護國1/ ≪북한의 대한민국 침략사≫
■북, 대한민국 공격사 65년
['천안함 北 소행' 발표] 김일성·김정일의 대한민국 공격사 65년
여객기 폭파·도끼 살해·군함 격침·납치… 피랍 어부만 3710명
6·25 이후 북한에 의해 납치됐거나 사망한 한국인은 최소 4119명에 이른다. 1953년 7월 정전(停戰) 이후 국ㆍ내외에서 납치된 인원만 3811명이다(2009년 발간 정부 통일백서). 여기에 북한의 도발에 의한 사망자가 군인과 경찰, 민간인을 포함해 최소 308명에 이른다. 이들은 1967년 해군 당포함 피격 침몰 사건(39명 사망)과 1968년 울진ㆍ삼척 무장공비 사건(18명 사망), 1987년 KAL 858기 폭파사건(115명 사망)과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17명 사망), 이번의 천안함 사건(46명 사망) 등 북한의 테러, 정규군ㆍ무장공비에 의한 공격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이다. 이 숫자는 언론에 의해 드러난 사건 희생자만 집계한 것이어서 실제 수는 이보다 더 늘어날 수 있다. 대한민국에는 정확한 피해자 통계도 없다.
○1950년 6월 25일 불법 남침
/6·25 전면전
개요 = 북한군이 당시 남북분단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을 감행했다. 선전포고도 없었다. 3년1개월2일간의 전쟁이 계속됐고,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조인하면서 전쟁이 중지되었다.
피해= 사망 51만1488명(군인 13만7889명, 민간인 37만3599명), 납치·실종 41만2239명(군인 실종 2만4495, 민간인 납치·실종 38만7744명), 부상 68만367명(군인 45만742명, 민간인 22만9625명), 포로 8343명
○1955년 5월 28일 대성호 납북
개요 = 한국전쟁 이후 첫 한국 어선 납북사례. 피해= 선원 10명 납북
○1967년 1월 19일 해군 당포함 피격 침몰
개요 = 명태잡이 어선의 월경을 막기 위해 초계 중이던 당포함이 북한 동해안 동굴포대의 해안포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피해= 승무원 79명 중 사망 39명, 부상 40명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침투 사건
개요 =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무장공비 김신조 등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비밀 침투했다.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들어왔다가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수류탄과 기관총을 난사한 사건이다. 공비 31명 중 28명 사살, 2명 도주, 김신조 생포. 피해= 최규식 종로경찰서장 순직, 다수의 민간인 인명피해
○1968년 1월 23일 미 군함 푸에블로 납치 사건
개요 = 동해 공해상(公海上)에서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가 북한의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에 의해 납치된 사건이다. 피해= 납치 당시 사격을 받아 미군1명 사망, 82명 귀환
○1968년 10월 30일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
개요 =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1·21사태의 실패를 만회하고, 남한에서 반정부 민중 봉기를 일으킬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울진ㆍ삼척 지구에 무장공비 120명을 침투시킨 사건이다. 피해= 이승복 어린이를 포함 군경 총 18명 사망
○1969년 6월 12일 흑산도 간첩선 침투
개요 = 남파 간첩과 접선, 이들을 월북시키기 위해 전남 신안 대흑산도로 북한의 간첩선이 침투했다. 섬으로 상륙하던 북한 공작원 3명을 사살하고 다음날 도주하던 6명을 추가로 사살했다.
○1969년 12월 11일 KAL YS-11기 납치 사건
개요 =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을 태우고 강릉에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의 KAL YS-11기가 대관령 상공에서 승객으로 위장해 타고 있던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해 납치됐다. 피해= 승객 승무원 중 39명은 한국으로 귀환하고 12명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970년 6월 5일 해군 방송선 납치 사건
개요 = 우리 어선 보호를 위해 서해 연평도 해역에서 비무장 경계임무 중이던 해군 방송선이 북한에 의해 납치됐다. 피해= 함장 정수일 중위를 포함 승조원 20명 납북
○1970년 6월 22일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미수 사건
개요 = 한국전쟁 20돌을 앞둔 1970년 6월 22일 새벽 서울 국립현충원에 북한 공작원이 잠입, 현충문에 폭약을 장치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하는 요인 암살이 목표였다. 천행으로 폭약 설치 중 폭약이 폭발돼 미수에 그쳤다.
