凍土의 獨裁者 이야기 4/ 김정은은 누구? 3/
▣ 고수석이 전하는 김정은의 잔인한 권력 탐험2 중앙일보
■ 새로운 권력의 탄생①
▲김국태 북한 노동당 검열위원장의 영구를 찾아 조문하고 있는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 [사진 노동신문]
수소탄 핵실험으로 한층 ‘주가’를 올린 김정은(32).
국제사회가 ‘럭비공’, ‘구제불능’, ‘우물안 개구리’ 등의 오명으로 그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은 이번 핵실험으로 보여줄 것은 다 보여줘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게 됐다. 앞으로 그의 행보가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때보다 커진 만큼 그를 다시 조명하고자 합니다.
한반도 절반의 상속인 김정은.
2011년 김정일의 사망으로 27세에 상속인이 됐다. 요즘 같은 고령화 사회에서 27세면 ‘애 어른’ 취급 받겠지만 최고지도자는 일반적인 애 어른과 다르다. 조선시대나 중국에 더 어린 왕(王)도 있었다. 김정일이 김일성의 사망으로 최고지도자가 된 52세에 비해 훨씬 빨랐을 뿐이다.
김정은은 2009년 1월 8일 김정일로부터 후계자로 지명을 받았다. 25세 생일날이었다. 김정일이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당초 예정보다 앞당겨진 것이다. 당시 김정은은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하고 하전사(병사 또는 부사관)로 군 복무중일 때다. 김정은이 하전사가 된 것은 김정일의 지시였다. 하전사 경험은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뒤 조선인민군을 다루는데 큰 도움이 됐다.
김정은의 후계자 수업은 지명되기 이전부터 시작됐다. 스위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2000년 8월부터다. 당시는 후계자로 지명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왕자 수업’에 가까웠다. ‘왕자 수업’의 스승은 김두남(2009년 사망) 전 금수산태양궁전 관장이 맡았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친동생이다. 김두남은 당시 16세였던 김정은에게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투쟁과 김정일의 선군사상 등을 가르쳤다.
김두남은 김일성· 김정일의 군사보좌관을 했다. 김일성은 군사 업무에 능통하고 특히 숫자에 밝은 김두남을 무척 좋아앴고 그와 군부 내의 중요한 일을 토론했으며 사망할 때까지 곁에 두었다. 김정일도 김일성에 이어 그를 군사보좌관으로 중용했다.
김두남이 사망하자 김국태(2013년 사망) 당 검열위원장이 김정은의 스승이 됐다. 김국태는 김일성과 항일 빨치산 투쟁을 함께 했던 김책(1951년 사망) 전 부수상의 아들이다. 김일성은 6·25 전쟁 기간에 사망한 김책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할 정도로 그를 무척 아꼈다.
혁명 2세대인 김국태는 당 선전선동부 부장, 간부부장, 김일성고급당학교장 등을 지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김정은에게 중앙당·내각 주요 간부들의 인사 관리 노하우를 가르쳤다. 그럼으로써 노동당 주요 간부들과 자연스럽게 교분을 쌓도록 주선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정일은 김국태에게 스승인 동시에 후계작업을 맡겼다. (계속)
② 2016.01.22 새로운 권력의 탄생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1984년 1월 8일 태어났다. 태어난 장소는 강원도 원산, 평양, 평안북도 창성군 등 3가지 설이 있다. 이 가운데 강원도 원산이 가장 유력하다. 북한이 이 곳을 원산-금강산 국제관광지대로 선정하거나 마식령 스키장, 원산국제공항 등을 건설하는데 공을 들였던 것도 김정은의 출생과 관련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의 어머니 고영희가 김정일의 휴양지인 여러 초대소 가운데 원산 초대소를 특히 좋아해 이 곳에서 출산을 준비했다고 한다. 특히 원산 초대소는 인근에 시중호라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데 고영희가 이 곳을 자주 들렀다. 시중은 고려시대의 으뜸가는 벼슬이름에서 따왔다.
김정은은 후계자로 임명된 이후 먼저 노동당을 접수하려고 했다. 김정일 시대의 노동당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선군정치가 지금까지 득세할 정도로 군대를 통한 국가운영에 매달렸다. 하지만 김정일은 내심 노동당이 우선이었다. 김정일 자신이 1964년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출발한 것도 있지만 군대를 너무 앞세우면 자신과 아들이 위험해 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아들에게는 당 중심의 국가 운영을 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공식 데뷔를 2010년 9월 당대표자회를 통해 진행했다. 당대표자회는 당대회 사이에 열리는 행사로 당대회에 버금가는 큰 행사다. 1966년에 열린 이후 44년 만이었다. 거기서 김정은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됐다.
그 동안 당중앙군사위원회는 유명무실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방위원회가 북한의 최고권력기구가 된 이후 정치·군사·경제 등 중요한 의사결정을 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계자를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앉힌 것은 노동당의 부활을 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군사 문제도 당중앙군사위원회로 가져와 정상화하겠다는 포석도 깔려 있었다.
여기서 의문점은 김정은이 조직지도부와 관련해 아직까지 밝혀진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김정일이 사망하기 전 까지 1년 정도 노동당에서 어떤 트레이닝을 받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 현재로써는 아쉬운 대목이다. 김정일은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출발해 1973년 조직지도부장이 됐다. 그럼으로써 노동당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조직지도부는 노동당의 핵심이기 때문에 김정은이 이 곳을 장악하지 못하면 ‘허수아비’가 될 수 있다. (계속)
③ 새로운 권력의 탄생
▲김정은 제1위원장이 2012년 9월 완공을 앞둔 평양민속공원을 찾아 시설을 살펴보고 있다. [중앙포토]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2010년 9월 당대표자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후계자에 올랐다. 지금부터는 후계자 수업을 제대로 받아야 했다. 최초의 멘토였던 김두남 인민무력부 부부장은 2009년에 사망했고 김국태 당 검열위원장(1924~2013)은 86세로 고령이었다.
따라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정은을 보좌해 줄 3인방을 지명했다. 그들은 김양건 대남비서, 박도춘 군수담당 비서, 김평해 간부담당 비서 등이었다. 김정일이 이들을 뽑은 것은 전형적인 테크로크라트인데다 어떤 세력에도 포함되지 않아 김정은에게만 충성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이들을 통해 노동당과 북한을 배웠다. 김정은이 지난해 12월 30일 김양건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애도한 것은 이 때 맺은 인연이 깊었기 때문이다. 박도춘은 지난해 4월 김춘섭 전 자강도 책임비서에게 국방위원회 위원을 물려주면서 당 비서에서도 물러났다. 하지만 박도춘은 지난 11일 김정은이 수소폭찬 실험에 관여한 인물들을 불러 기념사진을 촬영했을 때 동행해 건재를 과시했다. 현재는 정치국 위원에는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평해는 정치국 후보위원이며 당 간부담당 비서를 유지하고 있다.
김정은은 김양건-대남 관계, 박도춘-핵·미사일 등 군수 분야, 김평해-인사 등의 노하우를 들었다. 하지만 기간이 짧았다. 김정일이 1년 뒤에 사망하면서 한가하게 수업만 받을 수 없었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사망 이후 의사결정자(decision-maker)가 돼 버렸다.
‘김정은 보좌 3인방’은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뒤에도 승승장구했다. ‘김정일 운구차 8인방’ 가운데 5명이 물러나는 살벌한 공포정치 속에서도 이들은 김정은을 보좌하면서 후계작업을 안정화시켰다. 김정은은 김양건· 박도춘을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했다. 김평해는 올해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할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 권력은 정치국 서열로 정해진다. 북한 매체들이 사람의 직책을 발표할 때 제일 먼저 정치국 위치를 발표하는 것도 그 이유다. 따라서 후보위원에서 위원이 된 것은 의미가 크다
하지만 3인방은 세력을 가진 이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김정일이 키운 조직지도부, 국가안전보위부, 군부 등은 자신들의 세력을 이용해 김정은 주변에서 3인방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감시하고 견제했다. 김정은이 이들을 지켜주지 못하면 위험해질 가능성이 항상 노출돼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세력이 없어 제거되기도 쉽다.
다행히 3인방은 나서지 않는 성격에 점잖은 편이라 장수할 가능성이 많았다. 그러나 김양건이 교통사고(북한 공식 발표)로 사망하면서 어떤 세력들로부터 감시받고 견제받았을 수 있다는 의문이 제기됐다. 따라서 김정은이 최근 박도춘을 챙긴 것도 그런 연유일 가능성이 있다. 앞으로 김정은이 자신의 사람들을 어떻게 보호할 지 지켜볼 대목이다. (계속)
(4) 김정일의 유산
▲김정일 위원장과 김정은 제1위원장이 2010년 11월 함흥시 2·8 비날론연합기업소를 시찰하는 모습. [중앙포토]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2011년 12월 17일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이후 최고권력자가 됐다. 준비가 덜 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앞만 보고 가야지 뒤돌아 볼 수 없었다.
김정일은 많은 유산을 남겼다. 어린 아들에 대한 걱정이 많았기 때문이다. 멘토를 엄선해 붙여주고 후계자 수업을 받도록 했지만 최고의 멘토는 자신이었다. 멘토들은 교과서적인 얘기를 할 수 있어도 권력의 속성을 말할 수 없다.
김정일의 유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선군정치다. 김정은이 지금 핵·미사일을 움켜쥐고 한반도를 긴장시키는 것도 그 유산의 그림자다. 김정일은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권력을 잡자마자 내우외환을 맞았다. 안으로는 홍수·가뭄으로 이어지는 고난의 행군이 기다리고 있었고 밖으로는 제1차 핵위기의 여파가 있었다. 그 때 김정일에게는 체제 유지가 최대의 관건이었다. 그래서 ‘군(軍)을 우선한다’는 선군정치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선군정치는 김정일 시대의 슬로건이었다. 김정은 시대가 됐는데 선군정치가 북한의 통치이념으로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김정은은 핵·경제 병진 정책에서 방점은 경제에 두고 싶었다. 그가 “인민의 허리띠를 더 이상 졸라매게 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도 그 이유다. 하지만 아버지의 유산인 선군정치가 너무 깊게 박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김정일을 따라 선군정치를 이끌었던 세력들이 여전히 북한을 통치하고 있다.
그 세력은 조선노동당의 핵심인 조직지도부다. 김정일은 생전에 조직지도부를 통해 북한을 이끌었다. 조직지도부가 선군정치의 이념적 틀과 실천방식을 만들었다.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는 즈음인 1973년에 만들어진 3대혁명소조운동의 엘리트들이 조직지도부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3대혁명소조운동은 노동당과 내각의 젊은 일꾼들과 대학 졸업반 학생들을 중심으로 수만 명의 젊은 엘리트가 사상, 기술, 문화혁명을 추동하는 3대혁명소조라는 이름으로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에 파견되었다. 이들이 세대교체를 통해 김정일의 지지 세력이 됐고 그의 손발이 되어 김정일 시대를 풍미했다.
이들은 과거 냉전시절 진영 논리에 젖은 사람들로 개혁·개방보다는 중국·러시아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유지가 북한의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김정인에게서 스위스 유학시절 알게 모르게 체득한 자본주의 냄새를 빼려고 한다.
조직지도부는 김정은 시대에서 그의 조력자이자 걸림돌이다. 김정은이 아버지처럼 자기 세력을 만들기 이전까지는 이들을 통해 북한을 다스려야 한다. 한 때 2인자 소리를 들었던 장성택도 조직지도부를 넘지 못했다. 지금 2인자 역할을 하는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도 조직지도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지도자의 가장 큰 도전은 아버지의 지지 세력이다. 김정은이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지도이념으로 내세운 것도 조직지도부의 작품이다. 미래 보다는 과거·현재에 머무는 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북한의 미래다.
최근 김정은의 행보를 보면 김정일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집권 5년차에 접어들었고 공포정치로 권력을 장악한 것 같지만 자신이 만든 권력이 아니라 조직지도부가 만들어 준 권력이다. 지금 북한은 살아있는 김정은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김정일이 통치하는 것이다.
(5) 김정은과 중국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환담을 나누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진 중앙포토]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공식적으로 중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 후계자가 된 2009년 이전에 중국에 놀러 간 적이 있는 지 알 수 없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08년 6월 국가 부주석으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는 자리에 김정은이 배석했는지도 현재 확인하기 어렵다.
김정일은 김정은에게 ‘중국을 믿지 말라’고 당부했다. 중국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을 주지 말고 활용해라’는 의미다. 김정일은 젊은 시절에 중국의 배신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1972년 닉슨의 방중과 1992년 한·중 수교를 지켜보면서 중국이 언제든지 자신들의 국익에 따라 북한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정일이 어린 김정은에게 외교관계를 가르치면서 중국을 가장 많이 할애했다고 한다. 특히 중국이 건국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제2차 국·공 내전 시기에 북한이 중국을 도와준 점이다.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에 쫓겨 동북 3성으로 몰렸을 때 북한이 일본 군대가 철수하면서 남겨 둔 무기를 공산당에 제공했다. 북한이 중국에 큰 소리를 치는 가장 큰 이유다. 중국 공산당 원로들도 그 점에 대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김일성·김정일은 이런 점을 잘 활용했다.
때문에 중국은 김일성·김정일이 방중할 때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이 그들을 만나주었다. 다른 어떤 국가의 최고지도자들이 가더라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김정일은 이 점을 김정은에게 심어준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게 마음을 주지 말고 활용해라고 충고한 것이다.
중국 5천년 역사의 넓이·깊이·높이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나마 북한이 어느 나라 보다 중국을 아는 것 같다. 1,400km 국경을 맞대고 있을 뿐더러 그 동안 많은 전쟁을 통해 서로를 잘 알기 때문이다. 특히 6.25 전쟁이 끝난 뒤 1958년 철수할 때까지 중국 인민해방군이 북한에 주둔하면서 북한 여성들과 결혼을 많이 했다. 그 가운데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성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 장성 부인들이 북·중 간의 가교 역할을 해 왔고 지금도 양국 군부간의 인적 교류에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 외교 문제로 양국 교류가 중단돼도 군인들의 교류는 지속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북한의 제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국제 사회가 중국에 대북 제재를 강화할 것을 요구하지만 중국은 시늉만 내고 있다. 김정은은 중국이 북한을 싫어하는 줄 알지만 이번 일이 중국의 핵심이익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가 긴장되면 중국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지만 북한을 포기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김정은이 중국의 이런 속내를 잘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지난 17일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 실현과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을 병행 추진하는 협상 방식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왕 부장은 이날 베이징에서 줄리 비숍 호주 외무장관과 양자 회담을 마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 같이 말했다. 평화협정 체결은 그동안 북한이 주장해온 이슈다. 중국의 난데없는 제안이지만 중국의 전략이자 계산이다. 개성공단을 중단하면서 중국의 대북 제재 동참을 이끌어 내려던 한국이 참 이해하기 어려운 시추에이션이다.
(6) 김정은의 권력 해부①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할아버지-아버지의 유산 속에서 살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이후 최고사령관(2011년 12월 30일)-노동당 제1비서(2012년 4월 11일)-정치국 상무위원·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2012년 4월 13일)에 올랐다. 북한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지만 집권 5년차인데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통치이념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김정은의 통치이념은 ‘김일성-김정일 주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그대로 따라가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리를 다 차지했지만 아직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권위는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살아있는 김정은 보다 사망한 할아버지-아버지가 통치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1월 1일 김정은 제1위원장과 같이 앞줄에서 참배하는 조연준[사진출처 노동신문]
김정은을 둘러싸고 있는 권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당 조직지도부· 국가안전보위부· 백두혈통을 비롯한 빨치산 세력들이다. 김정은과 이들 권력들과의 미묘한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현재의 북한을 아는데 도움이 된다. 김정은 탐험은 김정은이 이들을 장악하고 있는지 반대로 이들에 의해 휘둘리고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김정은 탐험(6)은 김정은과 당 조직지도부의 관계를 다룬다.
조직지도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북한을 통치하는 조직이다. 북한 사회의 모든 정치·정치·사회·문화적 활동이 조직지도부에 집중돼 있다. 그래서 북한에서 말하는 ‘유일적 지도체제’, ‘유일적 영도체계’가 가능하다. 쉽게 말해 북한 주민들은 조직지도부에 의해 감시받고 통제된다고 보면 된다.
김정은도 조직지도부에 의해 움직인다. 그의 동선과 말은 조직지도부가 만든다. 공장·기업소, 협동농장, 기관, 학교 등 현장에서 행하는 정책지도방법인 현지지도의 장소와 동행하는 인물들을 조직지도부가 정해준다.
김정은이 현지지도에서 언급한 말도 조직지도부에서 정리한 뒤 김일성·김정일 연설의 내용을 첨가해 각 기관으로 내려 보낸다. 김정은을 경호하는 호위사령부도 조직지도부 소속이다. 따라서 김정은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직지도부가 관리하고 있다.
조직지도부는 김정일이 키웠다. 김정일이 1973년 9월 조직비서로 임명된 이후 조직지도부는 급부상했다. 김정일은 조직지도부를 자신의 세력들로 만들어갔다. 김일성은 노동당 사업을 김정일에게 일임하고 국가적 사업에만 치중했다. 국가의 중요한 일은 정무원(현재의 내각)에서 담당하도록 조정했는데 이는 김정일이 실수할 경우를 고려한 조치였다.
따라서 노동당은 김정일의 후계작업을 위한 기구로 꾸려졌고 이런 김정일을 뒷받침해 준 세력이 3대혁명소조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홍위병 조직을 모방한 것이다. 김정일은 조직지도부에 3대혁명소조지도부를 신설했고 홍위병처럼 노동당과 국가 기관의 젊은 일꾼과 기술자, 청년 인텔리 등 엄선해 구성했다. 김정일과 운명을 함께 할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첫 작품은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다. 김일성 우상화로 북한의 모든 상황을 여기에 집중시켰다. 김정일의 후계 작업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 김일성주의를 내세워 하나씩 제거했다.
3대혁명소조의 설립 목적은 젊은 피를 동원해 북한의 경제를 재생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목적이 변했다. 이들은 지방관리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면서 김정일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시키려고 했고 인민들 속에 김정일의 기반을 구축해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는데 주력했다. 당시 3대혁명소조에 대한 지방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3대혁명소조원들이 지방 사정이나 공장 및 농장의 실정을 모르면서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너희들이 해보라”는 식의 거친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3대혁명소조는 김정일의 후계사업과 김정일 정권이 들어서면서 조직지도부로 대거 진출해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의 조직지도부를 꽉 쥐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경옥 제1부부장, 조연준 제1부부장이다. 북한의 2인자로 알져진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출신이다. 김경옥은 2008년, 조연준은 2012년부터 제1부부장을 맡고 있다.
문제는 조직지도부장이 누구인지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정일은 사망하기 전까지 조직지도부장을 놓지 않았다. 그 이유는 조직지도부장의 막강한 권한 때문이다. 고(故) 황장엽 노동당 비서와 함께 탈북한 김덕홍씨는 자신의 회고록 『나는 자유주의자이다』에서 “김정은이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을 겸임한다는 북한의 공식보도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것은 북한 노동당 내에 김정은보다 더 높은 김일성족속이 있으며 그가 김정은을 섭정하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메시지일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일부 매체는 조직지도부장을 김정은의 누나 김설송을 지목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단정하기는 이르다.
조직지도부 사람들은 해외를 나간 적이 없다. 그 이유는 해외에 나간 사람은 자본주의에 오염될 가능성이 있다며 순수 국내파들로만 구성했다. 따라서 이들은 국제정세에 어둡고 과거 사회주의 진영논리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다.
북한이 핵개발을 하는 이유를 대외용 주간지 통일신보 2015년 3월 28일자에 밝힌 적이 있다. 세 가지였는데 첫 번째 이유가 핵무기가 김정일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의 하나라는 것이다. 힘이 없으면 자기를 지킬 수 없는 오늘의 세계에서 김정일이 북한을 핵강국의 위치에 올려놨다는 설명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조직지도부는 김정일 프레임에서 북한을 움직이려고 한다. 북핵 개발도 ‘핵무기=김정일 유산’이라는 등식으로 정당화시키고 있다. 중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개발에 고집하는 이유다. 조직지도부는 김일성 시대부터 줄기차게 주장해온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전까지 핵개발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김정은도 이 부분에서 조직지도부와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없다. 김정일의 유산을 거스르려면 명분이 있어야 한다. 명분이라면 북·미, 남북, 북·일 관계가 좋아져 북한이 주장하는 ‘경제강국’을 이룰 수 있는 환경 조성이다. 하지만 북·미 관계부터 꼬여 있으니 김정일의 유산은 지속될 수 밖에 없다. (계속)
(7) 김정은의 권력 해부②
▲북한 특별군사재판부가 장성택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모습. [사진제공=노동신문]
장성택의 사형 판결문을 보면 석연치 않은 대목이 한 개 발견된다.
장성택은 당과 국가의 최고 권력을 가로채기 위한 첫걸음으로 내각총리 지위를 얻으려는 어리석은 꿈을 꾸었다.”
장성택은 당과 국가의 최고 권력을 가로채기 위한 첫걸음으로 내각총리 지위를 얻으려는 어리석은 꿈을 꾸었다.”
북한에서 내각총리는 힘이 없다. 중국은 총리가 경제를 총괄해야 하는데 북한은 그렇지 못하다. 노동당의 계획재정부와 재정경리부가 북한 경제를 관장하고 있다. 내각총리는 노동당에서 정해준 대로 움직일 뿐이다.
장성택은 왜 이런 힘없는 내각총리에 욕심을 냈을까?
장성택은 김일성 시대로 돌아가려고 했다. 김일성 시대는 그래도 먹고 살만 했다. 당시 정무원(현재의 내각)이 경제를 이끌었다. 김일-박성철-이종옥 등이 총리를 맡으면서 북한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들은 김일성의 지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총리의 위상이 지금보다 높아 힘있게 경제정책을 이끌 수 있었다. 장성택은 그 시절의 총리를 꿈꿨던 것이다.
때문에 장성택은 비대해진 조직지도부와 티격태격 싸우는 것보다 내각을 키워려고 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비록 자신이 키웠지만 조직지도부에 권력이 집중되자 2007년 12월 조직지도부 행정부문을 독립시켜 당 행정부로 승격시키고 장성택을 행정부장에 앉혔다.
하지만 권력이란게 한 번 잡으면 더 꽉 잡고 싶은 것이다. 장성택은 김정일의 의도와 달리 자신의 파워를 키우는데 활용했다. 행정부가 국가안전보위부·인민보안부·검찰 등을 관장하면서 노동당에서 가장 강력한 부서가 됐다. 그러자 조직지도부의 견제를 받게 됐고 오히려 자신이 당하는 꼴이 됐다.
조직지도부는 2013년 장성택을 체포하기 전에 김정은을 백두산 삼지연으로 현지지도를 보냈다. 장성택이 김정은에 달려가 사정하면 상황이 바뀔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직지도부는 어린 김정은이 장성택을 보면 마음이 흔들려 결정을 미루거나 오히려 자신들에게 화살이 날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장성택은 처형되기 전까지 김정은을 만나지 못했다. 조직지도부는 장성택을 처형한 뒤 대대적인 사정 작업을 했다. 그리고 노동신문 등 언론매체를 통해 ‘장성택 지우기’를 대대적으로 펼쳤다.
조직지도부는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을 공포정치로 몰아갔다. 장성택 처형 이후 숙청·처형된 사람들은 김정은이 한 때 아꼈던 사람들이다. 이영길 총참모장,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변인선 총참모부 작전국장, 한광상 당 재정경리부장, 마원춘 국방위원회 설계국장 등이다.
북한은 이들의 숙청·처형 원인을 장성택처럼 공개하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한광상, 마원춘은 다시 복원돼 노동신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정은 시대에 숙청·처형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어떤 세력에도 가담하지 않고 오직 실력으로 그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다. 따라서 조직지도부가 제거하기 쉬운 상대들이다. 조직지도부의 방침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온갖 명분을 뒤집어 씌워 김정은의 곁을 떠나게 했다.
북한은 올해 5월 제7차 노동당 대회를 앞두고 있다. 이번 대회의 가장 큰 목적은 세대교체라고 한다. 이번 세대교체가 김정은, 조직지도부 가운데 어느 쪽을 위한 것인지 지켜볼 대목이다.
(8) 김정은의 권력 해부③
▲2013년 11월 공훈국가합창단의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좌)과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우). [사진 노동신문]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두 번째 권력은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다. 한국의 국가정보원에 해당한다. 북한이 김일성·김정일 사망때나 대북제재와 경제난 등으로 붕괴설이 나돌더라도 버틸 수 있는 것도 보위부의 촘촘한 감시 체계 때문이다. 북한 체제에서 누군가 딴 마음을 먹더라도 보위부의 눈을 피해 집단으로 모여 행동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런 보위부를 만든 사람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보위부는 1973년까지 사회안전부(한국의 경찰청)에 소속돼 있었으나 김정일이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정치보위 부문을 분리해 독립기관인 ‘국가정치보위부’로 개편했다. 김정일은 독립한 보위부를 자신이 장악한 조직지도부 소속으로 두었다. 이어 보위부는 1982년 국가보위부로 개칭됐고 1993년 오늘의 국가안전보위부로 변경됐다. 김정일은 사망할 때까지 국가안전보위부장을 겸했다.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시작하면서 보위부를 국가 최고기관인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옮겼고 수장인 부장은 국방위원회 위원을 겸하고 있다. 현재의 김원홍 부장은 보위사령관(한국의 기무사령관), 군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출신으로 2012년부터 부장을 맡아 장성택 축출에 앞장서는 등 김정은의 권력 체제 구축에 크게 공헌했다.
보위부는 1명의 부장 밑으로 조직·선전·검열·철도 등의 분야별 부부장이 있고 지역별로 직할시와 시·도·군 등에 지부를 두고 있다. 다른 기관이나 기업소, 인민무력부 산하 각급 중대에도 요원을 파견해 감시활동을 펴고 있다.
김원홍은 장성택 이외에도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변인선 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한광상 당 재정경리부장, 마원춘 국방위원회 설계국장 등을 처형·숙청하는데 앞장섰다. 김원홍이 제거 대상자의 비리를 캐내고 거기에 김정은을 비난하는 내용을 포함해 김정은에 보고하면 대부분 그의 의도대로 결정된다고 한다. 특히 성격이 급한 김정은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내용이 첨가되면 여지없이 처형된다.
김원홍은 이를 통해 북한에 공포정치를 조성하고 있다. 김정은이 최종 결정을 하지만 ‘악역’을 담당하면서 그의 권력을 키우고 있다. 장성택에게 사형을 선고한 곳이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였다는 것을 보면 새삼 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국가안전보위부의 힘이 비대해지면서 조직지도부의 갈등이 생기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다.
김정은도 비대해진 김원홍의 권력을 모를 리 없다. 지난해 처형·숙청 된 사람들은 ‘김정은의 남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비리를 보고를 받으면 그대로 넘길 수 없다. 화가 나서 김원홍의 보고에 동의했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한광상· 마원춘 등은 다시 복직했다.
김정은이 보위부를 견제하기 위해 조직지도부를 이용하고 있다. 조직지도부는 김정은 자신을 움직이지만 위협적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보위부는 다르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더라도 정보기관의 수장은 언제든지 자신에게 도전 세력이 될 수 있다.
김정은은 김양건 비서의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을 구성할 때 보위부에 보란 듯이 조직지도부 출신들을 대거 참여시켰다. 조연준·김경옥 제1부부장, 조남진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염철성 총정치국 선전부국장, 조경철 보위사령관, 김수길 평양시 책임비서, 박태성 평안남도 책임비서 등이다.
김정은의 견제가 어느 정도 효과가 발휘할 지 지켜봐야 한다. 유엔 안보리의 새로운 대북제재안이 통과되면 북한은 과거보다 고통을 받을 것이다. 북한은 그 책임을 놓고 또 다시 권력 투쟁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김정은이 그 과정에서 김원홍과 같은 배를 탈지, 아니면 다른 배를 탈지 올 상반기의 관전 포인트다.
(9) 김정은의 권력 해부④
▲2014년 10월 19일 북한 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인천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메달을 딴 선수와 감독을 만나 격려하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이를 수행하는 최용해 노동당 비서의 모습을 전했다. [중앙포토]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주변 권력 가운데 그나마 마음을 여는 곳은 항일 빨치산 2~3세대 들이다. 이들은 북한의 ‘금수저’들로 어릴 때부터 호가호위했던 사람들로 김정은과 스킨십이 많은 사람들이다. 최용해 당 비서, 오일정 당 비서가 대표적이다.
항일 빨치산 2~3세대들은 할아버지·아버지의 영향으로 김씨 부자에게 어릴 때부터 절대 충성을 해 왔다. 따라서 김정은은 어린 나이에 후계자가 되면서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권력을 순조롭게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고모부였지만 말수가 적고 깐깐했던 장성택 보다 다정다감했던 최용해를 더 편하게 생각했다.
김정은은 10대 시절을 외국에서 보내는 바람에 국내 친구들이 많지 않다. 김정일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평양에서 다니면서 동창생들이 많았다. 그들이 김정일의 후계자 신격화와 후계 체제 구축을 도왔다. 하지만 김정은은 친구, 동료 등 사회적 관계를 전혀 형성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항일 빨치산 2~3세대들이 그 빈 공간을 채워주고 있다.
최용해는 항일 빨치산 2~3세대에서 ‘큰 형님’으로 불린다. 아버지 최현(1907~1982) 전 인민무력부장이 김정일의 후계작업에 몸을 불사르며 나설 정도로 ‘충신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러 6』을 보면 김일성과 최현이 함께 웃는 모습의 사진이 첫 번째로 실렸다. 그리고 『세기와 더불어 4』에는 ‘백전노장 최현’이라는 제목으로 최현의 일대기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 책에는 최현이 사망할 때까지 “김정일 조직비서 동지께서 건강하시오?”라고 물었다고 쓰여 있다. 김일성은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최현을 주인공으로 하는 기록영화 ‘혁명가’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다.
아울러 김일성은 최용해도 『세기와 더불어 4』에서 극찬했다.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치르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면서 최용해가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잠깐 얼굴을 보인 뒤 인민문화궁전에 나가 축전을 준비할 정도였다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치켜세웠다.
김정은은 이런 최용해를 가까이 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그가 허물이 있더라도 눈감아 주려고 한다. 그래서 조직지도부나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시비를 걸더라도 잠시 쉬게 한 뒤 다시 복권시키곤 하고 있다. 지금은 건강문제로 공식 행사에 빠지기도 하지만 김정은은 “최용해는 내 사람”이라는 말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말한다고 한다.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다.
김정은의 가족 가운데 그의 가까이서 보좌하는 사람은 여동생 김여정이다. 현재 당 부부장으로 선전선동부에서 일한다고 알려졌다. 김정은의 현지지도에 자주 등장해 한국 언론에 가끔 소개되기도 한다.
그리고 김정은의 가족 가운데 베일에 싸인 사람이 김설송(43)이다. 김설송은 김정일과 첫 번째 부인인 김영숙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설송을 만나본 사람들은 그의 카리스마와 총명함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김정일은 김설송이 똑똑해 어릴 때부터 현지지도에 데리고 다니면서 교육을 제대로 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유교사상에 깊게 배여 있는 북한 사회에서 여성 최고지도자는 시기상조다. 때문에 김정일이 사망하기 전에 김설송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겼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탓에 탈북민 가운데 김설송을 당 조직비서 및 조직지도부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당 조직지도부는 [김정은 탐험(6)]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만약 김설송이 조직지도부장이 맞다면 김정은이 폼을 잡고 다녀도 정권 유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김설송의 남편은 조직지도부에서 군대 인사를 맡아 군부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이름은 신봉남으로 알려졌다.
김정은의 권력 주변에는 ‘김정은을 결사옹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뱃속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많다. 어린 황제나 임금이 있던 시절은 대부분 그렇게 했다. 이런 모습들이 충성경쟁으로 비춰지면서 서로에게 칼을 겨누기도 한다.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뒤 처형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그 속에서 김정은은 자신이 북한을 잘 이끈다고 착각하면서 살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 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10) 김정은과 軍
▲북한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2013년 5월 군 건설현장을 시찰하는 모습 [노동신문]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북한 조선인민군은 어떤 관계일까?
TV화면을 보면 고위 간부들이 김정은 앞에서 쩔쩔매는 장면이 나와 김정은이 군부를 꽉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잦은 인사와 처형·승진·강등으로 군부를 자신의 손바닥에 놓고 쥐락펴락하는 것 같다. 이와는 반대로 북한의 각종 행사에 군인들이 참여하는 것을 보면 마치 군부가 북한을 장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런 모습들의 북한을 바라보는 전문가들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 김정은과 군부의 관계를 각각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김정은이 군부를 장악했다", "김정은은 군부의 꼭두각시다" 등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군부의 고위 간부들은 혁명 2세대들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때부터 기득권을 유지하던 세력들이다. 김정은이 통제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언젠가는 통제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김정은 정권 이후 숙청 또는 처형된 이영호 총참모장,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변인선 총참모부 작전국장, 이영길 총참모장 등은 충성 경쟁하는 과정에서 김정은을 따르는 방법을 놓고 서로의 생각이 달랐거나 군 인사에 대한 불만으로 한순간에 훅 가버렸다.
김정은이 비록 이들의 숙청 또는 처형을 최종 결정했지만 조직지도부·국가안전보위부·보위사령부의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숙청 또는 처형 당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김정은의 남자’들이었다.
군부가 김정은에 반발하는 방법이 있다. 군복을 차려 입고 한 두명이 아니라 30여명이 한꺼번에 김정은 관저로 매일같이 몰려가 처벌을 각오하고 ‘아니되옵니다’라고 집단으로 항의를 하는 것이다. 젊은 김정은은 노병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면 겁을 먹을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김정은이 정권을 잡은 이후 2차례의 핵실험도 군부의 집단 행동의 결과다.
그렇다고 군인들이 자신들의 의지가 관철되지 않는다고 해서 김정은을 제거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군부는 자신들의 방식대로 김정은을 잘 모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북한 군부는 여전히 김정일 시대의 선군정치에 젖어 있다. 선군정치가 김정일의 유훈이기 때문에 김정은이 군부를 개혁하려거나 선군정치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이들은 김정일을 명분으로 내세워 집단행동에 들어간다.
만약, 김정은이 미적거리면 앞에서는 제대로 말을 못하더라도 돌아서서 자기들끼리 모여 “할아버지·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만들고 지킨 나라인데…” 라고 탄식을 한다고 한다.
군부가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위한 명분을 만들어 강하게 밀어 붙이면 김정은은 그들의 요구를 물리치기 힘들다. 그래서 김정은은 군부를 견제하기 위해 최용해 비서에게 군복을 입혀 군 총정치국장에 앉혔다. 총정치국장이 2인자로 군부를 감시하는 자리다. 하지만 군 경력이 전혀 없었던 최용해가 리더십을 발휘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2년만에 해임됐다.
김정은과 군부는 한 몸이 아니라 분리돼 있다. 김정은은 아직 군부의 압력을 물리칠 만한 힘이 없다. 그래서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군부는 김정은이 40대가 될 때까지 자신들이 잘 보필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고 한다. 지금 김정은에게 군을 맡기자고 하는 사람은 그 동안 숙청 또는 처형된 사람처럼 한순간에 훅 갈 수 있다.
(11) 핵·경제 병진 정책
▲북한 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 9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핵무기병기화사업을 지도했다고 전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통치이념은 ‘김일성-김정일 주의’다. 그리고 국정과제는 핵·경제 병진 정책이다. 북한이 사용하는 병진노선의 정확한 표현은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 병진노선’이다. 2013년 3월 31일 열린 3월 전원회의에서 결정했다.
이 노선은 1960년대 김일성 시절에 사용한 경제·국방노선에서 따왔다. 북한은 1962년 12월 10일 열린 노동당 제4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이 노선을 채택했다. 당시 북한이 사용한 정확한 표현은 ‘경제건설과 국방건설 병진노선’이다. 김일성은 쿠바 미사일 위기(1962년 10월 22일~11월 2일)와 한국의 군사정권 등장을 새로운 위기로 판단하고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김정은과 김일성의 공통점은 경제건설을 앞세웠다. 차이점은 김일성이 ‘국방’을, 김정은이 ‘핵무력’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따지고 보면 ‘국방’이나 ‘핵무력’이나 같은 말이다. 그러면 두 사람은 경제와 국방 가운데 어디에 비중을 더 두었을까?
김일성은 비슷하게 두었다. 김일성은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을 병진시킨다는 것은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의 어느 하나도 약화시키지 않고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을 말한다”고 밝혔다. 김일성은 경제·국방노선을 채택하기 이전에 국방 보다 경제에 주력했다. 6.25전쟁 이후 피폐해진 북한 경제를 재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1962년의 주변정세가 북한에 위협적이라고 판단하고 경제 중심에서 경제·국방 병진으로 옮겼다.
그런 결정에 대한 대가는 따랐다. 북한 경제는 1960년대 초반에 성장세를 유지하다가 후반 에 들어 주춤하면서 제1차 인민경제발전 7개년 계획(1961~1967년)을 3년이나 연장한 뒤 1970년에 비로소 끝냈다. 북한 경제는 내부적으로 경제·국방 병진으로 스텝이 꼬였고 외부적으로 석유파동 등으로 어려움을 맞았다.
김정은은 김일성과 달랐다. 경제 보다 핵무력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정권을 잡은 2012년 장거리 미사일 은하 3호를 발사하더니 2013년에 제3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그리고 올해 1·2월에 제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광명성호를 발사했다. 병진노선에 따라 경제는 장마당의 확대와 경제개발구 21곳 설치, 6·28조치(생산량 개인 처분권 확대) 등을 내놓으면서 플러스 성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핵무력의 강화로 유엔 안보리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제재가 강화돼 경제건설에 악재로 작용하게 됐다. 따라서 김정은은 올해 5월에 개최되는 제7차 노동당 대회를 앞두고 노력동원인 ‘70일 전투’에 매진하고 있다. 그러면서 선전 구호로 ‘자강력 제일주의’를 내세웠다. 노동신문은 이를 “자기 힘을 비상히 강화하여 자기 힘으로 자기 앞길을 개척해 나가는 혁명정신”이라고 설명했다. 쉽게 말하면 자력갱생과 같은 말이다.
김일성의 경험에 비춰보면 경제·국방 병진 노선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병진이 아니라 경제를 어렵게 만들고 국방만 살을 찌웠다. 제로섬 게임이었던 것이다.
김정은은 지금은 웃고 있다. 경제는 장마당과 개인 상업의 확대로 내수 시장이 활발해져 과거보다 활기를 띠고 있다. 신흥 재벌인 돈주의 증가로 생산과 소비가 자본주의 시장처럼 돌아가고 있다. 이는 중국 등 외부의 공급으로 가능했는데 이번 대북제재가 최대 고비다.
