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8/ 정치분야3/
□안철수 의원
2016.01.28 '제3당 혁명' 꿈꾸는 국민의黨
"거대 兩黨 개혁은 쇼… 국민들 속지마라"
- '안철수黨 미래 뻔하다'는 김종인?
그 생각 틀렸다는 걸 보여주겠다, 국보위 사과? 국민이 진심 판단…
- 총선에서 야권연대는 없다
우리 찍으면 與 어부지리 아니라 국민의黨 후보가 당선되는 것
'낙상 입원' 이희호 여사께 다녀와… 녹취록은 큰 결례… 사과 드렸다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은 27일 최근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이 북한인권법 등 쟁점 법안 처리를 합의한 것과 관련, "거대 양당이 국민의당 등장에 자극받아 개혁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아직은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지 근본적 변화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안 의원은 이날 서울 마포의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거대 양당의 담합 구조를 깨야만 근본적 정치 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더민주 문재인 대표가 오늘 사퇴했다.
"(한참 생각을 하더니)정말 아쉽다. 내가 제안했던 혁신전당대회를 문 대표가 수용했다면 건강한 경쟁을 통해 반전의 기회를 얻고 탈당을 할 일도 없었을 텐데. 여러 가지가 아쉽다."
―문 대표는 "지역 정서에 기댄 분열은 박근혜 정권 돕는 일"이라며 신당을 비판했다.
"우리가 기대려는 것은 지역 정서가 아니다. '기득권 양당 구도를 깨라'는 국민 정서에 기대려는 것이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국민의당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뻔히 보인다"고 했다.
"(웃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보여주겠다. 말이 무슨 소용 있나. 결과로 성과를 보여드리면 되는 것 아닌가."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이 27일 서울 마포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안 의원은 “신당의 미래가 짐작이 간다”는 김종인 더민주 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그분 생각이 틀렸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남강호 기자
―김종인 위원장이 자신의 국보위 전력에 대해 사과도 했다.
"글쎄. 그 사과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국민이 판단할 거다."
―천정배 의원부터 박주선 의원까지, 신당 구성원에 대한 원칙이 없는 것 아닌가.
"토론을 통해 합리적으로 조정 가능한 수준의 차이라고 본다."
―당초에는 전국정당, 중도정당을 만들겠다고 하지 않았나. 생각이 바뀌었나.
"절대 아니다. 외연 확대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고 앞으로 수도권과 영남권 후보들도 많아질 것이다. 지금은 창당도 하지 않은 단계다. 더불어민주당과 동등하게 비교하면 많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많이 도와줘야 한다."
―입당 예정인 여권 인사는 없나.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 박형준 전 의원을 접촉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구체적인 상대가 있는 문제라서 영입에 대해선 언급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3대 원칙(부패·이분법·수구보수)에 해당되지 않는 분이면 여야(與野) 구분 없이 어떤 분이나 함께할 수 있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이 최근 북한인권법 등 쟁점 법안 처리에 합의한 것을 두고 '신당 효과'라는 분석도 있다.
"국민의당이 없었다면 문 대표가 사퇴하고 더민주가 인재 영입하는 변화의 시도를 했겠나. 그 강고했던 새누리당의 지지율 40%가 무너졌겠나. 거대 양당의 개혁을 위한 몸부림을 보면서 국민들도 제3당의 존재가 꼭 필요하구나라고 느꼈을 것이다. 선거 때마다 양당은 '바꾸겠다'는 쇼를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국민들도 속으면 안 된다. 제대로 된 3당이 자리 잡을 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 "
―사당화(私黨化) 논란을 막기 위해 신당 대표를 다른 인사에 맡길 생각은 없나.
"어떻게 지도부를 구성하면 총선 승리를 할 수 있는지 다 모여서 논의해서 결정하겠다. 누구라도 당대표가 될 수 있다."
―지금 지역구인 서울 노원병 출마는.
"지역에서 열심히 활동했다. 바뀐 건 없다. 지역활동하면서 동시에 다른 지역 후보들도 도와줄 수 있도록 열심히 다니려고 한다."
―호남 지지율이 급변하고 있다. 호남 민심의 요체를 무엇으로 보나.
"정권교체다. 아직 우리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지율도 변화가 큰 것 같다. 정권교체에 대한 믿음을 드리겠다."
―본인이 정권교체 적임자라고 생각하나.
"지금은 어떻게 하면 총선 잘 치를지 그 생각밖에 없다. 대선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고 있다. "
―총선에서 몇 석을 목표로 하나. 성적이 나쁘면 사퇴할 생각인가.
"우리 목표는 3당이 아니다. 1당이 되는 것이 목표다. (그는 구체적인 의석 수를 제시하진 않았다)"
―"총선 연대 없다"는 생각은 변함없나.
"변함없다. 어떻게든 기득권 양당구조를 깨는 게 목표다. 새누리당 지지율을 가져왔고 정치 무관심층을 관심층으로 끌어들였다. 국민의당에 던지는 표는 사표(死票)가 아니다. 국민의당 뽑으면 국민의당이 당선된다. 정말 좋은 후보들을 공천하겠다."
―계속 신당 세력과 통합하는데 원외 민주당과 합치면 당명(黨名)도 민주당이 되나.
"지금 막 당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또 바꾼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희호 여사 신년 예방 녹취록이 공개돼 논란이다.
"이 여사께 있을 수 없는 결례를 했다. 오늘 낙상으로 입원 중인 이 여사를 찾아뵙고 다시 사과를 드렸다. 이 여사님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안 했다. 녹취록을 작성한 관계자에게 사표를 받아 수리했다."
조선일보 정우상 기자 김아진 기자
□유인태 의원
2016.03.21 더불어민주당
▲유인태 의원은 41년 전 자신에게도 선고됐던 사형제도의 폐지를 위해 두 달 남은 19대 국회의원 회기 동안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박경모기자 momo@donga.com
“양김(兩金·YS DJ) 때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공천하진 않았다.”
유인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거침없이 비판했다. 그는 컷오프에 걸려 20대 총선에 출마할 수 없다. 통보를 받자마자 마음의 준비라도 한 듯 바로 승복하고 불출마를 선언했다. “역시 유인태다” 소리가 당 안팎에서 나왔다. 1974년, 유신독재 반대시위가 격화되자 박정희 정권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배후로 지목하고 253명을 긴급조치 4호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주모자들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유인태도 그중 한 명. 4년 5개월 복역한 뒤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14, 17, 19대 국회의원과 노무현 정권 때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다. 18일 본사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말투를 흉내 내) 정치가 ‘×판 5분 전’이다.
“너무한다. 선거 앞두면 민심을 의식하는데 ‘×판 쳐도’ 내 표는 끄덕없다 자신하는 것 아닌가. 양김 때 그 양반들이 다 주물렀어도 눈치는 봤다. 언론에 가 귀띔하고 양해도 구했다. 대통령이 기준과 원칙도 없이 공천을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김무성 대표가 약한 건가.
“글쎄, 약점이라도 잡혔는지 꼬리를 너무 내린다. 배짱 튕기고 벌써 잠적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너무 매가리 없다.”
―콘크리트 지지율을 겁내는 것 아닐까.
“이런 예가 처음이긴 하지. 그렇다고 지지자만 보고 달리는 대통령 앞에 너무 약한 모습이다.”
―‘차르 김(김종인 대표)’은 잘하고 있나.
“엉망이지. 그래도 우리 자업자득이니….” 노욕이 노추(老醜) 돼선 안돼
―이해찬 쫓아낸 건?
“거기엔 할 말이 없다.”
일부러 아픈 곳을 찔렀다. “‘무자격자’로 찍혔는데….” 의외로 담담하게 “서슬 푸른 5공화국 때 집권당 사무총장을 지낸 이춘구의 마지막이 아름다웠다”고 했다.
“제천고를 다닌 인연으로 알고 지냈는데 무소속으로 나와도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런데 14대를 마지막으로 안 나왔다. 환갑 나이쯤 됐을까. 언론의 인터뷰도 일절 사절했다. 충북지사를 지낸 이원종도 그랬다. 나도 고향의 명예를 지키려 한다. 노욕(老慾)이 노추가 돼선 안 된다. 집사람이 지난 선거 때 ‘남편이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작년 가을쯤 ‘이제 그만할 거지’ 하더라. 하지만 당이 하도 ×판이어서 그만두기 어려웠다.”
이 대목에서 할 말이 많은지 얘기를 이어갔다.
“그때 역할을 한 중진의원이 많지 않다. 믿을 만한 중진인지의 기준은 보안을 지키느냐다. 어른 축에 드는 사람이 5, 6명 정도다. 범친노 중진이 문재인을 만나 사퇴를 권고했다. 문재인은 굴복하지 않는 모양새로 폼나게 내려놓겠다고 했다. 그게 작년 연말 때다. 그 얘기는 당 출입기자들도 몰랐다. 김종인 대표가 당 외연을 확장하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콩가루 집안을 콱 잡으니까 ‘진작 그러지’ 말까지 나온다. 어쨌든 양당 구도로 선거를 치르게 한 공로는 인정한다.”
―컷오프 전에 하지 그랬나.
“20% 컷오프는 안 하기로 한 것이다. 21명 탈당하면서 이미 숫자를 채웠다. 자동응답전화(ARS) 조사는 200, 300명만 동원하면 10% 올라간다. 호남에서 경선 많이 해본 사람은 착신 전환해 둔 건수가 1000건이 넘는다. 착신 전환해 두면 지지도 올리긴 쉽다. 설계한 조국이나 김상곤이 뭘 알고 했는지….”
(조국 교수가 "안심번호는 착신전환이 안된다"고 알려왔음) 의정 활동이 소홀했다는 지적엔 강하게 항변했다. “본회의, 상임위, 의총 안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의원은 왜 하냐. 나와 문희상은 거의 개근했다. 의총 안 나오는 ××는 기본이 안 된 거다. 다만 선거 체질이 아니라 지역구는 명절 아니면 안 갔다. 할 일 없이 시장이고 경로당이고 가는 게 뭐….”
―3월 3일 국회 고별인사는 자청했나.
“떠나는 마당에 이런 선거제도 갖고는 통합도 안되고 나라도 안 돌아간다, 사형제 폐지를 의원 172명이 서명해 2차례나 올렸는데 법사위에서 계속 뭉개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맞담배 피워
―당 소속 의원이 의원석에 한 명도 없었는데….
“외부 행사 갔다 왔는데, 우리 당 의원들이 의사당 로텐더홀 계단에서 테러방지법 규탄대회를 하고 있었다. 그걸 모르고….”
―‘엽기수석, 졸음의 달인’ 별명은 왜 생겼나.
