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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9/ 정치분야4/ 전여옥 의원 - 황주홍 의원

상림은내고향 2021. 12. 22. 19:50

사람들9/ 정치분야4/ 

□전여옥 2012-02-06 

"2005년 박근혜에게 우비 모자를 씌워준 것은…"

"난 의리의 돌쇠 '장세동' 아니다… 정치는 몸부림치며 벌이는 전투"

조폭의 충성심은 내게 없어… ‘배신녀’ 등 온갖 모욕 견뎌… 박근혜는 남 배려할 줄 몰라

“모든 사람에게 다 맞춰주고 좋은 게 좋다 식으로는 못해 나는 결코 위선적이진 않아”

 

전여옥 의원은“여당은 표를 얻겠다고 불쌍한 가족 버리고 도망치는 아비꼴 아닌가”라고 말했다./정경렬 기자 krchung@chosun.com

 

전여옥(53) 의원은 곱게 꾸미고 나왔으나, 나는 수식(修飾) 없이 물었다.

 

―박근혜 위원장을 왜 계속 공격하는가?

"당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자잘한 계산을 했다면 박근혜 세력에 맞서 힘든 정치를 안 했을 것이다."

 

―당신은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당을 위한 역할은 있다. 하지만 대선 후보가 되면 필패(必敗)다. 2007년 경선에서도 그런 판단을 했고 지금도 그렇다."

 

―지지도나 대선 날짜를 따져보면 여당에서는 다른 대안이 없지 않은가?

"지금의 여론조사에 연연하지 마라. 부질없다. 이회창도 그랬고 안철수도 그렇다. 문재인이 치고 올라가는 것을 보라. 노무현은 2%에서 시작했다. 당내에도 대통령 후보가 꽤 있고, 외부에도 있다고 본다."

 

―사적 감정이 개입되지 않았나?

"나는 한나라당에 들어와 열심히 일했고 많은 것을 봤다. 내가 보고 느낀 것에 대해 전달하는 것도 정치인의 의무다. 입 다물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용서받을 수 없다고 본다."

 

―당신은 얼마 전 낸 책에서 대변인 시절인 2005년 대구 행사 때 박 대표에게 우비 모자를 대신 씌워준 상황을 사진과 함께 실었다.

〈나는 바로 뒷줄에 앉아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의원들이 내게 말했다. '전 대변인, 뭐 하고 있나? 대표님 머리 씌워드려야지.' 순간 나는 당황했다. 자기 우비 모자는 자기가 쓰면 되는 것 아닌가?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자 카메라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졌다. 박근혜 대표는 한마디도, 미동도 없었다.〉

 

―모자 씌워준 것이 그렇게 자존심에 상처가 됐나?

"당시 친박(親朴) 의원들이 씌워주라고 소릴 질렸다. 5분간 지속했다. 그 사진이 어떤 식으로 실릴지 알았다. 내가 '무수리'나 시중꾼처럼 될 것이다. 그는 굉장히 잔혹한 사람이었다. 씌워주나 안 씌워주나, 내 충성심을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 그 뒤로 '박사모'들이 이 사진을 두고 '이렇게 딸랑이처럼 굴던 전여옥이 배신했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나라면 자발적으로 일어나 모자를 씌워줬을 것이다. 그까짓 게 뭐 대단한가.

"내가 왜 씌워줘야 하나. 나라면 내가 쓴다. 나는 당 대변인이지 모자를 씌워주는 개인비서가 아니다. 그는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수행비서에게 내 가방을 안 들게 한다. 사람은 다 똑같은 것이다. 가끔 들어줄 때가 있어도, 누가 보면 내가 빼앗는다."

 

―당신이 정몽준 전 대표의 땀을 닦아주는 사진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더라.

"그런 사진이 있다면, 아마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나는 위선적인 사람은 아니다. 위악적일 수는 있지만."

 

―그 뒤로 1년 10개월 '장수(長壽)' 대변인을 지냈고 당직 개편으로 물러났다. 둘의 관계에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꼭 그 하나의 상황 때문만이 아니고, 가까이 지켜보면서 놀라웠다. 어느 행사 방명록에 한 줄 쓰는데 10분을 고민한다. 옆에서 '이렇게 쓰면 된다'고 해도 안 들었다. 한참 뒤 '박근혜' 이름 석 자만 쓰더라. 자택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책장에 통일성 없는 책들이 꽂혀 있었다. 나는 그걸 보면 안다. 지도자가 될 사람은 지적 능력과 순발력이 중요하다. 처음엔 나도 여성대통령을 원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 내 판단은 옳다고 생각한다."

 

―한때 모셨던 사람에게….

"나는 '모셨다'는 말도 싫다. 평등하게 얘기하지. 부모님 외에는 잘 안 모신다."

 

―함께 오래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날들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 아닌가. 약점만을 까발리는 게 과연 옳은가. 우리 정서에도 맞지 않다.

"그런 비판은 내가 책임지면 된다. 나는 의리의 돌쇠 '장세동'이 아니다. 조폭(組暴) 같은 충성심으로 누구를 우상화하는 것이 우리 정치를 망쳤다. 베일이나 신비주의를 덮어쓴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이 우리나라를 위한 지도자감인가, 나는 관찰한 것이다. 나는 정권 교체를 위해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런 목적이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누구의 사람이 되려고 정치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2006년 전당대회'에서 여성 몫으로 배당되는 최고위원이 되라는 '친박'(親朴)의 주문을 무시하고, 득표순에 의한 최고위원이 되려고 뛴 게 결별 사유라고 들었다. 이 때문에 표가 분산돼 친박 몫 최고위원 자리 하나가 줄게 됐고.

"나를 박 대표의 '복심'(腹心)이라고 했는데, 그런 말도 싫었다. 어차피 인간적인 관계를 깊이 맺지는 않았다. 누가 승리를 가져다줄 것인가, 정권 교체를 해줄 후보를 나는 찾고 있었다. 취약점이 많은 박근혜 후보로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막바지에서 이명박 캠프로 건너갔다. 그렇게 갈 수는 있지만, 보통 사람 같으면 의리나 남의 눈 때문이라도 공격에 앞장서진 못할 것이다.

"나도 그쪽 진영으로부터 '배신녀'라든지 그 못지않은 핍박을 받았다. 그 계산은 끝났다. 나는 좌파정권으로부터 정권을 되찾아오는 게 목적이었다."

 

―그때의 박근혜와 지금의 박근혜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

"그때가 더 순수한 데가 있었다. 한나라당의 승리만을 위해 일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요즘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닌가."

 

―박 위원장의 원칙과 소신은 높이 평가되지 않는가?

"2008년 총선 때 한나라당의 어떤 후보가 사진을 같이 찍어달라고 했을 때 들어주지 않았다. '친박'을 표방하는 당 밖의 후보들이 그와 찍은 사진을 걸어놓고 선거운동을 했다. 당적은 한나라당이면서 무소속 혹은 친박연대의 손을 잡아주는 게 원칙인가. 나 같으면 탈당한다. 당적을 버리고 이 사람들과 같이 가겠다고 해야 한다. 사람은 분명해야 한다. 혼인 신고는 한나라당과 하고, 밖에 나간 사람과 손을 잡는 것은 어떤 원칙인가."

 

―당신은 '박근혜 저격수'라는 말은 듣지만, 야당 대선주자를 집요하게 공격한 적 없다.

"노무현이나 한명숙에 대해 공격해왔다. 좌파 정권에 맞서 나만큼 치열하게 싸운 사람이 없다. 지금은 우리 안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본다. 사랑하는 보수정당이 '박근혜당'이 된다는 게 안타깝다. 그냥 추대의 분위기로 가는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 이건 아니다. 하지만 공천을 앞두고 있어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얘기한다."

 

―일반 국민이나 당내에서는 '박근혜'라고들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현실이 그러한데 본인 혼자 부인하는가?

"나만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박 위원장이 성공하려면 4월 총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하고, 그 뒤로 혹독한 검증을 거쳐야 한다. 그게 불가능한 구조다."

 

―야당은 통합하고 전열을 갖추는 마당에, 당신의 언행은 '적전분열'이 될 수 있지 않은가?

"노선투쟁 한번 안 해 보고, 정당 정책도 포퓰리즘 빼고는 없다. 이게 너무 속상하다."

 

―한나라당 비대위가 정강·정책 개정안을 확정 발표했을 때, "그래 전권 잡았으니 다 좋다. 그런데 북 인권과 개방을 삭제한다? 진짜 미쳤는가"라고 공격했다. 당이 나름대로 살길을 찾아가려고 애쓰는 모습은 안 보이는가?

"마치 우리 몸에서 뇌와 척수(脊髓)를 빼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에서 북 인권과 개방을 삭제하는 것은 북한 주민을 동포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북한 주민을 버리면, 중국 미국 일본이 보호해주겠나. 우리 당이 당장 표를 얻겠다고, 불쌍한 가족 버리고 도망치는 아비 꼴이 아닌가. 정당의 문을 닫는 게 낫지. 이름은 갈 수 있어도 성(姓·정체성)은 가는 게 아니다."

 

―당신이 추구해온 이념과 가치에서 멀어지는 정당이라면 그 속에서 나와야 하지 않는가?

"너무 환멸스러워 정치를 그만둘까 고민했다. 몇몇 사람들과도 상의했다. 하지만 이 상황이 오래 못 갈 것이라고 본다. 4월 총선이 지나면 많이 바뀔 것이다. 이 당을 내가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당이 박근혜당은 아니다. 비대위에서 어떻게 하든 보수의 가치가 여전히 살아있다. 성(姓)이 안 갈렸다."

 

―그 보수의 가치는 뭔가?

"자유와 선택, 책임이다. 인간은 어떤 어려운 상황에 놓이더라도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성장시킬 책임이 있다. 국가가 그걸 다 해줄 수는 없다. 아무리 힘들고 가난해도, 굴복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정당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정치인은 회색과 중간지대가 없다"고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

"중립·중도를 표방하는 정치인은 가짜 정치인이다. 정치인은 가치와 이념을 위해 국민에게 '이렇게 가야 한다'고 몸부림치며 호소하고 설득해야 한다. 눈을 번득이며 말해야 하는 사람이다. 어디로 갈지 마음 정하지 못한 중도층을 우리 편으로 끌어와야 한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본인이 '강성(强性)' '독설'로 찍혀 있다는 걸 아나?

"내 단어는 정제돼 있는데, 아프게 들렸을 것이다. 정치에 들어와 인내를 배웠고 모욕에 견디는 것을 배웠다. 온 세상이 돌을 던져도 꿋꿋하게 앞으로 갈 수 있는 것을, 그게 자랑스럽다는 것도 배웠다."

 

―지명도는 높지만 지지율은 높지 않다.

"나는 인기인도 연예인도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맞춰주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하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대통령 될 생각이 없다. 나는 내 목적에 충실한 것이다. 이런 정치인도 한명은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당신의 진실성에 관한 것이다. '일본은 없다' 표절 시비 소송에서 1심과 항소심에서 모두 졌다. 대법 판결이 일년이 지나도 나지 않고 있다.

"2004년 내가 소송을 제기해 시작됐다. 나는 정치인보다 글을 쓰는 작가에 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항소심에서 졌을 때 가슴이 아프고 잠을 못 이뤄 수면제를 먹기도 했다. 나는 정말 부끄러운 게 없다."

 

―당신은 "나는 돈이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정치인이 돈에 대해 이처럼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좋아하니까. 나는 위선을 싫어한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나. 예쁜 여자 싫어한다는 남자와 똑같은 거다. 나는 돈이 없어 본 적이 있다. 부모님은 6개월 걸려 교대로 입원하고 동생은 셋이었다. 내가 맏이였다. 내가 해결해야 했다. 돈을 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지고 중요한지 안다."

 

―주식투자에서 많이 벌었다고 들었다.

"나 자신의 운명과 돈은 내가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점에 가서 책 100권쯤 사서 주식공부를 했다. 책 인세와 강연료를 투자했다. 지금은 펀드에 맡겼다. 나는 한번 꽂히면 에너지가 빵 터져나온다. 정치도 그렇다. '오늘 이런 말은 하지 말아야지' 하다가 '내일 그만둘 수도 있는데' 생각하면 거침없다. 나는 예민할 때도 있지만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니다."

 

이런 그녀를 적(敵)으로 두면 몹시 피곤할 것이다.

조선일보 정경렬 기자

 

2016.11.26 전여옥 전 의원이 옆에서 지켜본 ‘박근혜 대표’

2004년 김무성·유승민과 함께 ‘원조 친박’, 2007년 대선 때 MB 지지선언과 함께 탈박(脫朴)

“다음 대통령은 새누리당에서 나오면 안돼… 야당은 국민이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후보 내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민심이반이 가속화되고 있다. 하야(下野)·탄핵(彈劾) 같은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이런 가운데 ‘원조 친박’에서 ‘반박’의 선봉으로 돌아섰던 전여옥(57)

 

전 새누리당 의원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는 전 전 의원의 어록이 회자(膾炙)될 정도다. 그는 17대 대선을 8개월 앞둔 2007 4월 “박근혜 대표 주변 사람들은 무슨 종교집단 같다”며 박근혜 대통령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전여옥 전 의원이 옆에서 지켜본 ‘박근혜 대표’

전여옥 전 의원은 2012 19대 총선 이후 ‘조용히’ 살아왔다. 낙선과 함께 정계를 떠나 범인(凡人)으로 돌아갔다. 4년여 동안 침묵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해서다. 박근혜 대표 시절이던 2004~2006 2년 동안 한나라당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전 전 의원은 당시 김무성 사무총장, 유승민 대표 비서실장과 함께 ‘원조 친박’으로 불렸다. 그랬던 그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대통령이 될 수도 (없고), 돼서도 안 되는 후보라고 생각한다”며 박근혜 후보의 곁을 떠났다. 전 전 의원은 2012년 초에는 <i전여옥-전여옥의 私, 생활을 말하다>를 출간해 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그는 “박근혜 대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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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11 7일 오후 서울 목동의 한 커피숍에서 한때 ‘박근혜의 입’으로 불리던 전 전 의원과 만났다. 그는 “최근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지만 대부분 거절했다. 이미 정계를 떠난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좀 부담스럽다”며 말문을 열었다.

 

“최순실 국정농단은 예견됐던 일” 

19대 총선 낙선 이후 소식이 뜸했는데.

“아들한테 집중하면서, ‘육아’에 전념했다. 정치를 했던 8, 9년 동안 아이가 상처를 많이 입었다. 새벽 5시에 나가서 경로당·산악회 등 지역구 행사에 참석하고 집에 들어오면 밤 12시였다. ‘저녁 먹었니?, ‘영어학원 다녀왔니?’ 정도 묻는 게 전부였다. 지역구 어느 단체의 이사장님이 감기 걸리신 것은 챙기면서도 정작 내 아이는 돌보지 못했다. 지난 4년간 공부도 많이 하고 여행도 많이 다녔다. 뜻 깊은 시간들이었다. 국회에 있을 때 미처 보지 못했던 교육문제·청년문제 같은 것을 현장에서 많이 보고 느꼈다.


전 전 의원은 최근에 <흙수저 연금술>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머리말에서 “아들 꿀단지에게 늘 미안한 엄마다. 그러나 사랑만은 다른 엄마들 못지않다는 것을 꼭 알게 해주고 싶었다. 나의 넘치는 사랑으로 아들의 꿀단지를 채워주고 싶었다. 많은 것을 잘 견뎌준 꿀단지를 위해 이 책을 썼다. 엄마의 고마움을 담아 이 책을 나의 아들 꿀단지에게 준다”고 적었다.
 


현역의원일 때와 비교해보면 얼굴의 인상도 좀 달라진 것 같다.

“다들 그런 얘기를 한다. 이런 난국(亂局)에 좀 죄송한 말이지만 여의도를 떠난 뒤로 마음이 참 편해졌다. 국회의원 할 때는 운전기사가 딸린 차를 타고 편하게 다녔지만 힘든 부분도 많았다. 한마디로 자유가 너무 없었다.

 

▲2004년 박근혜 대표가 주요 당직자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유승민 비서실장, 박근혜 대표, 김무성 사무총장, 전여옥 대변인. 

 

‘최순실 게이트’로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이런 일을 예견했었나?

“예견됐던 일이다. 옆에서 지켜본 박근혜 대표는 지성 부족, 순발력 부족, 어휘력 부족, 콘텐트 부족이었다. 비선(秘線)의 결정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황당한 일들이 많았다. 백 번 양보해서 당대표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대통령이 돼선 안 될 인물이다. 일본의 아소 다로(麻生太郞) 전 총리, 미국의 조지 부시 전 대통령도 지성이 빈약한 편이긴 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정상적인 사고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인물이다. 모든 것이 비정상이다.


박근혜 대통령 주변 사람들이 최순실 씨의 존재를 몰랐나?

“김무성 전 대표도 ‘최순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사람들이 말하지 않았던 것은 박근혜 대표가 미래권력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 인기와 지지를 거부할 수 없었기에 오히려 이용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결국 ‘문고리 3인방’도 머슴에 불과했던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그 점은 (박근혜 대표가) 대통령이 되기 전과 후로 나눠야 할 것 같다. (고 이춘상 씨를 포함한) 당시 4인방은 말수가 적었다. 안봉근 수행비서만 의원들과 접촉했다. 가끔 의원들이 ‘대표에게 얘기 좀 전해달라’고 하면 안 비서는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라고 했다. 철저하게 정윤회·최순실 씨의 심부름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MB정권 후반기에 들어서 박근혜 의원이 ‘여의도 대통령’이 되면서 그들도 완전히 변했다. 그 전에도 그랬지만 의원들이 4인방을 접대하기에 바빴다.김용갑 전 의원이 한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된 뒤로는 그들의 전화 받는 목소리부터 달라졌다. 거만이 흐르더라. 아마도 3인방은 자신들과 최순실 씨, 박근혜 대통령이 나라를 움직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대통령 되기 전에 3인방이 종범(從犯)이었다면 지금은 공범(共犯)이다.
 

“모든 것이 비정상… 자기최면에 걸려 있어”

당대표를 거쳐 대통령에까지 오른 인물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권력의지 때문이라고 본다. 박 대통령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콘텐트가 없다’는 말과 ‘수첩공주’라는 말이다. 그걸 보면 자신의 역량에 대해 스스로도 아는 것 같긴 하다. 박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최태민 씨가 박 대통령에게 세 번이나 편지를 보내서 꿈에 육영수 여사가 나타나 나는 아시아의 지도자가 될 너를 위해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더 이상 슬퍼하지 마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희생했다는 말을 들었다면 펑펑 우는 것이 정상 아닌가? 그런데 아시아의 지도자라는 말에 감격하는 모습을 보며 머릿속이 하얘졌다. 2002년에 김정일을 만났을 때 그가 ‘2세끼리 잘해보자’고 했다며 뿌듯해 했다. 상설면회소 설치를 제외하고 김정일이 (우리측 요구를) 들어준 것이 없는데도 자기 부탁을 다 들어줬다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자기최면에 걸려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인들의 탐욕도 ‘최순실 국정농단’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배지를 달기 위해 국민을 속인 것이다. 야당에도 엄청난 정보가 있었을 텐데 역시 입을 다물었다. 국민의 ‘감성적 투표’도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박 대통령은 북한 어린이 의약품 지원 활동을 해온 ‘유럽-코리아재단’ 이사 자격으로 2002 5월 방북했다. 그는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나눈 대화 내용을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 소개했다.
 

