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4/ 탈북 지성인들이 말하는 북한3/
■ [탈북작가 림일이 쓰는 김정일 이야기]
2011-11-20 동아일보
<1> 현지지도
김정일에 눈도장 잘 찍으면 최고 표창
군부대-공장-농장 ‘모심사업’에 사활
20세기에서 완전 멈춰버린, 역사에 뒤떨어진 폐쇄국가 북한에서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현지지도(현장시찰) 중에 갑자기 사망했다.
1994년 7월 당시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두 번째로 북한의 특별방송에서 나온 김정일 사망 뉴스는 한반도에 예측불허의 긴장이 고조될 수도 있는 중대사변이다.
이제는 역사인물이 된 김정일은 생전에 현지지도를 많이 했다. 최고통치자로서 현지지도를 통해 인민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려는 노력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불행해진 북한 주민들의 궁핍한 삶은 아이러니하다. 결국 그의 현지지도는 그냥 현지지도뿐이었다.
생전에 인민에게 인자한 모습보다는 강한 카리스마를 더 많이 보였던 김정일이 군부대나 공장 농장 등을 시찰할 때 그가 선택해 간 곳은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보좌진이 기획하고 준비한 곳만도 전부가 아니었다.
그 비밀을 해부하면 이렇다. 북한에서는 모든 군부대나 공장, 기업소들이 김정일 방문 유치를 경쟁적으로 벌였다. 인민의 수령인 그가 현장에 와서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면 그 기관과 책임자는 최고의 표창을 받았기 때문이다.
빠른 승진은 기본이고 명절 때마다 고가의 선물을 받음은 물론이요, 각종 정치회의나 행사에서 상당한 특권을 가졌다. 다시 말해 미래가 확실히 보장됐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행정일꾼’인 공장, 농장의 간부들과 인민군 지휘관들이 맡겨진 본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김정일을 초빙하는 ‘모심사업’에 사활을 걸었다. 경제과업 총화에서 과대 포장한 허위실적이 난무했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집합한 전시성 행사도 만연했다.
이 일을 뒤에서 밀어준 사람이 바로 당비서와 정치위원인 소위 ‘당 일꾼’들. 다른 말로 ‘당 간부’인데 이들은 행정일꾼과 동등한 권한과 자격을 가졌다.
생전에 김정일의 현지지도 유치는 수천 대 일의 경쟁을 보였다. 인민군부대 각 군단에서부터 말단 중대까지 중앙기관은 물론이고 사회의 행정, 교육, 체육, 공업, 농업, 건설 등의 각 부문에서, 전국의 농어촌에서 이런 ‘모심사업’이 치열하게 이뤄졌고 100배수, 10배수로 압축해 최종 장소가 선택됐다.
이를 전담한 기관이 호위총국이다. 남한의 대통령경호실과 같은 호위총국은 조직과 규모가 방대하며 조직원들은 특수훈련을 받은 최정예요원으로 구성돼 있다. 본부 직속 3개의 전투여단이 있으며 이에 소속된 군인들의 사격술과 무술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예하부대인 평양경비사령부, 평양방어사령부 등을 포함한 호위총국의 전체 병력 수는 대략 12만 명 정도다.
특정기관 및 장소가 방문 예정지로 선별되면 그곳의 사람과 시설물까지 최소 한 달 전부터 비밀리에 특별 관리한다. 이유는 단 하나 김정일의 신변 안전을 위해서다.
생전 김정일의 현지지도 경호는 상상을 초월했다. 우선 금속탐지기와 보안대를 거쳐 3시간 전에 행사장소 입장이 완료된 참석자들은 본인 기준으로 직계 4촌 안에 정치범이나 남한 연고자가 없다. 상급기관의 추천을 받아 선택된 이들은 매우 열성적인 충성분자들이다.
다음 행사 장소나 노선을 3겹으로 장막을 치는데 제일 바깥선인 3선은 보안부(남한의 경찰), 2선은 국가보위부(남한의 국가정보원), 1선은 호위총국이 맡았다. 예를 들어 김정일이 평양에서 청진까지 열차로 이동했다면 그 거리 양쪽에 모두 100m 간격으로 3선 경호가 이뤄졌다. 각 지방의 공권력이 총동원됐다.
1968년 평양에서 태어나 사회안전부와 대외경제위원회에서 근무하다 1996년 쿠웨이트에 노동자로 파견돼 일하던 중 탈출해 1997년 한국에 왔다. 대표작 ‘소설 김정일 1,2’ 는 김정일위원장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로 평양의 거리와 건물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2> 특별열차
기관총-스텔스 장비 갖춘 ‘달리는 요새’
20량중 김정일 어디 탔는지는 일급보안
김정일은 현지지도를 위한 국내 장거리 시찰은 물론이고 수만 km의 외국 방문까지 교통수단으로 열차 하나만 이용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열차 안에서 마친 그이니만큼 그보다 기차를 많이 탄 정상이 세상에 또 있을까. 김정일은 평생토록 출장길에 비행기 타는 모습을 단 한 번도 안 보였으니 일각의 말대로 고소공포증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그는 기차 마니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1년 7월,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러시아를 국빈 방문한 김정일이 장장 24일간 시베리아대륙을 횡단해 모스크바까지 이동하면서 그가 이용했던 전용열차는 국제사회의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당시 김정일과 동행했던 콘스탄틴 풀리콥스키는 ‘동방특급열차’라는 저서에서 그와 환담을 나누었던 열차의 일부 객차는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선물한 것이며 일본에서 현대화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김정일이 푸틴의 호감을 사기 위해 러시아 선대 수령에 대한 예의를 갖춰 아마도 오래된 객차를 몇 개 달고 가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일종의 정치적 계산이었을지도 모른다.
평양에서 하늘을 나는 새도 통제할 만큼 극비 중에 극비인 1호 행사(김일성 김정일 참석 행사)에 동원됐을 때 봤던 김정일 전용열차는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럽고 탄탄해 보이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유럽에 특별 주문제작한 그의 전용열차는 세트당 20량씩으로 돼 있는데 국내 시찰 공무용, 개인 여행용, 외국 방문용 등 3개 세트에 모두 60여 대가 있다.
철통 보안 속에 거행되는 1호 행사가 시작되면 운행 중인 전용열차 앞뒤에서 별도로 2개의 열차편이 움직이는데 외관은 전용열차와 똑같이 꾸몄으며 여기에는 경호와 안전에 필요한 각종 행사전용 물자들이 가득 실려 있다.
평균시속 100km로 달리는 김정일 전용열차가 역사를 진입하기 3시간 전에 다른 노선의 전기를 모두 차단해 일반열차의 진입과 움직임을 완전히 통제한다. 그 정도가 끝이 아니다. 역사 안 대기실에 있던 손님들도 모두 밖으로 나오지 못하며 플랫폼에 멈춰선 일반객차 안의 여객들도 꼼짝달싹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북한 철도에는 평양을 비롯한 대도시에 김정일 전용역사가 따로 있으며 그의 전용별장에서 10∼20km 범위에도 전용열차 정거장이 있다. 이곳은 1년 365일 호위총국 정예요원들이 특별경비를 한다.
전용열차에서 그가 사용하는 칸은 회의실, 침실, 접견실, 집무실 등으로 꾸며진 몇 량이며 그것이 20량 중에 어느 부분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두 최고의 방탄설비가 돼 있으며 최신형 장비들을 갖추고 있다. 전용열차는 스텔스 기능을 갖춘 특수그물망, 즉 위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장치가 돼 있으며 모든 칸은 컴퓨터로 네트워크가 잘돼 있다. 회의실에는 위성전화 등 첨단 통신장비와 벽걸이 TV 등이 설치돼 있다. 접견실은 최고급 인테리어로 꾸며졌고 집무실에선 대형스크린으로 평양과 영상통화를 할 수 있다.
<3> 동상과 사진
北주민 “김일성=김정일”… 父동상 찾아가 애도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지난해 11월 공개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현지지도 사진. 후계자인 김정은과 함께 평양 용성식료공장을 찾았으나 방문 날짜는 밝히지 않았다. 동아일보DB
애도기간에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 동상을 찾아 통곡하는 모습을 보며 “김정일이 사망했는데 왜 김일성 동상에 가서 우는가” 하며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다. 평양과 지방, 각 기관과 유적지에 세워진 수천 개로 추정되는 김일성 동상에 비해 김정일 동상은 거의 없다. 물론 그것을 세운 사람은 김정일이다. 아버지이자 곧 자기였기에 굳이 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모르겠다.
북한 주민에게 김일성과 김정일은 이명동인이다. 사상과 지도력, 성품부터 인품까지 모두 똑같은 지도자로 교육받아 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북한 도시의 광장과 공공장소에서 산골의 마을회관까지 어김없이 김일성 김정일의 대형 사진이 있다. 굳이 비교하면 남한에서 사람들의 눈길이 미치는 곳곳마다 있는 상업광고판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생전 김정일의 현지지도 사진을 보면 단골 의문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장소와 날짜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전문가들도 고개를 가로젓는 부분이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비밀이 있다. 자본주의 국가의 살벌한 생존경쟁만큼 치열한 김정일 충성경쟁에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경합해 선택된 특정 기관과 장소가 바로 그의 현지지도 대상이다. 현실이 그렇다 보니 과거 시찰과 비교해 장소와 날짜가 같은 경우도 간혹 있다. 또한 국제적인 타이밍과 시선까지 충분히 고려해 신비주의를 관전 포인트로 맞춰 홍보하려는 보좌진의 계산도 들어 있다.
따라서 북한에서 내보낸 김정일 현지지도 사진에는 언제나 정중앙에 그의 얼굴이 맞춰져 있고 장소와 날짜, 시간이 없다. 이는 사소한 의심과 비난의 단서가 될 요소를 추호도 남기지 않으려는 치밀한 의도다.
북한에서 김정일의 얼굴 사진은 흔하게 볼 수 있다. 주요 관공서와 공장, 농장의 현관과 대회의실, 각 사무실은 물론이고 일반 주민이 사는 모든 가정에 그의 사진이 걸려 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80년대 초반부터다.
인민과 국가 위에 있는 최고지도기구인 노동당의 선전대로 김정일이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여서 인민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기관과 단체에서는 순번제로 각 사람이 매일 아침 1시간 일찍 나와 김정일 초상화를 닦아야 하는데 이게 ‘충성의 점수’로 승진이나 진급에 효과적이다. 남한 학생들의 ‘자원봉사 점수’가 대학 진학 때 유리한 것과 비슷하다.
미지의 세계, 북한에서는 사무실이나 가정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주민들은 당연히 방 안에 걸린 김정일의 초상화를 가장 먼저 꺼내온다. 생명을 위협하는 화염 속에서 자기 몸에 치료 불능의 화상을 입으면서까지 말이다.
<4> 방침
“시내 청소 좀…” 金 한마디에 100만명 걸레질
▲북한 주민들이 10월 평양 만수대지구 건설공사 현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준공 날짜는 노동당, 즉 김정일과 한 약속이나 다름없어 반드시 지켜야 한다. 동아일보DB
조선노동당의 방침은 곧 김정일의 지시다. 법과 국가 위에 있는 노동당이기에 그의 지시는 무조건 받아들여야 할 지상의 명령이다. 여기에는 약간의 반대도 있을 수 없다. 2000만 인민이 절대적으로 따른다.
북한의 모든 기관과 단체는 장기적인 사업계획은 물론이고 각 부서의 시시콜콜한 일까지 노동당, 즉 김정일의 승인을 받아 집행한다. 예를 들어 모 건설회사에서 올린 사업계획에는 언제까지, 어디에, 어떤 형태로, 몇 채 주택을 짓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준공 시기는 주로 김일성 김정일 생일을 포함한 국가적 명절에 맞춘다. 이것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러다 보니 부실공사가 많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정일과 한 약속이나 다름없기에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 공사 인부들이 어떤 조건에서도 한목숨 바쳐 맡겨진 과제를 무조건 수행하겠다는 ‘충성의 맹세문’을 발표하기도 한다. 이름 모를 두메산골의 작은 살림집 건설에서부터 사상 최대의 건축물인 서해갑문(대동강 하류에 70억 달러를 들여 완공한 남포지역 갑문) 시공까지, 나라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김정일 결재하에 이뤄진 1980년대 이후 시행된 북한의 건설은 대부분 부실공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가 평양에 있을 당시인 1996년 말까지 광복거리와 통일거리의 고층아파트 수십 동 중에 수직선이 정확한 아파트는 거의 없었다. 남한에도 널리 알려진 평양의 냉면전문점 ‘옥류관’ 근처인 만수대지구에서 2012년 강성대국 진입의 성과물로 현재 요란하게 진행 중인 30∼40층 고층아파트 10여 동 건설도 마찬가지다. 건설장비보다 인력이 더 많으니 공사가 더딜 수밖에 없으며 준공기일을 맞추려 24시간 작업을 한다. 비록 부실공사라도 기일을 맞춰야 훈장과 포상이 주어진다. 건설공법을 준수한다며 완공 시기를 연장했다가 책임자가 옷을 벗는 경우가 허다하다.
북한 주민들에게 김정일의 지시는 무조건 집행해야 할 과제고 의무다. 어느 날 김정일이 지방 출장을 마치고 평양으로 들어오며 “시내가 어지럽습니다. 청소 좀 하시오”라고 했다. 한 시간 뒤 100만 평양시민이 물통과 걸레를 들고 나와 방을 청소하듯 도로와 건물을 닦으며 “장군님께 심려를 끼쳐드렸으니 인민이 된 도리가 없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절대 신과도 같은 김정일의 지시는 때로 피곤하기도 하다. 1980년대 후반 언젠가 현지지도 길에서 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여성들을 본 그가 “우리 미풍양속으로 봐도 여자는 치마를 입어야지”라고 했다. 다음 날로 여성들의 바지 착용이 중단됐다. 부작용도 나타났다. 치마를 입고 자전거를 타니 불편했고 결국 여성 근로자들의 출근 때 지각 사태가 생겼다. 그만큼 일을 못하니 국가는 손해였다. 그래서 관련 일꾼들이 제의서(방침을 받기 위한 서류)를 올려 자전거를 타는 여성에 한해 바지 착용을 허락받았다. 지금은 여성들이 일상생활 때 바지를 많이 입지만 명절과 기념일, 국가적 정치행사 때는 조선옷(한복)을 입는다. 물론 노동당의 방침에 따른 것이다.
<5> 영화와 TV
영화광 김정일이 만든 혁명극 ‘조선의 별’
北 “2억5000만명 관람”… 全주민 10번씩?
▲김정일이 인민예술가 최익규와 함께 제작한 북한 혁명영화 ‘조선의 별’. 1920년대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의 항일투쟁을 다룬 영화로 인민배우 김원이 김일성 역을 맡았다. 동아일보DB
김정일은 영화광으로 유명했다. 북한의 2인자로 내정되기 이전인 1980년대부터 혁명영화(정치적 색채가 짙은 예술영화)를 다수 제작하면서 영화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의 대표작은 ‘조선의 별’로 인민예술가 최익규와 함께 만들었다. 1920년대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의 항일투쟁을 미화한 내용으로 1980년부터 제작한 10부작 혁명영화다. 김일성 70회 생일(1982년) 즈음에 개봉했다.
체제 선전을 기막히게 잘하는 북한 주장에 따르면 이 영화의 총관객은 2억5000만 명, 2000만 인민이 10회 이상 관람했다는 것이다. 북한에선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세계적인 정치학습의 나라인 북한에서 2000만 인민이 평생토록 하는 김정일 사상 학습과 마찬가지로 혁명영화 관람도 의무다.
감수성이 풍부한 당시 70대 노인이던 김일성과 그의 전우인 국가원로들은 ‘조선의 별’을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김정일을 후계자로 낙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여러 편의 혁명영화는 아버지께 영화로 효도하고 싶어서였고 영화로 인민들의 사상을 계몽하기 위해서였다.
옛 소련의 지원을 받아 시작한 북한 영화는 외국 축전에 내놓을 만한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고안해낸 아이디어가 1978년 1월과 7월 남한의 유명 영화배우 최은희와 신상옥 영화감독을 홍콩에서 납치한 것이다. 평양에 김정일이 지어준 동양 최고의 신필림영화촬영소를 가진 두 사람은 ‘소금’(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연기상) ‘돌아오지 않은 밀사’(체코 카를로비바리영화제 감독상) 등 명화를 만들었다. 오래도록 자신에게 충실할 것 같았던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1986년 3월 해외촬영 중 자유세계로 탈출하자 그는 고배를 마셨다.
노동당 경내에 있는 영화문헌청사는 김정일 전용영화관이었다. 수만 개의 외국 영화필름을 그대로 혹은 CD로 보관하고 있다. 영화 제작에 든 비용이나 장소까지 정확히 기록해 영구 보존한다. 할리우드영화는 물론이고 남한에서도 찾기 어려운 필름이 여기에 있다고 보면 된다.
그 많은 외국영화 가운데 김정일 취향에 맞춰 엄선해 그에게 보여주는 것이 관례다. 상영시간은 따로 없고 그가 오면 상영한다. 어떤 날은 혼자, 어떤 날은 측근들과 끝까지 보기도 하고 도중에 가기도 했다. 영화를 본 그가 “잘 봤다”고 하면 그 필름은 특수금고에 따로 보관했다. 아무리 훌륭한 영화라도 그가 “별로다” 하면 즉시 휴지통에 들어갔다.
<6> 인민복
伊원단으로 만든 수만달러짜리 잠바…
그 옷 입고 인민 고통 알기나 했을까
▲2000년 6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이 공항에 직접 나와 영접하고 있다. 김정일이 입은 짙은 갈색 잠바가 인민복이다. 동아일보DB
2000년 6월 평양에서 DJ를 만나 잠시 블랙에서 화이트로 이미지를 개선했던 김정일의 의상에서 단연 돋보인 것이 짙은 갈색 잠바였다. 품이 넉넉하고 활동성이 좋은 서양식 상의인 이 옷을 가장 많이 입은 국가원수는 김정일이다. 성인이 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옷만 입고 다닌 그의 잠바 사랑은 정말 대단했다. 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일 동지의 잠바 차림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위대한 장군님의 형상을 매우 잘 표현한다’고 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200여 개 나라 정상 중에 오로지 잠바를 입었던 사람은 그가 유일하니 어쩌면 이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이 세상에서 평생토록 입은 것도 모자라 저세상에도 입고 갔으니 말이다.
다음은 필자가 평양에 있을 때 노동당 강연에서 들은 내용이다. “당과 국가 간부들이 김정일 장군님께 ‘일을 좀 쉬면서, 건강도 살피면서 하십시오. 장군님께서 건강하셔야 우리 조국이 융성 번영합니다. 인민의 간절한 염원입니다’라는 건의를 수도 없이 올렸다. 그럴 때마다 그이께서는 ‘내가 쉬면 우리 인민들이 힘듭니다. 나도 수령님의 혁명전사로 단 하루도 쉴 수 없습니다. 하루 3시간 쪽잠을 자며 일을 해도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항상 잠바를 입습니다’라고 하시였다. 이토록 검소하시고 자애로우신 김정일 장군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 인민은 참으로 복 받은 사람들로 우리는 이 영광, 이 행복을 늘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한다. 또한 대를 이어 그이께 충성하는 것이 공민의 첫째가는 의무로 간직하여야 한다. 세상이 열백 번 변해도 경애하는 장군님을 따르는 우리의 마음은 절대 변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인민이 각 기관과 단체에서 노동당 강연을 의무적으로 청취했다. 당시는 먹고사는 것이 시급해 그게 과연 진짜일까 하는 의혹을 품은 적도 없었다. 서울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생전 김정일이 인민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면 국가로부터 식량을 못 받는 대다수 북한 주민들의 궁핍한 몰골은 뭐라고 해야 할까. 역전과 시장에서 음식쓰레기를 줍거나 훔쳐 먹는 고아와 가출 청소년들, 배고프다고 보채는 아기에게 줄 젖조차 없는 엄마들, 하루 한 끼 풀죽도 못 먹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노인들도 엄연히 김정일의 인민이었다. 또 굶주린 창자를 끌어안고 자유를 찾아 이역만리를 떠도는 수십만 탈북자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특수 주문한 이탈리아 고급 원단으로 만든, 한 벌에 수만 달러 하는 잠바를 입었던 김정일이 과연 대다수 인민이 멀건 죽으로 연명하며 힘들게 사는 것을 알기나 했을까. 전혀 몰랐을 것이다. 건강에 해로운 것은 굳이 알려하지 않았던 그가 복잡한 것이 싫어 단순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정장보다 편한 잠바를 입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김정은도 인민복을 입고 있다.
<7> 음주와 건강
애주가 김정일, 장성택이 南서 배워온 폭탄주 즐겨
▲애주가였던 김정일이 젊은 시절 즐겨 마셨던 유명 양주 중 하나인 리처드에네시. 루이 13세와 함께 최고급 코냑으로 불린다. 한 병 가격은 고급 에네시의 세 배 이상이라고 한다. 동아일보DB
겨울(1942년 2월 출생)에 왔다가 겨울(2011년 12월 사망)에 떠나간 김정일에게 추운 날씨에 몸을 덥혀 주는 알코올은 약이었을까, 독이었을까. 두주불사였던 젊은 날의 김정일은 리처드에네시, 스카치위스키, 카뮤트레디션 등 유명 양주를 많이 마셨다. 높은 도수의 술을 좋아했고, 취하면 고향인 러시아 하바롭스크를 그리워했다. 대장 계급 군복을 입고 시신이 안치된 장소에 나타난 매제 장성택이 2002년 10월 북한 경제시찰단으로 남한에 와서 배워간 ‘폭탄주’를 무척 좋아했다는 정설이 있을 정도로 그는 폭탄주 애호가였다.
그의 젊은 시절 술버릇은 상상만 해도 충분히 짐작이 된다. 마를 줄 모르는 외화, 세계에서 수입하는 특수 식품들, 마음만 먹으면 삼천궁녀의 대령도 가능한 절대권력, 그만한 자리에서 부귀영화를 못 누렸다면 말도 안 된다. 냉정하게 상상해 봐도 그는 평생 산해진미를 차려 놓고 여성들의 치마폭에서 달콤한 술만 마셨을 것이다. 상상은 물론이고 꿈마저 이룬 황태자가 정치학습에 지쳐 쓰디쓴 술을 먹고 울어본 적 있는 노동자, 농민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알기나 했을까.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담배를 피운 적은 있을까. 그는 기분이 좋을 때만 담배를 피웠는데 30대부터 골초였다. 로스만, BAT, 던힐 등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40대부터는 만수무강연구소(김일성 김정일의 건강 전담 연구소)에서 개발한 인체에 무해한 신제품 ‘백두산’이라는 전용 담배를 많이 피웠다.
