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8/ 탈북 지성인들이 말하는 북한7/
■ 주성하의 서울과 평양 이야기3/ 2016 - 2017 동아일보
2016-01-14 산 고슴도치에서 핵 ‘가시’ 뽑기
북한 TV에서 최고 인기 만화 시리즈는 ‘소년장수’, ‘다람이와 고슴도치’이다. 이 만화가 방송될 때는 거리에서 아이고 어른이고 찾아보기 힘들다.
‘소년장수’는 고구려시대 소년장수 ‘쇠메’가 외적들을 물리친다는 내용으로, 1997년에 50부로 끝났다. 그런데 재작년 김정은이 100부작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내려 현재 58부까지 나왔다. 오랜만에 나타난 쇠메는 청년으로 성장해 콧수염까지 길렀다. 적이 벌벌 떠는 용감한 청년 장수인데, 인민의 눈에 그 주인공의 모습으로 비치길 바라는 김정은의 욕망이 담긴 만화다.
‘다람이와 고슴도치’는 다람쥐와 고슴도치 동맹군이 꽃동산(북한)을 노리는 적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이들의 적은 승냥이 족제비 들쥐 부대인데 각각 미국 일본 한국을 의인화한 것이다. 우두머리 승냥이는 근육질 몸매에 사납고 힘도 세지만 머리가 나쁘다. 족제비는 교활하고 끈질기다. 들쥐는 승냥이와 족제비의 앞잡이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꽃동산 정찰 임무를 도맡고, 전공도 제일 많이 세우고 아이디어도 많다.
꽃동산에는 마을을 지켜준다고 큰소리치던 힘 센 곰도 살았지만, 술주정뱅이 곰은 들쥐 공작원이 머리 조아리며 건넨 독주를 먹고 그만 죽어버렸다. 이 곰은 소련인 듯하다.
다람이와 고슴도치는 만화의 형식을 빌린 인민 세뇌 시리즈이다. 실제 북한 당국은 자신들을 고슴도치에 비유하고 있다. 전국에 온통 땅굴을 파놓은 것도 고슴도치의 습성과 닮아 있다.
내 머릿속에도 김일성대 시절 들었던 중앙당 강연과장의 강연이 생생히 남아 있다.
“동산에 살찌고 맛있는 짐승이 널렸는데, 하필이면 호랑이가 가시 세운 고슴도치를 잡아먹으려 하겠냐.”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고슴도치가 1990년대 중반 영양실조에 걸려 죽다 살아났다. 가시도 다 빠지고 힘도 없어졌다. 그래서 새로 비장의 무기로 ‘핵’ 가시를 준비하고 있다. 잔가시는 다 버려도 치명적 가시 몇 개는 갖겠다는 것이다.
자연에서 고슴도치의 생존 방식은 아주 단순하다. 적이 나타나면 가시를 세우고 몸을 웅크릴 뿐인데 호랑이도, 곰도 피한다. 과거 햇볕정책으로 북한의 외투를 벗기겠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건 외투가 아니라 생존이 걸린 가시 껍질이었던 셈이다.
이제 와서 북한의 핵을 폐기시키기엔 너무 늦은 감이 있다. 북한이 원자탄을 수백 개씩 만들 것도 아니다. 핵보유국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선 10개쯤이면 되고, 많아봐야 수십 개면 충분하다. 이 정도 목표는 몇 년 뒤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핵실험 후 남한은 대북 확성기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북한이 이것 때문에 핵을 폐기할 리는 만무하다. 더구나 겨울은 북풍의 계절이라 대북 전단(삐라)을 뿌리는 사람들도 집에서 쉰다. 확성기 소리가 된바람을 거스르며, 북한의 맞불 방송 소음까지 누르며 당국의 설명대로 낮에 10km, 밤에 24km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북핵 폐기 목표는 화가 잔뜩 난 고슴도치의 등에서 치명적 가시를 뽑아버리겠다고 나선 모습으로 비유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굴에 몰아넣고 통로를 막는 것이 효과적 전략인 듯 여겼지만, 문제는 고슴도치가 굴에 비상구를 아주 많이 만들어 놓는다는 점이다. 통로 하나를 막으면 금방 우회 통로를 뚫어버린다.
더 근본적 문제는 산 채로 고슴도치 가시를 뽑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더구나 굴에 깊이 숨은 고슴도치의 가시는 뽑을 수도 없다. 굴 밖으로 끌어내야 가시를 뽑든 잡든 할 것 아닌가.
고슴도치에서 기름과 비계를 얻는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이 정글에서 고슴도치를 잡는 방법은 간단하다. 굴 앞을 지키다가 바나나 송이를 던지면 된다. 무거운 바나나가 가시에 박힌 고슴도치는 움직이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그 가시 때문에 붙잡혀 죽는다.
고슴도치를 자처하는 북한의 핵 가시 위에는 어떤 바나나를 던져야 할까. 방법은 분명 있을 것이다. 가령 미국 구글이나 페이스북은 스리랑카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몇 달 동안 성층권에 머무를 수 있는 기구나 태양광 드론을 띄워 무선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다. 레이더에 걸리지 않는 민간 소속의 기구가 평양 상공 성층권에서 인터넷과 방송 전파를 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북한 주민 머리 위에서 외부 정보가 폭포처럼 쏟아진다면 폐쇄된 북한도 굴 안에서 오래 버티긴 어려울 것 같다.
북한의 핵개발 역사는 30년이 넘는다. 이 긴 역사를 몇 년 만에 무효화시키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핵 폐기 정책도 길게 보고 다시 짜야 한다. 고슴도치를 살려두고 가시만 뽑을 것이냐, 공격성을 없애버릴 것이냐, 굴에 가둘 것이냐, 밖으로 끌어낼 것이냐. 결국 선택의 문제다
2016-01-17 수소탄 실험에 박수치는 북한 인민에게
예상했던 대로 북한의 자칭 수소탄 실험 이후 국제사회가 본격적인 제재에 나섰습니다. 제가 자칭이라고 하는 이유는 저는 수소탄 실험을 실패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무슨 수소탄이 3년 전 원자탄 실험보다 더 화력이 떨어집니까.
김정은은 수소탄 실험 이틀 뒤엔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 실험 장면도 공개했습니다. 김정은이가 쌍안경을 쥐고 지켜보는 가운데 미사일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 화염을 내뿜으며 하늘로 사라지는 장면이 방영됐습니다.
하지만 여기 영상 분석 전문가들이 아주 정밀히 분석해보니 그건 조작이었습니다. 오히려 로켓이 화염에 휩싸이다 폭발해 파편들도 보인답니다.
그런데 북한은 지난해 5월 수중 발사 실험할 때 영상에 재작년 6월 스커드 미사일 발사 영상을 짜깁기해서 마치 잠수함 발사 미사일 실험이 성공한 듯 선전합니다.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은 1991년 걸프전 때 명중률이 너무 낮아 놀림감이 된 미사일인데, 그럼에도 일단 발사될 때는 화염을 내뿜으며 멋지게 올라가죠.
또 이번 실험은 잠수함에서 발사된 것도 아니고 물 안에 발사대만 숨겨놓고 쏜 것입니다. 잠수함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려면 최소 3000톤급은 있어야 하지만, 북한에는 이런 잠수함도 없습니다.
12월에 했다는 잠수함 미사일 발사실험 영상을 한 달 만에 공개해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동안 실패해서 숨기고 있었던 것을 수소탄 실험 발표 이틀 만에 부랴부랴 영상을 조작해 내보낸 것 같습니다. 왜 그래야 했을까요.
그것은 잠수함 탑재 핵미사일이 핵 무력의 3대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핵무기를 갖고 있는 나라는 원자탄만 갖고 있어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상대가 먼저 핵을 쏘면 내가 핵이 있어도 먼저 무력화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핵무기를 생산한 나라는 장거리 핵미사일, 핵폭격기, 핵잠수함이라는 3대 무기를 가지려 합니다.
이중에서 최고는 핵잠수함입니다. 핵미사일이나 폭격기는 지상에 있기 때문에 핵 공격을 받아 사라질 수 있지만, 잠수함은 바다에 숨어 있다가 보복공격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사실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핵무기로 상대를 공격하고 싶어도, 상대의 핵무기가 여전히 살아남아 내가 보복 받을 가능성이 있다면 선뜻 핵무기를 쓸 수가 없습니다.북한이 핵미사일을 잠수함에 실으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미국이 먼저 공격해 북한의 군사력을 순식간에 쑥대밭을 만들 능력이 있어도 핵미사일을 실은 북한 잠수함이 살아남아 보복할 수 있다면 선뜻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란 계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북한은 아직 만들지도 못한 잠수함 발사 미사일과 실패한 핵실험을 매번 성공한 듯 떠들어서 “우리는 잠수함에서 핵무기를 발사할 능력이 있다”고 미국한테 인정받으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북한의 그런 모습이 너무 어이없기만 합니다. 마치 발발이 한 마리가 호랑이와 싸우겠다고 발톱을 갈고 있는 격이라고 할까요.
오직 김정은만 여전히 반세기 전 냉전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피해망상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럼 고생하는 것은 인민들뿐입니다.
1990년대 말부터 인공위성이 성공했다, 핵실험이 성공했다, 이번에 수소탄이 성공했다 해서 여러분들의 삶이 뭐가 달라졌습니다. 몇 년 뒤에 또 북한은 잠수함 발사 미사일이 성공했다고 하겠죠. 그러면 뭐가 달라집니까.
오히려 그럴수록 국제사회의 제재가 강화돼 인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기만 합니다. 김정은에겐 핵무기가 있으면 없는 것보다야 마음이 든든하겠지만 그건 김정은의 이해관계이지 여러분들의 이해관계가 아닙니다.
김정은이가 핵무기를 가졌다고 해서 조국통일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북한이 남쪽에 핵무기를 한발만 발사하면 즉시 미국의 핵 보복 공격으로 북한 도시들은 폐허가 됩니다. 김정은도 당연히 죽습니다. 김정은이 그런 무모한 모험을 할 것 같습니까.
이렇게 보면 김정은이 핵을 가진다는 것은 여러분들의 고생이 더 길어진다는 의미에 불과합니다. 멋모르고 수소탄을 만들었다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말 노예근성에 찌들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입니다.
언제까지 추운 겨울에 퇴비전투나 끌려 다니고 장마당에서 두 손을 호호 불면서 장사나 하고 살겠습니까. 사람으로 한번 태어나 세상 구경 한번도 못해보고 죽는 것이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대북제재로 이제 북에 돈줄이 더 말라가고 김정은은 그럴수록 여러분들의 주머니에서 딸라를 털어내기 위해 더 무자비해지겠죠.
반면 남쪽은 북한이 핵실험 하든 말든 전혀 영향 받지 않고 여전히 경제 강국으로 자기 갈 길을 갑니다. 이런 현실을 놓고 보면 정말 북한 인민만 불쌍합니다.
그럼에도 언젠간 여러분들이 오늘을 돌아보며 끔찍했던 김정은 체제를 추억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이 글은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전해지는 내용으로 2016년 1월 15일 방송분입니다.
남한 독자들이 아닌 북한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한 글임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2016-02-25 김정은도 기가 막힐 39호실 폐지 논란
1968년 1월 북한이 미국 해군 첩보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했을 때, 배 안엔 달러도 적잖게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이 “미 제국주의자들의 너절한 쓰레기”라면서 불태워 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은 달러를 혐오했다. 지금이라면 노동당 39호실로 실려 갔겠지만.
오늘날 김정은의 사금고 역할을 하는 39호실은 1970년대 중반 생겨났다. 그때쯤에야 북한이 달러 맛을 안 것이다.
최초의 39호실은 달러를 벌기 위해 노동당 재정경리부의 한 개 과(課)를 따로 독립시켜 만들었다. 이때 노동당 총비서는 김일성이었기 때문에 39호실의 자금 처리 권한도 김일성에게 있었다. 매번 아버지에게서 돈 타 쓰기 불편했던 후계자 김정일은 아버지 몰래 딴 주머니를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생긴 게 38호실이다.
김정일은 노동당 실권을 모두 장악한 뒤인 1986년 조직지도부가 관리하던 39호실도 손에 넣었다. 당시 39호실장과 그의 윗선이던 이성관 조직지도부 1부부장이 비리를 저질러 발각됐는데, 이를 구실로 김정일은 39호실을 자기 서기실 산하로 귀속시켰다.
이후 38호실과 39호실은 경쟁 관계로 공생했다. 39호실은 주로 외국에서 달러를 벌어 오고, 38호실은 국내에서 호텔이나 상점, 식당 영업으로 달러를 걷었다.
2008년부터 38호실은 이권 다툼의 희생양으로 기구한 곡절을 겪었다. 그해 김정일은 대규모 검열에 이어 38호실을 39호실 산하로 소속시켰다. 2011년 38호실이 부활하는가 싶었지만 얼마 안 가 3경제위(군수경제 담당)로 넘어갔고, 장성택이 숙청된 뒤엔 또다시 39호실로 통합됐다.
하지만 39호실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오히려 지금은 38호실까지 통합해 산하에 70만∼80만 명을 둔 전례 없이 비대한 기관으로 커졌다. 김정은의 사금고를 위해 거의 북한군 병력과 맞먹는 외화벌이 부대가 존재하는 것이다. 은행업 광업 수산업 농수산업 등 북한에서 달러가 될 만한 분야의 대다수는 39호실이 관리한다. 대북 제재를 위해 제일 필요한 일이 바로 39호실을 손금 보듯 파악하는 것이다.
이 39호실이 최근 황당한 논란의 대상이 됐다. 개성공단 폐쇄 직후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 유입 자금의 70%가 39호실로 흘러들어가 핵과 미사일 개발에 쓰였다”고 주장한 것이 발단이다. 사실 이 발언은 꼬투리 잡히기 좋은 말이라고 본다.
물론 개성공단 자금은 70%가 아니라 거의 100%가 김정은의 주머니에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김정은이 가진 수많은 자금원 중에 딱 개성공단의 달러가 핵 개발에 쓰였다고 단정할 증거는 제시하기 어렵다. 당장 나부터도 통장에 월급 상여금 원고료 등이 들어오는데, 저녁에 카드로 긁은 술값이 월급으로 낸 것인지, 원고료로 낸 것인지 증거를 대라면 할 말이 없다.
일주일 전 국회에서 낯 뜨거운 장면이 벌어졌다. 김광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8일 황교안 총리를 향해 “북한 39호실은 이미 4년 전에 폐쇄된 곳”이라며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호통을 쳤다. “없어진 조직을 가지고 근거가 있는 것처럼 국민을 호도하지 말라”고 김 의원이 야단칠 때 나는 너무 창피했다. 김정은이 볼까 봐….
김 의원은 합참 정보본부와 국가정보원 통일부에 확인을 했는데 “존재에 대해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다. 나는 그 어마어마한 규모의 39호실이 존재 여부 자체가 문제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우리가 대북 제재를 주도하려면 39호실의 움직임을 전부 파악해도 부족한데, 그 존재도 모르다면 도대체 어떻게 돈줄을 죈단 말인가.
그러나 관계 당국이 39호실의 존재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암만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다. 탈북자가 3만 명이나 한국에 들어와 있고, 내가 아는 39호실 출신 탈북자도 여럿이다. 또 숨어 사는 39호실 출신은 더 많은데 정부가 그런 답변을 했다는 건 납득할 수가 없다. 도대체 어느 부처들이 김 의원에게 39호실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대답했는지 정말 궁금하다.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북한을 모르는 의원 한 명이 잘못된 사실을 근거로 총리를 몰아가고, 총리는 반박도 못 하고 쩔쩔매는 모습이 온 국민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김정은이 그 모습을 봤다면 얼마나 낄낄거릴까 싶다. 이건 국격(國格)의 문제다.
김 의원이 39호실에 대해 정 궁금하면 내가 자세히 설명해 줄 용의가 있다. 그리고 “없어진 39호실을 놓고 정부가 사기를 치고 있다”는 식의 거짓 주장은 제발 당분간만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39호실이 뭘 하는지를 다룰 다음 칼럼이 나올 때까지만이라도….
2016-04-07 이영길 북한군 총참모장 숙청 사건의 전말
▲한 채당 20만 달러를 호가하는 평양 중심 만수대 거리의 고급 아파트 단지. 동아일보DB
이영길 북한군 총참모장 전격 처형 소식이 2월 초 한국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하지만 정통한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이영길은 처형된 것이 아니라 강등돼 현재 강원도 전방 1군단 산하 사단장으로 있다고 한다.
북한 뉴스를 다루면서 제일 껄끄러운 게 숙청 보도다. 죽었다고 하다가 살아난 경우가 많아 오보 위험이 적지 않다. 이영길도 다시 뉴스에 등장할지 아니면 영영 매장될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소식통이 전하는 이영길 숙청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내가 외무성이나 무역성 사람들이 살고 있다면 이해하겠지만 군대가 뭔 돈이 이리 많아. 당장 뒷조사를 해봐!” 지난해 9월 말 어느 날 김정은은 평양 시내 야간 시찰에 나섰다. 통치자가 암행어사처럼 밤에 시내를 시찰하는 일은 김일성 때부터 내려온 관례다. 북한이 왕조사회이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김정은이 차를 멈춰 세운 곳은 만수대거리 고급아파트촌. 7년 전 입주가 시작된 이곳은 김정은이 평양 건설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초기에 중국식 설계를 본떠 최고급 자재로 지었다. 평양 중심부 중구역 보통문에서 옥류교에 이르는 최상의 입지에 자리 잡았고 평수도 널찍하다. 아파트 일부는 국가에서 특정한 사람에게 분양했고, 일부는 판매됐다. 분양 아파트는 팔 수 없지만 처음부터 판매된 아파트는 나중에 거래가 가능하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18만∼20만 달러(약 2억∼2억3000만 원)를 호가했다. 이는 평양에서도 제일 비싼 아파트에 속한다.
김정은은 이 고급 아파트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궁금했던 것 같다. 그래서 측근에게 판매용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조사해볼 것을 지시했다. 얼마 뒤 조사보고서를 받아 본 김정은은 버럭 화를 냈다. 아파트 구매자의 60%가 군부였던 것이다.
김정은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군부의 집중 검열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이영길도 뇌물을 받고 측근들을 감싸준 비리가 걸려들었다. 검열에 걸리지 않을 자가 있을까 싶지만, 이영길은 좀 심했던 것 같다. 내부에서도 “젊은 놈이 눈에 뵈는 것이 없이 해먹었다”고 수군거릴 정도라고 한다. 아마 이영길은 ‘얼마나 이 자리에 있을지 모르니 있을 때 최대한 한몫 챙기겠다’고 생각했나 보다. 게다가 그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벼락출세해 고령자가 많은 군부 내부에서 반대파도 많았던 것 같다.
2월 초 이영길을 강등시킨 군부 수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월 말부터는 군 보위국(옛 보위사령부)을 대상으로 집중 검열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만수대거리에 집을 샀던 군 간부 중에 보위국 소속이 유독 많았다는 것이다. 북한 내부에선 보위국장인 조경철 대장이 다음 숙청 대상이라는 소문이 나돈다. 공교롭게도 3월 20일 북한 언론은 보위국이란 명칭을 처음으로 공개해 보위사령부가 사라졌음을 공식화했다.
보위사령부도 10여 년 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추억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이제는 그 권력이 김원홍의 국가안전보위부로 넘어갔다.
군부 비리 조사가 시작되자 평양 시내 고급식당은 순식간에 한산해졌다. 평양에서 호화식당의 대명사로 불리던 해당화관도 텅텅 비었다고 한다. 군인들은 호화식당의 주요 고객이었다.
군부에 돈이 넘치는 이유는 간단하다. 북한 최대의 이권단체가 됐기 때문이다. 장성택 숙청 이후 그의 파벌이 장악하고 있던 큼직큼직한 이권들이 군부로 대거 넘어갔다. 북한 수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원유 수입권도 장성택 최측근 수하인 장수길 행정부 부부장이 주물렀지만 그가 처형되면서 군부 손에 넘어갔다. 북한 원유 수입액은 매년 7억 달러로 추산된다. 이번 대북제재는 항공유 수입만 금지했을 뿐 원유는 금지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단둥에서는 중국 유조차가 수십 대씩 줄지어 북에 넘어가 돌아오지 않는다. 중국이 유조차까지 함께 팔기 때문이다. 북한은 요즘 주유소 사업이 붐을 이루고 있어 유조차 수요가 많다. 이 주유소 사업권의 대다수도 군부 소속 회사들이 쥐고 있다.
북한 수출액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던 석탄 이권 상당수도 군부가 갖고 있다. 지난해 북한의 석탄 수출액은 10억5000만 달러(약 1조2150억 원)였다. 석탄 가격이 좋았던 몇 년 전에는 15억 달러(약 1조7355억 원)가 넘기도 했다. 중국이 유엔 대북제재 결의에 따라 석탄 수입을 막으면 군부가 가장 큰 피해자가 된다. 거기에 비리 조사까지 시작됐으니 이 화창한 봄날에 속은 얼마나 새파랗게 떨릴까.
북한군 비리 이야기를 쓰다 보니 한 가지가 딱 걸린다. 오늘 이 칼럼을 읽어볼 정찰총국이나 통전부 등 북한 대남기관 담당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 내다보인다는 것이다. “우린 스스로 벌어서 해먹지 세금은 안 빼먹어”라고 할 게 뻔하다.
2016-04-21 “선생님, 우리가 착취당하는 것도 좀 써주세요”
“선생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우리가 착취당하는 것도 좀 써주세요. 죽겠습니다.”
어느 날 모르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러시아 연해주에 파견돼 일하는 북한 근로자였다. 오랫동안 내 칼럼을 읽어 오다가 전화할 용기를 냈다고 했다.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년에 3000∼4000달러를 북한 가족에게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작년부터 고향에 돈 보낼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했다. 북한에 뜯기는 것이 너무 많아서란다.
해외에 파견된 북한 근로자들이 죽을 맛이라고 아우성친다는 소식을 여러 경로를 통해 들은 바 있다. 도대체 얼마나 뜯기는지 궁금했다.
“1년에 북한에 얼마나 내야 합니까.”
“2016년 국가계획분이 40만 루블(약 680만 원)입니다.”
국가계획분이란 해외 파견 근로자가 북한 당국에 의무적으로 내야 하는 1인당 몫이다. 해외의 북한 기업은 근로자 머릿수만큼 배정된 돈을 당국에 제일 먼저 갖다 바쳐야 한다.
“국가계획분은 매년 얼마씩 올랐습니까.”
“2008년엔 14만 루블이었습니다. 2009년에 18만 루블, 2010년 20만 루블, 2011년 24만 루블, 2012년 25만 루블, 2013년 35만 루블, 2014년 36만 루블, 2015년 38만 루블, 올해 40만 루블….”
한이 맺혀 뇌리에 박힌 숫자가 쉼 없이 줄줄 나왔다. 기가 막혔다. 올해는 2010년보다 두 배나 올랐다.
“정말 너무하네요. 그렇게 벌 수는 있는 겁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사업소는 환율이 떨어져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루블로 임금을 받는데, 나라에선 과제를 달러로 내라고 합니다. 환율 부담을 몽땅 우리에게 덮어씌우는 거죠.”
왜 러시아 파견 근로자들이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는지 이해가 됐다. 요즘 환율로 볼 때 40만 루블은 대략 6000달러다. 2010년에는 20만 루블이 6000달러 정도였다. 국제 원자재 시장, 더 정확하게는 원유 가격 하락으로 러시아 루블화 환율이 크게 떨어지자 유탄을 북한 근로자들이 고스란히 맞았다.
북한 당국에 왜 근로자들의 수탈 강도를 높이느냐고 따진다면 그들은 “더 받는 것은 없다. 국가계획분은 5년 전에도 지금도 6000달러일 뿐이다”라고 변명할 것이다.
근로자 입장에선 루블화로 책정된 일당은 제자리걸음인데 예전보다 두 배나 돈을 더 내는 것이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다.
“국가계획분만 내면 끝입니까.”
“아닙니다. 식비로 매달 5000루블(약 8만5000원)을 내야 하고, 러시아 이민국에 1년에 한 번 거주 등록하느라 시험을 치는데 여기에 또 5만 루블(약 85만 원) 들어갑니다. 이런저런 것을 다 내고 남는 것을 나눠 가지는데, 요샌 다들 집에 돈을 못 보냅니다. 50만 루블 넘게 벌기가 쉽지 않거든요. 우린 월급이란 것도 없어요. 매달 잡비라며 1000루블 주는데 담배 15갑을 사기도 어려워요.”
그가 근로자 실정을 아랑곳하지 않는 북한 당국보다 정작 더 분통을 터뜨리는 대상은 사업소 간부들이었다. 러시아 업자의 요구를 맞추느라 노동자들은 새벽까지 자지 못하고 야간작업을 수시로 하는데, 사업소 책임자나 노동당 비서, 보위부 요원은 비싼 월세 집에서 유럽산 고급차를 타며 흥청망청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같은 노동자들은 러시아 측과 얼마에 계약하고 작업을 하는지도 몰라요. 우리가 번 돈이 나라에 가는지 간부들의 주머니에 들어가는지도 알 수가 없어요. 하긴 북한 사람은 다 도둑이 돼야 사니까 어쩔 순 없지만.”
그는 자기처럼 러시아에서 착취에 허덕이는 노동자는 4만∼5만 명이라고 말했다. 과거엔 벌목공이 대다수였지만 지금은 1만 명 남짓이고 나머지는 모두 건설노동자라고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러시아에 나오면 큰돈을 벌어간다고 해서 지원자가 많았는데, 요샌 돈을 벌지 못한다고 소문이 나서 나오겠다는 사람도 없단다.
북한의 다른 해외 건설노동자들의 처지도 비슷할 것 같다. 근래 북한이 노동자를 파견한 나라치고 환율이 꼬꾸라지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다.
나는 예전에 북한 해외 근로자 송출을 막는 데 반대했었다. 그렇게라도 그들에게 돈을 벌 길을 열어 주고 외국도 체험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해외 근로자 송출 차단에 찬성이다. 지금 북한 근로자들은 1년 내내 죽도록 일하고도 가족에게 돈을 보내기도 어려운 진짜 노예 신세다.
“그렇게 살 바에야 한국에 오시죠.”
“저는 가족 때문에 못 갑니다. 그런데 거긴 노동자 월급이 얼마예요. 예? 막노동해도 2000달러는 번다고요? 그럼 저도 반동이 될까 봐요. 근데 선생님은 독재만 끝나면 고향에 오실건가요? 아, 예, 꼭 오세요. 소원이 빨리 이뤄지길 바랍니다.”
2016-05-12 北 해외식당 ‘꽃 파는 처녀’들의 서글픈 운명
▲북한의 한 해외 식당에서 여종업원들이 공연하는 모습. 화려한 복장 뒤에 가려진 이들의 피눈물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북한 ‘5대 혁명가극’ 중 최고봉으로 꼽히는 가극 ‘꽃 파는 처녀’의 감정적 절정은 주인공 꽃분이 어머니의 죽음이다. 가난한 꽃분이는 병든 어머니의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앞 못 보는 여동생과 함께 매일 꽃을 꺾어 판다. 거친 산을 누비느라 발에서 피가 흐르고 허기져 쓰러지면서도 거지라고 모욕당해도 오직 어머니만 생각한다.
마침내 약 한 첩을 구한 꽃분이는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 속에 춤추며 집에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희망과 절망이 극단적으로 바뀌는 순간, 오열하는 꽃분이를 따라 관객도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1972년 김정일이 직접 창작지도한 가극은 193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착취받고 억압받는 세상을 뒤집어엎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는 사상을 주입하고 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절 가극 속에만 존재하던 꽃분이가 현실에 나타났다. 기차역을 누비며 “꽃 사시오”를 귓속말로 속삭이던 처녀들은 굶어 죽어가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몸을 팔러 나온 북한의 꽃분이였다.
그리고 다시 20여 년이 흘렀다. 이제 북한엔 굶어죽는 사람은 없어졌다. 하지만 꽃분이의 비극은 김정은 시대에 와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몇 년 전 해외 식당을 담당하는 북한 간부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모 식당엔 2년 전 어머니가 돌아간 줄도 모르는 여종업원이 있어요. 해외 파견 직원들에겐 가족이 사망해도 알리지 못하게 돼 있습니다. 충격을 받고 탈북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편지만 종종 오가지만 보위부 요원이 먼저 검열해 민감한 편지는 소각해버립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 아이는 가끔 시내 외출이 허락될 때마다 어머니 선물을 사 모으고 있습니다. 보는 내가 가슴이 터지는데 이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듣는 나도 가슴이 터졌다. 가극 ‘꽃 파는 처녀’에 등장하는 악독한 친일 지주도 이 정도로 천륜을 짓밟진 않았다.
남쪽에는 해외의 북한 식당 여종업원은 북한에서 중상층 이상 집안 딸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요즘 북한 식당 여직원들은 대다수가 가난한 집 딸들 가운데 인물과 예능을 보고 뽑는다. 오히려 잘사는 집은 딸을 해외에 보내지 않는다. 그곳에서 어떤 인권 유린이 일어나는지 이제는 잘 알려졌기 때문이다.
돈을 아끼느라 여러 명이 비좁게 생활하는 숙소는 감옥이나 다름없다. 그곳에서 중국 TV만 볼 수 있을 뿐 인터넷이란 건 꿈도 못 꾼다. 일주일에 아주 잠깐 허락되는 외출은 서로 감시하라며 둘 이상씩 내보낸다.
보위원 등 상급자에 의한 성폭행도 비일비재하다. 중국에 나오려면 보통 2000달러씩 뇌물을 줘야 한다. 돈이 없어 빚을 내 온 여종업원도 많다. 이들에게 송환시킨다고 협박하면 거절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성폭행 사건이 빈발하자 요즘은 보위원에게 가족까지 딸려서 함께 내보낸다. 하지만 그게 대책이 될 순 없는 일이다.
중국에 나온 한 북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해외에 나왔던 여성을 며느리 삼기를 꺼리는 집이 많아요. 외국을 경험한 여성들 역시 북한 같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결혼이란 굴레에 묶이는 걸 끔찍해하죠. 해외 식당 여종업원 중엔 시집가기보단 권력자의 첩이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여성도 많습니다. 권력의 비호 아래 돈 걱정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으니까요. 대다수 북한 식당과 상점 여성 책임자는 어느 권력자의 첩이라고 보면 됩니다.”
지난달 초 북한 식당 직원 13명이 탈북한 뒤 중국 내 북한 식당들엔 이 소식이 빠르게 퍼졌다. 소문에 따르면 여종업원 2명이 먼저 탈출했는데 하필이면 이들이 탔던 차가 교통사고를 냈고 공안 조사 과정에 탈북 기도가 드러났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식당 책임자는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보고가 들어가 소환될 상황이었다. 결국 종업원 13명은 한국으로, 7명은 북으로 돌아가는 운명의 결정을 내렸다.
소문을 전해들은 북한 해외 외화벌이 간부들은 “올 것이 왔다”고 탄식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최근 김정은이 각종 대회와 건설을 수시로 이것저것 다 벌여 놓고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외화벌이 과제를 강요하는 바람에 그들조차 “이러다 나도 탈북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달고 사는 상황이다. 사람이 참고 사는 것도 한계가 있다.
북한은 인민이 착취당하던 낡은 제도를 뒤엎고 새 세상을 세웠다고 자랑해 왔지만 오늘날 북한 인민은 작금의 사회 현실보다 20세기 초반의 착취제도가 차라리 낫다고 푸념한다. 가극 꽃 파는 처녀는 꽃분이가 혁명군이 돼 돌아온 오빠 철룡과 함께 지주를 처단한 뒤 이렇게 선동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천대받는 인민들아 일어나서라. 죄악의 이 세상 뒤집어엎자.”
2016-05-19 컨테이너 귀순 북한 의사의 한국 의사 생활
고인섭 씨는 평안남도 평성의대를 졸업하고 의사생활을 5년 이상 하던 스물아홉 어느 가을 날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에 성공했다. 2년 전 첫 탈북 때 공안에 열흘 만에 검거돼 북송된 뒤 두 번째 시도 끝의 성공이었다.
고 씨가 탈북을 결심한 이유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함이었다. 젊음을 누리고 싶었으나 월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부업으로 농사를 지어 식량을 마련해야 할 정도로 삶은 고단할 뿐 희망도 기대도 없었다.
중국에 도착한 고 씨는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물론 취직한 회사가 부도가 나는 등 적응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중국에 살고 있던 친척의 소개로 한국인이 준비 중이던 마네킹 회사 창업을 혼신을 다해 도왔다.
공장 터를 닦고 기반을 다지기 위해 잠을 아껴가며 하루 20시간씩 일할 정도로 2년간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사장에게 이용만 당했다. 열심히 일해 집을 사고 결혼도 하고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돈도 보내주려던 그의 계획은 어느 것도 이루어 지지 않았다.
“중국 호적을 취득하려면 120만 원 정도의 돈이 필요했어요. 사장님은 해결해주겠다는 빈말만 계속 하고선 일만 시키는 거예요. 회사가 어려울 때면 월급까지 털어 자재 구입을 도와주기도 했고 직원들 관리도 사비를 들여 애써가면서 기다렸지만 헛수고였어요.
형님이 중국에 방문했을 때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 사장님을 보며 깊은 회의감이 들었죠. 빈손으로 형님을 돌려보내는 데 눈물이 흘렀어요. 그때 떠나리라 결심했어요.”
추위가 극심한 소한 무렵 사장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고 씨는 그간 세워둔 치밀한 계획대로 수출용 컨테이너를 통해 한국으로 드라마 같은 탈출을 해냈다. 가족의 피해를 생각해서 한국에 들어갈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으나 당시는 그것만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일반적인 탈북자들의 경로와 다르게 한국에 들어오다 보니 국정원에서도 제 입국 사실을 알 수가 없었죠. 당시에는 몇 년간 열심히 돈을 벌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자고 마음먹었어요. 한국에 들어온 걸 알게 되면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피해가 간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나중에 발각되면 간첩 혐의를 쓰게 돼 위험한 상황이 된다는 걸 알고 나서야 자수를 결심하게 됐죠.”
“땀 흘려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엄청난 희열이었어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단적인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죠.”
의사의 길을 향해 항해를 시작하다
하나원에 들어가 영어를 처음 배우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그는 가슴이 뛰었다. 잠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한 것이 인생의 방향을 돌려세운 계기가 되었다. 고 씨를 곁에서 지켜본 상담사의 조언과 무료 영어강의를 맡았던 변강영 부장의 권유로 의사 고시를 준비하게 된 것이다.
