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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 이야기1/ 조선일보/ 조선일보 지령 3만호 -100년 전 모던 뉘우스 〈1〉1930년대 이승만은 이미 원로...당시의 노장파·소장파는 누구? - <10> 한국 영화의 상징, 단성사와 우미관

상림은내고향 2021. 12. 13. 20:04

■언론사 이야기1

★조선일보

2017.06.24  조선일보 지령 3만호

4·19 전날 고려대생 피습, 육영수 여사 피격, 4000억 비자금… 역사의 현장마다 특종이 빛났다

[조선일보 지령 3만호]  손기정 금메달 국제전화 인터뷰 기자 10명 월급 맞먹은 첨단취재

김구·김일성 협상 기사 들고 평양서 목숨 걸고 38선 넘어

한밤에 걸려온 의문의 제보전화 조폭들 '서진 룸살롱 살인' 특종

88올림픽 세계新 금메달 벤 존슨 약물 복용 잡아내 세계가 충격

 

지령 1호~20000호까지 신문의 꽃은 특종이다. 기사 한 건이 세상을 뒤흔들고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는다. 지령 3만호를 발행하기까지 97년 성상(星霜)을 헤쳐 온 조선일보에는 기나긴 역사만큼이나 빛나는 특종도 많았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생 피습 사건:1960년 4월 19일 자에 폭력배들이 고려대생을 습격한 사진을 정범태 기자가 

촬영, 특종 보도해 4·19의 기폭제 중 하나가 됐다.

조선일보는 1923년 3월 26일 2면에 '박열 사건 재판'을 보도했다.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裕仁) 암살을 계획했던 독립운동가 박열이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모습을 현장 취재한 것이다. 당시 일본 신문들이 '박열이 재판장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왜곡 보도했던 것과는 달리 조선일보 특파원 이석은 "사형선고를 받은 박열이 판결을 듣고서 돌연 만세를 고창(高唱)했다"고 보도했다. 2017년 6월 말 개봉을 앞둔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는 '조선일보만 만세 불렀다고 제대로 썼다'는 등장인물의 대사가 등장한다. 조선일보는 1930년까지 박열 관련 소식을 70여 차례 보도했다.

 

1936년 8월 11일 조선일보 2면은 '손기정 국제전화 인터뷰'를 실었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다음 날인 1936년 8월 10일, 김동진 동경지국장이 국제전화로 손 선수와 단독 인터뷰해 대서특필한 것이다. '세계 제패한 영웅의 가슴도/ 뜨거운 흥분 식자 쓸쓸한 애수(哀愁)/ 마침내 우승은 햇으나 웬일인지 울고만 싶소'란 제목으로 우승의 감격과 겨레의 비애를 담았다. 기사에는 '왜 손기정이 울고 싶었는지' 그 이유를 쓰지 않았으나 그것이 나라 잃은 청년의 슬픔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조선 독자는 거의 없었다.

 

기사는 수화기 너머 손 선수가 "네! 손기정이오"라고 한마디하고는 한참 그냥 흐느껴 울었다고 전해 독자의 심금을 울렸다. 이보다 앞서 경기 전날인 8일 이뤄졌던 전화 인터뷰에서 손 선수는 "조선서 보내주신 고추장과 마늘장선(장아찌)을 아주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김치만 있더라면 아주 제법이겠는데요"라며 웃었고, 동경지국장은 "도에 넘치게 긴장하지 말라"는 충고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두 차례 국제전화료로 '조선일보 기자 10명 월급이 한꺼번에 날아갔다'는 말이 있을 만큼 당시로서는 첨단 취재였다.

 

1937년 4월 13일 호외로 보도한 '백백교 사건'은 백백교가 신도 350여 명을 살해한 전대미문의 사건을 가장 먼저 알린 특종이었다. 경성 동대문경찰서는 이해 2월 17일부터 3월 말에 걸쳐 백백교 간부 남자 150명과 여자 50명을 검거했다. 교주 전용해는 경찰의 추격을 받으며 쫓기다가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에서 4월 7일 시체로 발견됐다. 조선일보는 보도관제가 풀린 13일 단독 입수한 교주의 사진과 그동안 자세히 취재한 내용을 담아 호외를 발행해 타지를 압도했다. 이후 지면에선 사이비 종교의 폐해를 경고하고, 조선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결국 무지몽매에서 오는 것이므로 문맹 퇴치와 교육 확대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광복 후인 1948년 4월 29일 1면에는 '김구·김일성 남북협상' 특종 보도가 실렸다. 남북협상 당시 김구 주석의 북행에는 조선일보 이동수·최성복 기자가 "알아서 재량껏 취재해 보라"는 사회부장의 지시를 받고 특파됐다. 이들은 원고지 장수까지 기록하는 소련군의 철저한 보안 검색을 받은 뒤 입북했고, 황해도 신평의 한 여관에서 사흘 동안 조사를 받은 뒤에야 평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북협상 본회의 일정이 끝난 뒤 북한 측이 남한 기자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산업 시찰 등 단체 행동을 계속 시켜 본사에 기사를 보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참인 이동수가 최성복이 쓴 기사와 자료를 들고 먼저 남행을 결심했다. 그는 38선 이북 강원도 통천이 고향이어서 몇 번 남북 경계선을 넘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동수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 평양을 떠난 지 하루 만에 신문사에 나타났다. 조선일보는 이미 만들어 놓은 29일자 지면에서 1면 광고와 사설까지 모두 들어내고 완벽한 특종으로 지면을 다시 제작했다.

 

▲1967 1 19일 해군 당포호 격침 해군 경비함 당포호가 동해안에서 북한 의 포격으로 침몰하는 사진을 윤병해 기자가 단독 입수해 보도한 1967 1 21일 자 사진.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북한 지령을 받은 재일 교포 문세광이 서울 국립극장에서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현장을 임희순 기자가 단독 촬영, 1974 8 21일 자에 공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에워싼 채 권총을 뽑아 든 경호원들과 총을 맞고 쓰러진 육 여사 모습이 보인다. 선우휘 주필이 위기의 순간 고관들의 행태를 비판한 시론 ‘단상(壇上)에 인영(人影·사람 그림자)이 불견(不見·보이지 않음)’이 사진과 함께 실렸다.

'공무원 득표 공작 분담'(1960년 1월 7일 석간 1면) 기사는 이승만 정부 말기 3·15 부정선거의 기미를 두 달 앞서 알아차린 특종 보도였다.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이 공무원들에게 일찌감치 '득표 공작을 분담하라'고 지시한 사실을 알린 것으로, 일반 공무원이 제1선, 경찰은 3선을 담당하고 방별(坊別)로 순회 좌담회를 열도록 지시했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조선일보는 3월 17일 자 논설위원 최석채가 쓴 사설 '호헌(護憲) 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로 국민의 궐기를 촉구했고, 4월 19일 아침에 '고려대생 습격 사건'의 처참한 현장을 사진으로 보도해 4·19의 기폭제를 이루게 된다.

 

'잔비(殘匪), 일가(一家) 4명을 참살(慘殺)'이란 제목으로 게재된 1968년 12월 11일 3면의 '이승복 사건' 역시 조선일보 단독 기사였다. 이해 12월 9일 북한 무장공비가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계방산 기슭 민가에서 일가족 4명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사회부 기자 강인원은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가 공비들에게 입이 찢겨 살해당한 이승복 소년의 기사를 특종 보도했다. 이 사건은 국민들에게 대공 경각심을 일깨웠고, 강원도 평창에 이승복 기념관이 세워졌으며 교과서에도 실렸다. 2000년대 들어 일각에서 이 보도가 오보라는 억지 주장이 제기됐으나 2006년과 2009년 대법원은 '조선일보 보도는 사실'이라고 확정 판결했다.

 

1970년 11월 22일 주간조선에 실린 '전태일 수기'는 분신자살한 노동자 전태일의 일기장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이상현이 영안실에서 단독 입수해 게재한 특종이었다. "대통령 각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전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18세 여성입니다. 하루 15시간의 작업은 너무 과중합니다"라고 적힌 일기장 내용은 논리 정연한 문장으로 노동 현장의 상황을 고발하고 있었다. 당초 사회면에 단신으로 실렸던 사건사고를 한국 노동운동의 불씨가 되도록 했던 역사적인 특종이었다.

 

'고려 금속활자 세계 최초 공인'(1972년 5월 28일 1면)은 조선일보가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쓰게 한 대표적인 기사였다. 유네스코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개최한 '책의 역사' 전시회에서 고려 시대인 1377년에 간행된 서적 '직지심경(直指心經·직지심체요절)'을 공개 전시함으로써 고려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75년 앞선 세계 최초 활자로 공인됐다는 내용이었다. 소장자인 파리 국립도서관이 1911년 파리의 두루오 경매장에서 구입했다는 것과 왜 뒤늦게 이 책이 세계 최고 활자로 공인받게 됐는지 상세히 보도했다.

 

1976년 1월 9일 1면에는 '주은래 사망' 기사가 크게 실렸다. 주은래(周恩來·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전날 암으로 사망한 사실을 국내 일간지 중 처음으로 보도한 것이다. 9일 오전 4시 4분 일본의 중국 통신이 신화사 통신을 인용해 타전한 것을 포착하고, 이미 시내판 신문을 인쇄하고 있던 시각에 윤전기를 세운 결과였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국내 매체 중에서 유일하게 이뤄낸 특종의 충격은 무척 컸고 "10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대특종"이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1976년 8월 22일 1면 '김일성의 사과 메시지'도 의미가 큰 특종이었다. 북한군이 미군 경비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한 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직후인 8월 21일 북한 측 수석대표와 유엔 측 수석대표 사이의 이례적인 단독 회담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이 미국 측에 유감을 표시하는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내용을 단독 보도한 것이다. 세계 4대 통신사가 모두 조선일보 기사를 인용함으로써 세계적인 특종이 됐고, 다음 날 미국 정부가 "김일성 명의의 사과문이 유엔군 총사령관 스틸웰에게 전달됐다"고 공식 확인했다.

 

 

○20001호~30000호까지

1986년 8월 15일 새벽 1시, 조선일보 사회부로 독자 전화가 걸려왔다. "사당동 정형외과에 흉기로 난도질당한 시체 4구가 널려 있다는데 구체적인 정황을 알 수 있겠습니까?" 황당한 내용의 전화에 여러 차례 속아본 사회부 기자는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점차 '제보자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야근자를 삐삐로 호출해 현장 확인을 시킨 뒤 안에선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리며 취재를 시작했다.

 

"병원에서 신고가 들어와 조사하러 나갔다"는 경찰 측 확인을 듣고 기사 초고를 완성한 1시 45분, 병원에 도착한 기자에게 걸려온 전화 속 목소리는 화급했다. "선배,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정말 지옥 같은 현장입니다!" 이날 사회면 톱기사인 '서진 룸살롱 살인 사건' 특종 보도가 나오는 순간이었다. '한밤 네 청년 살해 병원 유기' '검은색 승용차로 시신 운반'이란 제목이 달린 이 기사는 조직폭력배들이 유흥가에서 유혈 난투극을 벌인 뒤 4명을 살해해 병원에 시체를 버리고 도주한 사건의 1보였다. 이후 조폭 세계를 심층 해부하는 기사가 이어졌다.

 

1987년에 접어들면서 직선제 개헌으로, 대통령을 국민 손으로 직접 뽑자는 민주화 열망이 커졌다. 1월 14일 경찰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 박종철이 사망한 사건은 이후 '87년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20일 아침 조선일보는 그가 물고문을 당하던 중 질식해 사망했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고문은 없어져야 한다'는 사설을 실었다. 1월 24일 11면 '박종철 고문 경관 없이 현장 검증' 기사는 그 전날 사건 현장인 서울 용산구 갈월동 치안본부 대공수사 조사실에서 실시한 현장 검증 상황을 단독 보도했다. 뜻밖에도 정작 가해자인 두 고문 경관이 나타나지 않은 채 검찰과 경찰 관계자만 참석해 40분 동안 비공개로 '시설물 점검'만 했다는 내용이었다. 당국이 사건의 은폐·축소에만 급급했다는 것을 시사한 이 기사는 독자들의 공분을 샀고, 철저한 진상 조사 요구로 이어지게 됐다.

 

올림픽의 해인 1988년에는 지구촌 이목을 조선일보로 쏠리게 한 '세계적 특종'이 탄생했다. 1988년 9월 27일 1면에 실린 '벤 존슨 약물 복용' 기사였다. 사흘 전인 24일 열린 올림픽 육상 100m 경기에서 캐나다 벤 존슨이 9초79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서울올림픽 최대 관심사였던 벤 존슨과 칼 루이스의 대결에서 벤 존슨이 승리하며 세계인을 열광시킨 것이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특종 기사는 벤 존슨이 약물 복용으로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조사를 받았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보도 전날인 26일 이 사실을 제보받은 조선일보는 확인 취재를 통해 IOC가 이날 밤 10시에 벤 존슨과 팀닥터, 캐나다 IOC 위원 등을 소환하는 의무분과위원회 청문회를 연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특종을 유지하기 위해 보안에 신중을 기했고, 1면 톱기사와 5면 해설 기사를 준비하면서도 27일 자 가판에는 이 기사를 싣지 않았다. 그날 밤엔 신라호텔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관계자들의 현장 사진까지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 날 아침 신문이 발행되자 세계 언론사들은 조선일보를 인용해 황급히 뉴스를 송고하면서 조선일보의 취재 경위를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미국 UPI통신과 일본 마이니치신문 등은 조선일보가 단독 촬영한 스케치 사진을 얻을 수 없겠느냐는 전화를 걸어 왔다. 벤 존슨은 금메달을 박탈당하고 이후 2년간 출전 금지 조치를 받았다.

 

1990년 1월 18일 1면에선 '민정 민주 공화 3당 합당' 기사를 단독 보도했다. 6공화국 초, 당시 관심이 집중되고 있던 정계 개편 구도가 정치 연합이나 정당 통합 방식이 아니라 '개헌 가능한 3분의 2 의석을 확보할 수 있는 3당 통합 방식이 될 것'임을 최초로 적시한 특종 기사였다. 1992년 내각제 개헌을 추진할 것이라는 내용도 포함,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 간의 막후 교섭 내용까지 정확히 취재한 기사였다. 3당 합당은 일요일인 1월 21일 발표됐고, 조선일보는 면밀한 준비 끝에 이 내용을 담은 호외를 22일 자로 발행했다.

 

▲1993 8 18일 고구려 무용총 벽화 한국언론 첫 촬영:중국 지안(集安)에 있는 무용총 등 고구려 고분 8기 내부 벽화를 조선일보 특별취재반의 김주호 기자가 한국 언론 최초로 촬영해 공개했다.

 

▲2016년 11월 6일 웃으며 검찰 조사 받는 우병우 前 수석: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팔짱을 낀 채 검찰 조사를 

받는 모습을 고운호 기자가 330m 떨어진 건물 옥상에서 망원렌즈로 촬영해 단독 보도했다.

1992년 6월 25일 사회면에는 '예비역 합참 간부 50억대 토지 사기'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정보사 토지 사기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특종이었다. 이 기사는 예비역 대령인 합참 고위 군무원이 '서초동 정보사 부지 불하를 알선해 주겠다'며 민간인들에게 50여 억원을 받아 챙긴 뒤 군 수사기관의 조사가 시작되자 홍콩으로 도주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7월 5일 '정보사 부지 사기 관련, 제일생명 230억 사취당해' 등, 이 사건 후속 보도에서 조선일보는 주도권을 잡고 1면과 사회면 머리기사로 연속 특종을 터뜨렸다.

 

김영삼 정부 정국의 흐름을 뒤바꿔놓은 특종 '전직 대통령 비자금' 보도는 1995년 8월 3일 1면에 실렸다. 하루 전 서석재 총무처 장관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전직 대통령 중 한 사람이 수천억원의 가명 계좌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힌 내용을 단독 보도한 것이다. 보도 이후 야권은 진상 조사와 국정 조사권을 요구했고, 서석재 장관은 4일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정부가 '4000억원 계좌 진상 조사를 하겠다'는 내용이 6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되면서 이 사건은 진정되는 듯했지만, 2개월 뒤 '서석재 발언'의 실체는 본격 폭로됐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4000억원이며 40개 차명계좌에 예치돼 있다는 내용이었다. 검찰은 6공 비자금 전면 수사에 착수했고, 노 전 대통령은 검찰 조사를 받은 뒤 뇌물 수수와 정치 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한국 전직 대통령의 역사상 첫 구속이었다.

 

1996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으로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들떠 있던 한국은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구제 금융 사태로 급격한 추락을 맞았다. 이 사태 와중에서 조선일보는 1997년 12월 8일 1면에 'IMF 한국 경제 극비 보고서' 특종 기사를 실었다. IMF 협상단이 이사들에게만 제출한 이 보고서는 "10월 말에 이미 외환시장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지만 한국 정부는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외환 보유액과 금융부실 상태를 잘못 파악해 효과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한국이 금융 개혁과 재벌 개혁 등 IMF 경제 프로그램을 제대로 실행하면, 구제금융 전액을 모두 인출하기 전에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위기 극복을 다짐하는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는 기사였다.

 

김대중 정부에서 각종 '게이트'가 터져 나오던 시기인 2002년 4월 10일 1면에는 '김홍걸씨에 9억원 줬다' 특종 보도가 실렸다. 이번엔 대통령의 아들이 연루됐다는 뉴스였다. 정부 초기 인수위에서 일했던 최규선씨를 단독으로 인터뷰해 "김 대통령의 3남 김홍걸씨에게 벤처 투자 자금 명목으로 5억원, 주택·차량 구입비 4억원 등 모두 9억원을 줬다"는 진술을 받았다. 결국 김홍걸씨는 '최규선 게이트'와 관련해 구속 수감됐다.

 

2005년 7월 21일 1면은 '안기부 불법 도청' 특종이 장식했다. 안기부가 YS 정부 때 정계·재계·언론계 인사들의 대화를 불법 도청하는 비밀 조직 '미림팀'을 운영했다는 내용을 단독 보도한 것이다. 정보기관의 전화 도·감청이 논란이 된 적은 있었으나 술집이나 식당에 출장 나가 이뤄지는 '현장 도청'의 실체가 드러난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기사는 미림팀이 안기부 내 핵심 수뇌부 한두 명에게만 보고하는 특수도정팀으로 요정이나 한정식집, 룸살롱 등 현장에서 직접 도청기를 꽂고 도청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천안함 폭침 사건이 일어난 뒤인 2010년 4월 15일 1면에는 '합참의장, 49분 지나 첫 보고 받았다' 특종 기사를 냈다. 천안함이 폭침당할 당시 군의 보고·지휘체계에 큰 결함이 있었다는 이 기사는 나라의 안보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경보음과도 같았다.

유석재 기자

 

■ 6·25 전쟁통에도 신문 발행… 3만번의 '숨 막히는 전투'

대한민국 탄생과 성장의 역사, 그 선두에 조선일보가 있었다

최고의 프리미엄 미디어 향한 다음 3만호로의 여정을 기대

 

2017년 한국 사회는 어지러운 소통의 세상이다. 어지럽다 못해 현기증이 날 정도다. 그물망 같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네트워크 속에서 사람들은 쉼 없이 정보와 의견을 교환한다. 의견이 의견을 올라타고 또 다른 의견이 이를 덮는다. 검증 안 된 주장, 허위 사실, 심지어 괴담들이 연결에 연결을 거쳐 순식간에 확산되고 공론이 된다. 이처럼 미친 듯 돌아가는 속도전의 커뮤니케이션 시대에 신문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신문은 이 혼란스러운 시대의 '희망'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은 그의 저서 '홀로 볼링하기(Bowling Alone)'에서 흥미로운 자료를 제시한다. 미국 사회에서 지난 100년간 신문 구독률, 시민성, 민주주의가 놀라운 일치성을 보이며 함께 하락해 왔다는 것이다. 그의 연구는 간과할 수 없는 함의를 담고 있다. "신문 없이는 시민도, 민주주의도 없다."

 

조선일보 지령 3만호의 의미가 여기 있다. 1920년 3월 5일 창간 이후, 1955년 3월 23일 1만호, 1986년 4월 4일 2만호, 그리고 그로부터 31년이 흐른 2017년 6월 24일 3만호에 이르렀다. 6·25전쟁 때도 꾸준히 발행을 했다. 타지보다 먼저 지령 3만호를 맞게 된 이유이다.

 

긴 세월이었다. 그 세월의 두께와 깊이만큼 그 안엔 수많은 명암이 교차했다. 격동하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 너와 나, 우리 사회, 국가가 탄생하고 성장한 기간이었다. 민주주의와 시민성이 힘겹게 자라난 기간이었다. 그 선두에 조선일보가 있었다.

 

▲흥남철수 피란선서 합숙하며 戰時版 제작 - 1·4 후퇴 후 부산에서 발행된 제2차 전시판 속간호(1951년 2월 1일 자). 40여 명의 조선일보 사원들은 흥남 철수 당시 피란민을 태우고 온 선박에 합숙하면서 신문을 만들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3만번의 "숨 막히는 전투"였다. 기억이 생생한 지난 몇 년을 돌아보아도, 무능하다 못해 무참한 정치권력, 무모한 급진주의, 선동에 휘둘리는 군중심리에 맞서 민주주의와 국가의 안위를 수호하고 시민적 이성을 일깨우기 위한 외로운 싸움이 이어졌다.

 

그렇게 다져온 3만호였다. 그리고 그렇게 한 걸음씩 헤쳐 가야 할 또 다른 3만호일 것이다. 미디어 환경만을 보더라도 미래는 불투명하고 위험으로 가득하다. 미디어 폭발로 신문이 존립의 위기를 맞게 되리란 예측은 과장이 섞였을망정 신중히 대비되어야 한다.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디지털 미디어와 애플리케이션, 탈권위주의, 댓글과 공유 등 수평적 소통에 익숙한 젊은 세대를 끌어안아야 한다. 언론계의 치부와도 같은 정치적 진영 논리, 상업적 선정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믿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는 군중 속에 범람하는 가짜뉴스에 맞서 엄정한 사실 검증(fact checking)과 균형 잡힌 관점의 전달이라는 언론 본연의 역할을 선도해야 한다. 무엇보다 권력 감시와 비판의 선두에 서야 한다. 이를 위해 누구보다 엄격한 윤리적 좌표를 정립하고 지켜가야 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프리미엄 미디어로 나아가라." 그것이 지난 3만호의 역사가 오늘의 조선일보에 전하는 준엄한 명령이다. 일체의 권력에 굴함이 없이 이 소중한 국가, 시민, 민주주의만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라. 지금껏 그래 왔듯, 한 걸음씩 뚜벅뚜벅 나아가라.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31년 전 이규태 기자의 부탁

1986년 4월 4일 2만호 이규태코너에 '3만호 시대' 예측 

마지막 문장은 "3만호 되는 날, 나의 예측 평가해 달라" 

서울~뉴욕 45분에 돌파(×) 고독이 가공할 현실문제(○)

 

▶기자='아날로그 시대의 검색창', 이규태(1933~2006) 기자를 저는 이렇게 부릅니다. 백과사전적 지식을 원고지 6.5장에 담은 '이규태코너'는 '잡학(雜學)의 미학' 그 자체였죠. '디테일 정보'의 비결은 뭘까요?

