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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36/ 국방15/ 국방과학연구 - 사이버전 - 핵개발 능력 - 파키스탄 핵폭탄 만든 압둘 카디르 칸 박사의 육필 회고

상림은내고향 2021. 8. 20. 21:03

대한민국36/ 국방15/

■국방과학연구

2015-04-05 “제2의 천안함은 없다” - 해군 최초 잠수함사령부 현장취재

 

2월 하순 오후 남녘의 바닷가는 뜻밖에도 따뜻했다. 지레 겁먹고 두툼한 겨울 점퍼를 입은 취재팀이 무안할 정도로.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부드럽다. 부두에 갇힌 바다는 고요하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진해군항. 벚꽃의 도시 진해는 일제강점기 일본 해군의 요충지였다. 이곳에서 2월 2일 한국 해군 잠수함사령부 창설식이 열렸다.

 

잠수함 강국 북한

잠수함은 전략무기다. 전술무기가 개별 전투에서 사용되는 것이라면 전략무기는 적의 군사기지나 산업시설, 주요 무기체계를 파괴해 전쟁수행능력을 현저히 떨어뜨리거나 전쟁을 종결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핵무기, 대륙간탄도미사일, 전략폭격기, 항공모함, 잠수함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처럼 전략무기는 보유 사실 자체만으로 적에게 큰 위협이 된다.

 

그중에서도 잠수함은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내는 효율 만점의 비대칭전력으로 꼽힌다. 특히 전략핵잠수함에서 발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SLBM)은 오늘날 가장 위협적인 무기로 꼽힌다.

 

비대칭전력은 핵무기,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포함해 특수부대, 잠수함 등 게릴라전이나 기습전에 유용한 전력을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던 배경에 연합군 수상함과 상선을 무차별 격침한 잠수함 유보트의 활약이 있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태평양전쟁에서 진주만 기습으로 주도권을 잡은 일본 해군이 끝내 미국 해군에 참패한 이유 중 하나도 잠수함 운용전략의 실패였다.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벌인 포클랜드 전쟁의 승패도 잠수함 전력에서 판가름 났다.

 

한국 해군의 잠수함사령부 출범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간 남북한 전투력 비교에서 한국 해군은 비록 전투함 수에서 북한에 뒤지지만 종합적인 전력 면에서 우세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첨단무기와 자동화 시스템 등 질적인 면에서 앞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수상함끼리의 전력 비교였다. 우세하다고 자부하면서도 한편으로 찜찜했던 건 북한의 잠수함 전력 때문이었다.

 

일찍이 잠수함의 중요성에 눈을 뜬 북한은 1963년 구(舊)소련에서 잠수함 2대를 도입한 이후 지속적으로 늘려 현재 70여 척을 보유하고 있다. 수량만으로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잠수함 강국이다. 이에 비해 1992년 독일에서 잠수함을 도입한 한국 해군은 현재 13척을 운용한다.

 

2010년 3월 26일 해군 장병 46명의 목숨을 앗아간 천안함 사건은 우리 국민에게 잠수함 공포증을 안겼다. 침몰 원인을 조사한 민군합동조사단은 북한 잠수함(연어급)에서 발사한 어뢰가 천안함을 폭침했다고 결론지었다. 해상경계선을 넘어와 우리 함정 가까이에서 어뢰를 쏘고 사라지다니.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인 공격이었다. 아무리 첨단 수상함을 갖고 있어도 바다 밑이 뚫리면 속수무책이라는 점에 우리 군과 국민은 아연실색했다.

 

잠수함사령부 창설은 이처럼 다급한 안보 현실을 감안한 것이기도 하다. 이를 계기로 우리 해군의 잠수함 전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수량도 늘지만 무엇보다도 질적인 면에서 북한을 압도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2020년부터는 더 강력한 화력으로 무장한 3000t급 대형 잠수함을 도입한다. 이대로라면 한국 해군의 숙원인 원자력추진잠수함(핵잠수함)을 보유할 날도 머지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해군은 세계에서 6번째로 잠수함사령부를 갖췄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사령부가 생겼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 이전까지 해군 전투부대에는 1·2·3함대사령부, 작전사령부 등이 있었다. 소장이 지휘관인 사령부는 일선 최상급 부대로 독립적이고도 종합적인 지휘권을 행사한다.

 

/기지로 입항하는 잠수함. 사진=조영철 기자

 

‘물속의 닌자(忍者)’

그런데 그간 잠수함 부대는 사령부 한 단계 아래인 전단 체제였다. 그에 따라 작전, 수리, 교육훈련 기능이 분산돼 여러 사령부의 개별 지휘를 받아야 했다. 교육훈련만 잠수함전단이 맡고, 작전은 작전사령부, 정비는 군수사령부 지휘를 받아야 했다. 이제 사령부 창설로, 분산됐던 기능이 한 군데로 모이게 된 것이다.

 

잠수함사령부는 잠수함전대, 교육훈련전대, 기지대대, 수리창으로 구성됐다. 잠수함사령부는 진해만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다. 진입로 입간판에 ‘ONE SHOT, ONE HIT, ONE SINK’라는 부대 구호가 적혀 있다. 말 그대로 ‘한 방에 쏴서 맞히고 가라앉힌다’는 뜻이다. ‘물속의 닌자(忍者)’라는 별명을 가진 잠수함은 공격에 능한 반면 방어에 취약하다. 빨리 쏘고 빨리 달아나는 게 관건이다. 한 방에 제압하지 못하면 위치가 발각돼 역공당한다. 공격당해도 버틸 여지가 있는 수상함과 달리 잠수함은 한 방에 격침되고 승조원 전원이 몰사할 수 있다.

 

취재팀은 부대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곧바로 현장취재에 나섰다. 맨 먼저 한국 잠수함 발달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관을 둘러봤다. 제909잠수함교육훈련전대장 이성환 대령의 안내를 받았다. 역사관에는 사진과 문서를 비롯해 어뢰, 기뢰, 미사일 등 각종 무기, 음탐장비, 추진체계 모형 등을 전시해 놓았다.

 

1983년 4월 우리 기술로 만든 첫 잠수함(잠수정)인 ‘돌고래’ 진수식을 치렀다. 돌고래는 1991년까지 총 3척이 건조돼 전력화했다. 1990년엔 제57잠수함전대가 창설됐다.

 

돌고래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해군은 중형 잠수함 도입을 추진했다. 1989년 독일로 파견된 인수팀은 3년여 간 교육을 받은 후 1992년 10월 독일 하데베(HDW) 조선소에서 209급 잠수함을 인수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 43번째 잠수함 보유국이 됐다.

 

1호 잠수함의 이름은 ‘장보고’. 해군에선 같은 종류의 함정을 추가로 도입하면 최초 배의 이름을 붙여 ‘~급’이라고 한다. 오늘날 한국 해군이 보유한 모든 209급 잠수함을 장보고급 잠수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디젤-전기 추진 잠수함인 장보고급은 배수톤수 1300t에 길이는 56m다. 어뢰와 기뢰, 대함유도탄 등의 무장을 갖췄다. 최대 속력은 22노트로 북한 잠수함보다 2배 빠르다.

 

/출항 직전 홋줄을 걷어내는 잠수함 대원들. 사진=조영철 기자

 

역사관을 둘러보다가 ‘잠수함 안전항해 11015일’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1984년 12월 돌고래 인수 이후 이날까지 단 한 건의 사고 없이 운용해온 것을 기록한 것이다.

 

한국 해군이 2007년부터 도입한 214급 잠수함이 209급보다 우수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스노클링의 약점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스노클은 관을 물 밖으로 내밀어 공기를 흡입하는 장치다. 스노클이 작동할 때는 소음 탓에 적에게 피탐(被探)될 위험이 클 뿐 아니라 자체 탐지능력도 떨어진다. 214급은 스노클 대신 함내에 저장된 산소와 연료를 사용해 수중에서 축전지 충전 및 추진에 필요한 전원을 확보할 수 있다. 이른바 AIP(Air Independent Pro pulsion·공기불요추진체계) 시스템이다.

 

해군은 1호 214급 잠수함에 손원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209급이 장보고급으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214급은 손원일급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해군의 아버지’라 칭송받는 고(故) 손원일 제독은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손원일급은 배수톤수 1900t에 길이 65m다. 속력이나 무장은 장보고급과 비슷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AIP 시스템을 갖춘 손원일급은 잠항지속능력이 장보고급의 3~5배다. 장보고급이 완전히 충전한 후 물속에서 부상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시간은 고작 2~3일. 이에 비해 손원일급은 2주간 완전 잠항이 가능하다.

 

역사관을 나와 전술훈련장에 들렀다. 때마침 경연 기간이었다. 개별 잠수함 대원들의 전술기동 및 목표 추적 능력을 평가해 점수를 매기는 것이다. 평가장에 들어서자 대형 스크린에 아군 잠수함과 적군 수상함이 바쁘게 기동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이어 209급 조종훈련장을 찾았다. 이곳에는 실제 잠수함 구조와 똑같은 모형이 설치돼 있다. 취재팀이 내부에 들어서자 부사관들이 실제로 잠수함에서 하듯 모형을 가동했다. 어느 순간 “비상! 긴급잠항 150m!”를 외치자 배가 급강하하는 것처럼 모형이 흔들리면서 몸이 한쪽으로 쏠렸다. 다시 안전심도인 50m 지점으로 올라오는 데 걸린 시간은 00초.

 

‘한통속 전우애’

오후 4시가 넘어 잠수함사령부 본관으로 이동했다. 1시간 20분가량 윤정상 사령관 인터뷰를 진행한 후 잠수함들이 정박한 부두로 향했다. 윤 사령관이 동행했다.

 

봄을 앞둔 늦은 오후의 바닷가는 고즈넉했다. 햇살이 시나브로 바다를 쓸어댄다. 먼저 209급 이종무함을 찾았다. 함장 이준호 중령이 씩씩한 목소리로 브리핑을 했다. 이 중령 어깨너머로 보이는 마스트에 레이더와 잠망경, 스노클 등이 올라와 있다.

 

브리핑이 끝난 후 선교를 건너 함에 올랐다. 잠수함 갑판에서 선내로 들어가는 구멍은 성인 남자 몸뚱이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다. 10여 칸의 수직계단을 조심스레 밟고 내려가니 영화 속에서나 봤던 광경이 펼쳐진다. 좁은 통로 양쪽에 갖가지 장비가 빼곡하다. 수많은 버튼과 밸브에 눈이 어지럽다. 작아도 있을 건 다 있다. 무장실과 전투정보실, 조종실, 기관실…. 이 작은 배에서 바닷속을 뚫고 어뢰가 날아가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어뢰 한 발로 몇 배나 큰 수상함이 두 동강 난다는 게 더 놀랍다.

 

놀랍게도, 잠수함에도 조리실과 식당이 있다. 요리 중에는 전기 오븐에 쪄내는 이른바 ‘잠수함 스테이크’가 인기라고 한다. 저장 공간이 좁고 환기가 안 되기 때문에 연기나 습기가 발생하는 요리는 피해야 한다.

 

짐작은 했지만 침실과 화장실이 여간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 다닥다닥 붙은 3층 침대는 위아래 간격이 매우 좁다. 그나마 1인당 한 개씩 돌아가지 않아 교대로 사용해야 한다. 화장실은 단 2개. 더욱이 화장실 안에 변기와 세면대, 샤워기가 같이 있어 한 번에 여러 명이 쓰기가 불편하다. 승조원이 40명 안팎이므로 시간대를 정해 최대한 빨리 사용해야 한다. 청수(淸水)가 한정돼 있으므로 물 사용도 줄여야 한다. 빨래는 금지다. 출항 시 항해일수에 맞게 속옷과 양말을 준비한다. 비닐봉지에 빨래를 담았다가 육지로 나가면 처리해야 한다.

 

또한 잠수함의 생명인 은밀성을 보장하려면 소음을 줄여야 한다. 승조원들은 운동을 자제하고 방음화를 신는다. 이처럼 절제와 인내와 배려가 없으면 견디기 힘든 환경이다. 힘들지만 그래서 더욱 가까워진다. 이를 ‘한통속 전우애’라고 한다.

 

/한국 잠수함 부대의 전투구호.

 

돌고래의 패기

두 번째로 방문한 잠수함은 214급 정지함. 노련미 넘치는 함장 김원득 대령의 브리핑을 받은 후 함내로 들어갔다. 209급보다 실내가 조금 넓어선지 한결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자그마한 스핀사이클도 한 대 있다. 장비의 느낌도 다르다. 209급은 수동이지만 214급은 자동이다. 컴퓨터로 모든 장비를 작동한다. 무기도 더 싣는다. 하지만 생활여건은 크게 다르지 않다. 침대나 화장실, 식당 규모는 비슷하다. 다만 209급과 달리 변기와 샤워기, 세면대가 분리돼 있어 한 번에 3명이 각각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화장실에는 수상함에도 없는 비데가 설치돼 있다. 밀착생활을 하는 상황에서 최대한 냄새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다.

 

물속에선 전파가 통하지 않는다. 당연히 TV를 볼 수 없다. 인터넷도 안 된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은 반입할 수 없다. 다만 DVD 플레이어로 영화 감상은 가능하다. 209급에선 한자리에 모여 보지만, 214급에선 개인 침대에 설치된 모니터로 각자 원하는 영화를 본다.

 

마지막으로, 돌고래급 053함을 견학했다. 해군 함정 중 근무여건이 가장 열악하지만, 함장 박홍균 소령은 패기만만했다. 돌고래의 길이는 25m로 209급이나 214급의 반도 채 안 된다. 배수톤수(178t)는 214급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속력도 3분의 1 수준. 하지만 작다고 얕잡아봤다간 큰코다칠 수 있다. 어뢰와 기뢰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천안함을 침몰시켰다는 북한의 연어급 잠수정은 이보다 작다.

 

선체가 워낙 비좁아 침대가 부족하다. 화장실도 하나밖에 없고 취사시설도 없다. 식사는 도시락으로 해결한다. 한국 잠수함의 ‘아버지이자 막내아들’ 격인 돌고래는 현재 독자 작전보다는 특수전, 기뢰 설치 등 지원 임무에 주력한다. 선체와 장비가 낡아 몇 년 안에 모두 사라질 운명이다. 3척 중 한 척은 이미 2003년 퇴역했고, 나머지 2척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부두 안쪽에 퇴역한 1호 돌고래 051함이 전시돼 있다. 다소 투박해 보이지만, 30여 년 전 잠수함 불모지인 이 땅에서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든 것이라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옆으로 북한 유고급 잠수정이 보인다. 1998년 6월 동해안에서 나포된 것을 안보교육용으로 전시해놓은 것이다. 유고급을 개조한 것이 바로 연어급이다.

 

평화와 전쟁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던가. 잠수함 장병들은 오늘도 비좁은 선실에서 살과 살을 부대끼며 칠흑 같은 바닷속에서 전진한다. 가족과 조국의 안위를 위해. 제2의 천안함 사건을 막기 위해.

 

/1998년 6월 동해안에서 나포한 북한 유고급 잠수정. 사진=조영철 기자

 

▼잠수함 부사관 3인 직설 토로…“처우 개선돼야 후배들 많이 올 것”▼

둘째 날 취재 일정은 이종무함의 출항을 지켜보는 것으로 시작됐다. 오전 9시. 잠수함 기지는 전날 오후의 따사로움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쌀쌀했다. 손이 시릴 정도였다. 갈매기가 날고 바다는 바람에 출렁거린다. 구명조끼를 입은 대원들이 갑판에 한 줄로 늘어섰다. 함미엔 태극기가, 함수엔 해군기가 휘날린다. “전 계류색 걷어!” 구령에 대원들이 배를 묶어둔 홋줄들을 부지런히 걷어들인다. 바지선에서 잠수함이 떼어진다. 뱃고동이 3회 울린다. 물속에 몸을 숨긴 잠수함이 서서히 바다로 나아간다.

 

휴게실에서 부사관 3명과 마주 앉았다. 취재 요청에 따라 214급과 209급, 돌고래급에서 한 명씩 차출됐다. 원사가 2명이고 상사가 1명이다.

 

돌고래급 053함을 타는 김준호 주임원사는 1997년부터 잠수함을 탔다. 6년간의 육상근무를 빼면 12년 동안 탄 셈이다. 209급에서 8년간 근무했고 돌고래를 탄 지는 4년 됐다. 그는 잠수정 근무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처우 개선에 대한 바람을 드러냈다.

 

“특수전 요원들이 탈 때는 우리 침대를 내줘야 하므로 바닥에 모포를 깔고 자기도 한다. 내가 27년 근무했다. 수상함에서라면 관리직을 맡을 텐데, 인원이 없는 여기선 초임 하사나 마찬가지다. 기관실 바닥 닦는 일을 한다. 나는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후배들이 잘 오지 않으려 한다. 그들을 잠수함에 태우려면 좋은 대우를 보장해야 한다. 영관장교와 부사관 수당이 30만 원 차이 난다. 다행히 사령관께서 부사관들의 고충을 잘 이해하고 처우 개선을 위해 애를 쓴다.”

 

잠수함 승조 경력 11년인 이용철 상사는 209급만 7년 탔다. 지금 근무하는 이억기함이 3번째다.

 

“가장 안 좋은 것은 장기간 해를 못 본다는 점이다. 운동 부족으로 체력도 떨어진다. 매일같이 정밀점검을 반복해야 하기에 업무 스트레스도 크다. 한순간 실수로 치명적 사고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박관념이 생겨 집에서도 뭐든 확실히 챙기려 한다.”

 

‘최신형’ 214급을 타는 정연찬 원사는 자동화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장비 성능은 훨씬 좋아졌는데, 비상처치나 고장 시엔 오히려 불편한 점이 있다. 209급과 달리 214급에선 수동 조작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침대 수는 오히려 적다. 다만 세면대와 좌변기가 분리돼 화장실 사용은 편하다.”

 

비록 근무환경이 열악하긴 해도 잠수함 승조원으로서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214든 209든 돌고래든 가장 힘든 전투함을 탄다는 자부심은 똑같다.”(김준호 주임원사)

 

“잠수함 승조원은 수상함 승조원보다 자부심이 월등하다. 어떤 배든 깨부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이 충무공이 연전연승한 것은 질 싸움은 피하고 이길 싸움만 했기 때문이다. 현대전에서 이기는 싸움만 할 배는 잠수함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많은 격려와 지원을 해주면 고맙겠다.”(이용철 상사)

 

해군 통계에 따르면 부사관의 잠수함 지원율은 장교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111% 대 51%). 해군은 향후 부사관 처우 개선에 주력해 각종 수당을 신설하는 한편 기존 수당의 금액 인상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장기복무자 선발 시 우대한다는 방침도 정했다.

 

힘들고 고될수록 보람도 큰 법. 잠수함 한 번 타보지 않고 어찌 해군을 말하고 바다를 말할 수 있으랴.

조성식 기자 mairso2@donga.com

 

2015.08.06 '번개사업' 한 달 만에 기관총까지 제작

[44년前 초기 국산무기 개발 6인, 국방과학연구소서 감사패 받아] 북한 도발은 잦은데 美軍은 철수… 조국 지키기 가장 어려웠던 시절 시제품 본 朴대통령 "최고 선물"

88세 백발(白髮)의 노(老)신사는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국방과학연구소(ADD) 박물관에 전시된 박격포 앞에 서서 회상에 잠겼다. 44년 전인 1971년 그가 개발에 참여했던 박격포다. 그 뒤에 걸린 사진에는 그 시절 카빈 소총을 어루만지며 기뻐하는,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국무총리가 서 있다.

 

윤응렬 초대 ADD 부소장은 "1971년 겨울을 평생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공군 작전사령관을 끝으로 군을 떠나 있는데 1970년 8월 연구소 창설과 동시에 차관급 부소장에 임명됐어요. 창설 요원들과 열심히 기반을 닦고 있는데 1971년 11월 박정희 대통령께서 엄명을 내리셨어요. '국산 무기를 제조하라'고."

 

▲윤응렬(지팡이를 든 이) 국방과학연구소(ADD) 전 부소장을 비롯한 ADD 창설 원로들이 5일 ADD를 방문해 정홍용(왼쪽) 소장과 함께 초창기의 국산 무기들을 둘러보고 있다. /국방과학연구소 제공

 

암호명 '번개사업'의 시작이었다. 제한 시간은 넉 달. 윤 전 부소장과 연구원들은 밤낮으로 미군 소총과 박격포를 분해·조립해 보고 청계천을 드나들며 개발에 착수했다. 불과 한 달 만인 12월 16일 윤 전 부소장 등 ADD 관계자들은 시험 제작한 카빈 소총과 기관총, 수류탄, 지뢰를 들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윤 전 부소장은 "그때 박 대통령께선 '가장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크게 기뻐하셨다"고 말했다.

 

5일 윤 전 부소장과 문국진(84) 박사, 서정욱(81) 전 소장, 박철희(81) 전 실장, 구상회(80) 전 부소장, 정해일(79) 전 실장 등 ADD 창설 주역 6인이 ADD 창설 45주년을 맞아 ADD에 모였다.

 

윤 전 부소장은 "1960년대 후반 김신조 사건을 시작으로 수많은 무장공비 및 간첩선 침투 사건이 발생했다"며 "미 제7사단은 '닉슨 독트린'에 따라 24년간의 한국 주둔을 끝내고 본국으로 철수하는 등 안보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며 ADD 창설 당시를 회상했다.

 

구상회 전 부소장은 "창설 초기 정원이 60명이었는데 무기 연구 개발 경험을 가진 전문가는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그는 "대전차지뢰 시험 때는 관람하고 있던 박 대통령 근처로 폭발 파편이 날아들어 깜짝 놀랐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도 했다.

 

처음에는 소총 하나 제대로 만들기 힘들었던 ADD는 그 뒤 정밀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 KT-1 기본훈련기, K-9 자주포, K-2 차기전차 등 국산 무기를 총 171종 제작해냈다.

 

ADD 원로들은 앞으로 스마트 및 인공지능 센서 분야와 무기 관련 소프트웨어 개발에 ADD가 앞장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문국진 박사는 후배들에게 "영국 처칠 수상이 옥스퍼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한 이야기를 그대로 하겠다.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국방과학기술 개발에는 돈 기브 업, 네버 기브 업(Don't give up, never give up)! 절대로 포기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원로 6명은 이날 ADD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조선일보 전현석 정치부 기자

 

2015.08.10 국산 무기 개발 총본산 국방과학연구소의 45년

/현무-1 미사일

 

1971년 11월 11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ADD)에 병기 개발을 지시했다. “소총, 박격포, 탄약을 4개월 내에 국산화하라”는 내용이었다. 암호명 ‘번개사업’. 구체적으로 카빈 소총 10정, M-1 소총 2정, 경기관총 5정, 60㎜ 박격포 4문, 3·5인치 로켓포 4문, 수류탄 300발, 대전차 지뢰 20발 등을 만들어 내라는 지시였다.

 

당시 국내엔 금속, 기계, 전기, 전자 등 무기 생산의 기초가 되는 산업 기반과 기술 축적이 전무(全無)한 때여서 박정희의 이 지시는 날벼락이었다. 책정된 연구개발비도 970만원(현재 가치로 2억여원)에 불과했다. 최고권력자의 엄명인지라 개발팀은 그해 크리스마스는 물론 이듬해 설날 연휴까지 반납한 채 연구실 불을 밝혔다. 연구원들은 미군 소총과 박격포를 분해 조립해보고 서울 청계천을 드나들며 밤낮으로 개발에 매달린 끝에 1972년 4월 기본화기 사격시험에 성공했다. 사업 명칭대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은 격이었다.

 

이렇게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며 한국 무기개발을 이끌어온 ADD가 8월 6일로 창립 45주년을 맞는다. ADD는 1·21 청와대 기습사건 등 북한의 도발이 거세졌지만 주한 미 7사단은 철수하는 등 안보 공백 우려가 커지고 국산 무기로 자주국방을 할 필요성이 절실해짐에 따라 만들어졌다. 자주국방을 기치로 내세웠던 박정희 대통령의 ADD 사랑은 유별났다.

 

1970년대 ADD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불시에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함께 자며 애로사항을 듣는 등 각별한 애정을 쏟아 연구원들의 자긍심과 사기가 아주 높았다”고 말했다. 당시 해외 우수 두뇌를 대거 유치해 고급 관사 등 최고의 대우를 해줬다. 보안 수준이 가장 높은 극비 기관이어서 ‘대전 기계창’ 등 위장 명칭이 사용되기도 됐다.

 

ADD는 1970년대 소총 등 기본병기 국산화를 시작으로, 1980년대 선진국 무기 개량 개발, 1990년대 고도정밀무기 독자개발, 2000년대 세계적 수준의 첨단무기 독자 개발의 길을 걸어왔다. 지금까지 개발한 무기는 171종에 달한다. 여기엔 소총부터 최대 사거리 1500㎞인 현무-3 순항(크루즈)미사일까지 다양한 무기체계가 망라돼 있다.

 

ADD는 창립 8년 만인 1978년 9월 사거리 180㎞의 ‘백곰’ 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해 한국이 세계 7번째 지대지 미사일 개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했다. 그 뒤 개발된 현무-1·2 탄도미사일과 현무-3 지대지 순항미사일, 해성(천룡)-2·3 함대지 및 잠대지 순항미사일은 국군의 핵심 전략무기로 자리 잡았다. 현무-2는 한·미 미사일 지침에 따라 탄도미사일 최대 사거리가 300㎞로 제한됐을 때 개발된 미사일이다. 지난 6월엔 박근혜 대통령이 참관한 가운데 사거리 500㎞인 현무-2A 시험발사에 성공하기도 했다.

