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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6/ 불교에 대하여5/ 한국의 사찰3/ 반야사 영동 - 불영사 울진

상림은내고향 2021. 11. 29. 18:24

■ 종교 이야기6/ 불교에 대하여5/ 한국의 사찰3

●반야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백담사의 겨울  강원 인제

 

 

 

 

 

 

 

 

●백련사 -덕유산

 

 

 

 

 

 

 

●백양사 = 전남 장성 내장산

 

 

 

 

 

 

 

 

 

쌍계루 앞 계곡

 

쌍계루

 

 

 

●범어사 

불교문화재(상)

부산지방에는 금정산에 범어사와 청연암·대성암·원효암 등의 범어사 부속암자 및 말사들과 국청사·운수사가 있고, 금용산에는 선암사, 금련산에는 마하사, 화지산에 화지사와 같은 오래된 사찰이 많다. 이 밖에도 이미 폐사가 되어 버렸지만 금정산에 만덕사와 효의사, 금 용산 부근의 견강사와 백양사·인지암, 계좌산의 이름이 전하지 않는 절 등 다수의 불교문화재가 남겨졌을 것으로 짐작되나, 병란으로 인한 소실·파괴와 일제강점기와 광복 직후의 혼란기 불교재산의 관리 소홀로 분산 유실되었고, 이전이 용이하지 않은 건축물, 석조물 등은 다행히 오늘날까지 전하게 되었다. 또한 이 건축물과 석조물들은 주요 전국적인 거찰인 범어사, 만덕사에 주로 남겨져 있어, 그 규모나 양식들이 대단히 우수한 작품인 것이다. 이들 문화재중 범어사 중심의 불교문화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범어사

범어사는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금정산 기슭에 자리잡은 대사찰로서 오랜 역사와 많은 인재를 배출한 한국의 명찰이다. 부지면적 27,044평에 대웅전을 중심으로 불전(佛殿) 7, () 2, () 3, 영각(影閣) 1, 암자(庵子) 9, 요사(僚舍) 등 대소 160여동의 건물이 있고 "범어사삼층석탑"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범어사의 유래에 대하여는慶尙道地理誌≫·≪世宗實錄地理誌≫·≪新增東國餘地勝覽등 조선초기의 각종地理誌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동소이 한데 "금정산 산마루에 우물이 있어 그 물빛이 금색이고 그 속에 금색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에서 내려와 놀았다 하여 산 이름을 금정산이라 하고 그 아래에 절을 지어 범어사라 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러한 설화에는 다같이 범어사 창건의 구체적인 설명과 그 연대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다.

범어사의 연혁에 관한 문헌으로는梵魚寺創建事蹟古蹟이 한 권으로 된 목판본이 있는데 이 책으로 간행연대는 조선 숙종 39(1700)으로, 그리 오래된 기록은 아니나, 범어사에 오래 전부터 전해온 자료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엮은 책으로 추측되는 것이다. 이 두 기록은 내용은 대동소이하여 신라 흥덕대왕 때 왜구를 퇴치하기 위하여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간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 창건연대에 대하여創建事蹟은 신라 흥덕왕 때 라고만 하였고, ≪古蹟에서는 당 문종 태화 19년 을묘(乙卯), 신라 흥덕왕 때라고 명시하였다. 그러나 당 태화(太和) 연호는 9년까지이며, 9년이 바로 을묘년이므로 이는 당 태화9(신라 흥덕왕 10(835))의 와전일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범어사의 창건연대를 우 선 이때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현재 범어사에 남아있는 석탑·석등 등 석조 유물의 양식도 대체로 이 연대와 부합되므로 흥덕왕 때 범어사 창건설은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된다.그러나 문제는 흥덕왕보다 1세기반이나 앞 시대의 인물인 의상대사를 범어사 창건에 결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견 모순된 기록으로 보이나,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 는 것이다.

의상대사는 신라 문무왕 11(671) 당나라 유학에서 귀국하여 문무왕 16(676) 52세때 태백산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여 화엄의 중심도량으로 삼고 전국의 10대사찰에 전교하였다. 이것이 소위 화엄십찰(華嚴十刹)인데 그 중에 "金井之梵魚()"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범어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이 때에는 이미 범어사가 이름있는 절로 손꼽히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의상과 범어사는 이와 같은 인연이 있고, 또 금정산에는 의상이 수도하였다는 의상대의 전설도 있으므로 범어사의 창건과 의상을, 연대를 무시하고 결부시켜 앞뒤가 맞지 않는 설화가 꾸며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범어사의 창건시기가 의상이 화엄의 전교에 활약하던 문무왕시대까지 소급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범어사에서는 그 시기를 문무왕 18(678)에 의상조사가 창건(≪禪刹 大本山 梵魚寺案內≫ 1947 참조)하고 흥덕왕 때 가람을 크게 개창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다만 현재의 범어사에는 이 초창기에 해당하는 석조유물이나 자료가 전무한 것이 하나의 의문으로 남는다. 이 점에 대하여 초창기의 범어사 절터를 현위치가 아닌 다른 곳으로 비정하는 의견도 있다(≪釜山市誌, 1974, pp. 293~418 참조). 가령 그렇다고 한다면 범어사에 초창기의 유물이 전무한 현실과 흥덕왕 때 창건설이 생긴 이유가 모두 해명될 것이므로 앞으로 학자들의 연구에 기대하기로 한다.

