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2021-10/ 동아일보
10-01(금) 두 얼굴의 권순일
이재명 경기지사는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방송 토론회에서 ‘친형의 강제 입원을 지시한 적이 있느냐’는 상대 후보의 질문에 “그런 적이 없다”고 말했다. 강제 입원을 지시한 적이 있지만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라고만 했어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강제 입원을 지시한 적이 없다고 잡아떼다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까지 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김명수 대법원장과 최선임인 권순일 대법관을 제외한 나머지 재판관 10명은 유죄 5 대 무죄 5로 의견이 팽팽히 갈렸다. 그러나 대법원장을 빼고 가장 늦게 의견을 내는 최선임이 무죄 편을 들면서 추가 기울었다. 대법원장은 다수의견을 따른다는 관례에 따라 자동적으로 무죄 편에 섰다. 이 지사는 5 대 7로 무죄가 확정됐다.
▷당시 공표의 개념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권 대법관은 공표는 활자화의 의미를 가진 ‘퍼블리시(publish)’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토론에서의 발언에는 제한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런 주장은 대법원의 기존 판례에 반한 것이어서 반대의견 대법관들은 반발했다. 그러나 결국 토론에서의 발언에는 사실이냐 허위냐의 일도양단(一刀兩斷)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지가 주어져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말은 글과 달리 현장에서 공방(攻防)을 통해 부정확성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에 일도양단 사이에 여지가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늘 그렇듯이 어느 정도냐가 문제다. 정작 권 대법관 자신은 2015년 대법원 소부의 주심을 맡아 박경철 익산시장이 방송 선거토론회에서 상대편 후보가 한 건설사와 모종의 거래를 통해 쓰레기 소각장을 변경했다는 허위사실을 공표한 사실을 인정했다. 피의자가 누구냐에 따라 생각이 왔다 갔다 한다는 비판이 나올 만하다.
▷권 씨는 2014년 박근혜 정부에서 대법관에 임명됐다. 그의 판단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 덕분인지 2017년 12월 대법관이 겸임하는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됐다. 지난해 대법관 임기가 끝났는데도 관례를 무시하고 선관위원장을 계속 하려다가 빈축을 사고 결국 물러났다.
▷최근에는 대장동 개발 의혹을 받고 있는 화천대유의 고문으로 1억5000만 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이 지사 무죄에 결정적 기여를 한 덕분이 아니냐는 구설에 올라 있다. 이 지사가 허위사실 공표 혐의를 받은 사실 중에는 선거 공보물 등에 대장동 개발 이익을 과장했다는 등의 내용도 있다. 대장동과 이 지사의 관련성을 몰랐다는 권 씨의 해명은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0-02 기시다의 ‘3A’ 내각
일본 집권 자민당의 간사장은 당 자금을 관리하고 공천권과 인사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넘버 2’다. 이 자리를 5년 넘게 지내며 스가 요시히데 총리의 킹메이커 역할도 했던 역대 최장수 간사장 니카이 도시히로(82)가 1일 기시다 후미오 새 총재 체제를 맞아 물러났다. 니카이는 대표적인 친한파, 친중파로 꼽힌다. 주변국과의 관계가 험악해진 정냉(政冷)의 시기에 경제 교류를 통한 경열(經熱)을 주도하는 등 내각의 우경화 노선에 완충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중국과는 장쩌민 주석 시절부터 최고위층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고, 한국에는 박지원 국가정보원장과 ‘의형제’의 연을 맺은 사이라고 한다.
▷니카이의 후임 간사장으로는 아마리 아키라 세제조사회장이 기용됐다. 아마리는 아베 신조 전 총리, 아소 다로 부총리와 함께 자민당의 핵심 ‘3A’로 불리는 아베의 최측근이다. 아마리는 아소가 이끄는 아소파 소속이지만 이번 총재 선거에서 같은 파벌의 고노 다로 행정규제개혁상 대신 기시다를 지원했다. 특히 아베와 아소 간 소통 채널을 맡아 결선투표에서 기시다를 민다는 막판 합의를 이끌어냈다. 당의 정책을 담당하는 정무조사회장에는 총재 선거에서 아베의 공개 지원을 받았던 여성 극우파 다카이치 사나에 전 총무상이 발탁됐다. 아소는 부총재에 임명됐다. ‘3A 체제’의 재가동을 알리는 당직 인사가 아닐 수 없다.
▷기시다의 4일 총리 취임과 함께 발표될 내각 인선에서도 3A의 색채가 두드러질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우선 내각의 핵심인 관방장관에는 2차 아베 내각에서 문부과학상을 지낸 마쓰노 히로카즈 중의원이 내정됐다고 한다. 당초엔 아베의 심복이자 우익 강경파 하기우다 고이치 문부과학상이 떠올랐지만 ‘아베 일색이냐’는 비판 여론을 의식해 그나마 덜한 인물로 바뀌었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3A, 특히 상왕(上王) 아베의 영향력이 부각되면서 정작 기시다가 이끄는 기시다파에선 내각에 얼마나 기용될지가 관전 포인트가 될 정도다.
▷자민당은 1993년과 2009년 두 차례 정권을 잠시 내준 것을 제외하곤 60년 초장기 집권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에는 정당정치란 없고 파벌정치만 있을 뿐이라는 얘기도 있다. 기시다는 내 편도 없지만 적도 없다는 무색무취의 정치인. 그가 국민적 인기가 높은 고노를 제칠 수 있었던 것은 파벌정치의 결과였다. 총재 당선 직후 일성도 “내 특기는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이었다. 한일관계를 고려하면 온건 성향의 기시다 선출은 환영할 일이지만, 그에게 드리운 3A의 그림자는 너무 짙어 보인다. 얼마 남지 않은 친한파마저 사라지고 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10-04(월) 바가지 대중 골프장
코로나19 여파로 국내 골프 인구가 늘면서 대중 골프장들이 폭리를 취하고 있다. 지난해 전체 국내 골프장의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54% 늘어났다고 한다. 박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일 국정감사에서 밝힌 경기도의 한 대중 골프장 사례를 보면 1000원대 막걸리를 1만2000원에 판다. 떡볶이 가격도 시중의 10배가 넘었다. 카트 사용료는 10만 원으로 똑같은 경남 의령에 있는 대중 골프장에 비해 20배나 비쌌다.
▷주말골퍼라면 대부분 느끼고 있던 문제가 국감 무대에까지 오른 이유는 골프장들의 횡포가 그만큼 지나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 해외여행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청정지역으로 생각하는 골프장으로 몰리고 있다. 지난해 전국 501개 골프장 내장객은 4673만 명으로 전년 대비 12.1% 늘었다. KB금융경영연구소의 자영업 분석 보고서에는 지난해 골프 인구가 515만 명으로 1년간 46만 명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이렇다 보니 코로나19 이후 골프장 부킹은 사실상 전쟁이 됐고 모든 비용이 덩달아 올랐다.
▷대중 골프장들은 골퍼들이 몰리자 입장료와 카트 사용료, 캐디피 등을 올리면서도 서비스의 질은 개선하지 않고 있다. 코로나19로 지난 1년간 대중 골프장의 입장료는 평균 20% 인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주말 입장료를 회원제(비회원 25만∼27만 원)보다 많은 37만 원까지 받는 곳도 있다. 카트 사용료와 캐디피도 1만∼2만 원씩 올렸다.
▷사회적 거리 두기 4단계로 골프장에서 샤워를 못 하게 되면서 골프장들은 또 다른 부수입까지 챙기고 있다. 수도세, 전기세에 인건비까지 아끼면서도 골퍼들에게 되돌려주는 곳이 거의 없다. 과거엔 공사 등으로 샤워시설을 이용하지 못할 때 목욕비로 1만 원을 깎아줬다. 오히려 골프장들은 코로나19에 감염됐거나 검사 관계로 불가피하게 당일 빠졌을 때 돈을 더 받기도 한다. 4명에서 3명으로 인원이 줄어들면 3명에게서 그린피 1만 원씩을 더 올려 받는다.
▷세금을 덜 내고 이익은 더 챙기면서 대중 골프장의 영업이익률은 회원제보다 두 배로 커졌다. 대중제는 개별소비세(2만2000원)도 면제인 데다 종합부동산세 등의 경우 중과세 대상인 회원제와 달리 일반 세율이 적용된다. 입장료를 오히려 회원제보다 비싸게 받으면서도 대중 골프장이란 이유로 일반 과세 혜택까지 받는 것이다. 일부 소비자들이 모임을 만들어 폭리·갑질 골프장 정보를 공유하며 불매운동을 하지만 워낙 골프장 수요가 많다 보니 골프장들은 꿈쩍도 안 한다. 이런 ‘무늬만 대중제’인 골프장에 세제 혜택을 주는 것이 타당한지 검토가 필요한 때다.
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10-05 두테르테 ‘이상한 은퇴’
필리핀의 민주주의는 가문 간의 싸움이며 국민은 구경꾼일 뿐이라는 얘기가 있다. 아키노 로하스 마르코스 등 소수의 정치 가문이 선출직 자리를 꿰차고 정치와 경제를 주무른다는 뜻이다. 필리핀의 변방 민다나오섬 출신인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76)이 2016년 당선되자 필리핀의 후진적 족벌정치에 경종을 울렸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런데 두테르테 일가가 필리핀의 새로운 정치 가문으로 주목받고 있다.