“한 기자 때문이다. 정무수석 때 기자 20여 명과 중국집에서 만났다. 하나도 안 쓸 거라고 해서 편하게 얘기했다. 그 기자가 ‘박지원 실장이 대북송금 특검에 대해 뭐라더냐’ 물어 “‘그걸 안 했으면 좋겠다’ 그러지 뭐라 그래” 했더니 기사를 써 일이 커졌다. 그 뒤 ‘DJ와 노무현은 상고(商高) 나온 사람들이니 열심히 해야지’라고 농담한 얘기, 사형선고 받을 때 모친이 졸아 ‘모전자전’이라는 얘기, 유치원 초등학교 때 할머니에게 배워 민화투 육백 친 얘기, 그때부터 잡기가 늘어 바둑 장기도 잘 둔다는 온갖 얘기를 돌아가며 각 신문들이 일주일간 써댔다. 마지막 청남대 개방 행사 때 기자들이 버스에 탈 때 ‘사람 타는 버스에 왜 ×들을 태우냐’고 농담했다.”
―노 전 대통령과 맞담배 했다고 들었다.
“두 살 차이로 야당 같이하면서 했다. 청와대 갔다고 안 피우면 더 이상한 일이다. 정찬용은 나가서 피웠다. 그래서 ‘넌 양반이고 난 상놈이냐’ 그랬다. 문재인도 앞에서 피웠다. 후농(後農·김상현)도 DJ 앞에서 피웠다.”
―선거제도는 어떻게 바꿔야 하나.
“우리도 유럽처럼 다원화돼 있다. 다당제로 가야 한다. 3, 4당이 타협의 정치를 해야 한다. 새누리당 공천, 우리 당의 파동을 보면 당 따로 해야 할 사람들이 같이 있어 난리다. 유승민과 친박이 따로 있다면 이렇게 됐겠나. 지금 같은 지역구도와 소선거구제에선 생각이나 이념이 달라도 동거할 수밖에 없다. 유승민과 안철수가 같이하면 훨씬 건강한 당 만들 거다. 더민주당 강경파는 정의당과 하고, 새누리당도 극우에 가까운 사람끼리 정당 하나 더 만들면 된다. 전체 보수를 40% 정도로 보면 우리 쪽과 스펙트럼이 같은 중도보수가 하나의 정당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강봉균이 새누리당 선대위장 가고 하는 것 아니냐. 지금 더민주당 주류는 진보일 수밖에 없다. 현 제도로는 극단적인 쪽으로 원심력이 작용한다. 합리적 보수도 극단 보수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2004년 국가보안법 개정 협상 때 이부영 대표가 고생해 박근혜 당시 야당 대표와 타협에 성공했다. 그때 천정배 원내대표가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려 협상이 깨졌다. 오만이다. 그러나 추운 날 농성한 극단 세력의 눈치를 안 볼 도리가 없다. 그래서 통합의 정치는 요원하다. 이게 무슨 비극이냐.”
―안철수, 국민의당은 어떻게 되나.
“총선 끝나면 ‘아이고 내가 발을 잘못 들였구나’라고 할 거다. 뭘 잘 모르지 않느냐.”
―국민의당 호남 성적은….
“안철수당은 15대 민주당보다 훨씬 약체다. 이기택 김원기 노무현 이철 등이 있었지만 안철수만 한 대선주자가 없었다. 그래도 국민의당은 탈당 의원들이 절대다수여서 총선은 힘들다. 여야의 공천 작업이 끝나고 3월 말이면 3번은 안 보일 거다. 결국 1, 2번 싸움이다. 지방선거라면 얘기가 다를 수 있지만 지금은 총선이다. 국민의당이 호남 쪽 강세라고 하지만 최종 결과는 초라할 것으로 본다. 수도권은 전부 1, 2번 싸움이고 3번은 앞으로 뜰 사람도 없다.”
총선 후 김종인 주도권 어림없을 것
―수도권 후보 단일화 전망은….
“이름 알리고 경험 쌓으려는 후보는 완주하고, 단일화하자는 후보도 있을 거다. 후보 나름이다.”
―‘친노 패권주의’가 당 개혁 명분이다.
“언론이 작명한 거다. 박지원도 조장한 측면이 있다. 노 대통령 서거 후 추모를 주도한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싸가지가 없다. 이해찬 명계남…. 말들을 사납게 한다. 노무현 정부 때 장관 한 사람, 청와대 사람이면 다 친노인가. 지금 친노는 그거와 상관없다. 한명숙이 공천 줬던 강경파 비례들이 친노다. 86그룹 중에도 친노는 많지 않다. 그러니 ‘진보 패권’이 맞는 말이다. 문재인을 옹호하는 그룹은 10명도 안 된다.”
―총선 후에도 김종인이 주도권을 쥐나.
“어림없는 소설이다. 다만 그 양반이 역할을 하는 게 도움이 되고 사심 없이 하면 같이 갈 수 있다. 그래도 김종인이 주류가 될 수는 없다. 어쨌든 우리당은 진보가 주류다.”
―비대위 체제는 어떻게 되나.
“총선 후 전당대회를 해야지. 6, 7월쯤 전당대회를 해서 정상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
―당은 몇 석이나 얻을 것으로 보나.
“지금 의석 정도는 할 것으로 본다. 아직은 호남에서 열세다. 정의당이 최근 많이 올랐더라. 우리한테 실망한 진보 표가 거기로 갔다. 정의당 쪽과 얘기가 되면 선거구도가 한결 나아질 거다. 정의당 국민의당 후보가 모두 완주하면 매우 비관적으로 된다.”
―JP가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했는데….
“‘공동체의 운명을 어디로 가져가느냐’ 키를 쥔 게 정치다. 정치가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공동체의 성패가 달려 있다. 지금 같은 정치 혐오가 계속되면 쇠락의 길밖에 없다.”
―당에 조언을 한다면….
“선거구제는 개헌과 함수관계다. 대통령제와 다당제는 맞지 않는다. 87년 군사정권 끝나면서 선거제도 설계를 잘했어야 한다. 분권형 개헌과 선거구제 개혁으로 정치에 공동체의 문제가 녹아 들어가고 타협의 정치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경제도 살아날 수 없다. 고령화 저출산도 정치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극단적 대결구도 청산할 수 있을까.
“새누리당이 현 선거제 혜택을 가장 많이 봤다. ‘1노 3김’으로 여소야대이던 13대 때 국회의원 인기 좋았다. 5공 청산 같은 시대의 과제를 국회가 해결했다. 그러니 의원에게 사진 찍자, 사인해 달라 했다. 지금은 물갈이해도 4년 지나면 다 그×이 그× 된다. 국회는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 아니라 가면 병신 되는 곳이다. 새누리당이 5, 6%밖에 표 더 얻지 못했다. 투표율 60%니 사실상 국민 4분의 1 지지다. 그런데도 100의 권력을 행사하려다 보니 비극이 생긴다.”
그는 쟁점법안과 관련해 “상임위에서 합의가 거의 이뤄져도 BH(청와대)가 개입해 간사들이 결재를 받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청와대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 합의가 무산된 게 꽤 많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이 국회만 야단치는 것을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이어진 식사 자리에서 탁월한 그의 재담으로 좌중은 배꼽을 잡았다. 얼마 전 부산의 당 예비후보 사무실 개소식 뒤 자갈치시장 횟집 얘기를 화제에 올렸다.
“힐끗힐끗 보던 한 40대가 소주를 따르며 ‘참, 대인배십니다’라고 하더라. 자갈치시장에 무소속으로 나갈까.”
그는 “잘려서 더 유명해졌다”며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
□유진오는 누구
2017-09-29
대표적 근대 지식인, 광복후 문단 떠나 법학자·정치인으로 활동
유진오(兪鎭午·사진)는 1906년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태어났다. 기계유씨(杞溪兪氏)로서 ‘서유견문’(1895)을 쓴 유길준, 한국 최초로 ‘법학통론’(1905)을 쓴 유성준, 연희전문의 법학 교수 유억겸 등이 그의 친척이다. 부친 유치형도 게이오의숙(慶應義塾)과 주오(中央)대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법률가, 교육자 등으로 활동하였다.