최순실 씨가 고친 것이다. 최순실이니, 고영태니, 차은택이니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단어가 ‘통일대박’ 아닌가? 한마디로 B, C급들이 밥 먹으면서 한 얘기가 대통령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이다. ()이 비정상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최순실 씨가 고친 것이다. 최순실이니, 고영태니, 차은택이니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단어가 ‘통일대박’ 아닌가? 한마디로 B, C급들이 밥 먹으면서 한 얘기가 대통령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이다. ()이 비정상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김 위원장과의 만남은 5 13일 백화원 영빈관 회의실에서 속기사 1명이 배석한 가운데 1시간 동안 진행됐다. 박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의 대화 내용을 2004년 외신 인터뷰에서도 밝혔다. 박 대통령이 “(7·4 공동성명을 발표한 남북 지도자들의) 2세로서 평화정착에 노력하자”고 했더니 김 위원장이 “그렇게 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최태민 씨와 박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들은 적이 있나?

“그렇다. 국가정보원 관계자도 과거 안전기획부에서 만든 자료를 근거로 확인해줬다. 타자기로 쳐서 만든 그 자료는 두꺼운 책만 했다. 그게 여의도에 돌아다녔고, 웬만한 사람들은 다 읽어봤을 것이다. 박근혜 대표가 한 일간지와 인터뷰할 때 기자가 최태민과 관련해 ‘그렇게 전횡을 저지르고 부정을 했는데…’라고 물었다. 그러자 박 대표의 목에 파란 힘줄이 솟으면서 부들부들 떨렸다. 기자가 당황했다. 박 대표가 ‘저한테 고맙게 해주신 분’이라고 하더라. 그때 나는 ‘아, 이건 보통이 아니구나.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2년 동안 ‘박근혜의 입’ 역할을 하면서 특별한 경험도 적지 않았을 것 같다.

“지금 다 말하기는 어렵다. 중요한 점은 가까이서 (박근혜 대통령을) 보면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의원들과도 원천적으로 접촉과 대화가 없었다. 오죽하면 박근혜 대표가 물을 잘 마신다고 해서 (국회 본청 내) 정수기 앞에서 기다리는 의원들이 있었을까?
 

“최순실·정윤회 오만불손하기 그지없더라”

최순실·정윤회 씨의 존재를 언제부터 알았나?

95년 대구방송(TBC)에서 토크쇼를 진행했던 적이 있다. (TBC에서) 당시 야인이지만 인기가 높았던 박 대통령을 섭외했다. 그런데 한눈에 봐도 ‘상궁’ 느낌의 여자 2명이 박대통령을 따라다녔다. 그 여성들은 TBC 사장과 박 대통령, MC인 내가 함께한 식사자리에까지 끼어들었다. 담당 PD도 들어올 수 없었던 자리였다. 한 명은 최순실 씨였고 또 한 명은 그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목소리가 엄청나게 크고 당당했다. 교양 없고 오만불손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작가에게 ‘저 사람 누구냐’고 물었더니 ‘최순실이잖아요’라고 했다. 2000년쯤 한 여성지에 인터뷰 기사를 쓰기 위해 박근혜 의원을 (국회 의원회관 의원실에서) 만났다. 시커멓게 생긴 한 남자가 인상을 팍 쓴 채 앉아 있었다. 여비서들도 오만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난 뒤 섭외를 도와준 후배 기자가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그런데 ‘선배, 그래도 정윤회가 OK 해서 인터뷰가 성사된 거예요. 정윤회를 통하지 않고는 박 의원과 전화통화도 못해요. 이번에도 세 번이나 전화해서 겨우 OK 받은 거라니까요’라고 하더라.

 

▲2004 3 16일 한나라당에 입당한 전여옥 씨가 홍사덕(맨 왼쪽) 원내대표, 최병렬 대표(왼쪽에서 셋째), 이상득 사무총장(맨 오른쪽)의 환영을 받고 있다. [중앙포토]

 

요즘 인터넷에 ‘전여옥 어록’이 회자되고 있다. 지금 상황과 대비해보면 신기할 정도로 맞아떨어진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시절이던) 2012 1월의 일이다. 지역구민들과 보좌관들이 19대 총선 공천을 걱정해줬다. 일부는 ‘박 위원장은 큰 정치를 할 사람인데 반대편을 노골적으로 자르겠느냐’고 위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박근혜를 모르느냐’며 이미 주변정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6일 동안 잠도 자지 않은 채 의원회관에서 <i전여옥-전여옥의 私, 생활을 말하다>를 미친 듯이 썼다. 박 대통령이 열 받아서라도 최태민 씨와 관계를 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정말 박 대통령이 잘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출간 이후 온갖 비난에 시달린 것은 물론이고 신변에 위협까지 당했다.


박근혜 진영에서 이명박 진영으로 옮긴 뒤 배신자 논란에 시달렸는데.

“각오했던 일이기에 잘 견딜 수 있었다. 이준석(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 같은 젊은 친구들이 홍위병(紅衛兵)으로 나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진실을 알고 진실을 얘기했다. 어떻게든지 견뎌야 했고 견디려고 노력했다. 정치적으로 공과(功過)는 있었겠지만 돈 문제는 깔끔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명박 후보의 당선 이전에 박 후보가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본질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길을 가다 보면 누군가 다가와서 ‘복 많이 받으실 거예요’라는 말을 걸어온 경험이 있을 것이다. 최태민 씨는 이단종교에서 하는 것과 똑같이 했다. ‘집을 나와라. 형제들과 인연을 끊어라. 재산을 바쳐라. 나만 믿어라.’ 그렇기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은 성장이 정체된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외국에 나가면 한국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만큼 한국은 고속성장을 이뤘다. 급하게 벽돌을 쌓아 올리다 보니 빈틈이 많았는데 박근혜라는 정치인이 벽돌 하나를 빼버린 셈이다.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권력은 유리그릇이다. 잘못하면 깨지고 국민이 다친다.

 

“설마 김기춘 실장이 ‘통일대박’이라고 했겠나"

최순실 씨 혼자서 대통령의 연설문을 고치는 일이 가능했을까?

“매우 간단하다. 최순실 씨가 고친 것이다. 최순실이니, 고영태니, 차은택이니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단어가 ‘통일 대박’ 아닌가? ‘대박나세요’라는 말은 개업집에서나 하는 덕담이다. 한마디로 B, C급들이 밥 먹으면서 한 얘기가 대통령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이다. ()이 비정상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통일에 관해 명언(名言)이 나왔다면 최순실 씨 배후에 누군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해볼 수 있다. 설마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통일 대박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을까?

 

전여옥 전 의원은 여의도를 떠나면서 금배지를 뗐지만 그 대신에 자유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여의도에서 나온 뒤 만나는 사람마다 ‘참 편해 보인다’고 하더라”고 했다.

 

3년 전의 일로 기억된다. ‘전 전 의원의 아들이 사회적 배려 대상자 자격으로 자사고에 입학한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보도가 나와 논란이 됐었다.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얼마 안 돼 그 기사가 나왔다. 왜 이 시기에 이 기사가 나올까 의아했다. 나는 결혼을 늦게 했기에 아이도 늦게 얻었다. 더구나 정치를 하다 보니 (진학 등과 관련한) 정보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고교 진학을 앞둔 중3때였다. 담임선생님이 ‘국어·영어·수학 성적이 좋으니 사배자 자격으로 진학시켜보자’고 제안했다. ‘혹시 특혜라 고 하면 어떡하느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조건이 되기 때문에 특혜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더구나 그 자사고는 정원의 40%가량이 미달이었다. 그래서 입학시켰는데 아이가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아이와 상의 끝에 자퇴를 결정했다.


검정고시를 통해 고교 졸업장을 받았고, 지금은 학력인정 정비학교에서 자동차 정비기술을 배우고 있다. 얼마 전 아이가 ‘엄마가 집에 있었으면 서울대는 못 갔더라도 서울에 있는 대학교는 갔을 것’이라며 웃었다.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모든 외신 기사의 첫 문장은 ‘dictators daughter(독재자의 딸)’로 시작한다. 그런데 국민이 독재자의 딸을 선거권력으로 세탁해준 것 아닌가. 독재자의 딸이 이제는 ‘Shamans friend(무당의 친구)’가 됐다. 독재자의 딸이며 무당의 친구가 이 나라의 얼굴이 될 수 있겠는가?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사태 수습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권력의지가 워낙 남다르기 때문이다. 또 수습이 아니라 대수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여당은 죽어야 산다. 사즉생(死卽生)인 것이다. 다음 대통령은 새누리당에서 나와서는 안 된다. 새누리당은 국민 볼 면목이 없다. 야당은 4년 전 대선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왜 문재인 후보를 찍을 수 없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야당의 생각에 동의하기 어려운 분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다음 대선에서는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국민이 믿을 수 있는,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후보를 내야 한다. 지난 4월 총선을 봐라. 새누리당에서 ‘진박 감별사’ 어쩌고 하지 않았나? 국민이 더 이상의 모멸은 참지 못했기에 그런 결과(여소야대)가 나왔던 것이다. 국민 스스로가 이 상황을 넘어가겠다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의정활동 가운데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동의대 사태 때 흙수저 경찰과 전투경찰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감금했던 학생들은 민주화 세력이 됐고, 감금당한 경찰들은 반민주 세력이 됐다. 경찰들은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했다. 국회의원이라면 밝힐 것은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일로 인해 국회에서 폭행까지 당했지만 지금도 보람으로 생각한다.

 

89년 부산 동의대 시위진압 과정에서 숨진 경찰관과 전투경찰 7명에 대해 1인당 1억여 원의 정부 특별보상금이 2013년 지급됐다. 시위 학생들은 2004년 민주화운동가로 인정받아 보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폭력시위 현장에서 법질서를 지키려다 희생된 경찰의 유가족들은 그로부터 9년이 더 지난 보상금을 받았다. 보상금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한나라당 전여옥·이인기 전 의원 등이 발의한 ‘동의대 사건 등 희생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른 것이다. 전 전 의원은 2009 2 27일 국회 본청 앞에서 법률개정 추진에 항의하기 위해 국회를 방문한 여성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이날 낮 1230분께 전 의원은 본청 1층에서 출입구로 향하던 중 부산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공동대표 이모 씨 등 여성 5~6명으로부터 머리채를 잡히고 얼굴()을 맞았다.

 

나라 망신, 젊은 세대가 다시 겪지 않게 해야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담화을 어떻게 평가하나?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을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의 일이다. 기획팀에서 박 후보를 영국의 수상이었던 마거릿 대처 이미지로 띄우자고 건의했다. 그런데 박 후보는 몹시 기분 나빠했다.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라고 하더라. 2010 12월 한나라당 모 중진의원이 이런 말을 했다. ‘박 대표는 자신을 대통령(후보)이 아닌 세습군주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1차 대국민담화(10 25)를 보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예상은 했지만 저럴 수가 있을까 싶었다. 저렇게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것이 있구나 했다. 2차 대국민담화(11 4)에서는 자신을 세습군주로 여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자회견도 없이, 기자들에게 질문조차 받지 않고 돌아서는 모습을 보면서 창피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리 서툴러도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궁금증을 풀어줄 정도의 자질은 있어야 한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기자회견 횟수는 총 158, 연평균 20회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210(연평균 26)였다. 기자들이 지치고 지겨워할 때까지 질문을 받는다.

 

박 대통령은 고작 5(연평균 1.25). 질문도 거의 받지 않는다.

 

▲2009 2월 국회에서 테러를 당한 뒤 서울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는 전여옥 의원. [중앙포토]

 

방송기자, 정치인, 작가 등 여러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을 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여의도를 떠난 뒤 4년 동안 엄청난 변화 속에서 큰 성장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치인으로 살았던 삶보다 큰 의미와 만족을 느꼈다. 사실 인터뷰도 책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거의 하지 않았다. 얼마 전 모 일간지에 기고를 했던 것은 과거에 그 신문에서 내 원고를 담당했던 분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2년 전 세월호 참사가 터졌을 때도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 특파원에게 인터뷰 요청이 몰렸지만 모두 거절했다. 한국인으로서 그런 인터뷰에 차마 응할 수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보수층을, 지지자를 배신했다. 나라 망신이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냉철하게 (이 사태를) 봐야 한다. 과거에 박근혜 대표를 수행해서 미국 등 외국에 나가면 모든 외신 기사의 첫 문장이 ‘dictators daughter(독재자의 딸)’로 시작했다. 모욕적이다. 그런데 국민이 독재자의 딸을 선거권력으로 세탁해 준 것 아닌가. 그러면 잘했어야 했다. 독재자의 딸이 이제는 ‘Shamans friend(무당의 친구)’가 됐다. 독재자의 딸이며 무당의 친구가 이 나라의 얼굴이 될 수 있겠나? 어느 누가 그런 사람과 얘기하고 만나주겠나. 다들 웃을 것 아닌가. 우리는 다른 나라가 상상할 수도 없는 전쟁도 겪었고, 베트남전쟁에도 참가했다. 피를 흘리며 민주화 투쟁도 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 너무 마음 아파하고 상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나라가 몇 단계 내려갔지만 다시 점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끄러운 일이 젊은세대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

글 최경호 기자 squeeze@joongang.co.kr정리 김준석 인턴기자

사진 우상조 기자 woo.sangjo@joongang.co.kr

 

□정운천 당선자 2016-05-06 

전북에서 지역주의 깬 새누리당 

개표 종반 더민주 후보의 추격은 맹렬했다. 지난 4월 13일 자정 무렵 3000표를 앞서면서 당선 세리머니까지 마친 그에게는 악몽이었다. 새벽 4시 재검표 결과 간발의 111표차였다. 20대 총선에서 전주을의 정운천(62) 당선자는 새누리당 후보로 세 번째 도전 끝에 지역주의 장벽을 뛰어넘는 작은 기적을 이뤄냈다. 전북의 선거에서 보수 여당 후보의 당선은 강현욱 당선자(군산)를 낸 뒤 20년 만이고, 전주에서는 임방현 당선자를 낸 뒤 32년 만이었다.

 

총선 사흘 뒤인 4월 16일 오전 7시30분, 정 당선자의 집 근처 콩나물국밥집 구석 자리에서 벽을 향해 앉은 그를 만났다. 정 당선자는 “지역 장벽을 허무는 일만으로도 제 뜻의 절반을 이뤘다”며 “낙후된 전북의 설움을 풀어달라는 시민 명령을 수행하는 데 온몸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지난 4 13일 실시된 20대 총선에서 승리한 새누리당 정운천 당선자가 선거사무실에서 지지자와 사진을 찍고 있다. /조선일보 DB

지역 장벽 허물기 위해
'
쌍발통'을 마크로 붙이고
'
꼬끼오'를 외쳐

―무엇이 당선을 가져왔나.

“자갈밭에서의 고군분투였다. 지역 장벽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전북을 외롭게 만들었다. ‘낙후된 전북으로 더는 갈 수 없다, 열 개 의석 중 하나라도 바꿔 보자’는 시민 열망이 모여 이뤄낸 선거혁명이었다. 야권이 더민주와 국민의당으로 나뉜 구도 속에 유권자의 37.53%가 저를 지지해 주셨다.”

 

그는 2010년 전북지사 후보로 나설 때부터 자신의 이름 석 자 앞에 트레이드마크로 ‘쌍발통’을 붙였고, 유세 때마다 ‘꼬끼오’를 외쳤다. ‘야당의 외발통’만으론 지역이 발전할 수 없다, 지역 장벽에 갇힌 전북에 새벽을 깨우는 장닭이 되겠다는 호소였다.

 

―혼자 일을 얼마나 해낼 수 있나.

“제가 당선되면서 야당만이 아니라 집권 여당까지 전북을 적극 도울 수 있게 됐다. 야당 독주가 종식되고 실종된 정당정치가 복원되는 것이다. 혼자지만 야당 의원 9명 몫을 할 수 있다. 전북은 지난해 예산 증가율이 0.7%로 전국 17개 시도 중 꼴찌였다. 인구도 15년 사이 201만명에서 187만명으로 줄었다. 집권당 통로로서 지역을 위해 정부 여당의 힘을 수월하게 빌려올 수 있게 됐다. 전주 시민의 자존심과 자신감도 회복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총선 유세에서 그는 2011년 LH 본사 전주 유치에 실패하면서 1주일간 단식을 했던 함거(檻車·죄수를 태우는 수레)를 다시 끌고 나왔다. LH 본사 유치는 그가 낙선했던 도지사 선거의 공약이었다. 그는 유세 차량 앞 운동원들에게 슈퍼맨 복장을 입혀 “야당의원 열 몫을 하겠다”고 부르짖기도 했다. 유세장엔 회사를 휴직한 아들(28)과 대학을 휴학한 딸(24)까지 나와 무릎을 꿇었다. 부인(56)은 그가 도지사 선거에 나서면서 교사를 그만두고 전주의 80㎡(24평)짜리 아파트에 함께 살며 그를 도왔다.

 

새누리당이 싫은 민심 때문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 취급 받아

지인들 "무소속으로 나서라"

―무엇이 가장 힘들었나.

“지역 민심은 ‘새누리당은 무조건 싫다’였다. 전북의 222개 선출직 가운데 새누리당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설움 속에서 자신이 당원임을 밝히지 못해온 게 전북의 새누리당원이다. 손발 없이 맨몸뚱이로 부딪쳐야 했다. 시민들의 싸늘한 눈길 속에서도 ‘민생 119전북본부장’이란 명함으로 민원 현장 120곳을 뛰었다. 팥죽집, 순대국밥집 그리고 밤엔 맥주집에서 시민들을 만났다.”

 

지역구 동네 행사들에서 그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다. 전직 농식품부 장관이었고 집권당의 전북도당 위원장이기도 했지만 그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시의원들의 축사가 이어져도 그에겐 발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일이 허다했다. 외면당하는 그에게 가까운 지인들마저 “새누리당으론 안 되니 무소속으로 나서라”고 권유했다.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냈나.

“당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하기 위해 다가가서 감성에 호소했다. 새벽 산책길에서부터 밤 배드민턴 운동 모임까지 만나는 시민마다 악수를 청하며 말을 붙였다. 셀카로 함께 사진 찍은 분만 2만5000명이다. 두 번째로 치른 15대 총선에서 35.8%를 득표하고도 낙선해 가족과 함께 울면서 그만둘까도 했지만 20여년 농부로 살며 다져온 게 뚝심과 끈기다. 농부가 아니었다면 포기했을 거다.”

