凍土의 獨裁者 이야기 1
■ 북한 해방8년사
사진으로 보는 북한의 <해방 8년사>
▲ 소련군 입성을 기다리는 조만식(1945.8.24) 국가기록원 제공
▲ 북한지역 일본군 무장해제(조선인이 총을 들고 있다, 1945.8) 국가기록원 제공
▲ 인민군 창건식(김일성과 태극기, 1948.2) 국가기록원 제공
김일성이 북한정권의 수립시까지 태극기를 모셨는데…한마디로 가관이지요? 불청객-
▲ 북한 최초의 선거(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1946.11) 국가기록원 제공
▲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1946.11) 국가기록원 제공
▲ 북한의 화폐 개혁 포스터(1947.12) 국가기록원 제공
▲ 미소공동위원회 美측 대표단 회의장소 (평양, 1947.5) 국가기록원 제공
▲ 모스크바삼상회의 지지대회 광경(평양, 1947.5) 국가기록원 제공
▲ 남북연석회의 개최 포스터(1948.5) 국가기록원
▲ 남북연석회의 회의장(모란봉극장, 1948.5) 국가기록원 제공
▲ 북한-소련간 국경선 확정(1948.12) 국가기록원 제공
▲ 김일성 동상 제막식 광경(1949.1) 국가기록원 제공
▲ 농촌 탁아소 모습(함경북도, 1952) 국가기록원
▲ 강점숙 유치원(1947) 국가기록원 제공
▲ 귀가하는 학생들(1959) 국가기록원 제공
▲ 평양여성학교의 물리학시험 광경(1955) 국가기록원 제공
▲ 평양의 기술직업학교 수업광경(섬유공업 기술부, 1957) 국가기록원 제공
▲ 노동자 야간 휴게소(송진야금속공장, 1957) 국가기록원 제공
▲ 부상군인 휴양소(1952) 국가기록원 제공
▲ 원산휴양지(1957) 국가기록원 제공
▲ 강원도 송강 휴양지(1957) 국가기록원 제공
▲ 탈곡하는 농민(전 소작농, 1947) 국가기록원 제공
▲ 전시 전차(1951) 국가기록원 제공
▲ 위생방역(1951) 국가기록원 제공
▲ 옹기시장(1950) 국가기록원 제공
▲ 농민시장(1947) 국가기록원 제공
▲ 북한 최초의 자동차 “승리-58”(덕천자동차공장,1958) 국가기록원 제공
▲ 평양거리의 ‘버스픽’(평양, 1954) 국가기록원 제공
▲ 평양-북경간 직통 철도 개통(베이징역, 1954)
▲ 광산마을에 도착한 이동 영화차(1955) 국가기록원 제공
▲ 최승희 무용연구소 수업광경(1946) 국가기록원 제공
▲ 봉화협동조합 상점(1958) 국가기록원 제공
▲ 평양의 전경(1947) 국가기록원 제공
▲ 농업협동조합의 수입분배(사리원, 1958) 국가기록원 제공
▲ 원산조선소의 스쿠너 진수(원산, 1947) 국가기록원제공
▲ 평양 중앙광장 복구광경(1953)
▲ 평양섬유공장(1955) 국가기록원 제공
▲ 수풍발전소(김일성과 외빈, 1958) 국가기록원 제공
▲ 평양의 한 거리(1950) 국가기록원 제공
▲ 대동강 철교 복구식(1954) 국가기록원 제공
▲ 모란봉과 해방탑(1952) 국가기록원 제공
▲ 모란봉극장(1955) 국가기록원 제공
■김일성은 누구인가
■ 2017-02-06 미국 선교사의 중매로 태어난 김일성
오늘은 김일성의 출생비밀 편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20세 강반석과 18세 김형직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김형직과 강반석의 중매자는 뜻밖에도 미국 선교사 넬슨 벨입니다. 김형직은 어려서부터 미국 선교사들이 지은 평양순화학교를 다니며 목사의 꿈을 키웠고, 붓글로 한글 성경을 옮겨 적던 아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은 교회에 잘 나오는 학생에게 돈 1전씩 주었는데 김형직은 그 돈을 고스란히 교회 헌금통 안에 집어넣는 정직한 신앙심을 보여 미국 선교사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의 추천으로 김형직은 숭실학교에도 입학했습니다. 이 숭실학교가 1897년 미국 북장로교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당시 평양 신양리 26번지에 세워졌다는 사실은 북에선 절대 배워주지 않는 진실입니다.
독실한 기독교 장로 강돈욱의 둘째 딸로 태어난 강반석은 본명이 강신희였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이름을 반석으로 지었는데, 이렇게 이름을 바꿔준 사람도 미국 선교사 넬슨 벨입니다. 반석이란 이름은 예수의 12명 제자 중 한 명인 베드로를 우리말로 번역한 이름입니다.
김형직과 강반석을 중매서준 넬슨 벨 센교사의 사위가 바로 미국 침례교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입니다.
기억하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1992년과 1994년 평양을 두 번이나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고 김일성대에서도 강연했습니다. 저도 그때 북한에서 ‘왜 미국 기독교 목사를 초청해 부르지?’ 하고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바로 김일성에겐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장인은 자기 부모를 세례했고, 이름까지 고쳐주었던 그런 은인이라는 인연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반갑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개명하고,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던 집안에서 지금은 하나님이란 말만 나와도 처형시키는 악독한 김 씨 독재 일가가 탄생했단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죠.
북한은 김형직이 조선국민회를 무어서 일제와 투쟁했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알고 보면 김형직이 직접 무은 단체가 아닙니다.
한국의 초기 독립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승만과 박용만이라는 두 명의 유명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하와이에서 함께 지내며 한때 결의형제까지 맺을 정도로 친했지만 나중에 독립 방법에 대한 노선을 달리 하면서 결별합니다.
미국에서 기독교 신자가 된 이승만은 직접 총을 들고 싸우는 방식에 거부감을 표시한 반면 박용만은 직접 무장을 들고 일제에게 투쟁해야 한다는 무장투쟁의 신봉자였습니다.
그런데 1914년 숭실학교 졸업생 중 한 명인 장일환이란 사람이 미국 하와이에 건너가 박용만을 만나고 돌아와 그의 사상에 심취됐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숭실학교 친한 후배들을 끌어들여 평양 조선국민회를 만났습니다.
이때쯤에 박용만은 하와이 교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대조선국민군단을 만들었고, 산하에 사관학교까지 둘 정도로 영향력을 넓히고 있었는데 평양의 조선국민회는 이 대조선국민군단의 국내 지부였습니다.
조선국민회는 장일환이 대장이고, 김형직과 또 김형직의 1년 후배인 배민수란 사람 3명이 주도했습니다.
배민수는 충북 청주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돼 총살된 의병대장 배창근의 외아들로 반일사상이 강했고, 일제에게 체포돼 여러 번 감옥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미국에 건너가 목사가 된 뒤 해방 후 미국 통역관이 돼 돌아왔습니다.
한국 정부에서 아버지 배창근과 함께 나중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은 독립투사이기도 합니다. 장일환과 배창근 김형직은 평양에 있는 기자묘에 올라가 함께 눈물로 기도를 하면서 독립을 위해 싸우자고 결의했습니다.
그런데 1918년 2월 18일 조선국민회가 발각돼 모두 감옥에 갑니다. 당시 일제의 감옥은 북한 보위부 감옥처럼 악독했던 곳이라 고문 받던 중 지도자인 장일환은 체포 두 달만에 옥사했고, 10개월 옥고를 치른 김형직은 반죽음이 돼 겨우 살아나왔습니다.
집에서 몸조리를 하던 김형직은 일제 순사들의 감시를 피해 압록강 쪽으로 혼자 조용히 도망쳐 갑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친구인 오동진의 집에 숨어살면서 의종금감, 본초강목이란 고전의학서를 읽고 나중에 한의사로 행세하면서 활동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인 김형직은 공산주의자들을 너무 싫어해서 치료까지 거부했고, 나중에 공산주의자들에게 매를 맞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 김형직의 아들이 공산주의를 핑계로 나중에 민족주의자들을 다 죽인 것도 참 기가 막힌 일입니다.
기독교에서 최고 배신자를 ‘유다같은 자’라고 하는데, 김일성이야 말로 아버지 김형직과 강반석에겐 유다같은 자식인 것입니다. 아무튼 김형직은 민족주의 계열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고문으로 얻은 후유증으로 1926년 사망합니다.
김형직의 동생이자 김일성의 삼촌인 김형권도 1930년 8월 14일 조선국민부의 군자금 공작차 풍산에 왔다가 일제 순사 오빠시를 쏴죽이고 체포됐다고 여러분들은 배웁니다.
하지만 김형권은 최효일이란 사람의 부하로 박차석과 함께 국내에 왔고 오빠시를 쏴죽인 사람도 최효일입니다. 나중에 최효일은 체포돼 사형 당했는데 영화 ‘누리에 붙는 불’에선 김형권을 대장으로 만들어놨습니다.
김형권은 당시 도망치다가 군자금으로 19원을 빼앗은 강도죄로 징역 15년형에 처해졌다가 1936년 마포형무소에서 옥사합니다.
김일성의 아버지와 삼촌은 지도자가 아닌 누구의 부하로 활동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항일활동을 했던 것은 맞으니 이런 역사를 솔직하게 배워줘도 되는데 북한은 왜 역사조작을 그렇게 해대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시간엔 김성주가 어떻게 김일성이 됐는지, 진짜 김일성은 누구였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2017.04.19 북한 역사사전 단독입수...세종대왕·유관순 없고, 김일성 집안 미화에 A4 6장씩 할애
⊙ 북한 역사사전에 세종대왕·유관순 등 없어… 빈자리는 북한 역사에만 나오는 항일 혁명투사로 메워
⊙ “김일성 모친 강반석이 일본 경찰 얼굴에 침 뱉자, 질겁해 도망갔다”… 기독교인 강씨를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묘사
⊙ 김일성이 하녀 부리듯 한 첫째 부인 김정숙을 백발백중 명사수로 설명
⊙ 북한이 자랑하는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 “김일성이 보천보에 없었단 증거 있어”
(중국 공산당 길림성 당사 연구소 비밀문서)
⊙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했다는 김일성 증조부 김응우는 만경대 묘지기로
소작 얻어 생활
⊙ 김일성의 탁월한 전략전술로 인천상륙작전에서 승리했다는 북한
⊙ 1950년 9월 15일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우익 인사를 학살한 신천 사건을 미군이 저지른
학살로 왜곡
⊙ 국정교과서 씨 말리려는 세력은 북한 역사사전에 대해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전교조·민노총 등 좌파단체가 고등학교 한국사, 중학교 역사 국정(國定)교과서를 막고 있다. ‘최순실 교과서’ ‘박근혜 교과서’라는 게 이유다. 황당하기 그지없다. “이유가 그게 다인가”라고 지적하면 그나마 내놓는 게 ‘박정희 미화’다. 10월 유신을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한 독재체제였다”고 한 부분은 읽지 않은 모양이다.
국정 역사 교과서는 ‘굴욕적 한·일 회담’의 한계와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국민의 정당한 시위와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 사례도 열거했다. 좌승희 박정희 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은 “너무 눈치를 봤다”고 했다. 고등학교 한국사 국정교과서 검토본의 현대사 부문에서 경제·사회 분야 집필을 담당한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박정희 미화 교과서’라는 비판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은 1950년대의 자유시장경제 제도 정착, 후발주자로서의 이익, 인구구조와 교육열, 냉전하 중국의 봉쇄 등이 영향을 미쳤다. 이런 요인들을 제대로 설명했는지는 보지 않고 박정희 시기의 경제를 몇 쪽 서술했는지 계산하는 것은 유치하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김 교수는 일본 도쿄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일제하 한국 경제》 《한국의 경제성장》 《한국의 장기통계: 국민계정 1911~2010》 등의 편·저서를 냈다.
국정 역사 교과서 반대 운동에 앞장선 대표적 역사학자인 주진오 상명대 교수가 주도해 쓴 검정(檢定)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박정희 사진이 딱 한 장 실려 있다. 반면 어떤 대통령은 사진이 넉 장 실려 있다. 대통령 취임식과 민주화 운동, 김정일과의 남북 정상회담 때 모습이다. 하나같이 당당하거나 환하게 웃고 있다. 교과서는 1998년 그가 베트남 호찌민 묘소에 가 헌화하는 사진을 싣고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썼다. 교과서에는 ‘신선한 충격’ 같은 주관적 표현은 쓰지 않는다. 좌파단체는 이 교과서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특정 대통령을 미화했다는 비판은 이 교과서에 더 어울린다는 지적에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침묵은 긍정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그렇다면 북한의 역사 교과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월간조선》은 A4용지 255장 분량(글자 크기 4포인트) 북한의 역사사전(력사사전으로 표기)을 입수했다. 북한의 초·중·고 교과서는 이 역사사전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김일성 모친 강반석, 유관순 열사를 대신한 김금순
/김일성의 부모인 김형직, 강반석의 묘.
북한은 김일성의 모친인 강반석을 설명하는 데 A4용지 7장을 할애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식 표기 그대로 옮긴다.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낳아 키우신 어머님으로서, 혁명가의 아내 오직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신 열렬한 공산주의자이시며 탁월한 녀성정치활동가. 강반석 녀사께서는 김일성 동지께서 무송일대의 공산주의자들을 결속하여 조직하신 비밀혁명소조의 성원으로서 반일 부녀단체를 모으시고 그 조직을 도처에 확대하시면서 조국의 독립과 녀성들의 사회적 해방을 위한 투쟁을 적극 조직전개하시었다. 1928년부터 백산지구 부녀회 회장으로 활동하시었다. 녀사께서는 부녀회원들을 애국주의사상으로 교양하시는 한편, 낡은 봉건잔재의 유습으로부터 해방하며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기 위하여 힘쓰시였다. 집안에 비밀문건이 있다는 기미를 알아챈 일제경찰은 몇 시간 후에 말을 타고 달려와서 가택수색을 하려 하였다. 이때 강반석녀사께서는 추호의 동요와 주저도 없이 강의하고 도도한 태도로 경찰놈들에게 항거하시여 ‘자, 볼테면 봐라’고 엄하게 말씀하시면서 놈들의 낯짝에 침을 뱉으시었다. 강반석녀사의 강의한 기상에 질겁한 원쑤놈들은 가택수색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달아나버렸다. 녀사께서는 혁명을 위함이라면 서슴없이 바칠 고매한 기상으로 살며 싸우셨고 아드님의 혁명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우셨다. 김일성 동지의 발이 얼세라 귀중히 건사해오시던 자신의 머리채를 신바닥에 깔아주시기도 했다. 녀사께서는 일제의 갖은 박해로 하여 얻은 신병으로 그렇게도 바라마지않으시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시고 1932년 7월 31일 만 40살을 일기로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나시었다. 참으로 강반석녀사의 온 생애는 모든 것을 혁명을 위하여 바치신 가장 영광스럽고도 빛나는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생애였다.〉 ※북한은 김일성 원수와 무찔러야 할 원수가 동음이의어이기 때문에 김일성을 지칭하는 것은 원수로 무찔러야 할 대상은 원쑤로 어휘를 바꿨다.
강반석이 열렬한 공산주의자라는 첫 문장부터 오류가 있다. 공산주의자는 종교 자체를 부정한다. 강반석은 창덕학교 교장 강돈욱 장로의 둘째 딸로, 고향인 칠골동에 머물 당시 그곳에 있던 칠골교회에서 집사로 봉직했다. 반석이란 이름도 성경(베드로가 盤石이란 뜻)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반일 부녀단체를 구성했다는 것도 과장됐다. 유호열 고려대학교 북한학과 교수는 “(강반석에 대한) 북한의 주장은 확인할 근거가 없다”고 했다. 그 시기 악랄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일본 경찰이 강반석이 뱉은 침을 맞고 도망갔다는 주장도 난센스다.
항일 투쟁을 부르짖는 북한 역사사전에는 유관순 열사가 없다. 대신 일본강점기 때 김일성이 조직했다는 ‘항일아동단’의 단원으로 통신연락 임무 수행 중 체포돼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조직의 비밀을 지키며 저항하다 최후를 마쳤다는 김금순이 있다.
〈1934년 여름 김일성 동지의 지시 따라 김금순 동지와 아동단원들은 북만에 있는 반일 구국 군부대를 찾아가 유희대 활동을 하게 되었다. 김금순 동지는 유희 대공연을 통하여 김일성 동지의 위대한 혁명사상과 높은 덕성을 적극 선전하고 그들을 반일공동투쟁에로 불러일으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934년 늦가을 김금순 동지는 적구인 백초구에 갔다가 일제 헌병 놈에게 체포되었다. 김일성 동지의 품 안에서 참된 아동단원으로 자란 김금순 동지는 원쑤놈들의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고문에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떳떳이 쳐들고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사형장에 나서서 원쑤놈들을 단죄하였으며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 ‘조선혁명만세!’를 소리높이 부르고 영웅적인 최후를 마치였다. 그가 희생되었다는 비보가 유격구에 알려지자 모든 사람이 비분에 떨리는 가슴을 안고 김금순 동지를 추모하는 추도식을 가졌다. 그들은 추도가를 부르며 복수의 시위행진을 오래 계속하였다. 김일성 동지의 충직한 전사인 나어린 혁명가 김금순 동지의 장렬한 최후에 대한 소식은 유격대와 유격구 인민들 속에서뿐만 아니라 당시 국제적으로도 널리 소개선전되었다.〉
김일성 첫째 부인 김정숙
▲김일성과 그 첫 번째 부인이자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
김일성의 첫째 부인이자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4천만 조선인민의 위대하나 수령 김일성 동지의 가장 중직한 전사이며 조선혁명의 종국적 승리를 위하여 몸바쳐 싸운 열렬한 혁명투사이며 견결한 공산주의자. 김정숙 동지는 장구하고도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의 나날에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백발백중의 사격술로써 원쑤들에게 무리 죽음을 주었다. 김정숙 동지는 원수와는 용감하고 완강하게 끝까지 싸우는 투사였으나 인민들과 혁명동지들에게는 자기의 모든 것을 무조건, 그리고 묵묵히 다 바쳤다. 김정숙 동지는 항상 미소를 담은 상냥한 얼굴로 인민들과 혁명동지들을 대하였으며 몸을 돌볼 사이없이 부지런하게 일하였다. 김정숙 동지는 해방후 조국에 돌아와서도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제시하신 새 조국 건설로선을 심장으로 받들고 불면불휴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김정숙 동지는 새 나라의 주인이 된 녀성들을 수령의 주위에 굳게 결속시키기 위하여서와 녀성들의 정치조직인 녀성동맹을 창립하기 위한 투쟁을 정력적으로 벌렸다.〉
김정숙이 쐈다 하면 백발백중의 명사수였을 수 있다. 그런데 어디에도 김정숙이 사살한 일본군 인원 등이 정확히 명시돼 있지 않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격수들은 이런 부분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명확하다. 예를 들면 세계 최고 저격수로 꼽히는 핀란드군 출신의 시모 해위해(Simo Hayha)는 1939년 9월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한 겨울전쟁에서 총 800명을 사살했고, 소련의 대표적인 총잡이 바실리 자이체프(Vasily Zaytsev)는 2차 대전 당시 400명의 독일군을 해치운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밖에 이반 시도렌코(Ivan Sidorenko)는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서 500명을 저격했고, 여성인 루드밀라 파블리첸코(Lyudmila M, Pavilchenko)는 오데사 지역에서 약 2달 동안 187명을 사살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24년간 일했던 마이클 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김정숙은 빨치산 활동을 할 때 야영지에서 그 빨치산 대원들의 양말, 옷을 세탁하고 페치카에 불을 지피고 심부름하는 하녀 비슷한 여자였습니다.”