 

이규태=많이 읽기, 그러나 그냥 읽지 않기가 핵심이라오. 새벽 4시에 일어나 책을 집어드는 게 평생 습관이었소. 술값 밥값 아껴 산 1만여 권 책과 저널에서 얻은 정보를 10만여 개 색인으로 분류했지. 그 보물 덕에 1983년부터 그 칼럼을 6702회나 쓸 수 있었소.

 

▶기자=2006년 작고한 선배를 호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1986년 4월 4일, 조선일보 2만호 지면에 실린 '이규태코너' 제목이 '30000호 時代'였습니다. 미래를 예측한 칼럼인데, 마지막 문장이 이렇습니다. '3만호 시대가 되는 날, 누군가 이 예측이 얼마나 들어맞았나 맞혀 보았으면 싶다'. 이미 31년 전, 선배께서 후배를 소환해 놓은 겁니다.

 

이규태=그런가. 그래 어찌 읽었나. 기자=인용 목록이 짱짱했습니다. 미래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것은 근대 지식인들의 지적(知的) 사치 중 하나였지요.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쓴 미래 소설 '뉴 아틀란티스'(1627), 풍자적 미래소설 '에레혼'(1872), '에레혼(Ererwhon)'은 '노웨어(Nowhere)'를 거꾸로 조합해 만든 글자죠. 미국 SF의 효시 대접을 받는 1888년작 '돌아본 2000년(Looking Backward: 2000∼1887)' 등 보석 같은 이름들입니다. 행동 심리학자 스키너의 '심리 유토피아'를 인용했다고도 썼는데, 아무래도 1948년 그가 쓴 전설적 SF '월든 투'가 아닌가 싶습니다. 1986년 출간된 미 정부보고서 '2000년의 지구'도 목록에 있더군요. 이규태=내용 중 눈에 띈 것은?

 

▶기자=〈가사=全自動淸掃-全自動料理 같은 자동화가 진행되고 웬만한 가사는 로보트가 대행해 줄 것이다. 男女地位=여성의 지위가 급상승할 것이나 남자의 지위를 웃돌지는 못할 것이다.

섹스=남자는 성욕 감퇴가, 여자는 욕구 불만으로 사회문제화될 것이다.

家族=夫婦離合이 자유로워 씨 다르고 배다른 가족 구성이 될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대체적 경향을 정확히 짚어냈습니다.

 

이규태='항해술을 발명한 사람은 난파(難破)도 함께 발명한 것'이라지. 예측이란 틀리는 법, 뭐가 틀렸는지 어서 말해보게.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기자=〈우주스테이션에서 만든 약품과 식품을 동네 약국에서 사먹을 수 있게 되고, 뉴욕과 서울은 45분 만에 날 수 있는 초음속 여객기가 날 것이며, 심장병과 각종 암은 정복될 것이라 했다. 또 컴퓨터 발달로 언어 장벽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썼습니다만 기술 발전은 예측보다 더딥니다.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아직 약품·식품을 생산하지는 못합니다. 시속 2000km 이상의 콩코드 여객기는 소닉붐(음속폭음)과 사고로 2003년 중단됐고, 지난해에야 미국이 초음속여객기 프로젝트 'X플레인(Plane)'을 발표했습니다. 구글 번역기는 아직 오류가 많고, 우리나라에서만 각종 암으로 7만6855명, 심장 질환으로 3만3542명(2015년 기준)이 사망합니다. 〈食=감자와 토마토의 트기 식품인 포마토 같은 바이오식품이 보편화된다〉고 썼습니다. 현재 농업 기술로는 충분한 얘기지만, 대중이 그런 식품을 반기지 않습니다. 〈노동시간이 하루에 4~6시간에, 주 30시간을 넘지 않을 것〉이란 대목은 아직은 좀 먼 얘기입니다. 몇 곳 오류에도 불구, 글을 읽는 내내 흥미로웠습니다.

 

이규태=틀렸다면서 무슨 소리?

 

▶기자='미래상'에 관한 탁견 때문이지요. 〈고독=가공할 현실문제로 대두될 것이며 고독을 망각시키는 망각제가 요즘 소화제 이상으로 팔릴 것이다. 자살=물론 급증한다. 중세 유럽처럼 자살을 범죄시하여 형법으로 규제할 것이다〉 예측이 과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30년 전 인구 과밀의 한국에서 고독사와 OECD 최고의 자살률을 상상했다는 게 신선합니다.

 

이규태=19세기 쥘 베른 소설에 달 로켓이나 잠수함이, 에드워드 벨라미 소설에 신용카드 개념이 나온다오. 그들이 '족집게' 예측을 한 게 아니라, 그들의 '미래상(未來像)'을 후대가 구현한 것이지. 홀로그램을 발명한 노벨상 수상자 데니스 가버가 말했소.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들 수는 있다." 인류는 이 순간에도 미래를 만들고 있지. 그러나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다만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라는 제임스 깁슨(미국 심리학자) 말처럼 체감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기자란, 여기 서서 저기 오는 미래를 알려주는 사람 아닐까 하네. 내 예측이 좀 맞았다면, 그 기능에 충실했기 때문일 것이오. 가만있어보자, '4만호 시대', '5만호 시대' 자료도 내가 어디 색인을 만들어 뒀을 텐데….

박은주·디지털뉴스본부 부본부장

 

■ 오피니언 리더들 "조선일보 가장 즐겨 보고, 유용한, 한국 대표신문"

[조선일보 지령 3만호] 

재계·학계·법조계 등 530명 대상… 칸타퍼블릭 '신문 영향력 조사'

- 조선일보 모든 분야 압도적 1위

"집에서 구독" 22% "직장" 34%

"분석 가장 깊이 있다" 27%, "사설·칼럼 가장 좋아" 24%

 

재계, 학계, 법조인, 정·관계 등 각계각층의 오피니언 리더 다수가 '한국의 대표 신문'으로 평가한 신문은 조선일보였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칸타퍼블릭이 오피니언 리더 530명을 대상으로 '신문 영향력 평가 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선일보는 가장 독자가 많은 신문일 뿐 아니라 유용성과 분석력, 사설·칼럼 선호도 등 각 부문에서 선두에 올랐다.

 

◇오피니언 리더가 가장 많이 읽는 신문

이 조사에서 오피니언 리더들은 대다수(89.0%)가 '거의 매일 신문을 읽는다'고 답했다. 나머지 11.0%도 '일주일에 1~2회 이상 읽는다'고 했다. 하루 평균 신문을 읽는 시간은 '30분 이상~1시간 미만'(42.0%)과 '1시간 이상'(41.7%)이란 응답이 많았다. 매일 '1시간 이상' 신문을 읽는 비율은 조사 대상 중에서 60대 이상이 57.0%로 가장 높았고 50대는 41.4%, 40대 이하는 34.8%였다.

 

오피니언 리더들이 집과 사무실에서 가장 많이 구독하는 신문은 조선일보인 것으로 조사됐다. '집에서 구독하는 신문'은 조선일보(22.3%)에 이어 A신문(16.3%), B신문(7.2%), D신문(6.6%) 등이었다. '직장에서 구독하는 신문'도 조선일보(33.6%)가 2위인 A신문(22.9%)과 차이가 큰 편이었다.

 

 

'평소에 가장 즐겨 보는 신문'을 묻는 항목에서도 조선일보(30.6%)가 선두였고 B신문(16.3%), C신문(14.7%), A신문(14.4%) 등이 뒤를 이었다. 직업별로 조선일보를 주로 읽는 비율은 재계 34.9%, 법조인 및 정·관계 31.1%, 교육계 28.7% 등이었다.

 

'한국의 대표 신문'은 조선일보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신문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진 결과에선 조선일보(48.6%) 2·3위인 A신문(17.2%) B신문(12.1%) 등을 큰 폭으로 앞선 1위였다. 그 뒤는 C신문(6.4%), D신문(5.9%) 등이었다. 조선일보에 대한 평가는 60대 이상(56.1%)에서 가장 높았고 50(46.9%) 40대 이하(46.5%)는 비슷했다. 직업별로는 재계(54.9%)에서 평가가 가장 높았고 다음은 법조인 및 정·관계(48.1%), 교육계(38.2 %) 등이었다.

 

'가장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신문'을 묻는 항목도 조선일보(27.4%)에 이어 A신문(14.4%) C신문(13.6%) 2·3위였다.

 

신문 유용성 평가에서 조선일보는 60대 이상(31.8%)에 이어 50(29.8%) 40대 이하(23.2%) 등 모든 연령층에서 선두에 올랐다.

 

오피니언 리더가 꼽은 '분석이 가장 깊이 있는 신문'도 조선일보(26.7%), B신문(19.3%), A신문(16.8%) 등의 순이었다. 조선일보의 분석력에 대한 평가는 직업별로 재계 32.9%, 법조인 및 정·관계 27.4%, 교육계 22.8% 등으로 답했다. '사설·칼럼이 가장 좋은 신문' 분야도 조선일보(24.2%) 1위였고 다음은 B신문(20.0%) C신문(18.7%) 등이었다.

 

이 조사의 대상은 학계 및 교육계 137(대학 교수, 연구기관 박사, 초중고 교장·교감), 재계 152(기업체 임원, 경제단체 간부), 법조인 및 정·관계 106(판검사, 변호사, 공공기관 및 지방자치단체 간부정당인), 기타 135(시민사회단체 간부, 문화 분야 전문가, 외교·안보 분야 전문가) 등이었다.

 

조사 대상의 연령별 구성은 40대 이하 225, 50 198, 60대 이상 107명 등이었다. 조사는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칸타퍼블릭이 각 분야 전문가 리스트에서 무작위로 추출해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지난 6 7일부터 20일까지 실시했다. 홍영림 여론조사전문기자

 

■ 이상재·안재홍·한용운·홍명희… 시대를 이끌고

방응모·신석우·조만식… 대쪽같던 신문인

조선일보가 고난과 격동, 성취가 이어진 한국 근현대사와 호흡을 함께하며 30000호 발간의 위업을 달성하기까지 힘을 합쳐 신문을 만든 많은 사람의 고뇌와 땀이 있었다. 시대의 고비마다 민족의 갈 길을 제시하며 지면을 빛낸 논객들,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읽는 즐거움을 선사했던 문인들, 그리고 늘 넉넉지 않았던 경영을 책임지며 이들이 마음껏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뒷받침했던 경영자들의 면모를 소개한다.

 

 

■ 논객

 

안재홍

일제 치하 조선일보를 대표한 논객은 민세 안재홍이었다. 3·1운동에 참가해 3년간 옥고를 치른 뒤 시대일보 논설위원으로 언론계에 투신한 그는 1924년 민족운동가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주필로 초빙됐고 발행인·부사장·사장을 역임했다. 조선일보에 재직하던 8년간 사설 980여 편, 시평 470편 등 무려 1450여 편의 글을 썼다. 이 기간 경영 책임을 맡기도 했고, 1년 이상 옥고를 치렀는데도 한 해 평균 180편이 넘는 글을 쓴 것이다. 그의 글은 짧은 보도 기사가 아니라 장문의 논설이었다. 이는 그가 사상가였을 뿐 아니라 속필(速筆)이었기에 가능했다. 그와 함께 논설을 집필한 이관구는 “민세는 단숨의 필력으로 사설 한 편을 웅장 담대하게 반 시간 안팎으로 써놓았다”고 회고했다.

 

문일평

일제가 동화 정책을 펴면서 민족의 정체성이 흔들리던 1930년대 조선일보는 우리 역사와 전통을 알리는 칼럼과 사설을 게재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때 그 중심에 섰던 인물이 사학자 호암 문일평이었다. 그는 1928~1931년 배재·중앙고보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일보에 글을 썼고 1933년부터는 편집고문으로 상근하며 ‘사외이문(史外異聞)’ ‘화하만필(花下漫筆)’ ‘역사 이야기’ 등을 연재했다. 그가 조선일보에 발표한 방대한 분량의 역사물은 세상을 떠난 후 조선일보사에서 ‘호암전집’으로 간행됐다.

 

홍종인

식민지, 내전, 학생혁명과 쿠데타 등 우리 민족이 경험한 격동의 20세기를 조선일보 기자로서 목격하고 기록한 사람이 홍종인이었다. 1925년 시대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1929년 조선일보로 옮겨 1940년 일제가 강제 폐간할 때까지 근무했다. 그리고 광복 후인 1945년 12월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편집국장·주필·부사장·회장으로 재직했다. 두 차례에 걸쳐 10년간 주필을 역임한 그의 별명은 ‘홍박(洪博)’이었다. 대학을 다니지 않았지만 엄청난 독서량으로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퇴임한 뒤에도 편집국에 불쑥 나타나 신문 지면에 대해 까마득한 후배들을 질타하는 정열을 지녔던 ‘평생 현역 기자’였다.

 

최석채

2000년 5월 IPI(국제언론인협회)가 전 세계 언론인 50명을 선정해 ‘언론자유 영웅’ 칭호를 수여했을 때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포함된 사람이 조선일보 주필을 지낸 최석채였다. 광복 후 대구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경찰에 투신했던 그는 1954년 언론계로 복귀했다. 대구매일신문에서 편집국장과 주필로 재직하던 중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로 구속됐다가 무죄판결을 받았다. 1959년 10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1960년 3·15 부정선거 직후 ‘호헌구국 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는 사설로 4·19혁명의 불길을 지폈고, 1964년 언론윤리위법 파동 때는 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으로 반대 투쟁에 앞장섰다.

 

선우휘

‘욕 많이 먹은 언론인으론 기네스북감’. 조선일보 주필을 역임한 선우휘가 자기 자신을 평한 말이다. 광복 후 월남한 그는 언론인의 비판정신을 견지하면서 반공에 투철해 좌·우 양쪽에서 싫은 소리를 들었다. 1946년 3월 조선일보에 입사한 그는 1948년 군에 들어가 정훈장교로 1957년까지 근무했다. 1955년 단편소설 ‘불꽃’을 발표해 동인문학상을 받은 그는 소설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1961년 5월 논설위원으로 조선일보에 복귀한 그는 세 차례나 편집국장을 역임하며 회사가 어려울 때마다 ‘구원투수’ 역할을 맡았다. 1973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에서 납치됐을 때 한밤중에 정부를 비판하는 사설로 갈아 끼운 사건은 한국 언론사에 기록된다.

 

이규태

만 23년, 8396일, 6702회. 한국 언론 사상 최장수 연재물로 기록되는 ‘이규태 코너’는 1983년 3월 1일 ‘원고지 6~7장에 동서고금을 오가는 이야기로 시사 문제를 풀어내라’는 방우영 사장의 지시로 시작됐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고서와 신문·잡지가 쌓여 있는 서재에서 필요한 자료를 뽑아서 쉽지만 알맹이 정보가 가득 찬 감칠맛 나는 글을 써내는 솜씨는 한국과 세계 구석구석을 발로 누볐던 그이기에 가능했다. 당시 기자로는 드물게 공대를 나온 그는 1968년 ‘개화백경(開化百景)’을 연재하면서 ‘이규태 한국학’이라고 불린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고 ‘한국인의 의식구조’ ‘한국의 인맥’ 등 후속 연재물로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일가를 이뤘다.

 

 

■ 경영인

 

공식적으론 3대이지만 실질적인 조선일보 초대 사장으로 꼽히는 인물은 남궁훈이다. 한말 대표적 민족지였던 황성신문 사장을 역임한 그는 1921년 4월 조선일보를 인수한 송병준이 사장으로 초빙하자 ‘신문 제작과 사원 채용에 간섭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와 소작쟁의 기사를 과감하게 싣는 등 민족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지면을 쇄신해 취임 당시 3000부이던 발행 부수를 1만5000부로 끌어올렸다.

 

1924년 9월 남궁훈에게서 조선일보 사장 자리를 넘겨받은 인물은 이상재였다. 민족운동가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민족의 사표(師表)’로 추앙받던 그를 모셨다. 그는 고령으로 매일 출근하지는 않았지만 언론계의 어른 역할을 했다.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가 만들어졌을 때 회장으로 추대됐다.

 

1927년 3월 와병 중인 이상재가 사장에서 물러나자 신석우 부사장이 뒤를 이었다. 경기도 의정부 대지주 집안 출신인 그는 물려받은 재산을 조선일보에 쏟아부었다. 경영·편집진을 대폭 보강하고 조·석간제를 실시하면서 ‘혁신 조선일보’의 기치를 들었고, 사장으로 취임해서는 일제 비판에 더욱 고삐를 당겼다. 그는 재정난이 가중되는 와중에 1931년 5월 회사를 떠났다.

 

1932년 5월 말 조선일보가 경영권 분규까지 겹쳐 장기 휴간에 들어가자 경영 정상화 책임을 맡은 조병옥과 주요한은 개신교 민족지도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다. 오산학교 교장, 평양YMCA 총무를 역임한 그는 회사를 안정시키는 한편 새로운 사주(社主)를 물색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평안도 동향의 ‘금광왕’ 방응모가 그의 설득을 받아들여 1933년 3월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그해 7월 사장에 취임한 방응모는 웅장한 새 사옥을 짓고 취재용 비행기를 구입하는 등 과감한 투자로 조선일보의 중흥을 이끌었다. 경쟁지의 절반이었던 발행 부수는 3년 만에 거꾸로 두 배 이상 앞서게 됐다.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폐간된 이후 잡지 발행에 주력하던 그는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11월 복간호를 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공산군에 납북됐다.

 

선장을 잃은 조선일보를 지탱하는 역할은 방응모의 장손인 방일영에게 맡겨졌다. 27세에 경영 책임을 맡게 된 그는 전시판 제작을 진두지휘하는 등 전력을 기울였다. 1952년 4월 금융인 장기영을 사장으로 영입했고 1954년 5월엔 직접 대표로 취임해 조선일보 발전의 새로운 토대를 닦았다. 1952년 조선일보에 합류해 기자와 경영인으로 활동하던 방우영이 1964년 11월 형의 뒤를 이어 사장으로 취임해 1993년 3월까지 재임하면서 ‘정상(頂上) 조선일보’를 향한 발걸음을 이끌었다.

이선민 선임기자

 

■ 2017.12.26 [조선일보 윤리규범]

- 윤리규범 어떤 내용 담았나

언론신뢰 높이는데 최우선 가치, 취재·편집·윤리 실천지침 마련

취재원 복수로, 실명공개가 원칙… '~라고 열변 토했다' 식 표현 금지

개인적 소셜미디어 활동이라도 조선일보 기자로 인식됨을 경고

 

조선일보 윤리규범은 조선일보 기자들이 그동안 지켜온 취재준칙과 기자준칙에서 규정했던 내용들을 기반으로 인터넷·모바일 기기의 보급과 소셜미디어 확산에 맞춰 이 준칙들을 수정 보완했다. 특히 이번에 새롭게 마련된 윤리규범 가이드라인은 기자들이 취재 및 보도 과정에서 지켜야 할 구체적인 실천 지침으로 21장·52조·322항목에 이른다. 추상적인 원칙을 발표하는 수준을 넘어서, 기자들이 윤리규범을 반드시 지키도록 하자는 취지다. 미국 뉴욕타임스와 영국 BBC, 일본 NHK 등 세계 유력 언론사들도 상세한 내용의 가이드라인을 두고 있다.

 

◇취재와 기사 작성, 편집까지 망라한 교과서

본지 윤리규범과 가이드라인은 기자들이 취재원을 만날 때 주의할 내용부터 기사 작성, 편집자들이 유의할 점 등 신문 제작 전(全) 과정에서 지켜야 할 원칙과 행동수칙을 담았다. 예를 들어 취재 관련 조항에서는 '(취재할 때) 다른 직업인을 사칭해서는 안 된다'고 불법적 취재 금지를 밝혔다. 범죄와 반(反)사회적 사건에 대한 탐사 보도 등 신분 은닉이 불가피한 경우에도 반드시 부서장의 허락을 받도록 엄격히 제한했다.

 

▲지난 10월 서울 중구 조선일보 본사 대회의실에서 열린 윤리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위원들이 조선일보 윤리규범 최종안을 놓고 토의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준동 조선일보 노조위원장, 윤석민 서울대 교수, 박길성 고려대 부총장, 손봉호 위원장, 소순무 변호사, 김근상 성공회 은퇴주교, 강경희 조선비즈 취재본부장(당시 논설위원). /김지호 기자

 

사실 확인에 대해서는 취재 단계에서 '공식적인 경로나 복수(複數)의 취재원을 통해 확인할 것'과 '실명 공개가 가능한 정보원을 우선시할 것' 등을 명시했다. 사실 보도야말로 신문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또 '넌지시 말했다' '열변을 토했다' 등 주관적 표현을 직접 인용구의 술어로 사용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범죄 보도에서는 피의자와 피고인에게 경칭을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피의자가 현행범인 경우와 기소 후 피고인에 대해서는 경칭을 생략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기자는 취재 자료를 보도 이외 목적에 사용해선 안 된다. 정보를 이용한 사적 이익 추구 금지 조항에선 '업무상 알게 된 정보를 주식 투자나 부동산 거래 등 사적인 이익 추구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에 대해 보도하는 것도 금지된다. 가이드라인은 '기자는 친·인척이나 사적 친분 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집단, 과거 근무 기관에 관련된 취재 보도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직업 윤리와 관련해서는 기자의 대외 활동에 대해 '정치·사회 관련 취재 기자와 부서장은 해당 직무가 끝난 후 6개월 이내에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규정했고, 경제·산업 분야 기자의 경우 '취재 대상에게 영리 관련 아이디어를 제공하거나 사업 제안을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기자가 받아서는 안 되는 금품·향응의 종류에 '과도한 할인 혜택'까지 포함시켰고, 허용할 수 있는 선물·경조사비 수준은 청탁금지법의 기준에 따르도록 했다.

 

◇미디어 환경 변화 반영한 가이드라인

신설된 윤리규범의 또 다른 특징은 다양한 인터넷 기반의 취재 환경에서 기자들이 주의해야 할 점들을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한 것이다.

 

인터넷 취재의 경우 '문자 및 채팅 서비스를 이용한 취재는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표현이나 단어 사용에 예의를 다한다'고 제시했다. 특히 페이스북·트위터 등 소셜미디어 활동을 할 경우 어떤 곳에서든 조선일보 기자로 인식된다는 점을 명심하고 공정성과 신뢰성을 의심받지 않도록 행동할 것을 요구했다.

 

또 취재 기자들에게는 지나친 소셜미디어 활동이 취재원을 노출시킬 수 있으므로 주의를 기울이도록 당부했으며, 편향성 우려 불식을 위해 '소셜미디어를 통한 취재가 특정인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도 명시했다. 인터넷용 기사 편집에서는 '뉴스 기사 검색 횟수를 늘리기 위해 제목이나 사진, 기사의 일부를 바꿔 비슷한 기사를 반복적으로 게재하거나 전송해선 안 된다'고 규정했다.