 

그는 초등 5학년 교과서에 ‘참다래(키위) 아저씨’로 실린 ‘신지식농업인’이었다. 전북 고창 출신으로 남성고와 고려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전남 해남의 비닐하우스에 방을 들여 5년5개월간 기거하며 참다래 농업을 일으켰다. 정부가 1989년 4월 농산물 수입 개방과 함께 도태시킬 대표 작목으로 바나나·파인애플·키위를 들었지만 그는 이듬해 한국 첫 농민주식회사로 ‘참다래유통사업단’을 세워 농업 생산을 유통까지 확대했다. 1×2×3차 산업, 이른바 6차 산업의 효시였다. 그의 성공 신화는 고구마로 이어졌다.

 

▲새누리당 정운천 당선자. /조선일보 DB

 

새누리당은 국민 눈높이에 맞는 개혁 필요해
더민주에는 일당독주의 오만이 심판받은 것

―농사와 선거, 어느 게 더 어려웠나.

“정치는 안 하면 그만이었지만 농사는 죽고살기로 해야 했다. 참다래 농사 4년 만인 1987년 농장을 완성, 첫 열매를 맺었는데 태풍 ‘셀마’가 비닐하우스를 모두 날려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여러 해 질시의 눈길까지 보내던 마을 사람들이 그 절망적인 모습에 구원의 손길을 주셨다. 수십 분의 도움으로 농장을 복구했다.”

 

정 당선자는 “어떤 일이든 처절하게 무너져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이치를 그때 터득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 첫 농식품부 장관으로 2008년 6월 ‘광우병 파동’ 당시 ‘매국노’란 지탄을 무릅쓰고 촛불시위 한복판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시위대는 서울 개포동 그의 아파트까지 수차례 몰려왔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장관직은 광우병 사태의 책임을 지고 157일 만에 사임했다.

 

―참패 뒤에도 새누리당이 정신을 못 차린 것 아니냐.

“새누리당은 일단 정지, 집권을 향한 욕심을 비우고 모든 걸 내려놔야 한다. 당을 정상으로 돌려놓으려면 외부 인사도 과감히 영입해야 한다. 국민 눈높이에 맞는 개혁으로 새누리당이 변했다고 국민이 평가할 때 새누리당은 되살아난다. 국민이 왜 이런 선택을 했나 철저히 분석하고 단계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국회의원은 세비와 면책특권 등 너무 많은 권력을 쥐고 있다. 그 기득권부터 쳐내야 한다. 말로는 안 된다. 정치인의 말이나 이벤트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전북에서 더민주당 의석이 둘로 줄고 국민의당이 7명의 당선자를 냈다.

“일당독주로 오만해진 민주당에 대해 전북 유권자가 내린 준엄한 심판이었다. 민주당보다 새누리당이 더 싫으니 국민의당이 반사이익을 누렸다. 국민의당은 이를 잊지 말고 도민의 염원을 늘 되새기며 오로지 전북을 살려내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전북을 살리려면 여야를 불문, 화합하고 소통해야 한다. 전북의 3당은 경쟁적으로 협력해 나가야 한다.”

 

그는 장관 사임 후 스님이 주신 호(號)를 써왔다. ‘산을 갈아 경작한다’는 듯의 경산(耕山)이었다. 그는 “제 인생에 편하게 해온 일은 없었다”며 “그간의 설움을 동력으로 삼아 예산을 늘리고 기업을 유치하며 일자리를 만드는 데 혼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장관 시절 함께 일했던 정부 부처의 동료, 후배들도 그를 응원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지역주의가 한국 사회 제반 갈등의 시초”라며 “이제 물꼬를 튼 지역주의 해소의 물길을 넓히기 위해 선거에서 권역별 비례대표제, 석패율제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리자 국밥집 손님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일일이 악수들을 나눈 뒤 문으로 나서는 그를 향해 한 젊은이가 외쳤다. ‘정운천 파이팅!’

 

정운천 당선자의 홍보 영상. /정운천 유튜브 채널
조선일보 김창곤 기자  편집 최원철

 

□정홍원 前총리

2015.08.26 인터뷰

-朴대통령과 자주 독대

"대통령에 소통 건의하자 장관들 불러 얘기 들어…

언론에 노출 안되니 몰라"

-김영란法 위헌성 안고 있다

"原案에 적용대상 너무 넓어… 수정안 국회에 제출했더니 사립교원까지 들어가"

 

박근혜 정부 초대 총리로 1기 내각을 이끌었던 정홍원 전 총리는 지난 2월 퇴임 이후 6월부터 노숙인들을 위한 농장 자활 지원 활동과 무료 급식 봉사를 하고 있다. 검찰 고위직 출신이지만 변호사 개업이나 로펌행은 애초부터 접었다. 전관예우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퇴임 후 첫 단독 인터뷰를 위해 찾은 그의 서울 서초동 개인 사무실은 10평 남짓했다. 책상엔 책이 쌓여 있고, 한편에는 기타와 악보가 놓여 있었다. 정 전 총리는 왜 변호사 일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법원장, 검사장 같은 고위 공직자는 퇴직 후 변호사 등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고위직 자제 취업 특혜와 전관 봐주기는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고 사회 갈등 요인이 된다"며 "공직자로 명예를 얻은 사람이 돈까지 추구하면 안 된다"고 했다.

 

▲정홍원 전 총리가 20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지난 2월 퇴임 이후 처음으로 본지와 단독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 전 총리는“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6월부터 노숙자 무료 급식 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진한 기자

 

―세월호 사건과 잇단 후임 총리 후보자 낙마 과정에서 두 차례나 임기가 연장됐는데.
"
정말 물러나고 싶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상황이 어렵고 후임을 찾기가 어렵다. 연임해서 맡아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심신이 지친 상태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박 대통령과는 독대를 많이 했나.
"
많이 했다. 자꾸 불통 논란이 일어서 (박 대통령에게) '현장에 자주 가고 장관들도 만나서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시라'고 건의했다. 대통령은 '보이기 위한 것(쇼잉)은 안 좋다'고 했지만, 이후 장관들을 사회·경제 분야 등으로 나눠서 불러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이런 게 (언론에) 노출이 안 돼 모르는 것이다. 대통령에게 왜 대면 보고를 안 하느냐고 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비효율적인 경우가 있다. 인사권에 대해서도 '장관에게 많이 넘겨주자'고 했더니 대통령께서 '알겠다'고 했고, 실제로 많이 넘어갔다."

―국무회의가 '대통령 말씀 받아적기'라는 비판이 있었다.
"
대통령도 다른 사람이 말하면 받아적는다. 그런데 대통령 말을 장관이 받아적으면 안 되나. 그래도 마치 선생님 말씀을 학생이 받아적는 것 같다는 지적이 나와서 내가 '나중에 녹취록을 보면 되니 회의선 키워드만 적자'고 제안했다. 요즘은 장관들이 잘 받아적지 않는다."

 

▲사무실에서 기타를 치는 정 전 총리. /이진한 기자

 

'수첩 인사' '청와대 3인방'에 대한 논란이 많았는데.
"
나는 (대통령) 수첩에 없던 사람이니까, 수첩 얘기는 하지 않겠다(웃음). 대통령이 수첩에 적어놓으면 얼마나 적어놓겠나. (대통령이) 다양한 경로로 인사 관련 자료를 갖고 있다. 문제는 검증인데, 숨어 있는 문제들까지 걸러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수많은 자료와 보고가 올라오는 상황에서 3인방 얘기만 듣고 정책이 결정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사실도 아니다. 3인방이 각종 보고를 취사선택해 올린다는 이야기는 천만의 말씀이다."

―부패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
정부가 아무리 일을 잘해도 공직 사회 부패가 생기면 도루묵이 된다. 과거 정부에선 초반에 부패 척결을 외치다 경제를 핑계로 흐지부지되는 일이 반복됐다. 현 정부뿐 아니라 다음 정부까지 이어지는 부패 방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최우선적으로 공직자들이 '() 의식'을 버려야 한다. 국민에게 봉사하는 서번트(servant·종복)가 대접받고 생색내고 대가 받을 생각을 해서야 되겠나."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수수 금지법)을 놓고 논란이 적잖은데.
"
국민권익위원회가 낸 원안은 적용 대상이 지나치게 넓었다. 법무부가 위헌성과 현실 적용 문제가 있다고 의견을 내서 (총리였던) 내가 조율해 수정안을 국회에 냈다. 그런데 국회에서 기자와 사립학교 교원까지 넣었다. 적용 대상이 확대되면서 해석상 처벌 대상인지 아닌지 모호한 부분이 생겼다. 지금 현재 김영란법은 문제의 소지가 있고 위헌성을 안고 있다. 충분히 (수정도) 고려하고 가야 한다."

―정치권에 하고 싶은 말은.
"
국회가 변해야 대한민국이 한 단계 올라간다. 국회가 가장 권위주의적이다. 선거 승리보다 국익을 생각해야 한다. 북유럽에 가 보니 의원들에게 특권은 없고 할 일만 많아서 '3D' 기피 직업이라고 하더라. 우리도 의원 특권을 줄이고 명예직에 가깝게 가야 한다."

조선일보 배성규 기자 양승식 기자

 

□조훈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2017-06-05  조훈현 “하수인 나도 수가 보이는데… 고수들이 왜… ”

 

정치라는 바둑판. 첫 수를 둔 지 1년이 지났다. 아직은 초반전. 하지만 쓰나미처럼 밀려온 내우외환에 알파고 앞의 인간처럼 속수무책이었다. 손 따라 두면 진다는데….
 

그가 지난해 4월 총선에서 당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비례대표로 정치에 뛰어들었을 때 많은 사람이 의아해했다. 한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에게 정치는 너무나 새로운 분야였고, 당시 새누리당은 막장공천으로 온 국민의 지탄을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정치판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격변의 시간이었다. 바둑은 수읽기의 싸움. 수읽기의 최정상이 본 정치라는 바둑판은 어떤 세계였을까
 
▶정치인이 된 지 1년이 됐다. 
누가 그러더라. 10년 사이에 겪을 일이 1년 안에 벌어졌다고. 나도 모르게 여당 됐다, 야당 됐다 정신이 없더라. 밖에서 대충 살다 들어왔는데 너무 다른 세계였다. 그 와중에 엄청난 일들이 계속 터지고… 

 

▶뭐가 그렇게 다르던가. 
교문위가 가장 뜨거웠거든(그는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이다). 최순실 사태 때 K스포츠재단, 이화여대 부정 입학 등이 다 교문위 사안이지. 국정 교과서도 그렇고. 그래서 (여야가) 서로 대놓고 ×× 욕하고, 고함지르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데…, 어이구, 옆에서 보는데 한바탕 할 것 같더라고. 그런데 끝나자마자 방송사 카메라 불 꺼지니까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악수하고 같이 저녁 먹으러 가더라고? “어이, 오늘 술 한잔하자”면서…. 난 둘이 싸울 때 ‘이거 정말 큰일 났구나’ 하고 생각했지. 우리 같으면 며칠 동안 아예 말도 안 하잖아? 그럴 거면 처음부터 좋게 말하든지…. 어느 쪽이 진짜 마음인지…. 그런데 이게 이 세계의 ‘정석’인 것 같아. 사회의 정석은 아니고.

▲조훈현 의원의 형세 판단에 따르면 자유한국당은 지금 대마에서 미생마가 된 상태. 그는 “마치 집도 없고, 곤마만 많은 바둑 같은 상황”이라며 “상상도 못할 엄청난 강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정치에 입문할 때 주위에서 뭐라 안 했나. 

엄청 들었어. 이미지 버린다고, 왜 흙탕물에 들어가냐고…. 근데 (국회의원) 되기 전에는 그러다가 막상 되니까 아무 소리 안 나오더라고…. 200가지가 달라진다는데 뭐가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고, 잘못 알려진 것도 많은 것 같아. 금배지 달아도 일반 사람들은 아무도 안 알아주던데…. 

▶원래 보수인가 
굳이 말하면 보수 속에 진보라고 할까. 사람은 변하지 않으면 끝이야. 하지만 상황에 맞게 변해야지. 좋은 것은 지키면서. 예를 들면 부모나 스승을 대하는 게 우리 때와는 너무나 달라졌다고 할까. 선생님이 제자를 때리고, 제자가 선생님을 신고하고…. 솔직히 나는 교육자가 노동조합을 만드는 게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물론 돈을 받고 일하니까 노동자일 수 있는데, 교육이 과연 그렇게만 볼 성질의 것인지…. 자신은 굶더라도 애들 밥 사주고 그러는 게 스승이라고 생각하는데, 일부겠지만 지금은 ‘땡’ 하면 퇴근하는데 더 관심이 있는 것 같고…. 폭력은 안 되지만 사랑의 회초리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걸 폭력인지 아닌지 따지고 신고하니까 일이 커지지. 지킬 것은 지켜가면서 변하자는 거지. 

 

이렇게 사면초가인 바둑이 있었을까. 대마에서 미생마로…. 곤마(困馬) 주제에 늘 다니던 길로만 가려고 한다. 이대로 가면 죽는다. 필생의 수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한국당이 가장 안 변하는 곳이라 생각한다
너무 과거 습관에 파묻혀서…. 그게 통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지금은 그런 건 안 통하는 시대다. 전에 집권여당에 과반 의석의 ‘대마’여서 ‘대마불사’를 생각 하나본데 지금은 ‘미생마’인데…. 

▶‘임을 위한 행진곡’ 논쟁은 좀 유치하지 않나.
나도 제창과 합창의 차이를 국회 와서 처음 알았다(합창은 합창단이 주가 되어 부르며, 참석자들이 따라 부르는 것은 자유의사다. 제창은 참석자 모두가 따라 부르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는 용어적인 차이일 뿐 실제로는 자유의사에 따라 부르거나 안 부르면 된다). 구태여 그것을 따질 필요가 뭐가 있나 싶기도 하고. 합창이면 어떻고 제창이면 어떻고…. 부르고 싶은 사람은 부르면 되고 아니면 안 부르면 되지. 국민이 살아가는데 이게 무슨 상관인지. 그냥 서로 감정싸움이지. 그렇게까지 크게 싸울 일은 아니지.   

▶한국당이 어떻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나는 아직 정치를 잘 모르지만 지금 이대로 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느낌이 그래. 그대로 있으면 죽는 거지. 바둑도 좋을 때는 집도 많고 세도 두텁고 싸움도 잘되지만, 안 될 때는 집도 없고 곤마만 많고 갈수록 태산이다. 지금 우리 당이 그렇다. 그래서 엄청난 승부수를 둬야지. 보통 승부수로는 안 되고, 상상도 못할 엄청난 강수로 가야지. 어떤 강수인지는 내가 둘 수도 없고 둘 처지도 아니지만…. (강수는 반발과 저항도 그만큼 셀 수밖에 없지 않나?) 결국 사람의 문제니까, 상대가 있으니까 강수가 쉬운 건 아니지. 하지만 이렇게 “네, 네”로 끝날 문제는 아니다.

 

▶‘인명진 비상대책위원회’의 수술이 충분했다고 보나.
미흡했지. (한국당 지도부는 뼈를 깎았다고 하는데?) 그건 자체 분석이고…. (뭐가 가장 큰 문제였나?) 너무…, 내가 생각하기에는 일부분(사람들)이 너무 세…. 누군가 좀 균형을 잡고 이끌어나갈 사람이 필요한데, 그런 인물이 없는 것 같다. 너무 안에서만 싸워. 작년부터 그랬지만 지금은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는 거야. 여태까지 그러고 있고. 크고 작은 걸 떠나서…. (예상하지 못했나?) 진짜 이렇게 될지는 몰랐지…. 이럴 줄 알았으면…. 수읽기를 잘못한 건데, 하하하. 적은 밖에 있는데 왜 안에다 서로 총질을 해? 작년부터 계속 악수만 두는 거야. 그러니 이길 수가 있나. 지금도 정신을 못 차린 것 같고. 모두 화해하고 하나로 뭉쳐야 하는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뭐 하나 결정하려고 하면 사분오열이야. 이해관계 때문에…. 그럴 때 리더가 중심이 돼 이 길로 가야 한다고 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중심을 잡아줄 구심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강수가 필요하다는 거지.

 

봉위수기(逢危須棄·위기에 처한 돌을 모두 살리기보다 일부를 버리고 만회를 꾀한다). 모든 돌을 살릴 수는 없다. 사석이라 판단하면 아프더라도 버려야 한다. 육참골단(肉斬骨斷·내 살을 내주고 상대의 뼈를 끊는다). 나는 그럴 용기가 있는가…. 무엇이 사석인가. 

아직도 당 지지층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와 지지가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사석인가, 아니면 살려야 할 돌인가. 

어려운 문제인데…. 바둑으로 치면 끌고는 가야 하지만 내세울 수는 없는 상황이 아닐까. 지난해 총선, 이번 대선에서 나타난 민심을 제대로 읽는다면…. 새 인물, 새 변화가 필요하겠지. 

▶핵심 친박은 어떻게 해야 하나. 

정치를 내가 잘 모르지만, 자신들의 희생이 좀 따라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안 보인다.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뭔가 정해지면 좀 해줘야 하는데…. 모두의 입맛에 맞는 방법이 지금 있겠나. (자신이 친박 아닌가?) 친박은 친박이지. 처음에는 대부분 친박 아니었나. 내 스스로 친박이 된 것은 아니고, 원유철 전 원내대표 때문에 묶여서… 친원인가? 하하하(그를 비례대표로 끌어들인 사람이 원 전 원내대표다). 그래서 친박으로 분류되는 것 같다. (정치가 적성에 맞나?) 나는 안 맞지. 나는 아니야. 재미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여기서 일가를 이루기도 힘들고. 아직도 정치인이나 국회의원보다는 국수로 불리고 싶은 거지. 그게 듣기가 좋지. 그래도 의원인 동안은 내 역할은 다하고 싶다. 

▶선거 승리를 위해 정치에 문외한인 유명인을 영입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솔직히 작년에 알파고 아니었으면 영입 제안이 들어오지 않았을 거야. 작년이 2002년 월드컵이었으면 아마 허정무 전 축구국가대표 감독이 됐겠지(허 전 감독은 지난해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신청했다). 현실적으로는 정당도 선거를 해야 하니까 영입 경쟁을 할 수밖에 없고, 또 어려서부터 정치를 배운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결국 어떤 분야에 있다가 들어오는 것이니까…. 세상이 빠르게 변하니까 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의회에 진출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처음 발의한 법안이 역시 바둑진흥법 제정안이다.
바둑 진흥을 위한 기본 계획 수립, 바둑 지도자와 바둑 단체를 위한 지원 방안 등을 담은 것인데…. 우리의 전통문화이자 세계적인 위상을 떨쳤던 바둑의 발전을 위해 발의했다. 지난해 8월에 대표 발의했는데, 통과되는 데 쉽지 않다. 밖에서 볼 때는 올리면 에스컬레이터처럼 쭉 올라가서 땅땅 때리면 통과되는 줄 알았는데, 탄핵에 대선에 큰일이 많이 벌어지다 보니 자꾸 늦어지더라. 18대 국회부터 추진된 것인데…(발의된 법안이 해당 국회 임기 내에 통과되지 않으면 자동 폐기된다). 이번 임시국회에서는 꼭 통과됐으면 좋겠다. 

▶정치인 조훈현은 몇 수 앞까지 보이나. 

