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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2021-12/ 12.01(수) 연공서열 파괴 - 12.31(금) “아들은 남이다”

상림은내고향 2022. 1. 2. 18:12

만물상 2021-12/ 조선일보

12.01(수) 연공서열 파괴

상무, 전무 직급을 다 없애고 임원 명칭을 부사장으로 단일화한 SK그룹 계열사에서 한 임원이 한동안 명함을 3개 들고 다녔다. 원래는 상무급인데 곧바로 부사장 타이틀을 달게 돼 어색한 상황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부사장 명함을 내밀기 쑥스러운 자리에는 ‘상무’ 명함을, 높은 직책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한테는 ‘부사장’ 명함을, 내부 사정 뻔히 아는 계열사 사람한테는 ‘OO 담당’이라고 새긴 명함을 줬다고 한다.

 
 

▶서열에 민감한 한국 사회에서 기업들은 수평적이고, 능력 중심 조직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의 직급 체계를 없애고 호칭을 ‘매니저’로 통일한 곳도 있고, 영어 이름을 쓰는 곳도 있다. CJ는 21년 전부터 직급 호칭 대신 ‘님’ 자를 붙여 불렀다. 보수적인 은행권도 뒤늦게 합류했다. 하나금융그룹은 지난해부터 직급 호칭 없이 ‘영어 별칭’을 부른다. 김정태 회장은 이름 영문 이니셜을 따 ‘JT’로 불린다.

 

▶상사가 부하 직원을 일방적으로 평가하는 수직적 문화를 파괴하려 동료 평가, 360도 평가 등이 도입되지만 기대만큼 효과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일찍부터 영어 이름 쓰면서 개방적인 조직 문화로 알려졌던 카카오는 연말 동료 평가에 “이 동료와 다시 함께 일하시겠습니까”라는 문항이 있고, 그 결과를 본인에게 알려준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다. 올 초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앱 ‘블라인드’에 카카오 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이 방식이 잔인하다며 유서 형식 글을 띄웠다.

 

▶2012년 미국의 ‘배니티페어’ 잡지에 ‘마이크로소프트(MS)의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구글이나 애플이 급부상하는 동안 MS가 뒤처진 이유 중 하나가 ‘스택 랭킹’이라는 상대평가 제도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MS는 직원을 1~5등급으로 나눠 최하 등급을 내쫓았다. 이 엄격한 상대 평가로 협업 분위기는 사라지고, 구글 등 외부의 IT 강자들과 경쟁하는 대신 내부 정치만 횡행하는 기업 문화가 뿌리내렸다는 것이다. 결국 MS는 이 상대평가 제도를 폐지했다.

 

▶인사 제도는 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의 하나다. 삼성전자가 ‘연공서열 파괴’ 인사 개편안을 발표했다. 상대평가 대신 절대평가를 도입하고, 동료 평가를 시범 실시하며, 해당 직급에 8~10년씩 일해야 하는 직급별 승진 연한을 폐지해 30대에 임원이 될 수도, 40세에 CEO가 될 수도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40세 여성 CEO가 나오는 시대다. 거대 항공모함처럼 조직 문화가 더디게 바뀌던 삼성전자도 더 이상 변화를 거스르기 힘든 세상이 된 것이다.

강경희 논설위원

 

12.02 종편 10년

2011년 말 어느 방송 전문가는 갓 출범한 TV 종합편성채널(종편)의 앞날을 이렇게 예언했다. “종편 시청률은 절대 1%를 넘지 못할 것이다. 시청률 1%는 엄청나게 힘든 것이다.” TV조선에 대한 전망은 더 비관적이었다. “종편 4사 중 방송 경험이 전혀 없으니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개국 첫 1년, 그의 전망은 맞는 듯했다. 모든 종편의 시청률이 저조했다.

 

▲종편의 도약을 이끈 기수는 TV조선의 오디션 예능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이다. 이 프로그램은 시청자가 가장 사랑하는 방송으로 연거푸 뽑혔다./TV조선

 

▶이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보도·교양·오락·드라마 등 전 분야에서 종편은 지상파를 넘어서고 있다. TV조선 메인 뉴스 ‘뉴스9′의 올해 11월까지 평균 시청률은 5.9%다. 종편 중 1위는 물론이고, 수십 년 관록의 SBS와 MBC를 제치며 KBS에 이어 전체 2위에 올랐다. 지난해 실시된 방송사 신뢰도 조사에서도 TV조선은 19%로 지상파 포함해 전체에서 가장 높은 신뢰도를 기록했다. 언론계에선 방송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놀라운 도약이라고 평가한다.

 

▶종편의 도약을 이끈 기수는 TV조선의 오디션 예능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이다. 이 프로그램은 시청자가 가장 사랑하는 방송으로 연거푸 뽑혔다. 최근 시작한 ‘국민가수’도 8주 연속 예능 1위를 달리고 있다. 국민 오디션은 거실 풍경도 바꿨다. 핸드폰 들고 각자 방으로 흩어졌던 가족이 TV 앞에 다시 모였다. 임영웅이란 걸출한 스타도 배출했다. 코로나로 고통 겪던 사람들이 그가 부른 ‘바램’을 함께 노래하며 시름을 덜고 위로를 얻었다.

 

 

▶종편은 다매체·다채널 시대에 폭넓은 시청 선택권을 제공하며 방송 지형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도 한다. 특히 뉴스와 시사 프로는 정권의 응원단이 된 지상파와 달리 시청자들에게 다른 뉴스와 여러 의견을 제공했다. KBS를 정권 나팔수로 만든 장본인이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을 차지하고, 서울의 교통방송이 노골적인 정치 편파 방송을 하는 상황에서 시청자들은 “종편조차 없었다면 어디서 정부 비판 목소리를 듣겠느냐”고 한다. 실제 종편이 없었다면 적어도 TV에서 대장동 의혹은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종편이 12월 1일로 개국 10주년을 맞았다. 종편은 이제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장이란 새로운 상황을 맞고 있다. TV조선 인기 드라마 ‘결혼작사 이혼작곡’ 같은 한국 드라마들이 넷플릭스 등 OTT를 통해 전 세계 시청자와 만난다. 새롭고도 낯선 세상이다. 방송 환경은 격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 시청자의 사랑과 신뢰를 얻기 위해 방송인들이 흘린 땀이 이 변화를 헤쳐 나갈 힘이란 사실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12.03 오미크론 ‘축복’설

오미크론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맨 처음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남아공은 인구 5900만명 중 에이즈 감염자가 820만명이다. 코로나는 보통 감염 후 1주일이면 항체와 면역 세포 작용으로 몸속 바이러스가 퇴치된다. 감염 진단을 받아도 증상이 없으면 10일 뒤 격리에서 해제된다. 생활치료센터에서 나갈 때 검사받을 필요도 없다. 중증으로 가는 것은 감염 초기에 폐 등 장기가 망가진 후유증이다. 반면 면역 체계가 손상된 에이즈 환자는 바이러스를 밀어내지 못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보름에 한 번 정도 변이가 일어난다고 한다. 에이즈 환자는 몸속에 바이러스를 오래 지니면서 폭발적 변이를 일으키는 ‘진화의 공장’이 됐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미크론이 공포스러운 것은 바이러스 껍질에 있는 ‘스파이크’에 30개나 되는 변이가 생겼기 때문이다. 스파이크는 인체 세포에 달라붙어 파고드는 역할을 한다. 백신 접종이나 과거 감염으로 우리 몸속에 생긴 항체는 그 스파이크 단백질을 탐지해 무력화한다. 그런데 오미크론은 항체가 못 알아보도록 잔뜩 위장하고 나타난 것이다. 그 탓에 부스터샷 맞은 사람까지 감염 사례가 나왔다.

 

▶현재까진 감염자들 증세가 가볍다고 한다. 남아공 감염자 대부분은 피로감, 마른 기침 정도이지 중증은 별로 없다는 보도다. 한국 확진자도 상태가 안정적이다. 독일 전문가는 오미크론이 “팬데믹을 종식시켜줄 크리스마스 선물일 수 있다”고 했다. 오미크론이 델타 변이를 밀어내면서 코로나를 일반 감기 비슷하게 만들어주는 것 아니냐는 기대다. JP모건은 “오미크론으로 생긴 주가 하락은 저가 매수 기회일 수 있다”는 보고서까지 냈다.

 

▶바이러스는 독성이 약해지면 전파력은 강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감기를 일으키는 코로나 바이러스 4종이 그런 진화 과정을 거쳐 풍토병이 됐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렸을 때 감기 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어느 정도 면역력을 갖게 된다. 감기가 주기적으로 유행하지만 치명적 피해를 입히지는 않는다.

 

▶물론 속단은 금물이다. 남아공 오미크론은 백신을 맞지 못한 젊은이들 사이에서 주로 번지고 있다고 한다. 젊은 탓에 심각한 증세가 덜한 것일 수 있다. 코로나가 중증으로 발전하는 것은 감염 후 2주쯤 지난 때인데 아직 그 단계까지 오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작년 봄 미국 미네소타대 연구팀은 코로나가 대확산 파도를 너덧 차례 거친 후 2022년이 되면서 가라앉을 것이라 예측했다. 그랬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한삼희 선임논설위원

 

12.04 ‘정권 교체’ 내건 부동산 중개소들

어떤 이가 전세 계약을 하려고 부동산 중개 사무소에 들렀는데 부동산 매물을 붙여놓아야 할 입구에 ‘정권 교체’라는 인쇄물이 붙어 있었다. 그 중개사가 원래 야당 지지 성향이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일대 부동산 중개업소가 다 비슷했다. 집 사고파는 중개소가 반(反)정부 성토장이 된 건 문재인 정부의 ‘미친 집값’ 불똥이 부동산 중개사들에게 옮겨붙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억원짜리 아파트 한 채를 사고팔면 매수자, 매도자가 복비를 900만원씩 부담해야 했다. 문 정부 들어 서울 아파트 값이 2배 넘게 뛰면서 평균 가격이 10억원을 넘겼다. ‘미친 집값’에 ‘미친 복비’까지 부담해야 하니 국민들 원성이 폭발했다. 이 민심을 달래겠다고 정부가 지난 10월부터 부동산 중개료를 낮췄다. 그래도 집값과 전셋값이 너무 올라 사람들은 ‘복비 인하’를 별로 체감하지 못한다. 수입 줄어든 부동산 중개사들의 불만만 치솟았다.

