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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271. 총을 든 선비 박상진 - 280. 시대착오의 상징 평양 풍경궁

상림은내고향 2021. 11. 22. 17:05

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선일보

2021.08.25

271. 총을 든 선비 박상진

“무장투쟁으로 국권을 회복하고 공화국을 세운다.”

 

경주 세금 마차 강도사건

 

1915년 12월 26일 일요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받아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쾌재를 부른 사람도 있었고 충격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기독교 성탄절 기사 가운데에 실린 사건 기사 제목은 이러했다. ‘경주 아화(阿火)에서 관금봉적(官金逢賊) 팔천칠백원 분실 - 도적은 조선 사람’. 조선인 강도가 경주에서 세금 수송 마차를 털어 8700원을 강탈해갔다는 것이다. ‘…이십사일 오전 인시 사십분에 경주를 출발해 대구로 배송될 관금 팔천칠백원의 행낭이 경주 아화간에서 분실된 대사건이 있더라.’(1915년 12월 26일 ‘매일신보’)

 

▲1915년 12월 26일자 ‘매일신보’ 3면.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기사 가운데에 ‘세금 운송마차 탈취 대사건’ 기사가 실려 있다. 군기(軍器)를 마련하기 위해 광복회가 벌인 사건이었지만, 총독부는 광복 때까지 사건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1915년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뒤 조선 총독부 시정(施政) 5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한 해였다. 석 달 전 총독부는 경복궁을 허물고 조선물산공진회를 열어 식민 근대화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경사스러운 해’에 조선 강도에게 세금을 뜯겨? 그해 경성 숙련 목수 일당은 76전이었고(김낙년 등, ‘한국의 장기통계’1, 해남, 2018, p191) 이 목수가 연 200일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연봉은 152원이니, 목수 60명 연봉에 달하는 세금을 강탈당한 것이다.

 

태평양전쟁이 터지고, 일본 천황이 항복하고 조선이 해방된 뒤까지도 이 강도들은 잡히지 않았고, 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았다.

 

사건 후 30년이 지난 1945년, 마침내 그 강도범 친척이 전모를 밝혔다. 내용은 이러했다. ‘…권영만은 환자로 변장하고 마부에게 부탁해 우편마차를 빌려 탔으며 우재룡은 효현교 천변에서 다리를 부숴놓고 대기하다가 마차가 물을 건너는 사이에 마차에 올라타…’ 그리고 사건의 주범(主犯)을 이렇게 명기했다. ‘이는 박상진씨의 명령에 의해 이뤄진 일이었다.’(이상 박맹진, ‘고헌실기약초’, 1945) 박상진은 평소 동료 무리에게 거듭 이리 말했다. “중국 동삼성(東三省)에서 병사를 양성해 국권을 회복하고 공화국을 세운다.” 이 강도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에 대한 이야기다.

 

암울했던 1910년대 무단정치

1910년 8월 29일, 총성 한 번 울리지 않고 나라가 사라졌다. 수많은 지사들이 저마다 길을 제시하며 망국(亡國)을 피하려 했지만, 대한제국 황실은 망국을 택하고 말았다. 황실은 일본 왕족(王族)과 공족(公族)으로 살아남았다.(땅의 역사 201. 기미년 만세운동 특집 ③'왕족들은 무엇을 했는가’ 참조)

 

한일병합조약에 도장을 찍은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초대 총독으로 취임하며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헌병사령관이 경무총감을 겸직하고 헌병과 경찰은 범죄 즉결처분권부터 민사소송조정권까지 폭넓은 권한을 가졌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됐던 태형(笞刑)도 부활시켰다.(윤경로, ‘1910년대 독립운동의 동향과 그 특성’,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그런 엄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만주로 건너갔다. 감시를 피해 ‘독립전쟁’을 위한 기지를 해외에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천도교와 대종교, 기독교 같은 종교단체와 신민회(新民會)를 비롯한 각종 비밀결사 조직이 생겨났다.

 

봉건 조선을 부활하려는 복벽파(復辟派)는 사실상 소멸했다. 이미 1908년 유학자 이기(李沂)는 “농사꾼도 못 되고 상인과 공인도 못 되고 선비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들은 이미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선언했다.(이기, ‘일부벽파론·一斧劈破論’, 1908) 대신 사람들은 공화국을 염원했다.

 

울산 사람 박상진(1884~1921)은 바로 그 독립공화국을 꿈꾸며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시도했던 선비였다.

 

▲박상진(1884~1921)

 

박상진이 권총을 들기까지

다른 이들에 앞서 근대 시대정신에 눈을 뜬 선비들을 ‘혁신유림’이라 한다. 이들은 현실적으로 엄존하던 노비들을 해방하고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근대 교육을 실시했다. 총을 잡기도 했다. 안동 혁신유림 허위(許蔿·1855~1908)는 1908년 13도창의군을 지휘해 서울 진격작전을 벌였다. 그해 경기도 연천에서 체포된 허위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배후를 묻는 일본 관리에게 허위는 “이등박문이 배후요, 대장은 바로 나”라 답했다. 허위는 그해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 첫 사형수로 처형됐다.(허복, ‘왕산허위선생거의사실대략’)

 

그 시신을 수습한 사람이 허위의 제자 박상진이다. 1884년 음력 12월 7일, 양력으로는 1885년 1월 22일 당시 경남 울산 송정에서 태어났다. 나이 열여섯에 허위 문하로 학문을 익힌 뒤 스물한 살이던 1905년 서울 양정의숙에 입학해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했다.(국역 ‘고등경찰요사’(총독부 경북경찰부·1934), 류시중 등 역주, 안동독립운동기념관, 2010, p338)

 

일본 경찰에 따르면 박상진은 ‘우국(憂國)의 생각이 대단히 심각한 데가 있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양정 재학 시절 많은 사람을 만났다. 선교사 헐버트와도 교류했다. 충청의 혁신유림 김좌진도 만났다. 그 인연이 깊게 이어져, 1921년 박상진이 죽었을 때 김좌진은 ‘박의사 상진씨를 곡함’이라는 만사를 쓰고, 스스로를 ‘도원결의 20년인 의동생’이라고 칭했다.(박중훈, ‘고헌 박상진의 생애와 항일투쟁활동’, 국학연구 6집, 국학연구소, 2001)

 

1911년 중국을 여행하며 손문의 신해혁명을 몸으로 목격했다. 그리고 만주에서 안동 혁신유림과 신민회가 건설 중인 해외 독립기지도 경험했다. 그해 귀국한 박상진은 아버지 회갑연을 열며 ‘만주 동지의 실정과 사관 양성 기관을 설명한 뒤 집단이민을 제안했다.’(박상진 아들 박경중, ‘고헌박상진선생약력’, 1946) 과연 이민이 급증했다. 총독부에 따르면 1912년 ‘한일합병에 불평을 품은 계급들에 의한 선동과 교사’로 만주 이민이 급증했다.(박중훈, 앞 논문)

 

“무장 혁명을 한다”

그리고 1915년 8월 25일 박상진은 그때까지 인맥과 자금을 기반으로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했다. 박상진은 ‘총사령(總司令)’이었다. 그러니까 단순한 계몽단체가 아닌, 군사조직임을 뜻하는 직책이다.

 

“각국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조선에서도 가능하다.”(경성복심법원, 1919년 9월 22일 박상진 등 판결문) 혁명은 1911년 중국 신해혁명을 말한다. 이에 앞선 1905년 제정러시아에서도 제정을 향한 혁명 시도가 있었다. 왕정복고는 박상진 안중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혁명을 위한 수단은 무장이었고 무장을 위한 기초는 자금이었다. ‘광복회의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공화정치를 하는 것으로, 그 방법은 조선 내 자산가로부터 금전을 모집하여 군기(軍器)를 구입하여 독립을 도모하는 것이다.’(위 판결문) 중국 여행 때 반입한 권총 11정이 무장의 기초였다.(총독부 경북경찰부, 앞 책, p339)

 

광복회 결성 3년 전인 1912년 박상진은 ‘동지’라고 불렀던 평양 사람 김덕기, 전주 사람 오혁태와 함께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개업했다. 문중이 소유한 대토지도 그에게는 독립자금이었다. 그렇게 전국에 설립한 상회는 갑인, 이춘, 백산, 평북상회와 충부상회 등이었다.(’고헌실기약초’) 상회를 통한 무역과 거래로 합법적 자금 축적을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벌인 작업이 친일 부호를 대상으로 한 ‘의연금’ 모금이었다. 박상진은 동지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비밀과 암살, 폭동과 군령은 우리의 강령이다. 폭동은 현시점에 불가능하니 암살로 미래를 준비한다.’(경성복심법원, 앞 판결문)

 

가장 유명한 사건은 전 경북관찰사 장승원 사건이다. 1917년 11월 광복회는 전 경북관찰사 장승원을 권총으로 사살했다. 박상진 스승 허위에 의해 경북관찰사가 됐던 장승원은 훗날 “군자금을 지원해달라”는 허위 측 요청을 일본에 밀고했던 사람이다.(총독부 경북경찰부, 앞 책, p339) 광복회 회원 채기중과 경창순, 강순필, 유창순은 장승원을 사살하고 집 대문과 마을 버드나무에 이런 경고문을 붙여놓았다. ‘너의 큰 죄를 꾸짖고 우리 동포에게 경고한다 – 광복회원’.

 

세금 운송 마차 습격도 자금 모집에 동원된 비합법적 투쟁이었다. 1917년 미국 자본이 운영하던 평안도 운산금광 현금마차 탈취 미수 사건도 광복회가 주동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광복회 만주지부장 이진룡이 체포되자 후임에 임명된 김좌진이 만주로 떠났다. 서울 인사동에서 박상진은 김좌진에게 전별시를 이렇게 써주었다. ‘칼집 속 용천검 북두까지 빛나니 이른 때 공을 세워 개선가를 부르자’.(박중훈, ‘역사, 그 안의 역사’, 박상진의사추모사업회, 2021, p294)

 

1910년대를 살아낸 광복회

부호(富豪) 가운데 처단 대상을 골라 사살하고 그 현장에 광복회 행위임을 밝혀놓았으니 광복회는 강도 집단이 아니었다. 성리학과 신문물을 공부하고 대륙으로 간 혁신유림과 교류 끝에 나온 행동이니 박상진은 단순한 비분강개형 투사만도 아니었다. 세상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1910년대, 광복회는 뒷날 독립운동이 갈 길을 먼저 걸어간 조직이 아니었을까.

 

결국 1918년 1월 충남 도고면장 박용하가 광복회에 의해 처단되고 현장에서 광복회 명의 경고문이 발견되면서 박상진은 경찰에 체포됐다.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 1심 선고는 다음 날 팔도를 뒤흔든 만세운동으로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총 여섯 차례 재판을 거쳐 사형이 확정된 박상진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됐다. 딱 100년 전이다.

 

스승 허위가 서울 서대문형무소 처형 1번이었고, 제자 박상진은 대구형무소 처형 1번이었다. 그가 이리 썼다. ‘이룬 일 하나 없이 가려 하니 청산이 조롱하고 녹수가 찡그린다(無一事成功去 靑山嘲綠水嚬·무일사성공거 청산조녹수빈)’(박상진, 옥중절명시)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다가 울산 생가로 돌아와 사는’ 증손자 박중훈(67)이 말한다. “할아버지 본인은 원치 않았더라도 시대가 원했기에 기꺼이 격랑 속으로 들어가셨다.”

 

▲경북 경주에 있는 박상진 의사 묘 비석. /박종인

 

272. 광기의 사대(事大)-송시열의 달력과 정조의 허리띠

명나라 옛 달력 앞에서 송시열은 절을 하고 눈물을 닦았다

중국으로 통칭되는 역대 대륙 왕조 주변국은 그 왕조와 조공 관계를 유지하며 생존을 유지했다. 중국 왕조는 그 대가로 주변국 통치자를 그 영역 제후(諸侯)로 책봉해 큰 무력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이를 사대(事大) 외교라 한다.

 

전국 팔도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대부 묘비명은 ‘유명조선(有明朝鮮)’으로 시작한다. ‘명나라 속국 조선’이라는 뜻이다. 조선만이 아니었다. ‘유당신라(有唐新羅·924년 영월 흥녕사징효대사탑비)’라 기록한 통일신라 때 비석도 있다. ‘유송고려(有宋高麗·1021년 개성 현화사비명)’ ‘유원고려(有元高麗·1352년 권준묘지명: 이상 국사편찬위 한국사db)’ 같은 고려왕조 비석도 눈에 띈다. 그런데 조선은 해도 너무했다. 외교 정책이어야 할 사대가 윤리로 둔갑하고 권력 강화용 국내 정치 이데올로기로 쓰이더니 마침내 정신세계를 혼돈으로 몰고 가는 집단 광기(狂氣)로 변질됐다. 그 광기 이야기.

 

조선이 폐기한 이름, 황제(皇帝)

1392년 이성계가 이끄는 군부와 정도전으로 대변되는 신진사대부 연합 세력이 고려왕조를 타도했다. 그해 7월 17일 왕이 된 태조 이성계는 11월 새 나라 이름 후보로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두 개를 명 황제 주원장에게 올렸다. 이듬해 2월 주원장은 ‘조선’을 국호로 선택했다.(1392년 11월 29일, 1393년 2월 15일 ‘태조실록’)

 

국호 후보를 보내기 한 달 전 이성계는 옛 왕조 역사, ‘고려사(高麗史)’ 편찬 또한 지시했다. 59년이 지난 1451년 문종 1년 고려사가 완성됐다. 그런데 이 책에는 고려왕조가 사용했던 ‘황제(皇帝)’ ‘천자(天子)’ 같은 표현이 ‘왕(王)’으로 바뀌고 고려 황제 제도 또한 제후국 제도로 바뀌어 있었다.(김영식, ‘중국과 조선, 그리고 중화’, 아카넷, 2018, p33 각주)

 

1416년 태종 때 세자 담당 부서 경승부(敬承府) 윤(尹) 변계량이 “조선은 천자가 분봉한 나라가 아니라 단군을 시조로 하늘에서 내려온 나라”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고 주장했다. 실록 사관은 “동국(東國)에서 하늘에 제사하자고 하다니 분수를 모르는 억지”라고 비난했다.(1416년 6월 1일 ‘태종실록’) 1488년 성종 때 평양에 도착한 명나라 사신이 기자묘는 물론 단군 사당을 찾아 절을 하기도 했지만(1488년 3월 3일 ‘성종실록’), 조선 지도부는 황국 명에 대한 제후국 지위에 충실했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정묘호란이 터지고 병자호란이 터졌다.

