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1
09.17 월간조선 09월 호
세계사의 결정적 戰場 | 워털루 들판에서 나폴레옹은 누구에게 졌나?
⊙ 神이 자신에게 도전한 나폴레옹의 포병을 비[雨]로써 응징했다?
⊙ 프랑스 사람들은 나폴레옹이 웰링턴에게 진 것이 아니고 프로이센軍에게 졌다고 강변
⊙ 그날 나폴레옹은 치질과 고열에 시달렸다
⊙ 마지막에 투입한 황제근위대의 후퇴로 무너지다
⊙ 206년 전 신음과 비명으로 뒤덮였던 그 들판은 지금도 잡초만 무성하다
▲사자의 언덕. 브뤼셀 남쪽 워털루 전장에 평화를 기원하며 세운 기념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황제의 사망 200주년 석 달 뒤인 지난 8월 초, 나는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우버 택시를 타고 남쪽 워털루 마을로 향했다. 약 30분 걸렸다. 운임은 30유로. 워털루 결전장은 1815년 6월 18일 오전처럼 간밤에 내린 비로 젖어 있었다. 2004년 봄에도 여길 온 적이 있어 기념관에 들르기 전에 전장(戰場)이었던 들판을 먼저 걸어보았다. 206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전원 풍경, 잡초가 무성한 평지이다. 그날처럼 땅이 질퍽거렸다. 그날 나폴레옹은 대포를 제대로 운용할 수 있도록 땅이 굳기를 기다리느라 세 시간 이상 개전(開戰)을 미뤘는데 이게 치명적이었다.
연합군 총사령관 웰링턴 영국군 장군(공작, 이름은 아서 웰즐리)이 현장 지휘소를 설치했던 곳엔 ‘사자의 언덕’이란 기념물이 있다. 226개 계단을 40m쯤 기어 올라가면 사자상이 있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펼쳐진 전투현장이 내려다보인다. 웰링턴이 선점한 북쪽이 약간 높다. 남쪽에 포진한 나폴레옹은 그날 줄곧 완만한 비탈을 올라가면서 공격하였다. 이것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정치나 전쟁에선 상대가 선택한 무대나 조건에서 싸우는 건 늘 위험하다. 유럽 역사가 바뀐 그날 아침 나폴레옹은, 한 번도 웰링턴과 싸운 적이 없었는데도 그를 깔보는 논평을 하곤 했다.
사자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전장은 3×3km쯤 되어 보였다. 여기에 쌍방 약 20만명의 병력이 뒤엉켜 아홉 시간 동안 대포, 소총, 칼, 창, 기병돌격, 백병전, 포격전으로 격돌했다. 전투가 끝났을 때는 늦은 밤이었고, 이 좁은 땅에 약 5만명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쓰러져 있었다. 신음, 비명, 확인사살, 확인자살(刺殺) 속에서 동맹군 소속 군인과 근처 주민들이 몰려와 전사자와 부상자들의 소지품을 빼앗거나 훔쳤다. 특히 전사자들의 이를 뽑아 치과에 판 이들이 많았다.
워털루 전투 기념관에는 이긴 웰링턴보다 진 나폴레옹이 더 부각되어 있다. 이 부근이 프랑스어권이고 당시 벨기에가 프랑스 지배하에 있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다소 편향적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은 웰링턴에게 지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운이 나빴고, 오후에 웰링턴 군대와 합류한 프로이센군의 블뤼헤 장군 때문에 졌다는 식으로 설명하곤 한다. 거의 1000년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영국의 라이벌 의식이 워털루에 투영되고 있다. 특히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 워털루 전투를 자세히 묘사하면서 나폴레옹의 불운(不運)을 적극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면서 변호했다. 위고는 신(神)이 나폴레옹을 질투하여 불운의 덫을 놓았다고 했다.
한국의 나폴레옹 팬 朴正熙

▲기병돌격. 파노라마관의 기록화로 전투 100주년 때 프랑스 화가가 그렸다.
‘웰링턴 때문에 졌을까, 블뤼헤 때문에 졌을까, 아니다 그가 신을 건드렸으니 이길 수 있었겠는가.’
신의 질투가 나폴레옹의 신기(神器)인 포병을 무력화(無力化)시켰다는 것이다. 전날 밤 비를 내려 땅을 진창으로 만드는 식으로. 워털루 기념관의 짤막한 3D 영화보다는 파노라마관에서 본 길이 110m 기록화가 압권이다. 이 그림도 전투에 진 나폴레옹 군대 중심이다. 그날 전투는 나폴레옹군의 포병 일제사격, 보병돌격, 기병돌격, 황제근위대의 최후돌격 순으로 진행되어 공세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그림은 워털루 100주년을 맞아 프랑스 화가가 그린 것이다. 그림의 주제는 ‘프랑스 기병돌격’이다. 실패로 끝난 돌격을 지나치게 미화(美化)한 것은, 소설적 비장미(悲壯美)는 몰라도 정확한 역사기록은 아니다.
기념관 서점도 나폴레옹 관련 책이 많았다. 나폴레옹 이미지는 여러 상품의 브랜드로 활용되는데, 이 서점에서 산 책을 읽어보니 한 한국 기업인은 나폴레옹의 유명한 모자를 100만 달러 이상을 주고 매입해 회사에 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티픈 클라크라는 저술가가 쓴 책을 샀는데, 《프랑스는 어떻게 워털루에서 이겼나(혹은 그렇게 생각하는가)》였다. 프랑스인들이 영국을 질투, 나폴레옹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 요설(饒說)을 구사한다는 비판서이다.
한국의 가장 유명한 나폴레옹 팬은 박정희(朴正熙)일 것이다. 그는 보통학교 다닐 때 이순신과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병정놀이를 하면서 군인이 되고 싶어 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최후는 이순신과 닮았지만(“난 괜찮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그의 비장한 생애는 나폴레옹의 판박이다. 두 사람은 식민지에서 태어나 종주국 군대에 들어갔고, 포병장교가 되었으며, 쿠데타로 집권해 국가의 기틀을 세웠다. 독서인의 교양으로 근대국가 건설을 주도했으며 이혼 경력, 단신(短身), 사후(死後) 재평가도 공통점이다. 두 사람은 군인, 혁명가, 교사, CEO의 자질을 갖추었지만 큰 차이점도 있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더 대왕, 시저, 칭기즈칸급의 군사적 천재로서 16년간 이어진 나폴레옹 전쟁에서 약 300만명의 죽음을 불렀다. 박정희는 국가건설 과정에서 최악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단기간에 최대의 업적을 남겼다(18년간 수많은 시위에 직면했지만 한 번도 발포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인구 5000만명 이상의 큰 나라로서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 이상이고, 민주주의를 하는 진정한 강대국은 일곱뿐이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
파괴자와 건설자(나폴레옹 법전, 프랑스 은행, 교육제도, 특히 교사 양성제도, 기병·포병·보병을 일체화한 국민군 건설)의 양면(兩面)을 지닌 나폴레옹에 비교하면 박정희는 건설자의 면모가 압도적이다.
러시아 원정 실패의 결산이 워털루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결전은 약 20년간 유럽 대륙을 석권하였던 나폴레옹 군대를 파멸로 몰고 가, 루이 14세 전후부터 약 200년간 패권(覇權)국가 행세를 하던 프랑스를 내려 앉혔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대혁명 이후 25년간 진행된 대격동의 시대가 지고 19세기의 새로운 격변이 시작된다.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강대해지기 시작하고(독일 통일로 이어진다), 영국은 라이벌을 제거함으로써 ‘팍스 브리태니커’ 시대를 연다. 영국은 늘 마지막 전투에서 이긴다는 말이 있다. 전광석화의 군사적 천재 나폴레옹에게 이긴 웰링턴은 우직하고 끈질긴 지휘관이었다.
워털루 전투는 그로부터 3년 전 러시아 원정 실패의 결산이었다. 1799년, 프랑스대혁명 10년 뒤 쿠데타를 일으켜 29세에 집권한 나폴레옹은 1804년에 황제가 되고 그 이듬해 숙적 영국을 치려다가 트라팔가르 해전(海戰)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함대에 의하여 저지된다. 넬슨은 이순신(李舜臣)처럼 목숨을 바쳤다. 19세기 영국의 가장 유명한 두 장군 넬슨과 웰링턴은 나폴레옹 덕분에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도 불구하고 1805년은 나폴레옹 최고의 해였다. 그해 12월 2일 지금의 체코 브르노 근방 아우스터리츠에서 벌어졌던 이른바 ‘3제회전(三帝會戰)’에서 나폴레옹군 7만5000명은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와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 프란츠 2세가 이끈 동맹군 8만5000명을 격파(사상자 2만7000명), 사실상 유럽 대륙의 패권을 잡게 된다(이 전투 패배로 오스트리아 황제가 겸하던 신성로마제국도 거의 1000년 만에 해체되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의 거의 예술적 지휘로 그의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나폴레옹의 야망은 1808년부터 분수를 넘게 된다.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와 독일 에르푸르트에서 만난 그는 프랑스와 손잡고 영국을 고립시키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꽁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러시아가 영국에 대한 대륙봉쇄령을 어긴다는 트집을 잡아 거대한 전투를 구상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바르샤바공국(公國) 등 동맹국 병력까지 동원, 약 60만명의 대군을 편성해 1812년 6월 24일 러시아로 쳐들어갔다. 병력 수에서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정확한 수치이다). 수레가 3만 대, 전마(戰馬) 수십만 마리, 포도주를 2800만 병이나 싣고 갔다. 개전일은 공교롭게도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기습한 날(6월 22일)과 비슷한 날짜이고, 두 야심가에게 종말의 시작을 연 점에서도 비슷하다.
사라져간 60만 대군
러시아는 약 40만명을 동원했으나 결전을 피하고 초토화(焦土化) 작전을 펴면서 후퇴, 나폴레옹군의 길어지는 보급선을 게릴라전으로 괴롭혔다. 나폴레옹은 9월 중순 모스크바를 점령했으나 러시아 측이 불을 질러 도시의 90%를 태우니 잘 곳도 먹을 것도 없어졌다(당시 수도는 페테르부르크). 한 달 뒤 나폴레옹은 철수를 결심, 후퇴하는데 겨울이 일찍 닥쳤다. 러시아군은 쿠투조프 장군의 지휘하에 나폴레옹군을 공격, 60만 대군은 러시아 대평원에서 사라져갔다(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이 대목을 실감 나게 묘사했다). 20만명이 죽고, 18만명은 포로, 20만명이 탈영했다. 겨우 3만명이 생환(生還)하였다. 이런 인적 손실만큼 치명적이었던 것은 수십만 마리의 말을 잃은 점이었다.
나폴레옹의 동원력은 현저히 약화되어 이듬해 라이프치히 회전에서 패배, 1814년 황제 퇴위(退位), 지중해의 엘바섬을 일종의 영지(領地)로 받아 물러났다. 유럽을 호령하던 나폴레옹의 그때 나이는 44세, 그는 이 섬에서 쓰레기 처리 시스템까지 만들어주면서 마음을 붙여보려고 했으나 그의 뜨거운 피와 프랑스 상황이 나폴레옹을 마지막 무대로 불러냈다. 루이 18세의 실정(失政)과 감군(減軍)에 따른 제대군인들의 불만, 패전국으로 전락한 프랑스 국민의 상한 자존심을 전해 들은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26일 대대 병력의 부하들을 데리고 엘바섬을 탈출해 남불(南佛) 앙티브 근방에 상륙, 투항하는 정부군을 흡수해가면서 3월 20일 파리로 들어왔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했을 때는 ‘괴물탈출’이라고 보도했던 신문이 ‘황제귀환’이란 제목으로 그를 환영했다.
그때 빈에서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질서 재편을 논의 중이던 열강은 프랑스 외상(外相) 탈레랑의 제안과 오스트리아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나폴레옹을 무법자(無法者)로 규정, 동맹군을 결성하기로 결정한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각기 15만명의 병력을 동원하기로 합의했다. 나폴레옹은 이 대군이 집결하기 전에 선제(先制)공격을 하여 각개 격파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영국군과 프로이센군 약 20만명이 벨기에로 집결하는 사이 나폴레옹은, 6월 12일 먼저 보낸 약 12만명의 프랑스군을 따라 벨기에로 들어왔다. 그는 6월 16일 워털루 남쪽 두 곳에서 웰링턴의 영국군(주력)과 블뤼헤의 프로이센군을 격파해 흩어버렸으나 치명타(致命打)를 가하는 데는 실패했다. 패전 후 갈라진 웰링턴과 블뤼헤 부대가 다시 결합하기 전에 우선 웰링턴군을 섬멸한 다음 블뤼헤군을 무찌른다는 나폴레옹의 작전은 성공할 것인가?
운명의 아침, 치질통
운명의 그날 벨기에 브뤼셀 근교의 작은 마을 워털루 민가 지휘소에서 나폴레옹이 일어난 것은 새벽 5시쯤이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잠이 적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평소에는 하루 8시간씩 충분히 잔 뒤 일찍 일어나면 측근들로부터 정보 보고를 받고 그 자리에서 명령을 구술(口述)하곤 했다. 하루 평균 15통의 명령을 내렸다. 그는 아침에 집중적으로 일을 했다.
그런 그가 워털루 결전 날은 달랐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먹을 때까지 네 시간 동안 별달리 의미 있는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사후(事後) 여러 증언을 종합해보면 심해진 치질과 방광염 및 고열(高熱)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투병 중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부하들에게 숨기면서 전투 지휘를 해야 하는 삼중고(三重苦)를 겪고 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치질로 패전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섬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회고록을 구술할 때도 워털루 패전은 부하들의 잘못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아침을 먹은 뒤 나폴레옹은 식탁 위에 지도를 펴놓고 부하 장군들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유리한 정황이 90이고 불리한 점이 10이다.”
워털루 전투의 실질적인 야전 지휘관이 되는 네이 원수(元帥)가 찾아와서 ‘웰링턴이 철수를 준비하는 것 같다’고 보고했을 때는 면박을 주었다.
“귀관은 오판(誤判)하고 있어. 웰링턴은 주사위를 던졌어. 그런데 우리에게 유리한 판이 되었어.”
나폴레옹은 참모장 술 원수가 ‘패주한 프로이센 군대를 추적 중인 글로시 원수의 3만3000 병력을 불러들이자’고 건의하자 무안할 정도로 잘랐다.
“귀관은 웰링턴에게 패배했기 때문에 그를 위대한 장군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말해두건대 그는 엉망인 장군이고 영국군도 엉망이며 이번 전투는 그냥 산보 가는 거야.”
이날 오후에 가면, 글로시 원수의 병력을 빨리 회군시키지 않은 나폴레옹의 선택은 치명적 실수로 판명된다. 다른 장군이 영국 보병은 끈질기고 조준이 정확하기 때문에 정면 공격으로 중앙을 돌파하는 것보다는 측면이나 후방을 치는 우회(迂廻)기동을 건의했을 때도 나폴레옹은 비웃듯이 감탄사를 내지를 뿐이었다.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이 찾아와서 또 다른 정보를 전했다. 전날 저녁 제롬은 웰링턴이 그 전에 식사를 했던 워털루의 한 식당에 들렀는데, 웨이터가 엿들은 이야기를 해주더란 것이다. 요지는 퇴각 중인 블뤼헤 원수의 프로이센 군대와 영국군이 합류하여 프랑스군에 대항하기로 약속을 하더란 것이었다. 나중에 정확한 정보로 밝혀지지만 나폴레옹은 “그건 난센스야. 두 군대가 합류하려면 이틀은 걸릴 거야”라고 일소했다.
보병과 기병

