護國11/ 北共의 대한민국 挑發史1
■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
/아웅산 묘소 테러로 순국한 외교사절들의 마지막 모습
1983년 10월 9일, 전두환 대통령은 동남아 6개국을 공식 방문하기 위해 첫 번째로 미얀마(당시 버마)를 방문했다가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북한 특수 요원들에게 폭탄 테러를 당했다. 이 사고로 당시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심상우 국회의원(개그맨 심현섭 씨의 부친),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 기자 등 수행원 17명이 현장에서 순직하고 15명이 중경상을 입는 비극이 일어났다.
사건 당일인 1983년 10월 9일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한 수행원들과 경호원들은 아웅산 묘소에서 참배 행사를 위한 예행연습을 하고 있었고 사건 전날 미리 북한의 테러범 3명이 아웅산 묘소 건물 천장에 폭탄을 설치하고 아웅산 묘소 근처 숲 속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 폭탄은 1~2km의 먼 거리에서 원격으로 터트릴 수 있는 폭탄으로, 테러범 중 한 명인 신기철이 정확하게 10시 30분에 태극기를 휘날리는 벤츠 차량이 들어가고 애국가가 나오자 전두환 대통령이 도착한 걸로 착각하여 폭탄 3개를 터트렸다. 이계철 대사는 현장에서 순직했고 전두환 대통령은 간발의 차로 화를 면했다.
아웅산 묘지 폭탄 테러 사건은 김정일이 김일성의 허락을 받아서 인민군 정찰국 산하 특수 8군단 소속 특공부대 강창수 소장에게 명령을 내려 일어난 사건으로, 폭탄 테러를 맡은 행동대원은 조장 진모 소령, 조원 강민철 대위, 신기철 대위 3인 1조였다. 남한보다 북한과 더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던 미얀마 정부는 북한에 의한 테러로 밝혀지자 곧바로 북한과 단교를 선언하고 북한의 외교관과 그의 가족들이 48시간 안에 미얀마를 떠나도록 했다.
테러범 중 신기철은 체포된 후 도주하다가 경비병 총에 맞아 사망했고, 진모 소령은 줄곧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되었으며, 강민철은 수사에 적극 협조한 점이 참작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집행 유예로 25년간 장기 수감 생활을 하다가 2008년 5월 18일 양곤 인세인 교도소에서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건 후 북한과 단교를 유지해 오던 미얀마 정부는 2007년 4월 26일 북한과 재수교를 했다. 우리나라는 29년간 양국 정상 간 왕래가 없다가 2012년 5월 14일 베이징에서 한 · 중 · 일 정상 회담을 마친 이명박 대통령이 극비리에 미얀마를 방문하였고 같은 해 10월 8일에 테인 세인 미얀마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였다.
폭탄 테러 사건 이후 일 년에 한 번, 아웅산 장군 순교의 날에만 한번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던 아웅산 국립묘지가 2013년 6월 1일자로 일반인들에게 완전히 개방되었다.
이 사고로 아웅산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도열중이던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장관,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김재익 경제담당 대통령 수석비서관 등 17명이 순직하고 1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미얀마 당국의 수사 결과 이 사건은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 진모 소좌, 김민철 상위, 신기철 상위 등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밝혀졌다.
미얀마 정부는 이 사건의 수사를 매듭지으면서 11월 4일 낮 1시를 기해 북한과의 외교를 단절하는 한편, 양곤에 있는 북한대사관 직원들을 국외로 추방했다. 그뒤 12월 9일 양곤 지구 인민법원 제8특별재판부에서는 테러범에 대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한국 정부는 국민장 직후인 10월 14일 정국 수습의 일환으로 김상협 국무총리의 사표를 수리하고, 진의종을 국무총리로 하는 내각개편을 단행했다.
연합뉴스
■ 잊지 않습니다, 1983 아웅산 테러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택시 운전사 소웨나잉(49)씨는 아웅산 묘역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꽝!" 진동이 무릎까지 타고 올라왔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북한이 한국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폭탄 테러를 저질렀다는 거예요."
소웨나잉씨가 32년 전 일을 소상히 기억하는 것은, 요즘 들어 "아웅산 묘역으로 가달라"고 부탁하는 한국인 손님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들의 목적지는 묘역 입구에 자리한 '대한민국 순국사절 추모비'다. 이곳에 매일 100~ 150명 정도의 한국 추모객이 다녀간다. 미얀마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사전 비자가 필수적이고, 지리적으로 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숫자다. 이백순 주(駐)미얀마 대사는 "일부 여행사가 추모비 방문을 관광 코스에 포함시켜서 하루에도 관광버스가 두세 대씩 그 앞에 선다"고 설명했다.
아웅산 테러는 벌어진 지 한 달 만에 북한 정찰국 소행임이 드러났다. 생포된 주범 강영철(작전명 강민철)의 자백이 결정적이었다. 그런데 북한은 지금까지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고 있다. 우리나라 현대사 교과서 대부분도 이 참극을 다루지 않았다. 아웅산 테러는 기억에서 잊혀가고 있었다.
▲미얀마 아웅산 묘역 입구에 자리한 ‘대한민국 순국사절 추모비’. 아웅산 테러 당시 순국한 17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매일 100~150명의 한국 추모객이 이곳을 찾는다. /김형원 특파원
반전은 2012년에 일어났다. 이명박 대통령이 아웅산 묘역을 방문했는데, 묵념을 올릴 만한 장소가 없었다. 변변한 추모비 하나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는 여론이 조선일보를 통해 형성됐고, 우리 외교부가 미얀마 정부와 협의를 벌여 2년 만에 추모비가 섰다. 제막식은 지난해 현충일에 열렸다. 가로 9m, 높이 1.5m 크기에 아웅산 테러 당시 순국(殉國)한 17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추모 비 가운데에 틈이 벌어져 있는데, 이 틈을 통해 폭탄 테러 현장을 건너볼 수가 있다. 관리 부스에서 일하는 아우뮤(19)씨는 "추모객들은 묵념을 마치고, 그다음에는 폭탄이 어디서 터졌는지를 물어본다"고 말했다.
일주일이면 1000명이 넘는 추모객이 아웅산 묘역으로 발길을 향한다.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제대로 된 나라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일보 김형원 미얀마 특파원
■ 제1연평해전
1999년 6월 7일에서 11일에 거쳐 북한 경비정이 NLL을 침범을 거듭하면서 남한 해군과 충돌을 지속하였다.
6월 15일 오전 어뢰정 3척을 포함한 7척의 북한 함정이 남한 관할해역을 침범하였다. 남한 해군이 이에 맞대응하자 북한함정이 소총 사격과 25㎜ 기관포 발사 등의 공격을 해왔다. 남한 함정은 40㎜와 76㎜ 기관포로 응사하여 어뢰정 1척을 침몰시키고 대형 경비정을 대파했으며 중형 경비정 2척 반파, 소형 경비정 2척 파손이라는 전과를 기록했다.
북한군의 인명피해는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으나 30여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한 해군은 고속정과 초계함 일부에 경미한 파손을 입었고 군인 9명이 경상을 입었다.
▲남한과 북한의 해상경계 남한과 북한의 해상경계선을 표시한 지도
1999년 6월 7일 북한은 자국의 꽃게잡이 어선 보호를 이유로 경비정 1척의 북방한계선(NLL) 침범을 자행하였다. 이어 8일까지 북한어선 15척은 NLL을 4~7㎞까지 침범하였고 북한 경비정은 계속해서 3~4회 침범과 철수를 반복하였다. 남한 해군은 국제법에 의거하여 고속정 2개 편대의 신호로 철수를 요구하다가 북한함정의 행위가 의도적이라고 판단하고 고속정들로 진입차단 기동작전을 펼쳤다.
9일부터 북한은 경비정을 10척으로 증강하였고 어뢰정을 추가하여 편대를 구성하면서 NLL을 7~13.7㎞까지 침범하였다. 이에 남한 해군은 초계함 2척, 고속정 5개 편대를 현장에 투입하였다. 6월 11일 북한 경비정 4척이 NLL을 13.9㎞ 침범하여 남한 고속정에 충돌을 시도하자, 남한 고속정은 이에 맞대응하여 선체를 충돌시키는 밀어내기식 공격을 하였다. 이 충돌로 북한은 중형 경비정 2척 대파, 2척이 손상의 피해를 입은 반면 남한 고속정 4척은 경미한 손상만을 입었다.
6월 15일 오전 8시 45분, 북한 경비정 4척이 다시 NLL을 침범하여 남한 고속정에 충돌을 시도하였고 오전 9시 4분에는 어뢰정 3척을 포함한 7척의 북한 함정이 남한 관할해역을 침범하였다. 남한 고속정 6척이 이에 맞대응하여 역충돌을 시도하자 북한함정에서는 수류탄 4~5발을 남한 함정에 던졌고 인근에 있던 북한의 경비정과 증원된 3척의 경비정까지 합세한 총 10척의 북한 함정이 소총 사격과 25㎜ 기관포 발사 등의 공격을 해왔다.
이에 남한 함정은 40㎜와 76㎜ 기관포로 응사하여 교전이 일어난 지 14분여 만에 북한 함정 중 어뢰정 1척을 침몰시키고 대형 경비정을 대파했으며 중형 경비정 2척 반파, 소형 경비정 2척 파손이라는 전과를 기록했다. 북한군의 인명피해는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30여 명 이상이 사망했고 70여 명 이상이 부상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한 해군의 피해는 4척의 고속정과 1척의 초계함이 기관실 및 선체 일부에 경미한 파손을 입었고 군인 9명이 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북한이 NLL을 무시하고 12해리 영해를 주장함으로써 영해문제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 第二延坪海戰 서해교전
▲제2연평해전서 출동했던 참수리 357호 모형,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북한의 북방한계선(NLL) 침범으로 발생한 전투로, '서해교전'으로 불리다가 2008년 4월 '제1연평해전'에 이은 '제2연평해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99년 6월 7일에 발생한 제1연평해전 이후에도 북한 경비정의 NLL침범은 간헐적으로 발생했으며 2002년 6월 29일 오전 9시 54분에도 북한 경비정이 연평도 서쪽 7마일 해상에서 다시 NLL을 침범했다. 이에 남한 해군은 참수리 357, 358의 고속정 2대를 출동시켜 대응기동과 경고방송을 하며 접근했다. 오전 10시 25분, 북한 경비정은 갑자기 아무런 징후도 없이 참수리 357호에 85㎜포를 비롯한 모든 포를 동원하여 선제 기습포격을 하였다.
양측 함정 사이에는 즉각적인 교전이 시작되었고 남한 해군의 고속정과 경비 중이던 초계함 등이 교전에 가담하여 북한 경비정에 대응사격을 함으로써 10시 43분 북한 경비정은 퇴각했다. 교전결과 북한경비정은 외부갑판이 대부분 파괴되어 반파되었고 전사 13명, 부상 25명 이상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한 해군도 윤영하 대위를 포함한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했으며 참수리 357 고속정은 침몰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군 교전규칙이 기존의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밀어내기 작전)-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의 5단계 소극적 대응에서 '시위기동-경고사격-조준격파'의 3단계 적극적 응전 개념으로 변경되었다.
2015-06-03 제2 연평해전 당시 북한 군부와 北 경비정 교신 기록 최초 공개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발포명령만 내리면 바로 발포하겠다” 이틀 전 도발징후 묵살한 김대중 정부
“불당소리 들리나”(北 8전대사령부)
“포성소리 들린다”(北 경비정 388호)
⊙ “제2 연평해전은 金正日의 지시에 의해 해군사령부가 직접 지휘한 도발”
⊙ 해군작전사령부 분석문건, ‘6월 27일 北 등산곶 경비정 강력한 사격의지 보였다’
⊙ 확전 우려한 ‘보복사격 중지’로 북한에 잘못된 신호 보내 천안함·연평도 사건 유발
⊙ 한미연합사 한국 측, 對美보안으로 美와 도발정보 공유하지 않아
《월간조선》(月刊朝鮮)은 2002년 제2 연평해전 당시 우리측의 참수리 357호 고속정과 교전을 벌인 북한 경비정들이 북한 군부와 나눈 교신 내용을 단독으로 입수했다. 제2 연평해전은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경, 서해 북방한계선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 2척이 아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를 기습적으로 공격한 무력도발이다. 30여 분간의 전투 끝에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했다.
교신 내용을 살펴보면, 김대중(金大中) 정부하에서 제2 연평해전의 성격을 ‘적(敵)의 의도적 도발’이 아닌 ‘경비정 단독 범행’ 등으로 몰았던 것들이 허구였음이 드러난다. 당시의 논란을 잠재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셈이다.
교신 내용은 제2 연평해전 당시 대북(對北) 감시부대가 수집해 국방부장관, 국방정보본부, 합참작전본부, 해군작전사령부 등 관련 부대에 통보한 내용으로, 통상 특수정보(SI·Special Intelligence)라고 불린다. 이와 함께 《월간조선》은 제2 연평해전 이틀 전인 2002년 6월 27일 북한 감시부대가 북한 경비정의 결정적 도발징후를 포착한 ‘SI 15자’도 전격 공개한다. 이에 따라, 당시 군 지휘부의 정보 판단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교신 내용을 보면, 당초 서해교전이 북한 8전대사령부 주도로 이뤄졌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서해함대사령부 이상급에서 도발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제2 연평해전 당일 해전이 종료되기 직전, 황해도 소재 신천통신중계소가 북한군 해군사령부의 지시사항을 8전대사령부로 중계하고 있었다.
“신천중계소 중계는 서해함대 이상 부대가 간여했다는 증거”
▲2002년 10월 4일 국방부에서 열린 국회 국정감사에서 한철용 당시 5679부대장(소장)이 서해교전 직전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경고하는 정보보고서를 올렸다면서 블랙북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오른쪽 끝에 한 장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은 이상희 합참 작전본부장이다.
공개한 교신 내용은 긴급 시초보고(기지첩보 또는 생첩보)다. SI는 긴급 시초보고, 낱(단편)첩보, 종합정보보고서(블랙북) 등 세 가지 방법으로 전파된다. 북한군이 직접 교신한 내용을 기지에서 수집해 정보 가공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해당부대에 통보하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군의 노골적인 도발적 용어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군 관계자는 “신천중계소가 북한 서해함대사령부 이상의 상급부대를 위한 중계소임을 감안할 때, 최소한 서해함대사령부 이상의 상급부대가 간여돼 있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했다. 당일 그 시각 즈음, 신천중계소는 8전대사령부에 “사격을 했으니 이탈해서 올라오라고 (8전대에) 전해달라”라고 통보했다. ‘사격’과 경비정의 ‘이탈’을 언급하며 8전대에 사격을 마쳤으니 이탈해서 올라오라는 내용을 경비정에 ‘통보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우리 군 관계자는 이렇게 해석했다.
“북 해군사령부와 서해함대사령부는 선제공격 보고를 8전대사령부로부터 받고 교전한 684호에 직접 신천중계소를 통해 ‘이탈해서 올라오라’고 통신 결속을 시도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교신이 불가능하자, 8전대사령부에 684호와 통신해서 현장을 빠져나오라는 지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의도대로 선제공격을 했으므로 ‘이탈’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해전 당일 북 해군사령부의 지시 내용은 우리 측 임동원(林東源) 외교안보특보의 “우발적 경비정 단독 도발행위”, “8전대 이상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연합사가 공식적으로 통보해 왔다”는 주장과 전적으로 배치된다.
임동원 특보는 당시 북한의 도발을 “아랫사람들(경비정)이 한 일”이라고 통보해 왔다고 언급했다. 임 특보는 저서 《피스메이커》에서 제2 연평해전과 관련, “이튿날 아침 북측은 핫라인을 통해 ‘이 사건은 계획적이거나 고의성을 띤 것이 아니라 순전히 아랫사람들끼리 우발적으로 발생시킨 사고였음이 확인됐다’며 ‘이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내용의 긴급통지문을 보내왔다”고 밝힌 바 있다. 임 특보는 또 저서에 “며칠 후 한미연합사령관이 ‘제8전대 이상의 상급부대에서 도발했다’는 징후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정보판단을 공식 통보해 왔다”라고 기술했다.
북한 감시부대가 수집한 통신 중계소의 중계 내용, 즉 황해도 소재 통신 중계소가 해군사령부의 지시사항을 8전대사령부로 중계한 사실과 내용을 보면, 임 특보의 진술은 사실 왜곡인 셈이다.
북한 감시부대장을 지낸 한철용(韓哲鏞) 장군(육사 26기·예비역 육군소장)은 2010년 4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제2 연평해전 당시 8전대사령부는 3차례 ‘발포’를 포함하는 대남공격을 지시했다”며 “아랫사람들끼리의 우발적 도발이 아니라 8전대사령부가 도발을 지시했다”고 밝혔었다.
군 관계자는 “도발 이틀 전인 6월 27일에도 신천중계소가 경비정과 직접 통신 결속을 시도하는 것이 포착되기도 했다”면서 “이는 해군사령부가 중간 제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지휘했다는 증거”라고 했다.
“해군사령관 김윤심이 총 지휘”
▲북한 해군사령관 김윤심 대장.
김일성대를 졸업하고 통일전선부 요원으로 있다 2004년 탈북한 시인 장진성씨(뉴포커스 대표)는 “제2차 서해교전은 통전부의 기획안에 따라 북한 해군사령부 김윤심 대장이 총지휘한 사건”이라며 “당시 경비정(684호) 함장이 평양에 급거 다녀왔다”고 진술했다. 김윤심은 제1차 연평해전의 주역으로 서해함대사령관으로 근무하다 제2차 연평해전이 발발하기 전인 2002년 4월 13일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의 뒤를 이어 해군사령관으로 승진한 인물이다. 장 대표는 “김정일은 2002년 5월 1일 국제노동절에 맞춰 공장시찰을 하던 전통을 깨고 불쑥 해군사령부를 시찰해 서해교전과 관련한 점검을 했다”면서 “5월 2일자 《노동신문》을 보면, 김정일 가까이 있던 군인들 대부분이 연평해전 참전자들”이라고 했다.
그는 “통전부가 2차 서해교전을 서울월드컵이 진행되던 때로 정한 것은 NLL전략의 연장선에서 북방한계선 문제를 국제화하기 위한 것”이라며 “해군사령부를 방문한 김정일은 ‘남조선 함정과 전투하려면 함선에 방탄철갑을 입히는 것보다 T-34 전차포를 부착하고 소련제 다발식 고사총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화력을 보강하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그는 “김정일은 월드컵 기간 중 대놓고 군사교전을 벌인 것에 대한 국제비난이 집중되자, 그 모든 책임을 8전대사령관 등 애매한 장성 몇 명만 해임시키는 방법으로 돌렸다”며 “그들은 훗날 명예회복은 물론, 영웅으로 내세워 남한에 대한 적대선전의 주인공들로 활용했다”고 했다.
그는 평양시 대동강구역 문수동에 위치한 조선인민군 11호병원에서 제2 연평해전 부상병을 대상으로 교전 상황을 청취했다. 그는 “통전부 국장과 함께 ‘취재대상들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하고, 인민무력부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8전대 부상병들을 위한 특별병동에서 교전소감을 청취했다”며 “아군의 승리만을 선전하는 북한에서 처참한 상처를 입은 부상병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라고 했다.
金正日, 해전결과 직접 보고받았을 가능성 배제 못 해
▲지난해 6월 29일 제9주기 제2 연평해전 기념식이 평택 해군2함대사령부에서 열렸다. 이날 개관한 서해수호관에서 당시 손에 상처를 입은 권기형씨가 당시 교전 때 사용했던 무기를 가리키고 있다.
제2차 연평해전 이튿날인 6월 30일, 8전대사령부를 이륙한 헬기 2대가 평양 북방 민간 비행장인 순안 비행장에 착륙했다. 인공위성 사진에 의하면, 당시 헬기 2대가 착륙한 비행장에 세단 1대와 중형버스 1대가 주차되어 있는 것이 식별됐다.
한철용 장군은 “국방부와 북한 감시부대는 ‘부상자 수송인가, 작전 진두지휘 군고위층 수송인가’에 대해 위성사진 판독을 놓고 대립했다”면서 “국방부는 해전 부상자 수송이고, 북한 감시부대는 현지에서 작전을 진두지휘한 북한군 고위층 수송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북한 감시부대가 군 고위층 수송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환자 수송이라면 첫째, 세단과 중형버스 대신에 구급차(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어야 하고, 둘째 군 병원(인민군 11병원은 대동강 남쪽에 위치)이 아닌 굳이 평양 북방 순안 비행장까지 날아갈 필요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 장군은 “김정일이 특각(별장)에서 직접 전과(戰果) 보고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당시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확증은 없지만 김정일이가 어떤 방법으로든 해전에 관여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불문가지”라고 했다.
김정일은 대남 도발을 하거나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는 지하시설이 있는 특각에 숨어 지내는 습성이 있다. 당시에도 평소 애용하는 묘향산 특각이나 평양 북방 근교의 자모산 특각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그는 또 “군 고위층이 탑승한 헬기 2대가 순안 비행장에 착륙한 것도 김정일에게 해전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자모산 특각이나 묘향산 특각으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교전상황만 중계한 北 388호 경비정
북 경비정 684호와 또 다른 경비정 388호 등 총 2척이 NLL을 월선해 침범하면서 제2 연평해전은 시작됐다. 교신 내용에 따르면, 북 8전대사령부는 신천중계소를 통해 오전 10시25분 교전이 벌어지기 약 1시간 전에 이미 “684호 등산곶 동남 4NM 구역 차지할 것”(오전 9시28분), “388호 등산곶 동남 6NM 구역 차지할 것”(오전 9시31분) 등 이미 경비정의 기동지시 구역을 NLL 이남지역으로 지정하고 있어, 명백하게 의도적 도발임을 보여주고 있다.
388호는 우리 고속정 편대(2척)를 유인해 분산시킨 후 안전을 위해 기동하겠다고 8전대에 보고한다. 오전 10시15분 경비정 684호는 교전 직전 8전대사령부에 “고속정(참수리 357호)이 3NM까지 접근했다”라고 보고했고, 오전 10시20분 경비정 388호가 8전대사령부에 “고속정 두 척이 대기동하므로 혼란스럽다”고 보고한다. 이는 교전을 중계하려는 388호가 자신이 보호받기 위해 “보호하기 위해 기동하겠다”고 보고한 것이다.
군 관계자는 “684호가 참수리호를 공격해 교전이 벌어지면 자신이 위험하니까 교전 중계를 위해 안전한 지역으로 기동하겠다는 뜻”이라면서 “사전에 이미 전투상황을 중계하기 위해 388호가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의미”라고 했다. 교전에 참여한 684호가 파괴돼 통신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고 388호가 중계를 시도한 것이다.
▲2009년 12월 11일 경남 진해시 STX조선해양에서 최첨단 유도탄 고속함 4, 5번함인 황도현함(400t 오른쪽)과 서후원함(400t)의 진수식이 열리고 있다.
“684호 침몰 위험은 없다”
우리 해군 고속정의 차단 기동이 시작되던 오전 10시25분에 252편대 고속정 2척이 북한 경비정을 향해 북진하다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동쪽으로 함수를 돌리는 순간, 북한 경비정 684호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우리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를 향해 기습적으로 선제공격을 했다.
같은 편대 참수리 358호를 먼저 지나가게 한 다음, 뒤이어 동쪽으로 함수를 돌리던 참수리 357호를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앞서 간 참수리 358호가 응전을 못 하도록 해놓고 뒤를 따르던 참수리 357호에 전차포 등을 동원해 집중포격을 가했다. 매복작전에서 후미를 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앞서 가던 참수리 358호가 대응사격을 하기 위해 선수를 돌리는 사이에 북한 경비정은 4~5분간에 걸쳐 참수리 357호를 표적 삼아 집중포격을 가했던 것이다.
북 경비정 388호는 684호 뒤쪽으로 빠져서 위치한 다음, 전투상황을 중계했다. 오전 10시25분 8전대사령부가 “불당소리(포성) 들리냐”고 하자, 388호가 10시30분 “포성소리 들린다”고 보고한다.
8전대사령부는 388호 경비정에 10시50분 “684호와 같이 북상하라”고 지시했고, 아군도 당시 등산곶 경비정 684호가 화염과 연기를 자욱하게 피우며 경비정 388호에 예인되는 것을 지켜봤다. 그 직후인 10시56분, 2함대사령부는 ‘현장 전 전력 사격중지’를 지시하고, 11시가 되자 NLL 선상의 모든 함정에 전속력으로 남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1시5분, 순위도 전탐초소는 경비정 684호에 “8전대에서 표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통보한다. 북 경비정 684호가 참수리 357고속정 공격에 의해 기관 고장이 났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표류는 기관 고장으로 항해를 못 하는 상황을 뜻한다. 8전대사령부는 388호에 “684호는 사곶으로 입항시키고 대기하라”고 지시한다.
사곶항은 북한 경비정이 출항한 모항(母港)으로 388호에 684호 예인을 맡으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684호는 통신장비도 피탄당한 듯했다. 북한 경비정 2849호가 11시20분 “684호가 통신 결속이 되지 않는다”라고 8전대사령부에 보고하고 있다. 11시35분, 북 경비정 388호는 “684호, 침몰 위험은 없다”라고 8전대사령부에 최종 보고했다. 경비정 388호는 기동 불능인 경비정 684호를 예인해 북으로 돌아갔다.
한철용 장군은 “북한의 대함 미사일 관련 전자파는 교전 동안은 물론, 교전 직후에도 탐지되지 않았다”며 “교전 후 약 4시간 만인 오후 3시경 전자파가 탐지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사건 직후, 해군은 사격중지 명령을 하달한 이유로 북한 미사일 기지에서 전자파가 탐지돼 확전이 될까 봐 사격중지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한 장군은 “결국 북한은 우리의 보복을 우려해 교전 4시간 만에 대함 미사일 전자파를 발사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제2 연평해전은 제한된 협조하에 이뤄진 것으로 판단된다. 마치 자객 염장이 장보고를 살해하듯 공작 차원의 도발로 평가된다”고 했다.
국방부, 6월 13일 ‘발포’ 등 도발정보 1차 묵살
▲2009년 6월 25일 제2 연평해전에서 순국한 고(故) 윤영하 소령의 모교인 인천 송도고에서 윤 소령의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윤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씨가 아들의 흉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한 장군은 “북한의 결정적인 도발정보가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이나 있었으나, 국방부가 의도적으로 묵살해 해군에 하달하지 않았다”면서 “그 결과로 우리 해군은 북한의 도발의도를 전혀 모른 채 평상시와 같이 교전규칙대로 차단 기동에 나섰다가 기습공격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6월 13일 대북 감시부대는 북한 해군의 8전대사령부와 북한 경비정 간의 교신 내용 중에 매우 중요한 도발정보를 감청했다. 우리 고속정을 목표로 ‘발포’라는 결정적 도발용어가 포함된 북한의 도발정보였다.
이는 14자로 구성된 도발정보(SI 14자)로, 거기에는 당시 쏠 무기(해안포 또는 미사일)까지 언급돼 있었다고 한다. 1967년 1월 19일 동해에서 우리 어선을 보호하기 위해 출동했던 우리 해군 당포함이 북한의 해안포 공격을 받아 침몰하고 승무원 39명이 전사한 대형 참사 사건을 연상케 하는 정보였다는 것이다. 해안포는 사거리가 24km 이상으로, 레이더 포착이 되지 않아 해상의 함정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다.
한 장군은 “미군의 경우는 훈련 상황이 아니고 실제 상황하에서 한·미군을 목표로 ‘사격’, ‘발포’, ‘공격’, ‘기습’ 등 도발용어가 무선교신 중에 잡히면 수집과 동시에 ‘번개통신(Flash)’으로 국방성으로 보고한다”면서 “국방부는 그 무슨 믿는 구석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비정하게 묵살해 버렸다”고 했다.
국방부, ‘단순침범’으로 수정배포 지시
당시 국방부는 북한 경비정의 의도적인 NLL 침범을 ‘단순침범’으로 평가해 언론에 발표했다. 그리고 북한 감시부대가 부대의견으로 관련 부대에 전파한 ‘의도적 침범’이란 평가를 국방부와 동일하게 ‘단순침범’으로 수정해 다시 전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북한 감시부대가 국방부의 지시를 받고 블랙북(Black Book·주요부대에 배포하는 북한첩보 관련 일일 보고서) 내용을 수정해 다시 전파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한 것이다. 북한 감시부대가 관련 부대에 ‘양치기 소년’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6월 13일 항공사진에 의해 실크웜 대함 미사일 발사대도 식별됐다. 한철용 장군은 “이는 보조 수단으로서 1차로 당시에 쏠 무기로 공격이 실패하면 2차 실크웜 미사일(사거리: 95km)로 때리려고 ‘후보계획까지 수립했구나’라고 생각했다”면서 “1차 도발 실패 시에 대비해 실크웜 미사일까지 등장했으면 심사숙고했어야 했는데, 국방부는 안일무사 일변도였다”고 했다.
6월 14일 정보장군단 회의가 정보본부장실에서 열렸다. 회의 목적은 정보사령부와 북한 감시부대의 실무자 간 사소한 언쟁으로 약 40일간 정보사가 북한 감시부대로 인공위성 사진 등 항공사진을 전송하는 장치를 차단한 사건에 대한 그 조사 결과 보고회의였다.
북한 감시부대장인 한 장군은 회의 초입에 6월 13일의 ‘발포’ 등 도발정보(SI 14자)의 심각성을 말하고, 또 항공사진으로 찍힌 실크웜 대함 미사일의 등장은 간과해서는 절대로 안 될 징후라고 강조했다. 한 장군은 “당시 권영재(權寧載) 정보본부장과 정보본부의 간부들은 당시 남북 간 평화교류와 햇볕정책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소리로 듣는 것 같았다”고 했다.
국방부는 6월 20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북한 경비정의 NLL 침범은 북한어선 단속차 월선한 것으로서 단순침범”이라며 “서해 NLL은 평온하며 이상이 없다”고 발표했다. 6월 13일 ‘발포’라는 도발용어와 쏠 무기까지 언급된 도발정보가 있었고, 항공사진으로 실크웜 대함 미사일이 찍힌 영상(사진)정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방부는 태연하게 ‘NLL 이상무’라고 기자회견 시 발표했던 것이다.
▲사거리 95km에 달하는 북한의 실크웜 미사일. 군은 사격중지 명령을 하달한 이유로 북한 미사일 기지에서 전자파가 탐지돼 확전이 될까 봐 사격중지 명령을 내렸다고 했으나 실제로 북은 교전 4시간 만에 대함 미사일 전자파를 발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6월 27일 ‘발포’ 등 결정적 도발정보 또 묵살
북한 감시부대는 해전 이틀 전인 6월 27일, 결정적인 도발정보를 수집해 국방부에 또 보고한다. 8전대사령부에서 경비정에 ‘발포’를 1회 언급했고, 경비정은 8전대사령부에 ‘발포’라고 2회 언급하며 당시 우리 고속정과 대치상황을 보고한 것이다. 이는 8전대사령부가 결심만 하면 언제든지 공격하겠다는 도발이 임박했음을 암시하는 정보였다고 한다.