 

미국으로부터 사거리 제한을 받지 않는 순항미사일은 500~1500㎞의 다양한 유형이 개발돼 북한은 물론 유사시 중국·일본의 전략 목표물도 3m 이내의 높은 정확도로 타격할 수 있다. 특히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해성(천룡)-3 순항미사일은 적에 탐지될 가능성이 낮아 생존성이 높은 전략무기로 꼽힌다. 터키에만 10억달러어치를 수출한 K-9 자주포, 인도네시아·터키·페루 등지에 수십 대를 수출한 KT-1 기본훈련기 등도 ADD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ADD 관계자는 “40여년 동안 16조원을 투자해 12배인 187조원의 경제 창출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390여개의 국방기술을 민간에 이전해 1조1200억원의 매출효과를 내기도 했다고 ADD는 밝혔다. 차기 FM무전기가 민간 이동통신에, 105㎜ 곡사포 개량이 산업기계 피막처리에, 충격 센서설계가 자동차용 노킹센서에 각각 활용된 게 대표적인 예다. 서정욱·오명 전 과기부 장관 등 한국 과학기술 발전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을 많이 배출한 것도 ADD의 자랑거리다.

 

ADD는 각종 첨단기술을 활용한 미래무기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날아오는 미사일·포탄 등을 요격할 수 있는 레이저 무기, 포탄을 음속보다 6~7배나 빠른 속도로 발사해 수백㎞ 떨어진 목표물을 정확히 타격할 수 있는 레일건, 강력한 전자기파로 적의 전자장비를 무력화하는 EMP폭탄 등도 ADD가 심혈을 기울여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45주년을 맞은 ADD의 미래가 밝은 것만 아니다. 지난 7월 29일 정홍용 국방과학연구소장이 국방부 출입기자들과 가진 간담회는 ADD의 현재 및 미래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는 평가다. 정 소장은 간담회에서 “ADD가 그동안 수출해온 K-2 전차 기술, K-9 자주포, KT-1 기본훈련기 등은 이미 개발된 지 수년에서 20년 이상 경과된 것으로 지속적인 기술개발을 통해 발전시키지 않으면 국제 방산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고 퇴출된다”고 말했다.

 

정 소장은 ADD가 주요 국산무기 개발 때마다 ‘명품 무기’임을 강조했다가 일각의 비판을 받고 있는 것과 관련 “ADD가 개발한 명품 10선 중 결함이 있다고 지적된 무기체계는 K-21 보병전투장갑차, K-2 전차, K-9 자주포, K-11 복합소총 등 4종”이라며 “지속적인 투자와 기술개발을 통해 미운 오리 새끼를 백조로 재탄생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며 연구개발 정책의 수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방연구개발의 책임자가 기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무기 개발의 문제점과 한계를 언급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여기엔 단순한 방위사업 비리를 넘어서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우선 국방연구개발 인력 규모 문제다. ADD에 따르면 한국의 인구 1만명당 국방연구개발 인력은 0.5명인 데 비해 북한은 6.1명으로 약 12배나 차이가 났다.

 

미국(4명), 중국(3.7명), 대만(2.6명), 영국(2.3명) 등과 비교해도 5∼8배 차이가 난다. ADD 연구인력 규모엔 큰 변화가 없지만 연구개발 예산은 크게 늘어 ADD 연구인력 1명이 감당하는 사업과 예산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단위사업에 집중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과 역량 집중이 저하되는 것도 문제다. 국내 개발 무기의 경우 연구개발비가 유사한 형태의 해외 무기의 10∼30%에 불과해 신뢰성 있는 개발이 어렵다는 평가도 나온다.

 

ADD 관계자는 “한국도 미국의 M-1 전차처럼 계속 업그레이드형을 개발하는 진화형 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유용원 군사전문 기자

 

2015.09.18 화약부터 미사일, 장갑차, 전투기까지 생산…우수한 무기로 자주국방 실현

한국항공우주산업·두산DST·LIG넥스원·한화 국내 방위산업 4大天王

지난해 10월30일 강원도 원주 공군기지에서 열린 첫 국산전투기 ‘FA-50’ 실전배치행사. 박근혜 대통령이 비상출격 버튼을 눌렀다. ‘슈웅~’ FA-50 두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출격했다. FA-50은 가상적기(敵機)와 공중전을 펼쳤다. ‘쾅쾅쾅!!’ 열추적미사일 회피장치인 플레어를 쏘고 미사일이 발사됐다. 이날 박 대통령은 “우리 기술로 만든 첫 국산전투기 FA-50이 영공방위의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실전에 배치됐다”며 “지상·해상군과의 긴밀한 합동작전 능력이 크게 증대됐다”고 말했다.

 

FA-50은 한국항공우주산업(KAI·카이)이 생산한 전투기다. 카이는 대한민국 공군이 2005년부터 운용하고 있는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을 기반으로 FA-50을 개발했다. 6년간 총 3781억원을 투자했다. FA-50은 공대공(空對空)·공대지(空對地) 미사일과 기관포는 물론 합동정밀직격폭탄(JDAM), 다목적정밀유도확산탄(CBU-100) 등 최대 4.5톤 무장이 가능하다. FA-50은 공군에 실전 배치돼 대한민국 영공을 지키고 있다.

 

카이는 FA-50 외에도 기동헬기 ‘수리온(KUH-1)’을 생산, 공군에 공급하고 있다. 또 공군 핵심전력으로 자리매김할 한국형전투기(KF-X), 소형무장헬기(LAH)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대한민국, 우리가 지킨다.” 카이를 비롯한 국내 방위산업체가 맡은 역할이다. 적의 공격이나 침략을 막고 지킨다는 ‘방위(防衛)’라는 글자가 지닌 의미를 보면 알 수 있듯 방위산업체는 우수한 무기를 생산, 대한민국 군(軍)에 조달해 자주국방에 앞장서고 있다. 국내 대표 방위산업체로는 카이, 두산DST, LIG넥스원, 한화 등이 있다. 이 업체들이 개발·생산하는 전투기, 장갑차, 미사일, 화약 등의 무기는 한국군에 보급돼 나라를 지키는 데 사용된다.

 

물론 방위산업체는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민간기업이다. 이 업체들은 “정부가 지원하는 개발비용이 부족하다” “영업이익률이 너무 낮다” 등의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두산DST의 경우, 지난해 영업이익률이 3.6%에 불과하다. 때문에 방위산업은 기업이 꺼리는 산업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국가방위를 위해 없어선 안 될 산업분야다. 국내에 방위산업체가 없다고 가정해보자. 우리 손으로 만든 무기로 전쟁을 치를 수 없게 된다. 이는 국가안보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방위산업 전문가인 안영수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원의 설명이다. “방위산업을 키워야 국방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무기수입에 의존하면 국방력이 약화됩니다. 해외 방위산업체가 무기를 팔지 않거나 주요 부품을 제때 공급하지 않으면 한국군이 적시(適時)에 무기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국가를 지킬 수 없는 것이고 전쟁 발생 시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카이가 영공을 방어한다면 두산DST는 지상을 맡는다. 두산DST는 보병용 장갑차를 주로 생산한다. 2009년부터 보병전투차량인 ‘K21’을 양산하고 있다. K21은 25톤급 장갑차로, 동급 장갑차 중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수상(水上)운행이 가능하다. 탑승전투는 기본이다. 박영훈 두산DST 전력혁신팀 부장은 “K21에는 40㎜ 기관포와 중거리 유도무기가 탑재돼 적의 장갑차를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설명했다.

 

두산DST는 보병탑승용 장갑차인 ‘K200’을 기반으로 한 ‘K277(지휘소용)’, ‘K281(박격포 탑재)’, ‘K216(화생방)’, ‘K288(구난)’ 등의 장갑차도 생산하고 있다. 이밖에 ‘발칸(20㎜ 대공포)’, ‘노봉(해군용 40㎜발칸)’, ‘비호(30㎜ 자주대공포)’, ‘천마(지대공 유도무기)’ 등의 대공무기를 생산,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다.

 

▲두산DST가 생산하고 있는 보병전투차량 'K21'(위)과 LIG넥스원의 함대함 유도무기 '해성'. /(위)두산DST, (아래)LIG넥스원)

 

단순 이윤창출 아닌 국가방위 일조

“방위산업은 단순히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이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국하는 것이다. 자주국방에 일조한다는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LIG넥스원이 임직원에게 강조하는 핵심가치다. LIG넥스원은 정밀유도무기를 생산하고 있다. 중거리 지대공 유도무기 ‘천궁’, 함대함 유도무기 ‘해성’, 대전차 유도무기 ‘현궁’이 대표 무기다.

 

해성은 수상함에 탑재해 적함을 공격하는 대함 유도무기다. 전자파를 이용한 유도방식을 사용하고 해수면 밀착비행, 경사공격, 재공격 등이 가능하다. 2005년 해군에 실전 배치된 후 현재까지 핵심전력으로 사용되고 있다.

 

천궁은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상공을 지킨 미 중거리 지대공 미사일 ‘호크(Hawk)’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됐다. 국방과학연구소(ADD) 주도 아래 LIG넥스원이 유도탄 부문과 체계종합(조립), 양산을 맡았다. 현재 육군에 공급하고 있다.

 

천궁은 기존 호크 미사일에 비해 대(對)전자전 능력이 뛰어나고 명중률도 높다. 또한 다기능 레이더, 교전 통제소, 발사대와 유도탄 기능을 보유, 항공기를 탐지·추적해 다수의 표적과 동시 교전이 가능하다. 수직발사시스템을 갖춰 공중에서 점화·유도되므로 발사지점도 은폐할 수 있다.

 

한화는 화약, 추진기관과 정밀유도무기를 만들어 군 방위력 증가에 기여하고 있다. 한화는 최근 K9 자주포, 항공기 엔진 등을 생산하는 삼성테크윈을 인수해 종합 방위산업체로의 성장을 계획하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산업은 경공격기 'FA-50'을 생산해 대한민국 공군에 공급하고 있다. 사진은 한국항공우주산업의 경남 사천공장. /한국항공우주산업

박용선 이코노미조선 기자

 

2015.10.07 작전계획 번호에 담긴 뜻은

50 뒤에 붙는 두자리는 보통 국가·도발상황 의미

한·미 연합 작전계획(작계)이란 북한 도발 상황에 따른 한·미 연합군의 군사작전 계획을 뜻한다.

 

작전계획은 전쟁이 발발했을 때를 대비한 전시작전계획과 평시 국지도발에 대응하기 위한 평시 국지도발계획 등 크게 2가지로 나뉜다. 각각의 경우에 맞춘 군사력 운용 세부계획을 담고 있다.

 

최초의 한·미 연합 작계는 한미연합사가 창설됐던 1978년 나왔다. '작계 5027'이었다. 미군은 세계 각 지역의 사령부별로 숫자를 붙여 작계를 구분해 왔는데 숫자 '50'은 한반도를 관할하는 미 태평양사령부의 작계를 의미한다. 한반도 유사시 주일미군의 참전과 자위대의 후방 지원을 다루는 미국과 일본의 공동작계에는 '5055'라는 숫자가 붙었다.

 

50 뒤에 붙는 두 자릿수 숫자는 통상적으로 특정 국가 및 도발 상황을 의미한다. 남북한 전면전 상황을 가정한 작계는 '5027', 전면전은 피하고 북한 대량살상무기나 전략 목표 위주로 파괴하는 작계는 '5026'이다. 한·미는 1994년 이후 2년마다 작계 5027을 개정·보완해왔다.

 

 

이번에 한·미가 서명한 '작계 5015'의 숫자 '15'는 전시작전통제권의 한국군 전환 목표 시기였던 '2015년'을 뜻한다. 한·미는 전작권 전환을 앞두고 이를 위해 별도의 작전계획을 준비해 왔다. 작년 10월 전작권 전환이 재연기됐지만 예정대로 해당 작전계획에 '15'란 숫자를 붙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미연합사령관(미군)이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전시작전계획은 미측 주도하에 한국군과 미군 연합 군사력을 운용하는 계획을 담고 있다. 평시 작전권을 가진 한국은 순수 한국군 위주의 평시 국지도발계획을 수립해 왔지만,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북한의 도발 징후를 파악하기 위해선 미측의 정보 감시 자산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한·미가 공동으로 연합국지도발대비계획을 만들어 운용 중이다.

 

작전계획은 해당 계획에 대한 기본 개념이 담긴 '기본문'과 부대 규모별 세부계획인 '부록'으로 구성된다.

전현석 정치부 기자

 

2013.08.16 북 핵실험 전천후 감시할 위성이 뜬다

22일 발사되는 아리랑 5호는 영상레이더 탑재한 국내 첫 위성

낮밤·날씨 제약 없이 물체 식별

ICBM 개조 발사체로 러시아서 쏴

 

일주일 뒤, 한국의 ‘전천후 디지털 눈’이 우주공간에 뜬다. 미래창조과학부는 다목적실용위성(아리랑)5호가 22일 오후 8시39분(한국시간 오후 11시39분) 러시아에서 발사된다고 15일 밝혔다. 이 위성은 지난달 초 현지 야스니 발사장에 도착해 최종 점검 중이다.

 

 아리랑 5호는 국내 위성 최초로 영상레이더(SAR)를 탑재했다. 지상 550㎞ 상공에서 마이크로파를 쏜 뒤, 되돌아 오는 신호의 시간차를 측정해 영상화하는 장비다. 해상도는 1m(가로·세로 1m 크기 물체를 한 점으로 표시)다. 정밀 광학카메라를 탑재한 아리랑 3호(해상도 0.7m)에 비해 ‘시력’은 떨어지지만 낮과 밤, 날씨에 제약을 받지 않고 관측을 할 수 있다. 지난 2월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했을 때 아리랑 3호는 제대로 된 현장 사진을 제공하지 못했다. 실험장 상공에 구름이 끼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승조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은 “아리랑 5호가 있었다면 제대로 된 영상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발비는 총 2381억원이 들었다. 영상레이더만 외국과 협력을 통해 개발했고, 나머지는 모두 국내 기술로 만들었다.  

 

▲아리랑 5호를 실어 나를 드네프르 발사체가 지하 저장고에서 발사되는 모습. 드네프르는 탄도미사일을 개조한 발사체다. [사진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아리랑 5호는 보통의 위성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발사된다. 발사체인 드네프르(러시아~우크라이나를 잇는 강 이름)는 미·소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에 따라 퇴역한 ICBM을 개조한 것이다. 원래 이름은 R-36M ‘보에보다(슬라브어로 장군)’이지만 냉전 시기 미국은 이를 ‘SS-18 사탄(악마)’이라고 불렀다. 한번에 10개의 핵탄두를 나를 수 있고 사일로(보호 덮개가 있는 지하 저장소)에서 발사돼 추적과 요격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드네프르도 이 방식대로 발사된다. 외부 가스압력을 이용해 지상으로 올라온 뒤 허공에서 1단 엔진을 점화한다. 발사 화염으로부터 사일로를 보호하기 위한 ‘콜드 론칭(cold launching)’ 방식이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국경 근처에 있는 야스니 발사장은 지금도 러시아 군 기지로 쓰이고 있다. 2011년으로 예정됐던 아리랑 5호 발사가 계속 미뤄진 것도 이 때문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이 지분을 나눠 갖고 있는 발사업체(ISCK)가 한국과 계약을 맺었지만 러시아 정부가 뒤늦게 ISCK에 발사장 사용료를 올려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의 추가비용 부담 없이 ISCK가 러시아 정부에 돈을 더 주기로 했다.  

 

드네프르처럼 ICBM을 우주발사체로 개조할 수 있는 것은 기본 기술이 같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주발사체를 ICBM으로 전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일본이 27일 발사할 고체연료 발사체 엡실론과 이전 모델 M-5가 그런 의심을 받는다. 우주정책 전문가인 한양대 김경민(정치외교학) 교수는 “고체연료는 여느 우주발사체에 쓰이는 액체연료보다 추력은 떨어지지만 안정성이 높다”며 “고체연료 발사체는 언제든 군사 전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북한의 은하 3호는 액체연료를 사용하지만 연료를 태우는 산화제로 적연질산(질산+사산화이질소)을 써 의심을 받고 있다. 나로호의 연료는 캐로신(등유), 산화제는 액체산소였다. 액체산소는 극저온 상태로만 쓸 수 있어 발사가 연기되면 다시 빼내야 한다. 반면 적연질산은 상온에서 보관이 가능해 군사용으로 적합하다. 드네프르도 연료로 비대칭메틸하이드라진, 산화제로 사산화이질소를 쓴다.

 

2015.02.25 국내 무인기 기술은 세계 최고, 관련 제도는 세계 최악

▲美軍의 X-47B 무인기가 항공모함 위를 선회하고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위이이잉~” 소리를 내며 무인기가 날아오르자,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하고 이 모습을 지켜봤다. 무인기가 날아오르면서 촬영한 영상도 대형 화면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2016 드론쇼 코리아(Drone Show Korea)가 부산 벡스코에서 개막했다. 국내 중소기업부터 대기업까지 다양한 무인기 관련 업체가 자신들이 개발한 무인기들을 전시했다. 드론쇼 내내 전시장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 무인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짐작게 했다
  
 
그렇다면 국내 무인기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북한은? 미국은? 여러 의문이 남는다
  


  
북한의 무인기 개발 능력은
  
  
차세대 비대칭 전력으로 육성 中  

지난 2014 3월 청와대 상공을 비행한 북한의 무인기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국내에 추락한 3대의 무인기 잔해를 국방부 등이 분석해 언론에 공개한 바 있다. 기체의 전체적인 생김새는 중국산을 참고했고, 내부에 탑재한 엔진과 카메라 등은 무인기용으로 개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시중에 나와 있는 제품들을 조립해 만든 것이었다. 북한은 4차 핵실험 이후인 1 13, 정탐용 무인기를 보내기도 했다. 파주 도라산 부근 상공을 비행하던 북한의 무인기를 우리 군이 포착해 기관총 20여 발로 경고사격 했다. 이후 무인기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
  
 
북한은 무인기를 차세대 비대칭 전력으로 육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북전문사이트인 ‘38노스’는 1 19일 ‘돌아온 북한의 무인기(North Korea Drones on: Redeux)’라는 분석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북한은 1973년 무렵 한국에 배치된 주한미군의 무인기를 보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 1988년 무인기 개발에 착수했다. 이때부터 북한은 무인기 관련 부품을 중국이나 시리아 등을 통해 수입했다고 한다. 지난 2014년 국내에 추락한 북한의 무인기 중 1대가 중국의 민간무인기 업체에서 판매 중이던 모델과 일치한다는 주장은 이런 가설을 뒷받침해 준다. 이 기사는 북한이 정찰용 소형 무인기 외에도 열병식에서 공개한 중대형 무인기도 가지고 있으며, 이런 무인기는 폭탄을 장착해 공격용으로도 쓴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항우연의 성기정 책임연구원은 “북한의 무인기는 아직까지 그 수준이 RC 비행기(원격조종 장난감 비행기) 정도”라며 “기술적으로 한국이 훨씬 더 앞서 있다”고 말했다. 그럼 정말 북한의 무인기 수준은 형편이 없는 것일까.
  
 
기자는 앞서 ‘38노스’에 기사를 작성한 조지프 베르무데스 주니어(Joseph Bermudez Jr.) 선임 분석가에게 서면으로 북한의 무인기에 대해 문의했다.
  
 
―항공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의 무인기는 원격조종 장난감 수준이라고 하는데, 북한 무인기 수준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 평가는 부분적으로만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추락한 소형 무인기의 수준만을 보고 북한의 무인기를 저평가하는 것입니다. 북한이 보유한 다양한 무인기의 종류를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북한이 열병식에서 공개한 중대형급 무인기, DR-3 REYS(러시아제 고성능 무인기) 등은 그 성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원격조종 방식은 무선 장난감뿐 아니라, 대부분의 무인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입니다.
  
 
기자가 다수의 항공전문매체 등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러시아제 DR-3 REYS는 북한, 시리아, 이라크 등에서 사용 중인 무인기로 확인됐다. DR-3 REYS는 최고시속 950km/h 내외의 아음속(亞音速) 전술정찰기이다. 최대고도 19000피트이며, 항속거리 1000km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이미 1950년대부터 ‘Yastreb’라는 프로젝트로 정찰용 무인기를 개발해 왔다. 이런 무인기 중 하나가 바로 북한이 도입한 DR-3 REYS이다
  
 
―그럼 북한도 미군이 보유한 최신 공격형 무인기인 프레데터(MQ-1) 등과 유사한 무인기를 개발할 수 있나요.
 
“다른 국가의 도움 없이 가까운 미래에 북한이 그런 무인기를 개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가지고 북한이 다른 국가와 협업한다면,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죠. 북한이 의지를 가지고 밀어붙일 경우 충분한 잠재능력이 있습니다. 물론 현재로서는 ‘만약’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죠.
  
 
조지프 베르무데스 선임분석가의 말대로라면, 북한은 이미 무인기 분야에 상당한 기술을 보유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미국 무인기는 세계 최강인가
  
  
첨단 무인기 개발은 물론이고, 이제 무인기 조종사 양성에 주력

/항공모함에서 비행 시험 중인 미국의 X-47B. 사진=위키미디어  

 

  무인기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국가는 단연 미국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목소리다. 미국은 무인기를 단순히 운용하는 차원을 넘어서 모든 유인 항공기의 임무를 대체할 계획을 수립해 추진 중이다. 이런 유인기의 임무대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바로 항공모함 이착륙 무인기, 노스롭 그루먼사의 X-47B이다.
  
 
그동안 항공전문가들은 항공모함 위에 이착륙을 하는 것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해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X-47B 개발 초기 항모 이착륙이 불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X-47B는 항공모함 위에서 성공적인 이착륙을 보여줘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14년에는 유인 전투기인 F/A-18과 함께 비행한 뒤 항모로 복귀하는 임무까지 성공했다. 항모 위 이착륙은 일반적인 지상 이착륙보다 까다롭다. 왜냐하면 기상조건이 수시로 바뀌고, 항모 자체가 바다 위에 있어 계속해서 착지면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미군은 무인기 조종사 양성에도 상당한 노력을 쏟아붓고 있다. 무인기는 그 이름만 보자면 사람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무인기도 사람을 필요로 한다. 각각의 무인기를 원격으로 누군가가 조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항공전문가들은 무인기(UAV·Unmanned Aerial Vehicle)에서 무인을 뜻하는 ‘Unmanned’가 들어가지 않는 RPV라고 칭한다. RPV는 원격조종항공기(Remotely Piloted Vehicle)의 준말이다. 이런 이유에서 미 공군은 지속적으로 무인기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고 양성해 왔다.
  
 
미국의 항공우주전문매체 《에어엔스페이스(Air & Space)》는 미 공군이 무인기를 도입한 이후, 텍사스의 랜돌프(Randolph) 공군기지 등에 무인기 조종사 양성기관을 설립했다고 설명했다. 이 양성기관에서는 일반 조종사들처럼 무인기 조종에만 특화한 군인들을 양성하고 있다. 일반적인 공군 조종사들이 모두 장교로 구성된 반면, 2015년 말부터 무인기 조종사는 장교 이하 계급에게도 개방해 모든 군 계급이 무인기 조종사가 될 수 있다.
  
 
미시 커밍스 전직 미 해군 조종사이자 MIT대학의 자동화 분야 교수는 《에어엔스페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처음 무인기를 도입한 뒤 전투기 조종사 출신들을 무인기 조종사(UAV pilots)로 활용했다. 하나, 조종사 출신의 조종능력이 비()조종사 출신보다 무인기 조종실력이 더 떨어졌다. 그 이유는 조종사 출신은 항공기에 탑승해 있을 때를 연상해 육체적 감지에 더 의존했기 때문이다. 즉 엔진의 소리나 기체의 움직임 등을 느낄 수 없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이후 미 공군은 2009년부터 조종 경험이 없는 다양한 인재를 무인기 조종사로 모집하기 시작했다

  
  
국내 무인기 개발을 가로막고 있는 관련 제도
  
  
세계 최초 틸트로터 무인기 개발 등 관련 기술력 최고 수준

/세계 최초 틸트로터 무인기 TR60. 사진=항우연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하 항우연)이 개발 중인 무인기 중 눈길을 끄는 무인기는 단연 틸트로터(Tilt-rotor·VTOL) 무인기, TR60이다. 틸트로터란 항공기의 추진을 담당하는 엔진 부위가 가변적(可變的)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회전익(回轉翼)을 차용했다는 점에서 구조상으로 헬리콥터와 유사점이 있다. 이륙한 후에는 프로펠러의 방향을 틀어 항공기처럼 비행을 한다. 헬리콥터의 장점과 항공기의 장점을 집약한 것이다. 틸트로터 무인기의 최대 장점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이착륙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우리와 달리 미군은 유인기에 틸트로터(VSTOL) 방식을 적용해 V-22 오스프리(Osprey)라는 수송기를 운용 중이다. 그런데 이 V-22는 “과부(寡婦) 제조기(Widow maker)”라는 무서운 별명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전력화 이후 여러 차례 추락한 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가 개발 중인 틸트로터 TR60(군수용, 민수용은 TR100)은 미군의 V-22와 유사한 문제점은 없을까. 항우연의 박범진 선임연구원은 “TR60은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안정적인 비행능력을 갖췄다”면서 “이미 틸트로터의 자유낙하 안전성을 보완해 개발 중”이라고 말했다. 향후 TR60의 개발 방향이 미군과 유사한 유인기로 발전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박 연구원은 “미군처럼 수송기 방향으로 갈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1인용 운송수단 형태로는 진화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국방부와 산자부 간 손발 안 맞아 헤매는 무인기 사업 

무인기 민관 사업 부문의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는 고위 관계자 P씨를 어렵게 접촉했다. 그는 무인기 및 항공 분야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익명을 전제로, 현재 국내 무인기 사업 상황을 말해 주기로 약속했다. 다음은 그의 말이다.
  
