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진단]
◆ 고수석 편1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
■ 2017.08.25 북한의 대남비서傳
(1) 대남비서만 '3수'한 김중린
북한의 대남비서는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자리다. 한 때는 당 작전부(대남 공작원 훈련 및 요인 암살), 35호실(엘리트 간첩 양성), 당 대외연락부(비밀지하조직 구축 및 간첩 관리), 통일전선부(대남공작 및 남북대화 등) 등 4개 기구를 총괄할 정도로 막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초라해졌다. 현재는 대남비서가 통일전선부만 관장하고, 나머지 조직은 2009년 총참모부 정찰국과 함께 총참모부 정찰총국으로 확대 개편됐다. 김영철 대남비서가 개편된 정찰총국장으로 있다가 김양건 대남비서가 2015년 12월 사망한 이후 현재 자리로 옮겼다.
북한은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를 마친 뒤 비서국을 없애고 정무국을 신설했다. 그리고 비서 대신에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호칭하고 있다. 이 연재는 네티즌들에게 익숙한 대남비서로 표기하고자 한다. 출발은 1972년 7·4공동성명 전후로 남북 접촉이 시작될 당시 대남비서였던 김중린부터 시작한다. 그 이전 이효순-허봉학은 남북 접촉이 없었을뿐더러 그들의 대한 자료도 거의 전무하다. 이번 [대남비서傳]을 통해 남북관계사를 조명하고 문재인 정부에서 과거와 차원이 다른 남북관계를 기대해 본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비밀협상
김정일 지시로 아웅산 테러 지휘
하지만 희생양으로 좌천되기도
재일동포 북송으로 김일성에게 인정받아
노동당에서 오랫동안 중요직책 거쳐
김정은 7차 당대회에서 그의 공로 치하
김중린(1923~2010)은 대남비서를 3차례 역임했다. 첫 번째는 69년 4월~76년 9월, 두 번째는 78년 1월~83년 12월, 세 번째는 88년 11월~90년 1월이다. 대략 13년 정도를 맡았다. 북한의 대남비서 가운데 최장수다. 그는 대남 강경파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웅산 테러 사건을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지휘를 했다.
/김중린
김중린은 자강도 우시군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해방 이후 46년 평안북도 벽동군 당위원회 부장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우시군은 52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이전까지 벽동군 우시면으로 있다가 54년 자강도에 편입됐다. 김중린은 고향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52년 노동당 지도원으로 들어가면서 중요 직책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했다. 54년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윈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됐으며 제네바의 국제적십자회에 북한대표로 참석했다. 김중린이 김일성의 ‘눈도장’에 찍히는 것은 재일동포의 북한 귀환에 공을 세우면서부터다. 59년 2월 제네바에서 열린 북·일 적십자회담의 북한 대표로 참석해 성과를 올린 것이다. 김중린은 그 해 12월 재일동포 975명을 소련 선박 클리리온호와 토보르스크호에 태워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 청진항으로 데려왔다.
이후 김중린은 승진의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는 69년 4월 대남공작 실패 등의 이유로 숙청된 허봉학을 대신해 항일 빨치산 장군 출신이 아닌데도 대남비서로 전격 발탁됐다. 냉전 시절에 항일 빨치산 출신이 아닌 사람이 대남비서를 맡기 어려웠다. 앞선 이효순-허봉학은 모두 항일 빨치산 출신들이었다. 김중린은 급기야 70년 11월 제5차 노동당 대회에서 권력 서열 10위로 급부상했다. 10년 전 제4차 노동당 대회의 87위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성장이었다.
김중린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2년 5월 평양을 방문해 그를 만나면서다. 두 사람은 비밀협상을 가졌으며 이후락은 김일성과 그의 동생 김영주 당 조직지도부장을 만났고 두 달 뒤에 7·4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김중린이 김일성과 김영주를 도와 실무작업을 진행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보좌단이 72년 11월 김일성을 방문한 뒤 북한 내각 청사에서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요인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왼쪽부터 한응식, 김덕현, 강인덕 국장, 김중린, 최규하 특별보좌관, 김일, 이후락 부장, 김일성, 장기영 부총리, 박성철, 정홍진 국장, 유장식, 이경석. [중앙포토]
승승장구하던 김중린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김정일이 74년 후계자로 확정되면서 모든 권력기관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했다. 김정일은 76년 6월 대남 공작부문을 대상으로 집중 사찰을 시작했다. 사찰은 5개월간 지속됐고 김정일은 진행 상황을 하나씩 확인했다. 대남사업을 총괄했던 김중린도 자기비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김정일은 “50년대 이래의 대남공작은 한 마디로 0점”이라고 질책했다. 아울러 김정일은 “과거의 공작 활동은 모두 백지화해야 한다. 새로운 전략 전술적 방침을 가지고 새로운 각오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몰아붙였다.
사찰은 다음 해 4월까지 계속됐고 그 결과 김중린 76년 9월 노동당 산하단체인 ‘남조선연구소’의 소장으로 좌천됐다. 김정일이 대남서기를 겸하며 대남공작기관을 지휘했다. 남조선연구소에서 찌그려져 있던 김중린은 78년 1월 다시 대남비서에 복귀했다. 북한은 사람을 한 번 버렸다가 능력에 따라 복귀시키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 대남비서 시절에는 ‘악역’을 맡았다. 그 악역은 83년 10월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이었다. 서석준 부총리 등 한국 각료 4명을 포함해 17명이 사망해 세계를 놀라게 한 참극이었다. 아웅산 테러는 감독 김정일, 각본 김중린, 기술감독 김격식 등이 진행됐다. 김격식은 2010년 연평도 포격을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로 당시 총참모부 정찰국 소속으로 테러를 직접 지휘했다.
김중린은 아웅산 테러 사건을 또 다시 ‘물’을 먹었다. 북한은 입을 다문 채 늘 하던 대로 오리발을 내밀었지만 체포된 공작원이 범행을 털어놓으면서 탄로가 났다. 버마 정부가 테러는 ‘북한 부대에 의한 범행’이라고 발표했고 69개국이 북한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 내부에서도 아웅산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는 것이 퍼지면서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했다.
김중린은 또 다시 정치적 시련을 겪어야 했다. 83년 12월 대남비서를 허담(1929~1991)에게 물려주었으며 84년 3월 정치국 위원에서 후보위원으로 강등됐다. 85년 1월에는 정치국 후보위원마저 탈락됐다. 김정일의 미움이 그 만큼 컸다. 김정일은 아웅산 테러범들이 붙잡혀 범행을 털어놓는 바람에 국제적 망신을 당한 책임을 김중린에게 돌렸던 것이다.
그러나 김중린은 86년 8월 조선중앙통신사 사장으로 복귀했다. 조금 엉뚱했던 임명이었다. 김중린이 대남비서를 ‘3수’를 하게 된 것은 88년 11월이다. 이번에는 고작 1년 2개월 정도였다. 그 이후 그는 90년 1월부터 당 근로단체비서를 맡았다. 근로단체비서는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조선직업총동맹(직총)·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 등을 지도한다. 노동당 내에서 비중이 떨어지는 부서다. 김중린이 근로단체비서로 언제까지 있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당에서 중요직책을 맡았던 그는 2010년 4월 28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노동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 허담, 연형묵 등과 함께 김중린을 언급했다.
(2) 김정일의 '꾀돌이' 허담
김중린 대남비서가 83년 10월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물러난 뒤 그 뒤를 이은 사람은 ‘꾀돌이’ 허담(1929~1991)이다. 그는 머리가 영리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비위를 맞추는 데 따를 사람이 없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에 따르면 허담은 김정일의 뜻에 맞게 행동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무조건 헐뜯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머리가 영리해 김정일의 비위를 잘 맞춰
부인이 김일성과 사촌 관계로 승승장구
70~80년대 북한 외교를 대표한 주역
아웅산 테러 사건 이후 대남비서 맡아
85년 서울 방문해 전두환 대통령 예방
김영삼 ·문익환 ·임수경 등도 만나
▲허남 대남비서(사진 왼쪽)가 85년 5월 김정일이 경제사업에 대한 지도를 실속있게 하며 인민생활을 빨리 향상시키라는 지시를 메모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허담 대남비서, 연형묵 비서, 강성산 총리, 김정일. [사진 우리의 지도자]
허담은 김일성의 삼촌인 김형록의 딸 김정숙과 결혼했다. 그의 손윗동서는 양형섭(92)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다. 양형섭의 부인은 김정숙의 언니 김신숙이다. 따라서 김신숙․ 김정숙 자매는 김일성과 사촌 관계가 된다. 허담은 이런 배경 속에서 김일성-김정일 시대에 ‘슈퍼 파워’를 가졌다. 장성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허담은 70~80년대 북한 외교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48년 모스크바 대학을 졸업한 이후 외무성 참사로 외교업무를 시작했다. 55년 8월부터 노동당 지도원, 과장으로 거쳐 32살이 되던 61년 외무성 부상으로 승진했다. 초고속 승진이다. 그리고 69년 외무성 제1부상이 됐고 70년에 북한 외교의 수장인 외무상에 올랐다.
허담은 외무상에 있을 때 영국의 정보기관을 본떠서 북한에도 정보기관을 설치하자고 김정일에게 제안했다. 정보기관의 목적은 김일성 유일사상체계와 김정일 후계체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사회 각 부문에 걸쳐 주요 정보를 세밀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김정일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73년 5월 사회안전부 정치보위국을 하나의 국가기관으로 독립시켜 국가정치보위부(현 국가보위성)를 신설했다.
허담은 김정일을 보좌하는데 누구보다 정성을 다했다. 김정일을 찬양하는 회상기도 남겼다. 유고로 남긴 회상기는 그의 사후에 『김정일 위인상』이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허담이 북한 외교를 담당하면서 김정일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기록했는데 찬양 일색이다.
허담이 대남비서를 맡은 것은 13년 동안 외무상을 마친 83년 12월부터다. 아웅산 테러 사건 이후 당 국제비서였던 김영남이 허담을 대신해 외무상으로 발령이 났고, 당 국제비서는 김용순이 부부장에서 승진해 맡았다.
욕심이 많고 질투심이 강했던 허담의 부인 김정숙이 이 인사에 불만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당 국제부는 당내에서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 다음으로 힘이 셌다. 그래서 김정숙은 남편이 국제비서로 발령이 나기를 늘 바라고 있었다. 언제 통일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남비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김정숙은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의 책임주필, 조선대외문화연락위원장 등을 맡을 정도로 활발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김정숙의 불만은 그대로 끝났다. 김정일의 인사를 뒤집을 수 없었다. 김정일의 허담에 대한 신임은 날로 높아갔다. 허담은 김정일의 술 파티에 고정적으로 참석했으며 김정일과 찰떡궁합이 돼 갔다.
▲허담(왼쪽에서 네번째) 대남비서가 84년 5월 함경북도 청진조선소를 현지지도하는 김정일을 수행하고 있다. 오른쪽 끝은 연형묵 전 총리다. [사진 우리의 지도자]
허담은 대남비서를 맡은 뒤 85년 9월 서울을 방문했다. 대남비서가 서울을 방문해 대통령을 만난 것은 처음이다. 그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 있는 최원석 동아건설 회장의 별장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다. 『전두환 회고록 2』에 따르면 청와대는 보안유지가 어려울 뿐 아니라 대통령의 집무장소를 특사에게 공개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그곳을 대통령의 별장으로 위장하고 접견 장소로 이용했다. 허담은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하자는 내용을 담은 친서를 전달했다. 또한 허담은 통일 문제와 정상회담에 관한 ‘김일성 주석의 견해’를 담은 유인물을 일어선 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낭독했다
전두환은 허담에게 “김일성의 생전에 남북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반목에서 탈피할 것”을 촉구했다. 한 달 후 답방 형식으로 장세동 안기부장이 그해 10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다. 김일성은 “내가 전두환 대통령 각하 말씀 가운데 가장 감명 깊게 들은 것은 내가 더 늙어 죽기 전에 통일하자는 것인데, 나는 아직 건강하고 정력적으로 담화하고 통일국가를 위한 노력을 함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무르익던 남북정상회담은 북한이 한․미합동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 훈련을 취소해 줄 것을 요청하고 그해 10월 부산 청사포 앞바다에 북한 반잠수정을 침투시키는 등 도발을 하자 중단 위기에 놓였다. 북한은 기여히 86년 1월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하지 않는 것을 빌미로 남한과의 모든 회담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허담이 대남비서를 맡으면서 최초로 성사될 뻔했던 남북정상회담은 이것으로 물 건너갔다. 이후 허담은 경색된 남북관계보다 김일성의 외교 업무에 동원됐다. 86년 10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을 수행했고, 87년 5월 김일성의 중국 방문도 수행했다. 당시 허담은 전 외무상 자격으로 김영남 현 외무상과 함께 김일성을 수행했던 것이다.