위에 거론한 2건의 첩보는 수집기지의 시초보고로서, 수집기지에서 실시간으로 관련 부대와 국방부에 보고했다. 이어 북한 감시부대는 2건의 첩보를 한 건의 첩보인 ‘낱첩보 보고서’로 만들어 또 국방부에 보고했다. 이때 ‘발포’라는 도발어휘가 2회 언급됐다고 한다. 그리고 군단까지 배포되는 최종보고서인 북한 감시부대 블랙북 작성 시 ‘발포’라는 도발어휘는 2회 언급됐고, 이는 결정적인 도발정보(SI 15자)였다.
따라서 국방부는 같은 내용의 도발정보를 3건의 정보보고로 ‘발포’라는 도발용어를 도합 무려 7회(수집기지의 시초보고: 3회, 낱첩보: 2회, 최종보고서 블랙북: 2회)나 받아보았기 때문에 북이 공격한다는 사실을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국방부는 6월 13일 건처럼 도발정보를 의도적으로 묵살하고 예하부대에 하달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발포명령만 내리면 바로 발포하겠다”
기자는 북한 감시부대 한철용 장군을 만나 “‘발포’라는 도발용어만 가지고는 국민들이 도발의 심각성을 실감하기엔 좀 미흡한 점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국방장관을 지낸 천용택(千容宅) 당시 민주당 의원은 김승광(金勝廣) 특조단장(예비역 육군중장)에게 “SI 내용이 별 것 아니다”면서 “그 내용을 공개하고 나면 허탈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 장군은 다음과 같이 예를 들며 반박했다. 한 장군은 “조폭들이 일정 지역의 이권다툼에서 ‘갑’ 쪽의 조폭이 상대편 ‘을’ 쪽의 조폭을 대상으로 ‘처치 명령만 내리면 바로 처치하겠다’는 내용을 휴대폰으로 자기 두목에게 보고하는 것을 상대 ‘을’ 쪽 조폭이 엿들었다고 가정해 보자”면서 “그렇다면 ‘을’ 쪽 조폭과 그 두목이 엿들은 ‘처치’ 운운하는 내용을 심각하게 받아드릴까요,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여길까요?”라며 오히려 기자에게 반문했다. 한 장군은 “그런데 이틀 후에 엿들은 통화 내용대로 조폭 간에 살인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고 했다.
기자가 한 장군에게 “당연히 ‘처치’ 운운하는 통화내용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사안”이라고 하자, 그는 “그렇지요? 간과할 수 없는 내용이지요?”라고 되물었다. 기자는 한 장군의 말 속에 SI의 실마리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다면 ‘처치’ 대신에 ‘발포’라는 단어로 교체해 ‘발포명령만 내리면 바로 발포하겠다’라고 684경비정이 8전대사령부에 보고하였다는 뜻이네요?”
한 장군에게 동의를 구하자, 그의 안색이 변했다. 너무 구체적으로 예를 든 것을 후회하는 눈치였다. 기자는 틈을 주지 않고 “제가 한 말이 맞지요?”라고 다그치자,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기자는 지금까지 나온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발포명령만 내리면 바로 발포하겠다”는 내용이 북 경비정이 8전대사령부에 보고한 생첩보(수집기지 시초보고) 내용임에 틀림이 없다는 확신이 섰다.
한 예비역 장성은 “결국 6월 27일의 도발징후는 삼척동자가 보아도 결정적인 도발정보임에 틀림없었던 것”이라며 “6월 13일부터 우리 측 경비정을 공격하려고 상부에 계속 허가를 구했던 그 경비정이 바로 1999년 해전 때 우리에게 얻어맞았던 배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대비를 하지 않은 군 지휘부는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해작사 보고서, ‘등산곶 경비정 강력한 사격의지 보였다’
▲2002년 4월 2일 국회국방위에에서 발언하는 김동신 당시 국방장관. 김 장관은 서해교전 직후 경질됐다.
《월간조선》은 최근 아군 해군작전사령부가 작성한 ‘6월 27일 북 PCS 684호 NLL 침범 상황 결과’라는 당시 작전상황을 분석한 문건을 입수했다. 당시 해군은 북한 감시부대가 전달한 6월 27일자 도발정보(SI)에 대해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문건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 함정과 신천중계소 간 통신설정은 차상급 부대, 서해함대사령부, 해군사령부의 현장상황 모니터링과 개입징후를 암시한다. 등산곶 경비정 PCS 684호가 남방에서 조업 중인 북한어선(허위 표적)에 대해 단속을 지시받고, NLL 남방 12NM까지 침범했다가 북상했다.
적 경비정이 기동하는 남방해역에는 특이 접촉물은 없었고, 아측 고속정 편대가 적극적인 차단 기동을 했으나, 적정(敵艇)은 NLL을 2마일, 52분간 침범했다. 아측 고속정 편대가 차단 기동 중 양측 모두 전 포대가 상대를 향해 추적했다. 적 경비정이 지시점 기동·복귀 시는 12~13노트, NLL 남방 기동 시는 8노트 경제속력으로 기동했다.
등산곶 경비정(684호)이 NLL 침범 시 아 고속정에 대한 사격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8전대사령부와 사격기도 관련 교신(SI 15자)을 했다. 적정 대응 중인 아 고속정 편대에 전 포대를 추적했다. 기동 전 철저한 사격준비 상태를 갖추고 왔다.
등산곶 경비정에서 불상활동(미심쩍은 행동) 또는 사격요청 시 8전대는 4회에 걸쳐 적극 제지를 지시했다. 8전대 경비정 사격과 이동 관련 철저한 지휘통제를 했다. 경비정(684호)은 불상활동 또는 사격과 관련해 강한 집착을 보였다. 주변 지원세력 활동은 없었다. 8전대 등산곶 경비정 NLL 남하 기동 중 아 경비정과 초계함의 위치를 문의하는 등 아 함정의 대응능력을 확인했다.
6월 11일, 6월 13일 NLL 침범 시에는 아측 대응태세를 확인한 것과 북한 8전대 세력의 긴급출동 태세 점검 위주로 기동했으나, 금번 침범 시에는 등산곶 경비정이 아 고속정에 의해 포위된 상황하에서도 불상활동, 사격의지를 강력 보인 점, 인근 지원세력의 활동은 없었으나, 신천중계소와의 교신을 설정한 점 등이 특이하다.>
‘보복사격 중지’로 북한에 잘못된 신호 보낸 셈
▲한나라당 서해도발 사건 조사특위 강창희 위원장(가운데)과 강창성 의원(왼쪽) 등이 2002년 7월 4일 해군 제2함대를 방문, 정병칠 함대사령관(오른쪽)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
2함대사령관으로 제1 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끈 박정성(朴正聖) 제독은 “의문점은 북한 경비정 684호 단 1척이 우리의 해군 고속정 6척과 초계함 2척 등 총 8척과 대적한다는 것은 중과부적인 상황인데, 388호가 전투에 가담하지 않고 뒤에서 한가하게 전투상황을 중계했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이는 우리 해군이 보복응징 사격, 특히 초계함에 의한 76mm 함포의 보복응징 사격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과 확신이 없는 한은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공교롭게도 76mm 함포 보복응징 사격이 사격 도중에 중지되고, 그 결과 다 잡았던 북한 경비정은 살아서 돌아갔다”고 했다.
당시 적의 기습공격을 받자, 정병칠(鄭炳七) 2함대사령관(2009년 폐암으로 사망)은 교전규칙에 의거, 보복응징 사격에 나섰다. 초계함의 76mm 함포 50여 발을 때려서 적 경비정을 반 정도 침몰시켰다. 이제 50여 발만 더 때리면 적 경비정을 완전히 침몰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상급부대에서 사격중지 지시가 내려와 사격이 중지된 것이다.
박정성 제독은 “당시 중간에 사격중지 명령만 안 내려왔더라면 우리 해군은 제1 연평해전 때처럼 대승을 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면서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북한은 제1 연평해전 대패 때처럼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 더 이상 대남 도발을 못 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해전 후 사격중지 명령을 내린 상급부대가 어디인지를 놓고 합참과 해군작전사령부는 서로 책임을 전가하기에 바빴다.
한 예비역 장성은 “당시 해군은 정병칠 2함대사령관, 문정일 해군작전사령관, 이상희(李相憙) 합참작전본부장, 이남신(李南信) 합참의장으로 명령계선이 형성돼 있었다”면서 “해군 작전사령관은 당시 교전을 중지시킬 권한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해전은 합참 벙커에서 단계별로 위기대응반이 가동돼 합참 작전본부장(이상희 중장)의 지휘로 작전부장, 작전처장 등이 참석했을 것”이라면서 “사격중지 명령의 당시 최종 책임자는 이상희 장군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기자는 이상희 전 국방장관의 반론을 듣기 위해 마감 직전인 6월 15일과 16일 몇 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김정남도 고미요지(五味洋治) 《도쿄신문》 편집위원이 펴낸 책 《아버지 김정일과 나》에서 “한국의 부적절한 대응이 북조선의 공격을 초래한 면이 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국방부와 합참은 해전 후에 보복사격 중지 지시는 “확전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박정성 제독은 “이것이 결국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게 된다”면서 “이런 우리의 약점을 이용해 북한은 천안함을 폭침시키고 급기야는 백주에 연평도까지 포격한 것”이라고 했다. 박 제독은 “‘확전방지’를 전가의 보도처럼 여겨 사격중지를 하였다고 주장하는데 제1 연평해전 때는 청와대의 ‘확전방지’ 지시하에서도 보복응징 사격을 강력하고 철저하게 실시해 적 함정 1척을 침몰시키고 3척을 대파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확전으로 번지지 않았다”면서 “공군 전투기가 가담하지 않는 한 함정 간의 전투는 확전으로 번지지 않는다”고 했다.
연합사 한국 측, 對美보안으로 미측과 도발정보 공유하지 않아
▲이상희 합참의장과 리언 라포트 주한미군사령관이 2005년 9월 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내 합참 회의실에서 대 화력전 지휘·통제 임무 전환을 위한 서명식을 가진 뒤 악수하고 있다. 제2 연평해전 당시 이상희 전 장관은 합참작전본부장이었다.
해전이 종료되자 국방부는 “제2 연평해전은 ‘우발적’이고 경비정의 ‘단독행위’”라고 주장했다. 정부도 미국과 일본에 ‘우발적’이라고 내비치자, 미국 국방장관 럼스펠드는 “북한의 도발이라는 증거를 갖고 있다”고 언급했고, 정부는 움찔했다.
7월 5일, 리언 라포트 한미연합사령관은 남재준(南在俊) 연합사부사령관 등을 대동하고 국방장관을 예방해 제2 연평해전의 성격에 대해 논의했다. 이는 일정에도 없는 긴급 예방이었다. 이에 앞서 하루 전, 한미정보장군단 회의를 국방부에서 개최해 해전의 성격을 토의했으나, 미측과 북한 감시부대의 주장과 달리 국방부 정보본부가 ‘우발적’ 또는 ‘경비정 단독행위’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자 연합사령관이 직접 나섰던 것이다.
연합사령관이 북한이 도발했다는 교신 내용을 증거로 제시하자, 김동신(金東信) 국방장관은 결국 7월 5일 공식적으로 제2 연평해전은 ‘계획적’이며 ‘8전대까지 개입’한 도발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연합사 한국군 측은 북한 감시부대로부터 두 번에 걸쳐 결정적인 북한의 도발정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미보안으로 미측과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고 한다. 6월 13일 도발정보(SI 14자)는 아예 연합사 블랙북에 수록돼 있지도 않았다.
연합사에서는 주 1회 연합사령관에게 북한 군사 활동에 대한 정보 브리핑(CINC 브리핑)을 한다. 제2 연평해전 기간 중 두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측은 6월 13일과 6월 27일 북한 도발정보를 한 번도 브리핑 의제로 채택하지 않았고, 연합사령관과 토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철용 장군은 “남재준 부사령관은 ‘6월 27일 북한의 도발이 임박했다는 징후와 증거를 전달받지 못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면서 “6월 27일자 연합사 한국 측의 블랙북에는 5679부대의 보고내용이 그대로 포함됐다”고 했다. 한 장군은 또 “서해상 NLL은 한미연합사령부가 ‘우발계획’을 갖고 있는 지역”이라며 “주한미군 측에 블랙북을 정상적으로 전달했다면 북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해 희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은 “평시 작전권은 합참이 갖고 있으며, 북한 감시부대에서 수집한 정보는 연합사를 거쳐 국방부에 보고되는 것이 아니라 합참을 거쳐 국방부로 보고된다”면서 “당시 연합사에 온 블랙북에는 SI가 포함되지 않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또 “평시 연합사부사령관은 연합사령관의 부하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국군의 선임장교로서 연합사령관과 대등한 관계이고 동시에 보고받는 시스템이며, 본인이 연합사령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은 연합사의 업무계통과 절차를 모르는 이야기”라고 했다.
권영재 본부장의 뒤를 이어 국방정보본부장이 된 김충배(金忠培) 전 육사교장은 “2002년 10월 정보본부장으로 부임해 보니, 해전 당시 6월 13일 NLL을 침범한 북한의 도발가능성 특이정보(SI)가 모두 사실이었다”면서 “미군이 한국정보를 불신하는 데는 제2 연평해전의 영향이 크다”고 했다.
그는 “김대중 정부 들어서 한미연합사 미군 측은 북한 군사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데 반해, 국방부는 ‘북한군이 햇볕정책에 호응해 군사훈련을 줄이고 있다’며 미군을 설득하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2002년 6월 29일 북한 군부와 北 경비정 간 교신 내용
※오전 6시30분= 아군 고속정 3개 편대 6척, 조업 중이던 우리 어선 총 56척의 어로 보호를 위해 지원 출항.
오전 9시28분= “684호 등산곶 동남 4NM 구역 차지할 것”이라고 지시(北경비정, 8전대사령부, 신천중계소 간 교신내용)
오전 9시31분= “388호 등산곶 동남 6NM 구역 차지할 것”이라고 지시(北경비정, 8전대사령부, 신천중계소 간 교신내용)
☞북한 경비정의 기동지시 구역이 NLL 이남지역이므로, 이것부터 의도적 도발을 내포하고 있다.
※오전 9시37분= 북한 육도 경비정 388호(155t) 20노트 남하 기동 시작. 북한 어선 육도 20척(NLL 북방 4마일), 등산곶 10척(NLL 북방 3마일) 조업 중.
※오전 9시46분= 북한 등산곶 경비정 684호(215t), 388호 위치에서 서쪽으로 약 7마일의 간격을 두고 17노트 속도로 남하 기동 시작. 아군 고속정 편대 분산 목적. 2함대사 대북 경계강화 지시, 고속정 편대 조업어선 통제. 대응태세 유지 철저 지시.
※오전 9시54분= 북한 경비정 육도 388호, NLL 침범. 아군 해군함대 위기조치반 소집. 아군 고속정 253편대(참수리 328, 369호) 대응 기동 시작. 양측 고속정 간 거리 6.9km.
오전 10시= “고속정 2척(남측)이 2NM까지 접근했다”(北경비정 388호 → 8전대사령부에 보고)
☞북한 경비정 684호와 388호 두 척이 7NM 떨어져 동시에 남하했다. 684호와 388호는 애초부터 임무가 달랐다. 684호는 교전을 담당하고 388호는 남측 고속정 2척을 분산시킨 다음, 뒤로 빠져 우리 측 사거리 밖에서 교전을 중계한 것이다.
※오전 10시1분= 북한 등산곶 684호 NLL 침범. 아군 고속정 232편대(참수리 357, 358호) 대응 기동 시작. 양측 간 거리 12km.
※오전 10시14분= 아군 253편대 육도 경비정에 접근 차단 기동(간격 914m). 육도 경비정 388호 침로 변경 북상.
※오전 10시15분= 2함대사령부, 232편대에 등산곶 경비정과 2.7km 거리에서 차단 기동 지시.
오전 10시15분= “고속정(참수리 357호)이 3NM까지 접근했다”(北경비정 684호 → 8전대사령부에 보고)
오전 10시20분= “고속정 두 척이 대기동하므로 혼란스럽다”(北경비정 388호 → 8전대사령부에 보고)
☞교전을 중계하려는 388호가 자신이 보호받기 위해 “보호하기 위해 기동하겠다”고 보고한 것이다. 즉 684호가 참수리호를 공격해 교전이 벌어지면 자신이 위험하니까 교전 중계를 위해 안전한 지역으로 기동하겠다는 뜻이다.
※오전 10시23분= 232편대, 차단거리 914m 되도록 기동 시작.
※오전 10시25분= 등산곶 684호, 참수리 358호 차단 기동 통과 후 뒤따르던 357호에 85mm포 선제 사격. 357호, 358호 즉각 대응 사격. 357호 40mm 6발과 장전된 20mm 탄약 대부분 발사 추정. 358호 40mm 38발, 20mm 1050발 발사. 북 경비정 화염, 속력 감소. 기능마비 추정.
오전 10시25분= “불당소리(포성) 들리냐”(8전대사령부 → 388호에 지시)
☞불당소리는 북한이 포성(砲聲)이란 뜻으로 사용하는 은어다.
※오전 10시26분= PCC초계함 253/256편대에 고속정 232편대 지원 지시.
※오전 10시29분= 아군 해안포 긴급 전투배치.
※오전 10시30분= 공군전투기(미사일 장착) 긴급출격 대기 요청. 아군 256편대(327, 365호) 격파사격 개시. 최초 사거리 3.8km. 327호, 40mm 40발 20mm 600발 사격. 365호, 40mm 34발 20mm 440발 사격.
오전 10시30분= “포성소리 들린다”(北경비정 388호 → 8전대사령부에 보고)
☞경비정 388호가 우리 고속정 편대 2척을 분산 유도한 후에 해상전투에 가담하지 않고 교전 중인 경비정 684호 후방 원거리에 위치해 전투상황을 무선으로 생중계했다.
※오전 10시33분= 253편대(328, 369호) 격파사격 개시. 최초 사거리 3.6km. 328호, 40mm 65발 20mm 238발 사격. 369호, 40mm 70발 20mm 800발 사격.
오전 10시40분경= “사격을 했으니 이탈해서 올라오라고 (8전대에) 전해달라”(신천중계소 → 8전대사령부에 통보)
☞해군사령부와 서해함대사령부가 선제공격 보고를 8전대사령부로부터 받고 직접 신천중계소를 통해 교전한 684호에 “이탈해서 올라오라”고 통신 결속을 시도했으나, 교신이 불가능하자 8전대사령부에 684호와 통신해서 현장을 빠져나오라는 지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전 10시43분= 제천함 전방 이동, 격파사격 개시. 최초 사거리 10km. 76mm 32발 40mm 184발 사격.
※오전 10시46분= 253편대장, 아군 전사자 5명 보고.
※오전 10시47분= 진해함 전방 이동 격파사격 개시. 최초 사거리 13.5km. 76mm 21발 발사, 6~7발 명중 추정.
오전 10시50분= “684호와 같이 북상하라”(8전대사령부 → 경비정 388호에 지시)
※오전 10시51분= 등산곶 경비정 684호 NLL 이탈 북상. 화염·연기 발생 상태에서 육도 경비정 388호가 예인.
※오전 10시56분= 2함대사령부, 우리 측 현장 전 전력 사격중지 지시. 31분간의 교전 상황 종료. 북한 경비정 NLL 북방 0.5~1마일 지점 위치.
※오전 11시= 우리 측 해군 2함대사령부, 함정 전속력 남하 조치 지시.
오전 11시5분= “8전대에서 표류하라는 지시다”(순위도 전탐초소 → 경비정 684호에 지시)
☞북한 경비정 684호가 참수리 357 고속정 공격에 의해 기관 고장이 났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표류는 기관 고장으로 항해를 못 하는 상황을 뜻한다.
오전 11시15분= “684호는 사곶으로 입항시키고 대기하라”(8전대사령부 → 경비정 388호에 지시)
☞사곶항은 북한 경비정이 출항한 모항으로 388호에 684호 예인을 맡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오전 11시20분= “684호가 통신 결속이 되지 않는다”(北경비정 2849호 → 8전대사령부에 보고)
※오전 11시25분= 피해 함정 인원 확인 결과 보고(전사 4명, 부상 19명, 실종 1명).
※오전 11시25분= 제천함, 북한 스틱스 함대함 미사일 위협전자파가 탐지되었다며 채프(레이더 전자파 교란용 금속 은박편) 발사.
오전 11시35분= “684호 침몰 위험은 없다”(北경비정 388호 → 8전대사령부에 보고)
☞경비정 388호는 기동불능인 경비정 684호를 예인해 북상했다.
※오전 10시33분~11시59분= 참수리 358호, 357호 예인작업 착수. 13~15노트 속도로 357호 1.8km 예인. 교전지역으로부터 안전거리 이동 후 전사상자 확인, 구조. 선체 손상 확인. 소화·방수 실시. 358호, 전사상자 연평도로 후송 시작. 328호가 피격 357호 예인 중 심한 침수로 예인 포기. 피격 357호 조타장 한상국 중사와 함께 침몰. 8월 21일 연평도 서쪽 14마일, 북방한계선 남쪽 5마일 해상에서 참수리 357호 침몰 53일 만에 인양.
출처 | 월간조선 2012년 7월호
■ 2012.06.18 [제2연평해전 10년] 참수리호(2002년 6월 29일 피격) 비극의 비밀… 베일 벗은 'SI (특수정보) 15자'
"발포 명령만 내리면 바로 발포하겠다" 北의 15자 공격 이틀전 北경비정 교신 내용, 우리軍이 감청 당시 정부는 묵살
"계획 도발 아닌 우발적 사건"
▲한철용 감청부대장의 국회 증언… 대북 통신감청 정보를 총괄하는 한철용 5679부대장(육군 소장·사진 왼쪽)이 제2연평해전 발발 3달여 만인 2002년 10월 4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서해교전 직전 군 수뇌부에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경고했다며 비밀 문서를 내보이고 있다. 사진 오른쪽 아래에 서 한 부대장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이상희 당시 합참 작전본부장(안경 쓴 이)이다. /김진평 기자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서해교전)을 일으킨 북한 경비정 684호가 교전 이틀 전에 상급부대인 8전대(戰隊) 사령부에 보고한 'SI(Special Intelligence·특수정보) 15자'는 '발포 명령만 내리면 바로 발포하겠다'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월간조선 7월호가 보도했다. 우리의 대북(對北) 통신감청부대인 5679부대가 감청한 'SI 15자'의 존재는 이전에 알려졌지만 그 전모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월간조선이 또 최초로 입수한 당시 북한군 교신록에 따르면 제2연평해전이 종료되기 전에 황해도 소재 신천통신중계소가 북한 해군사령부의 지시 사항을 북한 경비정 684호가 소속된 8전대 사령부로 중계했다.
당시 북 해군사령부와 서해함대사령부는 선제공격 보고를 8전대사령부로부터 받고 684호에 "사격을 했으니 이탈해서 올라오라"고 지시했다. 또 8전대사령부가 현장 부근에 있던 북한 388호에 "불당 소리(포성) 들리냐"고 하자 388호 측에서 "포성 소리 들린다"고 답했다.
제2연평해전을 전후해서 북한군 간에 오간 교신 내용은 1999년 1차 연평해전에서 패퇴했던 북한이 2002 한일월드컵으로 들뜬 우리 사회 분위기를 틈타 치밀하게 준비한 끝에 선공(先攻)을 감행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당시 김대중 정부와 군 일각에서는 이같은 교신 기록을 입수하고서도 제2연평해전을 '우발적 사건'으로 평가해 논란이 빚어졌다.
제2연평해전은 2002년 6월 29일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이 우리 해군 고속정인 참수리 357정에 선제공격을 가한 것으로 이로 인해 357정 정장(艇長) 윤영하 소령 등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했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해군 자료에 따르면 우리 해군작전사령부는 '6월 27일 북 684호 NLL 침범 상황 결과' 문건에서 "등산곶 경비정이 NLL 침범시 아(我) 고속정에 대한 사격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8전대사령부와 사격 기도 관련 교신(SI 15자)을 했다. 기동 전 철저한 사격 준비 상태를 갖추고 왔다"고 분석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당시 국방부는 5679부대에서 수집한 '발포'라는 결정적 도발 정보와 해군작전사령부의 분석을 무시한 채 북한 경비정의 의도적인 NLL 침범을 '단순 침범'으로 평가했다.
▶우리 군(軍)의 대북 통신감청을 총괄하는 5679부대가 2002년 제2연평해전(6월 29일) 발생 전 두 차례나 도발의 징후를 파악했음에도 당시 김대중 정부와 군 수뇌부가 햇볕정책 등 남북 평화 분위기 조성 등을 위해 의도적으로 이를 묵살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5679부대는 도발 2주일여 전인 6월 13일 북한 경비정의 도발 정보를 최초 입수했다. 14자로 구성된 도발 정보에는 우리 고속정을 목표로 '발포'라는 용어와 함께 당시 사용할 무기 종류(해안포 또는 미사일)까지 언급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 정보는 해당 부대가 보고서 형태로 작성하면 합참 정보본부에서 이를 장관 보고용으로 수정 작성해 장관 보고를 한 뒤 다시 수정해 예하부대로 하달한다. 5679부대는 '발포'라는 용어를 적시한 도발 정보 14자와 함께 부대 의견으로 '월드컵 관련 긴장조성 유도를 위한 가능성 배제 불가' 등을 명시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당시 합참 정보본부가 이를 토대로 작성한 장관 보고용 보고서에는 도발정보 14자 내용이 삭제됐다. '월드컵 관련 긴장조성' 부분은 '단순침범'으로 바뀌었다. 최초 정보보고서를 작성한 당시 5679부대장 한철용 예비역 소장은 "정보본부장과 정보본부 간부들은 남북 간 평화교류와 햇볕정책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소리로 듣는 것 같았다"고 밝혔다.
5679부대는 이어 27일 '발포'라는 단어가 2회나 언급된 15자의 도발 정보를 입수해 이를 합참 정보본부에 보고했다. 당시 우리 해군이 작전상황을 분석한 문건인 '6월 27일 북 PCS(경비정) 684호 NLL 침범 상황 결과'에서도 우리 군이 북한의 15자 도발 정보를 파악했으며 북의 위협을 심각한 수준으로 파악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등산곶 경비정(684호)이 NLL 침범 시 아(我·우리) 고속정에 대한 사격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북한의) 8전대사령부와 사격기도 관련 교신(15자 도발 정보)을 했다" 는 것이다.
정보본부가 이를 토대로 작성한 장관 보고용 보고서에는 그전 보고와는 달리 15자의 도발 정보가 명시됐다. 하지만 해당 보고가 국방장관을 거쳐 예하부대로 하달될 때에는 이 내용이 삭제됐으며, '단순침범'이라는 내용만 남았다. 이에 대해 김동신 전 국방장관은 "제2연평해전 직전에 발포라는 단어가 포함된 도발 정보를 보고받은 바 없다"며 "해당 보고를 받았다면 당연히 예하부대에 이를 알리고 군 경계태세를 강화했을 것"이라며 관련 내용을 부인했다.
■ 2012.06.19 최윤희 해참총장(당시 해작사 작전처장) "北도발 직전, 긴장조성 말라는 지시만 받았다"
["우리 잘못 아니다" "나는 말 못한다" 당시 안보 수뇌부의 책임 떠넘기기] 김동신 당시 국방장관 - "합참이 우발적 도발로 보고 NSC서 계획 도발 결론" 반복 이남신 당시 합참의장 - "합참이 미쳤다고 우발적 도발로 보고했겠나" 당시 청와대 고위 관계자 - "NLL 가까이 갔다는 이유로 해군 작전실수 문책하려 했다"
2002년 6월 29일 발생한 제2연평해전 이틀 전 우리 군 대북 통신감청부대(5679부대)는 "발포명령만 내리면 바로 발포하겠다"는 북 경비정과 해군부대 간 교신을 감청해 군 수뇌부에 보고했으나 군 수뇌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 북에 기습공격을 받고 6명의 장병이 목숨을 잃었다.
사건 직후 합참 등 군 당국이 도발 성격을 '단순 도발' '계획적 도발' 중 어느 것으로 판단하고 보고했는가에 대해서도 당시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 간에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제2연평해전 발발 10년을 맞아 당시 김대중 정부와 군의 책임을 놓고 다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정권 수뇌에서 우발적 도발에 무게 둔 분위기"
정부는 연평해전 상황 종료 직후인 2002년 6월 29일 오후 1시 30분 정세현 당시 통일장관, 김동신 국방장관, 최성홍 외교장관, 신건 국정원장, 임성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임동원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 등이 참석한 가운데 1차 NSC(국가안보회의) 회의를 가졌고, 이어 오후 3시에 열린 2차 회의는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주재했다.
이날 회의 내용에 대해 김동신 전 국방장관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거듭 "합참이 우발적 도발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했으나 NSC 회의에서 토의를 거치면서 계획적 도발로 평가를 내렸다. 이것이 팩트다"라고 했다. 합참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남신 당시 합참의장은 본지 통화에서 "교전 직후라 상황 파악이 정확히 안 된 상태였으나, 당일 오후 이상희 합참 작전본부장이 언론 브리핑에서 '계획적 도발로 본다'고 밝혔는데, 합참이 미쳤다고 NSC에 우발적 도발 가능성을 크게 평가한 보고를 했겠느냐"고 했다. 김 전 장관이 상황을 오도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당시 NSC 회의에 참여한 전직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본지 통화에서 "교전 다음날 북에서 핫라인을 통해 전달한 메시지를 볼 때 평양(북 정권)에서 지시한 게 아니란 차원에선 우발적 도발로 볼 수 있었다"며 "당시 지원 함정 없이 참수리호가 NLL(북방한계선) 가까이 접근한 작전상의 실수를 문제 삼아 해군에 대한 문책 필요성까지 논의된 게 기억난다"고 했다. 우리 정권 핵심부는 북 정권 차원의 개입 증거가 없다는 차원에서 우발적인 도발로 보고 오히려 북한 도발로 피해를 입은 우리 해군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었다는 얘기다.
◇중요 도발 정보 묵살 논란
당시 5679부대는 제2연평해전 발생 2주일여 전인 6월 13일과 교전 이틀 전인 27일 우리 고속정을 목표로 '발포'라는 용어가 사용된 'SI 정보'를 국방정보본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13일 보고는 장관에게 가는 보고서에서 빠졌고, 27일 보고는 국방장관을 거쳐 예하부대로 하달될 때 이 내용이 삭제된 채 '단순 침범'이라는 내용만 남았다.
연평해전 발발 2주 전 북의 도발 징후를 포착했던 첫 보고가 '단순 침범'만 남은 것에 대해 김 장관이 정형진 당시 정보본부 정보융합처장을 강하게 질책해 정 처장이 예하부대 배포용 보고서를 수정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돼 왔다.