▲나폴레옹에게 승리한 영국의 아서 웰즐리(웰링턴 공작).
이날 나폴레옹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전투 시작을 못내 꺼려 한 낌새를 차릴 수 있다. 나폴레옹은 오전에는 별다른 이유 없이 허송했다. 전투 개시를 늦추는 명분이 생기긴 했었다. 포병사령관이 오더니 간밤에 내린 비로 땅이 젖어 포대를 움직이기 어렵다고 보고했다. 보통 때 같으면 그 정도의 이유로 결전 시간을 늦출 나폴레옹이 아니었지만 이날 그는 순순히, 혹은 기다렸다는 듯이 포격 개시 시각을 연기했던 것이다.
열병식을 마친 나폴레옹은 로솜이라 불리는 여관 앞에 지휘소를 차리고 의자에 앉았다. 그는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생각에 잠겼다.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한 사람은 나폴레옹이 갑자기 멍한 상태에 빠지는 듯했다고 기억했다. 이때 그는 치질로 인한 고통을 참으면서 전투 상황에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자리 잡은 지휘소도 전장(戰場)이 내려다보이는 곳이 아니었다.
해는 거의 중천에 떠올랐다. 오전 11시였다. 이때 영국군을 주력(主力)으로 하는 동맹군 6만7000명과 프랑스군 7만2000명이 1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나폴레옹과 웰링턴은 이제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양군(兩軍)은 다 같이 보병, 기병, 포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병이 가진 소총은 그 전 150년 동안 거의 개량된 적이 없었다. 당시의 소총 총탄은 지름이 2cm, 보병은 종이로 싼 화약을 가지고 다녔다. 입으로 봉지를 물어뜯어 화약을 발사판과 총대 속에 넣은 뒤 총알을 총대 속으로 밀어 넣고 쑤시개로 쑤셔 단단하게 틀어막고 발사하는 데 30초가 걸렸다. 훈련을 잘 받은 보병이라야 1분에 두 발을 쏠 수 있었다.
1815년 6월 18일 워털루에서 보병들이 쓴 소총은 50발 이상을 쏘면 화약을 점화(點火)시키는 장치가 작동하지 않게 되고, 총대 안에 화약이 차서 발사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 쑤시개로 총대를 쑤셔 소제하느라고 시간을 까먹어야 했다. 이 때문에 보병들은 여러 줄을 만들어 교대로 총을 쏘게 되었다. 유효(有效) 사거리(射距離)는 수백 미터였지만 좀처럼 명중하지 않았다. 전장에서는 조준사격보다는 한 방향으로 몰아 쏘는 지향사격이 주(主)였다. 근접하면 총검으로 백병전에 돌입했다.
기병(騎兵)은 칼, 권총, 소총, 창 등으로 무장했다. 칼보다는 창이 효과적이었다. 프랑스 기병만이 가슴을 보호하는 갑옷을 입었다. 기병이 말에서 내리면 갑옷 무게로 움직임이 둔해졌다.
포병술의 천재
워털루의 결전 날 웰링턴이 지휘하는 영국군 중심의 연합군 6만7000명은 156문의 대포를, 나폴레옹의 7만2000명은 246문의 대포를 갖고 있었다. 포병장교 출신인 나폴레옹은 포병을 활용하는 데 천재였다. 포격으로 적진을 흔들어놓은 뒤 보병, 기병, 마지막엔 정예 근위대를 투입해 결정을 짓는 방식이었다. 대포알은 세 종류였다. 터지지 않는 강철탄, 터지면서 파편으로써 살상(殺傷)하는 탄, 그리고 바늘・침 같은 것을 속에 넣었다가 폭파시키는 수류탄 비슷한 포탄. 터지지 않는 강철탄은 무게가 5kg 정도였는데, 보병·기병 밀집대형을 향하여 쏘면 수십명이 한 방으로 살상당하기도 했다. 대포의 발사 충격을 흡수하는 장치가 개발되지 않았을 때였다. 한 번 쏠 때마다 포대가 움직여 다시 조준하여야 했다. 발사속도는 소총과 같아 1분당 두 발 정도였다.
기병이 보병을 향해서 돌격하면 보병은 밀집대형으로 쪼그리고 앉아 총검을 숲처럼 세웠다. 말들도 이 총검의 숲을 향해서 질주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밀집대형을 만들면 보병은 두려움이 사라지고 달아나고 싶어도 이탈할 수가 없게 된다. 대형(隊形)을 벗어나면 기병에게 당하기 때문이다.
보병이 빨리 밀집대형을 갖추어 총검의 숲을 만들기만 하면 기병이 당해내기 어려웠다. 그런 대형을 갖추기 전에 돌격하여 보병을 패주(敗走)시켜야 했다. 이 때문에 기병이 돌격할 때는 보병이, 보병이 돌격할 때는 기병이 보조해주어야 했다. 이날 나폴레옹은 이런 상식을 무너뜨리는 이상한 작전을 편다.
통상적인 전투 절차를 보면, 먼저 포병의 집중 포격이 시작된다. 포격으로 적진이 흔들리면 보병이 앞장서고 기병이 뒤를 따른다. 보병은 적의 최전선(보통 포병)에 접근할 때까지 사격을 삼간다. 충분히 접근한 뒤 일제사격, 그런 다음 총검을 앞세워 바로 돌격을 개시한다. 그 직후 기병이 뒤에서 나타나 전열(戰列)이 흐트러진 적진(敵陣)으로 돌입, 적의 보병이 밀집대형을 갖추기 전에 전선(戰線)을 붕괴시켜야 한다. 이런 타이밍이 승패를 결정지었다. 어느 쪽이 끈질기게 버티는 보병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했다. 해군 국가인 영국은 그런 보병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이 웰링턴의 자랑이었고, 이날 진가(眞價)를 발휘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군의 후방, 여관 앞에다가 지휘소를 잡았다. 이곳에선 적군이 장악한 능선 뒤에서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능선상의 웰링턴은 저지대의 프랑스군 동향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포격 시작

머뭇거리던 나폴레옹이 웰링턴 군대를 향하여 포격을 명령함으로써 전투를 시작한 시각은 오전 11시30분쯤이었다[이 시각에 대해선 이견(異見)이 있다]. 첫 표적은 프랑스 군대의 좌익 앞에 있는 휴고몽이라 불리는 농장건물군(群)이었다. 2000명의 영국군이 지키고 있었다. 이곳에 대한 프랑스군의 포격과 잇단 보병 공격은 워털루의 본 게임은 아니었지만 전략적 중요성은 컸다.
요새화된 건물을 둘러싼 포격전과 백병전(白兵戰)은 종일 계속되었다. 영국 군대는 끝까지 건물을 지켜내었다. 한때는 정문이 돌파되어 약 100명의 프랑스 보병이 정원 안으로 들어왔다. 정원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한 영국군의 수기(手記)이다.
〈나(맥도넬 대령)는 프랑스 군인들의 함성이 등 뒤로 들렸을 때 정원에 있었다. 나는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양쪽 군인들이 뒤섞여 도끼, 총검, 칼로 백병전을 펼치고 있었다. 영국군의 일부는 계단을 따라서 저택 입구로 물러나고 있었다. 다른 군인들은 저택의 창을 통해 몰려오는 프랑스 군인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나는 부하 세명을 데리고 정문 쪽으로 달려갔다. 프랑스 군인들이 바깥에서 문을 밀어붙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사이 문을 다시 닫고 큰 나무틀을 내려 안에서 잠그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 웰링턴은 ‘워털루의 승리는 이 정문을 닫는 데 성공했기에 가능했다’고 쓴 적이 있다. 영국군은 정문을 봉쇄한 뒤 안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군인들을 찾아내 죽이느라고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북 치는 소년병은 살려주었다.
동맹군 요새로 변한 휴고몽 농가(農家)를 점령하기 위한 프랑스군의 공격은 한 시간을 넘어도 성공하지 못하고 국지적(局地的)인 공방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오후 1시 프랑스의 야전(野戰)지휘관 네이 원수는 전선(戰線)의 후방에서 의자에 앉은 채 지휘하고 있던 나폴레옹에게 전령(傳令)을 보내 보병 총공격 준비가 다 되었다고 보고한다. 이때까지도 나폴레옹은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는 전투가 진행 중인데도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일어나 망원경으로 전장을 훑어보고는 다시 앉고 했다.
프로이센군의 출현

▲워털루 전투 당시 프로이센군 사령관 블뤼헤.
네이의 연락을 받자 그는 다시 일어나 망원경을 눈에 대었다. 오른쪽으로 약 8km 떨어진 숲속에 정체불명의 부대가 보였다. 참모들은 부대의 복장으로 보아 프로이센 군인 같다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참모는 프랑스 군인 같다고 했다. 잠시 뒤 포로가 된 프로이센 기병장교가 불려왔다.
그는 웰링턴과 합류하기 위해서 달려오고 있는 블뤼헤 장군의 부하 장교라고 자백했다. 문제가 심각해진 것이다. 나폴레옹은 글로시 장군이 퇴각 중인 블뤼헤 장군 부대를 추적 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그 부대가 나타난 것이다. 나폴레옹은 약 20km 멀리 있는 글로시 장군에게 긴급 지시문을 보낸다.
‘즉시 아군 쪽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이 명령서를 기병장교가 갖고 달려가는 데 두 시간 이상 걸리고 이 명령서를 수령한 글로시 장군이 워털루까지 온다고 해도 한밤중일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우선 기병과 보병을 보내 접근 중인 프로이센군의 선봉을 요격하도록 조치했다. 이 단계에서 전투를 중단시키거나 후퇴하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아침 우리는 90대 10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60대 40으로 유리하다.”
오후 1시30분 네이 원수는 포병에 웰링턴 군대를 향하여 일제 포격을 명령했다. 9~15kg짜리 포탄들이 날아갔다. 양쪽 합해서 14만 군대가 가로세로 3×3km 정도의 공터에 밀집해 있었다. 밀집대형을 향하여 포탄이 쏟아지니 죽고 다치는 군인들이 많았다. 강철탄을 맞은 군인의 몸이 두 동강 나고, 머리통이 날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웰링턴 군대는 잘 견뎠다. 동맹군은 유럽의 여러 나라 군대로 편성된 혼성군이었는데, 영국군이 약 4분의 1이었다. 이들은 스페인에서 단련된 고참이었다. 웰링턴은 영국 사병들을 다국적 군대 사이에 끼워 넣어 다른 나라의 신참 군인들을 붙들어놓도록 했다.
프랑스군의 포격은 포탄이 진흙땅에 박혀 불발하는 등 큰 타격을 주진 못했다. 웰링턴은 보병들을 능선 뒤로 일단 물려 포화를 피하도록 했다. 프랑스 포병은 저(低)지대에 있었으므로 능선 뒤의 웰링턴군 동향을 잘 알 수 없었다. 네이는 동맹군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고 혼란에 빠져 붕괴하고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보병의 정면 공격을 명령했다.
보병 돌격 실패
약 1만7000명의 보병이 대열을 유지하면서 동맹군을 향하여 서서히 진격하는 모습은 장엄했다. 북소리에 맞추어 ‘황제 만세!’를 부르짖으면서 거대한 인간덩어리가 뚜벅뚜벅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양쪽에서는 기병이 따랐다. 엄청난 물체의 관성이 적진을 자연스럽게 돌파할 것 같았다. 여기에 약점이 숨어 있었다. 프랑스 보병은 너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장교들의 명령이 들리지 않았다. 간밤에 온 비로 땅이 질퍽질퍽했다.
많은 보병은 신발이 진흙에 감겨 벗겨졌다. 맨발의 보병이 되었다. 바지에 진흙이 붙어 행군에 지장이 컸다. 밀집대형 한가운데 있는 군인들은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적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태로 적진에 돌입하면 총을 쏠 수 있는 보병은 앞의 3열뿐이었다. 뒷줄 병사들은 덩어리로 엉켜 있어 장전도 발사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밀집대형은 포격의 좋은 표적이었다.
프랑스 보병이 접근하자 최전방을 지키던 네덜란드-벨기에군은 달아났다. 오후 2시30분쯤 프랑스 보병은 능선까지 올라갔다. 스코틀랜드 보병 3000명이, 능선 뒤에 숨어서 프랑스군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능선을 넘은 프랑스 보병이 50보 거리로 접근했을 때 이들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그들은 능선으로 달려가 다가오는 프랑스 보병들을 향하여 일제 발사했다. 한 발을 발사한 다음 제2탄을 쏘려면 30초가 걸린다. 그사이 프랑스 보병이 덮치므로 제2탄 발사를 포기하고 총검에 의지하여 돌격, 백병전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두 덩어리의 인간 집단이 정면충돌했다. 찌르고 쏘고 비명과 함성과 괴성이 오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순간 웰링턴의 부하 욱스브리지 중장이 2600명의 중기병 부대를 투입했다. 그들은 동쪽 비탈을 달려 내려가면서 프랑스 보병을 흩어버리고, 일순의 승리에 도취하여 너무 깊숙이 진격했다가 프랑스 창기병 2400명의 반격을 받았다. 영국 기병대는 지휘관 폰손비 소장 등 1205명과 1303마리의 말을 잃고 물러났다. 이 중기병 돌격은 괴멸적 타격을 입었지만 웰링턴군의 중앙에 집중된 프랑스 보병 공격의 기세를 꺾는 데는 성공했다. 프랑스 보병은 적진 돌파에 실패하고 일단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하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 두 군대가 일진일퇴하는 사이에 오후 3시가 지나고 프로이센군이 속속 도착, 동맹군에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전세가 웰링턴에게 유리해지고 있었다

▲기병돌격. 파노라마관의 기록화로 전투 100주년 때 프랑스 화가가 그렸다.
기병 돌격도 실패
오후 4시를 넘은 시각, 네이 원수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고 있던 웰링턴 진영의 중앙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판단하였다. 사실은 부상자를 뒤로 옮기는 것이었는데 후퇴라고 본 것이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네이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기병 돌격을 명령한다. 보병 지원 없이 너무 서둔 돌격이었다. 67개 중대의 9000명으로 구성된 기병이었다. 돌격이 시작된 직후 이를 지켜보던 나폴레옹은 ‘한 시간은 빠르다’고 중얼거렸으나 멈출 수가 없었다. 영국군 진영의 한 기록자는 이런 글을 남겼다.
〈네 시경, 우리 앞의 적 포대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거대한 기병의 무리가 나타나더니 진격을 개시하였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영원히 그 장엄한 광경을 잊을 수 없었다. 기병이 다가올수록 바다의 파도가 햇볕을 받은 것처럼 번쩍거렸다.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렸다. 이 엄청난 질량을 저지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유럽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 그들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을 때 영국군에 명령이 떨어졌다. 기병은 ‘황제 만세’를 외치며 돌진하고, 영국 보병은 무릎을 꿇고 총검을 세웠다.〉
기병은 비탈길을 질주하지 못했다. 너무 붙어 있어 그런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웰링턴군은 이들에게 집중 포격을 가했다. 말과 기수가 무더기로 무너져 벽이 될 지경이었다. 웰링턴군은 대혼란에 빠졌으나 방어진을 만드는 데 성공, 무너지지 않았다. 동맹군은 두 시간 동안 이어진 프랑스의 기병 돌격에 보병·기병·포병 합동작전으로 저항하였다.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기병 돌격의 실패를 지형에 돌렸다. 기병이 능선을 넘는 순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구덩이처럼 파인 지형이었고 이 속으로 기병이 쏟아져 들어가버렸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 상영된 영화 〈워털루〉(로드 스타이거 주연)는 이 주장을 따른 것이다. 위고의 이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 약간 파인 지형으로 실패의 원인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황제 근위대의 최후