▲허담(사진 왼쪽) 대남비서가 연도 미상 평양시 건설사업을 현지지도하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수행하고 있다. [사진 우리의 지도자]
허담은 88년 1월 당 국제비서에서 물러나는 황장엽(1923~2010)을 대신해 오매불망 기다렸던 당 국제비서를 맡았다. 당 국제부장인 김용순에게만 국제부를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허담은 국제비서를 하면서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을 겸했다. 89년 3월 방북한 문익환 목사와 공동성명을 발표했으며 같은 해 6월 김영삼 민주당 총재와 모스크바에서 회동했다. 그 해 8월에는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을 만나기도 했다.
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2016년 제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허담을 “우리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한 사람”으로 제일 먼저 호명했다.
(3) 경제통에서 출발한 대남비서 윤기복
허담 대남비서의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김중린이다. 대남비서가 ‘3수’ 째인 김중린은 1년 2개월 한 뒤 90년 1월 윤기복(1926~2003)에게 물려주었다. 윤기복은 81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부위원장을 맡는 등 남북관계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전임자였던 김중린·허담 등이 정치국 위원까지 승진한 것에 비해 윤기복은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그쳤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통계학 전공
국가계획위원장 등 경제요직 맡아
72년 서울 방문이 대남 관계와 인연
남북화해 무드 속에 대남 관계 지도
김일성 특사로 92년 방한해 정상회담 제의
회담 날짜가 김일성 생일에 맞춰져 불발
▲윤기복 [사진 노동신문]
모스크바 대학에서 통계학을 전공한 윤기복은 경제통으로 출발했다. 57년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겸 중앙통계국장을 시작으로 67년 재정상, 69년 국가계획위원장 등 경제부문 고위직을 두루 지냈다. 윤기복이 대남 관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72년 8월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을 맡고 서울을 몇 차례 다녀가면서부터다. 당시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이 72년 8월 평양에서 열렸다. 남북적십자회담은 이듬해 7월까지 열렸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그 인연으로 윤기복은 8년 뒤 조평통 부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대남관계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89년 범민족대회 위원장을 거쳐 이듬해 대남비서에 올랐다. 범민족대회는 남북한· 해외동포가 참여해 민간 주도의 통일운동을 기틀을 다지는 행사로 90년 8월 15일 제1차 범민족대회가 남과 북에서 각각 진행됐다.
북한은 그가 물러나는 92년 12월까지 탈냉전과 한국의 북방정책으로 외교적인 최대 위기를 맞았다. 한·소 수교(1990년), 한·중 수교(1992년) 등 북한의 우방국들이 한국과 손을 잡으면서 외교적 고립이 가속화됐다. 반면 남북한은 90년 9월부터 남북고위급회담을 열어 91년 남북기본합의서, 92년 한반도비핵화선언 등 결실을 보았다.
윤기복은 대남비서로 있으면서 남북고위급회담에 참석하는 연형묵 북한 총리 등 일행들을 지도했다. 그는 91년 12월 평양을 방문한 문선명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도 만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 윤기복은 김일성의 특사로 1991년 11월, 1992년 4월 두 차례 서울을 방문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해를 마무리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생각의 결과였다.
▲윤기복(사진 왼쪽) 대남비서가 1991년 12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는 문선명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윤기복은 두 번째 방문 때 김일성의 친서와 초청장을 갖고 서울에 왔다. 윤기복은 “4월 15일 김일성 주석 생일과 때를 맞춰 노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 정상회담을 갖자”고 전격 제의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김일성 생일 축하행사의 일환으로 정상회담을 이용하려는 북한의 계산된 의도에 말려들 수 없었다. 노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나는 정상회담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모양새가 너무 나쁘다고 판단해 초청을 거절했다. 모양새를 구겨 가면서까지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고 밝혔다.
이것으로 대남비서로서 윤기복의 임무는 거의 끝났다. 대남비서로서 활동하는 동안 90년 최고인민회의(한국의 국회) 통일정책위원장,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장 등을 겸임했다. 92년 12월 대남비서에서 물러난 뒤 당 과학교육비서를 맡았다. 자신의 원래 전공과 유사한 곳으로 돌아갔다. 노동신문은 2003년 5월 10일 그의 부고에서 “오랫동안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위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쳐 투쟁했다”고 기록했다. 이를 통해 윤기복의 삶의 궤적이 경제와 통일 분야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말년에 다시 통일 분야로 돌아왔다. 그는 99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중앙위원회 공동의장에 임명됐다. 공동의장으로 박성철 전 총리,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김용순 전 대남비서, 류미영 전 천도교 청우당 위원장 등이 있었다. 조국전선은 노동당의 통일노선과 정책을 옹호·관철하는 전위기구로 46년 북한의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들이 조직한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모태로 하여 49년 정당과 사회단체를 망라해 재조직한 단체다.
윤기복은 그 이후의 활동이 알려지지 않다가 오랜 병환 끝에 2003년 5월 사망했다. 그는 대남비서 선배였던 김중린·허담에 비해 역할이 적은 탓인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언급한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4) 춤 때문에 곤욕을 치른 김용순
한국 사람들이 북한의 대남비서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김용순(1934~2003)이다. 분단 이후 최초로 열린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국민들은 처음으로 대남비서를 TV로 확인했다. 그 이전에 서울을 방문했던 허담·윤기복 등은 비밀리에 대통령을 만나고 갔기 때문에 국민들은 알 수 없었다.
노래 잘 부르고 특히 춤을 잘 춰
84년 노동당 청사에서 춤판 벌여 철칙
김정일 술 파티에 빠지지 않고 참석
김정일 여동생 김경희와 염문설도
2000년 남북정상회담 끝나고
3개월 뒤 서울 방문해 대통령 만나
2003년 지방 출장갔다고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132일만에 숨져
▲김용순 대남비서(왼쪽 끝)가 2000년 8월 평양에서 한국언론사대표단을 만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수행하고 있다. [사진집 영도자와 인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키 큰 비서’ ‘다문박식한 외교관’이라고 부른 김용순은 54년 김일성종합대학 법학부 국제관계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이후 당 국제부에 첫 발을 내딛고 70년 주 이집트 대사로 나갔다. 북-루마니아 친선협회 위원장을 거쳐 74년 6월 당 국제부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김용순에게 행운이 찾아온 것은 83년 10월 아웅산 테러 사건이었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지자 서둘러 대규모 인사를 단행됐다. 김영남(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국제비서가 외교부장으로 가고 김용순이 83년 12월 부부장에서 국제비서로 승진했다.
김용순이 승진한 배경에는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김경희 당 국제부 과장이 있었다. 김경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동생으로 김용순과 ‘바람이 났다’고 소문날 정도로 사이좋게 지냈다. 김용순은 노래가 전문가 수준이었고 특히 춤을 잘 추었다. 따라서 김정일의 술 파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할 정도였다.
그런데 춤이 그에게 화근이었다.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에 따르면 김용순은 국제부 직원들에게 외국손님을 가정에 초대해 외교를 잘하기 위해서는 부인들까지도 춤을 출 줄 알아야 한다면서 직원 부인들을 노동당 청사에 모아놓고 춤판을 벌였다.
이 춤판은 문제가 됐고 김용순은 84년 10월 결국 철칙돼 평안남도 덕천탄광 노동자로 쫓겨났다. 몇 개월 동안 탄광노동자로 고생한 뒤 그의 ‘수호천사’였던 김경희 도움으로 김일성고급당학교로 돌아온 김용순은 87년 당 국제부 부부장으로 복귀했다. 김일성은 김용순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김용순이 아첨기가 심해 그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딸바보’였던 김일성이 김경희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김용순 대남비서(오른쪽 끝)가 1999년 9월 자강도 낭림군에 새로 건설된 문화주택을 현지지도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를 메모하고 있다. [사진집 영도자와 인민]
김용순의 복귀로 당 국제부는 황장엽 국제비서, 국제부 제1부부장, 김용순 부부장 등으로 삼파전이 벌어졌다. 국제비서가 되려던 김용순과 제1부부장의 세력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황장엽은 회고록에서 “제1부부장과 김용순의 세력다툼에서 김용순이 이길 것으로 내다봤다”고 기록했다.
황장엽의 예상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황장엽이 88년 국제비서에서 물러나면서 김용순이 국제부장이 됐다. 대개는 대남비서가 통일전선부장을 겸임하듯이 국제비서와 국제담당도 한 사람이 다 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춤꾼’인 김용순에게만 국제부를 맡길 수 없어 허담 국제비서-김용순 국제부장 체제로 운영했다.
허담은 국제비서를 맡았지만 건강악화로 비서업무를 거의 수행하지 못했다. 결국 김용순이 90년 5월 국제비서로 승진했다. 그는 국제비서로 있으면서 몇 가지 큰 일을 해냈다. 일본 자민당의 실력자 가네마루 신과 다나베 마코토 일본 사회당 대표를 평양으로 초청해 조선노동당과 함께 ‘북일 수교 3당 공동선언문’을 만들었다.
또한 김용순은 92년 1월 미국을 방문해 아놀드 캔터 국무부 정무차관을 만나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와의 핵안전협정을 체결하는 사전조율을 마무리했다. 북한은 김용순-캔터 회담 이후 8일 만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IAEA 핵안전협정에 서명했다. 김용순은 캔터를 만나 주한미군이 한반도 통일 후에도 지역의 세력균형과 안보를 위해 주둔이 필요하다고 전달했다. 이 얘기는 김정일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전달했다.
김용순은 92년 12월 대남비서로 옮겼다. 그 이후 사망하기까지 11년 동안 대남비서를 맡았으며 선배인 김중린 다음으로 그 자리를 오래 차지했다. 그가 대남비서를 맡았을 때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김용순은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지 3개월만에 김정일의 특사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해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고 제주도를 방문하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사진 오른쪽)이 2000년 9월 청와대를 방문한 김용순 북한 대남비서와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노동신문은 2008년 11월 17일 2면에 그를 추모하는 기사에서 “김용순이 출퇴근시간에 단어장을 들고 외국어를 익혔고 단 몇 분이라도 시간이 나면 책을 들여다보았다”고 학습의욕을 높게 평가했다. 아울러 외국에 출장을 갈 때는 가방에 읽을 책부터 챙겼다고 기록했다. 책 읽기를 좋아해서인지 생전에 『첫 봄』, 『믿음과 삶』 등의 단행본을 출간했고, 노래 ‘영생의 모습’을 작사하기도 했다.
김용순은 2003년 6월 16일 지방에 나갔다가 사업을 하고 돌아오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병원에 입원한 지 132일이 지난 그해 10월 26일 숨졌다. 김정일은 그가 사망한 이후 그를 잊지 못하고 자주 회고했다고 노동신문이 2008년 11월 17일에 밝혔다. 김정일은 2008년 8월 “김용순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지금 한 몫 단단히 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정일은 당시 뇌졸중이 일어나 감상적일 때가 늘면서 옛날 측근들을 그리워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 개회사를 하면서 허담·김중린 등과 함께 김용순을 언급했다. 그리고 김정은이 호명한 사람들의 일대기를 담은 기록영화 ‘영생하는 우리 당의 혁명 전우들’이란 제목으로 시리즈 만들었다. 김용순도 ‘당중앙위원회 비서였던 김용순’ 편으로 제작됐다.
(5) 김정은의 책사 김양건
김용순 대남비서의 후임은 김양건(1942~2015)이었다. 김양건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책사였다. 김일성-김책, 김정일-허담의 맥을 이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그의 장례식장을 찾아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충실한 방조자, 친근한 전우였다”고 회고했다.
김일성-김책, 김정일-허담의 뒤를 잇는
김정은의 책사로 7년간 대남비서 맡아
당 국제부에서 30년간 잔뼈가 굵어
싱가포르 비밀접촉 알려지면서 조사 받아
김정은의 신뢰로 당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
교통사고로 사망했지만 타살설도 제기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015년 12월 김양건 대남비서의 장례식장을 찾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김양건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기 이전에 김정은의 ‘고명대신’으로 뽑혔다. 그가 선택된 것은 어느 파벌에도 속해 있지 않은 전형적인 테크노크라트였기 때문이다. 김양건 외에 노동당 내부에서 또 다른 고명대신은 김평해 당 간부부장, 박도춘 전 군수담당비서였다.
김양건이 대남비서에 임명된 것은 2010년이다. 2007년 통일전선부장에 오른 뒤 3년 만에 대남비서와 통일전선부장을 겸임하게 됐다. 김양건은 김일성종합대학 불어과를 졸업한 뒤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현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 중앙위원회에서 근무하다가 73년 대외문화연락위원회 지도원으로 선발됐다. 대외문화연락위원회는 56년 창설된 당 국제부 산하단체로 여러 나라에서 친북 저변 세력을 확대하고 미수교국에 대해 관계수립의 여건을 조성했다.