이제 겨우 초보인데…. 바둑으로 치면 죽고 사는 것과 간단한 정석을 아는 정도? 하수지. (정작 정치 고수들은 엄청난 강수가 필요하다면서도 그럴 의지는 없는 것 같다.) 하수도 그 수가 보이는데…. (정치)고수들은 왜 그 얘길 안 하는 건지. 물론 자기 입장이 있어서 그렇겠지만….

▶문재인 대통령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바둑 10훈에 ‘조이구승자 필다패(躁而求勝者 必多敗)’란 말이 있다. 조급하게 이기려고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패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급하게 하지 말고 속도를 지키면서 했으면 한다. (프로기사 시절 별명이 행마가 빠르다고 해서 ‘제비’ 아니었나.) 빨랐지. 빨랐다. 그래서 창호(이창호 9)한테 잡혔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주대환 인터뷰

2017.06.07 “문재인 정부는 상위 10% 기득권 대변...조만간 바닥나 국민이 실망할 것”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2000년 민족사에서 가장 큰 사건"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의 공동대표. 최근 반(反)대한민국적 좌파사관(올드레프트)에서 벗어난 ‘뉴레프트(new left) 사관’의 관점에서 우리 현대사의 주요 쟁점을 짚어보는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를 펴냈다. /조선DB


“젊은 시절 나는 혁명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나는 과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혁명가도 못 되고, 노동운동가도 못 되고, 정치가도 못 되었다.” 최근 나온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나무나무)라는 책의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에 한 발이라도 걸쳐본 사람 치고 주대환(周大煥·63)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이는 없다. 서울대 종교학과 출신인 그는 민청학련 사건(1974), 긴급조치 9호 위반(1978), 부마항쟁(1979) 등으로 4차례나 구속되었고, 1980년대에는 김철순이라는 가명으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등에서 지하 조직 활동을 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는 공개 합법적인 진보정당으로 전환하자는 이른바 ‘신()노선’을 처음 제안한 사람이기도 하다. 1992년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았으며, 2000년에는 민주노동당 창당을 기획했다. 2004년 민노당 정책위의장 선거에서 다수파인 NL(김일성 주체사상파) 계를 꺾고 당선되었고, 2008년 민노당이 분당될 때 진보정당을 포기하고 그 판을 떠났다.

 

현재는 사회민주주의연대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면서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을 겸하고 있다진보진영 일부에서는 그가 ‘변절했다’고 비난하지만, 그가 낸 <좌파논어>라는 책 이름에서도 보듯이 그는 여전히 좌파를 자처하고 있다

▲주대한 대표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

 

그가 최근 펴낸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라는 책의 부제도 의미심장하다. ‘나는 4·19의 시()만 읽은 게 아니라 5·16의 밥도 먹고 자랐다.’ 주 대표는 책의 서문에서 자신이 걸어온 사상적 궤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난 40여 년 동안 내 생각의 틀은 모택동 사상, 레닌주의, 마르크스주의, 페이비언 사회주의, 루스벨트의 뉴딜 진보주의를 거쳐 왔다고 느낀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 나의 사상은 유라시아의 베이징, 모스크바, 베를린을 거쳐 도버 해협을 건너서 영국으로 갔다가, 다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그리고 이제 태평양을 건너서 한국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제야 한국을 어슴푸레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는 “나는 이 책에서 감히 ‘새로운 사관(史觀)’으로 대한민국의 70년사를 바라보고자 하였다. 나는 이 사관에 ‘뉴레프트(new left) 사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밝혔다. 그래서 그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먼저 말씀하신 ‘뉴레프트’ 사관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뉴레프트 사관이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사관은 ‘올드레프트(old left)’ 사관입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란 책이 만든 프레임에 갇혀 있는 기존의 ‘민족주의 사관’을 일컫는 것이죠. 저는 이를 비판 극복하는 뉴레프트 사관으로서 ‘민주주의 사관’을 제안합니다. 올드레프트의 민족주의 사관은 ‘후진국형’ 진보의 정신세계를 구성한다면 뉴레프트의 민주주의 사관은 ‘선진국형’ 진보의 세계관을 구성합니다.

 

대한민국의 요직과 핵심을 차지한 86세대 

-역사 전공자도 아니시면서 올드레프트의 민족주의 사관을 비판 극복하는 일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 일은 왜 중요하죠?

“현재 50대 초반인 소위 386, 486하던 ‘86세대’가 바로 이 민족주의 사관으로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중진이 되었습니다. 전교조나 공무원노조, 민주노총뿐만 아니라 언론이나 문화 분야에서도, 그리고 정치권이나 학계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요직과 핵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저는 봅니다.

 

-86세대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의 영향으로 대한민국 건국(建國)이나 대한민국의 발전 과정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군요.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이 필독의 현대사 교과서였습니다. 그 책을 학창 시절에 읽은 세대가 이른바 86세대죠.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만든 프레임으로 바라보면 대한민국의 탄생은 매우 부정적인 사건입니다. 친미파(親美派)인 이승만(李承晩)이 김구(金九)를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을 배제하고 친일파(親日派)와 손잡고 세운 단독정부가 대한민국인 거죠. 농지개혁도 실패하고 친일 청산도 못 했으니 이후의 발전과정에서도 정의가 실종되고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읽은 사람은 많았다고 하지만,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책이 만든 프레임은 그 세대 전체가 공유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세대도 포섭하고 있지요. 박근혜 정권이 무너지는 데는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한 무리수도 한몫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만큼 일반 국민들은 기존 교과서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의식이 없고, <해방 전후사의 인식>의 프레임은 강합니다.

 

2017년 5월 11일 오전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수석비서관 등에 대한 인선발표를 하고 있다. 민정수석비서관(왼쪽에서 두 번째)에는 조국 서울 대법학전문대학 교수가 임명됐다. /조선DB

 

-최근 정권 교체가 있었으니까 그 이야기도 잠시 하고 넘어가시죠. 대한민국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소위 86세대가 주도하는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보수우파 진영에서는 좌파정부가 탄생했다고 우려가 큽니다.

“제가 보기에 문재인(文在寅) 정부는 좌파정부가 아닙니다. 상위 10%의 기득권을 대변하는 정부가 어떻게 좌파가 될 수 있습니까. 현재 우리나라의 소득 점유율을 보면 상위 10%가 국민 소득의 48.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OECD 최고의 불평등 사회인 미국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민주당의 주된 지지 기반은 바로 상위 10%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기업 정규직, 공무원, 교사 같은 사람들은 세계적인 수준의 임금과 연금을 챙기고 있는 반면, 나머지 하층 노동자들과 자영업자들은 형편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아래 밑바닥의 하층 노동자들은 200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하고도 경쟁해야 하는 처지다 보니 임금이 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타파하여 임금의 평준화를 이룰 꿈도 꾸지 않는, 탐욕스런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나, 기초연금 20만원에 기대서 살아가는, 폐지를 줍는 빈곤 노인들을 외면하는 전교조 선생들이 어떻게 좌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상위 10%가 주로 지지하고, 그들과 나머지 국민들의 이해관계가 대립함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후보가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상위 10%는 주로 중년의 기성세대일 텐데 청년들 다수가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먼저 캥거루족이라든지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상위 10%가 곱게 키운 자식들이죠. 또 소득이 많은 사람은 부양가족도 거느릴 수 있고 주변을 챙기거나 교회에 헌금을 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 캥거루족은 정신적 캥거루족이 된다고 봅니다. 대체로 10% 정도의 국민은 상위 10%와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있고요, 그래서 ‘20 80의 사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대환 대표는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시야가 좁고, 평등 가치 지향이 분명하지 않았다"며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빈부격차의 확대를 저지하기보다는 (대기업 정규직) 조합원들만 중산층으로 빠져나왔다"고 비판했다. 사진은 현대차 노조의 파업모습. /조선DB  

 

"민주당 친노 패권은 상위 10%의 기득권을 대변"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20% 80%에 비하여 소수가 아닙니까? 80% 20%를 못 이깁니까?

“그렇습니다. 이데올로기적 지배는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조선의 양반은 10%쯤 되었지만 90%를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선이 아닙니다. 그래서 곧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난한 아버지를 둔 ‘흙수저’ 청년들과 하층 노동자들이 떠들기 시작할 것입니다. 뉴레프트 운동은 바로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려는 노력입니다. 


-대표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좌파는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역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좌파라고, 문재인 정부의 성격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대통령 참모 중에는 과거 주사파 출신도 있고, 소위 ‘강남 좌파’라 불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역시 86세대가 정권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당연한 것이고, 이제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들이 앞으로 열심히 잘해서 그 공과(功過)에 대하여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안희정 충남지사에게서도 보듯이 86세대가 철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50대로서 더 이상 학생 시절의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주사파였다는 이유로 그들에 대하여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인지요.

“글쎄요. 개개인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전체적으로 주사파라든지 그런 과거를 명쾌하게 밝히고 떳떳하게 전향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른바 전향을 하면 변절자로 낙인이 찍혀서 옛 동지들로부터 엄청난 인간적인 모욕을 받고, 진보진영에서는 더는 활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영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결국 보수진영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주사파였던 사람이 고위 공직을 맡게 되면 전향을 언제 어떻게 하였는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공평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안희정 같은 사람도 책인가 어디서 과거를 밝히라는 요구에 대하여 반발하는 말을 써놓았다고 하던데 그건 맞지 않습니다. 한편 건방진 태도이고 한편으로 교언영색(巧言令色)의 이중플레이지요.

 

-지금은 이석기 같은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생각을 그들 모두가 가지고 있지는 않겠지만, 대한민국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은 여전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을 ‘올드레프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86세대 운동권 주변 사람들이 이제 더는 주사파나 김일성주의자는 아니지만, 여전히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의 정신세계 속에서 성역은 백범 김구 선생입니다. 상해 임시정부이고요, 그들은 ‘이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인 것은 모두가 친일파 때문이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면서 바로 자신들이 청년들과 하층 노동자의 눈에 기득권일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안 합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아마 그런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할 겁니다. 그들을 나는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그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보시는지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특유의 솔직한 어법으로 자신을 (정신적으로) 83학번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문재인 대통령 역시 86세대와 코드를 맞추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원래 문재인 대통령은 정치에 뜻을 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다 알아서 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그를 끌어내어서 대통령 만들 수 있는 것이 그들(86세대)의 힘입니다.

 

-그런 민족주의자들, 친북 좌파적 성향의 사람들이 재벌개혁하고 소득 재분배해서 대표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불평등을 막겠다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상위 1%의 재벌과 특권층에 대해 공격을 하겠죠. 모든 것이 박근혜(朴槿惠)와 그 일파 탓이고 재벌 때문이라고 할 겁니다. 다소간의 효과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특권층에 대한 공격은 바로 상위 10%가 차지한 기득권에 대해서 방어하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입니다. 자유한국당 친박(親朴) 패권이 상위 1%의 특권층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민주당 친노(親盧) 패권은 상위 10%의 기득권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개혁은 조만간에 바닥이 나고, 국민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어서 이른바 ‘촛불 혁명’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이른바 적폐청산을 하겠다고 했는데요.

“저는 적폐라는 어려운 단어가 무슨 말인지, 사전을 찾아보았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적폐청산은 왠지 구한말 선비들의 ‘위정척사’ 비슷하게 들립니다. 아마 이 정부는 보수 정권이 했던 4대강 사업이나, 국방비리 같은 것을 조사하고 인적 청산을 하는 것이 적폐청산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적폐청산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는 없죠. 외과 수술을 해야 하는 데 마사지 좀 해주니 ‘시원하다’하며 만족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요. 한국 사회의 문제는 마사지 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건국에는 다양한 세력이 참여"

▲제헌헌법에 서명하는 이승만 대통령. 이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조선DB

 

-다시 대한민국 역사 이야기로 돌아가시죠. 대표님은 제헌(制憲) 헌법(憲法)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을 무척 강조하고 계시는데요.

“제헌헌법은 ‘해방이 되면 이런 나라를 만들 거야’라고 우리 선조들이 꿈꾸던 그 꿈을 한 글자 한 글자 새겨 넣은 것입니다. 제헌헌법을 만든 198명의 국회의원이 바로 건국의 아버지들입니다. 헌법 8조에 평등(平等)을 규정하고 있고, 9조에서 14조는 자유(自由)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자유와 평등의 나라로 건국된 것이죠.

 

-헌법 정신을 강조하는 이들은 많이 보아 왔지만, 제헌헌법의 가치를 강조하는 분은 오늘 처음 만납니다. 87년 헌법 이전의 헌법들은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는 분들도 있는데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헌헌법에 농사를 짓는 사람이 농지를 소유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대원칙이 박혀 있습니다. 실제 농지개혁법은 1949년 국회를 통과했고, 1950년에 마무리되었지만, 헌법에 이렇게 명시되어 있으니 농지개혁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를 했다고 하지만, 어쨌든 임기를 지켰잖습니까? 김일성(金日成)하고 비교를 해보세요. 이승만은 헌법에 따라 임기를 마치면 선거를 했고, 4년밖에 안 되는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하려고 그렇게 무리수를 두는 과정에서 추락해간 거 아닙니까?

 

-1987년 헌법 이후 민주정부가 출범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의 민주정이 1987년 이전에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86세대의 무식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민주주의 역사가 자기들로부터 처음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독립협회로부터 내려오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다시 공부해야 합니다.

 

-조금 전에 제헌헌법을 만든 198명의 국회의원들을 ‘건국의 아버지’로 표현하셨는데, 우리 역사에서는 건국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무척 생소하게 들립니다.

“제헌헌법을 만든 분들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면 누구를 건국의 아버지라고 할까요? 이승만 대통령을 놓고 국부(國父)니 마니 하는 논란을 벌이는 방식은 단 한 분의 아버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부 김일성 같은 사람을 찾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왼쪽부터 인촌 김성수, 해공 신익희, 죽산 조봉암. 주대환 대표는 "우파들은 이승만 대통령뿐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들 세 명의 공적을 함께 기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학문적으로는 상당히 진척된 것 같은데도 왜 대중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극단적인 의견대립이 흡사 해방 정국의 좌우갈등, 좌우익 진영의 내부 갈등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저는 이승만 대통령이 재평가받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이 세 분을 함께 모시라고 말합니다. 인촌은 한민당의 오너, 해공은 한독당의 배신자, 죽산은 공산당의 변절자였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은 이처럼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여 논쟁하고 갈등하는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해방공간의 복잡하고 유동적인 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선조들이 고뇌하고 토론했던 과정을 입체적으로 잘 엮으면 젊은이들에게도 얼마든지 재미있고 매혹적인, 그러면서도 교훈을 주는 역사를 꾸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우남 이승만의 원맨쇼로 만들어서야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우리 사회의 친일파 논쟁은 '정신병 수준'"

-최근 불거진 건국절(建國節) 논쟁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솔직히 저는 광복절을 건국절이라고 꼭 바꾸어야겠다는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잘 모르니 결국 (제 느낌으로는) 추진하는 측이 너무 성급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대하는 사람들도 문제가 있습니다. 일부 좌파들과 민족주의 진영에서 1948년에 건국되었다고 하면 마치 무슨 큰 잘못이나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정치인들도 여기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의 조소앙(趙素昻) 선생이 ‘건국강령’을 쓴 게 1941년 무렵입니다. 여운영(呂運英) 선생은 1944년 광복 직전 ‘건국동맹’을 만들고, 광복 직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건국이 1948 8 15일에 되었다는 건 너무나 명백하여 논란거리도 아니죠.

 

-현행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다는 점을 내세워 1948년 건국 주장은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헌법 전문에 그런 촌스럽고 노골적인 표현이 들어간 것도 문제이지만,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된 엄연한 사실을 말한다고 임시정부를 부정하거나 위상을 깎아내리는 건 아니죠.

 

-친북좌파 민족주의자들은 아무에게나 ‘친일파’ 딱지를 붙여 놓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친일파 논쟁을 보면 거의 ‘정신병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 일본은 군국주의로 치달아 1930년대 말이면 완전히 전시(戰時)체제입이다. 다이쇼(大政) 데모크라시 시절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특히 미국하고 전쟁을 일으킨 1941년부터는 교사까지 칼을 차고 다니는 살벌한 전시 체제였습니다. 거의 광적인 분위기였죠. 그 시대를 모르면 쉽게 민족주의자들의 선동에 넘어갑니다.

 

주 대표는 “반민특위 조사 대상에 오른 적이 없는 김성수와 조봉암 선생도 요즘에 와서 친일 시비의 수모를 당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김성수 선생의 경우 1962년에 추서된 건국훈장을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조봉암 선생의 경우 2011년 대법원에서 1959년 재판을 재심하여 무죄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보훈처는 건국훈장 추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당시 모든 신문이 폐간되고 유일하게 남은 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작은 기사 하나를 근거로 친일 혐의를 씌운 것이죠. 52년간 간첩혐의를 벗고 나니 이제는 친일파라고 하니 유족들이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차겠습니까.

 

- 21세기에 여전히 친일파 논쟁이 벌어지는 겁니까? 지난 대선(大選)에서도 여러 명의 민주당 대선 후보들이 친일파 청산을 외쳤는데요.

“친일(親日) 청산을 주장하는 사람한테 제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 친일파 본 적이 있느냐? 1962, 63년에 태어난 이들이 친일파를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도 아직도 우리나라의 모든 문제가 친일파 때문이라는 생각이 그들의 머리에 꽉 박혀 있습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에 있는 단 하나의 이유를 찾았다는 식입니다. 미안하지만 이런 생각은 전혀 검증되지 않은 허상이고요, 빗자루를 안고 허깨비와 씨름하는 꼴입니다.

 

경남의 거제시 고현동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내 흥남철수기념 조형물 옆에 세워진 김백일 장군 동상(왼쪽). 김백일 장군이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경남의 일부 시민단체 회원들이 동상 철거를 요구하며 검은 천을 두르고 쇠사슬을 묶었다(2011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나 백선엽(白善燁) 장군 같은 분들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니, 해방 당시 반민특위에서 박정희나 백선엽 같은 일본군 또는 만주군 하급 장교 부류는 애당초 친일파니 뭐니 하는 검증 대상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해방 당시 20대 청년인데 친일을 하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혈서(血書)? 입학 나이 제한에 걸리니까 그랬겠죠. 창씨개명(創氏改名)? 창씨개명 안하고 소학교(초등학교)라도 갈 수 있었나요? 

 

-우리나라 역사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흐르는 건 아닌가요?

“남한은 친일파가 권력을 잡았고, 농지개혁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하여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봉건 잔재가 남아서 남한은 여전히 반봉건 사회이고, 또 미국의 식민지다. 그러니 여전히 민족해방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 북한은 어쨌든 독립운동 항일투쟁을 한 사람들이 만든 나라 아니냐. 또 친일 청산과 농지개혁을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정통성이 북에 있는 게 아니냐 하는 것이 86세대 민족주의 사관의 관점입니다. 이를 집중적으로 비판한 것이 뉴라이트 자유주의 사관이고요.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2000년 민족사에서 가장 큰 사건" 

북한의 토지개혁 당시 선전 사진.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로'라고 선전했지만, 농민들 입장에서는 지주가 국가로 바뀐 것 외에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대표님은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에 대해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는데요.

