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 2021-12/ 문화일보
12월 01일(수) ‘메타버스 정치’ 명암

박민 논설위원
핫이슈인 메타버스와 관련, 최근 인터넷에서 관심을 끄는 글이 있다. 트위트에 올라온 글의 핵심 주장은 ‘메타버스는 공간이 아니라 시점’이라는 것이다. Meta(초월적인) + Universe(우주)의 의미를 보면, 메타버스는 공간이다. ‘시점’이란 주장의 출발은 ‘특이점’이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을 뛰어넘는 시점을 의미한다. 현실 세계에서 전개되는 인생의 모든 중요한 부분이 디지털 세계로 이동하다 마침내 디지털 일상의 비중이 더 커지는 시점, 즉 메타버스의 특이점이 바로 메타버스가 시작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현실 세계 속 일상의 비중은 TV로 80%, 컴퓨터로 70%, 스마트폰으로 50%까지 축소됐다.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 가상 인생이 실제 인생보다 중요해질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가상과 현실의 구분은 무의미해지고 자아는 여러 개로 분리된다. 원형이 중심이던 시대가 가면 단일의 가상 세계 대신 다양한 세계, 즉 Multi-Universe의 시대가 온다. 산업 측면에서는 투자와 성장과 이윤의 공간이 무한대로 확대된다. 페이스북이 사명을 ‘메타’로 바꾸고 마이크로소프트와 엔비디아가 메타버스 플랫폼과 비전을 발표한 것도 이 때문이다.
변화 적응 속도가 늦은 정치도 메타버스에 진입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은 메타버스인 ‘모여봐요 동물의 숲’에 캠페인 사무실과 투표소가 있는 2개의 섬을 만들어 선거운동을 했다. 한국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메타버스 플랫폼인 ‘제페토’에서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김두관, 박용진 후보와 국민의힘 원희룡 후보 등이 기자회견이나 출정식, 팬미팅 등을 했다. 지난 11월 20일에는 제페토에서 ‘제1대 아동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구리시 인창중 2학년 이채원 군이 67.2%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48명의 후보가 등록해 아바타로 선거운동을 했다.
그러나 정치에서 메타버스는 파괴적 도전이다. 국가의 권위는 흔들리고 선거, 정당 등은 근본적 변화를 겪을 수 있다. 가짜 뉴스와 여론 조작, 확증 편향 등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SNS의 부작용이 심해질 수 있다. 현실 세계에서는 다른 정파들이 함께 살 수밖에 없지만 메타버스에서는 자기가 만든 공간에서 생각이 같은 사람들만 모여 소통하는 등 폐쇄성이 더욱 강해지기 때문이다.
12월 02일 김은선의 ‘라보엠’

이미숙 논설위원
오페라 공연이 계절을 타지는 않지만, 특별히 추운 겨울에 어울리는 작품이 있다. 바로 자코모 푸치니의 ‘라보엠’인데, 1막에서 주인공 로돌포가 부르는 아리아 ‘그대의 찬 손’과 미미의 아리아 ‘내 이름은 미미’는 난로조차 없는 불 꺼진 파리의 다락방에서 처음 잡은 손의 온기를 느끼며 운명적 사랑에 빠지는 가난한 연인의 이미지를 절묘하게 그리고 있다. 파리 시민들이 카페 모무스에서 즐기는 성탄전야 파티를 다룬 2막도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어울린다.
‘라보엠’은 이탈리아 작곡가 푸치니가 38세 때 작곡한 작품으로, 1896년 토리노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지휘로 초연된 이후 세계적으로 많이 공연되는 작품 중 하나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는 19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가난한 예술가들의 삶과 사랑을 그린 ‘라보엠’의 무대를 20세기 뉴욕으로 옮기고 음악도 발랄하고 신나는 록으로 개작한 조나단 라슨의 뮤지컬 ‘렌트’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만큼 ‘라보엠’에 대한 사랑은 시공을 초월한다. ‘라보엠’은 주세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와 더불어 스타 성악가의 탄생을 알리는 작품으로 통한다.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가 최고의 로돌포, 최고의 미미로 불렸던 것도 그런 이유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1년 반 이상 공연을 멈췄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올겨울 시즌에 ‘라보엠’을 무대에 올렸다. 그런데 올해 음악 팬의 관심은 로돌포 역의 찰스 카스트로노보나 미미 역의 아니타 하티그가 아니라 지휘자 김은선(41) 씨에게 집중됐다. 지난해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한 그녀의 뉴욕 데뷔 무대라는 점을 감안해도 지휘자에게 관심이 쏠린 것은 이례적이다. 뉴욕타임스는 공연 평에서 “마에스트로가 라보엠의 서정미를 섬세하게 감각적으로 표현해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했다. 오케스트라를 긴장감 있게 이끌면서도 성악가들이 기량을 맘껏 발휘하도록 배려하는 김은선의 부드러운 카리스마에 대한 격찬인 것이다. 워싱턴DC에서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 시카고에서 ‘라 트라비아타’로 데뷔한 데 이어, ‘라보엠’으로 지난달 9일부터 뉴요커를 사로잡은 그녀의 공연은 3일 막을 내린다. 오페라 지휘계의 스타 탄생이다.
12월 03일 밀실정치와 중계방송 정치

이현종 논설위원
‘88만 원 세대’의 저자인 우석훈 성결대 교수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등장에 대해 ‘멀쩡한 보수 1세대’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무능해 보이는 586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와 멀쩡한 보수 현상이 이준석 돌풍의 원인이 아닌가 싶다”고 진단했다. 이 대표의 등장은 보수 정치권을 넘어 한국 정치의 충격이자 기대감을 잔뜩 부풀렸다.
그러나 취임 6개월이 지난 지금 ‘이준석 리스크’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대표 경선 당시 나경원 전 의원이 언론 인터뷰에서 “이준석 전 최고위원의 공격적 태도는 대선에서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했던 말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그동안은 36세 젊은 당 대표의 독특한 정치 행태라고 이해하는 기류도 있었지만, 최근 ‘잠행 사태’에서 보여준 그의 행동은 ‘신(新)구태’로 규정된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후보나 당의 지지율이 떨어지든 말든, 정권교체를 이루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는 발상으로 비친다.
3김 시대에 정치권 취재는 무척 어려웠다. 물밑 흐름을 취재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실세 정치인을 따라다녀야 했다. 공론의 장에서 결정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스와 소수 측근이 좌지우지했기 때문이다. 이런 밀실·안방 정치 행태는 조금씩 개선됐지만, 이 대표 취임 이후에 정반대의 역효과가 나타났다. 이 대표가 매일 인터뷰를 통해 시시콜콜한 내부 얘기를 다 푼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SNS에 글을 올린다. 지난달 29일 초선 의원들과 과음을 한 상태에서 페이스북에 ‘그렇다면 여기까지입니다’라는 글을 올리고 휴대전화를 끈 채 잠적했다. ‘중계방송 식 정치’의 단면이다. 정작 동료 정치인들과는 소통하지 않고 방송과 SNS가 놀이터가 됐다.
이 대표는 ‘날 공격하면 두 배로 갚는다’를 실천하는 것 같다. 부산의 장제원 의원 지구당 사무실을 방문해 10분 정도 체류하면서 사무실 직원들과 얘기하고, 장 의원 사진을 배경으로 활짝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자신을 비판해오던 장 의원을 겨냥한 듯하다. 권성동 사무총장이, 자신이 없는 지구당 사무실에서 찍은 사진을 공개한 데 대한 앙금으로 장 의원 사무실에서 사진을 찍고 공개했을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그러나 이 대표의 행태가 청년 정치의 실패가 돼선 안 된다.
12월 06일(월) 침대에 키 맞추는 文정부

