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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3/ 불교에 대하여2/ 절 사찰1 -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 최초의 불상 - 부끄러운 한국불교 - 2016.07.30 "외국인 스님은 장식품… 한국 불교 떠나겠다"

상림은내고향 2021. 11. 28. 17:41

종교 이야기3/ 불교에 대하여2 

■ 절 사찰1

불상을 모시고 승려들이 거주하면서 불도를 닦고 불교의 교법을 설하는 곳.

 

사원·사찰·가람(伽藍) 등이라고도 하며 우리말로는 절이라고 한다. 절[寺]의 어원은 상가람마(Sa○-ghā-rā-ma)로서, 교단을 구성하는 출가한 남자[比丘]와 출가한 여자[比丘尼], 재가(在家)의 남자신도[淸信男]와 여자신도[淸信女]의 사중(四衆)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한역(漢譯)하여 승가람마(僧伽藍摩)라 하였고, 줄여서 가람이라 표기하게 된 것이다.

 

석가모니의 전도(傳道) 초기인 기원전 6세기 무렵의 인도 승려들은 무소유를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정한 거주지가 없었다. 그들은 독신생활을 지키면서 걸식으로 수도생활을 영위하였다. 다른 종교의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숲속의 동굴이나 큰 나무 아래서 좌선하거나 유행(遊行)을 통하여 불법을 전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도 기후의 특성 때문에 우기에는 이와 같은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어, 외출보다는 한곳에 모여 정진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원시불전(原始佛典)에 속하는 ≪사분율 四分律≫의 기록처럼, 장마철에 외출한 불교수행인들이 질퍽해진 땅 위에 나온 벌레를 밟아 죽이게 되는 경우가 있어, 불살생(不殺生)의 계율관으로 볼 때 문제가 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는 우기를 피하려는 실리적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교단이 비대해지는 데 따른 화합의 필요성이라는 이념적 이유에서 우기의 석달 동안 바깥 출입을 삼가는 것을 규율로 정하게 되었다.

 

이 여름 석달 동안 출가자들이 한곳에 모여 적절한 공동생활을 하는 것을 안거(安居)라고 한다. 인도의 경우는 여름철만 안거에 해당하지만 중국·한국 등 북방성 기후의 국가에는 겨울철에도 석달의 안거기한이 있다.

 

안거를 하게 될 때 가장 필요한 일은 규율을 정하는 것과 공동으로 생활할 장소를 마련하는 일이다. 규율을 정하는 일은 부처님이 직접 제정하였지만 장소를 마련하는 일은 경제력 있는 신도들의 시주에 의지해야만 하였다. 이에 불교신도들은 부처님과 승려들이 한곳에 모여 안거할 장소를 자발적으로 마련하게 된 것이다.

 

불교의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집단거주의 장소는 죽림정사(竹林精舍)와, 수닷타(Sudatta)라는 장자(長者)가 온 산을 온통 금으로 덮어서 마련하였다는 일화가 전해 오는 기원정사(祈園精舍) 등이 있다.

 

이들 정사는 안거를 지내기 위한 실제적인 목적에 의하여 생긴 것으로, 불교교단의 공동재산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생겨난 당시의 절은 단순한 공동주거지의 성격을 띠었으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차 종교의례를 집행하는 성소(聖所)로서 그 성격이 승화되었다.

 

석가모니 당시의 불교의례였던 포살(布薩)·자자(自恣)·가치나(迦絺那) 등, 주로 자신의 허물을 대중 앞에서 참회하는 형식으로 된 이들 의례가 적어도 보름에 한 번씩 행하도록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모임의 근거지가 되었던 절은 규모나 숫자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대승불교가 일어나는 기원 전후에는 불탑(佛塔)의 건립이 유행하여 새로운 사찰기능을 갖게 된다. 특히 조형문화예술품 등 불교건축의 찬연한 전통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절은 그 목적과 지역적 여건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 성격으로 나누어졌다.

첫째는 일반적인 의미의 절이다. 이는 정사라고도 하는데, 주로 승려들의 공동주거지와 법회의식의 집행처로 사용된다. 인도에서는 이것을 비하라(vihara)라고 한다.

 

둘째는 전루(殿樓)로서, 넓은 형식의 누각을 가리킨다. 이것은 특히 인도나 동남아시아 불교사원에 많은데, 12세기 후반에는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첨탑(尖塔)의 양식으로 변모하게 된다.

 

셋째는 굴원(窟院)으로서, 자연 또는 인공으로 석굴을 파고 수도하는 도량이다. 엄밀한 의미로는 이 가운데에서 정사와 굴원만이 불교사원의 효시가 된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 나라의 경우 전루는 정사에 포함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시대가 흐를수록 대건축군(大建築群), 조직화된 승원(僧院)으로 발전하게 되며, 인도의 나란다(Nālandā), 인도지나(지금의 캄푸치아)의 앙코르와트(AngKor Wat), 우리 나라의 총림(叢林) 등 대본산(大本山)이 그 대표적 실례가 될 수 있다.

 

석굴군(石窟群)으로 널리 알려진 곳은 아잔타(Ajanta)·엘로라(Ell○ra) 등이 있으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3세기의 유지(遺址)도 있다. 이들 대규모의 석굴사원이 중국의 경우에는 운강(雲岡)석굴, 천룡산석굴 등으로 발전하였으며,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석굴암이 그 대표적 예이다.

 

중국에서는 승려들이 모여 사는 곳을 사원(寺院)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한(漢)나라 때 외국에서 온 사신들을 맞이하여 접대하고 머물게 하는 곳을 사(寺)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즉, 한나라 때 이역(異域)의 불교승려들이 처음 중국을 방문하였을 당시, 홍로사(鴻臚寺)라는 관청에 그들을 머물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국에서는 승려들이 머무는 곳을 ‘ㅇㅇ寺’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중국에 불교가 최초로 도입된 것은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때인 67년이다. 가섭마(伽葉摩)·축법란(竺法蘭) 등이 불상과 경문을 싣고 중인도에서 뤄양(洛陽)으로 들어오자, 명제는 크게 환영하여 뤄양성의 서옹문 밖에 정사를 지어 거주하게 하였다. 이 절의 이름을 백마사(百馬寺)라 하였으며, 이것이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이었다.

 

원래 사원이라 할 때의 ‘원(院)’은 회랑이나 담장을 둘러친 ‘원(園)’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당나라 때에는 ‘사(寺)’와 ‘원’을 같은 의미로 보았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는 ‘사’를 ‘원’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즉, ‘사’는 절 전체를 가리키며, ‘원’은 ‘사’ 가운데에 있는 별사(別舍)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암(庵)’은 흔히 산속에 있는 작은 집·토굴 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간혹 토굴 등 수행처를 수(藪)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원을 ‘절’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몇 가지의 설이 있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해질 때, 아도(阿道)는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善山郡)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것이 우리말로는 ‘털레의 집’이 되어, 그 ‘털’이 ‘덜→절’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속설로는 절을 많이 하는 곳이라고 해서 ‘절’로 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일본에서는 절을 ‘데라’라고 하는데, 팔리어(Pali語) 테라(Thera)에서 왔다는 설과 ‘털레의 집’에서 연유된 것이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보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테라는 장로(長老)를 뜻하기 때문에 큰스님이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요약하면, 절은 불상과 당탑(堂塔)을 모시고 승려들이 거주하면서 불도를 수행하고 교법을 가르쳐 펴는 기능을 가진 집이다. 지역과 기후에 따라 그와 같은 기능을 원만히 수행하기 위한 변형이 있을 뿐, 본질적인 면에서 정사·가람·사원·절은 모두 같은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절은 고구려에 불교가 도입된 이후 375년(소수림왕 5)에 세워진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이다(『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373년에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음). 신라의 경우에는 아도가 선산지방에서 최초의 포교활동을 한 모례의 집을 들 수 있으나, 공식적인 최초의 절은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빚은 천경림(天鏡林)의 흥륜사(興輪寺)를 효시로 보고 있다.

 

이 흥륜사지는 오릉(五陵) 곁의 절터로 추정되었으나, 현재는 이곳이 영묘사(靈妙寺)이고, 영묘사 터가 흥륜사일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고대 우리나라의 절은 주로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시 중심지에 건립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시대 상황과 사회적 여건에 따라 절에 따라서는 수행 또는 포교에 역점을 두는 특수성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에 의한 입지조건에 따라서 서로 다른 특징적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기능별로 볼 때 우리 나라의 절은 대략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평지가람형(平地伽藍型)이다. 그것은 수도를 중심으로 하여 넓은 사역(寺域)에 걸쳐 장엄한 건축물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왕실의 원당(願堂)이나 국찰(國刹) 등이 많고, 동시에 교통의 편리함 때문에 대중적 불교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둘째는 심산유곡에 자리잡은 산지가람형(山地伽藍型)이다. 이것은 신라 말엽에 들어 온 선종(禪宗)의 영향과 풍수지리에 의거하여 주로 수행생활에 적합하도록 설계된 특징을 지녔다. 이와 같은 사원은 현재까지도 수도도량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셋째는 천연이나 인공의 석굴에 사원을 건립하는 석굴가람형(石窟伽藍型)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암벽을 뚫어서 만들거나 석재로 지어서 거주장소나 법당을 세우게 되는데, 주로 기도도량의 기능을 지닌다.

 

그러나 이것은 입지조건에 따른 성격별 분류이고, 각각의 절은 모두 전문 수행인과 일반 수행인을 위한 기능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즉 그 사찰의 특성에 따라 참선·염불·간경(看經)·기도 등 특정한 불교신행을 집전하는 곳이 된다.

 

우리나라 불교의 전문수행은 주로 현교(顯敎)·밀교(密敎)·참선(參禪)·염불(念佛)의 네 가지로 분류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절은 이 네 가지의 분류에 의하여 수행하는 전문도량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교사찰은 주로 불교의 교리를 공부한다는 뜻으로서 강원(講院)을 갖추게 된다. 밀교사찰은 주문을 중심으로 수행하면서 만다라(曼茶羅)의 구조에 따라 독특한 불상 및 형태를 갖추며, 참선도량은 선원(禪院)을, 염불도량은 왕생극락(往生極樂)을 염하는 염불당을 갖추게 된다. 이 네 가지 외에도 청정한 몸과 마음을 가꾸는 율원(律院)을 갖춘 도량도 있다.

 

우리나라의 절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수행도량을 모두 갖춘 곳도 있고, 한두 가지만을 전문적으로 닦는 곳도 있다. 특히, 선원과 강원·율원을 모두 개설한 절을 총림(叢林)이라고 부르며, 대표적인 예로는 해인사·송광사·통도사·수덕사 등이 있다.

 

또 불교의 삼보(三寶: 佛·法·僧)를 사찰에 대비하여 비유하기도 한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는 점에서 불보(佛寶)사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판을 보존했다고 하여 법보(法寶)사찰, 송광사는 지눌(知訥) 이래 16국사를 배출했다고 하여 승보(僧寶) 사찰로 존숭받고 있다.

 

우리나라 절이 주로 산지가람형인 까닭은 몇 가지 사상적인 특색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는 한국인의 산악숭배 경향이다. 명산의 봉우리마다 불보살(佛菩薩)의 명호가 붙여지고 그곳을 골라 절터로 잡는 것은, 우리 고유의 산악숭배사상이 불교로 흡수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금강산 법기보살(法起菩薩)에 관한 신앙과 풍수지리 등 도참설(圖讖說)의 영향으로, 마침내 이 땅을 불국토(佛國土)라고 믿는 독특한 사상을 낳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는 실리적인 호국호법(護國護法)의 의지를 들 수 있다. 즉, 일본과 경계선이었던 동래에 범어사를 세우고 토함산에 불국사와 석불사(石佛寺, 현재 석굴암)를 창건한 것이나, 백제와 국경을 접하는 지리산·태백산 등에 절을 건립한 것은 조국 수호의 강인한 의지가 불력(佛力)으로 승화되는 사상성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셋째는 초세속주의(超世俗主義)의 경향 때문이다. 즉, 불법을 세속의 계도(啓導)라는 입장에서 받아 들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탈속의 경지가 존중되었고, 나아가서는 자연주의적 고대 불교의 인간관이 절을 자연과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산속에 건립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1) 당우(堂宇)

절은 수도하는 곳, 즉 불교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올바로 수립하며 그 진리를 널리 선양하고 구현하는 곳이다. 따라서 절은 수행과 교육과 포교의 세 가지 기능을 발전시켜 왔다.

 

이 세 기능을 보다 훌륭하게 충족시키기 위해서 절에는 예배의 대상인 불상이나 당탑이 가장 핵심 구조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불교의 발전과 함께 여러 종파가 생겨나고 그들이 의거하는 경전·교리 등에 차이가 남에 따라, 예배의 대상인 주존불(主尊佛)이 달라지기도 하였다.

 

불상이 조성된 것은 간다라예술이 발전하는 기원전 3세기 이후이며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4세기경에 처음 불상이 출현한다. 예컨대, 화엄종 사원에서는 비로자나불과 대적광전(大寂光殿), 정토종에서는 아미타불과 극락전, 천태종에서는 석가모니불과 대웅전 등의 건립 조성이 필수적인 것이 된다.

 

이와 같이 각기 다른 건축물을 갖추지만 그 기본에서는 우리 나라 절의 구성을 흔히 칠당가람(七堂伽藍)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칠당가람은 불전·강당·승당·주고·욕실·동사·산문의 일곱 가지이다.