 

임진왜란, 재조번방 그리고 인조반정

일본군 앞에서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천병(天兵)을 보내 구원해줬으니 명나라는 재조번방(再造藩邦·제후국을 다시 세워줌)의 황국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 종전 후 명군 총사령관 만세덕이 귀국하게 되자, 만세덕이 볼 수 있도록 서둘러 ‘再造藩邦’ 네 글자를 써서 내려보내기도 했다.(1599년 10월 5일 ‘선조실록’) 그리고 명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네 글자를 잊지 않았다.(1637년 5월 28일 ‘인조실록’, 김상헌의 상소문) 만절필동은 ‘황하가 만 번 휘어도 결국 동쪽으로 흐르듯, 황제 폐하를 향한 충성은 변치 않는다’는 뜻이다.

 

광해군에 이어 인조가 등극했다. 인조 세력이 광해군을 몰아낸 명분은 명나라에 사대를 하지 않은 무법과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하고 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패륜에 대한 징벌이었다. 두 차례 호란이 터졌다. 인조 정권은 오랑캐 청나라에 항복했다. 남한산성에 갇혔던 그들은 종전협정을 주도한 최명길을 간신이라 입으로 욕하면서 두 발로는 최명길이 열어준 문으로 산성을 빠져나갔다(從完城所開之門 而出去矣·종완성소개지문 이출거의).(최창대, ‘곤륜집’20, ‘지천공유사’)

 

대명 의리와 척화를 주장하던 정부가 오랑캐한테 항복을? 명분이 만신창이가 됐다. 사람들은 인조를 ‘더러운 임금(汚君·오군)’이라고 불렀고, 그 정부를 ‘하찮은 조정(小朝·소조)’이라고 불렀다.(1637년 8월 12일 ‘인조실록’, 대사헌 김영조 상소) 명분론자들은 권력을 유지할 길이 막막했다. 1644년 명나라 마지막 숨통이 끊어졌다. 이제 주인은 오랑캐 청나라였다.

 

▲충북 괴산 화양동계곡에 새겨져 있는 선조 친필 ‘萬折必東(만절필동)’, ‘온갖 고난이 있어도 명에 대한 충성은 영원함’. /박종인

 

사대의 변질, 정치투쟁 그리고 송시열

오랑캐에 의해 명이 멸망했다. 사대와 충성의 대상이 사라졌다. 그러자 명분론자들은 복수를 위한 북벌론과 조선이 명을 계승했다는 조선중화론을 새로운 사대 이데올로기로 완성했다. 겉으로 내세운 북벌론은 비현실적이었다. 함께 북벌을 준비하자는 효종의 말에 재야의 권력자 송시열은 “마음 수양부터 하시라”라고 응답했다.(송시열, ‘송서습유’7, ‘악대설화’)

 

명나라는 망했지만 명나라의 찬란한 중화(中華) 문명이 조선으로 건너왔다는 논리가 ‘조선중화론’이다. 조선은 명의 정신적 후계자요 명은 조선에서 부활했으니 복수를 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전쟁에서는 참패했지만 정신적으로 승리를 거뒀으니 명나라에 제사를 잘 지내고 정치를 잘하면 그만이었다.

 

이후 조선 국내 정치를 농단한 잣대는 대명 사대였다.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명에 대한 충성, 그리고 명이 소유했던 성리학적 세계관이 정파를 나눠 가졌다. 1689년 남인과 정쟁 끝에 사약을 받은 송시열은 “내가 살던 충청도 화양계곡에 명황제를 기리는 사당을 만들라”고 유언했다. 명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죽고 60년이 되던 1704년 정월 7일 송시열 제자들은 화양동 계곡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웠다. ‘만절필동’의 그 만동이다.

 

사흘 뒤인 정월 10일 이 사실을 알게 된 숙종은 두 달 뒤 창덕궁 후원에서 직접 숭정제에게 제사를 올렸다.(1704년 3월 19일 ‘숙종실록’) 그해 11월 숙종은 제사를 지낸 터에 단을 쌓고 이름을 ‘대보단(大報壇)’이라 지었다. 큰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이후 국왕과 노론 사대부 세력은 사대 순혈주의를 경쟁하며 권력을 나눠가졌다. 오랑캐 황제로부터 제후로 책봉을 받고, 오랑캐 달력을 쓰며, 오랑캐 황실에 조공을 하면서 뒤로는 명나라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을 사용하는 기이한 정치 체제가 멸망 때까지 이어졌다. 이제 그 만동묘와 대보단에서 벌어진 막장 풍경들을 본다.

 

명나라 달력에 감격한 송시열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 고황제(명태조 주원장)께서 오랑캐를 물리치고 위로 제통(帝統)을 이어받으셨다’로 시작하는 이 글은 ‘숭정을사년(1665년)’ 9월 배신(陪臣·황제의 신하) 송시열이 ‘백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百拜稽首·백배계수)’ 쓴 글이다.

 

‘호남 안찰사 유중이 1630년도 명나라 달력을 보여주었다. 내가 손을 씻고 절을 하고서 받은 다음 눈물을 닦으며 이리 말했다. “오랑캐 역법은 별을 가르고 하늘을 나눠 곳곳마다 절기가 다르다.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천하에 두 임금이 없다는 말이 사라졌으니 슬픈 회포가 더욱 간절해진다.”’(송시열, ‘송자대전’ 146, ‘경오 대통력 발·庚午大統曆跋’)

 

화양동 계곡 절벽에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는 송시열 친필이 새겨져 있다. ‘천지는 대명나라 것이요, 세월은 명 숭정제 것’이라는 뜻이다.

 

▲송시열이 새겨 넣은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 뜻은 ‘천지는 명나라 것, 세월은 숭정황제 것’./박종인

 

명나라 허리띠를 맨 정조

1787년 2월 11일 청나라에서 귀국한 사신 황인점이 정조에게 이리 보고했다. “어떤 자가 옥으로 만든 허리띠(옥대·玉帶)를 사라 해서 은자 60냥을 주고 샀다. 탐문을 해본즉 태조 고황제께서 내린 물건이었다. 귀한 물건을 싼값에 판 이유가 있으니 왕실에 바친다.”(1787년 2월 11일 ‘정조실록’) 3월 7일 정조는 대보단에 가서 제사를 올리고 제사에 참가한 유생과 무사들을 상대로 문무 과거시험을 치렀다. 무과는 활쏘기였고 문과는 시작(詩作)이었다. 정조가 내린 시제는 ‘조선관에 옥대(玉帶)를 팔았다(賣帶朝鮮館·매대조선관)’였다.(1787년 3월 7일 ‘일성록’) 규장각 출신인 성대중에 따르면 이날 정조는 바로 그 옥대를 차고 대보단에 제사를 올렸다.(성대중, ‘청성잡기’3, ‘잡언’)

 

위정척사파의 척사론과 독립문

1876년 개화를 결사 반대한 척사파 거두 김평묵은 척사의 명분을 이렇게 밝혔다. ‘조약을 맺으면 남인 무리들이 대궐을 침범할 것이고 필히 조정 권력이 바뀌어 서인은 일망타진될 것이다. 나라의 존망은 오히려 작은 일이다.’(김평묵, ‘중암선생문집’38, ‘척양대의·斥洋大意’)

 

1884년 사대를 가장한 저 권력욕과 광기에 넌더리 난 젊은 지사(志士)들이 반청(反淸) 독립과 개혁을 기치로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실패했다.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돌아온 혁명가 서재필은 1897년 조선 왕이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서울 서대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지었다. 조선 26대 왕 고종은 대한제국 황제가 되었다. 지금 영은문 돌기둥은 굳건하다.

 

▲독립문. 갑신정변 주역 서재필이 미국 망명 후 돌아와 건립을 주도했다./박종인

 

▲독립문을 세운 서재필 동상이 서 있다. 독립문은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상징한다./박종인

 

273. 서울 봉원사에 숨어 있는 근대사의 비밀들

대원군도 추사도 한바탕 꿈이었더라

▲서울 봉원사 대방(大房)에는 추사 김정희와 그 청나라 스승 옹방강의 글씨가 걸려 있다. 처음부터 이 절에 있었던 작품이 아니다. 대방은 흥선대원군 이하응 별장인 염리동 아소당을 이건해 만든 건물이다. 대원군 스승이 김정희였고, 그래서 아소당에 있던 작품들도 함께 절로 이사를 왔다. 대원군이 선친 묘를 이장하고 철거한 충남 예산 가야사 동종도 봉원사에 있다. 구한말 개화파 승려 이동인도 봉원사에 주석하며 갑신정변 주역들을 길러냈다. 근대사가 응축된 절, 봉원사다./박종인
 
 

서울 신촌 안산에 있는 봉원사 대웅전 현판 글씨는 원교 이광사가 썼다. 조선 후기 명필이다. 대웅전 옆 또 다른 법당 대방(大房) 대청에는 현판이 여럿 걸려 있는데, 주인공은 추사 김정희다. 김정희는 선배인 이광사 글씨를 졸렬하다고 혹평한 서예가였다. 그 현판이 걸려 있는 대방 원주인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원래 이름은 아소정이고 원래 있던 자리는 염리동이었다. 산으로 가는 계단 왼편 명부전(冥府殿) 현판은 정도전이 썼고, 주련은 이완용이 썼다. 계단 입구에는 이동인이라는 스님 기념비가 서 있다. 쇄국을 주도한 대원군과 동시대 인물 이동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개화(開化)를 주도한 각승(覺僧)이었다. 김옥균과 서재필은 이 절집에서 이동인을 만나 대오각성하고 혁명을 꿈꿨다. 개국 공신 정도전과 망국 관리 이완용, 시대를 뛰어넘은 앙숙 원교와 추사, 쇄국과 개화의 극을 걸어간 이하응과 이동인 그리고 젊은 혁명가들. 세기가 두 번 지난 오늘, 그들이 봉원사 대가람에 모여 있는 이유에 대하여.

 

‘내가 웃는다’, 대원군의 아소정

어느 날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시를 한 수 짓는다. 제목은 ‘아소당(我笑堂)’, ‘내가 웃는 집’. ‘내가 날 저버렸으니 그 책임 가볍지 않구나/나랏일 물러나 한적한 날 술잔만 기울인다/지난 일들 모두가 꿈이었구나/남은 삶 세속에 맡기자니 부끄럽기만 하다/(중략)/전생과 이생을 생각하며 내가 웃는다(我笑前生又此生·아소전생우차생)’(‘대동시선’ 권10, 장지연 편, 신문관, 1918)

 

1873년 겨울 친정을 선언한 아들 고종에 의해 하룻밤에 권력을 박탈당하고 쓴 시다. 이후 이하응은 그가 쓴 시 그대로 삶을 살았다. 1882년 왕십리 하급 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 때 잠깐 궁궐로 복귀했지만 곧바로 청나라 군사에게 납치돼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3년 뒤 대원군이 청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아들 고종은 대원군 존봉의절(大院君尊奉儀節)을 만들어 대원군이 사는 곳 대문에 차단봉을 설치하고 감시초소를 만들고 관리들 접견을 금지시켜 버렸다. 숨만 쉴 뿐, 권력 냄새조차 맡지 못 하도록 가둬버린 것이다.(1885년 9월 10일 ‘고종실록’)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에 의해 갑오정부 수장에 올랐지만, 이 또한 헛되이 끝났다.

 

그래서 대원군은 참 헛되이 살았다. 원래 살던 운현궁에 머물기도 했고 서울 염리동에 있는 별장에 살기도 했다. 별장은 지금 서울 염리동 서울디자인고교 자리에 있었다. 원래는 그가 미리 봐뒀던 묏자리였는데, 1870년 대원군은 그 자리에 별장을 짓고 일찌감치 묏자리 위에 살았다.

 

그 별장 이름이 아소정(我笑亭)이다. 대원군은 ‘자기 주검을 감출 가묘를 만들고 이를 감출 집을 지어 아소당이라 명명했고’(황현, ‘매천야록’ 1권 대원군의 가묘, 국사편찬위) 아들 고종은 집 주변 100보를 묏자리 경계로 삼았다.(1870년 8월 25일 ‘고종실록’) 1895년 갑오 개혁정부를 해산시킨 고종은 대원군을 아소당에 유폐시키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면담을 금지해 아비를 산송장으로 만들어버렸다.(1895년 4월 23일 ‘고종실록’) 대한제국 건국 넉 달 뒤인 1898년 2월 대원군이 “주상을 보고 싶다”고 세 번 외치다 죽었다. 그가 묻힌 곳이 아소정 자리였으니, ‘전생이든 이생이든 웃음밖에 안 나온다’고 했던 상남자 대원군의 끝은 그러했다.

 

지금 봉원사 대방 건물이 그 아소정이다. 1966년 아소정 자리에 들어선 동도중고교가 마침 중창불사 중이던 봉원사에 아소정을 팔았다. 봉원사는 화재로 불탄 염불당 자리에 아소정을 이건해 대방(大房) 법당을 지었다.

 

당호 아소당은 위세가 천하를 떨게 하던 1870년에 지었다. 그때 그가 웃었던 웃음과 말년에 웃었던 웃음은 매우 다르지 않겠는가. 아소당이 언제 아소정으로 바뀌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충남 예산 남연군묘 자리에 있던 가야사 동종. 지금은 봉원사에 있다./박종인

 

대원군의 꿈, 가야사 동종

봉원사 대웅전 동쪽 문 옆에는 작은 동종이 앉아 있다. 이 또한 대원군과 악연이 깊다.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이하응은 부친 남연군 관을 상여에 싣고 자그마치 500리가 넘는 길을 내려갔다. 1845년 대원군은 “가야사 석탑 자리에 묏자리를 쓰면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온다”는 지관 정만인 귀띔에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 묘를 충남 예산으로 옮겼다. 이듬해 정식으로 이장한 자리가 지금 남연군묘라 불리는 충남 예산 가야산 기슭 옛 가야사 터다.(‘남연군비’) 묏자리 주변에 산재한 절들을 총칭하던 가야사는 철거되고 말사 격인 묘암사에 있던 거대한 석탑 자리에 묘가 들어섰다. 과연 아들 명복(命福)과 손자 척(坧)이 황제가 되었지만 아비는 유폐돼 죽었고 나라는 사라졌다.