▲1821년에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죽은 나폴레옹의 데스 마스크.
이날 오후 돌아온 프로이센 군대는 프랑스군의 우익으로 접근, 본격적으로 전투에 가담한다. 워털루 인근 마을을 공격하고 프랑스군이 응전, 수차례 주인이 바뀐다. 나폴레옹은 아껴둔 근위대에서 4200명을 빼내 이들을 막도록 보냈다. 웰링턴 군대를 제대로 제압하기 전에 프로이센군이 나타나 양면 전투를 강요당했다.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도록 3만3000명의 병력을 붙여 보냈던 글로시 원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그는 워털루 전투가 시작되어 포성이 들리는데도 프로이센군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글로시군이 워털루에서 약 10km 떨어져 있어 즉각 추격을 포기하고 워털루로 돌아와 나폴레옹군과 합류했더라면 승패는 달라졌을 것이다. 참모들도 포성이 들리는 워털루로 돌아가자고 건의하였으나 글로시는 이를 거부하고 더 멀리 행군했다. 이 바보짓으로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다. 나폴레옹도 세인트헬레나섬에서 회고록을 구술하며 글로시를 속죄양(贖罪羊)으로 삼았다.
오후 5시를 넘어 프랑스 보병은 연합군 정면의 농가를 점령, 포병이 이를 방패 삼아 동맹군의 중앙 방어선을 때릴 수 있도록 했다. 네이 장군은 부관을 나폴레옹에게 보내 증원군을 요청했다.
“증원군? 없어. 내가 만들어내야 한단 말인가.”
웰링턴은 흔들리고 있었다. 중앙이 무너질 위기임을 감지한 것이다. 그는 참모들에게 “밤이 빨리 오든지 블뤼헤가 오든지 해야 할 텐데”라고 중얼거렸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 독백을 인용해 프로이센 원군의 주력이 오지 않았더라면 웰링턴을 끝장낼 수 있었다고 주장, 나폴레옹이 결코 영국군에 진 건 아니라고 강변한다.
오후 7시30분 드디어 나폴레옹은 마지막 카드를 꺼낸다. 예비로 아껴두었던 황제근위대를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프로이센군의 주력이 웰링턴군에 속속 합류하고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승부를 내야 한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황제근위대는 항상 최후에 등장해 무너지는 적군의 심장에 대못을 박아 승부를 결정짓는 역할을 해왔다. 이 정예부대는 한 번도 전투에서 진 적이 없었다. 이날은 달랐다. 전세를 굳히는 결정타가 아니라 불리해지는 전세를 회복시키기 위한 마지막 도박에 투입된 것이다. 남은 근위대는 5000명이 안 되었다. 나폴레옹은 이들 앞에 나타나 짧은 연설을 했다.
“결정적 순간이다. 귀관들은 사격하지 말고 총검으로 돌진하여 저들을 쓸어버려라.”
프랑스 포병의 포격 뒤, 근위대는 비탈을 올라갔다. 능선에 접근해 속보로 달려드는 순간, 웰링턴군은 집중포화를 안겼다. 첫 포격에 500명이 쓰러졌다. 보병이 이어서 나타나 근위대를 향하여 20보 앞에서 총검 돌격을 감행했다. 근위대의 뒤편에선 휴고몽 요새를 지키던 동맹군이 나와서 후군을 공격했다.
근위대는 갑자기 진격을 멈추었다. 불패의 근위대가 멈칫하자 ‘졌다’는 패배감이 프랑스 전군(全軍)을 감싸고 순식간에 전염되었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웰링턴 장군이 능선 위에 나타나 모자를 벗어 흔들어 총진격을 명령하였다. 황제근위대를 비롯, 프랑스군 전체가 등을 돌려 비탈을 내려가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20년간 유럽을 휩쓸었던 나폴레옹군의 총붕괴였다. 프로이센군이 앞장서서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했다. 블뤼헤 사령관은 포로를 살려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살아남은 근위대가 나폴레옹을 호위해 파리로 달아났다. 밤 10시쯤 웰링턴과 블뤼헤가 한 농장에서 만나 승리를 축하하였다. 들판엔 쌍방 약 5만명의 군인이 시신(屍身)이나 부상자로 변하여 누워 있었다. 이웃 농민들이 밤에 시신을 뒤지면서 물건을 약탈하고 프랑스군 부상자들을 죽였다. 달밤 아래 신음과 비명으로 뒤덮였던 그 들판에 차마 건물을 지을 수 없었는지 지금도 잡초만 무성하다. 웰링턴은 이날 밤 영국으로 보낸 전황 보고서에 ‘워털루 전투’라고 적어 이곳을 불멸(不滅)의 지명으로 만들었다.⊙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mongol@chosun.com
월간조선 09월 호
희귀사진으로 보는 중국공산당 100년
한 알의 불씨가 曠野를 불사르다!

▲문화대혁명 당시의 매스게임. 권력을 탈환하려는 마오쩌둥의 욕망은 문화대혁명 기간 중국 전역을 大動亂 속으로 몰아넣었다.
1921년 7월 23일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租界)의 어떤 집에 한 무리의 사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중국 곳곳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의 ‘대표’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50명. 중국공산당 창당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회의에 참석하면 준다는 지원금에 혹해서 참석한 사람도 있었다. 그 지원금은 소련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얼마 후 프랑스 조계 공무국(工務局·경찰)의 추적이 시작됐다. 대부분이 흩어지고 12명이 상하이 인근 자싱(嘉興)으로 몸을 피했다. 회의는 7월 31일까지 이어졌다. 이들은 시후(西湖) 연우루(煙雨樓) 앞에 띄워놓은 배 위에서 중국공산당 창당을 결의했다. 이들 중에는 후난성(湖南省)에서 올라온 28세의 청년 마오쩌둥(毛澤東)도 있었다.
창당 기념사진 같은 것은 없었다. 오랜 투쟁과 도피 생활 속에서 처음 자신들이 모였던 프랑스 조계의 집이 어디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도 가물가물해졌다. 회의 날짜에 대한 기억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1938년 5월 마오쩌둥은 제1차 당대회가 열린 달의 첫째 날인 7월 1일을 창당기념일로 하자고 제의했다

▲상하이 인근 자싱의 西湖에 띄운 배 안에서 중국공산당이 창당됐다.
미국 언론인 아그네스 스메들리가 홍군(紅軍)사령관 주더(朱德)와의 인터뷰를 기록한 책의 제목처럼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살랐다’. 12명으로 시작한 중국공산당은 난창(南昌)봉기나 광저우(廣州)코뮌 같은 초기의 시행착오, 장제스(蔣介石) 정부의 토벌전과 그 뒤를 이은 대장정(大長征) 같은 시련을 거치면서 살아남았다.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1923~1927년), 시안(西安)사변과 제2차 국공합작(1937~1945년), 중일전쟁은 미약하던 중국공산당이 성장하고 생존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결국 중국공산당은 일본이 패망한 후 재개된 제2차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승리했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天安門)에 올라선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언하면서 “신중국(新中國)이 일어섰다”고 외쳤다.
장제스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실망하고 있던 지식인들을 비롯한 많은 중국인이 ‘신중국’에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곧 산산조각이 났다. 토지개혁, 반우파투쟁, 대약진운동, 사회주의교육운동, 그리고 문화대혁명 등으로 신중국에서의 나날들은 영일(寧日)이 없었다. 수천만명이 굶어 죽고, 맞아 죽고, 얼어 죽고, 처형되고, 자살했다. 마오쩌둥 사후(死後) 덩샤오핑(鄧小平)이 집권해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중국은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1989년 천안문사태나 2019년 홍콩사태에서 보듯 중국공산당에 대한 도전은 유혈(流血)사태로 막을 내리곤 했다. 티베트나 위구르인, 그리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통일의 기회를 놓친 한국인들도 중국공산당의 희생자들이다.
미국 언론인 아그네스 스메들리가 홍군(紅軍)사령관 주더(朱德)와의 인터뷰를 기록한 책의 제목처럼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살랐다’. 12명으로 시작한 중국공산당은 난창(南昌)봉기나 광저우(廣州)코뮌 같은 초기의 시행착오, 장제스(蔣介石) 정부의 토벌전과 그 뒤를 이은 대장정(大長征) 같은 시련을 거치면서 살아남았다.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1923~1927년), 시안(西安)사변과 제2차 국공합작(1937~1945년), 중일전쟁은 미약하던 중국공산당이 성장하고 생존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결국 중국공산당은 일본이 패망한 후 재개된 제2차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승리했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天安門)에 올라선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언하면서 “신중국(新中國)이 일어섰다”고 외쳤다.
장제스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실망하고 있던 지식인들을 비롯한 많은 중국인이 ‘신중국’에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곧 산산조각이 났다. 토지개혁, 반우파투쟁, 대약진운동, 사회주의교육운동, 그리고 문화대혁명 등으로 신중국에서의 나날들은 영일(寧日)이 없었다. 수천만명이 굶어 죽고, 맞아 죽고, 얼어 죽고, 처형되고, 자살했다. 마오쩌둥 사후(死後) 덩샤오핑(鄧小平)이 집권해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중국은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1989년 천안문사태나 2019년 홍콩사태에서 보듯 중국공산당에 대한 도전은 유혈(流血)사태로 막을 내리곤 했다. 티베트나 위구르인, 그리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통일의 기회를 놓친 한국인들도 중국공산당의 희생자들이다.

▲1924년 6월 16일 황푸(黃埔)군관학교 개교식. 쑨원(孫文·가운데), 장제스(원 안) 등의 모습이 보인다. 중국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정치부 주임으로 있으면서 붉게 물들인 학생들은 후일 중국 공산혁명의 주역이 되었다.
오늘날 중국공산당 당원은 9000만명에 달한다. 중국공산당은 창당 100주년 기념행사를 당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당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다.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는 공산당 찬양가요처럼 공산당이 있었기에 아편전쟁 이후 ‘100년 국치(國恥)’에서 벗어나 오늘날과 같은 강성한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교육과 경축행사들이 계획되어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1989년 천안문사태 희생자 유족들의 모임인 ‘천안문어머니회’가 지난 6월 4일 공산당을 향해 “국민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최근 입수한 희귀사진들로 중국공산당 100년을 되돌아보는 특집을 꾸며본다.⊙

▲제1차 국공합작 당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부들. 당시 공산당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했다. 맨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선전부장 대리 마오쩌둥. 후일 일본이 세운 괴뢰정부의 수반이 되는 왕징웨이(汪精衛·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의 모습도 보인다.

▲1927년 4월 28일 처형되기 직전 리다자오(李大釗). 초기 중국공산당 지도자 중 한명인 그가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으로 있을 때 그의 밑에 있던 사서 중 한명이 마오쩌둥이었다

▲1922년 6월 8일 프랑스 유학생들은 중국소년공산당을 만들었다. 뒷줄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가 저우언라이다. 덩샤오핑도 소년공산당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1927년 10월 추수폭동에 실패한 후 1500여명의 패잔병들을 이끌고 장시성(江西省) 징장산(井岡山)으로 들어간 마오쩌둥은 그곳의 산적 세력을 흡수해 ‘징장산소비에트’를 건설했다. 가운데가 마오쩌둥(원 안), 그 왼쪽이 린뱌오다.

▲초기의 공산당 여성 당원들. 앞줄 왼쪽이 저우언라이의 아내 덩잉차오(鄧穎超)다.

▲1927년 8·7 회의가 열렸던 현장. 장제스의 쿠데타로 제1차 국공합작이 깨진 후 열린 8·7회의에서 공산당은 무장폭동 노선을 결의했다. 이후 공산당은 난창봉기, 광저우코뮨, 추수폭동 같은 무모한 폭동을 이어갔다.

▲大長征을 마치고 옌안(延安)에 도착한 홍군. 1934년 10월 장시성 루이진(瑞金)을 출발한 홍군은 370일간 1만2500km에 달하는 ‘고난의 행군’을 했다. 8만6000여명에 달하던 병력이 600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대장정 이후부터 제2차 국공내전 시기까지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였던 옌안은 오늘날 ‘革命聖地’가 되었다.

▲옌안 시절의 마오쩌둥과 그의 아내 장칭(江靑), 딸 리너(李訥). 리너는 문화대혁명 기간 중 마오쩌둥의 충실한 추종자 노릇을 했다. 후일 마오쩌둥의 경호원과 결혼했다.

▲집도 절도 없는 거지도 애국심은 있다! 중일전쟁 기간 중 방위성금 모금에는 거지들도 동참했다.

▲중일전쟁 중 철도를 파괴하는 항일 유격대원들.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투쟁을 통해 민중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46년 1월 7일 벌어진 내전반대 시위. 하지만 이미 내전은 시작되고 있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한 후 충칭(重慶)에서 만난 장제스(가운데)와 마오쩌둥은 駐中 미국대사 패트릭 헐리(왼쪽)의 중재 아래 내전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중일전쟁 시기의 홍군 총사령관 주더(朱德·가운데)와 덩샤오핑(원 안). 덩샤오핑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시기에 후일 ‘10대 元帥’가 되는 군인들 못지않은 戰功을 세웠다. 이러한 군사적 경력이 후일 그의 권력과 권위의 원천이 되었다.

▲동북민주연군(제4야전군)의 작전회의를 이끄는 린뱌오(林彪·가운데), 린뱌오는 국공내전 승리의 일등 공신이었다. 오른쪽 끝이 펑전(彭眞·前 베이징시 제1서기, 전인대 상무위원장).

▲1949년 1월 베이징 점령 직전 공산당軍의 마지막 지휘소였던 서백파(西柏坡) 지휘소에서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왼쪽).

▲1949년 1월 베이징 함락 후 ‘베이핑(北平·당시 베이징의 이름)해방대회’를 앞두고 천안문에는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사진이 걸렸다.

▲1964년 10월 중국은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물리학자 첸쉐썬(錢學森)은 ‘매카시 선풍’ 당시 중국 간첩으로 몰려 고초를 겪은 후 중국으로 귀국해 ‘중국 핵개발의 아버지’가 됐다.

▲1958년 국무원 부총리 시중쉰(習仲勳)과 두 아들. 왼쪽이 당시 5세던 시진핑(習近平) 현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다. 가운데는 시진핑의 동생 시위안핑(習遠平).

▲문화대혁명 초기의 문혁소조 지도부. (왼쪽부터) 치번위(戚本禹), 천보다(陳伯達), 장칭.

▲문화대혁명 당시 소총을 들고 혁명무용을 하는 소녀들. 험악한 시대였다.

▲1971년 5월 1일 천안문 성루에서 열린 마오쩌둥(왼쪽)과 린뱌오(오른쪽)의 마지막 만찬. 넉 달 후 린뱌오는 비행기를 타고 중국을 탈출하려다가 내몽골 사막에 추락해서 사망했다.

▲1976년 10월 6일 공산당 지도자 ‘4인방’(장칭·야오원위안·왕훙원·장춘차오)이 체포된 후 그들의 인형이 나무에 매달렸다. 4인방 체포에 환호하던 인민들은 문화혁명이 한창 진행될 때에는 4인방에게 환호했었다.

▲중국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는 자본주의의 상징과 같은 증권거래가 시작됐다.

▲1979년 1월 덩샤오핑의 미국 방문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후야오방(胡耀邦). 1980~ 1987년 공산당 총서기로 개혁·개방을 이끌었다. 1986년 부정부패에 항의하는 학생시위에 동조적인 입장을 취하다가 이듬해 실각했다. 1989년 그의 죽음은 6·4 천안문사태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산업현장을 시찰하는 덩샤오핑(원 안). 중국 인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실용적 지도자였지만, 천안문사태를 유혈진압한 냉혹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덩샤오핑(왼쪽)과 김일성. 젊어서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김일성은 중국 지도자들과 통역 없이 대화가 가능했다.

▲북한노동당과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만남. (오른쪽부터)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 북한 부수상 박성철,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중국 정보총책 캉싱(康生).