이에 대해 정 전 처장은 이날 본지 통화에서 "한철용 당시 5679부대장은 자기가 (보고를 다 했다며) 잘했다고 하고 김 전 장관은 (삭제를 지시한 건)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데…내가 아는 것을 전부 이야기하고 싶지만 정보를 다룬 사람으로서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 2012.06.28 제2연평해전 軍수뇌부, 盧정권때 오히려 승승장구
[유족들 최근 소송… 당시 지휘라인 거취 살펴보니]
정보수뇌부 일부만 솜방망이 처벌 - 北도발
정보 묵살하고도
정보 관계자들 大使 등 역임… 한철용만 괘씸죄로 중징계
작전수뇌부, 징계없이 영전 - 이상희 본부장, 국방장관 역임
문정일 사령관, 해참총장 승진… 전투지휘 정병칠만 인사 불이익
2002년 6월 29일 발생한 제2연평해전 전사자 유족과 부상 장병 등 12명은 지난 25일 김동신 전 국방장관 등 당시 군 고위 정보·작전 책임자 12명을 상대로 총 4억7200여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군이 잘못 대응해 병사 6명이 전사하고 우리 함정이 침몰하는 등 피해가 컸다는 것이다.
▲제2연평해전 10주년을 이틀 앞둔 27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호국전사자 리멤버링 체험행사’에 참가해 전사자에게 엽서를 쓰던 여학생이 제2연평해전 전사자 묘비를 바라보고 있다. /신현종 기자 shin69
당시 군 수뇌부는 사전에 북의 도발 징후를 포착했으나 이를 예하부대에 알리지 않았다. 또 "확전(擴戰)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교전 중 반파됐던 북 경비정을 추격해 응징하지도 않았다. 한 예비역 제독은 "당시 정부가 군의 정보·작전 수뇌부를 문책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군 수뇌부 중 책임지는 인사는 없었고 처벌도 대부분 솜방망이에 그쳤다. 오히려 영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보 수뇌부에 솜방망이 처벌"
국방부는 제2연평해전에 대한 책임을 물어 2002년 10월 11일 권영재 합참 정보본부장(지휘감독 소홀), 한철용 5679 통신감청부대장(주요첩보처리 및 보고 부실), 정형진 정보융합처장(안이한 정보판단 및 혼선초래 원인제공), 윤영삼 701정보단장(5679부대 지휘조치 혼선초래) 등 군의 정보 관계자 4명을 징계위에 회부했다.
해전 다음 날인 6월 30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정보교류회의 등에 참석해 물의를 일으켰던 권 본부장은 자진 전역해 징계위 심사를 받지 않았다.
남은 3명 중 실제 징계를 받은 사람은 한철용 부대장(정직 1개월·중징계)과 정형진 처장(근신·경징계) 2명이었다. 한 부대장은 당시 국회 국정감사에서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경고하는 정보보고서를 올렸으나 군수뇌부가 이를 묵살하고 '단순침범'으로 보고하도록 했다"고 밝혔었다. 이에 대해 "한 부대장이 괘씸죄에 걸렸다"는 논란이 일었다.
권 본부장은 전역 후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4년 3월 주(駐)터키 대사로 임명됐다. 권 본부장에게 정보를 취합해 전달했던 권영달 당시 군사정보부장은 2004년 전역한 뒤 2006년 주(駐)스리랑카 대사가 됐다. 정형진 처장은 근신 처분을 받고도 2003년 10월 소장으로 진급해 육군 정보학교장에 취임했다.
◇"작전 수뇌부는 오히려 승승장구"
당시 작전을 지휘했던 군 수뇌부는 징계 대상에서 전면 제외됐을 뿐 아니라 노무현 정권에서 승승장구했다.
이남신 당시 합참의장은 1년 6개월의 임기를 마치고 2003년 4월 전역했다. 이상희 작전본부장은 2003년 4월 대장으로 진급해 3군 사령관이 됐으며, 합참의장과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문정일 해군 작전사령관은 2003년 4월 대장으로 진급해 해군참모총장이 됐다.
해군 관계자는 "실제 전투를 지휘한 정병칠(작고) 2함대사령관만 패장(敗將)의 멍에를 지고 인사 등에서 불이익을 받았다"고 했다. '먼저 발포하지 말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교전 지침에 따라 작전을 펼치다 함정이 기습을 당한 정 제독은 이후 진급 심사에서 번번이 누락됐고, 2007년 4월 전역했다. 한 해군 예비역 제독은 "남북 화해 분위기에 편승해 정권 눈치만 본 군인만 승승장구한 꼴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전현석 기자
■ 2015-07-30 〈연평해전〉 흥행에 긴장한 金大中평화센터
“金大中만 戰死者 영결식에 가야 한다는 法은 없지 않으냐?” (박한수 金大中평화센터 기획실장)
⊙ 영화 〈연평해전〉 개봉하자, 13년 전 金大中 정부 대응 다시 비판받아
⊙ “金大中, 제2연평해전 때 적절 대응… 북한 사과도 받아”(金大中평화센터)
⊙ 海戰 다음날 대통령은 월드컵 결승전 관람차 出國… 금강산 관광객 515명은 북한行
⊙ 金泳三,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당시 두 차례 직접 조문
⊙ 金大中 정부, 北韓의 쌍방 책임 주장에 “대단히 긍정적인 사과”라고 好評 영화
〈연평해전〉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6월 24일 개봉한 이 영화는 관객 수 면에서 현재 상영 중인 여타 국내 영화를 압도적인 차이로 누르고 1위를 달리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운영하는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7월 13일 현재 479만명이 〈연평해전〉을 봤다. 하루 평균 23만명의 관객이 〈연평해전〉을 관람하기 위해 극장을 찾은 셈이다.
영화에 대한 평도 좋다. 현재 개봉한 국내외 영화 중 평점이 가장 높다. 〈연평해전〉을 본 사람들이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남긴 평점은 평균 9.29점이다. 각종 예매 사이트에서도 평균 9점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영화 〈연평해전〉은 ‘제2연평해전’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제2연평해전’은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쯤 서해 연평도 인근의 북방한계선(NLL)을 남하한 북한 경비정이 우리 해군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에 85mm 함포 사격을 기습적으로 하면서 발발한 해상 전투다.
이 전투 과정에서 집중 포격을 당한 참수리 357호의 승무원 30명 중 윤영하 소령, 한상국 상사, 조천형·황도현·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다쳤다. 참수리 357호는 침몰했다.
해전 당일은 한국과 터키가 월드컵 3·4위전을 치르는 날이었다.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단 얘기다. 그 과정에서 우리 영토를 지키다 산화한 해군 장병들의 영웅담은 조명을 받지 못하다가 최근 개봉한 영화 〈연평해전〉을 통해 뒤늦게 ‘부활’한 셈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절반은 20대다. 이들은 ▲‘제2연평해전’ 당시 우리 군 지휘부의 안이한 대응 ▲전투 다음 날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과 월드컵 결승전 관람 등에 대해 처음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인지 포털 사이트 네이버엔 영화 〈연평해전〉과 관련해 “몰랐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잊지 않겠다” “분노한다”는 취지의 영화평이 많다.
이 영화가 흥행하자 언론은 ▲김대중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 ▲대통령의 전사자 영결식 불참 등을 지적했다.
그러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김대중평화센터’가 “최근 〈연평해전〉 상영을 계기로 당시 상황에 대해 잘못 이해된 언론보도에 대해 명확한 사실 관계를 밝힌다”면서 보도자료를 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김대중 정부는 적절한 대응을 했고, 북한은 무력 도발에 대해 우리 정부에 공개 사과했다’는 것이다. 과연 김대중평화센터의 주장이 사실일까.
金大中 정부, 海戰 직후에도 ‘햇볕정책’ 강조
김대중평화센터는 앞서 언급한 보도자료에서 ‘제2연평해전’ 당시 김대중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에 대한 비판을 반박했다.
〈당일 김대중 대통령은 즉각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하고, ‘강력한 대북 비난 성명’과 ‘확전 방지’ 및 ‘냉정한 대응’을 지시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다룰 판문점 장성급 회담 소집을 북한에 요구했다. (중략) 이와 별도로 NSC는 북한에 공개 사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보장을 요구했다.〉
2002년 6월 29일, 김대중 대통령은 전투 개시 후 3시간30분이 지난, 오후 1시30분쯤 NSC를 열었다. NSC 회의 결과는 “이번 사태와 관련한 모든 책임은 서해 NLL을 침범한 북한 측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북한에 대해 사과와 재발 방지를 촉구하는 등 단호히 대응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발표하던 임성준(任晟準)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햇볕정책은 계속 유지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3년 전 교전 사태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햇볕정책을 유지했다”고 답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임 수석은 다음 날 또 “3년 전 연평해전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남북관계를 증진하는 방향으로 대북정책을 펴 나갔고, 그 결과 1년 후에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굳건한 안보태세의 토대 위에서 대북정책을 펴 나간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통일부 역시 해전 당일 오후 “민간 차원의 남북교류 협력은 예정대로 추진하기로 했다”면서 금강산 관광과 우리 측 민간단체의 방북과 대북지원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대중 대통령도 7월 2일 “전쟁을 하지 않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를 증진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며 햇볕정책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김대중 정부가 북한에 ▲공식 사과 ▲재발 방지 약속 ▲책임자 처벌 등 납득할 만한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북한의 유의미한 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해선 실행 여부를 떠나 ‘대북 지원 중지’ ‘금강산 관광 중단’ 등을 남북관계의 ‘지렛대’로 삼았어야 했다. 실제 그런 노력도 해야 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애초부터 이를 포기한 채 말로만 사과를 요구했다. 오히려 ‘햇볕정책’ 기조 유지 등 ‘유화’ 제스처를 강조했다. 상반된 두 개의 메시지를 동시에 북에 전달한 셈이다. 북한은 김대중 정부의 의도를 금세 알아챘을 것이다.
우리 해군 장병 25명이 죽거나 다친 전투 다음 날인 6월 30일 강원도 속초항에서 금강산 관광객 515명을 태운 쾌속선 설봉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떠난 것 역시 ‘연평해전’을 크게 문제 삼지 않겠다는 또 하나의 상징적 메시지로 북한은 받아들였을 것이다.
“대통령 日本行은 지금도 이해 안 돼”
▲제2연평해전’ 다음 날인, 2002년 6월 30일 월드컵 결승전 관람 등을 위해 일본에 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도쿄 하네다 공항에 마중 나온 가와구치 요리코 일본 외무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처신도 마찬가지였다. 국군 통수권자였던 그는 ‘제2연평해전’ 다음 날인 2002년 6월 30일 월드컵 결승전 관람을 위해 일본에 갔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은 오전 일본으로 출국하면서 “공동개최국의 대통령으로서 월드컵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해 결승전이 열리는 일본으로 간다”면서 “일본의 총리 등 지도자들과 대화를 갖고, 월드컵으로 한 단계 높아진 한·일관계의 유지·발전에 대해서도 논의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은 이른바 ‘월드컵 외교’에 더 가치를 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방일 첫날인 2002년 6월 30일 저녁 김대중 대통령은 월드컵 결승전을 관람했다. 이튿날인 7월 1일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했다.
7월 1일 《연합뉴스》는 김대중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스포츠·청소년 교류 확대 ▲역사공동연구위원회 운영 ▲한일 FTA ▲한일 고위경제협의회 운영 ▲경제 분야 협력기반 공고화 방안 등을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이 안건들이 ‘제2연평해전’과 그 후속 대응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었을까. ‘제2연평해전’ 전사자 유족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고(故) 박동혁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씨는 “부상당한 아들의 면회를 기다리며 TV를 보니 대통령이 일본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며 “(출국한) 성남비행장에서 국군수도병원까지 몇 분도 걸리지 않는데…”라고 말했다.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68)씨는 “서해에서 전투가 벌어진 이후에 대통령이 출국한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외국에 있던 대통령도 급히 귀국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2010년 5월 25일자 《동아일보》
6월 29일자 《문화일보》에 따르면 제2연평해전 당시 국군수도병원 군의관으로 박동혁 병장 등 부상자들을 치료했던 강원대 의대 이봉기 심장내과 교수도 “당시 군 통수권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월드컵 폐막식 참석을 위해 일본으로 갔다”면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고귀한 희생이 자칫 ‘개죽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같은 군인으로서 너무나 비참했고 국가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대중평화센터 측은 이와 관련해 “당시 상황을 잘 알지 못한 데서 오는 오해”라며 반박했다. 다음은 7월 6일, 《한겨레》가 보도한 기사 중 일부다.
〈당시 청와대 공보기획비서관을 맡았던 최경환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은 5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한·일 정상들은 당시 공동 개최한 월드컵 개·폐막식에 교차로 참석하기로 돼 있었던 데다, 이를 계기로 한·일 정상회담도 예정돼 있었기에 방일 일정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또 국제적 이목이 쏠려 있는 월드컵 폐막식에 김 전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는다면, 국제사회에 한반도의 안보 상황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金大中센터, “당시 총리들 영결식 보냈다” 거짓 주장
▲김대중평화센터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2002년 7월 1일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영결식’에 이한동 총리를 보냈다고 주장했지만, 이 총리는 이날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7월 1일 해군장(葬)으로 치른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당일 일본에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영결식 불참에 대한 비판은 2002년 7월부터 한나라당과 우파 진영, 각종 언론에서 제기한 것이었고, 영화 〈연평해전〉 개봉을 계기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와 관련해 김대중평화센터는 이렇게 주장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과의 전투 과정에서 숨진 전사자들의 영결식이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 관례에 따라 영결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당시 총리들(이한동 총리, 장상 총리서리, 장대환 총리서리, 김석수 총리)을 전사자들의 영결식장에 참석하도록 했다. 대통령이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는 관례는 당포함 사건(1967년 1월)이 발생했던 박정희 정부 때와 강릉 무장공비 사건(1996년 9월)이 발생한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김대중평화센터의 주장은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 이한동(李漢東) 당시 국무총리는 ‘제2연평해전’ 전사자(윤영하 소령, 조천형·황도현·서후원 중사)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김동신 국방부장관도 가지 않았다. 이남신(李南信) 합동참모본부 의장도 없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한국일보》의 기사다.
〈서해교전 전사장병 합동영결식에 이한동(李漢東) 국무총리와 김동신(金東信) 국방장관을 비롯한 국무위원, 정치인들이 전혀 참석지 않아 유족들의 분노를 샀다. 영결식에 모습을 드러낸 정부·군 최고위직은 장정길 해군참모총장이었으며, 이 밖에 일반 조문객 중에서는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과 손학규(孫鶴圭) 경기지사, 예비역 군 장성 정도만 눈에 띄었다. 고(故) 황도현 중사의 친구 이재민(25)씨 등 유족과 친지들은 “이번 희생의 책임을 나눠서 져야 하는 정부 인사들이 어떻게 한 사람도 얼굴을 비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 2002년 7월 2일자
같은 날,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한동 당시 총리 측은 ‘영결식 불참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張裳 총리서리’도 영결식 간 적 없어
▲제2연평해전’ 당시 전사한 윤영하 소령, 한상국 상사, 조천형ㆍ황도현ㆍ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왼쪽부터)
〈총리실 관계자는 “지금까지 각 군장(軍葬)으로 영결식을 거행할 경우 각군 참모총장 이하만 참석했던 게 관례”라면서 “국방부 측에서 참석 요청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느닷없이 총리가 참석할 경우 의전상 혼란 등을 고려해 불참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국방부도 “영결식이 해군장이어서 장례위원장인 해군참모총장의 상관은 참석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주장했다.(그러나 1996년 9월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당시 이수성(李壽成) 총리와 이양호(李養鎬) 국방부장관은 야전군사령부장(葬)으로 치른 전사자 영결식에 참석했었다.)
‘장상(張裳) 총리서리’는 재임 기간으로 봤을 때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영결식에 ‘총리서리’ 자격으로 간 일이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2년 7월 11일 자신의 아들들이 개입한 권력형 비리, 북한의 무력 도발 등으로 인해 등 돌린 민심을 수습하려고, 개각을 하면서 장상 당시 이화여대 총장을 총리서리로 지명했다.
장상 총리서리는 ▲위장 전입 및 땅 투기 ▲학력 위조 ▲아들의 국적 등 각종 의혹 때문에 국회의 임명 동의를 받지 못하고, 재임 20일 만인 2002년 7월 31일 총리서리직에서 물러났다. 따라서 8월 11일에 있었던 한상국 상사의 영결식 때는 장대환(張大煥) 당시 총리서리가 참석했다.
북한과의 전투 과정에서 숨진 전사자들의 영결식이나 장례식에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는 게 관례였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데 국군 통수권자가 불참하는 게 관례라고 하는 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다. 김대중평화센터가 주장하는 것처럼 박정희,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말 ‘전사자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일까.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동해 북방한계선 인근에서 명태잡이 어선의 월경을 감시하던 당포함(56함)이 북한 동굴 포대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 날은 1967년 1월 19일이다. 사건 직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고, 대응책을 논의했다. 이튿날 아침에도 국무회의에서 ‘모종의 대책’을 협의했다. 23일엔 부인 육영수 여사와 함께 서울 대방동 해군병원을 찾아 당포함 함장 등 10명을 1시간 동안 위로하고, 금일봉을 전달했다. 같은 달 25일엔 이후락 비서실장을 시켜 경남 진해 해군병원에 입원한 당포함 전상자를 위문하고, 금일봉을 전달했다.
당포함 전사자의 영결식은 1월 27일 오후 2시 진해 해군 신병훈련소 연병장에서 해군장으로 치렀다. 당시 이 자리엔 김성은(金聖恩) 국방부장관, 박동묘(朴東昴) 농림부장관, 장창국(張昌國) 합참의장, 김영관(金榮寬) 해군참모총장과 해군 장병 5000여 명, 유족과 진해 시민 6000여 명이 모여 전사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도정 청취 차원에서 경북을 방문한 다음 충북 청주로 이동해 충북지사로부터 도정 관련 브리핑을 받았다.
金泳三 대통령 때는 직접 조문
김영삼 대통령 재임 때인 1996년 9월 18일, 새벽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의 해안도로를 달리던 택시 기사는 거동 수상자들과 해안에 좌초한 선박을 발견하고 이를 경찰에 신고했다. 군 당국이 확인한 결과 이 선박은 북한의 잠수함이었다. 이에 따라 우리 군은 49일 동안 육지에 상륙한 무장간첩을 추적해 총 15명 중 1명은 생포, 13명은 사살했다. 나머지 무장간첩 1명은 도주했다. 소탕작전 과정에서 전사한 우리 군 장병은 총 14명이다.
이 중 이병희 상사, 강정영 병장, 송관종 상병(사후 1계급 추서, 이하 동일)의 영결식을 1996년 9월 25일 서울 강서구 등촌동 국군수도병원에서 진행했다. 당시 이 자리엔 이수성 총리, 이양호 국방부장관, 김영귀 국회 국방위원장, 윤용남 육군참모총장 등을 비롯해 1000여 명이 참석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보다 이틀 전인 9월 23일 합동분향소를 직접 찾아 유족들을 위로했다.
같은 해 11월 7일엔 오영안 준장, 서형원 소령, 강민성 병장 영결식이 서울 강서구 등촌동 국군수도병원에서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 전날 저녁에 분향소를 찾아 세 전사자 영정에 헌화했다. 10월 12일, 11월 15일에 영결식을 치른 전사자들과 관련해선 김영삼 대통령이 조문했다거나, 영결식에 참석했다는 내용을 전하는 기사는 없었다.
앞서 살핀 내용을 요약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영결식에만 불참했을 뿐 당포함 사건 관련 부상병들을 여러 차례 위문하고, 금일봉을 전달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엔 이수성 총리 등이 대통령을 대신해서 영결식에 참석토록 했다.
김대중평화센터는 전후 맥락을 무시한 채 “박정희, 김영삼 전 대통령도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영결식에 가지 않은 건 관례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 당시 3년 동안 청와대 의전비서관과 의전수석을 지낸 김석우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원장도 “그런 관례는 처음 듣는다”면서 “책임 회피성 발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결국 해당 보도자료를 작성한 박한수 김대중평화센터 기획실장에게 관례 유무에 대해 물었다. 다음은 그의 말이다.
“그전 대통령들은 다 (전사자 영결식에) 참석하셨답니까? 당포함 사건이나 강릉 무장공비 사건 때 대통령들이 영결식에 참석했느냐고요. 김영삼 대통령, 참석하셨나요? 안 했죠? 그런 게 관례가 되는 것 아닌가요? 우리 대통령은 거기 참석해야 되고, YS 대통령은 참석 안 해도 되고. 그런 법은 없잖아요?”
—그 두 건만을 놓고, 관례였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까.
“그럼 뭐라고 해야 하죠? 제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제가 찾은 건 2건인데….”
—이번에 보도자료를 작성하면서 그 근거를 찾았다는 얘기입니까.
“네, 네.”
박 실장 발언에 따르면 김대중평화센터가 박정희,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북한 도발에 의해 사망한 장병 영결식에 가지 않았단 사실을 확인한 건 최근이다. 따라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관례’에 따라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영결식’에 가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北韓, “제2연평해전은 우연한 충돌… 南北 쌍방의 책임”
▲‘제2연평해전’ 당시 해군 2함대 소속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는 북한 경비정의 집중 포격을 받고 침몰했다가 53일 만에 인양됐다. 선체의 탄흔들은 당시 전투가 치열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김대중평화센터는 또 “김대중 정부가 북한에 강력하게 대응해 공개 사과를 받았다”는 취지의 주장도 했다.
〈2002년 7월 20일 북한이 남북 대화를 제의하자, 김대중 정부는 서해도발 사건의 공개적인 사과, 재발 방지 약속,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했고, 북한은 7월 25일 남한의 통일부장관 앞으로 전통문을 보내 공개 사과했다. 북한이 우리 정부에 공개적으로 사과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실제 북한은 2002년 7월 25일 “얼마전 서해 해상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무력 충돌 사건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 북남 쌍방은 앞으로 이러한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간주한다”는 내용의 전화통지문을 우리 정부에 보냈다.
북한은 전통문에서 “우연히 서로 싸운 것”이라면서 우리 측에 책임을 전가했지만, ‘제2연평해전’은 북한의 치밀한 사전 계획과 그에 따른 선제 집중 포격 때문에 시작된 전투다. 북한이 계획적 도발을 준비하고 있다는 건 당시 군 지휘부도 사전에 첩보를 통해 알고 있었다.
제2연평해전 직전 대북통신감청부대는 ‘해상 도발 계획’이 담긴 북한군 교신 기록을 감청하고, 이를 토대로 북한군의 결정적 도발 정보를 수차례 보고했지만, 당시 군 수뇌부는 이를 묵살했다. ‘제2연평해전’ 이후 북한의 도발 관련 첩보를 보고한 감청부대장 한철용(韓哲鏞) 소장은 오히려 ‘정보 지원 부족’을 이유로 징계를 받고, 군복을 벗었다. (《월간조선》 2012년 7월호 참조)
북한의 계획적 도발임을 알면서도, 우리 정부는 ‘우발적 충돌’이란 표현이 담긴 북한의 전통문을 즉각 ‘사과’라고 인정했다.
김형기(金炯基) 당시 통일부 차관은 전통문 수령 후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북측이 이번 전통문에서 서해 사태에 대해 사과를 표시한 것으로 간주한다”면서 “이를 계기로 헝클어진 남북대화를 장관급 회담부터 다시 복원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긍정적인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당초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요구한 ‘책임자 처벌’과 ‘재발 방지 보장’에 대해선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었지만, 김대중 정부는 “대단히 긍정적”이라고 호평했다.
한편 북한의 전통문 내용을 ‘사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해도 김대중평화센터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김영삼 정부는 북한으로부터 이보다 더 높은 수위의 ‘사과’를 받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1996년 9월,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 당시 북한은 인민무력부 대변인 담화를 통해 “정상적 훈련 중 좌초됐으며 잠수함과 승조원을 무조건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3개월 뒤인 12월엔 조선중앙통신 등 매체를 통해 “막심한 인명피해를 초래한 잠수함 사건에 대하여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고 밝혔다.
왜 金大中 대통령의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영결식 불참’만 비판받을까?
종합하면 김대중평화센터의 주장 중 상당 부분은 사실과 다르거나 근거가 빈약하다. 그래서였을까. 결국엔 전임 대통령들을 끌어들여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영결식’에 가지 않은 걸 ‘관례’였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포함 사건 때 전사한 장병들의 영결식에 불참한 것,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 당시 교전 중 사망한 군인들의 영결식에 가지 않은 것 역시 비판 받을 만하다. 그러나 두 전임 대통령 사례를 든다고 해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결식 불참을 정당화할 순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두 전임 대통령이 한 다른 일조차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대중평화센터는 이런 식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두둔하기 전에, 국민들이 ‘전사자 영결식’에 불참한 두 전임 대통령에 대해선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는지,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영결식’에 가지 않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겐 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지부터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 2017년 03월 24일 “연평해전 우리 고속정 명중 北신무기 南에서 보낸 돈으로…”
엄낙용 前산은 총재 회고록
對北 송금 폭로 배경 털어놔 “제2연평해전에서 북한이 사용한 신무기가 남한에서 보낸 자금으로 이뤄진 것일 개연성이 있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24일 제2회 서해수호의 날을 맞은 가운데 엄낙용(69·사진) 전 산업은행 총재가 지난 2002년 대북(對北) 송금사건을 폭로하게 됐던 당시 상황을 회고록을 통해 처음으로 털어놨다.
엄 전 총재는 최근 내놓은 회고록 ‘한 공직자의 경제이야기’에서 “지난 2000년 산은 총재 취임 직후 정부 고위층의 지시로 비정상적 여신이 현대상선에 제공됐고, 현대 측은 ‘정부로부터 받으라’며 상환을 거부하는 것을 보며 대출된 자금이 북한에 제공된 걸 알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가 현대 외에 다른 그룹도 대북사업에 끌어들이려고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큰일 나겠구나.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특히 2002년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단 한 번의 포격으로 우리 해군의 고속정을 명중시켰다는 것을 알고 북한이 남한에서 보낸 돈으로 고성능 무기를 늘렸을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면서 “대북송금 문제를 어떻게 해서든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실제로 엄 전 총재는 당시 국회 산업은행 국정감사에서 증인으로 나서 산업은행의 현대상선 대출 과정에서의 외압을 증언하는 방식으로 대북 송금사건을 외부에 알렸다. 이는 ‘대북송금 의혹사건’에 대한 특별검사 수사가 진행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당시 증언 상황에 대해 “매우 곤혹스러워 허리가 끊어지게 아픈 통증을 느꼈다”면서 “그러나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북한에 거액을 제공하는 것은 군사적·정치적 용도로 사용될 것이 명백해 동의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엄 전 총재는 “북한에 자금을 제공해서 연평해전에서 나타난 결과는 우리를 공격하는 무기를 그들의 손에 쥐여준 형국이 아닐 수 없다”고 강조했다.
유현진 기자 cworange@munhwa.com
이미지
/월드스트리트저널 올해의사진
/연평도주민(2010.11.23)에 망신 당하는 손학규
/연평 포격 3주기 추모식 - 13. 11.23. 연평도 평화공원
■ 천안함 피격사건
구분일자내용상황발생/초동조치탐색/구조작전함체인양작전함체 잔해물 탐색/인양작전 및 사후조치
3.26. (금) |
21:22 천안함 백령도 서남방에서 북한 어뢰 공격으로 침몰 21:28 제2함대사, 천안함 침몰 상황 접수, 함미 완전 침몰 21:45 제2함대사, 서북해역 경계태세 강화지시 23:13 승조원 104명 중 58명 구조, 46명 실종 |
3.27. (토) |
13:30 해난구조대와 폭발물처리반 68명. 최초 탐색구조작전 실시 |
3.28. (일) |
22:31 옹진함, 음파탐지기로 천안함 함미 위치 확인 |
3.29. (월) |
01:31 양양함, 음파탐지기로 천안함 함수 위치 확인 |
3.30. (화) |
17:00 해군 특수전여단 수중폭파대(UDT) 소속 준위 한주호,함수 부분 탐색작전 중 실신/전사 |
4.1. (목) |
08:38 탐색구조단, 오전 잠수작업 기상 불량으로 취소, TOD동영상 미공개분 공개, 사고 해역에서 진도 1.5 지진파 관측사실 공개 |
4.2. (금) |
20:30 수색작전 후 조업구역으로 이동하던 저인망 어선 금양 98호 침몰(대청도 인근) |
4.3. (토) |
21:45 실종자 가족, 구조·수색작전 중단 요청 기자회견 |
4.4. (일) |
00:00 실종자 구조·수색작전에서 함체 인양작전으로 전환 |
4.15. (목) |
13:12 천안함 함미 인양(2함대사 도착 : 4.17, 19:09) * 실종자 36명 시신수습 |
4.23. (금) |
15:14 연돌 인양 |
4.24. (토) |
12:30 천안함 함수 인양(2함대사 도착 : 4.25, 21:47) |
4.26. (월) |
10:00 대통령, 천안함 46용사 조문(서울시청 앞) |
4.29. (목) |
10:00 천안함 46용사 합동 영결·안장식 거행 |
5.4. (화) |
11:00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대통령 주재) |
5.15. (토) |
09:23 프로펠러, 추진모터, 조종장치 등 수거 |
5.20. (목) |
10:00 민·군 합동조사단 조사결과 발표 |
5.24. (월) |
10:00 대통령 대국민 담화문 발표 |
■['천안함 폭침, 어뢰를 찾다'… UDT 현장 지휘관이었던 권영대 대령(上)]
해군 1특전대대장 권영대 중령은 진해(鎭海) 관사에서 뉴스를 보며 쉬고 있었다. TV에서 긴급 속보로 '서해 백령도 해상에서 군함 침몰 중' 자막이 나왔다. 2010년 3월 26일 밤 9시 40분이었다.
"그날 밤 선발대로 폭발물 처리반을 긴급 투입한 뒤 본대를 편성했다. 잠수(潛水) 숙달자와 장비 전문가 위주로 32명을 뽑았다. 대원들 개개인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한주호 준위가 명단을 짰다. 다음 날 대원들과 함께 헬기를 타고 백령도로 이동했다. 그렇게 56일간 사투(死鬪)가 시작됐다."
천안함 수중 작업의 UDT 현장 지휘관이었던 그가 '폭침(爆沈), 어뢰를 찾다!'라는 책을 출간했다. 당시 메모와 상부 보고서를 토대로 일기(日記)처럼 썼다.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하는 게 올라왔다. 가령 이런 대목이다.
〈해군사관학교 입교 후 군인으로서 30년을 복무하면서 아직까지도 신념처럼 생각하는 것이 '대한민국 국군은 국토를 방위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이다. 사실 이러한 평소의 신념이 천안함 폭침 사건 현장에서는 많이 흔들리게 됐다. 왜 국민은 군인을 못 믿는 것인가. 군인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총을 쥐여주고 나라를 안전하게 지킬 것을 바라면서 편히 잠들 수가 있는가.〉
이번 주말이 '천안함 사건' 6주년이 되는 날이다. 군함이 두 동강 나고 장병 46명이 숨지는 실전(實戰) 같은 장면의 기억은 많이 희미해졌다. 인천해역방위사령부에서 권영대(51) 대령을 만났다. 그는 해군 27전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권영대 대령은 "침몰하는 순간 생존 확률이 거의 없다. 에어 포켓은 영화에서나 가능하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천안함 '암초 충돌설'은 말이 안돼
―현역 군인 신분으로 이런 책을 내기가 쉽지 않은데, 상부 지시로 한 것인가?