이상과 같은 전후 사정을 감안하다면 범어사는 신라 문무왕 때 창건하고 흥덕왕 10(835) 현위치에 크게 개창하여 대가람의 면목을 갖추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같다. 흥덕왕 때의 개창 이후 범어사의 변천에 대하여는 아무런 기록이나 전설이 없는 것으로 보아 큰 변동없이 천년의 법통을 이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가 조선 선조 25(1592) 임진왜란의 병화로 일시에 회진된 뒤 10년이 지난 1602년 관선사(觀禪師)가 재건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화재로 전소하였다. 1613년 가을에 묘전대화상이 다시 역사를 시작하여 다음해 7월에 6법당과 7요사를 준공하니, 그것이 현재의 범어사인데 그 뒤로도 사세의 확장에 따라 크고 작은 증축·수축공사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범어사의 주요한 건물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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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大雄殿) 1613년 묘전 건립 1712년 중수
용화전(龍華殿) 1613년 묘전 건립 1638년 중수
관음전(觀音殿) 1613년 묘전 건립 1721년 중수
비로전(毘盧殿) 1684년 해민(海敏) 건립 1721년 중수
팔상전(八相殿) 1706년 명학(明學) 건립 1906년 중수
나한전(羅漢殿) 1613년 묘전 건립 1906년 중수
보제루(普濟樓) 1700년 자수장로(自修長老) 건립 1728년 중수
종 루(鐘樓) 1700년 명학 건립
불이문(不二門) 1700년 명학 건립
천왕문(天王門) 1700년 명학 건립 1990년 중수
일주문(一柱門) 1613년 묘전 건립 1719년 석주로 개수 1780년 중수
심검당(尋劒堂) 현 영각(影閣) 1613년 묘전 건립

 

범어사 대웅전

범어사 대웅전은 보물 제434,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경내에 소재하고 있다. 이 대웅전이 언제 처음으로 세워졌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어 타버리고, 1603 (선조 35)에 관선사가 재건하였다고 하며 이것도 오래되지 않아 다시 화재로 말미암아 타버렸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1614(광해군 6)에 묘전화상이 세웠고, 1713(숙종 39)에 흥보화상(興寶和尙)이 다시 수리한 것이다. 내부의 佛壇과 닷집 삼존불상(三尊佛 像)은 묘전화상의 중건 때 만들어진 것이며, 불상은 1824(순조 24)경 해민대사(海敏大 師)가 개금(改金) 하였다고 전한다.

건물의 양식은 정면이 3칸이고, 측면도 3칸인 다포식계통(多包式系統)이나, 지붕은 맛배지붕으로 되어 있어서 측면에는 공포를 배치하지 못하였다. 그 대신 측면에는 높은 기둥 두 개를 세워 중종량(中宗梁)을 받치게 하였으며, 그 위에는 다시 종량을 얹게 하고 박공 머리에는 바람을 막는 판자를 달았다. 내부에는 중앙보다 후면에 옥내고주(屋內高柱)를 두 개 세웠으나 맛배집 건축에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집안의 기둥을 세워 대량(大梁)의 길이를 연장하도록 계획된 것은 그 예가 매우 드물다. 대량과 중종량 위에 배치한 대공(臺工)들은 첨차와 양봉형(梁奉形)으로 구성된 간단한 받치개이며 그 위로 종량에 의지하여 우물천장 을 가설하였으나 그 주위는 4면을 중종량의 위치까지 꺾어서 빗천장을 만들었다.

공포는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서 내부의 살미첨차는 대량을 받친 제일 앞 부분만이 양봉과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공간포는 중앙 칸(中央間) 3개이고 좌우문이 두 개씩이다. 이 건물은 규모가 그다지 큰 것은 아니나 기둥의 두공과 처마의 구 조가 섬세하고 아름다워 조선 중기의 불교건물의 좋은 본보기가 되며 정면의 아담한 교창과 닷집의 섬세함은 우리지방에서 으뜸가는 목조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건물은 1969∼ 70년에 정부에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범어사 삼층석탑

범어사 삼층석탑은 보물 제250호로 지정되어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경내에 있으며,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4m 2중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 3층석탑으로 신라석탑의 양식을 갖추었으나 상·하기단의 면석(面石)에 기둥모양 대신 안상(眼象)을 조각한 특색을 보이고 있다. 지대석위의 하층기단 면석에는 귀기둥 사이에 삼구식안상(三區式眼象)을 음각하였고, 두툼한 갑석의 상면에는 2단의 괴임을 조각하였다. 비교적 큰 상층기단이 면석은 4매의 판석을 세우고 甲石은 2매의 판석으로 덮었다. 면석에는 가는 귀기둥 모양을 새기고, 그 사이에 꽉 들어차게 큼직한 1구식 안상이 특이한 수법으로 새겨졌다. 갑석은 밑에 부연이 있고 상면에 1단의 괴임을 깎아 탑신을 받치게 하였다. 탑신부는 각층의 옥신(屋身)과 옥개(屋蓋)를 별석으로 조성하였는데, 옥신석에는 귀기둥을 새기고 옥개석은 얇은편으로 추녀는 수평이며 받침은 4단이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위에 보주(寶珠)가 얹혀져 있으나 노반은 거꾸로 놓였고 보주는 후대에 제작 보충한 것 같다. 이 탑은 근년에 보수하면서 기단밑에 또 하나의 석단을 축조하여 그 위에 세웠기 때문에 우뚝 솟아 보이며 탑신부에 비하여 기단부가 너무 거대한 느낌을 준다. 또 탑신은 2층부터 1층의 절반 이하로 심하게 감축되어 균형이 어색하나 기단의 조식 등에 특색있는 석탑으로 범어사 창건 당시의 조성으로 생각된다.

 

범어사 당간지주

범어사 당간지주는 부산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산문 밖에 위치해 있다. 고려초기(10세기)에 조형되었으며, 이 당간은 당을 달기 위한 장대인데 당간을 세울 때 양쪽에서 이를 지탱하도록 세운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은 돌, , 또는 나무같은 것으로 만들어지나 지주는 모두 석조이다. 당이란 불가에서 사찰의 문앞에 세우는 기치의 하나인데 속칭 괘불(掛佛)이라 하여 대형의 불화를 그린 것이다. 이것을 큰 법회나 의식이 있을때 걸기 위하여 당간지주를 세우는 것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시대부터 성행하였다 한다.

이 당간지주는 일주문 밖 진입로 길가에 있는데 기단부는 파괴 되었다. 지주는 단면이 50×87, 높이 4.5m의 거대한 돌기둥이 79㎝ 간격으로 세워졌다 . 지주의 상단부 앞쪽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홈이 파여져 있고, 주두(柱頭)의 바깥쪽 모서리는 약간 둥글게 다듬어졌다. 이 당간지주는 치석이 약간 거칠고 아무런 치장도 없으나 소박한 조형미를 충분히 발휘한 작품이다. 기단부가 파괴되어 그 구조를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초기의 건립으로 추정된다. 범어사에는 이 밖에도 대웅전 앞뜰에 2, 미륵전 앞 에 2기의 소규모 당간지주가 있으나 모두 후세에 건립된 것이다.

