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퍼스펙티브 전 동양대 교수 중앙일보 2020.
08.26 "애국가 버리란 김원웅, 일장기 든 광화문 다 미쳤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김원웅 광복회장이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쓸데없는 발언을 했다. 이승만이 ‘친일파와 결탁’했으며 안익태는 ‘민족반역자’였다는 것이다. 개인의 견해라면 존중할 수 있다. 심지어 그의 견해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다. 문제는 발언의 화용론적 맥락이다. 제 개인적 견해를 공식행사에서 공인의 자격으로 발화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적절해 보인다.
‘하나의 시각’ 절대화해 역사 재단
국민에 필요없는 ‘국부 논쟁’ 불러
애국가를 버리라는 광복회장
일장기 나온 광화문, 다들 미쳤다
나라를 둘로 쪼갠 광복회장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동기의 불순함이다. 그는 ‘토착왜구’ 척결이라는 정권의 선동정치 프레임을 국민통합의 장이어야 할 광복절 기념식에 끌어들였다. 광복회장이 나라를 두 편으로 가르는 짓을 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인식의 편향성이다. 그의 발언은 낡은 민족주의 이념, 이른바 ‘NL(민족해방)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 있다.
결국 그의 선전포고로 국가주의 대 민족주의의 역사전쟁이 재개됐다. 서로 원수처럼 싸우나 두 이념은 역사를 단 ‘하나의’ 시각으로 재단하려는 환원주의를 공유한다. 그 하나의 시각이란 물론 ‘자기의’ 시각이다. 하나의 시각을 절대화하면 편향이 발생하기 마련. 둘은 상대의 편향으로 제 편향을 정당화하며 적대적 공생을 이어왔다.
우익 국가주의자들은 ‘체제’의 눈으로 역사를 해석한다. 그래서 독립투쟁보다는 국가체제의 수립을 더 중시한다. 여기서 정부수립에 참여한 친일파들을 건국의 은인, 구국의 영웅으로 추켜세우는 편향이 발생한다. 심지어 친일을 변호하려다가 일제가 식민통치로 조선의 근대화를 도왔다는 극단적 주장으로 치닫기도 한다.
반면 좌익 민족주의자들은 역사를 ‘민족’의 시각으로 재단한다. 그들에게 체제의 선택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여기서 이승만 정부를 분단의 원흉으로 폄훼하는 편향이 생긴다. 실제로 김원웅 회장은 언젠가 한국전쟁에 ‘민족해방전쟁의 의미’를 부여한 바 있다. 그러니 김정은을 위인으로 섬기는 모임에 가서 축사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두 개의 신화

/그래픽=최종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국가주의 신화를 파괴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반공교육만 받고 자란 세대는 이 책을 읽고 교과서 속 반공 투사들이 황군이었고, 교과서 속 문인들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 마음들에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이 땅의 현실은 견디기 힘든 배신감과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이 절망감은 국가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민족 정통성은 친일파를 청산한 북한에 있으며, 남한은 미국을 새로운 상전으로 모신 친일파들의 나라일 뿐이다.’ 이 편향의 정치적 표현이 바로 1980~90년대를 지배한 NL 운동이었다. 물론 이 민족주의 서사 역시 그것이 파괴한 국가주의 신화 못지않게 허구적이며 기만적이다.
이 정권 사람들은 반민특위를 해산시켰다고 이승만을 친일파의 거두로 몰아붙인다. 하지만 정작 일본에서 이승만은 강경한 반일 인사로 통한다. 독립운동을 했고, 이승만 라인으로 독도를 지켰으며, 한국전쟁 중 일본군의 참전에 극렬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알려진 것과 달리 그가 세운 초대 내각에 친일파의 이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반면, 비록 남한만큼은 아니더라도 북한 정권 역시 친일파들을 대거 기용했다.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 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텔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 그들을 새 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 주시었다.”
한 마디로 남이나 북이나 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친일 기술 관료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게다. 북에서도 친일파들은 노동당에 충성하며 출세를 했다. 반면 독립운동가들은 김일성 유일 체제에 반대하는 한 거기서도 숙청의 대상이었다. 연안파와 소련파·남로당 계열이 그렇게 사라졌다. NL 민족주의도 결국 북한판 국가주의 이념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버지 없는 나라
이 쓸데없는 논쟁은 곧바로 국부(國父) 논쟁으로 이어진다. 국가주의자들은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국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단독정부의 수립은 이승만의 업적도 아니었고 그의 오류도 아니었다. 남북이 각각 미국과 소련에 점령당한 상태에서 그것은 옵션이 아니라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 운명은 분명 우리가 원하던 게 아니었다.
반면 민족주의자들은 김구를 국부로 내세우며 김구를 암살한 친일파의 나라라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폄훼하곤 한다. 이런 것을 ‘발생론적 오류’라 부른다. 아버지가 도둑이라고 아들까지 도둑인가? 반면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했다 한들 그게 현재 북한에 존재하는 개인숭배와 3대 세습에까지 정당성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사관(史觀)은 실은 역사 수정주의에 불과하다. 국가주의자들은 1948년 정부수립을 ‘건국혁명’으로 보아 그날을 ‘건국절’로 제정하려 한다. 하지만 정부수립은 ‘건국’도 아니었고 ‘혁명’도 아니었다. 헌법 전문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와 함께 시작됐다. 우리에게 건국혁명이 있다면 그것은 3·1운동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주권자인 국민에게 있다. 전쟁의 폐허 위에 경제를 일으킨 것도 우리였고,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세운 것도 국민이었다. 좌·우익 전체주의자에게는 ‘국부’가 필요하겠지만, 민주주의자는 역사를 쓰는 데 굳이 국부를 요하지 않는다. 그런 아버지를 왜 둘이나 들이려 할까?
역사란 무엇인가
우리 역사의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는 것을 국가주의자들은 일본 우익을 따라 ‘자학사관’이라 부른다. NL 민족주의 역시 제 흑역사에는 애써 눈을 감는다. 국가주의자들은 ‘국가’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양민이 학살됐는지 봐야 한다. 민족주의자들 역시 ‘민족’을 해방한다는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양민을 희생시켰는지 봐야 한다.
역사는 국가를 위대하게, 민족을 거룩하게 하는 미화작업이 아니다. 역사는 피억압자가 당한 고통의 진실한 기록이자, 주권자인 ‘시민’의 눈으로 국가와 민족의 업적과 과오를 심판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두 세력 모두 남과 북에서 그 잘난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가혹한 ‘독재’가 행해져 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두 극단의 싸움은 나라를 해방 전후사로 되돌린다. 한쪽은 존재하지도 않는 종북좌빨 색출에 나섰다. “대한민국을 김정은이 움직이고 있다.” 다른 쪽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토착왜구 척결에 나섰다. “토착왜구들이 나라를 좀먹고 있다.” 망상에 빠진 수많은 이들을 희생시켰던 제 선조의 오류를 그대로 반복한다.
그렇게 역사를 밝히면서 도대체 거기서 배운 게 없다는 얘기다. 역사는 기억을 조직하는 문제다. 대화와 토론으로 도달한 합의 위에서 국가공동체의 기억을 공유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나 어차피 전체주의 사상. 서로 죽일 듯 싸우면서도 상대를 절멸의 대상으로 삼는 군사주의 마인드만은 사이좋게 공유한다.
친일청산 작업
“친일 반민족 권력이 장악해온 시대를 조문하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역사적 의무다.” 김원웅 회장의 말이다. 그냥 혼자 해도 될 일을 왜 굳이 “우리가 해야 할 일”로 만들까? 해방되던 해에 태어났어도 지금 75세. 친일파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역사적 의무는 있는데 청산할 친일파가 없으니, 묘지에서 죽은 친일파라도 꺼내야 하는 것이리라.
그는 유신정권과 5공 정권을 위해 일한 바 있다. 하지만 ‘친일 반민족 독재정권이 장악해 온 내 인생을 조문하는 게 내가 해야 할 역사적 의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저 ‘생계’를 위해 한 일이었다는 변명이다. 친일도 생계를 위해 했지 어디 굶기 위해 한 짓이던가? 그런 그가 친일이 묻었다고 애국가를 버리란다.
안익태가 친일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애국가는 그가 친일을 하던 시기에 만든 게 아니다. 애국가는 한국전쟁 때 국군 병사들이 불렀던 노래고, 5·18 광주 시민항쟁 때 시민군들이 불렀던 노래이기도 하다. 애국가를 애국가로 만든 것은 민중이다. 거기에 애국가의 정통성이 있고, 이 역사는 그에게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광복절이 건국절이 되니 8월 15일의 광화문에 일장기까지 튀어나왔다. 광복절 기념으로 광복회장이 애국가를 폐기하잔다. 그럼 저만의 애국가를 제정하든지. (그의 개인적 애국가로는 ‘죽창가’가 어떨까?)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제 역사를 무시당한 ‘시민’에게는 이 빌어먹을 상황이 그저 기막힐 뿐이다. 다들 미쳤다.
09.02 촛불 정권, 연성 독재로 전락했다
“한국의 리버럴 정권이 내면의 권위주의를 드러내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기사의 제목이다. 자칭 ‘촛불정부’의 변질을 외신에서도 주목하나 보다. 기사는 ‘더 개방적이고 반대의견에 관대한 정부’를 만들겠다던 문재인 정권이 반대 의견을 참지 못해 소송을 남발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정권의 ‘내면의 권위주의’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법의 지배와 법에 의한 지배 착각
민주 표방하며 권위주의적 통치
국민은 법 아래, 자신들은 법 위에
편의대로 반자유주의 법률 쏟아내
촛불정권의 권위주의 통치
문 대통령은 의료계 파업에 “원칙적 법 집행을 통해 강력히 대처하라”고 지시했다. 어조가 매우 권위주의적이다. 7년 전 경찰이 철도파업을 주도한 민주노총 간부의 체포영장을 집행했을 때는 이렇게 말했었다. “왜 이리도 강경한가? 대화와 협상이 먼저지 공권력이 먼저여서는 안 된다. 공권력 투입은 정부의 소통과 대화능력의 부족을 보여줄 뿐이다.”
현대국가에서도 민주주의는 파괴될 수 있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저자 레비츠키와 지블랫 은 그 일이 정권에서 법원·검찰·국세청 등 심판 역할을 하는 기관을 장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지적한다. 심판을 매수하는 방식인데, 이는 공직자나 비당원 관료를 해고하고 그 자리를 충신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정권의 충신들이 이들 기관을 장악하면 권력을 제어하는 수사와 고발을 차단함으로써 잠재적 독재자에게 도움을 준다. 그 경우 대통령은 마음대로 법을 어기고, 시민권을 위협하고, 심지어 수사나 검열의 걱정 없이 헌법을 위반한다. 그리고 정권의 입맛에 맞는 판사로 사법부를 채우고 법 집행기관의 힘을 무력화함으로써 처벌의 두려움 없이 권력을 휘두른다.”
지금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검찰총장과 감사원장과 판사들이 정권의 타깃이 되었다. 검찰총장의 손발이 잘리고, 조직은 온통 장관 라인으로 채워졌다. 여당 의원이 대놓고 감사원장에게 정권의 코드에 맞추라고 요구한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향에 대해서 불편하고 맞지 않으면 사퇴하세요.” 심지어 총리가 8·15 집회를 허용했다고 판사를 공격한다.
법의 위에 서 있는 사람들

/그래픽=최종윤
“자유민주주의는 법의 지배를 통해서 실현된다.” 검찰총장이 보다 못해 한마디 하자, 민주당은 이를 ‘반정부 투쟁 선언’으로 규정하고 나섰다. 법의 지배를 말했다고 반정부로 몰아가니, 이 정권은 법치에 반대하는 모양이다. 신정훈 의원이 호들갑을 떤다. “일반인의 입장에서 ‘법의 지배’ 같은 무서운 말들은 꽤 위험하게 들린다.”
원희룡 제주지사가 꼬집고 나섰다. 혹시 ‘법의 지배’(rule of law)를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로 착각한 게 아니냐고. 원 지사의 말대로 ‘법의 지배’는 사회 구성원은 누구나 법의 지배를 받는다는 민주주의 사회의 원칙, ‘법에 의한 지배’는 법을 통치수단으로 악용하는 권위주의 정권의 반칙이다. 교양 없는 의원이 이 둘을 혼동한 것이다.
이게 한 개인만의 문제일까? 둘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실은 정권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 문재인 정권은 ‘법의 지배’를 ‘법에 의한 지배’로 착각하고 있다. ‘법에 의한 지배’란 (1) 통치자가 법 위에 서 있는 존재로서 (2) 제 편의대로 법을 만들어 집행할 권한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개념이다. 이 두 요소가 문재인 정권에 고루 나타난다.
먼저, 그들은 법의 위에 있으려 한다. 조국 수사는 저항에 부딪혔다. 증권범죄 합수단은 해체됐다. 권력에 대한 수사는 중단됐고, 비리에 칼을 댄 검사들은 좌천됐다. 이른바 ‘검찰개혁’은 철저히 법의 지배에 ‘예외’를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국민은 법 아래 놓고, 자기들은 법 위에서 그것의 지배를 피해 가려는 것이다.
법 위에 선 존재라는 그들의 특권의식은 시각적으로도 확인된다. 선거 개입 사건의 피의자들은 검찰의 소환에 불응했다. 최강욱 의원은 재판을 받다가 자리를 뜨려 했다. 이수진 의원은 법정에서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법관을 탄핵하겠다고 한다. 이 모든 방자함은 자신들이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정치적 무기로서 입법
‘법에 의한 지배’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두 번째 요소, 즉 법을 통치자의 의지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에서다. 이는 민주당 의원들이 추진하는 일련의 비(非)자유주의적 혹은 반(反)자유주의적 입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칭 ‘리버럴’ 정당의 의원들이 줄줄이 자유주의에 반하는 법률들만 쏟아낸다. 얼마나 해괴한가.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손해액의 3배에 달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명기한 정청래 의원의 법안이다. 이 법은 언론의 관심을 못 받는 일반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 법이 보호하는 것은 그 동정이 언론에 보도되는 권력자들뿐. 언론계에서는 한목소리로 이 법이 헌법적 가치인 언론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훼손한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당론으로 채택된 역사 왜곡 처벌법은 위헌의 소지가 다분하다. 사실을 사실로 확정하는 작업은 사상의 자유시장에 맡겨야 하며, 확정된 사실도 반대 사실의 도전을 허용해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다. 이 민족보안법은 국가보안법 못지않게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것이다. 악의적 날조자들은 굳이 이 법이 없어도 그동안 처벌을 받아왔다.
이수진 의원은 국립묘지에서 친일 인사의 묘를 파내는 ‘파묘법’을 발의했다. 우리의 굴곡진 역사에는 긍정과 부정의 이중 규정을 받는 인물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들에 대한 보훈을 어떻게 할지는 학계나 시민사회의 합의로 정할 일. 한쪽의 견해를 법으로 강요하면 선거 결과에 따라 안장과 파묘를 반복하는 해프닝이 벌어질 것이다.
이 반(反)자유주의적 입법에 정점을 찍은 것은 황운하 의원의 의사 강제동원법이다. 민간인 의사들을 ‘재난관리자원’으로 규정해 국가 재난시 강제 징발하겠다고 한다. 신현영 의원의 법안에는 심지어 징발한 의료인력을 유사시 북한에 파견하는 내용까지 담겨 있다. 민간인을 군인 취급하는 셈인데, 이는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군국주의적 발상이다.
사법부를 진압하라
박주민 의원은 공수처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야당의 비토권을 무력화하는 내용이다. 공수처가 정권 보위를 위한 게 아니라는 근거로 자기들이 내세워 온 게 야당의 비토권인데, 그것마저 없애겠다는 것이다. 공수처를 대놓고 정권 보위기관으로 만들려는 모양이다. 의원입법이 통치자의 의지를 억지로 관철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원욱 의원은 광화문 집회를 허용한 판사의 이름을 따 ‘박형순 금지법’을 발의했다. 입법으로 사법부의 판결까지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판결이 문제라면 법 비판으로 풀 일. 법률이 문제라면 그 법에 따른 이를 ‘판새’라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두 가지를 다 한다. 입법을, 방역실패의 책임을 판사에 떠넘기는 대중 선동의 도구로 악용한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훨씬 더 우선적”이란다. 국민의 헌법적 권리를 제약하는 법은 늘 ‘생명과 안전’을 명분으로 내세워 왔다. 국가보안법을 생각해 보라. 과거에 그들은 테러방지법 막겠다고 필리버스터까지 했었다. 그때는 왜 ‘국민의 생명과 안전’보다 통신의 자유를 앞세웠을까? 이렇게 그들은 자기들의 적을 닮아간다.
리걸 마인드와 운동 마인드
민주당 의원들이 내놓은 법안들은 하나같이 해괴하기 짝이 없다. 거기에 일관된 특징이 있다면, 반(反)자유주의적이며 심지어 전체주의적이라는 점. 그들은 자신을 법치의 예외로 놓고 입법을 통치의 무기로 휘두른다. 이것이 ‘법에 의한 지배’다. ‘민주’를 표방해 온 정부가 어느새 권위주의 정권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들이 만든 법은 하나같이 위헌의 소지를 안고 있다. 입법을 ‘리걸 마인드’(legal mind)가 아니라 ‘운동 마인드’로 하기 때문이다. ‘리걸 마인드’는 어느 정권이 들어서도 공정하게 운영될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개혁으로 본다. 반면 ‘운동 마인드’는 제 대의를 관철할 수 있다면 시스템 따위는 좀 망가뜨려도 된다고, 아니, 그래야 한다고 본다.
검찰·감사원·법원·언론 등 감시와 견제의 기관들은 그들의 공격 대상이 됐다. 그 잘난 ‘개혁’으로 민주주의의 근간인 권력분립이 무너지고 있다. 이게 촛불을 들고 우리가 원했던 나라인가? 민주당은 리버럴하지 않다. ‘내면의 권위주의’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그들은 이미 독재자, 이른바 ‘연성 독재자들’이다. 촛불은 배반당했다. 시민은 기만당했다.
09.16 헬조선의 마왕들에게 던지는 물음
추미애 사태는 기어이 제2의 조국 사태가 됐다. 평등과 공정과 정의를 외치는 정권의 사람들이 실은 자기들의 성채에서 특권을 누려온 사실이 또다시 드러난 것이다. 대응의 기조도 그때와 똑같다. ‘적법’하다면 아무 문제없다는 것.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적법하다는 그 방식으로 서민들이 자식을 시험 없이 의전원에 보내거나 전화만으로 자식의 휴가를 연장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엔 특권이라 비판했던 그들
자신의 ‘청탁’은 ‘미담’으로 둔갑
자기 아이만 특별히 여기는 엄마
정의 담당 부서의 장 자격 있나?
반칙이 규칙으로 굳어져버리고
촛불은 어느새 지옥불로 변해
범죄자들의 변명 기법
오래전에 조국 전 장관이 SNS에 이런 글을 공유한 적이 있다. ‘범죄자들의 변명 기법. (1) 절대 안 했다고 잡아뗀다 (2) 증거가 나오면 별것 아니라고 한다 (3) 별것 같으면 너도 비슷하게 안 했냐며 물고 늘어진다 (4) 그것도 안 되면 꼬리 자르기를 한다.’ 문재인 정권 또한 조국과 그 가족의 비위 의혹을 정확히 이 ‘기법’으로 처리했다. 추미애 사건도 같은 궤적을 그리는 모양이다.
처음에 추미애 장관은 아들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고 잡아뗐다. “소설 쓰시네.” 이는 금방 거짓말로 드러났다. 국방부에서 부모가 민원을 넣은 기록이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의원실 보좌관이 부대로 여러 번 전화를 한 사실도 드러났다. 게다가 국방장관 정책보좌관이 통역병 선발과 관련해 여기저기 부적절한 청탁을 하고 다니다 “행동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은 사실도 밝혀졌다.
증거가 나오자 2단계로 넘어간다. “카투사 자체가 편한 보직이라 휴가를 갔냐 안 갔냐는 별로 의미 없는 얘기다.”(우상호 의원) “전화한 것은 사실인데 외압은 아니다.”(김남국 의원) “보좌진은 공사 경계선에 있어 문의 전화가 문제 안 된다.”(홍익표 의원) 심지어 “부모 자식 관계도 단절해야 하냐”(장경태 의원)는 항변, 심지어 “민원을 넣었다는 것은 권력을 행사한 게 아니라는 얘기”(설훈 의원)라는 궤변까지 나왔다.
사건이 ‘별것’으로 번지니 3단계가 시작됐다. 지지자들이 “너희 자식도 까 보라”고 외친다. 김남국 의원은 야당을 물고 늘어진다. “야당엔 군대 안 갔다 온 분들이 많다.” 그런데 확인해 보니 정작 병역을 면제받은 의원은 민주당이 야당보다 세 배나 많다. 병역을 면제받은 의원 2세 15명 중 14명이 민주당 소속이다. 이에 고무된 야당 의원들은 단톡방에서 군대 간 자식 사진 경연대회를 벌였다.
어떤 데자뷔

/그래픽=최종윤
3단계까지는 여야 가릴 것 없이 고루 사용해 온 기법이다. 민주당 고유의 종적 특성이 드러나는 것은 역시 4단계. 왜? 민주당의 사전에 ‘꼬리 자르기’란 말은 없기 때문이다. 조국도, 윤미향도, 추미애도 자르지를 않는다. 민주당의 방법은, 그들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는 대안 세계를 창조해 국민을 그리로 이주시키는 것이다. 그 가상현실은 물론 유치한 음모론과 맹랑한 미담으로 지어진다.
민주당의 김종민 의원은 이 모든 것이 “추 장관 중심으로 추진 중인 검찰개혁을 흔들어 보려는” 음모라고 주장한다. 김어준은 아예 “탄핵을 부정하는 태극기 부대 작품”이라고 규정한다. 이 음모론과 짝을 이루도록 뭉클한 미담도 만들어졌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은 익명의 카투사 출신을 내세워 서 일병이 ‘십자인대 파열’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굳이 안 가도 될 군대에 간 애국자였다는 것이다.
국방부에서는 이 모든 게 적법했다는 해명을 내놨다. 그 해명은 민주당과 조율을 거친 것으로 드러났다. 애초에 국방부가 아니라 민주당의 입장이었다는 얘기. 국방부가 법무부의 지청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마저도 거짓이었다. 그 일이 있기 석 달 전, 국방부에선 ‘진료 목적의 청원휴가는 최초 10일이며, 연장이 필요한 경우 군 병원 요양심사위원회를 거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최선의 방어는 역시 공격이다. 추 장관은 폭로자와 그의 증언을 보도한 방송사를 고소해 버렸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내부 고발자는 큰 결심과 용기를 필요로 하고 고발 이후엔 배신자라는 주홍글씨를 안고 살아가는 게 현실입니다.” 그 고발이 자기를 향하니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심지어 한 민주당 의원은 제보자를 범죄자라 부르며 검찰에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장관이냐 엄마냐
분명한 사실은 서 일병이 휴가를 연장받는 과정에서 부모 중 하나가 국방부에 민원을 넣고, 보좌관이 세 차례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통역병 선발 과정에도 민주당 출신 국방장관 정책보좌관의 로비가 있었다는 것도 사실로 밝혀졌다. 용산 배치 청탁 건 역시 ‘애초에 용산에 보내줬어야지’라는 서 일병의 글로 보아 사전에 그것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으리라 추정하는 게 자연스럽다.
사실은 허구로 지은 그들의 매트릭스를 위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선가? 추 장관이 발표한 사과문에는 일절 ‘사실’에 대한 해명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국민이 반대하는 탄핵을 한 죄를 갚겠다고 국민이 시키지도 않은 삼보일배를 하다가 무릎을 다쳐 높은 구두를 못 신는 중증 장애를 얻었다는 둥 애절한 신파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과를 받고도 그게 ‘무엇’에 대한 사과였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국회에 불려 나와서도 그는 ‘사실’의 확인을 모조리 피해갔다. "실제 보좌관이 전화했는지 여부, 또 어떤 동기로 했는지는 말씀드릴 형편이 못 됩니다.” 민원을 넣은 게 남편이었냐고 묻자 "주말부부라 남편에게 물어볼 형편이 못 된다”고 대꾸한다. 자신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단다. "저는 검은 것을 희다고 말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맞다. 그저 검은 것이 검다고 "말씀드릴 형편이 안 된다”고 했을 뿐.
불편한 사실을 차단한 채 망상으로 도피한 그는 그 안에서 아들과 함께 이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 ‘스포츠 경영학을 공부한’ 제 아이가 외려 역차별을 받아 통역병 선발에서 떨어져서 억울하단다. 여기에 선발 방식이 면접에서 제비뽑기로 바뀐 게 자기 측에서 벌인 로비 때문이었다는 얘기는 빠져 있다. 국회 단상 위에서 그는 ‘장관’이 아니라 채 못 자란 어느 큰 아기의 ‘엄마’로 행동했다.
적법하면 문제 없다
‘적법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청탁은 대개 ‘손타쿠’(忖度·다른 사람의 뜻을 헤아려 행동한다는 뜻)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므로 법정에서 직접적 지시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 수사팀 역시 증인의 중요한 증언을 누락시켰던 그 사람들. 설사 의혹들이 사실로 밝혀지더라도 딱히 적용할 법률을 찾기도 어렵다. 기껏해야 김영란법 정도랄까? 이번에도 적법의 잣대로 윤리적 책임을 피해가겠다는 속셈이다. 조국 사태 때 봤던 그 패턴 그대로다.
이 사건의 본질은 그가 공인(公人)으로서 해서는 안 될 추잡한 짓을 했다는 것이다. 보좌관이야 아들과 평소에 알고 지냈다 쳐도, 국방장관의 정책비서관이 통역병 선발을 위한 청탁을 하고 다니는 것은 추 장관 본인의 관여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물음은 이것이다. ‘제 아이만 특별히 여기는 엄마가 한 나라의 정의를 담당하는 부서의 장을 하고 있어도 되는가?’
추 장관은 24년 전 이런 말로 정치를 시작했다. "부잣집 딸이든 가난한 집 아들이든 사회에 나아갈 때는 누구나 동등하게 출발할 수 있는 기회 균등의 꿈이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2016년 당 대표 선거에선 이렇게 외쳤다. "금수저 가진 사람일수록, 고위공직자일수록 반칙을 통해 특혜를 누리고, 기회는 공정하지 않은 헬 조선이 되었다.” 그런 그가 대표가 되더니 반칙으로 특혜부터 누리려 했다.
그의 전임도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헬 조선의 현실을 목 놓아 규탄했다.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가가 삶을 결정해 버리는 사회,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런 그들이 그 끔찍한 지옥의 높은 자리에 앉아 마왕 노릇을 하고 있다. 그 모든 파렴치에도 조국을 임명 안 하면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된다”고 했던 게 대통령.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뒤바뀐 분이니, 그의 역할을 기대할 수도 없다.
촛불은 지옥불이 되었다. 슬픈 것은 그 지옥의 수인(囚人)들이 ‘우리가 조국’이며 ‘우리가 추미애’라며 제 자식들을 태울 유황불에 열심히 풀무질을 한다는 사실. 과거엔 특권을 비판이라도 할 수 있었다. 이젠 그것마저 불가능해졌다. 왜? 반칙이 이미 규칙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벌써 청탁을 ‘미담’이라 부르고 있다. 이 헬조선을 창조하신 대마왕께 묻고 싶다. 각하,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가가 삶을 결정해 버리는 사회, 끔찍하지 않습니까.”
10.14 與인사 뻔뻔함, 그뒤엔 '프레임' 있다
프레임 전쟁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유명한 실험. 수업시간에 그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세요.” 결과는 어땠을까?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은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든 낱말에는 ‘프레임’이 따라오기 마련. 일단 ‘코끼리’라는 말을 들은 이상 코끼리와 그에 결부된 연상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프레임을 부정해 봐야 외려 그것을 환기시킬 뿐이다.”
‘예언’과 ‘조작’ 동원하는 프레이밍의 선무당들
프레임 없이는 터져나오는 비리 감당할 수 없어
잘못 사과하는 대신 밑밥 깔아놓거나 공격하는 것
자유주의에서 벗어난 해괴한 전체주의 프레이밍
상대의 언어를 피하라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해명하며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국민들은 외려 그를 ‘사기꾼’의 프레임 안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예가 있다.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는 문재인 후보에게 따져 물었다. “내가 MB 아바타입니까?” 하지만 상대의 언어를 차용함으로써 그는 상대가 뒤집어씌우려는 그 이미지에 갇혀버렸다.
올바르게 설정된 프레임으로 위기를 모면한 경우도 있다. 장인의 좌익경력을 문제 삼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렇게 대꾸했다. “그럼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이 말로써 그는 부당한 연좌제 프레임을 깨버렸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남편의 해외여행이 질타를 받자 “말린다고 말려질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로 국면을 전환시켰다. 아내들의 공감을 자아내며 사건을 원래 그것이 있었어야 할 맥락 속에 다시 옮겨놓은 것이다.
그릇된 프레이밍으로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는 경우도 있다. 이 분야의 귀재는 트럼프 대통령이다. 러시아 유착 의혹이 제기되자 그는 이를 재빨리 ‘스파이 게이트’로 명명했다. 자신을 낙선시키려고 법무부나 FBI에서 공화당 선거캠프에 스파이를 심어두었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트럼프 못지않은 프레이밍의 귀재가 있다. 더불어민주당이다. 이 당 사람들의 프레임 전략은 여러 면에서 트럼프를 뺨친다.
김어준의 예언

/그래픽=최종윤
레이코프는 미국의 리버럴과 좌파들에게 보수의 프레이밍에 맞서 진보의 가치를 담은 ‘올바른 프레임’을 설정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민주당 사람들은 이 전략을 주로 자기들의 비리를 은폐하는 데 악용한다. 그 방식도 몇 가지 점에서 트럼프의 것보다 악질적이다. 당장 눈에 띄는 특징은 사건을 프레이밍 하는 데에 ‘네이밍’이라는 언어학적 기법을 넘어 ‘예언’이라는 주술적 형식까지 동원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18년 2월 말 김어준이 느닷없이 곧 미투 사건이 터질 것이라고 ‘예언’을 한다. “첫째 섹스, 좋은 소재고 주목도가 높다. 둘째 진보적 가치가 있다. ‘피해자들을 준비시켜 진보 매체를 통해 등장시켜야겠다. 문재인 정부의 진보적 지지자들을 분열시킬 기회다.’” 예언(?)은 적중했다. 3월 5일 JTBC가 안희정 충북도지사의 성추행 사실을, 이틀 후 프레시안에서 정봉주 전 의원의 성추행 의혹을 보도한다.
물론 이는 사건이 곧 터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미리 깔아둔 밑밥에 불과하다. 대중은 예언을 적중시킨 점쟁이의 말을 더 신뢰하기 마련. 이 주술에 머리가 포맷 당한 이들은 민주당 사람들의 비리 의혹을 지지자들을 분열시키려는 적의 공작으로 계열화하고, 그 음모(?)에 맞서 비리 인사를 적극 엄호하게 된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위기를 모면해 왔다. 예언의 은사를 입은 것은 김어준만이 아니다.
이해찬의 예감
지난 5월 이해찬 당시 대표가 노무현 전대통령 추도식에서 이상한 말을 했다. “노무현 재단과 민주당을 향한 검은 그림자는 좀처럼 걷히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모함을 받고 공작의 대상이 됐다. 지금도 그 검은 그림자는 여전히 어른거린다. 끝이 없고 참말로 징하다.” 곧 재단과 관련해 뭔가 사건이 터질텐데, 그게 다 적의 모함이고 공작이니 믿지 말라고 지지자들에게 미리 자락을 깔아둔 것이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얼마 후 노무현 재단에서 일했던 직원의 폭로가 있었다. 윤건영 의원이 과거에 ‘미래연’의 기획실장으로 일하며 본인 명의의 차명계좌로 지자체로부터 수천만 원의 용역대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예고된 폭로의 김을 미리 빼고 사건의 해석을 적의 ‘모함’과 ‘공작’으로 계열화하려고 애먼 공익 제보자를 ‘검은 그림자’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런 일을 공당의 대표가 한다.
언젠가 유시민 이사장이 검찰에서 계좌를 들여다봤다고 호들갑을 떨던 게 기억날 게다. 이 역시 지지자로 하여금 혹시 있을지도 모를 자신과 재단에 대한 검찰 수사를 특정 방향으로 해석하도록 미리 프레임을 깔아둔 것이다. 예고를 해두었기에 남세스러운 일이 터져도 지지자들은 혼란 없이 사건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계열화하게 된다. ‘유 이사장은 검찰의 모함으로 공작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사실의 해석에서 제작으로
트럼프는 그래도 프레이밍을 ‘사후에’ 한다. 여성혐오 발언을 지적받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 말을 딱 한 여자에게만 했다.” 젠더의 의제를 ‘그 여자’의 문제로 바꿔 놓은 것이다. 민주당은 한술 더 뜬다. 그들은 아예 예언의 형식으로 프레임을 ‘사전에’ 깔아버린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프레이밍 작업을 위해 그들이 사실의 ‘해석’을 유도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사실을 ‘제작’하려 든다는 데 있다.
‘검찰총장의 측근 한동훈 검사장이 종편 기자와 짜고 수감중인 이철씨를 압박해 유시민 이사장의 비리를 캐려 했다.’ 이 프레임을 그들은 머릿속의 해석이 아니라 아예 머리 밖의 사실로 만든다. 이를 위해 사기꾼 지모씨는 정치인 리스트가 있다고 기자를 속였고, MBC는 함정 취재로 이 공작을 거들었다. 최강욱 의원은 녹취록에 없는 한 검사장의 말을 지어냈고, KBS는 이 허구를 뉴스라고 내보냈다.
이른바 ‘검찰개혁’은 정책이 아니라 프레임의 이름이다. 그것도 한 사건이 아니라 모든 사건을 처리하는 ‘메타 프레임’. 그것으로 그들은 조국 사태를 덮었고, 선거 개입 수사에 제동을 걸었고, 라임·옵티머스 수사를 맡았을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을 해체했다. 그 프레임이 없이는 터져나오는 비리를 감당할 수 없으니, 머릿속에 주관적 해석으로 존재하던 그것을 밖으로 꺼내 사실로 굳혀두려 한 것이리라.
프레임의 폭력
법정의 이철씨는 검찰 조사에서 유 이사장에 관한 질문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가 한 검사장의 이름을 듣고 위협을 느꼈다는 3월 25일은 기자가 취재를 중단한 지 사흘 뒤였다. 애초에 실체가 없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검언유착’이라는 허구의 프레임 때문에 장관의 수사 지휘권이 발동되고, 부장검사가 상관인 검사장을 폭행하고, 취재 윤리 위반으로 기자가 구속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동양대 총장은 정경심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학교에서 쫓겨나야 했고, 나경원 전 의원은 검찰의 편파성을 증명하기 위해 13번이나 고발당해야 했고, 당직 사병은 추미애의 무결을 증명하기 위해 범죄자(‘단독범’)가 되어야 했다. 이 모두가 그 메타 프레임의 신성함 때문에 자행된 폭력이다. 그 매트릭스 안에서 가해자인 그들은 외려 모함을 받고 공작의 대상이 된 피해자로 행세한다.
그들의 뻔뻔함은 이와 관련이 있다. 그들의 사전에 사과는 없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이 메타 프레임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과 대신에 공격을 하는 것이다. 조국은 언론사와 소송전을 벌이고, 윤미향의 남편은 네티즌을 무더기로 고소하고, 추미애는 “언론에 무관용 원칙으로 대응해 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 허구의 프레임을 현실에 사실로 등록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리라.
어느 정당이나 프레이밍을 하기 마련이다. 여당이 ‘검언유착’의 프레임을 깔면, 야당은 거기에 ‘권언유착’의 프레임으로 맞선다. 그렇다고 모든 프레임이 다 정당한 것은 아니다. 폴 라이언 미국 하원의장은 공화당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스파이 게이트의 “증거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자기 당 대통령의 프레임이 올바르지 못함을 인정한 것이다. 이것이 프레임을 대하는 자유주의자의 태도다.
민주당은 어떤가? 당·정·청이 그릇된 프레임을 제작·유지·사수하는 데에 목숨을 건다. 이를 말려야 할 언론과 지식인, 시민단체들마저 이 사기극의 주연급 조연으로 활약한다.
민주당의 프레임은 관념론이 아니라 유물론이다. 그저 해석이 아니라 조작과 공작으로 제작되는 사실, 즉 대안 현실이다. 이 ‘작풍’은 자유주의적이지 않다. 리버럴 정당의 프레이밍 전략이 전체주의의 특성을 보인다. 해괴한 일이다.
10.21 "이영훈은 이승만 빙의했고, 조정래는 아직도 지리산 해방투쟁"
해방전후사’로 되돌아간 나라
소설가 조정래가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 이영훈을 “신종 매국노이자 민족 반역자”라고 비난했다. 이씨가 소설 『아리랑』에 묘사된 일본 경찰의 조선인 학살 장면이 왜곡이라고 비판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이 충돌을 그저 두 자연인 간의 감정싸움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그 바탕에는 국가 공동체의 기억을 조직하고 그로써 국가 정체성을 정립하는 문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좌우 진영 모두 ‘역사 수정주의’ 착란에 빠져
‘분단에 기생한 친일이 발목 잡는다’는 집권세력
생존자 없으니 죽은 친일파를 무덤에서 꺼내려 해
‘실증’ 부각한 『반일종족주의』는 21세기판 민족개조론
진영 싸움이 자유주의적 권리 제약으로 흘러선 안돼
역사학자 논쟁
독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86년 역사학자 에른스트 놀테가 신문에 도발적인 글을 발표한다. “나치와 히틀러가 ‘아시아적’ 행위를 저지른 것은 자기 자신들을 어떤 ‘아시아적’ 행위의 잠재적 혹은 현실적 희생자로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수용소군도’가 아우슈비츠의 원조였던 것은 아닐까? 볼셰비키의 계급학살이 나치의 인종학살의 논리적·사실적 선행자였던 것은 아닐까?”
놀테의 주장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홀로코스트와 스탈린주의 사이의 ‘인과적 연결’, 즉 홀로코스트는 스탈린주의의 만행에 대한 반작용일 뿐이며, 아우슈비츠의 원형은 소련의 노동수용소에 있다는 것이다. 둘째, 홀로코스트의 ‘유일성(Singularität)’의 부정, 즉 나치의 인종학살은 가스실을 사용했다는 기술적 측면을 제외하면 다른 나라들이 저지른 범죄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이를 철학자 하버마스가 반박하면서 논란은 ‘역사학자 논쟁’(Historikerstreit)이라 불리는 거대한 논쟁으로 번지게 된다. 논쟁의 배경이 된 것은 신보수화 경향이었다. 70년대 후반 진보가 세계적으로 퇴조기에 들어가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보수주의자들이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우리가 언제까지 앞 세대의 죄를 뒤집어쓰고 남에게 사과만 하며 살아야 하는가.’
대논쟁의 끝에 홀로코스트와 스탈린주의 사이의 인과적 연결은 없으며, 홀로코스트가 유일성을 띤다는 사실이 재확인되었다. 한 인종집단을 멸종시키기 위해 국가 기관이 조직적·체계적 프로그램을 가동한 예는 역사에 유례가 없다는 것이다. 놀테의 주장은 명백히 나치 범죄를 상대화하는 역사수정주의에 속한다. 하지만 그 엄격하다는 독일에서도 그로 인해 그가 처벌받지는 않았다.
이영훈의 ‘반일 종족주의'