“북한은 지주들에게 무상몰수(無償沒收)해서 무상분배(無償分配)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요. 국가에서 40%의 세금을 거두어 갔습니다. 40%는 일제 강점기 못지않은 엄청난 고율의 소작료입니다. 지주가 그냥 국가로 바뀐 거지요. 농민들이 토지를 사고팔 수도 없으니 소유권이 없는 겁니다. 그 후 집단농장을 만들었으니 농민들 입장에서는 다시 빼앗긴 겁니다.

 

이에 반해 남한에서는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했는데, 소출의 30% 5년만 내면 내 땅이 되었습니다. 30% 상환이 부담스러워 분배받은 땅을 포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애당초 남북의 농지개혁은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주 대표는 “해방 당시 85%의 농민이 소작농이었는데, 당시 국민의 70%가 농민이었다”며 “그들을 대대로 소작농이라는 천형(天刑)에서 해방시킨 것이 1949년의 농지개혁이었다”고 말했다.

 

“저는 이 농지개혁이 2000년 민족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토지혁명이라는 것은 쿠데타나 혁명의 슬로건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실제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겁니다. 토지혁명이든 농지개혁이든 엄청난 유혈혁명이 일어나도 잘 안 되는 겁니다. 필리핀이나 남미의 여러 나라를 보세요. 수도 없는 정변이 났지만, 여전히 대지주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잖아요. 저는 대한민국 건국과 동시에 이루어진 토지혁명이야말로,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시대 이래로 가장 성공적인 토지혁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농지개혁 때문에 6·25 때 농민들이 열심히 싸웠고, 공산화가 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1949년 정부가 농지개혁을 하려고 보니 이미 대상 면적의 절반 이상이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지주들이 대세가 기운 것을 인정하고 헐값에 땅을 팔아버린 겁니다. 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은 거저 주기도 했습니다. 결국 전쟁이 터져서 인민군들이 내려와서 보니 이미 농지개혁이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농민들이 인민군에 호응하여 손뼉 치고 환영할 이유가 없었죠.

 

-농지개혁을 통해 대한민국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있다면요.

“대한민국의 소작농이 모두 자영농으로서 새 나라의 국민이 된 겁니다. 완전한 새 출발입니다. 자영농의 나라로 대한민국이 건국된 거죠. 사람들은 1950년대 농민들이 문맹률이 높고 민도(民度)가 낮아서, 선거에서 막걸리나 고무신에 현혹되어 아무나 막 찍었다고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자기 이익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하게 찍었어요. 자영농을 비롯한 당시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당당한 주인으로서 주권을 행사한 겁니다.

 

▲1940년대의 흔한 농촌풍경.

 

-신생 독립국이 어떻게 그런 엄청난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었을까요?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운()도 좋았습니다.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국민당을 타이완으로 몰아냈는데 그게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겁니다. 또 북한에서 토지개혁을 먼저 했고요. 이런 상황에서 미국 국무부와 군정(軍政) 당국이 판단을 한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농지개혁의 실무 책임을 죽산 조봉암 선생에게 맡겼다는 겁니다. 그분은 아시다시피 원래 박헌영과 함께한 공산당원이었습니다.

 

-공산당계 인물에게 농지개혁을 맡긴 거군요.

“죽산은 독립운동도 누구보다 치열하게 하신 분이고, 건국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누구보다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승만은 아들뻘인 조봉암이 제헌국회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농림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합니다. 조봉암 농림부 장관이 차관과 농지국장, 기획실장 등 서너 명과 함께 밤을 새워 농지개혁법안의 기본 골자를 만든 겁니다. 강정택 차관과 강진국 농지국장도 굳이 이야기하면 좌익계 인물들이었습니다.

 

주 대표는 “흔히 우리나라는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만약 지주와 친일파가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면 친일파의 다수에게서 경제적인 토대를 완전히 몰수해버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친일파 몇 명 잡아서 사형선고를 내린 경우와 비교했을 경우 훨씬 더 실질적인 친일파 청산 조치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평등의 가치에서 출발한 신생 대한민국

-농지개혁을 통해 대한민국이 ‘평등의 가치’를 유전자로 가지게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원래 평등은 좌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농지개혁을 통해 모든 농민이 자영농이 되었고, 자영농이 열심히 일하고, 그 자식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현대 학문과 과학기술을 배우고, 산업을 발전시키고, 민주주의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신분질서가 완전히 해체되면서 절반은 왕후(王侯)의 후손이고 절반은 장상(將相)의 후손이 되었으니, ‘홍길동의 꿈’이 실현된 나라가 된 거죠. 그러니 평등 가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제대로 직면하면 좌파도 대한민국의 탄생을 긍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겠군요.

“우리는 조상들의 희생으로 좋은 나라에 살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봉건잔재를 청산했기 때문에 지난 60년 동안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였습니다. 저 또한 시골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고, 훌륭한 분들과 친구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밥 먹다가도 ‘정말 다행이야. 이 시대 이 나라에 태어나서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탄생 과정을 보면 물론 부끄러운 점도 많다’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점이 부끄러운 점인가요?

“먼저 자력(自力)으로 일본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해방시키지 못한 겁니다. 외세(外勢)를 등에 업은 채 싸우다가 분단도 되고, 심지어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했으니 부끄러운 점이 많죠. 사실은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미군정과 우익이 야합하여 낳은 자식이라고 해도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생아라고 해서 훌륭한 유전자를 갖지 말라는 법이 있나요? 공자도 사생아였습니다.

 

주 대표는 “역설적이게도 대한민국이 일군 성공과 발전, 특히 자본주의 발전으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며 “자유와 평등의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위태로워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2005년 9월 21일 여야5당 정책위의장 회의에 참석한 주대환 의장(맨 오른쪽). 오른쪽부터 주대환, 원혜영(열린우리당), 맹형규(한나라당), 김낙성(자민련), 김효석(민주당) 의장.

 

-갈수록 빈부(貧富)격차와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자영농의 나라로 건국되었고, 중산층이 두터운 나라로 유명했는데, 아주 빠른 속도로 불평등한 나라로 바뀌고 있습니다. OECD 국가 중에 거의 미국 다음으로 불평등이 심한 나라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에 따라 청년 실업과 노인 빈곤 문제가 심각하고, 자살률이 높고, 출산율은 낮고, 청소년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때문에 저는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평등이라는 유전자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동안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노동운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시야가 좁고, 평등 가치 지향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빈부격차의 확대를 저지하기보다는 (대기업 정규직) 조합원들만 중산층으로 빠져나왔습니다. 오히려 빈부격차 확대에 일조한 책임이 있습니다. 또 근간에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연공서열제 등을 개혁하기 위한 역대 정부의 노력에 저항하기도 하였습니다.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들은 ‘전두환 시절이 더 좋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젊은 시절 노동운동의 뒤를 따라다닌 사람으로서 참으로 통곡하고 싶습니다. 

 

주사파가 등장하게 된 이유

-앞으로 우리나라에도 대표님께서 말씀하시는 평등 가치를 실현하는, 수준 높은 노동운동이 등장할까요?

“한국에서 지금 빈부격차가 대물림되면서 계급이 만들어지려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계급사회로 변질되는 것을 저지하고, 평등한 나라로 되돌리려는 새로운 노동운동, 차세대 노동운동이 하층 노동자와 청년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선진국형 진보, 진정한 좌파가 등장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려고 하니, 평소에 궁금했던 문제가 새삼 생각이 났다.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1980년대에 와서 주사파가 갑자기 등장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민주화운동도 광기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주사파가 탄생합니다. 전두환을 몰아낼 우군(友軍)을 찾다가 북한이라는 존재를 재발견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북한의 물리적·군사적 힘에 끌렸지만, 생각을 그 방향으로 발전시키다 보니 북한이 정신적·도덕적 힘도 가진 것으로 믿게 된 겁니다. 만주의 무장 항일투쟁, 보천보 전투 이런 게 얼마나 멋지게 보입니까? 반면 자기들의 ‘정당한 주장’을 반대하는 놈들은 모조리 친일파의 후손이라고 생각하게 돼버린 거죠.

 

주 대표는 “한국 자본주의가 급성장하는 시기에 기성세대가 열심히 돈벌이하는 사이에 전두환이라는 악마를 죽이는 거창한 일을 스무살 어린 학생들이 한 것”이라며 “대학교는 이미 해방구나 마찬가지였고, 탄압이라는 것도 북한처럼 삼족(三族)을 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잠깐 잡아넣었다가 풀어주는 정도니 학생들의 간덩이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20대 초반의 아이들, 공부 잘한다고 어릴 적부터 칭찬만 받아온 아이들이 바로 레닌 같은 혁명가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겁니다. 이른바 ‘82학번들의 혁명놀이’가 시작된 것입니다. 제 이야기의 핵심은 주사파도 시대의 산물이고, 그들의 탄생에는 지금의 보수 세력의 책임도 있다는 것입니다.

 

30년 전의 그 ‘철없던 주사파 청년들’이 이제 50대 장년이 되어 대한민국의 중추를 장악하였다. 그들이 지금이라도 주대환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상흔 조선pub 기자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

파워인터뷰 2017년 05월 12일(金)

▲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이 10일 문재인 시대 개막을 맞아 서울 종로구 신문로 아산정책연구원에서 한국의 대외정책과 한반도 주변 4강과의 외교관계를 설명하면서 서울 시내 광화문 방향을 응시하고 있다. 최 부원장은 “한국과 미국의 동맹관계가 없으면 중국은 한국에 대해서 지금과 같은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늦게 ‘철(?)’이 들었지만 방향을 제대로 잡은 사람이다. 한창 공부해야 할 고교 시절 전국 여행을 다니며 낭만과 모험을 즐기다가 재수를 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대해 “좀 놀았다”고 말했다. 좀 논 덕에 외교·안보와 군사 분야에 관심이 깊으면서도 ‘점수’에 맞춰 경희대 영어영문학과를 선택해야 했다. 고교 시절 ‘문제아’라는 별명을 얻으며 방황하다가 재수 끝에 경희대에 입학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간 10일 공교롭게도 경희대 동문이면서 국내 대표적 외교·안보 전문가인 최 부원장을 만났다.

 

최 부원장은 철이 든 이후에도 평범하지 않은 길을 걸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 한국국방연구원에서 일하다가 30대 후반 김대중 정부가 처음 만든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책기획조정부장을 맡으며 공직에 뛰어들었다. 노무현 정부에선 외교안보연구원 미주연구 교수를 한 뒤, 이명박 정부에서는 소장에 오르며 외교 분야를 섭렵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국내 대표적 민간 외교·안보 전문 싱크탱크인 아산정책연구원의 부원장으로 영입됐다. 외교안보연구원 재직 시엔 한국정책방송과 아리랑TV에서 3년간 앵커를 하며 자신의 ‘끼’를 확인했다. 보수와 진보, 국방과 외교, 정부와 민간, 학자와 앵커를 오가는 이력은 최 부원장의 정책적 스펙트럼과 전문성에 이어, 사고의 탄력성까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을 평가한다면. 

“결국 탄핵정국으로부터 시작된 보수의 몰락을 의미한다. 변화를 바라는 국민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41%밖에 득표하지 못했다. 국정운영이 앞으로 쉽지 않다. 결국 협치가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건 인사다. 인사가 어떻게 되는지 봐야 정책의 방향성이나 정치 판도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눈여겨보는 인사 파트는. 

“외교·안보 분야다. 이 분야 인사를 봐야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이 ‘햇볕정책 2.0’이냐, 새로운 형태의 현실적·합리적 정책으로 갈 것이냐 판가름할 수 있다. 또 북한 문제에 몰입하는 정책이 될 것이냐, 좀 더 판을 넓게 보는 정책이 될 것이냐를 판가름할 수 있지 않을까.”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에 대해 보수층에서 여전히 불안해하는 시선이 있다.

“문 대통령은 대선 기간 중 북한에 대한 본인의 관점을 확실히 보여주지 못했다. 진보세력을 껴안으려다 보니 주저한 면이 있지만 이제 대통령이 됐기 때문에 대선 후보 시절과 상당히 다른 면을 보여야 한다. 또 문 대통령은 외교·안보의 관점이 북한 문제 중심으로만 짜여 있다. 좀 더 넓게 봐야 하는데, 큰 판을 보고 해석하는 그림이 갖춰져 있지 않다. 전반적으로 외교정책의 틀이 잘 안 보였다. 각론은 있는데 총론에서 좀 부족한 부분이 있다. 외교·안보 정책은 정부가 주도하면서 국민의 동의를 확보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문 대통령은 포퓰리즘으로 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노무현 정부도 그러했는데, 그게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궁합은. 

“잘 맞지 않는 궁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스스로 협상의 달인이라고 하는데 큰 틀에서 주고받기를 원하는 스타일이다. 문 대통령은 꼼꼼히 따지고 들어가는 스타일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면 궁합이 더 잘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큰 틀에서 치고, 합의할 것은 합의하며 줄 것은 주는 스타일이다. 문 대통령은 리더십이 강한 대통령은 아닌 것 같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수 있고, 트럼프는 그것을 약점으로 보고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좀 걱정이 된다.” 

 

―미국 보수 진영에서 문 대통령에 대한 의구심이 있나. 

“미국을 자주 다녀오는 편인데, 미국에서 문 대통령을 걱정하고 우려하는 것은 사실이다. 세 가지 사안 때문이다. 첫째 선거 운동 과정에서 개성공단 재가동과 금강산 관광 재개를 말한 것이다. 지금 중국까지 나서 국제사회가 북한을 압박하는 모드다. 그런데 한국이 제재를 스스로 풀어버린다는 것은 국제공조가 와해된다는 의미다. 비핵화를 방해하는 것이 오히려 한국이라고 걱정한다. 둘째 미국은 문 대통령이 남북대화 재개에 강한 집념을 보이는 점을 우려한다. 남북대화는 자칫 대화를 위한 대화로 이어지고, 결국 미국의 압박 정책의 약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 셋째 문 대통령이 한·일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려는 게 아닌지 미국은 우려한다. 미국으로선 두 동맹국이 잘 지내야 하는데, 이 합의가 뒤집히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사실 개성공단 폐쇄는 한국 정부가 북한에 대한 제재에 솔선수범해 나가고 국제사회의 동참을 이끈다는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 문 대통령은 개성공단에 대한 접근방법이 다르다. 우리가 북한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면 북핵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이는 과거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우리의 대외환경이 많이 바뀌었는데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상 관점이나 접근법이 과거 수준인 것 같아 걱정스럽다.” 

 

―한·미 동맹이 영원한가.  

“한·미 동맹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다. 우리는 한·미 동맹을 잘 활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국과 미국 간 동맹 관계가 없으면 중국은 한국에 대해 지금과 같은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 한·미 동맹이 없다면 중국은 우리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우리가 좀 더 자주적인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맞는 말이다. 다만 미국이 움직이는 분야에서 (보조를 맞추도록) 노력은 하되, 우리의 영향력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도 할 얘기는 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한국은 미국이 제일 만만하냐. 왜 미국에 대해서는 ‘노(No)’라고 하면서 중국엔 ‘노’라고 하지 못하나”라는 불만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 한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문제만큼은 중국에 강경하게 대응하니까, 미국 내에서 평가가 좋아졌다.”

 

―트럼프 행정부를 평가해달라. 

“애초 예상보다는 조금 낫다. 그런데 여전히 예측하기 힘든 정부다. 과거 한·미 관계는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박정희와 지미 카터 간, 그다음 노무현과 조지 W 부시 간이었다. 문재인과 트럼프 간에 세 번째 폭풍이 올 수 있다. 트럼프의 미국은 과거의 미국과는 분명히 다르다. 대통령 중심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큰 정부라서 우리가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주한 미국 대사가 장기간 공석인 것은 어떻게 봐야 하나. 

“한국의 비중이 떨어진다고는 보지 않는다. 인선이 쉽지 않다. 트럼프 정부가 가진 인재 풀 자체가 적다. 대신 주한미군 사령관이 창구 역할을 할 수 있다. 한반도 상황이 북한 문제를 중심으로 안보가 제일 중시된다고 본다면 주한 미 대사가 없더라도 그 정도 역할을 할 사람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사드 배치 비용의 한국 청구를 주장한 이유는.

“트럼프 대통령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비즈니스맨이다. 돈에 집착한다. 그러다 보니 미국이 지금까지 관철해왔던 가치와 리더십에 굉장한 손상을 주는 발언이 있었다. 이렇게 되면 미군은 마치 용병처럼 비친다. 심각한 문제다. 미국의 가치와 책임국으로서 평가가 완전히 저하돼버린 것이다. 문제는 미국엔 그런 사람이 대통령으로 있고 동맹을 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호응해 줘야 하나. 

“미국과 거래관계를 만들어야 된다고 본다. 미국이 원하는 게 무엇이고, 우리가 받아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나름의 대차대조표로 만들어야 한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시절 한·미가 주고받기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접근을 잘했다. 모든 것을 주지 않으려고 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미국이 선제타격 얘기를 하다가 돌연 ‘최대의 압박과 관여’를 꺼내 들었다. 대화 쪽으로 가는 것 같다.

“제가 볼 때 관여는 압박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다. 앞쪽(압박)에 방점이 찍혀 있다. 미국 주류는 결국 장기적인 압박을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갑자기 ‘관여’ 얘기를 하기 시작한 이유는 선제타격에 대해 한국과 일본의 우려 때문이다. 이 같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그 말을 꺼낸 것이다. 사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선제타격 얘기를 한 적은 없다. 다만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있다는 것이다. 만약 북한이 미국을 향해 직접 공격하는 상황에서는 미국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선제 타격을 해야 한다. 하지만 예방적 차원의 선제 타격이라면 다른 얘기다. 미국은 이미 그 시기를 지났다고 생각한다.”

 

―미국이 인내하는 시한은 얼마나 될까. 

“시한보다는 조건이 문제다. 미국은 북핵의 동결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버락 오바마 정부보다는 나은 것을 얻었다는 점을 트럼프 정부가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의혹 시설에 대한 사찰을 허용하는 수준까지는 가야 미국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사찰 요구 얘기가 미국에서 나오나. 

“내부적으로 검토되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오바마 정부 수준은 안 된다, 북핵 동결 수준도 아니다’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보상을 할 생각도 없다. ‘우리가 나쁜 일에 왜 보상해주나. 트럼프는 절대 보상을 안 한다’는 게 미국 사람들의 예측이다.” 

 

―그렇더라도 북한에 유인책을 줘야 하지 않나. 

“북한이 안보 위기를 심각하게 여기면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는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의 요구대로 대화의 전제 조건으로서 한·미 군사훈련 중단, 주한미군 감축 등 이런 얘기는 미국으로선 할 수 없다. ‘너네(북한)가 비핵화를 먼저 하면 우리(미국)는 관계개선을 위한 협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여기에 ‘체제에 대한 안전보장, 대북 강압 정책 안 하겠다. 6자회담 틀 내에서 북·미 관계 정상화 협상을 할 수 있다’는 정도만 돼도 본인(미국인)들은 너무 많이 준 것 같다고 생각한다. 워싱턴의 분위기가 안 좋다. 민주당 사람들마저도 과거보다는 더 강한 대북정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워싱턴 내 대화론자들은 굉장히 소수다.” 

