護國10/ 6.25 전쟁 이야기3/
■ 6월이면 생각나는 우방의 은인들
6월을 맞으면서 한국인들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7명의 미국인들이 있다.
트루먼, 맥아더, 밴 플리트, 무초, 릿지웨이, 애치슨, 워커.
▶제일 먼저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다.
6.25 남침 소식을 들은 그는 즉각적으로 미군을 보내기로 결심했다.이 결단으로 대한민국이 생존하고 있다.
韓民族 역사상 이렇게 많은 한국인들이 단 한 사람의 결심에 의하여, 그것도 외국인의 결정에 의하여 구제된 적은 없다.
당시 미국은 한국을 전략적 가치가 약한 곳으로 분류한 뒤였다. 남침 당한 한국을 미국이 지켜야 할 약속도 협정도 없었다. 미군 수뇌부는 오래 전에 아시아 방어선은 알류샨 열도-일본-필리핀으로 족하다는 판단을 내려놓고 있었다. 남침 한 해 전 駐韓미군을 철수시킨 것도 그런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참전 결단은 기적이다.
그 기적의 상당 부분은 이 미주리 시골 출신 대통령의 순박하고 우직한 성격과 관련이 있다.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군의 침략으로 유엔군이 서울을 내어주고 총퇴각할 때도 한국 편을 들었다. 당시 영국과 미국 내 상당한 여론은 한국에서 유엔군이 철수하는 것을 지지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우리를 믿고 함께 싸운 한국인을 버릴 수 없다"는 자세를 견지하고 버티었다.
▶두 번째 은인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다.
그는 거의 모든 관계자가 반대하는 인천상륙을 성공시켰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유엔군과 국군은 戰勢를 역전시켜 北進을 개시했다. 맥아더 장군은 물론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무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北進통일 직전에 유엔군은 퇴각하고 한때 미국은 한국 포기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맥아더 장군은 한국전 수행 방법에 대한 異見을 노출시켰다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었다.맥아더, 트루먼 두 분은 6.25 전쟁으로 많은 곤욕을 치렀다.
▶세 번째 은인은 매튜 릿지웨이 장군이다.
중공군의 침략으로 서울을 내어주고 퇴각한 유엔군은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자동차 사고로 숨지는 惡運을 만났다. 후임으로 부임한 사람이 육군참모차장이던 매튜 릿지웨이 중장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공수사단장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전 때 부하들과 함께 낙하산으로 뛰어내렸던 맹장이다.
그는 유엔군의 후퇴를 수원 선에서 멈추게 하고 반격작전을 통해서 휴전선까지 敵軍을 밀어 올렸다.
한국 포기 론을 잠재운 쾌거였다. 릿지웨이가 반격에 실패했더라면 수원 선에서 휴전이 되었던지 미국은 한국을 포기하고 철수했을 것이다.
▶네 번째 은인은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다.
6.25 남침이 일어나자 일본에 있던 8군 병력을 이끌고 와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의 방어에 성공했다.
이는 인천상륙작전의 기회를 만들어준 셈이다. 그는 北進 中 중공군의 침략을 맞아 잘 싸웠다.1950년12월 말 의정부에서 그를 태운 지프차가 한국군 트럭과 충돌하여 사망했다.
▶다섯 번째는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과 호흡을 함께 하면서 미군의 참전과 유엔군 파견을 성사시켰다. 그는 1950년 1월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한국이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시사 함으로써 김일성의 誤判을 불렀다. 이 연설에서 애치슨 국무장관은 "태평양 방어선은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으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이 방어선 이외의 지역에서 공격을 받을 경우 우선 공격받은 사람들이 싸워야 하고 모든 문명국가들이 유엔의 기치 하에서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6.25 남침이 일어나자 애치슨은 이 유엔 참전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애치슨은 영국의 노동당 정부가 미국에 압력을 넣어 한국전에서 손을 떼도록 만들려 할 때 이를 저지했다.
▶여섯 번째는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이다.
유엔군 사령관으로 영전한 릿지웨이 장군 후임으로 8군 사령관이 된 밴 플리트 중장은 李承晩 대통령의 뜻을 잘 받들어 한국군의 입장을 고맙게 배려했다. 그의 아들은 공군 조종사로 참전하여 평양 폭격 중 실종했다. 한국군을 强兵으로 키운 데는 밴 플리트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에서 親韓 인사로서 활약했다.
▶일곱 번째는 무초 駐韓미국 대사이다.
그는 6.25 남침 즉시 신속하게 워싱턴으로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하고 미군의 참전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국인의 입장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는 李承晩 대통령과는 긴장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으나 워싱턴의 정책수립 부서와 상대할 때는 한국의 입장을 많이 대변했다.
6.25 남침을 당한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을 떠나 大田으로 피하려고 할 때도 무초 대사는 "그렇게 하면 전선에서 싸우는 국군의 사기가 떨어진다. 각하가 떠나도 나는 남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무초 대사는 李 대통령이 서울을 떠난 뒤에도 근무하다가 철수했다.
6.25 전쟁으로 약5만 명의 미군이 한국에서 죽었다. 이들이 다 고마운 분들이다. 위에 든 일곱 명의 恩人은 그 대표적 인물일 뿐이다.
독재자의 침략을 받은 남의 나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自國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보내는 결정은 대통령 등 국가지도부가 참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다. 트루먼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이 일을 해낸 이들이다.
더 고마운 것은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한국을 구했다고 자랑하지도 않았고 알아달라고 한국인들에게 요구하지도 않았다. 이들 미국인이야말로 아낌없이 준 나무들이었다.
출처 : nero production
■ 2016.01.14 "맥아더 장군役 맡고 6·25 비극 알게 돼"
['인천상륙작전'서 맥아더役]
/맥아더 장군.
영화 '인천상륙작전'(감독 이재한) 촬영을 위해 내한한 배우 리엄 니슨(64)이 13일 인천 자유공원에서 열린 맥아더 장군 동상 헌화식에 참석했다.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 이날 오후, 검은색 재킷과 바지를 입은 리엄 니슨은 맥아더 장군 동상 앞에 섰다. '맥아더 장군을 기리며'(In memory of General Douglas Macarthur)라고 적힌 꽃바구니를 동상 앞에 놓은 뒤, 오른손을 들어 거수경례를 했다. 잠시 후 호국영령의 동상과 명단이 적힌 곳으로 발길을 옮겨 묵념을 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장군 역을 맡은 배우 리엄 니슨이 13일 인천 자유공원에서 6·25 참전 군인을 부조로 새긴 기념물을 쓰다듬고 있다. /태원엔터테인먼트 제공
첫 일정 장군 동상 찾아 헌화,
통일나눔 기부… 평화 기원도
제작사 태원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리엄 니슨은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6·25전쟁의 아픔을 공감하고 맥아더 장군에 대해 추모를 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면서 인천 자유공원 방문을 첫 일정으로 잡았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사령관과 인천상륙작전에서 엑스-레이 특수 첩보작전에 투입된 켈로부대원 8명에 대한 이야기다. 이정재·이범수 등이 출연하는 이 영화에서 리엄 니슨은 맥아더 장군 역을 맡았다. 그는 "6·25전쟁과 맥아더에 대해 공부 중인데 1950년 9월 15일(인천상륙작전일)이 얼마나 중요한 날이었는지 최근에야 알게 됐다"고 했다. 맥아더 장군은 6·25 전쟁 당시 유엔군 최고사령관으로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결행해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켰다.
리엄 니슨은 지난달 통일나눔 기부를 약정하면서 "한반도 통일을 준비하는 데 1515달러(약 177만원)를 기부하고 싶다. 앞으로 5년 안에 통일을 이루기를 소망한다"는 뜻을 밝혔다. 1515달러는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진 9월 15일을 상징하는 915달러와 매월 10달러씩 5년치(600달러)를 합친 금액이다.
그는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한국군과 21개국 참전 용사들의 희생을 기리면서 한반도 통일을 기원하는 프로젝트와 같다"며 "내겐 통일나눔 기부로 더 뜻깊은 영화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리엄 니슨은 '쉰들러 리스트' '러브 액츄얼리' '스타워즈-보이지 않는 위험' 등에 출연했으며 '마이클 콜린스'로 베네치아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테이큰'의 성공으로 할리우드의 액션 배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1일 한국에 도착한 그는 약 2주간 머무르며 영화를 촬영한다. '인천상륙작전'은 오는 7월 개봉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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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아더가 해임으로 전역한 이유
‘아메리칸 시저’ vs ‘전쟁광’ 당시 맥아더의 나이는 71세.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상하양원 합동회의 고별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습니다. 다만 사라질 뿐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52년간 입었던 군복을 벗었다. 맥아더가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업적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극과 극을 이룬다. ‘태평양전쟁’ 전문가인 《맥아더》의 저자 리처드 B. 프랭크는 방대한 자료 수집 외에도 권위 있는 역사가들의 조언을 받아, 공정하고 입체적으로 맥아더라는 인물을 그려내려고 애썼다. 책 뒷부분에서는 맥아더의 경력과 통찰력을 현재적으로 재해석해 최근 미국의 군사전략을 평가하기도 했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1950년 9월 15일 지휘함 마운트 매킨리 호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직접 지휘하며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오른쪽)의 설명을 듣고 있다. /플래닛미디어 제공
맥아더는 어떤 부분에선 동시대 거의 모든 군인이 가졌던 생각을 초월한 군인이었다. 1941년 독일의 공격을 받고도 소련이 살아날 것으로 전망했으며, 1951년에는 마오쩌둥이 단지 스탈린의 충실한 하인에 불과하다는 통념을 반박했다. 경제와 인구학의 측면에서 미국인들을 위한 가장 밝은 미래의 지평선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에 있다고 확신한 통찰력 있는 지성인이었다. 한편 그에게는 전쟁광, 불복종의 대명사, 과대망상증 환자, 마마보이, 오만한 사기꾼, 지독한 거짓말로 중대한 실패를 감춘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이 평생 따라다녔다.
한국전쟁 중 맥아더가 해임당한 이유는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에 불복종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을 예측하지 못하는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개입을 확인한 이후에는 한반도에 중국 국민당의 병력을 투입하고 미 해군과 공군이 중국 본토를 폭격하는 전략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가능성을 우려한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즉각 해임했다.
저자 리처드 B. 프랭크는 “맥아더를 고전적 비극의 영웅으로 볼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모든 비극 속 영웅처럼 맥아더가 가진 위대한 재능은 파멸적인 단점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단점이란 맥아더가 자신은 운명의 도구이며 오로지 자신의 의지만이 국가와 역사를 변화시켜 자신의 운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확신한 점이다.
'▲맥아더' 리처드 B. 프랭크 지음(왼쪽부터) /플래닛미디어 제공, 1951년 4월 19일 맥아더가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고별연설을 하는 모습. /플래닛미디어 제공, 1945년 9월 2일 미주리 호 함상에서 거행된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 장면. /플래닛미디어 제공
뛰어난 지적 능력과 타고난 체력
맥아더는 1880년 아칸소 주 리틀록 병영에서 태어났다. 대다수 전기 작가들은 그가 엄청난 지적 능력과 뛰어난 기억력, 빼어난 외모,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녔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타고난 체력이었다. 그는 동년배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젊었으며 수십 년간 그것을 유지했다. 그의 삶에 가장 중요한 존재는 부모였다. 아버지 아서 맥아더는 남북전쟁으로 뛰어난 무훈으로 명예훈장을 받아 명성을 떨친 장군이었다. 어머니 핑키는 아들에게 남편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더글러스에게 자신이 운명의 도구라는 믿음을 주입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녀는 아들이 55세가 될 때까지 대부분 함께 살며 곁에서 이 말을 반복했다. 맥아더는 정말로 자신이 운명의 도구이기 때문에 숙명적인 역할을 다할 때까지 신의 보호를 받을 거라고 믿었다. 맥아더는 두 번째 부인 진과 결혼할 때까지 정신적으로 어머니의 영향 아래 살았다.
맥아더보다 20세 연하였던 진은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맥아더는 어머니와 두 번째 부인 같은 강한 여성을 높이 평가했으며, 일본을 점령했을 때 여성 해방을 최우선 개혁 과제로 두었다.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맥아더의 첫 근무지는 당시 미국의 점령지였던 필리핀이었다. 이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공을 세우고 ‘용감한 자들 중에서 가장 용감한 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맥아더는 1919년 39세로 최연소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재직 중 교과 과정을 확대해 사회과학과 현대 군사사를 포함해 생도들이 미국 사회와 좀 더 자주 교류하고 그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책임을 부여하려고 애썼다. 1930년 맥아더는 최연소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했다. 대공황의 여파로 육군 예산이 대폭 삭감된 가운데 맥아더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육군의 장교 교육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싸웠다. 한편 과도한 시위 진압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32년 실직 상태에 있던 많은 참전용사가 참전 보너스 상환을 보장하는 법안 통과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진압군을 이끌었던 맥아더는 시위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고 주장하며 시위자들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이 사건으로 육군은 물론 맥아더도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었다. 이 사건은 그다음 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루스벨트가 당선됨으로써 공화당 정권이 물러나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맥아더가 1944년 2월 21일 두 번째 아내 진과 아들 아서 4세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다. /플래닛미디어 제공(왼쪽부터), 1944년 10월 20일 맥아더가 극적으로 필리핀에 귀환하는 모습. /플래닛미디어 제공, 맥아더가 일본 점령 시절 찍은 가장 유명한 사진으로 히로히토 일황과 처음 만났을 때 촬영했다. /플래닛미디어 제공
루스벨트 대통령은 맥아더를 필리핀 원수로 임명해 해외로 내보냈다. 필리핀에서도 맥아더는 정부 관계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군 경력을 접을 수 있었던 그 시기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으로써 맥아더는 태평양전쟁을 이끄는 지휘관으로 부활했다. 그는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일본 점령 당시 일본의 개혁을 이끌었다. 맥아더는 군인 신분임에도 공화당 지지자임을 당당히 밝혔고 대통령 예비선거에도 두 차례 출사표를 던진 경력이 있다. 그를 조직적으로 대통령으로 추대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통령 후보 지명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그가 발굴해 참모로 기용한 아이젠하워는 이후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리더십 원칙 : 적응성과 대담성
저자 프랭크는 맥아더의 리더십 원칙을 ‘적응성’과 ‘대담성’이라고 정리한다. 군 지휘관이자 최고 관리자로서 맥아더는 놀라운 적응성을 보여주었다. 상사나 부하 직원의 제안 가운데, 좋은점을 가려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재능이 뛰어났다. 남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데 능했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에서 과감한 대담성을 보여주었지만 그의 대담성은 때로 무모함으로 바뀌어 전세를 불리하게 이끌기도 했다.
맥아더는 부하들을 판단하는 첫 번째 자질로 충성심을 꼽았다. 부하들이 그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하도록 강요했으며, 충성스러운 소수 인원을 거쳐 모든 사항이 위로 전달되도록 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대가로 정보의 질과 양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부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맥아더가 즐겨 사용한 방법은 부하들 사이에 경쟁관계를 조장하고 서로 싸움을 붙이는 것이었다. 동기유발자로 칭찬과 아첨의 효과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맥아더 본인은 충성심을 보일 기회를 만들지 않았다. 정확히 표현하면 그럴 필요성이 별로 없었다. 육군참모총장이 된 뒤, 군에서 그를 제어할 상관은 없었다.
▲1918년 1차 세계 대전 중 맥아더는 전장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독특한 스타일을 개발했다. 정모를 즐겨 쓰고 무기를 거의 소지하지 않은 채 지팡이를 들고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고 다녔다. /플래닛미디어 제공
1·2차 세계대전은 그를 가장 진급이 빠른 군인이 되게 했고, 70대까지 현역에서 일할 기회를 주었다. 이는 민간인 상관들, 즉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정치 지도자들과 다양한 문제로 충돌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명예로운 퇴직 대신 해임으로 군 경력을 마친 것은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었을까. 6·25전쟁이 발발한 지 65년이 지났지만, 전쟁은 여전히 휴전 상태일 뿐 끝나지 않았다. 적어도 한국에서 ‘노병’ 맥아더는 죽지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임현선 조선뉴스프레스 기자
■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보다 더 큰 맥아더의 공(功)은?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 사진출처=조선DB
한국보다 대만 보호에 관심
맥아더는 이승만(李承晩)을 좋아하였지만 6·25 남침 이전엔 실질적인 도움을 준 적이 없다. 李 대통령은 미 극동군 소속 공군이 프로펠러 기를 제트기로 교체한다는 사실을 알고 퇴역하는 프로펠러 기를 달라고 하였지만 맥아더는 이 간청을 워싱턴에 전달하지 않았다. 李 대통령은 일본이 항복한 이후 압류한 한국인 선박이 60만 t에 이른다면서 돌려달라고 했지만 긍정적 반응이 없었다.
1949년 주한미군이 일본으로 빠져 나간 이후 한국 방어는 미 극동군 사령부 관할도 아니었다(한국군에 파견 나와 있던 미 군사고문단도 극동군 소속이 아니었다). 맥아더는 대만을 군사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보고서는 여러 번 올렸지만 한국 방어를 강화해야 한다는 건의를 워싱턴에 한 적은 없다. 1950년 1월 오마르 N.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도쿄에서 맥아더와 만나고 간 뒤, “우리는 한국은 전략적 가치가 적고 문제가 생기더라도 한국군이 대처할 수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고 말했다.