이신우 논설고문
지옥으로 가는 길은 대부분 선의(善意)로 포장돼 있다. 문재인 정부는 취임 첫해부터 저임금 근로자를 위한다면서 최저임금 과속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실직(失職) 공포’다. 내년 한 해 동안 중소기업들을 중심으로 약 13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것이 중소기업중앙회의 추산이다. 아르바이트 일자리의 주요 공급처였던 편의점들조차 무인점포로 대응하는 중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도 문 정부의 대표 브랜드다. 그럼 그 결과는? 공기업 신규 채용이 반 토막 났을 뿐이다.
주 52시간제 역시 전철을 밟는 중이다. 물론 직원 평균 연봉이 8000만 원 이상 되는 대기업 근로자들은 누구 말대로 ‘저녁 있는 삶’을 즐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9988’ 국내 기업 중 99%는 중소기업이고, 88%의 노동자는 중소기업에 적을 두고 있다. 자영업까지 합하면 절대다수의 인구가 이 분야 종사자들이다. 이들은 할 수만 있다면 좀 더 일을 하더라도 좀 더 많은 임금을 받기를 원한다. 52시간제로 당장 실질임금 감소를 겪게 된 이들은 얇아진 월급봉투를 다시 채우기 위해 또 다른 일터를 찾아 헤매느라 아예 ‘저녁 없는 삶’을 강요당하고 있다.
저임 노동자만이 아니다. 전형적 화이트칼라인 한국은행 직원들에게도 52시간제는 골치 아픈 존재다. 지난해부터 한은의 경제전망 발표가 한 달 반씩 미뤄졌다. 과거에는 월초에 경제 관련 통계가 나오면 평일 야근과 주말 출근으로 경제전망을 기간 내에 완성했지만, 획일적인 시간 규제가 국가 경제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경제전망까지 비틀어버린 것이다. 연구·개발(R&D)·신산업 창업 등의 두뇌 활동은 유연한 노동시간이 필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주 120시간 근무’ 발언은 결코 틀린 게 아니다. 쉴 때 푹 쉬더라도 일할 수 있을 때 바짝 하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윤 후보가 지난달 30일 52시간제를 탁상공론이라고 비판하면서 비현실적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공약했다. 52시간제는 전형적인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다. 이 침대는 손님의 키가 맞지 않으면 다리를 잘라버리거나 잡아 늘여 버린다. 왜 세상 모든 사람이 침대의 크기에 자신을 맞춰야 하는가.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침대에서 잘 권리가 있다.
12월 07일 둘다섯 ‘밤배’

김종호 논설고문
맑은 하늘에서 찬란한 햇빛이 내리쬐는 낮이든, 휘영청 밝은 달빛이 내려앉는 밤이든 고즈넉한 바다의 윤슬은 환상적이다. 인적이 드물어져 쓸쓸하고 황량한 정취를 자아내는 겨울 밤바다는 더 그렇다. 물결이 잔잔하고, 고운 모래가 2㎞에 걸쳐 반원형으로 오목하게 펼쳐진 경남 남해군의 상주해수욕장에 ‘밤배’ 노래비가 2008년 서게 된 것도 이런 풍경이 배경이다. ‘검은빛 바다 위를 밤배 저 밤배/ 무섭지도 않은가 봐 한없이 흘러가네/ 밤하늘 잔별들이 아롱져 비칠 때면/ 작은 노를 저어 저어 은하수 건너가네/ 끝없이 끝없이 자꾸만 가면/ 어디서 어디서 잠들 텐가/ 볼 사람 찾는 이 없는 조그만 밤배야’ 하는 ‘밤배’는 남성 포크 듀엣 둘다섯의 감미로운 화음이 돋보이는 대표곡이다. 시적인 가사도, 서정적인 멜로디도 애잔하다.
이두진(69)은 동국대 재학생이던 1973년에, 휘문고·동국대 1년 후배인 오세복(1953∼2021)과 함께 각자의 성(姓)을 ‘둘’과 ‘다섯’으로 표현해 합친 이름의 듀엣을 결성했다. 그해에 남해안 최대인 상주해수욕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금산(錦山)의 보리암에 올랐다가 떠오른 시상(詩想)과 악상(樂想)이 어우러져 탄생한 곡이 ‘밤배’다. 1974년 데뷔 앨범에 담았다. ‘빗소리 들으면 떠오르는 모습/ 달처럼 탐스런 하얀 얼굴/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버린/ 긴 머리 소녀야/ 눈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조심조심 징검다리 건너던’ 하는 ‘긴 머리 소녀’(오세복 작사·작곡)도 수록곡 중의 하나다.
그 둘다섯은 1980년 해체했으나, 각자 따로 활동하기 전의 명곡도 많다. ‘물소리 까만 밤 반딧불 무리/ 그날이 생각나 눈감아 버렸다/ 검은 머리 아침이슬 흠뻑 받으며/ 아스라이 멀 때까지 달려가던 사람/ 나도 같이 따라가면 안 될 길인가’ 하는 ‘일기’도 그중 하나다. ‘눈이 큰 아이’는 이렇게 끝난다. ‘내 마음에 슬픔 어린 추억 있었지/ 청바지를 즐겨 입던 눈이 큰 아이/ 눈 내리는 밤길에는 두 손을 잡고/ 말없이 걷자 하던 눈이 큰 아이/ 내 마음에 슬픔 어린 추억 있었지/ 지금도 생각나는 눈이 큰 아이’. ‘먼 훗날’ ‘얼룩 고무신’ ‘밤의 연가’ 등도 있다. 오세복은 지난 8월 11일 병환으로 타계했지만, 여전히 활동하는 이두진이 신곡도 계속 내놓으면 더 좋겠다.
12월 08일 파고(Fargo)의 女경찰

이도운 논설위원
미국 중북부의 노스다코타 주. 동쪽으로 미네소타, 남쪽으로는 당연히 사우스다코타, 서쪽으로 몬태나 주, 북쪽으로는 캐나다와 맞닿아 있다. 농업이 주 산업인 노스다코타의 주도(州都)는 비즈마크이지만 인구가 가장 많은 경제·교육 중심지는 동남쪽에 자리잡은 파고(Fargo). 해운업자 윌리엄 파고의 이름에서 유래한 도시다.
1997년 개봉한 조엘 코언 감독의 영화 ‘파고’가 이 도시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1987년 파고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다. 빚에 쪼들린 자동차 세일즈맨이 돈 많은 장인으로부터 몸값을 뜯어내기 위해 아내를 납치하려 불량배들을 고용했다가 벌어진 사건이다. 이 흉악한 사건 수사를 맡게 된 동네 경찰서의 마지 군더슨. 한눈에 봐도 몸이 무겁다. 만삭인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군더슨 본인도 주저하지 않고, 주변의 누구도 수사를 말리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특히 군더슨이 범인들에게 가까워질수록 그녀가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군더슨은 꼼꼼한 수사를 통해 범인들을 궁지에 몬 뒤 결국 검거한다. 군더슨이 자중지란 끝에 혼자 남은 범인을 경찰차에 태우고 눈 덮인 노스다코타 국도를 달릴 때의 무심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군더슨을 연기한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코언 감독의 동생 에단은 각본상을 받았다. 코언 감독은 아카데미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칸 영화제·영국 아카데미·시카고 비평가 협회 감독상 등을 수상했다. 명장이라는 코언 형제가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다만, 파고를 보면서 흉악한 범인에게 총구를 겨누는 만삭 경찰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겨울이 되면 파고를 다시 보는 영화 팬이 많다고 한다.
최근 인천의 흉기 난동 현장에서 경찰이 이탈해 논란이 됐다. 특히 두 명의 경찰 가운데 한 명이 여성이었다는 점이 부각됐다. 경찰은 코로나 때문에 호신장비 사용 등 실전 연습을 하지 못했다며 뒤늦게 훈련을 한다고 법석을 떨었고, 그래도 여론이 가라앉지 않자 인천경찰청장이 사퇴했다. 여성 경찰이 문제였을까? 군군신신(君君臣臣) 부부자자(父父子子). 대통령, 장관, 경찰청장, 경찰관 모두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소홀히 한 결과다.
12월 09일 중국의 장성과 고대사 왜곡

