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2021-08/ 동아일보
08-02(월) 사상 최고 수출의 명암
한국 수출이 월간 기준으로 최고를 나타냈다. 7월 수출액이 554억 달러로 무역 통계를 집계한 지 65년 만에 가장 많았다. 내용도 좋다. 반도체 등 기존 효자 품목 외에 바이오헬스, 2차전지 등 첨단 분야의 수출이 크게 늘었다. 반짝 실적도 아니다. 5개월 연속 월간 수출 500억 달러를 넘었다. 물건이 잘 팔리면 사람을 더 뽑고 투자를 늘리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국내 고용과 투자 확대를 체감하긴 쉽지 않다. 수출과 국내 경기의 연결고리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달 수출 관련 숫자는 모두 파란불이다. 15대 주력 품목 모두 플러스 성장을 했는데, 13개 품목은 두 자릿수 수출 증가율을 보였다. 중국 미국 유럽연합 아세안 등 4대 수출 시장 모두에서 수출액이 증가했다. 반도체 수출액은 110억 달러로 역대 7월 기준 최고였다. 정부는 코로나 파고를 넘었다며 잔뜩 고무된 표정이다. 수출과 교역이 세계 10위 이내라고 설명하고 하반기에도 좋을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수출이 잘되는데도 고용 사정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수출을 주도하는 대기업들은 공채를 폐지하며 신규 채용을 줄이고 있다. 연공서열 위주의 경직된 고용구조는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국내 투자도 마찬가지다. 국회예산처에 따르면 최근 20년 새 국내 기업의 해외 투자는 20배로 늘었다. 2006년부터는 해외 투자가 국내 유입보다 많은 상태다. 한번 나간 기업들은 돌아올 뜻이 없어 보인다. 자칫 65년 만의 수출 성과가 남의 나라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는 상황이다.
▷정부는 “역대 연간 최대 수출을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기업이 느끼는 환경은 지뢰밭이다. 기업 규제 법안은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최저임금, 주52시간 근무 등 현안에 대한 경영계의 호소는 무시되기 일쑤다. 수출의 공을 인정받기보다 반기업 정서에 위축될 때가 더 많다. 기업을 해외로 내모는 환경이 지속되면, 수출이 국내 경제에 미치는 효과가 갈수록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온 국민이 불사조처럼 일어나서 총화 단결하여’. 1977년 수출 100억 달러 기념우표를 발행하며 정부가 내놓은 문구다. 당시에는 기업 수출이 곧 국민의 성과이고 국내 생산과 소비로 직결됐다. 하지만 지금은 기업의 국적이 무의미한 시대가 되고 있다.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 글로벌 기업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자칫 기업 성과와 국내 체감 경기가 분리되는 상황이 고착화할 수 있다. 정부는 일자리와 투자 확대의 걸림돌부터 없애야 한다. 그래야 수출 성과를 국민들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08-03 체조 수영 육상의 영웅들
신재환이 2일 열린 도쿄 올림픽 기계체조 남자 뜀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양학선이 정상에 오른 뒤 한국 체조 사상 두 번째 금메달이다. 신재환은 1차 시기에서 최고 난도의 ‘요네쿠라’(공중에서 3바퀴 반 비틀어 돈 뒤 착지)를 성공한 뒤 2차 시기에서 ‘여2’(공중에서 두 바퀴 반을 비틀어 돈 뒤 착지)까지 깔끔하게 성공했다. 여2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여홍철 경희대 교수의 기술이다. 여자 뜀틀에서는 여 교수의 딸 여서정이 ‘여서정’ 기술로 동메달을 따 한국 여자 체조 사상 첫 메달 획득 및 첫 부녀 메달리스트가 됐다.
▷체조와 수영, 육상은 기초 종목으로 불린다. 체중에 따른 체급도 없고 싸울 기구도 없다. 오직 훈련으로 쌓은 신체 능력이 유일한 경쟁 도구다. 육상 남녀 100m 대결에 지구촌이 주목하는 이유가 신체 능력만으로 지구에서 가장 빠른 남녀를 가리기 때문이다.
▷남자 수영 자유형 100m에서는 황선우가 5위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황선우의 100m 5위가 69년 만에 아시아인으론 최고 성적이라는 사실은 그동안 신체 능력이 상대적으로 우수한 서구 선수들이 이 종목을 지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선우는 그 벽을 깼다. 육상 높이뛰기 남자 결선에서는 우상혁이 2m35까지 깔끔하게 넘어 개인 최고기록(2m31)보다 4cm를 더 뛰어 역대 육상 트랙과 필드 사상 최고인 4위에 올랐다.
▷기초 종목에서는 한계 상황까지 밀어붙이지 못하면 목표를 이루기 힘들다. 신재환은 허리에 철심을 박은 상태에서도 뜀틀을 수없이 뛰어넘어 요네쿠라와 여2를 완성했다. 본능적인 감각으로 돌 수 있는 수준까지 만들어 세계를 제패했다. 우상혁도 자신의 한계인 개인 최고기록 이상을 넘으려 줄기차게 시도했다. 우상혁은 8세 때 자동차 바퀴에 오른발이 깔려 왼발에 비해 1.5cm 작은 불리함도 극복했다. 달릴 때 좌우 균형이 맞지 않았지만 끊임없는 노력으로 밸런스를 맞췄고, 결국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들의 성취는 불모지에서 이룬 것이기에 더 빛난다. 대한체육회 등록 선수(2021년 상반기) 기준 육상은 남녀 총 5292명, 수영은 3155명, 체조는 1235명이다. 일본은 육상만 38만여 명이다. 인구를 감안해도 한국이 크게 떨어지는 수준이다. 이들은 사실상 무에서 유를 창출했다. 양학선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수영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한 ‘마린보이’ 박태환도 그랬다.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특출한 천재 하나에만 기대는 게 한국 기초 종목의 현실이다.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기초 종목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커지길 기대한다.
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08-04 ‘양포세’ 양도세 상담을 포기한 세무사
“시간을 드리겠다. 사는 집이 아닌 건 파시라.” 문재인 정부 첫해인 2017년 8월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방침을 밝히는 김현미 당시 국토교통부 장관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그 후 집값이 계속 오르자 정부는 매년 양도세제를 뜯어고쳤다. 지난해 초부터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 양도세 상담을 포기한 세무사, 즉 ‘양포세’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당론으로 정한 소득세법 개정안은 ‘징벌적 양도세제’의 결정판이다. 지금까지 다주택자가 여분의 집을 처분하고 남긴 한 채는 집을 산 시점부터 장기 보유·거주 특별공제를 받을 수 있었지만 2023년 1월 1일부터는 다 팔고 1주택자가 된 시점부터 기간을 계산한다. 이번에도 남은 1년 5개월 동안 “사는 집 아닌 건 팔라”는 뜻이다.
▷양도세 개편의 불똥은 ‘1가구 1주택자’에게도 튀었다. 법 개정 이후 집을 사는 1주택자는 나중에 집을 팔 때 차익 규모에 따라 장기보유특별공제 폭이 달라진다. 5억 원 이하, 5억∼10억 원, 10억∼15억 원, 15억 원 초과 등 시세차익이 커지면 최대 공제 폭이 40∼10%로 차등 적용된다. ‘똘똘한 한 채’로 올린 높은 시세차익도 환수할 불로소득으로 본 것이다.
▷4년 내내 다주택자를 표적 삼던 양도세가 1주택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건 여당 내 ‘부동산 정치’의 산물이다. 4·7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한 뒤 양도세 과세 대상을 실거래가 ‘9억 원 초과’에서 ‘12억 원 초과’로 완화하려던 민주당 지도부가 ‘부자 감세’에 반대하는 당내 강경파를 달래기 위해 다주택자와 ‘고가 1주택자’의 양도세 부담을 늘리는 쪽으로 타협했다. 부동산 거래세 완화란 취지는 실종되고 세금폭탄만 남았다.
▷양도세제는 더 난해해졌다. 1주택자만 봐도 거주·보유 기간에 따라 2019년 8가지였던 양도세율 경우의 수가 급증해 이번에 법이 개정되면 189가지로 늘어난다. 다주택자는 보유 주택 채수 및 지역, 처분 시기 등이 추가돼 경우의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효율성, 명확성, 적은 납세자 협력비용 등 좋은 세금의 원칙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양포세만 더 늘어나게 생겼다.
▷어느 나라건 청년층과 서민, 취업·교육 등의 이유로 이동하는 사람들은 빌릴 집이 필요하고, 그 대부분을 다주택자, 부동산 업체가 공급한다. 모두가 1주택자가 되기도 어렵지만 된다 해도 거주·이전의 자유가 제약될 수밖에 없다. 이미 높은 양도세에도 집을 안 판 사람 다수는 양도세가 더 강화돼도 집을 내놓기보다 버티거나 증여를 택할 가능성이 높다. ‘다주택자=악, 1가구 1주택=선’이란 여권의 인식이 초유의 ‘복잡계 세금’을 만들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8-05 ‘방호복 천사’
장갑을 끼고 일하느라 꺼풀이 벗겨져 너덜너덜한 손, 고글에 짓무른 자리마다 반창고를 붙인 얼굴, 환자 침상 밑에서 쪼그려 앉은 채 잠든 모습…. 코로나19 일선에서 간호사들의 헌신을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최근엔 또 한 장의 사진이 트위터에 공개돼 화제다. 방호복을 입은 간호사가 환자복을 입은 할머니와 마주 앉아 화투 패를 들여다보는 장면이다.