아시아의 총독
6·25 남침 당시 극동군 사령부 산하의 병력은 이러하였다. 육군이 10만8000명인데, 8만3000명은 일본에 주둔한 워커 중장 휘하의 8군 소속이었다. 제1기병사단, 7사단, 24사단, 25사단. 다른 병력은 필리핀, 오키나와, 마리아나 군도(群島) 등에 흩어져 있었다.
극동공군은 전투기가 1172대, 병력은 3만4000명, 해군은 직할 부대는 작았지만 태평양 사령부 소속으로 한 척의 항모, 한 척의 중순양함, 8척의 구축함, 3척의 잠수함을 가진 7함대가 이 해역(海域)의 주력(主力)이었다.
6·25 남침 직전 맥아더의 주된 관심은 대만이었다. 5월29일 그는 합참에 ‘대만은 불침항모(不沈航母)와 같기 때문에 미국의 서태평양 방어선(일본~오키나와~필리핀)에서 제외시켜선 안 된다’는 요지의 보고를 하였다.
무초 대사의 회고에 따르면 ‘맥아더, 이승만, 장개석은 광적(狂的)으로 이기적인 점에서 비슷하고, 李 대통령은 맥아더를 우러러 보았다’고 했다. 맥아더로선 이승만의 한국, 장개석의 대만, 미군 점령 상태의 일본, 그리고 자신이 구해준 필리핀을 거느린 ‘미국의 총독’이라는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경력과 실력이 카리스마가 되어 뒷받침하니 과대망상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신속한 초기 대응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전면 남침 소식을 접하고부터 맥아더는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그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집중 조명을 받지만 한국을 구한 맥아더의 진면목은 과단성 있는 초기 대응과 파병 결정 유도였다.
6월25일 첫날 그는 워싱턴(합참)의 승인이 나기도 전에 워커 8군 사령관에게 요코하마 항구에서 탄약, 박격포, 소총 등을 실은 배를 한국으로 출발시키도록 지시하였다. 해군, 공군 사령관에겐 이들 선박의 항해를 보호하도록 명령하였다. 워싱턴엔 7함대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6월26일 오후(도쿄 시간)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한국을 지키기 위한 무기 공급과 함께 해, 공군력의 사용을 허락하였다. 추인한 셈이다. 6월26일 무초 미국 대사는 주한(駐韓) 미국인의 철수를 시작하였다. 이틀 사이 약2000명이 인천항과 항공기 편으로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6월27일 처음으로 김포 상공에서 공중전이 일어나 미군기가 석 대의 북한 야크기를 격추하였다.
6월27일 맥아더는 합참에 국군의 전면적 붕괴가 임박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날 합참은 맥아더에게 38도선 이남에서 해공군이 북한군을 공격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맥아더는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이날 오후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 공군 사령관에게 적군(敵軍) 집결지와 장비 및 시설을 폭격하도록 지시, 8시간 안에 183회의 출격을 하였다. 이틀 안에 북한군 공군기 26대를 격추시켰다.
'미 육군의 개입 없이는 북한군 격퇴 불가능'
워싱턴 시간으로 27일 트루먼 대통령은 성명을 통하여 7함대를 대만 해협에 파견한다고 발표하였다. 1년 전 중국본토가 공산화된 이후 미국에서 쟁점이 되던 대만의 보호 여부가 이때 결정된 것이다. 한국전 덕분에 살아난 나라가 대만이다.
맥아더는 27일 존 H. 처치 준장이 지휘하는 15명의 현지 조사반을 한국에 보냈다. 극동군 사령부의 전방 지휘소 겸 연락단으로 이름 지었다. 처치 준장은 28일 밤 맥아더 사령관에게 ‘미 육군의 개입 없이는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몰아낼 수 없다’고 보고하였다.
다음날 새벽 6시 맥아더는 참모들을 전용기로 쓰던 C-54 기(바탄 호)에 태우고 폭우 속의 하네다 공항을 출발, 4시간 후 수원 비행장에 내렸다. 북한 전투기가 활주로에 있던 비행기를 공격한 직후였다.
수원의 한 학교 건물에서 맥아더는 이승만, 무초 대사와 함께 현황 보고를 들었다. 처치 준장은 9만8000명의 한국군 가운데 2만4000명만 소재가 파악된다고 하였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200만의 한국 젊은이들을 무장시켜야 한다고 건의하였으나 묵살되었다.
맥아더는 영등포 쪽 강둑에 올라 서서 불타는 서울을 바라보았다. 북한군이 쏘는 포탄이 주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두 가지 결정을 마음 속에 내렸다고 한다. 주일(駐日) 미군을 신속하게 투입하고, 북한군의 배후에 상륙작전을 편다.
수원으로 돌아온 맥아더 일행은 바탄호에 타고 오후 6시15분 하네다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출발 직후 비행장에 대한 북한 공군기의 공격이 있었다. 바탄 호 안에서 맥아더는 동승한 마가렛 히긴스 기자에게 도쿄에 도착 즉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군 사단을 한국에 보내야 한다는 건의를 하겠다고 말하였다. 밤11시에 하네다에 도착한 70 노장(老將) 맥아더는 다음 날 새벽까지 보고서를 준비하였다.
워싱턴도 빨리 움직였다. 큰 전쟁을 치른 이들이 수뇌부에 있었다. 한국전 초기 대응의 主役 트루먼, 애치슨, 브래들리, 맥아더가 6월25~30일 사이에 얼마나 빠르게 (세계사적 영향을 끼치게 될)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였는가 뒤돌아보면 감탄이 절로 난다. 이런 신속 대응이 없었더라면 미군이 오기 전에 북한군이 부산항을 점령하였을지 모른다.
6월30일 오전 미 합참은 맥아더에게 중요한 지침을 내린다. 해공군을 동원, 대만에 대한 중국의 공격을 저지하라(동시에 대만이 중국을 공격하는 기지로 이용되는 것을 막아라). 7함대를 극동군 사령부의 작전통제 하에 둔다. 북한 지역에 대한 작전도 허용한다.
맥아더는 이 지침을 받기 24시간 전에 공군사령관에게 북한지역을 폭격하도록 명령하였으니 워싱턴은 기정사실을 추인한 셈이다. 맥아더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엄청난 월권(越權)이었다.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
드디어 6월30일 이른 오후 맥아더는 미 국방부에 미 육군을 한국에 파병할 것을 요청한다. 그는 <해·공군만으로 대응하기엔 늦었다. 북한군이 진격을 계속하면 한국은 무너질 위험이 크고 한국군은 반격 능력을 상실하였으므로 우선 1개 전투 연대를 파견, 2개 사단 증파에 대비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워싱턴 시간으로 6월30일 새벽 4시 콜린스 육군 참모총장은 텔레타이프를 통하여 맥아더와 긴급회의를 시작하였다. 콜린스는 2개 사단 증파는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맥아더는 “이런 식의 늑장 대응으로는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할 수 없다.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 신속하고 명확한 지침을 내려주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압박하였다.
콜린스는 “연대의 전개가 끝나기 전에 2개 사단 파견에 대한 대통령의 허가를 받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이 순간 텔레타이프 화면이 하얗게 정지되었다. 맥아더가 콜린스 총장을 무시하고 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맥아더 전기(傳記) 3부작의 저자(著者) 클레이턴 제임스 교수는 <맥아더는 미군의 어느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술수를 쓴 것이다>고 했다. 콜린스는 맥아더의 무응답을 질책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새벽임을 무시하고 페이스 육군장관을 전화로 불렀고, 페이스 장관은 즉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 5시였다. 트루먼은 일어나 있었다. 페이스 장관이 맥아더의 건의 내용을 설명하였다. 트루먼은 “1개 전투 연대의 사용을 승인하였다고 맥아더에게 통보하라”고 말하였다. 페이스로부터 이를 전해 들은 콜린스는 맥아더에게 알리고 2개 사단 증파 건은 곧 결정하여 통보하겠다고 했다.
30일 아침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의회 요인들이 여러 차례 만나서 분주하게 회의를 거듭한 끝에 트루먼 대통령은 육군을 보내는 결단을 내린다. 그날 이른 오후 합참은 맥아더에게 “육군의 사용에 대한 제한을 해제한다”고 통보하였다.
한국을 구하다
미 육군의 공간사(公刊史)는 <육군을 파견하도록 하는 데는 맥아더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육군 파병 결정을, “역사적인 한 주간의 절정이었다”면서 “이로써 우리는 한국에 전면적으로 간여하게 되었다”고 썼다.
그 5일 뒤 미24 사단 선발대(스미스 대대)는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최초로 교전한다. 남침이 있은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아무런 영토적 이해(利害) 관계가 없는 나라가 지구 반 바퀴나 떨어져 있는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군인들을 보낸 것도 이례적일 뿐 아니라 결정과 행동의 신속성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이것이 인천상륙작전을 능가하는 맥아더의 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승패(勝敗)를 결정하는 전쟁의 핵심을 ‘속도’라고 확신한 맥아더의 천재성이 빛나는 순간이었고 이게 한국을 구한 것이다.
글 | 조갑제(趙甲濟)조갑제닷컴대표
■ 2015-06-25 6 ·25 영웅 밴 플리트 美8군 사령관의 전시 자필 메모 첫 공개
“백마고지 전투 승리로 전세 전환… 적군 앞으로 두달밖에 못버틸 것”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왼쪽)이 1953년 1월 부산에 임시로 마련된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국훈장을 받은 뒤 악수하고 있다. 이 사진은 국내에 처음 공개됐다.
미8군 사령관으로서 6·25전쟁을 이끈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1892∼1992)이 한국 정부에 당시 전황을 알린 것으로 추정되는 자필 메모가 24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메모 작성 시기로 추정되는 1953년 초 밴 플리트 장군은 전쟁이 두 달이면 끝날 것으로 분석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등에 따르면 동아일보가 입수한 2장의 메모는 밴 플리트 장군이 사령관으로서 전체적인 전쟁 판세를 파악한 메모의 일부로 보인다. 연필로 쓴 것으로 보이는 이 메모의 맨 윗부분에는 ‘육군 사령관 메모(Army Commander Memo)’라는 표시가 인쇄돼 있다. 메모 한 장의 좌측 상단에는 ‘외부용(ON)’, 다른 메모지의 좌측 상단에는 ‘내부용(OFF)’이라는 표시가 있다. ‘ON’이라고 표시된 메모에는 밴 플리트 장군이 한국 정부에 알리고자 하려던 것으로 보이는 내용들이 포함돼 있다.
▲전쟁 중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자필로 쓴 메모에는 적군이 두 달밖에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분석한 이유가 적혀 있다.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외부용으로 보이는 메모는 미8군을 뜻하는 단어인 ‘EUSAK(Eighth U.S Army in KOREA)’로 시작된다. 밴 플리트 장군은 이어 “또 한 달 (성과가) 아주 좋은 타격이었다. 적군 상황은 훨씬 더 나쁘다(Reds in a much worse condition). 현 전황이 유엔군에 가장 좋다”라고 썼다. 메모 아래에는 한국군 이름 2명과 ‘훈장(medal)’이라고 적었다. 그중 한 사람은 6·25전쟁 당시 초대 12사단장을 맡았던 윤춘근 장군이다. 이 같은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당시 한국 정부 관계자에게 알리기 위한 메모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군사편찬연구소 측의 설명이다. 내부용으로 보이는 문건에서 밴 플리트 장군은 6가지 이유에서 적군이 앞으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을 60일로 분석했다.
6가지 이유를 다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정치적인(Political) 변수와 △점령한 고지(Hills) △포병(artillery)과 보병(infantry)의 합동 작전(Try Art. Inf. team) 등을 꼽았다. 이어서 강원도 철원 지역에서 벌어진 대표적 전투였던 켈리(Kelly)고지 전투와 백마(Whitehorse)고지 전투를 표시한 뒤 ‘전환(Diversions)’이라고 적었다. 이들 고지전으로 국면 전환을 이뤘다는 뜻으로 보인다. 백마고지 전투가 1952년 10월이었던 만큼 이 메모를 쓴 시기는 1953년 초로 추정된다.
군사편찬연구소 남보람 소령은 “연합군을 지휘했던 밴 플리트 장군이 직접 전황을 분석한 기록은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사료”라며 “메모광으로 알려진 그가 6·25전쟁 관련 기록을 더 많이 남겼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적극적인 사료 발굴이 필요하다”고 했다.
■ 2016.09.16 인천상륙작전 66주년, 맥아더에 대한 오해
한국에는 북진통일을 막은 사람이 트루먼이란 오해가 있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망쳐버린 전국(戰局)을 수습, 한국을 살린 사람이다. 트루먼이 맥아더가 하자는 대로 중국을 공격하였더라면 소련을 불러들여 3차 대전이 났든지, 해공군력만으론 중국을 굴복시킬 수 없어 월남전 식의 지리한 육상전(陸上戰)에 휘말려 한국마저 잃었을 것이다.
오늘은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날이다. 낙동강 전선(戰線)까지 몰렸던, 국군과 미군을 주력으로 하는 유엔군은 배후가 차단당한 북한군이 무너지자 북진을 개시, 10월1일 38선을 넘고, 19일 평양을 수복, 통일을 눈앞에 두었다. 맥아더는 유엔군을 동서(東西)로 분리시키고 지휘권도 兩分하는 전략적 실수를 범했다. 국군이 평양을 탈환한 날 수십만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북한의 산악지대에 숨어들었다가 10월 하순 북진하는 유엔군 중 한국군을 골라서 기습, 큰 타격을 주곤 다시 산악지대로 물러났다.
중공군 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맥아더는 개입한 중공군이 3만 명에 불과하다고 과소평가(실제로는 그 10배), 병력 증강도 없이 11월 말 다시 총공세를 펴는 치명적 실수를 범한다. 중공군은 품으로 안겨오는 유엔군에 대하여 대우회 포위작전으로 나와 곳곳에서 국군과 미군이 고립되고 후퇴를 강요당하였다. 맥아더는 총퇴각을 명령하고 워싱턴에 중국으로 확전(擴戰)할 것을 요구한다. 만주 폭격, 중국 해안봉쇄, 대만의 장개석 군대 투입 등을 요청하고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한국을 포기, 미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자고 압박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 철수 건의를 거부, 끝까지 싸울 것을 명령, 한국을 두 번 구한다. 이 사이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하고(1951년 1월4일), 평택~원주~삼척까지 내려 온다. 후퇴하는 국군과 미군을 따라 북한주민들이 남행(南行)을 결단, 민족대이동과 이산가족의 비극이 일어났다.
미국은 1월 중순 영국의 권유에 이끌려 마지 못해 유엔 이름으로 현위치 휴전을 중국에 제의한다. 자신만만해진 중국의 모택동은 이를 거부, 한국을 살린다. 중국이 현위치 휴전에 동의하였더라면 남북은 37도선으로 갈려 한국은 곧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교통사고로 죽은 워커 장군 후임으로 한국에 온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이 반격에 성공, 1951년 3월15일 다시 서울을 탈환, 전선을 38도선으로 원위치시켰다.
이에 미국은 완승(完勝)을 포기하고 공산군에 휴전 회담을 제의, 2년간 계속되는데 그 사이 1차대전 때의 서부전선의 진지전을 방불케 하는 고지전(高地戰)이 이어졌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자 소련 공산당은 휴전을 결정, 그해 7월27일 총성이 멎는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직전에 회담의 가장 큰 쟁점이었던 반공포로를 석방, 충격을 준 다음 미국을 압박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하여 대만을 살리고, 일본을 경제부흥, 독일을 재무장시키며, NATO를 강화하며 한국을 자유의 방파제로 키우고, 미국의 국방비를 3배로 늘려 대소(對蘇)포위망을 완성, 본격적인 군비경쟁에 나선다. 그 40년 뒤 소련 등 동구 공산권이 내부 모순으로 무너지고, 중국은 개방되는데 북한만이 이런 역사적 대세(大勢)를 거부, 자폐증적 핵무장으로 한국을 인질로 잡아 延命하면서 적화통일의 결정적 기회를 노리고 있다. 결사항전(決死抗戰)으로 자유를 지켰던 선배들의 勞苦를 모르는 한국인들은 핵무장도, 핵방어망 건설도 반대하면서 '설마 김정은이 쏘겠나', '미국이 가만 있겠나'라면서 살찐 돼지의 삶을 선택, 굶주린 늑대에 잡혀 먹히는 길을 선택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약(藥)이 되었지만 한편으론 (毒)이기도 하였다. 이 작전의 성공에 도취한 맥아더는 중공군이 개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무시(또는 중국으로 확전하는 빌미를 만들기 위하여 방치), 아무런 대비 없이 평양~원산선 이북으로 북진을 하다가 모택동에게 역공(逆攻)당하였다. 당시 맥아더의 나이 70세, 주변엔 무조건적 충성파들이 많았다. 그의 권위에 눌린 미국 합참은 위험한 북진에 제동을 걸지 못하였다.