한국에도 수정주의자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들. 그들의 논리도 놀테의 것과 다르지 않다. “일본군 위안부의 원류는 조선시대 기생제이며, 해방 이후에도 한국군·미군 위안부 형태로 존속했다.” 즉 종군위안부와 조선시대 기생 사이에는 ‘인과적 연결’이 존재하며, 한국군과 미군도 비슷한 제도를 운영했으니 종군위안부의 ‘유일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학문적 이슈라기보다는 피해자의 고난을 기념하는 정치적 이슈에 가깝다. 때문에 피해자의 고통을 강조하려고 ‘사실’을 넘어 빈 곳을 상상력으로 채우기도 하고, 극단적 사례를 골라 사건을 과장하는 일도 벌어진다. 위안부 소녀상도 그런 보정 작업을 거쳐 빚어진 이미지다. 이런 허점을 파고들기 위해 수정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무기가 바로 ‘역사 실증주의’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보자. 수정주의자들은 일제하에서도 인구와 생산력이 늘었음을 ‘실증’한다. 문제는 비교의 대상이 조선시대라는 데 있다. 제대로 된 비교라면 그 대상이 자주적 근대화를 했을 경우의 조선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조선은 가정으로만 존재하기에 실증할 수가 없다. 그들에게 실증되지 않는 것은 곧 없는 것. 그러니 조선은 근대화의 능력이 없었다는 결론으로 나갈 수밖에.
그래서 일본이 나서서 조선을 근대화했다. 그런데 감사는커녕 외려 사과를 하란다. 대체 한국인들은 왜 저러지? 여기서 그들은 ‘민족성론’으로 나아간다. ‘반일 종족주의’가 한국인의 DNA이며 그 뿌리는 저 멀리 샤머니즘의 전통에 닿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 자랑하는 실증주의가 얼마나 허구적인지 드러난다. 이 허무맹랑한 주장을 대체 무슨 수로 실증하겠다는 것일까?
조정래의 ‘토착왜구'
식민지근대화론은 실은 민족주의 사학의 자기반성이었다. 이영훈씨의 스승 안병직 교수는 일찍이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주창한 바 있다. 일본의 식민통치로 근대화가 지체되어 남한이 미국의 식민지배를 받는 반(半)봉건사회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한국은 이미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 워낙 사실과 동떨어진 주장이라, 안 교수는 이를 폐기하고 우익으로 전향한다.
문제는 식민지반봉건론의 정치적 함의다. ‘식민지반봉건’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미국을 몰아내고 북한과 통일하는 수밖에 없다. 거기서 나온 것이 ‘반미자주화’라는 80년대 NL 운동론이다. 이 논리를 받아들이면 한국전쟁 역시 남한 인민을 미국의 식민통치에서 구하기 위한 민족해방전쟁으로 보게 된다. 바로 여기서 식민지근대화론과 대척점에 있는 좌익 수정주의가 탄생한다.
거기에도 다양한 버전이 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빌미로 삼는 ‘북침론’, 남한이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된 것을 근거로 한 ‘유도남침설’, 38선에서 늘 벌어지던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비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설(說) 등. 사실 이 이론들 대부분은 브루스 커밍스 등 미국 좌파학자의 것을 들여온 것이다. 운동권 필독서였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바탕에는 이 역사 수정주의가 깔려 있다.
한때 도그마를 파괴하는 역할을 했던 그 책이 이제는 스스로 도그마가 되었다. 이 책으로 역사를 공부한 집권세력은 “친일 미(未)청산이 한국 사회의 기저질환”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해방 75년이 넘도록 여전히 ‘분단에 기생해 존재하는 친일’이 민족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착란에 빠져 있다. 그런데 지금 살아있는 친일파가 없으니 자꾸 죽은 친일파를 무덤에서 꺼내려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과거사 문제에는 두 개의 차원이 존재한다. (1)수난의 역사를 기록하는 학문적 실증 (2)희생자의 고통을 기념하는 정치적 활동. 이 두 차원이 서로 생산적 긴장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올바른 기념이 가능하다. 하지만 민족주의자들은 기념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종종 엄밀한 실증을 생략한다. 식민지근대화론자는 그 틈을 치고 들어와 학문적 실증을 기념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데에 쓴다.
역사에서 ‘실증’은 중요하나, ‘실증주의’는 다른 문제다. 사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 역시 민족주의자들 이상으로 이념적이다. 반일 감정의 뿌리가 샤머니즘이라는 주장은 학문이 아니라 일본 우익이 조선인에 대해 가졌던 인종적 편견의 재판일 뿐이다. 민족사학을 비판하려다 과거의 식민사관으로 퇴행해버린 셈이다. 『반일종족주의』는 ‘조센징’의 근성을 뜯어고치자는 21세기 민족개조론이다.
한편 학문적 연구에 정치적 열정을 앞세우면 이념으로 현실을 재단하고, 상황을 과장하거나 선악의 구도로 극화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위안부상은 ‘순결한 소녀’의 이미지로 표상되었으나, 우리는 위안부가 되는 데에는 다양한 방식과 사정이 있음을 안다. 사실에 충실했다면 조선 징용공의 동상이 일본의 탄광노동자를 모델로 만들어졌다는 민망한 시비에 휘말리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이영훈은 1948년의 이승만으로 빙의해 건국 운동을 하고, 조정래는 아직도 지리산에서 해방투쟁을 한다. 두 세력이 각자 국가를 건립하거나 민족을 해방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싸우는 것을 말릴 수는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싸움이 시민의 자유주의적 권리를 제약하는 데로 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조정래는 과거에 소설로 인해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당한 바 있다. 그런 그가 최근 반민특위의 부활을 주장하고 나섰다. “150만, 160만 하는 친일파들을 전부 단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죄악에 대해서 편들고, 역사를 왜곡하는 그자들을 증발하는 새로운 법을 만드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제가 적극 나서려고 합니다.” 국가보안법이 가니 민족보안법이 올 모양이다.
단죄해야 할 그 150만, 160만은 누구일까? 아마도 100만에 달한다던 ‘남한 내 간첩’만큼 애먼 이들일 게다. 결국 자신의 도그마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민족반역자로 간주해 단죄하겠다는 얘기다. 시민을 ‘용공’으로 몰던 문화가 ‘민족정기’라는 이름의 민족광기로 부활했다.
E. H. 카의 말대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 그 대화를 법으로 단절해서는 안 된다.
10.28 권력형 비리가 검사 게이트로…사기꾼·법무부 '추악한 거래'
사기꾼과 법무부의 협업
민주당 정권은 프레이밍에 능하다. 프레임을 설정하는 것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 방식이다. 민주당에 프레임은 그저 세계를 해석하는 ‘인지의 틀’이 아니다. 그들의 프레임은 대안 세계를 창조하는 ‘제작의 틀’에 가깝다. 그들은 주어진 사실의 해석을 넘어 아예 대안적 사실을 만들어내려 한다. 이런 프레이밍의 방식은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민간 네트워크 이용한 수평적 협업으로 프레임 전환
과거 정보기관의 공작 정치와 유사한 연성 독재
방식범죄 피의자가 공익 제보자로 의인화 되며 수사 방해
범법자가 외치는 검찰개혁, 수혜자는 범법자와 여권 실세
부드러운 공작정치
이런 것을 ‘공작정치’라 부른다. 과거에 공작정치는 주로 정보기관을 통해 이루어졌다. 독재정권 시절 안기부·보안사·대검 공안부나 경찰청 대공분실에서 조작한 수많은 사건들을 생각해 보라. 지금 민주당에서 하는 공작정치는 그와는 성격이 다르다. 조작이 국가 기관의 수직적 지시가 아니라 민간의 네트워크를 이용한 수평적 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연성 독재의 방식이라 할까?
공작이 자꾸 반복되니 패턴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사기꾼들이 갑자기 폭로를 한다. 이들에게 증언(?)을 끌어내는 것은 친여 성향 변호사들. 일단 증언이 나오면 친여 매체들이 이들 범법자들의 주장을 검증 없이 내보낸다. 이어서 여당 정치인들이 앞다투어 검찰을 성토하면, 이를 받아 법무부 장관이 수사지휘권을 발동한다. 마지막으로 표적 인물에 대한 수사나 감찰이 이루어진다.
한명숙 사건에서 폭로자 역할을 한 것은 한신건영의 한만호와 동료 수감자들, 채널A 사건에서는 VIK의 이철과 제보자 지모씨였다. 라임 사건에서는 스타모빌리티의 김봉현 전 회장이 폭로자로 나섰다. 하나같이 중형을 선고 받았거나 중형이 예상되거나, 혹은 잡다한 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한 자들이다. 이들 범법자가 공익제보자로 행세하고 검찰은 졸지에 범죄집단으로 내몰린다.
이 공익제보(?)의 배후에는 늘 변호사들이 있다. 한만호 사건에서 검찰의 모해 위증교사를 주장하는 이의 법률대리인은 민본의 신장식 변호사. 민본은 민주당 민병덕 의원이 대표 변호사로 있는 법무법인이다. 채널A 사건에서 감옥의 이철과 제보자 지모씨를 연결시켜준 것 역시 민본의 A 변호사. 듣자 하니 이번 김봉현 편지사건을 담당한 이도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회(민변) 출신이라고 한다.
대안현실을 날조하라

/퍼스펙티브 10/28
이어서 방송이 움직인다. 한명숙 사건의 경우에는 뉴스타파와 MBC의 피디수첩, 채널A 사건에서는 MBC 피디수첩과 KBS 뉴스, 김봉현 사건에서는 JTBC마저 꺾쇠 달고 합류했다. 매체들이 범죄자들의 주장을 검증 없이 내보내면, 정치인들이 이를 정치적 의제로 만든다. 최강욱·황희석·김남국·김용민 등 고정 멤버 외에 민주당의 돌쇠형 의원들이 말을 보태며 요란하게 바람을 잡는다.
그렇게 범인이 의인이고 검찰이 죄인인 대안세계가 만들어지면, 이제 법무부 장관의 시간이다. 독일에는 사례가 없고 일본에서는 딱 한 번 발동된 수사지휘권. 그것이 몇 달 사이에 벌써 서너 차례, 발동됐다. 일본에서는 그 일로 장관이 옷을 벗고, 한국에서는 검찰총장이 옷을 벗었다. 그렇게 중대한 수사지휘권을 산책 강아지 똥 싸듯이 발동한 것이다. 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걸까?
한명숙 사건은 재심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9년 묵은 사건을 다시 끄집어낸 것은 그 사건이 검찰총장의 측근으로 알려진 모 부장검사와 관련이 있을 게다. 채널A 사건에서 표적이 된 것 역시 윤 총장의 측근 한동훈 검사장이었다. 이번 김봉현 사건에서는 아예 총장이 표적이 되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직접 감찰 운운하며 “결과에 따라 윤 총장의 해임건의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국의 법무부가 검찰을 범인으로 매도하고 범법자를 의인으로 추앙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정의’다. 헌정사에 기록될 만한 중대한 결정들이 범법자들의 확인되지 않은 주장에 기초해 내려졌다. 물론 범법자의 주장이라고 무조건 불신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일방적 주장을 검증 없이 공익 제보로 대접해 줘서는 안 된다. 그 이면에 무슨 동기와 배후가 있는지 누가 아는가.
범법자들의 거짓증언
그들의 증언(?)을 따져 보자. 한만호의 비망록은 이미 법정에 증거로 제출됐던 것이다. 한만호가 9억원을 현금화 한 사실은 확인됐다. 이를 누구에게 건넸는지 기록한 장부도 있고, 돈을 건넨 비서의 증언도 있다. 소수의견을 낸 대법관들도 3억원이 건네진 사실은 인정했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번복된 증언은 허위로 밝혀진 셈. 검찰이 압박수사를 했을지는 모르나 허위증언을 강요한 것은 아니다.
한동훈 사건도 마찬가지다. ‘이철이 정치인 리스트를 갖고 있다’는 제보자 지모씨의 주장이나 ‘채널A 기자가 이철에게 허위증언을 강요했다’는 최강욱의 주장은 거짓이었다. 이철씨는 검찰조사에서 유시민에 관한 질문은 받은 바 없다고 증언했다. 그가 한동훈 검사장의 이름을 듣고 공포를 느꼈다고 한 날은 채널A에서 취재를 중단한 지 3일 후. 그런데 이 거짓말들을 근거로 수사지휘권이 발동됐다.
이번이라고 다를까? 지난 8일 법정에서 “강기정 전 청와대 수석에게 5000만원을 전달했다.”고 증언했던 김봉현. 갑자기 “라임 관련 여권 정치인은 단 한 명도 연루된 사실이 없다.”고 말을 바꾸었다. 전관 출신 A변호사가 “여당 정치인과 강 전 수석을 잡아주면 보석으로 재판받게 해 주겠다.” 해서 허위증언을 했단다. 말이 되는가? 보석 결정은 검찰이 아니라 법원에서 하는 것인데.
라임 사건에 여권 정치인이 한 명도 연루되지 않았단다. 이 말을 믿으란다. 이미 이상호 부산 사하을 지역위원장이 8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기동민 의원 역시 적어도 고가의 양복을 받은 사실만은 확인됐다. 법정에서 강기정에게 5000만 원을 줬다고 한 것도, 이상호의 금품수수 사실을 언론에 제보하라고 시킨 것도 김 전회장 본인이었다. 이것도 검찰의 강요였던가?
권력비리가 검사 게이트로
김봉현이 검사들에게 술 접대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관 출신 A 변호사가 그들을 “추후 라임 수사팀에 합류할 검사들”이라고 소개했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이게 말이 되려면 그에게 7개월 후에 꾸려질 수사팀에 누가 합류할지 내다보는 예지력이 있어야 할 게다. 검찰이 야당 인사에 대한 수사를 덮었다는 주장도 거짓이었다. 그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벌써 마무리 단계에 있다.
그런데 이 허위진술을 근거로 장관은 수사지휘권을 발동했다. 왜 그랬을까? 물론 검찰과 총장에게 검사들의 비위를 알고도 덮었다는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서다. 이 ‘중상모략’을 견디다 못해 결국 남부지검장이 사표를 던졌다. “정치가 검찰을 덮었다.” 국감장의 여당 의원들은 검찰총장에게 옵티머스 수사를 덮었다는 엉뚱한 혐의를 뒤집어씌운다. 마치 스탈린주의 재판을 보는 듯하다.
김봉현은 “라임 사태와 본인 및 청와대 행정관, 여권 실세들은 전혀 연관성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청와대 행정관이 이미 이 사건으로 징역 4년의 형을 받았다. 게다가 그가 후배에게 보낸 문자가 남아 있다. “금감원이고 민정실이고 다 형 사람이여.” 그의 말에서 ‘본인 및’이라는 표현에 주목하라. 자기를 무죄로 해주면 라임을 ‘검찰 관계자들이 연루된 사건’으로 바꿔주겠다는 얘기다.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그의 말을 받아 법무부 장관이 바로 프레임 전환을 시도한다. 라임 사건의 본질은 ‘권력형 비리가 아니라 검사 게이트’라는 것이다. 그 결과 수많은 피해자를 낳고 청와대 정무수석과 행정관, 여당 의원과 지역위원장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가 검사 몇 명의 술 접대 사건으로 둔갑해 버렸다. 청와대는 범법자와 법무부의 이 불결한 거래를 추인했다.
올바른 목적은 올바른 방법으로 달성돼야 한다. 그릇된 방식으로만 달성될 목표라면, 이미 목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범법자들이 외치는 검찰개혁. 누구를 위한 것일까? 확실한 것은, 이 개혁의 유일한 수혜자 역시 이들 범법자 “본인 및 청와대 행정관, 여권 실세들”이 될 거라는 점이다. 범법자와 법무부의 코아비타시옹. 남미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이 나라의 현실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1년 『검찰을 생각한다』에 이렇게 썼다. 권력 비리를 수사할 때 ‘청와대가 견제와 감시를 하고 검찰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면, 이것은 곧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가 수사를 방해하는 외형이 돼 버린다.’ 맞다. 그 일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11.11 文정권, 바이든 가면 쓰고 행동은 트럼프…종지부 찍어야
지난 5일 백악관 기자회견의 방송 중계가 갑자기 중단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우편투표가 사기”라는 등 끝없이 거짓말을 늘어놓자 메이저 방송 3사가 “이 주장에는 증거가 없다”며 중계를 끊어버린 것이다. 작지만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이로써 거짓이 사실로 행세하는 이른바 ‘탈진실’(post-truth)의 시대에 종지부가 찍힌 것이다.
국민이 둘로 갈라지는 것 막는 대통령의 역할이 중요
통합 강조한 바이든 “상대를 적 취급하는 것 멈춰야”
문 대통령, 통합 말하면서 실제 행동은 ‘국민 갈라치기’
탈진실 정치에 신물 난 국민…광기정치 영원하지 않아
탈진실의 정치
부정선거 의혹이야 선거 때마다 늘 제기되곤 한다. 18대 대선 후에는 김어준이 ‘K값’ 운운하며 선관위 음모론을 퍼뜨렸고, 21대 총선에선 민경욱 전 의원이 개표조작 음모론을 펼쳤다. 음모론은 탈진실의 수법 중 최악의 것이라고 여겨진다. 흥미롭게도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김어준과 민경욱이 모두 트럼프의 불복을 지지하고 나섰다. 극과 극은 통하나 보다.
민 전 의원은 이제 트럼프도 “4·15 부정선거가 단지 의혹이나 음모론이 아니라고 느낄 것”이라며 ‘민트 동맹’을 제안했다. 남북 대화가 계속되기를 원하면 바이든을 찍지 말라던 김어준. 그는 방송에서 묘한 멘트를 날렸다. “선거는 바이든이 이겨도 대통령직은 트럼프가 유지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누가 이겼든 대통령은 트럼프가 해야 한다는 얘기다.
탈진실은 ‘공유되는 객관적 진리 기준의 사라짐’으로 정의된다. 위의 두 사람과 트럼프의 공통점은 사회에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진리 기준을 거부하는 데에 있다. 그들이 음모론을 퍼뜨리는 것은 그로써 사회의 보편적 동의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도 그게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그저 특정한 타깃 집단만 그것을 믿게 만들면 그것으로 이미 성공한 것이다.
트럼프는 진리의 ‘대응설’을 부정한다. 그에게 진리란 ‘사실과의 일치’에 있지 않다.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주장이라도 많은 이가 믿어주면 진리가 된다. 일종의 ‘합의설’인데, 그렇다고 거기에 ‘모든 이’의 합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 거짓을 인구의 절반만 믿어도 선거에 이기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금방 들통난 거짓말을 해대는 것이다.
민주당의 트럼피즘

/그래픽=최종윤
트럼프가 하는 짓을 한국에서는 민주당이 한다. 얼마 전 민주당의 김종민 의원이 국회 법사위에서 “총장이 측근이 있는 검찰청에는 특활비를 많이 주고 마음에 안 들면 조금 준다”고 말했다. 추미애 법무장관 역시 “윤 총장이 (특활비를) 주머닛돈처럼 쓰고 있다”며 “사건이 집중된 중앙지검에는 특활비가 지급된 사실이 없어 수사팀이 애로를 겪는다”고 주장했다.
중앙지검으로도 특활비가 내려갔다는 지적이 나오자 자기도 “들은 얘기”라며 “나도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발뺌한다. 확인 결과 검찰총장이 특활비를 쌈짓돈처럼 써왔다는 주장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이 허위를 근거로 장관이 공식적으로 감찰 지시를 내린 것이다. 총장만 쳐내면 그만이지, 어차피 실체적 진실 따위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지지자들의 머릿속에 ‘검찰=악마’라는 허구를 심어 놓는다.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라임 사건 피의자들이 줄줄이 진술을 번복한다. 스타모빌리티의 김봉현 전 회장에 이어 이강세 전 대표, 공범인 김 전 회장의 측근도 법정에서 검찰의 강압적 조사로 원치 않는 진술을 했다고 말을 뒤집었다. 거짓말이 사법행정까지 엉망으로 만든 것이다.
월성 1호기 관련 수사도 원래 검찰이 시작한 게 아니다. 사건의 불법성을 따져달라고 적용 법률까지 명시해 감사원에서 검찰에 요구한 것이다. 압수수색 영장을 내준 것은 법원이다. 그런데도 이낙연 대표는 이를 ‘정부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위한 정치수사’로 몰아간다. 그놈의 ‘정부 정책’은 감사 앞두고 밤에 몰래 자료를 삭제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인가?
이 대표는 월성 1호기 관련 수사가 “조국 수사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검찰수사를 무력화하려고 낡은 조국 프레임을 다시 꺼내든 것이다. 올 초만 해도 민주당은 4·15 총선이 행여 ‘조국 선거’가 되지 않도록 입조심을 했었다. 총선에서 압승하니 생각이 달라졌나 보다.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해도 콘크리트 지지율은 깨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인가? 날로 막말이 심해진다. 여성가족부 장관은 내년 보궐선거가 “국민 전체가 성(性) 인지성을 집단 학습할 기회”라고 말했다. 성추행은 자기들이 해놓고 학습은 국민보고 받으란다. 설훈 의원이 옆에서 거든다. 이 모두가 “성 인지에 대한 국민인식 자체가 아직 낮은 수준에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란다. 이로써 그들의 성추행은 성 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국민 탓이 된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8·15 광화문집회 주최자들을 “살인자”라 불렀다. 그들이 망언과 극언을 서슴지 않는 것은 그럴수록 지지자들이 열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참고로 트럼프는 2016년 한 캠페인에서 “내가 뉴욕 5번가 한복판에서 사람을 총으로 쏴 죽여도 지지자들은 나를 지지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전통적인 정치와는 구별되는 탈진실의 정치다.
무려 26명의 여성이 그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하고 나섰다. 그중 12명은 그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래도 트럼프는 끄떡없었다. 한국의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충남·부산·서울 등 지자체장의 성추행이 줄줄이 이어져도 지지율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당헌을 바꾸어 후보를 내고 심지어 그게 “책임 있는 공당”의 자세라고 강변할 엄두를 내는 것이다.
지지자들과만 소통하는 민주당
탈진실의 정치는 진리와 가치의 객관성을 포기한다. 객관성 없이 보편적 동의를 얻어낼 수는 없는 일. 그래서 탈진실의 정치꾼들은 ‘국민 일반’의 지지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타깃 집단에 호소할 뿐이다. 필요한 것은 그 집단의 광신적 지지다. 트럼프는 그들의 지지만으로 집권할 수 있음을 증명했고, 한국의 민주당은 그들의 지지만으로 통치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트럼프는 가짜 뉴스까지 유포하며 사기 선거로 대통령직을 도둑맞았다고 우긴다. CNN의 지적대로 “이 주장은 논리적이지도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지만, 어차피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탈진실의 유권자들이기 때문이다. 거짓말로 이들만 결속시킨다면, 4년 후 다시 대선에 도전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게다.
한국의 민주당 역시 진리와 가치의 객관성을 포기한 지 오래. 그들은 국민 전체가 아니라 지지자들하고만 소통한다. 이들만으로도 재집권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도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허위와 조작이라도 지지할 명분만 만들어주면, 그들은 민주당이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고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
탈진실 시대에 국민은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세계’를 공유하지 못한다. 국민의 절반은 현실에 살고, 나머지 절반은 대안 현실에 산다. 최강욱 의원은 김경수 경남도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이 시대에 피고인으로 사는 것은 훗날 훈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세계에선 비리로 재판받는 잡범들이 저 세계에서는 가슴에 훈장 단 국가유공자가 된다.
탈진실의 정점으로 치닫는 한국 정치
국민이 세계를 공유하지 못할 때 나라는 분단국으로 전락한다. 이때 중요한 것이 대통령의 역할. 당선이 확정되자 바이든은 바로 통합의 메시지를 냈다. “우리가 진전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적으로 취급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미국인이다.” “나를 뽑았든 그렇지 않든 모든 미국인을 위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우리 대통령도 그렇게 약속했었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한 일은 국민을 둘로 갈라치는 것이었다. 바이든의 가면을 쓴 채 트럼프로 행동해온 것이다. 미국 사회는 탈진실과의 싸움에서 일단 승리했다. 하지만 트럼프가 물러난다고 트럼피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비록 패했지만, 트럼프는 오바마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
한국에서 탈진실의 정치는 정점으로 치닫는 중이다. 상황은 더 나쁘다. 미국에는 트럼프가 하나지만, 한국은 정권 전체가 머리털로 만든 손오공 분신처럼 작은 트럼프들로 채워져 있다. 강력한 대안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광기 또한 영원하지는 않으리라. 이미 많은 이들이 탈진실의 정치에 신물을 내고 있다. 이제 우리 차례다. 우리도 거기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분한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
"상대방을 적으로 취급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미국인이다." 바이든 승리선언 대국민연설
11.18 "밀을 '재인산성 옹호자' 둔갑시킨 유시민…탁월한 어용지식인"
유시민씨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손에 들고 유튜브 방송으로 복귀했단다. 소식을 듣고 뿜었다. 그가 몰고 다니는 ‘대깨문’이야말로 자유주의의 적들이 아닌가. 이견을 낸 의원을 핍박하고, 바른말 하는 기자들 조리돌림하고, 견해가 다른 동료시민들 ‘양념’ 범벅을 만드는 오소리떼의 우두머리가 자유주의의 바이블을 “사랑한다”니, 이 무슨 변괴란 말인가.
지도자의 성역화, 지지자의 폭도화
둘의 결합 속에 거수기가 된 의원들
시민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안들
민주당은 자유주의 정당이 아니다
그가 생략한 자유론의 핵심
‘자유론’에는 배경이 있다. 유럽에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군주의 폭정에 대한 우려는 사라졌다. 민주주의는 자기가 자기를 통치하는 제도. 시민들이 자신에게 폭정을 할 리는 없잖은가. 하지만 그런 민주주의에도 폭정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 다수에 의한 소수의 억압. 이 새로운 폭정에 맞서 밀은 양심·표현·결사의 자유를 외치며 개인을 “주권자”로 선언한다.
민주주의가 다수의 폭정으로 흐르지 않도록 개인과 소수를 존중하라. 이것이 유시민씨가 빼놓은 ‘자유론’의 배경과 핵심이다. 밀이라면 아마 의회 절대다수라고 상임위를 싹쓸이한 민주당의 행위를 비난했을 게다. 여론을 등에 업고 밤중에 신천지 본부에 쳐들어가거나 그 교주를 살인죄로 고발한 지자체장들의 포퓰리즘은 혐오했을 게다.
“온 인류가 같은 견해이고 한 명만 반대 의견을 가졌다 해서 인류가 그 한 명을 침묵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그 한 사람이 권력을 가졌다 해서 인류를 침묵시키는 게 옳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이 밀의 자유주의 원칙이다. 그런데 지금 이 사회에서는 이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 그것도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의 손에.
친일파 파묘법, 역사왜곡처벌법, 징벌적 손해배상제, 박형순 금지법 등 집권여당에서는 일련의 반(反)자유주의적 입법으로 공론을 제약하고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며 권력분립을 훼손하고 있다. 당·정·청이 다수결 독재의 한길로 치닫는 상황에서 정권의 스피커 노릇 하는 이가 하필 ‘자유론’을 들고나왔다. 어찌 된 일일까?
자유론을 제약론으로

/그래픽=최종윤
의문은 곧 풀렸다. “자유론상 어떤 사람의 행동이 타인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지점에서는 개입이 정당하다. 집회 방치는 타인의 자유와 복리를 부당하게 침해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는 뜻이다.” 즉 광화문 차벽이 밀의 자유주의 사상에 부합한 조치였다는 얘기다.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유론’을 ‘제약론’으로 써먹은 셈이다.
그가 원용한 것은 이른바 ‘위해의 원칙’(harm principle). “사회 성원의 의지에 반해 행사되는 권력은 오직 그 목적이 타인에 해를 끼치는 것을 막는 것일 때에만 정당하다.” 이 원칙이 정말 차벽의 설치를 정당화해 주는가? 그럴 리 없다. 유시민씨의 독해는 성경에서 맘에 드는 문장을 뽑아 제멋대로 해석해 써먹는 사이비 교주의 그것에 가깝다.
그는 위해의 원칙에서 재인산성의 정당성을 끌어내나 정작 밀은 이렇게 말한다. “위해나 위해의 개연성이 사회의 개입을 정당화한다고 해서 그게 언제나 그런 개입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즉 위해의 원칙은 제한을 위한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얘기. 유시민씨가 필요한 절반만 인용하고 나머지 절반은 그냥 씹어 드신 것이다.
밀은 ‘위해’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다. 관심이 개인의 권리를 제약하는 데가 아니라 최대한 보장하는 데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위해의 원칙에서 재인산성과 같은 구체적 조치의 정당성을 도출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자 전도된 해석이다. 자유주의의 화신이 설마 그저 위해의 가능성만으로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데에 동의하겠는가.
다수의 폭정
밀의 사상에 부합하는 것은 집회를 허용한 우리 법원의 결정이다. “집회 자체의 개최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감염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필요 최소범위 내에서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려워 위법하다고 볼 소지가 작지 않다.” 즉, 금지조치가 기본권 제약에 요구되는 충분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게 자유주의다.
그런데 민주당의 의원들이 이를 원색적으로 비난한다. 판사의 이름을 딴 금지법을 만들더니, 심지어 국무총리와 법무장관까지 이 광란에 가세했다. 이들의 마인드가 자유주의에서 얼마나 동떨어졌는지 알 수 있다. 독일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집회가 열렸다. 독일의 법원 역시 이를 허용했지만, 거기에 시비를 거는 이들은 없었다.
저들이 저렇게 무리를 하는 것은 다수의 여론 때문일 게다. 당시 국민의 70%가 광화문 집회에 반대했다. 집회를 허용한 판사의 해임 청원에는 무려 20만이 참가했다. 광장에 차벽을 두르는 극단적 조치도 이 압도적인 여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정부에서 다수의 여론을 근거로 소수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밀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정부가 국민과 완전히 하나가 돼 국민의 동의를 받아서만 강제권을 행사한다고 하자. 하지만 스스로든, 정부를 통해서든 국민에게 그런 강제권을 행사할 권리는 없다. 최악의 정부만이 아니라 최선의 정부도 그럴 권리는 없다. 여론을 업은 강제 역시 여론에 반하는 강제 못지않게 나쁘다. 혹은 그 이상으로 나쁘다.” 자유주의는 이런 것이다.
공리보다 더 큰 가치
유시민은 자유론을 “사랑”한단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불행한 짝사랑이다. 그는 밀을 벤담으로 착각했다. 재인산성을 정당화하려 했다면 밀이 아니라 차라리 공리주의자 벤담을 원용했어야 한다. 벤담이라면 ‘집회를 금지당한 소수의 손실보다 코로나 방지에서 오는 다수의 이익이 더 크다’며 정부의 손을 들어줬을 테니까.
실제로 봉쇄조치를 정당화하는 데에 민주당 사람들은 공리주의 논변을 사용했다. “집회로 인해 국가적으로 엄청난 세금이 낭비되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천문학적 비용이 수반되는 결과를 초래했다.”(정세균) 유시민도 다르지 않다. 밀이 ‘자유론’을 쓴 것은 공리의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를 무시하는 벤담의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서였다.
밀에게는 공리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 인격과 인류 번영이 그것이다. 이렇게 공리를 넘어선 도덕적 이상을 주장하는 것은 “벤담의 원칙을 포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마이클 샌델) 인격과 인류의 번영을 위해 양보할 수 없는 가치가 바로 사상·표현·결사의 자유다. 밀은 공리의 이름으로 이들 가치를 제한하는 것이 사회에 이익보다 해를 끼친다고 본다.
예를 들어 보자. 추미애 장관은 ‘휴대폰 비밀번호 강제해제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당장은 수사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허용되면 오용은 시간 문제. 고작 ‘강요미수’ 사건 때문에 휴대폰을 까야 한다면, 그보다 중요한 사건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결국 언젠가는 온 국민이 국가의 요구에 알몸을 보여줄 처지가 될 게다.
탁월한 어용지식인
나라가 벤담이 말한 파놉티콘으로 변해갈 모양이다. 이 원형 감옥에서 간수는 모든 죄수를 감시하나, 죄수들은 간수를 볼 수가 없다. 지금 권력은 검찰과 감사원을 두드려대고 있다. 자신들은 들여다보지 말라는 얘기다. 어둠 속에 웅크린 두 눈으로 국민의 삶은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시선은 권력이다. 이 시선의 일방성은 민주주의의 부정이다.
테러 방지보다 개인의 ‘자유’를 앞세웠던 그들이 고작 한 사람을 잡으려고 비밀번호를 강제해제하려 한다. 그때 했던 필리버스터도 가짜, 한갓 전술이었던 게다. 지도자의 성역화, 지지자들의 폭도화, 둘의 결합 속에 거수기로 변한 의원들,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안들, 선동과 세뇌와 공작정치. 민주당은 자유주의 정당이 아니다.
유시민씨가 이를 반성하려고 ‘자유론’을 들고나온 것은 아니리라. 상한 고기 위에 칠하는 선홍색 물감이랄까? 변질된 정체성을 가리고 민주당에 자유주의의 외양을 덧씌우고 싶었을 게다. 거짓말로 지지자들을 선동해 방송사 법조팀을 날려버린 그이지만, 고양이라 생각한 개처럼 그에게는 자신이 여전히 자유주의자라는 착각이 필요한 모양이다.
유시민씨는 ‘어용지식인’을 자처한다. 실제로 그는 ‘어용’에 필요한 모든 재능을 타고났다. 도덕의 당파성, 지식의 피상성, 언변의 궤변성. 밀을 재인산성의 옹호자로 둔갑시키는 솜씨라면, 히틀러나 스탈린을 위대한 자유주의 사상가로 바꿔놓고도 남을 게다. 과연 탁월한 ‘어용지식인’이다. 보았는가. 어용질, 이렇게 하는 거다.
12.02 "지지자를 파블로프의 개로 만든 여권…檢개혁, 야바위판 됐다"
검찰개혁, 왜 지록위마의 야바위판이 됐나
진나라의 환관 조고가 황제에게 사슴을 바쳤다. “말입니다.” 황제가 물었다. “어찌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가?” 조고는 끝까지 말이라 우겼다. 다른 신하들 또한 조고를 따라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했다. 모두 조고의 위세에 겁을 먹었던 것이다. 결국 제 판단력을 못 믿게 된 황제는 정사에서 손을 떼고, 얼마 후 조고에게 죽임을 당한다.
‘죄목’만 남았을뿐 윤석열 해임은 기정사실
판사에 대한 세평 수집을 ‘불법 사찰’로 몰며
없는 죄를 창조하느라 야바위판 벌이고 있어
‘검찰개혁=윤석열 축출’ 조건반사에 자신감 얻어
불법사찰이란 무엇인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공판준비를 위한 세평 수집을 ‘불법사찰’이라 부른다. 서울고검의 공판업무 매뉴얼에는 ‘재판부별 재판방식에 편차가 있으므로 재판부별 특성을 파악해 적절히 대처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그것이 불법사찰이란다. 신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말로써 허구의 세상을 지으려는 것이다.
이 바벨의 혼란을 수습해준 것은 조국 전 장관의 SNS글. 거기엔 불법사찰의 명확한 정의가 등장한다. ‘첫째, 공직과 공무와 관련이 없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불법이다. 둘째, 대상이 공직자나 공무 관련자라 하더라도 사용되는 감찰 방법이 불법이면 불법이다. 예컨대 영장 없는 도청, 이메일 수색, 편지 개봉, 예금계좌 뒤지기 등등.’
이 정의에 따르면 해당 문건은 ‘사찰’과는 거리가 멀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것도, 불법으로 수집한 정보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가 내린 정의도 잊어버리고 그는 그게 불법사찰에 해당한다고 우긴다. 머리에 RAM만 있고 하드가 없나? 자고 일어나면 기억이 휘발하나 보다. 이를 지적하자 “악의적이고 야비한 오독”이란다.
그의 변명을 들어보자. “불법사찰의 방법에 영장 없는 도청, 이메일 수색, 편지 개봉, 예금계좌 뒤지기만 있는 게 아니란 점은 한국 사회 평균 보통인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인으로 생각해도 구글로 검색을 하고 공판검사에게 전화하는 것은 불법사찰의 방법이 아니다. 검색과 통화를 법으로 금지하는 나라도 있던가.
사슴은 말이 아니다