신동흔 기자

 

■조선일보 역사

 

■ 100년 전 모던 뉘우스 = 월간조선

〈1〉 1930년대 이승만은 이미 원로...당시의 노장파·소장파는 누구?

⊙ ‘50객’은 한용운 안창호 김규식 정인보

⊙ ‘40객’은 이광수 조만식 홍명희 여운형

⊙ 신세대 ‘30객’은 박흥식 김활란 정석태  

 

[편집자 주] 1920~30년대는 용광로의 시대였다. 근대 과학기술의 상징인 전기와 전차, 기차가 등장하고 근대화를 부르짖던 신문, 잡지와 방송(라디오)이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암울한 식민지였으나 신문물의 거센 물결이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을 탄생시켰다. 그 시절, 우리 사회의 단면을 알 수 있는 ‘뉘우스(news)’를 소개한다

 

▲1921년 미국 워싱턴에서 이승만과 서재필. 두 사람은 임시정부가 대미외교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에 설치한 외교담당 기관인 ‘구미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30년대 당시 식민지 조선의 여론을 이끄는 오피니언 리더들은 누구일까. 월간지 《삼천리》의 1934 8월호는 당대 정·재·사회·종교·문화계 엘리트를 ‘노장파’와 ‘소장파’로 나눠 소개한다. 장유(長幼)에 의한 구획은 전근대적인 사고와 닿아 있다.

 

《삼천리》는 70대를 의미하는 ‘70()’으로 6명을 꼽는데 서재필 윤치호 오세창이 포함돼 있다. 개화와 한일병탄을 경험한 이들이 1930년대에 이미 원로가 됐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롭다.

 

60객’은 모두 11. 이들 중 오세창은 ‘70객’에 이어 중복 게재됐다. 당시 오세창의 나이는 71. 그를 제외한 10명의 ‘60객’ 중에 이승만(당시 60) 이동녕(당시 66) 등이 포함돼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30년대 조선에서 원로로 대접받고 있었다

 

 ‘50객’과 ‘40객’은 각각 38명과 58명. 식민지 사회를 대표하는 중추적 인물이 망라돼 있다. 실질적인 오피니언 리더들이다. 대표적인 ‘50객’으로 한용운 안창호 김규식 정인보, ‘40객’으로 이광수 조만식 홍명희 여운형 신익희 조병옥 김병로 등이 이름을 올렸다.

 

  ‘30객’(39명)은 그야말로 당대 신진인사들이다. 이들은 1895년 갑오개혁 이후 태어난 ‘신세대’로 근대적 교육기관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더러는 유학생으로 해외경험을 쌓았다. 대표적인 인물로 화신백화점을 비롯해 화신그룹의 총수였던 친일파 기업인 박흥식, 이화여고에 재직했던 김활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나와 독일에서 의학박사를 받은 정석태 등이 ‘불같은’ 30대들이었다. 해방 후 반민특위위원장과 법무장관·검찰총장·대법관을 지낸 변호사 이인은 40객과 30객에 중복 게재됐는데 《삼천리》에 게재될 당시 나이는 39세다. 따라서 ‘30객’이 맞다. 

 

《삼천리》 1934년 8월호에 실린 명단을 인용한다. 일부 표기를 현대어와 한글로 고쳤음을 밝혀 둔다. 또 연희전문 ‘최원배’를 ‘최현배’로 바로잡았다. 중복 게재된 오세창, 이인은 나이에 맞게 수정했다. 

 

8월호는 또 당대 문인들도 나이에 따라 분류하는데, ▲40객은 홍명희 이광수 오상순 김안서 윤백남 이윤재 ▲30객은 김동인 염상섭 이태준 채만식 이상화 임화 ▲20객은 강경애 김기림 윤석중 모윤숙 최정희 등이다.

 

노장파와 소장파별 

▲70객客

권동진(權東鎭·천도교) 서재필(徐載弼·미국) 윤치호(尹致昊·기독교) 오세창(吳世昌·천도교) 나용환(羅龍煥·천도교) 박인호(朴寅浩·팔순)

 

▲60객

이동녕(李東寧·상해) 정운영(鄭雲永·노총) 이승만(李承晩·미주) 길선주(吉善宙·기독교) 문창범(文昌範·시베리아) 유진태(兪鎭泰·교육협회) 설태희(薛泰熙·물산장려회) 정한경(鄭漢卿·미주) 조성환(曺成煥·상해) 오세창(吳世昌·천도교)

 

▲50객

이동휘(李東輝·시베리아) 김동삼(金東三·북만주) 유동열(柳東悅·러시아) 서정희(徐廷禧·신간회) 안종원(安鍾元·양정교장) 최린(崔麟·천도교) 이시영(李始榮·상해) 한용운(韓龍雲·불교) 양주삼(梁柱三·기독교) 현헌(玄櫶·하와이) 김환규(金桓圭·신간회) 윤기섭(尹琦燮·북평) 윤해(尹海·상해) 김창제(金昶濟·이화여고) 박영철(朴榮喆·남업은행) 한상룡(韓相龍·조선생명) 남형우(南亨祐·남경) 김중세(金重世·帝大강사) 한명세(韓明世·모스크바) 윤덕병(尹德炳·노총) 정광조(鄭廣朝·천도교) 안창호(安昌浩·대전) 최규동(崔奎東·중동교장) 한명세(韓明世·시베리아) 신흥우(申興雨·기독교) 이종린(李鍾麟·천도교) 허헌(許憲·전 신간회) 김규식(金奎植·남경) 오하묵(吳夏默·시베리아) 김하석(金河錫·블라디보스토크) 조소앙(趙素昻·남경) 오경선(吳競善·세브란스 의전) 정인보(鄭寅普·연전교수) 명제세(明濟世·물산장려) 김윤주(金潤柱·徽高교장) 권덕규(權悳奎·저술) 이돈화(李敦化·천도교) 채필근(蔡弼近·목사)

 

▲《삼천리》의 1934년 8월호는 당대 정·재·사회·종교·문화계 엘리트를 ‘노장파’와 ‘소장파’로 나눠 소개한다.

 

조만식(曺晩植·기독교) 안재홍(安在鴻·저술가) 홍명희(洪命憙·저술가) 김병로(金炳魯·변호사) 여운형(呂運亨·중앙일보) 차상찬(車相璨·논객) 안일영(安一英·교육가) 민대식(閔大植·동일은행) 최두선(崔斗善·보성전문) 서상일(徐相日·노총) 박동완(朴東完·하와이) 유억겸(兪億兼·연전학장) 원세훈(元世勳·저술가) 장지필(張志弼·형평사) 남만춘(南萬春·시베리아) 구자옥(具滋玉·기독교) 김려식(金麗植·협성교장) 정인과(鄭仁果·기독교) 김성수(金性洙·보성전문교장) 최고려(崔高麗·시베리아) 안정근(安定根·상해) 김동성(金東成·중앙일보) 김계수(金季洙·해동은행) 이윤재(李允宰·저술가) 이용만(李容萬·세브란스의전) 신익희(申翼熙·상해) 김동원(金東元·평양) 장도빈(張道斌·저술가) 이상협(李相協·매일신보) 문일평(文一平·조선일보) 박창훈(朴昌薰·의학박사) 김명식(金明植·오사카) 방응모(方應模·조선일보) 유진희(兪鎭熙·저술가) 조기금(趙基琹·천도교) 송진우(宋鎭禹·동아일보) 박(朴)일리아(시베리아) 김(金)마리아(원산성경학원) 장덕수(張德秀·미주) 서춘(徐椿·조선일보) 김약수(金若水·저술가) 김재봉(金在鳳·노총) 이광수(李光洙·문인) 정운해(鄭雲海·평론가) 현상윤(玄相允·중앙교장) 박일병(朴一秉·화요회) 백관수(白寬洙·평론가) 양원모(梁源模·동아일보) 이청천(李靑天·시베리아) 최현배(崔鉉培·연전교수) 홍병선(洪秉璇·기독교) 조병옥(趙炳玉·저술가) 나경석(羅景錫·봉천) 배성룡(裵成龍·중앙일보) 김기전(金起田·천도교) 박찬희(朴瓚熙·동아일보)

 

▲30객

  김준연(金俊淵·저술) 이여성(李如星·동아일보) 박흥식(朴興植·화신) 이극로(李克魯·조선어학회) 이정섭(李晶爕·저술가) 홍성하(洪性夏·연전교수) 김양수(金良洙·저술가) 백락준(白樂濬·연전) 황애시덕(黃愛施德·여자基靑) 우봉운(禹鳳雲·근우회) 홍증식(洪增植·중앙일보) 이훈구(李勳求·숭실전문) 정칠성(丁七星·근우회) 김우평(金佑坪·만주) 이인(李仁·변호사) 박완(朴浣·천도교) 이관구(李寬求·저술가) 김윤경(金允經·배화여고) 고영환(高永煥·동아일보) 최승만(崔承萬·기독교) 황신덕(黃信德·기독교) 김경재(金璟載·저술가) 김활란(金活蘭·이화여고) 설의식(薛義植·동아일보) 이창휘(李昌輝·변호사) 정석태(鄭錫泰·의학박사) 현동완(玄東完·기독교) 이선근(李瑄根·개성고보) 한치진(韓稚振·연전) 홍양명(洪陽明·조선일보) 정응봉(鄭應鳳·천도교) 양윤식(楊潤植·변호사) 허정숙(許貞淑·근우회) 함상훈(咸尙勳·조선일보) 박래원(朴來源·천도교) 신태악(辛泰嶽·변호사) 홍기문(洪起文·조선일보) 송봉우(宋奉瑀·저술가) 김세용(金世鎔·저술가) 최선익(崔善益·중앙일보). 

 

문인의 춘추기(春秋記)

▲40객

 

홍명희 이광수 양백화(梁白華) 전영택(田榮澤) 오상순(吳相淳) 윤백남(尹白南) 김안서(金岸曙) 이윤재

 

▲30객

염상섭(廉想涉) 홍효민(洪曉民) 최봉칙(崔鳳則) 백기만(白基萬) 이태준(李泰俊) 함대훈(咸大勳) 김동인(金東仁) 양주동(梁柱東) 현진건(玄鎭健) 채만식(蔡萬植) 유도순(劉道順) 이상화(李相和) 이무영(李無影) 김기진(金基鎭) 박태원(朴泰遠) 박월탄(朴月灘) 서항석(徐恒錫) 장기제(張起悌) 이헌구(李軒求) 안석주(安碩柱) 노자영(盧子泳) 심훈(沈薰) 최독견(崔獨鵑) 이은상(李殷相) 정지용(鄭芝溶) 이종명(李鍾鳴) 박팔양(朴八陽) 홍해성(洪海星) 한인택(韓仁澤) 송영(宋影) 박화성(朴花城) 이기영(李箕永) 박영희(朴英熙) 주약섭(朱躍爕) 백철(白鐵) 장혁주(張赫宙) 정인섭(鄭寅燮) 김광섭(金珖燮) 방인근(方仁根) 주요한(朱耀翰) 김유영(金幽影) 서광제(徐光霽) 임화(林和) 김동환(金東煥)

                                                      

▲20객                                              

강경애(姜敬愛) 김기림(金起林) 김자혜(金慈惠) 윤석중(尹石重) 모윤숙(毛允淑) 최정희(崔貞熙) 장덕조(張德祚) 노천명(盧天命)⊙

[월간조선 2016년 9월호 / 글=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2〉경성(京城) 다방의 변천사 - 명동다방 효시는 천재 시인 이상(李箱)의 ‘무기麥다방’

⊙ 근대적 다방은 1923년 서울 충무로3가에 개업한 ‘후다미(二見)’

⊙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1927년 영화감독 이경손의 다방 ‘카카듀’가 최초

⊙ 서울역 앞 ‘돌체’는 음악, 충무로 3가 ‘윈’은 독일풍 찻집으로 유명

▲서울 멋쟁이들이 드나들던 경성 본정통 1정목 거리 모습. 지금의 충무로 1가다.

 

1930~40년대 유성기에서 흘러나온 노랫가락 하면 떠오르는 공간이 있다. 다방이다. 당시 경성(京城)에 처음 등장한 다방은 유흥공간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 멋쟁이들의 커뮤니티 공간이었다.

 

요절한 시인 이상(李箱)은 손수 여러 다방을 차렸고 영화감독 이경손(李慶孫) 역시 가배(珈琲)라 부르던 ‘커피’를 팔았다. 차나 음료만을 팔지는 않았다. 문인, 화가, 배우, 가수 등의 예술활동이 다방에서 펼쳐졌다. 문학의 밤, 시 낭송회, 그림 전시회가 열렸고 다방에서 원고청탁과 연극·영화인의 출연섭외가 이뤄졌다.  

 

다방이란 공간과 식(食)문화는 어떻게 식민지 경성(서울)에 도래한 것일까.

 

▲천재시인 이상이 직접 설계했다는 다방 ‘제비’. 
왼쪽부터 이상, 소설가 박태원, 시인 김소운.

 

1938년 6월에 발행된 잡지 《청색지(靑色紙)》에 실린 〈경성 다방 성쇠기〉를 보면 근대적 문화공간인 다방의 형성과 변천과정을 자세히 알 수 있다. 필자는 노다객(老茶客). 아마도 잡지 《청색지》의 필진으로 추정된다. 주요 필진은 박종화·임화·이상·백철·정지용·유치환·신석정 등 당대 최고 문인들이다. 

 

다방이 서울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23년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충무로 3가(당시 本町 3丁目)에 개업했던 ‘후다미(二見)’가 1호라는 것이다. 초기 다방은 일본인이 경영했고 주로 일본인 청년들이나 사교계 인사들이 중심이었다.

 

‘새 풍습을 익히고 돌아온’ 도쿄 유학파 출신 한국인이 늘면서 다방은 점점 한국인 엘리트 계층의 문화예술 공간으로 변한다. 한국인이 차린 최초의 다방은 1927년 영화감독 이경손에 의해 서울 관훈동에 연 ‘카카듀’다.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이경손은 한국영화 초창기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다방 ‘카카듀’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으나 프랑스 혁명 당시 경찰의 눈을 피해 모인 비밀 아지트의 술집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이경손의 ‘카카듀’가 그런 항일운동의 찻집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1932년 동경미술학교를 나온 이순석(李順石)이 현재의 소공동 근처에 ‘낙랑 파-라’라는 다방을 열었는데 이 다방 벽에는 슈베르트와 같은 예술가의 사진과 영화배우 사진, 정물화 등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서울 명동의 찻집 ‘가무’. 40여년째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멋 좀 아는 당대 ‘귀한 분들’이 자주 찾던 곳이라 한다.

 

이곳을 자주 드나들던 시인 이상이 1935년 직접 설계까지 해서 ‘무기(麥)다방’을 개업했다. 경성고공(京城高工) 건축과를 나와 한때 총독부의 건축기수로 일한 이상이니만큼 다방을 직접 설계했다는 사실이 어색하지 않다. 

 

이상은 ‘제비’ ‘69’ ‘쓰루(鶴)’라는 상호의 다방도 경영했으나 모두 오래가지 못했다. 돈은 못 벌어도 이상의 다방들은 문화예술인의 사랑방이었다. 또 이상의 다방이 ‘명동 다방시대’의 효시가 됐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무기 다방’이 당시 명치정(明治町·요즘의 명동)에 처음 들어서면서 주변에 다방이 들어선 것이다.

 

물론 명동 다방의 전성시대는 아무래도 6·25전쟁 이후다. 부산과 대구로 피란 갔던 시인, 소설가, 배우, 미술가들이 대거 명동거리에 등장, 다방에다 똬리를 틀면서다. 다방 ‘마돈나’ ‘플라워’ ‘동방싸롱’ ‘모나리자’ 등은 가난한 예술인들의 안식처였다. 

 

다음은 〈경성 다방 성쇠기〉 전문이다. 원문 의미를 살리면서 현대어 맞춤법 표기에 따라 수정했음을 밝혀 둔다. 

 

□발굴 원문

경성 다방 성쇠기

노다객(老茶客)

▲〈경성 다방 성쇠기〉가 실린 잡지
《청색지》 1호(1938년 6월 발행) 표지.

 

서울서 맨 처음 우리가 다점(茶店)이라고 드나든 곳은 본정(本町·요즘의 충무로-편집자) 3정목(丁目) 현재 ‘윈’ 근처에 있던 ‘이견(二見)’이란 곳으로 이곳이 아마 경성 다방의 원조일 것이다. 그 다음이 현재 본정 2정목에 식료품점 구옥(龜屋) 안에 있는 ‘금강산’으로 우리들과 같이 동경서 새 풍습을 익혀 가지고 돌아온 문학자나 화가나 그 밖에 지극히 소수의 내지인(內地人) 청년이 있을 뿐이었다. 아마 그 시절 다방 손님은 현재 적어도 나이가 30을 훨씬 넘은 중년으로 지금엔 대부분이 다방출입을 그만둔 이들이나 지금에 융성한 다방문화의 개척자들도 선공(先功)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뒤 조선사람 손으로 조선인가(街)에 맨 처음 났던 다방은 9년 전 관훈동(寬勳洞) 초(初) 3층 벽돌집(현재는 식당 기타가 되어 있다.) 아래층 일우(一偶)에 이경손(李慶孫)씨가 포왜(布哇·하와이-편집자)에선가 온 묘령 여인과 더불어 경영하던 ‘카카듀’다. 

 

이 집은 이씨의 떼카(‘메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편집자)다. 취미를 반영하야 촛불을 켜고 인도 모직마포 ‘테이블 크로스’에다 조선가면을 걸어 놓고 간판 대신에 붉은 칠한 바가지 세 쪽을 달아 놓아 한때 경성 가두에 이채를 발(發)하였다.

 

그러나 경영에 능치 못한 이씨이고 다방도 그리 흔치 못한 때라 불과 수수(數數) 월에 문을 닫고 이씨는 상해로 가고 여주인의 행방도 알 길이 없었다. 

 

그 뒤 2년인가 지나 본정에 명과(明果)가 개점을 하여 정말 맛있는 가배(珈琲·커피-편집자)를 먹여 이후 차 맛을 따라 모이는 손들을 끌거니와 역시 전문적 다점으로 종로대로에 근대적 장식을 갖춰 나타난 것은 8년 전 일미(日美·일본 도쿄미술학교-편집자)의 도안과(圖案科)를 나와 현대 영화배우 노릇을 하는 김인규(金寅圭)씨와 심영(沈影)씨가 차려 놓았던 ‘멕시코’다.

 

지금은 ‘뽀나미’와 더불어 ‘바’가 되어 주객(酒客)의 모양밖에 찾을 길 없으나 당대엔 문사(文士), 음악가, 배우, 신문기자들을 위시하야 문화인이 모여드는 양대 중심이었다. 

 

그 뒤가 경성다방 문화사의 제2기라고 할 때로 동경 미교(美校·일본 우에노미술학교. 도쿄예술대학의 전신-편집자) 도안과를 나와 화신(和信)에 있던 이순석(李順石)씨가 장곡천정(長谷川町·중구 소공동의 일제강점기 명칭-편집자)에 개업한 ‘낙랑 파-라’에서 비롯한다.

 

이 다점은 현재도 번창한 듯한 곳으로 당시에 있어선 그때까지 의례히 결손 보는 외입(外入) 장사로 알았던 다방경영을 본때 있게 수지를 맞춰 보인 데 있다 아니할 수 없다. 

 

성공에 주인(主因)을 생각해 보면 장소를 대담한 곳에 앉힌 것이 의외로 성공하여 내지인 손을 많이 끌 수 있었고 또한 종로 근방 다점에 가장 큰 폐단이었던 기생이나 주정군(酒酊軍) 출입이 태무(殆無)하야 다객의 취미에 적당한 기분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 등에 있지 않았던가 한다.

 

금요일마다 명곡 신보를 들고 어느 해엔가는 노(露·러시아-편집자) 문호 ‘투르게네프’ 100년제를 거행하야 유명하였다. 이씨에 뒤이어서는 김연실(金蓮實)이가 최근까지 ‘매담(마담-편집자)’을 보았다. 

 

그 다음이 작년에 죽은 이상(李箱)이 현재 ‘빠-뽀스톤’ 자리에 실내 시공만 했다가 팔아넘긴 ‘식스 나인(69)’이 열리고, 곧 뒤이어 이상이 자기 부인을 데리고 열었던 종로 1정목의 ‘제비’였다.

 

‘제비’는 이상의 건축 전문가로서의 관록을 보이는 호(好)설계로 다방 특유의 ‘디테일’의 ‘데코레이션’이 적고, 간결하였으며 인삼차를 팔고 화가들이 많이 모여 한때 인기를 끌었으나 1년이 못 가 명치정으로 자리를 옮겨 ‘맥(麥)’이란 새 가게를 내었다. 

 

이 사이에 조선은행 뒤 장곡천정 대가(大街)에 유치진(柳致眞)씨가 ‘프라타느(플라타너스-편집자)’를 개점하야 극연회(劇硏會)원, 신문기자, 해외파 문사들이 많이 모여 융성하더니 모 내지인 손으로 넘어가고 그 뒤 현재 조선빌딩 자리에 신 건설극단의 이상춘(李相春)씨가 설계한 다점이 하나 생겼다 없어지고 전기(前記) 이상의 ‘무기’가 다방 명치정 집중의 효시(嚆矢)를 지었다.  그 뒤 음악평론가 김관(金管)씨가 ‘에리자’를 열어 수년간 인기를 독점하였고, 뒤이어 ‘하리우드’ ‘노아노아’(폴 고갱의 작품 이름-편집자)가 생기고, ‘미야지마’ ‘백룡(白龍)’ ‘따이나’ 기타 수처가 생기고, 경성에 다점 전성 시대가 전개되고 명치정은 당연 다방문화의 중심인 관(觀)이 있다. 

 

이 가운데 특색 있는 것은 역시 ‘데리다’ ‘노아노아’ 그리고 최근 신설한 ‘오리온’이 새 인기의 중심이며, 경성 역전에 ‘도루췌(돌체-편집자)’가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본정 3정목의 ‘윈’이 경성 유일의 독일풍 다점으로 호다객의 발길을 끈다 할 수 있다.

 

좌우간 10여 년 전 ‘이견’이나 ‘금강산’에서 차를 마시던 때에 비하면 천양의 차가 있고, 우리 노다객들에게 일언(一言)시킨다면 현대 다방들이 좋은 음악을 들려준다는 것은 좋으나 차차로 19세기적인 전아한 서구미(西歐美)가 없어지고 아미리가(亞米利加·아메리카-편집자)화하는 데 일률(一律)의 적멸(寂滅)을 느낀다 아니할 수 없다.⊙

(출처=《청색지》 1, 1938 6, 46~47p)

 

〈3〉 각계 명사 암찰록(暗察錄) - “이런 말씀을 막 해서 괜찮을까요?”