 

▶복비 부담을 낮추겠다고 문 정부가 추진하는 ‘한국판 뉴딜 정책’에 ‘중개인 없는 부동산 거래 시스템 구축 사업’을 포함한 것이 부동산 중개사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8월 기준 공인 중개사 자격증 소지자는 46만6000명에 이른다. 경제활동인구 60명당 1명꼴이다. 75%는 장롱 자격증이고 실제 개업은 11만5000명 정도인데 그마저도 공급 과잉이라 폐업률이 높다. 집 한 채 거래하고 거액을 챙기는 직업인 것은 아니다. 뿔난 공인 중개사들이 ‘우리가 봉이냐. 정책 실패 책임 전가 말라’ ‘부동산 정책 실패, 민주당 정권 교체가 답이다’라고 쓴 팻말을 들고 거리에 나서고 있다.

 

▶네이버의 부동산 커뮤니티에 한 네티즌이 ‘집값 폭등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일까요?’라고 글을 띄웠다. ①무주택자 ②종부세 안 내는 1주택자 ③종부세 조금 내는 1주택자 ④종부세 수천만원 내는 다주택자 중에 답을 하나 고르라고 했더니 엉뚱하게 ‘최대 수혜자는 정부’라는 댓글이 주르르 붙었다. 집 없는 사람은 집값 전셋값 올라 분노하고, 집 가진 사람은 세금 많이 뜯겨 분노하고, 부동산 중개사는 복비 많이 받는다고 비난받다 복비가 깎여 분노한다. 두둑해진 건 세금 걷어간 정부 주머니뿐이다.

 

▶지금 여당이 다주택자 양도소득세를 낮추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은 부동산 중개사들 불만을 의식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5년 내내 제대로 된 부동산 정책은 외면하고 ‘부동산 정치’에만 매달렸다. 이제 민심의 역풍을 실감하는 모양이다.

강경희 논설위원

 

12.06 황당한 종부세

유럽 고가(古家) 중엔 창문을 해가 들지 않는 뒤쪽으로 낸 집이 꽤 있다. 왕정 시기, 건물 정면의 창문 수에 따라 부과한 창문세(稅)를 피한 흔적이다. 황당 세정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창문세는 국민 삶에 큰 상처를 남겼다. 주민들은 어두컴컴한 집에 살아야 했고 나라는 나라대로 세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스페인이 왕정 시기 도입한 ‘알카발라’란 매출세도 실패한 세제였다. 상품이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이동하는 모든 단계에 세금을 붙이는 바람에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세금 누적 현상이 빚어졌다. 국민 소비는 쪼그라드는데 세리와 국가만 배를 불렸다. 알카발라는 국민 경제를 황폐화하고 19세기 폐지됐다. 역사학자들은 나라를 말아먹은 세금이라고 지적한다.

 

 

▶많은 국민이 최근 받아 든 종부세 고지서를 보면서 황당해하고 있다. 서울 강남에 30년 가까이 살아온 한 회사원은 450만원이 적힌 종부세 고지서를 받았다. 40평대 아파트 한 채 가진 그는 재산세까지 합해 올해 1300여 만원을 보유세로 내야 한다. 두 달 치 봉급을 뜯긴 그는 “소득은 그대로인데 세금만 크게 오르니 어이없다”고 했다. 고액 양도세 때문에 다른 데로 이사 갈 수도 없다. 그는 “나라가 국민을 오도 가도 못 하게 가둬놓고는 돈을 갈취하는 꼴”이라고 했다.

 

▶공공 법인이며 사회단체들도 비명을 지른다. 사육신과 생육신 위패를 모신 강원도의 한 서원은 지난해 종부세 480만원에서 올해 8561만원으로 올랐다. 임대료를 5%만 올리라고 상한선까지 정하는 정부가 자기들이 받는 세금은 한 해 1800%나 올렸다. 대학이 소유한 교직원 사택과 기숙사, 종교 단체와 학교 등이 보유한 주택 등에도 법인 소유란 이유로 최고 세율인 6%를 적용했다. 집값이 아니라 사람 잡는 세금이다.

 

▶세금 부과할 때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정부가 당황했는지 공익법인에는 세율 특례를 적용하겠다고 엊그제 발표했다. 국민이 비명을 지른 다음에야 허겁지겁 보완책을 내놓은 것이다. 처음부터 세밀하게 검토해서 부과하지 말았어야 할 세금이었음을 실토한 셈이다. 급조된 규제가 낳은 참사라는 어느 부동산 전문가의 말이 딱 맞는다.

 

▶프랑스 정치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은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국가가 하지 말아야 할 일로 정책의 졸속 도입을 꼽았다. 사전에 부작용을 면밀히 검토해서 완성도 높은 정책을 내놓으라고 했다. 이 정권은 정반대로 갔다. 집값이 오를 때마다 서른 번 가까이 세제 누더기질을 하며 국민을 실험실 쥐처럼 괴롭혔다. 다음 정권이 반면교사 삼아야 할 실패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김태훈 논설위원

 

12.07 비아그라가 치매 예방약 되나

50대 남성 A 의사는 중증 고혈압 약을 매일 복용한다. 혈압은 그다지 높지 않으나, 탈모 방지용으로 먹는다. 두 가지제를 써도 혈압이 떨어지지 않을 때 쓰는 미녹시딜이라는 약이다. 다모증 효과가 있어 이미 두피에 바르는 탈모 치료제로 나와 있다. 이제 그것을 저용량으로 쪼개 먹는 사람이 늘고 있다. A 의사는 생전 나지 않던 가슴에 털이 났다고 했다. 모낭에 혈류를 늘려서 발모 효과를 낸다는 논문들은 조금씩 나오나, 아직 정식으로 승인된 것은 아니다.

 

▲푸른색 다이아몬드 형태의 '비아그라'.

 

▶한센병 환자들이 일반인보다 7년 더 오래 산다. 왜 그럴까 서울대 연구팀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DDS라는 항생제를 수십 년째 먹고 있는 사실을 발견됐다. 한센병 박테리아를 없애는 약이다. 병이 나은 이후에도 재발 공포 때문에 평생을 먹어왔다. 한 알에 70원이니 부담도 없었다. 노화 원인인 활성산소를 만들어내는 효소를 DDS가 억제한다는 것이 확인됐다. 한센병 약이 ‘장수 약’ 될 날이 올지 모른다.

 

▶본래 용처와 다른 효과가 발견되어 재탄생한 약물은 많다. 아스피린은 해열진통제로 쓰이다, 20세기 후반에 피를 굳지 하게 하는 ‘항혈전 효과’가 확인되어 현재는 심장병 예방용으로도 쓰인다. 전립선 비대증 치료제를 먹은 환자들에게 머리카락이 늘면서 프로페시아라는 탈모 치료제로 나왔다. 항생제 내성이 심각하다지만, 1960년대 옛날 항생제를 쓰니 요즘 세균들이 꼼짝 못 하는 일도 벌어진다. ‘아재 개그’가 젊은이에게 새롭게 먹히는 것과 같다.

 

 

▶비아그라도 심장병 치료제 개발 과정에서 발기 효과가 발견되어 쓰임새가 바뀐 약이다. 폐동맥 고혈압 개선 효과도 보여 선천성으로 앓는 아기들도 먹는다. 미국 클리블랜드대 연구소가 비아그라 복용이 치매 발병을 69%까지 줄인다는 논문을 발표해 화제다. 기존 약물 1600여 종 대상 유전자 데이터베이스와 700여만명의 진료 기록을 분석한 결과다. 새로운 쓰임새를 찾아내는 신약 재창출 기법으로 새 효과를 찾았다. 이제 총명한 노년을 위해 비아그라를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코로나 중증 감염에 쓰는 에볼라 치료제 렘데시비르도 신약 재창출로 찾은 것이다.

 

▶많은 제약회사들이 신약 개발에 수조 원을 쓰느니, 기존 약물의 새 용처 개발에 뛰어들고 있다. 관련 논문이 최근 20년간 160배 늘었다. 유전체의학과 인공지능을 활용하면, 신약 부재 국가인 우리나라도 신약을 가질 기회가 왔다. 새롭게 만들진 못해도 있는 것 갖고 활용해 빨리 치고 나가는 것은 우리가 잘하지 않나.

김철중 의학전문기자

 

12.08 기부천사 김달봉

크리스마스를 앞둔 2010년 12월 어느 날, 일본 군마현의 한 아동 상담소 앞에 누군가 돈다발을 두고 갔다. 기부자는 다테 나오토란 가명을 썼다. 만화 ‘타이거 마스크’의 주인공 이름이다. 얼마 안 돼 기부자는 평범한 일반인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선행에 감동한 사람들이 다테의 이름으로 전국 아동 시설 약 1000곳에 돈과 쌀, 생필품, 학생 가방 등을 보내기 시작했다. 다테 나오토는 익명 기부의 상징이 됐다

 

 

▶한국에는 가명의 기부 천사 김달봉이 있다. 최근 3년간 기부한 돈과 물품이 6억원을 넘는다. 지난해엔 코로나로 고통받는 소외 계층에 마스크 20만장을 전달해 달라며 1억원을 내놓았다. 인천 지역 공동모금회, 구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 사랑의연탄나눔운동, 전주 다문화 가정 돕기 기부자도 모두 김달봉씨인데 누구인지, 한 사람인지 단체인지도 모른다고 한다. 올해도 부안군청에 현금 1억2000만원을 기탁한 사실이 엊그제 알려졌다.