한국에는 북진통일을 막은 사람이 트루먼이란 오해가 있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망쳐버린 전국(戰局)을 수습, 한국을 살린 사람이다. 트루먼이 맥아더가 하자는 대로 중국을 공격하였더라면 소련을 불러들여 3차 대전이 났든지, 해공군력만으론 중국을 굴복시킬 수 없어 월남전 식의 지리한 육상전(陸上戰)에 휘말려 한국마저 잃었을 것이다.
한국전(韓國戰)의 진정한 영웅은 트루먼과 이승만(李承晩)이다. 맥아더는 약(藥)주고 병(病) 준 사람이라 공과(功過)가 엇갈린다. 일부 한국인은 맥아더를 우상 숭배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트루먼을 원균처럼 만들려 한다. 김구를 높이기 위하여 이승만을 폄하하는 것과 비슷한 유아적(幼兒的) 인물관이다.
육사 수석 졸업, 1차 대전 참전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맥아더는 70세였다. 미국의 현역 군인들 중 가장 고참이었을 뿐 아니라 50년의 군 복무 경험이 너무나 드라마틱하고 화려하였다.
1880년 아칸소 리틀록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는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는데, 맥아더도 1930년에 총장이 되었다. 맥아더는 1903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할 때 93명 중 수석이었다. 미국 육군의 전통은 수석 졸업자가 공병부대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1904년 그는 필리핀에서 공병 장교로 근무 중 게릴라의 습격을 받았을 때 권총으로 두 명을 사살하였다. 1905년엔 도쿄의 미국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 중이던 아버지의 부관으로 발령을 받아 아버지와 함께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시찰 여행하였다. 맥아더는 일본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고, 미국의 장래가 아시아와 연관되어 있다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1914년 멕시코 벨라크루즈 침공 작전에 참전한 맥아더는 무장 마적단의 습격을 받고 총격전을 벌여 몇 사람을 사살하였다. 1차 세계대전 때는 42(레인보우)사단의 여단장(잠시 사단장)으로 참전, 1년 이상 독일군을 상대로 혈전을 벌였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맥아더는 말과 글, 그리고 체육에도 밝은 인문적 교양인이었다. 192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올림픽 때는 미국 올림픽 회장 자격으로 선수단을 이끌고 가서 금메달을 24개나 차지하였다.
필리핀 총독을 지낸 아버지 덕분인지 필리핀 근무를 여러 번 하면서 아시아 통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군 상층부엔 맥아더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중시파(重視派)와 조지 마셜을 중심으로 한 유럽 중시파가 있었다. 맥아더는 1919년부터 3년간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의 교장이 되어 개혁을 많이 하였다. 이 자리는 육군의 엘리트 코스로서 여러 명의 참모총장을 배출하였다.
아이젠하워를 부하로
맥아더는 1925년에 최연소 소장(少將)이 되었고 50세에 후버 대통령에 의하여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까지 7년간 현직에 있었다. 퇴역군인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면서 워싱턴에서 시위를 벌이자 후버 대통령의 명령을 받들어 이를 강제해산하였다. 군인들의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보수층의 지지 또한 강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육군 예산을 삭감하려 하자 면전(面前)에서 악담을 하기도 하였지만 두 사람은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다. 1937년에 퇴역한 맥아더는 독립을 준비하던 필리핀 연방정부의 고문으로 부임, 창군(創軍)에 관계하였다. 이때 직속 부하로 쓴 사람이 승진이 늦었던 영관장교 아이젠하워였다.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의 정확한 직무능력을 믿고 일을 많이 맡겼다.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의 천재성을 존경하면서도 너무 정치적이고 이기적이며 쇼맨십을 부리는 데는 비판적이었다. 맥아더는 그런 아이젠하워의 솔직한 태도를 좋아하였다. 맥아더는 본토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아이젠하워를 수년간 붙들어두기도 하였다. 아이젠하워 전기(傳記)를 쓴 스티픈 E. 암브로즈 교수는 흥미로운 표현을 하였다.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보다 더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하였지만 되지 못하였다. 이건 아이러니다. 가장 정치적인 군인 맥아더는 대통령이 되지 못하였는데, 가장 비정치적인 군인 세 사람, 즉 워싱턴, 그랜트, 그리고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이 되었다.>
루스벨트 상대 대통령 후보로 거론
1941년 태평양 전쟁 직전에 맥아더는 현역에 복귀, 미 극동군 사령관이 되었다. 마닐라에서 지휘 중이던 그해 12월7일 진주만 공습이 있었다. 맥아더는 상부의 경고를 받았음에도 필리핀의 클라크와 이바 공군기지에 있던 전투기를 아홉 시간 동안 방치했다가 일본 전투기의 공습을 받았다. 폭격기 등 80여 대가 지상에서 파괴되어 극동군 사령부의 공군 전력(戰力)은 일순간에 사라졌다. 이는 맥아더가 범한 여러 차례의 실수 중 하나일 뿐이다.
1942년 3월 코레기도 섬에 고립되어 있던 미군을 버리고 맥아더는 가족과 함께 초계함 편으로 호주로 피신하였다. 이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명이었다. 남서태평양 지구 사령관이 된 맥아더는 호주를 발판으로 삼아 뉴기니, 필리핀 수복 작전을 펼친다. 그는 언론 대책에 매우 신경을 썼다. 특히 사진이 잘 나오도록. 루손 섬 해안에 상륙할 때는 사진 기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접안시설을 피하고 일부러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 참모들과 함께 바지를 적시면서 걸어가는 모습을 연출하였다. 이 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1943년 미국 공화당은 다음 해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이길 후보를 찾고 있었다. 놀랍게도 남서 태평양 지구 최고 사령관 맥아더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반덴버그 상원의원이 맥아더를 추대하는 움직임의 주역(主役)이었다. 그는 맥아더의 정보참모 윌로비를 중계자로 하여 자주 연락하였다. 이해 7월 갤럽 조사에 의하면 가상 대결에서 루스벨트는 56%, 맥아더는 44%의 득표율이 예상되었다. 농부들 사이에선 맥아더가 58~42%로 유리하였다. 공화당 내 후보 선호도에선 듀이가 늘 1등, 맥아더는 윌키와 2, 3위를 다투었다.
맥아더의 고차원적인 쇼맨십과 언론의 호의적인 보도, 그리고 골수 공화당 세력의 결집으로 맥아더는 대통령 선거 때마다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다. 맥아더는 한 번도 딱 잘라서 “나는 정치를 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한 적이 없다.
지금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들 가운데 가장 높게 평가 받는 인물은 마셜과 아이젠하워이다. 전쟁 중엔 달랐다. 1945년 3월 미국여론조사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1%가 맥아더를 최고 영웅으로 여겼다. 2등은 아이젠하워로서 31%, 3등은 패튼이었다. 마셜, 브래들리는 1%씩이었다.
일본 통치에서 발휘된 정치력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 일본의 항복을 받는 명예를 누리게 했다. 그는 8월30일 선발대와 함께 암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쓰기에 착륙하였다. 1945년 9월2일 도쿄 만에 정박한 미주리 호 항복문서 조인식에서 맥아더는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이 엄숙한 순간으로부터 피투성이와 학살의 과거에서 벗어나 더 좋은 세상이 나타나기를 바란다”는 이 연설과 1951년 의회 연설(“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그리고 죽기 직전의 웨스트포인트 고별 연설이 그의 3대 연설일 것이다.
맥아더를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인으로더 더 높게 평가하는 이들도 많은데 일본의 전후(戰後) 통치와 민주화에 대한 공 덕분이다. 자신을 찾아온 소화(昭和) 천황을 차렷 자세로 세워놓고 찍은 사진 하나가 일본인들의 경직된 의식(意識)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의 일본은 맥아더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헌법도 맥아더가 기초한 것이다.
하지만 현직 군인의 대중적 인기는 위험하기도 하다(시저, 나폴레옹 1세, 3세는 인기를 이용, 정권을 잡았다). 민주정부 하에서도 인기가 높은 군인을 대통령이나 장관 같은 민간인이 통제하는 데는 부담이 따른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엔 더욱 인기가 치솟았다. 공화당에서는 그를 1952년 대통령 선거 때 트루먼 대통령(아직 불출마 선언을 하지 않을 때)의 대항마로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맥아더에 비교하면 비정치적이고 모범적인 마셜 국방장관이나 브래들리 합참의장으로서도 맥아더를 통제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파멸적 사태를 부른 그의 위험한 북진이 워싱턴의 통제를 벗어난 것은 그의 화려한 카리스마 덕분이었다. 전형적인 미국 시골 사람의 우직한 기질의 소유자였던 트루먼은 맥아더를 ‘프리마돈나'라고 부르면서 조롱하곤 하였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 직후 언론과 정치가 맥아더를 우상으로 만들고 있는 분위기 속에선 그 또한 위축된 태도를 보였다. 지금 돌아보면 맥아더의 노골적인 불평과 공개적 비판에 성격이 불같은 트루먼이 잘도 참았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맥아더 앞에서 작아진 합참
매튜 리지웨이 장군은 육군참모차장으로 있을 때인 1950년 12월3일의 미 합참 회의를 기록에 남겼다. 중공군의 반격으로 유엔군이 총퇴각을 하는 가운데 맥아더가 대규모의 확전을 의미하는 만주 폭격과 중국 해안 봉쇄를 요청하고 있을 때였다. 합참은 그해 9월27일자로 맥아더 사령관에게 “소련 및 만주와 인접한 지역으로는 한국군 이외의 병력을 보내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맥아더는 11월 말 총공세 때 이를 무시, 미군을 투입하였다가 역습을 당하였다.
그럼에도 합참 상황실에 모인 국무부와 국방부 장관 및 3군 총장 등 20여 명은 토론만 하고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참다 못한 리지웨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토론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젠 즉각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말할 때가 아니고 행동할 때입니다.”
가타부타 반응이 없었다.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났다. 리지웨이는 호이트 반덴버그 공군 총장을 붙들고 물었다. 리지웨이가 육사 교관일 때 반덴버그는 생도였으므로 두 사람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였다.
“왜 합참은 맥아더에게 명령을 내려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는가.”
반덴버그 총장은 머리를 저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는 어차피 우리 명령을 듣지 않을 것인데, 무슨 소용이 있어요?”
리지웨이는 폭발하였다.
“명령을 듣지 않는 사령관은 그 누구라도 해임할 수 있잖아? 그렇지 않아?”
반덴버그 총장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나가버렸다.
사보타지
1951년 3월15일 서울이 유엔군에 의하여 탈환되었다. 서울은 전해 6월28일에 북한군에 점령되었다가 그해 9월28일에 수복된 후 이듬해 1월4일 다시 중공군에 넘어갔다가 돌아온 것이다. 유엔군의 주력인 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중공군을 38도선까지 밀어올리고 북진 태세를 취한 뒤 명령을 기다렸다. 그는 명령만 떨어지면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갈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확전(擴戰)을 단념하고 제한전을 선택한다. 확전으로 미국의 발이 아시아에 묶이는 것은 스탈린의 세계 전략에 넘어가는 것이며 그 결과로서 유럽을 잃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3월19일 애치슨 국무장관, 마셜 국방장관, 합참은 연석회의를 열고 대통령 성명으로 적군(敵軍)에 협상에 의한 한국 문제 해결을 제안하기로 결정, 휴가 중인 트루먼 대통령의 허락을 받았다. 합참은 20일에 맥아더에게 이런 내용을 미리 알려주었다. 21일 맥아더는 자신의 지휘권에 추가적인 제한조치가 없었으면 한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국무부는 한국전 참전국 대표들에게 협상 제안 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는 절차를 밟기 시작하였다.
3월24일 맥아더 사령관이 놀라운 발표를 한다. 워싱턴의 국가 지도부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적군 사령관에 협상을 제의한 것이다. 그 내용도 국가 원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우리가 그동안 참아온 군사작전을 (중국의) 해안지역과 내륙으로 확대한다면 공산 중국은 파멸될 것임을 敵軍도 알았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 문제와 관련이 없는 대만이나 중국의 유엔 가입 문제를 떠나서 나는 한국에 대한 유엔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는 문제를 놓고 적군 사령관과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추가적인 언명을 중지할 것을 지시한 다음 <더는 맥아더의 항명(抗命)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결심에 이르렀다.>(회고록)
누가 봐도 맥아더의 이 성명은 월권(越權)이고 抗命이며 국가 중요 정책의 사보타지였다. 니얼 퍼거슨 교수는 《巨人: 美帝國의 흥망》이란 책에서 <몇 명의 유럽 요인들에겐 맥아더의 성명이 일종의 혁명 선언문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썼다.
“군인은 ‘겸허함’을 모른다”
트루먼은 맥아더의 입장에서 그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맥아더가 ‘展示用 연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전쟁을 끝내는 공(功)이 그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가서는 안 된다>는 계산이 그로 하여금 이런 불충(不忠)을 저지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트루먼은 남북전쟁 때 링컨이 매클레런 장군으로부터 당하였던 수모도 생각하면서 군대는 문민이 통제해야 한다는 자유 정부의 대원칙을 확립하기로 결심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포병 대위 출신인 그는 회고록에서 왜 민간인이 군부를 통제해야 하는가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군대는 지휘관에게 공직자의 조건인 ‘겸허함’(humility)을 가르칠 기회를 거의 주지 않는다. 군인의 심리를 지배하는 말은 ‘지휘’ ‘복종’ 같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 헌법은 군대에 대한 문민통제의 원칙을 명시하였는데 맥아더가 이를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맥아더는 헌법정신만 위반한 것이 아니었다. 1950년 12월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가 잡지 및 통신사와 한 인터뷰를 통하여 자신의 실수를 변명하고 워싱턴 당국을 비판하자 모든 공무원들에게 허가 없는 대외적 의견표명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맥아더를 해임하는 절차를 놓고 고심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또다른 도발이 기다리고 있었다. 4월5일 미 하원의 야당 대표인 공화당의 조셉 W. 마틴 의원이 자신에게 보낸 맥아더의 편지를 공개한 것이다. 3월20일에 쓴 편지에서 맥아더는 장개석의 대만 군대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트루먼 정부의 결정을 비판하고, 아시아를 잃으면 유럽도 잃게 된다면서 유명해지는 문장으로 편지를 마감하였다.
<승리는 대체물(代替物)이 없다(There is no substitute for victory).>
해임
트루먼은 맥아더 해임을 이미 결심하였지만 정부와 군 지휘부의 만장일치 지지를 이끌어내려 하였다. 적대적인 공화당과 여론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분열되어선 안 되었다. 국무장관 애치슨, 국방장관 마셜, 그리고 합참의장 브래들리가 참석한 여러 차례의 회의 끝에 맥아더 해임에 모두가 동의하게 되었다. 일련의 회의에서 트루먼은 자신의 입장을 먼저 드러내지 않았다. 문제는 어떻게 맥아더에게 이 결정을 통보하느냐였다. 마침 육군장관 페이스가 한국에 가 있었다. 그로 하여금 직접 도쿄의 맥아더를 찾아가 해임을 통보하게 했다. 4월10일 밤,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트루먼을 급히 찾아와서 시카고 트리뷴이 해임 정보를 입수, 특종으로 보도할 것 같다고 보고하였다. 페이스 장관이 맥아더를 찾아가 통보하는 시간까지 미룰 수가 없게 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공보 비서를 시켜 기자들을 부르게 하였다. 4월11일 새벽 1시 기자들에게 대통령 명의의 해임 발표문이 배포되었다. 맥아더 후임에는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이 임명되었다. 맥아더는 자신의 해임 소식을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이런 실수도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반감을 선동하는 데 이용되었다.
맥아더가 대통령에 대한 엄청난 항명을 지속적으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트루먼의 맥아더에 대한 경멸감 못지않은 트루먼에 대한 맥아더의 경멸감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시골출신 정치인, 루스벨트가 급사(急死)하여 운 좋게 대통령이 된 사람, 아시아를 잘 모르는 사람, 특히 중국을 공산화시키는 데 협조한 사람. 그런 사람이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을 역이용, 모택동의 중국에 괴멸적 타격을 주려는 자신의 대전략을 훼방 놓는 데는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맥아더는 리지웨이가 주도한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북진(北進)의 기회가 생긴 틈을 이용, 중공군 개입으로 떨어진 자신의 명성(名聲)을 회복하든지 공개적 抗命으로 해임되는 길을 선택,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려는 계산도 하였을 것이다.
맥아더의 단점인 이기심, 오만, 너무 강한 자기 확신, 과대망상에 가까운 비현실적 전략이 합쳐지면서 한국이 희생된 면이 있다. 공산 중국 파괴를 최종 목표로 하는 순간 한반도 통일은 희생시킬 수 있는 부차적 목표로 내려앉았다.
루비콘 강을 건너다가 溺死
맥아더의 계산은 그 유명한 의회의 고별 연설 직후까지는 먹혀드는 듯하였다. 애치슨은 트루먼에게 맥아더 해임은 가장 어려운 정치적 투쟁을 부를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승리 이외엔 대안이 없다”고 외치는 인기 높은 장군을 전쟁 중에 무례한 방법으로 해임하였다고 하여 트루먼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공화당은 탄핵 운운하고, 트루먼 지지율은 26%까지 떨어졌고 맥아더 지지율은 69%로 치솟았다. 그의 의회 연설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다. 한 의원은 “오늘 여기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다. 육신(肉身)을 가진 하느님이었다”고 흥분하였다. 한 상원의원은 “연설이 더 계속되었더라면 시민들이 백악관을 향하여 몰려갔을 것이다”고 했다. 뉴욕에선 맥아더를 환영하는 700만 인파가 거리를 덮었다. 로마의 시저가 개선한 듯하였다.