⊙ 1926년 창간된 잡지 《별건곤》… 가십 기사로 유명인사의 시시콜콜한 사생활 들춰

⊙ “아무리 봐도 시골서 갓 올라오신 선비 같았다”(조만식)

⊙ “… 엉엉… 내가 길러내듯 한 아무개 놈이 나를 배반하였단 말이야”(송진우)

 

[편집자 주] 

▲《별건곤》 1933년 4월호 표지.

 

근대 한국의 신문·잡지는 개화와 계몽, 국권수호의 사명을 안고 탄생했으나 그 속에는 정보의 욕구 또한 담겨 있었다. 그 욕구는 간혹 가십(gossip)의 형태로 나타났다. ‘남을 헐뜯는 가십은 살인보다 위험하다’는 말이 있다. 때로 감추고 싶은 뒷얘기나 근거 없는 억측을 담고 있는 까닭이다. 잡지 《별건곤(別乾坤)》은 1926년 11월 창간돼 1934년 8월 종간됐다. 일제 탄압으로 폐간된 잡지 《개벽》의 후신이다. 《개벽》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대중의 흥밋거리와 가십을 주로 실었다. 《별건곤》은 서울의 불특정 지역을 탐방하는 〈암야탐사기〉로 인기를 끌었고 노숙자, 거지, 땅꾼 등을 등장시켜 대도시 경성(京城)의 이면을 추적하는 기사를 다루기도 했다. 《별건곤》 1933년 4월호의 〈우리가 본 그이들-각계 명사 암찰록(暗察錄)〉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여학생, 바(BAR) 보이와 요릿집 보이, 선술집 주모, 카페 여급, 목욕탕 주인, 기생 등을 등장시켜 이들이 본 유명인사의 민낯을 들춘다. 이 기사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계급과 계층의 분화, 지식인의 위선을 그리려 한 것 같은데 기사는 의도성을 가진 일방적인 주장이어서 객관성과 신뢰도가 떨어진다. 다음은 〈우리가 본 그이들〉을 원문은 살리되 정도는 현대어 맞춤법 표기에 따라 수정한 전문이다.

 

▲《별건곤》 1933 4월호에 실린 르포 기사 〈우리가 본 그이들-각계 명사 암찰록〉

 

▶여학생이 본 박희도(朴熙道)
姜貞○


서대문행 전차 속에서….

“이상스러운 영감 다 보겠네. 왜 남의 여자의 얼굴을 뚫어지라고 볼까?

속마음으로 이렇게 의심나는 생각이 나서 옆에 앉은 동무 애를 꾹 찔러 보았습니다. 


 “얘 너 모르니? 중앙보육교장 박희도씨 아니냐! 
 “응… 난 몰랐지. 

  비로소 가다가씨를 알아보니 옆구리에 주먹 맞은 소리처럼 “응!”이 나왔지 그렇지 않았던들 내 성미에 실례의 말로 무슨 욕이 끌어 나왔을 것입니다.
×
흠모하고 존경하는 뜻으로 저는 고개를 돌려 선생의 중절모 끝에서부터 구두코까지 유심히 보았습니다. 이것이 내가 선생을 생전 처음으로 대면한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코끼리’라는 별명을 들으시는 만큼 체격이 거대하시고 얼굴의 면적도 상당히 광막하셔서 정치가의 타입으로 되신 듯하였습니다. 더욱이 불룩하신 배는 나폴레옹의 배에 지지 않게 책략에 가득차신 것 같았습니다. 검은 안경 속으로 색색(色色)의 세상을 굴려 보시는 눈, 인중에 닿을 듯 말 듯 입술 모도가 선생의 비범한 인내력과 정력의 소유자심을 가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전체 골상의 조화는 거대한 동물-코끼리, 하마, -처럼 순하고 다정하신 성격으로 보였습니다. 오직 한 가지 옥의 티라고 할까! 선생의 체격에 비하여 음성이 너무나 센티멘털하게 가냘프신 것이었습니다. 


 아차! 노리까에가 바빠 그만두고 내릴 테예요. 나머지는 요다음에…. 


  (박희도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3·1운동 때 그리스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편집자 주)
 

▶바(BAR) 보이가 본 서춘(徐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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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습니다, 괜히. 그런 말씀을 했다가 나중에 야단이나 맞으면 어떡해요. 그 선생님 약주 취하시면 참 무서워요. 그럼 나중에 경(?)은 대신 쳐 주십시오. 


 그 선생님 참 알방구지요. 키는 조그맣고 얼굴은 까무잡잡하신 선생님이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것 같은 분이 참 다부지시지요. 그런데다 약주가 취해놓으시면 아닌 게 아니라 벌벌 떨려요. 가끔 오시게 되면 대개는 약주 가만히 취해오십니다. 그러니까 오셔서는 별로 약주를 더 안 잡숫지요. 아마 취하신 김에 히야까시 기분으로 오시는 것 같아요.… 그렇지요. 만약 저희만 있다면 안 오실 것입니다. 밉건 곱건 마담이 있으니까 그 때문에 오시겠지요. 취해서 오시고 더구나 그래서 오셨는데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계실 리가 있나요? 그 거친 목소리로 수틀리면 욕만 하시면서 왔다갔다하십니다. 그런 때일수록 더 무서워서 감히 말씀을 못 붙여 봅니다.… 그럼요. 마담도 겁을 내지요. 어떤 때는 안으로 피하는 걸요. 그럼 이년이 피한다고 욕을 소나기처럼 들어부으면서 야단야단을 하십니다. 그러신 데다 약주를 더 잡숫는 날이면 큰 야단나지요. 그러니까 그런 때는 잘 달래야지(?) 건드리거나 반대를 하면 큰일이 납니다. 어지간히 역찬 마담이니까 그렇지 좀 서투른 사람은 견디다 못해서 울고 맙니다. 이렇게 한바탕 야단을 하신 뒤에 가시기만 하면 오시는 것보다 더 반갑습니다. 가시려는 눈치만 보이면 얼른 가서 문을 열고 “안녕히 가십시오”하고 걸어가시는 뒤로 보면 큰길이 좁다고 이쪽으로 왔다 저쪽으로 갔다 건너만 다니시니 그렇게 걸어서 언제나 댁으로 가실지 걱정이나 가신 것만치 시원합니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오면 그야말로 폭풍이 그친 뒤 같습니다. 마담도 한숨 저이도 한숨-약주만 안 취하시면 잘 오시지도 않고 얌전도 하시는데 하여간 술이 나쁜 음식이야요. 이런 말 했다가 “이놈아 왜 거짓말해서”하고 양떡이나 먹으면 어떻게 합니까. 지가 그랬단 말은 마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이놈 내가 가는 것도 반가우냐. 하…. 


  (서춘은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언론인. 2·8독립선언 조선유학생 대표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편집자 주) 

 

▶선술집 술청에서 본 권덕규(權悳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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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약주 좋아하시지요. 꼭 오후에 댁으로 가시는 길에는 의례히 들러 가시니까요. 그러니까 어쩌다 들르시는 날이 있으면 도리어 저희가 궁금할 만하니까요. 오시면 두 분 아니면 세 분 친구나 함께 오시지 더 많이 여러분이 같이 오시는 적이 별로 적습니다. 

 

 술을 잡수시되 격 있게 잡수십니다. 척척 이야기를 해가면서 잡숫지 아무리 취해서도 연거푸 폭배로는 안 잡수십니다. 이렇게 한 잔 두 잔 다섯 잔쯤이 넘어서부터 그때는 그 작은 키를 돋움질해 가며 농담·재담·괴담이 한데 엉켜서 잔 수를 따라서 상술집 안주 나오듯 합니다. 그도 그렇거니와 같이 오신 손님 중에서 내시는 술이면 여간해서 가실 생각도 안 하시지만 가시자는 말씀도 안 하십니다. 그러기에 그 선생이 어느 때고 혼자 오시는 날이면 가슴이 성큼 합니다. 왜요? 혼자 오시면 몇 잔 안 잡숫고 가시니 말이지요. 가다가 어느 때는 단 한 잔만 잡숫고 가시는 때도 있으니까요. 그때는 어떻게 하시냐고요? 

 

 그런 때도 역시 댁으로 가시는 길이니까 저녁때 더구나 술꾼으로 출출한 김에 한 잔 생각이 무럭무럭 날 때이지요. 이랬던저랬던 하여간 들르시니까요. 쓱 들어서시면서 곧 술청 앞으로 오십니다. 이렇다저렇다 말씀 없고 “큰 거로 한 잔 부~” 큰 것이라니 막걸리 말이지요. 벌써 알아차리고 한 사발 듬뿍 드립니다. 그러면 놓기가 무섭게 쭉 마시시고는 김치쪽 한 점을 집으신 뒤에 “콩 한 잔 주~”하고는 손을 내밀고 일변 왼손을 펴시면 사발 속으로 땡그랑 오전 한 푼이 나자빠집니다. 일변 안주로 받은 콩 한 잔 안주는 주머니로 들어가며 선생의 한 발은 문밖을 내디디십니다. 그 밖에 또 무슨 이야깃거리요? 이런 때가 있지요. 어느 때 혹 딴 손님과 두 분이 오셔서 같이 오신 그 손이 내십니다. 그러다가 마침 다른 측 아시는 손님이 들어오시면 그때는 또 그편 손님들이 한 잔 두 잔 권하십니다. 그런 때에는 같이 온 손님은 한구석에서 적적하게 계십니다. 이런 경우에 만약 먼저 같이 오신 손님보다 나중 오신 편 손님이 아시는 분이 많고 술잔이나 먹을 만치 나갈 손님이면 미안 여부없이 먼저 같이 오신 손님께는 “인제 고만 먹읍시다”하면 그 손님은 자미가 없어서도 셈을 하십니다. 그러면 뒤미쳐서 “나는 이분들과 할 말이 있어 실례합니다”하고 젓가락은 잡은 채 계시니 그 손은 가지 별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말씀을 막 해서 괜찮을까요? 


  (권덕규는 국어학자. 《조선어큰사전》 편찬에 참여했고 1932 12월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원안을 작성한 인물이다.-편집자 주)
 

▶여급(女給)이 본 차상찬(車相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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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선생님이요 어디 그 선생님이 좀처럼 오셔야지요. 다른 카페는 자주 가시는지 몰라도 저희에게는 잘 아니 오시니까 흉이고 칭찬이고 말씀할 거리가 없는걸요. 하긴 그 선생님-어쩌다가 친구 바람에 오시기만 하면 벌써 어디선지 먼저 취하실 만큼 취해서 오시니까 오셔서는 별로 약주는 안 잡수시고 저 애들 데리고 별별 기기묘묘하고 귀청(耳膜)이 따끔따끔할 만치 야릇하고 숭측(흉측-편집자 주)스런 농담에 자미스럽기도 하고 어느 때는 망측도 스러워요. 사실 그분이 이름난 차상찬씨라고 알고 존경하고 보니까 그렇지, 그렇지 않으면 가다가 별 숭칙스러운 농담이나 하시고 여간 점잖은 손님으로는 손대지 못할 여자의 몸…에다 슬그머니 손을 내밀 때는 몸소름이 다 쳐요. 같이 오신 손님이 권하시는 술잔도 받으려 하지 않고 “카페 와서 이런 장난도 못하면 뭐 하러 와” 저희가 좀 싫어하는 기색이 있으면 당장에 “빌어먹을 년”하고 욕을 하십니다 그려. 그러고 하시는 말씀 좀 들어 보시오. “암만해도 일본 계집이 자미가 있어서 조선 계집들은 멋이 없어”하고 일본 여급을 불러다 옆에 앉히고 무어라 무어라 한동안 이야기를 하다가는 또 의례히 “이야나히도 데쿠세가와루이와”하고는 달아납니다. 너무 맘 놓고 말씀했다 나중에 큰 변이나 당하면 어쩝니까.… 네 네 참 한 가지 이야깃거리가 있습니다. 어느 때인가 서너 분이 오셨다가 맥주를 잡숫는데 겨우 두 병을 잡숫더니 무엇이 마음에 맞지 않으시던지 “가이게이(會計)”하고 퉁명스럽게 말씀을 하시더니 지갑을 들고 계시다가 195전 간조(회계) 2원을 내던지고 휘 나가시더군요. 그러니 제게 주시는 팁이 5전 아니야요. 그래도 생각하시고 주신 것이니 영원히 기념하려고 지금도 쓰지 않고 꼭 넣어두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보자시면 오전짜리 한푼 내여 봬드리지요.…하하하하. 

 

  (차상찬은 수필가·시인·언론인. 《개벽》을 비롯하여 《별건곤》 《신여성》 《농민》 《학생》 등 잡지의 주간 또는 기자로서 활약했다.-편집자 주) 

 

▶목욕탕 주인이 본 윤치호(尹致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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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씨! 특별히 정해놓고 우리 탕을 찾아오시는 윤치호씨는 다른 손님과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언제나 탕에를 오시려면 어린 아들 따님을 데리고 오시는데 이런 것쯤은 다른 이도 자녀 간에 같이 오시는 분이 많으니까 별로 특별할 것까지야 없겠지요. 


 그런데 한 가지 꼭 다른 이와 다른 점이 있으니 그것은 조끼를 입고 다니시면서 주머니 세간을 기다란 끈에다 꿰매어 가지고 다니시는 것입니다. 
 


 주머니칼 손수건 수첩…시계 만년필 열쇠 꾸러미…돈지갑 기타 주머니 세간을 모조리 청어장수의 비웃 엮듯이 죽 꿰어 가지고 이것을 또 주머니 속에다 넣고 다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탕에 오시면 먼저 그 주렁주렁 달린 꾸러미부터 내어 맡기시는데 이곳에 오셔서 또 두 가지 더 첨가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안경과 황금반지입니다. 


 하여간 조밀하신 편으로 좋은 성격이시나 실례의 말씀으로 만약 못된 스리란 놈한테 걸리시면 한꺼번에 잃어 버리실까 봐 그것이 걱정 대걱정입니다. 

 

▶기생이 본 조병옥(趙炳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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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사 영업국장으로 계시던 조병옥씨! 그분을 대하기는 요 근자에 주로 신문사 일로 해서 요릿집에 모이시는 회합 때부터입니다. 


 미국까지 가셔서 어느 대학을 마치시고 박사의 학위까지 가지고 계신 어른이라는 말씀을 들은 법한데 비로소 최근 몇 번 그 얼굴을 뵙게 된 것을 보면 아마 박사이신 만치 공부를 많이 하시노라고 도무지 요릿집 같은 곳에는 발 안 들여놓으셨던 모양입니다. 


 처음 뵈었을 때에는 그야말로 얼굴 모습이 실례의 말씀이나 몹시 무섭게 보여서 앞에도 가기 싫을 만치 정이 떨어졌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세 번 차차 낯이 익어가고 또 약주를 많이는 못하시나 다소 잡숫든지 하면 생기신 얼굴과는 딴판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다정하게 굴어주시고 또 같이 오신 여러분의 기분을 어떻게 잘 맞춰주시는지 정말 탄복하였습니다. 


 나는 여기서 사람이란 결코 얼굴 생긴 것만 보고는 참말 그 성격이나 마음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을 비로소 느꼈습니다. 비상히 엄격하신 듯하면서도 무한 유화한 그 점이 처음 사귀는 우리에게 적지 아니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요릿집 보이가 본 송진우(宋鎭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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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점잖으신 어른이요 사회의 명망가시라 어떠한 모임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별로 이렇다 할 흠절이 없으신 분이나 간혹 약주가 과하시든지 하면 그 크신 목소리로 말씀이 좀 많으신 편입니다. 그러나 술 잡숫고 잔소리하시는 거야 어데 선생 한 분뿐이 아니니까 그것은 문제될 것이 없지만, 그 어느 때인가 꼭 한 번 이러한 일을 뵌 일이 있습니다. 
 


 어느 때 몇몇 분이 놀러 오셨을 때인데 시간도 엔간히 길었고 또 약주도 꽤 많이 들어갔을 때인데 갑자기 송 선생 계신 방에서 흑흑 흐느껴 우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서 곧 뛰어들어가려다 혹시 큰 꾸중이나 듣지 않을까 하여 밖에서 머뭇하며 가만히 엿들으니까 송 선생이 약주가 잔뜩 취하신 모양이신데 어떤 사원 하나를 붙잡고 우시면서, 
 


 “… 엉엉… 내가 길러내듯 한 아무개 놈이 나를 배반하였단 말이야.… 흐…흐흐… 그놈이”하시는 겁니다. 그때 나는 혹시 다른 방 손님이 이 소리를 듣고 그분이 송 선생인 줄 알든지 하면 어쩌나 하고 속으로 어찌나 송구하였는지 모릅니다. 
 


 아마 선생은 평소에 가장 신뢰하던 어떤 분이 선생을 배반한 것이 뼈에 사무쳐서 원한이 되었던 모양이지요. 그러기에 약주 잡수신 후 그 울분이 터져 나오셔서 주위와 환경을 모두 잊으시고 서러워하심인 줄 알았습니다.

 

▶급사가 본 조만식(曹晩植)
○○童

 

조선일보 사장 조만식 선생! 나는 이번 새로 속간되는 혜택에 처음으로 뽑혀 들어간 풋내기 급사인데 처음에 선생님을 생각할 때에는 얼굴도 퍽 위엄이 있고 또 옷도 좋은 양복을 입으시고 또 금테 안경을 쓰시고 금 시곗줄을 늘이시고 번쩍번쩍하는 칠피 구두를 신으시고 또 상아로 만든 단장을 들고 다니시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입사하던 날 정작 사장 선생님을 뵙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사장실에를 들어가 보니까 웬 헙수룩한 어른 한 분이 앉아 계신데 암만 보아도 시골서 갓 올라오신 선비 같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마 사장 선생님을 찾아 뵈러 온 손님인 게다’ 생각하고 머뭇머뭇하고 있으려니까, 


 “왜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물으시는 고로 


 “네… 네… 저… 저… 사장 선생님을 뵈려고요. 


 하고 우물쭈물 대답하였습니다. 


 “그럼 얼른 말을 하지 왜 그리 섰어…. 


 그제야 나는 이 어른이 사장 선생님인 줄 알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머리도 아무렇게 깎으시고 수염도 안 깎으신 데다 조선 수목 두루마기 더구나 무릎까지 올라오는 짤따란 것-그리고 더욱 놀란 것은 버선에다 고무신을 신으신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모든 점을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수그려졌습니다. 


 선생님의 이 놀랍게 검소하신 데 대하여 진정으로 탄복하였던 까닭입니다.

 

〈4〉 지식인들의 소소한 일상

탈모에 대모(玳瑁)테 안경 차림이 주요한의 특징”

⊙ 탐정소설가 김내성의 산책로는 심야 무시무시한 곳 … 화가 정찬영은 로맨틱한 철로길

⊙ 소설가 박태원은 잔등에 아주 좋은 ‘복점’이 있고, 이왕직아악부 이종태의 얼굴은 곰보

 

20세기 초 한국의 모던 정신은 주자학적 질서가 아닌 자본주의적 일상을 통해 드러났다. 신문·잡지의 기사도 일종의 중인(中人)사상을 담은 세속화한 이야기가 중심이었다. 사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을 움직이는 실무진은 중인 계층의 벼슬아치들(개화파)이다.

 

중인사상이란 ‘문명개화에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삶의 방식’(김윤식의 《한국문학의 근대성과 이데올로기 비판》)을 말한다. 1910년 국권을 상실했을 때 양반이든, 중인이든, 천민이든 똑같이 망국인의 처지가 됐다. 이들이 속한 계층과 상관없이 갖게 되는 의식이 서구 자본주의 앞에 알몸을 드러낸 중인의식이다.

 

《조선일보》가 발행한 잡지 《조광》의 1937년 9월호에 실린 ‘각계 탐조등’ 제하의 〈그들의 산보로(散步路)〉, 〈안경 쓴 이, 안 쓴 이〉, 〈몸에 있는 흠〉, 〈담배 피는 사람〉 등 4편의 기사엔 당대 지식인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설가 박종화·이효석와 시인 임화·유치환, 문학평론가 김환태, 개성박물관장 고유섭, 음악가 박경호 등을 등장시켜 각자의 생활습관 등을 시시콜콜하게 적고 있다

 

《조광》이 소개한 이들 지식인이야말로 당대 근대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몸소 익혀 온 제2기 개화파들이다. 식민지라는 비극적 당대 현실 대신, 주변과 같은 일상적인 삶에 대한 탐색은 일종의 근대의식, 가치중립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을 의미한다. 이 가치중립적 세계관이 나중 시민의식 성장의 토대가 된다.  기사는 언문일치가 안 돼 ‘~습니다’ 체와, ‘~한다’ 체가 혼용돼 있다. 원문을 충실히 따르되 현대어 표기로 고쳐 소개한다.

 

▲《조광》의 1937년 9월호 표지.

 

〈그들의 산보로〉 각계 탐조등 기일(其一)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씨는 “산보는 허튼걸음이라 가고 싶으면 때와 장소를 가릴 게 없다”고 하여 생각나는 대로 집을 나가고, 이극로(李克魯)씨는 댁에서 전차길 가는 데가 숲속이라 30분은 걸어야 하니 자연 산보가 된다고 하고, 최상덕(崔象德)씨는 일에 끌려다니는 것이 곧 산보지()라 하고, 윤성상(尹聖相)씨는 봄·가을이면 시외로 산책을 하지만 가끔 본정통(本町通지금의 충무로-편집자)을 도는 것이 씨의 산책로이다. 시골에 있는 전무길(全武吉)씨는 매일 아침 뒷산에 오르고 서광제(徐光霽)씨는 보통 때는 산보를 하지 않고 이걸 모아 두었다 피서지에 가서 마음껏 산보를 한다고 한다. 천연정(天然町·서울 서대문구 천연동-편집자)에 박혀 있는 회월(懷月) 박영희(朴英熙)씨는 오후에 송림 속으로 가고, 개성 호수돈(好壽敦)의 임학수(林學洙)씨는 석양 혹은 밤 깊은 때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부산동(扶山洞) 또는 그 앞 인적이 고요한 행길로 산보를 하고, 김환태(金煥泰)씨는 댁이 내수정(內需頂·서울 종로구 내수동-편집자)이라 사직공원으로 산보하기로 작정은 해 놓고 실행을 못하고, 정근양(鄭槿陽)씨는 월요일 주간(晝間)에 한하여 본정이나 장곡천정(長谷川町·서울 소공동-편집자)으로 가고 윤기정(尹基鼎)씨는 저녁 때 본정통으로 간답니다.