북한은 이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42년 만에 개인 소득세를 부활하고 지방의 공장·기업소 등 국가 자산을 돈주들에게 사용하게 하고 토지세· 전기세· 물세 등만 받으려고 한다. 세금을 거둬는 대신에 경제자율권을 대폭 지방·개인에게 이전시키겠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이번 기회에 ‘김일성 따라하기’보다 ‘김일성 넘기’를 시도하고 있다. 성공할지 여부는 오는 5월 개최되는 제7차 노동당 대회가 끝나고 결정된다. 대북제재의 효과가 그 때쯤이면 알 수 있다.
(12) 북한은 미국과 전쟁 준비 중
북한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6·25전쟁 이후 잠시 정전했을 뿐 여전히 전쟁 상황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지난해부터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고 줄기차게 미국에 요구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다.
북한은 위기 상황이 조성되면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식’이란 구호를 주민들에게 강조한다. 1960년대 초부터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을 신화화화고 북한 주민들에게 행동 지침으로 유격대식 삶을 본받아 한다고 널리 선전하면서 북한 사회를 유격대식 사회로 전환시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이어 김정은도 ‘항일유격대식’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북한은 과거 일본과 싸웠듯이 지금은 미국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대상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뀐 것이다. 일제와 항일 전쟁을 끝내자마자 미국과 전쟁을 함으로써 전쟁의 대상이 바뀌었을 뿐 지금도 전쟁중이라고 생각한다.
조명록(1928~2010) 전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미국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을 만날 때 군복을 입은 것도 북한은 미국과 아직 전쟁중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이에 앞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조명록은 사복을 입고 김대중 대통령을 만난 것과는 사뭇 달랐다.
이처럼 김정은은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기 전까지는 전쟁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과의 대화 재개를 위해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계속하고 있다. 미국과의 전쟁 준비도 ‘항일유격대식’으로 한다. 기습적이고 잊을 만 하면 핵실험을 해 댄다. 그리고 올해 신년사에서 '핵'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경제'를 강조해 놓고, 성동격서로 핵실험을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북한은 유엔 안보리를 포함한 국제 사회의 제재에 대해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고 있다. 지난 2월 16일 광명성절을 맞아 방북한 재미 교포들에게 “북한은 6·25 전쟁 이후 외부 제재를 받지 않은 날이 없었다. 제재가 추가되는 것이 뭐 대수겠느냐. 고난의 행군도 겪었는데 그 때보다 어렵겠느냐”며 반문했다고 한다.
북한은 한·미합동군사훈련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최근들어 ‘수령결사옹위’를 부쩍 강조하고 있다. 미국이 북한에서 말하는 ‘혁명의 수뇌부’를 공격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전 주민들에게 수령옹위의 열혈투사가 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북한이 이번 한·미합동군사훈련을 겁내는 것은 이를 핑계로 김정은을 제거할까봐서다.
북한은 1989년 미국이 파나마를 침공해 노리에가 대통령을 체포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미국은 마음만 먹으면 다른 나라를 침공해 최고 지도자를 체포하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북한은 ‘수령결사옹위’를 강조했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체포되는 과정을 보면서 더 공포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한·미합동훈련 기간에 그것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두려워 하고 있다.
과거 일제와의 항일유격전에서 승리했다고 선전하듯이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그것이 통하리라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 북한의 현실을 제대로 얘기하는 사람은 바로 처형된다. 살기 위해서는 ‘불편한 진실’을 숨겨야 한다. 안타깝지만 북한의 현실이다.
(13) 신의주~개성 구간 철도 연결
▲북한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가 지난해 10월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에서 새로 만든 지하전동차를 돌아보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신의주~개성 구간(약 400km) 철도의 신설에 관심이 많았다. 기존의 신의주~개성 구간 철도는 북한의 서해안 지대를 종주하는 북한의 핵심 철도망이다. 전 구간이 전철화돼 있으며 평야지대를 통과해 터널도 5개에 불과하고 교량은 170여개가 있다. 중국 베이징에서부터 단둥과 신의주를 경유해 평양까지 국제열차가 운행 중에 있다. 하지만 노후화돼 기존 구간 옆에 새로 건설하려고 했다.
김정은은 국가경제개발위원회(현 대외경제성)에 지시를 내려 이를 추진하도록 했다. 철도성이 아닌 외자유치를 담당하는 국가경제개발위원회에 맡긴 것은 해외 투자를 받아 신설하겠다는 의도였다. 이 구간의 철도가 신설되면 개성~문산 간의 경의선과 연결하려고 했다. 북한은 이 철도가 신설되면 한국과 중국으로 오고가는 물류에서 발생할 수 있는 통행료를 챙길 수 있었다.
김정은은 중국이 지난해 8월 개통한 선양~단둥(208km)간 고속철도가 완공되기 이전부터 신의주~개성 구간 철도의 신설을 검토했다. 만약 단둥의 건너편인 신의주에서 개성까지 새로운 철도가 건설되면 ‘개성~선양 시대’가 열리면서 북한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정은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이를 추진했던 국가경제개발위원회가 2013년 장성택 처형으로 풍비박산이 났기 때문이다. 장성택은 당시 국가경제개발위원회를 맡고 있었다. 위원장은 김기석 전 조선합영투자위원회 부위원장이 맡고 있었다. 김 위원장을 포함해 국가경제개발위원회의 주요 인사는 장성택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김정은은 일부 국가경제개발위원회 간부들에게 별도로 이 사업을 맡기기도 했지만 장성택 처형의 광풍이 워낙 거세 지시를 내린 간부들을 보호해 주기 어려웠다.
신의주~개성 구간 철도 연결 사업에 뛰어들었던 중국 상지관군투자유한공사도 장성택 처형 이후 이 사업에서 손을 뗐다. 중국 정부는 북한 인프라 사업에 민간 기업이 뛰어드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중국 정부는 일대일로의 동쪽 연장선을 북한을 거쳐 부산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 프로젝트에 민간 기업이 끼어드는 것을 불편해했다.
신의주~개성 구간 철도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9년부터 추진됐다. 중국 선양 소재의 중국항공과기그룹공사(中國航天科技集團公司)가 철도 사업에 참여하려고 했다. 하지만 양측이 여러 차례 협상을 벌였지만 성사되지는 못했다. 김정일은 처음에 이 사업을 한국과 벌이려고 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이명박 정부와 꼬이면서 중국에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이를 이어받은 김정은은 아버지의 유훈사업을 성사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역사는 사소한 일로 방향이 틀어지듯이 장성택의 처형이 그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14) ‘핵·미사일 모라토리움’ 선언은 가능할까?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지난 25일 북한 인민군 창건일에 맞춰 제5차 핵실험을 강행할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국방부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예의주시했지만 북한은 예상과 달리 살짝 비켜갔다. 하지만 노동당 제7차 대회가 5월 7일로 예정돼 있어 핵실험을 강행할 시간은 아직 남아 있다.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지 않은 것을 놓고 중국의 고위 인사가 당대회에 참석할 수 있는 명분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조심스럽게 제기됐다. 북한이 자칫 ‘집안 잔치’로 끝날 수 있는 당대회에 최소한 중국 대표단은 참석해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체면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손님이 올 것 같지는 않다.
알듯말듯한 북·중 관계를 전망하기란 어렵다. 온갖 추측이 사실보다 더 사실 같아서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의 제5차 핵실험은 더 지켜볼 대목이다. 하지만 북한의 최근 행보를 보면 조건에 따라 핵 실험을 잠정 중단할 가능성도 있다.
북한 국방위원회는 지난 3일 대변인 담화를 통해 “일방적 제재보다 안정 유지가 급선무이고, 군사적 압박보다 협상 마련이 근본 해결책”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수용 외무상이 지난 23일 미국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중지하면 핵실험을 중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김정은이 노동당 제7차 대회 이후에 어떻게 나올지가 주목된다. 지금 추세를 보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의 실험은 계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멈출 생각이 없다”고 언급해 미국이 대화 제스처를 보이기 전까지 핵·미사일의 고도화을 중단하지 않을 조짐이다.
과거 북한의 형태를 보더라도 여기서 멈출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자존심이 강한 북한이 특별한 명분도 없이 쉽게 방향을 선회하지 않을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지금의 강경노선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시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언제까지인가다.
김정은이 ‘핵·미사일 모라토리움’을 선언할 가능성은 없을까? 이는 김정은이 지금 조성된 위기의 탈출구로 생각할 만한 카드다. 북한은 2001년 5월 요란 페르손 유럽연합(EU) 의장이 방북했을 때 미사일 발사를 2003년까지 유예한 적이 있었다. 선례가 있기 때문에 김정은이 국면 전환용으로 김정일처럼 모라토리움 선언을 할 가능성도 배제핼 수 없다. 문제는 명분이다.
이 부분이 김정은이 고민하는 부분이다. 안타깝게도 외부에서 명분을 받기는 어렵다. 김정은의 딜레마는 북한이 먼저 가시적인 조치를 내놓지 않으면 국제사회가 ‘당근’을 먼저 던질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북한이 언제까지 ‘몽니’를 부릴지 모르지만 시간은 북한 편이 아니다. 유엔 안보리의 제재가 단기적으로 효과가 적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북한에 불리하다.
이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북한이 자력갱생에 익숙해 이번 제재에 대한 효과가 생각보다 미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매에는 장사가 없다. 그동안 비축한 자원들이 서서히 고갈되면 ‘돈맛’을 들인 북한이 버티는데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 김정은에게 숙제다.
올해 미국의 대선, 내년 한국의 대선에서 북한을 이해하는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북한이 원하는 평화협정 체결,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 등이 하루아침에 이뤄지기는 어렵다. 김정은에게 타이밍이 중요하다. 그 타이밍은 5월이다. 라신 제르보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기구(CTBT) 사무총장은 미국의 소리(VOA)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수뇌부가 먼저 할 일은 핵실험 유예 선언”이라고 밝혔다. 그의 현명한 선택을 기대해 본다.
(15) 남북군사회담을 제안한 이유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노동당 제7차 대회에서 사업총화보고를 하면서 불쑥 ‘남북군사회담’을 제안했다. 제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이후 고조된 긴장 국면과 개성공단 중단 등 강대강 국면에서 돌파구를 마련해 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김정은은 왜 남북고위급회담 아닌 남북군사회담을 던졌을까?
김정은은 한국의 대북정책을 주도하는 세력을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이병호 국가정보원장 등 군인 출신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한국과 회담을 할 경우 현재의 긴장된 국면을 풀기 위해서는 남북군사회담이 적절한다고 본 것이다.
북한은 선군정치의 영향 탓인지 군인 대 군인으로 만나면 협상을 잘 풀린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민간 대 민간으로 만나면 서로 따지는 것이 많아져 답답함을 느낀다고 한다. 북한은 자기 논리에 강하지만 국제 정세를 해석하는 방법이 ‘우물 안 개구리’로 보일 수 있다는 열등감이 있어 내심 남북군사회담을 선호한다.
김정은은 사업총화보고에서 “우리는 조선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우선 군사당국간 대화와 협상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북남 군사당국 회담이 열리면 상호 관심사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협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정은은 지난해 8·25합의 때처럼 ‘김관진 실장-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의 만남을 통해 꼬일 대로 꼬인 남북 관계를 풀었듯이 이번에도 그런 장면을 희망하는 것 같다. 하지만 국방부 문상균 대변인은 “북한이 스스로 핵보유국을 자처하며 핵·미사일 도발 등을 자행하는 상황에서 긴장완화 등을 위한 군사회담이 필요하다고 한 것은 전혀 진정성이 없다”고 일축했다.
설령 가까운 시일내 남북군사회담이 성사되더라도 북한은 진정한 회담보다는 자신들의 선전장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그 동안 주장해 왔던 핵보유국 선전과 자신들의 핵보유가 한반도 전체의 안보를 위한 것이라고 자랑하는 기회로 삼을 것이다.
아울러 북한은 남북군사회담에서 핵문제를 꺼낼 가능성도 없다. 핵문제는 미국과의 문제로 간주하기 때문에 한국과는 상대하지 않으려고 한다. 따라서 김정은이 말한 ‘상호 관심사 문제들’에는 비핵화는 빠지고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 핵·미사일 모라토리움(잠정 중단)’이나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을 테이블에 올려 놓으려고 한다.
북한이 한국과 대화를 재개하고 싶다는 얘기는 최근 들어 솔솔 회자되고 있다. 태양절(4월 15일)에 평양을 다녀 온 재미교포들의 한결 같은 이구동성이다. 경제·핵 건설 병진노선에서 핵보유국으로 선포한데다 소형화·경량화는 어느 정도 진행돼 경제에 집중하고 싶어한다는 얘기다.
김정은은 사업총화보고에서 “경제의 어떤 부문은 한심하게 뒤떨어져 있으며 인민 경제 부문들 사이에 균형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선행 부문이 앞서 나가지 못해 나라의 경제 발전에 지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핵은 마음대로 됐지만 경제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돌파구로 남북대화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핵과 관련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어떠한 형태의 남북대화도 어려워 보인다.
핵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김정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포기시키려는 박근혜.
남북관계는 이기려는 사람과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지루한 장기전(長期戰)이 돼 버렸다. 대화만큼 좋은 것이 없는데 그것이 그렇게 마음처럼 되지 않고 있다.
(16)] 김정은의 도박
▲무수단 시험 발사 현장에서 관계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사진 노동신문]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왜 미국을 도와 줄까?
무수단 미사일을 줄기차게 쏘면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 사드)체계를 한국에 배치하려는 미국에게 명분을 더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정작 몰라서 그런지, 알면서도 다른 계산이 있는지 궁금하다.
김정은은 사드 배치 문제로 미국과 중국이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중국은 가뜩이나 남중국해 문제로 미국과 티격태격하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중국의 동북 3성을 미국에게 내 집처럼 들여다 볼 수 있게 할 수 없다. 게다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베트남 방문과 일본 히로시마 방문 등으로 중국의 포위전략을 보여줬다. 김정은은 한국에 사드마저 배치되면 중국에게 어떻게 반응할 지를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 미사일을 계속 쏘는 것을 보면 미국과 ‘도박’을 벌이는 것으로 관측된다. 워싱턴 군산복합체와 평양 군산복합체가 밀고 당기는 게임을 시작한 것이다.
김정은은 어떻게든 미국과 대화를 하려고 한다. 스토커 수준에 가깝다. 하지만 미국은 올해 대선 정국인데다 북한과 대화를 했다가 실패하면 본전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엉덩이를 빼고 있다. 그러면서도 비확산을 명목으로 조건부 대화를 던지고 있다. 조건부는 비핵화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미국국 부국장이 최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26차 동북아시아협력대화(NEACD)에 나온 것도 미국과의 대화를 위해서다. NEACD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산하 ‘세계분쟁 및 협력연구소(IGCC)’가 미·일·중·러 및 남·북한 등 6개국 외교부 관리·군인사·학자들을 초청해 개최하는 다자간 포럼이다.
최 부국장은 이번 회의에서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포기, 평화조약 체결, 세계 비핵화 등을 거론하며 “세계 비핵화 이전에는 핵을 포기할 수 없다”, “6자회담은 죽었다” 등의 주장을 펼쳤다.
미국은 이번 회의에 성김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보냈다. 최 부국장과 비교하면 높은 급이다. 미국의 대학이 주최하는 만큼 비중 있는 인사가 참석했고 북한의 대화 제의에 진정성을 파악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북한도 이번 회의에 미국의 입장을 살피러 나왔다. 그래서 부국장 급을 내 보낸 것이다. 그런데 회의 기간에 그동안 실패를 거듭하던 무수단 미사일이 성공하자 최 부국장은 이례적으로 주중 북한 대사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무수단 미사일 성공을 자랑했다. 최 부국장은 졸지에 몸값을 톡톡히 올리게 됐다.
최선희-성 김 두 사람이 비밀접촉을 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북한과 미국을 대표한 사람들이 만났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북·미가 그동안 쌓인 불신으로 정부끼리 느닷없이 만나기는 어렵다. 이런 민간 회의를 통해 자연스럽게 만나 서로의 ‘간’을 살펴보는 것이다.
김정은은 도발과 대화를 통해 몸값을 올리고 있다. 중국은 여러 차례 자제를 요청했지만 막무가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6월 초 이수용 노동당 부위원장을 만나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길 바란다”며 자제를 거듭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연일 무수단 미사일을 쏘아댔다.
김정은은 오바마와 시진핑 사이에서 ‘도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사일 도발로 미·중 끼리 사드의 한반도 배치를 놓고 싸우게 만들었다. 오바마를 상대로 사드를 배치할 수 있는 명분을 높여주고, 그 대가로 대화 국면을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다.
북한은 시진핑을 상대로 북·중 정상회담과 경제적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그 요구가 계속 받아들여지지 않자 계속 도발을 강행해 사드 배치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중국이 환장할 노릇이다. 중국에게 북한은 ‘계륵’같은 존재다.
이런 김정은의 도박을 보면 김일성을 빼어 닮았다. 김일성이 중국과 소련을 상대로 도박을 했듯이, 김정은은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하고 있다. 도박치고는 큰 도박이다. 잃을 게 없다는 식이다.
(17) 북한군의 피로감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 20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관한 전략군 화성포병부대들의 탄도로케트(미사일) 발사 훈련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 속 지도에는 북한 황주 일대에서 부산·울산 일대로 날아가는 미사일의 궤적이 그려져 있었다. [노동신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핵·미사일 드라이브’에 북한 군부는 죽을 맛이다. 피로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연일 쏘아대는 미사일을 성공시키자니 발사할 때마다 가슴을 조린다고 한다. 김정은은 집권 초반부터 군 주요 인사들의 잦은 교체와 계급장 조정 등으로 ‘군부 길들이기’를 해 왔다. 그의 길을 따른 자만이 살아남았고 그러지 못하면 가차없이 숙청됐다. 북한 군부는 김정은의 ‘선군 바람빼기’로 좋았던 시절도 다 갔다.
‘선군 바람빼기’는 지난 6월 개최된 최고인민회의(한국의 국회) 제13기 제4차회의에서 드러났다. 국방위원회 산하 인민무력부가 신설된 국무위원회 산하로 옮기면서 인민무력성으로 개명했다. 국무위원회는 국방위원회에서 확대 변경됐다. 인민군 총참모부는 최고사령부 산하에 있기 때문에 인민무력성은 군 행정만을 담당하게 됐다.
김정은은 올 들어 핵무기의 소형화·다종화와 함께 이동 수단인 미사일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도 그 하나다. 핵을 보유했다고 하지만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러시아가 용납할 리가 없다. 북한 군부는 김정은의 ‘핵·미사일 드라이브’를 이해하면서도 그만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어린 지도자의 어설픈 판단을 통한 일련의 군비경쟁이 또 다른 화(禍)를 불러 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것은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고 전쟁을 하면 자신들이 끝장난다는 정도를 알고 있다. 미군의 가공할 무기를 보았으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1950년에야 중국·러시아의 지원으로 가능했지만 지금은 이마저도 어렵게 됐다. 특히 야전군 군인들은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한다. 겉으로는 총폭탄 정신으로 싸우겠다고 하지만 속마음은 다르다는 것이다. 혹시나 전쟁이라도 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북한 군부는 제7차 당대회를 끝내고 남북군사회담을 제안하고 한국의 답변을 기다렸던 것이다. 군비경쟁이 지속될 경우 자신이 더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했지만 오랫동안 유지해온 대규모 병력과 재래식 전력을 단숨에 줄일 수 없다. 이것이 북한 군부의 고민이라고 한다. 북한이 해마다 발표하는 예산에서 군사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15~16%이다. 이 수치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2003년부터 지금까지 이 범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북한 주민들의 경제는 과거보다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 살림은 여전히 팍팍하다. 배급제가 유명무실 될 정도다. 여기서 군비경쟁마저 가속화되면 소련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소련은 미국과 군비경쟁을 벌이다 결국 파국을 맞았다.
그래서 북한 군부는 핵보유로 안보불안과 위협을 어느 정도 해소한 만큼 군비경쟁을 여기서 멈추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남북군사회담을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경제·핵무력 병진노선’가운데 핵무력에 자신감을 가진 만큼 경제로 무게 중심으로 옮기려는 것이다. 김정은이 궁극적으로 희망하는 것도 경제발전을 통한 정권 안정과 영속화다.
(18) 북한은 왜 미사일을 일본으로 쏘나?
북한이 5일 황해북도 황주 일대에서 노동미사일로 추정되는 탄도미사일 3발을 일본 방공식별구역(JADIZ) 해상으로 발사했다. 올 들어 16회. 대부분 일본 해상으로 떨어졌다. 북한은 왜 미사일을 일본으로 쏘았을까? 단순히 미사일을 쏠 곳이 동해상 밖에 없어서가 아니다. 북한은 자기들 방식대로 계산하고 미사일을 쏜 것이다.
북한은 일본과 대화를 하고 싶어한다. 미사일로 무슨 대화냐고 할지 모르지만 북한은 그 방법이면 일본이 대화에 응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지금 대선에 빠져있는 미국, 사드에 매몰돼 있는 한국에 비해 일본은 대화상대로 적격이다. 북한은 전쟁배상금(100억~300억 달러)에 대한 논의를 천천히 하더라도 일본이 자체적인 제재만이라도 완화해 주길 바란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견고한 한·미·일 3각 동맹을 훼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도 이런 일본의 사정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본과 손을 잡으려고 하는 것은 내년 동북아에서 공백 기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미국의 새로운 행정부는 내년에 과거 정책을 리뷰하고 새 정책을 준비하느라 동북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한국은 대선 정국으로 외부에 관심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내년은 일본이 동북아에서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기회다.
북한은 이를 사전에 간파하고 일본과 대화를 하고 싶은 것이다.
북한은 만약 개방을 본격적으로 할 경우 ‘최우선 고객’으로 일본을 생각하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어릴 때부터 일본 문화의 매니아였다. 특히 일본 만화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런 영향으로 일본에 대한 감정이 호의적이다. 어머니가 재일 교포 출신이라는 것도 한 몫을 한다. 김정은이 일본을 바라보면 다른 부분은 그대로 따라온다.
북한에 진출하려는 일본 사람이나 기업들도 북·일 관계에 ‘봄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북한의 지하자원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희토류, 금, 동, 마그네사이트 등 일본 경제에 필요한 자원이 북한에 풍부하게 매장돼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아시아의 맹주가 되고 싶다는 야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최대의 적수로 떠오른 중국을 견제하려는 이유다. 일본은 북한에서 중국을 떼내려고 한다. 그래서 북한에 당근을 제시해 왔다. 하지만 북한은 섣불리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의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북-중 관계를 보면 일본의 적절한 당근은 구미가 당길 수 있다.
김정은은 중국보다 미국을 더 선호한다. 중국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중국이 죽지 않을 정도로 북한을 지원하고 그래서 죽지 않고 살아 있기만을 바란다고 생각하고 있다. 김정은은 그런 중국이 너무 싫은 것이다. 그래서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고 싶어한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북한은 이런 이유로 일본과 대화를 원하고 있다. 그 방법이 거칠고 위협적이지만 북한은 그런 방법 밖에 모른다.
(19) 김정은과 미국 대선 2016.11.03
▲지난 30일 지지자들 앞에서 유세를 하는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 두 후보의 모습. [사진 중앙포토]
다음 주면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한다. 한반도에 가장 영향을 많이 주는 사람이다. 한국은 ‘최순실 게이트’로 관심이 확 떨어졌지만, 북한은 온통 미국 대선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트럼프 미국 공화당 후보가 이번 대선에서 승리하기를 바란다. 트럼프가 자신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최근 평양을 방문한 일본 주간지 ‘동양경제’의 후쿠가 게이스케 편집위원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는 “북한은 트럼프가 되면 뭔가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과거에도 미국의 민주당 보다 공화당을 선호했다. 6.25전쟁(1950~1953), 푸에블로호 사건(1968년), 북한 폭격 추진(1994년) 등 북한이 미국과 대결상황으로 갔던 때가 민주당 집권시기였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겉으로 강경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대화를 통해 풀려고 했다고 인식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북핵 문제를 6자 회담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공화당과는 통하는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김정은이 이번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내심 승리하기를 바라는 것도 여기에 있다. 트럼프가 스캔들로 곤혹을 치르면서 지지율이 떨어지자 딴 마음도 생겼다. 북한은 지난 10월 21~2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북미간 트랙2 형식의 대화를 가졌다. 북한은 한성렬 외무성 부상과 장일훈 유엔주재 차석대사, 미국은 로버트 갈루치 전 국무부 북핵 특사와 조셉 디트라니 전 6자회담 차석대표가 참석했다. 북한은 정부 대표, 미국은 민간인이 만난 것이다.
갈루치는 빌 클린턴 행정부의 사람으로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이끈 사람이다. 북한은 만약에 클린턴이 당선될 경우도 고려해야 했던 것이다. 갈루치는 클린턴이 당선될 경우 어떤 역할을 할지 알 수 없지만 북한으로서는 좋은 창구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 같다.
이번 쿠알라품푸르 회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디트라니 전 차석대표는 미국의 소리(VOA)에 “미국 인사들은 북한 외무성 관계자들에게 9.19 공동성명의 이행을 제안했고, 북한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을 거론하며 핵무기 개발의 정당성을 주장했다”고 말했다.
확인되지 않았지만 빌 클린턴의 방북도 얘기가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빌 클린턴은 2000년 미국 대선이 끝난 뒤 평양 방문을 추진했다. 하지만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그 꿈이을 좌절됐다. 그래서 북한은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내년 취임 하기 전에 빌 클린턴의 방북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새 행정부가 출범하기 전에 큰 틀에서 짜자는 의도였다.
북한은 트럼프를 선호하지만 클린턴에도 보험을 들어 두려고 한 것이다. 오는 11월 9일 결과가 나오겠지만 북한은 다음 행정부와 대화를 재개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에 절망한 북한이 다음 행정부 초반부터 대화의 물꼬를 트고 싶은 것이다. 북한은 비핵화보다 ‘핵동결’ 카드로 미국을 설득하려고 할 것이다.
북한이 미국에 원하는 것은 평화협정이다. 한반도의 이런 ‘거대한 거래’라 이뤄질 지는 다음 주부터 지켜볼 재미있는 구경거리다. 한국은 ‘최순실 게이트’에 빠져 치고박고 싸우겠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은 거대한 게임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 대선 결과가 기다려진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
■ 진쌍판 형 김정남을 죽이다.
2017.02.15
▶국정원 "김정남, 5년전 김정은에 '저와 제 가족 살려달라' 서신 발송"
국가정보원은 15일 “피살된 김정남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에게 ‘살려달라’는 서신을 보냈지만 결국 암살됐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이날 국회 정보위원회 간담회에 참석해 이같이 보고했다고 정보위 더불어민주당 간사인 김병기 의원이 전했다.
국정원은 “2012년에도 본격적인 (암살) 시도가 있었다”며 “이후 2012년 4월 김정남은 김정은에게 ‘저와 제 가족을 살려달라’는 서신을 발송하기도 한 바 있다”고 밝혔다. 김정남은 지난 2012년 4월 김정은에게 “저와 가족에 대한 응징명령을 취소해주기 바란다. 저희는 갈 곳도 피할 곳도 없다. 도망가는 길은 자살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북한 정찰총국 등 정보 당국은 지속적 암살기회를 엿보며 준비했고, 결국 이번 암살이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고 김 의원은 전했다. 김 의원은 “‘김정남 암살’은 김정은 집권 이후 스탠딩 오더(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명령)였다”고 했다.
국정원은 “김정은이 김정남을 암살한 까닭은 자기 통치에 위협된다는 계산적 행동보다는 김정은의 편집광적 성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고 김 의원은 전했다.
이철우 정보위원장도 “김정남이 김정은에게 위협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테러한 것은 김정은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라며 “편집광적 성향이 반영된 것”이라고 했다. 국정원은 김정남의 가족들이 마카오에서 중국 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보고했다.
김병기 의원은 “김정남이 망명 시도를 하다가 피살된 거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말레이시아를 포함한 다른 나라에 특별한 망명 시도를 했다는 사항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북한 내부에서 김정남 옹립시도가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일정한 지지세력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어서 상황상 맞지 않는다”고 했다.
국정원은 김정남을 암살한 여성 2명이 택시를 타고 도주했으며 아직 탈출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고했다. 이번 사건은 독극물 테러로 강력히 추정되지만 정확한 사인은 이날 부검을 통해 확인할 예정이라고도 전했다.
김정남 암살범에 대해 김병기 의원은 “아직 (말레이시아를) 탈출 못한 걸로 보인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어느 정도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엄보운 기자
▶말레이 경찰, 김정남 피살 공항 CCTV 분석… "흰 긴팔에 짧은 하의 여성"
/연합뉴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46)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독살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현지 경찰이 폐쇄회로(CC)TV 분석을 통해 용의자를 쫓고 있다고 말레이시아 현지 매체가 15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말레이시아 현지 매체 더스타 온라인이 공개한 공항 CCTV 영상에는 용의자로 추정되는 한 여성의 모습이 포착됐다.
13일 오전 9시 26분쯤 단발머리에 흰색 긴소매 셔츠와 짧은 하의를 입고 있는 한 여성이 공항 밖에서 작은 크로스 백을 메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 여성 주변에 짐을 가지고 있는 관광객들이 여럿 있어 여성은 언뜻 보면 일반 여행객처럼 보인다.
영상의 다른 장면에서는 이 여성이 차도로 나와 있는 모습도 포착됐다. 셀랑고르주(州) 범죄조사국(CID)의 파드질 아흐마트(Ahmat) 부국장은 공항에서 숨진 남성이 김정남인 것을 확인했다며 현지 경찰이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의 CCTV 영상을 분석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김정남은 지난 6일 마카오에서 말레이시아로 입국한 뒤 13일 9시쯤 다시 말레이시아 공항(KLIA2)에서 마카오로 출국하려다 두 명의 여성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 두 여성은 공항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도망갔다.
김정남은 누군가 뒤에서 그의 얼굴을 당겼으며 그의 얼굴에 어떤 액체를 뿌렸다고 말했다고 이 매체는 전했다. 또 국내 항공사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정남은 공항 내 저가비용항공사 전용 터미널에서 출국을 위해 셀프체크인 기기를 사용하던 중 여성 2명으로부터 미확인 물질을 투척받고 사망했다. 두 여성은 북한 공작원으로 추정되며 액체는 강력한 독성 물질로 보인다.
김정남은 즉시 도움을 요청해 공항 의무실에 보내졌고, 그는 두통을 호소했다고 현지 경찰은 전했다. 의무실에서 그는 약간의 발작 증상을 보였고 현지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결국 숨졌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현지 행적을 조사할 예정이며, 공항의 폐쇄회로 분석에 들어갔다고 이 매체는 전했다.
▶암살·납치·폭파 훈련 받는 北 여성공작원
북한은 과거부터 여성을 훈련시켜 공작원으로 활용해 왔다. 탈북자로 위장해 남파된 여간첩 원정화 사건이 국내에서는 대표적이었다.
국가안전보위부 소속인 원정화는 지난 2008년 7월 간첩 활동 혐의로 체포됐다. 당시 원정화에 대한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14세인 여자고등중학교 4학년(1988년) 때 성적이 뛰어나고 학교 공헌도가 높은 학생에게 수여되는 '이중 영예 붉은기 휘장'을 받았다. 우수한 성적과 좋은 출신 성분으로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에 선발된 뒤 평양에 있는 공작원 양성소 특수부대에 입대했다. 원정화는 18세 때까지 호신술과 독침 등 살상 무기 사용법, 산악훈련, 사격 등의 훈련과 군사정치 학습을 받았다고 공소장엔 기록돼 있다. 남파된 뒤 국군 장교들과 내연의 관계를 맺은 뒤 군사기밀을 빼냈다.
여성 공작원들도 남성들과 거의 비슷한 강도의 훈련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권도는 평균 3∼4단 이상이며, 수영으로 웬만한 섬을 오갈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암살, 납치와 폭파 교육도 받는다. 북한은 여성 공작원들을 오래전부터 활용해 왔다. 70년대 일본인 납치 때도 여성이란 점을 활용해 납치 대상들에게 접근했고, 김현희는 1987년 대한항공기 폭파 때 시한폭탄을 두고 내리는 역할을 했었다.
북한은 최근에는 사이버상에서도 '미인계'를 이용하고 있다. 국가정보원이 최근 밝힌 바에 따르면 유령 기관에 근무하는 미모의 여성 직원을 위장해 페이스북 계정을 개설한 뒤 이들을 통해 국내의 각종 정보를 빼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김명성 기자
▶김정남, 죽기 전 최후의 말은 "몸 상태 안좋다"…北 망명정부 간부설도 돌아
/김정남. /연합뉴스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북한 김정남(46)이 ‘북한 망명정부’ 간부가 될 것이란 풍문이 돌았다고 일본 지지통신이 15일 보도했다.
지지통신은 “김정남이 북한 후계 경쟁에서 탈락하고 이복동생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한 후에도 ‘김정남을 새로운 지도자로 세운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소문의 내용은 김정남이 고모부인 장성택 등과 연대해 중국을 방패 삼아 김정은 정권을 전복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통신은 “최근에도 ‘김정남이 일종의 망명정권 간부로 취임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관측이 있었다”며 “이 때문에 최근까지도 종종 김정남 암살미수 정보가 퍼졌다”고 전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은 한때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고 2013년 국가전복음모죄 등으로 처형된 장성택과 밀접한 관계여서 김정은의 경계 대상이 됐다.
또한 복수의 정부 소식통과 외신에 따르면 김정남은 지난 13일 오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 제2청사에서 오전 10시 이륙하는 마카오행 항공편을 이용하려다 신원 미상의 여성 2명에 의해 독살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현지 경찰 관계자는 김정남으로 보이는 남성이 “공항에서 '몸 상태가 안 좋다'며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신문은 이 말이 “그의 최후의 말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현지 경찰은 “공항 내 진료소에 데려갔지만, 이 남성은 공항에서 병원으로 이송되는 도중 사망했다고 병원 의사가 확인했다”고 밝혔다.
권순완 기자
▶독침과 미인계… 북한이 암살에 쓰는 주무기
[김정남 암살] 북한의 암살 사례
2011년 탈북자 도와오던 목사, 중국 단둥서 택시타다 독침 피살
황장엽, 평생 암살 위협 시달려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은 1997년 자택 엘리베이터 앞에서 총 맞아
북한은 과거에도 암살을 저지른 적이 있다. 또 독침 등 독극물을 이용해 암살을 시도했던 정황이 발견된 적도 있다. 지난 1997년 2월 15일 밤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당시 36세)씨 피격 사건이 일어났다. 이씨는 당시 경기 성남시 서현동 자택 엘리베이터 앞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 채 발견됐다. 당시 안기부와 경찰은 사건 3일 전 일어난 '황장엽 노동당 비서 귀순'에 대한 북한의 보복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수사를 벌였지만 살해범을 검거하지 못했고, 범인들이 북한에 돌아간 후에야 북한 공작원 소행이라는 걸 확인했다.
▲김정남 어머니 성혜림과 김정은 어머니 고용희(사진 왼쪽) - 김정남은 김일성의 장손이었지만 ‘배다른 형제’ 김정은이 북한 최고 권력자가 된 이후 긴 은둔 생활을 하다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사진은 김정일의 둘째 아내인 성혜림(왼쪽·김정남 생모)과 셋째 아내 고용희(오른쪽·김정은 생모)의 모습.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 귀순후 1997년 피살(오른쪽 사진) -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당시 36세)씨의 생전 모습. 지난 1982년 귀순한 이씨는 1997년 2월 북한 공작원에게 암살당했다. /뉴시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역시 귀순 이후 평생을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살았고 실제 북한에서 보낸 '황장엽 암살조' 2명이 검거되기도 했다.
북한 관련 활동을 했던 우리 국민을 독침으로 살해하려 했던 정황도 적발된 일이 있다. 지난 2011년 10월 검찰은 대북(對北) 전단 살포 운동을 하고 있는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탈북자 출신) 대표를 암살하려 한 혐의로 탈북자 출신 공작원 안모씨를 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당시 안씨 검거 현장에서 입수한 독총과 독침 등을 공개했다. 볼펜 모양의 독침은 뚜껑을 오른쪽으로 다섯 번 돌리면 침이 발사되는 형태로, 침에는 10㎎만 인체에 들어가도 즉사할 수 있는 브롬화네오스티그민이라는 독약 성분이 묻어 있다고 전해졌다. 안씨는 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8월엔 중국 단둥에서 탈북자를 도와오던 김창환(당시 46세) 목사가 브롬화네오스티그민 중독으로 사망해 '독침으로 암살당했다'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김 목사는 택시를 기다리다 갑자기 쓰러져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윤형준 기자
▶김정남의 가명 '김철'이 운영한 페이스북 보니…김정남 사진에 프랑스 국기
▲김정남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김철' 페이스북 계정/김철 페이스북 캡처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피살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이 ‘김철’이라는 이름으로 페이스북 계정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됐다.
15일 미국의 소리(VOA) 방송은 김정남의 사진이 자주 올라온 ‘김철’이라는 이름으로 된 페이스북 계정이 사실상 김정남이 사용하던 계정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말레이시아 경찰에 따르면 숨진 김정남의 여권에 이름이 ‘김철(Kim Chol)’로 적혀 있고, ‘1970년 6월 10일 평양 출생’으로 돼 있다. 김철은 마카오에 거주하는 김정남이 싱가포르·홍콩 등 동남아의 호텔을 예약할 때에 주로 쓰는 가명으로 알려졌다.
김정남의 사진이 자주 올라온 김철이라는 이름으로 된 페이스북 계정은 그동안 김정남의 지인이 운영하는 계정으로 추정됐으나, 김정남이 김철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이 페이스북 계정을 김정남 본인이 운영했을 추정도 나오고 있다.
이 페이스북 계정은 김정남의 아들인 김한솔의 페이스북 계정과 ‘친구’ 관계를 맺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상에 공개됐다.
본지 확인 결과 현재 이 계정의 프로필에는 김철이 마카오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게재돼있으며, 스위스 제네바 국제 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나와 있다. 실제 김정남은 아들 김한솔 등 가족과 함께 마카오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시물에는 2013년 11월 18일 김철이 스위스 제네바 국제 학교(International School of Geneva)에 입학한 것으로 등록돼 있다.
친구 목록에는 총 164명의 친구가 등록돼 있다. 페이스북 계정을 탈퇴한 것으로 알려진 김한솔은 친구 목록에 없으며, 등록 친구들은 스위스와 프랑스를 비롯, 동남아시아와 일본 등 다양한 국가 출신으로 이뤄진 것으로 확인됐다. 또 일부는 ‘김’, ‘정’ 같은 한국식 성을 사용하고 있었다.