하녀 비슷한 여자가 무슨 명사수이고, 무슨 최고 전술가냐는 이야기다. 마이클 리는 CIA에서 주로 북한 정보를 분석하는 일을 했다. 그는 1961년 김일성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나라며 급파한 간첩 황태성을 심문했고, 한국 여객기 테러 사건을 일으킨 김현희와 북한에 납치됐던 신상옥·최은희씨도 직접 만나 조사하는 등 굵직한 사건을 많이 맡아 온 인물이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도 “빨치산을 했던 사람들도 (마이클 리의 발언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 말 전하다가 수용소 간 사람도 꽤 된다고 들었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1962년 5월 30일부터 김일성의 직속 담당기자로서 온갖 연설문, 담화문을 대필한 한재덕씨가 쓴 ‘김일성을 고발한다’는 글을 실었는데 거기에 김정숙이 어떤 인물인지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나는 전후 두 번 김일성의 가정에 초대받아 그 아내와 애들까지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아내는 삼십 전후의 키가 조그마한 아주 평범한 가정부인으로 보였는데 그 촌뜨기 같은 소련식 옷차림이 그를 더욱 소박하게 보이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모로 보나 이전에 빨치산 투쟁을 하였다는 여성으로는, 더욱이나 소문 같은 명사수의 여장부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김일성이 예상외로 우락부락 큰소리를 내며 가정폭군 노릇을 하였는데 그 아내는 그 앞에서 벌벌 떠는 꼴이었다. 대개 밖에서 여성을 위하는 체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가정에서는 폭군이라고 했다. 김일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국 광복회
북한은 ‘조국 광복회’에 대해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항일무장투쟁시기 위대한 주체사상을 구현하시여 창건령도하신 우리나라에서의 첫 반일 민족통일전선조직으로 1936년 5월 5일에 창건되었다”고 했다. 〈조국 광복회창건은 국제 반파쇼인민전선운동의 확대발전을 촉진했으며 특히는 세계식민지 및 예속국가 인민들의 반제민족해방투쟁에 커다란 고무적 힘을 주었다.〉
실제 조국 광복회는 중국 공산당 동만주특위 정치비서 위극민이 정치위원 오성륜에게 지시하여 만든 것(《김일성 바로 알기》 중)이다. 북한은 조국 광복회를 전국적인 조직체인 것으로 날조했으나 국내에는 함북 갑산군에만 지부가 있었다. 몇몇 검정 역사 교과서에는 조국 광복회를 미화(美化)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동녕현성 전투
동녕현성 전투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천재적 군사전략가이시며 백전백승의 강철의 명장이신 김일성 동지의 총지휘 밑에 1933년 9월 항일유격대가 반일부대와 련합하여 전개한 전투. 동녕현성은 당시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쏘련을 침공할 목적으로 각종군사시설과 병력을 증강한 놈들의 정치군사상 중요지점이었다. 여기에는 일본군 1개 대대(500명)와 위만군 1개 련대(약 2000명) 그리고 일만 경찰 약 80명과 자위단놈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김일성 동지의 총지휘 밑에 진행된 동녕현성전투에는 항일유격대를 주력으로 하여 오의성, 사려장, 리삼협, 채사령 부대 등 많은 반일부대가 인입 되었다. 동녕현성전투는 김일성 동지의 탁월한 지휘 밑에 빛나는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항일유격대는 일제침략군 약 200명과 위만군 300여명을 살상하였고, 많은 군수품을 로획하였다. 이 전투를 통하여 전투에서 항상 주도권을 틀어쥐고 백전백승하는 김일성동지의 탁월한 령군술을 보여주었으며 일제의 소위 《무적황군》의 신화를 깨뜨려버리고 조·중인민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더욱 굳게 안겨주었다.〉
1933년 9월 동녕현성 전투 당시 김일성은 총지휘를 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같은 해 10월 12일 중국 공산당 중앙은 ‘만주 병사공작지시에 관한 지시’를 내려 항일 유격대를 건설할 것과 이 유격대를 농촌으로 확대하여 항일 유격전을 전개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에 따라 만주 지역에는 지역별로 공산 유격대가 형성됐다. 남만 유격대, 동만 유격대, 그리고 동북 인민혁명군 등이 그것이다. 동만 지역의 유격대는 1932년 초부터 같은 해 겨울까지 연길, 왕청, 훈춘, 화룡 등 4개 현을 중심으로 형성됐는데, 김일성은 왕청 유격대 소속이었다. 왕청 유격대 대장은 양성룡이었다. 동녕현성 전투에 나섰을 때 김일성은 왕청 유격대의 일개 소대장에 불과했다.
“(중략) 33년 9월 오의성군은 동녕현성을 공격했다. 오의성군은 1100명이었다. 사충항이 인솔하는 구길림 구국군 제3단도 가세하였다. 여기에 왕청, 훈춘의 유격대가 참가하였다. 그들의 병력은 200명 정도였기 때문에 구국군의 작은 부분을 구성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왕청의 부대는 양성룡이 인솔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김일성도 참가하고 있었다. 구국군은 성내로 진격하였지만 점령할 수는 없었고 결국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p.106, 와다 하루키 저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우호적으로 기술했다는 평가를 받는 책에서조차 그의 활약은 없었다고 나와 있다. 김일성은 “대중을 속일 때에는 엄청난 거짓말을 하라”는 히틀러의 명제를 충실히 체현한 것이다.
보천보 전투
▲양강도 혜산시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
보천보 전투는 북한이 ‘김일성의 역사적인 항일 무장전투’로 선전하는 전투다. 그들은 여전히 김일성이 직접 보천보 주재소를 습격하고 군중에게 반일(反日) 연설을 했다고 선전한다. 북한이 매년 6월 4일을 ‘보천보 전투 승리의 날’로 정해놓고 김일성 업적을 찬양하며 ‘보천보 정신’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시며 천재적인 군사전략가이신 김일성 동지께서 1937년 6월 4일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친솔하시고 일제의 전략상 요충지인 보천보를 들이쳐 일제침략자들에게 심대한 정치, 군사적 타격을 줌으로써 일제의 식민지통치 밑에서 신음하던 조선인민에게 민족해방의 서광을 안겨주신 력사적인 전투. 6월 4일 밤 10시 김일성 동지께서 올리신 한방의 총소리를 신호로 하여 전투는 개시되었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이 퍼붓는 복수의 총소리는 보천보 거리를 뒤흔들었다. 일제의 경찰관주재소가 삽시간에 불타버렸으며 면사무소, 산림보호구, 농사시험장 등 일제의 모든 기관에서 삼단 같은 불길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이날 밤 산림보호구 주임(일본놈) 놈의 《영전》을 축하하느라고 시내에 있던 원쑤놈들 중 유력자는 거의 다 한곳에 모여 술상을 벌렸다가 모두 무리 죽음을 당하였다.〉
객관적 증거자료를 보면 김일성의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 전투 참가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 같은 사실은 《조선일보》 1993년 12월 7일 자에 실린 ‘보천보 전투의 진실’이라는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기사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얼마 전 중국 조선족이 경영하는 심양의 요녕인민출판사가 발행한 조선족혁명렬사전을 입수했다. 3권으로 된 이 책은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사망한 72명의 사회주의 운동가의 약사(略史)를 담고 있다. 요녕인민출판사가 지난 83년 제1권을 낸 이후 9년 만에 제3권을 낼 정도로 이 책은 로작(勞作)이다. 관련자들의 증언을 철저히 들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김일성 주석의 가장 대표적인 항일투쟁이라는 보천보(혜산 근방의 지명) 전투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김일성이 사장으로 있었던 동북 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 간부들인 오중흡(1910~39·전 인민군 참모장 오극렬의 아버지), 권영벽(1909~45), 이동학(1911~38), 김산호(?~36) 등의 약사에 이 전투에 관한 소상한 기록이 적혀 있다. 권영벽은 보천보 전투를 앞두고 현지 정찰을 했으며 이동학과 오중흡은 전투에 직접 참가했다. 이동학 중대장이 책임진 경위중대는 보천보경찰주재소를, 7퇀4련은 영림소와 농사시험장, 소방대, 우체국 등 적 기관을 습격하기로 하고 7퇀의 오중흡 중대장은 일부 병력을 인솔하여 혜산 방향의 도로를 차단하고 그쪽에서 오는 적을 저격하며 8퇀의 일부는 경기 1정을 가지고 삼지연 방향에서 나타나는 적을 저격하기로 결정했다(여기에 나오는 퇀은 아마 중대보다 약간 큰 부대를 의미하는 것 같다-편집자 주). 돌격대는 이날 밤 10시 작전계획에 따라 보천보를 습격했다. 작전회의를 별동대 간부끼리만 했는지 사장인 김일성이 직접 주재했는지는 이 기록에 분명하게 나오지 않아 확인할 수 없지만 김이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1980년대부터 중국에서 김일성 부대 관련 연고자 130여 명을 인터뷰한 조선족 작가 유순호씨도 “보천보 전투 당시 김일성 부대에서 기관총 소대장으로 근무한 강위룡의 회고담을 들은 중국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2군 출신들을 1990년대 초반 만나 확인했는데 보천보 전투 당시 김일성은 압록강을 건너지 않았고 보천보에 없었다”고 했다.
유씨는 “광복 후 1950년대 초까지 중국 옌볜에서 지낸 강위룡은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에겐 ‘보천보 전투 때 내가 기관총을 들고 김일성 곁에 딱 붙어 서 있었댔다’고 한마디로 일축했다”고 전했다.
북한이 선전하는 보천보 전투 신화가 거짓이라는 것이다. 북한에 돌아가 평양위수사령관에 임명된 강위룡은 1967년 양강도 혜산에 ‘보천보전투승리기념관’이 건립됐을 때 현지 관계자들에게 진실을 말했다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에 의해 숙청됐다. 유씨는 “중국 공산당 길림성 당사(黨史) 연구소 비밀문서고에 있는 자료에도 김일성은 보천보에 가지 않았다는 증언들이 기록돼 있다”고 했다. 필명이 청설(靑雪)인 유씨는 1980년 희곡 〈숲속의 메아리〉로 문단에 데뷔했다. 중국의 항일 영웅 조상지를 그린 《비운의 장군(1998)》을 썼고 2002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만주의 파르티잔 허형식(2009)》을 펴내는 등 만주 항일 운동사를 연구해 왔다.
설령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보천보 전투는 일제 파출소를 습격한 것에 그친 사건이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는 “보천보 전투는 소규모 무장 병력을 기습 공격한 작은 전투로 북한에 의해 과대 선전됐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했다. 류석춘 연세대 교수도 “최근 만주 지역에서의 독립투쟁 기록을 살펴봤는데,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나 홍범도 장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를 제외하면 사실상 무장 항일투쟁이 지리멸렬한 수준이었고, 김일성이 벌였다는 항일투쟁도 이런 흐름 속에 있다”고 했다.
3·1운동
북한 역사사전에 3·1운동은 이같이 기술돼 있다.
〈조국을 해방하고 민족적 독립을 이룩하려는 조선인민의 불 같은 지향과 철천지원쑤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쌓이고 쌓인 민족적 분노는 로씨야의 사회주의 10월 혁명의 영향 밑에 드디여 1919년 전민족적 3.1봉기로 폭발하였다. 김형직 선생께서 뿌리신 반일애국사상과 혁명의 불씨는 3.1봉기를 계기로 이르는 곳마다 세차게 타 번지였다. 김형직 선생께서 키우신 애국적인 인사들과 청년 학생들은 평양과 강동, 만경대와 자강도 중강을 비롯한 국내외의 여러 곳에서 봉기 군중의 앞장에 서서 일제침략자들과 그 주구들의 죄상을 폭로규탄하면서 원쑤들의 탄압을 박차고 완강하게 싸웠다. 투쟁은 료원의 불길처럼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갔다. 3.1봉기는 이 운동을 맑스-레닌주의적 혁명로선과 전략전술에 의하여 이끌 탁월한 령도자와 혁명적당, 혁명적 계급이 없었고 게다가 일제의 탄압이 극심하였던 탓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북한은 3·1운동을 당시 평양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진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 우상 선전의 소재로 활용하면서도, 3·1절을 공휴일로 지정하지 않고 기념행사도 갖지 않는다. 2011년 청년지식인포럼 ‘story K’가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데일리 NK’와 함께 북한 관련 문서를 분석한 것에 따르면 김형직이 3·1운동에 앞장섰다는 것은 북한 당국의 일방적 주장일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3·1운동은 실패하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이후 대한제국의 복고(復古)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으로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민족적 합의를 이끌어 낸 사건이기 때문이다.
셔먼호 사건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에서 평안감사 박규수를 비롯한 관민 합동작전으로 격침됐지만, 북한 역사사전에서 이 사건의 주역은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로 대치돼 있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에서 평안감사 박규수를 비롯한 관민 합동작전으로 격침됐지만, 북한 역사사전에서 이 사건의 주역은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로 대치돼 있다.
〈샤만호의 침입사건은 실로 최근 100여년 동안이나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조선인민에게 형언할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가져다준 야수적 미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최초의 침략사건이었다. 1840년대부터 조선침략을 기도한 미국침략자들은 군함과 해적선들을 조선 근해에 자주 침범시켰다. 샤만호는 무장한 해적선으로서 여기에는 미국놈 프레스톤을 괴수로 하여 영국선교사 토마스라는 놈 등 수많은 침략의 무리들이 타고 있었다. 해적들은 불법적으로 만경대 부근에 기어들어 정탐과 살인, 강도행위를 하였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의 증조할아버님이신 김응우 선생님께서는 인민들의 앞장에 서시여 샤만호를 무찌르는 싸움에 용감히 나서시였다. 미제침략자들을 쳐부수기 위한 판가리 싸움이 벌어졌다. 인민들은 상류에서 수많은 나무배에 장작을 싣고 그에 불을 달아 적선에 부딪쳐 불타게 하였다. 이리 하여 미제침략자를 반대하는 조선인민의 첫 투쟁은 력사적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 신부 9명과 수천 명의 가톨릭 신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병인박해(1866년) 후, 프랑스 함대가 보복할지 모른다는 소문으로 조정에는 긴장감이 돌았고 민심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정체불명의 이양선 한 척이 대동강 어귀에 나타났다. 중국 톈진에서 출발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였다. 무역선이라지만 대포가 2문이나 장착돼 있었고 24명의 선원도 중무장한 80t급의 증기선이었다. 평양 군민이 격분한 것은 이들의 접근을 막으려는 조선 관리 3명을 셔먼호가 감금하면서였다. 흥분한 평양 군민들은 소총과 활을 쏘아댔고, 셔먼호 역시 포격으로 맞섰다. 탄약이 떨어져 하류로 후퇴한 셔먼호가 줄어든 대동강의 수위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자 평안 관찰사 박규수는 기발한 생각을 한다. 땔감 운반선 3~4척을 연결한 뒤 인화물질을 가득 싣고 불을 붙여 셔먼호 쪽으로 떠내려 보낸 것이다. 셔먼호는 불타버렸고 선원 역시 전멸했다. 1866년 7월 24일이었다. 대원군은 이 사건에 고무돼 빗장을 더욱 걸어 잠갔으나 5년 뒤 신미양요를 겪어야 했다.
전문가들은 김응우가 대동강에서 셔먼호를 불태웠다는 사실은 어떤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실무근 거짓이고 김응우가 게릴라 투쟁을 했다는 것 또한 완전히 날조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북한문제전문가인 도준호 명지대 초빙교수는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했다. 김일성 증조부 김응우는 만경대에서 묘지기로 소작을 얻어 생활했다.
인천상륙작전
북한 사람들은 인천 월미도를 인천상륙작전 때 미제에 맞서 처절히 항거했던 ‘영웅들의 섬’으로 안다. 1950년 9월 13일부터 사흘간 월미도의 북 해안포병 중대가 미 군함 10여 척을 격침하고 수천 명을 죽이는 등 결사적으로 항전한 것으로 당국이 허위 선전한 탓이다. 이런 주장을 담아 북에서 1980년대 초 제작한 〈월미도〉는 애국심을 고취하는 대표적 전쟁 영화다. 사전에도 이렇게 나와 있다.(북한은 인천상륙작전을 ‘인천-서울지구방어전투’로 칭한다.)
〈천재적군사전략가이신 최고사령관 김일성 동지의 탁월한 전략전술적방침을 높이 받들고 조선인민군부대들이 조국해방전쟁의 제2계단 초기시기 대규모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한 미제침략군에게 인천-서울지구에서 섬멸적인 타격을 주고 전선의 인민군주력부대들의 조직적후퇴를 보장한 영웅적방어전투. 인민군부대들은 적 장병 1만3000여명을 살상하고 전차 64대, 수륙량육전차 13대, 함선 19척, 포 수십문(그중 로획 18문), 자동차 64대를 파괴하고 ‘비29’중폭격기 5대를 포함한 26대의 적비행기를 쏴 떨구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를 통하여 천재적인 군사전략가이시며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신 최고사령관 김일성 동지의 탁월한 전략전술과 령군술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또한 이 전투는 수령의 두리에 철석같이 뭉친 인민군용사들과 인민들의 불패 위력을 시위하였다.〉
북한의 억지와 달리 유엔군은 한 명의 사상자 없이 인천항을 접수했고, 상륙 첫날 전투에서 미군 사망자는 20명에 불과했다. 무방비나 다름없었다. 《뉴욕타임스》 기자로 한국전쟁을 다룬 《콜디스트 윈터》의 저자인 고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은 생전 “계획이 치밀하고 노련한 면도 있었고, 전쟁의 신이 인민군에게 김일성이라는 부주의한 지휘관을 내려준 덕도 있었다”고 평할 정도였다.
신천 대학살
▲북한의 대표적인 반미(反美) 계급 교양 학습장인 신천박물관(황남 신천)에서 강사가 참관객들에게 전시 자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북한은 신천 사건을 “미군이 저지른 학살”이라고 주장하며 반미교육과 계급교양의 구심체로 삼고 있다. 북한 김정은은 2015년 11월 말 신천박물관을 찾아 “조성된 정세와 혁명발전의 요구에 맞게 우리 군대와 인민들 속에서 반제반미교양, 계급교양을 더욱 강화해 천만 군민을 반미대결전으로 힘 있게 불러일으키기 위해 찾아왔다”고 말했다.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의 일시적 후퇴시기 황해남도 신천군에 기어든 미제승냥이 놈들이 우리 인민들에게 감행한 대학살만행사건. 조선인민의 철천지원쑤 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도발한 첫날부터 전쟁력사상 류례없는 가장 야만적인 전쟁방법을 다 적용하였으며 특히 우리의 일시적 후퇴시기에는 천인공노할 대중적 학살만행을 전국도처에서 감행하였다. 놈들은 신천군내에서만 하여도 50여일 동안의 강점기간에 군내 전체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000여명을 가장 잔인하고 야수적인 방법으로 학살하였다. 국적 인민들은 학살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김일성 장군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혁명적 지조를 굳게 지켜 용감히 투쟁하였다.〉
신천 학살 사건은 1950년 10~12월 사이 북한 황해도 신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을 말한다. 김일성대 도서관에는 1960년대 발간한 신천 학살 사건 재판기록이 있다. 북한이 신천대학살을 대국민 선전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전에 발행됐다. 여기엔 신천에서 인민들을 학살하고 도망쳤다가 전쟁 와중에 간첩으로 다시 신천에 잠입했다 체포됐다는 전직 치안대원의 진술이 담겼는데, 미군의 악행이라고 할 만한 자백이 전혀 실려 있지 않다.(탈북자 출신 기자 증언) 또 한화룡 백석대 기독교학부 교수가 펴낸 《전쟁의 그늘-1950, 황해도 신천 학살 사건의 진실》에 따르면 신천 학살은 전쟁이라는 비정상적인 시기에 좌우익이 갈라서 서로 죽이고, 보복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시발은 인민군이었다.
백 교수의 이야기다.
“북한은 1950년 10월 17일 미군이 신천에 들어왔고, 다음날인 18일부터 여러 장소에서 학살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북한의 주장은 당시 미군의 행보와 각종 전사자료, 현지 월남자, 탈북자 등의 증언 등을 통해 완전히 허구임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전사와 월남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18일 밤 10시경에 미군을 태운 트럭 한 대가 신천에 처음 나타났고, 다음날 오전(19일)에 1개 정찰 소대가 트럭을 타고 들어왔습니다. 그 직후 미군 탱크 3~4대와 보병들이 신천을 통과해서 지나갔습니다. 따라서 북한이 미군이 학살을 시작했다는 17~18일에는 미군이 신천에 있지 않았습니다.”
백 교수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바뀌자 인민군과 공산당원들이 후퇴하면서 우익 인사들을 체포하고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라며 “신천, 안악, 은율 등지의 내무서에서 인민군에 의해 수많은 우익 인사와 가족이 처형당했다”고 했다.
이순신과 정약용
북한은 김일성 유일 영도체제를 뒷받침하는 주체사상이 통치이념으로 채택된 시점인 1967년부터 김일성을 제외한 누구도 명장이나 영웅으로 부각하지 않았다.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충효인의와 애국애민 정신으로 일관한 민족사의 대표적 위인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마찬가지다.