▷사진 속 주인공은 삼육서울병원 음압격리병동의 이수련 간호사(29)와 박모 할머니(93). 할머니는 중증 치매 환자로 유독 격리병실 생활을 힘들어했다. 할머니의 외로움과 공포감을 달래주기 위해 화투 놀이를 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사진은 지난해 8월 동료 간호사가 찍어 올해 대한간호협회 사진전에 출품하면서 뒤늦게 알려지게 됐다. 누리꾼들은 “백의의 천사가 아니라 화투 패 든 천사”라며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의사는 치료하고 간호사는 돌본다. 특히 의료진 외 출입이 통제되는 음압병동에서 간호사의 돌봄은 환자의 모든 일상과 함께한다. 식사를 챙기고, 씻기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병실과 화장실 청소를 한다. 이 모든 일을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레벨D 방호복을 입고 해낸다. 김이 서린 고글로 가려진 시야에 두세 겹 장갑을 낀 둔한 손으로 혈관을 찾고 주사를 놓는다. 두통과 메스꺼움을 달고 살고 24시간 가동되는 음압기 소음 탓에 이명에 시달린다. 업무량이 많다 보니 병실 안에서만 오가는데도 하루에 1만5000보를 걷는다고 한다.
▷감염 우려 때문에 가족 얼굴 한 번 못 보고 떠나는 환자의 마지막 손을 잡아주는 이도 간호사다.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가족이 보내온 편지를 환자에게 읽어주고, 환자가 남긴 말을 가족에게 전해줄 때는 다 같이 운다. “우리 형제들 잘 키워줘서 고마워요. 엄마 사랑해요.” “나도… 많이 사랑해.” 미국에선 코로나 이후 간호사 직업의 신뢰도가 89%로 7년 전(82%)보다 높아졌다. 의사(69→77%)보다 높다(갤럽).
▷코로나 초기엔 환자가 필요로 하는 곳마다 간호사들이 달려갔다. 암 진단을 받고도 한달음에 달려간 간호사,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자원한 부부 간호사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떠나고 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올 6월 전국 102개 의료기관을 조사한 결과 간호사 퇴사율이 20%가 넘는 병원이 13곳이나 됐다. 퇴사율이 45%가 넘는 병원도 있다. 격무와 열악한 처우 때문이라고 한다. 남은 ‘방호복 천사’들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그래도 환자들 앞에선 웃는다. “우린 절대 환자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함께 힘을 내주세요.”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8-06 아들 둔 부모, 딸 둔 부모
요즘은 아들보다 딸이란다. ‘딸은 예쁜 도둑, 며느리는 좀도둑, 아들은 큰도둑’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아들 가진 부모가 자식에게 들어가는 돈이 많아 은퇴도 못 하고 오래 일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나중에 늙어서 돌려받지도 못하니 ‘큰도둑’이란 표현이 크게 틀리지 않는 셈이다.
▷1935∼1950년대에 출생한 부모들을 대상으로 자녀 성별 및 숫자가 부모의 은퇴와 근로시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결과 딸보다 아들을 둔 부모가 더 오래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들이 한 명 늘어날 때마다 아버지의 주당 근로시간은 16.8% 증가하고 은퇴 확률은 5.5∼6%포인트 줄어들었다. 영문 학술지 ‘고령화 경제학저널’ 최신호에 게재된 ‘한국의 가족 내 재산 양도, 남아 선호, 은퇴 시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자식에게 들인 비용은 돌려받지 못해 그만큼 노년의 가난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 이 연구엔 김경국 경제부총리 비서관이 제1저자로 참여했다.
▷연구에 따르면 아들 키우느라 허리가 휘는 이유는 주거비용 탓이다. 한국에선 결혼할 때 ‘남자는 집, 여자는 살림’이라는 인식이 있어 아들에게 집을 해주느라 은퇴할 자유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2∼2019년 결혼한 1779가구를 조사한 자료에서도 신혼집 마련에 쓴 비용은 1억9500만 원이고, 남녀 기여도는 8 대 2이며, 이 중 40%를 부모가 지원해준 것으로 나타났다. KB리브부동산에 따르면 서울의 평균 전셋값이 6억3000만 원이니 아들이 하나인 집과 둘인 집의 부담은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요즘 결혼시장에선 외동아들이면 가산점을 받는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집값이 뛰면서 남녀 간 기여도 차이는 줄어드는 추세다. 웨딩컨설팅회사 듀오웨드는 매년 신혼부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혼비용 보고서를 발표한다. 2017년과 올해 자료를 비교해보니 결혼비용 가운데 신혼집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71%에서 82%로 커졌고, 남녀 기여도는 65 대 35에서 61 대 39로 격차가 줄었다. 딸 가진 부모의 부담은 그만큼 커지고 있는 셈이다.
▷결혼비용 부담에서 남녀는 평등해지고 있지만 부모 의존도는 높아지고 있다. 앞서 듀오웨드 조사에서 ‘부모 도움 없이 결혼할 수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2017년엔 74%였는데 올해는 45%로 확 줄었다. 부모의 재력에 따라 신혼집 마련 여부가 결정되고 평수가 달라질 경우 세대 내 불평등은 심화할 수밖에 없다. 성실한 남녀가 제 힘만으론 가정을 꾸릴 수 없는 상태가 계속되다간 ‘딸이건 아들이건 자식은 모두 큰도둑’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지 모른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8-07 바이든 “전기차가 미래”
1896년 9월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내러갠셋파크 경마장 출발선에 전기차 2대, 가솔린차 5대가 나란히 섰다. 총성과 함께 차들은 트랙을 돌기 시작했다. 결승선에 먼저 도착한 차는 리커(Riker) 전기차 회사의 삼륜차였다. 무거운 납축전지와 모터로 움직이는 전기차가 초기 가솔린 엔진 자동차를 앞섰던 것이다. 125년 전 이 경주는 전기차가 내연기관차를 꺾은 가장 오래된 레이스로 기록됐다.
▷이달 5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제너럴모터스, 포드, 스텔란티스 등 미국 3대 자동차사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 자동차 산업의 미래는 전기차다. 되돌릴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2030년부터 미국에서 팔리는 신차의 절반을 친환경차로 채우도록 하는 행정명령에도 서명했다. 20세기 초입에 반짝 인기를 끌다가 1908년 선보인 포드 ‘T모델’ 등 싸고 성능 좋은 가솔린차에 밀려 사라졌던 전기차가 확실한 대세로 떠올랐다.
▷지구 전역에서 나타나는 이상기후가 내연기관차 시대의 종언을 재촉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030년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1990년보다 55% 줄이는 계획을 6월 말 발표하면서 2035년부터 내연기관차 판매를 전면 금지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메르세데스벤츠는 2030년까지 모든 차종을 전기차로 바꾸기로 했고, 폭스바겐그룹과 BMW도 2030년까지 신차 중 전기차를 절반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연일 이런 소식을 듣다 보니 차를 바꾸거나, 처음 장만하는 사람이라면 전기차, 가솔린·디젤차, 하이브리드차 등을 놓고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내연기관차를 샀다가 머잖아 바꿔야 하거나, 시대에 뒤처진 사람으로 비칠까 걱정이다. 하지만 국내 전기차 구매자 중 40, 50대 고소득층이 많은 걸 보면 아직 청년 등에게 전기차 가격은 다소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최소 15∼20년 정도는 내연기관차와 전기차가 공존할 것으로 예상되고, 전기차 가격을 좌우하는 배터리 가격도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돼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주요국에 친환경차만 수출하는 시점을 2040년으로 잡아둔 현대차·기아는 다소 급해졌다. 올해 1∼7월 현대차·기아가 미국에서 판 친환경차가 작년 동기의 약 3배로 늘어나는 등 흐름은 좋다. 연내에 현대차의 전용 전기차 모델 ‘아이오닉5’, 내년엔 기아 ‘EV6’가 수출되기 시작하면 상승세는 더 가팔라질 것이다. 그보다는 전기차가 불러올 산업구조 변화가 문제다. 엔진차에 비해 전기차는 부품 수, 생산 인력이 30% 이상 줄고 자율주행 기능 등에 대한 투자는 훨씬 많이 필요하다. 내연기관차 시대의 향수에 빠져 있다간 닥쳐오는 전기차 시대의 파도를 넘기 어려울 것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8-09(월) 올림픽 포상
▷이런 부분을 보완해주는 것이 종목별 협회가 지급하는 억대 포상금이다. 양궁협회는 리우 때 개인전 2억 원, 단체전 1억5000만 원의 포상금을 지급했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규모를 지급할 것으로 보인다. 배구협회는 4위를 차지한 여자배구팀에 1억 원 이상의 보상금을 약속했고, 금메달을 획득한 체조, 펜싱 협회도 억대 포상금을 내줄 예정이다. 반면 남자 높이뛰기에서 한국 신기록을 수립하며 4위에 오른 우상혁은 2000만 원, 수영에서 아시아와 한국 신기록을 세웠지만 메달 획득에 실패한 황선우는 1000만 원의 포상금에 그친다고 한다. 협회의 예산 상황이 다른 데다 신기록 달성보다는 메달 획득 여부에 포상금 기준이 우선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선수들이 흘린 땀에 대한 보상 기준을 메달 여부로 정하면 간편할 수는 있겠지만 개인이나 단체, 기록이나 격투 경기의 차이를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 또 프로 스포츠가 발전한 인기 종목과 올림픽만을 바라보며 4년을 달려온 비인기 종목에 대한 보상을 천편일률적으로 하는 게 맞는지도 생각해볼 문제다. 무엇보다 몇몇 종목에 치우친 우리 올림픽 메달의 저변을 넓히려면 보상 체계를 시대 변화에 맞춰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08-10 2024 파리 올림픽
2020 도쿄 올림픽 폐회식에서 올림픽기(旗)가 다음 개최지인 프랑스 파리의 안 이달고 시장에게 전달된 뒤 영상이 나왔다. 요즘 ‘핫한’ 뮤지션인 우드키드의 전자음악을 배경으로 BMX(묘기 자전거)팀이 파리의 아연 지붕 위를 질주했다. 콩코르드 광장에서는 3대3 농구가 펼쳐졌다. 앞으로 1081일 남은 2024 파리 올림픽의 영상 초대장이자 예고편이었다.