 
“항공우주연구원과 대한항공이 합동으로 개발해 양산화를 준비 중인 TR60(KUS-VT·틸트로터 무인기)은 국내외로 이목을 끌었습니다. 국방부도 관심 있게 개발을 지켜봤습니다. TR60의 경우 세계 최초 틸트로터 무인기이고 그 활용도가 높다는 점 때문에 정부는 무인기 개발을 반겼죠. 그래서 산업통상자원부가 뛰어들었습니다. 양산화를 앞두고 산자부는 국방부에 양산비용을 같이 지원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국방부는 시제기(프로토타입)까지 다 만든 제품에 중간부터 국방부가 예산을 지원한 전례와 절차가 없다며 손사래를 치고 있습니다. 원래 이렇게 무기로 쓰일 수 있는 것들은 국방부가 개발 전부터 요구 사양을 내걸고 기업들이 입찰을 통해 그 요구에 맞춰 제품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주문 생산식이라는 것이죠. 이 때문에 국방부는 양산을 앞둔 TR60이 있는데도 최근 별도의 수직 이착륙기 소요 제기를 했다고 합니다. 결국 제도적 문제 때문에 또 다른 이착륙 무인기를 처음부터 국방부의 요구에 맞춰 만들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형국이 된 겁니다. 국방부는 이번 소요 제기에 이미 개발한 TR60을 선정할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소요 제기부터 특정제품을 정하고 출발하면 방산비리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자는 P씨에게 이 TR60을 국방부가 선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정부 입장에서는 아무 관심이 없어, TR60의 판매를 맡은 대한항공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중국이나 다른 국가에서 구매의사를 보이면 팔 수도 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연구개발비를 회수해야 하기 때문이죠.
  
 
제도적 절차와 관료주의 때문에 우리 기술로 만든 세계 최초의 틸트로터 무인기가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정부 부처는 절차, 전례만을 따지고 있다.  
 

 
  
법 때문에 노후 유인기를 무인기화하지 못하는 대한민국

 최근 대한항공이 개발한 KUS-VH가 차세대 공격용 무인기로 주목받고 있다. 도태된 공격용 헬리콥터인 500MD를 무인화해 사용한 것이 바로 이 KUS-VH이다. 대한항공의 조정호 상무에 따르면, “공격용 유인 헬리콥터를 무인화한 국내 최초의 사례”라면서 “성능은 기존 500MD보다 더 뛰어나다”고 강조했다. 이런 유인기의 무인화는 개발단가가 저렴하고, 도태 항공기 처리에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진다. 설계부터 새로 무인기를 개발하는 것보다 이미 비행성능이 입증된 유인기는 개발비용이 저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데 P씨에 따르면 “이 공격용 무인 헬리콥터가 양산도 하기 전에 법 때문에 실제 사용될지는 의문”이라고 한다.
  
 
사실 유인기의 무인화 사례는 미 공군 등에서 오래전부터 시도되어 왔다. 특히 미 공군에서는 이런 유인기의 무인화를 조종사들의 훈련에 도입해 왔다. 무인화한 도태 전투기를 원격조종으로 공중에 띄운 뒤, 전투기 조종사가 표적 삼아 공격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유인 전투기의 무인화 사례로 QF-4를 꼽는다.
  
  QF-4
F-4 팬텀 전투기를 무인화해 이름 앞에 ‘Q’를 붙였다. 미 공군의 제식명칭에서 ‘Q’는 무인기, Unmanned Drone’를 뜻한다. QF-4 전투기를 미 공군에서는 보통 ‘더미타깃(Dummy target·模造標的)’이라고 칭한다. 자동차 충돌실험에 사람 대신 더미(마네킹)를 사용하는 것과 유사한 이유에서다.
  
 
그동안 이런 더미타깃은 제작단가가 비싸 국내에서는 거의 사용되지는 못했다. 제작단가는 비싼데 표적으로 사용해 격추시키면 그 활용도가 1회성에 그친다. 그런데 이 더미타깃에 무장을 장착해 공격용 무인기로 활용한다면 어떨까. 대한민국 공군은 도태를 앞둔 F-5 F-4 전투기를 100대 이상 보유 중이다. 일반적으로 노후한 F-4 F-5 전투기들은 대부분 분해 폐기하거나, 몇 대는 엔진만 탈거해 제설(除雪)장비인 SE-88로 사용한다.
  
 
앞서 인터뷰한 항공전문가 P씨에게 도태를 앞두고 있는 우리 전투기들의 활용방안에 대해 문의해 봤다.
  
 
“공군에서 도태를 앞두고 있는 F-5 F-4 전투기들을 무인화하면, 경제적으로 이익이다. 군의 군사력 증강에도 도움이 된다. 하나, 제도적 걸림돌이 너무 많아 이를 모두 완화해야 한다.
  

/부산 드론쇼에 전시된 대한항공의 공격용 무인헬리콥터, KUS-VH.

 

  유인 전투기를 무인화할 경우 그 크기가 크고 성능이 우수해 일반 전투기와 동일한 비행절차를 거쳐야 한다. 가령 공역(空域) 진입, 주파수 할당 등과 같은 항공 절차이다. 이런 중대형 무인기는 항공 관제소의 통제를 거쳐야 하는데 이런 부분이 법으로 가로막혀 있다. 이런 법적 걸림돌이 제거되지 못하면 도태된 전투기들은 고철로 폐기될 수밖에 없다.
  
 
국내 도태를 앞둔 전투기들은 우리 군이 관리를 잘해 활용도가 매우 높다. 이들을 얼마든지 무인화할 수 있는 기술력이 국내에는 있다. 한마디로 충분한 항공기술은 있는데, 모든 게 법이 문제다. 현대전은 유인기와 무인기가 공존하는 양상이다. 즉 어려운 임무의 선두에 무인기가 먼저 들어가고 유인기가 따라 들어가는 식이다. 그런데 이런 세계적 흐름에 우리는 제도에 걸려 뒤떨어지고 있다.
  
  F-4
팬텀의 경우 노후한 기체이지만, 무장탑재 능력 면에서는 최신예 5세대 전투기들의 무장탑재 능력을 능가한다는 것이 공군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익명의 공군 관계자는 F-5의 활용성에 대해 입을 열었다. F-5는 노후한 전투기지만, 긴급 출동 시 3분이면 공중에 띄울 수 있어 전방 지역에서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신속한 출격 시간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차세대 전투기로는 불가능한 대응 시간이라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F-5를 대체해 배치를 앞두고 있는 국산 전투기 FA-50도 아무리 빨리 출격해도 보통 5분 내외가 소요된다는 것. 즉 이렇게 신속한 출격이 장점인 F-5 전투기를 무인화하면 유사시 북한의 도발에 신속히 대응이 가능하다.
  
 
무인화된 유인기는 내부에 조종사를 지원하는 각종 전자장비와 탈출장비 등을 제거해 무장 탑재량이 늘어나 공격력이 높아진다. 만약 우리 군이 도태되는 전투기들을 모두 무인화할 경우, 현 군사력 대비 공군력이 배 이상 증가한다는 게 P씨의 분석이다.  


  
국내 무인기 조종사 면허 발급 기관조차 없어

/부산 드론쇼에서 전시 중인 항우연의 TR60.  

 

  무인기를 운용하는 데는 무인기 자체 못지않게 무인기 조종사가 필수적이다. 무인기는 ‘조종사’가 무선으로 조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를 양성하고 있을까.
  
 
국방부는 2020년까지 대대 단위까지 무인기를 보급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내세웠다. 국방부 공보실의 나승용 대령에 따르면 “현재 군의 무인기 사업은 차질 없이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무인기와 관련된 추가질문에는 보안을 이유로 답을 피했다. 국방부의 답변이 미흡해 한국항공우주산업(KAI) 홍보실의 오동훈 차장에게 문의해 본 결과, “우리 군은 2017년까지 무인기 개발을 완료하고 2020년까지 전력화를 마친다”고 답했다. 오 차장에 따르면, 개발 중인 우리 군의 무인기는 정찰, 공격, 전자전 등 다양한 플랫폼을 개발할 예정이다.
  
 
국방부의 계획대로 대대 단위까지 무인기를 보급하면 최소 200대 이상의 무인기를 전력화하는 셈이다. 즉 이 무인기와 동일한 수의 조종사가 필요하다. 유사시 작전시간 등을 고려해 교대근무 조종사를 더하면 조종사의 수는 배로 필요하다.
  
 
기자가 공군본부에 국내 무인기 조종사 양성에 관해 문의해 본 결과, “국방부는 물론 공군에는 무인기 조종사 양성기관이 아직 없으며, 특별한 양성계획도 없다”고 답변했다.
  
 
군이 도입을 앞두고 있는 미국의 고고도 정찰기인 글로벌호크 같은 첨단 무인기도 그 성능을 십분 발휘하려면 훈련된 무인기 조종사를 필요로 한다. 무인기를 도입할 때, 무인기는 도입하지만 조종사는 도입하지 않기 때문에 분명 체계적인 무인기 조종사 양성 과정을 필요로 한다.

 

/무인기를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컴퓨터. 사진=김동연 월간조선 기자
  

  기자가 공군 관계자의 설명을 종합해 본 결과, “군은 무인기를 도입하면 해당 무인기를 운용할 수 있는 인력을 때에 따라 몇 명만 양성하면 끝난다”는 주장을 했다. 대부분의 군 관계자의 개념을 종합하면, 단순히 무인기만 있으면 작전은 저절로 수행되는 줄 알고 있다. 한 관계자는 기자에게 도리어 “조종사 양성이 왜 필요하냐”고 되묻기도 했다.
  
 
우리 군의 개념대로면 무인기 조종인력이 전역할 경우, 전략적 공백을 초래하게 된다. 무인기 조종사는 유사시 단기간 교육만으로 비행에 투입할 수 없다. 미숙한 조종사는 수십억 원에 달하는 무인기를 추락시킬 우려가 있다. 7공군 관계자에 따르면 “무인기 조종사 1명을 양성하는 데 최소 1년이 소요돼 전투기 조종사 교육기간과 동일하다”고 말했다.
  
 
변영섭 부산대학교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는 국내 무인기 조종 면허의 부재(不在)에 대해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군용은 물론 민간용 무인기 조종 면허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무인기의 종류에 따른 조종 면허를 정부에서 부여하는데, 국내는 면허 발급기관 및 제도조차 없어 하루빨리 개선이 필요하죠. 분명 이 면허 발급도 레저용 무인기, 중대형 무인기, 군사용 등 등급을 나눠 면허를 발급해야 합니다.
  
 
또 체계적인 안전 교육을 해야 하며, 면허를 정기적으로 갱신해 조종능력을 검증해야 합니다. 조종면허가 없는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무인기를 띄우면 여러 사고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무인기로 군사 지역에 진입한다거나, 군사용 주파수를 사용하는 등 여러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얘기죠.
  
 
최근 무인기는 테러집단 IS도 사용하고 있다는 게 기자의 중동취재원 옴라니 씨가 전해온 말이다. IS에 맞서 싸우는 쿠르드족 민병대도 상업용 무인기를 띄워 정찰용으로 사용 중이라고 전했다. 익명을 요청한 터키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터키는 시리아 국경 지역에 무인기를 투입해 24시간 감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렇듯 무인기는 전 세계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자산으로 대두되고 있다.

美 제너럴 아토믹스 社 인터뷰
 

북한 지도부 제거할 저승사자, 그레이 이글 한국 배치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미 국방부는 곧장 한반도에 공격용 무인기 MQ-1C 그레이 이글(Grey Eagle)을 배치했다. 이 무인기는 중동에서 요인 암살 작전에 사용했던 MQ-1 프레데터의 개량형이다. 그만큼 이 무인기의 공격력이 막강하다는 게 군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지난 2 6일 영() 일간지 《미러(Mirror)》는 테러집단 IS의 주요 인사 12명이 무인공격기 프레데터의 공격으로 사망했다고 전했다.
  
 
기자는 이 그레이 이글을 제작한 제너럴 아토믹스 에로노티컬 시스템스(General Atomics Aeronautical Systems·GA-ASI·이하 제너럴 아토믹스)사의 킴벌리 카시츠 홍보담당관에게 연락해 해당 무인기의 성능 등을 문의했다. 다음은 제너럴 아토믹스와의 일문일답이다.
  
 
MQ-1 프레데터에서 발전된 MQ-1C 그레이 이글은 어떤 부분이 개선됐습니까.
 
“전방위적으로 업그레이드했습니다. 엔진의 출력을 높여 동력성능과 비행성능을 개선하고, 탐지 센서와 통신체계를 보완해 더 안정적인 임무 수행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특히 무인기 통제에 쓰이는 통신장치를 암호화(Encrypt)해 유사시 적의 전자공격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착륙에 사용하는 부품도 개선해 기존보다 안정적인 착륙이 가능합니다.
  
 
―이 그레이 이글은 향후 한반도에 상주할 예정인가요. 현재 한국의 작전계획(OPLAN)에도 포함되는 전력으로 봐도 되겠습니까.
 
“보안과 관련한 질문으로 자세한 답변을 할 수 없으나, 지역적으로 상주(Stationed regionally)하며 유사시 투입합니다.
  
 
―무인기 전문가들에 따르면, 무인기는 유사시 일부 장비가 작동하지 않을 경우 대응책이 유인기에 비해 적어 추락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만큼 유사시 대비책이 적다는 뜻인데, 그레이 이글은 어떤 대응책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레이 이글은 그런 장비불능 상태에 대비해 항공통제 장비를 모두 삼중(三重·Triple unit)으로 제작했습니다. 이 외에도 기체에 이상이 생기거나 유사시 어떤 상황에서도 모()기지로 복귀(RTB)할 수 있습니다.
  
 
―무인기가 적진에서 임무 중 추락한다면, 추락한 잔해가 적을 이롭게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럴 경우, 추락한 기체를 회수하는 작전을 펼치게 되나요.
 
“이것은 무인기뿐 아니라, 모든 전략자산은 미 국방부가 적진에서 회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미군은 F-22의 성능에 상응하는 스텔스 무인기를 개발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미 미국은 스텔스기 제작능력을 가지고 있어, 예산 등이 준비되면 개발이 가능합니다.
  
 
―현재 귀사에서 제작 중인 첨단 무인기들을 한국에도 판매할 수 있습니까.
 
“현재 우리 제너럴 아토믹스가 보유한 무인기들은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에 FMS(대외군사판매)를 통해 판매할 수 있습니다. 이 무인기들은 동맹국에 판매가 허용된 MTCR Category 1에 해당하는 무인기들입니다.
  
 
―무인기 조종사 양성에는 얼마나 소요됩니까. 일반 전투기 조종사와 비교했을 때 교육 과정에 어떤 차이가 있나요.
 
“모든 훈련 및 교육 과정을 마치는 데 1년이 소요돼 전투기 조종사 양성기간과 거의 동일합니다. 그레이 이글과 같은 중대형 무인기를 다루기 위한 교육 과정은 전투기 조종사에 버금갑니다. 현재 모든 무인기 조종사 양성은 미 공군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향후 무인기 대외판매가 늘어나, 다양한 소비자가 발생할 것을 대비해 우리는 노스다코타(North Dakota)주에 조종사 양성기관을 만들 계획입니다.
  
 
―일부 항공전문가는 유인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 무인기 조종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 주장에 동의합니까.
 
“해당 주장은 주관적인 견해로 보입니다. 물론 미 공군에서는 무인기의 CAP(Combat Air Patrol·공중경계) 임무에 한해서는 조종 경험이 없는 사람도 채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제너럴 아토믹스의 경우 미 연방항공청(FAA)에서 인정받은 조종사만 무인기 조종사로 선발하고 있습니다. 전투기, 제트기, 회전익 항공기 등을 조종해 비행시간이 최소 300시간 이상 된 조종사들을 뽑습니다.
  
 
―향후 유·무인기들의 공중급유를 담당하는 무인기(Tanker UAV)를 제작할 가능성도 있습니까.
 
“기술적으로는 얼마든지 제작이 가능하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소요 제기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귀사의 무인기가 다른 항공업체인 보잉이나 록히드마틴의 무인기보다 앞선 점은 무엇인가요.
 
“우리 제너럴 아토믹스는 프레데터와 그레이 이글 시리즈를 미 공군과 육군에 납품해 왔습니다. 우리 무인기들이 미군과 함께 비행한 시간은 약 400만 시간에 달합니다. 이 중 90%의 비행시간은 모두 실전에서 비행한 시간입니다. 이렇게 실전에서 다양한 경험을 축적한 회사로는 우리가 유일합니다. 우리가 중고도(中高度) 무인기 시장에서 독보적인 이유입니다.”⊙

김동연 기자/ 자동차 칼럼니스트

 

2016.04.16 이스라엘의 미사일방어체계와 방위산업

▲이스라엘은 로켓과 포탄을 요격하기 위해 아이언 돔을 운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미국과 2년마다 한 번씩 대규모 미사일방어(MD)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올해도 지난 2 21일부터 29일까지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 인근 하트 조르 공군기지에서 양국군은 다양한 종류의 요격미사일을 시험하는 등 합동훈련을 벌였다.  


 
‘주니퍼 코브라(Juniper Cobra)’라는 이름의 양국 합동 미사일방어 훈련은 2001년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해 시작됐다. 당시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미사일로 초토화하겠다고 호언장담했었다. 이스라엘은 1991년 걸프전() 때 이라크로부터 39발의 스커드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 이스라엘은 보복에 나서려 했으나, 전쟁이 아랍 대() 이스라엘 구도로 변질되는 것을 우려한 미국이 이를 만류했다. 결국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답지 않게 보복을 자제했었다. 그 대신 양국이 시작한 것이 이 훈련이었다


  
1973년 이후 미사일방어체계 구축 나서

▲이스라엘의 高고도미사일인 애로-3 미사일  

 

양국의 합동 미사일방어 혼련은 현재 이란의 탄도미사일에 대처하기 위해 실시되고 있다. 올해 훈련에는 미군 유럽사령부(EUCOM) 소속 병력 1700명과 이스라엘군 병력 1500명이 참가했으며 미() 3 공군 사령관 티머시 레이 중장이 지휘했다. 이란 핵()협상이 타결됐음에도 불구하고 양국군이 미사일방어 훈련을 실시한 것은 이란의 탄도미사일 공격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이란 핵협상 타결에 강력히 반발해 온 이스라엘이 미국과 미사일방어 훈련을 실시한 것은 안보에는 한 치의 허점도 없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미국 다음으로 MD 체계를 촘촘하게 구축해 온 대표적인 국가이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이란의 탄도미사일, 레바논 무장정파(政派)인 헤즈볼라의 중·단거리 미사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인 하마스의 로켓포 공격 등에 대비해 다층적(多層的) MD 체계를 개발해 왔다.      

 

이스라엘이 MD 체계를 추진하게 된 것은 제4차 중동전쟁(1973 10) 때 이집트의 스커드와 시리아의 프로그 미사일 공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본 이후부터였다. 당시 예고도 없이 국경을 넘어 날아오는 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MD 체계 개발이다.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최소 4km에서 최대 2000km 이상의 로켓과 탄도미사일을 막기 위해 MD 체계를 개발해 왔다


 
이스라엘의 MD 체계는 크게 저()고도와 중()고도 및 고()고도 요격 등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고고도 요격 체계의 핵심은 애로(Arrow·화살)-3 요격미사일이다. 이스라엘은 지난해 12 10일 미국 뉴멕시코주 화이트 샌즈 미사일 훈련장에서 애로-3 요격미사일을 시험 발사해 성공했다. 애로-3는 이스라엘 국영 우주항공산업(IAI)과 미국 보잉이 공동 연구 개발한 요격미사일이다.
  

  애로-3는 지상에서 100km 이상의 대기권 밖에서 날아오는 탄도미사일을 고고도에서 요격할 수 있다. 미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요격미사일과 비슷하다. 이 미사일은 기존 미사일과 달리 대기권 밖에서 목표물을 찾아 직접 파괴(Hit-to-kill)한다. 무게는 700kg, 최대 속도는 마하 9이다. 외기권(外氣圈) 요격은 궤도의 불확실성 문제들이 있지만, 인공지능 시커(seeker)를 장착한 애로-3는 대부분 문제를 이미 해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란 샤하브3와 北 노동미사일은 쌍둥이

애로 미사일은 이란의 샤하브-3 탄도미사일을 대비해 개발됐다. 샤하브-3 미사일은 사거리 2000km, 중동에 있는 미국의 모든 군사기지와 이스라엘 전역을 사정범위 안에 두고 있다. A형부터 D형까지 4가지 종류가 있는 샤하브-3는 길이 16m, 직경 1.2m며 최대 속도는 마하 21인 것으로 추정된다. 샤하브는 페르시아말로 ‘유성’이라는 뜻이다.  


 
특히 샤하브-3 미사일은 북한의 노동미사일을 복제한 것이라는 말을 들어 왔다. 래리 닉시 미국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이란 샤하브-3 미사일과 북한 노동미사일은 쌍둥이”라고 지적했다. 북한과 이란은 1980년대 초반부터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에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란은 북한으로부터 스커드-B(1987), 스커드-C(1992), 노동1(1994) 등 미사일을 수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과거에는 이란에 기술전수를 해 줬지만 최근 들어 이란은 위성발사에 성공할 정도로 로켓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란은 2009 2월 자국 기술로 제조한 첫 인공위성 오미드(희망)호를 발사해 성공했다. 이로써 이란이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안착시킨 9번째 국가가 됐다. 이후에도 이란은 2010, 2012, 2015년에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다


 
이란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데 사용한 운반체는 사피르 로켓이다.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2단의 사피르 로켓은 길이 22m, 직경 1.25m, 무게 26t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북한 전문 웹사이트인 38노스는 북한이 지난 2 7일 발사한 광명성 4호의 3단 로켓이 이란 사피르의 2단 로켓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인공위성과 장거리 미사일의 공통 핵심기술은 운반로켓이다. 운반로켓은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진입시키기 위한 추진체로, 우주발사체(SLV·Space Launch Vehicle)라고 부른다. 우주발사체는 탄도미사일과 매우 비슷하다. 탄두 부분에 위성을 탑재하면 우주발사체이고, 폭탄이 실려 있으면 미사일이다.    


  
‘다윗의 물맷돌’

▲다윗의 물맷돌’ 요격체계에서 스터너 미사일이 발사되고 있다. 

 

 이란이 장거리 로켓을 계속 발사하자 이스라엘도 이에 대비해 애로-3를 적극 개발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애초 이스라엘에 자국의 사드(THAAD)를 구매할 것을 요청했지만 이스라엘이 독자적인 개발을 주장해 결국 공동개발과 생산을 하기로 합의했다. 이스라엘은 이르면 올해 말 애로-3를 실전배치할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애로-3 4개 포대를 먼저 배치하고, 차후에 4개 포대를 배치할 계획이다. 애로-3 1개 포대는 6발들이 4개의 발사대 차량과 탐지장비, 통제장치 등으로 구성된다.  


 
중고도미사일방어체계에는 애로-2와 ‘다윗의 물맷돌(David's Sling)’이 있다. 이스라엘은 2000년부터 애로-2를 실전배치해 놓고 있다. 애로-2 요격미사일의 최대 사거리는 90~148km, 요격고도는 50~60km이다. 속도는 마하 9이다. 애로-2는 날아오는 적의 미사일을 포착하고 요격미사일의 탄두를 폭파시켜 파편으로 파괴한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애로-2를 개량해 블록(Block) 1부터 5까지 개발했다. 애로-2 1개 포대는 이동식 발사대와 발사 통제 및 통신센터, 화력관제센터 및 이동식 레이더로 구성돼 있다. 발사대는 4개에서 8개가 있는데 1개 발사대에는 미사일 6발이 장착돼 있다.  


 
‘다윗의 물맷돌’은 최근 시험발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올해부터 실전배치에 들어간다. ‘다윗의 물맷돌’은 사거리 40~300km인 미사일과 로켓을 요격하는 중거리 요격미사일 방어체계이다. ‘다윗의 물맷돌’은 이스라엘의 국영 방산업체 라파엘과 미국의 방산업체 레이시언이 공동으로 개발했다. ‘마술 지팡이’로도 불리는 ‘다윗의 물맷돌’은 구약성서에서 고대 팔레스타인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물맷돌로 쓰러뜨린 다윗의 이야기에서 따온 이름이다.  


 
‘다윗의 물맷돌’의 스터너(Stunner) 요격미사일은 최대 사거리가 300km에 달하고 요격고도는 50~70km이다. 속도는 마하 7.5이다. 스터너 미사일은 밀리미터파 대역의 능동전자주사식 위상배열 레이더와 전자광학 및 적외선 영상탐색기 등으로 구성된 탐색체계가 장착돼 있어 패트리엇-3(PAC-3)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스터너 미사일은 16발이 들어가는 발사관에 장착된다. 또 적 항공기 요격용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 탄두나 근접신관(일정 거리에 접근하면 자동 폭발하는 신관) 없이 충격속도로 미사일을 파괴하며 전천후 발사가 가능하다. 대당 가격은 100만 달러이다. 헤즈볼라의 중거리 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아이언 돔’과 ‘아이언 빔’

이스라엘은 현재 단거리 로켓 방어시스템인 ‘아이언 돔(Iron Dome)’을 운용하고 있다. 아이언 돔은 2012 11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아이언 돔은 당시 하마스가 발사한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발사된 로켓 737발 중 273발에 대해 격추를 시도해 245발을 요격했다


 
아이언 돔은 사거리 4~70km 로켓과 155mm 포탄을 요격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라파엘사와 미국의 레이시언사가 합작으로 개발했다. 아이언 돔은 탐지레이더, 추적시스템과 화력통제시스템, 1발에 5만 달러인 요격미사일 20발이 든 발사대 3개로 구성된 이동식 포대이다. 요격미사일은 타미르라고 부르는데, 길이 3m, 지름 15cm, 무게 90kg, 사거리 4~70km이고 탄두에 11kg의 폭약을 탑재하고 있다. 레이더로 로켓이나 포탄을 감지하고 추적해 요격까지 걸리는 시간은 15~25초 정도이다. 아이언 돔 1개 포대가 15150km²에 이르는 지역을 방어할 수 있다. 1개 포대의 가격은 5000만 달러다. 이스라엘은 현재 8개 포대를 실전배치한 상태이다.  