/그래픽=최종윤
그는 공개된 문건에 판사의 이념성향이나 인격에 대한 평가, 개인 취미 등이 기재된 것을 문제 삼는다. 하지만 ‘이념성향’에 따라 판결이 달라진다는 것은 상식. 이는 공판 준비에 필요한 정보다. 판사의 ‘인격에 대한 평가’ 역시 미국에선 더 심하게 허용된다. ‘개인 취미’ 또한 불법이 아니라 불필요한 정보에 불과하다.
민주당 박주민 의원도 세평 수집이 ‘위법’이 되는 요건을 제시한 바 있다. “세평을 수집한 사람들을 위협·위축시키거나, 제어할 만한 개인적인 비위 사항이나 약점·취약점들이 수집돼 정리되어야만” 한다. 개인의 취미는 대상자를 위협·위축시키거나 제어할 만한 개인적인 비위 사항이나 약점·취약점에 속하지 않는다.
법원의 판례에 따르면 불법사찰은 ①위법한 목적으로 ②특정인에게 불이익을 줄 의도로 ③지속적이고 예외적으로 이뤄질 때 성립한다. 공판 준비는 위법한 목적이 아니고, 검사가 판사에게 불이익을 줄 처지는 못 되며, 문서 작성은 매뉴얼에 따라 일회적으로 이루어졌다. 세 요건 중 해당되는 게 하나도 없는 셈이다.
법무부는 ‘물의 야기 법관’이라는 표현을 들어 마치 검찰에서 판사를 사찰한 양 몰아갔다. 하지만 그 정보는 공판참여 검사에게 문의해 얻어낸 것이었다. 사법농단 공판을 담당한 부장검사 역시 문건을 유출한 사실이 없다고 확인하며 이렇게 꼬집었다. “법무부에서 오해될 수 있도록 잔기술을 부린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판결은 사전에 내려졌다
지록위마(指鹿爲馬, 윗사람을 농락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의 상황이 계속되자 사건의 법리 검토를 맡았던 이정화 검사가 양심선언을 했다. “문건에 기재된 내용과 다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죄가 성립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고, 감찰담당관실 검사들도 제 결론과 다르지 않아 그대로 기록에 편철했다.” 그런데 윗선에서 그 부분을 삭제하고 수사의뢰를 강행했다는 것이다.
법무부는 이렇게 변명한다. “확보된 재판부 성향 분석 문건 이외에도 유사한 판사 사찰문건이 더 있을 수 있는 등 신속한 강제수사의 필요성이 있었다.” 하지만 0에다 100을 곱한다고 어디 답이 달라지던가. 확보된 문건 자체가 사찰문건이 아닌데, 그런 문건이 100장이 더 있다 한들 어떻게 수사대상이 되겠는가.
전국 59개 검찰청 평검사들이 총장의 징계와 직무정지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전국 고검장과 검사장·사무국장들도 같은 목소리를 냈다. 장관 휘하의 법무부 과장들도 항의문서를 차관에게 전달했고, 추 장관 사람으로 알려진 조남관 권한대행까지 반기를 들었다. 그래도 장관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게다.
권력은 이미 총장을 내치기로 결정했다. 추 장관의 법률대리인은 그가 낸 직무정지 집행정지 신청이 기각될 거라 말했다. “이틀 후면 집행정지 효력이 없어지므로 소 이익이 없어진다.” 해임은 기정사실이고, 남은 것은 각하께서 거기에 사용하실 ‘죄목’뿐. 그래서 없는 죄를 창조하느라 지록위마의 야바위판을 벌이는 것이다.
야바위판
세평 수집을 ‘불법’이라 부르려면 그것을 뒷받침할 법률과 판례를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조국 전 장관은 그것을 제시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게 불법사찰이라 우기는 것은, 법학자가 아니라 정치인으로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법학교수회에서는 검찰총장의 직무정지를 ‘헌법과 법치주의의 훼손’이라고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법학을 전공한 그에게 리걸 마인드(legal mind)가 없다는 것은 심히 민망한 일이다. 그는 사법의 문제를 늘 정치화한다. 정의를 법정 안이 아니라 법정 밖에서 구하려는 것이다. 법정에서 묵비권을 행사했던 그가 밖에서는 헤프게 재잘거린다(twitter). 그의 판사는 법정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정의는 지지자들의 판결에 있다.
그래서 그들 앞에서 야바위를 벌이는 것이다. 바람잡이들의 연기도 볼 만하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윤석열의 혐의가 “충격적”이란다. 김남국 의원은 불법사찰에 “소름”이 끼친단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충격을 받고 닭살이 돋는 이상증세. 이 오버액션은 그 사건을 대하는 지지자들의 신체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넛지’라 할 수 있다.
백주 대낮에 이런 가공할 사기극이 가능한 것은 믿어주는 지지층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치적 설득에 기만극을 활용하는 것은 자유주의 정치 문화에서는 낯선 현상. 이런 것은 대의의 올바름으로 수단의 불법성을 용인하는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요즘 민주당의 정치 커뮤니케이션이 이상해졌다.
파블로프의 실험
1950년대 소련에서는 파블로프의 조건반사를 이용한 선전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개가 종소리에 반응하듯이 인간은 언어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실험의 요체는 끝없는 반복 학습으로 인민들을 ‘현실세계보다 구호·표어·상징에 반응하게 만드는 데’에 있다. 그 학습을 거친 이는 현실의 사슴이 아니라 ‘말’(馬)이라는 말에 반응하게 된다.
민주당은 지지자들을 현실이 아니라 구호에 반응하는 파블로프의 개로 만들었다. 사실 윤 총장은 개혁에 반대하지 않았다. 제도 개혁은 입법부 소관이고, 검찰 인사는 추 장관 혼자 했다. 거기에 저항의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현실에 반응하지 않는다. 그저 ‘기득권의 저항’이라는 구호에 반사행동을 할 뿐이다.
그가 개혁에 반대해 쫓겨나는 게 아니다. 그의 죄는 따로 있다. “울산 사건을 만들었다.”(황운하) “조국 일가를 쑥대밭 만들었다.”(김두관) “라임·옵티머스와 원전수사를 했다.”(김태년) 이제는 그냥 노골적으로 털어놓는다. 이 뻔뻔함은 지지자들의 몸속에 이미 ‘검찰개혁=윤석열 축출’이라는 반사기제가 형성됐다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재심 전문으로 유명한 박준영 변호사가 보다못해 항의하고 나섰다. “아닌 건 아닌 겁니다.” 하지만 민주당 지지자들은 이미 현실에 반응하지 않는다. 그저 ‘판사 사찰’이라는 신호에 조건반사를 할 뿐이다. 윤 총장은 해임될 것이다. 해임의 유일한 근거는 당의 구호와 지지층의 신체 사이에 형성된 생리학적 반사기제다.
대통령까지 이 집단망상의 포로가 됐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장관의 손을 들어주며 그는 감추어진 민낯을 드러냈다. 2012년 대선 후보 시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검찰수사와 인사에 관여했던 악습을 완전히 뜯어고치겠습니다.” 조건 반사된 지지자들을 거느린 채 그는 자신이 뜯어고치겠다던 그 악습의 수호신이 되었다.
12.09 "조국은 모세, 秋는 여호수아…신흥종교 된 檢개혁"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청새치. 노인이 항구를 돌아왔을 때 그 거대한 물고기는 상어 떼에 뜯어먹혀 앙상한 가시만 남은 상태였다. 검찰 개혁이 지금 딱 그 꼴이 되었다. 살이 모두 뜯겨나간 채 달랑 ‘공수처’ 하나 남았다. 앙상한 가시만 남은 그 물고기는 청와대 벽에 트로피로 걸려 각하의 개혁 위업을 후세에 전하는 데에 쓰일 예정이다.
환상의 공간에 사는 이들의 눈에는
조국이 백성을 검찰 땅에서 해방시킨 모세로
추미애는 약속의 땅으로 이끌 여호수아로 보일 게다
그들은 공수처가 있는 가나안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른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두 개의 검찰 개혁
우리가 생각하는 개혁 검찰의 상은 원래 이런 것이었다. “산 권력에 대한 수사와 기소도 주저하지 않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검찰, 누구를 어떻게 수사하고 기소할지 형사사법 절차와 관련해 정치적 통제에 좌우되지 않는 독립적인 검찰, 대배심제를 통해 기소권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받는 검찰, 구속제도 개혁을 통해 인질사법의 오명을 벗는 검찰.” (SBS 임창용 기자)
하지만 이 모든 내용이 사라지고 검찰 개혁이 어느새 ‘윤석열 자르기’로 전락해 버렸다.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55%가 검찰 개혁이 “변질됐다”고 대답했다. 애초의 취지에 맞게 진행된다는 응답은 고작 28%. 대표적인 진보 매체마저 검찰 개혁을 ‘실패’로 단정했고, 검찰 개혁의 설계자 김인회 교수 또한 검찰 개혁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할 때”라고 말한다.
왜 이 꼴이 됐을까? 동상이몽이라고, 애초에 시민사회와 민주당이 생각하는 검찰 개혁의 상이 달랐기 때문이다. 시민사회가 원한 것은 (1)권력에서 독립한 중립적 검찰, (2)절제된 권한을 행사하고 ‘국민’의 감시를 받는 민주적 검찰이었다. 반면 문재인 정권이 원한 것은 독립성을 고집하지 않고 자신들의 통제에 순순히 따르는 그런 검찰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고 정두언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MB정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구속에 반대했으나, 이인규·우병우 등 검찰 중수부에서 구속을 고집했단다. 이 원체험 때문에 검찰의 ‘독립성’ 자체를 위협으로 여기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 “선출된 권력”임을 내세워 “민주적 통제” 운운하며 억지로 검찰을 길들이려고 무리수를 두는 것이리라.
실패한 검찰 개혁

/퍼스펙티브 12/9
이 정권은 실은 진정한 검찰 개혁에는 관심이 없었다. 검찰권의 과도함을 문제로 봤다면 애초에 특수통인 윤석열을 기용하지 말았어야 한다. “적폐 청산”의 칼을 든 그에게 검찰권의 절제된 행사를 주문한 이는 없었다. 그들은 외려 철저한 수사로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킨 공로를 높이 평가해 기수까지 파괴해가며 그를 검찰총장 자리에 앉혔다.
개혁의 취지 중에서 남은 것은 검찰의 중립성과 독립성인데, 그마저 무너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살아 있는 권력에도 칼을 대라”고 호기를 부리더니, 정작 검찰의 날이 자기들을 향하자 온갖 트집을 잡아 총장을 내치려 한다. 개혁의 두 기둥이 모두 무너진 것이다. 그 결과 검찰 개혁은 ‘윤석열 파면’의 동의어가 되어 버렸다.
추미애 사단의 검사들은 이 정권이 원하는 검찰 개혁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증거도 없이 무리한 수사를 벌이고, 상관에게 독직폭행을 가하고, 총장을 음해하기 위해 계통과 절차를 무시하고 하나회처럼 움직인다. 심지어 총장 부인의 통화 내역까지 들여다봤단다.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 정권에서 원하는 개혁 검찰의 상을 보게 된다.
사실 윤 총장은 검찰 개혁에 저항한 적이 없다. 공수처 설치 등 제도적 개혁은 원래 입법부 소관이고, 검찰 인사는 어차피 장관 맘대로 했으니 그에겐 저항의 기회조차 없었다. 그는 외려 부하들에게 개혁에 적응할 것을 촉구해 왔다. 그가 했다는 ‘저항’이란 결국 권력 비리 수사를 중단하라는 지시를 거부한 것이었다. 이게 ‘개혁’에 대한 저항이던가?
‘검찰개혁교’의 성도들
여당의 원내대표는 윤 총장이 “살아 있는 권력이 아닌 검찰 개혁에 맞서다가” 징계위에 회부된 것이라 주장한다. 검찰 개혁이 실패했다고 보는 55%에게 한 말은 아닐 터, 이 거짓말은 아직도 개혁을 믿는 28%만을 위한 것이리라. 이들 콘크리트 지지층은 종교적 감수성이 남달라 검찰은 악마요, 추미애는 주의 전사 ‘추다르크’라 굳게 믿는다.
드디어 십자군의 공세가 시작됐다. “윤석열을 파면하라. 국민은 추미애를 응원한다.” 어용 매체들이 지원사격을 하고, 어용단체가 총장을 잡으려 저격수로 나섰다. 초선 의원이 법관들의 봉기를 촉구하자 몇몇 판사가 그 부르심에 응했다. 일부 종교인들도 ‘검찰 개혁=윤석열 해임’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왜들 요란하게 바람을 잡는 걸까?
그럴 만도 하다. 법원에서는 윤 총장이 신청한 집행정지를 인용했다. 감찰위에서는 윤 총장에 대한 징계가 부당하다고 의결했다. 법관회의에서는 이른바 ‘사찰’ 안건을 부결시켰다. 징계에 필요한 합리적 사유가 모두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신앙은 이성을 초월한다. 성서에 이르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 하지 않았던가.
징계의 사유는 없어도 징계위는 열린다. 과연 믿음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의 실상을,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해임의 증거를 보여주었다. 그 증거가 무려 여섯 가지란다. 그 재판은 세속의 증거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신성한 증거 앞에서 세속의 법률과 절차는 어차피 효력을 잃는 법. 재인천국 불신지옥. 이 성스러운 믿음 앞에선 헌법마저 무력하다.
약속의 땅 공수처
나라 꼴이 엘 그레코의 그림을 닮아간다. 이 16세기의 화가의 그림에는 한 화면에 두 개의 공간이 병존한다. 하나는 세속의 물리적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신학적 환상의 공간이다. 이 나라 백성들은 이미 두 개의 공간에 나뉘어 살고 있다. 55%는 법의 지배를 받는 세속의 공간에, 28%는 정치신학이 지배하는 환상의 공간에.
환상의 공간에 사는 이들의 눈에는 조국이 백성을 검찰 땅에서 해방시킨 모세로, 추미애는 그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 여호수아로 보일 게다. 그들은 공수처가 있는 가나안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른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믿음의 근거가 뭐냐고 따져 물어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들의 믿음은 어차피 이성에서 나온 게 아니니까.
그들의 머리는 정치신학적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에게 윤 총장은 파라오요, 검사들은 그들을 이집트의 병사들, 공수처에 반대하는 이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물리쳐야 할 아말렉의 군대다. 그들은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이교도들에게 혐오와 증오를 표출한다. 이교도는 밖에만 있는 게 아니다. 신앙촌 안에도 이단은 존재한다.
며칠 전 유튜브 탁발승 김용민이 나꼼수 동료였던 주진우를 종교재판에 넘겼다. 주 기자가 은밀한 사탄(윤석열) 숭배자란다. 신학 전공자답다. 주 기자는 울먹이며 결백을 호소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사함을 받지는 못했다. 원래 신학적 성격을 띤 의심은 쉽게 풀리는 게 아니다. 그가 윤 총장 사진을 밟고 지나간들 그들은 의심을 풀지 않을 것이다.
종교와 정치의 중첩
곧 열릴 징계위도 이 종교재판과 다르지 않다. 심의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결론이 내려져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 어떤 세속의 증거나 변론도 신이 석판에 새겨주신 여섯 혐의를 반박하지는 못한다. 종교재판은 원래 그런 것이다. 손을 묶어 물에 던져 익사하면 신의 버림을 받았으니 마녀인 것이고, 용케 헤엄쳐 나오면 악마의 도움을 받았으니 마녀인 것이다.
이 나라에는 정치와 종교의 중첩 상태에 사는 두 부류의 집단이 존재한다. 사랑제일교회와 민주당이다. 증상은 비슷하나 경로는 상이하다. 전광훈 목사가 신앙생활을 정치활동으로 바꾸어 놓는다면, 민주당 사람들은 정치활동을 신앙생활로 바꾸어 놓는다. 그 결과 ‘검찰 개혁’은 공수처를 섬기는 신흥종교가 되었다.
검찰이 악이라면 공수처는 왜 선인가. 검찰은 통제가 안 되는데 같은 공수처는 왜 통제가 되는가. 검찰이 권력의 개라면 공수처는 왜 개가 아닌가. 한 자루의 칼이 무서운데 왜 두 자루의 칼은 무섭지 않은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제도가 왜 이 나라에만 필요한가. 이런 이성적 질문을 던진 이는 이단으로 몰려 추방되었다.
이른바 ‘검찰 개혁’의 방향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의 비리에는 손도 대지 말라는 것이다. 권력은 이 추잡한 세속적 욕망에 용케 성스러운 종교적 광휘를 뒤집어씌웠다. 그 광휘에 뒤에 숨은 욕망을 보지 못하고 성도들은 최후의 결전에 나선다. 종교적 열정은 교회에 가서 해소하고 정치는 맨정신으로 하면 안 되나?
12.30 "정신줄 놓지 말라, 히틀러도 '선출된 권력'이었다"
나치 치하에 사는 유대인의 일상을 기록한 일기로 유명한 빅토르 클렘퍼러. 문헌학자였던 그는 나치가 막 부상하던 시기에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독특성에 주목한다. 그 시절의 메모를 토대로 쓴 ‘제3제국의 언어’에서 그는 나치 이데올로기가 대중이 사용하는 일상언어에까지 침투하는 과정을 상세히 기술한다.
‘선출된 권력’에 저항하면 ‘쿠데타’ 세력 간주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를 구별하지 못하며
민주주의의 파괴가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이런 언어의 혼란은 전체주의화의 첫 조짐이다
전체주의의 독특한 언어
그 시절 독일에서 암살은 ‘특별조치’, 고문은 ‘강력심문’, 강제수용소행은 ‘대피’라 불렸다. ‘광신적’은 자기들을 수식할 때는 긍정적 의미로, 적을 수식할 때는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됐다. ‘이질적 종자’나 ‘영원한 유대인’ 등 적을 공격하는 다양한 상투어들을 만들어 퍼뜨리는 것 역시 전체주의자들 특유의 언어습관에 속한다.
비슷한 현상이 이 나라에도 나타나고 있다. 증거인멸은 ‘증거보전’, 대리시험은 ‘오픈북’이라 불린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대상에 따라 의미가 달라져 그 대상이 자기편일 경우에는 ‘대법원의 확정판결 전까지는 다들 입 닥치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런가 하면 정적에 낙인을 찍는 상투어들도 널리 유행하고 있다.
‘기레기’나 ‘윤짜장’은 애교에 속한다. ‘토착왜구’와 같은 표현은 다소 심각하다. 그 바탕에 이데올로기, 즉 인종주의·민족주의 이념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을 반복적으로 입에 담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념에 적하된(ideology-laden) 상태가 된다. 이념이 실린 의식을 가진 이들과는 정상적 소통이 불가능하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맥락에는 ‘적폐’라는 표현이 즐겨 사용된다. 주로 적으로 지목된 집단에 사용되는 말인데, 최근 법원에서 몇 차례 정권에 거슬리는 판결을 내리자 ‘검찰적폐’와 ‘언론적폐’에 이어 새로 ‘사법적폐’라는 말이 등장했다. 이렇게 그들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새로 ‘적’을 발명해 그 앞에 이 딱지를 붙이곤 한다.
선출권력은 법을 초월하는가

/그래픽=최종윤
최근 그들이 빈번히 사용하는 것은 ‘선출된 권력’이라는 말이다. 이 표현은 ‘쿠데타’나 ‘통치행위’라는 말과 하나로 묶여 대통령을 헌법 위에 올려놓고 청와대를 대한민국의 법률이 적용되지 않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선포하는 데에 사용된다. ‘누구도 법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법치주의 원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표현인 셈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선 대통령도 법의 구속을 받는다. 그 잘난 ‘통치행위’도 헌법과 법률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민주당 사람들에게는 이 상식이 없다. 그들은 대통령에게 ‘통치행위’라는 이름의 초법적 행동을 할 권한이 있다고 믿고, 거기에 따르지 않는 이들은 ‘선출된 권력’에 저항하는 ‘쿠데타’ 세력으로 간주하곤 한다.
김두관 의원의 말을 들어 보자. 그는 법원의 판결이 “대통령의 권력을 정지시킨 사법 쿠데타”라며 이렇게 다짐한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의 통치행위가 검찰과 법관에 의해 난도질당하는 일을 반드시 막겠다.” 머리도 참 나쁘다. 절차를 위반한 징계가 대통령의 통치행위였다니, 결국 대통령의 직권남용 사실을 자인한 셈이다.
임종석도 끼어들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선출된 권력을 짓밟는 일을 반드시 막겠다.” 출마 선언을 참 이상하게도 한다. 정치인만이 아니다. 서울대 민교협에서도 법원이 판결로 “선출된 권력에 노골적으로 저항”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모 신문에는 묘한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이제 판사를 선거로 뽑아야 할까?’
독일의 민주주의 파괴한 히틀러
이 표현의 바탕에는 부당전제가 깔려 있다. 즉 ‘오직 선출된 권력만이 정당하며 선출되지 않은 기관은 기득권층’이라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 프레임이기도 하다. 자기들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권력이니, 검찰이든 감사원이든 사법부든 선출되지 않은 자들은 자기들이 하는 신성한 개혁질에 손도 대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다.
‘선출된 권력론’을 떠들어대는 것은 실은 자기들 정권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생각해 보라. 그 역시 ‘선출된 권력’이었지만 선출되지 않은 9명의 헌법재판관들에게 탄핵당했다. 그 일이 그렇게도 부당하다면, 지금이라도 감옥에 있는 그를 데려다 부정취득한(?) 정권을 반납할 일이다.
민주주의의 생명은 삼권분립에 있다. 그중 사법부는 원래 선출된 권력이 아니니, ‘삼권분립’이란 선출권력과 비선출 권력 사이의 견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고로 그저 ‘선출’됐다는 이유만으로 대통령이 전권을 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다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꿈이다.
그 꿈은 다른 체제에서나 가능하다. 실제로 ‘선출’된 후에 하고 싶은 대로 다 한 지도자가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 나치당은 문재인의 대선 득표율보다 고작 2% 더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1933년 3월 그 힘으로 ‘전권위임법’을 통과시켜 총통에게 전권을 몰아주게 된다. 바로 그날 독일의 민주주의는 종언을 고한다.
민주주의라는 말의 오염
얼마 전 대통령이 중요한 판결들을 앞두고 대법원장과 헌재소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권력기관 개혁’에 협조하라는 은근한 압력이 있었지만, 법원에서는 검찰총장 징계의 집행을 정지시켰다. “주문, 대통령이 신청인에 대하여 한 정직 처분의 효력을 정지한다.” 이 나라에 권력분립의 민주적 시스템이 아직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발끈한 김두관 의원이 검찰총장 탄핵을 추진하고 나섰다. “사법부의 결정을 불가역의 최종결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저는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행정부가 못한 일을 입법부에서 대신 처리하겠다는 얘기. 이 과감한 발상은 170대의 뇌 없는 무적의 거수기 부대가 의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헌재에서 탄핵이 기각될 수” 있다는 것쯤은 그도 잘 안다. 그래도 그 짓을 하는 것은 “국회 의결 즉시 윤 총장의 직무는 중지”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다 계획이 있다. “탄핵과 동시에 윤 총장과 그 가족에 대한 특검을 추진하거나 공수처에서 윤 총장 개인의 범죄행위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다는 것이다. 의원인지 깡패인지.
“대통령과 민주주의를 지켜야 합니다.” 원전 수사가 “대통령에 대항”하는 것이라 하는 것을 보니, 경제성 평가 조작이 대통령 지시였던 모양이다. 문제는 ‘민주주의’라는 말의 오염이다. ‘민주주의’가 졸지에 최고 권력자의 비위를 덮어두기 위해 권력기관을 동원해 타인과 그의 가족을 손봐주는 것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대중과 지도자의 결합
추미애 장관도 탄핵에 찬성하는 의중을 드러냈다. 제 유튜브에 같은 당 민형배 의원의 글을 올렸는데 글의 제목이 재미있다. ‘윤석열 탄핵, 역풍은 오지 않는다.’ 이분들이 현실감각을 잃어버렸다. 완전히 정신줄을 놓아버린 것이다. 그때는 오체투지를 하셔도 모자랄 텐데 삼보일배로 망가진 장관님의 관절이 괜찮으실지 모르겠다.
이들의 자신감은 광적인 지지자들에게서 나온다. “우리는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준 국민들과 지지자들의 목소리에 응답할 의무가 있다.”(김두관) “지지층의 분노야말로 민주진영의 정치적 대표자들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역풍’이다.”(민형배) 정경심 교수 재판부의 탄핵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무려 40만 명이 참여했다.
이렇게 대중의 분노를 동원하는 것 또한 전체주의 문화의 특징이다. 나치는 히틀러 1인이 아니라 실은 대중의 독재였다. 이 땅에 이 낯선 문화를 이식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잇단 법원의 판결이 보여주었듯이 민주적 시스템은 여전히 작동하고, 정권의 광신적 지지자들은 소수 극렬화해 점차 고립돼 가고 있기 때문이다.
‘선출된 권력’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 여전히 87년 이전에 머물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 시절엔 정말로 ‘민주주의’가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것만을 의미했었다. 한편, 선출된 권력이 법을 초월한 ‘통치행위’를 해도 된다는 발상은 80년대에 그들이 받았던 NL 인민민주주의 학습의 흔적으로 보인다.
집권한 이들이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다. 교양의 결핍이 빚은 이 언어학적 재난이 지금 벌어지는 모든 사태의 원인이다. 민주주의의 파괴가 ‘민주주의’라 불리는 현실. 이 언어의 혼란은 전체주의화의 첫 조짐이다. 그 위험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결코 무시해서도 안 된다.
2021.
01.06(수) "선동정치의 역습, 올 1월 이미 중도층은 與 떠났다”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두 정치인 사이에 논쟁이 붙었다.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교통방송의 김어준. 금태섭 전 의원이 “편향성이 극렬하고 다양하게 나타나면서 너무나 큰 해악을 끼치고 있다”고 그를 비판하자, 우상호 의원이 “종편방송 진행자 혹은 패널들이 훨씬 더 편파적”이라며 그를 옹호하고 나섰다.
1월 초 국정 지지율 34%, 중도층이 모두 떠났다는 얘기다
중도층에 어필하려면 프로파간다 정치를 포기해야 하는데
대깨문의 저항 때문에 이도 저도 못하는 게 민주당의 딜레마
그게 다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을 프로파간다로 때워 온 업보다방송인이 아닌 프로파간디스트
흥미로운 것은 우 의원이 김어준을 가리켜 “성향은 드러내되 사실관계에 기초한다는 철학이 분명한 방송인”이라 부른 것이다. 이 음모론의 대명사가 ‘사실관계에 기초한다는 철학’을 가졌다는 소리는 우리 귀에 해괴하게만 들린다. 우리 의원님은 허구가 ‘사실관계’로 통하는 대안현실에 사시는 모양이다.
김어준의 문제는 공중파를 사용해 사실관계를 왜곡한다는 데에 있다. 조국 사태 당시에 그의 ‘뉴스 공장’은 조 교수의 딸, 동양대 장모 교수, 입시업자 김모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그 인터뷰들을 통해 조민이 실제로 봉사활동을 하고 진짜 표창장을 받아 학교에 “정상적으로 진학”한 가상현실이 지어졌다.
법원의 판결로 보도가 허위로 밝혀져도 그는 정정도 사과도 하지 않는다. 우 의원 말대로 그가 ‘방송인’이라면 진즉에 퇴출당했을 게다. 그 짓을 하고도 여전히 마이크를 잡는다는 것은 이 정권에서 그의 위상이 단순한 ‘방송인’ 이상임을 뜻한다. 한 마디로 그는 정권을 지탱하는 대표적 프로파간디스트다.
김어준이 한 것은 ‘오보’가 아니다. 오보는 의도되지 않은 허위다. 오보에는 ‘정정’이 따르고, 청취자는 머릿속으로 그릇된 정보를 지우기 마련이다. 프로파간다는 다르다. 애초에 의도된 허위이기에 절대 교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김어준은 사과하지 않고, 대깨문은 계속 정경심 교수의 결백을 믿는 것이다.
프로파간다란 무엇인가

/그래픽=최종윤
‘프로파간다’에는 긍정적인 것에서 부정적인 것까지 다양한 정의가 존재한다. 하지만 자유주의 국가에서 이 말은 대체로 부정적 뉘앙스를 띤다. 그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주로 레닌이나 괴벨스와 같은 전체주의자들. 그래서 프로파간다의 사용 여부는 한 정치집단의 성향을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해럴드 라스웰에 따르면 프로파간다란 “환경의 다른 조건들을 바꾸지 않고 사회적 암시의 직접적 조작으로 견해와 태도를 관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김어준이 ‘냄새가 난다’는 말을 자주 사용할 때, 그는 사회적 암시를 조작해 그 어떤 악재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지지자를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파간다의 목적은 상황 자체가 아니라 상황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와 태도”를 관리하는 데에 있다. 프로파간다로 법원의 판결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지지자들의 “견해와 태도”를 전과 동일한 상태로 관리한다면, 지지는 유지된다. 이렇게 대중을 관념론자로 바꾸어 놓는 게 프로파간다의 본질이다.
권력은 김어준·유시민 같은 선동가들이 ‘콘크리트 지지층’의 창출과 유지에 필요한 존재임을 잘 안다. 게다가 40%에 이르는 그 콘크리트는 동시에 시청률을 떠받치는 열광적인 청취자이기도 하다. 결국 권력과 자본의 공통의 이해가 이들 선동가의 활약에 이중의 보호막을 제공하는 셈이다.
프로파간다는 인성을 파괴한다
예나 지금이나 프로파간다는 “대중의 심리적 조작으로 권력을 획득하고 대중의 지지로 그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자크 엘륄)이다. 이를 정치적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취함으로써 민주당은 ‘참여’의 의미를 왜곡시켰다. 그 결과 노무현의 ‘깨어 있는 시민’은 여기저기 양념이나 치고 다니는 ‘대깨문’이 되었다.
최근 유시민이 손에 책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시민에게 교양을 제공하려는 게 아니다. 프로파간다는 “어떤 분쟁에서 한쪽 편만을 들게 만들려는 시도”로, 애초에 “지식의 확산이 아니라 모종의 당파적 감정”(버트런드 러셀)을 조장할 목적으로 행해진다. 그 점에서 일반교육과 뚜렷이 구별된다.
프로파간다는 대중의 “인성에 영향을 끼쳐 비과학적이거나 의심스러운 가치로 여겨지는 목표를 추구하게 만든다.”(레오나드 둡) 거기에 노출된 이들은 맹목적인 진영논리에 갇혀 제 편의 범법을 변호하기 위해 비논리적 궤변을 사용하고, 다른 편을 악마화하기 위해 비합리적 음모론을 수용하게 된다.
프로파간다의 폭격을 받은 이들은 종국에 로고스(이성)와 에토스(윤리)를 상실하게 된다. 인격 자체가 말살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우려할 것은 프로파간다가 개인의 인성에 끼치는 이 장기적 폐해다. 대깨문을 이해하자. 그들도 피해자다. 그들의 몸은 나꼼수 이래 10년 넘게 프로파간다의 마사지를 받아왔다.
선포로서 진리
프로파간다는 현실감을 잃게 만든다. 그 어떤 과학적 증거도 창조론 신앙을 무너뜨릴 수 없듯이 그 어떤 세속의 사실도 프로파간다로 빚은 신념을 깨뜨릴 수는 없다. 프로파간다는 ‘선포’의 진리라 증명을 요하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외려 그 선포된 진리에 맞춰 사실을 왜곡하고 증거를 조작하려 든다.
그 진리가 현실에서 반박당한다면 그것은 세상이 사악한 것이다. 법원에서 정경심 교수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윤석열 검찰총장의 신청을 인용해도, 그것은 사법부의 사악함을 입증하는 증거로 처리된다. 그릇된 믿음을 교정하는 대신에 그들은 자기들끼리 그 믿음을 재확인하고 강화하기 위해 재판부 탄핵운동을 벌인다.
법원에서 검찰총장 징계의 효력을 정지시키자 민주당 이낙연 대표는 “대한민국이 사법의 과잉지배를 받고 있다. 사법의 정치화가 위험 수위를 넘었다”고 말했다. 김두관 의원은 그 판결을 아예 “사법 쿠데타”로 규정하고 나섰다. 프로파간다가 빚어낸 망상이 지지층을 넘어 집권당마저 집어삼킨 것이다.
민주당은 프로파간다로 절대 흔들리지 않는 ‘콘크리트’ 지지층을 구축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콘크리트에 발목이 잡혀 버렸다. 1월 초 국정 지지율 34%. 중도층이 모두 떠났다는 얘기다. 그래도 그들은 프로파간다 정치를 포기할 수 없다. 그 콘크리트라도 없으면 정권이 무너질 상황이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지지층의 덫
이낙연 대표가 사면론을 꺼냈다. 청와대와 교감을 거쳤을 것이다. 하지만 통합의 메시지로 중도층을 끌어안으려는 이 시도는 민주당 열성 지지층의 격렬한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오랜 프로파간다의 세례로 지지층의 머리가 이 정도의 정치적 유연성도 허용하지 못할 정도로 굳어 버린 것이다.
중도층을 끌어안으려면 선동정치를 버리고 의회정치를 회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오랜 관행대로 법사위장을 야당에 돌려줘야 한다. 하지만 이는 민주당에서 꿈도 꿀 수 없는 일. 그들의 다수결 독재는 실은 콘크리트 지지층의 주문에 따른 것이다. 여당의 독주를 지지층은 180석을 준 ‘국민의 명령’으로 이해한다.
극렬 지지층을 겨냥한 이 선동이 합리적 중도층에 먹힐 리 없다. 중도층에 어필하려면 프로파간다를 포기해야 하는데, 그 경우 들어 살 ‘세계’를 잃게 될 대깨문의 극렬한 저항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민주당의 딜레마. 그게 다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을 프로파간다로 때워 온 업보다.
왜 저럴까? 위기를 관리하는 데에 자기들에게 익숙한 운동권 프레임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을 감시하고 수사하고 심판하는 기관들을 ‘쿠데타’ 세력으로 몰아붙임으로써 기득권의 욕망을 숭고한 민주화 투쟁으로 포장하고, 대중의 머리에 자신들이 결백하다는 환상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새로운 선동 캠페인
과거의 군부독재 자리에 놓인 것은 검찰과 사법부. 둘의 공통점이라곤 고작 ‘선출되지 않았다’는 것뿐.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나 보다. 지지층의 머리에 ‘검찰·사법부=쿠데타 세력’이라는 등식을 심기 위해 엉뚱하게 다른 나라 얘기를 가져온다. 이 새로운 캠페인에는 이재명 도지사까지 가세했다.
그는 ‘위기의 민주주의-룰라에서 탄핵까지’라는 영화를 소개한다. “브라질의 재벌, 검찰, 사법, 언론 기득권 카르텔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극우 정권을 세웠는지 추적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이 영화에서 “기시감”을 느꼈단다. 정치적 망상을 현실로 둔갑시키려고 영화까지 동원한 것이다.
차기 주자마저 이 짓을 하니 그 당은 앞으로도 희망이 없어 보인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오직 프로파간다로만 창출되고 유지되는 권력이라면, 그 정권은 국가와 사회를 위해 되도록 빨리 무너지는 것이 좋다. 선동의 정치, 국민은 피곤하다.
01.20 "시대착오적 결사옹위...임종석, 제발 文 그냥 놔둬라"
“민주주의가 너무 쉽게 약해지지 않도록 대통령께서 외롭지 않도록 뭔가 할 일을 찾아야겠다.” 법원에서 검찰총장 징계의 효력을 정지시키자 임종석 전 비서실장이 SNS에 글을 올렸다. 대통령이 법치를 무시했다가 큰 망신을 당한 상황. 그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엔 오직 ‘지도자 결사옹위’의 생각밖에 없다.
“대통령께서 외롭지 않도록 뭔가 할 일을 찾아야겠다”
시대착오적인 지배자 숭배, 결사옹위의 글 올린 임종석
감사원·검찰·법원 때리는 선전선동으로 대선 출사표?
스스로 민주주의 정치 소양없음 드러낸 꼴…헛된 꿈 접어야
임종석 비서실장의 청와대
그가 대통령께서 외롭도록 그냥 놔뒀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청와대의 모든 비리가 실은 그가 비서실장으로 대통령 곁에 있을 때 저질러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 이 비위에는 청와대 8개 부서가 연루됐다. 이 모든 부서를 움직일 권한을 가진 이는 내가 아는 한 비서실장밖에 없다.
그 시절 전병헌 정무수석과 조국 민정수석의 직권 남용 사건이 일어났다. 월성 원전 경제성 평가 조작 사건도 그가 청와대에 있을 때의 일. 이번에 문제가 된 김학의(전 법무차관) 출국금지 사건도 그의 재임 중에 일어났다. 적법 절차를 무시한 이 사건에는 그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개입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일찍이 이렇게 많은 청와대 인사들이 비리에 연루된 적이 있었던가? 정무수석·민정수석·비서관·행정관 등 기소된 이만 열댓 명. 혐의도 뇌물에서 직권 남용, 공직선거법 위반까지 다양하다. 한둘이라면 ‘개인적’ 일탈이겠지만, 이렇게 많은 이들이 동시다발로 사고를 쳤다면 뭔가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청와대의 작풍(作風)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단순한 무능의 소치가 아니다. 그 모든 사고가 민주주의 체제의 운영원리 및 작동방식에 대한 근본적 몰이해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최근 임종석 전 비서실장이 쏟아내는 발언들은 그 오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뚜렷이 보여준다.
지도자의 말 한마디