〈리순신 장군은 임진조국전쟁때에 거북선을 만들고 왜적을 바다에서 물리치는데 공훈을 세운 애국명장이다. 그는 뛰여난 전략전술과 빛나는 승리로 하여 중세 해군전쟁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세계적 명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그는 량반지배계급출신의 지휘관으로서 그의 애국심은 국왕과 봉건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기초한 것이였다. 그의 념원은 왜적의 침략을 쳐 물리치고 량반지배계급의 통치질서를 바로 세우는데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왜란 당시 나라를 잘 지켜 싸운 것은 맞지만 양반·지주 계급이었고 또 무관이었으므로 어디까지나 인민이 아닌 봉건왕권에 충성해 지배계층을 위해 싸웠다는 것이다.
깎아내린 건 다산 정약용도 마찬가지다.
〈봉건 말기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 정약용은 《전론》에서 그가 제의한 대책은 봉건적 농본사상에 기초하여 대토지소유자들에 의한 토지의 겸병과 가혹한 착취를 다소 조절함으로써 봉건국가의 리익, 전체로서의 지배계급의 리익을 더 잘 보호하자는 것이였다. 즉 그가 내놓은 《전론》에서는 량반관리들은 여전히 후한 봉급을 받고 심부름꾼을 부리면서 호화롭게 살게 되어 있다. 그는 원래 노비문제와 같이 봉건 통치계급의 리익에 직접 관련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사소한 변경마저도 반대하는 보수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그가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에서 제기한 정치적 개혁안들은 봉건유교정치관에 기초하여 문란해진 봉건통치체계를 정리하고 봉건제도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산의 저술과 그 사상의 요체는 ‘개혁(改革)’이다. 그가 살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은 조선 봉건사회의 해체기(解體期)로서 누적된 봉건적인 병폐가 도처에 드러나 있었다. 이러한 총체적 위기의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고 바로 세우는 길은 개혁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산은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경세유표》는 당시의 법질서를 초월한 국정 일반의 개혁지침서다. 다산은 일찍이 수령을 지낸 아버지를 통해 지방의 실정을 보았으며, 출사해서는 정조의 어명으로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농민들의 고통을 직접 살펴보았다. 특히 전남 강진에서의 오랜 유배생활은 지방관리의 횡포와 무능, 아전들의 농간과 농민들의 억울하고 가엾은 사정을 소상히 체험할 기회를 주었다.
북한에서 다산의 대표적 저서 《목민심서》는 금서 1호다. 박금철·이효순으로 대표되는 갑산파는 1930년대 말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와 연계를 맺었던 인연으로 해방 후 권력 핵심에 진입했고 60년대 들어서는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까지 오르는 등 상당한 지위와 권한을 누렸다. 그러나 이들은 67년 5월 초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반당종파분자’의 오명을 쓰고 숙청돼 버렸다. 당시 갑산파 숙청을 주도했던 인물은 김정일로 알려졌는데 이때 그는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중앙기관담당 책임지도원이었다. 공개된 자료를 보면 이들이 숙청된 사유 가운데 하나는 “민족적인 것을 살리고 주체를 세운다”는 구실 아래 봉건유교사상을 설교했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실례로 다산의 《목민심서》를 간부들의 필독문헌으로 지정, 각급 당조직에 하달한 것이 문제가 됐다.
북한 역사에만 존재하는 인물
사전을 분석하면서 내린 결론은 북한의 역사는 김일성을 빼놓고는 그 어느 것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역사적 현장 중심에는 김일성 혹은 그의 조부모·부모·형제, 사돈의 8촌이 있었다. 3·1운동을 김일성 아버지가 주도했다고 하니, 말 다했다. 북한은 사전에 김일성 주위의 모든 사람을 반일 혁명투사라 명시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은 삭제하면서도 최현, 김책 등 빨치산 1세대로 불리는 이들에 대한 설명은 길게 늘어놓았다. 그나마 이들은 이름이라도 알려졌지, 북한 역사에만 등장하는 우리에겐 생소한 이름의 항일 혁명 투사도 상당했다. 이들을 소개하는 첫 문장은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조직령도하신 영광스러운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여 수령께 끝없이 충직했던 혁명투사”로 모두 같았다. 기사를 통해 공개한 북한의 역사 왜곡 김일성 가계 미화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다.
국정 한국사, 역사 교과서를 오류투성이 친일·박정희 미화 교과서로 낙인 찍고 씨를 말리기 위해 학교로 몰려가 아우성치는 전교조와 일부 단체가 북한의 역사사전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내릴지 궁금하다.⊙
[월간조선 2017년 4월호 / 글=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2019.04.01 주간조선 2551호
■ 김일성 소련 ‘붉은군대’ 이력서 단독입수
29세 김일성의 ‘붉은군대’ 이력서 16개항 경력 관련 질문에 답변
북한 김일성 주석이 만주에서 소련으로 월경한 직후인 1941년 1월 소련 공산당의 심사를 받는 과정에서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력서를 주간조선이 단독 입수했다. 권력을 잡은 후인 1990년대 발표된 김일성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은 있지만 빨치산 활동기에 작성된 김일성의 이력서가 공개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다. 김일성은 이 이력서가 작성된 지 약 1년6개월 후인 1942년 7월 소련 ‘붉은군대’에 입대한 뒤 대위로 전시(戰時) 특별 임관됐다.
B4용지 1.5장 분량인 이 문건의 내용은 김일성의 경력 사항에 대한 질문과 답으로 구성돼 있다. 질문은 소련 공산당 간부가, 답은 김일성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질문은 중국어 간체자, 답은 한문 번체자로 표기돼 있다. 이 문건은 러시아 사회정치사 국가문서보관소(Russian State Archive of Socio-Political History)에 ‘절대비밀’(우리식으로 2급 비밀에 해당·1급은 ‘극비’)로 분류·보관돼 있다가 지난해 말 러시아인 김일성 연구자의 기밀해제 요청이 러시아 정부에 받아들여지면서 공개됐다.
문서보관소에 ‘진지첸(김일성의 중국식 발음을 러시아어로 바꾼 뒤 한글로 표현한 것)의 개인 기록철’이라는 러시아어 제목으로 보관돼 있던 이 문건을 찾아낸 이는 러시아인 학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31). ‘소련 붉은군대와 북한 인민군의 연관성’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중국역사학과장인 아버지 콘스탄틴 째르치즈스키(54)와 함께 러시아 정부에 이 문건의 기밀해제를 요청했고, 러시아 사회정치사 국가문서보관소로부터 이 문건의 열람과 복사를 승인받았다. 그는 최근 주간조선에 러시아 사회정치사 국가 문서보관소의 직인이 찍힌 이 문서 사본과 원본 촬영 자료 등을 건넸다.
이 문건을 검토한 국내 김일성 연구자들은 “김일성이 남긴 중국어, 한자 문건이 많지 않아 필적 대조가 쉽지 않지만 문답 형식과 내용으로 봐서 김일성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날조, 과장된 북한의 기록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김일성 일대기 연구에 귀중한 1차 자료”라고 말했다.
째르치즈스키씨가 제보한 문건에는 김일성의 이력서 외에 이 이력서를 바탕으로 소련 공산당 간부들이 김일성을 심사한 결과를 담은 문건도 포함돼 있다.
한자로 ‘영도(領導) 인원(人員)의 이력표’, 러시아어로 ‘진 에르첸’(‘영도 인원’은 간부를 뜻함, 진 에르첸은 진지첸을 잘못 쓴 것)이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문건은 1번부터 16번까지의 문답으로 구성돼 있는데 질문은 푸른색 펜으로, 답은 연필로 보이는 필기구로 작성돼 있다. 작성 일자는 러시아어로 ‘1941년 1월’이라고 표기돼 있다. 이때 김일성의 나이는 29세였다.
□ 조사표(한국어 번역)
영도 인원의 이력표 진(김) 에르첸
1 성명 김일성
2 탄생지 조선 평양
3 민족 고려
4 교육 수준: 어디, 언제 교육을 받았나 중국 동북 지린성(吉林省) 지린시 유웬(毓文)중학교 퇴학
5 가족이 하는 일, 현재 어디 있나? 없음
6 1925~1927년 대혁명 때 어디서 일하고 있었나? (조직과 인명을 자세히 쓰세요) 없음
7 언제 어디 어느 군대에 복무했나? 사령관은 누구였나? 빨치산 부대에 입대하기 전 1932년 봄에 중국공산당 동만주 특별위원회 동찰롱(童長榮)의 지시에 따라 구국군(왕덕림 王德林)에 입대하였고 선전가로 일하였다.
8 언제 어디 어느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나? 어느 조직에 입당했나? 보증인은 누구인가? 1931년 펑톈성 안투(安圖) 중국공산당 조직에 입당하였다. 당 사업을 하러 파견을 신청하였고, 중국공산당 동만주 안투 조직에 가입하였다. 보증인은 이청산(李靑山)이다.
9 당신은 일본, 만주국 또는 국민당 당국으로부터 체포나 탄압을 받았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자유를 다시 얻었나? 1929년에 국민당으로부터 지린시에서 체포당하였다. 지린에 5개월 동안 수감되었는데 증거가 없고 보증인들이 있어 석방되었다.
10 당신을 당 사업과 빨치산 활동을 할 목적으로 만주로 파견한 자는 누구인가? 언제 파견했나? 연합군에서 얼마 정도 시간을 보냈나? 당신의 업무는 무엇이었나? 1932년에 중국 공산당 동만주 특별위원회는 나를 빨치산 부대에 파견하였다. 현재까지 나는 왕칭(汪清) 항일 빨치산 대대의 정치위원에 이어 제3연대의 참모장, 정치위원 제6사 사장, 제1연합군 제2방면군을 지휘했다.
11 당신은 실수, 동요를 한 적이 있는가? 당으로부터 징벌을 받았는가? 누구로부터 언제 왜 받았는가? 없음
12 당신은 다른 정당의 당원 또는 어느 종파의 일원이 아니었는가? 없음
13 누가 그리고 언제 당신을 당 사업을 위하여 선택하였나? 군대 내 당 사업을 했다. 제1연합군 정치위원은 내가 당 위원회에 참가하고 당 사업을 할 것이라고 결정했다.
14 당신이 하고 있는 당 사업은 현재에 어떻게 평가하나?
15 이미 결혼했으면 배우자에 대한 정보를 쓰라. 부인은 조선 사람이다. 빨치산 부대에서 재봉사로 일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당원이다.
16 상기에 필요한 질문 추가하라.
코간 동지의 말씀에 따르면, 본 조사표는 1941년 1월에 작성되었습니다.
민족은 ‘고려’, 부인은 ‘빨치산 부대 재봉사’
문건에 기재된 1번부터 5번까지의 문답은 기본적인 인적사항이다. ‘성명/ 김일성(金日成), 탄생지/ 조선 평양, 민족/ 고려(高麗), 학력/ 중국 동북 지린성 지린시 유웬(毓文)중학교 퇴학, 가족/ 없다’ 등으로 적혀 있다. 인적사항의 일종인 배우자 관련 질문은 15번에 나오는데 김일성은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부인은 조선 사람이고, 빨치산 부대에 재봉사로 일하고 있으며, 중국공산당 당원’이라고 기재했다. 여기서 ‘부인’은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인 김정숙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건을 검토한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는 “당시 빨치산 부대에서 바느질을 하고 밥을 하던 인물 정도로 보는 것이 맞다”고 했다.
이 문건의 내용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할 때 ‘보증인’이라고 밝힌 이청산(李靑山)이라는 인물의 존재다.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고, 어느 조직에 입당했으며, 보증인이 누군지’를 묻는 8번 항목에서 김일성은 ‘1931년 펑톈성 안투(安圖) 중국공산당 조직에 입당했고, 당 사업을 하러 파견을 신청했으며, 중국공산당 동만주 안투 조직에 가입했고, 보증인은 이청산이다’라고 답했다.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할 때 보증을 선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알려진 적이 없다. 북한은 초대 주석의 무결성을 입증하기 위해 김일성이 누군가에게 추천받았다거나 상위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숨겨왔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입당 후 조선노동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문건대로라면 이청산이라는 인물이 김일성을 공산당에 최초로 가입시킨 인물이 된다. 이에 대해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전 서울대 교수)은 “이 자료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북한의 공식 전기에 언급되지 않은 중공당 가입과 소련 측 검토를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이 ‘1929년 중국 지린시에서 국민당군에 체포돼 5개월간 감금당했다가 풀려났다’는 것도 이 문건을 통해 새롭게 확인된 사실이다. 김일성이 1929년 무렵 수감됐었다는 사실은 그간 알려져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에 의해 체포돼 얼마나 수감됐었는지가 불분명했다. 김일성 공식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그가 1929년, 1930년 5월, 1931년 봄 등 수차례 체포됐었다고 밝혀왔다.
김일성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서 빨치산 활동을 했는지도 이 문건에서 새롭게 드러난다. ‘당 사업과 빨치산 활동 목적으로 만주로 (당신을) 파견한 자가 누군지’를 묻는 10번 항목에서 김일성은 ‘1932년 중국공산당 동만주 특별위원회가 나를 빨치산 부대에 파견했고, 왕칭(汪淸) 항일 빨치산 대대의 정치위원에 이어 제3연대 참모장, 제6사 사장, 제2방면군에서 지휘를 맡았다’고 답한다.
특히 김일성이 왕칭 항일 빨치산 대대에 파견되기 전에 ‘왕덕림(王德林) 부대 밑에서 일했다’고 스스로 밝힌 것도 주목된다. 7번 항목에서 김일성은 ‘빨치산 부대에 입대하기 전인 1932년 봄 중국공산당 동만주 특별위원회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왕덕림의 구국군에 입대했고 선전가로 일했다’고 밝힌다. 이 문건 발굴자인 째르치즈스키씨는 “구국군은 당시에 중국공산당이 아니라 국민당과 더 가까웠다. 그래서 김일성은 이 사실을 숨기고 싶어했고 자신이 구국군에서 활동했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북한은 이 시기 김일성이 조선인 부대를 이끌며 독립적으로 항일투쟁을 했다고 선전해왔는데 이 조선인 부대가 왕덕림 부대 휘하에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만주에서 활동한 중국인 군 간부’ 정도로 알려진 왕덕림은 1938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 김일성(왼쪽 두 번째)이 허가이와 함께 소련 측 안드레이 로마넨코, 테렌티 스티코프와 의논하는 모습.
보천보전투 경력은 언급 없어
북한이 선전해온 1937년 보천보전투 경력이 이 이력서에는 언급돼 있지 않다는 점도 흥미롭다. 북한은 보천보전투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의 대표 사례로 홍보해왔는데 김일성은 이 문건 어디에서도 빨치산 활동과 관련된 주요 경력을 묻는 질문에 보천보전투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신주백 한림대 연구교수는 “왕칭 대대 6사 사장으로 있었던 김일성과 보천보전투를 지휘한 김일성은 같은 인물로 보인다”고 했다.
이 이력서의 답 부분을 김일성이 직접 작성했는지에 대해 이 문건을 검토한 국내 김일성 연구자들 대부분은 “자필일 가능성이 높다”고 답했다. 김일성 연구 권위자인 기광서 조선대 교수는 “정확한 필적은 필적 감정가가 대조해 봐야겠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김일성 주석 본인의 자필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도 “첫눈에 김일성의 필체로 보인다”며 “오른쪽으로 눕혀쓰는 특유의 필체가 젊었을 때도 그대로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고 말했다.
소련공산당 간부들이 이 이력서를 검토한 후 작성한 의견서도 눈길을 끈다. 러시아어로 작성된 이 의견서는 B4용지 1장 정도 분량으로, 작성 일자는 1941년 3월 14일로 기재돼 있다. 문건에는 빌코프, 쥬진, 플르셰브스키, 코간이라는 4명의 분석가 서명이 있다. 이들은 ‘참고서’라는 제목의 의견서 말미에 ‘결론: 1. 진지첸을 만주 빨치산 부대에 정치 일꾼으로 남도록 한다. 2. 1929년 진지첸의 체포 관련 사유를 알아봐야 한다. 무슨 까닭으로 체포되었는지, 누구의 요구 혹은 누구의 보증으로 석방되었는지 (알아봐야 한다)’라고 적었다.
이 문건을 발굴한 째르치즈스키씨는 이들 4명 모두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국제공산당 서기장의 직속 소련 간부들”이라고 주장했다. 디미트로프 서기장은 사회주의 불가리아의 초대 지도자를 지낸, 당시 국제공산당 서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이다. 반면 기광서 조선대 교수는 “이 문건에 디미트로프 서기장이 관여했다는 근거는 미약해 보인다”고 말했다.
▲ 러시아 사회정치사 국가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조사표’의 원본을 촬영한 것. photo 콘스탄틴 째르치즈스키
소련 간부들 “체포 사유 알아봐야”
이 문건의 성격에 대해서도 째르치즈스키씨는 “1941년 김일성이 국제공산당(코민테른)에 들어올 때 검증을 받았음을 의미하는 자료”라고 주장한 반면 기광서 교수는 “국제공산당은 입당에 있어 증명서를 발급한다든지 특별한 절차를 요하는 기구가 아니기 때문에 자국 영토에 들어온 김일성이 어떤 인물인지를 소련 공산당이 검토하는 과정에서 작성한 문건 정도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에 발굴된 김일성 이력서의 가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김일성 연구의 논란을 바로잡을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만주 독립운동사 연구의 권위자인 신주백 한림대 연구교수는 “공산당 간부의 검토에 거짓 내용을 적었다가 적발될 경우 엄청난 곤경에 처하기 때문에 이 문건에 기술된 김일성 본인의 이력은 사실이라고 봐야 한다”며 “대단한 가치가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기광서 조선대 교수도 “전반적으로 김일성과 관련해 알려진 사실과 크게 배치되거나 기존 연구를 뒤엎을 정도의 사실이 담겨 있지는 않다”면서도 “그간 학설이 분분했던 점들에 관해 논란을 정리할 수 있다는 면에서 의미를 갖는 자료”라고 말했다.
그간 국내외 김일성 연구자들은 이른바 ‘가짜 김일성’ 논쟁을 벌여왔다. 2000년 작고한 이명영 성균관대 교수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투쟁 경력은 허구이며, 김일성과 항일 빨치산 운동을 한 김일성은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해왔다. 이에 따르면 만주의 전설적인 무장투사였던 김일성은 1937년 이미 전사했고, 이후 김일선(金一善)이라는 항일 무장대원도 따로 존재했는데, 북한이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 경력을 포장하기 위해 이들의 경력을 모두 김일성 1인에게 몰아넣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 이력서의 내용대로라면 김일성이 1930년대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으며 빨치산 활동을 벌인 것은 사실로 보인다. ‘김일성 신화의 진실’ 저자인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는 “문건에 기술한 김일성의 활동 경력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3명의 김일성이 존재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 ‘조사표’를 바탕으로 소련 공산당 간부들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참고서’ 원본.
참고서 (한국어 번역)
진지첸, 조선인, 조선 출신, 헤이조(平壤)시, 중학교 퇴학, 지린시 중국 중학교에서 공부했음. 그의 아내가 조선인인데 빨치산 부대 재봉사로 일하고 있다.
1941년에 작성한 이력서에 따라 1929년에 진지첸은 중국 당국으로부터 체포당하였고, 5개월 동안 수감돼 여러 사람의 요구 및 보증에 따라 석방되었다.
펑톈성 안투(安圖)군에서 리칭상(李青山)의 추천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리칭상은 우리에게 모르는 사람이다.)
1932년 봄 이전에 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만주에 잘 알려져 있고 현재 사망한 왕덕림(王德林) 장군의 영도 밑에 있었던 구국군(救國軍) 부대에 입대하였고 거기에서 선전가로 일하였다.
1932년 동만주 특별 당위원회가 만주의 중국 빨치산 부대에 보냈다. 이때부터 제2군 왕칭(汪清) 빨치산 부대 정치위원, 제3연대의 참모장 및 정치위원, 다음에 제1통합만주항일군 제2방면군 지휘의 임무를 맡았다.
진지첸이 자신의 이력서에 쓴 바와 같이 그는 아무 정치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고, 당적 징벌도 받지 않았다.
결론:
1. 진지첸을 만주 빨치산 부대에 정치 일꾼으로 남도록 한다.
2. 1929년 진지첸의 체포 관련 사유를 알아봐야 함. 무슨 까닭으로 체포되었는지, 누구의 요구 혹은 누구의 보증으로 석방되었는지 (알아봐야 한다).
