권자를 중독시켜 정권을 연장하려는 좌파의 집권 구상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10년 전 취재 간 그리스에서 한 나라를 파산으로 몰아간 정치 포퓰리즘의 말로를 생생히 목격했다. 그곳은 집단 광기가 휩쓰는 카오스(혼돈)의 나라였다. 국가 부도를 피하려 방만한 복지 지출을 줄이자 반발한 국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아테네 한복판에서 투석전이 벌어지고, 청소 노조 파업으로 거리마다 쓰레기 봉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경찰관들이 제복까지 입은 채 시위에 나서는가 하면, 재판 중인 범죄자들이 판사 파업으로 거리를 활보할 지경이었다. 나라가 망하든 말든 ‘복지의 파티’를 멈추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때 만난 아테네 상공회의소 간부의 자조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포퓰리즘을 ‘탱고 춤’에 비유했다. 처음 국민을 꼬드긴 것은 좌파 정치가였다. 하지만 이내 국민도 공범이 됐다. 탱고의 달콤함에 취한 그리스 국민은 선거 때마다 나랏돈 퍼주는 정치인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그렇게 정치와 국민이 서로 부둥켜안고 망국(亡國)의 춤판을 벌였다. 그 간부는 “탱고는 혼자 출 수 없다”고 했다. 포퓰리즘의 악마성을 이처럼 정확히 짚은 말을 나는 알지 못한다.

 

포퓰리즘 정치는 마약 메커니즘과 다르지 않다. 본질은 중독성이다. 선심성 복지로 국민을 유혹해 국가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일단 중독만 시켜 놓으면 선거 승리는 식은 죽 먹기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경제가 침체될수록 선거 공학적 효과는 커진다. 먹고살기 힘들어야 국민이 더 포퓰리즘에 안달하게 되니까.

 

‘남미의 역설’이라는 현상이 있다. 경제를 황폐화시키고 재정을 거덜 낸 포퓰리즘 정당이 선거만 하면 승리하는 기현상이다. 베네수엘라는 수많은 국민이 끼니조차 못 때우는 실패 국가로 전락했지만 여전히 좌파 정권이 집권 중이다. 아르헨티나 역시 복지 축소의 ‘금단 증세’를 못 참은 유권자들이 좌파 포퓰리스트에게 또 정권을 안겨 주었다. 마약중독자가 마약상에게 매달리듯, 국민이 생활고에 시달릴수록 자신을 그런 처지에 몰아넣은 포퓰리즘 정치에 손을 벌리고 있다.

 

한국의 운동권 좌파도 남미 모델을 벤치마킹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재인 정권의 국정이 그랬다. 국민의 경제적 자립을 막으려 작정이라도 한 듯한 정책이 4년 내내 펼쳐졌다. 듣도 보도 못한 ‘소득 주도 성장’을 내세워 일자리를 줄이고 빈곤층을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국민 살림살이를 곤궁하게 해놓고는 세금으로 일자리 만들고 지갑도 채워주겠다고 했다. 서민은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집값을 올려 놓고는 정부가 제공하는 공공·임대주택에 들어와 살라고 했다. 어떤 정권 핵심은 ‘자기 집이 없어야 좌파에 투표한다’는 취지의 글을 썼다. 이게 본심일 것이다.

 

여당 안에선 ‘20년 정권’이니 ‘장기 집권’이니 하는 얘기가 무성했다. 자신도 있었을 것이다. 국민을 세금 퍼주기에 중독시키면 게임 끝이니까. 작년 총선은 정권 구상대로 굴러간 선거였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약속하고 지역마다 대규모 토건 사업을 공약했다. 선거 이틀 전엔 아동수당 1조원까지 뿌린 끝에 유례없는 압승을 거두었다. 퍼주기 매표(買票)라는 불패 카드를 손에 쥔 듯했다.