▷프랑스 국가(國歌)인 라 마르세예즈는 현대적으로 편곡돼 이 올림픽이 추구하는 가치를 드러냈다. 문화예술의 파리를 대표하는 공연홀 ‘메종 드 라 라디오’를 비롯해 기차역을 개조한 친환경 라이프스타일 카페, 아마추어 스케이터들과 타악기 연주가 어우러진 파리 북쪽 외곽 생드니의 광장 등이 나왔다. 2024 파리 올림픽은 거리의 아이들도 포용한다는 취지로 청년 범죄율과 실업률이 높은 생드니의 스타드 드 프랑스를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선정했다.
▷2024 파리 올림픽은 세 가지 약속을 내걸었다.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난 스포츠 관람, 모든 사람과 도시 전체에 개방,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관객들과 소통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펜싱과 태권도는 그랑 팔레, 승마는 베르사유 정원, 양궁은 앵발리드 산책로, 비치발리볼은 에펠탑을 마주 보는 샹 드 마스 광장에서 연다. 올림픽 중계만 봐도 영화 ‘파리로 가는 길’ 못지않은 파리 랜선 여행이 될 것 같다.
▷도쿄 올림픽은 팬데믹에서도 세계가 하나 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32조 원을 쏟아붓고도 흥행에는 실패했다는 평이다. 코로나19 탓이 크지만 올림픽에 대한 관심 자체가 식어가는 게 문제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도쿄 올림픽에서 스포츠 클라이밍과 서핑 등 ‘젊은 종목’들을 채택해 여성과 젊은층의 관심을 얻고자 노력했다. 2024 파리 올림픽에 거는 기대는 더욱 각별하다. 창의적인 올림픽을 선보이겠다는 파리는 2017년부터 오페라 가르니에 내부와 몽마르트르 등을 달리는 ‘런 마이 시티’라는 달리기 대회도 열고 있다. 다가올 올림픽 기간에 일반인도 참여하는 도심 마라톤 대회를 연다니 그 코스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에펠탑을 깃대 삼아 축구장 크기의 올림픽기가 이번에 걸렸다. 그 앞에서 2024 파리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브레이킹을 22세 프랑스 챔피언이 선보였다. 역사와 젊음의 만남이다. 최초의 여성 참여 올림픽(1924년)이 열렸던 곳인 만큼 2024 파리 올림픽은 변화하는 시대에 맞춘 연대(連帶)와 균형의 올림픽이 됐으면 한다. 세계인이 색다른 올림픽을 ‘직관’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셀프 시상, 경기 후 48시간 내 귀국과 같은 슬픈 ‘코로나 올림픽’은 도쿄에서 끝나기를 바란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8-11 카카오택시
카카오택시(카카오T)가 콜 비용을 정액 1000원에서 수요에 따라 최대 5000원까지 내도록 한 ‘스마트 호출 탄력 요금’ 제도를 2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바쁜 시간대에 택시를 빨리 부르려면 기본요금(서울 3800원)보다 더 많은 콜 비용을 내라는 것이다. 단거리 이용 소비자는 기본요금의 2배가 넘는 8800원을 내야 할 수도 있다.
▷2015년 택시 시장에 진출한 카카오는 초기엔 무료로 소비자와 택시 기사의 환심을 샀다. 그러다 택시 기사의 90% 이상, 국민의 절반 이상이 가입하며 독점적 지위에 오르자 ‘유료화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2018년에 콜을 유료화했고, 지난해에는 블루 서비스를 도입해 승차 거부 없는 배차를 구실로 최대 3000원을 더 받고 있다. 스마트 호출과 블루 서비스는 고급차량도 아닌 일반택시를, 쉽게 잡게 해준다는 명분으로 돈을 더 받는 사업이다.
▷카카오T는 택시 기사로부터도 월 9만9000원을 받는 ‘프로 멤버십’을 3월 도입했다. 회원으로 가입한 택시 기사에게 손님 행선지를 다른 기사들보다 먼저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고 돈을 받는다. 몇 년 전 자동 프로그램까지 만들어 손님을 먼저 잡으려는 택시 기사들이 있었는데, 카카오T가 이를 직접 사업화한 셈이다.
▷택시가 필요한 사람은 손을 들어 택시를 잡거나 앱을 켜서 택시를 부른다. 그런데 이 두 방식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길에서는 택시를 탄 후에 행선지를 알리면 되지만, 앱을 이용할 때는 목적지를 먼저 입력해야 한다. 만약 길에서 택시 기사가 행선지를 먼저 묻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냥 가버리면 승차 거부가 된다. 승차 거부는 세 번만 위반하면 택시 운전 자격까지 취소당하는 범법 행위다.
▷카카오T가 손님 행선지를 미리 알려주니 가까운 거리에는 택시가 잘 오지 않는다. 그런 환경을 만들어 놓고는 카카오T는 스마트 호출로 돈을 버는 셈이다. 장거리 손님 행선지를 특정 기사들에게 먼저 알려주는 것은 손님 골라 태우기를 조장하는 행위인데, 이걸로도 돈을 번다. 원칙에 맞춰 손님의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가까운 택시를 무조건 배차하면 손님이나 기사 모두 웃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드는 것은 택시를 이용하겠다는 의사만 표시하는 것이다. 앱으로 택시를 잡는다고 승차 거부의 빌미를 제공할 행선지까지 밝힐 이유는 없다. 규제 당국은 카카오T가 독점적인 지위를 이용해 요금을 올렸는지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더 나아가 카카오T가 승차 거부를 조장하며 사업을 영위하는 것은 아닌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밝혀내서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08-12 美 백인 ‘소수화’
미국 유색인종의 백신 접종률이 저조한 이유는 의료 체계에 대한 오랜 불신 탓이다. 20세기 초반 유색인종을 대상으로 약물 효능 실험에 강제 불임 시술까지 비밀리에 시행한 사실이 알려진 것. 불임 시술의 흑역사는 출산율이 높은 유색인종들에 밀려 백인이 멸종할지 모른다는 극단적 피해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백인들의 불안감을 더 자극할지도 모를 인구조사 결과가 곧 발표된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12일(현지 시간) 공개되는 2020 인구조사에서 백인인구가 사상 처음으로 감소해 그 비율이 60% 이하로 떨어진 것으로 집계됐다. 히스패닉은 20%, 흑인은 12.5%, 아시아계 비율은 6%다. 18세 미만에서는 백인이 절반이 안 된다. 2045년에는 백인이 전체 인구의 절반 미만으로 쪼그라들어 주류 인종의 지위를 잃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백인이 소수화하는 이유는 이민 인구가 늘어난 데다 유색인종의 출산율이 더 높기 때문이다. 2019년 미국의 인종별 출산율은 히스패닉이 1.94로 가장 높고 이어 흑인(1.77) 원주민(1.611) 백인(1.610) 아시아계(1.51) 순이다. 사회의 주류였던 백인 베이비 부머가 은퇴하면서 미국은 노인 복지 예산과 유색인종을 위한 영어교육비 중 어느 쪽을 늘려야 하는지 저울질하고 있다. 흑인들이 자유를 찾아 북쪽으로 대거 이동했던 20세기와 달리 최근엔 유색인종들이 일자리를 찾아 남하하면서 정치 지형도 바꿔놓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공화당의 텃밭이었던 애리조나주에서 승리한 요인 중 하나는 이 지역의 유색인종 유입이었다.
▷백인 사회엔 유색인종이 소수자로서 우대혜택을 받더니 이젠 주류가 돼 미국을 빼앗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 같은 피해의식은 ‘피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비백인(one-drop rule)’으로 분류했던 과거의 경직된 이분법에 근거한 주장이라는 반박이 나온다. 인종적 결합이 활발한 지금은 백인과 비백인을 가르는 경계 자체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백인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의 40%는 혼혈이다. 아시아계 10명 중 3명, 히스패닉 4명 중 1명, 흑인 5명 중 1명이 다른 인종과 결혼하는데 이 중 4분의 3이 백인과 한다. 이런 가정의 아이들은 백인과 같은 혜택을 받으며 주류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라난다.