“의사 면허 시험을 준비하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의사 생활을 다시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어요. 의사가 되려면 의대에서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야지 북한에서 배운 걸로는 의사는커녕 간호사도 되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의대를 가보려는 노력을 해봤지만 무조건 수능시험을 봐야 하더라고요. 의대의 장벽이 높다는 걸 알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원에서 도우미 역할을 해주신 상담사께서 안 되더라도 의사 면허시험에 도전해보라고 힘을 불어 넣어주셨죠. 특히 제가 일하던 곳까지 찾아와 제 열정이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손목을 잡아끌어주신 변 부장님은 제 인생의 멘토나 다름 없으세요.”
그렇게 해서 고 씨는 일을 하면서 의사 면허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땀 흘려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엄청난 희열이었어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단적인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죠. 중국에서는 열심히 일하려고 해도 연장이 나빠 오래 못썼어요.
그런데 한국에 오니 연장이 너무 좋더라고요. 아무리 힘든 노가다를 해도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그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말릴 정도로 위험을 무릅쓰고 난간에 매달리거나 뛰어다니다시피 하면서 일했어요. 그때는 일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6개월간 막노동 일을 하고 나머지 6개월을 공부해서 시험을 보는 식으로 각고의 노력 끝에 2년 만에 의사 고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시험 합격의 달콤함은 잠시였고 고난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통일의료사업은 먼 미래에만 국한돼 있는 불확실한 사업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인 사업이다. 여건만 된다면 통일 전이라도 이동식 병원 진출 계획도 세우고 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던 인턴 레지던트 시절을 이겨내다
고 씨의 수련의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병원 시스템을 전혀 모르다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쉬운 게 없었다. 시스템을 이해하고자 컴퓨터 앞에 살다시피 하며 피눈물 나는 시간을 보냈다. 모든 용어가 영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어의 벽도 높기만 했다. 매일 사전을 펴놓고 매 단어와 문장을 번역하고 인터넷을 검색하며 공부했다.
“인턴 레지던트 과정은 말할 수 없이 힘들었어요. 맨땅에 헤딩하기 일쑤였고 정신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니기 바빴어요. 심지어 간호사와도 의사소통이 안 돼 서로 일하기 힘들었죠. 특히 영어 때문에 어려움이 컸어요. 주변 사람들 누구 하나도 믿어주지 않고 인정도 받지 못한 채 바보같이 살았어요. 그만둬야 되나 하는 끊임없는 회의와 반문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인턴 시절에 너무 힘든 나머지 중도에 포기하고 싶었던 고 씨는 ‘한 달만 버티자’고 자신을 다잡았다. 그 한 달을 어렵게 버티고 나면 ‘석 달만 버티자’고 자신을 또다시 채찍질했다. 이렇게 그는 인턴 생활 1년, 2년을 견뎌냈다. 레지던트가 되자 시련은 더욱 커지기만 했다.
“회진하면서 서서 자기 일쑤였고 한 마디로 피곤에 절어 사는 시간의 연속이었어요. 레지던트 3년차 까지는 뭐가 뭔지 전혀 몰랐어요. 그러다 레지던트 3년차 말이 되니까 눈이 떠지더라고요. 환자가 오면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죠.”
그때서부터 주변 사람들이 놀라고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칭찬을 받기까지 말 못할 어려움은 그의 몸에 병이 되어 남아 있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던지 과민성대장증후군이 생겼어요. 스트레스만 받으면 설사가 나는데 아직까지도 고질병으로 남았어요.”
부모와 형제를 북한에 두고 온 그는 지독한 외로움과도 싸워야 했다. 남들처럼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었으나 한국 배우자를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탈북민이라는 남한 사회의 선입견을 떨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러던 중 인턴을 마친 2010년 탈북민 배우자를 만나 둥지를 틀었고 딸아이의 아빠가 되는 행운까지 얻었다.
통일 의료사업으로 큰 봉사하고 싶다
레지던트까지 마치고 난 고 씨는 2015년 3월부터 교수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있다. 간담췌외과 임상강사(펠로우)가 그의 정확한 직함이다.
“4~5년 뒤에 정식 교수가 될 수 있을 지 개원을 할 지 아직은 정해진 게 없어요. 아무나 교수가 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본교 출신이 아니면 어렵기도 하거니와 여러 가지 제약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일은 아니죠. 그동안 살아왔던 것처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다 보면 길이 열릴 거라 믿어요.”
앞으로 그가 하고 싶은 일은 통일 의료사업이다. 앞으로 통일이 이루어지면 북한에 진출할 수 있는 의료 인력을 육성하는 사업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이 사업을 생각하게 된 건 제 주머니 털어 봉사하는 것보다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신념이었어요. 일반적인 봉사를 하기엔 시간도 없거니와 제가 벌어서 봉사할 수 있는 돈도 한정돼 있으니까요.
물론 탈북자 위주로 진행될 거예요. 바로 그 사람들이 북한에 다시 돌아가서 일을 할 사람들일 테니까요. 혼자서 시작해 제가 이 사업의 1인자지만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기고 있어요. 아직은 구체적으로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계획하고 진행되고 있는 사업에 틀림없어요.”
그가 생각하는 통일의료사업은 통일이 되고 난 먼 미래에만 국한돼 있는 불확실한 사업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인 사업이다. 여건만 허락된다면 통일 전이라도 이동식 병원 진출 계획도 세우고 있으며 이는 그가 근무하고 있는 고대 안산병원과도 협의가 된 내용이다.
출처 남북하나재단 ‘동포사랑’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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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글 말미에 광고 두 개를 덧붙입니다. 원래 이런 것은 잘 안하는데, 꼭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용기 내 올립니다.
첫번째는 얼마전 페이스북에 올린 내용입니다. 이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 중엔 감회가 새로운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올린 내용은 이렇습니다.
“방금 단둥에서 탈북 꽃제비(고아)들을 보호해주던 선교사분이 공안에 체포돼 아이들 절반은 체포되고 11~15세 사이 아이 각각 2명씩 4명만 빠져나왔는데, 밤에 갈 데가 없습니다.”
제가 중국에서 이런 긴급한 전화를 받았던 때가 2011년 10월이었습니다. 그때 블로그를 통해 모금을 했는데, 사연을 올리자 불과 몇 시간만에 구출자금의 두 배를 모았습니다. 아이들을 바로 다음날 구출해 한국에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꽃제비 구출을 거기서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비슷한 사례가 계속 전해졌습니다. 한 달 뒤 한겨울 엄동설한 백두산 밀림 속에서 사는 아이들과 그들이 머물고 있는 노숙현장도(아래사진) 받았습니다.
그 아이들을 구출해오라고 당시 제가 장백에 사람 2명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현재까지 탈북자 130명 넘게 구출해 오게 됐고, 이중 30명 이상이 아이들입니다.
한국에 와서도 머물 데가 없는 애들 몇 명은 지금까지 서울에 아파트 잡아 숙식도 해결해줬습니다.그렇게 생명을 구했고, 서울에서 돌봄을 받던 아이들이 이제 성장해 자기 밥벌이하려고 직업을 탐구했고 얼마전 이 사회에 첫 발을 디뎠습니다.
업종은 사무실 에어컨(천정형 포함) 청소와 바닥 전문청소입니다. 현장에서 기술도 익혔고 장비도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에 인맥이 없어서 일자리를 찾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봄엔 여름에 쓸 에어컨 한번 청소하는 것이 어떠실까요.
독자분 중에 사무실 에어컨과 바닥 청소를 이들에게 맡겨주실 분 있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디든 달려가 성심성의껏 잘 해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연락은 010-5663-1615로 해주시면 됩니다.가능하신 분들은 꼭 한번 좀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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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중국에서 저에게 도와달라고 해서 오랫동안 인연을 맺었던 탈북 청년입니다. 여명학교 다닐 때부터 알았는데 이제는 훌쩍 커서 강원도 고성에서 자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해당화를 수익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역시 연줄이 없습니다.
최근 해당화 분양사업을 시작했는데, 아래 홈페이지 들어가보시면 ‘해당화분양사업계획서’가 있습니다.
혹시 해당화차가 궁금하신 분들은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꼭 차를 사지 않아도 아니더라도 강원도 어느 낮선 땅에서 자리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탈북 청년이 있다는 것 그것만 기억해 주셔도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05-26 섹시와 에스라인에 눈뜬 평양의 청춘들
▲2014년 평양에서 열린 제12회 전국조선옷전시회(패션쇼)에 참가한 북한 모델들이 1000여 명의 청중 앞에서 다양한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 출처 아람판 홈페이지
2002년 초여름 어느 날. 나는 경기 안양시에서 백화점을 낀 전철역 앞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원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지 며칠 안 돼 직업도 없을 때였다. 여름옷을 살 참이었는데 무엇을 사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쇼핑 전에 먼저 한국 남성들의 여름 옷차림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창 나이의 총각 눈에 남자들만 보일 리가 있나.
한 시간 정도 ‘관찰’을 마친 뒤 나는 “음, 남남북녀(南男北女)란 말이 맞는 말이네”라고 결론 내렸다. 여성들의 키는 확실히 북한보다 컸지만 바람이 휙 불면 날아갈 정도로 마른 여성이 대다수고 뚱뚱한 여성도 북한보다 훨씬 많았다. 눈이 남한화가 된 지금은 그 마른 몸매가 날씬한 몸매로 보이긴 하지만….
‘역시 남남북녀’란 생각은 그로부터 1년 뒤 서울 강남에 처음 갔을 때 무참히 깨져버렸다. 어슬녘 강남역 앞에서 약속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왜 내 앞엔 미인들만 지나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긴 미인들만 모아놓은 동네인가.”
물론 지금은 강남역에 다시 간다면 “코 세웠네. 턱 깎았네” 하며 어림짐작으로 견적을 때릴 수 있는 정도까진 됐다고 생각한다.
남쪽에서 강연을 다니다 보면 “북한 여성들이 예쁩니까” 하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러면 나는 “아니요. 조선시대는 그랬는지 몰라도 지금은 남남북녀가 아니라 남남남녀의 시대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대를 거치며 자란 북한 아가씨들은 영양 부족으로 평균 키가 작은 데다 땡볕 속에서 수시로 사회 동원을 나가다 보니 피부도 거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랬다 해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최근 북한 여성들의 평균 키는 빠르게 커져 평양의 아가씨들은 160cm가 돼도 작은 키라고 고민한다. 5년 전만 해도 155cm도 중간 키라고 했는데 벌써 그렇게 변했다. 미에 눈을 뜨는 속도는 더 무섭다.
그런 변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분야는 성형시장이다.
북한도 이제는 턱뼈 깎는 고난도의 수술을 제외하고는 웬만한 성형수술은 다 한다. 쌍꺼풀 수술이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이 10년도 채 안 됐는데 이제는 코도 높이고 이마에 필러도 넣는다.
가격도 매우 싸다. 쌍꺼풀은 20달러 정도, 코를 높이는 것은 재질에 따라 30∼50달러에 불과하다. 쌍꺼풀은 은퇴한 의사들이 집에 간단한 수술 도구를 갖춰놓고 도처에서 한다. 코 역시 구강병원에서 할 때도 있고 개인 집에서 하기도 한다.
얼마 전 한 북한 아가씨와 이야기를 하다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요샌 산원(産院)에서 가슴 성형도 한다는 말을 듣고 놀라 “아니, 북한 남자들이 이젠 그런 것까지 따집니까” 했더니 “선생님, 가슴 큰 여자 싫어하는 남자도 있습니까”라고 당당하게 대꾸한다.
북에는 심지어 키를 크게 해주는 수술까지 있다고 한다. 한국도 못 하는 것을 북에서 한다고 하는 것을 보니 돌팔이가 분명하다.
물론 수술의 종류가 다양화되는 것과는 별개로 의사들의 수준은 높지 않다. 재료도 중국에서 싼 것을 수입해 질을 보장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북한에선 “누가 사람이 붐비는 버스를 탔다가 코가 돌아갔다”는 식의 이야기가 자주 나돈다. 코가 돌아가도 손해배상은 상상할 수도 없다.
실력은 있지만 못하는 수술도 있다. 라식 수술이 대표적이다. 몇 년 전까진 평양 통일거리에 있는 안과병원에서 라식 수술을 했다. 2005년 국제라이온스협회가 기증한 병원이다. 한동안 미세각막절삭기라는 특수 수술칼이 없어 당사자가 직접 구입해 가야 했다. 그런데 이 병원의 첨단기계가 고장 난 뒤론 라식 수술을 할 곳이 없어졌다. 시력이 나쁜 여성들이 중국에 나와 제일 받고 싶어 하는 것이 라식 수술이다. 그런데 현지 가격이 1만5000위안(약 270만 원) 정도로 1년 넘게 벌어도 모으기 힘든 큰돈이다. 그래도 북한에서 안경 낀 여성은 너무 인기가 떨어져 외상으로라도 수술대에 오른다고 한다.
그나마 북에서 다이어트는 성형만큼 열풍이 불지는 않는다. 어차피 북에서 살면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 아직까진 살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미에 대한 욕망과 더불어 한국 드라마까지 광범위하게 퍼지다 보니 이젠 평양 젊은이들도 섹시하다느니, 에스라인이니 하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한다고 한다.
몇 년 전 평양 사람이 나보고 ‘파이팅’ 하길래 놀랐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세상이 돼버렸다. 한류가 점점 흘러들어갈수록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애정 표현도 갈수록 과감해진다고 한다.
앞으론 평양에서 “처녀 동무 완전 섹시합니다. 에스라인 죽이네요” 하는 말을 듣게 되더라도 절대 놀랄 일이 아니다.
2016-06-16 분단을 상징하는 최삼숙의 가족사
지난 4월에 중국 절강성 영파, 중국말로 닝보란 도시에서 북한 식당 종업원 13명이 한꺼번에 한국에 온 사실은 이미 잘 아실 겁니다.
13명 중 한 명은 책임자격인 남자고 한 명은 38살 여성이고, 나머지 11명은 20대 초중반 처녀들입니다.
사진들을 보니 남쪽에 와서도 별로 걱정할 필요 없이 알아서 잘 살 것 같아 보이는 똑똑해 보이고 아름다운 처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38살 된 여성은 나이가 10살 넘게 많아 아마 여자 지배인 아닐까 싶은데, 알고 봤더니 그가 최삼숙의 딸이랍니다.
최삼숙이 누군지는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1970년대 그리고 80년대엔 티비만 틀면 최삼숙의 노래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최고 여가수에 인민배우의 딸이 왜 왔을까요.
저는 알 것 같습니다. 북에서 잘 나가는 부모를 두고 있다 탈북한 청년들을 많이 만나봤는데 이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탈북 동기는 답답해서였습니다.
해외에 나와서 자유를 체험하다가 북한에 한 번씩 들어갈 때마다 생활총화 한다고, 사상 검토한다고 시달리고 나면 환멸이 느껴진답니다.
거기에 젊은 김정은이 올라선 뒤로 “내가 평생 이런 꼴을 당하고 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아득하답니다. 그래서 온다는 겁니다.
아무리 자유가 그리워도 어떻게 가족을 버리고 갈 수 있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오고 싶어도 못 오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안 그럼 아마 해외에 나온 사람 중에 도망치지 않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 중 용기를 내서 온 젊은이들을 보면 “부모 일생은 부모 일생이고, 나는 내 삶을 살아야겠다. 이렇게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주관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아마 최삼숙의 딸 리은경도 그렇게 생각했겠죠. 그리고 엄마가 모든 인민이 다 아는 인민배우인데 설마 정치범수용소에 보내진 않겠지 이런 생각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리은경에겐 믿는 구석도 있을 겁니다. 바로 어머니의 두 언니, 즉 이모가 한 명은 프랑스에, 한명은 한국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탈북하기 전에 이모들과 연락을 했을지도 모르고, 이모들이 오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최삼숙의 가정은 우리 민족의 가슴 아픈 분단사를 잘 대표하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최삼숙은 한국에서 너무 유명한 가수 남인수의 조카입니다. 남인수는 분단되기 전인 1945년 이전엔 남북을 통틀어서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미성을 지닌 가수로 추앙받았습니다.
분단된 이후에도 남쪽에서 가요 황제로 불렸고 1962년 사망할 때 한국 가수협회장을 지냈으며, 평생 1000곡이 넘는 노래를 남겼습니다.
여러분들도 너무 잘 아는 ‘낙화유수’ ‘애수의 소야곡’ 등이 바로 남인수가 부른 대표곡입니다. 남인수의 본명은 최창수인데, 그의 형제인 최창도의 딸이 바로 최삼숙입니다.
최삼숙의 어머니인 김봉점은 해방 후 서울에서 반미활동을 하다가 검거될 위기에 처하자 1948년에 3살, 1살 된 딸을 남기고 북으로 갔습니다.
1950년 전쟁 때 김봉점은 서울로 들어와 딸들을 만났는데, 후퇴하면서 38선 부근에서 낳은 딸이 최삼숙이라고 합니다. 이후 최삼숙에겐 최명원이란 남동생도 생겼죠.
최삼숙은 과거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을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는지 모른다. 운명하는 순간에도 ‘남녘에 있는 자식들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한스럽다’고 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최삼숙은 커서 평양방직공장 방직공이 됐는데 공장예술소조에서 활동 가야금병창으로 전국노동자예술축전에서 1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영화음악단 성악배우로 뽑혔는데 1971년 김정일이 ‘꽃파는 처녀’를 만들면서 주제가를 부르게 했습니다.
영화 ‘금희와 은희의 운명’에선 ‘아버지의 축복’을 불렀고, ‘열네번째 겨울’, ‘곡절 많은 운명’, ‘도라지꽃’ 등 3000여 곡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정말 이 집안은 참 대단한 집안입니다. 삼촌은 해방 전 민족을 대표하는 가요황제, 조카는 북한 최고 여가수입니다. 분단되지 않았다면 최삼숙 가정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금희와 은희의 운명이 최삼숙을 줄거리로 삼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최삼숙도 “갈수록 커가는 행복 속에 웃다가도 남녘의 언니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최삼숙은 집에서도 프랑스와 한국에 사는 얼굴도 보지 못한 언니들 이야기를 자주 했을 겁니다. 중국에 파견된 딸에게 몰래 연락을 해보라고 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덜컥 딸이 남쪽에 갔다니 어머니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아마 가슴이 찢어지겠죠. 잘 살길 바라면서도 다신 딸을 보지 못하는 그 어미의 마음은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최삼숙을 분단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두 언니를 남쪽에 두고 평생 그리워하며 살아야하는데, 오늘날 또 딸까지 남쪽에 갔으니 이제 딸까지 그리워해야 합니다.
리은경도 38살이니 북에서 시집을 가서 자식이 있을 가능성도 있죠. 그러면 그 역시 어머니 운명을 그대로 답습해 평생 이산가족으로 북에 남겨둔 혈육을 그리워하면서 눈물로 살아야겠죠.
분단 70년에 아직도 이런 이산의 아픔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들에겐 통일이 정말 뼈가 사무치게 손꼽아 기다려지는 일일 겁니다.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어쨌든 리은경은 자발적인 이산가족이 됐고, 서울에서 살게 됐습니다. 집안의 유전이라면 그녀도 노래를 잘 부를지 모르겠습니다.
노래만 잘 한다면 남인수의 조카 손녀에 최삼숙의 딸이란 그 이름만 갖고도 여기서 성공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꼭 성공해서 나중에 어머니 최삼숙까지 탈북시켜 서울에 데리고 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이 글은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전해지는 내용으로 2016년 6월 10일 방송분입니다.
남한 독자들이 아닌 북한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한 글임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2016-06-21 북한은 환경오염이 없어 깨끗하다는 착각
오늘은 2주 전에 시작했던 북한의 환경오염 이야기를 마저 할까 합니다. 사실 환경이란 것은 먹고 사는 게 해결돼야 신경을 쓰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당장 입에 들어갈 게 없는데 공기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남쪽도 옛날에 그랬고 지금 다른 나라들도 다 마찬가지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경제가 발전돼 부유해지니 이제는 삶의 질을 따지게 되는 겁니다. 환경이 오염돼 있으면 그때서야 이걸 수정한다고 부산을 피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미 다 오염돼 있는 것을 나중에 다시 되돌려놓으려면 정말 돈이 열 배는 더 듭니다.
서울도 요즘 미세먼지를 감축하기 위해 1년 안에 디젤버스 1,700대를 모두 친환경 연료인 압축천연가스 버스로 바꾸려 합니다. 이때 들어가는 예산만 2억 달러쯤 됩니다.
그 큰돈을 선뜻 멀쩡한 디젤버스를 폐기하는데 쓰려는 것을 보면 남쪽도 환경 의식이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지금 세계 인구의 80%가 서울처럼 도시에 몰려 살고, 엄청난 차들이 돌아다니면서 매연을 내뿜습니다.
특히 휘발유차보단 디젤차가 내뿜는 질소산화물은 1급 발암 물질이고 또 뇌졸중, 심장병, 폐암, 급성 호흡기 질환과 같은 다른 질병도 초래합니다.
그래도 남쪽엔 시꺼먼 연기를 풀풀 내뿜는 디젤차가 거의 없고, 차들에 대개 신형 엔진이 장착돼 있어 나름 신경을 많이 쓴 것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북에선 화물차 대다수가 까만 그슬음(그을음)을 마구 내뿜고 달리는데 그걸 신경 쓰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환경 의식이 그러니까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오래 살 수가 없고, 공기를 깨끗하게 하려는 노력도 안 하는 것이죠.
세계에서 대기오염으로 인한 사망자는 연평균 300만 명 이상인데 에이즈 사망자보다 훨씬 많습니다.
세계보건기구가 지난달 세계 103개국 3,000개 도시를 측정해서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농도를 분석해 자료를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초미세먼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데 호흡을 통해 사람 폐에 들어가 쌓이면 빠지지도 않고 치명적입니다.
그런데 제가 놀란 것이 잘 사는 나라들은 차도 많고 하니까 공기가 엄청 안 좋을 것 같았는데 전혀 반대였다는 것입니다.
유럽과 미국, 한국과 일본이 속한 서태평양 고소득 국가들의 대기오염보다 중동이나 아시아 가난한 국가들의 대기오염이 훨씬 더 심각합니다.
중저소득 국가의 도시 98%가 세계보건기구가 정한 기준치에 미달했으나, 고소득 국가에서는 이 비율이 56%로 뚝 떨어졌습니다.
초미세먼지 오염이 가장 심각한 30개 도시 중 절반 이상인 16곳이 인도 도시였고, 중국도 5개 도시가 올랐습니다.
대기오염이 제일 심각한 도시는 나이지리아 동부의 항구도시 오니차라는 곳인데, 여기 미세먼지 농도는 수치는 서울보다 15배쯤 나빴습니다.
서울 공기도 제가 불만이 많은데, 그 도시에선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나이지리아 도시가 발전하면 얼마나 발전했겠습니까.
그러니 북한 도시 주민들이 우린 공장 돌아가는 것도 없으니 자본주의 나라보다 깨끗할 것이야 하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란 겁니다. 공장이 없어도 대기 오염은 심각합니다.
제가 살던 때의 기억을 돌아보니 아침저녁마다 도시는 집집마다 때는 석탄 연기에 파묻혔습니다. 그 연기가 얼마나 건강에 나쁜지 아시면 놀라실 겁니다.
북한 도시들을 통과하는 강은 화장실 오물이 그대로 방치돼 강이라기 보단 걸쭉한 죽 같은데 코를 싸매지 않고선 다가갈 수 없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암모니아와 같은 물질이 건강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모르실겁니다.
공장이 가동되지 않아도 북한의 환경오염은 몇 천 만대의 차가 돌아다니는 한국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남쪽은 산에 나무가 울창해서 오염공기를 정화라도 시키지 북한 민둥산은 그런 기능도 못합니다.
북한은 오염물질을 정제하는 시설이 없어 대부분 다 소각해버립니다. 국내 소각도 문제지만 1990년대 초반 프랑스에서 쓰레기들을 가져다 불태워버린 것을 생각하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프랑스에서 산업 쓰레기를 페기해주기로 하고 가져다 태웠는데, 폐비닐 태우는 냄새는 도시를 진동했죠. 굴뚝들에서 비닐이 탄 새까만 매연 알갱이들은 온 도시에 내려앉아 길거리를 걸어가면 머리와 어깨에 시꺼먼 그을음이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인간의 건강에 치명적인 죽음의 연기였음을 나중에 서울에 와서 알고 나선 이가 갈렸습니다. 아프리카 후진국도 그런 짓은 안합니다.
그때 김정일이가 쓰레기 처리 대가로 톤당 200~300달러씩 받아 자기 주머니에 넣고, 인민들에겐 죽음의 공기를 선물했던 것입니다.
프랑스 쓰레기만 들여간 것이 아니라 1990년부터 일본에선 알미늄을 생산하고 남은 찌끼(찌꺼기)인 ‘알미늄잔회’라는 공해물질만 5만1,000톤이나 들여갔고 폐타이어도 150만개 이상 들여갔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평균 수명이 한국보다 10살 이상 짧은 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의료수준도 낮고 먹지 못하는 것도 이유이긴 하지만 이렇게 베이징보다 훨씬 더 나쁜 공기질도 수명을 단축시키는 중요한 원인입니다.
그런 환경오염을 김정일이 앞장서 막기는커녕 북한을 쓰레기 하차장으로 만들고 저만 돈을 벌어 스위스 비밀계좌에 수십 억 달러나 감춰놓은 거죠.
2009년엔 중국의 산업물 쓰레기가 북에 어떻게 유입되는지를 밝히고 이에 대책을 촉구하는 편지를 당에 보냈던 함흥화학공대 토질조사 연구소를 강제해산시키고 소속 간부들과 연구원을 전부 숙청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튼 김씨네 일가가 인민에게 지은 죄를 꼽으면 입이 아플 정도입니다. 그 죄과 중에는 북한을 삼천리금수강산이라 선전해놓고는 사실상 삼천리 쓰레기통으로 만든 것도 반드시 포함해 나중에 계산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이 글은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전해지는 내용으로 2016년 6월 17일 방송분입니다.
남한 독자들이 아닌 북한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한 글임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2016-07-04 정부청사로 근무지를 새로 옮겨가며
제가 기자 생활을 하면서 늘 바쁘게 살긴 하지만 이번 주는 특히 정신이 없이 보냈던 것 같습니다.
우선 제가 이번 주엔 국제부에서 정치부로 옮겼습니다. 기자는 부서를 옮기면 회사를 옮기는 것과 같은 큰 변화를 겪는다고 합니다.
그 말도 맞는 것이 사회부 나가서 경찰서를 대상으로 취재하다가 정치부에 가면 정치인들을 취재해야 하고, 경제부를 가면 회사들을 취재해야 합니다. 담당 영역이 달라지면 다 새로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생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정치부에서 외교안보팀에 소속됐습니다. 제 주업무는 통일부 취재인데, 외교안보팀의 소속원인 까닭에 외교부에도 나가야 하고, 국방부에도 나갈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국정원도 제가 담당합니다.
제가 이런 일을 담당하는 것을 보면 한국 사회가 참 괜찮은 사회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북한으로 치면 한국에서 의거입북한 사람이 노동신문사 기자가 돼서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조평통 담당 기자가 되고, 국가안전보위부 본부의 잘못된 일도 캐내서 쓰는 셈입니다. 이게 과연 북한에서 가능한 일일까요.
재일동포 출신도 믿지 못해 당 일꾼도 안 시키고, 보위부나 보안서에도 입대 시키지 않는 북한이 한국 출신을 어떻게 믿고 대남기관과 보위부 핵심 본부 취재를 맡기겠습니까. 북한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남쪽에 온 제가 하는 것입니다.
통일부 담당이라 이번 주부터 출근도 정부종합청사 통일부 기자실로 하게 됐습니다. 거기 가서 오랜만에 북한 사이트들을 둘러보는데, 기분 나쁜 영상이 하나 올라있더군요.
북한이 한국의 청와대와 정부 기관을 폭파시킨다면서 올려놓은 영상인데, 그 중에는 제가 일하는 정부종합청사를 폭파하는 것을 가상해 만든 합성화면도 있었습니다.
그러데 하필 폭탄이 터지는 위치가 제가 일하는 기자실 그 층이더라고요. 그만큼 제가 북한의 위협을 받는 곳에서 일한다는 뜻이겠죠. 통일부 출입기자를 하게 되면 일은 참 많아집니다.
제가 이번 주에 국제부에서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는 투표를 하는 바람에 그걸 막느라 새벽까지 정신없었는데, 정치부로 옮겨오자마자 이번엔 김정은이 국무위원장 됐다고 하는 바람에 기사를 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또 1박 2일로 김포에 가서 해병대 취재까지 했습니다. 해병대에 간 이유는 탈북대학생 20명이 최초로 해병대 체험을 하려 갔기 때문입니다.
해병대라면 북한으로 치면 해상육전대라고 할 수 있는 특수부대입니다. 탈북 대학생들이 이곳 군대 생활이 궁금하다고 하니 해병대에서 자기들의 부대에 불러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저도 따라가서 해병대 군복을 입고 취재를 했습니다. 참가자들은 계곡을 밧줄 하나에 의지해서 건너가는 훈련, 높은 곳에서 밧줄을 타고 뛰어내리는 훈련, 보트를 타고 이동하는 훈련, 갯벌을 기어가는 훈련 등을 받습니다.
저는 취재기자라 같이 하지 않았지만 그 고난도의 훈련을 땡볕 속에서 열심히 수행하는 탈북 청년들을 보면서 저런 정신으로 이 땅에서 잘 살길 기원했습니다.
유독 날쌔고, 동작도 정확한 청년이 있어 어떻게 잘하냐고 물어봤더니 이 청년이 북한군에서 3년 정도 복하고 온 경험이 있더라고요.
그 청년에게 북한군과 한국군의 차이가 뭔지 물어봤다니 너무 간단하게 대답해 제가 같이 웃었습니다.
“한국군은 이렇게 힘든 훈련을 해도 밥이라도 꽝꽝 먹여주는데, 북한군은 밥도 안주고 훈련시킨다”는 것입니다. 정말 간단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대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사람이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일입니다.
뭘 시키던지 배불리 먹여주는 것은 정말 기본에 기본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바로 북한이 그걸 못하고 있는 것이죠.
명색이 국가인데 배급도 안주고, 오로지 신경 쓴다는 것은 어떻게 인민들을 뜯어가나 그런 생각뿐입니다. 먹여도 안주고, 뜯어만 가겠다니 그게 날강도지 다른 것이 날강도입니까.
김정은이 욕심이 많아 온갖 최고 직함을 다 뒤집어썼다고 칩시다. 뭐 이번에 보니 최고재판소, 최고검찰소에서 최고란 이름을 다 뜯어내고, 내각도 헌법에서 최고주권의 집행기관이란 표현에서 최고를 빼고 국가주권의 집행기관이라고 서술했습니다.
최고란 수식어까지 자기가 다 가지겠다는 심보입니다. 좋습니다. 북한이 제 것이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칩시다.
문제는 사람이 양심이 있다면 명예만 가지겠다고 하지 말고 최고에 걸맞는 일을 해야죠. 실제로 하는 일은 전 세계적으로 최악의 짓만 돌아가면서 합니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릅니다. 점점 얼굴에 철판을 까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최고인민회의 때 김정은이 조는 장면이 5초 동안이나 나왔습니다. 현영철은 졸았다고 불경스럽다면서 총살시키고, 자기는 회의 시간에 졸고 있으니 이게 염치를 알면 이러겠습니까.
요즘 북한에서 금연하라면서 사람들 들볶는데, 김정은은 현지지도 나가서 줄담배를 피웁니다. 김정일도 옛날에 자기는 담배 끊고 남들보고 끊으라고 했는데, 김정은은 그런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역대 최고로 염치도 모르고 체면도 모르는 인간에게 제가 인민들 배불리 먹여주라고 말하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이제 저는 통일부 와서 저런 김정은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야 하는데, 앞으로 저런 모습 계속 보다 보면 제풀에 화가 나서 제명에 못살 것 같기도 합니다.
통일부 와 있는 것이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이지, 이제 며칠 밖에 되지 않아 잘 감이 서지 않는데, 아무쪼록 여러분들의 심정에서 좋은 기사를 더 많이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2016-07-07 북한 매춘과 마약의 충격 실태
▲북한 나진선봉시의 한 노래방. 넓은 곳에서 음주를 즐길 수 있게 돼 있다. 출처: 중국 관광객 블로그
이 글은 북한의 가장 어두침침한 곳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방인들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고 오직 현지인들만 알 수 있는 북한의 그 어두운 곳에선 매춘과 마약이 일상화돼 있다. 북한에 대한 이미지가 평양에만 한정된 사람들에겐 어쩌면 충격적일 수도 있다.
지난해 여름 북한 제2의 도시 함북 청진을 떠나 탈북한 A 씨는 그곳의 매춘 실태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오후 10시가 넘어 수남시장에서 도립극장까지 중심도로 옆 작은 2차로를 걸어오다 보면 어둠 속에 여성들이 쭉 늘어서 있습니다. 모두 몸 팔러 나온 여성들이죠. 10리(약 4km) 넘는 구간에 이런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셀 수 없이 많아요. 가격은 인물과 나이에 따라 결정됩니다. 일반적으로 중국돈 50위안(약 8700원)인데 40대 이상이면 30위안, 고운 처녀는 100위안을 받기도 합니다. 흥정이 이뤄지면 인근 가정집에 들어갑니다. 장소를 빌려주고 세를 받는 집도 많습니다. 남자가 기분 내키면 술과 안주를 사와 함께 먹기도 합니다. 콘돔 그런 건 없습니다. 북한 남자들 아직 그걸 모릅니다. 여성이 피임수술을 할 뿐이죠. 검사를 잘 안 하니까 매독 같은 성병이 정말 많이 퍼져 있습니다.”
중국돈 50위안이면 한 명이 한 달 먹고살 식량을 구입할 수 있는 꽤 큰돈이다. 여성들은 이 돈을 받아 집세를 내고, 수시로 단속한다며 접근하는 보안원(경찰)에게 뇌물도 준다.
매춘은 거리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요즘 북한엔 ‘카라오케이’라고 불리는 노래방이 많아지고 있다. 2000년대 중반 번창하다가 단속 때문에 위축됐는데 요즘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 이곳에서 노래만 부르면 1시간에 중국돈 3위안이다. 그런데 ‘가수’라고 불리는 여성을 부르면 시간당 4위안이 추가된다. 노래방 도우미인 셈이다.