▲진중권의 퍼스펙티브 임종석 그래픽=신용호
일단 눈에 띄는 것은 일련의 사건에 드리운 대통령의 그림자. 울산 시장선거 개입은 애초에 VIP 관심 사업으로, 잘 봐줘야 ‘손타쿠’(忖度, 남의 마음을 잘 헤아린다는 의미의 일본어) 사건이다. 경제성 평가조작 사건도 “월성1호기는 언제 멈추냐?”는 대통령의 한마디로 시작됐다. 김학의 사건 역시 “조직의 명운을 걸고 책임질 일”이라는 그의 한마디가 발단이 됐다.
대통령의 명이라면 법을 어겨서라도 무조건 관철해야 한다는 관념. 이는 사실 전체주의 국가의 초월적 지도자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법치국가에서는 아무리 대통령의 뜻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 그때는 대통령에게 사실대로 보고하고 무리한 지시를 철회시키는 게 올바른 참모의 역할일 게다.
그릇된 보좌로 정치적 위기에 처하자 집단으로 대통령 보위에 나섰다. 하지만 제 버릇 남 주나. 역시 법률과 절차를 무시하며 억지로 검찰총장을 내치려다 망신만 당했다. 대통령이 여론으로부터 고립되자 그분이 ‘외롭지 않도록’ 고독 관리사로 나섰다. 이 또한 시대착오적 지도자 숭배의 흔적이다.
선출된 권력이 법을 초월한 통치행위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거꾸로 이에 제동을 거는 검찰·감사원·사법부의 기능을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윤건영 의원), “정부의 민주적 시스템을 붕괴”(추미애 법무장관)시키는 행위라 부른다. 아예 의식 자체가 물구나무서 있는 것이다.
국민의 과반은 그들을 뽑지 않았다
임종석의 말을 들어 보자. “우리가 합의하고 지켜가는 민주주의 제도는 매우 불완전하며 허약하며 빈틈 투성이다. 각각의 구성원과 기관들이 끊임없이 성찰하지 않는다면 그냥 쉽게 무너져 내린다. 검찰과 법원이 서슴없이 그 일을 하고 있다. 도구를 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스스로 만든 권한처럼 행사한다.”
‘스스로 만든 권한’이 아니니, 검찰과 법원은 그것을 선출된 권력에 들이대지 말고 그냥 정권의 ‘심부름’이나 하라는 얘기다. 이 해괴한 논리는 당연히 감사원에도 적용된다. “주인의식을 가지랬더니 아예 주인 노릇을 한다.” 아마도 그의 머리에 ‘권력분립’이라는 개념만큼 낯선 것은 없을 게다.
그들은 검찰이나 법원의 것과 달리 자기들의 권한은 국민에게서 직접 나왔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43%를 받았을 뿐, 국민의 과반은 문 대통령과 민주당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게 권력분립이 필요한 이유다. 즉 검찰·법원·감사원은 그들을 선택하지 않은 과반을 포함한 온 국민의 눈이다.
검찰총장 징계를 무산시키자 임종석은 법원을 이렇게 비난했다. “국민의 눈치를 살피는 염치도 자신들의 행동이 몰고 올 혼란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국민의 눈치’를 말하나 정작 국민의 과반(52.4%)은 그 결정을 ‘잘한 일’이라 대답했다. ‘잘못된 일’이라는 의견은 40.6%에 머물렀다.
망국의 강철대오 전대협
그럼에도 그가 ‘국민’을 파는 것은 ‘대중과 지도자의 직접적 결합’이라는 이상한 정치모델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 전체주의적 모델에서 그 결합 밖의 사람이나 기관은 간단히 기득권 세력으로 치부된다. 임종석 역시 판사들에게서 “너무도 생경한 선민의식과 너무도 익숙한 기득권의 냄새”가 난다고 비난한다.
법관 평가에서 만점을 받은 판사가 기득권 세력이라는 판단의 근거는 화학적 성격의 것, 즉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그럼 그 결정이 잘한 일이라 대답한 국민은 어떡하나? 간단하다. 그냥 국민이 아닌 것으로 치면 된다. 그들은 ‘히코쿠민’(非國民), 즉 청산해야 할 적폐세력, 척결해야 할 토착왜구일 뿐이다.
최근의 여론조사에서 정경심 교수의 판결이 합당하다는 의견은 60%, 부당하다는 32%로 나타났다. 하지만 어차피 60%는 비국민, 진실은 ‘참’ 국민 32%의 의견에 있다. 그들에게는 이들이 판단의 최종심급. 이 콘크리트층이 사법부 위에 있다고 보기에, 법원이 “사실과 진실을 쫓지 않는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임종석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합의하고 지켜가는 민주주의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전체주의 정권을 추종하던 젊은 시절에 뇌에 새겨진 생각의 집요한 흔적이다. 그로 인해 청와대가 비리의 온상이 되고, 당정청이 국가 시스템을 공격하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졌다. 전대협 전사들이 망국의 강철대오가 된 것이다.
후퇴하는 한국의 민주주의
이 상황이 나라 밖으로도 알려졌나 보다. 얼마 전 민주주의 이론의 석학 래리 다이아몬드 교수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며 이렇게 지적하고 나섰다. “선거에 이겼다고 민의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추구할 민주주의는 견제와 균형, 사법부와 검찰의 독립, 정보사회 독립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번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이 뒤늦게 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윤석열을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라 부르며 그가 “정치할 생각을 하면서 총장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징계 사유 자체를 부정한 것이다. 월성 원전 감사 역시 “정치적 목적의 감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평가해 주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가 이번에 한 것이 바로 그동안 유기해 온 ‘대통령직의 윤리적 기능’. 그 기능을 진즉에 발휘했다면 이 모든 혼란은 없어도 됐을 것이다. 게다가 검찰·감사원·사법부에 대한 당·정·청의 공격 자체가 그의 묵인 아래 이루어진 일. 이를 아는 국민에게는 그의 발언이 유체이탈 화법으로 비칠 수밖에.
대중선동으로 출사표
아무튼 임종석만 머쓱해졌다. 그 직전까지 열심히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광훈·윤석열, 그리고 이제는 최재형에게서 같은 냄새가 난다.” 다들 김어준을 따라 이성에서 후각으로 진화론적 퇴행을 완수한 모양이다. 그렇게 발달한 코로 왜들 제 몸의 구린내는 못 맡을까?
그의 갑툭튀 행보는 정치권에서 대선 출사표로 해석된다. 하지만 청와대를 비리 소굴로 만든 비서실장 시절의 행적을 보나, 대중 선동으로 자기 정치를 시작한 지금의 행태를 보나, 그의 정치관은 “우리가 합의하고 지켜가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즉 그에게는 민주주의 정치에 요구되는 기초소양이 없다.
전대협 시절 그들이 아는 유일한 설득 커뮤니케이션은 선전 선동. 마타도어의 수준을 보라. ‘윤석열·최재형=전광훈’이란다. 이게 다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라는 문건으로 정치학습을 시작했던 시절의 후유증. 제발 그가 나라를 구하는 심정으로 헛된 꿈을 접었으면 좋겠다. 제2의 조국은 보고 싶지 않다.
01.27 "김어준 왜 사과를 모를까, 유시민과는 다른 게임 중"
“요즘 나는 눈이 나빠서 책을 못 봐. 대신 유튜브를 봐. 김어준(방송진행자)이 하는 유튜브는 다 봤어. 김어준이 민주당을 위해서 큰일을 하는 거야.”
유시민 “공직자인 검사들 말을 불신했다”며 사과문
공작 아닌 실수…위법성 조각 사유 마련에 초점 둬
존재론적 진리게임 벌이는 김어준의 ‘세월호 음모론’
검찰의 ‘무혐의’ 결정에 사과 않는건 자신을 세뇌하기 때문 이해찬씨가 민주당 대표 시절 금태섭 전 의원에게 했다는 말이다. 이 말 속에 지금 민주당의 모든 문제가 압축되어 있다. 즉 공당에서 매번 음모론을 근거로 정치적 결정을 내린다는 것.
정신적 대통령 노릇
당 대표부터 이러니 의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중요한 일이 생기면 김어준부터 찾아가 상의를 한다. 다들 김어준의 방송에 못 나가서 안달이 났다. 그의 성은(?)을 입어야 지지자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제 구실 못하는 사이에 사실상 김어준과 유시민(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정신적 대통령 노릇을 해왔다.
이들이 퍼뜨린 각종 음모론은 속속 무너져 내리고 있다. 정경심 교수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채널A 수사팀은 한동훈 검사장을 무혐의 처분한단다. 검찰총장에 대한 법무부의 징계는 효력이 정지됐다. 법원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실을 인정했다. 유시민 이사장은 금융기관으로부터 계좌추적의 통보를 받지 못했다.
결국 유시민씨는 사과를 했다. “대립하는 상대방을 악마화했고 공직자인 검사들의 말을 전적으로 불신했습니다.” 항소이유서로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리던 그 솜씨 그대로다. 나도 그를 거의 용서할 뻔했다. 그는 “어떤 형태의 책임 추궁도 받아들이겠다”고 하나, 그 ‘형태’안에 형사처벌은 포함되지 않은 듯하다.
그는 제 거짓말을 정서적 적대감과 논리적 확증편향의 소치로 돌린다. 공작이 아닌 실수라는 얘기다. 사과의 수취인도 ‘검찰의 모든 관계자’, 결국 한동훈이라는 특정인을 겨냥한 게 아니었다는 뜻이리라. 그의 사과문은 이렇게 위법성 조각 사유를 마련해 두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치신학, 선포의 진리

/김어준 그래픽=신용호
유시민은 사과라도 하나 김어준은 절대 사과를 하지 않는다. 왜? 애초에 하는 게임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하는 것은 ‘인식론적’ 진리 게임. 가령 ‘x는 세월호다’라는 명제가 있다고 하자. 이 명제는 x가 세월이면 참, 아니면 거짓이 된다. 이 게임에는 검증이 따르기에 오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형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반면 김어준이 하는 것은 ‘존재론적’ 진리 게임이다. 그의 진리는 선포(kerygma)의 진리, 뭔가를 비로소 존재하게 하는 그런 진리다. 가령 진수식에서 "이 배를 ‘세월호’라 명명한다”고 하자. 이 말과 함께 그 배는 그냥 ‘세월호’가 된다. 이런 유형의 게임에는 거짓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세우다 실패한 진리가 있을 뿐이다.
신부님이 빵 한 조각을 들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 빵이 정말 성체가 된다. 마찬가지로 김어준이 ‘냄새가 난다’고 하면 허구는 사실이 되고, 음모는 현실이 된다. 그렇게 표창장은 진짜가 되고, 검언 유착과 검찰 쿠데타는 현실이 되었다. 이 마술이 얼마나 신통한지 전직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그 주문을 따라 외고 다닌다.
김어준은 토론이나 논쟁을 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가 하는 것은 진위를 가리는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역할은 교주의 그것과 비슷하다. 사이비 교단 안에서 교주는 신의 노릇을 한다. 신이 어디 인간과 논쟁하던가. 신이 ‘빛이 있으라’고 하면 빛이 생기듯이 김어준이 ‘냄새가 난다’고 하면 정말 음모가 존재하게 된다.
한국의 라스푸틴
당 대표가 책 대신에 그의 유튜브를 보고, 의원들이 중요한 일을 그와 상의한다. 마치 제정 러시아 말기 황제 부처가 괴승 라스푸틴에게 국정의 자문을 받는 장면을 보는 듯하다. 김어준이 ‘무학의 통찰’로 민주당을 위해 큰 일을 한것처럼, 무학의 승려도 혈우병 황태자의 피를 멈추는 ‘영빨’로 궁정에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교주의 영향력은 교단 내로 한정된다. 김어준도 신도 집단의 밖에서는 그저 흔한 음모론자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의 황당한 상상력에 ‘개연성’과 ‘진지함’을 보태주는 것이 바로 그동안 유시민이 해온 역할이다. 음모론자의 입에서 나온 괴담도 (설사 ‘어용’이라도) 지식인의 입을 거치면 신뢰도가 달라진다.
유시민은 맹신적 지지자들에 한정된 김어준의 영향력을 나름 합리적이라 자부하는 층에까지 확대하는 노릇을 해 왔다. 김어준이 음모론으로 하나의 세계를 지으면, 유시민은 지식인으로서 그 허구에 논리적 정합성의 외관을 덧씌운다. 합리화할 수 없는 것을 합리화하려다 보니 당연히 억지와 궤변이 동원될 수밖에.
두 사람의 콜라보는 민주당 지지층의 지적·도덕적 수준을 급격히 끌어내렸다. ‘대깨문’은 이미 이성적 소통의 능력을 잃었다. 윤리의식도 망가졌다. 박원순 성추행 사건 때 2차 가해를 가한 것이 바로 그들. 김민웅 교수는 피해자의 편지를 공개해 그를 모욕했고, 한 친문단체는 아예 피해자를 ‘박원순 살인죄’로 고발하고 나섰다.
법리와 유가족의 심정 사이의 괴리
김어준의 거짓말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세월호 음모론이다. 그 폐해가 아직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최근 검찰 특별수사단에서 AIS 항적 조작, 기무사 및 국정원 사찰 등 의혹들 대부분에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좌절한 유가족들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세월호 진상규명에 무능하고 무책임한 문재인 정부 규탄한다.”
무슨 진상을 더 규명해야 할까? 배를 인양해 샅샅이 뒤졌다. 아이들의 혼을 촛불 삼은 정권이 들어섰다. 이제까지 8차례 수사가 이루어졌다. 대통령은 탄핵당했고, 선장은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청와대 인사 9명과 해경지휘부 11명이 기소됐다. 민간인 사찰 의혹으로 조사받던 기무사령관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벌어졌다.
특수단장은 어떤 ‘괴리’를 언급한다. "유가족이 기대하는 결과에 미치지 못해 실망할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법률가로서 되지 않는 사건을 억지로 만들 수는 없고 법과 원칙에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유가족의 기대와 법률가의 원칙. 그 어떤 수사로도 둘의 괴리를 메울 수 없을 것이다. 예정된 특검도 다르지 않다.
유가족은 그냥 상황 자체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어느 해명이 부모에게 자식이 희생된 상황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겠는가. 이 사회는 유가족의 영혼을 살피는 데에 실패했다. 한쪽은 이 사건을 ‘악재’로 관리하고, 다른 쪽은 ‘호재’로 이용하는 가운데 정작 유가족의 끔찍한 트라우마를 그대로 방치된 것이다.
세월호 고의 침몰설
그 외상을 더 깊게 만든 것이 바로 김어준이 유포한 세월호 음모론이다. 그는 제 개인방송을 통해 줄기차게 세월호 고의 침몰설을 주장해 왔다. 그가 제작한 영화 ‘그날, 바다’는 50만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 결과 고의 침몰설이 적어도 특정 집단 안에서는 공인된 사실로, 하나의 대안적 현실로 확고히 자리를 잡아버렸다.
고의 침몰설이 의심을 넘어 확신에 근접하면 당연히 거기에 어긋나는 결론은 심리적으로 수용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확신을 입증해주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수사는 종결될 수가 없다. 문제는 이것이 외려 유가족의 외상을 덧나게 하고 그들의 고통을 무한히 연장시킨다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이 어디 음모론으로 장난칠 대상이던가?
김어준은 세월호를 음모론적 상상력의 소재로 삼았고 그것을 사업 아이템으로 바꾸어 놓았다. 유가족의 절박한 심정과 대중의 집단적 외상을 돈을 버는 데 이용한 것이다. 그로 인해 발생할 사회적 비용보다 더 큰 문제는 수사가 성과 없이 끝날 때마다 유가족이 새로 끌어안게 될 좌절감과 분노감, 이는 또 어쩔 것인가.
음모론은 ‘원인’을 ‘범인’으로 의인화함으로써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가로막는다. 그들은 세월호를 고의로 침몰시킨 ‘범인’을 색출하려 한다. 그러는 사이에 침몰의 ‘원인’은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다. 생명을 이윤으로 바꾸는 관행.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일터에서 죽어간다. 육지의 세월호를 막아줄 중대재해처벌법은 누더기가 되었다.
세월호로 그는 돈을 벌었다. 누구는 배지를 달았고, 누구는 아이들 영혼을 천만 촛불로 바꿔 권좌에 올랐다. 그들은 뜻을 이루었고, 그 대가로 유가족들은 고통을 연장받았다.
그래도 김어준은 사과하지 않는다. 음모론자들은 남을 속이기 전에 그 거짓말이 확인되는 사실보다 더 깊고 더 참된 진실이라고 자기 세뇌부터 하기 때문이다.
02.03 "여당, 새로운 적 발명했다···대깨문 달래려 법관탄핵"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도록 갚아주겠다.” 기소당한 직후 최강욱 의원은 보복을 다짐했다. 하지만 법원은 위조 인턴증명으로 입시업무를 방해한 사실을 인정해 그에게 징역 8월에 집유 2년을 선고했다. 모쪼록 그에게 세상이 만만하지 않음을 “확실히 느끼는” 귀한 기회가 됐기를 바란다.
권력비리 수사 막는 싸움에서 전패하니 사법부로 표적 돌려 국면전환
일련의 판결은 허위와 날조로 지어진 민주당 지지자들의 상상계 파괴
한 명 희생으로 사법부 순결해지고, 민주당 완전해지고, 지지자 행복해져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국회에서 신석기시대 희생양 제의를 집전하는 것
새로운 적을 발명하라
법정에서 그는 점령군 행세를 했다. 재판 도중 약속 있다며 일어나는 피고인은 처음 봤다. 이분이 어디 심판받을 분인가. 대통령 우편에 앉아 있다가 저리로서 검찰과 법원을 심판하러 오신 분이아닌가. “법원에서 검찰이 일방적으로 유포한 용어와 사실관계에 현혹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같은 당의 황희석 최고위원은 “공소권 남용에 관한 주장에서 피의자의 조사받을 권리를 하찮게” 여겼다고 썼다. 하지만 검찰은 그의 “조사받을 권리”를 충분히 보장해 주었다. 그 권리를 “하찮게” 여긴 것은 최강욱 본인. 검찰 소환을 그는 세 차례나 거부했다. 상습적 자기 인권 침해범이다.
예상했던 대로 이들은 다음 개혁에 착수했다. 이른바 사법개혁이다. 이들의 개혁에는 늘 ‘적’이 필요하다. 그 적은 신속히 발명되었다. “법복을 입은 귀족들이 따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검사들을 대신해 이제 법관들이 새로 개혁에 저항하는 적폐세력으로 재(再)정의된 것이다.
개혁의 방법은 법관 탄핵. 열린민주당에서 총대를 멨다. “이제 국민이 선출한 권력인 국회가 사법 농단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사법개혁을 시작해야 한다. 열린민주당은 민주주의의 기초가 무너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법관 탄핵에 나설 것이며, 민주당이 함께 나서 줄 것을 촉구한다.”
반복되는 레퍼토리
왜 느닷없이 탄핵 카드를 꺼냈을까? 직접적 계기는 최강욱 판결이지만, 진짜 배경은 사법부의 판결에 대한 정권의 누적된 불만이다. 법원에서 자신들의 위법에 줄줄이 유죄를 선고하고, 자신들의 초법에 번번이 제동을 걸자 사법부에 “세상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싶어진 것이다.
“스스로 개혁할 기회를 부여받았던 사법부는 더이상 개혁 주체가 될 수 없다.” 익숙한 레퍼토리의 반복. 검찰에 했던 말을 ‘Ctrl C’ 해서 사법부에 ‘Ctrl V’ 한다. 자기들이 세운 검찰총장을 공격하더니 이번엔 자기들이 세운 대법원장을 비난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법개혁을 배신했다.”(이탄희 의원)
모든 게 검찰·감사원·법원·언론 탓이란다. 아무리 배터리를 교체해도 소리가 안 난다면 라디오가 고장 난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배터리 개혁을 하겠단다. 초현실주의적 풍경이다. 아스팔트가 벌떡 일어나 제 뺨을 때렸다고 도로 행정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사를 부리는 주정뱅이를 보는 듯하다.
180석을 가졌으니 탄핵 의결은 이루어질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을 또 한 차례 겪는 셈이다. 이 정권 들어와 ‘헌정사상 초유’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 정권을 담당한 이들의 몸에 기입된 운동권 습속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 시스템과 자꾸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목적을 잃어버린 탄핵
이미 2018년 11월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국회에 사법농단 판사들의 탄핵소추를 촉구한 바 있다. 그런데 그동안 내내 손 놓고 있던 민주당 의원들이 이제 와서 외려 판사들을 싸잡아 적폐로 몬다. 심지어 사법농단 세력의 의원 회유 공작을 도왔던 이수진 의원까지 목청 높여 ‘법관 탄핵’을 외친다.
무엇을 위한 탄핵일까? 탄핵 심판의 목적은 위법한 행위를 했으나 신분이 보장된 공무원을 해임하여 직무를 정지시키는 데에 있다. 하지만 탄핵의 대상이 된 이는 어차피 임기만료로 곧 옷을 벗을 예정. 그러니 심판의 실익이 없다. 결국 한 사람의 변호사 취업을 막겠다고 저 난리를 치는 셈이다.
실익이 없는 탄핵도 가능하다며 트럼프 예를 든다. 하지만 트럼프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자 사망자가 발생한 의사당 폭력사태의 선동자다. 그래서 그게 ‘상징적’ 의미라도 갖는 것이다. 반면 이번 탄핵의 대상은 이름도 생소한 일개 판사. 게다가 그는 문구만 주물렀을 뿐 유무죄 판단엔 개입하지 않았다.
그는 법정에서는 무죄를, 법원에서는 가벼운 징계를 받았을 뿐이다. 그런데 굳이 탄핵까지 해야 하나? 물론 탄핵은 행정심판이라서 유무죄와는 관계가 없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해서 그 일을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탄핵소추를 당했다. 그런데 그 소추를 꼭 했어야 했던가?
출구전략을 위한 희생양 제의
사법농단의 본령은 징용공 소송이다. 양승태 대법원장 등 몇몇 법관들이 재판을 고의로 지연시켜 청구권 소멸시효를 완성하는 꼼수를 부린 것이다. 사실상의 판결에 준한 개입을 한 것이므로,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의미의 ‘농단’이다. 그런데 이번 탄핵의 대상은 그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느닷없이 간택을 받아 사법농단의 ‘상징’이 되었다. 말이 ‘위헌’이지, 그 중대성에는 명예훼손 판결의 문구에 손대는 것에서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이가 존재한다. 주문도 아니고 방론에서 언급된 ‘위헌’이라는 말에서 바로 탄핵으로 비약할 일이 아니다.
고작 명예훼손 소송을 사법농단의 대표 사례로 내세우려니 명분이 부족했나 보다. 이낙연 대표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요구를 위축시키기 위해” 한 일이라며 거기에 새로 정치적 죄목을 첨가한다. 하지만 임성근 부장판사가 그걸로 세월호 진상규명을 방해하려고 했다는 설정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2년이나 늦게, 그것도 딱 한 사람을 찍어 탄핵을 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권력비리 수사를 막는 싸움에서 전패를 하니, 표적을 슬쩍 사법부로 돌려 국면의 전환을 꾀하려는 것이다. 180석은 싸움의 승리를 산술적으로 보장한다. 임 부장판사는 그 출구전략의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이다.
사법농단은 허울이고 그들의 속내는 따로 있다. 그들도 이번 탄핵이 이른바 ‘사법개혁’의 일환임은 부정하지 않는다. 탄핵 주역의 말을 들어보자. “예전에는 엉뚱한 판결이라고 느껴도 40만 명이 서명하는 일은 없었다. 사법 불신이 언제부터 누적되기 시작한 건지 짚어봤으면 좋겠다.”(이탄희 의원)
디지털시대의 인민재판
저 ‘40만’은 정경심 판사들의 탄핵 청원에 서명한 이들의 수다. 판결에 문제가 있다면 사실과 법리를 따져 비판할 일. 그게 불가능하니 그저 성난 ‘대깨문’의 머릿수나 인용하는 것이다. 판사 출신 의원이 디지털 인민재판에서 ‘정의’를 구한다. 이 모든 부조리한 사태가 실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동안 법원에서 내린 일련의 판결은 허위와 날조로 지어진 민주당 지지자들의 상상계를 가차 없이 파괴했다. 40만의 성난 목소리는 그 허구의 세계를 철거당한 이들의 좌절을 반영한다. 그들을 계속 잡아두려면 그들의 허탈과 분노를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 ‘무언가’가 바로 법관 탄핵이다.
고작 한 사람의 취업을 막을 뿐이나 그래도 이 목적 잃은 탄핵의 ‘정치적’ 효용은 크다. 이 보잘것없는 승리로 지지자들의 머릿속에 자신들이 이 썩은 나라의 구원자라는 허위의식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년간 묵혀뒀던 탄핵 깡통이 보존기간 만료 직전에 다시 먹고 싶어진 것이다.
우리는 선출하지 않았다
사법농단의 모든 책임을 한 사람이 짊어졌다. 검찰개혁 한답시고 민주당이 범한 모든 과오의 책임도 그가 대속(代贖)할 것이다. 단 한 명의 희생으로 사법부는 순결해지고, 민주당은 결백해지고, 지지자들은 행복해진다.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국회에서 신석기시대 희생양 제의를 집전하는 것이다.
그놈의 ‘선출된 권력’ 타령은 여전하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사법부를 국회가 이제는 정말 제대로 견제를 해야 되겠다.”(이수진 의원) 법정에서 제게 불리한 증언을 한 판사를 탄핵하겠다던 그분의 말씀이다. 이참에 그 ‘선출된 권력’ 타령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한마디 해야 쓰겄다.
솔직히 당신들, 좋아서 뽑아준 거 아니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 나라 선거판은 어차피 대변(최악)과 소변(차악) 중 하나를 고르도록 강요된 게임. 소변을 기대하고 골랐다가 매번 상자 안에서 대변을 확인하게 되는 그런 게임이다. ‘선출된’ 대변들이 이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02.10 "그들의 조국은 한국이 아니다, 민주당 586의 망상"
도박판인가? 여당에서 가덕도 신공항 카드를 내놓자 야당에서 그 위에 한·일 해저 터널을 얹어 되받아친다. 둘 다 진지한 고려에서 나온 정책적 의제가 아니라 지역 민심을 사려고 급조한 선거용 공약일 뿐이다. 해저 터널은 경제성이 불투명하고, 가덕도 신공항은 이미 경제성에서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시대의 독립군으로 친일파 후예에 맞서 투쟁한다는 허위의식
민주당 주류와 지지층이 정치적 신앙 공동체 이루고 있어 가능
‘국민의힘=토착왜구’라는 상상계는 그들 머릿속의 ‘서사’에 불과
그들이 말하는 ‘조국’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이 상상의 민족국가
친일이라는 만능열쇠
야당이 몰라서 그러겠는가. 민주당이 선점한 의제를 중립화한 후 해저터널을 새로운 의제로 설정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내 관심을 끈 것은 여당에서 맞불로 내놓은 ‘친일’의 프레임. 히데요시의 ‘정명가도’까지 등장하고 난리가 났다. 총선은 한·일전 만들더니, 보궐선거는 아예 임진왜란으로 치르려나 보다.
여당의 친일 프레임은 선거 외에도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 가령 징용공 판결로 일본이 경제보복에 나섰을 때 조국 당시 민정수석은 『일본회의』라는 책을 들고 회의에 나왔다. SNS에 ‘죽창가’를 올리기도 했다. 이 문제가 행여 정권 책임론으로 번질세라 민족주의 정서를 소환해 상황을 돌파하려 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용도는 비리를 덮는 것이다. 윤미향 사태는 간단히 “친일·반인권·반평화 세력의 최후 공세”(김두관 의원)로 처리되었다. 그렇게 “친일사관에 빠져있는 세력”(민병두 전 의원)에 이용당하니 일본정부와 친일세력만 좋아하고 있으며, 이것이 “완전하게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나라의 슬픈 자화상”(송영길 의원)이라는 것이다.
색다른 용도도 있다. 김원웅 회장의 광복회에서는 민주당의 설훈· 우원식·안민석 의원에게 ‘우리 시대의 독립군상’을 수여했다. 은수미 성남시장은 ‘단재 신채호상’을, 추미애 전 장관은 ‘최재형상’을 받았다. 결국 최재형 기념사업회에서 고인의 독립정신을 훼손한다고 이의를 제기했고 그 바람에 상 자체가 폐지됐다.
한·일전으로 치러진 총선

/퍼스펙티브 2/10
‘조국백서’는 586 세력의 상상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조국) 사태의 시작은 대법원 강제징용 관련 판결이었다.…나라 도처에 친일분자들이 집단적으로 서식하고 있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상황이었다.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자주적 입지를 만들기 위한 민주세력의 역사관을 무너뜨려 보겠다는 자들의 반란이었다.”
이것이 그들이 들어 사는 NL(민족해방) 상상계다. “우리는 승리했다고 여겼으나 사실은 포위되어 있었던 것이다. 촛불혁명을 뒤엎으려는 반동의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거의 망상의 수준이다. 이 허구를 부정하면 “보통의 시민들이 가진 혁명의 주도권에 대한 이해와 경의가 부재한 탓”이라는 타박을 듣게 된다.
유사 종교적 현상이다. 사이비 종교도 물의를 일으켜 교단이 위기에 처하면 그게 다 도처에 서식하는 사탄세력이 자신들을 핍박하는 현상이라 우기지 않던가. 집권층과 지지자들이 이렇게 피포위 의식(siege mentality)에 사로잡혀 있으니 나라가 늘 혁명과 반혁명의 내전 상태에 있는 것이다.
공당이 ‘총선은 한·일전’이라는 슬로건을 내건다. 민망한 일이다. 이게 가능한 것은 민주당의 주류와 지지층이 정치적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하나로 결속시켜 주는 것이 바로 NL 상상계, 즉 자신들이 우리 시대의 독립군으로서 친일파 후예에 맞서 민족 정기를 세운다는 허위의식이다.
민주당은 항일 정당인가
이 상상계는 물론 현실과 아무 관계없다. 현 민주당의 모체인 한민당은 친일·친미 반공세력의 결집체.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으니 그들 논리로라면 분단의 원흉인 셈이다. 게다가 상당수가 토지개혁에 반대하는 친일 지주들. 다들 무상몰수·무상분배를 외칠 때 유상몰수·유산분배를 말하던 기득권 세력이었다.
홍영표 의원은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가로막았다 하나, 그것은 자신을 돕던 한민당 인사들이 수사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한민당은 특위 해산의 공범이었다. 그 당의 조병옥은 미군정 경무부장으로 4·3 사태 당시 강경 진압을 지시해 ‘학살 원흉’이라 불린다. 후에 그는 민주당을 결성했고, 그 아들은 새천년민주당의 대표를 지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고생해도 친일파의 후손들은 국회의원이 되어 다들 잘 먹고 잘 살았다. 민주당의 신기남·이미경 전 의원의 아버지는 일본 헌병이었다. 김희선 전 의원의 아버지 가네야마 상은 특무경찰로 이재오 전 의원 아버지를 체포한 인물. 홍영표 의원의 조부는 일제 강점기에 고위직을 지냈다.
한편, 친일파라는 이승만은 독도를 빼앗았다고 해서 일본에선 외려 반일인사로 간주된다. 독립기념관을 지은 것은 친일파의 후예라는 민정당 정권이었고,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한다며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것은 김영삼 정권이었다. 반면 광복회 회장인 김원웅씨는 친일 후예 정당인 공화당·민정당·한나라당을 두루 거쳤다.
우리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한마디로 ‘민주당=독립군, 국민의힘=토착왜구’라는 상상계는 역사가 아니라 그들 머리에만 존재하는 ‘서사’일 뿐이다. 그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는 체제가 전혀 다른 남한과 북한도 외세에 저항하는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표상된다. 그들이 말하는 ‘조국’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이 상상의 민족국가를 가리킨다.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자주적 입지”(조국백서)라는 말은 결국 외세를 배격하고 우리의 운명을 우리 민족이 결정하자는 뜻이다. 이 낭만적 관념은 상상계의 북한을 현실의 북한으로 착각한 데서 비롯된다. 이 혼동이 북한의 선의에 대한 비현실적 기대감을 낳는다. 이번 북한 원전 사건도 그와 관련 있어 보인다.
그 계획을 ‘이적행위’라 부를 일은 아니다. 다만 공무원들이 왜 자료를 삭제하려 했는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다. 아마 윗선의 지시로 당시에 용인되던 수준과 속도를 넘어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하려 한 모양이다. 어쩌면 ‘통치행위’라는 윤건영 의원의 말은 탈원전이 아니라 북한 원전을 가리키는지도 모른다.
북한과 관련해 민주당 의원들의 실언이 잦은 것 또한 ‘조선은 하나’라는 NL 상상계와 관련이 있다. 태영호 의원을 “변절자”라 부른 문정복 의원의 폭언이나, “미국은 핵 5000개인데 북한은 갖지 말라는 법 있냐”는 송영길 의원의 실언은 그 상상의 공동체와 맺은 정서적 유대감이 무의식적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상상은 현실이 아니다
소설 『태백산맥』은 NL 상상계의 중요한 일부를 이룬다. 한 세대가 이 소설로 현대사 공부를 대체했기 때문이다. 그 책도 한때는 반공의 터부를 깨는 진보적 역할을 했을 게다. 하지만 그 저자가 “반민특위를 부활시켜 150만에 이르는 친일파를 단죄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 이면의 반동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NL 상상계는 여러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방해해 왔다. 위안부 문제도 ‘한·일전’ 프레임으로 양국 시민사회를 갈라놓을 일이 아니었다. 민족이 아니라 세계시민의 관점에 서서 그것을 개인에 대한 국가의 폭력,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에 반대하는 한·일 양국 시민들의 공동 의제로 만들었어야 했다.
상상계로 현실을 대체할 수는 없다. 내수용 죽창으로 외교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일. 그 난리를 치더니 강창일 주일대사는 ‘일왕’한테가 아니라 ‘천황폐하께’ 신임장을 받았고, 대통령은 위안부 판결이 “곤혹스럽다”며 일본 자산을 강제집행하지 않겠다는 뜻을 비쳤다. 애초에 민족을 불러낼 일이 아니었던 게다.
민족이 너를 부른다
걱정스러운 것은 이 철 지난 대립적 민족주의가 다음 세대로 대물림되는 것이다. 비교적 이념에서 자유로운 젊은 세대의 반일은 ‘일본에 먹힌다’는 피해의식보다 ‘이제 해볼 만하다’는 대결의식에 가깝다. 낡은 NL 서사가 그 이념의 공백을 틈타 철없는 ‘국뽕’ 게임에 세계관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얼떨결에 주체로 호출당한 이들은 뇌용량이 1비트로 축소되어 세상을 흑백의 이분법으로 바라보게 된다. 검찰=사법부=언론=국민의힘=토착왜구. 이 등식은 필요에 따라 임의로 연장된다. 문제는 토착왜구라는 표현에 담긴 인종주의 정서다. 집권당이 나서서 인종주의 편견을 용인하고 조장하니 한심한 일이다.
‘해방후 친일청산이 안 돼 아부하는 자들이 출세하고 정의로운 이들이 핍박받는 굴절된 현대사를 갖게 됐다.’ 검찰 인사를 보면 그들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과연 권력의 주구들은 영전했고 원칙을 지킨 이들은 좌천됐다. 이렇게 그들은 열심히 현대사를 ‘굴절’시키고 있다. 대체 누가 친일파의 후예란 말인가.
02월 17일 "우린 불법사찰 DNA 없다? 靑의 해괴한 나르시시즘"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진 파이프 바로 아래로 문장이 하나 적혀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도상은 파이프를 보여주나 문장은 이를 부정한다. 요즘 청와대에서 예술혼을 불태우나? 며칠 전 초현실주의 시를 발표했다. 제목은 ‘이것은 블랙리스트가 아니다.’
법원도 직권남용 혐의 인정한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
‘블랙리스트’란 말 없어 블랙리스트가 아니라는 청와대
증거인멸을 ‘증거보전’, 피해자를 ‘피해호소인’ 네이밍
초현실을 현실로 바꿔 인지부조화 해소하려는 몸부림
불법을 제독하는 완곡어법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이 처음 불거졌을 때 당시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은 그것을 ‘체크 리스트’라고 불렀다. 이런 것을 완곡어법(euphemism)이라고 하는데, 이 정권 사람들은 이 수사법을 각별히 선호하는 듯하다. 증거인멸을 ‘증거보전’이라 부르고,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이라 부르던 것을 생각해 보라.
완곡어법은 현실을 제독하는(detoxify) 기능을 한다. 나치는 고문을 ‘강력 심문’, 체포를 ‘자진 출두’, 살해를 ‘특별조치’라 불렀다. 이렇게 언어의 조작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유해한 것이 유해하다는 인식 자체를 지우고, 자기들 자신과 지지자들에게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조건 옳다는 맹목적 확신을 주입하는 것이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이 사태를 “전 정부 출신 산하기관장에게 사표를 제출받은 행위가 직권남용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다투는 사건”으로 규정했다. 대체 거기에 다투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는가. 음주운전 사건을 가리켜 ‘술 먹고 운전한 것이 음주운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다투는 사건’이라 하는 격이다.
판결문에는 “신분 또는 임기가 보장되는 산하기관 임원들에 대해 사표를 제출하게 하는 것은 직권남용”이라 적혀 있다. 자꾸 파이프가 파이프가 아니라고 우기니, 법원에서 아예 파이프는 파이프라고 못을 박은 것이다. “이는 타파돼야 할 불법 관행이지 피고인 행위를 정당화하는 사유로 고려할 수 없다.”
낱말을 새로 정의하라