열기(熱氣)가 가라앉자 이성(理性)이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상원이 韓國戰의 지도 문제를 놓고 청문회를 열었다. 프로들의 세계에서 ‘프리마돈나’는 추락하였다. 애치슨, 마셜, 브래들리는 맥아더를 맹공(猛攻)하였다. 측근으로부터 ‘강력한 심장을 가진 보스’로 존경 받던 트루먼 대통령을 국가, 특히 군 지휘부가 일치단결로 지지하는 모습이었다. 유순한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중국 확전을 반대하는 논리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잘못된 적을 상대로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전쟁을 하는 것이다.”
맥아더는 웅변은 잘하였지만 민주당 의원들의 집요한 질문에 논리적 설명이나 반박을 하지 못하고 억
지를 부리기도 하였다. 아시아적 시각에 사로잡혀 한국전을 세계정세 속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이란 인상이 굳어졌다. 5월 말 맥아더 지지율은 30%로 떨어져 반토막이 났다. 그를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죽었다. 그의 순회강연도 사람을 모으기가 어려워졌다.
<맥아더는 루비콘 강을 건너려다가 대안(對岸)에 닿기 전에 익사한 것이다.>(니얼 퍼거슨).
글 | 조갑제(趙甲濟)조갑제닷컴대표
2017.20.10 주한미군사령관 "對北 선제타격력 반드시 강화"
"북한의 궁수들 죽일 수 없다면 결코 화살을 다 잡아낼 수 없다"
워싱턴서 이어지는 北선제타격론… 이전과 분위기가 다르다
美정부·의회 고위급 이어 주한미군사령관까지 진지하게 거론
- 과거 '이론상 언급'과는 달라
美의회 "北타격 준비해야 하나" 청문회에서 질문형식으로 '주장'
美안보라인엔 강경파 대거 포진
- 한국 몰래 기습타격은 불가능
美민간인 대피 등 사전조치 필요, 北이동발사대 위치 파악 힘들어
전면전 확전 땐 피해 감당 못해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사령관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이 "북한의 미사일 시설을 타격할 수 있는 공격 역량을 반드시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대북 예방적 선제타격 등 군사적 옵션에 대한 미국 조야의 언급이 늘고 있다.
브룩스 사령관은 지난 7일(현지 시각) 미 육군협회가 워싱턴DC에서 개최한 미사일 방어 토론회 화상 기조연설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맞서 한국에 대한 방어 공약과 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방어만으로는 불충분하다"며 이같이 말했다고 미 육군이 홈페이지를 통해 9일 밝혔다.
브룩스 사령관은 "북한의 '궁수(archer)'들을 죽일 수 없다면 결코 '화살'을 충분히 잡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북한의 미사일(화살)을 요격하기에 앞서, 발사 시설(궁수)을 선제타격해 발사 자체를 막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는 "한국의 인구 밀집 상황 때문에 북한의 미사일이 하나라도 현 미사일 방어체계를 뚫는다면 엄청난 타격을 미칠 것"이라며 "미군은 반드시 (북한의 미사일 시설을 타격할 수 있는) 공격 역량을 확보해야 하며, 이를 항공 미사일 방어체계에 통합시켜야 한다"고 했다.
미국에서 최근 이 같은 '대북(對北) 예방적 선제타격'을 언급한 인사는 브룩스 사령관뿐만이 아니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8일 "군사력 사용을 포함한 새로운 대북 접근법을 마련하겠다"고 했고, 밥 코커 미 상원 외교위원장은 지난달 31일 북핵 청문회에서 "미국은 발사대에 있는 북한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선제공격할 준비를 해야 하는가"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해 마이클 플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등 새 정부 안보 핵심 라인에 강경파가 대거 포진하고 있는 것도 대북 군사 조치 언급을 그냥 보아 넘기기 어렵게 한다. 과거에는 주로 전문가들이 아이디어 차원에서 거론했지만, 최근엔 책임 있는 미 정부나 의회 고위 관계자들이 진지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ICBM 시험 발사 등으로 미국의 가장 민감한 부위를 건드릴 경우 한·미 양국 군의 대북 무력시위 강도도 높아지면서 선제타격론이 본격 부상하고 국내외 논란도 커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스텔스기·크루즈 미사일 등 동원 가능성
미국이 북한 핵·미사일 시설·기지에 대해 예방적 선제타격을 한다면 B-2 스텔스 폭격기와 F-22 스텔스 전투기 등 스텔스 무기와 정밀유도폭탄, 토마호크 크루즈(순항) 미사일 등이 동원될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은 각종 대공 미사일과 1만문이 넘는 대공포들로 세계에서 가장 조밀한 방공망을 구축하고 있다. 레이더에 거의 잡히지 않는 스텔스기나 북 레이더망을 교란하는 EA-18G 전자전기의 투입은 필수적이다. 주요 분쟁 지역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됐던 토마호크 미사일은 미 핵추진 잠수함, 이지스함 등으로부터 발사돼 1350㎞ 이상 떨어진 목표물을 정확하게 파괴할 수 있다. 아군의 인명 피해 없이 타격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지만 무거운 탄두(彈頭)는 실을 수 없어 강력한 지하 시설은 파괴할 수 없다는 게 단점이다. 이 때문에 스텔스 폭격기·전투기,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함재기들이 지하 20여m 시설을 파괴할 수 있는 벙커 버스터, JDAM(합동직격탄), 소형 정밀유도폭탄(SDB) 등으로 목표물을 파괴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B-2 스텔스 폭격기는 괌은 물론 미 미주리주 기지에서 직접 날아와 북 목표물을 폭격한 뒤 복귀할 수 있다.
◇우리 몰래 선제 타격은 불가능
일각에선 미국이 우리 몰래 기습적으로 선제타격할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군 관계자들은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몇 가지 사전 징후가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우선 한국 내에 거주하는 수만명 이상의 미국 민간인들 움직임이다. 군 소식통은 "만약 북한의 보복 공격으로 많은 미 민간인 피해가 생긴다면 트럼프 대통령도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사전에 최소 수천명 이상의 미 민간인을 일본 등지로 피신시켜야 한다. 주한 미군은 지난해 11월 미 민간인들을 수송기를 동원해 일본으로 소개하는 훈련을 실시했었다.
미국은 북한이 스커드·노동미사일로 주한 미군 기지 등을 보복 공격하는 경우에도 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포대나 패트리엇 PAC-3 미사일을 긴급 배치해야 한다. 현재 주한 미군에는 64기의 패트리엇 미사일이 배치돼 있지만 북 미사일 공격을 막는 데는 부족하다. 미국이 실제로 가까운 시일 내 북한을 선제타격하려 한다면 훈련 등을 명분으로 사전에 사드·패트리엇 포대 등을 배치할 가능성이 크다.
◇전면전 확전 우려 한계
전문가들은 "전면전 위험까지 무릅쓰면서 실제로 타격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하고 있다. 우선 북한은 현재 영변 핵 시설 외에 우라늄농축 비밀 시설들을 여러 곳에서 운용 중인데 한·미 정보 당국은 그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장거리 미사일의 경우도 KN-08·14 ICBM은 이동식 발사대에 실려 옮겨다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 파악이 어렵다. 선제타격은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을 완전히 무력화하는 것이 목적인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선 이 같은 사전 정보가 충족돼야 한다.
이와 함께 전면전 확전(擴戰) 시 수십만명 이상의 군인·민간인 사상자가 예상되는데 이를 최소화할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 김열수 성신여대 교수는 "미국이 타격을 한다면 우리 정부에 물어볼 텐데 과연 우리 정부와 국민이 얼마만큼 이를 용인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일에) 비용을 따지는데 과연 한국을 위해 (많은 돈이 드는) 전쟁을 각오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유용원 군사전문기자 양승식 기자
■ "여기 한국에서 헌신한 토이기 용사 묘로부터 옮겨온 흙이 있노라."
"밤낮 없이 계속된 3일간의 전투 결과는 경악 그 자체였습니다. 터키 여단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중공군 2개 연대를 일거에 궤멸시키며, '김량장(용인)'과 151고지를 점령했습니다. 터키군은 12명 전사, 30명 부상을 당한 반면 중공군은 1735명이 사살됐습니다. 이 용맹한 전투 장면이 UPI 종군기자에 의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터키군은 '백병전의 왕자' '신의 손(God Hand)'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언론인 김용삼(전 월간조선 편집장)씨의 말이다. 그는 "터키군은 6·25 당시 사상자가 3000여 명에 달할 만큼 아주 용감하게 싸웠으며, 한국과 터키를 '형제의 나라'로 부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했다.
/앙카라 한국공원에 있는 석가탑 모양의 기념탑
<터키(Turkey)는 1950년 6·25가 발발하자 그해 9월 25일에서 1953년 7월 27일까지 1만 4,936명을 우리나라에 파병했다. 그리고, 그들은 용감하게 싸웠다. 한국전에서 사망한 전사자는 765명. 행방불명된 군인도 175명에 이르며, 부상자가 2,147명이었다. 이들 중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부산의 유엔묘지에 잠들어 있는 전사자도 462명이나 된다.
1973년 터키의 앙카라(Ankara)시에 한국공원이 조성됐고, 1974년 경기도 용인에 터키군 참전비가 건립됐다.>
필자는 터키 역사 탐방 길에 앙카라 시내에 있는 한국공원(코레 파르크)을 찾았다. 공원의 중앙에 서 있는 높은 석탑이 눈에 들어왔다.
터키 공화국 제50주년을 기해 한국공원 만들어
공원 입구에서부터 한국과 터키의 우호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공원 팬스(fence)에 태극기와 터키국기의 문양이 조화롭게 이웃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앙카라에 있는 한국 공원의 팬스(fence)
탑의 아래에 한국어(한글)와 터키어로 '터키 한국전쟁 기념탑'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그 기념탑에는 작은 글씨로 한국전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이름, 생년월일, 전사한 날짜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이가 대체로 20세·21세·22세였고 10대 후반의 용사들도 있었다. 순간, 젊은 시절 자주 들었던 군가가 떠올랐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사라져간 전우야 잘자라"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태양 볕이 뜨겁다는 것을 불평할 수도 없었다. 한국군, 터키군 불문하고 그들의 죽음에 비하면 뜨거운 햇볕쯤은 고통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터키의 젊은 청년들이 낯선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던졌다'는 사실이 다시금 감동으로 다가왔다.
/한국전에서 전사한 터키 용사들의 명단
필자가 정신을 가다듬고 돌계단을 오르자, 석탑 기둥에 '탑의 건립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술돼 있었다.
<이탑은 토이기(土耳其)군이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한국전에 참전, 혁혁한 전공을 세운 바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다. 앙카라 시(市)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서 세워지게 된 탑은, 토이기 공화국 제50주년기념일을 기하여 한국 정부가 토이기 국민에게 헌납하다. 1973. 10. 29>
/탑의 건립 목적을 명시한 글- 터키어(좌), 한글(우)
한국의 묘지에서 옮겨온 흙에 고개 숙이다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의 일이다. 터키 공화국이 1923년에 세워졌으니 '이 나라 건국 50주년을 기해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탑의 중앙에 이르렀다. 탑 아래 작은 석곽(石槨)에는 가슴 뭉클한 글이 아로 새겨져 있었다.
/한국의 묘지에서 가져온 흙이 봉안된 석곽
"여기 한국에서 헌신한 토이기 용사 묘로부터 옮겨온 흙이 있노라."
짤막한 문장 하나가 또 한번 필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필자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동안 묵념을 했다. 비록 한줌의 흙이지만, 고인(故人)들의 명복을 빌었다.
'흙은 생명의 어머니이며 고향이다'고 했던가. 터키 용사들이 흙이 되어 어머니의 품을 찾은 것이다.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평화를 저해하는 모든 세력들을 배격해야 한다. 그래야 터키 용사들의 죽음이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앙카라 한국공원에서 꽃을 피운 무궁화
앙카라 한국 공원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무궁화나무·은행나무 등이 잘 자라고 있었다. 용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일까. 무궁화나무는 온몸이 익어버릴 것 같은 뙤약볕 아래서도 예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의 꽃말은 '일편단심' '은근' '끈기'다. 척박한 땅에서도 뿌리를 잘 내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점에서 우리의 민족성을 닮았다고 한다. 이국만리(異國萬里) 터키 땅에서 무궁화 꽃을 만나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삼천리강산에 우리나라 꽃"
'칸카르데시!'
터키인들은 우리를 '칸카르데시(피를 나눈형제)'라고 한다. 우리도 그들에게 상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서울의 여의도에도 앙카라 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1971년 8월 23일 서울특별시와 앙카라 시 간에 맺은 자매결연을 기념하기 위해 1977년 5월 1일 문을 열었다. 한국과 터키의 우호증진의 상징이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 2015.05.15 "내가 지킨 한국에 나를 묻어 달라" 佛노병의 유언에 울어버린 이승철
유족이 들고온 유해 맞아
가수 이승철씨와 각별한 인연을 쌓아오다 지난 3월 작고한 프랑스 노병(老兵)의 유족이 14일 유해를 들고 인천공항으로 입국했다. "내가 지킨 나라 한국에 나를 묻어 달라"는 노병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다.
▲14일 인천공항에서 가수 이승철씨가 6·25전쟁 프랑스인 참전용사 레몽 베나르씨의 유골함을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승철씨와 생전 각별한 인연을 이어온 베나르씨는 “제2의 고향인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국가보훈처 제공
14일 오후 이승철(49)씨는 87세를 일기로 숨진 6·25 프랑스인 참전 용사 레몽 베나르씨의 유족을 직접 맞았다. 베나르씨와 2010년부터 친분을 쌓아온 이씨는 15일 오전 11시 부산 UN기념공원에서 열리는 유해 안치식에 유족과 함께 참석할 예정이다.
▲가수 이승철씨와 프랑스인 6·25 참전 용사 레몽 베나르씨. /진앤원뮤직웍스 제공
두 사람은 2010년 9월 베나르씨가 프랑스의 6·25 참전 용사들과 함께 한국을 찾았을 때 이승철씨가 자신의 공연 DVD를 선물하면서 처음 알게 됐다. 이씨의 부친도 6·25와 베트남전 참전 용사로 대전 현충원에 안치돼 있어 두 사람 인연이 각별했다. 이후 이씨는 베나르씨의 프랑스 자택을 방문했고 또 그를 서울 자신의 집과 공연에 초대하는 등 친분을 쌓아왔다. 22세 나이로 6·25에 참전했던 베나르씨는 자신의 집을 태극기로 장식하고 평생 한국을 '제2의 조국'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현우 기자
■ [6ㆍ25와 나 - 강인덕]
평생 ‘공산주의 공부’를 업(業)으로 삼게 된 계기
⊙평양 고보 3학년 기말고사 때 전쟁 터져
⊙막내아들 위해 마당과 집 안에 굴 만들어준 부친
⊙1972년 남북회담 때 부모님과 납북된 넷째 형님 소식 들어
康仁德
⊙1932년 출생. 한국외국어大 노어과 졸업. 경희大 정치학 박사.
⊙중앙정보부 해외정보국장·심리전국장·북한국장, 극동문제연구소장, 통일부 장관 역임.
[편집자注]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3년 7월 27일 워싱턴의 한국전(韓國戰) 기념물 앞에서 열린 휴전 60주년 행사에서 “한국전은 무승부가 아니고 이긴 전쟁이며, 특히 동서 냉전(冷戰)의 승리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그는 “가난과 압제 속의 북한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5000만 명의 한국인들은 활력(活力) 있는 민주제도를 갖고,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대국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으니 한국전은 이긴 것”이라 평가했다. 2000년 6월 25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전 50주년 기념식에서 당시 클린턴 대통령도 비슷한 역사관을 피력했다. 그는 “역사라는 긴 렌즈를 통해 뒤돌아보면, 미국이 한국에서 버티어낸 덕분에 냉전(冷戰)에서 우리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며 “50년 전 한국의 능선(稜線)을 지켜낸 용감한 병사들 덕분에 (독일의) 젊은이들이 베를린 장벽 위에 올라가 (공산권의 붕괴를) 자축(自祝)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은 결코 역사를 과대 해석하는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는 최근 《월간조선》 6월호 기고문 〈완전히 달라진 한국전에 대한 세계사적 인식〉에서 “6ㆍ25전쟁은 제3차 세계대전(冷戰)의 승리를 가져온 위대한 항전”이라며 이렇게 썼다.
“남침과 동족상잔의 강조에서 벗어나 (6월 25일을) 이제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승리의 날로 기념하면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반도 냉전을 자유통일로 종식시킬 것을 다짐해야 맞지 않을까? 그렇게 해석해야 피의 대가(代價)를 제대로 계산할 수 있다. 한국전에서 목숨을 바친 한국, 미군 등 유엔군들은 45년간(1946~1991년) 지속된 냉전에서 자유진영이 승리, 수많은 인류가 자유와 번영을 누리도록 하는 데 고귀한 피를 흘린 셈이다.”