 

① 불전(佛殿): 본존불(本尊佛) 및 보살·호법신중(護法神衆) 등을 봉안하는 사원의 중심 건물이다. 인도에서는 부처님을 금빛 나는 분이라는 뜻에서 금인(金人)이라고 하는데, 거기에서 파생되어 부처님을 모신 집을 금당(金堂)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절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많은 불전들이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불전이다. 대광명전(大光明殿)은 비로전(毘盧殿) 또는 대적광전이라고도 하는데, 본존불로는 비로자나불을,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할 경우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이나 석가모니불을 함께 모신다. 극락전은 미타전(彌陀殿) 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하며 아미타불을 모신다.

 

미륵전(彌勒殿)은 용화전(龍華殿)이라고도 하는데, 미래불인 미륵불 또는 미륵보살을 모신다. 약사전(藥師殿)은 약사여래를 봉안하며, 팔상전(八相殿)은 부처님의 일생을 팔상으로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을, 응진전(應眞殿)은 부처님의 제자들인 십육나한(十六羅漢)을, 나한전(羅漢殿)은 부처님의 오백제자인 오백나한을 모신다.

 

관세음보살을 절의 주존불로 모실 때에는 원통전(圓通殿)이라 하며, 부속되는 불전 속에 관세음보살을 모실 때에는 보통 관음전이라 한다. 문수전(文殊殿)은 지혜 제일의 문수보살을 모시고, 명부전(冥府殿)은 지장보살과 지옥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의 그림을 모신 전각이다.

 

칠성각(七星閣)은 북두칠성을, 산신각(山神閣)은 토속적인 산신을 호랑이와 함께 그려서 모시며, 독성각(獨聖閣)은 말세 중생에게 복을 베푸는 나반존자를 봉안하게 된다. 산신각이나 칠성각은 불교신앙과는 직접 관련이 없지만, 이들 도교(道敎)신앙이 불교로 흡수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면에서 흥미로운 배치이다.

 

② 강당(講堂): 설법이나 법요의식(法要儀式) 등을 행하는 당우로서, 조선시대 선종에서는 법당(法堂)이라고 불렀다. 인도에서는 이 강당과 포살당(布薩堂)을 구분하여 지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특별히 별도의 건물을 짓지는 않았다. 다만, 강당 등에서 이와 같은 포살의식을 집행할 때에는 그 건물을 설계당(說戒堂)이라고 불렀다.

 

③ 승당(僧堂): 승려들이 좌선, 정진하는 곳이다. 후에는 승려들이 거처하는 곳인 승방(僧房)과 구별하기 위해서 참선하는 방이나 집을 선방(禪房)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④ 주고(廚庫): 공양(供養)을 마련하는 부엌과 창고 등 절의 살림을 경영하는 곳이며, 후원(後院)이라고도 한다.

 

⑤ 욕실: 목욕하는 곳이다.

 

⑥ 동사(東司): 측옥(厠屋) 혹은 해우소(解憂所)라고도 하는 변소이다.

 

⑦ 산문(山門): 사원의 입구에 있는 문으로서, 총문(總門) 또는 삼문(三門)이라고도 한다. 삼문이란 절 경계문인 산문, 큰문인 대문, 예배장소로 들어가는 중문의 셋을 가리킨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체로 일주문(一柱門)·천왕문(天王門)·불이문(不二門) 또는 문루(門樓)의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밖에도 불경을 보관하는 장소로 경장(經藏)이라고도 하는 장경각(藏經閣)과, 불교의식의 기본 법구인 종·북·운판(雲板)·목어(木魚)를 봉안하는 종각(鐘閣) 또는 고각(鼓閣)이 있다.

 

그리고 그 절과 인연이 있는 고승석덕(高僧碩德)들의 초상화를 봉안하는 영각(影閣)이 있는데, 따로 지을 때도 있고 고승이 거처하였던 방을 영각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또, 여러 승려들의 초상화를 함께 모시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주로 조사당(祖師堂)이라 한다.

 

칠당의 배치는 대체로 북쪽에서부터 남쪽에 이르며, 이러한 직선의 배열은 주로 인체에 결부시켜 생각하는 전통적 관습도 있다.

 

(2) 가람 배치

절에서 가장 중요한 구조물은 당우와 탑이다. 특히, 탑은 불상보다도 건립시기가 빠른 것으로서, 인도에서는 이미 서기전 2세기부터 건립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불교 도입 초기부터 탑 건립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신라 말부터 특히 산지가람에서는 간혹 탑을 조성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으며, 고려 이후 조선시대에는 드물기는 하나 탑이 절의 외곽지대로 밀려가거나 건립되지 않는 경우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 절에서 탑과 불전은 가장 기본적인 구조물이므로, 우리나라의 가람 배치를 논할 때에는 탑의 배치 형식에 기준을 두고 있다. 즉, 탑이 불전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으면 일탑식(一塔式) 가람 배치, 두 탑이 불전 앞 동서로 대칭하여 세워지면 쌍탑식 가람 배치, 탑이 하나에 금당이 셋일 경우에는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 가람 배치라 한다. 이는 탑과 불전 중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느냐 하는 차이점에서 생겨난 가람 배치이다.

 

탑이 예배의 주 대상이 될 때에는 일탑식으로 배치하였고, 불상이 주된 예배대상으로 될 때에는 쌍탑식 가람 배치를 취하였다. 우리나라의 사원은 불전 중심으로 된 가람 배치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사리신앙(舍利信仰)이 열렬하였기 때문에 탑에 대한 숭배도 매우 컸다. 따라서, 양자를 동시에 숭배하는 가람 배치법이 우리 나라 가람 배치의 골격을 이루면서 발전되어 왔다.

 

가람 배치는 크게 나누어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탑원(塔院)·금당원(金堂院)·승원 등이 함께 있는 복합형식과 탑이 있는 예배원(禮拜院)과 승원의 복합형식, 그리고 탑이 없는 예배원과 승원의 복합형식이다.

 

첫째, 탑원·금당원·승원의 복합 배치형식은 탑을 모신 지역과 불상을 모신 곳, 승려들이 거주하는 지역 등이 담장에 의해서 엄격하게 나누어진 형태를 가리킨다. 이른바 일탑가람식으로서 탑과 금당을 병립시키는 형식이다. 따라서, 사상적으로는 탑신앙과 불상신앙이 동등한 비중으로 생각되는 가람의 경영 형태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경주암곡(暗谷)의 고선사지(高仙寺址)가 대표적인 예로서, 삼층석탑을 해체 이전할 때에 사리함과 불상 등이 발견된 바 있다. 보문단지 조성으로 그 절터는 수몰되었고 삼층석탑은 경주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사리의 발굴 결과 이곳에는 탑원·금당원·승원 등이 엄격히 분리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삼국 통일 이전에 이와 같은 양식이 유행하였을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경주낭산(狼山)의 황복사지(皇福寺址)도 이와 같은 유형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둘째, 탑이 있는 예배원과 승원의 복합 배치형식은 탑과 금당, 또는 탑과 금당·강당 등이 회랑(廻廊)으로 둘러싸인 예배원과 기타 부속건물이 있는 승원으로 나누어진 배치 형식이다. 그러나 예배원 안에도 탑과 불적이 여럿 있는 경우와 하나씩만 있는 경우 등 다양한 가람 배치가 있다. 일탑일금당의 형식은 문경 봉암사(鳳巖寺), 이탑일금당은 불국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일탑다불전(一塔多佛殿)은 한 예배원 안에 불전이 여럿 있는 경우로서, 경주황룡사지(皇龍寺址)가 가장 대표적인 배치이다. 이 밖에도 이탑다불전과 다탑다불전 등의 유형이 있는데, 전자의 경우로는 익산미륵사지(彌勒寺址), 후자의 경우로는 보령성주사지(聖住寺址)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예배원 안에 여러 건물들이 복합적으로 배치될 때에는 금당과 탑이 주로 관음전·비로전·영산전 등의 독립된 불전들과 복합형식을 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들 예배원은 중문을 중앙에 두고 좌우로 종루(鐘樓)와 고루(鼓樓)·탑·석등(石燈)·금당·강당 등을 입지조건에 맞게 배치하며, 이들을 연결하는 회랑을 두르는 것이 일반적으로 지켜져 온 배치 원칙이다. 이것은 신라시대까지 그대로 지켜 온 신라 가람의 전형이다.

 

그러나 고려 이후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산지사원(山地寺院)의 건립이 성행하게 되어 변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즉, 인왕문·천왕문 등을 배치하고, 탑과 주불전을 중심으로 하여 누각이나 기타 건물들을 그 둘레에 배열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평지사원의 경우에도 중앙의 핵심 건물과 탑 이외에는 많은 불전들을 나누어서 건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에 따라서는 이 불전들을 각기의 군(群)으로 묶어서 관리하기도 하는데, 통도사와 같은 경우가 대표적 실례이다. 통도사는 이를 세 단으로 나누어 각각 상로전(上爐殿)·중로전(中爐殿)·하로전(下爐殿)이라고 한다.

 

셋째, 탑이 없는 예배원과 승원의 복합 배치형식은 고려시대까지는 거의 발견할 수가 없다. 조선시대부터 탑 없는 사원의 건립도 있었는데, 이것은 둘째 방식에서 탑을 없앤 배치형식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예배원 안에 다양한 불전이 있어서 예배소의 구실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유형 외에도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가람 배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절이지만, 기본 배치는 이 세 가지 유형에서 파생되어 조금씩 변형시키거나 편의에 맞게 개조한 것이 대부분이다.

 

(3) 건축재료

불교건축물은 시대나 지역, 창건주의 기호 등에 따라 각기 다른 재료를 쓰고 있으며, 건물의 비중에 따라서도 재료의 선택이 달라진다. 대개 절의 건축물을 구성하는 기본 재료로서는 풀[草]·벽돌·기와·나무·돌·금속 등이 있다. 초가[草屋]는 풀을 엮어 벽면을 만들고, 지붕에도 풀을 엮어 이는 형식을 취한다. 인도에서는 특히 하안거(夏安居) 때 애용되었으며,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깊은 산속에서 홀로 수행하는 수도자들에게 보편적으로 행해졌다.

 

나무집[木屋]은 신라시대에 유행했던 것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사찰건축물의 중심 재료가 되고 있다. 열대지방에서는 통나무를 엮어서 짓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나무를 잘라서 판잣집으로 짓는 경우가 많다. 소나무가 주종이지만, 간혹 잣나무 등을 목재로 쓰는 경우도 있다.

 

벽돌집[塼瓦室]은 중국 사원에서 유행한 수법이며,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유형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전탑(塼塔)이 유행하였던 시기가 있었던 만큼 벽돌로 지은 사원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돌집[石室]은 자연의 석굴사원과, 돌로 집을 짜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의 석질은 단단한 화강암 계통이 많기 때문에 인공적인 석굴보다는 자연동굴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석굴암은 돌을 짜서 집을 지은 대표적 실례이다.

 

또, 돌로 벽을 쌓고 지붕은 목조로 구축한 것도 있었다. 자연 석실을 이용한 경우로는 단석산(斷石山)이 있고, 인공의 경우는 고려시대의 것으로서 중원(中原)의 미륵당석굴(彌勒堂石窟)이 있다.

 

흙집[土屋]은 땅굴모양의 움막이나 흙으로 담벽을 만들고 지붕을 이은 것 등이 있다. 큰 절에서보다는 임시로 사용한 암자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절에는 필연적으로 상주대중(常住大衆)과 내집대중(來集大衆)이 있다. 우리나라 절의 큰방에는 이들 상호간의 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구분을 두는 것이 상례였다. 즉, 불상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왼쪽)은 청산(靑山)이라 하고 그 반대편을 백운(白雲)이라 한다. 청산에는 그 절에 상주하는 승려들이 자리를 잡고, 백운에는 수시로 모였다 흩어지는 방문객들이 자리를 잡게 된다.

 

사원생활은 그 자체가 수도의 표상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단위에서부터 대중들이 함께 하는 행사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규율과 질서가 있다. 따라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행위 등이 금지됨은 물론이며, 철저한 정숙이 요구된다.

 

승려로 입문한 이들이 통과해야 하는 첫번째 관문은 행자(行者) 교육이다. 1년 동안 불교의 기본교리·의례·기초경전 등을 공부하며, 그 이후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정식으로 승려생활에 입문하게 된다.

 

절에 있는 이들은 대략 맡은바 소임이 있는데, 행정 책임자를 주지(住持)라고 한다. 그 밑에 총무·교무·재무 등 삼직(三職)의 책임자를 두는 것이 통례이다. 절의 성격에 따라 선원인 경우에는 조실(祖室), 강원인 경우에는 강주(講主)·회주(會主)가 있다.

 

절의 살림살이를 맡은 이를 원주(院主)라 하고, 그 밑에 허드렛일을 맡은 이로서 공양주(供養主: 공양을 준비하는 승려)·부목(負木: 나무를 하고 불을 때는 승려)·채공(菜供: 반찬을 만드는 승려) 등이 있다.

 

우리나라 스님은 어느 절에 가든지 방부(榜付: 본인의 이름과 약력을 적은 기록표)를 드림으로써 그 절에 입실한 예의로 삼는다. 방부는 그 절의 행정 책임자나 상징적 책임자에게 드리는 것이 원칙이다.

 

방(榜)은 용상방(龍象榜)을 가리키며, 용상방 내의 한 소임을 맡음으로써 절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그 생활을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누구나 지켜야 할 것은 불제자로서의 신행 표현이다.