○1975년 9월 11일 전북 고창 무장공비 침투사건
개요 = 전북 고창의 전경대 해안초소에서 경계병이 해안 순찰 중 북한공작원 두 명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두 명 중 한 명을 사살했고 한 명은 도주했다. 피해= 경계병 3명 전사, 2명 부상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개요 =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두 명이 북한군이 휘두른 도끼에 의해 살해됐다. 피해= 한국군 네 명 부상. 미군 장교 2명 사망, 4명 부상
○1977년 7월 30일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미수
개요 =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배우 윤정희 부부를 유고의 자그레브로 유인해 북한으로 납치하려 했다. 우리의 예술인조차 납치 대상으로 삼았던 대표적인 사건이다.
○1977~1978년 8월 서해 고교생 납치
개요 = 1977년 8월과 1978년 8월 전남 홍도와 1978년 8월 군산 선유도에서 1년 사이 고교생 다섯 명이 실종됐다. 이후 고교생들이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됐음이 밝혀졌다. 2006년 5월 북한이 일본인 피랍자 요코다 메구미의 유골을 일본에 공개하는 과정에서 1978년 선유도에서 실종된 학생 김영남의 존재가 알려지게 됐다. 메구미가 김영남과 북한에서 결혼했던 것. 피해= 고등학생 5명 납북
○1978년 1~7월 신상옥·최은희 부부 납치
개요 = 1978년 1월 14일, 홍콩에 머물던 배우 최은희씨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되었고, 같은 해 7월 19일 아내를 찾겠다며 홍콩을 찾았던 신상옥 감독 역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됐다.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납치 5년이 지난 1983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의 미국대사관을 통해 극적으로 탈출했다. 피해= 2명
○1978년 4월 13일 고상문씨 노르웨이에서 납북
개요 = 서울 수도여고 교사로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연수 중 여권분실을 신고하러 한국대사관을 찾다 택시기사의 착오로 북한대사관에 들어가서 북한 공관원에 의하여 붙들려 납북됐다. 피해= 1명
○1980년 3월 23일 한강하구 무장공비 침투
개요 = 한강 하구에서 경계 근무 중이던 우리 초병이 경기 고양 법곳리 한강변으로 침투하던 무장공비 3명을 발견하고 전원 사살한 사건이다.
○1981년 6월 21일 충남 서산 무장 간첩선 침투
개요 = 북한 공작원 아홉 명이 사살되고 김광현은 생포됐다. 당시 김광현은 40대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 남파 공작원의 연령이 젊어지기 시작했다.
○1982년 5월 15일 2인조 동해안 무장공비 침투
개요 =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지경리 해안으로 침투하던 북한의 무장공비를 해안 경계병이 발견, 교전 끝에 한 명은 사살했고 나머지 한 명은 도주했다.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묘소 테러
개요 =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일행의 아웅산 묘소 방문 일정을 미리 알아낸 북한 공작원들이 묘소 내의 지붕에 폭탄 두 개를 설치해 터트렸다. 전두환 대통령은 당시 예정보다 현장에 늦게 도착해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피해=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이계철 주버마 대사,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 하동선 기획단장, 이기욱 재무차관, 강인희 농수산차관, 김용한 과기처차관, 심상우 의원, 민병석 주치의, 이재관 비서관, 이중현 동아일보 기자, 한경희 경호원, 정태진 경호원 등 17명 사망. 이외 14명 부상
○1983년 12월 3일 부산 다대포 간첩 침투
개요 = 부산 다대포 해안에 매복근무 중이던 초병이 침투하는 간첩 두 명을 발견하고 격투 끝에 생포했다. 이들을 침투시켰던 반잠수정은 우리 고속정과의 충돌로 격침됐다.