▷내년 대선에서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던 두테르테 대통령이 돌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차기 대선에서 대권에 재도전해 대통령 단임제 규정을 우회할 것으로 예상됐는데 여론이 나빠지자 부통령 도전을 포기한 것. 그 대신 후임 대통령으로는 장녀인 사라 두테르테 다바오 시장(43)이 거론된다. 필리핀 정가에선 두테르테가 딸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다시 그 자리를 노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두테르테 부녀는 다바오 시장과 부시장 자리도 주거니 받거니 했었다. 아버지가 다바오 시장이던 2007년 딸은 부시장이었고, 2010년 아버지가 시장 3연임 제한 규정에 걸리자 딸이 시장, 아버지는 부시장 자리로 바꿔 앉았다.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면서 딸은 시장 자리로 복귀하고 부시장 자리는 두테르테의 장남이 차지했다. 2019년 장남이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로는 차남이 부시장 자리에 앉았다.
▷사라는 변호사 출신에 터프한 정치 스타일이 아버지를 닮았다. 대형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경관 얼굴에 주먹을 날린 일화로 유명하다. 이혼한 아버지가 대통령이 된 뒤로는 영부인 역할을 하면서 중앙 정치 무대에서 얼굴을 알렸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리 마약과의 전쟁에 미온적이고, 미중 전쟁에서 방관자론을 제안하며 아버지의 친중 노선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대선 후보 1위 주자인데 최근엔 지지율이 28%에서 20%로 급락했다. 복싱 영웅 매니 파키아오 상원의원이 12%로 바짝 추격 중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앞세워 당선됐지만 그의 장남과 사위, 그러니까 사라의 남편은 마약 밀반입 연루 혐의를 받았다. 서민 대통령을 표방하며 대기업과 날을 세우면서도 친한 기업은 챙긴다는 뒷말이 나왔다. 최근엔 정부와 가까운 기업에서 방역 물품을 고가에 구매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된 상태다. 엘리트 가문정치 청산을 공언하고도 이제는 딸까지 동원해 정권 연장의 꼼수를 부리고 있다. 한때 ‘피플 파워’로 아시아 민주화를 선도했던 나라에서 벌어지는 족벌정치 소동은 민주주의를 시작하기보다 지켜내기가 얼마나 어려운 과정인지 보여준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0-06 차용증 ‘꼼수’
검찰은 대장동 개발특혜 의혹의 핵심인 유동규 씨(전 성남도시개발공사 사장 직무대리)가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 씨에게서 5억 원, 위례신도시 사업자로부터 3억 원, 이렇게 모두 8억 원의 뇌물을 받았다고 구속영장에 적시했다. 그러나 유 씨는 “뇌물은 받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그 대신 자신과 동업 중인 정모 변호사로부터 사업자금과 이혼 위자료 명목으로 11억 원을 빌렸다고 해명하고 있다. 뇌물이 아니라 차용증까지 쓴 정상 거래라는 것이다.
▷차용증은 선거철에도 종종 등장하는 아이템이다.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산의 한 구청장 후보가 긴급 기자회견을 했다. 지역구 의원 동생 P 씨로부터 “공천 대가로 10억 원 차용증을 작성하라는 메모를 받았다”고 폭로한 것. 법적인 시비를 피하기 위해 차용증을 쓰지만 사실상 10억 원을 공천헌금으로 내라는 얘기다. 해당 의원 측은 “공천에서 떨어지니까 흑색선전을 한다”고 반박했지만 P 씨는 구속 기소됐다.
▷가족 간에 돈을 주고받을 때도 증여세를 물지 않으려면 차용증을 써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차용증을 썼다고 해서 모두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자금 출처나 변제 방식이 설득력이 없으면 차용증은 증여세를 피하기 위한 ‘꼼수’로 취급된다. 지난해 국세청의 부동산 관련 세무조사에 따르면 고가의 서울 강남 아파트를 산 직장인 A 씨는 아버지에게 돈을 빌리고 30년간 갚기로 했다는 차용증을 작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A 씨의 경우 소득에 비해 상환해야 할 액수가 너무 컸다. 결국 국세청은 이 차용증을 가짜로 판단했고, 수억 원의 증여세를 부과했다.
▷다시 대장동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유 씨가 썼다는 차용증을 액면대로 믿기 어려운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무리 선의라고 해도 신고 재산이 2억 원에 불과한 유 씨에게 11억 원이라는 거액을 선뜻 빌려주는 것이 정상적인 거래인지 의문이 든다. 더욱이 유 씨는 지난해 말 경기관광공사 사장직에서 물러난 뒤 마땅한 직업도 없는 상태다. 이렇다면 11억 원이라는 거액의 빚을 제대로 상환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게 상식일 것이다.
▷또한 돈을 빌려줬다는 정 변호사는 성남도시개발공사에서 유 씨의 수족처럼 움직였다. 두 사람이 차용증을 썼다고 해도 별도의 이면 계약을 했을 거라고 추정할 만한 이유다. 그동안 대장동 개발과 관련한 유 씨의 해명은 대부분 검찰 수사에서 거짓으로 드러났다. 유 씨가 대장동 개발 대가로 700억 원을 받기로 했다는 녹취파일도 단순히 농담으로 넘길 수 없을 것 같다. 검찰이 이 차용증의 진위를 어떻게 가려낼지 지켜볼 일이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10-07 hallyu
글로벌 돌풍을 일으키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는 “난 오빠 없으면 안 돼”란 대사가 나온다. 이때 나오는 영어 자막이 “I need you, old man”이다. 나이 많은 ‘남사친’(남자사람 친구)을 old man으로 번역한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oppa(오빠)가 쓰일 것 같다.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이 최근 ‘오빠’ ‘한류(hallyu)’ 등 한국에서 비롯된 단어 26개를 추가했기 때문이다.
▷이 사전은 공식 블로그에 ‘대박(Daebak)! OED가 K-업데이트를 했다’는 글을 올렸다. K팝, K드라마, K뷰티 등 한국을 뜻하는 K를 앞에 붙인 것들이 세계적 인기를 끌면서 한국 관련 단어가 대거 업데이트됐다는 설명이다. 영화 ‘기생충’이 비영어권 영화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고 방탄소년단(BTS)이 글로벌 스타로 도약한 현상을 바탕으로 ‘한류’란 말도 올렸다.
▷새로 실린 단어들은 한국 대중문화의 공이 크다. ‘K드라마(K-drama)’는 ‘사랑의 불시착’ ‘킹덤’ 등 드라마 인기에 기인했다. 치킨과 맥주를 함께 즐기는 ‘치맥(chimaek)’은 ‘별에서 온 그대’의 영향이다. 배우 전지현은 “눈 오는 날엔 치맥인데”란 대사 한마디로 글로벌 치맥 열풍을 가져왔다. ‘먹방(mukbang)’은 2015년 국제 학술계에 소개됐다. 홍석경 서울대 교수가 글로벌 커뮤니케이션학회인 IAMCR에 ‘mukbang’을 주제로 학술논문을 내면서다.
▷흔히 영어와 다른 언어의 가장 큰 차이점이 어휘의 풍부함이라고 하지만 모든 언어에는 다른 언어보다 표현이 더 풍부한 분야가 있게 마련이다(빌 브라이슨의 ‘언어의 탄생’). 이번에 추가된 ‘언니(unni)’ ‘오빠(oppa)’ ‘누나(noona)’가 그렇다. 한국 드라마에 자주 나오고 K팝 스타들을 부르는 말이기도 한 이 어휘들은 한류의 글로벌 팬덤을 형성하는 동시에 정(情)이라는 한국만의 풍부한 정서를 담는다. ‘스킨십(skinship)’ ‘파이팅(fighting)’은 청춘들을 위로하는 BTS 노래들을 떠올리게 한다.
▷K팝(K-pop)이란 말은 1999년 한글날 빌보드 한국 특파원의 소개로 국제사회에 알려진 후 2016년 이 사전에 올랐다. 요즘엔 SNS와 유튜브를 통해 한류 콘텐츠가 쏜살같이 번역, 유통되는 시대다.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추억의 간식 ‘달고나(dalgona)’도, BTS의 지민·뷔·정국을 부르는 ‘막내(maknae)’도 조만간 글로벌 어휘로 뜰 가능성이 있다. 지금 세계인이 한류를 선망하고 있다. 한류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킬 기회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10-08 붙잡힌 ‘김미영 팀장’
‘김미영 팀장’에게서 “최저 이율로 30분 내에 3000만 원 대출 가능” 식의 문자메시지를 한 번쯤 안 받아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개그 코너의 소재가 될 만큼 널리 알려진 김미영 팀장은 보이스피싱의 상징이 됐고, 진짜 김미영 팀장들은 본인 이름으로 보낸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가 스팸 처리되는 등 곤욕을 치렀다. 그 김미영 팀장을 만들어낸 보이스피싱 조직의 총책이 붙잡혔다. 사이버수사를 담당하던 경찰관 출신이었다.
▷4일 필리핀에서 검거된 박모 씨(50)는 2008년 수뢰 혐의로 경찰에서 해임됐다. 그는 경찰 재직 중 보이스피싱 수사를 하며 알게 된 노하우를 악용해 보이스피싱 조직을 만들었다. 박 씨가 피해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문자메시지를 대량으로 보내면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 바로 김미영 팀장이다. 박 씨의 조직은 필리핀, 중국, 베트남에 콜센터를 두고 조직원 수가 100여 명에 달하는 기업형 범죄조직으로 성장했다.