▷미국의 인종 구성 변화는 백인의 소수화일까, 인종적 결합의 확대일까. 백인의 불안감을 악용해 인종적 갈라치기를 시도하는 포퓰리즘 정치에 굴복하느냐, 인종적 결합의 힘을 믿고 통합의 길을 가느냐에 다인종국가 미국의 성패가 달려 있을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8-13 78년 만의 유해 봉환
구한말 강원도와 함경남도 개마고원 등에서 신출귀몰하던 홍범도의 항일 의병대는 일본군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일제는 토벌 작전이 번번이 실패하자 급기야 1908년 가족을 동원한 회유에 나섰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의 부인은 “내가 설혹 (회유)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라며 버티다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숨졌다. 홍범도는 맏아들이 일제가 쓴 부인의 가짜 귀순 권유 편지를 들고 오자 엄하게 꾸짖으며 총까지 쐈다. 총알이 귀를 스쳐 생명을 건진 아들은 의병이 됐고, 바로 그해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만 16세의 어린 희생이었다.
▷1868년 평양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머슴, 식객승, 포수를 전전하며 천대와 멸시 속에 살았던 홍범도.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의 길에 투신했다. 간도로 건너간 선생은 1920년 우리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처음 꺾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대승도 견인했다. ‘하늘을 날고 축지법을 구사하는 장군’ ‘호랑이 장군’으로도 불렸다. 일제에게는 공포였지만, 고국의 민초들에게는 희망이었다.
▷하지만 해방이 되자 장군은 남북에서 모두 외면당했다. 남한은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고 레닌에게 자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 낙인을 찍었다. 북한은 ‘비호(飛虎) 장군’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김일성과 비교된다는 이유로 부각시키지는 않았다. 앞서 선생은 1937년 소련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카자흐스탄 키질로르다로 이주했다. 병원 경비, 극장 수위 등으로 일하다 광복을 두 해 앞둔 1943년 세상을 떴다. “독립을 최후까지 외치다가 죽은 후에야 그쳐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던 항일 전사의 쓸쓸한 마지막이었다.
▷카자흐스탄에 있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제76주년 광복절인 15일 한국으로 봉환된다.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간 지 100년, 서거한 지 78년 만에 조국 땅을 밟는다. 앞서 김영삼 정부 때 유해 봉환이 시도됐지만 북한의 조직적인 반대와 카자흐스탄의 미온적인 태도로 미뤄지다가 이제야 결실을 맺었다. 유해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일제가 만든 ‘조선폭도토벌지’에 따르면 1906년부터 1911년까지 항일 의병 1만7779명이 순국했다. 일제강점기 전부를 더하면 피해는 더 클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이 수많은 이름 모를 의병의 희생과 헌신 위에 가능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홍 장군을 기리는 독립된 추모공원과 추모비는 카자흐스탄에는 있지만 국내엔 아직 없다. 후손 될 자격이 있는지, 부끄럽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08-14 ‘머지포인트’
휴대전화 앱에서 8만 원에 산 전자상품권으로 마트에서 10만 원어치 물건을 살 수 있는 서비스가 있다. 20% 할인을 내세운 모바일 결제 플랫폼 ‘머지포인트’ 얘기다. 대형마트뿐 아니라 편의점 카페 음식점 등에서도 쓸 수 있다. 이용자들은 환호했다. 앱을 몇 번 두드리면 20%를 할인받는 신세계가 열린 것이다. 월간 거래액은 최근 1년 새 10배로 불어났고, 사용자는 100만 명에 육박한다. 그런데 11일 돌연 상품권 판매가 중단됐고, 쓸 수 있는 제휴업체도 10분의 1로 급감했다.
▷12일 오후부터 서울 영등포구의 한 건물 앞에 머지포인트 환불을 요구하는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 피해자들은 ‘환불받은 내용을 제3자에게 공유하지 않겠다’는 합의서에 사인까지 하고도 원금 일부만 돌려받았다. 이튿날까지 순서를 기다리다 발길을 돌린 사람도 적지 않다. 선결제로 머지포인트를 수백만 원어치 구매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시중 발행액은 100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먹튀’도 의심되는 상황이니 애가 탈 수밖에 없다.
▷머지포인트는 이용자가 늘수록 회사가 손해 보는 구조다. 사용자가 할인받는 금액의 상당 부분을 회사가 지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운영사인 머지플러스는 18만 원인 연간 구독권도 팔았다. 구독권을 사면 1년 동안 가맹점에서 20% 할인을 받는데, 구독 지원금 5만 원을 받고 나중에 구독권 결제액 18만 원도 돌려받는다. 이런 퍼주기로 서비스를 지속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폰지 사기(신규 고객 돈으로 기존 고객에게 수익을 주는 돌려 막기 사기)가 아니냐는 의혹도 나온다.
▷금융당국도 책임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머지포인트는 미리 돈을 받고 전자상품권을 파는 구조이므로 일종의 전자금융업으로 봐야 한다. 이 회사는 금융당국에 등록을 하지 않은 채 2018년부터 서비스를 해왔다. 무허가 영업이 3년간 방치된 셈이다. 금융감독원은 머지플러스가 당국에 등록을 하지 않아서 모니터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뒤늦은 변명일 뿐이다.
▷온라인 회원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업체들은 ‘계획된 적자’라는 표현을 곧잘 쓴다. 일정 가입자를 모을 때까지 발생하는 적자는 미리 예상했고 감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쿠팡이 적자를 내면서도 기업 가치를 인정받는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고객 신뢰를 잃으면 ‘계획된 적자’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이 될 수 있다. 머지플러스는 조만간 서비스를 재개하겠다고 밝혔지만 신뢰 회복이 우선이다. 그 첫걸음은 이용자의 환불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것이다. 치솟는 물가에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서민들이 억울한 피해까지 당할 순 없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08-16(월) ‘황연대 성취상’
스웨덴 예테보리시 다비드 레가 전 부시장은 팔다리 없이 태어난 장애를 이겨내고 장애인 수영 국가대표를 지냈다. 그의 도전에 큰 힘이 됐던 게 1996년 애틀랜타 패럴림픽(장애인 올림픽)에서 받은 ‘황연대 성취상’이다. “황연대 여사님, 당신이 준 상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14개의 세계 신기록을 세웠던 그는 부시장이 된 후 펴낸 자서전을 황 여사(83)에게 보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황연대 성취상은 겨울·여름 패럴림픽의 최우수선수(MVP)상으로 통한다. 그런데 좀 특별한 상이다. ‘노 메달’이어도 장애를 넘은 성취가 빛나면 수여한다. 한국 최초의 장애인 여성 의사로 장애인 권익운동을 이끈 황 여사가 1988년 당시 200만 원을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에 쾌척하면서 만들어졌다. 세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일제강점기 국민학교 입학을 거부당했던 그는 “내 나라에서 열리는 장애인 축제(서울 패럴림픽)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1988년 서울 패럴림픽은 스포츠 역사상 처음으로 장애인 올림픽이 올림픽과 같은 장소와 같은 해에 열린 대회다. 여기에서 황연대 성취상이 처음 선보였으니 뜻깊다. 2018년 평창 패럴림픽까지 남녀 각 14명씩 28명(21개국)이 황 여사의 사재를 턴 상(순금 메달)을 받고 ‘다르지만 멋지게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상의 본래 명칭은 ‘황연대 극복상’이었지만 2008년 베이징 패럴림픽부터 ‘황연대 성취상’으로 바뀌었다.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는 투쟁보다는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공하자는 긍정의 의지를 담았다.
▷그런데 이 상이 24일 개막하는 2020 도쿄 패럴림픽부터 사라지게 됐다. IPC가 상 폐지를 통보한 것이다. 황 여사의 아들인 황연대성취상위원회 정성훈 이사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평창 패럴림픽에서 시상했던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병 투병 중이지만 일제강점기를 겪은 만큼 도쿄에서 의미 있는 시상을 원하셨는데 실망이 크다”고 했다. 이 상 대신 도쿄 패럴림픽조직위원회가 관여하고 재정도 투입되는 ‘아임 파서블 어워드(I‘m Possible Award·나는 가능하다)’가 신설된다.
▷다가올 2024 파리 올림픽부터는 올림픽과 패럴림픽이 아예 같은 엠블럼을 쓴다. 장애와 비장애의 벽을 허무는 데 황연대 성취상의 기여가 컸다. 발달장애인이 직관적으로 경기종목을 이해할 수 있는 픽토그램을 개막식에 선보여 호평을 받았던 도쿄 올림픽이다. 뒤이어 열리는 패럴림픽에서 한국인이 만든 상을 굳이 없앤다니 유감스럽다. 우연이라기엔 석연찮은 구석도 보인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8-17 사이공과 카불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명장면은 헬리콥터 신이다. 1975년 베트콩에 함락된 사이공의 미국대사관에서 미국인과 현지인들이 뒤섞여 탈출하는 장면으로 미국의 패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비극적 ‘사이공 모멘트’가 46년이 흐른 15일 탈레반의 입성을 앞둔 아프가니스탄 카불 미대사관에서 재현됐다. 사이공 모멘트의 속편이라는 ‘카불 모멘트’다.
▷베트남전과 아프간전은 닮은꼴이다. 베트남전은 초강대국 미국이 ‘별 볼 일 없고 하찮은 작은 나라’(린든 존슨 대통령)에 무릎 꿇은 사건이다. 아프간전쟁은 미국이 830억 달러(약 97조 원)를 쏟아붓고 2400명이 넘는 미군을 희생시켜 가며 지원한 30만 아프간 정규군이 마약 밀매 등에 의존해 버텨온 6만∼7만5000명 탈레반에 백기 투항한, 미국에 베트남전보다 더한 치욕을 안긴 전쟁이다.