유진오는 1929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제1회로 졸업하였고, 이후 보성전문학교 강사를 거쳐 헌법 교수를 지내면서 조선의 토착 근대 사상을 대표하는 지식인이 된다. 1927년 ‘복수’ ‘스리’ 등을 발표하며 등단한 유진오의 소설 세계는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등단 직후인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의 초기로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많이 기울인 시기이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빈민 계층을 제재로 의미 있는 사회의식을 드러냈다. 1930년대 중반부터는 초기의 경향 문학적 요소를 벗어나 시정의 리얼리즘을 주장하였다. 이 계열의 작품들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가서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그것들을 관찰하고 기록한다는 정신의 산물이다. 식민지 시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서, 이 시기 평단으로부터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해방 이후에는 창작 활동을 중단하고 다양한 사회활동을 벌였다. 헌법 기초위원, 고려대 총장, 한일회담 수석 대표, 국회의원, 민중당 대통령 후보, 신민당 총재 등을 역임하고, 1987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분리된 ‘두 삶’이 공존하던 곳… 식민지 지식인의 ‘이유있는 방황’
▲ ‘김강사와 T교수’가 처음 발표된 1935년 당시 서울 거주 일본인은 서울 전체 인구의 약 25%에 달했다. 조선인과 일본인 거주지역은 대략 청계천을 기준으로 조선인의 북촌과 일본인의 남촌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북촌을 대표하는 공간이 종로라면, 남촌을 대표하는 공간은 을지로·명동 등의 충무로(혼마치) 일대였다. 사진은 ‘인쇄 골목’으로 탈바꿈한 을지로의 모습이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김강사와 T교수’의 배경…서울 종로·충무로 일대
▲ 김강사와 T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김강사와 T교수’는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현대문학사 전체로 확장해보아도 손꼽을 만한 지식인 소설이다. 일제강점기 하층민의 삶에 주목한 소설은 적지 않지만, ‘김강사와 T교수’처럼 최상층 지식인의 고뇌를 다룬 소설은 드물다. ‘김강사와 T교수’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지식인의 보편적 문제를 다룬 소설이면서, 동시에 식민지 지식인의 민족적 아픔을 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식민지배자 일본인과 식민지인 조선인이라는 그 폭력적 위계는 이 작품에서 경성이라는 도시의 분리를 통해서 실감 나게 드러난다. ‘김강사와 T교수’는 크게 세 가지 판본(1935년 1월에 발표된 ‘신동아’판, 1937년 2월에 일본어로 발표된 ‘문학안내’판, 1939년 ‘유진오단편집’에 수록된 학예사판)이 존재하는데, 식민도시이자 이중도시로서의 경성이 지닌 특징은 1939년 판 ‘김강사와 T교수’에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김강사와 T교수’ 이외에도 유진오의 소설에는 서울의 지역색이 풍부하게 드러난 경우가 많다. 서울의 빈한한 거리 풍경이 자세하게 드러난 ‘스리’나 ‘오월의 구직자’, “거룩한 어머니의 손길”로 비유되는 향수로 삼종 증조부의 별장 창랑정(현 마포구 현석동에 위치)을 회고한 ‘창랑정기’, 종로 뒷골목의 카페에서 일하는 여급 푸로라가 등장하는 ‘나비’, 서울의 변두리였던 홍파동과 왕십리를 통해 전향 지식인의 소시민적 삶을 드러낸 ‘산울림’ 등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서울서 나서 서울서 자라난 나”라는 작가의 고백처럼, 서울 가회동에서 태어나 평생 4대문 밖을 벗어난 적이 없는 실제 삶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강사와 T교수’의 주요한 갈등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인 김만필과 일본인 T교수 사이에서 발생한다. 일제의 폭압이 맹위를 떨쳐 양심적 지식인의 활동이 위축되던 1930년대 중반이 배경인 이 작품에서, 과거 사회주의 운동에도 관여한 바 있는 김만필은 동경제대 독일문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지만 일 년 반 동안 룸펜생활을 한다. 결국 그는 평소 경멸해오던 동경제대 교수, 조선총독부 과장, 전문학교 교장에게 부탁을 하고서야 강사 자리 하나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이러한 청탁의 연쇄고리보다 김만필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이 취업이 “정강이의 흠집”에 해당하는 경력, 즉 과거 사상 단체인 문화비판회 활동을 철저히 숨김으로써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그토록 힘들게 얻은 자리이지만, S학교에서의 생활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그곳에는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일본인 교수 T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T는 늘 웃음을 띠고 있는 외양과는 달리 교활하고 비겁한 인물로서, 어느 조직에나 있을법한 전형적인 모사꾼이다. 도련님 또는 책상물림의 티가 뚝뚝 묻어나는 김강사와 닳고 닳은 T교수의 대비를 통하여 이 작품은 지식인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날카롭게 형상화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T교수가 이전에 사회주의 활동을 한 김강사의 일거수일투족을 “탐정견”이나 “셰퍼드”처럼 끊임없이 감시하며, 결국에는 김강사를 파멸시킨다는 점이다. 이러한 T교수는 일제의 간교함과 억압을 대표하는 인물로서의 전형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강사와 교수를 주요인물로 내세운 소설답게 작품의 주요한 배경은 서울의 S전문학교이다. 이 학교는 유진오가 졸업했으며, 그 후에는 조수와 부수를 거쳐 예과 강사까지 역임했던 경성제대와 33년부터 강사로 활동했고 이후에는 교수로 재직했던 보성전문을 합쳐 놓은 것으로 보인다. S전문학교의 당당한 교사는 작품 발표 당시 유진오가 전임강사로 근무하던 보성전문의 본관을 닮아있다. 이 본관은 1934년에 준공되었으며, 영국의 케임브리지대와 미국의 예일대 본관을 모방하여 건축된 고딕풍의 호화찬란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학교의 실상은 경성제대를 그대로 빼닮았다. 모든 교직원이 일본인으로 되어 있는 것이나 학생 역시도 일본인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경성제대의 특징에 부합하는 것이다. S전문학교는 근대적 이성을 내세워 조선을 야만시하며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했던 일제를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의 대비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S전문학교의 당당한 철근 콘크리트 삼층 교사는 그 주위의 돼지우리같이 더러운 올망졸망한 집들을 발밑에 짓밟고 있는 것같이 솟아 있는 것”이다. 김강사는 취임식을 앞두고, “아침을 먹고 나온 하숙집 풍경, 그 더러운 뒷골목 속에 허덕거리고 있는 함께 있는 사람들, 하숙료를 못 내고 담뱃값에 쩔쩔매는 영화감독, 일 년 열두 달 감시를 못 벗어나는 요시찰인인 잡지 기자, 아침부터 밤중까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푸성귀 장사, 밥값 못 낸 손님들을 붙들고 꽥꽥 소리를 지르는 하숙집 마나님”과 “이 당당한 건물, 가슴에 훈장을 빛낸 장교, 모닝의 교수들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세계 사이에 서 있던 김강사는 일본인들의 세계인 S전문학교에서 결국 더러운 뒷골목으로 표상되는 조선인들의 세계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김만필의 시련은 일본인 교원만 가득한 S전문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조선인으로서 처음 교원이 된 김만필은 일본인들만 가득한 교관실에서 철저하게 홀로 남겨진다. 일본인 교원들은 신출내기이자 조선인인 김만필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는 것이다. 교관실에서는 노골적이고 맹목적인 식민주의적 담론이 공공연히 유통되기도 한다. T교수는 자신이 조선의 민속에 대해 연구를 했다며, 거짓말하는 여자한테는 똥을 먹인다거나, 조선 여자들이 살결이 고운 이유는 오줌으로 세수를 하기 때문이라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망발을 내뱉는다. 동료 일본인 교원들이 모두 낄낄거리며 웃는 그 참담한 교관실에서, 조선인 김만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런 풍속이 어데 있단 말씀이오, 나는 듣도 보도 못했소”라는 말을 “겨우” 던지고는 교관실을 빠져나오는 것뿐이다.
결국 T교수의 감시와 일본인 교원들의 따돌림으로 김강사는 강박 관념에 쪼들리는 신경쇠약 환자같이 항상 마음의 위협을 느낀다. 이것은 조선인이며 과거에는 사회주의 활동에도 열심이었던 김강사에게는 “당초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김만필이 겪는 이 괴로움은 유진오의 실제 삶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유진오 역시 누구보다 뛰어난 학자였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끝내 경성제대 교수가 되지는 못한 것이다.
일본인 관리(교수)와 조선인 강사의 처지는 그들이 사는 집에서도 확연하게 구분된다. H과장의 집은 북악산 밑 관사촌이며, T교수의 집도 “훌륭한 문화주택”이다. 관사촌은 삼청동 일대로 짐작되는데, 삼청동은 조선 시대는 물론이고 일제강점기에도 아름다운 풍광과 총독관저나 조선총독부와의 근접성으로 인해 고급주택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김강사는 근처의 “뒷골목 속 더러운 하숙”에서 지내며, 그는 하숙 온돌에 누워 “빈대 피 터진 벽”을 바라보고는 한다.
이러한 김강사와 T교수의 대비는 경성의 조선인과 일본인 전체로까지 확장해 볼 수 있다. 조선인 김강사와 일본인 T교수가 분명하게 구분되듯이, 1930년대 중반 서울은 일본인 거주지와 조선인 거주지가 선명하게 구분되었다. 실제로 식민지 시기 경성은 이중도시라고 할 만큼 많은 일본인이 조선인과 함께 살고 있었던 것이다. ‘김강사와 T교수’가 처음 발표된 1935년 당시 서울의 전체 인구는 약 44만 명이었고, 그중의 25% 이상이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조선인과 일본인의 거주구역은 조금 과장하자면 국경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대략 청계천을 기준으로 하여 전통적인 조선인 거주지 북촌과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으로 구분되었다.
북촌을 대표하는 조선인의 공간이 종로라면 남촌을 대표하는 일본인의 공간이 혼마치(本町·충무로 일대)이다. 혼마치를 중심으로 하여 오늘날의 남대문로에서 태평로, 회현동, 을지로, 명동 등에 일본인의 주요 거주지였던 남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간상의 특징을 반영하듯 T교수가 김강사를 데리고 다니는 곳은 철저히 남촌에 한정되어 있다. 둘은 처음 동경 여자라는 모던 여성이 일하는 세르팡 술집에 갔다가, 이후에는 아사히마치(旭町·지금의 회현동)에 있는 일본인 오뎅집으로 가서 술을 더 먹는다. 오뎅집을 나와서는 남촌의 상징인 미쓰코시 백화점 앞에서 택시를 타고 헤어지는 것이다.
일본인의 경성과 조선인의 경성은 매우 대조적으로 형상화된다. 연말을 맞이하여 일본인의 중심인 ‘본정(혼마치)통’은 매우 번잡하지만, 조선인들의 무대인 종로는 “일루미네이션만 헛되게 빛나고 세모 대매출의 붉은 깃발이 쓸쓸한 섣달 대목 거리의 먼지에 퍼덕이고 있을 뿐”이다. 새해가 되어도 종로 거리에는 “장식 하나 없고 살을 에는 매운바람이 먼지를 불어 올릴 뿐”인 것이다. 이처럼 초라한 종로의 뒷골목에는 “김만필과 비슷한 경우에 처해 있는” 젊은 사내들로 우글거린다. 일제강점기 “본정이 부유한 일본인의 상징이라면 종로는 빈곤한 조선인의 상징”(전우용, ‘종로와 본정’, ‘역사와 현실’, 2001, 189)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김강사와 T교수’에는 압축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종로의 위축과 고작 수십 년의 역사를 지닌 본정의 융성은 식민지라는 조건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주요 고객인 조선인들의 빈곤화와 북촌의 슬럼화로 인해 종로는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총독부의 각종 지원정책으로 인해 본정은 나날이 번화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김강사가 S전문학교로 가는 도중에 전차 창으로 보이는 북촌의 풍경은 “더러운 바라크 집들이 톱니빨같이 불규칙하게 늘어서” 있다.
이중도시로서의 경성은 유진오의 ‘가을’(‘문장’, 1939.5)에도 잘 나타나 있다. 유진오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진 1930년대 후반에 ‘시정(市井)의 리얼리즘’, 즉 단장을 들고 거리로 나가 시정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살펴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을 창작방법으로 내세운다. ‘가을’은 주인공 기호의 산책이라는 행위를 통해 시정의 리얼리즘이 미학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서, 시정 편력의 행위는 자연스럽게 1930년대 말의 서울 시내를 구석구석 드러내는 효과를 발휘한다. 답답한 마음에 산책을 나온 기호는 혜화정(혜화동), 창경원(창경궁), 원남정(원남동) 네거리, 종묘 뒤 큰 거리, 돈화문 앞 파출소, 운이정(운니동), 본정(충무로), 황금정(을지로), 안동 네거리, 창경원 정문 앞, 동소문을 지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본정의 술집에서는 이랏샤이마시, 스깡히도다와네, 맛다꾸다요, 시마이나사이요, 마다 하지맛다 등의 일본어가 자연스럽게 울려 퍼진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울의 거의 절반이 일본인과 일본어와 일본풍으로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은 가슴 아프지만 묻어둘 수만은 없는 서울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경재 문학평론가·숭실대 교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2015.11. 25 YS 의 열린 리더십
윤여준(76) 전 환경부 장관은 김영삼(YS) 정부에서 최장수 청와대 대변인 겸 공보수석(2년7개월)과 환경부 장관을 지낸 YS맨의 한 사람이다. 청와대에서 본 YS의 국정운영과 인사·소통방식을 들어봤다. 그는 “YS의 3당합당 합류는 반드시 민주화를 이뤄내겠다는 소명의식과 권력욕구가 반반씩 작용한 결과일 것”이라며 “민주화 시대를 연 ‘창업’의 리더십에선 YS만 한 영웅이 없지만 ‘수성’에 요구되는 과제는 미완으로 남기고 갔다”고 평가했다. 윤 전 장관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YS가 보여준 용기와 돌파력, 리더십엔 미치지 못해 ‘정치적 아들’이라 보기엔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시중의 대통령 욕 그대로 전하면 ‘이게 참모의 할 일’ 격려”
3당합당, 민주화 위한 차선의 선택
소명의식·권력욕 반반 섞인 승부수
현철씨 인사 개입, 부분적인 수준
추기경 면담 뒤 대국민 사과 결정
- YS는 민주화 투사이면서도 6공 세력과 손잡고 3당 합당을 강행해 논란을 불렀다.
