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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훈 칼럼(중앙일보) 2021/ 01.08 꼴통 진보를 버린 아름다운 배신자들 -06.25 문 대통령이 감동한 대접과 국격을 만든 건 6·25였다

상림은내고향 2021. 11. 18. 15:02

고대훈 칼럼 2021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01.08  꼴통 진보를 버린 아름다운 배신자들

문재인 대통령은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에서 고백했다. “신의 섭리 혹은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운명에 끌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노무현과의 만남과 ‘검찰에 의한 정치적 타살’이 권력을 향한 그의 운명을 호출했다는 의미다. 또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이라고 했던가. 장강의 뒷물결이 노무현과 참여정부라는 앞물결을 도도히 밀어내야 한다”고 썼다. 스스로 장강의 뒷물결이 되어 권력을 쟁취하겠다고 다짐했고, 운명의 힘으로 성공했다.     

정권 밀던 3040세대·중도층 이탈
윤석열 지지 선회로 가짜진보 응징
운동권 마피아의 폭주를 막으려면
정의로운 배신자들이 더 늘어나야

윤석열 검찰총장의 운명이 오버랩된다. “우리 총장님”으로 맺은 문 대통령과 인연은 ‘조국 수호 전쟁’과 ‘추미애 활극 전쟁’을 치르면서 혁명정권의 핍박에 맞서는 기구한 악연으로 전환됐다. 그런 고독한 투사의 아우라가 본인 뜻과 상관없이 그를 대권이란 정치 무대로 끌어올렸다. 윤석열이 문재인 정권이란 앞물결을 밀어내는 장강의 뒷물결이 될 운명인가. 2021년에도 코로나·부동산과 함께 그의 운명은 최대의 관심사다.
 
중도층 이탈, 레임덕 위기, 윤석열의 미친 존재감. 새해 쏟아지는 여론조사 결과는 세 가지로 압축된다. 문 대통령은 핵심 지지층이 떠나면서 취임 후 가장 낮은 지지율(34.1%)을 기록했고, ‘통합’ 차원에서 박근혜·이명박 사면론을 꺼낼 만큼 다급해졌다. 윤석열은 처음으로 30%대를 돌파하며 강력한 대권 주자로 떠올랐다. (리얼미터 조사 기준) 단순히 계산하면, 2020년 1월 조국 사태 후 윤석열 지지율은 10%대였는데 1년 사이 추미애가 20%를 보태줘 30%대까지 치솟았다. 반면 지난해 4·15 총선 직후만 해도 60%대이던 문 대통령의 지지는 30%가량이 빠져나갔다.
 
윤석열을 탄압할수록 그는 뜨고 문 대통령은 지는 지지율 30%의 수평이동은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자칭 진보 정권을 밀던 3040세대와 중도층, 이름하여 ‘민주시민’이 변절했다는 점이다. 조국·추미애를 내세워 1년 4개월에 걸쳐 윤석열 몰아내기 과정에서 보인 권력의 광기적 행태에 대한 응징이다. ‘내가 하면 개혁, 남이 하면 쿠데타’라고 우기고, 비리 가족을 골고다 언덕의 예수에 빗댈 정도로 실성한 집단에게 학을 떼고 있다. 퇴행적 꼴통 진보를 버리고 지지 철회의 반기를 든 이탈자가 느는 이유다. 이들을 ‘아름다운 배신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배신자들은 비이성적 집단의 박해와 정치적 폭력에 대항해 홀로 싸우는 윤석열의 배짱과 용기를 평가한다. 정의와 공정에 대한 타는 목마름을 적셔줄 영웅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지지로 응답한다. 현란한 혀의 놀림보다 “헌법정신, 법치주의, 상식을 지키겠다”는 너무도 당연한 말에 감격한다. 윤석열 지지 증가율이 구닥다리 보수 지지율에 반영되지 않는 걸 보면 이들은 좌우와 진보·보수를 넘어선 합리적인 시민임이 틀림없다.  
     
중국에 일산불용이호(一山不容二虎)란 속담이 있다. 하나의 산에 두 마리 호랑이가 공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윤석열은 조국과 추미애를 산 밖으로 내치는 1, 2차 대전에서 일단 승리했다. 마음의 빚을 진 조국의 누명을 벗겨주고, 검찰 개혁을 저지하는 악(惡)의 세력을 제거하려던 정권의 구도가 무너졌다. 하지만 ‘윤의 고행’은 끝나지 않았다. ‘권력의 산’에는 한 마리의 호랑이만 남는 법. 최후의 3차 대전이 다가오고 있다. 정권의 사람들은 윤석열 찍어내기 거사의 뼈아픈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벼른다. 공수처를 곧 출범시켜 월성 원전 경제성 조작 의혹 등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를 접수할 모양이다. 그것도 모자라면 검찰의 직접 수사권을 아예 박탈해 권력형 비리의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원천봉쇄하겠는 입장이다. 탄핵 운운 갈구면서 종이호랑이로 만들 궁리도 숨기지 않고 있다.
 