▷미국이 실패한 주요 원인은 현지 민심 오독(誤讀)이다. 미국에 베트남전은 자유와 공산 진영 간 대결이었지만 베트남인들에겐 ‘식민 지배에 맞선 민족해방투쟁’(토머스 프리드먼)이었다. 미국과 아프간의 악연도 미국의 냉전 프레임에서 비롯됐다. 1979년 옛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하자 미국은 소련에 맞서 싸우는 반군에 무기를 지원했다. 그중엔 무하마드 오마르가 있었는데 그는 탈레반의 최고 지도자가 돼 1996년 정권 탈취 후 공포정치를 개시한다. 미국의 지원으로 아프간은 ‘소련의 베트남’이 됐고, 미국이 키운 탈레반에 의해 아프간은 미국에 ‘제2의 베트남’이 됐다.
▷2001년 9·11테러 후 미국은 아프간을 침공, 75일 만에 알카에다 지원 세력인 탈레반을 쫓아냈다. 미국엔 이슬람 근본주의에 맞선 전쟁이었지만, 아프간엔 부족 간 전쟁에 가까웠다. 탈레반을 포함해 아프간인의 48%는 영국과 러시아 제국을 무찌른 파슈툰족이다. 하지만 미국이 지원하는 내각과 군부의 요직은 파슈툰족의 숙적인 타지크족이 차지했다. 탈레반은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을 파슈툰족 부활 운동과 뒤섞었다. ‘무솔리니(이탈리아 독재자)는 기차를 정시에 달리게 했다’는 말이 있듯 납치와 부패가 횡행하는 무법천지 아프간에 최소한의 질서를 제공한 건 탈레반 정권이었다. 정부의 통치역량이 무장세력 탈레반보다 못했던 것이다.
▷탈레반은 이슬람 신정국가 건설이 목표다. 의회도 선거도 없이 성직자 물라들이 통치하는 나라다. 20년 전과 달리 여성의 사회 참여율이 높고, 소셜미디어가 발달해 시민사회가 커졌다고 하지만 탈레반의 반인권적 억압 통치를 견디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카불 모멘트의 비극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8-18 아프간 여성의 눈물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아요. 우리는 역사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겠죠.”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앳된 아프간 소녀가 연신 눈물을 흘렸다. 얼굴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감이 가득했다. 한 인권운동가는 13일 트위터에 신원을 밝히지 않은 소녀의 영상을 올려 아프간의 절박한 상황을 알렸다.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점령한 지 하루 만인 16일, 광고판에서는 여성 모델들이 가려지고 있고 거리에는 외출한 여성이 없어 흉흉하다.
▷탈레반은 1996년 집권 후 극단적인 이슬람 율법으로 여성 인권을 억눌렀다. 초등학교조차 못 다니게 했고, 취업도 금지했다. 외출할 때는 전신을 가리는 부르카를 입혔고, 탈레반 대원과 강제결혼도 시켰다. 이를 어기면 몽둥이질이고 심하면 생명을 앗아갔다. 카불의 유일한 종합운동장인 가지 스타디움에는 매일 기도시간인 오후 3시 반 교수대와 투석대가 설치됐다. 율법을 어긴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오후만 되면 끊이질 않는 참혹한 시기였다.
▷20년 전 탈레반이 물러간 이후 아프간의 여성 인권은 빠르게 개선됐다. 지금은 여성이 대학생 가운데 3분의 1, 성인 취업인구 중 5분의 1로 늘었다. 여전히 서방에 비해서는 낮은 수치지만 그래도 여성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미군 철수가 시작된 5월 이후 25만 명이 피란길에 올랐다. 80%는 여성과 아이들이라는 게 유엔의 집계다. 이들은 탈레반에 쫓겨 주로 카불로 향했는데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나.
▷미국 국무부는 16일 탈레반이 여성의 기본권을 존중하고, 테러리스트를 숨기지 않아야만 정부로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탈레반이 아프간을 점령하면서 혼란과 무질서가 커지는 것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을 의식한 발언일 것이다. 앞서 조 바이든 대통령도 6월 아프간 여성과 소녀들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계속될 것을 약속했었다. 하지만 탈레반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아프간 여성들이 나약하지만은 않다. 탈레반이 주요 도시를 점령해 나가자 지난달 여성들은 직접 총을 들고 항전에 나서기도 했다. 과거의 인권 암흑기로 돌아가지는 않겠다는 각오였다. 대통령이 나라를 버리고 줄행랑을 쳤지만 아프간 최초의 여성 교육부 장관인 랑기나 하미디(45)는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던 날 평상시처럼 출근해 자리를 지켰다. 열한 살짜리 딸이 있다는 그는 “나도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만약 살아남는다면 수백만 소녀들을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나라에선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이제 아프간 여성들은 목숨을 건다. 그들의 용기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08-19 ‘홍색규제’ 리스크
‘캘리포니아 드리밍’과 ‘몽중인(夢中人)’은 1994년 개봉한 영화 ‘중경삼림’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에 실려 한국인들에게 유명해진 노래다.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은 특유의 몽환적 연출과 ‘꿈’을 소재로 한 노래들로 1997년 반환을 앞둔 홍콩 청년들의 불안감을 표현했다. 이 노래들이 중국의 노래방에서 사라질지 모른다. 중국 정부가 공산당에 대한 충성을 방해하는 노래의 ‘블랙리스트’를 10월 1일부터 도입하기 때문이다.
▷노래방 금지곡 지정의 계기는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에서 발생한 접대 술자리 성추행 사건이다. 회식 문화를 바꾼다며 중국 정부는 ‘음주를 동반한 회식’을 금지하는 한편 중국의 통일과 주권, 영토 보전, 민족 단결을 해치는 노래, 미신을 퍼뜨리는 노래, 음란 도박 폭력 마약과 관련된 노래를 퇴출하기로 했다. 이와 별도로 청소년의 과소비를 부추긴다는 지적을 받던 ‘아이돌 숭배 문화’도 당국의 표적이 돼 팬클럽 계정 4000여 개가 폐쇄됐다.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은 7월 1일 이후 중국에선 ‘홍색규제’ 도입이 일상이 됐다. 기념일 전날 중국과 패권경쟁을 벌이는 미국의 뉴욕증시에 상장해 ‘괘씸죄’에 걸린 디디추싱이 신호탄이었다. 점유율 80%로 ‘중국의 우버’로 불리던 디디추싱의 앱은 당국의 지시로 중국 내 모든 앱 장터에서 삭제됐고 주가는 폭락했다. 중국판 ‘배달의 민족’ 메이퇀뎬핑은 모든 배달원을 정규직으로 고용하라는 지시 때문에 수익성이 악화됐다. ‘게임은 정신적 아편’이란 당국의 비판에 1위 게임업체 텐센트는 청소년의 게임 이용 시간을 축소했다.
▷지난달 23일엔 ‘사교육과의 전쟁’이 선포됐다. 정규 교과목을 가르치는 교육기업의 설립이 금지됐고 기존 업체는 비영리기관으로 전환해야 한다. 140조 원 규모의 중국 사교육 시장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한국만큼 교육열이 높은 중국 중산층 학부모들은 불법 고액 가정교사를 구하느라 바쁘다고 한다. 사립학교의 비싼 교육비가 사회적 위화감, 출산율 저하 등 부작용을 낳는다는 이유로 베이징시는 14개 사립 초중고교 운영권을 강제로 거둬들였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권력 연장 여부가 결정될 내년 10월 20차 당 대회까지 공산당에 위협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규제와 통제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전방위 규제로 중국 기업들의 가치는 1조 달러(약 1180조 원) 이상 증발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중국 당국의 규제 리스크가 명확해질 때까지 중국에 대한 투자를 보류하겠다”고 밝혔다. 빽빽이 쌓인 나무 블록을 허물지 않고 하나씩 제거하는 ‘젠가 게임’처럼 서서히, 요령껏 위험을 줄이며 중국에서 발을 빼는 방법을 우리도 고민해야 할 때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8-20 밀라논나
구독자 87만 명의 파워 유튜버 ‘밀라논나’(밀라노 할머니) 장명숙 씨(69)는 요즘 “날마다 새로운 날을 맞는 게 설렌다”고 한다. 자신에게 예의를 지키고 오늘에 집중하기 때문이란다. “남의 시선과 평가에 나를 내맡기지 말고 내 마음부터 따뜻하게 달래고 품어 주세요. 넘어지면 넘어진 채로 잠시 쉬어 가고, 주변도 구경하며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이화여대를 나와 한국인 최초로 이탈리아 밀라노의 유명 패션학교 마랑고니에서 유학한 그는 패션 전문가로 인생 1막을 살았다. 부모의 뜻에 따라 결혼도 일찍 해서 두 아들을 키웠다. 67세이던 2019년 후배들의 권유로 패션 경험과 정보를 나눈 유튜브 활동이 그의 인생 2막을 활짝 열었다. 어쩌다 시작했는데 덤으로 돈이 들어온다며 수익은 기부한다.