▲마카오로 추정되는 곳에서 찍은 김정남 사진/김철 페이스북 페이지 캡처
최근에 올라온 게시물은 2015년 11월 16일 자신의 프로필 사진 위에 ‘프랑스 국기’를 입혀 올린 것으로, 당시는 프랑스에서 총기 테러 사건이 발생해 전 세계 페이스북 계정에서 테러 희생자에 대한 애도의 의미를 담아 프로필에 프랑스 국기를 입힌 운동이 일어난 시기였다.
계정에서 공개된 게시물에는 13개의 사진이 올라와 있으며, 가장 최근에 올라온 사진 7장은 2010년 마카오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사진에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친구가 남긴 댓글이 있고, 김철이 프랑스어로 단 댓글도 있다.
김철은 계정 정보에 ‘좋아하는 음악’으로 프랑스 가수 겸 작곡가 세르주 갱스부르와 일본 가수 이츠키 히로시를 선정했다.
이외 프랑스를 비롯한 스페인, 일본 등 다양한 나라의 식당을 ‘좋아하는 페이지’로 꼽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을 패러디한 인물 페이지, 미국 잡지 플레이보이 등도 ‘좋아하는 페이지’로 선정해 놨다.
이경민 기자
▶2017.02.16 "김정은 후계자 등극한 2011년 김정남 돕던 北 관리들 무더기 처형돼"
북한에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후계자로 등장한 2011년 전후 중국 베이징에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의 편의를 봐 주던 북한 관리들이 무더기로 처형당했다고 미국의소리(VOA) 방송이 15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일부 인사는 북한 노동당 지시에 따라 현지에서 김정남을 도왔다가 갑자기 ‘김정남 주변 인물’로 분류돼 숙청된 것으로 전해졌다.
VOA에 따르면 북한 고위 관리 출신 탈북자는 “2003년부터 2010년 초까지 베이징에 주재하던 곽정철 전 북한대사관 당비서가 김정남과 접촉한 혐의로 이듬해 처형당했다”고 말했다.
아시아 각국에서 근무하며 현지 북한 공관 사정에 밝은 이 탈북자는 “김정은이 후계자로 부각된 2011년 김정남 주변인물로 분류된 인사들에 대한 숙청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며 “북한 무역성(대외경제성) 당비서를 역임한 뒤 노동당 부부장급으로 중국에 주재하던 곽 비서는 당시 김정남을 3차례 만났다는 이유로 처형됐다”고 말했다. 곽 비서의 가족은 곽 비서가 처형된 뒤 모두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또 “같은 해 고려항공 베이징지사 대표와 부대표 등 3~4명의 직원들이 처형되고 가족은 수용소에 수감됐다”면서 “김정남의 여행과 탁송물 운반 등을 돕던 실무자들까지 숙청됐다”고 주장했다. 또한 베이징에서 노동당 지시에 따라 김정남을 보좌하던 강모씨 등 노동당 대외연락부 (225국) 소속 요원들도 같은 시기에 처형된 뒤 간암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처리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 탈북자는 “나는 직무상 1980년대부터 김정남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이후 평양에서 그와 여러 번 마주친 적이 있지만, 주민은 물론 노동당 간부조차 김정남을 포함한 김씨 일가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며 “북한에서 김씨 일가를 해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다. 김정은의 의도를 모르면서 ‘충성심’에 자발적으로 그런 일(암살)을 저지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강영수 기자
▶2017.02.17 '사전답사·스프레이 연습' 등 '김정남 살해' 용의자들의 드러나는 계획범죄 정황l
▲16일 김정남 살해 혐의로 체포된 인도네시아 국적 여성의 여권사진./말레이시아 매체 캡쳐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 피살 사건이 계획적이었다는 정황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말레이시아 현지 매체 ‘더 스타(THE STAR)’는 말레이시아 경찰 관계자를 인용해 "범행 전날인 12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2청사에서 촬영된) CCTV에 (김정남 살해) 용의자 6명이 공항 곳곳을 돌아다니며 서로에게 장난치듯 스프레이를 뿌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찍혔다”며 “용의자들이 하루 전 공항 보안을 살피면서 그 공격(김정남 독살)을 조심스럽게 계획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17일 보도했다.
이어 이 경찰 관계자는 “그들은 (공항) 출국장에서 그(김정남)를 공격하기 적당한 장소를 물색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범행을 직접 저지른) 여성들과 함께 있던 4명의 남성이 이번 사건의 ‘두뇌들(brains)’일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일본 NHK도 17일 인도네시아 정부 당국자가 말레이시아 경찰로부터 받은 정보라며, ‘김정남 암살’ 혐의로 두 번째로 체포된 여성 시티 아이샤(Siti Aishah·25)가 말레이시아 입국 전인 지난 2일 같은 혐의로 처음 체포된 용의자인 베트남 여권 소지 여성과 연락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체포된 여성들은 앞서 경찰에 김정남이 누군지 모른다거나, 일을 제안한 사람들이 TV 코미디 리얼리티쇼 제작진이라 생각해 장난인 줄 알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따라서 이 같은 계획범죄 정황들은 이들 진술의 허위 여부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공항 CCTV에 찍혀 김정남 살해 용의자로 지목된 여성 2명을 지난 15일과 16일 잇달아 체포했다. 15일 체포된 여성은 1988년생 ‘도안 티 흐엉’이라는 신분의 베트남 여권을 갖고 있었으나 아직 본인 확인이 안 된 상태이며, 두 번째 체포된 용의자 시티 아이샤는 인도네시아 외교부가 인도네시아 국적 시민이 맞다고 16일 밝혔다.
안상현 기자
▶'LOL ' 암살女 스마트폰 3대, 거액 돈다발, 핸드백엔 독극물
다국적 청부업자들이 김정남 살해… 배후에 북한이 조종했을 가능성
베트남 여성, 호텔서 머리카락 자르고 현금 250만원 내며 "숙박 연장"
인도네시아 여성과 공항서 대화한 중년 남성, 北정찰총국 요원 추정
암살단, 5초만에 범행 끝낸 프로급 솜씨… 도주前 독극물 장갑 버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발생한 김정남 암살 사건은 다국적 암살 용병들로 구성된 청부업자의 범행이라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배후에서 북한이 조종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16일 말레이시아 현지 중국어 신문 동방일보는 "경찰은 현재까지 검거된 여성 두 명과 도주 중인 남성 4명이 모두 특정 국가 정보기관에 소속된 요원이 아니라 일이 있으면 활동하는 청부업자로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6명 모두가 누군가로부터 지령을 받아 임시로 구성된 조직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CCTV와 취재를 통해 나타난 베트남 여권 소지자 여성의 행동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청부 암살업자에 가깝다.
가장 먼저 체포된 베트남 여권 소지 여성은 검거 직후 자신은 (16일 체포된) 인도네시아 국적 여성과 함께 말레이시아에 여행 왔다가 공항에서 만난 남자 4명이 "승객들에게 장난을 쳐 보자"라고 유혹해 김정남을 습격했다고 진술했다. 남자 4명은 범행 현장 인근 레스토랑에서 이를 지켜봤고, 사건 직후 2명씩 조를 이뤄 공항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반다르 바루 살락 팅기 지역의 수방자야 프린스 호텔에서 합류했다는 것이다. 이틀 뒤 자신을 제외한 남녀 5명이 "외출하겠다"고 하고 나간 뒤 돌아오지 않자 동행이었던 여성을 찾아 다시 공항에 갔다가 체포됐다는 게 이 여성의 주장이다. "나는 김정남이 누구인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하지만 일본 교도통신은 이 여성이 암살 직전까지 계획적이고 치밀한 면모를 보였다고 전했다. 도안 티 흐엉(Doan Thi Huong·29)으로 알려진 이 여성은 범행 이틀 전인 11일 오후 승용차를 타고 공항 인근의 엠프레스 호텔 세팡에 도착했다. 체포될 당시 제시한 베트남 여권으로 1박 숙박 신청을 한 뒤, 여행객답지 않게 객실에 종일 틀어박혀 지냈다. 다음 날인 12일에는 오후에 1만링깃(약 256만원)을 현금 뭉치로 들고 와 "더 투숙하겠다"고 요청했지만, 호텔이 만석인 바람에 다른 호텔로 옮겨야 했다.
그 뒤 이 여성은 멀지 않은 수방자야 프린스 호텔을 찾아 "가족과 연락해야 한다"며 인터넷이 잘되는 방을 골라 투숙했다. 당시 스마트폰을 3개나 갖고 있어서 종업원의 기억에 남았다. 호텔 종업원이 김정남 피살 직후인 지난 13일 점심 무렵 이 여성을 호텔에서 다시 봤을 때 애초 길었던 머리는 어깨 위로 올라올 정도로 짧아졌고, CCTV에 찍힌 영상에서처럼 'LOL'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 호텔 접수창구에서 일하던 남성 종업원은 교도통신에 "객실에 자른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어서 청소부들이 불평을 했다"고 증언했다. 여성은 호텔에 2박 요금을 미리 냈지만, 인터넷이 잘 안 된다는 이유로 하루만 묵고 호텔을 떠났다.
CCTV에 나타난 범행 모습 역시 아마추어가 했다고 보기엔 깔끔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말레이시아 뉴스트레이츠 타임스는 "CCTV 화면을 통해 분석한 결과, 두 여성이 범행을 하는 데 단 5초밖에 걸리지 않았다"며 "무결점(flawless)"이라고 표현했다. 둘은 인파를 헤치고 자연스럽게 김정남에게 다가가 한 명이 김정남 앞에서 시선을 분산하는 동안, 다른 한 명이 슬그머니 뒤에서 팔로 김정남 목을 제압한 뒤 독극물을 뿌렸다는 것이다.
범행 후에도 여성은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공항 게이트를 걸어나와 기계로 택시 승차 쿠폰을 구입해 택시 승강장에서 택시를 타고 현장을 벗어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범행 당시 베트남 여권 소지자 여성은 왼손에 짙은 색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택시 승강장에서는 장갑이 없었다"며 독극물이 묻은 장갑을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범행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물증도 발견됐다. 말레이시아 더 스타는 "베트남 여성이 하늘색 디올 브랜드 핸드백을 갖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김정남을 죽일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독극물이 든 병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말레이시아 중문지 광화(光華)일보는 경찰이 두 번째로 붙잡힌 인도네시아 국적 여성 용의자가 공항 내에서 중년 남성 한 명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CCTV 화면을 확보해 수사 중이라고 전했다. 이 화면에 첫 번째 용의자인 베트남 여권 소지자도 나오는 점으로 미뤄볼 때 이 남성이 암살을 지휘한 인물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스트레이츠 타임스는 "이 남성이 40대 북한 정찰 총국 직원일 수 있다"고 했다. 북한 정찰총국은 해외·대남 첩보·공작 활동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조선일보 오윤희 기자 남정미 기자
▶2017.02.17 암살 배후인 김정은 ICC 법정에 세워야
북한 출신 엘리트 탈북자들은 김정남 암살을 예견해 왔다. 김정은이 권력을 잡고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2인자로 나섰을 때 그가 5년을 버티지 못하고 제거될 것이라 예상했고, 장성택이 2013년 12월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음 차례는 김정남이 될 것이며 그 역시 5년 이상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됐다. 그렇다고 해서 탈북자로서 느끼는 착잡함과 비통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2000년 이후 최근까지 탈북한 엘리트들은 김정남이 김정은과 그의 친모 고용희의 감시선 안에 있었으며, 해외 파견 국가보위성 요원들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바로 김정남의 동선을 낱낱이 파악하는 것이었다고 전했다. 특히 김정은이 권력을 장악한 2012년 중국에서 김정남을 암살하려는 정찰총국의 움직임이 있었고, 이를 감지한 중국 당국이 북한 지도부에 경고했다는 사실들이 북한 연구자들 사이에서 공유됐다.
김정은은 왜 이렇게 김정남 암살에 편집광적인 집착을 보여 왔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로 방증된다. 김정남은 김정일의 장남이고 북한 주민들이 그토록 열광했던 영화배우 성혜림이 그의 친모다. 반면 김정은의 친모 고용희는 '째포' 출신의 이름 없는 무용배우 출신이다. 북한 주민들이 북송 교포를 비하해 부르던 용어가 바로 '째포'다. 김정은이 아직 친모의 이름도, 생일도, 사망일도 밝히지 못하고 우상화를 추진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정은이 혈통의 콤플렉스 때문에 김정남을 증오해 왔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김정남과 장성택-김경희 부부의 친밀한 관계였다. 김정일은 성혜림을 모스크바에 내보내면서 어린 김정남의 양육을 여동생 김경희와 매제 장성택에게 맡겼다고 황장엽 비서가 증언한 바 있다. 김정은은 자신이 최고지도자가 된 이후에도 김경희와 장성택이 김정남을 만나면서 생활비도 보태준다는 사실에 극도로 분노했다고 한다. 셋째로 김정남이 중국 당국의 비호를 받는 것을 보면서 김정은은 중국이 유사시 김정남을 자신의 교체 카드로 사용할지 모른다고 의심했다는 분석이 있다.
▲굳은 표정의 김정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아버지 고(故)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광명성절ㆍ2월 16일) 75돌 기념 중앙보고대회에 참석했다. 조선중앙TV와 중앙방송, 평양방송은 15일 평양체육관에서 당ㆍ정ㆍ군 일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보고대회에 김정은이 주석단에 나왔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
북한 같은 체제하에서 김정은의 지시 없이 이른바 '백두혈통'을 암살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아무리 김정남을 증오했어도 21세기 대명천지에 외국에서, 그것도 공항에서 사람을 독살한다는 것은 김정은이 얼마나 패륜적이고 잔인무도한 편집증 환자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암살자들의 자백이나 암살 증거가 추가로 나온다면 김정남을 보호해 오던 중국 지도부는 경악할 것이고, 암살자 일부의 여권 소지국인 베트남 등과 북한의 관계는 파열할 수 있다.
탈북 인권단체들은 장성택과 현영철을 고사총 등으로 처형하고 그 측근들을 정치범 수용소로 보낸 잔학 행위의 책임을 물어 김정은의 국제형사재판소(ICC) 제소를 추진하고 있다. 이번 김정남 암살 사건도 북한 인권이 얼마나 참혹한지 보여주는 단면이다. 국제사회는 김정은의 반인도적 범죄를 단죄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 첫 단계로 김정은을 ICC에 기소해 범죄에는 책임이 꼭 따른다는 경고 메시지를 북한 지도부에 보내야 한다
고영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前 북한 외교관
▶2017.02.18 암살수법은 北스타일, 이후엔 아마추어 '불가사의
여성 2명 바로 잡히고, 술술 진술 호텔 로비에 곰인형 들고 나타나, CCTV 의식 않고 웃는 모습도… 日언론 "北의 암살 관행과 달라"
▲곰인형 들고 나타난 ‘LOL’ 베트남 여성 - 김정남 암살 사건 용의자 중 하나로 ‘LOL 티셔츠’를 입은 도안 티 흐엉이 지난 13일 오전 9시 36분 커다란 곰 인형을 안고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한 호텔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일본 TBS 방송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여권을 소지한 두 20대 여성이 김정남 독살 혐의로 체포된 것과 관련해 지금까지 북한의 암살 관행과 다른 불가사의한 점이 적잖다고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이 17일 보도했다.
체포된 두 여성은 말레이시아 경찰 조사에서 "모르는 남자로부터 100달러를 줄 테니 장난 동영상에 출연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또 자신들은 김정남이 누구인지, 누구를 살해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참여했다고도 했다. 베트남 여권 소지 여성 도안 티 흐엉(29)은 범행 이틀 뒤 김정남이 살해된 쿠알라룸푸르 공항 2청사에 나타났다가 체포됐다.
이에 대해 한국에 정착한 한 전직 북한 공작원은 아사히신문에 "아마추어의 범행 같다"고 했다. 범행에 사용된 살해 수법 등은 북한 스타일이지만, 범행 이후 행태는 기존 북한 공작원들과 다르다는 지적이다.
일본 민영방송 TBS가 15일 공개한 호텔 CCTV 영상에서 흐엉은 호텔 로비에서 스마트폰을 보며 천진하게 웃는 등 CCTV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공항 CCTV에 찍혔을 당시와 마찬가지로 'LOL'이라고 적힌 티셔츠 차림에 커다란 곰인형을 안고 로비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도 포착됐다. TBS는 "체포 당시 이 여성은 웃고 있었다"라고 보도했다.
범행 후에는 최대한 빨리 멀리 달아나는 게 일반적인데 이번 사건에서는 두 여성 중 한 명이 범행 현장으로 돌아오다 붙잡혔다. 또 이들이 말레이시아 경찰 조사에서 의외로 빨리 말문을 열었다는 점도 의문을 증폭시키는 요소다.
이에 따라 전직 북한 공작원과 정보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북한이 이번 범행을 서둘러 진행했거나, 조직이 약해지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고 아사히신문은 전했다.
도쿄=김수혜 특파원
▶범행 전날 암살단 6명, 공항서 즐기듯 스프레이 쏘며 리허설
도주 4명 중 1명인 북한인 추정 스파이, 3개월간 여성 2명 포섭해 '김정남 암살' 기획
베트남 여성엔 석달전부터 접근
나이트클럽 호스티스로 일하는 인도네시아 여성엔 한달전 접근
서로 소개시켜 "장난 비디오 찍자" 남성 시나리오대로 수차례 연습
- 북한 측의 치밀한 양동작전?
여성 용의자 2명만 방치한 건 남성들 도주 위한 '미끼' 가능성
김정남 암살은 단시간 준비한 범죄가 아니었다.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은 용의자들이 몇 달 전부터 사건을 기획하고, 수차례 모의 연습을 한 데 이어 전날 현장 답사까지 마쳤다고 보도했다.
17일 말레이시아 중국보에 따르면 아시아인으로 알려진 남성 A가 첫 번째 용의자 도안 티 흐엉에게 접근한 것은 3개월 전이었다. A와 흐엉은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고, A는 자신의 친구들을 흐엉에게 소개해 종종 함께 어울리며 여행을 하기도 했다. 흐엉의 신뢰를 사기 위해 베트남 고향 집에 같이 다녀오고, 둘이서 같이 한국 여행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흐엉에게 "요즘 유행하는 장난 비디오를 찍어 보자"고 제안한 인물도 A였다.
중국보는 나이트클럽 호스티스로 일하는 두 번째 용의자 시티 아이샤도 한 달쯤 전 A를 알게 됐다고 전했다. 이후 A는 비디오 촬영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아이샤를 흐엉에게 소개했고, 둘은 각본에 따라 수차례 김정남 암살 당시 동작을 연습했다. 사건 당일인 13일 흐엉이 김정남 뒤로 다가가 팔로 목을 제압한 뒤 스프레이를 뿌리고, 아이샤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덮었다. 말레이 언론 더 스트레이츠 타임스는 "범행에 5초밖에 걸리지 않았다"면서 "무결점(flawless)"이라고 표현했다. A의 정체와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국보는 그를 스파이로 전했다. 이 보도대로라면 스파이로 보이는 이 남성 A가 말레이시아 현지에 거주하는 외국인 여성 2명을 고용해 김정남을 암살했다는 얘기가 된다.
▲체포된 용의자 2명의 진술로 재구성한 범행 일지 그래픽
사건을 조사 중인 연방 경찰의 다툭 세리 무함마드 푸지 하룬은 말레이 언론 뉴 스트레이츠 타임스에 "외국 요원들이 한 일이라고 믿는다"며 "하지만 두 여성 외에 분명 다른 사람들이 개입돼 있다"고 밝혔다. 여성 용의자 중 한 명은 이 인물이 북한 사람으로 보였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흐엉과 아이샤, 도주 중인 남자 4명까지 용의자 6명은 범행 전날 공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적합한 장소도 물색했다. CCTV 속에서 이들은 서로의 얼굴에 스프레이를 쏘면서 자못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현지 언론 더 스타는 전했다.
두 여성이 단순히 장난 비디오 촬영을 위해 동원된 여성이 아니라 살인 청부업자 같은 전문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베트남 여권을 소지한 첫 번째 용의자는 2~3성급 저렴한 호텔을 계속 옮겨 다녔고, 카드 대신 현금을 사용했으며, 호텔 객실에서 긴 머리를 잘라 위장하는 등 평범한 여성으로 보기 어려운 면모를 드러냈다. 로이터는 현지 사립 탐정의 말을 인용, "이는 정보 요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행동"이라고 분석했다.
인도네시아 매체 쿰파란에 따르면 아이샤는 신분증도 2개를 소지하고 있었다. 하나는 1992년 2월 11일 출생인 'Siti Aisyah', 다른 신분증에는 1989년 11월 1일생에 이름은 'Siti Aisah'로 표기돼 있었다. 직업도 하나는 가정주부이고 하나는 사업가로 각각 다르다. 왜 신분증을 두 개나 갖고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텔레그래프 보도에 따르면 나이트클럽 호스티스인 아이샤는 경찰 진술에서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남성이 비디오를 촬영하면 100달러를 준다고 하기에 승낙했다"며 "그들이 리얼리티 코미디 제작진인 줄 알았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김정남 피살 사건은 북한 측의 치밀한 양동작전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여성 용의자 두 명은 진범인 남성 4명이 달아날 시간을 벌기 위한 '미끼'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첫 번째 용의자가 범행 이틀 뒤 공항에 제 발로 다시 나타난 데다 미니스커트에 새빨간 립스틱 등 암살범이라고 보기엔 너무 튀는 옷차림을 하는 등 전문가의 행동으로 보기엔 너무 어설프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들 때문에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이는 도주 중인 남성 4명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중국보에 따르면 경찰은 이날 150명 이상의 인원을 투입해 두 여성 용의자를 상대로 공항 현장 검증을 벌였으며 달아난 남성 4명의 신병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 17일 말레이 사법 당국은 공항에서 피살된 남성의 신분이 김정남이라는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그는 죽기 전 영어로 "너무 고통스럽다. 너무 고통스럽다. 액체 스프레이에 맞았다(Very painful, very painful. I was sprayed liquid)"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쿠알라룸푸르=최규민 특파원 오윤희 기자
▶2017.02.20 김정남 살해 北용의자 총 5명…리정철 체포·4명은 17일 평양 도착
▲김정남 피살 사건 관련 말레이시아 경찰의 수사 선상에 오른 북한 국적 남성 용의자 4명. 왼쪽 큰 사진은 18일(현지시간) 체포된 리정철. 작은 사진은 이미 북한 평양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되는 홍송학(왼쪽 위), 오종길(오른쪽 위), 리재남(왼쪽 아래), 리지현. 이들은 김정남 암살 당일인 13일 모두 비행기로 말레이시아를 탈출했으며,
[말레이시아 경찰청 페이스북 外
▶ 2017.02.20 김정남 암살...‘은밀한 암살’ 상식 뒤엎은 ‘긴박한 이유’는?
▲ 지난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김정남을 독살한 것으로 보이는 여성. 현지 매체 더스타가 공항 CCTV에 포착된 여성 동영상을 입수해 보도한 것이다. photo 더스타 영상 캡처·뉴시스
김정남의 독살이 김정은의 지시에 의해 이뤄진 것이 맞다면 상식적인 질문이 남는다. 왜 김정은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용의자까지 노출해가면서 김정남을 죽였느냐는 점이다. 지난 2월 13일 김정남이 독살된 장소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 2청사의 항공편 탑승권 발매용 키오스크(무인단말기) 부근이었다. 인적이 붐비는 공공장소였고, 특히 입출국으로 바쁜 오전 9시경이었다. 용의자가 노출되기 쉬운 장소와 시간대에 엽기적인 방법으로 암살을 자행한 것이다. 말레이시아에는 북한 정찰총국 산하의 사이버 작전 기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은은 왜 ‘은밀한 암살’이라는 상식을 뒤엎은 걸까.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급박하게 김정남을 죽여야 할 이유가 있었고, 만약 그렇다면 김정남의 망명이 그 이유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공항이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암살을 자행했다면 그럴 만한 긴박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며 “최근 김정남의 망명설이 유포돼 있었고 실제 제3국 망명이 추진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유 원장은 “김정남이 중국령인 마카오로 들어가기 전에 암살을 시도한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며 “김정남을 보호해온 중국령 마카오로 일단 들어가면 김정남을 건드리기 쉽지 않고 망명이 추진되더라도 막을 수 없게 되자 공항에서 급하게 죽인 게 아닌지 의심된다”고 했다.
국가정보원이 지난 2월 15일 국회 브리핑에서 김정남의 망명 시도설에 대해 “그런 건 없었다”고 밝혔지만 최근 외교가에는 “김정남이 2월 초 신변 위협을 느끼고 한국 망명을 시도한 정황이 있다”는 말이 돌았던 게 사실이다. 김정남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몇몇 측근 외교관과 함께 한국 망명을 준비 중이란 소문이 있었고, 이러한 소문에 대해서는 국정원에서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남이 남한으로의 망명을 위해 우리 측과 접촉하려다가 북한 정보망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MB정권서 추진됐던 김정남 망명說
김정남은 과거에도 남한으로의 망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한 대북 소식통은 “MB정부 초반기인 2009년 김정남 망명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추진됐었는데 임태희 청와대 비서실장의 싱가포르 대북 비밀 접촉으로 남북관계 회복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중단된 걸로 안다”고 했다. 임태희 전 실장은 200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을 만나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양해각서 초안까지 만들었으나 최종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밝힌 바 있다. 임 전 실장은 전화통화에서 “당시 김정남 망명이 추진됐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MB정권 당시의 김정남 망명 시도는 최근 한 국내 매체가 보도하기도 했다. 경향신문은 지난 2월 11일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낸 편지가 김정남을 통해 김정일에게 전달됐다고 보도하면서 2012년 대선 때 국정원이 김정남 망명 공작을 시도한 정황을 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당시 김정남은 한국보다 유럽이나 미국으로 가기를 원했지만 미국 측과의 협상이 결렬됐고, 한국도 김정남의 ‘요구’를 맞출 수 없어 포기했다는 것이다. 대북 전문가들은 최근 김정은이 이 같은 보도를 보고 격분했을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김정남은 과거 남한으로의 망명을 고려하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선뜻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단 베이징과 마카오, 유럽 등에 흩어져 있는 가족들을 한꺼번에 몰래 빼내오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고 한다. 또 자신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온 중국보다 남한이 더 안전할 것이라는 확신도 서지 않았던 것 같다. 이종사촌인 이한영이 1997년 남한에서 암살당한 것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최근 다시 불거진 김정남 망명설과 관련해서는 ‘말레이시아 루트’도 주목받고 있다. 한 대북 소식통은 “말레이시아는 북한 고위층이 남한으로 망명할 때 은밀하게 자주 쓰는 루트”라며 “김정남도 말레이시아에서 한국 등 제3국 망명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지난해 중국에서 일하다가 탈북한 북한 여종업원 13명도 말레이시아 루트를 이용해 한국에 들어왔다. 김정남은 말레이시아에 자주 머물면서 싱가포르에 있는 내연녀를 방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북한 망명정권설과 이번 암살과의 연관성도 제기되고 있다. 일본 지지통신은 “최근에도 (김정남이) 일종의 망명정권 간부로 취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관측이 있었다”며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종종 그에 대한 암살미수 정보가 퍼졌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김정남이 후계 경쟁에서 탈락하고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한 후에도, 김정남이 장성택 등과 연대해 중국을 방패 삼아 김정남을 새로운 지도자로 세운다는 계획이 있다는 소문이 난 것으로 알려졌다”고 했다. 이러한 중국 후견하의 김정남 역할설은 특히 미국의 트럼프 정권 등장과 맞물려서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 미국으로부터 세컨더리 보이콧 등 대북 제재 동참 압박을 받고 있는 중국이 실제 김정은을 김정남으로 대체하는 데 관심을 가졌을 수 있고,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김정은이 김정남 소환을 추진하다 여의치 않자 제거한 게 아니냐는 시각이다.
대내외 경고 위한 충격요법?
물론 김정남을 공항에서 암살한 데는 전혀 다른 배경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즉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행동에 옮길 수 있다’는 대내외 경고를 위해 비상식적인 암살을 자행했다는 시각이다. 일종의 충격요법이라는 것이다. 북한은 1997년 이한영을 암살할 때도 공작원용 권총을 사용해 ‘우리가 암살했다’는 흔적을 남겼다.
국정원에 따르면, 김정은은 5년 전부터 김정남 암살을 집요하게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2월 15일 국회 정보위 간담회에 나온 이병호 국정원장은 김정남 암살이 김정은의 ‘스탠딩 오더’라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즉 김정남 암살이 취소 명령을 내릴 때까지 유효한, 반드시 처리해야 할 명령이었다는 것이다. 김정남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5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고, 집요한 암살 시도에 시달린 김정남이 2012년 4월 ‘저와 제 가족을 살려달라’ ‘저와 제 가족에 대한 응징 명령을 취소해달라’ ‘저희는 갈 곳도 피할 곳도 없다. 도망가는 길은 자살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등의 하소연을 담은 서신을 김정은에게 보낸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김정남은 가장 안전한 곳으로 여기던 중국 베이징에서도 암살당할 뻔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2012년 10월 국가보안법상 특수입·탈출 등 혐의로 북한 공작원 김모(50)씨를 구속기소하는 과정에서 김씨가 2010년 7월 북한 보위부 윗선으로부터 베이징에서 택시기사를 매수한 뒤 교통사고를 가장해 김정남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었다는 진술을 얻었다. 암살 기도는 김정남이 중국에 들어오지 않아 무산됐는데, 당시 중국 정부는 북한 측에 “중국 내에서 이런 일을 벌이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철우 국회 정보위원장은 “(김정남 피살은) 통치에 위협된다는 계산적 행동보다는 김정은의 편집광적 성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정남 암살이라는 돌발 사건이 향후 남북관계와 국내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쉽게 가늠하기 힘들다. 우리만 모를 뿐 이미 북한에서 심각한 내부 균열이 진행되고 있을 수도 있다
출처 | 주간조선 2445호 글 | 정장열 주간조선 부장대우
▶2017.02.20 김정남의 암살과 평양의 잠 못이루는 밤
▲ 독극물 공격에 정신 잃은 김정남 - 지난 13일(현지 시각)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독극물 공격을 받은 뒤 공항 내 의료 시설로 옮겨진 김정남의 모습. 정신을 잃은 채 의자에 널브러져 있다. / 뉴스트레이트타임스_조선DB
김정남 암살의 몇 가지 의문점
김정남의 피살에 대해 국정원은 스탠딩 오더 즉, 김정은 집권이후 언제든 제거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고 밝혔다. 또한 김정남이 김정은에게 “살려달라”는 내용의 절박한 편지를 보내 사실이 있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설명은 김정남의 피살 정황을 고려할 때 재고의 여지가 있다. 수년간 베이징과 마카오, 그리고 말레이시아를 왕복해온 김정남의 동선을 고려했을 때 그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는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정말로 김정남을 제거하려 했다면 굳이 CCTV가 촘촘히 설치된 말레이시아 공항이라는 공개된 공간에서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의 공항에서 피습을 당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그 어떤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았으며, 이는 근거리는 물론 원거리에서도 경호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말레이시아는 북한과 관계가 좋은 나라이며, 북한 공작원들의 아시아 주요 거점이다. 이는 피습직전까지 김정남이 자신에 대한 생명의 위협을 체감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남 피살의 원인으로 제기되고 있는 몇 가지 요인에도 의문점이 있다. 우선 김정남의 망명설이다. 김정남이 한국 또는 제 3국으로 망명을 시도하자 이를 우려해 제거했다는 추론이다. 그러나 김정남이 망명할 경우 김정은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또한 김정남이 망명을 했다고 해도 자신과 아버지 김정일이 관계된 일들을 소상히 밝혔을 것이라고는 예상하기 어렵다. 김정남과 관련된 비자금이 원인이라면 김정은의 집권 초기에 이미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김정남이 김정은을 김정일의 마지막 동거녀인 김옥의 자녀라고 말했다는 이유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김정은이 1984년생이라는 점에서 1964년생으로 알려진 김옥이 20살에 출산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김정남을 새로운 북한의 후계자로 보호했다는 설도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온 바다.
김정은의 불안과 새로운 위협의 등장?
김정은은 지난해 12월 말 북한 정권 최초로 노동당 초급당대표자대회를 개최했으며, 이 자리에서 세도주의와 관료주의, 부정부패를 언급하며 “혁명을 망치고 나중엔 당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고 강조했다. 북한 정치의 특성상 이 같은 발언은 최고수준의 경고이자 질책에 해당한다. 이 같은 언급은 2017년 1월 신년사에서도 반복되었으며, 김정은이 자신을 질책하는 이례적인 모습도 보여주었다. 50여년전 김일성 시대를 상징하는 “세상에 부럼 없어라”시기를 다시 만들겠다는 과거 회귀형의 약속도 했다. 금년 들어 북한의 언론매체들은 북한정권의 최대 위기였던 고난의 행군기에 등장했던 ‘강계정신’에 빗댄 ‘강원도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그 만큼 김정은 정권의 위기가 심각하다는 반증이다.
북한 지도부내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2인자를 허용치 않는 북한에서 그 동안 최고의 실세로 불려온 김원홍 국가보위상이 최근 해임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원홍의 해임은 일반적인 경우와 차원이 다르다. 김원홍은 김정은의 후계자 옹립과정에서부터 최측근이었으며 김정은 정권에서 자행된 모든 숙청을 주도한 핵심인물이기 때문이다. 장성택을 체포하고 처형판결을 내린 곳도 국가보위성의 전신인 국가안전보위부의 특별재판소였다. 김정은은 권력유지를 위해 노동당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 국가보위성, 인민보안성, 정찰총국 등 북한의 5대 공안기관을 활용한 공포정치를 펼치고 있다. 노동당 조직지도부가 서열상 위에 있지만 감시와 사찰을 위한 실질적 기능은 국가보위성이 앞선다는 점에서 공안기관 중 가장 강력한 실권을 가진 기관으로 볼 수 있다. 김원홍의 해임은 김정은 공안통치의 핵심축에 이상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권 6년차 김정은 정권은 여전히 불안하며, 주민들에게 끊임없는 내핍과 노력동원, 무조건적인 충성을 요구하고 있다. 이 같은 불안정성과 초조함은 잠재적 위협요인인 김정남 암살의 구조적 배경이다. 북한의 왕조적 세습체제에서 장자인 김정남은 김정은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음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 집권이후 지난 5년 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김정남의 암살을 전격적으로 단행한 이유는 최근 김정은 정권을 둘러싼 정치적 변화와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김정은 정권에 위협이 되는 모종의 움직임이 발생했고 김정남이 이 과정에 자의 혹은 타의로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었을 가능성이다.
단종은 세조에 의해 폐위되어 유배생활 중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단종의 존재는 세조에게 끊임없는 불안거리였으며, 금성대군의 단종복위를 위한 반정이 세조에게 구실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김정남의 성격과 정치적 위상을 고려했을 때 본인이 주도하여 북한내 정치적 상황변화를 꾀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주요 인물에 대한 숙청과정에 김정남이 연루되었을 가능성과 아울러 김정남의 의도와 상관없이 북한내 일부 정치세력에게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과거와 달리 김정은이 김정남을 무리해서라도 제거해야할 필요성이 최근 제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모든 독재체제는 결국 측근에 의해 붕괴한다.
김정남의 죽음은 김정은에게 결코 평온를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북한내에서 김정남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북한 로열패밀리에 대한 사항은 극비에 속하며 심지어 김여정이 김정은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조차 북한의 일반주민들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남의 암살은 시간차를 두고 북한내에 확산될 것이다. 300만대 이상으로 추산되는 북한내 휴대전화는 이미 정보확산체제를 형성하고 있으며, 과거와 달리 완벽한 외부정보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김정남의 암살은 배다른 형을 죽였다는 비정함과 아울러 베일에 싸여 있는 김정은 혈통의 비밀이 북한주민들에게 밝혀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어머니 고용희는 북한에서 천시하는 재일교포이며, 외할아버지 고경택은 일본군 군복공장의 간부출신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모 고용숙 일가가 탈북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김정은의 정치적 권위는 치명적 손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김정은은 그토록 닮고 싶어하는 할아버지 김일성을 만난적이 없으며,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없는 처지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동안 김정은 정권을 지탱해온 공안기관의 균열이다. 북한의 공안기관은 감시와 사찰을 통한 유혈숙청과 공포정치의 핵심축이자 김정은에게는 생명줄과 같은 존재다. 지난 5년간 무수한 숙청과정에서도 북한의 공안기관의 책임자들은 모두 살아남거나 승승장구한 이유이다. 노동당 조직지도부의 조연준, 김경옥, 조용원, 선전선동부의 김기남, 국가보위성의 김원홍과 인민보안성의 최부일, 정찰총국의 김영철 등이 바로 그들이다.
국가보위상 김원홍의 해임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는 독재체제의 붕괴가 공안기관내의 균열로부터 촉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독재체제는 공안기관을 활용한 공포정치에 의존하며, 따라서 공안통치의 균열은 정권자체의 취약성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독재정권의 공안기관들은 모든 정보를 독점하며, 따라서 독재체제의 붕괴시점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독재자들이 최측근에 의해 제거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하는 이유이다.
고모부에 이어 형인 김정남의 제거는 물론 김정은 정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김원홍 같은 인물마저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다는 사실은 공안기관의 핵심세력들에게는 정권의 원심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독재체제의 공안기구들이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이유는 내면적인 충성이 아니라 생존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들이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점이 명확할 경우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공안기구의 수장들이 생존을 위해 독재자를 제거하는 선택을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김정남의 제거는 ‘김정은 정권의 끝의 시작’일 뿐이며, 남은 것은 김정은 자신도 측근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는 끊임없는 불안의 연속일 것이다. 관심법이라는 극도의 히스테리로 측근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다 결국 부하 왕건에 의해 축출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궁예의 일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다. 김정은에게 평화로운 평양의 밤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글 | 조한범 통일연구
▶2017.02.23 北외교관·항공직원, 대사관에 은신… 말레이 "수사 받아라" 압박
- 김정남 암살 배후로 北정권 지목
"北대사관 2등 서기관 현광성과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 암살 개입"
범인들 현지 안내, 정보 제공한듯
- 말레이시아, 北에 노골적 반감
수사 협조 안하면 체포영장 방침 "金 안치 영안실 누군가 침범 시도"
北과 관련 있냐고 묻자 "수사 중"
칼리드 아부 바카르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이 22일 김정남 암살 사건에 대한 두 번째 공식 수사 결과 발표에서 추가 용의자로 주(駐)말레이시아 북한대사관의 2등 서기관 현광성(44)과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37)을 지목했다. 지난 19일 "북한 국적 남성 5명이 용의자"라고 밝힌 데 이어 북한 대사관 외교관과 국영항공사 직원을 용의선상에 올리며 이번 사건을 평양이 배후에 있는 북한 정권 차원의 범죄로 파악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바카르 청장은 3분 남짓한 브리핑에서 메모지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이어진 질의응답에서도 시종일관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했다. 회견장을 가득 채운 200여명의 취재진 중 일부가 추측성 질문을 하자 "우리를 믿어라, 자주 회견을 하고 있지 않으냐"고 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선 현광성과 김욱일의 역할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소식통을 인용, "현광성이 이번 사건의 총감독으로, 모든 과정을 조율하고 지켜봤으며 관련 내용을 강철 대사에게 보고했다"고 보도했다.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은 항공사 직원 신분을 이용해 김정남의 출입국 기록을 확인하고, 용의자들에게 공항 구조 등을 알려줬을 것으로 보인다.