 

▶우리나라 기부 규모는 2019년 기준 연 14조5000억원이다. 한 푼 두 푼 정성을 모으는 개인 기부가 65%로 기업이 내는 돈보다 훨씬 많다. IMF 사태로 모두가 힘들던 1998년부터 개인이 기업을 앞지른 건 의외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어려움을 겪을 때 오히려 주변을 살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코로나 사태가 이를 증명했다.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작년 12월 연말연시 기부 캠페인을 시작하며 잡았던 목표액은 3500억원이었다. 실제 들어온 돈은 4000억원이 넘었다. 연간 모금액도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한 8400여억원이었다.

 

▶미국 하버드 대학 연구팀이 기부의 전염력을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 참가자들에게 돈을 나눠주고 희망자에 한해 익명으로 공동 저금통에 기부하게 했다. 저금통에 모인 돈을 똑같이 나눠갖는 조건이어서 적게 기부할수록 이득을 보는 구조다. 참가자들은 이기적으로 굴지 않았다. 특히 누군가 기부액을 많이 내면 다른 참가자의 동참이 늘었고 공동 저금통에 더 많은 돈이 쌓였다.

 

▶이 실험은 인간성의 이타적 측면도 드러낸다. 돼지 저금통에 쌓인 돈을 독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죽이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 세상은 지옥이다. 인간은 그런 세상에서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뇌과학은 기부가 수지맞는 일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기부를 실천한 이들의 뇌에선 사랑 호르몬인 옥시토신 분비가 활성화된다. 이때 느끼는 행복감은 혈압을 낮추고 면역력을 높여 장수를 돕는다고 한다. 올 연말, 구세군 냄비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다.

김태훈 논설위원

 

12.09 부회장 전성시대

이학수 전 삼성그룹 부회장은 전성기 시절 삼성의 ‘1.5인자’로 불렸다. 오너 회장 밑의 ‘넘버 2′지만, 단순한 2인자를 넘는 준(準)오너급이란 뜻이었다. 그는 공개 활동을 꺼리는 이건희 회장을 대리해 분신처럼 활동하면서 10여 년간 그룹 업무를 총괄했다. 그가 초안으로 작성한 수십 개 계열사 사장 인사안을 이 회장이 거의 고치지 않고 그대로 결재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 재계 역사상 최고의 ‘실세 부회장’이었다.

 

 

▶모든 2인자가 그렇듯 재벌 부회장은 고도의 정무적 능력이 필요한 자리다. 경영 실력은 기본이고 너무 ‘오버’하지 않는 기민한 처세술, 오너가 눈만 깜빡여도 알아챌 정도의 충성심 등이 종합적으로 입증돼야 한다. 오너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면 ‘실세형 부회장’으로 승승장구한다.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복심 이인원 부회장은 후계 구도를 둘러싸고 ‘형제의 난’이 벌어졌을 때 판도를 좌우한 실력자였다. 그러나 대부분 사장급은 여기에 못 미친 채 사장 타이틀로 옷을 벗는다. “고생했다”는 배려 차원에서 퇴임 직전 예우로 부회장 직함만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

 

▶삼성의 최지성·권오현·김기남 부회장 등도 실세형이었다. 이들 중 권오현·김기남은 회장직까지 올랐다. 최근 10여 년 사이 주요 그룹에서 샐러리맨 출신이 회장까지 오른 사례는 이 둘뿐이라고 한다. 둘 다 반도체 엔지니어 출신이다. 삼성전자를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압도적 1위로 만든 ‘전설적’ 성과에 대한 예우였다. 미래에셋 그룹의 최현만 회장도 15년간 부회장을 지내다 이번에 회장으로 승진했다.

 

▶부회장이라도 다 동급은 아니다. ‘회장급 부회장’도 있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대표적이다. 이건희 회장이 오래 병석에 있었던 데다 본인은 지금도 재판을 받는 중이라 10년째 부회장에 머물러 있다. 현대차 정의선 회장도 부회장 타이틀을 뗀 것이 불과 1년 전이다. 작년 10월 정몽구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나면서 그제야 회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도 어머니 이명희 회장 아래서 16년째 부회장을 하고 있다.

 

▶올 연말 재계에 부회장 승진 바람이 불고 있다. 삼성그룹은 3명이나 부회장으로 승진시켰다. 이 중 정현호 부회장은 이재용 부회장 아래의 2인자로 인사·재무·사업전략을 맡게 됐다. SK·LG·롯데·현대중공업그룹도 부회장을 1~4명씩 임명했다. 유례없는 부회장 풍년이다. 총수 혼자 관리할 수 없을 만큼 대기업들의 사업 영역이 넓어져 각 부문을 맡은 CEO에게 힘을 실어줄 필요가 커졌기 때문이다. 4차 산업 격변기에 한국 경제의 도약을 이끌 스타 경영인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윤영신 논설위원

 
 

12.10 선진국 청소년 접종률 80%

▲전국학부모단체연합 등 60여개 단체가 9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앞에서 청소년 방역패스 철회 등을 요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초상권 확보) /신현종 기자

 

일본의 신종 코로나 확진자와 사망자가 확 줄어든 것은 세계적인 미스터리다. 9일 추가 확진자는 136명, 사망자는 3명이다. 우리와 접종 완료율이 비슷한데(한국 80.8%, 일본 77.6%) 다른 점이 있다면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을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60대 이상 고령층이 집중적으로 AZ 백신을 맞았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청소년 접종률이 높다는 것이다. 지난 6일 기준 12~19세 백신 접종 완료율이 72%다. 우리나라 12~17세 청소년은 33.1%다.

 

▶항체가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 바이러스의 기본 특성이다. 그 특성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백신을 접종했지만 항체가 떨어진 60대 이상 고령층, 백신을 맞지 않아 항체가 없는 소아·청소년 사이에서 집중적으로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 소아·청소년은 걸려도 무증상 등으로 가볍게 앓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지만 다른 사람들을 전염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이 문제다.

 

 

▶주요국은 청소년 접종이 마무리 단계이고 소아 접종을 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 5월부터 12~17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화이자 접종을 시작해 이미 52%가 맞았다. 5~11세 어린이 접종도 지난달 시작했다. 싱가포르 청소년 접종 완료율은 93%, 캐나다는 83%, 프랑스도 76%다. 주요국 중 유독 우리나라가 낮다.

 

▶정부가 청소년 접종을 독려하기 위해 내년 2월부터 12∼18세 청소년이 학원·독서실 등에 출입할 때 방역 패스를 적용하기로 하자 학부모·학생들이 반발하고 있다. 2009년 신종플루 백신을 접종할 때는 이런 논란이 없었다. 그때는 의료진 다음으로 소아·청소년이 접종했다. 고령층은 과거 독감 이력으로 신종플루에도 어느 정도 면역 효과가 남아 있지만 소아·청소년은 그렇지 않아 더 취약하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반면 이번 신종 코로나는 사망률 줄이기가 최우선 목표여서 고령층부터 맞았다.

 

▶사실 청소년 접종 문제는 논란이 생길 일도 없는 문제였다. 청소년 이상 반응이 심했으면 주요국에서 접종률이 80% 안팎에 이를 수 있겠나. 그런데 정부가 지난 9월 말엔 “건강한 소아·청소년의 경우 접종 이익이 작다”며 충분한 검토 후 자율 접종을 권고하더니 지난 3일 별다른 추가 설명이나 절차도 없이 불쑥 사실상 강제로 바꿨다. 어떤 학부모가 반발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있나. 위기에서 정부의 무능은 죄악이다. 학부모들도 과학 데이터를 믿고 우리 사회 전체의 감염을 줄이는 데 협조했으면 한다. 그것이 결국엔 각 개인에게도 이득이다.

김민철 논설위원

 

12.11 수능 정답 유예

▲2022학년도 대학 수학능력시험 성적표 배부일인 10일 강원 춘천고등학교에서 3학년 학생이 받아든 성적표에 생명과학Ⅱ 성적이 공란 처리돼 있다./연합뉴스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치른 입시생 중에 생명과학Ⅱ를 선택한 수험생 6000여 명은 이 과목 성적이 공란인 채 수능 성적표를 받았다. 출제 오류 논란이 벌어진 생명과학Ⅱ의 20번 문제를 놓고 수험생들이 소송을 제기했고 ‘정답에 대한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성적 처리를 하지 말라’고 정답 효력 정지 처분이 나왔기 때문이다.

 

▶동물 개체 수는 ‘마이너스 한 마리, 마이너스 두 마리’ 하는 식으로 셀 수가 없는데 생명과학Ⅱ의 20번 문제를 풀면 마이너스 값이 나온다. 이 문제를 틀린 수험생들은 출제 오류를 주장했지만, 문제를 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문제를 푸는 과정이 중요한 만큼 오류가 아니라는 입장이라고 한다. 생명과학Ⅱ는 30분 만에 20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이 한 문제에 15분이나 써버려 시험 망쳤다고 하소연하는 수험생도 있다. 결국 수험생들이 소송으로 맞섰다.

 

 

▶2014학년도 수능의 세계지리 8번 출제 오류는 1년 만에 판가름이 났다. 교과서에는 EU(유럽연합)의 총생산액이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권역보다 크다고 되어 있다. 세계 금융 위기로 2010년 무렵부터 EU와 NAFTA 경제 규모가 역전됐다. 평가원은 교과서대로 정답을 발표했는데 오류 논란을 제기한 수험생들은 소송도 불사했다. 1심은 평가원이 이겼는데 2심에서 뒤집혔다. 교육부와 평가원은 수능 치른 지 1년 만에 8번 문항을 전부 정답 처리하고 1만8884명의 성적을 다시 매겼다. 대학들도 입학 사정을 다시 해서 4년제 대학 430명, 전문대 203명 등 총 633명을 추가 합격시켰다.