○1987년 1월 15일 동진호 납북
개요 = 서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제27동진호가 북한에 의해 납북된 사건이다. 피해= 어부 12명 납북
○1987년 11월 19일 KAL 858기 폭파 테러
개요 =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KAL 858기가 미얀마 근해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북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에 의해 폭파됐다. 피해= 승객과 승무원 115명 전원 사망
○1993년 11월 30일 강화 교동도 무장공비 침투
개요 = 강화 교동도 빈장포 해안을 따라 침투하던 북한의 무장공비를 해안 경계병이 발견, 교전을 벌였다.
○1995년 10월 24일 충남 부여 무장공비 침투
개요 = 충남 부여군 정각사 뒷산에서 남파 간첩을 월북시키기 위해 내려온 무장공비 두 명을 초병들이 발견하고 교전 끝에 한 명을 사살하고 한 명을 생포했다.
○1996년 9월 18일 강릉 잠수정 침투
개요 = 공작원 침투 임무를 위해 내려왔던 북한의 잠수정이 속초 해역에 좌초됐다. 타고 있던 공작원들은 강원도 일대에 상륙했다. 전쟁에 대비하여 한국의 군사 시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강원도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에 참석하는 주요 인사들을 암살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다. 우리 군경의 추적 끝에 13명을 사살하였고, 조타수 이광수를 생포했다. 피해= 국군 11명, 경찰·예비군 2명, 민간인 4명 사망
○1997년 2월 15일 이한영 피살
개요 = 이한영씨가 성남 분당 자신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북한공작원 두 명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이씨는 김정일의 동거녀로 알려진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아들로, 1982년 10월 한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후 한 방송국 PD로 일하면서 ‘대동강 로열패밀리’란 제목의 책을 펴내 북한 정권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피해= 1명 사망
○1998년 6월 22일 속초 앞바다 잠수정 침투
개요 = 강원도 속초시 동쪽 바다에서 북한의 유고급 잠수정 한 척이 어선이 내려놓은 꽁치잡이 그물에 걸려 표류하다 해군 함정에 의해 동해안으로 예인됐다. 잠수정 내에서 승조원과 공작원으로 추정되는 9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1999년 6월 15일 1차 연평해전
개요 = 서해 북방한계선 남쪽 2㎞ 해역까지 내려온 북한 경비정 4척에 대해 해군 참수리급 고속정과 초계함 10여척이 두 차례에 걸쳐 선체를 충돌시키는 밀어내기식 공격을 감행했다. 충돌 공격을 받은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가 25㎜ 기관포로 공격을 가해 왔다. 북한 어뢰정 3척도 공격에 가담했으나 우리 해군 참수리급 고속정, 포항함의 반격으로 반파돼 퇴각했다. 피해= 해군 7명 부상
○2002년 6월 29일 2차 연평해전
개요 = 북한 경비정 두 척이 남한 측 북방한계선을 침범, 기습포격을 가해 해군 고속정 참수리호가 피격됐다. 25분간 양측 함정은 교전을 벌였고, 참수리호는 격침됐다. 피해=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6명이 전사, 19명 부상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피살
개요 = 금강산 관광지구에서 한국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 군사 경계지역을 침범하였다는 이유로 북한 초병에 의해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피해= 1명
○2009년 11월 10일 대청해전
개요 = 북한의 경비정이 우리 측의 경고를 무시하고 북방한계선을 침범. 이에 해군의 고속정이 경고사격을 가하자 북한 경비정이 남측 고속정에 조준사격을 하며 교전이 발생했다. 우리 해군의 사격으로 북한 경비정이 반파되어 북으로 퇴각한 사건이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격침
개요 = 서해 백령도인근에서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북한 잠수정의 기습 어뢰 공격을 받아 두 동강이 나면서 침몰했다. 승무원 46명이 사망했다. 피해= 천안함 승무원 46명, 해군UDT대원 1명(한주호 준위)
●6·25 전쟁 이후 北 납치史
납치어선 132척, 어부 3710명… 납북 후 미귀환 어부도 440명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정전 이후 북한은 끊임없이 우리 국민을 납치해 갔다. 통일백서에 따르면 북한에 의해 납치된 우리 국민은 무려 3811명에 이른다. 이들 중 3317명은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494명은 여전히 북한에 억류돼 있다.