 

범어사 조계문

범어사 조계문은 보물 제1416호로(200627일 지정), 일명 일주문 이라고도 하며,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산문밖 입구에 위치해 있다. 만법이 구족(具足)하여 일체가 통한다는 법리가 담겨 있어 또한 일명 삼해탈문(三解脫門)이라고도 하여 원래 사찰 건물의 기본 배치에 있어서 사찰 경내에 들어 갈 때는 먼저 지나야 하는 문이다. 일반적인 건물의 기둥의 배치는 방형으로 구성되지만, 조계문은 기둥이 일렬로 나란히 늘어선 것이 특징이다. 다른 조계문의 경우에는 다릿발을 설치하여 땅속에 묻음으로써 기둥을 고정시키고 또 옆으로의 기울어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인판(下引板)을 놓았는데 비하여, 이 조계문은 일렬로 된 4개의 높은 초석위에 짧은 기둥을 세워 다포(多包)의 포작(包作)과 겹처마로 많은 무게를 가지는 지붕을 올려놓음으로써 자체의 무게로 지탱케 하는 역학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조계문도 원래는 다른 조계문과 같은 양식으로 1614(광해군 6)에 묘전화상 이 절의 모습을 새롭게 가다듬기 위하여 이 문을 지을 때는 다릿발이 사용된 것으로 생각 된다. 이 점은 현재 남아 있는 평판에 귓기둥을 고정시킨 흔적과, 1718(숙종 44) 명흡대사(明洽大師) 로 바꾸었다는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1781(정조 5) 백 암선사(白岩禪師)가 중수한 것이라 한다. 정면 3, 측면은 맞배지붕 겹처마, 다포식 외삼 출목의 형식으로 공간포가 각 1()씩 배치되고 있는 목조 기와건물이다.

 

범어사의 불교문화재()

범어사 조계문

범어사 조계문은 보물 제1416호로(200627일 지정), 일명 일주문 이라고도 하며,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산문밖 입구에 위치해 있다. 만법이 구족(具足)하여 일체가 통한다는 법리가 담겨 있어 또한 일명 삼해탈문(三解脫門)이라고도 하여 원래 사찰 건물의 기본 배치에 있어서 사찰 경내에 들어 갈 때는 먼저 지나야 하는 문이다. 일반적인 건물의 기둥의 배치는 방형으로 구성되지만, 조계문은 기둥이 일렬로 나란히 늘어선 것이 특징이다. 다른 조계문의 경우에는 다릿발을 설치하여 땅속에 묻음으로써 기둥을 고정시키고 또 옆으로의 기울어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인판(下引板)을 놓았는데 비하여, 이 조계문은 일렬로 된 4개의 높은 초석위에 짧은 기둥을 세워 다포(多包)의 포작(包作)과 겹처마로 많은 무게를 가지는 지붕을 올려놓음으로써 자체의 무게로 지탱케 하는 역학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조계문도 원래는 다른 조계문과 같은 양식으로 1614(광해군 6)에 묘전화상 이 절의 모습을 새롭게 가다듬기 위하여 이 문을 지을 때는 다릿발이 사용된 것으로 생각 된다. 이 점은 현재 남아 있는 평판에 귓기둥을 고정시킨 흔적과, 1718(숙종 44) 명흡대사(明洽大師) 로 바꾸었다는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1781(정조 5) 백 암선사(白岩禪師)가 중수한 것이라 한다. 정면 3, 측면은 맞배지붕 겹처마, 다포식 외삼 출목의 형식으로 공간포가 각 1()씩 배치되고 있는 목조 기와건물이다.

 

범어사 명부전

명부(冥府)란 지부(地府)라고도 하며 불교에서 인간의 사후에 이승에서 지은 죄에 대한 심판하는 법정이라는 뜻이다. 명부전은 죄로 인하여 지옥으로 가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세 우는 법당이며, 일명 지옥전(地獄殿)이라고도 하고 십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범어사 명부전은 1658(효종 9) 9월에 소모장(召募將) 최공이 대웅전을 중수하고 그 구재를 이용하여 건립하였다. 초창기에는 지장전(地藏殿)이라 하였으나 1694(숙종 20)에 명치 대사(明治大師)와 자수장노(自修長老) 등이 중수하고, 명부전으로 고쳐 불렀다. 고종 28 (1891) 8월에는 양화대사(兩華大師)가 다시 중건 단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명부전 내의 중앙 고탁에는 석가 입멸 후의 중생의 구도를 서원(誓願)한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 )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좌로 도명존자상(道明尊者像)과 우로 무독귀왕상(無毒鬼王像)이 자리하고 있다.

동서의 차탁에는 진광왕(秦廣王), 초강왕(初江王), 송제왕(宋帝王), 오관왕(伍官王), 염라 왕(閻羅王), 변성왕(變成王), 태산왕(泰山王), 평등왕(平等王), 도시왕(都市王), 오도전륜 왕(五道轉輪王)의 십왕상(十王像)과 감제사자(監齊使者), 직부사자(直符使者)의 사자상이 각 6()씩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각상의 배후에는 그 상과 부합되는 독립된 정화(幀畵 )가 한 점씩 걸려있다. 건물 양식은 정면 3, 측면 3칸의 일고주 오량집으로 지붕은 맛배지붕에 겹처마이다. 공포는 내외 삼출목의 다포로 중앙칸에만 공간포를 2구 설치하고 협간 에는 1구씩 배치하였다. 천장은 가장자리를 약간 낮게 빗천장으로 꾸미고 가운데에는 좀 높게 우물반자를 짰다. 좌측과 후측벽의 바깥에는 방풍판을 달듯이 판자로 벽을 덮었다. 명부전은 조선후기 건물로서의 특징이 잘 남아있으며 범어사의 건물로는 대웅전과 함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건물의 하나였으나 92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범어사 석등

범어사 석등은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경내에 있으며, 부산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9세기)에 조각된 것이다. 석등은 4각형의 지대석위에 팔각형을 기본으로 한 하대석(下臺石), 중대석(中臺石), 옥개석(屋蓋石)을 차례로 올려놓은 전형적인 신라 양식의 석등이다. 지대석은 지중에 매몰되어 그 전모를 정확히 알 수 없어 하대석과 단일 석인지 별석으로 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우나, 하대석은 단엽팔판(單葉八辦)의 복연(伏 蓮)으로 조각되었다. 중대석〔間柱石〕은 팔각의 돌기둥이고 상대석은 두툼한 팔판의 겹 꽃 앙련으로 조각하고 상면에 팔각으로 된 괴임이 있다.