문희수 논설위원
고대 중국의 장성은 전국시대 연(燕)나라(서기전 1046∼222년) 장성과 이후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의 진(秦)나라(서기전 221∼206년) 장성 두 개가 있다. 진나라 장성은 지금의 만리장성으로, 전국시대 때 연·조 등이 북쪽 국경에 쌓았던 성들을 보수해 연결한 것이다. 그래서 두 장성의 동쪽 끝은 같다는 게 윤내현 단국대 명예교수의 분석이다. 지금의 허베이(河北) 내 베이징(北京)·톈진(天津)에서 동쪽 바닷가 쪽으로 갈석산이란 곳이다. 현재 만리장성은 갈석산에서 약간 더 동쪽인 중국의 유서 깊은 관문인 산해관까지 이어져 있다.
역작 ‘고조선 연구’에서 ‘대(大)고조선’을 제시한 윤 교수는 연·진 장성은 당시 고조선의 서쪽 강역과 직결한다고 했다. 재야 학자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갈석산은 현지에선 진시황부터 당나라 태종까지 9명의 황제가 올랐다는 뜻의 ‘9등 황제산’으로 부른다고 설명했다. 이곳을 자신들의 제국 동쪽 끝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윤 교수와 이 소장은 서기전 12세기 무렵의 기자조선과 기자조선을 정복한 위만조선, 그 후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치고 설치했던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도 이 부근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고조선 관련 부분은 논란이 있다. 오래전 일을 입증할 사료가 없으니 그렇다. 그러나 중국이 수년 전부터 국정 교과서를 통해 춘추전국시대 장성이 한반도 서북쪽에 있었다고 가르친다니 어이가 없다. 장성의 동쪽 끝이 압록강·청천강이었다는 고대사 왜곡이다. 수 양제가 쳐들어왔다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대패해 결국 패망했는데도 고구려를 정벌했다고 거꾸로 쓰는 등 왜곡 사례가 수두룩하다. 바로 중국 정부의 역사 왜곡인 ‘동북공정’의 결과다. 이는 지성호 국민의힘 의원의 동북아역사재단 국정감사 자료로 또 확인됐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일제 식민사학과 궤를 같이한다. 조선총독부 시절 식민사학을 대표하는 한 일본인 학자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황해도 수안군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수안의 방원진 석성 유적이 만리장성 유적이라는 억지다. 더 놀라운 것은 국내 고대 사학계다. 식민사학이 실증사학이라며 비슷한 주장을 따라 한다. 그러니 동북공정을 반박하지도 못한다. 통절한 반성이 필요하다.
12월 10일 방역 흑역사

박민 논설위원
스페인 독감은 20세기 최악의 재난이다.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이던 1918년 봄에 발생해 1919년 봄까지 전 세계로 확산, 최소 2000만 명에서 최대 1억 명의 사망자를 냈다. 식민지 조선도 스페인 독감을 피해가지 못했다. 1918년 9월 러시아와 만주를 거쳐 한반도 북부로 유입된 스페인 독감은 순식간에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됐다. 1919년 3월 조선총독부 공식 집계 결과, 전체 인구 1705만여 명 중 755만여 명이 감염돼 14만여 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10년간 무단통치를 해온 조선총독부는 감염자와 사망자 집계에 급급했을 뿐 접경 지역 검역 등 기본적 방역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예방접종은 대유행이 끝나고 수개월이 지난 1920년 1월 시작됐다. 1921년까지는 마스크를 제작·보급했다는 기록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총독부는 대유행을 조선인의 위생관념과 생활 방식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대유행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일본군이 조선에 재배치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에 대한 조선인의 불신과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고 결국 3·1운동으로 이어졌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촉매 역할을 했지만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한 데는 스페인 독감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스페인 독감 100여 년 만에 코로나가 찾아왔다. 의학 기술과 위생·방역 체계는 눈부시게 진보했지만 교통·통신의 발달로 조성된 최고의 확산 환경과 변이를 거듭하는 바이러스 앞에 전문가와 정부조차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다양한 방역 대책이 실시되지만 정확한 의학적 근거는 없다. 만원 지하철과 거리제한을 준수하는 50인 결혼식이 공존한다. 식당 제한 인원 4명이 8명보다 얼마나 확산 속도를 늦추는지 정확하게 계산할 수도 없다.
그래서 방역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다. 국민의 일상과 방역 수위 간 조화를 이루는 정책적 판단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행착오는 불가피하다. 방역 선진국과 후진국이 종종 뒤바뀌는 이유다. 상수는 방역 조치에 협조하는 국민의 인식과 태도다. 따라서 정부가 ‘K-방역’이란 단어까지 만들어 자화자찬하는 것은 오만하고 민망한 일이다. 지나치면 작은 실수도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되고 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방역 잠재력을 훼손한다.
12월 13일(월) 대통령의 정보 파악 능력

이미숙 논설위원
미국의 대통령은 정보 당국의 브리핑을 받으며 하루 업무를 시작한다. 중앙정보국(CIA)이 맡았던 대통령 정보브리핑은 9·11테러 후 국가정보국(DNI)이 신설되면서 DNI 임무가 됐는데, 전 세계 주요 정세가 보고되며 1시간가량 진행된다. 최근 미 중앙정보국(CIA) 웹사이트에 올려진 책 ‘대통령 이해하기(Getting to Know The President)’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는 정보 당국을 가장 불신했고, 버락 오바마는 정보브리핑을 가장 잘 활용했으며 아이패드로도 브리핑을 읽었다고 한다. ‘대통령 이해하기’는 1996년 CIA연구센터에서 출간된 후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업데이트되는데 최근 트럼프 편이 추가된 제4 개정판이 공개됐다.
트럼프는 정보 브리핑을 받을 때 논점에서 벗어나기 일쑤였고 집중력은 8∼9분밖에 유지되지 않았다고 한다. DNI 전 국장 제임스 클래퍼에 따르면 트럼프는 리처드 닉슨만큼이나 정보 당국을 싫어했고, 팩트도 제멋대로 해석했다. 서면보고는 아예 거부해 늘 구두보고를 했다는데 1·6 의사당 난입사태 후엔 브리핑이 중단됐다. 트럼프 말기 국정이 리어왕 때처럼 엉망이 된 것은 정보 당국의 보고를 거부하며 ‘대안적 사실’에 집착한 데 원인이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후보도 정보브리핑을 받는다. 대선 후보 정보브리핑은 해리 트루먼의 지시로 처음 시작됐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공화당 후보는 1952년 대선 당시 안보 상황을 훤히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취임 후 시행착오 없이 6·25전쟁 휴전 및 미·소 냉전 관리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다. 오바마는 대선 6개월 전부터 후보들이 정보브리핑을 받을 수 있도록 행정명령을 만들어 2016년 대선 때부터 시행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보 당국으로부터 정례 브리핑을 받지 않는다. 국가정보원이 주요 정보를 수시로 청와대에 보고할 뿐이다. 대선 후보에게도 정보 브리핑은 제공되지 않는다. 국정원의 정치 개입 우려 때문에 대선 후보와의 접촉은 불온시된다. 대통령이 외교·안보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트럼프처럼 정보를 왜곡해 국정을 실패로 몰고 갈 가능성이 커진다. 요소수 사태에서 종전선언 외골수 추진에 이르기까지 문 정권 국정 난맥상의 원인은 정보와 객관적인 정세 무시에 있다.
12월 14일 영화 ‘메멘토’