 
유치환(柳致環)씨는 웬일로 깍두기 코스를 그대로 밟고, 김내성(金來成)씨는 탐정소설가 답게 심야 새로 1시나 2시 특별히 으슥하고 무시무시한 장소로 간다고 합니다. 화가 정찬영(鄭燦英) 여사는 저녁 뒤에 어린이 손목을 잡고 로맨틱한 철로길을 넘어 소풍한다고 하며, 의사 이선근(李先根)씨는 아침에는 삼청정(三淸町·서울 삼청동-편집자), 저녁에는 한강이나 혹은 본정통으로 간답니다. 음악가 박경호(朴慶浩)씨는 무시·무정처, 개성(開城)박물관 고유섭(高裕燮)씨는 산보를 잘 안 하는 분이오. 이효석(李孝石)씨는 뜰 앞과 가까운 기자릉(箕子陵) 쪽으로 걸으며 생각에 깊고, 조선문학 연구가 방종현(方鍾鉉)씨는 일정일처지(一定一處地)로 다니는 산보는 좋지 않다고 생각나는 대로 산보를 다니고, 안회남(安懷南)씨는 본정통으로 많이 다닌답니다. 김광섭(金珖燮)씨는 방향 없는 산보로를 걷고, 김진섭(金晉燮)씨는 특별히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다니는 것이 감정에 맞는다고 합니다. 양주동(梁柱東)씨는 별로 산보를 하지 않고, 임화(林和)씨도 산보 안 하는 파. 박태원(朴泰遠)씨 역시 시간장소를 정해 놓고 산보하지 않는다니 산보엔 무취미파인 모양입니다 


 김남천(金南天)씨는 가회정(嘉會町·서울 가회동-편집자)에 사는 이만큼 삼청공원으로 발길을 옮기고, 이헌구(李軒求)씨는 수시 산보를 하는데 칸트가 못 되어 일정한 시간, 일정한 장소를 정하지는 못했다고, 이일(李一)씨는 조조(早朝) 6~7시 혹은 저녁 7, 8시 새에 삼청동으로 산보를 가고, 대동(大同)농촌사의 이훈구(李勳求)씨는 저녁 때 한적한 곳으로 다닌답니다. 여의(女醫) 길정희(吉貞姬)씨는 몸이 건강하니 산보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데 아마 산보를 하지 않고도 넉넉한 약으로 산보 이상의 효과를 얻으시는 모양. 이왕직아악부의 이종태(李鍾泰)씨는 산양 젖 짜 먹는 것으로 산보 삼고, 이석훈(李石薰)씨는 남 다 자는 밤거리를 혼자 도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엄흥섭(嚴興燮)씨 역시 남들이 모두 자는 밤 창의문(彰義門) 고개를 넘다가 대()경성의 네온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말없이 이상에 잠기는 것이 씨의 산보 코스라 한다
 


 
〈안경 쓴 이, 안 쓴 이〉 각계 탐조등 기이(其二)

▲《조광》이 소개한 이들 지식인이야말로 당대 ‘근대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몸소 익혀 온 제2기 개화파이다. 
왼쪽부터 임화, 박종화, 이극로, 주요한, 김내성.

  

대모테(거북의 일종인 대모·玳瑁의 견고한 등판으로 가공한 안경테-편집자) 로이드안경을 크게 쓴 이는 주요한(朱耀翰). 탈모(脫帽)에 로이드안경은 종로화신의 쌤물(해독불가-편집자)인지는 몰라도 문인으로 백화점 전무가 된 주씨의 특징. 시인 이일씨는 돋보기를 쓰고 소설가 구보(仇甫)의 본명 박태원씨도 로이드 식으로 현재 24도의 안경을 쓰는데 45도 깊어야 더 잘 보일 것이라는 것이 씨의 발명(發明). 전무길씨는 36도의 안경을 쓰고, 유치환씨는 변장할 때만 안경을 쓴다는데 변장한 것을 못 보았으니 그 안력(眼力)이 좋은 모양이고, 임학수씨는 근시 20도를 쓰고 최상덕씨는 도()는 없어도 피로를 낫게 하기 위해서 자외선 방풍경을 쓰고, 김내성씨는 괴테를 본받아 안경 쓴 이를 싫어하니 자연 안경이 없고, 박종화씨는 난시에 근시를 겸하여 안경을 만들고도 서먹서먹해 쓰지를 못한다고 한다. 근시안 10도의 소유자는 김진섭씨요, 김광섭씨는 몇 도 안경인지는 모르나 대모테를 쓰고, 안회남씨는 7도 안경을 쓰고 양주동씨는 강도(强度)의 근안(近眼)안경을 걸기가 싫어 쓰지 않는답니다. 김남천씨는 영화연극을 볼 때에 한해서 R 1.00, L 1.25도의 안경을 쓴답니다 


 박경호씨는 안경을 쓰는데 도수는 자기도 모르나 안경을 벗으면 온 세상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을 보는 것 같다 합니다. 권덕규(權悳奎)씨는 60(), 김복진(金復鎭)씨는 근시 22, 김관(金管)씨는 근시 좌 20, 30
 

  
〈몸에 있는 흠〉 각계 탐조등 기삼(其三)

▲《조광》의 1937년 9월호에 실린 ‘각계 탐조등’ 제하의 〈그들의 산보로(散步路)〉 기사.

 

남의 몸에 있는 비밀을 아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을 알아 그 비밀을 천하에 공개하는 것도 흥미있는 일의 하나입니다 

 
조선어학회 이극로씨는 몸 두 곳에 흠이 있는데 절대로 비밀을 엄수하시고, 김환태씨는 어릴 때 씨름을 하다 삐어서 왼편 팔이 좀 구부러졌고, 임학수씨는 바른편 귀 밑에 조그만 혹이 하나 있고, 제국병원 정근양씨는 수술한 자리의 흠이 하나 있답니다 
 


 이기정씨는 배에 직장염 수술을 한 곳이 흠져 있고, 김내성씨는 한 곳이 있고, 유치환씨는 있는 데도 있고 없는 데도 있다니 흉이 있는지 없는지 어리삥삥하고, 소아과 이선근씨는 어려서 석전(石戰)을 하다 돌에 맞아 두부에 두 곳이 있고 또 좌편 뺨에 흠이 있는데 이것도 역시 어려서 다리에서 떨어져서 난 흠이라니, 그렇게 지금은 얌전한 분이 어려서는 쌈 꽤나 한 모양. 음악가 박경호씨는 눈거죽 속과 손목에 수술한 자리가 있고 궁둥이에는 빈대 자국이 여나문 된다나요. 고유섭씨는 다른 흠은 없고 “두대(頭大) 체력이 흠이요” 하고 자백을 하고, 이효석씨는 몇 군데 흠이 있으나 밝히지를 않고, 방종현씨는 몸에 큰 흠이 있는데 절대 발표는 않고, 안회남씨는 이마 위에 흠이 있답니다.
 


 박태원씨는 잔등에 아주 좋은 ‘복점’이 있고, 김남천씨는 어려서 동무와 싸우다가 얼굴에 할퀸 자리가 있는데 지금은 퍽 없어졌다 하고, 이헌구씨는 왼편 손바닥이 어려서 물에 데어 잘못되어 있고, 이일씨는 우각(右脚) 상부에 동전(크기의-편집자) () 흑점이 있고 또 우수(右手) 소지(小指)가 까부러졌습니다 
 


 이종태씨는 얼굴이 곰보라 웬 몸의 흠을 얼굴에다 내어놓고 다니고, 월탄 박종화씨는 이마에 하나, 등에 하나, 머릿속에 하나 이렇게 전신에 삼태성(三台星) 같이 꽃 세 개가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상법(相法)에 의하면 귀인이 아니오?” 하고 껄껄 웃는다. 최상덕씨는 마음의 흠은 많아도 몸에는 흠이 없다고 한다. 부민(府民)병원 이성봉(李聖鳳)씨는 뜸자리 3곳이 있고, 백철(白鐵)씨는 몸에 기미가 많고, 이영민(李榮敏)씨는 운동하다 다친 흠이 있고, 권덕규씨는 곰보이다.

 

 대개(大槪) 이만하기로 하고 후일 다시 쓰기로 하자

〈담배 피는 사람〉 각계 탐조등 기사(其四)

글 쓰는 분들 중에 담배를 피는 분, 나 정도 피면 얼마 안 피운다는 분, 또 이제 그 조사기를 실어 보기로 하자. 

 

 탐정소설가로 새로이 등장한 김내성씨. 보기에는 그리 건강체로 생기지는 않았는데 하루에 10갑—말하자면 100. 이것을 하루 취침 시간을 8시간 잡고 16시간 동안을 눈 뜨고 있는 시간으로 잡고 본다면 1시간에 6, 그러니깐 반시간에 3대를 피우니 굉장한 애연가라고 할 것이다  


 그 다음 시인 월탄이 하루에 40, 영화비평가 서광제씨는 30, 또 에세이스트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김진섭씨가 30, 동아의 서항석(徐恒錫)씨가 30, 임화씨가 30, 그 다음으로 대개 10대 가량으로 박태원 김광섭 이헌구 엄흥섭씨 등을 들 수 있다. 김복진(金復鎭)씨는 조일(朝日) 1갑과 마도로스 타입으로 5대를 태우고, 김관씨는 40, 채만식씨도 40 
 


 그리고 하루에 평균 한 개비를 피운다는 괴벽을 가진 안회남씨가 있고, 한 대도 못 피는 파()로 이전(梨專)에 이태준(李泰俊), 김상용(金尙鎔)씨가 있고 북평(北平) 가 있는 주요섭씨, 문예평론가 백철씨, 이일씨, 시인 김기림(金起林), 김환태, 방종현, 전무길, 박용철, 윤기정, 유치환, 김남천, 최상덕씨 등 모두 무연파(無煙派)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담배를 필 줄 알면서도 못 피는 소위 금연파로 숭전(崇專)에 양주동씨가 있고 천연정에 박영희씨가 있다. 개성박물관장 고유섭씨도 무연파요, 음악가로 유머 소설 쓰시는 박경호씨는 하루에 한 대도 안 태신다니 역() 무연파일 것이다.

 

4〉 근대의 상징 ‘철도’

“우렁찬 기적, 딴 세상 절로 이뤘네”

▲ 1910년대 열차모습. 사진은 익산역 개통당시의 증기기관차다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이 세상에 나온 지 올해로 꼭 100년이다. 《무정》은 1917 1 1일부터 그해 6 14일까지 총 126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됐다. 한국소설의 기원이 된 《무정》은 우리 문학사에서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조연현)이요, 초창기의 신문학을 결산해 놓은 ‘시대적인 거작(巨作)(백철)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무정》의 주인공은 소설 속 이형식이나 박영채, 김선형이 아니다. 바로 기차다

 

  기차를 통해 기연(奇緣)이 이어지고 과거와 오버랩되며 반전이 일어난다. 문학평론가 김철은 《무정》에 등장하는 ‘기차’야말로 이 소설의 숨은 주인공이라고 진단한다
  

  당대 기차, 엄밀히 말해 증기기관차는 근대문명을 상징하는 ‘괴물’이자 자본주의의 기호다. 요란한 굉음과 길게 뻗은 철로, 거대한 잿빛 연기를 뿜으며 육중한 몸을 일으키는 기차만큼 당대인들을 놀라게 만든 물건은 없었다. 육당 최남선의 창가 〈경부철도가〉(1908)는 이렇게 시작된다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汽笛) 소리에 /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 /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 /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 / 우리네와 외국인 같이 탔으나 / 내외 친소(親疎) 다 같이 익혀 지내니 / 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뤘네

  - 최남선의 〈경부철도가〉 중에서

 

경인선 철도 개통식 장면. 노량진 역이다. 


 
〈경부철도가〉는 문명개화가 가져온 ‘철도 쇼크’를 노래한 것으로 기차의 빠르기를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라고 읊은 점이 흥미롭다. 기차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 밖 모습을 통해 내면을 성찰케 하는 ‘풍경의 발견’을 가져다주었다. 또 기차시간의 출발·도착을 의미하는 ‘시간의 표준화’, 한반도를 가로질러 중국 대륙과 시베리아로 이어진 ‘공간의 정복화’가 가능해진 점도 기차를 통해서다
 

  《월간조선》이 소개하는 〈지구를 나날이 긴축(緊縮)시키는 철도문명의 발달사〉는 1929년 월간잡지 《학생》 9월호와 10월호에 걸쳐 실렸다. 철도가 가져다준 20세기 문명의 변화를 담은 글이다. 각국의 이해관계로 고단했던 경인선 개통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사실 구한말 조선에서 철도사업은 열강들의 먹잇감이었다. 중국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 삼기 위한 일본의 야욕이 철도부설에 담겨 있었다
  

  국내 최초 철도인 경인선은 1899 9 18일 개통됐다. 미국인 제임스 모스가 첫 삽을 떴으나 자금난을 겪자 부설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인천항만공사 공식 블로그에 따르면, 일본이 부설권을 가져오기 위해 ‘조선이 정치적으로 어지럽다’는 거짓 소문을 미국에 흘렸고, 이로 인해 미국 투자자들이 자금을 회수, 모스가 자금난을 겪게 됐다고 한다
  

  원문을 충실히 따르되 현대식 표기로 고쳤다

 
  〈5〉
지구를 나날이 긴축(緊縮)시키는 철도문명의 발달사

  최진순(崔瑨淳)  

1. 서언

 교통기관의 발달로 인문의 진보와 함께 급격한 발전을 하여 육지로 해양으로 항공으로 천만리 장정을 단시간에 왕래하게 된 것은 참으로 경찬할 현상이다. 더욱 지구의 넓은 육지면을 거미줄과 같이 늘여놓은 철도망의 총연장은 160(粁·킬로미터)이다. 즉 적도 장() 40배가량이나 된다
  

  이와 같이 위대한 업적이 비교적 단기간 즉 1세기 이내에 된 것이다
  

  2. 일본 철도 연혁

▲1929년 9월호 《학생》 표지. 

 

  일본에서 철도부설(敷設) 계획은 명치(明治) 이전부터 발단되었다. 경응(慶應) 3(서기 1867) 12 23일에 당시 덕천(德川)막부 노중(老中·직명) 소립원일피○(小笠原壹○)씨가 미국공사관부() 서기관 호루멘 씨에게 교섭하여 미국인의 손을 빌려 경빈(京濱·게이힌-편집자) 간 철도선로 부설계획을 하려 하였으나 마침 그때에 덕천막부가 정권을 봉환(奉還)하게 되어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었다. 그 후 명치 2(서기 1869)에 정부는 동경과 경도(京都·교토-편집자)~대판(大阪·오사카-편집자) 간 급() 오우(奧羽)로부터 산양(山陽)·산음(山陰)·서해 제도(諸道)에 이르는 철도에 대하여 결의하고 우선 동경과 대판 병고(兵庫) 간의 간선과 동경~횡빈(橫濱·요코하마-편집자) 간의 지선급 비파호(琵琶湖·비와코-편집자)로부터 돈하항(敦賀港·쓰루가항-편집자)에 달()하는 노선을 예정하고 명치 2 10월에 먼저 경빈 간에 경비 50만냥으로 경빈 간 상인에게 위탁하여 부설 경영하려고 하였으나 상인 등은 위험을 느껴 이에 불응함으로 부득이 정부는 이달종성(伊達宗城·다테 무네나리-편집자), 대외중신(重信·오오쿠마 시게노부-편집자),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편집자) 등 제씨로부터 이 사업을 제임(提任)케 하고, 또 외채 100만 방(磅·파운드-편집자)을 모집하여 사업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명치 3 3월에 정부는 민부대장(民部大藏) 양성(兩省)내에 철도계를 두고 상야경범(上野景範·우에노 가게노리-편집자)으로 이 사무를 총리하게 하고 영국인 ‘에드몬드 모렐’ 씨가 공사 간독장(看督長)이 되어 동경 정거장의 위치를 정하고 4 4 3일부터 선로측량에 착수하고 동 12일에 석적(汐笛) 근방부터 공사를 착공하고 또 대판, 신호(神戶·고베-편집자) 양처(兩處)에 출장소를 두어 관서철도국이라고 칭하고 8월에 우선, 신호~대판 간 선로측량에 착수하고 동 11월에 본선공사를 기공하여 동서가 상응하여 공사를 급속히 진행시켰다
  

  (중략)
  

  명치 22년도 말에는 개업선 전장이 1136(哩·mile을 의미-편집자)에 달하였다. 더욱 모든 문화와 경제계도 익익왕성하여 철도공사도 일층 완성 개량되고 영업시간도 매우 신속하게 됐다. 명치 43년에 국가 백년지계로 약 23000만을 써서 현재 선로를 광궤(廣軌)철도로 개축하기로 계획하였다. 그 후 점차 개량 증설하여 8484리란 거장(巨長)한 선로를 유()하게 되어 동양에서는 제1일의 철도망을 가지게 됐다. ()이나 아직도 구미 각국에 비하여는 불편한 점이 적지 않다.  


  
4. 조선 철도

▲〈지구를 나날이 긴축(緊縮)시키는 철도문명의 발달사〉는 1929년 월간잡지 《학생》 9월호와 10월호에 실렸다.

 

  창설시대

  . 철도창설 이전 조선의 교통 : 사회가 진보되지 못하고 민족이 미개한 시대에는 사람들이 보답(步踏)하여 생()한 경로와 천연으로 항행할 수 있는 하천이 유일한 교통운수의 기관이다. 조선에서는 경성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 방으로 도로의 계통이 있었다


  
제1로(路) 《서북(西北)》 경성~의성 간 이정범(里程凡) 1086리(이전 10리가 지금 1리). 중요한 경유지는 고양(高陽), 개성, 황주, 평양, 박천, 의주. 

  제2로 《동북(東北)》 경성~경흥 간 이정범 2414리. 중요한 경유지 수유리, 김화, 수양, 덕원, 함흥, 북청, 단천, 길주, 종성, 부령, 무산, 회령, 은성.  
  

  제3로 《동(東)》 경성~평해 간 범(凡) 810리. 중요 경유지는 망우리, 양주, 양근, 지평, 원주, 강릉, 울진. 
  

  제4로 《동남(東南)》 경성~부산 간 범 907리. 중요 경유지는 한강, 용인, 충주, 문경, 대구, 청도, 양산.
  

  제5로 《남(南)》 경성~제주 간 범 2016리(해로 970리). 중요 경유지 동작진(시흥), 과천, 수원, 천안, 공주, 약산, 여산, 정읍, 장성, 영암, 해남. 
  

  제6로 《서(西)》 경성~강화 간 범 130리. 중요 경유지는 양화도, 양천, 김포, 통진, 강화.  

춘원 이광수.

 

  이외에도 간선이 있고, 또 지선이 유하며 도중 중요한 간소(簡所)에는 역(), (), () 등의 설비가 유하고 또 하천에는 도선(渡船)의 설비가 유하였다
  

  교통운수기관으로는 물자의 운반용에는 우(), (), 여라(驢騾·노새와 당나귀-편집자), 대차(大車), 경차이었고, 승용으로는 우마, 가마, 보교, 남여(籃輿·벼슬아치가 타는 작은 가마-편집자), 초헌(軺軒·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던 수레-편집자) 등이 유하였으나 대개는 보행으로 1일 수 리의 길을 왕래함에 불과하였다
  

  . 경인철도의 개통 : 서기 1895(명치 28) 1월 청국(淸國)과 전운이 분분할 때에 일본 내무대신 정상형(井上馨·이노우에 가오루-편집자)은 주한공사가 되어 와서 한국정부에 대하여 일찍 경인철도특허계약에 관하여 체결한 잠정합동조관(條款)의 세목을 결정하려고 그 교섭을 시작하였으나 용이히 해결을 짓지 못하였다. 전년 말부터 경인(京仁), 경부(京釜) 양 철도선로를 답사한 체신기사 선석공(仙石貢·센고쿠 미쓰구-편집자) 일행의 보고에 의하여 일본 정부는 양 철도를 분리하여 우선 경인철도 부설에 관한 협정을 지으려고 다시 교섭을 시작하였다. 이때 구미 제국은 여기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드디어 5 4일에 영, , , 4국 대표를 외부대신 김충식(金充植)씨에게 공문을 보내어 ‘철도 등의 이권을 전혀 일국(一國)에만 허함이 한국 급 기타 각국 상민에게 불리하다’는 경고가 있어 이 교섭은 여의히 되지 못하였다.
 

  미국인 ‘제임스 알 모스(James R. Morse-편집자)’가 구() 한국정부에 대하여 반도 전부 간선철도를 청부(請負)하려고 미국공사를 통하여 교섭하였으나 한국정부와 일본과의 잠정조관 체결이 성립되어 모스는 부득이 이 교섭을 중지하고 전후 사세(事勢)만 엿보고 있던 중 철도부설권 확정에 관한 교섭이 지연되고 더욱 한()정부는 일본정부에 대한 태도가 좋지 못함을 간파하고 다시 특허운동을 한 결과, 구 한국정부는 서기 1896(명치 29) 3 29일부로 경인간 철도부설의 특허를 모스에게 주었다
  

  이 계약은 본()철도 기공기를 특허한 일자로부터 12개월 이내로 하고, 기공 후 3년간 준공하기로 하여, 만약 여기 위반할 시는 모든 계약은 무효라고 규정하였으므로 모스는 곧 회사를 조직하고 측량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이와 같이 모든 교섭이 실패에 돌아가고 미국인 모스에게 철도부설권이 가게됨에 불만불평을 가지었으나 어이할 수 없었다

 

▲《무정》은 1917년 1월 1일부터 그해 6월 14일까지 총 126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됐다.

 

  모스는 측량한 결과 전선(全線)연장이 26리여(哩餘)이요, 선로는 약 1개년, 한강교량은 2개년을 요()할 예산으로 인천~경성 간 공사 기공식을 서기 1897 3 22일에 거행하고 실지(實地)에 착수하였다. ()이나 모스는 자금조달에 곤란이 생하였다. 미국 자본가들은 너무도 원격(遠隔)한 곳에 투자하기를 싫어하여 모스는 점점 곤란한 입장에 입()하여 부득이 부설권 양도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당시 경부철도부설위원 삽택영일(澁澤榮一·시부자와 에이치-편집자) 등은 외무대신 대외중신의 찬성을 얻어 경인철도를 양수(讓受)하기를 결정하고 교섭을 진행하여 경인철도 인수조합을 조직하고 서기 1897 5월에 횡빈에서 모스와 양수계약을 조인하고 계약금 5만불을 주었다. 그 후 조합에서는 공학박사 선석공을 감독기사장으로 하고, 모든 공사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모스는 6 13일에 돌연히 계약금 증가를 요구하여 만약 불연(不然)이면 계약금 외 상당한 부상금을 지불하고 계약해제를 요구하였다. 조합은 정부와 여러 번 협의한 결과 해()철도 외 부속물 등으로 제보(提保)도 하고 횡빈정금(正金)은행으로 100만원 해관(偕款)계약을 성립시키고 계약금 증가 요구를 철회시켰다

 

  이와 같이 경인철도 공사는 진행되었으나 정거장 설비와 선로의 구배(勾配) 기타 공사상에 모스와 의견이 충돌된 분규가 일어나서 여러 가지로 문제가 되었다가 겨우 해결을 지었다. 익년 3월에 모스는 새로 불국(佛國프랑스-편집자) 신지게트(신디케이트-편집자) 대표 크리고노의 300만원으로 본 철도를 양수하겠다는 말을 듣고 조합에 대하여 전매(轉賣)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모스로부터 시시(時時)로 추가 증불(增拂)의 요구를 받으며 공사 불완전을 염려하는 조합 측에서는 다시 모스의 교섭을 문()하고 미준공 현상대로 매수코저 하여 서기 1899 12월에 모스와 계약을 확정하고 외무성으로 한국정부에 대하여 이 교섭의 승인을 얻어 서기 1899 3 29 1702452원을 모스에게 지불하고 경인철도는 완전히 모스와 관계를 끊게 되었다
  

  경인철도 인수조합은 합자회사로 변경하고 금()자금을 725000원으로 하였다. 모스가 한 공사에 대하여 모든 결함을 수선 개량하고 일층 속히 공사를 진행시켜 서기 1899 9 13일에 인천~영등포 간 공사가 완료되어 동월 18일부터 동구 간 20리에 가영업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조선에서 철도개통의 효시이다. 더욱 동년 동월 30일부터 경성까지의 공사를 진행시켜 서기 1900 6월말에 한강교량을 준공하고 궤조(軌條·레일-편집자) 인연(引延·잡아당겨 늘임-편집자)도 완성되어 동년 7 8일에 경인 간 25리를 개통되어 경인선이 완성되었다. (이하 생략)

 

〈6〉 2017. 2월호  근대의 희로애락 ‘유행가’

“황야(荒野)를 달리는 인생아. 너 가는 곳 어대냐”

⊙ 유행가는 근대의 표정… 우리 민족의 진솔한 목소리
⊙ 윤심덕의 ‘사(死)의 찬미’, 한국 가요사상 최초의 인기곡

▲일제 강점기 당시 경성 종로2가에 있던 ‘조선 축음기 상회’ 모습. 