화사석은 한면 걸러 4면에만 장방형의 화창을 내고 창구 둘레에 1단의 액()을 만들어 화 창(火窓)을 끼우게 되어있고, 그것을 고정시키기 위하여 작은 못구멍을 뚫었다. 옥개석 역시 팔각형인데 추녀는 수평이고 전각은 약간 반전하였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여 비교적 경쾌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옥개석 위에 노반이 도치되어 있고 그 위에 작은 보주가 얹혀있다. 이 석등은 현재 높이 2.62m 가량인데 간주석이 다소 빈약하여 이것이 후세의 졸렬한 보충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또 상대석이 하대석에 비하여 너무 둔중한 감이 있으나 지대석의 크기나 그 구조 여하에 따라서는 균형있는 형태일지도 모른다. 이 석등은 삼 층석탑과 같이 범어사를 창건한 신라 흥덕왕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현재 매몰 된 부분을 복구하고 간주석을 알맞게 갱신하면 비교적 우수한 신라석등으로 복원될 것이다. 이 석등은 원래 용화전 앞뜰에 있던 것을 근년에 현 위치인 대웅전 앞으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원효암 서편 삼층석탑

원효암 서편삼층석탑은 부산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2호로 금정구 청룡동 524 원효암에 소 재해 있다. 통일신라시대(10세기) 말기 2중기단 위에 세워진 3층석탑인데 신라석탑 양식을 갖춘 탑이다. 이 석탑은 원효암에서 30m가량 떨어진 공지에 있던 것을 현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하층 기단은 갑석만 남아 있어 그 전모를 알 수 없으며 상층기단과 탑신부에는 다 소 손상이 있기는 하나, 대체로 완전한 편이다.

그러나 상층기단의 면석에는 다른 석재가 섞인듯 하고, 2,3층의 옥신석도 후세의 보작으로 여겨진다. 각 층의 옥개석은 손상이 심하나 원형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 추녀는 수 평을 이루고 있으며, 전각은 약간 반전하였으며 처마 밑에는 3단의 받침대가 있다. 현재 지상의 높이는 3m 정도로서 동탑보다는 약간 작은 규격의 탑이다. 건립 연대는 동탑과 대략 같은 신라 통일시대 말기로 추정되나 양자가 한 쌍으로 조성된 것은 아닌 듯하다.

 

금정산이란 이름이 유래한 범천과 금샘, 금어와 관련한 또 다른 일화는 범어사 창건 설화다. 범천의 범(梵)과 금어의 어(魚)를 합쳐 범어사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는 천상계와 지상계를 아우르는 절이라는 의미와 통한다. 범어사는 678년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해동의 화엄십찰 중의 하나로 창건했다. 무려 1,500년 전이다.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와 더불어 영남의 3대 사찰로 꼽힌다.

▲500년 가까이 된 소나무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

 

 

▲신라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웅전. 보물 434호로 지정돼 있다.

 

범어사를 중앙에 두고 왼쪽 너덜겅에서 고당봉 밑 금샘을 거쳐 타원형으로 도는 범어사 둘레길도 금정산과 범어사를 두루 살펴보며 걸을 수 있는 좋은 길이다. 먼저 범어사를 둘러본 후 왼쪽으로 나가면 서어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표피가 사람의 근육질과 비슷하게 생긴 서어나무는 남부지방에서 많이 자라는 수종이다. 바로 옆에는 너덜겅이 나온다. 금샘까지 계곡을 이루고 있는 너덜겅도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색지대로서 천연기념물로 신청할 예정이다.

 

▲보물1461호인 특이한 형태의 일주문

 

 

 

 

▲범어 8경에 들어가는 곳

 

 

●법주사 -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법흥사 요선암 마애불 - 영월

 

●보경사

포항 송라면 중산리 내연산

 

 

 

 

 

●보리암

 '한국 최고의 기도처' 남해 금산

▲이성계와 금산 산신 전설 등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남해 금산의 보리암 앞바다에서 찬란한 일출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남해군청 제공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했다는 장소인 남해 금산 영응기적비(암자 있는 곳)와 삼불암.

 

▲고려 말 이성계가 왕이 되기 위해 남해 금산 산신에게 백일기도를 올린 장소로 알려진 영응기적비.

 

▲고려 말 이성계가 왕이 되기 위해 남해 금산 산신에게 백일기도를 올린 장소로 알려진 영응기적비.

 

▲남해 금산 아래 자락에는 진시황의 신하 서복이 새긴 것으로 전하는 '서불과차'.

 

▲보리암 해수관음보살상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다. 맞은편에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져온 돌로 만들었다는 삼층석탑이 있다.

 

▲신선이 벗어놓고 간 신발로 전하는 문장암. 한림학사 주세붕이 새겼다는 '由虹門(유홍문) 上錦山(상금산)'이란 마애석각이 있다.

 

 

 

 

 

 

 

 

 

●보문사 = 오백나한 - 강화도

 

●보안암 석굴 = 사천 곤명  안에는 석조여래좌상과 16 나한상이 있다

 

●보탑사 = 진천

 

●봉복사 = 횡성

 

●봉암사

봉암사 선원 - 문경 뒤편 화양산

 

봉암사 수정암

 

정자 주암정

 

 

 

지증대사 부도에 새겨진 문양

 

●봉정사

 

 

 

 

 

 

 

국보 제15호 안동 봉정사 극락전

 

극락전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2년 보수공사 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을 발견하였는데, 우리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 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로 추정할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4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배흘림 형태이며, 처마 내밀기를 길게 하기 위해 기둥 위에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가운데에는 불상을 모셔놓고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 봉정사 극락전은 통일신라 시대 건축양식을 본받고 있다.

 

천등산(天登山) 봉정사(鳳停寺)

신라 문무왕 12년(672), 의상 대사의 제자인 능인 스님이 창건하였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 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 더욱 수행하던 능인 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러 산문을 개산하고, 봉황이 머물렀다 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 명명하였다.