윤석열의 친구 몇몇에게서 들은 그의 근황이다. “일방적으로 패다가 이제 그만두자는 게 말이 되는가”가 당장 사퇴할 수 없는 이유다. “어떡하든 임기를 끝까지 마치고 싶다”는 각오다. “솔직히 내 앞날을 나도 모르겠다. 하겠다고 되는 것도, 도망간다고 피할 수 없는 것 아니다”는 착잡한 심정이다. “여론의 지지가 나를 버티게 한 힘이다. 그래서 정치권에서 함부로 못 하는 거다”라고 이해한다. 여론이 그의 생명줄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진보라는 용어가 많이 오염됐다. 오죽하면 좌파 지식인들조차 ‘민주 건달’ ‘싸가지 없는 진보’ ‘히빠’(문빠에 빗댄 히틀러빠)라고 공격하며 진보의 배신자를 자처하겠는가. 민주화와 개혁의 가치로 위장한 운동권 마피아의 폭주를 막으려면 정의로운 반란이 더 늘어나야 한다. 그래야 정신을 차리는 척이라도 할 오만한 권력이다.
 
정권 배신과 윤석열 지지는 현직 대통령과 180석 ‘혁명의회’가 자행하는 독선과 폭주가 자초한 일이다. 편가르기 사회를 만드는 사악한 무리에 대한 거부감이 세력으로 뭉치고 있다. 그 세력이 장강의 뒷물결에 대거 합류할지 아직 모른다. 윤석열의 운명도 그 향배에 달렸다. 상식을 아는 아름다운 배신자들이 있기에 새해에 작은 희망을 본다. 

 

02.05  원전 미스터리의 진실, 법정에 세울 용기가 있는가

문재인 대통령이 격노했다. 국민의힘 김종인 위원장의 “이적행위” 발언에 ‘법적 책임’을 거론했다. “구시대의 유물 정치” “마타도어(흑색선전)”를 묵과하지 않겠다고 한다. 청와대 주변에선 “북풍 공작” “망국적 색깔론”이라며 험악하게 거든다. 요 대목에서 왜 안 나오나 했다. 검찰·야당에다 언론을 묶어 적폐세력으로 몰아치기 말이다. 아니나다를까 이낙연 대표가 언론개혁을 꺼냈다. “악의적 보도와 가짜뉴스는 혼란과 불신을 확산시키는 반사회적 범죄”라고 그럴싸한 구실을 붙였다. 사사건건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이 못마땅하니 조신하라는 무서운 신호로 읽힌다.     

북한 원전, 월성 1호기 커지는 의문
정부, 색깔론·언론개혁 내세워 반격
선동·가짜뉴스라면 법적 책임 묻길
표현 자유 따지는 역사적 재판될 것

“(문 대통령은) 신문을 꼼꼼하게 읽고, 인터넷 댓글까지 읽는다.”(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 그렇다면 원전 의혹에 대해 민심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으리라. 세상은 진보식 표현으로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하고, 북한식으론 “국민을 특등 머저리로 아는 모양”이라며 혀를 찬다.
 
왜 산업부 장관의 입에서 조폭영화에서 들을 법한 “너 죽을래” 막말이 튀어나왔나. 왜 공무원이 감사원의 컴퓨터 포렌식 하루 전 오밤중에 사무실에 몰래 들어가 원전 파일을 허겁지겁 지웠나. 왜 무당 굿판도 아닌데 ‘삭제 범죄’를 “신내림”이라고 둘러댔나. 왜 검찰이 원전 공무원의 구속영장을 청구하겠다는 그날 추미애 법무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의 직무 배제를 시도했나. ‘북원추’(북한원전건설추진방안)가 담긴 파일명이 ‘pohjois’(뽀요이스, ‘북쪽’이란 핀란드어)라는데, 첩보작전이라도 폈나. 멀쩡한 원전도 없애지 못해 안달인 정부에서 왜 일개 공무원이 겁을 상실한 채 북한에 원전 건설을 검토했나. 온통 의문투성이다.
 
조국·추미애 사태를 통해 운동권 정권 사람들은 상식을 벗어난 일을 버젓이 저지른다는 학습효과를 국민 뇌리에 주입했다. 저토록 괴이한 행동을 할 때는 삭제된 원전 파일에 뭔가 어두운 사연이 감춰 있으리라고 그래서 의심한다. 정부는 우연이고 음모론이라고 일축한다. “개인 아이디어”이고 “선거용 색깔론”이니 현혹되지 말라고 윽박지른다. 이낙연이 던진 언론개혁은 정부 생각에 반하는 주장을 펴면 유언비어와 가짜뉴스로 처벌하겠다는 경고일지 모른다.
 
원전 비밀 파일과 표현 자유의 관점에서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 사건은 많은 걸 시사한다. 1971년 6월 13일 뉴욕타임스(NYT)에 실린 ‘미국의 베트남 군사개입 확대 과정 30년’ 보도가 미국을 강타했다. NYT는 국방부 기밀문서(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해 미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의 정당성을 밀어붙이기 위해 조직적으로 선전과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베트남전 확전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이 조작되는 등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당시 리처드 닉슨 정부는 전쟁에 반대하는 히피들의 반정부 운동을 걱정했다. 곧바로 “기밀 유출로 국가안보가 위협받는다”며 NYT와 워싱턴포스트의 후속보도를 금지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페이퍼를 유출한 내부 제보자를 색출해 방첩죄(防諜罪)로 기소했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은 “어느 정부도 국민을 기만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이 헌법이 보장한 자유로운 언론의 책임이다”라는 역사적 판례를 남겼다. 어떤 권력도 국민을 속일 권리는 없다는 선언이었다. 제보자도 무죄였다. 이 사건은 베트남 전쟁을 ‘더러운 전쟁’으로 떨어뜨렸고, 닉슨 사임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다.  
     