(서명) / 빌코프 / (서명) / 쥬진 / (서명) / 플르셰브스키 / (서명) / 코간 /
1941년 3월 14일 2개의 복사본은 인쇄됨.
□ ‘김일성 이력서’ 발굴 학자가 재구성한 김일성 약력
▲ photo 한국학중앙연구원
1912년 4월 식민지 조선 평양 출생(본명 김성주)
1919년경 중국 지린성에 이민
1927년경 유웬중학교 입학
1929년 5월 조선공산청년회 사건으로 체포, 5개월 동안 수감
1931년 중국공산당 입당
1932년 중국국민구국군 입대
1932년 동북항일연합군 입대. 직위는 왕칭 항일 빨치산 대대 정치위원.
이후 제3연대 참모장, 정치위원, 제6사 사장.
1937년 6월 보천보 습격 지휘(제6사 사장 때로 추정)
1940년 12월~1941년 1월 소련으로 탈출 1942년 7월 소련 ‘노동자-농민의 붉은군대’에 입대. 계급은 육군 대위.
직위는 극동전선 제88독립보병여단 제1독립대대 대대장 1945년 9월 예멜리얀 푸가쵸프호를 타고 조선 원산에 상륙
1945년 10월 14일 평양 군중집회에서 주민들 앞에 최초로 등장 1945년 12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책임비서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년 8월 북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
1949년 6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0년 7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1966년 10월 조선노동당 총비서
1972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1974년 2월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공식 임명
1994년 7월 사망
“김일성이 이끌던 조선인 단독 부대는 없었다”
‘김일성 이력서’ 발굴한 러시아인 학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김일성 이력서’를 발굴해 주간조선에 제보한 사람은 러시아인 학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31·한국명 이휘성)다.
1988년 러시아 모스크바 출생인 그는 아버지 콘스탄틴 째르치즈스키(54)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중국역사학과 교수와 함께 러시아 당국에 이 문건의 기밀해제를 요청했고,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면서 문건이 공개됐다. 최근 그는 “김일성이 만주를 탈출해 1941년 소련 측으로부터 검증을 받은 기록을 찾았다”며 이 문건을 주간조선에 제보해왔다.
▲지난 3월 23일과 25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주간조선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8년 전 한국에 왔다는 그는 한국어가 유창했다.
그는 모국어인 러시아어 외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지난해 ‘김일성 이전의 북한’(한울)이라는 제목의 한글 연구서를 내기도 했다.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현재 국민대 유라시아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그는 이번에 발굴한 ‘김일성 이력서’를 바탕으로 쓴 논문을 올 6월 계명대 영문 학술지 ‘Acta Koreana’를 통해 발표할 예정이다.
- 문건을 어떻게 발견했나.
“처음에는 인터넷으로 우연히 찾아냈다. 1945년까지 김일성은 중국식 발음인 ‘진지첸’으로 불렸다. 그래서 진지첸이라는 이름을 키릴문자로 검색했는데, 김일성에 대한 기록문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모스크바에 계신 아버지에게 부탁을 했고, 아버지가 기록원을 방문해 직접 복사를 했다. 키릴문자로 중국 이름 진지첸이라고 쓰여 있기 때문에 기존 연구자들이 잘 몰라서 밝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 이력서의 글씨가 김일성 자필인가.
“김일성이 직접 썼다고 100%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김일성이 말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내 느낌으로는 김일성 자필일 가능성이 무척 높다. 중국어로 된 문과 답의 글씨체가 서로 다른 것이 보이지 않나. 공산당 간부가 중국어로 물어보고, 김일성이 답을 한 것이다.(원문에는 문답이 서로 다른 색깔의 필기구로 쓰여 있다.)”
- 김일성을 조사한 조사반원이 답변을 대신 작성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만일 소련 간부가 썼으면 처음부터 중국어가 아니라 러시아어로 썼을 것이다. 김일성 자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이 문건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
“김일성은 소련의 ‘붉은군대’에 입대하기 전에 검증을 받았다. 신원확인 절차라고 볼 수도 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에 관해 지나치게 왜곡해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소련도, 북한도 왜곡하지 않은 아주 객관적으로 쓰인 자료다. 이 자료를 보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 이 자료가 지금까지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것인지 확신하나.
“절대 공개되지 않은 자료다. 이것은 아버지와 내가 보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 요청으로 기밀해제된 자료이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소련이 임명한 사람이고 스탈린이 뽑은 사람이다. 이 자료를 보면 어떻게 소련이 김일성을 자신들의 사람으로 선발했는지 알 수 있다.”
- 이력서가 작성된 1941년 1월이면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던 시기다.
“맞다. 당시는 소련이 아직 나치 독일의 공격을 받지 않았을 때다. 하지만 만주에서 항일운동은 점점 어려워지던 시기였고, 김일성은 소련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은 소련 영토에서 이 검증을 받았고 신분이 확인된 뒤 붉은군대 장교가 됐다. 그는 전시특별임관 형식으로 대위로 임관했다. 그 뒤 소련군 장교로 귀국해 북한 수령이 됐고 그때부터 김일성 시대가 개막됐다.”
▲ 표도르 째르치즈스키의 아버지인 콘스탄틴 째르치즈스키 모스크바국립대 중국역사학과 교수.
- 이 자료를 통해 밝혀진 새로운 사실은 무엇인가.
“우선 재미있는 점은 김일성이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국제공산당 서기장의 직속 중간 간부 네 명으로부터 검증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 간부들은 고위급 간부는 아니고 중급 간부라고 볼 수 있지만 서기장 직속의 간부들이다. 나는 불가리아어로 작성된 디미트로프의 일기를 찾아서 이 간부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 일기에는 만주 빨치산에 관한 언급도 일부 있다. 디미트로프는 일기에서 만주 빨치산을 지휘하는 간부들의 상태를 ‘극히 나쁘다’고 평가했다.”
- 다른 새로운 사실이 뭐가 있나.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할 때 추천을 한 ‘이청산’의 존재가 눈에 띈다. 이 사람이 누군지 열심히 찾았지만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재미있는 건 김일성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에 ‘이청산이라는 노(老)혁명가와 만났다’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이청산의 추천을 받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는 말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세기와 더불어’는 영어, 러시아어 등으로 번역됐는데 거기서 이청산 한자 발음을 보면 중국식으로 번역하지 않고 한국식으로 ‘이청산’이라고 번역했다. 이로 미루어보면 이청산은 조선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다른 자료들을 통해 당시 이청산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한 ‘변학규’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변학규가 이 이청산과 동일 인물인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 김일성의 빨치산 이력과 관련해 또 다른 흥미로운 대목이 있나.
“김일성이 왕덕림(王德林)의 구국군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구국군은 당시에 중국공산당이 아니라 국민당과 더 가까웠다. 그래서 김일성은 나중에 이 사실을 숨기고 싶어서 자신이 구국군에서 활동했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문건에서는 솔직하게 기술하고 있다. 당시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은 복잡한 관계였다. 적대적이긴 했지만 같은 중국인이라서 나중에 항일투쟁을 같이 했다. 만주국 설립 이후에는 통일전선을 만들기도 한, 약간 복잡한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1929년부터 1932년까지 김일성의 행적이 베일에 싸여 있었는데 이 문건으로 상당히 풀린다.”
- 김일성 공식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와 배치되는 대목들도 있나.
“‘세기와 더불어’에는 김일성을 위인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사실과 다르게 기술한 점이 너무 많다. 회고록은 김일성을 ‘단독으로 행동하는 사령관’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가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조선인 단독 부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문건에 따르면 김일성은 맨 처음 중국공산당 동만주 특별위원회의 명령에 따라서 왕덕림의 구국군에 갔다. 김일성은 특별위 밑에 있었던 ‘보통 사람’이었다. 당시 두각을 나타낸 건 맞지만 북한에서 말하는 것처럼 엄청나게 훌륭한 군 지휘자는 아니었다.”
- 다른 주목할 만한 점은 어떤 것인가.
“김일성이 문건에 자신을 ‘조선인’이라고 쓰지 않고 ‘고려인’이라고 썼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나중에 그가 한국에 고려연방공화국 통일 제안을 한 적도 있지 않은가. 29세이던 이때부터 이미 고려라는 국명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 이력서 작성 당시 중국공산당 당원인 김정숙과 결혼을 한 상태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국민당군에 체포돼 감옥살이를 5개월간 했다는 사실도 새롭다.”
배용진 기자 max@chosun.com
■ 폭군 김일성 가계도와 대를 잇는 잔인성
■ 김정은 生母 고영희
김정은 生母 고영희 동생 고영숙은 제네바서 김정일 비자금 관리하다 1998년 남편과 함께 美망명
▲제주 고씨 종문회총본부가 보관하고 있는 제주 고씨 족보. 고경택과 고영옥의 이름이 올라 있다. /오재용 기자
북한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는 1952년 6월 26일 일본 오사카(大阪)시 이쿠노에 위치한 이쿠노 코리아타운 부근의 쓰루하시(鶴橋)에서 태어났다. 일본 공문서 외국인 등록 원표에 기재된 고영희의 출생 당시 이름은 고희훈(高姬勳)이며, 이후 북한에서 고영자라는 이름을 쓰다가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고영희로 개명했다. 북한은 김정은의 모계가 제주도 출신임을 내세워 '한라산 줄기'를 주장할 가능성이 있다. 제주도는 북한이 '4·3 인민봉기'로 규정한 4·3 사건의 무대이기에 고영희 가문을 '한라산 줄기'라는 새로운 혁명 혈통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백두 혈통과 한라산 줄기를 결합한 백두-한라 혁명 혈통을 만드는 것이다. 고경택은 1929년 제주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일본육군성 '히로타 군복 공장'에서 일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고경택은 일본에서 아들 고상훈(高相勳·1951년생·북한에서는 고동훈으로 불렸음), 딸 고영희, 고영숙을 낳았다. 고경택은 1962년 10월 21일 가족을 데리고 제99차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들어갔다. 고영희는 북송 이후 1971년 만수대예술단에서 무용가로 활동하던 중 김정일의 눈에 띄어 동거 생활을 시작했으며, 정철·정은·여정 3남매를 낳았다. 2002년부터 북한에서 '평양의 어머니'로 불리며 우상화되다가 2004년 5월 24일 프랑스에서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고영희의 오빠 고동훈은 1990년대 해외에서 북한 외교관으로 활동했고, 동생 고영숙은 제네바에서 김정일의 비자금을 관리하다가 1998년 5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제주=뉴시스】강재남 기자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봉개동 명도암 일대에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외조부 고경택(高京澤)의 허총(虛塚)과 외증조부 고영옥(高永玉)의 묘가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관심을 끌고 있다. 사진은 김정은 외가 '탐라 고씨 신성악파 흥상공계(興祥公系) 가족묘지' 모습이다.
■ 2015.12.08 고영숙, 미국서 세탁소 …‘평양 금수저’ 왜 북한 떠나나
지난 주 서울중앙지법엔 특이한 소송이 제기됐습니다. 안찬일 박사를 비롯한 탈북인사 3명으로부터 명예를 훼손당했다면서 미국에 사는 중년 부부가 6000만원을 배상하라고 요구한 건데요. 관심을 끈 건 원고인 이들 부부가 김정은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의 이모인 고영숙과 그의 남편 이강 씨란 점입니다.
“비밀 많이 알아 겁나” 17년 전 망명
최근 탈북자 상대 소송으로 눈길
김정은 형 김정남, 해외 체류·은둔
작은할아버지 김평일은 유럽 머물러
고씨 부부는 고소장에서 “김정일 비자금으로 우리가 도박을 하거나 성형수술을 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주장하는데요. 안 박사 등 피고 측은 “평양 로열패밀리로 호의호식 하던 고씨가 김정은 독재 비판에 재갈을 물리려 한다”고 발끈하고 있죠.
이번 사태를 계기로 탈북·망명하거나 해외에 은둔·체류 중인 김정은 가족 및 친인척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고영숙 씨는 김정은 제1위원장의 생모인 고영희(2004년 유선암으로 사망)의 동생인데요. 김정은이 스위스 조기 유학을 할 때 후견 역할도 했던 고영숙은 1998년 남편 이강과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김정일 정권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아 겁난다”는 이유였다는군요.
미국은 핵심 탈북 인사를 받아들인 후 중앙정보국(CIA)의 철저한 심문으로 고급 정보를 뽑아냅니다. 대북 첩보위성이나 감청으로 수집할 수 없는 김정일·김정은 관련 성향이나 내밀한 속사정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게 정보당국 관계자의 귀띔입니다. 북한의 보복이나 신원 노출을 막기 위해 추적이 어려운 ‘증인보호 프로그램(Witness Protection Program)도 가동합니다.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게 성형수술을 하는 경우도 흔하다는군요. 우리 정보기관이나 언론이 이들을 쫓기 어려운 것도 이런 이유때문입니다.
그런데 고영숙 씨의 경우 이번 소송 제기로 보호막을 벗어던진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남편 이씨가 소송대리인인 강용석 변호사를 찾아 서울로 오는 바람에 그와 부인의 행적이 우리 정보당국은 물론 서방 언론에 노출됐죠. 대북 소식통은 “고영숙 씨는 현재 미국 한인타운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것으로 안다”고 전합니다. 북한의 중동 미사일 수출 극비정보를 갖고 97년 망명한 이집트 주재 장승길 전 북한 대사도 공훈배우 출신인 부인 최모 씨와 미국에서 수퍼마켓을 한다는데요. 아무래도 한인 상대가 아니면 사업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군요.
김정은 제1위원장의 입장도 곤란해졌습니다. 대북 비판 발언을 쏟아내던 논객들에게 제동을 건 것은 고맙겠지만, 탈북·망명으로 얼룩진 가족 내력이 드러난 때문이죠.
사실 김정은 정권 들어 탈북자 단속이 강화되자 북한 주민 사이에선 “백두혈통(김정은 가계를 지칭)도 탈북 가족 아니냐”라는 볼멘소리가 나왔다고 합니다. 고씨 부부 외에도 이른바 ‘평양 금수저’ 계층이 국제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망명 사건을 일으킨 걸 지칭하는거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여인인 성혜림(2002년 사망)의 경우 언니 혜랑씨와 딸 남옥 씨 부부가 프랑스로, 아들 일남(탈북 후 ‘이한영’으로 개명)씨는 한국으로 망명했죠.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 씨도 후계경쟁에서 밀려난 뒤 마카오 등지에서 체류하다 2013년 이후 은둔중입니다.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김평일 체코 주재 북한대사도 88년 평양을 떠난 뒤 서방 대사로 전전하 고 있습니다.
오는 12일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한 지 2년째 되는 날입니다. 지난 4월 현영철 인민무력부장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지난달엔 핵심실세 최용해 노동당 비서도 몰락했죠. 곧 집권 5년차를 맞는 김정은 체제에서 평양 로열패밀리들에 눈길이 쏠리는 건 이런 상황도 한 몫합니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 2016.11.23 김일성의 숨겨진 아들 김현, 김성은으로 개명하고 김정은에 충성 맹세
▲ 김정은 가계도(나이는 2013년 기준). 김일성의 숨겨진 아들로 알려진 김현은 최근 '김성은'으로 개명하고 김정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김일성의 숨겨진 아들이자 김정은의 숙부인 김현(46)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던 김현이 최근 김정은에게 충성을 다짐하면서 이름마저 김성은으로 개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1월 23일 평양의 한 고위 소식통은 자유북한방송과의 통화에서 "최근 김정은이 고모부 장성택을 숙청하고 고모인 김경희를 감금하는 등 패륜과 탄압을 일삼고 있어 김정일의 이복동생들이 매우 불안에 떨고 있다"고 전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김일성의 숨겨진 아들로 전해진 김현이 최근 김정은에게 ‘원수님을 보위하는 성새가 되고 방패가 되겠다’는 맹세의 글을 올렸다고 한다. 그가 이름을 김성은(金城恩)으로 바꾼 것은 성새가 된다는 의미에서 '성'자와 김정은의 '은'자를 딴 것이라고 소식통은 설명했다.
문제의 김현(김성은)은 1971년생으로 김일성과 그의 안마를 전담했던 제갈 성을 가진 여성 사이에 태어나 1988년~1991년까지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장성택의 집에서 살면서 '장현'이라는 이름으로, 1994년부터 평양외국문도서출판사 일본어 번역과 과장을 지냈으며 2000년 김정일이 김현의 외교적 수완과 능력을 인정하면서 다시 김현으로 부르도록 했고, 그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현재 김성은은 북한 외무성 일본 담당 부서에서 근무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소식을 전한 소식통은 "한때 김일성의 아들로 대우받으면서 김현이 최고 존엄에 도전할 수 있는 대상으로 김정일에게 낙인돼 따돌림을 당했고, 심각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지만, 지금은 숙청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김정은에게 충성맹세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더하여 "최근에는 김현의 이복형인 김평일과 김정은의 이복 누나인 김설송도 정치무대에서 한발 물러서 숙청에 대한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한 소식통은 "이런 평양의 흐름과는 정 반대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남한의 대통령 하야운동은 참 대조적이다"는 주장도 폈다.
글 | 김설송 자유북한방송 기자
2016.06.22 황장엽 특종 기사로 유명한 김용삼 기자가 파헤친 김일성의 실체
▲'김일성 신화의 진실' 저자 김용삼씨
"김일성에 대한 연구가 무방비 상태가 된지 오래입니다. 1970년 이후 학자들의 연구가 끊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종북(從北) 세력들이 판을 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가짜 김일성을 추종하는 세력들에게 그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 책을 썼습니다."
지난 17일 강남의 한 식당에서 신간<김일성 신화의 진실>을 내보이며 필자에게 말한 저자이자 미래한국 편집장인 김용삼(58)씨의 제일성(第一聲)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김일성 신화는 그 출발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허위·거짓·조작·날조·가로채기·과장(誇張)으로 뒤범벅 돼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거짓의 숲에 들어가 자료와 증언을 통해 진실을 파헤치는 작업을 한 것이다"고 덧붙였다.
김일성 그는 누구인가?
저자의 말에 의하면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은 11명, 소위 짝퉁들이 날뛰고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이라는 이름의 한자 표기가 '金日成·金一成·金一星·金日星' 등 네 개나 되고, 그의 본명인 김성주도 '金聖柱·金成柱·金誠柱'로 세 개가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갔고, 평양 창덕학교 2년과 독립군이 세운 화성의숙 6개월을 제외하고는 모든 교육을 중국에서 받았다. 그리고, 중국의 국적도 취득했다. 중국에서 배우고 익힌 중국어는 만주 일대에서 마적 질과 공산당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유용한 무기가 됐던 것이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본다.
/<김일성 신화의 진실>의 표지
<1933년 9월 동령현성 전투에 공산유격대의 일원으로 참가하면서 빨치산 생활을 시작한 이 청년은 때로는 김성주로, 때로는 김일성이란 가명으로 활동하며 중국인 직속상관들의 총애를 받았을 것이다. 왜냐면 당시 공산유격대 활동에 종사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문맹이었으니까. 그나마 중학 교육을 받아 중국어와 한문을 읽고 쓸 줄 아는 김일성의 존재는 매우 귀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북한 지역에 공산 위성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내세울 지도자가 필요했다. 평양 주둔 소련군 제25군 사령부는 분위기를 파악해 보니 조선공산당의 지도자 박헌영은 서울에 있었고, 38선 이북 지역에는 믿을 만한 공산당원을 찾기 힘들었다.>
<소련군정은 그의 본명이 김성주였고, 만주 지방에서 항일 빨치산 운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짜 항일 빨치산 운동에 공을 세운 또 다른 '김일성 장군이 있다'는 풍문이 조선 인민들에게 널리 퍼진 가운데 조선 인민들이 해방된 조국에 그 장군이 개선하기를 고대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해방 후 그는 소련군정에 의해 조선인민의 '전설적 항일 투쟁의 영웅'으로 불리던 김일성으로 둔갑했던 것이다.
책에서의 만주 이야기...신기루처럼 사라진 만주국
'하늘과 땅 사이에 새로운 만주가 있다.'
1932년 3월 1일 탄생되어 1945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존재했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만주국 국가의 첫 구절이다. 만주사변 이듬해에 히트를 친 '만주행진곡'의 가사는 이렇다.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우리 목숨 버린다 할지라도 아깝지 않고, 일본의 생명선은 여기에 있으니 9천만 동포와 함께 지켜내자 만주를."