“매춘하는 여자들은 대개 마약을 하고 나옵니다. 얼음이라고 부르는 마약(필로폰)은 1g에 50위안 정도인데 이 정도면 10번 넘게 흡입할 수 있습니다. 마약을 해야 밤에 자지 않고 버틸 수 있을 뿐 아니라 낯선 남자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잊는다고 하더군요.”
북한에서 필로폰(히로뽕)은 과거 함흥 지역에서 만들어졌지만 제조기술이 이젠 청진 등 다른 도시들에도 퍼졌다. 아주 작은 필로폰 덩이를 은박지에 올려놓고 아래에 불을 붙이면 수은과 흡사한 액체로 변해 돌돌 구르면서 연기를 내뿜는데, 이걸 빨대로 흡입한다. 김일성 얼굴이 들어간 빳빳한 북한 지폐를 돌돌 말면 빨대로는 제격이라고 한다.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마약은 보통 중산층 이상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런데 얼음의 중독성은 생각보다 낮은 것 같다. A 씨도 북에선 오랫동안 필로폰을 흡입했지만 한국에 오니 그게 없어도 아무 영향이 없다고 했다. 그는 담배보다 훨씬 끊기 쉽다고 말했다. 실제로 내가 만난 최근 탈북자 중에 북에서 얼음을 해봤다는 사람이 꽤 있지만 이들 중 중독 때문에 남쪽에서 고생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얼음은 의외로 여성들이 더 많이 합니다. 돈을 버는 사람이 주로 여성이다 보니 가정 경제권이 여성에게 완전히 넘어갔기 때문이죠. 청진에는 여자를 도와 밥을 해주고 애를 보는 남자들이 절반은 될 겁니다.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사라졌는데 장마당에서 장사를 하려면 아줌마들이 더 잘하지…. 남자들이 낄 곳이 없습니다. 남자들은 아내가 장사할 때 짐을 날라 주고, 보호해 주고 그런 역할만 있어도 다행인 거죠.”
20년 전에 비해 완전히 달라진 풍경이다. 북한에는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오랫동안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6·25전쟁을 겪은 뒤 남자가 귀해지면서 여자가 절대복종하게 됐다는 설도 있다.
청진이 있는 함경도 지역은 남성우월주의가 특히 강한 곳이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만 해도 남자들은 돈도 못 벌면서 아내에게 큰소리를 치고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가정에서 큰소리치는 남성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이 글은 A 씨의 증언에 기초해 쓰는 것이지만, 다른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신의주나 원산 등 북한의 다른 주요 도시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남쪽 사람들에게 북한의 이미지가 대개 평양에 한정돼 있는 것은 이방인들이 가서 사진 찍을 수 있는 곳은 주로 그곳뿐이고 방문 시기조차 대개 특별행사 기간으로 한정됐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평양 시민들은 태어나서부터 거대한 세트장에서 사는 것이 적합하도록 군인처럼 질서정연하게 훈련돼 있다는 사실은 안다. 그러나 그런 평양도 가로등이 꺼지고, 도시가 어둠에 묻히면 많은 집에서 마약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고, 매춘하는 여성들이 거리를 유령처럼 떠돈다는 것은 잘 모른다. 오늘밤도 그럴 것이다.
2016-07-09 “해병대 훈련도 맵네요… 北은 굶기면서 내모니까 더 죽을 맛”
탈북 대학생들 특별한 軍 극기훈련 체험기
▲해병대 병영 체험에 참가한 탈북 대학생들이 지난달 28일 경기 김포시 해병대 2사단 연병장에서 PT체조를 하고 있다. 김포=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팔각모 얼룩무늬 귀신 잡는 사나이
불타는 적진 향해 우리는 간다
내 겨레 이 평등 함께 지키며
적진을 뚫고 간다 우리는 해병….”
지난달 말, 땡볕이 쏟아지는 경기 김포시 해병대 2사단 병영에 우렁찬 해병대 군가가 울려 퍼졌다. 병영에서 군가를 부르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이날 해병대 군복을 입고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남달랐다. 바로 북한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 탈북 대학생들이었다. 이곳에서 산을 하나 넘고 강을 하나 건너면 바로 북한 땅이다.
탈북 대학생들이 단체로 군 병영을 체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이 김포 해병대 2사단과 공동으로 2박 3일간 남북 대학생들이 함께 어울리는 해병대 극기훈련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한 것이다. 올해 참가자 35명 중 14명이 탈북민이었다. 14명 중 9명이 여성이었고, 9명 중 3명은 중년의 주부였다.
탈북민들이 해병대를 찾은 사연은 다양했다.
“한국에 온 지 3년 됐어요. 대학에 다니면서 제가 너무 나태해진 것 같아요. 정신력을 다시 가다듬기 위해 지원했습니다.” 경기 부천시 가톨릭대에 다니는 한영실(가명·22) 씨의 참가 동기는 나태함에서의 탈출이었다.
부산가톨릭대에 다니는 38세 탈북여성 조민옥(가명) 씨는 아들 사랑의 사연을 담았다.
“저는 한국에 와서 여기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아들이 둘입니다. 지금 큰애가 중1인데 꼭 직업군인으로 키우고 싶어요. 둘째는 여섯 살이라 아직 어리지만 둘째에게도 직업군인이 되라고 할 겁니다. 마침 저 같은 아줌마 대학생도 해병대를 체험하게 해준다고 해서 왔습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기 전에 제가 먼저 체험해 봐야겠어요.”
캠프에서 가장 열의를 불태우는 사람들도 바로 탈북 주부 대학생들이었다.
“평안북도의 한 탄광마을에서 살았는데, 북한에선 20∼30kg 배낭을 메고 달리는 차에 매달렸어요. 이 정도야….” 최고령인 영동대 안선영(가명·41) 씨는 해병대 훈련에 대해 자신감을 나타냈다.
“전 탈북하다가 북송돼 감옥에 두 번이나 갔었어요. 아무리 해병대라고 해도 북한 교화소보다 더할까요.”(조민옥 씨)
▲탈북 대학생들이 진흙탕을 기어가는 훈련을 받으며 힘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운동장에서 진땀을 흠뻑 흘리며 해병대 PT체조를 했다. 해병대 캠프 입소 신고식을 호되게 치른 이들에게 진짜 고비는 둘째 날이었다. 아침 일찍 래펠 훈련과정을 끝낸 이들은 곧바로 산에 올라 유격훈련을 시작했다. 절벽 사이에 걸린 외줄, 두 줄, 세 줄 밧줄을 잡고 차례로 건너가야 했다. 점심을 먹은 뒤엔 군용차에 탑승해 해병대 체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고무보트훈련(IBS)에 나섰다. 6명씩 조를 나누어 120kg짜리 고무보트를 수십 차례 들어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다시 갯벌을 포복으로 한참을 기어 다닌 끝에야 간신히 보트를 탈 수 있었다. 해병대 체험을 하는 누구라도 겪는 과정이다.
하루 종일 해병대 남녀 교관들의 불호령 속에 온 힘을 다 쏟아낸 탈북 대학생들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병영에 돌아왔다. 어둠이 깔리자 캠프파이어 시간이 다가왔다.
이깟 해병대쯤이야 하던 탈북 대학생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했을까.
“저는 차라리 50kg을 메고 가라면 더 쉽겠어요. 갯벌을 기려고 하니 뻘이 나를 그러안고 놓지 않아요. 뻘이 제일 무서웠어요.”(조민옥 씨)
“저도 북에서 비 오는 날 전기 철조망 밑을 쌀 배낭 메고 기어 건넌 적이 있어요. 이거 못 가면 네가 총에 맞아 죽는다, 이러면 할 수 있겠는데 지금은 안 되네요.”(안선영 씨)
“제가 북에서 이래 봬도 100kg 마대를 메고 날랐던 여자예요. 못 믿겠다고요. 정말이에요. 요령을 알면 해요. 그런데 해병대 PT체조는 정말 힘들어요. 이것만 없다면 또 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한영실 씨)
이날 교육을 지켜봤던 해병대 2사단 8연대장 이재욱 대령은 “남쪽 학생들보다 탈북 대학생들이 더 적극적으로 임했고, 훈련을 받을수록 참가자들의 표정이 많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한 탈북 대학생이 외줄을 타고 건너는 유격훈련을 하고 있다.
캠프파이어 시간에 조재현 유격교육대 교관이 “오늘 하루 종일 엄마를 그렇게 찾은 교육생”이라고 호출하자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미소를 지으며 명지전문대 뮤지컬학과에 재학 중인 강나라 씨(19)를 지목했다. 북한에서 예술전문학교를 다니며 성악을 전공하던 그는 2년 전 엄마를 찾아 북한을 떠나 한 달도 안 돼 한국에 왔다. 채널A 인기 프로그램인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를 통해 방송 출연도 했다. 그의 어머니 역시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한 정통 무용수이고 한국에 와서 탈북 무용단을 만들었다.
▲탈북 대학생 강나라 씨가 셋째 날 해병대 기초훈련과정 수료증을 받은 뒤 활짝 웃고 있다.
강 씨는 “작년에 대안학교에 있을 때 특전사 체험 캠프도 갔었는데, 그땐 한 코스도 제대로 못했지만 올해는 래펠과 유격훈련을 제대로 받았다”며 “죽도록 힘들었지만 나도 할 수 있다는 정신을 느꼈다”고 말했다.
모두가 힘들어했던 것은 아니다. 건국대에 재학 중인 이청송(가명·27) 씨는 모든 훈련 과정을 유난히 어렵지 않게 소화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심지어 이 대령으로부터 “PT체조 자세를 보면 프로급”이라는 칭찬까지 받았다. 알고 보니 그는 북한군 포병부대에서 통신병으로 2년 반을 복무하고 탈북한 청년이었다.
북한군 출신에게 한국 해병대 훈련은 어떻게 느껴졌을까. 저녁 식사 시간에 물었더니 그가 씩 웃으며 대답한다.
“쉽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 군대는 아무리 어려운 훈련을 해도 일단 밥은 먹여주지 않습니까. 북한군은 먹여 주지도 않고 내모니까 죽을 맛인 겁니다.”
이 씨는 한국에 온 뒤 직업군인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나이 때문에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다. 27세가 넘은 나이로는 직업군인으로 시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간접적으로나마 군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이번 캠프에서 탈북 대학생들과 함께 참가한 한국 대학생들은 20세 전후로 대개 대학 군사 관련 학과에 재학하고 있다. 한국관광대 군사과 2학년인 백현정 씨는 “처음에 올 때 북한 사람들과 어떻게 친해질지 걱정했는데 와서 군복을 입고 보니 누가 북한 사람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며 “그래도 힘든 훈련을 같이 하며 여러 북한 친구를 사귀어 좋았다”고 말했다.
남북하나재단은 “이번 프로그램의 목표는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남북 대학생들이 극한 상황 체험과 민주시민 교육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어려운 상황을 함께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기르고 소통, 화합하게 하려는 데 있다”고 밝혔다. 둘째 날 격려차 현장을 찾은 손광주 남북하나재단 이사장은 “군 체험은 국가 안보를 현장에서 체험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며 이런 훈련을 마치면 국가 안보관이 관념에서 현실로 옮겨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군에 입대하는 탈북 청년은 거의 없다는 점이 아쉬운 대목이다. 20세가 넘어 입국한 남성은 탈북자라는 게 쉽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를 꺼려 군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 통일부에 따르면 3월 현재 한국에 입국한 전체 탈북민은 2만9137명이고 20세 미만 남성 탈북자는 2155명이다. 이 중 올해 2월에야 공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한 탈북자 1호 군 복무자가 나왔다.
탈북 청년들이 군에 입대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과거엔 군인으로 전투에 나섰을 때 가족과 친구가 있는 북한군을 향해 총을 겨눌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보안 문제 등으로 탈북민의 입대가 차단됐다. 하지만 2010년 1월에 개정된 병역법 64조 1항 2호는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에서 이주하여 온 사람은 원할 경우 병역을 면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탈북민도 입대를 원한다면 언제든지 입대가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탈북 청년들이 군에 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남쪽에서 태어나도 적응하기 힘든데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살다 온 탈북민이 편견 없이 군대 문화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올해 전역한 1호 군 복무 탈북민은 부대 직속 상관만 유일하게 그가 탈북민인 것을 알고 있었다. 10세부터 한국에서 학교를 다녀 동료들조차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정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군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탈북 청년들도 있다. 남북하나재단 관계자는 “탈북 청년들은 입국 직후 하나원에서 정착교육을 받을 때 병역 면제 신청서를 받고 별다른 생각 없이 사인을 하는데, 이후엔 이를 되돌릴 수 없다”고 말했다.
대량 탈북이 시작된 지 20년이 넘었다. 탈북민들은 이미 한국 사회의 다양한 직종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넘기 힘든 벽도 있다. 경찰이 된 탈북민은 한 명도 없다. 정규 대학을 나와 정식 교사가 된 탈북자는 올해 처음 나왔다. 학부모들이 탈북민에겐 자녀를 맡기려 하지 않아 그는 극도로 신분 노출을 꺼린다. 군도 여전히 탈북민이 넘기 어려운 높은 장벽의 하나로 보인다.
2016-07-14 김정은에게 무시당하는 북한 군부
이번 최고인민회의 직후에 인민무력부가 인민무력성으로 명칭을 변경했더군요. 그런데 이런 중요한 일을 인민들에게 알리지도 않아 제가 참 의아했습니다.
저는 그런 사실을 북한 중앙TV가 2일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김정은의 국무위원장 추대 평양시 군민경축대회 녹화 중계를 보고 알았습니다.
거기서 박영식 인민무력부장을 ‘인민무력상’으로 호칭하더군요. 아마 지방은 정전 속에 사는데다, 신문도 못 보니 인민무력부가 인민무력성이 된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노동신문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국가기관으로 승격됐다고 크게 실으면서도 인민무력부가 명칭이 변경됐단 사실은 한 줄도 공지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엔 이런 내용이 다 신문에 공지문으로 발표됐는데, 이젠 군부가 아예 무시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원래 인민무력부,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이렇게 군, 비밀경찰, 경찰 조직은 체제 유지의 핵심 조직이라고 부로 승격시켰었습니다.
아무래도 내각 산하인 성보다야 훨씬 위상이 높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젠 인민무력성이 됐으니 군부도 내각 산하로 들어간 것일까요.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서 군부 위상이 말이 아니네요. 가만 살펴보십시오. 야전군인들은 대접을 못 받고 있지요.
북한군 지휘구성을 보십시오. 최고사령관은 군대에 가보지도 않은 김정은이고, 그 밑은 노동당 조직지도부 군 담당 부부장이던 황병서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황병서는 당일꾼이지 군인은 아닙니다.
지금 무력상인 박영식도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출신으로 사실상 황병서의 심복인 정치군인입니다.
반면 총참모장인 리명수는 무려 여든 셋입니다. 여든세살이면 걸음도 걷기 힘든데 군인이라니요. 그야말로 총참모장을 형식으로 박아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북한군은 전쟁하려 존재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황병서야 총정치국장이니 정치국 일을 하면 되지만 간부 사업하던 박영식이 전쟁이 나면 군단들을 제대로 운영하겠습니까.
리명수는 작전을 제대로 짤 수 있을까요. 중국은 나이가 70살이 넘으면 간부에서 물러납니다. 그래서 중국 지도부의 나이는 70살 아래인데, 이건 등소평이 나이 들어 간부를 하면 총기가 흐려진다고 해서 만든 전통인데 지금까지 잘 지켜집니다.
80살이 넘은 리명수가 용감하고 과감한 작전을 짤 수 있다고 저는 믿지 않습니다. 일선 부대를 한번 시찰하면 며칠 앓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이렇게 군 수뇌는 다 적절치 않은 인물들이 올라앉고 반대로 전쟁 좀 할 만한 능력이 되는 야전군인들은 계속 숙청해버립니다.
총참모장들의 운명을 되돌아 보십시오. 김정은 집권 직후 2인자로 꼽혔던 리영호는 숙청, 현영철은 회의장에서 졸았다고 공개 총살됐습니다.
김격식은 앓아 죽었다고 하는데, 진짜 앓아죽었는지 독살됐는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리영길도 1군단 사단장으로 강등돼 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리명수도 언제 죽을지 모를 운명입니다.
인민무력부장은 어떻습니까. 김정은 올라서고 총참모장이 5번 교체됐는데, 인민무력부장은 6번이나 교체됐습니다. 평균 재임기간이 10개월 정도밖에 안되는 파리 목숨이 된 겁니다.
반면에 김일성 때는 46년 동안 무력부장이 딱 5번 바뀌었습니다. 무력부장이 되면 평균 9년 넘게 자리에 있었다는 뜻이지요. 김정일 시절에는 17년 동안 3명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6년 정도는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김정은 밑에서는 무력부장이 10개월도 못 버티니, 무력부장이란 자리가 얼마나 헌신짝처럼 간주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김정은이 야전군인들을 홀대하는 것은 믿지 못해서 그러는 부분이 크다고 봅니다. 김일성은 전우라고 믿고 맡길 사람이 있었고, 김정일 때도 빨치산 출신들을 그냥 썼습니다.
그들은 항일투사라고 최고의 대접을 손자까지 다 해주니까 딴 생각을 안했죠. 독재정권을 함께 만든 장본인들이니 평생 자기들이 만든 자신들만을 위한 천국에서 여생이나 편히 살자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은 것이죠.
반면 김정은은 지금 군 간부들과 유대관계도 없습니다. 평생 총대를 들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김정은과 같은 애송이가 뭘 안답시고 훈시를 하면 얼마나 가소롭겠습니까.
김정은도 그런 눈치는 있겠죠. 그러니까 현영철의 경우처럼 자기에 대한 태도가 조금만 불손하면 용서 못하는 겁니다.
김정은에게 군 간부들과 함께 피 흘리며 싸운 과거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같이 공유할 추억이 있겠습니까. 김정은 눈엔 그저 쓸모없는 늙다리일 뿐일 겁니다.
물론 김정은이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가려면 군부는 이제 밀어낼 때가 됐습니다. 선군정치란게 뭡니까. 군부독재죠.
나라를 정상적으로 이끌어가려면 군이 정치나 경제에 개입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북한 지도자가 됐다고 해도 군부 힘은 빼야 하겠죠.
지난 20년 동안 그 선군정치라는 괴상한 통치 방식 때문에 군부는 거대한 정치 및 이권 집단이 됐고 돈벌이에 급급했습니다.
군부 간부들도 썩을 대로 썩어서 나라와 민족을 지키겠다는 마음보다는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마음이 열배로 더 커졌습니다.
욕심은 하늘같은데, 무식한 군인들에게 나라를 이끌 능력이나 구상 같은 것은 애초에 없습니다. 이런 무능하고 부패한 집단은 솎아내는 것이 좋습니다.
김정은이 그런 생각 때문에 군부를 홀대하는지는 몰라도, 일단 가는 방향은 맞으니 내각 중심으로 북한을 이끌어가길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동안 호화호식하고 영화를 누려온 군부가 이제 한순간에 홀대를 받게 됐으니 장령들이 느끼는 자괴감, 김정은에 대한 반감은 클 겁니다.
그렇게 무시당하면서도 욱하고 일어나기는커녕 찍소리도 못내는 북한군을 보면 불쌍합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2016-07-21 ‘죽음의 땅’에 건설되는 어린이 야영소
▲중국인이 촬영한 함경남도 문천시 철도역 인근 모습. 뿌연 공기 속에 황폐화된 산이 보인다. 사진 출처 중국인 관광객 블로그
북한이 함경남도 문천시에 건설 중인 문천소년단 야영소가 착공 2년 만에 완공을 앞두고 있다. 머지않아 요란한 준공식이 열리고 김정은 시찰 소식이 노동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릴 것이다.
문천야영소는 원산 송도원국제소년단 야영소에서 북쪽으로 불과 4km 남짓한 곳에 있다. 그 두 야영소 가운데에 김정은의 생가이자 지금도 매우 애용하는 602초대소(별장)가 있다. 다시 말하면 김정은 별장은 양쪽에 소년단 야영소를 끼고 있는 셈이다. 송도원야영소가 1959년부터 있었는데도 별장 다른 쪽에 굳이 소년단 야영소를 또 건설하는 이유도 궁금하다. 김정은이 아이를 유별나게 사랑해서일까, 아니면 어른을 주변에 두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해서일까.
문천에 소년단 야영소가 건설된다는 소식은 나를 몹시 놀라게 했다. 야영소와 문천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기 때문이다. 문천은 북한에서 가장 심각하게 오염된 지역으로 꼽힌다. 최근 바로 옆 원산에서 온 한 탈북자는 “문천은 땅 색깔이 다르다. 그곳에선 염소와 같은 풀 먹는 동물은 살지 못한다”라고 증언했다.
문천에선 카드뮴과 같은 중금속 만성 중독으로 나타나는 이타이이타이병 환자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그곳에 자리 잡고 있는 문평제련소 때문이다. 문천은 제련소의 도시다. 이 작은 도시의 주민 중 7300명이 제련소 종업원이고 공장 터만 220만 m²에 이른다. 북한 사람 누구나 문천이라는 지명을 들으면 제련소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북한의 3대 제련소인 문평제련소는 일제강점기인 1938년 스미토모 원산제련소라는 이름으로 건설됐다. 광복 후 이름을 바꾸어 지금에 이르렀다.
통일부 북한정보포털에 따르면 문평제련소의 생산 능력은 납 3만5000t, 조연 5만9000t, 아연 11만 t, 황산 9만 t이며 금, 은, 안티몬, 주석, 카드뮴이 부산물로 나온다. 이 가운데 카드뮴이 이타이이타이병의 원인이다. 이 병은 일본 미쓰이 그룹이 20세기 초반 운영하던 납, 아연 제련소 주변 사람들이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면서 알려졌다. ‘이타이’는 일본어로 ‘아프다’는 뜻이다. 1961년부터 7년간 조사를 진행한 일본 정부는 제련소 폐수에 섞여 있는 카드뮴에 중독된 것이 이 병의 원인임을 밝혀냈다.
약 100년이 지난 지금 북한이 그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물론 광복 후에도 생산 성과만 강조했지 환경오염에 대해선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은 결과물이다. 더구나 39호실에서 관장해 생산하는 금과 아연 등은 김씨 일가의 핵심 돈줄이어서 문평제련소는 오직 생산제일주의로만 내몰렸다. 문천에 사는 노동자나 주민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어 타지로 이사할 수도 없다. 또 다른 유명 제련소인 남포제련소는 2000년 환경오염 때문에 해체했지만, 문평제련소는 여전히 운영 중이다.
공장 역사가 80년 가까이 되면서 그 주변에는 아연 등을 뽑아낸 찌꺼기(슬래그)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런데 1990년대 말 북한에 각종 외화벌이 기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면서 이 슬래그 더미가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재가공하면 옛날 정제 기술 부족으로 미처 뽑아내지 못했던 금과 아연이 다시 쏠쏠하게 수거됐기 때문이다. 외화벌이 기관들은 뇌물까지 들여 가며 슬래그 더미를 나눠 가졌다. 수십 년 세월 굳어 가던 슬래그 더미는 다시 무질서하게 파헤쳐졌다. 구글 어스로 문천을 확대해 보면 벌겋게 파헤쳐진 땅과 물웅덩이가 곳곳에 보인다. 이 물은 아무런 정제 과정 없이 바다와 인근 강으로 마구 흘러 들어가고 있다.
바로 그 강 입구가 지금 북한이 건설한다는 야영소에서 불과 3km 거리에 있다. 이런 곳에 소년단 야영소를 세운다니 놀라울 뿐이다. 게다가 이 강이 흘러 들어가는 원산만은 육지 깊숙이 오목하게 들어간 지형 때문에 바닷물이 잘 순환되지 않는다. 5∼8월이면 원산의 앞바다에 적조 현상이 나타나 어패류와 해조류가 멸종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물론 이것이 모두 제련소 탓만은 아니다. 원산항 바로 옆의,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화학공장도 환경오염이 심각하다. 그렇지만 하부 구조를 몰라 선뜻 해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요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레이더의 전자파 문제로 난리가 난 남쪽을 보면서, 나는 이런 엄격한 기준으로 문천을 평가하면 어떤 수식어가 필요할지 궁금하다. 죽음의 땅? 북한은 죽음의 땅이라면 김정은 별장이 있겠느냐고 반박할지 모른다. 물론 김정은이야 먹는 것은 특별히 공수해 올 것이니 바다에 들어가는 것만 신경을 쓰면 될 것이다. 그래도 김정은의 별장은 부럽지 않다. 나는 중금속 범벅이 된 그 바닷물엔 도무지 뛰어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2016-08-04 북한 보위부는 탈북 기자가 왜 두려운가
▲북한 보위부에 납치된 탈북자 고현철 씨가 지난달 15일 평양에서 “유인납치의 진상을 밝힌다”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우리민족끼리 홈페이지
올해 입국한 대학 후배를 만났다. 통일전선부(통전부)에도 있었다는 그는 북에서 내 이름을 알았다고 했다. 통전부야 매일 한국 언론을 볼 것이니 남쪽 기자 이름을 아는 건 놀랍진 않았다.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통전부에선 주성하가 어떻게 평가되나요. 북한을 배신한 악질반동?”
“절대 아닙니다. 거기 사람들도 체제의 문제점을 아니까 사실에 기반한 비판은 수긍할 수 있죠. 통전부는 거의 다 김일성대 출신들인데, 속내는 오히려 동문이 남쪽에 나가 성공했다고 보는 것 같아요.”
물론 후배가 나에게 듣기 좋은 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한 가지는 확신한다. 매일 한국 신문을 본다면 김정은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통전부는 탈북자 10여 명의 북한 행적을 폭로한다며 ‘인간 쓰레기’와 같은 험한 용어로 온갖 인신공격을 퍼붓는 글과 동영상을 제작해 유튜브 등에 공개했다. 하지만 남쪽에 오자마자 기자가 돼 14년간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기사를 수없이 써온 나는 공격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당신은 봐주는 거 아니냐”는 말도 들을 때가 있었다. “대학 졸업 후 때를 묻힐 사이 없이 오다 보니 욕할 건더기가 없겠죠”라고 대답하면서도 실은 나도 궁금했다.
그런데 지난달 16일 노동신문에 내 이름이 10번이나 오르내렸다. 북한이 5월 27일 체포한 탈북자 고현철 씨의 기자회견을 통해서였다.
고 씨는 “주성하 놈은 ‘동아일보’ 기자의 탈을 쓰고 미국과 괴뢰정보원의 막후조종을 받으며 우리(북) 주민들에 대한 유인납치 만행을 감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폭로’ 중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주성하 놈은 미국과 남조선의 유인납치 단체들 사이에 자금을 중계해주고 연계를 맺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수잰 숄티의 ‘디펜스포럼’은 남조선의 ‘북 인권’ 단체들을 배후조종하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반공화국 모략단체인데 주성하는 바로 이 단체와 연결돼 있다.”
“5월 어느 날 주성하 놈이 나에게 ‘우리는 직업적으로 모든 일을 박근혜 정부의 안정을 보장하는 방향에서 고찰하고 진행하여야 한다’고 했다.”
직접 당하고 보니 황당해서 할 말을 잃었다. 단 한 번도 미국의 자금을 중계한 적도, 수잰 숄티를 만나거나 통화한 적도 없다. 고 씨를 만나 본 적은 있지만 5월엔 만난 일이 없다.
북한 내부 소식을 알 수 있는 선이 있다고 해서 올 3월 28일 회사 근처 낙지 요리전문점에서 그를 처음 만나 저녁을 먹었다. 그 뒤엔 만난 적도 통화한 적도 없다. 그가 고문에 못 이겨 내 이름을 댔을 수는 있지만, 그걸 갖고 현직 언론인을 엮는 수법은 너무 치졸해 헛웃음만 나왔다.
기자회견장에서 고 씨는 나를 언급할 때마다 유난히 책상 위에 있는 종이를 자주 내려다보았다. 써준 각본을 미처 외우지 못한 것 같았다. 보위부가 고 씨의 휴대전화에서 발견한 여러 ‘반동’들의 얼굴이라며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공개한 사진 중에는 내 얼굴도 있었다. 다른 사진들은 다 배경이 있어서 휴대전화로 촬영했다고 우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사진은 바로 이 칼럼에 실었던 프로필 사진이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 끼워 넣을 정도로 나를 함께 엮고 싶었나 보다.
나는 이번 북한에서의 기자회견이 통전부가 아닌 국가안전보위부의 작품이란 점에 주목한다. 북한 식당 종업원 13명이 한국으로 망명한 뒤 북한이 이를 보복하기 위해 눈이 뒤집힌 시점임을 감안하더라도 보위부는 정말 저질스러웠다.
고 씨 기자회견을 북한 매체들이 분노한 인민의 반향이라며 잇달아 내보내는 것을 보니, 경고의 의미로 전 주민에게 기자회견을 보게 한 것 같다. 그 덕분에 내 이름은 모략꾼의 이미지이긴 하지만, 북한 사람들이 다 알게 된 것 같다.
기자회견에서 다른 탈북자들은 ‘죄를 짓고 도주한 쓰레기’니 뭐니 했지만 나에 대해선 탈북자란 사실을 일절 밝히지 않았다. 이를 통해 나는 동아일보에 탈북 기자가 있다는 사실은 북한이 주민들에게 숨겨야 할 비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탈북자도 남쪽에서 대표적인 언론사의 기자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성공 신화처럼 받아들일까 봐 두려운 것이다.
북한은 기자회견 며칠 뒤엔 대남방송에 혈육까지 등장시켜 내게 보내는 편지란 것을 읽게 했다. 허나 북한은 내가 왜 남쪽에 와서 언론인이란 직업을 선택했는지 모르는 것 같다. 북한 인민이 자유롭고 풍요롭게 사는 날까지 그들 편에 서 있겠다는 맹세는 내가 북한을 탈출한 동기이자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신념이다. 날 흔들려는 북한의 비열한 이번 공격은 어떠한 살해 협박과 중상모략 속에서도 내가 이 자리에서 끝까지 버티고 서 있는 것 자체가 북한 독재 정권과 치열하게 싸우는 일이라는 믿음을 보다 굳세게 만들어 주었다.
2016-08-08 평양 70층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저는 이번 주에 여름휴가를 내서 전라도 완도라는 곳에서 보냈습니다. 시원한 백사장도 있고, 산도 있는 곳에서 모처럼 머리를 식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휴가라고 해도 시원한 집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요즘 날씨가 무척 덥죠. 밖에 나가 있어도 저절로 땀이 줄줄 흐릅니다. 올해가 역사상 가장 더운 해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더운 날에 공사장에서 땀을 뻘뻘 흘릴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바로 여명거리 건설장인데요, 가만 서있기도 힘든 날에 무거운 벽돌을 등짐으로 나르고, 시멘트 몰탈을 이기고 할 사람들은 얼마나 고되겠습니까.
한국은 작업장이나 집이나 에어컨이 있어 시원하게 보내지만, 북한 근로자들은 하루 종일 고생하고 돌아가 에어컨은커녕 시원한 물로 목욕조차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방송을 들으면 목욕은 됐고, 배나 불렀으면 좋겠다하는 사람들도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예전에 북에 있을 때 여름에 노력동원 많이 나갔는데 제일 힘들었던 기억은 공화국 창건 군중시위를 연습한다고 한 여름에 3달 내내 고생했던 일 같습니다.
아침마다 일어나 김일성대에서 김일성광장까지 한 시간 반 거리를 무거운 깃발대 묶음을 메고 다녔습니다. 땡볕으로 달아오른 화강석 바닥에 하루 종일 서서 깃발을 들었다 놨다 하는 연습을 석 달하니 몸무게가 40㎏ 초반이 되더군요.
그런데 그때는 젊어서 그런지 버텼습니다. 그 삶이 지옥과 같다는 점은 바깥세상을 모르니 전혀 알 수가 없었고요. 그런데 이젠 북에 돌아가 과거처럼 산다면 단 하루도 견딜 것 같지 못합니다.
제가 위성사진을 통해 여명거리 건설장을 내려다보았더니 사방에 건설자들이 자는 임시 숙소들이 들어차 있더군요. 김일성대의 유일한 운동장에도 박스같은 숙소들이 꽉 차 있어, 요즘 김대 학생들은 볼을 찰 곳도 없는 것 같습니다.
여명거리 건설하면서 제가 지냈던 기숙사도 다 허물어 버렸더군요. 6년의 추억이 간직돼 있던 기숙사 자리에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던데 마음이 좀 아팠습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5시 반에 기상해서 빗자루로 빡빡 쓸었던 기숙사 마당은 머잖아 누군가의 아파트 마당이 돼서 아이들이 뛰어놀겠죠.
그들은 전혀 알 수 없겠죠. 그 마당에서 몇십년 전에 20대 청년들이 매일 아침 김일성 찬양 노래를 부르며 행진해 다녔다는 것을요. 나의 젊음이 흘러갔던 기숙사 방은 이제 기억으로만 남게 됐습니다.
이번에 여명거리 건설 소식에서 눈길을 끌었던 것은 70층짜리 아파트를 건설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얼마 전 노동신문을 보니 55층과 50층짜리 아파트는 100일 만에 건설하고 70층 아파트도 63층까지 올라갔다고 자랑하더군요.
100일 만에 50층 넘게 올렸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면서 저게 과연 자랑꺼리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창건 기념일 맞추느라 저리 서두르는 걸까요.
그런데 100일 만에 건설한 아파트는 제대로 지어지는 것일까요. 부실공사 때문에 나중에 자그마한 지진이 오면 와르르 무너지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평양에 집이 부족하니 열심히 짓는 것을 뭐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살림집이 많으면 그만큼 집 없는 사람은 줄겠죠.
다만 저는 안전하게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정은이 지시한 날짜를 맞추느라 무리하게 부실공사를 하다가 나중에 대형 사고로 이어지는 일은 절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70층 정도의 아파트는 한번 무너지면 수천 명이 죽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 속담에 이빨도 안 난 아이가 콩밥 먹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평양에 왜 70층짜리 아파트가 필요한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서울은 평양보다 절반 밖에 안 되는 땅에 1000만 명이 몰려 사니까 정말 땅이 귀하고, 그러니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서울도 50층 넘는 아파트는 거의 안 짓습니다.
50층은 살기가 너무 불편합니다.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시간도 진짜 오래고, 여러모로 사람은 높은 곳에서 사는 게 불편합니다.
그런데 평양은 땅이 많아 20~30층짜리만 지어도 충분한데, 그럼에도 굳이 70층짜리를 짓는 것은 김정은의 허영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70층짜리 아파트에 살다가 난방도 안 오고, 전기나 물이 끊기면 어떻게 될까요. 고난의 행군시기 그런 시절을 보냈던 평양 사람들은 그 말에 진저리를 떨 것입니다.