 

▶입시 출제 논란은 50여 년 전 ‘무즙 파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5학년도 서울 중학교 입시에서 ‘엿 만들 때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을 고르는 문제가 출제됐다. 발표한 정답은 디아스타아제였는데 무즙도 맞는다고 학부모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학부모들이 무즙으로 실제 엿을 만들어 서울시교육위로 몰려가 “무즙 엿 먹어라” 시위까지 벌였다. 이듬해 무즙도 정답이 됐고 추가 합격자들이 나왔다. 이 사건은 과열 경쟁의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는 한 단초가 됐다.

 

▶카카오톡의 오픈 채팅에는 ‘생2(생명과학Ⅱ) 피해자 소송 단톡방’이 개설돼 있다. 별칭을 ‘망한 생2′ ‘생2 피해자’ ‘서울대 못 쓰는 생2러’ ‘억울해’ ‘왜 인정을 안 하니’ 등이라고 붙인 수험생들이 재판 정보를 나누며 소송에 임하고 있다. 시험 한 문제에 인생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입시 세대의 절박함을 보는 듯해 마음이 아프다.

강경희 논설위원

 

12.13(월) ‘이별 살인’

아르헨티나 속담에 ‘너를 사랑한 사람이 너를 울릴 것이다’는 말이 있다. 요즘은 그 정도가 아니다. ‘너를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면서 상대 여성과 가족을 상대로 끔찍한 일을 벌이는 일이 빈번하다. 툭하면 불을 지르고 칼을 꺼내든다. 대개 이별 통보를 받은 끝에 벌이는 짓이 많다. 엊그제 서울 송파구에서 스물여섯 먹은 남성이 헤어진 여자친구 집을 찾아가 흉기를 휘둘렀다. 여성의 어머니가 숨졌고 열세 살 남동생은 중태에 빠졌다.

 

 

▶사건이 잦고 유형이 비슷해 경각심이 무뎌질까 걱정이다. 지난달에는 서울 중구에 있는 한 오피스텔에서 서른다섯 남성이 전 여친을 살해했다. 희생자는 경찰에 신변보호 등록도 했고, 스마트워치 등으로 여섯 차례나 신고했지만 소용없었다. 그 이틀 전에는 30대 남성이 헤어지자는 여성을 흉기로 찌르고 19층 아파트 밖으로 던져 죽게 했다.

 

▶’데이트 폭력, 이별 범죄’ 같은 핵심 단어로 사례를 찾다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너무 많다. 경찰청은 국회 행안위 자료에서 “지난 5년간 데이트 폭력 신고가 8만 건 이상”이라고 했다. 그중 살인으로만 227건을 검거했다고 했다. 이수정 범죄심리학 교수는 “지난 10년 동안 파트너 폭력으로 1년에 100명 정도씩 죽어 나갔다”고 했다. 언론 기사만 일일이 세어봐도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여성이 가해자일 때도 있다. 어떤 학자는 “데이트 폭력의 피해는 성차(性差)가 거의 없다”는 통계를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강도 높은 폭력의 피해자는 여성이 압도적이다. 결별을 알려오자 문자 폭탄을 2만 건이나 보내고, 새 남자친구를 인질로 잡기도 한다. 배달앱 센터에 전화를 걸어 “어떤 전화번호로 음식 주문을 했는데 배달이 안 됐다. 주소 확인을 해달라”며 전 여친의 바뀐 주소를 알아낸다. 주거 침입과 폭행이 뒤따른다. 헤어진 여성 버스기사를 휘발유로 불을 질러 죽인 사건도 있었다.

 

▶데이트 폭력이라는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하면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칫 ‘3각 관계 갈등’ 혹은 강제 키스, 또는 여성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끄는 행위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요즘은 흉악 범죄 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형태로 나타난다. 여성 쪽 부모 형제도 무참히 당하곤 한다. 딸에게 “차라리 헤어지기 쉬운 남자를 사귀라”고 했다던 어떤 작가의 말에 기가 막힐 뿐이다. 나중에 가해자의 음주 측정을 하지 않기에 술에 취해 욱해서 그랬다는 식으로 빠져나가려 든다. ‘사랑해서’라는 핑계까지 내세우는 건 정말 역겨운 일이다.

김광일 논설위원

 

12.14 돈과 정치

사마천의 사기(史記) 마지막 장은 부자 이야기를 다룬 화식열전(貨殖列傳)이다. 사마천은 부자의 롤 모델로 전국 시대의 거부 백규를 꼽았다. 백규는 “때의 변화를 열심히 살피며” “세상 사람이 버리면 사들이고, 사람들이 사들이면 버린다”(人棄我取 人取我予)는 장사 원칙을 고수했다. 현대식으로 해석하면 ‘공포에 사고, 광기에 판다’는 역발상 투자법이다. 사마천은 “아껴 쓰고 부지런한 것이 생업의 바른 길이지만 부자들은 꼭 기이한 방법을 쓴다”면서 남다른 발상·안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00년대 초 중국 알리바바 창업주 마윈이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한 중견그룹 오너를 만나 비즈니스 모델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긴가민가하며 끝내 답을 주지 않았다. 다음 해 마윈은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 손정의를 만났다. 마윈의 6분짜리 브리핑을 들은 손정의는 즉석에서 4000만달러 투자를 약속했다. 14년 뒤 알리바바는 뉴욕 증시에 상장됐고, 손정의의 지분가치는 580억달러를 웃돌았다.

 

▶거부를 만드는 원동력은 시대 변화를 읽고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이다. 석유시대를 예감하고 정유사를 독점한 록펠러, 철도 시대를 예견하고 철강업에 올인 한 카네기가 그랬다. 영화 ‘빅쇼트’의 주인공 펀드 매니저는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위험을 간파하고 역으로 베팅(공매도)해 8억달러를 벌었다. 반면 안목이 부족하면 대박 기회를 놓친다. 1982년 삼성전자는 네덜란드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업체 ASML 인수를 제안받았는데 1.5% 지분 투자만 했다. 그 1.5%의 가치가 현재 5조원을 웃돈다.

 

▶국내에서도 4차 산업혁명 업종에서 대박 뉴스가 자주 나온다. 한 벤처 펀드는 암호 화폐 거래소로 매일 100억씩 순익을 내는 두나무에 투자한 덕에 10년 만에 100배 수익을 냈다. 게임 개발자 출신 한 개인투자자는 이 펀드에 20억원 정도를 투자해 두나무 주식 72만주(약 3500억원)를 받았다. 한 사모펀드는 게임업체 크래프톤에 투자해 5700억원 이상의 상장 차익을 얻었다. 물론 이런 대박 뉴스의 뒤에는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실패가 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가 10년 전 메타버스 게임 플랫폼 ‘로블록스’에 2000만원을 투자했는데, 10년 새 1287배 올라 250억원이 됐다고 공개했다. 10년 전 메타버스 트렌드를 예측하고 그 주역이 될 떡잎을 알아본 선구안이 놀랍다. 부자가 될 자격은 충분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안목이 정치에선 잘 안 통하는 것 같다. 부자의 자질과 정치인의 자질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일까.

김홍수 논설위원

 

12.15 임기 말 대통령 ‘외유’ 논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해 스페인과 이탈리아, 교황청을 순방했다. ‘현안이 없는데 왜 가느냐’는 목소리가 정부 내에서도 있었지만 듣지 않았다. 곧이어 사우디 등 중동 3국도 방문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2년 대선을 한 달 앞두고 인도네시아와 태국을 다녀왔다. 발리에서 열린 ‘민주주의 포럼’ 참석이 명목이었지만, 그 행사는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동행하지 않았을 정도로 외교적 비중이 낮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6년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3국 방문을 마쳤을 때 청와대 측은 ‘6대륙 정상 외교 마무리’라고 했다. 전 세계 육지를 다 돌았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임기 초엔 ‘4강’ 미·중·일·러를 중심으로 순방에 나선다.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같은 정상 외교 무대도 매년 빠지지 않는다. 그러다 임기 말이 다가오면 가 볼만 하거나, 가보지 못했거나, 가보기 어려운 나라를 방문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청와대 전 수석은 “대선 후보가 정해지면 국내에서 대통령의 영향력은 계속 줄지만 외국에선 여전히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위상 덕분이다. 골치 아픈 현안이 쌓인 국내보다 환대가 기다리는 외국이 더 좋을 수 있다. 역대 외교부 장관들은 대통령의 이런 심리를 이용해 해외 순방 일정을 만들어 왔다. 외교관 출신 한 사람은 “일종의 뇌물”이라고 했다. 임기 말 해외 순방을 거부한 대통령은 거의 없다고 한다. 미국도 마찬가지인지 클린턴 전 대통령은 성(性) 추문으로 하원의 탄핵을 받았던 1998년 한 해에만 45일간 해외에 체류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호주 방문을 마치고 오늘 귀국한다. 국내 코로나 상황이 매일 비상인데 해외에 있었다. 요즘 호주는 미국과 함께 ‘반(反)중국 전선’의 최일선에 있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호주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베이징올림픽 보이콧’에 대해 “한국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호주 방문은 중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도 했다. 한·호주 우호에 도움 되지 않는 말을 하려면 호주엔 왜 갔나.

 

▶덩샤오핑은 집권 직후인 1978~79년 미국·일본·북한·동남아 등 10여 국을 숨 가쁘게 돌아다녔다. 미·일과 수교하는 등 안보 위협을 제거했다. 그러고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외국에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개혁·개방의 외부 환경을 만든 최고의 ‘외교 전략가’란 평가를 받는다. 문 대통령도 ‘6대륙 정상 외교 완성’을 이룰지 지켜볼 일이다.