"군(軍)에서는 제한이 많아 소설로 쓰려고도 했다. 하지만 사실을 정확히 알려줘야 한다는 마음에 이렇게 썼다. 보안성 검토를 여러 번 거쳤지만 내가 쓴 대로 통과됐다."
―군(軍) 홍보를 위한 상부 결정이 아니라 본인 의지였다는 뜻인가?
"그렇다. 사건 당시에는 혼란스러웠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 정리돼야 하는데 '천안함 논란'이 계속됐다. 친척과 친구조차 '의심스러운 게 많더라'고 했다. 내가 현장에서 겪었던 걸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2년 전부터 원고를 준비했다."
―'천안함 침몰' 긴급 속보를 접했을 때 본인도 '암초 충돌'로 여겼다고 했는데?
"처음에는 그랬다. 두 동강 났다는 후속 보도를 보고는 '좌초(坐礁)'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암초 충돌로는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쪽 해역(海域)에는 좌초시킬 만한 암초가 없다. 나는 그전에 천안함과 크기와 형태가 똑같은 '여수함' 함장을 지냈고 백령도 해역에도 다녀봤기 때문이다."
/인양된 천안함.
사고 현장 방문한 MB
"내부 폭발 아닌가요?"
"아니면 두 동강 나겠나?"
―'내부 폭발' 가능성도 제기됐는데?
"내부 폭발도 선체를 두 동강 낼 수는 없다. 이는 선박을 타본 경험이 있다면 모두 공감한다. 현장 수중 작업에 들어갔을 때 수중 카메라로 우선 선체를 찍게 했다. 절단면(切斷面) 확인 결과 그을음 흔적이 없고 회수된 물건에도 탄 흔적이 없었다. 내부 폭발이 아닌 게 입증됐던 셈이다."
―사건 나흘째가 된 날, 현장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내부 폭발 가능성'을 언급한 것으로 나오는데?
"대통령은 여러 경로에서 보고를 받고 있어서 많이 알고 있었다. 당시 현장 브리핑에서 '함수(艦首·뱃머리) 위치가 잘못됐다'며 지적할 정도였다. 해군총장 이하 지휘부에게 몇 가지 날카로운 질문을 했다. 특히 '내부 폭발 소지가 충분히 있잖아요? 아니면 이렇게 두 동강 나겠어요?' 하고 말하자, 모두 답변을 못 했다."
배석한 그가 브리핑을 담당한 제독에게 "아니라고 말씀하십시오"라고 하자 "자네가 말씀드려"라고 했다. 결국 중령인 그가 "내부 폭발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순간 분위기가 싸늘했지만 그 뒤 대통령의 질문 방향이 바뀌었다. 마지막에는 '절대 예단하지 말아야 한다. 완벽하게 식별하고 과학적으로 증명까지 해야 한다'는 당부를 했다."
잠수 대원들은 최악의 기상, 강한 조류, 차가운 수온과 싸워야 했다. 목욕탕의 냉탕 온도가 16~17도인데, 바다 수온은 3도였다. 구조 작업을 재촉하는 여론의 압력은 새벽과 야간에도 바닷속으로 뛰어들게 했다. 호흡 조절기가 얼어 공기가 나오지 않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지난 2010년 3월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의 故 한주호 준위 빈소에 놓인 보국훈장 광복장. /조선일보 DB
―대통령이 현장을 떠난 직후 한주호 준위가 숨졌다. 잠수 수색 작업 이틀째였다. 그날 기상이 안 좋은데 대통령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업을 한 것은 아니었나?
"파도가 많이 쳤지만 잠수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대통령을 모셔야 했던 내가 작업 현장에 없었던 게 아쉬웠다. 그때는 긴급 이송 체계도 완전히 갖춰지지 않았다."
한 준위를 건져 올렸을 때 의식과 호흡이 없는 상태였다. 구조 지휘함의 체임버(잠수병 예방을 위한 특수 장비)에는 다른 대원이 들어가 있었다. 한 준위는 미(美) 군함으로 후송돼 심폐 소생술을 받았다.
"한 시간이 지나도 반응이 없었다. 군의관이 '그만 멈추자'고 했지만 '4시간 만에 호흡이 돌아온 경우도 있으니 30분만 더 하자'고 버텼다.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 시신을 싣고 돌아오면서 '이 답답한 양반아!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말을 안 들어'라며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있었다."
<下편에 계속>
<上편에서 계속>
―한주호 준위는 어떤 군인이었나?
"내가 한 준위한테 UDT 교육을 받았다. 교육훈련대에 오래 있었기에 지금 중사 이상의 절반은 그에게 교육받았을 것이다. UDT로서 자부심이 강했다. 천안함 사건 발생 당시 그는 전역을 2년 앞두고 있었다. 부대에 남아 지원해달라고 하자, 그는 '현장에 가지 못하면 나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아 금방 쓰러질 것'이라고 말했다. 솔직히 기뻤다. 그가 안 가겠다고 말했다면 아마 데려가려고 설득했을 것이다."
―정예 잠수 인력이 대거 투입됐어도 생존자 구조 실적은 없었는데?
"세월호 사고 때도 석 달간 현장에서 UDT 전력을 통제했다. 그때도 거의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잠수 인력이 대거 집결하지만, 정조(停潮) 시간이나 연결된 잠수 줄 등의 제약으로 실제 들어갈 수 있는 잠수사는 2명에서 최대 6명이다. 이런 잠수 여건을 모르기 때문에 온갖 의혹과 음모가 난무했다."
/천안함 수색현장 모습. /조선일보 DB
에어 포켓 희망,
현실에서는 힘들어
녹슨 스크류 부분은
물로 씻지 않아 생겨
―세월호 사고 때도 그랬지만, '에어 포켓'에 대한 기대는 현실에서 깨졌는데?
"바닷속으로 침몰하는 순간 생존 확률이 거의 없다. 에어 포켓으로 며칠간 생존해 있다는 것은 영화에서나 가능하다. 선내 격실(隔室)에는 각종 전선과 배관이 연결돼 있어 완전 방수가 안 된다. 가족 처지에서는 실오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어 한다. 우리는 알아도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수색하는 것이다."
사고 7일째, 선미(船尾)에서 시신 한 구(남기훈 상사)가 발견했다. 이는 생존자가 없다는 판단 근거가 됐다. 구조 작업은 중단됐다. 선체가 수면 위로 인양되자 그가 제일 먼저 들어갔다.
"탄약고에서 시신 한 구가 눈에 띄었다. 상의는 벗은 채로 계단을 움켜쥐고 있었다. 차가운 수온 때문에 형태가 유지돼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얼마나 추웠어? 이제 편히 쉬어야지' 하는 말이 나왔다."
그 뒤 그에게 증거물을 찾는 임무가 주어졌다. 사고 해역(가로세로 457m)의 바닥을 훑는 쌍끌이 어선 운용의 지휘를 맡았다. 작업 닷새째 날, 선원이 "또 발전기 같은 게 올라왔네" 하고 말했다. 어뢰 꼬리(스크루)였다.
"대부분 깨끗했고 일부 나사 부분만 약간 녹슨 상태였다. 윗부분에 찌그러진 얇은 알루미늄 판이 덮여 있었다. 그 속에 '1번' 글자가 있었는데 그때는 못 봤다. 그 뒤 TV로 국방부 기자회견에서 보니 스크루가 오래된 것처럼 심하게 녹슬어 있었다. 바닷속 금속 물질은 공기를 만나면 금방 녹슨다. 즉시 물로 씻어야 하는데 그렇게 안 한 것 같았다."
―스크루가 나온 뒤에는 바닷속 잔해물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고?
"나는 천주교 신자라 미신을 안 믿는데도, 어선 선장에게 '물속 전우들의 영혼이 지금까지 열심히 그물에 잔해를 넣어줬는데 결정적 증거물을 넣어주고는 이제 쉬러 갔다'고 얘기했다."
▲지난 2010년 4월 해군특수전여단(UDT/SEAL)이 천암함이 침몰되어 있는 함수 인근 지점에서 수색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조선일보 DB
추측성 보도와 오보는
들을 때마다 정말 힘들어
―현장 지휘관으로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현장 지휘를 하면서 상부에 실시간 보고를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국방부, 합참 합동조사단, 해군본부, 해군작전사령부, 탐색구조단 등 보고해야 할 상급 부대가 너무 많았다. 모두 보고받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휴대전화 하나로 정말 정신이 없었다. 그 뒤 이런 애로 사항을 보고해 해결됐지만."
―언론의 과열 경쟁과 추측성 보도에 대한 지적도 나오는데?
"언론 특성상 특종과 속보에 매달려 부정확하거나 추측에 따른 보도가 많았다. KBS는 단독 보도라며 '한 준위가 수색 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숨졌다'고 오보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군이 뭔가 감추고 있다'는 소리를 들을 때였다. 숱한 사람이 함께 작업하는데 은폐란 있을 수 없다. 만약 그랬다면 사병들이 전역한 뒤 가만히 입 다물고 있겠나."
―이명박 정부에서는 천안함 희생 장병들을 '영웅'이라고 불렀다. 군(軍)의 존재 이유는 싸워서 이기는 데 있다. 천안함 사건은 북한에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다. 우리 군으로서는 치욕적이지 않은가?
"맞다. 함정을 타면 잠수함을 찾는 대잠(對潛) 훈련을 수없이 한다. 천안함 함장은 정말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의 후배였다. 원칙에 맞게 했을 것이다. 그때 기상 상황이 안 좋았다. 전쟁 상황이 아닌데 어뢰 공격을 해온다는 것도 예상을 뛰어넘은 것이다. 사건 발생 뒤 우리는 바닷속 선체를 인양했고 끝까지 증거물을 찾아냈다. 비록 당했으나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낸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그의 책에는 '하루 이상 아무것도 식사를 못 했다' '5일째 침대 근처를 가본 적 없고 신발을 벗어본 적 없다' '군인은 국가가 주는 임무는 불평하지 않고 수행해야 하는 게 철칙이다' 같은 구절도 나온다. 그의 아들은 해군 부사관으로 세종대왕함을 타고 있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최보식 기자
■ [2010.3.26. 21:22 천안함 2년] [1] 국민 57% "천안함? 작년이었나 재작년이었나… 모르겠다"
조선일보·미디어리서치 여론조사
[천안함 인식 어떻게 달라졌나]
"정부가 천안함 진실 조작했다" 답변은 5%
천안함 폭침 2주기를 맞아 실시한 조선일보·미디어리서치 여론조사에서 천안함 폭침에 대한 국민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조사에서 천안함 폭침이 2년 전에 발생한 것을 아는 국민은 43.0%였고 57.0%는 모르고 있었다.
'천안함 폭침은 북한 소행'이라고 믿는 국민은 2010년 3월 사건 직후엔 50%였다가 점차 상승해 70%를 상회했지만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전쟁이냐 평화냐'란 구호가 이슈가 되면서 32.5%까지 하락했다. 그해 11월 연평도 포격 이후엔 다시 '북한 소행'을 믿는 여론이 80%까지 상승했지만 이번 조사에선 71.3%로 다소 하락했다. 북한 소행이란 것을 '믿지 않는다'는 응답 비율은 21.9%였고, '모름·무응답'은 6.8%였다.
'천안함 사건은 북한 소행'이란 것을 믿지 못하는 응답자들에게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 정부가 진실을 조작했다는 음모론이 유포된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질문한 결과에선 '사건 초기에 정부와 군 발표가 오락가락해서'가 64.9%로 가장 많았다. 이어 '실제로 정부가 진실을 조작해서' 23.7%, '천안함은 날조극이란 북한 주장을 믿는 사람이 많아서' 4.7%, '야당에서 정부를 불신하는 주장을 계속 해서' 2.9%의 순이었다. 이 중 '천안함 사건은 북한 소행'이란 정부 발표를 믿지 못하면서 동시에 '실제로 정부가 천안함 관련 진실을 조작했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5.2%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란 것을 믿지 않는 응답자들은 침몰 원인으로 '암초 충돌' 22.3%, '미군 오폭' 18.4%, '유실 기뢰 폭발' 18.2%, '군함 노후화로 인한 피로 파괴' 16.1% 등으로 답했다. 이번 조사에서 '우리 사회가 천안함 희생 장병과 유족들에 대한 예우와 위로가 부족했다'는 질문에 61.0%가 "공감한다"고 했다.
전국 19세 이상 700명을 대상으로 집 전화와 휴대전화를 병행해 RDD(임의번호 걸기) 방식으로 지난 17일 실시한 이 조사의 최대 허용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7%포인트다.
[세대별·성별로 쪼개진 천안함]
"北 소행" 20대 남자 73%, 20대 여자는 43%… 30대선 반대로
조선일보·미디어리서치 조사에서 천안함 폭침에 대한 세대별 여론의 간극은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디어리서치가 지난 2010년 5월 정부 발표 직전에 실시한 조사와 이번 결과를 비교하면 '천안함 사건은 북한 소행'이란 응답은 전체적으로 69.8%와 71.3%로 비슷했다. 하지만 연령별로는 20대(60.0→58.9%)와 30대(58.9→54.9%)에선 하락한 반면, 40대(71.8→74.3%)와 50대(81.7→83.0%), 60대 이상(78.1→85.0%)에선 상승했다. 서우석 서울시립대 교수는 "천안함 관련 음모론이 많이 유포됐던 인터넷과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에 더 많이 노출된 '2030세대'를 중심으로 정부 발표에 대한 불신이 더 커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특히 정부 발표 신뢰 비율은 20대 남성에선 73.1%로 높았지만, 20대 여성에선 43.6%로 크게 낮았다. 반대로 30대의 경우엔 여성은 60.9%로 높았지만, 남성은 49.0%로 낮은 편이었다. 정재기 숭실대 교수는 "30대 남성은 대북 문제에 대해 진보 성향이 강하지만, 여성의 경우엔 결혼과 육아 생활 속에서 대북 문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한편 천안함 사건 이후 정부가 개성공단을 제외한 다른 대북지원과 남북교역을 전면 금지한 5·24 대북제재 조치에 대해선 '인도적 지원은 재개해야 한다'가 55.7%, '대북제재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 24.9%, '대북제재를 전면 해제해야 한다' 16.8%였다. 최근 김관진 국방장관이 "북한이 다시 도발할 경우 10배까지라도 대응사격하라"고 한 발언에 대해선 '적절했다' 63.0%, '부적절했다' 34.1%였다.
조선일보 홍영림 기자 이용수기자
■ 2016-03-26 “영웅들 잊지 않겠습니다” 제1회 서해 수호의 날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1회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연평도 포격 도발로 전사한 장병들의 묘비를 어루만지고 있다. 서해 수호의 날은 북한의 무력 도발로 희생된 호국 용사의 정신을 잊지 말자는 취지로 제정됐다.
대전=청와대사진기자단
2017.04.08 "천안함 46용사는 지금도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습니다"
폭침 7주기… '천안함 대변인' 이기식 前 해군작전사령관
"그들은 살아있다"
軍과 국민들에게 北정권 실체 침묵의 증언
유족들이 진짜 애국자 해군과 국가 원망않고 오히려 軍을 위로해
3代가 해군가족
선친·부인·아들까지 해군에서 복무
이기식(60) 전 해군작전사령관(예비역 중장)은 "천안함 46용사와 천안함은 여전히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천안함이 북한 어뢰 공격으로 두 동강 나면서 46명이 전사했지만 7년째 국군 장병과 국민에게 북한 정권의 실체를 알리고 올바른 국가관과 안보관을 심어주고 있으니까요. 2010년 5월 평택 2함대로 옮겨진 이후 현재까지 100만명이 넘는 사람이 천안함 안보 견학을 했습니다. 제2함대 장병들은 출항하기 전 천안함을 생각하며 결의를 다집니다."
이 전 사령관은 평생 천안함을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爆沈) 직후부터 약 두 달간 천안함 브리핑을 맡았다. 당시 합동참모본부에서 사이버·심리·전자전(戰) 등을 담당하는 정보작전처장(준장)으로 근무했는데, 이 전 사령관이 대(對)잠수함 작전 전문가라는 이유로 국민 앞에 서게 됐다. 천안함이 소속됐던 제2함대 사령관(소장)으로도 부임해 서해 영해 수호 임무를 맡았다. 올 1월 전역한 이 전 사령관은 전역식도 2함대에서 치렀다.
천안함 폭침 7주기를 맞아 인터뷰 요청을 하자 그는 "경기도 평택 2함대 근처 석정식당에서 점심 먹고 천안함에 가 보자"고 했다. 이 식당은 천안함 전사자 고(故) 문규석 원사의 어머니 유의자(66)씨가 운영하고 있다. 부산에 살던 유씨는 "아들이 그리워서" 2012년 2함대 앞에 식당을 차렸다. 3일 유씨는 이 전 사령관을 보자 "사령관님, 한 번 안아봐요" 했다. 유씨는 "천안함 사건 처음에 제일 많이 욕하고 원망했던 사람 중 한 명이 이기식 사령관이었다"고 했다. "아들 잃고 정신없는데 계속 TV에 나와서 천안함에 대해 얘기하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참 고마워요. 2함대 사령관할 때도 그렇고, 요새도 나를 잊지 않고 찾아줘요." 이 전 사령관은 문규식 원사가 좋아했다던 제육볶음을 시켰다.
―천안함 브리핑 때문에 비판을 많이 받았죠.
"사건 초기 천안함이 침몰해 바닷속에 있어서 원인을 규명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유가족을 포함해 전 국민이 진실이 무엇이냐고 물었죠. 제대로 몰라서 브리핑을 못 했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래서 거짓말한다고 비판받았습니다."
―군 발표 내용이 자꾸 바뀌어 신뢰를 잃은 측면이 있습니다.
"북한 어뢰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보가 부족하다 보니 우왕좌왕한 면이 있었습니다. 군사 작전이 기밀에 속하는 내용이 많아서 공개 여부를 두고 시간도 걸렸지요. 군이 국민에게 빨리 알려줘야겠다고 판단해서 완전히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 나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군이 자성해야 할 부분이고, 이후 훈련과 보고 체계가 많이 개선됐다고 생각합니다."
―사건 발생 며칠 만에 북한 소행일 것이라는 의견이 많지 않았습니까.
"단편적인 증거들이 나왔지만 완벽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신중해야 했습니다."
―어느 때 가장 힘들었습니까.
"천안함 괴담이 확산됐을 때죠. 좌초설, 기뢰 충돌설, 미군 잠수함 충돌설부터 자작극이라는 의견까지요.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이라 할 수 있는 북한 어뢰 추진체를 발견했고, 인양된 천안함 모습에서 어뢰 공격 흔적을 발견했는데도 괴담이 수그러들지 않더군요. 한국·미국·영국·호주·스웨덴 등 5국 전문가로 구성된 합동 조사단이 결론을 내렸는데도요. 지금도 괴담이 진실을 덮는 걸 보면 안타깝습니다."
이 전 사령관은 2011년 11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제2함대사령부 사령관직을 수행했다. 그는 이때부터 천안함 유가족뿐만 아니라 제2연평해전 유가족도 만나고 있다.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 당시 북한 경비정 기습 공격에 맞서 싸우다 우리 승조원 6명이 전사했는데, 이들이 타고 있던 참수리 357정(艇)도 2함대 소속으로 2함대사령부에 전시돼 있다.
―전사자 유가족들을 만나면 마음이 편하지 않겠군요.
"네. 그런데 이분들이 오히려 군을 위로해 주십니다. 해군과 국가를 원망하지 않고요. 모든 장병을 동생, 아들, 딸처럼 대해 주세요. 천안함 46용사 중 전사자 6명의 시신을 못 찾았지만 그 유가족분들이 산화했다고 동의해 영결식을 함께 치렀어요. 이분들 모두 진짜 애국자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유가족이 있습니까.
"고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씨예요. 그분은 '나는 아무것도 배운 것 없는 시골 노인네'라고 하지만 정말 애국심이 투철한 분이죠. 유족 보상금으로 받은 1억원을 해군에 내놓았고, 해군이 이 돈으로 3·26기관총 18대를 마련했습니다. 제 전역식에도 오셨는데, 저만 보면 그렇게 안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2함대 사령관으로 있을 때 각오가 남달랐겠군요.
"저보다 2함대 장병들의 결기가 더 대단했습니다. 지금도 작전에 투입되면 다시 못 돌아올 수 있다는 각오로 임합니다. 2함대는 북한과 가까워서 근무 강도가 높은데도 한 번 2함대 복무했던 장교는 다시 돌아오려고 하죠."
―2함대 사령관 이후 해군사관학교 교장도 맡았지요.
"그때 정원의 10%는 학교장 추천을 받은 수험생 중 2박3일 면접이 당락을 좌우하는 특별전형 제도를 만들었어요. 수능 점수는 보지 않고요. 국가관과 리더십이 뛰어난 사람이 장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재 해사는 정원의 30%를 이 같은 방식으로 뽑고 있다.
이 전 사령관은 3대(代) 해군 가족이다. 아버지는 해사 4기 고(故) 이흥섭 대령이다. 3형제 중 장남인 이 전 사령관은 해사 35기이고, 막내 이기남 중령은 해사 38기다. 이 전 사령관의 아들은 해군에서 병사로 복무했다. 이 전 사령관의 부인 김태숙(56)씨도 해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이 전 사령관은 "아버지 임종을 하지 못한 게 한스럽다"고 했다. "아버지는 6·25 때 해사 생도 신분으로 서해 압록강 부근 신미도 전투에 참전해 북한의 소련제 야크기 1대를 격추하는 공을 세웠어요. 이승만 대통령에게서 충무무공훈장을 받았죠. 2013년 3월 13일 이 훈장을 해군사관학교에 기증했어요. 아버지는 병상에 계셨는데, 저는 임무 수행 중이었고 나머지 가족들은 기증식에 참석했죠. 그날 아버지 병세가 갑자기 위독해져서 운명하셨어요. 가족 모두 임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천안함 폭침 이후 책상 위에 천안함 46용사와 실종자 수색작전 도중 순직한 한주호 준위, 제2연평해전 전사자 6명 사진을 두고 있다. 그는 "2함대 구호가 '싸우면 박살 내자'인데, 앞으로 후배 장병들이 북한군을 박살 내는 그 순간까지 앨범을 치우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전현석 기자
■ 2017.08.17 7년 전 천안함이 우리 기뢰(機雷)에 부딪혀 침몰했다는 러시아 문건은 어떻게 공개됐나?
북(北)의 천안함 폭침(爆沈) 부정론자들이 국제적 근거로 활용한 러시아 문건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이 흘렸다!
⊙ 2010년 7월 27일 한 진보 성향 언론매체가 보도한 천안함 관련 러시아 문건은
국정원 산하기관에서 나온 것으로 드러나
⊙ 문건 유출자로 지목된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의 책임연구위원 A씨 여전히 현직에서 활동 중
⊙ A씨, 문재인 정권 들어선 후 국가안보실 1차장 하마평 올라
⊙ “A씨의 징계 수위를 놓고 당시 국회 정보위원회 여야 위원들 간 이견(異見)이 있었다”
(당시 국회 정보위원회 관계자)
⊙ 참여연대, 북한과 함께 천안함 진상 재조사를 하자고 문재인 정부에 건의
7년 만에 진실이 드러났다. 《월간조선》 취재결과 7년 전 북한의 천안함 폭침(爆沈)을 부정하는 진영에서 ‘천안함 기뢰 충돌설’의 국제적 근거로 활용한 ‘러시아 해군 전문가 그룹의 검토 결과 자료’ 문건이 국가정보원 산하 외곽 연구기관인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의 책임연구위원 A씨로 인해 공개된 것으로 밝혀졌다. A씨는 일명 러시아 천안함 보고 자료를 외부에 흘렸다. 정확한 입수 경로를 알 수는 없지만 한 진보매체는 이 문건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보도했다.
국회 정보위원회 관계자는 “당시 문건을 외부로 흘린 것으로 파악된 A씨의 경질 여부를 두고 위원회 내부에서 논란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 야당이자, 현 여당 정보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정보위원회 비공개 회의 때 원세훈 국정원장에게 A씨를 경질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주장했다는 것이다.
당시 원 원장은 A씨의 문건 유출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건 유출 사건으로 인해 징계를 받은 A씨는 지금도 여전히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A씨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서 총괄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활동했던 4선의 송영길 의원과 가깝다고 한다.
선거대책위원회의 최고위직은 선거대책위원장이지만 이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실제 선거운동을 끌고 가는 자리는 총괄 선거대책본부장이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후 A씨는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잊지 못할 그날
2010년 3월 26일 밤 9시 15분, 북한 연어급 잠수정(130t) 정장(艇長)은 백령도 서남방 4.8km 지점에서 은밀하게 잠망경을 올렸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흘렀다. 주변 상황이 어뢰를 발사하기에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이다. 잠수함은 통상 어뢰 발사 전 잠망경으로 목표물을 확인한다. 이때가 수상함에 발견될 가능성이 제일 크다.
그러나 이날은 그럴 걱정이 없었다. 백령도 근해에 2m 내외의 파도가 일고 있었던 탓이다. 천안함을 확인한 잠수정은 급히 잠항하여 중어뢰를 발사했다. 천안함은 두 동강이 났고, 꿈 많던 46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북한 소행일 것이라고 짐작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상회담을 열자고 매달리는 북한과 막후 접촉을 진행 중이던 이명박 정부도, 햇볕정권 10년 동안 ‘김정일은 식견 있는 지도자’라고 세뇌(洗腦)를 받아 온 일반 국민도 그저 불행한 사고가 터진 것이라고 믿었다.
“천안함 폭침은 북한 소행”
▲《월간조선》 취재결과 7년 전 북한의 천안함 폭침(爆沈)을 부정하는 진영에서 ‘천안함 기뢰 충돌설’의 국제적 근거로 활용한 ‘러시아 해군 전문가 그룹의 검토 결과 자료’ 문건이 국가정보원 산하 외곽 연구기관인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의 책임연구위원 A씨로 인해 공개된 것으로 밝혀졌다. 사진 속 인물은 사건과 전혀 관련없음.
2010년 5월 20일 천안함 폭침 사건을 조사해 온 국제 민·군 합동조사단은 “천안함은 북한제(製) CHT-02D 어뢰의 수중(水中) 폭발(에 따른 버블제트의 영향)에 의해 선체가 두 동강 나 침몰했다”고 발표했다. CHT-02D는 함정이 내는 소리를 추적해 목표에 접근, 폭발하는 어뢰다. 길이 약 7m, 직경(直徑) 53cm, 무게 1.7t에 250kg의 폭발화약을 담은 중(重)어뢰다.
조사단은 “이 북한제 어뢰는 (서해 우리 해역을 무단 침범한) 북한의 잠수정으로부터 발사되었다는 것 외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고도 했다. 국제 민·군 합동조사단은 한국인 전문가 49명과 미국·호주·영국·스웨덴 4개국 전문가 24명 등 73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어떤 외부 충격이 가해졌을 때 천안함 절단면과 같은 결과가 나오는지 수없이 모의실험을 했고, 천안함 절단면과 사고 해역에서 발견된 북한 어뢰추진체에 각각 남아 있는 흡착물을 비교 분석해 ‘어뢰에 의한 수중 폭발’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조사단은 천안함이 ‘어뢰 등의 외부 폭발’에 의해 침몰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간 공개하지 않았던 천안함 선체 실물 사진 20여 장을 공개했다. 이를 보면 두 동강 난 선체 앞·뒷부분의 절단면 밑바닥이 모두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꺾여 있는 게 뚜렷하다.
천안함 바로 아래에서 강력한 수중 폭발이 있었다는 증거다. 조사단은 “사고 당시 2~3초간 (버블제트 물기둥 현상인) 높이 약 100m의 흰색 섬광 기둥을 보았다”는 백령도 해안 초병(哨兵)의 진술도 처음으로 공개했다. 조사단은 북한을 ‘주범(主犯)’으로 지목하게 된 물적(物的) 증거로, 쌍끌이어선이 2010년 5월 15일 천안함 폭침 현장 부근 바다 밑에서 수거한 길이 1.5m의 어뢰 뒷부분의 동체(胴體)를 공개했다.
동체 내부에는 한글로 1번이라고 표기돼 있었다. 조사단은 “북한군이 어뢰 제작 과정에서 남긴 것으로, 우리 군이 2003년 습득(拾得)한 북한군 훈련용 어뢰에 한글로 ‘4호’라고 쓰여 있는 것과 일치하는 (북한군만의) 표기 방식”이라고 했다. 조사단은 비밀 정보자료를 통해 “북한의 서해 해군기지에서 운용되던 일부 소형 잠수정과 지원 모선(母船)이 천안함 폭침 2~3일 전에 기지를 떠났다가 천안함 공격 2~3일 후에 복귀한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반면 같은 시기에 북한과 비슷한 어뢰를 사용하는 중국·러시아 등 다른 주변국의 잠수정은 모두 자국(自國) 내 모(母)기지에 정박 중이었거나 그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에 참여한 4개국 대표는 각국의 이름을 걸고 ‘북한 어뢰 공격에 의해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조사결과에 동의한다’는 친필 서명을 남겼다. 조사 결론은 국제적으로도 공증(公證)됐다.
기뢰에 의해 침몰했다는 러시아 문건의 실체
▲천안함 폭침이 북의 어뢰 때문이라는 증거. 북 어뢰 추진축 뒷부분 안쪽에는 1번이라 적힌 글씨가 선명하다. 숫자는 북한군만의 표기방식이다.
조사단의 세밀한 과학적 조사결과가 나왔지만, 인터넷에는 좌초설, 기뢰 충돌설, 미군 잠수함 충돌설, 정부 자작극 등 온갖 음모론이 난무했다. 이 중 ‘기뢰 충돌설’이 특히 힘을 받았다. 2010년 7월 27일 한 진보 성향 언론매체는 〈단독/ 러시아, 천안함 침몰원인 ‘기뢰’ 추정〉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2010년 5월 31일부터 6월 7일까지 한국에 머물며 천안함 침몰 사고를 직접 조사했던 러시아 조사단이 작성한 문건(러시아 해군 전문가 그룹의 검토 결과 자료)을 보도했다. 이 매체는 문건을 그대로 옮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 해군 전문가그룹은 2010년 5월 31일부터 6월 7일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를 접하고 분석과 실험을 위해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러시아 전문가들에게 제시된 자료를 분석하고 실험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천안함 폭발은 접촉에 의하지 않은 함선 하부의 수중 폭발로 분류된다.
둘째, 한국 측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천안함 침몰사건의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들어맞지 않는다.