▷보이스피싱 초기였던 2010년대 초반에는 어눌한 발음의 중국동포들을 이용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박 씨는 내국인으로만 조직을 운영했다. 메시지를 보고 전화를 건 사람들은 철저하게 준비된 보이스피싱범들에게 속절없이 속아 넘어갔다. 경찰의 수사로 국내 조직이 와해된 2013년까지 박 씨 일당이 뜯어낸 돈은 약 40억 원으로 조사됐지만 이들의 통장 입출금 내역 등을 종합할 때 전체 규모는 400억 원대로 추정된다.
▷보이스피싱은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김미영 팀장이 너무 많이 알려진 뒤에는 ‘김민수 검사’나 ‘금감원 이동수 과장’ 등의 이름으로 국가기관을 사칭하며 피해자들을 속이고 돈을 빼냈다. 요즘엔 SNS 메신저를 이용해 가족이나 친구인 것처럼 속이는 메신저피싱이 부쩍 늘고 있다. ‘내 휴대전화가 고장났다’며 원격조종 앱을 설치하게 한 뒤 신분증과 계좌번호 등을 빼내는 게 대표적 수법인데 주로 고령층을 노린다. 올 상반기 메신저피싱의 연령별 범죄 피해액을 보면 50대 이상의 비중이 약 94%에 이른다.
▷보이스피싱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지만 치밀한 계획과 심리전으로 무장한 보이스피싱범들을 맞닥뜨리면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올해 상반기 보이스피싱 범죄 규모는 845억 원에 달한다. 보이스피싱 피해를 줄이는 길은 미리 공부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미국 국립사법연구소 연구 결과 비슷한 유형의 사기범죄에 대해 들어봤고, 사기범이 접근해올 때 신원을 알아보려고 한 사람은 범죄를 피할 가능성이 높았다. 저금리 대출 광고 메시지를 보고 연락하지 말 것, 지인 이름으로 수상한 문자메시지가 오면 전화를 걸어 신원을 확인할 것 등 예방수칙을 눈여겨보고 실천해야 보이스피싱의 덫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0-09 CIA 코리아센터 해체
2017년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초대 중앙정보국(CIA) 국장에 임명된 마이크 폼페이오. 야심만만한 하원의원 출신 폼페이오는 취임하자마자 트럼프 대통령의 최우선 어젠다에 맞춰 북핵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고자 했다. 그래서 찾은 인물이 막 은퇴한 한국계 CIA 요원 앤드루 김. 그의 조언은 이랬다. “CIA에 인재들이 꽤 있죠. 한데 정보 수집, 분석, 비밀작전 등 여러 부서에 흩어져 있습니다. 각 부서는 칸막이가 높아서 최고의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요. 이들을 하나의 텐트 아래로 데려와 시너지 효과를 내야 합니다. 김정은이 누구인지, 무엇이 그를 움직이는지 알아내려면 뭔가 다른 시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CIA 분석가와 요원 수백 명이 ‘코리아미션센터’라는 텐트 아래 모였고, 앤드루 김이 초대 센터장을 맡았다. CIA 안에 중동 유럽 같은 지역이나 대테러 같은 임무가 아닌 특정 국가를 전담하는 첫 미션센터였다. 당초 코리아센터의 임무는 북한 정보의 수집과 분석보다는 비밀작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대통령의 승인이 내려지면 언제라도 북한 지도자를 전복시키는 은밀한 행동을 계획하는 것이었다. 당시 정보기관으로서 CIA의 명성은 추락할 대로 추락해 있었다. 특히 이라크전쟁 때의 비밀작전 실패는 ‘고장 난 장난감 집’이란 오명까지 안겼다. 코리아센터 창설은 그런 실패의 역사를 만회할 기회이기도 했다.
▷북한의 잇단 핵·미사일 도발과 북-미 정상 간 험악한 말폭탄이 오가던 시절, 코리아센터가 어떤 대북 비밀공작을 기획했고 뭐라도 실행했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그러나 이후 북-미 간 정세가 급변하면서 코리아센터는 대북 협상의 막후 주역으로 부상했다. 특히 김 센터장은 국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폼페이오의 평양 방문을 매번 수행했고, 통역마저 배제된 김정은과의 회담에 배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9년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래 북-미 관계가 장기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코리아센터는 다시 짙은 베일 속으로 들어갔다.
▷CIA가 7일 새 조직으로 ‘중국미션센터’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넘버1 과제인 중국 견제를 위한 개편인 셈이다. 이에 따라 코리아센터는 동아시아를 담당하는 부서로 흡수될 것이라고 한다. ‘은둔의 왕국’ 타이틀을 은근히 즐기는 북한으로선 자기네 정보를 캐고 지도부를 해치려는 조직의 해체를 반기겠지만, 그만큼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엔 섭섭할 수 있다. 특히 거듭된 대화 손짓에 짐짓 ‘일없다’면서도 도발이든 협상이든 한판 벌여야 하는 김정은 처지에선 자신의 속내를 읽어줄 이들을 못내 그리워할지 모른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10-11(월) 깐부
‘깐부’가 정치권에서 화제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어제 소셜미디어에서 홍준표 의원을 향해 “경선이 끝나면 정권 교체를 위해 함께 어깨를 걸고 나가야 하는 동지들”이라며 “홍 선배님! 우리 깐부 아닌가요”라고 먼저 적었다. 이에 대해 홍 의원은 “깐부는 동지다. 동지는 동지를 음해하지 않는다”고 했다. ‘깐부 맺자’고 내민 손을 쳐내 버리는 모양새다.
▷깐부는 딱지치기, 구슬치기를 할 때 한 팀이나 동지를 뜻하는 은어다. 지역에 따라 깜보, 깜부, 가보, 갑오 등으로도 불렸는데 뜻에는 별 차이가 없다. 동아일보는 1968년 3월 21일자 ‘어린이 언어생활에 미치는 전파광고의 영향력’이란 기사에서 ‘깜보’를 ‘약속’을 뜻하는 아이들 사이의 은어로 소개한 적이 있다. 깐부 관계인 친구들은 보통 구슬과 딱지 같은 것도 거리낌 없이 서로 나누며 공유한다. 구슬의 홀짝을 맞히는 게임은 베팅한 만큼 가져가는 확률 게임인 만큼 밑천이 많을수록 유리하다. 승리를 위해선 연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이들도 진즉에 알았던 것이다.
▷깐부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없는 말로, 어원조차 불투명하다. 국립국어원은 상호에 ‘깐부’가 들어간 치킨업체에 문의도 했지만 이북이 고향인 대표자가 어릴 적 들었던 말이라는 답변만 들었을 뿐 명확한 어원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 에도시대 때 동업자 카르텔인 ‘가부나카마(株仲間)’나 고사성어 ‘관포지교(管鮑之交)’, 그리고 영어의 ‘콤보(Combo)’에서 유래됐다는 주장도 있으나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추억 속에 잠자고 있던 깐부를 다시 깨운 것은 넷플릭스의 화제작 ‘오징어게임’이다. 극 중 구슬치기 게임 편에서 참가자 1번인 오일남(오영수 분)이 456번인 성기훈(이정재 분)에게 일대일 깐부를 맺자고 한다. 하지만 다른 팀이 아닌 상대방을 죽여야만 본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놓이면서 깐부 간의 신뢰와 진정성이 시험대에 오른다.
▷오징어게임 속 일부 인물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며 깐부인 동료의 승리를 지원했고, 결국 우승은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현실 정치는 이렇게 단순히 오징어게임처럼 흘러갈 수도 없고, 흘러가서도 안 된다. 국가의 미래 비전을 보이고 국민의 공감을 얻는 인물이 최종 승자가 되어야 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주요 공약이든 비리 의혹이든 철저하고 치열한 토론과 검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상대를 향한 막말과 막연한 트집 잡기는 곤란하다. 대선 본선이 다가오고 있다. 혼탁하고 무질서한 오징어게임식 경쟁은 가상의 드라마에서 본 것으로 충분하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10-12 노벨상 받은 기상학
노벨 물리학상 120년 역사상 처음으로 기상학 분야에서 수상자가 나왔다. 수상자 3명 중 2명이 90세 동갑내기 기상학자다. 마나베 슈쿠로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와 클라우스 하셀만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교수다. 이들은 반세기 이상 기후변화 연구에 매진해 지구 온난화 예측 가능성을 높였다.
▷마나베 교수는 1967년 발표한 논문에서 이산화탄소 농도 상승이 지구 온난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예측모델을 발표해 기후변화 연구의 선구자로 통한다. 하셀만 교수는 지구 온난화가 인간이 배출한 이산화탄소로 인해 발생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산업화 이전 수준 대비 지구 평균온도가 1.5도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파리기후협약(2015년)의 토대를 닦은 연구다.
▷기후변화와 관련해 노벨상 수상이 나온 적은 있다.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지구 온난화에 대한 국제적 행동을 촉구해 2007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윌리엄 노드하우스 예일대 석좌교수(경제학)는 기후변화를 서구 경제성장 모델에 통합해 201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기상학이 학문적 성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건 처음이다. 기후에 대한 인류의 지식이 견고한 과학적 토대 위에 세워졌다는 걸 증명했다는 평가다.
