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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 16/ 이슬람교1/ 기원 - 창시자 - 라마단

상림은내고향 2021. 12. 10. 17:56

종교 이야기 16/ 이슬람교

■이슬람교 창시자 

2015년 07월 23일 이슬람교 창시 무함마드는 40세때 예언자로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570년(추정) 아라비아 반도의 마을 메카에서 가난한 과부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무함마드’란 아랍어로 ‘찬양받는 자’ ‘뛰어난 자’란 의미다.

 

유년에 어머니마저 잃은 그는 조부와 숙모의 손에 성장했다. 25세쯤 부유한 미망인 하디자와 결혼해 평온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기 시작했던 그는 40세 때인 610년 동굴에서 명상 중 신의 계시를 받으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전신이 눌려 으깨어지는 것 같은 감각과 함께 천사 가브리엘의 환상을 접하며 “너는 신의 사자(使者)다”는 음성을 들었던 것.

 

이때부터 그는 예언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전능자·창조주·심판자 ‘알라’ 중심의 유일신교인 이슬람교를 창립하고 설교를 시작한다. 우상 숭배를 공격하고 반대파와 토론하며 기적도 행하면서 심한 박해를 받게 된 무함마드는 622년 메디나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를 ‘히즈라’라고 부른다.

 

이주가 일어났던 아랍력의 첫날인 622년 7월 16일부터 이슬람교의 기원이 시작됐다. 무함마드는 이슬람 교단의 예언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안목을 지닌 지도자이며 군사 사령탑이었다. 이슬람교 확장을 위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등을 정복하고, 628년에는 각종 다신교 우상들을 무너뜨렸다.

 

아라비아에서 군사적으로 막강해진 그는 동맹 맺기를 원하는 국가들에 이슬람교 신자가 돼야 한다는 전제를 내세워 아라비아 전역의 통일을 이룩한다. 무함마드는 첫 아내 사이에서 3남 4녀를 낳았고, 5명의 아내를 두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632년 3월 메카 신전을 순례한 후 메디나에 돌아와 같은 해 6월 8일 열병을 앓다가 부인 아이샤의 무릎을 벤 채 숨을 거뒀다.

김대종 기자 bigpaper@munhwa.com

 

■마호메트의 탄생

동로마 제국이 점차 쇠퇴하여 그 힘이 약화되고 게르만족의 국가들도 미처 본격적인 기틀을 잡지 못한 7세기의 혼란한 유럽에 거센 태풍이 불어오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밀어닥친 이슬람의 열풍이었다.

 

대부분이 사막인 광대한 아라비아 반도에는 예전부터 셈어족에 속하는 아랍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대개 가축을 거느리고 오아시스를 찾아다니는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비가 많이 오는 곳에서는 간혹 농경생활을 하는 부족도 있었다. 일찍부터 대상(隊商)무역이 발달하여 메카 같은 도시가 생겨났지만 아직 정치적 통일은 이루지 못한 상태였고 종교도 다신교였다. 이러한 아라비아 반도에 새 빛을 던져 준 사람이 바로 마호메트(Mahomet)였다.

 

서기 570년경, 아라비아의 메카(Mecca)에는 마호메트라고 불리는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마호메트는 태어난 지 2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었고, 6살 되던 해에는 어머니마저 잃고 말았다. 고아가 된 마호메트는 작은 아버지인 아부타레부의 집에서 자라났다.

 

그 무렵, 메카에는 웅장한 카바 신전이 있었다. 이 카바 신전에는 여러 신들을 모셔놓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신으로 모셔진 것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커다란 검은 돌이었다.

 

나이 어린 마호메트는 아라비아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그 검은 돌에 예배하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 돌이 정말 신인가요?"

 

그 말을 들은 작은 아버지는 엄숙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고 말고, 저 돌은 아라비아에서 제일 큰 신이지. 저 검은 돌에 기도를 드리기만 하면 무슨 소원이든지 다 이루어진단다."

 

비록 어린 나이의 마호메트였지만 그것은 헛된 일로 여겨졌다. 마호메트가 12살 되던 해, 처음으로 작은 아버지를 따라 대상에 참가하여 시리아 국경까지 여행을 했다. 그 후로 여러 차례에 걸쳐 여행을 하면서, 유대인의 신과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듣게 되었다.

 

그가 청년이 되었을 무렵, 메카에는 카디자라는 부유한 미망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죽은 남편이 하던 장사를 맡아 관리해 줄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자 조카인 튜지마가 나서서 그의 친구인 마호메트를 추천했다.

그때 25살의 마호메트는 작은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었다. 카디자의 관리인으로 들어간 마호메트는 대상을 이끌고 먼 곳까지 장사를 하러 다니면서 여러 종교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었다. 그러는 동안 카디자는 마호메트에게 호감을 갖게 되어 두 사람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마호메트는 메카에서 으뜸가는 부자가 되었으나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지지 않았고, 오히려 메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헤라라는 산의 동굴 속에서 단식을 하며 인생의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가 어려서부터 의문을 품어 오던 것은 아라비아 사람들이 어째서 카바 신전의 검은 돌을 그토록 숭배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에 대한 새로운 진리를 찾으려고 애썼다. 마호메트는 특히 여행 중에 들은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인상 깊었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만이 계신다. 그리고 그 분은 인간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사랑의 신이시다."

그 진리를 떠올린 마호메트는 알라를 생각해 냈다.

 

알라는 아라비아인들이 믿고 있던 신들 중의 하나로서, 알라는 신전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이었다.

 

"알라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같은 것이다. 그렇다. 알라야말로 진정한 하느님이다."

결국 그는 헤라 산의 동굴 속에서 스스로 진리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 순간 어디선가 마호메트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 그대 신의 예언자여!"

얼마 뒤에도 계속 들려 왔다.

"마호메트여, 마호메트여, 마호메트여!"

 

그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나더니 동굴 안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마호메트는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온몸에 느끼며 소리쳤다.

 

"나는 알라의 예언자다."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그는 우선 아내에게 참된 신, 즉 알라에 대해 설교했다. 다음에는 11살 난 사촌 동생에게, 그 다음에는 하인들에게 설교했다. 그는 이처럼 주변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차츰차츰 메카의 사람들을 신도로 만들어 갔다. 그의 새로운 진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 들었고, 그를 따르는 신도의 수는 계속 늘어갔다.

 

그러자 메카를 지배하고 있던 유력한 사람들이 마호메트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들은 신성한 카바 신전의 검은 돌을 믿지 않는 마호메트를 위협했다.

 

"너의 진리는 엉터리이다. 더이상 검은 돌을 모욕하는 짓을 계속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리스도교 수도승들이 시리아 지방을 여행 중인 마호메트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마호메트는 위협에 굴복하지 않았다.

 

"만일 내 오른손에 태양을 놓고 왼손에는 달을 놓고서 나에게 입을 다물라고 할지라도, 나는 이 진리를 설교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뒤로 유력자들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 박해를 당하면서도 마호메트는 메카에 머물며 계속해서 진리를 가르쳤다.

 

이렇게 마호메트가 새로운 종교를 시작한 지 13년째 되는 해에 메카로부터 북쪽으로 40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야스리브라는 도시에서 신도들이 찾아왔다.

 

"우리 야스리브의 사람들도 당신의 설교를 듣고 진리를 깨우치게 하여 주십시오."

 

야스리브 사람들이 마호메트를 초청하자 그는 쾌히 승낙하고 떠날 준비를 하였다. 바로 그때 신도 한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검은 돌을 숭배하는 자들이 군대를 이끌고 이리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제자인 알리가 마호메트를 재촉했다.

 

", 우선 이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예언자이십니다. 뒷일은 제가 맡겠습니다."

 

마호메트는 어둠을 타고 메카를 빠져나와 제자 아부베크르와 단 둘이서 야스리브로 갔다.

 

그가 야스리브에 도착했을 때 시민들은 환호하며 그를 맞이하였다. 그들은 이미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도피의 해를 이슬람교에서는 헤지라(Hegira)라고 부르며, 그들의 기원 원년(元年)으로 삼고 있다. 서기 622년의 일이었다. 이 야스리브는 이후부터 메디나(Medina)라고 불려졌는데, 메카와 함께 이슬람의 성지로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

출생 570
사망 632
국적 아랍 메카

 

 이슬람교의 창시자. 611년 신의 계시를 받아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622년 종교적인 탄압을 피해 메디나로 피난하여 그곳에 포교의 중심을 정하였다. 이것을 헤지라(聖遷)라고 한다. 632년 사망할 무렵 남부 아라비아 전역이 이슬람교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아라비아의 홍해 연안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는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에 필적할 만한 종교인 이슬람교의 창시자이자 지중해 주변에 거대한 제국을 세운 정복자이기도 하다.

 

아라비아 사회는 무함마드가 탄생하기 전에야 비로소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경제생활은 매우 단순해서 낙타를 이용한 대상(caravan)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메카는 특히 인도양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대상로(隊商路)의 요지였다. 예부터 흩어진 유대 인들이 살았으며 이비아니교, 마리아나이트, 네스토리우스교 등 그리스도교 이단이 로마의 이단정죄를 피해 거주하였다.