안용현 논설위원

 

12.16 김정은 10년

▲북한 김정은은 지난 10년간 핵, 미사일 폭주로 정치 권력을 강화해 왔다. /조선일보 그래픽

 

10년 전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 장례식 내내 울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때 김정일이 눈물을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과 대조됐다. 김정일은 공개 연설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정은은 2012년 첫 공개 연설에서 “다시는 인민들이 허리띠 조이지 않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해 부인 리설주와 함께 공식 석상에 나타났고, 미키마우스와 미국 영화 ‘록키’ 주제가가 등장한 음악회도 관람했다. 김일성·김정일 시대와는 다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2013년 12월 김정은이 고모부 장성택을 잔인하게 처형했다. 김정일 때처럼 소총이 아니라 대공(對空) 무기인 14.5mm 고사총으로 사람을 박살 냈다. 그해 30명, 2014년 40명, 2015년 60명을 제거했다고 한다. 시신을 화염방사기로 소각까지 했다. 그 참극을 가족들이 강제로 보게 했다. 1인 독재를 굳히려고 엽기와 야만을 일삼았다. 그래 놓고 평양 보육원 공연을 보고 울고, 미사일 개발자에게 훈장을 주면서도 울먹였다. 한편으론 죽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눈물짓는다.

 

 

▶북이 석 달 전 ‘시·군 발전법’을 채택했다. 된장·비누 같은 소비재 공급부터 관광·무역까지 지방정부가 알아서 하라는 내용이다. 북 정권은 평양만 챙기겠다는 것이다. 북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했을 만큼 지금 지방에선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제재와 코로나 자체 봉쇄로 북 교역액은 10년 전 63억달러에서 작년 8.6억달러로 급감했다. 2019년 하노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서두르지 않겠다”고 했을 때 김정은은 “시간이 없는데”라고 했다. 북 수출 1~4위 품목이 전부 막혔기 때문이다. 그 시간도 벌써 2년 넘게 흘렀다.

 

▶노동신문이 그제 ‘김정은 10년’을 평가하는 장문의 글을 발표했다. 10년 업적은 3대 세습 완성으로 요약된다는 것이다. 세습 권력을 보장하는 것이 핵이다. 김정은이 ‘영원히 한길 가리라’를 강조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김씨 독재와 핵 폭주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란 의미다. 140kg이 넘던 김정은의 살이 눈에 띄게 빠졌다. 건강을 위해 뺀 것인지, 건강이 나빠져 빠진 것인지 불확실하다고 한다.

 

▶얼마 전 북이 ‘오징어 게임’을 몰래 시청한 학생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800만 대 보급된 휴대전화의 저장 카드로 유포된 ‘오징어 게임’을 보고 북한 현실과 비슷하다고 생각한 주민이 적지 않다고 한다. ‘오겜’ 같은 현실이 영원할 수 있을까. ‘김정은 20년’이 궁금하다.

안용현 논설위원

 

12.17 너무나 비과학적인 ‘코로나 장례’

▲14일 경기 고양시 서울시립승화원에서 유족들이 고인의 시신이 담긴 관을 향해 절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작가 박완서는 6·25 때 숙부와 오빠를 잃었다. 오빠는 사고로 총상을 입고 집으로 돌아와 몇 달 뒤에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오빠가 좌익 활동을 한 전력 때문에 주변에 알리지도 못하고 서둘러 매장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이것을 ‘죽음을 꼴깍 삼킨 것’이라고 표현했다. 제대로 예를 갖추지 않고 오빠 장례를 치른 휴유증은 나중에 ‘부처님 근처’ 같은 소설에 잘 나타나고 있다.

 

▶코로나 사망자에 대해선 ‘선(先)화장, 후(後)장례’가 정부 지침이다. 이에 동의해야만 장례 지원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코로나 사망자의 80%가 이 지침을 따랐다. 이 때문에 “제대로 추모도 하지 못하고 떠나 보내게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는 유족들 호소가 잇따랐다. 생전에도 격리 상태로 치료를 받았는데, 죽어서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비인륜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죽음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저자 강봉희씨는 지난해 2월 대구 코로나 사태 때 코로나로 숨진 23명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는 책에서 “코로나 사망자는 여느 죽음과는 정반대”라고 했다. 일반적으론 사후 24시간이 지나야 화장할 수 있는데 코로나 사망자는 24시간 안에 화장을 마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코로나로 돌아가신 분은 죽음이라 할 수도 없다”며 “방역 매뉴얼에 따라 슬퍼할 겨를도 없는, 애도받지 못한 죽음”이라고 했다. 유족도 밀접 접촉자거나 확진자인 경우가 많아 장례식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선화장’ 장례 지침은 코로나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유행 초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과학적 근거가 없고 과한 지침이라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세계보건기구(WHO)나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WHO는 에볼라·콜레라 외 시신은 일반적으로 감염성이 없다며 코로나 시신을 화장 처리해야 한다는 것은 미신에 불과하다고 했다. CDC도 “코로나 감염 여부는 매장과 화장 사이 선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시신을 밀봉 처리하고 관 속에 넣으면 바이러스 유출 가능성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화장터 직원들이 전신 방호복을 입고 운구하라는 지침도 비과학적이다.

 

▶지난 10월 질병관리청 국감에서 ‘선화장’ 지침이 과하다는 지적에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지침을 보완하고 있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다. 유족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도록 임종과 화장 절차를 참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곳곳에 있는 비과학적인 부분을 하나씩이라도 걷어내야 한다.

김민철 논설위원

 

12.18 결혼도 이혼도 안 하는 젊은이들

시인 문정희는 ‘부부’에서 결혼 생활의 고단함을 토로하면서도 한 번 맺은 인연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결혼은 사랑을 무화(無化)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부부란 서로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라고 했다. 반면 한 세대 아래 진은영은 시 ‘가족’에서 애정이 말라버린 부부가 사는 가정의 살풍경을 가차없이 고발한다.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오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 들려준 노부모의 불화 사연은 진은영 시에 가까웠다. 50년 으르렁거린 사이가 최근 더 틀어져 이혼 얘기까지 오간다고 했다. 아버지는 “중매로 만나 네 어미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했고, 어머니는 “아직 살 날이 남았으니 지금이라도 바로잡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반백 년 살고도 끝내 갈라서는 황혼의 갈등은 통계로도 나타난다. 지난해 서울에서 30년 넘게 살다가 헤어진 황혼 이혼이 3360쌍으로, 결혼 4년 내에 갈라서는 신혼 이혼 수(2858쌍)를 앞질렀다. 2000년엔 2.8%에 불과했던 황혼 이혼 비율도 큰 폭으로 늘어 지난해 처음으로 20%를 돌파했다.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 같다.

 

▶황혼 이혼이 어제오늘 현상은 아니다. 장수의 결과이기도 하고, 높아진 개인의 행복 추구 경향에 따른 변화이기도 하다. 30~40년 살고 사별로 끝나던 결혼이 이제는 50년 이상 이어지니 틀린 말이 아니다. 일부는 졸혼(卒婚)·해혼(解婚)·휴혼(休婚) 등으로 이혼하지 않고 헤어져 각자 행복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런데 젊은 층의 결혼과 이혼은 앞선 세대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결혼 지속 기간별 이혼 실태를 봤더니 지난 7~9월 신혼 이혼 건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7.2%나 줄었다. 이 추세는 수년째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20년 넘게 함께 산 부부의 이혼도 줄었지만 감소 폭은 4.7% 정도였다. 20년 전에는 이혼 부부가 평균 11년 만에 갈라섰지만, 최근엔 이 기간이 7년 더 긴 18.5년을 함께 살았다는 조사도 있다.

 

▶이런 통계는 ‘젊을수록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는 통념을 깬다.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을 망설인다. 좁은 취업문과 천정부지 집값의 영향이 크다. 그러니 결혼에 앞서 이성과 함께 살며 짝을 고르는 세태가 우리 사회에서도 퍼지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자연히 젊은 층 이혼도 줄 것이다. 세태가 어떻게 변하든 젊은이가 짝 찾기를 주저하는 세상이 정상일 수 없다.

김태훈 논설위원

 

12.20(월) 박근혜의 ‘옥중 5년’

미국 포드 부통령은 1974년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가 취임 후 한 달 만에 내린 조치는 닉슨 사면이었다. 모든 참모가 말렸지만 그는 “분열과 증오를 딛고 미래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여론은 ‘협잡 사면’이라고 들끓었다. 닉슨이 포드에게 사면을 약속받고 대통령 직을 넘겼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포드는 대통령 신분으로 의회 청문회에까지 섰다.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면서 2년 후 대선에서도 졌다. 하지만 후세 역사가들은 “사면이 정치 파국을 막았다. 어려웠지만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했다.

 

 

▶1997년 12월, 15대 대선 사흘 후에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당선인이 마주 앉았다. 이 자리에서 군사반란·뇌물죄로 수감 중이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이 결정됐다. 두 사람 모두 전·노 전 대통령에게 구원(舊怨)이 깊었다. 일부 국민 반발도 컸다. 하지만 김 당선인은 사면을 건의했고, 두 사람을 구속시켰던 김 대통령도 대승적 결단을 내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7년 3월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으로 구속 수감된 지 4년 9개월째다. 대통령 재임 기간(4년 1개월)보다 더 길다. 해외에선 페루의 후지모리 전 대통령이 반인권·부패 혐의로 12년간 복역하다 사면받은 사례가 있다. 하지만 국내에선 노태우(768일), 전두환(751일) 전 대통령보다 훨씬 긴 역대 최장 기록이다. 박 전 대통령은 내년 2월이면 만 70세가 된다. 그동안 수차례 허리 디스크로 치료받았다. 칼로 베이거나 불에 덴 듯한 통증으로 잠을 못 이룬다고 했다. 한동안 의자가 없어 책을 받치고 앉기도 했다.

 

▶정치권에선 몇 차례 사면론이 나왔다. 여권에선 작년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 사면 카드로 야권을 분열시키자’는 얘기가 있었다.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올 초 “사면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여권 핵심에선 “촛불에 대한 배신”이라고 반대했다. 청와대도 “때가 아니다”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형집행 정지도 검찰이 불허했다.