말레이시아와 북한은 1973년 수교 이후 44년간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북한이 말레이시아 영토에서 암살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경찰 수사를 의심하면서 양국 관계에 금이 가고 있다. 강철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는 "수사 결과를 믿을 수 없다"고 했었다. 북한 대사관은 이날도 "말레이시아 경찰 발표는 근거가 없다"고 비난하면서 "살해 용의자로 구금 중인 북한 국적자 리정철과 베트남·인도네시아 여성 등 3명이 불합리하게 체포됐으니 즉각 석방을 요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건이 터진 뒤에도 북한 대사관은 배후에서 용의자들을 은닉했다. 22일 말레이시아 중국 매체 동방일보가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말레이 경찰은 일찌감치 공항 CCTV를 통해 두 사람의 신원을 추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상 정보를 파악했을 때는 이미 둘이 대사관에 몸을 숨긴 상태였다. 동방일보는 "두 용의자가 범행 직후부터 대사관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만약 이들이 북한 대사관 안에 계속 숨는다면 대사관을 불가침 영역으로 지정한 빈 협정에 따라 주재국 사법 당국이 강제 구인할 수는 없다.
▲암살 성공에 웃음 짓나… 자카르타 거쳐 도주하는 北용의자 3명 - 지난 13일 김정남 암살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 현장에서 지켜보고 달아난 북한 남성 홍송학과 리재남, 리지현(오른쪽부터)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하는 장면이 공항 CCTV에 잡혔다. 이들은 활짝 웃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세 사람은 자카르타와 두바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평양으로 귀국했다. /NHK
말레이시아 경찰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북한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바카르 청장은 "북한 대사관에 '용의자 진술 녹취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지만, 오늘 아침까지 답을 듣지 못했다"며 "그들(북한)은 전혀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했다.
김정남 시신이 안치된 쿠알라룸푸르 병원(HKL)에 경찰들이 운집한 이유를 묻자, "누군가가 병원 영안실에 침범하려고 시도했다"면서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정확한 신원은 밝히지 않겠다"고 북한을 시사하는 듯한 답변을 했다. 하지만 "영안실에 침입한 사람이 북한 정부와 관련이 있나"라고 하자, "수사 중"이라며 직접 답변은 피했다.
말레이시아는 북한 대사관이 계속 수사 협조를 하지 않는다면 강경책을 쓰겠다는 입장이다. 바카르 청장은 "만약 북한이 계속 수사 협조에 응하지 않을 경우, (용의자에 대해) 체포 영장을 발부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외교관은 면책 특권이 있기 때문에 현광성을 강제 수사하기는 어렵고 빈 협정에 따라 대사관에 숨은 김욱일을 강제 구인할 수도 없다.
바카르 청장도 이를 의식한 듯 동방일보에 "만약 끝까지 북한 측이 협조하지 않을 경우, 경찰 자유재량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그것이 어떤 방법일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현광성을 본국으로 추방하는 것도 가능한 선택지 중 하나일 것으로 보인다.
바카르 청장은 또 "북한이 (사건에 대한) 공동조사 요청을 했는데, 받아들일 거냐"는 질문이 나오자,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이것은 전적으로 말레이 정부의 관할권(jurisdiction)"이라고 잘라 말했다. 또 "평양으로 도주한 북한 국적 용의자 4명이 사건에 깊숙이 관여한 것이 확실한 만큼 북한에 이들의 송환도 요구했다"고 밝혔다.
오윤희 기자 김진명 기자
▶2017.02.27 김정은 정권의 저승사자 될 김정남
북한, 美는 물론 中에도 골칫거리… 그렇지만 北 核시설 공격은 위험해
대신 북한 정권 교체 추진하자김 정은이 형 암살로 선수친 듯
당장은 효과 봤다고 생각하겠지만 역사적 반전의 결정적 계기 될 수도
역사상 정적 암살은 빈번했다. 스탈린의 명령으로 멕시코에 망명 중인 트로츠키가 암살된 사건(1940)이 대표적인 예이다. 스탈린은 타고나기를 잔인한 "피에 굶주린 살인마(후계자였던 흐루쇼프의 평가)"였다. 북한 역사에서도 무자비한 주민 탄압과 정적 살해·암살은 일상사였다. 그러나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은 타고난 살인마가 아니었다. 공산 체제 자체가 그들을 잔인하게 만들었다는 게 더 적확한 설명이리라. 왕조적 족벌 체제이기도 한 북한에서 가장 힘센 집안은 물론 김씨 가문이며 그다음 서열이 김일성의 외가인 칠골 강(康)씨 가문이다. 김일성가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오죽하면 모친 이름이 강반석(盤石)이었을까. 모태 신앙인 김일성은 공산주의라는 다른 '종교'로 개종했지만 자신의 기독교적 배경을 숨기지 않았다. 1946년 2월에 출범한 사실상 북한 정부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 강양욱은 김일성의 외종조부로 일제시대 도의원을 지낸 목사였다. 요즘 방송에 자주 나오는 강명도 교수는 북한 최상류층 출신 탈북자로 바로 강양욱의 손자이자 김일성의 친척이다.
피바람이 몰아치는 북한사에서도 이 두 집안은 비교적 안전한 위치를 보장받았다. 김일성 피를 가진 소위 '백두 혈통'은 죽이지 않는다는 불문율도 존재했다. 일제시대 일본 헌병 보조원을 지낸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는 1970년대 초반까지 북한 정권의 2인자로 군림했다. 그런데 김정일과 벌인 권력투쟁에서 패하고도 죽임을 당하지 않고 아직도 96세로 생존하고 있다. 김정일이 몹시 증오한 인물 중 하나는 이복동생 김평일이었다. 작고 뚱뚱하고 수줍은 정일과 달리 평일은 잘생기고 운동도 잘했고 호방한 성격이어서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김일성가의 가정교사로 지근거리에서 이 집안을 볼 수 있었던 김현식 교수는 탈북 후 회고에서 순진한 소년이었던 김정일이 폭군이 된 이유 중 하나가 김평일에 대한 열등감이었다고까지 평가한다. 그런데도 김평일은 비록 끊임없는 감시를 받으며 외국을 전전하고 있지만 죽지 않고 현재 체코 대사로 재직 중이다. 김정은 정권 초기 2인자였던 장성택은 처참하게 처형됐다. 김정은의 고모부지만 '백두 혈통'이 아니기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번 김정남 피살은 이런 '백두 혈통 보존 법칙'을 깬 점에서 이례적이고 왜 이 시점에 이런 무리수를 저질렀는지 살펴봐야 할 사안이다.
▲김정은(오른쪽)의 이복형 김정남(왼쪽). /AP 연합뉴스
김정은으로선 자기 목줄을 쥔 중국과 친해 대안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장성택과 김정남을 제거하면서 중국의 대안 카드를 없앴다는 점에서 일정 성과를 거뒀다. 이 사건으로 우왕좌왕 당황하는 중국 모습을 보면 그의 도박이 성공한 듯도 하다. 그러나 당장 큰 위협이 아닌 이복형 김정남을 무리하게 죽인 데서 김정은의 초조함도 읽을 수 있다. 한반도의 궁극적 지향점은 북한의 체제 변환(regime transformation)일 것이다. 북한을 한국처럼 자유롭고 풍요한 사회로 만들기 위한 통합이 그 목적이다, 그러나 이 목표를 단기에 이루기는 어렵다. 대신 북한의 체제 교체(또는 정권 교체·regime change)라는 단기 목적을 위해 여러 나라가 힘을 모아야 할 순간이 다가온다. 다른 사회라면 최고 지도자의 대안이 될 사람이 많겠지만 공산 왕조 체제라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 북한에서는 '백두 혈통'이 대안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지금은 다른 백두 혈통도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됐다. 독재자는 공포와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수단으로 권력을 유지한다. 김정은이 아버지 김정일로부터 이어받은 방식이다. 그러나 노회한 아버지에 비해 김정은은 이 방법을 노련함을 결여한 채 매우 거칠게 적용하고 있다. 중국과 친분이 없는 그의 공포정치는 오히려 독이 될 가능성이 높고, 자신의 명을 재촉할 수도 있다.
'21세기의 노스트라다무스'라 평가받는 조지 프리드먼은 중국이 자체 문제로 결국 북한 문제에 전처럼 신경 쓸 수 없게 될 것이라 예언했다. 또한 미국의 트럼프 정부도 김정은의 핵무기 불장난에 골치를 썩이기에는 다른 산적한 문제가 너무나 많다. 점점 더 세계의 골칫거리가 되어가는 북한을 그냥 내버려두기 곤란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 핵 시설에 대한 선제타격이 대응책으로 거론되나 이는 다소 위험한 방법이다. 그렇다면 미·중 양국이 덜 위험하고 돈이 덜 들어가는 방법을 찾는 데 묵계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김정은이 감행한 도박이 김정남 암살이고 당장은 효과를 보는 듯도 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양국이 모종의 해결 방안을 공동 모색할 여지를 오히려 넓혀놓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역사는 수많은 역설과 반전으로 점철됐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강규형 명지대 교수·현대사
▶ 2017.03.02 김정남-마카오 15년 커넥션
▲ 마카오 옛 만다린오리엔탈호텔(왼쪽)과 MGM 마카오(2008년 1월)를 찾은 김정남. photo 김정남 페이스북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은 지난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국제공항 제2청사(KLIA2)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가 타려던 에어아시아 AK8320편은 그날 쿠알라룸푸르에서 마카오로 직항하는 유일한 항공편이었다.
김정남이 가려고 했던 마카오는 줄곧 북한의 동남아 공작거점이었다. 마카오의 식민모국이었던 포르투갈은 좌파 청년장교 주도의 카네이션혁명(1974) 직후인 1975년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중국과 포르투갈이 수교한 1979년보다 4년이나 앞선 시점이다. 이로 인해 북한은 외교적으로 마카오를 중시했다. 2005년 미국이 마카오 소재 방코델타아시아(BDA·회업은행)를 북한의 돈세탁에 관여한 일로 제재하기 전까지 마카오는 북한의 돈세탁·무기판매·위폐유통·마약밀매·사치품조달·해외테러 창구였다.
1983년 미얀마 아웅산 묘소 테러도 마카오에서 기획됐다. 1987년 대한항공 KE858편을 폭파한 김현희가 수개월 머물며 훈련을 받은 곳도 마카오 내항(內港) 근처의 ‘명주대(明珠台)’란 허름한 5층 아파트였다.
특히 1990년대 초반, 마카오와 함께 북한 해외공작의 양대 축이었던 동독을 비롯한 동구권 공산국가들이 몰락하면서 북한의 마카오 의존은 더 심해졌다. 1994년 마카오 경찰이 북한계 무역회사를 급습해 대량의 위폐 뭉치를 찾아낸 일도 있었다. 1999년 마카오가 중국으로 반환되면서 북한에 더욱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대가로 지불한 대북송금도 마카오를 통해 전달됐다.
김정일의 장남이자 김일성의 장손인 김정남이 마카오에 머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김정일 생전에는 김정남이 마카오 주재 북한 대표부 역할을 해온 조광무역과 함께 북한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이에 김정남 사후 북한과 마카오의 관계 설정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마카오 자본의 북한 투자도 상당한 수준이다. 평양 대동강 양각도(羊角島)에 있는 양각도국제호텔의 평양오락장과 나선 비파해수욕장 인근의 엠페러오락호텔은 마카오 자본이 개설 또는 운영하는 카지노 호텔이다. 양각도국제호텔은 객실 수 1001개의 북한 최대 호텔이고, 엠페러오락호텔은 북한 최초의 카지노 호텔이다. 이들 카지노 호텔에는 마카오 현지인들도 상당수 취업 중이다. 이 같은 사실은 2015년 7월 평양 양각도국제호텔 지하의 평양오락장(카지노)에서 근무하던 마카오 국적 직원 레이웡푸가 의문사하면서 드러났다.
앨버트 영, 스탠리 호, 황청화…
마카오 자본의 북한 투자는 1997~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7년과 1999년은 각각 영국과 포르투갈의 해외식민지였던 홍콩과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되던 해다. 홍콩과 마카오 반환 수년 전부터 현지 부호들의 해외재산 도피 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몇몇 부호들은 북한을 도피처로 선택했다. 먼저 북한의 사업 가능성에 눈을 뜬 것은 홍콩·마카오에서 ‘시계대왕’으로 불리는 앨버트 영(楊受成)이다. 엠페러그룹 앨버트 영 회장은 홍콩의 작은 시계방으로 시작해 롤렉스와 오메가 등 시계 유통을 장악하며 거부가 된 기업가다. 이후 보석·부동산·호텔·엔터테인먼트로 업종을 늘려 마카오에도 카지노 호텔인 그랜드엠페러호텔(영황오락주점)을 소유하고 있다.
앨버트 영이 중국 매체인 ‘남방인물주간’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1995년 룽융투(龍永圖·당시 중국 대외무역경제합작부 부장조리)가 북한 방문단을 조직해 따라갔다. 당시 북한에서 사업 기회를 전혀 찾을 수 없었는데 ‘김정일의 형제’란 사람이 나와 만나길 원하며 ‘북한 유일의 카지노 허가건’을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그 다음날 그는 내 호텔로 찾아와 ‘나선의 한 지방을 개방해 특구로 조성한 뒤 중국을 배울 것’이라고 했다. 마카오의 카지노를 거론하며 내게 투자하라고 했다.”
‘김정일의 형제’가 누구였는지 확인되지는 않는다. 결국 앨버트 영은 이듬해인 1996년 북한 당국으로부터 카지노 면허를 취득했다. 25년간 카지노 호텔을 경영한 뒤 북한에 기부채납하는 조건이었다. 이후 1998년부터 호텔과 카지노 착공에 들어가 1999년 7월 31일 문을 열었다. 1억8000만달러(약 2000억원)를 들여 만든 북한 최초의 카지노호텔이다.
앨버트 영 다음으로 북한에 진출한 것은 스탠리 호(何鴻燊)였다. 스탠리 호는 1961년부터 2002년까지 마카오의 카지노를 40년간 독점한 ‘도박왕’이다. 앨버트 영이 비록 마카오에 그랜드엠페러호텔을 갖고 있지만, 호텔 내 카지노인 ‘엠페러팰리스(英皇皇宮)’의 운영 주체는 스탠리 호 소유 ‘STDM(마카오여유오락)’의 상장 자회사 ‘SJM홀딩스(마카오도박)’다. 앨버트 영은 사실상 동업관계에 있는 스탠리 호에게 북한 카지노 사업권 일부를 넘겼다. 스탠리 호 역시 북한에 발을 들이게 됐다. 이후 스탠리 호는 1999년 평양의 양각도국제호텔 지하에 평양오락장이란 평양 최초의 카지노를 개설했다. 양각도국제호텔은 북한이 프랑스와 함께 세운 47층 호텔로 1990년 완공했는데 1995년에야 개관했다.
당시 스탠리 호의 북한 투자는 스탠리 호의 오랜 파트너인 황청화(黃成華)가 사실상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차이(華材)투자 회장으로 있는 황청화는 스탠리 호 소유 카지노의 VIP룸을 도맡아 위탁경영한 인사로 알려져 있다. 마카오의 대표적 친북(親北)인사로, 1990년대 초반부터 북한 국영 무역회사로 마카오 대표부 역할을 한 조광무역과 긴밀히 협력해왔다. 또 마카오 주재 북한 명예영사직을 맡으면서 ‘조오(조선-마카오)국제여행사’를 세워 마카오에서 북한 비자발급 업무를 대행하기도 했다. 양각도국제호텔 카지노 개설 역시 스탠리 호와 황청화가 공동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9년 10월 1일, 양각도국제호텔 내 평양오락장 개관식 때 스탠리 호는 황청화와 함께 전용기 편으로 북한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행사에는 스탠리 호와 황청화를 비롯 앨버트 영 등 대북사업에 관심이 있는 홍콩·마카오 기업인 100여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북한과 마카오의 긴밀한 관계는 그때부터 줄곧 이어진다. 지금은 폐지됐지만 평양~마카오 간에 고려항공 정기편이 취항할 정도였다. 매년 해마다 홍콩 주재 북한총영사관이 주최한 김정일 생일축하연에도 스탠리 호와 앨버트 영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마카오를 관할하는 주홍콩 북한총영사관은 김정일의 58회 생일인 2000년 2월 16일 개설됐다. 나선과 평양 두 곳의 마카오계 카지노에서 창출된 세수는 모두 김정일의 통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 이 같은 사실은 2005년 중국 연변자치주의 한 고위 공무원이 나선의 엠페러 카지노를 27차례 드나들며 351만위안(약 5억8000만원)의 공금을 탕진한 사건이 터진 직후 알려졌다. 당시 조사에 나선 연변자치주는 “나선 카지노에서 나온 수입은 나선시가 아닌 중앙정부로 흘러들어간다”고 밝혔다.
김정일이 2002년 돌연 ‘신의주특별행정구’ 설치를 발표하고 50년간의 행정·입법·사법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했을 때 모델이 바로 마카오였다. 김정남은 일본 언론인 고미 요지(五味洋治) 도쿄신문 편집위원과 나눈 이메일을 통해 “북한에서는 당시 신의주를 중국의 마카오처럼 카지노사업이 활성화된 관광도시로 추진했기 때문에 중국 당국이 동북3성의 자본 유출을 우려하여 제한을 두었다고 알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중국 당국은 북한이 신의주특구 행정장관으로 임명한 중국 출신의 네덜란드 국적의 화교 사업가 양빈(楊斌) 어우야(歐亞)그룹 회장을 탈세 혐의로 전격 구속하면서 신의주 프로젝트를 무산시켰다. 그 후에도 마카오 기업인들은 국제사회에 북한의 입장을 간간이 전달해왔다. 스탠리 호는 2003년 제2차 이라크전쟁 때 북한 고위 관계자의 말을 빌려 “사담 후세인에게 북한을 망명처로 제공할 용의가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
▲ 앨버트 영이 카지노를 개설한 나선 엠페러오락호텔.
BDA 사건 이후도 마카오 체류
하지만 2005년 미국이 북한의 돈세탁에 관여한 혐의로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를 제재하면서 북한과 마카오 관계는 결정적 전환점을 맞는다. 당시 BDA와 함께 미국 정부가 제재 대상으로 검토했던 은행이 스탠리 호 소유의 ‘성흥(誠興)은행’이다. 마카오 3대 은행 중 하나로 북한의 돈세탁에 관여한 혐의를 받았다. 성흥은행은 북한 계좌를 동결시키는 선에서 미국 정부의 제재를 가까스로 비켜갔고, 2007년 중국 최대 국유 상업은행인 중국공상은행(ICBC)에 지분을 떠넘기며 위기를 모면했다.
BDA 사건 직후 마카오에 있던 조광무역 등 북한 무역상은 중국 광둥성 주하이(珠海)로 대거 넘어갔다. 마카오와 경계를 맞닿은 주하이는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 단행 직후인 1979년 선전과 함께 최초의 경제특구로 지정한 곳 중 하나다. 하지만 BDA 사건 이후에도 김정남은 마카오를 줄곧 지켰다. 김정남은 2010년 고미 요지 편집위원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마카오에 자주 가는 이유는 가족이 거주하는 중국에서 가장 가까운 자유분방한 곳을 찾기 위한 것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BDA 사건 이후 소원해진 북한과 마카오의 관계에 김정남이 일종의 ‘비선(秘線) 창구’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원래 김정남의 주된 활동 근거지는 베이징이었다. 김정남은 고미 요지 편집위원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89년 12월”이라며 “1995년부터 베이징에 거주했다”고 밝힌 바 있다. 2001년 ‘팡슝(Pang xiong)’이라는 이름의 도미니카공화국 위조 여권을 들고 일본 도쿄 나리타공항에서 강제출국된 후 돌아간 곳도 베이징 수도공항이었다. ‘팡슝’은 중국어로 ‘뚱보 곰’ ‘뚱보 형’이란 뜻이다. 김정남이 베이징에서 거주한 곳은 베이징 수도공항에서 동북쪽으로 떨어진 올림픽조정경기장 인근의 ‘용원(龍苑)별장(드래곤빌라)’이다. 나리타공항에서 김정남과 함께 얼굴이 노출된 첫째부인 신정희와 둘째 아들 김금솔의 거주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김정남의 마카오 거주를 최초로 확인한 것은 2007년 1월 일본 요미우리신문 보도였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김정남이 마카오에 넘어온 시점을 대략 2004년경으로 추정한 바 있다. 하지만 김정남 피살 직후 드러난 김정남의 마카오 거주지 중 한곳인 주상복합 가안각(嘉安閣)의 등기 기록에는 ‘이혜경’이란 사람이 2002년 5월 해당 부동산을 취득한 것으로 돼 있다. 이혜경은 마카오에 거주하는 김정남의 둘째부인으로, 김정남과의 사이에 김한솔·김솔희 남매를 두었다. 그렇다면 김정남은 2002년부터 마카오를 오갔다는 얘기가 된다. 2001년, 가족들과 함께 일본 도쿄 디즈니랜드에 가려다 나리타공항에서 입국이 불발된 그 다음해다.
그때부터 김정남은 첫째부인 신정희가 사는 베이징과 둘째부인 이혜경이 사는 마카오를 오고가는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마카오에서는 주거지를 수시로 옮겨다녔다. 둘째부인 이혜경 소유가 확인된 구도심의 주상복합 가안각뿐만 아니라 바로 앞 주상복합아파트 부호화원(富豪花園)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가안각과 부호화원은 마카오 보안사령부(보안사) 바로 옆이다. 김정남과 그 가족들이 최근까지 모습을 보였다는 부호화원은 중국여행사(CTS)가 소유한 ‘부호주점(비버리플라자호텔)’과 공중다리로 연결돼 있다. 중국여행사는 중국 국영 여행사로 마카오 통행증 업무 등을 대행하는 사실상 국가기관이다. 중국의 보호와 감시를 받기에는 최적지다.
이 밖에 김정남은 그의 경호원들이 거주한 곳으로 알려진 마카오 구도심 관음당 인근의 주상복합 분향각(芬香閣)에서도 모습을 보였다. 고려항공 승무원 출신의 셋째부인으로 알려진 서영란이 거주하는 마카오 타이파섬 해양화원(海洋花園·오션가든) 22층에서도 모습을 드러냈고, 김한솔·김솔희 남매가 다닌 련국(聯國)학교 인근의 고급아파트 호정도회(濠庭都會·노바시티)에서도 목격된 바 있다. 또한 마카오 콜로안섬 최남단 체옥반(竹灣)해변의 고급빌라인 죽만호원(竹灣豪園)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 스탠리 호가 카지노를 개설한 평양 양각도국제호텔.
친북 기업인 도움받았나?
김정남은 마카오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스탠리 호·앨버트 영·황청화 등 소위 ‘친북(親北) 마카오 기업인’들의 상당한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김정남이 2007년 2월 일본 TBS에 포착된 마카오반도의 옛 만다린오리엔탈호텔(문화동방주점)은 스탠리 호 소유다. 지금은 그랜드라파호텔(금려화주점)로 이름이 바뀌었다.
1984년 개관한 만다린오리엔탈호텔에는 스탠리 호 소유의 ‘동방오락장(카지노 오리엔탈)’이 있었다. 김정남은 이곳의 카지노와 수영장 등에서 자주 목격됐다. 홍콩 SCMP는 “김정남이 만다린오리엔탈호텔에 가명으로 장기간 투숙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김정남이 ‘김철(Kim Chol)’이란 이름으로 운영한 페이스북 계정에는 2008년 11월, 동방오락장 앞에서 찍은 사진도 등장한다. 지금은 ‘지메이(集美)카지노’로 이름을 바꾼 이곳의 VIP룸은 마카오 주재 북한 명예영사인 황청화가 도맡아 운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남은 만다린오리엔탈호텔을 주 활동거점으로 마카오반도 외항매립지(NAPE) 일대 고급호텔을 자주 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김정남의 페이스북에는 ‘MGM 마카오’ ‘윈 마카오’에서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다. 이 밖에 외항매립지 근처 리스보아호텔(포경주점)과 골든드래곤호텔(금룡주점)도 김정남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나온 곳들이다. 리스보아와 골든드래곤은 마카오 현지에서 매매춘 영업으로 유명한 곳. 이 호텔의 카지노 업장은 모두 스탠리 호의 STDM이 운영 중이다. 이후 2009년 스탠리 호가 뇌수술을 받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그의 자녀들과도 끈을 계속 이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탠리 호는 4명의 부인들로부터 17명의 자녀들을 두고 있다.
‘Living Las Vegas in Asia’
김정남이 머물렀던 타이파섬의 고급아파트 호정도회는 스탠리 호 소유의 STDM과 순탁(信德)그룹이 공동으로 개발·시행한 고급아파트다. 홍콩섬의 마카오 페리터미널로 쓰이는 순탁센터를 비롯해 호텔과 부동산 사업을 하는 순탁그룹은 스탠리 호가 둘째부인에게서 낳은 딸 팬시 호(何超琼)가 경영한다. 팬시 호는 스탠리 호의 실질적 후계자로, 홍콩·마카오를 통틀어 최고 여성 갑부다.
김정남이 자주 이용한 옛 만다린오리엔탈도 순탁그룹이 절반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또한 마카오반도 신항매립지에 있는 ‘MGM 마카오’도 미국 MGM과 공동으로 운영 중인데, 김정남은 MGM 마카오에서 찍은 사진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김정남이 2010년 한국 언론(중앙선데이)과 최초로 인터뷰를 한 타이파섬의 알티라호텔(옛 크라운마카오)은 스탠리 호의 둘째부인이 낳은 아들 로렌스 호(何猷龍) 소유다. 김정남은 당시 알티라호텔 10층의 이탈리아 식당 ‘오로라’에서 한국 언론에 처음으로 노출됐다. 로렌스 호는 2002년 카지노 문호개방과 함께 호주의 카지노 기업인 크라운과 ‘멜코-크라운’이란 합작사를 꾸려 신규 카지노 면허를 취득한 뒤 코타이스트립 일대 카지노를 공격적으로 개척했다. 알티라를 비롯 시티오브드림, 스튜디오시티 등이 멜코 크라운이 운영하는 카지노 리조트호텔이다. 더욱이 알티라호텔은 김정남과 가족들의 타이파섬 거주지였던 호정도회 아파트 바로 옆이라 김정남이 자주 애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카오 친북 기업인 중 팬시 호는 북한과의 연관성 때문에 2009년 미국 뉴저지주의 카지노 당국이 정식으로 문제를 삼은 바 있다. 당시 뉴저지주 카지노 당국은 팬시 호의 부친 스탠리 호가 북한 평양에서 카지노를 운영한다는 사실과 마카오의 조직범죄와 연관돼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당시 중간 연결고리로 지목된 사람이 마카오 주재 북한 명예영사를 지낸 황청화였다. 현지 언론은 황청화를 “범죄기록은 없지만 조직범죄와 연계해 경찰이 주시하는 인물”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물론 스탠리 호의 조직폭력 연계설은 지난 50여년간 꾸준히 제기됐지만 본인은 줄곧 부인해왔다.
하지만 스탠리 호의 초기 동업자로 마카오에서 ‘도신(賭神)’ ‘도성(賭聖)’으로 추앙받는 입혼(葉漢)이 삼합회(三合會)의 뿌리인 비밀결사 ‘홍문(洪門)’ 출신이란 점이 줄곧 해외진출에 발목을 잡았다. 2015년에는 스탠리 호의 조카 앨런 호 리스보아호텔 이사가 매춘여성 96명과 함께 체포되기도 했다. 본토 조직과 연계해 중국 여성들을 공급받고, 보호비를 받는 조건으로 리스보아호텔 내의 성매매 영업을 방조한 죄였다. 실제 리스보아호텔 지하 아케이드에는 물고기처럼 빙빙 돌면서 매춘 영업을 하는 소위 ‘회유어(回游魚)’로 불리는 여성들이 즐비했었다. 리스보아호텔 나이트클럽 역시 김정남이 목격된 곳들 중 하나다.
김정남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2010년 1월 7일, ‘Living Las Vegas in Asia(아시아의 라스베이거스에 살다)’란 글을 남겼다. 김정남의 화려한 아시아 라스베이거스 생활은 결국 ‘형제 살인’이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출처 | 주간조선 2446호 글 | 이동훈 주간조선 기자
▶2017.03.08 [체류 말레이시아 국민 출국 금지]
외교가 "전례 찾아볼 수 없어"
말레이 "우리 국민이 안전해야 북한인들도 출국할 수 있다"
네티즌들 "개성공단의 미래… 재가동 반대해야" 목소리 확산
북한이 7일 자국에 체류 중인 말레이시아 국민의 출국을 금지한 것에 대해 외교가에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인질 외교'"란 반응이 나왔다.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는 이날 "우리 시민을 '인질'로 잡은 이런 혐오스러운(abhorrent) 조치는 모든 국제법과 외교 규범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라고 했다. 우리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저것(인질 사태)이 개성공단의 미래"라며 개성공단 재가동에 반대하는 여론도 일기 시작했다.
◇근거 없는 억류는 국제법 위반
북한은 이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말레이시아 국민에 대한 출국 금지 조치를 발표하며 그 기한을 "말레이시아에서 일어난 사건(김정남 암살)이 공정하게 해결돼 말레이시아에 있는 (북한) 외교관들과 공민들의 안전 담보가 완전하게 이뤄질 때까지"라고 밝혔다. 북한인 8명을 김정남 암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한 말레이시아 당국의 수사 결과에 불만을 품고 이번 억류 조치를 취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한 셈이다. 용의자로 지목된 뒤 주말레이시아 북한 대사관에 숨어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한 대사관 2등 서기관 현광성(44)과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37)에 대한 수사를 포기하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북한의 이런 조치를 합리화할 만한 국제적 규범이나 전례는 찾기 힘들다. 우리 외교부 당국자는 "외국인의 출국을 막으려면 그 사람 개인이 문제가 될 만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뚜렷한 혐의와 근거가 있어야 한다"며 "단지 두 나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상대국 국민을 모두 억류하는 것은 정상적인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전쟁법(laws of war)에는 국가 간의 무장 충돌이 있을 때 자국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되는 전쟁포로나 상대국 민간인을 억류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전시(戰時)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전시도 아닌 평시에 자국 국민을 불법 억류당한 말레이시아는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외신에 따르면 쿠알라룸푸르 시내에 있는 북한 대사관 정문에는 폴리스 라인이 생겼고, 주변 도로가 폐쇄됐다. 이전까지 북한 대사관 직원에 한정해서 내려졌던 출국 금지 조치는 곧 말레이시아에 머물고 있는 '북한인 전체'로 격상됐다. 라작 총리는 자국민 보호를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겠다면서 "북한에 있는 모든 말레이시아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받을 때까지는 말레이시아에 있는 북한인들도 출국할 수 없다"고 했다. 또 할릿 아부 경찰청장은 북한 대사관에 숨어있는 현광성과 김욱일이 나올 때까지 "설령 5년이 걸리더라도 기다릴 것"이라며 수사 의지를 분명히 했다.
◇개성공단 재개 반대 여론 일어
북한의 말레이시아 국민 억류 조치가 알려지자, 우리 네티즌들은 작년 2월 폐쇄된 개성공단의 재가동에 반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놓았다. 이날 관련 게시판에는 "만약 개성공단을 폐쇄하지 않았다면 이번 사드 배치를 핑계로 개성공단 입주 기업의 한국인들을 다 볼모로 잡았을 것" "개성공단에 (다시 가면) 북한의 인질이 된다"는 등의 글이 올라왔다.
실제 개성공단이 가동되던 시절 북한은 수시로 개성공단을 볼모화했다. 2009년 3월에는 한·미 합동 군사훈련에 반발하며 육로 통행을 전면 금지했고, '북한 체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현대아산 근로자 1명을 136일 동안 억류했다. 2013년 4월에는 북한의 3차 핵실험 후 열린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비판하면서 일방적으로 개성공단 폐쇄를 발표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입주 기업의 우리 측 인원이 모두 철수할 때까지 북한이 이들의 귀환을 막을 가능성에 가슴 졸여야 했다. 정부 당국자는 "개성공단이 가동되는 동안에는 북한이 언제든 우리 측 인원을 인질로 잡을 수 있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정책을 수립해야 했다"며 "개성공단이 재가동되면 그런 상황도 되풀이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명 기자
▶2017.03.31 김정남 암살과 관련된 논란 5가지
⊙ 암살이 장난이라던 두 여성 용의자 공격 후 각각 분산 도주해
⊙ 아이샤보다 키 큰 흐엉이 김정남 뒤에서 손 뻗어 안면까지 공격
⊙ 베트남 국적의 흐엉은 왜 눈에 띄는 LOL 티를 입고 나타났나?
⊙ 용의자들은 현지인인가? 신분세탁 북한 공작원인가?
말레이시아 현지 매체가 보도한 김정남. 사진=외신 캡처
이번 암살의 장소와 방법 등을 두고 그 배후가 북한이 아니라며, 북한을 옹호하는 형태의 발언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월간조선》은 북한을 포함해 국내 일부에서 북한이 배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논란 5가지가 타당하지 않음을 분석해 봤다.
김정남에게 직접적인 공격 및 접촉을 한 두 명은 여성이다. 말레이시아 당국에 따르면 한 명은 LOL 티셔츠의 용의자로 유명해진 베트남 국적의 도안 티 흐엉(Doan Thi Huong)과 인도네시아 국적의 시티 아이샤(Siti Aishah)였다.
논란 1 - 북한은 현지인을 고용한 것인가?
북한이 동남아 현지인을 고용했을 가능성이 있을까. 과거 남파공작원으로 활동했던 김동식씨에 따르면 현지인 고용은 공작에서 가장 기피하는 방법이다. 그 이유는 현지인을 고용할 경우 프로페셔널한 수준이 아니기에 각종 훈련에 최소 6개월이 걸리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북한의 공작원은 고도로 훈련된 사람들로 근접격투 및 급소 공격 등에 능하고 유사시 도망치는 방법 등을 염두에 둔 훈련 과정을 거친 사람들로 알려졌다. 이 외에 공작원들은 외국어 교육도 받는다는 게 김동식씨와 다수의 탈북자의 전언이다.
현지인을 고용할 경우 유리한 점도 다수 있다. 언제든지 현지에서 섭외가 가능하다. 섭외 비용도 비교적 저렴하다. 이번 암살에 투입된 두 명은 약 10만원가량을 대가로 받았다고 밝혔다. 현지인은 공작 이후를 책임질 필요가 없고, 공작의 배경 등 세부적인 교육을 할 필요가 없다. 한마디로 한 번 쓰고 버리기 용이한 일회용이다. 설령 체포돼도 그 배후를 추적하기 어렵다. 공작 중 죽거나 실패해도 별로 염려할 것이 없다. 현재까지의 수사 과정을 살펴보면 두 명의 여성 용의자는 독극물을 맨손에 바르고 공격에 임했다. 즉 이들은 독극물에 대한 사전정보가 거의 없었고 이들이 공작 이후 죽었어도 무방했다는 방증이다.
논란 2 - 신분세탁한 북한공작원인가?
무하마드 깐수. 1990년대 말 국내에서 체포된 필리핀 국적의 모 대학 교수 이름이다. 국정원의 확인 결과, 그는 북한의 남파 고정간첩이었다. 그의 북한 이름은 정수일이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북한에서 거주하다 레바논, 필리핀 등을 거쳐 필리핀으로 국적을 세탁했다. 용모마저도 필리핀 사람처럼 생겼다. 그는 국내 안보 상황과 관련된 정보 등을 국내 호텔의 팩스로 중국으로 수시로 보냈다. 결국 수상히 여긴 국정원에 덜미를 잡혔다. 정수일은 간첩이었지만 학업적 능력은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그는 한국어, 중국어, 영어, 아랍어, 스페인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했다.
1987년 KAL기를 폭파한 공작원 김현희는 일본인 행세를 했다. 그녀가 공작에 사용한 이름은 하치야 마유미였다. 당시 안기부와의 수사 과정에서 줄곧 일어만 구사하며 일본인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계속된 수사 끝에 북의 지령을 받아 항공기를 폭파했다는 사실을 자백했다. 김현희는 당국의 수사 중 일본인이라고 하면서도 일본 수상의 이름을 몰랐고, 그녀가 제시한 일본의 거주지 주소는 가짜였다.
북한의 전직 남파공작원 김동식씨는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서는 남파공작원을 양성할 때, 외모를 보고 국적을 세탁한다고 했다. 필리핀 사람같이 생겼으면 필리핀어를 가르쳐 필리핀 국적을 주고, 일본인같이 생겼으면 일본어를 가르쳐 일본 국적을 주는 식으로 세탁 후 적국에 침투시킨다. 즉 이번 암살의 용의자도 용모만 동남아인과 비슷할 뿐 실제는 북한의 공작원일 가능성도 있다.
신분을 세탁한 북한 공작원을 암살에 활용할 경우, 가장 큰 장점은 아무래도 작전 성공률이 올라간다. 고도로 훈련된 요원들이라 공격과 이후 처리가 현지 고용인 대비 탁월하다. 단점은 적발될 경우 북한이 배후임이 비교적 쉽게 밝혀지게 되며, 김현희나 김신조처럼 전향될 가능성도 있다.
논란 3 - 두 여성 용의자는 단순한 장난인 줄 알았나?
▲두 여성 용의자인 인도네시아 국적의 아이샤(좌)와 LOL 티셔츠를 입었던 베트남 국적의 흐엉(우). 사진=조선일보
두 여성 용의자는 김정남 암살이 장난(prank)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격 당시 상황이 담긴 CCTV 영상을 보면 이 말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공격 전후 행동 때문이다. 공격 전 이 둘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김정남에게 다가간다. 둘이 같이 공모한 서프라이즈 형식의 장난이라면 굳이 이런 치밀한 접근을 준비했을 가능성이 적다. 공격은 불과 2초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이러한 민첩한 공격은 단순한 장난보다는 철저한 준비와 연습을 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독극물을 김정남의 얼굴에 바르기 전 두 여성의 동작에서는 주저하는 몸짓이나 어느 쪽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생각하는 듯한 제스처는 포착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를 놀래키려 다가가면 그 동작에서는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 있기 마련이다. 또 장난기 어린 표정과 행동이 몸짓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런데 영상에는 장난기 없는 냉철한 동작만 남았다.