▷1901년 X선 발견을 시작으로 지난해 초거대질량 밀집성 발견에 이르기까지 노벨 물리학상은 그동안 좁게는 물리학, 넓게는 천문학과 지구과학에 집중했다. 그런데 왜 지금 기상학일까. 전문가들은 인류와 지구의 공존을 서둘러 모색해야만 기후붕괴를 막을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이라고 경고한다. 독일 공영방송 ARD는 오후 8시 뉴스 직전 기후학자가 일기예보를 진행하면서 기후변화 문제도 다룬다. 남극의 빙산이 왜 녹는지, 이탈리아 홍수의 원인은 무엇인지 알려주자 “기후위기의 심각성이 실감나게 다가온다”는 시청자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이달 31일부터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회의(COP26)가 열린다. 마나베 교수는 이곳에 모일 세계 정상들을 향해 말한다. “환경뿐 아니라 에너지 농업 물 등 여러 사안이 얽힌 기후정책을 만드는 것이 기후예측보다 천 배는 어렵다.” 8일 탄소중립위원회와 관계 부처는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26.3%인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40%로 대폭 상향한 조정안을 제시하며 각계 의견을 수렴해 최종 결정하겠다고 했다. 노벨상 받은 기상학자들이 기후예측보다 어렵다고 하는 기후정책은 신중하게 수립해야 한다. 국내 산업구조를 무시한 국제적 쇼가 돼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10-13 김정은, 생뚱맞은 주적론
한국은 노무현 정권 시절 국방백서에서 ‘주적’이란 표현을 삭제했다. 이후 보수 정권에서 되살리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주적(primary enemy) 대신 가장 주요한 위협(primary threat) 등의 표현을 썼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몰라도 군사적으로는 조삼모사(朝三暮四)다. 우리가 주적이란 말을 쓰든 가장 주요한 위협이란 말을 쓰든 실제 군사적 현실의 주적은 북한이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주적이란 말을 쓰든 안 쓰든 실제 군사적 현실의 주적이 한국과 미국인 것은 변함없다.
▷10일은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일이었다. 북한은 이날 주로 열병식을 개최해 왔다. 그러나 올해는 김정은이 열병식에 참가했다는 보도는 없고 국방발전전람회에 참가했다는 보도만 있어 열병식 대신 일종의 무기전람회를 개최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그 자리에서 지난달 시험발사한 극초음속미사일(화성-8형) 등 최신 무기를 망라해 보여준 뒤 국방력 강화를 핵심 국가정책으로 천명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주적은 전쟁 그 자체이지 남조선이나 미국 등 특정한 어느 국가나 세력이 아니다”라는 주적론을 펼쳤다.
▷김정은의 그날 주적론은 생뚱맞은 측면이 있다. 우선 그날의 무력 과시 기조와 맞지 않는다. 게다가 김정은은 올 1월 당 대회에서만 해도 “최대의 주적인 미국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 지향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집권 초기인 2017년에는 주민들을 상대로 ‘남조선은 우리의 주적’이라는 사상 강연회를 잇달아 열었다. 북한 정권의 생각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남북 대화, 북-미 대화 재개를 의식한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김정은의 주적론 립서비스가 최근 미국 정부의 대북 정보기관 코리아미션센터(KMC) 해체에 호응하는 태도 변화라는 분석도 있지만 영변 핵시설 원자로 재가동 의혹에 대한 국제사회의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목적이라는 상반된 분석도 있다. 다만 그 의도가 어떠하든 ‘주적은 전쟁 그 자체’라는 말은 무기를 녹여 쟁기를 만든 성인군자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최소한 한반도 비핵화의 대의(大義)를 거슬러 핵무기를 개발하고 그 고도화를 꾀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주적이란 표현의 삭제가 평화를 가져오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주적은 전쟁 그 자체’라는 말이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하거나 한국이 핵무기 통제권을 얻어 남북이 서로에 대해 대등한 군사적 억제력을 확보한 위에서만 함께 뜻을 모아 전쟁 그 자체를 주적으로 삼는 한반도 평화의 추구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0-14 대권 4수 심상정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12일 정의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심 후보의 대선 도전은 이번이 네 번째다. 그는 당원투표 100%로 진행된 결선투표에서 6044표(51.12%)를 얻어 당선됐다. 그러나 경쟁했던 이정미 전 대표(5780표·48.88%)와의 표 차는 264표에 불과했다. 정의당의 간판이나 다름없던 심 후보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됐지만 1차 경선에서 과반 득표를 못해 결선투표로 갔다. 막판까지 승부도 아슬아슬했다. 당내에선 “또 심상정이냐”라는 피로감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노동운동가 시절 그는 ‘철의 여인’으로 불렸다. 전국금속노조 사무처장이던 2003년 국내 최초로 산별 중앙교섭을 통해 ‘임금 삭감 없는 주5일 근무제’ 합의를 끌어낸 덕분이었다. 젊은 세대와 격의 없이 소통하면서 ‘심블리’(심상정+러블리)라는 애칭도 생겼다. 국회에서 차분하게 팩트와 논리로 질의하는 모습은 과격해 보이는 진보정치인의 이미지를 바꿔 놓았다. 이런 자산이 심 후보가 진보정당 소속으로 유일한 4선의 대중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꽃길만 갈 수는 없었다. 2011년 진보세력이 뭉친 통합진보당을 출범시켰지만 당내 자주파(NL) 그룹과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창당한 지 1년도 안 돼 갈라서야 했다. 심 후보는 진보 진영이 민감해하는 ‘종북(從北)주의’ 청산을 외치고, 천안함 위령탑을 참배하는 등 변신을 시도했지만 진보 진영 내 갈등은 장기화됐다.
▷2019년 조국 사태는 정의당의 정체성에 일격을 가했다. 당시 당 대표였던 심 후보는 거센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조국 법무부 장관 인준에 손을 들어줬다. 더불어민주당과 손잡고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 이듬해 총선에서 20석 이상의 교섭단체를 만들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을 한 결과였다. 하지만 역풍은 거셌다. “진보 정당이 기성 정당의 구태를 뺨칠 정도”라고 반발하는 진성 당원들의 탈당이 속출했다. 그나마 기대했던 선거제 개편도 거대 양당이 위성정당을 만들면서 무용지물이 됐다. 결국 정의당은 6석의 미니 정당으로 주저앉았다. 진보의 위기라는 경고등이 켜졌다.
▷심 후보는 민주당을 ‘가짜 진보’, 국민의힘을 ‘극우 포퓰리즘’이라고 싸잡아 비판했다. 민주당과의 후보 단일화 여부에 대해선 “그런 질문 자체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거대 양당에 염증을 느끼는 제3지대 유권자들을 공략하겠다는 목표다. 하지만 보수-진보 진영 대결이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상황에서 제3지대의 문이 쉽게 열릴 수 있을까. 앞으로 심 후보가 내놓을 차별화된 비전과 정책이 진보의 부활을 알리는 의미 있는 득표로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10-15 “유럽은 원전이 필요하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가스 밸브’를 쥐고 유럽을 흔들고 있다. 러시아는 유럽 천연가스 소비량의 약 35%를 공급하는데 이달 들어 푸틴의 한마디에 가스 값이 10%씩 오르내리고 있다. 글로벌 공급난으로 가스 값이 1년 새 7배나 폭등하자 러시아의 입김이 세진 것이다. 유럽에선 공장이 멈추고, 서민들이 올겨울 추위에 떨어야 할 처지다. 유럽은 온실가스 배출이 적은 액화천연가스(LNG) 사용을 늘려 왔다. 이를 두고 미국 CNBC는 “유럽이 러시아의 인질이 됐다”고 한다.
▷푸틴 입만 쳐다보던 유럽이 원전을 들고 나왔다. 유럽 10개국 에너지장관들이 11일 “유럽인은 원자력발전이 필요하다”는 공동기고문을 여러 신문에 실었다. 다음 날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새로운 원전 기술에 약 1조4000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탄소중립’은 해야겠는데 신재생에너지는 아직 믿기 어렵고, LNG 수급은 불안한 게 유럽의 처지다. 영국과 독일은 겨울을 나려고 화석연료 발전을 다시 늘리고 있다. 탈(脫)탄소를 계속하려면 원전 외에 답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LNG 외에도 에너지 값이 폭등하고 있다. 국제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에 다가섰고, 석탄 값도 치솟았다. 코로나 회복세와 겨울철이 맞물려 수요는 급증한 데다 공급망마저 망가진 까닭이다. 친환경 흐름에 따라 채굴량도 급감했다. 에너지 값 상승은 물가 상승을 부추겨 경기 회복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서둘러 값싸고 안정적인 에너지 원료를 확보하는 게 각국 정부의 시급한 과제가 됐다.
▷에너지는 정치적 힘이다. 중국이 지난해 정치적 이유로 호주산 석탄 수입을 금지할 때만 해도 기세등등했다. 하지만 석탄발전이 어려워지면서 되레 급소를 찔린 셈이 됐다. 러시아는 인근 몰도바에 친서방 정부가 들어서자 가스 공급을 줄여 압박하고 있다. 심지어 푸틴 대통령은 2014년 유럽 18개국 정상에게 “가스를 끊겠다”는 협박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유럽이 러시아를 적으로 규정한 태도를 바꾸면 가스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했다. 적도 우군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에너지다.