‘악의 평범성’을 설파한 한나 아렌트는 ‘정치에서의 거짓말(Lying in Politics): 펜타곤 페이퍼 고찰’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다. 베트남 전쟁은 ‘첫 패전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피하려고 현실을 호도한 대국민 기만극이었다고 분석했다. “정치에서 거짓말이 반복되면 그 거짓을 생산해낸 자들조차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는 자기기만에 빠진다”고 원인을 지적했다.
 
북한 원전 건설 추진과 7000억원을 날린 월성 1호기의 경제성 조작 의혹은 내 나라 안보와 내 세금이 걸린 중대한 문제다. 정상회담 성공과 김정은 답방을 성사시킨 정권이란 신기루를 좇아 절차적 정의를 무시했는지 따지고, 삭제된 530개 파일의 실체를 밝히는 건 국민 권리이자 언론 책무다. 청와대와 정부는 악의적으로 왜곡한 선동과 가짜뉴스가 있다고 진짜 믿는다면 법적 책임을 말에서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 허위사실 유포든 명예훼손이든 국가기밀 누설이든 걸어 법의 심판을 받아보자. ‘원전 파일 미스터리의 진실’은 펜타곤 페이퍼 사건처럼 통치권의 한계와 표현의 자유를 놓고 뜨겁게 논쟁하는 역사적 재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추신: 10부작 다큐 ‘베트남 전쟁(The Vietnam War)’과 영화 ‘더 포스트(The Post)’를 설 연휴에 보길 권한다. 다큐는 국가 권력의 거짓말과 더러운 전쟁의 전개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이런 부조리를 폭로하는 언론의 용기를 감동적으로 그린다. 아렌트의 ‘정치에서의 거짓말’을 이해하는 데도 유익하다. 더 포스트의 홍보 문구가 인상적이다. ‘세상을 속인 완벽한 거짓말, 세상을 바꾼 위대한 폭로’.

 

03.05  화성 탐사선과 대통령의 가덕도 순시선

화성의 대지를 보았다. 아득한 지평선까지 펼쳐진 검붉고 광활한 황무지였다. 화성의 바람소리를 들었다. ‘휙’ 하며 스치는 짧은 잡음이었지만 화성에도 바람이 분다는 게 경이로웠다. 인간이 처음 접한 화성의 소리라고 한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화성 로버(탐사선) ‘퍼서비어런스(Perseverance, 인내)’가 4억7200만㎞를 날아간 뒤 지난달 18일 지구로 보내온 착륙 장면의 실시간 동영상과 사진들이 우주와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미국 화성 탐사가 주는 도전과 희망
과거 묶인 한국에서 꿈과 미래 실종
윤석열 없는 ‘검수완박’이 개혁인가
감동과 설렘이 없으면 죽은 사회다

퍼서비어런스는 40억년 전 물이 흘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예제로(Jezero) 분화구 일대에서 외계 생명체의 흔적을 찾고, 인간의 거주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흙과 암석을 채취해 지구로 보내는 임무를 수행한다.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는 “2050년까지 100만 명을 화성에 이주시키겠다”고 공언한다. 인간이 화성에 사는 공상과학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퍼서비어런스에 감동하며 소개하는 진짜 이유가 있다. 미지의 신세계를 향한 도전과 용기, 미래를 꿈꾸는 희망이 사람 사는 맛이라는 진리에 가슴이 뭉클했다. 대한민국이 이걸 잃어버렸다는 암울한 현실이 아팠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과학의 힘, 미국의 창의력, 그리고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입증됐다”고 자랑했는데, 그들의 저력이 부러웠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나라’는 이처럼 생산적 진보정신이 만드는 것이다.
 
화성 탐사를 보다가 우리에게도 꿈이 있나 되돌아본다. 이 정권에서 내일·미래·희망·설렘이란 단어가 실종됐다. 4년 내내 아픈 과거를 후벼 파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에만 끌려다녔다. 적폐몰이로 정적에게 가한 증오와 복수는 조선시대 사화(士禍)가 이랬겠구나 하는 간접 경험을 강요했다. 독립군인 양 환상 속에 친일파와 토착왜구 축출이란 사명을 띠고 정의의 사도 행세를 하는 집권 세력은 일제시대의 치욕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문빠’는 홍위병이 설쳐대던 중국의 문화혁명을 떠올렸고, 망한 나라들의 포퓰리즘을 학습하게 했다.
 
문재인 정권의 남은 1년은 달라질까. 저항의 마지막 보루로 버티던 윤석열 검찰총장마저 제거한 뒤 성취하는 권력형 비리가 없는 깨끗한 정부, 부산을 세계적 물류허브로 만들 가덕도 신공항 건설, 나라 곳간이 텅 빌 때까지 돈을 쓰는 ‘화수분 정부’가 이 정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비전이다.
 