 

대한 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 중 하나인 봉정사의 최초 창건은 의상 대사 창건설과 능인 대덕의 창건설 중 대체로 능인 대덕의 창건으로 보고 있으며, 창건 이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 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 전쟁 때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사찰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誌) 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다.

 

고려 태조와 공민왕께서 다녀갔으며 ‘가장 한국적인 것을 보고 싶다’는 요청에 따라 영국 여왕을 안내한 아름다운 사찰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극락전(국보 제15호)을 비롯해 대웅전(국보 제311호),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고금당(보물 제449호), 대웅전 후불탱화(보물 제1614호),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620호), 영상회 괘불도(보물 제1642호), 아미타설법도(보물 제1643호)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우리는 한동안 부석사 무량수전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배웠고 누구나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72년에 봉정사 극락전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상량문에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극락전의 옥개부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한 건물을 지은 후 중수하게 되는 시기는 대개 150~200년쯤 뒤이니 그렇다면 1363년에서 그만큼 앞에 지었다는 얘기가 되고, 1376년에 중수한 기록을 갖고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을 앞선 것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기록으로 중수한 연도를 확인한 것이지, 처음 지은 날짜가 확인된 것은 아니므로 확실히 먼저 지었다고 하기에는 어쩐지 자신 없는 측면도 있어서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봉정사 극락전 모두 최고의 목조 건물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기록으로 실제 건축시기를 확실히 아는 최고(最古) 절집은 수덕사 대웅전이다. (1308년 창건)

 

뿐만 아니라 지난 2000년 2월에는 극락전 옆에 있는 대웅전의 지붕 보수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宣德十年乙卯八月初一日書’ (선덕 10년 : 1435년, 세종 17년)이라고 적혀있고 新羅代五百之余年至 乙卯年分法堂重倉(신라 시대 창건 이후 500여 년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하다)라고 되어있어 대웅전 창건이 1435년 중창 당시보다 500여 년이나 앞섰다는 말이니, 현존 최고의 건물이 극락전에서 다시 대웅전으로 바뀔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는 여론이다. 그리하여 봉정사 대웅전은 2009년 6월 30일 국보 제311호로 승격되었다.

 

이와 함께 대웅전 내 불단 바닥 우측에서 辛丑支正二十一年 鳳亭寺 啄子造成 上壇有覺澄 化主戒珠 朴宰巨 (지정 21년 : 1361년, 공민왕 10년)에 탁자를 제작, 시주. 시주자 박재거)라고 적힌 묵서명도 확인되어 대웅전 불단이 현존 최고의 목조건물임이 판명되었다.

 

그 밖에도 발견된 상량문에는 2층 누각 신축, 단청을 한 시기,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 사찰규모 등을 알려주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 초 당시 봉정사는 팔만대장경을 보유하고 500여 결(1만여 평)의 논밭에다 안거 스님 100여 명에 75칸의 대찰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하기야 국내 곳곳에 천년고찰이 한두 곳이 아니니 어느 날 어느 절집 상량문이나 묵서명이 발견되어 또 다른 최고(最古)의 기록을 갱신할지 알 수 없으니 내심 기대해 본다. 아무튼, 2015년 현재 공식 국내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은 지금 소개하려는 국보 제15호 '봉정사 극락전'이다.

 

극락전(極樂殿) 영역

봉정사는 일주문을 지나 조금 걸어 올라가면 경사진 길에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누문(樓門) 만세루(萬世樓)를 지나 주불전인 대웅전 앞에 서게 되는데 극락전은 그 대웅전의 왼쪽에 있다. 대웅전과 극락전, 주전(主殿)을 2개 모신 특이한 구조이다. 대웅전은 만세루와 마주 보며 왼쪽에 화엄강당(華嚴講堂), 오른쪽에 무량해회(無量海會)가 있고 극락전은 왼쪽에 고금당(古金堂), 오른쪽에 무량해회(無量海會)가 있으며 대웅전 앞에 만세루가 있듯이 극락전 앞에 우화루가 있었는데 영산암으로 옮겨 갔다.

 

대웅전과 마주 보는 곳에는 중문 격인 진여문(眞如門)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철거되어 없으며 오른쪽 무량해회 앞으로 돌아나가는 협문에 진여문(眞如門)이라고 씌어 있다. 대웅전 앞마당은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으나 극락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하나 서 있다.

 

▲봉정사는 주전(主殿)이 2개가 되는 특이한 구조이다. 사진에서 왼쪽 팔작지붕이 대웅전, 오른쪽 맞배지붕이 극락전이다.

 

▲극락전 전경. 낮은 축대 위로 왼쪽이 고금당, 오른쪽이 무량해회인데 무량해회는 대웅전 쪽이 앞이고 극락전 쪽은 뒷면이다.

 

▲옆면을 보면 4칸의 면 분할이 뚜렷하고 9개의 도리가 돌출되어 9량 집임을 알 수 있다. 지붕이 충분히 나와서 안정되어 보인다.

 

▲뒷면은 중앙에만 앞면과 비슷한 모양의 문을 내었는데 사용하지는 않는 듯하다.

 

▲극락전 앞마당에는 경북유형문화재 제182호 삼층석탑이 서 있고, 오른쪽은 고금당(古金堂)이다.

 

▲극락전 현판, 1386년 병인년(丙寅) 6월에 송파동몽(松坡童蒙)이 썼다고 되어있는데 이는 안동 권씨 권행의 15세손 송파(松坡) 권인(權靷)을 말하며 동몽(童蒙)은 자신을 낮춰 부른 말이다. 그 옆에는 광서(光緖), 즉 청나라 덕종 광서 8년이므로 1882년 임오년(壬午) 4월에 채색하였다고 쓰여 있으니, 극락전 못지않게 현판도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극락전 내부에는 뒷벽 중앙에 나무로 불단을 만들어 주불인 아미타불을 모셨는데 위쪽 닫집이 섬세하지만 화려하지는 않다.

 

극락전은 1972년에 완전 해체, 수리하면서 단청까지도 새로 칠하였다고 하는데 예전 단청을 그대로 살렸는지는 모르지만, 그 옛날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을 왔을 때 이 극락전의 중수에도 관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는 임금에 대한 칭송 문구가 단청무늬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주상전하(主上殿下), 성수만세(聖壽萬歲)가 쓰여 있다. 아마도 불사에 힘을 실어준 공민왕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남겨둔 것이 아닐까?