▷유럽의 목표는 원전 자체가 아니라 다양한 에너지원이다. 유럽 장관들은 “원전은 전략적 차원에서 에너지 자율성을 확보하게 해준다”고 했다. 탈탄소로 가는 길에서 외부 입김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대안을 찾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한국도 남의 일이 아니다. 유럽처럼 전기를 수입하기도 어려운 처지여서 에너지원을 놓고 주변에 휘둘릴 위험이 훨씬 크다. 탄소 배출이 없는 ‘다른 에너지원’도 필요하다는 유럽의 지적을 우리도 새겨야 할 때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10-16 日 100세 정년
일본의 가전양판점 노지마는 지난해 7월 직원들이 65세 정년 이후에 1년 단위로 재계약하며 80세까지 비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정년 제도를 바꿨다. 하지만 “더 오래 일하고 싶다”는 요청이 쏟아지자 이번 달부터 아예 80세 상한을 없앴다. 환갑은 물론이고 칠순, 팔순, 구순 잔치를 사무실에서 회사 동료들과 함께 여는 일이 많아지게 됐다.
▷100세 이상 인구만 8만6000명이나 되는 초고령사회 일본은 100세 시대를 넘어 ‘100세 정년 시대’를 향하고 있다. 노지마 직원 3000여 명은 건강만 받쳐 준다면 100세가 돼도 하루 5시간, 주 4일 일하고 월 12만 엔(약 124만5000원)을 받는 비정규직 시니어 직원으로 매장에서 전자제품을 팔 수 있다. 올해 4월 세계 최대 지퍼 제조업체 YKK그룹이 65세 정년을 없애는 등 ‘정년 70세’를 권장하는 일본 정부의 정책에 호응하는 기업이 많아지고 있다.
▷50대까지 일하는 것도 과하다고 생각하는 파이어(FIRE)족들에게 100세 정년은 상상하기도 끔찍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자립, 조기 퇴직(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을 달성해 30, 40대에 퇴직하고 여생을 즐기기만 하면서 보내기에 ‘인생 100세’는 너무 길다는 게 문제다. 취업플랫폼 사람인의 여론조사에서 ‘정년 후에도 일하고 싶다’는 비율은 50대 이상(94.8%)에서 제일 높았지만 40대(89%), 30대(86%), 20대(78%) 등 모든 연령층이 정년 후에도 더 일하길 원했고 선호하는 은퇴 연령은 평균 72.5세였다.
▷퇴직 후 한국인의 주요 선택지 중 하나였던 자영업 사장님의 길도 점점 험난해지고 있다. 자영업은 망하거나 본인이 스스로 사업을 접기 전에는 은퇴가 없다는 게 최대 장점이지만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란 정책 리스크, 코로나19 사태라는 대형 천재지변을 겪으면서 취약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1998년 이후 최저로 떨어진 근로자 중 자영업 취업자 비율도 당분간 늘어나기 어렵다.
▷한국은 일본보다 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지만 기업의 자발적 참여를 통한 은퇴자의 고용 연장, 현재 60세인 법정 정년 연장 등이 충분히 논의되지 않고 있다. 극심한 취업난을 겪는 청년층 표심을 자극할까 봐 정부와 정치권이 본격적인 공론화를 꺼리기 때문이다. 이 중 고용연장은 은퇴와 국민연금 수령 개시 시점 사이에 끼어 있는 소득절벽의 충격을 줄이고, 국민연금 고갈 시기를 늦춰 미래세대 부담을 덜어줄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다. 내년 3월 선출될 차기 대통령에게 취임 초부터 맞닥뜨릴 고민거리가 될 것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0-18(월) 사라진 가을
기습적인 한파가 10월에 찾아왔다. 어제 서울 아침 최저기온은 1.3도로 64년 만에 가장 낮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 반팔을 입어야 할 정도로 무더웠기 때문에 지난 주말 부리나케 옷장 정리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다. 날은 추워도 가는 계절을 붙잡겠다며 코스모스와 억새가 핀 들판으로 나들이 행렬도 이어졌다. 다들 한 일은 달라도 마음은 비슷했을 것이다. ‘가을아, 너무 빨리 가지 말아주렴.’
▷이번 가을 한파의 원인은 한반도 상공에서 세력을 유지하던 아열대 고기압이 축소되고 그 빈 대기공간을 중국 북동부와 몽골에서 온 대륙 고기압이 채웠기 때문이다. 필리핀 동쪽 해상에서 발생한 태풍 곤파스가 베트남으로 이동하면서 밀어 올렸던 덥고 습한 기운이 태풍 소멸 이후 급격히 약화되면서 찬 공기 덩어리가 내려온 것이다. 기상청 관계자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바람도 숨을 쉰다”고 한다.
▷가을은 꽃을 피운 나무가 열매를 맺는 수확의 시기인 동시에 여름과 겨울 사이에 숨을 쉬는 계절이다. 하지만 전날보다 어제 아침 최저기온이 무려 11.6도가 떨어지자 “여름에서 겨울로 건너뛰어 가을이 사라졌다”는 한탄 섞인 얘기들이 나온다. 한 번 북쪽에서 내려온 추위는 일주일 정도 지속되기 때문에 수요일인 20일에 2차 한파가 몰려왔다가 24일에야 평년 기온으로 회복될 것으로 전망된다.
▷가을은 대개 9∼11월로 정의되지만, 기상청은 가을의 시작을 ‘하루 평균기온이 20도 미만으로 내려간 후 다시 올라가지 않는 첫날’로 정하고 있다. 그런데 지구온난화로 가을의 첫날이 점점 늦춰지고 있다. 최근 30년 동안 가을의 첫날은 9월 26일로 거의 10월이 다 돼서야 가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 기간 가을은 총 69일로 한국의 사계절 중 가장 짧았다. 그런데 올해는 10월에 이례적으로 아열대 고기압이 발달해 남부 일부 지역에서 최고기온이 30도를 넘더니 가을 한파까지 닥쳤다. 가을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사라져 역대 최고로 짧은 가을로 기록될 가능성마저 있다.
▷한국의 뚜렷한 사계절이 좋았던 건 각자의 색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날씨가 너무 덥거나 추워지면서 가을의 선물인 단풍도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가수 아이유는 ‘파란 하늘 바라보며 커다란 숨을 쉬니 드높은 하늘처럼 내 마음 편해지는’ 가을 아침이 커다란 기쁨이고 행복이라고 노래 불렀다. 사람도 계절도 극단으로 치닫지 않아야 마음의 여유를 갖고 지나온 길과 앞으로 갈 길을 헤아려볼 수 있다. 얄미운 가을 한파를 감내하며 일주일 후에 다시 찾아올 가을을 소중하게 맞자. 시월의 어느 멋진 가을날을….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10-19 중국 빈집 1억 채
중국부동산정보그룹(CRIC)은 매년 구이청(鬼城·귀신마을) 지수를 발표한다. 빈집이 많아 귀신마을로 불리는 곳들의 순위를 매긴다. 불과 5년 전까지 빈집이 절반 정도면 상위권에 오를 수 있었다. 요즘은 10채 중 7채는 빈집이어야 귀신마을 축에 속한다. 부동산 개발업체들이 너도나도 빚을 내 주택사업에 뛰어들다 보니 중국 빈집이 1억 채에 다가섰다. 귀신마을이 중국 경제의 시한폭탄이 됐다.
▷영국 연구기관 캐피털이코노믹스는 중국 미분양 아파트를 3000만 채로 추산했다. 이와 별도로 분양 후 사람이 살지 않는 아파트가 약 1억 채이다. 중국은 부동산 부문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담당하며 경제성장을 이끌어왔다. 미국이 지난 100년간 사용한 시멘트를 중국은 최근 3년간 집 짓는 데 썼다고 한다. 부동산에 의존한 성장 모델이 끝을 보이고 있다. 남은 건 빚과 빈집이다.
▷중국에서는 10년 전부터 도시 주택 5채 중 1채가 빈집이었다. 그런데도 빈집이 늘어나는 것은 투기 때문이다. 개발업체들은 대박을 꿈꾸며 빚으로 집을 짓고, 수요자는 일단 사놓고 오를 때까지 기다린다. 성장에만 목을 맨 정부는 부동산 과열을 방치했다. 결혼 문화와 부동산 투기를 연결짓기도 한다. 1자녀 정책으로 태어난 ‘소황제’(하나만 낳아 황제처럼 키운 응석받이)를 결혼시킬 때 집을 장만해 주려는 것이다. 양가 상견례 때 목에 힘을 주려면 집 한 채 정도는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빚더미 개발업체가 쓰러지면 돈을 빌려준 금융회사도 부실해진다. 도산 위기에 몰린 헝다(恒大)그룹의 부채만 약 355조 원이다. 공사가 중단되면 분양받은 사람들은 값을 치르고도 집을 넘겨받지 못한다. 건설업체와 은행, 가계가 연쇄적으로 무너졌던 한국 외환위기 당시와 비슷할 수 있다. 중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집값이 안정적이고 부실한 개발업체는 소수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넘쳐나는 빈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아직 답을 찾지 못한 것 같다.
▷집은 넘쳐나는데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은 더 어려워졌다. 대도시나 인근의 쓸 만한 빈집을 여러 채 가진 부유층들이 값이 오를 때까지 ‘버티기’를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빈집이 늘어도 도시 집값은 떨어지지 않고 있다. 반면 투기 바람을 타고 외곽에 마구잡이로 들어선 빈집들은 흉물로 방치되고 있다. 공사가 중단된 집들도 늘고 있는데, 노숙자들이 몰려들어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도 현재 방치된 빈집이 150만 채에 육박한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출산율이 떨어지고 인구 감소가 본격화하면 빈집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10-20 콜린 파월, 영원한 군인
2001년 3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김대중(DJ)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 자신을 ‘디스 맨’이라고 칭한 부시의 결례 못지않게 DJ를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회담에 배석했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이례적인 이석(離席)이었다. 부시가 대화 도중 갑자기 파월에게 눈짓을 하자 파월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파월은 전날 언론에 “새 행정부는 전임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이어받을 것’이라고 밝혔었다. 밖으로 나간 그는 기자들에게 “내가 앞서간 것 같다”며 자신의 발언을 번복했다. 부시 행정부 초기 네오콘(신보수주의) 강경파에 둘러싸여 있던 파월의 처지를 보여준 상징적 장면이었다.