김양건은 77년부터 당 국제부 지도원으로 들어가 부과장, 과장, 부부장을 거쳐 20년 만인 97년 당 국제부장으로 승진했다. 그 이후로 10년 동안 당 국제부장으로 근무한 뒤 2007년 통일전선부장으로 옮겼다. 전임자 김용순과 같은 케이스였다. 통일전선부장은 김용순 대남비서가 2003년 사망한 뒤 4년 동안 공석이었다. 4년 동안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실상 대남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김양건이 대남사업을 맡은 이후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2009년 싱가포르 비밀접촉, 2015년 8.25 남북고위급접촉 등 굵직굵직한 일들이 많았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과 8.25 남북고위급접촉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겠지만, 싱가포르 비밀접촉은 그에게 시련을 안겨 주었다.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2015년 8월 25일 남북고위급접촉 북측 대표로 참석해 공동발표문을 작성한 뒤 홍용표 통일부 장관과 악수하고 있는 김양건 대남비서(사진 오른쪽). [중앙포토]
김양건은 2009년 8월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조문단으로 김기남 비서(현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와 함께 서울을 방문했다. 김기남은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고, 김양건은 이를 진행하기 위한 사전 접촉으로 싱가포르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이 대통령은 그해 10월 임태희 노동부 장관을 보냈다. 이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2015년 2월 발행)에 따르면 이 비밀 접촉은 북한의 지나친 요구(옥수수 10만t, 쌀 40만t, 비료 30만t,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 1억 달러, 북한 국가개발은행 설립 자본금 100억 달러)로 중단됐다.
김양건은 빈 손으로 돌아갈 수 없어 “그대로 가면 죽는다”며 싱가포르에서의 논의사항을 적은 쪽지에 임 장관의 사인을 받아갔다. 싱가포르 비밀 접촉 이후 그해 11월 개성에서 통일부-통일전선부의 실무 접촉이 열렸다. 북한은 싱가포르의 논의사항을 ‘합의문’이라고 우기며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결국 실무 접촉이 결렬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물 건너갔다.
김양건은 『대통령의 시간』에 당시의 협상 내용이 공개되면서 2015년 2월 곤욕을 치뤘다. “그대로 가면 죽는다” 등의 표현이 북한의 입장에서 굴욕적으로 비쳤는지 국가보위성(한국의 국가정보원)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당시 김양건의 복귀에 관심을 쏠렸다. 하지만 그는 2015년 2월 당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면서 오히려 존재감을 과시했다.
김양건은 그해 12월 29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김용순 대남비서, 이제강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등도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자동차가 적은 북한의 현실을 감안해 타살설도 끊임없이 제기됐다. 당시 김양건은 대표적인 대표파로 강경파들에게 ‘눈엣가시’였다.
김정은은 장례식에 참가해 눈물을 흘리며 “함께 손잡고 해야 할 많은 일들을 앞에 두고 이렇게 간다는 말도 없이 야속하게 떠났다”고 말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91년 5월 허담이 사망했을 때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린 것과 비슷했다.
김정은은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에서 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승리를 위해 헌신한 사람으로 김양건을 허담·연형묵·김중린·김용순 등과 함께 호명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91년 5월 허담의 장례식장을 찾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조선중앙TV 캡처]
(끝) 군인 출신 대남비서 김영철
2015년 12월 사망한 김양건의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김영철 대남비서다. 한국 사람들에게 천안함 폭침 사건과 연평포 포격 사건의 주범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김영철은 군인 출신으로 드물게 대남비서를 맡았다. 군인 출신이 대남비서를 맡은 사람은 1968 년 1월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했던 1.21 사태의 주범 가운데 한 명인 허봉학이 있었다.
천안함·연평도 사건의 주범으로 알려져
인민군 대장으로 당 서열 12위까지 올라
남북고위급회담 때 '찬바람' 부는 인상 남겨
군인 출신이지만 회담 능력 보여 비서 맡은 듯
정찰총국 사업을 가져오려다 황병서와 마찰
지난해 7월 혁명화 교육을 받고 복귀
김영철은 혁명유가족과 고위층 자녀를 북한 엘리트로 양성하는 교육기관인 만경대혁명학원으로 졸업하고 조선인민군 대장까지 오른 사람이다. 그는 2009년 2월 신설된 정찰총국장에 임명되면서 각종 대남·해외 공작업무를 지휘했다. 정찰총국은 노동당 소속의 작전부(침투 공작원 호송·안내 담당)과 35호실(해외·대남 정보수집 담당), 인민무력성 산하 정찰국 등 3개 기관이 통폐합되면서 만들어졌다.
▲김일성이 1990년 9월 서울에서 열린 첫 총리회담인 남북고위급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북한 대표단과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최우진 외교부 순회대사, 김정우 대외경제사업부 부부장, 안병수(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 연형묵 총리, 김일성, 김광진 조선인민군 대장, 윤기복 대남비서, 백남준(백남순) 정무원 참사실장, 김영철 조선인민군 소장. [사진 노동신문]
이런 경력을 가진 김영철이 대남 공작과 함께 대화를 주도하는 대남비서로 올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다. 허담·김용순·김양건처럼 외무성이나 당 국제부 출신 가운데 대남비서를 맡거나 대남 비서가 담당하는 통일전선부의 내부에서 승진할 것으로 점쳤다. 하지만 이런 예상을 깨고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군인 출신을 그 자리에 앉혔다. 통일전선부 내부 사람들도 예상 밖 인사였다고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도 남북관계의 긴장되면서 김정은이 군인 출신을 임명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영철과 회담을 했던 군 장성들은 “군인 이미지와 달리 남북군사회담에서 보여준 모습을 보면 회담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 점을 김정은이 평가했을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김영철은 군인 출신으로서 보기 드물게 남북 회담이 자주 참석했다. 1990년 9월 서울에서 분단 이후 처음으로 열린 첫 총리회담인 남북고위급회담 북측 대표에 참석했다.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자신의 회고록 『피스메이커』에서 김영철의 첫인상을 “군복 차림의 젊은 김영철 인민군 소장은 날카로운 눈매에 찬바람이 감도는 쌀쌀한 태도로 아무 말 없이 손만 내밀었다”고 적었다. 당시 김영철은 44살이었고, 연형묵 전 총리를 수행했다.
남북고위급회담은 이후 7차례 열려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등을 결실로 맺었다. 그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의전경호 실무자접촉 수석대표를 맡았고 2007년 제2차 남북국방장관 회담 북한 대표로 참석했다.
김영철은 2016년 초 대남비서를 맡은 뒤 경사를 맞았다. 그해 열린 노동당 제7차 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했다. 당 서열 12위다. 하지만 대남비서가 정찰총국장보다 쏠쏠한 ‘재미’가 없는 자리다. 남북관계가 악화된데다 대남비서 산하의 조직들이 이미 2009년 정찰총국으로 넘어가 역할이 대폭 축소됐기 때문이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왼쪽에서 둘째)이 지난해 2월 평양에서 열린 당 중앙위, 당 인민군위원회 연합회의를 지도하고 있다. 당시 주석단에는 정찰총국장에서 대남비서로 자리를 옮긴 김영철(김정은 오른쪽)이 인민복을 입고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사진 노동신문]
이에 따라 그는 정찰총국 5국(대남 및 국외정보 수집 업무)과 정찰총국 산하의 외화벌이 무역회사 청봉무역을 통일전선부로 이관하려고 했다. 전 정찰총국장의 힘을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이를 월권행위로 규정하고 김정은에게 “김영철이 개인 권력을 조장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김영철은 이로 인해 지난해 7월 약 한 달간 혁명화 교육(지방 공장이나 농장에서 노동을 하며 정신교육을 받는 처벌)을 받고 복귀했다.
김영철은 통일전선부를 군인 출신인 자신의 심복들로 채운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으로 이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이다. 인민군 중장(별 둘)이다. 남북장성급 군사회담과 남북군사실무회담 북측 대표를 맡아 남북 군사회담에 자주 얼굴을 비쳤던 사람이다. 이선권 외에도 군인 출신들을 통일전선부로 데리고 오는 바람에 개인 권력을 조장한다고 인식되기도 했다.
■ 북한 경제를 이끈 총리傳
(1) "경제는 당신이 수상이야"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오매불망 간절히 바라는 것은 경제강국이다. 김일성은 한 평생을 “모든 사람이 다 같이 흰쌀밥에 고기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 살려는 인민의 염원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가 달성해야 할 중요한 목표”라고 역설했다. 김일성의 ‘소원’을 아들인 김정일은 실현하지 못했고 손자인 김정은은 ‘경제발전과 핵무력건설 병진노선’으로 노력하고 있다. 세 부자가 그 동안 인민들을 배불리기 위한 노력은 눈물겨웠다. ‘70일 전투’, ‘100일 전투’, ‘200일 전투’ 등 노력동원을 통해 주체적으로 달성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방법과 방향이 틀렸다. 지금도 여전히 잘못된 방향과 방법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70일 전투’를 ‘200일 전투’로 늘린다고 북한 경제가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북한 경제를 이끌었던 총리들을 통해 그들의 노력과 문제점을 살펴보고 남북 경제협력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고 자 한다. [편집자주]
정준택이 김일성을 대신해 경제 맡아
북한 경제 호황기 이끈 주역
일본 도쿄 유학한 광산지배인 출신
중국 천윈과 비견되는 계획경제 설계자
80년대 북한 경제 어려워지자
김일성 "정준택만 있었으면"
김일성의 경제 참모 정준택
김일성은 6.25전쟁 끝난 이후 사회주의 경제의 토대를 다져갔다. 전쟁 이후라 계획경제의 필요성이 증가했고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기반한 경제를 운용할 수 없었다. 국가가 자원을 분배하고 물자를 필요한 만큼 만들어내는 계획경제의 형태를 강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
1950년대 김일성의 직책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군사위원회 위원장, 인민군 최고사령관, 내각 수상이었다. 내각 수상은 지금과 비교하면 국무위원장에 해당된다. 김정은은 현재 당 위원장, 당중앙군사위 위원장, 인민군 최고사령관, 국무위원장을 맡고 있다.
50년대 내각 수상의 역할은 지금의 국무위원장에 내각 총리를 보탠 자리다. 북한이 1972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내각 수상의 역할이 국가주석과 정무원 총리로 분리됐다. 국가주석과 정무원 총리는 지금으로 따지면 각각 국무위원장과 내각 총리에 해당된다.
국가주석과 정무원 총리로 분리되면서 경제는 총리에게 맡겨졌다. 지금의 중국 국무원 총리가 경제를 책임지는 것과 같은 시스템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1950년대 북한 경제를 이끈 실질적으로 사람은 김일성이 아니라 정준택(1911~1973)이다. 국가계획위원장과 정무원 부총리를 역임하는 등 북한 경제를 호황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정준택은 지금의 총리 자리는 아니지만 김일성을 대신해 북한 경제를 이끌었다.
▲김일성이 1968년 평양시 승호지구를 현지지도하면서 정준택(사진 왼쪽)에게 사업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사진=월간 조국]
김일성이 정준택을 얼마나 아꼈는지는 1990년 10월 북한의 대표적인 경제전문가 양성기관인 원산경제대학을 그의 이름을 따서 정준택경제대학(현재 정준택원산경제대학)으로 개명한데서 알 수 있다.
김일성과 정준택의 인연은 1945년 11월에 시작됐다. 김일성이 일제 시대에 한국의 최대 중석을 산출하는 황해북도 곡산군 만년광산의 지배인 출신이었던 정준택에게 산업국장을 맡긴 것이다. 당시 산업국장은 나라의 공업을 담당하는 중책이었다.
정준택은 개성에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자혜의과대학에 다니다가 ‘적색독서회사건’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2년 만에 퇴학당했다. 고국으로 다시 돌아와 서울고등공업학교에 들어가 졸업한 뒤 선광기사 자격을 취득한 뒤 일본 미쓰비시(三菱)광업회사에 취직하면서 광산에 발을 디디게 됐다.
김일성은 장기간 일본 식민지 지배로 인한 저발전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분야에서 지식인을 활용하는 이른바 ‘인테리정책’을 실시했다. 1948년 정부를 출범시키면서 북한 경제의 사령탑인 국가계획위원장에 정준택을 앉혔다. 정준택은 당시 북한의 대표적인 ‘인테리’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인테리’로 꼽히는 인물 대다수는 친일파였다. 당시 북한에는 전쟁으로 인해 각 분야의 인재가 부족했고 남아있는 지식인은 일제 치하에 관료로 지내거나 도쿄 유학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국가 운영을 위해 과거 친일 행적이 있더라도 간부로 눈감고 중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준택은 광복 직후부터 6.25전쟁 시기, 전후복구건설시기 등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산업과 계획사업을 맡으며 경제 각 부문을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시키려고 노력했다.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일등공신이었다. 김일성은 80년대 중반 북한 경제가 어려워지자 “정준택이가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라는 말을 자주 했다.