 

  유행가는 근대의 표정이다. 그 표정에는 사랑, 이별, 슬픔, 망향 등 원초적 감정과 나라 잃은 설움이 묻어 있다. 식민지 격동의 시대를 산 우리 민족의 진솔한 목소리다. 유행가가 본격화되는 과정에 민요와 동요, 가곡도 한국 가요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고산(新高山)이 우르르 기동차 가는 소리에 구고산(舊高山) 큰 애기 반봇짐만 싸누나.(민요 ‘신고산 타령’ 중에서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윤극영의 ‘반달’ 중에서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조두남의 ‘선구자’ 중에서) 


 
유행가의 확산은 일본 레코드 자본의 국내 상륙과 관련이 깊다. 1907년 미국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원반(圓盤) 레코드 〈양산도〉를 발매한 것이 국내 최초다. 당시 레코드는 ‘소리판’, 축음기는 ‘유성기’라 불렸다. 1920~30년대 레코드계 스타는 당대 명창이던 송만갑·이동백·정정렬·김창룡·김창환이다. 다섯 명을 ‘국창(國唱)’이라 불렀다.   


  1925
년 처음으로 본격적인 유행가가 나왔다. 채규엽(蔡奎燁)이 부른 ‘봄노래’가 시초였다. 학생 사이에서 인기를 끌면서 일본의 콜럼비아 회사가 서울에 지점을 내고 신인가수 선발 콩쿠르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정사(情死) 사건’으로 유명한 윤심덕(尹心悳) 1926년에 부른 ‘사의 찬미’는 부유층의 전유물인 레코드를 일반에 널리 보급시켰다. ‘사의 찬미’는 한국 가요사상 최초의 인기곡으로 꼽힌다
 


  반면 한국인이 최초로 작사·작곡한 대중가요는 ‘황성옛터’다. 1928년 발매될 당시 곡명은 ‘황성의 적(). 빅타 레코드에서 출시, 순식간에 5만 장이 판매됐다고 전한다. 이 노래를 부른 이애리수(李愛利秀)는 ‘민족의 연인’으로 스타 반열에 올랐다.
 


  
오노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되돌아 꽃 피고 새 우는 이 봄을 노래하자.(‘봄노래’ 중에서


 
광막(曠寞)한 황야(荒野)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어대냐.(‘사의 찬미’ 중에서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의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황성옛터’ 중에서)


 
태평양전쟁을 전후해 8·15까지는 가요의 암흑기다. 전쟁에 반하는 노래는 부를 수 없었고, 경쾌한 리듬의 멜로디도 전쟁의욕 저하를 이유로 배제됐다


 
잡지 《사행공론》 1938 9월호에 실린 〈조선 유행가의 변천〉은 시인 이하윤(異河潤)이 썼다. 당시 이하윤은 콜럼비아 레코드의 문예부장이었다. 이 글은 초창기 한국 가요를 설명하는 귀중한 자료다.  


  
〈조선 유행가의 변천〉 대중가요 소고
  
이하윤(異河潤)
  

▲일제 때 간행된 잡지 《사해공론》 1938년 9월호 표지(왼쪽). 
《사해공론》에 실린 이하윤의 〈조선 유행가의 변천〉.

 

  유행가라고 하면 누구나 레코드를 연상할 만치 그 관계가 깊다. 그러나 우리가 유행가의 기원을 찾으려면 물론 민요나 잡가, 속요 등과 연락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오히려 다른 일방으로 창가 혹은 동요의 유행을 더듬어 상고(想考)하지 않으면 안 될 줄 생각한다 


 
‘학도야~’ 하는, 또는 ‘공부할 날 많다 하고~’ 등으로 시작되는 ‘근학가(勤學歌)’라든가, ‘열차가’ ‘축구가’ ‘망향가’ ‘관동 8경가’류의 창가, 그리고 서양가요의 번역, ()하면 ‘매기의 노래’(매기의 추억), ‘클레멘트의 노래’ 또 서과서(書科書)로부터 퍼져 나온 ‘카나리아의 노래’ 등은 ‘카츄샤’ ‘장한몽(長恨夢)’ ‘이 풍진 세상을’ ‘지난 엿새 동안~’ 등과 시기를 전후하야 그 유행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이 동요가 유행하던 그 시대에는 지금 있는 것 같은 유행가는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야 윤극영 작곡의 ‘푸른 하늘 은하수’ 하는 ‘반달’을 위시하여 ‘봄 편지’ ‘오빠생각’ 등의 압도적 유행은 여기 특기할 만하며 따라서 그 당시에는 동요단체의 조직, 동요집 출판, 동요 레코드의 제작 등이 왕성하였으며 뒤를 이어 인기를 잠시 집중시킨 것은 윤심덕(尹心悳)의 가요 레코드라 하겠다. 정사(情死)를 앞두고 ‘다뉴브 왈츠곡’에 작사·취입한 ‘사()의 찬미’가 한동안 유행계의 물의를 일으킨 기억도 너무 또렷하다

 

▲김우진과 윤심덕. 국내 최초의 성악가인 윤심덕과 극작가 겸 연극운동가 김우진의 비극스토리는 당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은 1926년 8월 4일 시모노세키와 부산 사이를 운항하던 관부 연락선(德壽丸)에서 투신했다.

 

  이렇게 레코드 예술이 진전됨에 따라 ○창(○唱, 판독불가·편집자주)이라는 데서 소위 유행가란 명목으로 ‘낙화유수’니 ‘세 동무’니 ‘암로(暗路)’니 ‘봄노래’니 ‘방랑가’ ‘오동나무’ 등 아직도 귀에 새로운 가요의 유행을 보게 되었다. 그 대부분이 방랑을 노래한 것이었고 ‘봄노래’만이 비교적 씩씩한 기상을 띤 노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 그 대체적 경향이 역시 창가의 범주를 확실히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만은 사실이겠으며 더구나 편곡, 그 반주 등은 오늘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치 거리가 있다. 그러자 이애리수(李愛利秀)가 부른 ‘황성(荒城)의 적()’은 경향(京鄕)을 물론하고 새로운 ‘쇼크’를 주어 방방곡곡 청춘남녀의 입에서 입으로 그 유행을 용()하게 되니, 아직까지 채규엽, 강석연(姜石燕), 이애리수, 이정숙(李貞淑) 등 몇 사람 못 되는 레코드 가수의 수효가 늘고 작곡하는 사람이 일가를 이루게 되고 회사 측으로서도 한층 이 방면에 새로운 주력을 게을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영화와 유행가와의 밀접한 관계는 실로 오늘에 있어서 세계적 현상이지만 다른 의미에 있어 조선의 유행가 초창기에도 그 가수나 또는 주제가적 성질로 보거나 ○○(판독불가·편집자주) 하나인바 실례가 연극과 영화에서 이를 분리하지 못한 것이 증명된다. 물론 여기 대하여는 따로 논해야 할 한 가지 과제에 틀림없는 것이다.(중략)  


 
이미 일부의 문인이 하여튼 이 방면 작사의 붓을 대게 되었고 또 문단과 악단에서 이 문제가 약간 논란이 되어온 결과 오늘까지의 유행가에서 많은 진보의 자취를 엿볼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이다. 나머지 다른 한 가지 경향은 ‘도()の 양()’ 이후 ‘독도의 정한(情恨)’ ‘애상곡’과 같은 작품의 출현이다. 이리하야 작곡에 있어서는 이고범(李孤帆), 김안서(金岸曙), 유도순(劉道順) 그리고 필자가 비교적 전문 삼은 듯한 감이 있었고 작자로는 전수린(全壽麟), 김영환(金永煥), 김교성(金敎聲), 전기현(全基玹), 김준영(金駿泳), 이면상(李冕相) 제씨를 초기의 공헌자로 이 자리에 예거치 않을 수 없다

 

▲이난영의 불후의 명작 〈목포의 눈물〉 앨범 커버. 
  

  ‘목포의 눈물’이 역시 뒤를 이어 유행가계를 풍성하게 될 때에는 빅타-콜럼비아만의 무대가 아니었고 이경설(李景雪), 김용환 등을 가진 폴리도르(Polydor레코드·편집자주)와 ‘목포의 눈물’의 가희(佳姬) 이난영(李蘭影)을 끌어간 오케(Okeh레코드·편집자주)가 서로 눈을 붉혀가며 다투어 그 진용을 꾸미기에 전력을 다하게 됐다.   

 

  작시(作詩)의 작곡에 그리고 신()가수 발굴에 그들은 과연 전지(戰地)에 있는 병사와 다름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재 활약하는 작시에 박영호(朴英鎬), 작곡가에 손목인(孫牧人), 김해송(金海松) 등 쟁쟁한 현역을 일일이 열거키 어려울 만치 많은 포옹하게 된 것이다 


 
‘처녀 총각’이 신민요에 속하는 유행가라면, 선우일선이 부른 ‘꽃을 잡고’도 신민요라고 부르는데 이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소위 신민요란 어떠한 것을 말하느냐. 유행가란 어떤 것이냐에 대한 이상으로 여기엔 이론도 많을 것이요, 또 장황한 설명이 없이는 그 뜻을 밝히기 힘들 것이로되 막연하나마 일언으로써 말하자면 고유의 민요성을 띤 유행가라고 해두는 수밖에 없다.  


 
다른 부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조선의 유행가만을 분리해 가지고 그 변천 내지 발전상을 말할 수는 없다. 그중에서도 ‘酒は淚か’(술은 눈물인가), ‘丘を越えて’(언덕을 넘어), ‘港の雨’(항구의 눈물), ‘哀しい夜’(슬픈 밤), ‘無情の夢’(무정의 꿈), ‘二人は若ぃ’(우리 둘은 젊은이) 등의 유행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제작된 유행가 이상으로 유행하였고 또 감명 깊은 그것들이 아니면 아니다. 과연 고가정남(古賀政南), 강구야시(江口夜詩) 대관우이(大關祐而) 같은 작곡가는 반도(半島) 작곡가의 사실상 선배요, 그들에게 끼쳐준바 영향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 하겠다. 오늘에 와서는 우후죽순같이 다시 일어서도 유행가의 생산 과잉적 현상은 면()할 수 없다. 침체기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면 개척한 경향에서 또 침체로 또 그 모방적 현상의 유행을 따라서 이렇게 변천하는 동안에 시대는 흐르고 세상은 변한다. 아무튼 유행가의 유행시기가 레코드 회사의 범주와 같이 매우 짧아진 것만은 세계적 경향이요 필연적 귀결이다. 따라서 어느 모로든지 조선적 내지 독창적 그러나 그것이 대중적인 특색이 없이는 레코드판의 음악적 향상에 따라서 서양 재즈에 나아가서는 명곡에 그 세력을 빼앗길 우려가 적지 아니하다. 팬의 청각이 살찌고 한계가 넓어지고 상업술이 발달된 오늘에 있어서 과연 어떠한 노래를 어느 가수가 어떠한 매력으로 그 노래를 부르게 해야 될런지 제조자 측의 뇌심(惱心)하는 바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오늘에 와서는 실로 수천 종의 유행가가 제작되어 혹은 사라지고 혹은 나타나고 있는 동안에 몇 가지의 가작(佳作)을 남김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7> 근대의 역사학

“조선인은 도처에 강용(强勇)한 자취 남겨”

▲문화재청은 2011년 10월 24일 《조선일보》 사료관에 소장 중인 《조선일보》 문자 보급 교재 3종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20세기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는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출발한다. 서구의 근대역사학의 방법론(역사서술 방식, 역사인식 태도 등)을 적극 받아들여 민족적 저항과 식민지 현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 식민교육을 받은 역사학도가 배출되는 상황이었으나 근대 역사학계는 민족적 현실에 주목, 강렬한 민족정신의 흐름을 새로운 역사학에 담았다. 박은식(朴殷植), 김규식(金奎植), 신채호(申采浩)의 뒤를 이은 근대 역사학자로 정인보(鄭寅普), 안재홍(安在鴻), 문일평(文一平)이 대표적이다


 
위당(爲堂) 정인보(1893~1950)는 일제 관학자(官學者)들의 한국 역사 왜곡(한국의 역사가 중국이나 일본의 식민지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날조)에 분노, 1930년대 이후 역사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역사의 본질을 ‘얼’이라는 민족정신에서 찾으려 했던 인물이다


 
민세(民世) 안재홍(1891~1965) 3·1운동, 신간회, 조선어학회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투옥된 애국지사다. 1930~40년대에 걸쳐 쓴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은 단군조선에서 삼국시대까지 우리 역사의 대계를 고조선 사회의 발전 과정이란 논리로 정리했다. 우리나라가 중국인 기자(箕子)에 의해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 ‘기자조선’의 문제를 ‘단군조선’의 계승관계로 파악했다.(김용섭, 1930~40년대의 민족사학〉 참고)


 
그는 《조선일보》에 재직할 당시 단재(丹齋·신채호)의 《조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를 신문 학예란에 연재하기도 했다. 민세는 단재사학의 계승자였다


 
민세가 쓴 〈1400만 문맹과 대중 문화 운동〉은 당시 《조선일보》가 추진했던 문자 보급 운동을 소개하는 글이다. ‘역사학은 민족 전체의 성장이나 발전 과정에 관한 학문이 아니면 안 된다’는 민세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이 글은 잡지 《삼천리(三千里)(1931 9월호)에 실렸다. 글을 쓸 당시 민세는 《조선일보》 사장(1931.7~1932)이었다. 그는 사장을 맡으면서 “1400만 문맹을 깨우치는 대중 문화 운동인 문자 보급 운동을 한 7년 잡고 매년 대대적으로 진행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해 《실생활》 9월호에 실린 〈조선인 생활화의 3표준〉도 민세의 글이다. ‘조선인은 강용(强勇)하며 유약하지 않지만, 사고를 관념적·철학적·시적(詩的)에서 이지적·사무적·기술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민세는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평택·무소속)됐지만 6·25 당시 납북됐다. 북한 평양방송은 1965 3 1일 그가 평양 시내 한 병원에서 75세 일기로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1989년 그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을 추서했다.   

  
  
1400만 문맹과 대중 문화 운동
  
안재홍(安在鴻)

▲안재홍이 《조선일보》 문자 보급 운동에 대해 《삼천리》에 쓴 〈1400만 문맹과 대중 문화 운동〉. 

  

  상식 보급과 민중 보건의 선양 운동을 골자로 삼아서 《조선일보》는 그 대중과의 접촉을 면밀히 하려고 합니다. 언론기관이 대중을 떠나서 아니 될 것은 누구나 여기는 바로 두말할 것 없으며 민중 보건에 관한 선양은 아직 그 초보도 잘못 걷는 터이니 지레 말을 말기로 하고 조선일보사에서 벌써 3년째나 계속 사업으로 하는 이 문자 보급 운동 이야기를 조금 하려 합니다. 문자 보급은 대중 문화 계발(啓發)의 첫걸음으로 이 운동이겠고 또 그것을 일사업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온당하려니와 그는 대단치 않은 문제입니다.   


 
그런데 문자 보급 운동을 나는 불언실행으로 하는 《조선일보》의 사시에 관한 일대사업이라고 봅니다. 무어 그 사업을 실행할 적마다 사고(社告)를 크게 내고 기사를 부품하게 선전하고 사설로 고취하고 또 반원에게는 일정한 현상(懸賞) 형식으로 하야 성대한 위안과 수상식까지 하니 온통으로 대대적 선전거리가 되는 것이라, 어떻게 불언실행이냐고 당장 변박(辨駁)이 있을 줄 아나, 그러나 그런 것은 다만 그 사업 진행의 사무적 순서요, 그 본질을 논핵하고 선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 아는 것이 힘
 
○ 배워야 산다!  

의 짤막한 표어로서 표시됨과 같이 알고저 배우기를 고조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부품한 선전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선에 1700만 인의 문맹이 있으니 학령에 달()치 아니 한 어린이를 약 200만으로 치고 노쇠한 이와 중년 이상의 부녀로서 좀체로 교양을 새로 받기 어려운 이를 100만이라고 하더라도 1400만가량의 문맹이 광명인 교양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계 숫자상으로 따지어 보건대 그 초등교육기관에서  

  조선 인구수 20,437,219
 
보통학교 수 1,710
 
1교당 인구수 11,952인강(人强)
 
보교(普校) 생도 수(公私合) 487,878
 
매 생도당 구수(口數) 42
 
전 조선 학령 아동 2,450,000
  100
인 중 취학 비율 19.9%
  

▲삼천리 1931년 9월호 표지. 

 

  즉 전() 학령 아동에 견주어 2할 미만의 취학률도 200만에 가까운 아동은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하는 형편이요, 최근에 발표된 조선의 서당 총수 11,469개소, 그의 생도 162,247인이매 그를 보통학교 생도 수에 가산하더라도 74630인에 불과하고 하물며 서당 교육의 생도는 ‘한글’을 못 배우는 자 많으니 진정한 현대적 대중교육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보통학교가 늘어간다 할지라도 매년 학령 아동이 과잉하여 감이 퍽은 많으니까 이러한 강습교육이 매우 필요할 것입니다.   


 
이 문자 보급 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하기는 지금으로부터 3년 전 1929 7월부터입니다. 그때 석판 인쇄로 한, 한 장의 ‘한글원본’과 반원증과 한글 깨친 자의 자필증명용지를 준비하고 겨우 10일 남짓 선전하였던바

반원 지원자 409
한글원본 4만 교  

를 배부하게 되었었고 추기(秋期)에 가서 보고자만의 성적으로  

반원 91
1.
한글 해득자 약 300 

이었습니다. 1930년인 작년에는 미리부터 약간의 준비가 있었고 ‘한글원본’은 약 20()의 비교적 정밀한 교재로 출판허가에 의한 단행본 교과서로 하고 반원을 모집한바,  

  반원 지원 900여 인
  1.
반원 참가학교 대중소 46개교
  1.
한글원본 약 9만 부

 추기에 가서 보고된 성적은
  

  반원 161
  1.
한글 해득자 1567

▲민세 안재홍.

 

  이니 이로써 보면 막대한 성적도 아닌 것 같으나 그러나 시내에 있어 조선일보사와 가장 인접지에 있는 모 여자고보 같은 데는 생도가 다수 출동하야 각각 우량한 성적을 내었으면서도 ‘무어 나도 민족봉사의 자동적 열성으로 한글을 가르친 것인데 상을 받으려는 것처럼 보고를 길드란히 하는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일절 보고가 아니 왔습니다. 이런 것은 아름다운 일이면서 한편으로는 큰 유감인 것은 모처럼 문맹을 타파하고서도 그 통계조사가 잘 안 되는 것은 자못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시의 통신과 기타 상황으로 보아 다수 미보고 반원의 성적을 아울러 양년(兩年) 동안 3만의 문맹이 타파되었다고 추단(推斷)합니다. 그는 어찌 되었던지 연령에는 경향 각지에서 향응(響應)한 정도가 전보다도 훨씬 나았으니 이것은 미리 말을 앞세우지 않는 바이오, 방금 《조선일보》에 그 문자 보급 반원의 동원은 매일 보도(保導)되는 터입니다. 금년에는 줄잡아서 보고된 해득자 수가 3만 수천 인에 달하리라고 예상되는 터이며 이로써 이 운동은 보고되는 성적보담도 청년 각계에 매우 깊은 이해를 가지는 것으로서 지금부터는 소사반공배(小事半功倍·작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거둔다)로 발전될 것입니다


 
금후에는 다시 한 7년 잡고 매년 대대적으로 진행하겠는데 거기에는 다만 한글의 읽고 쓰는 단순한 교양에 한하지 않고 계단적으로 그 방향 내용을 아울러 상향시키겠습니다. 다만 불언실행이란 취의에 의하야 미리 허풍을 떨지는 않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선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침만으로 만족하라’는 뜻의 말을 반원에게 읽어주기로 하며 진행하는 것입니다. 전후 10년 동안이면 꽤 좋은 성적이 나타날 줄 확신합니다.  
  (
출처=《삼천리》 1931 9월호)  

  
  
조선인 생활화의 3표준
  -
과학 기술 관리의 간능

  
幹能·재간과 능력, 편집자 註
 
안재홍

▲안재홍은 〈조선인 생활화의 3표준〉에서 ‘한 사람 몫의 일꾼 노릇을 할 만한 지식·기량·기술 및 경험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의 조선 청년들은 퍽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려운 시대, 어수선한 사회에서 온갖 복잡한 문제에 머리를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주의(主義)상 문제로도 온갖 미숙한 사상과 주의로써 매우 복잡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를 여기에 논할 경우는 못 되지만 한 가지 조선 사람이 일반적으로 그 결점을 깨닫고 일상생활에서부터 전진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범연하게 보아서 인간으로서 생활화하도록 하자는 것이겠습니다. 누가 생활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리오마는 역사적, 사회적 제()조건의 아래에 가장 그 처지에서 생활해 가고 생활의 승리자·성공자 될 만한 도덕적 제조건을 갖추도록 자기를 인간으로서 완성하여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한 사람으로서 훌륭한 덕성의 소위자(所謂者)가 되고 상식도 상당히 풍부하고 또 사교상으로 보아서도 나무랄 점 없을 만큼 좋은 사람일지라도 그저 다 ‘좋은 사람’으로 되어가지고서는 사회생활의 1차 더욱 똑똑히 말하자면, 사회적 협동 책임자의 일원으로서는 매우 쓸모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정치가로서 군인으로서 재정가로, 상업가로, 기타 목사, 기수(技手), 사무원, 직공 등으로서 무엇이고 한 사람 몫의 ‘일꾼’ 노릇을 할 만한 지식·기량·기술 및 경험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모두 정치가, 군인, 재정가, 기타 통솔 지배의 지위에만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니까, 결국은 대다수의 인민은 모두 일반적인 과학적 지식·기술 및 관리의 간능으로서 사무가, 기술가, 직공 등의 직능을 할 만큼 스스로를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많이 정치가나 군인이나 기타 통솔자의 지위에 갈지라도 한편으로는 무어시고 자기의 전문하는 ‘한 가지 재주’는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독일인은 이전에 황제나 황후나 총리대신까지라도 모두 기술(技術)상으로 한 가지 재주씩은 다 배워서 순연한 일개인으로 직업인으로 살려 하면 살아갈 만큼 또 한 사람 몫은 할 만큼 하는 일종의 불문(不文)의 법이 있는 것이요, 노국(露國·러시아, 편집자 註)인은 어떤 한 사람이고 혹 만부득이 외국에 망명이라도 하는 경우에는 어데 가든지 곧 생활비는 나오도록 할 만큼 지식·기술을 배웠던 것입니다. 이만큼 되자면 물론 일개인의 의사나 노력으로만 될 것이 아니오, 전 사회의 모든 조건이 서로 맞아야 할 것이니까, 그리 쉽게 말할 수도 없지마는, 현대 청년은 우선 그 마음부터 그렇게 가져야 할 것입니다
  

▲《실생활》 1931년 9월호 표지.