▷자메이카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파월은 학군장교(ROTC)로 임관한 이래 군인으로서 승승장구했다. 냉전 말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거쳐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 때 역대 최연소이자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에 올랐다. 그는 1991년 걸프전쟁을 이끌며 무력 개입은 분명한 목표 아래 압도적인 전력을 사용해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는 ‘파월 독트린’을 보여줬다. 그 명성 덕에 공화당 대선 후보로 심심찮게 거론됐다. 아들 부시 행정부에서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으로서 최고위 외교관이 된 것은 그에겐 큰 시험대였다.
▷파월은 군 출신으로 국무장관이 된 조지 마셜, 나아가 대통령까지 오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꿈꿨을지도 모르지만 부시 행정부에선 외롭게 분투해야 했다.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강경한 대외정책에 맞서 온건 실용파로서 목소리를 냈지만 역부족일 때가 많았다. 때론 원치 않는 ‘총대’도 메야 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전 유엔 연설은 그의 이력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됐다. 슬라이드까지 동원해 후세인 정권이 비밀리에 대량살상무기(WMD)를 개발해 왔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정보였다. 훗날 그는 “그 일로 고통스럽다”고 털어놨다.
▷파월은 공직을 떠난 뒤 당파와 이념에 얽매이지 않았다. 특히 군을 정치에 끌어들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겐 넌더리를 냈다. 지난해 6월 마크 밀리 합참의장은 엉겁결에 군복을 입은 채로 트럼프의 정치 이벤트에 등장해 구설수에 오른 뒤 군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사임해야 할까요?” 파월은 단호했다. “제길, 안 돼. 그 자리를 절대 받지 말라고 했건만. 트럼프는 완전 미치광이야.” 밀리는 사표를 내는 대신 ‘있어선 안 될 자리에 있었던 실수’에 대해 공개 사과했다. 18일 파월의 별세에 애도와 헌사가 넘치지만 누구보다 마음이 무거울 이들은 ‘영원한 선배’를 떠나보내는 군인들일 것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10-21 유류세 인하
/뉴시스
‘배럴당 100달러, L당 2000원.’ 요즘 기름값 공포를 나타내는 수치다. 국제유가는 1년 새 2배로 치솟으며 배럴당 90달러에 다가서고 있다. 국내 주유소 휘발유값도 서울에선 L당 평균 1800원을 돌파했다. 코로나 회복세와 북반구 겨울철이 겹쳐 기름 수요는 급증했는데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기름값이 서민 생계와 물가를 압박하자 정부가 유류세 인하를 검토하고 나섰다.
▷휘발유값에서 유류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48%를 넘는다. 여기에는 교통에너지환경세 교육세 주행세 등이 포함된다. 부가세까지 더하면 절반 이상이 세금이다. 정부가 가장 최근에 유류세를 내린 것은 2018년 11월이다. 인하율은 15%였다. 이번에도 같은 방식을 적용하면 휘발유값이 L당 123원 하락한다. 지난해 휘발유 자동차 1대당 1102L를 소비했다. 평소 집에 세워두는 차까지 평균을 낸 수치인데, 123원 인하를 적용하면 연간 13만5000원을 아낄 수 있다. 매일 자동차로 출퇴근하거나 영업에도 쓰는 경우에는 절감액이 훨씬 늘어나게 된다.
▷유류세 인하가 그대로 기름값에 반영되지는 않는다. 주유소 입장에선 이미 높은 값에 들여놓은 재고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 판매량이 적은 읍면 지역 주유소들은 재고를 소진할 때까지 기름값 인하 폭이 작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이유로 과거 3차례 유류세를 내렸을 때 주유소별 가격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 정부는 10일 이내에 유류세 인하 방안을 내놓기로 했다. 내달이면 기름값이 싼 주유소 앞에 차들이 잔뜩 늘어설 것 같다.
▷유류세 인하 방식은 기름을 많이 쓸수록 혜택이 커진다. 경차나 소형차를 타는 서민보다 중대형차를 모는 부유층이 기름값 인하 효과를 더 누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저소득층만을 대상으로 유가 환급금을 주자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기획재정부는 20일 국정감사에서 유가환급금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지급 대상을 가려내기 어렵고, 새로 예산을 편성해야 하는 등 걸림돌이 많다는 이유다.
▷미국 기상당국은 올겨울 혹독한 추위를 예고했다. 적도 저수온 현상(라니냐)과 북극 한파가 겹쳐 북반구가 꽁꽁 얼어붙는다는 전망이다. 북반구는 인구가 밀집해 난방용 기름 수요가 많은 곳이다. 이 때문에 일부 원유 선물 투자자들은 내년에 배럴당 200달러를 넘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코로나 사태 이후 망가진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도 유가 불안 요인이다. 국제유가가 계속 오르면 유류세 인하 효과는 사라진다. 주유소 기름값뿐 아니라 전반적인 물가도 급등할 수 있다. 서민들에게는 이래저래 혹독한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10-22 콩글리시
미국 대학에 다니는 한국인 유학생들은 장학금 받기가 어렵다. 집 주소가 ‘캐슬’ ‘빌라’ 아니면 ‘팰리스’여서 거부의 자제들로 오해받기 때문이다. 엉터리 영어인 콩글리시라도 써야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의 허영심을 꼬집은 우스갯소리다.
▷콩글리시를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이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 씨다. 그는 저서 ‘가짜 영어사전’(2000년)에서 콩글리시를 “반쪽짜리 영어, 쭉정이 영어”라고 했다. 콩글리시엔 일본식 영어(Japlish)인 ‘네고’ ‘아파트’ ‘스킨십’ ‘오토바이’와 한국에서 만든 ‘핸드폰’ ‘오피스텔’ ‘아이쇼핑’ ‘애프터서비스’가 섞여 있다. 우리끼린 통하지만 외국인은 모른다. ‘노마크 찬스’는 ‘빵점짜리 기회’, ‘샐러리맨’은 ‘셀러리 파는 사람’, ‘백댄서’는 ‘곱사춤’이라 이해한단다.
▷그렇다고 콩글리시를 피해가기는 쉽지 않다. ‘SNS’ ‘핸들’ ‘팬티’ ‘러닝머신’처럼 이미 입에 붙어버린 단어들이 너무 많다.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는 최근 한국의 콩글리시 문화를 조명한 기사에서 한국 정부가 한글날을 맞아 바른 우리말 사용을 촉구하면서도 정부 역시 ‘위드 코로나’ ‘언택트’ 같은 콩글리시를 많이 쓴다고 지적했다.
▷국내 전자회사가 ‘디지털 익사이팅’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가 콩글리시라고 비난받은 적이 있다. 문법적으로 ‘디지털리 익사이팅’이나 ‘디지털 익사이트먼트’라 해야 옳다는 것이다. 문법 파괴에 엄격한 우리와 달리 영어권에선 창의적 표현이라며 관대한 편이다. 애플이 ‘Think Differently’가 아니라 ‘Think Different’라고 했을 때 세상에 없는 걸 생각해내는 애플 정신을 구현한 슬로건이라는 호평이 나왔다. 앞서 소개한 더타임스도 콩글리시 같은 혁신이 언어의 성장과 발전의 필수 요소라는 전문가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소개했다.
▷언어는 유기적 존재다. 한때 웃음거리였던 콩글리시가 한류 덕에 영어권에서도 ‘쿨’한 표현으로 각광받는다.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PC방’ ‘스킨십’ 같은 콩글리시와 함께 ‘콩글리시’도 등재됐다. 21년 전 안정효 씨가 싸움 거는 줄로 오해받는다며 ‘파이팅’이란 말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 요즘은 외국인들이 웃으며 ‘파이팅’을 외친다. 엉터리 언어의 남용도 경계해야 하지만 유연할 필요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는 언어가 ‘브로큰 잉글리시(엉터리 영어)’라는 말이 있다. 현대 영어엔 앵글로색슨어에서 내려온 표현은 20%도 안 남아 있다. 영어의 풍부한 어휘는 중국의 칭글리시, 싱가포르의 싱글리시, 뉴질랜드의 키위 영어, 그리고 콩글리시까지 포용한 덕분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0-23 연필 깎는 日공무원들
31일 치러질 일본 중의원 총선을 앞두고 군마현 오타시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유권자들이 투표할 때 사용한 연필을 가져가도록 했다. 이를 위해 시 당국은 유권자 수에 맞춰 연필 11만3000개를 주문했다. 시청 공무원들은 20일에 실시된 사전 선거에 쓰일 연필 1만 개를 깎았고, 31일까지 연필 10만3000개를 더 깎아야 한다. 바쁜 업무 시간에 공무원들이 모여 앉아 자동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은 뒤 1개씩 보호 캡을 씌우는 진풍경이 TV를 통해 알려지자 “최첨단 시대에 행정 인력과 예산 낭비”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연필 구입에는 669만 엔(약 6800만 원)이 들었다.