한국전이 냉전 승리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정치인과 기자들뿐 아니라 한국 학자들을 제외한 세계의 거의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정설(定說)이 되었다. 헨리 키신저(닉슨 정부 때 안보 보좌관을 지낸 美中 화해의 주역)는 《외교》라는 저서(著書)에서 이렇게 썼다.
<(공산주의자들이) 도전하였을 때 미국 정부는 기존의 전략을 폐기하고 맞서기로 결정하는 용기를 보였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점령되면 아시아에서 미국의 입장, 특히 일본과의 중대한 관계가 약화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의 지도국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시험에서 합격했다.>
한반도에서 소련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막은 한국인들은 휴전 하의 경제ㆍ정치ㆍ문화 경쟁에서 북한에 이겼고, 이것은 자유진영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공산진영을 동(東)과 서(西)에서 감제하는 초소 및 자유진영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쇼윈도 역할을 한 곳이 베를린과 서울이었다. 냉전시대 서독과 한국을 지켜낸 아데나워와 이승만은 세계사적 차원의 반공지도자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국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냉전)의 승리를 가능하게 하였다면 그 역사 속에 영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미국 등 해외 학자들은 미군 파병을 결단한 트루먼 대통령, 그를 외교 전략적으로 보좌한 딘 애치슨 국무장관, 서울을 점령하고 남진하는 중공군을 저지, 반격에 성공한 리지웨이 8군사령관 등을 영웅으로 꼽는다. 맥아더의 인천상륙 작전은 높게 평가되지만 중공군의 개입에 대한 어이없는 오판(誤判)과 문민(文民) 대통령에 대한 항명(抗命)과 해임으로 종합적 평가는 그리 높지 않다(한국은 예외). 한국군 장군으로는 다부동 전투의 영웅 백선엽(白善燁), 춘천을 3일간 방어하여 적(敵)의 전략을 흩트려버린 김종오(金鐘五) 6사단장이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누구보다도 한국전의 흐름을 주도한 두 최고 지도자는 이승만과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여기에 6ㆍ25 당시 나라를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쟁에 참가했던 무명의 용사들과, 전쟁의 참화 속에서 뼈를 깎는 듯한 고통ㆍ고난을 당당히 이겨낸 그 시대의 한국민 또한 영웅이 아닐까 싶다.
올해로 6ㆍ25전쟁 발발 66년이 되었다. 북한 김정은이 핵무기로 세계를 협박하고 있지만 통일은 한반도의 대세(大勢)다. 제대로 된 통일을 위해 우리 세대는 66년 전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 ‘6ㆍ25’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월간조선》은 6년 전(前) 6ㆍ25를 체험한 31인의 소중한 증언을 모았다(2010년 6월호 별책부록). 증언자 중에는 이제 고인(故人)이 된 분도 있다.《조선pub》 독자에게 다시 소개한다. 6ㆍ25를 제대로 아는 것, 그것은 통일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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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6일 아침, 나는 여느 날처럼 학교에 갔다. 무장한 인민군이 학교를 포위하고 있었다. 하루 전날 전쟁이 났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졸업반이었던 우리 평양고보 3학년생들은 학교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틀 후가 기말시험이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부터 학교는 시끄러웠다. 2학년 후배, 3학년 동기생 가운데 일부가 인민군 장교로 학교를 떠나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빨리 사변(事變)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학교를 포위한 인민군은 선생님들을 닦달했다. ‘학생들을 인민군으로 자원입대하도록 설득하라’고 한 것이다. 일부 선생님은 눈치를 봤지만, 몇몇 기개 있는 선생님은 인민군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중에 연세대 사학과 교수를 지낸 차창열 선생님, 형법을 가르친 정영석 선생님은 지원서를 주지 않고 딴청만 부렸다. 이분들이 며칠 늑장을 부리는 사이 미군의 폭격이 28일부터 시작됐다. 평양 전체에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기회는 그때뿐이었다. 우리는 학교 담을 넘어 사방으로 튀었다. 멀리서 우리를 보고 있었을 선생님들의 모습이 아련하다. 나는 한달음에 고향집으로 향했다. 내 고향은 평양시에서 남쪽으로 20리(약 8㎞)에 있는 대동군 용연면 소리다. 고향집에서 막내아들을 노심초사(勞心焦思) 기다리던 부모님이 나를 반겼다.
막내아들 위해 굴을 파놓은 아버님
고향집에서 나는 아버님이 마련해 놓은 피란처에 들어가서 살았다. 아버님은 당신 연세 50세에 본 막내아들이 혹시 인민군에게 끌려갈까 봐 집 근처에 굴을 파놓고, 집 천장 한구석에 피란처를 만들었다. 내 고향집은 북한 정권의 감시대상이었다. 아버님이 파놓은 피신처가 아니었으면 나는 곧장 인민군에 끌려갔을 것이다.
우리 집이 북한 정권의 감시대상이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우리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 집안사람들은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었다. 우리 집안은 일제강점기 때 항일(抗日)운동을 했는데, 형님들은 조국해방단 소속으로 활동했다. 형님들은 1944년 조국해방단 소속인 것이 드러나 형무소에 수감됐다. 1945년 광복 후 겨우 풀려나와 조국 광복의 기쁨을 맛보게 됐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풀려나온 형님들에게 더 큰 시련이 닥쳤다. 김일성(金日成)이 항일무장단체인 조국해방단을 자신의 어용(御用)단체인 민주청년동맹의 기관단체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일성의 사촌동생인 김원주가 넷째 형님과 ‘너나’ 하는 사이로 조국해방단 소속이었다. 김일성은 항일운동을 했던 사촌동생과 그 조직을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도구로 만들고 싶어했다.
장(長)형님을 제외한 나머지 세 형님은 고민 끝에 고향을 등지고 1945년과 1946년, 서울로 남하했다. 이로써 고향에는 부모님과 장형님, 출산이 임박한 누님 한 분이 남아 있었다.
영국군과 중공군의 주둔지가 된 강씨 집성촌
▲이후락 중정부장의 극비 방북에 이어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적 사업추진을 위한 남북 적십자회담이 열렸다. 1972년 8월 30일 평양 대동강 문화회관에서 열린 제1차 본회담.
나는 10월 중순이 돼서야 피신처인 굴과 천장에서 나왔다. 10월 16일로 기억한다. 아버님이 불러서 나가 보니, 영국군 선발대가 우리 집 마당에 짐을 풀고 있었다. 당시 우리 집은 고향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컸기 때문에 영국군 선발대가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내 아버님은 젊었을 때 고향 마을 인근에 약 1만5000평의 땅을 사서 우리 가족 집을 짓고, 당신 사촌, 육촌 가족에게 땅을 나눠줘 집을 짓게 했다. 한마디로 ‘강씨’ 가족의 작은 집성촌(集姓村)을 만들었다. 나중에 항공사진으로 우리 고향 마을을 보니, 마을과 따로 떨어져 있는 정사각형 모양의 우리 집성촌 윤곽이 뚜렷했다.
전쟁 중에 고향집이 중공군의 야전병원이 됐다는 얘기를 훗날 들었다. 강씨만의 작은 집성촌을 만들겠다던 아버님의 바람과 달리, 고향집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국제 성씨(姓氏)들의 집합소가 됐다.
4개월 만에 피신처에서 나온 나는 고등학교에서 배운 짧은 영어로 영국군의 심부름을 하며 얼마간을 지냈다. 하루는 아버님이 나를 부르더니 ‘서울로 가라’고 하셨다. 서울로 떠난 세 형님의 안위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길로 짐을 싸서 서울로 향했다. 인민군들은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퇴각했고, 서울로 내려가는 길은 국군과 연합군 차지였다.
인민군 포로 수송 열차를 타기 위해 평양역에 도착하자, 낯익은 얼굴들이 사방에서 보였다. 모두 평양고보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평양 치안대에 있거나, 국군에 입대해 포로수송을 담당하고 있었다. 평양고보 친구들의 배려로 경기도 수색까지 쉽게 기차를 타고 내려갔다. 수색에서 곧장 형님들이 있는 영락교회로 가서 형제 상봉을 했다. 이때가 1·4후퇴 한 달 전이었다.
대구 피란길에 가고파의 김동진 선생 만나
1950년 12월 중순부터 북쪽에서 유엔군과 국군이 내려왔다. 중공군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과 국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서울은 아우성이었다. 고향집에 계시던 장형님이 서울로 내려왔다. 행방이 묘연했던 넷째 형님은 납북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 서울 중구 충무로 극동빌딩 인근에서 인민군에 납치돼 끌려가는 걸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다. 남아 있는 형제는 대구로 내려갔다. 고향집에 계신 부모님과 누님 소식은 들을 방법이 없었다. 그저 살아계시기만 바랄 뿐이었다.
대구로 피란 와서 나는 학도병에 지원했다. 당시 지원서를 받은 곳이 대구 효성여대였다. 지원서를 쓰고 나오는 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가곡 ‘가고파’의 작곡가인 김동진(金東振) 선생님이었다. 김동진 선생님은 나의 형님들 숭실학교 후배였다. 나와 친구들이 “선생님”하고 부르자, 선생님이 “오호, 너희 평양놈들이구나”하며 반색을 했다. 그러면서 “내가 지금 작곡을 하나 했는데, 노래 한번 불러보자”고 했다. 선생님이 풍금을 치고 우리가 노래를 했는데, 가사가 이렇게 시작됐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백만이냐. 대한남아 가는 데 초개(草芥)로구나.’
가사는 역사학자인 이선근(李瑄根) 선생님이 지었다고 했다. 전쟁 중에 두 천재가 의기투합해서 저 유명한 군가를 만들었다. 이선근 선생님은 말 그대로 양반(兩班)이었다. 군인으로 별을 달아서 무반(武班), 학자로 대학교 총장, 문교부 장관, 초대 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을 지내서 문반(文班)이었다.
공산주의 공부할 젊은 장교 발탁
▲1950년 10월29일 태극기가 꽃밭을 이룬 평양시민들의 이승만대통령 평양입성 환영대회.
김동진 선생님은 나를 이선근 선생님에게 소개를 했고, 당시 국방부 정훈국장이었던 이선근 선생님은 다시 정훈국으로 데려갔다. 나는 의정부 미 1사단 산하 예비 1사단으로 배치됐다.
이곳에서 전쟁 내내, 의정부부터 연천까지 일대 재건 사업을 담당했다. 민간 교회를 만들고 소학교를 만들어주는 작업을 했다. 당시 군대에 군종장교가 없어서 내가 군종장교를 불러오는 일을 도맡아 했다. 전선(戰線)이 수십 차례 오르락내리락한 끝에 결국 1953년 휴전이 됐다.
나는 인민군에 끌려갈 고비를 넘기고, 여러 차례 포탄을 피한 끝에 겨우 한국에서 살아남았다. 우리 가족은 남북분단처럼 둘로 나뉘었다. 부모님, 누님, 넷째 형님은 북한에 남았고, 형님 세 분과 나는 타향인 남한으로 내려왔다. 분단이 된 이후부터, 북에 있는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시 부모님의 연세가 이미 일흔을 앞두고 있었고, 누님은 출산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김일성이 싫다고 피란 온 넷째 형님은 북으로 끌려갔다.
전쟁이 끝난 후, 정훈국에 남아서 진로를 고민했다.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대학 갈 형편이 못 됐다. 정훈국 소속으로 KBS에서 대북방송을 했다. 당시 육군본부는 젊은 장교 가운데 공산주의에 대한 공부를 시킬 사람을 찾고 있었다. 실향민(失鄕民)으로 대북방송을 하는 내가 제격이라고 판단했는지, 나를 발탁했다. ‘공산주의 공부를 하면 학비를 대준다’고 해서 더 생각하지 않고 공산주의 책을 보기 시작했다. 공산주의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내가 병법을 맡을 테니,자네는 군사전략을 공부하게”
산더미처럼 쌓인 공산주의 관련 서적 사이에 야전침대를 놓고 밤새도록 읽고 또 읽었다. 국군이 북한 노동당 사무실 등에서 노획한 문서, 공산당 선언 등을 베껴 쓰면서 공부했다. 1954년 한국외대 노어과에 입학하면서부터,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엥겔스 등의 저술을 원전(原典)으로 공부했다.
1955년 대학 생활과 정훈국 장교 생활을 겸하며 생활하고 있을 때, 정훈국에 해병대 장교 한 명이 찾아왔다. 자신을 국방대학원 교수라고 소개하는데, 이분이 초대 교수부장을 했던 문희석(文熙奭) 장군이었다. 문 장군은 내가 공산주의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난 후부터 나를 유심히 지켜봤다. 어느 날, 다시 나를 찾아온 문 장군은 내게 이렇게 제안을 했다.
“내가 병법을 공부하고 있으니, 자네가 군사전략을 공부하게. 그럼 내가 영국 IISS(국제전략연구소) 회원이니 자네를 그곳에 소개시켜 주겠네.”
문희석 장군은 전쟁 전엔 중앙대 교수였다. 그는 병법에 관심이 있어,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군에 남은 사람이다. 그만큼 병법에 관심과 조예가 깊었다. 몇 번 만나 보니, 문 장군이 진실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의 의견을 따랐다. 대학 졸업 때까지 그와 함께 공산주의에 대한 공부를 했다.
당시 외대 옆에 사상계 사무실이 있었다. 공산주의 공부를 하다 막힐 때면 사상계에 가서 양호민 (梁好民) 선생님 등에게 조언을 받았다. 당시 사상계에 있던 분들은 “어린놈이 공산주의 공부를 하네”하시면서 귀여워했다. 신일철(申一澈) 전 고대 철학과 교수와 함께 여러 선생님에게 개인교습을 받았으니, 학자로서는 이보다 행복할 수가 없는 시절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해병대에 입대했다. 물론 문희석 장군의 권유 때문이었다. 해병학교를 거쳐 해병대 사령부에서 낮에는 해병장교로 일하고, 밤에는 밤을 새워 공산주의 책을 읽어 내려갔다. 얼마 있지 않아, 김성은 장군(국방부 장관 역임)이 해병사령관이 되고 문희석 장군이 작전국장이 됐다. 두 분이 나를 해병대 정보국으로 보내서 전략분석관으로 일했다.
쿠바 사태 후 중정 서기관으로 발탁
1년 후에 4·19와 5·16이 잇따라 터졌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중앙정보부가 창설됐다. 나는 중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쟁이 끝난 후부터 중정으로 옮기기 전까지 약 8년간 공산주의에 관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그 공부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62년 10월 22일 이른바 ‘쿠바사태’(쿠바미사일위기)가 일어났다. 전 세계가 핵전쟁 위기감으로 긴장했고, 중정 안에서도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대부분의 중정 분석관이 ‘전쟁이 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내가 전쟁이 나지 않을 것이라며 한창 떠들고 있는데, 당시 북한과장이 내 얘기를 우연히 들었다. 나를 불러서 갔더니 “왜 전쟁이 안 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하기에, 대략 이런 식으로 대답했다.
“전쟁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흐루시초프와 소련 공산당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쿠바는 미국의 목구멍에 낀 가시 같은 존재다. 전쟁을 해서 쿠바를 잃는 일은 이 가시를 제거하는 건데, 소련 공산당이 가시를 빼버릴 리가 없다.”
과장의 지시로, 쿠바사태 전망에 관한 보고서를 써서 제출했다. 과장은 이를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金鍾泌) 전 국무총리에게 올렸다. 그때부터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다. 매일 밤마다 외신이 들어오는 기계 앞에서 쿠바사태에 관한 기사를 훑어나갔다. 당시는 새벽 2시부터 4시까지는 외신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때 깜박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타다다닥’ 하는 소리에 잠을 깨보니 외신이 들어오고 있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송고된 기사를 봤더니, UPI발(發)로 ‘쿠바로 행하던 소련 선단(船團)이 소련으로 회항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떴다. 새벽 4시에 남산에서 내려와 청진동 해장국집으로 가던 가벼운 마음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쿠바사태로 인정을 받은 나는 사무관 승진 6개월 만에 서기관으로 승진했다. 과장을 달기도 전인 1962년부터 대통령에게 브리핑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북한과장이 됐을 때, 대한민국에 들어오는 모든 북한 정보는 나에게 집중됐다. 정보분석관 출신이었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배려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정보분석관의 중요성을 잘 알았고, 중앙정보부의 정보를 잘 이용하는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나에게 생업, 가족에게 업으로 남은 6·25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있었고 7·4남북공동성명도 발표됐다. 나는 당시 남북대화 사무국장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우리 일행을 태운 헬리콥터가 내린 곳은 내 고향 대동군 용만면 소리에서 불과 10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때 나는 전쟁 이후 헤어진 부모님, 누님, 형님 소식을 처음으로 들었다. 북한 당국은 내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하지만 언제 돌아가셨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납북된 넷째 형님은 살아계신다고 했다. 당(黨) 학교에서 당사(黨史)를 공부하고 가르친다고 했다. 북에 끌려가서 처형될 형편이었지만, 김일성의 사촌동행인 김원주가 넷째 형님을 살려주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만약 김원주가 1960년대에 죽지만 않았으면, 좀 더 편하게 살았을 것이다.