 

메카의 지배 계급은 5세기 말경 황야에서 온 쿠라이시 족으로 무함마드는 쿠라이시 족의 하심 가에서 570년에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한때 메카 시를 지배할 정도의 명문가였으나 그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가세가 크게 기울어 그의 수중에는 한 푼의 재산도 상속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으며, 어머니마저 그가 6세 되던 해에 메디나에서 돌아오는 길에 병에 걸려 죽었다. 그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라다가 이후 삼촌 아부 탈립에게서 자라게 되었다. 하지만 아부 탈립은 자식이 워낙 많은데다 가난했기 때문에 무함마드는 어린 나이에 삼촌과 함께 샴으로 대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슬람교 문헌에는 그가 문맹에 무학(無學)으로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오랜 목동생활과 삼촌을 따라다니며 얻은 대상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현실적인 지혜에 빠르게 눈을 떴다. 그는 삼촌의 소개로 부유한 과부 카디자의 고용인으로 들어가 시리아 지방으로 대상 무역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이 여행에서 엄청난 소득을 올리고 돌아오자 카디자는 감탄하여 열다섯 살이나 어린 그에게 청혼했다. 그리하여 무함마드는 스물다섯 살에 연상의 카디자와 결혼하여 부유한 상인이 되었다.

 

▲비를 기원하는 무함마드와 사람들

 

하지만 일신의 평화와 달리 그의 인생에는 불행이 닥쳐왔다. 아들들이 태어나기만 하면 어린 나이에 사망했던 것이다. 대상 무역을 다닐 수 있는 건강한 아들을 선호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고민은 점점 커졌다. 그리고 메카 시 근처의 히라 산 동굴에서 명상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다. 그는 홀로 금식과 명상기도를 하며 진리를 깨닫기 위해 노력했다.

 

611년의 어느 날 그는 명상을 하던 도중 가위에 눌리는 듯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천사 가브리엘이 그의 목을 잡고 신의 말씀을 복창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도망치듯 돌아와서 자신이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 종교를 창시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그의 아내 카디자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며, 그 후 친척과 친구들을 포교 대상으로 삼아 차츰 교세를 넓혀갔다.

 

처음 메카 시에서는 이슬람교의 교세가 넓어지는 것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무함마드가 메카 시민을 상대로 포교를 시작하자 시민들이 그에게 반발하게 되었다. 메카 시는 카바 신전으로 오는 아라비아 각지의 순례객들을 상대로 쏠쏠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고, 가장 부유한 상인들로 이루어진 평의회가 시를 지배하고 있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부는 신이 주신 선물이라는 무함마드의 주장은 메카의 이러한 금권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622, 무함마드는 메카 시의 종교적 탄압에서 탈출하여 야스리브로 거점을 옮겼다. 야스리브는 무함마드를 융숭하게 대접했기 때문에 후에 '예언자의 도시(madinat an-nabiy)'라고 불리게 되었고, 현재는 '메디나(Medina)'라고 불린다.

 

메디나에는 서로 패권을 다투고 적대하는 아우스, 하즈라지라는 2개의 아랍 부족과 3개의 유대 인 부족이 살고 있었다. 무함마드는 이들 부족의 조정자로 나섰다. 메디나의 아랍 인과 무함마드 사이에 은밀한 교섭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622년 아카바의 맹약이 체결되어 메디나의 아랍 인은 무함마드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곧 메카의 이슬람교도가 떼를 지어 메디나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사태의 심각함에 놀란 메카의 대상들은 그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그는 교묘하게 난을 피해 그해 9 24일 무사히 메디나에 도착했다. 이것이 헤지라(聖遷, 성전)로 이슬람교도는 서기 622 7 16일을 이슬람력의 시발점으로 삼게 되었다. 종교인 동시에 사회조직의 원리이기도 한 이슬람교는 이 해에 틀이 잡혔던 것이다.

  

메디나

메디나에서의 생활은 무함마드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이곳에서 비로소 종교라 불릴 만큼 교세를 확장하고 신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종교의 수장이자 군사사령관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그는 무섭게 신장된 자신의 교세를 바탕으로 각 도시를 상대로 포교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7년간 계속된 메카 시와의 종교전쟁은 메디나 시의 승리로 끝났고 메카는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630, 무함마드는 쫓겨나듯 탈출했던 메카 시로 당당히 돌아왔다. 그는 아라비아 반도를 점차 통일시키며 행정조직을 개편해 그때까지 자발적이었던 희사(喜捨)를 정부에 바치는 세금으로 바꾸었고, 혈연에 의한 인간의 결합을 종교에 의한 결속으로 대체했으며, 다신교를 영구히 금지했다. 이슬람교도 사회는 평등원칙에 따라 오직 《코란》의 율법에 의해서만 지배되었다.

 

632, 무함마드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신은 유일하며 신자는 형제'라는 것을 재차 이야기했다. 전승에 따르면 새로 선출된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Abu Bakr)는 비탄에 빠진 신자들에게 "만일 그대들이 무함마드를 숭배하고 있다면 분명히 무함마드는 죽었다. 그러나 만일 신을 숭배하고 있다면 신은 지금도 살아 있다. 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사망한 후에도 그의 계승자들은 무함마드의 포교전쟁을 계속 수행해갔다. 7세기에는 메소포타미아 및 전 페르시아 지방이 이슬람의 손에 들어갔다. 8세기에는 이집트를 거쳐 북아프리카가 침략에 굴복했고, 이슬람교도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지중해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이처럼 이슬람교의 포교전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먼저 포교전쟁에 동원된 병사들에게 현실적인 보상을 약속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용감히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슬람교에서는 포교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자는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아울러 전쟁을 통해 세계 제국이 실현되면 끝없는 부와 번영을 함께 누리게 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광만이 존재하는 전쟁에서 사막인들은 무서운 전투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지적할 것은 이슬람교의 전투적 성격이다. 무함마드는 선교사업을 일종의 무력에 의존하여 수행해나갔다. 포교 대상지에게 전쟁, 개종, 조공을 바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여 감화나 설교보다는 무력에 의한 포교를 했다. 그러나 일단 무력으로 정복된 지역에 대해서는 관대한 정책을 폈다. 그들이 복종하는 한 별다른 간섭 없이 유화정책을 펴나갔고, 개종하지 않는 사람들도 세금만 내면 차별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이는 비잔틴 제국의 가혹한 지배를 받던 피지배국 국민들을 감동시켰고, 덕택에 별다른 거부반응 없이 이슬람교를 뿌리내리게 할 수 있었다.

 

아울러 그 교리가 단순하여 많은 유대 인들과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쉽게 동화될 수 있었다는 점 역시 이슬람교가 빠르게 보급될 수 있었던 이유로 거론되고 있다.

다음 백과사전

 

■무함마드의 여인들 2017-01-30 월간조선 01월 호

⊙ 이슬람교의 전승(傳承)을 종합하면 무함마드의 아내 13, 일부 시아파 전승에 의하면 21명에 달해
25살 때 40살의 과부 사업가 카디자와 결혼, 9살 소녀, 며느리(양자의 아내)도 아내로 삼아
⊙ “예언자께서는 세 가지를 좋아하셨다. 예배, 향수, 여자” (이븐 사으드)

박현도
1966
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저술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계시를 받는 무함마드.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이슬람교 신자들, 즉 무슬림들에게 신앙의 표본이다. 이슬람교의 경전 《코란》 33 21절은 무함마드를 ‘하나님과 최후의 날을 소망하고, 하나님을 자주 기억하는 사람들이 따라야 할 훌륭한 모범’이라고 강조한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를 신()이나 신적인 존재가 아닌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냥 인간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 삶의 모범으로 따라야 할 인간으로 받아들인다


 
이슬람교 초창기부터 무슬림들을 가까이에서 접하여 이슬람교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무함마드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에 근거하여 신의 아들이자 신으로 믿는 예수는 평생 독신(獨身)으로 산 데 비해 무함마드는 많은 아내를 두었으니 위대한 예수와 달리 천박한 욕정에 휩싸인 인간으로 보았다. 중세(中世) 이후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무함마드에게 늘 따라다닌 별명이 호색한(好色漢)이었다. 대체 무함마드는 얼마나 많은 아내를 두었고, 왜 그렇게 여러 번 혼인을 해야 했을까?  


  
  《코란》은 아내를 4명으로 한정

  무함마드의 아내 수는 정확히 셀 수 없으나 이슬람교의 전승(傳承)을 종합하면 약 13명으로 볼 수 있다. 이슬람교의 일부사처(一夫四妻), , 최대 네 명의 아내를 동시에 둘 수 있다는 규칙을 알고 있는 독자는 다소 의아해할는지도 모른다. 《코란》 4 3절은 이렇게 말한다. 〈고아가 된 소녀들을 공평하게 대할 자신이 없다면 네 맘에 드는 여인 둘, , 또는 네 명과 혼인하라. 그러나 공평하게 대할 자신이 없다면 한 명이나, 또는 네가 소유하고 있는 여인들과 혼인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불공평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낫다.  


 
소유하고 있는 여인들이란 몸종을 의미한다.  