월성 1호 경제성 조작,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라임·옵티머스 펀드 사기, 조국 가족 의혹 같은 비리 사건이 없는 평온한 세상이 올지 모른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한 박탈) 시대가 다가왔다. “우리 총장님”이라고 치켜세우던 윤석열이 자신들의 비리를 캐자 집요하게 내쫓겠다며 탄압하더니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았나 보다. 기어이 검찰의 수사권 해체를 밀어붙이며 윤석열 몰아내기에 성공했다.
 
이제 부패·공직자 등 6대 범죄의 검찰 직접수사를 다 빼앗고 중대범죄수사청을 설치하는 법안만 통과하면 저들의 뜻은 완성된다. 최강욱·황운하 의원 등 불법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잠재적 범죄자들이 주도하는 개혁이 바로 이런 그림이다. 윤석열의 지적은 정확하다. “내가 밉고, 검찰이 밉다”고 하루아침에 검찰 수사권을 빼앗는 입법 횡포는 “권력자에 치외법권 주는 셈”이다. 이런 사회에서 정의와 공정은 죽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가덕도 앞바다에 순시선을 띄우고는 “가슴이 뛴다”고 했다. 그 말 한마디에 28조원짜리 가덕도 신공항 사업이 일사천리로 추진된다. 여당에서조차 “하천 정비도 이렇게 안 한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다. 지방의 어느 공항처럼 고추 말리는 공항이 될까 걱정하는 국토부의 반대도 소용없다. 퍼서비어런스 계획에 투입된 돈이 27억달러(약 3조원)이다. 화성을 10번 탐사할 수 있는 돈을 바다 메우고 활주로 까는 삽질공화국 건설에 쓴다. 4·7 보궐선거가 얼마나 다급하면 저럴까 하는 동정심도 가지만 ‘국민의 대통령’이 할 이벤트는 아니었다. 선거에 눈이 멀어 절차적 정의와 상식이 무너졌다.
 
재난지원금이든 위로금이든 줄 수 있다. 나라가 거덜 난다고 발작을 일으키는 건 과장된 반응이다. 그러나 코로나19를 핑계로 선거용으로 여한 없이 뿌려보겠다는 심보라면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집권세력은 지난 4월 총선에서 돈의 힘을 봤다. 뿌리면 된다는 확신을 갖은 듯하다. 개처럼 벌어 나라 곳간을 채워준 건 국민인데 586운동권이 적선과 선심을 베풀며 정승 행세를 한다. 국민의 의식수준을 60~70년대 고무신 선거, 막걸리 선거로 퇴보시키고 싶은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100억대 투기 의혹은 정권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읽게 한다. 그들도 보고 배웠다. 거짓말하는 대법원장, 감옥의 담장 위를 걷는 잠재적 범법자들의 개혁, “우리 편에 서라”고 외치는 장관, 범죄를 ‘신내림’이라 둘러대는 공무원의 농단에 한 숟가락 얹은 것에 불과하다. 총체적 도덕 붕괴 현상이다. 비겁한 인물들이 이끄는 나라에서 어떻게 ‘가슴이 뛴다’는 희망을 품겠는가.

 

04.02 우리는 바닥의 하류인생인가

위와 바닥, 그 표현이 불편하다. “위에는 맑아지기 시작했는데 바닥에 가면 잘못된 관행이 많이 남아있다”는 발언이 그렇다.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친여 매체에 한 말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 투기 사태를 염두에 뒀다지만 그의 잠재인식이 보인다. 자신을 포함한 위의 상류인생들은 깨끗한데, 바닥의 하류인생들은 혼탁하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는 “그런 것까지 고치려면 재집권해야 한다”고 했다. 아랫것을 훈육하겠다는 운동권 출신 정치인의 도덕적 우월주의가 풍긴다.    

맑은 윗물-혼탁한 아랫물 이분법
독립투사 반열 오르려는 선민의식
민주화 성취를 독점한 운동권 신화
오만 방치하면 ‘바닥’ 소리 듣는다

민주화 기여와 미흡한 예우, 그 선민의식은 오만하다.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73명이 민주유공자예우법을 발의했다가 4·7 보궐선거를 의식했는지 잠시 후퇴했다. 유신 반대 운동과 6월 항쟁에 참여했던 운동권 인사들을 유공자로 지정하고 자녀들까지 교육·취업 등을 지원하는 법이다. “민주화에 공헌한 사람에게 합당한 예우를 한다”는 게 명분이다. 운동권이 법을 만들고 셀프로 유공자가 되고, 그 특혜를 자식에게도 대물림하는 그림이다. ‘공헌 없는 대중’과 자신들을 차별화하고, 토착 왜구와 싸운 독립투사 반열로 승화시키겠다는 자아도취가 느껴진다.
 
운동권 신화가 우리 사회를 지배한다. 이 나라의 민주화가 오로지 운동권의 투쟁과 희생 덕에 성취된 것이라는 영웅 신화가 배회한다. 신화는 무오류의 아우라를 구축한다. 정의의 사도가 엔지니어링 되고 대중은 받듦의 추종자로 전락한다. 그런 환상의 세계에서 위와 바닥은 청정과 오염으로 나눠지는 다른 계급이고, 특권과 반칙은 예우로 둔갑한다.
 