50년대 중반 소련의 원조가 삭감하면서 북한은 자본·물자·기술 부족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집단 증산운동 이른바 ‘천리마 운동’을 본격화하고 전쟁으로 인한 농촌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농업협동화’ 작업을 진행했다. 생산과 유통 전반을 국가가 장악함으로써 1950년대 말 북한은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1950년대 트랙터를 생산하는 북한 기양농기계공장 노동자들. [사진=조선화보사]
당시 북한 경제의 슬로건은 ‘중공업 우선, 경공업· 농업 동시 발전’이었다. 곰곰이 따져보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다. 중공업 우선이면 경공업과 농업은 뒤로 쳐질 수밖에 없다. 인민들의 반발을 의식해 중공업 우선에다 경공업· 농업 동시 발전이라는 말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왜 중공업 우선일까? 당시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중공업 우선정책을 추진했다. 이유는 3가지다. 첫째, 중공업이 국가 경제발전 수준과 경제적 실력을 의미했다. 따라서 경제 발전 경쟁이 다분히 중공업의 비중 높이기에 집중됐다. 둘째, 국방력과 국민경제의 전쟁동원 능력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첫 굴착기를 생산하는 북한 낙원기계공장 근로자들. [사진=조선화보사]
서방 자본주의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자주 국방을 우선시했고 이를 위해서는 중공업이 관건이었다. 셋째, 농촌인구가 대다수였던 북한이 경공업을 우선 성장으로 삼으면 시장협소와 수요부족에 부닥칠 수 있었다.
정준택은 북한의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중국 계획경제의 거두인 천윈(陳雲, 1905~1995)과 비견된다. 천윈은 1949년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국무원에서 계획경제를 설계했던 인물이다.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이 계획경제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1950년대 초 공식석상에서 “경제는 천윈이 제일 잘 안다”, “천윈 동지가 한 말들을 새겨듣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칭찬에 인색했던 마오쩌둥이 누군가를 극찬한 것은 극히 드물었을 정도로 최고지도자에게 신임을 받았던 부분에서 정준택과 비슷했다.
▲김일성이 1973년 1월 정준택 장례식에 참석해 공화국영웅칭호와 함께 금별메달을 그의 시신에 달아주고 있다. [사진=월간 조국]
북한에서는 정준택의 삶을 가리켜 ‘오랜 인테리’라 부르기도 한다. 그는 북한 정권 수립 시기부터 27년 동안 김일성의 곁을 지키며 지식인으로서 경제를 맡아왔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북한은 그를 당·정 모든 경제 간부들이 따라 배워야 할 모범으로 내세우고 있다.
북한은 김일성이 정준택의 부인인 김정원의 60세, 70세, 80세, 90세 생일 때마다 생일상을 차려주었다고 선전했다.
(2) 지팡이 짚고 총리 맡은 김일
북한의 2대 총리는 김일성의 ‘오른팔’ 김일(1900~1984)이다. ‘오른팔’이란 표현은 김일성이 직접 언급한 말이다. 김일의 본명은 박덕산. 김일성이 해방 직후 그에게 지어준 이름이다. 김일성은 “내 이름에서 두 자를 내어 주었다”고 말했다.
김일성이 '내 오른팔'이라고 불러
항일혁명열사로 '농업상' 맡기도
국가 제1부주석 등 요직을 거쳐
1972년 정무원 총리로 경제 책임져
4년간 아픈 몸을 이끌고 전국 누벼
김정일 "몇 천t 석탄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
▲김일성과 김일(사진 오른쪽). [사진=조선중앙TV 캡처]
김일은 늘 자신의 이름에 대해 “‘김’자는 수령님을 언제나 잊지 말고 생각하라는 뜻이고 ‘일’자는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김일’이라는 이름을 한평생 오직 수령님 한 분 밖에 모르는 혁명전사로서 신념의 표시로 간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대목은 조총련 월간지 『조국』(2004년 11월호)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김일은 북한에서 ‘수령 결사옹위의 1번수’로 불러지고 있다. 당과 수령의 영도체계를 세우는 것을 삶의 과업으로 삼고 투쟁해 왔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1번수’라는 칭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에게 붙여 준 정치적 평가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지난해 5월 열린 제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일성· 김정일 다음으로 항일혁명투사 9명을 한 명 한 명 언급했다. 그 가운데 최현, 오진우, 오백룡 등 쟁쟁한 항일혁명투사들을 제치고 김일을 가장 앞세웠다. 북한에서 그의 정치적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김일은 함경북도 어랑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간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일성을 처음 만난 곳은 1936년 가을 중국 지린성 장백현에 있는 곰의골 밀영에서다. 당시 김일은 중국 공청(공산주의 청년동맹) 연길현 위원회 서기였고,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장을 맡고 있었다. 김일성을 만나기 이전에는 1932년 초부터 지하당 및 대중 단체 사업을 시작했고 1935년 10월 동북항일연군에 합류했다.
6.25전쟁 이후 김일은 1954년 3월부터 내각 부수상 겸 농업상으로 전후복구건설과 사회주의기초건설에 전념했으며 1959년 1월부터 내각 제1부수상으로 활동했다. 일각에서는 그를 두고 당과 수령의 지시를 듣는 즉시 이행한다고 해서 ‘당 정책집행의 제1선 돌격투사’라 불렀다.
북한은 1972년 헌법 개정으로 내각을 정무원으로 바꾸었다. 김일성은 6.25전쟁 이후 북한 경제를 이끌다시피 한 정준택(1911~1973)이 병으로 앓기 시작하자 정무원 총리 자리를 놓고 고민이 많았다. 당시 김일성의 최측근에 있던 혁명1세대들은 60~70대 고령이 돼가고 있었다.
고민 끝에 김일성은 정준택의 후임으로 1950년대 농업상을 역임했던 김일을 선택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김일이 1965년부터 앓았던 질환이 1971년 8월 다시 악화된 것이다. 하지만 병은 그에게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는 1972년부터 병마와의 싸우면서 4년간 정무원 총리를 맡았다.
북한은 71년부터 진행된 6개년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기본 과업으로 ‘3대 혁명소조운동’을 제시했다. 3대혁명은 사상, 기술, 문화 부문에서 현대적 기술을 갖추고 김일성 유일사상으로 무장하며 사회주의 인민으로서 건전한 생활양식을 따라야 한다는 의식개혁 운동이었다.
김일성이 제안한 ‘3대 혁명소조운동’은 생산 현장의 생산력 증대운동과도 연계돼 있었다. 산업 전반을 공업화함으로써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기계화를 통해 근로자 해방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는 경제 발전과 직결된 과제였다. 트랙터와 자동차 생산을 늘리고 농업과 경공업 부문에서 현대화를 이루고자 한 것이 바로 이러한 노력에 해당된다.
▲김일 전 정무원 총리가 아픈 몸을 이끌고 지팡이를 짚으며 안주탄광연합기업소 갱막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사진=조선중앙TV 캡처]
하지만 이런 노력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1974년 오일쇼크의 여파로 북한 경제에 ‘쓰나미’가 불어 닥친 것이다. 중공업 우선정책을 유지해 오던 북한에게 오일쇼크는 수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승승장구하던 북한 경제가 꼬꾸라지던 시기이며 남북한 경제가 역전되는 순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은 운신하기 힘든 몸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전국 각지를 다니며 경제 사업을 지휘했다. 농사철에는 농촌에 나가 농업정책을 철저히 관철하도록 했고 겨울철에는 동해안 함경남도 신포시에 나가 물고기 수송조직 사업을 관장했다.
아울러 전력증산을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청천강 화력발전소 건설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1976년 정무원 총리에서 물러난 뒤 국가 제1부주석을 맡을 때였다. 당시 김일은 “직무가 달라졌어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책임자로 파견해줄 것을 자처하고 현지에 나갔던 것이다. 이런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김일이 몇 천만 Kwh의 전력이나 몇 천만 t의 석탄과 결코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원로”라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014년 3월 김일 전 정무원 총리의 사망 30주년을 맞아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있는 그의 반신상에 화환을 보냈다. [사진=조선중앙통신]
북한은 1984년 김일이 사망한 뒤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 맨 위쪽에 김정숙(김일성 부인) 등과 같은 라인에 그의 반신상을 놓았다. 가족들 가운데 동생 박성철(1913~2008)은 김일이 1976년 물러난 정무원 총리를 그대로 이어받았고 국가 부주석까지 역임했다. 아들 박용석(1928~2007)은 노동당 검열위원장을 맡았다.
이경주 인턴기자 lee.kyoungjoo@joongang.co.kr
(3) 경제를 유격대식으로 접근한 박성철
김일이 물러난 후 총리 자리를 이어받은 제3대 총리는 박성철(1913~2008)이다. 그는 군인출신으로 항일혁명시기 김일성의 ‘당번병’으로 활동했다. 해방 이후 그는 김일성의 신임을 바탕으로 10여 년간(1959~1970) 외무상을 지내며 북한 외교의 ‘얼굴마담’ 역할을 했다. 총리직은 1년 8개월 맡았고 최단명이다.
항일혁명투사로 경제는 문외한
김일성이 시킨 일은 유격대식으로
총리시절 전력문제 해결에 총력
10여년 외무상으로 '얼굴마담' 역할
김정일 후계 지명에서 우유부단
사망때 김정일 조화만 '딸랑' 보내
▲박성철 북한 전 총리 [사진=중앙포토]
김일과 박성철은 지금의 총리처럼 경제전문가가 아니었다. 김일성이 경제의 ‘경’자도 모르는 이들에게 총리에 앉힌 것은 시키는 일은 잘해서였다. 김일성이 시킨 일은 항일유격대식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박성철은 경북 경주시 출신으로 1934년 항일유격대인 동북인민혁명군(후일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해 자신보다 한 살 많은 김일성과 함께 활동했다. 해방 이후 그는 항일투쟁시기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1950년 제15사단장으로 6.25전쟁에 참가했다.
하지만 그는 6.25전쟁 당시 연전연패(連戰連敗)를 당하면서 사단장에서 해임됐다. 하지만 전쟁 이후 1953년 민족보위성(인민무력성) 정찰국장으로 기사회생했다. 김일성은 이듬해 “전쟁도 끝났으니 여기 일은 걱정하지 말고 외국에 가서 지내다 오는 게 좋겠다”며 불가리아 북한 공사로 내보냈다. 당시 박성철은 전쟁 중에 복부수술을 받은 후유증에다가 위장병을 앓고 있었다.
김일성은 1956년 그를 노동당 국제부장으로 불렀다. 국제부는 사회주의권과의 당(黨)대 당(黨) 외교를 담당하는 부서로 중국·러시아 공산당의 창구였다. 그 이후 외무성 부상, 외무상으로 승승장구했다. 김일성은 박성철을 본격적으로 북한의 대외활동에 앞장서는 ‘얼굴마담’으로 키우고자 했다.
김일성은 1965년 인도네시아 방문 때도 그를 데리고 다니며 신흥세력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가르쳤다. 덕분에 박성철은 10여 년 간 외무상으로서 외교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1972년에는 내각 제2부상으로 7·4남북공동성명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7·4남북공동성명을 위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먼저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만났다. 하지만 서울 답방은 김 부장 대신에 박성철이 내려왔다. 남북대화 석상에서 박성철은 이전의 북한 사람들과는 다른 풍모를 보였다고 한다. 몸집이 컸고 악착스럽지 않았으며 대화할 땐 구수하고 털털하게 말했다. 아마도 김일성은 그의 털털한 풍모를 ‘얼굴마담’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5월 29일 서울에 도착한 박성철(사진 오른쪽) 북한 내각 제2부수상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중앙포토]
돈 오버도퍼 전 워싱턴포스터 기자는 자신의 저서 『두개의 한국』에서 “남북한은 공동성명 날짜를 미국의 독립기념일(7월 4일)로 택한 것은 아마도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천명하기 위해서인 듯했다”고 기록했다.
1976년 박성철은 정무원 총리로 임명됐다. 경제 사업은 그에게 생소한 업무였지만 김일성은 자신이 내각수상으로 지낼 때의 경험을 이야기해주며 박성철이 총리 역할을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도록 도와줬다.
북한은 1977년을 인민경제발전 6개년 계획(1971~1976)이 차질을 빚자 1년을 더 연장해 마무리 하려던 ‘완충의 해’로 정했다. 북한은 그 해 오랜 가뭄으로 처음으로 전력부족이 산업 현장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한의 전력설비는 수력과 화력이 6:4로 수력의 비중이 높다. 따라서 가뭄은 북한 전력사정에 적신호였다.