 

하루 일과 가운데 새벽 3시30분, 오후 6시 30분의 조석예불(朝夕禮佛), 법당에서의 헌향(獻香), 오전 11시에 행하는 마지의식(摩旨儀式:불전에 밥을 지어 올림)의 헌공(獻供), 그리고 예참(禮懺:참회의식) 등은 공동의 수행이다.

 

특히, 백장청규(百丈淸規: 중국의 백장이 지은 규칙)로서 이어오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一日不食).’라는 철칙을 잘 준수하고 있다. 그 밖에 운력(運力)이라 하여, 절의 큰 일이나 산림 가꾸기 등에는 그 절에 거주하는 모든 승려들이 참석하는 것이 상례이다.

 

사원생활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은 물론 행정 책임자인 주지나 상징적 대표격인 조실(祖室)이 집행하지만, 그 이외의 중요한 논의는 대중들이 함께 모인 대중공사(大衆公事)를 통하여 결정하고 집행한다. 특히, 절 내에 있는 강원·선원 등의 교육기관은 엄한 규율 아래에서 생활이 전개된다. 절의 기능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일은 수도이며, 그를 위한 승려의 교육은 필수적인 관건이 된다.

 

강원은 사미과(沙彌科)·사집과(四集科)·사교과(四敎科)·대교과(大敎科)를 기본 과정으로 삼고 있는데, 수료연한은 5년이 걸린다.

 

대교과까지 이수한 승려들은 수의과(隨意科)를 개설할 수 있다. 일반 승려들과 함께 강원의 학인(學人)들은 새벽 3시에 기상하여 4시에 예불, 6시에 조공(朝供), 7시부터 11시까지 오전 강의,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오후 강의를 받고, 저녁 9시에 취침한다.

 

선원의 수행은 안거의 시기에 행하는 것이 상례이다. 예불이 생략되면 다만 삼배(三拜) 드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오전 오후의 일과시간에는 주로 참선에 몰두하는데, 50분 좌선, 10분 경행(經行)을 하루 10시간 이상 계속한다.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선원은 간화(看話: 話頭를 가지고 참선하는 방법)에 의존하며, 선방의 규율을 담당하는 이를 입승(立繩)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사원의 운영은 오교구산(五敎九山) 혹은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체제로 유지되어 왔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을 반포함으로써 31본산제도(本山制度)를 확립하였다. 이 제도는 우리나라의 절을 지역별로 나누고, 그 각 본산 밑에 말사(末寺)를 두어 본산에서 말사들을 관장하는 제도였다. 말사로 등록된 당시의 사찰은 1,384개소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불교종단은 비구·대처(帶妻) 승단 간의 분쟁과 여러 신흥 불교종단의 출현으로 본산제도가 사실상 사원을 관장할 수 없게 되었다. 1962년 4월 12일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이 통합종단으로 출범하게 되면서 북한에 있는 사찰을 제외하고 25본산제도를 확립하였다. 행정적으로는 총무원(總務院)이 불교사업을 관장하며, 그 밑에 각급 본산이 자율로 사업을 관장하게 된 것이다.

 

25본사는 ① 직할교구 조계사(曹溪寺), ② 용주사(龍珠寺), ③ 신흥사(神興寺), ④ 월정사(月精寺), ⑤ 법주사(法住寺), ⑥ 마곡사(麻谷寺), ⑦ 수덕사(修德寺), ⑧ 직지사(直指寺), ⑨ 동화사(桐華寺), ⑩ 은해사(銀海寺), ⑪ 불국사(佛國寺), ⑫ 해인사(海印寺), ⑬ 쌍계사(雙磎寺), ⑭ 범어사(梵魚寺), ⑮ 통도사(通度寺), (16)고운사(孤雲寺), (17)금산사(金山寺), (18)백양사(白羊寺), (19)화엄사(華嚴寺), (20)선암사(仙巖寺), ㉑ 송광사(松廣寺), ㉒ 대흥사(大興寺), ㉓ 관음사(觀音寺), ㉔ 선운사(禪雲寺), ㉕ 봉선사(奉先寺)이다.

 

이 25본사에는 1,068개의 말사가 소속되어 있고, 각 사암(寺庵)에는 신도회(信徒會)가 조직되어 있다. 그들 신도단체의 횡적 연계를 맡은 본부가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이다.

 

최대 종단인 조계종 이외의 종단으로는 천태종·태고종·진각종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 불교의 해외포교는 1965년 이후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에 설치된 재일 홍법원(在日弘法院)을 비롯하여 1971년 홍콩에 홍콩 홍법원이 건립되었으며,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혜능사(惠能寺), 캘리포니아의 조계선당(曹溪禪堂), 버지니아의 일붕선원(一鵬禪院), 캐나다의 홍법원 등이 있다.

 

1974년에는 네팔 정부가 추진하는 룸비니(Lumbini)개발사업에 참여하여, 부처님의 성지(聖地)에 우리나라 사원을 건립할 계획을 추진중에 있다.

 

1982년에는 대만에 한국 홍법원을 건립함으로써, 현재 우리나라의 해외 홍법원은 미국·캐나다·일본·독일·스위스·프랑스·동남아시아·남미 등 12개국에 이르고 있다.

 

■ 절 - 사찰2

우리나라는 약 7할이 산이고 그 산에는 웬만하면 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방에 갔다가 절을 만나는 일은 아주 일상적인 일입니다. 외국친구들과 같이 지방에 관광 차 갔을 때 절을 건너뛰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경주에 가서 석굴암이나 불국사를 가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또 이 두 절은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세계적인 절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나, 우리 문화를 외국인들에게 소개하려 할 때 절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유산입니다.

 

‘불국사 일주문’의 모습. 

 

절의 모습이 화려한 이유

절은 물론 기능적으로는 승려들이 수행하고 신도들을 위해 의례를 지내주는 곳입니다. 그러나 절을 마디로 말한다면, ‘붓다 랜드’, 부처님 나라라고 있습니다. 한자말로는불국토이지요. 그래서 건물은 말할 없이 화려하게 꾸며놓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절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곳인데 그렇게 알록달록하게 단청을 해서 정신없게 만드냐고 말입니다. 그것은 절이란 부처님이 계신 장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은 인간 세상과는 비교도 되게 화려한 곳입니다. 이를테면 절은 극락과 같은 곳인데 사바세계와는 본질적으로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래 종교 건축은 이렇게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미는 법입니다. 서양의 교회나 이슬람 사원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웅장하고 호화롭게 짓지 않습니까? 이것은 신의 세계를 지상에 건설하고 신자들로 하여금 장엄함에 압도당해 종교심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것입니다.

 

한국 절의 기본 구조

그러면 한국 절의 기본 구조부터 볼까요? 우리나라의 가운데 통도사 해인사 같은 대규모 사찰들은 나름대로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지만 기본적인 면에서는 같은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절은 당간지주로부터 시작됩니다. 당간지주는 개의 기둥과 철로 통으로 되어 있는데 철통(당간) 기둥 사이에 넣어서 깃대 역할을 하게 합니다. 절에 행사가 있으면 당간 위에 깃발을 달아 신자들이 절을 찾을 있게 것입니다. 일종의 이정표인 셈이죠. 지금 절을 다녀보면 대부분 지주만 있는데 이것은 당간이 철로 만든 것이라 녹슬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보물 28호인 김제 금산사 당간지주. <출처 wikipedia(Steve46814)>

 

당간지주를 지나면 일주문이 나옵니다. 그대로 기둥이 줄로만 되어 있는 문입니다. 절의 영역, 그러니까 부처님 나라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일주라는 단어는 어려운 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해석되지만 일주는일심(One Mind 혹은 Cosmic Consciousness)’ 상징한다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우주가 가장 깊은 마음인 일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지요. 어려워졌는데 어떻든 문을 지나면 이제 속세하고는 이별입니다. 그러나 아직 부처님 세계에 것은 아니고 중간 단계에 있다고 있습니다. 절에 가보면 보통 일주문부터 가는 길에 시내가 흐르는 것을 발견할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것일 겁니다. 머리와 마음속에 있는 번뇌를 모두 시내에 흘려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만나게 부처님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걷다보면 문이 하나 나옵니다. 천왕문으로 안에는 험상궂게 생긴 명의 장수가 있지요? 이들은 사천왕으로 원래는 힌두교의 신이었는데 불교가 가져다 불교를 수호하는보디가드 만들었답니다. 그런데 천왕들을 보면 발로는 악귀들을 밟고 있고 인상마저 험악하지요? 자비의 종교인 불교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천왕들을 보면 불교가 인도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한국으로 전해졌다는 것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얼굴은 중앙 아시아인이고 옷은 중국 원나라 장수의 갑옷을 입었으며 손에는 조선 검을 들고 있으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한국식으로 변용이 되어도 흔적은 남는 모양입니다

 

이제 진짜 붓다 랜드에 가까이 왔습니다. 부처님 땅의 입구에는 문이 있습니다. 문은 보통 불이문(不二門)이라 불리는데 문을 넘어서면 대웅전 마당이 됩니다. 이곳이 바로 붓다가 주석하고 있는 부처님 나라입니다. 불이문은 이름의 의미가 일주문보다 어렵습니다. 직역하면둘이 아니다라는 것인데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우주와 나는 둘이 아니다정도로 보면 되겠습니다. 인간과 우주는 하나인데 인간이 자꾸 분리해서 욕심을 가지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이렇게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당에는 보통 탑과 석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웅전 안에는 실제의 붓다가 앉아 있습니다. 탑은 붓다의 유골을 간직하고 있는 무덤과 같은 것이라고 했지요? 그런가 하면 역시 상징성이 풍부합니다. 등으로 어두운 사바세계를 비춘다고 해도 되고 무명에 덮여 있는 마음을 비춘다고 해도 됩니다. 전체 영역이 부처님 나라라면 법당 안은 붓다가 거하고 있는 궁전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불상 위를 보면닫집이라 해서 집이 하나 있지요? 집이야말로 붓다가 거주하는 집이 되는 것이죠. 불교 신자들은 붓다의 궁전으로 들어와 그를 예배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법당 안은 예배공간이 되는 셈입니다.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에 위치한 보물 제292호 부안 개암사 대웅전.

 

여기까지가 절의 가장 기본 되는 건물들입니다. 보통 이런 요소들을 갖추고 있으면 절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암자라는 것을 많이 들어보셨죠? 암자는 작은 절이라 절과 같은 구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예배 공간과 승려들의 숙소만 있지요. 그러니까 일주문이니 천왕문이니 하는 것들이 없고 역시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석굴암은 암자가 아니라 절을 뜻하는 석굴 불러야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작지만 절의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밖의 건물들

절에는 건물들 외에도 건물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요사채라 불리는 승려들의 숙소가 없어서는 되겠죠. 한국의 절에는 법당에 버금가게 인기가 있는 건물이 있는데 그것은 삼성각입니다. 3인의 성인을 모셨다고 하는데 중에 둘이 한국적인 신입니다. 가운데 항상 호랑이를 대동하고 있는 할아버지는 산신이고 그냥 혼자 있는 분은 칠성신이라 보면 됩니다. 신은 한국 고유의 신으로 언제부터 절에서 모시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대체로 고려 말로 추정합니다. 원래 불교는 포용력이 강한 종교라 자기 종교의 신이 아닌 신들도 이렇게 포섭합니다. 아마도 이런 토착신들에게 익숙해 있을 한국 불교도들을 절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런 신들을 모시게 것일 겁니다.

 

▲나무를 깎아 잉어 모양으로 만들고 속을 파 내고 그 속을 두드려 소리를 내는 불구(佛具)인 목어. 

 

이외에도 죽은 이들을 천도하는 명부전이 있고 관음보살 같은 인기 있는 보살을 모시는 관음전이 있는 것처럼 안에는 수없이 다양한 건물들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사물을 보관하고 있는 범종루도 잊어서는 되겠습니다. 건물 안에는 땅과 지하, 물과 하늘에 살고 있는 수없이 다양한 생명들에게 불음을 전하는 종과 북과 목어(나무 물고기), 운판(구름판) 있습니다. 이제 정도의 정보면 어떤 외국 친구에게도 절에 대해 쉽게 설명해줄 있을 겁니다.

 

사진그림 최준식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였다. 한국문화와 인간의식 발달에 관심이 많으며 대표저서로는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등이 있다.

 

■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 영광군 법성면 법성포

 

 

 

 

 

 

 

 

 

 

 

 

 

 

 

 

 

 

 

 

 

 

 

 

 

 

 

 

 

 

 

 

 

 

 

 

 

■ 2012.04.25 최초의 불상

우전왕(優塡王)과 불상(佛像)

부처님께서 코삼미국에 계실 때였다. 무비(無比)라고 하는 처녀가 있었다.

 

그지 없이 아름다워 그 미모를 비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무비라는 이름을 얻었다. 아버지 마인제(摩因提)는 그러한 딸이 커다란 자랑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기 딸은 마땅히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마침, 코삼미국에서 오신 부처님을 본 마인제는, 부처님이야 말로 자기 딸의 남편르로 합당한 남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인제는 딸 무비를 데리고 부처님에게 무릎을 꿇고 사뢰었다.

 

“사문 고타마시여, 여기 있는 저의 딸 무비는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항상 옆에 두고 사랑 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유혹하지 말아라. 내가 보기에 그대의 딸은 조금도 아름답지가 않다. 머리 끝가지 말끝까지 아름다운 곳은 하나도 없구나. 어서 데리고 돌아가거라.