 

―미국 내에 선제타격에 대한 여론이 강한 것도 아니지 않나. 

“그렇다. 아무리 강경한 사람이라도 전쟁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결국 외교로 갈 수밖에 없는데 현재 그러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북한 당국자와 북한 관련 미국 민간전문가가 만나는 반관반민(半官半民) 형식의 ‘트랙 1.5 대화’를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북·미 간 양자 대화 가능성은. 

“‘트랙 1.5 대화’에 미국 정부는 전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미국 정부 관리가 하나도 안 갔다. 오슬로엔 정례적으로 북한 사람들을 불러다 회의를 여는 외교정책 연구소가 있다. 미국 정부가 메시지를 전달해달라고 부탁한 것도 없다. 미국 싱크탱크 쪽에서 북한 사람을 만나겠다고 하면 미국 정부는 ‘만나라’ 그러고 만다. 우리는 북·미 간 비밀 대화접촉 시도라고 보는데 그건 아니다.”

 

―그럼 의미 있는 대화체는 무엇인가. 

“만약 그 대화가 미국 내에서 개최되면 그건 의미가 있다. 비자를 발급해주는 것이니까. 북·미 당국 대화는 아직 많이 먼 얘기다. 뉴욕채널도 아직 가동이 안 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게 중국 주재하에 열리는 북·미 간 대화다. 과거 3자 대화 같은 거다. 김대중·이명박 정부 시절 다 해봤다. 그런데 그때보다 미국 정부가 더 완고한 입장이다. 북한이 말로 하는 수준 정도론 안 된다.”

 

―북한이 이런 신호를 받았을까. 

“미국은 지금 대북 제재의 25%밖에 안 했다고 한다. 나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세우는 방법도 외교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트럼프 정부는 ‘우리가 더한 압박도 할 수 있는데 북한, 너네 잘 생각해봐. 중국도 간접적인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래서 중국이 놀란 것이다. ‘세컨더리 보이콧’(북한과 거래하는 제3국 기관이나 기업에 대한 제재)을 안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보는 것이다.”

 

―뭔가 북·미 간 ‘빅딜(Big deal)’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분위기인데 전혀 다른 상황인가.

“그렇다. 한국 정부는 빅딜 대화를 바라는 것 같은데 미국 정부에 조언하는 사람들을 만나보고 언젠가는 북한과 미국이 딜을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빅딜을 하려면 트럼프가 얻는 게 많아야 하고, 지금 북한이 내놓은 카드로는 그게 안 된다. 지금 ‘급한 불은 껐다’ 정도다. 당분간 북핵은 소강과 탐색 국면 정도로 갈 것이다. 북한도 한국의 새 정부를 살펴봐야 한다. 미국 내에서 대화 얘기는 거의 사라진 상태다.”

 

―북한이 대화로 핵무기를 포기할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 생각을 바꾸는 게 굉장히 어려운 것이다. 과거 북한은 김일성·김정일 정권 초기만 하더라도 경제적 인센티브가 있으면 포기하겠다는 딜이 성사될 수 있었다. 그런데 김정은 정권 시기에 들어와서는 협상이 안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핵을 택할 것이냐, 체제 몰락을 선택할 것이냐’ 압박하자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에 상당히 세게 밀어붙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 과정에서 긴장 국면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런 긴장국면에서 미국이 북한을 타격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미국 본토에 대한 실질적인 타격 위협이 없는 한 미국은 북한을 때리지 않는다. 북한의 우라늄 시설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 ‘서지컬 스트라이크’(특정 포인트만 공격하는 외과 수술식 타격)는 북한의 핵 개발 속도를 몇 년 늦추는 것밖에 안 된다. 가능성이 낮다. 미국이 바라는 것은 장기적 관점에서 북한의 체제 전환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북핵은 단기간에 풀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중국이 진짜 대북압박에 나선 것인가. 

“이번엔 좀 다른 것 같다. ‘트럼프는 다르다’는 것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확실히 느낀 것 같다. 그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 그러면서도 딜은 가능한 사람인 것 같다고 보는 듯하다.”

 

―두 정상의 대화에 대한 후일담 없나. 

“나중에 들은 얘기가 있다. 트럼프가 시진핑에게 ‘이렇게 해달라’고 구체적으로 말한 게 없다고 한다. 다만 ‘잘해주길 바란다’는 정도만 얘기해놓고 3일 뒤인가 시진핑에게 전화해선 ‘잘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어봤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굉장한 압박을 하는 것이다. 미국의 움직임이 과거와 다르다는 것을 중국도 심각하게 생각한다. 정상회담 중 시리아에 미사일을 쏘고, 칼빈슨호가 한반도로 간다고 하니까 중국으로서는 ‘우리가 무엇인가 역할을 하지 않으면 미국이 무엇을 할지 예측할 수 없다’고 느낀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중국의 외교정책 DNA가 바뀌었다, 이 정도는 아니고.”

 

―중국은 자존심이 유독 강한 나라인데 시 주석으로서는 모욕적일 수 있지 않나.

“그래서 언론보도를 특별하게 많이 하지 않았다. 사진만 몇 개 보도하고 넘어갔다. 시진핑에겐 불쾌한 정상회담이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미국이 굉장히 화가 나 있는 상태구나, 저걸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중국에 좋지 않다, 중국이 경제성장을 하려면 미국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해야 되는데 이 환경을 얘네(미국)가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구나’ 이렇게 판단한 것 아닐까. 그러면서 일단 소나기는 피하자는 식의 실용적 태도로 돌아선 건 아닌가 한다. 속으로는 절치부심할 것이다.”

 

―중국은 미국의 무엇을 두려워하나. 

“중국으로선 연평균 6.5% 이상 성장해야 하는데 그것을 흔들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두 가지가 가장 핵심적이다. 하나는 지적재산권 문제다. 다른 하나는 환율조작이다. 이번에 트럼프와 시진핑은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에 대해 한마디도 안 했다. 중국으로서는 완전히 허를 찔린 것이다. 시진핑이 답변할 것을 많이 가져갔을 텐데 말 한마디 안 했다. 세 번째 아킬레스건이 있다면 중국 시장에서의 외국 기업 차별이다. 이것은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할 수 있다. 중국으로서는 방어할 방법이 없고 경제성장이 언제 둔화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는 것이다. 미국이 경제·통상 분야에서 중국 때리기를 예상보다 안 하고 있는데, 중국의 태도를 지켜보는 것 같다.” 

 

―북한이 이런 상황에서 핵실험을 할 수 있을까. 

“언젠간 하긴 할 것이다. 기왕에 핵 보유 국가가 될 것이라면 하루라도 빨리해서 쐐기를 박는 것이다. 아니면 조금 유예하는 길이다. 당분간은 유예할 것 같다. 지금 상황이 불리하다고 보기 때문에. 물론 계속해서 미사일실험 같은 군불은 땔 것이다.” 

 

―북한이 6차 핵 실험에 나선다면 중국이 무엇을 할 수 있나.

“북한을 가장 괴롭힐 수 있는 것이 석유와 식량 문제다. 식량은 인도적인 문제라서 쉽지 않다고 본다면 답은 석유 공급을 차단하는 것이다. 금융거래와 노동력 문제도 큰 카드다. 노동자 수용 인력을 제한하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중국이 북한을 포기할까. 

“큰 틀에서 보면 북한을 포기하는 것은 미국의 영향권을 더 확장해 주는 것이다. 그건 아니다. 중국이 가장 바라는 것은 북한 내 개혁세력의 등장이다. 김정은 대체세력의 등장. 가장 좋은 것은 김정은이 개과천선해서 덜 호전적인 방식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것이지만 지금 문제는 장성택 등 대체세력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중국은 굉장히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현 지도부는 포기하더라도 북한은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지정학적인 차원의 미국과의 게임에서 중국이 열세로 몰리는 상황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한·중 관계를 어떻게 가져가야 하나. 

“너무 급히 개선하려고 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특히 사드 문제를 확 뒤집는다면, 중국에 ‘한국은 흔들면 언제든 중국으로 올 수 있는 쉬운 상대’라는 것을 각인시켜줄 뿐이다. 문 대통령이 사드에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외교적으로 끌어가면서 실행을 연기하는 방식으로 천천히 풀어나가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새 정부는 중국에 대한 과거의 환상부터 없애야 한다. 그동안 중국은 무역흑자를 내주는 나라라는 좋은 이미지였는데, 지난 1년간 중국의 민낯을 본 것 아닌가. 중국이 무슨 선의를 가지고 있나. 중국처럼 힘을 숭상하는 국가가 있을까. 더 이상 중국의 선의를 기대하지 말고 외교적으로 고단수 전략을 펴야 한다. 중국을 상대하려면 무엇을 원한다 해도 천천히 가야 한다. 역설적으로 한·미 동맹이 커져야 중국도 한국의 입장을 존중해 줄 수 있다. ‘한국이 ‘노’ 하니까 미국도 못 움직이는구나, 한국과 잘 지내야겠다’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야 한다. 중국은 우리에게 늘 이익을 남겨주는 꿈의 시장이 아니다. 중국은 경쟁상대다. 이상적인 파트너라고 보면 큰 오산이다.” 

 

―한·일 관계는 어떻게 풀어가는 게 맞나.

“한·일 위안부 합의의 전면 재검토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아베에게 칼자루를 넘겨주는 꼴이다. 일본과의 안보 협력 문제는 현실적인 차원에서 필요하다. 일본이 가진 정보능력이나 미국의 능력을 봤을 때 일본을 끌어안는 게 유리하다. 일본이 북한 문제에 있어 독자적 능력을 가지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본 내에서 ‘한국은 필요 없다. 미·일 동맹으로 충분하다’는 소위 ‘코리아 패싱’ 논의가 커지고 있는 것은 결과론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다. 일본이 좋아서가 아니라 일본을 묶어서 활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일본에 대해서는 역사와 안보를 분리하는 작업을 추진해야 한다. 미국 내에서는 아베가 두 개를 연계하려는 움직임에 불만이 많다.” 

인터뷰 = 김만용 차장(정치부) mykim@  정리 = 인지현 기자 loveofall@munhwa.com

 

□최서면 선생

2015.08.16  [장덕수 암살 사건, 일본 망명, 朴正熙의 조력자… '한·일 외교의 怪物' 

"반성 않겠다면 그건 日本 손해… 우리가 엎드려 절 받으려고 해선 안 돼"

 

"金九는 정치인이 아닌 '간디'와 같은 독립운동가

李承晩은 탁월한 정치가… 그의 功과 過는 7:3"

 

"朴正熙가 다리를 꼬고 앉아 구두 밑창에 구멍이 보여…

그는 "시간이 안 틀린다"며 '시티즌' 시계를 차고 있어"

 

자택의 거실에는 '竭忠報國(갈충보국·충성을 다해 나라를 돕는다)' 액자가 걸려 있었다. 始林山人(시림산인)이 崔書勉 少年(최서면 소년)에게 써준 걸로 되어 있다.

 

이제 거동이 불편해 전동 휠체어에 의지하는 노인이지만, 최서면(87)씨에게도 '소년(少年)'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연희전문에 다니던 열아홉 살 때였다. '장덕수(張德秀) 암살 사건'으로 투옥되자 당시 이시영 부통령이 보내준 글이다. '열심히 공부하라(書勉)'는 뜻으로 '崔書勉'이라는 이름도 새로 지어줬다. 그 이름대로 평생 한일관계사 공부를 해온 셈이다."

 

―장덕수 암살(1947년)의 주모자가 맞나?

해방 공간에서 장덕수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동의했다는 이유로 총을 쏜 걸로 아는데. "당시 나는 김구(金九) 선생을 모시는 한독당(韓獨黨) 산하 대한학생연맹 위원장이었고, 두 명의 암살범이 그 조직에 가입돼 있었다. 그 관계밖에 없다. 만약 내가 개입됐다면 사건이 난 날 도망을 갔어야지, 그냥 집에 있다가 잡혔겠나.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1년 반 뒤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 뒤 장면(張勉) 박사의 비서, 미(美) 군용기를 타고 망명, 일본 도쿄에서 한국연구원 설립, 한일관계사 희귀 자료와 책자 20여만점 수집, 김대중(金大中) 후원, 박정희(朴正熙)의 조력자,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을 움직인 '한·일 외교의 괴물(怪物)'…. 최서면씨 자체가 '현대사(現代史)'인지 모른다. 풍운아처럼 시대를 살았고 미스터리한 대목도 많다.

 

▲최서면 선생은 “한·일 문제 전문가, 학자로 불리기도 했지만 스스로 돌아볼 때 훌륭한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고운호 객원기자

 

―김구(金九) 선생부터 시작하자. 그는 어떤 인물인가?

"행정가적인 정치인이 아닌 독립운동가로서 그를 봐야 한다. 인도의 간디는 행정적인 의미에서 네루(인도의 초대 총리)보다 못하다. 그러나 민족사적 의미에서 네루가 간디를 따라갈 수 없다."

 

―김구는 남한 단독정부를 반대했다. 남북 협상을 추진하다가 실패했고, 북한에 이용당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반대한 인물이 된 셈인데.

"단독정부를 반대한 게 아니다. 단독정부를 세우더라도 북한 김일성과 일단 협상을 해보고 나서 하자, 그래야 명분과 대표성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그분은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어떤 점을 말하나?

"전후(戰後) 처리 구상을 논의하는 카이로 회담(1943년)에 참석하기 전 장제스(蔣介石)가 김구를 불렀다. '장차 조선 문제가 나올 텐데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그때는 식민지 조선을 신탁통치하자는 분위기였다. 김구는 '신탁통치를 하면 나는 어디로 또 망명을 해야 합니까. 조선의 즉각적인 독립을 원할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카이로에서 장제스의 제안으로 '조선을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키는 걸로 결정 났다. 그렇게 움직인 것은 김구의 기여였다."

 

―이승만(李承晩)에 대한 평가는?

"반대편에 있었지만 존경받을 만하다. 탁월한 정치가였다. 남한 단독정부는 완성품이 아니고 이상적인 것도 아니었지만, 당시 현실에서 나름대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 공과(功過)를 7대3으로 본다."

 

―선생은 이승만 정부 시절 장면(張勉) 박사의 비서를 하다가 1957년 일본에 망명한 걸로 아는데?

"감옥에서 가톨릭에 귀의해 노기남 대주교(최초의 한국인 주교)와 장면 박사를 만나게 됐다. 그런 인연으로 장면 박사의 비서로 일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 때 장면 세력을 제거하려는 공작이 있었다. 그 정보를 알고 이분들이 내게 피해 있으라고 한 것이다. 미 군용기로 일본에 밀항했다."

 

그가 혼자 사는 아파트에는 한·일 관계 자료와 책자들로 꽉 차 있다. 정부 연구기관과 대학에도 그는 적지 않은 희귀 자료들을 넘겼다. 특히 그는 안중근 의사에 관한 자료를 발굴한 공로가 크다. 그가 일본 고서점에서 '안응칠 역사(安應七 歷史)'라는 책을 입수함으로써 국내 처음으로 '안중근 전(傳)'이 출판될 수 있었다.

 

―일본에서 한일관계사 자료 수집을 하게 된 계기는?

"당초 한국을 떠날 때 이탈리아에 가기로 한 것이다. 일본에서 이탈리아행 수속을 밟는 동안 일본 국회도서관을 다녔다. 일본이 그동안 해놓은 한국 연구 자료들을 보게 된 것이다. 한국 사람으로서 내가 부끄러웠다.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5년 동안 국회도서관에서 공부했다. 그러다가 한국연구원을 세우면서 나도 자료를 찾고 모으게 된 거지. 도쿄의 간다(神田) 헌책방을 다니느라 바빴다."

 

―20만 점의 자료 수집 재원은 어디서 나왔나?

"내가 일본 갈 때는 11호 차뿐 이었지." ―11호차? "두 발로 갔다는 거지. 하지만 하느님은 일용할 양식을 준다. 밥만 먹겠다는 사람은 밥만 주고, 책을 꼭 필요로 한 사람은 책까지 준다."

 

―중앙정보부의 에이전트 역할을 하면서 돈을 받아 썼다는데?

"일본에서 그 시절 유행된 얘기지. 중앙정보부의 돈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문교부에 신청해서 국회 심의를 거쳐 보조금을 받았다."

 

―4·19 뒤 장면 정부가 들어섰을 때 왜 안 돌아갔나?

"장면 정부가 오래 갈 것 같지 않다는 소문이 들렸다. 한국에서는 '일할 사람이 없는데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했지만 '1년만 기다려보고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분은 치세에는 훌륭한 재상 감이었지만 난국에는 부적합했다."

 

―얼마 안 가 5·16 쿠데타로 장면 정부가 무너졌는데.

"나는 일본에서 반(反)박정희 정권 강연을 많이 하고 다녔다. 1970년대 초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씨는 내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일본과의 경제 협력이 필요한 시기였으니 골치 아팠을 것이다. 당시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주한 일본대사가 박정희에게 '최서면을 한번 만나보라'고 권해 내가 청와대에 불려갔다."

 

―일본대사가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나?

"가나야마 대사는 재임 시절(1968~1972년) 한국을 위해 많은 역할을 했다. 한·일 관계가 잘못되면 일본 외교는 다 소용없다는 철학을 가졌던 인물이다. 어느 날 박정희가 한잔하자며 청와대로 그를 불러 '일본대사도 한국을 도와야 한다. 포항제철 건설과 관련해 답장을 못 받으면 돌아올 필요가 없다'며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에게 전할 친서를 맡기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겨, 1997년 우리 가톨릭 묘지에 안장됐다."

 

―어쨌든 그의 주선으로 만난 박정희의 첫인상이 어땠나?

"청와대에 들어가니 국무회의가 막 끝난 것 같았다. 회의를 위해 응접실에 갖다놓은 소파를 치우는 중이었다. 박정희도 소파를 옮기는 걸 돕고 있었다. 그런 뒤 자리에 앉아 '가물었다가 오늘 비가 몇 ㎜ 내려 대전까지 모심기를 했다. 조금만 더 오면 수원까지 할 수 있겠다. 최 원장이 와서 비도 내려주니 감사하다'고 말했다. 묘한 느낌을 받았다."

 

―무슨 대화를 나눴나?

"그에게 '공산주의자가 맞느냐?'고 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당시 일본 우익은 박정희를 그렇게 봤기 때문이다(박정희는 남로당 가입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그 뒤 재심에서 형집행정지로 풀려남. 형 박상희는 1946년 대구폭동에서 사망). 내가 일본에 돌아가면 여기에 답을 해줘야 하니까. 박정희는 이 질문에 자극을 받았다. 군 시절 조사를 받았지만 김종필이 잘 처리해서 오해를 안 받게 됐고, 형은 공산주의자인지 모르나 존경한다는 식으로 답했다."

 

―첫 만남이 있은 뒤로 박정희 편으로 돌아선 걸로 아는데?