 
이스라엘은 레이저 무기도 개발하고 있다. ‘아이언 빔’(Iron Beam)이라고 불리는 이 무기는 트럭 모양의 레이저 빔 발사대와 레이더, 통제소로 구성됐는데, 날아오는 적 로켓이나 포탄, 박격포탄, 소형 무인기 등을 요격할 수 있다. 사거리는 최대 7km이고 레이저 빔을 한 번 쏘고 4~5초면 다시 쏠 수 있다. 앞으로 2~3년 후면 실전배치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적의 미사일을 감지·추적할 수 있는 레이더들도 개발해 왔다. 가장 뛰어난 위력을 보이는 레이더는 EL/M-2080 그린파인이다. 그린파인 레이더의 탐지거리는 최대 500km이다. 30여 개의 표적을 동시 추적할 수 있는 그린파인 레이더는 미사일 상승 단계부터 궤적을 추적해 작전통제소로 전송하고 통제소는 낙하 예상 지점을 파악해 미사일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대비할 수 있도록 한다


  
수퍼 그린파인 레이더, 한국공군도 사용

▲그린파인 레이더는 최대 500km까지 탐지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그린파인 레이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EL/M-2080S 수퍼 그린파인 레이더도 개발했다. 이 레이더는 그린파인보다 출력이 2배 정도 더 높으며, 작고 강력한 신형 송수신 모듈 적용으로 탐지거리가 900km까지 대폭 확대됐다. 이스라엘은 애로-2와 애로-3에 수퍼 그린파인 레이더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공군도 현재 수퍼 그린파인 레이더 2대를 운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물맷돌’에는 방산업체인 ELTA사의 EL/M-2084 S밴드 AESA 레이더를 사용하고 있다. 이 레이더의 축소형 모델은 아이언 돔의 레이더로 운영되고 있다. AESA 레이더는 최대 탐지거리가 350~400km에 달하며 1200개의 표적을 동시에 탐지할 수 있다. 이 레이더가 대포병용으로 사용될 경우 포탄과 로켓탄 등의 소형 표적을 100km 밖에서 탐지할 수 있으며 200개의 표적을 동시에 탐지할 수 있다


 
애로-2 3 및 ‘다윗의 물맷돌’, 아이언 돔을 모두 가동한다면 이스라엘의 하늘은 완벽한 ‘철()의 지붕’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이번 미국과의 주니퍼 코브라 미사일방어 합동훈련에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MD 체계를 시험했다. 특히 이스라엘은 미국이 보유한 MD 체계와의 정보교환과 호환 여부도 시뮬레이션을 통해 가동했다. 미국은 그동안 이스라엘과 공동으로 MD 체계를 개발했으며 막대한 자금도 지원해 왔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미국으로부터 매년 30억 달러(35000억원) 규모의 군사원조를 받아 왔는데 향후에는 이를 최대 50억 달러까지 확대하길 바라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2017년 만료되는 군사원조 협정을 갱신하는 방안을 놓고 협의를 해 왔다.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볼 때 미국은 이스라엘에 군사원조를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    


  
이란, 핵탄두 탑재 가능한 가드르-110 시험발사

이란의 샤하브-3 미사일. 북한의 노동미사일과 쌍둥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란 핵협상 타결 이후 이란과 테러조직들의 자국 공격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이란은 지난해 10월 탄도미사일 에마드를 시험 발사했다. 페르시아어로 ‘기둥’이란 뜻을 가진 에마드 미사일은 샤하브-3의 개량형이다. 미국의 군사 전문가들은 750kg 정도의 탄두를 장착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미사일의 사거리가 1700km에 가깝고 정밀도가 오차범위 500m 안쪽으로, 이스라엘을 충분히 타격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호세인 데흐칸 이란 국방장관은 “에마드는 목표를 타격할 때까지 궤적을 통제할 수 있는 미사일”이라면서 “이란은 높은 정밀도를 보인 에마드 미사일로 적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란 혁명수비대(IRGC)는 에마드를 시험 발사한 지 사흘 후에 지하 500m에 있는 대형 미사일 기지의 모습을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했다. IRGC는 “우리는 사거리가 다양한 미사일들을 보유하고 있다”면서 “최고지도자가 명령만 내리면 언제든지 발사할 준비가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란은 또 지난해 11월에도 파키스탄과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항구도시 차하바르 인근에서 샤하브-3를 개량한 가드르-110을 시험 발사했다. 이 미사일의 사거리는 1900km로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은 이란이 핵협상 타결에도 불구하고 핵개발을 비밀리에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핵합의가 이뤄진 이후에도 이란은 핵무기를 보유하겠다는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다”면서 “이란은 여전히 중동 정세를 불안하게 하는 행보를 지속하고 있고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어기면서 전 세계에 공포를 퍼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네타냐후 총리의 이런 발언은 이스라엘이 앞으로 이란의 핵개발에 대비해 더욱 강력한 억제수단을 보유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무장을 국가의 존립을 가장 위태롭게 하는 위협으로 간주해 왔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만약을 대비해 억제수단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스라엘, 核실험 없이 核무장

이스라엘은 공식적으로 핵보유를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있으며(NCND),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도 거부해 왔다. 이스라엘의 역대 지도자들 중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핵무기에 대해 언급한 사람은 없다. 역대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의 생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핵무기 보유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핵주권을 스스로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한 직후부터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는 현실을 고려해 핵개발을 추진해 왔다.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핵개발에 착수한 것은 1956 10 17일 프랑스와 비밀합의한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이스라엘은 프랑스와 영국과 함께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한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대신 프랑스는 이스라엘의 네게브 사막에 있는 디모나에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을 지어 주고 우라늄을 공급해 주기로 약속했다. 디모나는 이후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핵무기 개발 시설이 됐다. 영국도 1959년과 1960년 플루토늄 생산에 꼭 필요한 중수 20t을 이스라엘에 제공했다. 이스라엘의 핵개발에 필요한 자금은 미국의 유대인계 부자들이 모금했다. 프랑스는 1960 2 13일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사하라 사막 지하에서 최초로 지하 핵실험을 실시했다. 이 핵실험으로 프랑스는 핵보유국이 됐고, 이스라엘은 프랑스로부터 핵기술을 제공받았다.  


 
이스라엘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이후 핵실험 없이 핵폭탄을 제조했다. 미국은 1968년 이스라엘이 핵폭탄을 제조한 사실을 알았지만 문제 삼지 않았다.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1969 9 25일 백악관을 방문해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회담했다. 당시 두 정상(頂上)은 “이스라엘이 공개선언이나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의 보유를 밝히지 않으면 미국은 이스라엘의 핵 프로그램을 묵인하고 보호할 것”이라는 내용의 비밀협약을 맺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밀협약의 내용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현재 80~300개의 핵폭탄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보유한 핵폭탄은 80개이다. 영국의 군사 컨설팅 업체인 제인스 인포메이션 그룹은 이스라엘이 100~3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는 이스라엘의 핵탄두 수를 200개로 추산했다. 또 미국의 핵확산 반대 비정부기구인 핵위협 이니셔티브(NTI)의 추정치는 100~200개다. 《이스라엘과 핵폭탄》이란 책을 쓴 미국의 애브너 코언은 이스라엘이 적게는 수십 개, 많게는 300개가 넘는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추정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도 2008년 이스라엘은 최소 150기의 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군사용 정찰위성 운용

▲핵탄두를 운반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예리코-3 미사일.  

  

이스라엘은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비롯해 잠수함과 폭격기 등 운반수단도 갖추고 있다. 이스라엘이 보유한 탄도미사일들 중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미사일은 예리코(Jericho)-2이다.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도시인 예리코에서 따왔다. 예리코는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나팔소리와 큰 고함소리만으로 성벽을 무너뜨린 도시로 유명하다.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예리코가 신()의 뜻으로 멸절(滅絶)했다는 의미에서 이 미사일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예리코-2는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2단 중거리 미사일이다. 길이 14m, 직경 1.56m, 중량 26t, 탄두무게 1t인 예리코-2 1메가톤급 핵탄두를 운반할 수 있다. 사거리는 1500km로 추정된다. 따라서 예리코-2로는 이란을 공격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개발한 것이 예리코-3이다. 예리코-3는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이라고 볼 수 있다. 2008년 실전배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3단 고체연료 로켓이며, 길이 15.5m, 직경 1.56m, 중량 30t, 탄두무게 1000~1300kg이다. 예리코-3 750kg짜리 1개의 핵탄두 또는 2~3개의 MIRV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다. 사거리는 4800~6500km로 추정되는데, 미국 의회조사국은 예리코-3 미사일이 탄두무게를 1t으로 할 경우 사거리가 11500km라고 평가했다. 이스라엘은 2011 11월 예리코-3의 개량형을 성공적으로 시험 발사한 적이 있다.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우주 강국인 이스라엘은 독자적인 인공위성도 보유하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이 운용하고 있는 군사용 정찰위성은 오페크(Ofek) 5, 7, 9호이다. 이스라엘은 3개의 군사용 정찰위성을 운용하며 탄도미사일을 정확하게 목표에 타격할 수 있다.    


  
F-16I F-15I, 核폭탄 투하 가능

▲이스라엘 공군의 F-16I 전폭기는 핵폭탄을 투하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또 핵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F-16I F-15I를 보유하고 있다. 이 전폭기들은 연료를 대량으로 탑재할 수 있고 필요하면 공중급유를 받을 수 있다. 특히 F-16I 수파(Sufa)는 이스라엘의 요구에 따라 미국이 제작한 비행기로 기존의 F-16과는 다른 항공기이다. 수파는 히브리어로 ‘폭풍’이란 뜻이다. 이스라엘 공군은 모두 102대를 미국 록히드 마틴사로부터 도입했다. F-16I의 특징은 최대 2000L 이상의 연료를 추가 탑재할 수 있어 작전반경이 최대 2000km에 달한다는 것이다. 장거리 폭격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항공기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보유한 돌핀급 잠수함도 핵탄두를 탑재한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 독일 HDW사가 제작한 돌핀급 잠수함은 길이 57.3m, 너비 6.8m에 배수량 1640t(수중 1900t)으로 수중에서 최고 20노트로 항행하며 순항거리는 4500km이고 200m까지 잠수할 수 있다. 승조원 35명에 특수부대원 10명을 태운 채 한 달간 작전할 수 있다. 또 선수에 구경 650mm의 어뢰관 4기와 533mm 발사관 6기 등 모두 10기를 갖추고 있다. 6발을 재장전해 발사할 수 있다. 650mm 발사관으로는 순항미사일이나 탄두 중량 227kg, 사거리 130km의 잠대지 하푼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고, 수중추진기에 탑승한 특수부대원을 외부로 보내는 등 지상과 해상표적 공격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스라엘은 현재 돌핀급 잠수함 5척을 보유하고 있으며 내년까지 1척을 추가 도입할 예정이다. 이 잠수함은 팝아이(Popeye) 터보 크루즈 핵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다. 이 미사일은 650mm 어뢰관에서 발사되며 길이 6.25m, 사거리 320km이다. 이 미사일은 2002년 시험발사에서 1500km를 비행했다.    


  
이스라엘의 방위산업

크루즈미사일 등을 발사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돌핀급 잠수함.

 

이스라엘은 북쪽으로는 레바논, 동쪽으로는 시리아와 요르단, 남서쪽으론 이집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인구 780만명(유대인 75.4%, 아랍인 20.6%, 기타 4%), 국토 면적 2770km²(우리나라 경상북도 크기)인 이스라엘은 자원조차 별로 없는 국가이다.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3000여 년간의 디아스포라(diaspora·離散) 끝에 유대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웠다. 이스라엘은 건국 이후 1974년까지 이집트, 시리아 등과 4차례의 중동전쟁을 벌였다. 2006년 레바논 무장조직인 헤즈볼라와 2008년과 2012, 2014년 팔레스타인 무장정파인 하마스와 전투를 벌였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과는 앙숙 관계이다.  


 
이스라엘은 안보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 36659달러(세계 24)를 기록하는 등 경제력을 과시해 왔다. 특히 이스라엘은 안보와 경제 분야를 모두 발전시켜 온 강소국(强小國)이다. 이스라엘이 다층적인 미사일방어체계와 핵무기 및 운반수단까지 보유한 군사강국이 된 것은 무엇보다 방위산업을 적극 육성해 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방위산업 생산규모는 100억 달러로 제조업 전체 생산규모의 10.5%에 달한다. 방위산업 고용은 6만명으로 제조업의 14.3%, 국가 전체 고용의 1.7%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높다. 특히 이스라엘은 방위산업을 국가 생존전략 차원에서 육성해 왔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그동안 연구·개발(R&D) 예산을 대거 투입해 최첨단의 독자적인 무기체계 개발에 주력해 왔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연간 R&D 지출규모는 GDP 4.4%로 세계 최고다. R&D 예산에서 방위산업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30%로 세계 1위다. 이스라엘이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된 비결은 세계 최고 기술을 자랑하는 방위산업이 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인당 무기 수출액 세계 1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방산기업들은 IAI, 엘빗시스템스(Elbit Systems), 라파엘, 이스라엘군사산업(IMI) 4개사이다


  IAI
는 최대 방산회사로 미사일·우주항공, 군용·상용기, 수리·정비, 레이더, 기술지원 부문 등 6개 사업군()을 보유하고 있다. 요격미사일, 무인기, 위성, 위성발사용 로켓 부문에서 양산 능력까지 갖췄다. 이 회사 주도로 이스라엘은 최초로 인공위성 발사를 단 한 번에 성공시키기도 했다. 특히 IAI의 레이더 기술은 세계 수준급인 것으로 평가된다. IAI의 전신은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인 다비드 벤 구리온이 1953년 설립한 베덱(Bedek) 항공이다. IAI 1986 F-16에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은 라비(Lavi) 전투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IAI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 TA-50용 레이더 22대를 판매했다


 
라파엘은 1948년 이스라엘 군과학화단(HEMED)으로 출범했으며 1952년 우리나라 국방과학연구소에 해당하는 이스라엘 연구개발국(EMET)을 거쳐 2000년 민간기업으로 독립했다. 라파엘은 공격용과 요격용 미사일 등을 주로 개발·생산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연평도에 배치된 스파이크(Spike) 미사일을 개발한 회사도 라파엘이다.  


  IMI
는 우지(Uzi) 기관단총을 비롯해 메르카바 전차 등 주로 육군용 장비 전문업체이다.
 


 
엘빗시스템스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민간 방산업체이다. 이 회사는 항공기 업그레이드 사업부터 C4I, 장갑차, 전자광학센서, 보안 분야 등에서 능력을 발휘해 왔다. 엘빗시스템스는 연간 매출의 10% R&D에 쓸 정도로 신무기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엘빗시스템스는 한국형 헬기(KHP)에 항공전자장비 체계 통합 및 임무컴퓨터 소프트웨어(SW)를 개발, 공급했다


 
이스라엘의 방산업체들은 전 세계로 무기를 수출한다. 이스라엘 국민 1인당 무기 수출액은 300달러로 세계 1위다. 방산업체들의 평균 수출 비율은 무려 75%에 이른다.  


  
안보 문제에는 左右 없어

이스라엘의 역대 정부는 좌·우파에 관계없이 그동안 철저한 자주국방, 막강한 군사력으로 힘의 우위 유지, 도발에는 가차 없는 응징과 보복, 필요할 경우 선제공격 전략을 고수해 왔다. 이스라엘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된 것도 정치권이 안보 문제에선 한목소리를 내 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국민들도 안보 문제에선 전폭적으로 정부를 신뢰한다. 전쟁이나 테러 등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스라엘 국민들은 강력한 단결력을 과시해 왔다. 반면 안보환경이 이스라엘과 비슷한 우리나라의 경우 안보 문제에서조차 정치권은 정쟁을 일삼고 있으며 국론도 분열돼 있다. 북한의 제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도 우리나라는 미국의 전략자산에만 의존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독자적인 무기개발을 통해 스스로 생존권을 지켜 온 이스라엘의 전략을 곰곰이 되새겨봐야 할 듯하다. 

출처주간조선 2402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59. 서울대 영문과 졸업.
⊙ 공군사관학교 영어교관, 《한국일보》 국제부 차장, 《주간한국》 편집장 역임.
⊙ 저서: 《홍군 VS 청군-미국과 중국의 21세기 아시아 패권 쟁탈전》
《네오콘-팍스 아메리카나의 전사들》 《유러화의 출범과 21세기 유럽합중국》
《유럽의 문화도시》 《러시아 곰은 웅담이 없다》 등.

 

■사이버 전략

2015.09.23 이탈리아 해킹팀 사건을 통해 본 해킹 세계의 변화

유출된 해킹팀 자료는 해커들의 ‘공짜 노다지’

실제로 스마트TV를 몰래카메라로 악용하거나 해적 방송을 내보내는 게 가능하다. 심장병 환자들이 사용하는 심박 조율기도 원격 해킹을 통해 심장에 전기 충격을 가할 수 있다. 해커들이 노트북을 이용해 16km 떨어진 거리에서 달리고 있는 차량 시스템을 해킹해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를 마음대로 조작했다. ⊙ 하드웨어·소프트웨어의 취약 부분인 제로데이 취약점… 인터넷 세상의 메르스와 같아 ⊙ 사물인터넷(IoT) 기기 늘면서 보안위협 사례 급증 ⊙ 우리나라, 제품 취약점 분석·공개하는 행위 법적으로 허용해야  

 

/이탈리아 해킹팀의 RCS, 갈릴레오.

 

  지난 6월, 이탈리아 보안업체 ‘해킹팀(Hacking Team)’이 해킹을 당했다. 이 회사는 감시 및 도·감청용 스파이웨어를 개발·판매하는 업체다. 프랑스의 비(非)정부기구인 ‘국경없는 기자회(Reporters without Borders)’가 ‘인터넷 오적(五賊)’ 중 하나로 지목한 곳이기도 하다. 국경없는 기자회는 매년 〈인터넷의 적들(Enemies of The Internet)〉이란 보고서를 통해 인터넷 검열과 감시로 인권을 침해하고 정보자유를 억압하는 인터넷의 적들을 공개하고 있다.

 

 2013년에는 “디지털 용병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며 해킹팀을 비롯해 감마 인터내셔널(Gamma International), 블루코트(Blue Coat), 아메시스(Amesys), 트로비코(Trovicor) 등 5곳을 ‘인터넷 오적’이라 밝힌 바 있다. 이 중 감마 인터내셔널도 작년에 해킹을 당했었는데, 일부 보안전문가들은 이것이 이번 이탈리아 해킹팀을 해킹한 세력과 같은 집단의 소행일 것이라 보고 있다.    


  디지털 용병, 이탈리아 해킹팀과 RCS 

정체 모를 해커들에게 해킹을 당한 며칠 후인 7월 6일, 폭로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WikiLeaks)’는 해킹팀이 갖고 있던 이메일 등 내부 자료(약 400GB 분량)를 공개했다. 이후 연일 뉴스에서는 이 업체와 거래한 내역이 있는 국가와 단체를 낱낱이 세상에 까발리고 있다.
 
  언론 기사와 자료를 종합해 보면 지금까지 확인된 해킹팀의 고객은 모두 37개 국가, 67개 기관이다. 가장 활발히 해킹팀과 거래한 국가는 멕시코(11개 기관)였으며, 지불한 금액은 무려 580만8875유로(약 72억8200만원)이다.

 

이 뒤를 이탈리아(7개 기관), 모로코(2개 기관), 사우디아라비아(3개 기관) 등이 잇고 있으며, 미국(3개 기관)이 9번째로 많은 145만 유로를, 싱가포르(1개 기관)가 11번째로 많은 120만 유로를, 우리나라(1개 기관으로 국가정보원·일명 5163부대)가 19번째로 많은 68만 유로(약 8억5000만원)를 지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회사의 주력상품은 ‘갈릴레오’라 불리는 RCS(Remote Control System·원격조종 시스템)이다. 사실 RCS는 이미 우리 주변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다. PC가 고장 나거나 특정 웹 서비스가 안 될 때 AS센터에 가지 않고 고치는 방법이 있는데, 원격에서 전문가가 의뢰자의 PC에 접속해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결하는 방법이다.

 

AS기사가 방문하면 비용과 시간이 드는 데 비해 원격에서 기사가 의뢰자 PC에 접속하면 보다 간단하고 편리하게 문제점을 찾고 고칠 수 있다. 이때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RCS이다. AS기사는 사용자의 동의를 얻은 후 PC에 RCS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실행한다.

 

 이후 전문가는 마치 의뢰자의 PC 앞에서 수리를 하는 것처럼 원격에서 PC의 모든 기능을 제어하며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 이외에도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스마트폰 위치추적 및 데이터 원격 삭제 서비스 등도 이런 RCS 기술을 이용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탈리아 해킹팀의 RCS, 갈릴레오는 이들과 기능은 거의 같지만 목적이 다르다. 우선 사용자 동의 없이 몰래 PC나 스마트폰에 설치되며, 일단 RCS가 컴퓨터에 깔리면 인터넷·e메일·컴퓨터에 보관된 각종 파일 등을 감시할 수 있게 된다. 스마트폰에서는 통화와 문자 메시지·주소록·달력 등을 감시하고 위치(GPS) 추적도 가능하다.

 

또한 IP anonymizer란 익명통신 기능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제품을 만든 해킹팀조차 구매 고객 중 누가 누구를 감시하고 있는지 알아내기 어렵다. 한마디로 사용자 몰래 스파이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해킹팀은 소위 ‘제로데이(0-Day) 취약점’이란 것을 이용한다.  


  인터넷 세상의 메르스, 제로데이(0-Day)의 취약점

 “Hacking Team breach a gold mine for criminal hackers(해킹팀이 해킹범죄를 일삼는 자들에게 금광을 노출시켰다).”
 
  이는 이탈리아 해킹팀 내부자료 유출사건 이후 한 외신이 보도한 말이다. 여기서 금광이란 ‘제로데이(0-Day) 취약점’을 일컫는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기에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사람이 만든 컴퓨터나 소프트웨어도 완벽할 수 없으며, 오류(일명 버그·Bug)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업체들은 제품 출시 후에도 지속적인 업데이트 및 기술지원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이런 문제를 해결한다.
 
  제로데이 취약점이란 제조사가 해당 오류에 대해 모르거나, 알고는 있지만 아직 오류 수정을 하지 못한 ‘컴퓨터 소프트웨어 또는 하드웨어상의 취약한 부분’을 일컫는다. 이러한 제로데이 취약점은 해킹기술과 결합될 경우 백신프로그램으로도 탐지나 치료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산업체, 학계, 연구기관 등 보안과 관련된 일을 하는 이들에게 꾸준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세계 각국의 정보기관들은 방어 또는 공격의 목적으로 이러한 제로데이 취약점을 조금이라도 먼저 확보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 같은 제로데이 취약점을 이용한 해킹의 안전지대가 아니다. 작년 말 온 나라를 들쑤셔 놓은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 해킹 사고의 경우에도 범인들은 한컴 한글 워드프로세서의 제로데이 취약점을 이용해 공격을 시도했었다.
 
  이탈리아 해킹팀의 갈릴레오 RCS가 진짜 무서운 이유는 바로 이 제로데이 취약점 때문이다. 사용자의 동의를 구하고 투명하게 설치·운영하는 일반 RCS 프로그램들과 달리, 해킹팀의 갈릴레오 RCS는 웹브라우저나 운영체제(OS), 어도비(Adobe) 플래시 플레이어 등의 제로데이 취약점을 이용해 몰래 침투한다. 기존 백신프로그램으로는 탐지나 치료가 불가능하다. 그러면 해킹팀은 이러한 제로데이 취약점을 어떻게 구할 수 있었을까.
 
  보안전문가인 블라드 치르클레비치(Vlad Tsyrklevich)는 최근 그의 블로그를 통해 ‘해킹팀 사례로 본 제로데이 취약점 암거래 시장 연구(Hacking Team: A Zero-Day Market Case Study)’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바 있다(https://tsyrklevich.net/2015/07/22/hacking-team-0day-market/ 참조). 그에 따르면 이탈리아 해킹팀은 RCS에 사용할 제로데이 취약점을 구하기 위해 D2Sec, 넷트라가드(Netragard), 뷔펜(VUPEN), 취약점 브로커리지 인터내셔널(Vulnerabilities Brokerage International), 코세인크(COSEINC), 쿼바 시큐리티(Qavar Security) 등과 같은 공격기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오펜시브 시큐리티(Offensive Security) 전문업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으며, 취약점 한 개당 평균적으로 3만5000~12만 달러 사이의 가격에 매입해 왔다고 한다.