 

그 동안, 그만한 얼굴로 서서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던 무비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려 돌아갔다. 부처님으로부터 거절을 당한 마인제는 딸을 코삼미국의 우전왕에게 보였다. 무비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우전왕은 곧 그녀를 궁으로 데리고 가서 후궁을 삼았다. 무비는 부처님이 자기의 아름다움을 업신여긴 것을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부처님에 대해 나쁜 감정을 품게 되었다.

 

무비는 부처님을 존경하는 우전왕의 왕비를 해치므로 해서, 부처님에게 욕을 보이고자 여러 가지 계략을 꾸몄다. 무비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우전왕은 무비의 모함을 믿고 왕비를 활로 쏘아 죽이라고 명하였다. 왕궁의 뜰 복판에 왕비를 세워두고 백개의 화살을 쏘았다. 왕비는 자비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며 자기를 해치는 사람들을 한결같이 용서해 줄 것을 빌었다. 그러자 화살은 왕비를 세 번 돌고 왕의 발 앞에 와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왕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물었다.

 

“그대는 천녀(天女)인가? 아니면 용녀(龍女)인가? 아니면 나찰녀(羅刹女)인가?

 

왕비는 대답하였다.

 

“대왕이시여, 저는 천녀도 아니고, 용녀도 아니고, 나찰의 여자도 아닙니다. 저는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듣고 오계를 받아 어기지 않는 신도일 뿐입니다.

 

대왕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저는 지극한 자비심으로 대왕과 나를 해치려는 이들을 구제해 주도록 부처님께 기원했습니다. 대왕께서 저를 해치고자 하였으나, 저의 자비심에서 나온 기원 때문에 저는 상처도 입지 않았습니다. 대왕이시여, 지금 곧 부처님께 나아가 귀의하고 마음의 안정을 얻으십시오.

 

우전왕은 곧 부처님께 나아가 죄를 빌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이같이 말씀하시었다.

 

“대왕이여, 남자에게는 네 가지 나쁜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여자의 요사(妖邪)한 말을 듣고서 진실을 믿지 않고 거짓을 믿으며, 둘째는 아내를 보물과 같이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부모를 나쁘게 생각 하며, 셋째는 여색(女色)을 가까이 하면 설사 보시를 한다 해도 깨끗한 행이 끊기게 되며, 넷째는 음행에 빠지면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 남자의 나쁜 점입니다.

 

우전왕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서약한 다음, 삼귀계를 받았다.

 

이같이 해서 부처님께 귀의한 우전왕은 다섯 나라의 왕들이 모여 부처님을 찾아 갔을 때, 왕도(王道)에 대해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왕의 공덕과 과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대왕이여, 왕의 과실에는 열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왕위를 찬탈한 경우 종성(種姓)이 높지 않은 것이며, 둘째는 대신과 관리의 제약을 받아 자재하지 못하는 것이며, 셋째는 백성이 조그만 허물을 지어도 용서하지 않고 사납게 성을 내어 혹독하게 벌하는 포악함이며, 넷째는 신하들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고, 크게 성내어 관직을 빼앗고 재산을 몰수하고 처자를 빼앗는 것이며, 다섯째는 논공행상(論功行賞)에 인색한 것이며, 여섯째는 삿되고 아첨하는 말을 좋아하며, 랄로는 선한 정치를 한다 하면서 실제로는 바른 법에 의하지 않으며, 일곱째는 선왕의 법도에 따르지 않고, 정실인사(情實人事)를 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인과(因果)를 믿지 아니 하고, 본능에 따라 몸과 말과 뜻으로 악업을 짓고, 백성을 널리 구제하지 않고, 선법(善法)을 행하지 않는 것이며, 아홉째는 선()과 악(), ()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면 열째는 방종하고 방탕한 것입니다.

 

만약 국왕이 이 같은 열 가지 과실을 범하면, 아무리 많은 새물과 큰 군대를 가지고 있어도. 끝내는 백성과 신하의 신망을 잃고 재난에 닥쳤을 때 이기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대왕이여, 왕의 공덕에는 열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종성이 존귀함 이며, 둘째는 자재함이며, 셋째는 성질이 온화한 것이며, 넷째는 너그러운 것이며, 다섯째는 논공행상이 분명하고 두터운 것이며, 여섯째는 바른 말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일곱째는 선왕의 법에 비추어 신중하게 인사(人事)를 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선법(善法)을 행가는 것이며, 아홉째는 선과 악,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하는 것이며, 열째는 방종하지 않고 방탕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재물이 없고 대군이 없어도 오래지 않아 관민(官民)이 협동하여 산업에 힘써 나라는 저절로 풍요 해 질것입니다.

 

대왕이여, 만약 왕이 신하와 백성의 충성심과 성실함을 살피지 아니하고, 또 저마다의 능력을 살피지 아니하고서 정실에 따라 자리를 마련하고 정시에 끌려 녹을 정하면, 이는 나라의 힘을 쇠약하게 합니다. 또 왕이 신하와 백성들의 충성심과 성실함과 능력을 잘 살펴 적재적소에 사람을 쓰되 그에 맞는 녹을 주지 않으면, 이는 나라의 힘을 쇠약하게 합니다. 또 왕이 방일하여 나라의 일을 소홀히 하면 나라의 힘을 쇠약하게 하며, 국고를 지키지 아니하면 나라의 힘을 쇠약하게 하며, 선법을 닦지 아니하고 악법을 행하면 나라의 힘은 쇠약하게 합니다.

 

우전왕과 다른 네 나라의 왕들도 부처님의 말씀을 깊이 간직하여 행할 것을 다짐하고 돌아갔다. 이 때, 우전왕은 부처님께 코삼미국으로 오시어 머물러 주실 것을 청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코삼미국으로 오시어 머물러 주실 것을 청하였다. 부처님 께서는 이를 허락하시고 코삼미국으로 가시었다.

 

코삼미국에 머무르시는 동안, 우진왕은 매일같이 부처님과 그 제자들에게 공양하며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며 기쁨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부처님 께서는 33()에 계시는 어머니 야마부인에게 설법하기 위하여 잠시 코삼미국을 떠나시었다. 곧 돌아오시리라 생각했던 부처님께서 돌아오시지 않자, 우전왕은 근심이 되어 병을 얻어다. 여러 가지로 치료를 하였으나 우전왕의 병은 낫지 않았다. 신하들은 왕의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을 상의한 끝에, 왕의 병은 부처님을 뵙지 못해서 난 병이므로 불상을 조성해서 옆에 모시고 뵙도록 하면 왕의 병이 나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신하들은 왕의 허락을 받아 우두산(牛頭山)에서 나는 가장 훌륭한 전단향(旃檀香)의 나무로 높이 다섯 자의 불상을 조성 하였다.

 

완성된 불상을 보자 우전왕의 병은 곧 씻은 듯이 나았다.

 

이렇게 해서 최초의 불상이 조성되었다.

 

한편, 파사익 왕은 우진왕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붉은 황금으로 높이 다섯 자의 불상을 조성하였다. 이것이 두번째 불상의 탄생이었다.

출처: 책 박경훈의 【부처님의 생애】

 

■ 2016년 07월 04일 승가와 스님

엄주엽 문화부 선임기자

 

승가(僧伽)는 붓다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뒤 5명의 비구를 상대로 첫 설법을 했을 때 성립됐다. 조계종출판사에서 최근 출간한 자현 스님의 ‘스님의 비밀’에 보면, 승가란 한 사람의 승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지향한 수행공동체를 통칭한다고 돼 있다. 붓다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의 ‘무리’라는 뜻으로 ‘중’()이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여기서 불교 수행자를 가리키는 ‘중’이란 말이 나왔다. 유래를 살펴보면 ‘중’이 더 적합성이 높다고 볼 수도 있다.

 

초기 승가의 구성원은 모두 평등했으며, 합리적인 규율에 따랐다. 불교의 율장에는 의식주 생활부터 몸가짐 하나하나, 심지어 성()의 문제까지 너무 세세하다 싶게 규정해 놓았는데, 이를 통해 초기불교 시대에 승가의 규율이 얼마나 엄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절대신()을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는 붓다()와 그의 가르침(), 그의 제자들의 공동체인 승가()가 불자들의 영원한 귀의처(歸依處)이다.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을 막론하고 불교가 있는 곳에서는 이 세 가지(삼보·三寶)를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 불자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왔다.

 

승가라는 말은 고대 인도 지역어인 산스크리트의 ‘상가(sangha)’에서 왔다. 중국에서 ‘승가’로 음역했고, 보통 ‘승’으로 줄여 불렀다. 그런데 ‘승’은 보통 스님을 가리키기도 했다. 여기서 혼선이 생긴 걸까. 최근 조계종에서 ‘승가’와 ‘스님’을 구분하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달 조계종의 국회 격인 중앙종회에서 우리말로 번역한 삼귀의(三歸依)를 최종 확정했는데, 여기서 ‘귀의승(歸依僧)’ 부분을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로 통과시켰다. 앞서 ‘찬불가’에서도 이처럼 사용돼 문제 제기가 있었다. 

 

이 문제를 몇 차례 제기한 허정 스님은 ‘승가’라는 공동체에 귀의하는 것인데 개인인 ‘스님들’에게 귀의한다고 하면 불교의 첫걸음부터 잘못 가르치게 된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승가가 줄어 승이 되고, 한국 불교에서 승을 높여 부르려다 보니 ‘승+님’에서 ‘스님’으로 되면서 승가라는 단어의 본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됐다는 설명이다.

 

불교에서 ‘승가는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승가’ 대신 ‘스님들’을 대입하면 ‘스님들은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는 어색한 말이 된다. 그러므로 ‘승가=스님들’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교학자들 중엔 이런 오역이 비구·비구니뿐 아니라 남녀 신도까지 포함하는 수행공동체로서 승가의 열려 있는 개념과 가능성을 스님들만의 것으로 축소하려는 횡포라고까지 비판하며, 승가의 엄밀한 재해석을 요구하기도 한다. 번역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쪽에선 ‘스님들’은 복수로 공동체의 의미도 담고 있어 ‘승가’와 같은 뜻이라고 설명하지만, 논란을 잠재우긴 어려울 것 같다.

 

‘삼귀의’와 ‘찬불가’는 불자들이 예배할 때마다 함께 암송하는 조계종의 가장 중요한 의례로, ‘우리말 삼귀의’도 앞으로 전국 사찰에서 쓰이게 된다. 이에 대해 이견이 분분하다면 곤혹스러울 것 같다. 전문적인 논의나 사부대중의 공의를 모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문화일보

 

■ 한국의 산신, 산신각, 삼성각, 칠성각의 의미와 그 차이

혹시나 절에 산신각이나 삼성각, 칠성각이 있는 줄은 아십니까? 보통 그 절의 제일 뒤편 끝 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없는 절이 거의 없을 겁니다. 유명 대형사찰에도 있습니다. 의심나면 확인해보세요. 100% 장담합니다. 한국의 불교가 우리의 전통 샤머니즘과 도교와 결합된 전형적인 한 형태를 띠는 사당의 일종이지요.

 

▲변산 내소사에 있는 삼성각. 중앙에 칠성신과 양쪽에 산신,독성신이 있다.

 

한국에서 불교가 융성하게 된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가 한국의 샤머니즘 혹은 산신과 화합내지는 융화했다는 데 있습니다. 샤머니즘은 기본적으로 민간신앙이고 기복신앙입니다. 국가의 기본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통치이념으로는 부족하죠. 3~4세기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올 무렵, 부족국가에서 중앙국가로 넘어가면서 국가 기틀을 잡아야 하는 시기였죠.

 

▲울진의 유명 사찰인 불영사에 있는칠성각.

 

외래종교인 불교는 국가 지도자들의 이념과 이해관계와 꼭 맞아떨어졌습니다. 강력한 중앙집권을 유지할 수 있는 이념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하나의 종교로 통치할 수 있게 된 거죠. 이 때 불교는 불교만의 색채를 주장하지 않고 민간신앙을 흡수하는 불교로 조금은 변모하게 됩니다. 그 전형적인 형태로 남아있는 게 현재 절에 있는 산신각이나 섬성각, 칠성각이죠.

 

▲울진 불영사에는 산신각도 있다.

 

그러면 이 산신각과 삼성각, 칠성각은 무엇일까요?

 

대개 산악 지대에서 산신을 단독으로 모시거나, 지역의 영신과 함께 모시는 사당을 산신당이라고 합니다. 사찰에 있는 경우엔 산신각, 산령각, 삼성각, 칠성각 등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먼저 산신각의 경우엔 대개 독립적인 인물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등장인물이 한민족 시조인 단군, 박씨 시조인 박혁거세, 단종 등입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무형문화유산인 강릉단오제의 산신은 김유신 장군입니다. 그 외에도 이름이 파악되지 않은 승려 등이 많습니다. 우리 민족의 문화적 자부심을 갖기 위해서라도 민속학자들이 조속히 밝혀야 할 부분들이지요.

 

▲지리산 쌍계사에 있는 산신각.

 

그 다음으로 산신과 함께 모셔놓은 신령 중 가장 보편적인 신령이 독성입니다. 독성은 불교적으로 부처님의 도움 없이, 부처님 생전에 홀로 깨친 성자라는 뜻입니다. 독성은 더욱이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산신보다 훨씬 더 신비적이라고 보여지죠. 간혹 독성이 삼신각의 세 신령, 즉 산신과 칠성 가운데 있거나, 독립적인 사당에 모셔진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엔 또 독성각이라고 하죠.

 

▲쌍계사에 있는 불교와 도교의 결합을 잘 보여 탱화.