“YS는 87년 DJ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군정을 종식하려면 6공 세력과 손을 잡아서라도 대통령이 되는 길밖에 없다고 결단한 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민주화를 이뤄야 한다는 소명의식과 권력욕구가 반반이었을 것이다. 현실 정치인으로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현실은 최선 아닌 차선·차악을 택해야 할 때가 많다.”
- 청와대 공보수석 시절 아들 현철씨 문제를 사과하는 YS의 대국민 발표를 작성했다.
“내가 직접 썼다. 당시 현철씨의 국정개입 논란이 갈수록 증폭되자 나는 김광일 대통령비서실장을 찾아가 ‘이 문제를 적당히 덮고 넘어가려 하면 대통령이 임기를 못 채울 수도 있다’고 하니 그도 동감을 표시하며 ‘옷 벗을 각오로 돌파하자’고 하더라. 그러나 현철씨가 잘못한 게 없다고 주장하는 수석들도 많아 YS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어느 날 김수환 추기경이 전화해 YS를 뵙고 싶다고 했다. 두 분이 두 시간 넘게 얘기를 나눈 뒤 추기경이 나오는데 휘청거리시더라. ‘내가 할 일은 다 했어. 이제 당신들 일만 남았어’라고 하더라. YS가 그 뒤 개신교와 불교 지도자까지 모셔 얘기를 듣더니 ‘다들 말씀이 똑같다’며 내게 ‘대국민 사과문을 써오라’고 했다. 고심을 거듭해 작성한 초안을 놓고 매일 아침 YS와 한 자 한 자 검토했다. ‘아들을 조사해 책임질 일이 있으면 응분의 책임을 묻겠다’는 대목에서 YS가 돌연 사인펜을 들더니 ‘응분의’를 지우고 ‘사법적’이라 쓰더라. 내가 “그러시면 대통령이 아들의 죄를 인정했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고 말렸지만 ‘대통령 아들은 잘못이 있어도 벌받지 않아야 한다는 거야?’라고 일축하더라. 아마 YS는 아들의 무고함을 확신한 것 같다. 그래서 조사 끝에 아들의 죄 없음이 밝혀지면, 극적인 반전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한 듯하다.”
“나는 국민의 공감을 얻으려면 생방송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수석들은 대통령 심경이 어지러우니 적어도 15~20분은 시차를 두고 방송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YS는 ‘윤여준 수석 판단이 맞아. 생방송으로 해’라고 했다. 용기를 얻은 나는 ‘단 한 명의 배석자도 없이 대통령 홀로 고독하게 사과문을 읽어야 한다’고 추가 주문을 했다. ‘읽다 울음이 나오면 우세요. 열 번 틀리게 읽으면, 열 번 고쳐 읽으세요. 감정의 흐름에 맞기세요’라고도 했다. YS는 ‘알았어’ 하며 그대로 하더라.”
- 사과문에서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란 대목이 눈길을 모았다.
“발표 20분 전 대통령이 내게 전화해 ‘다른 건 다 좋은데 그 표현은 좀 속된 것 아이가?’라고 물었다. ‘원하시면 자식의 허물은 부모의 허물이라고 고쳐드릴 수 있다. 그러나 듣는 국민들을 생각하면 지금 표현이 훨씬 와닿을 것’이라 했다. 그러자 ‘윤 수석이 고집하면 할 수 없지’라고 힘없이 받아들이더라. 참 죄송했다. 담화가 나가자 국민들이 대통령을 동정하는 쪽으로 돌아섰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후 YS는 보고하러 들어가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천장을 쳐다보고 있는 일이 흔했다. 그래서 웬만한 건 보고하러 들어가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 현철씨의 국정개입 논란은 어떻게 보나.
“현철씨는 YS에게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 시절 핵심 참모여서 신뢰가 컸다. 그러니 현철씨로선 인사문제에 나름 발언권이 있었을 것이다. YS는 인사를 결정하면 홍보수석인 나를 불러 내용을 알려주고 발표를 지시한다. 내가 집무실을 나오면 청와대 비서실장과 민정수석이 기다리고 있다가 ‘누가 됐느냐’고 묻는다. ‘아무개’라고 알려주면 깜짝 놀라는 걸 몇 번 봤다. 민정에서 올린 후보와 다른 사람이 됐다는 뜻이다. 둘이 ‘왜 인사가 이렇게 됐지?’ ‘아이, 다 알잖아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기도 했다. 현철씨가 개입된 결과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게 사법 처리의 대상은 될 수 없다.”
- 박근혜 대통령도 3인방 등 청와대 측근들이 인사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은 바 있다.
“현철씨의 개입은 극히 부분적인 것일 뿐 YS는 공적인 인사시스템을 무시하지 않았다. 또 참모가 직언해도 전혀 언짢아하지 않았다. YS가 나를 불러 ‘경제 부처의 모 장관을 바꿔야겠다. 잡음이 많다’고 한 적이 있다. 나는 ‘기업들이 음해성 얘기를 했을 수도 있다. 잡음의 내용이 사실인지가 중요하다’며 말렸다. 그랬더니 수긍하면서 장관을 갈지 않았다. 그만큼 참모의 얘기를 기탄 없이 들었다.”
-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동이 500m나 떨어져 있어 논란인데 그때도 구조는 같았다.
“그 구조를 바꾸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특히 대통령 집무실이 테니스장만 해서 낭비가 크다. 문 열고 대통령 책상까지 오래 걸어가야 한다. 그럼에도 수석들은 YS와 소통이 자유로웠다. 대통령 공식 일정에 틈이 나면 곧 바로 뵙고 직보할 수 있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집무실을 드나들었다. 분위기도 권위와 거리가 멀어 정말 편하게 얘기했다.”
- 당시 YS에게 직언을 하면 얼마나 받아줬나.
“10개 건의하면 6~7개는 받아줬다. 내가 ‘그렇게 하시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고 하면 ‘내 생각이 짧았다’며 없던 일로 한다. 민정수석이 시중에 도는 대통령 욕을 그대로 전하면 무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끝까지 들었다. 다른 수석들이 ‘아무리 그래도 욕까지 보고할 이유가 있나’고 탓하면 YS는 ‘괜찮다. 그게 민정수석 할 일’이라 감쌌다.”
- YS의 ‘열린 소통’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또 있나.
“많다. YS는 항상 연초에 기자회견을 했다. 그해의 국정계획을 국민에게 반드시 보고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회견문은 20분 분량으로 간략히 써라’고 내게 신신당부해 체육 분야를 빼고 써드렸다. 그러자 ‘이 사람아. 체육이 얼마나 중요한데. 관계자들도 서운할 기라’며 추가하라고 했다. 그래서 발표문은 30분, 35분으로 늘어나기 일쑤였다.”
- 96년 총선 공천은 YS가 다 했다. 요즘은 상상이 안 가는 얘기다.
“평생 정치를 한 사람이고, 공천도 오래 해봐서 대단히 능란하다. 사람을 평소에 굉장히 유심히 찾는다. 선거 때마다 능력 있는 신인을 발탁해 새 피를 수혈해야 한다는 소신이 있었다. 손학규·김문수 같은 운동권 출신을 인재로 키웠고 이회창을 총리에 임명해 대권 주자로 만들지 않았나.”
- 하지만 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는 YS와 각을 세워 악연이 됐다.
“대구 유세에서 ‘영삼 인형’을 밟는 이벤트까지 벌어지면서 상도동 가신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들은 내게 이회창에 대해 입에 담기도 힘든 험한 욕을 하면서 ‘이회창은 우리 상도동과 동교동의 관계를 모른다. 싸울 땐 치열해도 동지적인 관계가 있다’고 했다. DJ가 당선돼도 YS 측에 나쁠 게 없으니 굳이 이회창을 돕지 않겠다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다.”
- YS에게 가장 아쉬운 게 경제다.
“97년에 접어들면서 국무회의에서 경제 부처 장관들이 경제상황이 나쁘다고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경제부총리는 ‘펀더멘털이 튼튼한데 무슨 소리냐’며 면박을 주기 일쑤였다. 이러니 대통령도 경제가 위험한 줄 몰랐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그해 3~4월께 경제수석이 돌연 ‘나라 경제가 급격히 어려워지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 일주일 전까지 “경제에 문제가 없다”던 그였다. 나는 YS에게 ‘어떤 나라 경제도 일주일 만에 나빠지지는 않는다. 민간에선 경제가 위험하다는 경고가 나온 지 오래다. 당국자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YS가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더라. 나도 맞받아서 그를 보았다. 그러자 YS는 ‘알았다. 그래야 되겠지?’ 하더라. 얼마 뒤 일부 관계자에게 조치가 내려졌다.”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YS의 정치적 아들’을 자처하는데.
“YS는 결단을 내리면 실패를 두려워 않고 밀어붙이고 결과도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이런 자질 측면에서 김 대표는 아직 미흡하다. 현 시점에선 YS의 정치적 아들이라고 할 만한 인물은 (정치권에) 없다.”
- YS가 대통령 시절 DJ와 어떤 사이였나.
“내가 상도동 출입기자 시절엔 YS가 ‘DJ는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걸 수없이 들었다.(웃음) 그러나 YS는 대통령이 된 뒤엔 DJ를 깎아내리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YS 임기 중 DJ가 두 차례 청와대에서 영수회담을 했는데 YS에게 아주 깍듯이 대하더라. ‘대통령 각하’라 부르며 존댓말을 쓰고 몸가짐을 정중히 하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YS도 똑같이 하더라. 의원 시절 사석에선 두 사람이 말을 놓았다지만 대통령과 야당대표로 만나니 달라진 것 같다.”
- 영수회담 내용은 어떻게 공개했나.