운동권이 대거 포진한 청와대의 풍경이 그렇다. 대통령은 경남 양산에 영농 경력 ‘11년’으로 적고 형질을 대지로 바꿔 저택을 지으면서 농지투기 단속을 남 일처럼 말한다. 청와대 2인자였던 임종석 전 비서실장은 “박원순 그렇게 나쁜가”라며 끊임없이 2차 가해를 가한다. 김상조 전 정책실장은 자기 집 전셋값을 왕창 올려놓고 세입자 보호를 태연하게 외친다. 재개발 투기 탓에 물러났던 김의겸 전 대변인은 보란 듯이 국회의원으로 영전했다. ‘맑은 윗물’과는 거리가 멀지만 문제의식이 없다.
 
이해찬은 세종시에서 농지 일부를 대지로 바꿔 땅값이 4배 올랐다고 한다. 이 땅 근처에 ‘우연히도’ 고속도로 나들목이 생긴다. 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박주민 의원은 법안 통과 한 달 전 자신의 서울 아파트 임대료를 크게 올렸다. 구정물이 집권당을 흐른다.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은 김해 신공항 추진을 폐기하고 가덕도 신공항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못사는 사람들이 밥을 미쳤다고 사 먹냐”던 그가 28조원이 쏟아질 테니 ‘밥 사 먹을 노다지’를 잡으라고 투기를 부추기는 셈이다. 예비 타당성 조사를 면제한 97조원의 토건사업은 큰 투기판이 섰다는 신호다. 고위공직자 절반이 땅을 보유 중이다. 그래 놓고 투기와의 전쟁을 얘기한다. LH 직원들의 일탈은 배우고 따라 한 모방범죄일 수 있다. 공공기관에 셀 수 없는 낙하산을 투하하면서 일자리에 신음하는 청년들을 걱정하는 척한다. 이게 당·정·청 윗물의 추한 자화상이다.
 
이 정권의 주류인 86운동권은 5060세대에 속한다. 그들이 대학에 다닐 때 운동을 통해 정치적 사회변혁을 꿈꾸던 친구들과, 기업에 뛰어들어 부유한 서구의 민주사회를 따라잡으려던 친구들이 섞여 있었다. 자란 환경, 어울리던 선후배에 따라 운명이 갈렸다. 엘리트 운동권은 민주화 세력이란 훈장을 달고 정치인이 됐다.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세일즈맨은 세계를 뛰어다녀 3만 달러의 선진국으로 끌어올렸건만 박정희 시대의 유물인 양 산업화 세력으로 깎아내렸다.
 
넓은 세상을 경험한 산업화 세력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 이념편향성이 옅은 실용적 합리주의자들이 많다. 엄혹한 시절 운동권 친구들이 겪은 고초를 알기에 부채의식을 느끼는 염치가 있다. 과대포장된 운동권 자본을 앞세워 국회와 청와대와 정부의 요직을 독차지해도 운동의 순수성을 믿고 밀어줬다. 그 보답으로 돌아온 게 위선과 내로남불로 뒤범벅된 참담한 현실이다. 미 국무부 인권보고서가 조국·박원순·오거돈·김홍걸·윤미향의 성추행과 부패를 흉봐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무감각한 권력이다.
 
왜곡된 신화를 깰 때가 됐다. 1987년 6월 항쟁만 해도 운동권이라 다 한 것처럼 윤색됐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밝힌 용감한 기자들, 이한열 열사의 죽음, 넥타이부대 등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다. 이병철·정주영이 노동자의 피와 땀 없이 혼자 이 나라 경제를 일으켜 세우지 않은 것처럼. 2016년 겨울의 ‘촛불’도 성난 시민의 열망이 피워냈건만 열매는 운동권이 독점했다.
 
‘샤이 진보’ ‘샤이 보수’는 없다. 퇴보와 꼰대를 거부하는 합리주의자가 지지를 거두는 현상일 뿐이다. 민주화 완장에 주눅이 들고 ‘선출된 권력’의 폭력에 무기력하니 업신여긴다. 조지 오웰이 말했다. “거짓이 판치는 시대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곧 혁명이다.” ‘우리는 바닥의 하류인생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게 그 첫걸음이다.

 

05.07 프로파간다를 파는 공영방송

교통방송(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은 우리 저널리즘에 무거운 화두를 던졌다. 그의 행위가 언론 활동인가 프로파간다(선전)인가 묻고 있다. 그동안 언론의 정치적 편향성이 문제가 되곤 했지만, 전체주의 사회와 직결된 언론의 프로파간다 논쟁은 생소하다. 친정권 쪽에선 “진실을 말하는 천재”라며 아부와 예찬을 쏟아낸다. 진중권씨는 ‘프로파간다 머신’이라고 대놓고 비판하고, 34만여 명이 ‘김어준 퇴출’의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의하며 대결을 벌이고 있다.     