 

그 가야사에서 만든 작은 동종(銅鐘)이 봉원사 대웅전에 앉아 있다. 종에는 1760년 덕산, 예산, 회덕, 천안 같은 충청도 주민들이 추렴해 만들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왜, 언제 이 종이 봉원사로 왔는지는 기록이 없다. 남연군묘 이장 사건을 제외하면 두 사찰은 함께할 인연이 희미하다. 옛 아소정과 봉원사 거리는 10리밖에 되지 않으니 이 또한 대원군이 남긴 흔적일 확률이 크다. 지금 남연군묘는 발굴 작업이 한창이니, 조만간 이 비밀 또한 풀리지 않을까.

 

대원군의 스승, 김정희

아들이 왕이 되기 전 대원군은 난(蘭)을 치며 살았다. 그가 그린 난초는 대원군 호를 따서 ‘석파란(石坡蘭)’이라 불린다. 난을 치는 그 기법과, 글을 쓰는 그 서법을 대원군은 추사한테 배웠다. 스승 김정희는 석파란 그림을 보고 이렇게 평했다. ‘보여주신 난폭(蘭幅)에 대해서 이 노부(老夫)도 손을 오므려야 하겠습니다. 압록강 동쪽에서 이만한 작품이 없습니다.’(김정희, 완당전집 2권 ‘석파에게 주는 다섯 번째 편지’) 글씨와 그림 스승이니, 당연히 아소정에는 추사 작품이 많았다.

 

▲청련시경 현판(추사 김정희)

 

그래서 1966년 봉원사가 아소정을 구입하고 보니 추사 글씨가 딸려와 있지 않은가. 횡재라. 옛 아소정인 봉원사 대방에는 추사 글씨 두 점과 청나라 학자 옹방강 글씨 한 점이 걸려 있다. 추사 것은 ‘靑蓮詩境(청련시경·푸른 연꽃과 같은 시의 경지)’와 ‘珊瑚碧樓(산호벽루·산호처럼 푸른 누각)’, 그리고 ‘無量壽閣(무량수각)’은 김정희의 청나라 스승 옹방강(翁方綱) 글씨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풍운아도 가고 그 스승도 갔다. 인연은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남았다.

 

▲산호벽루 현판(추사 김정희)

 

대웅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쓴 명필인데, 김정희(1786~1856)는 자기 전 시대 명필인 이광사 글씨를 “졸렬한 필법”이라고 악평했다. 원교와 추사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 주에 하기로 한다.

 

▲대웅전 현판(원교 이광사)

 

개화승 이동인, 그리고 갑신정변

‘하루는 김옥균이 여럿을 데리고 새 절로 놀러가자고 했다. 매우 공손하고 공부도 많이 한 스님을 만났다. ‘만국사기(萬國史記)’라는 책을 받아서 읽었다. 책을 읽고 나니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처럼 인민의 권리를 세워보자는 생각이 났단 말이지. 이것이 우리가 개화파로 나서게 된 근본이야.’(김도태, ‘서재필박사자서전’, 을유문화사, 1972, p83~85)

 

서재필이 기억하는 ‘새 절’은 봉원사다. ‘공부도 많이 한 스님’은 봉원사에 있던 개화승 이동인(1849?~1881?)이다. 이동인은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을 경험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 이동인을 찾아서 김옥균과 박영효와 서재필과 그 무리들이 봉원사를 들락거렸다. 이동인은 이들을 ‘혁명당’이라고 불렀다.(이용희, ‘동인승의 행적上’, 국제문제연구1권1호, 서울대국제문제연구소, 1973) 이동인은 왕실 밀사로 1881년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 파견에 큰 역할을 맡았는데, 이후 종적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젊은 엘리트들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세상을 뒤집어놓았다. 서재필은 이렇게 회고했다. ‘이동인 스님이 우리를 인도해줬고, 새 절은 우리 개화파의 온상이라.’(위 같은 책)

 

사라진 이동인은 계단 옆 기념비로 인연을 잇고 있다. 한때 쇄국을 주장했던 권력가 흥선대원군과 개화로 변혁을 꿈꿨던 혁명가들 흔적이 절에 남아 있다. 명부전과 대웅전, 그리고 추사와 원교가 들려줄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하기로 한다.

 

▲대원군 별장인 아소당 건물. 지금은 봉원사로 옮겨와 법당이 됐다. /박종인

 

274. 봉원사에 숨은 근대사 비밀② 명필 원교와 추사에 얽힌 왜곡된 전설

정말 추사는 名筆 이광사 현판을 떼버리라고 했을까

전남 해남에 있는 대흥사에도 대웅전 현판인 ‘대웅보전’(사진)은 원교 이광사가 썼고 ‘무량수각’ 현판 글씨는 김정희가 썼다. 서울 봉원사에 가면 두 명필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글씨를 볼 수 있다. 대웅전 현판은 이광사, 대방(大房)에 있는 현판 두 개는 김정희 글씨다. 세간에서는 제주 유배길에서 대흥사에 들른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이광사 글씨를 깎아내리며 떼라고 했다가 유배 후 성숙해진 마음으로 그 글씨를 다시 걸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전혀 근거가 없다.

 

서울 봉원사는 원래 지금 연세대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1752년 영조가 그 자리에 사도세자 아들인 손자 의소세손 묘를 쓰면서 지금 안산 기슭으로 이건됐다. 그래서 이후 사람들은 봉원사를 ‘새절’이라고 불렀다. 1884년 갑신정변 주역 서재필도 “새절에서 개화승 이동인을 만났다”라고 했고(김도태, ‘서재필 박사 자서전’, 을유문화사, 1972, p83~85) 1970년대까지 주민들도 ‘새절로 소풍 간다’고 했다.

 

영조 때 왕찰이었던 사찰인지라 크고 작은 권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 개국 공신 정도전은 이 절 명부전(冥府殿) 현판을, 조선 망국 대신 이완용은 명부전 주련(柱聯) 글씨를 남겼다. 대원군 옛 별장 아소정(我笑亭)을 이건한 대방(大房)에는 흥선대원군 스승 추사 김정희 흔적이 남아 있다. 김정희 현판 두 개, 김정희 스승인 청나라 학자 옹방강 현판이 하나 걸려 있다. 추사 현판 가운데 행서로 쓴 ‘珊糊碧樹(산호벽수)’를 봉원사는 ‘珊糊碧樓(산호벽루)’라 소개하고 많은 이 또한 그렇게 잘못 알고 있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산호벽수’는 ‘산호 가지와 벽수 가지처럼 서로 잘 어울려 융성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제일 큰 법당인 대웅전에 걸린 ‘大雄殿(대웅전)’ 현판 필자는 원교 이광사다. 추사가 졸필(拙筆)이라고 맹비판한 추사 선대(先代) 명필이다. 이제 이 이광사와 김정희에 얽힌, 사실로 굳어버린 전설 혹은 괴담(怪談)을 알아보기로 한다.

 

해남 대흥사, 원교 그리고 추사

김정희가 역모에 연루돼 제주도로 유배를 간 1840년 이야기다.

 

‘전주⋅남원을 거쳐 완도로 가던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났다. 기개가 살아 있어, 대흥사 현판 글씨들을 비판했다.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 추사는 있는 대로 호통을 치며 신경질을 부렸다. 초의는 그 극성에 못 이겨 원교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고 한다. 1848년 12월 63세 노령으로 귀양지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초의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옛날 내가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지금 어디 있나? 다시 달아주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어.”’(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산사순례’, 창비, 2018, p128, 129)

 

위 내용은 같은 저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작과 비평사, 1993, p88~89)와 ‘완당평전’ 1권(학고재, 2002, p337~338), 2권(p517~518)에 동일하게 실려 있다. ‘완당평전’ 후 유홍준이 새로 낸 김정희 평전 ‘추사 김정희’(창비, 2018, p242, p355~356)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유홍준은 이렇게 평했다. ‘추사 인생의 반전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법도를 넘어선 개성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그는 외로운 귀양살이 9년에 체득한 것이다.’(‘산사순례’(2018), p130)

 

자신만만 오만방자하던 50대 김정희와 그 필체가 귀양살이 후 성숙해져가는 과정을 말하는 대표적인 에피소드다. 신문, 방송 할 것 없이 모든 매체는 이를 자기계발과 성숙을 말하는 글 소재로 삼아 글을 써왔다. 그런데 결론은 이렇다. 이 이야기는 허구(虛構)다.

 

▲해남 대흥사에 있는 추사 김정희 편액 ‘無量壽閣’.

 

천하명필 원교 이광사

소론인 이광사는 노론이 판치던 영조 때 몇 가지 역모 사건에 연루돼 전남 완도 신지도로 유배 가서 거기에서 죽었다. 영조 31년 ‘형(경종)을 죽이고 왕이 된 역적 영조’라는 대자보가 나주 객사에 걸린 ‘나주 괘서 사건’이 터졌다. 수사 과정에서 이광사 이름이 튀어나왔다.(1755년 3월 6일 ‘영조실록’) 그가 체포된 직후 자결을 결심했던 아내 문화 류씨는 엿새 뒤 남편이 처형됐다는 유언비어에 목을 매고 죽었다.(이광사, ‘원교집’ 권7, ‘망실 유인 문화류씨 묘지명(亡室孺人文化柳氏墓誌銘)’), 죽지 않은 이광사는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당했다. 그때 이광사는 “뛰어난 재주가 있으니 원컨대 목숨은 살려달라”고 청해 사형을 면하고 유배형을 받았다.(이규상(1727~1799), ‘병세재언록’, 민족문학사연구소 역, 창작과비평사, 1997, p127)

 

그 뛰어난 재주가 글씨였다. 명필이었다. 그래서 부령 유배지에서 ‘지방인들을 많이 모아 글과 글씨를 가르치자’(1762년 7월 25일 ‘영조실록’) 다시 전남 진도로, 신지도로 떠돌며 유배 생활 끝에 죽었다. 신지도 시절에도 팔도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그 글씨를 받아갔다.

 

▲봉원사 명부전. 현판은 정도전, 기둥에 있는 주련은 이완용 글씨다.

 

웬만한 남도 큰 절에는 이광사 글씨로 쓴 현판들이 걸려 있다. 강진 백련사, 해남 대흥사, 고창 선운사, 구례 천은사가 대표적이고 서울 봉원사도 그중 하나다. 영조를 역적이라 칭한 역적 글씨가 영조가 왕찰로 삼은 봉원사 대법당에 걸려 있으니 아이러니다. 그 간난고초 속에서도 이광사는 ‘서결(書訣)’이라는 서법 책을 남겼고, 그 모든 고초와 비극을 목격한 아들 이긍익은 역사서 ‘연려실기술’을 기술했다.

 

후배 천하명필 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는 영조의 서녀 화순옹주의 외가 후손이다. 집안은 노론이다. 청나라에서 신문물을 배운 김정희는 이광사와 전혀 다른 필법으로 새 명필 반열에 올랐다. 이광사는 1777년에 죽었고 김정희는 1786년생이니 본 적은 없다.

 

그런 그가 이광사 필법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세상이 다 원교의 필명(筆名)에 온통 미혹(震耀‧진요)돼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니, 참람하고 망령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큰 소리로 외쳐 심한 말을 꺼리지 않는구나. 원교는 천품이 남보다 뛰어났으나 재주만 있고 배움은 없었다(其天品超異 有其才而無其學‧기천품초이유기재이무기학).’(김정희, ‘완당전집’ 6권 ‘원교필결 뒤에 쓰다(書圓嶠筆訣後‧서원교필결후)’) 금석학과 역대 중국 필법을 연구한 추사였다. 조선에 얽매인 원교 글씨가 그에게는 촌스럽게 보였고, 게다가 반(反)영조 세력인 소론 이광사를 명필로 칭송하는 세상이 이 명문 노론에게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추사의 유배와 곤장 36대

그 추사가 1840년 8월 한 역모에 연루돼 수사를 받았다. 김정희는 의금부에 체포돼 다른 공범 혐의자들과 함께 고문을 받았다. 고문 방식은 신장(訊杖), 널찍한 몽둥이로 패면서 심문하는 방식이었다. 피의자 생명에 치명적인 고문이라, 조선은 개국 초부터 신장은 한 번에 30번을 때리지 못하고 한 번 신장을 때린 뒤에는 사흘 뒤에야 다시 때릴 수 있도록 법으로 정했다.(1417년 5월 11일 ‘태종실록’, 1511년 4월 11일 ‘중종실록’ 등)

 

그래도 심문 도중 물고(物故‧맞아 죽음)되는 사례가 빈번하자 정조는 ‘흠휼전칙(欽恤典則)’을 만들어 몽둥이 규격을 정했다. 고문 수사를 할 때 쓰는 몽둥이는 길이 105㎝(3척5촌·1척=30㎝ 기준)에 손잡이는 길이 45㎝(1척5촌), 지름 2.1㎝(7푼)이며 매를 때리는 부분은 길이 60㎝(2척)에 너비는 2.7㎝(9푼) 두께는 1.2㎝(4푼)였다.(1778년 1월 12일 ‘정조실록’) 때리는 방법은 ‘엄중(嚴重)하게.’(‘속대전’ 형전 ‘형신추국(刑訊推鞫)’)

 

그 신장을 김정희는 여섯 차례에 걸쳐 모두 서른여섯 대를 맞았다. 1840년 8월 23일 5대, 다음 날 7대, 25일 3대, 29일 5대, 30일 7대 그리고 9월 3일 9대.(1840년 8월 23일~9월 3일 ‘일성록’‧석한남, ‘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 가디언, 2017, p99~100, 재인용) 오늘내일 상간으로 김정희는 물고될 처지였으나 우의정 조인영의 청원에 목숨을 건지고 제주 유배형을 받았다.(1840년 9월 4일 ‘헌종실록’) 함께 신장을 얻어맞으며 심문당하던 김양순은 4차례에 걸쳐 신장 61대를 맞다가 죽었다.(1840년 8월 27일 ‘헌종실록’) 그리고 김정희가 의금부 도사와 동행해 멀고 먼 유배길을 떠났다. 유배형 가운데 가시나무 울타리 속에 갇히는 위리안치(圍籬安置) 형이었다.

 

고문 받은 몸으로 떠난 유배길

‘몸에 형구(刑具)가 채워지고 매를 맞아서 곤욕을 받는 것인데,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겸하였습니다. 40일 동안 몸에 형구가 채워지고 매를 맞는 참독(慘毒)을 만났으니, 고금천하에 어찌 혹시라도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김정희, ‘완당전집’ 3권, ‘권돈인에게 보내는 편지’4)

 

제주로 가려면 완도에서 배를 타야 한다. 제주에 도착한 후 김정희가 동생 김명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김정희는 9월 27일 아침 완도에서 배를 타고 석양 무렵에 제주에 도착했다.