 

  조선사람은 강용(强勇)한 인민입니다. 전설시대로부터 전 유사시대를 통하여서 조선인은 도처에 모두 강용한 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용담이나 전쟁사를 들춰낼 것도 없이 명백합니다. 지금은 모든 역사적 원인이 문약(文弱)·유약(儒弱)·유약(柔弱)한 것 같은 상태에 빠져 있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만일의 때에 발현되는 조선인의 본성은 결코 유약한 것이 아닙니다. 또 조선인이 개인으로서 퍽 총명한 소질을 가진 것도 자타가 모두 이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인이 민족적으로 사회적으로 그 천재를 잘 발휘하느냐 그는 실로 그렇지 못합니다. ‘어려서 신동, 자라서 바보’라는 말이 있지마는 조선인은 이러한 경우에 있습니다
  

  이는 첫째, 시대 경우 등 사회적 원인이 그러한 것이니 이 점은 따로이 크게 논할 바어니와 순연한 인위적 견지에서 본다 하더라도 조선인은 대체로 관념적·철학적·시적(詩的) 또 공상적으로 흘러가서 확고, 또 정세(精細)하게 이지적·사무적·기술적으로 나아가지 않는 편이 많습니다. 이는 요컨대 그 천품의 관계도 많겠지만 자(판독불가·편집자 註)로 유교편중·도학편중·문학편중인 유생(儒生) 중심의 그릇된 치자(治者)도덕의 발호하던 유폐(流弊)가 그 고질을 이룬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현대의 청년은 인간으로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지마는 이외에 어떻게 현실사회의 각 방면에 나아가서 일개의 일꾼으로 쓸모있는 인물이 되어야 할 것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오, 그를 위하여서는 모든 정밀한 실제 지식을 주는 과학—더욱이 자연과학—과 기술 및 관리의 간능에 통효(通曉·환하게 깨달아서 앎)하도록 평상(平常)에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일을 맡았으되 어떻게 처리하여야 할는지 모르는 관리의 간능이 서투른 사람은 조선인 사이에 퍽 많습니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지배할 수 있더라도 기술과 관리의 간능이 없어서 실패하는 일은 매우 많은 것입니다. 이것은 평이한 뜻이지마는 각각 여념(餘念)할 표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출처=《실생활》 1931 9월호)

 

<8> 외도(外道)와 정조

“혼인의 형식은 남녀 화합, 실질은 남녀 투쟁”

⊙ 처의 간통만을 처벌하는 입법례는 지배계급의 철저적 승리(1933)
⊙ 여성의 정조… 남녀 간 인격을 균등히 구비한 미래사회에서는 없어질 말(1927)

 

▲1930년대 후반의 결혼식 모습. 신여성과 모던보이의 결혼이다. 사진=황정호

 

  근대의 물결은 결혼과 연애에 대한 봉건적 사고를 바꾸었다. ‘연애 없는 결혼생활(早婚)은 비도덕적’이란 서구의 사조가 들어왔고 신교육을 받은 여성 사이에서 봉건적 가족제에 대한 각성이 이뤄졌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사상도 구시대 결혼관에 대한 비판을 부추겼다


 
이 과정에서 정조에 대한 인식이 깨지고 축첩·외도·이혼·간통의 문제를 여성의 입장에서 서서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남성에 예속된 여성의 경제적 의존관계가 결혼관계에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도 생겨났다
  

▲1939년 2월 9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엇지하릿가(어찌하리까)’. 
독자는 “남편 있는 여자를 사랑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신여성의 자유연애를 담고 있다.

 

그러나 신구 풍습의 충돌은 곳곳에서 마찰음을 빚었다. 조혼을 한 남편(연애 없는 결혼이란 이유로)이 신여성과 연애하거나, 자유연애를 열망하는 신여성 역시 아내가 있는 인텔리 남성과 연애하는 현상 때문이었다. 여성으로선 또 다른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판례에 나타난 정조〉(1933)와 〈양성문제로 보아 연애결혼을 논함〉(1927)은 당대 결혼과 정조, 이혼, 연애에 대한 사회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글이다. 원본을 살리되 현대 표기법으로 고쳤다.  

 

  판례에 나타난 정조
  
신태악(辛泰嶽)
  

▲《신가정》 1933년 7월호 표제지.

 

  일기는 찌는 듯한 이때 여러분이 법률강좌를 읽고 앉아 있을 일을 생각하니 이 글을 쓰는 나로서는 미리 마음이 갑갑하여집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재미있는 재료를 택하야 쉬웁게 써 보려고 하니, 원래 법률이라는 것은 시나 소설과 달라서 굳고 빽빽한 것이라 용이히 그 목적을 달하기는 곤란할 듯하야 순전한 법률상 설명보다도 차라리 판례에 나타난 재미있고 알아둘 필요 있는 사실을 뽑아 써 보는 것이 좋을 듯싶어 이에 남녀 간 중대문제인 정조문제에 관하여 한두 가지의 판례를 적어 보겠습니다
 
× ×
 
정조라는 관념은 근래 사상계의 변천에 따라 그 해석이 달러 간다. 그러면 법률이 보는바 ‘정조’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법률이 보는 정조라는 문제는 결국 남녀 간에 정조의 의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인데 이 문제는 법률문제라기보다 도덕문제이다. 도덕상으로 말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정조를 지켜야 할 것이며 남녀 간에 차별이 있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형법에는 그 183조에 간통죄에 관한 규정을 설하야 ‘남편 있는 부녀가 간통할 때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함’이라 하여 놓고 남편이 다른 여자와 간통할 때는 어찌한다는 규정은 설하지 않었다. 이 법률은 방종하는 남자들을 ××하기 위하여 제정한 법률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또 남의 처가 된 여성의 간통은 이혼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남자의 간통은 아무 관계가 없다. 이러한 법률에 의하야 조선의 고등법원은 소화 3 10 6일에 재미있는 판결을 내리었다
 


 
이○○이라는 자가 그의 처 박씨를 학대하야 두 살 먹은 아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쫓아 버리었다. 그리고 이○○은 첩을 얻어 가지고 살아오던 중 박씨는 너무도 분하야 이러한 사실을 이유로 하야 이혼소송을 제기하였다. 이 일을 당한 이○○은 이혼하지 않겠다고 버티었다. 사건은 1심과 2심을 지나 고등법원까지에 이르게 되었는데 고등법원에서는 ‘조선에 있어서는 첩 제도가 폐지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일반사회에서는 첩 두는 것을 그리 큰 비행(非行)으로 알지 않는 형편이니 축첩하였다는 한 가지 일만 가지고는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고 하야 박씨의 청구를 기각하야 버리었다. 이 판결은 남자에게는 정조를 지킬 아무러한 의무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본 대심원(大審院)의 판례에는 이와 반대되는 재미있는 판결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일본 어떤 한 촌에 ‘마사’라는 노파가 있었다. 그의 딸 ‘가네’에게 십수 년 전에 ‘고헤이(五平)’라는 서양자(壻養子)를 맞아 결혼하야 주었었다. 그 부부간에 아이 셋까지 낳아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던 중 ‘고헤이’는 그 집에서 나가 그 근방에 사는 ‘아끼’라는 과부의 집에 가서 머슴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 주인 과부하고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의 처 ‘가네’와 어머니 ‘마사’는 여러 번 집으로 돌아오기를 권하였으나 그 말에 응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돈도 한 푼 보내지 않아서 생활은 극히 곤란하게 되었고 아이들의 양육도 어렵게 되었다.  


 
때는 바로 대정 13 9 28. 노파 ‘마사’는 ‘곤도’라는 어떤 변호사 사무원에게 이 일의 해결을 의뢰하였다. ‘곤도’는 ‘그놈! 참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고 그날 곧 노파를 데리고 ‘아끼’의 집에 가서 “처자가 있는 사람과 관계를 맺어 가지고 동거하는 것은 형법상 간통죄가 성립되는 것이니 만약 고소만 하게 되면 2년 이상 5년 이하의 징역을 살게 된다. 그러나 상당한 돈만 내게 되면 고소는 그만둘 터이니 알아서 하여라” 하고 위협하였다. 이 말은 변호사 사무원이 거짓으로 한 말로 기실은 처 있는 남자가 다른 독신 여자와 관계를 맺었다 할지라도 간통죄가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을 모르는 두 사람은 그만 놀라서 ‘고헤이’와 처 ‘가네’와의 이별하는 돈으로 ‘아끼’에게서 현금 100원을 받고 또 자녀를 양육하는 비용으로 매달 9원씩 5년간 주겠다는 ‘아끼’와 ‘고헤이’가 연대한 계약서를 받었다. 그런데 이것이 형사문제가 되어 ‘곤도’는 공갈죄로 기소되어 제1심에서 유죄의 판결을 받고 다시 제2심에서 징역 9개월의 선고를 받았다
  

▲《신가정》에 실린 〈판례에 나타난 정조〉 첫 장. 

 

  피고 ‘곤도’는 자기의 한 일에 대하야 변명하기를 “원래 피고 ‘고헤이’는 처에 대한 정조의 의무에 위반하였고 ‘아끼’는 ‘고헤이’로 하여금 그 의무에 위반하도록 하게 하야 처 ‘가네’의 권리를 침해하였음으로 처 ‘가네’는 이들에게 대하야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를 가지었다. 그래서 자기는 ‘가네’를 위하야 그 권리를 실행하였음에 불과하므로 다소의 강요는 있었다 할지라도 공갈죄를 질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종래의 법률론으로선 당초부터 문제가 되지 않는 변명이었다. 그러므로 2심 재판소에서도,


 
“우리나라의 현행법으로는 남자의 간통죄, 즉 남자의 정조의무를 인정치 않았고 또 사회통념으로 본다 하더라도 처가 남편에게 대하야 정조를 강요할 권리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 따라서 ‘곤도’가 행한 바 공갈수단은 권리의 실행행위라고 할 수는 없다. …” 


 
라고 하야 피고의 변명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의 대심원장 ‘요고다’ 박사를 부장으로 한 대심원 제1형사부는 이 점에 대하야 견해를 달리해 원판결을 파기하고 대심원 자신이 사실심리를 다시 하게 되었다. 이것은 대정 15 7 20일의 결정이다. 이 결정 중에 유명한 ‘남편에게도 정조의 의무가 있다’는 신안(新案)이 발표되어 있다. 이러한 신안을 전제로 하야 대심원 제1형사부는 소화 2 5 17일의 판결로 피고 ‘곤도’에게 무죄를 언도하였다. 이 대심원의 남자 정조론을 이에 간단히 말하면 대체로 이러하다.   


 
“혼인은 부부의 공동생활을 목적하는 것이므로 배우자는 서로 협력하야 공동생활의 평화와 안전 행복을 보전하기 위하야 서로 성실을 지킬 의무가 있다. 배우자의 한편이 불성실한 행위를 하면 이는 확실히 다른 한편에 대하야 그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부는 서로 정조를 지킬 의무가 있다. 민법 제813조 제3호는 남편이 간통하였다 할지라도 처는 이혼을 청구할 수 없으며 형법 제813조도 또한 남편의 간통을 처벌하지 않았으나 그것은 인습에서 나온 특수한 입법정책에 속하는 규정이므로 이 규정이 있다고 하야 민법상 남편에 대하야 정조의 의무를 요구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후략)  


 
이와 같이 정조에 관하야 현행의 법률은 남녀 불평등주의를 가졌으나 대심원의 판결은 남녀평등주의로 항하여 간다. 그러면 어찌하야 현행 법률은 남녀 불평등주의를 가지게 되었는가. 이 점에 관하야 요전에 문제를 일으켜 크게 떠들던 경도제국대학 교수 ‘다끼가와(瀧川)’ 씨의 말을 빌어서 설명하면 이러하다.   


 
“남녀평등의 원칙은 혼인제도의 논리적 요구이다. 그러나 종래에 여자는 경제적으로 따라서 법률적으로 남자에게 예속된 상태에 있다. 남녀 간에 이러한 관계는 혼인에 반영되었다. 즉 혼인은 형식적으로는 남녀의 화합이나 실질적으로는 남녀의 투쟁으로 사회생활에 있어서 지배계급을 대표하는 남편과 피압박 계급을 대표하는 처의 가정 내의 투쟁의 축도(縮圖)에 불과한 것이다. 간통은 투쟁의 필연적 산물이니 현행법과 같이 처의 간통만을 처벌하는 입법례는 지배계급의 철저적 승리의 표현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점에 관한 입법례는 차차 평등주의의 경향을 가짐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벌하는 방향의 평등이냐 벌치 않는 방향의 평등이냐 하는 점에 있다. 이 점에 관하야 다시 ‘다끼 가와’ 교수의 설명을 빌어 말하면,  


 
“결론은 스스로 정하야진다. 그것은 일부일처제의 가족제도를 낳은 경제관계가 소멸됨에 따라 간통죄로 소멸될 것은 물론이다.  


 
즉 간통죄에 대하야는 남녀를 다 같이 처벌하지 않게 되리라는 말이다.()
  (
출처=《신가정》 1933 7월호)  

  
  
양성문제로 보아 연애결혼을 논함
  
옥순철(玉順喆)
  

▲《신민》에 실린 〈양성문제로 보아 연애결혼을 논함〉 첫 장. 

 

  기아에 몰리어 동주서사(東走西死)하는 판에도 연애문제와 정조문제로 상당히 세상의 여론은 비등한 감이 없지 아니하다. 물론 먹은 후에 다음가는 문제이니만큼 사회적으로 충분히 떠들어 토론할 바임을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근일에 와서 청년남녀들 간에 거의 상습적으로 고창절규(高唱絶叫)하는바 양성의 연애결혼이라는 어의가 무엇이며 현금 행하고 있는 남녀관계의 현상을 통찰한다 하면 연애결혼이니 자유연애라고 할 만한 점이 나변(那邊·어느 곳·편집자 註)에 있는지를 전력을 다하여 탐득(探得)하여 보려고 하여도 보이지를 아니한다. (중략


 
남녀관계의 최초의 형태는 물론 일부다처(一夫多妻)이었으니 추장(酋長)이라는 것이 권력으로 많은 여성을 독점하였었고 감히 경쟁하는 자들이 없는 한에서는 그대로 유지하였었고 일부다처라든가 다처다부(多妻多夫)의 난혼이라는 것은 일시 특수한 사정으로 인하야 일어난 것이다. 예를 든다면 권력으로 많은 여성을 독점한 자를 축출(逐出)하고 포로의 많은 여성을 각각 자유로 취하는 비상시기에 난혼이라는 것이 생기며 또는 전쟁이 일어나서 남성이 출전한 시에 다처일부(多妻一夫)의 상태들이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의 일례로는 구주(歐洲)전쟁 당시에 구주의 형편을 보아도 알 것이다. 이것을 죄악이니 부도덕이라고는 못하였을 것이다. 도덕이라는 것으로는 기인하야 정조관 또는 혼인관이 변한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사회적 사정에 의하야 변한 것이다.   


 
지금 일부일처(一夫一妻)제를 현금 도덕상으로 찬양한다 하더래도 일부일처제 역() 도덕에 준비하야 성립된 것이 아니고 그 사회의 사회적 사정에 의하야 성립된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바 사실이다. 먼저 남성의 성욕적 요구 또는 경제적 과시에서 포로 겸 첩으로 정하였던 여성은 남성의 ○○물의 감소로 산아를 양육할 수 없으니 그 처지에서 다처다자(多妻多子)를 유지할 수 없는 경우에서는 부득이 1인의 남자와 1인의 여성이 결합하게 하여 일부일처제라는 것이 성립되었다. 다시 말하면 일부일처제의 기인(基因)은 경제적 즉, 식량문제이다. 지금도 오히려 유여(裕餘)있는 계급에서는 일부다처제가 현존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리고 경제적 여유라는 것보다 자기 일신도 유자히 곤한 자는 일부일처제커녕 가정적 파탄을 이루는 사례도 부소(不少)하다
  

▲《신민》 1927년 5월호 표지.

 

  기독교 신자들은 일부일처제가 교리에 의한 도덕관념에 의하야 성립되는 것이라고 하니 기독교 신자의 일부일처설은 여성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아니하고 유혹물로 취급하고 등한시하는 중에 우연히 된 것이다. 재래의 종교 신자로는 1인의 여성으로 그 만족할 수 있음으로써이었다. 그럼으로 현대의 남녀의 결합 또는 이혼이 대반(大半) 경제사정에 의하야 기()하는 이상 또는 이에 동요하는 이상엔 붙고 떨어지는데 신성·불신성 운운도 가소로운 일이며 정조 운운도 망발이다. 왜 그러냐 하면 현하(現下)의 남성은 여성을 소유시하는 것이며 여성은 남성을 의지하고 기식(寄食)하려는 육신의 부양자에 불과함으로써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나) 최초부터 인간으로 결합하고 그 근본을 살핀다면 상호 인간으로써의 결합이 아니었음으로써이다.   


 
만일 여성으로도 그 사회의 인격적 요소를 충분히 구비하고 일개의 인격으로 경제적 상호 독립한 남녀관계라 하면, 즉 처()는 부()의 부양을 바라지 아니하고 부에 대한 처의 기식이 없다 하면 종래의 경제적 대상인 정조에 대하여는 평가 운운이 없어질 것이다. 결합도 이혼도 하등의 부도덕이 없을 것이다. 지금 여성의 공격점인 정조문제에 대하야 남녀 간 인격을 균등히 구비한 미래사회에서는 없어질 말이다. 그러므로 인격적 요소를 구비하지 못하였으니 대체로 경제적으로 기식하기로 정조를 제공하고 순() 인간 결합이 되지를 못함으로 정조 운운의 시비가 기하는 것이다. 물론 정조라는 말은 과거에서는 여성에 한한 말이었지만 이후 신 사회에서 양성이 완전한 인격결합을 보게 된다 하면 정조의 시비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완구로부터 표정인형으로 진화한 부인들도 행복된 인형보다도 불행한 인간이 되어 보겠다는 것이, 즉 부인 해방운동이다. 남성사회운동이 아울러 인간운동이다. 이 인간운동이 종결을 고하기 전에 정조 운운은 부르주아의 여성독점을 강요하는 논조이며 연애결혼 운운은 현하의 남녀관계를 애써 가면서 허위로 신성화시키려는 말이다. 지면의 관계로 더 쓰지 못하고 후일을 약하고 각필(閣筆)한다.  
  (
출처=《신민(新民) 1927 5월호, p39~43)

 

<9> 의복의 변화

       머리 깎고 양복 입으며 축음기를 듣지만 …

⊙ 조선옷, 다듬이질과 재봉하며 옷에 시간과 노력 바쳐
⊙ 양복, 노동하거나 사무보는 데 조선옷보다 편해

 

▲일제시대 문인의 모습. 양복과 두루마기, 한복을 고루 입었다. 
사진 왼쪽부터 이광수,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김동환.

 

  한국근대의 의식주 변화는 단발령(1895) 이후 급격히 진행된다. 조선조 말기의 외인(外人)의 눈에 비친 변발의 이전과 이후 모습은 샤를르 달레(Charles Dallet)의 《조선교회사서론》(1874)과 러시아 대장성이 조사한 《한국지(韓國誌)(1905)에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의복 역시 마찬가지다. 양복이 개화의 상징이 됐으며 한복은 구시대의 상징으로 변모됐다. 양복과 한복을 바라보는 당대 지식인의 시선 변화는 이갑수(李甲秀·1899~1973)의 〈양복과 조선복의 장단점〉에 자세히 기술돼 있다. 이 글은 1932년 잡지 《실생활》 9월호에 실렸다.   


 
이갑수는 경성의대를 졸업하고 한국인 중 처음으로 1924년 독일 베를린대에서 내과 의술을 배워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그는 이 글에서 ‘조선옷은 옷됨이 너그러워 자유스럽지만 집무에 불편하고 옷감에 돈이 더 든다’고 꼬집는다

 


1930년대 중반 일간지에 실린 미국산 중고 양복 판매 광고. (출처=www.theartist.co.kr) 

 

  1932년 잡지 《동광》 8월호에 실린 경성제대병원 김성진(金晟眞·1905~ 1991)의 〈우리 가정의 위생적 생활개선〉에서도 의복 문제가 거론된다.   


 
그는 ‘다듬이질을 하거나 방망이질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옷이 상하기 때문이다. 김성진은 이후 서울대 의과대학 학장, 보건사회부 장관, 국회의원, 공화당 원내총무를 지냈다. 현대어 표기로 고치되 원문을 살려 옮겨 적는다

양복과 조선복의 장단점
  
독일의학박사 이갑수

▲1932년 잡지 《실생활》 9월호에 실린 이갑수의 〈양복과 조선복의 장단점〉.