  이처럼 《코란》은 아내의 수를 4명으로 규정하는데, 무함마드의 아내 수는 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전승에 따르면 632년 무함마드가 죽었을 때 모두 열 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무함마드에게 아내를 네 명으로 제한한 《코란》 계시가 적용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무슬림들은 많은 수의 아내는 전통적으로 하나님이 예언자들에게 내린 특권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부 현대 무슬림 학자는 4명으로 아내를 제한한 《코란》 계시가 내리기 전에 무함마드가 아내를 많이 두었다고 이해한다. 반면 일부 서양학자들은 무함마드의 아내가 네 명이었을 때 《코란》 계시가 내렸기에 네 명으로 적혀 있다고 보기도 한다   


  
40’이라는 숫자의 의미 
 

무함마드의 아내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코란》 33 50절은 무함마드가 혼인할 수 있는 여성의 범위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혼례금을 주고 혼인계약을 맺은 여인, 전쟁에서 얻은 여성포로, 메디나로 함께 이주해 온 친척이나 외척인 여인, 무함마드에게 혼인을 제안하고, 무함마드가 받아들인 신앙인 여성과 혼인의 연()을 맺을 수 있다. 그런데 무함마드는 이러한 《코란》 계시가 내리기 이전, 즉 예언자 소명을 받기 전에 첫 번째 혼인을 하였다. 무함마드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했다고 한 카디자(Khadija)가 바로 첫 번째 아내다

 

  전승에 따르면 카디자는 두 번 혼인을 한 과부로 성공한 사업가였다. 무함마드는 카디자가 고용한 종업원이었다. 카디자는 무함마드의 성실함에 매료되어 혼인을 제안했고, 무함마드가 받아들여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때 무함마드의 나이가 25, 카디자는 40세였다고 한다. 그런데 둘 사이에 아들이 셋, 딸이 넷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카디자의 생물학적 나이가 40살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중근동(中近東) 문화에서 40은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다.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하고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고, 예수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를 하고, 무함마드가 40살 때 예언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40의 상징성을 잘 보여준다.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온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었을 때를 두고 “내 나이 40이었을 때”라고 말했다. 이처럼 숫자 40은 완전, 완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카디자와 아이샤

▲14세기 초 이란 화가가 그린 무함마드와 예수. 무함마드는 낙타, 예수는 당나귀를 탄 것으로 그렸다.  

 

  카디자는 무함마드가 강렬한 종교체험을 하고 왔을 때 그를 믿어 준 최초의 무슬림으로 알려졌다. 61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무함마드를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든든하게 후원하였다. 카디자와 혼인하기 전까지 무함마드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웠다. 《코란》 93 8절에서 무함마드를 두고 “곤궁한 너를 보고 부유하게 해 주지 않았는가?”라고 한 말은 카디자와 부부가 되기 전 무함마드의 궁핍한 삶을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무슬림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카디자, 카디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파티마(Fatima),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파라오의 아내 아시야(Asiya)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네 명의 여인으로 꼽았다고 한다

  

  또 카디자가 죽은 후 3번째 아내로 받아들인 어린 아이샤(Aisha)는 무함마드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카디자에게 강력한 질투심을 느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어느 날 무함마드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돕고 있을 때 왜 그런 일을 하냐고 아이샤가 물었다고 한다. 이에 무함마드는 “카디자가 친절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런 사람들을 도우라고 말했지. 마지막 유언이었어”라고 답하자, 아이샤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카디자! 카디자! 당신에게는 이 세상에 카디자 외에 다른 여자는 없군요”라고 소리쳤다. 평소 참을성이 뛰어난 무함마드였지만 질투하는 아이샤의 모습을 보고는 이내 말을 건네지 않았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카디자가 살아 있을 때에는 다른 여인을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디자가 죽고 난 후 무함마드는 재혼 대상으로 과부 사우다(Sawda)와 여섯 살 된 아이샤를 추천받았는데, 둘 모두와 혼인하게 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두 번째 아내 사우다는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피해 부부가 함께 에티오피아로 이주했다가 남편이 죽은 후 메카로 돌아온 과부였다. 세 번째 아내 아이샤는, 무함마드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을 때부터 흔들림 없이 늘 곁에서 도움을 주던 오랜 친구이자 무함마드 사후 제1대 칼리파가 되어 무슬림 공동체를 이끈 아부 바크르의 딸이었다


 
무함마드와 정혼(定婚)할 때 아이샤의 나이는 6살이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데 아버지가 무함마드의 무릎에 앉혀 놓았다고 한다. 혼인이 성사되었을 때 무함마드는 약 53, 아이샤는 약 아홉 살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나이 차다.
 


 
이 때문에 서구 그리스도교 학자들은 무함마드를 “소아성애자(Pedophile)”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혼인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21세기 현대 서구(西歐)나 우리 사회의 입장에서 7세기 아라비아 사회의 관습을 마음대로 재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마음을 흔드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당시 사회에서 논란이 컸던 것은 자이납(Zaynab bint Jahsh)과 부부의 연을 맺은 일이다. 자이납은 무함마드의 외사촌인데, 무함마드가 노예에서 해방시킨 후 양자(養子)로 삼은 자이드(Zayd ibn Haritha)와 부부가 되었다. 무슬림 역사가 따바리(Tabari, 839-923)에 따르면, 어느 날 무함마드는 자이드 집에 갔다가, 제대로 옷을 입고 있지 않았던 자이납을 보고 눈길을 돌렸다. 이에 자이납은 얼른 옷을 챙겨 입고서 남편은 없지만, 무함마드는 자신의 부모와 같이 친근한 사람이기에 들어오라고 말했다. 무함마드는 거절하면서 거의 들리지 않는 낮은 소리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마음을 흔드시는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며 속삭였다. 자이납은 남편 자이드가 돌아오자 이러한 이야기를 전했다. 자이드는 곧바로 무함마드에게 달려가 자신이 아내와 갈라설 터이니 자이납을 아내로 맞으라고 권하였다. 무함마드는 그러지 말라고 거절하였다. 자이드는 아내와 가까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무함마드에게 이혼하겠다고 거듭 말하더니 결국 그녀를 떠났다. 무함마드는 아이샤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자이납과 혼인을 하라는 계시를 받고 홀로 된 자이납과 부부가 되었다. 이때가 626년경으로 무함마드가 약 56, 자이납이 38세 되던 해였다


 
당시 아랍 사회에서 양자를 친자(親子)와 다를 바 없는 아들로 간주하였다. 결국 무함마드가 며느리와 혼인하여 근친상간(近親相姦)을 저지른 셈이다. 《코란》(33:37-38)은 자이드에게 아내 자이납을 버리지 말라고 하였지만, 실은 무함마드가 마음속에 감추는 것이 있었고 자이드가 이혼을 하자 하나님이 무함마드와 자이납의 혼인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그렇게 한 이유는 당시 사회의 관습과 달리 믿는 자들이 양자가 이혼한 아내와 부부의 연을 맺을 때 어려움을 없애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면서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명령하신 일을 할 때 예언자가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33:38)’고 명시한다. 이로써 이슬람 사회는 이전 아랍 사회와 달리 친자와 양자가 같지 않다고 규정하면서 가족을 새롭게 정의하였다.
  


 
무함마드와 자이납의 혼인은 당시뿐 아니라 오늘날 무슬림들에게도 불편한 일이다. 양자가 친자와 같은가 같지 않은가가 문제가 아니라 따바리가 남긴 기록의 신빙성이 관건이다. 예언자가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여성을 보고 마음을 빼앗겼다는 전승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슬림들은 먼저 이 이야기의 출처가 거짓말쟁이로 유명한 와끼디(Waqidi, 748-822)라고 비판한다. 또 미인으로 알려진 자이납은 무함마드의 외사촌으로 무함마드가 그녀의 미모를 진즉부터 알고 있었는데 새삼스럽게 그때서야 비로소 아름다움에 반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자이납이 탁월한 미녀였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다. 무함마드가 혼인을 결정했을 때 어린 아내 아이샤는 자이납이 예뻐서 걱정했다고 하니 말이다.
  


 
무슬림들은 이처럼 무함마드와 자이납의 혼인이 무함마드의 욕정과 관계없다고 강조한다. 그 이유는 서구 그리스도교 학자들이 이 사건을 무함마드가 얼마나 비윤리적이고 호색한인지 잘 보여주는 좋은 예로 들며 비난하고 나섰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언자가 어쩌면 그렇게 성적(性的)으로 타락할 수 있느냐며 조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는 것은 몹시도 불편한 일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무함마드가 윤리적이냐 아니냐라는 문제보다는 무슬림 역사가인 따바리가 예언자에게 유리하지 않은 이야기를 그대로 싣고 있는 것이 더 놀랍다.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자신에게 전해 오는 그대로 전하는 역사가의 자세는 실로 위대하다


        여종 마리야

▲생애 마지막 메카 순례에서 최후의 설교를 하고 있는 무함마드(맨 오른쪽). 11세기 페르시아 학자 알-비루니(al-Biruni)의 천문학 서적에 삽입된 그림.   

 

  여러 아내 중 특히 무함마드가 좋아했던 아내로 꼽을 수 있는 여인은 무까우끼스(Muqawqis)라는 직위명으로 불리는 이집트 통치자가 선물과 함께 보냈다고 하는 그리스도인 마리야(Mariya). 그녀는 이집트 그리스도교를 뜻하는 콥트(Copt)교인으로 불렸는데, 정식 혼인을 거친 아내가 아니라 여종으로 무함마드의 여인이 됐다. 첩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이슬람 사회에서 여자 주인은 남종과 성관계를 맺을 수 없지만, 남자 주인은 여종과 관계를 가질 수 있다.


  627
년경 메디나로 온 마리야는 미모가 출중했기 때문에 어린 아내 아이샤가 다음과 같이 시기하였다고 한다.

 

     “나는 마리야만큼 질투심을 느껴본 여자가 없다. 그녀는 정말 예뻤고, 사도 무함마드는 마리야가 우리 동네에 처음 왔을 때 만나러 가서 밤낮을 그녀와 함께 보냈다. 그가 마리야에게 잘해 준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아내들의 숙소를 순번을 정하여 돌아가면서 방문하였는데, 4번째 아내 하프사(Hafsa)와 보내기로 한 날 마리야와 함께 있다가 하프사에게 들켰다고 한다. 이에 무함마드는 마리야와 더 이상 관계를 가지지 않겠다고 하였고, 하프사는 비밀을 지키기로 했다. 그러나 하프사가 아이샤에게 일러바쳐 소동이 일었고, 이에 무함마드는 아내 모두와 이혼하고 더 경건한 여인을 아내로 받아들이겠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결국 무함마드는 마리야를 더 이상 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취소했다. 둘 사이에는 이브라힘이라는 아들이 생겼지만, 아기 때 죽었다. 이브라힘은 무함마드가 카디자 외에 여인에게 낳은 유일한 아이였다. 무함마드가 죽을 때까지 마리야는 여종의 신분을 유지했다

       

 유대인 아내도 있어

▲무함마드가 죽기 전 최후의 모습. 1595년 오스만 제국의 예술가 루프티 압둘라가 그린 예언자의 일생 그림 중 하나.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소장.   