‘김어준 뉴스공장’의 편향성 논란
‘정파적 공영방송’ 신조어 만들어
참과 거짓 희롱하는 프로파간다
다른 공영방송 전염될까 두렵다

미디어는 거울이 아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뉴스는 가공된 현실(reality)을 담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이슈 중 일부를 선택해 아젠다(의제)를 만들고 프레임(틀)을 씌운다. 그리고 특정한 의미를 부여해 대중에게 제시한다. 저널리즘에서 ‘현실의 재구성’이라고 한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이 생산하는 재구성된 현실은 정파적이다. 노골적인 편향 전략이 높은 청취율의 비결이다. 여당에선 “김어준 없는 아침이 두렵다”고 할 정도로 의지한다. 집권 세력의 구미에 맞게 마사지한 현실이 마음에 든다는 뜻이다. 송영길 신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등장으로 김어준 퇴출론이 나오자 뉴스공장을 감쌌다. “언론의 자유는 보장된다. 보수언론에도 편향성과 잘못된 사실이 많기 때문에 균형 있게 가야 한다.” 보수에 맞선 진보적 편향은 괜찮다는 색다른 발상이다.
 
1940년대 프로파간다의 대부였던 괴벨스를 불러오자. 히틀러의 선전장관이던 괴벨스는 언론을 ‘나치의 피아노’라고 강변했다. 나치 정권이 원하는 곡을 연주하는 것, 즉 프로파간다가 언론의 유일한 존재 이유라고 봤다. 라디오는 프로파간다의 도구였다. 그 라디오는 ‘괴벨스의 주둥이’라고 불렸다. 괴벨스는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믿게 된다”고 했다. 그의 프로파간다는 거짓을 지어내 대중의 증오를 자극하고,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눠 상대를 악마화하는 게 핵심이었다.
 
프로파간다는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만들기 위해 위협적이고 악마적인 적(敵)을 생성하고 그것을 전쟁의 목적과 결부시킨다”(라스웰). 그 증오에 불을 붙이는 도구가 미디어다. 그런 미디어에 팩트(사실)와 진실은 없다. 프로파간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조작과 왜곡을 가리지 않는다. 허구와 거짓을 교묘하게 조합해 왜곡된 현실을 창조하며 여론을 호도한다.
 
김어준은 진실을 확인하기 힘든 음모론을 퍼뜨리며 팬덤을 구축해왔다. 보수 정권 시절 천안함 좌초설, 박근혜 대통령 당선 선거의 개표조작설, 세월호 고의 침몰설을 지어냈다. 개인적 미디어인 팟캐스트나 유튜브의 주장이기에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이 정권 들어 공공재인 TBS 방송망을 태운 음모론은 차원이 다르다. 4·7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생태탕’ ‘페라가모 신발’이란 음모론으로 희화한 것은 대표적이다. ‘미투 공작설’, 정의기억연대의 회계 부정을 폭로한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배후설’도 있었다. 이런 음모론의 근거는 “냄새가 난다”는 그의 후각이 실체의 전부다. 팩트와 증거가 없이 상대를 공격하는 전형적인 프로파간다 수법이다. 장자연 사건, 조국 딸 표창장 위조 사건, 추미애 전 장관 아들의 휴가 특혜 의혹 등 정권의 유불리를 따지는 사건에는 어김없이 개입했다. 특정인을 출연시켜 ‘착한 우리’를 괴롭히는 ‘나쁜 그들’을 대비시키는 프로파간다 방식이 동원됐다.
 
신문·방송·인터넷 등 미디어는 코로나 백신처럼 특정 이슈에 있어 대중에게 자신들이 만든 각기 다른 현실을 내놓고 경쟁을 펼친다. 이렇게 재구성된 현실은 매체의 이념 성향이나 가치관에 따라 정파적 색채를 띨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부실한 백신 전략을 무능 탓으로 볼지, 미국의 자국우선주의 탓으로 볼지 엇갈리는 식이다. 그래도 정상적인 언론이라면 팩트의 검증, 불편부당, 사적 편견을 배제하는 균형성이라는 저널리즘 원칙을 지키려 노력하다.
 
TBS는 공영방송이다. 일 년 예산의 73%가 시민 세금에서 나온다. 김어준의 총출연료가 22억원을 웃돈다고 한다. 세금으로 낸 내 돈이 프로파간다를 팔아준 대가로 지급되고 있다. ‘공영이지만 정파적 방송’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이율배반적 신조어가 성립된다. 가짜뉴스(fake news), 허위조작정보(disinformation), 탈진실(post-truth)이란 개념이 혼란스런 마당에 프로파간다와 똑같은 ‘편파 저널리즘’까지 등장한 셈이다.
 
프로파간다는 위험하다. 진실을 가짜뉴스로 몰고, ‘냄새’를 진실로 둔갑시켜 만든 오염된 정보를 정치적으로 악용한다. 미디어와 뉴스가 정치화에 종속되는 것이다. 정파적 공영방송을 떠받드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전체주의적 지배의 이상적 주체는 확신에 찬 나치나 헌신적인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 참과 거짓을 더는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참과 거짓을 희롱하는 게 프로파간다의 본질이다. 거대 공영방송까지 전염될까 두렵다. 

 

05.28 청년예찬

청춘의 반란이 ‘유쾌·상쾌·통쾌’하다. 4·7 서울·부산시장 선거 때만 해도 스쳐 지나가는 ‘젊은층의 보수화 바람’이려니 했는데 예사롭지 않다. 국민의힘 대표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이준석·김웅·김은혜 소장파의 약진 속에는 창조적 파괴를 갈망하는 2030 청춘의 기운이 꿈틀거린다. 진영과 이념, 여야를 뛰어넘어 낡은 질서에 변화를 요구하는 목마름이 느껴진다.     