박성철은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화력발전소의 전력생산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수력발전의 감소는 전력 부족으로 이어졌고, 전력 부족은 석탄 생산을 감소시켰다. 전력은 석탄생산에서 필수요인이다. 석탄 감소는 또 다시 화력발전소의 전력 생산에 차질을 빚게 했다. 북한의 이런 악순환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전력공업성과 석탄공업성이 서로 ‘남 탓’을 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북한은 두 부처를 붙였다 떼었다를 반복했다. 전기석탄공업성은 1962년 내각에 처음 만들어졌다가 1972년 전력공업부와 석탄공업부로 분리됐다. 1998년 전기석탄공업성으로 합쳤다가 2006년 다시 지금의 전력공업성과 석탄공업성으로 분리했다. 이렇게 반복하는 이유는 전력과 석탄의 생산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총리까지 승승장구 하던 박성철에게 시련이 다가왔다. 바로 김정일 때문이다. 후계자 지명 과정에서 박성철은 우유부단한 자세를 취했다. 그것이 김정일에게 ‘눈엣가시’였다. 김정일은 그에게 “악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정일은 자신의 후계자 지명에 불만이었던 사람들에게 톡톡히 분풀이를 했다. 김동규 국가 부주석, 이용무 총정치국장, 지경수 당 검열위원장, 지병학 인민무력부 부부장 등을 숙청했다. 박성철이 김정일의 칼날에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박성철은 1977년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명예직인 ‘국가 부주석’을 맡게 됐다. 하지만 80년대 들어 김정일이 명실상부한 후계자가 되면서 박성철의 공식 활동은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93년 박성철 국가부주석의 생일 80돌을 맞아 직접 전화해 축하해주고 수예품 대형병풍에 “박성철 부주석의 생일 80돌을 축하하여. 김일성”을 새겨주기도 했다. 그는 김일성이 사망하기 전까지 최측근에 있었던 혁명 1세 원로였다.
1998년 김정일은 국방위원장으로 재추대되면서 헌법을 개정하고 주석제를 폐지했다. 그해 박성철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에 임명됐다. 그는 2008년 사망하기 전까지 자리를 지켜왔다.
▲박성철 전 총리의 유가족들이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을 방문해 그의 반신상 주위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사진=월간 조국]
그는 사망한 이후 다른 항일혁명투사들과 함께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안장됐다. 김정일 은 박성철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지 않고 빈소에 조화만 보냈다. 반면 김정일은 오진우 인민무력부장과 연형묵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장례식에는 참석했다.
(4) 공대생 출신 이종옥 총리
북한은 이종옥(1916~1999)을 제4대 총리로 임명하면서 테크로크라트 시대를 열었다. 이전의 김일· 박성철 등 항일빨치산 출신들이 경제를 담당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전문 경제인들이 북한 경제를 맡기 시작한 것이다.
▲이종옥 총리 [사진=노동신문]
이종옥은 1940년 중국 하얼빈 공업대학을 졸업한 ‘공대생’이다. 이종옥이 대학을 다닐 때는 일제시대로 일본이 이 대학을 운영하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일본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들을 ‘식민지 인테리’로 부른다. 이종옥도 그런 사람이었다. 해방 이후 김일성은 인재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가 비록 일본 대학에 다녔지만 함경북도 청진방적공장 지배인으로 보냈다.
이종옥은 여기서 뜻하지 않는 운명을 맞이한다. 그는 공장을 복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 공장에 근무했던 경력자를 영입해야 했다. 현지인 가운데 숙련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이종옥에 불만을 가진 주변 사람들이 ‘친일행위’라며 그를 고발한 것이다. 당시 친일행위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곤란한 처지에 빠진 그를 구한 것이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이다. 김정숙이 청진에 잠시 머물 때 문전걸식하던 여성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 여성이 청진방적공장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여성이 김정숙에게 이종옥의 딱한 사정을 알려준 것이다. 김정숙은 이를 김일성에 보고해 이종옥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김정숙이 이종옥에게 생명의 은인이 된 셈이다.
김일성은 훗날 이종옥에게 “김정숙이 그 때 나에게 얘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동무는 더 큰 고생을 했을 거야”라고 말했다. 이종옥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다. 예를 들면 ‘김일성의 책사’였던 김책이 “똑똑한 지식 청년을 또 한 명 찾아냈다”며 김일성에게 그를 추천하기도 했다.
이종옥은 1949년 산업성 부상, 경공업상을 거쳐 1956년 북한 계획경제를 책임지는 국가계획위원장에 올랐다. 그는 국가계획위원장을 맡으면서 노동당 공업부장을 겸직했다. ‘공대생’ 출신이라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1961년 제4차 노동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이 되면서 정치국 서열 11위로 승진했다.
그 이후로도 승승장구는 이어졌다. 이종옥은 내각 부수상 겸 금속화학공업상을 맡았다. 하지만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는 법. 1968년 김일성의 ‘대안의 사업체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반당 분자로 지목돼 함경북도의 광산지배인으로 좌천됐다. 대안의 사업체계는 공장·기업소의 지배인 단독 책임제에서 공장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제로 바꾸었다. 이종옥은 이 방식이 효율성을 떨어뜨린다고 본 것이다. 김일성은 이런 이종옥에게 “그 누가 뭐래도 나는 동무를 100% 믿소. 아니 200%, 300%를 믿소”라며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주었다.
▲이종옥(왼쪽에서 세번째) 국가 부주석이 1991년 10월 중국 방문에 앞서 김일성 등과 신의주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주창준 주중 북한 대사, 김용순 비서, 이종옥 국가 부주석, 김일성, 한성룡 비서,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 [사진=노동신문]
이종옥은 1972년 다시 광업상으로 복귀하고 정무원 부총리를 거쳐 1977년 경제사령탑인 총리에 임명됐다. 이종옥이 총리로 임명 될 당시 북한은 후계자로 지명된 김정일 시대가 시작될 즈음이었다. 이종옥이 총리로 임명된데도 김정일의 영향이 가장 컸다.
테크노크라트였던 이종옥은 김정일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다. 당시 북한 경제는 화려했던 60년대를 마감하고 더딘 성장을 하고 있을 때다. 1975년 경제성장률이 5.4%였는데, 계속 낮아져 1980년에는 3.8%에 불과했다. 쌀 생산량도 1975년에는 281만t이었다가 1980년에는 265만t으로 줄었다. 이렇게 추락하는 북한 경제를 살릴 ‘소방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종옥은 총리를 맡으면서 인민경제발전 제2차 7개년(1978~1984년) 계획을 시작했다. 이 계획의 슬로건은 인민경제의 주체화·현대화·과학화였다. 주체화는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동력기지, 원료기지를 확대해 자체 생산능력을 높이자는 것이다. 현대화·과학화는 생산공정의 기계화와 자동화를 전면적으로 실현하자는 구호였다. 이 슬로건은 지금도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다.
북한은 경제발전을 위해 사회적으로는 ‘숨은 영웅 따라 배우기 운동’을 벌였다. 공장 노동자들 속에서 모범이 되는 사람을 골라내 그를 전면에 내세워 닮도록 하는 운동이다. 종전의 운동이 집단적 노력 경쟁을 독려하는 것인데 반해 이 운동은 개인적 모범을 창출해 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 경제는 옛날로 다시 돌아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김정일은 이종옥의 노력만큼은 인정했다. 그래서 1980년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이종옥을 노동당 상무위원으로 임명했다. 총리가 노동당 상무위원을 겸한 첫 번째 사례였다.
북한에서는 보직 보다 정치국 서열이 더 중요하다. 총리가 경제 정책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정치국 서열이 높아야 한다. 중국을 보더라도 리커창 국무원 총리가 정치국 서열 2위다. 전임 총리였던 원자바오는 정치국 서열 3위였다.
▲이종옥 국가 부주석(사진 가운데)이 1991년 10월 9일 김일성과 함께 중국 산동성 곡부시의 역사문화유적들을 돌아보고 있다. [사진=노동신문]
하지만 북한은 총리가 정치국 서열에서 중국처럼 높지 않을 경우가 많았다. 자세한 내용은 앞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이종옥은 비(非) 항일빨치산 출신에다가 테크노크라트 출신으로 정치국 서열 5위된 것이다. 박성철(6위), 최현(7위), 임춘추(8위) 등 쟁쟁한 항일빨치산 출신들을 제쳤다.
이종옥은 1983년 7월 정치국 상무위원에 해임되고 그 이듬해 총리에서도 물러났다. 화려했던 시절이 끝난 것이다. 명예직인 ‘국가 부주석’을 얻었지만 이제는 ‘훈수꾼’이 돼 버렸다. 그의 마지막 공직은 1998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다. 그는 이듬해 8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노동신문은 1999년 9월 24일자 2면에 그의 부고란에 “해방 후 첫 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국의 융성발전을 위해 활동해 온 재능 있는 지도 일꾼”이라고 이종옥을 기록했다.
(5) 김정일의 '눈치밥'에 기죽은 강성산 총리(5 - 8대)
북한에서 총리직을 2번 한 사람이 2명 있다. 강성산(1931~2007)과 박봉주다. 강성산은 5대 총리(1984~1986년)와 8대 총리(1992~1997년)를 지냈다. 박봉주는 다음에 소개할 예정이다. 강성산은 첫 번째 총리를 마치고 지방으로 좌천됐다가 6년 뒤에 다시 총리로 복귀했다. 남들은 ‘복’도 많아 두 번씩이나 총리를 한다고 하겠지만 그에게는 불편했던 시기였다.
▲강성산 총리 [사진 중앙포토]
강성산은 중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강위련이고 삼촌은 강위룡이다. 강위련은 항일혁명시기 기관총 분대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강위룡은 해방 이후 김일성의 호위사령부 책임자였다. 이런 인연으로 강성산은 어릴 때부터 김일성의 사랑을 톡톡히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강성산은 혁명유자녀를 북한 최고의 엘리트로 양성하는 만경대혁명학원 졸업 후 체코 프라하 공대를 유학하며 테크노크라트로 성장했다. 당시 유학 동문으로는 6대 총리 이근모(1986~1988)와 7대 총리 연형묵(1988~1992)이 있다. 김일성은 1969년 군수시설들이 모여 있는 자강도 당 책임비서에 강성산을 발탁했다. 이후 그는 평양시 당 책임비서를 거쳐 1973년에는 평양시 인민위원장을 맡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임명되면서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섰다. 1975년에는 정무원(지금의 내각) 교통체신위원장을 맡아 중앙 부처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정무원 부총리를 거쳐 1984년 정무원 총리에 임명됐다.
그는 김일성의 신임을 받았지만 김정일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김일성의 둘째 부인 김성애의 남동생 김성갑과 각별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김정일과 김성애는 물과 기름이었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강성산은 평양시 인민위원장에 있을 때 김성갑을 위해 집을 지어주기도 했다.
김성갑은 누나의 위세를 등에 업고 1960년대 중반 평양시 당 조직비서를 맡는 등 군과 당에 자기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다. 김정일은 김성갑과 어울려 다니는 강성산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실제로 그는 첫 번째 총리직에 있으면서 김정일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
▲김일성이 1985년 8월 만경대 물놀이장을 강성산 총리(사진 왼쪽) 등과 함께 둘러보고 있다. 오른쪽으로부터 4번째에 김정일도 보인다. [사진 영광의 50년]
1980년대 북한의 경제 성장은 상당히 둔화돼 있었다. 자력갱생을 구호로 국가계획경제에만 집중한 결과다. 한편, 중국은 1979년 ‘중외합작경영기업법’을 제정해 자유무역지대인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대외개방정책으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중국의 경제 성장을 지켜본 북한은 외국으로부터의 기술 및 자본 도입이 필요함을 실감했다. 이에 1984년 북한은 외국과의 합작투자를 위한 합영법을 제정했다. 바로 강성산이 총리로서 합영법을 주도했다.
북한은 합영법을 시행함으로써 본격적인 개혁·개방을 모색했다. 강성산은 1985년 모스크바를 방문해 고르바초프와 만나 ‘경제 및 기술적 협조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당시 북한은 소련과의 경제협력 덕분에 이전의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하고 제3차 7개년계획(1987~1993)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의 개혁·개방 시도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북한이 합영회사를 운영하면서 기대했던 공업·운수·건설·과학기술·관광 사업의 투자와는 달리 실제로는 소규모의 경공업과 서비스업에서만 투자가 이뤄진 것이다. 강성산은 합영법 시행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해임됐다. 이후 그는 1988년 함경북도 당 책임비서로 좌천됐다.
하지만 김일성은 4년 뒤 그를 다시 불렀다. 제3차 7개년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연평균 성장률 7.9%, 국민소득 1.7배의 목표에 전혀 미치지 못했고, 각종 지표는 오히려 계획을 시작한 때의 전반으로 떨어졌다. 김일성은 강성산이 과묵했지만 붙임성이 좋고 실무능력이 뛰어난 점을 높이 평가해 다시 기회를 주었다. 이로써 그는 두 번째 총리(1992~1997년)를 맡게 됐다.
▲강성산 총리가 1996년 4월 가족들과 함께 만수대언덕에 있는 김일성 동상에 헌화하고 있다. [사진 조선중앙TV 캡처]
하지만 시기적으로 그의 총리 재임은 불운했다. 첫째, 그를 아껴주었던 김일성이 1994년에 사망했다. 둘째, 두 번째 총리 재임 기간에 ‘고난의 행군(1995~1997년)’으로 불리는 북한 경제의 최악의 시기가 덮쳤다.