■ 한국 측에서 공식적으로 언급한 폭발시간(21시 21분 58초)은 보유 자료들에 비춰 본 실제의 예상 폭발시간이나 사건 당일에 함선 안의 전류가 끊어져 마지막으로 찍힌 동영상의 촬영시간(21시 17분 3초)과 일치하지 않는다. 천안함에 탑승해 있던 승조원이 탑승 승조원들이 부상당했다고 해안 통신병에게 핸드폰으로 알린 시간이 21시 12분 03초로서, 이 첫 통화시간 기록은 한국 측이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 천안함은 해당 참사가 일어나기 전부터 해저면에 접촉되어 오른쪽 스크루 날개 모두와 왼쪽 스크루 날개 두 개가 손상을 받았으며, 훼손된 스크루를 광택이 나도록 심하게 깎아 스크루의 넓은 범위에 걸쳐 마찰로 인한 손상 부위가 있었던 것이 조사결과 감지되었다는 점이 확인된다. 앞서 언급한 스크루 날개의 몸체 쪽과 끝쪽이 늘어나 있다. 오른쪽 스크루 날개 중 한 개의 가장자리에 금속 균열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함선 오른쪽 프로펠러 축이 순간적으로 멈추면서 생겨난 관성작용에 의해 프로펠러 날개의 변형이 발생하였다”는 한국 민군 합동조사단 측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다.
■ 피해 함선에서 프로펠러 축의 오른쪽 라인에 엉켜 있는 어선 그물의 잔해가 발견되었다. 이는 “기동지역 내에 어로구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한국 측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 제시된 어뢰의 파편이 북한에서 제작된 것일 수는 있으나, 잉크로 쓰인 표시는 일반적인 표준(위치, 표기방법)에 들어맞지 않는다. 제시된 어뢰의 파편을 육안으로 분석해 볼 때, 파편이 6개월 이상 수중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함선의 피해지역에는 기뢰 위험이 존재하며 이는 한반도 서해안에서 정박 및 항해 장소를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로도 간접적으로 입증된다.
러시아 전문가들이 조사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천안함의 사고원인이 접촉에 의하지 않은 외부의 수중 폭발이라는 주장이 확인되었다.
둘째, 천안함은 침몰 전에 오른쪽 해저부에 접촉하고 그물이 오른쪽 프로펠러와 축의 오른쪽 라인과 엉키면서 프로펠러 날개가 손상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물이 오른쪽 프로펠러와 축의 오른쪽 라인과 엉키면서 천안함이 항해 속도와 기동성에 제약을 받았을 것이다.
함선이 해안과 인접한 수심 낮은 해역을 항해하다가 우연히 프로펠러가 그물에 감겼으며, 수심 깊은 해역으로 빠져나오는 동안에 함선 아랫부분이 수뢰(水雷) 안테나를 건드리며 기폭장치를 작동시켜 폭발이 일어났다.
또한, 다른 해석으로는 함선이 내비게이션의 오작동 아니면 기동성의 제약 상태에서 항해하다가 우연히 자국의 어뢰로 폭발됐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한국 측에서 제시한 어뢰 파편은 구경 533mm 전기 어뢰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 어뢰가 천안함에 적용됐다는 최종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나?
▲2017년 3월 24일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묘역’에서 한 전사자의 유족이 묘비 앞에서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날 대전현충원에서는 국가보훈처 주최로 ‘제2회 서해수호의 날’ 행사가 열렸다.
천안함 침몰의 원인이 ‘외부의 비접촉 수중 폭발’에 의한 것이지만, 어뢰가 아니라 기뢰 폭발일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이 담긴 이 문건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우리 군이 백령도 앞에 부설했던 기뢰가 천안함 스크루에 끌려 올라와 충돌해 폭발,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황당한 음모론은 더욱 활개를 쳤다. 앞서 언급했듯 진보 성향 언론매체가 보도한 이 문건은 국정원 산하 외곽 연구기관인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의 책임연구위원 A씨가 외부로 흘린 것이다.
이 매체가 보도한 러시아 해군 전문가그룹이 작성한 문건은 큰 무게를 둘 필요 없는 자료였다는 지적이다. 조사단은 73명의 국내외 전문가가 참여해 34일간 과학적 객관적 조사과정을 거쳐 결론을 낸 반면 러시아 문건은 불과 3명의 러시아 해군 전문가가 5일 동안 우리 측 설명을 듣고 절단된 천안함을 살펴본 후 작성됐다.
상식적으로 이렇게 작성된 문건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도 인정한 조사단의 결과보다 정확할 확률은 거의 없다. 실제 기뢰로 인한 폭발은 말이 안 되는 분석이다. 백령도 앞에는 1977년 설치된 30여 발의 MK-6 개량형 기뢰가 있긴 했다.
하지만 1985년 폭발을 유도하는 도전선이 절단됐고 컨트롤 박스가 제거돼 불능화(不能化)한 상태였다. 2008년에는 2개월여간의 수색 끝에 남아 있던 기뢰를 찾아내 제거했다. 게다가 러시아는 여전히 북한 편에 서려는 본성을 숨기지 않는 국가다. 북한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천안함과 관련한 러시아 내 친북 인사의 글을 선전도구로 활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북한의 천안함 책자(〈천안함 침몰 사건의 진상〉)를 보면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소장인 알렉산드르 보론초프(Alexander Vorontsov)가 2010년 6월 10일 ‘천안함 사건은 미국과 한국의 자작극’이라는 식으로 쓴 글을 그대로 실었다.
〈천안호 사건 조사 결과 발표 후 미국, 남한의 움직임은 마치 사전에 면밀히 준비한 각본에 따른 것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든다. 남한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유엔 안보이사회를 통한 대북 압박을 보다 강화하는 것을 이상적인 방안으로 간주하고 여기에 중국과 러시아를 참가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미국은 이번 사건을 중국 인접 지역에서 미국의 군사정치적 이익을 더 잘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성했다고 보고 있다.〉
이 글을 쓴 알렉산드르 보론초프는 학회에 북한 기근(饑饉)을 부인하는 등 북한 정부의 입장을 대변한 경우가 많다. 그는 북한이 지난 2009년 4월 5일 무수단리에서 광명성 2호라고 명명한 장거리미사일 시험 발사를 진행했을 때 “북한이 미사일이 아닌 인공위성을 발사한 만큼 2006년 안보리 결의안을 위반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국회 정보위 관계자들은 A씨의 문건 유출 사건에 대해 “A씨가 조사단의 결정을 뒤집어 보겠다는 계산을 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을 한 것 같다”고 했다.
여전히 북한 소행 부정하는 참여연대
▲참여연대는 2017년 6월 1일 국정기획자문위원회(문재인 정부의 정권인수위원회 격)에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야 할 9대 분야 90개 개혁과제 제안서’를 제출했는데 90개 과제 중 하나가 ‘천안함 침몰 진상 규명’이었다.
많이 줄기는 했지만, 아직도 천안함 폭침이 북의 소행이 아니라는 황당한 음모론을 퍼뜨리는 사람들과 그걸 믿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2010년 6월 유엔 안보리에 조사단 조사결과의 의문이 많다는 보고서를 제출한 시민단체 참여연대는 정권이 바뀌자 천안함 사건에 대해 재조사를 주문했다.
참여연대는 2017년 6월 1일 국정기획자문위원회(문재인 정부의 정권인수위원회 격)에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야 할 9대 분야 90개 개혁과제 제안서’를 제출했는데 90개 과제 중 하나가 ‘천안함 침몰 진상 규명’이었다.
참여연대는 제안서에서 “천안함이 침몰한 지 7년이 지났지만 군 기밀주의로 인해 침몰 원인에 대한 많은 의혹이 풀리지 않은 채 아직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며 “국회는 초정파적인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국정조사를 통해 사건 진상을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 참여연대는 “조사결과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관련 국가 및 북한의 참여까지 허용하는 국제적 검증작업도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북한과 함께 천안함 진상 재조사를 하자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참여연대의 입김은 그 어느 때보다 커진 상태다. 핵심 요직에 참여연대 출신 다수가 포진한 까닭이다. 허위 혼인신고, 아들의 고교 시절 퇴학 처분 번복 등 논란으로 사퇴한 안경환 전 법무부장관 후보자는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에서 활동했다. 당시 센터 부소장은 현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에서 일했고,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도 장 실장과 함께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에서 ‘경제민주화 운동’을 했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는 2010년부터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지냈다. 정 후보자는 2010년 북한의 천안함 폭침에 대한 미국 입장을 비판했다.
당시 정 후보자는 미 의회에서 열린 한반도 평화포럼에서 “천안함 사건은 과학저널 《네이처》에서도 논쟁이 진행 중인 사안인데, 미국이 천안함 사건을 유엔 안보리에 회부한 한국 정부를 지지한 데 대해 한국 시민사회가 미국의 ‘균형자’ 역할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참여연대 출신 인사들은 청와대 행정관급에서도 여러 명 활동하고 있다.
5·24조치 해제하면 순직한 장병은 뭐가 되느냐?
문재인 정부가 남북 관계 재개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면서, 청와대, 정부 핵심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5·24 제재 해제 목소리가 나온다. 문 대통령을 오랫동안 도왔던 문정인 통일외교안보 특보는 5월 22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5·24 조치는 이미 유명무실화됐으니 해제해야 한다”며 “북핵(北核)을 없애는 것은 다음 문제이고 당장 북한이 미사일을 증강하는 것을 저지하는 게 중요하다. 이를 위해 정상적인 거래를 하면서 북을 안심시켜 대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눈치 빠른 통일부 당국자들은 민간 교류를 본격적으로 재개하는 방안 검토에 착수했다고 한다. 5·24 제재는 2010년 북한의 천안함 폭침으로 우리 군인 46명이 숨지고 나서 취한 최소한의 조치다. 개성공단을 제외한 방북 등 남북 교역을 불허하고, 북한 선박의 우리 해역 운항 불허, 대북 신규 투자 불허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북한은 천안함 폭침에 대해 어떤 책임도 인정한 적이 없다. 도리어 우리의 자작극, 모략이라고 한다. 이런 북의 행태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우리가 먼저 나서서 5·24조치를 해제하면 북한은 ‘남한이 자작극’임을 시인했다고 선전할 것이다. 자유한국당 소속 국회 정보위 관계자들은 “5·24조치 해제하면 순직한 장병 46명은 뭐가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미 있는 재판 결과
2016년 1월 2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는 천안함 폭침 사건에 대해 “정부와 군 당국이 침몰 원인을 조작했다”며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기소된 인터넷 매체 서프라이즈 전 대표 신상철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천안함 폭침이 북의 소행이라는 것은 법적으로도 명백히 밝혀진 사실이다. 2016년 1월 2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는 천안함 폭침 사건에 대해 “정부와 군 당국이 침몰 원인을 조작했다”며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기소된 인터넷 매체 서프라이즈 전 대표 신상철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일부 네티즌이 아직도 ‘천안함 기뢰 폭침설’ 등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법원이 신씨가 제기한 ‘천안함 음모론’은 모두 허위이고 천안함은 북한 어뢰에 의해 침몰한 것이 맞다고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 재판부는 이날 선고에 앞서 “명예훼손 사건이지만 천안함의 사고 원인과 항간에 떠돌던 여러 의혹에 대해 과학적 근거에 따라 철저히 조사했다”고 밝혔다.
신씨는 2010년 3월 31일 천안함 합동조사단이 발족한 이후 민주당(더불어민주당 전신) 야당(지금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추천으로 민간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신씨는 “(군이) 다 조작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며 합조단을 떠난 뒤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매체 서프라이즈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음모론을 주장했다.
천안함 침몰의 1차 원인은 ‘좌초’이고, 선박이나 미군 군함과의 충돌이 2차 원인이라는 것이다. 검찰은 2010년 8월 신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이날 1심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5년 5개월이 걸렸다. 법정에 출석한 증인만 57명이나 됐고, 검찰이 제출한 수사 기록도 5000쪽을 넘었다.
신씨가 암 치료를 받느라 상당 기간 공판이 중단되기도 했다. 50회 넘는 공판이 열리는 동안 재판부는 6번, 공판 검사는 5번 바뀌었다. 재판부는 이날 핵심 쟁점인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해 “천안함은 수중 폭발에 따른 충격파와 버블 효과에 의해 절단돼 침몰했고, 사용된 무기는 북한 어뢰 ‘CHT-02D’나 그와 유사한 어뢰”라고 밝혔다. 신씨가 주장해 온 음모설을 일축한 것이다. 재판 결과에 대해 신씨를 추천한 더불어민주당은 침묵했다. 당시 원내대표였던 이강래 전 의원은 “신씨를 대체 누가 추천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평택 2함대 천안함 기념관 외부 전경. 기념관에 들어서면 가장 처음 보이는 것이 두 동강이 난 천안함이다.
해군은 천안함이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한 지 7년 만인 2017년 1월 2일 경기도 평택에 천안함기념관을 열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가장 처음 보이는 것이 두 동강이 난 천안함이다. 두꺼운 강철판은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고, 수백 가닥의 전선은 바람에 힘없이 흔들렸다.
흰 해군 정복(正服)을 입은 안내장교 김인지 중위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검은 페인트가 칠해진 부분이 흘수선(吃水線·배와 수면이 만나는 선)입니다. 밑에 있어야 할 흘수선이 천장에 가서 붙은 게 보이십니까? 좌초가 아닌 강력한 외부 폭발로 침몰했다는 증거입니다.”⊙
출처 | 월간조선 2017년 8월호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 2018.02.23 북한 김영철 주범 천안함 피격(被擊) 시나리오
북한 김영철 주범 천안함 피격(被擊) 시나리오 최초 공개
북한 잠수정, 사흘간 매복하다 수심 30m 지점에서 어뢰 발사
수심 30m 지점으로 잠항한 북한 잠수정은 천안함과 거의 같은 속도로 접근하면서 3km 떨어진 거리에서 어뢰 1발을 발사했다. 어뢰는 천안함을 향해 나아가 가스터빈실 좌현 3m 아래, 수심 약 6~9m 부근에서 근접신관의 감응으로 정확하게 폭발했다. 어뢰가 발사된 후 채 3분이 걸리지 않았다
⊙ 북한의 연어급 잠수정과 공격에 대한 구체적인 가설 첫 공개
⊙ 북한 연어급 잠수정, 2010년 3월 24일 서해 비파곶 기지 출항
⊙ 천안함, 백령도 좁은 해역에서 ‘8자형 패턴’ 경계 수개월째 반복한 것이 禍根
⊙ 폭발 몇 초 후 물기둥이 함 중앙 치는 모습 보며 명중 확인… 3월 30일 母기지 복귀
천안함 피격(被擊) 5주기를 앞두고, 폭침을 일으킨 북한 잠수정의 움직임과 공격 방식에 대한 가설(假說)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 내용은 폭침(爆沈) 당시(2010년 3월 26일) 수중 해양환경과 한미(韓美) 군(軍) 당국의 정보, 천안함의 항적자료, 북한의 잠수정 전술 등을 토대로 추정한 것으로 이명박(李明博) 정부 시절, 청와대 국방비서관실(室)이 내부적으로 공유했던 사안이다.
이런 사실은 천안함 폭침 당시 청와 대 국방비서관실에 근무했던 행정관 이종헌(李鍾憲)씨가 1월 말 출간할 《실록 천안함》에 담겨 있다. 《월간조선》은 앞서 원고 일부를 입수했다.
지금까지 북한 잠수정의 구체적인 이동경로나 공격방식에 대한 군 당국의 분석과 판단은 있었으나 그 경로 등에 대한 추정이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처음이다. 앞서 2011년 간행된 《천안함 피격사건 백서》에는 피격 발생에서 구조·인양 등 피격 이후의 정부 대응이 중심이었다. 이번에 공개되는 공격 가설은 천안함 피격의 객관적 사실로 단정할 수 없으나 축적된 정보와 자료, 합리적 판단을 토대로 작성된 것임을 밝혀둔다. 천안함 진실규명 노력의 값진 산물이자 결정판이다.
이 전 행정관은 책 출간에 앞서 “지금도 상당수 국민이 북한 공격 사실을 믿지 않고 있다. 더 이상 천안함 공격을 북한 전쟁범죄와 도발 목록에 올리는 데 이견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지난 5년은 천안함 희생의 탈상(脫喪) 과정이었다. 고귀한 희생을 새로운 남북 화해와 협력의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이 일어나기 전부터, 우리 군은 북한 잠수정에 의한 어뢰 공격 가능성을 검토했다. 몇 차례의 전술토의도 진행했다. 당시 군 정보 파트는 북한이 잠수함을 활용해 함정 공격을 연습하고 있다는 첩보를 보고하기도 했다.
2010년 1월, 합참은 북의 잠수함 공격에 대비해 함정의 방향을 자주 바꾸는 등 상황별 대응조치를 지키고 숙달하도록 지시했다. 또 해군도 2월 22일부터 구축함과 초계함, 잠수함 등 각종 대잠(對潛) 전력이 참가한 가운데 북한 잠수함의 함정 공격 상황을 가정한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겨우내 얼었던 북한 서해안의 결빙(結氷)이 풀리던 그해 3월 23일 북한 남포와 비파곶, 해주 기지에서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 연어급 잠수정, 예비 모선(母船) 등이 거의 동시에 움직이는 모습이 포착됐다. 하지만 이내 북한 상어급 잠수함(300t급) 2척은 3월 23일부터 28일까지, 연어급 잠수정(130t급)은 3월 24일부터 31일까지 미식별됐다. 하필 비파곶과 남포의 해군기지 등이 구름에 가려져 있어 한미 당국의 감시망은 이들의 기지 이탈과 사라진 ‘순간’을 포착할 수 없었다.
동시에 예비 모선 여러 척도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피격 당일 3월 26일 해군 2함대엔 ‘또 다른 공작 예비 모선과 연어급 잠수정 1척이 기지를 이탈하여 미식별되고 있다’는 정보보고가 전파됐다.
피격 이후 한미 당국은 모든 감시망을 총동원해 북한 잠수함 기지와 잠수함정을 정밀 추적했다. 이들 미식별 잠수정과 공작선은 3월 31일에야 포착됐다.
이 전 행정관에 따르면, 북한 잠수함정의 미식별 사례는 매우 잦았다고 한다. 수일 또는 수십 일 동안 행적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2011년 6월에도 북한 잠수함 한 척의 행방불명이 예상 외로 길어져 우리 군 당국을 긴장시킨 일이 있었다.
특정한 잠수함의 ‘실종 상태’가 길어지면 한미 군 당국의 긴장은 점점 높아져 간다. 다른 수상함이나 전투기, 탱크와는 달리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지 알 길이 없고 또 해안 침투 등 특이하고 다양한 도발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함정 수리 등을 위해 건물 내부로 들어가 있거나 훈련 중인 것으로 믿으며 애써 긴장을 달랜다.
수개월째 같은 경계 패턴이 禍가 돼
▲인양한 천안함의 아랫부분을 촬영한 사진. 외부 충격으로 선체가 안쪽으로 눌려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잠수함정은 기지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정확하게 식별할 수 있다. 한번 행적을 놓치면 우리 감시망에 다시 잡힐 때까지 어디서 뭘 하는지 알기란 쉽지 않다. 최첨단 군사위성이나 한미연합 영상장비의 어떤 광학 렌즈도 수중(水中)을 탐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수상(水上)이 아닌 수중을 찍는 렌즈는 없기 때문이다. 전파도 수중에서는 얼마 나가지 못해 사정은 거의 같다.
특히 매복과 기습을 노리는 수중의 적을 막기란 매우 힘들다. 북한 잠수정은 초계함이나 대잠항공기가 올라갈 수 없는 NLL 이북의 특정 지점에서 잠항(潛航)을 시작해 공해로 나가고, 공해상에서 대기하다 침투하는 전술을 주로 쓴다. 이 전 행정관의 말이다.
“천안함을 공격한 북한 잠수정도 같은 경로를 따랐습니다. 군은 북의 잠수정 예상 침투경로를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대잠시설을 설치했지만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숨어드는 적을 탐지하는 것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9년 11월 10일 대청해전(大靑海戰) 이후 서해 NLL의 백령도 남서방 경계작전은 이미 수개월째 같은 경계 패턴을 유지해 왔습니다. 따라서 경계수역과 대응체계는 이미 북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 전 행정관은 북한 연어급 잠수정이 3월 24일 비파곶 기지를 출항해 서해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공작 모선과 조우했을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천안함 공격조인 공작 모선과 잠수정이 함께 움직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우리 감시 자산에서 사라졌다. 따로 움직였을 것으로 본다. 따로 움직일 경우 우리의 정보 감시체계를 피할 가능성이 높고 포착되더라도 통상적인 훈련 등으로 위장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작 모선의 역할은 주로 잠수정에 연료나 음식물을 보급하거나 평양으로부터 내려온 작전명령을 전달한다. 당시 잠수정은 공작 모선으로부터 필요한 지원을 받고 스노클(일종의 숨대롱)만 수면에 노출한 채 공해상으로 남하하다 백령도 서남방으로 은밀히 침투, 3월 25일 오후 백령도 서북쪽 천안함 경비 수역 외곽에 도착해 매복에 들어갔다.
이때 천안함은 기상악화 때문에 경계수역을 이탈해 대청도 서방에 닻을 내리고 피항 중이었다.
잠수정이 어뢰를 발사하기 위해서는 6노트 이상의 속도로 기동해야 하고 발사침로 유지를 위해서는 5노트 이상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 또 조류 속도의 영향을 덜 받기 위해 수면 근처보다는 최소 30m 이상 수심이 깊은 곳에서 어뢰를 발사해야 한다. 이 전 행정관의 말이다.
“북한 신형 잠수함정의 탐지거리는 우리 초계함(PCC) 소나(음탐장비)에 비해 너무나 월등했습니다. 북한 잠수정에 장착된 어뢰의 사거리는 12km 이상으로, 천안함 소나의 탐지거리보다 몇 배 이상 길었어요. 잠수정은 천안함이 탐지할 수 없는 먼 거리에 숨어서 멀리서 보고 어뢰를 쏠 수 있었어요.”
북한 잠수정, 천안함 가까이에 접근해 ‘에이치아워’ 기다려
▲천안함 피격 4주기인 2014년 3월 27일 인천시 옹진군 46용사 위령탑에서 열린 ‘천안함 46용사 참배’에 참석한 군 장병들이 희생자들의 부조 앞에서 경례를 하고 있다.
다음은 구체적인 천안함 폭침 가설이다.
피항 중이던 천안함은 3월 26일 오전 8시30분 임무수역에 복귀했다.
3월 26일 백령도 앞 파고는 3.5m로 매우 높았다. 북한 잠수정은 25일 오후 천안함 경비수역 외곽에서 매복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천안함은 합참의 ‘잠수함 대응지침’에 따라 1~3마일 정도마다 침로를 급격히 바꾸며 불규칙하게 기동했다.
3월 16일 평택항을 떠나 이 좁은 해역에서 11일째 8자형의 유사한 패턴으로 돌며 경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거의 제자리에 붙박이로 있는 아주 쉬운 표적이었다.
북한 잠수정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천안함은 오전 11시, 오후 1~2시30분, 오후 5시와 7시 등 여러 차례 수심 50m 이상 수역으로 진입했다가 다시 백령도 인근으로 들어갔다. 이날 비운(悲運)의 천안함은 오후 2시부터 포상휴가를 내걸고 함내 승조원들의 ‘도전 골든벨’ 행사를 열고 있었다.
주간의 기습은 위험하다. 발각될 위험이 높고 은밀한 도주가 용이하지 않다. 잠수정은 끈질기게 에이치아워(H hour·공격 개시 시각)를 기다렸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북한 잠수정은 남동쪽으로 흐르는 조류를 타고 모든 소음을 죽인 채 잠항하며 경비구역 안으로 파고들었다. 공격 대기 지점은 백령도 서방 5마일 지점이었다. 드디어 밤이 되었다. 이날 밤은 월광(月光) 81% 수준. 표적 탐지 및 식별도 비교적 쉬웠다.
밤 8시부터 천안함은 먼바다로 나오지 않고 백령도 연안과 3.5km 정도 거리를 두고 152도 방향으로 동남진을 시작했다. 천안함은 밤 9시5분 백령도 쪽으로 45도 변침(變針)하면서 속력을 높였다.
일반적으로 배가 항로를 바꾸는 순간 파도를 배 옆쪽으로 받게 되면 배가 많이 흔들리게 된다. 천안함은 파도의 영향을 최소화해 덜 흔들리게 하기 위해 속력을 9.4노트로 올렸다. 변침이 완료되자 속력은 5.2노트로 떨어졌다.
백령도 방향으로 나아가던 천안함은 밤 9시10분쯤 327도 북서 방향으로 최후의 대(大)변침을 실시했다. 천안함은 백령도 ‘두무진’ 해안선과 나란히 6.7노트로 움직였다. 잠수정은 밤 9시17분쯤 마침내 공격이 용이한 수심 50m 지점으로 접어들었다. 이때 잠수정은 천안함의 8시 방향에 있었다. 천안함은 함의 좌현을 잠수정에 그대로 드러낸 채 북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좁은 해역, 8자형 패턴의 悲劇
▲미국의 민간 상업 위성 구글어스에 찍힌 북한 남포기지에 정박 중인 연어급 잠수정. 2011년 6월 촬영됐다.
좁은 해역 내 8자형 패턴의 움직임은 잠수정이 천안함의 함 중앙을 공격할 수 있고 명중률이 극대화된 최적의 각도를 노출시켰다. 북한 연어급 잠수정은 28m 크기로, 좌우 발사관에 직경 54cm, 총 길이 7.35m, 무게 1.7t의 어뢰(CHT-02D) 2발을 장착하고 있었다.
자체 소나로 천안함의 항적을 추적하던 북한 잠수정은 수심 40m 지점에서 공격 대기를 하다가 수심 10m로 부상해 잠망경을 꺼내 최종 목표를 식별했다.
다른 변침 없이 10여 분째 북서 방향으로 움직이는 천안함 불빛이 확인됐다. 그리고 다시 수심 30m 지점으로 잠항한 후 천안함과 거의 같은 속도로 접근하면서 3km 떨어진 거리에서 어뢰 1발을 발사했다.
수심 30m 지점에서 유속 2.89노트의 썰물을 가르며 30노트 이상의 속도로 비스듬히 상승했다. 어뢰는 천안함의 추진기와 엔진으로부터 방사되는 소음을 탐지하여 가스터빈실 방향으로 진입했다. 어뢰는 천안함을 향해 나아가 가스터빈실 좌현 3m 아래, 수심 약 6~9m 부근에서 근접신관의 감응으로 정확하게 폭발했다. 어뢰가 발사된 후 채 3분이 걸리지 않았다.
폭발 몇 초 후 물기둥이 함 중앙을 치고 올라오는 모습을 보며 명중임을 확인한 잠수정은 서해 쪽 공해상으로 도주했다. 피격 1시간20분 후 대북 경계와 도주로 차단을 위해 속초함이 현장에 도착했다. 속초함은 북쪽 NLL 방향을 수색하다가 레이더에 걸린 특이물체를 탐지하고 포탄을 쏘기 시작했다. 이미 잠수정은 우리 군의 서쪽 작전경계선 AO(작전지역·Area of Operations) 바깥 공해상으로 도주한 후였다. 그리고 이 잠수정은 3월 30일 모(母) 기지로 복귀했으며 31일 식별됐다.
탄로난 北의 거짓말
천안함 폭침 이후 북한은 진상공개장에서 ‘우리는 알루미늄 합금이 아닌 강철합금 재료로 만든 주체식 어뢰를 쓴다’며 피격 현장에서 수거한 통칭 ‘1번 어뢰(CHT-02D 어뢰)’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번 어뢰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프로펠러의 성분은 알루미늄-규소합금(Al 86%, Si 14%)이었으나 고정타와 축은 철로 되어 있었다.
북한이 수출용으로 전 세계에 뿌린 CHT-02D 어뢰 소개 자료를 살펴보면 ‘어뢰의 외피는 알루미늄, 마그네슘 고강도 합금’으로 명시되어 있다. 북한의 강철어뢰 주장이 곧바로 허위로 드러난 것이다.
또한 북한은 ‘연어급 130톤짜리 잠수정은 없다’고 주장했으나, 이 역시 금세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다른 군사용 첩보위성이 찍은 사진을 제시할 필요도 없이, 상업용 민간위성인 구글어스 영상에 이 연어급 잠수정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북한은 총 70여 척의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으며 천안함을 공격한 연어급 잠수정은 10여 척을 가지고 있다. 북한 서해 해군기지 중 잠수함정을 운용하는 곳은 황해북도 초도와 비파곶, 그리고 황해남도의 옹진 사곶과 해주이다. 또한 대동강 하구 서해갑문 안쪽의 남포항에는 북한 서해함대사령부와 특수임무를 띠고 활동하는 잠수정 기지가 있다. 초도에는 9전대, 비파곶에는 11전대가 있다.
사곶과 해주에는 주로 고속정과 어뢰정을 운용하고 있으나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수심이 얕아 소형 잠수정이 드나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행정관의 말이다.
“사건 발생을 전후해 서해에서 기동했던 주변국의 잠수함정은 모두 식별됐고 그 위치도 확인됐어요. 다만 북한의 잠수함정은 식별되지 않고 있었어요. 여기에 연어급 1척과 공작 모선 1척이 공격 전에 모 기지를 이탈했으며 공격 후 복귀했던 겁니다. 당시 시계불량 등의 이유로 추적하지 못해 행방을 놓쳤던 잠수함정 중에서 연어급 1척이 실제 공격에 참여한 것입니다.”⊙
출처 | 월간조선 2015년 2월호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천안함 주범 김영철, 2009년 "우리 설정 해상경계선 지키려 무자비한 군사조치” 협박
군부가 대남공작 주도권 장악, 대남공작이 전투화(戰鬪化)될 것
⊙ 작년 초 노동당 작전부, 35호실 등이 국방위 정찰총국 산하로 들어가
⊙ 군부가 대남공작 주도권 쥐었던 1967~1970년 대남 도발 빈발
/김영철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지난 3월 26일 해군 천안함 침몰사건이 발생한 이후, 원인을 놓고 다양한 주장이 제기됐다. 정확한 원인은 천안함 인양 후 국내외 공동조사단의 정밀조사로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북한 잠수정에 의한 어뢰공격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천안함 사건이 북한에 의한 도발이라면, 우리는 북한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느 부서에서, 왜 이런 도발을 자행했는지에 대한 배경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향후 우리 정부의 대응방향과 수위를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도발배경을 분석하는 데 중요한 것은 ‘대남(對南)전략적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북한의 대남전략을 정확히 이해해야 북한의 의도와 향후 행동방향을 예측해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천안함 도발배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남전략의 관점에서 ‘2012년 강성대국론(强盛大國論)’과 2009년에 단행한 대남공작부서의 대규모 개편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북한은 2008년 1월 1일 신년공동사설에서 ‘김일성(金日成) 출생(1912년) 100주년이 되는 2012년까지 사회주의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겠다’고 공포한 이래, 각종 행사, 언론보도 등을 통해 이를 독려해 오고 있다.