이신우 논설고문
지난 2000년 세상에 나온 영화 ‘메멘토’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기억추적 스릴러 작품이다. 아내가 살해당한 후 10분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오로지 사진·메모·문신 등으로 남겨진 기록에만 의존해 범인을 쫓는다. 이 주인공은 기억을 살려내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영화와 반대로 기억의 단편조차 지워 내려 애쓰는 정치인이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다. 수많은 사람이 관련 증거를 들이대도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나는 모른다”거나 “기억에 없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지면 시작을 잊게 되지”라는 영화 속 대사와 흡사한 경우도 생긴다.
이 후보는 애초 “(성남시) 대장동 사업의 설계는 제가 한 것”이라고 자랑했다. 그러나 이 같은 언급이 배임 혐의로 연결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자 핵심 사항인 ‘초과이익 환수조항’에 대해 “건의를 받았는지 제안했는지를 제가 모른다”고 했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의 핵심 인물인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은 2010년 성남시장 선거 당시 선거대책본부 참모를 맡았고, 이후 인수위원으로 활동했다. 나중에는 경기관광공사 사장에 취임했다. 이런 유동규에 대해 그는 “측근이 아니다”라거나 “임명 과정을 모른다”고 했다.
이 후보는 애초 “(성남시) 대장동 사업의 설계는 제가 한 것”이라고 자랑했다. 그러나 이 같은 언급이 배임 혐의로 연결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자 핵심 사항인 ‘초과이익 환수조항’에 대해 “건의를 받았는지 제안했는지를 제가 모른다”고 했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의 핵심 인물인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은 2010년 성남시장 선거 당시 선거대책본부 참모를 맡았고, 이후 인수위원으로 활동했다. 나중에는 경기관광공사 사장에 취임했다. 이런 유동규에 대해 그는 “측근이 아니다”라거나 “임명 과정을 모른다”고 했다.
성남시장 재임 시 성남도공 사장은 황무성 씨였다. 황 사장은 임기 도중 물러났다. 외부 압박이 있었다는 보도다. 그런데 황 사장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주장했다. 지난 7월 경기도 교통연수원의 사무처장은 공무원으로서 이낙연 전 경선 후보를 비방한 이유로 문제가 됐다. 이 직책은 경기지사 임명직이다. 그런데도 이 후보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심지어 자신이 다녔던 경원대학(현 가천대)에 대해 “어디 이름도 잘 모르는 대학”이라고 했고, 조폭을 변호해놓고는 “조폭인 줄 몰랐다”고 한 적도 있다.
메멘토에서는 “화나는데 이유를 모른다, 죄책감이 들어도 이유를 모른다”는 대사가 나온다. 빠른 속도로 기억이 사라지는 바람에 감정을 유발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도 못 느끼나. 하지만 영화에는 이런 대사도 나온다. “눈을 감는다고 세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12월 15일 재명學

이현종 논설위원
“나는 톈안먼 광장 근거리에서 중국 공산당 총서기 시진핑(習近平)의 연설을 학습하고 경청할 수 있었고 무한한 영광을 느꼈다.” 중국의 한 대학 개학식에서 재학생 대표 연설자로 나선 여대생 펑린(馮琳)의 영상이 최근 중국 SNS에서 조회 수 1억3000만 건을 넘겼다고 한다. 여배우 같은 미모의 여대생이 시진핑과 공산당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하는 영상이 이렇게 엄청난 조회 수를 기록한 것은 시진핑 1인 지배가 더욱 강화되면서 학습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중국이나 북한에서 있을 법한 절대 권력자에 대한 우상화나 ‘배우기 운동’이 더불어민주당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성남시장 출신이라는 ‘변방’의 비주류인 이재명 후보가 당의 중심에 서자 그를 배우자는 움직임이 송영길 대표 주도로 퍼지고 있다. 송 대표는 지난달 29일 ‘릴레이 이재명 바로 알기 캠페인’을 공개 제안하면서 이 후보 자서전 ‘인간 이재명’ 등 5권을 책상 위에 놓고 메모하며 읽는 모습을 SNS에 올렸다. 출장길에도 KTX 안에서 책 5권을 읽는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1990년대 대학가를 휩쓴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을 연상시킨다. 당 차원에서도 교육용 자료를 배포했다.
이런 ‘재명학(在明學)’ 열풍에 정청래 의원이 독후감을 SNS에 올리며 호응하고 나섰다. 그는 13일 페이스북에 ‘인간 이재명을 읽고’라는 글에서 “인간 이재명 책을 단숨에 읽었다. 이토록 처절한 서사가 있을까? 이토록 극적인 반전의 드라마가 또 있을까? 유능한 소설가라도 이 같은 삶을 엮어낼 수 있을까?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면서 인간 이재명과 심리적 일체감을 느끼며 아니 흐느끼며 읽었다”고 했다.
송 대표나 정 의원은 모두 586 운동권의 대표적인 인사들이다. 당시 학생운동권에 NL 주사파가 휩쓸고 있을 때 입문서로 ‘수령론’은 필독서였다. 주체사상의 핵심인 수령론은 불멸의 수령에게 충성을 다 바쳐야 한다는 것인데, 당시 운동권은 같은 학번이라도 지위가 높으면 존댓말을 하고 떠받들었다. 이들에게 ‘재명학’은 수령론처럼 어쩌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이 후보가 매일 말을 바꾸는 바람에 따라가기 어렵다는 의원도 많다. 재명학 이전에 ‘진짜 이재명’부터 알아야 하지 않을까.
12월 16일 ‘샤워실 바보’ 물가 대책