▲미국 닉슨 대통령은 1972년 2월 중국을 전격 방문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이 손잡으면서, 중국이 국제무대로 복귀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시진핑과 중국 원로 과학자 우민. 시진핑은 원로 과학자들을 깍듯이 예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월간조선 10월 호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이후의 세계
美의 다음 전쟁은 글로벌 차원에서 國益에 직접 관련된 전쟁
⊙ 美, 아프간 철수로 全 세계 어디에서도 전쟁 벌이지 않는 나라가 됐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어디서도 전쟁 벌일 수 있게 돼
⊙ 영국 등 유럽, 對中 견제의 助演이 아니라 主演
⊙ 지난 8월 미국 증시에 중국 관련 기업은 하나도 上場 안 돼… 금융 디커플링 시작
⊙ 한국만 ‘중국 패권론’에 현혹… 중국을 통한 反美정서 해소용인가?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前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6월 14일 브뤼셀에서 열린 NATO 정상회의에 참석, 중국·러시아 견제를 위해 회원국들이 협력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사진=AP/뉴시스
‘가속도가 붙는 시대와 그에 맞서는 준비를…’
유럽의 대표적인 지성(知性) 중 하나인 프랑스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가 최근 언론에 기고한 글의 제목이다. 세상 스피드가 예상을 뛰어넘어 엄청 빨라지고 있으며 신속한 대응이 절실하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갑자기 글로벌 뉴스 헤드라인으로 등장한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미국과 서방 쪽의 부실한 대응을 지적한 글이다.
아탈리는 1989년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무너질 때의 일을 소개하고 있다. 당시 조지 H. 부시 미국 대통령은 독일 통일이 10년 뒤에야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 동서독 통합은 부시 발언 이후 불과 1년 만에 이뤄졌다. 탈레반의 카불 입성도 원래 1년 이상 걸릴 것으로 전망했지만, 미군 철수가 이뤄지는 순간 함락됐다.
아탈리는 냉전(冷戰) 종식 이후 나타난 변화를 보면서, 글로벌 시대의 스피드가 앞으로 한층 더 가속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예를 들어 2050년으로 예상되는 파멸적인 지구 온난화(溫暖化)도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4년 뒤인 2025년에 닥칠 수 있고, 미군의 나토(NATO) 철수도 미국 이익에 맞춰 한순간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변이(變異) 바이러스 확산, 중국의 타이완(臺灣) 침공도 스피드를 더해가는 발등의 불이라고 경고한다.
탈레반의 카불 점령 소식도 마찬가지다. 지난 8월 15일부터 난리를 치면서 글로벌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더니, 9월 1일 이후 갑자기 해외토픽 수준 뉴스로 뚝 떨어졌다. 여성 인권 문제와 관련된 탈레반의 폭정(暴政) 소식이 줄을 잇고 있지만, 9월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이라크·시리아 관련 뉴스가 그러했듯이, 미국인 집단 참수(斬首) 같은 좀 더 충격적인 ‘핏빛’ 뉴스가 없는 한 앞으로 탈레반 관련 뉴스는 해외토픽 수준에 머물다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이다.
탈레반도 결국 다시 미국을 찾게 될 것
아프가니스탄 문제가 일단락되면서 그 이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언제나처럼 반미(反美)를 외치는 사람들은 미국의 권위 추락과 미군에 대한 불신(不信)을 강조하면서 ‘미국 황혼론’에 무게를 두는 듯하다. 2001년 9·11 동시 테러 이후 20년이나 이어져온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실패로 끝나면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미국의 영향력·지도력이 급추락할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과연 그럴까?
북한·쿠바·필리핀·베트남·이란·이라크 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미국과 전쟁을 벌였거나 갈등 관계에 있는 나라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슈퍼 파워 미국을 물리쳤다는 국가적 자부심이 넘치는 나라들이기도 하다.
그런 승리감의 이면(裏面)에는 초라한 현실이 드리워져 있다. 물리적으로 쫓아내기는 했지만, 나라 전체가 엉망이 됐다. 미국과 관계 맺었을 때보다 더 나쁜 현실만 밀려왔고, 미래는 한층 더 나빠질 전망이다. 돌고 돌아,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나라들은 미국과 다시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싫어서 쫓아내기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라가 미국이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승리감에 도취해 당분간 큰소리를 치겠지만, 3800만 국민의 밥그릇을 채우려면 그들도 미국과 관계 개선을 하기 위해 목을 매게 될 것이다.
미국이 옳은지 그른지를 물으며 단죄(斷罪)하는, 정의(正義)의 세계관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혹자는 이에 대해 박수를 치고 존경의 눈으로 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의문이다. 국내에서도 가닥을 잡기 어려운 정의론이 국제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다고 믿는 발상 자체가 신기하다. 이해관계에 따라 부모·자식 간 관계조차 막장으로 가는 시대다.
미국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핵심이다. 미국이 악마인지 천사인지 여부는 논외 사항일 뿐이다. 미국이 천사는 아니겠지만, 악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현실을 무시하고 흑백 논리로 미국을 본다면, ‘우리끼리 주체의 나라’만이 유일한 대안(代案)이 될 것이다.
미국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된 중국
‘중국’은 아프가니스탄 사태 이후 글로벌 뉴스의 키워드가 되고 있다. 21세기로 들어선 이후 중국은 줄곧 세계 뉴스의 헤드라인을 차지해왔기에 사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사태 이후 중국은 ‘미국과 정면으로 부딪칠 나라’가 됐다는 점에서 이전과 상황이 다르다. 이제는 쿠션 없이 ‘미국과 정면으로 부딪칠 나라’가 중국이란 말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하면서 미국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전쟁을 벌이지 않는 나라가 됐다. 발칸반도·중동(中東)·아프리카 등 거의 전 세계를 무대로 미군이 전쟁을 벌이던 상황은 역사 속 아스라한 기억으로 사라져버리는 듯하다.
‘전쟁광(戰爭狂) 미국’이 사라졌으니 마침내 지구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정반대다. ‘평화의 미국’은 이제 언제 어디에서라도 전쟁을 벌일 수 있게 됐다. 앞으로도 미국과 무관하게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면 결국 대부분이 ‘해결사 미국’에 손을 내밀 것이다. 전쟁 당사국(當事國)만이 아니라 주변국이나 이해 관련국이 미국을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당분간 그런 요청에 무심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후유증’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미국의 적(敵)’으로 부상(浮上)한 중국이 거부의 배경에 있다. 미국에 있어서 중국은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니다. 미국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미국의 다음 전쟁
역사를 통해 보면, 패권(覇權)국가는 지구상 어딘가에서 항상 전쟁을 벌인다. 영향력이나 영토 확장만이 아니라, 전쟁을 통한 긍정적 효과와 결과가 패권국가로 나아가게 하는 동인(動因)으로 작용해왔다. 전쟁을 통해 내부를 통일하고, 군수(軍需)산업을 통한 경제 활성화가 가능하다. 전쟁이 진행되는 국가는 출산율도 높다는 것이 상식이다. 죽음을 앞둔 인간의 본능 때문에 인간은 가능한 한 많은 자식을 남기려 한다.
고대(古代) 로마를 보자. 기원전 1세기 황제 아우구스투스 등장 이래 476년 멸망할 때까지 서로마 역사 전체가 전쟁의 역사다. 변방 정복과 영토 확장이 로마 황제와 역사의 자화상이다. 로마가 공화정 이후 500년 넘는 동안 대제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끊임없는 전쟁이었다.
로마처럼 미국도 전쟁으로 얼룩진 나라다. 독립 쟁취, 영토 확장, 자원 확보, 인구 증가, 문화 확산에 이르는 미국이란 나라의 배경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자리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난 뒤에도 미국의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다음 전쟁에는 전제 조건이 하나 있다. 국지적(局地的) 차원의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닌, 글로벌 차원에서 미국 국익(國益)에 직접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
일본의 중국 점령을 묵인해주려 했던 미국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 회담에서 만난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는 미국을 대일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처칠을 활용했다.
지난 8월 15일, 일본 NHK는 진주만 공격 직전까지의 국제 정세에 관한 흥미로운 방송 한 편을 내보냈다. 미국에서 최근 발견된 당시 국민당 주석 장제스(蔣介石)가 쓴 일기를 기초로 한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다. 최근 일본과 타이완의 우호관계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 이런 방송이 나오게 된 이유일지 모르겠다.
방송의 핵심은 일본에 대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자세다. 장제스 일기와 당시 비밀문서를 통해 밝혀졌지만, 미국은 당초 일본의 중국 점령을 인정하려 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 한 달 전,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 코델 헐이 만든 대일(對日) 잠정협정안이 근거다. 협정안은 일본에 보내기 직전에 유럽 우방국에서 먼저 회람(回覽)됐다. 이의(異意)가 없을 경우 곧바로 일본에 전달될 협정안이었다.
협정안 내용은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 철수하라’는 요구가 핵심이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석유 금수(禁輸) 조치에 맞서 동남아시아 석유생산국들을 무력(武力) 점령한 상태였다. 미국은 일본이 물러나면 거기에 따른 보상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협정안에 대해 유럽 국가 대부분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동남아시아 이권(利權)에 민감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오히려 협정안을 지지했다. 그러나 단 한 나라가 맹렬히 반대했다. 영국의 처칠 총리다. 그는 곧바로 루스벨트에게 반대 의사를 전달했다.
처칠이 반대한 것은 협정안 이면에 있는 핵심 사안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미국이 제시한 협정안에는 일본군의 중국 철수 문제는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묵시적(默示的)으로 일본군의 중국 지배를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중국을 넘겨주고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자는 것이 루스벨트의 당초 생각이었다. 처칠은 이런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 처칠은 루스벨트에게 “일본에 중국을 넘겨줄 경우 일본이 당장은 더 이상의 침략을 멈추겠지만, 장차 동남아시아 전체를 요구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장제스 일기를 통해 밝혀졌지만, 당시 처칠이 루스벨트에게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중국 측의 끈질긴 외교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장제스는 미국과 영국을 통한 항일(抗日) 외교에 매달렸다. 그는 미국·영국의 참전 없이는 중국이 결국 일본에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장제스는 여러 차례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의 대일 참전을 호소하지만 루스벨트는 무심하게 대했다.
그러자 장제스는 처칠에게 주목했다. 그는 영국을 통해 미국을 우회 설득하는 외교에 주력했다. 그는 처칠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내 일본군의 공격 능력과 확전(擴戰) 가능성을 경고했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만약 처칠이 아니었다면, 처칠에게 끈질기게 편지를 보낸 장제스 외교 수완이 없었다면 오늘날 중국이란 나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만약 루스벨트의 협정안이 수정 없이 도쿄에 전달됐다면, 일본은 동남아시아 이권을 포기하고 중국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면 진주만 기습 공격도 없었고, 결국 미국과의 전쟁도 없었을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이익이 보장되는 선에서 일본의 중국 지배는 영원히 인정됐을 것이다. 물론 조선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남았을 것이다. 장제스야말로 일본으로부터 중국과 조선을 지켜낸 최고 공로자라 볼 수 있다.
진주만 공격 다음 날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서 ‘미국이 전쟁에 들어가는데 중국도 협력해주기 바란다’는 편지를 받았다. 장제스는 당시의 소회를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 중국의 항일전략 성과는 최고 정점(頂點)에 서 있다. 대일전쟁에 미국·영국이 참가하게 됐다는 것은 중국의 국가적 행운이다.”
1940년대 일본과 오늘날 중국

▲영국 항공모함 퀸엘리자베스호. 미국·일본과의 합동훈련에 참가했다. 사진=영국 국방부
아프가니스탄 이후 글로벌 상황을 보면 중국이란 나라가 키워드가 될 수밖에 없다. 미국은 물론 유럽 선진국가들도 중국을 직접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5일 일본 요코스카(橫須賀) 해군기지에 영국 항공모함 퀸엘리자베스호가 입항했다. 24년 만의 일본 방문인데, 남중국해를 무대로 한 미국·일본 합동군사훈련을 위해 들른 것이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 직전 상황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만주와 중국이 21세기 타이완과 일본 센카쿠(尖閣)열도로 바뀌었을 뿐, 기본 구도는 똑같다.
21세기 중국 처지에서 보면, 진주만 공격 직전의 일본보다 더 나쁜 상황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80년 전 미국은 당초 일본에 중국을 넘겨준 뒤 평화와 상호 간 이권 보호를 받아내려 했다. 지금은 영국 등 유럽이 아예 처음부터 중국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어서 미국이 적당히 타협할 수 없다. 미국이 타이완과 센카쿠를 중국에 넘겨주려 할 경우, 일본은 물론 유럽이 반발할 것이다. 동맹국의 의사를 중시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유럽은 아직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홍콩에 이어 타이완·센카쿠열도가 중국에 넘어가게 되면 동남아시아 전체가 중국 지배권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 2021년 남중국·동중국 바다에서 벌어지고 있다.
디커플링 자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와 이해관계에 있는 유럽도 반중(反中) 전선에서 결코 조연(助演)은 아니다. 당당한 주연(主演)이다. 미국이 요청해 유럽의 반중전선이 구축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동남아시아 이권과 더불어 위구르·홍콩 문제를 지켜보면서, 유럽이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원하게 된 것이다.
‘중국 패권론’
이렇듯 미국과 유럽이 힘을 합쳐 중국에 대적(對敵)하고 있지만, ‘중국 패권론’을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실패 이후 미국의 추락을 틈타 중국이 급부상할 것이란 전망이 곳곳에서 나온다. 탈레반과의 협상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지하자원을 획득하는 등 중국의 외교·경제적 영향력이 중앙아시아 전체로 확대될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부분적으로 가능한 얘기다. 그러나 중국이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에서 패권을 잡는 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다. 그럴 능력도, 의향도 없는 나라가 중국이다.
한국은 드물게 ‘중국 패권론’을 믿고 따르는 나라 중 하나다. 필자가 보면 OECD 선진국 가운데 한국에서만 접할 수 있는 독특한 정서이자 해석이다. 중국을 통한 반미감정 해소라는 기묘한 심리라고나 할까?
‘중국 패권론’을 강조할 경우 ‘미국 황혼론’도 자연히 따라온다. 언제부턴가 쑥 들어갔지만, ‘G2’라는 말이 한국 언론의 시사용어로 유행한 적이 있다. 미국과 중국을 동등한 글로벌 패권 주자로 대하는 것이 G2 개념의 핵심이다.
G2는 원래 오바마 집권 2기 때 민주당 일부에서 흘러나온 개념인데, 국제무대에서 중국의 책임론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후변동·환경·난민·인권 같은 영역에서 중국도 미국에 준하는 정도의 책임을 다하라는 의미였다. 따라서 중국은 G2라는 표현 자체를 싫어한다. G2는 한국에서 한동안 통용되던 그런 개념이 아니었다.
최근 중국 총리 리커창(李克强)도 실토했지만, 2021년 중국에는 월(月)수입 150달러 이하의 인구가 6억명에 달한다. 그런 수준의 나라를 미국과 대등하고, 가까운 시일 내에 미국을 넘어서는 슈퍼 파워가 될 것이라며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던 나라가 한국이다.
중국산 전기자동차의 운명
미국이 중국과의 디커플링에 들어간 직후 그런 허황된 생각들은 사그라들었다.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디커플링 이후 중국의 경제 하락이 가속화되고 있다. 단기적 차원의 수출·수입 문제가 아니다. 장기적 차원에서 중국의 산업구조 자체가 서방 수준과 기준에 못 미치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은 중국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 없이 버틸 수 없다. 희토류(稀土類) 같은 희귀 금속이 자주 거론되지만, 싸니까 중국산이 강할 뿐이다. 환경 파괴를 무시하고 값을 올릴 경우 미국의 선택권은 무궁무진하다. 노동 집약적 상품의 경우 중국 우위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기술력을 기초로 한 고(高)부가가치 상품은 다르다. 미국 협력, 나아가 미국 시장 없이는 도약할 수 없다.
간단한 예로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전기자동차(EV)를 예로 들어보자. 배터리가 생명이라면서, 수많은 배터리 공장이 세계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 한국 신문을 보면, 중국이 가장 앞선 것처럼 보도되고 있다. 부분적으로 앞선 것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 정부가 제시하는 전기자동차 기준이다. 짧은 충전(充電)시간과 긴 구동력이 전부가 아니다. 특허권, 환경, 노사(勞使)관계, 사용 후 관리, 심지어 기업 내 여성 임원 비율에 관한 기준이 전기자동차에도 적용될 것이다.
10분 충전하면 1000km, 1만km를 달리는 전기자동차가 있다 해도 중국산이 미국의 수많은 기준을 뚫고 들어오기는 어렵다. 일단 중국 공산당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부될 수 있다. 100만원대 중국산 전기자동차도 나오는 판이니까, 개발도상국에서는 팔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큰 시장도 아니고 돈이 될 수 없다.
전기자동차뿐 아니라 다른 기술 집약적 고부가가치 제품도 똑같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미국이나 서방 선진국에 중국산 전기자동차, 나아가 고부가가치 제품의 진입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다.
그럴 경우 미국에도 피해는 있다. 그러나 중국이 한층 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고부가가치 상품 차단으로 연결될 디커플링이 계속되는 한 중국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美中 금융 디커플링 현실화
미국은 제조업과 무관한 금융·서비스 대국이다. 기축(基軸)통화인 달러를 통한 중국 기업에 대한 자본조달도 디커플링 이후 급추락하고 있다.
지난 8월, 뉴욕 주식시장에 신규 상장(上場)된 중국 관련 기업은 하나도 없다. 7월에는 1개가 있었다. 중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금융 디커플링이 현실화됐음을 의미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중국 기업은 미국 금융시장에 상장해서 달러를 통해 기업 확장에 나서고 싶다. 그러나 디커플링 정책에 의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지난해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외국기업설명책임법’이 근거다. 회계와 관련해 미국식 기준을 엄밀히 적용하는 과정에서 상장 자체가 어렵게 된다. 기존 상장된 기업들도 미국식 회계 기준에 어긋날 경우 언제든지 퇴출(退出)될 수 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중국 정부는 외국에 상장하는 중국 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재무구조 규정을 한층 강화하는 과정에서 주가(株價) 폭락이 줄을 잇고 있다. 한국인 귀에도 익은 중국판 우버, 디디추싱(滴滴出行)은 좋은 본보기다. 지난 6월 뉴욕에 상장했지만, 한 달 만에 시가 총액 180억 달러가 폭락했다. 중국 정부가 해외 상장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5일 미국 하원 군사위원회가 ‘파이브 아이즈(Five Eyes)’를 한국에 개방할 것이란 뉴스가 흘러나왔다. 영미권 5개국에만 문을 연, 일찍부터 일본이 눈독을 들인 정보공유동맹체가 ‘파이브 아이즈’다. 실현 여부는 지켜봐야겠지만 반중전선 참가를 전제로 한 개방일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철수 일주일 만에 미국 의회가 대중동맹 강화에 나선 것이다.
‘중국 짝사랑’에 빠진 한국 정부의 자세를 보면 ‘파이브 아이즈’ 가입 기회를 준다고 해도 받을지 의문이다. ‘미군 정보 용병(傭兵)’ 운운하면서 ‘파이브 아이즈’ 가입에 결사반대라는 기묘한 데모가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適者生存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조지 스펜서가 남긴 유명한 말 중 하나가 ‘적자생존(適者生存)법칙’이다. 스펜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적자생존법칙은 더 강하거나 더 개량된 것이 살아남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 열악한 상황하에서, 기존 제도에 맞춰가면서 생존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차기 대통령 선거가 반 년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차기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이후 밀려들 국제정치의 변화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1980년대 미국 레이건 대통령 때 벌어진 식의 글로벌 대변화를 만날 수도 있다. 미국이 일치단결할 경우, 소비에트 붕괴 같은 대사건이 중국이나 북한에 나타날 수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아탈리가 지적했듯이, 부시가 10년 걸린다고 본 독일 통일도 1년 만에 이뤄졌다.
‘K-자화자찬’ 덕분에 한국이 전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듯하다. 중국 정부가 인터넷 계정 몇 개만 차단해도 K팝, K게임 전체가 요동친다. 성(城)을 쌓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데는 단 하루면 충분하다.
주변 4강을 고려해볼 때, 적자생존법칙이 ‘영원히’ 필요한 곳이 한국일지 모르겠다. 강하고 개량된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미 던져진 기존 프레임에 맞춰가면서 열악한 환경을 하나둘 극복해나가는 것이 생존의 비결이다.⊙
11.26 13세기 몽골제국의 등장, 21세기 지구촌을 예감하다
세계사의 탄생