 

  조선옷의 장점을 말하면 나의 사견으로는 대개 다음과 같다. 첫째로 조선옷의 장점이란 것을 말하면 조선옷은 위생상 대단히 좋다. 옷이 너그러워서 몸을 구속하는 데가 없이 혈액의 순환이 잘되며 옷이 널찍널찍해서 공기가 잘 통하고 해서 위생상으로는 조선옷이 퍽 좋다. 그러나 여자의 옷만은 여러 가지 점으로 불위생이다. 그리고 조선옷은 또 다른 나라 옷보다 입고 있는 외양이 우아하고 위의(威儀)가 있다. 이런 것들이 장점이라 할 수 있으며 단점으로는,  


  (
) 조선옷은 옷됨이 너그럽게 되어 몸 놀리기가 자유스럽고 편해서 안일(安逸)한 만큼 입는 사람에게 자연히 나타(懶惰)한 기분을 갖게 한다. 기거(起居)동작이 편하기 때문에 조선옷을 입고서는 어디든지 오래 앉아 있게 되며 드러눕거나 하는 등 맘대로 뒹굴게 되어 빨빨한 기운이 저절로 죽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옷간 기거동작이 느려지며 게을러지게 한다

  
  (
) 경제상으로 보아 조선옷은 단점이 많다. 옷감에 돈이 더 든대서 불경제라는 것이 아니다. 조선옷은 옷이 쉬 더럽기 때문에 여러 번 빨게 되는데 옷을 빨 때에 옷이 해지는 것은 둘째 문제로 하고 다듬이질을 하며 옷을 다시 재봉하며 하는 동안 여자는 아주 옷에만 시간과 노력을 바치게 된다. 여자가 이렇게 옷에만 힘을 쓰게 되는 고로 다른 일에는 돌아볼 여가가 없게 된다.  


 
그리고 옷을 자주 빨아 입으려면 금전의 소모도 불소(不少)하다. 조선옷은 또 의복감 거기에 결점이 있어서 그런지 며칠이 못 되어 후줄그레지며 비 같은 것을 맞으면 두 번 다시 그대로 입을 수 없게 되는 등 경제적으로 단점이 많다


1930년대 일본 도시샤 여자전문학교 학생들. 왼쪽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이다. 
이들은 유학 중에도 여전히 한복을 입었다. 

 

  () 조선옷은 또 집무하는 데 불편하다. 노동을 하거나 사무를 보고 하는 데는 지금의 조선옷은 양복보다는 불편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경험하는 바일 것이다.  


 
양복에 대해서 말하면 그 장점은 조선복을 입으면 기분이 나()해지는 점과는 반대로 양복을 입으면 용기가 나는 듯하며 근()한 기분 즉, 발발(潑潑)해지는 듯하며 민활(敏活)해지는 것이다. 양복의 옷됨이 가뜬하고 또 조선옷처럼 거추장스럽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몸의 동작이 빨랑빨랑해지며 늘 동작을 하게 된다. 그래서 저절로 심신이 느릿느릿해지지 않게 되고 근하게 되며 힘을 내게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경제를 해입으면 경제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양복은 그다지 심하지 않다 하더라도 비교적 조선옷보다는 비위생적이다. 팽팽하고 쫄리는 데가 있고 또 내의가 몸에 꼭 붙어 있고 너그럽지 못해서 혈액의 순환에나 공기의 유통, 광선의 흡수 등이 덜되기 때문에 위생상 좋지 못하다  


 
양복, 조선복의 장단점은 대개 위에 말한 것과 같은데 우리는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의복을 입을 것인가? 양복으로 지낼 것인지 조선옷을 입을 것인지 이중으로 입을 것인지 이에 대하야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의 역사가 있고 우리 문화의 산물인 우리 옷을 버릴 수 없으며 또 그대로 입기도 무엇하니까 이에 개선할 필요가 있다. 경제적으로 불만이 없도록 하기 위하야 다듬이질이나 세탁할 적마다 선봉(綫縫)하는 것이나 백색이나를 폐지해서 손이 덜 걸리게 할 것이고 기분이 나()하여지지 않도록 정도까지 옷의 양식을 고치어 집무에 불편이 없도록 옷의 광장(廣長)을 줄이고 옷고름을 폐지하며 옷의 제도를 고치고 양복의 내의와 같이 속옷을 입고 지내며 적어도 2~3개월간은 계속해 입도록만 개량한다면 우리 조선옷은 어떠한 나라 옷보다도 가장 좋을 것이다.   
  (
출처=1932년 《실생활》 9월호, p19~20)

 

우리 가정의 위생적 생활개선
  
경성제대병원 김성진
  
  
남편이 밖으로 나가는 원인 

▲1932년 잡지 《동광》 8월호에 실린 김성진의 〈우리 가정의 위생적 생활개선〉. 

 

  대단히 덥습니다. 나는 오늘 저녁에 여러분과 함께 우리의 생활을 좀 더 행복스럽게, 좀 더 건전하게 하는 문제에 대하야 잠시 생각하야 보고저 합니다.   


  19
세기 말부터 지속하야온 물질문명은 20세기에 이르러 ○○(판독불가-편집자註)한 발달을 보이어 우리 생활에 많은 이복(利福)을 주었습니다. 항공, 무선전화의 실용화는 세계를 비상히 축소하였으며 기계과학의 응용으로 사회생활을 간편, 단순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조선에도 이 문명의 서광이 비치어서 일찍이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었으며 축음기를 듣고 발성영화를 보러 다니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소위 문화생활을 한다는 현대인의 가정에 들어가서 그의 내면생활을 살피어 볼 때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있음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러한 불합리한 생활을 하는 사람의 가정을 상상하야 보시오.  


 
그는 맥고(麥藁)모자가 찌그러지지 아니 하도록 조심스럽게 얕은 문을 움츠리고 들어옵니다. 몰취미인 가정에는 장독, 장작 등이 놓여 있고 좁은 마루에는 밥상, 화로, 도마, 식기 등이 꼭 차서 구두끈을 끄를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저녁 준비에 골몰한 주부의 종 다듬질을 보십시오. 방으로 마루로 뜰로 장광으로 부엌으로 신발을 벗었다 신었다 하야 참으로 불이 날 것 같습니다. 어둠침침한 방 안은 어떻습니까! 파리의 떼가 천진스럽게 자고 있는 어린 아손(兒孫)의 얼골에 진을 치고 방구석에 놓이어 있는 변기로는 악취가 발산합니다. 빈대피로 서책을 친 벽에는 입던 옷, 입는 옷, 입을 옷이 무질서하게 걸리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의 가정에는 아무 취미도 오락도 없어 그에게는 이곳은 밥을 먹여 주는 집, 그리고 잠을 재워 주는 집임을 인식할 뿐입니다.   


 
이 사실은 마침내 저녁 후에 똑같은 환경에 있어 그를 방문한 그의 우인(友人)과 함께 그가 가정에 있어 얻지 못한 위안을 주류나 도박장에 구하려고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극단의 예일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과도기에 있는 급조문맹인의 가정에는 왕왕이 이러한 기형적 문화생활이 현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생활개선의 의미가 있으니 근일 신문, 잡지에, 혹은 의연회(議演會)에서, 이 문제가 중시되는 소이(所以)라고 생각합니다. 대저 생활개선은 말하기는 쉬워도 실행은 어려운 것입니다. 즉 우리의 가정에는 수백 년 인습에 의한 습관이 있고 또 이것을 고수하고저 하는 노인이 계십니다. 또 한 가지 어려운 문제는 살림이 곤궁한 것이지마는 이러한 주위사정에 속박되어 졸연히 개혁은 되지 않습니다. 점진적으로 한 가지씩 한 가지씩 개선하야 가는 동안에 우리의 이상에 가깝도록 힘쓰는 것이 생활개선 운동의 실행방법일 것입니다.(중략

  
  
의복-백의(白衣)를 입을까 색의(色衣)를 입을까 

  다음은 우리의 입는 의복에 대하야 생각하야 보겠습니다. 조선인은 백의민족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의복을 입어 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모이신 여러분의 옷도 대부분이 흰옷입니다

  
 
근래에 와서 백의는 너무나 단순한 취미이며 또 쉬이 더러워지니까 자주 세탁을 요하야 경제이니 색의로 개량하자는 운동이 성행합니다

  
 
대저 의복은 신체의 보호와 외계온도에 관한 조절이 목적이고 경편(輕便)과 청결이 생명이니까 이 점만 만족한다면 백의이고 색의이고 무관할 것입니다

 
 
백의가 자주 세탁을 요()하야 불경제라고 색의를 하여 입고 1~2년 그대로 입고 지낸다 하면 위생에 괴로웁게 되어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불경제가 될지도 모릅니다. 요는 세탁법을 개선하야 방망이로 두드리거나 다듬이질을 하는 것을 철폐하야 의복의 손상을 아니 하도록 하는 것이 백의를 색의로 개량하는 것보다 선무일 줄 압니다
  (
출처=1932년 《동광》 8월호, p63~69)
 

<10> 한국 영화의 상징, 단성사와 우미관  -  근대적 희로애락을 발산하다!

⊙ 무성영화 시대 한국영화는 거의 단성사에서 개봉
⊙ 현대적 설비의 명치좌, 약초극장에 밀려 2류 극장으로 떨어져

▲단성사는 1907년에 개관했다가 박승필(朴承弼)이 인수, 3층 건물로 증축하고 영화전용 상영관으로 출발했다. 

 

  근대의 상징은 영화관이다. 급변하는 바깥세상의 모습이 영화관을 통해 전해졌다. 영화관은 근대문명의 교육장과 다름없었다. 그중 단성사(團成社)는 민간 형태의 최초 극장으로 초기 한국영화 태동의 산실이었다.   


 
단성사는 1907년에 목조 2층 건물로 시작해서 경술국치 이후 일본사람 손에 넘어갔다가 1910년에 당시 판소리와 창극을 주로 공연했던 광무대의 주인 박승필(朴承弼)이 인수, 3층 건물로 증축하고 영화전용 상영관으로 출발했다.   


 
국내에서 처음 제작된 영화 〈의리적 구토(仇討)〉가 1919 10 27일 단성사에서 상영돼 10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조선일보》 2001 1 19일자 ‘이규태 코너’에 따르면,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서울의 인력거는 한 대 예외 없이 기생들이 타고 단성사로 몰렸기에 기방은 개장휴업 사태가 계속됐다고 한다.   


 
이후 단성사는 〈장화홍련전〉(1924), 나운규의 〈아리랑〉(1926), 〈춘향전〉 (1935)을 상영했다. 특히 〈아리랑〉을 보려고 종로 기독회관까지 관람객이 줄을 섰고, 2년간 연속상영이라는 흥행기록을 세웠다. 판권을 샀던 임수호는 벼락부자가 돼 ‘아리랑 팔자’란 말이 회자했다


 
일제 강점기 말에 대륙극장으로 개칭했다가 광복 후 다시 단성사로 복귀했다. 1960~90년대는 제2의 전성기였다. 또 단성사 상영은 흥행의 보증수표였다. 〈역도산〉(1965) 〈겨울여자〉(1977) 〈장군의 아들〉(1990) 〈서편제〉(1993) 등 히트작이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이후 영화관이 멀티플렉스로 변화하자 단관이던 단성사도 2005년 총 10개관의 멀티플렉스로 재건축했으나 경영난을 맞아 2008년 최종 부도처리됐다. 3번의 유찰을 거쳐 2015 7 575억원에 낙찰됐다. 한 해 전 감정가는 9626920만원이었다

 

▲우미관은 단성사·조선극장과 더불어 서울 북촌의 한국인을 위한 공연장으로 인기가 높았다

 

  우미관(優美館) 1912년 개관되어 1982년 문을 닫았다. 단성사·조선극장과 더불어 서울 북촌의 한국인을 위한 공연장으로 일본인 영화관인 황금좌·희락관·대정관 등과 대조를 이뤘다.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음악·무용발표회 등 각종 공연도 이뤄졌다.   


 
개관 당시 위치는 지금의 종각 부근인 경성부 종로구 관철정 89번지. 당시 “우미관 안 가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말이 회자했다. 개관 초기에는 2층 벽돌건물로 1000명가량이 앉을 수 있는 긴 나무의자가 있었단다. 항상 2000명가량의 관객이 빽빽이 들어차 벙어리 화면과 변사의 입을 쳐다봤다고 한다.(《동아일보》 1982 11 18일 기사 참조)

 

▲현재의 단성사 건물. 작년 9월 1일 1차 오픈한 ‘단성골드 주얼리센터’는 지상 1층에 백화점식 복합 주얼리센터를 조성했고, 2층에 국내 최초로 보석·원석 갤러리를 꾸몄다.
  

  무성영화 시절에는 채플린의 〈황금광시대〉나 〈카추샤〉 〈몬테크리스트 백작〉 〈파우스트〉 등을 상영했다.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도 단성사와 함께 상영됐다. 변사의 임기응변에 이따금 반일(反日) 표현이 섞이기도 해 이를 두려워한 일경이 항상 고등계 형사를 배치, 감시했다고 한다.   


 
1924 12 17일에는 우미관에서 《조선일보》가 첫 라디오 방송 실험을 했다는 기록, 1928년에는 국내 최초로 발성영화(‘소리나는 활동사진’)를 상영했다는 기록도 있다. 화재(1959)로 소실된 이후 옛 화신백화점 뒷자리(인사동 262번지)로 옮긴 뒤 재개봉 극장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경영난으로 1982 11 30일 문을 닫았다
  

▲동양극장 개관을 알리는 《동아일보》 1935년 11월 4일자 1면 광고.

 

  동양극장은 한국 최초의 연극 전용 극장으로 1935 11월 준공됐다. 서구 근대극이 본격적으로 상륙하던 시절, 신파극에 뿌리를 두고 ‘배귀자 악극단’을 주축으로 전속극단이 조직돼 상업극을 주로 상연했다. 동양극장의 제1전속극단은 ‘청춘좌’였고, 사극을 주로 공연하는 ‘동극좌’가 2전속, 희극을 전문으로 한 ‘희극좌’가 3전속이었다. 그러나 희극을 즐기는 관객이 적어 ‘희극좌’는 수명이 길지 못했고 1936년 ‘동극좌’와 합병하여 ‘호화선’이 됐다.  


 
〈경성 북촌 극장가 성쇠기〉는 《비평》 1938 10월호에 실렸다. 원문의 의미를 살리되 현대어 표기에 맞게 고쳤음을 밝혀 둔다.     

 경성 북촌 극장가 성쇠기
 
京城 北村 劇場街 盛衰記

  
백암동인(白岩洞人)
 

《비평》 1938년 10월호 표지. 

 

  지금이나 조금 오래 전이나, 40만 부민(府民) 때나 70만 부민 때나 경성의 소위 북촌(北村)에 극장이라는 것은 늘은 것은 업고 오히려 불타 없어지지 않은 것이면 기생퇴물같이 얼굴이 시퍼러둥둥한 헌 건물의 우미관(優美館)과 싸움투성이의 단성사(團成社)라는 것이 있고 조선의 흥행극장이나마라도 기업적으로 연극단체를 조직해 놓고 통제적(統制的)으로 극장을 경영하는 동양극장(東洋劇場)이 새 깃발을 들고 나온 것뿐이다.   


 
우리들이 무엇이나 지나간 것을 너무 캐고 비판한들 돌아오는 그 문제만큼은 신통할 것 없으니 조선극장(朝鮮劇場), 단성사에 대해서는 현재가 너무 비참하니 윤곽만 잠시 말하고 동양극장에 대하야 아는 데까지 써 보기로 하자.


     조선극장이 처음 세워지기는 현재 불탄 자국만 남은 인사정(仁寺町)인데 내지인 조천(早川)이란 사람이 세워 놓고 얼마 하다 이태진(李泰鎭)에게 넘어가고 그 후 김찬영(金讚泳)에게로, 그리고 현재 제일극장(第一劇場)의 관주(館主)인 ミナト(미나토·편집자註)에게 팔여 넘겼었는데 물론 그 사이에 현철(玄哲), 신용희(申鎔熙), 김조성(金肇聲) 등의 등장으로 여러 가지 추잡한 문제를 일으킨 적도 많고 또 어느 때는 양화(洋畵) 제일봉절(弟一封切)로 경성에서 내로라하고 행세한 적도 있었으나 그나마라도 지금 극장이나 있고 무엇을 한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문제라도 붙여 보겠으나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아는 이만큼 가정적으로도 불행한 일청년(一靑年)의 성냥 불장난으로 다 타 버리고 땅덩어리만 남아 겨울에는 가련하게도 스케이트장, 그렇지 않으면 시골로 다니는 곡마단 부스러기가 와서 지내가는 행인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뿐이요, 우미관이래야 5전 입장료를 받을 때를 최고로 지금은 경성 내에서 제일 더러운 집으로 소위 “겡가도리”의 소굴이든 우미관패의 잔해가 그저 남아 있는 것 같고 제일극장이래야 그역 우미관류이며 오직 북촌에서 문제되어 때로는 서로 경영상, 혹은 영업상으로 경쟁도 하고 흥행방식을 때때로 꾀하는 것도 결국 동양극장과 단성사뿐이다.
  


 
단성사라면 조선사람의 머리에는 아직까지도 머리에 인상이 깊은 것은 고 박승필(朴承弼)씨가 처음 시작해서 중간에 그분이 돌아가고 박창현(朴昌鉉)씨가 맡아 하게 되고 그 후의 여러 가지 추문, 소문 등이 많아서도 경영체는 늘 박씨의 일파에서 해 온 것으로, 북촌에서 조선사람의 극장경영은 오직 이것 하나뿐이었고 무성영화 시대의 조선영화는 거의 다 단성사에서 봉절했다


     그리고 수년 전에 극장을 신축하고 최신 RCA 영사기를 배치하야 한때는 전 경성의 양화 봉절관으로 수위를 점령했던 것도 지금에는 옛 꿈 가진 비화, 애화만 자어내고 있을 뿐이다.
  


 
단성사가 오늘날 이렇게 쇠퇴하게 된 제일의 원인은 물론 가급적 현대적 설비를 해 놓은 명치좌(明治座), 약초극장(若草劇場) 등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류극장으로 아니 떨어질 수 없었지만 결국 단성사를 오늘날 비경에 빠지게 한 것은 신무대 때문이요, 지엽적으로 조그마한 문제를 든다면 내부의 추잡한 문제를 들 수 있으나 그것은 그만두고라도 단성사를 신축할 때에 그 설계의 빈약함을 지금 또 탓을 아니 할 수 없다   


 
일지사변(日支事變-중일전쟁·편집자註)이 나기 전까지도 조선극장이 그 뒤 터를 더 사서 늘여서 크게 지으려다가 옆집에서 땅을 안 파니까 할 수 없이 그냥 그 터로 사계로 짓는다고 했고 구() 종로서 터에 모()가 극장을 짓는다는 둥 또는 공평정(公平町) 공설시장 비스듬히 건너편 광장에 내지의 재벌이 나와 극장을 짓는다는 소문의 소문이 돌아다녔으나 북지(北支)의 총소리 한 방으로 그런 말은 꼬리를 없애 버리고 오직 현재는 숨넘어가는 어린애와 같은 운명에 있는 단성사와 조선 흥행극계에 무적함대와 같이 돌진해 가는 동양극장이 있을 뿐이다


     동양극장이 처음 개관식을 하기는 소화(昭和·1935-편집자註) 10년 가을인 모양인데 지금은 고인이 된 홍순언(洪淳彦)씨가 극장명의 관계로 와케지마 후지로(分島周次郞)씨와 형식상으로 손을 잡고 실상의 극장의 경영은 한때 조선문단에 넘어가 거탄(巨彈)적 존재이며 신문연재 소설에 왕좌격이던 최독견(崔獨鵑)씨를 지배인으로 맞아들인 홍순언씨의 두뇌의 명철함을 가히 짐작할 배니 최독견씨가 동양극장의 모든 일을 맡아가지고 오늘날까지 일하여 왔는데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연극은 기업적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을 조선에서 뚜렷이 보여준 이가 최씨이며 배우들도 연극으로 생활의 안정을 할 수 있다는 심념(心念)을 굳게 넣어 준 것도 최씨이니 현재 동극에서 매월 월급을 먹고 있는 사람이 200여 명이요 배우들도 전부 매월 최저 사오십 원에서 최고 백여 원의 월급을 받고들 있다   

 

▲《비평》 1938년 10월호에 실린 〈경성 북촌 극장가 성쇠기〉 첫 장.

 

동극이 처음 탄생할 때에 큰 공로를 한 분이 현재 동극 문예부에 있는 이운방(李雲芳)씨인데 그분의 알선으로 청춘좌(靑春座)라는 것이 조직되었는데 그의 멤버는 대개 토월회의 후신이라고도 할 만한 심영(沈影), 서월영(徐月影), 박제행(朴齊行)씨 등이 중요한 멤버이었다. 

 

이 청춘좌는 주로 동양극장에서 경성손님을 상대로 하려고 조직한 것이니 그 다음 지방순회극단을 조직하여야 하겠음으로 동극좌(東劇座)라는 것을 또 조직하였다.   


 
그리고 또 새로운 시험으로 조선에서도 손님을 웃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을 조직해 보겠다는 것이 주점으로 희극좌(喜劇座)라는 것을 또 조직해서 수차 흥행을 하여 보았으나 아직 조선에는 일러(그렇다면 오늘의 조선의 연극팬은 눈물을 즐겨하는 모양이다.) 결국 실패하고 동극좌와 희극좌와 합병을 시킨 것이 결국은 금일의 호화선(豪華船)이라는 것인데 결국 동양극장의 ドル箱($)은 청춘좌이다   


 
그러면 오늘날 연극을 궤도에 잡아 올리고 통제와 기업적 조직 아래에서 연극흥행을 해 나가며 배우의 이상과 출세의 길을 열어 준 것이 오늘의 동양극장이라면 그것을 운전해 온 사람이 즉 최독견씨이다.
  


 
조선의 연극흥행에 있어서 그의 공은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금년 봄에 들어가 동양극장에서는 이중흥행을 하여 낮에는 영화를 2회 상영(上映)하고 야간에만 평상대로 연극을 상연하는데 이것이야 재래의 연극에서야 2회 상연(上演)으로 인한 배우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피로에서 완전히 구해냈다고 볼 수 있으며 극장 경영상이나 연극의 질적 향상이나 사회적 문제로 보더라도 배우들의 보건을 위하야 크게 기뻐할 배다.
 


 
그런데 그 극장의 설계가 얼른 보기에는 객석을 너무 소홀히 한 것 같으나 실은 무대에 돈을 더 들이고 연구를 하야 조선에서는 처음 보는 회전무대라는 것을 만들어 왔다


     이렇게 비약과 진전이 있는 데는 물론 여러 가지의 문제가 없을 수 없어서 혹은 청춘좌의 일부 배우가 탈퇴를 하야 중앙무대(中央舞臺)라는 것을 조직해서 중간극이니 무엇이니 해 봤으나 결국 완전히 실패해 버리고 금년 5 1일 동양극장은 여러 가지 풍문 속에서 극계의 성공아 최독견씨의 손에 경영 일체가 넘어가고 말았다.
  


 
과거의 동양극장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현재의 동극의 전권을 장악한 최씨의 수완을 크게 기대하여도 좋을 것이나 벌써 들리는 말에는 조선영화 배급계의 오솔리티(authority·편집자註)인 이창용(李創用)씨와 같이 경성촬영소를 매수하야 조선영화 제작도 한다 하니 불행과 비운만 거듭하던 조선흥행계에서 기린아 최독견씨의 앞날의 원대한 성공을 빌며 붓을 놓는다.       

(출처=《批判》 1938 10월호. p.7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