김정일은 중년기 키 160cm에 체중 80kg으로 비만이었다. 오랫동안 만병의 근원인 비만이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건강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는 의미일까. 그의 사망 원인인 심근경색은 40대부터 있었던 일종의 심장질환이다. 그는 2007년 5월 독일 심장센터 의료진을 평양으로 불러 심장수술을 받았다. 북한에서 과거 김일성과 김정일은 어떤 수술도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받았다. 수술환자가 수령임을 알면 의료진이 긴장하고, 그로 인한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로부터 15개월 만인 2008년 8월 김정일은 갑작스러운 뇌중풍 발작을 맞았다. 이때 세계적 뇌신경 전문의인 프랑스의 프랑수아그자비에 루 박사 등 10명의 의료진을 평양으로 불러 치료를 받았다. 그를 수령으로 모신 혁명적 영광을 안고 사는 북한의 2000만 인민은 굶주림과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풀뿌리로 생명을 연장하는 가난 속에 산다. 김정일이 인민의 생명을 자기 생명의 1만분의 1만큼이라도 소중히 생각한 지도자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2008년 뇌중풍으로 인한 죽음의 암초를 비켜간 그가 잦은 일정으로 결국 17일 현지지도 열차 안에서 쓰러졌다. 뇌중풍 회복세를 보였고 고령에 왜 그리 무리하게 현지지도를 했는지 의혹이 간다. 절대권력자였지만 언젠가 자신도 죽는 인간이란 사실을 알고 주체 못할 정도로 우울증이 컸던 것은 아닐까.
<8> 통치자금
김정일 예금 300억달러 추정… 가짜 국제보험 팔아 외화벌이도
노동당은 곧 김정일이기에 북한에서 사용하는 ‘당자금’이란 표현은 김정일이 쓰는 돈을 의미했다. 정치에서 생명과도 같은 돈이기는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경제 순위가 150위 밖인 북한의 경제 수준으로 보면 화폐가치도 그만큼 낮다. 북한 일반근로자의 평균 임금은 내화 2000원, 최근 암시장 환율로 0.5달러다. 굳이 비교하면 휴지나 다름없다.
그러니 김정일이 쓴 돈은 당연히 외화였다. 1970년 설립된 노동당 39호실 산하 ‘대성은행’은 당자금 전담은행이다. 1년 예금액은 3억∼4억 달러, 현재 200억∼300억 달러가 있을 거라는 게 전문가들의 추측이다. 막강한 39호실은 해외 지부 20개, 무역회사 100여 개를 비롯해 금광까지 거느리고 있다. 해외 지부에서 매년 벌어들이는 2억∼3억 달러는 고스란히 김정일의 비자금으로 외국은행 비밀계좌에 분산 예치된다.
북한의 외화벌이는 다양하다. 해외에서 문화 공연, 건설 유치, 식당 진출 등 돈이 되는 일이면 뭐든 한다. 허위 투자 유치와 가짜 국제보험 판매도 외화벌이의 일종이다. 수출품은 농토산물 도자기 미술품 등이 기본이고 철광석 구리 마그네슘 등 고가 지하자원을 외국에 헐값에 팔기도 한다.
국내 무역회사들은 주민들에게 외화벌이 할당량을 준다. 많은 인민이 산과 바다를 전전하며 약초를 캐고 물고기를 잡아 당에 바친다. 그래야 식량이 나오고 생필품을 공급받을 수 있다. 외화를 많이 벌어 바치면 영웅이 되고 출세도 쉬우니 죽기 살기로 열성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전국에서 1년 내내 민관군이 피와 땀으로 벌어들인 외화는 ‘충성의 당자금’이란 이름으로 김정일에게 바친다. 특정 시기에 김정일이 간부들과 인민들에게 베푸는 돈을 ‘사랑의 당자금’이라고 부른다. 스위스를 비롯한 외국 은행에 수백억 달러를 갖고 있었던 김정일은 한 없이 돈을 썼을 것이다.
필자가 평양에 있을 때인 1992년 2월 이런 일이 있었다. 김정일의 50회 생일을 앞두고 노동당에서 “이번에 사랑의 당자금으로 평양시민들에게 김정일 장군님의 크나큰 선물이 차려진다. 우리는 장군님 가까이에서 사는 수도시민의 영광을 늘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한다”는 강연을 들었다. 그것도 몇 주 전부터 일과 후 1시간 동안 매일 회의실에 모여 강연을 듣고 감사 토론을 벌였는데 정작 선물을 받고 보니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 평양시민 가족당 받은 선물은 가정용 전자벽시계와 2인용 이불 1개, 2kg짜리 돼지고기 통조림 등 세 가지인데 모두 중국산이었다. 평양시민이 역사상 받은 가장 통 큰 선물이었다.
<9> 눈물
혼절할 정도로 통곡하면 출세… 어찌 울지 않겠나
김일성 사망 때와 똑같이 조선중앙TV에는 매일 김정일 사망에 통곡하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나왔다. 그것을 본 남한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친부모가 죽어도 사흘이면 눈물이 마르는데 북한 주민들은 어떻게 열흘이나 저렇게 많은 눈물을 쏟아낼까. 저게 진짜 눈물일까, 가짜 눈물일까. 가장 폐쇄적인 사회에서 사는 북한 주민들은 평생토록 “김일성 김정일 싫다”는 말을 못하고 산다. 그랬다가는 3대가 멸족이다. 그러나 그들도 의식이 있기에 속으로는 ‘그들이 싫다’고 생각할 수 있다.
김일성이 생전에 해마다 TV에 나와 신년사에서 “인민에게 쌀밥에 고깃국 먹여주겠다”던 새빨간 거짓말, 인민의 입에 재갈을 물려 놓고 “우리 인민은 참 좋은 인민”이라고 우롱한 김정일의 뻔뻔함을 그들도 알고 있다. 남한 사람들 같으면 “왜 작년에 했던 말 또 하고 지키지도 못하느냐” “왜 당신 사진만 찢어도 감옥에 보내느냐” 하고 항의했겠지만 북한 사람들에게는 꿈같은 얘기다.
무능하고 잔인한 지도자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원망을 평생 마음속에 담고 산 북한 주민들인데 이들의 사망에 왜 오열할까. 그들도 감정의 동물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이 가짜냐 진짜냐를 떠나 그냥 눈물이다.
필자가 평양에서 김일성 사망 당시 흘렸던 눈물의 비밀은 이랬다. 분향소를 대신하는 김일성 동상과 사적비 부근 대형 스피커에서 추모곡이 흘러나온다. 거기에 김일성의 일대기를 흥분한 어조로 낭송하는 아나운서의 멘트가 조문객들의 심금을 울린다. 많은 사람이 모이면 자제력을 잃고 쉽게 흥분하거나 다른 사람의 언동을 따라하는 군중심리도 발동한다.
또 북한에서는 정치적 행사에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없다. 설령 더 열성적인 모습을 보이려는 독자 행동도 용서가 안 된다. 모든 사람이 소속된 조직과 단체에서 당비서(정치담당 간부)의 지시에 따라 질서 있게 행동한다. 조문이 24시간 중에 단 1분도 비우지 않고 열흘 동안 계속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한다.
애도 기간 같은 큰 정치행사에서 조금이라도 불순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낙인이 붙어 평생토록 불이익을 받는다. 반대로 땅을 치며 통곡하는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이면 승진도 쉽고 출세도 이뤄진다. 그러니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가뜩이나 이 엄동설한에 배고픔으로 눈물을 흘리는 북한 주민들인데 김정일 사망으로 애도의 눈물까지 흘려야 하니 세상에 그들만큼 불쌍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진짜든 억지든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린 인민들을 위해 김정일은 단 한 번이라도 운 적이 있을까. 오래전에 굴뚝 연기가 멎은 공장에 나와 김일성 학습을 하는 고된 노동자들, 흉년에 한숨만 짓는 농민들, 영양실조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어린이들의 눈물겨운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배고파 굶어 죽고, 추워서 얼어 죽고, 지도자를 비판했다고 맞아 죽어야 하는 인민들이 굶주림을 참다 못해 중국으로 탈출해 초라한 몰골로 숨어 다니는 개보다 못한 처지를 알기나 했을까.
신이 주신 똑같은 생명의 가치를 김정일은 너무나 다르게 알았다. 잘났든 못났든 인민들 덕에 그는 세상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 인민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사는데 외국 은행에 수백억 달러를 숨겨 놓았으니 북한 주민들이 그 사실을 알면 정말 통곡하지 않을까.
<10·끝> 대역
죽은 뒤에도 계속되는 대역說… “최소 3명” 추측도
필자가 평양에 있을 때 일부 주민들 사이에 “얼마나 신통했으면 장군님 영화 배역을 준비하는 사람이 어느 날 창광원(최고급 대중목욕탕)에 나왔는데 인민들이 경애하는 장군님인 줄 알고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는 풍문이 돌았다. 오래전부터 북한에서 김정일 영화를 준비하려 했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는 그의 만류로 중단됐다. 이제는 역사인물이 됐으니 앞으로 나올 것으로 전망한다.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기에 반드시 그럴 것이다.
북한의 김정일 사망 발표 3일 뒤 인터넷에는 ‘죽은 김정일은 대역배우였고 진짜 김정일은 두 달 전에 죽었다. 그의 활동을 보도하는 전담 아나운서인 인민방송원 이춘희가 50일간 잠적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황당한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생존은 물론이고 사후에도 계속되는 김정일 대역설이다. 그만큼 그는 희대의 악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지 않을까 싶다.
일본의 북한전문가인 시게무라 도시미쓰 와세다대 교수는 예전부터 “지금의 김정일은 대역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2002년 북-일 정상회담 때의 김정일 목소리는 동일하고 2004년 북-일 정상회담 때의 목소리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남한이 대북 첩보 수집에서 의존하는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오래전부터 “진짜든 가짜든 대역을 포함해 김정일은 최소 3명 이상”이라고 했다. 물론 가설이고 추측이다. 폐쇄적인 북한체제 특성상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2008년 여름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뇌중풍 이후 북한에서 주기적으로 내보낸 여러 장의 그의 사진은 대역설을 충분히 부추기고도 남았다. 늦가을인데도 한여름에나 볼 법한 초록이 우거진 배경 사진, 예전과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사람들과 찍은 사진, 매우 건강한 모습의 사진 등 하루 이틀 차이로 이런저런 사진이 공개되니 각 분야 전문가들도 혼란스럽기만 했다. 신속과 정확성을 생명으로 삼는 언론사들도 좌왕우왕하며 아니면 말고 식의 추측성 보도를 쏟아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악명 높은 독재자들이 암살을 피하기 위해 대역을 쓴 것은 비밀도 아니다. 아돌프 히틀러에서부터 피델 카스트로와 사담 후세인까지 독재자들에게 시대와 역사를 아울러 붙었던 것이 바로 대역설이다. 일신의 향락과 부귀영화, 절대적인 영구 통치를 위해 잔인무도했던 독재자들이 국민에게 지은 죄가 너무 커 하늘이 무서워 이용했던 것이 바로 대역이다.
김정일은 세계 독재자의 한 명이었다. 그는 20대부터 자신의 관저와 전용극장에서 액션과 첩보영화를 흥미롭게 봤고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무능한 정치가였지만 탁월한 독재자였던 그에게 있어 대역은 어쩌면 신변 안전상 무엇보다 필요한 작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한 권력에 대역을 못 쓸 것도 없지 않은가. 김정일은 생전에 평양을 방문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환담에서 “평소 인민들에게서 돌팔매질을 맞는 꿈을 꾸기도 한다”고 했다. 그래서 대역설은 더더욱 신빙성이 있다. 김일성 김정일의 66년간 철권통치가 막을 내렸다. 아버지 후광에, 그리고 순진하고 바보 같은 인민을 잘 만난 덕에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고 간 김정일이다. 그것도 모자라 인민이 무서워 죽어서도 산 사람만큼 경호를 받으며 하늘이 무서워 호화궁전의 유리관 속에 영면했을까. ‘
림일 ‘소설 김정일’ 저자
■칼럼
2013.12.19 누구든 책임져야 했다, 이번엔 장성택… 다음은
2년 전 이맘때 사망한 김정일은 소위 영화광이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술영화에 수령 충성의 혁명 사상을 삽입해 전체 인민에게 학습시켰다. 20대 젊은 시절 예술영화촬영소에서 살다시피 한 김정일이 북한의 영화를 독점 지도하던 1960~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받았던 여배우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우인희이다.
예술영화 '세 동서' '한 자위단원의 운명' '목란 꽃'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면서 당대 유명 인기 배우로 명성을 떨쳤다. 전형적인 미인인 그녀의 남편은 20부작 북한 최고의 첩보영화 '이름 없는 영웅들'(1978~1982)을 감독한 류호손이다.
너무도 아름다움이 죄였을까? 평양의 많은 남자가 그녀의 주변을 배회했고 우연히도 우인희는 재일 귀국자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이 추운 겨울날 차고의 승용차 안에서 잠들었고 히터에 질식돼 남자가 죽으면서 발각됐다. 남자의 부친은 노동당을 후원하던 일본의 갑부였는데 대노했다.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우인희를 흔적도 없이 날려 보내라"고 지시했다. 1980년 3월 평양시 하당리 사격장에 모인 2000명의 연예인 앞에서 최후를 예감한 그녀는 "나에게 유혹의 눈길을 보내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서라!"고 외쳤으나 "배우 우인희는 부화방탕 죄로 인민의 이름으로 총살형에 처한다"는 요란한 방송 멘트에 묻혀버렸다. 곧 수십 발의 기관총성이 울렸고 그의 몸이 산산조각이 났다.
허무하게도 우인희의 죄목은 '불륜'이다. 국가보위부 특별조사에서 토설한 그녀의 불륜 리스트에는 놀랍게도 김정일의 이름도 나왔다. 고민 끝에 역사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기 위해 김정일은 그 같은 잔인한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얼마 전 생존의 김정일을 오랫동안 보좌했던 장성택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반당, 반혁명, 부화방탕 등 온갖 죄목을 뒤집어쓰고 사형됐다. 세상이 놀랐다. 김정일의 유일한 여동생의 남편이 장성택이다. 그가 했던 모든 일이 수령을 음해하고 정권을 뒤집으려는 극악무도한 반역죄라는데 필자는 이해가 안 간다.
북한은 장성택이 아니라 누구라도 하루는 고사하고 단 한 순간도 자신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회가 아니다. 2000만 인민 모두가 수령의 의도대로 숨 쉬고 생활하는 집단이다. 장성택이 국가 간부로 수행한 국내 활동과 어떤 대외 사업도 모두 수령의 재가를 받아 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 같은 3대 세습도 불가능했고, 지독한 수령 독재 체제 자체가 붕괴한 지 오래전 일이다.
배고픈 아이들의 학교 결석률이 높아지고, 굶어 죽는 노인들이 늘고 있다. 인민들은 멀건 죽을 먹으며 종일 라디오에서 울리는 수령 찬가를 들으며 죽은 김정일 동상과 기념관 건설에 동원돼 고된 노예노동을 한다. 일이 끝나면 온갖 정치 학습과 강연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면서도 그에 대한 불만은 감히 입 밖에도 못 낸다.
김정은이 북한 주민들에게 했던 첫 육성 인사말이 "다시는 우리 인민을 배곯게 하지 않겠다"인데 결국은 50년 전 "인민에게 쌀밥에 고깃국을 먹이겠다"는 할아버지 김일성의 거짓말과 꼭 같음을 확인한 지난 2년이었다.
어떻게든 인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누구든 책임을 져야 했다. 그게 장성택인데 이유가 있었다. 지난 1997년 식량난이 극심할 때 농업정책 오류의 문제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한 서관희 농업상(장관)과 2010년 화폐개혁 실패 책임을 지고 사형당한 박남기 노동당재정경제부장(부총리)을 본 인민들의 공포 억제 면역도 강해졌다. 그래서 더 큰 인물이 필요했고 결국은 그게 장성택이었다.
자신의 불륜이 두려워 인민이 사랑하는 아까운 여배우도 서슴없이 총살한 김정일이다. 산 사람도 부러울 만큼의 호화 궁전에 영면한 그가 세상에 하나뿐인 매제가 못난 아들에 의해 흔적도 없이 처형되었음을 알면 그 기분이 과연 어떨까?
조선일보
2015.05.19 뉴욕서 접한 北 김정은 대리인의 추태
지난 4월 30일 미 뉴욕 유엔(UN)본부 출입처에서 꼼꼼한 검사를 마치고 국제회의장에 들어섰다. 반원형 청중석은 각국 대표와 옵서버로 가득했다. 여기서 김정은 독재 정권을 뛰쳐나온 용감한 탈북자들이 북한 인권 상황을 고발했다. 필자를 비롯한 탈북자 20여 명도 방청객으로 참석했다.
가까운 곳에 동양인 남자 셋이 앉았다. 그들의 재킷 왼쪽에 붉은 김일성 초상화가 달렸다. 유엔 북한대표부 사람들이다. 결연한 낯빛이다. 왜 아니겠는가? "외교관들은 국제 무대에서 사회주의 정신을 고수하고 제국주의자들과 싸우는 대외 전사이고 외교 혁명가"라고 김일성이 말하지 않았던가?
영양 부족이 뚜렷한 마른 얼굴도 눈에 띄었다. 북한 외교관들은 터무니없는 월급으로 외식할 엄두도 못 내고 대개 대사관 안에서 콩나물비빔밥에 단무지, 야채 절임을 먹는다고, 서울에서 만난 외교관 출신 탈북자들은 증언했다.
북한 인권 상황을 고발하는 탈북자 증언이 시작됐다. 탈북해 2007년 미국에 온 대학생 조지프 김(25)씨는 12세에 아버지가 굶어 죽었고,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중국을 왕래하다 붙잡혀 감옥에 간 사연을 토로했다.
이때 필자 자리에서 다섯 줄 뒤에 앉은 북한대표부 이성철 참사관이 느닷없이 손을 들더니 준비한 성명서를 읽어 내려갔다. 사회자가 중단을 요구했으나 그는 "탈북자들은 조국을 버린 배신자들이며 이런 행사는 공화국을 흔들려고 미국 정부가 만들었다"면서 막무가내였다.
탈북자인 내가 조국을 버린 배신자라고? 필자가 유년 시절 받은 북한 고등교육에서 "조국은 곧 장군님"이라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장군님인 김일성과 그 자손은 누구인가? 민족과 영토 분단의 비극 6·25의 전범자 김일성, 무능한 정치로 1990년대 중반 300만 인민을 굶겨 죽인 김정일, 오늘도 한반도를 핵으로 위협하는 김정은이다.
탈북자에게 조국은 김정은 독재 정권이 군림하는 북한이 아니라 고향에 두고 온 부모 형제들이다. 우리는 가슴이 찢어지는 생이별을 한 그들을 마음에 담았지 절대로 배신하지 않았다.
화를 삭일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북한 외교관들 면전에 대고 "불쌍한 사람들이구먼. 변명하지 마!"라고 했다. 국제 무대에서 김정은의 대변인인 북한 외교관들의 더러운 민낯을 보며 내가 19년 전 쿠웨이트에서 등진 평양 독재 정권의 추악함을 재확인했다
2016.02.03 내 고향 북한의 설
지난 주말 열 살 난 막둥이 손을 잡고 집 근처 대형 마트를 찾았다. 며칠 뒤 강원도 어느 스키장에 가기 위해 필요한 준비품을 사기 위해서다. 경기 침체라지만 그래도 설이 가까이 와서인지 넓은 주차장에는 쇼핑을 나온 고객들이 세워놓은 다양한 승용차가 평소보다 더 많이 들어찼다.
'없는 것 빼고는 모두 다 있다'는 마트 안에서 갖가지 상품을 고르며 북새통을 이룬 고객들의 표정에도 명절에 대한 기대로 미소가 잔뜩 어렸다. 부모 손 잡고 나온 아이들은 무엇을 사달라며 행복한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아무튼 나라에 돈이 있어야 국민도 잘살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높아야 명절도 기다려지는 법이다. 행복에 겨운 아들과 즐거운 쇼핑을 하면서 고향 생각에 잠겼다.
북한에서 설은 지난 1960년대 김일성의 '시대에 맞지 않는 봉건적 잔재'라는 교시로 청산됐다가 90년대 초반 김정일의 지시로 '민족 전통문화를 장려하는 차원'에서 부활했다. 초기에는 하루만 쉬다가 요즘은 이틀을 쉰다. 첫날은 아침 일찍 김일성·김정일 동상을 찾아 절을 한 후 각자 소속된 조직과 단체별로 정치 학습과 강연 및 문화 행사를 갖는다. 다음 날은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공원과 극장 등을 찾아 유희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일반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노래방, 커피숍, PC방 등 문화 시설은 전혀 없다.
조상의 묘소를 찾아 만복기원의 절을 올리고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부모님께 세배를 드리며 덕담을 나눔에서부터 씨름과 윷놀이, 장기와 바둑 등 우리 민족의 고유 민속놀이는 남한과 똑같다. 재롱떠는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동네 강변에서 하는 제기차기와 술래잡기, 썰매 타기와 눈싸움도 별 다름없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차이점이 있다. 먹을 것이 흔한 남한에서 설날 아침 으레 마주하는 민속 음식인 떡국은 북한의 일반 주민들에는 정말 고급 음식이다. 서울에서 생일에 먹는 미역국도 평양에서는 임신부가 출산 후 먹는 대표 음식이다.
/이철원 기자
모든 것이 국가 배급제인 북한에서는 설날 상점과 식당에서 주민들이 흥청거리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TV에 비치는 평양의 연출된 모습은 오직 그들만의 소왕국에서 존재하는 이색적 그림이다. 솔직히 말해, 산 사람이 먹을 음식도 제대로 없는 실정이니 죽은 조상님께 드릴 차례상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김정은 시대 들어서도 계속되는 국가의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노동자들에게 월급도 제대로 못 주는 형국이니 아이들에게 주는 세뱃돈도 거의 전무하다. 북한 조선중앙은행의 각 저금소(지점)는 입금만 되고 출금은 전혀 안 된다. 세상에 뭐 그런 곳도 있느냐는 의문이 가겠지만 여하튼 북한은 그런 곳이다.
북한에선 남한처럼 자가용을 타고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을 찾아 세배 드리는 풍경을 볼 수 없다. 친인척 중에 관혼상제가 있을 때만 정부의 승인을 받고 지역을 벗어나는 북한 주민들이다. 설령 평양에서 청진을 기차로 간다고 해도 빠르면 하루 이틀, 늦으면 1주일 이상 걸린다. 그렇다고 가정용 전화로 안부를 묻는 것도 아니다. 당과 국가의 고위간부들 집에는 전화가 있지만 일반 주민들이 사는 아파트에는 경비실에 한 대 있을 정도이며 시내 공중전화도 교환이 연결해준다. 휴대전화 구입비는 일반 주민들의 100년 월급과 맞먹는 꿈도 꾸지 못할 엄청난 부의 상징이다.