"박정희가 오른쪽 다리를 꼬고 앉았는데 구두 밑창에 구멍이 보였다. 그게 감동적이었다. 헤어질 때는 그에게 차고 있는 시계를 보여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당시 일본에 와서 롤렉스 시계를 사고는 '하이트(白金)'라며 자랑하던 고위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일본에서 부속품을 들여와 우리가 처음 조립한 시티즌 시계다. 2년이 되도 시간이 안 틀린다'고 했다. 일본에 돌아와 강연을 하면서 박정희의 구두와 시계 얘기를 했다."

 

―지금 일본 정·재계 분위기는 선생이 교유하던 시기와 많이 달라졌지 않나?

"그 시대 일본 사람들은 과거 자기가 했던 짓을 알기에 '한국에 이건 해줘야지' '우리가 참아야지' 했다. 한국이 잘돼야 일본이 잘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전후 체제에서의 '탈각(脫却)'. 전후 체제를 넘어서고자 한다. 그런 마당에 우리가 과거 일본인에게 했던 것처럼 '너 잘못했지'로만 대응해서는 안 된다."

 

―아베 총리가 관심 인물인데, 그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어떠했나?

"교활한, 속을 알 수 없는… 정치가다운 정치가였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에서 그가 군수성 차관을 했다. 하지만 그는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평소 굽신거리는 그가 전쟁 예산에 도장 찍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도조 내각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그는 '친한파'로 분류됐는데?

"다른 속셈을 감추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기시는 총리를 그만둔 뒤에도 '한일협력위원회'를 만들어 역할을 했다. 내가 물밑 작업을 해서 연세대에서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줬다. 수여식장에서 목사가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무슨 일이 이런 일이 있습니까. 언제는 싸우라고 해놓고 이제는 은혜를 주라고 하십니까. 그러나 용서하라고 하시니 용서하겠습니다.' 기시는 '정말 감동적인 날'이라고 했다. 박정희 정권 때 한국에서 명예학위를 받은 일본 인사들끼리 '한림회', 훈장을 받은 인사들끼리 '광화회'를 스스로 조직했다. 친한파 그룹이었던 셈이다."

 

―아베 정권에 대한 전망은?

"대국(大國)은 과거의 잘못을 알고 반성함으로써 한 단계 발전해왔다. 일본이 반성하지 않겠다면 그건 일본의 손해이고 부끄러운 나라가 될 뿐이다. 그런 일본에 우리가 엎드려 절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선생은 무엇을 해온 사람인가? "한·일 문제 전문가, 학자, 교수로 불리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를 돌아볼 때 훌륭한 학생이었다. 학연후지무지(學然後知無知·배우고 나니 내가 무식한 것을 알게 됐다)…."

조선일보 [최보식이 만난 사람]

 

□홍지만 의원 

2015.12.23 "새누리 대장은 대통령… 야당 독재"

"새누리당 의원들의 대장은 대통령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 모든 후보들이 박근혜를 외치는 이유는,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할 때기 때문이다." "야당 독재다." "입법부의 기능이 마비됐다."


22일 오후 5시에 생방송된 중앙일보 인터넷 방송 ‘직격인터뷰’ 31회에 나온 새누리당 홍지만 의원의 말이다. 그는 중앙일보 강찬호 논설위원과 인터뷰에서 선거국 획정 등 총선 룰, 공천 방식, 진실한 사람 논란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홍 의원은 1993년 SBS에 기자로 입사해, 2002년부터는 앵커로 활약했다. 2008년 퇴사 후엔 정계에 진출하여 대구광역시 달서구 갑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해 제19대 총선에서 당선되었다.
 

다음은 강찬호 중앙일보 논설위원과 새누리당 홍지만 의원의 일문일답 전문.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
"아침 5시 반에서 6시쯤 일어나 버스를 타고 출발하려는 산악회 분들과 인사를 나눈다. 산에 오르는 분들은 생각이 긍정적이다. 친해지기도 했다. 시간이 나면 와룡산에 오르기도 하는데, 18대 국회 때 낙선을 한 이후 4년 동안은 거의 매일 산을 올랐다. 그리고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장사 준비하시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아침은 그렇게 보내지만, 낮에는 행사가 많다. 국회의원이 되고 보니 안 좋은 게 있는데, 바로 모든 행사에 다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곳은 가고 어떤 곳은 안가면 서운해 한다. 특히 최근 한 달간은 송년회가 너무 많아서 힘들었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에만 17군데, 목요일 저녁에만 15군데의 모임을 갔다."

-내년 총선 룰 변경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나오면서 더욱 그랬을 것 같다.
"그렇다. 오픈프라이머리와 경선이야기가 나와서 총선이 조기 과열됐다. 지금은 오픈프라이머리가 과거 이야기가 됐지만, 나는 그때도 오픈프라이머리 문제를 지적했었다. 대표도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새로운 공천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던 것 같다. 오픈프라이머리의 문제점은 바로 돈 선거가 부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초단체장이나 구의원 · 시의원 중 해당 지역에서 사업을 해 돈이 많은 사람이 돈 선거를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또한, 그 과정도 매우 혼탁해진다. 물론 오픈프라이머리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 이상적인 공천 시스템이 되겠지만, 그 이면에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많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당에서 주민들의 의지를 반영한 상향식 공천을 하겠다는 말이 쉽게 나왔다. 이럴 경우 단순히 자신이 해당 지역에서 구청장이나 시의원, 혹은 구의원을 오래 했다는 이유로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이 붙을 수 있다. 기업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고, 당은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권을 창출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어느 지역이든 제대로 된 후보를 내세워 선거를 이겨야한다. 그런데 대구·경북 지역은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으면 유리해진다. 그래서 ‘야, 뭐 대구 ·경북이 고민할 게 있나. 공천만 받으면, 새누리당 깃발만 꽂으면 끝나는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래서 예선이 굉장히 치열하다. 다른 수도권의 경우, 새누리당 지지자와 새정치연합의 지지자가 구분이 되어있다. 소위 ‘중간 표’를 얼마나 흡수하는가는 '공중전을 얼마나 잘하느냐', '국민의 여론이 어떻게 흘러가느냐'로 나뉜다. 하지만, 대구·경북 지역은 사실 당 공천이 문제여서, 후보들이 나오면 새누리당 내에서 싸우는 것이 된다. 대구 지역의 경우. 가령 나의 경우 달서구갑에 예비 후보가 4명이나 나와 있다. 따라서 이런 부분이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전략공천이 필요한가.
"필요한 곳은 해야할 것이다. 현재 지역마다 룰 자체가 다 다르다. 선거의 향배, 전체적 여론의 흐름, 정부의 정국 주도권 등을 전부 다 파악해 하나의 룰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한 몸이 되어 나아가야한다. 현재 국회 선진화법 때문에 많은 국회의원 중 1명만 반대해도 통과가 안 되고 있다. 19대 국회의원이 되고나서 정말 충격을 받았다. 민주주의는 반대 의견이 있을 경우 다수결로 표결을 해 합의하는 것이다. 한 표라도 많으면 국회의원이고 대통령이고 당선되곤 한다. 따라서 의견이 맞지 않으면 다수결로 하면 되는데, 이건 다수결도 아니다. 지금처럼 법안을 통과시켜야 할 시기가 와도, 한 명이 반대하면 통과가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당이 내년 총선에서 180석 이상의 다수 석을 확보해 잘못된 선진화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 대구·경북의 공천방법은 어떻게 돼야하나.
"공천 룰은 공천 특위와 당 지도부가 논의해 제대로 된 방향으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천 방법에 따라 개개인의 이익이 달라지기 때문에 ‘공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는 정답이 없다. 특히 180석 이상을 확보하고 정권 재창출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남이나 대구·경북 말고 서울 수도권에서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짜야한다. 오픈프라이머리의 경우 역선택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사람일 경우 오픈 프라이머리를 해서 1등이 되어 나가도, 상대 당과 붙었을 때 100% 진다면 오픈프라이머리가 힘을 못 쓴다. 선거 전략은 민심의 흐름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지며 그럴 수밖에 없다."

-대구의 경우 새누리당에서 공천이 된 사람이 야당에 질 가능성은 적지 않은가. 오픈프라이머리가 문제라면, 경선은 해도 문제가 없지 않은가.
"경선을 해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내 지역구의 경우, 당대표와 최고위원 회의에서 기초단체장이 총선에 나오면 당심과 민심에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에 불이익을 주겠다고 했다. 그랬지만 우리 지역에도 구청장이 12월 초에 사표를 쓰고 나왔다. 나 같은 초선 의원의 경우 국회의원으로서 예산·법·입법·정부감사 등의 일도 하고 있기 때문에, 동시에 지역구를 관리하기가 매우 힘들다. 따라서 이건 불공평한 것이다. 이런 것만 봐도 이상적인 상향식 공천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기초단체장은 지역살림꾼이기 때문에 당에서 공천을 주는 것인데, 그것을 자기 정치적 야욕을 위해 쓰면 안 된다. 구청장이 사표를 쓰고 나오면 보궐선거를 해야하고, 그러면 시의원이 구청장에 도전하니 시의원 자리를 위해 또 다시 보궐선거를 해야 해서 선거 비용도 만만치 않다. 비용은 다 국민의 세금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선 투표는 어떤가.
"나름대로 결선투표에도 논리가 있다.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고 본다. 다만, 일률적인 룰은 만들어야하기 때문에 중간지점을 찾아야 한다. 일률적인 룰을 만들되 유동성 있게, 지역별로 조건이나 상황에 맞게 좀 움직일 수 있는, 유연한 틀을 만들어놓고 진행을 해야 한다.

-홍 의원의 트레이드 마크는 CCTV 영유아 보호법이다. 어린이집에 CCTV 도입하자는 의견에 처음에는 모든 의원들이 적극적으로 동의하다가 갑자기 그 의견이 수그러 들었다. 전국 곳곳에서 어린이집 원장이 압박을 해서 그랬다고 한다. 그런데도 홍의원은 지속적으로 보호법을 주장했다.
"역대 대통령은 공무원 표를 의식해서 공무원 연금 개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공무원 연금 개혁 법안을 어렵게 밀어붙였다. 예산이 부족해 다 같이 허리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에서 그동안 공무원 연금을 나누어주느라고 하루에 이자만 100 억씩 들었기 때문이다. 꼭 개혁할 필요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린이집에 CCTV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앵커 할 때도 봤지만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폭력이 일어나곤 한다. 부모 된 입장으로 생각하면 무조건 CCTV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법안이 2013년도 상임위에서 폐기가 되었다. 그래서 2014년 4월에 재발의하고 계속 재발의했다. 폐기가 되었던 이유는 어린이집 교사들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교사의 인권도 당연히 존중되어야한다. 하지만, 아직 어려 말도 잘하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표현도 잘 못하는 아이들의 인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올해 1월엔 인천에서 어린이집 폭행 사건이 터져 국민이 경악하였고, 결과적으로는 법이 통과되었다. 외국사례를 봐도, 미국의 대부분의 주에서 어린이집 CCTV는 물론 실시간 IP TV까지 거의 허가 조건에 들어가 있다. 유럽 선진국도 마찬가지다. 법안 발의 과정에서 어린이집 원장들을 많이 설득했고, 나중엔 원장들도 잘했다고 했다. 물론 나도 어린이집 교사의 인권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달 전 어린이집 교사 처우개선을 위해, 내가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다른 의원들은 어린이집 원장의 압박에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들의 영향력이 그렇게 큰가.
"선거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그 영향이 커지기도 한다. 여야가 박빙일 땐, ‘카더라 통신’이 번지면 아주 민감해지기 때문에 거부했을 것이다."

-유아의 인권이 한 단계 격상된 것 같다. 홍의원도 이로 인해 많은 주목을 받은 것 같다.
"사실 내가 더 자랑스럽고 뿌듯해 하는 건 구글(Google)세다. 구글세는 회의 중 비서관이 이게 문제라고 이야기해 회의를 거쳐 발의하게 되었다. 물론 한 국가에서 법안을 만든다고 해서 구글이 그 법안을 따라갈 수는 없다. 그래서 ‘법안이 통과될 수 있을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G20에서 각국 정상들이 도입이 필요하다고 잠정적 합의를 해 내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외국인 투자기업은 조세 감면을 많이 받는다. 세금 혜택을 받는 게 연간 약 5000억 원이다. 구글 코리아(Google Korea)의 경우 유한 회사로 등록되어서 매출이나 소득 신고를 안 해도 되고, 과세 자료도 없다. 다른 사업과 달리 구글은 인터넷이기 때문에 사업장이 없어 눈에 안 보인다. 고정 사업장이 없으니 과세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과세를 하기 위해 '정보통신 서비스는 컴퓨터 프로그램 저작물의 사용'이라고 봤다. 그래서 이를 사용료 소득으로 규율해 세금을 부과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아직 아이디어만 제시한 단계라 정부에서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내년 총선에서 당선이 되면 어떤 정책을 펼치고 싶나.
"우리 지역에 성서산업 단지가 있다. 이 산업 단지가 30년이 넘었다. 공단이라고 이야기하면 무섭고 어두운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그런 곳에서 청년들이 일자리를 구하고 싶을 리 없다. 성서공단을 제대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미에 있는 국가 산업단지의 경우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 국각가 시설이나 직원 처우를 개선해주는데, 지방 산업 단지는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해 대구시의 예산으로 다 해결해야한다. 시의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실상 처우 개선이 어렵다. 그래서 자신의 지역구에 산업단지가 있는 의원들하고 노후산업단지지원특별법을 만들었다. 일반 산업단지가 전국에 574개가 있는데,  지방자치에 이를 개선하기에는 돈이 부족할 경우, 국가에서 금전적 지원을 해주자는 것이다. 주차장도 만들고, 도로도 정비하고, 가로등도 만들자는 거다. 즉, 일반·지방 산업 단지도 국비를 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만든 법이다. 작년 12월 법을 통과시키자마자 일반산업단지 중 최초로 혁신산단을 만들었고, 7월에 재생산단을 만들어 3천억 정도 국비를 받을 틀을 만들어놨다. 지금 예산 상황이 좋지 않아 집행이 안 되고 있는데, 이것이 집행되도록 하면 재선이 되어야한다."

-초선 의원이기 때문에 서러움을 느낀 적 있다면.
"일반적으로 예산 얻을 때도 그렇고, 회의에서도 강하게 말하면 조금 눈치를 준다. 예산을 받을 때는 재선 의원의 말에 조금더 힘이 실리게 되긴 한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 예산은 지난 한해 동안 5천 5백억을 따냈다. 발로 뛰는 효과를 본 것 같다."

-중앙 언론에서는 여당 초선의원이 존재감이 없다고 말한다. 특히 대구·경북 초선 의원들은 공천되면 당선되는 곳이라 그런지 기대한 만큼 활약이 없다고 말한다.
"18대 때나 17대 때는 초선 의원들이 ‘야당 그러지 마라’하는 목소리를 크게 냈었다. 언론에서 그런 지적을 하는 것을 보면 상대적으로 목소리를 덜 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나는 기자 생활을 하며 서울 물을 조금 먹긴 했지만 대구 촌놈 출신이다. 대구 사람들은 대체로 순하고 조용하다. 모임에 가서도 튀지 않고, 조용히 양반처럼 지켜보기만 한다. 어쩌면 그런 대구사람들 특유의 성격과 문화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일부 언론과 수도권 의원들은 대구 경북이 새누리당을 대표하는, 대구·경북 패권주의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 수도권 새누리당 의원이라고 당에서 신경을 쓰지 않고, 그런 게 어디 있겠나. 오히려 더 신경 쓴다. 수도권이 한국 인구의 반을 차지하기 때문에, 당이 그곳에 신경을 쓰고 기세를 잡는 게 맞으며 당에서 지원도 많이 한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예전부터, 한나라당일 때부터 ‘대구·경북이 보수 여당의 심장이다, 새누리당의 텃밭이다.’ 하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발전시켜서 잘사는 나라는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 이 시점에, 당이, 특히 보수당인 새누리당이 한 쪽 지역에만 특혜를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다. 내가 볼 땐 대구 의원들이 나서지 않고 순한 사람들이라 불이익을 받았으면 받았다.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그 근거는 잘 모르겠으나,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역에서는 영남에서 올라온 의원을 보면 부럽기도 할 것 같다. ‘공천만 받으면 끝나는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서서히 옛날 말이 되고 있다. 이젠 주민들이 소속 당 뿐만 아니라 모든 면모를 다 보고 투표한다. 국민이 다 지켜보고 있다."

-‘진실한 사람 논란’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
"‘진실한 사람’이란 말은 좋은 말이라고 생각하며 나도 동감한다. 국민은 진실한 사람 뽑아야한다. ‘다른 것도 다 해봤으니, 국회의원도 해볼까’ 하고 나온, 진실하지 않은, 정치적 야욕만 가지고 뛰는 사람은 뽑으면 안 된다. 그 지역에서 정말 주민을 생각하며, 주민을 위해 일하고, 국가와 주민의 삶을 함께 고민하는 사람을 뽑아야한다. ‘진실한 사람은’다른 게 아니고 ‘국민에게 진실한 사람’을 이야기하며 그런 사람을 뽑아야한다는 이야기라고 본다."

-일각에서는 청와대나 내각에서 대통령과 함께 일한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 아니냐는 말을 한다.
"보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어차피 주민의 선택을 받아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진실한 사람을 정하는 건 주민이다."

-결국 진실한 사람이란 국민에게 진실한 사람이라는 말인가.
"말을 덧붙이자면 새누리당 의원들의 대장은 대통령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 모든 후보들이 박근혜를 외치는 이유는,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할 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 명만 반대해도 법안 통과가 안 되니까 답답하다. 야당 독재라고 본다. 국민의 손에서 뽑힌 대통령이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펼치려고 하는데 야당이 왜 발목을 붙잡나. 법안의 장단점을 전문가와 국회의원들이 면밀히 분석해 결정한 것도 야당이 무작정 못하게 한다. 만나서 토론도 하고 협의하고, 시행하더라도 '어떤 점은 고치자’ 하며 수정해야하는데 무조건 상임위도 안 열어주고 법도 통과시키지 않는다. 이념 법안도 아닌데 답답하다. 이제는 국민이 야당을 거의 다 포기한 것 같다. 그래서 국회의장이 직권 상정해야 한다 말한 거다. 회의 진행 자체가 마비가 되어버리니까 답답해서 국회의장 해임 이야기도 나온 거다."

-여당 의원은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대통령까지 입법부의 수장에게 압력을 가해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삼권분립에 어긋난다고 보지는 않는가.

DA 300

 

"지금은 나라가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비상사태라고 본다. 입법부가 마비되어 회의도 안 열고, 보이콧을 하고 있다. 반대를 하려면 회의를 연 상태에서 ‘이건 안 된다’라고 말하고 그에 대해 토론을 해야 하는데 회의 자체를 보이콧 하고 있다. 이건 입법부의 마비이다. 그러니 대통령이 국가와 국민을 생각해 달라고 말 한 것이다."