경제 전문가였던 강성산도 ‘고난의 행군’ 시기에 아무 힘도 쓸 수 없었다. 김정일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는 ‘식물 총리’였다. 그리고 지병으로 병원에 누워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김정일은 강성산을 총리에 앉혀 두었다. 어려운 시기에 ‘말’을 바꾸는 법이 아니었던가 보다.
그는 고난의 행군이 끝나가던 1997년 홍성남 총리 대리체제가 들어서면서 총리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 사망할 때까지 그의 행적은 공개되지 않았다.
(6) '복지부동' 이근모 총리
북한의 6대 총리는 이근모다. 재임기간은 1986년 12월부터 1988년 12월까지로 2년이었다. 총리 가운데 최단명했던 박성철 보다 4개월 더 한 셈이다. 이근모는 탈북민들도 기억을 못할 정도로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전임 강성산 총리가 김정일의 ‘눈치밥’에 기를 펴지 못했듯이 이근모도 마찬가지였다. 서슬 퍼런 김정일 밑에서 살아남으려면 복지부동이 최고였던 것이다.
개혁 성향 인정 받아 총리 맡았지만
서슬퍼런 김정일 밑에서 존재감 '0'
제3차 7개년계획 맡았지만 고전
아들 문제로 총리에서 해임됐지만
악화된 경제 책임은 후임자가 떠 안아
말년에 함경북도 당 비서를 맡기도
▲이근모 정무원 부총리(김정일 뒷편)가 1984년 서해갑문을 방문한 김일성과 김정일을 수행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사진 우리의 지도자]
우리가 어렴풋이 그를 기억하는 것은 1987년 1월 총리를 맡자마자 오진우 인민무력부장과 함께 공동명의로 한국에 남북고위급 정치․군사 회담을 제의한 정도다. 하지만 당시는 성사되지 못했다. 남북고위급 회담은 1990년 9월에 가서야 비로소 서울에서 열렸다. 당시 연형묵 총리가 단장으로 내려왔다.
이근모는 한국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등으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을 무렵에 총리직에 올라 1987년부터 시작한 제3차 7개년계획(1987~1993)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가 총리에 임명된 것은 개혁 성향 때문이다. 김일성이 준퇴진 상태가 됐고 권력이양 과정을 밟고 있던 김정일이 당시에 개혁 성향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이근모는 전형적인 테크로크라트 출신이다. 김일성종합대학을 거쳐 소련 레닌그라드공업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53년 노동당 조직지도부 과장을 시작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그 이후 당 기계공업부장과 평안남도 당 책임비서·인민위원장, 정무원(현 내각) 부총리 겸 채취공업부장을 거쳐 86년 정무원 총리에 임명됐다.
그가 맡은 첫 번째 임무는 제3차 7개년계획을 조기에 성공시키는 것이다. 제3차 7개년계획의 특징은 이전의 경제계획에 비해 목표치를 하향 조정한 점이다. 제2차 7개년계획(1978~1984)은 과거에 비해 국민소득 1.9배, 공업총생산 2.2배였지만, 제3차 7개년계획은 국민소득 1.7배, 공업총생산 1.9배였다.
이근모는 이런 하향 조정에도 불구하고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근본적으로 중공업 우선의 경제발전 전략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북한은 전쟁 상황이나 전쟁을 준비하는 조건에서 적용되는 중공업-경공업-농업 순서를 6.25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버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북한은 여전히 미국과 전쟁중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국가 규모가 작고 경제발전 수준이 낙후된 국가가 중공업 중심의 공업화를 고집할 경우 농업과 경공업은 더욱 낙후시킬 수 밖에 없다. 그 영향 탓에 북한은 국민경제의 기형적 발전과 생산력의 위축, 그리고 인민생활의 쇠락을 가져왔다.
이에 반해 중국은 맑스-엥겔스의 유물론을 근거로 사람들에게 의식주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농업-경공업-중공업 순서를 채택했다. 그 결과 북한과 중국은 다른 길을 가게 됐다.
제2차 7개년계획에서 ‘재미’를 보지 못한 김일성은 실패를 반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 87년 5월 베이징을 방문했다. 제3차 7개년계획의 성공적인 수행과 경제발전을 위해 중국의 지원이 어느 때보다 절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 때보다 대규모 방문단은 아니었다. 필요한 인원만 대동했다. 허담 대남비서, 김영남 외교부장, 이종옥 전 총리가 수행하는 정도였다. 허담은 전 외교부장 자격으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중국은 여유가 없었다. 4대 현대화사업(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에 소요되는 투자 증대에 따라 외부에 대한 지원을 매우 제한했다. 따라서 상황이 호전되면 대북 지원을 개선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김일성은 그해 11월 이근모를 중국에 보냈다. 마침 중국이 제13차 당대회를 끝난 이후라 중국 지도부는 기분이 들떠 있을 때였다. 새로운 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된 자오쯔양은 “중국은 조선노동당과 조선인민이 우리 당 제13차 대회를 열렬히 축하해 것에 대해 충심으로 감사를 표한다”며 “오늘 조선인민은 새로운 7개년계획의 웅대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며 북한을 추켜세웠다.
▲이근모(사진 오른쪽)가 연도 미상 평양시 건설사업을 현지지도하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수행하고 있다. 이근모 오른쪽으로 연형묵이 보인다. 연형묵은 이근모 후임으로 총리에 임명됐다. [사진 우리의 지도자]
하지만 덩샤오핑은 달랐다. 이근모는 그의 장황한 ‘설교’를 들어야 했다. 덩샤오핑은 이근모에게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고 북한에도 이것의 필요성을 간접적으로 강조할 뿐이었다.
김일성에 이어 이근모도 ‘빈손’으로 귀국했다. 기대했던 중국의 지원은 없는데다가 처음부터 삐걱거렸던 제3차 7개년계획은 93년에 경제계획의 실패를 시인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북한은 93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제6기 제21차 전원회의에서 주요 목표들이 미달됐다고 인정했다.
이근모는 88년 12월 국가보위부(현 국가보위성) 마약판매 담당이었던 아들이 총살을 당하고 자신은 지병까지 도져 총리직에서 해임됐다. 당시는 억울했을 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운이 좋았다. 그가 총리에서 물러난 다음해인 1989년부터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붕괴로 북한의 대외경제 환경이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제3차 7개년계획의 실패는 후임 연형묵 총리가 뒤집어쓰게 됐다.
이근모는 총리에서 물러난 뒤 4년 뒤인 92년 함경북도 당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김정일이 98년 함경북도 성진제강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할 때 수행했으며 그 이듬해 함경북도를 다시 찾았을 때도 그를 수행했다. 이근모는 2001년 7월 그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그 이후의 행적은 공개되지 않았다.
(7) '김정일의 예스맨' 연형묵 총리
북한의 7대 총리는 ‘김정일의 예스맨’ 연형묵(1931~2005)이다. 1990년대 김정일의 측근 중의 3명을 꼽으라면 연형묵, 김용순, 이용철 등이다. 김용순(1934~2003)은 대남 관계를 총괄했던 당 통일전선부장이며 이용철(1928~2010)은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군 간부의 인사를 한 손에 쥐고 있었다.
김정일보다 11살 많은 '형' 같은 존재
만경대혁명학원 1기생으로 체코 유학
88년 총리에 올라 '경제사령관' 맡아
90년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 북한 대표
제3차 7개년계획 실패 책임 안고 총리 해임
'강계정신'으로 부활해 다시 김정일 곁으로
▲연형묵 비서(사진 왼쪽)가 1984년 1월 낙원식료공장 창광분공장을 현지지도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 사항을 메모하고 있다. [사진 우리의 지도자]
김정일이 2008년 뇌졸중을 일으킨 이후 감상적으로 빠질 때도 자주 입에 담은 3명에도 연형묵은 포함됐다. 나머지 2명은 김용순, 허담이었다. 허담(1929~1991)은 70~80년대 김정일이 아꼈던 외교부장이었다. 이 처럼 연형묵은 김정일에게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었다.
연형묵은 48년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이 제의해 세운 만경대혁명학원 1기생이다. 만경대혁명학원은 항일빨치산 시절 숨진 전우들의 고아들을 보호하고 교육을 시킨 곳이다. 연형묵은 9살 때 부모를 잃고 중국 동북부 지역을 방랑하던 중 발견돼 보호를 받았다. 김정일보다 11살이 많았지만 우직해서 김정일의 신뢰를 받았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호위병으로 발탁된 그는 김일성과 체격이 비슷해 구두를 바꿔 신었을 정도로 김일성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김정일에게 형과 같은 존재였다. 70년대 김정일의 파티 동료로서 수령의 아들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연형묵은 53년 체코 프라하 공대를 입학했다. 동문수학한 사람은 최영림 전 총리, 김시학 전 김일성고급당학교장, 김병률(1930~2013) 전 최고재판소장 등이다. 연형묵은 59년 귀국한 뒤 출세가도를 달렸다. 62년 당 중공업부 부부장을 시작으로 68년 당 중공업부장을 거쳐 71년 당 비서에 올랐다.
85년 정무원(현 내각) 부총리 겸 금속 및 기계공업위원장을 거쳐 88년 이근모의 바통을 이어 받아 총리에 임명됐다. 연형묵은 83년 6월 후야오방 중국 총서기의 초청으로 중국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김정일을 오진우 인민무력부장과 함께 수행하기도 했다.
연형묵이 한국인들에게 기억되는 장면은 1990년 9월 서울 강남의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강영훈 총리와 악수하는 장면이다.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 13개월에 걸쳐 치열한 논쟁을 거친 뒤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체결 당시 연형묵이 북한 대표단장을 맡았고 한국은 정원식 총리가 서명했다.
▲연형묵 부총리(사진 오른쪽)가 1988년 7월 두만강역을 현지지도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수행하고 있다. [사진 우리의 지도자]
이 때까지만 해도 연형묵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당시 연형묵의 가장 큰 역할은 북한 경제를 살리는 것이었다. 87년부터 시작한 제3차 7개년계획이 초반부터 삐걱거려 이근모 대신에 연형묵가 총리로 앉았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문제가 많았던 북한 경제에 김정일의 총애를 받던 연형묵이 총리를 맡더라도 뽀족한 대책이 없었다.
연형묵은 92년 7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이후 화해·협력을 이어가는 차원과 남북경협을 통한 북한 경제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김달현 부총리를 서울로 보냈다. 김달현은 세 가지 협력사업을 제시했다.
첫째, 시베리아-북한-한국을 연결하는 가스관 건설사업에 관한 남북간 협력이다. 둘째, 원자력발전소의 공동건설 및 전력 공동사용에 관한 남북간 협의였다. 셋째, 남포 경공업단지 합작건설에 대우의 즉각 참여를 승인해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김달현은 ‘남포 경공업단지 기술조사단 파견’과 ‘최각규 경제부총리의 평양 방문초청 수락’이라는 합의만 들고 돌아갔다.
당시 제1차 북핵 위기가 불거지면서 한국은 ‘선 핵문제 해결 후 경제협력’ 이라는 핵연계전략의 입장을 분명히 했고 북한이 요구한 경협 시범사업 추진을 사실상 거부했다. 남포 공단 조사단의 파견은 이뤄졌지만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경제부총리의 평양 방문 계획도 ‘남한 조선노동당 간첩단 사건’으로 무산됐다.
김달현의 서울 방문은 실패로 끝났고 북한 강경파들은 이를 ‘장미빛 환상’이라고 공격했다. 제3차 7개년계획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면서 연형묵은 92년 12월 총리에서 해임되고 자강도 당 책임비서로 좌천됐다. 김달현도 남북경협 실패의 책임을 지고 93년 12월 해임됐다.
자강도로 쫓겨난 연형묵은 98년 ‘강계정신’으로 다시 복귀했다. 강계정신은 김정일이 98년 1월 자강도 강계시 일대를 시찰한 것을 계기로 북한이 대대적으로 내세웠던 슬로건이다. 북한 전역에서 고난의 행군으로 아사자가 속출하고 공장 대부분이 문을 닫는 상황에서 자강도 주민들은 연형묵의 지휘 하에 중소형발전소 등을 자체로 건설해 스스로 경제난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데서 생긴 말이다.
연형묵은 98년 9월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강계정신’을 성공시키고 당시 국가최고기관이었던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돌아왔다. 당시 김정일 곁으로 간 것이다. 연형묵은 2003년 9월 국방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승진한 뒤 췌장암으로 2005년 사망했다. 북한은 그를 애국열사릉에 안장했다.
▲연형묵 비서(사진 오른쪽)가 1984년 10월 평북제련소를 찾아 생산품을 보고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수행하고 있다. [사진 우리의 지도자]
김정은은 지난해 5월 당 제7차 대회에서 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건설에 헌신한 사람을 호명할 때 허담 다음으로 연형묵으로 불렀다. 그리고 김용순· 이용철 등 김정일의 측근들도 함께 호명했다.