“회담 뒤 청와대를 나간 DJ가 내용을 발표케 하고, 우리는 기자들에게 팩트만 요약해 알려줬다. 그런데 뉴스를 보니 (야당 입장만 반영된) 의심스러운 대목들이 보도되더라. YS에게 이를 알리고 ‘언론사에 연락해 바로잡을까요?’라고 물으니 ‘놔 둬라. 야당은 원래 그렇게 하는 기다’하며 웃고 말더라. 두 거목, 양김의 이런 통 큰 정치가 그립다.”
글=강찬호 논설위원 사진=박종근 기자
□李仁浩 교수
2018.05.23 ‘탄생 200주년 맞은 칼 마르크스가 역사와 현실에 미친 영향’
“문명사회 不文律을 다 때려 부수는 게 진보인 양 착각하게 만든 게 가장 큰 잘못”
⊙ “공산주의 체제는 多數의 이름을 빌려 少數 독재 하는 이중적 구조, 국민을 선전과 선동으로 속이면서 이끌어나가는 체제로 갈 수밖에 없어”
⊙ 이승만, “기업인을 적대시하고, 국가를 약화시키고, 모든 재산을 共有하는 식으로 하면, 발전 동력·창의력이 나올 데가 없다”
⊙ “사람들을 속이고, 역사를 정치도구화하는 건 스탈린이 하던 짓”
李仁浩
1936년생. 서울대 사학과·美웰즐리대 사학과 졸업, 美하버드대 사학박사 / 고려대 사학과 교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駐핀란드대사, 駐러시아대사,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명지대 석좌교수, KAIST 초빙석좌교수,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KBS이사장 역임. 現 서울대 명예교수
▲사진=조선일보DB
올해는 칼 마르크스(Karl Marx・1818~1883)가 태어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독일 라인란트의 트리에에서 하인리히 마르크스와 헨리에타 마르크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국의 자유주의 사상가 이사야 벌린은 《칼 마르크스-그의 생애와 시대》에서 이렇게 말했다.
〈19세기 사상가 중에 칼 마르크스만큼 인류에게 직접적이고 체계적이며 강력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다. 그는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은 뒤에도 추종자들에게 지적・도덕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때 유럽에서는 위대한 대중적 영웅들과 순교자, 로맨티스트 등 전설적인 인물들이 그들의 삶과 언어를 통해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새로운 혁명적 전통을 창조한 민주적 민족주의의 황금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대중적 영향력은 그 황금시대에서조차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을 정도로 강력했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소련・동구의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했다. 마르크스는 그가 죽은 지 100여 년이 지나 드디어 완전히 ‘역사의 관(棺)’ 속으로 들어가나 싶었다. 하지만 2008~2009년의 글로벌 금융・재정위기를 겪으면서 마르크스는 다시 부활했다. 멀리 다른 나라들까지 갈 필요도 없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 혹은 그 ‘한국적 변태(變態)’인 주체사상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 정부와 사회 곳곳을 장악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이인호(李仁浩・82)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난 것은 마르크스가 세계사와 한국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한국 현실에 끼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많은 국민은 이 교수를 최초의 여성 대사(주핀란드대사, 주러시아대사)로, 전 KBS 이사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원래 러시아 지성사(知性史)를 전공한 서양사학자였다. 1980년대 초 그가 번역한 《인텔리겐찌야와 혁명》 《지식인과 저항》 등은 당시 학생과 지식인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시절 이후에는 북한인권운동 및 좌(左)편향 역사교과서를 바로잡기 위한 운동에 앞장섰다. 문재인(文在寅)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야당 성향 KBS 이사진을 교체하려는 정권 및 노조(勞組)의 시도에 완강하게 저항하다가 KBS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간의 고초로 인해 심신(心身)이 많이 상하지 않았을까 걱정됐는데, 82세의 노(老)교수는 여전했다.
마르크스주의의 매력
▲칼 마르크스 (1818~1883).
― 금년이 칼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입니다.
“역사에 직접 미친 영향으로 보면, 마르크스는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라고 볼 수 있어요. 마르크스의 사상이 철학적으로, 진리로서, 위대하다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것이 전 세계 역사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에서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 마르크스의 사상이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
“노동하는 힘없는 다수(多數)가 평등하게 인간답게 사는 세계를 만든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이상(理想)이 가장 매력적이었고, 그 때문에 영향력이 컸던 것이죠.”
― 마르크스 이전에도 여러 형태의 유토피아주의 같은 게 있었지만 마르크스주의처럼 지속적으로 강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마르크스가 특히 호소력이 강했던 이유는 뭘까요.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내지 산업화 초기, 즉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하는 진통이 가장 컸을 때,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라는 이론을 내세웠어요. 이전의 농업시대에는 가난해도 집단(공동체) 내에서 어느 정도 서로 보호해 가면서 살 수 있었어요. 하지만 산업화 초기는 인간이 경제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심리적으로 소외(疎外)당하면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인간의 소외라는 게 피부로 느껴지던 시대였습니다. 때문에 이론과 현실의 배합이 강렬했던 거죠.”
레닌주의로의 변질
▲레닌과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를 후진적 러시아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크게 변질시켰다.
― 같은 유럽에서도 각 나라마다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는 게 달랐지요.
“마르크스의 조국이었던 독일에서는 마르크스 이론가들이 정치실험을 하지만 결국은 사회가 혁명적으로 변하는 것보다는 차츰차츰 수정주의적으로 법적인 절차를 거쳐서 변화해 가는 것이 이롭다는 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사회민주주의지요. 반면에 ‘역사는 단계를 거쳐 발전하는데,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해서 자기모순이 발생하면 사회주의 혁명을 거쳐 공산주의 시대로 넘어간다’는 마르크스의 이론대로 객관적으로 혁명이 일어날 여건이 되지 않는 러시아·중국 같은 후진국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 마르크스의 이론과는 달리 자본주의 후진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이유가 뭘까요.
“기득권층을 무너뜨리면 현재 억압받고 있는 가난한 다수가 권력을 쥐게 된다는 주장이 정치·경제 후진국에서 그만큼 더 잘 먹혀들어 간 거지요. 마르크스도 죽기 전에 자기 이론대로라면 러시아 같은 나라가 혁명이 일어날 객관적인 여건은 안 되지만 혁명이 성공할 현실적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는 걸 인식하고 자기 이론을 수정해야 하는지 고민했던 흔적이 있습니다.”
― 왜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걸까요.
“레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금융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해서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에 달하면 프롤레타리아가 의식화되어 극소수의 부르주아를 뒤엎고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이론인데, 산업화 초기 단계에 있던 러시아에서는 그걸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객관적 상황이 무르익고 정치적으로 민주화되어 시민의식이 생기기를 기다리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조급했던 거지요. 레닌은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농민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 반발심을 혁명적 에너지로 동원하려고 도농(都農)동맹을 고안해 냈습니다. 레닌에게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프롤레타리아가 의식화되기를 기다리는 대신, 소위 의식 있는 ‘혁명적 아방가르드 인텔리겐치아’가 노동자·농민의 이름을 빌려서 혁명을 하는 것으로 마르크스의 이론을 변형한 것입니다.” 이인호 교수는 “그 바람에 마르크스의 이름을 빌린 공산주의 혁명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게 됐다”고 말했다.
“공산주의 체제는 마르크스가 말한 기본적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왔기 때문에 다수의 이름을 빌리지만 실은 소수가 독재를 하는 이중적 구조, 국민을 선전과 선동으로 속이면서 이끌어나가는 체제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것도 1당 독재로 끝나지 않고 그 가장 추악한 형태인 1인 독재로 가버렸지요.”
이승만의 공산주의 비판
― 마르크스주의는 일제(日帝)하 한국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지요.
“레닌은 계급투쟁뿐 아니라 민족모순이라는 것을 집어넣어서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피(被)압박민족의 해방을 주장합니다. 봉건주의를 타파하는 동시에 민족해방을 하는 데에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일제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는 굉장히 매혹적인 이념이었지요. 그때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이승만(李承晩) 박사는 ‘이론적으로 볼 때 공산주의의 이상은 아주 매력적이지만 방법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합니다.”
― 이승만 박사가 1923년 《태평양잡지》에 기고한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은 지금 봐도 정말 명쾌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결함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본성을 잘못 파악한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저마다 능력과 추구하는 목표가 다양하다는 걸 몰랐어요. 인간을 순전히 경제적 동물로 보고 경제적으로만 풍족해지면 욕심이 없어진다고 했죠. 그건 정말 터무니없이 잘못된 가정이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마르크스가 놓친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이 박사는 ‘자본가·기업인을 적대시하고, 지식인들을 홀대하고, 종교를 박해하고, 국가를 약화시키고, 모든 재산을 공유(共有)하는 식으로 하면, 발전 동력·창의력이 나올 데가 없다’고 지적합니다. 소련의 실험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 아서 쾨슬러나 앙드레 지드 같은 서구의 지식인들이 소련 공산주의에 열광하고 있을 때에, 이 박사는 그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지요.”
― 그런 통찰력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이승만 박사가 동양의 학문적 전통, 한국인으로서 체험한 비애(悲哀) 위에 서양 학문을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박사는 인간성의 본질,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책상머리에서 이론을 만들어낸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감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죠.”
― 해방 후 남한 주민들의 70~80%가 우리가 독립 후 지향해야 할 체제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를 원했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70~80%라는 건 과장인 것 같지만, 여운형(呂運亨) 정도의 중도(中道)노선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은 상당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세계공산주의운동이 코민테른을 통해 나오지만 실제로는 모스크바가 자기네 국가이익을 위해 주도하는 세계운동이고, 그 지령을 받는 한 공산주의자들은 순수한 의미의 애국자가 될 수 없다는 걸 몰랐습니다. 반면에 이승만 박사, 김구 선생 같은 분들은 소련공산당의 지령을 받아서 움직이는 한, 공산주의 세력은 우리가 추구하는 자주독립을 향해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았죠.
어느 나라에서나 일단 공산당에 가입하면 모든 걸 당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철칙(鐵則)입니다. 소련·동구가 무너질 때에도 공산당 당적(黨籍)을 버리지 않았던 영국의 공산주의자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같은 사람도 그걸 인정합니다. 그는 ‘공산당원이 되면 사생활에서 어떤 여자와 사귀느냐 하는 것도 당의 명령에 따라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솔직하게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고 대답했죠.”
이승만과 스탈린의 대결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국사교과서에서는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바뀌었다.
― 김구 선생은 결국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이탈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가 ‘민족’이라는 가치에 매몰됐었기 때문일까요.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거죠.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구를 완전히 장악하고 냉전(冷戰)이 시작됐다는 것, 김일성은 완전히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움직인 사람이라는 걸 간파하지 못한 거죠.
반면에 이승만 박사는 북한에 이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임시정부 같은 게 수립됐으니 우리도 임시정부 같은 것을 만들어서 대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걸 두고 지금 저쪽에서는 이승만의 정읍발언 때문에 분단이 됐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이 박사가 끌어낸 것이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입니다. 그대로 됐으면 우리는 선거를 통해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었어요. 그걸 거부한 게 소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실 공산주의 체제가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게 부정적이었죠.”