▷시 당국은 이번 조치가 과거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올해 4월 시장 선거에선 유권자가 사용한 연필 1만 개를 하나씩 소독하느라 행정 인력이 더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엔 유권자들이 사용한 연필을 가져가도록 행정 개선을 했다는 것. 근본적 처방이 없으니 ‘오십보백보’다.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일본의 독특한 투표 방식 때문이다. 일본 공직선거법 46조는 ‘선거인은 투표용지에 후보자 1명의 이름을 자필로 써서 투표함에 넣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래서 후보자 이름을 직접 써야 한다. 볼펜 등을 쓰면 투표용지에 번질 우려가 있어서 연필을 주로 사용한다.
▷우리나라는 후보자나 정당 칸에 도장만 찍는 방식이어서 간단하지만 일본에선 철자가 한 획이라도 틀리면 무효 처리된다. 투표 방식이 어려우니 일본 정치인 이름 중에서 쓰기 쉬운 이치로(一朗), 다로(太郞) 등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래서 일본 선거에선 정책 공약보다 후보자 이름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한다.
▷일본 관공서나 기업에서 도장을 사용하는 문화가 뿌리 깊은데도 유독 투표할 때만 도장을 사용 못하게 한 것도 특이하다. 유권자들이 직접 이름을 써야 하니 지나치게 번거롭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한 일본 정부도 1994년 공직선거법을 개정해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 ‘기호식’ 투표를 허용했지만 실제로는 도입되지 못했다. 한번 굳어진 관성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탓일 게다.
▷일본의 ‘아날로그’ 행정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닐 정도다. 도쿄 올림픽 와중에 신속해야 할 코로나19 확진자 집계도 일일이 팩스로 처리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빈축을 샀다. 중의원 전체 465석을 새로 뽑는 이번 선거에서 과반인 233석 이상의 의석을 얻으면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는 재신임을 받게 된다. 기시다 내각이 출범하면 이런 낡은 구습부터 손질해야 하지 않을까.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10-25(월) 골드워터 규칙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 측과 국민의힘 경선 후보인 원희룡 전 제주지사가 ‘소시오패스(sociopath·반사회적 인격 장애)’ 발언을 놓고 격돌했다. 원 전 지사의 아내인 정신과 전문의 강윤형 씨가 유튜브에 출연해 이 후보에 대해 “자기편이 아니면 아무렇게 대해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듯 답변하는 것은 소시오패스의 전형”이라고 말한 것이 불씨가 됐다.
▷23일 원 전 지사와 함께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이 후보 측 현근택 변호사는 “강 씨 발언은 공직선거법상 후보자 비방과 허위사실 공표에 해당한다”며 공식 사과를 촉구했다. 이에 맞서 원 전 지사는 “전문적 소견에 비춰 의견을 이야기한 것인데 사과할 일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감정이 격해지자 생방송 도중 자리를 뜨는 ‘방송사고’까지 터졌다.
▷방송 이후에도 장외 공방은 계속됐다. 여당 측은 “문제의 발언은 명백한 의사윤리 위반”이라고 집중 공세를 폈고, 원 전 지사는 “대통령 후보의 정신 건강은 명백한 ‘공적 영역’”이라고 받아쳤다. 일반인이 이런 발언을 했다면 별문제가 안 됐을 텐데 정신과 전문의의 의견이었다는 사실이 민감했던 모양이다.
▷1964년 미국 정신의학과 전문의들이 한 잡지사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 배리 골드워터에 대해 “정신 상태가 대통령직 수행에 적절하지 못하다”고 답변한 것이 논란이 됐다. 골드워터는 잡지사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고, 당시 잡지사 편집장은 보상금으로 7만5000달러를 지불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정신의학회는 전문의가 직접 진단하지 않은 공인(公人)의 정신 상태에 대한 의견을 언급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라고 선언했다. 전문의가 직접 진료를 했고, 당사자의 동의가 있는 경우에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른바 ‘골드워터 규칙’이다. 우리나라 정신의학회도 회원들에게 이 같은 골드워터 규칙을 준수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우선 평범한 일반인이 아닌 공인이라면 개인의 프라이버시만 강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타인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인에 대해선 건강 문제도 경고해야 한다는 ‘경고의 의무(duty to warn)’와 충돌할 소지가 있다. 그래서 전문가들의 의견 제시를 획일적으로 막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의 정신·심리학 등 전문가들도 2017년 콘퍼런스를 열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수많은 사람의 생사가 걸린 대통령직이라는 권력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전문가의 직업윤리와 엄중한 대통령직의 무게 사이 적절한 균형점을 모색해야 할 때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10-26 3개의 녹취록
‘대장동 게이트’에서 세 번째 녹취록이 등장했다. 대장동 개발사업이 시작되기 직전인 2015년 2월 6일 당시 성남도시개발공사 황무성 사장과 유한기 개발본부장이 나눴던 대화가 녹음된 것이다. 하급자인 유 본부장은 “이미 끝난 걸 미련을 그렇게 가지세요”라고 압박하다가 당시 이재명 성남시장, 정진상 성남시 정책실장, 유동규 성남도개공 기획본부장 등까지 거론하며 기어이 사표를 받아냈다. 민간 사업자에게 유리하도록 사업을 진행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황 사장을 몰아내는 장면이 녹취록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대장동 게이트의 문을 연 것은 ‘정영학 녹취록’이었다. 대장동 패밀리 중 한 명인 정영학 회계사가 2019∼2020년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 씨, 남욱 변호사, 유동규 씨와 대화한 것을 녹음했다가 지난달 말 검찰에 제출한 것이다. 김 씨가 유 씨에게 700억 원 지급을 약속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밝혀지면서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1200억 원대의 배당금을 가져간 천화동인 1호의 실소유주 논란을 불러일으킨 김 씨의 “그분” 발언, 로비의 실체를 언급한 “실탄은 350억 원”이라는 발언도 녹취록에 담겨 있다.
▷대장동 사업이 시작되기 전인 2013∼2014년에 벌어진 일은 남 변호사가 녹음해 검찰에 제출한 ‘남욱 녹취록’에 담겨 있다. 유 씨는 대장동 개발 방식이 정해지기 전부터 남 변호사에게 민관합동 개발 방식을 언급하며 “민간 사업자로 선정되도록 해 주겠다”, “니네 마음대로 다 해라”라고 특혜를 약속했다. 그 대가로 유 씨는 3억여 원을 받았다. 검찰이 남 변호사 녹취록 등을 바탕으로 밝혀내 유 씨 공소장에 적은 혐의 내용이다.
▷대장동 사건 외에도 2013년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내란선동 사건에서는 지하혁명조직 내부고발자가 제출한 녹취파일과 녹취록 32개가 스모킹건(결정적 증거)이 됐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에서는 정호성 전 대통령부속비서관의 휴대전화에서 발견된 녹음파일 200여 개가 핵심 증거가 됐다. 미국에서는 워터게이트 당시 대통령 집무실에서 대화한 내용이 녹음된 테이프를 통해 닉슨 대통령이 사건을 은폐하려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하야로 이어졌다.
▷3개의 녹취록을 통해 대장동 사업이 시작되기 2년여 전부터 진행된 유 씨와 민간 사업자 간의 유착, 사업 본격화 직전에 진행된 사전 정지 작업, 사업이 진행된 이후 수익 배분 및 로비의 실체에 대한 윤곽은 드러났다. 하지만 녹취록이 만능열쇠는 아니다. 수사팀은 녹취록에 녹아 있는 증거들을 가려내고 보완해서 로비와 특혜의 전모를 밝히는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0-27 증오 부추긴 페북
페이스북 이용자는 하루 평균 14번 정도 접속한다고 한다. 이용자들이 페이스북에 빠져드는 것은 게시물을 올리거나 ‘좋아요’ ‘댓글’이 달릴 경우 이른바 ‘쾌락 호르몬’이라 불리는 도파민이 신체에 분비되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페이스북 부사장을 지낸 차마트 팔리하피티야는 페이스북을 “도파민에 의해 작동하는 단기 피드백의 순환 고리”라고 했다.
▷페이스북 전 직원인 프랜시스 하우건은 25일 영국 의회 청문회에서 “페이스북은 사람을 극단으로 몰아넣고 증오를 부채질한다”며 “중도 좌파는 극좌파로, 중도 우파는 극우파가 되도록 부추긴다”고 증언했다.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이 이용자에게 더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콘텐츠를 노출시켜 극단주의를 키운 반면 이를 차단할 안전 조치엔 소홀했다는 것이다. 그는 페이스북이 의도적으로 유명인의 인종 혐오 발언이나 가짜 뉴스를 지우지 않았고, 자회사 인스타그램도 청소년 자살률을 높이는 유해 게시물을 방치했다고 폭로했다.
▷사람들은 본인의 선택에 따라 페이스북을 이용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치밀하게 계산된 알고리즘이 골라주는 콘텐츠에 주로 노출되고 있다. 페이스북은 친밀도, 시의성, 가중치 등을 고려해 추천 콘텐츠를 이용자들의 눈에 쉽게 띄는 페이지 상단에 노출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런 알고리즘이 클릭 수를 높여 수익을 극대화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증오와 대립, 그리고 분열을 일으키는 극단적인 내용이 잘 걸러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페이스북은 2019년 인도에서 가상의 21세 여성 계정을 만들어 3주간 알고리즘 실험을 했다. 그 결과 추천 콘텐츠에 참수당한 시체나 인도의 파키스탄 공습 등 폭력적인 내용, 가짜 뉴스가 다수 포함됐다. 당시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던 한 직원은 “3주 동안 죽은 사람의 사진을 평생 본 것보다 많이 봤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런 내용은 내부 문건을 확보한 외신 보도를 통해서 23일 공개됐다. 뉴욕타임스(NYT)는 “페이스북이 이용자들에게 큰 악영향을 미친다는 근거”라고 지적했다.