(8) 오직 실력으로 총리에 오른 홍성남
북한의 8대 총리는 강성산이다. 강성산은 이 시리즈의 5회째에 이미 총리를 운 좋게도 두 번씩이나 한 사람으로 소개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9대 총리 홍성남(1929~2009)을 살펴보고자 한다.
프라하공대 출신으로 중공업 전문가
경제정책 총괄 국가계획위원장을 맡아
98년부터 6년간 총리로 북한 살림 이끌어
김정일 '드라이브'에 따라가기 급급
98년 헌법에 사적 소유 확대 등 개혁 내용 포함
큰 과오 없이 물러난 뒤 함경남도 당비서로
▲홍성남 북한 전 총리. [사진 노동신문]
홍성남이 내각 총리를 맡은 것은 1998년부터다. 그 보다 97년 2월부터 와병중인 강성산을 대신해 총리 대리 직책을 맡아 북한 경제를 맡아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공식적으로 임명한 첫 총리였다. 강성산은 92년 연형묵에 이어 다시 총리를 올랐지만 임기 내내 건강이 좋지 않아 골골했다.
홍성남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연형묵이 다녔던 체코 프라하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귀국 이후 57년 군수공장인 평안북도 구성공작기계공장 지배인을 맡으면서 중공업 분야에서 테크로크라트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구성공작기계공장은 종업원 5800여명 규모의 특급기업소로 2000년대 초반부터 ‘자동화의 본보기 공장’이 되면서 공장 현대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한 곳이다.
홍성남은 그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64년 당 중공업부 부부장을 거쳐 70년 당 중공업부장으로 중용됐다. 그가 정무원(현 내각)으로 간 것은 73년 9월이다. 그 곳에서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을 맡았다. 국가계획위원회는 노동당에서 수립한 경제정책에 따라 북한의 모든 경제계획을 종합 작성하고 각 부서에서 이를 수행하도록 지도· 감독하는 기관이다. 한국의 기획재정부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홍성남은 이런 막중한 자리인 국가계획위원장을 73년~77년, 86년~88년 두 번씩이나 맡았다. 김일성이 경제에 정통하고 업무추진에도 빈틈이 없는 그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86년 정무원 제1부총리에 승진한 뒤 98년부터 총리를 맡았다. 오직 실력만으로 총리까지 올라갔다.
▲홍성남 총리(사진 가운데)가 2002년 10월 평양 만수대 예술극장에서 열린 남북장관급회담 환영만찬에서 정세현 통일부 장관(사진 왼쪽)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김영성 내각참사. [사진 공동취재단]
홍성남이 총리를 맡았던 시기는 고난의 행군(1995~1997년)과 유훈 통치가 끝난 후 본격적인 김정일 시대가 열리던 때였다. 김정일은 먼저 98년 9월 헌법을 개정하면서 정무원을 내각으로 개편하고 경제의 자율성을 확대했다.
개정된 헌법 24조에는 사적 소유 범위를 확대했다. 가축과 주택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개인 소유 재산은 상속할 수도 있으며 생산수단의 소유 주체에 대해 기존의 ‘국가와 협동단체’에서 ‘국가와 사회· 협동단체’로 확대해 사회단체도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헌법 36조는 대외무역에 대한 통제를 완화했다. 대외무역의 주체도 기존의 ‘국가가 하거나 국가의 감독 밑에서 한다’는 조항을 ‘국가 또는 사회·협동단체가 한다’로 수정했다. 사회·협동단체도 대외무역의 주체가 될 수 있게 허용했다.
헌법 75조는 거주· 여행의 자유를 인정하는 조항을 신설했다. 식량난으로 철저한 통제가 어려워진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98년 헌법 개정의 특징은 권력 분산과 경제개혁의 내용을 포함했다. 하지만 중국·베트남 등에서 추진했던 경제개혁 노선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
홍성남이 총리가 됐던 9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강성대국’을 선포했다. 강성대국은 그해 4월 김정일이 자강도를 현지지도한 내용을 조선중앙방송에서 보도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이는 부강하고 융성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고난의 행군’ ‘사회주의 강행군(1997년 말~1998년)’ 이라는 구호를 제시하며 주민들의 희생을 요구했지만 98년에는 새로운 희망을 주민들에게 불어넣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드라이브’에 홍성남은 따라다니기 급급했다. 그렇지만 6년 동안 총리를 한 것을 보면 능력은 인정받은 셈이다. 선군정치의 영향으로 한정된 경제 자원이 군사부문에 우선적으로 배정되는 상황에서 그 자리에 오래 버텼다.
홍성남은 총리에서 물러난 뒤 함경남도 당 책임비서를 맡았다. 2008년 11월 함경남도 단천광산기계공장 창립 50주년 기념보고회 참석을 끝으로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홍성남은 2009년 3월 요독증성 심근장애로 사망했다. 북한은 그를 연형묵과 마찬가지로 평양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했다.
(9) '오뚝이' 박봉주 총리
북한의 10대 총리는 박봉주 현 총리다. 박봉주는 강성산(1931~2007)과 함께 총리를 두 번씩이나 한다. 첫 번째는 2003~2007년이고, 두 번째는 2013년부터 현재까지다. 두 번 모두 합치면 역대 최장수 총리가 된다. 올해 78세다.
총리를 두 차례 역임한 역대 최장수
지방 대학을 졸업하고 빽없는 '흙수저'
2002년 경제시찰단으로 서울 방문
'7·1조치 '의 주역으로 총리에 올라
장성택 배신으로 정치국 상무위원 승진
'경제·핵' 병진 노선의 선봉장으로 승승장구
박봉주 이름 앞에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오뚝이’ ‘경제개혁파’ 등이다. 그의 삶을 보면 이런 수식어가 바로 연상된다. 박봉주는 북한 고위 관료들이 다니는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등 명문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에게 낯선 평안남도 덕천군 덕천공업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김일성 일가와 연고도 없는 ‘흙수저’였다.
▲박봉주 총리(오른쪽에서 세번째)가 2015년 6월 24일 리모델링한 평양국제비행장(순안공항) 항공역사를 현지지도를 하는 김정은의 지시사항을 듣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그는 소위 ‘깡’ 하나로 총리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직장생활은 1962년 평북용천식료공장 지배인부터 시작했다. 실력을 인정받아 83년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 책임비서로 옮겨 10년 동안 근무했다.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는 평안남도 안주시에 있는 북한의 대표적인 석유화학공장이다. 그 공로로 93년 당 경공업부 부부장으로 발탁됐다.
김정일이 정권을 잡은 98년 내각 화학공업상으로 기용된 박봉주는 2002년 10월 경제시찰단 일원으로 장성택 등과 함께 한국에 왔다. 그는 삼성전자와 포항제철 등을 직접 둘러보기도 했다. 서울 동대문의 두타타워를 방문했을 때 일화가 유명하다. 당시 박봉주는 상인들에게 열심히 질문했다.
이를 지켜 본 기자들이 박봉주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지금 볼 게 많은데 눈이 두 개뿐이요. 말 좀 걸지 마세요”라고 대답했다. 자본주의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김정일은 2000년과 2001년 중국 방문을 통해 중국의 발전상에 충격을 받고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를 발표했다. 이 조치는 급여 인상·배급 제도의 변화·환율의 현실화·기업 소 책임경영 강화 등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박봉주가 이 조치를 입안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7·1조치’의 추가 방안으로 금융제도와 상품유통 체계에 시장경제 요소를 가미하려고 했다. 또한 국가개발은행 설립도 추진했다. 하지만 2005년부터 한국 상품이 종합시장에서 팔리는 등 이른바 ‘황색바람(자본주의 풍조)’이 불어 군부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들에게 빌미를 제공했다. 결국 박봉주는 2006년부터 ‘식물 총리’로 전락했다. 2007년 4월 실각한 박봉주는 평안남도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좌천됐다.
하지만 그는 ‘오뚝이’처럼 3년 4개월만인 2010년 8월 당 경공업부 제1부부장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2년 뒤 당 경공업부장을 맡았고 2013년 4월 다시 총리가 됐다. 그리고 총리가 되기 하루 전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 정치국 위원이 됐다. 후보위원을 건너뛰고 바로 정위원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박봉주에게 상당한 힘이 실리게 됐다.
박봉주는 농촌과 공장, 건설 현장 등을 다니며 현장을 독려했다. 노동신문 등 북한 매체들은 김정일 시대와 달리 그의 현장 시찰을 언론에 보도했다. 김정일 시대는 총리의 현장 시찰은 언론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김정은이 박봉주에게 많은 권한을 줄테니 책임도 져라는 시그널이었다.
▲노동신문은 2013년 12월 8일 박봉주 총리가 국가과학원을 방문한 것을 3면에 실었다. 김정은은 김정일과 달리 총리의 현장 시찰을 언론에 공개하게 했다. [사진 노동신문]
박봉주가 이처럼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장성택이다. 장성택이 2003년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있을 때 그를 강력 추천해 총리로 앉혔다. 그리고 장성택은 2013년 당 행정부장으로 있을 때 그를 다시 총리로 앉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개혁·개방에 긍정적이었던 장성택과 박봉주는 코드가 절묘하게 맞았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장성택이 처형되는 과정에서 박봉주는 장성택의 편이 돼 주지 못했다. 서슬퍼런 칼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박봉주는 ‘장성택의 성토장’이 됐던 2013년 12월 8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장성택을 비판했다.
▲북한 조선중앙TV는 2013년 12월 9일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모든 직무에서 해임한 소식을 전하며 박봉주 내각 총리가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을 비판하는 화면을 내보냈다. [사진 조선중앙TV 캡처]
장성택을 비판한 뒤 박봉주는 김정은으로부터 확실한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지난해 5월 노동당 제7차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됐다. 정치국 서열 4위다. 총리가 재임시절에 정치국 상무위원을 겸한 것은 이종옥과 박봉주 뿐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직책보다 정치국 서열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박봉주는 역대 다른 총리들보다 힘을 갖게 됐다. 아울러 그는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도 됐다. 총리가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이 된 것은 이례적이다. 이 같은 인사는 김정은이 2013년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진노선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분석할 수 있다.
북한은 비로소 중국처럼 총리가 힘을 갖고 경제성장의 임무를 맡게 됐다. 중국은 리커창 총리가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서열 2위이며, 앞선 원자바오 총리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서열 3위였다. 총리가 이 정도 돼야 경제를 제대로 맡을 수 있는 것이다.
(10) '교통의 사나이' 김영일 총리
북한 총리 가운데 재임 기간에 서울을 찾은 사람은 지금까지 2명 있다. 연형묵(1931~2005)과 김영일(1944~ )이다. 연형묵은 1990년 9월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로 방문했고 김영일은 2007년 11월 제1차 남북총리회담에 참석했다.
북한 육해운성에서 28년간 근무
대학 졸업후 항해기사 자격 취득
장관인 육해운상에서 총리로 발탁
2007년 제1차 남북총리회담 참석
화폐개혁 실패의 여파로 총리서 낙마
총리는 '경제사령관' 보다 경제실패 '희생양'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11월 16일 청와대에서 제1차 남북총리회담을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가는 김영일 북한 내각총리 일행을 위한 환송 오찬을 마련했다. 노 대통령과 김영일 북한 총리(왼쪽), 한덕수 총리(오른쪽)가 오찬장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김영일은 북한의 제11대 총리다. 박봉주 전임 총리가 2007년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김영일은 한국의 국토교통부에 해당하는 육해운성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나선특별시 나진해운대학(현 나진대학)을 졸업하고 항해기사 자격을 취득한 뒤 79년 육해운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98년 육해운상(장관)이 될 때까지 육해운성에서만 근무한 ‘교통의 사나이’였다. 그리고 2007년까지 육해운상을 역임한 뒤 총리로 승진했다. 육해운상을 포함해 육해운성에 근무한 기간만 무려 28년이다. 지금까지 총리들은 당과 내각을 오고 간 사람들인 반면 내각에만 있었던 사람이 총리에 임명된 것은 처음이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힘’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김영일 총리(오른쪽 네번째)는 2010년 2월 9일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2.8비날론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왼쪽 둘째)을 수행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김영일은 ‘충성사업’으로 총리를 시작했다. 그가 총리에 임명된 해는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1917~1949) 생일 90주년이었다. 그래서 김정일은 김정숙의 고향인 함경북도 회령시에 600세대의 아파트를 지으려고 했다. 김영일은 자신을 총리로 뽑아 준 김정일에게 보답하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래서 취임한 지 9개월 만인 2008년 1월 600세대를 완공했다.
이 아파트 건설은 총리가 나설 일은 아니었다. 함경북도 당위원회에서 준비하고 있었던 일이다. 김영일은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로 생각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김영일이 총리로 재임했던 2007년부터 2010년까지는 권력교체기였다. 김정일이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지도부에 큰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김영일은 김정일의 신임으로 총리까지 올랐지만 정치적 기반이 없던 터라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김영일은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숨’만 쉬고 살아야 했다.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2009년 후계자로 지명된 김정은이 경제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후계 체제의 기반에 될 경제 건설에 힘을 쏟았다. 평양에 10만 세대 주택 건설을 지시하고 심각한 전력난 해소를 위해 자강도 희천수력발전소 완성을 서둘렀다. 김정일은 그 지휘봉을 김정은에게 맡겼던 것이다.