▷그가 말하는 ‘나이 잘 드는 법’은 남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지기 위해 내가 비교해야 할 대상은 남이 아니라 ‘어제의 나’다. 그러려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편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애초에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걸 심사숙고해 고른 뒤 후회하지 말 것. “나만의 색깔로 자유롭고 재밌으면 되지!” 살아보니 성실과 실력을 이기는 건 없더란다. 인생의 걸림돌이 나오면 디딤돌이라고 여긴다. 산이라면 넘고 강이라면 건너면 된다.
▷“할머니가…”로 시작하는 그의 화법은 과도한 위로나 칭찬과는 거리가 멀다. 설교도 조언도 아닌 그저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담백한 응원을 건넨다. 한 유튜버 구독자는 이런 댓글을 남겼다. “‘어른이 된다는 건 포기할 줄도, 담담할 줄도, 용기를 낼 줄도 아는 것’이란 말씀에서 위로를 받았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 올 때 기억하며 힘을 내겠다.” 기성세대가 젊은이들과 수평적 관계를 유지해야 꼰대가 되지 않는다는 밀라논나는 우리 사회의 ‘할머니’란 말에 따뜻한 성숙함을 불어넣었다.
▷골프 대신 봉사로 삶을 충만하게 채우겠다는 그는 꼭 필요한 가구만 집 안에 둔다. 영상을 통해 그의 집을 본 이들은 오래된 에어컨에서 검소함의 품격을 느낀다. 그는 매일 한 시간 이상 걷고 ‘햇살 멍 때리기’를 한다. 야채와 견과류로 저녁 식사를 한 후에는 반드시 스트레칭을 하고 잠자리에 든다. 그 잔잔하고 꾸준한 모습이 누군가를 살리기도 한다. “살아갈 의욕이 없었는데 살아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름답게 나이 드는 것에 대한 롤 모델이 절실해진 고령화시대다. 그래서 다들 말하나 보다. “논나(할머니), 당신은 정말 멋진 어른이에요.”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8-21 국민 버린 아프간 대통령
“아프가니스탄에서 하늘은 두려움의 근원입니다. 폭격으로 존재가 소멸되는. 제가 재무장관이 됐을 때 3년 이상 살 가능성은 5% 이하라고 생각했죠. 아프간인 대다수가 하루 세 곳 이상의 라디오방송을 듣습니다. 세계(정세)가 중요하니까요. 그들의 가장 큰 걱정이 뭘까요. 버려지는 것입니다.” 세계적 명사를 초청하는 지식콘퍼런스 TED 강연에서 2005년 아슈라프 가니 당시 카불대 총장은 소련군 점령 이래 아프간이 겪은 공포의 삶을 이렇게 전했다.
▷가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났지만 10대 때부터 미국에서 공부한, 사실상 절반은 미국인으로 산 인물이다. 소련 침공으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그는 문화인류학자가 되어 세계은행과 미국 대학에서 근무했다. 미군의 탈레반 축출 이후에야 24년 만에 귀국해 재무장관으로서 정부개혁을 주도했다. 45년간 보유하던 미국 시민권은 2009년 첫 대선 도전을 위해 포기했다. 2014년, 2019년 대선에서 승리했지만 그때마다 부정선거 논란이 일었고 선거에 불복하는 경쟁자와 권력을 나눠야 했다.
▷카불 함락 며칠 전까지 대통령으로서 가니는 미군의 갑작스러운 철수를 비난하며 군벌과 국민에게 반(反)탈레반 저항과 봉기를 촉구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마지막 처신은 촌부보다 못 했다. 누구보다 먼저 줄행랑을 쳤다. 행선지조차 밝히지 않은 외국으로 도주했다. 카불 주재 러시아대사관 관계자가 전한 그의 탈출 행적, 차량 4대에 가득 찬 돈을 헬기에 실으려다 모두 싣지 못해 일부는 활주로에 버리고 떠났다는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행방이 묘연했던 가니는 사흘 뒤에야 아랍에미리트에 체류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페이스북 동영상을 통해 “더 많은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했다. “거기 남았다면 25년 전 일이 되풀이됐을 것”이라며 1996년 탈레반이 카불 장악 직후 당시 대통령을 공개 처형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그가 도망치며 먼저 떠올린 것은 좁은 하수구에서 피범벅이 돼 최후를 맞거나 수염이 덥수룩한 채 토굴에서 끌려나온 독재자들이었을지 모른다. 공포에는 지도자의 위신도 품격도 없다.
▷가니는 “아프간에 돌아가기 위해 상의하고 있다”며 귀국 의지도 밝혔다. “떠나올 때 내겐 옷 한 벌과 조끼, 샌들뿐이었다”며 자금 횡령 의혹도 부인했다. 하지만 국민을 버린 배신자, 실격(失格)한 지도자의 말은 이미 신뢰를 잃었다. 아프간에 남은 암룰라 살레 제1부통령은 가니의 부재에 따른 합법적인 임시 대통령을 자임했다. 가니의 귀국 가능성도 희박해 보이지만 설령 돌아간다 해도 아프간에 그의 자리는 없을 것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08-23(월) 두 번의 장마
기후변화가 한반도의 강수량에는 아직 큰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비가 오는 패턴은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한 열흘간 길게 많은 비가 이어지는 장마가 규칙적으로 찾아왔다. 한동안 해를 볼 수 없어 빨래를 말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 장마는 드물어졌다. 2014∼2019년만 해도 제대로 된 장마를 찾아볼 수 없었다. 2020년에는 장마가 무려 54일간 느슨하게 길게 이어졌다. 올해는 장마가 5일 정도로 유독 짧게 끝나는가 했는데 무더위 후 또 한 번의 장마가 찾아왔다.
▷장마는 남아시아에서 동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을 아우르는 ‘몬순’ 기후의 특징적인 현상이다. 장마를 중국과 일본에서는 매우(梅雨)라고 한다. 중국말로는 메이위이고 일본말로는 쓰유다. 우리나라에서도 한자를 쓰던 과거에는 매우라고 많이 썼다. 매실이 익어가는 계절에 내리는 비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보통 6, 7월을 말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나라는 보통 6월 말이나 7월 초에 장마가 시작된다. 장마가 끝나면 얼마 뒤 무더위가 시작되고 열흘이나 보름가량 열대야와 싸우다 보면 아침과 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느껴져 여름도 가는구나 하고 느끼게 되는 것이 여름철의 기후 패턴이다. 여름이 끝날 때쯤 한여름 태평양을 달군 뜨거운 열기가 태풍을 만들어 올라오기 시작해 추석 무렵까지 이어진다. 태풍이 뿌리는 비는 하루 이틀이면 끝나지만 장마전선이 만드는 비는 일주일 이상 이어지기 때문에 구별할 수 있다.
▷무더위 속에 치른 도쿄 올림픽이 끝날 무렵인 8월 12일 이후 한반도보다 위도가 낮은 중국 대륙 지역에서 일본 열도까지 장마전선이 길게 형성됐다. 중국 후베이성, 일본 규슈와 히로시마 등지에서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지난주까지도 중국과 일본에 영향을 미친 이 장마전선이 지난 주말 북상해 한반도에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무더위 이후의 장마는 태풍과 겹치면 더 많은 피해를 낳을 수 있다. 일본은 태풍 ‘크로사’가 겹쳐 피해가 더 컸다. 우리나라도 이번 주 태풍 ‘오마이스’가 동시에 찾아온다.
▷기후학자들에 따르면 몬순 기후 지역에 두 번 정도 나뉘어 비가 집중되는 현상이 최근 30년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두 번째 장마는 보통 가을장마인데 올해는 그 시기가 빨라져 여름에 두 번의 장마다. 장마가 짧아지거나 길어지거나 혹은 한 번 오거나 두 번 오거나 혹은 그 시기가 빨라지거나 늦어지거나 하는 현상은 어쩌면 우리가 장마라고 불러온 규칙적인 기후현상이 사라지고 있는 조짐일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8-24 WeThe15
인구의 15% 장애인을 위한 캠페인
양손이 없는데도 가장 빠르게 펜싱 칼을 휘두른다. 한쪽 다리가 없는 선수가 가장 멀리 뛴다. 인간의 능력엔 한계가 없음을 감동으로 확인하는 이벤트가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이다. 2020 도쿄 패럴림픽이 24일 개막해 162개국 4400명의 선수들이 22개 종목의 메달 539개를 놓고 기량을 겨룬다. 개회식의 주제는 “우리는 날개를 가지고 있다”.