 

유배 죄인을 압송하는 관리들이 작성한 ‘의금부노정기’(연대 미상)에 따르면 서울에서 제주까지 규정된 압송 기한은 13일이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사항이다. 1672년 현종 때 유배형을 받은 사간원 헌납 윤경교는 유배지에 7~8일 늦게 도착하자 처벌을 받았다.(1672년 8월 29일 ‘현종실록’) 경종 때 갑산으로 유배형을 받은 주청부사 윤양래는 도착이 이틀 늦었지만 ‘쉬지 않고 이동했기’ 때문에 처벌은 없었다.(김경숙, ‘조선시대 유배형의 집행과 그 사례’, 사학연구 55,56호, 한국사학회, 1998) 그런데 김정희는 9월 4일 유배형을 선고받은 뒤 23일 만에 제주에 도착했다. 선고를 받고 늦게 출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문당한 역적이 유배길을 이탈?

도착 기한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는 유배길, 그것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떠난 유배길에서 경로를 이탈해 해남 산중 대흥사를 찾을 수 있겠는가. 설사 갔다고 해도 대웅전 현판 필자를 비판하고 끌어내리며 자기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같이 고문을 당했던 김양순은 매를 맞다가 죽었다. 죄목은 역모였다. 쉬지 않고 걸어도 지체될 길에서 한가하게 친구 만나러 산중으로 들어갈 역모꾼은 없으리라. 그러니 8년 뒤 유배에서 풀린 김정희가 대흥사에 들러 현판을 다시 걸라고 한 이야기도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해남 대흥사 대웅전. 편액 '대웅보전'은 원교 이광사 글씨다.

 

‘원교 글씨를 보니 웃음이 다 난다’

5년 뒤인 1853년 3월, 김정희가 북청으로 두 번째 유배를 갔다가 경기도 과천으로 돌아온 뒤 초의에게 편지를 보냈다. ‘원교의 대웅전 편액을 다행히 본 적이 있다(大雄扁圓嶠書幸得覽過‧대웅편원교서행득람과). 천박한 후배들이 비평할 바는 아니나 만약 원교의 자처한 바로 논하면 너무도 전해들은 것과 같지 않다. 그가 조맹부체의 덫 안에 추락해 있다는 말을 면치 못하겠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不覺哦然一笑‧불각아연일소).’(김정희, ‘완당전집’ 5권, ‘초의에게 보내는 편지’37)

 

대웅전 현판을 떼라고 했다는 언급은 없다. 다시 붙이라고 했다는 정신적 성숙함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는 더한 자신감이 읽힌다. 위 책 ‘완당평전’(2002)에는 ‘이 전설은 고증하지 않기로 한다’고 적혀 있다. ‘추사 김정희’(2018)는 이 에피소드를 ‘두 번째 전설은’이라며 전설로 전언(傳言)하고 있지만 이 책보다 뒤에 나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산사순례’(2018)에는 ‘전설’이라는 언급이 없다. 아름다운 사실로 굳혀버린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처음 알린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전설을 인정하게 되면 전설이 사실이 되는 거다. 굳이 ‘전설에 따르면’이라고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 전설이 사실이 되었다. 봉원사, 대흥사에 가면 그 현판들을 꼭 일별할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275.훈민정음이 모든 이의 문자, 한글이 되기까지

그리하여 한글이 萬民의 글자가 되었다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한글박물관 입구. 1446년 음력 9월 29일 ‘세종실록’에 실린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어제(御製)의 언해본이다. 지식인층 외면 속에 훈민정음은 민간에는 급속도로 전파됐고, 19세기 말 조선을 찾은 청나라 학자들 눈에는 ‘당 태종이 군자의 나라라 한 말이 거짓이 아닐 정도로’ 모든 이들이 책을 읽는 나라가 됐다. 훈민정음은 근대 한글로 재탄생해 조선과 대한민국을 각성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됐다. /박종인

 

1446년 음력 9월 29일 예조판서 정인지가 이리 선언하였다. ‘훈민정음은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1446년 9월 29일 ‘세종실록’, 정인지 훈민정음 서문)

 

400년 세월이 흘러 1882년 양력 8월 임오군란 진압을 위해 조선에 온 청나라 오장경 부대 막료 설배용(薛培榕)이 경성 거리를 구경하며 이렇게 기록하였다.

 

‘농부들도 모두 글을 알고 집집마다 모두 편안히 읽으니 당 태종이 군자의 나라라고 한 것도 거짓이 아니었다(農每知書 戶皆安讀 唐太宗稱爲君子之國 信不誣也‧농매지서호개안독당태종칭위군자지국신불무야).’(설배용, ‘조선풍속기(朝鮮風俗記)’, 소방호재여지총초, p61)

 

바로 이 조선문자, ‘한글’ 이야기다. 1446년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이 ‘집집마다 편히 읽는’ 손쉬운 문자 한글이 되기까지 이야기.

 

수난 받은 훈민정음과 세종의 논리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글자를 지었다. 비록 간단하지만 응용이 무궁하니 이를 훈민정음이라 일렀다.’(1443년 12월 30일 ‘세종실록’) 이 실록 기록에는 미묘한 정치적 맥락이 숨어 있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같은 집현전 정5품 이하 20, 30대 신진 학자들을 부려서 비밀리에 추진하던 프로젝트였다. 아는 사람은 이들 측근과 맏아들 동궁(문종), 둘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정도였다. 그런데 그 비밀 프로젝트가 동지섣달 어느 날 완성되고, 그 사실이 그 달 마지막 날에야 알려진 것이다.

 

과연 두 달 뒤 집현전 중진들이 집단 상소로 새 문자 창제를 반대하고 나왔다. 여러 반대 논리 가운데 학문에 관한 반론은 이러했다. “27자 언문만 공부하면 출세할 수 있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고심노사(苦心勞思)하여 성리(性理)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1444년 2월 20일 ‘세종실록’) 분노한 세종은 상소에 참가했던 중진 학자들을 모조리 하루 동안 옥에 가두라 명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1446년 훈민정음이 공식 반포됐다. ‘해례(解例)’ 서문을 쓴 정인지는 ‘바람 소리와 학 울음, 닭 울음 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문자라고 자평했다. ‘해례’는 집현전 학자들이 집단으로 정음의 제작 원리와 구성을 설명한 설명서다.

 

그런데 이 ‘해례’를 보면 훈민정음은 그저 발성기관을 모방한 단순한 표음문자가 아니었다. ‘해례’는 마치 성리학 문헌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모음을 구성한 ‘천원지평인립(天圓地平人立: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며 사람은 서 있다)’이라는 삼재(三才) 원리를 비롯해, ‘해례’에 동원된 이론들은 세종 원년 명 황제로부터 선물로 받은 ‘성리대전’ 같은 성리학 서적들에서 취한 이론들이다. 태극, 음양, 오행, 삼재, 그리고 주역을 비롯한 유교 경전에 나타나고 구성된 원리들이다.(곽신환, ‘훈민정음 해례에 반영된 성리학의 영향’, 유학연구 37집, 충남대 유학연구소, 2016) 성리학적 논리를 부여함으로써 3년 전인 1443년 겨울 부딪쳤던 저항은 크게 무마되고 기성 지식사회의 동의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조선 정부는 훈민정음 보급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불경을 언해하고 성리학 서적을 언해하고 삼강행실 같은 충효 사상을 담은 책을 언해해 전국에 보급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훈민정음은 지식인 사회로부터 외면받았다. 고급 정보를 담은 책은 100% 한문으로 간행됐다. 언문으로 번역된 서적은 농서나 의서 같은 실용 서적에 한정됐다. 사서삼경 또한 언해본이 나왔지만 한문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백성에게는 어려웠다. 더군다나 과거시험을 준비할 여유가 없는 백성에게는 불필요한 수험 서적이었다.

 

널리 퍼져나간 언문

하지만 민간에서는 이 훈민정음이 적극적으로 수용됐다.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50년도 지나지 않은 1490년 충청도 회덕에 사는 여자 신창 맹씨는 함경도에 근무하는 군인인 남편 나신걸로부터 언문 편지를 받았다.(배영환, ‘현존 最古의 한글편지 ‘신창맹씨묘출토언간’에 대한 국어학적인 연구’, 국어사연구 15권 15호, 국어사학회, 2012) 편지에는 함경도에서 경성(한성)으로 전근됐으니 옷을 보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한글박물관 입구. 1446년 음력 9월 29일 ‘세종실록’에 실린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어제(御製)의 언해본이다. 지식인층 외면 속에 훈민정음은 민간에는 급속도로 전파됐고, 19세기 말 조선을 찾은 청나라 학자들 눈에는 ‘당 태종이 군자의 나라라 한 말이 거짓이 아닐 정도로’ 모든 이들이 책을 읽는 나라가 됐다. 훈민정음은 근대 한글로 재탄생해 조선과 대한민국을 각성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됐다. /박종인

 

그리고 100년 뒤 안동에 사는 원이 엄마는 1586년 ‘둘이서 머리 하얗게 되도록 살다 함께 죽자더니 먼저 가냐’며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원이 아빠 이응태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이 편지를 읽으면 꼭 꿈에 나와 말을 걸어달라’고 적혀 있다. 원이 엄마는 편지 첫머리에 남편을 ‘자네’라 불렀다. 성리학에 매몰되기 전인 조선 초 남녀 관계는 평등했다는 사실까지, 대한민국 사람들은 이 ‘언문’ 편지를 통해 알 수 있었다.(‘안동 정상동 일선문씨와 이응태묘 발굴조사 보고서’, 안동대박물관, 2000)

 

그리고 1901년(광무 5년) 정월 25일 조봉길이라는 사내가 여섯 살 먹은 딸 완례를 윤참판 댁에 종으로 팔았다. 딸을 팔고 받은 돈은 찰벼 다섯 섬, 메벼 네 섬과 가을보리 한 섬이었다. 계약서는 지수남이라는 사내가 언문으로 작성했다. 궁중에서 창안된 신 문자가 급속도로 전국에 전파됐음을 알 수 있는 문서들이고, 민간에서는 언문이 의사소통 수단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음을 알려주는 문서들이다. 이전에는 표현하지 못했던 백성의 희로애락과 일상이 적나라하게 표현돼 있다.

 

▲1901년 1월 25일 한글로 작성된 노비 문서. 딸 완례를 윤판서집에 판다는 계약서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중세 훈민정음에서 근대 한글로

완례가 윤참판 댁에 노비로 팔려가고 4년이 지난 1905년 7월 19일 의학교장 지석영이 새로운 맞춤법을 제안한 ‘신정국문(新訂國文)’을 상소해 고종으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7월 8일 올린 상소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세계 모든 백성이 누구나 글을 알고 날이 갈수록 문명으로 전진하고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어물어물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해득하기 어려운 한문에 인이 박여 쉽게 이해되는 국문을 숭상하지 않기 때문이다.’(1905년 7월 8일 ‘고종실록’) 공동체로 하여금 고급 정보를 공유하게 하는 문자 해독력이야말로 근대화의 첩경이라는 당연한 주장이었다.

 

이미 1894년 갑오개혁 때 모든 문서는 ‘국문(國文)’으로 작성한다는 정책이 채택됐지만(1894년 7월 8일 ‘고종실록’) 그 맞춤법에 대해서는 이뤄진 바가 없었다. 지석영 상소 넉 달 뒤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실질적으로 사라졌지만, 국문 근대화 작업은 계속됐다.

 

1907년 7월 8일 대한제국 정부 학부(學部) 산하에 ‘국문연구소’가 설립됐다. 이를 제안한 사람은 학부대신 이재곤이었다. 황제에게 재가를 청한 사람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었다. 연구위원 7명 가운데 정3품 서기관 주시경도 끼여 있었다. 주시경은 이미 1896년 ‘독립신문’ 근무 당시 국문연구모임을 주도한 적이 있는 학자였다.(이기문, ‘개화기의 국문연구’, 한국문화연구소, 1970, p31)

 

이 과정에서 순국문과 국한문 혼용 가운데 혼용이 논쟁 끝에 채택되고, 20세기 초 현재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자음과 모음이 정리됐다. ‘훈민정음’ 이래 정서법이었던 ‘소리 나는 대로 쓴다’는 원칙 또한 폐기되고 ‘발음과 무관하게 단어를 표기한다’는 새로운 원칙이 확립됐다. 예컨대 ‘꼬슨’ 혹은 ‘꼬츤’이 아니라 ‘꽃은’이라고 쓰고 ‘바라메’가 아니라 ‘바람에’라고 쓴다는. 이듬해 8월 주시경은 서울 봉원사에서 국어연구학회라는 민간연구회를 창립했다. 이 학회가 오늘날 한글학회 뿌리다. 이후 식민 시대에도 훈민정음을 성리학적 원리를 토대로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주류가 되지 못했다.

 

▲1908년 주시경이 창립한 ‘국어연구학회’ 기념비. 서울 봉원사에 있다. /박종인

 

근대 한글, 그리고 21세기

동대문시장 간판들을 보니 글자를 합하면 낼 수 있는 소리가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오종사, ‘조선풍토약술’, 인하대한국학연구소, 앞 책, p54)

 

오종사는 앞에 언급한 설배용과 함께 조선을 찾았던 중국 학자다. 19세기 말 조선을 찾은 중국 지식인들이 조선 문자에 보인 관심은 근대화에서 밀린다는 위기감에서 나왔다. 이후 중국 근대 지성 루쉰(魯迅)은 이렇게 선언했다. ‘한자가 멸망하지 않으면 중국이 반드시 망한다(漢字不滅 中國必亡‧한자불멸 중국필망).’(노신, ‘병중답구망정보방원(病中答救亡情報訪員)’, 1936)

 

1950년 중화민국 부주석 류사오치(유소기)가 선언했다. “조선(북한) 대사 이주연이 나에게 말했다. “아무 곤란 없이 외국 저작을 한글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런 문자 개혁을 배우라.”(‘건국 이래 유소기 문고’ 1책, 중공중앙문헌연구실, 중앙문헌출판사, p441, 자오춘얀, ‘언어의식 형태와 중국한어병음운동’, 싱가포르대 박사논문, 2012, 재인용)

 

조선 왕조 내내 사대(事大) 받던 저 나라가 부국강병을 위해 조선 문자를 연구하겠다니 참 무섭다. 중세 훈민정음을 계승한 근대 한글은 어찌할 것인가. 폐기한 옛 자모는 영원토록 불필요할 것인가. ‘훈민정음과 한글은 패러다임이 다르다. 이제 한글을 세계 문자로 발전시키기 위해선 한글에 훈민정음식 표기법을 입히는 것이 중요하다.’(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심소희) 망국 후까지 국어학자들이 치열하게 논쟁했던 이유도 ‘과거 보존’이 아니라 ‘미래’ 아닌가.