 

공격기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오펜시브 시큐리티 전문업체 중에는 사이버 무기로 이용할 수 있는 제로데이 취약점을 집중 연구해 이탈리아 해킹팀과 같은 업체에 팔기도 하지만, 그레이해쉬(GrayHash), 블랙펄시큐리티(Blackperl Security), NHSC 등과 같이 고객이 의뢰한 특정 제품이나 서비스에 한해 취약점을 찾아 신속히 패치할 수 있게 돕는 업체들도 있다.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하고 있는 기기의 취약점인지 여부, 독점적으로 자신들에게만 파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동종 업체들에게 동시에 파는 것인지 여부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고 한다.   


  세계 도·감청 장비 거래 규모, 한해 50억 달러
 

해킹팀 사고 이후 마이크로소프트(MS)와 어도비 등 제로데이 취약점으로 피해를 입은 업체들은 긴급 패치를 내놓았다. 어도비는 플래시 보안취약점 패치를 마련했고, MS도 지난 7월 21일 윈도7, 윈도8, 윈도비스타 운영체제에 대해 지적된 ‘오픈타입 폰트’ 취약점 패치를 내놨다.
 
  국내 보안업체들 또한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최근 오픈넷, 진보네트워크센터, P2P재단코리아 준비위원회 등의 시민단체들이 공동으로 “해킹팀의 스파이웨어를 국가정보원도 사용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보안업체들은 여전히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RCS용 백신(일명 오픈백신)을 오픈소스로 개발해 무료로 배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얘기다. 하우리, 안랩, 이스트소프트 등 국내 보안업체들은 해킹팀 이슈가 드러난 7월7일부터 이미 자사(自社) 백신 제품군에 RCS 치료기능을 추가했으며, 해킹팀의 RCS 외에 그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기능을 하는 변종에 대해서도 치료가 가능하도록 지속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들 외에도 국내 기업으로는 엠시큐어와 KTB솔루션이 RCS와 기타 스파이 앱을 탐지·차단하는 솔루션을 이미 제공하고 있다.
 
  오히려 국내 시민단체에서 보급하고 있는 ‘오픈백신’이나 국제앰네스티가 배포하고 있는 ‘디텍트(Detekt)’ 등은 치료기능 없이 단순히 RCS 감염(설치) 여부를 탐지하는 것만 가능하므로 일반 국민은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한다. 실제로 디텍트 홈페이지(https://resistsurveillance.org/)를 방문하면 다음과 같이 “디텍트는 백신이 아닌 RCS 탐지도구이며, 반드시 최신 버전의 백신과 함께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전 세계 감시 및 도·감청 장비의 거래 규모는 한 해 약 50억 달러(약 5조8000억원) 규모로 추정된다. 그로 인한 수익 역시 매년 20%씩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유럽과 미국 기업들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세계 곳곳의 국가정부에 공공연하게 감시장비와 소프트웨어를 판매해 왔다.

 

바세나르 협정(Wassenaar Arrangement)은 최첨단 사이버 보안이나 해킹 관련 소프트웨어와 장비에 대해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하다. 특히 이번 해킹팀 사고 이후 많은 사람은 제로데이 취약점이 돈이 되며, 충분히 사업화가 가능하고 성장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사물인터넷에 의한 위협적 해킹 사례

▲세계 각국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해킹방어대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은 2013년 열린 코드게이트2013대회.
 

상황을 더욱 안 좋게 만드는 것은 최근 들어 급부상하고 있는 사물인터넷(IoT·Internet of Things)이다. 우리 주변의 다양한 사물에 통신기능을 넣어 서로 연결해 상호작용하는 IoT는 가전과 PC, 자동차와 같은 익숙한 기기는 물론 기업경영, 의료, 스포츠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접목돼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IoT 기기가 확산하면서 이를 노린 보안위협 또한 급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스마트TV의 경우 실내 몰래카메라로 악용하거나 해적 방송을 내보내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 세계적 권위의 해킹·보안 콘퍼런스인 ‘블랙햇(Black Hat) 2013’에서 국내 연구팀에 의해 시연됐다. 심장병 환자들이 많이 하고 다니는 심박 조율기 같은 경우 15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원격으로 해킹해 심장에 전기충격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이 2012년에 발표되기도 했다. 자동차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해 ‘블랙햇 2015’에서 해커들은 노트북PC를 사용해 약 16km 떨어진 거리에서 달리고 있는 지프 체로키 차량의 시스템을 해킹하는 데 성공했다.
 
  해커의 조종으로 차량의 에어컨이 최대출력으로 작동하는가 하면, 라디오가 켜지고 와이퍼가 작동했으며,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도 마음대로 조작이 가능했다. 결국 제조사인 크라이슬러는 해킹 위험 차 140만대를 리콜했다.
 
  영국의 인터넷 매체인 텔레그래프는 HP의 보고서를 인용, 현재 사용되고 있는 IoT 기기가 약 250개의 잠재적인 보안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전한 바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90%의 기기는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있었고, 이 중 70%는 이들 정보를 암호화하지 않은 상태로 전송하고 있었다. 또 60%는 보안되지 않은 인터페이스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보고서는 “수많은 IoT 기기들의 인터넷 연결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보안 관련 고려사항 역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며 “스마트폰과 같이 단일기기에서의 몇 가지 보안위협이 IoT를 통해 집이나 회사에 상호 연결되면서 50~60가지로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렇듯 보안위협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다양해지는 IoT 시대에 한두 개의 기관으로 보안대책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집단지성을 활용한 보안’ 일명 ‘크라우드 시큐리티(Crowd Security)’다. 미국 《와이어드 매거진(Wired Magazine)》의 제프 하우(Jeff Howe)가 2005년에 만든 용어 크라우드 소싱을 빗댄 ‘크라우드 시큐리티’는 외부자원을 활용해 보안성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원래 크라우드 소싱(Crowd Sourcing)이란, 대중(Crowd)과 외부발주(Sourcing)의 합성어로 생산·서비스 등 기업활동 일부 과정에 대중을 참여시키는 것을 말한다.
 
  크라우드 시큐리티의 대표적인 예로는 기업 등이 자사 서비스 제품의 보안성 강화를 위해 제로데이 취약점을 찾아 신고해 준 사람에게 포상금을 지급하는 ‘버그 바운티(Bug Bounty)’와 캐나다에서 열리는 국제 제로데이 취약점 찾기 대회인 ‘캔섹웨스트 폰투오운(CanSecWest Pwn2Own)’을 들 수 있다.

 

실제로 지난 3월에 열린 ‘캔섹웨스트 폰투오운 2015’에서는 한국의 한 화이트해커가 구글 크롬, 마이크로소프트 인터넷 익스플로러, 애플 사파리 등 3개의 주요 웹브라우저에서 7개의 보안 취약점을 발견해 대회 역사상 최대 규모인 22만5000달러(한화 약 2억5342만원)의 상금을 차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판도라의 상자 열려, 적극 대응해야

  이 같은 크라우드 시큐리티를 우리나라에 도입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첫째는 법적인 문제이다. 소프트웨어저작권보호와 관련해 우리나라는 역분석(reversing)을 ‘호환성 확보를 목적으로 한 것’ 외에는 금지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기업이 이 조항을 확대 적용해 연구활동을 위해 제품의 취약점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논문 등의 형태로 발표하는 행위를 원천적으로 막고 있는 실정이다.
 
  둘째는 의식의 문제이다. 해킹기술의 발전속도는 방어기술의 개발속도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취약점이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창피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기업들은 자사 서비스나 제품에서 보안 취약점이 발견됐다는 사실 자체를 쉬쉬하며 감추려고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의식을 바꿔야 하고 국민도 사이버 안보상의 흐름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페이팔 등은 이미 크라우드 시큐리티를 널리 활용하고 있다. 국내의 경우 대기업 중 삼성전자가 시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스마트TV 한 분야에 국한되어 있다. 관련 대회로는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이 후원하는 ‘시큐인사이드 CTB(SECUINSIDE Capture The Bug)’ 대회가 올해 처음 열렸으나 외국에 비해 상금 규모가 작아 우수 화이트해커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어렵다.
 
  이제 언제 어디에서나 온라인 상태로 사는 세상이다. 사람도 물건도 모두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삶은 편리한 만큼 불안하기도 하다. 감시 및 도·감청 장비 시장은 더욱 커질 것이고 제로데이 취약점 거래는 앞으로 더 활발해질 것이다. 이탈리아업체 해킹팀의 내부정보가 유출되면서 열린 판도라의 상자에 대해 이제는 우리도 본격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출처 | 월간조선 9월호  김승주 고려대 사이버국방학과·정보보호대학원 교수

 

2015-10-02 해킹팀 전·현 직원이 말하는 대한민국 안보

⊙ 전 직원, “정보기관의 내국인 감시는 필수”

⊙ “해킹 프로그램을 북한에 판 적은 없어”

⊙ 유출된 100만 건의 이메일 중 북한 관련 이메일 700여 개

⊙ 해킹팀 사장, “북핵은 서방국 대부분을 사정권에 두고 있어, 예의주시해야”

⊙ 해킹팀 자체의 보안은 허술… 내부 규정에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 깔라’ 지침도 없다

/해킹팀 홈페이지 동영상 캡처.

 

  이탈리아 사이버보안업체, 해킹팀(HT)의 내부 이메일 100만 건이 위키리크스(WikiLeaks)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공개되었다. 이 여파로 국내에서는 민간인 사찰 의혹이 야당을 중심으로 제기됐다. 야당은 국가정보원(NIS)이 해킹팀으로부터 산 해킹 프로그램의 사용처 등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고 공세를 벌이고 있다.
 
  이 이메일은 왜, 어떤 경로를 통해 유출됐을까. 이메일 유출이 대한민국 안보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해킹팀의 거래 대상에 북한은 없을까. 기자는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이메일 유출의 발단이 된 이탈리아 해킹팀부터 취재해 보기로 했다.
 
  이 기사의 전반부는 해킹팀의 현직 직원과 전직 직원의 인터뷰로 구성했고, 후반부에는 유출된 이메일 중 북한과 관련 있는 부분을 모았다. 해킹팀의 현 직원은 실명을 밝혔지만, 전 직원은 익명을 요청해 와 ‘델타’라는 가명을 썼음을 밝힌다.

 
  원천적 부인 나선 해킹팀 현 직원

/이탈리아 사이버보안업체 해킹팀의 홈페이지

 

  해킹팀이란 회사의 웹사이트는 이메일 유출 사건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특이한 점이 없었다. 다만 해킹팀의 최신뉴스(Latest News)창을 클릭하면 자신들의 입장을 담은 성명서가 떴다. 내용은 “해킹팀이 여러 국가에 제공한 해킹 프로그램은 합법적인 절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되어 있다. 또 “이러한 정보를 유출한 자는 분명 범죄”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해킹팀의 성명서를 확인하고 기자는 곧장 서면으로 연락을 취했다. 에릭 라베(Eric Rabe)라는 현직 해킹팀 직원이 답변을 했다.
 
  그는 이번에 유출된 이메일의 파장 때문인지 자신의 직책이 무엇인지 밝히기를 꺼려 했다. 이름만 밝혔다. 기자는 그가 실제 현직 직원인지 확인하고자 유출된 100만 건의 이메일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그의 이름은 약 7000여 개에서 검색되었다. 검색된 이메일의 내용을 보면 그는 해킹팀에서 행정 및 대외업무를 도맡아 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안타깝게도 이메일에서도 그의 직책은 없었다. 다음은 그와의 문답이다.
 
  ―현재 이메일의 대량 유출은 국제 해커조직 어나니머스(Anonymous)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맞습니까.
  “현재 누가 유출했는지에 대해 경찰과 함께 조사 중입니다. 우리 해킹팀은 이 조사에 적극 협조하고 있습니다.”
 
  ―해킹팀이 판매 중인 해킹 프로그램을 북한도 구매한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현재 해킹팀의 정보 보안은 어떤가요. 향후 비슷한 경우가 발생할 것을 대비한 계획이 있나요.
  “이번 사이버공격이 있고 나서 우리는 우리의 보안 수준을 대폭 보강했습니다. 이런 사이버공격을 받는 것이 우리 해킹팀뿐이던가요. 이미 JP모건, 소니(픽처스), 미국 정부 등도 이런 유사한 사이버공격을 받은 바 있습니다.”
 
  ―유출 자료 중 눈여겨볼 자료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번에 유출된 이메일들이 우리 것이라 한 적 없습니다.”
 
  ―더 말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와 함께 일하는 파트너, 고객, 혹은 잠재고객 등과 관련한 그 어떠한 내용에 대해서도 답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일절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이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해킹팀의 답변을 종합해 보면 해킹팀은 이번 사건의 이메일 유출 경위, 유출된 문건 모두 해킹팀과는 무관하다는 식으로 답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와 같은 사이버공격에 대비해 사내 보안을 대폭 강화했다고 강조했다. 유출 문건이 자기들 것인지 확인해 줄 수 없다면서도 추가 공격에 대비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에릭 라베 해킹팀 직원은 민감한 질문을 모두 피해갔다. 이에 기자는 해킹팀에 이번 사건과 관계없이 사이버보안 전문기업으로서 북한 사이버군(軍)의 능력을 평가해 달라고 다시 서면 질문서를 보냈다. 과연 보안 전문가들이 바라본 북한 사이버군의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
 
  이번에도 에릭 라베 현직 해킹팀 직원은 협조적이지 않았다. 그는 “북한과는 그 어떠한 거래도 한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북한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 순간 그 자체만으로도 파장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설령 답변을 한다고 해도 그 답변은 오직 추측에 의한 답변일 뿐이다”라고 답했다.
 
  해킹팀은 이번 이메일 유출 사건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들의 치부를 더 이상 드러내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해킹팀 내부 상황 전한 전직 직원

해킹팀 내부 상황을 잘 알면서도 모든 질문에 답을 해줄 만한 사람이 있을까. 기자는 여러 해외 취재원을 통해 수소문한 끝에 해킹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사람과 어렵게 접촉할 수 있었다. 그는 익명을 요청해 왔다. 편의상 전직 해킹팀 직원을 ‘델타’라고 지칭했다. 기자는 델타가 전직 직원임을 여러 채널을 통해 확인했다. 그의 이름도 유출된 100만 건의 이메일에 분명히 있었다.
 
  델타는 “해킹팀은 전·현직 직원들을 상대로 강도 높은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전·현직 직원 모두를 이메일 유출 사건의 용의선상에 올려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도 아직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며 자신의 불안전한 상태를 기자에게 밝혔다.
 
  취재 과정에서 델타와의 접촉은 마치 첩보 영화를 방불케 했다. 사이버보안 전문가이자 현재 해킹팀의 이메일 유출 용의선상에 올라 있는 그는 기자에게 까다로운 보안조건을 요구해 왔다. 취재 과정에서 기자는 델타가 요구하는 보안조건을 충족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답변도 얻을 수 없었다. 이 과정은 델타의 신변보호 때문에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분명 일반적인 접촉방법과는 달랐다. 다음은 델타와의 문답이다.

 
  “사내 규정에 컴퓨터 안티바이러스 깔라는 지침 없어”

▲지난 2013년 3월 20일 한국인터넷진흥원 인터넷침해대응센터 직원들이 방송사·금융사에 대한 북한의 사이버공격에 대처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이번 해킹팀의 이메일 100만 건 유출은 국제 해커조직 어나니머스의 소행이라고 하는데 맞습니까.
  “현재 누구인지는 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확실한 것은 전·현직 직원 모두가 용의선상에 올라 있다는 점입니다. 나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이 업계가 좁다 보니 과거 해킹팀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더욱 의심을 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해킹팀에서 배운 기술을 토대로 새로운 회사를 차리거나 다른 회사로 이직할 경우, 해킹팀의 기술을 빼돌릴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해킹팀은 현재 자신들이 개발한 해킹 프로그램 RCS(Remote Control System·원격통제시스템) 등을 전직 해킹팀 직원들이 해독할 수 있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해독을 위한 자료 등을 이번 이메일 유출 사건처럼 가지고 나갔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전직 직원들이 RCS 기술을 빼돌렸다고 해서 얻을 이득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자가 해킹팀의 에릭 라베 씨에게 문의해 본 결과, 해킹팀이 과거 북한과 거래한 적은 없다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내가 아는 바로는 맞는 말입니다. 해킹팀이 북한과 거래를 한 적은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 기자는 앞서 인터뷰한 에릭 라베가 실제 현직 해킹팀의 직원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해킹팀의 보안 수준은 어떻습니까.
  “해킹팀의 관리자 계정은 비밀번호 등을 포함한 많은 부분이 취약합니다. 아마도 이런 관리자 계정의 취약성이 이번 이메일 유출의 원인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내가 해킹팀에서 근무하는 동안 회사 규정(Company policy) 어디에도 컴퓨터에 보안 프로그램을 깔아야 한다는 지침은 없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델타는 기자에게 해킹팀의 관리자 계정에 사용한 비밀번호를 보내주었다. 이 자료를 보면 해킹팀이 자주 사용한 관리자의 비밀번호는 ‘P4ssword’였다. 한마디로 비밀번호를 뜻하는 ‘Password’의 철자 하나를 모양이 유사한 숫자로 바꾼 것이 전부라는 말이다. 해킹팀의 비밀번호에는 특수문자를 사용하지도 않아 비전문가가 보기에도 허술하고 유추가 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北 사이버군, 익명성 무기로 사이버공격 감행

―해킹팀을 떠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당시 내 판단은 해킹팀이 맡고 있는 시장이 너무 작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리어 일반적인 기업 등을 상대로 일을 하거나, 일반 기업에서 일하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때문에 전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만두게 되었죠.”
 
  ―당신은 보안 전문가로서 북한의 사이버군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북한은 과거 소니픽처스(Sony Pictures)와 한국 기업에 디도스(DDOS·분산 서비스 거부) 공격을 한 바 있습니다만.
  “북한은 이미 상당한 자금을 사이버 분야에 투자해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이버상의 전투는 치명적인 피해를 (상대에) 안기면서도 자신들에게는 직접적인 피해를 안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입장에서 누구도 피를 흘리는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자신들의 소행임을 숨길 수도 있습니다. 익명성을 담보로 얼마든지 공격이 가능한 것이죠. 이 때문에 강대국이라면 사이버군 양성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기업의 입장에서도 이제는 이런 사이버공격에 대비를 해야만 합니다. 이런 공격은 실제로 기업에 큰 피해를 안길 수 있습니다. 모든 사기업은 이런 공격으로부터 스스로 막아낼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만 합니다. 사이버보안 분야 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은 지난 2010년 사이버사령부를 창설했으며 병력은 약 400명 정도의 규모다. 국방부의 조사에 따르면 북한의 사이버군 병력은 최소 3000명 정도다.
 
  《조선일보》 7월 22일자 〈北, ‘伊 해킹팀’ 기술로 사이버공격〉 기사에 따르면 북한은 유출된 해킹팀의 이메일에서 원천코드를 뽑아내 한 단계 더 진화한 해킹 기술을 습득했다. 이미 이 기술을 토대로 국내 탈북자 단체 사이트 5군데 정도를 공격한 바 있다. 이렇듯 북한의 사이버군은 계속 진화하고 있는 반면, 한국의 대비책은 미비한 실정이다. 유용원 《조선일보》 군사전문기자는 칼럼에서 “우리 군은 사이버전 교전규칙도 없다”고 지적했다. 


  “위키리크스 공격은 得보다 失이 많아”

▲국가정보원과 이탈리아 보안업체 해킹팀 사이에서 해킹 프로그램 거래를 중개한 나나테크 현관.

 

  ―해킹팀의 유출 이메일에는 수많은 국가 정보기관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공개한 위키리크스는 왜 각국의 정보기관으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정보기관들이 위키리크스 서버를 공격해 자신들의 정보가 공개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을 텐데요.
  “일단 위키리크스의 가치는 중립적입니다. 특정 국가나 단체를 지지하지 않죠. 위키리크스의 이익을 위해 어느 한쪽으로 정보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설령 특정 국가의 정보기관이 위키리크스를 공격했다가 그 사실이 밝혀지면 더 수상하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문제를 더 키울 위험성이 있죠.
 
  물론 과거에 미국의 싱크탱크 스트랫포(Stratfor)의 이메일이 공개된 직후 위키리크스도 디도스 공격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추후 정상복구 되었습니다.
 
  보안업계의 전문가로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이버보안이라는 것은 공격보다 방어에 드는 비용이 더 저렴합니다. 즉 공격을 감행하려면 많은 자금을 필요로 합니다.
 
  가령 위키리크스를 누군가 공격해서 다운시켰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도 다시 또 다른 위키리크스를 만들어 오픈하면 그만입니다. 위키리크스를 공격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위키리크스를 공격해서 얻는 득보다 실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위키리크스의 서버는 매우 견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공격하기 어려운 구조인가요.
  “그렇습니다. 사이버보안상 위키리크스를 공격하는 것은 어렵고 공격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을 모아야 합니다. 이 때문에 위키리크스를 사이버상에서 공격하는 것보다 위키리크스를 만든 줄리안 어샌지(Julian Assange)를 공격하는 것이 낫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위키리크스의 서버를 운영하는 반호프사(社)에 따르면 위키리크스의 서버는 피오넨(Pionen)이라 불리는 스웨덴 스톡홀름의 산(山)속 벙커에 있다. 이 벙커는 군사 목적으로 1970년대에 만든 것으로 핵폭탄 및 수소폭탄의 공격에도 버틸 수 있는 구조로 설계되었다. 해당 벙커 출입문의 두께만 40cm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부에는 비상전력 운용을 위한 독일제 잠수함용 디젤엔진 2대까지 있다.

 
  “한국민들은 정보기관이 감시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이번 해킹팀 사건은 한국에서 큰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해킹 프로그램을 통한 민간인 사찰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국 상황은 다른 국가들의 반응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어느 국가든지 안보를 담당하는 기관(Local Law Enforcement Agency)이 있기 마련입니다. 대개 정보기관이죠. 이런 기관들은 법적으로 간첩(Spy)을 추적하고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 나라의 내국인을 상대로 조사를 벌일 권한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정보기관 등은 그 나라의 치안을 유지하고 범죄를 예방하는 것입니다.
 
  만약 국가의 안보기관이 자국민을 감시(Surveillance)하지 못한다면, 수많은 범죄의 피해를 고스란히 국민이 떠안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국민들이 정녕 그런 범죄의 피해를 스스로 받아들이겠다면 정보기관이 감시할 의무는 필요치 않습니다.
 
  나는 오히려 묻고 싶습니다. 정보기관들에 감시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면 어떻게 범죄를 예방하겠습니까? 무슨 방법으로 범죄로부터 국민을 지켜낼 수 있겠습니까. 내 생각에 한국 국민들은 정보기관에 이러한 감시 능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깨달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정보기관에 감시 능력이 없다면 그 국가는 많은 위협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해당 국가는 안보적 안정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물론 국민의 프라이버시(Privacy)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정보기관마다 절차를 가지고 있고 이 절차에 의해서만 감시가 진행되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절차가 존재함으로써 프라이버시와 감시가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델타의 답변은 ‘한국의 국가정보원과 같은 정보기관들이 안보 관련 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국민에 대한 합법적 감시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한국의 과거 정보기관들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범죄와 관련없는 사람들을 사찰해 왔던 전력(前歷)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해킹팀은 사기업입니다. 이런 사기업이 여러 나라의 정보기관과 함께 일한 것이 이번 이메일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만약 이탈리아 정부가 국내 안보를 명분으로 해킹팀에 자료를 공개하라고 한다면 공개해야 한다고 봅니까.
  “해킹팀은 사기업으로서 보안솔루션을 각국의 정보기관에 제공해 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해킹팀은 의뢰받은 대로 솔루션을 제작할 뿐이지, 각국의 정보기관이 어떤 목적으로 또 누구를 대상으로 해당 솔루션을 사용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내용은 각국의 정보기관에서도 밝히지 않는 내용입니다. 즉 이탈리아 정부가 해킹팀을 조사해도 그 용처를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세나르 협약(Wassenaar Agreement)에 따라 해킹팀은 스스로 자신들이 타국으로 판매한 기술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느 나라에 판매했는지를 단계별로 밝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국가를 상대로 한 보안솔루션 업계는 다른 업종에 비해 분야가 한정되어 있다고 당신은 앞서 말한 바 있습니다. 이 시장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요. 각 국가의 정보기관이 이런 솔루션을 자체 개발하지 않고 해킹팀과 같은 외부 사기업에 의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든 국가가 이런 보안솔루션을 자체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설령 자체 능력을 보유한 국가라고 할지라도 모든 분야의 프로그램에 자체 개발한 프로그램만을 적용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니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해킹팀과 같은 업체에서 판매하고 있는 솔루션을 사는 것입니다. 그게 아무래도 손쉽게 솔루션을 획득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해킹팀의 프로그램 구매 국가 중 일부는 해킹팀이 개발한 보안솔루션을 연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입합니다. 즉 이미 국제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보안솔루션으로부터 사이버공격을 받을 것에 대비해 새로운 프로그램의 개발에 참고하기 위한 목적인 것입니다.” 


  유출된 이메일 중 북한 관련 내용은 700여 건

  기자는 인터뷰를 마치고 실제 유출된 100만 건의 이메일을 확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기자가 확인하고자 한 부분은 바로 북한이다. 일단 전·현직 해킹팀 직원들의 답변을 통해서 북한이 해킹팀의 해킹 프로그램을 구매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확인되었다.
 
  공개된 100만 건의 이메일 중 ‘북한(North Korea)’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메일은 약 700여 건이다. 이 이메일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해킹팀의 다비드 빈센제티(David Vincenzetti) 사장이 전 직원에게 보낸 ‘북핵’에 관한 이메일이다. 이메일의 제목은 “만약 800kt의 핵탄두가 (미국) 맨해튼(Manhattan) 중심부에서 터진다면?”이다.