세상을 바꾼 건 청춘의 저항정신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보낸다고
좋은 시절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Latte is a horse(나 때는 말이야)’ 같은 넋두리를 한마디 해야겠다. 꼰대세대인 필자는 그동안 청춘의 인내심과 소심함을 살짝 경멸했다. 꼰대들은 흙수저 출신이라도 노력하면 출세할 길이 열렸고, 월급만 착실히 모으면 아파트 한 채는 거뜬히 장만했고, 중상층으로의 신분상승이 보장되는 그런 세상을 살았다. 1980~90년대 권위주의 시절에 청춘을 보낸 장년층에게 그 엄혹한 시간들을 견디게 한 힘은 꿈과 패기였다. 민주화든 산업화든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청춘이 살아있는 사회가 정상이고 발전이 있다.
 
분노와 저항은 청춘의 특권이다. 그동안 우리 청춘들은 특권을 잊어버린 세대라고 착각할 정도로 무기력했다. 진로인지 참이슬인지 족보도 없는 ‘소주’(소득주도) 성장론이란 환상이 빚어낸 불행을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체념하는 듯했다. 청년층 4명 중 1명이 놀고 있는 실업의 고통에 허덕이고, 비정규직·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기구한 신세인데도 군말이 없었다. 늘어나는 일자리라곤 택배밖에 없는 게 IT 강국의 현주소다.
 
집에 관한 한 완벽한 벼락거지로 추락했지만 위정자의 무책임을 따지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4주년 기자회견에서 “부동산만큼은 할 말 없다”고 했다. ‘미안하다’로 그만이었다. 계층 상승의 사다리는 통속 드라마에 나오는 허구에나 존재한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류는 그렇다 치고, 운동권 출신이라는 새로운 빽과 인맥이 판치고, 신기득권과 구기득권이 지위와 특권을 대물림하는 나라가 됐으니 비집고 틀어갈 틈이 사라졌다. 청춘들은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음)과 빚투(빚내서 투자)로 집과 암호화폐에 무섭게 달려든다. 적자생존의 정글사회에 적응하는 건가.
 
벼락거지가 된 것도 억울한데 청춘들을 돈에 눈 먼 속물로 대한다. 해외여행비 1000만원, 전역자 사회출발자금 3000만원, 청년기본자산 5000만원을 내걸고 표를 달라고 한다. 훗날 청춘들이 갚아야 할 돈을 선심 쓰듯 내미는 얕은 수작은 청춘이 깔봄의 대상이 됐음을 의미한다.
 
같은 땅덩어리에 서 있는 우리는 서로를 용납하지 않는 모두가 낯선 이방인이 됐다. 오직 하나의 목소리와 관점만 강제하며 청춘의 상상력을 짓누른다. 상생과 공정이란 겉만 번드르르한 언어의 유희로 현실을 왜곡한다. 생활이 된 반칙과 편법, 거짓과 위선, 내로남불은 불치의 병이 됐다.
 
이런 대혼란의 책임자들은 청와대와 정부를 나가자마자 교수로 복직하고 기업과 로펌으로 옮겨 전관예우를 챙긴다. 온갖 흠결과 부정투성이의 인물이 “능력 있는 인재”로 둔갑해 장관에 오른다. 고문료로 매달 수천만 원을 받고 2조 원대 펀드 사기를 변호한 인물이 버젓이 검찰총장 후보에 발탁된다. 이게 출세의 표준이다.
 
지금 청춘들이 보여주는 반항의 몸짓은 그래서 희망적이다. 겁을 상실한 권력 집단을 두렵게 하지 않으면 총체적 부조리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달은 듯하다. 숨 막히고 암울한 구조를 깨지 않으면 빚투·영끌 인생으로부터 영원히 탈출할 수 없다.
 
세상을 바꾼 건 언제나 청춘의 저항정신이었다. 이 땅에서 4·19혁명, 6·10항쟁을 이끈 건 청춘의 뜨거운 피였다. 유럽과 미국에서도 그랬다. 프랑스의 1968년 5월 혁명 때 청춘들은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며 낡은 체제를 거부했다. 미국의 반전운동과 히피문화는 기성 체제를 뒤흔들며 인권과 인종차별, 성 해방 문제를 사회에 던졌다. 92년 전 일제에 대항해 쓴 민태원의 수필 ‘청춘예찬’은 지금도 유효하다.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汽罐)과 같이 힘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청춘의 도전이 이번에는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날지라도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절망하고 주저앉는 건 기득권 세력이 바라는 바다. 그들이 속삭이는 공허한 공감과 위로에 속지 말라. 어느 정치인의 주장처럼 ‘장유유서(長幼有序)’ ‘구상유취(口尙乳臭)’라는 폄하에 기죽을 필요 없다. 어떤 가정환경 출신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학벌이 좋든 나쁘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 정직한 대가를 받는 사회가 결국 온다는 가슴의 외침을 따르라. 청춘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정치 제도를 줄기차게 요구해야 한다.
 
부당한 체제에 순종하는 청춘은 죽은 젊음이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유행가 가사를 읊조리며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좋은 시절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분노하는 청춘들이여, 그대를 응원하는 꼰대들이 많다는 점을 꼭 기억하시라. 