이들은 어디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진입해 독을 어떻게 묻힐지를 정확히 알고 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런 간결한 동작은 연습 없이는 불가하다. 뒤에서 독을 바르던 LOL 티셔츠를 입은 흐엉의 모습은 흡사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간결하고 빨랐다. 독을 후미에서 바른 인물이 흐엉이라는 점도 놀랍다.
흐엉은 CCTV 영상 등을 토대로 볼 때 여자치고 키가 크다. 최소 165cm 이상으로 보인다. 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은 그녀가 암살 후 포착된 CCTV 영상이다. 포착된 영상 속에서 그녀의 뒤편에는 검은색 차림의 남성이 서 있다. 해당 남성과 키를 비교해 보면 흐엉은 해당 남성과 키가 비슷하거나 더 크다. 다른 장면을 봐도 마찬가지다. 즉 뒤에서 안면을 공격하는 점을 미리부터 알고 아이샤보다 키가 큰 흐엉을 배치한 것이다. 키가 작은 여성이 자기보다 키가 큰 남자의 얼굴까지 팔이 닿기는 쉽지 않다. 흐엉이 김정남의 후미에서 공격한 이유다. 흐엉이 뒤를 맡은 게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공격 직후 뒤에 있던 흐엉은 앞쪽 방향을 향해 그대로 걸어갔다. 아이샤도 안면에 독을 바르고 그대로 진행방향을 향해 달렸다. 이런 동선은 자연스럽다. 보통 사람은 당황하거나 즉흥적인 상황 등에 처하면 자신이 걸어온 방향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오면서 인지했던 동선에 익숙한 쪽을 택하는 것이다. 진행방향으로 계속 진행할 경우 어떤 상황이 자신 앞에 닥칠지 몰라 해당 방향을 택하지 않고 뒤돌아 뛰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미리 짠 동선을 알고 있다는 듯이 공격 후 망설임 없이 전진했다.
공격 직후 아이샤는 살짝 뛰기도 하는데 사람은 심리적으로 위기 상황이 인지되면 도망친다. 이를 정신 및 심리학 등에서는 ‘싸움 혹은 도망(Fight or Flight Response)반응’이라고 한다. 각성과민(覺醒過敏·hyperarousal)에 의해 유사시 사람은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한다. 즉 아이샤는 자신이 행한 행동이 위기임을 감지했고, 본능적으로 도망치고자 뛴 것이다.
장난이었다면 장난 이후 김정남에게 웃으면서 어떤 장난인지를 밝혔을 것이다. 최근 유튜브 등에서 성행하는 장난도 이런 형태다. 장난 직후 장난에 당한 사람에게 숨겨져 있는 카메라의 위치 등을 알려주고 장난이었음을 시인한다. 그런데 이 두 명은 이런 행동 없이 이내 공항에서 벗어난다.
도망치는 방향도 둘은 달랐다. 같이 공격을 하고도 함께 도망가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공항을 탈출한다. 이런 분산 도주는 당국의 추적을 어렵게 하는 방법이다. 순간적으로 경찰이 어느 쪽을 쫓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고 시간을 지체하게 한다. 최악의 경우 둘 중 한쪽만 잡히게 되어 다른 공범의 도주 시간을 벌어준다.
논란 4 - 공항에서 버젓이 대낮에 암살을 한다?
▲김정남(가운데 가방을 둘러 멘 남성)의 공항에서의 모습이 담긴 CCTV 영상. 사진=조선일보
김정남 같은 인물은 자기 스스로 공격을 받을 가능성을 인지한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혼자서 야밤에 조용한 장소에 갈 이유가 없으며, 가더라도 혼자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김정남을 은밀하게 제거하기는 어렵다. 은밀하게 처리하기 어렵다면 사람이 많은 장소가 차선책으로는 최선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게 남파공작원 김동식씨를 포함한 전문가들의 말이다. 아예 사람이 많을 경우에는 범인이 노출될 가능성은 있지만 도주 시 수많은 인파 속으로 숨어 빠져나갈 수 있다. 이번 암살처럼 2초 정도로 공격이 간결하면 주변에 있던 사람조차 잠시 한눈을 팔면 공격 장면을 목격하기 어렵다. 설령 한두 명이 보고 주변 경찰에 이런 사실을 알린다고 해도 범인들이 태연하게 연기하며 빠져나가면, 오히려 공격을 보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 신고자를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다.
논란 5 - 눈에 띄는 LOL 티셔츠와 곰 인형을 왜 들었나?
▲암살에 가담한 북한 국적의 용의자, 리지현. 사진=조선일보
미국의 온라인 매체 ‘홉스앤피어스’에는 전직 공작원 및 사설 탐정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된 추적을 피하는 방법이라는 글이 있다. 이에 따르면 공작원은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공작을 할 경우 일부러 눈에 띄는 복장을 착용하기도 한다. 가령 빨간모자를 쓰고 범행장소에 출현한다. 그리고 범행 후에도 빨간모자를 쓰고 도망치다가 국면을 전환하는 시점에서 모자를 벗어버리면 추적하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런 방법은 정보국의 현장요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로 ‘용모의 변경(change of appearance)’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시각적인 맹점 중 하나인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를 활용한 것이다.
어빈 록(Irvin Rock) UC버클리대의 시각심리학자가 최초로 언급한 이 무주의 맹시는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invisible gorilla experiment)’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실험에서 흰 옷을 입은 여성들이 검은 옷을 입은 여성들 사이를 오가며 농구공을 16회 패스하는 동안 검은색 고릴라 탈을 쓴 사람이 지나간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공을 총 몇 번 패스하는지 보라고 하면, 참가자의 절반가량은 지나가는 고릴라를 찾지 못한다. 당시 현장에서 LOL을 입은 흐엉에게 시선이 집중된 동안 김정남을 사전에 접촉하거나 주변에서 지켜본 다른 요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수사를 통해 2진과 3진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부분이 확인됐다.
LOL처럼 눈에 띄는 옷을 입은 흐엉은 공항에서는 해당 옷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공항을 빠져나온 뒤에는 복장을 바꿀 요량이었는지도 모른다. 사건 발생 며칠 뒤 사건 때와 동일한 차림새를 하고 공항에 다시 나타난 그녀는 일부러 잡히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기후가 더운 말레이시아에서 며칠 동안이나 같은 옷을 입고, 다시 범행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형 곰 인형까지 들고 와 체포되기를 바랐던 의도된 계획으로도 보인다. 암살에서 상대적으로 중책을 맡지 않은 이들이 체포되는 동안 당국의 추적에 혼선을 주고 시간을 벌 수 있다. 이 때문에 실제 암살을 계획했다고 알려진 주요 용의자 3명은 말레이시아를 출국해 평양으로 돌아갔다.⊙
글 | 김동연 월간조선 기자/ 자동차 칼럼니스트
▶2017-02-15 [김정은 이복형 김정남 피살]말레이-韓 당국이 확인한 피살 상황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북한 당국의 지령을 받은 공작원으로부터 피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은 13일 오전 8∼9시경이다.
14일 정보당국에 따르면 김정남이 피살된 장소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 내에서도 저가항공사 출국 수속 카운터가 몰려 있는 2청사인 것으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 정부 소식통은 “김정남은 이날 비행기를 타고 마카오로 떠나려다 변을 당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또 “김정남이 공항 쇼핑구역에서 쓰러졌다”고 말했다. 마카오는 김정남이 최근 몇 년간 이복동생 김정은의 암살 위협을 피해 전전해 온 국가 중 하나다.
피살 당시 김정남을 향해 여성 두 명이 다가갔고 이들은 독침을 이용해 김정남을 공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 범죄수사국(CID) 관계자는 “바늘에 찔려 독살 당한 시신이 푸트라자야 병원에 안치된 것은 맞다”면서도 “우리는 김정남이 누군지 잘 알지 못해 독살당한 시신이 김정남인지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로이터통신은 푸트라자야 병원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사망한 북한 남성은 1970년생이며 성은 Kim(김)”이라고 보도했다. 김정남은 지금까지 1971년생으로 알려졌다.
반면에 독침이 아닌 독극물에 적신 헝겊을 피살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보도가 말레이시아에서 나왔다.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 ‘말레이시아키니’는 14일 현지 경찰 고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비행기 탑승 수속 중이던 김정남에게 한 여성이 접근해 독극물로 추정되는 액체가 묻은 헝겊을 머리에 뒤집어씌웠다고 보도했다. ‘독극물 헝겊’ 공격을 받은 김정남은 눈이 따갑다며 항공사 직원에게 고통을 호소했고, 이후 푸트라자야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보당국이 확인한 사진에 따르면 김정남은 공항에서 완전히 널브러져 있는 상태였다. 정보당국 관계자는 “말레이시아 현지 수사 당국이 촬영한 현장 사진을 입수해 확인한 결과 당시 쓰러진 김정남 상태를 보면 이송 중에 사망했다기보다 현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또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사망한 것 같다”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김정남의 시신 상태로 볼 때 독침 공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며 “북한이 요인을 암살할 때 주로 독침을 사용하는 점도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현재 김정남 시신을 푸트라자야 병원에 안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김정남을 공격한 직후 달아난 여성 두 명을 추적 중이지만 현재까지 이들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말레이시아 경찰국은 김정남 피살 사건과 수사 상황 등을 조만간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남은 6일부터 말레이시아에 체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남은 북한 정권 후계자가 김정은으로 굳어진 2010년 이후 마카오 중국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홍콩 등을 떠돌며 생활해 왔다. 최근에는 주로 말레이시아에 머물면서 내연녀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인근 국가인 싱가포르를 자주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남은 2014년에도 쿠알라룸푸르의 한식당에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미모’ 뛰어난 북한 정찰국 女공작원…수년간 암살·공작교육
김정남 피살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북한 여성 공작원들은 뛰어난 미모를 바탕으로 암살과 공작 전문가로 육성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 청사에서 수속을 밟던 중 신원 미상의 여성 2명에서 독살당한 김정은의 살해 주범도 북한 정찰국 소속 여성 공작원인 것으로 전해졌다. 외신 등에 따르면, 이들 여성들은 마사지를 해주겠다며 접근했고 눈가리개로 김정남의 눈을 덮자 김정남은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이후 팔뚝에 독침을 놓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 여성들이 ‘미모’를 무기로 자연스럽게 김정남에게 접근했고 미확인 물질(스프레이)을 김정남에게 투척했다고 보도했다.
미인계를 이용한 북한의 암살·공작 시도는 오래전부터 계속돼 왔다.
1970년대 일본인 납치때도 여성이란 이점을 활용해 납치 대상에게 접근했고, 1980년대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때 시한폭탄을 두고 내리는 역할도 여성 공작원이 수행했다.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를 비롯한 북한 고위층 탈북자 암살 명령을 받은 것도 여 공작원이었다.
북한 공작원의 주요 무기는 독총, 독침, 독극물, 권총 등인 것으로 알려진다.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씨는 당시 경기 성남시 서현동 자택 엘리베이터 앞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 채 발견됐다.
지난 2011년 10월 검찰은 탈북자 출신 공작원 안모씨를 구속기소하며 독총과 독침을 공개하기도 했다. 볼펜 모양의 독침은 뚜껑을 일정횟수 돌리면 발사되는 형태로 침에는 인체에 10㎎만 투여해도 즉사하는 브롬화네오스티그민이 묻어있었다.
손전등형 독총과 만년필형 독총 등 독총의 종류도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처럼 생겼다.
여성 공작원들은 이런 암살·공작 무기 외에 산악훈련, 사격, 호신술 등 남성과 비슷한 강도의 훈련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소속 원모씨에 대한 검찰 공소장을 보면 18세까지 살상무기 사용법, 특수 훈련 및 군사학 등을 익혔다.
기본적으로 암살·납치·폭파 교육을 받으며 강도 높은 체력훈련도 거치는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뉴스1)
▶北 여성공작원이 김정남 살해 확실시, 간첩 출신 원정화 “南 어딘가서 지금도 활동”
북한 김정남을 살해한 장본인이 여성 공작원이 확실시 됨에 따라 과거 위장 간첩으로 활동했던 원정화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북한은 과거부터 여성을 훈련시켜 공작원으로 활용해왔다.
국가안전보위부 소속이었던 원정화는 탈북자로 위장해 국내에 정착한 후 국군 장교들과 내연 관계를 맺으며 군사기밀을 빼내다 지난 2008년 7월 잡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2013년 만기 출소했다.
당시 원정화에 대한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그는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에 선발된 뒤 평양에 있는 공작원 양성소 특수부대에 입대했다.
원정화는 18세 때까지 호신술과 독침 등 살상 무기 사용법, 산악훈련, 사격 등의 훈련과 군사정치 학습을 받았다고 공소장에 기록되어 있다. 원정화는 과거 MBN ‘시사마이크’에 출연해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자면서 소변을 볼 정도”라며 북한에서 훈련 받을 당시를 전했다.
이어 원정화는 “내가 탈북자로 위장해서 남한 사업가들을 북한으로 보냈다”라며 “내 손으로 7명을 (북한으로)보냈다”라고 말했다.
또한 “북한 해커들이 (군 간부) 명함 속에 있는 이메일을 해킹해서 정보를 다 수집했다”라고 말했다. 이 외에도 국가정보원 장악·故 황장엽 살해 등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원정화는 "(위장 간첩이) 남한 어딘가에서 지금도 활동하고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15일 통일부는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말레이시아에서 숨진 북한 남성에 대해,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살해된 것이 확실시된다고 밝혔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북조선 공작원에 의한 범행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박해식 동아닷컴 기자
▶北대사관 차량, 김정남 시신 부검 병원 앞에서 포착
김정남의 시신이 안치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병원(HKL)에서 15일 북한 대사관 차량이 포착됐다. 말레이시아 언론 더스타 온라인판에 따르면 이날 HKL 앞에서 북한 대사관 소속의 차량 세 대가 목격됐다.
자동차에는 ’28-35-DC’ 등 외교용 차량 번호판이 부착 돼 있었다. 앞서 이날 오전 8시55분께 푸트라자야 병원에 있었던 김정남의 시신이 부검을 위해 경찰차 네 대의 보호를 받으며 쿠알라룸푸르병원으로 이송됐다. 더스타은 차량을 타고 온 북한 대사관 측 관계자들이
“김정남의 시신이 있는 영안실 안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앞서 일본 매체들은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관이 김정남의 시신 인도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당국은 사인을 밝히기 위한 부검을 실시한 뒤 시신을 인계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쿠알라룸푸르병원 대변인은 “오늘(15일) 안에 부검이 완료될 것으로 보인다”며 “경찰이 공식입장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뉴시스】
▶김정남, 2014년 파리서 동아일보 기자와 국내외 언론 마지막 인터뷰
北 사정 묻자 “잘 모르고 알려고 안해”
장성택 얘기 꺼내자 “정말 할말 없어”
“건강? 아직 쓸만해 보이지 않냐”… 사진 촬영 요청에 “절대 안돼”
“김정남 선생님이시죠? 동아일보 기자입니다.”
2014년 9월 29일 오전 8시 반,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 근처에 있는 르메르디앙 에투알 호텔 로비. 당일 오전 4시 반부터 4시간 동안 호텔 식당 앞에서 소위 말하는 ‘뻗치기’(현장 지키기)를 한 기자가 이렇게 물었을 때 동행했던 여성은 시선을 피하며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김정남(당시 43세·사진)은 달랐다. “여기(호텔)에 한국 사람들이 좀 보여서 누군가가 미디어(언론)에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은 했는데… 결국 왔군요.”
당시 그는 북한 사정을 묻는 기자에게 “잘 모르고, 솔직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국가 운영 방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한동안 말없이 기자를 바라보다 “약속할 순 없지만 생각을 정리해 마음이 내키면 (기자 명함을 가리키며) 이쪽으로 말씀드리겠다”고 말했다.
국내외 언론사 기자 가운데 마지막으로 기록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남이자,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인 고(故) 김정남과의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됐다.
김정남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라는 표정과 말투였다. 약간의 두려움도 느껴졌다. 자리를 피하려는 김정남에게 건강을 묻자 “아직 쓸 만해 보이지 않냐”며 웃으면서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비교적 담담하게 대화를 이어가던 김정남은 북한에서 후견인 역할을 했던 고모부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2013년 12월 숙청됨) 이야기를 꺼내자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고개를 돌리면서 푹 숙였고, 아랫입술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단호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할 말 없습니다. 이제 그만 좀 하시죠.”
기자는 ‘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김정남은 “절대 안 된다”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기자는 김정남이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에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뒷모습을 몰래 촬영했다. 또 식당에 들어가 그가 식사하는 모습을 찍으려 했다.
당시 기자의 모습을 본 김정남은 빠르게 얼굴을 돌리며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기자에게 뛰어와 “지금 뭐 하는 거야?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고 외쳤다. 호텔 직원들에게는 유창한 영어로 “이 사람이 나를 사진 찍었다. 이건 사생활 침해니 경찰을 부르라”고 외쳤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김정남 지인 “생전 한국行 권유에 씩 웃기만…애인 행방 확인해야”
13일 살해된 김정남(46)에게 생전 지인이 한국행을 권유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이 15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김정남이 생전 자주 만났다는 말레이시아 거주 한인은 A 씨는 RFA에 “힘들게 불안해하며 살지 말고 남한으로 가라, 한국 정부에서 보호해 줄 거라고 했지만 시익 웃기만 하고 반응 안하더라”고 말했다.
A 씨는 김정남에게 한국행을 더욱 강력하게 권했어야 했다며 아쉬워했다고 RFA는 전했다. A 씨는 그러면서 “매번 (중국에서 보내준) 경호원들과 같이 있었는데 이번 사고 때는 없었나 보다”며 “김정남이 여행할 때 항상 같이 있던 중국계 싱가포르인인 애인의 행방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RFA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한인회 임원 출신인 A 씨는 김정남이 생전에 말레이시아 방문시 수 차례 식사를 같이 하는 등 자주 만났다고 한다. 그는 김정남의 최근 행적과 관련해서는 “작년 늦여름에 식당에서 만나서 대화를 나눈 것이 언론에 노출되고 김 씨의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전했다.
동아닷컴 디지털뉴스팀 dnews@donga.com
▶김정은의 다음 타깃은…김평일 김정철 김한솔 가능성
김정남 아들 김한솔 김정일 이복동생 김평일도 타깃될 수
김정은 형 김정철도 안심 못해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고모부 장성택이 처형된 데 이어 이복형 김정남마저 독살되면서 김정은 체제의 공포정치에 대한 우려가 한없이 커지고 있다. 정권 안정에 조금이라도 장애가 된다면 혈족을 가리지 않고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포악함으로 인해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 이복형 김정남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데 있다. 여전히 김정은은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총구를 겨눌 수 있다. 이 경우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이복동생 김평일 주체코 북한대사와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 그리고 자신의 친형 김정철도 예외는 아니다.
먼저 김평일 대사는 현재 숙청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다는 관측이지만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닐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김 대사는 김정일 후계 구도가 정해지지 않았을 당시 북측에서 후계자로 거론됐던 인물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그를 공관장으로 내세워 서방 세계와의 창구로 사용하고 있으나, 장기적으로 볼 때 독재 구도를 흔들 수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도 없지 않다.
김한솔은 김정은의 권좌를 넘볼 인물은 아니지만 자신의 아버지 김정남이 독살당했다는 점에서 김정은에 대한 원한이 클 수밖에 없다. 김정은 입장에서는 그런 김한솔을 그냥 보고만 있을 이유도 없다. 더구나 신변 위협을 느끼는 김한솔이 우리나라를 비롯해 어디로 망명할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김한솔은 2012년 핀란드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독재자’라고 부르며 세습에 부정적 입장을 드러낸 바 있다. 그는 최근 마카오에서 중국 당국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의 친형 김정철도 불안해 할 수 있다. 김정철은 공개 활동을 자제하면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어 당장 신변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란 평가다. 그는 영국 등지에서 개인적 관심사에 몰두하며 ‘평양’과 완벽하게 거리 두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북한 내부에서 권력 투쟁 긴장이 고조될 경우 김정은 위원장의 동복이라는 이유로 파편을 맞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이들은 모두 ‘로열패밀리’로 분류되면서도 세습 과정에서 권력 중심부에서 멀어졌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 피살된 김정남도 마찬가지다. 이에 따라 향후 신변에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항상 있는 것이다. 이밖에 당장 추가적인 대거 숙청은 없을 테지만, 장성택 라인과 김정남의 가족 등 김정은의 세습에 부정적인 로열패밀리에 대한 위협도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정보 당국은 김정은 위원장이 권력을 잡은 후 5년여 동안 처형된 당과 군의 간부가 100명을 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난 2015년 5월 불경죄로 총살된 현영철 전 인민무력부장이 대표적이다. 북한은 올해 1월에도 한국의 국가정보원 격인 국가보위성에 대한 검열을 단행, 김원홍 보위상을 숙청하고 ‘김원홍 라인’으로 분류되는 간부들을 대거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장성택 숙청 당시 반(反) 김정은 세력 대부분이 제거된 만큼 추가적인 대규모 숙청 등의 공포정치는 없을 것”이라면서도 “다만 잔불을 제거하기 위한 추가 숙청은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뉴시스】
▶2017-02-16 [김정남 피살]北의 암살 동기 탈북 간부 등 대북 소식통 분석
▲공항 피살 현장 삼엄한 경비 15일 오전(현지 시간) 말레이시아 경찰들이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피살된 쿠알라룸푸르공항 2터미널 현장을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다.
쿠알라룸푸르=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 입국한 날짜는 이달 6일이다. 피살 시점인 13일 오전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있었다. 살해된 장소도 공항 화장실 등 후미진 곳이 아니라 출국장 바로 앞이었다. 김정은의 지시나 북한 권력기관의 충성 경쟁에 따른 암살이 맞는다면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공개된 장소에서 김정남을 제거하려고 한 진짜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이 커지고 있다.
○ 의도적으로 대낮에 범행?
정보기관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15일 “공작은 대범하게, 치명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충격요법이 되는 데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행동에 옮길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기 때문이다. 2006년 11월 영국으로 망명했던 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는 런던 시내 호텔에서 독극물에 감염된 뒤 5일 만에 숨졌다. 사용된 독극물이 러시아산(産)이라는 심증은 있었지만 끝내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김정은 역시 대낮에 공항에서 이복형을 살해함으로써 대내외에 공포 통치의 효과를 극대화하려 했을 수 있다. 북한은 1997년 김정남의 이종사촌 이한영을 살해할 때도 공작원용 권총을 사용함으로써 ‘북측에서 다녀갔다’는 증거를 남겼다.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리기 위한 것으로 분석됐다.
국가정보원은 이날 국회 정보위에서 김정남에 대한 암살 기도가 5년 전부터 지속돼 왔다고 보고했다. 그동안 암살 지령이 ‘스탠딩’(유효한 상태)이었다는 점에 비춰 보면 김정은이 갑자기 살해를 결심한 게 아니라 북한 공작 조직에서 최적의 장소와 시간에 맞춰 행동을 감행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 고위 탈북자는 “마카오에서 누군가가 사업 아이템 등을 제시하며 김정남을 꾀어냈고 현혹된 김정남이 마카오 귀로에 오르자 항공편, 동선을 파악한 공작원들이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일 생일 75주년(16일)을 앞두고 정찰총국 등이 김정은에게 충성 경쟁을 벌이면서 김정남을 제거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김정은 집권 이후 탈북한 전 북한 고위 간부는 김정남 피살 시점과 관련해 “김정남의 ‘약발’이 다 떨어졌고 기댈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정일 생전에는 경제적으로 풍족했고 북한 정보도 많았던 김정남이기에 딴마음을 먹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궁지에 몰렸기 때문에 언제든 망명 등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김정은이 판단했을 수 있다. ‘끈 떨어진 김정남이 더 위협적’이라고 해석한 대목은 역설적이다. 김정남의 보호막 역할을 했던 고모 김경희가 더 이상 김정은을 견제하지 못하게 되면서 살해 작전이 행동에 옮겨졌을 수도 있다.
○ “김정은 출생 비밀을 쥔 시한폭탄?”
김정은이 김정남을 집요하게 제거하려 한 것은 통치의 ‘정통성’과 직결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이 간부는 “김정남은 존재 자체가 문제”라며 “북한에서 철저히 함구했던 김정남의 존재가 드러나면 김정은 수령 체제에서 가장 약한 고리인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정남이 김정은의 더 깊숙한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표적이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북 소식통은 김정남이 2010년 6월경 마카오에 있을 때 “김정은은 김옥(김정일의 네 번째 부인)의 아들로 1984년생”이라고 지인들에게 말했다고 전했다. 김정남은 “이후 김정은을 고용희가 데려다 키웠는데 이를 아는 사람은 장성택 김경희 등 몇 명뿐”이라고도 말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김정은은 1982년생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김정남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셈이다.
실제 김옥은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1년 가까이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였다. 고용희의 존재조차 비밀로 해온 김정은에게 이보다 더한 ‘김옥 생모설’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김정남이 실제 망명을 시도해 김정은의 출생 비밀 등을 공개하는 상황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얘기다.
해외에서 10년 넘게 머물며 북한의 화폐 위조와 마약 제조 등 불법 행위를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김정남의 입을 영원히 닫게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신변 위협이 5년 가까이 이어진 점에 비춰 김정남은 자신과 직계가족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비망록을 작성해 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일종의 보험인 이 비망록에는 자신이 그동안 지켜본 북한 사회, 김정일 김정은 부자의 약점 등이 상세히 적혀 있을 수도 있다.
조숭호 shcho@donga.com
▶2017년 02월 16일 김정남 암살 女용의자 1명 추가 체포
제3국인 고용 원격암살후 도주… 北 ‘은폐형 新테러수법’?
드러나는 ‘청부범행’ 전모
1 사전계획
김정남 말레이 동선 철저 파악
인파많은 시간대 공항서 범행
2 원격암살
당국감시망·외교마찰 피하기
女용의자 “장난” 황당 진술도
3 꼬리자르기
女2인조에 수사망 집중시킨후
배후4명 2개조로 현장 벗어나
북한 김정남 암살 사건 여성 용의자 2명이 체포되면서 북한의 요인 암살과 관련된 새 수법들도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다른 국적자를 고용한 ‘원격조종’에 철저한 사전 숙지와 교육, 과감한 접근과 범행 및 도피, 배후세력 은폐 등 첩보영화를 뺨치게 하는 수법이 눈에 띄었다. 말레이시아 경찰에 검거된 베트남 국적의 여성 용의자는 도주한 남성 4명의 지시를 받고 ‘장난’에 동참했다고 진술했지만 현지 수사 당국 관계자는 “여성 2인조가 어떤 국가(북한)에 고용돼 암살을 자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 것으로 현지 매체가 보도했다.
◇철저한 사전 계획 = 김정남 암살 사건의 배후로 북한이 지목되는 가운데 범행 현장에 고도의 훈련을 받은 북한의 전문 공작원이 아닌 베트남 여권 소지 여성이 있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한이 사전 준비단계부터 정보당국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대리인을 사전 포섭, 훈련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마치 첩보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과감한 범행이 인파로 북적이는 공항 내에서 이뤄졌고, 제작기법상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독성 물질이 범행 도구로 사용됐다는 점도 철저한 준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이다.
범행을 벌인 일당은 김정남의 6일 말레이시아 입국 후 12일 마카오로 출국하려고 하기까지의 일정과 동선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앞서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이 “북한은 5년 전부터 김정남을 암살하려고 계속 시도해왔다”면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집권 이후 스탠딩 오더였다”고 밝힌 것은 북한이 다양한 시나리오를 상정해 암살을 준비해왔음을 뒷받침한다.
◇제3국인 고용한 원격조종 = 북한이 제3국 여권 소지자를 이용한 암살 사건을 벌인 것은 실제 사건을 기획한 용의자들의 도주시간을 버는 한편, 수사 과정에 혼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체포된 여성 용의자가 이틀간 은둔하다 수사망이 좁혀지자 범행 장소에 다시 나타난 것이나, 독극물을 뿌린 후 “장난인 줄 알았다”고 진술하는 등 다소 황당한 행보를 보인 데에도 이 같은 배경이 있을 것으로 추론된다. 제3국 사람을 고용한 데에는 북한 국적의 청부업자들이 전면에 등장할 경우 북한의 동남아 내 주요 거점국가인 말레이시아와의 전면적인 외교마찰이 불가피하다는 점도 작용했을 수 있다. 다만 북한이 배후에서 베트남인을 김정남 암살에 동원한 것으로 확인될 경우 베트남 정부의 강한 반발이 예상된다는 점에서 신분 위장을 위해 베트남 위조여권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은 “북한의 제3국인 고용 암살 사례는 1986년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벌어진 김포공항 테러 사건 때도 있었다”며 “동서독 통일 이후 동독 비밀문서에서 밝혀졌는데 북한이 아랍계 테러리스트들에게 돈을 주고 사주했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5명이 숨진 당시 사건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테러였지만 이번 사건은 요인 청부살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배후세력 은폐 = 베트남 여권 소지 여성을 앞세운 이번 사건은 북한 당국의 철저한 ‘꼬리 자르기’ 수법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말레이시아 경찰 등에 따르면 김정남을 습격한 여성 용의자들은 범행 후 곧바로 택시를 타고 도주했으며 다른 남성 4명은 별도로 공항을 벗어났다. 2개 조로 나눠 범행현장을 벗어난 것은 수사망을 애초 여성 2인조에 집중시키고 배후 세력을 은폐하기 위한 시도라는 것이다. 이후 6명은 살락 팅기에 있는 호텔에 합류했는데 이 과정에서 북한계로 추정되는 남성으로부터 향후 사법 처리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지시받았거나 모종의 금전 거래가 이뤄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호텔에서 하루를 보낸 뒤 나머지 5명이 외출해야겠다고 한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진술한 점도 주범이 아닌 ‘종범’을 내세워 배후세력의 행방에 대해 모르쇠 전략을 세우려 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체포된 여성이 심문 시 답변에 막힘 없이 자신은 김정남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며 “사전에 경찰 조사에 대비해 답변을 준비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수사 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북한계 남성 등 달아난 나머지 용의자들의 신원 확인과 체포가 사건 실체 규명에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인지현 기자 loveofall@munhwa.com
▶2017년 02월 16일 김정남 암살 女용의자 1명 추가 체포
▲ 형 암살… 부친 참배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15일 당 고위 관료와 인민군 장성 등 지도부와 금수산태양궁전으로 들어서고 있다. 노동신문은 16일 “김 위원장이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75돌 생일을 맞아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
- 말레이 경찰… 처음 체포된 女용의자는 베트남 국적
“북한계 포함된 남자 4명 사주 받고 독살” 자백
“독극물 분사 뒤에 손수건으로 10초간 입 압박”
‘청부암살’ 유력… 부검 결과 이르면 주말 발표
북한의 김정남 암살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범행 주체를 은폐하기 위해 베트남 여성을 고용한 ‘청부살인’이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16일 말레이시아 경찰은 김정남에게 독극물을 뿌려 살해하고 도주한 베트남 국적의 여성 한 명을 추가로 체포하고 범행을 사주한 북한 공작원들을 추적 중이다. 일본 교도(共同)통신은 추가로 체포된 여성 용의자가 한국여권을 소지하고 있다고 보도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이날 말레이시아 경찰은 전일 도안 티 흐엉(29)이라는 이름의 여성을 체포한 데 이어 김정남 암살에 가담한 또 다른 베트남 여성 한 명을 검거하고 달아난 북한 공작원이 포함된 4명의 행방을 쫓고 있다. 이중에는 베트남 국적의 남성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거된 여성은 여권상으로는 1988년 5월 31일 베트남 북부 도시 남딘에서 태어났다. 말레이시아의 중국어 신문 동방일보(東方日報)는 현지 경찰을 인용해 “15일 체포된 여성 용의자가 심문 과정에서 ‘남자들의 의뢰로 다른 용의자 여성과 함께 13일 공항에서 김정남을 습격했다’고 진술했다”고 보도했다.
요미우리(讀賣)신문은 “체포된 여성의 진술에 따르면 사건에 관련된 남성 4명 중에는 베트남 국적과 북한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경찰 조사로는 체포된 용의자들은 동행했던 남자 4명의 지시를 받아 KLIA2 출국장에서 김정남에게 독극물 스프레이를 분사하고 구토를 막기 위해 손수건으로 얼굴을 10초 가까이 눌렀던 것으로 나타났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용의자들이 북한으로 의심되는 ‘한 국가’에 고용돼 청부 살인을 감행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AFP통신은 “먼저 검거된 여성 용의자가 15일 경찰에 체포된 뒤 밤샘 조사를 받았고, 16일 법정에 출석한다”고 보도했다. 김정남의 시신 부검 결과는 이르면 이번 주말 발표될 것으로 전해졌다.
쿠알라룸푸르 = 장병철 기자 jjangbeng@munhwa.com
▶2017년 02월 18일 “김정남 암살 ‘北 용의자’는 1970년생 리정철”
암살 사건 관련 현지에서 체포된 4번째 용의자…北여권 소지자는 처음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 암살 사건을 수사 중인 말레이시아 경찰은 네 번째 용의자로 북한 여권을 소지한 남성을 체포했다고 18일 밝혔다.
17일 밤 셀랑고르 주에서 체포된 이 남성은 만 46세(1970년 5월 6일생) ‘리정철(Ri Jong Chol)’로, 외국인 노동자에게 발급된 말레이시아 서류를 소지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 외에 자세한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말레이시아 경찰이 이에 앞서 김정남 암살 용의자로 베트남 여권 소지자 도안 티 흐엉(29)과 인도네시아 국적 시티 아이샤(25)등 여성 용의자 2명과 시티 아이샤의 말레이시아인 남자친구를 체포한 바 있다. 이날 체포된 리정철은 당초 경찰이 밝힌 도주 남성 용의자 4명 가운데 1명으로 추정된다.
경찰 발표에 앞서 말레이시아 중문매체 중국보 등은 이 남성의 체포 사실을 보도하며, 경찰이 이 남성이 복수의 이름을 사용하거나 가짜 신분증명서를 사용하고 있었는지 등을 조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리정철’이라는 인물이 현지 일부 언론이 지목한 북한 정찰총국 소속 공작원인지 다른 누군가에게 고용된 청부업자인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현지 경찰은 그가 김정남의 암살을 실행한 주모자이자 공작원인지 등을 확인하고 있다.
앞서 경찰에 붙잡힌 여성 용의자 2명은 모두 김정남을 모른다고 주장하거나 “장난인 줄 알았다”면서 범행을 부인하고 있으나 수상한 행적이 많은 상황이다.
김정남 암살 사건의 용의자로 북한 여권 소지자가 처음으로 체포돼 이번 사건의 배후를 밝히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지 주목된다.
말레이시아 중문 매체 성주(星洲)일보는 이날 폐쇄회로(CC)TV에 찍힌 남성 4명의 사진을 공개하며 이들이 김정남 암살 용의자라고 밝혔다. 이들 중 베이지색 모자를 쓴 한 명은 경찰이 체포한 북한 여권 소지 남성과 외모가 흡사하다고 경찰은 확인했다.
김정남은 지난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제2국제공항에서 여성 2명의 접근을 받은 후 신체이상을 호소해 병원에 옮겨지던 중 숨졌다.
<연합뉴스>
■ 김정남은 누구?
▶2017.02.15 피살된 北 김정남과 배다른 형제 김정철, 김정은
김정남(46)은 김일성의 장손(長孫)이다. 김정남은 1971년 5월 10일 평양에서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과 영화배우 출신의 성혜림(成蕙琳)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른바 '백두 혈통'의 적장자인 셈이다.
김정일은 1968년부터 북한 유명 영화배우 성혜림과 동거를 시작했다. 당시 성혜림은 전 조선작가동맹위원장 이기영의 장남 이평(李平)과 결혼해 '옥돌'이라는 딸을 낳고 살던 유부녀였다.
그러나 김정일과 성혜림 사이에서 태어난 김정남의 존재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성혜림과의 부도덕한 관계가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에게 첫 손자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다.
그 뒤 성혜림은 1974년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에 의해 모스크바로 쫓겨났고, 김정남은 장성택·김경희 부부가 키웠다. 김정남은 3명의 아내와 동거하면서 이들과의 사이에서 2남 2녀의 자녀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에는 김정남의 첫째 아내 신모씨와 아들이 거주하고, 마카오에는 김정남의 둘째 아내 이혜경과 이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 김한솔(23)과 딸 김솔희(18)가 있다.
김정은은 김정남의 배다른 동생이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세 번째 아내인 고용희 사이에 태어났다. 고용희는 재일교포 출신 무용수였다. 김정은으로서는 어머니가 다르지만 서열상 큰형인 김정남의 존재가 계속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과 고용희 사이에서 태어난 김정은의 친형 김정철은 현재 북한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철은 2015년 5월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턴의 공연을 보기 위해 런던을 방문했었다.
최근 망명한 태영호 전 공사는 "김정철이 아무리 김정은의 형이라고 해도 그 어떤 역할이나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 반면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은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맡는 등 실세로 활동하고 있다.
글 | 강주혁 자유북한방송 기자
▶2017.02 22 김정남 암살-중국에 김정남은 ‘북한판 시아누크’였나
▲ 지난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독살된 김정남. photo 연합
2012년 1월 14일 베이징 서우두(首都)공항 제3터미널 게이트 앞. 나는 베이징(北京)의 한 대학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하고 서울로 돌아가려고 의자에 앉아 게이트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무심코 왼쪽을 보니 마치 미쉐린 타이어 광고에 나오는 타이어맨처럼 뚱뚱한 남자가 나타나 내 앞을 통과하려던 중이었다.
‘김정남이다….’
나는 벌떡 일어나 10보쯤 걸어 그 뚱뚱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김정남씨 아니냐?” 그는 의외로 선선히 “맞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엄청난 양의 땀을 온 얼굴에서 흘리기 시작했다. 혼자서 마카오행 출국 게이트를 향해 걸어가던 중 웬 남자가 불쑥 앞을 가로막더니 “김정남씨 아니냐”고 했으니,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지난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여성 2명이 갑자기 그에게 다가가 살해한 정황을 보면, 늘 그런 공포에 시달리던 김정남으로서는 땀을 흘릴 만했을 것이다.
내가 김정남을 만난 그날은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사망한 지 한 달 가까이 되던 날이었다. 그래서 김정남이 자신의 아버지 김정일의 사망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부터 말을 던졌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많이 놀랐나요?”
“아… 네… 자연이죠… 뭐….”
아마도 ‘사람이 한 번 나서 죽는 것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놀라 경황이 없던 터라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됐다.
“아버지 장례식에는 다녀왔어요?”
“아… 네… 네, 네, 네….”
그는 명확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평양에서 열린 김정일 장례식에 김정남이 참석했는지 여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던 상태였다. 이후 김정남이 평양에 가긴 했지만 김정일 시신을 보고 인사만 하고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은 채 평양을 떠났다는 일본 언론의 보도도 있었다.