  北 SLBM 보도 직후, 伊 해킹팀 ‘북핵 주시’

▲뉴욕 맨해튼에서 핵탄두가 폭발했을 경우를 묘사한 그래픽. 핵과학자회보(The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사이트 사진 캡처.

 

  이메일의 발송시점은 북한의 《로동신문》이 핵잠수함 발사 핵미사일(이하 SLBM) 시험발사 성공을 보도한 지난 5월 9일 다음날 오전 10시(한국시각 오전 1시)로 되어 있다. 제목에는 직접적으로 북한을 지칭하고 있지 않으나, 내용을 살펴보면 서두부터 북한의 SLBM 발사 성공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본 내용을 반드시 숙지하라는 문구를 빈센제티 사장이 직접 써두었다.
 
  숙지하라는 문구는 ‘OT? Definitely Not’이라고 쓰여 있는데, 여기서 OT?는 ‘Off Topic?’의 약어이다. 번역하자면 “이것이 (우리의) 주제 외 이야기인가? 절대 아니다”라는 말을 의미한다. 해킹팀의 전(全) 직원은 북핵 문제에 대해 반드시 숙지하고 있으라는 지시이다.
 
  이 지시에 이어 빈센제티 사장은 “세계에서 가장 혐오스럽고, 비합리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국가인 북한의 핵폭탄이 우리를 사정권 안에 두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핵과학자회보(The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에 실린 “만약 800kt의 핵탄두가 (미국) 맨해튼 중심부에서 터진다면?”에 대한 분석 자료를 첨부해 직원들에게 전파했다.
 
  해당 자료는 3명의 전문가, 즉 린 이든(Lynn Eden) 미국 스탠퍼드대 선임연구원, 시어도어 포스톨(Theodore Postol) 미국 MIT대 물리학자, 스티븐 스타(Steven Starr) 미국 미주리대 과학 프로그램 연구소장이 분석, 작성한 것이다. 미국 맨해튼 상공에서 핵탄두가 폭발했을 경우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이 분석에서는 핵탄두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공개된 러시아의 핵무기를 예로 들고 있다. 러시아가 대륙간탄도미사일(이하 ICBM)을 미국 본토를 향해 발사했을 경우 30분 이내에 미국 서부에 도달한다고 계산했다. 800kt의 핵탄두를 선택한 이유는 러시아가 보유한 핵무기 중 과반수가 바로 이 800kt의 탄두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메일에 포함된 분석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이 분석은 정확한 수치를 들어 자세하게 핵폭발을 묘사하고 있다. 이를 북한의 핵폭탄에 빗대어 해킹팀의 사장은 직원들에게 북한의 핵개발을 주시하라고 한 것이다.
 
  해당 이메일에는 이 분석과 더불어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실린 북핵 관련 기사도 첨부했다. 해당 기사 제목은 “북핵 위협이 높아지고 있다고 중국이 경고했다”이다.
 
  이 기사는 “북한의 핵무기 보유량이 예상보다 많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내년(2016년)이 되면 북한은 현재 보유 중인 핵무기의 양이 두 배에 달할 것”이라는 전문가의 예상을 인용했다. 이 기사는 “북한은 KN-08 미사일에 핵무기를 탑재하면 사거리가 약 8900km에 달해 유사시 미국의 서부 지역을 공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메일에서 해킹팀의 사장은 “북핵은 서방국 대부분을 핵무기의 사정권 안에 두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매우 나쁜 것이다(very very bad)”면서 다시 한 번 북핵은 간과할 수 없는 위협임을 직원들에게 강조했다.
 
  “미국이 이란에 한눈을 파는 사이, 북한의 핵무기 저장량이 늘어났다”라는 제목의 이메일도 있다. 역시 빈센제티 사장이 전 직원에게 보낸 것이다. 해당 이메일은 앞서 언급한 ‘800kt 핵탄두’를 다룬 이메일을 보내기 하루 전인 5월 9일 보낸 것이다.
 
  빈센제티 사장은 《뉴욕타임스(NYT)》에 실린 기사를 인용해 중요한 부분은 진하게 표시하여 직원들의 경각심을 고조시켰다. 빈센제티 사장이 진하게 표시한 부분은 “북한이 핵시설을 확장하는 것을 미국이 더 이상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부분과 “2013년 대비 북한은 이미 보유한 핵무기의 수를 두 배로 늘렸고, 2016년까지 핵무기 20여 기를 보유할 것이다. 이미 지난 20년간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고 핵무기를 보유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이란과의 핵협상을 통해 이런 전철을 다시 밟게 될 것이다”라는 부분이다.
 
  해당 이메일에 포함된 《뉴욕타임스》의 기사에는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2012년에 촬영한 사진이 실려 있다. 2년 전보다 핵시설을 더 보강한 모습이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흔적도 없이 사라져

 
  [폭발 초기, 불덩이(Fireball)]
 
  800kt의 핵탄두가 가지는 파괴력은 TNT 다이너마이트 80만t과 동일한 것이다. 이 핵탄두의 폭발력 배가는 지상에서부터 약 1.6km(1마일) 위 상공에서 폭발시킬 경우이다. 폭발시점에서 핵탄두의 중심부는 섭씨 약 1억 도까지 온도가 상승한다. 이 온도는 태양보다 4~5배 더 뜨거운 온도이다. 이처럼 과열된 온도로 인해 주변 공기의 온도도 고온으로 오르게 되고 폭발과 함께 이 공기는 사방으로 발사되듯이 분산된다.
 
  이때 공기가 퍼져나가는 속도는 시속 수천km에 달한다. 이 여파는 일종의 충격파(衝擊波·Shockwave)이며 상당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폭발 후 1초가 지나면 반경 2km 내외는 초토화되며 중심부에서 퍼져나가는 충격파의 온도는 최초 폭발시점보다는 줄어들어 섭씨 약 8800도가 된다. 최초 폭발 때보다는 차가워진 온도지만 태양의 표면 온도보다는 높은 것이다. 즉 핵폭탄이 폭발함과 동시에 약 7800만 평에 달하는 면적은 모두 불에 타 버린다.
 
 
  [화염폭풍]
 
  폭발이 발생한 직후 폭발 지역 주변은 모두 화염에 휩싸이게 된다. 불이 붙어 엄청난 열기를 뿜어낸다. 폭발과 함께 뿜어져 나간 공기가 일시적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이 공간을 메우게 되면 화력은 배가된다. 이 과정에서 주변에 흩어졌던 화염이 한데 어우러져 더 큰 화염폭풍을 일으키게 된다. 이때 응집되는 화력은 폭발 시 발생했던 폭발력보다 약 15~20배 강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화재 시 형성되는 굴뚝현상(Chimney effect)은 폭발 지역 주변의 찬 공기를 끌어 모으고 이 과정에서 화염폭풍은 더 커지게 된다. 이 화염폭풍은 주변의 물체를 잡아당겨 피해의 범위는 더 넓어진다.
 
 
  [핵무기의 폭발지점(Ground zero) 맨해튼]
 
  상공에서 핵폭탄이 터지면 그 밑에 모든 물체는 한순간에 소멸된다. 그 강력한 폭발로 해당 지역의 모든 건축물을 증발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제아무리 단단한 콘크리트 구조물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폭발 지역 주변의 모든 건물이 찢어지듯이 산산조각날 것이고 이렇게 부서진 건물의 잔해 안에 숨겨진 가연성 물질 등이 폭발의 열기를 증폭시킬 것이다. 이 열기로 인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크라이슬러 빌딩 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폭발 반경 이내의 건축물들은 부서지고 외벽의 페인트가 녹아서 흘러내릴 것이다. 화염폭풍 때문에 지상의 자동차들은 마치 추풍낙엽처럼 흩날릴 것이다. 이 폭발의 영향권에 들어 있는 자동차와 건물들은 고온의 열기를 이기지 못해 불이 붙고, 가로수를 비롯한 모든 식물의 잎은 폭발할 것이다. 직접적인 폭발범위 밖의 UN본부 건물도 녹아내릴 것이다.
 
 
  [생존자 없다]
 
  폭발지점인 맨해튼의 미드타운(Midtown)부터 반경 5~7마일(8~11km) 이내에는 생존자가 없다. 폭발지점으로부터 약 14km 밖은 폭발 시 발생한 충격파의 영향으로 모든 건물의 창문이 깨지고 폭발 중 불에 타 재가 되어버린 먼지들이 바람을 타고 주변을 휩쓸 것이다. 이 먼지바람은 버스와 트럭들을 날려버릴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폭발지점으로부터 약 3km 밖에 있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Metropolitan Museum)까지도 고열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 박물관 안의 고귀한 전시품들도 마찬가지다. 약 5km 밖, 뉴저지(New Jersey)주에 있는 유니언시티(Union City)도 폭발 시 발생한 섬광(閃光)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폭발 시 발생하는 빛은 태양의 1900배에 달하는 밝기이다. 핵폭발이 발생한 지역의 5km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여기서 발생한 열기를 피할 수 없다. 고열에 피부가 타들어 가거나 최소 3도에서 4도 화상을 입게 된다. 앞서 설명한 모든 내용은 최초 핵폭발이 발생하고 난 뒤 12초에서 14초가 지난 후를 묘사한 것이다. 5km 밖에서도 최초 폭발지점으로부터 발생하는 열기와 충격파는 최소한 3초 이상 지속된다. 이 충격파로 인해 대부분의 건축물은 박살이 나고 고층건물도 대부분 부서진다.
 
  8.5km 밖의 할렘(Harlem)을 비롯한 퀸스(Queens) 등의 지역들도 정오에 내리쬐는 사막의 태양보다도 600배 강한 폭발의 열기와 에너지로 인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날 것이다. 폭발지점의 약 14.4km 밖, 뉴저지주의 이글우드(Eaglewood) 등에서 폭발을 지켜보았을 때, 폭발에서 발생하는 빛은 태양보다 약 100배 강한 빛이다. 이 폭발로 인해 맨해튼에는 생존자가 없을 것이다.
 
  수십km 밖의 도시들도 몇 시간이 지나면 핵폭탄에서 방출되는 방사능으로 인해 서서히 피해를 보게 된다.

 
  “핵폭탄은 크든 작든 재앙” 강정민 핵무기 전문가 

  기자는 앞서 확인한 해킹팀의 “만약 800kt의 핵탄두가 (미국) 맨해튼 중심부에서 터진다면?”에 포함된 분석이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분석인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이에 핵무기 전문가인 강정민 박사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는 카이스트(KAIST)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교수이자 미국의 환경싱크탱크인 Natural Resources Defense Council의 핵전문가이다. 다음은 강 박사와의 문답.
 
  ―이메일에 첨부된 분석 내용이 객관성이 있습니까. 정확한 분석인가요.
  “비교적 정확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편입니다. 추가로 제가 첨부한 자료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강 박사가 기자에게 보내온 자료는 미국 국방부에서 작성한 ‘핵무기의 효과(The Effect of Nuclear Weapon)’라는 제목의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200자 원고지 기준 총 660장 분량으로 핵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과 영향 등이 면밀히 분석돼 있었다.
 
  과거 미국이 핵무기 실험을 진행하면서 축적한 자료 등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으며, 내용은 핵폭발이 지상에서 일어날 경우, 공중에서 터졌을 경우, 지면에서 약간 높은 지점에서 터졌을 경우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폭발 시 발생하는 물리적인 수치와 계산 공식 등도 담겨 있었다. 해당 자료와 이메일에 포함된 내용을 비교해 본 결과, 비교적 정확한 계산으로 산정된 자료였으며 신뢰도가 높은 내용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북핵의 경우도 분석보고서의 결과가 가능한가요.
  “북한의 플루토늄 핵무기 또는 고농축 우라늄 핵무기의 폭발 성능은 잘해야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던 (소형) 핵무기의 성능 정도를 가질 겁니다. 즉 20kt의 폭발력을 의미합니다. 이메일에 첨부된 내용은 800kt으로 이렇게 막강한 폭발력은 수소를 사용한 핵무기의 경우에 가능한 것이며, 지금의 북핵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만약 서울 상공에서 북한 핵무기가 터진다면 어느 정도의 파괴력을 가집니까.
  “북한이 보유한 20kt급 핵탄두의 영향력은 하나의 도시로 한정됩니다. 이것은 파괴력이 더 강한 800kt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킬로톤이라는 폭발력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폭발력이 크든 작든 터진 곳에 가해지는 피해는 동일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800kt이라는 수치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며, 히로시마 원자폭탄과 비교한다면?
  “800kt이라는 수치는 80만t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했을 때 발생하는 폭발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히로시마 원폭 또는 나가사키 원폭과 비교하면 40배 정도 더 강하다고 보면 됩니다.”
 
  ―왜 이런 내용을 사이버보안업체(해킹팀)가 예의주시했을까요.
  “핵폭발이 발생하면 이로 인한 피해가 막대합니다. 컴퓨터 내 보안자료를 다 파괴하게 됩니다. 또 전산망 마비 등을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예의주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북한의 SLBM 개발 추이와 핵무기 개발 추이를 연계해서 분석한다면 어떻습니까.
  “SLBM의 개발 추이와 핵개발 추이를 연계시킬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핵무기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까.
  “20kt이든 800kt이든 핵탄두의 폭발력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단 1kt의 핵무기라고 해도 반경 0.8km 이내는 완전히 소멸해 버립니다. 그리고 폭발지점으로부터 수km에 달하는 지역은 치명적인 방사선, 화염폭풍, 방사능 낙진 등으로 피해를 면할 수 없습니다. 즉 그 규모에 관계없이 핵폭탄이 현대 도시 어디에서 폭발하든지 결과는 과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경우보다 더 치명적인 재앙을 안겨주게 될 것입니다.” 


  왜 해킹팀은 북핵을 예의주시했나 

 기자는 해킹팀의 사장이 직원들에게 북한의 핵무기 개발 추이를 지켜보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여러 차례 보낸 이유가 궁금해졌다. 강 박사는 핵 공격이 발생할 경우 전산망 마비와 보안자료의 소멸을 염려해 예의주시한 것으로 봤다. 기자는 앞서 인터뷰한 전직 해킹팀 직원 델타에게도 그 이유를 물었다. 델타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해킹팀은 항상 안보적인 부분과 관련해 북한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사장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중요한 안보 관련 소식은 종종 사내 직원들과 공유합니다.”
 
  해킹팀이 왜 북핵 내용을 예의주시했는지는 델타의 말처럼 빈센제티 사장만이 정확한 이유를 알 것이다. 어쩌면 강 박사의 분석대로 핵폭발이 미치는 전산장애 등을 고려한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여러 나라의 정보기관을 상대로 사업을 벌였던 해킹팀의 입장에서 안보와 직결된 뉴스는 세계 안보정세와 트렌드를 읽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북한과 관계없는 해킹팀조차 북한 핵을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여겼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해킹팀의 태도는 북한을 마주하고 있는 한국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한국 국민은 북한의 도발위협과 북핵 개발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양치기 소년의 한낱 거짓말로 치부하는 분위기마저 있다. 한국이 북한의 핵개발에 무감각해지는 사이 이역만리 떨어진 이탈리아의 보안업체가 받아들이는 북핵의 심각성은 잠들어 있던 한국의 안보의식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

출처 | 월간조선 9월호  글 | 김동연 월간조선 기자/ 자동차 칼럼니스트

 

2016.04.23 사이버보안업체 리크타(Reaqta)사의 세르주 운 아태국장 인터뷰

리크타(Reaqta)()는 해외 정보기관의 사이버보안 및 분석을 맡고 있는 유럽의 사이버보안 전문업체다. 이 업체의 세르주 운 국장은 IT 업계에서 10년 이상 몸담은 전문가다. 운 국장은 과거 이탈리아 사이버보안업체 해킹팀(HT)에서 소프트웨어 전문가로 일한 바 있다. 해킹팀은 작년 내부 이메일이 유출되면서 우리 국가정보원(NIS), 미 연방수사국(FBI), 태국·멕시코의 군과 경찰 등이 메신저 모니터링 프로그램(RCS) 개발을 의뢰한 사실이 세간에 알려졌다.
  

  세르주 운 국장에게 서면으로 북한의 사이버 능력과 소니 픽처스 해킹사건에 대해 문의해 봤다.  
  
  
“북한, 추적 피하려고, 라자루스 그룹과 연계해”

/리크사의 홈페이지.  

  

다음은 세르주 운 국장이 보내온 답변이다.

  

  “문의하신 내용은 민감한 내용이며 특히 요즘은 사이버상에서 그 공격(해킹)의 근원지를 명확히 잡아낸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를 비롯한 사이버보안 전문가들은 북한의 이번 공격은 라자루스 그룹(Lazarus Group)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라자루스 그룹은 국제적인 사이버범죄 집단으로 사이버 해킹을 일삼는 집단입니다. 이 집단은 2007년을 기점으로 여러 해킹을 진행했습니다. 대표적인 해킹으로는 ‘플레임 작전(Operation Flame, 해킹의 작전명-플레임은 화염·火焰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라자루스 그룹의 이 해킹공격은 북한의 주도하에 남한을 집중공격했던 ‘트로이 작전(Operation Troy)’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라자루스 그룹은 북한과 함께 남한에 사이버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라자루스 그룹의 공격에는 독특한 패턴이 있습니다. 이것은 컴퓨터 내부로 침입한 뒤, 안에 있는 정보들을 탈취해 간다는 것입니다. 지난 트로이 작전에서 라자루스 그룹은 남한으로부터 대량의 군사관련 정보들을 탈취해 갔습니다.  


 
정보를 탈취한 뒤로는 마스터 부트 레코드(Master Boot Record, MBR)를 박살내고 남아 있는 내용을 모두 삭제해 버립니다. 이런 MBR 공격 외에도 DDoS공격(단번에 다수의 컴퓨터가 일제히 하나의 서버에 접속해 서비스를 중단시키는 공격)도 라자루스 그룹이 자주 사용하는 공격 패턴 중 하나입니다. 이들이 이런 DDoS 방식의 공격을 하는 이유는 공격대비 최대 효과를 내기 위함과 동시에 (남한) 정보당국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세르주 운 국장은 북한이 해킹에 라자루스 그룹을 가담시킬 경우 북한에 두 가지 이점이 생긴다고 분석했다. 첫째, 정보당국의 추적을 어렵게 하고, 둘째 해킹집단을 활용함으로써 해킹의 공격전술을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이점 때문에 아직도 일부 종북단체는 소니 픽처스 해킹과 남한의 DDoS 공격을 라자루스 그룹에 덧씌우고 ‘북한은 결백하다’는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의 과거 테러 전례로 볼 때, 이런 여타 조직과의 연계 공격은 흔한 일이다.  


  1988
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북한은 중동 테러조직의 수장인 아부 니달(Abu Nidal)에게 돈을 주고 김포공항에 폭탄을 설치해 폭파한 바 있다. 운 국장의 말을 종합해 보면, ‘라자루스 그룹=북한’이라는 모종의 공식이 생긴 셈이다. 세르주 운 국장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라자루스 그룹의 해킹 능력은 갈수록 진화해 점차 추적이 더 어려워지는 양상을 보입니다. 2013년 자행된 대남 사이버 공격, ‘다크서울(DarkSeoul)’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공격의 방식(modus operandi)이 지난 트로이 작전과 매우 유사했습니다. 당시 공격의 일부를 추적하자 북한이 사용하는 IP 주소가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다량의 정보가 탈취됐고 탈취 이후 곧장 남아 있던 정보가 모두 삭제되는 패턴을 보였습니다.  


  2014
년 소니 픽처스 해킹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니 픽처스를 공격했다고 자처한 자들은 ‘GOP(Guardians of Peace, 평화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해킹 집단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사용한 해킹 프로그램 코드(code)의 많은 부분에서 라자루스 그룹이 사용하는 코드들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소니 픽처스 해킹의 배후로 라자루스 그룹과 북한이 지목된 이유입니다.  


  
“기술적 검토 하니, 남한내 종북세력 공조흔적 찾을 수 있어”

▲국정원이 “북한이 남측 주요 인사들의 스마트폰을 해킹했다”고 발표한 지난 3월 8일 오전 서울의 한 시민이 자신의 스마트폰 해킹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연이은 해킹에 북한과 라자루스 그룹이 지목되자, 북한은 자신들이 해킹의 배후가 아닌 것처럼 꾸미려고 2014, 2015, 2016년에 걸쳐 돌연 유럽의 전산망을 공격합니다. 유럽 사이버 공격에서는 정보는 탈취하지 않고 악성코드에 감염된 컴퓨터들의 소프트웨어를 박살내는, 조금은 다른 전술을 구사합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의 공격방식을 다양화해 일전의 소니 픽처스 공격의 용의선상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는 꼴이었습니다. 그런데 코드를 분석해 보니 ‘다크서울’ 공격 때와 유사한 방식이었습니다.  


 
모든 내용을 종합해 보면, 몇 가지 결론에 도달합니다. 북한은 라자루스 그룹을 활용해 대남 사이버 공격에서 공격대비 최대효과를 도모합니다. 공격시 공격받은 컴퓨터에 피해를 적게 남기지만 추적이 어렵도록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활용해 공격합니다(operating abroad).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공격의 기술이 복잡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기술적으로 매우 진화된 방식은 아닙니다. 기술적인 완성도가 떨어지더라도 여전히 이들은 장기간 특정 전산망 안에 침투해서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충분한 능력을 보유 중입니다. 이런 북한의 잠복침투 중 국제사회에 발각될 가능성은 현저히 낮습니다.  


 
이들이 저지른 대규모(large scale) 공격은 나의 경험으로 볼 때 대규모로 훈련된 해커들(potentially sizeable team)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 공격에 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공격을 위해서는 북한 밖, 3(서버)에서 공격 전 상당기간 공격대상에 대한 정보를 물색하고 감시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르주 운 국장은 기자에게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북한의 여러 해킹에 사용된 코드를 면밀히 분석해 본 결과, 대남 사이버 공격은 남한을 조준해 만들었다고 했다. , 모든 공격은 남한의 전산망에 매우 특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 이외의 세력이 해킹에 가담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남한내 종북세력 등의 공조 가능성을 제기한 것. 북한이 사이버 공격에 필요한 일부 내용 등을 남한의 종북세력 등에게 의뢰해 사전에 제공했다는 것이다. 사이버 공격을 위해서는 북한 외부에서 활동하는 세력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는데 환경과 지리적인 특성상 남한 내 종북세력 등이 남한의 IT기술과 관련된 핵심 내용을 북에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세르주 운 국장은 일각에서 북한 이외의 공조집단으로 미국이나 소니 픽처스 내부의 직원 등을 거론하는 일부 언론의 의혹에 대해서는 그럴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는 “기술적인 세부 사항을 검토해 봤다면, 미국이나 소니 픽처스를 지목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자신의 추측을 확신했다.  

 

  “사이버 공격의 궁극적 목표는 남남갈등”

세르주 운 국장은 말미에 남한의 IT와 관련된 당부의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북한의 해킹능력은 점차 진화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그들의 사이버 능력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남한의 정부와 기업에 상당한 피해를 안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한은 분명 이런 공격에 대비해 즉각적으로 사이버 공격의 주체를 식별하는 능력을 개발해야 합니다


 
북한의 지속적인 대남 사이버 공격의 의도가 단순히 정보를 탈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북한의 궁극적인 목적은 남한의 주요 전산망을 흔들어 정치적인 공작(political strategy)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북한의 공격 양상으로 볼 때 북한은 자신들의 사이버 능력을 과시하고 남남갈등을 촉발시킬 가능성이 농후해 보입니다.   


 
따라서 주요 정보를 가지고 있는 남한의 정부와 기업 등은 분명 사이버 보안에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시대가 지날수록 첨단기술은 우리의 삶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술의 진보만큼 사이버 보안에 대한 투자도 필수 사항입니다


 
앞으로의 전쟁은 물리적인 전쟁에서 사이버 전쟁으로 옮아가는 양상입니다. 한국은 이미 사이버 기술이 상당히 진보한 국가이기 때문에 이미 갖춰진 전산망을 잘 활용한다면 유사시 주요 정보를 공유하고 즉각적인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이 기술적으로 진보한 차세대 IT 강국이 되는 길입니다.”⊙

출처월간조선 5월호  김동연 월간조선 기자/ 자동차 칼럼니스트

 

2016년 09월 13일 “北은 ‘인터넷은 총’이라며 전쟁 준비중인데 우린 무방비”

한국국가정보학회장인 한희원 동국대 법과대학장이 지난 9일 서울 중구 필동 학장실에서대통령과 정치인들이 국가정보를 제대로 알고 안보를 굳건히 해야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지킬 수 있다며 체계적인 국가정보학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한희원 한국국가정보학회장

 국가정보학’ 전문가 한희원(58·법학과 교수) 동국대 법과대학장은 요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국내에선 아직 생소한 학문 분야인 국가정보학의 중요성을 보다 널리 알리고 주류 학문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모든 열정을 고스란히 쏟고 있기 때문이다. 꾸준한 집필 활동은 물론이고 동국대 대학원에 신설된 석·박사 과정을 통해 후배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정부 관계자와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한 국가안보 자문, 각종 토론회 및 세미나 참석도 늘었다. 지난해 12월 18일에는 전문성을 인정받아 한국국가정보학회 6대 회장으로 취임하며 활동 보폭을 넓혔다. 무엇보다 학회 회원으로 있는 군과 검찰·경찰·국가정보원 출신 등의 정보 전문가들과 함께 다양한 학제 간 연구를 진행하며 국가안보를 지키는 데 활용할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그는 평소 공식 석상에서 “국가정보학은 단지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학문”이라며 “국가정보를 바탕으로 안보를 굳건히 해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수호하기 위한 학문이 바로 국가정보학”이라고 강조한다.  