비밀 자금을 관리하는 노동당 39호실로부터 800만 달러를 가져오고 중국 단둥(丹東)시로부터 대출을 받아 주택 건설을 시작했다. 김정은은 아버지에게서 배운 속도전을 재현해 ‘150일 전투’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인력동원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건축자재가 제때에 공급되지 않아 10만 세대는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었다. 결국 돈이 필요했다.
북한은 자금조달 방법으로 생각한 것이 화폐개혁이었다. 해방 이후 5번째 시도다. 화폐개혁의 명분은 인플레이션 억제· 재정 확충· 시장활동 억제 등을 통해 계획경제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는 암시장 거래로 돈을 번 신흥 부자들에게 그 동안 모은 돈을 통해 내게 하려는 ‘꼼수’였다.
이에 따라 2009년 11월 30일 구화폐 100원을 신화폐 1원으로 교환하는 조치를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현금 교환은 1세대당 10만원까지로 제한했다. 한도액을 넘는 구화폐를 장롱 속에 감춰 두려고 해도 휴지가 되기 때문에 신흥 부자층에게는 큰 타격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화폐개혁은 당초 의도와 달리 북한 경제를 심각한 혼란으로 빠뜨렸고 그 동안 추진해 온 경제정책에 많은 차질과 피해를 주었다. 북한 원화가치가 추락하고 북한 경제의 달러화·위안화 현상을 가속화시켰다. 화폐 교환은 12월 6일까지 진행됐다.
▲김영일 총리(사진 왼쪽)가 2007년 10월 29일 베트남을 방문해 응우옌민찌엣 베트남 국가주석을 주석부에서 면담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화폐 가치의 급변으로 물가는 폭등했다. 쌀값이 30배나 급등해 암시장에서 매매가 이뤄지지 않았고 노동자에 대한 임금 지불도 중단되는 공장이 생겼다. 이 혼란에 대한 책임은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이 뒤집어 썼다. 북한은 죄명을 화폐개혁 실패가 아니라 간첩죄를 적용했다. 6.25전쟁 시기 틈을 타 북한에 잠입한 간첩이며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방해하고 자본주의 경제방식을 채택하려다 체포됐다는 것이다. 북한이 화폐개혁 실패를 그의 죄명으로 할 경우 정책 실패로 시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화폐 개혁의 실패는 총리였던 김영일에게도 여파가 미쳤다. 박남기가 2010년 3월 처형된 이후 3개월 만에 김영일도 총리에서 내려왔다. 총리는 말로만 ‘경제사령관’이었지 경제 실패에 책임을 지는 희생양에 불과했다.
김영일은 총리에서 물러난 뒤 그의 행적은 공개되지 않았다.
(11) '백전노장' 최영림 총리
북한의 12대 총리는 최영림(1930~ )이다. 최영림 처럼 북한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친 사람도 드물다. 북한 노동당의 최고자리인 정치국 상무위원을 비롯해 내각 총리, 평양시 당위원장, 중앙검찰소장, 국가계획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 금속공업부장, 금수산의사당(주석궁) 서기실 책임서기 등을 지냈다.
북한의 주요 요직 다 거친 '경제통'
화폐개혁 실패의 구원투수로 등판
'6.26방침' 주도하면서 경제안정에 주력
김정일에서 김정은 넘어가는 권력교체기
큰 대과없이 총리 마치고 물러나
국가원로로서 조용하게 활동
▲최영림 총리(사진 가운데)가 2012년 10월 황해북도 황주군의 농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최영림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을 거치면서 숙청의 칼날을 피해 지금까지 건재하고 있다. 올해 나이 87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보다 2살, 김기남 당 중앙위 부위원장 보다 1살 어리다. 최영림은 총리를 2010년부터 2013년까지 3년 동안 맡았다. 권력이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총리로 재임할 나이는 80~83세로 고령이었다. 지금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자리는 1998년 헌법 개정때 신설된 자리로 현재는 김영주(김일성 동생) 전 조직지도부장과 최영림 등 2명이 있다.
최영림은 만경대혁명학원과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뒤 경제기사의 자격을 받을 정도 ‘경제통’으로 성장했다. 그는 1956년 당 조직지도부 책임지도원으로 공직을 시작했다. 내각 총리에 임명되기 이전까지 당과 내각을 오고가며 테크노크라트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최영림이 총리로 재직할 당시는 북한이 1,2차 핵실험한 이후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가 강화된 시점으로 살림살이가 더 쪼들려 있을 때였다. 전임 김영일 총리는 화폐개혁 실패와 종합시장 폐쇄에 따른 물가인상 등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김영일과 함께 경제를 이끌었던 곽범기, 오수영, 박명선 부총리도 함께 물러났다.
대신에 부총리로 강능수, 김낙희, 이태남, 전하철, 조병주, 한광복 등을 보강했다. 이 가운데 강능수를 제외하고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경제전문가들이었다. 김낙희는 협동농장경영위원장 출신으로 황해남도 당위원장을 지낸 사람이고 이태남은 황해제철연합기업소· 승리자동차연합기업소·강선제강연합기업소 당 위원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조병주는 용성기계연합기업소 지배인 출신이다. 최영림은 이런 사람들을 보강시킴으로써 경제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했다. 강능수는 문화상과 당 영화부장 겸 국가영화위원장 등을 역임한 문화계 인사였다.
최영림은 새롭게 구성한 부총리와 함께 경공업과 인민 생활 향상에 관심을 쏟았다. 화폐개혁과 종합시장 폐쇄로 인한 후유증에서 벗어나 주민들의 실제 생활수준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김정일과 김정은의 현지지도도 인민생활과 관련된 것이 자연스럽게 많아졌다.
▲최영림 총리(사진 왼쪽 둘째)가 2011년 4월 평안남도 안주시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에서 비료생산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그가 총리로 재임할 때 가장 공을 들인 것은 2012년 6월 28일 발표한 ‘우리식 새로운 경제관리체계를 확립할 데 대하여(6.28방침)’였다. 그 내용은 시장경제 요소를 가미해 경제 운용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공장·기업소의 판매수입을 국가와 공장·기업소가 일정 비율로 나누게 했다. 근로자들은 제품 판매로 수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배급이 중단됐고 국가기관이나 교육·의료 등의 분야에 근무하는 근로자들만 배급을 받았다.
협동농장은 작업 분조를 줄이고 생산품의 일부를 농민들이 소유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국가가 제시한 목표를 달성하면 그 생산물을 국가와 분조가 7대 3으로 나누도록 했다. 이전보다 농민들의 몫이 많아져 근로의욕을 자극할 수 있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최영림이 총리로서 이런 변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이전의 몇 차례 변화 시도가 그랬던 것처럼 6.28방침도 체재 내의 부분적 개혁을 넘어서지 못했다. 최영림은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큰 대과없이 절반의 성공을 마치고 2013년 4월 총리를 박봉주에게 물려주었다. 김정은은 총리가 정치적 힘이 없으면 어렵다는 것을 알았는지 정치국 후보위원도 아닌 박봉주를 바로 정치국 위원으로 임명했다. 박봉주는 지난해 6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했다.
최영림은 총리에서 물러난 뒤 최고인민회의와 전국노병대회 등에 참석해 원로로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노동당의 재정관리 사업을 감사하는 당중앙검사위원장인 최승호가 아들이며 북·미 간의 1.5트랙(반관반민)을 주도하는 최선희 외무성 미국국장이 딸이다.
(12 끝) 장성택도 탐낸 북한 총리
리커창 중국 총리는 시진핑 국가주석 다음으로 공산당 정치국 서열 2위다. 리커창은 이 힘으로 중국 경제를 이끌고 있다. 전임 총리였던 원자바오는 정치국 서열 3위였다. 사회주의 국가는 정치국 서열이 곧 권력이다. 직책은 단지 얼굴 마담에 불과하다.
정치국 서열 높아야 '힘'쓰는 총리가 돼
박봉주,최영림,이종옥은 실세형 총리
실무형 총리는 경제 실패하면 희생양
장성택은 김일성 시대의 총리를 꿈꿔
당시는 노동당 보다 내각에 인재 더 포진
김정은은 박봉주에게 많은 힘 실어줘
북한도 마찬가지다. 현재 총리인 박봉주는 정치국 서열 4위다. 전임 총리였던 최영림은 정치국 서열 3위였다. 두 사람은 역대 총리 가운데 그나마 총리로서 제 역할을 한 셈이다. 정치국 상무위원을 겸하면서 총리를 했던 두 사람의 재임 기간 동안 북한 경제가 공교롭게도 회복세를 맞고 있다. 장마당(한국의 시장)은 2010년 200여개에서 2015년 400여개로 늘었고 신흥재벌인 ‘돈주’들의 등장으로 경제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박봉주 총리(오른쪽 세번째)가 지난 4월 15일 김일성 생일 105주년 맞아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 참석했다. 박 총리는 오른쪽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다. [사진 화보집 조선]
이종옥 총리도 재임시절 정치국 서열 5위였다. 이종옥은 1977년부터 1984년까지 재임하면서 하락기에 접어든 북한 경제를 회생시켜보려고 ‘소방수’ 역할을 다했다. 하지만 김일성이 “300%까지 믿는다”고 했던 이종옥도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본질적인 한계에는 어쩔 수 없었다.박봉주·최영림·이종옥 등 3명과 항일빨치산 출신 총리였던 김일·박성철을 제외하고 나머지 총리들은 경제 실패의 책임을 지는 ‘희생양’에 불과했다. 강성산·이근모·홍성남·김영일 등 이들의 운명은 그랬다. 정치국 서열이 낮아 눈치를 보거나 김일성·김정일이 시키는 대로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하는 운명이었다. 연형묵 총리는 ‘김정일의 예스맨’ 답게 총리에서 물러난 뒤 김정일 시대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북한 총리는 김일성이 언급한 대로 ‘경제사령관’이다. 중국 총리도 마찬가지다. 다만 북한과 중국의 차이점은 중국은 집단지도체제로 경제를 국가 주석의 개인 스타일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주로 총리가 이끌었다. 하지만 북한은 1인 지도체제로 총리가 김일성·김정일· 김정은에 주로 휘둘렸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길 수 있는데 장성택은 왜 사망하기 이전에 내각 총리를 하고 싶었을까? 힘 없는 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장성택의 특별군사재판 법정 판결문을 보면 ‘장성택은 당과 국가의 최고 권력을 가로채기 위한 첫걸음으로 내각 총리 지위를 얻으려는 어리석은 꿈을 꾸었다’고 명시돼 있다.
▲2013년 12월 12일 국가전복음모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직후 총살된 장성택. 당시 조선중앙통신은 "장성택놈은 (김정은의) 계승 문제를 방해하는 천추에 용납 못할 대역죄를 지었다"고 주장했다. [사진 노동신문]
장성택은 김정은을 경제가 어려웠던 김정일 시대보다 먹고 살 만 했던 김일성 시대로 돌아가도록 하고 싶었다. 김일성은 1948년부터 1972년까지 총리를 겸했다. 당시는 총리를 내각 수상이라고 불렀다. 장진성 뉴포커스 대표는 “김일성이 경제 발전을 위해 실무형 인재들을 노동당 보다 내각에 포진시켜 국가를 경영했다”며 “72년 국가주석제를 만들기 이전까지 김일성이 총리를 겸하면서 경제를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뉴커스는 탈북민 인터넷신문이다.
장성택은 김일성의 이런 모습을 떠올렸고 총리가 북한 경제를 이끄는 것이 지금의 노동당이 주도하는 것보다 좋을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힘 있는 내각 총리를 맡아 북한 경제의 문제점을 바꿀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끝내 그 꿈은 물거품이 돼 버렸다.
지금 김정은은 박봉주 총리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다. 정치국 상무위원,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 국무위원회 부위원장 등 김일성을 제외하고 역대 총리들 가운데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특히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까지 겸하게 한 것은 파격적인 대우다.박봉주가 실제로 이런 권한들을 행사하면서 제 역할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과거 총리와 차이점은 김정은이 박봉주를 경제 현장을 많이 다니도록 하고 언론에도 자주 등장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경제에 관한 한 박봉주에게 많은 권한을 주고 대신 책임도 지우려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북한 경제를 이끈 총리]를 사랑해 주신 네티즌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북한 총리는 그 동안 힘이 없는 자리로 알려져 북한 연구자나 국민들의 관심이 덜 한 직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부 네티즌은 처음 들어보는 총리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리즈를 시작한 것은 북한 연구의 다양화와 언제 재개될지 모르지만 남북 경협이 활성화될 때 북한 경제를 이끈 총리들의 이름 정도는 알아 두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서입니다. 거듭 네티즌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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