불쑥 마주치자 엄청난 땀 흘리기 시작
김정남은 내가 앉아 있던 서울행 항공기의 탑승 게이트가 있는 곳에서 오른쪽 방향에 있는 마카오행 항공기 탑승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필자는 김정남이 베이징 서우두공항에서 일본 언론사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일본 언론들은 당시 서우두공항에 자기네들 말로 ‘하리코미(현장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지키기)’를 하고 있었다. 김정남은 일본 기자들이 영어로 하는 질문에 영어로 대답했는데, 미국식 영어는 아니지만 영어에는 자신이 있다는 태도였다.
“나우 폴리티컬 시추에이션 오브 평양 이즈(지금 평양의 정치적 상황은)…” “더 모스트 임포턴트 팩터 오브 더 퓨처 오브 노스 코리아 이즈 마이 파더즈 디시전(북한의 미래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우리 아버지의 결정)…”.
김정남은 두 명의 부인을 두고 있었는데 한 명은 베이징 교외의 한 별장에, 다른 한 명은 마카오의 한 아파트에 감추어 두고 베이징과 마카오를 수시로 오가면서 지내고 있었다. 지난 2월 13일 말레이시아에서 암살당한 것은 쿠알라룸푸르에 세 번째 여자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대사관이 있고, 북한과 말레이시아가 비자 면제 협정이 체결돼 있는 것을 보면 김정남으로서는 중국의 보호막 바깥인 말레이시아 출입은 삼갔어야 했는데, 결국은 중국의 보호막 바깥으로 나갔다가 변을 당한 셈이다.
중국 외교부는 김정남 피습 이틀 만인 지난 2월 15일 겅솽(耿爽) 대변인이 나서서 중국 정부의 공식입장을 밝혔다.
“우리는 (김정남이 암살당한 데 대한) 관련 보도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사건의 발전에 밀접한 관심을 갖고 주목하고 있다. 우리의 이해에 따르면, 관련 사건은 말레이시아에서 발생했고, 현재 말레이시아 정부 당국이 사건에 대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김정남의 처와 아들이 마카오에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대변인인 나로서는) 관련 상황을 파악하지 않고 있다.”
겅솽 대변인의 말은 “김정남의 처와 아들들이 마카오에 거주하고 있지만 그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외교부 대변인인 나의 일은 아니다”라는 뜻으로 들렸다.
중국 정부가 그동안 김정남을 마카오에서 거주하도록 배려해주고 보호해온 데에는 과연 무슨 실익이 있었던 것일까. 김정남은 2001년 5월 4일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다 일본 언론에 얼굴이 공개되면서 아버지 김정일로부터 미움을 사 마카오에 거주하게 된 이후 중국 관영매체에 다음과 같이 밝힌 일이 있었다.
“중국 정부가 나를 보호하는 것은 동시에 나를 감시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내가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다. 내가 마카오에 거주하는 이유는 마카오가 중국 대륙에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마카오가 자유분방한 도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술을 마시기 좋아하기 때문에 통풍을 앓고 있다. 통풍이 종종 발작하기 때문에 매일 요산 복용제를 먹고 있다.”
중국에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주변국(周邊國)’이 모두 14개가 있다.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한반도, 남쪽으로는 인도를 비롯해서 베트남, 미얀마,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있다. 캄보디아도 중국의 주변국 가운데 하나다.
캄보디아 국왕으로서 국가원수이던 노로돔 시아누크(1922~2014)는 1973년 3월 프랑스를 거쳐 소련을 방문 중이었다. 당시 ‘불교 사회주의’를 추구하던 시아누크는 북베트남이 무기를 조달하던 ‘호찌민(胡志明) 루트’가 캄보디아 국경 내를 통과하고 있던 사실을 묵인해주고 있었다. 3월 18일 미국의 지원을 받는 총리 겸 국방장관 론 놀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시아누크의 국가원수직 박탈을 선포했다. 시아누크는 그 소식을 모스크바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소련 관리로부터 들었다. 베이징으로 향하는 비행기 위에서 시아누크는 대성통곡을 했다. 그에게는 돌아갈 조국이 없어진 것이었다.
1973년 3월 19일 베이징공항에는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국방장관 예젠잉(葉劍英), 국가주석 리셴녠(李先念)이 나와 시아누크를 영접했다. 저우언라이는 “시아누크 국왕의 중국 방문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당신은 여전히 캄보디아의 국가원수이십니다”라면서 악수를 청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시아누크에게 국빈관 조어대(釣魚臺) 5호루를 통째로 내어주고 시아누크 일행과 가족들이 중국에 장기 거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시에 베이징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진행 중이었다. 마오쩌둥의 내연의 처로, 문화대혁명을 사실상 지휘하던 장칭(江靑)을 비롯한 4인방은 조어대에 숨어살면서 문혁을 조종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이 때문에 시아누크 일행에게 청왕조 시절 프랑스가 대사관으로 쓰던 건물을 마련해주고, ‘캄보디아 원수부(元首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1975년 8월 캄보디아 국내에서는 키우 삼판이 이끄는 크메르루주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론 놀 정권을 무너뜨리고 전국을 장악하는 국면이 조성됐다. 키우 삼판은 베이징으로 사절을 보내 시아누크 국왕을 국가원수의 자격으로 귀국하도록 배려해주었다. 시아누크는 귀국 직전 환송식을 베풀어준 덩샤오핑(鄧小平) 앞에서 자신이 작사작곡한 ‘내가 사랑하는 나의 제2의 조국’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 지난 2월 15일 오후 김정남의 시신 부검을 참관한 강철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대사(왼쪽). photo 뉴시스
중국이 시아누크를 대접한 이유
키우 삼판은 불과 6개월 뒤인 1976년 4월 시아누크의 국가원수직을 박탈하고 왕궁에 유폐시켰다. 그랬다가 1979년 폴 포트가 권력을 잡자 시아누크는 다시 국가원수직을 회복했으나 1994년 아들이 정변을 일으켜 다시 베이징으로 피신했고, 결국은 2012년 10월 15일 베이징에서 90세 인생을 마감했다. 중국공산당과 정부는 시아누크를 위해 천안문광장의 오성홍기를 반기(半旗)로 게양하는 예우를 해주었다.
지난해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자 루캉(陸慷)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내놓았다. “한국의 이웃으로서 중국은 한국의 국내 정세를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우리는 한국이 국내 정세의 안정을 빨리 회복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탄핵안은 한국의 내정이므로, 중국 정부는 이에 대해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는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캉 대변인은 이어서 이런 말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한국의 대통령이며, 그는 취임 이후 중·한(中韓)관계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우리는 이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 집권기간에 한국 정부는 사드 배치에 동의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중국 측의 전략안전 이익을 해치는 일이므로 나는 확고하게 반대한다.”
이전에 중국 외교부 대변인들은 한국의 국내 정치에 대해 질문을 하면 짤막하게 “우리는 다른 나라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다”고만 말해왔다. 그러나 박 대통령 탄핵과 관련해서는 뭔가 말이 길어졌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앞으로 관찰해야 할 사항이다.
5년간 시아누크를 망명객으로서 베이징에 데리고 있던 중국은 시아누크가 귀국할 때 “다른 나라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말을 생략하고, “캄보디아 인민들이 시아누크 국왕을 중심으로 단결하기를 바란다”는 논평을 내놓았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를 이해하려면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중국 지도자들과 외교부가 “우리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김정일을 우두머리로 하는 조선노동당 주위로 단결하기를 바란다”고 논평한 사실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그 말은 김정일 이외의 인물이 북한을 장악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강력한 희망의 표시인 동시에 명백한 내정간섭이었다. 중국이 김정남을 그동안 보호해온 것은 북한 유사시 북한판 시아누크를 상정해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출처 | 주간조선 2445호
글 |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2017.02.15 北 김정남과의 대화록, "김일성 외모만 닮은 김정은이 북한 주민 얼마나 만족시킬지 걱정…”
金正男은 2004년부터 최근까지 고미요지(五味洋治) 《도쿄신문》 기자와 이메일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메일은 150통이 넘는다. 김정남은 북한 로열패밀리의 깊숙한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는 異腹 동생 金正恩의 어두운 미래를 예견했다.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과의 대화를 정리한 《아버지 金正日과 나》를 조만간 출간할 예정이다
⊙ 후계자 김정은 등장 후 아버지에게 동생 교육 잘 해달라 주문
⊙ 개혁ㆍ개방하지 않으면 북한이 망하고, 개방하면 정권이 붕괴
⊙ 김경희ㆍ장성택 부부, 지금도 내게 애정 가져
⊙ 권력 세습은 ‘웃음의 대상’이다
⊙ 동생이 원하면 협력하겠다. 단 외국에서
⊙ 통풍으로 발작 증세, 요산 조절제 매일 복용
⊙ 金正恩은 상징적인 존재일 뿐… 체제 유지 실패시 軍이 실권 장악
⊙ 2001년 일본 불법 입국 당시 젊은 여자는 女비서, 어린 아이 손 잡은 여성이 나의 유일한 아내
▲ 일본 TV 아사히 등과 인터뷰를 했을 때의 김정남.
2011년 12월 19일 오전 12시, 북한 당국이 김정일(金正日)의 사망을 공식 발표하자마자 고미요지(五味洋治) 《도쿄신문》(東京新聞) 편집위원은 중국에 있는 김정남(金正男)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 12월 19일: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세계가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뭔가 이야기할 생각은 없습니까?>
답은 곧바로 왔다.
< 12월 19일: 애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노코멘트입니다. 더 이상 취재에 응할 수 없습니다. 金正男 拜>
2004년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7년간 이메일 대화는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에게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평양에 갔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사실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으나 김정남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짧은 메일만 보내왔다.
金正男과의 우연한 만남
고미요지 기자는 1년 전(2010년)에 있었던 ‘김정남의 요청’을 떠올리며 “마침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2010년 9월, 이복(異腹)동생 김정은(金正恩)이 정권 후계자로 공식 등장하자 김정남은 고미요지 기자에게 “나의 생각을 정리해 적절한 시점에 세상에 공개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2004년부터 최근까지 150통의 이메일을 교환했다. 2011년 1월과 5월에는 중국에서 두 차례 만나 심도 있는 대화도 나눴다.
두 사람의 만남은 처음부터 기획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2004년 베이징공항에서 우연히 만나 첫 인사를 나눴고 그해 몇 통의 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해 연말 김정남은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
고미요지 기자는 참고 기다렸다. 《도쿄신문》 서울지국장과 베이징지국장으로 있으면서 북한과 김정일 부자(父子)에 관한 기사를 꾸준히 보도하며 5년 가까이 김정남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다가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장하고 한 달 뒤인 2010년 10월, 김정남은 고미요지 기자에게 불쑥 접근해 왔다. 북한 정권의 폐쇄성과 비밀주의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한반도 정세를 고려할 때, 김정일 첫째 아들과의 만남은 고급 정보에 목말라 있는 기자로서 큰 행운이었다.
두 사람의 이메일 대화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고미요지 기자가 한국어로 묻고 김정남도 한글로 답변하는 식이었다. 김정남은 고미요지 기자에게 자신의 속내를 솔직히 드러냈다.
▲김정남은 “김정은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며 기존 파워엘리트들이 북한 정권을 주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정일, 원래는 3대 세습에 반대
고미요지 기자는 전 세계 언론인 중에서 김정남과 가장 오래,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유일한 저널리스트다. 그는 김정남을 통해 북한 정권의 실상과 한ㆍ중ㆍ일ㆍ북의 상호관계를 내다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됐다.
그는 김정남과의 대화를 정리해 《아버지 金正日과 나―김정남 독점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조만간 책을 낼 예정이다(일본 문예춘추사 발간예정). 김정남의 고백은 세계 유일 3대(代) 세습국가의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읽을 수 있는, 사료(史料)적 가치가 높은 기록물이 될 것이다.
김정남은 김정일이라는 절대권력이 사라진 진공 상태의 북한과 주민들의 안위(安危)를 걱정했다. 그는 후계자 김정은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할아버지(김일성)를 많이 닮았다는 사실만으로 주민에게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지 걱정이 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현재 김정은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며 기존 파워엘리트들이 북한 정권을 주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았다.
김정남은 후계 구도와 관련해 “(부친은) 아들이 권력을 이어받지 못하게 할 것이다. 세습은 나와 아버지 김일성의 업적을 망칠 것”이라며 3대 세습을 반대했다는 사실도 처음 공개했다. 그는 또 스위스 유학을 마치고 북한에 들어간 후 “개혁ㆍ개방하지 않으면 북한이 무너진다”고 주장하면서 아버지로부터 경계대상이 됐다는 사실도 고백했다. 북한이 개혁ㆍ개방할 경우 김정일 정권이 붕괴할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개혁ㆍ개방이냐 체제 수호냐를 놓고 수수방관하고 있는 동안에 시간이 너무 지나버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도 했다.
김정남은 김정은의 강력한 후원자인 고모 김경희(金敬姬)와 고모부 장성택(張成澤)에 대해 “지금도 좋은 관계에 있어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 (두 사람의) 특별한 관심 안(속)에 있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가 2006년 경제 개방에 적극 관심을 보인 적이 있다”며 “고모부 장성택을 단장으로 30여 명의 경제 간부들을 중국 상하이에 보내기도 했다”고 밝혔다.
김정남은 2001년 일본 불법 입국과 관련해 “위조여권으로 해외로 외출하는 것은 당시 (북한에서) 일반적이었고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으며 도쿄의 유명 호텔과 음식점을 다녔다. 김정은도 브라질 여권을 위조해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했다. 이런 ‘악습’은 2001년 자신의 일본 불법 입국 사건으로 인해 없어졌다고 했다.
그는 최근 중동국가에 불어닥친 ‘재스민혁명(민주화혁명)’에 대해 “북한 사람들은 외부의 소식에 민감해져 있다”며 “북한은 긴장하고 있다”고 했다.
김정남은 2011년 10월 언론에 공개된 자신의 아들(김한솔)과 관련해 “모험심이 강해 스스로 분쟁 지역인 보스니아 모스타르 소재 국제학교를 선택했고 아들의 견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부모로서) 걱정하고 있다”고 했다.
김정남은 일본 문화와 국민성에 대해서도 좋은 감정을 나타냈다.
갑자기 날아온 수수께끼 같은 한글 메일
▲2010년 9월 김정은은 북한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후계자로 공식 등장했다. 김정남은 이에 대해 “권력세습은 사회주의 이념에도 부합하지 않고, 웃음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정남과 고미요지 기자의 인연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9월, 베이징 외교가(外交街)는 ‘일본인 납치 문제 협의를 위한 일북(日北)회담’ 개최로 분주했다. 당시 《도쿄신문》 베이징특파원이었던 고미요지 기자는 북측 대표의 입국에 맞춰 타(他)언론사 동료 기자들과 함께 공항 입국장으로 달려갔다.
운명의 만남은 여기서 이뤄졌다. 김정남이 입국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고미요지 기자를 포함한 여섯 명의 일본 기자는 김정남에게 말을 걸었다.
“평양에서 오는 길입니까?”
김정남은 “김정남 맞습니다”라고 짧게 답변한 후 택시에 올라탔다.
고미요지 기자는 본능적으로 “연락하시라”는 말과 함께 명함을 전달했다. 옆에 있던 다섯 명의 기자도 덩달아 명함을 줬다.
김정남은 그로부터 넉 달 뒤인 12월 3일 일본 기자들에게 안부인사를 보냈다.
< 12월 3일: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 지난 9월 15일 베이징공항에서 만나 기뻤습니다. 연말연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행복을 기원합니다. 김정남 拜>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의 이메일을 받고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김정남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일본 기자에게 이메일로 연말 인사를 했다”는 내용의 짧은 기사를 본사에 송고(送稿)했다.
반응은 예상외로 컸다. 한국의 정보기관 관계자는 고미요지 기자에게 “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한국 기관원의 부탁을 거절했다.
고미요지 기자는 북한식(式) 용어를 사용하며 김정남에게 정성을 쏟았다.
< 12월 4일: 김정남님, 메일 보내줘서 감사합니다. 공항에서 만났을 때는 천천히 얘기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공화국(북한)에 관심이 많고 금강산과 평양에 간 적도 있습니다. 한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답장이 곧바로 왔다.
< 12월 4일: 나는 귀하가 가지고 있는 질문에 대해 답변을 드릴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공항에서 명함을 받았으므로 안부를 전했을 뿐입니다.>
고미요지 기자는 답장 겸 질문 형식의 메일을 다시 보냈다.
< 12월 4일: 정남씨에 대해 많은 글을 읽었습니다. 어릴 때 해외 유학할 무렵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기회에 몇 가지 소문의 진상을 밝히는 게 어떻습니까?>
기자의 직접적인 질문에 김정남은 예상과 달리 신속히 답했다.
< 12월 4일: 귀하의 질문에 충분한 답변을 드릴 수 없습니다만 내가 일본에 간 사실은 맞습니다. 서울에 간 적은 없습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사건(불법 입국) 이후 평양에 한번도 들어가지 못했다는 소문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나는 항상 조국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 야후 메일 계정 사용한 김정남
고미요지 기자는 다음 날 다시 메일을 보냈다.
< 12월 5일: 일본에 몇 번 가봤습니까? 도쿄 아카사카 술집에 간 적이 있습니까? 젊은 시절 평양 고려호텔 지하에서 권총을 발사하며 놀았다는 얘기는 사실입니까?>
김정남은 일본 기자의 취재의욕을 저버리지 않았다.
< 12월 6일: 일본에 몇 번 갔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중략) 권총 얘기는 사실과 다릅니다. 나의 어학실력이나 컴퓨터 활용능력은 일반적인 수준입니다. 고려호텔 사건은 나와 관련이 없습니다. 언론이 소설을 쓴 것입니다. 베이징에 비밀 기지가 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닙니다. 현재 지위에 대해서는 노코멘트입니다.>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이 구사(驅使)하는 영어와 한국어 표현에 적지 않게 놀랐다고 한다. 그는 후계문제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 12월 6일: 한국의 야후 메일을 사용하고 있는데 한국인 주민등록번호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후계자 문제는 언제 결정됩니까? 아버님이 이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까?>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는지 답장은 불과 20분 만에 전달됐다.
< 12월 6일: 내가 한국 야후 메일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는 누구나 가입할 수 있었습니다. 후계 문제는 철저히 공화국 내부 문제이며 결정권은 부친에게 있습니다.>
< 12월 7일: 죄송합니다만 주고받은 메일을 토대로 두 번 기사화했습니다. 남쪽(한국) 기자에게서 자신도 메일을 보내고 싶다는 전화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 12월 7일: 내 메일 주소를 타인에게 알리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김정남은 이 같은 메일을 보내고 두 시간 뒤 “그동안 질문에 성의껏 답변했습니다. 이제 대화를 끝내고자 합니다”고 통보해 왔다. 김정남은 ‘한국 기자’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2010년 10월, 김정남이 고미요지 기자에게 메일을 다시 보내기까지 5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2004년 연말 마지막 메일을 보낸 후 한동안 연락이 없자, 고미요지 기자는 3년 뒤인 2007년 메일 대화록 중 일부를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 월간지 《문예춘추》에 게재했다. 그는 기사 말미에 이렇게 썼다.
< 국가 상황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핵개발에 힘차게 매달리는 북조선에서 김정남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그에게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다.>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에게 “다시 연락 달라”는 메시지를 기고문을 통해 전달했다.
다시 도착한 김정남發 메일
▲1975년 김정남이 군관복을 입고 외할머니와 찍은 사진.
2010년 10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김정남은 고미요지 기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 10월 22일: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 예전 베이징공항에서 만난 고미 선생님은 북조선 전문가로 생각합니다. 만약 질문이 있으면 대답하고 싶습니다. 혹시 기사를 쓰고 싶다면 보도 시기를 후계자 결정 1주년인 내년(2011년) 9월로 해주기를 바랍니다. 저는 뭐든 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뜻밖의 메일을 받은 고미요지 기자는 2010년 9월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일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김정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고 한다. 그는 김정은의 등장이 김정남으로 하여금 어떤 의도에서건 뭔가 행동으로 옮기도록 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노련한 고미요지 기자는 답장을 곧바로 보내지 않았다. 무슨 대화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3일 동안 곰곰이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김정남은 애간장을 태웠을 것이다.
< 10월 25일: 김정남 선생님,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메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공화국의 미래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는 가운데, 선생님이 하고 싶은 말도 많을 것입니다. 만약 공화국에 대한 생각을 들려주시면 소원대로 하겠습니다.>
예상대로 김정남은 즉각 답했다.
< 10월 25일: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답변을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렇게 연결된 것에 대해서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는 선생님의 수많은 질문에 답변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물론 민감한 부분이나 개인 프라이버시는 피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싶습니다.>
고미요지 기자는 그에게 천천히 그리고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 11월 1일: 북조선의 세습에 왜 반대합니까? 김정은씨와 만난 적이 있습니까?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에는 왜 참가하지 않습니까?>
김정남은 ‘3대 세습’에 강한 반감을 보이며 긴 글을 보냈다.
< 11월 3일: 3대 세습이라는 것은 과거 봉건 왕조 시기를 제외하고는 전례가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사회주의에 부합할 수 없습니다. 또 3대 세습에 가장 부정적이었던 부친이 그렇게 한 것은 북한 내부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백두의 혈통’만 믿고 따르는 데 익숙한 북조선 주민들에게 그 혈통이 아닌 후계자가 등장할 경우, 예상 밖의 일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북조선의 특수성을 고려해 ‘백두의 혈통’에게 세습을 단행했다고 봅니다. 나는 3대 세습에 반대합니다. 그러나 북조선 내부의 안정을 위해 세습을 해야 했다면 따라야 합니다. 북조선 내부의 혼란은 한반도의 혼란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한 것입니다. 나는 형으로서 동생 김정은에게 협력하고자 합니다. 어디까지나 동생이 원하는 경우에 말이죠. 또한 도움도 ‘해외에서’라는 조건을 달고 싶습니다. 나는 동생 김정은을 대면한 적이 없습니다. 김정철(金正哲)과는 외국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북조선 정치와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노동당 대표자회에 참가할 이유도 없고 명분도 없습니다.>
권력 세습은 ‘웃음의 대상’
< 11월 5일: 중국에 대해 질문을 드립니다. 중국은 공화국의 세습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죠? 중국은 공화국의 불안정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 11월 5일: 중국 정부의 대(對) 북조선 견해는 잘 모릅니다. 북조선과 중국은 혈맹관계이지만 양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도 세습을 환영한다기보다는, 북조선의 내부 안정을 위해 북조선이 강행한 후계 구도에 이해를 표명한 것으로 봅니다. 나는 중국에 오래 체류하고 있습니다만, 정부의 간부들과 그다지 인연이 없습니다. 중국 정부가 나와 가족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은 이웃 나라 국가 지도자의 가족에 대한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중국 정부가 나를 북조선의 차기 지도자라고 지목하고 보호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 11월 6일: 세습의 타당성, 선군(先軍)정치, 개혁ㆍ개방 가능성, 마카오 생활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말씀해 주세요.>
김정남은 답변에서 아버지 김정일이 추진하는 정책 대부분을 부정했다.
< 11월 10일: 권력 세습은 웃음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사회주의 이념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북조선이 안정적으로 경제 회복을 이루고 풍족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동생에 대한 나의 순수한 마음이 일부에서는 ‘북조선 버전 왕자의 난’ ‘김정남이 동생 김정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고 설명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선군정치…. 북조선이 근래 최고의 이념으로 규정했던 선군정치에 대해 내가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설령 내가 어떤 견해를 갖고 있더라도 그것이 북조선 정치에 미치는 영향도 없습니다. 나는 주민들이 잘 먹고 살 수 있도록 정치를 해달라는 희망뿐입니다. 평양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해외에서 북조선 주민들의 실상을 접할 때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나는 아버지와 후계자를 보조하는 간부들 중에서 북조선 주민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궁금합니다. 현실을 볼 때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생존과 안락만을 추구해 국사(國事)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주민들과 지도자 사이의 장벽을 쌓는 사람들이 아버지와 후계자 주위에서 사라졌으면 합니다. 그들은 북조선의 발전과 후계자의 미래에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상식에 의하면, 북한이 경제 발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개혁ㆍ개방은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중국에 오래 체류하면서 중국의 발전상을 직접 보고 체험했습니다. 북조선은 ‘강성대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북조선이 말하는 ‘강성대국’이라는 것은 사상, 군사, 경제강국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사상은 강한 측면이 있습니다. 군사는 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는 숫자의 과학입니다. 북조선의 경제 실상을 볼 때 경제강국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상적으로, 군사적으로 강하다고 해서 주민들에게 계속 “허리 벨트를 더 조여라”고 주문하는 것은 더 이상 명분도 없습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북조선이 추진 중인 나진ㆍ선봉 도시건설 계획에 대한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동영상을 보면서 개혁ㆍ개방 없이, 또한 미국과 서방의 대규모 투자 없이 나진ㆍ선봉이 과연 싱가포르처럼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마카오 생활에 대해서는 오해가 많은 듯합니다. 먼저 일각에서 보도된 것처럼 내가 마카오에 있는 VIP 카지노를 출입했다면 지금쯤 거지가 되어 거리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과거 마카오에 관광차 갔을 때 슬롯머신 게임을 한 적이 있지만, 현재 마카오에 살면서도 카지노에는 출입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내가 서방교육을 받아서 어려서부터 자유를 만끽하며 성장했다는 점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지금도 자유분방함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북조선의 여권을 가지고 비자 없이 갈 나라가 과연 몇 개나 있을까요? 만약 북조선 여권으로 전 세계 여행이 자유로웠다면, 내가 도미니카 여권을 위조해 일본의 디즈니랜드를 방문하러 갔을까요? 내가 마카오에 자주 가는 이유는 가족이 거주하는 중국에서 가장 가까운 자유분방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북한 고위층 관련 한국 보도는 대부분 부정확
< 11월 13일: 성실하게 답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질문합니다. 2008년 부친이 병에 걸렸을 때 정남씨가 프랑스와 독일에서 의사를 데려왔다고 보도됐는데 맞습니까? 정남씨는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모스크바에 살았던 어머니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죠.>
< 11월 14일: 아버님의 건강 관련 문제와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답변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해하십시오. 나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어머님의 묘지가 있는 모스크바도 자주 갑니다.>
김정남은 사적인 질문, 아버지의 건강 상태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답변을 단호히 거절했다. 김정일의 건강상태는 북한의 최대 국가 비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고미요지 기자는 “중국에서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 11월 14일: 언제 편한 시간에 만나 천천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동의하시면 즉시 비행기 티켓을 구입하겠습니다. 그런데 정남씨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나라를 ‘북한’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11월 15일: 북한을 북한이라고 해야지 무엇이라고 합니까? 한반도가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다는 유감스러운 현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북과 남은 유엔에 동시 가입한 엄연한 두 국가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북한이라고 하고, 대한민국을 남한이라고 부르는 게 잘못됐습니까? >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이 갖고 있는 경계심을 풀기 위해 가벼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김정남은 과거 일본을 방문했을 때 자주 들른 곳에 대해 언급했고, 한국의 북한 소식 보도에 대해서는 “탈북자를 소스로 사용하는 경우 북조선 시장 정보나 지역 정보는 비교적 정확하다고 할 수 있지만 고위층 관련 정보는 대부분 거짓말이거나 부정확하다”고 밝혔다.
남한의 약점 알고 있는 북조선
▲2010년 11월 북한의 포격 도발로 화염이 치솟는 연평도의 모습. 김정남은 “연평도 사태는 북조선 군부가 자신들의 존재 이유, 핵 보유 정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저지른 도발”이라고 정의했다.
두 사람이 몇 번의 메일을 주고받는 사이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도발 사건이 터졌다. 고미요지 기자의 질문은 민감한 내용으로 다시 바뀌었다.
< 11월 25일: 남북 사이에 가슴 아픈 일이 발생했습니다. 왜 저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까?>
< 11월 25일: 북남(北南) 사이에 이번 같은 일이 생겨 매우 걱정입니다. 북조선은 서해5도 지역이 교전지역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핵(核), 선군정치 모두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부적절한 대응도 북조선의 공격을 초래했다고 봅니다. 한국은 공격을 받아도 확전(擴戰)을 막기 위해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습니다. 전면전 발발(勃發) 시 한국이 받는 경제적 손실은 막대합니다. 북조선은 한국의 이러한 약점을 알고 있고, 언제 어디서나 이와 유사한 공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연평도 사건은 실로 걱정입니다. 오늘 인터넷을 통해 이번 포격이 내 동생의 정치적 업적으로 선전(宣傳)되고 있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선전만을 듣고 사는 북조선 주민들은 실상을 정확히 모르겠지만, 전 세계가 내 동생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이 가슴 아픕니다. 동생이 동족(同族) 민간인을 포격한 악명 높은 지도자로 묘사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후계자를 보좌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 11월 26일: 북조선은 앞으로도 (남쪽에) 도발을 계속할 것이라 생각합니까? 군(軍) 강경파가 많은 것 같네요.>
< 11월 26일: 나는 고미요지 씨가 북조선 전문기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동생 김정은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물론 있습니다. 향후 만났을 때의 인터뷰 내용은 모두 기사화해도 괜찮습니다! 연평도 사태는 북조선 군부가 자신들의 지위와 존재의 이유, 핵 보유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저지른 도발이라고 생각합니다.>
< 11월 27일: 최근 일본에서는 정남씨에 관한 기사가 정말 많습니다. 그건 그렇고 김정은은 어떤 성격입니까? 아버지를 닮았다는 설(說)과 일본과 중국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년 초 베이징 혹은 마카오에서 만날 수 있습니까? 천천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 11월 27일: 동생 김정은의 성장 과정은 모릅니다. 직접 만나본 적이 없는 내가 그의 성격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TV화면에서 볼 때 외모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닮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 11월 29일: 연평도 사태는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아버님에게 직접 말하는 기회는 있나요?>
< 11월 29일: 나는 부친에게 항상 직언(直言)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있는 그대로 계획 없이 직언합니다. 과거 핵실험, 미사일 발사 실험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를 직언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도 북조선 주민들의 윤택한 삶을 위해 매진하도록 동생(김정은)을 잘 교육시켜 달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내 직언을 부친이 받아들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미(韓美) 해상 연합훈련이 끝나고 있군요.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김경희ㆍ장성택에게서 각별한 사랑받아
< 12월 3일: 지금은 마카오에 계십니까? 따뜻한지요? 고모 김경희씨, 고모부 장성택씨와 자주 만나고 있습니까? 주말 잘 보내세요.>
< 12월 5일: 북조선의 후계 구도가 공식화된 후 미디어는 소설을 쓰는 데 여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고모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나는 고모님과 고모부에게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고, 지금도 그분들의 각별한 관심 속에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 12월 10일: 어제 중국 정부의 간부와 아버님이 만났습니다. 건강한 것 같았습니다. 그건 그렇고, 아버님이 정남씨에게 “북조선의 후계자가 돼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까? 만약 북조선이 혼란하면 귀국해 지도자가 될 생각은 없습니까? 본국에서도 기대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 12월 11일: 건강한 아버님의 모습을 TV에서 볼 수 있어 기뻤습니다. 나는 부친의 장남으로 혜택을 받아 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후계자의 목록에 오른 적은 없습니다. 장남을 중시하는 풍습 때문에 나를 후계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지적했지만 부친이 누구보다 3대 세습에 반대했기 때문에 동생이 후계자로 낙점(결정)되기 전까지 후계자 논의는 금기시됐습니다. 더구나 나는 북조선의 후계자가 될 생각이 없었습니다. 북조선의 차기 지도자는 나로서는 견딜 수 없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나 자신의 인생을 끊고 싶지는 않아요.>
김정남은 이메일 대화 곳곳에서 폭탄발언을 했다. “이복동생 김정은을 만난 적이 없다” “핵실험에 대해 국제사회의 우려를 부친에게 직언했고 북한 주민이 잘살 수 있도록 동생을 잘 교육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도 김경희ㆍ장성택 부부의 관심 속에 있다”는 내용 등은 북한 전문기자였던 고미요지 기자도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알려진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김정남에게 직접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성과였다. 고미요지 기자 입장에서 김정남의 메일 한 통, 한 통이 기삿거리였다.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을 직접 만나기 위해 다각도로 전략을 폈다.
< 12월 20일: 정남씨를 만난다면 지금까지의 인생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머님에 대해서는 어떤 추억을 갖고 있습니까? 새해는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 전 보낸 메일에서 “아버님이 3대 세습을 반대했다”고 했는데 그러면 누군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던 것입니까?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 12월 21일: 새해는 당연히 가족과 함께 보냅니다. 부친이 과거 어떤 후계 구도를 구상했는지는 부친만이 알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3대 세습이 자행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인은 예의 바르고, 근면하고, 무엇을 해도 노력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오늘처럼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룬 것도 이 같은 열정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건강하고 유익한 연말연시!>
< 12월 25일: 저도 동감입니다. 북일(北日)관계가 하루빨리 정상화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조선은 왜 군사 중시의 강경 노선을 유지합니까?>
북조선 대화 의사 있다
< 12월 26일: 북조선이 왜 이렇게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북조선은 지정학적으로 열강에 끼여 지금까지 생존해 왔습니다. 군 중심의 강경 노선은 생존을 위한 정치적 시스템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북조선은 자신의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핵을 고집합니다. 북조선만이 핵을 가질 수 없다는 국제사회의 이상한 논리에 도전하는 입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강경 행동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실히 해두고 싶습니다. 그런데 2012년 강성대국 진입을 목표로 북조선은 지금 매우 초조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로포즈’가 조금 와일드(Wild)하지만, 대화 의사가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점을 북조선을 상대하는 열강들이 좀 고려하면 어떻습니까? 일단 대화의 실마리가 발견되면 북조선에서도 대화를 원하는 사람들의 입지가 강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핵을 보유한 나라가 압력에 의해 핵을 스스로 포기한 사례를 알고 계십니까? 북조선을 계속 몰아붙이면 도발을 원하는 북조선의 강경파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만 초래하지 않습니까?>
김정남은 자존심 강한 북한의 속내와 북한 정권을 ‘요리’하는 중요한 방법을 고미요지 기자에게 알려준 셈이다. 6자회담 당사국이 참고할 만한 내용으로 판단된다.
< 12월 27일: 북조선의 상황을 잘 보고 계시는군요. 감탄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마카오 생활은 완전히 자유입니까? 혹시 한국의 정보 관계자와 중국 공안 당국에서 감시를 받고 있습니까?>
< 12월 28일: 마카오 생활은 자유입니다. 한국 국가정보원과 중국 국가안전부는 나의 행적에 관심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감시 차원에서, 또 보호 차원에서도 불가피한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가피한 운명은 즐기면서 사는 게 좋습니다. 정보 기관이 관심을 가지고 해도 내 자유를 침해하는 수는 없습니다.>
2011년 새해가 밝았다.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에게 만나자는 제안을 여러 차례, 구체적으로 보냈다.
< 1월 8일: 나와 아내는 1월 12일 홍콩, 13일에는 마카오로 갑니다. 여행 일정대로 13일에는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을 위해 휴대폰 번호를 드립니다. 만남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 1월 9일: 전화번호 잘 받았습니다.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겠습니다. 통화는 가능한 한 삼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문자 메시지가 잘 안 될 경우,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두 분의 마카오 여행을 환영합니다!>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의 약속이 취소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마카오 출장을 준비했다. 인터뷰가 성사된다면 김정남의 사전 허락을 얻어 취재하는 세계 최초의 인터뷰가 되는 것이다. 그동안의 언론에 보도된 김정남 인터뷰는 공항이나 호텔, 길거리 등에서 이뤄진 즉석 인터뷰였다.
마카오에서 독점 인터뷰
▲2001년 일본 불법입국 당시 사진. 김정남의 이모 성혜랑은 “김정남의 심미안을 볼 때 뒤쪽 여성이 부인일 것”이라고 했지만, 김정남은 “아이 손을 잡고 있던 여성이 부인”이라고 밝혔다. 그는 “부인이 셋이라는 얘기는 거짓이며, 이 여성이 나의 유일한 아내”라 했다.
고미요지 기자는 2011년 1월 13일, 부인과 함께 홍콩에서 마카오로 향했다. 부인을 동반한 것은 일반 관광객으로 가장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김정남으로 하여금 의심과 긴장을 풀게 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고미요지 부부는 마카오의 한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과 카메라, 녹음기만 들고 약속장소로 달려갔다. 약속된 시각에 김정남이 나타났다. 고미요지 기자는 곧바로 커피를 주문했다. 가벼운 질문과 농담도 했다.
대화 초반 김정남은 “2007년 선생님이 《문예춘추》에 쓴 기사를 읽었다”고 밝혔다. 고미요지 기자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 “다시 그를 만나 여러 가지 의견을 듣고 싶다”고 썼다. 김정남은 메일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고미요지 기자가 쓴 마지막 부분을 분명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풀렸다. 인터뷰는 한국어로 진행됐다. 고미요지 기자는 《도쿄신문》 1월 28일자로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다음은 언론에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내용이다.
―2009년 북조선은 화폐개혁을 실시했습니다. 김정은이 발의하고 강행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화폐개혁 자체는 대단한 실수,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김정은이 주도했다는 사실은 모릅니다.”
―김정은씨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습니까.
“지금도 옛날도, 동생에 대해서는 부친의 위업을 계승하고 주민이 더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게 소원입니다. 또한 한반도에서 연평도 포격 사건과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북남관계를 잘 조정해 주길 바랍니다.”
―김정은씨는 경험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경험이 부족합니다. 경험은 쌓으면 됩니다.”
―2008년 아버지가 병을 앓은 후 성격이나 행동에 변화가 있었습니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최근에는 얼굴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인기스타도 아니고(웃음) 일본 TV 기자와 언론의 추적을 받고 있지만, 그것이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상관하지 않아요(웃음).”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계속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일본 방송국에 잘 아는 기자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메일을 주고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나와 관련된 기사는 거의 읽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이 많아 일일이 대응할 가치가 없습니다. 단지 조총련에서 번역해 주면 봅니다.”
―북조선은 개혁ㆍ개방할 것으로 생각합니까.
“북조선이 가장 원하는 것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입니다. 그 다음으로 한반도 평화 정착 문제, 경제 재건 방안 등입니다. 이 시점에서 개혁ㆍ개방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아버지와 자신의 성격에 차이가 있습니까.
“내가 보기에 닮은 점도 있고 닮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주위 분들은 성격이 비슷하다는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200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효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올 추석에는 참배를 하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계구도 실패하면 軍이 실권 쥘 것
1차 인터뷰는 이쯤에서 마무리됐다. 다음 날 2차 인터뷰가 다시 진행됐다. 김정남은 전날과 달리 경계심을 풀고 상당한 여유를 보였다. 인터뷰는 두 시간 동안 진행됐다. 문신(文身)을 새긴 이유, 거주하는 곳, 가족생활 등 여러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젊은 혈기에 문신을 했습니다. 물론 야쿠자와 관계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베이징 시내의 한 아파트입니다. 아이는 마카오와 베이징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일본인과 한국인 중에 친하게 지내는 동료가 있습니다. 제네바 국제 학교에 다닐 때 사귄 다양한 친구도 있습니다.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미국인 친구도 있습니다.”