세계사를 돌아볼 때 실크로드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통용됐다. 일단 협의와 광의, 두 가지로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가장 이 말의 기원에 충실한, 즉 좁은 의미의 실크로드가 있다. 문자 그대로 고대 이래로 중국산 비단 혹은 더 나가 아시아 동부 지역의 물산이 중앙아시아 사막 지역을 거쳐서 인도나 서아시아, 더 멀리 지중해까지 전달됐던 교역 루트를 지칭한다.
좀 더 의미가 넓은 실크로드도 있다. 비단과 상품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사회·문화적 요소, 이를테면 인적·문화적 왕래도 교류 대상에 포함됐다. 교류 루트 역시 사막은 물론 북방의 초원과 남방의 해상까지 아울렀다. 오늘날 학계는 물론 일반인이 이해하는 실크로드는 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문화·경제 교류로 세계가 하나로
개별 지역 넘어서 변화·발전해와
동서 연결한 여행기·지도 잇따라
근대 유럽도 몽골이 닦은 길 이용
‘세계사 = 유럽사’ 고정관념 씻을 때
지구촌은 서로 영향받으며 발전
실크로드는 이를테면 문명의 대동맥이었다. 근대 이전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북반구, 즉 아프로-유라시아 세계에 속한 여러 지역 사이의 교류와 소통을 가능하게 했다. 만약 그 옛날 곳곳의 지역·문화에 새 피를 전달해준 대동맥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계사는 과연 지금 어떤 모습이 됐을까. 분명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과 매우 달랐을 게 확실하다.
예를 들어 중국이나 이란 혹은 유럽 등이 외부 세계와 전혀 접촉하지 않고, 각자 닫히고 고립된 자기만의 세계 속에 갇혀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세계의 역사(world’s history)’는 있었을지언정 ‘세계사(world history)’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막·초원·바닷길 모두 포함한 개념

▲이란 출신 라시드 앗딘의 『집사(集史)』 나오는 삽화. ‘마귀에게 과일을 바치는 석가모니’. [사진 할릴리 컬렉션]
우리가 이제까지 읽어왔고 또 안다고 생각해온 세계사는 사실상 ‘세계의 역사’이지 ‘세계사’가 아니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 때에 배운 세계사 교과서는 대체로 문명의 4대 발상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세계 주요 문명의 역사를 각각 별도로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대부분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이 세계를 석권하면서 ‘세계사’가 탄생한 것으로 배웠다. ‘근대’가 탄생하기 이전에는 본격적이고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러한 고정 관념은 이제 마땅히 수정돼야 한다.
오늘날 ‘지구촌’이란 용어는 상식이 됐다. 더는 ‘지구’ 전체를 여러 곳으로 분리하고, 개별 지역을 독립적인 공간으로 생각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글로벌’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다. 실제로 2007년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시작된 금융위기는 전 세계에 심대한 충격을 안겼고, 2020년 중국에서 터져 나온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벌써 2년째 전 세계를 마비시키고 있다. 어느 한 곳에서 발생한 사건이 얼마나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확산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는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근대 이전의 세계사를 살펴보자. 과거 어떤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이 금융위기나 코로나19처럼 지구촌 전체에 충격과 변화를 가져다준 적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물론 그 속도는 좀 더 느리고 범위도 제한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사건과 변화에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5000년 전 인도-유러피언의 대이동

▲네보산에서 영면에 든 모세’다. [사진 할릴리 컬렉션]
지금부터 5000년 전 유라시아 서부 초원에서 시작된 인도-유러피언의 이동을 따라가 보자. 그들의 이주는 구대륙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유럽과 인도·이란 등지의 민족 구성을 결정짓는 사건이 됐으며, 고대 동부 유라시아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흑사병도 마찬가지다. 14세기 전반 중앙아시아 어느 곳에선가 시작된 이 전염병 역시 전 세계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고, 그에 따른 한 역사적 격변을 아직도 정확하고 충분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심각한 여파를 미쳤다.
세계사의 ‘세계성’은 유럽의 등장으로 근대에 들어와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상고 시대 이래로 실크로드는 아프로-유라시아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엮은 동아줄이었고, 아메리카 신대륙을 그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콜럼버스가 읽고 메모했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스페인 세비야 소재 콜럼버스 도서관 소장품이다.
이제까지 통상적인 세계사 서술 방식에서 볼 때 유럽의 근대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드디어 세계가 하나로 연결됐고,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가 탄생했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실은 그 전에도 세계사는 엄연히 존재했다. 유럽의 근대가 바꾸어 놓은 변화는 ‘그 전에 없었던’ 세계사가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라, ‘기왕에 있었던’ 세계사가 유럽이 주도하는 세계사로 재편됐다는 사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세계사의 흐름을 돌이켜 볼 때 근대 유럽 이전에는 그 주도권이 어느 한 지역, 또는 한 민족에 제한된 것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분산돼 있으면서도 세력균형을 이뤘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지역적인 편차가 존재했고, 시대에 따라 특정 지역이 보다 더 우세하고 팽창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균형이 깨진 결정적 전환점이 있었다. 바로 13세기 몽골제국의 등장이다. 몽골은 서부 유럽과 인도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유라시아 전체를 통합한, 문자 그대로 ‘세계제국’을 수립했다. 그 전에도 알렉산더의 정복, 이슬람의 팽창 등에 힘입어 거대 제국이 일어난 적이 있었지만, 그 제국의 범위와 영향력은 몽골보다 매우 한정됐다.
몽골제국은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고, 실크로드를 통한 경제·문화 교류를 극대화하는 장을 마련했다. 만약 ‘몽골의 시대’가 없었다면 ‘유럽의 근대’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몽골의 시대에 일어난 그 무엇이 ‘유럽의 근대’를 가져오게 한 것일까.
성경의 세계관에서 벗어난 유럽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소장된 콜럼버스 초상.
가장 중요한 것은 아프로-유라시아라는 광대한 지역을 하나의 세계로 생각하게 됐다는 데 있다. 즉 그 전에도 인류는 하나의 세계 속에 살고 있었지만, 그들이 살고 있던 그 세계가 하나라는 ‘인식’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몽골제국은 하나의 세계, 하나의 세계사라는 인식을 탄생하게 했다. 물론 이를 현실화한 것은 몽골 시대에 이뤄진 인적·물적 대교류였다. 수많은 사람이 유라시아의 동쪽 끝과 서쪽 끝을 왕래했고, 그들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기록으로 남겼다. 베네치아 출신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 모로코인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가 대표적 사례다. 수많은 중국인 역시 서아시아로 갔고 그곳에 체류하면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이란의 역사서들에는 그곳에서 활동하던 많은 ‘키타이인’, 즉 중국인들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세계사와 세계지도도 만들어졌다. 이란 출신의 라시드 앗 딘은 몽골 세계제국의 역사를 집필하면서, 동시에 중국·인도·유럽·투르크·유대인의 역사도 같은 책 안에 서술했다. 말 그대로 역사상 ‘최초의 세계사’가 태어난 셈이다.
그런가 하면 나중에 대원제국의 군주 쿠빌라이는 자말 앗 딘이라는 지리학자에게 세계지도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물은 현재 사라졌지만, 그것을 활용한 지도들이 중국과 조선에서 잇따라 제작됐다. ‘대명혼일도(大明混一圖)’와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가 그것이다. 유럽에서도 중세의 성경적 세계관에서 벗어난 근대적 세계지도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카탈루냐 지도’를 선보였다.
물론 서유럽은 몽골제국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몽골인이 닦아놓은 ‘몽골의 세계’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그 혜택을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 베네치아나 제노아 출신 상인들의 교역 무대는 지중해를 넘어서 유라시아 전역으로 뻗쳐 나갔다. 피렌체 출신의 페골로티가 쓴 『상업실무서』라는 책을 보면 흑해에서부터 ‘키타이’ 중국까지 가는 여행 루트가 자세히 묘사돼 있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제노아 출신이라는 사실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는 마르코 폴로의 글을 탐독했으며 몽골의 대칸이 지배하는 ‘인도(India)’, 즉 동방으로 가려고 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몽골의 시대에 실크로드가 만들어 놓은 세계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일보 김호동 서울대 명예교수
12월 08일 ‘혁명의 도시’ 파리
굶주린 민중이 이룬 대혁명… 신분질서 벗자마자 자본질서에 포획되다

▲ 혁명의 역사 위에 이제는 패션과 쇼핑과 미식의 도시가 된 파리. 이 도시의 상징인 에펠탑이 높게 솟아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빅토르 위고 “혁명의 적은 낡은 세상”… 앙시앵레짐 무너지고 ‘자유·평등·우애’의 세상 열려
하수도까지 개조 ‘천상의 도시’ 꾸몄지만 빈민들 외곽으로 쫓겨나 … 졸라는 “돈이 위생이요 청결이요 건강이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의 대결이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마지막 장면에서 라스티냐크는 파리의 휘황한 불빛을 내려다보면서 다짐한다. 그의 눈은 사교계를 향한 욕망으로 이글거린다. “벌집에서 꿀을 미리 빨아 먹은 것 같은 시선”이다. 두 딸의 허영을 채워주려고 헌신하다 모든 걸 잃고 쓸쓸히 죽어 간 고리오 영감의 장례식을 치른 직후의 일이다. 순진한 시골 청년 라스티냐크는 영감과 함께 무덤에 묻혔다. 법률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올라온 이 청년은 파리 사교계를 드나들면서, 또 영감의 마지막을 함께하면서 파리를 지배하는 진정한 힘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돈’이었다. 최후의 순간에 고리오는 절규한다. “아! 내가 만일 부자인 데다 재산을 거머쥐고 자식에게 주지 않았다면, 딸년들은 여기에 와 있을 테지. 키스로 내 뺨을 핥을 거야! 지금은 아무도 없군. 돈은 모든 것을 다 준단 말이야, 심지어 딸까지도. 오! 내 돈, 어디에 있느냐?”
‘고리오 영감’에서 발자크는 자본주의 사회의 섬뜩한 진실을 냉정하게 드러낸다. “돈이 바로 생명이고,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돈이 있는 동안 고리오는 딸들에게 쓸모 있는 인간이었으나, 돈이 떨어지자 그를 찾아온 것은 외로운 죽음이었다. 영감의 죽음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번지고 있는 고독사의 원형이다. 돈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인륜을 저버린 비극이 어디서든 벌어진다는 것을 발자크는 예리하게 통찰해 낸다.
파리의 한복판에는 센강이 흐른다. 강 한가운데 시테섬이 있다. 로마 군대는 갈리아 땅을 정복한 후, 이 섬에 성벽을 쌓아 군대를 주둔시켰다. 갈리아의 일족인 파리시족이 오래전부터 거주하던 땅이었다. 파리라는 이름은 이 종족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로마제국기에 센강 왼쪽 기슭이 먼저 개발되고, 6세기 프랑크족이 정복해 프랑크 왕국이 들어선 후 오른쪽 기슭에도 차츰 건물이 들어섰다. 12세기에 이 도시를 둘러싼 성벽이 완성되면서 비로소 오늘날 파리의 윤곽선이 생겨났다.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 시테섬 주변이 정치적·종교적 중심을 이루고, 왼쪽에는 파리대와 함께 지성의 전당이 펼쳐지고, 오른쪽에는 시장이 들어서서 경제가 발전하는 구조다. 프랑스는 중세 이후 현재까지 유럽의 강국이었고, 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주도했다. 십자군 전쟁 때 신의 이름을 빌려서 약탈과 학살을 자행한 유럽 군대의 사실상 주력이었고, 영국과 100년 전쟁을 치르면서는 잔 다르크의 신화와 함께 민족국가라는 정치적 유행을 낳았으며, 신교도인 위그노 학살을 일으키면서 추악한 종교 전쟁의 서막을 열기도 했고, 태양왕 루이 14세로 상징되는 앙시앵레짐의 폭정이 본격화한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의 탐욕이 낳은 끔찍한 비극의 강물 속에서 프랑스인들은 진실을 향한 성찰을 놓지 않았고, 자유에 대한 갈망을 표현했다. 신의 이름으로 서로를 학살하는 종교 전쟁의 와중에 몽테뉴는 “인간은 천사가 되려다 짐승이 된다”고 경고했다. 자신만 진실을 쥐고 있다는 독선이 비극의 씨앗이라는 것이다. 몽테뉴는 에포케(epokhe·나는 아직 모른다)와 크세주(Que sais-je·내가 무엇을 아는가)를 진실에 접근하는 태도로 생각했다. 진리를 알고 있다는 오만한 판단을 일단 멈추고, 살아 있는 동안 겸손한 태도로 탐구를 거듭하면서 자신의 삶을 끝없이 더 나은 상태로 바꿔가는 ‘에세(Essais)’의 정신이 이로부터 나왔다.
앙시앵레짐이 인간 자유를 억누르고 사상을 박해할 때, 볼테르는 ‘캉디드’ ‘자디그’ 같은 ‘철학 단편’을 통해서 봉건적 미몽을 풍자하고 종교적 광신을 비판함으로써 자유를 옹호하고 관용을 호소했다. “이성은 온화하고, 인정이 있으며, 너그러움을 고취하고, 불화를 잠재우며, 덕성을 확고히 하고, 강제로 법을 유지하기보다 법에 복종하는 것을 즐겁게 만든다.”
무엇보다 볼테르는 지식인의 존재 양식을 발명했다. 유대 상인 장 칼라스가 재판을 받고 억울하게 사형을 당하자, 볼테르는 즉각 행동에 나섰다. 사건의 경위를 조사해 칼라스의 무고함을 밝혀내고 기고와 행위를 통해 권력에 맞서는 여론을 일으켰다. 에밀 졸라, 장 폴 사르트르, 미셸 푸코 등으로 이어지는 위대한 전통의 시작이었다. 그 덕분에 프랑스에서는 어용들을 감히 지식인으로 부르지 않게 됐다.
볼테르의 자유는 디드로·달랑베르·루소 등으로 이어지는 계몽의 씨앗이 됐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적 토대로 자라났다. 혁명의 방아쇠는 ‘빵’이었다. 굶주린 민중이 봉기하고, 낡은 신분 질서에 염증을 느낀 부르주아가 호응했다. 여성들은 신도시 베르사유로 행진해 루이 16세의 항복을 받아냈다.
왕정은 폐지되고 교회가 공격당했다.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있었고, 마침내 왕의 목을 베어낸 후 ‘자유·평등·우애’에 바탕을 두고 평민들이 협력해서 자신을 다스리는 세상이 열렸다.
‘93년’에서 빅토르 위고는 말한다. “혁명에는 적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낡은 세상이고, 따라서 혁명이 그것에 무자비한 것일세. 혁명은 왕 속에 있는 왕권을, 귀족 속에 있는 과두정치를, 군인 속에 있는 독재를, 사제 속에 있는 미신을, 판관 속에 있는 야만을, 한마디로 모든 유형의 폭군 속에 있는 모든 폭정을 뿌리째 뽑아낸다네. 수술이 두려움을 주지만, 혁명은 그 일을 확신 넘치는 손으로 감행한다네.”
미숙한 자유는 혼란과 공포, 배신과 반동을 불러왔다. 1799년 혼란을 틈타서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주의 혁명의 길을 막았다. 19세기 내내 파리는 반동 왕정이 가져온 숨 막히는 억압과 해방을 갈망하는 시민 봉기가 교차하면서 피의 강물로 적셔졌다. 특히, 노동자 계급이 일어선 1848년 2월 혁명은 날로 위력을 더해가는 자본주의의 폭풍 속에서 새로운 지배 계급으로 올라선 부르주아 계급에 큰 충격을 줬다. 이로부터 “벌레가 과일 속에 파고들어 만들어 낸 구불구불한 길”들과 지저분하고 오래된 주택에 사는 ‘수상하고 위험한 노동자들’을 몰아내고, 파리를 깨끗하고 위생적인 부르주아 도시로 바꾸는 파리 대개조 계획이 시작된다. 모델은 베르사유였고, 지휘자는 조르주 외젠 오스만이었다.