지난 9일 서울 중구 필동 동국대 법과대학장실에서 만난 그에게 오전에 발생했던 기습적인 북한 5차 핵실험에 대해 물었다. 한 학장은 “당연한 수순으로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라며 담담한 반응이었다. 오히려 정치권으로 화살을 돌렸다. 그는 “국제사회에선 북한 핵 개발을 사실상 인정하며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반면, 우리는 정치권이 ‘북한 핵 보유를 인정한다, 못한다’를 놓고 불필요한 논쟁만 일삼았다”고 비판했다. “북한에 시간만 벌어준 꼴이 됐다”는 안타까움이다. 그는 “북한 핵무기를 직접 파괴할 경우 전면전 우려가 있는 만큼 핵무기 부품이 북한으로 유입되는 통로를 차단하는 데 주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더 나아가 미국의 핵우산을 확고히 제공받거나 (한국의 독자적인) 핵 개발 필요성을 진지하게 논의함으로써 북핵 억제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 학장은 국가정보학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체계적인 연구에 나선 이 분야의 대표 권위자로 꼽힌다. 검찰 출신으로 국가인권위원회 등을 거쳤다. 국가정보학은 정보의 개념과 법적 정당성, 철학적 의미를 비롯해 국가정보기관의 활동과 기능, 역사 등 국가정보 제반에 대해 학문적이고 논리적인 연구를 목표로 하는 신설 학문이다. 국가 이익과 안전을 위한 정책 수립과 최고 정책결정권자의 의사결정 과정, 국가의 대내외 정책 역사 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실용적인 학문으로 평가된다. 국내에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학문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한 학장은 “이전까진 일부 정치학자들만 국가 정보기관 및 공작활동 등과 관련해 한정적인 연구를 진행했다. 이제 막 본격적인 연구를 추진하기 위한 첫걸음을 떼는 단계”라고 전했다. 한 학장은 “우리나라에선 특히 국가정보를 학문적으로 다루는 대상이 아니라 권력의 장막 뒤에서 대통령과 정보책임자 등 권력자들끼리 비밀리에 공유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05년, 한 학장은 나이 50이 다 돼 떠난 미국 유학 중에 국가정보학을 처음으로 접한 뒤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특히 “국가정보가 단지 권력자의 ‘실력의 장’에 속하는 영역이 아니라 ‘법이 개입하는 영역’임을 목도하고 흥미를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인디애나주립대 대학원 법학 석사 과정 중에 저명한 학자인 스콧 베이츠 학장과 조지 에드워드 학장 밑에서 각각 국가정보법과 국제인권법을 배우며 큰 영향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연방수사국(FBI), 국립정찰국(NRO), 국립지리정보국(NGA) 등 미국 16개 정보기구들에 대한 연방대법원 판결문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국가정보라고 하면 보통 선글라스와 트렌치코트를 착용한 비밀요원이 도청·협박·매수·회유로 빼내 은밀히 취급한다는 이미지가 강한 한국과 달랐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법원이 특정 정보활동에 대해 법과 위법의 경계를 명확히 규정한 사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자료를 찾던 중 6·25전쟁과 관련한 연방대법원 판결문도 읽어볼 수 있었는데, ‘북한 김일성이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을 받아 1950년 새벽에 남침했다’는 대목이 명시돼 있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국가정보를 법 규범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학문으로 체계화시킬 마음을 먹게 됐다”고 말했다. 유학생활 중 그는 영어가 현지 학생들보다 서투른 데다 20세 이상 어린 학생들과 경쟁해야 하는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2번째 고시공부’를 한다는 각오로 공부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미국인 학장들에게 잘 보여 좋은 학점을 받을 요량으로 한국 갈비를 많이 대접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한 그는 “자극을 받아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공부에 매진한 결과, 대부분 과목에서 A와 B+ 학점 이상을 받을 수 있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한 학장의 얘기에 빠져들던 중 문득 정보전문가로 거듭나기 전까지 그가 살아온 길이 궁금해졌다. 1958년 강원 속초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아버지와 평범한 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북한 함경남도 정평군 출신으로 일본 유학생 출신인 아버지는 대지주 집안이라는 이유로 북한에서 부르주아로 낙인 찍혀 인민재판을 받을 위기에 처해 있던 중 1948년 극적으로 북한을 탈출한다. 수복지구인 설악동 출신 어머니는 6·25전쟁 중 오빠를 인민군 손에 잃었다. 한 학장은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공산당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사람 목숨도 가볍게 여기는 집단이라는 말을 자주 듣고 자랐다”고 회상했다. 자연스레 남북관계와 국가안보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환경에서 컸다는 설명이다.
 


한 학장은 집안 형편이 ‘흙수저’ 출신이라고 할 정도로 어려웠다. 다행히 공부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고려대 법대에 진학한 뒤 집안 살림을 일으키기 위해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는 “당시 몸이 아주 허약해질 정도로 공부에만 집중한 결과, 운이 좋게도 대학교 4학년 때인 23세에 고시에 합격했다”고 전했다. 유명한 사시 24기 동기로는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홍준표 경남지사, 주호영 새누리당 의원 등이 있다. 대검찰청 검찰연구관으로 재직하던 2002년 국가인권위원회 법무담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권법에 흥미를 갖던 중 평소 가깝게 지냈던 검찰 선배인 고 김창국 초대 인권위원장이 “함께 일해 보자”며 이직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다음 해 인권침해조사국장으로 옮긴 후 군이나 장애인 복지시설 등에서 자행되던 각종 인권유린 사태를 조사해 개선 기회를 만드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다 돌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2005년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이 직속상관인 사무총장으로 온 뒤 업무 스타일이 좀 맞지 않아 휴직계를 제출했다”고 설명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좋은 스승과 풍요로운 연구환경에서 국가정보학에 천착하며 전문성을 쌓을 수 있었다. 2007년에는 동국대 제의를 받아 정학장으로 발령받았다.


한 학장은 학자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덕목으로 끊임없는 학구열과 비판적 태도를 꼽는다. 그는 시간이 허락하면 하루 10시간 이상 미국 중앙정보국(CIA) 문서 등 정보 관련 자료를 읽고 해석하는 것을 즐긴다. 오전 2∼3시에 일어나 꾸준히 책을 쓰는 습관도 유지하고 있다. 국가정보학원론 등 2008년부터 현재까지 그가 쓴 책만 17권에 이른다. 지난해엔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최고 안보전문가 과정을 수료하며 부족한 학문적 갈증을 채웠다. 공개 세미나와 칼럼 등을 통해선 “국정원장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전문성을 바탕으로 선임돼야 하고, 국정원 직원들 역시 능력을 더 갖춰야 한다”고 쓴소리를 하고 있다. 그는 “아내가 그만 좀 하라고 말릴 정도”라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의 진정성이 통했는지 국정원은 물론이고 정부와 정치권에서 국가안보 관련 자문 요청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에게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안보 선진국과 비교해 한국의 국가안보 수준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묻자 꽤 심각한 답변이 되돌아왔다.
 


“솔직히 저는 대한민국이 운으로 돌아가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테러방지법이 최근에야 통과될 정도로 국가안보 관련 법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국가안보사범을 간첩죄로 처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 안보 선진국들은 국가기밀을 누설해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안보사범들을 간첩죄로 엄히 다스려 징역 15∼20년의 중형을 부과하지요. 또 북한은 ‘인터넷은 총이다’를 기치로 삼고 사이버테러를 넘어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에 대한 대비도 무방비 상태입니다. 사이버테러방지법 제정이 시급한 이유입니다. 일각에선 국정원의 지나친 권한 강화와 감청 등 인권침해를 우려하는데, 정보기관에 ‘권한’이 아니라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시각을 교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 사생활을 들여다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보 위협세력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법 제정을 논의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일각의 반발을 의식한 때문인지 설명이 이어졌다. 그는 “미국처럼 분기별로 관련 보고서 제출을 의무화해 정보기관의 실적을 유도하고 경각심을 갖도록 견제하는 한편, 사이버테러방지법 등 인권침해 우려가 있는 법안은 영구법이 아닌 한시법으로 제정해 실적을 보고 폐지를 논의하는 방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대통령이나 장관, 국회의원들이 경제나 안보 관련 정보 외에 불필요한 공작 혹은 정치정보에 관심을 두지 않아야 국정원이 불필요한 정보를 생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특히 대통령은 왜곡 가능성이 있는 서면 보고를 받기보다는 정보 책임자와의 독대를 통해 국내외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직접 업무 지시에 나서야 한다”며 “국가정보를 제대로 알고 안보를 굳건히 하는 데 주력해야 국민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최준영 기자 cjy324@munhwa.com

 

■핵 능력

■비망록을 통해 본 대한민국 원자력 창업 스토리

〈1〉 1950년대 태동기

李承晩 대통령, 초대 원자력과장 불러 “원자폭탄 만들 수 있나?

▲1959년 7월 14일 서울 홍릉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TRIGA MARK -Ⅱ)’ 기공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첫 삽을 뜨고 있다. 왼쪽이 범산 김법린 초대 원자력원장.

 

  지난 1 6일 북한이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4차 핵실험을 감행함으로써 북핵문제는 사실상 통제불능 상태로 빠져들고 말았다.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 진위 여하와는 별개로, 북의 핵 능력은 소형화·경량화 단계를 뛰어넘어 다종화·다수화의 단계에 진입한 것을 의미한다.
  
 
중국 전문가들은 북한이 이미 핵탄두를 20개 정도 보유하고 있고, 2016년에는 20개를 추가로 만들 만큼 우라늄을 농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4차 핵실험 감행 이후 여권을 중심으로 자체 핵무장론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새누리당 원유철(元裕哲) 원내대표는 최근 “북한의 공포와 파멸의 핵에 맞서서 우리도 자위권 차원의 평화의 핵을 가질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이춘근(李春根)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대한민국의 핵무장은 일본의 핵무장을 초래할 것이며, 일본이 핵무장을 결심할 경우 세계 패권국을 지향하는 중국에 치명적인 일이 될 것”이라며 “일본이 핵무장을 할 경우 중국은 세계는커녕 아시아의 패권국이 되는 것도 용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중국이 한국의 핵무장을 반대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 중국은 자국이 보유한 지렛대로 북핵을 폐기시키면 되는 일”이라며 “미국은 이스라엘처럼 우호국이 핵무장하는 것을 막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중국의 급부상을 핵무장한 동맹국 한국이 막아 줄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한국의 핵 능력, 1960년대 중국보다 뛰어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장관급)을 지낸 박익수씨.

 

지금까지 핵 보유국들은 핵개발을 결심한 이후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원자로를 보유한 후 핵실험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국은 10개월, 소련 14개월, 영국 27개월, 프랑스 49개월, 이스라엘 40개월 미만, 중국 26개월이 걸렸다.
  
 
현재 한국의 핵 능력은 1940년대의 미국, 1960년대의 중국보다 뛰어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우리 원전에 쌓인 사용 후 핵연료는 1만 톤에 육박하고, 이 중 플루토늄이 수십 톤으로 핵폭탄 한 발 제작에 8kg이 필요하므로 플루토늄 폭탄을 대량 생산할 수도 있다. 원자력 전문가 K씨는 “국가가 결심하면 2년 이내에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수준”이라고 했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서균렬(徐鈞烈) 교수는 “한국의 원자력 기술을 종합해 세계 5, 운전기술 세계 1, 그리고 핵폭탄 제조 잠재력 세계 10위권”이라면서 “핵개발을 위한 기술력과 경제력을 종합해 보면, 한국은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일본, 독일에 이어 이탈리아, 스페인, 브라질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이 오늘날 ‘원자력 기술 세계 5, 운전기술 세계 1, 그리고 핵폭탄 제조 잠재력 세계 10위권’이라는 원자력 강국의 반열에 올라선 것은 세계 과학계에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원자력계 인사들은 “사실상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역사는 원자력 개발의 역사”라며 “해방 후 원자력 기술 개발의 역사를 훑어보면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미친 영향이 실로 막대하다”고 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한국의 원자력 산업을 이해하려면 세계 원자력 산업의 변화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무기로 등장한 핵이 발전을 하는 동력원으로 변모한 데는 국제정치적 배경이 있었다. 요동치는 세계 정치의 환경 속에서 한국은 미련스러울 만큼 원자력 발전에만 집중했다. 덕분에 미국으로 대표되는 원자력 강국과의 마찰을 최소화했다. 반면 북한의 지도자는 처음에는 원자력 발전에 주력하다 소련의 붕괴 이후 핵개발에 전력함으로써 세계의 이단아로 전락했다. 한국은 이승만(李承晩), 박정희(朴正熙), 전두환(全斗煥) 등 원자력의 중요성을 간파한 지도자들을 만난 덕분에 세계적인 원자력 강국으로 부상했다.
  
 
《월간조선》은 박익수(朴益洙) 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2006년 작고)의 비망록(《한국원자력창업비사》)을 입수해 그 내용을 토대로 ‘대한민국의 원자력 창업 비사(祕史)’를 싣는다. 박익수 전 위원장은 1955년 한미원자력협정 가조인 순간부터 1999년까지 자신이 경험한 부분을 객관적으로 기록했다.
  
  1948
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강대국을 중심으로 핵개발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 1952년 처칠의 영국, 1960년 드골이 이끄는 프랑스가 핵실험에 성공했다. 그리고 1964년 마오쩌둥의 중국도 핵실험에 성공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미국은 진화에 나섰다
  
  1953
12 8일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Atoms for Peace)’이란 제목으로 연설하며, 원자력 발전 등 평화적 목적으로 핵을 이용하려는 나라에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아이젠하워의 발언은 원자력에 관심이 있는 나라들에 큰 호응을 얻었고, 결과적으로 미국 지지세력을 크게 늘리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창설 제안과 함께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국제적 협조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54 8 30일 새로운 원자력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국제협력과 민간협력에 관한 조항을 담고 있었고, 123조에 ‘대통령은 30일 전에 의회에 예고한 후 일개 국가(우방국) 또는 일개 지역방위기구(NATO, SEATO)와 원자력 협력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고 규정해 향후 외국과의 원자력 협정의 통로를 마련했다.


  
국제 전력계의 巨物 시슬러

▲한국에 원자력의 씨앗을 뿌려준 워커 시슬러 씨(왼쪽 세 번째).

 

  아이젠하워 연설에 따라 세계 각국은 IAEA 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에 돌입했고, 1957 IAEA는 유엔 산하기관으로 창설됐다. 한국은 당시 유엔 가입국이 아니었으나 1956 IAEA 헌장에 서명함으로써 이 기구의 창립 회원국이 됐다. 1956 10 26일 정부는 유엔본부에서 열린 IAEA 협약문 제정 총회에 임병직(林炳稷) 유엔대표에게 서명하도록 했고, 1957 6 17일 국회는 국내 원자력 연구를 활성화하고 한국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사국에 진출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한국은 1957 8 8 IAEA에 정식으로 가입했고, 같은 해 10 5일 극동지역 이사국으로 선출됐다.
  
 
해방 직전 남북한의 발전량을 비교하면 남북한 전체 1459000kW의 시설용량 중 남한이 차지한 비율은 14%(206000kW)에 불과했고, 나머지 86%(1263000kW)에 달하는 발전시설은 북한에 편재돼 있었다. 남북의 산업구조상 남한은 농산물과 식료품을 중심으로 한 산업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북한은 전력을 비롯한 광공업 등이 중심을 이뤘다. 특히 유연탄 등 거의 모든 광산물이 북한에 편중돼 있었고, 발전시설은 거의 전부가 북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정부수립 직전인 1948 5 4, 북한은 남한으로의 송전을 일시에 끊는 이른바 ‘5·14 단전’을 감행했다. 5·14 단전으로 미 군정하의 남한은 심각한 전력난에 빠졌다. 그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인물이 워커 시슬러(Walker Lee Sisler·1897~1994)였다.
  
 
시슬러는 코넬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미 정부 전쟁물자생산국에서 전력생산과 관계된 일을 한 국제 전력계의 거물(巨物)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아이젠하워 유럽주둔군 총사령관 휘하에서 전후 유럽의 전력계통에 대한 복구사업의 총책임을 맡아 유명세를 떨쳤다. 그는 전후 디트로이트의 에디슨사 회장, 세계에너지회의(WEC) 의장, 미국 원자력산업회의 의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의 단전 소식을 들은 시슬러는 자신이 미 정부에 근무할 때 건조한 발전함을 보내 줄 것을 미 정부에 건의했고, 미 정부는 자코나 발전함, 엘렉트라 발전함을 각각 부산과 인천항에 급파해 전력을 공급하도록 했다. 6·25전쟁 당시도 한국은 심각한 전력난에 허덕였다. 그때 미국이 파견한 3kW급 발전함 레지스탕스도 시슬러가 미 정부 전쟁물자생산국에 재직시 건조한 것이었다.
  
  6
·25전쟁이 끝난 후 한국 정부가 당인리발전소(현 서울화력발전소) 25000kW 3호기 건설을 추진할 때, 시슬러는 마셜플랜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차관(AID)을 주선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의 노력 덕분에 한국은 1956 3 3호기를 준공해 부족한 전력을 메울 수 있었다.
  
 
한국 정부는 1956 7월 시슬러를 초청했다. 전후 복구사업으로 전력 문제가 심각했고, 그의 자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조선전업(한국전력의 전신), 서울대 등을 방문해, ‘원자력 발전의 실용화’에 대해 강연했다. 시슬러는 7 8일 이 대통령과 만나 한국의 전력사업 개황을 듣고 “한국도 원자력 발전을 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한다. 이 대통령은 “우리가 원자력 발전을 하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고, 언제쯤 실현 가능하냐”고 물었고, 시슬러는 “정부 안에 원자력 전담기구를 설치해 정부 차원의 원자력 발전 업무를 추진하고,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해 원자력에 관한 연구를 맡기고, 50명 정도의 과학자를 선진국에 보내 원자력 과학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했다.
  
 
시슬러는 휴대하고 다니는 ‘에너지 박스(Energy Box)’를 이 대통령에게 선보였다. 그는 박스에서 3.5파운드 무게의 핵연료 막대기를 꺼냈다. 시슬러는 “3.5파운드 무게의 석탄을 태우면 4.5kW/h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고, 3.5파운드의 우라늄을 태우면 1200kW/h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며 “무게는 같지만 우라늄은 무려 300만 배나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은 언제쯤 원전을 가질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20년 후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다. 실제로 그의 예언대로 한국은 21년이 지난 1977년 고리 1호기 시운전에 들어갔다. 미국에 유학해 원자력의 힘을 잘 알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시슬러의 원자력 권유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소련의 상업용 원자로 ‘오브닌스크’ 

  1955 8월 제1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국제회의가 열렸을 때, 당시 원자로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미국과 영국, 소련, 프랑스, 캐나다 등 5개국에 불과했다. 동서 냉전의 와중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과 우방국에 대한 원자력 에너지 기술 제공 제안에 소련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1951
9월 소련은 모스크바 남서쪽 100km에 위치한 오브닌스크(Obnin-sk) 5000kW급 세계 최초의 상업용 원전(흑연감속로)을 건설하기 시작해 1954 6월 준공했다. 한국이 두 번째로 도입한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Ⅲ의 열출력이 2000kW인 것에 비하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소련은 오브닌스크 원자로에서 생산한 전력을 판매했기에 이 원자로는 세계 최초의 상업용 원자로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소련은 원전 준공식에 인도의 네루 총리, 유고의 티토 대통령, 베트남의 호찌민(胡志明), 북한의 김일성(金日成) 등을 초청했다. 김일성이 오브닌스크 원전 준공식에 참석한 것은 북한도 일찍이 원자력에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당시 서방 세계는 누가 대용량 상업용 원자로를 먼저 제작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렸다. 1955년 ‘제1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국제회의’를 개최한 이듬해 영국이 그 주인공이 됐다. 영국은 1956 10 17일 콜더홀에 92000kW급 가스냉각로형 원자로 두 기를 준공했다. 출력 92000kW는 당시로서는 대용량이어서 상업용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이듬해 1957 12월 미국은 펜실베이니아주 시핑포트에 10kW(가압경수로형) 상업용 원전을 준공했다. 이어 미국은 1961년 세계 최초로 원자력 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진수했다.  


  
원자력 스터디그룹의 탄생

▲연희전문학교 數物科(자연계열)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박철재 문교부 기술교육국장(왼쪽). 문교부 초대 원자력과 과장을 지낸 고 윤세원 박사.

 

  한국 정부가 원자력에 구체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첫 계기는 1955 2 2일 유엔에서 날아든 한 통의 초청장 때문이었다. 1955 8 8일 미국은 유엔을 통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1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73개국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주목할 것은 그때까지 기밀로 취급되던 원자력 관련 논문 1132편이 쏟아져 나왔다.
  
 
세계 원자력계의 흐름에 올라타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한국은 이 회의에 박철재(朴哲在) 문교부 기술교육국장, 윤동석(尹東錫) 서울대 금속공학과 교수, 이기억(李基億) 서울대 문리대 교수를 참석시켰다. 회의에서 우리 대표단은 한국의 전력수급 전망과 우라늄·토륨 등 지하자원 분포 실태에 대해 발표했다. 박철재는 귀국 길에 미국 오크리지(Oak Ridge) 국립연구소에 들러 원자력 연구시설을 둘러봤다고 한다.
  
 
박철재는 귀국 즉시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인 윤세원에게 제네바회의의 내용과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의 연구활동을 설명했다. 이때 갖고온 서적과 논문을 보여주면서 원자력 연구개발에 동참하기를 권유했다. 박철재는 원자력 전문가를 양성하고 관련 정보를 수집·정리하기 위해 원자력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스터디그룹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를 계기로 윤세원은 국방과학연구소의 김준명(金俊明)과 상의해 서울대 문리대와 공대를 졸업한 30대 전후의 후배들을 모아 비공식 세미나 그룹을 만들었다. 처음 스터디그룹은 윤세원, 김준명, 김희규(金熙圭), 이병호(李炳昊), 민광식(閔光植), 정구순(鄭求珣), 이진택(李鎭澤), 이수호(李洙灝), 현경호(玄京鎬) 10명으로 구성했다. 이른바 ‘1세대 원자력 과학자들’이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박철재가 갖고온 미 원자력위원회 발간 《Research Reactor(연구용 원자로), 김준명이 소개한 레이먼드 머레이의 《Introduction to Nuclear Engineering(원자력공학개론)》을 교재로 박철재 문교부 국장실과 국방과학연구소 회의실을 교대로 이용하며 토론을 벌였다. 또 원자력 관련법과 원자력의 연구개발 제도를 만들기 위해 선진국의 원자력 관계 법령을 입수해 번역 토론하기도 했다.
  
 
연구 결과는 이후 원자력법을 개정하는 기초자료로 활용했다. 초창기 원자력의 기초연구와 외국의 관련 법규 조사는 정부 공식적 기구에서 추진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 친분으로 모인 비공식 그룹이 진행했다. 후에 이 그룹을 ‘스터디그룹’이라 불렀다.
  
 
해방 직후 국내 과학기술계의 상황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일제가 남긴 과학기술 관련 기관이라곤 이공계 대학인 경성제대 이공학부와 의학부, 그리고 몇 개의 전문학교를 포함한 교육기관, 중앙공업연구소, 중앙지질조사소, 농산물검사소 등에 불과했다. 과학자의 수는 100명 남짓이었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문교부 내 실업교육국(1950년 기술교육국으로 개편), 상공부에 광무국·수산국·전기국·공업국을 설치했으나, 이 기관들은 체계적인 과학기술진흥 계획 아래 행정을 수행할 기능을 갖지 못했다.
  
  1945
년 해방과 함께 경성제국대학은 폐교되고 경성대로 되었다가 1946년 국립대학설치령에 따라 국립 서울대가 탄생했다. 경성대 이공학부는 관립 경성공업전문학교와 합병해 서울대 공과대학이 됐다. 종전 직후였던 당시, 원폭을 비롯해 각종 신무기가 쏟아져 나오면서 공학에 대한 관심이 커져 수많은 인재가 서울대 공과대학으로 몰려들었다.
  
 
원자력에 대한 갈증은 6·25전쟁 때 미군이 진주하면서 해갈됐다. 원자력공학을 전공한 미군 장교들이 당대의 원자력 석학인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의 레이먼드 머레이(Raymond L. Murray) 교수가 쓴 원자력 교과서를 들고 들어온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 70달러에 불과한 최빈국이었다. 이러한 실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시슬러의 조언을 귀담아 원자력 인재 양성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1957년 원자력 전문가를 키우기 위해 국비 유학생 제도를 도입하라고 지시했다. 원자력 공부에 목말라하던 인재들이 대거 지원했다. 선발된 인재들은 여러 해에 걸쳐 총 237명이 차례로 출국했다. 그들의 절반은 영국으로, 나머지는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 유학생으로 가장 먼저 선발돼 도미한 유학생 대표는 윤세원(尹世元·전 선문대 총장, 2013년 작고)이었다. 1950년대 실무 차원에서 한국원자력의 토대를 마련한 두 사람은 박철재와 윤세원이었다. 연희전문-교토제대 동문 관계로 얽힌 두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으며 한국 원자력의 토대를 만들었다.    