/퍼스펙티브 2/17
윤리는 아예 문제도 안 된다. 그들의 관심은 불법이 아니게 낱말을 ‘정의’하는 데에 가 있다. 전직 청와대 대변인은 ‘블랙리스트’라는 말을 “지원을 배제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정부 조직을 동원해 치밀하게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좁게 정의했다. 그래 봤자 이 케이스는 그들이 정한 요건을 두루 충족한다.
장관의 지시로 쫓아낼 인사 30인의 명단을 만들었다. 청와대 비서관실 요청으로 대상자들의 약력·임기·보수와 세평을 기록한 문서를 작성했다. 심지어 ‘조치 계획 문건’까지 만들어 조직적으로 대상자들에게 사퇴를 종용하고, 불응하는 이들에게는 감사를 이용해 사표를 내도록 협박을 가했다. 뭐가 더 필요한가?
그러자 현직 대변인이 슬쩍 요건을 하나 덧붙인다. “지원 배제 명단의 존재 여부,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감시나 사찰 여부.” 그래도 감시나 사찰은 없지 않았냐는 항변이다. 그럴까? 판결문에는 환경부에서 대상자들의 세평을 수집하고 특정인의 경우 야당 의원들을 찾아다니는 동향까지 파악했다고 적혀 있다.
전·현직 대변인이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낱말의 정의를 되도록 좁게 내렸지만, 이 사건은 그 까다로운 요건들을 두루 충족하고도 남는다. 특히 ‘김 모 감사의 경우 비위 조사 후 조치한다는 내용’은 블랙리스트가 감시나 사찰의 수준을 넘어 정치보복의 수단으로 실행됐음을 보여준다.
블랙리스트는 이 정권의 인사정책
정의는 제 마음대로, 적용은 제 편할 대로다. 그들은 “세평을 수집한 사람들을 위협·위축시키거나, 제어할 만한 개인적인 비위 사항이나 약점·취약점들이 수집돼 정리되어야만 블랙리스트”(박주민 의원)라 했다. 그러더니 거기에 해당하지 않은 검찰의 세평 수집은 ‘사찰문건’으로 규정해 검찰총장 징계의 사유로 삼았다.
문재인 정권의 고유성은 ‘참을 수 없는 그 존재의 뻔뻔함’에 있다. 전 환경부 장관이 2년 6월의 형을 받고 구속됐는데 청와대가 내놓은 공식 입장을 보자. “우리 정부는 전 정부에서 임명한 공공기관장 등의 임기를 존중했습니다.” 그럼 김 전 장관이 ‘공공기관장 등의 임기를 존중한 죄’로 구속됐단 말인가.
공공기관장의 임기를 존중하는 게 이 정부의 인사정책 기조란다. 하지만 판결문은 “임원들이 정해진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고 못 박았다. 게다가 김 전 장관이 그 자리에 제 사람을 앉히려 그랬겠는가. 청와대에서 내려보낸 낙하산 부대를 앉히려 그런 거지. 다른 게 아니라 이게 문재인 정부의 인사정책 기조다.
재판부에서도 이를 “대통령 비서관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는 일”로 판단했다. 위에서 시킨 일이라는 얘기다. 신미숙 인사비서관의 상관은 청와대 인사수석과 임종석 비서실장. 이게 어디 환경부만의 일이겠는가. 이 사건을 알린 김태우 특감반원은 당시 “330개 공공기관의 인사리스트가 있다”고 폭로한 바 있다.
그들의 해괴한 나르시시즘
판결문에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혐의를 부인하며 명백한 사실조차 다르게 진술하고 있다.” 그래서 재판 도중에 구속이 된 거다. 정경심 교수 재판에서도 같은 얘기가 나왔었다. “객관적 물증과 신빙성 있는 증언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소사실을 부인(한다).” 이렇게 팩트 자체를 부정하는 게 이 정권 사람들의 종적 특성.
언젠가 청와대에서는 “문재인 정권의 DNA에는 민간인 사찰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왕후장상에 어디 씨가 따로 있던가. 마찬가지로 블랙리스트 만드는 잡것들에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자기들은 씨가 다르다고 굳게 믿는다. 해괴한 나르시시즘이다.
자기들에게는 불법사찰의 DNA가 없단다. 그러니 자기들이 리스트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블랙리스트일 수가 없는 것이다. 궤변이 예술(?)이다. 판결문에 ‘블랙리스트’라는 말이 없으니 블랙리스트가 아니란다. 판결문에 ‘퍽치기’라는 말이 없으니 ‘둔기로 두부를 가격해 금품을 탈취’했을 뿐 퍽치기는 안 했다는 논리다.
뭐라고 네이밍을 하든 그들이 추잡한 짓을 했다는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철학이 다르니 나가라고 한 것도 아니고, 결국 게걸스럽게 자기 패거리들 밥그릇이나 챙겨주려고 벌인 일. 법원은 그 짓의 위법성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런 식의 계획적이고 대대적인 사표 징구 관행은 이전 정부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적폐 청산’을 외치는 그자들이 실은 더 썩었다는 얘기. 하지만 이 나라에서 만물의 척도는 민주당이다. 같은 관행도 남이 하면 ‘적폐’, 자기들이 하면 ‘적법’이다. “산하기관 임원에 대한 평가와 관리 감독을 하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전혀 없는 적법한 인사와 관련된 감독권 행사입니다.”(홍영표 원내대표)
블랙리스트는 블랙리스트다
자신들이 새로운 ‘적폐’라는 사실을 끝내 인정하지 않는다. 정당화가 안 되니 슬쩍 물타기로 넘어간다. 국정원을 통해서 이미 묵은지가 되어버린 MB(이명박) 정권 시절의 블랙리스트 사건을 물고 늘어질 태세다. 아마도 ‘환경부 문건이 아니라 이런 게 진짜 블랙리스트’라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국내 정치에 국정원을 끌어들이는 것을 ‘적폐’라 비난하더니, 그것도 자기들이 하면 적폐가 아닌가 보다. 공당에서 하는 짓이 유치하기 짝이 없다. MB 정부가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고 문재인 정부의 블랙리스트가 용서되는가. ‘두 개의 잘못이 하나의 옳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미국에서는 이를 초등학교에서 배운다고 들었다.
자기들은 늘 ‘그런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블랙리스트 만드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이번만이 아니다. 박원순도 어디 ‘그런 사람’이었던가. 그들이 블랙리스트를 블랙리스트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인정할 경우 그들과 지지자들의 상상계, 즉 자기들이 나라를 구하는 세력이라는 허위의식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 징그러운 나르시시즘이 사람을 질리게 한다. 블랙리스트가 블랙리스트가 아닌 초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검찰의 수사권을 폐지하고 법원을 장악하려 신판 사법농단까지 부린 것은 그 초현실을 아예 현실로 바꾸어 인지부조화를 실천적으로 해소하려는 몸부림이리라.
파이프가 파이프가 아니라는 그림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 하지만 그 그림 안으로 들어가 파이프가 파이프가 아니라 우기는 이들과 더불어 사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다. 언제부터인가 나라가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변했다. 그런 곳에서는 무의미한 동어반복이 외려 가장 의미있는 진리가 된다. ‘블랙리스트는 블랙리스트다.’
02.24 "文 깨달았을까, 신현수 분개한 '우리편'의 쿠데타"
“왜 우리 편에 서지 않느냐.”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신현수 민정수석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정의의 여신 디케는 편을 가리지 않으려 제 눈을 가리는데 정의를 담당하는 부서의 장관이 ‘편’ 가르는 것으로 임기를 시작한다. 이 나라에선 정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법무부의 사명이 되어버렸다.
사태는 봉합했지만 대통령 패싱한 농단 세력은 그대로 남아
윤석열 사태 책임 물어 추미애 경질한 대통령만 실없는 사람 돼
기관장을 ‘우리 편’ 만들어 정의를 사유화하는 게 이 정권의 DNA
블랙리스트, 사법농단, 국정농단…탄핵된 정권과 뭐가 다른가
이 나라를 누가 통치하는가
인사의 기준도 ‘우리 편’이었다. 책임을 물어야 할 서울중앙지검장은 유임했다. 검찰총장 시키겠다는 얘기다. 1인 5역으로 검찰총장을 음해했던 이는 남부지검장으로 영전했다. 나라의 중요 사건을 담당하는 두 부서를 모두 장악한 것이다. 반면 억울한 누명을 쓴 이는 복귀하지 못했다.
이쯤 되면 대통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추미애 전 장관을 경질했을 때만 해도 뭔가 바뀔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실제로 대통령은 자신이 징계를 재가했던 윤석열 총장을 “우리 정부의 검찰총장”이라 부르기까지 했다. 그런데 후임 장관이 곧바로 ‘추미애 시즌 2’를 연출한다.
대통령만 바보가 된 셈이다. 실제로 검찰 인사안이 대통령 재가 없이 발표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민정수석이 그 책임을 물어 법무부 장관의 감찰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청와대에서는 이를 부인하나, 대통령의 재가가 이루어진 과정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다.
“보고되는 과정과 재가 과정은 통치행위로 봐야 한다.” 인사안이 재가 없이 발표된 게 사실인 모양이다. 그게 통치행위였단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된다. 이 나라는 누가 통치하는 것일까? 대통령을 건너뛰고 인사안을 발표하는 것은 대체 ‘누구의’ 통치행위일까?
조국은 가게무샤인가

/퍼스펙티브 2/24
장관이 말한 “우리 편”은 누구일까. 조국 라인? 그동안 검찰에 관련된 일은 현직이 아닌 전직 장관이 지휘하다시피 했다. 법사위에 포진한 강성 의원들의 검찰 해체 공작도 그와 조율된 느낌이다. 전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시에도 법무부 문안이 조국 라인을 통해 밖으로 샌 바 있다.
전직 장관이 SNS로 검찰 해체를 독려하고 당 전체가 그의 춤에 장단을 맞춘다. 중대범죄수사청도 처음엔 몇몇 초선 의원들의 객기로 보였으나, 전 장관이 “검찰개혁의 마지막 단추”라며 더불어민주당과 열린민주당의 결단을 촉구하고 나서자 아예 여당의 공식 입장으로 굳어졌다.
이들이 검찰을 해체하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하나는 검찰총장 징계가 불발로 끝난 것에 대한 공적인 보복, 다른 하나는 자기들을 기소한 데에 대한 사적 복수다. 조국을 위시하여 검찰의 직접 수사권을 박탈하려 드는 이들은 대부분 검찰에 기소되거나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사실 조국 라인 초·재선의 막강한 영향력은 그것이 정권 실세의 이해와 일치한다는 데서 나온다. 즉 친문실세들이 이들을 앞세워 자기들을 향한 검찰의 수사를 무마하고, 지지층을 정치적 흥분상태로 유지해 지지율을 관리해 온 것이다. 장관이 말한 “우리 편”은 이들을 가리킬 게다.
누가 국정을 농단하는가
민정수석이 사의를 표명한 게 그저 자기 ‘개인’을 따돌린 것에 대한 항의는 아니었을 게다. 그가 대통령에게 법무부장관에 대한 감찰을 건의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감찰’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은, 민정수석이 그 사안을 감찰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사태라 판단했음을 시사한다.
검찰총장 징계사태의 책임을 물어 추미애 장관을 경질한 것은 국정의 기조에 변화를 주겠다는 대통령의 대국민 약속이었다. 그런데 이를 신임 장관이 뒤집어 대통령을 실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민정수석의 눈에는 이것이 대통령의 인사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로 비친 것이다.
조 전장관에 대한 수사를 대통령 인사권에 도전하는 ‘쿠데타’라 우기더니, 진짜 쿠데타는 자기들이 한 셈이다. 일각에선 그 배후로 ‘부엉이 모임’ 출신들이 만든 ‘민주주의 4.0’을 지목한다. 법사위원장부터 법무부·행안부·중소벤처기업부·문화체육관광부 장관까지 이 ‘친문 하나회’에서 차지했다.
문제는 대통령이다. 법무부 장관이 들고 온 인사안이 ‘추미애 시즌2’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 안을 추인해 줬다. 대통령이 이들 친문 하나회 세력에 끌려다닌다는 얘기다.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하더니, 정작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이들은 따로 있나 보다.
문제는 대통령 자신이다
그들은 늘 하던 버릇대로 했을 게다. 어차피 대통령도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최순실의 뜻이 곧 박근혜의 뜻이 아니던가. 내 뜻이 어차피 대통령의 뜻이니 대통령은 이심전심으로 건너뛰어도 된다고 가볍게 생각한 것이고, 신 수석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는 국정농단으로 본 것이리라.
신 수석이 복귀하면서 대통령에게 ‘거취를 일임’한 것은 그의 결단을 촉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국정 운영을 정상화할 것인지, 앞으로도 이들의 국정농단을 방관할 것인지 결정하라는 얘기다. 대통령은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아니, 그 결단조차 대통령이 내리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나마 사표 파동 덕에 정권 수사를 담당한 검사들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다른 한편, 별것 아닌 사건을 우리고 또 우려먹은 사골 임은정 검사에게는 수사권이 쥐어졌다. 그에게는 친노 대모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받은 뇌물의 악취를 제거하는 작업이 맡겨질 것이다. 모종의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로써 사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레임덕이 걱정돼 수술하다 말고 절개한 부위를 급히 봉합한 것일 뿐, 대통령을 ‘패싱’한 농단의 세력과 기제는 그대로 남아있다. 복귀한 신 수석이 오래 버틸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청와대에서 감시자의 역할을 계속하는 한 충돌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우리 편’의 정의
새로운 일이 아니다. 조국-추미애-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임명될 때마다 늘 사달이 났다. ‘정의’란 편을 가리지 않는 공정함을 가리키나 정의부(=법무부)의 장관이 ‘우리 편’의 정의를 실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민심은 정권을 떠났지만, 지지율만 돌아오면 그들은 같은 짓을 반복해 왔다.
어디 검찰에만 그랬던가. 감사원장에게도 ‘우리 편’이 되라고 종용했다. 거짓말하는 대법원장을 통해 농단을 하고, 판사들의 편을 갈라 우리 편은 유임, 다른 편은 교체했다. 이렇게 공정이 요구되는 기관들의 장을 ‘우리 편’ 만들어 정의를 사유화(私有化)하는 것이 이 정권의 DNA가 됐다.
이 정권의 남다름은 ‘우리 편’의 정의를 아예 신념화했다는 데에 있다. 그들에겐 그게 나쁘다는 인식 자체가 없다. 정치를 전쟁으로, 즉 적과 나를 가르는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전쟁터의 ‘정의’는 공정이 아니라 승리. 그래서 정의를 담당하는 기관의 장들까지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이다.
내가 하면 착한 농단, 남이 하면 나쁜 농단. 이것이 ‘우리 편’의 정의다. 정의의 사유화는 비리를 감추고 특권을 지키는 데에 필요한 것. 그들도 어느새 잃을 것보다 지킬 게 더 많은 기득권층이 됐다는 얘기다. 하긴, 블랙리스트에 사법농단에 이제는 국정농단까지, 탄핵당한 정권과 뭐가 다른가.
역주행하는 민주주의
‘우리 편’의 정의가 지배하는 곳은 기회주의자들의 천국이 된다. 진정으로 슬픈 것은 이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이들이 고통을 받고, 직분을 지키는 이들이 핍박을 받는다. 거짓을 말하는 이들은 영전하고, 직분을 배반하는 이들은 출세한다. 그 우울한 광경을 우리는 눈앞에서 지켜보고 있다.
역겨운 것은 그 짓을 역사적 사명으로 아는 그들의 허위의식이다. “역사의 전진을 위해서 민주당이 승리해야 한다.”(이낙연 대표) 자당 지자체장의 성추행 사건 때문에 치르는 선거. 후보를 내지 않는 책임정치에서 당헌을 바꿔 후보를 내는 무책임 정치로 가는 것이 “역사의 전진”이란다.
우스갯소리가 있다. 아내가 뉴스를 듣고 고속도로를 타는 남편에게 전화를 한다. “조심해. 거기 차 한 대가 역주행하고 있대.” 남편이 대꾸한다. “한 대가 아니야. 차들이 다 역주행하고 있어.” 앞으로 달린다는 그의 신념이 다른 운전자들에겐 악몽이 된다. 대한민국은 그 고속도로를 닮았다.
노무현 정권이 왼쪽 깜빡이 켜고 우회전을 했다면, 문재인 정권은 역사의식의 방향을 잃고 아예 역주행을 한다. 저 도로의 무법자를 누가 멈출 것인가. 폭주에 제동을 거는 일은 결국 유권자의 몫으로 남는다.
03.10 "고무신 대신 공항...탄핵정부보다도 못한 문 정부"
“가덕도에 관문 공항이 들어서면 하늘길, 바닷길, 육지길이 만나 세계적 물류 허브가 될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부산으로 내려가 이렇게 말했다. 이 행사에 당·정·청의 고위 인사들이 총출동했다. 노골적인 선거 개입이다. 재집권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집요한 의지가 엿보인다.
국민 53.6% 반대 가덕신공항 특별법, 60년대 매표정치의 회귀
박근혜는 김해공항 확장 결정, 문 정부는 탄핵정부만도 못한 정권 돼
무책임한 여권, 한심한 야당…매표의 대금은 결국 국민 세금으로
공적 마인드라곤 전혀 없는 이들이 의원, 장관, 대통령 하는 나라
나라를 좀먹는 후견주의
이렇게 특정 집단에 재화를 제공하는 대가로 표를 얻는 행태를 ‘후견주의’(clientelism)라고 한다. 후견주의는 한정된 재화의 균등하고 효율적 배분을 저해한다. 당장은 제 지역에 떡고물이 떨어지니 좋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짓을 모든 지역에서 따라할 테니 그 피해는 결국 모두가 고루 입게 된다.
당에서 그 짓을 하면 대통령이 뜯어말려야 한다. 대통령직은 특정 정당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위한 자리다. 대통령이라면 국가의 미래를 위해 당리당략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에게 결여된 것이 바로 그 소양. 기어이 이 나라 정치문화를 60년대 매표 정치로 되돌려 놓고야 말았다.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53.6%가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이 ‘잘못된 일’이라 대답했다. ‘잘된 일’이라는 응답은 33.9%. 대상지인 부산·울산·경남을 포함해 모든 곳에서 부정 여론이 우세한 가운데 엉뚱하게 신공항과 무관한 호남지역에서는 긍정적 여론이 우세했다. 여기서 이 사업의 정략적 성격이 드러난다.
신공항은 호남-PK 연대의 물적 토대를 만드는 사업이다. 게다가 PK와 TK의 분열까지 유도할 수 있으니 신의 한 수인 셈. 국민의 혈세로 제 표를 사는 파렴치한 매표행위지만, 이를 견제해야 할 야당도 선거를 치르려면 그 흐름에 편승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무책임의 정치가 보편화한다.
휴지가 된 국토부 보고서

/진중권의 퍼스펙티브 그래픽=신용호
국토부는 안전성·시공성·운영성·환경성·접근성·항공수요·경제성 등 7개 항목 모두에서 가덕신공항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부산시는 장기 침하가 50년간 35㎝ 진행될 거라 주장하나, 가덕도보다 여러 조건이 더 나은 간사이 공항도 22년 동안 13m가 침하됐다. 유지비가 10조원을 넘었단다.
근처로 빌딩 높이의 배들이 다닌다. 해수부에서 반대한다. 진해비행장과 공역도 겹친다. 공군도 반대한다. 외해라 바람은 세고 활주로는 40미터나 솟아있다. 공항이 항공모함이니 언더슛으로 아시아나기 샌프란시스코 공항 사고보다 끔찍한 참사가 예상된다. 국내선은 김해에 놔둔다니 돗대산 위험은 그대로.
거기에 가덕도에는 지형보전 1등급 지역이 6곳, 녹지자연 절대보존 지역 3곳, 동백꽃 군락지와 1㎞ 안에 낙동강 하류 철새 도래지가 있다. 환경부에서 반대하는 이유다. 원전 2년 연장도 참지 못해 불법을 저질렀던 투철한 환경론자들이 생태계의 보고를 파괴한다. 이게 정권이 자랑하는 ‘그린 뉴딜’인가?
건설비도 말이 7조 5억원이라 하나 실제로는 15조 8천억이 든다. 공항만 지으면 수요가 생기나? 김해공항의 물동량은 인천공항의 10%, 액수로는 5%에 불과하다. 20년 후 물동량이 60만 톤이라는 장밋빛 전망에 따라도, 280만 톤인 인천의 현재 물동량의 4분의 1도 안 된다. 세계적 허브와는 거리가 멀다.
입법농단, 180석의 입법독재
황당한 것은 대통령의 발언. “국토부가 책임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국토부 보고서에는 특별법을 수용하면 공무원의 ‘성실의무 위반’이 된다는 의견이 첨부돼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 공무원들에게 위법을 종용한다. 월성 원전 사건 때도 그렇게 “책임 있는 자세”를 가졌다가 공무원들이 구속됐다.
입법도 졸속이었다. 오죽하면 여당 의원의 입에서 “동네 하천 정비도 그렇게 안 한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김해신공항은 법적으로는 아직 살아 있다. 폐기되어도 신공항 입지는 새로 선정되어야 하고, 입법은 그다음의 일이다.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한 것은 자기들이 봐도 사업성이 없다는 얘기다.
“가덕도 신공항을 되돌릴 수 없도록 법제화하겠다.”(이낙연 대표) 예비 결과 사업성이 없어도, 사업타당성조사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아도, 환경영향평가에서 반환경적 사업으로 평가돼도 저 법이 있는 한 사업을 되돌릴 수가 없다. 이 나라에서는 비가역성의 열역학 법칙을 입법에 적용한다.
법률이 ‘올 마이티’하다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듣는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이 법은 하천·환경·항만·군사시설 등 관련 법률 31개를 일거에 무력화한다. 한마디로 법률들의 법률, 즉 헌법 아닌 헌법인 셈이다. 그 법의 전능함은 물론 180석의 전능함에서 나온다. 거의 제헌권력 수준의 입법 독재다.
도대체 왜 가덕도인가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의 타당성 연구에서 김해신공항은 818점, 밀양은 665점, 가덕도는 635점을 받았다. 그런데 국무총리실에서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이를 뒤집었다. 국가 사업을 재집권의 수단으로 악용하니 635점 짜리가 818점 짜리의 대안이 되는 해괴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당·정·청에서는 온갖 장밋빛 환상을 부풀리나 김해에 대한 가덕도의 비교우위는 딱 하나, 야간운항이 가능하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런던의 히드로, 암스테르담의 스키폴,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의 대표적 공항들도 야간 운항을 제한·금지하고 있다. 그래도 허브 노릇 하는 데 아무 지장 없다.
활주로 한 줄이 김해에 있든 가덕도에 있든 차이라곤 야간운항이 가능한 것뿐인데 난리가 났다. “산업구조 재편의 기폭제”(김경수 경남지사)가 되고, “북극항로의 연중 이용이 현실화되고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연결되는 미래”(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가 열린단다. 북극항로와 횡단열차가 김해로는 연결이 안 되나?
가덕도 공항에 반대하는 것은 “지역 홀대”라고 선동을 한다. 사유실험을 해 보자. 부산시에서 주장하는 건설비 7조 5천억원을 주되, 공항의 건설·보수·유지 및 운영에 관한 일체의 권리와 책임을 부산시에 넘겨주는 것이다. 이 제안을 과연 그들이 받을까? 아마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붕괴되는 국가 시스템
그 사업이 세금 먹는 하마가 되리라는 것을 그들도 안다. 가덕도에 대한 집착은 외려 그 기대감(?)에서 나온다. 하지만 4대강에 뿌린 22조원은 지역민이 아니라 건설업자들의 배로 들어갔다. 표본수가 적어 신뢰하기 어렵지만 부·울·경에서도 54.0%가 특별법이 잘못된 일이라 답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 정권은 절차와 질서를 파괴해 국가의 엔트로피를 정말 비가역적으로 증가시키고 있다. 국토부·환경부·해수부 등 정부 부처의 공식 의견은 무시됐다. 관련 31개 법률이 일거에 무력화됐다. 5개 시·도지사들 사이의 합의도 번복됐다. 국가 운영의 시스템 자체가 망가지고 있는 것이다.
선례가 만들어졌으니 앞으로 선거철마다 비슷한 특별법들이 계속 만들어질 게다. 대구·경북 신공항 특별법도 만들어 달란다. 우리 충청도는 핫바지인가? 발끈한 서산시장이 “충남도 찍소리”는 해야겠다며 민간공항 지어달란다. “특별법은 바라지도 않는다. 예타 면제 대상 사업으로라도 선정해 달라.”
철딱서니 없는 정치인들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조국 전 장관은 이렇게 말했었다. “선거철 되니 또 토목 공약이 기승을 부린다. 신공항 10조면 고교 무상교육 10년이 가능하며, 4대강 투입 22조면 기초 수급자 3년을 먹여 살린다.” 그랬던 그가 가덕도 신공항에는 ‘노무현 국제공항’이라는 이름까지 지어 바친다.
공구리도 남이 치면 나쁜 토목, 내가 치면 착한 토목이란다. 자기들이 비난하던 MB(이명박 전 대통령) 정권과 뭐가 다른가. 정의당 대표 시절 심상정 의원은 김해공항 확장으로 결정한 것을 “박근혜 정권에서 한 일 중 가장 책임있는 결정”이라 평가한 바 있다. 이 정부는 어느새 탄핵 정부만도 못한 정권이 됐다.
당·정·청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고, 편승하는 야당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들이 매수한 표의 대금을 우리는 피 같은 세금으로 대신 치러야 한다. 공화국은 ‘공적 업무’(res publica)라는 뜻이다. 이 나라에선 공적 마인드라곤 전혀 없는 이들이 의원을 하고, 장관을 하고, 심지어 대통령을 한다. 고무신이 공항으로 바뀐 것을 ‘발전’이라 불러야 하나? 그래도 1960년대 정치인들은 고무신 뿌리는 데에 제 돈을 썼다. 요즘 정치인들은 그 일을 하는 데에 나랏돈을 쓴다. 빤한 부조리를 보고도 막을 길이 없다. 대통령부터 정치인들이 하나같이 저속하고 무책임하다. 제발 철 좀 들자.
03.17 “지지율 1위라도···尹 대통령 못한다는 그들의 착각“
정치를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여론조사에서 적합도 1위를 기록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 얘기다. 작년 이맘때 이 사태를 경고한 바 있다. 권력이 사법 시스템을 무력화하면 총장은 정치로 내몰리게 된다. 법치를 무너뜨린 게 정치라면, 그것을 세우는 일은 정치적 과제가 되기 때문이다.
윤석열을 유력한 대선 후보로 만든 공신은 전·현직 법무장관들
정권 반대자의 혐오 때문 아니라 법치 파괴에 대한 중도층의 저항
정치 여부는 스스로 판단할 몫…출마 권리가 곧 대통령 자격은 아냐
지금 이 나라의 가장 큰 과제는 정치의 윤리적 차원을 회복하는 일누가 그를 정치로 내몰았는가
조국 사태 이후 당·정·청은 계속 검찰총장을 흔들어댔다. 노골적으로 사퇴를 요구하며 징계까지 했다. 그렇게 정치로 내몰더니 그 가능성이 현실화하자 부랴부랴 ‘윤석열 금지법’을 발의했다. 이미 1997년에 헌재는 검찰총장의 공직 취임 제한을 위헌으로 판정한 바 있다. 급하니 위헌적 입법까지 한 셈이다.
그를 유력한 대선후보로 만든 공신은 전·현직 법무부 장관들. 조국 전 장관은 비리수사를 막으려 ‘검찰 쿠데타’의 프레임을 짰고, 추미애 전 장관은 그를 징계하려 했고, 박범계 장관은 ‘검수완박’으로 결국 그가 총장직을 지켜야 할 이유마저 없애 버렸다. ‘대선 후보’ 윤석열은 이렇게 탄생했다.
친여매체도 한 역할을 했다. 한겨레신문은 윤 전 총장이 성접대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친여 성향의 검사가 확인 안 된 사실을 언론에 흘린 것이란다. 애먼 기자들 음해하더니 검언유착은 정작 자기들이 하고 있었던 게다. 그러더니 이제 그에게 “정치하지 마시라”(성한용 선임기자)고 훈수까지 둔다.
그 칼럼에 따르면 윤 전 총장은 ‘정치 바람’이 들었다. 이유는 두 가지란다. 첫째, “여론조사에서 뜨면 멀쩡했던 사람도 눈이 돌아간다.” 둘째, 특수통 검사 출신이라 “프레임을 짜서 상대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선거를 치르는 정치인과 닮은 데가 있기” 때문이란다. 인식이 다소 천박하다.
그가 정치하면 안 되는가

/퍼스펙티브 3/17
“문재인 정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그를 대선주자로 띄웠단다. 하지만 정권이 그와 충돌할 때마다 지지율은 폭락하곤 했다. 그의 인기가 정권 반대자들의 정서적 혐오가 아니라, 정권의 법치주의 파괴에 대한 중도층의 저항에서 나왔다는 얘기다. 기자에게는 이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다.
정치인이 하는 일이 고작 프레임을 짜서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인가? 국회 국민통합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89%가 한국 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심하다고 대답했고, 그중 63.1%는 그 원인을 정치로 꼽았다. 이게 다 당·정·청이 손잡고 국민을 진영으로 갈라쳐 온 결과다.
기자는 윤 전 총장이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두 가지를 든다. “첫째, 할 수 없다. 정치 경험과 국정 경험이 없는 사람은 대통령을 할 수 없다. 윤석열 전 총장이 경제와 외교를 알까?” 경제?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이재명 후보로부터 제 공약도 모르냐는 핀잔을 들었다. 외교? 무슨 외교를 ‘죽창’ 들고 하나.
“둘째, 될 수 없다. 지금 여론조사 수치는 반문재인 성향 유권자들의 화풀이에 불과하다. 거품이라는 얘기다.” 모든 여론조사 수치는 어차피 거품. 현 대통령 지지율도 80%를 웃돌다가 지금 30%대로 추락하지 않았는가. 그 지지율을 굳히느냐 마느냐는 하기 나름. 기자가 돗자리 깔 일은 아니다.
비리 수사를 막는 나라
“부패가 만연한 부패 공화국에서는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부패 공화국이 아니다. 범죄율도 다른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낮다.” 그렇게 깨끗한 나라에서 청와대 인사들의 범죄율은 왜 그리 높은지. 그래서 검찰총장이 대선 후보로 불려 나온 것 아닌가.
윤 전 총장에겐 “평생 쌓은 특수 수사 경험을 살려 대한민국 수사기관의 반부패 역량을 높이는 데 기여”하란다. 증권범죄합동수사단 해체하고, 수사권 조정으로 LH(한국토지주택공사) 비리 앞에서 검찰의 발이 묶인 상황. ‘검수완박’ 외치며 검찰을 없애면 반부패 역량의 상실은 명약관화. 거기에 항의해 사퇴한 것 아닌가.
기자는 “천하의 윤석열 검사가 거악 척결이라는 풍운의 꿈을 안고 검사가 된 수많은 후배 검사들을 X팔리게 해서야 되겠는가”고 썼다. 윤석열 검사가 누구처럼 정권의 개 노릇 했던가? 정권 스피커 노릇하다가 청와대 들어간 기자, 윤석열 전 총장 비판하다 총장추천위원에 위촉된 기자가 있는 신문사. ‘X팔려서’ 어떻게 다니는지 모르겠다.
윤 전 총장이 정치를 할지, 하면 어느 쪽에서 할지 아직 모두 열려 있다. 벌써 견제에 들어가는 것을 보니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다. 그에게는 출마할 권리가 있고 명분도 있다. 다만, 그것만으로 대통령의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 판단은 출마 후에 어떤 정치를 할지 들어보고 내려도 늦지 않다.
권력의 유혹
기자는 “정치 경험과 국정 경험이 없는 사람은 대통령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정치 경험이 많은 대통령 둘은 지금 감옥에 있고, 국정 경험이 많은 또 다른 대통령은 퇴임 후 감옥 안 가는 걸 국정 목표 삼고 있다. 반면, 체코의 하벨 대통령은 경험이 없는 문인이었지만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다.
저널리스트라면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이 나라엔 성공한 대통령이 없는가?’ ‘왜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정권이 그들이 청산한다던 그 세력이 되었는가?’ 우리는 이유를 안다. 경험은 풍부하나 철학이 빈곤한 대통령이 그 직에 따른 윤리적 기능을 포기해 버렸기 때문이다.
코펜하겐 대학 소닝상 수락 연설에서 하벨은 ‘권력의 유혹과의 싸움에서 패하기 시작한 이들’의 특징을 지적한다. “자기는 오직 국가에 봉사하고 있을 뿐이라고 자기를 설득하는 가운데 스스로 자신이 탁월하다 믿게 되고 특권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이 정권 사람들의 특징이 아닌가.
하벨은 대통령의 특권 속에 살다 보니 “평생을 비판해 온 공산주의 살찐 괭이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턱에 서 있음을 깨닫는다”고 고백한다. 국정 경험이 없는 그를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것은 성찰의 능력이었다. “권력을 쥐었기에 나는 끝없이 나 자신을 의심한다.”
하벨과 대극을 이루는 것이 조국 전 장관이다. 그는 제 SNS에 ‘대선 진로 좋은 데이’ 소주병 사진을 올리며 이렇게 썼다. “고향은 언제나 ‘원초적 힘’을 불어넣어 준다.” 그의 대선 출정가에는 윤리적 성찰은 없고 오직 ‘원초적’ 본능만 있다.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정치다.
성찰 없는 원초적 힘
딸의 입시 비리로 아내가 구속된 마당에 버젓이 남의 딸 입시부정 의혹 기사를 링크하는 것도, ‘검찰 쿠데타’라는 프레임을 짜서 검찰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도 다 그 ‘원초적 힘’의 발로이리라. 그 힘으로 그와 그의 친구들은 정치의 윤리적 차원을 폐기하고, 윤리의 최소한을 규제하는 법을 파괴해 왔다. 조국 전 장관은 이 정권의 표상이다. “부동산 부패는 검찰책임이 크다.”(추미애 전 장관) “수사권 있었을 때 검찰은 뭐 했냐?”(박범계 장관) “추미애 장관이 수사를 지시했지만 검찰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이낙연 선대위원장) 여기에 성찰은 없다. 그저 책임을 검찰에 돌리는 프레임이 있을 뿐이다.
정치는 언제 부도덕해지는가
야당이라고 다르겠는가. 결국 정치권의 이 보편적 무성찰과 무책임이 윤 전 총장을 대선후보로 불러낸 것이다. 그는 헌법정신과 법치주의를 말한다. 하지만 법은 그저 윤리의 최소한일 뿐. 법치의 파괴는 이 정권 사람들이 법의 토대가 되는 윤리와 도덕 자체를 무너뜨린 것의 결과일 뿐이다.
정치는 부도덕한 것이 아니다. 하벨은 말한다. “정치란 도덕적 감성,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능력, 진정한 책임감, 취향과 기지,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 절제의 감각, 겸손을 더 많이 강조하려는 인간적 노력이 행해지는 장소다.” 우리가 이를 믿지 않을 때, 바로 그때 정치가 부도덕해지는 것이다.
정치를 할지 말지는 그가 판단할 몫. 다만 그가, 아니 대권을 넘보는 모든 정치인들이 하벨의 연설문을 읽었으면 한다. 경제니 외교니 다 장관의 일. 대통령의 일은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가장 큰 과제는 정치의 윤리적 차원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대중이 그에게 투사하는 희망의 정체다.
기자는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벨은 말한다. “희망은 뭔가가 잘 되리라는 확신이 아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게 옳다는 확실성이다.” 정직은 최선의 방책, 원칙은 최선의 전술이다.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그냥 옳은 길을 가는 것 자체가 희망을 실현하는 길이다.
03.24 징그러운 가해자 중심주의, 민주당의 성추행 잔혹사
“공천을 통해 시민들로부터 심판을 받는 것이 책임 있는 도리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작년 10월 당시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의원총회에서 한 말이다. 어느새 심판의 그 날이 다가왔다. 성추행을 하고도 스스로 책임지기를 거부하는 정당에 책임을 지우는 길은 그의 말대로 “시민들로부터 심판”밖에 없다.
“박원순은 그렇게 몹쓸 사람이었나?”“박원순이 롤 모델”
성추행 부정하는 책 출판까지…조직적 가해구조 여전
고통 호소하는 피해자에 대한 비난과 2차가해 당장 멈추고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가게 회복 돕는 게 우리의 의무
민주당 안의 가해구조
충남도지사, 부산시장, 서울시장. 민주당 지자체장들이 연이어 성추행을 저질렀다. 이쯤 되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당이라는 조직 자체에 뭔가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얘기다. 민주당의 그 징그러운 조직문화는 성추행 자체만이 아니라 그 사건들을 처리하는 방식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여성운동의 대모’라는 남인순 의원은 박원순 전 시장 측에 성추행 피소 사실을 알려주었다. 단톡방에서는 피해여성을 ‘피해자’가 아닌 ‘피해호소인’이라 부르자고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당시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박 전 시장의 성추행에 관해 묻는 기자에게 ‘후레자식’이라 욕설을 퍼부었다.
가족장으로 예정되었던 박 전 시장의 장례는 갑자기 ‘서울시장(葬)’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피해자는 이를 보며 “절망을 느꼈다”고 했다. 성추행 2차 가해를 했던 오성규 전 비서실장은 경기도 테크노파크 원장으로 영전했다.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가 중소기업벤처부장관 시절에 승인하고,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임명했다.
민주당은 당헌까지 고쳐 후보를 공천했고, 공천을 받은 박영선 후보는 ‘피해호소인’ 3인방을 공동선대본부장과 캠프 대변인에 임명했다. 쏟아지는 비난으로 이들이 사퇴하자 “20만 표가 날아갔다는 말이 있다”며 아쉬워했다. 진성준 의원은 ‘피해호소인’이란 표현은 “불가피했다”며 이들을 두둔했다.
보궐선거로 박원순 복권 시도