 

칠성각은 북두칠성 하나하나에 주요 상징적 의미를 담아 그린 탱화를 말합니다. 중앙에 대표 보살이 있고, 그 주변에 여섯 보살이 호위하고 있으며, 다시 이를 지키는 인물들이 여러 명이 등장하고 있죠. 한편으론 굉장히 난해한 그림입니다.

 

따라서 산신각은 단군이나 단종 등과 같이 산신 탱화 단독으로 모셔진 경우를 말하며, 삼성각은 단군과 독성, 칠성신 등 세 명의 신을 함께 모신 사당을 말합니다. 칠성각은 칠성신만 모신 경우를 말하겠죠.

 

▲쌍계사에 있는 불교와 도교의 결합에 대한 설명이다.

BY pichy91

 

■ 혜초의 여행 경로

 

■ 부끄러운 한국불교

2014-11-17  조계종 또 내분 이판 vs 사판

 

한국 불교 조계종의 상징적 인물인 송담(88) 스님이 지난 9 12일 조계종 종단 탈퇴를 선언한 뒤 조계종단이 들썩거리고 있다. 송담 스님은 인천 용화선원 원장이자 법보선원 이사장. 그는 당시 탈종 이유로 “조계종의 수행 가풍이 맞지 않다”고 말했다. 자승 총무원장이 이끄는 조계종이 수행집단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났고 더 이상 한국 불교를 대변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비판으로 해석됐다.
   
   
송담의 탈종 선언에서 두 달이 지나면서 조계종 안팎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비구, 비구니와 함께 사대부중의 한 축을 담당하는 재가불자들이 송담 스님의 종단 탈퇴 선언 원인이 종단의 부패에 있다면서 총무원을 겨냥한 집단행동에 나섰다. 재가불자연대는 12월 초 조계종 총무원의 개혁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연대 측은 조계사에서 3000여명의 신도가 참석, 종단 자정을 촉구할 계획이다.
   
   
‘청정한 바른 불교를 희망하는 재가불자들의 모임’(공동대표 우희종 서울대 수의대 면역학 교수, 김종규 참여불교재가연대 교단자정센터 원장, 김경호 지지협동조합 이사장)은 이에 앞서 지난 10 14일 선언문을 내고 “한국 불교의 정신적 스승인 송담 큰스님이 탈종 선언을 한 현실에 참담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면서 “수행 가풍이 맞지 않는다는 스님 말씀은 타락한 수행 풍토를 만든 정치승들을 척결하지 못한 종도들에 대한 뼈아픈 질책이자 준엄한 경책”이라고 주장했다. 공동선언문에 서명한 146명의 재가불자들은 “종단은 송담 스님의 승적을 즉각 회복하고 여법하게 모셔야 한다. 정치파벌은 모두 해체하고 출가초심 수행자의 본보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12 8일 동안거 시작에 맞춰 전국선원 수좌회 소속의 승려가 총무원이 있는 조계사에서 종단의 자정을 촉구하는 방안도 논의하고 있다.
   
   
조계종에는 행정승인 사판승이 있고 수행승(수좌승)인 이판승이 있다. 조계사에서 수행승들이 모여 종단 자정을 요구하며 동안거를 시작한다는 건, 종단 행정을 담당하는 사판승의 안방에서 이판승들이 무언의 시위를 전개하겠다는 것이다. 조계종 안팎에서는 이번 송담 스님 탈종과 뒤이은 재가불자들의 움직임을 이판승과 사판승의 대결구도로 보는 시각이 있다. 사판승의 대표인 종단 총무원장이 자승 스님이다. 자승 총무원장이 강력한 집권체제를 만들고 나서, 그간 성역으로 여겨졌던 이판승 주도의 특정 사찰 산하 재단들을 총무원의 영향력 아래로 두려 한 게 반발을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탈종한 송담 스님도 인천에 있는 재단법인 법보선원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법보선원은 관리·운영권을 두고 1930년대부터 총무원과 갈등을 겪어온 선학원(원장 법진·사무실은 조계사 인근 종로구 안국동에 있음)과 마찬가지로 이판승들이 주도해 왔다. 선학원은 이판승들의 총본산 같은 곳으로 전국에 500여개 사찰을 보유하고 있다.
   
   
재가불자들과 이판승들은 자승 총무원장을 중심으로 한 사판승들의 힘이 견제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는 점을 우려한다고 강조한다. 재가불자들 사이에선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쥔 승려들의 전횡이 커질까 우려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자승 총무원장은 송담 스님이 종단탈퇴를 선언한 뒤인 지난 10월 중앙종회 선거에서 압승, 자기 계파만으로도 종법 개정이 가능한 의석 수를 확보했다. 국회에 비유하면 개헌이 가능한 전체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확보했다. 80명의 중앙종회 의원 중 자승 원장의 계파인 ‘불교광장’ 소속 의원이 56명이다. 중앙종회의 야당 격인 종책모임 ‘삼화도량’(회장 영담스님) 15석가량을 얻는 데 그치며 선거에서 완패했다. 자승 총무원장은 보다 강력한 집권기반을 마련했고, 견제하고 균형을 유지해야 할 반대세력은 위세가 꺾였다.
   
   
중앙종회 의원 선거 초기만 해도 삼화도량 측은 장주 스님의 도박폭로 건을 재론하며 자승 총무원장의 직무정지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공세적 모습을 보였으나 선거 패배 이후에는 잠잠해졌다. 이번에 쌍계사 몫으로 서울 봉은사 전 주지였던 명진 스님이 중앙종회에 진출한 정도가 그나마 야당 측의 성과라면 성과다. 자승 원장과 대척점에 섰던 명진 스님이 중앙무대에서 집권세력을 얼마나 견제할지가 관심을 끄는 정도다.
   
   
현재 조계종단은 집권세력인 불교광장의 핵심 승려 200명 정도로 구성돼 있다. 조계종 소속 전체 승려는 14000여명. 전체 승려의 1.4% 정도인 총무원장 세력이 요직을 독점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재가불자연대는 이들이 주요 보직을 나눠 갖고 정부 보조금을 멋대로 사용한다고 비판한다.
   
   
지관 전 총무원장 시절 총무원장 종책특보로 일한 김영국 연경정책연구소장은 “조계종이 갈 데까지 갔다는 얘기를 듣는 데 자승 원장을 견제할 세력마저 마땅치 않다. 집권세력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게 재가불자들의 바람”이라고 말했다. 종단 쇄신을 책임지는 결사본부장 도법 스님에 대해서도 재가불자들은 “자정보다 집권세력의 방패가 되는 측면이 더 강하다. 종단 개혁을 위해 도법 스님이 총무원을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총무원 측은 송담 스님 탈종의 직접적 원인을 법인법 제정에 따른 이견 때문으로 보고 있다. 조계종 중앙종회는 지난해 ‘법인관리 및 지원에 관한 법’을 제정하고 각 사찰 산하의 재단을 총무원에 등록하도록 강제했다. 총무원 측은 불교계의 법인 현황 파악을 위한 법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조계종 내 200여개의 재단 중 절반은 “재단 운영의 자율성 침해”라며 반발하고 있다.
   
   
송담 스님이 주도해온 법보선원의 경우도 재단 형태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조계종단의 법인법에 따라 총무원에 관련 사무를 등록해야 한다. 하지만 법보선원은 총무원의 관리 아래에 놓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적원을 제출했다.
   
   
송담 스님의 탈종에는 25개 교구본사 중 하나인 용주사(경기도 화성 소재) 주지 선임을 둘러싼 갈등도 작용했다는 말이 나온다. 용주사의 경우 전통에 따라 선방 스님 중에서 위촉되어 왔다.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다른 교구본사의 주지직과는 다른 풍토다. 그런데 지난 8월 자승 총무원장 측과 가까운 성월 스님이 그동안의 관례를 깨고 주지 선거를 관철시켰고 당선됐다. 수행승의 가풍에 따라 주지가 임명되어온 관례가 깨지고 승려들을 상대로 한 선거전이 벌어진 것에 송담 스님과 제자들이 실망했다는 후문이다. 용주사 신임 주지 성월 스님이 말사인 수원사 주지를 교체하는 과정에서도 논란이 빚어졌다. 30여년 동안 수원사를 이끌어온 성관 스님이 주지 자리에서 해임되자 일부 신도들은 반대집회를 열며 반발했다. 수원사 신임 주지에는 자승 총무원장의 측근인 총무원 호법부장 출신의 세영 스님이 품신됐다.
   

▲ 송담 스님

 

이처럼 총무원이 중앙 통제를 강화하자 이에 반발, 송담 스님과 그의 제자들이 용주사에 탈종계를 제출했는데 결국 이판승의 세계에 사판승이 밀고 들어온 것을 경계한 움직임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김영국 연경정책연구소장은 “총무원의 중앙집권 강화정책이 이판승들이 지켜온 가풍과 충돌하게 됐다”며 “용주사 주지 선거에서도 금품이 오고갔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또 자질이 부족한 스님이 말사에 임명되면서 신도들이 반발했다”고 말했다.
   
   
실제 총무원이 제정한 법인법에 대해 반발하는 세력은 수행집단인 이판승 계열이다. 송담 스님이 이끌고 있는 법보선원과 수행 승려들의 본산 격인 선학원은 그동안 사판승이 통제하기 어려웠던 이판승들의 영역이었다. 전국에 500여개 사찰을 보유한 선학원의 경우 총무원이 독립 종단의 형태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서 향후 운영에 적극 관여할 것임을 시사한 바 있다. 이렇게 되자 선학원 측은 총무원에 재단 등록을 거부하고 임원진이 “조계종 종헌, 종법에 동의할 수 없음”을 이유로 제적원을 제출한 상태다. 이에 맞서 총무원은 지난 10월 초 선학원 이사장인 법진 스님에 대해 ‘종단 법통을 문란하게 한 죄’를 물어 멸빈(승적 발탈)을 결정했다.
   
   
현재 총무원은 법인관리법 시행을 둘러싼 갈등과 논란 확산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총무원 측은 “종단은 법인 운영에 관여할 법적 근거가 없고 관여할 이유도 없다. 법인의 이사 선임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는 해명서를 발표했다. 총무원은 조계종 인터넷 홈페이지에 ‘법인관리법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라는 코너를 만들어 메인 화면에 띄우기도 했다.
   
   
자승 총무원장은 송담 스님의 탈종 문제로 진퇴양난에 놓였다는 게 종단 안팎의 시각이다. 자승 총무원장은 송담 스님과 마찬가지로 25개 교구본찰 중 하나인 용주사 문중 출신이다. 특히 송담 스님은 자승 총무원장의 은사와 같은 반열에 있다. 송담 스님은 자승 총무원장의 은사인 정대스님의 사형이며 이에 따라 자승 총무원장은 송담의 조카 상좌인 셈이다.
   
   
자승 총무원장이 송담 스님의 탈종계를 수리하지 못하는 것도 선승의 법통을 잇는 문중의 어른이 종단을 떠나는 것을 방관할 경우 자신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스승과도 같은 문중의 어른을 처벌할 경우 전국 수좌승들의 반발에 직면할 게 자명하다. 이에 따라 자승 원장은 송담 스님의 탈종계를 반려하는 모습을 보이며 “송담 스님의 큰 뜻을 받들어 잘 모시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상태다. 총무원 기획국장인 남전 스님은 주간조선에 “송담 스님의 탈종계를 반납하고 우리가 어른을 조금 더 잘 모시겠다는 참회의 메시지를 전했다. 탈종의 문제를 재고해 주시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남전 스님은 재가불자들이 총무원의 자정을 촉구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늘 있어 왔던 얘기들 아니냐”고만 말했다.
   
   
조계종 총무원이 조용하게 송담 스님 탈종 사건을 매듭지으려고 하나 재가불자 단체들이 반발하고 나옴으로써 사태는 커질 전망이다. 행정승들이 명분에서 수행승에 밀리기 때문에 재가불자들을 통제하고 싶어도 잘 되지 않는다. 재가불자들은 “수행 위주의 승려들이 지켜온 가풍은, 종단을 혼탁하게 한 행정승들의 행태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재가불자연대는 송담 스님 탈종을 계기로 이판승과 사판승의 경계를 구분 짓는 방식으로 종단의 운영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재가불자연대 측은 “이판과 사판은 성격이 다르다. 지금 집권당이나 야당세력은 모두 사판인데, 누가 권력을 잡아도 비슷한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일탈이 수행을 하는 이판승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총무원의 권력이 비대해지면서 욕심이 커진 듯한데 이번 기회에 이판과 사판의 영역이 공존하는 형태로 종단의 운영방식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재가불자연대가 자승 원장을 압박하는 수단은 조계종 총무원 안팎에서 벌어진 부정과 비리 사건이다. 도박·횡령·뇌물 사건이 종단 내부에서 끊이질 않는 걸 대표적인 종단의 세속화로 꼽고 있다. 1999년 서울 강남의 해림도박사건이 대표적이다. 이후 일부 승려의 해외원정도박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고 2012년 백양사 인근에서 도박을 하던 조계종 주요 승려들의 동영상이 공개돼 큰 파장을 낳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장주 스님이 현 종단의 최고위층 인사와 도박을 했다면서 검찰에 자수하는 사건도 있었다. 종단 최고위 인사의 이름까지 거명된 장주 스님의 폭로 건에 대해 검찰의 수사는 지지부진했고 이를 공개했던 장주 스님이 오히려 멸빈당했다.
   
   
배임·횡령 사건도 잊을 만하면 발생한다. 2009년 충남 공주 마곡사 범용 전 주지스님이 배임수재 혐의로 법정구속된 바 있고 법화사 시몽 스님은 2010년 국고보조금 유용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 2012년에는 표충사 주지스님이 사찰 소유 토지를 불법 매각해 45억원을 챙겨 달아나는 사건이 있었다. 일부 승려는 교구본사 주지 재임 시에 말사 주지 자리를 돈을 받고 파는 사례도 있다.
   