▷신체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추락의 순간에도 희망의 날개가 돋는다. 육상 여자 100m와 200m에 출전하는 전민재(44)에겐 단단한 두 다리가 ‘날개’다. 5세에 뇌염을 앓고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이 된 그는 “스무 살까지만 살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키가 149cm로 작은 편이지만 트랙에만 서면 폭발적 스퍼트로 100m를 14.70에 주파한다. 2012년 런던, 2016년 리우 100m와 200m에서 3개의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남자 휠체어 배드민턴 세계 랭킹 1위인 김정준(43)은 2005년 공장에서 일하다 절단기에 옷이 빨려 들어가는 바람에 두 다리를 잃었다. 그 대신 굵게 단련한 두 팔로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누구보다 강한 스매싱을 날린다. 그는 도쿄 패럴림픽에서 처음 정식 종목이 된 배드민턴의 유력 우승 후보다. 이번 대회에선 해외 패럴림픽 사상 최다인 86명의 선수가 태극마크를 달고 14개 종목에 출전해 종합 20위를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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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럴림픽과 함께 경기장의 감동을 장애인 차별 해소로 이어가기 위한 캠페인 ‘WeThe15’이 시작됐다. 전 세계 인구의 15%에 달하는 12억 장애인을 위한 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 인권 운동으로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와 국제장애연합(IDA)이 주도한다. 19일엔 도쿄 스카이트리,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로마 콜로세움 등 30개국 120여 개 랜드마크에 일제히 이 캠페인의 상징색인 보라색 조명등을 켜는 홍보 행사를 가졌다. 도쿄 패럴림픽이 끝난 뒤에도 10년간 장애인의 사회 통합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스포츠는 신체 기능이 떨어지는 장애인에게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2020 장애인 생활체육 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장애인 생활체육 참여율은 24.2%로 전체 국민 참여율(60.1%)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장애인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운동 장소는 ‘집 안’이었다. 장애인용 시설도 드물고, 있다 해도 승강기나 경사로가 없어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누구나 즐기는 스포츠를 장애인도 똑같이 즐기는 것, 국내 WeThe15 운동이 여기서부터 출발하길 기대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8-25 스마트 팜
극심한 가뭄과 한파로 세계 최대 커피 생산국 브라질의 작황이 악화하면서 국제 커피콩 시세가 급등하고 있다. 세계적 기상이변이 부른 ‘애그플레이션’(농산물 가격 상승) 현상인데 성인 1인당 연간 350잔 넘는 커피를 마시는 한국인들에겐 달갑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머잖아 기후변화 걱정 없이 품질 좋은 ‘한국산 커피’를 마시게 될지 모른다. 지구 반대편과 생육조건을 똑같이 만들어주는 스마트 팜 기술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2019년부터 경북 포항에서 커피 재배에 도전해온 김일곤 씨(54)는 조만간 1000평짜리 스마트 팜 시설을 지어 커피나무 2000그루를 심기로 했다. 토질만 맞으면 커피 생장에 필요한 열대고원 기후는 자동온실 등 농업기술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미 강원도 일부 지역에선 커피 재배가 이뤄지고 있다. 경북 김천시에서 멕시코 고추 할라페뇨를, 전남 영광군에선 열대과일 애플망고를 키우는 등 기후, 계절의 한계를 뛰어넘는 첨단 농업이 확대되고 있다.
▷농업 분야에서 창업하는 창농(創農)에 미래를 건 청년들도 많아지고 있다. 작년에만 20, 30대 1362가구가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재광 일산쌀농업회사법인 대표(33) 같은 청년농부들은 사람 없이 움직이는 자율주행 트랙터로 경기 고양시 논에 모내기를 하고, 드론을 조종해 농약을 친다. 고령화와 농촌인구 감소로 외국인 근로자 없이 농사짓기 힘든 현실을 스마트 농법으로 극복한 것이다. 스마트 팜 농장을 모바일 기술로 연결하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스마트폰을 조작해 갑작스러운 날씨변화에 대응할 수 있어 청년 농민은 땅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서울 서초구 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 옛 지하상가는 올해 ‘메트로 농장’으로 탈바꿈했다. 스마트 팜 솔루션업체 넥스트온은 발광다이오드(LED) 조명 밑에서 3, 4주간 키운 샐러드 채소들을 백화점 식품관, 프랜차이즈 카페에 공급하고 있다. 교육, 문화시설이 부족해 농촌에 가서 살기 꺼리는 사람들 대신 농업이 도심으로 찾아온 셈이다. 올여름 뜨거운 날씨로 야채 수급에 차질이 빚어진 뒤 유통업체들은 스마트 팜 농장을 신선한 채소 공급원으로 주목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사회적 거리 두기로 도시의 삶이 팍팍해질수록 목가적 농촌생활을 꿈꾸는 이들은 늘어난다. 하지만 첨단기술로 업그레이드된 농업은 이미 이런 전원생활 수준을 크게 뛰어넘었다. 컨테이너 안에 딸기 재배시설을 집약한 ‘딸기 컨테이너 팜’ 기술을 동남아시아에 수출한 스마트팜 업체 퍼밋엔 대기업, 벤처캐피털의 투자가 몰린다. 매년 5%씩 커가는 스마트 팜 산업은 한국 경제의 미래 성장 동력으로 성장하고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8-26 아마존이 온다
한국은 글로벌 유통기업의 무덤이다. 세계 1, 2위 할인점인 미국 월마트와 프랑스 카르푸가 한국에 진출한 지 8년, 11년 만인 2006년 나란히 짐 싸서 떠났다. 외신은 “세계 유통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이번엔 글로벌 이커머스 기업으론 처음으로 1위 업체인 미국의 아마존이 한국에 상륙한다. 아마존은 12개국에 진출해 있는데 현지 회사와 합작 형태로 시장 공략에 나서는 건 한국이 처음이다.
▷아마존은 국내 이커머스 4위 업체인 11번가와 손잡고 해외직구 서비스 ‘아마존 글로벌 스토어’를 31일 오픈한다. 아마존에서 판매하는 수천만 개 상품을 11번가 앱과 웹에서 한국어로 주문할 수 있는 서비스다. 배송기간은 6∼10일,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16만 개 상품을 엄선한 ‘특별 셀렉션’은 4∼6일이다. 배송비는 2만8000원 이상 구매하면 무료다.
▷아마존의 최대 강점은 ‘A부터 Z까지 모든 걸 판다’는 홍보 문구대로 상품 소싱이 어느 기업보다 광범위하고 촘촘하다는 것. 그동안 한국에선 구하기 어려운 주방용품, 운동화, 원서 등을 찾아 12개국 아마존을 뒤지거나, 미국 ‘블프’와 일본 아마존의 특가 찬스를 노리던 소비자들로선 아마존이 온다는 소식이 반갑기만 하다. 주문 결제 배송 반품 환불 등 모든 문의를 한국어로 할 수 있으니 온·오프라인에서 ‘아마존 주문 잘하시는 분’을 찾아 아쉬운 부탁을 할 필요도 없게 됐다.
▷하지만 아마존이 한국 시장에서도 강자가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결제액이 일정 액수를 넘어가면 관세와 부가세가 붙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다. 배송 기간이 단축됐다고는 하나 국내 소비자들은 이미 로켓배송, 총알배송에 익숙해진 상태다. 아마존은 미국 시장 점유율이 40.4%, 일본 아마존은 52%다. 한국엔 절대 강자가 없다. 1위 네이버의 점유율이 17%, 2위 쿠팡이 14%에 불과하다. 어느 한 기업에 몰리지 않을 만큼 한국 소비자들의 입맛이 까다롭다는 뜻이다.
▷월마트와 카르푸의 실패 요인으로는 ‘현지화 전략 부재’가 꼽힌다. 한국인은 백화점 같은 쇼핑 환경을 좋아하는데 외국처럼 창고형 매장을 고집하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글로벌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한국 정착에 성공한 코스트코의 성공 비결도 현지화 전략 거부다. 한국 할인점과는 다른 창고형 매장에서 쇼핑하며 외국에 온 듯한 체험을 할 수 있어 좋아한다는 설명이다. 비슷한 상품과 서비스 사이에서 기어이 차이점을 찾아내고, 가격 서비스 편리함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는 ‘까탈스러운’ 한국 시장에서 아마존이 어떤 유통 역사를 쓰게 될지 궁금하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8-27 접종 꺼리는 2040
“내 아이들은 꼭 백신을 맞히겠다고 약속해 줘.” 마흔둘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 네 아이의 어머니가 동생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신신당부한 말이다. 텍사스에 살던 이 미국 여성은 평소 건강했고 코로나19에 걸리더라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다. 접종을 꺼렸던 그는 감염된 뒤에야 ‘백신을 맞게 해 달라’고 의사에게 부탁했지만 이미 때를 놓친 뒤였다. 미접종자였던 남편 역시 코로나로 숨졌다. 어린 자녀들은 험한 세상에 부모 없이 남겨졌다.
▷젊은층이 백신 접종에 시큰둥한 점은 세계 각국이 비슷하다. 지난해 말 미국에서 실시된 한 설문조사에서 ‘접종을 하겠다’고 응답한 비율이 65세 이상은 75%였지만 20대는 55%에 그쳤다. 실제 접종 완료율도 65∼74세는 80%를 넘긴 반면 18∼24세는 50%에 미치지 못한다. 영국 보건당국은 청년층의 접종을 독려하기 위해 코로나 감염을 겪은 20, 30대의 경험담을 동영상으로 소개하는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한국 역시 18∼49세의 백신 예약률이 67% 선에 그치고 있다. 3명 중 1명은 현재로선 백신 주사를 맞을 생각이 없다는 얘기다. 50세 이상의 경우 예약 사이트 먹통 사태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예약률이 80%를 넘었던 것과 대비된다. 젊기 때문에 코로나에 감염되더라도 극복할 수 있는데 굳이 불편하게 접종을 하고 부작용 우려까지 감수할 필요가 있느냐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짧은 생각이다.