 

▶이번 성탄절이나 신년에 박 전 대통령이 마지막 특사를 받을 것이란 전망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없던 일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꼬박 감옥에서 보내게 된 셈이다. 박 전 대통령은 지지자들과 주고받은 옥중 서신을 책으로 펴낸다고 한다. 그는 책 서문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삶의 무상함을 느꼈다”고 썼다. 한 시대의 권력자였지만 여성이기도 한 그의 아픔을 보듬고 넘어갈 아량을 보여줄 수 없는 것일까.

배성규 논설위원

 

12.21 두뇌 조종 무기

대니얼 크레이그의 007 은퇴작으로 화제를 모은 영화 ‘노 타임 투 다이’에는 특정 유전자 배열을 가진 사람들만 공격하는 초소형 로봇이 등장한다. 유전자 배열을 공유하는 인종이나 소수 민족만 말살할 수 있다는 설정이다. 허황된 것 같지만 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유전자 분석 결과가 공개돼 있다. 침 한 방울, 머리카락 한 올이면 순식간에 누군가의 유전자 배열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

 

 

▶생명공학 기술은 ‘캡틴 아메리카’도 현실로 불러낼 수 있다. 병충해에 강한 쌀이나 가뭄에 강한 밀을 만드는 기술은 이미 상용화됐다. 유전자를 조작한 이런 작물이 전 세계에서 팔려나간다. 과학자들은 힘이 센 사람이나 지구력이 강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유전자도 알고 있다. 고통을 느끼지 않거나 감정이 메마른 사람을 만드는 유전자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이런 사람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유일한 걸림돌은 실험 대상이 사람이라는 것뿐이다.

 

▶생체 실험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나라는 없다. 하지만 전쟁이 목적이라면 달라진다. 1939년 나치 독일군은 병사들에게 ‘기적의 약물’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폭설과 추위 속에서 얼어 죽어가던 병사들이 기력을 회복했고, 불안과 스트레스에서도 벗어났다. 이 약물의 명칭은 메스암페타민. 오늘날 필로폰으로 불리는 마약이었다. 나치는 이런 약물 개발을 위해 수용소의 유대인에게 생체 실험을 일삼았다.

 

▶몇 년 전 해외에 있는 미국 외교관들을 공격한 러시아의 극초단파 무기가 논란이 됐다. 극초단파는 주파수가 촘촘해 귀를 거치지 않고 사람의 뇌를 손상시켜 이명·환각·두통을 유발한다. 사람에서 효과가 충분히 입증됐으니 러시아가 이를 전쟁에서 사용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지난주엔 중국 군 연구소가 두뇌 조종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미국발 뉴스가 나왔다. 중국군이 사람의 뇌파로 생각을 읽고, 감정을 조종해 전쟁에 활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뇌파를 읽는 기술 역시 1970년대 선의의 의학적 시도에서 출발했다. 현재는 하반신 마비 환자가 생각만으로 로봇 다리를 조종해 일어서고 걷는 단계까지 발전했다. 하지만 이를 악용하면 총 한 번 쏘지 않고 적을 무력화할 수도 있다. 노벨이 광산용으로 개발한 다이너마이트는 전쟁의 판도를 바꾼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됐고, 라이트 형제가 만든 비행기는 10년도 지나지 않아 전투기가 됐다. 뇌파 연구를 무기화하느냐 아니냐는 결국 인간에게 달려있다. 다만 중국 공산당에도 인간의 가치가 최우선인지가 문제일 것이다.

박건형 기자

 

12.22 돌파감염서 버티기

요즘 백신을 맞았는데도 코로나에 걸렸다는 사람이 너무 많다. 60대 이상 감염자의 절반 이상이 백신 2차 접종을 마친 경우다. 새 변종 오미크론은 부스터샷(3차 접종)까지 일부 무력화하고 있다. 미국은 첫 등장 3주 만에 신규 감염자의 73%가 오미크론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도 시간문제다. 돌파 감염이 더 거세게 올라올 상황이다.

 
 

▶바이러스끼리도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인다. 2년 전 중국 우한서 시작된 코로나19 원형은 현재 찾아볼 수 없다. 새 변종은 살아남기의 일환으로 사람 목 세포에 더 잘 달라붙는 형태로 진화한다. 목에 닻을 거는 스파이크 단백질 변이가 델타는 2개지만, 오미크론은 15개다. 센 놈이 목 안을 차지하면 순한 것들은 들어올 자리가 없다. 바이러스는 사람 몸 밖에 있으면 죽으니, 밀려난 것들은 길거리를 헤매다 며칠 내 사라진다.

 

▶코로나와의 대결은 도전과 응전의 전쟁이다. 코로나19가 등장해 인간을 공격하자, 인류는 mRNA 백신을 만들어 대응했다. 수세에 몰리는가 싶던 바이러스는 델타 변이를 만들어 백신을 무력화했다. 이에 인류는 부스터샷으로 대항했다. 그걸로 승기를 잡은 듯했으나, 바이러스는 오미크론을 내세워 역공을 시작했다. 장군과 멍군이 교차하는 긴박한 형세다. 인류 과학이 오미크론에 특화한 백신을 내년에 내놓겠다고 하나, 바이러스가 무엇을 새로 등판시킬지 모른다.

 

▶돌파 감염은 수두나 독감 인플루엔자 등 다양한 감염병에서도 일어난다. 사람마다 백신 항체 생산량과 지속 기간이 다르고, 변이는 언제든 일어나기 때문이다. 시련을 이겨내면 더 강해지듯 ‘돌파 감염자’는 수퍼 면역력이 생긴다. 그들의 혈액 속 항체는 화이자 백신 2차 접종 후 2주 지난 수준보다 1000% 더 효과적이고 풍부하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미국 의사협회저널(JAMA)에 실렸다. 그렇기에 돌파 감염은 대개 가벼운 증상만 일으키고 백신 미접종자보다 치유가 빠르다.

 

▶백신은 바이러스를 감지하고 전투를 치르는 보병(중화항체)만 키우지 않는다. 적의 형태와 상관없이 바이러스로 인한 염증에 대처하고 전쟁터를 유리하게 정리하는 주력군(T세포 면역)에도 동원령을 내려 전쟁 훈련을 시킨다. 변종이 중화항체를 피해 철책선을 뚫고 들어와도, 준비 태세를 갖춘 주력군이 있기에 큰 화는 피할 수 있다. 빗발치는 돌파 감염 속에서 건강하려면, 부스터샷으로 방어막을 치고, 면역력과 단련된 체력으로 버텨야 한다.

/김철중 논설위원, 의학전문기자

 

12.23 중국 여론 조작단

▲중국 테니스 스타 펑솨이(왼쪽)가 웃는 얼굴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올렸다. /트위터

 

2007년 중국 후진타오 주석이 정치국 회의에서 “인터넷상 여론·사상 기지 건설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중앙정부가 곧바로 “인터넷 평론원 부대를 조직하겠다”고 복명했다. 국가 차원의 ‘여론 조작단’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중국 인터넷 인구가 2억명을 돌파할 때였다. 앞서 2004년 말쯤 중국 지방정부가 댓글 한 건당 ‘5마오(약 85원)’를 준다며 조작단을 모집했다. ‘우마오당’이었다. 2015년 공산주의청년단이 지방 조직에 1000만명이 넘는 ‘댓글단’을 뽑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런 조작단들이 매년 4억8000만개의 댓글을 단다고 2017년 하버드대 연구진이 밝혔다.

 

▶최근 시진핑 주석이 ‘공동 부유(함께 잘살자)’를 강조하는 건 빈부 차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의미다. 중국 소득 불평등이 ‘태평천국의 난’을 부른 청나라 말기와 비슷하다는 내부 보고서도 있다. 부패 역시 고질병이다. 공산당은 이런 누적된 불만이 10억 네티즌을 통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마오쩌둥은 “정권을 뒤집으려면 먼저 여론을 형성하라”고 했다. 여론 조작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올 들어 위구르인들이 나와 “인권 탄압은 없다” “미국 주장은 헛소리”라고 말하는 동영상 수천개가 쏟아졌다. 자발적으로 찍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분석해보니 같은 표현과 주장이 반복됐다. 지역 선전 기관이 제작한 동영상이었다. 국제기자연맹(IFJ) 보고서는 “코로나 사태 이후 중국 정부가 국제 언론들을 매수해 긍정적 이미지를 만들려 했다”고 전했다. 중국 국내를 넘어 해외 여론 조작에도 나선 것이다.

 

▶중국 정부가 민간 업체를 고용해 트위터⋅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상 여론을 조작했다고 뉴욕타임스가 그제 보도했다. 중국 최고위 인사의 성폭력을 고발한 펑솨이가 올린 웃는 사진에는 ‘좋아요’가 쏟아지고 있는데 ‘조작’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계약 조건으로 ‘중국이 지정한 게시물 월 10회 최상단 노출’ 등도 내걸었다고 한다. 중국 당국이 주도하던 여론 조작 일부를 ‘민간 외주’로 돌린 것이다. 전 세계가 쓰는 소셜미디어의 ‘좋아요’를 직접 조작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시진핑이 한마디만 하면 ‘좋아요’ 수천개가 순식간에 달리는 경우가 많다. 한국 대선 여론을 조작했던 드루킹 일당의 ‘킹크랩’처럼 자동 프로그램이 작동 중인 것은 아닌가. 2019년 호주 총선을 앞두고 중국이 정당 등을 사이버 공격했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중국의 여론 조작이 어디까지 뻗칠지 알 수 없다.