▲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가고일 석상이 파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벤 윌슨의 ‘메트로폴리스’에 따르면, 오스만은 정녕 무자비했다. 유서 깊은 건물이든, 복잡한 골목이든, 낮은 언덕이든 방해되는 것들은 모조리 철거해 버렸다. “아름답고 위생적이고 교통이 편리한 근대 도시”를 위해 곳곳에 대로를 조성하고, 지하엔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유명한 하수관을 배를 띄울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만든다. 곳곳에 넓은 공원과 광장을 조성하고 극장과 카페, 백화점과 공동주택 등을 대량으로 건설하며, 거리 전역에 가스등을 깔아서 한밤에도 대낮처럼 밝은 도시를 거의 인류 최초로 창조한다. 오스만의 작업 결과, 파리는 그 자체로 극장이 된다. 빛이 잘 들고 공기가 잘 통하며, 질서 정연하고 우아하게 치장된 근대의 상징이자 지금 여기에 구현된 천상의 도시였다. 도시 전체가 진열장이고 구경거리였다. 관광객들이 온 세상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귀족들·부르주아들과 어울려 살던 노동자들·빈민들은 파리의 외곽으로 모조리 쫓겨나고, 이로 인해 역사상 최초로 출퇴근의 물결이 나타난다. “시의 문 앞에서 멈추어 선 사람의 물결이 차도 위까지 길게 이어졌다. 연장을 지고, 빵 하나씩을 낀 채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이었다.”(‘목로주점’) 새로운 파리의 공간 위생학은 인구 위생학이었고, 또 ‘돈의 위생학’이기도 했다. 졸라는 말한다. “돈은 위생이요, 청결이요, 건강이다.”(‘돈’)
혁명이 약속한 자유와 평등과 우애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패션과 쇼핑과 미식의 도시 파리는 특권 구역이 됐다. 신분의 질서를 벗어나자마자 자본의 질서가 다시 사람들을 포획하면서 우울증을 가져왔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는 말한다. “공원에는 좌절된 야심, 불행한 발명가, 이루지 못하고 만 영화, 상처 난 마음, 파란만장하고 폐쇄된 넋이 주로 찾는 산책로가 있다. 이 후미진 은신처는 인생 불구자들의 집합소다.”(‘파리의 우울’) 하지만 자유를 향한 꿈이 포기된 것은 절대 아니다. 에두아르 마네는 술집 카운터에 선 여성을 여신처럼 당당히 묘사함으로써 타락한 도시에서 아름다움을 끌어냈고, 보들레르는 악으로 전락한 도시 곳곳을 산책하면서 악의 흔적에서 기어이 꽃을 찾아냈다. 시인은 외쳤다. “어디라도 좋다,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
문화일보 장은수 문학평론가
■ 용어설명
베르사유, 현대 신도시의 원형 : 파리 교외에 있는 베르사유는 본래 프랑스 왕실의 사냥터였다. 이곳에 화려한 궁궐을 지은 것은 “내가 곧 국가”라고 선언했던 루이 14세였다. 절대왕정을 상징하는 그는 정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더럽고 시끄러운 도시 파리를 떠나서 깔끔하고 질서 잡힌 신도시를 만들고 싶어 했고, 20년의 공사 끝에 현대 도시의 원형을 창조했다.
직각과 대각으로 시원하게 뚫린 대로들, 아름답게 가꿔 드넓게 펼쳐진 정원 등 도시의 모든 것은 계획된 채 조화롭게 배치돼 한가운데 우뚝 솟은 궁궐을 향했다. 그 가장 높은 곳에는 세상 전체를 내려다보는 왕의 침실이 있었다. 사방의 자연과 온 세상 인간이 모두 정복당한 뒤 왕을 향해 경배하는 듯한 숨 막히는 모양이었다. 파리 시민들은 베르사유를 혐오했다. 혁명 때 그들이 무엇보다 바랐던 일 중 하나가 수도를 인간이 숨 쉬는 도시 파리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秘史 12.13 월간조선 12월 호
■오늘의 유럽을 만든 두 巨人의 영혼을 연 담판
드골-아데나워, 獨佛 화해를 넘어 유럽 통합의 길을 열다!
⊙ 드골은 獨佛 화해의 조건으로 서독의 핵무장 포기와 프랑스의 핵무장을 못 박았다
⊙ 드골의 위대한 지도력은 문장력에서 나왔다
⊙ “내가 가장 존경하는 직업은 첫째, 위대한 문필가, 다음은 위대한 사상가, 셋째는 위대한 정치인, 넷째는 위대한 장군”(드골)

나는 지난여름 시작한 45일간의 유럽 여행 마지막 코스를 프랑스의 아르덴 지역 도시 스당으로 잡았다. 영어명으로는 세단(Sedan)인데 프랑스 사람들에겐 악몽(惡夢)의 이름이다. 1870년 여기서 나폴레옹 3세가 지휘하는 프랑스군 10만 명이 프로이센군에 항복하고 황제는 포로로 잡혔다. 1940년 5월 15일, 프랑스 수상 폴 레노는 영국 수상 처칠과 통화하면서 “스당이 돌파되었습니다. 우리는 졌습니다”라면서 흐느꼈다. 프랑스군은 그 40일 뒤 항복한다.
프랑스가 이 두 번의 치욕, 특히 국가의 명예심과 영혼마저 무너진 두 번째 패배에서 어떻게 다시 일어날 수 있었나?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프랑스 육군이 6주 만에 항복한 것은 군사적 패배일 뿐 아니라 정신적 붕괴였다. 프랑스 국민은 좌우(左右)로 갈려 싸우느라고 나치 독일에 대한 적개심을 잊었고 프랑스군은 패배를 수치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 도덕적으로도 철저히 망가진 프랑스를 거의 혼자서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샤를 드골이다.
드골의 분노
프랑스군의 이론가로 유명했고 일찍부터 전차와 전투기를 결합시킨 전격전(電擊戰)을 예상하고 기갑군단의 창설을 주창했던 드골이었다. 그의 전쟁교리를 프랑스군은 무시했지만 히틀러는 참고했고, 독립적인 전차군단을 육성했으며 아르덴 돌파전에 투입, 성공했다. 드골은 제4기갑사단장으로 임명되어 스당이 돌파된 직후 반격작전에 나섰다. 부분적으로 성공하고 독일군 포로 수백 명을 붙잡기도 했으나 무너진 둑을 메울 순 없었다. 5월 16일의 상황을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북쪽으로부터 내려오는 피란민 속에는 패잔병들도 보였다. 그들은 독일 기갑부대로부터 궤멸적 타격을 받았다. 달아나던 병사들은 독일군에게 붙잡혔다. 독일 기계화부대는 이들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한 다음 서진(西進)하는 독일군의 길을 막지 말고 남쪽으로 가라고 놓아주었다. “우리는 너희를 포로로 잡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면서 가버렸다고 한다.
이런 모욕적인 광경을 목도하고 나는 한없는 분노를 느꼈다. 아, 이런 바보짓! 전쟁은 최악의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세계는 넓다. 내가 살아남는다면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적을 무찌르는 그날까지. 그리하여 이 국가적 수치가 깨끗하게 지워질 때까지. 그 이후 내가 한 모든 행동은 그날 결심한 것이었다.〉
드골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세 번 부상당했는데, 프랑스 동부전선 베르당 전투에 중대장(대위)으로 참전했다가 1916년 3월 독일군의 포로가 된 적이 있다. 32개월 동안 포로수용소에 있었는데 다섯 번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붙잡혔다. 독일과 프랑스군은 포로가 된 장교들을 예우하여 그는 책을 쓰기도 했다.
敗戰의 도시 스당

▲스당 뮤즈강. 1940년 독일 기갑군단은 이 강을 건너 프랑스를 무너뜨렸다.
브뤼셀에서 남쪽으로 달려 룩셈부르크를 지나 프랑스의 스당으로 가는 길은 아르덴 숲을 지난다. 아르덴 숲 지대는 면적이 경상남도 정도이고 벨기에-룩셈부르크-프랑스에 걸쳐 있으며 아름드리나무로 울창하다. 언덕과 낮은 야산, 그리고 평지의 연속이다. 프랑스군이, 독일 전차군단은 이 숲 지대를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 방어에 소홀했다가 당한 것이 이해도 되었다. 프랑스는 아르덴 지역을 지나는 뮤즈강이 자연적 방어망이라 생각했다.
스당은 군사도시여서인지, 두 번의 결정적 패전(敗戰)의 현장이어서인지 무거운 분위기였다.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중세(中世)의 성곽엔 군사박물관이 있었고 보불(普佛)전쟁 기록이 많았다. 프랑스 군인들이 단체로 입장, 패전의 교훈을 되새기고 있었다. 스당 시내를 가르는 뮤즈강은 너비가 100m 내외였다. 독일군 전차군단은 1800대의 전차와 3만 대가 넘는 차량으로 50여 시간에 걸쳐 아르덴 숲을 통과한 뒤 이 뮤즈강을 건넌다.
대안(對岸)에서 진지를 구축했던 프랑스군은 독일 전폭기의 맹폭(猛爆)을 견디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달아났다. 프랑스 공군이 만약 아르덴 숲속에서 교통체증을 겪고 있는 독일 전차군단을 발견, 폭격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은 거기서 끝났을지 모른다. 실제로 한 프랑스 정찰기는 숲속에 엉켜 있는 어마어마한 기갑부대를 발견, 상부에 보고하였으나 “잘못 봤겠지. 거기에 독일군이 있을 리 없다”며 묵살당했다.

▲아르덴의 숲. 프랑스군은 독일 기갑부대가 숲을 통과하기 어렵다고 오판했다.
스당을 돌파한 구데리안 장군 휘하의 독일 전차군단은 케르크 쪽 해안을 향하여 돌진, 벨기에 북쪽으로 진출했던 프랑스·영국 연합군의 주력을 배후에서 차단, 포위, 섬멸했다. 독일 군인들은 필로폰을 먹고 불철주야로 야수(野獸)처럼 싸웠다.
나는 스당의 성곽 안에 있는 호텔을 예약하려 했으나 만원(滿員)이라 가까운 샤를빌메지에르 근방 작은 호텔에서 잤다. 샤를빌메지에르 광장은 크고 활기가 넘쳤다. 이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 격전지로서보다는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출생지로 더 유명하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타이타닉〉으로 출세하기 전에 랭보를 연기한 영화 〈토탈 이클립스〉는 흥행에는 대실패했지만 시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정확하게 그렸다는 평을 받는다. 35세에 죽은 그가 19세 때까지 쓴 시는 20세기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랭보는 시를 절필(絶筆)한 이후 아프리카 등을 유랑하다가 죽었다.
대문장가

▲스당의 요새.
프랑스 문학의 힘은 프랑스어로 쓴 고흐의 편지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나는 드골의 지도력이 여기서 나왔다고 본다. 영국 저술가 폴 존슨도 《모던 타임스》에서 드골을 정치가나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지성인으로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썼다.
드골은 《전쟁 회고록》으로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2014년에 알려졌다). 나는 이 회고록은 인간적 깊이와 문장력에서 처칠의 회고록을 능가한다고 생각한다. 드골은 두 권의 회고록을 직접 썼다. 아르덴 돌파전으로 정치적·군사적·정신적으로 파탄 난 프랑스와 군대와 국민들을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의 고뇌가 스며 있다. 프랑스의 자존심을 되찾는 것이 조국 재건(再建)의 핵심임을 파악하고, 거의 맨손으로, 경멸을 받아 가면서 처칠·스탈린·루스벨트 같은 세기적 거인(巨人)들을 상대로 밀고 당기는 처절한 모습은 비슷한 처지의 이승만(李承晩)과 자꾸 겹쳤다(이승만 또한 대문장가이다).