이들 납북자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1955년 5월 28일 대성호(10명)를 시작으로 동해와 서해에서 납치된 우리 어민들이다. 통일부가 발간하는 통일백서 및 납북자 관련 단체들을 통해 확인되고 있는 것만 지금껏 어부 3710명과 어선 132척이 납북됐다. 피랍자 중 3270명은 송환되었으나 440명은 지금도 북한에 억류되어 있다.
북한의 우리 어선과 어부에 대한 납치는 1960년대 중·후반에 특히 극에 달했다. 납북자가족모임(대표 최성용)에 따르면 1968년 한 해에만 44척의 어선이 납치됐고, 1964년부터 1969년까지 6년간 무려 77척의 우리 어선이 납북됐다. 이렇게 납북된 어선의 어부 중 223명이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북한에 억류돼 있다.
세상에 알려진 통계치보다 납북 어선과 어부는 더 많을 수 있다. 통일부는 물론 납북자 단체들이 내놓고 있는 자료들의 현황이 서로 상이할 뿐만 아니라 이제껏 납북자와 관련한 정확한 실태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나 납북자 관련 단체들이 내놓은 자료를 통해 현재 억류 중으로 알려진 납북자들이 북한에 생존해 있는지, 그 생사(生死) 여부조차 현재로서는 확인해볼 뾰족한 방법이 없다. 현재 간간이 이루어지고 있는 납북자들의 귀환은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송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다. 1967년 천대11호를 타고 있다가 납북됐던 어부 진정팔씨(2002년 귀환·2009년 사망), 1970년 봉산22호와 함께 납북된 이재근씨(2000년 귀환), 1973년 꼬막 채취선 대영호를 탔다가 납북됐던 김병도씨(2003년 귀환), 1975년 동해에서 납북된 천왕호 선원 고명섭씨(2005년 귀환)는 모두 목숨을 건 탈북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1960~1970년대 납북된 어부들이 현재까지 생존해 있다면 대부분 일흔을 넘긴 고령이다. 빠른 시일 내 분단이 해소되지 않으면 이들이 고향 땅을 밟을 가능성은 낮다. /
조동진 기자 zzang9@chosun.com
■[시간여행] 북한의 도발 사례
▲1967년 1월 19일 해군당포함(56함)초계함이 북한 해안포에 격침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강서룡 국방차관. 김영관 해군 참모총장등 군 고위장성들은 91함상에 안치된 56함정사건11구의 영령의 명복을 빌었다.
입력 : 2015.08.24 14:32
북한의 도발
현재 목함지뢰와 폭격 도발로 인해 남북한이 초긴장 상태로 대립하고 있다. 북한은 과거부터 수십여차례에 걸쳐 군사 도발을 감행한 적이 있다. 따지고 보면 북한의 군사 도발은 그렇게 특별한 일도 아니다. 그 만큼 수 많은 군사도발을 이어왔다.
/1967년 흉탄에 가라 앉는 56함의 최후.
/1968년 북한군 20여명이 침입하여 동부서 순찰대에 습격도주했다. 회의장입구에서 북측경비병이 미군을 습격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포함한 북측의 무장공비가 청와대기습을 시도 했다. 공비 김신조가 생포되고 있다.
/1968년 1월25일 청와대 습격을 위해 세검정 부근까지 내려왔던 1.21무장공비를 추적끝에 사살한 수색대원들이 사체를 수습하고 있다.
/1969년 판문점에 전시된 무장공비 침입의 증거. 정전위 회장밖에 주문진에 침입하다가 사살된 무장공비의 유루품이 널려있다.
/1972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김일성.