북한에 의하면, ‘2012년 강성대국 실현’이란 사상강국·군사강국·경제강국의 달성으로 실현된다. 북한이 말하는 강성대국의 완성이란 궁극적으로 전조선혁명(사회주의혁명 실현, 즉 적화통일)으로 완수되는 것인데, 결국 2012년 적화통일의 문을 열겠다는 것이다. 북한으로서 2010년은 강성대국 실현을 위한 교두보를 대내외적으로 구축해야 하는 중요한 해인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대남전략과 하위체계인 대남공작도 이의 연장선에서 매우 공세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북한 대남공작부서의 전면 개편과 의미
북한은 2012년 강성대국 실현(적화통일 완수)을 위해 2009년 초 대남공작 기구를 대대적으로 개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의 내용은 국방위원회 직속으로 ‘정찰총국’을 신설하고 산하에 작전국(舊 노동당 작전부), 정찰국(舊 총참모부 정찰국), 해외정보국(舊 노동당35호실) 등을 두었다. 노동당 대외연락부도 225부로 명칭이 바뀐 후, 정찰총국 소속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 통일전선부는 축소했다. (표 참조)
이와 같은 대남공작기구 개편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대남공작의 주체가 ‘당(黨·조선노동당)’에서 ‘군(軍·국방위원회)’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는 북한이 지난 60여 년간 전개해 온 당 중심의 대남공작이 실패하였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다.
이는 김일성 사후(死後) 김정일(金正日) 통치시대에 들어서 ‘군’을 최우선시하는 선군(先軍)노선을 강조하고, 2009년 4월 9일 북한 헌법 개정시 선군사상을 주체사상과 함께 북한의 지도이념으로 내세우면서 국방위원회를 명실상부한 최고권력기관으로 규정한 연장선에 있다.
둘째, 기존의 당 중심의 대남공작 체제로는 적화통일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군 중심으로 대남공작 체제를 개편한 것이다. 김정일은 대남공작의 궁극적 목표가 ‘전조선혁명의 완수(적화통일 실현)’인데 당의 대남공작부서가 이를 달성하지 못한 책임을 묻고, 군을 통해서 이른바 ‘수령의 조국통일 유훈’(적화통일)을 관철하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셋째, 향후 대남공작의 방향은 기존의 방식에 추가하여 대남테러, 제한적 무력도발 등 전투화(戰鬪化)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정권수립 이전부터 지금까지 대남공작에 진력해 왔다. 당이 모든 사업을 지도하는 체제의 특성상 대남공작을 담당해 온 것도 노동당이었다. 그런데 대남공작의 주도권이 잠시 군부로 넘어간 시기가 있었다. 그때가 1967~1970년이다.
당시 북한군이 주도권을 장악했던 대남공작은 후에 군사모험주의, 좌경맹동주의(左傾盲動主義)라고 자체비판을 받을 정도로 초강경 일변도였다. 한국전쟁 이후 가장 비타협적인 대남테러 도발을 자행하였던 이 시기 대남공작의 특징과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군부가 대남공작 주도권 쥘 경우 강경화
첫째, 당시 북한의 대남공작 부서들은 김일성의 환갑이 되는 해인 1972년까지 적화통일을 완성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대남공작을 전개했다. 이는 북한이 2008년부터 김일성 출생 100주년인 2012년까지 강성대국을 달성하겠다는 ‘적화통일 스케줄’과 대비된다.
둘째, 그동안 민간출신이 당에서 담당했던 대남공작 부서를 군 중심으로 개편하였다. 김창봉 민족보위상(우리의 국방장관에 해당)이 대남공작의 지휘권을 가지고 노동당 대남총국을 대남사업총국으로 개편하였다. 당 대남총국장이자 연락부장이었던 리효순을 숙청하고, 현역군인인 허봉학(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을 대남사업총국장에 임명했다. 또 군 대남침투공작 부서인 특수정찰국을 특수정찰총국으로 확대 개편하고, 국장에 민족보위성 부상(副相·국방차관)인 김정태(북한 부수상과 인민군 전선사령관을 지낸 김책의 차남)를 취임시켰다. 당시 특수정찰총국은 124군 부대, 283부대, 837부대 등 무장소조(小組) 형태의 연합특수부대를 신설, 운용하며 1·21 청와대 기습사건 등 각종 대남도발을 일삼았다.
이 당시 북한의 대남공작 라인은 김일성 북한군 최고사령관 - 김창봉 민족보위상 - 김정태 특수정찰총국장 및 허봉학 당 대남사업총국장으로, 명실상부하게 군부 중심으로 대남공작 부서가 재편되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북한의 대남도발 사례를 보면, ▲청와대 기습사건(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정찰총국 소속 124군 부대 소속 31명의 무장공비를 남파시켜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던 사건) ▲1968년 11월 울진-삼척 대규모 무장공비 침투사건(120명 침투) ▲미국 해군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사건(1968년 1월) ▲동해안 공해 상공 미국 해군정찰기 EC121기 격추사건(1969년 4월) ▲KAL기 납북사건(1969년 12월) ▲해군경비함 56호 격침사건(1967년 1월, 해군사망 11명, 실종 27명, 부상 23명) ▲열차폭파사건(운정역 미군 화물열차, 초성역 열차, 문산 철도 폭파사건 등) ▲무장공비 침투사건(정읍, 임실, 진안, 제천, 단양, 괴산 침투) ▲한국군(12사단, 28사단, 7사단) 및 미군2사단 기습 ▲미군59항공대 헬기 피격(1969년 8월) ▲서해상 승용호, 동해상 어선 부성호 등 20여 척의 어선나포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천안함 사건은 북한의 대남공작 기구 개편 이후 군부 주도의 전투적인 대남공작이 다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국방위 정찰총국 소행 가능성 높아
/북한의 대남공작 총책인 오극렬 국방위 부위원장(왼쪽)과 정찰총국장 김영철(오른쪽).
금번 천안함 침몰이 북한 잠수정의 어뢰공격에 의한 것이라면, 이는 북한의 정규 해군이 자행한 것이 아니라 국방위 직속의 대남공작 부서인 정찰총국이 자행했다고 볼 수 있다.
북한 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1800톤의 로미오급 잠수함과 300톤 상어급(SSC) 소형 잠수함은 백령도 해상의 수심(水深)을 감안할 때 작전이 용이치 않다. 따라서 북한이 사용한 잠수정은 80톤 유고급 잠수정(SSC)과 반(半)잠수정으로 좁혀질 수밖에 없다. 반잠수정에 장착된 어뢰는 경(輕)어뢰로 파괴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가능성이 낮다. 결국 중(重)어뢰를 장착할 수 있는 유고급 잠수정(유고제 잠수정을 개량)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유고급 잠수정은 북한 해군이 아닌 국방위 정찰총국이 대남침투 및 공격용으로 여러 척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천안함 사건을 정찰총국 소행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지난 1998년 6월 22일 동해안 양양에서 꽁치그물에 걸려 좌초한 북한의 유고급 잠수정을 보면, 레이더 탐지를 피하기 위해 강화플라스틱(FRP)으로 외부도장을 했고 소나(음향탐지기)를 피하기 위해 하이스쿠르프로펠러(HSP)와 특수 소음감소팬(PBCF)을 장착했으며, 어뢰관 2문과 기뢰부설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현재 북한의 대남공작 지휘라인을 보면 김정일(국방위원장)-오극렬 대장(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대남담당)-김영철 상장(上將·정찰총국장)으로 이어진다. 오극렬(79)은 공군사령관·총참모장 등을 역임한 후 1989년부터 대남공작원 양성과 대남침투를 담당하는 부서인 당 작전부장을 20년간 지냈다. 2009년부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김영철(64) 정찰총국장은 1968년 미(美) 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당시 인민군 소좌(우리의 소령에 해당)로 판문점 군사정전위 연락장교를 맡았다. 그는 인민무력부 부국장, 남북고위급회담 북측대표, 남북군사분과위 북측위원장, 남북장성급 군사회담 북측대표를 역임한 대남통으로 알려져 있다. 작년 12월 국방위 정책실장(당시 인민군 중장) 자격으로 개성공단을 방문, 상주(常駐)인원 제한 등을 강요한 12·1 조치 이행 상황을 점검한 바 있다. 작년 12월 13일에는 남북장성급회담 대표로 “우리가 설정한 해상경계선만 있다. 지금 이 시각부터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의 무자비한 군사적 조치가 취해지게 될 것”이라고 협박한 바 있다.
북한의 도발 저의
북한이 천안함을 격침했다면, 그 의도는 무엇인가?
첫째, 단편적으로는 작년 11월 10일 대청해전의 보복성격이 강하다. 북한은 3월 8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대변인 담화 등을 통해 여러 차례 대남군사위협과 보복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혀 왔다. 1·2차 연평해전 패배를 복수하기 위한 3차 교전에서조차 패배한 북한군(해군)의 자존심을 대남공작 전문부서인 국방위 정찰총국이 만회해 준 것이다.
둘째, 지난 좌파정부와는 달리 북한에 휘둘리지 않으며 남북관계에서 나름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위협이다. 비밀리에 대남무력도발을 자행해 우리 내부의 안보위협을 높여 남남(南南)갈등과 사회혼란을 조성하고 궁극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국정관리 기반을 무력화(無力化)하려는 것이다.
셋째, 북한정권의 목표인 적화통일, 특히 2012년 강성대국 실현을 위한 혁명역량 강화의 일환이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 선체 인양 후 공동조사단이 북한이 자행했다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더라도, 북한은 결코 이를 인정치 않을 것이다. 향후 북한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보복공격, 북한선박의 제주항로 통행 금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부 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북한을 압박할 경우, 북한은 더 강하게 대남위협을 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협박에 우리가 넘어가서는 안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북한이 사태해결 혹은 다른 명목으로 당국자회담을 제의하면서 상당한 정도의 대남유화책을 구사할 가능성도 있다. 그 결과 남북관계가 어느 정도 진척되더라도 북한 김정일은 정권목표인 적화통일 실현을 위한 대남공작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적화혁명에 앞서 대남공작 자체가 김정일 체제 생존의 유용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출처 | 월간조선 2010년 5월호 글 | 류동열 치안정책연구소 안보정책실 선임연구관
■ 2018.03.26 "천안함 유족들 가장 힘든 한 해 보내고 있다"
[오늘 천안함 폭침 8주기… '천안함재단' 손정목 이사장 인터뷰]
"천안함 폭침 주범 김영철 방남, 서해수호의날엔 대통령 안 와 최근엔 다시 천안함 괴담 번져…
작년 현충일때 자리 배정 못받고 국군의날 행사선 주빈석서 빠져"
"천안함 유족들이 바라는 건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46용사를 대한민국이 기억하고 그 명예를 지켜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최근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이 소망을 이루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손정목(63) 천안함재단 이사장은 천안함 폭침 8주기(3월 26일)를 하루 앞둔 25일 서울 영등포 재단 사무실에서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천안함 유족들은 폭침 주범인 김영철의 방한(訪韓)으로 가장 힘든 한 해를 보내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손정목 천안함재단 이사장은 25일 재단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천안함 유족들은 2010년 이후 가장 힘든 한 해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오종찬 기자
손 이사장은 "천안함 유족들은 전 정부와 비교해 문재인 정부에서 자신들이 홀대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유족들은 작년 현충일 행사 때 자리를 배정받지 못했고, 헌화 대표 명단에서도 빠졌다고 한다. 작년 해군 평택 2함대에서 열린 국군의날 행사에선 유족들이 주빈석에서 제외됐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선 없었던 일이었다.
천안함 유족들은 이번에 천안함 폭침 주범으로 꼽히는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이 평창올림픽 폐회식 때 북한 대표로 오는 것에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청와대에도 항의 서한을 두 차례 보냈다. 2010년 이후 천안함 유족들의 첫 단체 행동이었다. 손 이사장은 "숨진 남편이나 아들 명예에 혹시라도 해가 될까 봐 항상 숨죽여 살아왔던 천안함 유족들이 오죽하면 이랬을까 생각해 달라"고 했다.
그는 "정부가 조금이라도 천안함 유족을 배려했다면 대표를 바꿔달라고 북한에 요구하거나, 사전에 유족에게 양해라도 구했어야 했다"고 했다. 그는 "천안함 유족들은 문 대통령이 취임 이후 처음 맞는 서해 수호의 날 행사에 꼭 올 것이라 믿었다"고 했다. 서해 수호의 날은 제2연평해전(2002년 6월 29일)과 천안함 폭침(2010년 3월 26일), 연평도 포격(2010년 11월 23일)으로 전사한 장병 55명을 합동으로 추모하기 위해 2016년 제정됐다. 매년 3월 넷째 주 금요일 열리는데, 올해는 지난 23일 열렸다.
1회 때는 박 전 대통령이, 2회 때는 탄핵 정국으로 황교안 당시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참석했다. 문 대통령은 22~28일 베트남·아랍에미리트(UAE) 순방을 이유로 불참했다. 손 이사장은 "진보 단체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문 대통령이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안 온 것이라고 유족들은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손 이사장은 "천안함 승조원에 대한 천안함 괴담이 최근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천안함 폭침은 5개국 국제합동조사단이 2개월여 동안 조사한 끝에 북한 소행이라고 결론이 났다"며 "그런데도 천안함 괴담을 퍼뜨리는 사람들은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했다.
손 이사장은 "천안함 교훈은 북한이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도발할지 모른다는 사실과 우리 군은 이러한 북한 도발에 항시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남북 대화 분위기에서도 이를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했다.
손 이사장은 해군 예비역 중장(해사 32기) 출신이다. 천안함 폭침 당시 해군 대책본부장을 맡아 경기도 평택 2함대 현장에서 40여 일 동안 사태 수습을 하고 유족을 살폈다. 재단 이사장에는 지난 2016년 12월 취임했다.
그는 "천안함 폭침에서 살아남은 승조원 상당수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등으로 고생하는데, 사회 시선이 두려워 이를 숨기고 있다"며 "남은 임기 동안 이들을 보살피는 데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했다.
전현석 기자
2018 월간조선 5월 호
■ 천안함 피격 ‘1번 어뢰’ 인양의 비하인드 스토리
왜 또 천안함 폭침에 딴소리하나?
당시 軍 당국, ‘北, 잠수함을 활용한 함정공격 연습’ 첩보 입수
⊙ ‘1번 어뢰’ 쌍끌이 어선 동원 비밀… 특수고무로 제작된 그물망으로 닷새 만에 인양
⊙ 합조단 파견 나온 공군 대령이 쌍끌이 제안 “2006년 동해안 F-15K 추락 당시 쌍끌이로 잔해 90% 인양”
⊙ ‘1번 어뢰’ 인양 후 북한 특수부대 침투 대비해 극비리에 보안시설로 옮겨
⊙ “제기된 의혹 재차 검증하다 보니 합조단 조사 신뢰성 높여”(박정이)
⊙ KBS 〈추적60분〉의 천안함 의혹 방송… “공영방송 의도가 무언지 의아해”
⊙ “천안함 주범 김영철은 민족의 죄인, 부끄러운 줄 알아야”(이종헌)
▲천안함 침몰 29일 만인 2010년 4월 24일 오후 백령도 남쪽 해상에서 천안함의 함수가 인양돼 바지선에 올려지고 있다. 함수의 절단면은 그물망에 덮인 채 제한적으로 언론에 공개됐다.
3월 26일 천안함 폭침 8주기를 맞아 재조사의 뇌관이 점화되었다. 다분히 정치적이며 의도성을 지닌 의혹 제기다. 지난 3월 28일 방영된 KBS 〈추적60분 - 8년 만의 공개 천안함 보고서의 진실〉은 또다시 천안함 의혹에 기름을 얹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팩트가 나왔다기보다는 기존 의혹들의 되돌이표다.
좌초설, 기뢰설, 잠수함충돌설, 한미자작극설 등 천안함 폭침을 바라보는 의혹도 제각각이다. 천안함 민군 합동조사단(이하 합조단)의 조사결과에 맞서는 통일되고 일관된 주장이 없다. 즉 의혹 세력들은 자신의 주장에 부합하는 부분적인 사실만을 크게 부각시키고 다른 증거나 사실에는 아예 눈을 감는다.
게다가 천안함 사건의 주범인 김영철은 “남측에서 천안함 폭침 주범이라는 사람이 저 김영철”이라며 우리 국민을 조롱하는 상황이다. 천안함의 진실은 밝혀졌지만 우리 사회 내 의혹 세력이 있는 한 단죄까지는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도발과 만행을 규탄하는 노력은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끝난 것이 아니다. 북한의 책임 인정과 사과 등의 전제하에서 천안함 응징 수단인 5·24 조치의 건설적 전향적 논의가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5·24 조치는 개성공단을 제외하고 남북교역을 전면 중단시킨 사상 첫 대규모 대북제재를 말한다.
기자는 천안함 피격사건 직후 합조단장으로 활동, 진실규명에 앞장선 박정이(朴正二) 예비역 육군 대장과 《천안함 전쟁 실록, 스모킹 건》의 저자 이종헌(李鍾憲)씨를 만났다.
육사 32기 출신인 박정이 예비역 육군 대장은 12사단 37연대 2대대 소대장을 시작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22사단 55연대장 시절 강릉무장공비 대침투 작전에 참가했으며, 13공수여단장, 20기계화보병사단장, 합참 작전부장, 수도방위사령관, 합참 전력발전본부장, 제1야전군사령관 등으로 36년간 복무했다. 지난 2011년 10월 17일 전역했다.
박정이 전 합조단장은 ‘군번줄’ 일화로 유명하다. 지난 2010년 4월 30일 천안함 침몰 원인 규명을 위한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한 30명에 가까운 장성들 중 인식표(군번줄)를 차고 있던 서너 명의 장성 중 한 명이었다. 부하들에게 포용력 있는 선 굵은 지휘관이자 강한 책임감을 바탕으로 한 완벽한 업무 처리로 정평이 높은 인물이다.
이종헌씨는 천안함 피격 직후 청와대에 설치된 천안함 실무 T/F 책임을 맡아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정부와 군 수뇌부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했다. 이듬해 3월에는 《천안함 피격사건 백서》 발간에도 참여했다. 그는 “천안함 의혹이 합리적 의심의 영역도 있었지만 상당 부분은 이념과 진영 논리에 근거해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려 했고 결과적으로 북한을 변호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주장한다.
기자는 박 전 단장과 이씨를 지난 4월 2일 경기도 분당에 위치한 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만났다.
‘스모킹 건’의 추억
▲박정이 전 천안함 민군 합동조사단장(왼쪽)과 《천안함 전쟁 실록, 스모킹 건》의 저자 이종헌씨.
박정이 전 합조단장은 36년의 군 생활 중 두 가지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1996년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났을 때 3000여 명의 연대병력을 이끌고 한 달 반 동안 야외에서 무장공비 소탕을 위한 대침투 작전을 수행한 적이 있었어요. 야전 상황이다 보니 제일 어려웠던 게 병력의 급식과 세탁, 배설 문제였어요. 실전 상황에서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야전 군기를 확립하며 작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체감했어요. 그때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두 번째 기억은 합동조사단장 임무를 부여받은 일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일을 했나 싶어요. 당시 합참 준비태세검열실과 국방부 조사본부, 국방부 감사관실에서 천안함 피격의 원인 규명에 나섰지만 사건 발생 시점이 계속 바뀌고, 천안함 사건 당시 인근 레이더상의 새떼를 북한 전투기로 오인해 경고사격을 하는 등 계속 지엽적인 문제로 사건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민군 다국적 합조단이 꾸려진 겁니다.
쌍끌이 어선을 동원해 건져 올렸던 북한 ‘1번 어뢰’는 천운이 아니고선 건져 올릴 수 없다고 봅니다. 또 조사 방식도 굉장히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결과였고요. 군 생활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의미 있고 자긍심을 느끼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종헌씨는 “5·24 대북조치나 유엔 의장성명 등은 ‘스모킹 건’을 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합조단은 피격 현장에서 ‘1번 어뢰 추진체’를 인양했고 정보분석을 통해 북한 수출용 카탈로그에서 북한산 어뢰(CHT-02D)의 정체를 확인했어요. 북한은 이 어뢰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객관적 증거 앞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죠. 김정은을 위한 통 큰 도발의 꼬리가 잡히면서 북한의 만행은 다시 세계인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만약 스모킹 건을 찾는 데 실패했다면, 천안함의 진실은 미궁으로 빠져들었을 겁니다.”
박=“그때 중국이 협조했더라면 의장 성명이 아니라 유엔결의안까지 가능했어요.”
이=“당시 우리 대표단은 유엔에서 각국 대사들 앞에서 브리핑을 잘하셨고 영상자료까지 만들어 호소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유엔 주재 중국 대사나 러시아 대사조차 반박하지 못했어요. 그들은 북한을 끝까지 챙기려고만 했지요. 그나마 타협이 된 게 의장성명이고 천안함 피격 주체를 명시하지 못한 일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천안함은 실전 상황에서 ‘비접촉 어뢰’로 공격받은 드문 사례
― 지난 3월 28일 KBS 〈추적60분〉 보셨나요? 북한 소행이 아니라는 세력이 유포했던 의혹의 재탕이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천안함 피격 이후 8년이 지났는데 변화된 새로운 의혹이 하나도 없었어요. 새로운 팩트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주목하고 반박하겠지만 전혀 없었어요.”
박=“새로운 것은 38년 동안 수중구조 일을 했다는 민간업체 대표의 증언이 아닌가요?”
천안함 함수를 직접 인양한 민간업체 대표 전중선씨는 〈추적60분〉과의 인터뷰에서 “천안함 바닥에 무언가에 긁힌 듯한 스크래치(scratch·긁힘 현상)가 있는 것을 선명하게 봤다. 어뢰에 맞았는데 스크래치가 왜 생기느냐”고 주장했다.
이=“아닙니다. 당시에도 인양업체 관계자가 스크래치 주장을 하길래 군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얘기를 왜 하느냐’며 항의한 일이 있었어요. 과학적 분석이나 검토 없이 그냥 본 대로 얘기한 것이죠.”
박=“천안함은 두 동강이 나면서 일부 긁힘 흔적도 나 있었어요. 그건 침몰 시, 그리고 인양하면서 쇠밧줄에 묶어 올리면서 자국이 생긴 겁니다.”
이=“긁힌 흔적은 세월호 인양 때도 똑같이 있었습니다.”
박=“제가 볼 때 그건 스크래치가 아니거든요. 좌초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찢김 현상(cutting)으로 봐야 하는데, 스크래치라고 애매한 소리를 한 겁니다.
또 천안함이 어뢰 폭발이 아니라는 증거로 생존 장병이나 시신에서 고막 파열이나 코피가 나는 등 이비인후과적 손상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천안함 피격은 어뢰에 의한 직접 타격이 아닙니다. 수중에서 어뢰가 폭발, 그 충격에 의해 천안함이 두 동강 난 것입니다. 검안결과, 화상이나 파편상, 관통상이 없었고 생존 환자 대부분 골절이나 열창, 타박상이 다수입니다. 사망한 이들 역시 전원 익사로 추정됩니다.”
이=“어뢰에 의한 직접 타격은 2차 세계대전 당시 U보트를 생각하면 됩니다. 직접 타격의 경우 화염과 폭발이 일어나고 배가 두 동강이 납니다. 그러나 천안함은 비접촉 폭발이에요. 어뢰가 함체에 직접 부딪치지 않았어요. 배 밑에서 터져 폭발 압력이 위로 솟구쳐 버블이 선체를 치고 올라갔다가 가라앉으며 배가 두 동강이 난 겁니다.”
박=“맞아요. 사람들이 접촉 폭발과 비접촉 폭발을 전혀 모르고 얘기를 합니다.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 해군사령관 카를 되니츠가 이끌던 U보트는 접촉식 폭발어뢰로 연합국 함선을 공격했다. 이때 어뢰가 함정을 직접 타격하면서 승조원들 일부는 고막 손상과 파편상, 화상을 입었고 함정은 불바다가 된 후 침몰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에는 실전 상황이 드물어 비접촉 어뢰의 폭발 사례는 거의 없다. 천안함은 어뢰가 함체에 직접 부딪치지 않은 비접촉 폭발로 생긴 충격파와 버블 효과에 의해 두 동강 난 채 침몰했다. 천안함의 경우는 실전적 상황에서 비접촉 어뢰 공격을 받은 매우 드문 사례였다. 박정이 전 단장의 말이다.
“당시 천안함 피격사건은 수중에서 비접촉 어뢰 폭발로 발생한 것이죠. 수중에서 어뢰가 비접촉 폭발을 하면 충격파와 가스버블이 발생하는데, 가스버블 외부에서 발생하는 충격파가 먼저 선체에 충격을 가했고, 동시에 가스버블이 팽창하면서 선체를 들어 올려 배가 꺾였고(호깅 현상·hogging), 다시 수축되면서 선체를 아래로 당겨 재차 꺾였어요.(새깅 현상·sagging) 이때 버블이 붕괴되면서 버블제트 충격이 발생해 선체가 절단된 것입니다.”
KBS 〈추적60분〉의 의도는…
▲천안함 침몰사고 민군 합동조사단 공동단장인 박정이 합참 전력발전본부장이 2010년 4월 25일 국방부에서 인양된 함수 절단면을 설명하고 있다.
― 〈추적60분〉은 군 TOD(열상감시장비) 영상에서 천안함이 함수와 함미로 분리됐을 때 그 사이에 점점 멀어지는 ‘검은 점’이 나타난 것에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검은 점’이 잠수함이 아니냐는 것이었어요.
박=“TOD상의 ‘검은 점’이 무언지를 두고 당시 합조단 내부에서 논란이 됐고 검토의 검토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생존 병사가 ‘구명정이 터진 것’이라는 증언을 했죠.”
이=“‘검은 점’ 주장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잠수함과의 충돌로 몰아가려고 나온 의혹입니다. TOD 영상을 보면 ‘검은 점’ 속도가 배의 진행 속도보다 늦어요.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안이 텅 비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파도가 따라가는 속도보다 늦은 거지요. 이것은 상식적으로 볼 문제입니다. 만약 힘이 있고 단단한 물질이라면 함수가 떠내려가는 속도와 같은 속도로 떠내려가야 하는데 힘이 없으니 부력에 의해 천천히 떠내려가요. 그래서 구명정이 맞습니다.”
천안함 ‘흡착물질’ 논쟁도 〈추적60분〉에서 다뤄졌다. 흡착물질이란 천안함 선체와 이른바 ‘1번 어뢰’, 모의수조폭발실험에서 나온 백색분말가루를 말한다. 합조단은 어뢰 폭발 시 나타나는 알루미늄 산화물 계열의 폭발물질이라는 입장이지만 의혹 세력들은 “자연(용액상태)에서 침전하면서 생기는 물질”이라고 주장했다.
박 전 단장은 이에 대해 “실험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일축했다.
“흡착물질은 실험 조건이 다른 상태에서 실험하면 결과물이 다를 수 있어...
■ 2018-04-15 “천안함 좌초라면서 왜 암초는 제시하지 못하나”
[인터뷰] 조광현 전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 조사위원
3월 28일 방영 KBS ‘추적 60분’에 대한 반론…“허위로 결론 난 것 재탕”
/인양된 천안함이 바지선에 얹혀 있다.
사건 발생 8년째. 천안함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그간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절반이 ‘북한 소행’이라는 정부 발표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 3월 하순 천안함 폭침 의혹을 다룬 KBS ‘추적 60분’이 새삼 논쟁을 일으킨 배경에는 그런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 방송 이후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는 재조사를 요구하는 글이 크게 늘었다. 물론 정부나 군은 단호히 부인한다. 한마디로 과학적 근거가 없는 억측이라는 것이다.
▲2010년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합조단)에서 민간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던 조광현(78) 예비역 해군 대령도 같은 판단이다. 조씨는 해군 특수부대 역사에서 신화적 인물로 통한다. UDT(수중폭파대) 교육훈련대장과 UDU(해군첩보부대) 대장을 거쳐 UDT 초대 전대장을 지냈다. 천안함 폭침이 발생한 후 그가 이끄는 예비역 UDT 대원들은 실종자 수색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지난해 9월 천안함 관련 법정 공방에 관여하기도 했다. 천안함 폭침 조작 의혹을 제기해 해군 관계자들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신상철 씨의 항소심 재판에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한 것이다. 2010년 4월 기소된 신씨는 2016년 1월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4월 초 조씨를 만나 ‘천안함의 진실’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추적 60분’에서 제기한 의혹에 대해 “대부분 재탕 수준이고 신씨 재판 과정에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내용”이라고 비판했다.
“방송에 나온 전종선 씨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근거로 그런 얘기를 했느냐’고 물어봤다. ‘폭발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좌초인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하더라.”
천안함 함수 인양업체 대표였던 전씨는 방송에서 “어뢰에 맞았는데 왜 (배 밑바닥에) 스크래치가 생기느냐”며 좌초 의혹을 제기했다. ‘추적 60분’은 전씨의 말을 ‘8년 만의 증언’이라며 크게 부각했다.
“폭발에 대한 전문지식이나 경험 없어”
-스크래치에 대한 의혹 제기는 처음이 아닌데.
“선저(船底) 일부의 페인트칠이 벗겨진 걸 두고 하는 말인데, 침몰과 인양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자국이다. 좌초됐다면 맨 밑바닥에 있는 소나돔(음파탐지기 덮개)과 스크루(프로펠러)가 손상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소나돔이 멀쩡하다. 스크루도 좌현은 그대로고, 우현 쪽만 앞쪽으로 휘었다.”
-왜 한쪽만 휘었나.
“폭발 충격으로 우현 스크루 샤프트가 이탈해 뒤로 밀렸다. 엔진이 정지되자 관성이 작용해 블레이드(프로펠러 날개)가 앞쪽으로 휘었다. (합조단 조사 과정에서) 스크루 제조회사가 모의실험을 했는데 똑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또 다른 인양업체 관계자도 법정에서 ‘선저에 부딪힌 흔적이 있다. 폭발한 배와 상태가 다르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인양업체 사람들이 왜 그런 주장을 할까.
“폭발에 대한 전문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두라 3호와 비교해 엉터리 주장도 하는 것이다. 국내에는 수중 간접 폭발을 경험해본 사람이 별로 없다.”
유류운반선 두라 3호는 2012년 1월 해상에서 선내 유증기 폭발로 침몰했다. 당시 시신 수습에 참여했던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는 “시신의 목이 없었다. 그게 폭발이다”라며 천안함 희생자의 시신이 온전한 데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폭발이 있었다면 고막이 터지거나 골절상, 타박상을 입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만약 어뢰가 선체를 직접 타격했다면 그런 현상이 나타났을 수도 있다. 폭발 지점에 있는 승조원은 다 사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접촉 수중 폭발이기에 인체에 끼치는 영향이 크지 않았던 것이다.”
조씨는 “두라 3호는 공기 중 직접 폭발이고 천안함은 수중 간접 폭발”이라고 강조했다.