명절도 아닌 주말에 설날 풍경을 미리 앞당겨 만끽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손에 쥔 작은 휴대폰으로 빠르게 변하는 지구촌 곳곳은 물론이요 세상 사람들이 사는 다양한 모습까지 환히 들여다보며 웃음 가득한 아들의 행복한 모습에 도취한 내가 북한의 총리나 장관보다 훨씬 더 낫지 않을까. 그들도 없는 자가용을 타고 다니며 외국은 물론 국내 어디든 아무 때나 다닐 수 있는 풍족한 자유로움, 일을 잘못한다고 대통령과 정부를 비판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내가 20년 전 이곳 남한으로 오길 백번 잘했다. 북한에서 설날에도 못 먹는 떡을 1년 내내 먹을 수 있고 명절에도 구경 못 하는 여유로운 표정을 매일같이 볼 수 있으니까. 내가 서울에서 보는 시민들의 순수한 꾸밈새는 거짓과 포장이 없는 진실의 그림이다. 이거야말로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훈훈한 세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휴전선이 가로막혀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그리운 고향을 마음에 그려본다. 하루빨리 70년 분단의 고통을 마무리하고 통일이 되어 반가운 얼굴들을 마주했으면 좋겠다. 민족의 고유 명절 설을 맞으며 고향에 계시는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우리 동포들에게 새해에는 더 나은 생활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조선일보
2016년 10월 12일 ‘김정은 맞춤형’ 제재가 필요하다
림일 탈북 작가
지난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에 놀란 미국이 강력한 대북정책으로 북한과 거래하는 제3국의 기업과 은행, 정부를 제재하는 ‘사실상’ 세컨더리 보이콧을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 김정은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9월 9일 5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발끈한 미국이 이번에는 북한을 국제 금융망에서 퇴출시킬 것이라고 나섰다.
북한 핵(核)의 절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대한민국도 분노하긴 마찬가지다. 북한에 유입되는 달러를 막기 위해 개성공단 운영을 전면 중단하고, 해외에 거주하는 교민과 관광객들의 현지 북한식당 이용도 자제토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북한의 외화보유량은 다소 줄겠지만, 김정은 개인을 포함한 ‘북한 정권 전체’에 대한 제재엔 별 도움이 안 된다. 미국 등 국제사회가 북한의 하늘과 바닷길을 아무리 엄격히 통제한다 해도 1300㎞에 이르는 북∼중, 북∼러 국경까지 차단할 수는 없다. 그리고 수많은 중국, 러시아 민간인들까지 통제하기는 더욱 불가능하다. 설령 세계 각국의 ‘북한식당’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5만 명으로 추정되는 해외 노동자가 없어져도, 외국 은행에 예치된 북한의 자금이 모두 동결된다 해도 김정은 정권은 버틸 것이다. 북한도 나름의 ‘국가’이기 때문에 국고(國庫)가 마르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집단이다. 전 세계에 걸쳐 독재국가가 있긴 하지만, 북한처럼 전체 주민이 ‘수령 결사 옹위’ 정신병자가 된 나라는 없다. 글로벌 세상에 다른 나라의 진실은 전혀 모른 채 오직 수령이 주는 식량으로 양육되는 가축 같은 국민은 지구상에 오직 북한 주민뿐이다. 그러기에 자신은 평생 ‘이밥에 고깃국’ 한 그릇 못 먹으면서도, 피둥피둥한 김정은의 안색이 조금만 안 좋아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의 건강을 걱정하고 자기 목숨을 버려가면서 고철덩이나 다름없는 수령의 동상을 호위한다.
그러면 김정은에게 가장 무서운 건 뭘까? 레이더에 안 잡히는 미국의 B-52 폭격기일까, 아니면 ‘김정은 참수부대’일까. 그것도 아니면 미국의 대북 선제 공격일까? 결국 이를 결정하게 만드는 사람도 김정은이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군사 장비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2000만 북한 주민이다!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입과 귀를 막아놨으니 세상의 진실은 모두 가려져 있다. 김일성의 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도 대한민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알고 있고, 아버지 김정일과 재일동포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김정은을 하루아침에 최고 지도자로 모시고 있다.
그래서 70년 독재가 있었고, 앞으로도 그 이상 집권 가능한 게 김씨 왕조의 ‘백두혈통독재’다. 김정은의 3대 세습 독재 체제 아래 신음하는 2000만 북한 주민을 이 세상의 모든 진실과 김정은의 정체를 깨닫고 분노할 줄 아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줘야 한다. 그 방법은 하나다. 대북 전단(삐라)과 방송이다. 지금 탈북민들이 기업과 종교 단체에서 구걸하다시피 후원을 받아 1년에 몇 차례 대북 전단을 보내고 있다. ‘통일 준비작업’인 그 성스러운 일을 음지에서 지원하진 못할망정 뒷다리나 잡아선 안 된다.
북한은 전 세계적으로도 찾아볼 수 없는 김정은의 1인 통치 집단이다. 그러니 김정은이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워할 만한 ‘맞춤형 제재’가 필요하다. 미국과 한국이 지금 대북 제재에 들이는 비용의 100분의 1이나 전투기 1대 값도 안 되는 예산으로 김정은을 얼마든지 궁지로 몰 수 있다. 그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집단은 3만 탈북민이다. 독재자는 강한 것 같지만, 그것까지도 가짜다.
문화일보
2016-11-15 탈북자 고위 공무원을 보고 싶다
20년 전 이맘때 평양에서 중동의 쿠웨이트로 건설 노동을 나갔다가 월급도 못 받고 5개월 동안 노예 노동에 시달리다 대한민국으로 탈출했다. 수출용 자전거 한 대도 생산 못 하는 북한에 비해 세계 5위 자동차 생산국인 남한의 경제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경제도 경제였지만 내가 남한에서 받은 감동은 많은 사람이 꾸준한 노력으로 악전고투 속에 정상에 올라 희망을 준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내일 당장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이 이루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북한 주민들이 “휴전 이후 63년간 남한 정부에서 2000만 인민의 대표인 3만 탈북민 가운데 국가 고위 공직자로 임명한 사람은 몇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대답은 “딱 한 명!”이다. 그는 김일성종합대 교수 출신으로 탈북민 최초의 고위공직자(통일교육원장)였던 조명철 전 국회의원.
하지만 그는 김정일 독재 정권 아래서 300만 인민이 굶어죽은 ‘고난의 행군’ 시기부터 크게 늘어난 대다수 탈북민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3만 탈북민 출신 중 국가 고위공직자를 딱 한 명 배출한 것은 심히 야박하지 않은가. 남과 북의 두 체제를 경험한 탈북민을 인재로 양성하는 것이 곧 통일일진대 현 정부가 그 통일에 너무나도 인색하다는 생각이다.
탈북민 중에는 남한에 와서 대학 공부를 한 사람이 2000명이 넘는다. 그중에 석·박사 학위 취득자가 100명 이상이며 대학교수도 적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인 이 땅에 와서 지극히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다. 또한 열악한 환경에서 대북 방송 마이크와 펜을 들고 사명감으로 묵묵히 일해 온 오피니언 리더들도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진정으로 통일을 준비하려면 탈북민 중에서 우수한 사람들을 국가 고위 공직에 임명하는 통 큰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 정부가 고위 공직에 경험과 능력이 우수한 탈북민들을 임명하면 통일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처럼 통일을 말로만 하지 말고 실제로 북한 주민들이 공감할 그림을 그려야 한다.
사선을 넘어온 인민군 군인이 특진하여 국군에서 당당히 복무하고 탈북민 출신 교사가 교단에서 남한 학생들을 가르치며 탈북 외교관이 승진하여 해외에서 대한민국 외교관으로 근무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목숨 걸고 찾아온 자유의 이 땅, 대한민국에서 장차관, 기관장, 국회의원이 되면 북한의 2000만 인민에게 감동의 선물이 된다. 그것이 진정한 통일 준비가 아닐까
동아일보
■ 박상학의 삐라 전쟁
2014-10-11 삐라와 고사포사격의 상관관계는 無
북한은 저들의 軍전투교범을 통해 ‘포병이란 여러 가지 포로 무장한 륙군의 한 병종이며 사명에 따라 지상포병, 해안포병, 고사포병으로 나눈다’고 규정 하고 있다.
포병의 사명은 ‘적의 유생력량과 무기, 전투기술기재 및 방어시설물들을 소멸, 격파하고 보병과 땅크, 함선들의 전투행동을 지원하며 부대 및 대상물을 엄호하는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포병은 지상, 해안, 고사포병으로 나뉘며 고사포병은 ‘공중의 적을 소멸하며 국가의 정치, 경제, 군사적 의의를 가지는 대상물들과 부대들을 적의 공중습격으로부터 엄호하는 것이 사명이다’고 밝히고 있다.
이제 북한의 군사교범 몇 단락을 인용해 가면서 10일 오후, 북한군의 고사총 사격이 어떤 전술에 근거한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저들은 軍『포병전술』의 해설문 「포병이 수행하는 임무에서 소멸, 진압, 파괴, 방해란 무엇인가」를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소멸이란 적의 유생력량을 타격하여 전투력을 잃게 함으로써 새로운 력량과 기재를 보충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격파시키는 것.
진압이란 적의 전투력량을 림시적으로 잃게 하며 기동을 제한하거나 못하게 하며 지ㅜ히가 파탄되어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할 정도로 격파시키는 것.
파괴란 적의 방어시설물들과 군사기재 및 그 밖의 대상물들을 마사 버리는 것.
방해란 화력으로 적의 행동을 교란하거나 못하게 하며 봉쇄하거나 적을 늘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하여 피로케 하는 것.
10일 대북전단을 노렸더라는 북한의 고사총이 어떤 목적으로 발사되었는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도 무방하겠지만, 그 외 제기되는 몇 가지 의문점들은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왜 저들의 사격지점이 파주(오두산 통일전망대 주차장)가 아니고 연천인가 하는 것으로 ‘인명피해 만큼은 비껴가겠다’는 북한당국의 자상한 처사에 대한 해석이다.
현재 대북전단을 날리는 탈북자단체는 공개를 주장하는 A그룹과 비공개를 주장하는 B그룹 외 10여개 단체가 있다. 북한 당국은 이들 모두를 ‘반역자’로 매도하고는 있으나 유독 A그룹을 향해서만 "삐라살포지점은 그대로 둘 수 없는 도발 원점이며 우리가 그 즉시 청산 해버려야 할 물리적 타격 목표"라고 위협해 왔다.
9일 역시, A그룹의 전단 살포 소식이 국내언론에 실리자 마자 북한은 또 다시“자유북한운동연합’의 인간쓰레기들을 용서치 않겠다”고 공언했으며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는 등으로 협박도 가해왔다.
그렇다면 응당 10일 오전 11시 대북전단을 살포한 ‘자유북한운동연합’의 ‘쓰레기’들과, 저들이 말하는 ‘남조선 어용언론인 및 경찰 관계자 30여명’이 있는 파주의 도라산 통일전망대로 고사총을 난사해야 했다.
하지만 북한은 그로부터 약 다섯 시간 뒤인 오후 3시 55분경 연천군 합수리 일대에서 우리 측 민간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구실로 간헐적 고사총 사격을 가해왔으며, 그것도 풍선을 향해서가 아니라 허공에 대고 마구 총탄을 퍼 붓는 우스꽝스러운 작태를 연출했다.
확인해 본 결과 B그룹의 리더인 탈북자 이 모씨는 “사건이 발생한 날 연천지역에서 100여개의 풍선을 날린 것은 맞지만 당일 22시10분경에야 북한의 도발소식을 들었다”고 할 정도로 북한의 도발시점과 유리되어 있었고 지역 주민들조차 사건 당시 벌어지는 상황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북한의 도발은 ‘삐라’와 동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 ‘포탄공격’이라는 언론의 실책과 우리군의 대응사격 및 ‘진돗개 하나’발령 등에 힘입어 연천은 전운이 감도는 전쟁터마냥 각인됐고 ‘삐라’와 ‘북한의 보복타격’이라는 단어가 교묘한 조합을 이루고 탈북자들을 공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말이 난 김에 ‘포탄사격’과 ‘고사총 사격’의 차이를 짚어보면, 포탄은 인명 및 전투기술기재의 파괴 수단인데 반해 고사총은 지상목표를 직접 겨누고 사격하지 않는 한 직접적인 인명살상은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번 사격은 북한이 호언해온 ‘원점 타격’과는 거리가 먼 심리전의 일환이었음을 밝혀두고 싶다.
다음은 시기 문제이다. 왜 북한은 고위급 회담이 언급된 지금 시점에 고사총 등을 난사함으로 스스로 분위기를 깨려고 들까.
지난달 13일과 15일 청와대 국가안보실에 전통문을 보내 남측이 대북전단 살포를 중단해야 대화의 문이 열릴 수 있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던 북한이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가 표현의 자유 등을 내세워 탈북단체의 전단 살포를 막지 않았다는 것을 빌미로 ‘단호한 행동을 보여줘 그동안의 위협이 빈말이 아님을 보여준 것’이라는 일부의 주장이 100% 틀린 말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들 말처럼 ‘대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고’, ‘모처럼 마련된 북남관계개선의 도도한 흐름이 있는데’ 이 같은 흐름을 깨고 부디 이 시점에 고사포를 쏘아대는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노동당창건일이라고 하는 10월10일을 계기로 재 점화된 김정은 와병 및 식물인간 설 등을 잠재우기 위해 벌린 연극이라면 이 또한 황병서 일행의 1일 쇼처럼 드러나고야 말 잔꾀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전 북한군 대위(예술선전대 작가), 현 자유북한방송국 대표.
2014.10.13 김씨가문 세습 비판이 주요 내용… 올해만 5000만장 이상 보내
대북전단에 무엇이 담겨있나
1달러 지폐·라디오·라면 등 北주민에게 필요한 생필품도
탈북자 단체들이 보내는 대북 전단에는 한국의 발전상과 세계의 뉴스, 김일성 가문 3대 세습 비판과 그들의 부정부패 사례, 기독교 관련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이와 함께 북한 주민에게 필요한 1달러 지폐, 소형 라디오, DVD, 라면, 스타킹, 라이터 등 생필품도 들어 있다.
전단은 북한 주민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북한식 표현을 많이 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 인민의 어버이 수령이라고 하자! 그런데 왜 인민 대중인 당신들은 강냉이죽도 없어 굶어 죽고, 입 하나인 수령은 왜 그렇게 방방곡곡 사냥터, 별장, 동상 천지인가?!' 하는 식이다. 남북한 경제력과 군사력 격차에 대한 내용도 있다. '세 번에 걸친 서해 해전에서 0대9 침몰 대파로 보여줌. 자동화된 남측 군함에 수동 조작 북측 군함으로 도저히 안되자 몰래 천안함 기습, 연평도 포격' 등의 내용이다.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와 회원들이 지난 10일 경기도 파주에서 북으로 날려 보낸 대북 전단. 대한민국의 산업화·민주화 등 번영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북한의 3대 세습 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이 미화 1달러짜리 지폐와 함께 들어 있다. /뉴스1
이 밖에도 '고모부(장성택)까지 처형한 사악한 패륜아 김정은' 같은 문구와 함께 김정일의 여자들, 김정은과 리설주 관련 내용,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활동 내용 등이 담겨 있다. 8·15 광복이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국 등 연합군 공격에 의해 일제가 무조건 항복한 데 따른 것이라는 등 북한 주민들이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도 들어 있다.
북한에 전단을 보내는 단체는 주로 자유북한운동연합(대표 박상학)과 기독탈북인연합 대북풍선단(단장 이민복)이다. 이민복 대표는 올해에만 25회에 걸쳐 풍선 1567개(전단 약 4700만장)를 북한에 보냈다. 풍선 1개에는 A4 용지 절반 크기의 대북 전단 약 3만장이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북한운동연합도 올해 공개·비공개로 수십 차례에 걸쳐 대북 전단 700만~800만장을 날려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두 단체가 날려 보낸 대북 전단의 양만 5000만장을 넘는다. 박 대표는 "작년까지 해상에서 배를 타고 날려보낼 때는 지금보다 2배 넘게 날려 보냈다"며 "올해는 해상 출입이 막혀 육상에서만 뿌리다 보니 숫자가 줄었다"고 했다.
조선일보
2014.10.13 박상학 "대북전단 중단하자는 김무성, 국민 기본권 짓밟으며 독재자에 아부하나"
지난 10일 북한이 경기도 연천 지역에서 살포된 대북전단(삐라)에 공중 사격을 했다. 그동안 대북전단 살포를 중단하라며 조준 사격하겠다는 경고는 여러 번 있었지만, 실제 사격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은 “괴뢰패당의 처사로 북남관계가 파국에 빠지게 된 것은 물론, 예정된 제2차 북남 고위급접촉도 물거품이 된 것이나 다름없게 됐다”고 보도하는 등 격앙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런 북의 강경 대응 때문인지 우리측 반응도 이전 보다 자제 목소리가 더 커지고 있다. 그동안 ‘삐라와 남북 대화는 양립할 수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해 온 야당뿐 아니라, 여당에서도 전단 살포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당 대표 입에서까지 나왔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11일 “우리가 북한을 자극하는 일은 가능한 안 하는 게 좋겠다”며 대북전단 살포가 남북관계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으니 자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박상학, “김무성, 북한 이야기 할 자격 없는 사람”
대북 전단 살포를 주도해온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는 12일 프리미엄조선과 전화인터뷰에서 김무성 대표의 발언에 대해 “국민의 기본권을 짓밟으면서 독재자들에게 아부하자는 것”이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그는 전단 살포 때문에 북한과 대화가 진전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선 “그런 이야기는 북한의 농간에 넘어가 그들의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이라며 “터무니없다”고 일축했다.
박 대표는 인터뷰 내내 “답답해서 부아가 치민다”는 얘기를 여러 번 했다. 그는 “지금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대북전단 살포인데, 이를 하지 말란다고 안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냐”며 “왜 이렇게 항상 북한정권에 관대한가”라고 성토했다. 그는 김무성 대표를 향해 자신이 한 이야기를 한 글짜도 빠짐 없이 그대로 실어달라고 부탁했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
다음은 박 대표와의 일문일답
―여당 대표까지 나서 전단 살포를 그만 해달라고 한다.
“거짓 위선자가 폭력을 휘두른다고 해서 북한 인민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그런 발언은 우리 국민의 기본권을 짓밟으면서 독재자들에게 아부하자는 말과 같다. 김무성 대표라는 사람은 원내대표 시절 120개 법안을 한꺼번에 처리할 때도 북한인권법은 쏙 뺀 사람이 아닌가. 그런 사람이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건가.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북한이 고위급 접촉에 한 달여의 시간을 둔 것은, 우리가 이 문제 등에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보겠다는 뜻 아니겠나.
“그런 말씀 마시라. (황병서 등이)10월 4일날 군복 입고 와서 거짓 미소를 짓더니 다시 3일 만에 무력도발을 했다. 한쪽으로는 대화를 하고 그 미소가 마르기 전에 또 도발을 하는 이런 국면에서 어떤 진정성을 보고 우리가 전단 살포를 멈춰야 한단 말인가.”
―북한은 고위급 접촉이 무산된 것이 전단 살포 때문이라 주장한다.
“그것이 맞는 이야기이겠는가. 4일날 황병서가 내려와 놓고 7일에 무슨 일이 있었나. 그런 식의 주장은 모두 북한의 일방적 주장이다. 그걸 그대로 믿는 것인가. 그들의 입장을 왜 우리가 대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인가. 만약 북한이 NLL 넘어와서 함포 사격을 안 했으면 10일날에 공개적으로 이렇게 살포를 안할 수도 있었다. 모든 도발의 빌미는 북한이 줬다.”
―연천군 주민들도 안전문제 등을 이유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연천군 주민 중 우리를 응원하는 사람도 많다. 물론 불안한 면도 있겠지만, 평화적 방법으로 전단 보내고 하는 것을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막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 것이 바로 북한이 노리는 남남갈등이다. 몇몇 사람이 반대한다고 원칙과 정의를 버릴 순 없다. 북한이 공갈과 협박을 한다고 해서 우리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정신과 체제를 그렇게 밟을 수는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화를 막는 빌미를 주게된다는 주장도 있다
“대화는 대화대로 해라, 대신 빌빌대지 말고 우리한테 하는 주장을 북한에 하라는 말이다. 북한이 선군독재를 선민정치로 바꾸고 대한민국을 협박하지 않으면 우리도 전단 살포 안한다. 그렇게 북한에 당당하게 말을 하라. 그렇게 하지 않는 김정은을 비판해야지 왜 평화적 편지에 총질하는 북한을 응원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대화를 안해봤나. 그 결과가 뭐였나, 핵실험 아니었나. 그렇게 속고 또 속아야 하나.”
―전단 살포는 언제까지 계속할 건가.
“북한이 핵노선을 폐기하고 선군독재를 선민정치로 바꾸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전단을 살포하겠는가. 다만 천안함 격침, 연평도 포격, 박왕자씨 사살에 대한 사과, 이것만 해도 우리는 중단할 수 있다.”
▲지난 2012년 9월 9일 자유북한운동연합 소속 회원들이 경기도 파주 임진각 망배단 앞에서 '김정은의 거짓과 위선에 속지말자'는 내용의 대북 전단 20만장을 날려보내고 있다/조선일보DB
―현실적으로 북한이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들 아닌가.
“현실적이든 비현실적이든, 그런 걸 당당히 이야기해야지, 그렇다면 사람을 죽이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인가. 왜 우리는 북한의 잔인한 독재자들에게 이렇게 관대한가. 북한에는 무조건 한 수 지고 들어가고, 가능하지 않다는 그런 얘기만 한다. 그렇다면 가능한 게 뭔가, 그런 것도 가능하지 않은 놈들하고 왜 대화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대화 자체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북한이 전단에 총격까지 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지금 북한지도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북한군이 대북전단에 동요돼 유사시 총부리를 대한민국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돌릴 지 모른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굉장히 훌륭한 일이다. 심리전이라는 게 싸우지 않고 적을 물리치는 것으로, 사실 군이 해야 한다. 그걸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막아놓는 건데….”
―앞으로 반대 목소리가 더 커질 수도 있다.
“대북전단 살포로 잔인한 수령독재가 위협을 느낀 것은 잘 된 것이지 잘못된 일은 아니다. 독재자가 공갈 협박을 한다고 해서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아니란 뜻이다. 잔인한 자에게 관대한 자는 존중받아야 될 사람에게 잔인하다. 지금 대한민국 현실이 그렇다.”
☞박상학씨는 1968년 양강도 혜산시 출신. 1999년 탈북 이후, 북한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투쟁하겠다며 탈북자들과 자유북한운동연합 조직. 2005년부터 대북 전단 배포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음. 이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에는 국제 인권상인 하벨상을 수상.