화해협력관계의 시작
7월 4일 이후락 중정부장이 북한과 합의한 7개항의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평화통일, 교류, 적십자회담, 서울-평양 직통전화 설치, 남북조절위 설치 등을 밝혔으나 그 성과는 미미했다.
/1976년 판문점내에서 미류나무 절단작업중이던 미군을 도끼로 무장한 북측군이 습격, 보니파스 미군대위등 2명을 살해했다. /당시 유엔군사령부가 촬영
'또 시작된 도발'
1976년 '8ㆍ18판문점도끼만행사건'은 한반도를 일촉즉발의 전쟁 발발 위기로 몰아갔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의 도끼만행에 목숨을 잃었다.
/1976년 8월 18일 북한의 도끼만행 사건으로 인해 19일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려 사상 첫 옥외회의를 하고있는 경비장교회의는 북한의 생떼로 17분만에 끝이 났다.
/1987년 11월 29일 인도양상공에서 김현희 주도하에 대한항공858편 테러사건이 있었다. 공중폭파된 대한항공 858기의 잔해가 승객들의 일부유품과 함께 1990년5월 대한항공 화물기편으로 김포공항에 돌아왔다.
/1987년 대한항공측이 버마정부로 부터 인수한 858편기 잔해들(위), 1988년 기자회견장에서 김현희(아래).
김현희는 1988년 1월 15일 기자회견장에서 고개를 떨군채 내-외신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했다. 김은 기자들이 현재의 심경을 묻자 '비행기 폭파로 돌아가신분들과 가족을 생각하면...' 이라며 울먹였다.
/1999년 6월 15일 제1차 연평해전이 발생했다. NLL수역에서 발생한 연평해전 당시의 모습.
/2002년 6월 29일 제2차 연평해전이 발생했다. 제2연평해전 유가족들이 2003년 6월 24일 평택 해군 제2함대 사령부에서 열린 제2연평해전 전적비 제막식에서 전사자들의 얼굴 부조를 만지며 오열하고 있다.
이후에도 北의 도발은 계속 됬다.
-2009년 11월10일 서해교전(대청해전)서해북방한게선에서 남북해군교전 북한해군 반파 3명사상 아군피해 경미.
-2010년 3월26일 백령도해상에서 천안함 피격침몰사건 발생.
-2010년 11월23일 북한 연평도에 포격실시 전사2명 부상16명 주민가옥20여채 전소.
북한이 도발에 대해 '사과나 유감'을 표명한 사례는 4차례
1. 북한이 도발에 대해 처음으로 사실상의 사과를 한 건 1972년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7·4 공동성명을 위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을 때, 김일성은 1968년 발생한 1.21 청와대 습격 사건을 거론하며 내부 강경파가 저지른 일이라고 직접 유감을 표명했다.
2. 1976년 북한군이 도끼를 휘둘러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한 이른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한미 양국이 데프콘 3호를 발령하고 전투 태세를 갖추며 압박하자, 북한은 황급히 김일성 명의의 사과문을 전달해 위기를 모면했다.
3.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과 2002년 2차 연평해전 당시 북한의 유감 표명은 남북 장관급 회담 재개 등 대화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진 / 조선일보DB
2017-09-16 北도발 37건중 20건 ‘주말 또는 연휴’
주변국 방심 틈타 전시효과 극대화… 北 ‘기념일’ 전후로도 23건 집중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11일(현지 시간) 대북 석유 수출을 제한하는 조항 등이 포함된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자 북한은 즉각 “최후 수단도 불사할 준비가 돼 있다”며 강력한 도전을 예고했다. 실제 나흘 뒤인 15일 북한은 탄도미사일 도발을 감행했다.