   
승려의 정체성을 흔드는 사건도 벌어졌다. 2011년 은해사 돈명 스님은 결혼증명서 사본이 공개돼 논란이 됐다. 재가불자연대는 특히 돈명스님에 대한 총무원의 처벌과정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재가불자연대 측은 “비구의 정체성을 흔든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자승 총무원장과 가깝다는 이유로 가벼운 징계로 마무리됐다. 종단 내 도박사건을 폭로한 스님들이 멸빈을 당한 것과 비교된다”고 했다.
   
   
총무원장과 종단의 국회 격인 중앙종회 의원 선거 때마다 금품살포설이 끊이질 않는 것도 문제다. 지난 10월 임기 4년의 중앙종회 의원 선거에서 자승 총무원장의 계파가 재적의원의 3분의 2 이상을 확보했는데 일각에서는 1표당 상당액의 금품이 오고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재가불자연대를 이끌고 있는 서울대 우희종 교수는 “권력을 쥔 승려들의 일탈 차원을 넘어 조계종 자체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있고 있다. 자승 총무원장이 자정과 혁신을 하겠다고 했지만 공염불에 그쳤다. 송담 스님은 탈종 선언을 통해 이와 같은 불교의 위기를 지적한 것”이라고 말했다.

| 김대현 주간조선 기자  

 

2015.11.24 용역깡패·조폭 '사찰 대결'

태고종, 종단 주도권 놓고 조폭 출신 등 동원 패싸움

前·現 총무원장 등 13명 기소

 

지난 1월 22일 이모(54)씨는 불교 태고종 총무원 사무실을 '접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폭력조직 이리배차장파 부두목 출신이었다. 태고종 총무원장을 지냈고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송모(68·법명 종연)씨가 두 달 전 태고종 비대위의 경비·의전을 담당하는 호종국장 자리를 주며 그를 끌어들였다. 이씨가 세운 '총무원 접수 계획'에는 '노루발못뽑이(속칭 빠루)와 망치, 절단기 등을 동원하고 반대파 승려들이 반발할 경우 힘으로 제압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1월 23일 이씨 등 비대위쪽 승려 12명이 총무원 사무실로 들이닥쳐 사무실 안에 있던 직원·승려들에게 망치를 휘두르고 주먹을 휘둘렀다. 이씨 등은 결국 힘으로 총무원 사무실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19일 뒤 이씨 등에게 밀려난 총무원장파 승려들이 반격을 개시했다. 경찰은 양측의 충돌로 인한 불상사를 막기 위해 건물 출입을 통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총무원장 이모(64·법명 도산)씨가 동원한 용역 직원과 승려 20여 명이 '빼앗긴'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비대위 승려들을 다 쓸어버려라." 총무원장의 지시를 받은 사람들이 각목을 휘두르면서 조폭 출신 이씨도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았다. 이씨는 결국 옷이 벗겨지고 실신한 채 총무원 사무실 바깥으로 끌려나왔다. 비대위쪽 한 승려는 무릎 십자인 대가 파열돼 전치 8주의 부상을 당했다.

 

조폭과 용역 깡패까지 동원된 태고종 내분 사태는 전·현직 총무원장들의 주도권 다툼이 원인이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부장 이철희)는 23일 폭력행위 처벌법 위반(집단·흉기 등 상해) 혐의로 태고종 비대위 위원장(전 총무원장)인 송씨와 현 총무원장 이씨를 구속 기소하고, 양측의 승려 11명을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석남준 기자

 

▲중들의 싸움 - 15.8.31 경기 화성 조계종 제2교구본사 용주사에서 주지 성월 스님에 대한 대처승 논란으로 몸싸움

 

2015.11.24  종교인들, 부상 경찰은 위문 안 하나

"백남기님을 포함한 부상당한 모든 분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지난주 조계종 화쟁위원회는 조계사로 도피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요청한 중재 문제를 논의한 긴급회의를 끝내고 가진 기자회견 말미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이날 회의에서는 한 위원장의 중재 요청에 대해서는 즉답을 주지 못했다. 대신 화쟁위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엄격한 법 집행이 필요하다는 의견, 종교단체로서의 자비행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 모두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것들"이라고 했다.

 

화쟁위가 오늘(24일) 회의에서 어떤 결론을 내릴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날 발표문에서는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으려 애쓴 흔적은 역력했다. 그래서 기자는 화쟁위 발표 중 "부상당한 모든 분" 중에는 이번 시위 과정에서 다친 경찰들도 포함돼 있다고 믿고 싶다.

 

이 문장이 눈에 띈 것은 지난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와 정의평화위원장 유흥식 주교가 서울대병원으로 백남기씨를 위로 방문한 장면과 겹쳐졌기 때문이다. 백씨는 지난 14일 시위에서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뇌수술을 받고 위중한 상태로 알려졌다. 종교 지도자로서 천주교 신자인 백씨 병문안은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남는다. 폭력이 난무한 이날 시위에서는 경찰도 113명이 부상했고 이 중 2명은 아직 입원 중이라고 한다. 물론 백씨와 경찰의 부상 경중(輕重)은 다르다. 그걸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백씨와 부상한 경찰 모두 우리 사회 갈등의 피해자이다. 종교 지도자들이 백씨뿐 아니라 입원 중인 경찰들도 방문했다면 어땠을까. 김 대주교는 백씨 병실을 찾은 자리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언급은 진압 경찰에 대한 시위대의 시위 방식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김 대주교 등이 부상 경찰도 찾아 위로하고 손이라도 잡아줬다면 생명 존중에 대한 그 발언의 울림은 더욱 컸으리라 생각한다.

 

기자의 이메일 수신함에는 늘 종교 단체들이 발표한 각종 성명이 수북하게 쌓인다. 최근의 주제는 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다. 내용은 한결같다. 진보좌파 단체들은 반대, 보수우파 단체들은 찬성이다. 지난 10여년을 되돌아봐도 종교계 역시 좌파 단체들은 이라크전 참전, 4대강 사업 등에 줄곧 반대했다. 반면 종교계 보수우파 단체들은 이 사안들에 찬성해왔다. 돌이켜보면 종교가 이 갈등들에 의견을 내서 평화롭고 지혜롭게 해결되기보다는 오히려 신자들마저 두 쪽으로 갈라지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사회에 존경받는 원로가 점점 사라져 간다고 한다. 종교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 사회에는 종교인에 대한 기대가 남아있다. 갈등의 한 당사자가 되기보다는 한 걸음 떨어져서 양쪽의 주장에 귀 기울여  들어주고 손을 맞잡아 주는 것만으로도 위안과 평화를 줄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기대이다. 작년 방한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고통 앞에서 중립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방한 기간 내내 국내의 갈등 상황에 대해 명시적으로 어느 한쪽 편을 든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의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조선일보 김한수 기자

 

2015.11.27  때 되면 가더라도… 준비해서 가야지요

[한국 불교 첫 호스피스병원 운영하는 비구니 능행 스님]

죽음에 관한 책 '' 펴내

"막상 죽음 닥치면 허둥대는 우리… 미리 존귀한 여정 준비해야"

▲불교 호스피스의 개척자인 능행 스님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 능행 스님은“죽음의 여정을 존귀하게 준비할 때 더욱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된다”고 했다. /자재요양병원 제공

 

"오늘 오후 임종 대기 환자가 계셔서 전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제사 문자를 보았습니다. 서른세 살 젊은 엄마가 다섯 살짜리 아들을 곁에 두고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죽어가고…."

25일 자정 무렵 기자가 받은 문자 메시지다. 보낸 이는 능행(55) 스님. 한국 불교 첫 호스피스 전문병원인 울산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원장이다. 호스피스 병원 일상의 한 단면이다.

능행 스님은 최근 책 '숨'(마음의숲)을 펴내고 26일 기자들과 만나 "죽음이라는 쓰나미가 분명히 오고 있는데 우리는 '때 되면 가겠지'하면서 살다가 막상 닥치면 준비 없이 허둥댄다"며 "미리미리 살아가는 방식과 죽음의 존귀한 여정을 생각하자는 뜻에서 책을 썼다"고 말했다.

"말기 환자들은 대부분 병원에 오면 삶의 의지를 불태웁니다. 저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루만 살자. 하루가 열흘 되고, 열흘이 1년 된다'고요. 대신에 오늘 해야 할 것을 기쁘게 하자고 말씀드리지요. 그러면 불안해하던 분들이 생기를 얻더군요." '하루만 살자'는 이 말은 환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절실한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자재병원에서는 환자들이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완화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가능한 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삶을 마무리하도록 하고, 죽음 이후에도 시신을 바로 안치실로 옮기지 않고 가족들이 충분히 애도하고 아파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고 했다.

 

능행 스님은 평소 1년을 결산하는 앨범을 만들어 볼 것을 권했다.

 

"한 해 동안 좋았던 일, 슬펐던 일을 기록하고 사진도 모으고 유언도 써보세요. 이런 준비 과정을 거치면 죽음의 순간에도 좀 더 편안해지고, 남은 가족들에게도 좋은 추억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저도 5년 전부터 앨범을 만들고 있어요."

30대 초반에 출가한 스님이 20년 전 활동을 시작할 때만 해도 불교계에서 호스피스는 낯설었다. 그러나 지금은 능행 스님이 회장을 맡고 있는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에 스님 50여 명을 포함해 1000여 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능행 스님은 "'수행이 먼저'라는 우리 불교계의 생각도 많이 변화해 요즘은 안거(安居·석 달간의 참선 집중 수행)를 마친 젊은 선승들이 병원에서 한두 달씩 봉사하다가 다시 선방(禪房)으로 향하곤 한다"고 말했다.

2000년 한 해에만 137명을 임종하고 그 이후로는 세어보지 않았다는 능행 스님. 그는 "죽음의 질은 돈과는 관련이 없다"며 "많은 분이 마지막 순간에 '좀 쉬어가며 살걸' '자녀와 시간을 더 보낼걸'하며 후회한다. 지금부터라도 쉬면서 가족과 소통하라"고 권했다.

김한수 문화부 기자

 

2015-11-21   한상균 은신으로 본 종교시설과 수배자

#1. 2013 12. 박태만 철도노조 수석부위원장이 조계사에 은신했다. 그는 가장 먼저 조계종 화쟁(和諍)위원회에 중재를 요청했다. 또 공식 창구를 통해 종단 측과 소통했다. 종단은 박 수석부위원장이 머무는 건물 아래층에 직원을 상주시켰다. 조계종 직원들은 직접 식사까지 제공하고 경찰과 언론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했다. 굳이 민주노총 직원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박 수석부위원장은 이따금 스님들과 식사하고 경내 산책도 했다. 조계종은 적극적으로 노사 중재에 나섰고 내부의 반발 여론도 달랬다.


#2. 2015
11. 한상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이 조계사에 은신했다. 그는 조계종 측과 공식 대면한 18일 전까지 이틀 동안 비공식 창구로 접촉했다. 하지만 2년 전과 달리 한 위원장을 보호하는 종단 직원들은 없다. 식사도 제공되지 않아 민주노총 자체적으로 도시락 배달을 하고 있다. 한 위원장은 산책은커녕 은신처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서신과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조계종은 한 위원장의 중재 요청에 ‘즉답’을 내리지 않고 있다. 당장 그를 내치지는 않았지만 내부 의견은 부정적이다. 


2013
12월의 조계사와 2015 11월의 조계사는 달랐다. 두 모습을 비교해 보면 조계종 측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 파업하다 들어온 박 수석부위원장과 불법 폭력시위를 하고 도피한 한 위원장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단은 이런 의견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지 않고 있다. 종교시설이 사람을 내치는 모양새에 부담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민주화 투쟁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의 성당이나 사찰 등은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자주 겪었다. 시대적 상황이 바뀌면서 이에 대한 종교시설의 대처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2000 12월 명동성당 2000 12월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한국통신 노조가 인력 감축과 민영화에 반대하며 농성을 벌이는 가운데 한쪽에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한국통신 노조의 장기농성 이후 명동성당은 허가 없는 성당 내 집회를 금지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민주투사의 ‘은신처’ 명동성당의 변화 

1970, 80년대 군부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의 ‘성지’이자 수배자들의 마지막 은신처는 주로 명동성당이었다. 명동성당은 군사정권도 강제 진입을 주저할 정도로 성역으로 받아들여졌다. 군부의 억압을 피해 수많은 ‘민주투사’들이 명동성당에 몸을 숨기거나 성당 안에 터를 잡고 장기 농성을 했다. 1991년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당시 강 씨가 명동성당에 숨었을 때도 가톨릭계는 “극단적으로 따지면 성당은 죄인들의 모임 장소다. 천사에게는 성당이 필요 없다”며 그를 보듬었다. 
 

명동성당이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자리 잡은 건 유신체제 선포 2년 후인 1974년경이다. 유신정권이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에 연루됐다며 지학순 주교를 구속했고, 이후 천주교가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서면서 자연스럽게 명동성당은 시국사범을 보듬는 ‘정치, 사회적 공간’이 됐다. 


그런 명동성동이 변한 건 15년 전. “그때 명동성당 언덕이 텐트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었죠. 성당에서 농성을 한다고 양해를 구한 사람은 10명 중 1명이나 됐을까요? 저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 12월 명동성당이 중부경찰서에 시설보호 요청을 할 무렵 성당에 근무했던 관계자의 얘기다.