 

276. 근대사가 응축된 군산 기행① 그들이 기억하는 군산

군산 바닷바람에 실려오는 100년 전의 기억

군산항. 1899년 대한제국이 이 항구를 개항한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군산을 스쳐갔다. 서글픈 식민의 풍경 속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던 조선사람들, 그리고 꿈을 이루기 위해 조선을 찾은 일본 서민과 자본가까지. 군산이라는 도시는 그들이 남긴 흔적을 애써 지우지 않고 21세기 대한국인들이 볼 수 있도록 보존해놓았다. /사진가 서경석

 

이 가을 항구도시 군산으로 많이들 가봤으면 좋겠다. 되도록이면 근대사 공부를 하고 가면 좋겠다. 그러면 미곡(米穀)을 수탈당한 군산항은 평화로운 산책로로 변해 있을 것이다. 일본으로 향한 욕망 가득한 쌀가마가 쌓였던 장미동(藏米洞)은 아름다운 문화공간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 욕망이 응축돼 있던 조선은행은 근대 건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 변해 있을 것이고. 조선 농민을 부려 대형 농장을 경영했던 농장주 구마모토 리헤이 별장은 대한민국 농촌 보건의 아버지 의학박사 이영춘 기념관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군산에는 그 모든 역사가 일상화돼 있고, 그 일상 속에서 여행객들은 저도 모르게 역사를 호흡하는 것이다. 한 단어로 종잡기 불가능한, 이 땅 근대사가 응축된 군산 기행 시작.

 

군산의 개항과 미곡상 히로쓰

1898년 5월 26일 대한제국 정부는 군산을 외국에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경남 마산과 함북 성진도 함께였다.(1898년 5월 26일 ‘고종실록’) 이듬해 5월 1일 군산이 정식으로 개방됐다. 군산 개항은 쌀이 필요한 일본 측 요구와 맞아떨어졌다. 호남에 펼쳐진 곡창을 일본과 연결할 수 있는 최단거리 물류지가 군산이었다. 군산은 순식간에 상전벽해의 땅이 되었다.

 

1892년 염전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조선 부산에 와서 살던 히로쓰 기치사브로(廣津吉三朗)는 1895년 청일전쟁 통역관으로 취직해 2년 동안 일했다. 열일곱 살이었다. 9년 뒤인 1904년에는 러일전쟁 첩보원으로 또 징병돼 남포와 평양과 압록강과 만주 봉천에서 스파이로 활동했다. 전쟁이 끝나고 받은 생명보험금 450엔으로 김씨 성을 가진 조선인 지주와 합작해 군산에 미곡상을 차렸다. 땅을 사서 지주도 되었다.(후지이 가즈코, ‘식민도시 군산의 사회사1- 신흥동 일본식가옥과 히로쓰집안의 역사’, 간세이가쿠인대학 사회학부 기요 115집, 간세이가쿠인대학 사회학부연구회, 2012)

 

군산 하면 쌀이고 그때 쌀 하면 곧 돈인지라 히로쓰는 이내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일본으로 귀국하던 일본인에게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큰 집을 지었다. 1935년이다. 그 집이 지금 군산 신흥동에 있는 ‘히로쓰 가옥’이다. 누가 봐도 큰 집이었고 누가 봐도 조선이 아니라 일본 그 자체다.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그 큰 부(富)를 그대로 놔두고 가방 하나 들고 귀항 티켓을 샀지만 부산항에서 그 가방마저도 도둑맞았다. 적수공권으로 귀향한 히로쓰는 4년 뒤 화병으로 죽었다. 그 집은 지금 군산에 남아 있다.

 

▲히로쓰 가옥. 군산에서 미곡상과 농장을 경영했던 일본인의 흔적이다./박종인

 

임피 사람 이진원(86)의 기억

“우리 아버님이 한의사라 비교적 잘살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일본 사람 옆에 가도 못 했어요 무서워서. 우리 집 옆에 직사각형으로 터를 잡고 수천 평, 조선 사람들은 주변에 토막집 그냥 천막처럼 지어놓고 사는 거예요. 80년 전이네. 제가 여섯일곱 살 됐을 때 그 일본사람 집에 넓은 밭이 있었는데 팥을 심는 거예요. 그걸 작은 부삽으로 심는데 그게 신기했어요. 내가 꼬마니까, 왜 그랬는가 몰라요, 울타리 너머 가서 그 부삽을 가지고 와서 우리 집 마당 도랑에서 놀고 있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막 거인이 부엌을 통해서 들어오더니 소리를 지르며 나를 때려요. 그래서 내가 거기서 기절을 했습니다. 깨어나서 보니까 우리 누님하고 어머니가 나를 안방에 뉘어 놓고 울고 있는 거예요. 그게 기억이 나요. 아주 그냥, 일본 사람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고 우리는 그냥 그럭저럭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인식을 가졌어요. 그런데 해방이 되고 학교 선생님이 그래요. ‘이제부터 마음대로 조선말 써도 된다.’ 아, 이게 해방이구나 하고 느꼈더랬습니다.” 미곡을 실어나르던 임피역은 2008년 영업을 멈췄다. 역 앞 공원에는 거꾸로 가는 시계탑이 서 있다. 탑신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시실리(時失里)’, 시간을 잃은 곳.

 

▲악덕지주'와 '의료사업가'라는 이중적 기억, 구마모토 리헤이. /이주민 제공

 

시마타니의 금고, ‘악덕지주’ 구마모토

개정면 발산리에는 발산리 유적군이 있다. 안내판만 보면 옛 절터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농장주 시마타니 야소야가 자기 농장에 그러모은 옛 석물들이다. 몇 개는 훗날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됐다. 1903년 조선에 건너온 이 야마구치현 출신 중년 사내는 농장 안에 금고를 ‘지었다’. 2층 건물 하나를 콘크리트로 지어서 금고로 썼다. 해방이 되고 농장은 초등학교로 변했다. 금고, 발산리 유적은 학교에 남아 있다. 미군정청에 귀화를 신청했으나 불허됐고, 시마타니 또한 히로쓰처럼 가방 두 개 들고 귀국선을 탔다.

 

▲군산 발산리 유적군. 농장주 시마타니가 자기 농장에 수집해놓은 옛 석물들이다. /박종인

 

시마타니보다 한 해 전 군산에 온 구마모토 리헤이는 게이오대 이재과(경제학과) 출신이다. 호남 옥토(沃土)를 본 구마모토는 물주를 모아 거대한 농장을 만들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이어 호남 지주로는 가장 땅이 넓었고, 관리인들은 ‘총독부 정책보다 10년 정도 앞섰다고 농장 스스로 자부할 정도로’ 농업 전문가들이었다.(’화호리, 일제강점기 농촌 수탈의 기억1′,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2020, p36) 갑부가 된 구마모토는 군산에 당대 최고 재료만 써서 별장을 지었다.

 

농장은 생산성도 높았지만 조선 농부들에게 물리는 소작료도 고율이었다. 소작료를 둘러싸고 총독부가 나설 정도로 갈등이 깊었다. 소작민들이 “소작료 주고 나면 먹을 게 없어서 못살겠다 싶어 만주로 가는” 슬픈 일이 다반사였다.(20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 ‘20세기 화호의 경관과 기억’, 눈빛, 2008, p47)

 

▲대한민국 농촌 보건의 아버지 이영춘. 구마모토 농장 무료진료소에서 활동했다. /이주민 제공

 

의료사업가 구마모토의 별장, 이영춘 기념관

그런 반면 1934년 농장 안에 병원을 설치하고 소작인과 그 가족에게 무료 진료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 사업을 위해 고용된 의사가 세브란스의전 출신 의사 이영춘(1903~1980)이었다. 평남 용강 사람 이영춘은 이후 군산 사람이 되었다. 이영춘은 구마모토가 한 말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게 농장의 정략 사업이라 혹평할지 모르나 이 선생만은 진의를 이해해주시라.” 그 의료 혜택을 받기 위해 일부러 소작을 신청하는 조선인도 많았다.(이영춘, ‘나의 교우록’, 쌍천이영춘박사기념사업회, 2004, p28)

 

▲구마모토 별장, 그리고 이영춘 기념관. /박종인

 

해방이 되었고, 구마모토 또한 농장을 두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이영춘은 그가 남긴 별장에 살았다. 그 옆에 병원을 짓고, 간호학교를 짓고, 진료를 하고 강연을 하며 농촌 보건 사업을 벌이다 1980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남에게 주고 죽었다. 삼촌을 보며 자라나 치과 의사가 된 조카 이주민(78)이 말한다. “삼촌 행적이 찬란해 똑같이 살려고 노력했는데, 어쩌면 돈 못 버는 것까지 똑같이 살았네.” 구마모토가 남긴 별장은 지금 남김없이 주고 간 이영춘 기념관이 되었다.

 

그렇게 같은 바닷바람 속에서 같은 시대에 서로 다른 방향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 이야기해본다, 그 도시에 남은 흔적에 대하여.<다음 주 계속>

 

277. 근대사가 응축된 군산 기행 ②황제 지주제를 설계한 대한제국

땅의 歷史]대한제국 황실이 설계한 식민 수탈 시스템

왜구와 군산항 뜬다리

 

14세기 고려 내륙까지 쳐들어왔던 왜구(倭寇)가 노린 목표는 쌀이었다. 임진왜란 때 군량미를 노리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이순신이 방어한 곳도 곡창 지대 호남이었다. 고려 말 호남 세미(稅米)을 모은 진성창이 군산에 있었고, 진성창을 공격한 왜구를 최무선이 물리친 진포해전도 군산에서 벌어졌다.

 

▲전북 군산항에는 ‘뜬다리’라고 불리는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다. 식민시대 호남평야에서 나온 쌀을 일본으로 싣고 가는 대형화물선 접안시설이다. 간조와 만조 물때에 따라 수면 위로 뜨고 내리는 부잔교다. 당시 대지주들은 고율의 소작료를 받으며 소작농을 통해 쌀을 생산했고, 생산한 쌀은 많게는 생산량의 절반을 일본으로 팔았다. ‘식민지 지주제’라는 이 토지 시스템은 대한제국 황실이 실질적인 설계자였다./박종인


그 군산항에는 뜬다리가 있다. 부잔교(浮棧橋)라고도 한다. 왜구 이후 마침내 조선 침략에 성공한 일본이 만든 대형 콘크리트 접안 시설이다. 1926년 이후 ‘왜놈들이 우리의 고혈을 빨아 먹기 위하여 쌀을 실어 내갈 목적으로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은’ 다리다.(1948년 11월 30일 ‘군산신문’) 해방 뒤에는 ‘뻣정다리처럼 삐쭉하니 병신이 되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앞 신문)가 됐지만, 뜬다리는 간조와 만조 수위에 따라 시설 전체가 오르내릴 수 있는 첨단 구조물이었다.

 

군산은 일본이 호남 지역 미곡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든 항구도시였다. 그 쌀을 군산으로 운반하기 위해 전주~군산 도로(1908)를 만들었고 익산~군산 철도(1912)를 만들었다. 철저하게 쌀을 위해 만든 도시였다. 그리하여 해방이 됐을 때 군산은 ‘미처 몇 달 가지 못해 선박 출입이 전연 없이 말할 수도 없이 한산해진’ 항구가 돼 버렸다. 지금 군산은 전쟁과 전후 눈물 나는 노력으로 재탄생한 도시다. 그래서 지금 군산항 풍경 속에는 저 끔찍한 기억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 일본이 어떻게 자기네 식민지 조선에서 쌀 ‘수탈’에 성공했는지 그 과정을 보기로 하자.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일본 미곡 수탈의 설계자는 대한제국이었다.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 원칙

1910년에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토지조사 사업 목적은 조선의 토지 실태 파악 및 근대적 소유제도 확립이었다. 일찍 근대화한 일본과 동질 구조를 만들어야 지배가 용이했다. 그리고 지배 구조에 가장 기초적인 요소는 땅이었다. 특히 봉건 지주-소작농이 역사적으로 결합돼 있는 농지는 말 그대로 접수 대상 0순위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은 농촌 인구가 급감하고 쌀 소비량이 폭증하던 시기였다. 이미 값싼 조선 쌀을 수입하던 일본은 식민지화와 함께 조선을 식량 기지로 삼으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통감부를 설치한 일본은 곧바로 토지조사에 들어가 국유지 실태를 파악했다. 이를 토대로 1910년 토지 측정과 서류 조사를 통해 조선 토지 실태를 파악했다. 그때 만든 토지대장이 21세기 대한민국 토지 측량에 여전히 쓰인다. 이때 통감부와 총독부가 세운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근대 법 체계에 없는 관습적인 조선 소유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조사가 완료돼 국유화된 토지에 대해 행정적 이의 제기는 허용하지 않는다.

 

두 원칙 모두 일본 본국에서는 법적으로 허용된 농민의 권리이고 구제 방식이었지만 조선에서는 허용하지 않았다.(남기현,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성립된 토지소유권의 성격 검토’, 개념과 소통 27권0호, 한림과학원, 2021)

 

이런 원칙으로 이뤄진 토지조사 결과 대규모 토지가 국유화됐고, 그 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대지주에게 불하돼 농장으로 변했다. 고율의 소작료를 내며 소작인들이 거둔 쌀은 군산 뜬다리 부두를 거쳐 쌀값 경쟁력이 높은 일본 시장으로 건너갔다. 저가인 조선 쌀 수입에 일본 농민들 반발이 심했지만 조선에 있는 대지주들은 거부(巨富)를 쌓았다. 이런 미곡 생산 시스템을 ‘식민지 지주제’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행정적 이의 제기가 불가능하고 관습적 소유권을 부정한 토지 수용은 누구 아이디어였을까. 정답은 대한제국이다. 더 정확하게는 대한제국 황실이 그 설계자다.

 

▲군산지역 대지주였던 시마타니 야소야의 금고 건물. 미곡 생산과 수출이 만든 거부(巨富)의 상징이다./박종인


구한말 국유지 조사

건 조선 농업은 이러했다. 국가와 왕실, 민간 대지주는 자기 땅을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았다. 땅 없는 농민은 그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소작료를 냈다. 대개 소작료는 병작반수(並作半收), 수확한 곡식 절반이었다.