6·25가 발발했을 때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던 누님은 딸을 낳았다고 했다. 누님과 얼굴도 모르는 조카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평양에서 함경북도 회령으로 쫓겨났다. 누님의 남편, 내 매부가 전쟁 중에 동(東)평양 치안대를 맡았다. 매부는 홀로 월남(越南)해서 서울 근교에서 목사로 활동했다. 이런 매부의 전력(前歷) 때문에 북한 정권은 누님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누님은 말도 못할 고생을 겪었을 것이다.
내가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통일부 장관에 임명됐을 때, 동북 3성 어디선가 보낸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내 누님의 사위, 내게는 조카사위가 되는 이가 보낸 편지였다. 그는 북한에서 탈출해 동북 3성 어디선가 살고 있다며 자신을 한국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 나는 이 편지를 한국에 살고 있는 매형에게 보여줬다. 매형이 자신의 사위를 만나기 위해 접촉했지만, 결국 연락이 되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북한의 공작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6·25는 우리 가족을 두 쪽으로 갈라놨다. 하지만 내가 생업(生業)으로 ‘공산주의 연구’를 하게 된 것도 6·25 때문이다. 우리 민족 모두에게 그렇겠지만, 나와 우리 가족에게도 6·25는 업(業)으로 남아 있다.⊙
< 정리=金南成 前 月刊朝鮮 기자>
■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이대용 전 駐越 공사]
"압록강대장, 압록강대장! 飢寒이 얼마나 심하오 부족한 날 용서하오…" ―낙동강 전투 당시 무전 교신
"전쟁 때는 無垢의 정신으로 굵고 짧은 삶 값있게 살다
화사한 꽃이 떨어지듯 가버리는 게 軍人의 일생"
"鴨綠江물 수통에 담는 장면… 그건 사진이 아니라 그림
그때는 그것이 요란스럽게 역사에 남을 줄 몰랐어요"
"전쟁 때는 무구(無垢)의 정신으로 굵고 짧은 삶을 값있게 살다가 화사한 꽃이 떨어지듯이 가버리는 것이 군인의 일생이라고 했어요. 그러하듯 6·25 때 예하 소대장 4명과 직속상관인 부(副)대대장과 대대장까지 모두 전사했어요. 나만 운 좋게 살아남았어요."
입속에서 웅얼거리는 듯한 이대용(91) 전 주월(駐越) 공사의 말은 알아듣기 쉽지는 않았다.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말이 내게는 '전설(傳說)이 살아남았다'는 것으로 들렸다.
그는 6·25의 첫 승전으로 기록된 '춘천 전투'의 중대장(제6사단 7연대 1대대 1중대)이었다. 낙동강의 화산 전투에서 '내 목숨이 끊어지겠구나' 하면서 방어 진지를 사수했다. 북진할 때는 그의 중대가 맨 먼저 압록강에 도달해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았다. 베트남전(戰)에서는 사이공(현 호찌민)이 함락되기 직전 교민 철수를 위해 마지막까지 남았다. 체포된 그는 감옥살이를 한 뒤 5년 만에 귀환했다. 몇 년 전 그가 펴낸 '6·25와 베트남전 두 사선(死線)을 넘다'라는 책의 제목 그대로였다.
―6·25 발발 당시 스물다섯이었더군요. 그날 아침이 기억납니까?
"춘천에 하숙집을 얻어 영외 거주를 하고 있었어요. 그날 비가 내렸어요. 오전 8시 반쯤 쿵쿵 포성(砲聲)이 들렸어요. '일요일인데도 우리 포병부대가 사격훈련 하는구나' 했어요. 나는 도서관에 책을 빌리려고 나섰어요. 그때 연락병이 달려와 '인민군이 38선 넘어 공격해와 비상이 걸렸다'는 거예요. 고무장화를 신은 채 부대에 복귀했어요."
―6·25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릅니까?
"우리 중대가 맨 먼저 압록강에 도달한 것이지요(1950년 10월 26일). 그때 남북통일이 되는가 감개무량했어요. 인민군들은 압록강 뗏목 다리를 건너 중국으로 도망쳤어요.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압록강가에 주둔했어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떠 담는 사진 속 주인공이었습니까?
"그때 사진이 어디 있어요? 나중에 그림을 그렸거나 다른 데서 찍은 겁니다."
―사진이 없었다고요?
"그때 중대와 대대에는 사진사가 없었어요. 나는 물을 뜰 생각도 안 했어요. 뒤늦게 대대장(김용배)이 도착해 '남북통일 축원을 위해 대통령께 보내 드려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어요. 내 연락병 오달희가 자기 수통으로 물을 떠 온 걸로 기억해요. 그는 나중에 전사했습니다. 어쨌든 그 수통을 후방으로 보냈어요. 전쟁기념관에 수통이 전시돼 있는데, 그게 그 수통인지 모르겠어요. 그때는 그것이 요란스럽게 역사에 남을 줄은 몰랐어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의 압록강 주둔은 2박3일로 끝났지요?
"10월 28일 저녁쯤 '초산으로 철수하라'는 무전 연락이 왔어요. 중공군이 서북 방면에서 밀고 들어와 후방을 몇 겹으로 차단했어요. 포위망을 뚫고 나오면 또 포위가 되곤 했습니다."
그의 중대가 중공군과 만난 횟수는 22회였다. 이 중 13회는 크고 작은 교전을 벌였다.
"어떤 부대에서는 각자 민간인복으로 갈아입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어요. 우리 중대원도 그렇게 하기를 원했어요. 나는 '군인은 총칼을 버릴 수 없다. 사즉생(死則生)이다. 마지막 총알 한 발은 자기를 위해 써라'고 말했어요. 총 들고 끝까지 싸우면서 포위망을 뚫고 나온 중대는 우리밖에 없었어요. 사단사령부에서 유일하게 생환 신고식을 했지요."
―6·25 전쟁을 통틀어 최고의 지휘관은 누구였다고 생각합니까?
"직속상관인 김용배 대대장은 최고의 군인이었어요. 일본군에 지원했던 흠결이 있었지만, 그분은 천재적인 전략가였고 용감했고 인격적으로 훌륭했어요. 적의 총알이 이마를 스쳐 지나가 피가 뚝뚝 흐르는데도 '별거 아니야'라고 태연했어요. 한번은 낙동강 전투에서 내가 죽음을 떠올리며 방어진지를 사수하고 있을 때 '압록강대장(제1중대장의 음어), 압록강대장! 기한(飢寒·추위와 굶주림)이 얼마나 심하오. 부족한 나를 용서하오'라며 무전기로 전해왔어요. 나는 전쟁터에서 한 번도 눈물 흘린 적 없었는데 그때는 무전기를 쥔 채 흐느껴 울었어요.(김용배는 1951년 7월 제7사단 5연대장으로 부임한 뒤 양구 전투에서 전사. 당시 30세)"
―6·25가 끝난 뒤 어떤 계기로 주베트남 대사관 무관으로 나가게 됐습니까?
"나는 군지휘관의 그릇이 되고 싶었어요. 미(美) 육군참모대에 연수를 다녀온 뒤 연대장까지 마쳤어요. 하지만 그 시절엔 부정(不正)과 결탁하지 않고는 군인 월급으로 가족과 함께 살 셋집도 얻을 수 없었어요. 무관 시험에 응시한 것은 봉급 수준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었어요."
그가 1963~66년 남베트남에서 근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보직이 주어지지 않았다. 장군 진급 심사에서도 몇 차례 떨어졌다.
"왜 고위직에 인사를 다니지 않느냐는 말을 들었어요. 나는 아부도 상납도 부정(不正)도 못했어요. 그런 세태가 역겨웠어요. 전역 자원서를 제출했는데 뜻밖에 장군 진급이 됐어요. 알고 보니 그해 한 심사위원이 내 진급을 강하게 주장했어요. 결국 정원이 아닌 예비명단으로 올렸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낙점한 겁니다."
/국가보훈처 사진
―장군이 된 뒤 이번에는 주베트남 대사관 정무공사(1968~72년)로 발령났지요?
"박 대통령의 지시였어요. 그때 베트남에 진출한 한진과 현대 등 기업의 문제가 있었어요. 한진의 경우 미화(美貨)를 밀반입하려다 압수되고 3배의 벌금을 물게 된 사건이 터졌어요. 월남의 응우옌 반 티에우 대통령과 미(美) 참모대학을 같이 다녔던 나를 보내게 된 겁니다."
―그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티에우 대통령을 만나 국익 차원에서 이를 해결하자, 조중훈 회장 형제가 감사 표시로 미화 30만달러와 베트남 화폐(10만달러)가 든 가방을 들고 찾아왔어요. 국내 아파트 40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이었어요. 내가 야단쳐 돌려보내자, 조 회장이 '나중에 자연인이 될 때 큰 저택을 지어 드리겠다'고 말했어요. 나는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했어요."
물론 이런 약속이 지켜질 리 없고, 조중훈 회장은 저세상 사람이 됐다. 2년 전 이 스토리를 알게 된 한 작가가 한진그룹에 알리자,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는 동생 조중건 전 부회장이 찾아와 감사를 표시했다고 한다.
―베트남 근무를 마치고 1년도 안 돼 또다시 대사관 공사로 나갔더군요.
"돈 싸들고 인사를 안 다니니 사단장 시켜줄 리 없었지요. 한직(閑職)에 보냈어요. 군복을 벗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을 무렵, 직속 사령관이 불러 골프를 치러 갔다가 박 대통령을 만났어요. '이 장군, 요즘 어디 있나?'고 물어요. 내가 소속을 말하자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가다가, 되돌아와서 '왜 보직을 받지 못했지?' 물었습니다. 며칠 뒤 국방장관이 나를 불러 '소장으로 승진 예편시키고 주월대사관 부(副)대사로 발령내라는 게 각하의 지시'라고 했어요.(하지만 그는 경제공사로 발령났고 결국 진급을 못 하고 준장으로 예편함)"
남베트남 패망 이틀 전 1975년 4월 28일 주월 한국대사관은 폐쇄됐다. 그는 교민 철수 작전 책임을 맡았다. 사이공 외곽에서 포성이 들렸다. 상황은 급박했다. 그는 그때까지 탈출 못 한 잔류 교민 175명을 데리고 프랑스 정부에서 운영하는 병원(치외법권 지역)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사이공은 함락됐다.
―결국 체포돼 감옥에 갇혔는데, 그때 선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미 대사관에 갔을 때 미국 공사가 '지금 혼자 옥상에 올라가 헬기를 타라'고 권했어요. 교민들을 버려두고 혼자 떠날 수는 없었어요. 6·25 때 다들 죽었는데 나는 지금껏 살았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나 생각했어요. 그때 잔류 교민들을 인솔하지 않았으면 다음 날 사이공에 진입한 월맹군에 의해 거의 다 사살됐을 겁니다."
그는 햇볕이 안 들어오는 감방에 갇혔다. 297일 만에 일광욕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몸무게는 78㎏에서 46㎏으로 줄었다.
―북한노동당 공작요원 3명이 파견돼 직접 심문을 하고 '북한 망명 자술서'를 강요했다면서요?
"나를 북으로 데려가 정치적으로 활용하려고 했지요. 나는 결코 항복하지 않았어요."
그의 석방 안건을 놓고 한국과 베트남, 북한 3자 비밀협상이 진행됐다. 북측에서는 '남한에 수감된 남파 간첩 450명과 교환하자'고 요구했다.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한국 원자력 사업과 인연이 있었던 유대계 거상(巨商) 아이젠버그가 해결사로 나섰다. 그러던 중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박 대통령이 피격되는 10·26이 발생했다.
이대용 공사가 풀려난 것은 1980년 4월 12일이었다. 그는 아이젠버그의 개인 전용기를 타고 들어올 수 있었다. 4년 7개월간 수감을 포함해 베트남 억류 5년 만이었다.
―그 시절 국내 상황은 어수선했지요. 우리 정부에서는 어떻게 대접했습니까?
"최규하 대통령이 청와대로 불러 '박 대통령이 살아있었으면 크게 치하했을 텐데 청와대 금고가 바닥이 났다'며 봉투를 하나 줘요. 300만원이 들어있었어요."
―베트남에서 장군님을 심문했던 '안닝노이찡(특별경찰)' 3인방 중 한 명이 나중에 주한 베트남 대사로 부임했다면서요?
"악명 높았던 즈엉징특이었어요. 그는 김책공대와 김일성대학에서 유학해 우리 말을 잘했어요. 평양 주재 베트남 대사를 한 뒤 2002년 주한 베트남 대사로 왔어요."
―부임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어떠했습니까?
"세상 요지경이다 싶었어요. 하지만 복수한다는 것은 조국에 큰 누를 끼치는 거라, 표가 안 나는 복수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지요."
―그해 9월 신라호텔에서 '베트남 수교 10주년' 행사에서 조우를 했다고요?
"그는 긴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를 만나자 '당시 심문을 받을 때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고 말하던 장군님의 선견지명에 놀랐다'고 했어요. 서로 총을 겨누던 관계가 국교정상화로 우방이 됐으니까요. 나는 '그때 당신은 당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고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고 답했어요. 그 뒤 우리는 친구처럼 가끔 만났어요. 원한의 외나무다리에도 꽃은 피구나 생각했어요."
최보식 선임기자
■ [6ㆍ25와 나 - 존 리치]
최초 공개 컬러 사진들로 되돌아본 한국전쟁
[편집자注]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3년 7월 27일 워싱턴의 한국전(韓國戰) 기념물 앞에서 열린 휴전 60주년 행사에서 “한국전은 무승부가 아니고 이긴 전쟁이며, 특히 동서 냉전(冷戰)의 승리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그는 “가난과 압제 속의 북한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5000만 명의 한국인들은 활력(活力) 있는 민주제도를 갖고,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대국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으니 한국전은 이긴 것”이라 평가했다.
2000년 6월 25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전 50주년 기념식에서 당시 클린턴 대통령도 비슷한 역사관을 피력했다. 그는 “역사라는 긴 렌즈를 통해 뒤돌아보면, 미국이 한국에서 버티어낸 덕분에 냉전(冷戰)에서 우리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며 “50년 전 한국의 능선(稜線)을 지켜낸 용감한 병사들 덕분에 (독일의) 젊은이들이 베를린 장벽 위에 올라가 (공산권의 붕괴를) 자축(自祝)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은 결코 역사를 과대 해석하는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는 최근 《월간조선》 6월호 기고문 〈완전히 달라진 한국전에 대한 세계사적 인식〉에서 “6ㆍ25전쟁은 제3차 세계대전(冷戰)의 승리를 가져온 위대한 항전”이라며 이렇게 썼다.
“남침과 동족상잔의 강조에서 벗어나 (6월 25일을) 이제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승리의 날로 기념하면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반도 냉전을 자유통일로 종식시킬 것을 다짐해야 맞지 않을까? 그렇게 해석해야 피의 대가(代價)를 제대로 계산할 수 있다. 한국전에서 목숨을 바친 한국, 미군 등 유엔군들은 45년간(1946~1991년) 지속된 냉전에서 자유진영이 승리, 수많은 인류가 자유와 번영을 누리도록 하는 데 고귀한 피를 흘린 셈이다.”
한국전이 냉전 승리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정치인과 기자들뿐 아니라 한국 학자들을 제외한 세계의 거의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정설(定說)이 되었다. 헨리 키신저(닉슨 정부 때 안보 보좌관을 지낸 美中 화해의 주역)는 《외교》라는 저서(著書)에서 이렇게 썼다.
<(공산주의자들이) 도전하였을 때 미국 정부는 기존의 전략을 폐기하고 맞서기로 결정하는 용기를 보였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점령되면 아시아에서 미국의 입장, 특히 일본과의 중대한 관계가 약화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의 지도국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시험에서 합격했다.>
한반도에서 소련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막은 한국인들은 휴전 하의 경제ㆍ정치ㆍ문화 경쟁에서 북한에 이겼고, 이것은 자유진영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공산진영을 동(東)과 서(西)에서 감제하는 초소 및 자유진영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쇼윈도 역할을 한 곳이 베를린과 서울이었다. 냉전시대 서독과 한국을 지켜낸 아데나워와 이승만은 세계사적 차원의 반공지도자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국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냉전)의 승리를 가능하게 하였다면 그 역사 속에 영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미국 등 해외 학자들은 미군 파병을 결단한 트루먼 대통령, 그를 외교 전략적으로 보좌한 딘 애치슨 국무장관, 서울을 점령하고 남진하는 중공군을 저지, 반격에 성공한 리지웨이 8군사령관 등을 영웅으로 꼽는다. 맥아더의 인천상륙 작전은 높게 평가되지만 중공군의 개입에 대한 어이없는 오판(誤判)과 문민(文民) 대통령에 대한 항명(抗命)과 해임으로 종합적 평가는 그리 높지 않다(한국은 예외).
한국군 장군으로는 다부동 전투의 영웅 백선엽(白善燁), 춘천을 3일간 방어하여 적(敵)의 전략을 흩트려버린 김종오(金鐘五) 6사단장이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누구보다도 한국전의 흐름을 주도한 두 최고 지도자는 이승만과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여기에 6ㆍ25 당시 나라를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쟁에 참가했던 무명의 용사들과, 전쟁의 참화 속에서 뼈를 깎는 듯한 고통ㆍ고난을 당당히 이겨낸 그 시대의 한국민 또한 영웅이 아닐까 싶다.