―북조선의 미래에 대해 의견을 말씀해 주세요.
“북조선은 내부적으로 매우 불안정합니다. 한국에 포격을 가한 것처럼 군사 권력이 커질 것입니다. 후계자 구도가 실패하면, 반드시 군이 실권을 쥘 것입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겠습니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무기나 마약을 판다는 얘기는 거짓입니다. 그런 일을 하면 금세 각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여행을 할 수 없게 돼요. 내가 현재 갈 수 없는 곳은 홍콩, 미국, 일본과 태국뿐입니다. 태국은 북조선에 의한 태국인 납치 문제가 있어 가지 않습니다.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면 유럽에도 갈 수 없지요.”
―2001년 일본에 왔을 때 강제 출국조치를 당한 후 아버지로부터 꾸중을 듣고 후계자에서 제외됐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북조선에서는 위조여권으로 해외여행을 하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내 사건 이후 그 악습은 북조선에서는 없어졌습니다. 김정은도 브라질 여권으로 일본에 갔었습니다.”
―아버지와 지금도 연락하고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직접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최근 술과 담배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게 걱정인데, 주위의 인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프랑스어와 영어가 능숙하네요.
“제네바의 국제학교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영어도 배웠습니다. 한때 러시아에 유학을 해 간단한 회화(會話)는 할 수 있습니다(김정남은 고미요지 기자에게 러시아어로 ‘당신은 러시아어 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중국어와 일본어도 식당에서 요리를 주문할 정도는 합니다.”
―유학 후 북조선에 들어가 대학에 다녔습니까.
“1980년대 후반에 귀국해, 대학은 다니지 않고 부친 옆에서 일을 도왔습니다. 당시 나는 많은 스캔들을 일으켰습니다. 부친에게 질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 인터뷰를 마쳤다.
祖國 북조선의 엄중 경고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과의 대화를 정리한 《아버지 金正日과 나》를 조만간 출간할 예정이다(일본 문예춘추사).
마카오 ‘밀회(密會)’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신뢰’라는 다리가 만들어졌다. 고미요지 기자의 입장에서는 대어(大魚)를 낚은 셈이었다. 이후 둘 사이의 메일 교환은 계속됐고 마침내 인터뷰 기사가 1월 말 《도쿄신문》에 나갔다.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터졌다. 북한이 김정남에게 엄중 경고조치를 한 것이다.
< 2월 5일: 《도쿄신문》에 게재된 기사 내용이 북조선을 자극한 것 같습니다. 경고를 받았습니다. 추가 기사 게재는 당분간 보류합니다. 부탁합니다.>
< 2월 13일: 인터뷰 기사가 보도된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사 내용은 좋았다고 생각합니다만,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으면 친구로서 대화하고 싶습니다.>
< 2월 13일: 친구로 만나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인터뷰는 응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평양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 2월 22일: 요즘 중동에서 시작된 민주화 요구 시위가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가 북조선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 2월 22일: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북조선 당국을 긴장시키는 사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 2월 23일: 북조선에서 인터넷을 자유롭게 보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버님은 매일 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 2월 23일: 북조선에서는 일부 사람만이 자유롭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칙적으로 해외에 상주하는 북조선 사람(공관 직원 포함)도 특별한 상황 이외에는 인터넷에 접속하지 말라고 돼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통제할 방법은 없습니다. 가정의 전화선에 모뎀을 연결하면 인터넷 접속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국경을 오가며 사업하는 북조선 사람도 국경을 넘으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이 PC방입니다. 북조선 사람들은 외부 소식에 민감합니다. 심각한 정보 통제가 북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정보를 획득하고 싶은 갈망을 자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에게서 오는 메일 내용이 점점 짧아지는 상황을 뒤집기 위해 중국에서의 2차 ‘밀회’를 계획했다. 김정남은 의외로 쉽게 만남을 약속했다.
동일본 대지진에 대한 哀悼 메일
< 3월 4일: 아버지에 대한 무서운 인상을 미디어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남씨의 입담은 한국사람처럼 들린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 3월 5일: 지적한 대로 미디어(언론)가 아버지를 무서운 독재자로 묘사한 부분이 매우 많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말투가 한국사람의 말투와 비슷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아마도 한국에서 살았던 북조선 외가 친척들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현재 해외에서 생활하면서 몸에 밴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외)할머니는 내가 어릴 때 돌봐주신 고마운 분입니다. 내가 몇 살 때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머님의 질환 치료 때문에 모스크바에 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 앓고 계신 우울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가 어릴 때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있다고 해서 내가 확실히 후계자였다는 견해는 조잡한 생각입니다. 북조선 최고 통치자의 아이들이라면 모두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여동생 여정이도 어릴 때 군복 입고 촬영한 사진이 있습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46분,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다. 고미요지 기자는 신문사 건물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김정남에게 자신은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했다.
< 3월 11일: 오늘 일본에서 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베이징은 지진이 없어 좋겠군요. 베이징에서 다시 만나 술 한 잔 합시다. 스위스 유학 시절의 추억도 들려주세요.>
< 3월 11일: 무사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귀국의 재난 피해자에게 애도의 뜻을 보냅니다. 나는 통풍이 있어 맥주는 잘 마시지 않습니다. 혈중 요산이 높고 때때로 통풍 발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매일 요산 조절제를 복용합니다. 물론 나는 술을 좋아합니다. 지금의 나이에 벌써 통풍 발작을 몇 차례 경험한 것은 술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스위스 제네바는 정말 좋은 곳입니다. 스위스는 중립국으로서 300년 이상 전쟁이 없었던 나라입니다. 무엇보다 평화로운 국가 이미지가 좋습니다.>
< 3월 12일: 답변 감사합니다. 어머님과 관련해 모스크바에 자주 갑니까.>
< 3월 13일: 오랫동안 타향에서 혼자 살다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회한이 큽니다.>
< 3월 19일: 원자로가 녹아 방사능 물질이 퍼지지 않을까 매우 걱정입니다. 아내도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동요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질문 드립니다. 제네바에서 있을 때 어떻게 지냈나요?>
트위터, 페이스북 덕분에 유학 친구 되찾아
< 3월 19일: 하루빨리 일본 국민이 평온을 되찾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원자력발전소는 지구 생태계를 위해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네바 추억을 말씀드린다면 국제학교 재학 중, 터키를 비롯한 각국에서 온 많은 학생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는 동서(東西) 냉전과 남북(南北) 대치 상황이 첨예했던 시절이라고 기억합니다. 그때도 나는 일본, 미국, 한국 등 서방의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단 한번도 정치 이념을 주제로 대화한 적은 없습니다. 지금도 그 시기의 친구 중 일부와 교제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 덕분에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를 많이 되찾았습니다. 지금도 일 년에 몇 번 그들과 유럽,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재회하고 있습니다. 친구의 대부분이 스키를 즐겨 탔지만 나는 운동신경이 민첩하지 못해 스키를 못 탑니다.>
< 3월 21일: 만약 제네바에 계속 머물렀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북조선 외교관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나요?>
< 3월 21일: 제네바에 있을 때 조국이 그리웠어요. 그러나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항상 현지 친구들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학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와서 더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제네바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대학에 진학했을 것입니다. 단, 외교관이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북조선 외교관이란 당국의 메시지를 그대로 전하는 일이고, 재능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에서 9년간 체류한 김정남은 북한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자본주의 청년으로 성장했다. 평양으로 돌아간 후 사회주의 독재정치를 펴는 아버지와의 대립은 불가피했다.
< 3월 21일: 정남씨가 유학하는 동안 아버님은 쓸쓸해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유학을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국제적인 시각을 키우기 위해서였습니까?>
< 3월 23일: 부친은 저를 유학 보내고 난 후 매우 외로워했습니다. 저 역시 부친 곁을 떠날 때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유학을 떠난 후 나의 이복형제 정철, 정은, 여정이 태어나 부친의 애정도 이복동생으로 기울어진 것 같습니다. 내가 완전한 자본주의 청년으로 성장해 북조선으로 돌아간 때부터 아버지는 나를 경계했습니다. 아마도 부친의 기대를 거역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들이 해외에서 국제적인 감각을 가질 것을 희망하면서도 유학 기간은 단축되었습니다. 동생들이 현지 친구들과 사귀지 못하도록 엄격히 통제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스위스 베른에서 유학한 동생들은 북조선에서 온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체류했습니다. 북조선 유명 오케스트라단인 보천보 전자악단과 기쁨조로 유명한 왕재산 경음악단의 여자들이 스위스를 들러 남동생, 여동생들의 친구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만화 김정은》은 사실에 가까워
▲2001년 1월 상하이 둥팡밍주(동방명주) TV중계탑에서 도시 전경을 바라보는 김정일. 그는 당시 ‘천지개벽’이라 놀라며 개혁개방을 생각했지만, 체제위협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는 게 김정남의 분석이다.
< 3월 24일: 지금 한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만화 김정은》을 읽고 있습니다. 책 사진을 첨부합니다. 여기에 정남씨에 대한 내용이 나왔네요.>
< 3월 24일: 나도 한국 지인에게 보내달라고 해서 이미 읽었습니다.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만화 김정일》과 후지모토 씨가 최근에 낸 책도 읽었습니다. 아마 그 책은 평양 고위층이 다 읽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국 만화에까지 등장하는 나를 평양이 불편해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 3월 26일: 5월 16일이나 17일쯤 만나는 것은 어떻습니까? 비행기 티켓을 미리 예매해야 합니다.>
< 3월 30일: 5월 일정은 아직 확답할 수 없습니다. 내가 5~6월에 바쁩니다. 연락 드리겠습니다.>
< 4월 2일: 메일을 읽으면서 느낀 것인데 정남씨가 본국으로부터 협박을 받거나 신변 안전 문제가 있습니까? 걱정됩니다.>
< 4월 2일: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긴박한 상황은 아니지만 주의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 4월 10일: 5월 13일부터 16일까지 베이징에 갑니다. 시간이 맞으면 공항 주변 홀리데이 인 호텔에서 만날까요? 질문이 있습니다. 최근 북조선의 경제 정책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 4월 11일: 5월에 반드시 만날 수 있습니다. 북조선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북조선이 외국 투자를 유치해 경제를 회복한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현실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풍그룹이든 조선합작투자위원회든 대(對) 북조선 투자를 유치하기 어렵습니다. 북조선에는 외국 투자 유치에 필요한 보호 정책 및 규정이 없습니다. 북조선 당국이 제멋대로 한국과 맺은 금강산 관광 개발 독점권을 취소하거나, 한국의 현대가 지은 금강산 시설들을 일방적으로 점유하는 그런 무지(無知)를 계속 보이면 북조선에 투자할 외국인은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북조선은 국제사회에 신뢰를 쌓는 것이 경제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을 해주면 좋겠습니다.>
< 4월 21일: 후계자 김정은의 생모(生母)는 고영희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4월 23일: 생모가 고영희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 4월 29일: 바쁘십니까? 5월 10일이 정남씨 생일이더군요. 조금 빠르지만 축하드립니다.>
< 4월 29일: 내 생일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일날은 가족과 함께 보냅니다. 와이프가 만들어주는 만두 수프를 마시고,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입니다.>
< 5월 1일: 5월 일정은 결정되었습니까? 정말 짧은 만남이라도 가지고 싶습니다. 이복형제 정철씨가 싱가포르에 놀러 갔을 때 북조선 간부의 아이들로 구성된 ‘봉화조’라는 그룹이 동행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 그룹은 정말 있나요? 또 정남씨가 대남 정책을 맡았던 김용순씨의 아들과 친한 관계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 5월 2일: 북조선에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신용카드 대신 현금 사용
▲보스니아 유나이티드 월드 칼리지(UWC)에 다니는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 본처와의 사이의 아들(금솔)은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다. 김한솔은 김금솔보다 두 살 많다.
고미요지 기자와 김정남과의 2차 밀회 일정이 다가왔다. 고미요지 기자는 홀로 베이징을 방문했다. 2011년 5월 16일,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며 베이징 시내를 며칠 동안 배회했다. 하지만 귀국 전날까지 김정남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밀회 계획을 포기한 고미요지 기자는 귀국을 앞두고 베이징에 있는 중국인 학자와 저녁약속을 잡았다. 밤 10시가 넘어도 김정남의 전화는 없었다. 고미요지 기자는 중국인 학자와 술잔을 계속 기울였다. 자정 무렵 시각을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꺼내든 그는, 마카오에서 사용하는 휴대폰 전화번호로 다섯 통의 부재중 전화가 걸려온 사실을 확인했다. 김정남이라 직감(直感)했다.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 속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 김정남은 베이징의 한 고급호텔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고 했다.
고미요지 기자는 곧바로 김정남에게 달려갔다.
고급호텔 꼭대기 층에 위치한 고급 바(Bar)의 희미한 조명 속에서 젊은 남녀가 놀고 있었다. 카운터에 야구모자를 쓴 사람이 고미요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김정남은 카운터에 홀로 앉아 고급 위스키를 ‘원샷’으로 주문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몇 잔을 더 주문했다. 그때마다 신용카드 대신 100위안짜리 현금을 꺼냈다. 김정남은 취기(醉氣) 때문인지 자신의 지갑이 바닥에 떨어져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고미요지 기자는 이국(異國)에서 가정을 가진 김정남의 끝 모를 외로움을 엿볼 수 있었다고 한다.
새벽 2시. 두 사람은 헤어졌다. 김정남은 중국 고급차를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고미요지 기자는 “만난 것만으로도 성과가 있었다”고 자신을 위로하며 다음 날 아침 귀국길에 올랐다. 김정남이 먼저 메일을 보냈다.
< 5월 17일: 무사히 귀국했습니까? 이번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 5월 17일: 함께 술을 마셔 기뻤습니다. 다음은 싱가포르나 마카오에서 만납시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꾸준히 메일을 주고받았다.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에게 그동안 주고받은 내용을 토대로 기사를 써도 되는지를 물었다. 김정남은 “당분간 시간을 달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 6월 3일: 얼마 전 한국 보도에 따르면, 정남씨의 아들이 갑상선에 문제가 있다고 하던데 괜찮습니까?>
< 6월 3일: 부정확한 기사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만, 때로는 어이가 없습니다. 부친과 함께 김정은이 방중(訪中)했다는 오보까지 나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김정은의 단독 방중 가능성에 회의적이었습니다. 현재 김정은이 중국 지도부와 단독 면담하기에는 김정은의 공식 직함이 빈약합니다. 김정은이 내년에 더 높은 자리에 임명된 후에 단독 방중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단 한 명
< 6월 6일: 가족에 특별한 변화는 없습니까? 그런데 점점 고모부 장성택씨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 6월 17일: 조금 바빴습니다. 가족은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나는 북조선이 경제를 개혁해 주민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모부가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계신 게 다행입니다.>
< 6월 18일: 정남씨는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아이들의 교육에 특별히 신경을 쓰고 계십니까?>
< 6월 18일: 나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강요하면 스트레스가 많아져 공부를 더 싫어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생활에서 좋은 친구들과 사귀는 것을 권장합니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거짓말, 마약, 도박을 하면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끊겠다는 것입니다.>
< 7월 1일: “김정일 이복형제 김평일 평양에서 가택 구류”라는 뉴스를 보았습니까?>
< 7월 1일: 신뢰성이 떨어지는 기사입니다. 2001년 일본에서 일(불법 입국)이 있었을 때 동행한 여성에 관한 것도 그렇습니다.>
< 7월 5일: 당시 일본 사건 때 동행했던 두 여성 모두 부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 7월 6일: ‘와이프들’이라는 표현은 이상합니다. 내 와이프는 당시 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여성입니다. 내 와이프가 고려항공 사장의 딸이라는 설은 어디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당시 어린 아이와 와이프 그리고 여자 비서가 동행한 사실을 놓고 언론이 소설을 썼습니다. 와이프가 두 사람이라, 웃기는군요. 내가 사랑하는 와이프는 한 명뿐입니다.>
< 7월 6일: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많은 기자가 정남씨에게 세 명의 부인이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 7월 7일: 내가 잠시 동거하여 아이가 있거나 교제한 다른 여성은 있습니다만, 결혼한 와이프는 단 한 명입니다. 나의 여성 편력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와이프 세 명과 산다는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나를 이상한 이미지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불쾌합니다.>
反美감정은 북한 체제 유지에 필요
< 7월 16일: 어제 한국 뉴스에 코카콜라가 평양에 공장을 건설하고 콜라를 판매한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 7월 16일: 신빙성이 없는 기사라고 생각됩니다. 아시다시피 북조선은 반미(反美)감정을 고취하기 위해 코카콜라, 청바지 등 미국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물품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습니다. 북조선에서 코카콜라, 청바지가 몰래 거래되고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러나 북조선 당국은 분명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코카콜라의 진출을 용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7월 27일: 아버님은 2002년 중국 상하이의 발전을 눈으로 확인하고 매우 놀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국내로 돌아오면 그 놀라움을 잊고 자국의 개방에 부정적으로 되는 것 같습니다.>
< 7월 27일: 상하이 발전은 아버지도 인정했습니다. ‘천지 개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기억하지만, 개혁ㆍ개방이 가져오는 북조선의 체제에 대한 위협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가면 견디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 7월 29일: 신의주 경제특구 구상은 왜 실패했는지 아십니까?>
< 7월 29일: 신의주 개발 실패의 원인은 북조선 내부에 있습니다. 중국인 양빈을 행정장관으로 임명하는 과정에서 중국 정부와 조율 없이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당시 북조선은 신의주를 중국 마카오처럼 카지노 사업을 위주로 한 환락도시로 개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동북 3성의 자본이 유출되는 것을 우려해 제한을 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8월 15일: 오늘은 종전 기념일입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북조선은 반일(反日)이라기보다 반미(反美) 감정이 더 강한 것을 느낍니다. 한국은 반일 감정이 더 심각한 것 같네요.>
< 8월 15일: 최근 한국의 반일 감정이 독도 영유권을 놓고 강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독도 문제만은 북조선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북조선은 일본 비판 때만 한국과 동조합니다. 북조선이 반미 감정을 고취하는 이유는 체제 유지를 위해서입니다. 유일한 초강대국과 맞서 있다는 자부심과 선군정치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고,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반미 감정을 고취하는 것입니다. 경제 파탄의 원인이 미국의 북조선 고립ㆍ압살 책동 때문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도 반미 감정의 고취가 필요합니다.>
< 9월 11일: 좋은 추석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내년 4월 15일 김일성 주석의 탄생 백주년에 큰 행사가 예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내용을 아시나요?>
< 9월 14일: 내년 4월 후계자의 지위를 높이는 행사가 있을 것입니다. 북조선이 추진하는 황금평, 나진 특구 개발 착공식이 있은 지 한 달이 지났지만 해외 투자 뉴스가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최근 후계자(김정은)가 중시하는 군부 가족 아홉 명이 탈북해 북조선 당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외모만 닮은 김정은
▲중국의 차기 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을 비롯한 태자당은 김정남을 김정은의 대안으로 여기며 그를 보호하고 있다.
김정남은 고미요지 기자의 질문에 성실히 답변해 주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자극하거나 비난하는 내용은 담지 않았다. 아버지의 목숨이 100일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일까.
김정남은 2011년 10월 아들(한솔) 문제로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김한솔은 동거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본처 사이에는 김금솔(男)이 있다.
< 10월 15일: 수많은 매체가 아들에 대해 보도하고 있습니다. 왜 분쟁지역인 보스니아에 있는 학교를 선택했습니까?>
< 10월 17일: 유학 장소로 스위스를 논의했지만 한솔이 지망한 유나이티드 월드 칼리지(UWC)는 스위스에 분교가 없었습니다. 그 학교의 분교는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캐나다에 있었지만 이미 학생 등록이 끝난 상태였습니다. 모험성향이 강한 아들은 결국 보스니아 모스타르를 선택했습니다. 분쟁지역에 아이를 보내려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국 그의 선택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새 나도 아이를 유학 보내는 나이가 됐습니다. 세월이 참 빠릅니다.>
김정남이 자신의 아들을 유학 보낼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 김정일이 사망한 것은 운명(運命)의 장난일까, 자연의 순리일까. 그날의 시간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 12월 10일: 안녕하세요. 현재 평양은 건설 러시라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 12월 10일: 자본이 많아지고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만, 억지로 공사를 진행할 경우 부실 공사가 우려됩니다. 할아버지 외모만 닮은 김정은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후계자 김정은은 2012년 정식 데뷔하는 것으로 예정돼 있었지만, 김정남은 자신의 소식통을 통해 북한 내부 사정을 전해 듣고 머지 않아 위기가 있을 것이라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은 갑자기 찾아왔다. 김정일이 사망한 것이다.
고미요지 기자는 이복형제 김정남과 김정은 그리고 북한의 미래에 대해 이런 분석을 내놓았다.
“중국은 표면적으로는 김정은 체제를 지원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김정은 체제가 순조롭게 가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고 있다. 그것은 중국에 체류하는 김정남과 깊은 관련이 있다. 김정남과 150통의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중국의 의도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북한은 군사력에 의존해 존립하는 나라다. 그러나 이대로는 경제 자립을 전망할 수 없다. 김정은 체제가 국가의 안정과 빈곤이라는 모순을 풀지 못하고 혼란에 빠질 경우 ‘김정남 옹립 시나리오’가 현실성을 가질 것이다. 이것은 결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김정남은 중국에 의해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차기 국가주석 시진핑의 출신 모체인 ‘태자당’이 김정남을 지지한다는 시각이 있다. 태자당은 자금력, 정치력이 우수해 김정남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다. 김정은 체제가 파탄했을 때, 사상적으로 중국과 가까운 김정남을 평양에 보낼 수 있다. 중국이 가진 마지막 북조선 압박 카드인 셈이다. 김정남 자신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을 것이다. 권력을 장악한 김정은, 중국을 배경으로 와신상담하는 김정남. 두 사람의 불화는 수면 아래에서 더욱 깊어지고 있다.”⊙
“김정은이 중시하는 군부 가족 9명 탈북해 북한 당국 골머리 앓아”![]() 2011년 9월 8일 북한 청진항을 출발해 9월 13일 일본 해상보안청에 의해 구출된 후, 10월 4일 한국에 입국한 군부 가족 일행. 김정남은 2011년 9월 14일 고미요지 기자에게 보낸 메일에서 “최근 후계자(김정은)가 중시하는 군부 가족 아홉 명이 탈북해 북조선 당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전했다. 김정남이 언급한 군부 가족 9명은 도대체 누구이며 왜 북한을 탈출했을까. 묘하게도 같은 날 아침, 국내 주요 조간신문은 “일본 해상보안청은 9월 13일 오후 탈북자로 추정되는 9명을 이시카와현 앞바다에서 구조했다”고 전했다. 탈북자는 남성 3명, 여성 3명, 남자 어린이 3명이었다. 이들은 일본 경찰 조사에서 “9월 8일 북한 청진에서 출항했다. 우리는 모두 가족과 친척이며 한국에 가고 싶다”고 밝혔다. 인솔자 격인 한 남성은 조선인민군 소속 현역 군인으로 알려졌다. 이시카와현 노도반도에서 청진까지의 거리는 750km. 이들이 타고 온 8m 길이의 목조 어선으로는 사실상 항해가 불가능한 거리다.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인민군 가족 일행은 10월 4일 한국에 인도됐다. 현재 이들은 정부 합동신문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행 중 1명은 “나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지낸 백남운(白南雲ㆍ1895~1979)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조선노동당에서 한국인 납치업무를 담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한국 외교부 대변인은 “확인해 주기 어렵다”고 했다. 참고로, 백남운은 8ㆍ15 광복 후 월북한 사회주의 계열 인사로, 북한 정권 수립 때 초대내각 교육상과 최고인민회의 의장까지 지낸 북한 정권의 핵심인물이다. 백남운의 손자가 사실이라면 김정남이 언급한 ‘후계자가 중시하는 군부 가족’일 가능성이 높다. 김정남이 9월 14일 메일에서 언급한 ‘탈북 군부 가족 9명’과 같은 날 한국 언론에 보도된 ‘인민군 가족 9명’은 과연 같은 사람들일까. 김정남의 메일 발송 시점과 탈북자의 성분, 가족의 수, 한국에 입국한 인민군 탈북자 일행의 증언 등을 종합하면 이들이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백남운의 손자’라고 주장하는 탈북자의 얘기를 중국에 있는 김정남이 확인해 준 셈이다. 김정은이 공식 후계자로 오른 지 1주년이 되던 시점(2011년 9월)에 이들이 왜 탈북했을까. 이들이 어떤 정보를 갖고 있기에 북한 당국은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할아버지는 자진 월북(越北)했고, 손자 일행은 자유를 찾아 자진 탈북(脫北)했다는 점이다. |
[월간조선 2012년 2월호 / 글=백승구 월간조선 기자]
▶2017.02.16 "김정남, 장성택 처형된후 '인생 슬퍼, 너무하다'며 우울해했다"
김정남 일가 살았던 마카오 찾아가 知人들 만나보니…
마카오, 둘째부인 이혜경이 자녀 한솔·솔희 키운 곳
知人 "사건후 이혜경 휴대폰 꺼져… 비상 행동지침대로 잠수 탔을 것"
교민 "金, 폭탄주 10잔에 포커 즐겨… 드라마 '태양의 후예' 재밌다더라"
말레이시아·싱가포르 대도시에 내연녀 한 명씩 있다는 소문도
15일 오후 김정남(46) 일가가 살았던 곳으로 알려진 마카오 구(舊)도심의 한 8층짜리 아파트. 주차장 앞 경비원에게 "김정남 가족이 여기에 사느냐"고 묻자 "어떤 말도 해줄 수 없다. 거주민이 아니면 빨리 떠나라"고 했다. 이 아파트는 출입구가 한 곳뿐이고, 마카오 무장경찰 본부와 가깝다. 한 시간을 기다렸으나 북한인으로 추정되는 주민은 보지 못했다.
마카오 타이파섬에 있는 고층 아파트 단지도 상황은 비슷했다. 1층 현관 앞 경비원은 "이 동(棟)에서 북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오늘 여러 기자가 찾아와 '김정남 가족'에 대해 묻는데 아는 게 없다"고 했다. 이곳은 김정남 아들인 한솔(22)과 딸인 솔희(18)가 다녔던 국제학교와 걸어서 5분 거리다. 김정남은 2008년쯤 아이들의 등하교 편의를 위해 새로 지은 이 아파트로 이사 왔다. 그러나 한솔이 남한 여자 친구를 집으로 데려오면서 주거지가 교민들에게 알려지자 2011년 무렵 구도심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왼쪽)김정남 일가 살았던 마카오 고층 아파트 - 지난 13일(현지 시각)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독살된 김정남 일가가 살았던 곳으로 알려진 마카오 타이파섬의 고층 아파트. 이 아파트는 김정남 아들인 한솔과 솔희가 다녔던 국제학교에서 5분 거리에 있다. (오른쪽 위)김정남, 가명 '김철'로 페이스북 - 김정남이‘김철’이라는 가명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들. /안용현 기자·'김철' 이름의 김정남 페이스북 캡처
마카오는 김정남의 둘째 부인인 이혜경(42·여권명 장길선)이 한솔과 솔희를 키운 곳이다. 김정남의 오랜 여성 경호원인 서영란도 마카오에 거주한다.
김정남이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마카오 부동산 4곳 중 최근 거주했다는 2곳을 둘러봤으나 가족의 행방은 확인하지 못했다. '김일성 장손'인 한솔은 작년 하반기 프랑스를 떠나면서 "마카오로 간다"고 했고, 우리 정보 당국도 그의 마카오 체류를 언급했으나 최근 한솔을 직접 봤다는 교민은 만나보지 못했다. 작년 9월 국제학교를 졸업한 솔희의 행적도 알려진 게 없다.
마카오에서 김정남 일가와 오래 교류한 A씨는 "어제(14일) 밤 김정남이 독살됐다는 뉴스를 보고 부인(이혜경)에게 연락했는데 (휴대전화가) 딱 꺼져 있었다"며 "김정남에게 변고가 생길 경우를 대비한 '행동 지침' 비슷한 것을 마련해뒀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 상황에선 잠수 타는 것(몸을 숨기는 것)이 상식적 대응 아니겠느냐"고 했다. 김정남 가족의 한국 망명 가능성을 물었더니 "중국 땅인 마카오에선 북한 애들(공작원)이 함부로 못 움직인다"며 "한국보다 마카오가 더 안전할 수 있다"고 했다.
마카오에서 김정남을 만났던 인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김정남은 2002년쯤 마카오에 터를 잡았다. 투자 이민 형식으로 들어와 마카오 시민권을 받았다고 한다. 한 교민은 "김정남은 한국 식당 3~4곳에 자주 나타났고, 종종 카지노에서 포커 게임을 즐겼다"고 했다.
김정남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대신 술은 즐겼다. 주량은 소주 1~2병 또는 폭탄주 10잔쯤이라고 한다. 사우나에서 김정남을 봤다는 한 교민은 "가슴과 배에 용 문신이 있는데 등에는 없었다"고 전했다. 최근 한국 드라마 중에는 '해를 품은 달'과 '태양의 후예'를 특히 재미있게 봤다고 한다.
김정남은 2011년 12월 아버지 김정일이 사망하기 전에는 마카오를 거점으로 동남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 활개치고 다녔다.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는 직접 프랑스로 날아가 뇌신경 전문의를 평양으로 데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김정일이 죽고 2013년 12월 고모부 장성택까지 전격 처형되자 김정은의 동선은 동남아와 중국 일대로 제한됐다. 베이징에는 첫째 부인인 신정희가 딸과 함께 거주하고 있고, 말레이시아·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지의 대도시에는 '김정남의 여인'이 한 명씩 있다는 소문이 돈다. 비행기를 탈 때는 혼자 움직였지만 동남아 식당 등에 나타날 때는 여성을 동행했다고 한다.
마카오의 A씨는 "밝은 성격이던 김정남이 장성택 처형 이후에는 우울해하면서 '인생이 슬프다. 그렇게 (장성택을) 죽여야 했나. 너무하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대북 정보 소식통은 "김정남은 장성택의 도움으로 북한 무역의 창구 역할을 하며 상당한 돈을 번 것으로 안다"며 "후견인 장성택의 처형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미국의소리(VOA)방송은 이날 '김철'이란 이름의 페이스북 계정을 김정남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이 계정은 한솔과 '친구' 관계로 이어졌으며 총 164명이 친구로 등록돼 있다. 이 계정에 올라온 사진 12장 중에는 배경이 2010년 마카오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마카오=안용현 기자
▶2017.02.16 "김정남은 모스크바에서 암 치료 중인 어머니에게 미음과 갈비탕, 김치를 챙겨다 줄 정도로 효자였다"
김정남 독살 소식을 듣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최근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낼까 생각하면서 언젠간 다시 그를 만나 취재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김정남과의 인연은 모스크바 특파원 시절부터 줄곧 이어졌다. 2001년 그가 일본 밀입국을 시도하다 추방된 뒤 모습을 드러낸 곳이 모스크바였다.
2002년 초 지인들로부터 그를 보았다는 제보를 받고 본격적으로 취재에 나섰던 때다. 김이 모스크바 한인 식당과 가라오케를 들락거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사실이었다. 때론 목전에서 놓치기도 했다. 김정남의 모스크바 출현은 생모 성혜림 사망 시점과 일치했다. 모스크바 유고자파드나야(남서쪽) 바빌로바 85번지 러시아 외교부 산하 아파트에 살던 성혜림은 당시 건강이 악화돼 모스크바 중앙의료원에서 정기 치료를 받고 있었다.
김정남은 아픈 어머니를 위해 한식당에 몰래 찾아와 미음과 갈비탕에다 김치 같은 밑반찬까지 특별 주문해 챙겨다 주는 효자로 소문났었다. 성혜림이 죽기 전까지 한동안 계속했다. 어린 아들 김한솔을 성혜림에게 안기며 노모의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고 한다.
2002년 5월쯤 친하게 지내던 주재원이 북한 대사관 외교 차량(적색번호판 D87)이 호텔 밖에 주차돼 있고 김정남과 인상 착의가 비슷한 사람이 미모의 여성들과 가라오케로 들어갔다고 제보해 왔다. 분위기가 심상찮다 싶어 저녁 무렵 전화받자마자 바로 호텔로 찾아갔다.
식당과 가라오케 방을 하나하나 열어가며 김정남을 찾았다. 하지만 식당과 가라오케를 샅샅이 뒤지던 순간 그는 바로 윗층에서 기자를 보고 있었다. 가라오케 주인이 뒷문으로 김정남 일행을 빼돌린 것이다. 일본 밀입국 후 처음으로 모스크바에 등장했던 그를 놓친 순간이었다.
이후 김정남은 잊을만 하면 모스크바에 나타났다 흔적 없이 사라졌다.
한 번은 김정남이 모스크바발 베이징행 여객기에 오르기전 공항 VIP라운지에 등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항에 근무하는 항공사 러시아인 여직원을 보내 사진을 찍게 했다가 김의 경호원에 발각됐다. 일곱살 아들 김한솔을 데리고 다닐 때였다.
김정남은 특파원에게 전화를 걸어와 거칠게 말했다. "동무 정정당당하게 하라. 왜 숨어서 누굴시키냐. 원하면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김정남은 늘 당당했다. 그가 가짜 여권을 가지고 다녔는지 몰라도 적어도 러시아나 중국에서는 그가 입국해 움직이는 동선만 봐도 훌륭한 정보니 이들 나라에선 그를 제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2002년 5월 18일 성혜림이 죽자 김정남은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해외를 나돌며 생활하는 동안 성혜림은 그의 ‘우산’이었는데 방풍막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성혜림이 살아있는 동안 김정일로부터 제한적 사랑이라도 받아왔는데 친모 사망으로 은둔 생활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을 것이라는 게 주변 얘기였다.
기자의 취재 결과 김정남의 성혜림 사랑은 알려진 것보다 더 해 보였다.
당시 기자는 성혜림 사망 기사를 쓰면서 모스크바 묘지에 그를 '매장했다'는 표현을 썼다. 이 기사가 김정남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김은 '매장'이라는 표현이 상당히 거슬렸는지 조선일보에 기사가 나간 뒤 바로 기자에게 연락해 왔다.
'마카오 닷컴' 이메일로 '가족 신변 조심하라'는 메일이 왔다. 발신자는 김정남 자신이었다. 그는 메일에서 “(어머니는) 매장이 아니라 안장했다”고 했다. 그가 얼마나 어머니를 애틋하게 생각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정병선 기자
▶2017.02.23 김정남의 불운한 삶과 여자들...세 명의 부인과 가족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맏아들이자 김일성 국가주석의 맏손자인 백두혈통의 핵심.
그리고 현재 북한을 집권하고 있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피습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유력 후계자에서 떠돌이 신세로 전락해 살다 죽은 불운한 그의 삶을 알아봤다.
사망 시각은 2월 13일 오전 9시경, 장소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이다. 오전 10시에 출발하는 마카오행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던 김정남이 기습 공격을 당했다. 지나가던 여성 2명이 김정남을 뒤에서 잡고 얼굴에 의문의 액체를 뿌렸다. 이후 김정남은 두통을 호소하면서 공항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숨을 거뒀다. 이송 이전 잠시 머물렀던 공항 내 치료소에서는 약한 발작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피습 당시 김정남은 김철이라는 이름이 적힌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여권에는 1970년 6월 10일 평양 출생이라고 적혀 있었다. 말레이시아 측은 사망한 김철이 김정남이 맞다고 공식 확인했다.
# 피살 정황은?
유동인구 많은 한낮 국제공항에서 급습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은 독극물 공격을 받고 쓰러진 김정남의 모습을 독점으로 공개했다. 사진 속의 그는 보라색 반팔 셔츠와 청바지, 검정 벨트 차림에 카키색 가죽 구두를 신은 채 정신을 잃고 공항 소파에 쓰러져 있었다. 오른쪽 손목에는 염주를, 왼쪽 손에는 시계와 반지를 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맏아들이자 김일성 국가주석의 맏손자, 백두혈통의 핵심인 그가 독극물 테러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말레이시아 경찰이 본격적으로 수사에 나섰다. CCTV에 포착된 여성 용의자를 포함해 모두 4명의 용의자를 체포했다. 첫 번째 용의자는 베트남 여권 소유자인 여성 도안 티 흐엉(29), 두 번째 용의자는 인도네시아 국적의 시티 아이샤(25)로 확인됐다. 남자 네 명의 사주를 받았다는 도안 티 흐엉의 진술을 바탕으로 경찰은 계속해서 공범을 추적했고, 시티 아이샤의 말레이시아인 남자친구와 북한 여권을 소지한 남성 리정철을 각각 세 번째와 네 번째로 체포했다. 처음 경찰은 도주한 남성 용의자 4명을 지목했는데, 리정철이 그중 한 명으로 추정된다. 일부 언론은 그를 두고 북한 정찰총국 소속 공작원으로 지목하기도 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고용된 청부업자일 가능성도 있다. 용의자들은 김정남을 모른다거나 장난인 줄 알았다면서 범행을 부인하고 있지만 여러 수상한 행적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정황상 치밀한 계획을 통한 암살로 보이는 김정남의 정확한 사인을 알아내기 위해 말레이시아 정부는 부검을 실시했다. 그러나 아직 사인을 가릴 보고서를 내놓지 못했다. 첫 부검 당시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관이 강력하게 항의를 하면서 즉각적인 시신 인도를 요구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1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은 현재 마카오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2 CCTV에 포착된 여성 용의자의 모습
3 불운한 후계자의 삶을 살았다.
# 왜 피살됐나?
계속되는 김정은식 3대 세습 공포정치
정확한 사인이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김정남의 피살을 두고 북한의 소행으로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김정은의 지시가 있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측근의 과잉충성 경쟁에서 희생당했거나 해외 망명을 타진하다가 적발되어 살해당했다는 등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집권 6년 차인 김정은은 숙청과 처형 등 공포정치를 이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본인의 3대 세습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으로 본다. 본인의 권세를 위해서는 백두혈통, 즉 김정일의 순수 혈통들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생모는 재일교포인지라 김정남이 북한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언젠가 본인의 정통성에 위협이 생길 수 있다.
이런 정황이기에 소위 백두혈통 인물들은 삶에 위협을 받아왔다. 실제로 김정남은 김정은 체제 이후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 살아온 것으로 알려진다. 김정은이 후계를 받은 이후인 2009년 4월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는 우암각이라는 평양의 별장을 습격해 김정남의 측근들을 구속했다. 우암각은 해외에 거주하던 김정남이 북한으로 들어올 때마다 비밀 정치 회동을 하던 장소다.
김정남에 대한 김정은의 위협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중국에서 암살 시도가 있었을 때는 중국정부로부터 중국 내에서 김정남을 죽이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를 받은 적도 있다.