조선일보
2014.10.27 삐라는 북한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사병시절 나의 군복상의 오른쪽 주머니엔 늘 손바닥만 한 달력이 들어있었습니다. 땅 끝 마을 해돋이 사진이 뒷면에 그려져 있던, 또 어느 해엔가는 정동진의 푸른 바다가 출렁이던 작지만, 10년을 함께해온 내 삶의 동반자였습니다.
“풍선에서 떨어지는 ‘적지물자’를 다치기만 해도 손이 썩는다”던 소문이 나 돌던 어느 해 겨울엔, 그 말이 거짓임을 증명이나 하려는 듯 중대며 대대 연병장에 ‘불티나’ 표 라이터며 ‘아리랑’ 표 담배 등에 섞여 새롭게 디자인된 달력이 하얗게 내리기도 했습니다.
눈에 쌍심지를 켠 지휘관들 앞에서 ‘적지물자’ 따위는 불태워버리기도 했지만 달력 몇 장만큼은 주머니에 포개 넣었다가 또래 사병들끼리 나누어 갖던 그때, 나는 그해 달력의 뒷장을 통해 유독 북한에서만 군복무10년이 강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코끼리 등에 탄 20대 초반의 ‘괴뢰군’사병과 젊은 여성이 어울려 찍은 사진 한편에 ‘한국군은 30개월, 북한군은 10년, 세상에서 유일한 인민군의 장기복무제도’라는 표어가 새겨져 있었고 이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길고 가장 어이없는 병역제도의 중심에 내가 서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 놀랐던 것은 김정일의 고향이 백두밀령이 아니라 하바롭스크였더라는 것과 ‘미제의 식민지인 남조선’에서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경기대회’가 개최되었는가 하면 90년대 초, 자동차 누적생산량이 1천만대가 넘었더라는 믿기 어려운 사실들이 자꾸만 자꾸만 가슴속에 쌓여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손바닥만 한 삐라가 없었다면 나는, 그리고 탈북자들 다수는 ‘지구는 주체사상을 축으로 돌아간다’던 북한당국의 이야기를 지금도 믿었을 것이고 ‘장군님은 백두산이 낳은 불세출의 영장이시며 남조선은 헐벗고 굶주린 미제의 식민지’라는 것에 매료되어 탈북을 꿈꾸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삐라가 북한주민들을 계몽시키는 것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는 어느 교수님의 이야기는 ‘무식’이고, “밥벌이를 위해 삐라를 뿌리는 고로 정부가 저들에게 직업을 주면 골치 아픈 일이 없어 질 것”이라는 어느 연구위원의 이야기는 ‘교만’을 넘어 갈등과 상처의 씨가 되어 탈북자들의 가슴을 두고두고 아프게 할 것입니다.
결국 그런 ‘북한전문가’들과 ‘사이비 연구가’들의 잘못된 인식과 발언에 기댄 북한의 대북전단 살포중지의 파상공세가 시작됐고, 고사총탄 몇 발에 6.25를 겪은 우리 국민들임에도 ‘생명권’을 논하게 했으며, 대북전단 살포현장에서 우리가 우리끼리 싸우는 가슴 아픈 현실이 연출되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북한의 독재정권을 비판하고 북한주민들에게 세상의 진실을 알려주는 대북전단이 ‘남북관계를 파탄시키는 괴물’이 된 이유를 저는 알고 싶습니다. 또 핵무장까지 갖추었다고 하는 북한이 대포 몇 발을 쏘면서 NLL을 새롭게 그어버리면 그때도 우리끼리 싸우지 않는다는 담보가 과연 있는지도 묻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에 민주주의의 우월성이 없다면 핵무기를 가진 북한정권과 어떤 대화를 하든 밀리게 되어 있다는 것을, 정의와 원칙에서 한걸음 물러서면 백 걸음 천 걸음을 물러서야 한다는 것을 왜 탈북자들만 외쳐야 하는지도 궁금하고 또 궁금합니다.
대북전단 살포현장에서 일부시민들에 의해 전단과 풍선이 갈가리 찢기던 날 북한은 국방위원회 성명을 통해 ‘우리 공화국은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의 극악무도한《인권》소동을 무자비하게 짓뭉개 버릴 것이다’는 폭언을 퍼 부으며 또 다른 위협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음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김성민
2014-10-28 북한이 對北전단 문제 삼는 것은 멍청한 짓
/대북전단
충청도 사람들을 뜻하는 속된 말이 하나 있다. ‘멍청도’다. 타칭(他稱)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자칭(自稱)도 ‘멍청도’다. 충청도 사람들이 모이면 스스로 “우리 ‘멍청도’는 이래저래서 문제야”라는 말을 곧잘 한다. 충남 부여가 고향인 필자도 “야, 멍청도”라고 불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재미있는 점은 부른 사람도, 불린 사람도 그런 호칭을 ‘비하(卑下)’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체로 ‘픽’하고 웃어넘긴다. 정말 멍청해서 멍청이라고 했다면 기분 나쁘겠지만, 부른 사람도, 불린 사람도 그러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두 눈 멀쩡한 사람에게 “××”라고 말한다면, ‘픽’하고 웃어넘길 일이지, 정색하고 덤빌 일은 아니니까 그럴 게다.
북한에서 대북(對北)전단 살포를 문제 삼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북한이 對北 전단 살포를 중지하라고 우리를 압박하는 것은 정말 멍청한 짓이다. 전단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정정당당히 증명해 보이면 된다. 북한 체제가 진정 자기들 주장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픽’ 하고 웃어넘기면 그만이다. 정색을 하고 덤비는 것은 전단에서 지적하는 별의별 일들이 실제로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특히 북한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 사람들에게 틀림없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체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할 뿐이다. 그러니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
對北 전단은 계속해서 날려 보내야 옳다. 소위 우파(右派)에 속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하지만, 절대 그러면 안된다. 대내외로 당당히 공표하면서 살포해야 한다. 그래야 북측이 계속 생떼를 쓸 것 아닌가. 그래야 우리 외의 더 많은 세상 사람들이 북한의 실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조남준 언론인
2014.10.30 박상학의 울분, "이런 식이라면 김정은 50년 간다"
지난 10월 한 달 간의 최대 이슈는 단연 ‘대북전단’이다. 북한 지도부는 대북전단 중단을 위해 모종의 ‘작정’(혹은 작전)을 한 듯하다. 심지어 인천에 온 북의 최룡해 일행의 방문도 대북전단을 막기 위한 고도로 계산된 행위로 비칠 정도다. 북한은 대북풍선을 향해 고사포를 쏘아 긴장감을 한껏 높이는 한편, ‘삐랴냐 대화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2013년 5월 4일, 경기도 파주 임진각에서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와 북한인권운동가 수잰 숄티 등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조선DB
지난 25일에는 경기도 파주 임진각에서 대북전단을 날리려던 대북전단보내기국민연합(대표 최우원) 회원과 이를 막으려는 사람들 간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날 복면과 마스크를 한 일단의 청년들은 대북전단을 탈취하고 풍선을 칼로 찢는 등 전단살포를 격렬하게 저지했다.
이날 현장에는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도 있었다. 그는 임진각 일대에서 전단 살포가 저지되자 저녁 무렵 일행 몇명과 김포 월곶면의 한 야산으로 이동해 2만장의 전단을 살포했다. 박 대표는 “그 어떤 거짓과 폭력을 동원해도 진실은 절대로 막을 수 없다”며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날 전단을 기어이 보냈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27일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박상학 대표를 만났다. 박 대표는 1968년 북한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나 김책공대를 졸업한 수재(秀才)다. 그와 가족은 북한에서 엘리트 계층으로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는 위치였지만, 1999년 가족과 함께 탈북한 후 2000년 2월 한국에 도착했다(월간조선 2009년 1월호에 박상학 대표의 탈북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다= 편집자주).
박 대표는 남한에 온 이후에도 서울대 모바일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등 평범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북한에 남아 있던 숙부들이 보위부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한 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촌들은 빌어먹는 꽃제비가 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박 대표는 “삼촌과 조카들의 소식을 듣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았다”고 한다. ‘도저히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야만인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생각에 김정일에 대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후 박 대표는 북한인권개선과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고, 2004년부터 지금까지 대북전단 보내기 운동에 전념해오고 있다. 작년에 미국 인권재단(HRF)으로부터 국제인권상인 ‘하벨상’을 받았다.
▲10월 25일 오후 1시 대북전단보내기국민연합 등 보수단체 회원 40여 명이 임진각에서 대북전단을 날려보내려 했으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가로막혀 전단 살포가 무산됐다. /조선DB
"아무도 전단 살포 막을 권리 없어"
기자를 만난 박상학 대표는 먼저 “지난 25일 임진각에서 진행한 대북전단 날리기 행사는 자신이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한 애국보수단체에서 기획한 행사인데 저는 격려 인사차 참석했다가 주민으로 위장한 김정은이 추종자들로부터 그런 봉변을 당하고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대북전단 행사를 폭력으로 가로막은 사람들은 주민들이 아니라, 밀양송전탑반대운동, 제주해군기지반대 등 반대한민국 시위 때마다 이름을 바꾸어 등장하는 전문 데모꾼들입니다.”
-TV 화면을 보니 트랙터를 몰고 나온 농민들도 보이던데요.
“그 분들은 임진각 주차장 안쪽에 있었습니다. 입구에서 애국시민단체들을 격렬하게 저지하며 폭력을 행사한 사람 중에는 현지 주민들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선량한 주민들이 동요하는 것은 종북좌파 선동꾼들이 지역주민들을 끊임없이 선동하고 공포심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북 전단은 어떻게 빼앗겼습니까.
“원래 대북전단을 날릴 때는 행사요원이 먼저 들어가서 자리를 잡은 후에 전단과 풍선을 실은 트럭이 들어와야 하는데, 그날은 트럭이 먼저 들어가서 행사요원을 기다리다가 전단을 강탈당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유민주 국가에서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에 폭력을 동원해서야 되겠습니까. 복면을 쓰고, 칼을 들고 남의 재물을 강탈해서 파손하는 행위가 날강도가 아니면 무엇이 날강도란 말입니까. 이들은 잔악한 김정은을 닮아서 그와 똑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10월 25일 경기 파주 임진각에서 복면을 쓴 남녀 무리가 대북전단을 날릴 풍선을 빼앗아 커터칼로 찢고 있다. /MBN 방송 캡쳐
-지난 10월 10일 북한이 대북전단에 고사포를 발사한 후 야당(野黨)은 대북전단 발송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민주당(새정치연합)에게 늘 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잔인한 자에게 관대한 자는 동정 받아야 할 자에게 잔인하다’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입니다. 북한 인민들의 알권리를 위해 활동하는 사람의 편에 서지 않고, 독재와 위선의 편에 서서 북한 인민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대북전단 발송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딱 맞는 말입니다.”
-대북 전문가 중에 남북 고위급회담 접촉을 앞둔 시점이니까, 회담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당분간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이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주장하는 이른바 대북 전문가라는 자들이 북한의 잔악한 행위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는 것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북한의 잔악한 행위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의 편지를 보내는 것이 도발입니까? 아니면 거기에 대고 총질을 하는 것이 도발입니까? 살인자나 인질범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살인범에 맞서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들의 주장은 김정은의 편에서 김정은을 대변하는 적반하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박상학 대표는 “대화라는 것은 대화하려는 사람의 진정성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황병서와 최룡해는 불과 얼마 전까지 자기의 동지였고, 상관으로 모셨던 장성택을 잔인하게 죽이는데 앞장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인천에 와서 미소 한번 짓고 갔다고 해서 진정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들은 인천에서 고위급 회담을 위한 접촉을 하자고 해놓고 돌아가서 3일 만에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와 우리 군함에 함포 사격을 지시했습니다. 또한 그 얼마 후에는 군사분계선(DMZ) 안에서 우리측 초소에 총격을 가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대화에 진정성을 가진 사람들이 할 행동입니까?”
"사람이 독재자 앞에서 이처럼 비굴해질 수도 있는가"
▲북한이 보낸 삐라. 연평도 포격에서 전사한 우리 장병들의 사진을 넣고 위협하고 있다.
-보수 우파 인사들 중에서도 우리 국민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이기 때문에 대북전단 발송을 정부가 막아야 한다거나, 비공개로 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이도 있습니다.
“북한은 지난 5~6월까지 인민군 차원에서 우리 쪽에 전단을 보냈습니다. 저는 우리의 대북전단을 비방하는 사람 중에서 북한의 삐라발송 행위를 비난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적이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탈북자들이 진실의 편지를 보내는 것만 문제 삼는 것을 보면 사람이 적 앞에서 이처럼 비굴해 질 수도 있는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평화적으로 보낸 편지에 총질을 하는 김정은의 만행에 분노를 하는 것이 사리와 상식에 맞는 행동이 아닙니까. 저는 대북전단이 도발의 빌미를 주기 때문에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이 어디인지 무척 궁금합니다.”
-비공개로 보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제가 수백번을 비공개로 대북전단을 날려왔지만, 외부 세력이 아닌 지역주민들의 반대에 막혀서 전단을 못 날린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현지 주민들에게 대북전단의 내용을 보여주면 모두 ‘좋은 일 한다’며 격려를 해줍니다. 절대다수의 우리 국민들은 북한의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부 언론과 소위 대북 학자라는 사람들이 먼저 김정은의 공갈과 협박에 넘어가서 북한이 아니라 우리 국민을 대상으로 대북전단이 위험하다는 이상한 선동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우리의 언론이 잔혹한 적의 말을 이처럼 곧이곧대로 믿고 고분고분 따랐답니까?”
-전단의 내용이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는 것을 지적한 대북 전문가도 있더군요.
“북한은 공개 방송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험한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런 것은 괜찮고 북한 주민들에게 진실을 전하는 대북전단은 자극적이라서 안 된다는 것은 무슨 황당한 주장인지 모르겠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우리가 보낸 전단의 내용은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가, 자유민주 체제란 무엇인가, 세계인권 선언은 무엇인가 등등 북한 주민들이 인간으로서 알아야 할 권리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또한 남한의 역대 대통령(이승만 -박정희-박근혜)과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을 비교하여 누가 진정으로 민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인가를 알려주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북한 주민들이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내용입니다.”
-왜 우리의 이승만-박정희-박근혜 대통령을 소개하는 전단을 만들었는지요.
“이승만 대통령은 5000년 민족역사에서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인민의 국가를 세운 건국의 아버지이고, 박정희 대통령은 궁핍한 국민의 삶을 오늘과 같은 부유한 삶으로 만들고 경제 개발의 선봉에 섰던 분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아버지를 모셨던 딸이자 처음으로 여자 대통령이기 때문에 이 세분이 가장 상징적인 분이라고 생각해서 북한 주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소개한 것입니다. 제가 30년을 북한에서 살았는데 살면서 가장 궁금했던 사람이 바로 이승만ㆍ박정희 두 분 대통령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박상학 대표가 최근 북으로 보내고 있는 대북전단 종류.
"북한이 민주화 되는 게 그렇게 나쁜 것인가?"
-대북풍선에는 삐라 외에도 몇 가지 물품이 들어간다고 들었습니다.
“지난 10년간 약 60~70종류의 전단을 제작해서 북으로 보냈습니다. 최근에는 <미꾸라지가 진짜 용이 된 대한민국>이란 30쪽짜리 소책자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소책자는 대한민국의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CD에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의 진실을 알리는 내용이 들어 있고, 그 외에 USB와 트랜지스터 라디오, 1달러짜리 지폐 등을 보냅니다.”
-지난 10일 임진각에서 날린 풍선 하나가 공중에서 그냥 터지더군요.
“그날 풍선이 서로 부딪히면서 타임머신이 잘못 작동하여서 하나가 터졌습니다. 뭐, 미사일을 쏴도 실수가 나오는데요…. 우리 국민들도 대북전단이 어떻게 날아가는 지, 또 그 내용은 무엇인지 봐야 하니까 하나 정도는 남쪽에서 터져도 됩니다.”
-대북전단을 보내는 데 풍선 말고 좀 더 최신 기술을 적용할 수는 없습니까.
“열기구를 쓰면 좋지만,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우리 형편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방법입니다. 북한 인민군이 지난 6월 우리 쪽에 전단을 보낼 때는 열기구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북한은 전단에 대해 거의 발작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독재자와 위선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사실과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69년 동안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북한 인민의 모든 인권과 자유를 빼앗아 온 수령을 자애로운 인민의 어버이로 둔갑시켰습니다.
우리 대북전단은 북한 인민에게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리고 있습니다. 북한 인민이 엄청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미제와 남조선 괴뢰집단 때문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의 수령의 잘못이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전단을 통해 전 세계에서 유일한 세습독재와 선군(先軍) 독재 때문에 인민이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때문에 김정은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또한 전단을 통해 진실을 알게된 북한 주민들이 혹시 저항을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북한 정권은 사력을 다해 이를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북한 내부가 불안해지면 평화에 위협이 오고, 결국 우리에게 좋을 게 없기 때문에 전단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도 있더군요.
“종북 좌파나 민주당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저는 민주당 사람들에게 제1야당으로서 자신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내세워온 민주화가 북한에서는 일어나면 안되는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건지 되묻고 싶습니다. 인민의 손으로 수령독재를 타도하고 민주화를 이룩하는 게 그렇게 나쁜 것입니까? 북한 인권법 통과를 10년째 가로막고 있는 게 민주당입니다. 이게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북한 인민들이 알면 얼마나 큰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겠습니까.”
총한방,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적을 제압하는 방법
-‘지난 10년 동안 대북풍선을 보냈는데 북한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느냐’며 ‘대북전단 발송은 그냥 보이기 위한 쇼’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쇼’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위대한 쇼’를 하고 있습니다. 이 쇼가 김정은이에게 얼마나 두려우면 대북전단을 막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사활을 걸고 있겠습니까. 이 얼마나 위대한 쇼입니까.
그리고 아무 효과가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남한 주민이 아니라,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풍선을 날립니다. 북한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전단이 효과가 없다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여기 앉아서 김정은의 대변인 같은 소리나 늘여놓지 말고, 북한 주민이나, 탈북자들에게 먼저 물어보고 나서 그런 소리를 하든지 말든지 했으면 합니다.”
▲2011년 3월 31일 오전 6시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고막리에서 대북전단을 날리고 있는 탈북자단체 자유북한운동연합 회원들. /조선DB
-삐라의 효과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죠.
“대북전단이 가장 많이 떨어지는 곳이 휴전선 155마일 부근입니다. 그곳에는 10대 말에서 20대까지의 북한의 젊은 군인들 60만명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대북전단은 젊은 군인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총한방, 피한방울을 흘리지 않고 적의 정신을 무장해제 시킬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 바로 대북전단이자, 심리전입니다.
평소에 이런 심리전이 있어야만 유사시 그들의 총부리를 우리가 아니라 김정은이에게 돌리게 할 수 있고 북한 주민들의 마음도 우리 쪽으로 돌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정부와 군은 이렇게 중요한 심리전 수단을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자부심이 뭐입니까? 인구는 북한의 두배이고, 경제력은 100배가 넘습니다. 거기에 세계최강 미국까지 우방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총질 몇방에 두려움에 떨면서 내부분열과 남남갈등을 일으키고 있으니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당시 우리 군(軍) 당국은 “북한의 소행이라는 증거가 나오면 대북방송을 재개하겠다”고 공언했지만, 결국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이 대북방송을 하면 원점(原點) 타격하겠다고 협박을 하니까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습니다. 이는 겁많은 지도자가 적 앞에 굴복한 대표적인 경우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국가 지도자가 적에게 얼마나 과감하게 맞서느냐에 따라서 그 구성원들인 국민이 용감해 질 수 있고, 비굴해 질 수도 있습니다.
공산주의를 무너뜨린 레이건이나 철의 여인 대처 같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있었다면 우리 국민이 적의 협박에 두려워하지도 않고, 당당히 맞서왔을 겁니다. 그동안 국가 지도자나 정치인들부터 북의 위협에 겁을 먹고 적 앞에 비굴하게 놀아났기 때문에 허공에 총질을 한 작은 위협에도 남남갈등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같은 대북전단 보내기 운동을 하고 있는 이민복 대북풍선단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박 대표를 비판하더군요.
“정말 슬픈 일입니다. 저는 종북 좌파들만 우리의 행동을 비판하는 줄 알았는데, 같은 탈북자가 같은 일을 하는 동지들을 비판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분은 자신이 하는 방식만 옳고 정당하다는 주장 아닙니까.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수많은 탈북자와 탈북자 인권단체, 그리고 북한 인권운동에 앞장섰던 수잰 숄티 같은 사람들과 국제인권단체 등 공개적으로 북한인권활동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이민복 단장의 주장은 전단을 보내더라도 자신처럼 조용히 보내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열번 중의 아홉번은 조용히 보내고 있습니다. 대북전단이라는 것은 무슨 추진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바람에 따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대부분을 비공개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전단을 항상 준비해놓고 있다가 적당한 바람이 불면 곧바로 나가서 날려야합니다.”
-간혹 전단을 공개적으로 보내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아주 간혹 공개행사를 하는데 거기에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북한으로 전단을 보낸다는 것을 언론을 통해 북한주민에게 알리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를 십시일반 후원해주신 분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국가도, 기업도, 그 흔한 재단이 한 푼도 우리를 후원하지 않습니다. 국민의 도움 없이는 대북전단을 보낼 수가 없기 때문에 국민 여러분께 직접 호소하기 위해 일부 행사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김정은의 노림수는 남한을 인질로 잡는 것"
-인터넷 댓글을 보니까 박 대표가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대북전단을 보내는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북한이 저에 대해서 악의적으로 선전ㆍ선동한 내용을 그대로 퍼뜨리는 세력이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우리의 행동이 남북대화에 지장을 준다며 통일부 장관 명의로 공문을 보내서 중단하라고 압력을 가했고, 심지어 장관이 남북교류법 위반으로 저를 고소까지 했습니다. 물론 법원이 제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통일부 직원이 현장에 나와서 자제해달라고 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는 당시 통일부의 행태에 하도 분통이 터져서 ‘당신들은 대한민국 통일부가 아니라, 조선노동당의 통일전선부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대놓고 비판을 했습니다.”
▲울고 있는 박상학 대표. 2008년 12월 5일 오전 대북 전단지 살포와 관련 한나라당 당사에서 박희태 대표와 면담 도중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08년에 그는 야당인 민주당 대변인으로부터 '매국단체'라는 소리를 듣었고, 여당과 정부로부터는 남북 대화를 위해 풍선 발송을 중단해달라는 엄청난 압력에 시달렸다. 결국 정부가 북한과 몰래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와중에 2010년 천안함 폭침이 발생했다. /조선DB
-지금의 통일부는 어떻다고 보시나요.