당시 일본 본국 정부는 만주국에서 나는 철광석과 석탄을 이용하여 공업기지화하기 위해 '만주 산업발전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이로 인해 농업지대였던 만주 일대에 세계 최신예 중화학공업시설이 들어서면서 만주는 하루아침에 산업지대로 돌변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은 '만주 산업발전 5개년 계획'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본국 정부 총예산의 3배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퍼부었다. 한국인으로서 나라를 잃고 만주 군에 몸담고 있던 박정희를 비롯한 만주군 출신 리더 그룹들(정일권, 백선엽 등)은 지축을 울리며 진행되는 거대한 산업화의 소용돌이를 체험했다. 그것은 농업국가가 근대화를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산 교육장이었다.
"박정희와 만주군 출신 리더 그룹은 만주국 시절 자신들이 체험한 만주국의 개방, 교류, 통상, 국제화, 중화학공업화라는 발전 패러다임을 고스란히 이 땅에 옮겨 와서 대한민국에 이식시키는 데 성공, 국제사회의 모범국가로 자리매김하는 기회를 창출해냈다."
반면에 김일성은 토벌대에 쫓겨 폐쇄된 공간에 갇혀 몰래 숨어 다니며 양민을 납치하여 돈을 뜯어내고, 식량과 생필품을 약탈하는 마적질, 비적질로 연명했다. 오늘날 북한이 저처럼 폐쇄 은둔형 국가로 전락하여 전 국민을 굶기고 있는 것은 김일성의 만주 체험의 연장이다. 일본의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78)'가 북한을 '유격대 국가'로 정의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와 김일성은 각각 1979년과 1994년에 고인이 됐다. 그것으로 한반도에 새겨진 '만주의 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들과 손자가 대를 이어 '수령'으로 통치하고 있고, 남한에서는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에 이어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됐다."
"아직도 북한은 김일성 체제의 파탄을 수습하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고, 남한은 박정희 체제가 낳은 산업화·근대화의 단물을 빨며 살아가고 있다. 한편에선 박정희 체제의 저항적 테제로 탄생한 '민주화 세력'중 일부가 박정희의 친일 경력을 공격하며, 김일성의 항일(抗日) 무장투쟁을 '민족'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흠모한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진면목이다."
888쪽이나 되는 이 책은 이렇게 마감한다. 저자는 '방대한 자료 작성은 차치(且置)하고 편집과 교정 작업에만 꼬박 1년이 걸렸다'고 했다. 열정과 집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일본에서도 알아본 '황장엽 특종'의 김용삼 기자
"아! 황장엽 씨 특종보도를 하셨던 분 아닙니까?"
/World village(2005년 Vol. 9)의 표지
특종의 위력은 대단했다. 지난 2005년 봄, 일본 도쿄(東京) 역 앞 카페에서 필자의 지인 아사히(朝日)신문의 '마쓰무라 시게오(松村茂雄)' 기자(현 규슈지역 지사장)가 당시 월간조선 편집장이었던 김용삼 씨의 명함을 받자마자 한 말이었다.
'김일성 신화의 진실'을 쓴 저자 김용삼은 현역 언론인 시절인 1997년 2월 13일부터 거의 한 달가량을 황장엽 망명 사건을 특종 보도해 전 세계 언론들이 그의 글 받아쓰기에 열을 올리게 했던 장본인이다. 당시 김용삼 기자는 황장엽 망명 특종으로 뉴욕타임스를 비롯해 뉴스위크, 일본의 NHK와 문예춘추, CNN, BBC 등 전 세계 유명 언론의 인터뷰 공세에 시달리기도 했다.
2005년도 일본 출장은 월간조선의 부록<변화하는 일본 제대로 알아야 극일(克日)이 가능하다>는 특집판 취재를 위해서 갔었다. 그 때도 독도문제로 한일관계가 격랑의 시기였으나 필자 지인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일본인이 한일화합의 의미로 그려준 김용삼씨의 캐리커쳐
그리고, 나고야(名古屋)에서 나고야중부전략연구회 멤버인 '나카네 마시요시(中根政好)' 씨는 "때만 되면 국민감정을 부채질하는 일본의 일부 우경화(右傾化) 정치인들이 문제다"고 하면서 "진실을 외면 또는 왜곡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그렇다. '제대로 안다는 것'과 '진실을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진실이 아닌 가짜가 판을 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진짜가 아무것도 없다면 모든 것은 제로(0), 아무 것도 나올 수 없는 제로입니다...우리 모두 진위 불명입니다. 우리를 지휘하거나 억누르는 자도, 우리를 규합하거나 분리시키는 자도 진위불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유명작가 '제수알도 부팔리노(Gesualdo Bufalino)'의 소설 <그날 밤의 거짓말>(이승수 譯)의 한 대목을 떠올리면서 '진실의 중요성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해봤다.
글 |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 독도 문제와 백두산을 떼어준 매국노 김일성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자국(自國)의 교과서에 표기하는 등 독도 문제로 조용한 때가 없습니다. 독도 문제는 기본적으로 영토 문제입니다. 정상적인 국가는 영토를 침략당하면 자위적 차원에서 반격에 나섭니다. 이는 현실적으로 일본이 독도를 자기들 영토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전쟁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독도 문제와 아울러 일본의 고질적인 교과서 왜곡 문제도 불거지고 있습니다. 일본은 형장으로 끌려갔어야 할 전쟁범죄자 히로히토가 아무런 책임 추궁을 받지 않고, 도리어 그 직위를 유지했기 때문에 과거사에 문제에 대해 자기 모순에 빠진 나라입니다. 어쨌든 저는 일본과의 영토와 과거사 문제는 궁극적으로 ‘국력(國力)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독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우리 역사상 최악의 매국노인 김일성이 떠오릅니다. 김일성은 1962년 6ㆍ25전쟁에 참전한 보답으로 중국과 극비조약을 체결하고 백두산의 절반을 중국에 넘겨버렸습니다. 우리 역사상 영토 자체를 타민족에게 잘라준 매국(賣國) 행위를 한 작자는 김일성이가 처음일 것입니다.
조선 왕조는 중국과 약 300년에 걸친 국경 분쟁을 하면서도 단 한치의 땅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정조 때는 중국과 비문을 세워 우리 땅을 지켰고, 청나라 후반에 중국이 또다시 영토문제를 시비 걸자 오히려 고종 황제는 간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세금을 거두는 등 실효지배로 대응했습니다. 현실적으로 백두산 이북 쪽 영토는 고래로 우리 민족이 살아왔고, 우리가 개척한 땅이기 때문에 청나라도 어쩌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1909년 일제가 간도 땅을 중국에 넘겨주었습니다.
이에 앞서, 993년(성종 12) 거란이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얼마나 전세(戰勢)가 불리했으면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안(案)과 서경 이북을 거란에 떼어주고 강화를 하자는 안을 놓고 갈라졌습니다. 이에 문신(文臣) 서희가 자진해서 국서를 가지고 적진에 가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거란의 소손녕은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고려가 차지한 고구려의 옛 영토를 내 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서희는 “고려는 곧 고구려와 같다. 우리는 그 후손으로 같은 말을 쓰고 있으니 우리가 고구려의 후신”이라고 맞받아치며, 또 한편으로 설득하여 결국 거란군을 철수시켰습니다.
도리어 거란은 돌아가는 길에 여진을 정벌하여 강동 6주를 고려에 내 주었습니다. 당시 송나라와 고려, 거란 등과의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여 거란의 양보를 얻어낸 것입니다. 고려말 공민왕도 원나라에 빼앗겼던 옛 고려 영토를 회복하는 데 힘썼습니다.
이렇게 조상들이 피눈물로 지켜온 우리의 국토를 김일성은 무슨 떡고물 주무르듯 지도에 줄을 죽 그어 하루 아침에 중국에 넘겨 버렸습니다. 백두산은 중국에 넘겨줄 하등의 이유가 없는 명백한 우리 땅이었습니다. 이처럼 매국노 김일성은 백두산 절반을 영영 되찾을 수 없게 해 놓았습니다. 하기야 외세의 힘을 빌려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눈 김일성에게 눈곱만큼의 애국심이나 역사관이 있었다면 그가 국토를 팔아먹는 매국 행위를 이처럼 거침없이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역사관은 중요한 것입니다.
김일성은 6ㆍ25때 전세가 불리해지자 자기가 사지(死地)로 내몰았던 이북의 인민군과 백성을 버리고 자기만 살고자 중국으로 도망갈 계획까지 세워놓았습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선조 임금의 뒤통수까지 쫓아 왔을 때, 선조는 압록강을 넘으려고 했습니다.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치닫는 일본 군대에 얼마나 겁이 났겠습니까. 하지만 신하들이 압록강을 넘는 순간 종묘사직은 사라진다며 결사로 막았습니다. 6ㆍ25때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까지 후퇴했습니다. 낙동강 전선이 불안할 때 미군이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일본으로 건너가라”고 건의했습니다. 이에 이승만은 “나는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발자국도 못 물러선다”고 단호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재직 시 대마도를 우리 영토라고 주장했고, 평화선을 선포한 후 일본의 접근을 차단함으로써 독도를 지켜냈습니다.
백두산을 이(異) 민족에게 잘라 넘긴 김일성의 행태를 보건대 그가 만약 남한의 공산화에 성공했더라면 과연 독도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장담하건대 아마 지금쯤 독도에는 태극기 대신 일장기가 휘날릴 공산이 크다 하겠습니다.
■ 2017.02.07 "김일성은 보천보에 가지도 않았다"
/김명성 기자
"북한이 김일성의 대표적 항일 투쟁으로 선전하는 1937년 6월 4일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 전투 당시 김일성은 압록강을 건너지 않았고 보천보에 없었다."
1980년대부터 중국에서 김일성 부대 관련 연고자 130여 명을 인터뷰한 조선족 작가 유순호(55·사진)씨는 6일 "보천보 전투 당시 김일성 부대에서 기관총 소대장으로 근무한 강위룡의 회고담을 들은 중국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2군 출신들을 1990년대 초반 만나 확인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유씨는 "광복 후 1950년대 초까지 중국 옌볜에서 지낸 강위룡은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에겐 '보천보 전투 때 내가 기관총을 들고 김일성 곁에 딱 붙어 서 있었댔다'고 한마디로 일축했다"고 전했다.
북한이 선전하는 보천보 전투 신화가 거짓이라는 것이다. 북한에 돌아가 평양위수사령관에 임명된 강위룡은 1967년 양강도 혜산에 '보천보전투승리기념관'이 설립됐을 때 현지 관계자들에게 진실을 말했다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에 의해 숙청됐다. 유씨는 "중국 공산당 길림성 당사(黨史) 연구소 비밀문서고에 있는 자료에도 김일성은 보천보에 가지 않았다는 증언들이 기록돼 있다"고 했다.
필명이 청설(靑雪)인 유순호씨는 1980년 희곡 '숲속의 메아리'로 문단에 데뷔했다. 중국의 항일 영웅 조상지를 그린 '비운의 장군'(1998)을 썼고 2002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만주의 파르티잔 허형식'(2009)을 펴내는 등 만주 항일 운동사를 연구해왔다.
유씨가 김일성의 과장·날조된 항일 투쟁 신화를 바로잡기 위해 지난달 '김일성평전 상편'(1912~1935년)을 내놓았다. 보천보 전투의 진실은 하편(1936~1945년)에 담길 예정이다. "북한이 만든 김일성 회고록은 사실을 조작하고 부풀리는 등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지경이다. 중국 옌볜에는 김일성을 따라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고 정착했던 항일연군 2군부대(김일성이 몸담았던 부대) 연고자가 적잖게 살고 있었다. 그동안 말을 아꼈던 이들이 1970년대 김정일이 북한의 후계자로 추대됐을 때부터 김일성의 흠을 들추는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북한 당국은 그에게 집필 중단을 요구했다고 한다. 유씨는 "특히 북한에서 성모마리아처럼 숭배되는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이 안도현 만보라고 부르는 중국 동네에서 아편농사를 지었던 조광준이라는 홀아비와 재혼한 사실은 빼달라고 사정했다"고 전했다. 그는 "하편에선 1940년 김일성이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피할 때 벌였던 행적들을 소상히 밝힐 예정"이라며 "당시 김일성은 임신한 부인 김정숙을 거추장스럽다고 길가에 버렸고 김정일은 백두산도 러시아 하바롭스크도 아닌 길가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김명성 기자
2017.09.10
■ 북한 김씨 일가 3대의 학업 성적...조선자본주의공화국 "소련관료, 김일성의 마르크스 이론 시험 성적보고 대실망"
아들 김정일은 학교에서 수시로 여자농락, 손자 김정은은 '띨띨'하다고 놀림당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북한이 소개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극형에 처하겠다는 책이있다. 바로 《로이터통신》의 서울 특파원 제임스 피어슨과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으로 근무했던 대니얼 튜더가 최근 발간한 '조선자본주의공화국'이다.
북한은 8월 31일 중앙재판소 대변인 담화를 통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것들은 두 놈의 영국 기자 나부랭이들이 써낸 모략 도서 내용을 가지고 우리 공화국의 존엄을 엄중히 모독하는 특대형 범죄를 감행했다”며 “공화국 형법에 따라 극형에 처한다는 것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대남 기구나 관제 언론이 아닌 중앙재판소가 협박에 동원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은 영국 국적을 가진 두 명의 전ㆍ현직 기자가 취재하고 기록한 북한의 초상화다.
《노스 코리아 컨피덴셜(North Korea Confidential)》이라는 이름으로 2015년 해외에서 먼저 출간된 이 책은 한국판 제목이 시사하듯 “북핵에 가려진 북한의 일상”, 즉 북한인의 일상에 스며든 자본주의 풍경을 담아내는 데 주력했다.
책에는 북한 여성들이 BB크림을 바르고 스키니진을 입고 다니며 성형수술까지 감행한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두 한국의 대중가요를 듣고, 중국에서 들여온 DVD나 USB 메모리스틱을 통해 한국의 TV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장마당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일은 이제 북한 전역에서 일상적인 모습 등 흥미로운 사실이 많이 있다
한국어도 제대로 못했던 김일성
하지만 무엇보다 기자의 시선을 끈 것은 104~105 페이지에 실린 김일성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김일성이 머리가 좋지 않아 한국어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있다.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로 부상하는 데 굉장한 운이 따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 공산당원과 함께 만주에서 활동한 게릴라 지도자로서 상대적으로 높은 지명도를 누렸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ㅅ고련군에 소속돼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교육이 부족한 인물로 간주됐다. 심지어 한국어 실력도 떨어졌다. 해외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결과였다. 그를 북한 괴뢰 정부의 미래일원으로 봤던 소련 관료들은 그가 마르크스 이론 시험에서 거둔 성적을 보고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악명높은 소련 비밀경찰의 우두머리인 라브렌티 베리야의 눈에 들었고...(중략) 김일성은 밖으로는 자기를 평등주의의 선봉자인 것처럼 내세웠지만 북한 경제의 근대화와 산업화에서 초반에 성공을 거뒀음에도 그는 사실 봉건주의자이자 가부장주의자였다. 당시 한반도는 과거 수세기 동안 지속된 왕조 체제와 양반 귀족 지배 체제에서 벗어나던 중이었다. 그렇게 보면 김일성처럼 자기모순적인 지도자가 출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만은 않다.>
학교에서 여학생을 수시로 농락한 김정일
학업 성적이 좋지 않은 것은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 손자 김정은도 마찬가지였다.
김정일은 1960년 동독 항공 군관학교에 잠시 유학했지만,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개월 만에 도중하차한다. 김정일은 보안 등의 문제로 가명을 사용해 학적에는 남아 있지 않다.
베를린에서 발행하는 《타게스슈피겔(Tagesspiegel)》지도 1994년 7월 12일 이 같은 사실을 보도했다. 이 신문은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 김정일이 김일성의 명령으로 지난 60년 동독에서 잠깐 유학했지만, 사관생도로서의 엄격한 훈련을 이기지 못해 불과 1개월 만에 중도하차했다고 썼다. 당시 기사 제목은 ‘의문의 인물 김정일에게 동독군은 너무 엄격했다’였다.
어쩔 수 없이 김정일은 1960년 4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 64년 8월에 졸업했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도 김정일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미모의 여학생을 수시로 농락, 임신시키는 등의 행동을 했다.
《월간조선》이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1984년 4월 만든 ‘김정일은 어떤 인물인가’라는 대외비(對外秘) 문건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어린 학생 시절부터 나이 많은 사람에게 한 번도 경어를 써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안하무인 격인 망나니 행동을 해온 김정일은 김일성 대학 시절 미모의 여학생을 보기만 하면 마구 농락, 임신시키는 등 호색 문제아의 면모를 보였다. 중학생 때도 주위의 여학생 중 마음에 드는 여자는 경호원을 시켜 닥치는 대로 납치, 농락하였다.〉
김정일은 삼석 인민학교와 제4인민학교, 남산고급중학교(현 평양 제1중학교)를 나왔다.
띨딜하다고 놀림받은 김정은
이명박 정부 때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을 지낸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김정은이 북한의 '임금'이 될 텐데 어떤 인간인지 알아보기 위해 간접적으로 IQ 검사를 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한 팀은 김정은의 인척이 있는 일본 오사카로, 한 팀은 (김정은이 유학 생활을 한) 스위스 베른으로 파견했다"며 "김정은이 다른 사람과 나눈 대화를 복원하는 간접 방법으로 IQ를 추정했는데 결과적으로 '낫 소 배드(not so bad)', 중상 이상으로 나왔다"고 했다.
정보당국의 조사가 사실이라면 김정은은 중상(中上) 이상의 IQ를 공부하는 데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2010년 11월 24일 영국 일간지 《더 선(The Sun)》은 김정은이 스위스 유학시절 공부를 잘 못해 같은 반 학생들이 ‘김(Kim)’ 대신 ‘띨띨하다’ ‘둔하다’는 뜻의 ‘딤(dim)’을 붙여 ‘딤정은’으로 부를 정도였다고 전했다.
이 신문을 보면 스위스 최고 사립학교에서의 교육에 많은 돈을 쏟아부었지만, 김정은은 교실의 낙제생이었다. 중등교육 검정시험 자격증에 해당하는 것조차 따지 못했다. 결국 15세 때 베른국제학교에서 공립인 리베팰트학교로 전학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금세 열등한 학생층으로 떨어졌다. 옆자리에 앉았던 포르투갈 외교관의 아들 조앙 미카엘루는 “김정은과 내가 반에서 가장 둔한 학생(the dimmest student)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나 2군에 속했다. 김정은은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기 위해 애를 썼지만, 독일어를 잘하지 못했다. 또 문제를 내고 대답을 하라고 하면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곤 했다”고 말했다.
2년 뒤 2012년 4월 1일 스위스 일간지 《르 마탱(Le Matin)》도 김정은이 1990년대 스위스에서 2년간 다닌 국제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익명의 소식통들을 인용해 김정은이 스위스 베른국제학교 시절 첫해에 75일, 두 번째 해엔 105일을 결석했다며 이같이 전했다. 당시 김정은과 같은 반 학생이었다는 사람은 그가 오후에 학교에 나온 적이 많았고 성적도 좋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들이 말한 바로는 당시 ‘박운’이란 가명을 쓴 김정은의 자연과학 성적은 6등급 가운데 3.5등급이었다. 또 수학·문화·사회·독일어 등에서 과락을 겨우 넘는 성적이었고, 영어는 처음 고급반에 들어갔다가 보통 반으로 재배치됐고 과락을 겨우 넘겼다. 반면 음악과 기술은 최고 등급인 6등급 바로 밑의 5등급이었다.
김정은은 1993년부터 2000년까지 스위스에서 유학했다. 이후 2002년에 김일성종합대학 군사학과에 입학, 2007년 졸업했다.
글=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 김정은 폭주 성향은 아버지 김정일 닮은 것…. 임신 중인 여자 총살현장 직접 참관
□ 김정일의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성격 보여주는 7가지 사례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안기부가 작성한 김정일 대외비 문건.
지난 정부에서 정보 당국이 북한 김정은의 성격을 조사한 결과 ‘거칠고 폭주하는 성향’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김정은의 성격은 아버지 김정일을 꼭 빼닮았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1984년 4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만든 ‘김정일은 어떤 인물인가’제목의 대외비(對外秘) 문건에는 김일성의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성격이 잘 나와있다. 문건은 김정일이 측근이라도 비밀 누설 시나 진정(陳情) 때는 처단하고, 총살 현장을 직접 참관하는 등 잔인한 성격이라고 설명한 뒤 그 사례를 자세히 소개했다.