2013년에는 고모부 장성택을 숙청하면서 공포정치를 고조시켰다. 김정남은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그의 남편 장성택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었다. 후계구도에서 밀려난 이후에도 장성택을 통해 생활비를 조달받았던 것이다. 장성택 처형 당시 김정남과 너무 자주 접촉한 것이 처형 원인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이런 상황 속에서 김정남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3대 세습을 추종하는 일은 없다”, “아버지(김정일)는 세습에 반대했지만 국가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등의 발언을 일본 <도쿄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남기기도 했다. 북한이 안정되고 경제 회복을 달성하기를 바란다면서 자신의 생각이 고국을 위하는 순수한 바람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김정은 세습 이후 현재의 북한 체제를 반대한다는 본인의 생각을 알린 것이다.
대북 관련 전문가들은 백두혈통을 말살하려는 김정은의 돌발 행동이 앞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번 김정남의 사망을 계기로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의 행방에도 관심이 쏠렸는데, 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파리에서 대학을 졸업한 이후 인도주의적인 활동에 참여하고 싶다던 김한솔은 마카오의 어딘가에서 가족들과 함께 은신 중이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 떠돌이로 살다 간 비운의 후계자
김정남은 누구?
1971년 5월 10일생. 김정일의 장남이다. 그의 생모는 배우 성혜림. 당시 그녀는 유부녀 신분이라 김정일이 김일성의 눈치를 봤으나, 백두혈통 첫아들에 대한 집안의 애정은 각별했다. 김일성은 김정은을 정식 손자로 인정하지 않고 장남인 김정남을 후계자로 봤다는 내부 정보원의 증언 기록도 있다. 김정남은 실제로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1) 문화적 혜택 풍요롭게 누린 코스모폴리탄 김정남은 문화적인 혜택을 풍요롭게 누렸다. 해외유학도 이른 나이에 경험했다. 13세이던 1983년에 러시아 모스크바의 프랑스어 특수학교를 다녔다. 이후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학교와 제네바 대학교를 거치면서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 러시아어까지 능통한 코스모폴리탄이 됐다. 김정남은 오랜 유학기간을 통해 자신이 자본주의 청년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기도 했다. 아버지 김정일의 사망 이후 이복동생 김정은이 최고지도자에 오르면서 그는 권력구도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후계구도에서 밀려난 뒤로는 완전한 방랑자 신세가 되어 평생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고국행은 2008년 김정일 건강 이상설 때 평양에 잠시 들른 게 전부다.
2) 후계자 수업 받았으나 아버지 눈 밖에 난 일화들 그는 20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98년 이후 북한 인민군 소속 비밀경찰부대인 인민군 보위사령부의 요직을 맡았다. 당시 북한 내부에서 김정일과 김정남을 각각 장군과 작은 장군으로 불렀다는 증언도 있다. 2001년에는 김정남이 당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의 아들 장미엔항 사회과학원 부원장과 회동한 사실도 있다.
그러나 1996년 이모인 성혜랑의 미국 망명으로 입지가 흔들렸고, 2001년에는 가짜 여권을 들고 일본 밀입국을 시도하려다 적발되어 김정일의 눈 밖에 났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유학생활로 인해 개방적 성향까지 지닌 그는 점점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났고 결국 해외에서 도피생활을 하면서 떠돌이로 전락했다. 중국 베이징에서 기자들에게 후계구도에 관심이 없다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 김정은 집권이 결정된 이후에는 권력세습을 반대한다는 인터뷰를 한 기록도 있다.
결론적으로 김정일은 김정남을 해외로 보내 ‘지도자 수업’을 하게끔 했으나, 결과적으로 김정남은 자본주의 체제에 익숙한 개방적인 인물이 되어 돌아왔다. 김정남은 스위스 유학을 마친 뒤 아버지에게 경제개방 및 개혁을 주장했고, 이는 김정일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3) 자본주의 받아들인 컴퓨터광 후계자로 물망에 오르던 당시 김정남은 2002년 평양-남포지역 이동전화 개통을 위한 남측과의 협상을 사실상 주도하고, 중국의 실리콘밸리인 중관춘을 수시로 드나드는 등 북한경제에 신산업을 도입하려는 행보를 보였다. 그는 IT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북한의 정보통신산업을 총괄하는 조선컴퓨터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적도 있다. 컴퓨터 및 벤처산업에 상당한 지식을 가져서 일본 조총련으로부터 입수한 최신 게임기와 소프트웨어를 밤새 작동해보는 등 컴퓨터광으로도 유명했다. 북한 최초의 인터넷이 그의 집에 설치된 바 있다.
4) 세 명의 부인 둔 김정남, 그가 남긴 사람들 피살 이후 김정남의 가족은 중국 당국의 신변보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때 행방이 묘연했던 아들 김한솔은 마카오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사생활이 노출되지 않은 첫째 부인 신정희와 아들 김금솔은 베이징에 있다. 2001년 5월 김정남이 일본에 밀입국하다가 적발돼 추방당할 때 선글라스를 쓰고 핸드백을 든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을 뿐이다. 아들은 어린 시절 캐나다에 머물렀다고 알려져 있다.
둘째 부인 이혜경과 아들 김한솔, 딸 김솔희는 마카오에 있다. 김정남의 시신 인도를 요구하면서 눈길을 끈 이혜경은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로, 북한 예술공연단 출신의 명품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아들 김한솔은 2013년 파리정치대학에 입학해 졸업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핀란드의 한 언론에 나와서 삼촌을 독재자라고 말하고, 북한 주민들이 편하고 부유하게 살 수 있도록 도움이 되고 싶다는 체제 비판의 발언도 남겼다.
그리고 화제가 되는 것이 셋째 부인 서영라다. 김정남이 피살 직전 가려고 했던 마카오에는 셋째 부인 서영라 씨가 살았다. 내연녀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 세 번째 아내로 알려져 있기도 했던 서영라는 최근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 근무했던 것이 밝혀져 세간을 놀라게 했다. 1976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녀는 조선노동당 126연락소 직원으로서 경호, 감시의 임무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1년 김정남이 위조여권으로 일본 입국을 시도하다가 적발되었을 때 공개된 사진 속에서 가족과 몇 걸음 떨어져 명품 가방을 들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여성이다. 당시 김정남은 이 여성을 비서라고 밝혔는데 현재는 세 번째 아내가 됐다.
# 공포정치 이어가는 북한
김정은에겐 실세로 불리는 여자들이 있다!
김정남 피살의 배후 의혹을 받을 만큼 공포정치를 펼치고 있는 김정은의 행동이 앞을 내다볼 수 없다고 여겨지는 가운데, 북한을 움직이는 실세는 김정은의 여자들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김정일이 지도자일 때만 해도 여자가 나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김정은 체제 이후 달라졌다.
/리설주와 함께한 모습
● 퍼스트레이디 리설주 김정은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이다. 예술단 출신인 리설주는 북한의 황후로 불리는 김정숙(김일성의 부인이자 김정일의 어머니)과 외모가 닮아서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이나 권력기관에서 직책을 맡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접촉이 잦은 만큼 리설주에 대한 김정은의 신뢰도가 높다. 기존의 북한 풍토와 달리 공식행사에 리설주를 자주 대동하고, 개명하지 않은 리설주의 동명이인들을 평양에서 추방시킨 일도 있다.
● 이복누나 김설송 김정일과 둘째 부인 김영숙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다.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의 경호와 일정 관리도 김설송이 하고 있다. 북한 정권 내부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보를 갖고 있고,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는 조직의 정점에 있으며 당 비서국을 장악하고 있는 핵심 권력이다.
/실세로 부상한 동생 김여정
● 동생 김여정 백두혈통 공주로 불리는 인물이다. 김정은의 동생인 그는 공식활동을 시작하면서 실세로 부상했다. 고모 김경희의 부재를 김여정이 채우고 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남편 장성택의 처형 후 종적을 감춘 김경희는 자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기도 했고, 일각에서는 평안북도의 한 초대소에서 휴양 중이라고도 알려지기도 했다. 김여정의 공식 직급은 노동장 부부장이다. 김여정의 남편은 당 핵심기관인 노동당 39호실에서 근무한다. 김정은 등 북한 최고지도부의 비자금 관리와 지도부를 위한 수익 창출에 관여하는 곳이다.
/김정남의 모친인 배우 성혜림
● 내연녀들 김정은은 내연녀들의 존재도 노출이 되어 있다. 존재감이 있는 인물은 퍼스트레이디 자리를 위협하는 내연녀,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려심이다. 김정은은 리설주와 결혼하기 전까지 려심과 연애를 해왔으나 김정일과 김경희의 반대로 포기했다. 하지만 지금도 교류를 해오고 있다고 한다.
성악 가수로 유명한 현송월과도 연애를 했다. 역시 김정일의 반대로 결혼에는 실패했다. 현송월은 리설주가 몸담은 적이 있는 은하수악단을 비롯해 왕재산경음악단, 모란봉악단 등 다른 동료 가수들과 음란 동영상을 촬영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총살형에 처해졌다는 소문이 돈 적도 있으나 최근 북한의 국영 방송에 모습을 드러냈다.
출처 | 여성조선 2017년 3월호 글 | 임언영 여성조선 기자
▶2017.03.02 김정남은 과연 중국식 개방론자였나?
▲ 상하이 푸동(좌)과 푸시(우)를 배경으로 사진 찍은 김정남. photo 김정남 페이스북
지난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독살당한 김정남(金正男·46)은 왜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 북한의 체제 구조상 최고권력자 김정은(金正恩·33)의 교사(敎唆) 없이는 김정남의 죽음은 현실화될 수 없었다. 김정은의 생모는 재일동포 출신의 고용희였고, 김정남의 생모는 성혜림이었다. 김정일(金正日)을 같은 아버지로 하는 이복형제라는 핏줄과 권력 다툼이 김정은으로 하여금 김정남을 죽이지 않고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불구대천의 관계로 만든 것일까.
김정남의 사망을 보는 중국 웨이보(微博) 블로거들의 견해는 좀 다르다. 김정은이 김정남을 독살 교사한 것은 당연히 패륜이지만 그것은 북한 내에 중국식 개혁개방을 둘러싸고 벌어진 노선 투쟁에서 최종적으로 김정남이 지지하던 개혁개방 노선이 패배한 결과라는 것이다. 김정남의 패배는 2013년 12월 12일 친중(親中)주의자 장성택 조선노동당 행정부장이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고사총 숙청을 당함으로써 예고됐던 패배였다. 2010년 김정일이 세 차례나 베이징을 방문해서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를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을 만나 이른바 ‘개혁개방 학습’을 할 때 김정일의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중국 지도자들과 김정일의 대화를 메모하던 모습을 보여준 것이 장성택이었다. 김정일과 장성택의 그런 모습은 많은 중국 지도자들에게 김정일의 북한이 보다 개방적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그러나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의 돌연한 사망은 북한 내 중국식 개혁개방 노선의 사망선고이기도 했다. 웨이보 블로그에 뜬 차이나데일리 뉴스에 따르면, 1971년생인 김정남은 9세 때부터 스위스 유학을 하는 10년 동안 개방적인 서양을 충분히 구경하고 왔다. 이후 귀국해서 중국을 여행하는 동안 ‘북한이 중국식 개혁개방을 해야 국제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생각의 씨앗을 갖게 됐다. 김정남은 1990년 평양으로 귀국한 뒤 1994년 할아버지 김일성이 사망하자 기회 있을 때마다 아버지 김정일에게 중국식 개혁개방에 대한 자신 나름의 생각을 전달했다고 한다.
김정남은 1989년 12월 처음으로 중국 여행을 했고, 1995년부터 2005년까지 10년간은 주로 중국에서 거주하면서 특히 상하이(上海)의 고속발전을 자주 가서 보았다. 그러나 김정일의 생각은 확고했다. 북한이 중국식 개혁개방을 하면 더 이상 김씨 왕조의 권력세습은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더구나 2008년 9월 9일 김정일은 북한 정권 수립 기념일 행사에 불참했고, 이유는 뇌출혈과 심장쇼크로 반신불수 상태에 빠진 때문이라는 사실이 공개됐다. 김정일의 마음은 다급해졌고, 그런 김정일의 눈에 순수 백두혈통은 아니지만 어린 김정은이 자신의 후계자로 더 적합한 것으로 판단됐다.
당시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은 이미 2001년 5월 도미니카공화국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밀입국하려다 적발돼 추방당하는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김정일의 눈에서 결정적으로 벗어났다. 김정남은 그 이전에도 세 차례나 일본에 밀입국을 시도한 일이 있었으며,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정남은 일본의 홍등가에도 출현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2003년부터는 북한 군부에서 김정은과 김정철의 생모인 고용희 숭배 분위기가 조성됐고, 이는 중국식 개혁개방을 바라지 않는 군부가 김정은을 지지한다는 의사표시로 인식됐다. 2004년 고용희가 병사했을 때 김정은은 23세가 됐다. 김정남은 이미 자신을 컴퓨터게임과 주색(酒色)에 빠진 플레이보이로 위장하고 있었다. 도쿄(東京)신문 서울특파원과 베이징특파원을 지낸 고미 요지(五味洋治)가 김정남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바탕으로 쓴 ‘아버지 김정일과 나 : 김정남의 고백’이라는 책에 따르면 김정남은 겉으로는 주색에 빠진 인간으로 위장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독서도 많이 하고, 주변 상황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의 사망은 북한 내 개혁개방파들에 대한 사망선고였고, 김정남과 김정남을 지지하는 장성택 그룹에 최후의 날이 됐다. 여기에는 중국식 개혁개방을 거부하는 북한 군부의 동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결국 2017년 2월 13일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독살당함으로써 당분간 북한 내에는 중국식 개혁개방을 선호하거나 추진하는 세력은 발붙일 수 없게 됐다.
중국식 개혁개방이란 1976년 9월 원론적인 중앙계획경제주의자 마오쩌둥(毛澤東)이 죽고 1978년 12월 권좌에 오른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공산당 제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통해 ‘사상해방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내외에 선포함으로써 시작된 또 다른 혁명이다. 덩샤오핑이 말한 ‘사상해방’은 “마오쩌둥 사상에서 해방되자”는 말이며, ‘실사구시’란 “마오쩌둥의 유훈에 따른 유훈통치를 거부하고 모든 판단은 현실에 대한 판단에서 출발한다”는 말이었다. 북한이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다음 아들 김정일이 ‘유훈통치’를 선택한 사실과 사뭇 다른 흐름이었다.
그때로부터 40년, 중국 경제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사회주의 상품경제 단계를 거쳐 사회주의 시장경제 단계에 도달해 있다. 물론 여기에는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던진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전유물이 아니며, 사회주의도 시장경제를 할 수 있다”는 말과 ‘선부론(先富論·누구든 먼저 부자가 되면 여러 사람이 먹고살 수 있다)’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현재 중국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이미 헌법에서 지워버렸으며, 생산수단의 공유화란 구절도 삭제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통해 부자가 된 사람도 중국공산당 가입이 전면적으로 허용되는 변화를 이루어왔다.
중국식 개혁개방을 선호하던 김정남의 사망으로 이제 북한은 스탈린주의자 김정은과 개혁개방을 거부하는 군부가 끌고 가는 세상이 됐다. 이제 겨우 22세인 김한솔이 백두혈통의 장손이기는 하지만 김한솔 역시 언제 김정은의 공작에 희생될 지 모르는 처지다. 말 그대로 북한은 퇴색한 스탈린주의자 김정은이 아무런 출구 없는 통치를 하는 국면을 맞게 됐다. 김한솔이 제2의 김정남이 되어 북한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김정은 정권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 플랜의 카드가 될 수 있는 날은 과연 언제쯤일까.
출처 | 주간조선 2446호
글 |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2017.04.06 김정남 전문기자 日 고미 요지, “日 언론, 北 비방 방송 중단 북한과 거래 있었다
▲ photo AP
김정남의 독살에 누구보다 놀랐을 사람이었다. 고미 요지(五味洋治·59) 도쿄신문 편집위원. 김정남과 오랜 기간 연락을 주고받은 세계 유일한 언론인이다. 두 차례 대면 인터뷰에, 150통 이상의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편지 내용을 정리해 2012년 ‘아버지 김정일과 나’를 출간했다.(한국어판 제목은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
그와 김정남은 2004년 9월 처음 만났다. 중국 베이징공항에서였다. 북한 외교관을 태운 고려항공 비행기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김정남처럼 보이는 남성이 입국장에 갑자기 나타났다. 고미씨와 함께 대기 중이던 예닐곱 명의 일본 기자들이 설마 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대부분 서울특파원 출신이었던 이들은 모두 한국어에 능했다. “혹시 김정남씨인가요?” 남자는 순순히 맞다고 답했다. 고미씨와 김정남 사이 13년에 걸친 인연의 시작이었다.
취재차 서울을 찾은 고미씨를 지난 3월 24일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김정남이 피살되고 40일째를 앞둔 날이었다. 하루종일 김정남 특집을 내보내며 열을 올리던 일본 언론에서 어느 순간 슬그머니 김정남의 이름이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고미씨에게 왜 그런지 물었다. 조총련과 일본 언론이 맺은 일종의 ‘계약’ 때문이라고 그는 분석했다.
“여러 방송에서 김정남 특집을 제작하고 있었다. 저도 몇 군데와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방영이 전면 취소됐다. 알아 보니 북한 측에서 협상을 제의했다.”
‘계약’의 내용은 이렇다. 북한을 비난하는 방송의 방영을 중단하면 4월 25일에 열릴 북한 창군절에 중계사로 초청하겠다는 것. 방송사에 제안을 전달해 온 건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었다. 창군절(創軍節)은 한국으로 치면 ‘국군의 날’쯤 되는 날이다. 북한은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 만주에서 항일빨치산 부대를 조직했다며 이날을 인민군이 탄생한 날로 홍보한다. 창군절에는 보통 대대적인 퍼레이드가 열린다.
창군절 중계와 북한 비방방송을 맞바꾸는 계약은 북한과 일본 언론, 양측 모두에 밑질 것이 없는 협상이다. 북한은 북한을 찾은 해외 언론들에 높은 금액의 ‘시설 사용료’를 받아왔다. 고미씨는 “고이즈미 전 총리가 북한을 찾았을 때 동행취재를 했다. 당시 일본 방송사는 송출비용으로만 300만엔을 냈다”고 말했다. 다섯 개 방송사만 쳐도 시설 사용료가 원화로 약 1억5000만원이다. 이번 방북에 일본 언론은 스태프들을 대거 보낼 예정이라고 한다.
“김정남 피살 소식에 충격을 받았나.” 새삼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고미씨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큰 충격을 받았다. 제 아내도 김정남씨를 같이 만난 적이 있다. 아내는 뉴스가 나온 후 매일 울었다. 이제 자기 앞에서 김씨 얘기를 꺼내지도 말라면서 말했다. ‘당신이 쓴 책 때문에 죽은 것 아닌가.’ 아내는 책 출간에 반대했다. 아내 외에도 많은 일본인들이 ‘당신이 쓴 책 때문에 김정남이 죽었다’고 말을 전해왔다.”
- 2012년에 책은 왜 출간했나. “당시는 김정은 정권이 막 들어섰을 때였다. 책을 내 백두혈통의 장자인 김정남의 메시지를 세상에 알리자고 생각했다. 신생 정권이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게다가 내용의 수위가 높지 않았다. 비밀이랄 게 그다지 없었다. 예전에 이한영이 낸 책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시 김씨는 ‘백 일만 출간을 기다려 달라’고 했다. 백 일 동안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 언제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나. “2012년 1월이 마지막이었다. ‘책을 내면 우리의 관계는 끝이다’라는 게 그의 마지막 메시지였다. 그 말대로 책을 낸 후 연락이 두절됐다. 이메일 계정 자체가 없어졌더라.”
김정남이 2004년 베이징공항에서 김정남과 조우한 일본 기자들 중 유독 고미씨와 연락을 이어간 이유는 뭘까. 고미씨는 “근성을 높게 평가해준 것 같다”고 말했다. “김정남씨가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2004년 첫 만남 이후 베이징 거리를 헤매며 계속 김정남의 흔적을 좇았다. 거주하는 동네는 물론이고 근처 슈퍼마켓, 미용실, 식당을 탐사 취재했다. 그 과정을 계속 기사로 냈다. 그걸 읽고 연락을 해온 것 같다.”
- 2012년 이후엔 한 번도 못 만났나. “못 만났다. 대신 책을 읽은 독자들이 김정남을 알아보고 행적을 제보하더라. 인도네시아에서 봤다는 사람이 많았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이탈리아 식당에 자주 나타난다는 연락을 받았다. 직접 찾아갔다. 중국 여성과 같이 왔다더라. 싱가포르에서 같이 다닌 여성도 중국인이었다. 키가 크고 영어를 잘하는 여성이라고 했다.”
- 김정남이 두 아들 김한솔과 김금솔 얘기를 자주 했나. “김정남은 김한솔을 예뻐했다. 한솔에 대해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자신과 생각이 같다고 좋아했다. 김한솔이 대학을 졸업하고 신변이 안정되면 다시 공개 발언하겠다고 했다. 김금솔은 당시 베이징에 살고 있었다. 캐나다계 국제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김정남은 김금솔 생모와 별로 사이가 안 좋았다.”
김정남의 죽음 후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탈북자들이 그를 망명정부의 수반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사실이 그중 하나다. 영국에서 설립된 탈북자단체 국제탈북민연대의 김주일 사무총장은 김정남에게 망명정부 수립을 세 차례 제안했다고 언론에 말했다. 경호원 서영란이 김정남의 ‘세 번째 여자’라는 추측도 보도됐다. 서영란은 김정남 가족의 2001년 일본 위장입국 당시 동행했던 인물이다. 어디까지 사실일까.
마카오에 거주한 김정남을 오랫동안 알고 지내며 어울린 인물이 있다. 이동섭 마카오 한인회장이다. 지난해 12월에도 김정남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에게 위의 보도가 사실인지 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단호한 부인이 돌아왔다.
“김정남 관련 오보가 너무 많이 나왔다. 서영란은 김정남의 애인이 아니다. 집사일 뿐이다. 부인 두 명을 챙기기도 바쁜데 또 다른 애인을 어떻게 두나. 한솔이와 금솔이를 두고도 여러 얘기가 있는데 한솔이 엄마가 정실부인이다. 북한 호적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카오 혼인증명서에는 한솔이 엄마가 부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금솔이보다 한솔이가 한 해 먼저 태어난 장자다.”
▲ 2011년 1월 마카오에서 만난 고미 요지씨(왼쪽)와 김정남.
망명정부 논란에 대해서도 선을 그었다. “김정남씨는 정치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만나서 밥 먹고 술 마실 때도 ‘어떤 드라마가 재밌다’ ‘어디어디에 출장 나간다’ ‘어떤 사업을 하려고 한다’, 이런 얘기만 한 사람이다.”
고미씨의 설명도 일치한다. “김정남씨는 누구에게도 정치적인 발언을 안 했다. ‘요전에 어디어디를 다녀왔다, 뭐가 맛있었다, 어디 갔더니 재밌었다’, 이런 식의 얘기만 했다. 일본 기자들 사이에는 김정남과 아무리 길게 얘기해도 기사가 될 만한 민감한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는 공감대가 퍼져 있었다.”
TV아사히가 거의 유일한 예다. 피살 사건 후 TV아사히의 기자는 “2010년 11월 김정남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갔더니 김정은을 비판해서 놀랐다”고 말했다. 뜬금없는 정치적 발언은 왜 나왔을까. 당시 김정남은 평양에 다녀온 참이었다. 본인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어떤 식으로든 언론에 토로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고미씨는 추측했다. 일본 언론계에는 당시 일본 언론과 김정남 사이에서 다리를 놔준 조선족 브로커가 부추겨서 정치적 발언이 나왔다는 얘기도 돌았다.
접촉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백두혈통’이어서인지 김정남 주변에는 일종의 ‘브로커’들이 많았다. 김정남은 지난 3월 1일 저녁 6시 이시이 하지메(石井一·83) 전 일본 자치상을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장소는 마카오의 스시집이었다. 이시이 전 자치상은 북한과 연이 깊은 인물이다. 1990년 자민·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초당파 방북단의 사무총장을 맡아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의 물꼬를 텄다. 이후 수차례 방북해 김일성도 만났다. 둘 사이를 중개한 인사는 재일동포 사업가. 그의 신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안전상의 이유로 사업가의 존재를 비밀로 해줄 것을 이시이 전 자치상 측이 일본 언론에 당부해서다.
고미씨는 “김정남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려는 인물들이 주변에 많았다”고 말했다. “그들 중에는 재일동포도 있었고 일본인도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피살 후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있다. 김정남 피살 후 김정남과 가장 친한 인물 중의 하나가 일본에 와 있어서 찾아갔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하더라. 조총련에서 김정남과 가까웠던 한 인사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왜 김정남을 세상에 드러내려 했을까. 고미씨는 “일본에서 북한 보도는 언제나 큰 화제를 낳는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김정남을 다루면 틀림없이 높은 시청률이 나왔다. 브로커들은 김씨 일가와 친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정치력과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제는 김한솔에게 이목이 쏠린다. 김한솔을 보호하고 있다고 발표한 단체 ‘천리마 민방위’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평소에도 비서나 수행원 없이 혼자 홀가분하게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는 김정남. 그를 오랜 기간 지켜본 고미씨와 이동섭 회장은 김정남을 ‘인간적으로 꽤 괜찮았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고미씨는 김정남의 지난 5년 중 자신이 놓친 퍼즐을 찾으려 요즘도 김정남의 흔적을 찾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북한 지역도 한국의 영토로 규정했다. 김정남도 엄연한 한국인이라는 얘기다. 김정남의 죽음이 ‘제2의 이한영 암살’로 흐지부지 잊혀지지 않도록 한국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인터뷰를 마치며 든 생각이다.
출처 | 주간조선 2451호 글 | 하주희 주간조선 기자
■ 2017.03.08 김한솔, 유튜브에 동영상 올려… "아버지 살해됐다
▲김한솔이 유튜브에 동영상을 올렸다. /유튜브 캡처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암살된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22)이 “아버지가 살해됐다”고 밝히는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8일 ‘천리마 민방위(Cheollima Civil Defense)’라는 단체가 ‘KHS Video’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유튜브 영상에서 김한솔은 “내 이름은 김한솔이다.
북한 김씨 가문의 일원”이라며 “내 아버지는 며칠 전에 피살됐다”고 말했다. KHS는 김한솔의 영문 이니셜로 추정된다. 그는 “현재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있다. 상황이 나아지길 기대한다”고 했다.
그는 영상에서 신분을 확인시키려는 듯 북한 여권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인적사항이 적힌 페이지는 영상에서 검게 모자이크 처리됐다. 정보당국은 “영상 속 인물은 김한솔”이라고 밝혔다. 정보당국은 김한솔이 직접 이 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것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https://youtu.be/AIKV0TqoD4E
싱가포르 매체 채널뉴스아시아는 이날 “최근 천리마민방위와 접촉해 김한솔 동영상을 소개받았으며, 탈북지원 활동가 윤도희로부터 비디오에 나오는 사람이 김한솔이 맞는다고 확인받았다”는 내용 등을 보도했다. 이 동영상을 게재한 천리마민방위는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단체다.
탈북자 지원단체로 추정되는 천리마민방위는 홈페이지에서 “지난달 김정남 피살 이후 그 가족에게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이 왔다”며 “급속히 그들을 만나 안전한 곳으로 직접 이동시켰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그 외 북조선 사람도 요청을 보내와 탈출을 여러 번 실행했다. 김정남 가족의 현 행방이나 탈출 과정에 대한 사항은 이 이상 공개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였다. 천리마민방위는 또 “긴급한 시기에 한 가족의 인도적 대피를 후원한 네덜란드 정부, 중국 정부, 미국 정부와 한 ‘무명의 정부’에게 감사를 표한다”라고 밝혔다. 특히 “갑작스레 도움을 요청했을 때 우리에게 급속히 응답을 주신 주조선-주한 네덜란드 엠브레흐츠 대사님께 특별한 감사를 표한다”며 “엠브레흐츠 대사님은 인권과 인도주의를 향한 네덜란드의 오랜 원칙적 입장을 입증하신 분”이라고 했다.
천리마민방위가 언급한 엠브레흐츠 대사는 현재 주한 네덜란드 대사로 재직 중인 인물이 맞는다. 김정남 피살 이후 김한솔 등 김정남의 가족 보호 과정에 네덜란드 정부가 모종의 역할을 했다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김상윤 기자
▶김한솔 도피는 미·중·네덜란드 국제 첩보전의 결과?
김정남 아들 김한솔의 7일 유튜브 동영상 공개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그의 후원세력으로 추정되는 ‘천리마민방위’가 “긴급한 시기에 한 가족의 인도적 대피를 후원한 네덜란드 정부, 중국 정부, 미국 정부와 한 ‘무명의 정부’에게 감사를 표한다”고 한 것이다.
이를 놓고 외교가에서는 김한솔의 거취와 관련해 크게 세 가지의 추정이 나오고 있다. 김한솔은 지금 ‘안전한 제3국’에 피신해 있다는 점, 그의 도피가 미국·중국·네덜란드·무명의 정부가 개입된 국제 첩보공작에 의해 이뤄졌을 가능성, ‘천리마민방위’라는 조직 또는 단체가 대한민국, 미국 등의 정보기관과 연계해 김한솔 말고 다른 북한 주요 인사들의 망명에 깊숙이 간여하고 있을 가능성이다.
우리 국정원은 물론 미국 측도 아직까지 김한솔 도피 작전의 실재 여부나 김한솔의 도피처 등에 대해선 일절 확인해 주지 않고 있다.
그러나 김한솔과 천리마민방위가 언급한 내용을 잘 살펴보면 ‘김한솔 도피작전’의 윤곽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김한솔은 김정남이 살해당할 때 중국 마카오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지난해 프랑스 대학을 졸업한 뒤 마카오 가족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지난달 13일 김정남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전해졌을 때 제기된 의문은 “김정은이 조카인 김한솔은 살려둘까”였다. 김한솔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남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북한 ‘백두혈통’의 적통 장손(長孫)이다. 김정은이 자신의 권력 구축에 장애가 될 것으로 보고 이복형인 김정남을 죽인 마당에 또 다른 위협 요소인 조카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김한솔도 당연히 자신에게 닥쳐올 위험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보호막이었던 중국 정부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긍정적인 답을 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중국이 사실상 ‘경호’를 책임지고 있던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공항 한복판에서 살해당했다는 사실. 김한솔로서는 ‘중국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중국도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졌을 법하다.
이런 와중에 ‘천리마민방위’가 김한솔을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한솔 아버지 김정남도 평소 재외 탈북자단체 등과 접촉해 왔던 정황이 알려졌었다. 천리마민방위도 그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천리마민방위는 김한솔에게 ‘중국만 믿지 말고 다른 곳도 생각해 보라. 우리가 도움을 주겠다’는 메시지를 전했을 것이다. 그동안 여러 탈북 주요 인사들이 대한민국이 아니라 미국, 유럽 국가들을 택했다. 천리마민방위가 그동안 여기에 개입해 왔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김한솔에게도 대한민국이 아닌 미국, 유럽 등을 도피처로 제시했을 것이고, 어렸을 때부터 유럽에서 유학생활을 해 온 김한솔도 긍정적으로 반응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엠브레흐츠 주한 네덜란드 대사. /조선DB
김한솔의 의사를 확인한 천리마민방위는 자신들과 네트워크가 있는 제3국 정부의 문을 두드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천리마민방위가 “특히 갑작스레 도움을 요청했을 때 우리에게 급속히 응답을 주신 주조선-주한 네덜란드 엠브레흐츠 대사님께 특별한 감사를 표한다. 엠브레흐츠 대사님은 인권과 인도주의를 향한 네덜란드의 오랜 원칙적 입장을 입증하신 분이다” “인도적 대피 요청을 사절한 몇몇 정부에 유감을 표시한다”고 언급한 부분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천리마민방위가 네덜란드를 비롯한 몇몇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네델란드만 호응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천리마민방위가 네덜란드의 문을 두드린 것은 네델란드가 남북한 겸임 대사를 두고 있고, 유럽의 대표적인 인권 중시 국가라는 점을 고려한 결과로 해석된다.
네덜란드 정부는 사안의 중대성, 정보력, 대중(對中) 발언력과 협상력 등을 감안해 미국 측에 SOS를 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김한솔의 ‘정보 가치’ 등을 고려해 당연히 적극적으로 나섰을 것이다.
미국과 네덜란드 측은 마카오가 중국 영토이므로 먼저 중국 측에게 ‘김한솔 도피’에 대한 양해와 협조부터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도 고민은 있었겠지만, 김정남 살해에 이어 김한솔까지 위해를 당할 경우 져야 할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결국 김한솔을 비롯한 김정남 가족의 이주(移住)에 동의하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다.
그렇다면 ‘무명의 정부’는 왜 나왔을까. 외교 관계자들은 “김한솔이 지금 있는 곳이 ‘무명의 정부’ 땅일 것”이라고 말한다. 김한솔과 천리마민방위 측은 김한솔과 가족의 신변 안전을 고려해 유튜브 영상을 통해 김정남 피살과 관련한 메시지는 공개하면서도 현재 있는 곳은 밝히지 않은 채 ‘무명의 정부’라고만 언급했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와 정보당국은 이 모든 과정에 직접 개입했거나, 아니면 미국 당국 등과 긴밀하게 정보를 공유했을 것으로 보인다. 인적·물적 지원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김정남 피살 사건 직후 김한솔 등 김정남 가족의 안전 문제에 관심이 쏠렸을 때 우리 정부가 “김한솔을 비롯한 김정남의 가족은 안전하다”고 단언했던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디지털이슈팀
▶김한솔 동영상 공개한 '천리마민방위'는 어떤 단체?
/천리마민방위 홈페이지 캡처
8일 김정남의 장남 김한솔의 동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한 단체는 ‘천리마민방위(Cheollima Civil Defense)’라는 곳이다. 천리마민방위는 국내에 있는 탈북자들에게도 생소한 단체여서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김한솔씨를 돕고 있는 단체로 추정되지만, 북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가상의 단체명을 내세웠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천리마민방위는 영상과 함께 홈페이지 주소(http://www.cheollimacivildefense.org/)도 공개했다.
홈페이지 상단에는 “북조선 사람들에게”라는 제목으로 “탈출을 원하시거나 정보를 나누고 싶은 분은 우리가 지켜 드리겠다”며 “어느 나라에 계시든 가능하다. 가시고 싶은 곳으로 안전히 보내드리겠다”고 적혀 있다. “여러 북한 사람을 벌써 도와온 우리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고도 했다.
페이지 하단에 작성한 성명문에서는 “김정남 피살 이후 그 가족에게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이 왔고, 그들을 만나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드렸다”며 “그 외 북한 사람도 탈출을 여러 번 실행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네덜란드·중국·미국 정부와 ‘한 무명의 정부’, 북한 내 지원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또 “인도적 대피 요청을 사절한 몇몇 정부에게 유감을 표한다”고도 했다.
홈페이지에는 자신을 ‘북조선 고위 간부’라고 칭한 이가 ‘탈출을 도와줘서 감사의 큰절을 올린다’며 올린 글도 있다. 그는 “북한 사람들이 외국에 나오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단어가 탈출”이라며 “대사나 검열단 간부도 탈출 심리는 똑같다”고 했다.
이어 그는 “천리마민방위는 단체 이름도, 업적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형체가 없는 신비한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며 “몇 시간 만에 이뤄진 탈출 과정에 신속하게 동원했던 고급 승용차, 비행기 등 열정과 준비가 놀라웠다”고 했다.
천리마민방위 측은 “돕고 싶으시면 이메일로 연락하라”며 이메일 주소(CCDjoin@protonmail.com)도 공개했다. 이들이 사용하는 ‘protonmail’은 스위스 소재의 보안 이메일 업체로, 메일 내용을 암호화한 뒤 저장해 서버가 해킹당하더라도 수신자와 발신자 외에는 메일 내용을 열람할 수 없다.
이와 함께 재정적 지원은 온라인 가상 화폐 비트코인으로 해달라고 요청하며 비트코인 주소도 올렸다. 비트코인은 경로 추적이 어려우며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쓸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8일 오전 홈페이지 글에서는 간단한 양식 수정이 이뤄졌다. 고위 간부의 글에 큰따옴표를 붙였고, 해당 글 하단에 문단을 구분하는 특수문자(***)가 추가됐으며 ‘북조선 고위 간부로부터’ 앞에 하이픈(-)이 들어갔다. 김상윤 기자
▶2017.03.09 탈출에 비행기·고급차 동원… 신비한 그림자 같은 '천리마 민방위'
[김한솔 구하고 영상 공개한 단체]
처음 등장… 탈북민도 못 들어봐
'천리마' 영문 스펠링, 北과 달라… 해외 특정기관·인물이 만든 듯
"천리마 민방위는 이름도 업적도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몇 시간 만에 이뤄진 탈출 과정에 신속하게 동원했던 고급 승용차, 비행기 등 열정과 준비가 놀라웠다."
'김한솔의 동영상'을 8일 유튜브에 공개한 '천리마 민방위'의 홈페이지에는 자신을 '북조선 고위 간부'라고 밝힌 인물이 올린 글이 떠 있다. 이 간부는 천리마 민방위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며 "감사의 큰절을 올린다"고 했다. 이 '고위 간부'가 실존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국정원 측은 이에 대한 확인을 거부하고 있다. 천리마 민방위도 그동안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단체다. 국내외 탈북민들과 북한인권운동 단체들은 이날 "처음 듣는다"고 했고,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도 "우리가 알고 있는 단체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북한에서 '천리마'는 천리마운동, 천리마동상, 천리마잡지 등과 같이 단체나 구호에 가장 흔히 쓰이는 단어 중 하나다. 민방위는 우리의 민방위와 같은 개념이다. 그러나 이를 조합해서 말을 만든 것은 북한 사람들로서 어딘가 어색하다고 한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장은 "북한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두 단어를 조합한 이상한 명칭을 사용하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홈페이지에 공개된 천리마의 영문 스펠링 'Cheollima'도 북한에서 사용하는 'Chollima'와 다르다. 이 때문에 북한 출신이 만든 단체라기보다 해외에 있는 특정 기관이나 인물이 북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가상의 이름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앞으로 이를 활용해 북한 고위층의 더 많은 탈북을 유도하려는 것이란 해석도 나왔다.
천리마 민방위는 추적을 차단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사용했다. 이 단체가 공개한 이메일 계정 'Protonmail.com'은 스위스에 서버를 두고 모든 메일을 암호화해서 익명성과 보안을 지켜주는 회사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홈페이지 역시 소유주를 추적할 수 없도록 막아주는 'WhoisGuard'란 회사를 통해 지난 4일에 개설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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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암살용의자 2명 기소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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