 

  마리야처럼 여종의 신분으로 무함마드의 여인은 된 자로는 아랍 여인 주와이리야(Juwayriyya)와 두 명의 유대인 사피야(Safiyya), 라야나(Rayana)가 있다. 주와이리야는 627 20살 때 무슬림군에 포로로 잡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무함마드의 아내가 됐다. 일부 전승에 따르면 여종으로 있다가 무함마드가 죽기 직전 온전한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사피야는 628, 라야나는 627년에 각각 무슬림군에 포로로 잡혔다. 사피야는 여종이었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종의 신분을 벗고 정식 아내가 됐다. 라야나는 무함마드의 여인이 되었지만, 631년 죽을 때까지 여종의 신분으로 있었던 듯하다.   


 
모두 13명의 여인 중 처녀의 몸으로 무함마드의 여인이 된 이는 아이샤가 유일하다. 나머지 12명은 모두 과부거나 이혼녀였다.   

 

무함마드가 여러 아내를 둔 이유는 과부가 된 여인들을 복지 차원에서 돌보고, 다른 부족과 정치적으로 화평을 이루기 위한 정략적(政略的)인 목적 때문이었다. 두 번째 아내 사우다, 네 번째 아내 하프사, 다섯 번째 아내 움 살라마(Umm Salama), 여섯 번째 아내 자이납 빈트 쿠자이마(Zaynab bint Khuzayma)는 이슬람을 믿고 따르다가 과부가 된 여인들이었다. 열 번째 아내 움 하비바(Umm Habiba)와 열두 번째 아내 마이무나(Maymuna)는 두 여인이 속한 집안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 소위 정략적으로 한 혼인이었다


        인간적이고 자유로운 예언자 무함마드

▲낙원에서 미인들에게 둘러싸인 예언자 무함마드. 18세기 오스만 투르크의 그림.   

 

  632년 세상을 떠날 때 무함마드는 여인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최후의 날을 아이샤의 숙소에 머물다 그녀의 품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함마드의 죽음을 끝까지 지킨 여인은 모두 열 명이다. 이 중 마리야만 여종의 신분이었으니, 정식 아내는 아홉 명이었다.   


 
무슬림 공동체는 이들 아홉 명의 여인을 “신앙인의 어머니”로 부르며 존경했다. 《코란》에 따르면 무함마드 아내들은 보통 여인들과 다르고(33:32), 선한 일을 하면 보상을 두 배로 받으나, 나쁜 일을 하면 벌 또한 두 배로 받으며(33:30-31), 재혼을 할 수 없다(33:53). 
 


 
무슬림 전승을 비교하면서 대체로 13명의 아내를 정리해 보았지만, 이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시아파 전승에 다르면 21명까지 그 수가 늘어나기도 한다. 중국 무슬림들은 예언자에게 9명의 정식 아내와 여종으로 여인이 된 자, 즉 첩이 7명이 있었는데, 이는 구천칠지(九天七地)를 위대한 예언자가 포용하는 우주론적 의미를 지닌 것이지 육체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한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간에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참으로 인간적인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꾸 예수와 비교하여 쾌락의 유혹에 약했다고 무함마드를 폄하하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그의 모습에서 지난 1400여 년 동안 무슬림들이 하나님을 향하는 인간의 길을 찾은 것은 아닐까 한다


 
“예언자께서는 세 가지를 좋아하셨다. 예배, 향수, 여자.   

  이븐 사으드(Ibn Sad, 784-845)가 전하는 예언자 전승이다. 약점으로 보이는 것까지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초기 무슬림 전승자들의 모습에서 인간 무함마드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과 함께 무슬림 전승의 탈()현대적인 자유로움을 본다면 감상이 과한 것일까? 참으로 인간적이고 자유롭다.

 

■호칭으로 보는 이슬람의 역사

칼리프, 술탄, 에미르, 셰이크, 이맘, 물라…. 이들 단어의 공통점을 아시겠습니까? 이슬람 문화권에서 기원해 다른 문화권에도 전파된 지도자의 호칭입니다. 칼리프와 술탄은 왕, 에미르는 왕자, 셰이크는 족장이나 장로, 물라는 종교지도자에 해당하는 용어로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이슬람국가’(IS)가 갑작스레 역사상으로 사라진 칼리프국가를 선포한 뒤 이런 호칭의 정확한 뜻과 기원, 차이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이슬람 문화권 지도자의 호칭을 정리해봤습니다. 아랍어 발음이나 뜻을 정확히 옮기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이슬람 관련 국내 자료나 염미권 자료를 토대로 그 기원과 차이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처음엔 다섯 개 정도만 하려했는데 정리해나갈수록 새로운 호칭이 쏟아져 ‘과연 끝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 속에 악전고투를 펼쳐야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정리해놓고 나니 후련합니다. 혹시 오류를 발견하시면 기탄없는 질정 부탁드리겠습니다.

 

(1) 칼리프

아랍어로 계승자, 대리자를 뜻하는 ‘할리파’의 유럽식 표기입니다. 그렇다고 ‘알라(신)의 대리자’란 뜻은 아닙니다. 그건 최후의 예언자인 무함마드에게만 해당합니다. 정확히는 무함마드의 대리자라는 뜻입니다. 632년 무함마드가 죽고 난 뒤 그 권위를 승계해 이슬람공동체 ‘움마’를 다스린 최고지도자를 뜻합니다. 초기엔 신과 직접 교감한 무함마드의 신성함까진 갖추지 못한 정치·군사 지도자를 의미했지만 후대의 술탄이나 에미르에 비해선 종교적 정통성이나 위상이 높았습니다.

 

수니파와 시아파 공통으로 무함마드 사후 초기 4명의 칼리프(아부 바크르-우마르-우스만-알리)를 정통 칼리프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2대 우마르를 제외하곤 모두 합의제로 선출했기에 집단지도체제의 최고지도자에 더 가까웠습니다. 이들 칼리프가 다스리는 지역을 칼리파트라고 하는데 정통 칼리프 시대엔 움마=칼리파트였던 셈입니다

 

4대 칼리프인 알리가 불의의 죽음을 맡고 나서 세습을 통해 아랍제국을 다스린 우마이야 왕조(661~750)와 그 뒤를 이은 아바스 왕조(750∼1258)의 왕도 칼리프에 해당합니다. 시아파는 그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지만 수니파는 ‘정통 칼리프’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를 수용합니다. 우마이아 왕조에선 칼리프 보다는 ‘믿는 자들의 사령관’이란 뜻의 ‘에미르 알 무미닌’이란 칭호를 선호했습니다. 상당히 초기부터 칼리프의 대용어로 에미르가 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바스 왕조가 쇠퇴하기 시작한 9세기 중반부터 주로 투르크계 노예용병인 맘루크 출신이 술탄 또는 에미르를 칭하면서 칼리프는 종교적 정통성만 담보하는 상징적 지위로 전락합니다. 이후 아바스 칼리프는 중세유럽의 교황 또는 일본의 텐노(天皇)와 비슷한 위상만 누리며 상당기간 존속합니다. 1258년 몽골의 침입으로 아바스 칼리프는 사실상 폐절됩니다. 다만 1261년 이집트 맘루크 왕국에서 그 후예를 찾아내 다시 칼리프로 추대하면서 가냘픈 명맥을 이어갑니다.

 

1517년 오스만 투르크 왕조(1299~1922)의 술탄 셀림 1세가 이집트 맘루크 왕조를 정복하면서 칼리프의 권좌는 이스탄불로 옮겨집니다. 하지만 200년 가까이 칼리프란 칭호 대신 술탄만 사용되다가 18세기 말 이슬람 부흥론이 일면서 칼리프란 호칭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특히 오스만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 2세(1876~1909 재위)가 서구 열강에 맞서 아랍민족의 단합을 끌어내기 위해 칼리프를 표방합니다. 하지만 1차대전의 패배 이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터키공화국이 성립하면서 1924년 3월 칼리프제는 공식 폐지됩니다.


이렇게 사라진 칼리프란 칭호는 90년 뒤인 2014년 6월 IS가 칼리프국가(칼리파트)를 선포하면서 부활합니다. 그 초대 칼리프를 자처하는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의 이름을 뜯어보면  IS가 칼리프란 호칭에 집착하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선 ’아부 바크르’는 역사상 최초의 칼리프였던 아부 바크르(573?∼634)의 이름입니다. 아부 바크르는 이라크와 시리아 정복에 착수한 최초의 이슬람 지도자입니다. 다음 ‘알 바그다디’는 ‘바그다드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이라크 북부 사마라 출신인 그가 왜 이 이름을 쓰는 걸까요? IS는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 동북부를 영토로 삼고 있습니다. IS 이전 명칭인 ISIL(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또는 ISIS(이라크 시리아 이슬람국가)도 모두 이들 지역명을 포함합니다. 수니파 칼리프 왕조인 우마미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의 수도는 각각 시리아 다마스커스와 이라크 바그다드였습니다.