“마찬가지입니다.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부서의 수장이 북에서 황병서 일행이 내려오니까 ‘김정은이의 건강이 어떠냐’고 물어보면서, 북한 주민의 안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남북대화를 하려면 대화의 목적이나 전략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 대화든지 무조건 대화가 중요하니까 일단 대화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것이 통일부의 방식입니다. 이에 반해 김정은은 자기가 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하고 싶은 모든 행위를 다 하고 있습니다. 통일부는 북한을 상대하는 전략이나 구체적인 목표나 목적이 없기 때문에 그냥 북한의 노림수에 끌려 다니기 바쁜 형국입니다.”
-대북전단 발송에 도움을 주지는 못할 망정 방해는 하지 말아달라는 건가요.
“노무현 정부 때는 대북 퍼주기를 워낙 많이 해서 그런지 몰라도 북한이 비교적 조용했습니다. 그 후 보수정권이 들어왔는데도 북한 주민들에게 사실을 말하고, 전달하는 게 점점 힘들어집니다. 대북전단 보내기 운동을 해오면서 우리나라의 자칭 보수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기회주의적이며 종북좌파와 싸울 줄 모르고, 비겁한 자들인가 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솔직히 좌파보다 기회주의적인 보수가 하는 행동들이 더 역겨울 때가 많습니다.”
-개인이 대북풍선을 날릴 방법은 없는지요. 요즘 하는 말로 ‘인증 샷’을 찍어서 SNS에 올린다든가.
“저는 오래전부터 대북전단 보내기를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대하자고 호소해왔습니다. 북한 주민들에게 편지 한 장씩 써 보내기운동도 좋습니다. 하지만, 너무 힘든 일이라 현실적인 호응은 별로 없습니다. 이 일이 워낙 위험하고 힘든 일이라 많은 사람이 중간에 그만두었습니다.
현재는 칠순이 넘은 저의 어머니와 동생, 제수씨, 부인 등 온 가족이 매달리다 시피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누군가는 해야만 하기 때문에 저에게는 사명과 의무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김정은 정권이 막을 내리고, 북한 인민이 독재에서 해방되는 날까지 멈추지 않을 겁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허공에 총 몇발 쏜 것으로 남쪽의 여론이 단번에 갈라지는 데 만약 대포라도 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 수도권에 포라도 한방 떨어지면 ‘불안해서 못 살겠으니 서울을 내주고 더 남쪽으로 수도를 옮기자’는 여론이 들끓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에 앞서 김정은이 핵을 가지게 되면 가장 먼저 북방한계선(NLL)을 양보하라는 협박을 할 겁니다. 겁에 질린 우리 국민은 김정은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정부를 압박할 것이고, 결국 조국의 앞바다를 적에게 내줘야 하는 사태가 올 겁니다.”
박 대표는 “이후 계속해서 김정은의 또 다른 공갈과 협박이 이어질 것”이라며 “ ‘서울만 우리가 차지할 테니 서울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면서 ‘우리 말을 듣지 않으면 핵무기를 쏘겠다’고 위협하는 단계까지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이 핵을 확실하게 가지는 날이면 위협의 수위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란 말씀이죠.
“지금 김정은은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고 있고, 혈맹(血盟)이라는 중국으로부터도 버림받고 있는 처지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서 정권을 연장해야 할 판인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대한민국을 인질로 잡고 협박을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자신의 인질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공갈ㆍ협박이 먹혀들도록 끊임없는 공포심을 조성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공포심이 극대화되면 김정은이가 달라고 하는 데로 다 해줘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됩니다. 결국 김정은은 우리의 주권을 하나하나 찬탈해서 대한민국을 질식시키는 전략을 펴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한 발자국을 물러서면 내일은 열 발자국을 물러서야 하는 게 우리가 처해 있는 안보 현실입니다.”
박 대표는 “오늘 우리가 대북전단을 양보하면 우리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협박에 의해 양보한 결과가 되기 때문에 종국에는 김정은이에게 우리의 모든 주권을 양보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2012년 10월 22일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자유로 당동IC 부근에서 경찰들이 탈북자단체의 대북전단 차량의 임진각 진입을 통제하자 박상학 북한민주화추진연합회 대표가 차량위에 올라가 대북전단을 뿌리려 하고 있다. /조선DB
"통일에 대한 국민 각자의 열의와 의지가 중요"
-최근 정부가 북한과 대화를 위해 서두른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전쟁 중에도 대화는 필요하다는 언급했습니다. 저는 박 대통령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어떤 대화를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화에는 여러 종류의 대화가 있습니다. 적의 도발에 두려움을 느껴 굴종적으로 구걸하는 대화도 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가치관으로 무장한 채 적과 당당하게 맞서기 위한 대화도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자존심이 없는 국민이라고 해도 금강산의 박왕자씨 피격사건,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폭격에 대한 아무런 사과 한마디 받지 않은 채, 5ㆍ24조치를 해제하고,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고, 퍼주시기 식 대북정책을 재개한다면 그것을 과연 주권 국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현재 정부가 취하는 대화는 어느 쪽에 가깝다고 보시는지요.
“아직은 지켜봐야겠지만, 자유대한민국의 체제와 가치를 확고히 지키고, 또 그것을 북한에 확산시키려고 하는 대화는 아니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궁지에 몰린 것은 김정은인데 왜 우리가 궁지에 몰린 것처럼 행동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스물아홉 살짜리 동네 어린 망아지 같은 애송이한테 질질 끌려 다니는 굴욕적인 대화라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앞으로 김정은 정권이 몇년이나 갈 것으로 예상하는지요.
“지금처럼 어린애의 불장난에 겁을 먹고 남남갈등으로 분열하면 김정은의 독재가 50년은 더 가리라고 봅니다. 저는 김정은 정권의 운명은 우리가 대북정책을 얼마나 원칙 있게 끈기를 가지고 밀고 나가느냐에 따라 달렸다고 봅니다.
우리 국민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평화적 통일을 이루기 위해 작은 희생은 감수하고 통일에 호응하느냐에 따라 통일의 시기를 내년으로 앞당길 수도 있고, 50년 후에도 통일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김정은 독재를 끝내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국민의 의지와 염원에 달렸다고 봅니다.”
박 대표는 “결국 북한의 작은 위협에 우리가 쉽게 분열하는 것은 국민의 마음속에 통일을 진정으로 바라는 열망이 크지 않기 때문”이라며 “반드시 통일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열망이 있을 때 김정은이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는 국민이 될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좌파 정부 시절 종북주의자들은 통일이 마치 국민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는 것처럼 선동하고 대중들에게 통일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주입해 왔습니다. 그 결과 국민은 통일에 대한 긍정과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여 혼돈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의 마음속에 악을 미워하고, 통일에 대한 열망이 약하기 때문에 적의 작은 위협에도 쉽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과 위선, 폭력이 어느 한순간에는 두려움을 주고 여론을 호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종국에 가서는 진실이 반드시 승리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저는 이 일을 절대로 멈출 수가 없습니다.”
대북풍선 후원계좌
국민은행 533901-04-004327, 농협 237075-52-071505(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이상흔 조선pub 기자
2014.11.14 대북전단살포, 단순한 표현의 자유 문제 아니다
지난 달 11일 군·경은 북한인권단체가 대북전단이 실린 풍선을 띄우려는 것을 강제로 저지하였고, 지난 달 15일 해병대는 애기봉 등탑을 철거했다. 이것이 바로 북한이 지난 달 10일 대북전단풍선을 향하여 고사총을 발사하고 그 유탄이 연천군 중면 사무소 앞마당에 떨어진 이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풍경들이다.
북한의 권력자들이 쾌재를 부르기에 충분해 보인다. 지난 60년대와 70년대 북한은 ‘삐라’라고 불리는 체제선전용 전단을 남한으로 날려 보냈고 우리 정부도 같은 방법으로 맞대응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남북한 사이에 적대적 체제경쟁을 벌이면서 정부 주도로 상대방 주민들에게 심리전을 편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었고, 북한은 세계 최악의 인권침해 국가로 전락하였다. 이제는 정부가 아니라 탈북자들을 포함한 북한인권단체들이 대북전단을 날려 보내고 있고, 그 목적도 민간차원에서 북한주민들에게 기본적 인권과 외부세계의 실상을 일깨워 주는 데 있다.
탈북자들은 북한의 혹독한 1인 독재체제의 피해자이거나 이에 환멸을 느끼고 사선을 넘어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에 가족과 친지를 두고 있다.
북한정권이 모든 정보를 독점하면서 주민들과 외부세계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는 상황에서 탈북자들이 고향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풍선뿐이다. 북한주민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겨우 풍선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자체가 북한의 절박한 인권상황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지적 활동을 가능케 하는 지식과 정보이다. 외부의 정보가 완전히 봉쇄된 채 살아가야 하는 북한주민이야말로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식량지원보다 더 시급한 것은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지식과 정보의 제공이다.
인권의 보편성은 이제 국제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고, 그래서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에 대하여는 국제사회가 개입하는 것이 정당화되어 있다. 유엔은 지난 해 북한인권 조사위원회(COI)를 구성하여 북한의 인권침해 행위를 체계적으로 조사한 데 이어 인권침해의 책임자들을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지난 6일 이러한 내용이 포함된 북한인권결의안을 유엔에 제출하였는데, 공동제안국 수가 현재까지 49개국에 이르고 있다. 이 상황에서 민간단체가 보내는 대북전단을 삐라로 폄하하면서 방해하고 남북화해를 운운하는 것은 반인권적 행위로서 전 세계 자유인의 이름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윤남근 교수(고려대 로스쿨, 국가인권위원회 위원)
2015.08.27 "어떤 경우에도 대북전단은 계속 됩니다"
▲북한이 “남측지역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 한다”고 하자 우리는, “남측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모든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기로 하였다”는 남북공동발표문에 합의했다.
어제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의 목함지뢰테러에 대한 시인과 사과, 책임자의 처벌과 재발방지 약속 없이는 대북방송을 멈추지 않겠다고 국민과 약속했다.
그런데 목함지뢰 도발의 주체가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고 잔인한 범죄행위에 대한 시인도 사과도 없이 비열하고 간교한 악마의 ‘유감 표명’ 한마디에 우리는 진정한 통일의 대상인 2천만 북한인민의 사실과 진실의 알권리마저 ‘최고존엄’의 편의에 따라 편승함으로서 얼마가지도 못할 가짜 평화를 또다시 적에게 구걸하였다.
앞에서는 대화와 협력이라는 ‘우리민족끼리’를 내들고 뒤에서는 우리민족 살육하는 저 포악무도한 김정은의 변하지 않는 악마의 본성을 뻔히 알면서도 핵무기 보다 더 위력한 ‘대북심리전’이라는 우리의 비교할 수 없는 비대칭 전력을 이렇게 쉽게 포기한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탈북자들은 독재의 피해자 2천만인민에게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지금 이 시각부터 공개던 비공개던 낮이던 밤이던 김정은을 규탄하는 대북전단을 즉시, 계속 북한으로 살포할 것이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
2015년 08월 26일 “敵에 구걸해 얻은 가짜평화 대북전단 계속 살포하겠다”
남북 고위당국자 접촉 협상 타결로 남북 간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북한의 유감 표명 수위와 진정성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대북전단을 살포해 온 탈북자단체 북한자유운동연합의 박상학(사진) 대표는 26일 문화일보와의 통화에서 “남북합의는 목함지뢰 사건에 대한 (북한 정부의) 시인과 사과도 없는 형식적 유감 표명에 정부가 비겁하게 뒷걸음질 친 것”이라며 “정부가 확성기 방송을 중단한 이 시점에서 우리라도 북한 주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대북전단 살포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은 협상 초기 목함지뢰 사건의 책임자 처벌과 정중한 사과가 있기 전까지는 대북 방송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북한이 목함지뢰 사건에 대한 책임 시인과 사과 없이 유감 표명으로 그쳤는데도 방송을 중단하고 거짓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날씨를 고려해 비공식적으로 대북전단을 계속 살포할 계획”이라며 “북한의 기념일인 공화국 건립일(9월 9일)에는 공식 살포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자유운동연합은 또 오는 10월 10일 북한의 노동당 창건일에도 공개 대북전단 살포를 계획 중이다. 박 대표는 어렵게 조성된 화해 분위기를 해치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우려도 일축했다. 그는 “적에게 구걸해 얻어낸 평화는 곧 쉽게 깨져버릴 가짜 평화인 만큼, 북한의 진정한 반성과 사과가 전제된 평화가 구축될 때까지 전단 배포는 계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다영 기자 dayoung817@munhwa.com
■ 이소연(뉴코리아여성연합 北 4군단 여군 상사 출신)의 수기 - 조선일보
■ 2015-09-25 북한의 여군은 어떤 존재일까
▲2015년 4월 22일 오전,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탈북 여군 5인이 밝히는 '살인적인 북한의 군생활 폭로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북한군 내의 여군 인권 실태에 대해 폭로했다. 사회자 탈북여군 이소연 씨가 기자회견의 취지를 발표하고 있다. / 조선DB
북한에 여군의 수는 18만 명,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리고 ‘여군의 길’은 멀다. 뭐니 뭐니 해도 여성의 군 입대는 가정환경과 본인의 충성심 외, 뇌물이 따라야 한다.
1992년 3월, ‘자랑스러운 조선인민군’의 여성군인이 되기 위해 시 군사 동원부(병무청)에 모여든 회령시 내 고등중학교 졸업생은 얼핏 봐도 100명이 훨씬 넘어보였다.
초모대상이 열 명이라는 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몰려든 이유는 간단하다. 군대에 나가야 남들보다 조선노동당 입당을 빨리 할 수 있고 고로, 이른바 남다른 경력 쌓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성으로서, 군 생활을 통해 입당을 하고, 혹시 제대될 때 대학이라도 추천받게 되면 초급간부는 물론이요, 혹시 군당이나 도당에서 평생 간부로 일할 ‘조건’을 갖추게 된다.
한편으론 배급조차 제대로 못주는 사회생활에 비해 군대에서의 생활은 적어도 ‘입고 먹을 걱정은 없을 것’이라는 편견과, 이따금 거리에서 마주치곤 하는 여성군인들의 활기찬 모습도 ‘희망사항’으로 작용한다.
당시 열일곱 살 난 나도 이런 ‘부푼 꿈’을 안고 입대를 청원했었다.
북한의 모든 남학생들은 열네 살이 되면 초모대상자로 등록되고, 열다섯 살이 되는 해엔 신체검사를 받아야 하지만, 여성의 경우는 ‘무조건 입대’가 아니라서 입대를 지원하는 사람만 별도의 신체검사를 받게 된다.
제법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신체검사였지만, 때문에 50여명이 우루루~떨어진 신체검사의 관문을 나는, 무난하게 넘어섰다. 이튿날 진행된 ‘집체담화’와 ‘개별담화’(적성검사)도 그리 오랜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군사동원부 지도원이 학교와 거주지를 신원조회 차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른바 적대계층의 자녀가 아닌지, 성분불량자 가족이 아닌 지 등을 조사했다는 이야기다.
나름 학교생활도 잘했고, 성적도 우수했던 내가 학교측으로부터 추천을 잘 못 받을 리 없었다. 또 도내의 주요 대학 교수였던 아버지를 둔 덕분에 출신성분도 남에게 뒤지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음에도 열흘 후 발표된 입대합격자 명단엔 나의 이름이 없었다. 그까짓 군 입대쯤이야 무슨 일이 있겠냐 싶어 별로 마음을 쓰지 않고 있었지만, 상황이 돌변했다. 당장 4월에 입대하게 되었다고 기뻐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급해진 나는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그러는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던 아버지가 내게 하셨던 질문이다.
“그렇게 군대에 가고 싶냐?” “예에~!”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만, 그 힘든 곳에 꼭 가야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게야?” “가서 꼭, 조선로동당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통일병사가 되겠습니다!”
그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내일 군사동원부에 다시 가 보라”고 하셨다.
이튿날 나는 군사동원부를 다시 찾았고, 뜻밖에도 군사동원부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라는 동원부장의 방으로 불리워 갔다.
“이지훈 선생님의 딸이라구” “네”
“어제 밤에 학생의 군 입대와 부대배치가 결정됐어.” “네?!”
“혹시 4군단이라구 들어봤나? 뭐 최전연 군단이 아니니...나름 편한 곳이고, 또 학생의 아버지가 아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잘 된 거지. 안 그래?”
(이렇게 쉽게 되는 것을...) 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날 밤, 나의 입대를 위해 군사동원부 부장과 당비서에게 찾아갔었다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평소에 면식이 있는 사람들이였지만, 선물을 빙자한 갖가지 ‘뇌물’을 승용차 트렁크에 가득 가득 싣고 갔었다는.
강산이 변한다는 10년,,,그 첫해 이야기
북한군의 주적은 대한민국 국군이다. 한편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강한 군사력에 늘 불안을 느껴온 북한은 결국 여군들까지 전투병과에 인입시킴으로 ‘수 적 우세’로 대응하려 했다.
이러한 이유로 여성들의 군 입대를 고안해 낸 당국은 고사총과 해안포, 통신병종 등에 ‘여성중대’를 만들어 놓고 3개월가량의 신병훈련을 마친 여군들을 해당 부대의 전투병으로 투입시켰다.
이에 비하면 군의소의 간호중대나 참모정치부의 수예중대(군기를 만드는 여군들의 중대) 군인들은 상대적으로 편한 군복무를 보장받은 사람들이다. 또 각 군단에 하나씩 있는 군단예술선전대도 여군들이 선호하는 배치 지였다.
그렇게 많은 여군들이 부러워하는 '군단예술선전대'에 뽑혔던 기쁨이란...신변훈련소에서 우연히 만났던 선전대 대장의 추천으로 신병교육을 마친 나는, 예술선전대 대원이 되었다.
학창시절 손풍금 연주나 나름의 장끼로 또래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은 바는 있지만 그 정도 실력으론 전문가 집단인 예술선전대에 명함을 내 밀기 어렵다는 것 쯤 모르지 않던 나였다.
하지만 북한 여군들의 군 생활에서 필수요소이기도 한 이른바 ‘인물-체격’이 선전대에 어울렸던 모양이다. 키도 컸고, 조금 어색한 설명이지만, 북한에서 ‘미인이 많은 동네’라는 회령이 고향인 나였다.
때마침 2년에 한번 씩 진행되는 ‘군무자 예술축전’을 코앞에 두고 있던 때어서 나는 여성중창과 혼성중창의 멤버가 되었다. 석 달 남짓한 ‘군무자 예술축전’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군단예술선전대의 또 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첫째로 내가 입대를 다짐하며 소원했던 노동당 입당이 선전대에서는 불가능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예술대학 졸업생이거나, 사회의 전문 예술단에서 배우로 일하던 이름하여 ‘경력 소유자’들이었다.
그런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예술적 기량이 생명”이라는 곳에서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군에 입대한 나는, 저들에 비하면 나이도 한참 어렸던 탓에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순서를 정한다고 해도 밀리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떠난 4군단 예술선전대의 한 선배를 지난 해 이곳 대한민국에서 만났다. 그리고 선배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선전대에서 생활하다가 입당을 못하고 제대된 친구들이 꽤 많지. 전투단위에 비해 워낙 쿼터가 적게 나오는데다가 경쟁이 심하기 때문이지...그때 떠나길 잘했어"
글쎄다. 예술적 기량은 좀 약했을지 몰라도 정신, 육체적 준비상태를 기준으로입당순위를 정한다면 남에게 절대 밀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 하지만 나는 선전대생활을 포기하고 4군단 직속 ‘포 종심 정찰대대’ 무선 병이 되었다.
그렇게 막, 내가 전투부대로 병과를 옮긴 이듬해 북한의 모든 여성군인들에겐 기존 5~6년의 군복무 대신 10년 동안 군사복무를 해야 한다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10년이라니?! 당시 18살이었던 나는, 27살이 되어야 제대가 가능한 ‘끔찍한 상황’과 맞닥드렸다.
딱 5년을 기획-준비했던 군복무였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충성스럽게 군복무를 하리라 다짐한건 맞지만, 5년 정도 군복무를 하면서 입당도 하고, 사회적 신분도 상승시킨 후 22살쯤 제대, 25살엔 결혼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꿈과 포부가 10년 후의 일로 아득히 밀려갔다. 대체 왜 이런 날벼락이 하필이면 내가 군복무를 하는 기간에 떨어진걸까. 극상해서 5~6년이었던 여군들의 복무기간이 하루아침에 고무줄처럼 늘어난 이유가 궁금했다. (계속)
2015.10.30 "꿀보직의 조건"
군인의 첫걸음 신병훈련소
각 도에 한 개씩 있는 군사동원부에서 ‘초모전쟁’을 치른 북한의 젊은이들은 군인이 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인 신병훈련소로 들어간다.
신병훈련소는 각 군단과 사단에 한 개씩 있으며 훈련기간은 2개월, 즉 8주로 정해져 있다. 1990년까지는 신병훈련을 일반병종은 6개월, 특수병종은 1년에서 2년까지 하는 곳도 있을 정도로 북한의 신병훈련기간은 만17세 이상의 북한청소년들을 군인 화 하기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하지만 이 최적의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영양실조환자가 속출하고 심지어 아사자들까지 발생하자 북한 당국은 이러한 사태에 대비해 신병훈련기간을 8주로 줄이기로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신병훈련기간은 문자그대로의 훈련 기간이었음으로 이 기간 동안 입소자들은 군인이 되기 위한 훈련을 고루 소화해야 했는데, 열일곱을 갓 넘긴 청소년들에게 무리한 훈련임이 분명했다.
산악훈련은 물론이고 나서 처음 몸으로 익혀야 하는 집총훈련, 제식훈련, 사격훈련 같은 것들을 온 종일 익히다보면 저녁이 채 되기도 전에 온 몸이 녹초가 되어 버리곤 했다.
그 중에서도 체육훈련은 신병훈련소 입소 생 모두에게 지옥훈련처럼 다가섰다. 모두 4종으로 분류되는 철봉, 평행봉, 돌입전회 같은 것들은 여러 동작을 하나로 묶어 4세트를 소화해야 했는데 여군들이 가장 힘들어 했던 훈련이었다.
각개 종목들에 대한 훈련이 있은 뒤 개인별, 분대별로 평가를 하곤 했는데 한명이라도 누락되거나 필요점수에 도달하지 못하면 분대와 소대, 때로는 중대원 모두에게 반복훈련(집단처벌)을 시킴으로 피해갈 수 없는 함정을 파기도 했다.
체육훈련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하는 병사도 있지만 군사규정, 대열규정 암기 등 각종 정신교육 때문에 시달리는 병사들도 허다했다. 군사규정과 군사규율은 김일성, 김정일의 친필지시로 규정되어 있어 토, 씨 하나 틀리지 말아야 하며 분대별, 소대별 경쟁학습을 통해 재무장을 시키는 방법을 써 나갔다.
특별히 암기를 잘 못하는 병사들은 밤새 잠을 안 재우고 암기를 시키거나 중대나 신병훈련소 전체 군인들 앞에서 망신시키는 방법으로 처벌을 주었다.