저는 고층 아파트에서 김치는 어떻게 담궈 먹는지도 궁금합니다. 남쪽은 김치 냉장고란 것이 있지만 평양은 그런 거 구입하기 쉽지 않지요. 그리고 여긴 다른 반찬이 많아 김치를 거의 먹지 않지만 북한은 김치가 한 해 겨울을 나는 식량과 마찬가지라 많이 담궈야 합니다.
4인 가족이면 거의 1톤을 담글 텐데 그걸 70층이나 올려다 베란다에 독을 잔뜩 놓고 벼 껍질로 보온을 하려면 기가 막힐 겁니다. 김정은이가 그런 대책은 세웠는지 궁금합니다.
지금은 들어보니 전기는 잘 온다고 들었습니다. 전기가 오면 지금 당장이야 물도 잘 보장이 되겠고, 엘리베이터도 다닐 것이며, 전기 난방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그럴거냐는 질문에 누구도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죠.
지금 북한은 핵과 미사일 개발로 유엔의 강력한 제재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모로 보아 앞으로 경제 상황이 좋아질 확률보단 나빠질 확률이 높습니다.
70층 아파트에 살다가 며칠만 전기가 끊기면 정말 재앙입니다. 이건 걸어 내려갈 수도 없고 말입니다. 저라면 절대 30층 이상에선 안삽니다. 김정은의 허영에 맞추느라 한 여름 땡볕 속에서 건설하는 사람도 힘들고, 아파트에 사는 사람도 모험이고…
서울에서 시원한 여름을 보내는 저는 여러분들이 너무 안쓰럽습니다. 정말 북한에도 좋은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2016-08-15 中 ‘南 사드’ 싫다고… ‘핵개발 北’에 되레 原油공급 등 늘려
[유엔 결의 역행하는 중국]식량도 역대최대 규모 50만t 지원
▲중국이 북한에 식량을 무상지원하기로 결정한 직후인 올해 6월 중순경 북한 화물차량들이 중국 랴오닝 성단둥과 북한을 잇는 압록강대교를 건너 중국으로 향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중국이 식량 무상 지원과 함께 대북 원유 공급 등 대북 지원 규모를 확대하고 있다.
중국 식량 지원이나 원유 공급 자체가 유엔 대북 제재 결의 위반은 아니지만 6월 방중한 이수용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중국에 핵 개발 고수 의지를 천명한 가운데 중국이 대북 식량 지원으로 화답한 것은 북핵 폐기에 대한 중국의 의지를 의심케 만들 수밖에 없다. 특히 중국의 대북 식량 무상 지원의 규모가 역대 최대 규모인 50만 t에 이른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의 핵실험 및 장거리미사일 발사 직후 채택한 대북 제재 결의에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이 나서서 역행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북한의 핵 개발을 가장 강력하게 압박해야 할 시점에 오히려 대북 지원을 늘려 강력한 지원 메시지를 보내는 중국이 과연 국제질서에 대한 책임을 걸머진 주요 2개국(G2)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대규모 식량 지원과 더불어 북-중 간 교역도 본격적으로 되살아나 유엔의 대북 제재를 무력화시키고 있는 증거와 증언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유엔 차원의 대북 제재가 시작된 뒤 한동안 이에 동참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던 중국이 최근 북한과의 관계 회복에 나서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남중국해 분쟁을 놓고 미국과 일본을 압박하는 동시에 한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결정에 대한 반발 움직임일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중국 해관(세관)총서가 8일 공개한 국가별 월 무역액 통계에 따르면 6월 북-중 무역총액은 5억377만 달러(약 5564억 원)로 작년 같은 달 4억6042만 달러(약 5085억 원)보다 9.4% 증가했다. 안보리 제재 결의 채택 이후 4, 5월에 줄어들던 교역 규모가 회복된 것은 중국이 대북 수출량을 크게 늘렸기 때문이다. 7월 이후 교역 규모는 더욱 크게 증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요미우리신문은 북한으로 가는 원유 송유관 시작 지점인 단둥(丹東) 외곽 원유 저장 시설을 드나드는 화물열차의 운항이 대북 제재 초기 하루 1편에서 6월 하순부터는 2, 3회로 늘었다고 전했다. 북-중 소식통은 이런 추세라면 올해 원유 지원 규모가 예년 평균인 50만 t을 넘어설 것이라고 예상했다. 신문은 또 유엔 제재 품목인 중국의 북한 철광석 수입이 올해 6월 전년 대비 2.7배로 증가했고 톈진(天津) 항에서는 대북 제재 이후 중단됐던 석탄 하역 작업이 이달 들어 재개됐다고 보도했다.
대북 소식통은 북-중 국경에선 중국이 북한에 시멘트를 10만 t 이상 지원한다는 소문도 퍼져 있다고 전했다. 그는 “김정은의 지시로 건설되는 여명거리 공사가 막바지 단계에 이르면서 이를 부정부패의 기회로 보고 크게 한탕 해 먹으려는 북한 간부와 중국 상인 간의 거래가 북-중 국경에서 활발해졌다”고 전했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도 단둥 소식통을 인용해 “낮에는 중국이 대북 제재를 시행하는 것처럼 조용하다가 오후 8시만 되면 특수용접봉, 상수도관, 창유리, 타일, 시멘트 등 건설자재를 실은 북한행 차량이 긴 행렬을 이루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 소식통은 “얼마 전까지 북한으로 들어가는 화물차량의 통관은 1주일에 이틀만 가능했지만, 요즘은 매일 가능하다”고 말했다. 또 단둥에서는 지난달부터 신의주를 당일 둘러보는 여행이 시작돼 하루 관광객이 1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조봉현 IBK경제연구소 부소장은 “최근 중국이 자국 사업자 보호를 이유로 북-중 무역 통관을 다시 느슨하게 하고 있으며 밀무역도 대폭 묵인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중국 쪽으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중국의 식량 지원 결정(6월 1일)은 한국 정부가 사드 체계 배치를 발표(7월 8일)하기 전에 내린 것이어서 사드 결정과 직접 연관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최근 대북 지원 움직임이 보인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8-08-18 난수 방송을 기다릴 탐사대원 동무들에게
▲김정일이 지켜보는 가운데 팔뚝에 돌을 올려놓고 망치로 깨부수는 훈련 시범을 보이는 북한 특수부대원. 동아일보DB
27호 탐사대원 동무.
나는 당신이 남쪽에 있는지, 북쪽에 있는지, 아니면 방송 원고에만 존재하는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다만 평양방송이 격주로 금요일 오전 1시 15분에 내보내는 난수 방송을 통해 당신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저번 방송이 12일에 진행됐으니 다음 지시는 26일 금요일 오전에 또 나오겠네요.
여성 방송원이 “지금부터 27호 탐사대원들을 위한 복습 과제를 알려 드리겠다”며 “509페이지 68번, 742페이지 69번…”과 같은 식으로 다섯 자리 숫자를 읽는 것은 처음엔 남쪽 언론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언론도 곧 식상해질 겁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상관은 없습니다만, 지금도 대남 공작원을 양성하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이 문 닫았다는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후배들은 계속 훈련받고 있겠죠.
27호 동무는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모르겠지만 김현희, 김동식 등 임무를 수행하다가 체포된 당신의 선배들을 통해 북쪽의 공작원 훈련 내용을 전해 듣긴 했습니다. 공작원은 인민군 특수 병종의 4∼5배나 되는 훈련량을 소화해 철인이 된다면서요. 그런데 내가 남쪽에 와서 살아 보니 정말 시대착오적인 쓸데없는 훈련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글은 그래서 적는 것입니다. 내가 겪은 남쪽의 삶과 혹시 당신이 체험했을 경험을 두루 종합해 꼭 보고해 주길 바랍니다.
우선 육체적 능력은 거의 필요 없습니다. 공작원은 군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근육이 빵빵하고, 손에 굳은살까지 있으면 더 의심받기 쉽습니다. 공작원들이 제일 중시하는 게 산악 돌파 훈련이라면서요. “하룻밤에 40∼80km를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김정일의 ‘교시’에 따라 공작원들은 30kg의 모래 배낭을 메고 40km를 3시간 만에 가는 훈련을 한다면서요. 그 교시는 이미 유훈이 돼 누구도 감히 바꿀 엄두를 못 내고 지금도 그런 훈련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참 끔찍합니다. 그런 육체적 능력이면 차라리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제가 남쪽에 와 보니 여긴 산에 나무와 잡초가 빽빽하게 우거져 접근할 엄두조차 못 내겠습니다. 아무리 공작원이라도 산 몇 개 넘으면 탈진할 겁니다. 행군을 암만 잘해 봐야 멀리 도망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요즘엔 적외선 카메라가 설치돼 칠흑 같은 밤이라도 다 찾아냅니다. 공작원은 비트(은신처) 파는 훈련도 열심히 한다고 들었는데 그냥 땅을 깊숙이 파고 영원히 거기서 쉬는 게 안 잡히는 유일한 길 같습니다.
달리는 자동차 잡아 타기 훈련은 지금도 하나요. 여기 와 보면 알겠지만, 이젠 시골까지 포장도로가 다 돼 있어서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인 우사인 볼트도 차를 못 따라갑니다. 차는 또 어찌나 많은지 몰래 잡아 타려면 깊은 시골에서나 가능할 겁니다. 그런데 시골 가서 뭐 할 게 있겠습니까.
독도법(讀圖法)도 필수과목이라 하더군요.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도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목적지와 자기 위치를 다 아는 시대입니다.
현지화를 한다면서 서울말도 힘들게 배운다고 하던데, 그것도 필요 없습니다. 요새 남쪽은 세계화가 돼서 말투가 이상하다고 신고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제가 일하는 서울 광화문에도 중국인이 어찌나 많은지 차라리 중국인 행세를 하는 게 훨씬 안전합니다. 어쩌면 3만 명이나 되는 탈북자 흉내를 내는 게 더 쉬울지 모르겠네요. 서울말 가르칠 교관이 필요하다고 사람 납치해 가는 일도 할 필요 없습니다.
제일 웃기는 일은 단도 던지기를 배운단 소리였습니다. 중세시대도 아닌데, 참…. 요즘 남쪽은 폐쇄회로(CC)TV 카메라가 쫙 깔려 있어서 임무를 완수해도 도망갈 수 없을 겁니다. 총 암만 잘 쏘고 단도 잘 던져 봐야 어차피 범인 검거율이 세계 최고 수준인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어렵습니다. 그런 거나 할 거면 특수 훈련 자체가 무의미하군요.
제가 볼 때는 공작원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구글어스 돌리면 손금 보듯 볼 수 있는데 굳이 와서 정찰할 필요도 없고, 웬만한 정보는 다 신문에 실리는데 기자도 모를 진짜 비밀에 당신이 무슨 수로 접근합니까. 그러니 인터넷이나 도입해 공작원 보낼 시간에 검색을 열심히 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암살도 마찬가지입니다. 웬만하면 잡혀서 정체가 드러날 것이고, 그럼 미국이 기다렸다는 듯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할 텐데 그걸 감수할 가치가 있을까요.
그러니 27호 탐사대원 동무. 만약 남쪽에 왔다면, 그래도 견문이 넓어졌을 당신이 솔직히 말하세요. 쓸데없는 훈련은 왜 시키고, 쓸데없는 지시는 왜 내리느냐고요.
2016-08-22 가짜 외국인 명의로 계좌 만들어 北비자금 관리
北의 유럽자금총책 망명 막전막후
노동당 39호실 유럽 자금총책 김명철 씨는 유럽에서 외국인 명의의 차명계좌를 이용해 북한의 비자금을 능숙하게 분산 관리하던 전문가로 알려졌다. 김 씨가 갖고 잠적한 차명계좌 중엔 인도인 명의의 계좌도 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김 씨는 인도인 명의의 차명계좌에서 돈을 찾기 위해 예금주의 위임장을 지닌 변호사를 차명계좌가 있는 은행에 보내 다른 은행에 있는 자신의 계좌나 현지처 명의의 계좌에 돈을 입금시켰다. 이후 김 씨가 돈이 입금된 은행 지점에서 매니저를 만나 인출했다. 인도인은 김 씨가 조작한 가상의 인물이다. 김 씨는 유럽의 많은 중소은행들이 예금 유치만 중시한다는 허점을 파고들어 이런 방식을 활용해 다양한 차명계좌를 관리했다고 한다.
북한 인사 명의의 계좌는 서방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기 때문에 북한은 자금세탁 블랙요원을 활용해 비자금을 숨겨왔다. 김 씨 정도 레벨의 ‘기술자’는 북한에 몇 명 되지 않아 북한 당국의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김 씨는 평양엔 본부인을, 해외엔 현지인 부인을 두는 이중생활을 20년 가까이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자식은 북한 부인에게서만 낳는다는 노동당의 원칙 때문에 현지인 부인과는 자녀를 두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 씨는 두 아들을 서방에서 키웠다. 김 씨는 해당 국가 영주권자이지만 두 아들은 올 상반기에 해당 국가 시민권을 차례로 획득했다.
그의 마음이 떠난 배경에는 북한의 과도한 요구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몇 년 전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외화 획득 과제를 부과했고, 뜻대로 되지 않자 가족 중 한 명을 터무니없는 구실로 국가안전보위부 감방에 가뒀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자주 쓰는 가족을 인질로 하는 압박전술이었다. 그래도 김 씨가 과제를 달성하지 못하자 구속된 가족을 고문하기 시작했고 결국 가족이 숨지는 ‘사고’가 벌어졌다.
이 경우 해외 요원은 철수시키는 것이 원칙이지만 김 씨를 대체할 인물이 없어 즉각 소환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은 김 씨가 분노해 망명길에 오르게 했다. 김 씨 가족을 숨지게 만든 보위부 요원은 처벌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김 씨는 현재 서방 국가의 보호 아래 주기적으로 은신처를 옮기며 잠적 생활을 하고 있다. 김 씨는 한국에서의 신변 안전 문제, 미국의 독재자 자금 전액 몰수 정책 때문에 망명지를 어디로 선택할지를 두고 고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6-08-24 계란에 사상을 넣으면 바위도 깬다니…
이제 일요일이면 브라질 리우 올림픽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북한은 4년 전 런던 올림픽 때보다 더 저조한 성적을 냈습니다.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4개 땄는데 이번엔 2개 밖에 못 땄고 국가별 금메달 순위에서도 20위권 밖으로 밀려나게 됐습니다.
김정은이 그래서 열 좀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집권해서 체육에 힘을 집중한다면서 얼마나 열심이었습니까. 그래서 이번 올림픽에도 과거엔 체육성 국장급을 대표단장으로 보냈는데 이번엔 최룡해까지 행차했습니다.
또 체육상과 체육성당 비서는 물론, 노동당 조직부 간부들, 근로단체부 부부장, 선전부 부부장까지 대거 따라갔습니다. 그만큼 이번 올림픽에 건 기대가 높았다는 것을 의미하겠죠.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에 김정은이가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인 최룡해를 불러다 금메달 몇 개나 딸 수 있겠냐고 물었답니다.
북한에서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최룡해가 4개까지 가능하다고 하니 김정은이가 적어도 대여섯 개는 따와야 한다고 지시를 했답니다. 금메달을 많이 따서 자기의 영도력을 과시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런데 금메달이 김정은이 다섯 개 따라고 하면 따고, 여섯 개 따라고 하면 여섯 개를 땁니까. 이번에 올림픽에 와서 최룡해는 역성을 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김정은이 여섯 개를 따오라고 했는데, 첫 경기에서 믿었던 엄윤철이 은메달을 따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최룡해는 메달 수상식도 안보고 얼굴 찌푸리고 경기장을 나가더니 회의실에 역기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혼을 내는 모습도 기자들에게 포착됐습니다.
심지어 거리에 나가서까지 역정을 내더군요. 마지막 기대를 모았던 김국향까지 물에 뛰어들기 경기에서 본선에 올라가지 못하고 예선에서 탈락했습니다. 아마 최룡해는 북한에 돌아가서 크게 책임 추궁을 당할 것 같습니다.
이번 올림픽은 아무리 최고 정예를 뽑아 훈련해도 가난한 나라는 돈 있는 나라를 따라 못 간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준 계기가 됐습니다.
북한 체육이 금메달을 못 따는 이유는 설명하기 비교적 간단합니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먹지 못해 영양이 전반적으로 부실하다보니 선수를 뽑을 수 있는 후보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축구 경기 같은 데 나가면 북한 선수들은 상대팀에 비해 아이들 같습니다. 키가 작고 힘이 밀리니 이기겠습니까. 농구나 배구, 육상 등이 대표적이지만 체육도 잘 먹어서 키가 크고 힘이 좋아야 선수가 우승을 합니다.
북한엔 그런 키가 크고 힘이 좋은 아이들 자체가 적죠. 신체가 좀 되는 걸 보고 열댓 살에 선수로 뽑아서 갑자기 잘 먹여봐야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사람의 발육은 5살 이전에 얼마나 잘 먹었는지에 따라 많이 관계가 되는데, 5살 이전엔 또 선수될 줄 어떻게 알고 잘 먹이겠습니까.
반면 잘 사는 나라는 영양공급이 좋으니까 선수가 아닌 사람도 키도 크고 힘도 좋습니다.
또 경제력이 있어야 돈이 들어간 최고의 선진적 장비와 환경에서 최고의 훈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발전된 나라에 가면 작은 동네에도 북한 국제 경기장보다 더 좋은 경기장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나 운동을 생활화하게 되고 선수 뽑을 사람도 엄청 많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선 미국과 영국이 금메달을 제일 많이 따서 1등과 2등을 나눠서 했고, 중국과 러시아를 제외하면 독일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등 경제력 순위로 금메달 순위가 결정됐습니다.
한국은 항상 올림픽을 하면 10위권 안에는 들어갔습니다. 런던 올림픽 때에는 금메달 순위로 종합 5위를 했는데, 올해는 성적이 그보다는 못합니다.
한국이 크지도 않은데, 스포츠 경기를 하면 강국을 따돌리고 앞서 나가는 것을 볼 때마다 뿌듯합니다.
그런데 북한은 아무리 열심히 따라가도 안 되죠. 북한이 뭐 금메달 따려는 욕심이 떨어지겠습니까. 그래도 아무리 욕망이 커도 경제력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번에 역기에서 은메달을 딴 엄윤철 선수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역도 때 금메달을 땄을 때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갑자기 “달걀로 바위를 깰 수 있을까요?”하고 되묻더니 “김정은 원수님은 달걀로 바위는 깰 수 없지만 달걀에 사상을 넣으면 바위도 깰 수 있다고 했습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런 정신으로 최선을 다했기에 애국가가 울려 퍼질 수 있었다고 큰 소리로 말합니다.
엄 선수의 말은 “위대한 사상의 힘은 무궁무진하다”고 선전해 온 북한 당국의 선전과 일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엄윤철 선수가 이번엔 사상을 적게 넣어서 은메달에 그쳤단 말입니까.
저는 사상을 넣은 달걀로 바위를 깰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어처구니없어 웃었습니다. 사상을 넣던 기술을 넣던 달걀은 달걀인 것입니다.
김정은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선전을 해대니까 북한 사람들이 다 바보가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노동당이 하도 사상과 정신력의 힘은 가장 위대하다고 선전하니까 미국하고도 전쟁해서 이길 수 있다고 믿는 북한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미국하고는 안 된다고 하는데 북한만 그리 믿고 있습니다. 21세기의 돈키호테가 따로 없는 겁니다.
미국이 한해 군사비로 쓰는 돈이 5000억 달러가 넘습니다. 국방비만 북한의 국민총생산액보다 20~30배나 많습니다. 그 돈이 다 어디 가겠습니까. 최고의 무장 장비를 갖추는데 다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북한도 마찬가지로 돈이 있어야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거고요. 하지만 노동당이 사상만 강조하니까 인민군인들도 반세기도 더 지난 고물 무기를 갖고 미국과 싸워 이긴다고 합니다. 밖에서 보면 정말 한심해서 말이 안 나옵니다.
사상만 강하면 뭐든지 다 해볼 수 있다고 믿는 신화, 그거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헛소리인줄을 이번 리우 올림픽을 보면서 북한 주민들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2016-09-22 北 수해, 대량탈북 방아쇠 될까
이달 초 북한 북부 지역을 휩쓴 대홍수는 남쪽 탈북자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피해 지역인 함경북도 연사 무산 회령 남양 온성 경원은 북-중 국경 지역이어서 이곳 출신 탈북자도 매우 많기 때문이다. 8월 말까지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2만9350명 중 함북 출신은 62.3%인 1만8284명이며 이들 중 절반 이상이 피해 지역 출신으로 파악된다. 홍수 피해가 큰 양강도 출신도 4042명(13.8%)에 이른다. 수많은 탈북자가 가족 걱정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이다.
경기 용인의 한 탈북 여성은 침수된 남양의 모습을 TV로 지켜보다 비명을 질렀다. “어쩜 좋아. 우리 집이 물에 잠겼네. 부모님은 어떻게 됐을까.” 그는 지금도 부모님 소식을 알지 못한다. 적잖은 탈북자들이 비슷한 처지다.
유엔은 이번 홍수로 사망·실종자 538명에 가옥 3만5000여 채가 유실 또는 파손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유엔에 정확하게 보고한 것 같지는 않다. 전화 연락이 닿은 회령의 한 주민은 사망·실종자 수를 듣고는 “헛소리다. 회령에서만 그보다 더 많이 죽었다”고 말했다. 마을이 사라진 회령 강안동 한 개 부락에서만 200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다. 피해가 가장 큰 무산에서도 주초 노동자구가 사라졌다. 북한은 8월 31일 밤 댐 붕괴 위험이 제기되자 두만강 상류 서두수와 마양댐의 수문을 갑자기 열었다. 이 때문에 군인들이 재산을 훔쳐갈까 봐 피난 가지 않고 집을 지키던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많이 죽었다.
연사에서 한 병영이 사라져 군인 40여 명이 몰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군인 사망자는 유엔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것 같다. 국경경비대 출신 탈북자에 따르면 두만강에만 경비병력 1만 명 이상이 배치돼 있는데, 이들은 강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강가를 따라 2∼3km마다 설치된 소대 단위 병영도 홍수로 무너진 곳이 많다. 동시에 북한과 중국 쪽 철조망과 잠복초소들도 피해가 컸다. 북한이 20년 넘게 ‘공들여’ 구축한 북-중 국경 봉쇄망이 한동안 기능 정지 상태에 빠진 셈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이재민이 10만 명 넘게 발생했는데도 아직까진 대량 탈북 사태가 없다는 점이다. 집과 재산을 잃고 살길이 막막하면 한국의 가족을 찾아 탈북할 사람도 많을 법한데도 그렇다. 두만강 인근 주민 중 상당수는 가족 또는 친척 중에 탈북자가 있는 경우가 많다. 회령 유선구의 한 마을 절반가량이 탈북해 남쪽에서 선생들까지 대거 참석하는 동창회가 열릴 정도라는 말이 나온다. 설령 집안에 탈북자가 없더라도 국경에서 살다 보면 밀수 루트를 한두 개는 알고 있어 중국 쪽에 연줄을 찾기도 쉽다. 그런데도 없다. 왜일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을 수 있다. 수해 직후 북한은 군, 보안원, 노동자 규찰대 등을 총동원해 국경에 ‘인해(人海)장벽’을 쌓았다고 한다. 또 외부와의 통화를 막으려고 전파 탐지와 방해전파 송신도 훨씬 강화했다. 중국 쪽 도로도 상당수 유실돼 탈북에 성공해도 당장 국경 지역을 빠르게 벗어나는 데 필요한 차량을 구하기 어렵다.
이것이 다는 아닌 것 같다. 남쪽과 전화가 연결된 한 무산 주민은 “나라에서 우리를 걱정해 엄청나게 관심을 돌려줘서 눈물을 흘린 사람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김정은에게 불만이 가득한 불법 밀수꾼이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게 더 충격적이다. 두만강 사람들은 북한에서 한국과 중국 등 외국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체제에 대한 반감도 제일 높은 편이다. 그런 사람들이 김정은이 여명거리 건설을 중단하고 10만 명의 복구 인력을 보냈다고 감동해 울었다니. 혹시 오랫동안 소외돼 살았던 설움 때문일까. 난 갑자기 충성심이 되살아나 탈북 생각을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 감동이 얼마나 갈지는 더 두고 봐야겠다. 지원 인력은 주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주택 건설보다는 김씨 일가의 사적 건물이나 구호판 보수공사에 우선적으로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쌀값도 급등하고 있다. 복구에 집중한다고 장마당을 폐쇄했고, 여러 국경 세관도 피해를 봐 중국에서 물자가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주민들은 급박한 상황에서 TV 등 비싼 가전제품을 챙겨 나올 생각만 했지 식량은 들고 나오지 못했다. 집에 쌀을 몇 t씩 쌓아두고 있던 장사꾼들도 피해를 봤다. 달랑 몸만 온 복구 인력은 수해가 휩쓸고 간 밭에서 그나마 남은 작물을 훔쳐 가는 데 열심이다. 두만강의 물살은 점점 가라앉고 중국 쪽 도로도 복구되고, 남쪽 가족과 연결되는 사람도 늘어날 것이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9월 중순에도 서리가 내린다. 황망했던 마음들이 가라앉고 굶주림과 추위에 떨다 보면 갑자기 생겨난 충성심의 유효기간을 이재민 스스로가 확인하게 될 것 같다.
2016-10-06 “탈북해 한국 가면 정말 잘 사나요?”
▲박근혜 대통령이 8월 15일 “통일이 되면 북한 간부와 주민 모두가 동등하게 대우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이달 말이면 한국에 입국한 누적 탈북자가 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1일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북한 주민과 군인들에게 “언제든 대한민국의 자유로운 터전으로 오시길 바란다”며 탈북을 권하는 연설을 했다.
이를 들으니 언젠가 북한의 지인이 내게 전화로 물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남조선 가면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요?”
그때 난 이렇게 대답했다. “북한보단 잘살지만, 자유롭게 살면 굶어 죽어요. 가족 벌어 먹이려면 열심히 일해야죠. 여기서처럼 악착같이 일한다면 북한에선 노력영웅이 될걸요.”
박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 때도 “통일은 북한 간부와 주민 모두가 어떠한 차별과 불이익 없이 동등하게 대우받고 각자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 반문할 탈북자들도 꽤 많을 것이다.
“그럼 지금의 탈북자 차별 정책은 뭔가요. 내세울 것 없는 흙수저 탈북자는 남쪽 와서도 빈곤층 벗어나기 힘든데, 왜 금수저 간부는 돈도 많이 주고, 보호도 해주고, 국책기관에 취직시켜 늙을 때까지 많은 월급을 주나요?”
남쪽에선 탈북자를 두고 ‘통일의 역군, 소중한 자산, 먼저 온 미래’와 같은 듣기 좋은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달 28일 통일부 ‘북한인권기록센터’ 개소식은 탈북자가 실제 어떤 대접을 받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북한인권기록은 탈북자의 피눈물이며, 절규의 기록이다. 탈북자들은 지난 10년간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마침내 법이 통과돼 정부 부처까지 생겨났으니 사실상 탈북자에겐 감개무량한 잔칫날이 아닌가. 하지만 슬프게도 이날 개소식에 초대받은 탈북자는 한 명도 없었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을 비롯한 높은 공직자들만 현판 앞에서 활짝 웃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주인이 받는다’는 속담처럼 북한인권법 통과로 통일부엔 국장 자리가 2개나 생겼고, 과도 4개나 신설됐다. 앞으로 퇴직 공무원들의 소중한 일자리가 될 예산 134억 원짜리 북한인권재단도 생겼다.
하지만 탈북자는 주연도, 조연도 아니었다. 이날 행사장엔 초청받지 못한 탈북 단체장 3명이 나타났다. 이들은 북한인권재단 이사 12명 중에 북한 인권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탈북자를 포함시켜 달라는 내용이 담긴 요구서를 전달했다. 탈북자 정착을 지원하는 공공기관인 남북하나재단은 매년 2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쓰고 있지만 탈북자 출신 이사가 한 명도 없다.
북한과 탈북자를 다룬다는 기구와 예산, 자리는 계속 생겨나지만 탈북자 사이에선 “탈북자 팔아 남한 사람만 먹고살지 말라”는 말도 나온다. 일부 과격파의 목소리로만 치부할 수도 없다.
남북관계 악화로 일이 줄어든 통일부는 탈북자 정착을 주요정책 1순위로 내세우고 전체 사업예산의 70%를 투입하고 있다. 그런 통일부 직원들은 진심으로 탈북자 정착에 관심이 있는 것일까. 남북하나재단에 기부금 명세를 요청해 살펴보니 통일부 직원 전체 528명 중 불과 3%인 17명만 매달 기부하고 있었다. 17명의 평균 기부액수는 4500원이었다. 장관도 차관도 명단에선 볼 수 없었다. 통일부 고위공무원 중엔 기조실장만 월 5000원씩 내고 있었다.
이런 통일부가 재단엔 탈북자 정착을 위한 소액기부를 장려하라고 독려하고 모금 실적을 평가에도 반영한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는 남북하나재단 상담원은 80명 중 절반 이상이 기부에 참가했다. 1000원 한 장 안 내는 사람들이 내릴 평가가 두렵다는 이유도 있다. 1인당 평균 기부 액수도 8400원으로 통일부의 약 2배인데, 상담원의 3분의 1은 탈북자다.
통일부는 탈북민의 봉사 활동도 적극 장려한다. 5∼8월 탈북자 단체들은 47회 이상의 봉사활동에 연인원 약 500명을 참여시켰다. 영세민 임대주택에서 기초생활수급권자로 사는 탈북자가 남쪽 사람들 눈에 예쁘게 보이려고 눈물나게도 봉사라는 이름의 대국민 인식 개선사업에 참여하는 셈이다. 정작 통일부의 사회공헌활동은 3년째 전무하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 것일까.
행복할 것이니 탈북하라는 선전보단 탈북자 3만 명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 몇 만 배 더 중요하다. 현실은 아직도 그런 행복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목숨 걸고 남쪽에 온 탈북자의 5%가량이 차별과 암울한 미래에 절망해 한국 사회를 떠났다. 외국으로 가려는 탈북자는 훨씬 더 많다. 대통령이 약속한 “자유롭고, 차별과 불이익이 없고, 동등하게 대우받고, 각자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며 행복을 추구하는 세상”은 어디에 있을까. 꿈에서라도 한 번 봤으면 좋겠다.
2016-10-20 탈북자 스스로 정착 제도를 만들면 어떨까
▲2004년 7월 베트남에서 집단 입국한 탈북자들이 전세기에서 내리고 있다. 이 사건 후 정부는 탈북자 정착지원 기본금을 삭감했다. 동아일보DB
노무현 정권 때 탈북자 정착지원 기본금이 기존의 55% 수준으로 대폭 삭감됐다. 최근 노 정부 핵심 실세들이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 전 북한의 의견을 물었다는 의혹으로 시끄럽지만, 설마 정착금 삭감까지 상의하진 않았을 거라 믿는다.
다만 그 시기를 두고 말이 많았다. 2004년 7월 베트남에서 탈북자 468명을 한꺼번에 데려왔다가 북한의 거센 항의를 받은 지 반년도 안돼 정착금 삭감 제도가 도입됐기 때문이다. “정착금으로 가족을 또 데려오는 게 골치 아파 만든 법”이란 이야기도 들었다. 설마.
어쨌든 새 제도는 “단점을 보완한 개선 정책”이라는 정부의 홍보와는 달리 탈북자를 참으로 많이 울렸다. 이때부터 탈북자는 평균 10평대 초반 임대주택과 700만 원을 기본금으로 받게 됐다. 이 중 일시금은 300만 원. 나머지 400만 원은 3개월에 100만 원씩 나눠 주었다.
국내 입국을 도왔던 탈북 브로커에게 300만 원을 주고 나면 탈북자는 사회에 나온 첫날부터 라면 사먹을 돈도 없다는 뜻이다. 정부의 대책은 “브로커 비용을 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비현실적 일을 강요한 것이다. 브로커도 옥살이까지 각오하고 탈북자를 데려온다. 불법으로 버스를 대여하고, 여기저기 숨겨놓은 비밀 숙소를 거쳐 일주일 동안 중국 대륙을 횡단해 동남아까지 오면 비용도 꽤 든다. 이 코스로 패키지 여행을 해도 이보다 낮은 가격이 나오기도 힘들 것이다. 중요한 것은 브로커 비용을 주지 않으면 탈북자들이 더는 올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눈물의 첫 달을 버티고 나면 동사무소에서 기초생활수급비 40만 원을 6개월간 받을 수 있다. 분할 지급되는 정착금까지 합치면 한 달에 70만 원 남짓이다. 먹고살 수는 있지만 장만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의복, 휴대전화, 가전제품, 가구 등을 모두 새로 사야 한다. 여기에 아파트 임차료와 관리비, 통신비도 나간다.
결국 당장 일을 해야 살 수 있다는 뜻이다. 허나 한국 사회를 전혀 모르는 탈북자가 허둥지둥 얻는 일자리는 대개 외국인노동자조차 기피하는 최악의 근무환경이다. 배려란 것이 들어설 틈도 없고, 말투조차 매우 거친 곳이 대부분이다. 탈북자들은 일이 힘들어서라기보다는 멸시와 수모에 못 견딘다. 몇 달 못 버티고 나와 다시 직업을 구해도 사정은 마찬가지. 점점 사람이 무서워지고 다시 취직할 의지는 사라져간다. 인터넷엔 “너희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집과 정착금을 받고도 불평만 하니 탈북자를 받지 말자”는 댓글이 가득하다.
노무현 정권이 만든 정착 제도의 골격은 보수 정권으로 바뀌어도 그대로다. 정부마다 생색내는 버전만 조금씩 달라지고 분할 지급분 100만 원을 일시금으로 돌렸다는 차이에 불과하다. 탈북자의 생활도 변함이 없다. 4개월째 매끼 라면만 먹고 산다는 군관 출신 탈북자도 만나봤다. 너무 야윈 그에게 “뭘 먹고 사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충격적인 대답을 한 것이다.
제도와 사고방식 등 모든 것이 북한과 정반대인 곳에 온 탈북자에겐 초기 1년이 정착에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지원도 이때에 집중돼야 한다. 하지만 공무원들이 짜놓은 정착 제도는 학원, 자격증 취득, 취업 등의 코스를 순서대로 통과할 경우 1년 뒤부터 임무를 완수한 데 대한 보상인 양 추가 인센티브를 주는 식이다.