동아일보가 1998년 북한의 대포동 1호 발사 이후 5일 탄도미사일 발사까지 북한의 주요 도발(핵 실험, 대형 미사일 발사, 연평도 포격 등 포함) 37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 북한은 이번처럼 안보리의 규탄 성명 발표나 제재안 결의 등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 직후 빈번하게 도발에 나선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은 지난해 1월 안보리가 4차 핵실험을 규탄하며 ‘중대한 추가 제재’를 예고하자 직후 장거리 로켓인 광명성호를 발사했다. 이에 안보리가 3월 결의안 2270호를 채택하자 노동미사일 발사로 도발했다. 올해 역시 지난달 5일 유엔 안보리가 2371호를 통과시키자 북한은 “새 대북제재 결의를 전면 배격한다”고 선언한 뒤 괌 포위사격 위협, 6차 핵실험 등을 감행했다. ‘안보리의 규탄→북한의 도발→안보리의 제재 결의→북한의 더 강한 도발’이란 패턴이 반복된 것이다. 이는 최근 수위가 높아진 안보리 제재가 실제 북한에 상당한 부담을 주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또 분석 결과 북한은 37건의 도발 중 23건(62%)을 이른바 북한의 ‘8대 기념일(김일성·김정일·김정은 생일 등)’에 집중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16건이 기념일 직전 또는 당일에 집중돼 다음 달 10일 노동당 창건일을 앞두고도 추가 도발에 나설지 주목된다.
이와 함께 북한은 20건(54%)의 도발을 ‘주말(금∼일) 또는 설·추석 연휴 전후’에 감행했다. 주변국들이 방심한 시점에 기습 도발을 이어온 셈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북한 지도부에선 주말 또는 국제적으로 대형 이슈가 있는 시점 등을 골라 도발하는 게 ‘전시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고 했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11월 14일 33년 만의 판문점 北 총격…도발·경계실패 철저히 따져야
북한 병사 1명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13일 귀순했다. 그러나 북한군 총격으로 귀순 병사는 몸에 6∼7발의 총상을 입었으며, 긴급 후송돼 응급수술을 받았음에도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라고 한다. JSA 지역에서의 북한군 총격은 1984년 11월 소련인 바실리 마투조프 망명 사건 이후 33년 만이다. 당시 북한군은 망명 저지를 위해 사격을 하며 군사분계선(MDL)을 넘었고, 총격전이 벌어져 한국군 1명이 전사하고, 북한군 3명이 사망했다.
아직 정확한 진상이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따져봐야 할 부분이 많다. 첫째, 북한군 총탄이 MDL을 넘어왔다면 명백한 도발이다. 군 당국은 ‘남측으로 날아오지 않았다’고 했으나 축소·은폐 의혹이 짚인다. 총탄 6∼7발을 맞은 채 MDL 남쪽 50m 지점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귀순병이 MDL을 넘은 뒤에도 사격을 계속했는지 등을 철저히 밝혀내야 한다. JSA 초소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다면 더 큰 문제다. 남측 대응이 적절했는지도 의문이다. 판문점 지역은 유엔군사령부 관할이지만 한국군이 주요 역할을 맡고 있으며, 귀순 병사를 구조한 것도 한국군이다. 대낮임에도 총성을 듣고 상황을 파악했다는데, 경계 실패가 의심된다. MDL 남쪽 지역임에도 북한군 공격이 두려워 포복 자세로 접근하는 등 구조 골든타임을 허비했다고 한다. 대대적인 반격 채비를 갖추고 과감한 구조에 나섬으로써 남쪽을 향해 사격 엄두도 못 낼 정도의 결기를 보여주었어야 했다.
둘째,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비무장 병사에 대해 무차별 사격을 가한 것은 그 자체로 반(反)인륜적 만행이다. 독일은 통일 후 베를린 장벽을 넘는 동독 주민들을 사살하도록 명령한 동독 지휘라인의 책임자들을 사법 처리했다. 동독법에 적합한 행위였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독일 사법부는 과잉 대응으로 ‘보편적 인권을 침해한 것’이란 판결을 내렸다. 비저항 탈주자를 사살하는 ‘과잉 행위’를 규탄하고, 처벌을 예고함으로써 자유를 찾는 행렬을 격려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노무현-김정일 회담 직전인 2007년 9월에도 북한군이 JSA 지역으로 귀순한 사실이 이번에 새로 밝혀졌는데, 당시 왜 은폐했는지도 규명해야 한다.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면 또 하나의 심각한 대북 굴종이다.