①노동당 국제부 부부장 최준덕(50세)이 사소한 거짓말을 했다 하여 재떨이를 머리에 던져 심한 상처를 입혔음(최준덕은 김정일의 첫사랑이자 두 번째 부인인 성혜림의 묘지기였다. 김정일의 최측근이며 김정일 서기실(비서실)의 2인자였던 그는 김정일과 함께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를 다니다가 모스크바로 유학, 러시아통이 됐으며 러시아어에도 능통하다. 그는 본처 자리를 빼앗기고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린 성혜림이 치료를 위해 1974년 모스크바에 머물자 성씨를 돌보는 역할을 했다.)
②77년 첩 관계 등 사생활을 누설한 공관관리책임자 이수헌(39세)을 처형.
③77년 자신의 난잡한 여자관계 등 사생활을 누설한 연락군관 추태식(52세, 대좌)을 처형.
④78년 난잡한 여자관계를 만류한다고 노동당 선전선동부부장 박성수(52세)를 처형.
⑤80년 김일성에게 김정일의 사생활이 너무 방탕하고 퇴폐하다고 진정하는 익명의 투서사건이 발생하자 2개월의 수사 끝에 선전선동부 부부장 이명재(55세)의 처를 범인으로 색출, 남편이 직접 총살토록 조치.(이 사건에 대해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씨는 생전 “김정일 비밀파티에 이명재 당시 당 부부장이 참석했는데 이명재 부인이 비밀파티 사실을 알고 김일성에게 바로잡아 주라고 편지를 썼다. 그런데 그 편지가 중간에 김정일에게 들통이 나서 김정일이 이명재를 불러다 부인단속을 하라고 말했다. 이에 이명재가 ‘제가 부인을 죽일까요’라고 물었고, 김정일은 그 자리에서 허락해 이명재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부인을 쏴 죽였다”고 했다.)
⑥81년 자기와 정을 통한 간호원 이영미(27)가 부모에게 “나는 김정일을 모시고 있다”는 편지를 보낸 사실을 알고 임신 중임에도 처형.
⑦81년 자신의 허가 없이 첩에게 모스크바행 비행기표를 사준 공관관리과장 노종일(55세)을 첩이 보는 앞에서 마구 구타.
□ 김정은 IQ는 중상 이상이다
정보당국, 김정은 친인척과 주변 인물들 통해 탐문
지난 정부에서 정보당국이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IQ(지능지수)와 성격을 친·인척과 주변인을 탐문하는 형식으로 조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는 '김정은의 지능지수는 중상(中上) 이상 수준이며, 성격은 거칠고 폭주하는 성향'이었던 것으로 6일 알려졌다.
이명박 정부 때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을 지낸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6일 국회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의원 대상 안보 강연에서 과거 정보 당국이 김정은의 신상을 조사한 내용을 일부 소개했다.
남 교수는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김정은이 북한의 '임금'이 될 텐데 어떤 인간인지 알아보기 위해 간접적으로 IQ 검사를 하기로 했다"며 "이를 위해 한 팀은 김정은의 인척이 있는 일본 오사카로, 한 팀은 (김정은이 유학 생활을 한) 스위스 베른으로 파견했다"고 했다.
그는 강연에서 조사한 시점과 정보 당국이 파악한 김정은의 IQ 수치를 밝히진 않았다. 남 교수는 본지 통화에서 "김정은이 다른 사람과 나눈 대화를 복원하는 간접 방법으로 IQ를 추정했다"며 "결과적으로 '낫 소 배드(not so bad)', 중상 이상으로 나왔다"고 했다.
남 교수는 또 이날 강연에서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은 열 살 이후 3개월 이상 평양에 있지 않았고, 김정철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여성호르몬 과다증이 있어서 김정은을 후계자로 낙점했다"고 했다. 또 "김정은이 열다섯 살 때 한 살 많은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김정은이 어린 나이에 담배를 피워 담배를 끊으라고 했더니 상소리를 했다"고 말했다.
글=월간조선 뉴스룸
■김정은, 대북 확성기 방송 통해 자신의 최대 약점인 친일파 외손자라는 사실 밝혀질까 겁내
김정은 외할아버지는 육군성 산하 ‘히로타 군복 공장’에서 일해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 조선 DB
북한 김정은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대북 확성기 방송이다. 대북 방송은 북한의 최고 존엄인 김정은을 확실하게 겨누는 우리 군의 몇 안 되는 비대칭(非對稱) 무기다.
김정은은 대북 확성기 방송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2015년 8월 지뢰 도발을 응징하기 위해 우리 군이 11년 만에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을 때고사포를 쏴대며 격렬히 반발했던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북한은 우리 확성기와 대북 전단 살포 기구 등에 대한 타격 훈련도 꾸준히 실시하고 있다.
2015년 8·25 남북 합의 당시 북한 대표단이 평소와 달리 협상 도중 회담장을 박차고 나오지 않은 이유도 '대북 방송을 무조건 중단시키라'는 김정은의 특명 때문이었다.
대북 확성기 방송은 2015년 8·25남북 합의로 중단됐다가 2016년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전면 재개됐다. 북한도 같은 시기에 대남 확성기 방송을 시작했다. 군은 현재 MDL 인근 10여 곳에서 고정·이동식 확성기 10여 대로 하루 2∼6시간씩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김정은은 대북 확성기로 자유와 진실이 전파되는 것을 두려워 한다. 특히 북한 주민이 알면 안되는 자신의 아킬레스건이 존재하기에 더욱 그렇다.
김정은의 친모 고용희는 북송 재일교포 출신이다. 북한에서는 북송 재일교포를 ‘째포(재일교포를 비하한 표현)’라고 부른다. 정보 당국 관계자는 “고용희의 출생 당시 이름은 고희훈이었고, 일본 이름은 다카다 히메(高田姬)였다”고 했다.
고용희의 부친, 즉 김정은의 외조부인 고경택은 친일 행적이 있다. 일본에 살 때 육군성 산하 ‘히로타 군복 공장’에서 일한 것으로 비밀 자료에서 드러났다. 김일성이 항일투쟁에서 맞섰던 일본군의 군복을 만들어준 게 며느리 고영희의 부친이란 얘기가 되는 셈이다. 이런 이유로 일부 당 간부와 주민 사이에서는 “원수님(김정은을 지칭)은 백두혈통이 아니라 후지산 줄기”라고 비꼬는 이야기도 돈다고 한다.
친일파의 외손자라는 사실은 김정은에게 치명적 약점일 수 밖에 없다. 2017년 대북단체들은 이같은 사실을 폭로하는 전단을 북한으로 날려보냈다.
문재인 대통령은 7월 6일(현지시간) ‘7·6 베를린 구상’을 통해 “휴전협정 64주년(27일)에 맞춰 군사분계선에서의 적대행위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그 조치중 하나로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이 거론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작성한 문 대통령의 원고엔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이 구체적 사례로 들어 있었다"고 했다.
북한은 김정은이 가장 싫어하는 대북 확성기 방송 폐지를 검토하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6차 핵실험을 했고, 그에 더해 ICBM급 시험 발사까지 마쳤다.
글=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 09.21 무자비한 공개 처형, 10대 여학생 성노예화...김정은 점심 한끼 150만원짜리 먹어
북한 특권층 탈북여성 '김정은 실상' 英 매체에 폭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임희연 씨. 사진=Daily Mirror
북한 특권층에 있다가 탈북한 여성이 영국 매체 《미러(Mirror)》와의 인터뷰를 통해 김정은의 실상을 폭로했다. 《미러》는 이 여성이 2015년 탈북한 ‘임희연’이란 가명의 26세 여성으로, 지난 3일 서울의 비공개 장소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19일 보도했다.
《조선일보》가 20일 미러의 인터뷰 기사를 인용 보도한 바에 따르면, 아버지가 북한군 장교 출신인 임씨는 평양의 모 대학을 졸업하고 북한 당국이 제공한 평양시의 아파트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으로 51세에 사망하자 공포감을 느껴 탈북을 결심했다.
무자비한 공개 처형, 대공포(對空砲) 사격 뒤 탱크로 짓이겨...
김정은 집권 후 무자비한 처형 집행이 반복되면서 북한 주민들은 끔찍한 처형 장면을 눈앞에서 봐야했다고 한다. 임 씨는 "모란봉 악단 단원 11명이 음란영상물 제작 혐의로 처형되는 모습을 바로 60m 떨어진 곳에서 봤다"고 말했다. 그녀는 "밧줄로 몸이 묶인 음악가들이 머리가 천으로 덮인 채 운동장에 나왔는데, 입에 재갈이 물려 아무런 애원의 소리도 내지 못했다"면서 "한 명씩 마지막 순간까지 대공포를 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온몸이 부서지고 사방에 피가 튀었지만 1000명의 관중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탱크들이 이미 조각이 난 시신 위를 되풀이해 지나가며 짓이겨 아무 형체도 남지 않게 했다"고 증언했다.
10대 여학생들 '성 노예'로 차출
그녀는 또 "자신이 다니던 학교에서 10대 여학생들을 선별해 김정은의 ‘성 노예’로 데려갔다"고 말했다. "가장 예쁘고 다리가 얇고 일자로 뻗은 학생들을 데려갔다. 김정은에게 철갑상어 알과 같은 매우 진귀한 음식 음식을 대접하는 법과 마사지하는 법을 배우고 나중에 그의 성 노예가 된다"고도 했다. 이어 “이 여성들은 당연히 김정은과 잠자리를 해야 하지만 절대로 실수해서는 안 되며, 잘못할 경우 어느 순간 사라진다”고 했다. '임신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마찬가지로 사라진다”고 답했다. "이 여성들은 김정은의 버림을 받게 된 뒤에는, 고위 관리들과 결혼하게 된다"고 말했다.
하루 점심값 약 150만원, 제비집 수프 등 초호화 식단 즐겨...
그녀는 또 "김정은의 하루 점심 식사 비용은 1000파운드(약 150만원)에 달하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제비집 수프'"라고 전했다. 제비집 수프는 1kg당 약 300만 원에 달하는 금빛 제비의 타액으로 만들어진 중국 요리이다. 김정은은 철갑상어 알이나 다른 비싼 수입 식품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평양에 살던 임씨와 어머니, 남동생 세 가족은 아버지가 사망한 뒤 약 5000파운드(약 760만원) 가량을 검문소마다 만나는 군인들에게 뇌물을 각각 나눠주며 차로 20시간을 달려 중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임씨는 인터뷰 말미에 “북한을 탈출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때만큼 행복한 적이 없었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월간조선 뉴스룸
■ 12.14 김정일 '비밀' 술파티에서 울려 퍼진 남한 가요들
《신상옥·최은희 비록》으로 되돌아본 70, 80년대 북한 김씨왕조의 실상
▲1980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 참석해 얘기를 나누고 있는 김일성(왼쪽)과 김정일. 김정일은 이때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내외에 공개됐다. 김정일 뒤에 보이는 얼굴은 전 외교부장 허담. 사진=조선DB
과거 70~80년대 북한 독재정권의 실상을 자세히 알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있다. 2001년 월간조선사에서 펴낸 《신상옥·최은희 비록 - 우리의 탈출은 끝나지 않았다》가 바로 그것이다. 납북됐다 극적으로 탈출한 영화예술인 부부의 충격 증언이 담겨 있다.
북한 수뇌 김일성과 김정일이 누구인지, 그들의 야욕과 능력의 한계는 무엇인지, 북한 체제의 허위와 진실은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해 면밀히 밝혔다. 목숨을 걸고 극비리에 녹취한 수뇌들의 육성 발언, 생생하게 묘사된 북한 정치와 사회의 풍경 등은 지금도 찾기 힘든 고급 정보다.
음험했던 김일성·김정일 시대의 북한을 기억한다면, 폭주하는 김정은 시대의 북한 또한 그 허실을 통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북한 김씨왕조와 독재정권의 실체적 진실을 알아보자.
1. 김정일 파티의 단골손님들과 남한 유행가
〈김정일은 거의 매주 금요일만 되면 나(최은희)를 불러내어 파티를 열고 영화와 뮤지컬 등을 구경시켰다. 어떤 때는 그가 직통전화로 나를 직접 부르고 어떤 때는 김학순, 강해룡을 통해 연락해 왔다.
연회 때는 김정일의 여동생 부부도 자주 참석해 나는 이들과도 잘 알게 되었다. 이런 때면 경음악 밴드에 맞춰 트로트, 디스코 춤을 추고 어떤 때는 블랙잭, 마작 등 도박들도 한다.
밖에 나가면 항상 김일성 찬가와 혁명의 노래 일색이지만 연회 때면 '동백아가씨' 등 한국의 대중가요를 즐겨 듣고 부른다. 겉모습과는, 그리고 일반 서민들의 생활과는 너무 다른 권력층만이 즐기는 별세계다.
▲북한 평양 만수대에 서 있는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대형 동상. 사진=조선DB
이 연회의 단골손님은 김정일과 그의 여동생 김경희 부부, 조사부장 이완기, 부부장 강해룡·김주영, 연락부 부부장(현재 부장) 정경희(여), 외교부 부부장 김용순, 김정일의 비서 유 동무, 김일성 기록영화 담당 부부장 김명제, 지도원 김학순 등이고 외교부장 허담 내외도 자주 참석했다.
김정일은 처음 두세 번은 파티 때 나를 자기의 옆자리에 앉혔으나 그다음부터는 유씨 성을 가진 20대 후반의 미모의 여비서를 옆에 앉히고 나는 자기의 맞은편에 앉혔다.
연회는 주로 중앙당 연회실에서 열렸다. 중앙당에는 연회실이 여러 개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때는 대연회실에서 열리고 어떤 때는 중연회실, 소연회실에서 번갈아 열렸다. 나의 숙소로 정해진 김정일 별장에서도 연회가 두 번이나 열렸다.
... 술잔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김학순이 일어나더니 나더러 노래를 하라고 시켰다. 나는 노래를 잘 못 부른다면서 꽁무니를 뺐다. 노래 부를 만한 흥미도 없었거니와 막상 무슨 노래를 부를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김정일이 한마디했다.
"최 선생, 거 있지 않습니까? '이별', 패티김이 부른 '이별' 말입니다. 그것 한번 부르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 박수가 터졌다. 동의의 표시와 함께 빨리 부르라는 재촉 박수였다. 김정일이 남쪽에서 유행하는 가요 이름을 다 알고 또 그 노래를 부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데 나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 김정일. 사진=조선DB
... '산을 넘고 멀리 멀리 헤어졌지만...'이라는 대목에 이른 순간 생이별을 한 채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부조차 알 수 없는 신 감독 생각이 북받쳐 떠올랐던 것이다. 나는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터질 듯한 눈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나는 김학순이 불러주는 가사를 받아 '이별'을 간신히 끝마쳤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또 요란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주문이 쏟아져 나왔다.
"한 곡 더 뽑으시오. 한 곡 더..."
그러나 나는 무슨 노래를 부를지 몰랐다. 그때 김정일로부터 또 다른 신청곡이 나왔다.
"'하숙생' 하나 더 부르시오. '하숙생'..."
그는 '이별'과 '하숙생' 외에 '찔레꽃' 등의 노래를 좋아했다.〉
2. 남파간첩들의 야간훈련
〈이불 속에서 남쪽 방송을 듣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요란하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었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새벽 1시가 조금 넘었다. 접대원 허학선이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귀에 익은 공급지도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주무십니까?"
"아니오. 왜 그러세요?"
나는 불을 켰다.
"저, 죄송합니다. 선생님 쓰시는 건전지등 좀 빌려 주십시오."
"그렇게 하세요."
나는 머리맡에 놓인 건전지등을 집어 주었다. 나는 혼자 밥 먹기가 싫어 접대원과 요리사가 있는 부엌방으로 가서 같이 먹는 때가 많았는데 다음날 아침도 식사를 같이 하면서 물어 보았다.
"지난밤에 갑자기 전지등은 왜 빌리러 왔나요?"
"예, 어젯밤 공작원 야간 훈련이 있었는데 훈련을 하다 보니 건전지가 떨어졌답니다."
요전에 얼핏 들으니 이곳 동북리 초대소 일대는 위수구역이고 '공작원(간첩) 훈련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전등을 빌리러 온 사람도 남파간첩 훈련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허학선은 다시 말을 이었다.
▲김정일이 2004년 4월 19일부터 21일까지 중국을 방문하면서 이용했던 특별열차의 내부 모습이 과거 기록영화에서 공개됐다. 사진은 톈진역에 정차된 열차 안에서 김정일이 중국 공산당 간부 등과 담소하고 있는 장면이다. 사진=조선DB
"참, 선생님. 말이 난 김에 얘긴데 물건들을 잘 건사해 놓으십시오."
"왜요?"
"공작원들이 훈련 중에 감쪽같이 집안에 들어와서 물건을 가져가는 경우가 있답니다. 우리 집에는 그럴 리가 없겠지만 혹시 누가 압니까? 주의하시는 게 좋습니다."
간첩들의 훈련 중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도둑질 훈련도 포함돼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날인가 나는 식사 중에 호기심이 나서 접대원과 요리사에게 다시 물어 보았다.
"공작원들이 (남한에) 한 번 가면 얼마나 있다가 돌아오나요?"
"빠르면 한 40, 50일?"
한쪽이 다른 쪽에 동의를 구했다.
"응, 그렇다고 하던데..."
"혹시 아주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은 없나요?"
"글쎄요..."
두 사람은 괜한 말을 했다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3. 김일성의 '고려연방제' 야욕
〈우리는 김일성과 만나게 되면 대화 내용을 녹음하려고 은희의 핸드백 속에 소형 녹음기를 넣고 갔는데, 은희는 핸드백을 무릎에 올려 놓지 않고 일부러 자기와 김일성이 앉은 사이 의자 위에 올려 놓았다. 김일성은 언제나 그가 하던 말을 판에 박은 듯이 되풀이했다.
(*편집자 주: 해당 발언에서 김일성은 자유민주주의 정부에 의한 통일이 아닌 김씨왕조를 승인하는 연방제(두 개의 제도)를 주장하면서 민족주의의 감성(하나의 민족)으로 통일 문제를 호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 남조선 제도는 그대로 두고 북조선 제도도 그대로 두고 서로 자치를 하면서 한 개의 나라 두 개의 정부를, 이 두 개의 정부를 연방해서 한 개의 나라로 만들어 가자고 유엔에 가입하면 앞으로 어떻게 되든지 간에 이 국제적으로 이 분열된 조선을 영구화시키는 것은 아니거든요. ... 그러니까 두 개의 정부를 시인토록 하는데 이거 하문 그저 연방정부 만들어 가지구 '조선'을 '고려'라고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뭐 상대방에서 좋은 의견이 나오면 좋은 이름도 좋고.
▲북한 김일성과 김정일. 사진=조선DB
그러나 '신라'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적합지 않아. 신라라는 건 왜 그런고 하니 우리 거 역사적으로 보면 당나라하구 비밀리에 연합해 가지구서 이 백제를 치고 고구려를 쳐서 망하게 해서 승리한 게란 말이오. ... 만일, 만일 통일하는데 한 개 민족으로 어떻게든지 살아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십시오. 역사 앞에 어떻게 하나 한 민족으로서 두 개의 제도로 살 수 있지 않소.
홍콩에, 홍콩은 50년 동안을, 내 이번에 갔을 때 등소평이 말하지 않소. 자기가 좋은 일 하나 했는데 더 늙기 전에 홍콩은 거저 50년간을 자본주의 사회로 그대로 두고서 그저 평화적으로 통일하겠다. 잘한 게지요. 그러니까 한 개 나라에 두 개 제도는 있을 수 있다는 문제 아니오. 우리도 그렇게 두 개의 제도를 하잔 말이오."〉
정리=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자료=《신상옥·최은희 비록 - 우리의 탈출은 끝나지 않았다》 본문 내용 발췌·인용
■ 12.23 2017년 김정은의 '무모한 도발과 폭정' 10가지는 무엇?
김정남 독살, 정적들 숙청, 웜비어 사망, 6차 핵실험, 귀순군 사격 등
/사진=조선DB
22일(현지시각) 미국 일간지 《USA투데이》가 '김정은이 세계를 기겁하게 한 10가지 방식'을 선정했다.
이 신문의 표현만 놓고 보면 김정은의 10가지 방식이 세계를 기겁하게 만들었다지만, 사실상 국제사회의 제재를 무시한 북한의 무모한 도발이거나 잔혹한 폭정으로 여겨질 따름이다.