올해로 6ㆍ25전쟁 발발 66년이 되었다. 북한 김정은이 핵무기로 세계를 협박하고 있지만 통일은 한반도의 대세(大勢)다. 제대로 된 통일을 위해 우리 세대는 66년 전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 ‘6ㆍ25’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월간조선》은 6년 전(前) 6ㆍ25를 체험한 31인의 소중한 증언을 모았다(2010년 6월호 별책부록). 증언자 중에는 이제 고인(故人)이 된 분도 있다.《조선pub》 독자에게 다시 소개한다. 6ㆍ25를 제대로 아는 것, 그것은 통일의 출발이다.
▲한 소년이 추락한 북한 전투기의 잔해 위에 올라 손을 흔들고 있다. 이 소련제 야크기는 전쟁 초기 잠깐 맹위를 떨치나, 유엔군은 곧 압도적인 공군력으로 한반도 상공의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북한이 6·25전쟁에 동원한 소련제 야크 전투기의 잔해에 올라가 신나게 손을 흔드는 소년, 어린 삼 남매와 함께 쌀가마를 얹은 수레를 끌고 가는 억척스러운 어머니, 진달래꽃을 꺾어 철모에 꽂은 앳된 병사의 모습….
치열한 전투에 가려졌던 6·25 당시의 일상이 생생한 컬러 사진으로 되살아났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 NBC 종군기자였던 존 리치(John Rich·92) 씨가 전쟁 초기부터 휴전협정 조인 시까지 3년여 동안 촬영한 컬러 사진 70여 점을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는 “전쟁 당시 사진을 찍으면서 세계가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국인들이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이 사진들을 통해 내가 본 것을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존 리치의 사진전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은 한국전쟁 60주년을 기념해 2010년 6월 서울 효자동 ‘청와대 사랑채’에서 열렸다. 전시는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와 주한미국대사관이 주최하고 서울셀렉션이 주관했다.
/글 | 존 리치(John Rich) 한국전쟁 종군 기자
존 리치
⊙ 1917년 미국 출생.
⊙ UPI의 전신인 International News Service의 도쿄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맥아더 장군 및 히로히토 일왕 등 인터뷰.
⊙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으로 파견되었으며, 1950년 12월 NBC News로 옮겨 3년 동안 한국전쟁 취재.
⊙ 한국전쟁 이후 베를린 특파원으로 4년 근무했고, 베트남전쟁을 10년간 보도하는 등 주요 분쟁지역을 취재하는 종군기자로 30년간 활동.
⊙ 미국 방송협회와 조지아대가 주최하는 미국의 방송상
(Peabody Award) 수상.
사진제공 : (주)서울셀렉션
■ 2016.07.29 "열여덟 살에 경험한 3일간의 전쟁이 내 인생을 바꿨다."
[주간조선: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참전한 해럴드 엘런스 목사]
66년 만의 귀환이었다. 노병(老兵)은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의 인천 앞바다 모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공중에서 엄호하는 전투기와 바다 위에 늘어선 함선, 해안에 정박한 상륙정까지 인천상륙작전을 실제와 흡사하게 재현해놓은 디오라마(diorama)였다. 노병이 보고 있는 건 자신의 인생을 바꾼 사흘이었다.
지난 7월 8일 연세대 교정에 있는 상남관에서 만난 해럴드 엘런스씨는 약간 흥분한 듯 보였다. 전날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을 돌아본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했다. 인사를 하며 내민 손 위로 녹색 에메랄드가 박힌 반지가 보였다. 왼손엔 빨간색 보석이 박힌 반지가 있다. “녹색 반지는 박사가 되었을 때, 루비 반지는 군대에서 각각 받았지요.” 엘런스씨는 7월 3일부터 6일까지 연세대에서 열린 2016 국제성서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양손의 반지는 그의 다채로운 이력을 잘 보여준다. 신학자이자 개신교 목사인 그는 대령으로 예편한 퇴역군인이다. 그의 첫 전장(戰場)이 바로 한국이었다.
“1950년 7월 16일, 제 열여덟 번째 생일날이었습니다. 징집 통지서가 날아왔어요. 그때 저는 대학교 2학년에 재학하고 있었습니다. 일찌감치 성직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정했던 참이었지요. 통지서를 받아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곳은 미 해병1사단. 보직은 M2중기관총 사수였다. 엘런스씨가 한순간 원망하며 찾았던 하나님, 혹은 운명은 그를 한국전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장으로 데려다놨다.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이었다.
▲지휘함에서 상륙 상황을 지켜보는 맥아더 장군(가운데)과 알몬드 장군(오른쪽). /주간조선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8선 일대에서 일제히 남침 공격을 감행했다. 북한군은 나흘 만에 수도 서울을 함락한 뒤에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탱크 하나 없던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려 내려갔다.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은 북한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순간! 수세에 몰린 연합군이 택한 타개책이 바로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 즉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인천은 상륙지점으로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조수간만의 차였다. 밀물과 썰물 때 조수의 차가 최고 9m, 최소 7m가량이었다. 바닷물이 빠지면 수백m의 갯벌이 드러났다. 이 말은 선봉으로 상륙한 병력이 다음 물때까지 최소 9시간 이상 추가 지원 없이 버텨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발을 옮기기도 힘든 갯벌에 병사들을 내려놓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잘못하면 병력이 차례로 괴멸될 수도 있는 위험한 작전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방파제였다. 안전하게 육지에 오른다 해도 견고한 방파제를 넘어야 했다. 나무 사다리를 걸쳐놓고 오르는 동안 적군에게 무차별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럼에도 연합군사령관 맥아더는 인천을 고집했다. 성공만 하면 적군의 병참로를 단번에 끊을 수 있는 교두보가 확보되기 때문이었다. ‘성공 확률은 5000분의 1도 안 된다’는 해군 내의 격심한 반대 속에 작전이 수립됐다.
▲미 제7사단이 인천항에 상륙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장면. /국가기록원 제공
디데이(D-day)인 9월 15일, 미 10군단이 조용히 서해를 거슬러 올라갔다. 연합군 7만5000여병력의 어깨에 한반도의 명운이 짊어져 있었다. 10군단 예하에는 미 해병 1사단과 미군 7사단이 소속되어 있었다. 해병 1사단은 제1해병연대와 제5해병연대로 이뤄져 있었다. 간척사업의 결과 지금은 해안선이 거의 일직선 형태지만 당시 인천은 반도 모양이었다.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월미도는 가느다란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인천에 상륙하려면 반드시 월미도 해안을 거쳐야 했다. 제5해병연대가 월미도 상륙을 맡았다. 5연대가 1연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투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새벽 5시 월미도 해안에 로켓이 퍼부어졌다. 상륙 예정 시각은 6시30분. 전투기의 공중 엄호를 받으며 5연대 3대대가 해안으로 향했다. 도착한 시각은 6시33분. 연합군이 거짓 정보를 흘린 탓이었는지, 북한은 인천에 추가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5연대 3대대는 북한군의 저항을 뚫고 월미도를 점령했다. 지휘함으로 공식 보고가 들어간 시각은 8시. “오늘만큼 해병대가 자랑스러운 적이 없었다.” 맥아더 장군의 일성이었다. 이제 관건은 다음 물때까지 월미도와 육지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었다. 인천 시가지 쪽에서 월미도로 추가 병력이 오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파도의 방향이 육지를 가리켰다. 17시30분, 나머지 병력이 상륙주정에 옮겨 탔다.
엘런스씨는 1해병연대 소속이었다. 해변에 무사히 닿은 다음엔 상륙 거점(beach head)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는 5명의 기관총 사수로 이뤄진 분대의 분대장이었다.
“그때 저는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해안을 향해 다가가는 배 안에 앉아 과연 오늘 밤이 올 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지요.”
▲해럴드 엘런스 목사.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소년들의 전쟁’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야외에는 방파제를 오르는 병사들을 재현한 조형물이 있다. 엘런스씨는 조형물을 보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슬픔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날 어린 군인들은 너머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고 공포와 싸우며 나무 사다리를 올랐어요. 앞으로 갈 수도 없는데 뒤로 갈 수도 없었어요. 전쟁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조형물입니다.”
같은 시각, 상륙부대를 엄호하기 위해 인천항 내항까지 들어간 구축함에 적의 포탄이 쏟아졌다.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디데이 3일 전부터 인천 해안을 포격했다. 참호 깊숙이 숨어 있는 적군과 엄폐된 해안포까지 없앨 순 없었다.
엘런스씨가 번뇌와 싸우며 인천으로 향했던 그날, 경상북도 영덕군에서도 또 하나의 상륙작전이 펼쳐졌다. ‘장사상륙작전’이다. 한국 학도병으로 구성된 772명이 9월 15일 부산을 떠나 영덕군 장사리로 향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 일종의 교란작전이었다. 당시 영덕군은 북한군 점령지였다. 장사상륙작전에서 학도병 200여명이 죽거나 다쳤고 나머지는 행방불명됐다.
여든넷의 노병은 잠시 열여덟 살의 소년으로 돌아간 듯했다.
“국가가 아이들을 제물로 바친 겁니다. 그들은 열여덟, 열아홉 살짜리를 그저 전장으로 내몰았을 뿐입니다. 만약 마흔 살 이상의 군인만 전쟁에 참전하게 했다면 전쟁이 일어났을 것 같습니까.”
연합군은 북한군 인천경비여단과 18사단, 31사단을 격파하고 인천을 되찾았다. 미군의 피해는 예상보다 작았다. 9월 15일 당일 전사한 병력은 21명, 1명이 실종되고 174명이 부상당했다. 대승이었다. 크로마이트 작전이 한국전쟁사 아니, 세계전쟁사에 길이 남을 주요 상륙작전으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한국전쟁 전체 전세가 순식간에 역전됐다.
▲상륙작전이 성공한 다음 날인 9월 16일 대형 상륙함 4대에서 물자가 하역되고 있다. /주간조선
군목이 되어 다시 전장으로
다음 날 한강진격작전이 시작됐다.
1해병연대와 5해병연대는 각각 경인국도의 북쪽과 남쪽으로 갈라져 서울로 진격했다. 한강변을 따라가던 엘런스씨의 분대는 강 너머의 북한군을 발견했다. 사격을 퍼붓자 위치를 파악한 북한군이 응사를 했다. 분대원 3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2명은 중상을 입었다. 엘런스씨는 물론 중상을 입은 쪽이었다.
왼쪽 넓적다리 안쪽의 동맥이 끊어졌다. 멈추지 않고 콸콸 흘러나오는 핏줄기를 보며 엘런스씨는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하나님 당신이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죽음이 실체를 갖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 의무병이 그를 찾아냈다. 즉시 병원선으로 옮겨졌다. 배 안에서 받은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9월 18일 그는 한국을 떠났다. 일본의 미군기지를 거쳐 고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의 퇴역군인 병원에서 한 달간 치료받은 뒤 전역 명령을 받았다.
/영흥도에 있는 해군전적비. /박종인 기자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제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입니다. 전쟁에 대해 떠드는 사람은 그곳에 있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로 그곳에 있었던 사람은 전쟁에 대해 얘기하지 않습니다. 전쟁에는 인간성 혹은 생명 같은 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그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얘기하려 해도 제대로 전달할 방법이 없습니다. 말을 꺼내는 순간 전쟁터에서 느낀 고독이 되살아날 뿐입니다.”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그는 고독 속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군목(軍牧)의 길을 택한 것. 1953년의 일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하나는 외롭게 고통받는 병사들에게 성직자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정환경이었습니다. 제 형제들이 전쟁터에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전에 참전했을 때 제 남동생은 독일에서 정보요원으로 복무하고 있었어요. 제 형제들과 그 아들들이 복무한 기간을 합치니 170년이 되더군요. 제 결심을 더욱 공고하게 한 건 베트남전입니다. 1955년 베트남에서 전쟁이 시작되고, 1964년부터 50만명의 젊은이들이 미국을 떠나 전쟁에 투입됐습니다.”
일반에게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한국전쟁에도 성직자들이 참전해 죽음에 맞선 병사들의 영혼을 지켰다. 제1기병사단 소속이었던 에밀 카폰 신부가 그 예다. 중공군에 포위되자 퇴각 명령을 뒤로하고 부상병의 곁을 지켰던 그는 1951년 서른다섯의 나이에 벽동 포로수용소에서 병사했다. 약을 훔쳐 다른 포로들을 살리고, 죽기 직전까지도 동료 군인들의 고해성사를 들은 그의 행적은 뒤늦게 알려졌다. 2013년 오바마 미 대통령은 카폰 신부에게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추서했다. 미국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무공훈장이다.
▲인천 월미도 앞 바다에서 율곡이이함 장병들이 전몰장병과 호국 영령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해상 헌화를 하고 있다. /해군 제공
10년간 육군 군목으로 복무한 엘런스는 베트남, 파나마, 베이루트 등 미군이 가는 곳에 함께했다. 대령으로 예편한 후에는 예비역으로 군이 부를 때마다 달려갔다. 군목을 교육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덕분에 한국도 서너 번 방문했다. 주한미군에 소속된 100여명의 군목을 교육하기 위해서였다.
군목에게 필요한 자질이 무엇인지 물었다. “군대는 ‘독재가 허용되는’ 조직입니다. 군목은 명령의 위계 사이를 잘 넘나들며 각각의 군인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신을 섬긴다는 성직자가 전쟁을 인정할 수 있는 걸까.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전장으로 들어와 인간들을 구원하려 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말똥(더러운 것)을 이용해 꽃을 피우신다는 걸 말입니다.”
‘한국전쟁에도 그 얘기가 적용되는가’ 묻자 엘런스씨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세요. 잿더미에서 꽃을 피워내지 않았습니까. 절대적인 비극은 없습니다.”
인터뷰 자리에는 엘런스씨의 지인인 이성일 연세대 영문과 명예교수가 동석해 있었다. 이 교수는 “(엘런스씨가) 다리가 불편하셔서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을 못 보여드려 아쉽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부터 좌편향 세력들이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자는 주장을 계속해오고 있다.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연방통추) 등의 단체다. 이들은 맥아더 장군을 가리켜 ‘점령군 두목’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급기야 2006년엔 동상을 훼손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태식 전 주미대사는 “당시 헨리 하이드 미 하원 외교위원장이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맥아더 장군 동상을 훼손하느니 미국으로 돌려달라’고 편지를 썼다”고 지난해 열린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말했다.
엘런스씨는 66년 전의 사흘을 마치 얼마 전에 겪은 것처럼 또렷이 묘사했다. 나무 사다리에 매달려 방파제벽을 오르는 소년들의 뒷모습을 그는 얼마나 자주 떠올린 걸까. 1950년 9월 15일 여명을 뚫고 해안에 상륙한 젊은이들이 없었다면, 2016년의 우리에겐 ‘장군님’을 비난할 자유도, 역사를 되돌아볼 권리도 없었을지 모른다.
/영화 '인천상륙작전' 포스터. /주간조선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들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함께 세계전쟁사의 주요 장면으로 꼽히는 ‘인천상륙작전’, 인해전술의 대명사로 기록된 ‘중공군 참전’ 등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아서인지 한국전쟁은 미국과 한국에서 꾸준히 영화화됐다. 휴전 얼마 후인 1955년엔 ‘원한의 도곡리 다리’가 제작됐다. 영화 ‘매쉬’(1970), 그레고리 펙이 맥아더 역을 맡아 그의 삶을 영화화한 ‘맥아더’(1977)도 있었다. 통일교에서 4000만달러 이상을 들여 인천상륙작전을 소재로 해 제작했지만 흥행엔 실패한 영화 ‘오 인천’(1981)에선 로렌스 올리비에가 맥아더 장군 역을 맡았다. 한국에서는 ‘태극기 휘날리며’(2003), ‘고지전’(2011) 등이 제작됐다.
이번엔 ‘인천상륙작전’이다. 오는 7월 27일 동명의 제목으로 개봉한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포화 속으로’(2010)의 이재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전투 장면 중심의 전쟁영화보다는 첩보영화에 가깝다. 인천상륙을 돕기 위해 비밀리에 대북 첩보작전을 펼친 이들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북한군으로 위장해 인천 사령부로 잠입한 해군 첩보대위 ‘장학수’(이정재)와 그의 정체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늦추지 않는 북한군의 인천 방위사령관 ‘림계진’(이범수) 사이의 긴장이 주요 줄거리다. 맥아더 장군 역할은 배우 리암 니슨이 맡았다. 7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는 “맥아더 장군 역을 제안받고 이 전쟁이 얼마나 중요한지 흥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맥아더를 연기하기 위해 조사를 많이 했다”며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란 책을 읽고 맥아더 장군이 얼마큼 논란이 많은 인물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전설적인 인물을 연기하게 돼 영광”이라고도 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8월 초 미국에서도 개봉될 예정이다.
하주희 주간조선 기자 최원철 편집
■ 2018.03.29 "北, 6·25때 대동강서 납북공무원 2000명 학살"
납북인사가족協, 미군 문건 입수
"1950년 10월 8일부터 사흘간 총살, 시신은 대형 구덩이 3곳에 매장… 부상당한 포로 등 200여명도 사살" "4월 열리는 남북정상회담 때 학살·납북 피해 문제 다뤄달라"
북한군이 6·25전쟁 당시 약 2000명에 달하는 남한 공무원을 학살한 사건이 미군의 기밀문서로 확인됐다. 사흘 동안 이뤄진 대량 학살이었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를 통해 입수한 '한국전쟁범죄 사건번호 141에 대한 법적 분석(Legal Analysis of Korean War Crimes Case Number 141)'에는 당시 북한군이 저지른 납북 공무원 학살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나와있다.