▷미국 하원에서 최근 ‘악성 알고리즘 방지법’이 발의된 것도 이런 위기의식 때문일 것이다. 알고리즘이 추천한 콘텐츠로 물리적, 정신적 피해를 입으면 플랫폼이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는데 특히 페이스북의 폐해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이 컸다. 영국 의회도 비슷한 규제 검토에 들어갔다. 페이스북은 “알고리즘을 결코 악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제는 이런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기업 윤리를 저버린 회사는 결국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10-28 노태우 전 대통령 국가장
세상을 떠난 역대 대통령은 7명인데 장례 형식은 네 가지였다. 이승만 윤보선 대통령은 가족장을 지냈고 최규하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장,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이 국장, 김영삼 대통령은 국가장을 치렀다. 26일 서거한 노태우 대통령 장례도 어제 국무회의에서 국가장으로 의결했다.
▷유족이 가족장을 원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현직 대통령은 국장, 전직은 국민장이 관례였다. 국장은 9일장에 영결식이 공휴일로 지정되고 전액 국고로 지원한다. 반면 국민장은 7일장이고 영결식은 공휴일이 아니며 비용도 일부만 지원해 국장보다는 예우의 수준이 낮다.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은 관례에 따라 국민장으로 치렀는데, 3개월 후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는 같은 전직임에도 고인의 공로에 비추어 최고 예우가 필요하다는 유족의 요구를 수용해 전직 대통령으로는 유일하게 국장을 지냈다.
▷이후 국장과 국민장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2014년 법을 바꿔 국장과 국민장을 ‘국가장’으로 통일했다. 국가장은 최대 5일장이며 공휴일 지정은 없고 조문객의 식사비 노제 삼우제 비용 등을 제외한 전액을 국고에서 지원한다. 2015년 서거한 김영삼 대통령 장례가 국가장으로 엄수된 첫 사례다. 의회주의자였던 고인은 국회의사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하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장례비용은 15억8864만2240원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내란죄로 실형을 선고받아 전직 대통령의 예우가 박탈된 상태이고 국립묘지 안장도 불가능하지만 국가장 결격 사유는 없다. 정부는 5·18 희생자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검소한 장례식을 당부하고 떠난 고인을 법이 허용하는 최대치인 5일간의 국가장으로 예우하기로 정했다. 여당 내에선 ‘전두환 국가장 배제법’을 발의하면서도 고인에 대해서는 ‘큰 과오와 작은 공’을 함께 인정하는 분위기다. 유족은 장지로 고인이 대통령 재임 시 조성한 통일동산이 있는 경기 파주를 원하고 있다.
▷미국에선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을 ‘고인과 국가의 마지막 대화’라고 한다. 역대 대통령들이 드물게 한자리에 모여 화합의 메시지를 전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 전현직 대통령들은 다양한 이유로 모이기 어렵고, 서로 마주쳐도 서먹한 인사를 주고받는다. 박근혜 대통령은 재임 시절 김영삼 대통령의 영결식에 불참해 ‘대를 이은 불화 탓’이란 뒷말을 낳았다. 문재인 대통령도 노태우 대통령을 5일장으로 예우하면서도 조문 가지는 않았다. 미국처럼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이 고인과 국가의 마지막 대화가 되기에는 아직 아물지 않은 현대사의 상처들이 많은 것 같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0-29 미국은 ‘大사직’ 시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1호 공약이 최저임금 인상이다. 시간당 7.2달러인 연방 최저임금을 2025년 15달러로 올리는 것이 목표다. 그런데 요즘은 15달러를 넘게 줘도 일할 사람을 찾지 못해 애태우는 고용주들이 많다. 코로나19로 폐쇄했던 영업장들이 다시 문을 열고 있지만 돌아오려는 사람들이 크게 줄어든 탓이다.
▷코로나가 회복세를 보이며 미국의 월간 채용 공고 건수가 7월부터 1000만 건을 넘어섰다. 그런데 자발적 퇴사자 수도 매월 400만 명으로 증가 추세다. 스쿨버스 운전사를 구하지 못해 재택수업을 하고, 환경미화원이 없어 쓰레기가 쌓이고 있다. 기업에선 신규 채용과 고용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화장품 업체 세포라는 직원들에게 전 제품을 30% 할인해준다. 고용 유지를 조건으로 특별 보너스를 지급하는 식료품 체인점도 있다. 직원이 부족해 일부 매장이 수, 목요일 휴업 중인 스타벅스는 내년부터 시간당 임금을 17달러로 3달러 올리기로 했다.
▷이 모든 게 코로나 때문이다. 미국 인구조사국이 지난달 일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더니 465만 명이 “코로나 감염 후 회복이 덜 돼서” “코로나에 걸린 가족을 돌봐야 해서”라고 답했다. 코로나로 건강염려증이 생긴 베이비붐 세대가 조기 은퇴한 영향도 크다. 코로나 이후 올 8월까지 ‘초과 은퇴자’가 300만 명이 넘는다. 업종별로는 감염 위험이 덜한 제조업과 금융업은 퇴사율이 낮아진 데 비해 대면 업무가 많은 헬스케어와 코로나로 업무량이 폭증한 기술 분야는 퇴사율이 높아졌다. 30∼45세 퇴사율이 특히 높다. 코로나로 신입사원 직무교육이 어려워진 기업들 간에 경력사원 스카우트전이 치열하기 때문이다(하버드비즈니스리뷰).
▷두둑한 실업수당이 근로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초래했다는 분석도 있다. 미 정부는 코로나 이후 지난달까지 실직자들에게 주당 300달러를 추가 지급했다. 주 정부가 매주 지급하는 270∼570달러 실업수당에 300달러를 더하면 일하지 않고도 매월 2280∼3480달러(약 266만∼407만 원)를 챙길 수 있다. 특히 팬데믹 기간에 교외 지역으로 이사한 사람들에겐 매일 아침 고생스러운 출근을 선택할 유인이 적어진 셈이다.
▷코로나가 끝나도 구인난은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팬데믹으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갑자기 해고되고, 번아웃 상태로 내몰리면서 인생관과 직업윤리가 달라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대사직(Great Resignation)’ 시대로 불리는 미국의 구인전쟁이 미국 사회를 어떻게 바꿔 놓을지 궁금하다.
10-30(토) 부스터샷의 효과
“얀센은 한 번만 맞으면 된다더니….” “화이자 2차까지 맞았는데 부스터샷 예약하라는 문자 받았어요.” 코로나19 백신 접종 완료율이 70%를 돌파하자 이번엔 추가접종(부스터샷) 준비로 분주하다. 이달 12일 고위험군을 대상으로 시작된 부스터샷이 다음 달부터는 얀센 접종자와 50대 이상, 18∼49세 기저질환자로 확대된다.
▷부스터샷을 하는 이유는 백신의 약발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접종 후 3∼6개월이 지나면 중증화 예방 효과는 여전해도 감염을 막는 효과는 줄어든다. 미국에선 델타변이가 우세종이 된 후 백신 감염 예방 효과가 91%에서 66%로 급락했다. 올 2월 말부터 백신을 맞은 요양시설에서는 돌파감염이 속출하고 있다. 경남 창원의 한 병원에서는 돌파감염으로 추정되는 100여 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얀센의 돌파감염률(0.267%)이 가장 높고 모더나(0.005%)가 가장 낮다. 얀센 접종자 전원을 대상으로 부스터샷을 하는 이유도 ‘물백신’이라 불릴 정도로 돌파감염률이 높아서다.
▷부스터샷은 대개 1, 2차 접종 때와 같은 백신을 쓰지만 교차접종도 효과와 안전성 면에서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접종 후 이상 반응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경우 1차보다는 강도가 강하고 2차보다는 약했다. 18∼25세 남성은 화이자나 모더나 같은 mRNA 백신 접종 후 심근염, 18∼49세 여성은 얀센 접종 후 혈전증을 앓는 사례가 있지만 극히 드물다. 방역 당국은 mRNA를 기본으로 하되 백신 종류가 2종을 넘지 않도록 할 계획이다. 얀센 접종자는 mRNA 백신과 얀센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미국 국립보건원에 따르면 얀센 접종자는 부스터샷으로 모더나를 맞을 때 항체 수준이 76배, 화이자는 35배 높아졌고, 같은 얀센으로 맞으면 4배 증가하는 데 그쳤다.
▷부스터샷을 하는 나라는 40개국이 넘는다. 올해 7월 가장 먼저 시작한 이스라엘은 12세 이상이 접종 대상인데 부스터샷을 맞지 않으면 공공장소 출입을 제한한다. 지난달부터 65세 이상 고령층을 대상으로 시행 중인 미국은 접종 대상을 40세 이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일본은 접종 완료 후 8개월이 지난 전원에게 부스터샷을 하기로 했다.
▷부스터샷의 효과는 화이자의 경우 감염 예방 효과는 11배, 중증화 예방 효과는 19.5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감염을 완벽히 막지는 못한다. 일찌감치 부스터샷을 개시한 영국과 독일에선 요즘도 하루 3만∼4만 명 안팎의 확진자가 쏟아지고 있다. 백신을 두 번 세 번 맞아도 거리 두기와 마스크 쓰기 없이는 일상 회복이 어렵다는 뜻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