 

1894년 벌어진 동학농민전쟁은 그 지주제의 모순과 탐관오리의 부패가 원인이었다. 가혹한 소작료와 더 가혹한 세금과 부패에 질린 백성은 세금 포탈을 위해 땅을 숨겼고, 소작농은 고향을 벗어나 유민(流民)으로 떠돌았다.

 

1894년 8월 재정 위기 극복을 위해 갑오개혁정부는 국유지로 분류된 땅에도 세금을 매기기로 결정하고 전국에 있는 국유지 조사에 착수했다. 각 역원(驛院) 소속 역토(驛土)와 각 관청이 보유하고 있는 둔토(屯土), 왕실 소유 궁방전(宮房田)이 대상이었다. 주민이 농사를 짓고, 해당 역과 관청이 소작료를 받는 땅들이었다. 조선정부는 500년 동안 면세(免稅) 대상이던 이들 땅에 세금을 부과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1895년 9월 처음 현장에 나간 관리들이 조사를 해보니, 어떤 국유지들은 엉뚱한 사람들이 지주(地主)라며 서로 땅을 사고팔고 소작인들로부터 소작료를 받고 있지 않은가. 몇 백 년 건드리지 않았던 땅에 자연발생적으로 주인이 생기고 땅 거래가 이뤄지고 있던 것이다. 매매계약서가 ‘권축(卷軸·두루마리)을 이룰 정도로’ 몇 백년 대대로 거래를 해온 땅도 있었다.(배영순, ‘한말 역둔토조사에 있어서의 소유권분쟁’, 한국사연구 25, 한국사연구회, 1979)

 

갑오개혁 정부의 토지개혁

갑오개혁 정부가 토지조사사업을 하면서 내건 원칙은 ‘어떤 땅이든 경작하는 사람이 세금을 낸다’였다. 언뜻 보면 ‘경자유전’ 원칙과 유사하게 읽히지만, 실질은 매우 달랐다.

 

국가 소유로 확정된 땅에 농사짓는 농민은 그때까지 각 관청에 내던 소작료와 함께 중앙정부에서 납세 의무를 부여받았다. 이중과세라는 농민들 항의에 정부는 “소작료는 해당 관청에 내는 것이고 세금은 중앙 탁지부에 내는 게 마땅하다”며 이중과세 주장을 일축해버렸다.(1896년 11월 ‘각도각군소장보고’ 3책 ‘개성부송서면 사포둔민의 소장’, 배영순, 앞 논문 재인용)

 

대한제국의 역주행

1897년 3월 아관파천에서 복귀한 고종이 명을 내렸다. “토지를 군부(軍部)로 이관하라.”(1897년 3월 10일 ‘고종실록’) 군부는 민씨 척족을 비롯해 고종 최측근이 도맡아하던 부서였다. 그리고 국가가 지주(地主)로 변신한다.

 

군부는 현금으로 받았던 소작료와 세금을 다시 곡식으로 받는 도조(賭租)로 징수 방식을 바꾸고 소작료 또한 민간 농지 소작료에 달할 만큼 인상해버렸다. 쌀값이 폭등하고 인플레로 화폐가치가 하락하자 시세차익을 노린 조치였다.(김양식, ‘대한제국기 역둔토에서의 항조 연구’, 역사학보 131, 역사학회, 1991)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황제에 등극했다. 3년 뒤 고종은 국유지 담당 부서를 내장원(內藏院)으로 변경했다.(1900년 9월 30일 ‘탁지부각부원등 공문래거안’ 3책, 배순영, 앞 논문 재인용)

 

‘황제 지주제’의 완성과 내장원

내장원은 황실 금고를 담당하는 부서다. 부서장인 내장원경은 이용익, 고종 최측근이다. 이용익은 돈을 찍어내는 전환국장(1899), 탁지부협판(1900), 탁지부대신서리(1901), 토지 조사 및 등록 사업부서인 지계아문(1901)과 양지아문(1902) 부총재를 연달아 혹은 동시에 지낸 인물이다. 대한제국 재정을 한 손으로 움켜쥔 사람이었고, 바로 그 사람이 황실 금고를 지키는 내장원경이었다. 개혁정부가 추진했던 토지개혁이 농상공부에서 탁지부로, 군부, 그리고 마침내 황실로 그 주체가 바뀐 것이다. 대한제국 시절 진행된 이 토지개혁을 ‘광무양전’이라고 한다.

 

1900년 광무양전을 위한 사전조사 원칙(‘사검겸독쇄장정’)에는 이렇게 규정돼 있다.

 

첫째 기존 조사와 무관하게 토지를 남김없이 재조사할 것, 둘째 징세를 거부하는 자는 장을 때려 옥에 가두고 납세를 독촉할 것(杖囚督捧·장수독봉), 셋째 도조가 낮은 곳은 농민을 지도한 뒤 인상할 것.(이윤상, ‘대한국기 황실 주도의 재정운영’, 역사와 현실 26권, 한국역사연구회, 1997)

 

과중한 징세에 전국적으로 납세를 거부하는 민란이 벌어지자 1902년 고종은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2년 뒤 고종은 “상납이 부실하다”며 감독관을 재파견했다.(‘훈령조회존안’ 54책 1904년 8월 1일 훈령 각도관찰사, 이윤상, 앞 논문 재인용)

 

그렇게 국유화된 토지에서 세금과 소작료가 징수됐다. 1896년 5만1000냥이었던 내장원 토지세 수입은 1903년 500만냥이 넘었다. 500만냥이 넘는 그 돈은 모두 국가가 아닌 황실로 귀속됐다. 국가 재정 담당 부서인 탁지부는 ‘당장 한 달 경비가 부족해 집부허산(執簿虛算·장부만 보고 헛계산)을 하며 벌 몇 마리가 빈 벌집 지키듯 할 정도’로 금고가 비어 있었다.(1898년 12월 28일, 1899년 3월 1일 ‘황성신문’)

 

황제 지주제와 식민지 지주제

근대 소유권 확립이 아니라 ‘황제의 지주권을 명확히 하기 위한’ 조사였다. 이 과정에서 위에 언급한 ‘두루마리로 쌓아놓은’ 민간 매매 문서는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유지에 관습적⋅역사적으로 존재하던 지주들은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항의하는 농민에게 내장원은 ‘이미 조사가 집행됐으므로 사유지라는 주장은 부당함’이라고 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배영순, 앞 논문) 수백년 국유지를 거래하며 살던 농민들은 국가 아니 황제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내장원은 경리원으로 바뀌었고, 통감부와 총독부는 그 틀대로 식민지 지주제를 완성했다. 여기까지가 군산에 뜬부두가 서게 된 역사적 경로다.

 

278. 근대사가 응축된 군산 기행3(끝) 구마모토 농장과 의료 선구자 이영춘

식민시대, 그 이중적인 삶과 기억과 군산에 남은 흔적들

군산 동국사. 1913년 구마모토 리헤이를 비롯한 군산 지역 일본인 시주로 만든 금강사가 원형이다. 지금도 대웅전을 비롯해 건물마다 그 원형이 남아 있다. 식민시대 탐욕으로 점철된 삶이 있었고, 단칼로 재단하기 어려운 삶이 있었다. 식민 본국 일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식민지 조선의 삶은 요동쳤다./박종인
 

# 세월과 공간을 넘어, 이성당

남원 사람 이석호는 일본 홋카이도로 이주해 살다가 해방 후 귀국했다. 군산 중앙통에 정착해 빵집을 냈다. 이름은 이성당(李盛堂)으로 지었다. 이씨가 번창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1948년 6월 미군정에서 불하받은 옆집 적산가옥으로 가게를 옮겼는데, 지금은 이석호의 집안 손주 며느리 김현주(59)가 주인이다.

 

지금 이성당 주소는 군산시 중앙로177인데, 해방 전 주소는 군산부 메이지마치(明治町) 2초메(丁目) 85번지2였다. 거기에는 1906년 일본 시마네현 이즈모(出雲)에서 군산으로 이주한 히로세 야스타로가 운영하는 빵집이 있었다. 빵집 이름은 이즈모야(出雲屋)다.

 

1981년 군산을 방문한 히로세의 손녀 쓰루코는 자기네 빵집 자리에 있는 빵집 문을 열며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타임머신을 탄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함한희 등, ‘빵의 백년사’, 전북대 무형문화연구소, 2013, p21) 이 글은 빵집 이즈모야와 이성당, 그리고 세월과 공간을 초월해 군산에서 벌어졌던 삶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군산 개정면 발산리에 있는 발산초등학교 뒷뜰. 이 자리에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던 시마타니 야소야가 모은 석물(石物)이 박물관처럼 모여 있다. 상당수가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됐다./박종인


# 농민을 옥죈 소작제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만 35년. ‘왜 일본이 그 식민 시대를 만들었나’라는 질문은 부질없다. 자기네에게 득이 되니까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이다. 조선에게 득을 주려고 식민지를 만들었다는 말은 얼토당토않다.

 

‘조선인은 매년 지주는 자작으로 화하고 자작은 자작 겸 소작으로 화하고 자작 겸 소작은 순소작으로 화하는 반면에 일본인은 매년 소작은 자작으로 화하고 자작은 지주로 화하여 매년 농가 호수가 증가하는 까닭에 조선인의 생활 상태는 나날이 퇴보하여 살 수 없어 남부여대(男負女戴)로 정든 고향을 등지고 북만주로 향하게 되었다.’(1928년 8월 1일 동아일보 ‘매년 3000여 정보가 일본인의 소유화’)

 

500년 동안 조선 농민을 옭아맸던 소작제는 식민 지주제로 진화했다. 식민 조선 농민은 일본인과 조선인 대지주 땅을 빌어먹으며 살아야 했다. 조선 쌀은 분배 단계에서는 그 지주에게, 가공 단계에서는 대규모 정미업자에게, 최종 유통 단계에는 이출항의 대규모 이출상인에게 집중된 분배와 유통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였다.(송규진, ‘일제하 쌀이출 좁쌀 수입 구조의 전개 과정’, 사총 55권0호,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02)

 

# 떼부자가 된 지주들

생산성은 증가했고 쌀 생산량 또한 증가했지만, 이런 독점적 유통 구조로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비율은 더 증가했다. 1910년 조선 쌀 생산량은 1040만석이었는데 수출(일본 이출 포함)은 83만석으로 7.98%였다. 그런데 1928년 생산량 1351만석 가운데 49.65%인 671만석이 일본으로 나갔다. 1931년에는 생산된 쌀 가운데 54.29%가 대일 이출 물량이었다.(‘조선총독부총계 연보 농업편’) 그동안 잡곡을 포함한 조선 내 일본인-조선인 곡식 소비량은 2.03석(1915~1919)에서 1.64석(1930~1936)으로 감소했다.(菱本長次, ‘朝鮮米の研究’, 千倉書房, 1938, p703: 이상 송규진, 앞 논문 재인용) 그런데 조선 내 일본인은 쌀 소비량이 1920~1928년 1.20석으로 변동이 없지만 같은 기간 조선인 쌀 소비량은 0.62석에서 0.52석으로 감소했다.(이여성 등, ‘數字朝鮮硏究’ 1권, 세광사, 1931, p37) 재한 일본인은 쌀을 양껏 소비했고, 조선인은 부족한 쌀을 잡곡으로 충당했다는 뜻이다.

 

통계상으로 보면 1920년대 중반~1930년대 중반 조선은 대일 쌀 생산기지 역할을 했다. 이 시기는 조선 농민들이 대지주로부터 수탈당한 시기가 분명하다. 대일 쌀 이출(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수출’이 아니라 ‘이출’이라고 한다)로 돈을 번 집단은 지주들이었고 소작 농민들은 고액 소작료와 고리대로 힘든 삶을 살았다.

 

조선 시대 평균 50%였던 소작료를 식민 시대에는 70%가 넘게 받는 지주들도 있었다. 여기에 비료와 볏짚, 종자 값을 별도로 책정했다. 아무리 생산량이 증가했어도 지주에 대한 적대감은 사라지지 않았고, 일본인이 됐든 조선인이 됐든 지주에 대한 적의와 피수탈의 경험은 민족 차원의 수탈로 각인됐다. 1930년대 말 전국 500정보(150만평) 이상 대지주 가운데 조선인은 43명이었고 일본인은 65명이었다.(’화호리, 일제강점기 농촌 수탈의 기억1′,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2020, p27)

 

▲구마모토 리헤이.


# 대지주 구마모토 리헤이와 군산

그 대지주 가운데 조선반도 1위가 군산과 정읍 일대에 대농장을 소유한 구마모토 리헤이였다. ‘수탈’로 상징되는 모든 일이 구마모토 농장에서 벌어졌다. 70%가 넘는 소작료, 비료와 볏짚 비용 소작인 전가, 계약 위반 시 소작 계약 일방 해지 등등.

 

구마모토 농장에서 일했던 농민들은 ‘거대한 쌀 창고가 가마니를 공룡이 먹이를 빨아들이듯 했다’고 기억한다.(함한희 등, ‘식민지 경관의 형성과 그 사회문화적 의미’, 한국문화인류학 43권1호, 한국문화인류학회, 2010)

 

▲한때 대지주 구마모토 별장이었다가 더 오랜 세월 농촌 보건의 아버지 이영춘의 사무실로 쓰였던 군산 이영춘 기념관.