문희수 논설위원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이 갈팡질팡한다. 내년 재정 지출도 크게 늘려 사상 최대인 607조7000억 원의 초 슈퍼예산을 짜놓고는 급등하는 물가 관리가 비상이라며 내년 초 공공요금 동결 등 대책 마련에 부산하다. 내년 세출예산의 73%를 상반기에 조기 집행하기로 확정했던 게 바로 지난 8일이다. 물가를 잡겠다면서 나랏돈을 대량 푸는 역주행을 하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오는 20일쯤 발표할 내년 경제정책 방향에서 소비자물가 상승률 관리 목표치를 2%대로 올릴 것이라고 한다. 한국은행의 물가안정 목표치(2.0%)를 넘는 관리 목표치가 설정되기는 지난 2016년 이후 처음이다. 그만큼 물가관리가 비상이라는 얘기다. 기재부는 내년 상반기까지 전기·가스 등 공공요금 동결을 적극 검토 중이다. 지하철·시내버스·택시 등 대중교통 요금, 상하수도 요금, 종량제 봉투 요금까지 지방자치단체가 결정하는 공공요금 인상도 최대한 억제할 모양이다. 사실 고물가가 심상치 않다. 국제 원자재 가격 급등, 글로벌 공급망 차질 등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0월 3.2%, 11월 3.7%에 이어 이달 역시 오미크론 변이 등으로 급등할 전망이다. 특히 서민 생활에 직결하는 식탁 물가 상승률은 지난 3분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네 번째로 높았다. 4분기도 상위권에 들 게 분명하다.
문 정부의 대응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당초 하반기 물가는 안정될 것이라고 큰소리쳤고, 그 후엔 물가가 급등하는 데도 경제를 살리려면 내년 역시 대규모 재정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주장하더니 이젠 물가관리 비상을 외친다. 그러면서 거꾸로 나랏돈을 내년 초부터 풀기에 여념이 없다. 똑같은 기재부인데도 정책의 방향이 제각각이다. 뜨거운 물과 찬물을 번갈아 틀기 바쁜 ‘샤워실의 바보’도 비웃을 일이다. 더구나 여당은 국민의힘이 주장하는 자영업자 지원금 공약을 물타기 하면서 방역 실패 책임 추궁을 회피하려고 벌써 내년 초 100조 원 추경안을 거론하고 있다. 대선용 돈 풀기가 근원이다. 좌고우면하며 상충하는 대책들을 연일 쏟아낸다. 고물가의 역습이 벌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는 사이에 고물가 속 저성장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는 점점 커진다. 민생은 갈수록 고달파져 간다.
12월 17일 장애자, 장애인, 장애우

이도운 논설위원
장애를 가진 사람을 정부가 처음 공식 규정한 것은 1981년으로 볼 수 있다. 그해 유엔의 권고에 따라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제정되면서 장애자라는 호칭이 통용됐다. 장애자는 노동자, 교육자, 환자 등과 마찬가지로 장애에 한자 접미사 ‘놈 자(者)’를 붙인 일본식 표현이다. 장애자의 어감이 좋지 않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1987년 관련법을 ‘장애인복지법’으로 바꿨고, 이때부터 장애인이라는 용어가 통용됐다.
필자는 2000년을 전후해 장애인 단체로부터 두 번 연락을 받았다. 한 번은 보도자료에 나온 장애자 표현을 무심코 따라 썼는데, “장애우라고 표현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장애인이라는 표현이라도 써달라”고 했다. 또 한 번은 언론사 축구대회에서 무릎을 다쳤던 경험을 ‘열흘간의 장애인 체험’이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썼는데, 역시 단체에서 “장애우라는 표현도 써달라”고 전해온 것이다.
장애우는 ‘벗 우(友)’ 자를 붙여서 좀 더 친근하게 부르는 말. 장애인이 사회에서 격리되지 않고 함께 살아야 하는 이웃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그런데 장애인이 스스로를 벗이라 지칭하기도, 또 연장자를 벗으로 부르기도 민망한 측면 등이 있었다고 한다. 또 장애인의 주체성을 저해하는 동정적·시혜적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이에 보건복지부가 2015년에 장애자, 장애우 아닌 장애인으로 통일해 부르자는 캠페인을 시작했다고 한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 13일 당 중앙선대위 장애인복지지원본부 출정식에서 ‘장애우’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해 여권의 비판을 받았다.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선대위 대변인은 “장애인과 가족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망언”이라고 했고, 오현주 정의당 대변인은 “장애인을 향한 우월 의식과 시혜적 시선을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갑자기 영하 7도까지 떨어진 추운 날씨에 실외 행사에 참가한 장애인들에게 ‘친근감’을 표현한 것이 이렇게까지 비판을 받을 일인가.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2017년 3월 취약층 공약을 제시하면서 장애우라고 썼고,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도 전국장애인위원회 출범식 축사에서 같은 표현을 했다. 두 사람도 우월 의식을 과시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존중의 마음을 담아 장애우라고 불렀을 것이다.
12월 20일 포크 가수 남궁옥분

김종호 논설고문
‘흘러가는 하얀 구름 벗을 삼아서/ 한없는 그리움을 지우오리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 꺼지지 않는/ 작은 불꽃 피우오리다’. 너무 상큼하고 낭랑해서 슬픔도 밴 듯한 목소리의 포크 가수 남궁옥분(63)이 1983년 발표한 ‘나의 사랑 그대 곁으로’ 시작 부분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히트곡으로, ‘어디선가 들려오는 그대 목소리/ 살며시 손짓하며 나를 부르네/ 나의 마음 꿈길 따라 찾아가리라/나의 사랑 그대 곁으로’하고 끝난다. 김승덕이 작사·작곡했다. 세월을 뛰어넘은 생명력의 남궁옥분 명곡은 이 밖에도 많다. ‘알게 될 거야’ 등이 담긴 1979년 제1집 음반으로 공식 데뷔한 그가 1981년 발표해 일약 스타 반열에 오른 박동률 작사·작곡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도 대표적이다. ‘때로는 당신 생각에/ 잠 못 이룬 적도 있었지/ 기울어 가는 둥근 달을 보며/ 타는 가슴 남몰래 달랬지’ 하고 시작하는, 그해 ‘대학생들이 뽑은 노래 1위’였다.
그는 고등학생이던 1975년 포크동아리 ‘참새를 태운 잠수함’에 참여하며, 화가이던 꿈을 가수로 바꿨다. 당시 DJ 이종환이 운영하며 포크 가수 등용문 역할을 하던 서울 명동 음악살롱 쉘부르의 노래경연대회에서, 그는 세 번째 도전한 1977년 우승해 상금 3만 원도 받았다. 이종환은 ‘얼굴이 못생겼다’며 공연엔 나서지 못하게 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노래와 기타 연주 연습에 매달려 역량을 더 키웠다. 결국 이종환은 그를 쉘부르 무대에 세웠다. 남궁옥분이 밝힌 일화다. 1982년엔 국민을 대상으로 한 어느 방송의 최고 인기 가수 선정 투표에서 남자는 조용필, 여자는 그가 1위였다. 1980년대엔 매일 그의 노래가 전국 도시마다 거리에 흘렀다. ‘호박꽃’ ‘네 마음은 바람인가 봐’ ‘눈부시게 맑은 날’ ‘설악산’ ‘재회’ 등.
‘꿈을 먹는 젊은이’(김중순 작사, 김호남 작곡)도 그중 하나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기에, 절망을 딛고 새해 ‘희망’을 품으며 따라 불러 봄 직하다. ‘타오르는 꿈을 안고 사는 젊은이여/ 우리 모두 같이 흥겨웁게 노래해요/ 푸른 나래 펴고 꿈을 먹는 젊은이여/ 성난 파도처럼 이 자리를 즐겨요/ 행복은 언제나 마음속에 있는 것/ 괴로움은 모두 저 강물에 버려요/ 사랑과 욕망도 모두 마셔버리고/ 내일을 위해서 젊음을 불태워요’ 하고.
12월 21일 2022 경제동맹과 脫중국