가장 가혹한 처벌은 잠을 재우지 않거나 밥을 먹이지 않는 처벌로, 훈련과제를 수행하지 못하는 병사들이 대상이었지만, 때로 분대와 소대가 집체적으로 받게 될 경우, 해당 병사가 느끼는 고통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외 신병훈련소는 임시부대 형태의 집단으로서 기존 중대나 대대처럼 부업조(농사짓는 인원)나 부업 밭을 갖고 있지 못함으로 부식물 공급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훈련소소장과 참모장을 제외한 초급군관(장교)과 부사관들을 타 부대에서 선출해 신병교육이라는 임시임무를 부여하는 형태여서 책임감 및 유대감이 심히 결여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어떤 부대는 실속 있는 신병들을 데려오기 위해 실속 있는 교관(부사관)들을 파견했는가 하면 어떤 부대는 나이를 먹어가며 입당과 훈련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른바 ‘찔통’교관들을 보냄으로 신병들이 스트레스 해소의 먹잇감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파견된 교관들은 기존 부대에서의 직무에 상관없이 신병훈련소에서 새로운 직무, 즉 사관장, 부소대장, 분대장이 되어 병사들에게 훈련을 주었다.
이처럼 복합적 문제를 안고 있는 북한의 신병훈련소는 통일군인이 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군복을 입은 북한의 젊은이들을 단숨에 영양실조에 걸린 병사로, 혹은 꿈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 기회만 엿보는 상시적 병역 기피자로 만들어 버렸다.
내가 입대해 군인으로서의 첫 걸음을 디딘 4군단 신병훈련소는 그나마 전군에서 시설과 환경이 좋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하지만 이곳 역시 각 부대에서 파견되어온 교관들이 신병들을 대상으로 군사훈련과 대열훈련을 비롯해 고강도 훈련을 주입시키고 있었다.
1992년 9월의 4군단 신병훈련소에는 4개의 남자(신병)중대와 2개의 여자중대가 있었는데 필자도 그곳 5중대의 군인으로 신병훈련을 받았었다.
6시 아침기상과 함께 바지를 입고, 위에는 하얀 내복을 걸친 남, 여 군인들이 화장실을 거쳐 운동장에 모여 아침운동을 하는 모습은 나름대로 활기에 찬, 봐줄만한 모습들임에 분명했다.
신병훈련이 갓 시작했을 때, 그리고 하루의 첫 일과가 시작될 무렵엔 누구나, 솜털이 보시시 한 앳된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열정과 패기에 넘쳐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사람들의 얼굴은 피골이 상접해갔고 신체조건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신입병사 모두가 후줄근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훈련을 받으면 받을수록,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슨 오합지졸의 무리처럼 변해가던 신입병사들이었다.
게다가 10월에 접어들면서 다가온 가을바람이 그렇게 차가울 수가 없었다.
북한군에는 배식 판이 없다
신병훈련을 생각하면 배고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북한군 병사들은 특수병종을 제외하고 일 평균 800그램의 식량을 공급받는다. 이에 준해 한 끼 200그램 이상의 밥과 국가가 정해놓은 고기, 채소 등 4780칼로리가 보장된 식단대로 식사를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실지로 200그램 이상의 쌀로 밥을 지으면 적은 량이 아니다.
더욱이 북한군에서는 증기밥솥이란 걸 사용하기 때문에 쌀알이 퉁퉁 부을 대로 부어 나오다 보니 밥그릇에 정량대로 밥을 담으면 그릇에 넘쳐날 정도다. 그 외 국가가 말하는 정량대로 고기와 채소를 곁들이면 북한군에는 영양실조라는 말이 애당초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991년 김정일은 군 신병교육 기관에서 영양실조에 걸리는 병사들이 속출하고 결핵과 간염 환자들이 줄을 잇자 신병훈련기간을 줄이는 것과 함께 공급물자는 늘려줄데 대한 지시를 내렸었다.
4군단 신병훈련소는 그 시범 기관으로 선정되었고 따라서 전군에서 가장 우수한 신병훈련소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늘 군단 대열과장(상장)이 훈련소에 상주해 있으면서 병사들의 식생활과 내부반 생활을 살폈고 하루가 멀다하게 군단 간부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병사들의 삶과 훈련모습 등을 지켜봤다.
당연히 간부들이 내려오는 날에는 밥상에 자체로 만든 두부 한 조각이 등장했고 소위 주말에 병사들과 함께 보내겠다는 인간성 있는 간부가 내려오는 날에는 돼지고기가 한두 점 보이는 고깃국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간부들이 등장하지 않는 날에는 늘 염장 무 3형제(염장 한 무를 세 가지 형식으로 썰어서 만든 반찬을 이르는 말)가 식탁에 올랐고, 이처럼 열악한 급식환경 속에서 주머니에 소금을 넣고 다니는 병사가 행복한 병사로 취급되기도 했다.
군인들, 특히 신입병사들을 잘 먹이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있었고, 일부 지휘관들의 배려와 관심이 있었음에도 기본적인 급식환경이 되어 있지 않다보니 특별한 며칠을 제외하곤 모두가 굶주림을 호소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나마 염장무와 염배추 만큼은 그리 부족한 축이 아니어서 배고픈 군인들은 짬 시간만 나면 염장창고로 달려가곤 했다. 들켜서 처벌을 받기도 하지만, 배고픔과의 사투는 늘 검질겼다.
어떤 여군들은 신병훈련소에서 거의 유일한 반찬인 염장무나 염장배추를 기피하는 신체조건을 가짐으로 단박에 영양실조 환자로 전락하기도 했다. 남들은 없어서 못먹는 것을 왜 먹지 않느냐고 하면 ‘꼬랑내’ 맡기가 죽기보다 싫다고 도리머리를 흔들곤 했다.
이런 환경이다 보니 어쩌다 가을걷이나 수해복구 같은 대민활동에 동원되는 날이면 작업장에서 부딪치는 민간인들에게 간곡히 소금 등을 요구하게 되고 식사시간이면 염장무로 만든 반찬대신 밥에 찬물을 부어 소금을 찍어 먹는 것을 최상의 식사로 간주하기도 했다.
이런 급식환경만 보아오다가 한국에 입국한 뒤, 안보강연 차 다녀온 어느 부대에서 군인들이 사용하는 배식 판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도 있다. 군인들이 자신이 먹을 만큼의 밥과 반찬을 알아서 담아가다니...
물론 북한군엔 배식판 따위가 없다. 일렬로 줄지어 들어가는 식당엔 이미 배식근무 성원이 차려놓은 밥그릇에 움푹 들어간 밥이 담겨져 있고 반찬도 2인당, 혹은 4인당 한 개씩의 접시에 미리 담겨져 있는 상태다.
정갈함도 없고 따스함도 없다. 식당 전체에서 풍기는 꼬랑내와 군인들 몸에서 풍기는 땀내가 묘하게 어울려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잡 내와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돌뿐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조금만 생활하다 보면 어디 콱 다치기나 해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만 팽배해 진다. 실지로 함께 생활했던 한 친구는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시퍼런 낫으로 손가락 두 마디를 고의로 잘라버리고 감정제대(의가사제대)차 집으로 갔다.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는 그 병사를 부러워했고, 나도 마음속으로 간절히 또 간절히 어떤 형식으로든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3명의 동료 훈련병들과 간부전용 식당의 배식 및 접대를 맡게 됐다. 선출된 이유를 물을 형편도 아니어서 그냥 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키와 인물이 뽑인 이유라는 이야기가 다른 동료들 속에서 나돌고 있었다.
일하면서 보니, 훈련병식당과 같은 건물에 있었어도 간부식당은 차원이 달랐다. 수명 간부들의 점심 한 끼를 위해 2명의 요리사가 동원되고 24가지 반찬을 매 개인 별로 접시에 담아 내놔야 하는 이 식사는 신병들에게 차례지는 모든 것을 소화해 내는 간부들만의, 간부들을 위한 호화판 식당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돋보이던 건 해주 앞바다에서 잡아온, 머리가 달려있는 살아있는 생선회였고, 이 요리를 제때에 식탁에 올리기 위해 식당 안은 매일처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선출되어 온 신병 3명에게는 손톱을 잘라라. 손을 씻어라. 왼손 팔에 수건을 어떻게 들러라...몸가짐 하나까지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군단의 고위간부들을 위한 접대부였다. 신입병사들과 한 지붕 아래서 하는 식사지만, 저들만의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이른바 접대부까지 고용해 먹자판을 벌려놓고 있었다.
이런 간부들이 등장하는 날에는 훈련소 지휘관들이 훈련생들의 식량을 시장에 내다 파는 등으로 돈을 준비하고 뇌물을 준비해 저들에게 바쳐야 했고 각종 요리로 진수성찬을 차리곤 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훈련생들은 간부들이 온 날이면 고기라도 한 점 먹을 수 있다고 기뻐하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억이 막히고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자대배치! 예쁘면 꿀 보직
8주간의 신병훈련을 마치고 군인선서를 했다. 드디어 진짜 군인이 된 것이다. 나를 포함한 교육생들은 너나할 것 없이 군단 직속 부대로 가길 원했다. 하지만 군단 직속 신병훈련소를 나왔다고 누구나 직속 부대로 가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또 군단 직속 부대 같은 경우에도 고사포, 고사총과 같은 전투병과가 있고 통신병, 혹은 간호병 같은 병과가 있어 누구나 고심했다.
신병훈련소의 소대장이나 분대장들은 대부분이 직속 부대에서 파견되었던 사람들인지라 그들에게 평소 그들에게 잘 보였던 사람들은 대부분 저들을 따라 직속 구분대로 배치 받았다.
이를 간파한 일부에서는 늦게나마 밤잠을 설쳐가며 간부들과 교관들의 옷을 세탁해 주거나 금속제품을 닦아 주는 등으로 ‘이쁜짓’을 해 가며 쉽고 편한 곳으로의 배치를 추구하기도 했다.
특히 여성지휘관들에게 잘보이기 위해 화장품이며 사회에서 가지고 들어와 몰래 숨겨두었던 소장품들을 ‘선물’하기도 했고 심지어 중국산 생리대라는 것을 바치는 이들도 있었다.
말이 난 김에 생리대 이야기를 하면, 북한 여군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이른바 마법의 날이 오면 군에서 공급한 가재 천으로 이에 대처하고, 이후 세탁을 해서 다시 사용하곤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금은 때로 질이 좋지 않은 1회용도 공급한다지만, 그때에는 1회용이란 것을 꿈에서도 바라지 못하고 살았다. 1인당 1년에 4미터씩 제공하고 이를 다시 사용하기 편리하게 다시 잘라서 매번 빨아 써야 하는 고통은 실로 가볍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이런 과정과 시간을 지나 우리는 드디어 자대 배치의 날을 맞았다. 서로가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기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는데, 이-소-연! 하는 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나를 포함해 세 명의 군인을 별로로 불러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군단사령부에 특별히 뽑혀서 간다는 대열과장의 보충설명도 아련히 들려왔다. 사령부? 가서 어떤 일을 하게 될까? 그리고 훈련소에서 제일 키가 커 키다리 3인방이라던 우리를 따로 부르는 까닭은 뭘까...
이런 나의 심정을 알아버리기라도 한 듯, 대열과장이 우리 3인방을 앞으로 불러 세우고 입을 열었다. 올해만 해도 두 차례나 김정은 장군님께서 4군단 지휘부를 찾으셨는데, 여성군인들이 키도 작고 예쁘지도 않다고 말씀하셨다나 뭐라나...
그래서 이번 신병들 가운데 특별히 키도 크고 예쁜 군인들을 차출해 군단직속 부대로 데려 간다는 이야기였다.
장군님께서 예쁜 군인들을?!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입대해서부터 신병훈련을 받고, 자대에 배치되는 순간까지 ‘생긴 덕’을 본다는 게 무슨 말인지 실감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계속]
2015.11.20 여군도 10년, 세계 최장의 군 복무연한을 자랑하는 북한
법도 없다
북한 ‘인민군’의 군인복무기간은 내각결정 148호(1958년)에 의해 지상군 3년 6개월, 해·공군은 4년으로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의 군복무 경험자들은 ‘실지로는 5~8년간 복무’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시작부터 내각 결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당국은 청년들의 입대와 제대 기준을 명확히 공포, 제시하지 않았을 뿐더러 국내 정치적 환경과 남북 관계의 변화에 따라 입대와 제대 공간을 고무줄처럼 줄였다 늘였다 하면서 북한의 젊은이들을 사회, 정치적 희생 물로 삼아왔던 것이다.
여기에 세월과 더불어 가중해지는 청년들의 ‘맹목적인 충성심’을 역으로 이용해 북한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국가를 위한 희생’을 노골적으로 강요해왔다.
70년대 초반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김일성은 베트남전쟁에 인민군 파병을 결심하고 1군단 및 2집단군(현재 2군단)산하의 군인 3천여 명을 강원도 고성지역에 불러 모았다.
대체로 3년차 이상의 고참 들로 재구성된 이른바 파병부대가 3개월간의 종합훈련을 막 끝내려던 1973년 1월, 전쟁 당사국인 미국과 베트남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결국 ‘파병부대’는 해산되게 됐고, 차출되었던 사병들은 각기 본대로의 복귀를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2집단군 관하의 사병 몇 명이 당시의 최고사령관이었던 김일성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건이 벌어졌다.
내용인 즉, 국내 및 국제정세가 이토록 어려운 때, 우리가 어떻게 제대시기가 됐다고 군복을 벗겠는가. 우리들은 조국과 인민을 위해 청춘을 불사를 결사의 각오가 되어 있으니 군복무를 더하게 해 달라.
한국군 사병 가운데서 이런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가 궁금하지만 북한에선 예사로운 일이고, 김일성도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편지를 받은 김일성은 이튿날 오진우(총참모장에게)를 방으로 불러들여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애들이 군복무를 더 하겠다고 하는데 얼마나 더 시킬까”
곁에 있던 오진우 왈 “수령님, 지금 우리나라 남자애들의 결혼 적령기가 스물 여덟 살 정도이니까...1년 전 쯤...그러니까 대략 스물일곱 살 까지 시켰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결국 김일성은 ‘인민군군인들의 제대를 27살의 나이를 기준으로 변경 시키도록 한다’는 총참모부의 보고서에 사인을 했고 이듬해인 1974년 봄부터 북한군 군인들은 약 27살의 나이를 기준으로 제대 되는 진풍경을 맞게 됐다.
하지만 이 기막힌 환경에도 함정이 있었다. 제대 나이를 꼭 27살로 밝힌 것이 아니라 ‘약 27살’이라고 여지를 둠으로 당국자들이 마음먹기에 따라 2~3년 정도는 군인들의 제대연한을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더 북한군 군인들의 군복무 연한을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7살에 (초등학교) 입학해 중학교를 졸업, 17살에 군에 입대하는 애들은 27살 제대 기준으로 꼭 10년간의 군복무를 말하게 된다.
하지만 8살에 입학, 18살에 학교를 졸업하는 애들은 9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또 신검 기준 미달이나 가정 환경 때문에 입대를 미루다가 3년 혹은 4년 후인 20살내지 22살에 군에 입대하는 사람들은 5년 혹은 7년 동안의 군복만 남게 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이고,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북한의 모든 법 위에 군림하는 김일성의 지시가 떨어진 그날부터 북한군 사병들의 제대(나이)기준은 오로지 당국만 결정할 수 있게 되어버렸고 군인들은 당국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져 버렸다.
입대 8~9년차가 되는 해에 ‘가라’고 하면 ‘이른바 집단배치지’로 연대와 사단의 제대군인 모두가 ‘한날한시에 제대 된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말이다.
또 입대 10~11년 차가 되어도 제대 명령이 떨어지지 않으면 ‘말뚝’ 박으란 말인 줄 알고 묵묵히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 오늘날 북한군의 ‘현실’이라는 이야기다.
아비를 능가하는 김정일
1991년 12월 김정일이 북한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김정일은 ‘10년 복무제’(1993년 4월)를 내와 그가 20살에 입대하든 22살에 입대하든 무조건 10년을 채우도록 함으로, 고갈 되어 가는 군의 머리수를 채우도록 했다.
바야흐로 북한의 경제난과 식량배급 중단에 의한 대 기근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공장은 공장대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학교와 마을, 도시와 농촌이 서서히 숨을 죽여 가던 시기였다.
그나마 120만이라는 군대가 무리를 지어 농촌을 돕는다고 뛰어다녔고 고속도로를 건설한다, 무슨 시멘트 공장을 건설한다 하면서 북한이란 사회를 겨우 지탱해 나가고 있었다. 군대가 없으면 북한이란 사회가 풍지박산 날 위기에 처해있던 순간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김일성은 그래도 예하 사병들이 충성편지라도 썼고, 그에 화답하는 형식으로 군복무를 늘였지만 김정일은, 문자 그대로 안하무인, 막무가내였다.
명을 다해가는 김일성을 떠나 이른바 ‘떠오르는 태양’인 자신에게 줄을 대고 있는 빨치산 출신의 오진우(인민무력부장 겸 총정치국장)며 최광(총참모장) 등을 거느리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그에겐 인민군 군인 따위의 군복무 연한 같은 건 소털처럼 가볍고 또 문제될 것 없는 일이었다.
“나라사정이 어려우니 주식은 공급하고 부식은 부대 자체영농 등으로 해결하라”는 지시를 거듭하여 내리는 등으로 북한군 전체 군인들을 기아와 영양실조에 몰아넣은 김정일은 1997년 가을, 군복무 조례를 다시 변경해 남자 30살, 여자 26살로 북한군 군인들의 복무연령을 연장토록 하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전군에 하달했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나는 1990년 입대자로, 1997년 가을이면 제대를 꿈꾸던 나이였지만, 천만 뜻밖에도 ‘앞으로 4년이나 더 군복무를 해야 한다’는 기막힌 환경에 처하게 됐고 꿈과 미래, 오늘과 내일이 마구 뒤엉키는 복잡한 환경을 경험해야 했다.
나와 같은 해에 입대했지만 4월과 7월에 제대한 동기생들은 다들 집으로 돌아가 시집부터 간다고 난리도 아닌데, 나를 포함해 가을 제대를 기다리던 나머지 여군들은 만10년을 채워야 한다는 커다란 고통에 빠져버렸다.
어떻게 해, 이를 어떻게 해...아빠 엄마에게 이 딸은 어엿던 조선노동당원이 됐고 이제 며칠 안 있어 제대한다는 편지까지 써 보냈던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잠도 제대로 이루질 못했었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약과’였다. 남자는 13년, 여자는 10년이라는 말은 제대를 꿈꾸던 북한군의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폐해와 손실로 다가왔다. 개중에는 불명예제대를 당하거나 심지어 10여 년간 공들인 탑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출당까지 당해 내 쫒기는 현실도 벌어지게 했다.
무엇보다도 군기가 문란해 졌고 아빠 엄마가 된 사병들이 늘기 시작했다. 한국군과 달리 북한군은 사병은 절대로 결혼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군복무 연한을 기록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 후방공급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곳에서 무슨 일인들 일어나지 않는단 말인가.
더하여 군 생활 10년을 넘긴 고참은 갓 군관학교를 나온 젊은 지휘관들이 이래라 저래라...말을 붙이기조차 어려운 존재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지휘관들의 승인도 없이 부대를 이탈해 하루 이틀 보내다 오는 군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심지어 한 달, 두 달...부대를 이탈해 부대인근 여성들과 지내다 복귀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러지 않아도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도둑질과 일탈을 일삼던 북한군 군인들인데 3년이나 더 연장된 병영생활은 지옥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둑질, 강도, 강간, 무장탈영에 지휘관 구타까지...없는 것이 없었고 사건 사고가 그칠 날이 없어 보였다.
여군으로 있다가 제대한 사람들은 제대 후, 꼭 부대에 한두 번씩 찾아오곤 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들처럼 장사라도 해 보려니, 식량이나 돈이 필요함을 느낀 저들이 부대에 들어와 지휘관들이나 후배, 혹은 가깝게 지내던 남성 군인들을 통해 군 품과 식량을 얻어가기 위해서였다.
그간의 ‘정’ 때문에 제대한 여군들에게 무엇이라도 쥐어 보내기 위해선 반듯이 ‘도둑질’이나 ‘약탈’이 필요했다. 또 혼기가 꽉 찼던 여군 제대자들은 부대로 들어올 때 대체로 결혼 여부를 증명이라도 하듯, 아기들을 들쳐 없고 여봐란 듯이 나타나곤 했다.
복무연한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제대를 4년이나 미루게 된 현역 여군들은 아기를 업고 나타난 동기생들을 부러워하기 시작했고 연애가 허용되지 않는 병영생활이지만 나름의 연애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불어난 복무연한 때문에 졸지에 막사에서 ‘늙어가게 된’ 남군들과 여군들은 밤마다 연애를 통해 서로를 위로하기 시작했고 부대 내 지휘관들조차 늙으수레 해 가는 저들이 처량했는지 눈을 감아주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여군들의 경우, 만 10년제 복무 명령이 나온 이후 2년여 정도가 지나 배가 불러오고, 따라서 군복무를 더는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진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생활제대 되거나 경우에 따라 당 처벌을 받고 출당 당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그래도 병영 안, 혹은 병영 밖 연애는 계속됐다. 남군들은 만 13년 동안, 여군들은 만 10년 동안...누군가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당장 죽을 것만 같은 정서적 공백상태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도 그 공백과 허탈을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라를 지키고 조국을 통일한다고 스스로 탄원, 입대를 자처했는데 누구를 탓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말 한마디 잘못하면 고향은커녕 수용소엘 끌려간다는 데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속이 터져도 말 할 수 없고, 한이 넘쳐도 하소할 수 없던 나의 병영생활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계속]
2016.04.01 감옥은 '탈북학교
[주간조선:北 4군단 출신 이소연 뉴코리아여성연합 대표(上)]
말투가 똑 부러졌다. 깡마른 몸은 당차 보였다. 군인 출신다웠다. 2010년 연평도를 포격한 북한군 4군단 상사 출신 이소연(41) 뉴코리아여성연합 대표의 스케줄표는 빽빽하다. 종편, 라디오 등 방송출연도 많고 탈북 여성 단체인 뉴코리아여성연합 행사도 줄을 잇고 있다. 학교·단체를 찾아가서 개최하는 ‘통일 토크콘서트’는 올해 50회를 기획하고 있다. 탈북 여성들을 위한 직업교육도 하고 있고 오는 4월부터는 심리치료도 계획하고 있다.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는 ‘북한에는 여자가 없다’는 주제로 기자회견을 열고 열차승무원, 군 간호사, 협동농장 출신 탈북 여성들의 입을 통해 북한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폭행, 성추행 실태를 고발했다. 북한 여성 인권의 현실은 참담했다. 주간조선은 북한 여성 인권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이 대표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지난 3월 14일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에서 뉴코리아여성연합 회원들과 함께 동영상 촬영법 교육을 받고 있는 이 대표를 만났다. 교육이 끝나기를 기다려 겨우 시간을 얻었다. 1시간 여유밖에 없다는 이 대표를 붙들고 2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는 단답식으로 빠르게 진행됐다.