공무원들에겐 탈북자 정착 실태는 숫자일 따름이다. 오자마자 극한의 생존 환경에 빠뜨려 마구잡이로 취직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도 정착 제도가 개선돼 취업률이 높아졌다고 홍보한다. 탈북자의 절망과 눈물을 재는 지표는 애당초 없다. 선진국처럼 먼저 온 탈북자들이 직접 정착 제도를 설계했다면 전혀 달랐을 것이다. 배고플 때의 빵 한 개가 배 채운 후의 빵 세 개보다 더 가치가 있음은 배고파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법이다.
사선을 헤쳐 온 탈북자에겐 반드시 한숨 돌릴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여유가 생기고 적합한 일자리를 찾아 연착륙할 수 있다. 이런 황금의 여유를 최소 반년만 가진다면 탈북자의 정착 의지와 행복감은 확 높아질 것이다.
예산이 더 드는 일도 아니다. 빛 좋은 개살구처럼 멀리 달아놓은 인센티브를 10억 원 정도만 앞으로 돌리면 된다. 탈북자를 위한다며 전국에서 벌이는 사업도 재검토해야 한다.
매년 1000명가량 들어오는 탈북자도 감당하지 못해, 오자마자 부풀었던 희망을 눈물과 함께 홀로 라면 국물에 말아 마시게 해서 되겠는가. 이러고도 북한 주민에게 자유와 풍요가 기다리니 탈북하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탈북민은 먼저 온 통일이며 통일의 시험장”이라며 정착 제도 개선을 주문했다. 탈북민이 왜 시험장인진 모르겠지만, 통일의 주체로는 보지 않는 것 같다. 대통령의 새로운 주문에 개선이란 이름의 수술용 칼을 쥔 공무원들이 시험장 수술대에 누워 있는 탈북자의 어딜 또 아프게 쑤실지 참말로 걱정스럽다.
2016-10-25 한국의 50년 전을 닮은 북한 무역
요즘 세계 경제가 썩 좋진 않습니다. 북한처럼 고립된 나라야 세계 경제에 위기가 오던 호황이 오던 실감이 전혀 나지 않겠지만, 다른 나라들은 다릅니다.
서로 경제가 밀접히 연관돼 있다 보니 어느 나라 경제가 침체되면 다른 나라도 영향을 받습니다.
특히 수출주도형 나라들이 세계 경기의 영향을 밀접히 받는데, 수출 위주의 경제 정책이 위주인 남쪽 역시 세계 경제가 좋지 않으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은 지난해에 사상 처음으로 세계 6위의 수출대국 자리에 올라섰습니다. 세계무역기구에 따르면 한국의 작년 수출액은 5269억 달러로 집계됐습니다.
6위라는 숫자만 보면 그게 대단하냐 할 수 있지만 이건 세계 200여개 나라 중에 6위입니다.
한국보다 위에 있는 수출 국가는 중국, 미국, 독일, 일본, 네덜란드인데, 이중 네덜란드만 인구 1680만 명으로 한국보다 인구가 작습니다.
중국, 미국, 독일, 일본 정도는 여러분들도 잘 아는 세계 경제 강국이고 한국보다도 인구가 훨씬 많은 나라들이죠.
한국 아래 순위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와 같은 서구 강국이 있습니다. 이걸 보면 한국이 대단한 것이죠.
한국의 세계 수출 순위는 세계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12위에서 2009년 9위, 2010년 7위로 뛰어오른 뒤 5년 만에 또다시 한 계단 올라서 7년 만에 6계단 상승했습니다.
이 기간에 수출액도 2008년 4220억 달러에 비해 1000억 달러 넘게 늘어난 5269억 달러가 된 것입니다.
한국이 세계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35%에서 3.46%로 상대적으로 올라갔습니다.
작년 세계 최대 수출대국은 2조2749억 달러 어치를 수출한 중국이 차지했습니다. 한국보다 4.3배 정도 많은데, 인구는 한국의 26배 정도 많으니 1인당 수출규모는 비교할 바가 못 되는 것이죠.
중국은 임금이 저렴하다 보니 세계 중요 기업들이 다 중국에서 물건을 생산해 가져가기 때문에 수출액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수출액 2위는 미국으로 1조5049억 달러입니다. 인구 3억의 미국이 인구 5000만 명의 한국에 비해 인구는 6배 많은데 수출액은 3배 정도만 많습니다.
3위 독일은 1조3289억 달러, 4위는 일본은 6251억 달러, 5위는 네덜란드는 5670억 달러로 집계됐습니다.
일본 인구는 1억3000만 명 정도인데, 수출규모는 겨우 1000억 달러 정도 한국보다 많습니다. 한국이 7년 만에 수출규모를 1000억 달러 올린 것을 보면 따라갈 수 있는 수준입니다.
물론 수출액이 곧 그 나라가 잘 사는지 판단 기준은 되지 않습니다. 수출액이란 것은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장마당에서 물건을 판매할 때 계산하는 매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하루에 쌀 10톤씩 파는 쌀 장사꾼이 있고 1톤씩 파는 장사꾼이 있다고 합시다. 돈을 누가 더 많이 벌겠습니까. 당연히 많이 파는 장사꾼이 벌게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쌀 1톤에 600만 원 정도 한다고 하면 10톤 파는 장사꾼은 6000만 원 어치 팔고, 텔레비전 파는 장사꾼은 1000만 원 어치만 팔았다고 하면 누가 더 많이 벌겠습니까.
이건 모릅니다. 쌀 파는 장사꾼은 아무리 매출이 많아도 남겨 먹는 게 적으면 이윤이 적을 수 있고 텔레비전 파는 장사꾼은 보다 많이 남겨 먹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국가가 수출액은 적어도 한국보다는 잘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나 미국 역시 1인당 수출액을 따지면 우리보다 적지만 생활수준은 높습니다.
한국이 세계 6위 수출국이 된 것은 지난해 다른 나라들이 수출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계 경제 부진과 저유가로 수출단가가 하락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수출이 감소했는데, 미국이나 유럽연합, 일본에 비해 한국과 중국은 상대적으로 선전한 편입니다.
한국의 수입액은 4368억 달러로 수출한 돈보다 수입한 돈이 900억 달러 정도 적습니다. 팔 건 많은데 사올건 적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럼 북한의 무역 규모는 어떨까요? 지난해 북한은 수출 27억 달러, 수입 35억6000만 달러입니다. 번 돈보다 쓴 돈이 더 많은 격입니다.
수출액은 한국의 200분의 1밖에 되지 않고 수입액은 120분의 1 정도입니다.
인구는 2배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이렇게 큰 격차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올해는 국제사회의 강도 높은 대북제재가 이어지면서 북한의 무역 규모는 더욱 줄어들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의 무역은 91%가 중국에 의존해 있습니다. 공식무역만 이 정도니 밀무역까지 합하면 대외 무역의 거의 95%를 중국에 의존한다는 말입니다. 중국이 어느 순간 거래를 끊으면 북한은 망하는 거죠.
북한의 무역을 가만히 보면 한국의 1960년대와 닮아 있습니다.
남쪽의 1961년 수출상품을 1등부터 10위까지 꼽아보면 1위가 철광석이고 그 뒤를 중석, 실, 무연탄, 오징어, 생선, 흑연, 합판, 쌀, 돼지털입니다.
철, 무연탄, 오징어, 물고기, 흑연 이런 것은 지금 북한의 주력 수출품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뭔 의미일까요?
가난하면 가공을 못하고 원자재를 내다 팔 수밖에 없는데, 북한이 지금 딱 한국의 50년 전 모습이란 소리입니다.
한국의 작년 수출 주요 품목은 1등부터 5위까지 꼽으면 반도체, 자동차, 선박, 통신기기, 석유제품으로, 모두 팔면 이윤이 많이 남는 상품입니다.
남과 북은 이처럼 50년이 넘는 경제 발전 격차를 갖고 있는데 북한은 여전히 자기들이 대단한 강국인양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돈키호테와 같은 망상은 지금까지로도 충분합니다. 김정은은 이제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어떻게 해야 인민이 잘 살 수 있을지, 뭘 팔아야 돈을 벌지 이런 것이나 고민하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2016.11.03 애기신 무당의 중앙당 간부 집 굿풀이
▲2009년 3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나선 김정일이 투표용지를 받고 있는 모습. 동아일보DB
탈북 직전 점쟁이를 찾아갔다. 김일성대에서 6년 동안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할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주체사상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건만 목숨 걸 순간이 되니 그따윈 소용없었다.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인 건 알겠는데, 주체사상은 내일 내가 죽을지 살지를 알려주지는 않으니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때 지인이 “용한 점쟁이가 있다”며 나를 점쟁이에게 데려갔다. 40대 중반 여성 점쟁이의 말 중에 “먼 길 떠날 팔자야. 물 건너가면 크게 되겠어. 다 잘될 거야”라는 말이 확 들어왔다. 속으론 “내가 강 넘으려는 걸 어떻게 알았지” 하고 기겁했다. 점 본 값은 쌀 2kg가량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이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 과정에서 국가안전보위부에 잡혀가 고문을 받을 때조차 “용한 점쟁이가 물 건너가 크게 될 팔자라고 했으니 여기서 죽을 팔자는 아닐 거야”라고 믿으며 의지를 가다듬었다. 쌀 2kg 값에 잘될 것이란 굳은 믿음을 가졌으니 결과적으로 손해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앞날이 불안하고 확신이 없으면 초월적 존재나 운세학 등에 기대고 싶어지나 보다. 두만강을 건널 때는 교회를 구경도 못한 나조차 “하나님 잡히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까지 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죽기를 각오할 일이 없어서인지 미신과는 담을 쌓았다.
한 해의 운세를 점쳐보는 토정비결도 북한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남쪽에 처음 왔을 때 지하철 책 할인 코너에서 ‘토정비결’을 발견했다. 그때 북한에선 토정비결은 가보(家寶)였다. 필사본이라도 있으면 운세를 봐달라는 사람이 몰려들어 큰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런 귀한 책이 단돈 만 원도 안 했다. 냉큼 샀는데 몇 년 지나고 보니 그 책이 어디 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요즘 토정비결은 북에서도 살 수 있다고 한다. 중국돈 300위안(약 5만 원·북한 돈 37만 원)인데, 이 돈이면 쌀 60kg 이상, 옥수수는 100kg 이상 살 수 있다. 요즘은 토정비결 대신 두께는 3분의 1 정도, 너비도 3cm 작은 운세 관련 책이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2013년경부턴 컴퓨터 있는 집 대다수가 한국에서 들어간 사주팔자 프로그램을 깔아 놓고 매일 운세를 보는데, 요즘 5.0 버전이 가장 최신이라며 널리 퍼지고 있다.
불확실성이 많아진 북한에선 요즘 그야말로 미신의 전성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사람들은 당과 수령을 마음속에서 파버리고 그 대신 미신이든 귀신이든 아무튼 보이지 않는 존재를 채워 넣었다. 요즘엔 정월 대보름이면 북한 도시 주변에 있는 산과 강은 대부분 불바다가 된다. 촛불을 켜고 빙 둘러서서 소원을 빌고, 강물에 촛불과 돈을 넣은 종이배를 둥둥 띄운다. 몇 년 사이 생겨난 풍경인데 아무리 단속해도 소용이 없다. 간부들도 차를 타고 다리를 지나는 척하면서 돈을 강에 던져버린다고 한다.
점집이 십 리에 하나씩 있다는 말도 나온다. 하도 북에 점쟁이가 넘치다 보니 북한을 뛰쳐나와 한국에서 무당을 하고 있는 탈북여성도 몇 명 있다.
북한은 종교와 미신이 혁명사상을 좀먹는 사회악의 온상이라며 강력하게 처벌하고 있지만 점집은 나날이 늘어난다. 하긴 간부들부터 미신에 매달리니 통제가 될 리 만무하다. 심지어 요샌 보위부 수사관들도 몰래 점집에 가서 범인을 잡아달라고 부탁한다고 할 정도니.
이름이 좀 알려진 점쟁이들이 몰래 평양에 불려 다닌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한 탈북인은 “둘째 누나가 애기신을 업었다고 하면서 점을 봐주는데 형제가 다 한국에 왔는데 점쟁이 누나만 벌이가 좋아 한국에 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중앙당 간부에게 굿과 부적을 해주고 500달러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또 다른 탈북민은 친한 점쟁이가 “중앙당 간부 집을 돌며 점을 봤는데 하나같이 팔자가 새까맣다. 그래도 돈 받았으니 좋은 말만 해주고 왔다”고 말했다고 했다.
김정은이 걸핏하면 숙청하니 중앙당 간부들이야말로 미래가 제일 불안할 집단일 것이다. 장령(장성) 전용 병원인 어은병원의 동의의학과(한의과)에선 ‘상문(喪門)’을 본다는 명목으로 팔자와 관상까지 공공연하게 봐준다고 한다. 팔자가 새까맣다는 중앙당 간부들이 지금도 살아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들이 두려워해야 할 액살(厄煞)은 안 보이는 귀신이 아니라 김정은이다.
북한 권력자들도 미신을 잘 믿었다. 중요 대회가 소집되는 날짜를 보면 대개 손이 없는 날이다. 김정일의 경우는 숫자 3에 집착했는데 그가 대의원 선거 때 출마한 선거구는 333호나 666호처럼 3과 연관되는 번호였다. 김정은도 재작년 111호 선거구에 출마했는데 세 숫자를 합치면 3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3에 집착해도 소용없나 보다. 김정일은 12월에 69세로 죽었다. 최고의 점쟁이가 찍어 주었을 숫자 3은 행운의 숫자가 아닌 액운의 숫자였던 것 같다. 김정일이 환생한다면 “내가 다 해봤는데, 사교, 미신, 점쟁이 따윈 절대 믿지 말라”고 목청껏 외칠지 모를 일이다.
2016-11-17 두만강의 변신과 대량 탈북시대의 종말
▲북한 북부 국경에서 살림집을 건설한 북한 군인들이 만세를 부르며 자축하고 있다. 우리민족끼리 홈페이지
요샌 북한이 북부 홍수 피해지역 살림집 건설을 완공했다는 소식 같은 건 언론의 가십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북한은 50일 동안 총력을 쏟아부어 1만1900채의 살림집을 완성했다고 주장하나 내부공사까지 끝낸 것 같진 않다. 살림집 겉모양은 훌륭해 보인다. 예전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북한의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었지만 이젠 북한이 중국 같고, 중국이 북한 같은 착시현상까지 벌어질 만하다.
현지 주민은 “열쇠만 들고 들어가 살 수 있도록 하라”는 김정은 지시가 내려왔다며 살림살이 전부를 당국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글쎄. 그렇게까지 해줄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낡은 집 대신 새 집이 생기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듯하다.
북한은 이번 수해를 두고 ‘전화위복’이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낡은 부락들이 현대적으로 바뀌게 됐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 전화위복이란 말은 김정은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북한은 두만강에 바짝 붙어있던 마을들을 수차례 이전하려고 시도했다. 강 옆 부락들이 탈북의 온상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실제로 실행하지 못했던 것은 그 많은 마을을 강제로 철거해 옮길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을 이번 홍수가 해결해준 셈이다. 그토록 눈엣가시 같던 강 옆 마을들이 사라졌다. 북한은 멀리 산 밑으로 마을들을 이전했다. 핑계도 좋다.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서란다.
이 때문에 새로 지어진 마을들을 보면서 “집들이 멋있다”고 감탄하기에 앞서 “이젠 탈북이 정말 어려워지겠구나”라는 절망스러운 생각부터 들었다.
집단 부락화된 마을엔 담장이 없다. 옆집 모르게 밀수하는 것도 불가능해졌고, 한국 드라마를 보기도 힘들어졌으며, 수상한 외부인은 즉시 고발될 것이다. 국경경비대와 주민들의 결탁은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어느 집에 어느 군인이 드나드는지 전체 마을이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탈북하기 위해 감수해야 할 부담도 더 커졌다. 국경 사람들은 김정은의 은혜를 받았다. 만약 탈북했다 체포되면 현대적 주택을 선물로 내려준 지도자의 은혜를 팽개치고 도망친 배신자라는 무서운 낙인이 찍히게 된다. 지금은 멋진 집이 생겼다고 좋아할 국경 사람들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숨 막히는 게 뭔지 체감할 것이다.
게다가 국경경비는 나치의 집단 수용소가 울고 갈 정도의 구조로 완성되고 있다. 탈북한 국경경비대원은 “두만강 경비대 한 명이 맡고 있는 구간은 8m”라고 말했다. 입대할 때 아예 “조국이 맡겨준 8m를 목숨으로 사수하겠다”는 선서까지 한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과거 마을들이 있었던 두만강 옆을 따라 넓은 경비도로를 만들고, 양옆에 철조망까지 세우면 완전한 국경 봉쇄가 가능해진다. 높은 곳에 폐쇄회로(CC)TV까지 설치하면 두만강엔 개미 한 마리 접근하기 어려워진다.
심지어 북한은 두만강을 따라 대못이 튀어나온 대못판을 깔아놓는 것도 모자라 지난해부턴 목함지뢰까지 묻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경 소식통은 “지난해부터 지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목함을 여러 기업들에 할당해 걷어 들였고 군수공장에서 폭약을 설치해 주요 탈북 통로에 묻고 있다”고 말했다. 탈북을 시도하는 사람은 죽어도 좋다는 뜻이다.
철조망과 지뢰, 대못판을 피해 두만강을 넘는다고 해도 끝이 아니다. 중국은 홍수로 파괴된 철조망을 과거보다 더 튼튼하게 복구하고 있고, 두만강 바로 옆에 군부대도 증강해 주둔시키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대량 탈북의 시대는 불행하게도 이젠 끝난 듯하다. 11일 저녁을 기점으로 한국 입국 탈북자는 3만 명을 넘었지만, 어쩌면 이 안에 포함된 사람들은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보수정권 9년 동안 아무리 북한을 압박하고 한국으로 넘어오라 외쳐도 정작 현실은 원하던 것과는 정반대가 됐다. 핵과 미사일 개발 속도는 더 빨라지고 이젠 탈북까지 막히게 됐다. 게다가 제 코가 석자인지라 북한에 대한 남쪽 사람들의 관심도 사라지고 있다.
국경이 막힐 것임을 재빨리 눈치 채고 지난달 말 탈북한 노동당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오는 사람들은 진짜로 죽음을 각오하고 와요. 무서워서 못 넘어옵니다. 잡히면 영영 나오지 못하는 수용소에 갑니다. 그래도 백성들은 다 철조망을 붙들고 서서 언제면 남쪽으로 갈까, 모두 그렇습니다.”
요즘 우리를 매일 어이없게 만드는 소식들도 한국을 동경하는 북한 주민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북한 당국은 최근 남쪽의 상황을 거의 실황 중계하듯 신이 나서 보도하고 있는데, 12일 밤의 100만 촛불시위 소식도 반나절 만에 전했다. 하지만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의 요구대로 물러난다면 저런 민주주의 체제로 가서 살아보고 싶다는 북한 사람들의 소망은 오히려 몇 곱절 커질 것 같다
2016-12-15 인민의 기대를 팽개친 김정은 집권 5년
북한이 김정은의 세상이 된 지 17일로 딱 5년이 됐다. 당일 낮 12시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다가 김정일 사망 뉴스를 보고 깜짝 놀라 회사로 뛰어 올라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참 빠르다.
아버지가 급사한 뒤 TV에 나타난 김정은에겐 자신감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 표정은 해마다 달라졌다. 지금은 얼굴에 두려움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지나친 자신감이 불러오는 만용과 객기까지 엿보일 정도다.
그런 사례 중 하나가 김정은이 즐기는 전쟁놀이 규모다. 4, 5년 전엔 포사격을 시켜도 한 개 대대나 연대 정도를 끌고 나왔지만, 요새는 최소 몇 개 군단 산하의 수백 문을 멀리 원산의 자기 집 근처까지 끌고 와서 섬을 향해 포탄을 마구 퍼붓는다.
11일에 김정은이 참관한 청와대 습격 훈련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북한이 공개한 사진 속 청와대 모형 3채는 대리석에 청기와까지 얹어 만든 아주 그럴듯한 건물이었다. 크기도 청와대의 절반이라고 한다. 북한의 경제력을 감안할 때 이 정도 건물을 지으려면, 한국으로 치면 빌딩 하나 세우는 셈일 것이다.
그런데 특수전 군인 수십 명이 등장해 마구 총질하고 불을 지르더니 뒤이어 방사포 부대의 무차별 포격으로 순식간에 몽땅 무너뜨렸다. 그걸 보면서 김정은은 크게 웃으며 즐겼다. 적어도 이 놀이에 든 돈을 생각한다면 저렇게 얼굴이 밝을 순 없을 것이다. 그걸 보면서 “5년 뒤엔 서울을 날려 버리는 ‘놀이판’을 벌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지금쯤 김정은은 “5년 해보니 통치 같은 건 별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며칠 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별장에 틀어박혀 있어도 찾는 사람도,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다. 가끔 머리도 식힐 겸 시찰을 나가 몇 마디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그럴듯한 ‘교시’로 둔갑돼 인민에게 전달된다. 고위급 간부 중 눈빛이 건방져 보이는 자를 가끔 찍어내 죽이면 할아버지뻘인 수하들은 손으로 입을 막고 무릎을 꿇고 눈도 마주치지 못한다. 뭔 짓을 해도 말릴 사람이 없는 시스템을 세습해준 할아버지,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고마울 것이다.
김정일 사망 직후엔 인민의 눈치가 보여 김일성 광장에서 “더는 인민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라고 연설이라도 했지만 5년을 지나 보낸 지금은 그런 거짓말조차 할 필요조차 못 느끼는 것 같다. 인민의 눈이 두렵다면 아버지 5년째 제삿날을 코앞에 두고 돈 들여 건물을 짓고 포탄으로 날려버린 뒤 좋다고 웃을 순 없는 것이다.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참담한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은 외국물을 꽤 먹은 김정은이 집권 후 개혁개방 정책을 펼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정은 5년간의 행보는 그와는 정반대였다. 헛된 기대였다. 마치 차디찬 바다에 자식을 수장시킨 부모의 심정을, 부모를 불행히 잃은 대통령이 누구보다 잘 이해할 것이라고 한국인들이 착각했던 것처럼….
남쪽엔 국민과 담을 쌓고 자기만의 세상에서 살던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는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존재한다. 하지만 시리아 상황에 비춰 보면 북한과 같은 공포 독재 체제에선 주민 수십만 명이 죽고 수백만 명이 난민으로 떠돌아도 정권이 붕괴될 것으로 자신할 수 없다. 한국은 권력자의 허상에 잠시 속았을지라도 국민의 힘으로 바로잡을 수 있지만, 북한 인민은 김정은 밑에서 거짓된 줄 알면서도 영원히 속은 척하며 사는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체제가 만드는 차이이다.
더구나 김정은은 요새 남쪽 정세를 보면서 “내가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하려면 북쪽엔 민주주의의 ‘민’자도 허용하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질 것 같다. 한국의 현 상황이 북한에선 공포통치의 고삐를 더 죄는 반면교사가 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북한 매체들도 아직 주민에게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음을 전하지 않고 있다. 탄핵 전에는 매일같이 “남쪽에서 전 국민이 떨쳐나선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고 생중계하듯 대대적으로 전했던 것에 비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보도 태도다. 인민이 뭉쳐 일어나면 김정은도 내몰 수 있다는 상상 자체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듯하다.
절망적인 북한을 보면 인민의 삶을 전혀 모르는 김정은 옆에 일반인 비선 실세가 좀 있다면 차라리 상황이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마저 해본다. 술에 취해 늙은 군 실세들에게 밤새 반성문을 쓰게 하는 안하무인의 김정은이라면 관저를 드나드는 일반인 비선 실세가 더 망칠 것도 없어 보인다. 농단할 국정도, 파괴할 헌정도 없는 저 북한의 김정은 1인 독재 체제는 순조롭게 5년째를 넘기고 있다. 이런 현실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사랑하는 혈육을 남겨두고 떠나온 고향에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탈북자들의 가슴에선 매일 피눈물이 흐른다.
2016-12-29 ‘김일성평전’과 김일성의 실체
▲30부만 가까스로 출판된 ‘김일성평전’. 오른쪽 사진은 1930년대 초반 김일성 장군으로 활동했던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군사위 서기 양림이다
논란이 예상되는 새로운 책을 하나 알게 됐다.
‘김일성평전(상·하편)’. 상편만 700쪽이 넘는다. 저자 유순호는 중국 옌볜에서 나서 자랐고 오래전부터 항일투쟁사에 천착했다. 동북항일연군 군장 조상지의 전기 ‘비운의 장군’(1998년)을 쓴 지 3년 뒤 중국에서 “사회주의 문화시장을 교란한다”는 죄목으로 활동 금지를 당해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이후 조상지의 후임인 허형식 군장의 전기 ‘만주 항일 파르티잔’(2009년)을 출판했고 이번에 김일성평전을 마무리했다.
난 김일성 연구의 한 획을 그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서대숙)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와다 하루키)은 물론이고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까지를 모두 정독했다. 이 중 유순호의 김일성평전은 과거 모든 김일성 연구서를 뛰어넘는 ‘끝판왕’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저서들이 광복 이전의 기록물 중심인 데 반해 김일성평전은 항일 연고자들의 회고, 중국 공산당의 비밀자료실에 보관된 문헌들과 수백 장의 진귀한 사진 등 과거 김일성 연구자들이 접할 수 없었던 생생한 중국 측 자료들로 채워져 있다. 동북의 항일투쟁사를 논함에 있어서 중국 측 자료의 중요성은 거의 절대적인데 드디어 그 빗장이 풀린 것이다.
저자는 1980년대부터 20년 넘게 관련 자료를 모으고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당시엔 김일성의 상관이던 인물들이 중국에 많이 생존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들이 거의 다 세상을 떠나 더 이상 만나거나 얘기를 들을 수 없다.
김일성평전은 김일성 신화의 거품을 걷어내고 있다. 혁명 모금을 한다며 부자들을 협박하던 10대의 김성주도, 만주에 퍼진 김일성 신화를 이용하려 이름을 개명한 20대의 김성주도 당시 함께했던 이들의 증언으로 밝혀내고 있다. 앞서 만주에서 김일성으로 활동했던 인물들이 누구였는지도 책은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북한이 크게 선전하는 ‘북만원정’도 사형 당할 위기에 처하자 야반도주한 것이며 1938년에 김일성이 일제에 항복하려 했다는 증언도 들어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1920, 30년대 만주는 거대한 항일의 바다였고, 김일성은 작은 실개천이었다. 김일성의 가장 큰 업적은 죽거나 사로잡히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최후까지 살아남은 김일성은 수많은 항일 선배들의 업적을 가로채 실개천을 바다로 둔갑시켰다. 이런 신화 조작은 지금도 3대 세습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한 중국인 연고자는 저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일성이 자기가 하지 않은 일, 남이 한 일도 자기가 한 일이라고 거짓말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 이것은 도적질과 같은 행위가 아니고 뭐겠는가.”
나는 통일 후 북한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김일성 신화를 벗겨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은 옛날 반공교육 시대에 만들어진 김일성 가짜설로는 어림도 없다. 김일성과 함께했던 이들의 증언은 빼고, 그냥 ‘카더라’식 위주로 채워진 주장은 북한 역사보관소의 원본 문헌들만 공개돼도 즉시 생명력을 잃을 것이다.
김일성평전은 통일 후엔 북한에서 밀리언셀러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 책이 완전무결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는 책은 찾기가 어렵다.
북한은 김일성평전의 출판을 막기 위해 원고를 사겠다는 등 각종 회유를 했고, 사료를 갖고 뉴욕까지 날아와 이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역사는 진실이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원고를 들고 서울로 왔다. 하지만 그가 100여 개의 출판사와 접촉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보수단체가 고소하면 변호사비로 큰돈을 날릴 것”이란 이유라고 한다. 자비로 우여곡절 끝에 겨우 상편 30부만 찍었지만 이대로라면 이 책은 출판사를 찾지 못해 묻힐 처지다.
이미 1980, 90년대에 김일성의 항일투쟁사를 담은 책들이 출판됐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2016년의 대한민국에 접어든 마당에 김일성 신화를 무너뜨릴 저서가 김일성의 항일활동을 다뤘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있다.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우리는 진보한 것인가, 퇴보한 것인가. 역사 앞에 정직하게 대할 자세와 준비는 돼 있는 것인가. 북한의 역사 왜곡을 당당히 단죄할 수 있을까. 김일성평전 하나 찍을 아량조차 사라진 곳이 된 것일까.
난 김일성평전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사람이 어떻게 인민을 철저히 배신했는지를 통일 후의 북한 사람들이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7-01-12 김정은의 반성문 정치와 신년사의 자아비판
▲올해 신년사를 발표하던 김정은은 “능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다”며 갑자기 머리 숙여 사과했다.
2013년 초 조선인민군출판사 편집부장이 체포됐다. 불평불만을 내세우며 태업하는 등 출판사를 잘 이끌지 못했다는 죄였다. 군인들을 불평하지 못하도록 세뇌해야 하는 사람이 오히려 남보다 더 많이 불평했으니 문제가 크다고 본 것 같다.
그런데 뜻밖에 편집부장은 “죄를 용서해 주라”는 김정은의 지시를 받고 석방됐다. 4월부터 북한 전역에서 이 일을 김정은의 위대한 은덕이라고 선전하는 강연회가 열렸다. 강연회에서 전달된 내용은 이렇다.
“원수님(김정은)께서는 그를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읽으시고 ‘그가 지금 한순간 잘못했어도 과거 당을 위해 공을 세운 것이 없겠나. 그의 경력 자료를 다 가져오라’고 했다. 그가 병사 생활을 잘했다는 자료를 보시곤 ‘반성문도 진심으로 솔직히 쓴 것 같으니 99% 잘못했어도 과거 1%라도 잘한 것 있으면 용서해 주자’고 하셨다.”
자칫 정치범으로 낙인찍혀 가족과 함께 사라질 운명에 처했던 편집부장은 그렇게 김정은의 인간미를 전하는 표본이 돼 살아남게 됐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북한에서 사람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반성문을 쓰라는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그전까지 북한에서도 반성문은 명백히 잘못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만 썼다. 그러나 편집부장 사건이 있은 뒤부터는 노인들까지 1년에 최소 한 차례 이상 반성문을 쓰게 했다. 간부나 해외 파견자들은 훨씬 자주 써야 했다. ‘북한 통치의 10계명’이나 다름없는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60개 조항별로 위반 사실을 따져서 최소 10장 이상 써야 했고, 다 쓰기 전엔 집에도 보내지 않는다. 이런 위협적인 말도 꼭 따른다.
“솔직히 고백을 하면 과거 잘못은 다 용서가 되지만 반성문에 쓰지 않은 잘못이 드러나면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 내가 당신을 봐주려면 솔직히 써야 한다.”
북한은 급격히 불신 사회로 빠져들었다. 친한 몇 명이 모여서 한 일이나 발언이 누구의 반성문에 올라갈지 모르는 일이 됐기 때문이다.
반성문 바람이 불기 5개월 전인 2012년 12월 김정은은 “어디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모두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반성문 쓰기는 동향 파악은 물론이고 불평불만을 막고 공포 분위기를 만드는 데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런 시스템은 김정일의 통치방식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김정일은 후계자로 내정된 1970년대에 ‘전국 일일 직보체계’와 ‘생활총화제도’를 만들어 북한을 틀어쥐었다. 일일 직보체계는 당 조직과 국가보위성, 인민보안성이 해당 지역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각자의 라인을 통해 매일 중앙당 조직지도부에 보고하는 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에선 어떤 사건을 숨길 수가 없다. 가령 당에서 일부러 누락시킨 보고가 보위성을 통해 전달되면 처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김정일은 전국을 파악해 장악했고 지금도 이런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된다. 김정은은 여기에 더해 반성문으로 개인별 약점까지 틀어쥐려 하는 것이다.
반성문은 생활총화의 ‘약점’도 보완했다. 생활총화는 대중 앞에서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을 하는 것인데 함부로 말해 상대에게 해를 입히면 소속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한다. 그래서 남의 결함을 비판할 때 매우 신중할 수밖에 없다. 반면 반성문은 몰래 고자질하는 것이기 때문에 양심적 죄책감조차 무디게 만든다. 세계에서 가장 정보화에 뒤처진 북한이 김정은 시대에 와서 역설적으로 최악의 ‘빅브러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일본 도쿄신문은 북한 내부 관계자를 인용해 흥미로운 기사 하나를 보도했다. 지난해 9월 김정은이 만취한 상태로 군 원로를 모아 놓고 “너희가 군사위성 하나 못 만든 것은 반역죄와 같다”고 고함을 치며 밤새 반성문을 쓰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난 김정은은 반성문을 들고 서 있는 군 원로들을 보고는 “왜 모여 있는가. 다들 나이도 많고 하니 더 건강에 신경을 써라”고 말했다. 숙청의 공포에 시달리며 밤새 반성문을 썼던 군 원로들은 긴장감이 풀어져 소리 내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이다.
일본발 북한 기사들은 사실 신빙성을 신중히 따져봐야 하지만 김정은의 ‘반성문 사랑’을 감안할 때 이 보도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김정은이 올 신년사에서 자아반성을 하면서 머리를 숙이는 장면을 보며 북한 간부들과 주민은 섬뜩했을 것 같다.
앞으론 “장군님도 저렇게 겸허히 반성하는데, 너희들은 사소한 잘못도 숨길 생각 마라”며 협박당할 일만 남았다. 누구를 숙청할 때 ‘당 앞에 맹세하고 쓴 반성문조차 거짓으로 썼다’며 더 가혹하게 처벌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인민 앞에 매일같이 반성해도 부족한 김정은이 거꾸로 인민에게서 반성문을 받아내는 이 기괴한 장면을 보면 기가 막힐 뿐이다.
2017-01-26 '바보’ 탈북자 유상준
▲2004년 자신이 중국에서 구출한 14세 탈북 소녀와 서울에서 반갑게 재회한 유상준(왼쪽)
탈북민 유상준(54)의 첫인상은 어수룩해 보인다. 말주변도 없다. 느릿느릿 말하다 “저처럼 북에서 농사나 짓던 놈이 뭘 알겠습니까”라며 자주 수줍은 표정을 짓는다.
알고 보면 그는 아주 빨랐던 사람이다. 남한으로 오는 게 아주 어려웠던 2000년 12월 남한으로 왔다. 한국 입국 탈북민 3만여 명 중 선착순 1000명 안에 들어간다.
남한에서 상상했던 그의 꿈은 2001년 7월 부서졌다. 아버지를 찾아 탈북했던 하나밖에 없는 12세 아들 철민이가 몽골 국경을 넘다 굶주림과 탈진으로 숨졌다. 차인표가 열연한 탈북 영화 ‘크로싱’(2008년)의 실제 인물이 유상준이다.