 

(2) 술탄

아랍어로 권력 또는 권위를 뜻하는 ‘술타’에서 파생한 단어로 권능이나 통치를 뜻합니다. 본래는 이슬람의 최고 통치권자인 칼리프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일정 지역을 통치하던 정치군사지도자의 칭호입니다. 9세기 중반 이후 아바스 왕조가 쇠퇴하면서 아바스 제국 아래 사실상 개별왕조를 세운 이들이 자칭타칭 술탄을 표방하면서 이슬람권의 세속군주를 뜻하게 됩니다. 페르시아(현재의 이란) 통치 지역에선 전통적 왕의 호칭인 ‘샤’와 병치되기도 합니다. 술탄이 다스리는 지역은 칼리파트와 구분해 술타나트라고 부릅니다.

 

초기엔 황제(칼리프)로부터 통치 지역을 나눠받는 왕(술탄)의 관계와 유사했습니다. 후대로 가면서 일본의 텐노(天皇)와 쇼군(將軍)의 관계를 닮아가게 됐고 종국에 가선 술탄이 칼리프의 역할을 대신하게 됩니다. 실제 1258년 아바스 정통 칼리프가 폐절된 뒤 강성해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사실상 칼리프의 역할까지 대신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술탄이란 칭호의 위상도 크게 강화됩니다. 1924년 터키의 술탄제는 칼리프제와 함께 폐지됐지만 오만과 부르나이에서는 여전히 최고 지배자를 술탄으로 부르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3) 에미르

아미르 또는 에미르로 발음되는 이 호칭은 아랍어로 ‘명령’과 관련한 어근 ‘-m-r’에서 파생했습니다. 보통 군대의 사령관을 뜻했으나 현재는 왕자(prince)나 통치자의 칭호로까지 확대됐습니다. 영어의 제독을 뜻하는 admiral도 이 단어에서 파생해다고 합니다. 에미르가 다스리는 지역을 에미리트라고 합니다. 이걸 토후국이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현재의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바레인의 왕을 에미르라고 부릅니다. 아랍에미리트의 경우 아라비아반도 남부 7개 에미리트의 연합인데 대통령은 수도인 아부다비의 에미르가 맡고 부통령 겸 총리는 두바이의 에미르가 맡습니다.

 

보통 에미르를 술탄 보단 급이 낮은 총독쯤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술탄에 버금가는 칭호입니다. 수니파 우마이야 왕조 때는 칼리프 칭호를 대신해 ‘에미르 알 무미닌’(믿는 자들의 사령관)이란 칭호가 쓰였습니다. 또 시아파는 정통 칼리프 중 가장 중시하는 4대 칼리프 알리를 ‘에미르 알 무슬림’(무슬림의 사령관)으로 차별화해 부릅니다. 10세기 아바스제국 시대가 되면서 칼리프가 임명한 최고군사령관을 ‘에미르 알 우마라’(에미르 중의 에미르)로 부르기 시작하는데 이 직함을 지닌 인물이 일본의 쇼군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특히 페르시아 지역에서 출원해 아바스제국의 수도 바그다드까지 진출했던 부와이흐 왕조(945~1055)의 왕이 이 칭호를 썼습니다. 이를 전후해 아바스 제국의 도처에서 군사 ·재정상의 권한을 겸하여 법관을 임명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화폐를 주조하는 사실상의 독립왕조의 왕들이 이를 자처했습니다.


(4) 셰이크

아랍어로 ‘나이’나 ‘연로’라는 단어에서 파생한 경칭입니다. 보통 40대 이상의 남자에게만 붙이는 이 호칭은 문자 그대로만 보면 ‘장로’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슬람권에서 이 호칭을 붙이는 경우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한 갈래가 정치적 권위나 경제적 자산을 갖춘 세력가라면 다른 한 갈래는 학문 분야의 권위자입니다. 전자는 과거 부족의 대표자 내지 지도자의 존칭으로 쓰던 것이 확대된 것이고 후자는 과거 이슬람신학교 정규과정을 마친 신학자에 대한 존칭이 다른 학문분야까지 확대된 것입니다.

 

지역별 의미차이도 존재합니다. 아라비아 반도에선 성공한 사업가에게 붙여주는 호칭으로 한국의 ‘사장님’ 정도에 해당합니다. 레바논과 아프리카 지역에선 셰이크가 아랍계 귀족의 호칭으로 쓰입니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같은 남아시아에선 이 지역으로 이주한 아랍계 혈통임을 드러내는 이름의 일부로 쓰입니다. 인도네시아 같은 동남아에선 존경받는 무슬림에게 사후 존칭의 의미로 붙여줍니다.

 

(5) 이맘

이슬람교의 크고 작은 종교 공동체의 통솔자를 말합니다. ‘앞에 있다’라는 뜻의 ‘아마마’라는 동사에서 파생해 지도자나 모범, 사표란 의미를 획득했습니다. 다만 수니파냐 시아파냐에 따라 현격한 위상 차이를 갖습니다.

 

수니파의 이맘은 성직자가 없는 이슬람교에서 타종교의 성직자와 가장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모스크(성원)에 모여서 집단 예배를 할 때 원칙적으론 모인 신도들 중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자를 그때그때 선정하게 돼있습니다. 특히 금요 정오집단예배처럼 특별한 예배에선 전문 설교사(하티브)가 정치성이 가미된 설교(후트바)를 실시하는데, 이맘이 이를 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보통 이슬람신학에 정통한 학자를 뜻하는 울라마 중 한 명이 특정 모스크의 상임 이맘을 맡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점에서 수니파의 이맘은 기독교의 목사와 비슷합니다. 지역별 모스크에 상주하며 종교의례를 주재하지만 가톨릭 신부와 달리 임명직이 아니라 추대직이며 결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시아파의 이맘은 가톨릭의 교황에 맞먹는 지존의 위상을 지닙니다. 시아파는 4대 칼리프이자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가 무함마드에 버금가는 영적 권능을 지녔다고 믿습니다. 이런 특별한 영적 권능을 ‘이맘의 권능 또는 권위’란 뜻의 이마마(Imamah)라고 부르는데 국내에선 보통 이마위(位)로 번역합니다. 시아파 이맘은 알리로부터 이 이마위를 물려받아 ‘신의 빛’(누르 후함마디)을 전하는 지고지순한 존재로 신과 인간의 중개자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아파 이맘은 사실상 ‘신성화된 칼리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아파에선 이 이맘을 어디까지 인정하느냐에 따라 여러 파벌로 나뉘는데 다수파인 열두이맘파는 알리와 그의 후손 11명만을 이맘으로 인정합니다. 이에 따르면 12대 이맘인 무함마드 알 하산은 872년 네 살의 나이에 속세에서 모습을 감춘 ‘숨은 이맘’이 됩니다. 대신 그의 의지를 대물림 받은 와킬이라 불리는 대리인을 통해 ‘우마’를 다스립니다. 940년 제4대 와킬이 숨을 거둘 때까지 이어진 이 시기를 ‘소은폐의 시대’라고 합니다. 4대 와킬이 후계자 없이 죽은 이후 지금까지를 ‘대은폐의 시대’라고 하는데 세상의 종말을 앞두고 ‘숨은 이맘’이 다시 출현하는 것을 기다리는 시대입니다.

 

(6) 울라마 & 물라 & 파끼 & 까디

모두 이슬람학자 내지 율법학자를 가르키는 호칭입니다. ‘알고 있는 자’라는 뜻의 알림의 복수형인 울리마는 종교적 문제에 대한 학식 있는 자의 총칭으로 보면됩니다. 예배를 집전하는 수니파의 이맘, 이슬람학자이자 꾸란학교 교사인 물라와 파끼, 종교재판관인 까디는 모두 울리마에 해당합니다. 역사적으로 울리마는 이슬람통치 이념의 수호자이자 통치권력의 담보자입니다. 아바스왕조 이후 칼리프, 술탄, 에미르 같은 세습군주들도 공식적으로 최고위급 울라마 회의체의 선출과정을 거쳐야 정통성을 부여받기 때문입니다. 푸코가 말한 지식과 권력의 결합을 이 시대 이후 울리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라는 ‘주인’이란 뜻에서 파생한 단어로 이란과 중앙아시에서 이슬람학자, 교사, 율법학자를 아우르는 경칭입니다. 까디는 ‘결정하다’는 뜻에서 파생한 단어로 샤리아(이슬람율법)을 토대로 일상생활에 이슬람 교리를 적용해 재판관를 뜻합니다. 다만 정부에서 임명한 공식 재판관이란 점에서 다른 울리마와 차별성을 띱니다. 덕망있는 울리마 중에서 공직을 부여받은 사람이란 점에서 영미권의 치안판사를 닮았습니다. 파끼는 ‘소유자’라는 뜻에서 출발해 지역에 따라서 때론 물라, 때론 까디의 동의어로 쓰입니다. 파끼는 특히 중동에서 까디와 차별화된 율법학자, 그러니까 공직은 없지만 민간의 존경을 받는 율법학자에 대한 존칭으로 쓰입니다.

 

(7) 아야톨라

‘신의 징표’란 뜻을 지닌 시아파 고위직 종교권위자에 대한 경침입니다. 20세기 초 이란입헌혁명 과정에서 새로 도입된 현대적 칭호로 종교적 율법에 대한 독자적인 유권해석(이즈티하드)을 내릴 수 있는 무즈타히드에게 주어집니다. 이즈티하드는 샤리아에 대한 독창적 해석으로 수니파에선 금지된 반면 시아파에선 무즈타히드라고 부르는 최고 경지의 율법학자에 한해 허용합니다. 아야톨라는 이란의 종교지도자 회의체에서 공인한 무즈타히드에게 주어지는 칭호입니다.