▲드골의 《전쟁 회고록》.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드골은 14권의 책을 썼고 연설문은 다섯 권의 책으로 남아 있다. 원고지에다가 만년필로 글을 썼다. 천천히 정성을 다해 썼는데 특히 구두점(句讀點) 찍기에 신경을 썼다. 구두점 찍기는 문장이 숨을 쉬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누가 나에게 영향을 끼쳤는가 묻지 마라. 사자는 그가 소화한 양(羊)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나는 평생 독서를 하였다”고 했는데 그의 간결한 문장은 어마어마한 깊이와 폭을 가진 독서와 사색의 산물이었다. 제5공화국 때 한 장관이 물었다.
“장군께서 가장 숭배하는 직업은 무엇인가요.”
“첫째, 위대한 문필가, 다음은 위대한 사상가, 셋째는 위대한 정치인, 넷째는 위대한 장군.”
드골은 1958년 권좌에 복귀한 후 소설가 앙드레 말로를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 국무회의를 할 때는 수상의 맞은편 자리에 앉히고 회의를 주도하도록 배려했다.
70대의 나이에 두 번 나라를 살린 점에서 드골과 이승만은 비슷하고 짓밟힌 민족혼(民族魂)을 되찾기 위하여 우방국 지도자들을 상대로 악역(惡役)을 마다하지 않고 싸워야 했던 점에서도 유사하며, 이런 정신력의 원천이 무서운 자기 확신과 이를 뒷받침한 문장력에서 나왔다는 점도 서로 통한다. 차이점도 있다. 드골은 자신의 정치 노선을 이어갈 세력을 만들어 그 뒤의 프랑스를 이끌도록 했지만 이승만은 이념정당 건설에 실패, 사후(死後) 평가가 박하다는 점이다.
역사적 연설

▲드골은 1940년 6월 18일 BBC 방송을 통해 프랑스인들에게 對獨항전을 호소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드골은 기갑사단장에서 국방차관으로 옮겼다가 프랑스 정부가 항복을 결정하자 불복(不服), 영국으로 도피, 결사항전을 결심한다. 그가 처칠을 설득하여 맨 처음 한 일은 BBC를 통한 방송이었다. 1940년 6월 18일의 이 방송 연설은 역사적 명문(名文)이다. 이날은 하필 워털루 패전 125주년이었다.
“프랑스인들에게 보내는 드골 장군의 호소:
오랫동안 프랑스군의 수뇌부에서 일했던 지도자들이 정부를 구성하였습니다. 우리 군대가 패배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이 정부는 적대(敵對) 행위를 중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적(敵)과 협상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기계화된 적의 군사력에 의하여 육상과 공중에서 압도되었고, 지금도 압도당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진실입니다. 우리의 병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독일군의 탱크와 비행기와 전술이 우리 군대를 퇴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 지도자들을 곤경으로 몰아넣은 것은 독일의 탱크, 비행기, 전술이 만들어낸 기습의 효과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게 끝장일까요? 우리가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할까요? 우리의 패배는 최종적이고 재기불능인가요? 이런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아니오!
내가 모든 사실을 아는 입장에서, 프랑스의 대의(大義)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 나를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패배시킨 바로 그 요인들이 어느 날 우리를 승리로 이끌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걸 기억하십시오. 프랑스는 홀로 선 게 아닙니다. 프랑스는 고립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뒤에는 광활한 제국이 있고, 우리는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고 싸움을 계속하는 대영(大英)제국과, 같은 대의로 손잡을 것입니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미국의 엄청난 공업력을 무제한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불운(不運)한 우리나라에 한정된 전쟁이 아닙니다. 이 싸움의 결과는 프랑스 전역(戰役)으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계전쟁입니다. 실수가 많았고, 늑장도 부렸으며,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지만 이 세계가 장차 우리의 적을 파멸시킬 모든 수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덮친 기계화부대의 거대한 중량(重量)에 의하여 붕괴되었지만, 더 강력한 기계화부대가 우리를 승리로 인도할 미래를 내다봅니다. 세계의 운명이 여기에 달렸습니다.
나 드골 장군은 런던에서, 영국 영토에 있거나 있게 될 모든 프랑스 장교와 남자들, 무기를 가졌거나 갖지 않았거나를 불문하고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영국 영토에 와 있거나 장차 오게 될 군수공장의 기술자와 숙련공들에게도 호소합니다. 나와 연락합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프랑스 저항운동의 불꽃은 죽지 않아야 하며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 연설에서 예언한 경로대로 히틀러는 진다. 드골의 역사적 예지력(豫知力)이 놀랍다.
몽클라르 장군

▲랄프 몽클라르 장군
드골의 호소에 응한 프랑스 군인들은 매우 적었다. 나치 독일이 허용한 남불(南佛) 비시 정부의 페탱 원수는 한때 총애했던 부하 드골의 저항운동을 반역으로 규정, 궐석(闕席)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하도록 했다(프랑스 해방 뒤 드골은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된 페탱을 감형했다). 6월 29일 드골은 노르웨이 전선에서 영국으로 철수한 프랑스 산악사단의 주둔지를 방문했다. 사단장은 항복한 프랑스로 돌아가겠다면서도 드골이 부대원들을 설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사단에 배속되었던 외인(外人)부대 여단의 지휘관은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대령이었다. 그는 부대원들과 함께 드골에게 합류하겠다고 했다. 드골이 얼마나 고맙게 생각했을까? 이 대령은 별명이 있는데 몽클라르이다.
한국전에 프랑스 대대장으로 참전한 바로 그 사람임을 드골의 회고록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특종(特種)을 한 것처럼 반가웠다. 한국전이 터지자 프랑스는 지원병 700명을 보내는데 제2차 세계대전 참전자들로 구성된 강팀이었다. 퇴역을 앞둔 현역 중장 몽클라르는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 프랑스 대대를 이끌었다. 미(美) 2사단에 배속되어 1951년 초 양구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었으나 구조될 때까지 버티어냈다. 당시 58세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 여러 번 부상당하였다.
그는 1941년 자유프랑스군으로서 프랑스의 비시 정부 소속 외인부대와 싸울 처지가 되자 옛 동료들을 상대로는 총을 쏠 수 없다고 지휘를 거부하기도 했다. 드골의 회고록엔 몽클라르의 용전(勇戰)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나온다. 그는 1951년 한국전선에서 귀환, 퇴역했다가 1962년 파리의 유명한 군사박물관 겸 군인묘지인 앵발리드 관장으로 취임, 2년 뒤 사망, 거기에 안장되었다.
역전의 용사들로 구성된 한국전 프랑스 대대는 연 3000명이 참전, 30%가 죽거나 부상했다. 그의 아들 증언에 따르면 몽클라르 장군 부인은 갓 태어난 아들을 봐서라도 한국에 가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몽클라르는 한국에서 생후 11개월 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사랑하는 아들아, 언젠가 너는 내가 한국으로 떠나야 했던 이유를 물을 것이다. 너와 같은 또래 한국의 아이들이 길에서, 물속에서, 진흙 속에서, 눈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여기 왔단다.”
히틀러와 독일의 情慾

▲드골은 히틀러를 ‘독일인들이 갈망하던 새로운 애인’에 비유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샤를 드골의 《전쟁 회고록》에 나오는, 그가 직접 상대했던 처칠·스탈린·루스벨트·트루먼 등에 대한 인간적 묘사는 절묘한데, 특히 히틀러의 최후에 대한 평가는 몇 권의 책을 응축한 것 같은 밀도이다. 역사와 문학과 정치가 만난 경우이다. 번역하여 소개하고 싶은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명문(名文)이다.
〈히틀러에게 있어서 자신의 악업(惡業)을 종식시킨 것은 반역이 아니라 자살이었다. 그 악업을 구현한 것도 그였고 끝장낸 것도 그 자신이었다. 이 프로메테우스는 묶이지 않으려고 자신을 심연(深淵)으로 던졌다. 무(無)에서 출발한 이 사나이는 독일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 새로운 애인(愛人)을 갈망하는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을 내던졌다. 몰락한 황제와 패배한 장군들과 멍청한 정치인들에게 싫증이 난 그녀는 미지(未知)의 이 거리의 사나이에게 몸을 맡겼다. 이 사나이는 모험적이고, 지배적이었으며, 그의 히스테릭한 목소리는 그녀의 비밀스러운 본능을 자극했다. 더구나, 베르사유에서 당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 용감한 커플은 그들 앞에 기나긴 미래가 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1930년대 유럽은, 여기저기서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유혹과 공포로 시야(視野)가 흐려졌고, 민주주의에 절망했으며, 한물간 이들의 훼방 속에서도 독일의 역동성에 수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모든 것을 이루려 했다. 그는 파시즘과 인종주의를 결합한 교리를 만들었다. 전체주의 시스템은 그가 견제나 제약 없이 행동하도록 허용했다. 기술의 발전은 그의 손에 놀랍고 충격적인 카드를 쥐여주었다. 그 시스템은 폭압으로, 폭압은 범죄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괴물에겐 모든 행동이 정당화되는 법. 더구나 히틀러는 강력할 뿐 아니라 간교하기도 했다. 그는 독일이란 애인을 어떻게 유혹하고 어떻게 애무하면 되는지를 잘 알았고, 완벽하게 낚인 독일인들은 그들의 주인을 열광적으로 따랐다. 최후의 최후까지 독일인들은 그를 노예처럼 모셨고, 어떤 나라 사람들이 그 어떤 지도자에게도 제공한 적이 없는 봉사를 했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극복할 수 없는 인간적 장애물에 직면하게 된다. 그의 거대한 계획은 인간의 밑창에서 나오는 저열한 힘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나 사람은 진흙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그 어떤 용기도 가질 수 없는 존재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너무 나간 오만이었다. 독일 제국은 무엇보다 먼저 민주국가들이 전쟁을 두려워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베르사유 체제를 무너뜨리려 했다. 그러고 나서는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를 합병하는데, 파리의 비겁한 굴종과 모스크바의 공모(共謀)가 이를 가능하게 했다. 그다음엔 중립을 지키는 러시아 앞에서 프랑스를 정복하거나 겁을 먹은 프랑스 앞에서 러시아를 타도하려 했다. 이 두 목표가 달성된다면 영국은 미국의 사치스러운 중립 때문에 (독일의) 멍에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럽은 좋든 싫든 새로운 질서의 물미 아래로 완전히 통합될 것이며 일본은 동맹국의 역할을 맡아 미국은 포위, 고립되고 굴복하고 말 것이다.
‘히틀러의 시도는 초인적·비인간적’
처음엔 계획한 대로 흘러갔다. 무서운 무기와 무자비한 법으로 무장한 나치 독일은 연전연승(連戰連勝)의 가도(街道)를 달렸다. 제네바, 뮌헨, 독소(獨蘇)불가침 조약 등은 히틀러가 이웃 나라들을 경멸하는 근거를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이 나라들 가운데서 용기와 명예심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파리와 런던은 폴란드의 살해를 묵인하지 않았다. 그 순간에 히틀러도 맨정신이었으므로 자신의 속임수가 들통났다고 알아챘을 것이다. 그의 기갑군단은 국가도 지휘부도 상실한 프랑스를 쓸고 지나갔지만 영국은 해협 건너에서 항복을 거부하였고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서도 저항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투쟁이 바다에서 바다를 건너 아프리카로, 중동으로, 그리고 프랑스의 비밀 저항전선으로 번져갔다.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독일 병력은 다른 전장(戰場)에 분산되어 소련을 굴복시킬 정도로 충분하게 투입될 수 없었다. 그 뒤 미국은 일본의 공격으로 전쟁에 뛰어들었고, 군사력을 확실하게 전개하였다. 독일과 히틀러의 엄청난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운명은 이로써 결정되었다.
히틀러의 시도는 초인적(超人的)이었고 비인간적이었다. 그 어떤 주저도 없이 이런 자세를 유지하였다.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맞이한 최후의 고통스러운 시간까지 그는 전성기 때처럼 아무런 반대도 없이 강고하고 무자비하게 초인적, 비인간적 자세를 견지하였다. 자신의 투쟁이 가져온 그 기억들의 끔찍한 위대성을 위하여 그는 주저하지도, 타협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지구를 들어 올리려 하는 타이탄은 굽힐 수도 접을 수도 없는 법이다. 그러나 정복당하고 파멸당함으로써 그는 다시 인간성을 되찾았을 것이고, 모든 것이 종말에 이르렀을 때, 아무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을 흘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드골-아데나워 역사적 회담
드골은 패전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 전승국(戰勝國)으로 만들었고, 프랑스는 유엔 안보리 5대 상임 이사국의 일원이 되었다. 프랑스가 1958년 알제리 독립 문제로 내전(內戰) 일보 직전까지 가자 싸움만 하던 정치권이 만장일치로 그를 불러내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改憲), 제5공화국을 열었다. 10년의 재임 기간 그는 독일과 화해, 유럽 통합의 기초를 놓았고, 핵무장을 했으며 자유 진영의 한 중심이면서도 미국과 소련에 대해 독립적인 외교노선을 유지하였고 원자력 산업 등 과학과 공업을 진흥시켜 GDP에서 처음으로 영국을 추월했다. 이런 드골의 공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높게 평가되는데, 특히 서독의 아데나워와 손잡고 추진한 독불(獨佛) 화해는 EU(유럽연합) 탄생으로 이어져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나를 편하게 이 지역을 여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58년 9월 14일 콘라트 아데나워 수상은 82세의 노령(老齡)이었다. 서독을 11년간 통치,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권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랑스 영내(領內)로 들어서자 불안해졌다. 그 몇 달 전 권좌로 돌아온 샤를 드골 수상(제5공화국 개헌 뒤 대통령이 된다)의 초대로 콜롱베에 있는 드골의 자택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길가엔 독일군의 공격으로 죽은 프랑스 군인 묘지가 많았다. 그는 드골이 권위주의적이고 공격적이며 반독(反獨) 성향이 강하다는 보고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회담을 수락한 것이 실수가 아닐까 생각도 했을 것이다.
콜롱베 자택에서 그를 기다리던 68세의 드골도 불안했다. 도착 시각이 지나도 아데나워가 나타나질 않는 것이었다. 늦어지면 늙은 부인이 마련해놓은 점심 요리가 식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아데나워가 탄 차는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느라고 늦었다. 드골은 아데나워가 천천히 승용차에서 내리자 다가가서 두 손으로 악수를 하고 독일어로 인사를 했다. 독일 손님을 집안으로 인도하느라 서두는 바람에 아데나워는 넘어질 뻔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천주교 신도인 두 사람은 출생지(콜롱베와 쾰른)도 라인강 주변의 역사와 문화를 공유(共有)하는 관계여서 그날 대화는 영혼과 영혼의 교감으로 이어졌고, 그 뒤의 독불 화해는 물론이고 유럽 통합의 길을 내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두 巨人, 영혼을 열다!
정계에 복귀한 드골은 당시 서독 수상 아데나워의 위대성을 간파했다. 드골은 정치와 인간을 늘 역사적으로 파악하는 사람이다. 그는 회고록(《희망의 회고록: 재생과 노고》)에서 아데나워를 이렇게 분석했다.
〈가장 유능한 지도자이자, 독일을 프랑스와 함께 가는 나라로 만들려고 했던 콘라트 아데나워가 수상직에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이 라인란트인(人)은 골족과 튜턴족의 성격을 상호보완적으로 체득(體得)하였다. 그런 성격은 라인강 변의 로마 문명에 거름 역할을 하였으며 프랑크 제국 샤를마뉴의 영광으로 이어졌고,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의 존립 근거가 되었으며, 프랑스 왕과 선제후(選帝侯)의 관계를 뒷받침했고, 독일을 혁명의 열기로 타오르게 했으며, 괴테·하이네·스탈 부인, 그리고 빅토르 위고를 감흥(感興)시켰고 두 민족이 격하게 싸우면서도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면서 길을 찾도록 했다. 이 애국자는 히틀러의 광적인 야망과 독일 대중과 엘리트들의 맹종이 만든 독일과 이웃 나라들 사이 증오와 불신의 장벽을, 프랑스만이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아데나워도 드골을 높게 평가했고 돌아온 드골이 장기 집권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드골을 만나고 싶어 했다. 드골은 그를 콜롱베의 자택으로 초대했는데, 드골은 ‘늙은 프랑스인과 더 늙은 독일인’이 두 민족의 대표로서 만나는 데는 화려한 궁전보다는 소박한 분위기가 더 어울린다는 판단을 했다고 한다. 만나자마자 아데나워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귀하가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 찾아왔습니다. 귀하의 인격과 프랑스를 위하여 이룩한 업적, 그리고 다시 권좌에 돌아오게 된 배경 등을 생각할 때 그런 수단을 갖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 두 국민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나라를 완전한 우호 관계로 재정립할 수 있는 입장에 이르렀습니다. 두 나라가 옳은 방향으로 접어들긴 했지만 그것은 독일의 패배와 프랑스의 기진맥진에 기인한 것으로 역사의 시간대로 본다면 쉽게 변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문제는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관계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와 독일은 서로에 어마어마한 도움이 되는 진정한 장기적 상호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서로 갈등하다가 서로 적대하게 될 것이며 이는 상호 몰락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귀하의 목적이 두 나라의 진정한 화해라면 나도 함께 노력할 결심이고, 이 분야에서 확실한 자산을 갖고 있습니다. 수상직을 11년간 지켜왔지만 나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그 직을 유지할 것이며, 내가 쌓아온 업적에 대한 평가와 히틀러로부터 나와 가족이 받은 핍박의 기록은 나로 하여금 원하는 방향으로 독일 정책을 끌고 가게 합니다. 귀하는 어떤 방향으로 프랑스 정책을 밀고 나가려 합니까?”
화해의 원칙