아들을 잃고 1년 넘게 우울증, 자살 충동과 싸우던 그는 2003년 훌쩍 중국으로 건너갔다.
http://voda.donga.com/3/all/39/795248/1
“중국엔 한국으로 오는 길을 모르는 탈북민이 너무 많았고, 한국엔 혈육을 데려오지 못한 탈북민이 너무 많았습니다. 먼저 온 내가 이들을 데려와야겠다 생각했죠.”
2004년 그가 첫 번째로 구출한 사람은 철민이 또래인 14세 탈북 소녀였다. 그 소녀는 지금 성균관대를 졸업한 27세 여성으로 성장했다.
이듬해엔 직접 새 탈북루트를 개척했다. 당시만 해도 탈북 브로커들은 한국으로 보내주는 대가로 수백만 원씩 받았다.
유상준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 한국에서 7만∼8만 원씩 일당을 받으며 몇 달 일해 돈을 벌어선 중국으로 건너가 탈북민을 구출했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한국에 와서 막노동을 했다. 구출한 사람 중 몇 명이 고맙다고 자발적으로 돈 봉투를 건넬 때도 있었지만 100만 원을 주면 50만 원은 다시 돌려줬다. 그 이상은 받아본 일이 없다.
유상준의 도움을 받아 한국까지 온 탈북민은 500명이 넘는다. 이 중 90여 명은 그가 직접 인솔해 몽골 국경을 넘었다. 그러던 중 2007년 7월 중국 공안에 체포돼 5개월 동안 수감생활도 했다. 내몽골 감옥에서 여름옷을 입고 영하 40도를 견디느라 이가 다 빠질 정도로 골병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 그는 1년 넘게 병치레를 하면서도 세탁소 운영과 아파트 경비 일로 돈을 모았다. 그 돈을 들고 2009년 중국에 건너갔다. 다시 탈북민을 돕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서 대북전단(삐라) 풍선이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고 그는 “중국에서 대북전단을 날리면 북한 깊숙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유상준은 중국에서 풍선 가스 구매처를 찾아다녔고, 인쇄물을 찍었다. 그러다 2011년 5월 중국 국가안전국에 잡혔다. 그를 신고한 것은 다름 아닌 탈북 여성이었다.
“눈을 가리고 팬티만 입은 채 24시간 동안 내내 맞았습니다. 2명씩 교대로 들어와 때렸는데 너무 맞아서 지금도 기억력이 성치 못합니다.”
그는 다행히 북송되지 않고 한국으로 추방됐다. 몇 년 뒤 자신을 신고했던 여성이 서울에서 탈북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상담사로 일하는 것을 우연히 보고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며 복수를 하지 않았다.
다시 중국에 갈 수 없게 된 유상준은 한국에 와서도 대북전단을 날려 보내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원통하게 숨진 아들의 한을 풀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대북전단을 보내는 곳을 몇 개월 따라다녔지만, 핵심 ‘영업비밀’은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한다. 탈북 루트를 혼자 개척했던 10년 전처럼 그는 이번에도 혼자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 출근 전 풍선 타이머를 연구했고, 퇴근해서도 연구에 매달렸다. 동네 재활용장에 사정을 해서 선풍기 타이머들을 모두 뜯어오기도 했다. 0.01mm 니크롬선(발열체의 일종)을 꿰느라 목 디스크가 걸렸다. 잠을 못 자며 4개월 꼬박 고생해 수천 m 상공 영하의 온도에서도 작동하는 타이머를 만들어냈다.
유상준은 요즘 지하철 전동차 청소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한다. 월급은 150만 원 남짓. 주거비와 교통비, 통신비, 쌀값 등을 다 합쳐 자기를 위해 쓰는 돈은 30만 원도 안 된다. 그는 임대 및 관리비가 13만 원인 임대주택에 홀로 살면서 돈이 아까워 난방도 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탈북 고아 2명을 후원했고, 지금도 탈북자 구출 후원금을 보낸다. 아들 둘을 군에서 잃고 홀로 사는 옆집 할머니를 위해선 TV와 전화기를 사주고, 눈 수술비까지 보탰다.
몇 달 월급이 모이면 남의 차를 빌려 대북전단을 조용히 북에 날린다. 그러곤 또 돈을 모은다. 필요한 사람에겐 자기가 연구한 노하우를 전부 가르쳐준다.
유상준의 한국 생활 16년은 이렇게 흘렀다. 그의 인생사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울컥해진다. 그는 자랑할 줄 모른다. 위에 쓴 유상준의 일대기는 그의 지인들에게 듣고 본인에게 확인한 것이다. 하나를 하고 열을 했다고 자랑하기 급급한 이 세상에서, 이런 ‘바보’가 탈북자 중에 소문 없이 숨어 있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2017-03-09 북한군 설계연구소장이 처형된 사연
김정은은 농구광으로 알려졌지만 11세 때엔 승마에 푹 빠졌던 적이 있다. 평양 미림승마구락부에 가면 김정은이 1990년부터 2013년까지 총 386차례나 승마를 했고, 특히 1995년 한 해 동안 149차례나 찾아와 집중적인 승마훈련을 했다고 해설사가 설명한다. 금수산태양궁전 건너편에 위치한 미림승마구락부 자리엔 원래 중대급인 북한군 ‘534 기마부대’가 있었다. 말이 기마부대이지 사실 김씨 일가 전용 승마장이다. 김정일도 이곳을 자주 찾았다.
북한에서는 황태자였지만 1990년대 말 스위스에 간 김정은이 현지에서 말과 전용 승마장을 구할 여력은 없었던 것 같다. 김정은은 말 대신 농구에 빠졌다. 당시 동창들에 따르면 김정은은 여학생들에게 말도 못 걸 정도로 수줍음을 많이 탔다. 그러나 농구공만 잡으면 승부욕에 불타 ‘폭발적 플레이메이커’란 평가를 들었다. 미국프로농구(NBA)에 푹 빠져 있던 김정은의 방에는 어떻게 찍었는지는 몰라도 그가 LA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 시카고 불스의 토니 쿠코치 등 당대의 유명 농구 선수들과 찍은 사진도 있었다고 했다.
나중에 북한 ‘최고 존엄’이 된 김정은은 2012년 평양에 물놀이장과 롤러스케이트장을 만들고 마식령에 스키장을 짓는 등 놀이시설 건설에 집착했다. 김정일의 요리사를 지낸 후지모토 겐지 씨는 2008년 8월 김정은이 “우리는 여름이면 제트스키도 타고 승마도 하는데 일반 사람들은 뭘 하면서 놀까” 하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아마 김정은에겐 놀이시설 건설이 인민을 위한 나름의 배려였던 것 같다.
승마의 즐거움도 전하고 싶었던지 김정은은 2012년 11월 미림승마장을 찾았다가 “이곳에 인민을 위한 승마장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지으라고 그림까지 그려가며 자세한 지시를 마원춘 국방위원회 설계국장에게 내렸다. 마원춘은 다시 구체적 설계 지시를 북한군 설계연구소에 맡겼다. 설계소장이 기초 도안을 살펴보니 건물 정면 뾰족한 지붕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림승마장은 대동강 바로 옆에 있는데, 겨울엔 강을 따라 강풍이 불어내려 온다.
설계소장이 마원춘에게 말했다.
“강풍이 센 이곳에 이 설계대로 지으면 자칫 지붕이 날아갑니다. 지붕 방향을 강과 반대로 돌려 앉히면 될 것 같은데 이런 의견을 좀 보고해 주십시오.”
마원춘이 듣고 보니 합리적 의견인지라 “알았어. 내가 보고하지”라고 답변했다. 설계소장은 자기의 뜻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믿고 지붕을 반대로 돌려 앉힌 대로 건설을 시작했다.
건설이 한창이던 2013년 5월 김정은이 승마장 건설장을 찾아 둘러보다 갑자기 얼굴이 사색이 됐다.
“뭐야, 지붕이 왜 저 방향이야.”
갑자기 당황한 마원춘은 자기가 직접 설명하는 대신 설계소장을 불렀다.
“여긴 강바람이 너무 셉니다. 바람에 지붕이 날아갈까 봐 뒤로 돌려 앉혀서….”
설계소장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김정은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놈들이 누구 맘대로 설계를 뜯어고쳐. 이런 놈 필요 없어.”
그러고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차를 타고 떠났다. 설계소장은 현장에서 호위사령부에 체포된 뒤 다음 날 처형됐다. 죄명은 ‘1호 행사 방해죄’였다. 마원춘의 비겁함에 애먼 설계소장이 처형되고 가족도 풍비박산 난 것이다.
당시 김정은이 승마구락부 건설장에서 화를 냈다는 것을 북한 매체가 이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마원춘 역시 이듬해 숙청됐다가 다행히 복권되긴 했지만 이후 승마장 사건과는 무관한 일로 처벌을 받았다.
김정은은 그해 10월 미림승마구락부가 완공될 때까지 무려 10여 차례 현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자기 뜻대로 건설되고 있지는 않은지 불안했던 것 같다.
김정은은 왜 승마구락부 지붕에 집착했을까. 비밀은 승마구락부 완공 직후 김정은이 했다는 말에서 풀렸다.
“저 지붕은 내가 위대한 수령님들께 드리는 충성의 경례를 형상화한 것이오.”
지붕의 모양이 강 건너편 금수산태양궁전에 미라로 누워있는 김일성, 김정일에게 보고하는 모양새라는 뜻이다. 그러면 그렇다고 미리 말하면 될 것을, 김정은의 속심을 알 길이 없던 설계소장만 억울하게 죽었다.
이후에도 다른 건물 설계 때문에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5년 2월 양각도 과학기술전당의 지붕 모양을 바꾸란 지시에 토를 달았다는 이유로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이 공개 처형된 것이 대표적이다.
역사에는 궁예가 독심술(讀心術)로 남의 생각을 꿰뚫어 본다며 죄 없는 신하들을 마구 죽였다고 기록돼 있다. 먼 훗날 후손들은 ‘21세기의 김정은은 궁예와는 반대로 자기 마음을 읽는 독심술이 없다고 사람을 마구 죽인 캐릭터 이상한 폭군’으로 배울지 모르겠다.
2017-03-23 탈북 1호견 ‘이리’의 한국 정착 이야기
▲2011년 10월 주인을 따라 북한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탈북 1호견’ 이리. 탈북 이듬해 하나원에서 찍은 모습이다.
6년 전 10월 어느 초저녁. 평안북도의 한 어촌마을에서 나서 자란 누렁이가 온종일 실컷 뛰어놀고 집에 돌아와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자기에게 ‘이리’란 이름을 붙여준 주인집 식구는 물론이고 얼굴을 알고 지내던 이웃집 식구들이 아이를 등에 업은 채 평소와 달리 살금살금 어디로 이동하는 것이 아닌가. 일행은 무려 21명이나 됐다.
“혹시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는 것 아닐까?”
이리가 몰래 따라가 보니 주인 일행은 부두에 정착한 5t짜리 꽃게잡이 배에 올라타고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들이 뛰는 소리가 이리에게까지 전해졌다. 이리의 동물적 감각이 명령했다.
“지금은 절대 버려지면 안 돼.”
이리는 무작정 주인을 따라 배에 올랐다. 시동을 걸기 전 주인이 이리를 발견했지만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아무 말도 없었다.
배는 사흘 동안 쉼 없이 항해했고, 이들이 한국 해경에 발견된 직후 이리는 ‘탈북 1호 견’이란 칭호를 얻었다. 남쪽에서의 이리의 ‘팔자’는 탈북해서 온 사람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리에게 좋은 점을 설명하라고 하면 제일 먼저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된 것을 꼽지 않을까 싶다. 이리가 살던 북한에서 개는 집을 지키다가 언제든지 죽음을 맞을 수 있는 ‘보신탕용’ 운명이었다. 살이 올랐다는 이유로 밧줄에 목이 졸린 뒤 둔기로 머리를 맞아 피 흘리며 죽는 친구들을 이리는 수없이 보았다.
물론 남한에서도 개는 태어날 때부터 ‘식용견’과 ‘애완견’으로 신분이 갈려 극과 극의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이리가 남한에서 마주친 개는 대부분 애완견이기 때문에 이리가 이런 사정을 알 리 만무하다.
이리의 초기 1년을 지켜본 목격자는 “처음엔 사람을 보면 겁에 질려 꼬리를 사타구니에 집어넣었는데 반년쯤 지나니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으르렁거리기 시작할 정도로 기가 살아났다”고 말했다.
또 하나 좋은 점은 식사의 질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사료란 것을 구경해 본 적이 없는 이리는 초기 1년 동안 하나원에서 나오는 잔반을 먹었다. 멀건 죽만 먹으며 허기를 채우는 데 급급했던 북한과 달리 여기선 기름진 식사가 꼬박꼬박 차려졌다.
처음 왔을 때 말라 있던 이리는 어느새 피둥피둥 살이 쪘다. 하지만 나쁜 점도 있다. 이리는 한국에 와서 가슴 아픈 생이별을 해야 했다. 고향에 두고 온 형제와 친구들 이야기가 아니다. 함께 살던 주인과 떨어져야 했던 것이다.
하나원 초기 석 달 동안은 주인이 밥도 가져다주고 자주 나타나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대도시에 임대주택을 받은 주인은 ‘아파트에서 개를 기를 수 없다’는 말에 자리 잡을 때까지 이리를 하나원에서 키워 달라고 부탁했다.
주인을 따라간다고 해도 10평 남짓한 임대 아파트에 여러 식구가 함께 살아야 하는 처지라 이리까지 함께 살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리는 하나원에 남겨져 주인을 그리워하며 지냈다.
더 나쁜 점은 자유를 박탈당한 것이다. 이리는 하나원에서 사람을 물 수 있다는 의심을 받아 목에 쇠사슬을 차고 우리 반경 몇 m를 벗어날 수 없었다. 산이며 바다를 친구들과 천방지축으로 뛰어놀다 밥 먹을 때만 집에 가면 됐던 과거의 삶과는 영영 작별했다.
길을 가다 마주친 이성과 첫눈에 반하는 사랑 같은 건 영영 사라졌다. 이리가 처음 살던 하나원 양주 분원에서는 그래도 사람들이 이리가 외로울 것이라고 친구 하나를 데려와 옆에서 머물게 했다.
하지만 강원도 화천에 하나원 제2분원이 완공돼 이사 간 뒤에는 종일 홀로 외롭게 지내야 했다. 그러다 1년 뒤 드디어 주인이 이리를 데려가려고 나타났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반가웠다.
하지만 하나원을 나가서도 이리는 주인 가족과 함께 살 수 없었다. 일하고, 학교에 가는 등 모두가 밖에서 열심히 사느라 배변 훈련이 안 된 덩치 큰 개를 작은 집안에 가둬서 키우는 것은 무리였다. 이리는 다시 다른 곳에 맡겨졌다.
이리가 동네에서 마주친 남쪽 개들과 잘 소통하는지는 알 수 없다. 탈북민은 말투가 이상하다고 남쪽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만, 개들끼리 “너 짖는 투가 이상하네”라며 차별할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북에선 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친구들과 사귀면 됐는데, 남쪽에 오니 크기와 생김새가 천차만별인 친구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이리는 진돗개처럼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것도 아닌, 그냥 평범한 잡종견일 뿐이다. 하지만 이리는 탈북 도중 조마조마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린 듯 한 번도 짖은 적이 없었던 영리한 개이다.
이리의 주인은 지인에게 “탈북하면서 개까지 데려온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지만, 배에까지 따라온 산 생명을 매정히 버릴 수 없어 데리고 왔다”고 말했다 한다. 목숨 건 사선도 함께 넘어왔지만 안타깝게도 남쪽엔 이리와 주인을 위한 마당은 없었다.
2017-04-13 김일성경기장에서 무너진 정성옥 신화
▲7일 오후 북한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남북 여자 축구 경기에서 남북의 선수들이 물러서지
않고 서로 엉켜 치열하게 볼 다툼을 하고 있다.
북한 스포츠에서 정신력의 상징처럼 꼽히는 인물이 1999년 8월 29일 제7회 스페인 세비야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마라톤에서 우승한 정성옥(당시 25세)이다. 정성옥은 ‘한반도 최초의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라는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
이런 신화 뒤엔 눈물나는 사연이 있다. 정성옥이 우승하기 전 4년 동안은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다. 마라톤 선수들도 ‘국수죽’을 먹으며 뛰었다. 옥수수 국수를 물에 몇 시간 담그면 국수오리(면발)가 몇 배로 퉁퉁 불어나고 뚝뚝 끊어지는데, 여기에 배추 시래기를 넣고 휘휘 저으면 국수죽이 된다. 양이라도 많아 보이라고 만드는 게 국수죽이지만 당시 북한의 ‘국민음식’이었다. 체력 소모가 심한 마라톤 선수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얼핏 ‘라면소녀’로 알려진 한국 임춘애의 사연과 비슷해 보인다. 1986년 아시아경기 육상에서 금메달 세 개를 목에 걸었던 임춘애는 우승 소감으로 “라면 먹으면서 운동했고 우유 마시는 친구가 부러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나중에 본인은 그게 “말도 안 되는 오보”라고 밝혔다. 실제론 삼계탕으로 체력 보충을 했고, 대회 직전에는 뱀과 개소주를 먹었으며, 우유를 먹으면 설사를 해 마시지 못한다는 것이 본인 설명이었다.
그렇게 보면 정성옥의 환경은 임춘애와 비교조차 안 된다. 게다가 몇몇 사람만 아는 사실이지만 정성옥은 대회 출전 몇 개월 전 임신 중절 수술까지 받았다. 그는 1996년 국가대표팀에서 만난 남자 마라톤 간판 김중원과 연애 중이었다. 김중원은 정성옥이 대회에 출전하기 전 중국의 성(省)급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해 상금 8000달러를 받았다. 김중원은 자기가 받은 상금 일부에서 300달러를 떼서 애인에게 개엿과 개소주를 만들어 먹였다. 그렇다고 체력이 하루아침에 생길 리가 만무한 일이다.
정성옥은 북한 최고의 여성 마라토너도 아니었다. 그는 북한 간판선수 김창옥(당시 대회 10위)의 페이스메이커로 대회에 참가했다. 고맙게도 경기 전 코치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뛰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그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우승을 했다.
정성옥의 지인들은 그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죽기 살기로 뛰었다고 말했다. 황해도 해주의 지방공장에서 18년간 화물차 운전사로 일했던 그의 아버지는 대회 직전 차로 사람을 치어 사망하게 해 재판을 받게 됐다. 감옥에 가게 된 아버지를 살리려면 대회에서 무조건 1등을 해야 한다고 정성옥은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딸이 우승해 ‘공화국 영웅’과 ‘인민체육인’ 칭호를 받고 ‘온 국민이 따라 배워야 할 귀감’이 된 뒤 그의 부친은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영웅의 아버지가 돼 각종 매체에 출연했다.
대다수 북한 사람들에겐 정성옥이 “결승 지점에서 (김정일) 장군님이 ‘어서 오라’고 불러주는 모습이 떠올라 끝까지 힘을 냈다”는 아부의 말 한마디로 인생을 바꾼 선수로 기억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정성옥은 공화국 영웅이 될 수도, 5만 달러 상금 전부를 하사받을 수도, 부유층이 사는 평양 보통강구역 서장동의 호화주택과 벤츠 S500을 선물로 받았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정성옥의 성적과 임기응변 발언은 아버지도, 자신도 살렸다. “대단한 유명인이 됐으니 나 같은 건 거들떠도 안 볼 것”이라며 한숨을 쉬던 김중원도 버리지 않고 1년 반 뒤 결혼했다.
정성옥의 정신력과 물질적 성공은 지금도 북한 스포츠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신력이 가장 잘 먹혀든 분야가 바로 세계 정상급에 올라선 여자축구다. 북한은 지금까지 국제축구연맹(FIFA) 주관대회에서 4회(U-17 2회, U-20 2회)나 우승했다. 그래서 북한 여성들은 체육을 할 바엔 이왕이면 축구를 하려 한다. 그래야 우승 가능성이 있고, 우승하면 가족과 함께 평양에 살 자격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여자축구 선수들은 10대 초반부터 남자들과 함께 훈련하며 유럽 선수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체력을 쌓는다. 또 끊임없이 정성옥의 정신력을 배우라는 ‘정신교육’도 받는다.
하지만 그런 북한 선수들이 안방에서 한 수 아래로 여기던 남한에 밀려 월드컵 출전이 좌절됐다. 남한엔 ‘정성옥’도 없고, 여자축구가 국민 스포츠도 아니지만 태극 낭자들은 북한과의 경기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력으로나 전혀 밀리지 않았다. 콧등이 멍들어도, 팔이 빠져도, 쥐가 나도 뛰었다. 경기 뒤 동료의 등에 업혀 나온 선수도 있었다. 북한 선수들과의 단체 몸싸움도 주저하지 않았다.
‘태양절’ 분위기에 빠진 평양에서, 김일성의 이름을 딴 경기장에서, 북한의 5만 관중 앞에서 ‘정성옥의 정신력 신화’는 그렇게 태극 낭자들에게 무너져 내렸다. 한편으론 많은 북한 선수에겐 지방의 가족을 불러올려 평양에서 살고픈 간절한 꿈이 사라진 순간이기도 했다.
2017-04-27 “공주님 오셨습니다”
▲4월 15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열병식 도중 김여정이 오빠 김정은을 보좌하는 장면이
북한 중앙방송 화면에 여러 차례 등장했다.
2013년 겨울 어느 날, 북한에서 내로라하는 부친을 둔 20대 자녀들이 강원도 마식령스키장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갑자기 사복 입은 건장한 남성들이 우르르 들어와 사람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란 ‘금수저’들이 순순히 응할 리 만무했다. 어렵게 평양에서 마식령까지 몇 시간 동안 달려와 겨우 좀 놀아보려 했는데 영문도 모르고 내쫓기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화가 난 한 젊은이가 나서 소리쳤다.
“당신들 누구야.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 중앙당 아무개야.”
요즘 남쪽에선 이런 짓이 항간의 분노를 자아낼 일이지만, 북한에선 아직도 이런 허세가 아주 진지하게 잘 먹힌다.
한 양복쟁이가 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공주님 오셨습니다.”
젊은이가 목을 빼 살펴보니 저쪽에 검은 세단 몇 대가 서 있었다. 북한에서 권력자의 자녀로 살아가려면 눈치 또한 기막히게 빨라야 한다.
금수저들은 즉시 상황을 파악했다. 김여정이 친지들과 스키 타러 온 것이다. 그리고 이 사복 남성들은 김정은 가계를 호위하는 호위사령부 7국 소속일 터이다.
찍소리 못 내고 ‘공주님’에게 쫓겨나 자존심이 상한 금수저들은 원산의 한 호텔에서 밤새워 술을 퍼마셨다.
여정이 지금도 북한에서 공주님으로 불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점점 오빠의 그늘 아래 무서운 권력자로 커가고 있다는 정황은 자주 목격된다.
이달 평양에서 진행된 태양절 관련 행사에서 여정은 여러 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13일 열린 여명거리 준공식에선 여정이 경호담당으로 보이는 중장 계급 군인과 이야기하며 나란히 행사장으로 들어오다 갑자기 멈춰 서서 뭔가를 지시하는 듯한 모습이 TV 카메라에 포착됐다. 지시를 받은 중장이 뒤돌아서 다시 부하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하며 “공주님 지시야” 했을지는 알 수 없다.
여정은 15일 열병식이 거행된 김일성광장 주석단에서도 화제의 인물이었다. 그는 주석단 뒤쪽을 부지런히 오가며 행사를 챙겼고, 최룡해 등 고위 간부들에게 거리낌 없이 접근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22세에 불과했던 천진난만했던 공주는 28세인 지금은 권력의 맛을 충분히 깨달은 무서운 공주로 변했을지 모른다. 국정원은 지난해 10월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여정이 최근 간부의 사소한 실수도 수시로 처벌하는 등 권력남용 행태를 보인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이쯤 되면 간부들도 자기들끼리 공주님이라고 함부로 부르기 어렵게 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 여정의 호칭은 공주님에서 ‘김여정 동지’로 바뀌게 될 것이다.
여정에 앞서 북한 고위급이 아는 공주는 두 명 더 있다. 김정일이 본처인 김영숙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자 여정의 이복언니 김설송도 한때 무서운 공주였던 시절이 있었다. 김정일은 2008년 8월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깨어난 뒤 거동이 불편해지자 설송에게 자신을 부축하게 했다. 당시 간부들 사이에선 “누가 설송의 눈에 잘못 보여 목이 날아갔다”는 소문이 자주 퍼졌다.
설송에게도 착했던 시절이 있다. 설송이 1989년 김일성대 생물학부에 입학해 처음 등교할 때 일화다. 당시 중앙당에서 근무했다가 은퇴한 남성이 대학 경비원이었는데, 그는 “대학총장 선생님께 전화해 달라”는 설송을 잡고 오지랖 넓게 굴었다.
“아버지가 누군데 총장을 불러? 그냥 중앙당에서 일한다고? 과장급이냐, 부부장급이냐. 과장급이면 입학할 때 2000달러쯤 뇌물 줬을 것이고, 부부장급 정도면 그냥 붙었겠네….”
하지만 뒤늦게 총장과 당 비서가 달려와 설송을 황송하게 영접하는 모습을 본 경비원은 사태를 파악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때 설송이 “아저씨, 괜찮아요” 하고 싱긋 웃고 넘어갔고, 경비원도 처벌받지 않았다는 소문이 대학에서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 퍼졌다. 여담이지만 설송이 생물학부에 입학했단 사실이 알려지자, 생물학부에 자녀를 둔 고위 간부들은 자식을 다른 학부에 옮기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다. 간부들은 “태양의 주변에 가면 타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정이 등장한 이후 설송이 어떻게 됐는지는 듣지 못했다. 김정일이 죽은 뒤 그를 챙겨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북한의 ‘원조공주’이자 여정의 고모인 김경희는 생사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조카의 손에 남편과 시댁 가문이 멸족되는 수모를 당한 경희의 생존 여부는 이제 와 사실 별 의미도 없다.
오빠와 부친이 죽자 비운의 공주로 전락한 고모와 이복언니와 달리 여정은 북한의 새 실세로 등극했다. 하지만 그의 미래 역시 오빠 김정은의 수명에 달렸을 뿐이다. 여정이 훗날 역사책에 ‘잔혹한 오누이’, ‘마녀공주’로 기록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2017-06-08 문재인 정부에 낸 북한의 첫 ‘시험문제’
▲문재인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이던 2015년 8월 광복절 70주년 기념 기자회견에서 경제영역을 북한과 대륙으로 확장한다는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을 집권 비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대북접촉 승인을 받은 남한 민간단체들에 북한이 5일 보낸 답장을 보며 “대남 부서는 건재하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의 보수정권 9년 동안 북한의 대남 담당 ‘에이스’들도 많이 사라졌을 법한데 워낙 ‘선수층’이 탄탄한 모양이다.
일단 북한은 민간단체의 방북을 모두 불허하고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남측위)’만 허락했다. 얼핏 평양에서 열리는 6·15공동선언 17주년 기념행사에 들러리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읽힌다.
하지만 남측위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초기 남측위 참여 단체들은 한국진보연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종교단체,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를 포함한 시민사회 등 크게 4개 그룹으로 나눠볼 수 있다. 그런데 남북관계가 냉각되면서 대다수 단체가 빠지고 진보연대와 민화협 일부만 남았다. 진보연대 소속이 아닌 이창복 상임대표 의장이 수장 역할을 맡고 있지만 남측위의 주축은 진보연대다.
진보연대가 누군가. 2010년 밀입북한 뒤 수많은 친북 발언을 쏟아내 국민의 공분을 자아낸 한상렬 목사가 이 단체 상임고문이다. 2012년 북한에서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 경애하는 김정은 최고사령관님 만세” 삼창을 외친 노수희 범민련 부의장을 ‘통일투사’로 칭송하는 곳이 진보연대다. 구속된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대표가 “진보연대 동지들은 제 마음속의 동지들입니다”라고 평가한 곳이다.
이들이 평양에 가면 어떻게 행동할까. 남측위는 통일부에 곧 방북 신청을 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를 승인하는 건 큰 모험이다. 첫 방북단이 평양에서 국민 정서에 반하는 말과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키면 그 역풍은 고스란히 새 정부가 뒤집어쓴다. 북한 대남부서는 한국 기자들조차 잘 모르는 남측위의 구성까지 다 파악한 듯하다.
한편으로 북한은 다른 민간단체의 방북은 모두 거절한 뒤 6일 노동신문을 통해 “인도적 지원과 민간교류 수용보다는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먼저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이는 새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 노력에 북한이 보인 첫 실질적 반응이다.
민간단체들이 보따리 싸들고 우르르 몰려오자 “우릴 비렁뱅이 취급하느냐”는 북한 특유의 자존심도 작용했겠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고약한 ‘시험문제’도 숨어있다.
일단 북한의 말을 해석하면 “시시하게 시간 끌 생각이 아니라면 판부터 바꾸자”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남북 시장 통합’ 등 대형 공약을 내놓은 문재인 대통령이 과연 이를 이행할 의지는 있는지 테스트를 하려는 의도도 다분히 숨어있다. 당면 현안으론 “곧 미국에 가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면 우리 편을 좀 들어달라”는 부담까지 얹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도 새 정부를 한 달간 관찰하며 남북관계를 어떻게 할지 고심했을 것이다. 지난달 26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첫 대북접촉 승인을 받은 뒤 열흘이나 지나 답을 내놓은 것을 보면 민간단체 방북을 허용할지도 심사숙고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북한의 결론은 “문 대통령이 먼저 확실한 의지를 보여줘야 우리도 믿고 마음을 열겠다”는 것으로 내려졌다.
민간교류와 인도적 지원 재개라는 ‘군불’부터 지펴서 점차 남북관계에 온기를 불어넣으려던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시작부터 어려움을 겪게 됐다.
북한이 보낸 시험문제는 그들의 시각에서는 일리가 있다. 5년마다 정부가 바뀌면서 대북정책이 널뛰기를 하는 남한을 수십 년 지켜본 북한으로선 힘들더라도 집권 첫해에 판을 바꾸어야 남은 4년 동안 큰 걸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한으로선 유엔의 대북제재가 보다 강경해지고 있고, 중국마저 동참하는 마당에 혼자 대열을 이탈하기 어렵다. 설사 그렇게 하더라도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할리 만무하다.
정부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마음 같아선 북한이 ‘갑’이 아님을 확실히 보여주고 싶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토록 비난했던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과 차별점이 뭐냐는 비난에 시달릴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과 등을 돌릴 생각이 없는 한 당장 민간단체 방북 이상의 것을 주기도 여의치 않다. 북한도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북한이 제시한 문제를 남한이 풀 수 있을까. 난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북한이 제시한 이 문제는 우리가 아닌 북한이 먼저 풀어야 답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민간단체를 거부한다면 정부가 다음 행보로 대북특사를 파견하는 ‘성의’ 정도는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사는 김정은에게 이런 뜻을 분명히 전달할 필요가 있다.
“열쇠는 지금 당신이 쥐고 있다. 첫 선물은 남쪽이 아닌 북쪽이 먼저 내놓아야 한다. 그러면 확실히 화답할 것이다. 싫다면 우리도 답을 찾을 수 없다.”
2017-06-22 김정은 승용차 추월했던 사단장의 운명
▲2013년 5월 평양 미림승마장 공사 현장을 방문한 김정은이 군 관계자들을 질책하고 있다.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은 자기 말을 무시했다며 수시로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아일보DB
“와, 도로가 끝내주는데…. 밟아라, 밟아.”
2010년 초 북한군 총정치국 회의 참석차 평양에 오던 황해도 주둔 4군단 산하 모 사단장은 기분이 한껏 들떴다.
개성∼평양 고속도로의 평양 쪽 관문인 ‘조국 통일 3대헌장기념탑’ 근처에 오니 시내까지 쭉 뻗은 넓은 도로가 펼쳐졌다. 운전병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팔라딘’의 액셀을 힘껏 밟았다. 2007년 북한은 일본 닛산과 중국이 합작으로 설립한 ‘정저우 닛산’에서 이 차를 300여 대 구매해 사단장과 사단 정치위원들에게 주었다.
6단 자동변속기에 배기량 3275cc인 팔라딘은 당시 북한에선 보기 드문 최신 승용차였다. 이런 차를 먼지가 풀풀 나고 울퉁불퉁한 시골에서 몰고 다니다 모처럼 평양의 넓은 아스팔트에 들어서니 질주 본능이 생겨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
마침 밤이라 다니는 차도 별로 없었다. 이들은 앞차를 마구 앞지르며 질주했다.
그런데 추월당한 한 고급 차가 갑자기 가속해 팔라딘을 재차 추월한 뒤 앞길을 막고 정지했다. 무려 벤츠600이었다. 북한에서 벤츠는 노동당 간부들만 탄다. 한국에서는 장관급인 노동당 비서의 관용차가 벤츠280임은 웬만한 사람은 안다. 그런데 무려 600이라니 사단장과 운전병은 기가 질려 버릴 수밖에 없었다.
멈춰 선 벤츠 창문이 열리더니 새파란 젊은이가 얼굴을 쑥 내밀고 차를 째려보았다. 그러다 아무 말 없이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 다음 날 열린 총정치국 회의에선 그 사단장과 운전병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벤츠600을 직접 운전했던 김정은에게 걸려 이들이 처벌을 받았다는 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얼마 뒤 김정은을 열 받게 만드는 일이 또 있었다. 평양에서 원산으로 가는 도중 마식령을 관통하는 길이 4km의 ‘무지개 동굴’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터널은 좁고 긴 데다 환풍 장치도 제대로 없어 평소 매연으로 꽉 찬다. 이곳에서 김정은 앞으로 매연을 새까맣게 내뿜으며 북한군 화물차가 느릿느릿 달렸는데 비키라고 아무리 경적을 울려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선군정치를 앞세우던 당시 북한에서 군 차량은 교통경찰도 단속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아마 운전병은 차종이 구별되지 않는 민간 승용차가 뒤에서 경적을 울려대니 “감히 군대 차량에게”라는 심정으로 더 천천히 갔을지도 모른다.
김정은은 분노했다. 2010년 5월 5일 군에는 ‘청년대장 동지 방침’이란 것이 하달됐다. 당시 김정은은 후계자 신분이었음에도 직접 자기 이름으로 지시를 하달한 것이다.