이인호 교수는 “공산주의가 가장 기승을 부리던 1945~1953년 세계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대결은 이승만과 스탈린의 대결이었다”면서 “한반도 남쪽마저 스탈린에게 먹히느냐 마느냐 하는 힘든 대결에서 이승만이 승리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위대한 지도자였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한반도 북쪽에는 ‘당(黨)이 모든 걸 해줄 테니까 당에 복종하라’고 하는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섰지만, 이승만 박사는 ‘국가가 모든 걸 해주지는 못하지만 개인을 해방시켜 줄 테니 각자 자기가 힘낼 수 있는 대로 뛰어라, 대신 국가는 기본 인프라와 교육을 제공해 주겠다’고 하는 체제를 세웠습니다. 그 결과 남과 북이 원래는 같은 체제였는데, 우리는 있는 힘을 다 쏟아 여기까지 온 거고, 북한은 있던 힘이 억압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런 차이가 나게 된 것이죠.”
“역사를 정치도구화하는 건 스탈린이 한 짓”
― 지금 정부는 교과서에서 대한민국이 유엔의 승인을 받은 유일 합법정부라는 표현을 빼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문구가 어떻고 하면서 그 사실을 부정하는 인간들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가장 악랄한 점이 바로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속이고, 역사를 정치도구화하는 건 스탈린이 하던 짓이에요.”
― 4·3 제주폭동 등에 대한 평가도 흔들리고, 6·25가 남침이라는 사실조차 가르치지 않게 될 모양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실제로 역사가 어떻게 일어났는가 하는 것을 알아서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데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자기들 소견에 맞추어서 역사를 조작하는 유혹에 빠지고 있는 건 문제입니다. 현실공산주의가 역사를 왜곡해서 정적(政敵)을 죽이는 걸 예술의 경지로 발전시켰는데, 이걸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요.
마르크스주의건, 자유민주주의건 간에 지적(知的) 판단력, 도덕적 정직성이 모든 사회 발전의 근간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다를 수 있어도, 과거에 일어난 일을 뒤엎을 수는 없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왜곡하거나 가르치지 않는 것은 결국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체제’라고 하는 북한의 논리에 말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 대통령이 ‘1919년 건국’을 주장하는 걸 보니, 대한민국 건국 70주년은 아주 썰렁하게 지나가게 생겼습니다.
“지나가는 것 정도가 아니라 아주 지워버리려고 하고 있잖아요. 대통령이라고 하는 사람이 임시정부와 국가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건 독재 중의 독재지…. 대통령이 됐다고 해서 역사를 자기 마음대로 쓰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어….”
― 이른바 최순실 사태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이후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 그리고 공무원·군인·법조인·교사 이런 사람들조차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확신이 없는 걸 보면 대한민국은 그간의 빛나는 성취에도 불구하고 결국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에 실패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최순실 사태니 뭐니 해서 멀쩡한 대통령을 탄핵이라는 형식을 빌려 불법으로 몰아낸 거 아니에요?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할 정도로 국가를 해치는 일을 한 게 있나요? 없잖아요?
이건 헌법재판관을 비롯한 지식인 계급이 사리(私利)를 위해서 국가를 배반한 거예요. 스페인의 정치학자 오르데가 이 가제트가 말한 ‘지식인의 배반’이 벌어진 거죠.”
‘지식인의 배반’
―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정말 공허한 이론을 가지고 대중을 오도(誤導)하고 있어요. 지금도 시장 같은 데 가서 이야기를 나누면 우리가 얼마나 살기 좋아졌는지 다들 인정해요. 자기들이 직접 체험했으니까…. 불과 반(半)세기 동안에 이렇게 형편이 달라지는 나라가 세상에 별로 없는데, 그걸 전부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어요. 결국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선동이 학생운동 같은 데서부터 침투하기 시작해서 국민들의 의식을 교란시킨 겁니다. 우리가 너무 경제발전과 정치에 취해서, 지하를 통한 세뇌(洗腦)공작, 특히 역사교육을 통한 세뇌공작에 당한 거죠.”
이 교수는 “이렇게 된 데에는 박정희 정권의 잘못이 크다”고 지적했다.
“박정희 정부의 가장 큰 실수 중의 하나가 지식인을 군인 다루듯이 힘으로 억압하려 하면서 연구소에서조차 공산주의에 대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게 하는 우매한 반공정책을 편 것입니다.”
― 지식인 사회의 문제점도 있지 않았을까요.
“반대세력 역시 박정희 시대에는 ‘군사독재 타도’만 외치면 모든 게 되니까 공산주의에 대해 깊이 공부하지 않았어요. 그게 역작용을 일으켜서, 소련에서 공산주의가 무너져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전개되던 시절에 우리나라에서는 학생운동이 주사파(主思派)의 소굴이 되어 버렸어요. 그만큼 우리나라 지식계가 세계와 동떨어져서 역사에 대한 이해도, 진정한 지식인으로서의 양식과 양심도 저버린 세력이 되어 버렸어요. 특히 역사학계는 완전히 파산했어요, 파산!”
이인호 교수는 1990년경 경험한 일을 이야기했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한창 진척시키고 있던 1990년경, 고르바초프의 이론가였던 바짐 메드베데프를 서울대로 초청, 강연을 마련했어요. ‘고르바초프의 오른팔’이 왔다고 하니 운동권 학생들도 많이 들으러 왔어요. 한 학생이 ‘소련이 세계사회주의운동의 구심점이었는데 어떻게 그 사명을 저버리고 다른 쪽으로 간다고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더군요. 나중에 메드베데프는 웃으면서 ‘당신 나라 학생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다면 페레스트로이카를 시작하지 말 걸 그랬다’고 하더군요.”
혁명 前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고민
― 젊은 시절에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거나 관심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한국에서는 전혀 없었지요. 6·25가 났을 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어요. 아버지는 북쪽으로 끌려가다가 도망쳐 나와서 인천상륙작전 때까지 숨어서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부역 당하고, 온 가족・친척이 수난당하는 것을 봤어요. 계급투쟁 이론을 적용해서 소위 유산층(有産層)에 속하는 사람들을 다 인민의 적(敵)으로 취급하는 것, 완장 찬 사람들이 제멋대로 하고 다니는 걸 보면서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 미국에서 러시아 지성사를 공부하셨지요.
“미국 웰즐리대학에 유학 중이던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 위성을 발사하자 충격을 받은 미국은 러시아 연구를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웰즐리대학에서도 러시아 지성사 강좌가 개설됐는데, 들어보니까 너무 재미있더군요. ‘어떻게 하면 서구를 따라잡으면서도 우리의 영혼을 빼앗기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하던 19세기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고민이 바로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아, 내가 이걸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인호 교수는 1980년대 초, 러시아혁명 전야(前夜) 러시아 지식인들의 고민을 담은 《인텔리겐찌야와 혁명》을 번역, 소개했다. 이 교수가 말하는 이 책의 내용 몇 구절을 보면, 마치 오늘의 한국 사회를 예견하는 듯해서 모골이 송연해진다.
“잘못된 정치체제에 항의하던 사람들이 권력에 의해 압살(壓殺)당하고 나면, 어린애들이 나서서 사회의 구세주(救世主) 역할을 자임한다. 이들은 인생의 경험이 많이 부족하면서도 구세주의 역할, 독선(獨善)에 빠진다. 젊은 나이에 한창 공부를 하고 사물을 직시하는 능력을 배양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하다 보니 여러 면에서 문제가 심각하고, 결국 ‘어린애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다.”
“러시아 사람들은 정의(正義)에 대한 갈구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진리와 정의를 혼동해서, 정의의 이름 아래 진리를 쉽게 무시한다. 말하자면 정의감에 솔깃하게 들리면 거짓도 쉽게 받아들인다.”
“악법(惡法)과 오랫동안 싸우다 보니까 법 자체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모른다. 법이라는 것이 있어야 인간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인데, 악법을 거부한다고 법 자체를 등한시한다.”
“사회구조가 잘못됐다는 것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개인이 도덕적으로 인격을 연마하고 자기 수련을 해야 하는 중요성을 간과한다.”
“혁명가가 되는 사람의 동기를 보면,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이기 때문에 자기가 누릴 수 있는 특권(特權)을 다 버리고 전체를 위해서 혁명운동에 뛰어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反)사회적으로 쓸모가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입장에서, ‘이 사회가 뒤집혀야 내가 기회가 있다’고 해서 뛰어드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극(極)에서 극이지만, 혁명지상주의(革命至上主義)라는 전제 아래서 힘을 합쳐 일한다. 그래서 혁명이 성공했을 때, 누가 권력을 잡을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추구하는 쪽이 잡지, 이상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지 못한다.”
‘역사의 당위성’에 대한 믿음이 낳은 독선
실제로 이인호 교수는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들이 혁명 전야에 고민했던 문제들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몸으로 체험했다.
― KBS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이 정권 출범 이후에 험한 일을 많이 당하셨지요.
“계급투쟁론과 역사발전단계론을 믿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역사의 당위성(當爲性)’이라는 걸 내세우면서, 공산주의로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걸 향해서 움직이는 자신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그 ‘역사의 당위성’을 거부하는 세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대시해도 된다고 봅니다. 본래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혁명이론이라고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인간을 오히려 도구화하고 개인의 도덕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고, 혁명을 위해서는 심지어 살인도 정당화된다고 하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집니다. 이 점이 마르크스주의나 그와 유사한 극단적인 좌파혁명 이론들이 나타내는 가장 부정적인 증상이죠.”
― 마르크스주의에 긍정적 측면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정치적 민주주의를 통해 자본주의의 횡포 가능성을 제어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 하는 점을 경고했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긍정적인 면이라고 봐요. 물론 영국의 선거법 개혁, 근로시간 규제 등에서 보듯이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자유주의 사회에도 자체 수정 기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라는 강력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나오면서 그런 노력에 박차를 가하게 됐습니다. 독일 비스마르크가 사회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한 것이 그 예(例)죠.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일정 정도 기여한 것은 확실합니다. 또 현실사회주의(소련)가 나치즘, 파시즘을 패배시키는 데 기여한 것도 기억할 만한 일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마르크스주의 때문이라기보다는 국가 이익의 작용이라는 측면이 있지만 말입니다.”