▲북한군 증언으로 그린 총살 당시 상황 - 1950년 10월 북한군이 평안남도 대동군의 한 언덕에서 납북 공무원 약 2000명을 총살하던 상황을 기록한 그림. 미군 기밀문서‘한국전쟁 범죄 사건번호 141에 대한 법적 분석’38쪽에 나온다. 당시 학살에 가담한 북한군 포로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려졌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문건에 따르면, 북한 내무성 소속 부대는 1950년 10월 납북 공무원 약 2000명을 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 기암리 북서쪽에 있는 한 언덕에서 학살했다. 그해 9월은 국군과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켜 북한으로 진격하던 때였다. 북한군은 시변리(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시변리로 추정)라 불리는 곳에서 포로 2000여 명을 인도받았다. 서울과 개성 지역 공무원들이었다.
학살은 10월 8일 자정 무렵부터 시작했다.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포로 800~ 1000명을 총살했다. 나머지 포로는 같은 방식으로 9일 자정부터 학살했다. 포로가 모두 숨진 시간은 10일 오전 4시 30분쯤이었다. 3일 만에 2000여 명을 학살한 것이다. 북한군은 시신을 쉽게 매장하기 위해 대형 구덩이(mass graves) 3개를 미리 파 두고 구덩이 주변이나 안에 포로를 세웠다. 사살(射殺)과 동시에 시신이 매장되게끔 한 것이다.
학살된 포로들이 매장된 대형 집단 무덤 세 곳은 미군과 국군의 현지 조사에서도 확인됐다. 현지 정보원들로부터 이 학살극을 전해 들은 미군은 같은 해 11월부터 조사에 나섰다. 미 육군 소속 존 테일러 중령 등 미군 관계자와 국군 관계자들이 11월 17일 학살이 이뤄졌다는 지역을 방문한 결과, 가로세로가 각 15m 이상, 깊이 2m에 달하는 대형 집단 무덤 3곳이 발견됐다.
보고서엔 포로들이 이동하는 동안 학대받은 내용도 나온다. 남한 포로들은 이동하는 동안 식사를 거의 제공받지 못했다. 대열에서 뒤처지면 구타를 당했고, 아픈 포로들은 대열 뒤로 보내진 뒤 사살됐다. 약 200명이 이런 식으로 살해됐다.
80쪽짜리 이 문건은 1953년 6월 한반도에 상주하던 미군 후방기지사령부(Korean Communications Zone)가 학살에 가담한 북한군 포로 3명과 민간인 목격자 증언, 현지 조사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이영조(63)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로부터 기증받은 '한국전쟁 범죄 사례(KWC)' 문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 이미일(69)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대표는 "이번 학살 사건으로 한국전쟁 당시 납북 피해가 명확히 증명됐다"며 "4월 열리는 남북 정상회담에서 이런 납북 피해를 다루지 않는다면 그 평화는 가짜 평화"라고 말했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28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한반도 평화와 종전을 말하려면 휴전협정에서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지금까지 고통받는 전쟁 납북 피해자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며 "4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반드시 의제화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안상현 기자 조유미 기자
■ 2016.06.25 6·25전쟁 66돌, 참전 연예인들 이야기
▲지난 21일 한자리에 모인 참전연예인협회 관계자들. 왼쪽부터 참전연예인협회 사무총장 이진형(예비역 중령), 가요 ‘홍콩아가씨’를 부른 금사향 협회 고문, 3대 미스코리아 진 김미정 협회 부회장, 협회 홍보이사인 코미디언 방일수씨. 이씨는 현역으로 6·25전쟁에 참전했고, 방씨는 베트남 전쟁 때 장병 위문공연을 했다. [사진 오상민 기자]
“옛날에는 추억을 만들고 살았는데, 이제는 추억을 더듬고 살아.”
정훈공작대에 소속돼 전쟁터 누벼
‘홍콩아가씨’ 부른 가수 금사향
가수 현인의 부인인 배우 김미정
지하철 시청역 9번 출구에서 중앙일보까지 100m가 채 안 되는 길 중간에 그는 10여 분을 쉬었다가 걸음을 이었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추억’이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떠올렸다. 그 자신이 이젠 추억이 돼버린 가수 금사향(87·여)씨였다.
본명 최영필. 1946년 상공부 섬유국에서 영문 타이피스트로 일하다 그해 럭키 레코드사 주최 조선 13도 가수 선발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운명이 달라졌다. ‘별들이 소근대는 홍콩의 밤거리/ 나는 야 꿈을 꾸며 꽃 파는 아가씨~’(‘홍콩아가씨’)가 그의 노래다.
또 한 사람이 함께 인터뷰에 응했다. 3대 미스코리아 진(眞) 출신 영화배우 김미정(82)씨. 미스코리아 출신 할머니는 여전히 곱고 꼿꼿했다. 본명 김영자. 가수협회장을 지낸 고(故) 현인씨의 부인인 그는 “옛날엔 왜 이름들을 그렇게 촌스럽게 지었는지 몰라”라며 쑥스러워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동시에 꺼내놓은 자격증의 녹색 바탕에 ‘6·25 참전 국가유공자’라고 적혀 있었다.
둘 모두 총 대신 마이크를 들고 6·25 전장을 누볐다. 여성에, 총은 한 번도 쏴 보지 않았지만 참전은 참전이다. 장병들과 피란민을 대상으로 한 위문공연이 정훈공작대(군예대·軍藝隊) 소속 종군 연예인이었던 이들의 역할이었다.
금씨는 국방부 정훈국 소속, 김씨는 8사단 정훈공작대 소속으로 최전방을 누볐다. 하루에 세 번 공연을 한 적도 있고, 전쟁 기간 1000번이 넘는 공연을 했다고 한다. 국군이 진격하면 북쪽으로, 후퇴하면 남쪽으로 부대를 따라 이동했다.
“하루는 자고 있는데 갑자기 후퇴를 한다며 밖으로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침낭 지퍼를 내려야 하는데 지퍼가 고장 나 움직이지 않아 빠져 나오지 못하자 옆에 있던 남자 군인이 나를 침낭째로 덜렁 안고 트럭에 던졌지요.”(김미정)
전쟁터에 나선 이유를 물었다.
“가수 생활을 하다가 전쟁이 나니까 다른 연예인들과 같이 군에 간 거죠. 구봉서·배삼룡씨 등등이 그랬어요.”(금사향)
“서울 왕십리에서 살고 있었는데 친구들과 뚝섬에 놀러 갔다가 전쟁이 났어. 식구들과 헤어져 단신으로 대구까지 피란을 갔지요. 1951년 초 군부대를 찾아 여자 의용대에 자원했어요. 군대에 가면 먹여주고 재워준다기에. 그런데 열여덟이라 너무 어려 안 된다는 거예요. 대신 정훈공작대라는 곳에 보내 준다기에 얼른 좋다고 했지요.”(김미정)
그들은 일명 ‘먹물도장’을 찍고 전쟁터로 나갔다. 죽어도 군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였다. 공연단 전용 GMC 트럭은 이들의 발이자 무대였다. 트럭이 서는 곳이면 내려서 공연을 했다. 동선은 철저히 비밀이었다. 공연을 하는 곳엔 군인들이 모여 있기 마련이고, 자연 북한군의 표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미정씨(마이크 앞)가 6·25전쟁 중 피란민들을 대상으로 위문공연을 하고 있다. 김씨 왼쪽에서 춤추는 여성(흰옷)은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씨의 막내딸이자 김씨스터즈로 활동했던 김애자씨. [사진 육군]
공연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날이 새면 전투에 나설 장병들을 위해 새벽 3시에 공연한 적도 있다. 트럭 화물칸을 무대로 공연을 하고 조명은 다른 트럭의 라이트를 썼다. 쓰레기통 두 개를 세워 널빤지를 깔고 그 위에서 마이크 없이 노래를 부른 적도 있다.
“공연은 처음엔 캉캉춤 같은 무용으로 시작해요. 여자 무용수들이 다리를 번쩍번쩍 들면 장병들이 좋아했지요. 그리고 사회자가 나와서 가수를 소개하고 노래를 두어 곡 하고 만담도 했지요. Y담(음담패설)을 섞으면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요즘 코미디는 재미없어. 노래와 무용을 하면 공연이 끝나요. 공연은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가량. 노래는 ‘베사메 무초’ 같은 외국 노래도 하고 ‘님 계신 전선’을 많이 불렀지요. ‘홍콩아가씨’는 전쟁이 끝난 다음에 나왔어요.”(금사향)
“평상시엔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어요. 무대에 오를 땐 직접 만든 드레스나 한복을 입지요. 당시엔 푸른색 화장이 유행이었는데. 화장품이 없으니 당구 칠 때 쓰는 푸른색 초크를 구해다 갈아서 돼지기름에 풀어 얼굴에 칠했어요. 콧대를 세워 보이려고 성냥이나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든 뒤 물을 부어 검은색으로 코 옆에 라인을 그었지요. 화장할 땐 그런대로 괜찮은데 물로는 지워지질 않아 석유(휘발유)로 지우곤 했어요. 립스틱은 인주로도 쓰고(웃음).”(김미정)
혈기 왕성한 장정들에게 이들은 지금의 걸그룹 뺨치는 인기를 누렸다. 자고 있는데 누군가 천막을 찢고 손을 집어넣어 머리에 꽂혀 있는 핀을 뺏어 가거나 옷을 훔쳐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한다. 속옷은 빨고 난 뒤에 널지도 못할 정도였다.
“전쟁터에서 여자 속옷을 지니고 있으면 총알이 비켜간다는 미신 때문에 우리 속옷을 많이 훔쳐 갔어요.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들 알고 훔쳐 가는지…(웃음) 나중에는 팬티 하나를 갈기 갈기 찢어 여러 명이 조각을 나눠 가지기도 하더라고요. 화장실에서 용변을 볼 때 훔쳐보는 건 예사였지요.”(금사향)
“북한군을 향해 월남을 종용하는 방송도 했지. ‘친애하는 인민군 여러분 여기는 자유 대한민국입니다…’하고.”(김미정)
“포탄이 날아오더라도 조명(헤드라이트)이 꺼질 때까지 노래를 불렀어요. 어떤 때는 ‘쾅’ 하는 소리에 공연이 중단된 적도 있고. 그런 날은 정말 무섭고, 걱정도 되고, 잠이 안 와서 밤새 침낭 속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공연을 위해 체모를 뽑아 철사에 붙여 수염으로 쓰기도 했고.”(금사향)
이들은 부대에서 먹고 잤다. 월급은 없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물론 공연 중 들려오는 포탄, 따발총 소리가 가장 무서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걱정이었던 건 공연단 운영을 중단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었다. 공연이 중단되면 굶어야 했기 때문이다. 배고픔이 어떤 건지 그들은 너무 잘 알았다. 트럭을 타고 가다가 빈집을 발견하면 장독대부터 뒤져 고추장을 찾은 뒤 밭에서 무를 뽑아다 찍어 먹는 게 특식이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미군들이 타고 가던 트럭 속으로 초콜릿을 던져주면 얼른 가슴(브래지어) 속에 넣어 숨겨두곤 했지요. 그러다 초콜릿이 가슴에서 녹은 적도 있고….”(김미정)
“미군이 비행기에서 던져주던 시레이션(전투식량) 박스를 받으러 가다가 떨어지는 박스에 맞아 죽은 사람도 봤어요.”(금사향)
금씨는 불편한 몸으로 옆에 있던 가방 속에 꽂혀 있는 흰 막대기를 가리켰다. “휴전선에서는 4000원, 문방구에선 2000원인데 난 저걸 평생 가지고 다녔어.”
흰 막대기는 소형 태극기였다. 그는 가운데 태극문양을 짚으면서 말했다. “내 인생은 군대에서 시작해서 군대에서 끝났어. 전쟁이 있어 내가 먹고살았지.”
전쟁 ‘덕’에 먹고살았다는 말 자체가 전쟁의 역설이었다.
“총소리가 울리면 자동으로 피란 보따리 챙기고, 인민군으로 전향하는 사람들도 봤고, 자기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기도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지.”(금사향)
“하루는 동료가 부대 옆에 빈집을 발견하고 횡재했다며 거기 들어가 잤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옆에 시체 4구가 있는 걸 보곤 놀라서 뛰어나온 거야.”(김미정)
이 말을 들은 금씨가 “전쟁은 비참하고 비통하고 애통한 것”이라고 정리의 말을 남겼다.
‘비실이’ 배삼룡, 6사단 위문단 인솔자 맡은 게 시초
1950년 6·25전쟁 때 후퇴를 거듭하던 육군 6사단은 충북 충주 근처에서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군예대(軍藝隊)를 만들었다. 당시 6사단에 속해 있던 ‘비실이’ 배삼룡(코미디언)씨가 위문단 인솔자로 선정돼 격전지를 찾아다닌 게 군예대의 시초 격이다.
이후 각 사단이 군예대를 만들었다. 안다성, 손인호, 박시춘, 남인수, 허장강, 이예춘, 김진규, 백설희, 박노식, 이매방, 황해, 독고성, 신카나리아…. 이런 왕년의 쟁쟁한 이름들이 당시 군예대에서 활동했다. 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군예대의 활동도 줄어들긴 했지만 당시 군예대 출신들은 70년대 초 전쟁참전연예인협회를 만들었다.
최근엔 국방부 산하 사단법인(이사장 코미디언 석현)으로 운영 중이다. 협회에 소속된 연예인은 70~80명 정도. ‘홍콩아가씨’의 금사향씨는 협회 고문을, 고 현인씨의 부인 김미정씨는 부회장을 맡고 있다.
베트남전에 다녀온 MC 겸 코미디언 방일수(방청평·협회 홍보이사)씨는 “참전연예인들은 총을 들진 않았지만 최전방에서 장병들과 함께 전쟁을 치른 전우들”이라며 “만 76세인 내가 거의 막내뻘인데, 지금도 군부대를 찾아가 장병들을 위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글=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사진=오상민 기자
■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할리우드 스타들
'배트맨 집사' 알프레드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고?
/출처 : 위키미디어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일 연합군으로
참전한 전쟁입니다. 미국, 영국 등 총 21개국의 UN 연합국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정전 60주년을 맞아 한국을 찾은 UN군 참전용사들 / 출처 : 위키미디어
●한국전쟁에 참여한 군인들 중에는 유명 할리우드 배우들도 있었습니다.
오늘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할리우드 스타들을 소개해드립니다
/출처 : NBC 드라마 '형사 콜롬보'
- 제임스 맥이친 (1930.05.20 ~ )
대표작 :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테너 플라이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미국 내에서 150편이 넘는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한 베테랑 영화배우인
제임스 맥이친은 1951년 미 제2보병사단 일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출처 : 비미오 American Veterans Center 동영상 캡쳐
1952년 정찰대 소속으로 전우 시신을 수습하다 허벅지 총상과 내장 관통상을 당한 뒤 1953년 1월 귀국했으며 은성 훈장과 퍼플하트 훈장을 받고 그해 9월에 전역했습니다.
/출처 : 비미오 American Veterans Center 동영상 캡쳐
/출처 : 국가보훈처
제임스 맥이친은 2016년 우리 정부의 초청을 받아 방한했었는데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배우보다 군인으로 기억되길 원한다"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습니다.
/출처 : 영화 '럭키 유'
- 로버트 듀발 (1931.01.05 ~ )
대표작 : 대부, 지옥의 묵시룩, 딥임팩트
영화 대부로 알려진, 세계 제1의 조연 배우로 유명한 로버트 듀발은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직전에 배치되어 1954년까지 근무했습니다.
/출처 : 영화 '위 오운 더 나잇'
그는 고위장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고교 졸업 후 육군에 입대, 일병으로 복무하였습니다.
/출처 : 영화 '지옥의 묵시룩'
- 마이클 케인 (1933.03.14 ~ )
대표작 : 다크나이트, 킹스맨, 인터스텔라 등
'배트맨 집사'로 많이 알려진 영국 배우
마이클 케인은 젊은 시절, 학교 중퇴 후 보병으로 영국군에 입대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출처 :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
/출처 : 영화 '독수리 착륙하다'
그는 한국전 당시를 회고하면서 수많은 중공군에 쫓기며 죽을 고비를 겪었고 제대 후에도 한국전 참전 기억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불어 당시의 생존 경험이 이후 자신의 삶을 바꿔놓았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18살의 마이클 케인 (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
마지막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한국전쟁 직후 전쟁에 지친 연합군에게 큰 힘을 주고 간 배우도 있습니다.
/유엔군 위문 공연을 위해 전격 내한한 마릴린 먼로
- 마릴린 먼로 (1926.06.01 ~ 1962.08.05)
세계적인 섹시 심벌로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마릴린 먼로는 일본 신혼여행 중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위문 공연을 위해 전격 방한했었습니다.
/마릴린 먼로는 4일간 한국에 머물면서 10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공연을 펼쳤습니다.
고향을 떠나 향수에 젖어있던 병사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고 합니다.
/M46 패튼 전차에 탑승한 마릴린 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