北 정권은 스스로 무너지지 않고
주민들이 권리를 주장할 때 변화해
여성은 성과 노동력 착취의 대상
―기자회견에서 고발한 북한 여성 인권 실태는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군부는 물론이고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 할 것 없이 강간, 성추행은 흔한 사건이다. 중앙당 간부들 사이에서도 노골적으로 일어난다. 북한에서 여성은 하나의 도구로 이용될 뿐이다. 기쁨조만 봐도 그렇다. 어릴 때부터 뽑아놓고 고등학교 때 부모도 모르게 데려간다. 단 손톱자국 같은 흉이라도 있으면 안 된다. 여성은 성과 노동력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북한 군부 내 성폭행 사건도 심각하다고 들었다.
“실제 우리 중대에서 벌어진 일이다. 120명 중 남자는 20명밖에 없었지만 간부는 100% 남자였다. 나는 1소대였는데 2소대의 중대장과 부중대장이 소대의 여군들을 전부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임신한 피해 여군들이 군 병원으로 갈 수는 없고 군에서 가까운 해주시 병원으로 전부 간 거다. 병원이 하나밖에 없으니 의사, 간호사들은 전부 알 것 아닌가. 그들의 고발로 2년 만에 발각이 됐다. 군단 간부들이 조사를 해보니 소대원들이 전부 당한 거다. 워낙 수가 많다보니 가해자 처벌을 안 할 수 없었다.”
―가해자 처벌을 안 하기도 한다는 건가.
“다른 부대서도 성폭행 사건은 매년 불거진다. 특히 입당 열쇠를 쥐고 있는 정치지도원이 가해자인 경우가 많은데 거의 처벌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 여군들이 불명예 제대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군 간부 한 명을 양성하기 위해 투자한 시간과 돈을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중대 사건도 중대장, 부중대장 모두 감옥에도 안 가고 제대시키고 끝났다. 피해 여군 중 가장 성폭행을 많이 당한 4명은 불명예 제대 처분이 내려졌다.”
―소대 전체 여군이 대상이었는데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나.
“남들은 땔감 구하러 가고 농사지을 때 편한 보직을 받기도 한다. 대가를 보고 성상납을 하게 되는 것이다.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감히 문제제기를 할 생각도 못한다. 문제제기를 하는 순간 여군들 사이에서도 미움을 받는다. 어려서부터 성교육, 인권교육은 받아본 적이 없다 보니 문제의식조차 없는 것이다.”
―여군 자원입대가 40%에 달한다고 하던데.
“군인은 북한에서 훌륭한 직업에 속한다. 의무복무 기간을 거치면 당원이 될 수 있다. 나는 의무 기간이 10년이었는데 요즘엔 7년이다. 60~70%는 당원이 된다. 또 다른 이유는 집안의 입을 하나라도 덜기 위해서다.”
▲탈북자들. /조선일보 DB
인권을 무시하고 통일하기 힘들어
유엔 대북제재엔
"김정은 머리가 아플 것"
―최근 통과된 북한인권법을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고초가 많았다. ‘삐라. 전단지 보내면 포가 날아온다. 단체를 어떻게 다 지원해주느냐. 대한민국 인권도 힘든데 북한 인권까지 신경 써야 하느냐’고 한다. 북한 인권은 세금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북한은 대한민국이다. 단지 갈라져 있을 뿐이다. 최종 목표는 통일인데 인권을 무시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나. 북한 정권은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다. 북한 주민들이 인간으로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때 북한 체제의 변화가 올 수 있다. 인권을 꾸준히 이슈화해서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북한인권법이 북한에 어느 정도의 압박이 된다고 생각하나.
“북한은 아예 인권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 자유가 있는지 권리가 있는지에 대한 인식조차 없다. 김정은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탈북자들을 통해 북한 인권이 세계에 공개되는 것이다. 인권을 증언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쓴다. 체제 유지를 하면서 국제사회에 자리매김하고 싶어하는데 최대 방해세력 아니겠나.”
―북한인권법 관련 재단 설립 등 역할을 제의받은 것이 있나.
“아직 구체적으로 진행된 것은 없는 것 같다. 북한에서 살다 왔고 북한 정세를 우리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다. 산증인인 만큼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겠나. 제의가 온다면 기꺼이 할 것이다.”
―유엔 대북제재 결의안에 대해 김정은 정권이 어떻게 나올 것 같은가.
“김정은이 머리가 많이 아플 것이다. 대북제재 한 귀퉁이라도 느슨하게 하기 위해 뒤에서 중·러를 이용하지 않겠나. 무역 일꾼들을 통해 지원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북한 주민 생계를 위한 지원 목소리가 벌써 나오고 있지 않나.”
▲마식령 스키장 건설에 동원된 북한 군인들의 모습. 건설에 사용될 물과 흙 등을 여군들이 등짐으로 옮기고 있다. /조선중앙tv
'인도적 지원' 하지 말아야
쌀 보내도 당으로 빼돌려
빵공장 지어도 당으로 빼돌려
주민들은 혜택 못 봐
―그렇다면 인도적 지원을 하지 말아야 하나.
“솔직히 그렇다. 쌀 보내고 빵 공장 지어줘도 당 간부 등 중간에서 다 빼돌리지 주민들은 덕을 보지 못한다. 제2의 고난의 행군이 나올지라도, 설사 내 부모가 어떻게 될지라도 이번 기회에 확실하고 실질적인 제재를 가해야 한다. 제2의 고난의 행군이 온다면 그때의 주민들이 아니기 때문에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으로 보면 이 대표가 눈엣가시일 텐데 위협을 받은 적은 없나.
“작년 4월 북한에서 24명의 처단자 명단을 발표했다고 들었다. 그중 여자가 2명인데 내 이름이 있다더라. 어디를 가든 보고하고 몸조심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보다 더 위험한 분들이 많다.”
이 대표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다.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이 대표의 부모는 아직 북한에 있다. 이 대표는 2008년 두 번째 만에 탈북에 성공해 한국으로 왔다. 그동안 두 명의 오빠는 감옥에서 죽고 부모와는 전화 연락을 하고 지낸다고 했다. 최근 남북관계가 경색된 와중에도 전화 연결이 되느냐는 질문에 이 대표는 “자유롭지는 않지만 연락은 된다”고 답했다. “어머니가 북한 당국에서 경고를 받았는지 나한테 좀 조용히 살면 좋겠다고 하더라”면서 웃었다. 북한 인권운동에 뛰어든 계기를 물었더니 이 대표가 얼굴까지 붉어지며 힘주어 대답했다. “그동안 당한 것이 너무 억울해서 그럽니다.”
<下편에 계속>
▲김정일曰 "여자는 밤에만 필요한 기쁨조"
▲"탈북 中 엄마가 성폭행 당해도 못 울어"
<上편에서 계속>
탈북 여성들 속을 보면 재만 남았다
1992년, 18세에 입대한 이 대표는 의무복무 10년을 마치고 당원 자격을 얻어 고향인 회령으로 돌아왔다. 관할 시당 등록과에서 직업 배치를 받아야 했다. 시당 책임비서한테 밉보였던지 배치를 받은 곳은 회령 탄광이었다. 당원이라 거부도 못하고 가서 곡괭이 들고 탄을 캐는데 도저히 힘에 부쳤다. 대학교수인 아버지 ‘백’을 동원해 다시 배치를 받은 곳이 수출 피복공장이었다. 러시아에서 천을 들여와 옷을 만드는 곳이었는데 거의 문을 닫은 상태였다. 월급은 당연히 안 나왔다. 그때가 2002년, 장마당이 등장해 독립채산제를 도입했다. 공장에 적만 걸어두고 이 대표도 시장으로 나갔다. 철, 잡화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썩을 염려도 없고 돈이 됐다. 중국서 전기코드, 자전거, 중고 TV를 들여와 팔았다. 이 대표는 “돈 벌어 하루 한 끼라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었다”고 말했다.
수십년 세뇌 당해온 것이
南 드라마로 바뀌기 힘들어
―탈북을 언제 결심했나.
“장사를 하다 보니 거꾸로 섰다.”
―거꾸로 섰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북한에서는 손해가 났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다.”
―남한 드라마를 보고 탈북했다는 사람들이 많다.
“절반 정도 영향은 미쳤겠지만 다는 아니다. 수십 년 세뇌를 당해왔는데 드라마 몇 편이 그걸 송두리째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랬다면 북한 주민 모두 탈북했을 것이다. 굶어죽는다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도 배가 고팠다. 드라마에서 본 것도 있고 다들 탈북한다는데 나도 가보자고 생각했다.”
―가족들 걱정은 안 됐나.
“처음 탈북을 시도한 때가 2006년이다. 강력한 처벌을 하고 경종을 울려도 탈북 행렬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한 사람이 탈북해도 나머지 가족이 충성심이 있으면 안고 간다는 방침이 나왔다.”
―첫 탈북 과정은 실패했다.
“브로커를 잘 만나야 한다. 남한에 가서 정착금을 받아 브로커에게 주는 후불제다 보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돈을 잘 받을 수 있느냐이다. 그러다 보니 중국 남자에게 팔아넘기기도 하고 쉽게 돈 벌 연구만 한다. 내가 말을 잘 안 듣고 따져대는 데다 결정적으로 공안기관에 신고하겠다고 했다. 중국에 팔아도 말썽이 생기겠다 싶었는지 밤에 남자 4명이 와서 때린 후 비닐테이프로 손발과 입을 막고 승용차 짐칸에 싣더니 두만강에 던졌다. 죽는구나 생각했다. 오전 10시쯤이었는데 북한 측 국경경비대에서 지켜보고 있다 나를 건져냈다.”
―북송된 후 처벌은 안 받았나.
“중국으로 간 경우는 생계형, 한국으로 가다 붙잡히면 정치적 탈북자로 분류가 돼서 처벌이 달랐다. 생계형은 6개월 단련대만 거치면 풀어준다. 정치적 탈북자와 3차례 이상 시도한 경우는 교화소로 보내져 3~7년형을 산다.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 사람이 아니다. 나는 두만강에 내던져진 덕에 단련대와 감옥을 거쳐 1년 만에 나왔다.”
―두 번째는 한국으로 곧장 왔나.
“중국 단둥을 통해서 바로 왔다. 그땐 브로커를 잘 선택했다. 감옥에서 학습을 다 했다. 감옥이 탈북학교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매우 열악한 탈북 환경
인신매매, 폭행…
―최근 탈북 행렬이 뜸해졌다.
“김정은 체제 들어 내적 질서를 강화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또 1990년대 중국으로 넘어왔던 생계형 탈북자들이 그동안 남한으로 다 들어왔다. 요즘에는 북한에서 곧장 오는 사람들이 늘었다.”
―남한에 온 탈북자 3만명 중 여성이 70%라고 들었다. 왜 여성 비율이 높은가.
“가족 생계를 책임진 여성이 많기 때문이다. 중국에 정착하는 데도 여자들이 유리하다.”
―탈북 여성에 대한 인신매매가 요즘에도 심각한가.
“그렇다. 중국에 머물렀다 온 사람들이 많지 않나. 누군가 작정하고 이끌어주지 않는 한 브로커들한테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인신매매 브로커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않나.
“북한 내에서 브로커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중국에 브로커를 만들 수밖에 없다.”
―남한에 정착한 탈북 여성들의 문제는 뭔가.
“많이 벌어도 150만원이다. 브로커에게 떼주고 북한에 남은 가족들에게 생활비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북한에서 못 먹고 살다 그만큼 벌면 행복한 것 아니냐고 하지만 그런 시선이야말로 우리를 사회에서 버려진 사람으로 내모는 것이다. 상대적 비교를 할 수밖에 없다. 그들 속을 들여다보면 다 재만 남았다. 북에 남아 있는 가족들 생각하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이 대표의 정착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하나원을 나와 첫 일자리는 서울 영등포 근처 칼국수집이었다. 그곳에서 3시간 만에 쫓겨났다. 점심시간 직장인들이 몰려드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식은땀이 나면서 공포감이 들었다.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하고 나와 하얗게 질린 그를 보고 주인이 시급을 쥐여주고 등을 밀었다. 무엇보다 말투가 문제였다. 그러다 겨우 구한 것이 밤 10시부터 아침 7시까지 편의점 아르바이트였다. 퇴근해서 고시원 청소를 하고 다시 오후부터 서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문제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주세요, 어쨌어요?, 요요 하는데 물어보는 건지 달라는 건지 도통 구별도 안 되고 뭘 달라는 건지 알 수 없더란다. 우리나라 말을 내가 왜 못 알아듣나 자괴감도 들었다. 그런 시간을 2년 보냈다. 지금은 북한 말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탈북자를 소재로 재미 한인 2세가 쓴 연극 'You for me for you(당신을 위한 나를 위한 당신)'의 한 장면. /Tristram Kenton 제공
방송활동 적극적인 이유는
북한실상 알리기 위해서
“나 하나로 북한 실상이 알려질 수 있다면”
북한 인권운동에 눈을 뜨게 된 건 장교 출신이었던 두 오빠가 이 대표 때문에 강제 제대를 당하고 감옥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였다. 자살을 생각했을 만큼 괴로웠다. 처음으로 북한 인권문제를 생각했다. TV에서 탈북자 단체들이 활동하는 뉴스를 봤다. 북한 실상을 알리고 여성들의 인권 실태를 알리자는 뜻을 같이한 탈북 여성들과 함께 2011년 뉴코리아여성연합을 조직했다. 현재 회원은 300여명에 이른다. 마침 채널A에서 하는 탈북자 토크 프로그램인 ‘이제 만나러 갑니다’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이 대표는 “나 하나로 북한 실상이 알려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여군 출신 탈북미녀로 알려지면서 강의 요청도 많아졌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 등 방송에 출연한 탈북 여성들의 증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격하고 이해하지 못할 일들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잘 살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북한이 맞느냐? 둘 다 북한이다. ‘너는 왜 맨날 후진 이야기만 하느냐’고 묻는데 재미와 감동을 위해 거짓과 포장으로 꾸며낸 프로그램은 오래갈 수 없다.”
―탈북자들이 오히려 자본주의 습성을 빨리 받아들인다는 생각도 든다.
“건강은 안 좋지 돈은 없지. 돈을 좇아가면서 살 수밖에 없다. 나도 잘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돈 돈’ 하며 살았다. 탈북한 지 만 7년이 되는 올해 들어서야 내가 불쌍하다는 자각이 들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좋지만 과도한 욕심 때문에 행복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엔 사람들에게 욕심을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돈이 아닌 가정이나 일을 통해 자신을 채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남남북녀라고 하지 않나. 와서 보니 어떤가.
“북한 남자들이 날 죽이려고 할 텐데. 하하. 장점만 말하면 북한 남자들은 가식이 없다. 말하고 싶은 것은 다 말한다. 때론 시원하기도 하다. 남한 남자들은 상대 배려가 뛰어나다. 예의도 바르고. 기분 나쁘지 않게 돌려 말한다. 장단점이 다 있다.”
이 대표는 남한 남자와 결혼을 해 26개월 된 아이를 기르고 있다. 결혼 후 가정이 생기고 마음의 여유가 생긴 듯했다. 이 대표는 무엇보다 사회에서 탈북자들을 보는 마인드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못사는 데서 왔으니 지금 생활에 만족하면서 살아라’가 아니라 똑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해주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심리적으로 단 한 번도 힘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따뜻하게 봐 달라.” 이 대표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본 기사는 주간조선 2399호에서 발췌했습니다.> 황은순 주간조선 차장
2016.01.28 여군시절의 추억, 전 인민군 상사가 말하는 '정치학습'
120여만 병력가운데 40%를 차지하는 북한여군들은 남성들과 달리 ‘자원입대’형태로 군에 입대한다. 그리고는 곳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한다. 군복을 입고, 조국을 지킨다는 허구한 나날들이 너무 힘에 부치기 때문이다.
구타도, 상급반항도, 무단외출과 탈영도 다반사다. 병영(막사)에서 함께 생활하고 군율과 질서에 매어있는 군인들 속에서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 먼저 북한 여군들의 일과(내무반)생활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여군들은 동절기와 하절기로 나누인 일과생활을 하고 있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면 5.40분 기상, 20분간 아침운동, 40분간 침구정돈 및 부대주변청소, 이후 아침식사, 식사 후에는 정치상학(정치학습), 군사상학(군사훈련)시간을 보내며 점심식사 후, 무기청소 및 조준연습 1시간, 이후 다시 시작되는 군사상학, 저녁식사, 분대별 ‘10대준수사항 총화’(훈련총화) 및 TV관람, 저녁점검과 취침 등으로 이루어진다.
동절기에는 기상시간이 한 시간 늦게 이루어지며 여군들은 남군들보다는 여가생활시간을 조금 더 쓸 수 있는 ‘혜택’을 받고 있다. 이를 테면 남성군인들은 아침운동시간이 30분인데 반해 여군들은 20분간만 운동에 참가하고 침구정돈을 빌미로 막사에 들어가는 식이다.
또한 부대마다, 혹은 지휘관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고참이나 분대장들이 누구누구가 생리중이라고 지휘관들에게 알리면 훈련이나 작업에서 해당 대원이 빠지는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를 기화로 남보다 좀 더 휴식을 취하거나 작업 등에서 자주 누락되는 경우 군무생활 낙오자로 찍히기가 십상이다. 때로 남성군인들로부터, 혹은 동료인 여성군인들로부터도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한다.
누군 생리를 안 하냐고?! 왜 너만 자주 빠지는 가고?!... 그래서 북한여군들 속엔 ‘생리를 해도 안 아프게 생리를 하는 여군들이 장땡이다’는 말이 있다. 그냥 참고 또 참고...아파도 아픈 척 하지 않는 게 군복무를 잘 하는 사람이고, 입당도 빨리 할 수 있는 길이니 말이다.
그렇게 참을성 있는 군인이 되라고,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는 혁명전사가 되라고 매일처럼 가르치기도 한다.
인민군정치상학
알려진 사실이지만 북한의 기본전투단위인 중대엔, 군사지휘관인 중대장과 정치지휘관인 정치지도원이 있다.
중대장이 군사를 책임졌다면 정치지도원은 중대군인들의 정치생활과 학습을 책임지고 있다. 그래서 김일성, 김정일, 현재 김정은이 하달하고 있는 훈련명령도 그냥 ‘0000년 군사훈련에 대한 명령’이 아니라 ‘0000년 전투정치훈련에 관한 명령’이 되곤 한다.
군사훈련만이 아니라 정치훈련을 받듯이 각인시킨다는 이야기다. 이에 따라 북한의 모든 중대(혹은 독립소대)군인들은 동·하계 훈련의 전 과정을 통해 정치학습을 받게 된다. 이 정치(상학)학습은 격일로 진행되는바 하루건너 한번, 한번에 2시간씩 진행되며 정치지도원이 직접 교육자로 나서고 있다.
하루건너 한번에 2시간씩이니까 따지고 보면 매일 한 시간씩 정신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더해 매주 토요일은 이름 하여 ‘정치일’이다. 강연과 학습에 이어 주 노동당(청년동맹)생활총화가 진행된다. 어찌 보면 북한군 생활 전반이 저들이 말하는 ‘당성단련의 용광로’인 셈이다.
이 ‘당성단련의 용광로’속에서 군인들은 첫째, 수령에 대한 충실성 교육을 받게 된다. 우리 수령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며 수령만 믿고 따르면 혁명에서 승리한다는 식이다. 둘째로는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에 대해 반복, 또 반복해 듣는다. 우리식 사회주의는 세상에서 가장 우월하며 썩고 병든 남조선 사회에 비해 비할 바 없이 우월하다는 식이다. 외부소식이 철저히 차단된 북한, 더욱이 병영생활을 하면서 주입식교육에 몰두해 있는 병사들에겐 제법 그럴듯한 소리로 들리고, 결국엔 ‘남조선인민들의 해방을 위해 조국을 통일해야한다’는 결론이 도출되곤 한다. 세 번째로는 미제는 우리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수, 남조선 괴뢰군은 미제의 총알받이며 허수아비...등의 교육이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다.
지금에 와서는 그 모든 것이 말짱 헛것이고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지만, 10년 동안 오로지 그러한 이야기만 반복적으로 듣다보면 세상은 실지로 북한을 중심으로, ‘장군님의 뜻’에 따라 돌아가는 듯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교육과정은 사람의 정신뿐 아니라 육체마저 병들게 한다.
생각해 보시라. 매일처럼 진행되는 정치학습은 복습과 예습, 과제를 동반함으로 잠을 설치며 공부, 또 공부해야 한다. 정치학습 교제뿐 아니라 신년사를 비롯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새로운 지시가 나올 때 마다 필기하고 암기하고, 문답식 학습경연이란 것을 통해 발표하고 총화 받고 평가받는 것이 정치학습이다.
이러한 정치학습에 빠지거나 특별한 사유 없이 지각, 조퇴하는 경우 정치지도원은 해당 군인의 평정서에 ‘사상적으로 불결하다’는 딱지를 붙인다. 이러한 ‘딱지’는 평생 따라다닐 뿐 아니라 입당이나, 표창휴가, 승진이나 여타의 평가사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외에도 군인들의 정신무장을 위한답시고 조국과 수령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빨치산 대원들과 전쟁영웅들의 회상실기, 덕성실기 등의 자료들을 가지고 끊임없이 교육하고 또 교육한다. 대한민국 군인들도 정신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지만 북한과는 정말 비교가 안 되는 것으로 안다.
또 한 가지, 북한군 군인들의 청치학습을 말함에 있어서 빼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정치학습을 진행하는 ‘교양실’(장소)이 너무 춥다는 것이다. 북한군엔 어느 중대(독립소대)를 막론하고 정치상학 ‘교양실’이란 것이 있는데 사용용도는 오로지 정치학습과 생활총화, 군인궐기모임과 같은 정치적 일정과만 연계되어 있다.
이 ‘교양실’에는 역시 어느 중대를 막론하고 김일성, 김정일 혁명력사 도록이 비취 되어 있다.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너비 70에 높이 1.20㎝의 정교한 액자 50개에 김일성의 증조할아버지가 미국선박 ‘셔먼호’를 격침시켰다는 이야기부터 김일성의 어린 시절 이야기, 김정일이 당과 국가의 지도자로서 나라를 어떻게 부강발전 시켰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진으로 쭈욱~전시시켜 놓은 게 도록이다.