그는 “소외 계층이 아닌 사람들이 찾아와 성당 측에 사전 양해도 구하지 않고 ‘장소’만 이용하는 건 문제였다”고 말했다. 고액 연봉을 받는 대기업 노조, 댐 건설 찬성 단체와 반대 단체 등 다양한 이익집단이 몰려왔다. 그는 “명동성당에서 집회를 열면 언론에서 한 번이라도 더 비춰 준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자리가 비좁을 정도여서 성당에 모여든 수배자들끼리 서로 텐트를 ‘대물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어떤 이는 성당 관계자에게 “이틀 정도 있겠습니다”라고 해놓고 1주일이 넘도록 철거하지 않았고, 밤에 몰래 들어와 그냥 지내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문에 일부는 신부나 신도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변화의 결정적 계기는 2000년 한국통신 노조의 농성이었다. 대규모 파업 농성을 벌였던 한국통신 노조는 그해 12 22일 농성을 풀고 철수했다. 노조원들이 철수한 성당 주변은 한마디로 쓰레기 더미였다. 명동성당은 다음 날 “앞으로 명동성당 내에서 점거농성과 시위를 불허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교구장이던 고() 김수환 추기경의 의지가 없었다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구보다 강력하게 민주화운동을 후원해 온 김 추기경도 시대적 흐름의 변화를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제도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뤄진 만큼 무분별한 집단행동으로 인해 가톨릭 성지가 더 이상 훼손돼선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는 게 가톨릭계 인사들 얘기다. 


당시 백남용 명동성당 주임신부는 “그동안 성당 내 여론을 수렴한 결과 교회 공동체를 분열시키며 정상적인 신앙활동을 차단하는 집회는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면서 “앞으로 정리집회 등 간단한 행사는 허용하겠지만 점거집회나 장기 천막농성 등의 요청이 들어오면 단호히 거절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0
년 정진석 추기경이 “국책 사업인데 무조건 반대보다는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취지로 4대강 사업 반대 여론에 우려를 표명하자 진보와 보수 성향 단체들의 시위로 한때 시끄러운 적도 있었지만 이는 모두 성당 밖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서울대교구 서동경 홍보팀장은 “최근 몇 년 사이 명동성당 내에서 농성이나 시위가 벌어진 적이 없다”며 “명동성당이 정치적 또는 집단적 목적 달성을 위해 이용되는 것을 막겠다는 교회의 원칙이 사회적 합의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고 말했다. 


새로운 은신처로 자리 잡은 조계사도…  

명동성당의 집회 불허 방침 이후 조계사가 수배자들의 새로운 은신처가 됐다. 2013년 말 박태만 철도노조 수석부위원장이 조계사로 숨어들었을 때 “산사에 찾아온 짐승도 쫓지 않고 먹이를 주는 게 불교 정신”이라며 그를 받아들인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불과 2년 뒤 한 위원장의 은신을 바라보는 조계종 내부의 시선은 딴판이다.


17
일 조계사를 찾은 신도 유모 씨(42·여)는 “관음전 앞에 카메라가 많아 ‘부처님을 찍는 건가’ 생각했는데 한 위원장을 찍기 위해 온 것이었냐”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일을 마치고 조용한 사찰에서 잠시 쉬었다 가려고 했는데 이곳도 당분간 시끄러워질 것 같다”며 절을 나섰다. 


조계사는 국내 최대 불교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의 ‘행정부’ 격인 총무원이 있는 핵심 시설이다. 총무원장으로 상징되는 종단 지도부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어서 운동권 세력이 선호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와 관련한 수배자들의 장기 은신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은 불교계를 자극했다. 조계사 주변에 배치된 경찰이 수배자 검거를 위해 일일이 차량을 검문하면서 당시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이 타고 있는 차량 트렁크를 뒤지자 불교계가 크게 반발했다. 공교롭게도 기독교(개신교) 장로였던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불교계가 정부의 종교 편향을 주장하던 때였다. 결국 당시 어청수 경찰청장이 사과했지만 상황은 마무리되지 않았고, 그해 8월 서울광장에서 정부의 종교 편향을 비판하는 범불교도대회가 열렸다. 주최 측 추산 20만 명, 경찰 추산 6만 명의 대규모 행사였다. 


하지만 이번 한 위원장 은신을 둘러싸고 조계사 신도는 물론 종단 내부에서도 과거와 달라진 기류가 확연하다. 그만큼 이번 시위 과정에서 나타난 시위대의 폭력성에 대한 국민 여론이 좋지 않음을 방증한다. 한 위원장 은신 이후 조계종 내부에서는 자비를 표방하는 불교가 도움을 요청한 사람을 내쳐선 안 된다는 정서도 있지만 퇴거를 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핍박받는 자의 피난처인가, 범법자 위한 소도(蘇塗)인가

군부독재나 부당한 공권력이 활개 치던 당시 종교시설은 ‘소외된 자’에게 중요한 피난처였다. 종교계가 그들을 보듬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고, 국민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덕분에 종교시설 내 공권력 투입은 금기(禁忌)로 여겨졌다. 2002년 발전노조 조합원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이 조계사 내부로 진입했다 결국 서울경찰청장이 사과하고, 이후 조계사에 공권력이 투입된 적이 없다. 
 

종교시설 외에도 민주화 이후 대학, 언론사 등은 우리 사회에서 공권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영역으로 꼽히고 있다. 자율성이 보장돼야 하는 대학이나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본연의 기능으로 하는 언론사에 공권력을 투입하면 국민적 공감을 받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달 29일 서울 이화여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학교 방문에 반대하는 총학생회 학생들을 사복 경찰이 저지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지난해 말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관련 청와대 문건’을 보도한 세계일보에 강제수사 가능성이 나올 때도 논란이 거셌다.


하지만 요즘 종교계의 고민은 공권력이 아닌 국민의 시선이다. 한 위원장이 도피 중인 조계사가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국민 여론이다. 현재 조계사에 머물고 있는 한 위원장은 종교가 보호해야 할 소외된 약자일까, 종교를 이용하려는 정치적 불청객일까? 그리고 2000년 명동성당의 결정과 2015년 조계종의 결정은 과연 어떻게 다를까?

김민 kimmin@donga.com    ·김갑식·박성진 기자 

 

2016.02.12 "무릎 아픈 어르신들이 좋아하네요"

법당에 등장한 '예배 의자'

불교 사찰 법당에 '예배 의자'가 등장했다. 전북 김제 청운사(주지 도원 스님)는 지난해 말 무량광전을 신축하면서 한 줄에 5~6명씩 나란히 앉을 수 있는 긴 의자를 들였다. 바닥은 마루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법당에 들어서면 방석 대신 의자에 앉아 소지품은 의자 앞 선반에 올려놓고 법회도 드린다.

 

사찰이 교회에서 주로 쓰는 '예배 의자'를 들이게 된 것은 시대 변화를 상징한다. 주지 도원 스님의 설명은 이렇다. "사찰이 농촌 지역에 있어 어르신이 많은데 요즘은 50대 중에도 신경통, 관절염 있는 분이 많다. 또 젊은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침대, 식탁, 소파 생활을 해서 템플스테이를 해보면 방바닥에 앉아 20분을 못 넘긴다. 그래서 무량광전은 지을 때부터 입식으로 계획했다."

 

 

108배를 비롯해 절 수행을 원하는 신자들을 위해선 별도 공간을 마련했다. 사십구재, 천도재 등도 무량광전에서 지낸다. 그래도 큰절을 올리고 싶어하는 신자를 위해선 불단 앞에 2m 정도 여유 공간을 마련해 앞에 나와서 하도록 했다. 도원 스님은 "한복에서 양복으로 바뀌고, 단발령으로 머리카락을 자를 때에도 처음엔 어색했지만 사회와 생활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신자들에게 굳이 바닥에 앉았다 일어서는 불편을 감수하라고 할 이유가 없다" "지금은 다른 사찰의 스님들에게 문의도 많고, 직접 와보는 분도 많다"고 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천주교와 개신교가 처음 이 땅에 들어왔을 때 교인들은 모두 마룻바닥에 앉아 예배를 드렸다. 1907년 평양대부흥의 발화지로 유명한 평양 장대현교회의 옛 사진에는 바닥에 빽빽하게 앉은 신자들 사이에 새뮤얼 마펫 목사가 혼자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서울의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도 1920년대까지 마룻바닥에 앉아 예배 드리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성당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름다운 풍광으로 드라마 '러브 레터'의 촬영지가 되기도 했던 강원 횡성 풍수원성당. 1908년 낙성돼 100살이 넘은 문화재(강원도 지방문화재 69)인 이 성당은 지금도 마룻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 미사를 드린다. 그러나 성당 뒤편엔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 있었다. 관절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위한 자리였다. 이제는 명동성당에서도 사라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성당의 신자석 의자에 장궤()틀이 달려 있었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꿇어앉기 위한 받침대였다. 그러나 이 역시 불편함 때문에 거의 줄어드는 추세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법당과 성당, 교회의 '앉는 풍경'도 달라지고 있다.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16.02.16 靑年 법정 曰 "성철 스님! 질문 있습니다"

1967년 녹음된 '백일법문' 도중 성철·법정 스님 問答 내용 50년 만에 책으로 엮어 출간

▲1973년 무렵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가운데)과 법정 스님(오른쪽), 그리고 훗날 송광사 주지를 지낸 현호 스님이 함께 자리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이건 멍청해서 묻는 게 아니고요…."

 

1967년 해인사의 겨울은 뜨거웠다. 그해 해인사 초대 방장에 오른 성철(性徹·1912~1993) 스님의 '백일법문'이 열렸던 것. 전국의 선승(禪僧)들이 해인사로 몰려 이미 당대의 전설이 된 성철 스님의 사자후(獅子吼)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30대 젊은 스님의 질문이 법문을 끊고 들어왔다. 법정(法頂·1932~2010) 스님이었다.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이 '백일법문' 중 주고받은 질문과 대답이 50년 만에 공개됐다. 최근 '설전'(책읽는 섬), 즉 '눈싸움(雪戰)'이란 제목으로 발간된 책을 통해서다. 두 스님의 문답이 책으로 엮이게 된 것은 '백일법문' 녹음 테이프를 풀던 중 법정 스님이 등장하는 대목을 발견한 덕분이다.

 

내용은 지금 읽어도 '당돌'하다. "필요하면 그때그때 물어야지, 법문 끝나고 나서 나중에 질문하면 그때의 감정이 없어지니까 질문에 힘이 없어질 것 같습니다"라며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무엇입니까?" "중도(中道) 이론을 좀 쉽게 설명해주십시오" "중국 선종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등등으로 꼬치꼬치 이어진다. 중국 선종(禪宗)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되는 육조 혜능이 글도 모르면서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깨쳤다는 부분에 대해 성철 스님이 "금강경 한문이 아니라 중국말을 듣고 깨쳤다"고 답하면 "말이나 문자나 같은 것 아니냐?"고 대든다.

 

자신의 수행뿐 아니라 후학들을 지도하는 데 있어서도 추상같기로 유명한 성철 스님이었지만 젊은 법정 스님의 '도발'에 대해서는 너무도 친절히 답변해줬다. 불교의 핵심 사상인 중도 사상에서부터 자신의 출가 사연까지 모든 것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법정 스님의 질문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법문을 듣는 다른 스님들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속의 나이 20년, 출가 나이[法臘·법랍]도 20년 차이가 나는 두 스님이지만 진리를 놓고 묻고 대답하는 순간만큼은 구도(求道)의 길을 걸어가는 선후배였을 뿐이었다.

 

책에는 1982년 두 스님의 대담도 실렸다. 1967년 이후 15년 만이었다. 그 사이 성철 스님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됐고,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비롯한 에세이로 필명을 날리고 있었다. 대화 내용 역시 15년 전에 비해 묵직하다. 그러나 질문은 여전히 날카롭다. 법정 스님은 짐짓 "왜 스님을 만나러 온 사람들에게 3000배를 시키는가" "간단하게 불교를 뭐라 설명하겠는가"라고 묻고 "사람이… 정말 성불할 수 있는가" "(성불하는 데 언어문자는 필요 없다고 하면) 우리 '팔만대장경' 은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런 진지한 문답 가운데 성철 스님은 자신의 좌우명이 '영원한 진리를 위하여 일체를 희생한다'는 것이라며 "나는 진리를 위해 불교를 택한 것이지, 불교를 위해서 진리를 택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50년 전, 35년 전의 대담을 통해 이제는 이승을 떠난 두 스승의 진리 탐구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16.03.04 "韓 불교, 다양한 知的 DNA 수용해야 할 때"

[冬安居 마치고 독일 가는 현각 스님] 

"한국 불교는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고 외부의 지적(知的) DNA(intellectual DNA)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버드대 출신의 미국인 현각(52) 스님은 흥분했다. 지난겨울 석 달간 조계산 송광사에서 동안거(冬安居)를 마치고 오는 7일 독일로 떠나기에 앞서 지난 2일 그를 만났다. 현각 스님은 5일 오후 서울 조계사에서 '헬조선과 선(禪)'을 주제로 법문도 예정돼 있다.

 

―"'토킹 헤드(talking head), 말만 많은 텅 빈 대가리'가 되는 것 같다"며 2008년 말 독일로 떠났다. 독일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뮌헨과 인근 레겐스부르크를 오가며 선(禪)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한국에서 책('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때문에 너무 유명해졌다. 연예인, 스타 같았다. 실수였다. 좀 외롭고 싶었다.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없애기 위해 독일로 갔다. 지난해 가을 레겐스부르크에 40평 정도 수행 공간을 마련하고 '불이선원'이라 이름 붙였다. 독일로 돌아가면 출가자, 재가자 가리지 않고 진정한 사부대중 수행공동체를 만들려고 한다."