-대구·경북이 너무 보수적이고, 이것이 우리나라 여러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선입견 때문에 그런 거다. 대구 국회의원 중 지도부나 최고위원도 없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해 달라.
"국회가 바뀌어야 할 때다. 반대를 위한 반대, 싸움을 위한 싸움은 끝내야 한다. 그래야 정부가 바로 선다. 입법부가 마비된 것은 비상사태다. 또한 국민을 위해 일하는, 진실한 사람은 국민이 알아본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하겠다."
정리 김유진 인턴기자 kim.yoojin@joongang.co.kr
촬영 김세희 · 조수진 · 공성룡

 

□황주홍 의원

2016.01.05 새정연 탈당 - 이념 과잉에 신물 난 국민 제3의 길 원해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민주연합 탈당 이후 정치권이 요동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추가 탈당이 이어지면서 분당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고, 새누리당도 지지율이 떨어지는 등 여파에 시달리고 있다. 12 23일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17일 문병호(인천 부평갑)·유성엽(전북 정읍)·황주홍(전남 장흥·강진·영암), 20일 김동철(광주광산갑), 23일 임내현(광주북을) 의원 등 모두 5명이 탈당한 상태다. 이런 탈당 도미노가 호남을 넘어 수도권까지 번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주간조선은 안철수 의원 탈당 이후 선도탈당을 결행한 황주홍(63) 의원과 만나 요동치는 호남 민심의 향배와 탈당의 변(辯), 그리고 안철수 신당의 미래에 대해 물었다. 초선인 황 의원은 탈당 직전까지 새정치민주연합 전남도당위원장을 맡았고, 2004년부터 2011년까지 강진군수를 세 차례 지냈다. 황 의원은 안철수 의원이 창당을 공식 선언한 지난 12월 21일 기자간담회에도 동료 탈당 의원들과 함께 참석했었다. 황 의원과는 12월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황주홍 의원.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탈당 결심 설명들은 주민들,
'
잘했다'며 격려해줘
안철수 신당으로 세력 규합돼야

- 탈당에 대한 지역구 반응이 어떤가.

“탈당 전날 지역구와 전남 도당을 돌면서 1000명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 탈당 결심을 설명드렸다. 절대 다수가 ‘잘했다’면서 박수를 쳐주는 분위기였다. 이의를 제기하거나 비판하는 분이 한 명도 없었다. 우리의 결단이 옳았다는 것은 이후의 여론조사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12월 21일 발표된 미디어오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광주전라에서 안철수 신당이 36.2%, 새정치민주연합이 17.5%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쾌조의 스타트라고 본다.”

 

- 제3지대에서 신당 세력들을 합치는 윤활유 역할을 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여전히 유효한가.

“당초 어떤 신당이든 개인 이름이 붙는 걸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해 제3지대 창당을 구상했었다. 하지만 정치는 현실이다. 안철수 의원 탈당 이후 당초 예상보다 강한 바람이 불고 있고 전국적으로 세가 불어나고 있다. 전국적 상징성과 정당성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제는 안철수 의원이 중심이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안철수 신당이 지금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다만, 박준영·천정배·박주선·김민석·정동영 등과의 연대 의지도 동시에 천명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 신당 추진 세력들이 많은데 이들이 다 안철수 신당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전원이 다 들어와야 하고, 그렇게 될 전망이다. 안철수 의원도 밝혔지만 2월 8일 설 전까지 신당 참여 면면에 대한 발표가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1월 하순경 신당 세력들과의 통합과 연대 모색이 있을 것으로 본다.”

 

- 정치 신인 영입 노력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안철수 신당의 색깔은 기성 정치인과 정치 신인들 중 누가 주도하나.

“어려운 질문인데, 균형을 잡지 않을까 생각한다. 참여하는 현역 의원들이 20~30명 정도 된다면 현역 아닌 분들도 균형과 조화를 이뤄가며 참여할 것이다. 탈당한 지 며칠 안 됐지만 ‘같이 해보고 싶다’며 저에게 연락해 오는 분들이 꽤 있다. 안 의원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은 하되 혼자서 다 할 순 없기 때문에 역할을 분담해서 좋은 분들 영입을 위해 저도 창구 역할을 할 생각이다.”

 

- 안철수 의원은 신당 구상과 관련해 ‘민생’‘중도’ ‘이분법적 사고를 하지 않는 사람’ 등 몇 가지 키워드를 제시했다. 어떤 사람들이 안철수 신당의 주류가 될 것으로 보나.

“새누리당 내부와 지지층에서도 지나친 가치 논쟁으로 편가르기를 하고 상대방을 단죄하는 ‘박근혜식 극한 이념정치’에 공감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 우리는 이 분들을 합리적 보수라고 본다. 이런 박근혜 정치와 완벽한 닮은꼴이 바로 ‘문재인 정치’다. 문재인 대표는 세상을 선(善)과 악(惡)으로 나누고, 자기는 늘 선이라며 반대 세력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정치를 한다. 문 대표는 항상 박근혜 대통령이 역주행한다고 비판하는데 남에 대해 내뱉는 단어와 표현이 본인한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이런 박근혜·문재인 두 극단 세력이 맞부딪치니까 정치가 실종되는 것이다. 서로가 극한적으로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며 이념 과잉의 정치를 하니까 자기 이데올로기와 진영밖에 남는 게 없다. 그 결과 지금 정치도 실종되고, 나라도 국민도 안중에서 사라져버린, 오직 저급 정치만 남겨놓고 있잖은가.”

 

"승리의 길 가겠다"며 탈당한 문병호·유성엽·황주홍 의원. /조선미디어 유튜브 채널

합리적 진보세력이 대안
편벽된 자세 보인 文 위험해

 

- 중도에 기반한 제3정당을 희망하는 유권자가 많다는 얘기인가.

“합리적 보수가 있다면 합리적 진보도 있다. 나는 우리 유권자들이 새로운 대안 정치세력을 희망해 왔다고 생각한다. 너대니얼 호손의 ‘큰 바위 얼굴’에서처럼 지금 우리 국민들은 늘 누군가가 새 정치 질서의 깃발을 들고 나서주길 기대하다가 마침 안철수라는 사람이 나오니까, 제3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유력한 대안 정치인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양극단의 이념정치에 신물 나고 식상해 하는 국민에게 안철수 신당 정도라면 정권 교체가 가능할 수 있다는 꿈과 기대가 모아지고 있는 중이라고 본다.”

 

- 새정치민주연합 밖에 있는 사람들은 왜 비주류들이 문재인 대표와 친노(親盧)에게 반감을 갖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한명숙 전 총리가 대법원 판결로 유죄판결을 받자 문재인 대표와 친노들이 뭐라고 했나. 정치탄압이고 희생, 속죄양이라고 했다. 13명의 대법관이 전원 일치로 유죄판결을 내렸는데 한명숙 전 총리를 영웅시하며 모금운동을 제안했고 교도소에 들어가는 날 백합꽃을 들고 가 눈물을 흘렸다. 만약 문 대표가 시민단체 소속이라면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문 대표는 한 표라도 더 얻자는 대중정당의 지도자다. 그런데 한명숙 판결에 대해 그런 편벽(偏僻)된 자세를 보였다. 아마 그 때문에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율이 5% 정도 떨어졌을 것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문 대표와 친노들은 지금도 자신들이 옳다고 믿고 있다. 이런 예는 한둘이 아니다.”

 

- 그런 예가 뭐가 또 있나.

“문 대표는 참 희한한 지도자다. 표가 안 나오는 방향으로, 다수 국민들이 싫어하는 쪽으로만 간다. 지난 4월에는 국회의원 정수를 400명으로 늘리자고 했다가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았다. 민심을 모르는 것인지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한 것인지 모르겠다.”

 

황 의원은 이 대목에서 지난 12월 2일 2016년 예산안 표결 당시 문 대표가 반대표를 던진 사실도 상기시켰다.

 

“12월 2일 자정이 넘어 표결에 부쳐진 예산안은 여야가 한 달간 밀고 당기면서 합의한 것이다. 그런데 표결에 부친 결과 200여명의 찬성자 외에 49명의 반대자가 나왔다. 무소속이나 원내 비교섭단체 소속이라면 반대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49명의 반대자 중에 바로 문 대표가 있었다. 무슨 개인적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제1야당 대표가 여야 합의 사안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문 대표는 이후 열린 관훈클럽 토론에서 한 패널이 예산안에 반대표를 던진 이유를 묻자 ‘당 대표는 반대표 던지면 안 됩니까’라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그것은 여야 합의된 내년도 이 나라 예산안을 부결시키겠다는 의사표시를 한 셈인데, 다들 그런 식으로 나오면 이 나라가 뭐가 되나. 그런 편견과 아집에 찬 언행을 보면서 이 사람에게 진짜 국가관이 있는 건지, 국가관이 없지 않다면 그분이 국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뭘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마 자기 이념과 이데올로기와 자기 진영의 논리가 최우선시되는 그런 독특한, 그리고 매우 위험한 사고방식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 여당이나 야당이나 항상 국민을 앞세우는데 왜 여론 무시 정치가 나온다고 보나.

“생각의 편향성, 편견 때문인데 아마 스스로는 고치기 어려울 것이다. 1970~1980년대식 생각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그런 세력들을 ‘이념의 수인(囚人)’이라고 표현한다. 문재인 대표나 박근혜 대통령 다 마찬가지다. 자기 생각의 울타리,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얘기는 경청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오늘(12월 22일)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도 ‘박 대통령이 변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던데 그게 결국 같은 의미다.”

 

▲지난 12월 21일 신당 창당을 공식화하는 기자회견을 한 후 탈당 의원들과 손을 잡고 있는 안철수 의원(가운데). 왼쪽부터 황주홍, 문병호, 안철수, 김동철, 유성엽 의원. /연합뉴스

 

, '대권병' 걸려 무리수 둔다
당권 장악해 차기 대선후보 노려

- 문재인 대표와 친노 주류도 혁신을 얘기한다. 이번 총선 공천 과정에서 의원들을 평가해 하위 20%를 자른다는 것인데, 이는 액면 그대로 보면 그야말로 변화이고 혁신 아닌가.

“그 혁신안이 문재인·김상곤 합작품인데 속을 들여다보면 철저하게 비주류를 쳐내기 위한 것이다. 의원 평가를 의정활동과 지역구활동 평가, 선수별·상임위별 의원들끼리의 다면평가, 선거 기여도, 여론조사 등으로 한다는 것인데, 이 중 여론조사를 빼면 전부 주관적이고 자의적으로 흐를 수 있는 평가 항목들이다. 누가 칼자루를 쥐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이른바 인치(人治)를 하겠다는 얘기다. 법치, 즉 규칙과 제도와 시스템에 의해서 해야 하는데, 21세기 대명천지에 인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지역활동 평가의 경우 중앙당에서 당직자 두 명을 내려보내 하루 정도 돌면서 평가한다는 것인데, 지역 사정을 잘 모르는 젊은 당직자들이 어떻게 의원 활동을 평가한다는 건지 납득하지 못하겠다.”

 

- 그런 맹점을 알면서도 일부러 혁신안을 밀어붙였다는 건가.

“나는 평가가 객관적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며 의원총회 등에서 강하게 반대했다. 여론조사와 지역구 평가가 크게 다른 게 아닌데 왜 굳이 나누느냐고 항변도 했다. 특히 다면평가는 이제 어디서도 하지 않는, 말도 안 되는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혁신위원인 조국 교수와 문재인 대표는 정부도 다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내가 실상이 궁금해서 인사혁신처에 공식적으로 문의했는데 노무현 정부 때 하던 다면평가는 지금 다 폐기해 전혀 안 하고 있다는 공문을 받았다. 번연한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동료가 동료를 죽이는 다면평가는 대(大)파벌에 속해야 유리하기 때문에 사실 파벌을 장려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내가 다면평가를 하려면 의원 300명 전원에게, 새누리당·정의당 동료 의원들에게도 물어보라고 반박했을 정도다. 밖에서는 왜 혁신에 반대하느냐고 그러지만 실상은 소수파 비주류 죽이기다. 내가 탈당 전 중앙당의 당무감사를 거부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황 의원에 따르면, 새정치민주연합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와 무리수는 문 대표가 이른바 ‘대권병’에 걸린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자신의 집권 프로그램에 모든 걸 맞추다 보니 빈번하게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표와 박원순 서울시장이 사법연수원 동기인데, 내가 그 동기분들 몇 명을 개인적으로 안다. 그중 한 분 말씀이 문 대표가 얼마 전 ‘지난 대통령 선거 때는 엉겁결에 준비 없이 나갔는데도 48% 득표를 했다. 그런데 이제 정치를 알 것 같다. 해볼 만하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것이다.”

 

황 의원에 따르면, 문 대표는 지난 대선 패배 후 펴낸 ‘1219 끝이 시작이다’라는 저서에서만 해도 ‘진영 정치’ ‘싸가지 없는 정치’ 등 대선 패배의 원인에 대해 비교적 올바르게 진단하고 토로하면서 이제 당에서는 더 좋은 분을 찾아 정권교체 희망을 이어가길 바란다고 썼다. 마치 정계은퇴하고 출마를 안 할 것처럼 얘기했는데 어느 순간 대권병에 걸려버린 것이다.

 

“지난 전당대회 때도 당권·대권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그렇게 주변에서 얘기했는데 자신의 집권 프로그램에 따라 당권도 장악해버린 것 아닌가. 당권을 장악해야 확실하게 대선후보가 될 수 있다는 계산이었던 거다. 그러나 그 결과 지금 당은 분열되고 있고, 그 자신 역시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지나친 욕심이 결국 패망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 문재인 대표가 현재로선 야권에서 지지율 선두권을 달리는 유력 주자인 것은 사실 아닌가.

“물론 사실이다. 그런데 ‘지기 위한 2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새정치민주연합은 사당(私黨)이 아닌 공당(公黨)이다. 그런 당이 마치 문재인 대권 프로그램을 위해 복무하는 듯한 모습이 문제라는 얘기다. 문재인 대표가 영입한 손혜원 홍보위원장은 광고 홍보전문가이지만 문 대표 부인인 김정숙 여사의 친구다. 근데 손 위원장이 무슨 발언을 한 줄 아나. 자신은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당에 왔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문재인 말고는 박원순, 안희정, 안철수 누구도 대권 후보로 지지할 수 없다는 것 아니냐. 당직자는 지위고하를 떠나서 당무에서 엄정중립을 지켜야 한다. 한 사람을 위해 다른 잠정 후보들을 적대시하는 발언은 사실 파면감이다. 그런데 이런 당직자에 대해서 누구도 제대로 질타하거나 이의 제기를 못하고 있다. 모두 박수치거나 아니면 숨 죽이고 있다.”

 

▲황주홍 의원. /조선일보 DB

 

공천다가오니 모두가 입조심만 해
새정치는 文 대권 위한 조직

- 안철수 의원이 탈당의 변에서 밝히긴 했지만 당에 있으면서 제대로 비판 못하고 당을 바꾸지 못한 책임은 있는 게 아닌가.

“사실 그게 더 문제다. 아무도 이의 제기를 하지 않고 비주류들은 거의 모두 숨 죽이고 있는 게 현실이다. 특히 4월 총선과 이에 따른 공천이 임박해오면서 거의 모두가 아연 몸 조심 입 조심하는 그런 당이 되어버렸다. 그 정도로 새정치민주연합은 문재인 대권 프로그램을 위해 복무하는 정당이 돼 버렸다. 그래서 자조적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이 사당역으로 가버렸다’는 농담이 나온다. 나는 새정치민주연합에서 그나마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김한길·안철수·박지원 세 사람이었다고 본다. 그나마 세 사람이 끊임없이 ‘아니다’고 얘기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오죽했으면 안철수 의원이 그 당에 있으면서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겠나.”

 

- 문재인 대표가 안철수 의원을 향해 ‘새누리당식 생각’이라고 비판한 데 대해 안 의원이 격분해 탈당의 동기가 됐다는데.

“그건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려버리겠다는 의도 아니냐. 안철수 의원 이마에 주홍글씨 낙인을 찍은 것이다. 멀쩡한 야당 지도자 보고 새누리당 ‘엑스맨’이라고 하는데 그런 인격모독에 어찌 화가 나지 않겠나.”

 

- 새정치민주연합에서 혁신안대로 의원들 평가가 이뤄져 하위 20%가 물갈이될 것으로 보나.

“혁신안이 제대로 작동된다면 문재인 대표가 1번으로 걸러져야 한다. 본회의 출석률도 좋지 않고 제대로 된 법안 하나 변변하게 낸 것도 없다. 또 지역구인 부산 사상구 여론이 얼마나 좋지 않으면 거기 출마하지 못하고 다른 데로 탈출하려고 하겠나. 지역구 관리도 엉망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니 문재인 의원이야말로 하위 20%에 가장 먼저 속할 사람 아니냐는 말이다. 문재인 대표가 먼저 잘리지 않으면 그건 혁신안도 아니다.”

 

- 결국 새정치민주연합에서 몇 명의 의원이나 탈당할 것으로 보나.

“연말 연초에 걸쳐 20명 이상은 될 것이다.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문제가 없다고 본다. 김한길·박지원 의원은 이미 당에서 마음이 떠났다. 두 사람이 탈당하느냐가 분열이 분당으로 가는 시금석이 된다.”

 

- 노무현 정권 당시 부산파를 대표하던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이 인사에서 호남을 차별했던 게 호남이 문 대표에게 등을 돌린 원인이 됐다고 보나.

“글쎄,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문 대표가 청와대에 있을 때 호남 차별적 인사를 주도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그것 때문에 호남 여론이 안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대선 때 호남에서 문 대표에게 90% 이상의 절대 지지를 몰아줬던 사실은 호남 차별 인사 때문에 지금 싫어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근거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호남 여론이 전국 여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호남이 조금 더 예민하게 총선 결과와 정권교체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나는 결국 호남 유권자들이 문 대표의 그릇과 깜냥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 지난 대선 때는 그렇게 몰표를 줬는데 이후 하나같이 국민 여론과는 엇박자를 놓으니까 실망하고 절망한 것이라고 본다. 지난 재보선 패배 후에도 호남을 달랜다며 혼자 불쑥 광주를 방문했는데 그런 돌출적 행동으로는 민심을 달랠 수 없다. 이번에도 순창의 정동영 의원을 그야말로 불현듯 찾아갔는데, 박지원 의원이 오늘 내게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알아도 문재인이 순창으로 간 까닭은 모르겠다’고 할 정도였다.”

 

- 요즘 옆에서 보니까 안철수 의원이 달라진 것 같나.

“머리를 이전보다 좀 더 짧게 깎지 않았던가.(웃음) 깊이 있게는 모르지만 본인이 좀 더 결연해진 것 같다. 이번이 정치인으로서 마지막 리스크를 짊어진 것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국회 들어와, 특히 드센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산전수전 다 겪지 않았나. 학습효과가 있는 분이니까 본인 말대로 정치를 압축적으로 체험하면서 정치 인식이나 판단 지평도 달라졌을 것으로 본다. 이번에는 꼭 성공하겠다, 오직 국민 눈높이만을 생각하면서 힘있게 나아가겠다는 얘기를 스스로 자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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