‘5월 5일 방침’으로 불리는 이 지시에는 “요새 군 운전사들이 무법천지이니 강하게 단속해 엄중히 책임을 물으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때부터 북한군 경무원(헌병)들은 교통질서를 어기는 장성들의 차를 직위에 상관없이 단속했다. 예외는 없었다. 인민무력부장도 단속되면 청사에서 내려다보이는 구내 운동장에서 운전병과 함께 2시간 넘게 제식훈련을 해야 할 정도였다.
‘금수저’만 될 수 있는 장성 운전병들은 시장에서 산 맵시 나는 군복과 비싼 내의를 입고 살다가 이때부터 후줄근한 북한군 면내의를 입고 다녀야 했다. 병사들 속에선 “청년대장이 참 쪼잔하다”는 불평이 터져 나왔다.
청년대장은 난폭 운전만 못 견딘 것이 아니었다. 김정은은 후계자 신분일 때 예고 없이 군 관련 시설을 시찰했다. 김정일은 몇 달 준비한 세트장에 가서 안내해주는 동선을 따라 쭉 본 뒤 사진을 찍고 돌아갔지만, 김정은은 뒷마당에도 불쑥 들어가 담배꽁초가 많다며 화를 냈다고 한다. 그때마다 내로라하는 간부들이 빗자루를 들고 나와 쓰느라 난리가 났다.
2012년 5월 김정은이 평양 만경대 유희장을 방문해 보도블록의 잡초를 직접 뽑으면서 “설비의 갱신은 몰라도 손이 있으면서 잡풀을 왜 뽑지 못하는가. 한심하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는 소식이 북한 매체들에 실렸다. 북한 매체에서 지도자가 화를 내는 것을 보도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기강을 세우려고 일부러 공개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러저런 상황을 종합해 보면 원래 김정은은 무시당하는 것과 더러운 것을 못 참는 성격인 것 같다.
하지만 자기 맘대로 성질을 부릴 수 있는 국내와 달리 국제무대에서 김정은은 철저히 ‘왕따’ 신세로 무시당해왔다. 압박하면 할수록 핵과 미사일에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무시당하는 데 대한 반발일 수도 있다.
우리는 보수 정권 내내 김정은을 별로 상대해 본 일이 없고 성격 같은 건 몰라도 됐다. 하지만 앞으론 다르다. 문재인 정부는 김정은과의 대화를 위해 햇볕정책 시기 남북 협상의 주역들을 요직에 중용했다. 그런데 과거 협상 경험이 얼마나 유효할진 모르겠다. 어쩐지 김정은은 김정일보다 말을 트기가 훨씬 까다로울 것 같다.
2017-07-06 김정은의 핵미사일 도박 멈추게 하려면
▲지난해 6월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화성-10’ 발사를 지켜보고 있는 김정은. 미국 본토 타격이 가능한 핵미사일을 가지려는 김정은의 야망은 이제 종착점을 눈앞에 두고 있다. 동아일보DB
이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의 대북 정책으론 북한의 핵미사일 보유를 막을 수 없다.
북한의 의도는 명백하다. 핵미사일로 미국과 협상해 정권의 장기적 안전을 보장받겠다는 것이다. 즉, 올해 33세인 김정은이 늙어 죽을 때까지 북한을 통치하는 걸 보장받겠다는 의미이다. 북한 모든 정책의 시작과 끝은 김정은의 생존이며, 핵미사일은 김정은이 가진 최후의 카드다. 그러니 끝까지 부둥켜안을 수밖에 없다.
김정은만 살 수 있다면 수백만 명이 굶어 죽는 것쯤은 감수할 수 있는 북한이니 제재와 압박이 잘 먹혀들 리도 만무하다.
김정은은 “이거 받고 나 살려줄 거냐”며 미국을 향해 핵미사일 카드를 내밀었다. “핵문제는 미국과 풀 문제이니 남조선은 끼어들지 말라”는 말은 김정은의 본심이다. 그의 눈에 한국은 주제 파악 못하고 끼어드는 성가신 불청객이다. “제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괴뢰들이 그 무슨 ‘군사적 대응’을 떠들어대고 있는 것은 가소롭기 그지없다”고 한 4일자 노동신문 기사가 곧 김정은의 의중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이 레드라인을 넘어서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영토에 포탄이 쏟아져도 미국의 승인이 없으면 원점 폭격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비장하게 쏟아내도 “가소롭다”는 반응만 돌아올 수밖에 없다.
지금 김정은은 미국을 저돌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늙고 병든 김정일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흥정하는 척하며 시간이나 끌자”는 생각이 강했다면, 살날이 긴 김정은은 “시간 끌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젊을 때 큰 도박 한 번으로 평생 편히 살겠다는 속셈이다. 상대가 승부사 기질이 강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라면 협상이 통하겠다는 판단도 했을 것이다.
정작 트럼프는 북한의 첫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소식에 “한국과 일본이 이것을 더 견뎌야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중국이 북한을 더 압박해 이 난센스 같은 상황을 끝내야 할 것”이라고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남의 일인 듯 한가하게 딴청이다.
북한은 이런 미국에 눈 한번 떼지 않고 “나 좀 봐줘”라며 계속 어필하고, 한국은 그 북한에 매달려 “제발 나랑 말 좀 해줘”라고 구애하고….
이 우스꽝스러운 관계를 끝장내는 길은 “이거 받고 나 살려줘” 하는 김정은에게 “너 죽을 거냐, 저거 버릴 거냐”라고 역으로 제안하는 길뿐이다.
사실 김정은 제거는 어렵지도 않다. 미국은 물론, 한국도 결심만 하면 언제든 가능하다. 진짜 문제는 그 뒤에 벌어질 일이다. 김정은이 제거된 북한에서 펼쳐질 혼란은 주변 국가들엔 대재앙이다. 이 대재앙을 막거나 수습하는 데 드는 대가야말로 김정은이 들고 있는 비싼 생명보험이라 할 수 있다. 이 보험금을 지불할 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김정은에게 계속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핵 실전 배치가 끝나면 김정은이 할 짓이 뻔하지 않은가. 한국을 향해 걸핏하면 “핵 한 방 맞아볼래”라고 으름장을 놓을 게 분명하다.
우리는 협박을 받아들이며 살지, 아니면 이 관계를 끝낼지를 선택해야 한다. 자존심 있는 국가라면, 분노를 느끼는 인간이라면 협박을 참고 살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너무 비싸 엄두도 내지 않았던 보험금 계산을 시작할 때가 온 듯하다. 이 계산이야말로 우리가 주체가 돼야 한다. 왜냐하면, 김정은의 생명보험금은 한국과 중국이 대부분을 부담해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직함이 잔뜩 붙은 나이 많은 명사들을 모아 위원회나 구성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미래를 읽고, 냉정하게 계산할 수 있는 젊은 인재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중국을 어떻게 설득할지다. 중국은 누가 강요해도 북한 붕괴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대안 리더십이 부재한 북한에서 김정은이 제거되면 혼란은 필연적이며, 이어 쏟아지는 난민은 중국 동북지역의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중국은 수천 년 역사에서 동북이 혼란스러웠을 때 늘 중원이 무너졌다. 가뜩이나 약화되는 공산당의 일당독재 체제가 동북 혼란이란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까.
중국에 북한은 터지면 내게 파편이 쏟아지는 폭탄과 같은 존재다. 이런 중국을 내 편으로 만들려면 파편을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자면 그게 가능한지, 비용은 얼마나 들지 계산부터 해야 한다. 물론 우리 역시 북한 붕괴를 감당할 수 있을지 냉정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김정은은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이 북한의 붕괴를 감수할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는 한 끝까지 막 나갈 것이다. 그 계산이 맞을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답이 나올 때까지 계산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김정은의 핵도박은 “북한 붕괴를 감당할 수 있다”는 계산서를 보여줄 때에만 끝낼 수 있다.
2017-07-20 왜 순교의 피는 북한 사람의 몫인가요
▲북한 지하교회 교인들의 기도 모습으로 알려진 사진. 하지만 이들이 진짜 북한 지하교인들인지, 촬영 장소가 북한이 맞는지는 확실치 않다. 북한에서 종교 활동이 발각되면 사형을 피하기 어렵다. 동아일보DB
J 집사님께.
집사님이 보내신 “북한에서 무기노동교화형을 선고받은 김정욱 목사의 무사 귀환을 위해 기도하자”는 카카오톡 단체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북한에 억류됐던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 씨가 지난달 사망한 뒤 북에 억류된 한국인 선교사 3명의 귀환이 다시 관심사가 됐지요. 정부 당국자도 “남북 당국 간 대화 채널이 복원된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이 억류된 우리 국민의 안위를 확인하는 일”이라고 말했죠.
그런데 죄송하지만, 저는 함께 기도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악한 것일까요. 제 말도 한번 들어보십시오.
저는 김 목사가 2014년 평양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보았습니다.
자신을 범죄자라고 지칭한 그는 “국가정보원의 지시에 따라 북쪽 사람들을 첩자로 소개하고 중개했다”며 “제가 저지른 반국가 범죄 혐의에 대해 북한에 사과한다”고 하더군요. “가족에게 건강하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말도 했습니다. 기자회견장에선 김 목사 지시로 간첩 활동을 했다는 북한 주민들의 자백 영상도 상영됐습니다. 그들은 이미 국정원 간첩으로 몰려 죽었겠죠. 한 북한 소식통은 그 사건으로 평양에서 최소 30명, 많게는 100명 넘게 체포됐다고 전했습니다. 북한에선 기독교를 믿으면 살아날 수 없습니다. 하물며 국정원 간첩 혐의까지 썼는데 살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겐 가족에게 마지막 말을 남길 기회조차 없습니다. 김 목사가 선고받았다는 무기형이 그들에겐 간절한 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죄라곤 중국 단둥에서 한국 선교사를 만났던 것밖에 없습니다. 몰래 성경 좀 읽고 용돈을 받아 쓰자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단둥의 그 선교사가 무책임하게 제 발로 평양에 올 줄은, 보위부에 체포돼 자신들을 스파이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고문당해 어쩔 수 없이 불었다고 자기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이들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저만 해도 북-중 국경에 너무 가고 싶지만 가지 않습니다. 제 목숨도 소중하지만, 혹 제가 체포돼 수많은 사람이 연쇄 피해를 볼 것이 더 두렵기 때문입니다. 독약을 삼킬 각오가 돼 있어도 가기 싫습니다. 지난달 중국에 가서 가족과 접촉하려던 탈북자 6명이 북한에 납치됐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제가 자다가 보위부에 납치돼 아는 사람들을 줄줄이 불어 죽게 하고는 기자회견장에 나와 “제발 나를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장면은 상상조차 끔찍합니다.
한때 북-중 국경엔 탈북자 선교를 한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탈북자들을 모아놓고 비밀리에 성경을 가르치는 ‘통독반’들도 즐비했습니다. 한국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북한의 복음화를 위해 순교하자고 가르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처소가 공안에 발각되면 일어나는 일은 비슷했습니다. 선교사는 한국으로 추방되고, 탈북자들만 북한에 끌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저는 북에서 기독교를 믿었다고 고문받다 죽는 탈북자들을 직접 보았습니다.
왜 순교의 피는 탈북자만의 몫인가요. 물론 납치되거나 테러당한 선교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개는 탈북자만 죽고 선교사는 살았습니다. 김 목사가 무사 귀환하면 선교 대상이 됐던 북한 주민들만 죽고 한국 선교사는 살아 돌아오는 기록이 또 하나 생길 겁니다.
저는 자신이 순교할 각오가 됐을 때 탈북자에게 그리 가르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을 위해 독약을 삼킬 각오가 됐을 때 북한 선교에 나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선교보다 열 배 이상의 각오를 가져야 하는 것이 북한 선교입니다.
하지만 그런 각오를 가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이해할 수 없는 선교사들도 적잖게 봤습니다. 예전에 위험한 북-중 국경에서 탈북 고아들을 키우는 선교사에게 애들을 안전한 한국으로 무사히 오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단칼에 거절당했죠. 얼마 전 러시아에서 탈북한 북한 노동자는 도움을 주는 한국 선교사가 성경 공부만 계속시킬 뿐 한국으로 가는 데 도움 줄 생각조차 없다고 제게 연락해 왔습니다. 중국에서 탈북 고아를 키우면, 탈북 노동자를 개종하면 선교사는 후원자 앞에 면목이 서겠죠. 그러나 그게 고아와 탈북민을 위한 일인가요. 그들에겐 안전하게 살 한국행이 우선입니다.
이 글로 열악한 사역 현장에서 고생하는 많은 선교사가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물론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좋은 사역자도 사소한 부주의로 한순간에 사람을 죽이는 사역자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 주시길 바랍니다.
모두가 북한의 한국 선교사 억류에만 분개하고 당장 구출해야 한다고 할 때, 누군가는 그들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탈북 기자인 제가 아니면 누가 또 하겠습니까.
집사님, 제 이야기를 이해하실 수 있으십니까.
2017-08-05 核불가침 조약→한미훈련 중단→미군 철수… 北의 벼랑끝 베팅
北 ICBM 도발, 김정은의 속셈은 북한 김정은이 미국 본토를 겨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전 보유란 최종 목표를 향해 마지막 전력 질주를 하고 있다. 7월에만 두 차례나 ICBM을 시험 발사했다. 준비되는 족족 그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곧바로 발사하는 것이다.
지난달 28일 발사된 화성 14형은 최대 고도 3724.9km를 찍었다. 이번 ICBM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다는 데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탄두 대기권 재진입 기술까지 완성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개발 속도로 볼 때 이 관문도 곧 넘을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 단계는 ICBM에 경량화된 핵탄두까지 장착하는 것이다.
김정은은 미국의 그 어떤 제재에도 핵탄두를 장착한 ICBM을 보유하겠다는 야심을 버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김정은이 핵탄두 장착 ICBM에 집착하는 속내는 무엇일까. 그의 속셈과 야심을 독백 형식으로 분석해 봤다.
고지가 눈앞에 보이는데 핵탄두 ICBM을 포기하라고? 절대 못해. 무조건 고!’
이걸 위해 10년 넘게 제재 속에서 허리띠를 조이며 살았는데, 그동안 흘린 피땀이 아까워서라도 절대 못 버려. 온갖 제재 하려면 얼마든지 하라지. 어차피 제재해 봐야 실효성도 없고 우린 잘 단련돼 있다.
내게 제일 중요한 것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제재로 인민이 좀 죽어 나가도 체제 유지엔 큰 문제없다. 1990년대 중반 1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어도 권력을 끄떡없이 유지한 아버지의 노하우도 물려받았으니까 그건 자신이 있다. 설사 굶주린 인민이 폭동을 일으켜도 핵탄두 ICBM을 쥐고 있는 이상 미국이나 남조선이 절대 개입할 수 없으니 내부 진압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미국의 달콤한 약속에 넘어가 핵 개발을 포기한 리비아의 카다피나 핵이 없어 비참하게 죽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핵과 ICBM 개발을 통해 인민들에게 ‘미국과 맞서 싸우는 위대한 지도자’라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제 와서 포기하면 내 체면은 뭐가 돼? 이걸 개발하는 동안엔 내부도 강력히 통제할 수 있다. 지도자가 초강대국 미국과 정면으로 맞서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 불평불만이나 하는 자들은 살려둘 필요조차 없지.
미국은 늘 우리를 무시하고 거지 취급해왔다. 사실 빈말이었지만 우리가 아무리 평화협정을 맺자고 요구해도,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하라 해도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본토가 핵 공격 사정권에 든다면 얘기가 달라질걸? 이젠 체급이 달라졌으니 당당하게 핵 군축 협상장에 마주 앉을 수가 있다. 미국이 부르면 나가긴 하겠지만 핵무기는 포기할 수가 없어. 그 카드를 줘버리는 순간 나의 유일한 힘은 사라지는 것이니까.
난 ‘조미 핵 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요구할 거야. 미국이 핵 가진 러시아나 중국과도 잘 지내는데 우리가 그들처럼 살자고 요구 못할 이유는 없어. 미국이 불가침을 약속하면 조미 간에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며, 한미 군사훈련도 하지 말라고 요구할 생각이다. 그리고 미군을 철수시켜야지. 그럼 남조선은 내 수중에 들어온다.
남조선이 도중에 끼어들어 민간교류니, 공동 경제개발이니 미끼를 던지는 것은 자기 주제도 모르는 것이지. 돈으로 따져도 우리의 핵 ICBM이 얼마짜리인지 저들은 이해도 못 해.
2000년에 아버지가 미국과 미사일 협정을 맺었을 때 우리가 받기로 한 것을 상기해 줄까. 우리가 미사일을 폐기하는 조건으로 미국은 매년 10억 달러씩 3년간 30억 달러와 매년 인공위성 3개를 발사해 주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가진 미사일은 고작 사거리가 1200km에 불과했다고.
이제는 사거리가 10배로 늘었고, 거기에 핵탄두까지 얹을 수 있으니 500억 달러쯤 불러도 우리가 손해야. 미국이나 남조선이 그런 돈 내놓을 수 있어? 절대 못 내놓을 거야.
미국이 우리의 핵과 ICBM 능력을 인정하면 그때부턴 나도 좀 고민이 된다. 그때 가선 핵실험과 ICBM 시험 발사는 더 이상 저들을 놀라게 할 수 없을 테니. 그렇다고 우리가 언제까지 실험만 하고 있을 순 없잖아.
그땐 좀 더 세게 나갈 수도 있다. 남조선이 괴로울 때까지 계속 시달리게 하는 거야. 그렇다고 저들이 나와 전쟁을 치를 리도 없잖아. 미국을 향해선 중동과 같은 외국에 핵 ICBM 기술을 판다고 해볼까. 이 세상엔 이 정도 기술을 사려고 적어도 수십억 달러를 지불할 나라는 얼마든지 있을 거야.
너무 나가다가 미국이 나를 제거할 수 있다는 건 좀 걱정이 돼. 그러나 나도 잘 따져봤다. 나를 대신해 조선을 확실하게 틀어쥐고 통치할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천만에. 장성택, 김정남처럼 조금이라도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다 죽였다. 나를 제거한 뒤 이 땅이 무정부 상황이 되고 동북아에 연쇄 혼란이 벌어질 상상을 하면 끔찍할 거야. 중국도 그런 상황은 절대 용납할 수가 없을 것이고. 저들도 계산할 줄 안다면 차라리 핵과 ICBM 값을 치러주는 게 훨씬 싸게 먹힌다는 걸 어렵지 않게 판단할 거야.
아무튼 일단은 지금 나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돌아갈 퇴로가 없다고. 일단 핵 ICBM 완성해 놓고, 달라진 지위에서 어떻게 할지 고민해야지. 어차피 인정하든 않든 핵과 ICBM은 매우 유용하게 활용할 수가 있다. 이건 나의 전 재산이기도 하다.
2017.08.17 사드 보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지난달 중순 중국에서 가족이 체포된 한국 탈북민들이 9일 서울 명동 중국대사관 앞에서 북송을 하지 말아달라며 시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가족은 14일 북송됐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2년 전 쓰지 않았던 특종이 있다. 그해 9월 3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 전승 70주년 행사에 참가해 대한민국 정상으론 최초로 톈안먼 성루에 섰다. 그로부터 딱 보름 뒤인 18일 멀리 북-중 국경에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기적이 일어났다.
이날 옌지공항에서 탈북자 30명이 중국 공안 차량에서 내려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들은 한국으로 오던 중 7월 중순 쿤밍(昆明)에서 체포된 2개조와 칭다오(靑島)에서 체포된 1개조였다. 일행 속엔 수백 명의 부하를 두었던 북한군 군관 출신도 있었다.
이들은 탈북자들이 ‘도문 변방수용소’라고 부르는 지린(吉林)성 투먼(圖們)시 공안변방대대 변방구류심사소에 수감돼 있었다. 두만강 옆의 이 수감시설은 탈북자들이 북송 전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이다. 이곳까지 가면 사실상 북송 확정이기 때문에 ‘도문까지 갔다’는 말은 탈북자들에겐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 보위부도 어떤 탈북자 몇 명이 수감돼 있는지 건너편 감옥의 사정을 손금 보듯 파악하고 있다.
중국이 이곳에 수감된 탈북자를 공식 석방한 경우는 내가 알기엔 한 번도 없다. 그런 상상도 못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그것도 30명씩이나, 심지어 비행기까지 태워 준 것이다.
이들의 한국행은 명백히 박 전 대통령이 톈안먼 성루에 오른 데 대한 보상이었다. 그러나 이를 당일에 알고도, 난 이 역사적인 행운아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묻어버렸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북한이 중국에 강력히 반발해 다음 기회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이듬해 7월 한미 당국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전격 발표하기 전까지 중국에서 탈북자들이 체포됐다는 소식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지난해 4월 중국 북한식당 종업원 13명이 버젓이 비행기를 타고 한국까지 온 것도 중국의 묵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지난해 지린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 일부 지역에선 중국 남성과 오랫동안 동거한 탈북여성과 자녀가 합법적으로 살도록 중국 당국이 호구까지 발행해 주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하지만 사드 배치 선언 이후 지난 1년 동안 중국의 탈북자들에겐 다시 지옥이 시작됐다. 한국행 길에 올랐던 탈북자들이 다시 무더기로 체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한국 기업이 피해 입는 소식은 많이 알려져도, 목숨을 잃는 탈북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문재인 대통령이 6월 말 미국을 방문해 확고한 한미동맹을 재확인한 이후 중국의 탈북자 단속은 갑자기 크게 강화됐다.
지난달 중순에도 주요 탈북 경유지인 쿤밍을 휩쓴 대검거 바람에 버스로 몇 시간만 더 달리면 한국에 왔을 수십 명의 탈북자가 또 체포됐다. 이들 중 노동당 간부가 아내와 10대 자녀 3명과 함께 품고 있던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사랑하는 자식의 입에 독약을 밀어 넣어야 했을 부모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은 한국행을 시도한 탈북자는 무조건 살아나올 수 없는 정치범수용소에 끌어가고 있다. 북송이 곧 죽음인 상황에서 그 가족은 고통스럽게 죽길 원치 않았던 것이다.
지난달 체포된 탈북자들의 한국 가족 모임에 4일 찾아갔다. 북에서 탈출시켜 데려오던 어머니를 잃게 된 딸, 조카를 잃게 된 삼촌…. 일행 중엔 8세 여아도, 10세 남아도 있었다. 탈북기자가 뭔가 해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 앞에 서는 것은 가슴을 허비는 고문이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이들이 찾아간 청와대와 외교부도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9일 중국대사관 앞에서 ‘내 가족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투먼’에 수감돼 있던 이들 가족은 14일 북송됐다. 중국이 논란이 커질 것을 우려한 듯싶다.
미국도 중국과 북한을 향해 온갖 제재 카드를 내놓고 있지만 정작 그들의 아킬레스건인 탈북자 문제는 한마디 언급도 없다. 결국 북한은 마음 놓고 탈북자를 죽이고 있고, 중국은 살인방조 행위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가 죽는다고 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탈북자는 한반도에서 비운의 새우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선양(瀋陽) 인근의 한 도시 감옥에 탈북자 50여 명이 수감돼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사드 문제가 빨리 원만히 해결되면 혹시 중국이 북송시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있다고 한다. 사드 전자파와 소음이 환경 기준을 통과했다는 정부의 13일 발표를 접했을 때 난 그들을 떠올렸다.
사드가 앞으로 몇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탈북자 문제에 협조적이던 중국이 돌변하면서 지난 1년간 한국민이 될 뻔한 수백 명이 북에 끌려가 목숨을 잃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지도 않고 있는 현실이 나는 더 슬프다.
2017-08-29 전혜성의 재입북과 먹히지 않는 대남공세
최근에 남쪽에서 살다 북한으로 돌아간 전혜성이란 여성이 한동안 남쪽 언론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여기 와서 한 3년 살다가 갑자기 몇 달 전 북에 돌아갔는데, 북한 대남용 인터넷 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에 출연해 남쪽을 비난하고 있죠.
전혜성이 특히 주목을 받은 이유는 예쁘장한 외모로 여기 TV 방송에 여러 차례 출연해 ‘탈북방송인’으로 불렸던 게 컸습니다. 북에 재입북한 사람들은 다 여기서 버티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전혜성의 경우도 과거 이름 없던 시절에 돈 좀 벌려고 인터넷 음란방송에 출연했는데, 그 영상이 그만 세상에 공개돼버린 경우죠. 그런 부끄러운 과거사가 공개됐는데 여기서 얼굴 들고 살기가 어려우니 그만 북으로 확 가버렸습니다.
빛 독촉에 돌아간 사람, 부끄러운 과거 때문에 돌아간 사람, 가족 데려오려다 잡혀서 돌아온 척 하는 사람 등 돌아가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북한은 이런 사람들이 오면 TV에 출연시켜 남조선은 썩고 병든 세상이라고 선전했습니다.
“남조선은 지옥이었다, 우릴 사람 취급도 안해주었다, 지은 죄가 있어 머뭇거렸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세 돌아오니 따사로운 당의 품이 품어주었다.” 북에 간 사람들이 하는 말은 대개 이렇게 다 똑같습니다.
전혜성도 요즘 지방을 돌면서 자기를 납치해 간 박근혜는 곧 사형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핵무장에 미국과 남조선이 사정하고 있다는 강연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강연을 TV에 나와서 왜 못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북한에서 북으로 돌아간 탈북자로 처음으로 내세운 것이 2012년 7월 박인숙 여성이었습니다. 박인숙 여성이 한국에 오자 북한은 음악대학 교원이던 아들과 며느리를 황해북도 시골에 추방시켰죠.
그리곤 보위부가 돌아오면 아들 살려 줄 건데, 안 오면 죽으니까 알아서 하라 이렇게 협박을 해왔습니다. 자식의 목숨을 인질로 삼아 협박하는데 어머니가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박인숙 여성은 내가 가서 죽더라도 아들한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 이런 절절한 모정으로 목숨 걸고 돌아갔습니다.
북한의 대남기관이 가만 따져보니 박인숙 여성을 죽이기보단 이런 사람이 잘 살고 있다고 선전하면 더 많은 탈북자들이 돌아올 것 같았단 말이죠.
그러다보니 박인숙 여성의 경우는 추방이 풀린 아들과 함께 평양에서 살게 돼 일이 잘 풀린 경우입니다. 그런데 감시 받으며 사느라 마음은 늘 불안하겠죠.
헌데 박인숙 여성이 기자회견에 나온 뒤에 그가 살았던 청진에서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얼굴이 짜들짜들 까맣던 장마당 할머니가 남조선에 갔다 오더니 피부가 허옇고 기름이 좔좔 흐르고, 나이도 십년은 젊어졌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남조선 물이 참 좋긴 하다 이런 소문이 퍼졌죠.
이런 소문이 워낙 믿는 사람끼리 몰래 돌아가니 북한이 그걸 눈치 채지 못한 듯싶습니다. 이후에도 돌아간 탈북자들을 내세워 기자회견을 계속 했죠.
그런데 제가 정확히 기억은 못하겠는데 어느 순간부터 기자회견이 딱 중단됐습니다. 전혜성의 경우도 외국에서만 볼 수 있는 우리민족끼리라는 매체에만 출연시키지 북한 사람들은 그런 여인이 돌아온 줄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딱 보면 북한의 전술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리고 그 변화의 배경은 이젠 탈북자가 북으로 돌아가서 남조선이 지옥이고 장군님이 따사롭다고 아무리 눈물을 흘려봐야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눈이 있으면 보겠죠. 남쪽에서 지옥처럼 살다 왔다는 탈북자들의 얼굴이 얼마나 때깔이 좋습니까. 서울물 2~3년만 먹으면 이설주나 김여정 피부보다 더 좋아지는 거 보이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기 서울은 성형수술이 세계적 수준입니다. 중국, 일본, 동남아는 물론 저기 중동에서도 여성들이 성형하려 줄지어 밀려오는 곳입니다.
서울에선 턱을 깎고, 눈을 키우고, 코를 높이는 건 일도 아닙니다. 그런 성형을 하게 되면 예전의 모습이 싹 사라지고 미인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전혜성의 경우도 처음에 한국에 왔던 모습하고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높았던 광대뼈는 사라지고, 무서웠던 눈매는 부드러워졌습니다.
전혜성이 만약 고향에 가게 되면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와서 “저 혜성이예요”하면 “아이구나. 남조선에 가더니 시골 촌여자가 영화배우 돼서 돌아왔네” 이러지 않겠습니까.
북한이 재입북 탈북자를 내세우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텔레비에서 선전했는데 다시 남쪽으로 도망쳐 오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에만 7명이나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가족을 데리러 갔다 보위부에 체포되자 조국이 그리워왔다고 거짓말을 한 경우죠. 그리고 기자회견 적당히 하고 기회를 노리다가 가족하고 다시 도망치는 것입니다.
6월에도 작년에 우리민족끼리에 나왔던 남자가 아내를 데리고 또 도망쳐 한국에 왔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김정은이 좋아서 왔다고 해놓고는 또 도망쳤다면 오히려 선전 안하기보다 못한 감당 못 할 역효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재입북자들을 기존 고향에서 집까지 주고 살게 해주는 것도 역효과가 나죠. 남은 사람들은 “탈북하지 않은 우리만 바보네. 나도 나가서 남쪽물 좀 먹어볼까” 이럴 것이 뻔한 것이죠.
결국 북한은 자기 땅에서도 먹히지 않는 선전을 대남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에서 기자회견 했던 사람들도 계속 남쪽으로 돌아오는데, 그런 선전이 남쪽 사람에게 먹힐까요.
이젠 좀 재입북자를 내세운 선전을 작작하길 바랍니다. 남북에서 다 통하지 않는 거짓말을 대남기관은 왜 저리 열심히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걸 보면 일등 바보들이 따로 없어 보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이 글은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전해지는 내용으로 2017년 8월 25일 방송분입니다.
남한 독자들이 아닌 북한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한 글임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2017-08-31‘혁명의 어머니’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올해 1월 1일 김정은 리설주 부부가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하는 모습. 국정원은 리설주가 2월 셋째를 출산한 것으로 보인다고 28일 밝혔다.
미사일보단 리설주가 더 높이 떴다.
북한 탄도미사일이 일본 상공을 가로지른 날, 네이버에선 오후 늦게까지 리설주가 실시간 인기 검색어 1위에 올라 있었다. 북한 미사일은 2위.
사람들이 리설주가 2월 셋째를 낳았다는 소식에 더 큰 관심을 보인 것이다. 남쪽 인터넷을 수시로 살필 김정은이 검색어 순위를 보며 “역시 내 아내 인기는 식을 줄 몰라. 앞으로 이미지 관리를 더 철저히 해야지”라며 즐거워할지도 모를 일이다.
김정은 우상화와 더불어 설주는 머잖아 ‘혁명의 어머니’로 등극해야 할 몸이다. 혁명의 어머니는 성녀(聖女)여야 한다. 정은과 만나기 전 딴 남자와 손잡은 과거조차 없어야 한다.
설주는 20세 때인 2009년부터 정은과 동거를 시작했다. 이때부턴 문제될 순 없지만 그 전이 문제다. 설주는 북한 최고의 예술 인재 양성학교인 금성학원에서 최고의 ‘퀸카’였다. 본인이 아무리 뿌리쳐도 남자가 줄줄 따라다녔을 것이다. 더구나 금성학원의 연애 풍조는 다른 학교에 비해 훨씬 자유롭다.
금성학원 시절의 설주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동창들이다. 평양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옆에 있는 금성학원은 11세부터 전국에서 인재를 뽑아 9년 동안 성악과 기악을 훈련시킨다. 함께 사춘기를 보냈고 졸업 후에도 같은 예술단에서 일하다 보면 서로의 사생활은 너무 잘 알 수밖에 없다.
오랜 친구였던 설주가 갑자기 정은의 간택을 받았을 때 동창들은 불행히도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다. 질투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설주가 연애하던 남자친구 있었잖아. 자격도 안 되는 얘가 말이 돼” 하며 서로 수군거리다가 급기야 증거사진까지 돌렸다고 한다. 재빨리 태워버려도 시원찮을 사진을 돌려본 ‘죄’로 이들은 목숨을 잃었다.
그게 딱 4년 전 2013년 8월 말 벌어진 은하수관현악단과 왕재산음악단 예술인 9명이 처형된 사건이다. 당시 이들이 ‘포르노를 찍었다’라느니 “‘리설주도 우리와 똑같이 놀았다’고 말해 죽었다” 등의 설이 돌았지만, 실상은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사진 때문에 죽인다곤 할 수 없으니 부화타락했다(성적으로 문란했다)는 죄를 잔뜩 씌웠다.
내막을 잘 아는 탈북민에 따르면 문제의 사진은 설주가 학생 시절 남자친구와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옆 잔디밭에서 어깨를 감싸고 찍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 사진 한 장이 순결하지 않다는 증거가 될 순 없지만, 성녀에겐 딴 남자에게 가슴 설렜던 과거 따윈 없어야 했다.
가뜩이나 설주 동창들을 주시하던 당국은 사진의 존재를 알아챘다. 설주와 친구들이 가수로 있던 은하수관현악단에 중앙당 간부가 내려와 공식적인 회의에서 3차례 정도 경고를 했다고 한다.
“설주 동지는 이제 일반인이 아니다. 그와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 입에도 올리지 말라.”
한편으론 단원들을 은밀히 불러 문제의 사진을 누가 퍼뜨렸고, 누가 봤는지 캐기 시작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도 처벌받을 게 뻔한 상황이라 이들은 한결같이 “그런 사진은 본 적이 없다”고 발뺌했다.
하지만 집요한 추궁에 결국 실토한 사람이 생겼다. 원본 사진과 돌려본 사람의 이름도 줄줄 나왔다. 북한은 이들을 체포한 지 불과 사흘 뒤 강건종합군관학교 사격장에서 문화예술계 간부 및 종사자 수천 명을 모아 총살했다. 집행관은 “부화타락한 인간들이 감히 혁명의 최고 수뇌부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다”고 소리를 질렀다.
처형장 맨 앞줄엔 악단 동료들을 앉혔다. 말뚝에 묶인 9명에게 1인당 90발씩 AK-47 자동소총 점발사격이 가해졌다. 사형수 중 가장 나이 어린 연주자 청년은 스무 살을 갓 넘겼는데, 청진에서 평양에 뽑혀온 지 얼마 안 돼 죽임을 당했다.
총소리가 멎었을 때 앞에 앉은 여가수 중 오줌을 지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집행관은 앞줄부터 일어나 말뚝 주변을 빙 돌게 했다고 한다. 90발을 맞으면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된다. 며칠 전까지 함께 웃던 친구와 동료의 피와 살점을 밟으며 그들이 느꼈을 공포를 글로 설명할 수 있을까. 김정일은 유부녀 성혜림과 자신의 관계를 발설한 연예인들을 정치범수용소로 보내 격리했지만, 정은은 설주의 과거를 피로 지워 땅에 묻었다.