“두라 3호는 유증기로 인한 내부 폭발이고 천안함은 외부 폭발이다. 두라 3호처럼 실내 격실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면 목이나 팔다리가 날아갈 수 있다. 만약 어뢰가 선체를 뚫고 들어갔다면 해당 격실만 파손되지 선체가 두 동강 나지는 않는다. 천안함에 발사된 어뢰는 음향 추적 방식으로 배 밑에서 폭발하도록 설계됐다. 폭발할 때 발생한 버블제트로 선체가 절단된 것이다.”
그는 ‘탬핑(tamping) 효과’를 언급했다.
“육상에서 폭파훈련 시 폭발물에 모래나 흙을 덮어놓으면 충격파가 감소된다. 그게 탬핑 효과다. 물은 공기보다 훨씬 무겁기 때문에 탬핑 효과가 크다. 버블제트가 발생할 경우 1차 충격파가 선저를 때리고, 2차 충격파가 격벽과 상갑판 등으로 확장된다. 이때 격벽이나 갑판이 충격을 흡수한다. 그래서 다른 격실에 있는 사람에게는 충격파가 직접 전달되지 않는다.”
군함이 다닐 수 없는 곳
방송에서는 좌초의 증거보다 폭발에 대한 반증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맞춘 듯싶다.
“좌초라고 주장하려면 일단 암초를 제시해야 한다. 거기에 대해선 입증을 못 하니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합조단에서 좌초 가능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검토했나.
“물론이다. 해양조사원도 정밀 조사를 했다. 군함이 좌초로 두 동강 난 사례는 거의 없다. 항해 도중 배가 바위에 부딪혀 좌초된 경우 물이 빠지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선체가 두 동강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좌초되더라도 승조원은 대부분 살 수 있다. 좌초됐다고 배가 몇 분 만에 가라앉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해도를 펴놓고 사고 해역 지형을 설명하는 조광현 씨.
그가 준비해온 해도를 펼쳤다. 사고 해역 일대의 지형과 수심 등을 함께 살펴봤다. 해도에서 암초는 r(rock의 약자)로 표시한다. 천안함 기동항로에 해당되는 수역에는 r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육지와 가까운 낮은 수심에만 몇 개 보일 뿐이다. 합조단에 따르면 천안함이 어뢰에 피격된 지점의 수심은 47m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설명했다.
“바위는 여기 얕은 데밖에 없다. 다 눈에 보이는 작은 것들이다. 그런데 군함이 다닐 수 없는 곳이니 부딪힐 일이 없다. 부딪혀도 배가 두 동강 날 리 없고.”
사고 당시 천안함은 백령도에서 남서쪽으로 2.5km 떨어진 수역에서 저속 항해 중이었다. 침로는 327도, 속도는 6노트(약 시속 11km)였다. 남서풍이 20노트로 불었고, 파고는 2.5m였다. 사고 직전 후타실 등이 찍힌 폐쇄회로(CC)TV 영상을 보면 배에 요동이 없는 듯하다. 병사들은 편안하게 운동하고 탁자 위 물병도 출렁이지 않는다. 이를 두고 ‘추적 60분’은 영상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파고 2.5m이면 배가 많이 흔들리지 않나.
“파도가 높아도 방향을 잘 잡아 항해하면 그다지 흔들리지 않는다. 함수에 비해 함미가 덜 흔들린다. 후타실은 함미에서 가장 흔들림이 덜한 곳이다.”
-천안함 침몰 후 열영상장비(TOD)에 나타난 미상 물체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했다. 일정 속도로 함수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던데.
“천안함 승조원이 구명정이라고 증언했다. 함수와 함께 표류한 것으로 보인다.”
천안함 함수가 가라앉은 수역의 깊이는 20m. 조씨는 “함수가 열 몇 시간 동안 (조류에) 밀려다니다 물이 점점 들어차면서 가라앉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2010년 4월 7일 KBS ‘9시 뉴스’는 이른바 ‘제3 부표’ 의혹을 제기했다. 제3 부표는 천안함 폭침이 발생한 후 처음 수중 탐색에 나선 UDT 측에서 백령도 용트림바위 근처에 설치한 것이다. 함수, 함미 침몰 지점으로부터 각각 1.8km, 6km 떨어진 곳이다.
KBS는 한주호 UDT 준위가 이곳에서 미군 작전과 관련된 비밀 임무를 수행하다 숨진 것처럼 보도했다. 이에 대해 해군과 UDT동지회는 허위보도로 군과 한 준위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강력히 항의했다. 다음 날 KBS는 국방부의 반론을 보도했다. 이 일에 대해선 조씨가 할 말이 많다. 직접 관련됐기 때문이다.
“제3 부표는 수중 탐색을 시작할 때 기준점으로 설치한 것이다. 아직 선체 흔적을 찾지 못했을 때였다. 3월 28일 함수를 발견한 후에는 그쪽에서만 작업했다. 부표는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뒀는데 이걸 가지고 KBS가 소설을 썼다. 미군 훈련과는 상관이 없다. 인근에 미군 구조함이 대기 중이었는데 헬기로 인명구조 훈련을 했다고 한다.”
제3 부표와 한주호 준위
천안함 폭침 발생 직후 해군은 선체 및 실종자 수색에 나섰다. 함수는 UDT, 함미는 SSU(해난구조대)가 맡았다. 3월 29일 실종자 가족의 요청에 따라 UDT동지회 회원 7~8명이 함수 수색에 동참했다. 그런데 수중 환경이 좋지 않아 작업 시간과 횟수가 제한됐다. 물살이 세고 수온이 낮은 데다 시정(視程)도 짧았다. 한 번 잠수하면 15~20분밖에 작업할 수 없었다. 조씨는 해군 현장 지휘부 및 현역 UDT 대원들과 예비역들의 작업 방식을 조율했다.
3월 30일 오후 한 준위가 순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튿날 한 준위와 함께 작업했던 UDT동지회 회원들은 백령도에서 빠져나와 빈소를 찾았다. 4월 2일 동지회 회원들과 함께 백령도로 들어간 조씨는 해군 지휘관에게 수색 작업을 인양 작업으로 전환할 것을 건의했다. 실종자 가족을 설득하려면 현장 작업이 얼마나 힘들게 진행되는지를 보여줄 수중 동영상이 필요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5t급 어선을 빌려 사고현장으로 향했으나 풍랑이 거세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날 오전 10시 육지에서는 한 준위 영결식이 거행됐다.
“포구로 돌아오니 오전 10시 가까이 됐다. 우리는 한 준위가 작업했던 곳이 잘 보이는 용트림바위로 가서 자체적으로 추도식을 치렀다. 한 준위 동기생이 대표로 조사를 낭독했다. 동행한 KBS 취재팀이 이 장면을 촬영했다. 취재팀은 우리와 한 숙소에 머물면서 내내 같이 움직였다. 그런데 4월 7일 KBS ‘9시 뉴스’에서 이날 찍은 영상과 수중 탐색에 참여했던 동지회 회원과의 통화 내용을 뒤섞어 제3 부표 의혹을 제기했다. 잠수사는 장비 챙기고 물속에 들어가는 것만 신경 쓰지 작업 위치는 알 필요가 없다. 인터뷰에 응한 동지회 회원은 한 준위 팀과 함께 작업한 내용을 말했다. 실제로는 천안함 함수를 수색했는데, 기자가 제3 부표를 언급하자 위치를 혼동해 대답한 것이다. 그게 마치 다른 배를 수색한 것처럼 비쳤다”
합조단에 따르면 천안함은 북한군 연어급 잠수정이 발사한 음향유도어뢰(CHT-02D)에 의해 침몰했다. 쌍끌이어선 그물에 걸려 올라온 어뢰추진체는 폭침의 결정적 증거가 됐다. 그런데 어뢰추진체의 흡착물질을 두고 일부 과학자가 이견을 제시했다. 이승헌 미국 버지니아대 물리학과 교수, 정기영 안동대 지구환경과학과 교수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합조단은 어뢰추진체와 천안함 선체에서 동일한 흡착물질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폭발 시 형성된 알루미늄 산화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교수 등은 수중 침전 작용으로 생성된 알루미늄 황산수화물이라고 주장했다. ‘추적 60분’도 이 문제를 거론했다. 이에 대해 조씨는 “실험 방식이 다르다”고 반박했다.
“어뢰 폭발 시 섭씨 3000도의 고열이 발생한다. 합조단은 실제 폭발과 비슷한 환경을 조성해 실험했다. 그런데 의혹을 제기하는 측에서는 그런 조건에서 할 수 없으니 동일한 자재를 가열해 실험했다. 그 결과 온도가 1100도까지만 올라갔다. 실험 환경이 다르니 결과도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뢰 폭발 시 발생하는 고열은 수십만 분의 1초 안에 급속히 냉각한다. 합조단 실험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이승헌 교수의 실험에서는 냉각 시간이 2초 이내였다는 것이 군 당국의 설명이다.
바닷가에서 기뢰 폭발 실험도
-어뢰추진체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북한 소행이라고 발표하기가 곤란하지 않았을까.
“확증은 없지만, 파손 상태를 보면 어뢰 폭발에 의한 침몰로밖에 볼 수 없었다.”
-합조단도 처음부터 어뢰에 의한 폭발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물론이다. 처음에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고 조사했다. 좌초를 비롯해 기뢰나 내부 유도탄 폭발 가능성도 검토했으나 다 사실이 아니거나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애초 기뢰 폭발을 진지하게 검토했던 것으로 안다.
“1970년대 우리 해군이 백령도 근해에 기뢰를 깔아놓은 적이 있다. 적이 상륙을 시도할 때 터뜨리는 조종기뢰였다. 뇌관에 전선을 연결해 육상에서 스위치를 누르면 터지는 방식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 철거되거나 유실됐다. 그런데 이 중 남아 있는 기뢰가 저절로 터져 천안함을 폭발시켰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기뢰를 설치했던 회사의 임원이 합조단에 그런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과 함께 바닷가로 가서 폭발 여부를 실험해봤다. 조종기뢰에 쓰는 부품을 구해 물속에 넣었는데, 뇌관이 터지지 않았다.”
-북한 잠수정이 우리 영해로 들어와 공격한다는 건 대담한 작전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정도나 다가와 어뢰를 쏜 것으로 짐작하나.
“연어급 잠수정은 길이 30m에 130t밖에 안 된다. 얼마든지 안 들키고 깊숙이 들어올 수 있다. 소나에도 잘 안 잡힌다. 게다가 백령도 쪽 수역은 물살이 세서 탐지하기가 더 어렵다. 어뢰에 음향 추적 장치가 있으니 근접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천안함 논쟁은 편향동화(偏向同化)와 집단극화(集團極化)의 절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북한 잠수정이 어뢰를 발사하는 것을 본 사람이 없는 이상 어쩌면 이 논쟁은 진실과 상관없이 꽤 오랫동안 지속될지 모른다. 우려스러운 것은 과학적 논쟁을 넘어선 정치적 공방이다. ‘정권 차원의 조작’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친북용공 세력의 음모론’이라고 몰아붙이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조씨는 “재판 과정에서 대부분 허위로 드러난 주장을 반복적으로 퍼뜨리는 사람이 있다”며 “정치적 목적을 가진 일부 세력이 악의적인 거짓말과 괴담으로 정부에 대한 불신과 남남갈등을 부추긴다”고 개탄했다.
의혹 제기는 합리적 추론의 선을 넘어가지 않아야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입증할 수 없는 전제조건을 내걸어 가설이나 추론을 사실로 이끄는 논법은 위태롭다. 이를테면 좌초나 충돌을 확신해 과학적 근거 없이 사고 지점 수심이나 충돌 대상을 임의로 설정하는 것은 무모하다. 추론에 추론을 거듭한 것이라면 아무리 그럴듯하게 들려도 신뢰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반대로 과학적 의혹 제기에 대해서는 열린 자세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신상철 씨의 저서 ‘천안함은 좌초입니다!’와 국방부가 펴낸 ‘합동조사결과 보고서’ ‘천안함 피격사건 백서’를 비교하며 읽은 소감이다.
조성식 기자 mairso2@donga.com
■ 04.16 "문 대통령이 '천안함 생각' 왜 바뀌었는지 밝히면, 지금 같은 혼란 없어질 것"
[현 정권에서 다시 확산되는 '천안함 음모론'… 윤덕용 당시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장]
"많은 사람이 조사했고 숱한 세월 흘렀지만
'내가 조작에 참여했다'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아"
"수중 폭발의 결정적 증거 전혀 언급하지 않고
애매한 것에 의혹 부풀려 의도적으로 왜곡한 KBS"
현 정권에서 '천안함 조작설'이 다시 확산되고 있다. 의혹들은 그럴듯해 보인다.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장이었던 윤덕용(78) 전 카이스트 교수는 답변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의혹을 싸 들고 그를 만났다.
▲윤덕용씨는“북한이 천안함에 대해 저렇게 나오는 걸 보니 비핵화 회담의 진정성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1999년 수중 폭발 실험에서 호주 군함 '토렌스함'의 절단면은 어지럽게 찢겼다. 천안함은 거의 반듯하게 절단됐다. 과연 어뢰의 수중 폭발로 인한 게 맞나?
"폭발이 선체 어느 부위에서 났느냐에 따라 절단면이 다를 수밖에 없다. 천안함의 함미 쪽 강철 벽이 있는 지점에서 폭발이 났기 때문에 벽을 따라 일정하게 갈라졌다."
―선체와 어뢰 추진체에 붙어 있던 흰색 물질에 대해
"폭발 당시 폭약의 한 성분인 알루미늄이 산소와 결합해 생긴 비결정 알루미늄 산화물"이라며 어뢰 피폭(被爆)의 증거라고 했다. 하지만 정기영 안동대 교수는 이는 어뢰 폭발과 무관한 '알루미늄 수화물'이라고 했는데? "알루미늄 산화물에 여분의 산소가 더 결합돼 있어 다른 수화물 복합체로 알았던 것 같다. 폭발했으면 산화물이 돼야 하는데, 이는 수화물이기 때문에 수중에서 자연 발생했다고 잘못 본 거다. 조사단도 알루미늄 산화물에 산소가 왜 이렇게 많은지 처음엔 이해를 못 했다. 열(熱) 분석 실험에서 온도를 올리자 물이 증발돼 알게 됐다. 폭발하면서 알루미늄 산화물의 표면에 기공(氣孔)이 형성돼 수분이 달라붙었던 것이다. 조사 보고서를 봤으면 금방 풀리는 의문이다."
―이승헌 버지니아대 물리학과 교수도 그 흡착 물질이 어뢰 피격의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알루미늄을 섭씨 1100도로 40분간 가열해 2초 이내에 급랭하는 실험을 해보니 원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되는 '결정 알루미늄 산화물'이 생성됐고, 폭발 증거라고 말한 '비결정 알루미늄 산화물'은 나오지 않았다는데.
"그의 실험은 3000도 이상 고온과 20만 기압 이상의 고압에서 1초 내에 터지는 폭발 실험이 아니었다. 연구실에서 폭발 실험을 재현할 수가 없다. 당시에 이미 잘못된 실험이라고 지적됐다. 그 자신도 엉터리 실험을 했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알면서도 계속 강변하는 것이다."
―그런 '비결정 알루미늄 산화물'이 폭발이 아닌 자연적으로 생길 수는 없나?
"침몰한 한두 달 사이에 자연적으로 그렇게 많이 생길 수 없다. 당시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직접 수중 폭발 실험을 해봤다. 똑같은 흡착 물질이 생겼다. 황(S)도 많이 결합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못 풀었다. 이런 물질을 규명해 본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역사상 처음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
"전쟁 중에는 함선이 침몰해버리면 끝이다. 그걸 건져 올려 실험한 적이 없다. 호주 군함 '토렌스함'도 수중 폭발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보는 실험이었다."
―사고 해역에서 건져 올린 어뢰 추진체의 '1번'이라는 파란색 글자에 대한 조작 의혹도 있다. 이승헌 교수는 "폭발 직후 어뢰의 추진 후부 온도는 쉽게 350도 또는 1000도 이상까지 올라간다. 이 온도에서는 잉크가 타버려 '1번' 표기는 지워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는데.
"어뢰 앞부분에 화약이 들어 있다. 폭발 때 온도가 올라가지만 1초 이내의 순간이어서 어뢰 후미인 추진체까지 열 전달이 안 된다. '1번' 글자는 흰 페인트 위에 쓰여 있다. 그 페인트는 100도만 돼도 지워지는데 그 페인트조차 지워지지 않았다. 온도가 안 올라갔기에 '1번'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우리 군이 확보한 북한어뢰 설계도에 그 추진체가 나와 있다."
―우리 군(軍)에서 어뢰 추진체를 몰래 사고 해역에 빠뜨려놓았다는 음모론도 있다.
"끝이 없다. 당시 어뢰 추진체를 끌어올린 쌍끌이 어선의 선원들은 중국인들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조사에 참가했고 숱한 세월이 흘렀지만 '내가 조작에 참여했다'고 양심선언한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정권에서 양심선언하면 빛을 볼 수 있는데도…."
―어뢰 추진체를 못 건졌으면 조사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수중 폭발 근거는 충분했다. 다만 북한 소행임을 확실히 입증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침몰 지점에서 어뢰 추진체가 발견되면서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정말 천운(天運)이었다."
―민간 대표로 참여한 신상철씨는 "폭발이 됐으면 엄청난 열로 선체 내부가 완전히 녹아내려야 하는데 그을음이라든지 인체 손상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다. 폭발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우리 조사단은 석 달을 합숙했는데, 신상철씨는 두 시간 참석했다. 자기주장만 하고 먹히지 않자 나오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는 버블(거품) 순환에 의한 수중 폭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배 밑 7m 지점에서 폭발해 생긴 버블이 배를 들어올렸다가 내려놓으면서 선체가 갈라지는 것이다. 선체를 직접 타격하는 것과는 다르다. 폭발 시점에는 고열이 발생하지만 수중에서 순간적으로 이뤄져 선체에 전달이 안 됐다. 폭약은 터지는 순간 기체가 되므로 거의 그을음이 없다. 절단면에서 약간의 폭약은 검출됐다."
―폭발로 두 동강 났다면 선체 내 형광등이 깨지지 않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군함의 특수 형광등이었다고 들었다. 일부는 깨졌다고 한다."
/이덕훈기자
―폭발이었다면 장병들의 고막이 왜 안 터졌느냐는 의혹도 제기하는데.
"폭발 당시 어느 위치에 있었느냐에 따라 다르다. 숨진 장병에 대해서는 고막 손상 여부를 조사하지 않았다. 생존자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수중 폭발에 고막이 안 터질 수 있다."
―3~4월 까나리가 잡히는 철에 죽어 떠오른 까나리가 한 마리도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런 주장은 처음부터 있었다. 조류가 빨랐기 때문에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다 흩어지거나 흘러갔을 것이다."
―천안함 인양 업체 관계자들도 어뢰 폭발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는데.
"수중 폭발이나 어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선저(船底)의 스크래치로 좌초했을 것이라는데, 침몰이나 인양할 때 생겼을 수 있다. 암초 유무를 파악할 수 있는 해저(海底) 지도가 있었다. 사고 해역에는 암초가 없었다. 선저에서 튀어나와 있고 강화 플라스틱 재질로 된 소나돔도 멀쩡했다."
―'내부 폭발' 의혹도 계속 나오는데.
"선내 폭약 등 무기 체제를 점검해보니 그대로였고, 보일러실이 터지지도 않았다. 절단면을 보면 내부에서 바깥으로 터진 모양이 아니었다. 잠수함과의 충돌설도 제기하는데, 그 근방에는 아군 잠수함이 없었다. 잠수함에 부딪히면 선체에 자국이 생기지만 그것도 없었다. 잠수함 충돌로는 선체가 그렇게 갈라지기 어렵다."
―러시아 보고서는 우리 군(軍)이 설치해놓은 '기뢰 폭발'로 추정했는데?
"배 밑에서 기뢰가 그렇게 폭발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뢰 추진체가 이미 발견됐는데 기뢰 주장은 터무니없다. 러시아가 그런 보고서를 정식으로 제출한 적이 없는데, 아마 '가짜'일 것이다. 러시아 전문가들은 조사가 다 끝난 뒤 와서 설명을 듣고 갔다."
―'수중 폭발'로 확신하게 된 계기는?
"미국 조사단의 총책임자는 잠수함 전문가인 해군 제독이었다. 그는 수중 폭발과 관련된 자료를 다 갖고 왔다. 인양된 함수와 함미를 보자마자 '절단면이 구(球)처럼 버블 모양이다. 이는 버블에 의한 피격'이라고 짚어냈다. 선체를 보강해주는 철판 표면에는 안으로 움푹 팬 부분이 있었다. 압력이 외부에서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전혀 몰랐나?
"잠수함 어뢰를 개발하는 국내 기술자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잠수함도 그런 성능의 어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런 내용을 공개 안 했다."
―당시 국내외 전문가 73명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은 92일간 조사를 했다. 서로 의견 충돌이 있었던 대목은?
"외국 대표들은 우리가 좀 무리한 주장을 하면 '이건 100%가 아니다'며 반론을 제기했다. 홀랑홀랑 넘어가지 않았다. 이견이 있으면 동의할 때까지 토론했다. 보고서 내용은 외국 전문가를 포함해 만장일치로 이뤄진 것이다. 결정적 물증인 어뢰 파편까지 나왔으니 거의 완벽한 조사였다."
―이런 보고서를 믿지 못하는 심리는 뭘까?
"정치인 중에는 보고서가 나오기 전부터 '믿지 않겠다'는 이들이 있었다. 보고서가 나왔을 때는 아예 읽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음모론을 계속 주장하면 표가 떨어질까 봐 나중에는 눈치를 봤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런 의혹에 동조하다가 생각을 바꾼 것 같았다."
―사실에 대한 확신보다, 중도나 보수의 표를 얻기 위해 그랬던 것이 아닐까?
"문 대통령이 어떻게 확신을 갖게 됐느냐를 밝히면 지금과 같은 혼란이 없어질 것이다."
―지금 의혹을 제기하는 쪽에서는 '합리적 의심'이라고 하는데?
"합리적이 아니라 쓸데없는 의심이다. KBS 프로는 수중 폭발의 결정적 증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사소하고 애매한 것을 의혹으로 부풀렸다. 내가 보기에는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 같았다."
―정치, 이념, 무지가 사실을 왜곡하는 것 같다. 북한은 이 기회를 잡아 "천안함 폭침론은 적폐 청산 대상"이라고 나왔다. 현 정권은 북한과 회담을 위해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라는 걸 흐릿하게 하려는 것 같은데.
"북한이 천안함 사건에 대해 저렇게 나오는 걸 보면서, 과연 비핵화 회담에 얼마나 진정성이 있을지, 믿지 않게 됐다."
그는 미국 MIT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고, 하버드대에서 응용물리학 석·박사를 했다.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귀국해 카이스트와 포항공대에서 재직했다.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
■ 2018년 02월 28일 ‘천안함 46용사’ 호국魂이 통곡한다
김종호 논설위원
처참한 폭침 선체 전시해 두고
뼈아픈 교훈 삼는 이유 잊은 채
무력 공격 주범을 감싸기까지
특별열차 운행과 국빈급 환대
면죄부 준 것과 다를 바 없어
어떤 정부도 그래서는 안 돼
‘772함 수병(水兵)은 귀환하라/ 772함 나와라/ 온 국민이 애타게 기다린다/ 칠흑의 어둠도/ 서해의 그 어떤 급류도/ 당신들의 귀환을 막을 수 없다/ 작전 지역에 남아 있는 772함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그러고는 침몰 수병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른 뒤 이렇게 명령한다. ‘호명된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전선(戰線)의 초계(哨戒)는 이제 전우들에게 맡기고/ 오로지 살아서 귀환하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대한민국이 부여한 마지막 명령이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해역을 지키던 ‘식별번호 772’인 천안함이 2010년 3월 26일 북한 잠수정의 어뢰 공격으로 폭침된 지 3일째에 해군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라왔던 시(詩) 일부다. 실종 수병들을 구조하기 위해 밤낮없이 급박하게 수색 중이던 당시, 등단 시인 아닌 김덕규 부산 동아대 의대 내과 교수가 국민적 절통(切痛)함과 안타까움을 대변한 내용이다. 김 교수가 “수색 상황을 전한 신문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가슴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올라와 온몸을 휘감았다. 그 감정들을 써내려가다 보니 시가 됐다”고 밝힌 것으로, 이를 접한 국민 모두의 심금을 더 울렸다.
김 교수 묘사대로 수병 46명이 전사(戰死)한 천안함 폭침 당시의 절박했던 국민 심정과 참혹했던 실상은 뼈아픈 교훈과 함께 대한민국이 결코 잊어선 안 된다. 경기도 평택시에 있는 해군 2함대 안보공원에 처참하게 두 동강 난 천안함 선체를 전시해놓은 이유도 달리 없다. 그 앞에 천안함 46용사의 호국(護國) 정신과 서해 수호 의지를 담은 전시관을 건립해 지난해 1월 2일 개관한 취지도 마찬가지다. 그 벽에 있는 이런 글귀가 방문객들의 마음을 더 숙연하게 한다. ‘그대들이 흘렸던 피와 눈물은 이제 조국의 바다와 하나가 되어, 이 땅의 산천초목을 물들이고, 대한민국과 함께 우리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입니다. 우리는 그대들이 목숨 바쳐 지킨 바다를 반드시 사수하고,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 번영을 위해 끝까지 싸워 승리하겠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천안함 46용사의 호국 혼(魂)이 통곡할 만큼 참담하다. 명백한 물증과 함께 민·관(民官) 전문가들의 과학적 조사로 북한 소행임이 확인된 천안함 폭침 당시 북한군 정찰총국장이던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의 방남(訪南)을 문재인 정부가 받아들였다. 청와대·통일부·국방부·국정원 등이 폭침 주범으로 확정할 수 없다는 식의 해괴한 논리로 그를 감싸기도 했다. ‘평화 올림픽’을 내세우면서도 다수의 국군을 전사하게 한 무력 공격 총책을 25일 폐막식의 귀빈석에 앉게 했다. 그에 대한 국빈(國賓)급 환대(歡待)는 27일 북으로 돌아가기까지 2박 3일 체류 기간 내내 지속됐다. 그를 위해 평소엔 서지 않는 역에 멈추는 특별열차까지 운행했다. 문 대통령이 환하게 웃으며 그와 손을 맞잡았고, 한 시간 동안 비공개 회동도 가졌다. 그가 묵은 서울 최고급 호텔로 문 정부 고위 인사들이 줄지어 찾아가 접대했다. 그에게 면죄부를 준 것과 다를 바 없다.
국군통수권자를 비롯한 안보 책임자들부터 그런 식이어선 국가 역할에 대한 국민 신뢰마저 흔들리기 쉽다. 오죽하면 천안함 전사자인 민평기 상사의 모친 윤청자(75) 씨가 “정부에 바란 것은 국가에 목숨 바친 아이들의 명예를 지켜주고 기억해 달라는 것뿐이었는데, 이제 나라를 믿고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한탄했겠는가. 그는 어려운 살림에도 정부 보상금 1억 원에 성금 등을 합친 1억898만8000원 전액을 자신이 쓸 돈이 아니라며 “우리 영토·영해를 한 발짝이라도 침범하는 자들의 응징에 사용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국방부에 헌납했었다.
북한이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영토를 직접 무력 공격해 민간인 생명까지 앗아간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기습 포격도 총책은 김영철이었다. 해병대 병사 2명이 전사하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은 그 포격으로 의병제대했던 김지용(30) 씨는 그의 방남을 두고 “군 장병들의 희생을 짓밟고 적(敵)을 반기는 정부를 보고 있자니 내 아이들은 군대에 보내기 싫어진다”고 말했다. 천안함 46용사의 호국 혼을 배반하는 식의 대북 언행은 국가 안보를 걱정하는 대한민국 국민보다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김정은 정권을 더 감동하게 하려는 것으로도 비치게 마련이다. 어떤 정부도 그래서는 안 된다.
문화일보
/천안함 용사 4주기 14.3.26. 국립대전현충원
■ 지뢰 도발
■ 2015.08.10 북한 DMZ서 천안함식 도발… 수색하던 군인 2명 중상
지난 4일 DMZ(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폭발사고는, 북한군이 우리군을 살상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매설한 지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조사됐다고 10일 국방부가 밝혔다.
합동참모본부는 이달 4일 서부전선 DMZ 수색작전 도중 김모(23) 하사와 하모(21) 하사가 중상을 입은 사건에 대해, 지난 6~7일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특별조사팀과 공동으로 합동현장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 같이 파악됐다고 10일 발표했다.
군은 “폭발물의 잔해를 분석한 결과, 현장에서 수거한 철제 용수철과 공이 등 5종 43점이 북한제 목함지뢰와 일치했다”며 “목함지뢰의 매설위치와 위장상태 등을 봤을 때 북한군이 의도적으로 매설했을 가능성이 확실시된다”고 밝혔다.
국방부 안영호 조사단장(준장)은 “잔해물과 목함 파편에서 녹슨 흔적과 부식이 거의 없어 최근까지 비교적 관리가 잘 돼 있었다”며 이 지뢰가 매설된 지 오래되지 않았을 것으로 분석했다.
군은 이와 함께 합동참모본부 명의의 대북(對北) 경고성명을 통해 “정상적인 군대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비열한 행위”라고 규탄하고 “수차례 경고한 대로 북한이 자신들의 도발에 응당하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도록 할 것”이라고 엄중 경고했다.
/북한 목함지뢰 폭발 상황/조선DB
한편 군은 매설된 지뢰의 위치가 우리측 수색정찰로의 추진철책 통문에서 남쪽으로 25㎝(1발), 북쪽으로 40㎝ 떨어진 지점(2발)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군에 따르면, 추진철책은 우리측 GP(경계초소)와 GP 사이에 있는 철책으로, 수색팀은 추진철책 사이에 난 통로인 통문을 통해 DMZ에 진입한다. 통문은 평소 이중 자물쇠로 잠겨 있는데 DMZ 진입시에만 통문을 연다고 군은 밝혔다. 따라서 통문 남쪽 방향에 있는 지뢰의 경우, 북측이 통문 아래에서 남쪽 방향으로 팔을 내밀어 지뢰를 정교하게 매설하고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도록 위장한 것으로 우리 군은 분석했다.
우리 군은 7월22일까지 해당 통문을 통해 정상적으로 작전을 실시했으나 당시까진 특이점이 없었다고 밝혔다. 군은 ▲해당 지형이 남고북저(南高北低) 지형에 ▲배수가 용이한 마사토(모래) 토양으로 돼 있고 ▲철책 주변에 유실된 흙이나 수목 등 부산물이 없는 것으로 미뤄 빗물 등에 유실된 지뢰일 가능성은 없다고 밝혔다.
합참은 “수차례 경고한 대로 북한이 자신들의 도발에 응당하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도록 할 것”이라며 “이번 도발에 대해 사과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엄중히 촉구한다”고 했다.
군은 지난 천안함 폭침(爆沈) 이후 “북한이 도발하면 도발원점과 지원, 지휘세력을 응징하겠다”는 입장을 수 차례 밝혀왔다.