해당 매체는 올 한 해 동안 북한의 여러 도발로 인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간의 정치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올해 북한이 저지른 10가지 사건을 보면 김정은이 위험천만한 자신만의 길을 고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1. 트럼프 취임 3주 만에 첫 미사일 발사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약 3주 정도 지났을 때 북한은 장거리 탄도미사일 북극성 2호를 쏘아 올렸다. 이는 이후 북한의 잇단 미사일 도발의 시작이었다.
2. 이복형 암살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 올해 2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북의 지령을 받은 암살조에 의해 살해됐다.
3. 정적들 숙청
김정남 독살 후, 최소 5명의 북한 정부 관리가 처형당했다. 2011년 20대에 권력을 잡은 김정은은 수 년간 '피의 숙청'을 고집하고 있다.
4. 웜비어 사망
북한에 억류됐다가 풀려난 미 버지니아대학 학생 오토 웜비어가 미국에 귀환한 지 채 한 주가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미 당국은 북측의 학대와 가혹 행위로 인해 웜비어가 사망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5. 미국령 괌 근접사격 위협
북한이 미국령 괌에 있는 미군기지를 겨냥해 미사일 근접사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는 미국 영토에 대한 최초의 구체적 위협으로 알려졌다.
6. 수소탄 첫 실험
북한은 지난 9월 최초로 수소탄 실험을 시도, 6번의 핵실험 중 가장 강력한 규모로 실행했다. 수소탄 제조기술을 완성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국제사회에 경고음으로 작용했다.
7. 미 공군기 위협
지난 9월 북한 외무상 리용호는 자신들의 영공으로 넘어오는 미 공군기를 격추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미 공군기의 군사훈련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8. 극단적 모욕과 말의 전쟁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을 지칭해 '늙다리 미치광이'라는 성명을 냈다. 북한이 영문 성명에 쓴 '도터드'(dotard·망령이 난)란 단어는 메리엄 웹스터 사전 등에서 검색이 폭주하기도 했다.
9. 미 수도까지 겨냥한 ICBM
북한이 지난달 발사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은 정상 발사 각도라면 사거리가 1만3000km에 달할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됐다. 이는 미 본토는 물론 동부 워싱턴DC까지 도달할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10. 귀순병사 사격
지난달 13일 북한은 비무장지대(DMZ)를 넘어 남쪽으로 귀순하는 병사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최근 북한이 또 한 명의 귀순병사를 추격하자 한국군이 대응 사격을 하기도 했다.
글=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 3대 독재자들의 凶像
만수대 언덕(74년 김일성 생일 기념 제작, 2012년 4월 13일 김정일 부자상 추가)을 비롯해
▲만수대창작사(김일성·김정일의 기마상)
▲김일성군사종합대학(김일성·김정일 부자상·2012년 10월 29일 김정일 추가)
▲인민무력부(김일성·김정일 부자상·2012년 8월 29일 김정일 추가)
▲국가안전보위부(2012년 10월 2일 김정일 단독 건립)
▲조선예술영화 촬영소(김일성 입상)
▲평양학생소년궁전(김일성, 어린이 3명 군상)
▲만경대 혁명학원(김일성 입상, 군복착용)
▲강건종합군관학교(김일성 입상)
▲김일성종합대학(김일성 입상)
▲김일성정치대학(김일성 입상)
▲금성제1중학교(김일성 입상)
▲김성주소학교(김일성 학생시절 입상)
▲창전소학교(김일성 학생시절 입상)
▲창덕학교(김일성 입상)에 김일성·김정일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평양시에 존재하는 김일성·김정일 동상의 위치와 특징이 자세하게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친 신도들
/주석궁
/ 파라오 놀이
/주체사상탑
□ 독재자가 독재자로부터 받은 선물
/독재자 카다피가 김일성에게 준 말을 탄 리비아 사람
/금장검
/은꽃병
■ 잔인한 金正日파일
2016.04.08 [단독입수] 安企部가 만들었던 대외비 문건
□ 北 김정일 김정은의 잔인성과 복잡 음탕한 여자관계
1984년 4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는 ‘김정일은 어떤 인물인가’라는 대외비(對外秘) 문건을 만들었다. 최은희·신상옥 부부 납치 사건이 계기였다. 북한 공작원은 1978년 한국 최고의 여배우와 감독으로 활동하던 이들을 납치했다. 영화와 연극에 광적이었던 김정일은 영화산업에 주력했으나 결과가 신통치 않자 이들을 납치할 것을 명령했다. 희생양이 된 두 사람은 북한에서 ‘신필름영화촬영소’를 세우고 체제 선전 영화를 만들었다.
부부는 납치 8년 만인 1986년 해외촬영을 위해 오스트리아 빈에 간 뒤 현지 미국 대사관을 통해 극적으로 탈출했다. 미국에 체류했던 부부는 1989년 5월 11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부부의 강제 납북(拉北)부터 탈출까지 8년간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The Lovers and the Despot)〉에는 김정일이 납치를 언급하는 내용이 나온다. 최은희씨가 김정일의 이야기를 몰래 녹음한 것이다. 녹음에서 김정일은 “내가 두 사람을 우리 쪽으로 건너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우리도 장례식처럼 늘 우는 영화 말고, 국제적 영화제에 나갈 만한 영화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안기부가 작성한 김정일 대외비 문건.
다큐멘터리에서 최씨는 녹음테이프에 대해 “나중에 남한으로 돌아가게 되면 아무도 우리 얘기를 믿지 않을 테니 증거가 필요하다는 신 감독의 말을 듣고, 가방 속에 녹음기를 갖고 들어가 몰래 녹음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정일이 ‘최은희·신상옥 부부 납치’를 진두지휘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안기부에 김정일이 어떤 인물인지를 잘 보여주는 문건을 만들어 은밀히 해외 언론에 제공하라고 지시했다. 국제사회에 김정일 규탄 여론을 확산하라는 명령이었다.
안기부는 통신 감청 정보망과 다수의 휴민트(인적 정보)를 통한 각종 보고서와 탈북자 진술 내용 등을 종합해 A4용지 7페이지 분량의 ‘김정일은 어떤 인물인가’라는 제목의 문건을 완성했다.
문건에는 ▲김정일의 성장과정 ▲비인간적 잔인성과 호전성 ▲극에 달한 호화 사치 생활 ▲복잡·음탕한 여자관계 ▲변태적 음란 기질 ▲김정일, 반대세력 숙청을 위한 암살대 조직 운영 ▲김정일 특별지시로 대남공작 부서인 작전부에 해외 납치 전담과 설치 및 국제적 납치 만행 자행 내용이 담겼다. 부전자전일까. 32년 전 만들어진 김정일 관련 문건을 보면 그의 아들 김정은도 보인다. 문건 제목을 ‘김정은은 어떤 인물인가’로 바꿔 지금 공개해도 무방할 정도로 부자(父子)는 똑 닮았다.
엉망인 학교생활
▲1986년 북한 탈출 63일 만에 모습을 나타낸 최은희·신상옥 부부. 전두환 전 대통령은 김정일이 ‘최은희ㆍ신상옥 부부 납치’를 진두지휘했다는 사실에 분노, 안기부에 김정일 관련 문건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사진=조선일보
문건에 따르면 김정일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1960년 동독 항공 군관학교에 잠시 유학했지만,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개월 만에 도중하차한다. 김정일은 보안 등의 문제로 가명을 사용해 학적에는 남아 있지 않다.
베를린에서 발행하는 《타게스슈피겔(Tagesspiegel)》지도 1994년 7월 12일 이 같은 사실을 보도했다. 이 신문은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 김정일이 김일성의 명령으로 지난 60년 동독에서 잠깐 유학했지만, 사관생도로서의 엄격한 훈련을 이기지 못해 불과 1개월 만에 중도하차했다고 썼다. 당시 기사 제목은 ‘의문의 인물 김정일에게 동독군은 너무 엄격했다’였다.
어쩔 수 없이 김정일은 1960년 4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 64년 8월에 졸업했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도 김정일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미모의 여학생을 수시로 농락, 임신시키는 등의 행동을 했다. 문건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어린 학생 시절부터 나이 많은 사람에게 한 번도 경어를 써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안하무인 격인 망나니 행동을 해온 김정일은 김일성 대학 시절 미모의 여학생을 보기만 하면 마구 농락, 임신시키는 등 호색 문제아의 면모를 보였다. 중학생 때도 주위의 여학생 중 마음에 드는 여자는 경호원을 시켜 닥치는 대로 납치, 농락하였다.〉
김정일은 삼석 인민학교와 제4인민학교, 남산고급중학교(현 평양 제1중학교)를 나왔다.
실력 부족으로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 것은 김정은도 마찬가지였다.
2010년 11월 24일 영국 일간지 《더 선(The Sun)》은 김정은이 스위스 유학시절 공부를 잘 못해 같은 반 학생들이 ‘김(Kim)’ 대신 ‘띨띨하다’ ‘둔하다’는 뜻의 ‘딤(dim)’을 붙여 ‘딤정은’으로 부를 정도였다고 전했다.
이 신문을 보면 스위스 최고 사립학교에서의 교육에 많은 돈을 쏟아부었지만, 김정은은 교실의 낙제생이었다. 중등교육 검정시험 자격증에 해당하는 것조차 따지 못했다. 결국 15세 때 베른국제학교에서 공립인 리베팰트학교로 전학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금세 열등한 학생층으로 떨어졌다. 옆자리에 앉았던 포르투갈 외교관의 아들 조앙 미카엘루는 “김정은과 내가 반에서 가장 둔한 학생(the dimmest student)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나 2군에 속했다. 김정은은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기 위해 애를 썼지만, 독일어를 잘하지 못했다. 또 문제를 내고 대답을 하라고 하면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곤 했다”고 말했다.
2년 뒤 2012년 4월 1일 스위스 일간지 《르 마탱(Le Matin)》도 김정은이 1990년대 스위스에서 2년간 다닌 국제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익명의 소식통들을 인용해 김정은이 스위스 베른국제학교 시절 첫해에 75일, 두 번째 해엔 105일을 결석했다며 이같이 전했다. 당시 김정은과 같은 반 학생이었다는 사람은 그가 오후에 학교에 나온 적이 많았고 성적도 좋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들이 말한 바로는 당시 ‘박운’이란 가명을 쓴 김정은의 자연과학 성적은 6등급 가운데 3.5등급이었다. 또 수학·문화·사회·독일어 등에서 과락을 겨우 넘는 성적이었고, 영어는 처음 고급반에 들어갔다가 보통 반으로 재배치됐고 과락을 겨우 넘겼다. 반면 음악과 기술은 최고 등급인 6등급 바로 밑의 5등급이었다.
김정은은 1993년부터 2000년까지 스위스에서 유학했다. 이후 2002년에 김일성종합대학 군사학과에 입학, 2007년 졸업했다.
비인간적 잔인성
▲1995년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백두산 정상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이라며 북한이 화보집 《조선》을 통해 공개한 사진. 사진=조선일보
‘비인간적 잔인성과 호전성의 소유자 부분’에는 김정일이 측근이라도 비밀 누설 시나 진정(陳情) 때는 처단하고, 총살 현장을 직접 참관하는 등 잔인한 성격이라고 설명한 뒤 그 사례를 자세히 소개했다.
〈사례-1. 노동당 국제부 부부장 최준덕(50세)이 사소한 거짓말을 했다 하여 재떨이를 머리에 던져 심한 상처를 입혔음(최준덕은 김정일의 첫사랑이자 두 번째 부인인 성혜림의 묘지기였다. 김정일의 최측근이며 김정일 서기실(비서실)의 2인자였던 그는 김정일과 함께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를 다니다가 모스크바로 유학, 러시아통이 됐으며 러시아어에도 능통하다. 그는 본처 자리를 빼앗기고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린 성혜림이 치료를 위해 1974년 모스크바에 머물자 성씨를 돌보는 역할을 했다.)
사례-2. 77년 첩 관계 등 사생활을 누설한 공관관리책임자 이수헌(39세)을 처형.
사례-3. 77년 자신의 난잡한 여자관계 등 사생활을 누설한 연락군관 추태식(52세, 대좌)을 처형.
사례-4. 78년 난잡한 여자관계를 만류한다고 노동당 선전선동부부장 박성수(52세)를 처형.
사례-5. 80년 김일성에게 김정일의 사생활이 너무 방탕하고 퇴폐하다고 진정하는 익명의 투서사건이 발생하자 2개월의 수사 끝에 선전선동부 부부장 이명재(55세)의 처를 범인으로 색출, 남편이 직접 총살토록 조치.(이 사건에 대해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씨는 생전 “김정일 비밀파티에 이명재 당시 당 부부장이 참석했는데 이명재 부인이 비밀파티 사실을 알고 김일성에게 바로잡아 주라고 편지를 썼다. 그런데 그 편지가 중간에 김정일에게 들통이 나서 김정일이 이명재를 불러다 부인단속을 하라고 말했다. 이에 이명재가 ‘제가 부인을 죽일까요’라고 물었고, 김정일은 그 자리에서 허락해 이명재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부인을 쏴 죽였다”고 했다.)
사례-6. 81년 자기와 정을 통한 간호원 이영미(27)가 부모에게 “나는 김정일을 모시고 있다”는 편지를 보낸 사실을 알고 임신 중임에도 처형.
사례-7. 81년 자신의 허가 없이 첩에게 모스크바행 비행기표를 사준 공관관리과장 노종일(55세)을 첩이 보는 앞에서 마구 구타.
사례-8. 81년 김정일이 여동생 김경희(36세)와 같이 지방여행 시 동행한 예술단원 한 사람이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자 김정일이 이를 보고 권총을 꺼내 총살하려는 것을 김경희가 만류하여 중지.
사례-9. 김정일이 탑승한 차량이 주행 시, 마주치는 모든 차량은 사전 정지토록 의무화하고, 이를 위반하여 머뭇거리거나 늦게 정차하는 차량이 있으면 동승한 비서로 하여금 탑승자를 확인해 반드시 처벌.〉
개인감정에 근거해 잔인하게 숙청, 처형하는 것은 김정은도 마찬가지다. 국정원에 따르면 김정은이 권력 전면에 나선 2012년 7월 이후 처형된 고위 간부는 100여 명에 달한다.
김정은의 첫 표적은 김정일 사망 이후 군부 실세로 꼽히던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이었다. 김정은은 2012년 7월 리영호를 전격 해임했다. 그의 해임은 김정은 군 통제 강화 과정에서 비협조적 태도를 취한 데 대한 문책성 인사로 알려졌다. 리영호를 포함해 김정일 장례식 때 영구차를 호위했던 김정각, 김영춘, 우동측 등 ‘군부 4인방’도 김정은 시대 개막 이후 모두 숙청되거나 일선에서 물러났다. 특히 2013년 12월에는 자신의 고모부이자 김정일의 사망 이후 북한 2인자로 군림하던 장성택을 전격 처형,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죄목(罪目) 중에는 김정은에 대해 ‘왼새끼를 꼬며(딴마음을 먹고)’, 김정은을 추대하는 자리에서 ‘건성건성 박수를 쳤다’는 것도 있었다.
지난해 4월에는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재판 절차도 없이 대공화기인 고사총으로 공개 처형되면서 김정은 체제의 잔혹성이 국제사회에 다시 한 번 각인됐다. 처형 이유는 ‘김정은이 참석한 행사에서 꾸벅꾸벅 졸았기 때문’이었다.
현영철의 처형 한 달 뒤인 지난해 5월 김정은은 최영건 부총리도 처형했다. 최영건은 김정은이 추진하는 산림녹화정책과 관련해 불만을 표출하고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을 이유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은 올 2월에는 우리 군(軍)의 합참의장에 해당하는 북한 리영길 인민군 총참모장(군부 서열 3위)을 처형했다. 죄목은 ‘종파분자 및 세도·비리’인 것으로 전해졌다. ‘반(反)김정은 파벌을 구축하고 권력 남용 비리를 저질렀다’는 얘기다.
代를 잇는 호화 사치 생활
▲일본 《마이니치(每日) 신문》이 2009년 6월 14일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 김정일의 3남 김정은의 16세 때 사진. 《마이니치》 측은 이 사진을 김정은이 재학한 것으로 알려진 스위스 베른의 공립중학교 급우로부터 입수했다고 밝혔다. 김정은은 스위스 유학시절 지적 수준이 떨어져 학교생활에 애를 먹었다. 사진=일본 마이니치 신문
김정일은 생전 호화 사치 생활을 즐겼다. 김정일이 가장 좋아하는 술은 1980년 프랑스 보르도산 샤토 라투르(Chateau Latour)라는 와인이었다. 병당 560만원 정도 한다. 김정일은 이 술을 오스트리아의 유리 명품인 리델(Riedel)의 와인잔에 따라 마셨다. 애완견 수입·관리에만 매년 수십만 달러를 쓰기도 했다. 정통한 대북 소식통은 “김정일은 프랑스 수의사를 수시로 불러 애완견의 건강검진까지 했다”고 했다. 2009년에는 이탈리아에 호화요트 2척(240억원가량)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 요트는 이탈리아 경찰에게 압수됐다. ‘극에 달한 호화 사치 생활자’ 부분에는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잘 정리돼 있었다.
문건 내용이다.
〈○80년 중앙당 김정일 공관 확정 보수 시 서독 기술자를 초빙하여 최고급 외제 장식품으로 치장하는 등 영국화 200만 파운드(당시 기준 한화 30억원 상당) 허비.
○평양에 미화 1억 불 상당의 공관 4개소, 각 지방에 초호화 별장 9개소, 최신형 고급 외제 승용차 30대 등 소유(김정일은 꼭 독일산 벤츠 자동차를 탔다. 김정일은 차 값을 금괴로 결제, 벤츠사 최고 고객 중 한 명이었다. 별장 내에서만 사용하는 번호판 없는 벤츠도 많았다.)
○전용 창고에는 자신이 농락한 여자들에게 선물할 각종 고급 물품(보석류, 향수, 시계, 전자제품, 여자 의류, 여자 신발류, 핸드백 등)이 산적.
○전시에 대비, 서방은행에 금괴 7톤 및 거액의 외화 예치.〉
김정은은 김정일보다도 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 북한 인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안위(安危)와 사치를 위해선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실제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안이 발효된 상황에서도 김정은 정권은 집권 후 4년여 동안 자동차, 수상스키, 승마용품, 카펫, 전자제품 등 사치품을 사들이는 데 21억 달러(약 2조4000억원)를 탕진했다.
김정은은 자신이 유학생활을 했던 스위스에서 만든 사치품을 선호한다. 김정은이 2010년 10월 노동당 창건 65주년 행사 때 찬 시계는 스위스 파텍 필립(Patek Philippe)사 제품으로 추정된다. 주문 생산만 가능한 제품으로 가격은 1억원 정도다. 2012년엔 스위스 메델라(Medela)사의 심포니 유축기(모유 짜는 기계) 등 고급 출산·육아용품에 15만 유로(약 1억9200만원)를 썼다. 메델라사의 심포니 유축기는 국내 산모들 사이에서 ‘꿈의 유축기’로 불리는 제품으로 300만원이 넘는 고가(高價)다. 또한 김정은은 유학 시절 즐겨 먹던 스위스 에멘탈 치즈를 북한에서 만들려다 실패하자 수입해 먹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김정은은 핀란드와 독일 업체들로부터 가정용 사우나 설비들을 수입하기도 했다. 소식통은 “아버지(김정일)처럼 밤샘 파티를 즐기는 김정은이 숙취와 피로 해소 목적으로 도입을 지시했다”며 “파티용 포도주 및 양주 수입량도 김정일 시절보다 증가했다”고 말했다. 김정은은 중국에 진출해 있는 북한 무역회사를 내세워 영국제 최고급 요트를 구입하기도 했다. 김정은의 요트는 위성사진에 잡힌 바 있다.
북한 전문가인 커티스 멜빈(Curtis Melvin)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한미연구소 연구원은 2015년 10월 촬영한 위성사진을 공개하면서 “남포항에서 길이 약 50m의 호화 요트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미국의 북한 전문 인터넷 매체인 ‘NK 뉴스’는 김정은이 지난 2013년 5월 동해안을 10일간 시찰할 때 영국제 호화 요트인 ‘프린세스 95MY’를 이용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영국 요트 회사인 프린세스 요트가 만든 ‘프린세스 95MY’의 당시 가격은 약 450만 파운드(약 80억원)였다.
복잡한 여자관계
▲2013년 8월 25일자 《로동신문》에 게재된 김정일, 김정은 자료사진. 김정은은 김정일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사진=로동신문
‘복잡·음탕한 여자관계를 가진 패륜아’ 부분에는 김정일의 은밀한 사생활이 담겼다. 관련 내용이다.