이인호 교수는 “마르크스주의로 인한 긍정적인 영향도 있었다는 얘기도 꼭 써달라”면서도 “나는 부정적인 영향이 더 컸다고 보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본성, 그리고 인간사회가 문명사회로 진화하면서 생긴 여러 가지 불문율(不文律)들이 있습니다. 그걸 지켜야 인간답게 살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불문율로 지켜오는 걸 다 때려 부수는 게 진보이고 발전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게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문재인 정부도 사회발전을 시키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건설한 쪽은 다 부정적으로 얘길 하고, 그걸 치받고 올라온 사람들만 큰일을 한 것같이 하잖아요? 그런 사회가 어떻게 발전을 하겠어요? 파괴로 가지.”⊙
월간조선 06월 호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이정현 의원 인터뷰
2016-04-18
[여당 최초 湖南 재선… '朴의 남자' 이정현]
"공천파동 리더십 없던 인간을 '대선 주자' 반열에 올려
여론조사 해주고 언론에선 매일 등장 시켜"
"朴 대통령 '不通' 비판? 그렇게 안 보는 견해도 있어
그분 스타일을 바꾸라는 요구는 무리라고 봐"
아침에 통화하니, 이정현(58) 의원은 "황송하다, 황송하다"고 말했다. 그런 단어가 몸에 밴 듯했다. 오후 비행기로 그의 지역구 전남 순천에 내려갔다. 그는 유세 차량을 타고 다니며 당선 인사를 하다가 약속 장소로 왔다. 얼굴은 빛이 날 만큼 검게 탔고, 입에선 쉰 소리가 났다. 목 때문에 오면서 병원에 들러 주사 한 대를 맞았다고 했다.
"저는 촌놈입니다. 오피니언 리더가 아닌 다수 유권자에게 맞춰 바닥 선거운동을 했습니다. 과거에는 후보자의 학력과 경력이 뛰어난 게 먹혔지만, 지금 유권자들은 말 안 해도 자기네 속을 잘 알아주는, 자기와 똑같은 후보를 좋아해요. 제가 노인정에 들어가면 '보일러 고치러 오셨소?'라고 물어요. 새벽 인력 시장에 가면 같이 일자리 찾으러 온 사람으로 여기다가 제 목소리를 듣고는 '어, 이정현 아니야' 하고 돌아봅니다."
▲이정현 의원은 “자기를 믿어준 보스를 배신하는 인간은 사람으로 안 본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선거 막판에는 유권자들에게 "살려달라"고 울면서 매달렸다면서요?
"너무 절박해서, '한 번만 더 도와달라'고 말하다가 울먹이기도 했지요. 지나가는 젊은이들이 손을 흔들어줄 때는 너무 감격해 유세차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과거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던 부인도 선거운동에 나섰다고요?
"아내는 선거 기간 세 번이나 입원했습니다."
―아무리 선거가 급해도, 아내를 못 하게 해야 남편의 도리지.
"아예 내려오지도 못하게 했지요. 그런데 아침에 나보다 먼저 나가버리니…."
여당(與黨) 최초로 그는 호남에서 재선했다. 한 번은 할 수 있지만 두 번 당선은 쉽지 않다. 이번에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한때 여론조사에서 상대 후보에게 20%포인트까지 밀렸다.
"전국적으로 새누리당이 이렇게 혹독한 심판을 받았지만 저는 호남에서 살아남았습니다. 19대 재·보선에서 당선된 뒤로 1년 8개월간 순천을 오가느라 비행기를 241번이나 탔어요. 지구 두 바퀴를 돈 거리입니다. 지역구 사무실에 따로 제 방을 두지 않았어요. '주민들이 나를 만나러 왜 사무실까지 오나. 부르면 내가 뛰어가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해왔는데 공천 파동이 터진 겁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여기에 와서 상대 후보와 함께 무릎까지 꿇었습니다. 하지만 순천 시민들은 제 진정성을 믿어줬어요. 위대한 겁니다…."
―새누리당의 공천 파동은 왜 일어났다고 봅니까?
"우리 정당에는 시스템이 없습니다. 그때그때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의 생각·욕심·야심이 작용하는 겁니다. 자신의 마음속으로 대통령이 다 되어 있다고 믿고는, 과거 3김(金) 같은 카리스마도 없으면서, 전 구성원을 이끌고 갈 큰 가치도 없으면서, 신뢰조차 못 받으면서, 혼자서만 자기 방식대로 하려고 했기 때문이죠. 그게 먹혀들 리가 없었던 거죠."
―누구를 염두에 두고 말합니까? 김무성 전 대표입니까, 이한구 전 공관위원장입니까?
"공천 파동은 모두의 책임입니다. 공관위원장과 당대표가 그런 행태를 보일 때 방치하고 굴러가도록 한 당 구성원들의 책임이지요. 방관하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까지 몰려서도 제동을 못 걸었고, 그 순간에도 아무런 리더십을 못 보였어요." 뒤이은 그의 말에서 표적(標的)이 분명해졌다.
"지금 정당은 가치도 리더십도 없어요. JC(청년회의소)만도 못합니다. 기껏 선거만을 위해 있는데, 그 선거 대비도 못 하지 않습니까. 선거가 예측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정치 일정에 정해진 것인데 이렇게 개판을 만들어 놓았어요. 이런 정치 지도자가 국가 어젠다는 어떻게 끌고 가겠습니까. 이런 감이 안 되는 인간을 '대선 주자' 반열에 올려 여론조사해주고, 언론에서는 날마다 등장시킵니다."
―이번 총선은 '박근혜의 선거'였고, 참패에는 박 대통령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주장도 있는데?
"모두의 책임입니다."
―모두의 책임이라면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선거 참패하면 몇 명을 마녀사냥하고 한 달쯤 지나 다 잊어버립니다. 지금껏 늘 그래왔습니다. 그러니 국민이 선거 심판을 해도 정치가 바뀌지 않습니다. 선거 참패로 당사자들은 죽었는데 '누구 탓 누구 탓' 하며 부관참시해 뭐합니까. 우리 정당과 국회의 근본 문제를 치료해야 합니다."
―근본 문제라면?
"당 구성원들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걸 바로잡아야 합니다. 당 최고 의결 기구인 최고위원회를 열면 매스컴에 보여주기식 발언만 하지, 국가적 정책을 위해 진지하게 회의를 한 적이 없습니다. 비공개회의로 들어가면 환담·잡담만 합니다. 이게 1년에 6백억~7백억원씩 세금 지원받는 우리 정당의 모습입니다. 이번에 난리를 쳐도 좀 지나면 원상으로 돌아갑니다. 저 권력, 저 오만을 어떻게 이겨냅니까. 백약이 무효입니다. 국회 실상을 까발려야 하고, 독버섯을 햇빛에 드러내야 합니다."
―어떤 국회 실상을 말합니까?
"국민은 국회의 실상에 대해 10%도 알지 못합니다. 가령 국회에서 예산 386조원 심의가 이뤄지는 과정이 제대로 보도된 적이 없습니다. 예산 집행 결과에 대한 평가도 거의 형식입니다. 있는 그대로 실상을 다 까발리면 국회는 안 바뀔 수가 없을 겁니다. 국민이 국회의 부조리를 깨야 합니다." ―새누리당 대표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비쳤지요? "제가 세상을 바꿀 재목은 못 되지만 정치만은 꼭 바꿀 생각입니다. 이 뜻이 꺾이면 기꺼이 정치판을 떠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새누리당의 대표성이 있다고 봅니까?
"굉장히 있다고 봅니다. 저를 간단히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23년간 호남에서 다섯 번 출마했습니다. 여기서 단련된 것은, 땅 짚고 헤엄치기와는 다릅니다. 저는 새누리당 안의 정서도 알고, 새누리당과 떨어진 곳의 민심도 체험했습니다. 저처럼 예외적인 인물이 역사를 만드는 겁니다."
―선거가 끝난 뒤 박 대통령과 통화했습니까?
"그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1984년 민정당 당료(黨僚)로 들어갔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였다. 식사 자리에서 그가 "호남을 버리면 안 된다"고 열변을 토하자 "어쩜 말씀을 그렇게 잘하세요"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그는 당대표의 수석 부대변인을 맡았다. 그 뒤로 지난 대선 때 박근혜 캠프 공보단장, 집권 뒤에는 청와대 정무수석·홍보수석에 발탁됐다.
―본인이 '박(朴)의 남자'로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도자의 성공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는 게 옳지, 냉소하고 팔짱 끼는 게 옳습니까. 그걸 '누구의 남자'라는 말로 만들면…."
―나쁜 뜻만 아니라, 박 대통령의 신임과 총애를 받는다는 수사(修辭)이겠지요.
"그렇다면 전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분의 정치 철학과 일치했어요."
―어떤 정치 철학을?
"사심 없이 오로지 국가와 국민에 대한 생각·열정만 있어요. 그것에 끌렸어요. 저 역시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그런 박 대통령의 단점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글쎄. 제가 말하기에는…."
―단점이 없던가요?
"왜 없겠습니까.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들과 많이 접촉했어요. 대통령이 된 뒤로 제약이 있었지만, 국민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직접 대화하고 설득했으면 합니다."
―밀실 인사 등 폐쇄적 의사 결정과 소통 부재에 대한 비판이 많았는데, 청와대에서 근무할 때 이를 간언했습니까? 대통령의 뜻과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참모의 도리라고 생각했습니까?
"그 내부 의사 결정 과정을 모르면서 '혼자 결정했네. 주변 말을 안 듣네'라고 섣불리 말합니다. 모든 결정에는 과정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를 공개할 순 없는 겁니다. 보기에 따라 '밀실(密室)'일지 모르나, 어떤 대통령이 '공개(公開) 인사'를 합니까. 공개할 경우 발탁되지 않은 사람에 대해 어떻게 책임지고, 인사 로비를 어떻게 감당할 겁니까. 언론인 중에는 자기 기준으로 '불통(不通)'이라고 비판하지만, 그렇게 보지 않는 견해도 있는 겁니다. 누가 대통령이 돼도 모든 사람을 100%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돼도 이런 인사와 국정 운영을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인가요?
"이번 총선에서 국민이 보여준 선택의 의미를 파악하겠지요. 아마 국민이 원하는 쪽으로 다가가고 소통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대통령의 스타일이 바뀔까요?
"스타일은 자신의 시각(視角)과 같은 겁니다. 그게 원칙과 정도를 벗어나면 고쳐야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 관점에서는 그분의 원칙과 정도를 최고 가치로 본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걸 바꾸라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 스타일로 여러 가지 불필요한 낭비와 갈등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국가 이익을 위해 본인 스타일을 바꿀 수 있지 않으냐고 요구하면 안 되는 겁니까? 대통령의 원칙이 늘 옳다고 주장하는 게 맞는가요?
"요구할 수 있습니다. 저도 역할을 할 수 있으면 그렇게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대통령과 의견이 맞지 않거나 갈등 관계가 된 적은 없었습니까?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바깥에서는 그렇게 안 보겠지만, 저는 대통령께 해야 될 말을 안 한 적이 없습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제 의견과 다른 최종 결정이 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건 보스의 권한입니다."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 혹은 미덕은 뭘까요?
"진정성과 의리입니다."