박민 논설위원
위드 코로나 정책의 실패로 연말연시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희망 속에 새해를 설계하기엔 코로나 확산 기세가 두렵다. 이 와중에 대한민국의 다음 5년을 책임지겠다는 대선 후보들은 비전을 제시하기는커녕 가족 비리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그러나 미래는 준비하는 사람의 몫이다.
서점에는 예년처럼 2022년 전망서가 서가를 점령하고 있다. 먼저 눈길을 끄는 건 ‘더 이코노미스트’의 2022 세계 대전망(The World Ahead, 지난해까지는 The World in)이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내년에도 코로나19 팬데믹이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세계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재택과 출근이 뒤섞인 하이브리드 체제에서 재택근무의 비중, 원격 근로 감시, 불평등 문제 등이 분출하면서 ‘노동의 미래’가 새로운 화두로 부상할 수 있다. 바이러스 없는 관광지를 겨냥한 여행 상품이 등장하고 우주 개발 경쟁은 더욱 뜨거워진다. 대형 플랫폼 크리에이터가 플랫폼을 구축하는 분산 네트워크도 활성화된다. 카이스트 미래전략연구센터가 펴낸 ‘미래전략 2022’는 슈퍼코로나바이러스, 블랙아웃(대정전), 하이브리드 전쟁, 핀테크와 암호화폐로 인한 금융 대변동 등을 우리 사회가 당면하게 될 X이벤트(극단적 사건)로 제시했다.
서울대 이근·중앙대 류덕현 교수 등의 ‘2022 한국경제 대전망’은 여전히 안미경중(安美經中: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프레임에 매여 있는 대선 후보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미국과 중국, 수출과 내수, 과감한 재정지출과 국가채무 통제의 3가지 딜레마 속에서 진퇴양난에 빠져 있던 한국경제는 새해에 합종연횡이란 새로운 흐름에 적응해야 한다. 2022년부터 세계 경제의 프레임은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에 기반한 생산의 저비용 효율화’에서 ‘미국과 중국 중심의 동맹형 GVC(글로벌 가치 사슬)’로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제조업 강국 한국은 한시적으로 미국 중심의 탈중국 GVC 구축에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반면 중국 중심의 제조업 GVC 구축이 완성되면 중국은 더 이상 한국의 시장이 아니다. 결국 한국 입장에선 중국보다 미국 등 서방이 더 중요한 합종연횡의 대상으로 재부상한다. 안미경중이란 진퇴양난의 탈출구로 ‘안미경미’를 검토해야 한다는 의미다.
12월 22일 ‘재인 앙투아네트’

이미숙 논설위원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선하고 바른 이미지 덕분에 록스타급 인기를 누린 정치인이지만,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듯한 행동이 몇 차례 공개되면서 실망을 줬다. 대표적인 게 지난 2013년 12월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추모식 때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헬레 토르닝슈미트 덴마크 총리와 활짝 웃으며 셀카를 찍는 모습이 취재진에 포착된 사진이다. 위대한 지도자의 별세를 기리는 엄숙한 자리에서 장난스레 농담을 하며 셀카를 찍는 행태를 보며 오바마가 저런 수준의 사람이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지난 8월엔 호화로운 환갑잔치에서 마스크도 끼지 않은 채 참석자들과 춤을 추는 동영상이 트위터에 공개되며 뭇매를 맞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5일 호주 방문 마지막 날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배경으로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와 부부동반으로 셀카를 찍는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려 논란이 되고 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SNS에 올린 글에서 “대통령의 소셜미디어에는 관광지 셀카가 아니라 코로나와 맞서 싸우는 의료진과 꿋꿋하게 버티는 국민의 영웅적 이야기가 올라가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러자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상대국 정상의 호의를 대통령 비난의 소재로 활용하는 것은 국익에 큰 손해를 끼친다”면서 오히려 야당의 외교 결례라고 응수했다. 국빈 방문국에서 상대 총리의 권유로 사진 한 장 찍은 것을 갖고 야당이 문제 삼는 것은 과도하다는 반박이다.
관광 명소에서 셀카를 찍을 수는 있다. 그러나 코로나 비상 상황에서 그런 사진을 공개한 것은 정치적 공감능력이 없다는 증거다. 문 대통령은 정상회견 때 모리슨 총리로부터 “자유와 안정을 위해 타협할 것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모욕적 훈수까지 들은 상황이다. 공식 석상에서 ‘뺨 맞은 것’은 뒤로한 채 따뜻한 환대 운운하며 사진을 올린 것은 오미크론 위기를 견디고 있는 국민 가슴에 염장 지르는 행위와 다름없다. 코로나 와중에 환갑 파티를 벌인 오바마를 향해 “버락 앙투아네트가 됐느냐”고 했던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의 화법을 빌리자면, 웃음을 머금은 시드니의 문 대통령은 ‘재인 앙투아네트’로 불릴 만하다. 위드 코로나 실패로 살얼음판을 걷는 국민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12월 23일 저무는 ‘영부인’ 시대

이현종 논설위원
영부인(令夫人)은 보통 지체 높은 사람의 부인을 3인칭으로 높여 부르는 말인데 법적으로는 ‘대통령 배우자’로 불린다. ‘대통령 등의 경호에 관한 법률’ 제4조의 경호 대상에 ‘대통령과 그 배우자’로 규정하고 있지만, 의무나 책임, 보수 등의 규정은 없다.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하고 미성년 자녀들이 청와대에서 생활하면서 대통령 부인을 영부인, 아들을 영식(令息), 딸을 영애(令愛)로 부르는 것이 국민에게 익숙해졌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영식·영애는 물론 영부인도 점점 사용하지 않는 추세다. 외국에서는 ‘퍼스트레이디(first lady)’로 통칭된다.
역대 대통령 12명 가운데 결혼을 하지 않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제외한 11명은 모두 기혼 남성이다. 이들 배우자 11명은 다양한 사회활동은 했지만,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의 부인 질 바이든 여사처럼 근무지로 출근하거나 특정 업무를 수행하며 임금 노동을 했던 영부인은 없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는 사회운동가로서 기생관광 반대, 원폭 피해자 지원 활동을 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는 결혼 전부터 여성·사회운동을 했던 운동가 출신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는 재임 중 새세대심장재단을 만들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퇴임 후 공금횡령 등으로 처음으로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는 한식세계화 운동을 주도했는데 부처를 동원하면서 문제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는 대통령 전용기를 이용해 인도를 방문해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펼쳤는데 적절성을 두고 논란이 된 바 있다.
역대 영부인들은 특정한 아이템을 잡아 ‘펫(pet) 프로젝트’를 가동했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는 재임 중 한 번도 공식 인터뷰를 하지 않는 등 철저히 내조에만 집중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부인 김건희 씨의 등판을 둘러싸고 논란을 빚는 가운데 윤 후보는 언론 인터뷰에서 “대통령 부인은 그냥 대통령의 가족에 불과하다. 대통령 부인에 대해 법 바깥의 지위를 관행화시키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2부속실을 폐지하겠다고도 했다. 영부인이라는 말도 쓰지 않겠다고 한다. 대선 전략도 가미됐겠지만, 기본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12월 24일 ‘낙수효과’는 있다