 

그리고 이번 대선에도 똑같은 전략을 들고나왔다. 이재명 후보는 월 수십만 원의 기본 소득이며 기본 주택, 기본 대출을 주겠다는 공약을 걸었다. “나라 곳간이 꽉꽉 채워지고 있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들고나왔다. 음식점 총량제, 주 4일제, 가상 화폐 과세 연기처럼 대중 입맛에 맞는 공약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국토보유세로 온 국민을 90 대 10으로 편 가르는 갈라치기 기술도 펼쳤다. 전형적 포퓰리스트 수법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퍼주기 선물을 마냥 즐기는 줄 알았던 국민이 놀랍게도 “노(No)”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봄 서울시장 선거에선 1인당 10만원씩 위로금을 주겠다는 여당 후보가 낙선했다. 부산에선 ‘가덕도 신공항’에 올인한 민주당 후보가 떨어졌다. 퍼주기 전략이 먹히지 않은 것이다. 여당이 ‘세금 납부 연기’라는 초유의 꼼수까지 쓰면서 밀어붙인 전 국민 재난지원금은 반대 여론이 60%를 넘어섰다. 급기야 이재명 후보도 전 국민 지원금 주장을 철회하고 말았다. 좌파의 필승 공식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드디어 국민이 정신 차리고 포퓰리즘에 퇴장 신호를 보낸 것일까. 더 두고 볼 일이지만 적어도 우리 국민은 그리스·남미 국민보다 현명하다. 복수의 여론조사에서 ‘기본 소득’ 반대 의견이 65%에 달했고, 국토보유세에 대해선 55%가 ‘부적절하다’고 응답했다. 67%가 ‘분배’보다 ‘성장’이 중요하다고 답했다는 조사도 있었다. 국민이 ‘노’하는 순간 포퓰리즘 좌파의 장기 집권 구상은 뿌리부터 무너진다. 국민을 중독시켜 손쉽게 정권을 먹으려 하지 말고 다른 길을 알아봐야 할 것이다.

 

12.17 吳 시장은 왜 세운상가에 올라 ‘분노의 눈물’ 흘렸나

이념으로 폭주하는
운동권 정권이 바뀔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왜 대다수 국민이
정권 교체를 바라는지,
서울시의 오늘이
예고편처럼 보여주고 있다

▲ 1968년 준공 직후의 세운상가.

 

변방을 떠돌던 야인 시절, 오세훈 서울시장은 세운상가 앞을 지날 때마다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그는 시장에 첫 당선됐던 2006년, 세운상가군(群) 건물을 철거해 녹지화하는 계획을 세웠다. 주변 지역과 통합 개발해 종로에서 남산까지를 녹지 벨트로 잇는다는 도심 재창조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무상 급식 논란 끝에 그가 물러나고 박원순 시장이 당선되면서 계획이 뒤집혔다. 낡은 건물을 ‘보존’하는, 이른바 도시 재생 방식으로 전면 수정된 것이다.

 

개발 사업이 중단되면서 지은 지 50년 넘은 건물들은 흉물로 변해갔다. 주변 일대는 눈뜨고 보기 힘들 만큼 슬럼화가 진행됐다. 박 시장은 1000억원을 들여 건물들 사이로 공중 보행로까지 설치했다. 철거를 못하게 대못 박은 것이었다. 10년이 지난 뒤 오 시장이 다시 시정(市政)을 이어받았다. 그는 지난 가을 세운상가 옥상에 올라 폐허 같은 광경을 둘러보고는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박원순 시정은 ‘보존 지상주의’에 빠져 도심 쇠락을 방치했다. 그 사이 서울의 도시 경쟁력은 10위에서 17위로 추락했다. 그렇게 10년 세월을 허비한 전임자의 무책임에 대한 분노였을 것이다.