문화일보 사설
합참 “北, 귀순 북한군에 40여발 사격한듯”
유엔군사령부 “지프타고 접근
하차후 추격조가 무차별 총격”
MDL 넘은후에도 北사격 시사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지난 13일 귀순한 북한 군인에 대해 추격조가 40여 발의 사격을 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병사가 군사분계선(MDL)을 넘어선 뒤에도 총격이 가해졌는지를 놓고 혼선이 계속되고 있어 명확한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
서욱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은 14일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어제 오후 3시 14분쯤 판문각 남쪽에서 이동하는 북한군 3명을 관측했고, 이후 북한군 1명이 지프를 타고 돌진해 남쪽으로 오는 것을 식별했다”며 “북한군 3명과 적 초소에 있던 1명이 (귀순 병사를) 추격해 사격을 했고, 40여 발을 사격한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유엔군사령부도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북한군 한 명이 대한민국과 북한의 실질적인 경계선인 군사분계선 인근까지 차량을 통해서 왔다”면서 “이후 그는 차량에서 하차해 계속해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도주했으며 도주하는 동안 다른 북한 병사들로부터 총격을 지속적으로 받았다”고 설명했다. 군사분계선을 넘은 뒤에도 사격이 가해졌음을 시사한 것이다. 반면 군 소식통은 “북한군 추격조 수명이 귀순자를 추격해왔고 귀순자를 살상할 목적으로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면서도 “총격은 군사분계선 이북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는 “자세한 사항은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조사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한 정보당국자는 “이 귀순 병사의 상태가 2차 수술을 결정하기 힘들 정도로 계속 고비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유진 기자 klug@munhwa.com
11.14 송영무 "JSA 北총탄 처음 넘어…군사정전위 통해 조치 요구할 것"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14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14일 북한군이 전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귀순하던 병사에게 사격을 가한 것과 관련, 이는 북한 총탄이 우리쪽으로 넘어온 최초의 사건이라고 밝혔다.
송 장관은 이날 국회 국방위원회 긴급보고에 출석, ‘JSA에서 북한의 총탄이 우리 쪽으로 넘어온 최초의 사건 아니냐’는 정진석 자유한국당 의원의 질문에 “맞다”고 답했다.
이어 송 장관은 ‘북한이 정전 협정을 위반했다. 북한에 대해 바로 조치를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나오자 “그래서 바로 (총격 사건을) 어나운스(발표)를 했다”며 “군사정전위를 통해 북한 측에 (적절한 조치를) 요구하겠다. 요구가 안 받아들여지면 법적 조치를 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의 조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송 장관은 귀순 병사 사건과 관련된 우리 군의 대응에 대해 “몇 초가 되지 않는 순간에 상황을 판단해 (위기를) 최소화하고 넘어온 병사에 대해서도 대처를 잘 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앞서 합참은 이날 국회 국방위에서 ‘북한군이 귀순병사를 향해 40여발 사격을 했으며, 귀순자 1명이 MDL(군사분계선) 50m 지점에 쓰러져 있는 것을 식별한 뒤 (우리군) 간부 3명이 포복으로 접근해 귀순자를 안전지역으로 끌어냈다”고 보고했다.
11.17 탈북 병사 쓰러진 뒤에도 총질, '통일 후 끝까지 단죄' 선언을
판문점에서 탈북하다 총상을 입은 북한 귀순병을 치료 중인 이국종 아주대 중증외상센터장은 그제 "뒤에서 맞은 총알이 골반을 부수고 들어가 45도 각도로 위로 향하면서 소장을 으스러뜨리고 위쪽 복벽(배근육)에 박혔다"며 "쓰러진 상태에서 맞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북한군은 귀순병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쓰러진 후에도 확인 사살하듯 총질을 했다는 의미다.