〈김정일은 본처(영숙, 성·나이 미상) 외에 첩 2명과 생활하면서도 주변의 근무여성을 특별양성하여 성적유희로 농락하고 있다. 김정일은 77년부터 매년 시·도 예술전문학교 졸업반 여학생 가운데 미모의 30여 명을 선발, 평양적십자병원 의대에 1년 과정의 특설 반에서 기본간호교육을 시키고 홍콩·마카오 등지에 파견하여 안마술 등 단기간의 연수를 시켜 자신이 최종심사한 여자를 집무실·공관·별장 등에 배치하여 즐기고 있다. 또 영화배우 유진희 (〈당의 참된 딸〉 주인공)·홍영희(〈꽃 파는 처녀〉의 주인공)·최삼숙·이정순·채수련·오화자·고지미 등 10여 명과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10여 명·전용타자수·담당간호사 등 숱한 여자들과 성적유희를 자행하고 있다. 김정일은 이들에게 공훈 배우 칭호를 수여하고 고급물품을 선물했다. 김정일은 변태적인 기질이 다분한데, 주말마다 각종 연회를 열고 무용수들에게는 나체로 춤을 추게 하며 참석자(중앙당 부부장급 이상)로 하여금 이들을 애무토록 한 뒤 즐기는 등 변태적 음란 기질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김정일은 최소한 10명의 사생아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러시아 일간지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Komsomolskaya Pravda)》지는 1997년 9월 23일 이런 사실을 폭로했다.
이 신문은 ‘수령과의 잠자리’라는 제호 아래, 기쁨조를 비롯한 김일성-김정일 부자(父子)의 여성 편력을 거의 전면에 걸쳐 소개한 뒤, “우리(러시아) 여성들도 김정일의 관심을 비켜가지 않았다”며 “러시아 여성 연예인들이 엄청난 공연료를 받고, 김정일 개인손님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러시아 여성 연예인들의 평양 방문은 북한 특수기관에 의해 비밀리 이뤄지고 있는데, 이들은 많은 출연료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 단 한 차례도 공개공연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91년 김정일 손님으로 평양을 방문한 모스크바 여성 합창・무용단원들을 평양 주재 러시아 대사관이 목격함으로써 처음 드러나게 됐으며, 러시아 최고 인기 여가수 알라 푸가초바(Alla Pugatcheva)도 91~92년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또 이 신문은 “김정일에게 수많은 사생아가 있으며, 확인된 아이만 하더라도 10명 정도”라고 덧붙였다.
김정은도 김일성, 김정일과 마찬가지로 여성들과 은밀한 사생활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소식통은 “김정은이 집권 초반에는 초대소나 별장 등을 별로 이용하지 않았지만 2014년 다리 이상과 발목 수술 이후엔 초대소·별장 등지에서 휴양하는 일이 잦다”며 “김정은이 자주 찾는 초대소와 별장 등지에는 키 170cm 이상 미모의 여성들이 근무하고 있다. 김정은은 김정일 생존 시 활동했던 기쁨조를 모두 해임하고 새로 (기쁨조를) 뽑았다”고 했다. 그는 이어 “최근 평양에선 ‘기쁨조’에 선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얼굴에 흠집 내는 여성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과거엔 ‘기쁨조’에 선발되면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던 평양 여성들이 “김씨네와 중앙당 늙은 영감들의 노리개질은 하기 싫다”며 거부한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첫사랑인 현송월과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북한판 걸그룹’ 모란봉악단 단장인 현송월은 노동당 국제부장과 《로동신문》 책임주필을 지낸 현준극의 조카로 김정은보다 다섯 살이 많다. 연상의 여인인 성혜림과 연인 관계였던 아버지 김정일은 쓰라린 경험 때문이었던지 둘 사이를 떼어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정일이 죽고 둘의 관계는 다시 가까워졌다.
강명도 경민대 교수는 “현송월이 그 나이에 인민군 대좌(대령) 계급을 단 것은 김정은의 총애가 없다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암살대 조직
실제 김정은은 모란봉악단 공연이 있을 때마다 현송월을 자신과 가까운 곳에 배석시키고 있다. 심지어 지방을 방문할 때도 현송월을 수행시켜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는 소문도 있다.
문건에 따르면 김정일은 ‘김일성 부자 세습체제’를 반대하는 인사를 극비리에 숙청하기 위해 국가정치보위부 내에 비밀단체인 암살대를 조직, 직접 지휘했다.
〈암살대는 의사, 저격수, 운전수 등 15~20명으로 이뤄져 있으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령사항을 즉각 수행한다. 76년 3월 교통사고로 발표한 당시 정무원 부총리 남일(당시 6l세)의 사망도 실은 ‘암살대’에 의한 처단임. 김정일은 남일이 소련의 비호하에 주석이 되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죽이기로 마음먹음. 김정일은 암살대에 평양〜남포 간 고속도로에 대형화물트럭을 세워놓았다가 달려오는 남일의 승용차로 돌진, 충돌하여 죽이라고 명령. 암살 후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위장 보도.〉
김정은도 김정일처럼 암살대를 운영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김정은은 국가안전보위부를 이용해 자신의 반대세력을 축출, 처단하고 있다. 보위부에서 제거 대상자의 비리나, 김정은을 비난하는 내용을 캐내면 여지없이 처형한다고 한다. 장성택,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변인선 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한광상 당 재정경리부장, 마원춘 국방위원회 설계국장 등의 처형, 숙청도 보위부의 작품이다.⊙
글 | 최우석 기자
■ “어머니 생각난다” 김정일 ‘눈물젖은 두만강’ 자주 불러
▲평양의 한 호텔 지하에 있는 화면반주음악장(한국의 노래방)에서 일하는 여성 봉사원이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여성 봉사원은 북한 뿐 아니라 한국·중국 노래, 팝송을 부른다. [사진 중앙포토]
중국 내 북한식당 종업원이 탈북하면서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들이 식당에서 부르는 한국 노래도 그 가운데 하나다. 북한에서는 이를 ‘계몽기가요’라고 부른다. 해방 이전의 대중가요를 말한다. ‘목포의 눈물’, ‘ 황성옛터’, ‘나그네 설움’, ‘눈물젖은 두만강’ 등 1920년대부터 해방전까지의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노래들이다. 한국의 KBS ‘가요무대’에서 주로 들을 수 있는 곡들이다. 나라를 빼앗긴 한민족의 눈물겨운 처지와 민족적 울분을 반영한 노래로 일제에 대한 항거의 정서가 깔려 있어 북한 주민들에게 부르게 하고 있다.
/화면반주음악장(한국의 노래방). [사진 중앙포토]
‘계몽기가요’를 확산시키는데 가장 앞장 선 사람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김 위원장은 계몽기가요를 민족의 귀중한 음악유산으로 생각했다. 김 위원장은 “일부 사람들이 계몽기가요를 덮어놓고 부르지 못하게 한다는데 옳지 않다”며 “텔레비젼 방송과 소리 방송(라디오)으로 내보내라”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일제 항거 내용 담긴 남한 옛 노래
평양음악무용대학 정규과목으로
한국 손님 발길 끊긴 해외 북한식당
팝송 ‘마이웨이’, 중국 노래 불러
김 위원장은 계몽기가요 가운데 ‘눈물젖은 두만강’을 특히 좋아했다. 그는 2007년 노동당 중앙위원회 문학예술부문 책임일꾼들과 한 담화에서 “몇해(2002년) 전에 외국방문을 마치고 두만강을 건널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눈물젖은 두만강’이었다”며 “우리 어머님(김정숙)님께서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건넜던 강이라 이 노래를 들으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김일성 탄생 90주년과 조선인민군 창건 70주년을 맞아 2002년 만든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의 첫 노래로 ‘눈물젖은 두만강’을 넣기도 했다.
김 위원장의 지시로 계몽기가요는 북한 내부 뿐 아니라 해외식당에서도 자유롭게 부를 수 있게 됐다. 북한은 계몽기가요를 확산시키면서 주의사항도 붙였다. 계몽기가요와 해방 이후 한국에서 만들어진 노래들을 잘 구별할 것을 주문했다. 10년 전 중국 내 북한식당으로 일하다 탈북한 조나경씨는 “1980~90년대 한국에서 나온 노래 가운데 계몽기가요와 비슷한 유형의 노래들이 있어 계몽기가요로 잘못 알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노래가 ‘홀로 아리랑(서유석 노래)’ 이다. 조씨는 “노래 제목에 ‘아리랑’이 붙어있어 착각하기 쉬웠고 리듬도 계몽기가요와 비슷해 헷갈렸다”고 설명했다.
▲한국 노래는 ‘계몽기가요’라 불리는 해방 전 대중가요로 ‘목포의 눈물’ ‘ 황성옛터’ ‘번지없는 주막’ 등이 있다. [사진 중앙포토]
북한은 지난해부터 계몽기가요를 ‘민족문화’로 재평가하고 조선중앙TV에서 심심찮게 등장시키고 있다. 북한 최고의 음악·무용 교육기관인 평양음악무용대학은 계몽기가요를 정규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북한이 계몽기가요로 분류한 노래는 600여곡이다. 이 가운데 일부를 편곡하기도 했다. 북한은 편곡할 때 당대의 시대감이 살아나게 하려고 악기 편성을 요란하게 하지 않았다.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한 탈북자 최순영씨는 “많은 악기를 사용하면 본래의 맛을 살릴 수 없고 오히려 억지로 꾸민 맛이 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수들에게도 계몽기가요는 노래에 담겨져 있는 감정을 살리기 위해 소박하게 부를 것을 주문한다고 한다. 최씨는 “김 위원장의 지시로 계몽기가요를 튀지 않게 불렀고 복장은 전통의상을 주로 입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해외 북한식당의 출입을 자제할 것을 권고했다. 따라서 한국 사람들이 중국 내 북한식당에서 계몽기가요를 들을 기회가 사라졌다. 중국 베이징에 사는 중국 동포 김기석씨는 “한국 사람들이 북한식당을 찾지 않아 종업원들이 공연할 때 계몽기가요 대신에 중국 손님들을 위해 중국 노래와 팝송을 주로 부른다”고 말했다. 이들이 부르는 팝송은 ‘마이 웨이(My Way)’, ‘탑 오브 더 월드(Top of the world)’, ‘예스터데이(Yesterday)’ 등이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
■ 2017.01.27 숙청설 돌던 김옥(김정일 마지막 부인) 알고 보니
▲김정일의 마지막 부인 김옥(왼쪽)이 2011년 5월 북·중 정상회담 뒤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했다. [중국 CC-TV 캡처]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생모 고용희(1953~2004)의 무덤을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당초 고영희로 알려졌으나 미국 거주 중인 김정은의 이모부 이강의 인터뷰 통해 고용희로 밝혀짐)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 부근에 고용희 탄생 60주년인 2012년 6월 16일 초호화 묘로 조성해 놓고 노동당과 군부 간부 등만 단체참배를 허용할 뿐이다. 커티스 멜빈 미국 존스홉킨스대 연구원은 무덤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고용희가 재일동포 출신이라는 점과 그 친척 중에 탈북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고용희의 여동생 고용숙과 오빠 고동훈은 탈북해 각각 미국과 유럽에 살고 있다.
호위사령부 출신 탈북자 증언
고용희, 호감 가졌던 김옥 발탁설
“섬세하고 눈물 많았던 김정은
엄격히 키워 고집 있는 사람 돼”
김정일의 비밀 가장 많이 알아
장성택과 달리 비자금 내놓고
정치 불관여, 구명 요청 했을수도
여기에 더해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북한 호위사령부(한국의 대통령 경호실) 출신의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을 실제로 키운 사람은 고용희가 아니라 김옥(김정일의 마지막 부인)”이라며 “김정은은 생모보다 자신을 키운 김옥에게 더 많은 정이 들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생모인 고용희는 무용수 출신이라 그런지 육아에 관심이 많지 않았고 김정은은 고용희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못 느꼈다”고 주장했다. 이는 고용희가 자신들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김옥을 발탁했다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용희는 김옥과 친했다고 한다. 대북 소식통은 “김옥의 할아버지가 도쿄대를 졸업한 수재라 재일동포 출신인 고용희가 김옥에게 각별한 호감을 가졌다”고 밝혔다.
김정일이 생모인 김정숙(1917~49)을 우상화한 것에 비해 김정은은 고용희의 우상화에 다소 소극적이다. 노동당 중앙위원회 영화문헌편집사가 2012년 만든 기록영화 ‘위대한 선군조선의 어머님’(85분)을 제작하게 하고 노동신문 2012년 2월 13일 4면 서사시에 ‘평양어머님’ 정도를 깜짝 등장시킨 게 거의 전부다. 자식 된 기본 도리에 머무는 수준이다.
김정은의 육아교육은 김옥이 담당했다고 한다. 그것도 호되게 훈련을 시켰다는 것이다. 대북 소식통은 “아기들마다 차이가 있는데 김정은은 세 살 넘어서야 겨우 말이 트였다”고 말했다. 말이 늦게 트인 데다가 성격이 섬세하고 눈물이 많아 각별한 배려가 필요한 아이였다고 한다. 대북 소식통은 “김옥은 김정은이 최고지도자의 자식이지만 때로는 매를 들기도 하고 말썽을 피우면 방구석에 무릎을 꿇리고 양손을 들게 했다”고 말했다.
[“김정일보다 22살 아래인 김옥 반말 사용”]
1964년생인 김옥은 북한의 예체능 고등종합 교육기관인 금성학원 출신으로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그리고 보천보전자악단과 함께 김정일 시대를 대표하는 왕재단 경음악단의 피아니스트가 됐다.
김정일과의 인연은 1980년대 후반 왕재산 경음악단에서 눈에 띄어 김정일의 기술서기로 들어가면서 시작됐다. 기술서기는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이상 간부들의 건강을 보살피는 직책으로 주로 간호사들 중에 선발된다. 김정일에게는 여러 명의 기술서기가 있는데 이들은 일반 간부의 기술서기와 달리 우리의 비서에 해당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김옥이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김정은의 ‘가정교사’ 역할을 하게 됐다.
탈북민 인터넷 신문인 뉴포커스 장진성 대표는 김옥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얘기를 들려 주었다. 장 대표는 “김옥이 김정일보다 나이가 22살 아래지만 아무 거리낌없이 반말을 하는 사이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김정일은 오히려 그런 모습을 즐겼고 감상하듯 웃으며 넘겨 버리곤 수했다고 한다. 또 장 대표는 “정치국 위원, 당 비서들도 그런 지위를 누렸던 김옥에게 김정일을 숭배하듯 최고의 경어를 썼고 머리를 조아렸다”고 덧붙였다. 장 대표는 노동당 대남부서인 통일전선부 ‘101 연락소’에서 근무했다.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은 그런 김옥의 엄격한 지도를 받으며 성장하면서 어릴 때와 달리 대범해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북한에 ‘담벽도 문으로 생각하고 밀고 나간다’는 말이 있는데 김정은은 한번 결심하면 완강하게 밀고 나가는 고집 있는 사람이 됐다”고 덧붙였다.
김옥은 김정일의 군부대 및 산업시설 시찰 등 현지지도 수행은 물론 외빈 접견에 참석할 정도로 그의 신임이 두터웠다. 대북 소식통은 “김옥이 그런 업무를 수행할 정도로 정치·군사·외교·경제 분야에서 ‘똑소리’가 났다”고 말했다. 김옥은 김정일의 방중·방러 때마다 동행하면서 그를 보좌했다. 아울러 조명록(1928~2010) 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2000년 미국을 방문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 등과 면담할 때도 수행원 자격으로 배석했다. 대북 소식통은 “지금도 김정은이 김옥의 능력을 높게 평가해 자문을 구할 때가 많다”고 털어놓았다.
김옥은 2004년 고용희가 유선암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한 이후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역할은 김정일이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김정일과의 사이에 아들(13)을 1명 낳았다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 우상화를 위해 만든 기록영화 ‘위대한 선군조선의 어머니’에는 생전 그녀의 영상이 담겨 있다. 1 영화 마지막 장면으로 등장한 김정일과 고용희의 사진. 2 선글라스를 끼고 현지지도를 수행하는 모습. 3 어린 김정은과 함께한 모습. [영상 캡처]
[고용희 사망 이후 퍼스트 레이디 역할]
김정일이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김옥의 역할은 더 커졌다. 김정일은 20여 년 동안 자신의 곁에서 ‘1급 참모’ 역할을 해 온 김옥을 더 믿고 의지했다. 김정일은 애당초 부자 세습에 다소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2004년 12월 접촉했던 베이징의 북한 고위 관료로부터 들은 내용이라며 “김정일이 ‘내 대(代)에서 부자세습이 가능하겠나’라고 털어놓았다”고 전했다. 대북 소식통도 “김정일은 자신이 후계자가 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권력 싸움을 자식들에게는 더 이상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갑산파 사건(1967년), 급진 군부세력(69~70년), 김동규 사건(76년) 등 세 번에 걸쳐 대대적인 숙청을 강행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김일성 지시에 따른 것이고, 김동규에 대한 숙청은 김정일이 직접 지시했다. 그래서인지 김정일은 김동규 사건을 가장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김동규는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동료로 1974년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는 데 적극 찬성했던 인물이다. 그 바람에 김일성-김일(1910~84?국가 부주석)에 이은 권력 서열 3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김일성은 건강에 문제가 있어 업무에 관심을 쏟지 못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2인자였다. 그런 김동규가 76년 6월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김정일을 비판한 것이다. 모든 것을 김정일 중심으로 운영하는 것과 후계 작업을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을 문제로 지적했다. 아무리 김동규라도 김정일과 지도부는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김동규를 포함해 그에 동조했던 이용무 군 총정치국장, 지경수 당 검열위원장, 지병학 인민무력부 부부장 등을 숙청했다.
그런 과정을 거쳤던 김정일은 ‘세습을 하면 내부적으로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다. 대북 소식통은 “김정일은 중국식 집단지도체제, 태국식 입헌군주제 등을 고려했지만 건강 문제가 생기면서 그런 생각을 접었다”고 말했다.
[김옥 평양 인근 거주, 친정 일부는 수용소행]
김정일은 건강 이상이 생긴 이후 대리통치를 장성택·김경희 부부에게 맡겼다. 그리고 동향보고는 김옥을 통해 받았다. 김옥의 능력과 판단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옥의 직책은 국방위원회 과장으로 알려졌다. 대북 소식통은 “장성택 등 당·군 간부들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추천했지만 김정일은 김옥의 추천을 더 비중 있게 들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정은을 추천한 이들은 고용희의 장남인 김정철이 여성스럽고 유약한 반면 김정은은 승부욕이 강해 김정일을 닮았다고 본 것이다. 『김정일의 요리사』라는 책을 쓴 후지모토 겐지도 “김정일이 김정철에 대해서는 ‘여자 같다’며 못 미더워했다”고 말했다. 대북 소식통은 “김정철은 여성 관계가 복잡했고 일본을 자주 드나들면서 자본주의에 너무 빠져 후계자로서 부적절했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사망하기 이전까지 김옥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때문에 최고 권력에 오른 김정은은 아버지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김옥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자신을 키워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은 있지만 반면에 자신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이기도 했다. 대북 소식통은 “이를 눈치챈 김옥은 김정은이 집권하자마자 과거 김정일이 자신에게 준 비자금을 그에게 바치면서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구명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이에 김정은이 감동을 받아 김옥의 요청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반면 통치자금의 일부를 관리하고 있던 장성택은 달랐다. 장성택은 중국에 숨겨놓은 비자금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김정은에게 주지 않았다. 김옥과 장성택의 차이점이었다. 대북 소식통은 “김옥에게 ‘신의 한 수’를 가르쳐준 사람이 김정일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때 김옥의 숙청설이 나돌았다.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지난해 7월 “김옥과 그의 친정 식구들이 김정은이 집권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2013년 7월께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보도했다. RFA는 “김옥의 남동생인 김균이 고용희가 사망한 이후 김옥이 김정일의 총애를 받자 안하무인 격으로 행동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고 설명했다. 김균은 2011년 45세에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에서 일약 총장 직무를 대리하는 제1부총장으로 발탁됐다.
하지만 김옥은 현재 평양 인근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친정 식구 가운데에 일부가 RFA의 보도대로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한다.
고수석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
□김정일의 일생
폭군 김정일 졸하다 11.12.17
■ 강성대국의 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