 

대못은 시정 곳곳에 박혀 있었다. 오 시장은 서울시가 시민단체의 자금줄로 전락한 사실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매년 1000억원 규모의 시 예산이 보조금이며 위탁금 명목으로 시민단체들에 지원되고 있었다. 제대로 된 타당성 심사나 검증도 없었다. 시민단체가 신청하면 사실상 자동 지급되는 시스템이 제도화되어 있었다. 그렇게 서울시에 줄을 댄 등록 시민단체가 2300개에 달했다. 인건비와 운영비 태반을 서울시에 의존하는 단체들이 수두룩했다. 오 시장은 이를 ‘현금인출기(ATM)’에 비유했다. 과장이 아니었다.

 

M사단법인이라는 마을 공동체 사업 단체가 있다. 박원순 시장 당선 이듬해 세워진 이 단체는 설립 4개월 뒤부터 서울시 지원을 받기 시작됐다. 마치 시가 돈 대줄 것을 알고 설립한 것 같았다. 이후 10년간 M법인이 지원받은 액수는 626억원에 달한다. 절반 이상이 임직원 인건비였다. 더 기막힌 것은 M법인의 사무국장 등이 이 사업을 담당하는 서울시 과장급으로 채용된 것이었다. 시민단체 사람이 공무원 자리에 들어앉아 자기가 몸담았던 단체에 예산 배정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돈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사실상 동일인이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말이 어울렸다.

 

다른 영역도 다르지 않았다. 박원순의 서울시는 ‘OO센터’라는 이름의 중개소 조직을 만들어 시민단체 업무를 위탁했다. 그런데 ‘OO센터’ 직원 대부분이 시민단체 출신이었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중개소에 들어가 자기가 일했던 단체에 돈을 주는 식이었다. 사업 공고를 낼 때부터 특정 단체를 전제로 한 규정을 만들거나, 시 내부 회의에 참여하는 단체를 사업자로 선정하는 등의 ‘내부 거래’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공정한 사업성 평가나 관리·감독이 이루어질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니 세금 쓴 만큼 효과가 나올 리 없었다. 사회 주택 사업은 3500억원이 투입됐지만 공급 실적은 목표의 25%에 불과했다. 베란다 태양광 사업체 14곳은 118억원을 지원받고 3년도 안 돼 폐업해 ‘먹튀’ 논란을 불렀다. 61억원이 들어간 마을 생태계 사업은 요리·파티 같은 취미 활동의 밥값으로 쓰이는 게 고작이었다. 10년간 1조원이 시민단체와 관련 사업체에 투입됐지만 서울 시민들은 효과를 체감하지 못한다. 세금으로 시민단체 월급 주고 활동비 대 준 셈이 됐다.

 

오 시장은 내년 예산안에서 시민단체 지원금을 절반으로 잘라냈다. 정치적 편항성 논란을 빚은 TBS 출연금은 33% 삭감했다. 그러자 거센 반발이 일었다. 시민단체들이 연대 기구를 결성해 ‘반(反)오세훈 투쟁’을 선언했다. 여기에 이름 올린 단체가 1090개에 달했다. 서울시에 뿌리 박은 기득권 먹이사슬이 얼마나 광범위한지를 보여주는 숫자였다.

 

서울 시의회 의석의 90%를 차지한 민주당은 ‘오세훈표 예산’을 난도질했다. 예산안 심의에서 오 시장이 추진한 중점 사업비를 모조리 ‘0원’으로 삭감했다. 반면 시민단체 지원금은 원래대로 전액 부활시켰다. TBS 출연금은 도리어 13억원 증액까지 시켜 놓았다. ‘여소야대’의 쓴맛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서울시는 이념 폭주하는 운동권 권력이 교체됐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비정상의 정상화다. ‘시민단체’를 ‘586 운동권’으로, ‘보존 집착’을 ‘부동산 아집’이나 ‘탈원전’으로 바꿔 쓰면 문재인 정권도 다르지 않다. 왜 절대다수 국민이 정권 교체를 바라는지, 서울시의 오늘이 예고편처럼 보여주고 있다.◎

 

박정훈 칼럼  조선알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