▲국방부 안영호 조사단장(준장)이 북한군이 군사 분계선을 몰래 넘어와 지뢰를 파묻은 것으로 파악된 현장에서 조사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국방부는 10일 이 같은 조사내용을 발표하고 북한의 도발에 대해 단호하게 응징할 것이라고 밝혔다./파주=국방부 공동취재진
국방부 합동조사단이 전하는 지뢰 폭발 상황
지난 4일 비무장지대(DMZ)에서 우리 군 수색대원 2명에게 중상을 입힌 지뢰는 군사분계선(MDL)을 몰래 넘어온 북한군이 파묻은 것이었다. 국방부 합동조사단은 “불과 5분 간격으로 지뢰가 잇달아 폭발하고 2명이 쓰러졌다”며 “위기 상황에서도 장병들은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침착하게 부상당한 전우를 후송했다”고 밝혔다.
국방부 합동조사단에 따르면 지뢰가 폭발한 경기도 파주 우리측 DMZ 추진철책 통문에 육군 1사단 수색대원 8명이 도착한 것은 지난 4일 오전 7시 28분이었다. 이 지역은 군사분계선 남쪽 440m 지점이다. 추진철책은 DMZ 안에 있는 GP(초소)들을 이어주는 시설이다.
두 명의 피해 군인 중 먼저 지뢰를 밟은 것은 하모 하사였다. 7시35분쯤 그가 통문을 통과해 발을 딛는 순간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지뢰가 터졌다. 합동조사단은 “하 하사는 폭발로 인해 몸이 공중에 떴다가 피투성이가 된 두 다리가 철조망에 걸린 채 쓰러졌다”고 했다.
이 상황에서 또 다른 피해 군인 김모 하사는 부상을 입은 하 하사를 부축해 통문 안으로 들어오다가 바로 안쪽에 매설된 지뢰를 밟았다. 이 시간은 7시 40분이었다. 김 하사는 다른 대원들과 함께 쓰러졌다. 하지만 부상을 당한 사람은 김 하사 뿐이었다. 합동조사단은 “당시 병사들은 북한군과 전투가 시작된 것 아니냐는 판단을 갖고 긴급하게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고 했다.
사고 현장에서 부상당한 병사의 후속이 시작된 것은 7시 50분이었다. GP로 옮겨진 김 하사와 하 하사는 GP에 와있던 앰뷸런스에 오른 다음 군 헬기로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송됐다. 합동조사단은 북한군이 지난달 말 이곳에 잠입해 목함지뢰 3개를 매설한 것으로 보고 있다.
北이 사용한 '목함지뢰'는?
북한이 비무장지대(DMZ)지역에 매설한 대인지뢰는 목함지뢰와 수지재(PMN)지뢰, 강구(BBM-82)지뢰 등 세종류다. 이중 목함지뢰는 소나무로 만든 상자에 폭약과 기폭장치를 넣어 만든 일종의 대인지뢰다.
10일 군당국에 따르면 북한군이 ‘목함 반보병지뢰’(PMD-57)로 부르는 목함지뢰는 옛 소련에서 2차 세계대전 때 개발한 간단한 나무상자 형태이다.
▲과거 인천 교동도에서 발견된 목함지뢰
전체 무게는 420g으로 길이 22cm, 높이 4.5cm, 폭 9cm이다. 상자 안에는 TNT 220g의 폭약과 기폭장치인 MUV 퓨즈, 안전핀이 들어 있다. 살상반경은 최대 2m에 이른다. 1m 이내에서 터지면 사람의 폐가 손상되고 3.5m 이내이면 고막이 파열된다고 한다. 군 관계자는 “폭발지점으로부터 13~15m에 이르는 창문을 파손할 정도로 위력이 세다”고 했다.
목함지뢰는 상단에 1~10㎏의 압력이 가해지면 덮개가 퓨즈를 누르고 안전핀이 빠지면서 공이 발사되어 터지도록 돼있다. 사람이 상자 덮개를 열고자 압력을 가하거나 밟으면 터지게 설계돼있다.
나무 상자로 만들어져 금속 지뢰탐지기에 잘 탐지되지 않는다. 나무 대신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것도 있다.
지난 4일 터져 우리 군 부사관 2명을 다치게 한 목함지뢰는 목함에서 강한 송진냄새가 나고 상자 안의 철재 잔해물이 녹슬거나 부식되지 않아 최근에 매설된 것이라고 군은 설명했다.
지뢰 폭발 긴박한 상황에도 전우애로 위기 넘긴 수색대원들
지난 4일 북한군이 매설한 지뢰 폭발 사고 과정에서 우리 군 수색대원들이 보여준 전우애가 국민들에게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국방부 합동조사단은 10일 사고 당시 열상감시장비(TOD)로 촬영된 영상을 공개했다. 이 영상을 보면 지뢰 폭발이 일어난 직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부상 병사를 구하기 위해 현장으로 뛰어드는 수색대원들의 모습이 확인된다. 전우 2명의 부상에도 침착하게 후송작전을 펼치며 혹시 있을지 모를 북한군 공격에 대비하는 모습도 영상에 잡혔다
▲【서울=뉴시스】지난 4일 비무장지대(DMZ)에서 우리 군 수색대원 2명에게 중상을 입힌 지뢰폭발사고는 군사분계선(MDL)을 몰래 넘어온 북한군이 파묻은 목함지뢰가 터진 것으로 조사됐다. 사진은 합동참모본부가 10일 공개한 영상에 지뢰가 폭발한 뒤 수색대원이 부상당한 동료를 옮기고 있는 모습. 2015.08.10. (사진=합참 제공) photo@newsis.com
국방부 합동조사단은 “불과 5분 간격으로 지뢰가 잇달아 폭발하고 2명이 쓰러졌다”며 “위기 상황에서도 장병들은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침착하게 부상당한 전우를 후송했다”고 밝혔다.
합동조사단에 따르면 지뢰가 폭발한 경기도 파주 우리측 DMZ 추진철책 통문에 육군 1사단 수색대원 8명이 도착한 것은 지난 4일 오전 7시 28분이었다. 이 지역은 군사분계선 남쪽 440m 지점이다. 추진철책은 DMZ 안에 있는 GP(초소)들을 이어주는 시설이다.
두 명의 피해 군인 중 먼저 지뢰를 밟은 것은 하모 하사였다. 7시35분쯤 그가 통문을 통과해 발을 딛는 순간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지뢰가 터졌다. 합동조사단은 “하 하사는 폭발로 인해 몸이 공중에 떴다가 피투성이가 된 두 다리가 철조망에 걸린 채 쓰러졌다”고 했다. 그러자 수색분대장인 정모 중사가 주저없이 통문 북쪽으로 뛰어들었다. 1사단 수색대대에 7년째 근무 중인 정 중사는 410여회 수색작전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다. 그는 하 하사를 지혈하면서 "내가 경계할 테니 빨리 후송하라"고 소리쳤다.
정 중사는 올해부터 전방 GOP(일반전초) 사단에 보급된 응급처치키트를 열어 지혈했다. 통문 남쪽에 있던 의무병 박준호 상병이 오른발은 통문 북쪽에, 왼발은 통문 남쪽에 두고 정 중사가 부축해 나오는 하 하사를 맞았다.
또 다른 피해 군인 김모 하사는 하 하사를 부축해 통문 안으로 들어오다가 바로 안쪽에 매설된 지뢰를 밟았다. 이 시간은 7시 40분이었다. 박 원사와 의무병이 좌우에서 하 하사 상체를 부축하고 뒤쪽에서 하체를 손으로 받쳐 나오던 김모 하사가 그만 지뢰를 건드렸던 것이다. 폭발 충격으로 3명 모두 쓰러지면서 잠시 정신을 잃었지만 부상을 입은 것은 김 하사 뿐이었다.
군은 “김 하사는 특전사 출신으로 앞에서 팀을 이끄는 부분대장”이라며 “지난 3월에는 대대 작전·교육훈련 유공 표창을 받은 정예 수색요원으로 2년 전에 여읜 아버지를 대신해 홀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시는 효자”라고 했다. 김 하사는 다리가 절단돼 치료를 받은 뒤에도 깨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은요. 다른 사람은 어떠냐”고 물었다고 한다.
두번째 폭발 직후 수색대원들은 적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포복 자세를 취했다. 다치지 않은 장병들은 통문 남쪽 경사진 둔덕으로 이동해 총구를 북쪽으로 겨냥했다.
사고 현장에서 부상당한 병사의 후송이 시작된 것은 7시 50분이었다. GP로 옮겨진 김 하사와 하 하사는 GP에 와있던 앰뷸런스에 오른 다음 군 헬기로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송됐다. 두 부상 장병은 사고 발생 1시간 25분만에 국군수도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합동조사단은 북한군이 지난달 말 이곳에 잠입해 목함지뢰 3개를 매설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합동조사단 관계자는 “긴박한 상황에서 수색대원 모두가 다친 장병을 구출하거나 적의 공격에 대비하며 적극적으로 작전에 임했다”며 “우리 정예 병사들의 살아있는 전우애와 사명감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고 했다. 하 하사와 김 하사의 수술을 맡았던 국군수도병원측은 “적절한 현장의 응급조치와 신속한 후송으로 사고에 비해 환자들의 상태가 나쁘지 않다”며 “무엇보다 환자들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까지 가지 않은 것은 모두 현장의 장병들 덕분”이라고 했다.
국방부가 지난 4일 비무장지대(DMZ)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 사고로 우리 군 2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북한군이 사용하는 목함지뢰가 사용됐고, 유실된 지뢰일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10일 국방부에 따르면 국방부 전비태세검열단이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특별조사팀과 공동으로 조사한 결과, 이번 지뢰 폭발 사고의 폭발물 잔해 분석 결과, 현장에서 수거한 철제 용수철, 공이 등이 북한제 목함지뢰와 일치했다. 또 철재 잔해물과 목함 파편에서 녹슬음과 부식이 거의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최근까지 비교적 관리가 잘 되어 있었던 지뢰로 보인다.
목함지뢰라고 하더라도 집중호우로 유실된 지뢰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과거 유실 지뢰로 군 장병과 주민, 피서객이 부상을 입는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군은 사고가 발생한 지역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지형이고 배수가 잘 되는 마사토 토양으로 물골이 없었다”며 “유실되었을 경우 철책 일대에 유실된 흙이나 수목이 있어야 하지만 흔적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군은 이번 사건이 북한군이 의도적, 불법적으로 군사분계선을 침범한 후 우리 군 병력의 이동로 상에 목함지뢰를 매설해 살상을 기도한 군사 도발로 판단하고 있다. 근거는 지뢰가 매설된 위치와 위장 상태 등이다.
▲지뢰 폭발 현장./ 사진=국방부 공동취재진
지뢰는 군사분계선 이남 440m 지점의 우리 측 수색 정찰로에 있는 추진철책 통문에서 남쪽으로 25㎝, 북쪽으로 40㎝ 떨어진 지점이다. 군은 “북한군은 먼저 통문 하단 공간을 이용해 남쪽 방향으로 팔을 내밀어 지뢰를 정교하게 매설하고 위장한 후, 북쪽에도 동일한 방법으로 매설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어 “군은 7월 22일까지 해당 통문을 통해 정상적으로 작전을 실시했으나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조선일보 손덕호 기자
■ 2015년 08월 11일 “다리 없어도…영원히 대한민국 군인으로 남고 싶다”
▲ 자랑스러운 아들들 지난 4일 북한의 비무장지대 지뢰도발사건 당시 수색 작전에 참가한 문시준(왼쪽부터) 소위, 정교성 중사, 박준호 상병이 11일 오전 경기 고양시 덕양구 국군고양병원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뢰사고 金하사·河하사 “다리 없어도 할 수 있다”
목숨 건 최악 상황에서도 진한 전우애 ‘영웅 2인’
“몸이 회복되면 근무하던 수색대대로 복귀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평생 군인으로 남고 싶어요.”
지난 4일 비무장지대(DMZ) 수색 정찰 도중 북한군이 매설한 목함지뢰에 다리가 잘리는 중상을 입었지만 무사히 수술을 마친 수색팀 부팀장 김모(23) 하사와 하모(21) 하사가 다음날 병문안을 온 지인들에게 건넨 말이다. 두 하사는 이날 1사단 수색대대장 출신으로 역시 DMZ 지뢰사고로 두 다리를 잃고 교관으로 근무 중인 이종명 대령과 육군 1군단 소속 장성, 가족들의 위로에 오히려 이 같은 의지를 밝혔다.
합동참모본부가 사고 당일 열상감시장비(TOD)로 촬영한 현장 동영상에는 피와 살이 튀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침착한 태도와 진한 전우애를 보여준 수색팀의 용감한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두 하사가 소속된 팀원들은 2차례 폭발사고에도 개인 안전을 돌보지 않았다. 압박붕대로 부상자를 신속히 응급처리했다. 폭발 충격에 나뒹굴었음에도 즉각 일어나 부상자를 포복자세로 후송했다. 이들 수색팀은 진한 전우애와 침착함을 보여주었다.
김 하사는 수술한 후 깨어나자마자 첫마디로 “하 하사는 괜찮으냐”고 물었고, 하 하사 역시 “다른 팀원들은 괜찮으냐”며 팀원들의 안위를 걱정했다고 이 대령은 전했다. 한쪽 발목이 잘려나간 김 하사는 수술 후 성한 다리로 디디며 강한 재활 의지를 보였다.
두 영웅은 올해 9월 전역을 앞둔 이 대령이 방문하자 “부대로 복귀하고 싶다”며 평생 군인으로 남겠다는 의지를 다진 것으로 전해졌다. 15년 전인 2000년 같은 지역에서 후임 대대장이 지뢰를 밟자 구하러 들어갔다 두 다리를 잃은 이 대령이 이날 두 하사에게 “두 다리가 없어도 군 생활을 잘할 수 있다”고 격려하자 이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한편, 4일 사고 현장에 있었던 수색대원 문시준(24) 소위는 이날 경기 고양시 국군고양병원에서 열린 언론 인터뷰에서 “다시 그곳으로 가서 적 소초(GP)를 부숴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문 소위는 결연한 표정으로 “아군이 느낀 고통의 수만 배를 갚아주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정충신 기자 csjung@munhwa.com
■ 2015-08-12 北 목함지뢰는 2천원짜리... 지뢰 탐지 기술, 어디까지 왔나
다이애너 비(妃)를 죽인 지뢰’.
지뢰 반대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 사이에선 정설로 통하는 ‘썰’이 있다. 대인지뢰 반대운동을 활발히 벌이던 영국 다이애너 황태자비가 갑작스럽게 죽은 배후에 군수산업체들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주장. 1997년 6월 12일 다이애너비는 영국 왕립지리학회 행사에서 대인지뢰를 쓰지 말자는 연설을 했다. 두 달 후 프랑스 파리에서 연인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다 사고로 사망했다. 인권 운동 등 여러 사회운동을 활발히 벌이던 그녀가 죽기 직전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운동이 바로 대인지뢰 사용금지 운동이었다.
2천원이면 지뢰 1발 만들어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지뢰사고는 아프리카의 르완다나 소말리아에서 일어나는 먼 얘기로 느껴질지 모른다. 최근 일어난 북한의 지뢰 테러는 지뢰가 생각보다 우리와 가까이 있다는 걸 일깨워줬다.
초기의 지뢰는 금속 재질이었다. 1977년, 생산 단가를 낮추기 위해 플라스틱 지뢰가 개발됐다. 플라스틱 지뢰는 1978년부터 전 세계에 보급됐다. 북한이 이번에 매설한 지뢰는 목함 지뢰, 즉 나무로 만든 지뢰다. 플라스틱 지뢰보다도 생산 단가가 더 낮다. 구소련에서 생산하던 지뢰를 가져다가 본떠서 만들었다. 나무 필통처럼 생겼다. 10kg 중반대 이상의 압력이 가해지면 터진다. 전문가들은 미화 2~3달러만 들이면 목함 지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목함 지뢰의 일련번호는 PMD로 시작한다.
/북한산 목함 지뢰. 나무 필통 모양이다 (합참 제공)
목함 지뢰를 사용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북한 정도다. 나머지 나라는 대부분 플라스틱 지뢰를 쓴다. ‘플라스틱’, 이것이 지뢰 사용 문제를 꼬이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플라스틱 지뢰는 탐지가 불가능하다. 탐지가 거의 완벽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플라스틱 지뢰 개발 3년 후인 1980년에야 알려졌다. 그래서 최소한 지뢰 내부의 ‘공이’라도 금속으로 만들자는 합의가 한때 국제적으로 이뤄졌다. 애초부터 상대를 살상하기 위해 만드는 무기에 ‘도의적’인 제한을 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될 터... 합의는 지켜지지 않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80여 개국에 1억 6천만 발의 지뢰가 묻혀있다고 전문가들은 추산한다. 이 수치는 점점 더 늘고 있다. 지뢰 매설 숫자는 저절로 줄어들지 않는다. 누군가가 밟아서 터져야만 없어진다. 지뢰는 인기 있는 거래품이기도 하다. 한 해에만 1천만발이 넘는 지뢰가 거래된다. 이 중 5백만~6백만 발의 지뢰가 매설된다.
UN에는 지뢰 제거만을 다루는 조직이 있다. UN의 한 해 예산이 약 51억 달러. 이 중 지뢰 관련 예산이 5억 달러, 지뢰제거와 지뢰로 인한 희생자 구제를 위해 쓰인다. 매년 제거되는 지뢰는 20만 발 가량이다.
한반도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국방부 공식 자료에 따르면 현재 남한 지역에 매설된 지뢰는 112만 5천발이다. 실제로는 이것보다 훨씬 많은 거라는 게 전문가들의 추정이다. 휴전선 인접 지역뿐 아니라 후방의 각종 군사기지 부근에 지뢰가 매설되어 있다.
전세계 지뢰 밀집도 1위 지역은 DMZ
문제는 지뢰가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지표에서 약 10cm 아래에 매설하는 지뢰는 비가 많이 오거나 태풍이 오면 유실될 수 있다. 올해엔 뜸했지만, 홍수 후 엉뚱한 곳에서 지뢰가 발견되는 사고가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이유다. 어디에 얼만큼의 지뢰가 묻혀 있는지 아직도 파악이 안된 곳도 여러 곳이다. 국회가 지난 2011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최소한 209곳이 ‘미확인 지뢰지대’다. 지뢰가 묻혀 있는 건 아는데, 어느 지점에 몇 발이나 묻혀 있는지 정부도 누구도 모른다는 말이다.
부산 태종대 해역은 대인지뢰 때문에 아예 폐쇄가 된 경우다. 태종대에서는 대인지뢰 뿐 아니라 대전차지뢰도 발견됐다. DMZ 지대는 전 세계에서 지뢰 밀집도가 가장 높은 지역으로 꼽힌다. 말 그대로 지뢰밭인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몇 번이나 DMZ 평화공원 조성을 언급했다. 지뢰 전문가들은 이를 ‘꿈같은 얘기’로 평가한다. 현재 같은 속도라면 지뢰제거에만 500년 가까이 걸릴 텐데 언제 터를 닦아 공원으로 만드냐는 얘기다.
/김도영 광운대 국방융합과학기술연구소장
한국의 지뢰 탐지 기술은 어디까지 왔을까. 김도영 광운대 전자바이오물리학과 교수에게 물었다. 국방융합과학기술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지뢰 탐지 기술을 연구하고 있는 김 교수는 ‘갈 길이 멀다’고 일축했다.
“지뢰 탐지 기술 개발은 전 세계적인 이슈예요. 플라스틱은 비금속물질입니다. 금속탐지기는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눈을 돌린 게 폭약입니다. 대인지뢰의 경우 25~28그램의 화약이 들어가요. 폭약을 찾는 기술이 연구되어 온 이유예요. 방법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폭약 속에는 질소가 들어있지요. 질소를 찾는 겁니다. 예를 들면 NQR방식(핵사극자공명), TNA방식 등이 있어요.
미국에서 연구한 기술로 엑스레이 이미징 테크놀로지라는 기술이 있어요. 쉽게 생각하면 공항 검색대에 있는 ‘알몸 투시기’가 그겁니다. 이게 원래는 지뢰를 찾기 위해 개발했는데 현장에서 쓸 수가 없는 걸로 판명됐어요. 그러니 용도를 공항 검색대용으로 바꾼 겁니다. 대당 약 100억 원에 팔았지요. 한국도 2대를 들여와서 인천공항에 1대, 김해공항에 1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실용성이 없어요. 너무 비싸거나, 이동식으로 개발이 안되는 거예요. 우리나라만 해도 산악 지형이 많은데 쉽게 옮길 수 없으면 어떻게 쓰겠어요.”
▲지뢰 탐지를 하는 모습. 사진에 등장한 금속탐지기로는 기존에 널리 쓰이고 있는 플라스틱 지뢰를 찾아낼 수 없다.
외국에서는 개나 쥐를 이용해 지뢰를 찾으려는 시도가 있다. 김 교수는 지뢰 탐지견 캠프를 방문했던 경험을 들려줬다.
“국제적인 지뢰 관련 단체들의 본부는 모두 캄보디아에 있어요. 크메르 루주 정권이 국토 전역을 지뢰밭으로 만들었거든요. 그 나라 인구수보다 많은 지뢰가 아직도 깔려있으니까요. 캄보디아에 있는 지뢰 탐지견 훈련 캠프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지뢰 탐지견을 이용한 탐지도 결국 폭약을 찾는 거예요. 후각을 이용하겠다는 거죠.
예전에는 독일산 셰퍼드를 이용했는데 이제는 몸이 작고 가벼운 견종을 훈련시킵니다. 예전 지뢰는 약 25kg의 압력이 가해져야 터졌는데 중국산 지뢰는 10kg만 넘어도 터지는 거예요. 아이들이 밟아도 터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셰퍼드가 밟아도 터지는 거죠. 지금은 코커스패니얼 같이 체구가 작은 견종을 훈련시켜요. 지뢰 탐지견을 훈련시키는 데는 긴 시간이 걸려요. 비용도 비쌉니다.”
▲예전엔 독일산 셰퍼드를 지뢰탐지견으로 훈련했으나, 현재는 체구가 작은 견종을 이용한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도 정부 차원에서 지뢰 탐지 기술을 개발하겠다며 예산을 해마다 쓰고있는데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2천 원짜리 ‘스텔스 지뢰’로 한국사회를 흔들어 놓는 재미를 본 북한은 앞으로도 지뢰를 애용할 터다. 지난 2010년에도 홍수 후 북한에서 목함 지뢰가 수십 개 떠내려 왔다. 수거된 것만 82발이었다. 북한이 의도적으로 흘려보낸 것 아닌지 의심할 수 있다.
세계적인 ‘지뢰밭’ DMZ와 지뢰 테러분자들을 지척에 두고 우리 군당국 및 정부는 지금까지 뭘 하고 있는 걸까. 국방부는 지난 2013년 ‘지뢰제거업법’ 법률안을 발의했다. 일정한 자본금과 기술인력 및 장비를 갖춘 지뢰제거업 희망자가 국방부장관의 허가를 받아 지뢰를 제거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이다. 이 법안은 이렇다 할 논의도 없이 국회 상임위에 머물러 있다. 민간 차원의 지뢰 탐지 연구도 자연스럽게 전면 정지된 상황이다.
정부의 무관심 속에 우리 병사들은 2천원 짜리 지뢰로 목숨을 위협당하고 있다.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 2015.08.22 [北 포격 도발] 연천·파주 접경지 르포 - 北의 상습도발 두렵지 않다
긴장감 속 차분함 잃지않아… 작년 이후 9차례 대피훈련
지하 벙커서 25시간 생활… 고역이었지만 통제 잘따라
"도발책임 명백히 北에 있어… 이번엔 끌려 다니지말라"
북한이 경기도 연천군 중면에 포격 도발을 감행한 지 하루가 지난 21일에도 이 지역엔 여전히 긴장이 감돌았다. 연천군에 내려진 대피령이 이날 오후 6시를 기해 해제됐지만 북한이 전날 '군사적 행동 개시'를 경고한 데 이어 21일 김정은이 북한군 전방 부대에 준전시 상태를 선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긴장도는 더 높아졌다. 그래도 전날 오후 5시부터 대피를 시작해 하루를 지하 대피소에서 보낸 주민들은 그간 북한 도발을 일상적으로 지켜봐 와서인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중면 삼곶리와 횡산리 주민 58명은 이날 오후 6시 대피령이 해제될 때까지 면사무소와 횡산리 마을에 설치된 지하 대피소에서 지냈다. 면사무소 옆 대피소는 지난해 10월 10일 북한군이 민간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에 반발해 쏜 고사총 탄환이 떨어진 지점 근처에 있다. 잠시 바람을 쐬기 위해 대피소 밖으로 나온 권오복(55)씨는 "이곳 주민들은 북한의 고사총 도발도 겪었고, 대피 훈련을 수도 없이 해서 이골이 난 사람들"이라며 "나도 방독면 착용법, 심폐소생술, 소화기 사용법에 대해 웬만한 젊은 예비군보다 잘 안다"고 했다.
연천군은 전날 북한군 도발에 대한 우리 군의 대응 사격이 이뤄지기 4분 전인 오후 5시쯤 중면과 신서면에 주민 대피 방송을 처음 내보냈다. 이 방송 이후 40분 만에 대부분의 주민이 대피소에 모였다. 박경우 중면 부면장은 "접경(接境) 지역인 데다 평소 여러 차례 대피 훈련을 해온 덕에 주민들이 놀란 가운데서도 비교적 차분히 대피했다"고 했다. 연천군 주민들은 작년 이후에만 국지전·도발 대비 훈련(4회), 민방공 대피 훈련(4회), 지역별 특성화 대피 훈련(1회) 등을 하며 북한군 도발에 대비해왔다.
그래도 '실전(實戰) 대피' 생활은 고역이다. 무더위에 습기까지 더해 지하 대피소는 푹푹 쪘다. 한 80대 할머니는 "나이 든 사람들이 후덥지근한 곳에서 잠을 자면 몸이 더 아프고 쑤시다"며 "밤에 잠깐 집에 갔는데 당국에서 대피소에 머물라고 해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왼쪽 사진)21일 오전 경기 연천군 중면사무소 인근 대피소를 방문한 정종섭(가운데) 행정자치부 장관이 남경필(오른쪽) 경기지사, 김규선(왼쪽) 연천군수와 얘기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북한의 포격 도발 다음 날인 21일 경기 연천군 대피소 앞에서 외신 기자가 카메라를 보며 리포팅을 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
21일 날이 밝자 일부 주민은 잠깐씩 대피소에서 나와 바람을 쐬며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를 놓고 얘기 나눴다. 일부 주민은 북한의 도발 위협 수위가 점차 높아지는 데 대해 불안해했지만, 정부의 단호한 대응을 주문하는 주민도 적지 않았다. 삼곶리 주민 최병은(82)씨는 "북한이 군사 행동을 하겠다고 위협하고, 우리 군도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하니 '뭔가 터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도 "그렇다고 북한 도발에 계속 끌려 다닐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 했다.
연천과 인접해 있는 파주시의 접경 지역 주민들은 전날 밤 10시 40분쯤 대피령이 해제되면서 귀가했다. 21일엔 남측 비무장지대(DMZ) 내 유일한 민간인 거주 지역인 대성동 마을과 민간인 통제선 위쪽 해마루촌·통일촌 주민 790여명에게 집에서 대기하라는 '대피 준비 명령'만 내려졌다. 대성동 마을 주민 김동구(46)씨는 "북한의 돌출 행동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처럼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통일촌 주민 이완배(62)씨는 "이번 도발의 책임은 명백히 북한에 있기에 정부가 단호히 맞서 못된 버릇을 고쳐주면 좋겠다"고 했다.
■ 2015.08.26 SK “전역 연기 50명 우선 채용”
복무 기간을 늘려서라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병사들의 각오가 대기업 회장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SK그룹은 최근의 남북 무력 대치 상황에서 전역을 연기하겠다고 신청한 장병들을 신입사원 채용 때 우선적으로 뽑겠다고 25일 밝혔다.
SK는 “남북 협상이 타결되기 전인 24일까지 전역 연기를 신청한 장병들 중에서 SK 입사 희망자가 있으면 소정의 채용 과정을 거쳐 우선 채용할 방침”이라고 이날 공표했다. SK는 올 하반기 공개채용 때부터 이들 장병이 전역연기신청 증빙서류를 첨부해 제출하면 채용 후보 1순위에 올릴 방침이다.
이 결정은 전방 육군 장병 50여 명이 육군 내부 네트워크망과 소속 부대를 통해 전역 연기를 신청했다는 소식(본지 8월 25일자 6면)을 접한 최태원(55) 회장의 의견에 따른 것이다.
SK 관계자는 “오전 일찍 회장이 전화를 해 SK그룹이 장병들을 채용할 수 있는지 검토해보라고 했다”고 전했다. SK 인사파트에서는 곧 검토 작업을 거쳐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는 한 공개채용에서 우선 채용이 가능하다’고 보고했다.
특히 최 회장은 이날 간부들에게 “전역 연기를 결정한 병사들의 의지가 SK에 필요한 문화와 일맥상통한다”고 강조했다. SK는 그룹 차원에서 SKMS(SK Management System)라는 기업문화 정책을 펴고 있다. 최 회장은 “강한 기업문화, 즉 패기와 열정을 사원들과 공유하고 싶다”며 “이 병사들이 우리 그룹에 들어온다면 그런 문화 확산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최 회장의 차녀 민정(24)씨는 지난해 9월 해군 사관후보생으로 입영했다. 지난 4월부터 한국형 구축함인 충무공 이순신함(4400t급)에 배치됐다. 현재 전투정보보좌관으로 중동 아덴만에 파견돼 소말리아 해적들로부터 우리 상선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역시 이날 전역 연기를 신청한 장병들의 취업을 적극적으로 알선하겠다고 밝혔다. 강호갑(61) 회장은 “장병들의 결단에 희망과 자부심을 느꼈다”며 “중견기업들의 취업 수요를 파악해 적성에 맞는 직장을 찾아주겠다”고 말했다.
문병주 기자 moon.byungjoo@joongang.co.kr
2015.09.06 朴대통령, 지뢰 도발 부상 장병 위로 방문
▲박근혜 대통령이 6일 분당서울대병원을 방문해 지난달 4일 DMZ 지뢰도발로 인해 부상을 당한 육군 하재헌 하사를 격려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박근혜 대통령이 6일 분당서울대병원을 방문해 지난달 4일 DMZ 지뢰도발로 인해 부상을 당한 육군 하재헌 하사를 격려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6일 오후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지난달 4일 DMZ 지뢰도발로 인해 부상을 당한 육군 하재헌 하사가 격려차 병원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경례를 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박근혜 대통령이 6일 오후 국군수도병원을 방문해 지난달 4일 DMZ 지뢰도발로 인해 부상을 당한 육군 김정원 하사를 격려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6일 오후 국군수도병원에서 지난달 4일 DMZ 지뢰도발로 인해 부상을 당한 육군 김정원 하사가 격려차 병원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경례를 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 2015-08-27 ‘레이저 김’ 김관진 “나는 全軍 지휘했던 사람”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