혁명의 어머니의 삶도 만만치는 않다. 인기 가수였던 설주는 지금 열심히 출산 중이다. 28세에 벌써 자식이 3명이다. 성별이 확인된 것은 ‘주애’라는 딸(둘째)뿐이다. 국가정보원은 29일 첫아이가 아들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그렇더라도 왕조를 물려주려면 예비 ‘왕자’ 한 명은 더 있어야 한다. 올해 낳은 셋째의 성별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설주에게 아들이 있다면 발편잠은 잘 수 있을 것 같다. 딸만 낳았다면 아들 못 낳은 왕비는 반드시 밀려난다는 역사가 되풀이될 뻔했다. 김정일의 세 번째 여자의 아들인 정은이야 말로 누구보다 설주가 아들을 많이 낳길 기대할 것 같다. 설주는 앞으로 몇 명을 더 낳아야 할까.
2017-10-19 최룡해 아들 사고소식에 김정은 직접 찾아와 “무조건 살려라”
▲지난해 5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노동당 7차 대회 경축 군중대회 주석단에서 김정은이 최룡해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달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최룡해는 명실상부한 북한의 2인자로 부상했다. 조선중앙TV 캡처
2013년 봄 어느 날. 자정 무렵 평양 서성거리 한 도로에서 젊은 남성 두 명이 한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었다. 한 명은 페달을 밟고, 한 명은 짐받이에 앉았다.
갑자기 뒤에서 군용 승합차가 이들을 덮쳤다. 아스팔트에 내동댕이쳐진 둘을 그대로 둔 채 차량은 도망갔다. 이런 뺑소니는 북한에서 흔한 일이다. 사고를 당한 남성들은 뒤늦게 근처 모란봉구역의 평양 제1인민병원 구급실(응급실)에 실려 갔다.
당직 의사들이 보니 출혈이 심해 가망이 없었다. 의식 잃은 이들은 사체실로 옮겨졌다. 신분 확인을 위해 의사는 이들의 지갑 속 증명서를 꺼냈다.
“최현철. 1984년생. 미혼. 평양시당 조직부 책임부원…. 이런, 당 간부네. 시당에 알리세요.”
40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봉화진료소 구급차가 병원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사체실에서 현철만 꺼내 급히 사라졌다.
평양에서 김씨 패밀리 전용 병원이자 극소수 특권층 간부들만 치료하는 봉화진료소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평양시 하급 간부인 부원이 감히 문턱에도 못 갈 곳이다.
깜짝 놀란 의사는 보통강구역당 조직부원으로 확인된, 페달을 밟았던 남성을 병상에 옮겨 산소호흡기를 달았다. 하지만 현철보다는 상태가 좋아 보였던 그 남성은 끝내 숨을 거뒀다. 그게 일반 병원의 한계였다.
한편 봉화진료소에도 비상이 걸렸다. 새벽 4시에 김정은이 직접 찾아온 것이다. 그는 실려 온 청년을 가리키며 “최씨 가문의 대가 끊기면 안 된다. 무조건 살려내라”고 지시했다.
최현철은 최룡해 노동당 부위원장의 외아들이자, 최현 전 북한 인민무력부장의 유일한 손자였다. 현철에겐 복실이란 이름의 누나만 하나 있다. 복실은 날 때부터 얼굴에 손바닥만 한 기미가 있어 얼굴 반쪽을 늘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다닌다.
현철이가 사고를 당했을 때 군 총정치국장이었던 최룡해는 지방 군단에 출장을 나가 있었다. 최룡해 아들의 교통사고 소식은 김정은의 단잠을 깨울 만큼 중요한 보고였다. 체포된 뺑소니범은 공교롭게 최룡해가 수장으로 있는 총정치국의 선전선동부 소속이었다.
김정은의 특명에 최고 의료진이 총동원됐다. 현철은 42일 만에 눈을 떴다.
하지만 뇌를 다쳐 발음도 어눌했고, 거동도 불편했다. 현철은 요양원을 전전하며 치료를 받다가 그해 말 싱가포르까지 가서 고막 수술을 받았다. 그래도 사고 전만큼 멀쩡해지진 않은 것 같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이 무렵 평양엔 현철과 김여정이 결혼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기도 했다.
위의 사건은 최룡해에 대한 김정은의 신뢰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최룡해가 누구에게 밀려났다는 식의 보도가 가끔 나오긴 하지만, 누가 뭐래도 최룡해는 빨치산 최현의 자식이다. 최현은 글도 모르는 까막눈이지만 김일성 독재를 구축하는 데 으뜸 공신 노릇을 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낙점되는 데도 최현이 큰 역할을 했다.
최룡해도 김정일의 최측근으로 살았고, 지금은 김정은을 보좌하고 있다. 대를 이어 김씨 일가를 지키는 ‘백두혈통’의 문지기 역할을 충실히 해오고 있는 셈이다. 군 경력이 없던 최룡해가 2012년 4월 군 총정치국장이 된 것도 김정일 사망 직후 김정은이 쿠데타를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정은이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하는 과정을 거쳐 권력을 확실히 장악할 때까지 2년 동안 최룡해는 군부를 감시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이달 7일 노동당 제7기 2차 전원회의에서 최룡해는 기존의 6개 보직에 더해 2개의 보직을 더 받아 총 8개의 감투를 썼다. 정치국 상무위원, 정무국과 국무위원회 부위원장 등 당정 주요 보직을 두루 꿰찬 명실상부한 북한의 2인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북한에서 최룡해는 최현과 빨치산 출신의 아내 김철호 사이에 태어난 확실한 빨치산 2세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북에서 수십 년 동안 기자로 일한 탈북자는 “최룡해는 김철호의 아들이 아니다”고 말했다. 광복 후 최현이 38선 경비여단장으로 있던 때 황해도 현지 여성과 눈이 맞아 1950년에 태어난 자식이 최룡해임을 빨치산 동료들은 다 안다는 것. 그렇더라도 그가 최현의 아들이고, 김철호 손에서 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최룡해는 젊었을 때 미모의 처녀들을 기쁨조로 뽑아 김정일의 파티를 흉내 내며 방탕한 생활을 하다 47세 때인 1997년부터 무려 5년이나 자강도 랑림의 임산사업소에서 고된 ‘혁명화’를 거쳐야 했다. 이때 그는 북에선 김씨 혈육이 아닌 한 누구라도 철저히 몸을 낮춰야 산다는 교훈을 얻은 것 같다.
북한 2인자의 외아들인 현철이 당 기관의 말단 직책에서 10년 넘은 낡은 겨울옷 차림에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것도 아버지의 뜻일 것이다. 김정은과 동갑내기인 현철은 앞으로 어디까지 오를 수 있을까. 3대 세습 국가에선 3대 세습 문지기도 별로 이상해 보이진 않는다.
2017-11-02 나를 낚아낸 북한 해킹 고수
▲북한이 최근 해킹능력을 빠르게 키우고 있다. 평양의 인터넷 회선이 크게 늘어나 해커들이 중국에 나올 필요도 없어졌다. 사진은 집권 초기 군부대를 방문해 컴퓨터 작업을 지켜보고 있는 김정은. 사진 출처 우리민족끼리 홈페이지
아뿔싸. 미끼가 매우 파격적이라 이번 낚시엔 제대로 걸려들었다.
난 평소 이메일 첨부파일은 거의 열지 않는다. 북한 해커들이 내 컴퓨터를 얼마나 엿보고 싶어 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하도 낚시 메일을 많이 받아서 이젠 척 보면 감이 온다.
그런데 이번엔 전날 과음이 문제였다.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아는 분의 이름으로 온 메일의 첨부파일을 무심코 클릭한 것이다. 동시에 ‘아차’ 싶어 화들짝 놀라 발송인에게 전화했더니 역시 메일 보낸 적이 없다고 했다.
전문가에게 분석 의뢰를 했더니 거의 100% 북한 소행이며, 보기 드물게 매우 잘 짜인 해킹 프로그램이라고 혀를 찼다. 클릭 한 번 잘못했다가 포맷하느라 한나절을 허비했다.
내가 실수를 한 건 꼭 숙취 탓만은 아니다. 해커는 내가 지난해 12월 칼럼으로 ‘김일성 평전’을 소개했다는 것도 파악해 적절히 활용했다. 첨부파일 제목도 ‘김일성의 실체’였다.
무엇보다 방심했던 이유는 “이런 메일을 설마 북한 해커가 보냈을까” 싶을 정도로 내용이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선 이유 불문하고 ‘김씨 가문’을 욕보이는 ‘불경’을 했다간 무조건 사형이다.
그런데 이번 메일은 내 상식을 완전히 깼다. 내게 김일성 신화를 허무는 녹음파일을 만들어 북한에 살포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는데,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김형직(김일성 부친)이 사망하고 강반석(김일성 모친)이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살길이 어려워서 한족에게 재가를 하였다는 사실도 있고 하니 여러 자료들을 잘 배합하면 북한 주민들 머릿속에서 김일성 신화를 확실히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일성 가계에 대하여 환멸을 느낄 수 있도록 잘 체계화하고 녹음을 하여….”
이런. 북한 해커가 김일성 신화에 환멸을 느끼도록 하자고 꼬드긴다.
“우리가 더 많은 일을 하여 북괴가 스스로 망하거나 또는 북한 주민들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도록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더 파격이다. 누가 죽임을 당해야 할지 밝히진 않았지만, 북괴가 망하게 하잔다.
북한 독재를 무너뜨리자고 여러 번 되풀이했는데, 이건 찔렸는지 ‘독재’를 ‘독제’로 의도적으로 틀리게 썼다. 이런 파격적 내용으로 해커는 나의 클릭을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걸 감히 승인할 간부는 없을 터이니 이건 분명 독자적 행위라고 판단한다.
나는 북한 해킹 수준을 언론의 부풀려진 내용이 아니라 있는 실체 그대로 비교적 잘 파악하고 있다.
북한 사이버전 부대는 두 곳이다. 해킹 담당은 정찰총국으로 예전 노동당 작전부와 군 정찰국 해커부대가 통합돼 수백 명 규모인데 정찰국 출신들의 실력이 조금 더 높다. 인터넷 심리전은 몇 년 전 창설된 100명 규모의 군 총정치국 적군와해공작국(적공국) 소속의 사이버 부대가 담당한다.
해커들은 대개 금성학원 컴퓨터반을 졸업한 뒤 김일성대와 김책공대에서 2∼3년 추가 교육을 받는다. 예전엔 해킹하려면 중국에 나와야 했고, 팀원 중에서도 허가받은 몇 명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평양에 앉아 수백 명이 동시에 해킹이 가능할 정도로 인터넷 선이 많이 들어갔다. 물론 북에선 감시가 철저하기 때문에 나를 낚은 해커는 중국에 파견된 ‘고수’로 추정된다.
미국이 북한 해킹부대 수백 명이 평양에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을 중국이 제공하고 있단 사실을 파악하고 있을까. 미국도 해킹 피해를 많이 받는다고 하니 이 칼럼 이후 미국의 대중 압박 항목에 인터넷 차단도 포함될지 모른다.
북한 해킹 역량을 키워준 일등 공신은 한국 언론이다. 하도 북한 사이버 역량을 과대 광고해주니 ‘해킹’이 뭔지 전혀 모르던 북한 늙은 간부들까지 “요새 대남공작원 파견하기도 어려운데 이런 노다지가 있는가 보군” 하고 큰 관심을 끌게 해줬다.
요즘 수시로 북한이 국방부 작전계획을 빼갔다, 이지스함 설계도를 빼갔다는 보도가 나온다. 그런데 이런 비밀은 북한만 군침을 흘릴까.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과 비교 불가한 수준의 최정예 해커들을 국가 차원에서 대거 운용하고 있다. 그런데도 십 년 넘게 해킹만 발생하면 무조건 북한 소행이란 뻔한 발표가 나온다. 문재인 정부에선 “이번 해킹은 북한이 아니라 중국 또는 러시아 소행으로 보인다”는 ‘획기적’ 발표가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다.
단, 이건 분명히 하자. 정보가 털린 것은 해커의 수준이 높아서라기보단 우리의 보안이 허술했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글을 읽을 북한 대남기관에도 한마디 한다. 누가 “주성하의 컴퓨터 해킹에 성공했다”고 보고하거들랑, 그가 보낸 메일 내용도 파악하길 바란다.
성과에 아무리 목을 매도 그렇지, 어떻게 북한 사이버 전사가 감히 ‘최고존엄’ 가문을 모욕하고, 북괴 멸망을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이 해커 멸문지화를 당하고 싶어 환장했나 보다.
2017-11-26 평양의 미인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
▲2015년 봄 북한의 원로 가수들이 총출동해 진행된 공연 ‘추억의 노래’에서 열창하는 북한 인민배우 가수 최삼숙. 유튜브 캡처
“북한 미인은 어디에 다 가 있죠?”
최근 몇 달 동안 탈북 예술인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질문을 던졌다. 묻게 된 계기를 설명하려면 작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사실 그때 중국의 북한 식당 여종업원 12명이 한국에 왔다는 통일부의 깜짝 발표에 난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들 속에 ‘북한 가요계의 여왕’ 최삼숙의 외동딸이 포함됐다는 소식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남쪽 사람들에겐 이 전설적 가수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할 듯싶다.
최삼숙은 북한 예술의 전성기였던 1970, 8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다. 가수 남인수(본명 최창수)의 조카이기도 한 그는 북한이 ‘불후의 고전적 명작’이라고 내세우는 ‘꽃 파는 처녀’(1972년) 주제곡을 포함해 수백 편의 영화, 드라마 주제곡을 불렀다. 북한이 제작한 영화가 아무리 많아도 연간 수십 편에 그쳤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대를 주름잡은 것이다. 31세 때 예술인의 최고 명예인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고 40년 동안 가수로 활동하며 부른 독창곡은 2800곡이 넘는다. 아마 북에 한국 같은 노래방이 있다면 노래 목록 책자는 최삼숙이란 이름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러니 최삼숙은 한마디로 “여러분이 한국 최고 가수로 누구를 꼽든, 북에서 그의 인지도는 그것 이상이다”쯤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가수의 외동딸이 탈북했다니….
최삼숙이 딸을 돌려보내라며 만든 서류에 적은 주소를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평양시 동대원구역 신리동 64반?”
주체사상탑 뒤편 이 동네는 평양 중산층 거주지에도 속할까 말까 한 곳이다. 북한 최고의 여가수가 인기 없는 동네의 허름한 작은 아파트에 사는 것이다.
그때부터 사정을 좀 알 만한 탈북자를 만나면 “왜 최삼숙이 신리동에 사냐”고 물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더 놀라웠다. 돈 없는 가수가 거기 사는 게 뭐가 이상하냐는 것이다. 한 탈북 예술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경훈 알죠? 2000년대 초반 이경훈이 하도 초라한 행색으로 양동이를 들고 물 길으러 다니길래, 외화벌이 회사 다니는 지인이 돈을 좀 쥐여주었더니 덥석 받고 눈물 글썽이며 고맙다고 인사하더래요.”
‘남자 최삼숙’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경훈이 몇 푼의 동정에 울먹였다니. 비록 출신성분이 나빠 인민배우 아래인 공훈배우에 머물렀지만 그만큼 많은 노래를 부른 남성 가수도 드물다.
탈북 예술인들은 말했다.
“예술인이 가진 게 뭐가 있어요. 권력이 있나, 달러 만질 수 있나, 장사할 수 있나. 예술인끼리 눈 맞아 살면 배급에 목매달고 사는 거지가 되기 십상이죠.”
남쪽에서는 선전선동에 강한 북한에선 예술인이 큰 대우를 받는 줄 안다. 하지만 실상은 권력자의 눈에 든 일부 아이돌만 특혜를 받는다고 했다.
사정을 듣고 보니 온 나라가 다 아는 최고의 가수 어머니가 끼니 걱정하는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를 최삼숙 딸의 심정이 이해됐다. 중국에 와서 바깥세상에선 스타가 어떤 대접을 받는지도 똑똑히 봤을 것이다.
“그래, 나 같아도 열 받지. 가수는 그렇다 치고 영화, 드라마 배우는 좀 낫지 않나요. 제가 북에서 살 땐 동네에서 예쁜 여자애들을 보면 ‘배우감이다’ 이랬는데.”
“에이, 뭘 만들어야 출연하든지 말든지 하죠.”
하긴 요즘 북에서 새 영화, 드라마가 거의 안 나오긴 한다. 아버지와 달리 김정은은 핵미사일에 미쳤지 영화엔 별 관심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유가 그것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뭘 찍어도 몰래 본 할리우드 영화, 한국 드라마에 눈 높아진 사람들이 재미없다고 욕설을 퍼부으니 예술인들이 만들 의욕도 없어졌어요.”
6년 전 있었던 일이라 한다. 김정일이 한국 드라마가 부러웠던지 “우리도 역사물 드라마 제대로 한번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단다. 그래서 최고 배우들이 총출동해 찍은 것이 23부작 ‘계월향’이었다. 하지만 TV로 10부까지 방영했을 때 참고 참던 김정일이 “재미없다”고 화를 내며 “때려치우라”고 했단다. 드라마가 도중에 방영이 갑자기 중단됐다. 한국에선 상상하기 어렵지만, 북한이니 가능한 일이다.
나도 유튜브로 계월향을 봤다. 여주인공은 낯선 신인이었다. 이후엔 사라진 것 같아 궁금해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아, 걔는 집에 돈 좀 있어 여주인공 됐죠. 요새 영화나 드라마나 주인공이 되려면 의상은 모두 자기 돈으로 해결해야 해요. 소속사나 매니저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집에 돈이 없음 배우 못 해요. 잘사는 집은 딸 한 번 띄워서 시집 잘 보내려고 해요.”
영화계나 가요계가 저 지경이면 도대체 북한의 미인과 가수 소질을 타고난 인재는 다 어디에 가 있을지 궁금해졌다.
“어디겠어요. 달러가 도는 곳에 가 있죠. 예쁘면 외화를 쓰는 식당이나 상점의 접대원, 봉사원이 최고죠. 돈 있는 남자와 만나 결혼할 확률도 높고요.”
아하. 북한의 미인을 만나려면 평양의 외화식당과 외화상점에 가야 하는 것이었다.
2017-11-30 애국열사 대접 받는 장성택 형들
▲본보가 단독 입수한 평양 형제산구역 신미동 ‘애국열사릉’ 장성택 형들의 비석. 가운데 장성우와 오른쪽 장성길이 각각 장성택의 맏형과 둘째형이다. 이 사진은 2015년 5월에 촬영됐다. 익명 제공
김정은이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해 세상을 경악시킨 지 어느덧 4년이 돼 간다. 2013년 12월 장성택 사형 판결문에는 그가 “개만도 못한 천하의 만고역적”으로 적시돼 있다.
이쯤 되면 그의 가문도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다는 것은 북한 사람들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실제 한국에선 장성택 일가는 어린아이까지 포함해 3대가 멸족됐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그런데 얼마 전 뜻밖의 사진 하나를 보게 됐다. 북한을 방문한 한 해외 교포가 내게 평양에서 찍어온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애국열사릉에서 찍은 사진 중에 장성택의 두 형 묘비가 있는 것 아닌가. 물론 그 교포는 자기가 장성택 형들의 묘비를 찍은 줄도 전혀 몰랐다.
해당 사진은 장성택 처형 1년 반 뒤인 2015년 5월 말에 촬영된 것이다. 북한에서 ‘장성택 잔재 청산’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지 한참 뒤에도 이들이 여전히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도 묘비는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평양 형제산구역 신미동에 있는 ‘애국열사릉’은 북한 체제에 충성을 다하다 사망한 인물들 약 800명이 매장된 곳으로 우리의 현충원과 비교되는 곳이다. 수많은 사람이 참관하는 이런 곳에 ‘만고역적’의 두 형인 장성우와 장성길이 여전히 애국열사로 대접받으며 묻혀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탈북민들 역시 북한이 장성택의 두 형 묘를 애국열사릉에서 파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했다.
장성택의 맏형인 장성우는 ‘조선인민군 차수(대장과 원수 사이 직급)’로 소개돼 있으며 2009년 77세로 사망한 것으로 묘비에 적혀 있다. 장성우는 북한군 정찰국장, 노동당 민방위부장 등을 지냈다. 둘째 형인 장성길은 ‘조선인민군 장령’으로만 소개돼 있다. 장성길은 인민무력부 혁명사적관 관장(중장)을 지내다가 67세로 사망했다.
이들은 장성택이 처형되기 각각 4년, 7년 전에 사망했지만, 만고의 역적으로 처형된 동생을 둔 이상 연좌제에서 벗어나긴 어렵다. 북한은 1997년 서관희 노동당 농업담당 비서를 처형한 뒤 그를 등용했던 김만금 농업위원장을 간첩으로 몰아 13년 전 사망해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던 김 위원장의 유골을 파내 부관참시하기도 했다.
장성택의 두 형이 여전히 애국열사로 인정받고 있다면 그의 가족들 역시 처형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다시 말해 장씨 집안 3대 처형은 소문에 불과했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신뢰할 수 있는 한 대북 소식통은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 당국이 관례대로 장성택 가문을 몰살시키려 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성택의 아내인 김경희 노동당 비서가 김정은을 직접 찾아가 “내 남편을 죽였으면 됐지 시댁까지 몽땅 매장하려 하냐”며 펄펄 뛰었다고 한다. 평소 김경희는 시댁 식구들을 일일이 챙겨 그들에 대해 애정이 깊다. 김정은은 살아 있는 고모의 위세를 이기지 못해 이미 수용소에 끌고 갔던 이들까지 풀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김정은이 “장성택 가족을 죽이지 않을 테니 고모는 죽은 듯 조용히 지내라”는 제안을 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현재로서는 장성택 집안에서 확실히 처형된 이는 장성택 맏형인 장성우의 차남 장용철 전 주말레이시아 대사와 장성우의 사위로 외화벌이 업체 사장을 지낸 최웅철이다. 이들은 장성택이 처형된 2013년 12월 12일 이전에 먼저 처형됐다.
장성우 자식 중 막내 외동딸과 결혼한 최웅철은 인맥을 통해 장성택 사건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눈치챘다. 그는 말레이시아에 있는 처남 장용철에게 연락했다.
“이번 일은 심상치 않아. 우리도 죽을 것 같아. 빨리 외국으로 튀어야겠다.”
“응. 그래 매부, 그럼 빨리 여기로 빠져나와.”
하지만 이들의 대화는 이미 장성택 주변에 대한 철통같은 감시를 펴고 있던 보위부에 포착됐다. 보위부는 즉시 장용철을 현지에서 체포해 소환시켰고, 최웅철도 체포했다. 이들은 조국을 버리고 적들에게 도주하려 했다는 반역 혐의로 장성택 처형 전에 먼저 총살됐다.
이처럼 장성우는 동생만 대역죄인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아들과 사위까지 반혁명분자로 총살된 것이다. 이런 그가 여전히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는 것은 미스터리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묘가 언제까지 애국열사릉에 있을진 장담할 수 없다.
아직까지 김경희는 살아 있다. 국가정보원은 8월 29일 김경희가 평양 근교에서 은둔하면서 신병 치료를 하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김경희가 살아 있다면 그의 시댁 식구인 장성택의 가족은 아직 잡을 수 있는 동아줄이 남아 있는 셈이다. 하지만 올해 71세인 김경희조차 사망한 뒤에도 김정은의 자비가 지속될 거라 보긴 어렵다. 시한부 인생을 살 장성택의 가족은 하루하루 어떤 심정일까.
2017-12-14 장성택 가문을 관통한 ‘사위의 저주’
▲2013년 12월 13일 북한 노동신문에 실린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의 마지막 사진. 신문은 장 부장이 전날인 12일 특별군사재판을 받은 뒤 형법 제60조에 따라 즉시 처형됐다고 밝혔다. 동아일보D
3년 12월 13일 북한 노동신문에 실린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의 마지막 사진. 신문은 장 부장이 전날인 12일 특별군사재판을 받은 뒤 형법 제60조에 따라 즉시 처형됐다고 밝혔다. 동아일보DB
어제(13일)는 장성택 전 북한 노동당 행정부장 처형 소식이 전해진 지 4년째 되는 날이다. 세계가 경악했던 그날이 어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다.
김일성의 사위에서 “개만도 못한 만고의 역적”으로 낙인찍혀 돌봐줬던 조카의 손에 처형당한 장성택의 일생은 통일 후에도 이런저런 이야기 소재로 꽤 많이 활용될 듯싶다. 지난 4년간 장 씨에 대해 이런저런 정보를 적잖게 들었다. 그는 캘수록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1980년대 말에 벌써 김정일을 가리켜 “저런 난봉꾼이 권력을 잡았으니 우린 희망이 없다”며 극소수 친한 지인들과 통음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만큼 김정일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장 씨는 김정일을 도와 손에 피도 많이 묻혔다. 그는 사위-매부-고모부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했다.
특히 장성택과 그의 가문을 보면 ‘사위의 저주’란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장성택을 닮은 듯, 장씨 집안의 사위들은 누구도 비운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가문은 전생에 ‘사위’와 무슨 지독한 악연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김경희가 아버지 김일성을 비롯한 온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끝까지 장성택을 쟁취한 러브스토리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게 시작은 아름다웠으나 말로는 비참했다.
장성택의 형제들 역시 공교롭게도 모두 딸이 한 명씩 있었는데 사위들의 운명은 모두 비극으로 끝났다.
맏형 장성우의 외동딸은 숙모 김경희와 똑같은 방식으로 남자를 점찍고 쟁취했다. 그가 반한 남자는 1990년대 북한 최고 미남 배우로 뭇 여성의 선망의 대상이던 공훈배우 최웅철이었다. 당시 최 씨는 약혼녀가 있었다. 그러나 권세가 하늘을 찔렀던 장씨 집안의 장녀를 뿌리치지 못했다.
최 씨는 결혼 후 배우를 그만두고 평양에서 택시회사를 경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사업은 당연히 잘됐다. 하지만 그런 삶도 10년 남짓. 그는 장성택이 체포된 뒤 심상치 않은 눈치를 채고 처남인 말레이시아 대사 장용철의 도움으로 해외로 도망치려다 체포돼 비밀처형됐다. 누구나 다 아는 배우였던 그는 지금 북한에서 철저히 매장됐다. 그가 처형된 뒤 북한은 그가 출연한 영화 25편에 대해 시청 금지 및 비디오테이프 몰수령을 내렸다. 이 중엔 북한이 시대의 명작이라 선전했던 영화도 다수 포함됐다. 탈출 시도만 안 했어도 조카사위라는 것만으론 처형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형인 장성길의 외동딸은 평양외국어대를 다니다 동창에게 반해 결혼했다. 장성택은 둘째 조카사위를 자신이 수장인 행정부 산하 54부 통역원으로 받아 키워주었다. 54부는 북한의 ‘알짜’ 외화벌이 이권을 거머쥔 부서였다. 장성택 처형과 함께 행정부는 전원 숙청됐다. 장 씨의 최측근인 장수길 행정부 부부장 겸 54부장은 장성택보다 20일쯤 먼저 처형됐다.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는 “행정부의 부부장과 과장 15명이 총살당하고, 그 아래로는 전 가족이 정치범수용소로 갔다. 북한 역사상 한 부서 전체가 이렇게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고 증언했다. 장성택 조카사위의 운명이야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가 54부에만 들어가지 않았다면 큰 화는 면했을지 모른다.
장성택의 누나 장계순의 외동딸은 김일성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장씨 집안의 외동딸 중 제일 먼저 결혼했다. 김경희가 중매를 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상대가 하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외아들인 황경모였다. 1997년 2월 황 전 비서의 한국 망명으로 그는 가족과 함께 자택연금됐지만 그해 10월 말 보위부의 감시를 따돌리고 탈출했다. 당시 34세였던 황경모는 김일성대 철학부를 졸업한 수재에 태권도 7단 유단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북한을 벗어나지 못하고 보름 뒤 평북 용천군 어느 산골에서 체포돼 곧바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는 장씨 가문의 기세가 서슬 퍼럴 때라 장계순의 딸은 이혼 절차를 밟고 집에 돌아왔지만, 충격으로 오랫동안 독수공방했다.
장성택과 김경희 사이에도 외동딸 장금송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파리 유학 중이던 2006년 자살했다. 한국에는 장금송이 1978년생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는 그보다 2∼3세 어리다. 그는 유학 중 만난 백인 남성을 사랑하게 됐지만, 부모가 강력히 반대하자 우울증에 걸려 목숨을 버렸다. 상대가 네덜란드 국적이란 말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어머니 김경희는 장성택이 아니면 자살하겠다고 했고, 그 피를 받은 딸은 진짜로 자살했다. 장성택은 사위를 볼 기회도 없었다.
장씨 집안의 여인들은 아직까진 생존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부모 잃고, 남편 잃고, 기댈 곳도 없는 그 처지가 지금 알코올의존증에 빠져 치료 중인 김경희를 꼭 닮았다. 이 여인들의 덧없는 일장춘몽(一場春夢)이여.
2017-12-28 ‘미제 난닝구’ 자랑한 ‘위대한 영도자’
▲2014년 1월 8일 평양에서 열린 미국 전직 프로농구 선수들과 북한 농구 선수들과의 친선 경기 도중 데니스 로드먼이 김정은 부부를 향해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동아일보 DB
미국프로농구(NBA) 선수 출신의 데니스 로드먼이 북한에 처음 갔던 2013년 2월 28일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있었던 일이다.
묘기 농구단 ‘할렘 글로브 트로터스’를 데리고 간 로드먼은 이날 김정은과 리설주 앞에서 북한 팀과 친선경기를 펼쳤다. 평양에서 고르고 고른 핵심 계층들로 1만2000석 규모의 관중석도 꽉 찼다.
처음 보는 거구의 흑인들이 눈앞에서 뛰어다니는 농구경기도 흥미로웠지만, 김정은의 일거수일투족도 관중의 중요 관심사였다. 김정은이 등장해 불과 1년 남짓 지났던 때라 대다수 관중은 그렇게 가까이에서 김정은을 본 것이 처음이었다.
관중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은 경기가 끝난 뒤 일어났다.
미국 선수가 김정은에게 다가가 할렘 글로브 트로터스의 유니폼을 전달하자 김정은은 활짝 웃으며 유니폼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몸을 돌려 왼쪽을 향해 몇 번 흔들고, 뒤를 향해 흔들고, 다시 오른쪽을 향해 흔들고…. 유니폼 선물을 관중을 향해 흔드는 것은 한국이나 또 외국의 기준으로 보면 크게 이상한 것은 없다.
문제는 그곳이 가장 폐쇄적인 북한이라는 점이다. NBA가 뭔지, 유니폼 선물이 뭘 의미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곳이다. 아무리 유명 인사가 기념 사인을 해주려고 해도 “함부로 낙서하지 마시라요”라며 펄쩍 뛸 곳이 평양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린 김정은을 신처럼 보게끔 교육받았단 말입니다. 우리 지도자에게 양키가 난닝구를 선물한 것도 우릴 거지로 여기나 싶어 자존심 상하는데, 지도자란 사람이 미국 놈한테 스프링(러닝의 북한 사투리) 쪼가리나 받고선 입이 귀까지 째져서 우릴 향해 흔들며 자랑한단 말입니다. 전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위대한 영도자는 무슨 개뿔. 저거 바보 아니냐 싶더라고요.”
그 장면이 TV로 방영되자 북한 사람들도 끼리끼리 수군거렸다. 그들의 눈엔 NBA 유명 스타의 유니폼도 한낮 싸구려 러닝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에겐 국가수반이 러닝셔츠를 선물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모였다. 그런데 ‘민족의 태양’ ‘절세의 위인’ ‘위대한 선군영장’ 등 수백 가지의 찬양 수식어가 따라붙는, 신처럼 여기라 교육받는 김정은이 양키의 러닝셔츠를 받고 흔들어대며 자랑까지 하다니. 모자란다는 단어를 빼고 그들이 이 상황을 이해할 방법은 없었다.
김정은이 로드먼에게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김정은. 2013.2.28’이라고 적힌 선물까지 주었다는 것을 알면, 북한 사람들은 더 충격을 받았을 게 분명하다.
이듬해 김정은의 30번째 생일인 1월 8일 비슷한 일이 또 벌어졌다. 이번엔 로드먼이 경기장에서 김정은을 “베스트 프렌드”라고 지칭하면서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고 경기 중엔 김정은 옆자리에서 담배까지 피웠다. 대단한 고위 간부도 김정은 앞에선 무릎을 꿇고 입까지 가리는 것만 봤던 북한 사람들은 그저 속으로 “세상에”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귀와 코, 심지어 입술에까지 고리를 매단 저 정신 이상해 보이는 흑인 ‘양키’가 도대체 뭔데 공개 장소에서 감히 우리의 ‘최고 존엄’을 친구라 스스럼없이 부르며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맞담배까지 피우다니.”
그들에게 “김정은은 스위스 유학 시절 로드먼의 유니폼을 입었던 광팬이었다”고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그럼 “팬이란 게 뭔데요”라고 반문할 게 뻔하다. 남쪽에 갓 온 탈북민에게 팬이 뭔지 장황하게 설명해줘도 “세상에 밥 먹고 할 짓도 없지”라는 대답을 듣기 일쑤다.
팬이 뭔지를 이해시켜도 문제다. 김정은을 온 세상이 우러러본다고만 배웠지, 김정은이 설마 남의 유니폼까지 따라 입을 정도로 누굴 좋아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그들 보기엔 그건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로드먼은 북한을 5차례 방문했지만, 지금은 가지 못한다. 미 국무부가 9월부터 미국인의 북한 여행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로드먼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신을 북한에 평화특사로 파견해 달라고 촉구했고, 11일엔 중국 베이징까지 가서 괌과 북한 간의 농구경기를 주선하겠다며 인터뷰도 열었다. 그래도 방북 허가는 얻어내지 못했다. 북한에서 어떤 대접을 해주었기에 저렇게 애타게 가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허가 절차를 무시하고 북한에 가지 않는 것을 보면 적어도 친구 옆에서 살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내가 볼 때 로드먼은 김정은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다. 미국 호텔 바에서 큰 소리로 세 시간이나 김정은을 칭찬하다 쫓겨난 일도 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 김정은을 비난하면 로드먼이 참지 못하고 반박한다.
로드먼을 향한 김정은의 팬심이 지금도 그대로일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둘이 계속 어울려 같이 노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아 보인다. 이들의 정신세계를 더 자주,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지 않을까.◎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