▲1961년 7월 18일 쾰른공항에서 드골을 영접하는 아데나워. 두 사람은 역사적·문명적 공감대를 공유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드골이 아데나워를 라인란트인이라고 부르고 ‘아우스트라시아’(라인강 변의 프랑스 동부,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서부 지역 문화권)를 언급한 것은 그의 깊은 역사의식을 보여준다. 히틀러란 괴물을 만든 독일인과 아데나워를 구별하는 시각이다. 라인강을 둘러싼 로마문명, 게르만족 중에서도 가장 먼저 패권을 장악, 오늘의 프랑스 및 독일을 통치했던 프랑크족, 그 전성기를 열어 이탈리아를 포함한 서유럽을 거의 통일하였던 샤를마뉴(大王이란 뜻이 있다)의 맥을 이을 수 있는, 즉 독불 화해를 넘어서 유럽 통합을 지향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로 본 것이다. 아데나워는 라인강 문화권인 쾰른에서 태어나 쾰른 시장을 지냈고 히틀러 시절엔 정계에서 밀려나 투옥, 연금(軟禁) 등 고초를 겪었으며 이 경력이 그를 전후(戰後) 독일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드골은 그와 아데나워가 역사적·문명적 공감대를 갖고 있다고 본 것이다.
드골은 자신의 비전을 장엄하게 요약하였다.
“독일의 야욕(野慾)에 따른 결과로 프랑스는 세 번, 1870년, 1914년, 1939년에 끔찍한 고통을 겪었지만 프랑스는 지금 패배하고 해체되고 국제적 위상이 초라하게 된 독일을 마주하게 되어 두 나라 관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모든 것보다 우선하는 유럽 통합의 중요성과 이것이 성공하려면 파리와 본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감안할 때 두 나라 국민들이 화해하고 그들의 노력과 능력을 통합하여 역사의 진로를 바꿀 때라고 생각합니다.”
두 늙은 거인(巨人)은 구체적 논의에 들어간다. 아데나워는 세 가지 어려운 부탁을 프랑스에 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첫째는 독일이 다른 나라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아 국제적 위상을 회복하도록 프랑스가 도와주었으면 한다. 둘째, 소련 진영의 위협, 특히 베를린에 대한 위협에 노출된 독일을 지원할 것. 셋째, 독일 재통일(再統一)의 권리를 인정해줄 것.
드골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자신의 통합, 안전, 혹은 서열(序列)과 관련하여 프랑스는 독일의 도움을 받을 일은 없지만 숙적(宿敵)의 재활을 기꺼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돕겠습니다. 두 국민들의 화해를 위하여, 세력 균형의 유지를 위하여, 그리고 유럽의 단합과 평화를 위하여. 이런 도움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독일 측에서도 충족시켜줘야 할 조건들이 있습니다. 현존하는 국경선을 존중할 것, 동구권과 친선의 태도를 유지할 것, 핵무장을 완전하게 포기할 것, 재통일을 서두르지 않을 것.”
“프랑스는 위대성을 추구해야 존립 가능”
아데나워는 드골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였다. 이 대목에서 드골은 흥미로운 관찰을 한다. 아데나워가 독일의 재통일을 갈망하긴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프로이센적이고, 개신교적이며, 사회주의적인 동독 지역을 즉각 흡수하는 데 불안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는 감상을 회고록에 적었다.
아데나워는 스탈린이, 통일된 독일의 중립화를 조건으로 통일을 허용하겠다고 제안하였을 때 이를 거부한 적이 있다. 그는 중립국으로서의 재통일보다는 확실하게 자유 진영, 즉 서유럽 편에 서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를 한반도에 적용한다면 한국은 연방제식 중립화 통일보다는 분단을 지속하더라도 한·미·일 동맹을 축으로 하는 자유 진영 편에 서 있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드골과 아데나워는 유럽의 장래에 대하여 긴 대화를 이어갔다. 아데나워는 서유럽의 시스템을 도입하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다시는 독일인이 과거처럼 소외감을 느껴 힘의 숭배로 빠져들고 히틀러의 품 안에 안겨버렸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드골은 유럽경제공동체(EEC)에 영국이 가입 신청을 해도 이를 거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영국의 도움으로 독일에 항전했지만 영국의 역사적 배경과 행태로 보아 유럽 통합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근년의 영국 EU 탈퇴는 드골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말해준다. 드골은 아데나워에게 독일이 핵무장을 해선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프랑스는 핵무장을 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들의 조국이 유럽의 마스토돈(거대 동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이 위대성에 대한 자각과 책임의식이 오랜 분열적 습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단합을 유지해왔습니다. 이런 국제적 사명을 포기하면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에 대한 관심을 잃고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프랑스의 쇠락은 독일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나라에 손해가 될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이렇게 응수했다.
“동의합니다. 나는 프랑스가 세계에서 응당 차지해야 할 위상을 다시 찾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독일 국민들도 프랑스 사람들과는 다른 천재성을 가졌지만 똑같은 의미의 존엄성을 필요로 합니다. 귀하가 독일이 그런 존엄을 회복하는 것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음과 영혼을 열어놓고 한 대화였다. 아데나워는 회고록에 드골에 대한 인상을 남겼다. 언론을 통해 들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고 했다. 젊은 사람의 기백을 가지고 있고 세계정세에 정통했으며 그의 애국심은 공격적이지 않았고 소박성과 자연스러운 태도에 놀랐다는 것이다. 이날의 공감대에 기초하여 두 나라는 화해 협력의 길을 달려갔고, 9세기 이후 1100년 동안 샤를마뉴, 카를 5세, 나폴레옹, 히틀러가 무력(武力)으로 시도하였다가 실패한 유럽 통합이 성공했던 것이다. 드골은 회고록에서 1958~1962년 사이 두 사람이 40회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15회 만났고, 100시간 이상 흉금(胸襟)을 털어놓는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고 자랑했다.
케네디에게 한 예언

▲1961년 5월 31일 케네디 부부와 만난 드골. 드골은 케네디에게 월남전 참전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1969년, 프랑스 대통령직에서 스스로 물러난 드골이 1970년에 죽고 나서 나온 회고록은 《희망의 회고: 재생과 노력》이다. 이 책에는 1961년 5월 31일 프랑스를 방문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드골은,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한 지 넉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활기에 넘쳤고, 품격 있는 부인과 함께 정말로 매력적인 커플이었다고 평했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이 월남에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이며, 이는 인도차이나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는 목적이라고 설명하자 일장훈시 하듯이 이렇게 말했다고 적었다.
“귀하는 이 지역에 개입하면 끝도 없는 수렁에 빠질 것임을 곧 알게 될 겁니다. 민족 전체가 궐기하면 어떤 외세도, 아무리 강력해도, 그들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 지역의 지도층이 이해관계에 따라 미국에 복종한다고 해도 인민들은 따르지 않을 것이고, 진정으로 미국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귀하가 (반공)이념을 내세워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민중의 눈에는 그 이념이란 것도 미국의 권력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비칠 겁니다. 그래서 미국이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일에 휘말리면 휘말릴수록 공산주의자들은 더욱더 민족 독립의 챔피언으로 보일 것이며, 그들은 절망한 이들로부터 더 많은 지지를 받게 될 겁니다.
우리 프랑스가 일찍이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자리를 대체하려고 우리가 떠난 데서 시작하여 우리가 끝낸 전쟁을 재개(再開)하려 하는군요. 미국이 얼마나 많은 인력과 돈을 부어 넣든 바닥을 모르는 군사적·정치적 수렁으로 차츰차츰 빠져들게 될 것임을 예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불행한 아시아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이들 나라를 운영하는 일을 떠맡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전체주의로 밀어 넣는 요인인 비참함과 모욕감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돕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서방 세계의 이름으로 귀하에게 하는 것입니다.”
민족 전체가 궐기하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말은 그 자신이 망한 프랑스를 되살릴 때 경험했기에 더욱 확신에 차 보인다. 케네디는 드골의 말을 경청했지만 그 뒤의 사태 전개는 불행히도 드골의 예언대로 흘러갔다. 미군 5만 명의 전사(戰死)를 견디지 못한 미군은 철수하고 월남은 공산화되었다. 드골의 적중한 예언은 역사적 경험에 기초한 그의 지성(知性)과 지혜를 보여준다.
1940년 5월 아르덴 전투 때 프랑스군에 배속되었던 월남군 기관총 사수(射手)들은 뮤즈강을 건너는 독일군을 상대로 끈질기게 버티었는데 프랑스군이 오히려 먼저 도망을 쳐버렸다. 1954년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 월남을 포기하였다. 월남은 13세기 말 몽골 쿠빌라이 군대의 침공을 저지한 기록도 남겼다. 월남 민족의 저력을 잘 아는 드골의 충고였다. 미국의 월남 개입을 주도한 관리들은 명문대학교 출신의 최고 엘리트(The Best and the brightest)였다. 그들이 놓친 것은 월남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에 대한 드골 수준의 통찰력이었다. 드골의 탁월한 리더십의 근저엔 엄청난 독서와 경험으로 축적된 역사의식이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문적 교양이, 큰 인물을 만든다.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20세 때 죽은 딸

▲드골은 조국을 패전과 내전위기로부터 두 번 구했다.
1958년 드골은 수상으로 추대되자 내각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改憲), 만성적인 정치 불안에 종지부를 찍었다(제5공화국 출범). 자신을 다시 권좌로 밀어 올린 알제리 주둔 군부의 뜻과는 달리 드골은 알제리 독립을 승인, 극우(極右) 비밀군사조직으로부터 여러 차례 암살 기도(企圖)에 직면하였다(그가 탄 차가 매복 공격을 당하여 집중사격을 받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살아났다). 알제리 주둔군의 쿠데타 시도도 진압하였다.
드골 치하(治下)에서 프랑스는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고 과학기술(항공·원전 등)을 발전시켰으며 핵무장을 하고 중국과 수교(修交)하는 등 미국에 예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걸었다. NATO의 작전통제권에 프랑스군이 들어가는 데 반대한 드골은 1966년 NATO에서 탈퇴, 퐁텐블로에 있던 NATO 사령부도 브뤼셀로 밀어냈다(2009년에 복귀).
그의 사후(死後)에도 드골 노선은 프랑스 정치의 주류(主流)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두 차례 16년간 프랑스를 이끌었다. 처음엔 망해버린 나라를, 두 번째는 내전 직전의 나라를 맡아 위기 탈출에 성공하였다. 오늘의 프랑스, 오늘의 유럽은 드골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다. 드골의 문학적 지성에서 나온 세상의 조화(造化)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문학은 인간과 나라의 품격이다.
드골의 전기(傳記) 《최후의 위대한 프랑스인》을 쓴 영국인 찰스 윌리엄스는 드골의 신념은 프랑스의 국익을 수호하는 것 하나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초월적이고 초연한 리더십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드골을 존경하는 사람들도 그로부터 인정(人情)을 느낄 순 없었다. 드골이 진정으로 사랑한 이는 다운증후군을 앓다가 스무 살에 죽은 딸 한 사람뿐이었다고 했다. 1948년 딸이 죽자 드골은 부인에게 “이제야 우리 아이도 다른 사람과 같아졌다”고 했다고 한다.
묘비명
그는 마지막 1년을 회고록 집필에 쏟았다. 두 번의 은퇴 기간에 쓴 두 권의 회고록이 드골을 역사 속에 깊고 굵게 새겼다. 그는 문필가로 살고 죽은 사람이다. 미리 써놓은 유언에서 가족장으로 할 것과 장례식에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참례(參禮)하는 것을 금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해방군으로 함께 싸웠던 전우(戰友)들의 조문만 허용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이 유언을 존중하여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별도의 영결식을 가졌다. 퐁피두 대통령은 드골의 서거를 발표하면서 “프랑스는 과부가 되었다”고 했다.
드골은 자신의 묘비(墓碑)에 이렇게만 새기게 했다.
〈Charles de Gaulle, 1890~1970〉
그는 은퇴 후에 대통령 연금(年金)을 받지 않았다. 다만 대령 계급에 해당하는 연금만 받았다. 유족은 그가 죽은 뒤 유지 능력이 없어 저택을 팔았다.⊙
드골의 정치名言
샤를 드골의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고 짧다. 정치, 전쟁, 국민의 속성을 꿰뚫어 본 명언들을 모았다.
*원자폭탄을 갖지 않은 나라는 진정으로 독립하였다고 할 수 없다.
*위기만이 프랑스를 단결시킬 수 있다. 265가지나 되는 치즈를 가진 나라를 갑자기 단합시킬 순 없다.
*내가 사람들을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개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침묵은 권력의 최종 병기이다.
*용감한 사람은 난관(難關)에 특별한 매력을 느낀다. 곤경에 직면하였을 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옳을 때 화를 내는데 처칠은 잘못할 때 화를 낸다. 우리는 서로 화를 낼 때가 많다.
*애국심은 동족(同族)을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이고, 민족주의란 이민족(異民族)을 미워하는 것이 먼저이다.
*정치인은 주인이 되기 위하여 머슴 행세를 한다.
*나는 누구한테도 속하지 않지만 모두에게 속하는 사람이다.
*정치인들은 자신이 말한 것도 믿지 않기에 다른 사람들이 그를 믿으면 놀란다.
*침묵만큼 권위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은 없다. 침묵은 강자(强者)의 광휘(光輝)이고 약자(弱者)의 피난처이다.
*신비함이 없으면 명성(名聲)도 없는 것은, 친숙함이 경멸을 부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심사숙고(深思熟考)하지만 행동하는 이는 혼자이다.
*정치에선 조국이나 유권자들을 배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럴 경우) 유권자들을 배신할 것이다.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조갑제TV 대표 mongol@chosun.com
■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 사진들
1912년 4.11일 오후 2시경 아일랜드 퀸스타운을 떠나는 타이타닉호. 죤 모로가 찍은 이 사진은 타이타닉호의 마지막 사진으로 확인되었다

일자리를 찾는 구직인. 1930년.

1900년의 8개국 연합군
왼쪽부터; 영국, 미국, 호주, 인도,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태리, 일본

1991년 공산주의가 붕괴하자 수천명의 알바니아 난민이 이태리 바리에 도착하고 있다.

1968년 체코에 침공하여 건물을 부수고 들어가는 소련 탱크.

영국 HMS Daphne 호의 갑판에 구조된 노예들이 모여 있다. 1868년.

미국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히틀러. 1941.11

엘비스 프레슬 리가 강제 입대하여 선서하고 있다 . 1958년

이집트 스핑크스 앞의 사무라이 그룹, 1864년.

194.8.6일 원폭 폭발 전과 후의 히로시마

베를린 올림픽에서 환호하는 미국 여자로부터의 키스를 받은 히틀러. 1936.8.16.

관람 회전차 위의 쿠 클럭스 클랜, 1925년

한국전에서 위문 공연하는 마릴린 몬로. 1954.2.11.

벨로루시아 전선의 여자 스나이퍼들 – 775명의 사살. 1945년.

키스 굿바이.

환경 보호국 (EPA) 가 세워지기 전까지 뉴욕은 가장 오염된 도시중 하나였다. 1966년.

1943년 테란 회의에서의 스탈린, 루즈벨트, 쳐칠. 1943년.

1922년 열리기 전의 3245년된 투탕카멘 무덤의 문을 묶어 놓은 밧줄.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