체제가 싫다고 떠나는 사람들의 등 뒤에서 쏴 죽이는 것은 문명사회에선 상상할 수 없는 범죄다. 베를린 장벽 28년간 동독을 탈출하다가 사망한 주민은 584명이었다. 이 중 369명은 국경수비대가 정조준한 총에 맞았다. 베를린 장벽에서만 126명이 사살됐다. 통일 후 독일은 동독의 과거 범죄에 비교적 관대했지만 국경수비대 발포에 연루된 사람은 말단 병사부터 최고 지도부까지 예외 없이 법정에 세웠다.
그 재판은 마지막 발포 희생자였던 크리스 게프로이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를 찾으면서 시작됐다. 게프로이는 1989년 2월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10발의 총을 맞고 숨졌다. 1991년 기소된 국경수비대원들은 법정에서 "당시 동독 법과 규정을 따른 것"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자유를 찾아가는 동료 시민을 향해 37m라는 짧은 거리에서 상체를 정조준한 것은 처형이나 다름없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독일은 발포 명령자를 찾기 위해 동독 공산당 문서를 샅샅이 뒤졌으며 1974년 당 안보 담당이던 에리히 호네커가 "가차 없이 총포가 사용돼야 한다"고 발언한 것을 확인했다. 동독 최고 지도자였던 호네커가 기소된 것은 이 발포 명령 때문이었다. 국방장관과 총사령관도 살인 교사죄로 중형을 선고받았다. 독일은 이 문제로 246명을 재판에 회부해 132명에게 유죄를 내렸다.
북·중 국경을 넘다가 총격을 당했다는 탈북자 증언은 쉽게 들을 수 있다. 주민을 노예로 짓밟으면서 탈출하면 등 뒤에서 총을 쏜다. 정부는 '통일 후 탈북민에 대한 조준 사격만은 끝까지 처벌한다'고 선언해야 한다. 북 주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다.
조선일보 사설
11-29 北, ‘도발 중단’ 75일만에 탄도미사일 1발 발사…동해상 낙하
북한이 '도발 휴지기‘에 들어간지 75일만인 29일 새벽 탄도미사일을 기습 발사하는 도발을 감행했다.
합동참모본부는 29일 “북한이 29일 새벽 3시 17분경 평안남도 평성 일대에서 동쪽으로 불상의 탄도미사일을 1발을 동해상으로 발사했다”며 “미사일과 관련한 세부 사항에 대해선 한미 군 당국이 분석 중에 있다”고 밝혔다. 북한이 평양 북서쪽에 위치한 평성에서 미사일을 쏜 건 이번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이 미사일은 동해상 일본측 배타적경제수역(EEZ)에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 등 도발을 감행한 건 9월 15일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을 발사해 북한 탄도미사일 발사 역사상 가장 긴 거리인 3700여km까지 비행시키는데 성공한지 75일만이다. 이후 별다른 도발이 없이 70여 일을 넘기자 일각에선 북한이 고강도 대북제재와 최근의 테러지원국 재지정, 전략폭격기 B-1B 편대의 풍계리 핵실험장 코앞 출격 등 미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를 통한 고강도 군사적 압박 등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강도 높은 대북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북한이 더 큰 도발을 준비하느라 관련 기술을 완성시키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안심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앞서 일본 정부는 27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전파신호를 포착하는 등 북한이 도발 재개에 나설 이상징후가 속속 포착된 바 있다. 군 관계자는 “북한이 원래 28일 새벽 도발하려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나 날씨가 좋지 않아 잠시 도발 타이밍을 늦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한편 도발 임박 징후를 포착하고 비상 근무에 들어갔던 우리 군은 북한이 미사일을 쏜지 6분만인 이날 새벽 3시 23분경 북한 탄도미사일 도발에 대응해 지·해·공 미사일 합동 정밀타격훈련을 실시했다. 군 당국이 북한 도발 직후 이에 맞서 육군 및 해군, 공군 미사일 전력을 모두 동원해 무력시위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합참은 “북한의 도발원점까지의 거리를 계산해 지·해·공 미사일이 동시에 탄착하는 방식을 적용해 정밀타격훈련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
손효주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