/퍼스펙티브 3/24
박 후보만이 아니다. 그와 경선을 벌였던 우상호 후보 또한 제 SNS에 박원순이 “롤 모델”이라며 “박원순이 우상호이고, 우상호가 박원순”이라 써 올렸다. 열성 지지자들의 표 때문에 박원순의 성추행 사건으로 인해 치러지는 보궐선거를 그의 정치적 명예회복의 장으로 바꾸어 놓으려 한 것이다.
지지자들의 상태는 더 심각하다. ‘조국백서’의 저자 김민웅 교수와 민경국 전 서울시 인사기획비서관은 피해자가 박 전시장의 생일을 맞아 보낸 친필 편지를 공개했다. 변태가 아니라면 직원이 생일 때마다 시장에게 편지를 보내야 하는 사정에서 시장실을 지배하는 구조화한 억압의 실체를 짐작할 게다.
보궐선거가 박원순의 정치적 복권의 장으로 흐르는 것을 보다 못해 피해자가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자 TBS 공중파를 통해 김어준이 그것을 “정치 행위”라고 비난한다.
“그걸 비판한다고 2차 가해라고 하면 안 된다.” 이런 헛소리가 서울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중파로 흘러나간다.
친여 매체 오마이뉴스의 손병관 기자는 아예 박원순의 성추행 사실을 부정하는 책(『비극의 탄생』)까지 냈다. 그 책에 친노무현 인사 조기숙 교수가 추천사를 썼고, 나꼼수 김용민이 방송을 통해 자락을 깔아 주었다. 그 기자 역시 피해자의 기자회견이 5~6개월 전에 계획된 것이라는 음모론을 편다.
그들이 진짜 하고 싶은 말
박 전 시장의 성추행은 공식적 사실이다. 그는 목숨을 끊음으로써 그 사실을 자인했다. 제게 닥칠 그 모든 불이익을 각오하고 피해자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그의 죽음으로 수사가 중단됐지만, 검찰·법원에 이어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51명의 증언을 토대로 그의 성추행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은 피해자의 증언을 흠집내는 데 골몰할 뿐 자신들의 ‘시나리오’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왜? 그들의 주장이 말이 되려면, 20대의 젊은 여성이 ‘난닝구’ 입은 사진이나 보내는 60대의 노인에게 연정을 품었다는 대단히 비현실적인 가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결국 피해자가 박 전 시장에게 먼저 추근대다 허위 폭로를 했다는 것이리라. 그렇게 대놓고 말을 못 하니 피해자가 보낸 편지를 공개하는 식으로 변죽만 울려대는 것이다. 그걸로도 모자랐나 보다. 그의 폭로에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대안 서사까지 만들어 퍼뜨리고 있다.
박 전 시장은 왜 자살했는가? 그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선정성을 악용하는 언론과 정치권이 가하는 인신공격이 무서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반복돼선 안 된다.” (열린민주당 김진애 의원) 결국 피해자의 폭로와 언론과 정치권의 선정성이 무고한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얘기.
조직적 공격당하는 피해자들
그들은 이렇게 피해자를 가해자로, 가해자를 피해자로 바꿔 놓았다. 지난 1월 ‘적폐청산 국민연대’에서는 피해여성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로 고발하겠다고 나섰다. 피해자가 기자회견을 하자 그들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이라며 그를 선거법 위반혐의로 선관위에 고발했다.
안희정 사건 때에도 민주당 지지자들은 피해자를 조직적으로 공격한 바 있다. 안으로는 똘똘 뭉쳐 피해자를 이상한 여자로 만들어 버리고, 밖으로는 지지자들을 동원해 피해자에게 무차별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피해자를 위해 증언한 몇 안 되는 이들은 ‘배신자’로 찍혀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윤미향 사태 때는 어땠는가. 민주당 지지자들은 이용수 할머니를 향해 “위안부가 뭔 벼슬이냐”, “진짜 위안부가 맞느냐”는 등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은 바 있다. 애먼 이들에게 ‘토착왜구’ 딱지를 붙이더니, 정작 위안부를 부인하는 토착왜구는 자기들이었던 셈이다. 징그러운 족속이다.
실제로 피해자성을 부인하는 이들의 논리는 위안부를 부정하는 한·일 극우파의 주장과 동일하다. ‘증언만 있을 뿐 물증이 없다’ ‘피해자의 증언이 오락가락한다’ ‘반대되는 증언도 있다.’ 세세한 것을 트집 잡아 실체적 진실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반일 종족주의’와 ‘비극의 탄생’은 남근주의 쌍생아다.
그들의 가해자 중심주의
이는 여성에 대한 남성 권력의 폭력이 진영과 국경을 넘어 ‘가해구조’로서 엄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구조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들이 외려 죄인처럼 숨어 지내야 했다. 그 징그러운 구조에 균열을 내려고 ‘피해자 중심주의’의 원칙을 관철시킨 것이 하필 박 전 시장. 비극적인 역설이다.
박 전 시장이 그 ‘피해자 중심주의’에 발목을 잡혔단다. 아니다. 그의 죽음은 결코 피해자 중심적이지 않았다. 그는 유서에서 제 잘못을 인정하지도, 피해자에게 사과하지도 않았다. 외려 죽음으로써 진상의 규명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를 조장했다. 누구 말대로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피해자가 불이익을 무릅쓰고 거짓말할 이유는 없다. 반면 가해를 돕거나 방조한 이들에겐 거짓말할 이유가 있다. 증언의 무게가 같을 리 없다. 안희정 사건에서 봤듯이 그들은 피해자의 편을 든 이들에겐 ‘조직의 쓴맛’을 보여준다. 그런 이들의 증언만 골라 모아 아예 ‘가해자 서사’를 구성한 것이다.
가해자 중심주의는 성추행을 그레이 로맨스로 둔갑시킨다. “공직자의 로맨스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배우자일 뿐이다.”(조기숙 교수) 피해자는 2차 가해로 고통을 받는데, 그에게 “장미빛 미래”(손병관 기자)가 펼쳐지고 있단다. 여기엔 가해자의 이해가 있을 뿐, 피해자의 배려는 없다.
박원순이 돌아온다
“용산 공원의 숲속 어느 의자엔가 (…) 박원순의 이름 석 자를 새겨넣었으면 좋겠다.” 임종석 전 비서실장의 말이다. 그는 묻는다. “박원순은 그렇게 몹쓸 사람이었나?” 피해자에게 박원순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박원순은 떠났어도 이렇게 가해의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사람들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저를 상처 주었던 정당에서 시장이 선출되었을 때 저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든다.” 이 두려움은 현실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피해자의 두려움에서 선거법 위반만을 본다. “지금의 인터뷰는 사전선거운동에 해당한다.” 정경심 변호인단으로 활동한 김필성 변호사의 말이다.
손병관 기자는 피해자의 호소를 “정치적 반사이익을 받을 곳이 보은할 것으로 계산”해서 하는 행위로 본다. 그게 그가 말한 피해자의 “장미빛 미래”인가 보다. 하지만 성추행 피해자에게 “장미빛 미래”란 없다. 그저 돌아가고 싶은 과거의 일상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그 회복을 도울 의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당장 멈추라, 그 징그러운 가해를.
03.31 김어준 없는 아침이 두려운 사람들
“김어준, 그가 없는 아침이 두려우십니까? 이 공포를 이기는 힘은 우리의 투표입니다. 오직 박영선! 박영선입니다.” 민주당 송영길 의원이 SNS에 올린 글이다. 왜 그들은 김어준(‘뉴스공장’ 진행자) 없는 아침을 ‘공포’라 부르는 걸까? 어쩌다가 서울시장이 고작 김어준의 밥그릇이나 지켜주는 자리로 전락했을까?
‘김어준의 뉴스공장’, 유익·신뢰·중립·시의·흥미성 모두 최하위
정부와 서울시·교육청이 김어준 프로 지원, 공공재 TBS를 사유화
이해찬 “김어준이 민주당 위해 큰일 한다”…여당 헤게모니 구축에 활용
핵심 지지 40대 무너지면 레임덕, 정권 재창출 어려워 공포 느끼는 것
민주당의 프로파간다 머신
지난 2011년 김어준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안철수·박원순 후보에게 “시장 되면 저에게 교통방송을 달라”고 농을 했단다. 이 농담은 5년 뒤인 2016년 정말 현실이 된다. 그렇게 시작된 ‘김어준의 뉴스공장’은 제4기 방송통신심의위에서 가장 많은 제재를 받은 프로그램이 되었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의 조사에서 ‘뉴스공장’은 경쟁 프로그램 중 유익성·신뢰성·중립성·시의성·흥미성의 5개 항목 모두에서 최하위. 특히 공영방송의 생명인 ‘중립성’은 54점으로 경쟁 프로그램인 ‘김현정의 뉴스쇼’(87점)나 ‘김종배의 시선집중’(84점)에 30점 이상 뒤처진 것으로 나타났다.
TBS의 총예산 505억 원 중 77%는 서울시가 부담한다. 서울시에선 2019년 라디오 홍보예산의 43%를 ‘뉴스공장’에 배정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작년 라디오 광고의 47%를 TBS에 주었다. 경기도교육청은 최근 3년간 라디오 홍보비의 54%, 서울시교육청은 42%를 ‘뉴스공장’에 집행했다.
4기 방심위 출범 이후 ‘뉴스공장’이 받은 6차례의 제재는 사유가 모두 ‘객관성 위반’. 그동안 노골적으로 당파성·편파성을 추구해 왔다는 얘기다. 이렇게 정부와 지자체와 교육청이 손을 맞잡고 민주당의 ‘프로파간다(선전 선동) 머신’을 지원해 왔다. 전파든 세금이든 공공재를 이렇게 사유화해도 되는가?
선동으로 마비된 정당 기능

/진중권의 퍼스펙티브 그래픽=신용호
이해찬 민주당 전 대표는 그의 당파성을 공공연히 찬양한다. “김어준이 민주당을 위해 큰일을 한다.” 과거에 언론인의 표상은 손석희 JTBC 사장이었으나, 지금 그들의 영웅은 김어준. 그 동네의 지적·도덕적 수준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지금 민주당의 위기는 이 커뮤니케이션의 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즘 나는 눈이 나빠서 책을 못 봐. 대신 유튜브를 봐. 김어준이 하는 유튜브는 다 봤어.”(이해찬 전 대표) 집권여당의 대표가 책은 안 읽고 음모론 유튜브나 보고 앉아 있다. 대표가 이 지경이니, 의원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다들 ‘뉴스공장’에 출연해 김어준의 ‘세례’를 받으려고 안달이 났단다.
정상적인 정당이라면 대중의 흥분을 차가운 이성으로 거르고, 그들의 거친 언사를 정제된 언어로 정식화해야 한다. 하지만 민주당의 586 실세는 김어준의 선동방송을 통해 대중을 늘 정치적 흥분 상태로 몰아넣고는 그들의 분노를 당의 안팎에서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데 활용해 왔다.
민주당의 위기는 구조적인 것이다. 이해찬 전 대표 이래 민주당은 권리당원 제도로 김어준에게 세뇌당한 극성분자들 중심으로 정비되었다. 이들이 당내의 이견자를 배척하고 당밖의 비판자를 핍박하니 피드백 시스템이 마비될 수밖에. 그 결과 진보와 중도의 합리적 계층이 떠나버린 것이다.
정보를 움직이는 음모론
김어준은 음모론의 대명사로 통한다. 천안함 좌초설, 개표 조작설, 세월호 고의침몰설 등 그동안 그는 크고 작은 수많은 음모론으로 대중을 현혹해 왔고, 정부와 청와대에서는 그것을 통치에 적절히 활용해 왔다. 그 결과 당·정·청과 지지자 모두 음모론적 사유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얼빠진 음모론 교주의 특이한 사고방식이 아예 국정마저 집어삼켰다. 검찰개혁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것은 ‘검찰 쿠데타’ 음모론. 채널A 사건과 한명숙 사건에서 수사지휘권 발동의 근거가 된 것 역시 음모론이었다. 이는 검찰총장이 임기를 못 마치고 사퇴하는 불행한 사태로 이어졌다.
김어준은 특유의 음모론 모드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피해자를 공격했다. 기자회견의 배후에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투다. 박영선 후보가 2차 가해자들을 캠프의 전면에 내세운 것도 다 이런 분위기에서 가능한 일이다. 음모론은 이렇게 시민의 로고스(이성)을 마비시키고 사회의 에토스(윤리)를 파괴한다.
보다 못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입을 뗐다. 그는 “권력형 성범죄 때문에 선거를 다시 치르게 됐는데도 선거 과정에서 2차 가해까지 계속되고 있다”며 무너진 로고스(상식)와 에토스(정의)의 회복을 촉구하고 나섰다. “시민들의 투표가 상식과 정의를 되찾는 반격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무학의 통찰
김어준에 대한 신뢰는 그에게 어떤 신비한 인식능력이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그 자신은 그걸 “무학의 통찰”이라 부른다. 무학에서 통찰이 나올 리는 없고, 그 통찰이란 게 실은 점쟁이의 영험함 같은 것이다. 음모론을 남발하다가 그중 몇 개만 맞추면 대중은 오직 그것만 기억하는 법.
계속 틀리던 예언이 어쩌다 적중하면 그 신비한 인식능력에 대한 대중의 신심은 깊어진다. 그는 자신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논리적이 아니라 종교적 성격의 것임을 안다. 그래서 제 말이 거짓으로 드러나도 사과를 하지 않는 것이다. 사과는 교주의 무오류에 대한 신앙을 깨기 때문이다.
지성과 지식인을 불신하는 반(反)지성주의는 선동가들의 공통된 특성이다. 그들은 이성에 대한 열정의 우위, 논리에 대한 직관의 우위, 사유에 대한 행동의 우위를 믿는다. 지식인은현실에 논평이나 하며 대중에게 잘난 척이나 하지만, 자신들은 대중과 더불어 현실을 창조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반지성주의는 대중을 지성계로부터 차단한다. 대중은 우중(愚衆)이 된다. 이를 제지해야 할 지식인들마저 거기에 굴복해 버렸다. 이 나라의 대표적 ‘어용지식인’은 김어준을 “천재”라 추켜세웠다. 그러니 합리적 담론 대신에 선전선동이 공론장을 점령할 수밖에. 하지만 그게 오래 가겠는가?
선전으로 형성된 강철대오
지금 40~50대는 여론의 ‘섬’이 되었다. 이들은 대학시절에 접한 운동권식 사고와 어법에 친숙하다. 반면, 운동권 문화를 모르는 20~30대는 다른 정치성향을 보인다. 박영선 후보는 그런 그들의 부족한 역사의식을 탓한다. “20대는 과거의 역사에 대해 40대와 50대보다 경험치가 낮지 않나.”
상징적으로 말하면 지금 민주당을 지탱하는 것은 ‘전대협·한총련 세대의 연합’이다. 그중 40대는 거의 10년 동안 김어준에게 뇌를 폭격당해왔다. 이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면 정권은 레임덕에 빠지고, 정권 재창출도 어려워진다. 그래서 김어준 없는 아침이 그들에게는 ‘공포’로 느껴지는 것이다.
세뇌는 무서운 것이다. 나치 시절 독일인들은 각 가정에 설치된 라디오를 통해 하루 종일 선전방송을 들으며 살았다. 그 효과가 얼마나 집요했던지, 훗날 연합군 전략기획국에서 “독일의 저항의지를 꺾은 것은 그들의 군사력이 아니라 그들의 선전기구를 무력화했을 때”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급했나 보다. 상왕이 돌아왔다. 이해찬 전 대표가 제일 먼저 찾은 것도 김어준. 그의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거가 어려울 줄 알았는데 거의 이긴 것 같다.” 패망의 순간까지 세뇌된 독일인들은 전세를 역전 시킬 기적의 무기(Wunderwaffe)를 믿었다. 민주당의 분더바페는 ‘샤이 진보’다.
김어준을 어찌할 것인가
순수 공익의 관점에서 그의 방송은 퇴출당해야 마땅하다. 자정은 불가능하고, 방통심의위의 구성상 왜곡·편파 보도의 견제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옳다고 해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강제 퇴출은 보기에도 좋지 않고,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
순수 정략의 관점에선 그를 내버려 두는 게 좋다. 당·정·청과 지지층을 초토화시켜 민주당을 위기로 몰아넣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게 그다. 대선을 앞두고 그가 말아 먹을 게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는 민주당의 엑스맨, 아니 엑스 슈퍼맨이다. 더 좋은 것은 민주당에선 이를 모른다는 것이다.
민주당에서 사과를 한다. “정책도 정책이지만 더 심각한 것은 우리 정부, 여당의 잘못된 자세였다.” 네거티브를 해도 지지율이 안 오르나 보다. 민주당은 반성과 자성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니 민주당의 말을 믿지 말고 조국 전 법무장관의 말을 들으라.
“파리가 앞발을 싹싹 비빌 때 이놈이 사과한다고 착각하지 말아라. 파리가 앞발 비빌 때는 뭔가 빨아먹을 준비를 할 때고 이놈을 때려잡아야 할 때다.”
04.21 "주도적으로 패한 민주당이란다, 그들의 반성은 가짜다"
교도소장이 죄수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말한다. “너희에게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를 가져왔다. 어느 것부터 들을래?” 당연히 좋은 소식부터. “오늘 너희들의 속옷을 갈아입게 해 주겠다.” 죄수들은 환호한다. “이어서 나쁜 소식. 너희들끼리.” 민주당을 보면 이 농담이 생각난다.
“조국 사태 사과 용의” 꺼냈다 문자폭탄, 초선들 반란 진압당해
잘못 인정하면 민주당이란 신앙 공동체가 위기에 빠진다 착각
민주당 지배한 인지부조화, 더 가열찬 공정·상식 파괴의 길 주문
친문일색, 혁신의 대상이 주체로 나서는 해괴한 일 벌어지고 있어
소신파의 반란과 진압
비상대책위원장이 친문 핵심 도종환 의원이란다. 비대위원 7명 중 4명이 ‘친문 하나회’라 불리는 민주주의 4.0 소속. 그 짧은 비대위 기간 이후에 벌어진 당대표·원내대표의 후보들 역시 송영길·홍영표·윤호중 의원 등 강성 친문. 이미 당이 친문 일색이라 친문·비문 따지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결국 자기들끼리 팬티 갈아입고는 ‘국민 여러분, 우리 쇄신했어요. 속옷 갈아입었어요. 믿어주세요’라고 외치는 격이다. 그 당에도 제정신 가진 사람은 있다. 보다 못한 노웅래 의원이 한마디 했다. “국민에겐 ‘이 사람들이 아직도 국민을 졸로, 바보로 보는 거 아닌가’ 이렇게 보일 수 있다.”
조응천·김해영 의원 등 이른바 소신파들도 쓴소리를 했다. 그러자 김어준이 바로 진압에 나선다. “그들은 소신파가 아니라 공감대가 없어서 혼자가 된 것”이라며 “선거에 가장 도움이 안 됐던 분들이 가장 도움이 안 될 말을 가장 먼저 나서서 한다”고 힐난했다. 그 당의 노선은 김어준이 정한다.
초선의원 다섯이 조국 사태에 대해 “사과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자 김정란·고은광순 등 친문 스피커들이 이들의 전화번호를 공개한다. ‘대깨문’들은 찍어준 좌표에 따라 ‘초선족’ 의원들에게 문자폭탄을 투하했다. 초선들은 부랴부랴 “조국이 잘못했다고 한 것은 아니다”고 해명하고 나섰다.
민심과 당심의 괴리

▲지난 9일 더불어민주당 초선 의원 5명이 4·7 재·보선 참패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강성 문파를 중심으로 ‘조국 책임론’에 대한 반발이 일면서 민주당은 당심과 민심의 괴리라는 딜레마에 빠졌다. 왼쪽부터 장철민·장경태·오영환 의원 한명 건너 이소영·전용기 의원. [연합뉴스]
반란은 신속히 진압당했다. 선거를 통해 민심과 당심 사이의 현격한 괴리가 확인되었지만, 당의 안팎으로 이를 바로 잡을 기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리 혁신한다고 떠들어도 결국 누런 팬티에 하얀 분칠을 하고 나타나 빨아 입었다고 우기는 격. 그 고약한 냄새는 어떻게 하고?
이럴 때 요구되는 것이 ‘차기’의 역할이나, 그마저도 기대할 수가 없다. 이낙연 전 대표는 이번 선거로 아웃당했고,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당내 기반도 약하고 반문으로 낙인이 찍힌 바 있어 후보가 되려면 친문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이런 민감한 때에 잘못된 발언 하나로 정치 생명이 끝날 수 있다.
당심과 민심의 괴리란 곧 신앙과 현실의 괴리를 의미한다. 조국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조국이 잘못했다고 하는 순간 서초동 촛불집회부터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믿음이 파괴되고, 그로써 민주당이라는 신앙 공동체 자체가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조국만은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자 페스팅어가 지적한 인지부조화의 상태다. 대홍수로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 믿는 사이비종교가 있었다. 하지만 종말의 그 날 대홍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다고 그들의 신앙이 붕괴하는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심이 인류를 구했다고 말했다. 민주당과 지지자들이 지금 그 상태에 있다.
민주당의 인지부조화
믿음과 현실 사이의 이 부조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정청래·김용민 의원에 따르면 참패의 원인은 조국이 아니다. “그럼 작년 총선은 어떻게 이겼는가?” 이런 궤변으로 자기들이 옳다는 믿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조국 때문에 지지율 까먹다가 코로나 덕에 운 좋게 이긴 것 아닌가?
재·보선에서 참패한 것은 검찰개혁이 미진했기 때문이란다. 손혜원 전 의원이 SNS에 소감을 올렸다. “민주당이 살길은 오로지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뿐.” 이른바 ‘검찰개혁’을 한답시고 공정과 상식을 파괴한 것이 참패의 원인이거늘 외려 그 짓을 더 가열차게 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 탓도 빠지지 않는다. 이낙연 전 대표는 “이번 선거에서 언론들의 보도 태도가 한번은 검증 대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열린민주당의 최강욱 의원은 굳게 다짐한다. “그래서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은 분리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다음 세대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끝장을 보겠다.”
아예 현실을 부정하는 이도 있다. “선거의 주도권은 주도적으로 패배한 민주당에 있는 것이지 국힘당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대화 상지대 총장의 말이다. 한마디로 졌지만 이겼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하면 다음 대선에서도 다시 ‘선거의 주도권’을 쥐고 ‘주도적으로 패배’할 게 빤하다.
국민이 묻는 것
이는 민주당이 처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반성을 하려면 이 모든 사태의 근원인 조국과 선을 그어야 한다. 하지만 그를 버리는 순간 지지층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다. 오랜 선동과 세뇌로 그들의 믿음은 정치적 신념을 넘어 종교적 신앙의 차원으로 승화한 터. 논리적 설득이 불가능한 상태다.
일본 천황은 패전 후 ‘인간선언’을 통해 스스로 인간이 되었다. 그 덕에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 사회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처럼 민주당 또한 거듭나려면 조국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나를 버리라’며 지지자들을 설득해야 하나, 그에게 그런 염치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
법정에 나온 정경심 교수 변호인단은 검찰이 USB를 삽입해 증거를 오염시켰을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법원이 바보인가. 이는 재판을 위한 사법적 행위라기보다는 법정 밖의 신앙공동체를 겨냥한 정치적 행위에 가깝다. 즉 1심 판결에 흔들리지 말고 계속 신앙공동체의 결속을 유지해 달라는 얘기다.
당권 주자인 홍영표 의원은 "국민 눈높이에서 공감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가 안이했다”고 반성했다. 그에게 묻는다. 그래, 조국이 입시비리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하는가? 그의 대답은 이것이다. "조국 전 장관의 입시비리 문제의 사실관계는 재판을 통해 확정될 것이다.” 반성은 가짜다.
멈출 수 없는 폭주 기관차
"저부터 반성하고 변하겠다.” 법사위원장으로 입법 독주를 주도해 온 윤호중 의원의 말이다. 반성하겠다더니 외려 원내대표로 영전하시겠단다. 어이가 없다. 애초에 중앙위원회에서 뽑기로 했던 최고위원도 전당대회에서 선출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친문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민주당 전당대회 투표반영 비율은 일반 권리당원의 비율(40%)이 국민일반(10%)이나 일반당원(5%)의 그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문제는 이 권리당원들이 대부분 ‘대깨문’이라는 것. 그러니 투표를 해봐야 민심과 당심의 괴리가 극복될 리 없다. 이 비율을 바꾸는 일은 다음으로 미뤄졌다.
민주당의 권리 당원제는 사실 친문 주류가 강성 지지층을 활용해 당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 참여민주주의를 위해 도입한 제도가 당내에서 이견자를 제거하고 당밖으로는 ‘양념’질이나 하고 다니며 당과 대통령에 무조건 충성하는 홍위병 양성소가 된 것이다.
개혁을 더 세게 안 해서 참패했다며 외려 유권자를 탓하는 게 그들이다. "그렇다고 친일 보수 정당 손을 들다니.” "개혁을 하지 않아서 반개혁 정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는 게 말이 되냐.”(민주당의 한 초선의원) 대깨문 커뮤니티에는 "20대에게 투표권을 주지 말자”는 글까지 올라왔다.
집단은 생각하지 않는다
집단지성은 집단 내의 이질성을 전제한다. 집단이 등질적일수록 정답에서 멀어지기 마련. 민주당이 딱 그 꼴이다. 권리당원들이 이견자를 공천에서 탈락시키니 이견을 낼 수가 없다. 그 결과 당이 안으로는 더 순수해지고, 밖으로는 더 배타적으로 변해간다. 민심과 당심의 괴리는 필연적이다.
당대표·원내대표·최고위원도 모두 강성 친문의 몫이 될 게다. 친문이니 비문이니 하지만 "당에는 이미 계파가 사라졌다.”(우원식 의원) 정도의 차이일 뿐 어차피 친문 일색이라 딱히 책임 물을 곳도 마땅치 않다. 그러니 인적 청산은 없고, 혁신의 대상이 주체로 나서는 해괴한 일이 벌어질 수밖에.
오지 않은 종말이 신도들의 신앙을 꺾지 못하듯이 참패한 선거가 민주당의 신앙을 꺾지는 못한다. 정청래 의원의 말이다. "개혁은 자전거 페달과 같아서 멈추면, 계속 밟지 않으면 넘어지고 쓰러져서 전진할 수가 없다. ‘180석이나 줬는데 지금 뭐 하고 있나’ 여기에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한다.”
멍청할 정도로 솔직하다. 반성하는 척을 한들 이 DNA가 어디 가겠는가? 현재 민주당은 구제불능이다.
04.28 "이준석, 마지막 조언이다···남초 사이트서 주워듣지 말라"
인구 절반이 대의되지 못하는 현실, 여성할당제는 효율·생산성 높여
‘성 격차 없애면 GDP 14% 증가’…할당제는 제로섬 아니라 윈윈 게임
2030 좌절시킨 사회에 대한 분노를 여성에게 대리분출 부추기지 말고
성실하게 일만 하고도 먹고살 수 있는 정책 내놓는게 공당의 역할
10여 년 전에 똑똑한 보수의 두 청년에게 ‘공부를 하라’고 권고한 적이 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이준석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 여전히 나는 그를 아낀다. 근데 그가 이상한 길로 가고 있다. 지적을 해도 듣지 않는다. 애정이 담긴 조언이라도 듣지 않으려는 이에게 억지로 하는 것은 민폐. 이게 마지막이다.
이준석의 포퓰리즘
먼저 여성에 대한 그의 뿌리 깊은 편견을 지적하고 싶다. 중앙일보 지면에서 그는 해괴한 소리를 했다. 여성할당제의 수혜자인 세 여성 장관이 무능해 이 나라의 민생이 무너졌단다. 그게 다 최고 실력자를 기용하지 않고 수치적 성평등에 집착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걸 말이라고 하는가.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의 후임인 변창흠 장관은 어디 남자라서 유능하고,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의 전임 조국 전 장관은 유능해서 나라를 두 토막 냈는가. 게다가 민생의 책임을 왜 여성 교육부총리에게 묻는가? 이 나라 민생을 책임진 것은 총리와 대통령. 모두 남성이다. 역대 정권의 무능한 장관들 역시 대부분 남성들이었다.
‘시대착오’라는 여성할당제는 OECD 모든 국가에서 시행하는 제도. 그 덕에 내각과 의회에서 여성비율이 OECD 평균 30%에 이르게 됐다. 한국은 10~20% 안팎. 다른 나라들은 2030년까지 완전한 성비를 이룬다는 목표 삼아 나아가는데, 저 혼자 시대착오에 빠져 과거로 가고 있다.
성평등은 생산성을 증대한다

/퍼스펙티브
선진국에선 왜 할당제를 할까? 첫째, 인구의 절반이 공적 결정에서 제대로 대의되지 못하는 것이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여성이 섞이면 집단의 지능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준석씨는 ‘수치적 성평등’을 비효율로 보나, 성평등은 외려 조직의 효율과 생산성을 증가시킨다.
골드먼삭스의 2019년 보고서는 성 격차를 해소할 경우, 한국의 GDP가 14.4%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일본에서도 여성관리자 비율이 높은 회사의 매출이나 수익성이 평균 대비 높다. OECD의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 이는 여성의 능력이 떨어진다는 남성들의 편견을 무색하게 한다.
OECD에서 할당제는 국가경쟁력 제고 방안으로 여겨진다. 작년에 보수당이 주도하는 독일의 연립정부는 “상장기업이 여성 이사를 자발적으로 선출하도록 유도하려던 정책은 실패했다”며, 기업의 반발에도 3인 이상 이사를 두는 기업엔 반드시 1인 이상 여성을 두도록 의무화했다.
이씨에게는 이 상식이 없다. 결핍된 교양을 남초 사이트에서 주워들은 소리로 때우고 있는데, 그런 얘기는 애초에 공론의 장에 들여올 게 못 된다. 남초 사이트에서는 환호를 받을지 모르나, 공론장에서는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뿐. 그래서 만날 때마다 공부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는 할당제를 ‘제로섬 게임’으로 보나, 원래 그것은 ‘윈윈 게임’이다. 성 격차를 없애 GDP가 14% 증가하면 그것은 남녀 모두의 일자리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나마 잘 지켜지지도 않는 이 제도마저 없애면 GDP 증대 효과는 기대할 수 없게 될 터. 이걸 공당의 정책이라고 내놓는가?
무엇을 주려고 하는가
그가 이대남(20대 남성)에게 주는 메시지는 알량하기 짝이 없다. 한국이 2030을 장관이나 기업임원 시켜주는 쿨한 나라던가? 어차피 여성할당은 2030과는 별 관계없고, 남은 것은 이공계 장학금, 기관이나 지자체의 지원사업에서 가산점 등 몇몇 산발적인 예들뿐. 그거 없앤다고 이대남의 처지가 달라지나?
그가 문제 삼은 이공계 장학금 여학생 할당 규정. 그 제도는 여성들의 이공계 진학률을 30%로 끌어올리는 계획의 일환으로 2014년 박근혜 정권에서 도입한 것이다. 그게 문제라면 ‘박근혜 키즈’인 본인이 해명할 일이다. 도대체 박근혜 정권보다 더 후퇴해서 어쩌자는 얘기인가?
이공계에 여학생 비율을 늘려야 하는 것은 여성들의 이공계 기피가 임금격차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수학은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math is not for girls)라는 편견을 둘러싼 논쟁. 그 결론은 여성들의 이공계 기피를 초래하는 교육환경이나 사회적 조건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산점이나 할당제는 특정 성의 참여를 장려하는 데에 필요한 정책이다. 여초가 심한 곳에서는 남성의 참여를 장려하는 가산점이나 할당제가 적용된다. 현재 대다수 교대에서는 여학생 비율이 60~80% 넘지 못하게 제한한다. 아예 입학시 특정 성을 우대하는 예가 이거 말고 또 있던가?
이미 성평등을 이루었다?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만 읽었어도 할당제 없애자는 소리는 할 수 없을 게다. 국민 대다수가 읽은 이 책을 이씨는 아직 안 읽었단다. 그러더니 내게 그 대신 ‘투 웨이밍’이라는 학자의 이름을 판다. 검색해 보니 신유교주의의 주창자란다. 그런데 그 분의 사고가 많이 이상하다.
어느 책을 보니 이 분이 “대학의 거의 모든 학과에서 여성이 남성을 추월했다”며 대만의 교육이 곧 “여성 지식인들에게 장악”될 거라고 말했단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얘기. 저자는 그를 이렇게 평한다. “그는 ‘이젠 남자가 여자에게 역차별 당한다’고 말하는 중국 대륙의 남자처럼 군다.”
이씨 역시 2030에선 외려 남성이 역차별을 당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캔사스대 김창환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의 20대 여성은 학과·학점·스펙이 똑같은 남성 대비 82.6%밖에 못 벌고 있다. 이대녀(20대 여성)는 성 격차가 본격화하는 경력단절 이전부터 이미 차별을 받고 있다는 얘기다.
2030에서는 남성의 역차별을 말할 정도로 성 평등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순수 판타지다. 현재 공기업이든 사기업이든 여성이라 해서 가산점 주는 예가 있던가. 반대로 기업에서 출산·육아로 기업에 부담을 준다고 시험점수를 조작해 여성들을 떨어뜨렸다 적발된 예는 몇 차례 있었다.
왜 사소한 것에 분노하는가
그들은 분노케 한 가산점들을 모아 봤다. 서울 ‘2017년 창업허브 예비창업기업 육성 프로그램’(0.5점), 2018년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소상공인 특화기술개발지원사업’(1점), ‘창업 프로젝트’(3점), ‘반려동물산업 창업지원’(3점), 과기부 ‘K-Global 창업 멘토링 사업’(2점). 달랑 이게 전부다.
창업 분야에서 과소대표되는 여성의 참여를 장려하기 위한 제도이리라. 달랑 이 몇 개 프로젝트의 여성 가산점에 그토록 분노한다면, 남성할당제로 아예 입학하는 여학생 수를 제한하는 교대 입시에는 광분을 해도 모자랄 일. 하지만 여성들은 군말 없이 이 불이익을 수용하지 않던가.
‘나는 왜 사소한 일에만 분노하는가?’ 간단하다. 거대한 일엔 분노가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2030을 좌절시킨 것은 거대한 사회구조. 알기 힘든 이 추상적 구조에 대한 분노를 그들은 여성이라는 구체적 존재에 투사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는 그들을 좌절시킨 그 구조의 의인화다.
할당제나 가산점을 없애면 가능할 수도 있었을 GDP 14.4% 증대, 거기서 창출될 일자리는 포기해야 한다. 그들이 좌절과 분노를 여성에게 대리 분출하는 것을 부추길 때, 이씨는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외려 그들의 절규를 무시하고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표(票)퓰리즘
황교안씨(전 자유한국당 대표)도 거기에 숟가락을 얹는다. “문재인 정부는 일반 국민이 부자 되는 꼴을 결단코 보지 못하는 듯하다.” 늙으나 젊으나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2030의 문제의 대책이 고작 빚내서 가상화폐 사라는 것인가? 코인 사는 젊은이가 외국의 다섯 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거늘.
젊은이들이 가상화폐에 매달리는 것은 그것밖에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일자리는 줄어들고, 취직해도 근로소득으론 집을 살 수 없다. 성실하게 일만 하고도 먹고살 수 있게 해줄 방안을 내놔야지, 이대남의 분노는 여성에게 돌리고, 좌절은 가상화폐로 풀어주는 게 공당에서 할 짓인가.
이준석씨가 이대남 표심을 안티페미니즘의 표출로 푸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 해석을 고집하는 것은 당내의 입지를 위한 개인 이데올로기일 뿐. 그의 안티페미 캠페인은 국민의힘으로 올 수도 있었을 2030 여성들을 ‘영원히’ 내칠 뿐이다. 그는 제 이익을 위해 당의 이익을 해치고 있다.
김병민 정강정책위원장이 국민의힘의 공식입장을 밝혔다. “양성평등 사회의 실질적 구현을 위해 남녀가 기회를 동등하게 보장받도록 해야 하며, 정치를 비롯한 공적 영역에서 성별의 대표성을 확보하도록 남녀 동수를 지향한다.” 이게 정답이다. 당을 위해서라도 그는 일탈을 멈춰야 한다.
05.05 "한명숙은 조작수사 희생양, 이 소설 창작뒤 움직인 그들"
권력은 때로 더러운 공작을 벌인다. 그 점에 관한 한 굳이 여야를 가릴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 방식에는 두 당이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즉 보수정권의 공작이 사실을 ‘은폐’하는 소극적 차원에 머문다면, 민주당 정권의 공작은 아예 없는 사실을 ‘창작’하는 능동적 성격을 띤다는 것.
애초에 없는 사실을 창작한 뒤 대중에 허구의 스토리 증폭시켜
무위로 끝난 김학의·장자연 사건 재수사, 대중은 좌절했지만
자신들 향한 수사 예봉 무디게하고 검찰 개혁의 명분 확보해
국가기관 동원한 공작으로 국민 불신 초래하고 법치 훼손시켜
공작정치의 패턴
패턴이 있다. 먼저 스토리를 창작한다. ‘검찰이 유시민(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쳐서 총선에 영향을 끼치고 대통령을 탄핵하려 한다.’ 이 황당한 각본에 따라 재소자와 전과자를 증인으로 캐스팅한다. 법무법인 ‘민본’의 변호사가 이들을 법률적으로 대리하며, 친여 매체를 통해 그들의 허구를 현실에 사실로 등록한다.
이른바 ‘모해위증교사’ 의혹 사건도 패턴이 똑같다. 먼저 ‘한명숙 전 총리가 검찰의 조작수사의 희생양’이라는 스토리를 창작한다. 이어서 재소자들을 캐스팅하고, ‘민본’의 변호사가 나서서 친여 매체를 통해 사기 전과자들의 증언을 증폭시켜 대중의 의식 속에 그 허구를 사실로 등록한다.
마치 영화를 제작하듯이 다수의 협업으로 날조가 이루어졌다. 문제는 이 허구가 국가기관까지 움직인다는 것. 법무부 장관이 수사지휘권을 발동하면 정치 검사들이 무리한 수사를 벌인다. 두 장관의 지휘권 발동은 모두 허탕으로 끝났다. 그나마 나라의 시스템은 아직 작동한다는 얘기다.
수사의 ‘결론’으로 얻어져야 할 것을 미리 ‘창작 스토리’로 전제해 놓고 그 시나리오에 맞추어 증거와 증인을 조작하는 방식. 이로써 그들은 비위를 저지른 자신들을 방어하고, 이른바 검찰개혁의 명분을 확보하는 한편, 자신들은 도덕적으로 무오류라는 상상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현실을 대체한 스토리