이신우 논설고문
경기도 이천시의 SK하이닉스 인근 상가 골목에 요즘 색다른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SK하이닉스의 올해 3분기 실적을 축하하는 내용이다. 해당 현수막에는 “SK하이닉스 11조8000억 원 매출 역대 최고기록, 임직원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문구가 담겨 있다. 가까운 길목의 LED 전광판에 쓰인 “상인회는 SK하이닉스를 언제나 응원합니다”라는 글귀를 봐서는 자축 광고도 아니다. 사실은 모두 이천상인연합회에서 직접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최운열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서강대 교수 시절 대기업 중심의 성장 논리를 폈던 경제학자다. 그랬던 그가 민주당 소속 의원이 되면서 대기업 법인세 인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내세웠던 논리가 평소의 주장과 정반대였다. 기업이 성장하면 일자리와 소득이 늘어난다는 이른바 ‘낙수효과’가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낙수효과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최 전 의원뿐이 아니었다. 지난 수년간 좌파 정치인이나 경제학자들은 하나같이 대기업 옹호를 뒷받침해왔던 낙수효과론이 정작 실증적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며 배척해왔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군산시와 시민들이 겪는 경제적 고통에 대해 좌파 경제학자나 정치인들은 일제히 침묵을 지켰다. 2017년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가 폐쇄된 데 이어 2018년 5월 한국GM 군산공장이 문을 닫았을 때였다. 회사와 회사를 지켰던 임직원들이 줄줄이 떠나면서 도시 인구는 줄고 상권은 일제히 얼어붙었으며, 부동산 가격은 하락했다. 2010년 미국 시애틀 시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현상이 발생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인 아마존이 이곳으로 본사를 옮기면서 시애틀에는 일자리 4만 개와 연간 바이어 등 방문객 23만 명, 전후방 산업효과로 인한 고용 창출 5만3000명, 연관 직간접 투자 380억 달러의 낙수효과가 발생했다. 당시 미국과 캐나다의 수십 개 도시가 아마존 본사를 유치하겠다며 전쟁을 벌인 이유다.
많은 좌파 경제학자의 주장과 달리 이천시나 시애틀처럼 많은 도시가 낙수효과가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이들 도시야말로 국가나 지방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은 기업이고, 일자리 역시 기업이 만든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12월 27일(월) 쟈니 리 ‘바보 사랑’

김종호 논설고문
‘긴 세월 차곡차곡 쌓인 그리움처럼/ 흰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밤/ 님 향한 내 가슴만 속절없이 속절없이 두근두근/ 그대는 아실까 모르실까’. 본명이 이영길인 원로가수 쟈니 리(83)가 지난 6월 발표한 신곡 ‘바보 사랑’ 일부다. 이영만 작사, 강유정 작곡이다. 그의 최대 히트곡은 서영은 작사, 백영진 작곡인 ‘뜨거운 안녕’이다. 1966년 첫 독집 음반에 담은 노래로, ‘또다시 말해 주오 사랑하고 있다고/ 별들이 나란히 손을 잡는 밤’ 하고 시작한다. 독일 출신 가수 니코가 1997년 ‘트로트 팝’ 앨범을 내면서, 영어 가사로 불러 ‘나 여기 있다’는 의미의 제목 ‘Here I am’으로 수록하기도 했다.
쟈니 리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중국 지린에서 연극배우인 중국인 아버지와 기생 출신의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유년기를 상하이에서 보냈다. 귀국해 평남 진남포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그를 데리고 다니기 어려웠던 처지의 어머니는 친정에 맡겼다. 6·25전쟁의 혼란 속에 가족과 생이별한 그는 부산으로 피란해 미군 장교에게 입양됐다. 1958년 상경해서 이듬해에 극단 쇼보트에 들어갔고, 1961년부터 독집 음반을 내기까지 미8군 무대에 섰다. 그의 또 다른 대표곡은 김민용 작사, 길옥윤 작곡인 ‘내일은 해가 뜬다’다. 첫 독집에 담았으나 주목받지 못한 채, 그 뒤로 다른 가수들이 ‘사노라면’ 제목으로 리메이크해 부른 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2004년 무렵까지는 ‘구전 민요’ ‘작자 미상(未詳)’ 등 엉뚱한 추측이 따라붙기도 했다. 1974년 돌연 미국으로 갔다가 2년 후 귀국했고, 1978년 다른 예명 이훈으로 재즈 음반을 냈으며, 1980년 하와이로 이민도 갔던 그의 복잡한 역정과 무관하지 않다. 결혼도 5번 했고.
2021년이 저물어가고 있다. 쟈니 리가 식도암 수술을 받고도 기적같이 목소리를 되찾기까지 보였던 불굴의 의지, 그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가수 활동을 하며 신곡까지 내놓은 진취적 자세 등을 새삼 되돌아보게도 하는 연말이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때도 올 테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행복하지 않던가’ 하고 시작해, ‘오손도손 속삭이는 밤이 있는 한/ 한숨일랑 걷어 치고 가슴을 쭉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하고 끝나는 그의 노래도 들으면서.
12월 28일 ‘검은 호랑이’ 해

이도운 논설위원
2022년 새해는 임인년(壬寅年)이다. 육십갑자의 서른아홉 번째 해에 해당한다. 천간(天干)인 임(壬)은 큰물·호수·바다, 검은색을 상징하고 지지(地支)인 인(寅)은 호랑이, 나무를 뜻한다. 따라서 임인년은 ‘검은 호랑이’의 해로 풀이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임인년에 발생한 가장 중요한 일은 서기력 채택과 ‘원’ 화폐 사용이다. 둘 다 1962년의 일이었다. 그해에 정부는 고려 시대 때부터 써왔던 단기력 대신 예수 그리스도 탄생을 기준으로 한 서양식 서기를 공식 사용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역사관을 따른다기보다는, 세계적 보편 단위를 따르는 근대화의 상징적 조치 가운데 하나였다. 단군력으로 따지면 내년은 4355년이다. 또 긴급통화조치법에 따라 ‘원’이 기존의 ‘환’을 대체해 통용되기 시작했고, 이후 한국은행법에 이를 명기했다. 국제표준화 화폐 코드는 KRW이고, 기호는 \으로 했다. 한자 표기는 없다. 처음에 원(圓)으로 표기하기도 했지만 이후 순수 한국말로 했다.
좀 더 과거로 가면 1722년에 임인옥사(壬寅獄事)가 발생했다. 소론의 김일경·목호룡 등이 임금을 죽이려는 역적이 있다며 정인증·김용택 등 60명을 고했고, 당시 임금이던 경종은 이들을 모두 잡아들여 처단했다. 조선시대 사화가 늘 그렇듯 경조에 이어 영조가 임금이 된 뒤에는 김일경·목호룡이 무고 혐의로 처형됐다.
세계사를 돌아보면 1842년에 제1차 아편전쟁이 끝났다.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 아니라 유럽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1902년에는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 쿠바는 400년에 이르는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지만, 미국의 보호국화가 진행됐다. 아이러니하게도 60년 뒤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해 전 세계가 제3차 대전, 핵전쟁 공포에 빠지기도 했다.
앞으로 시간이 지난 후에는 2022년 대통령 선거가 임인년의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3월 9일 대선과 함께 5개 지역구의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실시되고, 6월 1일에는 전국 광역 및 지방의 단체장과 의원 선거도 치러진다. 향후 대한민국의 국정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대선에 출마한 주요 후보 가운데 호랑이띠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다. 물론 띠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 수 없다.
12월 29일 中에 발목 잡힌 K배터리