 

이란의 율법학자는 크게 3단계로 나뉩니다. 맨 아래 단계가 샤리아를 토대로 전통적 유권해석을 내릴 수 있는 ’호자통 이슬람’입니다. 두번째 단계가 이즈티하드를 내릴 수 있는 아야톨라입니다. 아야톨라는 추종자를 거느리고 독자적 세력을 확대해갈 수 있으며 시아파 신도라면 누구가 자신이 추종하는 아야톨라가 있어야한다고 합니다. 이 아야톨라 중에서 학식과 인품이 절륜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정된 사람은 ’마르자 타클리드’라고 불리게 됩니다. ‘모방의 원천’이란 뜻의 마르자 타클리드의 다른 명칭이 바로 대(大) 아야톨리로 번역되는 ‘아야톨라 우즈마’입니다. 현재 생존 아야톨라 우즈마는 66명이라고 합니다.

 

이 아야톨라 우즈마 또는 마르자 타끌리드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을 ‘마르자 타끌리드 무틀락’(절대적 모방의 원천)으로 추대합니다. 이 사람이 사실상 정통 칼리프와 열두 이맘 그리고 네 와칼의 역할을 대신한 것이지요. 하지만 1961년 최후의 마르자 타끌리드 무틀락이 죽은 뒤부터는 여러 명의 아야톨라 우즈마의 집단지도체제가 됩니다. 그러다 1979년 이란혁명을 성공시킨 루홀라 호메이니가 최고지도자가 되자 ‘마르자 타끌리드 무틀락’이란 호칭 대신 이맘의 호칭을 부활시킵니다. 따라서 이란은 이슬람의 교황에 해당하는 이맘이 다스리는 나라, 이마메이트가 된 셈입니다. 현재 이란의 이맘은 1989년 호메이니가 죽은 뒤 그 계승자가 된 알리 하메네이(75)입니다.

 

(8) 마흐디

무슬림은 세상이 종말을 고하는 최후 심판의 날이 오면 ‘숨은 이맘’이 나타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도(引導)된 이’라는 뜻의 마흐디는 그 최후의 날이 닥치기 전 마지막으로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나타나 이슬람 황금기를 재현한다고 알려진 지도자를 말합니다. 기독교의 메시아, 불교의 미륵불, 우리의 정도령과 비슷한 종말론적 구원신앙의 중심에 있는 인물입니다.

 

마흐디의 역할에 대한 믿음은 수니파와 시아파 등 모든 무슬림들에게 공통된 것이라고 합니다. 수니파는 미래에 도래할 전혀 새로운 지도자로 받아들입니다. 반면 열두 이맘파는 마흐디를 기대하는 자라는 뜻의 문타자르라고 부르며 열 두번째 이맘이자 현세에 숨어있는 ‘숨은 이맘’과 동일시합니다. 이때문에 이슬람문화권 역사에서 마흐디를 자처하는 인물을 수없이 많이 만나게 됩니다.

 

P.S> 자 이렇게 이슬람 지도자 호칭의 의미와 역사를 따져가다보다 보니 뭐니뭐니 해도 수니파는 칼리프, 시아파는 이맘이라는 것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IS가 왜 그렇게 칼리프란 칭호에 집착하는지도 좀더 선명하게 이해됩니다. 시아파의 맹주 이란이 호메이니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최고의 호칭인 ‘이맘’을 부활시키자 수니파인 IS 역시 그에 맞설 수 있는 최고의 호칭인 칼리프를 부화시키려고 하는 것 아닐까요?^^

 

■이슬람의 생필품

 

 

 

 

 

 

 

 

 

■이슬람 성지 순례

 

이슬람 성지순례를 '핫즈(Hajj)'라고 한다. 핫즈는 '무슬림의 다섯 기둥'이라 불리는 이슬람 교도가 지켜야할 5가지 의무 (신조암송, 하루 5회 기도, 구제, 라마단 금식, 성지 순례) 가운데 가장 성스러운 의식으로 꼽힌다. 메카 순례를 마친 이슬람 교도의 이름 앞에는 '알 하지'라는 경칭이 붙을 정도로 존경을 받는다.

 

성지순례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마지막 일정을 재현하는 이슬람 최대의 행사로, 순례의 달이라 불리는 이슬람력 12월의 8~12일에 치러진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은 돈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메카각주[1] 의 성지를 일생에 한번 이상 순례하는 것을 의무로 정하고 있다.

 

서기 630 1월 메카에 무혈입성한 무함마드가 이곳의 우상을 제거한 뒤 순례 성지로 선포했다. 이어 632년 메카에서 카바를 참배하고 주변을 돌아보고 생애 마지막 연설을 했는데, 이것이 이슬람 성지순례의 일정과 의례로 굳어졌다.

 

순례자는 메카 외곽의 미카트각주[2] 에서 평복을 벗고 남자는 바느질을 하지 않은 두 조각의 흰 천인 아흐람으로 몸의 아래 위를 가리고, 여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가리는 하얀 옷을 입고 성지에 들어간다. 신발은 발이 보이는 슬리퍼만 신을 수 있다. 이는 지위고하, 빈부에 관계없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의미다. 순례기간 내내 순례자들은 "알라여 내가 왔나이다 명을 받들어 왔나이다"라고 쉬지 않고 되뇐다.

 

순례기간에는 머리카락을 자른다든가 손발톱을 깎을 수 없고 향수를 뿌리거나 보석으로 치장할 수 없으며 성관계나 언쟁, 험담을 해서도 안된다.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도 다치게 해서는 안되며 희생물을 제외한 어떠한 생명체도 죽일 수 없다.

 

순례의 종류

세계 종교 중 성지순례를 의무로 규정한 종교는 이슬람뿐이다. 순례의 종류에는 △이슬람력 12 8일부터 10일 사이에 정해진 절차를 수행하는 정기적인 순례(핫즈, 일명 '대순례')와 이 기간 외에 대체로 정해진 절차대로 행하는 순례(옴라, 일명 '소순례'), 임의의 기간에 몇가지 절차만 밟는 순례(지야라) 등이 있다.

 

마스지드 알 하람과 카바

 

흔히 '메카를 순례한다'고 할 때 그 중심에는 '마스지드 알하람'이 있다. 마스지드 알하람은 '신성한 사원'이라는 뜻으로 '메카 대사원(Great Mosque of Mecca)'으로도 불린다. 마스지드 알 하람은 무슬림에게 최고 성지인 카바 주위를 보호하고 예배를 올리기 위한 사원이다.

 

카바는 아랍어로 주사위를 뜻하며, 마스지드 알하람의 중앙에 있다. 이슬람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것으로 무슬림은 전세계 어느 곳에서나 하루 다섯 차례 카바를 향해 예배한다. 길이 12m, 너비 10m, 높이 15m의 입방체로 속이 비어있고 창문이 없는 대리석으로 둘러싸여있다.

 

카바의 동쪽 모퉁이에는 경배의 대상인 흑석이 있다. 흑석은 길이 약 30cm인 타원형의 검은 돌덩이로, 천당에서 떨어진 돌이라 하여 신성시한다. 실제로는 운석으로 알려져 있다. 카바를 참배하는 순례자들은 이 흑석에 입맞춤하거나 손으로 만져보고자 한다.

 

마스지드 알하람의 총 면적은 18만㎡으로 동시에 50만 명이 예배를 할 수 있는 규모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2013년 성지순례 때 310만명의 신자가 몰리자 1시간에 300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도록 규모를 40만㎡ 늘리는 공사를 2년 간 진행했다. 그러다 2015 9 12일 강풍에 크레인이 쓰러져 100여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슬람 성지순례 절차

마스지드 알하람에 기도 후 입장하여 카바 주위로 가서 흑석이 박혀 있는 부분으로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7바퀴 돈다. 이를 '타와프'라 한다. 카바를 보자마자 기도문을 외우고, 걸어서 한 바퀴를 돌 때마다 흑석을 만지거나 가능하다면 입맞춤을 한다. 할 수 없는 경우 문구를 읊조리며 손가락으로 흑석을 가리킨다.

 

카바를 7번 돌고 나서는 카바 동쪽 근처의 '아브라함의 발자국'이 있다는 곳에서 두번 기도를 하고 남쪽에 있는 성천인 잠잠 샘에 가서 물을 마신다. 이 샘물이 신의 은총을 준다고 믿기 때문에 실컷 마시고 물을 떠가지고 고향에가서 선물하기도 한다.

 

이어 카바의 동쪽에 있는 '솨파' '마르와'라는 두 구릉 사이( 420m) 7번 왕복한다. 이 의식을 '사이'라고 하는데 두 구릉 모두 마스자드 알하람 내부에 있다. 왕복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머리를 깍는다. 순례자에 따라 전체를 삭발하거나 부분부분 짧게 자르기도 한다. 이후 메카 동쪽 7km 지점에 있는 미나 평원에 가서 숙영한다.

 

둘째날 해가 뜨면 메카 동쪽 25km 떨어진 성산 아라파트에 가서 각종 행사를 치른다. 632년 무함마드가 사망하기 석달 전 마지막 설교를 했던 곳으로 정오에서 황혼이 질 때까지 기도한다. 최후 심판의 날 신 앞에 나서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순례행사의 절정이다. 해가 지면 메카에서 12km 떨어진 무즈달리파 산으로 이동해 하룻밤을 묵는다.