/진중권의 퍼스펙티브 그래픽=신용호
억울한 옥살이를 한 이들의 변호를 맡아 ‘재심 전문’이라 불리는 박준영 변호사. 그가 1300쪽에 이르는 ‘대검 과거사 조사단’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공개된 보고서의 내용, 그리고 그 작성의 경위를 살펴보면 권력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추잡한 짓을 해 왔는지 알 수 있다.
패턴은 다소 다르나 ‘스토리’에서 출발하는 것은 앞의 예들과 마찬가지. ‘사악한 검찰이 동영상에서 얼굴을 확인하고도 김학의 전 법무차관의 성 접대를 불기소 처리했다.’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검찰에서 그를 기소하지 않은 것은 그가 아니라 피해여성을 특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원주 소재의 윤중천씨 별장에서 수 차례 접대를 받았다’는 스토리는 아예 한겨레신문의 보도를 통해 사실로 둔갑했다. 이 또한 사실이 아니었다. 과거사진상조사위의 이규원 검사가 제 유도 심문을 윤중천씨의 답변으로 둔갑시켜 면담 보고서를 허위로 작성한 것이다.
앞의 두 예에서처럼 여기서도 범죄자의 증언이 결정적 증거로 활용됐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엔 윤중천 본인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데 있다. 여러 차례 유도 심문을 해도 그에게서 원했던 답변이 나오지 않자 아예 면담 보고서 자체를 조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건번호도 가짜
날조는 계속된다. 이규원 검사는 김학의 전 차관의 출국을 막으려 가짜 사건번호를 붙여 출금요청서와 승인요청서를 만들었다. 명백한 불법이다. 당시 대검찰청 반부패강력부장 이성윤 서울지검장은 동부지검에 이 가짜를 추인해 달라고 요청했다가 ‘불법’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 날조극 덕에 현실은 한동안 물구나무 서 있어야 했다. “검찰은 제 식구 감싸기식 태도로 비판받아 왔습니다. 성폭력 혐의를 조사하지 않았고, 사건 은폐·직권 남용 혐의를 받은 수사 검사도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피해자의 피맺힌 통곡은 계속되고 있습니다.”(민주당 정춘숙 의원)
하지만 박준영 변호사의 폭로에 따르면 검찰은 제 식구를 감싼 적이 없다. 성폭력 혐의는 조사 결과 법적 처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피해자도 명확히 성폭력 피해자로 분류하기 애매했다. 출국금지의 불법성을 은폐하고 직권을 남용해 수사를 막은 것은 이성윤 서울지검장.
그들이 현실을 물구나무 세운 것이다. 왜 그랬을까? 정춘숙 의원의 말을 들어 보자. “김학의 성폭력 사건은 검찰개혁의 신호탄과 같은 사건입니다.” 검찰개혁은 민초들의 삶과는 별 관계없는 의제. 애초에 부족한 개혁의 명분을 억지로 만들어내려니 허구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물타기
모든 사건의 발단은 대통령의 지시였다. 2019년 3월 문재인 대통령은 버닝썬·김학의·장자연 등 과거에 무혐의로 종결된 사건들의 철저한 재수사를 지시했다. 김학의 사건 재수사의 동력은 존재하지도 않는 윤중천의 발언, 장자연 사건 재수사의 동력은 사기꾼 윤지오의 허위증언이었다.
정권에 부담이 되는 버닝썬 사건에 물을 타려고 슬쩍 검찰 사건 두 개를 끼워 넣은 것이다. 당시 민갑룡 전 경찰청장은 국회에서 “동영상에 등장하는 남성이 김학의라는 건 육안으로도 식별 가능했다.”고 증언했다. 피해자가 특정이 안 돼 기소 못 한 것을 알면서 사태를 호도한 것이다.
그즈음 청와대 이광철 비서관은 버닝썬 사건에 연루된 윤규근 총경에게 ‘민 청장이 더 세게 발언했어야 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청와대발(發) 기획사정 의혹을 키우는 대목이다. 이광철 비서관은 김학의 전 차관의 불법 출금 사태에도 깊이 연루되어 현재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이 날조극의 규모를 보라. 대통령, 청와대 민정비서관, 두 법무부 장관, 경찰청장, 출입국본부장, 서울중앙지검장, 대검 과거사진상조사위, 친여 매체들과 어용지식인들. 영화 한 편 찍는 데에도 엄청난 인력이 들어가거늘, 영화를 현실로 만드는데 이 정도 인력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민중은 시작(詩作)을 한다
김학의·장자연 사건이 가해자들을 처벌하지 못한 채 종결된 것은 한탄할 일이다. 이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정당하며, 정치권이 그 분노에 응답하는 것을 탓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 방식. 그들은 허구의 스토리를 만들어 대중의 정의감을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에 철저히 이용해 먹었다.
‘민중은 시작을 한다.(Das Volk dichtet)’ 하이데거의 말대로 민중은 스토리에 열광하며 그것을 스스로 지어내곤 한다. 스토리 속에서 이성은 감정으로, 논리는 상상력으로 대체된다. 스토리는 세상의 그 모든 복잡함을 단순한 선악 이분법으로 환원하고, 권선징악의 교훈으로 요약한다.
기소엔 증거와 시효가, 출금에는 적정절차(due process)가 필요하다. 확립된 법치의 규칙들을 무시하면 일시적으로 정의감을 만족시킬지 몰라도, 장기적으론 사회에 더 큰 불의를 가져온다. 이 복잡한 사정을 그들은 이야기로 대체했다. ‘검찰이 제 식구와 특권층을 챙기려고 사건을 덮었다.’
스토리를 활용한 이 포퓰리즘으로 정의가 회복될 리 없다. 김학의·장자연 사건 재수사는 다시 무위로 끝났다. 애초에 허황한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대중은 좌절했다. 하지만 권력은 제 목적을 다 이루었다. 부족한 개혁의 명분을 확보했고, 자신들에 대한 검찰수사의 예봉을 무디게 했다.
권력의 선의를 믿지 말라
이런 통치는 자유주의 정치문화에는 낯설고, 실은 전체주의형 정치 커뮤니케이션에 가까운 것이다. 국가기관을 동원해 국가기관을 공격하면 국가기관 전체가 불신을 받게 된다. ‘검찰=악마’라는 비현실적 인식에서 나온 개혁방안이 현실적일 리 없다. 그래서 법치만 훼손하고 만 것이다.
결과를 보자. 대통령은 지지율이 폭락했다. 이광철 비서관은 검찰수사를 받고 있다. 이성윤 지검장은 직권남용, 이규원 검사는 공문서 위조, 정진웅 부장은 독직폭행으로 기소됐다. 유시민 작가는 명예훼손으로 기소됐고, 윤지오는 사기혐의로 수배됐다. 과거사위는 또 다른 과거사가 되었다.
180석의 최강 여당이 통치하는 상황에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정치 상황과 무관하게 이 나라의 시스템을 지탱하는 이들이 있다는 얘기. 박준영 변호사의 외로운 싸움을 응원한다. 권력의 선의를 믿으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사악한 정권이 들어서도 흔들리지 않는 법치 시스템이다.
VR(가상현실)은 현실이 아니다. 재·보선에 참패하고도 아직 현실감을 못 찾았다. 김용민 의원은 ‘당심이 곧 민심’이라며 빛바랜 검찰개혁에 더욱더 매진하겠단다. 친노 대모 한명숙 전 총리는 ‘억울하다’며 자서전을 낸단다. 이제 대법원 판결까지 무시할 태세다. 대체 왜들 저럴까? 무서운 사람들이다.
05.19 "한겨레가 중재하고 조국이 맞장구친 '기상천외한 사과'"
한겨레신문의 편집인이 재·보선 참패의 원인으로 조국 전 법무장관을 꼽으며 그의 사과를 촉구했다. 그의 권고에 따라 조국 전 장관이 사과를 했다. 하지만 말이 ‘사과’이지, 과거 청문회장의 면피성 사과를 재탕하며 거기에 76자를 덧붙인 것에 불과했다. 그의 ‘돌려막기 사과’는 대중의 분노만 샀다.
‘탄핵의 강’ 건넌 국민의힘은 재·보선에서 승리했지만
‘조국의 강’ 건너지 못한 민주당, 공정 이슈 맞물려 참패
진보의 보물이던 조국, 민주당도 손절 고민하는 애물 전락
윤리문제가 진영수호 문제로 치환…거대한 허구를 어찌할까
탄핵의 강과 조국의 강
작년 총선에서는 야당이 ‘탄핵의 강’을 건너지 못해 참패했다. 그 후 국민의힘은 김종인 비대위 하에서 두 대통령의 실정에 대해 사과를 했고, 그 결과 이번 재·보선에서 압승할 수 있었다. 아직 탄핵을 부정하는 발언도 더러 나오나, 적어도 공식적으로 국민의힘은 탄핵의 강을 건넜다.
반면 민주당은 ‘조국의 강’을 건너지 못해 이번 재·보선에서 참패를 했다. 민주당의 영원한 우군이라 믿었던 2030이 대거 국민의힘으로 돌아섰다. ‘공정’의 이슈에 민감한 젊은 세대의 눈에 스펙을 조작하여 딸을 의전원에 들여보낸 조국 전 장관이 ‘걸어다니는 불공정’으로 보였을 게다.
참패를 하고도 민주당은 여전히 조국의 늪에 빠져 있다. 그 당에서 조국은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서는 안 되는 야훼와 같은 존재. 초선 의원 몇몇이 ‘조국 책임론’을 들고 나왔으나, 이 반란은 강성 지지자들에 의해 신속히 진압당했다. 최종 선언문에서 ‘조국’의 이름은 빠졌다.
하지만 이 문제의 해결 없이 대선을 치를 수는 없다. 국민들은 민주당 대선후보에게 제일 먼저 조국 사태에 대한 견해부터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조국을 부인하자니 집토끼가 달아나고, 끌어안자니 산토끼가 달아난다. 그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조국을 피해가는 방법

/진중권의 퍼스펙티브 그래픽=신용호
한겨레 칼럼은 이 딜레마의 출구를 제시한다. “사과하고 반성해야 할 이들은 대통령과 당 대표, 그리고 이른바 조국-윤석열 사태에 책임이 있는 이들이다.” 재미있다. 이른바 조국-윤석열 사태? 그 사태는 줄곧 ‘조국 사태’로 불렸지, 누구도 그것을 ‘조국-윤석열 사태’라 이른 바 없잖은가.
칼럼은 조 전 장관을 문제삼는 맥락에서 애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끌어들여 양비론을 편다. “조국과 윤석열 중 누가 옳은지, 누구 편에 서야 하는지를 묻는 것은 우문에 가깝다. 아마도 조국도 틀렸고, 윤석열도 틀렸을 것이다.” 결국 조국 편에 선 우리도 틀렸지만, 윤석열 편에 선 그들도 틀렸다는 얘기.
정말 그럴까? 정경심 교수는 4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법원에서 검찰수사의 정당성을 인정했다는 얘기다. 반면 윤 전 총장에 대한 징계는 무산됐고, 이른바 검찰개혁을 주도한 추미애 사단의 검사들은 이미 기소됐거나 곧 기소될 예정. 현실에서 조국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은 완패했다.
‘조국-윤석열 사태’는 민주당 지지층의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한 신조어다. 지지자들은 조 전장관이 검찰의 희생양이라며 끝까지 그를 지키려 하나, 그럴수록 민주당 지지율은 떨어진다. 우리만이 아니라 그들도 틀렸으니 싸움을 비긴 걸로 치고 이쯤에서 조국 수호전쟁을 접으라는 주문이다.
적법이고 합법이었다
지지자들이야 이 아큐식 정신승리법으로 달래도 문제는 조국 본인이다. 이 지경이 되도록 그는 싸움을 그만둘 뜻이 없다. 한겨레 칼럼은 이렇게 권한다. “결자해지라고 했다. 당사자인 조국 전 장관부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그런데 주문의 구체적 내용이 좀 이상하다.
“법정에서 무죄 입증을 하지 말란 말이 아니다. 형사 법정에서의 분투와 별개로 자신으로 인해 실망하고 분노했을 많은 촛불 세력, 젊은이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의 말을 건넬 수는 없을까.” 4년의 중형이 내려진 불법에 대한 책임은 빼줄 테니 도의적 책임만 인정하고 사과하란 얘기.
조국이 이를 마다하겠는가? 그의 76자짜리 사과는 딱 이 수준에 맞춰졌다. “당시 존재했던 법과 제도를 따랐다 하더라도, 그 제도에 접근할 수 없었던 많은 국민과 청년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고 말았다. 기존의 법과 제도를 따르는 것이 기득권 유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그는 제 행위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무리 당시 적법이었고 합법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활용할 수 없었던 사람에 비하면 저나 저희 아이는 혜택을 누렸다고 생각한다.” 사과의 형식으로 외려 그 행위가 “적법이었고 합법”이었다고 재차 강조할 뿐이다. 이걸 사과라고 하는가.
결코 끝나지 않은 싸움
한겨레 칼럼의 제안은 문제의 참된 해결이 아니라 은폐 혹은 봉합일 뿐이다. 조국 지지 부대에는 명분 없는 패배를 무승부로 호도하고, 조국에게는 국민 앞에 사과하는 시늉만 하라고 주문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과 못하겠으면 사과하는 척이라도 하라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그런다고 지지자들이 조국수호 전쟁을 그만둘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싸움에서 비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반복된 세뇌와 선동으로 본말이 전도되어, 어느새 그들에게는 조국을 지키는 것이 민주당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제가 됐다. 그래서 문제 아닌가.
조국 본인도 싸움을 멈출 수가 없다. 이미 현실에서 설 자리를 잃은 그는 어차피 광적인 지지자들의 머릿속의 환상 속에 거처를 마련할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절대로 지지자들의 믿음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 그마저 파괴되면 버림받은 영혼이 거주할 유일한 장소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해괴한 얘기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2심 첫 공판에서 정경심 변호인단은 “PC에 외부 USB가 접속한 흔적이 있어 증거가 오염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1심 판결문에 굳이 그 PC가 아니어도 표창장 위조는 충분히 인정된다고 적혀 있는데,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
효용이 다한 조국 카드
조국 사태는 쉽게 끝날 일이 아니다. 열린민주당의 김의겸 의원은 “검찰이 증거를 소극적으로 은폐한 정도를 넘어 적극적으로 증거를 조작했다”며 “검찰의 증거 훼손 가능성에 대해 공수처가 직접 수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경심 변호인단도 차마 하지 못한 주장까지 한 것이다.
1심에서 사실을 다투고 2심에선 인정할 것은 인정하되 형량을 다투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는 유무죄 판단과 아무 관계 없는 ‘외부 USB 접속 흔적’을 언급하고,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이를 1심 판결을 뒤집는 증거로 둔갑시켜 법정 밖의 지지자들을 현혹하고 결집하려 한다.
조국의 이 파렴치한 태도는 그의 장관 임명이 민주당의 대선 기획의 일환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그 때문에 제 개인의 윤리적 문제를 진영의 공적 문제로 치환하여, 자신과 가족의 비위를 부인하고 은폐하는 게 곧 진영수호라는 공익을 위한 것이라는 허위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그가 실존적 막장에 내몰린 것은 그 자신의 책임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정권 재창출을 위해 무조건 그를 사수해 온 민주당 전체의 책임이다. 결국 자기들의 이해를 위해 한 개인을 카드로 철저히 활용해 먹고는, 그 카드의 효용이 다하자 이제 와 우아한 손절을 고민하게 된 것이다.
보물에서 애물로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뻔뻔한 거짓말을 한다. 풍기에서 있었다는 아이의 카드가 서울과 부산에서 사용됐다. 조민이 양자(量子)인가, 동시에 두 장소에 출현하게. 국민들은 이런 양자역학적 규모의 궤변을 들어주느라 지쳤다. 이젠 민주당에서도 내심 손절을 원하는데 대체 왜 그럴까?
조국 수호의 정치적 이득은 사라진 지 오래이고, 남은 것은 그의 사적 동기뿐. 훤칠한 외모, 최고의 학벌, 앙가주망을 하는 진보적 법학자. 그 허상은 이미 파괴됐는데, 지지층의 집단 환각 속으로 들어가 밖에선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그 나르시시즘을 유지하는 게 그렇게도 중요한가.
한때 진보의 보물이었던 그가 이제는 민주당마저 부담스러워하는 애물로 전락했다. 문제의 한겨레 칼럼에는 그 짜증이 잔뜩 묻어난다. 하지만 조국 하나를 손절한다고 해결될 문제인가? 조국사태는 애초에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이 함께 구축한 집단 환각. 이 거대한 허구는 어찌할 것인가.
조국은 ‘사과 아닌 사과’를 한다. 대통령은 ‘만류 아닌 만류’를 한다. 양념 치는 대깨문들은 상대에게 예의를 지키고, 양념 당하는 이들은 그 양념을 달게 맞으란다. 게다가 송영길 대표 아래 민주당은 ‘친문 아닌 친문’ 당. 이 양자 중첩들은 민주당이 처한 동일한 딜레마의 상이한 얼굴이다.
05.26 "尹의 메시지 무엇인가, 그에게 시간이 별로 없는 까닭"
출마선언도 하기 전에 여당 주자들이 일제히 견제에 들어갔다. 정세균 전 총리는 “검찰개혁의 몸통은 윤석열”이라고 말했고,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편중된 경험이나 벼락공부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 역시 “예쁜 포장지 대신 내용물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정권이 무너뜨린 공정에 대한 열망이 윤석열 현상 만들어
진보의 기득권 세습, 반칙 일삼아 온 데 대한 민초의 분노
법적·형식적 정의 넘어 경제적·실질적 정의에 답해야할 때
윤석열 현상 거품인가…정치공학 아닌 분명한 메시지 내놔야
포장지 대신 내용물
정 전 총리의 발언은 무시해도 좋다. 국민이 아니라 강성 지지층을 겨냥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대깨문’이라는 ‘신앙 공동체’ 내에서는 검찰개혁이 중요한 사안인지 몰라도, 국민 대다수에게는 그저 ‘서민들이 민생고에 시달리는 동안 민주당 고위인사들의 특권만 대폭 향상시킨 사건’일 뿐이다.
이낙연 전 대표의 지적은 곧 시작될 검증의 방향을 보여준다. 세상을 검찰의 눈으로만 본다거나, 대통령이 될 준비가 부족하다는 지적은 그저 공세로만 치부할 게 못 된다. 실제로 많은 국민들이 그 부분을 궁금해하기 때문이다. 그 의구심을 일소하는 것은 윤 전 검찰총장 본인의 몫으로 남는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물을 공개”하라는 이재명 지사의 지적이다. 앞으로 그가 자신의 콘텐트를 공개하면, 이른바 ‘윤석열 현상’이 거품인지 아닌지 자연스레 가려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대정신’이다. 지난 재·보선은 그 시대정신의 하나가 ‘공정’의 가치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법적·형식적 공정을 넘어서

/진중권의 퍼스펙티브 그래픽=신용호
윤석열 현상의 바탕에는 정권이 무너뜨린 공정에 대한 열망이 깔려 있다. 그걸 알기에 이재명 지사도 그동안 내세워온 ‘기본 시리즈’를 뒤로 물리고 ‘성장과 공정’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이리라. ‘성장’으로 현 정권의 정책과 거리를 두고, ‘공정’으로 윤석열과의 차별성을 지우겠다는 계산이다.
윤 전 총장을 공정의 상징으로 만들어준 것은 그동안 정권이 저질러 온 불법·탈법·초법의 행태. 정권이 ‘내로남불’의 화신이 된 상황에서 국민은 ‘네 편 내 편’ 가리지 않고 칼을 공정히 대는 검찰총장에게 진영의 차이를 넘어 사회의 기본 규칙을 다시 세워줄 인물이라는 기대를 품게 된 것이다.
울산시장 선거 개입, 원전 평가조작, 김학의 전 법무차관 불법 출국금지 등은 헌법과 법률을 무시한 사건들. 정권은 이런 불법과 초법적 행위를 일삼으며, 통치행위라는 이름으로 검찰의 수사를 방해해왔다. 그 결과 정권이 훼손한 법치를 회복할 인물로 자연스레 윤 전 총장이 주목을 받은 것이다.
저 하늘 위의 ‘공정’을 서민 자신의 문제로 각인시킨 것은 조국 사태였다. 민초들은 평등을 외쳐 온 진보마저 기득권을 세습해 주려고 반칙을 일삼아 온 것을 보고 분노했다. 그래서 조국을 수사하다가 온갖 고초를 겪은 인물에게, 마음속으로 정권을 심판해줄 적임자를 찾게 된 것이다.
윤석열의 상징자본은 이 법적·형식적 정의의 가치다. 하지만 이는 대권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공정을 시대정신으로 만든 대중의 무의식에는 더 깊은 차원의 공정, 즉 경제적·실질적 정의에 대한 욕망이 깔려 있다. 문제는 이 채워지지 않은 욕망에 대답하는 것이다.
경제적·실질적 공정
조국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근원을 갖는다. 그 분노는 ‘공정한 노력을 통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층 사다리 자체가 사라졌다’는 깊은 좌절에서 나온다. 실제로 이 나라는 언제부터인가 급속히 그 지위와 특권이 세습되는 새로운 신분제 사회로 바뀌어 가고 있다.
사실 한국만큼 평등한 사회도 없었다. 한국전쟁으로 모두가 잿더미에서 출발해 누구나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활기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부모의 경제력 차이가 자식들의 교육 격차를 낳는다. 상류층은 반칙과 편법까지 사용하니, 교육을 통한 계층이동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소득주도성장’이 무색하게 소득격차는 줄지 않았다. 게다가 근로소득으로는 벌어지는 자산 격차를 따라잡을 수 없다. 원래 큰돈은 일하지 않고 버는 것. 그저 건물을 사고파는 것만으로 수억원을 챙기는 곳에서 서민에게 허용된 계층상승의 유일한 길은 영끌해서 주식과 코인을 사는 것뿐이다.
사실상의 신분제와 세습제는 시장경제의 퍼포먼스를 저하시킨다. 또 코인의 등락에 팔려있는 정신에 노동의욕이나 창의나 혁신이 생길 리 없다. 노동만으로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없으니, 다들 아이 낳기를 꺼리고 그 결과 생물학적 재생산마저 위협받게 됐다. 이는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다.
평등이냐 공정이냐
이 위기에 여당의 주자들은 대증요법이나 남발하고 있다. 이재명 지사는 대학 안 간 청년에게 1000만 원의 ‘해외여행비’를, 이낙연 전 대표는 전역자에게 3000만 원의 ‘사회출발자금’을, 김두관 의원은 모든 청년에게 5000만 원의 ‘기본자산’을, 정세균 전 총리는 신생아에게 1억원짜리 ‘적립통장’을 마련해 주겠단다.
전형적인 진보의 평등주의 정책이다. 이를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재원을 마련하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세금을 통한 재분배도 국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시장의 실질적 불공정에서 빚어지는 불평등을 사후적으로 완화하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데에 있다.
이번 선거에서 반란을 일으킨 젊은 세대는 진보의 평등주의를 믿지 않는다. 그 어느 세대보다 능력주의의 성향이 강한 데다가, 평등을 외쳐온 진보의 위선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재명 지사가 이른바 ‘기본’ 시리즈를 슬쩍 뒤로 젖혀둔 것은 그에 대한 호응이 뜨뜻미지근했기 때문일 게다.
해외여행을 다녀온들 학력에 따른 차별이 사라지는가. 사회출발자금을 받은들 젠더가 평등해지는가. 그 돈을 받은들 아무리 일을 해도 집을 살 수 없는 현실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젊은 세대는 게임의 결과를 사후적으로 교정하는 것보다 게임의 규칙 자체를 공정하게 해주기를 원한다.
삶의 질 개선 요구에 답해야
윤 전 총장이 대권에 도전할 뜻이 있다면,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개선해 달라는 대중의 요구에 답해야 한다. 이제 앞으로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지 자신의 메시지를 내놓을 때가 됐다. 그에게 기대를 거는 이들은 그의 대답을 고대하고 있다. 더 늦어지면 피로도가 심해질 것이다.
이른바 검찰개혁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 국면이 지나면 그의 이름이 상징하는 법적·형식적 공정의 의제는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갈 게다. 그러니 자신이 선점한 공정의 가치를 법적·형식적 차원에서 경제적·실질적 차원으로 확장시켜야 한다. 공정은 적당히 보수적인 가치다.
부모가 아닌 제 노력으로 계층이동이 가능하다는 믿음도,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 보금자리를 마련해 소박하나마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도 사라지고 있다. 일하지 않고 벼락부자가 된 이들에게 ‘벼락거지’들이 박탈감을 느끼는 것은 이 사회가 근본적으로 불공정하다는 얘기다.
남녀가 법적·형식적으로는 동등하다고 해도, 어느 성으로 태어나느냐에 따라 소득과 지위는 달라진다. 설사 반칙과 편법을 뿌리 뽑고 법적·형식적 공정을 완벽히 보장한다 해도, 어느 집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한 개인의 미래는 크게 달라진다. 경제적·실질적 불공정이란 이런 것을 말한다.
국민의 원하는 삶
중요한 것은 좌절한 국민에게 들려줄 정치적 ‘복음’이다. 민주당 주자들은 현금을 뿌리는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 집권여당의 대표는 졸속으로 LTV(주택담보대출비율)를 90%로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들은 문제와 진지하게 대면하는 대신에 사안을 철저히 선거공학으로만 다루려 한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열심히 일만 하면 삶이 나아질 거라는 바람이 배신당하지 않는 것이다. 이 소박한 꿈을 이루려면 진보적·보수적 정책의 실용적 조합, 그에 대한 정치적 합의와 사회적 대타협, 그것을 끌어내기 위한 통합의 리더십 또한 필요하다. 민주당 정권은 거기서도 실패했다.
국민은 대통령에게 슈퍼맨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문제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문제와 진지하게 씨름하고, 필요하다면 야당에 솔직하게 조언과 조력을 구하고, 반대하는 국민까지도 배제하지 않고 끝까지 설득해 공동의 노력에 참여시키는, 그런 평범하게 위대한 정치인을 원한다.
물론 그의 노력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파우스트의 말처럼 “인간은 노력하는 한 실수하기 마련이다.” 설사 실패를 하더라도 그 탓을 남에게 돌리지 않고, 제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할 줄 아는 정직한 정치인에게 국민은 절대로 등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윤석열의 메시지를 듣고 싶다.
06.02 "좀비가 돌아왔다···조국을 치워야 진보 다시 세울 수 있다"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떠돌고 있다. 조국이라는 유령이. 한동안 잠잠했던 그가 ‘회고록’을 손에 들고 요란하게 귀환했다. 책의 겉장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과연 불씨는 살아 있었다. 그 불씨가 목하 지지자들 사이에 큰 불길로 번질 조짐이다.
회고록 출간으로 ‘무덤에서 걸어나온 좀비’ 조국, 불씨 재점화중
자신이 초래한 공적 책임엔 눈 감고, 가족의 ‘사적 피해’만 내세워
유죄받은 11개 혐의 적법했다면 법정에선 왜 묵비권 행사했나
폐허 위에 진보 다시 세우려면 조국의 망령을 무덤으로 보내야
성(聖) 가족의 피
“가족의 피에 펜을 찍어 써 내려 가는 심정이었다.” 법을 어겨 처벌을 받은 게 예수의 보혈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그가 어디 무고한 희생양 행세를 할 처지이던가. 정경심 교수는 기소된 15개의 혐의 중 11개가 유죄로 인정돼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 혐의들 하나하나가 결코 가볍지 않다.
참고로 시험문제를 유출한 숙명여고 교감은 징역 3년을 받았다. 그의 쌍둥이 딸도 당시 미성년자였음에도 기소되어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반면, 위조문서를 행사하고 방송에 나가 허위 인터뷰까지 한 조민은 성인인데 기소도 되지 않았다. 외려 특혜를 받은 셈이다.
가족이 피를 흘리게 한 것은 실은 본인이다. 자기와 제 가족이 한 일을 몰랐을 리 없었을 터. 임명을 포기했더라면 비위의 대부분은 드러나지 않고 그냥 묻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 돌파를 선택했고, 그 결과 자기가 지금 ‘멸문지화’라 부르는 그 상황을 자초한 것이다.
“불법은 없습니다.” 청문회 준비과정에서 그는 이렇게 단언했다고 들었다. 이는 치명적 오판으로 드러났다. 그래도 여전히 그는 그 스탠스를 유지한다. 법원에서 유죄가 인정된 11개 혐의 모두 ‘적법이었고 합법’이었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왜 법정에서 묵비권을 행사했는가.
회고록인가 낙서장인가