 

또한, 극락전은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면서도 매우 소박하고 간결해 보이는데 이는 전체적인 건물의 구조나 목재들의 결구처리 방식이 단순한데서도 느낄 수 있다. 특히 기둥 위에 올린 공포를 보면 옆에 있는 대웅전의 공포와 비교하여 극락전 공포는 꼭 필요한 구성만 갖추었을 뿐 장식적인 부분이 아예 없음을 알 수 있다.

 

▲극락전은 처마 아랫부분과 외목도리, 공포, 그리고 보가 지나는 목제 부분에만 가볍게 단청을 하였는데 기둥 위에만 위치하여 몇 개 되지 않는 공포의 모양이 비교적 단순 간결하다.

 

봉정암은 극락전만으로도 그 무게가 가늠하기 쉽지 않은 절집이다. 국보 제15호 봉정사 극락전이 그만큼 크고 무겁다는 뜻이다. 물론 최근 들어 대웅전 건물에서 역사적인 기록들이 추가로 발견되어 최고(最古)의 영예를 넘겨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고려 때 법당건물의 고건축물로서의 값어치는 불변일 것이다.

 

또한, 봉정암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빛날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년 배용균 감독),’ ‘동승(2003년 주경중 감독)’이 영산암에서 촬영되어 그 유명세를 보탰으니, 그 이후 찾는 발길이 계속 이어진다고 하며, 문화재청, 대한불교조계종, 안동시 등이 나서서 2018년까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고 한다. 부디 좋은 성과를 거두어 모범적인 문화유산으로 길이 보전되기 바란다.

 

●浮石寺 - 太白山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677년) 때의 고승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로 우리나라 화엄종의 종찰로 꼽힌다. 화엄종을 이어온 대부분의 고승들이 이곳에서 배출된 것이다. 궁예가 자신의 아버지인 경덕왕의 초상화를 칼로 찔렀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역사 속 절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른 절에서는 부처가 정면에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에서는 고려시대의 불상 소조여래좌상이 왼쪽,

즉 서쪽에서 동쪽을 보고 앉아 있다. 이 부처 또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호) ,조사당(국보 19호)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45호) ,조사당 벽화(국보 46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호)등의 국보와 3층석탑·석조여래좌상·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그리고  많운 문화재가 보전되어있다

 

무량수전 앞에 서면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하다,

 

부석사 금동관세음보살과 겅은여, 그리고 선묘낭자

▲5월 14일,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대한민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이색적인 집회가 열렸다. 

 

고려 불상을 일본에 주자는 행사이다. 이에 소식을 들은 많은 네티즌들은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한 매체의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일본이 과거 약탈한 수많은 문화재에 대한 취득 경위조차 밝히지 못하는 데 한국 사람들이 앞장 서 반환하자는 주장에 ‘웬 오지랖’이라며 반발하였다. 더구나 행사장에서 대마도 관음사 전 주지인 다나카 셋코(田中節孝)가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는 모습은 주장의 순수성조차 의심하게 하였다.  

 

부석사는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경북 영주와 충남 서산에 같은 이름으로 창건한 절이다. 경북 영주는 676년, 충남 서산은 677년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절에는 같은 설화가 전해져 있다. 

 

당나라에서 불교를 공부한 의상은 연정을 품은 여인, 선묘의 청혼을 거절하고 귀국하자 선묘낭자는 바다에 투신, 용이 되어 의상의 귀국 길을 돕고 나아가 부석사의 창건을 도왔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심지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뜰에 선묘낭자가 석룡으로 변했다는 설화가 있다. 이를 실증하기 위해 KBS에서 심층 촬영한 결과 15M크기의 용 모양의 돌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또한 서산 부석사도 같은 창건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의상대사가 선묘낭자를 기리기 위해 당나라와 가까운 서산 도비산에 부석사를 짓고자 할 때 이를 반대하는 도적들을 선묘낭자가 물리치고 자신은 부석사 앞바다에 검은 여로 변해 지금까지 있다는 것이다.

 

의상대사, 선묘낭자, 석룡, 검은여, 부석사 

충남 서산 천수만에 있는 검은여 표시판, 동일한 기록이 부석사에도 있다


이들은 한 묶음이다. 이러한 배경에 최근 서산 부석사에 있던 고려 불상, 금동관세음보살이
화제이다. 1330년 고려의 국운이 다할 때, 서산의 민초들이 간곡한 소원을 담아 조성한 관음상은 그 소원만큼 온갖 풍파를 겪고 있다. 특히 최근에 대마도에서 밀반입된 점을 핑계삼아 일본에 되돌려주자는 하는 이들이 있자, 이에 대하여 <서산부석사 관음상의 눈물>을 집필한 김경임 전 주)튀니지 대사는 반박하는 글을 보내면서 이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지적하였다. 김경임 전 대사는 외교관으로 주일, 주미 대사관의 근무는 물론, 유네스코 본부에서 국제사회의 문화재반환과정을 보고 배웠다. 이런 이유로 한국의 문화재반환운동에 기여하고자 <세계문화재 약탈사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사라진 몽유도원도츨 찾아서> 등을 집필하였다.  

 

다음은 김경임 전 대사의 부석사불상을 일본에 돌려주자는 것에 대한 반박 기고문이다.   

"부석사 관음불상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5.11일 인터넷 매체 “뉴시스(Newsis)“는 문화재 환수운동 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혜문 )>등이 2012년 10월 한국 문화재 절도단이 대마도 간논지(觀音寺)에서 절취한 서산 부석사 관음불상을 즉각 일본에 돌려주라고 주장했음을 보도했으며, 아울러 이들 단체가 다음날 ‘대마도 불상 반환 촉구’ 집회를 열고 1만 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 법무부, 외교부, 문화재청에 제출하고 6월 초 간논지를 찾아가 절도행위 사과문을 전달한다는 계획임을 보도했는데, 12일 예정대로 이 단체는 외교부 정문 앞에서 ‘대마도 불상 반환 촉구’ 집회를 열고 불상의 일본 반환을 촉구했다.