안용현 논설위원

 

12.24 부부의 반말

외국에서 유학하다 만나 결혼한 어느 부부는 서로 존중하자는 의미로 평소 존댓말을 쓴다. 그런데 부부싸움만은 영어로 한다. 존댓말로 다투자니 아무래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반말로 싸우자니 자칫 험한 말을 주고받을 위험이 있어서 영어를 쓴다고 했다. 반면 아내가 평소 안 하던 존댓말을 쓰면 긴장된다는 남자도 있다. 반말할 때는 다정하고 친밀하던 아내가 갑자기 정색하고 높임말을 쓰며 다가오면 십중팔구 싸움 거는 신호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가 부부는 서로 존대했다. 그러나 평등한 관계는 아니었다. 아내는 남편을 존경법·겸양법·공손법 등 세 가지 방식의 극존칭 경어로 대했다. 반면 남편은 ‘이러하오’ ‘저러하오’ 등 예사높임말을 썼다. 평민들처럼 아내에게 반말하지는 않았지만, 존중해서라기보다는 체통을 지키자는 취지였다. 소수서원을 세운 조선 중기 문인 주세붕의 시조 ‘지아비 밭 갈러 간 데 밥고리 이고 가/ 반상을 들오되 눈썹에 맞초이다(...)’는 부부간 언어조차 불평등했던 시대의 단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국어에서 존댓말은 주로 연장자나 낯선 이에게 쓴다. 불어에선 그 쓰임이 우리와 사뭇 다르다. 불어의 ‘tu’는 ‘너’, ‘vous’는 존칭인 ‘당신’으로 해석되는데, 엄밀히 말해 ‘tu’는 반말이라기보다 관계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손자가 할머니를 부를 때 ‘tu’라 하는 것은 불손해서가 아니라 친해서이다. 프랑스 직장에서 상사가 부하에게 “나를 tu라 부르라”고 한다면 맞먹어도 된다는 게 아니라 서로 익숙해진 사이라는 의미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엊그제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실세는 김건희씨로 알려져 있다. 김씨가 사석에서도 윤석열 후보에게 반말을 한다”고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대통령 부인이 권력을 휘둘러선 안 된다는 송 대표의 발언 취지는 타당하다. 하지만 김건희 실세론의 근거가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반말’이라고 한 데서 많은 이가 고개를 저었다. 한 시사평론가는 “요즘 반말 안 하는 부부도 있느냐”며 “어설프게 프레임 작전을 짰다”고 비판했다.

 

▶존댓말을 한다면 아내만 남편에게 존대하기보다 부부가 함께 쓰는 게 타당하다. 근래에 부부 사이 반말이 보편화하고 있다. 부부간 친밀함을 강조하는 세태이기도 하고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지며 부부 관계가 평등해진 시대 변화도 반영됐을 것이다. 존댓말이든 반말이든 그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고 부부가 선택할 문제다. 물론 부부는 서로 존중하면서 평등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김태훈 논설위원

 

12.25 수사기관장들의 ‘꾀병’

영국의 내과의사 리처드 애셔가 1951년 ‘뮌하우젠 증후군’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애셔는 논문 첫 문장에 “뮌하우젠 증후군은 의사들 대부분이 목격했을 정도로 흔하다”고 썼다. 뮌하우젠 증후군 환자의 특징이 있다. “갑자기 중병에 걸렸다며 병원에 온다. 심각한 병세를 간절하게 호소한다. 누가 보더라도 바로 입원시켜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다. 그러나 모두 꾸며낸 일이다. 의사도 ‘속았다’고 깨닫는 데 제법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뮌하우젠 증후군은 쉽게 말해 ‘꾀병’이다.

 

 

▶꾀병의 동기는 다양하다. 한국에선 병역 기피에 꾀병이 자주 동원된다. 소변 검사를 받을 때 설탕액을 소변에 넣어 당뇨병 환자인 척하거나, 단백질이 소변으로 빠져나가는 약을 먹어 신장병 환자가 되기도 한다. 응원용 나팔이나 자전기 경음기를 귀에 대고 큰 소리를 내 청각을 마비시킨 뒤 장애 진단서를 받아 병역 면제를 받기도 한다. 특별한 증세가 없는데도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약성 진통제를 맞으려는 것이라고 한다.

 

▶애셔는 꾀병의 5대 동기에 ‘범죄자가 수사를 피하려는 의도’를 넣었다. 조국 전 법무장관의 아내 정경심 교수는 뇌종양·뇌경색 진단을 받았다면서 검찰에 입원 증명서를 냈다. 이 증명서는 뇌 질환과 무관한 정형외과에서 발급됐고 의사나 병원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조 전 장관의 동생 조권씨는 거리를 활보하더니 구속 영장 청구를 앞두고 디스크 증세를 호소하며 병원에 입원했다.

 

▶수사기관 최고 책임자들도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병원 치료를 핑계 대는 ‘꼼수’를 쓰고 있다. 김진욱 공수처장은 정치인 사찰 문제를 항의하러 찾아온 야당 의원들을 3시간 넘게 피해다녔다. “이비인후과 치료 후 몸이 좋지 않아 정형외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김오수 검찰총장도 법조 출입 기자들이 대검 대변인 휴대전화 탈법 감찰과 언론 자유 침해에 대해 해명을 들으러 온다고 하자 “치과에 가서 이를 뽑아야 한다”며 휴가 일정을 앞당겨 떠났다. “다음에는 또 무슨 과 치료를 받겠다고 할지 궁금하다”는 말이 나온다.

 

▶‘꾀병 감별법’도 있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한 뒤 장기간 입원하는 ‘나이롱환자’를 가려내는 기법이다. 아무 효과 없는 약을 진통제인 것처럼 먹였는데 통증이 가라앉았다고 하면 꾀병으로 보는 식이다. 자신의 잘못을 추궁당하는 자리를 피하려고 칭병(稱病)하는 공직자들에게도 꾀병 감별법을 적용해보면 어떻겠나.

금원섭 논설위원

 

12.27(월) 민중가수

서울서 대학 다니던 형이 방학 때 시골집에 오더니 노래를 가르쳐줬다. 김민기의 ‘아침이슬’이었다. 중학생 귀에 그 노래는 정서적 충격 그 자체였다. 특히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하는 구절은 전기 감전 같았다. 그때까지 배웠던 노래는 동요, 건전가요, ‘맹호부대 용사들아!’ 하는 월남전 참전 노래, 그리고 어른들 노래를 따라 부르던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같은 게 전부였다. 그런데 태양이 묘지 위에 타오르다니.

 

 

▶대학에 들어가니 전혀 다른 노래 세상이 펼쳐졌다. 김민기 한대수 양병집 같은 저항 가수들 노래를 거의 다 외웠다. 특히 김민기 노래 ‘금관의 예수’에서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곤욕의 거리...’를 읊조릴 때면 숭고한 비장미에 몸을 떨었다. 한대수의 ‘물 좀 주소’도 애창곡이었다. 그리고 엊그제 별세한 양병집은 ‘소낙비’ ‘서울 하늘’ 같은 노래로 불온한 영혼들을 사로잡았다.

 

▶운동가요에도 온건 서정파가 있고 격렬 전투파가 있다. 70년대와 80년대는 분위기도 크게 달랐다. 그러나 원조 격인 서유석 양희은 같은 가수를 민중가수로 부르기엔 망설여진다. 그냥 시대를 이끌었던 가인일 뿐이다. 어떤 집회 때 마이크 앞에 섰다고 해서 민중가수라고 자격증을 주는 것도 아니다. 공식 분류가 있을 턱이 없다. 때론 서정적인 노래가 더 ‘혁명적’으로 쓰일 때도 있다. 민중가요와 ‘날라리 노래’를 넘나든 가수도 많다.

 

▶김민기 노래 중 ‘늙은 군인의 노래’는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으로 시작한다. 전투적 민중시인인 김남주가 생전에 김민기에게 항의했다고 한다.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내 청춘...’ 같은 대목이 너무 패배적이라는 것이다. 이 노래는 3년 전 현충일에 추모곡으로 쓰였고, 최백호가 불렀다. 한때 군의 사기 저하를 이유로 금지곡이었는데, 이제 공식 행사장에서 불리다니 세상 변한 걸 실감한다.

 

▶TV조선 프로그램 ‘내일은 국민가수’가 엊그제 ‘제1대 국민가수’ 박창근을 뽑고 막을 내렸다. 그런데 과거 그가 몇몇 집회에 참여했다 해서 논란이 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누구 편도 아닌 노래의 편입니다.” 맞는 답변이다. 그가 무슨 ‘개념 연예인’ 행세를 한 것도 아닐 것이다. 연전에 김민기는 한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의도나 계획을 갖고 (곡을) 만드는 체질이 아닙니다.” 그는 ‘세월호’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청도 사양했다고 했다.

김광일 논설위원

 

12.28 휴대전화 분실의 ‘멘붕’

PC로 카카오톡에 ‘휴대전화 분실, 전화번호 보내줘’라는 메시지를 올린 친구에게 들으니 “기억나는 전화번호가 하나도 없다”고 한다. 심지어 아들 전화번호도 바로 생각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국내 휴대전화 가입 대수는 7127만대로 전체 인구(5170만명)의 1.4배에 이른다. 휴대전화 보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분실물 목록 1위도 당연히 휴대전화가 됐다. 올해 서울 시내 버스와 택시에서 시민들이 가장 많이 잃어버린 물건도 휴대전화(전체 분실물의 31.3%)라고 한다. 서울 지하철에서 1년간 잃어버린 휴대전화도 1만8670대나 된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세상과 철저하게 단절되는 느낌”이라고 한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전화번호 중에 기억하고 있는 것은 7.2개에 불과하다는 조사가 있다. 휴대전화에 깔린 모바일 메신저도 쓸 수 없어 사적 연락뿐 아니라 업무 처리도 대부분 막히게 된다. 금융 거래나 결제도 마찬가지다. 모바일 뱅킹만 이용하거나, 신용카드 대신 모바일 카드만 사용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경제 활동이 마비될 수밖에 없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개인 정보, 사진과 동영상이 다 털릴 수도 있다. 휴대전화가 없어 일손을 못 잡고 허둥댔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휴대전화 분실은 통행금지나 마찬가지다. 제주도에 혼자 여행 갔다가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40대 남성은 갈 수 없는 곳이 더 많았다고 했다. 여행 가이드에 나온 유명 식당, 카페에 갔지만 QR코드도 찍지 못하고 안심 전화도 걸 수 없어 입장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백신을 맞았어도 접종 확인서가 잃어버린 휴대전화 속에 있으니 보여줄 방법도 없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렸을 때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를 알려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영국 생리학회가 2017년 성인 남녀 2000명의 스트레스 지수를 조사했다. 배우자 사망, 교도소 수감, 화재·홍수, 중병, 해고 등 18가지 상황을 주고 어느 경우에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지 물어본 것이다. 그 결과 ‘스마트폰 분실’은 테러 위협과 거의 같은 수준의 스트레스를 줄 수 있는 것으로 나왔다. 스마트폰 분실 스트레스를 가장 강하게 느끼는 집단은 25~34세 청년층으로 나타났다.