 

▲현재 독일에서 한국 선불교를 알리고 있는 미국인 현각 스님. 그는 “한국 불교는 전통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며 “그러나 세계화를 위해서는 다양한 지적 DNA를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아직도 배타적인 한국 불교
세계화·국제화한다고 하지만
 
작년 '100인공사' 토론 자리에
외국 스님 단 한명도 안 불러"

 

―유럽인들의 참선에 대한 반응은 어떤가.

"지난가을 집중 수행 기간에 한 30대 독일 여성이 찾아왔다. '남동생은 자살했고, 어머니는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남자 친구와도 헤어졌다'며 울었다. '호흡하는 나'에 집중할 것을 권했다. 이틀이 지나자 미소가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 창밖의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며 눈물을 흘렸다. 환희의 눈물이었다. 내가 지금 생각해도 눈물 나도록 고마운 스승님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본래의 성품을 바로 보게 해주신 것. 서양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 불교를 '테크놀로지'로 받아들인다. '종교'가 나 외의 다른 존재를 믿는 것이라면, 불교는 수행을 통해 나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원수들과 같은 자리에 있어도 '헤이 주드'(비틀스 노래)가 들리면 모두 함께 어깨를 들썩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불이(不二)'라고 선원 이름을 지은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다. 불교적으로 나와 너, 세상 만물이 둘이 아닌 것과 한국의 통일을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나는 육신의 부모와 정신적 아버지가 모두 분단국 출신이다. 아버지는 동서로 나뉜 독일계, 어머니는 남북으로 갈린 아일랜드계, 숭산 스님은 북한 출신이다. 독일은 통일됐고, 아일랜드도 평화롭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서해, 남해, 동해로 나누지만 본질은 모두 물, H₂O다."

 

 

―평소 한국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말해왔다.

"어릴 때부터 '왜 어떤 나라의 어린이들은 전쟁과 기근에 시달리고 나는 이렇게 편하게 살까?' 같은 고민이 있었다. 그런 고민 때문에 여러 종교의 문을 두드렸는데 숭산 스님이 마음의 열쇠를 열어줬다. 그 가르침이 좋아서 출가했는데 그곳이 한국이었고, 결과적으로 한국도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 불교는 나 같은 외국인이 보기엔 아직 너무 배타적이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예를 들어 조계종은 작년 '사부대중 100인공사'를 열었다. 출가자와 재가자가 한자리에서 토론하는 자리였다. 좋은 시도다. 그런데 거기에 외국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인종차별이 있던 1960년대 미국에서 흑인은 버스 뒷자리에 앉아야 했다. 나는 한국 불교로 출가한 지 27년 됐지만 여전히 '뒷자리로 가라'는 말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국 불교가 세계화, 국제화한다고 하는데 왜 이미 한국 불교가 좋아서 온 사람들의 경험을 활용하지 않나? 답답하다."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보나.

"한국 스님들은 '독일엔 신도가 몇이나 있냐'고 묻는다. 나는 '제로(0)'라고 말한다. 그 대신 '공부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몇 명이다'고 답한다. '무슨 화두를 들고 있냐'고도 묻는다. 부처님과 육조 혜능 스님 이후에 나온 것이 1700공안(公案), 화두다. 부처님과 육조 스님이 1700개 중 어떤 화두로 깨쳤나? 매일 신문 1면부터 더 큰 화두가 외치고 있다. 숭산 스님은 내가 한국말이 늘어도 '어, 현각이 한국 사람 다 됐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전통만 고집하기보다는 다른 문화 전통에서 온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과 지적 DNA를 수용해야 한다."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16.07.30 "외국인 스님은 장식품… 한국 불교 떠나겠다"

하버드대 출신 美 현각 스님 "기복 종교로 돌아가… 참 슬퍼"

 

베스트셀러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저자인 미국인 현각(52·사진) 스님이 "외국 스님들은 오로지 조계종의 데코레이션(장식품)"이라며 "한국 불교의 좁은 정신으로부터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현재 그리스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그는 지난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현각 스님은 한국 불교를 떠나는 이유로 유교적 관습, 남녀·국적 차별, 형식주의, 기복(祈福)주의, 스님과 신도의 차등 등을 들었다. 그는 "한국 선불교를 전 세계에 전파했던, 누구나 자기 본성품을 볼 수 있는 열린 그 자리는 그냥 기복 종교로 돌아갔다"며 "기복=$(돈). 참 슬픈 일"이라고 적었다.

 

그는 '서울대 왔던 외국인 교수들, 줄줄이 떠난다'는 제목의 지난 26일 자(A12면) 조선일보 기사를 인용하며 "이 사람들 마음을 100% 이해하고 동감한다"며 "8월 중순에 한국을 마지막으로 공식 방문한다. 화계사로 가서 은사(숭산) 스님의 부도탑 참배, 지방 행사 참석 그리고 사요나라(작별) 준비"라고 적었다. "환속은 안 하지만 유럽·미국에서 활동할 것"이라고도 했다.

 

현각 스님의 조계종 비판은 처음이 아니다. 그는 지난 3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도 "한국 불교는 나 같은 외국인이 보기에 너무 배타적"이라며 "나는 한국 불교로 출가한 지 27년 됐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이 있던 시대에 흑인들이 당했던 것처럼 '버스 뒷자리로 가라'는 말을 듣는 느낌"이라고 했었다.

 

현각 스님은 이번 페이스북 글에서도 "숭산 스님께서 45년 전에 한국 불교를 위해서 새 문을 열었고, 나와 100명 외국인 출가자들이 그 포용하는 대문으로 들어왔다"며 "그런데 (조계)종단이 그 문을 자꾸자꾸 좁게 만든다"고 말했다.

 

1960년대 이후 서구 지식인을 대상으로 포교 활동을 폈던 숭산(1927~2004) 스님은 외국인 제자들이 한국 불교에 정착하도록 보살핀 '큰 우산'이었다. 현각 스님은 숭산 스님 입적 후 한국을 떠나 독일 등 유럽에서 지냈으며 다른 외국인 제자들은 계룡산 무상사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한수 기자

 

2016.07.30 조계종 수입 내역…강남 봉은사 210억원으로 1위

▲무역협회 빌딩에서 담은 서울 강남 봉은사 전경. [중앙포토]

 

“숭산 스님이 세운 혁명적인 화계사 국제선원을 완전히 해체시켰다. 한국 선불교를 전 세계에 전파했던, 누구나 자기 본 성품을 볼 수 있는 열린 그 자리를 기복 종교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기복 = $(돈)’.”

 

하버드대 출신 푸른 눈의 현각(52) 스님이 “한국불교와 인연을 끊겠다”고 밝히면서 이렇게 한국 불교계를 비판했다.

 

한국 불교계는 얼마나 소득을 올리고 있을까. 대한불교조계종은 올해 4월 직영사찰 4곳의 재정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서울 강남 봉은사는 2015년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를 포함해 210억8700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는 지난해 수입이 200억4900만원이었다. 경북 갓바위 선본사와 인천 강화 보문사의 지난해 수입은 각각 98억1500만원, 47억5800만원으로 조사됐다.

 

봉은사 일반회계 수입은 중 가장 많은 건 불공 수입으로 100억1500만원이었다. 이어 법요 행사 수입(23억 1800만원), 기타 수입(5억 2700만원), 교육 연수 수입(3억 7400만원), 전년도 이월금(6억 3200만원) 순으로 조사됐다.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의 2015년 일반회계 기준 수입은 138억원으로 불공 수입이 65억9800만원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법요 행사 수입(33억5600만원), 일반수입(17억원), 교육연수(10억원), 기타수입(7억1000만원), 전년도 이월금(5억1000만원) 순이었다.

 

선본사와 보문사의 지난해 불공 수입은 각각 45억 2000만원과 14억 6800만원으로 나타났다. 자승 총무원장은 올해 초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결산 규모 30억원 이상 사찰의 재정을 공개하겠다”고 했지만 조계종 직영사찰 4곳만 최종 공개했다.

 

불교계 내부에선 현각 스님을 계기로 재정 공개를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 4월 공개한 재정 내역에선 세부 수입과 지출을 확인할 수 없다 불자와 국민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선 일방적인 발표를 넘어 공개검증을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도 들린다.

강기헌 기자 emckk@joongang.co.kr

 

2016.08.01 조계종을 떠나는 현각(玄覺) 스님의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 현각 스님
 

하바드 출신 불교 승려 현각(玄覺) 스님. 그가 한국불교 조계종을 떠난다고 선언했다.

 

“내가 어떻게 그 조선시대 정신에만 어울리는 교육(을 하는 조계종단)으로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서양 사람들, 특히 서양 여자들을 보낼 수 있을까?” “한국 선불교를 전 세계에 전파하고 누구나 자신의 성품을 볼 수 있는 그 자리를 기복 종교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기복 = 돈’이기 때문이다. 참 슬픈 일이다”라고 그는 개탄했다.

 

현각 스님이 그 어떤 인연법(因緣法)에 따라서인지 처음 한국에서 구도(求道) 생활을 시작했을 무렵부터 필자는 그분이 책을 통해서나 인터뷰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에 항상 마음 깊이 공감하곤 했었다. 한국적 종교문화에 비해 서양인인 그분의 ‘지적(知的) 분위기'가 필자에겐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이걸 “신앙이 아직 덜 뜨거워서..”라고 일부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덜 뜨거워도 좋으니 나에겐 그게 더 좋다”고 생각했다.

 

‘지적(知的) 분위기’라고 필자가 말하는 건 “종교는 지식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종교를 신실하게 믿더라도 지성적인 사유(思惟)의 형식을 함께 껴안고 가면서 믿어도, 아니, 그러는 게 훨씬 더 좋지 않겠느냐는 것뿐이다. 예컨대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지동설 아닌 천동설을 ‘진리’라고 권력으로 강제하거나 맹신하는 게 과연 참 종교적 자세였느냐?”는 물음이다. 더군다나 근래에 와 일부 종교인들이 특정 정치성향으로 급경사하면서부터, 필자의 실망감은 더 커졌다.

 

성당 문 위에 “4대강 지지자들일랑 이번 지자체 선거에서 찍어주지 말자”는 현수막을 일부(소수이겠지만) 천주교 사제들이 내걸질 않나, 도심 폭력시위 주모자가 부녀자 신도들 앞에서 팬티 바람으로 난리법석을 피우는데도 일부(소수이겠지만) 불교 승려와 단체가 그 범법자를 마치 '쫓기는 피난민'인양 봐주질 않나...하는 등등의 어이없는 행태를 보고서 필자는 "종교를 믿는다"는 게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를 헷갈릴 지경이 되었다.

 

그런 종교인들은 말할 것이다. “우리는 세속적인 정치-사회 문제와 관련해서도 정의와 진리에 대한 배타적 해석권(解釋權)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 마디로 그냥 씩 웃어주겠다. 현각 스님의 떠남도 이런 한국 종교계의 비()종교적 어수선함에 대한 환멸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교적 영성-불교적 진리-불교적 구도(求道) 자체를 떠난 건 아닐 것이다. 종교적 심성을 떠난 건 더더욱 아닐 것이다. 아니, 그는 오히려 이 떠남을 계기로 종교적 영성이 더 심화될 것이라 믿는다. 그의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 류근일 언론인, 전 조선일보 주필 

 

2016년 04월 04일(月)  사찰 작년 총수입… 봉은사 210억-조계사 200억

조계종 4개 사찰 재정 첫 공개  봉은사 불공 수입만 101억

서울 강남 봉은사의 지난 한 해 수입이 210억여 원으로, 대한불교조계종 총본산인 조계사(200억여 원)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도 도량으로 잘 알려진 경북 갓바위 선본사, 인천 강화 보문사는 각각 98억여 원, 47억여 원의 수입을 올렸다. 조계종은 지난 1일 이 같은 내용의 직영사찰 재정 자료를 종단 홈페이지(www.buddhism.or.kr)에 게재했다고 4일 밝혔다. 종단 차원에서 사찰 재정을 일반에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따르면 봉은사는 일반회계 150억6900만 원, 특별회계 60억1700만 원 등 총 210억8700만 원의 수입을 보고했다. 일반회계에서는 불공(기도 등) 수입이 101억5900만 원으로 67%를 차지했다. 지난해 계획한 중창불사를 위한 수입이 46억4800만 원으로 특별회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조계사는 불공 66억5800만 원, 법요·행사 34억3000만 원 등 138억4000만 원의 일반회계상 수입을 올렸고 특별회계 부문에서는 총본산 성역화불사 29억9500만 원 등 46억6100만 원의 수입을 보고했다. 선본사는 불공 45억2100만 원, 각종 불사 24억4300만 원 등 수입을, 보문사는 불공 14억6800만 원, 문화재구역 입장료 2억9800만 원 등의 수입을 기록했다. 조계종은 재정을 공개하는 사찰 수를 지속적으로 확대할 계획으로, 근래 성직자 재산공개 등과 관련해 타 종교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

 

■ 석탄일 이미지

▲싱가포르 = 석탄일(vesak day) 하루 앞둔 승려 신도들 - 싱카포르 태국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등 에서는 음력 4월15일을 석탄일로 채택

 

 

 

 

 

▲광화문의 봉축행사를 알리는 대형 조형등

 

 

 

▲부산 삼광사 15.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