 

다음날 해가 뜨기 전 미나 평원으로 출발하는데, 무즈달리파 산에서 자그마한 조약돌 49개를 줍는다. 미나 평원 부근의 3개의 마귀 돌기둥으로 가 주워온 조약돌을 7개씩 던지며 '악마야 물러가라"라고 외친다. 이를 '알 자마라트'라 한다. 현재 이 돌기둥은 순례를 위해 지어진 별도의 건물 내에 있다. 돌기둥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칠 때 유혹한 사탄을 상징하며. 순례객들은 돌을 던짐으로써 저주를 표한다.

 

이후 이드 알-아드하라 불리는 희생제를 치른다. 희생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알라의 제물로 바치려했으나 대천사 가브리엘의 중재로 양을 대신 바쳤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행사다. 여의치 않은 경우 돈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희생제는 이슬람권 최대 명절로 순례에 참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정에서 양이나 낙타, 소 등을 잡아 제를 올린 뒤 가족과 이웃, 가난한 사람들과 나눠 먹는다. 이슬람권 국가들은 통상 메카 순례 마지막 날부터 3~4일간을 공휴일로 지정해 희생제를 기념한다.

 

반복되는 성지순례 압사사고

핫즈 기간에는 매년 전세계에서 오는 200~300만 명의 신자들로 메카 인근이 인산 인해를 이룬다. 교통수단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성지순례에 나선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성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하지만 비행기 등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수백만명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엽의 순례자가 5~15만 명으로 추산되었던 것에 비하면, 순례자 수는 1세기 동안 약 40배 넘게 늘어났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나라별로 인구규모를 기준으로 순례자 수를 할당해 성지순례 인원을 통제하고 있다. 각 사우디 대사관에서 성지순례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대체로 자국의 이슬람 종교부의 추천을 받고 비자를 신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절차에도 불구하고 밀입국자들이 적지 않아 사우디 정부는 적정 인원을 맞추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성지순례 기간 동안 압사사고 등 각종 사고가 속출하고 있다. 특히 미나에서 마귀 돌기둥에 돌을 던지는 의식에서는 사람들이 돌기둥을 맞히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려고 몸싸움을 벌이면서 자주 압사사고가 일어났다. 사우디 정부는 돌기둥을 돌벽으로 바꾸는 등 대대적인 정비를 벌였으나 여전히 사고가 계속되고 있다.

 

이 의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2006 362, 2003 251명이 압사했고, 1990년에는 1426명이 사망했다. 2015 9 24일에도 마귀 돌기둥에 돌을 던지는 의식을 진행하던 중 압사사건이 생겨 최소 769명이 사망하고 934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미국 AP통신은 사망자 수가 1400명에 달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메카로 향하는 보행용 터널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무려 1426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났다. 그 이후로도 1994 270, 1998년에는 180명의 순례객이, 1997년에는 메카 인근 텐트촌 화재로 343명이 숨졌다. 2004년에는 순례객 사이에 충돌이 벌어져 244명이 숨지는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화합의 종파, 이바디- 월간조선 2017. 1월호

⊙ 전체 무슬림 인구의 1% 미만, 오만 인구의 60% 차지

⊙ 정의(正義) 관념 강하고 능력 중시
⊙ 불신자와 비무슬림을 ‘육체적으로는 멀리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기초해 다른 종파와의 화합 중시


박현도
1966
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저술

▲오만의 수도 무스카르에 있는 술탄 카부스 대모스크. 이바디파인 오만은 종파 종교간 화합에 힘쓰고 있다.
사진제공=주한오만대사관

 

중동이나 이슬람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슬람에는 수니와 시아라는 양대 종파가 있다는 것, 사우디아라비아를 종주국으로 하는 수니가 다수(85~90%)이고 이란을 종주국으로 하는 시아가 소수(10~15%)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 밖에도 수니와 시아의 교리가 혼합된 소수 종파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이바디(Ibadi)라고 하는 종파다. 걸프협력기구(GCC) 소속 6개국 중 하나인 오만이 바로 이바디 무슬림들이 세운 나라다. GCC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이란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오만은 인구 399만명의 소국이지만, 국민소득이 2500달러에 달하고, 확인된 천연자원 매장량만 해도 가스가 9310m³, 원유가 53600만 배럴에 이른다.


오만 국민의 약 60%가 이바디 무슬림이다. 이바디 무슬림은 오만 외에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튀니지, 알제리, 아랍에미리트 등에 흩어져 있다. 이바디 무슬림 인구는 전 세계 무슬림 인구 대비 1%에도 못 미친다.


이바디는 관용정신이 뛰어난 종파다. 이바디가 다수인 오만의 경우, 소수인 수니나 시아와 아무런 문제 없이 어울려 잘 산다. 종파 분쟁이 없다. 비록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이바디는 자신과 믿음이 다르다고 수니와 시아를 박해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통혼(通婚)도 문제가 없다. 비무슬림들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이슬람 종파 중에서 다른 신앙에 대해 가장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는 관용의 종파가 이바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소수로 살다 보니 시아처럼 자신이 이바디라는 것을 감추는 것도 허용한다. 그렇다면 이바디는 어떻게 시작된 종파일까? 역사의 시계를 7세기로 돌려 보자.


이슬람의 분열

▲이슬람교를 개창한 예언자 무함마드.

 

632년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은 후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는 없지만, 예언자가 남긴 공동체를 이끌 지도자는 필요하였다. 이러한 지도자를 칼리파라고 불렀는데, (예언자의) 계승자라는 의미다. 요즘 IS(이슬람국가)가 자신들이 세운 국가를 칼리파 국가라고 하는데, 칼리파라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역사적으로 첫 번째 칼리파는 무함마드를 처음부터 옆에서 도왔으면서 자신의 어린 딸 아이샤를 무함마드의 아내로 내어준 장인 아부 바크르(재위 632~634)였다. 두 번째는 역시 무함마드의 동료이자 장인인 우마르(재위 634~644) 였다.


이슬람의 분파 문제는 세 번째 칼리파 우스만 때 똬리를 틀기 시작하였다. 우스만은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무함마드를 반대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항복한 부족 출신이었다. 자신이 속한 부족과 달리 그는 일찍이 무함마드를 따랐고 무함마드는 그러한 우스만을 아꼈다. 그런데 우스만은 칼리파가 되자 자신의 부족 출신을 중용하였다. 사람들이 고운 눈으로 볼 리 만무하였다.


656
년 우스만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메디나로 몰려왔다. 그들은 결국 우스만을 살해하였다. 당시 이들과 우스만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고 했던 알리가 네 번째 칼리파가 되었다.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결혼하였기에 사위였다. 그런데 우스만 친족들은 알리가 우스만을 죽인 자들을 처벌하지 않은 것을 보고 우스만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우스만의 친척이었던 당시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657년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현재 IS가 점령하고 있는 시리아의 라까(Raqqah) 인근 시핀(Siffin)에서 알리의 군대와 맞대결을 벌인다.


양쪽 공히 약 10만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나 전면적인 맞대결은 피하고 부분적인 전투만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부자, 같은 부족 사람들이 서로 다른 편에 있었으니 전투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골육상쟁이었으니 말이다. 긴 대치전과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지던 중, 우스만 쪽 군인들이 이슬람의 경전 코란을 창에 걸고 코란에 결정을 맡기자고 주창하였다. 이에 알리의 진영이 술렁거렸고, 결국 알리는 중재에 동의하고 말았다. 이것이 기나 긴 비극과 참화의 시작이었음을 어찌 알았으리.


칼리파 시대의 종언

알리의 진영에는 중재를 부당하다고 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알리가 코란 계시를 어겼다고 생각하였다. 코란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만일 믿는 자들 중 두 파가 싸움에 이르면 해결책을 찾아라. 그러나 만일 한쪽이 다른 쪽에게 잘못을 범하면 잘못을 범한 쪽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때까지 싸워라.(49 9).


“더 이상 분열이 없을 때까지 싸워서 믿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이르도록 하라.(8 39).


사실 세 번째 칼리파 우스만의 죽음에 알리의 책임은 없다. 그리고 우스만은 자신이 행한 잘못 때문에 죽었다. 알리는 정당한 칼리파다. 알리에게 우스만의 죽음을 책임지라고 거병을 한 무아위야는 반란군이다. 반란군은 코란 계시에서 가르친 대로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데 잘못한 일이 없는 알리가 중재에 동의하였다. 코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다. 이들이 보기에 알리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부한 대죄(大罪)를 지었고, 따라서 더 이상 진정한 신앙인의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다. 중재를 거부한 이들의 구호는 명료하였다. “라 후크마 일라 릴라!” 하나님만이 판결을 내리신다!


인간평등을 주장한 카와리즈

▲시핀전투를 계기로 무슬림세계는 수니와 시아로 분열되고 이바디파가 생겨났다.

 

그리고 이들은 알리를 떠났다. 알리 쪽에서 이들의 마음을 돌리려는 노력을 하였지만 별무소용이었다. ‘떠나간 자들’이라고 해서 아랍어로 이들은 ‘카와리즈(Khawarij, 단수 카리지 Khariji)’라고 불렸다. 알리는 이들을 응징하였다. 많은 이가 어제까지 전우였던 사람들 손에 죽었다. 그리고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븐 물잠 알-무라디가 661 1월 금요일 이라크 쿠파 모스크에서 알리를 살해하였다. 죽은 자들을 위한 복수극이었다. 이로써 아부 바크르-우마르-우스만-알리로 이어진 정통 칼리파 시대가 저물고 알리에 맞섰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창건한 우마이야 칼리파조가 이슬람사에서 부자(父子) 상속의 신왕조를 열었다.