 

▶국내에 휴대전화 서비스가 처음 선보인 것은 1988년 7월 1일이었다. 33년 만에 휴대전화는 생활 필수품 차원을 넘어 ‘생존 필수품’ ‘제2의 자아’까지 변모했다. 이 정도니 휴대전화 분실을 ‘멘붕(멘털 붕괴)’ ‘영혼 이탈’이라고 하는 것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금원섭 논설위원

 

12.29 ‘돈벼락 새 역사’ 쓰는 화이자

30년 전 그리스 한 대학 동물병원에서 수의사로 일하던 청년이 지금은 전 세계 국가 수장들이 전화 통화를 못해 안달하는 몸이 됐다. 화이자 CEO 앨버트 불라(60)가 그 주인공이다. 코로나 백신 전쟁에서 최종 승자가 돼 전무후무한 대박 신화를 쓰고 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부모에게서 “융통성을 발휘해 기회를 포착하는” 생존법을 배웠다고 했다.

 

 

▶화이자의 mRNA 코로나 백신은 화이자가 만든 것이 아니다. 터키계 독일 과학자가 개발한 것이다. 화이자는 이 독일 벤처기업에 수익 절반을 떼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해 재빨리 손을 잡았다. 화이자는 독일 벤처기업에 연구자금을 지원한 독일, 개발자의 모국 터키만 예외로 인정해 주고, 나머지 나라에 대해선 철저히 이익 극대화 전략을 추구했다. 선진국엔 백신 1회분 19달러, 개도국 10달러, 후진국 6.75달러라는 가격이 그렇게 설정됐다.

 

▶화이자가 코로나 백신 시장을 장악한 비결은 압도적 생산·유통 능력에 있다. 직영 공장 9곳, 위탁 공장 20곳을 돌려 올해만 백신 30억개를 생산했다. 유통에 필요한 초저온 박스를 자체 제작했고, 여기에 들어가는 드라이아이스를 공급하기 위해 드라이아이스 공장까지 지었다. 그 결과 화이자 백신의 미국·유럽 시장점유율이 70~80%에 달한다. 올해 백신 판매액이 360억달러(약 43조원)에 이르고 이익률은 50%를 웃돈다.

 

▶갑질도 엄청났다. 백신 수입국에 도입량, 단가를 발설하지 말라는 비밀 유지 각서를 받았다. 수입국에 국유 자산을 담보물로 요구했다. 부작용에 대한 면책을 요구하고, 가격 질서를 교란할까 봐 수입국의 백신 기부까지 금지시켰다. 화이자의 한 직원은 “수많은 나라와 동시다발로 계약 협상을 진행하면서, 상대 정부가 얼마나 빨리 (우리 요구에) 응하느냐에 따라 계약 체결 여부가 결정됐다”고 말했다.

 

▶화이자 역사를 보면 대형 재난을 성장 기회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 남북전쟁 땐 구충제로, 2차 대전 땐 페니실린 대량 생산 기술로 연합군 항생제 수요를 싹쓸이했다. 이번엔 코로나다. “코로나 백신이 돈벼락 역사를 새로 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먹는 코로나 치료제까지 가세하면 화이자가 내년엔 세계 1위 제약사(현재 8위)로 등극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화이자 CEO 집 앞에선 “인류의 비극을 대박 기회로 삼는다”는 비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후손이 그런 욕을 먹고 있다니 아이러니하다.

김홍수 논설위원

 

12.30 현기증 나는 한수원의 변신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 조작 사건 공소장을 보면, 2017년 7월 25일 취임한 백운규 산업부장관은 8월 2일 내부 회의에서 ‘이관섭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사장의 교체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그때 이 사장은 임기가 2년 3개월이나 남아 있었다. 넉 달 뒤인 12월 4일 검찰이 이 사장의 집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별건 수사로 알려졌다. 이 사장은 한 달여 뒤 물러났다. 그가 2017년 10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때 ‘건설 재개’ 지지 입장을 밝혀 정권에 밉보인 게 결정적 문제였을 것이다.

 

 

▶2018년 4월 취임한 후임 정재훈 사장은 임원추천위원회에 냈던 ‘직무 수행 계획서’에서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결정이 가급적 연내에 이뤄지도록 하겠다’고 적었다. 월성 1호기 폐기를 약속하고 사장이 된 것이다. 정 사장 취임 한 달 뒤 탈원전에 비판적인 사외이사 세 명이 모두 우호 인사들로 교체됐다. 다시 한 달 후 이사회에서 월성 1호기 즉각 폐쇄가 결정됐다.

 

▶정 사장은 취임 넉 달째부터는 ‘한수원이 원자력을 넘어선 종합 에너지 기업으로 발돋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신재생까지 포괄해 사업 영역을 확장하겠다며 ‘신사업 발굴팀’이란 것도 발족시켰다. 당시 한수원 사명(社名)에서 ‘원자력’을 빼는 걸 검토한다는 소문까지 났다.

 

▶최근엔 한수원이 세계 최대 수상 태양광을 건설한다고 부산하다. 2018년 10월 정부가 10조원을 들여 새만금에 태양광 등 초대형 재생에너지 단지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한수원은 여기서 1차로 300㎿급 수상 태양광의 주관 사업자로 선정됐고 전체 수상 태양광 설계와 15㎞ 송변전 설비 공사까지 수주했다. 그런데 감사원이 지난 17일 한수원이 설계 업무를 면허가 없는 현대글로벌에 수의 계약으로 맡겼다면서 관련자 문책을 요구하는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현대글로벌은 수주한 뒤 이를 통째로 면허를 가진 다른 엔지니어링사에 하도급으로 넘겨 손도 안 대고 33억원을 벌었다.

 

▶정재훈 사장은 지난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신한울 3·4호기 원전 건설이 재개됐으면 좋겠다”는 의외의 발언을 했다. 그러더니 최근 한수원은 “원전은 환경 보전에 유리한 초(超)저탄소 에너지원”이라며 원자력을 ‘녹색 에너지’로 분류해 지원해달라는 입장을 환경부에 전달했다. 요즘 대선을 앞두고 여당과 정부 내에서 탈원전을 재고하자는 말들이 나오는 분위기다. 풀이 바람보다 먼저 눕는다는 말이 있다. 한수원의 변신을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다.

한삼희 선임논설위원

 

12.31(금) “아들은 남이다”

미국 매사추세츠에 사는 딕 호잇은 전신마비 아들을 휠체어에 태우고 평생을 달렸다. 40년간 마라톤과 철인 3종 경기 등에 1100회나 나갔고 미 대륙도 횡단했다. “달릴 때는 장애를 전혀 못 느낀다”는 아들의 말 때문이었다. 그는 아들을 실은 고무배를 허리에 묶고 바다를 헤엄쳤고 특수 자전거에 아들을 태우고 페달을 밟았다. 그는 “아들은 내 심장이고 몸”이라고 했다. 호잇이 80세로 생을 마감하자 미국 사회가 ‘가장 위대한 아버지’가 떠났다고 애도했다.

 

 

▶동해에 사는 생선 뚝지는 암컷이 알을 낳고 떠나면 수컷이 40일 동안 알을 지킨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쉬지도 않고 지느러미를 흔들어 알에 산소를 불어넣는다. 새끼가 부화하면 수컷은 지쳐 죽는다. 가시고기 수컷도 가시를 세워 알을 보호한다. 새끼가 나오면 자기 몸을 먹이로 내어준다. 사람 못지않은 부성애다.

 

▶'자식은 원수’라고도 한다. 티베트의 환생 이론에 따르면 전생에 원수였던 연인이 자식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자식은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버릴 수도 없고, 무관심할 수도 없다. ‘안 보겠다’고 백 번을 결심해도 자식이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것이 부모다. 그래서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참고 삭일 수밖에 없는 게 부모다. 노인 학대 사건의 제1 가해자가 아들이라고 한다. 그래도 부모는 어쩔 수 없다. 상속에 눈이 뒤집힌 아들의 칼을 맞은 어머니가 아들이 살인범으로 붙잡힐까 봐 증거를 삼키고 숨지는 영화가 있었다. 영화 속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아들의 도박에 대해 “대통령 부인은 공적 존재지만 성년인 아들은 남”이라고 했다. ‘부부는 헤어지면 남’이라지만 ‘아들이 남’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 ‘아들 문제는 나와 상관없다’고 선을 그으려는 것처럼 들린다. 역대 대통령들은 거의 예외 없이 아들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들은 줄줄이 구속됐다.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 아들도 검찰·특검 조사를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그 일로 목숨까지 끊었다. 그래도 ‘아들은 남’이라고 한 사람은 없었다.

 

▶이 후보는 대장동 사업에서 유동규 전 본부장의 비리가 드러나자 “측근이 아니다”라고 했다. 성남공사 간부인 김문기씨가 극단적 선택을 해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 후보는 누구라도 걸림돌이 되면 ‘손절’할 수 있는 것 같다. 심지어는 자신이 한 말도 문제가 되면 ‘손절’한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들을 남이라고 할 줄은 몰랐다.◎

배성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