 

06.25 문 대통령이 감동한 대접과 국격을 만든 건 6·25였다

해외에 나가면 애국심이 절로 생긴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랬나 보다. 5월의 한·미정상회담과 6월의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직후 SNS에 올린 소회에는 나라 사랑의 자부심이 물씬 풍긴다. 미국에선 “정말 극진히 대접받는 느낌이었다”고 소개했고, G7에선 ‘한강이 이룬 기적의 역사’를 언급하며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전했다. 부패와 기득권에 찌든 ‘적폐의 나라’에서 ‘국뽕’ 프레임으로 돌변한 인식 전환이 생경했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한·미정상회담과 G7 정상회의는
우리의 국격과 대접 유지하려면
어떤 외교를 할지 일깨워준 기회
6·25전쟁의 아픈 경험에 답 있다

대접과 국격. 문 대통령의 벅찬 감동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한·미정상회담은 대접에 방점이 찍혔다. “최고의 순방, 최고의 회담”이라며 만족했다.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해 해리스 부통령, 펠로시 하원의장 등 최고위급 거물에게서 극진한 환대와 예우를 받았으니 감격할 만했다. 2017년 12월 명색이 국빈(國賓)으로 방문한 중국에서 혼밥의 푸대접을 당했던 기억을 반추하면 감회가 더욱 남달랐을 것이다.
 
영국 콘월 G7회의에서는 격상된 국격을 실감한 듯하다. 문 대통령은 귀국 후 22일 국무회의에서 “대한민국의 달라진 위상과 국격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나라가 됐다”고 흥분의 여운을 털어놨다. 솔직히 문 대통령이 맨 앞줄에서 G7 정상들과 함께 찍은 한장의 사진은 우리의 국력을 상징하는 압축적 장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 외교무대에서 주눅 들지 않고 서방 정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코로나19, 기후변화, 자유·공정 무역 등 지구촌 현안을 논의하는 반열에 올라섰으니 내심 뿌듯한 게 당연하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고 선언했다.
 
과장이나 허풍이 아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 1인당 명목 국민총소득(GNI)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66달러에서 2020년 기준 3만1880달러로 약 480배 치솟았다. 올해 한국의 1인당 GNI는 G7(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중 이탈리아를 뛰어넘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환율과 물가 수준을 고려한 한국의 구매력은 일본을 이미 추월했다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조사도 있다. 한국을 포함한 ‘G8’이 황당한 꿈이 아닐 수 있다. 이런 성취는 세계 최빈국이라는 불명예를 딛고 기적처럼 경제발전을 이뤄낸 국민들의 헌신과 땀의 결과물이다. 이에 더해 “6·25는 오늘의 우리를 만든 전쟁”이라는 지난해 6·25전쟁 기념식에서 밝힌 문 대통령의 발언은 핵심을 찌른다.
 
오늘은 6·25전쟁 71주년이다. 중국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북한은 ‘조국해방전쟁’이라고 자기들 입맛대로 부른다. 우리는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고 모호하게 정의한다. 6·25의 성격 규정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명확했다. 정상회담 중 청천강 일대 전투에서 인해전술로 밀려온 중공군을 혈투를 벌이며 물리친 94세의 6·25전쟁 영웅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하는 행사에 문 대통령을 초청한 것은 일종의 메타포어였다. 한국과 미국은 한편으로 싸운 혈맹이었고, 그 반대편에 중국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일깨웠다. 미국·영국·프랑스 등 우방의 핏값으로 중국의 공산화를 막아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가능했다는 메시지도 담겼다.
 
문 대통령은 훈장 수여식에서 “미국 참전용사들의 그 힘으로 한국은 폐허에서 다시 일어나 오늘의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고 화답했다. 문 대통령이 누리는 국격과 대접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6·25전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고나 할까. 쉽게 비유하자면 냉전시대에 편을 잘 먹었기에 이 정도 컸다는 얘기로 풀이된다.
 
국익에 따라 움직이는 냉혹한 국제 외교에 공짜는 없다. 대접에는 청구서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한미·G7 정상회의는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미국이 돌아왔다(America is back)와 중국몽(中國夢)이, 미국의 더 나은 세계 재건(B3W, Build Back Better for the World)과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가 거칠게 충돌한다. 쿼드 군사동맹과 반도체 경제동맹을 요구하는 미국과 “불장난 말라”고 위협하는 중국이 서로 우리 편에 서라고 으르렁댄다. 세계 질서의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신냉전시대의 전조라고들 걱정한다. 미국과 중국이 전쟁으로 치닫는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질 경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통지서가 날아들지 모른다.
 
문 대통령은 “우리보다 훨씬 크고 강한 나라인데도 그들이 외교에 쏟는 정성은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라고 했다. 진심이라면 편협한 흑백논리에 갇혀 죽창가를 부르는 토착 왜구 놀음을 이제 접어야 한다. 중국 앞에서 “높은 산봉우리”라고 치켜세우는 비굴한 외교로는 “과거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다”는 중국의 왜곡된 역사관을 고칠 수 없다.
 
대접은 나를 알아주는 것이고, 격(格)을 맞춰주는 게 친구다. 한·미정상회담과 G7회의는 대한민국의 국격과 대접을 유지하려면 어떤 외교를 펼지를 알려준 소중한 기회였다. 줄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진실 말이다. 6·25 한국전쟁의 아픈 경험에 그 답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