/진중권의 퍼스펙티브 그래픽=신용호
‘가족의 피’라는 표현은 매우 자극적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피로써 구원을 얻었듯이, 그의 지지자들은 성(聖) 가족의 피로써 공수처와 검수완박을 얻었노라고 믿을 게다. 인쇄도 되기 전에 책이 벌써 4만 부나 팔렸단다. 흘러간 줄 알았던 조국의 시간이 홀연히 되돌아온 것이다.
책의 내용은 ‘회고록’이라 부르기에는 민망한 수준. 자신의 페이스북 글과 페이스북 친구들의 격려사들, 그리고 관변언론의 기사들을 복사해 붙인 것에 가깝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한동훈 검사장을 서울중앙지검장 시켜 달라고 했다는 고자질을 빼면, 대부분 주관적 추측과 망상에 근거한 검찰 음모론.
“대통령 2명을 감옥에 보낸 윤석열은 조국 수사와 검찰개혁 공방이 계속되는 어느 시점에서 문재인 대통령도 ‘잠재적 피의자’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울산시장 선거 개입은 대통령 숙원사업, 일종의 손타쿠(忖度·남의 마음을 미리 헤아린다는 뜻의 일본어) 사건. 법치국가에서 대통령은 ‘잠재적’으로라도 ‘피의자’가 되면 안 되나?
대통령을 끌어들인 것은 책임을 검찰에 전가하기 위해서다. “내 흠결과 무관하게 검찰의 문재인 정부 총공격과 이에 대응하는 여권 지지층의 ‘전쟁’은 벌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즉, 꼭 자기가 아니더라도 검찰은 정권을 공격했을 터이니, 사회분열이 내 탓이라 하지 말라는 얘기다.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일각에서 4·7 재·보궐선거 참패가 조국 탓이라고 한다. 지금도 ‘기승전-조국’ 프레임은 끝나지 않았다. 전직 고위공직자로서 정무적·도의적 책임을 무제한 지겠다. 저를 밟고 전진하길 바란다.” 그가 정말로 민주당이 자신을 밟고 나아가기를 바란다면 애초에 이런 책은 내지 말았어야 한다.
책이 나오자 선거 참패 후 잠시 반성하는 듯했던 민주당은 바로 과거 모드로 돌아갔다. “조 전 장관이 고난 속에 기반을 놓은 개혁과제, 특히 검찰개혁의 완성에 힘을 바치겠다.”(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 “가족의 피로 쓴 책이라는 글귀에 자식을 둔 아버지로, 아내를 둔 남편으로서 가슴이 아리다.”(정세균 전 국무총리)
“조국의 시련은 개인사가 아니다. ‘조국의 시간’을 우리의 이정표로 삼아야 한다.”(추미애 전 법무장관) 이 모두는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이른바 ‘대깨문’의 표를 얻기 위한 발언이다. 대선 주자 중 유일하게 이재명 경기도지사만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일찌감치 1위를 굳히고 중도층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대권 주자들마저 이러니 자기를 밟고 가라고 한들 민주당에서 감히 누가 그를 밟겠는가. 그러니 그 말은 사실 ‘어디 한번 나를 밟고 지나가 보라’는 협박에 가깝다. 한때의 유력한 차기 주자가 지금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당의 다리를 끌어당기는 물귀신 같은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팬덤 정치의 업보
1심 판결문을 통해 범죄의 사실과 유죄의 증거들이 낱낱이 공개됐다. 그로써 조국과 지지자들의 억지는 설 자리를 잃었다. 이번 재·보선의 참패를 통해 조국 수호의 정치적 효능도 검증이 끝났다. 이를 보고도 이성적 판단을 못 한다. 조국 수호가 일종의 종교적 신앙이 되어버린 것이다.
민주당은 정치적 필요에서 현실을 왜곡했다. 거기에 세뇌된 지지자들은 검찰개혁 국면에서 그들의 강력한 우군이 되어주었다. 지금 그들은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그 세뇌가 얼마나 집요하고 강력했던지 법원의 판결과 선거의 결과를 보고도 그들은 아직 망상을 버리지 못한다.
그 망상을 깰 유일한 인물은 오직 조국 자신뿐. 즉 그가 1심에서 드러난 사실들을 깨끗이 인정하고, 자신이 그동안 거짓말을 해 왔다고 고백하고, 지지자들에게 이제 자신을 밟고 가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일을 해야 할 그 자신이 누구보다 깊숙이 그 망상에 빠져 있다는 것.
망상의 공동체를 해체할 수 없다면 선이라도 그어야 한다. 지금 그 일을 할 사람은 송영길 대표. 하지만 최고위부터 지지자들까지 당이 강성친문에 장악당한 상태라, 대표라 한들 그 비합리적 열정의 덩어리와 선을 긋는 게 쉽지가 없다. 그래서 결말을 빤히 알면서 몰락해 가는 것이다.
조국이라는 재앙
조국의 시간은 고통스러웠을 게다. 하지만 거짓은 가졌던 연민의 정도 거두게 하는 법. 그 고통이 세인의 연민을 사려면,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의 시간에 그만 고통스러웠던 것도 아니다. 1심 판결문엔 그가 “진실을 말하는 이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줬다.”고 적혀 있다.
그는 국민만이 아니라 진영도 분열시켰다. 과거의 동지들이 얼굴을 마주보기 민망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갈라진 이들은 다시 하나가 될 수 없을 게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처럼 조국 사태 이후에는 마치 아무 일 없었던 듯 과거의 동지로 돌아갈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조국은 진보적 가치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그 어떤 진보적 기획도 이제는 신뢰를 받지 못하게 됐다. ‘평등’이라는 말은 아예 입에 담기조차 어려워졌다. 두려운 것은 그 틈에 불어닥치는 ‘반동’의 광풍이다. 무한경쟁의 찬양, 여성주의 공격, 이주민 혐오 등 저주는 이미 시작되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등 진보의 재생산 구조는 오래전에 끊겼다. 시민단체와 진보 매체는 어용이 되었고, 진보적 지식인들은 조국·윤미향·박원순 사태를 거치며 제 존재의 바닥을 드러냈다. 이는 그들이 과거에 가졌던 사회적 발언의 힘을 현저히 떨어뜨렸다. 조국은 진보의 재앙이었다.
폐허 위에 진보 세우기
이렇게 당과 진영과 나라를 초토화해 놓고 그는 ‘가족의 피’를 말한다. 자신이 초래한 사회적 폐해에 대한 ‘공적 책임’엔 눈을 감고, 자신과 가족의 탐욕이 초래한 ‘사적 피해’를 내세운다. 공인으로 져야 할 책임을, 자식을 둔 아버지, 아내를 둔 남편으로서 당한 아픔으로 덮으려 한 것이다.
제목은 ‘조국의 시간’이나 내용은 ‘윤석열의 시간’이다. 책이 온통 윤석열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인과관계가 뒤집혀 있다. 윤석열이 어디 정치하려고 그를 수사했던가. 그를 수사하다가 정치로 내몰렸지. 그를 대선 주자로 만들어준 것은 조국 전 장관 자신이었다.
조국은 ‘개인’이 아니다. 진영이 집단으로 그를 옹호했다. 그가 개인을 넘어 한 세대의 집합적 표상이라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조국이다’라는 구호는 참이다. 즉, 다들 다소간은 조국처럼 살아온 것이다. 안 그렇게 살았던 이들마저 구호를 따라 외치며 점점 조국이 되어갔다.
이 폐허 위에 진보를 다시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조국의 망령을 무덤으로 보내야 한다. 이 도돌이표 유령을 치우지 않으면 진보는 영원히 제자리걸음을 해야 할 게다. 그런데 아무리 묻어도 망령이 자꾸 되돌아온다. 무덤에서 걸어 나온 좀비를 부활한 예수로 아니, 답답한 일이다.
07.15 '화가 구혜선' 왜 욕 먹나···'홍대 이작가'가 들춘 불편한 진실
얼마 전 ‘홍대 이작가’로 활동하는 이규원 작가가 팟캐스트 방송에서 구혜선씨의 작품에 악평을 한 적이 있다. 그는 구혜선씨의 작품이 “입시 학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라며 그에게 “본업에 집중하는 게 낫겠다”고 권했다. 이 발언으로 그는 거센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창작하는 연예인들에 대한 미술계의 반감은 뿌리 깊다. ‘조영남 대필’ 사건 때는 화가 단체들이 그를 엄중히 처벌하라고 성명을 냈다. 학자와 비평가들은 검찰에 기소의 논리를 제공하고, 어느 화가는 아예 법정에서 검찰측 증인으로 나섰다. 이 적대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기능이 아니라 신분으로서 예술가
누구나 예술가되는게 현대미술 꿈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된 창의성
표적잃은 분노가 연예인 향한 것
하나의 근원은 화가를 ‘기능’이 아니라 ‘신분’으로 보는 낡은 관념. 한 마디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이 작가 행세하는 게 보기 싫은 것이다. 돈으로 족보를 사서 양반행세 하는 상놈을 바라보는 몰락 양반들의 심정이랄까. 조영남 사건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규원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통 예술가들은 짧게는 대학 4년 길게는 유학 포함 7~8년 동안 내내 교수님, 동료들, 평론가들에게 혹독한 평가를 받고 미술작가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이것이 한 사람을 온전한 ‘미술작가’로 대접해 주기 위한 그들의 자격요건이다.
하지만 작가가 되기 위해 꼭 ‘제도권’을 거쳐야 하나? 현대미술의 출발점인 인상주의 운동은 제도권 밖에서 일어났고,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은 아예 제도권 비판으로 먹고살았다. 20세기의 위대한 예술가들은 제도권의 성채를 무너뜨리고 누구나 예술가가 되는 사회를 꿈꾸지 않았던가.
작가는 사회의 미학적 문화를 책임진 존재. 작품을 만드는 것은 그 임무 중 일부일 뿐이다. 예술은 자기 목적이 아니다. 작가의 존재 이유는 대중이 세계를 미학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데에 있다. 그 체험은 단순한 감상에서 출발해 스스로 작품을 만드는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다.
따라서 연예인들이 직접 창작을 하고 전시를 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라 외려 권장할 일이다. 영화를 공부하지 않은 이들이 영상물 만들고,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이들이 작곡을 하고, 언론학을 배우지 않은 이들도 방송을 하는 시대에, 왜 미술계에선 진입장벽의 드높음을 강조할까?
구혜선이 소인(素:아마추어) 창작에 머물렀다면 그들에게 칭찬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전업 작가들이 참지 못하는 것은 그가 작품을 판매까지 한다는 사실일 게다. 생각해 보라. 자기들 작품은 안 팔리는데, 자기들이 보기엔 아마추어에 불과한 이들의 작품이 팔리다니,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그들의 생각대로 그가 연예인의 유명세를 이용해 ‘입시학원’ 수준의 작품을 팔아먹고 있다 치자. 그렇다 한들 그걸 불편하게 여길 이유는 없다. 팬심으로 그림을 사 주는 이들이 구혜선의 작품을 안 산다고 그 돈으로 예술성 높은(?) 전업 작가들의 작품을 사겠는가. 둘은 시장이 다르다.
이 적대감의 바탕에는 어떤 좌절감이 깔려 있는 듯하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극화가 제일 심한 곳이 미술계. 그곳에서는 미술계에 할당되는 사회적 부의 대부분을 소수의 스타작가들이 차지한다. 대다수의 작가들은 말이 ‘전업’이지 작품활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기조차 힘들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평균적 노동량으로 결정된다. 한 상품을 만드는 데에 A는 1시간, B는 2시간, C는 3시간이 들었다 하자. 이때 상품은 6/3=2의 가치를 갖는다. 1시간을 들인 A는 평균보다 1을 더 받고, 3시간을 들인 C는 1을 덜 받는 셈이다. 생산력이 높은 A가 생산력이 낮은 C의 노동량을 제 것으로 취하듯이 한 점에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을 받는 스타작가의 작품은 그 가치를 평균 이하로 평가받거나, 아예 가치 실현에 실패한 수많은 작가들이 흘린 땀의 결정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미술시장만큼 신자유주의적인 곳도 없다.
‘노동가치설’에 입각한 이 비판을 반박하는 자본주의적 어법은 ‘현대사회에서 가치는 노동력이 아니라 창의성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술계만큼 이 신자유주의 논변이 완벽히 들어맞는 곳이 다시 있을까? 노골적인 실력주의가 비판은커녕 외려 상찬되는 곳이 미술계가 아닌가.
예술은 시대를 앞서 왔다. 마르셀 뒤샹은 백 년 전에 개념과 물리적 실행을 분리했다. 요즘 기업들은 제품의 제작을 임금이 싼 나라에 맡긴다. 이른바 ‘양극화’는 미술계의 논리와 어법이 사회에 관철된 결과로 발생한 일종의 미학적 자본주의 현상이다. 예술이 꼭 유토피아인 것은 아니다.
이 창의성 신화의 근원이 실은 미술계. 그러니 작가들이 이 현상을 비판하기도 뭐하다. 그래서 표적을 잃은 분노가 연예인을 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가치실현을 거절당하는 무명작가들의 보편적인 운명에서 연예인들만 ‘예외’가 되는 게 ‘공정’하지 못하게 보였을 게다.
그들의 좌절은 요즘 젊은이들이 느끼는 그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그러니 그들의 분노 또한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08.12 NFT 작품, 펀드가 된 예술
간송재단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대체불가능 토큰’(NFT)으로 바꾸어 판매한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NFT 예술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부동산을 살 돈이 없는 이들이 가상화폐 투자로 몰리듯이, 고가의 작품을 살 돈이 없는 이들에게 NFT 예술은 매력적인 투자처로 떠오르고 있다.
육신을 버리고 영혼이 된 예술작품
작품 아우라는 소유권에서 나온다
NFT 작품은 금융자본주의의 산물
바보를 현자로 만드는 더 큰 바보
똑같이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도 NFT와 가상화폐는 다르다. 가상화폐는 대체 가능하다. 내 돈 만 원이나 네 돈 만 원이나 차이가 없듯이 비트코인 한 개는 다른 한 개와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반면 NFT 작품은 대체 불가능하다. 그것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물(unikat). 모종의 원작이다.
물론 해례본의 물리적 원본이 존재하는 한 NFT 훈민정음은 그저 복제(copy)에 불과하다. 그래서일까? 외국에선 NFT의 유일성을 보장하려고 아예 원작을 불태우는 일까지 벌어졌다. 뱅크시의 판화 ‘바보들’(2006)은 그렇게 NFT라는 이름의 영혼이 되어, 무려 40여만 달러에 팔려나갔다. 국보로 지정된 해례본이 그런 운명을 맞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원본이 존재하는 한 NFT 해례본의 가치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기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비록 물리적 원본의 유일성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NFT로서 유일성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NFT 예술은 애초에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져 물리적 실체 없이 그 자체로 원본이 된다. 이 기술에는 몇 가지 장점이 있다. 가장 큰 것은 아날로그 예술작품에 고질적으로 따라다니는 문제, 즉 위조의 시비에서 완벽하게 자유롭다는 것이다. NFT 예술은 진품성을 완벽히 보장한다. 나아가 NFT는 무명의 예술가들에게 전에는 없었던 기회를 제공해준다. 몇 푼의 돈만 내면 화랑을 거치지 않고도 작품을 NFT로 등록해 직접 대중에게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래 수수료가 드는 것도 아니고, 물리적 실체가 없기에 유통이나 보관에 따로 비용을 지불할 필요도 없다.
복제와 원작은 서로 배척한다. 원작은 유일성·지속성을 가지나, 복제는 반복성·일시성을 갖는다. 즉 ‘모나리자’의 복제는 수없이 많으나, 그것의 원작은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그것뿐이다. 500년을 지속해 온 원작과 짧게 존재하다가 버려지는 복제는 물리적으로도 분명히 구별된다.
NFT 예술은 복제와 원작의 이 전통적 차이를 지운다. 가령 NFT의 구입자는 그것을 제 홈페이지에 올려놓을 수가 있다. 그가 허용만 한다면 홈페이지 방문자들이 그것을 ‘Ctrl C’할 수도 있다. 그렇게 얻어진 복제도 원작과 아무 혹은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유일성을 갖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NFT 작품의 유일성이 ‘소유권’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원래 예술작품은 솔로몬의 재판에 나오는 아이와 같은 존재. 아이를 칼로 잘라서 나눠 가질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작품이 ‘소유권’으로 환원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온전한 작품을 팔아 대금을 나눠 가질 수는 있잖은가.
예술이 펀드가 된 셈인데, 사실 이 경향은 아날로그로 출발했다. 다미엔 허스트의 ‘신의 사랑을 위하여’(2007)는 백금을 씌운 해골을 8601개의 다이아몬드로 덮은 작품이다. 허스트는 이를 그 자신이 포함된 익명의 컨소시엄에 735억원에 팔고, 그 지분의 3분의1을 투신사에 팔아 제작비를 댔다.
그 작품은 어디에 있을까? 3분의1 지분만 가진 투신사에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투신사는 자신이 감상할 수도 없는 작품의 소유권의 일부만 가진 셈이다. 반면, NFT의 경우에는 작품을 공동으로 구입한 투자자들 각자가 온전한 작품을 가질 수 있다. 다만 소유권만 n분의1로 제한될 뿐이다.
원작은 유일물이기에 이른바 ‘아우라’(분위기)를 갖는다. NFT에서 유일한 것은 소유권. 오늘날 아우라는 작품의 물리적 현존이 아니라 그것의 소유권에서 나온다. 제조업에 기초한 산업자본주의는 오래전에 계좌에 기초한 금융자본주의로 변모했다. 이 상황이 예술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불태워진 뱅크시의 작품엔 크리스티 경매장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림 속 칠판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바보들, 저걸 정말로 사다니.’ 클릭 한 번으로 복제해 가질 수 있는 작품을 수억을 주고 사는 바보들. 이 바보짓의 토대는 그것을 더 비싼 값에 살 더 큰 바보들이 있다는 굳은 믿음이다.
NFT 작품은 가상화폐의 예술적 버전이다. 주식은 실물경제와 연동이 되어 있지만, 가상화폐는 그렇지 않다. 허스트의 작품은 물리적 오브제를 거래하는 예술시장과 연결되어 있으나 NFT 작품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그 위험한 바닥에 뛰어들어 폭탄 돌리기를 하는 바보들이 참 많다.
그들은 바보일까? 아니다. 허상이라는 가상화폐도 신입 바보들 덕에 여전히 유지되고 있잖은가. 태환화폐가 불환화폐로 바뀐다고 경제가 무너지던가? 새로운 예술시장에서 차익실현에 성공한 이들은 외려 기회를 보고도 놓친 나를 바보로 여길 것이다.
09.09 예술원은 꼭 존재해야 하는가?
소설가 이기호씨가 어느 문예지에 발표한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가 조용히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형식은 소설이나, 실은 대한민국 예술원의 고질적 문제를 드러내는 다큐멘터리 같은 작품이다. 그는 문화예술 예산의 삭감으로 지원사업에 응모했던 젊은 작가들이 줄줄이 탈락하는 상황에서 예술원만은 외려 예산이 증가했다는 사실을 알게 돼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작품이 지적하는 예술원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조직의 목적 자체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거기 계신 어른들 대부분 대학교수 출신이잖아요? (...) 교수로 정년 퇴직해서 매달 300만원, 400만원 사학연금 받으시는 분들이 예술원 회원이 돼서 또 매달 180만원 더 받아 가시는 거예요.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을. 이게 좀 비겁한 거잖아요?” 이미 잘 사는 분들에게 무슨 지원이 필요하단 말인가.
조직의 목적 자체가 불분명하고
운영도 폐쇄적, 그들만의 리그
예술 위한다면 명예만 취하고
돈 내가며 후배들 창작 지원해야
둘째는 조직의 구성과 운영의 폐쇄성이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그 선출 제도 때문이에요. 자기들이 스스로 예술원 신입 회원을 선출한다? 이게 말이 됩니까? (...) 아무리 뛰어난 작품을 썼다 하더라도 자기들하고 안 친하면 안 된다는 거잖아요?” 한마디로 자기들만의 리그라는 얘기다.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박경리 선생, 최인훈 선생도 회원이 아니라니, 거기 모인 분들은 얼마나 위대하신 분들일까?
예술원 예산 32억원 중 20억원 정도는 회원들에게 월 180만 원씩 나눠주는 수당으로 나간다. 나머지 10억 여원 중 4억원은 4개 분과에 1억원씩 나눠주는 대한민국 예술원상의 상금이란다. 그 상도 회원들끼리 나눠 받다가, 이에 대한 비판이 나오자 얼마 전에 외부인에게 주는 것으로 바뀌었단다. 하지만 수상자로 선정된 그 ‘외부인’도 결국은 회원들과 가까운 사람들. 대체 이런 조직이 왜 필요할까?
충남대 오길영 교수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예술과 국가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때로는 시대와 불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예술의 타고난 숙명”이다. 그런데 “국가가 지급해 주는 급여를 매달 따박따박 받는 ‘국가기관’에 속한 예술가가 그 국가의 행태를 뾰족하게 드러내는 작업에 힘을 쏟을 수 있을까?” 예술원이라는 제도 자체가 예술의 본질과 충돌한다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이런 인식이 몸에 배어있는 분이었던 것 같다. 아주 오래전에 어느 예술원 회원이 박경리 선생을 찾아뵙고 회원이 되실 것을 권유했단다. 그런데 박경리 선생이 이를 단칼에 거절하셨다고. “그딴 곳 안 간다.” 그들의 허위 의식이 역겨우셨던 모양이다. 국가에서 부여하는 예술원 회원으로서 명예 따위는 사실 작가나 문학의 본질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예술원이라는 제도에 대한 이 불신은 정당하다. 우리 예술원은 1950년대에 반공우익문인단체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그 모델이 된 것은 천황제 시절의 일본의 예술원이었다. 다른 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술 아카데미’(예술원)는 원래 이탈리아에서 탄생했으나,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하에서 예술적 취향마저 국가에 복속시키는 기관으로 제도화한다. 이것이 서구 예술원들의 뿌리가 된다.
‘예술원 회원’이라는 것이 명예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19세기 중반 이후 예술사에서 ‘아카데미’라는 명칭은 사실 욕설로, 즉 ‘인습에 매인 관제예술’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현대예술 자체가 아카데미에 대한 저항 속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예술원’의 존재가치를 의심하는 시각은 이 ‘모더니즘’ 예술혼에서 나온다. 사정이 이러하거늘, 도대체 이 시대에 예술원이란 제도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물론 그 기원이 절대왕정에 있다고 지금의 예술원이 관제단체인 것은 아니다. (이를 ‘발생론적 오류’라고 부른다.)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는 예술이라고 반드시 국가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 서구의 예술원들은 시민혁명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이 원칙을 관철해 왔고, 그 결과 지금 시민의 감각기관으로서 예술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한국의 예술원을 막대한 예산을 써가며 교육, 전시, 창작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서구의 예술원들과 비교하는 것은 매우 민망한 일이다. 예산이라고 달랑 32억원. 그걸로 무슨 예술을 진흥한단 말인가. 사실 한국(과 아마도 일본)의 예술원은 일종의 ‘보훈단체’다. 사실상 문화적 ‘신분제’의 기관으로 운영되니,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감시가 날카로워지면서 그 존재 이유마저 의심받게 된 것이다.
예술원이 정말 예술을 위한 기관이 되려면, 회원들은 오직 ‘명예’만을 취하고, 국가로부터 돈을 받을 게 아니라 돈을 내가며 후배들의 창작을 지원하는 조직으로 바뀌어야 한다. 일단 예술원이 제 기능을 하는 것으로 확인되면 국가의 지원을 대폭 늘릴 필요가 있다. 사실 이 나라에 그 말의 온전한 의미에서 ‘예술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우리도 번듯한 예술원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10.07 오징어 게임 단상
어릴 적만 해도 수많은 놀이들이 있어, 그 수가 거의 올림픽 종목에 달했다. 오징어, 다방구, 만세국기,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닭싸움, 기마전, 자치기, 구슬치기, 비석치기, 사방치기, 딱지치기, 팽이, 공기, 실뜨기 등등.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 그렇게 다양하고 풍부하게 놀았다. 그런데 그 많던 놀이는 다 어디로 갔을까?
호모 루덴스
학자들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으로 다양한 것을 거론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지성을 가졌다’(호모 사피엔스)는 것과 ‘도구를 제작한다는 것’(호모 파베르)이다. 네덜란드의 사회학자 하위징아는 흥미롭게도 인간의 종적(種的) 특성을 ‘놀이’에서 찾았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놀이하는 동물(호모 루덴스)이라는 것이다.
거대한 게임이 돼버린 우리 삶
‘오징어 게임’이 반향 일으킨 건
판타지 아닌 삶을 목격했기 때문
오징어 게임, 세계 곳곳서 진행중
하위징아에 따르면 인류의 문명 자체가 놀이로서, 놀이 속에서 자라 나왔다고 한다. 노동에는 꼭 춤과 노래가 따랐고, 공동체의 삶에는 축제가 필수적이었다. 학문조차도 현자들의 수수께끼 놀이에서 비롯됐고, 전쟁마저도 스포츠처럼 신사적 규칙에 따라 수행됐다. 검사와 변호사로 나뉘어 진행되는 재판에선 아직 놀이의 흔적이 엿보인다.
하지만 근대 이후 상황이 달라진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는 과거의 ‘호모 루덴스’를 ‘생각하는 인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캘빈은 직업을 신의 소명으로 설명했다. 그 결과 놀이는 신의 명령을 거스르는 태만의 죄악으로 여겨지게 된다. 놀 줄 모르고 오로지 일만 하는 ‘회사인’은 이 직업소명설의 세속적 실현이다.
근대 이후 삶은 진지해졌다. 어른들은 더 이상 놀지 않고, 놀이는 아이들의 전유물이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아이들마저 제대로 놀리지 않는다. 부모들이 어릴 적부터 사회에 나가 일할 준비를 시키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대신에 다른 아이들과 시험성적을 놓고 생존경쟁을 하고 있다.
어린 시절 ‘오징어 가이상’이라는 놀이가 있었다. 그 놀이가 이루어지는 공간에는 현실과 다른 규칙이 적용된다. 오징어의 머리와 몸통 사이로 난 좁은 길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두 발이 아니라 한 발로 다녀야 한다는 것. 이렇게 일시적으로 현실과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놀이의 특수한 공간을 ‘매직 서클’이라 부른다.
어른의 세계를 떠나 아이들의 놀이 속에서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이 매직 서클이 최근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디지털 혁명으로 삶 자체가 거대한 게임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놀이를 이용해 학습을 하고, 기업에서는 경영과 생산의 효율을 높이는 데에 놀이의 전략을 활용한다. 이른바 ‘게이미피케이션’의 시대다.
모든 것이 무서운 기세로 놀이와 결합하고 있다. 교육은 ‘에듀테인먼트’로, 정치는 ‘폴리테인먼트’로, 정보공학은 ‘인포테인먼트’로 변해가고 있다. 심지어 저널리즘마저 과거의 진지함을 잃고 일종의 콘텐트 사업, 모종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변모했다. 독자나 시청자들은 보도의 가치를 ‘사실’보다는 ‘재미’에 두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는 대변인 선발을 ‘토론 배틀’이라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치렀다. 여기서 우리는 2030 세대 특유의 ‘유희적’ 정치의식을 엿볼 수 있다. 기성 정치인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이 유희화 물결에 올라타고 있다. 감각이 떨어지다 보니 방식은 구리다. 며칠 전 안상수 전 인천시장은 대선후보 토론장에 토르 망치를 들고 나왔다.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정보혁명과 더불어 산업자본주의는 빠르게 유희자본주의(ludo-capitalism)로 진화하고 있다. 이는 역사의 필연이다. 일찍이 카를 마르크스는 미래에 도래할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이 유희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의 공산주의적 유토피아가 오늘날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실현된 셈이니, 이보다 더 큰 역사의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하지만 삶의 유희화가 그의 생각대로 마냥 유토피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오래전에 사라진 놀이들을 다시 불러낸다. 하지만 그렇게 불려 나온 기억은 추억보다는 악몽에 가깝다. 유희자본주의에서 삶은 게임이 될지 모르나, 그 게임은 삶처럼 끔찍한 것일 수 있다.
‘배틀 로얄’ ‘헝거 게임’ 등 데스 게임을 모티브로 한 영화는 전에도 많았다. 그런데 왜 하필 ‘오징어 게임’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일까? 그것은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리얼리즘 때문이리라. ‘오징어 게임’에서 대중은 판타지가 아니라 삶 자체를 보았다. 우리의 삶이 이미 데스 게임의 매직 서클에 갇혔다는 얘기다.
마르크스가 꿈꾸던 ‘노동의 유희화’는 우리 사회에서 디스토피아로 실현되었다. 여기서 삶은 게임이 되었다. 생명을 건 대박의 놀음이 되었다. ‘오징어 게임’이 한국을 너머 세계적 반향을 일으킨 것은, 설사 여기서만큼 극단적 형태는 아니더라도 그 현상이 이미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리라.
10.28 증오는 나의 힘
이번 대선은 증오 투표가 될 것이다. 어느 캠프에도 제 후보에 열광하는 분위기는 없다. 그저 상대 후보를 향한 적의가 있을 뿐. 상대에 대한 증오, 이것이 그들이 자기 편 후보를 지지하는 유일한 이유다. 어쩌다가 정치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나마 위안이 있다면 이게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트럼프 정권 이후 이 현상이 극명해졌다. 과거에는 민주당에도 공화당 스러운 의원들이 있었고, 공화당에도 민주당 스러운 의원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두 당이 서로 섞일 수 없게 확연히 갈렸다. 그렇게 진영으로 갈린 유권자들이 서로 상대에게 적의와 증오를 퍼붓는 게 정치의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감정 중 사랑보다 강한 게 증오
대선, 상대에 대한 적의만 남아
여기에 특정 집단 혐오 더해져
다섯 달 증오의 극한 경험할 것
물론 과거에도 두 진영 사이에는 적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엔 그 정도가 지나쳐 아예 대화와 타협에 기초한 민주주의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릴 지경에 이르렀다는 진단이다. 문제는 증오의 감정에 기초한 정치를 다시 이성적 대화에 기초한 정치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데카르트 같은 합리주의자들은 이성으로 감정을 길들일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경험주의자 흄은 데카르트의 생각은 비현실적이라 결론짓는다. 일상을 관찰해 보니 이성이 감정을 이기는 경우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 대안으로 흄은 이이제이의 전법, 즉 특정한 감정을 그보다 더 강력한 감정으로 제어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런데 인간이 가진 수많은 감정 중에서 제일 강력한 게 증오의 감정이 아닌가. 사랑이 아무리 힘이 센들 증오만큼 집요하고 강렬할 수는 없다. 그러니 다른 감정으로 증오를 제어한다는 흄의 전략도 여기엔 소용이 없다. 문명이란 거대한 감정의 용 덩이를 둘러싼 얇은 맨틀 같은 것. 한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악마’다. 그 증오가 얼마나 강렬한지 조국 사태 때 조 전 장관의 지지자들은 윤석열 저주 인형을 만들어 바늘로 찔러 댈 정도였다. 이때 형성된 ‘악마상’은 정경심 교수의 중형선고로 검찰 수사의 정당성이 법원에서 인정받은 지금까지도 원형 그대로 지지자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
야당 지지자들에게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조폭시장’. 그들은 ‘아수라’를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로 여긴다. 심지어 영화 속 안남시의 모델이 성남시였다는 설까지 떠돈다. 흥행에 실패한 이 영화가 최근 넷플릭스에서 역주행을 하고 있단다. 야당 지지자들의 머릿속에 이재명 후보는 그렇게 안남시장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
그 이상으로 강력한 게 이재명 후보에 대한 이낙연 지지자들의 증오. 그들에게 이재명은 제 형을 강제로 정신병원에 보내고 형수에게 쌍욕을 퍼붓는 ‘사이코패스’다. 형수에게 쌍욕을 하는 녹취록, 시 의회에서 삿대질하고 철거민에게 폭언을 하는 영상 등 그의 남다른 인성을 강조하는 자료들은 대부분 이들이 유포한 것이다.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별다른 정보가 없을 때 사람은 일단 사안을 호오의 감정으로 판단한다. 이 최초의 이미지는 너무 강렬해 그 이후에 따르는 이성적 판단을 제 아래 종속시켜 버린다. 그때 이성은 고작 감정이 내린 최초의 판단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게 된다.
정치인들도 증오의 정치에 나섰다. 유권자를 이성으로 설득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효과를 거두는 기법을 왜 마다하겠는가. 이재명 후보는 ‘윤두환’ 상을 만들려고 전두환 비석을 밟았다. 원희룡 후보는 이재명을 ‘소시오패스’라 불렀고, 조국 전 장관은 윤석열을 ‘사시(司試)오패스’라 불렀다.
증오가 특정 인구집단을 겨냥하면 혐오가 된다. 정치인들은 증오만이 아니라 혐오까지 이용한다. 이재명 후보는 의사집단, 특정 종교집단에 대한 증오를 활용해 지지율을 끌어올려 왔다. 국민의힘 후보들의 경우에는 여성혐오와 노조 혐오가 아예 공통 공약이 되다시피 했다. 지지율이 증오와 혐오에서 나오고 있다는 얘기다.
왜 이렇게 됐을까? 그 바탕에서 나는 이 사회의 어떤 부정적 상태를 본다. 어차피 비전도 희망도 없는 세상. 그 해결책마저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그 불행의 원인으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지목해 미워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한다. 증오와 혐오가 이 가혹한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유일한 힘이 된 것이다.
얼마 전 ‘설거지론’이라는 것으로 SNS가 시끄러웠다. 그 바탕에서도 어렵지 않게 여성 혐오를 읽을 수 있다. 계층 사다리가 끊어진 사회. 치열한 오징어 게임에서 패한 이들이 자신이 겪어온 사회적 좌절을 자조에 가까운 여성 혐오로 풀어내는 것이다. 좌절과 체념조차도 이제는 혐오 없이는 할 수 없게 된 모양이다.
증오는 우리의 힘이다. 우리는 증오로 버티고 있다. 증오할 누군가가 필요할 때 만만한 게 정치인, 그것도 상대당 후보. 앞으로 대선까지 다섯 달 동안 증오의 극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끔찍하다.
12.02 로봇과 감정이입
얼마 전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가 로봇박람회 ‘2021 로보월드’ 현장에서 4족 보행 로봇을 넘어뜨렸다가 ‘로봇을 학대’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후보는 성능실험을 위해 주최 측에서 권유한 일이었다고 해명했지만, 대중의 눈에는 로봇을 다루는 모습이 다소 난폭하게 비친 모양이다. 한갓 기계에 불과한데, 왜들 그렇게 불편해 하는 걸까?
사실 이 소동은 처음이 아니다. 몇 년 전 보스턴 다이내믹스에서 균형회복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4족 보행 로봇을 난폭하게 걷어차는 영상을 공개한 적 있다. 그때도 전 세계의 네티즌들이 ‘로봇 학대를 중단하라’는 표어와 로고를 만들어 퍼뜨리며 이에 항의한 바 있다. 로봇이 고통을 느끼는 것도 아닐 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거 기능성 로봇은 기계로 분류최근엔 AI 장착한 반려로봇 등장로봇학대 논란, 감성이 바뀐 때문기술발전이 가져온 변화 수긍해야
로봇 제작자와 로봇 사용자가 로봇을 대하는 태도가 같을 수는 없다. 공학자들은 로봇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로봇을 온갖 극한적 조건에 몰아넣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괴롭혀야 한다. 반면 그 로봇과 더불어 살아야 할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반려 로봇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것은 당연히 부당한 ‘학대’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두 집단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감정이입’(empathy)이다. 로봇을 개발할 때 공학자는 되도록 감정이입을 배제해야 한다. 그래야 그 어떤 조건에서도 기능하는 좋은 로봇을 만들 수 있다. 반면 사용자의 경우에는 로봇과 감정이입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인간의 감정이입을 끌어내는 기계야말로 성공한 로봇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모든 로봇에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원반처럼 생긴 청소 로봇이나 자동차 공장의 조립 팔을 생각해 보라. 이런 기능성 로봇(service robot)에 감정이입을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감정이입의 대상이 되는 것은 주로 그 외양이나 행동이 인간이나 동물을 빼닮은 반려 로봇(companion robot)들이다.
듣자 하니 최근 로봇의 개념 자체가 변하고 있다고 한다. 로봇에 인공지능이 장착되면서 과거의 기능성 로봇들은 더 이상 로봇이 아니라 그냥 기계로 분류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교적 로봇(social robot), 즉 인공지능을 장착해 유사 인격체로 행동하는 기계만이 본격적인 로봇, 진정한 로봇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감정이입이 로보틱스의 중요한 주제로 떠오른 것은 그 때문이다. 2000년대 초 첫 논문이 등장한 후 최근 10년 동안 로봇과 감정이입의 관계를 다룬 논문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아주 거칠게 구분하면 주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로봇에 감정이입 능력을 부여하는 과제, 다른 하나는 로봇에 인간이 감정을 이입하는 문제다.
전자는 물론 인간의 감정을 읽어내고 그에 적합한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로봇을 개발하는 공학적 과제다. 후자는 로봇이라는 유사 인격체의 법적 지위에 관한 법학적 논의, 혹은 로봇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관련된 복잡한 철학적, 윤리학적 논의다. 이번에 문제가 된 ‘로봇 학대’ 논란은 물론 후자의 문제영역에 속한다.
그깟 기계에 감정을 이입하다니 어떻게 보면 황당한 일이다. 실제로 이재명 후보의 지지자들은 고작 기계에 ‘학대’라는 표현을 적용하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그저 자기 후보를 공격하기 위해 동원한 부당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로봇을 학대했다고 비난하는 이들의 동기가 마냥 순수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번 논란의 바탕을 이루는 사회적 감성의 변화를 보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는 개를 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이들이 개의 식용에 거부감을 느낀다. 얼마 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개식용에 반대한다’면서도 ‘식용견은 따로 있다’고 했다가 커다란 곤욕을 치른 바 있다. 사회적 감성이 달라진 것이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동물을 기계로 여겼다. 다만, 신이 만든 기계라서 인간이 만든 기계보다 더 복잡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내의 반려견을 해부하기까지 했다. 그의 제자 말브랑시에 따르면 동물은 기계라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동물이 비명을 지르는 것은 부품과 부품이 맞부딪혀 내는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이게 ‘정상’이었을지 몰라도, 오늘날 누군가 이런 소리를 한다면 ‘사이코패스’로 간주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동물들도 우리처럼 고통을 느끼는 존재임을 안다. 얼마 전 파스타를 만들려고 무심코 조개들을 산 채로 프라이팬 위에 올려놓았는데, 그 뜨거운 열기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사회적 감성이 변한 것이다. 이른바 ‘로롯 학대’ 논란은 사회적 감성의 ‘역전’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과거에 인간들은 생명체마저도 죽은 물건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벌써 죽은 사물까지도 일종의 생명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로봇이 생명을 닮아갈수록 이 경향은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타자의 고통을 대신 느끼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기술이 가져온 이 변화를 이제 긍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12.30 "설강화가 문제? 그럼 '쉰들러 리스트'는 나치 미화냐"
‘설강화’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 드라마가 군부독재를 미화하고 민주화운동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누군가 청와대에 드라마의 방영중단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을 올렸고, 20만 명이 넘는 이들이 거기에 서명을 했다. 그것으로 모자랐는지 이 드라마가 ‘반헌법적’이라는 청원까지 올라왔다.
이를 말려야 할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까지 거들고 나섰다. “운동권에 잠입한 간첩, 정의로운 안기부, 시대적 고민 없는 대학생, 마피아 대부처럼 묘사되는 유사 전두환이 등장하는 드라마에 문제의식을 못 느낀다면 오히려 문제다.” 대체 그런 설정에 왜 문제의식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운동권에 간첩이 잠입했다고 설정하면 안 되는가? 극히 일부지만 1980년대 운동권이 간첩과 접촉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짓 하다가 전향한 이들까지 있다. 하지만 간첩 몇몇이 끼어 있었다고 민주화운동 자체가 북한의 지령이 되는가? 그거야말로 당시 보안사와 안기부의 논리 아닌가.
‘설강화’ 공격은 운동권의 시대착오
민주화에 간첩잠입 설정 왜 안되나
안기부 1명 정의로우면 미화인가
상투적 세계관으로 창작억압 안돼
안기부 요원 딱 한 명을 정의로운 인물로 설정한 것이 안기부라는 기관 자체를 미화한 것인가? 그런 논리라면 영화 ‘피아니스트’와 ‘쉰들러 리스트’는 나치 집단 전체를 미화한 극악한 영화라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현실로도 존재할 수 있는 일이 왜 드라마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걸까? “시대적 고민 없는 대학생”이란다. 그런데 내 기억에 따르면 학생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80년대에도 캠퍼스에서 다수를 점한 것은 그 시절 운동권이 “시대적 고민 없는 대학생”이라고 비난했던 이들이다. 80년대 대학생은 무조건 ‘시대적 고민’을 하는 인물이어야 하는가? 그거야말로 현실 왜곡이다.
이 소통의 바탕에는 독특한 미학이 깔려 있다. 소설 속의 ‘개인’은 이른바 ‘전형’, 즉 한 ‘집단’의 표상이어야 한다는 관념. 바로 80년대 운동권의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이다. 결국 그 낡은 미학에 따라 한 ‘개인’을 한 ‘집단’의 표상으로 간주하다 보니 21세기에 이런 시대착오가 벌어지는 것이다.
‘전형론’의 고질적 문제는 문학적 형상의 묘사를 상투화한다는 데에 있다. 즉, 안기부 요원들은 모두 사악하고, 운동권은 언제나 순결하고, 80년대 대학생은 누구나 ‘시대적 고민’을 하는 존재로 묘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전형에서 벗어난 묘사를 했다가는 곧바로 ‘반동’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1930년대에 독일의 화가 그로스. 그도 노동자를 영웅적 ‘전형’에서 벗어나게 묘사했다고 ‘프티부르주아 반동’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동지들은 내가 노동자를 묘사하는 방식에 반대한다. 나의 프롤레타리아가 진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프티부르주아가 빚은 인공적 형상이라는 것이다.” 리얼리즘도 하나의 미학이니 그것을 비평의 기준으로 삼는 것을 탓할 일은 아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그저 ‘하나’의 미학이라는 사실이다. 그 ‘하나’ 외에도 드라마를 보는 다양한 시각들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저들은 자기들의 낡은 미학만이 유일하게 옳은 시각이라 강변한다.
여기까지도 참아줄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집단의 위력으로 그 낡은 관념을 강요하는 데에 있다. 기업들을 압박해 광고를 끊고, 방송사를 공격해 방영 중단을 요구한다. 그저 그들만큼 머리가 나쁘지 않다는 이유에서 졸지에 드라마 볼 기회를 빼앗긴 다른 시청자들의 권리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이런 일이 반복되면 창작자들은 자기검열을 강화할 수밖에 없고, 이는 미학적으로 치명적 결과를 낳게 된다. 심상정 후보의 말을 들어보자.
“엄혹한 시대에 빛을 비추겠다면, 그 주인공은 안기부와 남파간첩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피와 땀, 눈물을 흘렸던 우리 평범한 시민들이 돼야 한다.”
한 마디로 ‘오직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인민대중(“우리 평범한 시민들”)만이 이런 드라마의 문학적 영웅이 될 자격이 있다’는 얘기. 이런 종류의 지침에 따르다 보면 북한에서나 만들 법한, 뻔한 설정의 상투적 작품들만 나오게 된다. 이게 창작을 얼마나 질식시킬지 굳이 말해야 하는가.
리얼리즘의 역설은 실은 ‘리얼’과는 아무 관계 없다는 것. 그로스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내가 그리는 것과 다른 프롤레타리아를 상상할 수 없다. 나는 그들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저임금에 시달리고, 냄새 나는 집에서 살며 때로는 ‘정상에 오르라’는 부르주아적 욕망에 지배당한다고 본다.”
이게 ‘리얼’ 프롤레타리아트다. 심 후보가 말한 “우리의 평범한 시민들”도 6·10항쟁 바로 전날까지는 ‘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한다’고 욕을 했었다. ‘리얼’ 대중은 용감한 혁명가이면서 동시에 비겁한 기회주의자다. 상투형으로 전형화하기에 인간은, 그리고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다.
자신의 상투적 세계관으로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 그거야말로 민주화운동이 추구하던 가치의 배반이다. 자신의 교조적 관념으로 상상의 영역마저 통제하려 드는 자들. 이 이념 깡패들이야말로 열린 사회의 적들이다. 민주화운동은 우상이 아니다. 그것을 남조선 수령으로 만들지 말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