 

2012.2월 대전지법이 내린 부석사 불상 이전 가처분 결정이 3년이 지난 2016.2월 만료됨에 따라 <부석사 불상 봉안위원회>가 불상의 부석사 인도를 위한 소송을 제기해 놓았음에 비추어 부석사 불상의 향방과 관련된 혼선을 피하기 위해 문화재 환수문제의 소위 전문가로 알려진 유명인사의 무책임한 주장을 반박하지 않을 수 없다. 

 

“경색된 한일관계를 풀기 위해 인도주의적이고 도덕적인 양심에 입각해 불상을 지체 없이 간논지로 반환해야 한다....엄연히 절도범들이 훔쳐온 불상을 그냥 먹겠다는 게 정상적인 국가인가. UN 가입국으로서 할 짓인가. 유네스코에서 한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당장 돌려줘라.“(5.11. 뉴시스 보도 인용) 

 

한일관계, 인도주의 도덕과 양심, 유엔, 유네스코 등 중요한 공적가치를 나열하여 언론에 호소하고 있는데,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반환목적이 “경색된 한일관계를 풀기 위해서”라는 위험한 발상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경색된 한일관계를 풀기 위해 왜 하필 우리가 부석사 불상을 반환해야 하는가? 일본이 불상을 한국에 반환해야 한다는 생각은 할 수 없는 것인가? 문화재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얼마나 국내외의 경멸을 자초한 부질없는 짓이었는가는 이집트의 과거 예에서 잘 볼 수 있다. 19세기 풍전등화 같은 국가의 운명에 노심초사한 나머지 이집트 정부는 서구제국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오벨리스크를 런던, 파리, 뉴욕에 기증했지만 결과는 이집트의 유구한 역사이자 고귀한 정신을 상징했던 위대한 문화재를 영원히 상실한 것이었고 예정된 코스에 따라 이집트는 영국의 식민지로의 전락을 피할 수 없었다.  

 

우리의 소위 전문가들은 불상이 절도범들에 의한 절도품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불상을 한낱 물건으로만 본 것인데, 더구나 이 불상은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이 문제의 진정한 주인공인 관음불상과 불상을 제작하여 부석사에 봉안했던 서산 부석사와 주민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하다. 전문가들은 일본으로 즉각 돌려주라고 주장하기 전에 부석사나 서산 주민들과 의논을 했는가? 관련인들의 양해 없는 해결은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다는 교훈을 최근의 한일관계에서 배우지 못했는가?  

 

불상, 즉 문화재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후세를 위해 남겨진 선조의 유산으로서 과거를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현재의 우리에게는 과거를 기억하는 물증이다. 우리는 이러한 유산을 통해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고 기억을 공유한다.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기억을 통해 현재에 재생되며 우리의 현재와 관계한다. 이 불상은 고려말 고단한 삶을 살았던 서산인들과 왜구의 침구에 신음했던 우리 모두의 역사를 현재에 되살려주는 강력한 물증이다.

 

이 불상은 고려말 극락세계를 염원했던 서산인들의 신앙심으로 부석사에 영원히 봉안되었지만, 고려말 왜구에 의해 약탈되었다. 왜구에 의한 약탈이 아니라면 이 불상이 대마도 왜구의 후손이 세운 간논지에 존재했던 일을 설명할 수 없다.  

 

“500여년 전 왜구가 부석사에서 약탈한 정황은 있지만 결정적인 문헌 증거가 없다. 고려시대의 부석사와 현 부석사가 동일한 사찰인 지도 확실하지 않다.” 우리의 전문가들은 이렇게 강변하고 있지만, 문헌증거가 아닌 정황증거만으로 문화재 약탈이 입증된 다수의 국제적 사례가 있음을 알고 있는가? 더구나 고려시대의 부석사와 현 부석사를 동일한 사찰임을 의심하는 것은 불상과 부석사의 관계를 끊어 불상을 연고 없는 문화재, 이른바 아무도 찾지 않을 “고아 문화재(orphan cultural property)“로 만들려는 발상으로서 이것은 문화재의 또다른 훼손행위이다. 이러한 무책임한 주장을 하기에 앞서 이들은 오늘날의 서산부석사가 고려말 처음 관음불상이 안치되었던 그 서산 부석사가 아니라는 증거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불상은 서산의 과거역사이자, 왜구의 침구에 의해 피폐해진 고려의 역사를 환기해주는 강력한 물증이다. 기억은 시간과 함께 흐려지고 변질되다가 기억하는 사람과 함께 소멸된다. 그러나 동일한 과거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기억은 집단기억이 되면서 개인의 기억보다 더욱 정확하고 더욱 힘차게 살아남아 후대로 이어진다. 이렇게 되면 지나간 과거는 다시 오는 미래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불상은 적당히 넘겨줄 수 있는 흘러간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대마도 주민들에게도 이 문제가 그들에게 편리한 식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이 불상은 대마도 사람들에게는 잊고 싶은 그들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그들의 현재의 삶에 대한 뿌리를 성찰하게 만드는 계기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이 불상이 일본 전문가들에 의해 왜구의 약탈물로 결론이 모아진 직후 1974년 불상을 국가중요문화재로 등록하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후안무취를 보이고 있다. 우리의 전문가들은 이러한 일본정부의 입장에 동조할 뿐 아니라 사과까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들의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부석사 불상문제의 해결은 진정한 소유자에게 환수시키는 것이다. 일본정부와 대마도 측에서 진정한 소유권을 입증하는 노력이 해결의 첫 단계이다. 또한 해결은 반환만이 유일한 방식이 아니다. 영구대여, 복제품 기증, 공동소유, 공동관리, 교환전시 등 다양한 방식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노력 없이 무조건 반환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사회에서 가장 비윤리적이고 무책임한 “묻지마”식 해결방법이 될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 문제가 수백년 전에 일어난 일인 만큼 오늘날의 해결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세월이 약은 아니다. 시간은 없는 소유권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 문화재 문제에서 국제사회의 공통된 법리이다. 수백년 전 왜구의 약탈은 공소시효 등의 이유로 법적으로 구제 받을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국제사회에서는 80년 전에 저질러진 나치약탈의 문화재는 환수되어야 한다는 것이 확립된 관행이다. 또한 수 백년 전 전시 약탈된 문화재의 반환문제 역시 꾸준히 논의되고 있음을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일예로, 유럽 종교전쟁의 와중인 1712년 빌메르겐(Villmergen) 전쟁에서 쥬리히에 문화재를 약탈당한 스위스 셍갈 주(Zurich, Saint-Gall, 모두 당시는 각자 독립 공국이었음)는 1996년 당시 약탈된 문화재가 쥬리히 박물관에 존재함을 발견한 즉시 쥬리히를 상대로 협상을 벌려 2006년 일부 문화재를 회수했다.  