배급도 못주는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선전물들은 국가가 직접 제작해, 북한군의 말단 중대에까지 일일이 공급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이 도록은 북한군 모든 군인들의 암기의 대상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역대 대통령들은 물론, 현직 대통령의 생일도 알지 못하는데 반해 북한군 군인들과 젊은이들이 김정은의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는 물론 김일성의 작은아버지와 삼촌들의 족보를 쭈욱~내리 엮을 수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이, 혁명력사 도록 때문이라는 것도 밝혀둔다. 책상이며 의자도 나름 최고급이다.
중대막사엔 제대로 된 책상하나 없어 부서지고 찌그러진 책상을 수리해 쓰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교양실’에 만큼은 광택이 번들거리는 책상과 의자가 늘 정리되어 있다. 도록 판은 물론이고, 창문도 늘 깨끗이 닦아 놓아야 한다. 하지만 춥다. 영하 10도를 웃도는 북방의 혹한 속에서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정치지도원의 이야기를 받아 적어야 한다.
때로 그 아까운 나무를 ‘교양실’ 아궁이에 집어넣기도 한다만, 이는 추위에 떠는 군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도록 판이 얼지 말고 습기로 인해 오손되지 말라는 의미다. 그래서 군인들이 실내에서 하는 정치학습보다 차라리 땀 흘리며 뛰어다녀야 하는 야외훈련을 더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불요불굴? 항일의 여성영웅?
이러한 ‘교양실’에서 여군들이 제일 먼저 따라 배우고 본받아야할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김일성의 아내이자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이다. 북한은 이 김정숙을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항일의 여성영웅이라 칭송하며 모든 여성들의 귀감으로 삼고 있다.
불요불굴(不撓不屈), 즉 구부러지지도 굽히지도 않는다는 뜻이란다. 어떤 어려움에도 결코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꿋꿋이 견디어 나가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런 사람이 다름 아닌 김정숙이며 우리모두가 따라배워야 하는 항일의 여성영웅이라는 것이다.
그런 김정숙의 고향이 나와 같은 회령이었다. 가난한 소작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독립의 꿈을 키웠으며 자라서는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에 입대, 김일성의 가장 충직한 혁명 전사였더라는 이야기다. 더하여 일제와 싸우던 빨치산 시절 혹한기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김일성의 속옷을 가슴에 품고 말리었다고 했다.
자신의 길었던 머리채를 잘라 김일성의 신발깔창을 만들어주었다는 일화도 소개해 주었다. 또 작식대원(취사원) 시절엔 일제와의 전투가 한창이던 속에서도 빨치산대원들의 식사를 보장하기 위해 펄펄 끓는 죽 가마를 머리에 이고 십리 길을 달렸다고도 했다.
처음에는 그럴 듯 했다가 해를 거듭하며 자꾸 듣다보니 도무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들을 엮어 군인들을 세뇌시킨다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하지만 혁명력사 학습시간에 나오는 내용인데, 어디다 감히 토를 단단 말인가. 나도 남들처럼 열심히 김정숙 관련 내용을 암기했고 생활총화 때나 군인모임 때나 줄 곳 인용하군 했었다.
불요불굴의 혁명투사이시며 항일의 여성영웅이신 김정숙 동지께서는 위대한 장군님의 속옷을 가슴에 품어 말리었고 전우들을 위해 펄펄 끓는 죽 가마를 머리에 이고 십리 길을 달렸는데 나는 위대한 장군님의 혁명전사라고 말로만 떠들면서 실지 행동에서는 그렇지 못한... ...
아비가 아들에게 바친 헌시, 그리고 ‘어머니’ 시에 대한 일화
90년대 초반에 전군에 하달된 인민군 총정치국 지시문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지으신 송시, ‘광명성 찬가’에 대한 학습과 실효투쟁을 철저히 진행 할 것”
근무성원도 당직병 한명만 제외하고 모두 ‘교양실’에 모이라는 정치지도원의 지시가 떨어졌고 중대 군인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교양실’에서 정치지도원은 위대한 서사시마냥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바쳤다는 헌시를 읊어 나갔다.
<백두산 마루에 정일봉 솟아있고/ 소백산 푸른 물은 굽이쳐흐르누나/ 광명성 탄생하여 어느덧 쉰 돌인가/ 문무충효 겸비하니 모두다 우러르네/ 만민이 칭송하는 그 마음 한결같아/ 우렁찬 환호소리 하늘땅을 뒤흔든다.>
뜻인 즉 백두산의 정기와 소백수(백두산의 개천)의 푸른 기상을 안고 태어난 김정은(광명성)이 어느덧 생일 쉰 돌을 맞고 있으며 그는, 문무충효가 뛰어나 모든 사람이 우러르고, 만민이 칭송한다는 내용으로 김일성이 아들 김정일의 생일을 맞아 몸소 지어 바쳤다는 ‘헌시’라는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북한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처음 한동안 충격에 빠져버린 듯 했다. 어떻게 애비가 돼 가지고 자식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하는 듯 한 헌시를 지어 바친단 말인가. 또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시를 북한주민 모두에게 암기시키고 실효 모임까지 하도록 한단 말인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북한주민들의 정서상, 아비가 아들을 칭송하는 시 따위는 어딘가 불편해 보였고 정상적인 행동이 아닌 것처럼 비쳐지고 있었다.
혹시 아들 김정일이 다 늙은 아비에게 시라도 지어 바치라는 비정상적인 요구를 하지 않았나 십은 위구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역시 정치국 지시에 따른, 정치학습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헌시 암기와 낭독, 실효모임이었음으로 누구하나 빠지는 사람이 없었고, 지금까지 나도 눈감고 줄줄 암기할 정도로 ‘뼈 속 깊이’ 새겨 넣었었던 바다. 그리고 그 학습효과에 힘입어 김정일은 자연히 ‘광명성’이 되어 버렸다. 그랬던 김정일이 갑자기 ‘어머니’가 되어 버린 사건도 있었다.
때는 1990년대 중반으로 북한주민 모두가 굶주림에 시달리고 지어는 굶어죽기 시작하던 이른바 ‘고난의 행군시기’였다. 편지로 혹은 인편을 통해 고향소식을 들은 군인들이 마음속으로 동요를 일으켰던 시기이기도 했다. 수령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사상적 각오야 누구에겐들 없으랴 만은, 고향의 부모형제들이 굶어죽는다는 이야기에는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위한 사상교육은 더욱 강화되는 판국이었다. 나라가 이처럼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기 때문에 김정일도 쪽잠에 좨기밥(주먹밥)을 먹어가면서 인민들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당시 교육의 핵심었다.
그러던 어느날, 만성적인 배고픔에 시달리던 군인들은 허리끈을 한 번 더 조여 매고 있을 때, 김일성과 김정일이 극찬했다는 시와 노래를 무조건 암기하라는 명령이 또 떨어졌다.
전쟁 때 적의 화구를 막았다는 리수복 영웅이 지었다는 시(나는 해방된 조국의 청년이다)와 수령님의 안녕을 바라는 내용이 담긴 노래(수령님 밤이 퍽 깊었습니다)외 열 개나 되는 가요와 시였다. 그 가운덴 지금은 북한주민 누구나 졸졸 외우고 있는 김철 시인의 ‘어머니’란 시도 들어있었다.
2016.02.15 북한 여군 병영수기, "일당백 목욕을 아시나요?"
병영이라 함은 군대가 집단적으로 거처하는 ‘집’을 말한다. 즉 병사들이 추위와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가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을 뜻하고 있다.
어느 나라나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군 집단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이 전투를 수행할 수 있도록 교육받고 훈련되는 곳이 곧 병영이다.
이런 병영을 군인들의 ‘집’이라고 한다면 그곳에서 생활하는 군인들이 어떤 생활환경을 갖추고 있는가에 따라 전투력 등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구대비 세계 1위의 병력을 자랑하는 북한, 4차에 걸친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을 통해 내적으로는 체제 안정을 다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사회의 원칙과 기준에 심각하게 도전하고 있는 북한군의 병영생활은 과연 어떨까.
전군을 강타한 '옴'
1996년 봄, 북한군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이른바 정세에 따른 비상이 아니라 전 군으로 확산되고 있는 피부병 때문이었다.
어떤 경로를 거쳐 침습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중대를 단위로 한 모든 병실(막사)에 옴이라고 하는 피부병이 돌기 시작했고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따지기도 전에 막사안의 전체 군인들을 옴쟁이로 만들어 버렸다.
필자도 그때 처음 알았지만, 옴이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진드기에 의해 생기는 피부병으로 신체접촉 등을 통해 전염되는 전염성 감염질환이었고 감염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어마 어마한 것이었다.
중대장과 중대정치지도원을 쓰러뜨리는가 싶더니 일주일도 채 못된 사이에 하사관 전체와 갓 입대한 신참마저 옴쟁이로 만들어 버렸다.
가장 손쉽게 감염되는 곳이 손이나 팔, 겨드랑이와 생식기라고 하더니 어느 날 부터인가 남군 여군 할 것 없이 바지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사타구니를 긁어대는 진풍경마저 펼쳐졌다.
밤에는 특히 가려움이 심해져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수반되고, 피부를 긁고 자극을 가해 2차 감염이 일어난다면 농창과 종기 등의 질환으로 끝임 없이 ‘진화’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장의 괴로움에서 해방되기를 원했던 군인들은 강냉이 송치 등에 나무꼬챙이를 끼워 간지러워지는 피부를 긁고 또 긁어대고 있었다.
밤마다 막사에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려움과 사투를 벌이는 군인들의 신음소리가 새어나왔으며, 아침에 서로 얼굴을 마주하면 서로가 자신들의 상처를 보여주는 것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 땐 그 이상의 위로가 없어보였다.
그 와중에도 지휘관들의 우선 관심을 돌려야 했던 군인들이 있었다. 내가 속해있던 중대에서 영양실조 환자가 여섯 명이나 있었는데 옴이라는 이 전염병이, 핏줄만 앙상하게 드러나 있던 이들을 먼저 공략하는 듯 했다.
머리조차 쳐들 힘이 없던 이들의 가는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 사이를 무지막지하게 파고들던 옴, 그들에게 유일한 보약이고 치료방법이던 햇볕 쪼이기마저 할 수 없을 만큼 스멀스멀 기어오르던 가려움의 고통...
이런 고통을 가셔내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군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모포를 세탁하고 햇볕에 건조시키는 것이었는데 매일처럼 빨래를 하고 건조를 시켜도 오히려 감염의 속도를 재촉하는 듯 했다.
하루 일과가 긁는 것이었고, 긁다가 끝나는 게 당시의 일과였다. 필자가 속해있던 부대는 혼성부대여서 남성군인과 여성군인들이 서로를 의식 할만도 한데 도대체가 체면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어보였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마침 대열검열 시간이어서 전 부대가 도열했고 그 앞으로 결속소 소장(중령)이 걸어 나오는데 자세가 영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와서는 부소장의 대열보고도 받지 못한 채 다짜고짜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사타구니를 긁어대는 것이었다.
폼 나게 영접 보고를 받고 전 대원들 앞에서 일장 훈시를 하는 게 정석이었지만 그날만큼은 ‘긁는 시범’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대원들을 불러 세운 듯 했다. 처녀군관들까지 포함해 60여명의 여군들이 도열한 앞에서 무슨 긁음의 시범을 보여주는 듯 안간힘을 다 쓰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도 지휘관이 앞에 있으니 그 순간만큼은 ‘간지러워도 참아야 한다’를 열 백번 부르짖던 병사들이었지만, 호주머니 속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지휘관의 손을 의식한 순간부터 너나없이 긁고 싶은 유혹에 빠져버렸고 유혹을 이기지 못한 손들을 주머니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가려움을 이겨낸 자그마한 탄성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시원함에서 비롯된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지휘관을 의식하고 웃음을 거두는 대원들을 바라보던 그 지휘관의 이야기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지금은 무력부 적으로 옴이야”
대책 없는 북한군의 위생상태
무력부적이라 함은 한국의 국방부를 일컫는 말로 당시 북한에서 전 군적으로 가려움과의 전투를 치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막사 내 옴 병은 불결하기 짝이 없는 북한군의 위생상태를 고발이라도 하듯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부대단위로 해결하라’는 총참모부의 전신지시만 연발시켰다.
상부로부터 매일같이 닦달을 받게 된 중대 급 간부들은 ‘없는 의약품’ 대신 민간요법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고, 드디어 ‘유황에 돼지기름을 섞어 바르면 옴이 낳는다’는 비책도 알아버렸다. 하지만 돼지기름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유황은 농장에 나가면 구할 수 있었지만 먹고 죽을 돼지도 없는데, 몸에 바를 돼지기름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소대와 중대마다 ‘돼지기름 구하기조’가 구성 되고 내무반생활을 접은 그들은 여기저기 민간인마을로 돌아다니며 돼지기름을 수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사발 정도의 돼지 구름이 어렵게 구해지기도 했지만 전 중대원들이 바르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그나마 돼지기름은 구하는 족 족 지휘관들의 차지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자 군인들은 ‘우리가 언제 비단이불을 덮고 살았냐’며 돼지기름 대신 맨 물에 유황을 타서 몸에 바르기 시작했고 그로 인한 후유증에 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누구의 ‘발기’인지 ‘유황에 돼지기름’대신 ‘유황에 석회를 끓여 바르면 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대원들은 중대의 목욕 가마에 유황과 석회를 넣고 끓여대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지나자 시뻘겋게 우러나온 비장의 ‘약’이 나왔고, 군인들은 보물처럼 그 시뻘건 물을 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냥 바른 것이 아니라 ‘전염성 진드기가 피부를 파고들었으니 피부가 벗겨질 만큼 깊숙이 바르라’는 명령 하에 칫솔에 ’약‘을 발라 피부가 벗겨질 만큼 발라댔으니 그 고통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었음을 밝혀두고 싶다.
여하튼 그해 가을, 전군을 강타한 옴 병은 진정국면에 접어들었고 군인 모두가 사타구니를 주무르던 망신스러운 사태도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대한민국에 와서, ‘옴이란 비문화적인 위생환경에서 비롯된 전염병’이란 걸 알았고 그런 전염병이 돌 때는 세탁도 함께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당백 목욕’을 아시나요?
비문화적인 위생환경이란 말이 나온 김에 현재도 북한의 여군들이 주로 하고 있는 ‘일당백 목욕’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일당백이란 한사람이 백을 당한다는 말로 김일성, 김정일, 인제는 김정은 마저 쓰고 있는 저들만의 대명사이다.
김일성 때 군인들에게 강조됐고 김정일 때도 강조됐으며 오늘날, 이른바 선군정치를 펴고 있는 북한에서 군인들이 입에 달고 사는 그 말 ‘일당백’. 김일성은 동부전선의 어느 중대를 찾아가서 ‘일당백 중대’가 되라고 격려했고 김정일은 다박솔 초소의 ‘일당백 여성군인들’을 자랑했으며 김정은은 청천강발전소 건설장에서 ‘일당백의 기상으로 공사를 다그치라’고 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일당백의 구호가 김 씨 가문 최고사령관들의 말처럼 훈련장이나 건설장에서만 쓰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군인들은 훈련장이나 건설장이 아닌 곳에서도 이 말을 쓰곤 했고 필요에 따라서는 스스로의 고통과 싸우면서도 일당백을 외치곤 했다.
나를 포함한 여군들은 주로 목욕할 때 이 구호를 외치곤 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도 북한군 막사 내엔 제대로 시설을 갖춘 목욕탕이 없다. 겨울철엔 손발을 제대로 씻을 더운물이 ‘전혀 없음’도 강조하고 싶다. 막사마다 세면장은 있지만 목욕시설이 전무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싶다.
내가 생활하던 부대는 군단직속 부대여서 제법 수도꼭지에서 산골물이 좔좔 흘러나오긴 했지만 겨울철엔 얼어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렇게 물이 얼어버릴 때, 땀을 흘리는 훈련이 없고, 따라서 목욕을 안 하고 겨울 내내 버틸 수 있는 환경이라면 오죽 좋으랴만, 훈련은 훈련대로 해야 했고 그로인해 여군들의 몸에서 땀내는 땀내대로 진동하곤 했다.
(필자는 사실 어느 때나 수도꼭지를 돌리면 더운물이 콸콸 나오는 세상도 있다는 걸 대한민국에 와서야 처음 알게 됐다.)
당시만 해도 필요에 따라 더운물이 나올 수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당연히 목욕을 위한 더운물은 ‘만들어야’ 했고 ‘만든 더운물’은 한바가지 정도씩 동료들과 똑같이 나누어 쓰곤 했다.
그렇게 미지근한 물 한 소랭이를 들고 들어서는 이른바 세면장엔 온기한 점 없다. 그래도 옷을 탈의하고 목욕재개를 해야 했으니, 서서히 찬물과 몸의 온기가 합쳐지면서 살결은 빨갛게 물들고 몸의 이곳저곳이 바늘에 찔린 듯이 아파나기 시작한다.
그 고통의 순간이 지나기 바쁘게 분대원들 앞에서 ‘준비’구령을 외치는 분대장, 그러면 모든 분대원들이 미지근한 물 한소랭이를 어깨위로 쳐들고 분대장의 다음 구령을 기다린다. 그러면 분대장은 순간도 망설임 없이 ‘시~작!’하고 외친다. 그 명령에 맞춰 분대원들은 일시에 ‘일당백!’을 외치며 재빨리 찬물을 머리위로 끼얹는다.
쩡~~함과 함께 북조선 여군들의 겨울철 목욕재개가 끝난다. 그렇게 나도 10년을 견디어 냈다.
세탁은 고문이다
물로 인한 여군들의 고통은 세탁으로 또 이어진다. 지하수에 파이프를 연결해 끌어올리는 수도에선 장마철이면, 세탁을 할 수 없을 정도의 흙탕물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그 정도는 비가 끊기면 해결되는 문제다. 10평정도의 세면장에 여군들이 우르르 모여서 주어진 시간 내에, 경쟁적으로 손세탁을 해야 하는 환경이 문제였다.
상급자가 밑에서 빨래를 하는데 하급자가 위쪽에서 빨래를 하다간 큰 코 다친다. 상급자의 세탁물을 대신 빨아주어야 했고, 그런 센스가 없어 졸경을 치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특히 목욕물도 없는 겨울엔 빨래 자체가 고문이었다.
2년에 한번 주는 단벌 군(동)복은 세탁 자체를 포기 한다 쳐도 누구하나 말하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여자로 태어난 게 무슨 잘못이기라도 한 듯 달마다 치러야 하는 고생은 피할 수가 없다. 남한처럼 일회용 생리대가 아닌 재생 생리대를 써야하는 북한의 여군들에겐 피해갈 수 없는 난제가 그것이다.
그래도 2년에 한 번씩 4미터의 가재 천을 생리대 감으로 나누어 주곤 했는데 너무 빨아 써서 한쪽으로 밀리기도 했지만, 일단은 몸에 맞게 자른 그것을 늘 깨끗이 빨아서 준비해 놓아야 다음 달을 맞을 수가 있었다. 그나마도 수고스럽게 씻어서 빨래건조장에 널어놓으면, 그마저도 잃어버리기가 일쑤였다.
옮기기도 부끄러운 이런 이야기를 더 이상 쓰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조선일보
2017년 03월 07일 “중대장이 여군 30명 性폭행…北, 軍성범죄 심각”
▲ 이소연 뉴코리아여성연합 대표가 지난 3일 서울 영등포구 사무실에서 북한의 참혹한 여성 인권 유린 실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곽성호 기자 tray92@
내일 세계여성의 날… 이소연 대표가 말하는 ‘北여성인권 침해실태’ 가부장적인 北 가정폭력 ‘만연’ 軍·직장서도 여성 철저히 소외 탈북과정서 性노예 생활하기도 “가부장적인 북한 사회에서는 가정폭력이 만연해 있습니다. 직장 내 성차별과 성희롱도 심각하고요. 특히 남성 중심적인 분위기가 강한 군대 내 성폭력과 성추행은 말로 옮기기가 끔찍할 정도로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렇게 핍박받다 북한에서 탈출한 여성들은 탈북 과정에서도 브로커 등에게 각종 성범죄에 노출됩니다.”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지난 3일 서울 영등포구 뉴코리아여성연합 사무실에서 만난 이소연(42) 대표는 여성으로서, 특히 탈북 여성으로서 북한에서 경험한 끔찍한 여성 인권침해 실태를 상세히 털어놨다. 세계 여성의 날은 1908년 미국의 여성 노동자 1만5000여 명이 선거권 보장·노동조합 결성의 자유·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날로, 1975년 유엔에서 기념일로 지정했다.
2008년 탈북한 이 대표는 “북한은 1946년 ‘북조선 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을 제정했지만,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사회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어 여성들이 살아가기 힘들다”며 “가정폭력이 만연하고 직장 내 승진에도 한계가 있다”고 전했다. 북한에서 군인이었던 이 대표는 “1999년 당시 우리 중대가 4개 소대로 구성돼 있었는데, 그중 1개 소대에 소속된 30여 명의 여군이 중대장한테 모두 성폭행을 당했다”고 털어놨다. “매일 여군들을 불러 강제로 성관계를 하는데, 이를 폭로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가해자를 엄중히 처벌하고 피해자에게 마땅한 보상을 해줘야 하는데 북한은 법령으로는 ‘남녀 평등’을 규정해놨지만 현실에선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에게 오히려 책임을 묻는 분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대표는 “철저히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북한에선 군에서도 여성이 최고로 오를 수 있는 지위는 중위”라며 “일반 회사의 간부직도 여성들은 철저히 소외된다”고 말했다.
탈북 과정에서도 성범죄에 노출된다. 브로커를 잘못 만난 탈북 여성들은 성매매를 강요당하는데 나이에 따라 20만∼50만 원의 ‘몸값’이 매겨진다. 이 대표는 “최근 탈북한 27세의 한 여성은 3년 동안 조그마한 방에 갇혀 지내면서 화상채팅을 위해 몸을 노출하는 ‘성노예’ 생활을 했다”고 폭로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 땅을 밟아도, 북한에 남은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기 위해 돈이 필요한 여성들은 성매매의 유혹에 쉽게 빠져든다는 지적이다.
이 대표는 “탈북 여성들이 일반 회사에 취직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직장을 구해도 월평균 급여는 120만 원 남짓이라 성매매의 길로 들어서는 여성들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한국에 가족이 없고 한국 법이나 문화에 대해 잘 모를 것 같다는 이유로 탈북 여성들을 쉽게 보는 경우도 있다”며 “동네 병원 간호사로 취직했던 31살의 한 탈북 여성은 의사에게 수차례 성추행을 당해 결국 일을 그만뒀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8일 오후 6시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사단법인 휴먼아시아와 공동으로 ‘북한에는 여자가 없다’는 주제로 토크 콘서트와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그림 공모전을 개최한다.
이어 10일과 17일에는 각각 스위스 제네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와 미국 뉴욕 유엔 여성지위위원회를 방문해 북한의 여성 인권 유린 실태를 고발할 예정이다. ◎
박효목 기자 soarup624@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