▷현재 국내 위중증 환자 434명 가운데 약 4분의 1이 20∼40대다. 또 40대 이하의 치명률이 낮다고는 해도 지금까지 41명이 목숨을 잃었다. 젊다고 해서 증상이 가볍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증이 아니더라도 감염되면 생활치료센터에 들어가는 등 불편이 뒤따른다. 젊은층은 활동량이 많아 바이러스를 옮길 위험이 크다는 점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본인은 괜찮을지 몰라도 자기 때문에 감염된 가족이나 주변 사람에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젊은층이 접종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을 젊은이들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정부의 백신 공급과 접종 계획이 들쭉날쭉하면서 신뢰가 떨어졌고, 접종 이상 반응이 나타나도 보상을 받기 어려운 점 등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감염 위험을 줄이고 중증으로 진행될 가능성을 낮출 가장 확실한 방법을 외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18∼49세는 9월 18일까지 추가 예약이 가능하므로 시간은 남아 있다. 지금이라도 바로 예약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이 코로나로부터 자신과 주변을 보호하기 위한 현명한 선택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8-28 중국 빅테크의 기부
‘1차 소득격차 축소, 2차 세금 및 사회보장제도, 3차 부유층과 기업의 자발적 기부.’ 17일 중국 공산당 제10차 중앙재경위원회 회의를 주재한 시진핑 국가주석이 ‘다 같이 잘살자’는 뜻의 ‘공동부유(公同富裕)’를 새 화두로 제시하면서 내놓은 실천 계획이다. 눈치 빠른 중국 기업인들은 ‘부유층, 기업의 기부’란 말을 듣자마자 회사 재무책임자를 호출했을 것이다.
▷중국의 매출 3위 전자상거래 업체 핀둬둬는 24일 농촌 문제 해결을 위해 100억 위안(약 1조8000억 원)을 내기로 했다. 창업 후 줄곧 적자였고 흑자 전환된 올해 2분기 순이익도 24억1500만 위안이어서 감당하기 힘든 규모의 기부다. 하지만 시 주석 발언 다음 날 최대 인터넷 기업 텐센트가 500억 위안을 헌납한 뒤 핀둬둬 같은 기업들이 줄을 잇고 있다.
▷중국에선 1978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주도하면서 시작된 ‘선부론(先富論·일부가 먼저 부자가 돼 부를 확산시킨다는 이론)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내년 10월 3연임 결정을 앞둔 시 주석으로선 빅테크들의 기부를 받아 국민에게 나눠주면 정의로운 이미지를 세우면서 빈부격차에 대한 불만도 잠재우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중국식 기부는 미국식 기부와 차이가 크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 같은 실리콘밸리 기업인들은 자기 힘으로 창업해 세계적 기업을 키운 뒤 은퇴를 전후해 기부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분야에 재산의 절반 이상을 쾌척한다. 반면 보조금, 정치적 후원을 통해 기업의 성장 과정에 깊이 개입한 중국 공산당, 정부는 대놓고 ‘사회에 대한 보답’을 요구하고 있다. 거부했다간 알리바바의 마윈 창업자처럼 집에서 그림만 그리게 될 수 있다.
▷군사독재, 권위주의 정부를 경험한 한국인들에게 ‘기업 옆구리 찔러 기부 받기’ 행태는 낯설지 않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기업에 정부와 정치권은 응분의 책임을 요구했고, 오너 일가가 사재(私財)를 출연해 기부하는 것으로 사태가 마무리되곤 했다. 코로나19 이후 정치권에서 제기된 ‘기업이익 공유’ 주장들은 그 잔재인 셈이다.
▷한국의 기부 문화는 빠르게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재산 절반 이상 기부를 약속한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 김봉진 배달의민족 창업자 등은 맨바닥에서 굴지의 기업을 일궈낸 자수성가형 사업가들이다.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산을 물려받은 삼성 일가는 1조 원의 기부금과 함께 국보급 미술품 수만 점을 기부해 한국의 문화 수준을 단번에 끌어올렸다. 기업 손목 비틀기를 진짜 기부와 헷갈리는 지금의 중국 수준에 한국이 머물렀다면 결코 볼 수 없었을 모습들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8-30(월) 닌자 미사일
9·11테러 이후 미국의 대테러 전쟁은 무인항공기(드론)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특히 전투용 드론의 등장, 즉 무인기와 정밀유도폭탄의 결합은 수백∼수천 km 밖에서 아군의 희생 없이 표적을 타격하는 군사적 혁신이자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표적을 오인해 엉뚱한 희생자가 생기고 민간인까지 폭발에 휘말려 사망하는 부수적 피해로 인해 현지의 반미(反美) 감정을 확산시켰다. 미국은 그 해법도 밀리테크(군사·military와 기술·technology의 결합)를 통한 보다 정교하고 깔끔한 무기 개발에서 찾고 있다.
▷미군이 28일 아프가니스탄 동부 낭가르하르주에서 이슬람국가(IS)의 한 분파인 IS-K의 고위급 표적 2명을 드론 공격으로 제거했다. 이틀 전 카불 공항에서 미군 13명을 포함해 200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낸 자폭 테러의 기획자와 조력자를 보복 살해한 것이다. 미 국방부는 민간인 사망자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외신들에 따르면 이번 보복 조치에 사용된 드론은 ‘하늘의 암살자’로 불리는 무인공격기 MQ-9 리퍼, 타격 무기는 ‘닌자 미사일’로 불리는 헬파이어 미사일 특수개량형(AGM-114 R9X)이었다고 한다. 적국 수뇌부나 테러조직 지휘부를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하는 ‘참수작전’의 핵심 전력이 동원된 것이다.
▷닌자 미사일은 기갑차량 파괴용인 헬파이어 미사일을 인간 표적용으로 개량한 비폭발성 운동에너지 미사일이다. 폭약이 든 탄두가 없고 그 대신 강철 칼날 6개가 표적에 충돌하기 직전 펼쳐져 내리꽂히면서 반경 50cm 영역을 파괴한다. 주변 피해를 최소화하고 목표만 확실히 해치우는 것이다. 그 칼날이 일본 자객 닌자(忍者)의 암살용 검처럼 생겼는데, 1970년대 미국에서 많이 팔린 주방용 식칼 브랜드 긴수(Ginsu)를 따서 ‘나는 긴수’라고도 불린다. 2017년 실전 배치된 이래 알카에다 등 테러 지휘부 제거에 사용됐다. 그 피격 현장 사진을 보면 주변에 폭발 흔적이 없고 차량만 갈가리 찢긴 모습을 볼 수 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이번 보복작전 지침은 “그냥 진행하라(Just do it)”였다고 한다. 바이든은 “이게 마지막이 아니다. 끝까지 뒤쫓아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며 미군을 희생시킨 테러엔 철저한 응징으로 본때를 보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미국은 일단 조기 철군을 통해 아프간의 수렁에서 벗어나더라도 테러와의 장기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 그것은 밀리테크를 더욱 앞세운 특수작전일 것이다. 하지만 깨끗한 전쟁은 없고, 뛰어난 기술적 우위도 잘못된 전략 아래선 승리할 수 없다. 실패로 끝난 20년 전쟁의 초라한 뒷모습이 보여주듯.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08-31(화) 어린이 접종 의무화
이스라엘 정부는 9월 1일로 예정된 각급 학교 개학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최근 델타 변이의 영향으로 하루 1만 명이 넘는 확진자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학교 문까지 열면 감염자가 폭증할 우려가 있었다. 논란 끝에 개학은 계획대로 하되 12세 이상 미접종 학생들은 교내에서 백신을 맞을 수 있도록 해 학생 접종률을 높이기로 했다. 더 나아가 미국에선 어린이 접종을 의무화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하지만 아동·청소년에 대한 접종은 신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은 29일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백신을 의무적으로 접종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미국에선 12∼15세의 43%, 16∼17세의 51%가 1회 이상 백신을 맞았는데 더 적극적으로, 더 어린 학생까지 접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 스페인 덴마크 등 유럽국들도 12∼18세 1차 접종률이 50%를 넘겼다. 중국에선 각 지방정부에서 학교마다 접종 진행 상황을 확인하면서 접종을 독려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12∼17세에 대해 4분기부터 접종을 할 계획이라고 어제 밝혔다. 초6∼고2 학생들에 대한 접종 일정이 처음으로 나온 것이지만 부모들은 이 소식을 마냥 반기지는 못한다. 1년 반 동안 온·오프라인 수업을 왔다 갔다 하며 생활이 흐트러진 아이를 보면 하루빨리 백신을 맞혀 안정적으로 학교에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면서도 화이자·모더나 백신은 접종 이후 심근염 같은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점에서 걱정을 떨칠 수 없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나뉜다. 신중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한국에선 19세 이하 감염자 중 사망 사례가 없고 어린이들은 무증상이거나 경증인 경우가 많아 접종에 따른 득과 실을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고위험군 가족과 동거하거나 기저질환이 있는 학생 등이 아니라면 접종 여부를 각 가정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본다. 반면 델타 변이의 무서운 확산에 따라 더 이상 아동·청소년도 안전하다고 할 수 없고, 사회 전체의 집단면역 달성을 위해선 장기적으로 학생들에게도 접종을 권할 수밖에 없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아이들의 코로나 감염을 줄이기 위해서는 아이들에 대한 접종 못지않게 어른들의 접종률부터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가족이나 교사, 강사가 아이들에게 바이러스를 옮기는 사례가 국내외에서 꾸준히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어린이에 대해 대규모 접종이 진행 중인 해외의 상황을 참고해 부작용을 줄일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상황에 가장 적합한 아동·청소년 접종 방안을 찾아나가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