그런데 그때 지역 신문인 ‘군산일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구마모토를 비롯한 (전북) 지방 지주들은 토지와 농사 개량, 소작인 지도에 열심이지만 소작료 징수에는 다소 비난을 받고 있다. 다작(多作)하여 다취(多取)하는 주의인데 다취가 과하다는 비난이 없지 않다.’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반면 (조선인 대지주인) 현준호 같은 사람은 경영 방식이 상당히 원시적이고 소작료는 아버지 시대 그대로이지만 소작인 지도도 별로 하지 않아 오히려 좋지 않다는 비평까지 있다.’(1935년 9월 19일 군산일보 ‘전남북 지주 색채 양분’)

 

구마모토가 ‘소작료를 많이 취한(다취‧多取)’ 악덕 지주인가 혹은 ‘근대 기술을 도입해 생산성을 높인(다작‧多作)’ 자본가였나에 대해 당시에도 여론이 엇갈렸다는 뜻이다. 하지만 자기가 수확한 쌀을 절반 이상 바친 조선 농민에게 구마모토는 그냥 지주가 아니라 악덕 ‘일본인’ 지주였다. 대신 구마모토 농장 앞에서 말편자를 박아주며 먹고살던 가난한 일본인 시가(志賀)는 ‘정확한 이름도 모르는 초라한 사람’으로 낮춰보며 살았다.(함한희, 앞 논문)

 

# 선한 지주 구마모토, 선한 의사 이영춘

1935년 6월 17일 세브란스의전 병리학교실에 근무하던 이영춘이 일본 교토제국대 의학박사 학위논문 심사에 통과됐다. 조선인 지도교수 윤일선 아래 조선에서 공부한 최초의 조선인 박사였다.(1935년 6월 19일 ‘동아일보’) 사흘 뒤 경성 조선호텔에서 구마모토 리헤이라는 지주가 세브란스 교장 오긍선을 만나 병리학교실에 3년간 연구비 500원을 매년 지원하겠다고 약정했다. 이영춘은 8월 31일 정식으로 일본 문부성에서 박사 학위 인가증을 받았다.(같은 해 6월 23일, 9월 1일 ‘조선일보’)

 

▲이영춘


1호 박사가 확정되기 두 달 보름 전인 4월 1일, 이영춘이 학계와 의학계를 버리고 구마모토 농장 조선인 전담 병원 주치의로 취직했다. 구마모토는 본인이 운영하는 재일 조선 유학생 장학회 혜택을 받은 조선인 의사들에게 먼저 의뢰를 했으나 거절당한 터였다.(이영춘, ‘나의 교우록’, 쌍천이영춘박사기념사업회, 2004, p27: 영문학자 이양하도 구마모토 장학생 가운데 하나였다.)

 

취직을 청하는 구마모토에게 이영춘은 “월급이 아니라 무료 진료가 목적이니 귀하가 나를 아사(餓死)시키지 않으리라 믿는다”고 답했고, 구마모토는 총독부 의원부 고등관 월급인 150원을 주겠다고 답했다.(이영춘, 앞 책, p23)

 

조선인 진료는 전액 무료였다. 이영춘에 따르면 구마모토는 ‘수일 전까지 건강하던 소작인이 농장 앞 공동묘지로 장사(葬事)해 가는 광경을 여러 번 목격하고,’ ‘수의사는 두 명이나 두고도 가장 중요한 소작인 질병에 대비하지 못해 자책감을 느꼈다’고 했다.(이영춘, 앞 책, p26)

 

이영춘은 또 구마모토가 한 말을 이리 기억한다. “세상은 선의의 사업도 호평하려 하지 않는 법이니, 우리 무료 진료 사업도 농장의 정략 사업이라 혹평할지 모른다. 이 선생만은 내 진의를 이해해주기 바란다.”

 

그리하여 구마모토 농장 자혜진료소 문 앞에는 연일 소작인과 가족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영춘은 1935년 첫해에만 환자 7000명을 진료했고 연인원으로는 3만명을 진료했다. ‘지랄병 발작’이라는 응급 요청에 회충약만으로 순식간에 치료된 아이도 있었다. 소작인을 가장해 찾아오거나 소작권을 사려는 사람도 생겨났다.(이영춘, 앞 책, p28)

 

▲호남평야에서 생산한 쌀을 군산항으로 실어날랐던 임피역./박종인


# 해방, 그리고 그들

해방이 되었다. 구마모토처럼 군산에서 대농장을 경영하던 시마타니 야소야는 개정면 발산리 농장에 그동안 수집한 석물(石物)과 농장을 그대로 두고 귀국했다. 농장에는 2층짜리 콘크리트 금고 건물도 있었고, 석물 몇몇은 훗날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됐다. 보물인 동시에 식민지에 각인해둔 탐욕의 흔적이다. 농장 앞에서 말편자를 박던 일본인 사기는 어찌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구마모토 또한 모든 걸 놔두고 두 번 다시 조선으로 오지 못했다. 도쿄 조선인 YMCA는 용산에 고아원을 운영했던 소다(曾田)와 구마모토에게 감사장을 증정했다. 이영춘은 1961년 일본에서 구마모토와 재회했다.(이영춘, 앞 책, p45)

 

이영춘은 구마모토농장 병원을 인수해 농촌보건사업을 계속했다. 간호대학을 설립하고 병원을 증설하고 농촌을 순회하며 보건 활동을 벌이다 1980년 재산 하나 없이 죽었다. 사무실로 쓰던 군산 구마모토 별장은 이영춘기념관이 됐다. 그는 대한민국 농촌 보건의 아버지다. 큰아버지를 보며 자란 조카 이주민(78)은 의료와 봉사 그리고 가난까지 똑같은 길을 걸으며 군산에 살고 있다.

 

2011년 이성당 대표인 집안 며느리 김현주와 이즈모야 창업주 손녀 히로세 츠루코가 일본에서 만났다. 츠루코는 사위와 함께 이마리시에서 제과점을 운영했다. 사위에게 넘길 때까지 제과점 이름은 이즈모야였다.<군산기행 끝>

 

279. 친일파로 낙인찍힌 사회사업가 이종만

“내 꿈은 조선 농촌을 갱생시키는 것이외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 NH농협 종로지점 건물은 1926년 ‘조선일보’ 사옥으로 지어졌다가 ‘조선중앙일보’ 사옥(1933), 1937년 이후에는 ‘대동광업주식회사’ 본사 사무실로 사용됐다. 대동광업 사장 이종만은 ‘소작농 없는 자작농의 조선’을 꿈꾸며 함남 영평금광 매각자본 155만원으로 농촌과 교육 갱생 사업을 벌였다. 해방 후 그는 금광이 있는 북한으로 넘어갔다. 그는 지금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박종인

 

수수께끼의 인물 이종만

‘남들은 이종만씨를 마치 조선의 로스차일드요, 카네기라고 부른다. 어떤 이는 천만장자의 몸이면서 다 찢어진 양복에 각반을 치고 손수 굴 속에 들어가 갱부(坑夫)들과 괭이 잡고 일도 하며 어떤 때는 5전짜리 전차를 타고 동대문 밖 빈민굴에 나타나 100원도 주고 1000원도 주고 돌아온다 하여 몬테크리스토 백작 모양으로 상상하는 이도 있다. 세상 여러 십만 명의 주목을 끌고 있는 이종만씨란 대체 어떠한 인물이며 그의 사업관, 황금관은 어떠한고 필자 또한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삼천리’ 11권7호 1939년 6월호)

 

‘창랑객(滄浪客)’이라는 식민시대 잡지 ‘삼천리’ 기자는 1939년 이종만이라는 인물을 빈민굴에 적선하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비유하며 그를 인터뷰했다. 이종만은 식민 조선 3대 금광왕으로 불리는 금광 갑부다.

 

그런데 이종만은 대한민국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돼 있다. 내용은 이렇다. ‘이종만: 일본명 쓰키시로 쇼마(月城鍾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북지위문품대’로 1000원을 기부했다. 1938년 10월 정주경찰서에 ‘황군위문금’을 냈다.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전 조선 유림을 동원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을 맡았다. 1940년 7월호 ‘삼천리’에 게재된 <지원병사 제군에게>라는 칼럼에 격려의 글을 실었다.’(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발췌) 친일과 반일이 세상사를 재단하는 칼날로 변해가는 이 시대, 이종만 혹은 쓰키지로 쇼마의 일생을 보기로 한다.

 

이종만(1886~1977)

 

견지동 111번지 붉은벽돌집

삼천리 기자 창랑객이 이종만을 인터뷰한 곳은 서울 ‘대동광업주식회사’ 사무실이다. 사무실 주소는 경성 견지초(堅志町) 111번지다. 거기에는 붉은 2층 건물이 있고 현판에는 금색으로 회사 이름을 새겨넣었다. 그 건물은 ‘실로 조선일보가 앉았을 적에는 이상재 옹을 위시해 안재홍, 신석우, 유진태 등 한다 하는 거인(巨人)들이 드나들며 안팎으로 사회 일을 지휘하던 자리요, 훗날 중앙일보가 되면서 여운형, 최선익 등이 또한 천하를 논하던 곳’이다.(‘삼천리’, 앞 글)

 

1926년 ‘조선일보’가 네 번째 사옥으로 만든 건물이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는 여운형이 운영하던 ‘조선중앙일보’ 사옥으로 쓰인 건물이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휴간한 뒤 1937년 폐간됐다.

 

그 이후 해방 때까지 바로 이 이종만이 운영하는 ‘대동광업주식회사’가 건물을 인수해 사용했다. 매각 비용은 9만8000원이었다.(’삼천리’ 10권10호 1938년 10월호) 지금도 남아 있는 이 건물은 농협 건물로 사용 중이다.

 

광산업자 이종만의 오뚝이 일생

저 거인들이 거쳐 간 건물을 인수한 광산업자 이종만의 인생은 이러했다. 이종만은 갑신정변 2년 뒤인 1886년 반농반어의 마을인 울산 대현면 용잠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종만은 ‘실로 언어도단인 병마절도사의 전횡을 그저 “양반은 지엄한 존재라 여기고 억울한 삶을 계속하던” 고향 사람들’을 기억한다.(1940년 4월 3일 ‘동아일보’)

 

우리나라 나이 스무 살이 된 1905년 이후 이종만은 대실패 연속의 인생을 살았다. 러일전쟁 군수품인 ‘빨간약’ 재료로 미역이 쓰인다고 해서 부산에 미역 도매상을 차렸더니 전쟁이 끝나버렸다. 그물을 사고 어선을 사서 명태잡이를 시작했다가 전복 사고로 명태를 다 수장시켰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무기 원료인 중석(텅스텐) 가격이 폭등하면서 강원도 양구에 중석광을 차렸다. 5만원(3030년 9월 현재 10억 원: 1914년 현재 쌀값 기준·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가까이 벌었나 싶었더니 전쟁이 끝나면서 중석값이 폭락했다. 빚을 갚고 또 거지가 됐다.

 

이어 목재상을 차렸더니 홍수에 목재들이 다 사라져버렸다.(이상 1937년 6월 10일 ‘조선일보’) 최창학, 방응모 같은 금광으로 성공한 사람이 잇따라 탄생하자 1928년 이종만 또한 함남 명태동에서 금광 개발에 착수했다. 이번에는 성공했다. 그런데 1931년 겨울 동업자 사기극에 말려 한푼도 건지지 못하고 쫓겨났다. 가진 돈은 27전이었다.

 

실패밖에 모르는 사업가 이종만은 또 금광업에 매달렸다. 1934년 이종만은 채산성 부족으로 방치된 함북 영평금광을 일본인에게서 450원에 사들였다. 2년 뒤 노다지가 터졌다. 1936년 한 해에만 40만원어치가 넘는 금이 채굴됐다. 그 돈으로 이종만은 역시 함남에 있는 장진금광 개발권을 사들였다. 한 해 채금량 140만원이 넘었다. 마침내 금광왕이라는 딱지가 붙게 된 것이다.

 

실패한 사업가의 상상초월 반전

위에 인용한 ‘삼천리’ 기자는 인터뷰 기사를 이렇게 끝맺었다. ‘말이 이에 미치매 나는 심중(心中)에 울었다. 왜 이리 이 사람을 늦게 만났냐고, 이분의 손목을 붓잡고 오래도록 울고 십헛다.’

 

왜 울고 싶었을까. 노다지가 터지고 딱 1년 뒤인 1937년 이종만이 그 영평금광을 155만원에 팔아치운 것이다.

 

그리고 2년 뒤 찾아간 삼천리 기자 창랑객에게 이 천하갑부가 이리 말한 것이다. “이 사장의 자리란 것이 실상은 본의가 아닙니다. 나는 저 갱부들과 같이 굴속에 들어가 그네와 같이 일하고 그네를 가르치고 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안하고 또 그가 소원이여요.”

 

인터뷰 2년 전인 1937년 5월 11일 이종만은 영평금광을 155만원에 매각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 날 경성에 있는 ‘천진루’라는 허름한 여관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또 다른 회사를 설립하겠다는 이종만이 설명회를 여는 날이었다. 새 회사 이름은 ‘대동(大同) 농촌사’다. 이종만이 입을 열었다. “조선 인구 팔 할이 농사에 종사하는 만큼 조선인 생활은 농촌에 달렸고 농민의 빈궁은 가장 우리의 관심할 바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10여 년 동안 광업에 종사하다가 금전을 잡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조선 농촌 갱생을 위하여 미력이나마 드려보자고 계획을 했습니다.”(1937년 5월 13일 ‘조선일보’)

 

가진 돈은 모두 조선을 위해

450원짜리 금광을 155만원에 팔아치운 졸부 입에서 놀라운 발표가 줄줄 튀어나왔다. ‘155만원 가운데 50만원으로 ‘대동농촌사’를 만든다. 조선 6개 지역에 집단농장을 만들어 경작자에게 영구히 경작권을 준다. 매년 수확량의 삼 할을 의무금으로 징수해 농지 추가 매입 비용으로 쓰고, 30년 뒤에는 의무금을 폐지한다. 교육, 위생, 문화 문제를 부락민이 자치한다. 교육시설을 만들어 농촌의 중추인 청년을 양성하겠다.’ 조선 농촌의 암(癌)인 소작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다.(이상 ‘조선일보’ 위 날짜 등) 이종만은 농장용 토지 매입을 위해 100만원을 추가로 투입하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영평금광을 판 돈 전액을 농촌 갱생에 쓰겠다는 발표였다. 쌀값을 기준으로 1937년 150만원은 현 시가 170억원이다.(2020년 9월 현재·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기자회견 이틀 뒤 이종만은 영평금광으로 가서 전 직원과 인근 마을에 12만원을 기부하며 석별식을 치렀다. 그달 28일 이종만은 고향에 보통학교 설립기금으로 1만5000원을 기부했다.

 

▲‘대동광업주식회사’를 설립한 이종만을 ‘문화발전에 기대가 다대(多大)한’ 사업가로 소개한 1937년 6월 10일자 ‘조선일보’. /조선일보db


또 일주일이 지난 6월 6일 이종만은 ‘대동광업주식회사’ 설립을 공식 발표했다. 자본금 300만원으로 장진금광을 비롯한 소유 광산을 운영할 이 회사는 광부 전원이 조합원이며, 이들은 임금은 물론 조합원으로 이익 배당을 받게 된다고 했다.(1937년 6월 9일 ‘조선일보’)

 

이종만은 더 이상 노다지 졸부가 아니었다. 그는 ‘문화발전에 기대가 다대(多大)한’ 사업가였고(6월 10일 ‘조선일보’), ‘가진 땅이 157만평에 불과한 것이 (조선 농촌이) 매우 섭섭해할 독지가’(1937년 9월 17일 ‘동아일보’)였다.