 

영국은 1476년부터 노르만디 바요 직물 박물관(Bayeux Tapestry Museum)에 소장된 프랑스 문화재 바요 카펫의 반환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정복왕 윌리엄의 전투를 묘사한 70m에 달하는 이 카펫은 윌리엄의 프랑스 부인 마틸다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이다. 약탈의 직접적 증거는 없지만, 최근 이 카펫이 영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속속 나옴에 따라 영국 의회도 이 카펫의 반환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물론 프랑스의 완고한 태도에 비추어 반환의 현실성은 크지 않겠지만, 국제사회는 교섭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에게는 타산지석의 교훈이지만 일본에게는 강 건너 불은 아닐 것이다.

글 | 이상근 문화재환수국제연대 상임대표

 

 

 

 

 

 

 

 

 

 

 

●부인사 = 팔공산

 

 

 

 

 

 

●慶州 佛國寺 세계문화유산

토함산(745m)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불국사는 1,440년전  신라 법흥왕 22년에 그 어머니 뜻에 따라 나라의 안정과 백성의 평안을 위하여 세워졌으며, 그후 신라 경덕왕 (742-764)때 재상 김대성이 다시 지어 절의 면모을 새롭게 하였다.

 

1920년 이전에는 일부 건물과 탑만이 퇴락한 채 남아 있었으나 지속적인 원형복구 및 보수로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불국사는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

 

보존 국보

다보탑(국보 제20), 3층석탑(국보 제21),

연화교 ·칠보교 (국보 제22), 청운교 ·백운교(국보 제23),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

상륜부, 벼락 맞아 400년간 사라졌다 1970년 복원

고려 정종 때만 지진 세 차례 1966년 도굴로 탑 아래 훼손… 다보탑은 2008년에 보수

. 상륜부는 조선 선조 때인 1596년 벼락 피해를 입어 대부분 사라졌다가 400년 가까이 지난 후인 1970년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을 모델로 새로 만들어 끼워 넣었다. 1200년 넘는 세월을 건너오며 석가탑이 겪어야 했던 풍상(風霜)의 한 조각이다.

 

통일신라 최대 탑

아래에서 보는 느낌과 달리 석가탑은 거대하다. 높이는 10.8m. 웬만한 3~4층 건물 높이다. 1층 탑신 7.7t, 1층 옥개석 7.1t, 2층 옥개석 6t….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석탑인 만큼 부재 무게도 엄청나다.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을 통돌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탑 상륜부를 떠받치는 접시 모양 장식인 '노반(露盤)'도 500㎏이나 된다. 이 때문에 석가탑 해체·복원 작업은 탑 상륜부의 장식인 '복발(覆鉢)' 위쪽은 수작업으로 해체하지만, 아래쪽은 크레인을 동원해 해체하게 된다.

 

 

◇얼마나 훼손됐나

27일 현장에서 본 석가탑은 1층 탑신이 파괴되고, 상하층 기단 갑석(甲石)에 금이 가는 등 훼손 상태가 심각했다. 상륜부에서는 노반 모서리도 파손됐고, 꼭대기 보주는 금이 갔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석탑 내부를 채우고 있던 적심(자갈과 흙) 가운데 흙이 거의 빠져나왔기 때문에 각각 6~7t이 넘는 옥개석과 탑신의 무게를 못 견디고 탑 곳곳에 균열이 생기거나 파손됐다"고 설명했다. 연구소는 이 때문에 부분 보수 대신 탑 전체를 해체해 다시 조립하는 근본적 해결책을 택했다.

 

석가탑 아래 땅 속? - 석가탑 동쪽 측면에서 탐사한 전기비저항 단면도. 전기비저항탐사는 땅속에 전기를 흘려 전류 흐름에 저항하는 물질 특성을 측정, 땅속을 영상화시키는 방법. 석가탑 바로 아랫부분은‘다짐층’때문에 지하 4m까지 전기비저항도가 높게 나타났다

 

석가탑의 수난

석가탑은 그동안 지진과 벼락, 도난 때문에 훼손돼 대대적 보수를 거쳐야 했다. 1966년 석가탑 부분 보수 때 '석가탑 중수기(重修記)'가 나오기 전까지 수리를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중수기는 1024년과 1038년 두 차례 보수한 사실이 있다고 기록했다. 중수기에 따르면 1차 수리 후 10여년 만에 1038년 다시 보수하게 된 이유는 지진 때문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정종대에만 세 차례 지진이 경주를 덮쳤다고 썼다. 조선 중기인 1596년 벼락으로 상륜부가 파손됐다. 1916년 발행된 '조선고적도보'에는 상륜부가 없는 석가탑 사진이 실렸다. 1970년 석가탑 상륜부를 복원하기까지 머리 장식이 없는 세월을 400년 가까이 견뎌야 했다. 1966년에는 도굴꾼들의 손길까지 타서 탑 아랫부분 곳곳에 금이 가고 훼손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배병선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석가탑 해체 때 나온 부재들은 모두 재활용하고, 관람객들이 복원작업을 볼 수 있도록 공개해 문화재 교육의 장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한편 석가탑과 마주 보고 있는 다보탑(국보 20호)은 2008년 부분 해체·보수작업을 하며 부재 8점을 교체한 바 있다.

 

◇석가탑 용어

상륜부(相輪部). 옥개석 위쪽의 여러 장식물
노반(露盤). 탑 꼭대기 지붕 바로 위에서 상륜부를 받치는 돌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의 지붕돌
갑석(甲石). 기단 위에 덮는 뚜껑돌

 

○옛날의 불국사

 

1909년의 대웅전 모습

 

1914

 

1919-1 전경

 

1919-2

 

1919-3

 

1922년 일제가 복원한 광경

 

1924년 보수 광경

 

현재

 

 

 

 

 

 

 

 

 

 

 

 

만추

 

 

석굴암

 

 

 석가탑,다보탑

 

 

●불영사 - 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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