카와리즈는 수니파나 시아파와 달리 누구나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인 칼리파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흑인노예라도 칼리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정통 칼리파처럼 예언자가 나온 꾸라이시 부족 출신일 필요도, 수니처럼 부자세습일 필요도 없고, 시아처럼 예언자의 피가 흐르는 집안 사람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또 이들은 한 번 죄를 지으면 무슬림 지격이 없다고 믿었고, 무슬림이 아니면 죽여도 좋다고 여겼다. 자신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포용하지 않았다. 절대적인 인간평등을 주창한 점에서는 그 어떤 무슬림 공동체보다 현대적 평등사상을 견지하였지만, 정의사상이 지나치게 강하여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거부하고 배척한 점은 극단주의에 가까웠다.


우마이야 칼리파 시대에 이들은 오늘날 이라크 바스라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는데, 이들 초기 과격한 카와리즈파에서 온건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이룬 파가 이바디파다. 이바디라는 이름은 당시 지도자였던 압드 알라 이븐 이바드에서 나왔다. 이바디는 카와리즈와 달리 일단 이바디 교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카와리즈는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무슬림을 우상숭배자로 부르고 엄히 다스렸다. 수니는 무슬림이 중죄(重罪)를 짓더라도 여전히 무슬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바디는 그러한 사람들을 여전히 유일신론자로 여기되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로 간주하였다.


불신자를 적대시 않는 이바디

이때 중요한 개념을 사용한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단어가 불신(不信)이다. 아랍어로 쿠프르(kufr)라고 한다. 원래의 의미는 ‘감사하지 않는다’인데 불신으로 통용된다. 불신자는 카피르(kafir). IS가 사람을 죽일 때 잘 쓰는 용어가 바로 불신(쿠프르), 불신자(카피르). 대단히 엄중한 용어다.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불신자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극형이다. 그런데 이바디는 이들 단어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바디는 감사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총에 감사하지 않는 것(쿠프르 니으마)과 우상숭배의 불신(쿠프르 시르크)으로 나눈다. 전자(前者)는 이바디가 아닌 무슬림, 후자(後者)는 비무슬림의 상태를 각각 가리킨다. 이바디 무슬림이 아니더라도 무슬림은 여전히 무슬림으로 여긴다. 비무슬림은 말 그대로 유일신 신앙이 없는 사람이다. 이바디는 이 둘을 모두 멀리하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육체적이 아니라 마음으로 멀리하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친하게 지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믿음을 지니고 있기에 영국인들은 동아프리카를 지배한 오만의 이바디를 두고 이슬람의 모든 종파 중에서 이바디가 가장 온건한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수니나 시아와 문제 없이 잘 어울렸고, 현재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다르다고 적대시하지 않았다. 이들이 적대시한 대상은 정의(正義)롭지 못한 통치자였다. 올바른 지도자에 대한 의식이 7세기 때부터 변함없이 내려온다. 이바디는 수세기 동안 정의로운 이맘이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금요일 합동예배를 준행하지 않았다. 금요 합동예배는 정의가 실행되는 대도시에서만 열려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일반적으로 무슬림 금요 예배 때는 예배 인도자인 이맘이 설교할 때 반드시 지역의 지배자 이름을 언급한다. 이는 오늘날과 같이 언론매체가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 사람들에게 지역의 실질 지배자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다. 마치 지금도 천주교회에서 미사 시간에 교황, 해당 성당이 속한 교구의 주교 이름을 호명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바디는 지역의 통치자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판단하면 설교 시간에 통치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강렬한 정의의식의 발로다.


이바디, ‘코란은 창조된 하나님의 말씀’

▲걸프 연안 지도.

 

이바디는 전반적으로 수니와 가까운 편이지만 이바디 특유의 독특한 점이 꽤 많다. 하나님의 손, 분노와 같이 하나님을 인간적으로 설명한 코란 구절의 신인동형(神人同形)적 표현을 이바디는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경전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읽고 받아들이는 태도는 극단주의적 사유의 지름길이다. 이바디는 그리스의 이성적 철학 사조의 영향을 받아 코란의 신인동형적 표현을 상징적이고 은유적으로 읽었다.


그런데 코란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어떻게 될까? 12세기 아부 아미르 알-꾸라시는 “맨 허벅지가 드러나는” 최후의 심판일이라는 코란 68 42절의 표현을 두고 자신의 허벅지를 치면서 “바로 여기 이처럼 진짜 허벅지”라고 설명하였다.  14세기 한발리 법학파의 저명 인사 이븐 타이미야는 하나님이 내려오신다는 코란의 표현을 설명하면서 설교대에서 몇 발자국 내려오면서 “내가 지금 내려오는 것과 똑같이”라고 말하였다. 이해하기는 쉬울지 모르나 이처럼 경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 주변에서 극단주의는 결코 없앨 수 없다.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코란을 그렇게 읽는 IS 2014 6월부터 우리에게 잔인한 모습을 얼마나 보여주었는가! 극단주의자들은 문자주의에 기생해서 자란다. 이바디는 그러한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이바디는 코란이 ‘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수니의 입장과 달리 ‘코란은 창조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이바디는 이외에도 신()을 이 세상이나 저세상에서 직접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하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대죄인을 위해 중재 역할을 한다는 수니 일반의 믿음을 거부한다. 지옥에 간 자들이 지옥 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믿는다. 3번째 칼리파 우스만, 4번째 칼리파 알리, 알리와 맞서 싸운 무아위야를 모두 비판한다.


화합 위해 노력하는 오만 정부

▲아랍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주한 오만대사관. 서울 신문로 한글회관 옆에 있다.사진제공=주한오만대사관

 

오늘날 이바디의 나라 오만은 가급적 학교에서 이슬람 분파의 역사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피하고, 이슬람 교육을 이바디, 수니, 시아가 모두 받아들이는 것을 중심으로 실시하고 있다. 차이를 부각하기보다는 서로 같은 점에 방점을 두어 종파 차이에 따른 불필요한 다툼을 방지하여 국민화합을 이루고자 하는 국가의 노력이 돋보인다.


오만에서 이슬람은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여타 국가와는 달리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바디의 견해를 드러내 놓지 않는다. 다만 이바디 관련 출판물을 후원하면서 이바디 전통을 이어 간다. 현재 오만의 최고 종교지도자인 셰이크 아흐마드 이븐 하마드 알-칼릴리는 “이바디와 다른 종파의 차이는 중요하지도 않을뿐더러 무슬림 사회의 통합을 결코 방해할 수 없다”는 의견을 이미 표명한 바 있다.


1979
년 이란의 이슬람혁명이 성공한 후 거대한 시아국가의 위협에 맞서기 위하여 결성된 것이 GCC. 2011년 이래 시리아 내전, 예멘 내전에서 이란을 제압하고자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걸프 아랍국가들이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오만은 그러한 대오에서 조용히 발을 빼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사이에 두고 지리적으로 이란과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오만은 외교적으로도 이란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아직 서로 종파로 형성되기 전인 657년 시핀 전투에서 시아, 수니, 이바디가 서로 다른 길로 갈라섰다고 볼 수 있다. 시아 이란, 수니 걸프 아랍국, 이바디 오만. 거기에 알카에다나 IS 같은 극단주의 세력이 등장하면서 ‘이슬람=극단주의 테러리스트’라는 등식이 성립했다. 오만과 이바디의 사례는 이슬람 세계가 분열을 씻어내고, 타 종파, 타 종교와 화합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참고로, 국내 오만 대사관은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도심 속의 작은 궁전의 모습인데 외양에서 아랍풍이 물씬 풍긴다. 서울역사박물관 근처에 있다. 기하학적인 외부 문양이 마치 종파의 조화를 상징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라마단

이슬람교도들은 매년 약 한 달 정도 해 뜰 무렵부터 해 질 녘까지 금식을 하는 종교 의식이 있는데, 금식을 하는 달(月)을 라마단(Ramadan)이라고 한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으로 9번째 달이다. 라마단 기간은 이슬람교의 창시자가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서기 632년부터 시작되었다.

금식은 이슬람교에서 강조하는 계율 중 하나로, 라마단 기간 중 금식은 종교적 의무일 뿐 아니라 단지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차원을 넘어 몸과 마음을 수련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 배고프고 힘든 사람들의 고통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라마단 기간 중에는 이슬람 신자가 아닌 외국인이라도 금식하는 사람들 앞에서 음식을 먹거나 마시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므로 외국인들이 먹거나 마시려면 금식하는 사람들 앞에서 떨어져야 한다.

라마단 기간에는 음식뿐 아니라 음료, 흡연, 성행위 등이 모두 금지된다. 라마단 기간 동안 이슬람교도들은 폭력, 화, 시기, 탐욕, 중상 등을 삼가함으로써 이슬람의 가르침을 따르고 서로 잘 지내고자 한다. 또한, 이 기간에는 반종교적인 행위 역시 금지된다.


전쟁 중인 군인, 장거리 여행객, 어린이, 노약자, 임신 중이거나 수유 중인 여성, 중병에 든 사람 등은 금식이 완화되거나 면제된다. 또한, 라마단 기간에 가난한 이웃에게 식량을 사 주거나 친구와 친척에게 선물을 주는 풍습도 있다.

 

▲라마단 종료 - 이집트 무슬림의 금식 성월 종료 기도 14.7.28

 

▲말레이시아에서 방글라데시 이주 무슬림

 

▲아프카니스탄 대통령 라마단을 끝내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프랑스

 

▲당돌한 꼬마 - 14.7.28 프랑스 마르세유 한 전시회장의 라마단

 

▲필리핀 마닐라

 

▲필리핀 케손시티

 

▲이집트 = 13. 7. 10. 카이로

 

▲터키 = 미마르시나 사원의 라마단 첫날 12. 7.20.

 

▲파키스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