문희수 논설위원
전기차 시대에 한국산 배터리(K-배터리)가 잘나간다. 그렇지만 앞길이 밝지만은 않다. 특히 중국산 원료·중간재에 대한 너무 높은 의존도가 ‘아킬레스건’이다.
현재 전기차 배터리는 한국이 주도하는 리튬이온 배터리가 주류다. 4대 핵심은 양극재·음극재·분리막·전해질이다. 양극재는 니켈·코발트·망간 같은 희토류를 섞어 만들고, 음극재는 흑연이나 실리콘으로 만든다. 중국이 이들 원료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게 문제다. 재료비 비중이 가장 큰 양극재는 중국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57%나 된다. 전해질은 71%, 음극재는 66%, 분리막은 54%다. 더구나 중국은 1차 가공 시장도 좌지우지한다. 사실상 중국 없이는 배터리를 만들 수 없는 구조다. 최근 삼성·LG 등이 배터리값을 10% 안팎 올렸거나 올릴 예정인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이 남미·아프리카 등에서 리튬·코발트·니켈 등을 싼값에 싹쓸이한 후 1차 가공품 값을 대폭 올린 여파다.
게다가 핵심 원료 가격도 급등세다. 리튬은 지난해보다 5배 이상 급등하며 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코발트값도 3년 만에 최고치다. 배터리값이 킬로와트시(kwh)당 100달러가 되면 전기차와 내연기관차 가격이 비슷해질 것이라고 한다. 배터리값은 2010년 1200달러에서 지난해 140달러까지 급락했지만, 내년에는 인상으로 반전해 100달러 시기가 당초 2024년보다 늦춰질 것으로 블룸버그 등은 전망한다.
K-배터리가 살려면 근본적으로 차세대 배터리로 가야 한다. 원자재 확보가 쉬운 나트륨이온 배터리, 전해질이 고체인 전고체 배터리 또는 그 중간단계인 반고체(젤) 배터리가 대안으로 개발 중이다. 일부 진전이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중국발 자원 리스크가 갈수록 심각하다. 주요 국가 간 자원전쟁이 치열하지만 한국은 밀려나 있다. 문재인 정권이 적폐로 몰아세우며 남의 일처럼 외면해 온 결과다. 문 정부는 지난 27일 희토류 등 핵심 품목 200개를 지정해 관리에 나선다며 뒤늦게 부산을 떨지만 이미 한참 늦었다. 게다가 중국을 추종하며 눈치만 살피니, 제2·제3의 요소수 사태가 터지지나 않을지 조마조마하다. 기업들만 동분서주하며 안간힘을 쓴다. 내년 출범할 정부마저 자원전쟁에서 밀리면 미래가 없다. 새 정부 할 일이 너무 많다.
12월 30일 ‘이석기와 백 년’과 文정부

박민 논설위원
지난 24일 대전 교도소 앞.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 가석방으로 출소하자 김재연 진보당 대선 후보 등 300여 명의 지지자가 ‘의원님과 함께 새로운 백 년을’ 등의 피켓을 들고 환호했다. 이 전 의원은 “말 몇 마디로 (저를) 감옥에 넣은 사람은 사면되고, 그 피해자는 가석방 형식으로 나와 통탄스럽다”고 말했다. 형법 제72조 1항은 ‘행상(하는 짓이나 태도)이 양호하여 뉘우침이 뚜렷한 때’를 가석방 요건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 의원에게서 뉘우침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전 의원은 재판에서도 혐의를 줄곧 부인했다. 더구나 이 전 의원은 2003년 반국가단체 활동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뒤 특별사면과 복권을 통해 선처를 받았다.
더 큰 문제는 가석방의 악영향이다. 8년여가 지나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이 전 의원의 내란 선동 혐의는 충격적이었다. 검찰에 따르면 RO(Revolutionary Organization:혁명 조직) 총책이던 이 전 의원은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하고 정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하자 ‘결정적 시기’가 임박한 것으로 판단하고 조직원들에게 ‘전쟁 대비 3대 지침’을 내렸다. 2013년 5월 12일에는 130여 명이 모인 비밀회합에서 ‘북한의 전쟁 상황 조성 시 이에 호응하기 위한 물질적-기술적 준비 체계’를 주문했다. 이어진 권역별 토론에서 평택 유류 저장고 파괴, 관문 전화국인 혜화전화국과 분당전화국 파괴, 장난감 총기의 살상용 개조 등이 논의됐다. ‘적과의 내통’ 계획이 서울 도심에서 논의된 것이다. 더구나 이를 주도한 사람은 현직 국회의원이었다. 항소심 재판부도 “헌법과 국회법에 따라야 할 국회의원의 주도 아래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해할 수 있는 내란선동죄를 저지른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뉘우침 없는 이 전 의원의 가석방은 위험한 시그널이 된다. 헌법에 보장된 양심, 언론, 집회·시위의 자유도 체제 전복 시도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흔들릴 수 있다. 이 의원은 과거의 행태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크다. ‘새로운 백 년’을 외친 지지자들은 기꺼이 동참할 것이다. 진보당이 제2의 통합진보당이 될 수 있고 차기 지방선거와 총선에서 제2, 제3의 이석기가 나올 수도 있다. 이 전 의원이 이미 출소했지만 가석방 문제를 다시 짚어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12월 31일(금) 방글라데시의 기적

이미숙 논설위원
세계 200여 개국 중 소득이나 인적 자원, 경제 취약성 등으로 유엔이 최빈국(LDC)으로 지정한 나라는 46개국이다. 유엔은 1971년 총회에서 LDC 기준을 정했는데 대부분 아프리카 국가들이고 아시아에는 네팔과 동티모르, 라오스, 미얀마, 방글라데시, 아프가니스탄, 예멘, 캄보디아, 부탄 등 9개국이 있다. 지난 50년간 세계적인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LDC 그룹엔 변화가 없었는데, 지난 11월 24일 유엔은 총회에서 방글라데시와 네팔, 라오스를 2026년 LDC에서 ‘졸업’ 시킨다는 놀라운 결의안을 채택했다. 아시아의 LDC 3개국이 자력으로 빈곤에서 벗어나는 기적을 이뤄낸 것이다.
세 나라 중 가장 극적인 나라는 인구가 1억6000만 명인 방글라데시다.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전쟁에서 300만 명이 희생되고 홍수에 콜레라까지 돌아 1971년 독립 때 ‘사지가 절단된 폐인과 같다’는 의미의 ‘바스켓 케이스(basket case)’로 불릴 정도였다. 비틀스 멤버인 조지 해리슨이 방글라데시를 돕기 위해 노래를 만들어 모금 캠페인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런 절망적 국가가 반세기 만에 경제 규모를 덴마크나 싱가포르 수준으로 키우며 LDC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미 공영라디오 npr에 따르면, 방글라데시는 국제 비정부기구(NGO)의 도움으로 어린이 및 여성들에 대한 교육 및 직업 훈련을 강화하면서 의류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이 결과 방글라데시 의류업은 수출의 80%를 차지하며 경제를 키우는 동력이 됐다.
동파키스탄으로 불리던 방글라데시는 독립 후 미래 세대 교육에 집중하며 경제성장에 매진해 국부를 키웠다. 지난 10년간 경제성장률은 평균 6.7%다. 반면 서파키스탄으로 불리던 파키스탄은 전쟁 후 핵 개발에 몰두하며 이슬람 원리주의에 따라 여성에 대한 교육도 방기했다. 개발도상국 범주에 들지만 국가별 국내총생산(GDP) 순위는 방글라데시에 뒤진다. 최빈국 낙오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국제사회에서는 6·25전쟁 후 70년 만에 세계 10위 경제 대국이 된 한국과 핵 개발로 경제 파탄 상태에 빠진 북한이 종종 비교된다. 남북한의 서로 다른 전략이 국가의 운명을 바꾼 것인데, 동·서 파키스탄으로 불렸던 두 나라도 남북한에 이어 새로운 비교 모델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