―배신(背信)에 대해서는?
"아주 나쁘게 봅니다. 솔직히 그런 인간을 저는 사람으로 안 봅니다. 자기를 믿어주고 정을 나눈 사람에게 등 돌린다는 것은 아주 독한 심사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사적인 인간관계가 아니라, 정치적 입장과 견해차 때문에 멀어지는 걸 '배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등 돌리고 총질을 해서는 안 됩니다. 보스를 설득해야지요. 그래도 안 되면, 나 같으면 판을 떠나든지 끝을 낼 겁니다." 처음엔 쉰 소리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나를 앞에 두고 웅변(雄辯)을 토해내고 있었다.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
□이회창 前 자유선진당 총재
2017.04 17 이회창 “박근혜 전 대통령 엎드려 사과했다면 보수 궤멸하진 않았을 것”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총재는 문재인, 안철수 후보의 ‘사드 말 바꾸기’를 비난할 때는 손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언성을 높였다. 사드처럼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입장을 뒤집는 후보들을 보수 유권자들이
준별해야 한다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 언론 노출을 꺼리던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총재가 입을 열었다. 19대 대통령 선거가 전례 없을 정도로 보수 진영에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 구도로 전개되자 보수의 재생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현재 보수를 대변하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와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의 지지율은 한 자릿수에 머물고 있다(14일 한국갤럽 조사 기준). 이변이 없는 한 보수 후보가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보수의 버팀목’인 이 전 총재는 13일 이럴수록 보수의 존재 이유를 숙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로서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나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중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될 것 같다. 누가 될 것 같은가.
“지금은 두 후보가 양자 대결 구도를 이루지만 사실 어떻게 될지 모른다. 두 후보 중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내가 말한다면 보수 진영은 낙담하고 실망에 빠질 것이다.”
死票심리, 보수의 패배주의
―여론조사를 보면 상당수 보수 유권자들까지 마음을 돌린 듯한데…
“사표(死票)를 만들어선 안 된다는 심리가 있다. 그러나 이는 보수 유권자들의 전형적인 패배주의다. 이념의 시대가 갔고, 좌우 이념은 낡은 진영 논리라고 말하지만 지금도 밑바닥에는 좌우 정치의 오랜 대립과 경쟁의 논리가 깔려 있다. 이념은 근본적인 문제다. 보수는 좀 멀리 내다봐야 한다. 정권을 빼앗겨도 단 5년간이다. 보수가 살아남아 건전한 견제 정당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확실한 보수적 가치와 신념을 가진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보수 후보에게 던지는 표는 사표가 아니라 생표(生票)다.”
―보수 유권자도 덜 나쁜 후보, 즉 차악(次惡)을 찍겠다는 심리도 있지 않나
“그런 심리는 보수가 생즉사(生則死), 즉 살려고 하다 결국 죽는 것이다. 심지어 보수 정당 안에서도 국민의당과의 연대를 말하고 있는데 정치인들조차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참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무슨 뜻인가.
“문 후보와 안 후보는 차이가 없다. 안 후보가 보수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국가 지도자는 정치적으로 어떤 이념을 품고 있고 어떻게 행동해 왔으며 기반은 무엇인가를 놓고 판단해야 한다.”
―안 후보는 ‘안보는 보수’라고 하지 않았나.
“처음엔 안철수의 새 정치를 아주 주의 깊게 보고 감명받은 때도 있었다. 하지만 새 정치는 무산되고 말았다. 현재만 놓고 봐도 안 후보의 국민의당은 그 기반이 박지원 대표를 비롯한 과거 민주당 세력이다. 이 세력은 ‘김대중 정신’을 이어받은, 쉽게 말하면 햇볕정책이라는 아주 잘못된 남북관계를 설정하고 그것을 금과옥조로 신봉하는 정당이다. 그렇다면 안 후보가 국민의당을 장악하고 여러 가지 대북관계를 바꿔나갈 수 있겠나?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본다.”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잣대는 뭔가.
“대북관계가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를 확연히 구별하는 제1의 기준이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가 기본 가치다. 그 기초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자유가 확고하게 있다. 북한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짓밟는 수령 독재체제다. 남북의 체제는 양립이 불가능하다. 다만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평화 공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대북정책에는 반드시 하나의 필요적 명제가 있다. 포용하고 공존하되 북한의 개방과 개혁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원은 하지만 북한의 개혁·개방과 연계하는 상호주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이를 무시하고 무조건적 지원을 해온 햇볕정책은 정말 폐기해야 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까지 공식적으로 북한에 건넨 돈만 8조 원이 넘는다. 이 돈으로 핵무기를 제조할 토대와 골격이 만들어졌고 지금 김정은의 ‘핵 장난’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햇볕정책을 신봉하는 세력이나 정당을 국민이 분명하게 알고 판단했으면 한다.”
―과거 대세론의 당사자로서 ‘문재인 대세론’을 어떻게 보나.
“나는 불안하게 봤다. 얼마 전까지 혼자 지지율이 높았지만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오니까 금방 내려앉았고 안철수 후보가 자강론을 내세워 밀고 나가니까 또 흔들렸다. 그래서 대세론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문 후보는 유력 후보다.
“문 후보가 사람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본 원칙이 아주 불안하다.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기각하면 다음은 혁명밖에 없다고 말했다. 혁명이라는 것은 현재의 지배구조와 사회구조, 정치구조를 완전히 뒤엎고 지배 엘리트층을 모두 바꾸는 것이다. 대선에 나오는 사람이 그렇게 말할 수 있나. 더구나 법을 배웠다는 사람이….”
文·安‘사드 말 바꾸기’ 변검 보는 듯
이 전 총재는 자칫 후보들에 대한 평가가 될 수 있고 폄훼가 될 수도 있다며 조심스러워했지만 일단 말문이 열리자 마음속에 담아뒀던 말을 남김없이 쏟아냈다. 특히 두 후보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등 안보 문제와 관련해 말을 바꾸는 것을 가리켜 “순식간에 얼굴 가면을 바꾸는 중국 전통극인 변검(變瞼)을 보는 것 같다”며 “이런 후보들을 어떻게 믿고 앞으로 5년간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운명을 맡기겠느냐”고 비판했다.
―보수 후보들의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
“나도 답답하다. 바른정당이 탄생한 경위나 서로 맞설 수밖에 없던 사정을 보면 자유한국당과 손잡는 것은 어렵다. 이제 와서 두 당이 합쳐봤자 지지율 상승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지지율이 오르려면 아주 큰 지각변동을 가져오는 극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두 후보가 끝장토론을 해보면 좋겠다. 서로 치열하게 보수의 위치와 가야 할 길, 신념, 이런 것을 놓고 속을 털어놓으면 단일화든 뭐든 화두가 나올 수 있지 않겠나.”
―보수진영이 지리멸렬해진 원인은 뭐라고 보나.
“박 전 대통령이 가장 큰 원인이고 책임이 있다. 나도 박 전 대통령 본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돈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최순실 일당을 끌어들여 국정을 수행하고 세금이 들어가는 사업을 농단하게 한 점이다. 국민을 화나게 하고 좌절시키고 실망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40% 안팎의 중도층이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보수를 더할 수 없는 위기에 빠지게 한 배경이다.”
―이 전 총재 본인이 2012년 대선 때 박 전 대통령을 돕지 않았나.
“지난 대선에서 박 전 대통령을 위해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 2002년 대선 때 박 전 대통령이 독감에 걸린 상태에서도 나를 위해 충청 지역을 맡아 유세를 도와주었다. 그걸 기억해 지원을 요청받았을 때 흔쾌히 도왔다. 다행히 당선됐는데 이후 국정을 수행하는 방식을 보고 실망했고 기대를 접었다.”
―박 전 대통령의 파면을 본 소회는….
“국민에게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 시켜 달라고 적극적으로 다닌 일이 부끄럽고 자괴심을 크게 느꼈다. 박 전 대통령의 실체를 몰랐던 탓이다. 국민께 드릴 말씀이 없고 죄송하다. 박 전 대통령은 국민 앞에 엎드려 사과했어야 했다. 옛 새누리당 지도부도 청와대 앞에 가서 멍석 깔고 직언을 했다면 보수가 지금처럼 궤멸 상태에 빠지진 않았을 것이다.”
박근혜 구속, 잘못된 관행 탓
―박 전 대통령을 구속한 데 대해서는….
“나는 구속에 반대했다. 자유선진당 총재일 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불구속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형사소송에서는 검찰과 피의자가 각기 당사자로 대등하게 다퉈야 한다는 원칙과 불구속의 원칙이 있다. 검찰은 피의자를 구속해 약자로 몰아넣으면 수사에 편리하고 자백을 받아내기 쉽다고 여긴다. 박 전 대통령의 죄는 사법 절차에서 가려지겠지만 수사 단계에서 꼭 구속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구속영장이 기각되면 검찰이 패배한 것이고 발부되면 승리했다고 보는 것도 아주 잘못된 관행이다. 많은 국민이 구속을 못 시키면 검찰이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것도 문제다.”
―이 전 총재는 2002년 대선 때 이른바 ‘3대 의혹 사건’으로 불리는 조작된 검증의 최대 피해자였다. 이번 ‘초(秒)치기 대선’에서 검증이 제대로 될까.
“선거를 몇 차례 치러보니까 네거티브 캠페인은 불가피하다. 네거티브는 예수가 입후보해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말한 대로 2002년 대선 때 3대 의혹이다, 5대 의혹이다 하는 걸 겪으면서 이건 네거티브가 아니라 범죄라는 생각을 했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조작하는 것은 제재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 고발을 해도 사법처리 결과는 선거가 끝난 뒤에나 나온다. 선거 기간 중에 고발해 봐야 소용이 없다. 풀어야 할 숙제다.”
이 전 총재를 괴롭힌 3대 의혹은 △아들 병역비리 은폐 △기양건설 로비자금 수수 △최규선 자금 수수 등이었으나 선거가 끝난 뒤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이 위중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직접 제재할 것처럼 나오는 것 자체는 아주 긍정적으로 본다. 실제로 선제타격을 하고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한미 동맹 간에는 전쟁의 불똥이 튀지 않도록 막을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도 동북아시아에서 강자 노릇을 할 것이 아니라 세계 정세를 주도하는 국가라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북한을 완충지대로 삼아 놓아두지 말고 양질의 국가로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북한은 절대 핵무기를 놓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북핵의 비확산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협상을 하려고 할 때 한국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새 대통령이 가장 시급하게 할 일이 있다면….
“국가와 정부를 움직이는 소프트웨어가 아주 망가졌다. 새 대통령은 국정의 기본 시스템을 빨리 세워야 한다. 지금 한국 대통령은 국제관계에서 완전한 부재 상태다. 새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외국 정상들을 만나면서 대외관계를 복구해야 한다.”◎
이진 논설위원 lee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