 

대동농촌사는 함남 영흥, 경기 연천, 평남 평원과 경남 하동에 집단농장 다섯 군데를 만들었다. 총면적은 750정보(225만평)였다. 이름은 농장이 아니라 ‘농촌’이었다. 쌀을 생산하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이 가운데 ‘하동농촌’은 1940년 정식으로 이종만과 농민들 사이에 ‘자작농 계약’이 맺어졌다.(방기중, ‘일제말기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과 이념’, 한국사연구 95호, 한국사연구회, 1996)

 

“같이 잘살 길을 찾고자”

이종만은 이어 1937년 10월 신사참배를 거부해 폐교 위기에 처한 평양 숭실학교를 120만원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계획이 불발되자 이종만은 이듬해 평양에 ‘대동공전’을 설립했다. 이미 수십 차례 사업에 실패하는 동안에도 고향과 경성에 학교를 설립해 아이들을 가르친 이종만이었다.

 

어느덧 이종만은 대동광업주식회사와 대동농촌사와 대동출판사와 대동공전을 운영하는 대사업가가 돼 있었다. 그런데 이종만은 “2000만~3000만원이면 대학 하나 만들 수 있을 텐데 공업과 농업과 광업을 포함한 종합대학교는 꼭 만들고 싶다”고 했다. 왜? “다 같이 잘살 길을 찾자는 일 이외에는 없소이다.”(‘삼천리’ 맨 앞 글)

 

삼천리 기자 창랑객이 인터뷰 기사 말미에 “손목을 붓잡고 울고 십헛다”라고 쓴 이유가 짐작이 가고 남는다.

 

이종만의 월북과 ‘친일인명사전’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금광업에 대한 총독부 지원이 중단됐다. 금광을 모체로 한 이종만의 ‘대동’ 사업체 또한 심한 자금난에 빠졌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총독부 기부 활동을 시작한 이종만은 1940년대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석하는 등 소위 ‘친일 활동’을 벌이다 해방을 맞았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김구와 함께 참가했다 돌아온 이종만은 그해 가을 다시 북으로 가 돌아오지 않았다. 미완으로 남아 있는 장진금광이 함경도에 있었다. 이후 이종만은 북한 정부 광업부 고문이 되었고, 1977년 죽었다. 그가 만든 대동공전 후신이 김책공과대학이다. 이종만은 지금 ‘자본가’로 유일하게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대한민국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를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자’로 규정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했다. 험한 시대를 살아간 한 기업가 이야기 끝.

 

2021.11.17

280. 시대착오의 상징 평양 풍경궁①

“외국은 수도가 둘이다. 평양에도 궁궐을 지으라”

충남 부여에 있는 신라 고찰 무량사는 멀고먼 평양에 있던 대한제국 궁궐 풍경궁과 인연이 있다. 풍경궁은 1902~1903년 “기자(箕子)가 문명과 예법을 전파한 평양에 두 번째 수도를 세운다”며 광무제 고종이 만든 궁궐이다. 총공사비 1000만 냥은 평안도 백성이 책임졌다. 1927년 경성으로 이건된 풍경궁 정문 황건문은 해방 후 동국대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71년 무량사에 목재로 팔려갔다. /박종인


1971년 12월 10일 서울 동국대학교 정문으로 쓰이던 황건문(皇建門)이 해체되고 학생회관이 신축됐다. 해체된 황건문 부재는 충청남도 부여에 있는 고찰 무량사(無量寺)가 사들였다. 무량사는 세조 계유정난 이후 세상을 떠돌던 김시습이 죽은 절이다. 김시습 부도가 무량사에 서 있다.세월이 지나 무량사 보살들과 승려들도 모두 바뀌어, 이제는 그 목재를 어느 건물에 사용했는지 알지 못한다. 동국대학교에는 황건문 주춧돌이 어딘가 남아 있다고는 하나, 쉽게 찾지 못한다.황건문은 대한제국 황제 광무제 고종이 평양에 만들었던 궁궐 ‘풍경궁(豐慶宮)’ 정문이다. 평양에 있던 그 문이 서울로 왔다가 고찰(古刹) 속으로 사라져 버린 이야기.

 

1906년의 기이한 살인사건

1906년 1월 10일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대한제국 육군 참령(소령)이자 평북 의주군수 신우균이 군부대를 동원해 민간인 가족을 총으로 쏴 죽인 사건이 벌어졌다. 기사는 이러했다. ‘의주군수 신우균씨가 의주군 광성면에 사는 김택간을 풍헌으로 삼아 향록전을 거두게 하니, 백성이 모두 풍경궁 공사가 끝났는데 향전은 어디 쓸 것인가 하며 세금을 내지 않으려 하여 징세가 불가능한지라. 군수가 풍헌을 잡아들여 장 30대를 친 뒤 얼른 돈을 거두라 한즉 김택간이 풍헌에서 사퇴해버렸다. 군수가 대로하여 순사를 보내 김택간을 체포하라 했으나 순사가 백성에게 저항하지 못해 빈손으로 돌아와 다른 데로 날라버렸다고 하더라. 군수가 분노하여 군부대 박동수 참위(소위)와 상의해 병정 10명을 보내니, 병정이 밤에 택간의 집에 들어가 총으로 택간 머리를 쏘고 아이 두 명과 6촌 한 명을 사살했다더라.’(1906년 1월 10일 ‘대한매일신보’) 왜 군수 신우균은 불필요한 공사비를 거두려 했으며 김택간은 이를 목숨을 걸고 거부했을까.

 

세 가지 겹경사와 평양 행궁

광무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우고 5년이 지난 1902년 여름, 황태자 이척이 황제에게 이리 상소했다. “세상에 다시 없을 세 가지 경사가 겹쳤나이다. 폐하가 51세가 되시고 등극하신 지 40년이 되었고, 망육순(望六旬·60세를 바라보는 나이)을 맞아 기로소(耆老所·국가 원로 예우 기관)에 드시니 이 세 경사야말로 천 년에 제일 큰 경사요 천년의 행운입니다.”(1902년 8월 4일 ‘고종실록’)

 

열두 살에 왕이 된 고종이 쉰한 살이 되었고 등극한 지 40년이 되어서 기로소에 들었다. 한 가지 일에 세 가지 의미를 붙여 천년간 최대 경사라며 황태자는 여러 가지 경축 이벤트를 내놓았다. 이미 거듭 올라왔던 그 청에 떠밀려, 고종은 존호(尊號)를 받고 국내외 귀빈을 불러 파티를 했다.

 

그런데 더 큰 이벤트는 이미 진행 중이었다. 석 달 전인 5월 1일 특진관 김규홍이 이렇게 상소문을 올렸다. “당당한 황제의 나라로서 어찌 수도를 두 군데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깊이 생각하고 재결을 바랍니다.” 고종은 ‘깊이 생각한 뒤’ 닷새가 지난 5월 6일 조령을 내렸다. “요즘에는 외국도 수도를 두 군데 세우고 있다. 기자(箕子)가 정한 천년 도읍지로, 예법과 문명이 시작된 평양에 행궁을 세우라.” 그리고 이리 덧붙였다. “백성이 모두 바라고 기꺼이 호응하는데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나라의 천만년 공고한 울타리로 삼겠다.”

 

그해 굶주린 경기도 백성이 교하에 있는 인조릉 장릉(長陵) 송림을 침범해 껍질을 벗겨 먹었다. 솔숲에는 쭈그리고 앉아 죽은 사람이 줄을 잇고 있었다.(황현, ‘매천야록’ 3권 1902년 15. 경기도의 기근, 국사편찬위) 8일 뒤 고종은 “당장 경비가 궁색하다고 해서 그대로 둘 수 없다”며 황실 자금인 내탕금 50만 냥을 내려보냈다.

▲1903년 12월 1일 평양성 객사를 떠나 풍경궁으로 가는 고종 부자 초상화 행렬을 그린 어진예진서경풍경궁봉안반차도(御眞睿眞西京豊慶宮奉安班次圖) 부분. 왼쪽 가마에 고종 초상화가 실려 있다. /부산시립박물관

고종 부자 초상화

다음 날 고종은 행궁을 만들려는 구체적인 목적을 털어놓았다. “어진(御眞)과 예진(睿眞)을 서경에 봉안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다 말하였다.”(이상 1902년 5월 1일, 6일, 14일, 15일 ‘고종실록’) 어진은 고종 본인 초상화를, 예진은 아들인 황태자 이척 초상화를 말한다. 그러니까 평양 행궁은 임금 본인이 행차하기 위한 궁궐이기에 앞서 자기네 부자(父子) 초상화를 모시는 궁궐이라는 것이다.

 

6월 7일 황명에 따라 그 황제와 황태자 초상화가 임시로 평양 관사(객사)에 봉안됐다. 6월 23일 궁궐 명칭이 풍경궁(豐慶宮), 정문 이름은 황건문(皇建門)으로 결정됐다.

 

평양 행궁 공사가 한창이던 10월 19일 대한제국 법궁 경운궁(덕수궁) 정전인 중화전이 완공됐다. 고종이 선언했다. “이렇게 해야만 임금의 지위가 더없이 엄하여 존귀함과 비천함의 구별(尊卑之別·존비지별)을 보일 수 있느니라.”(1902년 10월 19일 ‘고종실록’)

 

러시아를 향한 풍경궁(豐慶宮)

‘기자가 문명을 가져온’ 평양에 행궁을 짓는 일은 ‘요와 순 임금의 예악과 법도를 이어받은 대한제국’ 황제에게는 당연한 결정이었다.(1897년 10월 13일 ‘고종실록’ 대한제국 선포문)

 

외교적으로는 ‘인아책(引俄策)’, 친러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친러로 외교 노선을 바꿨다. 대한제국 초기 군사고문, 재정고문과 총세무사는 모두 러시아인이었다. 1898년 말 독립협회가 잇따라 주최한 만민공동회에서 ‘러시아 축출’을 들고나와 주춤해졌지만, 대한제국은 이후로도 친러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1900년 3월 30일 대한제국은 마산을 러시아 군함 기항지로 조차해줬다. 얼어붙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을 찾던 러시아가 대한제국으로 진출한 것이다. 중앙아시아에서 대립하던 영국에도, 만주를 놓고 갈등하던 일본에도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런 극도로 긴장된 국제 정세 속에서 평양 행궁 건설이 시작된 것이다. 평양은 러시아식으로 편제된 지방군, 진위대 주둔지였다. 을미사변 같은 정변이 터지거나 국내에서 러일 충돌이 발생하면 평양은 고종이 피신할 수 있는 피난처이기도 했다.(장영숙, ‘대한제국기 고종의 풍경궁 건립을 둘러싼 제인식’,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03, 2020)

 

역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막중한 이 공사를 맡은 사람은 평남관찰사 민영철이었다. 1902년 6월 10일 고종은 민영철을 서경감동당상(西京監董堂上)에 임명하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서도(西道) 백성이 흉년 피해를 집중적으로 받았으니 방책을 상의하고 조치를 취하여 백성이 힘들고 지치지 않게 하라.”

 

공사비의 출처, 백성

풍경궁은 총규모 360여 칸짜리 대형 궁궐이었다.(1927년 3월 16일 ‘조선일보’) 터는 평양성 외부 기자묘 옆이었다. 고종은 이를 위해 두 차례에 걸쳐 내탕금 100만냥을 내려보냈다.

 

1903년 10월 주요 전각이 완공됐다. 그런데 백성에게서 거둬들인 공사비 장부 ‘평안도향전성책’에 따르면 내탕금 100만냥을 제외한 풍경궁 총공사비는 1005만1368냥이었다. 이 가운데 소위 ‘향례전(鄕禮錢)’이 673만1368냥, ‘원조전(援助錢)’이 나머지 332만냥이었다. 평양 백성이 분담한 금액만 120만냥에 달했다.(김윤정, ‘평양 풍례궁의 영건과 전용에 관한 연구’, 부산대 석사논문, 2007) 향례전은 평남북 향안(鄕案)에 등록된 양반에게 부과된 돈이다. 향록전이라고도 한다. 원조전은 가구와 토지당 부과된 돈이다.

 

향례전과 원조전 1000만 냥을 당시 원(圓)으로 환산하면 200만원이다. 1902년 대한제국 세입예산 758만원의 26%다. 한 나라 예산 4분의 1을 백성을 털어서 궁전 건축에 투입한 것이다. 고종이 내려준 내탕금 100만냥은 1000만냥이 넘는 총공사비 10%에 불과한 착수금에 불과했다.(이영호, ‘향인에서 평민으로’, 한국문화 63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3) 고종은 “기꺼이 동원된 백성들이 가상해” 2년 동안 이 지역 토지세 증가분의 33%를 깎아주라고 명했다.(1903년 1월 18일 ‘고종실록’)

 

그해 12월 공사 현장을 돌아본 의정부 의정 이근명이 보고했다. “병정들이 소와 말을 빼앗고 재물을 노략질하며 부녀자들을 겁박하고 있다. 잡세가 번다해 100리도 안 되는데 세금을 거두는 곳은 열여덟 곳이나 된다.” 고종이 답했다. “여전히 그렇다고? 그중에는 반드시 올바른 세금(正稅·정세)도 있을 것이다.”(1903년 12월 10일 ‘고종실록’)

 

▲사천왕문에서 바라본 부여 무량사. 사천왕문을 비롯해 이 절 어디엔가 풍경궁 흔적이 숨어 있다. /박종인

 

식민지, 그리고 황건문의 이건

나라가 사라지고 1927년 ‘조선일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풍경궁은 광대한 건물인데, 건축비로 실상 사용된 금액은 인민으로부터 공취된 총금액의 5분의1밖에 되지 않는다 하며 대다수는 민영철, 김인식, 궁내부 기타 중간 협잡배의 배를 채웠으니 평안남도의 피폐는 이로 인하여 더욱 심하였다.’(1927년 3월 16일 ‘조선일보’) 민영철은 평남관찰사 겸 공사 총책임자였고 김인식은 평양감리였다.

 

1904년 러일전쟁과 함께 풍경궁 공사는 미완으로 종료됐다. 이후 일본군 병영으로 사용되던 풍경궁은 식민시대 병원으로 전용됐다. 1924년 그 정문인 황건문이 일본 사찰인 경성 조계사 정문으로 이건됐다. 그때 신문 기사는 이러했다. ‘몇백만 민중의 원망 덩어리요, 몇몇 대감 배에 기름을 찌우게 한 원한의 기념각이 황건문이다.’(1924년 9월 4일 ‘조선일보’) 광성면민 김택간 가족 학살 사건은 끝나지 않은 탐학(貪虐)의 결과였다.<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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