  
한미원자력협정 체결을 둘러싼 自主權 논쟁

IAEA 설립과는 별도로 미국과 소련은 자국과 우호관계에 있는 국가들과 원자력협력협정을 경쟁적으로 체결하기 시작했다. 실험용 원자로용 농축우라늄의 제공과 원자로 건설을 위한 자금의 부분적 원조를 약속한 것이다.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을 계기로 터키를 시작으로 우방국들과 원자력협정을 맺어 온 미국은 1956 2 3일 한국과 협정을 체결했다.
  
  1955 7
1일 양유찬(梁裕燦) 주미 한국대사가 워싱턴에서 월터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 미 국무부 차관보, 루이스 스트라우스(Lewis L. Strauss) 미 원자력위원회 위원장과 ‘한미원자력협정’에 가조인을 했다. 협정의 정식 명칭은 ‘원자력의 비군사적 사용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 간의 협력을 위한 협정’이었다.
  
 
최초의 한미원자력협정은 전문과 본문 10개조로, 원조의 목적, 수입국의 혜택과 의무, 협정의 효력 부분으로 구성했다. 협정문은 첫째 ‘연료를 대체할 때는 사용된 연료의 형태와 내용을 변경하지 않고 반환해야 한다’며 원자로에서 생산되는 플루토늄의 관리를 엄격하게 했다. 둘째, ‘대한민국 또는 미합중국의 사인(私人)과 사적 기관은 타방 국가의 사인 및 사적 기관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것으로 한다’고 했다(4). 이 규정은 양국 원자력 업자의 국제적 상행위의 법적 근거가 되는 동시에 미국 원자력 업자를 한국에 진출시켜 한국 원자력 자원과 원자력 시장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셋째, ‘연구용 원자로를 포함하지 않는다(10조 다항)’고 규정했다. 연구용 원자로가 절실한 한국의 입장에서 어처구니없는 조항이었다. 미국의 지원을 원한 한국 정부는 협정 전문에 ‘대한민국 정부는 원자력의 평화적 및 인도적 사용을 구현하기 위해 연구 및 발전계획을 실현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또한 이 계획에 관해 미합중국 정부와 미합중국 공업으로부터 원조를 바라고 있으므로’라고 명기했다. 따라서 협정체결을 전적으로 미국이 주도하고 한국은 수동적인 스탠스를 취했다.
  
  1955
7 1일 가조인했던 한미원자력협정은 1955 12 9일 국회동의를 거쳤으나, 1956 6 11일 미 정부의 수정 제의가 있었다. 미국 원자력위원회는 원래 협정문에 있던 ‘대한민국 정부 또는 그 관할하에 허가를 받은 자에게 연구용 원자로의 건조와 운영에 필요한 원자로용 물질을, 특수물질을 제외하고 위원회가 적당하다고 인정하는 방법으로 대여한다’고 한 조문을 수정하자고 한 것이다. 서독, 네덜란드 등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맺은 국가들이 특수핵물질에 대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정부는 수정안에서 ‘원 협정에서 제외됐던 특수핵물질을 비롯해 원료물질, 부산물 기타 방사성 동위원소 및 안정동위원소를 포함한 중요물질까지 상호 합의하는 분량과 조건하에 매도 또는 대여 받을 수 있다’고 규정했다. 미국은 서독 등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하한 경우에도 일시에 우라늄235 100g, 플루토늄 10g, 우라늄233 10g을 초과하여 대여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한미원자력협정은 1957 8 10일 국회동의를 통해 최종 비준됐다.
  
 
한국은 당시 국제원자력회의에 참석하고 미국과 협정을 체결하는 등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세계적 흐름에는 동참하고 있었으나, 국내 경제적 여건과 과학기술계의 상황은 이를 뒷받침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또한 원자력법의 제정 등 제도적 장치와 구체적 사업의 방향도 모호한 상태였다. 잡지 《새벽》은 1955년 송년호에서 60여 페이지에 달하는 원자력 특집을 꾸밀 정도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됐다. 그러나 1955 7 25일 한미 간 협정 전문이 일간지에 보도되자, 원자력계에서는 논쟁도 활발하게 벌어졌다.
  
 
박익수 전 위원장은 《동아일보》(1955 7 30)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소견’이라는 칼럼을 통해 “지성의 최고 대표기관인 학술원이 의당 적극적인 관심과 의사표시가 있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를 계기로 당시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장래원(張來元) 사무총장과 스터디그룹의 대표이자 초창기 한국 원자력 사업을 주도한 윤세원 문교부 원자력과장 등 세 사람이 원자력 발전의 자주성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장래원 총장은 “미국의 원자력 원조가 농축우라늄의 대여량을 제한하고, 방사성 동위원소의 직접적인 이용을 막기 때문에 ‘원자로 운전기술자 양성’에는 적당하나, 한국 원자력 연구개발의 지상과제인 ‘원자력 발전 연구’에는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미국의 협정제의가 원자력 국제시장을 확보하려는 데 있다”면서, “미국의 의도에 맞서 한국은 연료를 미국 측이 제공하는 농축우라늄에 의존하지 말고 국산 천연우라늄을 사용하는 방안을 세우는 등 자주·자립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래원의 지적에 대해 윤세원 과장은 “‘원자력=전력’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비록 소형이긴 하지만 연구용 원자로의 가동에 의해 많은 수의 과학자를 양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성자의 이용, 원자로에서 나오는 방사성 동위원소의 이용 등 많은 이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천연우라늄을 이용한 원자로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많은 과학적 성과가 필요하다”면서 “한국의 과학적 수준을 고려할 때 미국에서 제공하는 원자로를 먼저 받아들여 원자로에 대한 경험을 쌓은 후에 자력으로 건설하는 것이 순서에 맞다”고 주장했다.
  
 
장래원은 미국의 의도를 간파하고 협정내용의 수정을 제의한 반면, 윤세원은 협정 자체에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미국이 제공하는 것을 우선 받아들여 한국의 원자력 산업을 키워 보자는 입장이었다. 두 사람의 논쟁을 지켜보던 박익수 전 위원장은 “국가간 협정이나 정책은 이해관계가 전제되는 것이므로 이번 미국의 세계 원자력정책이 결과적으로 미국이나 우리도 공히 이익이 될 것”이라면서도 “우리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주권국민으로 당연한 태도”라고 했다.
  
 
한미원자력협정을 체결하고 난 직후인 1956 3 9, 정부는 문교부 기술교육국에 원자력과를 만들었다. 그러나 윤세원의 해외연구 관계로 초대 과장은 즉각 임명하지 못했다. 정부는 윤세원 교수를 문교부 원자력과 설치 1 7개월 만에 초대 과장으로 임명했다. 원자력과의 당면과제는 조속히 원자력법을 제정해 원자력 행정기구와 직제를 만들고, 원자력연구소 부지를 정하는 한편, 연구용 노형을 결정해 도입하고, 원자력 훈련생을 해외에 파견하는 등 할 일이 산더미였다


  
“원자력연구소 지을 곳 없으면 진해 해군기지도 고려해 봐” 

이승만 대통령이 원자력 산업에 얼마나 야심을 가졌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박익수 전 위원장 비망록에 등장하는 윤세원씨의 회고다.
  
 
〈과장으로 부임한 지 1개월이 지난 1957 11월경으로 기억합니다.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들어오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경무대로 들어오라는 시간에 들어갔더니, 첫마디가 “우리나라에서도 원자폭탄을 만들려면 만들 수 있나”라고 물어서, “지금 당장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연구를 계속하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그럼 자네 원자력에 대한 계획을 잘 세우고 그러면 정부도 자네가 하는 일을 잘 밀어 줄 거야. 연구소를 지을 장소는 사람들의 출입이 뜸하고 보안도 잘되는 곳이 좋아. 만일 적당한 장소가 없으면 진해 해군기지가 있는 곳도 찾아봐요”라고 하셨습니다.
  
 
원자력을 연구하려면 반드시 연구용 원자로가 있어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개정된 한미원자력협정을 근거로 윤세원 과장이 올린 ‘연구용 원자로 구입’ 품의서를 결재했다. 1958 8 16일 정부는 연구용 원자로 구매단을 구성해 미국에 파견했다. 단장은 박철재 소장, 구매단원은 윤세원, 김희규, 이진택이었다. 이들은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있던 이기억, 유학 중인 전완영, 이병호를 합류시켜 협조를 받았다.
  
 
조사단은 미국에서 처음 본 원자로 가운데 제너럴 아토믹(GA)의 트리가 마크-Ⅱ 스위밍풀형이 구조도 단순하고 가격도 마음에 들어 기초연구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트리가 마크-Ⅱ는 1958년 제네바 제2차 원자력평화이용회의에서 가장 호평을 받은 제품이었다. 조사단은 1958 12 27일 제너럴 아토믹사의 ‘트리가 마크-Ⅱ’를 도입하는 것이 좋겠다는 보고서를 이 대통령에게 올렸다.
  
 
트리가 마크-Ⅱ의 도입비용은 732000달러로 결정됐다. 원자로 계약대금은 331000달러였고, 여기에는 핵연료 대금이 빠져 있었다. 당시 핵연료는 미국 원자력법상 국가에서 통제관리하는 물자로 판매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핵연료는 별도로 미국 정부와 리스협정을 맺고 임차 형식으로 계약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원자로 구입을 위한 충분한 자금이 없었다. 고민하던 한국 정부는 1958 7 24일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미국 정부의 원자로 구입대금 무상원조에 대한 지출교섭을 우리보다 교섭능력이 뛰어난 제작사 제너럴아토믹사에 맡겼다.
  
 
달러 부족에 허덕이는 한국의 사정을 알아챈 미국도 절반에 가까운 35만 달러를 지원해 주기로 했다. 미국에서 받은 무상원조 자금 35만 달러 중 계약금 331000달러를 제외한 잔여금 19000달러와 원자로 건설을 위해 한국 정부가 부담할 35만 달러, 그리고 중앙산업의 하청공사비 약 3만 달러 등 총 40만 달러는 재무부 이한빈(李漢彬) 이재국장(경제기획원장관 역임)의 노력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대통령은 40만 달러를 미국의 양유찬 대사 명의로 미국은행에 예치해 놓고 주로 연구기기 구입대금으로 전결해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도입 계약은 한국을 대표해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가 해럴드 밴스(Harold S. Vance) 미국 원자력위원회 위원장과 체결했다.
  
  100kW
용량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를 도입하면서 운전 인력도 필요했다. 1959년 봄 정부는 미국 시카고의 알곤 원자력연구소 부설 국제원자력학교를 8기로 수료한 양흥석, 이관, 이창건, 장지영, 정운준, 한희봉 등 6명을 제너럴아토믹사로 보내 트리가 마크-Ⅱ 원자로 운전기술을 배우게 했다. 이들은 두 달 후 트리가 마크-Ⅱ의 운전면허증을 받고 귀국해 한국인 최초의 원자로 운전 면허자가 됐다.   


  
“아예 과학부를 만드는 것은 어때?

연구용 원자로 도입이 가시화하자 시슬러가 방향을 제시한 대로 정부 차원에서 원자력 업무를 할 기관을 만들어야 했다. 문교부 기술교육국의 원자력과로는 원자력 업무를 제대로 추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윤세원 과장은 1956 1 14일 일본 원자력법을 참고해 ‘원자력법’의 초안을 잡았다.
  
 
이승만 정부는 원자력법을 집행할 기구로 ‘원자력원’ 창설을 추진했다. 그러나 원자력원 산하 원자력위원회가 행정기관이 될 수 없다는 점(정부조직법 저촉)과 원자력 행정기관인 원자력원을 문교부장관 감독하에 둘 것이 아니라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두어야 하는 문제점 때문에 국회와 정부가 해를 넘겨 가며 대립했다. 우여곡절 끝에 문교부와 국회가 절충을 시도하여 원자력법은 1958 2월 간신히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이 제정된 해에 한양대 공과대학이 국내 최초로 원자력공학과를 만들었다. 이듬해인 1959년 서울대 공과대학도 원자력공학과를 설치했다.
  
 
원자력법은 원자력원을 대통령 직속의 독립기관으로 하는 동시에, 원자력의 전반적 정책 입법의 심의의결기관인 원자력위원회, 사무를 담당하는 사무총국, 원자력 연구개발을 주임무로 하는 원자력연구소로 구성하는 것이 골자였다. 원장은 국무위원급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원자력법이 1958 3 11일 공포되자 문교부는 이를 토대로 1958 10월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원자력원을, 같은해 2 3일 그 산하기관으로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했다.
  
 
어느날 박철재 국장이 윤 과장을 불러 “원자력원은 규모가 작으니 이 기회에 문교부처럼 과학부를 만드는 것이 어떠냐”고 했고, 윤 과장이 당시 이재학(李在鶴) 국회의장을 찾아가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이재학 의장은 윤 과장에게 “이 사람아, 한꺼번에 하지 말고 단계적으로 해. 처음부터 크게 만들었다가 할 일도 없으면 곤란하지 않아?”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1959
1 21일 원자력원을 설립한 정부는 초대 원자력원장에 프랑스 유학파로 불교계의 거목이자 자유당 3선 의원인 김법린(金法麟·1899~1964, 동국대총장 역임)씨를 임명했다. 사무총장은 조달청 출신 김대만(金大萬), 기감(技監)에는 서동운(徐同運) 서울대 교수를 임명했다. 박익수 전 위원장의 회고다.
  
 
“원래 원자력 사업에 관한 중요사항은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외무부, 재무부, 부흥부, 국방부, 문교부 장관으로 구성된 5부 장관회의에서 협의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문교부장관이 책임지고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자력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원자력원이 발족하면서 이런 절차와 5부 장관회의에서 벗어나 문교부장관의 소관 아래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됐습니다.
  
 
원자력원은 발족 두 달 만인 1959 3 1일 원자력연구소를 만들어 초대 소장에 문교부 기술교육국장인 박철재씨를 임명했다. 원자력연구소는 해방 이후 한국에 만들어진 최초의 연구소다. 박 소장은 원자력연구소의 핵심인 원자로부장에 윤세원 과장을 임명했다. 기초연구부 김영록 부장, 방사성동위원소연구부 한준택 부장 등을 1급으로 임명했다. 이러한 높은 직급은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원자력연구소는 1959 3 1일 홍릉에 있는 서울대 공과대학 4호관을 빌려 출발했다. 3·1절을 택해 원자력연구소를 개소한 것이 심상치 않았다. 힘이 없어 당한 식민지배를 설욕하겠다는 이승만 정부의 의지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다. 행정은 서무와 건설, 두 과로 구분해 운영했다. 연구소 초기 시절, 해외에서 훈련받은 20여 명의 연구관을 주축으로 출발했고, 1961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1961 10월 연구소 조직은 3개 부에서 6개 연구실로 개편됐다. 이렇게 출범한 원자력연구소는 당시 최고의 대우를 해 주면서 인재들을 불러모았다. 이때 연구소에 들어간 이창건(李昌健) 박사에 따르면, 원자력연구소 근무자는 본봉의 100%씩 연구수당과 위험수당을 더 받았기에 본봉만 받는 원자력원 근무자에 비해 월급이 세 배나 많았다고 한다.  


  
, 한국의 연구소 부지 선정에 불만 표출

▲1959년 3월 1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 서울 공대 4호관에서 개최된 원자력연구소 개소식. 앞줄 왼쪽에서 6번째가 박철재 초대 소장, 다음이 김법린 초대 원자력원 원장.

 

  원자력연구소의 부지 선정은 이승만 정부가 연구소를 어떠한 용도로 활용하려고 했는가를 보여주는 좌표다.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 고위인사들은 원자력연구소를 군의 경호를 받을 수 있는 강원도나 진해 등에 두려고 했다. 반면, 상공부는 전기·수도·도로망이 완비된 충주비료공장이 있던 충주를 희망했고, 원자력과를 품고 있던 문교부는 안양과 군포 사이에 있는 수리산의 박달리(博達里) 일대를 추천했다.
  
 
한국의 모든 정부기관은 원자력연구소를 후방지역의 안전한 곳에 두려고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정부는 원자력연구소를 군사적 용도로 쓰고 싶다는 의중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박달리는 일본군 탄약고가 있던 22만평 부지로, 정락은(鄭樂殷) 국방과학연구소장의 안내로 최규남(崔奎南) 문교부장관, 박철재 기술교육국장이 현지를 답사해 크게 만족했다는 것이다. 윤세원 부장은 박익수 전 위원장의 비망록에 이러한 증언을 남겼다.
  
 
1958 4월 미국 극동과학담당관(미국 주재)인 페닝턴(W. H. Penning-ton)이 서울에 왔는데, 부지를 선정해 놓았다고 하니까 가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와 동행한 미시간대학의 G. H. 위플 교수와 함께 박달리를 구경시켜 주었는데, 이곳을 본 이들의 첫마디가 ‘왜 이런 오지에다 정하느냐. 대학 근처에 사람들이 왕래하기 편한 곳에 정하는 것이 좋을 텐데’ 하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우리들이 ‘대한민국은 발전속도가 빨라 머지않아 서울에서 30~40분 거리가 될 것이다. 일본의 도카이무라(東海村)도 처음에는 시골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자,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박익수 전 위원장의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무자들이 현지를 다시 답사했습니다. 어느 사이 미8군 팻말이 붙어 있었고,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어요. 5부장관회의에 이 사실을 보고했더니 당시 김일환(金一煥) 국방부차관이 ‘미8군에서 사용하겠다는 청원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고 전했습니다.
  
 
결국 미국 측의 강력한 반대로 원자력연구소 부지는 서울대 공과대학 근처 육군공병대 불도저연습장으로 낙점됐다. 국방부가 나서 여러 후보지를 놓고 안보평가를 한 끝에 그곳에 짓기로 한 것이다. 국방부가 부지를 선정한 것은 한국 정부가 원자력연구소를 안보시설로 보았다는 뜻이다.
  
 
원자력연구소 담당자들은 서울대 윤일선(尹日善) 총장을 찾아가 연구소의 부지시설계획과 공과대학과의 연구협력을 설명하며 13만평을 원자력연구소 부지로 할애해 달라고 했고, 인접 사유지 12만평을 합쳐 약 25만평의 연구소 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박익수 전 위원장은 “이 대통령이 처음부터 원한 장소는 아니지만 최초의 연구기관은 서울 근교에 건설하고 계속해서 대전 이남에 분산 건설하겠다고 보고해 결재를 받은 것은 지금 생각하면 잘한 일”이라고 했다.
  
 
트리가 마크-Ⅱ 도입을 결정한 정부는 1959 7 14일 서울시 공릉동의 원자력연구소 부지 안에서 원자로 건설을 위한 기공식을 가졌다. 원자로 건물 설계는 당시 촉망받던 건축가인 김중업(金重業)씨가 맡았다. 김중업은 설계를 위해 2개월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를 돌며 방사선 차폐시설, 방호시설, 동위원소 생산시설 등에 대한 구조물을 시찰하고 두 권의 노트로 정리해 보고했다.
  
 
기공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3부 요인과 함께 참석해 직접 역사적인 ‘시삽’을 했다. 이 대통령은 훈시를 통해 “장차 원자력연구소는 훌륭한 아토믹 머신(Atomic Machine)을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당시 이 대통령이 말한 ‘아토믹 머신’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첫 삽을 뜬 원자력연구소 내 트리가 마크-Ⅱ 원자로 공사는 4·19 5·16이라는 정변을 겪고도 1962 3 30일부터 정상 가동했다. 원자력을 향한 한국민의 열망을 그 어떤 정변도 막지 못했다.

출처월간조선 2016년 2월호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감수 : 申載仁 전 국가핵융합연구소장

 

2016.03.05 “원자력계 내분만 없었다면 한국 이미 핵보유국 됐을 것”

⊙ 건국 후 최초의 하극상(下剋上) 사건인 ‘파이클럽 사건’… 초대 원자력과장 윤세원(尹世元) 사표로 봉합
5·16 쿠데타 세력, 1962년 트리가 마크Ⅱ 원자로 기공식 테이프 끊고 원자력 개발 시동
⊙ 최형섭(崔亨燮) 소장 부임으로 원자력 행정 기틀 마련… KIST 설립으로 과학기술 도약 ‘시동’
⊙ 트리가 마크Ⅱ 1962 3 19일 오후 452분 핵분열 성공, 원자력 시대 도래

▲최형섭 초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
1962년 4월 원자력연구소장으로 부임해 연구소 내 내분을 잠재우고 행정적 기틀을 마련했다.

 

  2007년 한국원자력연구원으로 문패를 바꿔 단 원자력연구소가 지난 2 2일 창립 57주년을 맞이했다. 이날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전·현직 임직원과 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연구원 대강당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1959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시절 원자력연구소로 출범한 한국원자력연구원은 국내 유일의 원자력 종합연구기관으로 원전 핵연료 국산화, 한국 표준형 원전 개발 등 기술 자립뿐 아니라 연구용 원자로 및 소형 원자로(SMART) 기술 개발과 해외수출을 이뤄냈다. 현재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4세대 원자력 시스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종경(金宗經) 원장은 “앞선 57년간 연구원을 거쳐 간 선배들의 열정과 불굴의 의지가 지금의 원자력 기술을 만들었다”고 했다. 신재인 전 원자력연구소장, 소형 원자로 SMART 상용화에 공을 세운 김시환(金時煥) 전 한국원자력연구소 일체형 원자로 연구개발 사업단장 등 원자력계 원로들은 기념식을 마친 후, 지난해 4월 한미원자력협정 재개정 이후 주목받고 있는 파이로 프로세싱(Pyro-processing·건식고온재처리) 일관공정 시험시설(PRIDE)을 둘러보았다고 한다.
  
 
이날 공개된 PRIDE는 파이로 프로세싱 전 공정을 공학 규모로 모의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시설로, 2015 12월 준공식을 갖고 본격 가동을 시작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모의 사용 후 핵연료’를 이용해 수행한 단위공정별 성능시험 결과를 바탕으로 각 단위공정 간 연계성을 강화해 일관공정 성능 실험을 수행할 계획이다.
  
 
한국수력원자력 자료에 따르면, 2014 3월 현재 우리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사용 후 핵연료의 양은 15000톤에 달한다. 우라늄이 93.4%, 플루토늄 1.2%라고 한다. 핵무기 제조에 들어가는 원료인 핵분열 물질은 일단 확보한 셈이다. 게다가 증폭 핵분열탄과 수소폭탄 개발에 필요한 핵융합 물질인 중수소와 삼중수소도 확보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중수소는 바닷물에서 추출하고, 삼중수소는 리튬6에 중성자를 대량으로 조사(照射)해 얻어진다. 리튬6과 삼중수소 모두 핵무기 개발에 이용될 수 있는 핵물질이어서 국제적으로 수출입에 통제가 따른다. 그런데 삼중수소는 리튬6을 통한 추출뿐 아니라 중수로의 부산물로도 나온다. 중수로 원자로의 중수(重水) 속에 존재하는 삼중수소를 액체 상태로 분리한 뒤 초저온(-256) 상태에서 농축하면 순수한 삼중수소를 얻을 수 있다. 중수로인 월성 원전은 2007년부터 TRF(Tritium Removal Facility·삼중수소제거장치)를 설치해 자체적으로 삼중수소를 거의 무한정으로 생산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삼중수소를 추출하기 위한 촉매기술부터 저장용기까지 세계 두 번째로 자체 개발했다고 한다.
  
 
그동안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는 군사적 목적 전용의 우려 때문에 한미원자력협정에 의해 상당 부분 규제당해 왔다. 그러나 지난해 4월 한미원자력협정을 재개정하면서 ‘파이로 프로세싱에 대한 공동연구를 향후 10년간 추진하고 그 결과물을 바탕으로 연구 및 사업 방향을 정립한다’는 내용을 삽입해 재처리의 숨통을 틔웠다


  
일본의 고속증식로는 재처리 명분 쌓기용

▲일본 후쿠이(福井)현 쓰루가(敦賀)시에 있는 고속증식로 몬주의 모습. 현재 가동 중단 상태지만 연간 유지비가 180억 엔(약 2600억원)에 이른다. 일본은 핵연료 재처리를 명분으로 고속증식로를 보유하고 있다.

 

  ‘파이로 프로세싱’이란 재처리 기술 중 하나로, 사용 후 핵연료에 포함된 우라늄 등을 회수, 차세대 원자로인 고속증식로의 핵연료로 재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사용 후 핵연료에는 우라늄 약 96%, 플루토늄 약 1%, 넵투늄·아메리슘·큐륨·세슘·스트론튬 등 핵분열생성물(장반감기 핵종과 고방열 핵종)이 약 3% 포함돼 있다. 파이로 프로세싱은 이 사용 후 핵연료를 500℃ 이상의 고온에서 소금을 녹인 것과 비슷한 용융염 매질과 전기를 이용해 전기화학적으로 처리하는 기술이다.
  
 
파이로 프로세싱은 기존의 습식 재처리에 비해 공정상 플루토늄을 단독으로 분리할 수 없어 핵무기 비확산성이 높고 우라늄 활용률을 거의 100% 가까운 상태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플루토늄의 경우, 다른 물질과 섞여 추출되기 때문에 그 순도는 다소 떨어진다. 서균렬(徐鈞烈) 서울대학교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파이로 프로세싱을 통해 얻은 플루토늄의 양은 매우 적고( 1.2%) 불순물이 섞인 저순도지만, 고폭 화약을 이용해 압축하면 1억 도에 이르는 고온을 내기 때문에 증폭 핵무기 개발에 응용할 수 있다”고 했다.
  
 
서 교수는 “우리는 30여 년 전부터 경수로보다 사용 후 핵연료가 몇 배나 더 많이 나오는 중수로 원전을 운용해 왔다”면서 “현재 중수로에서 나오는 사용 후 핵연료 물질은 엄밀히 따지면 미국의 통제권 바깥에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월성 1호기의 경우, 캐나다의 캔두(CANDU)형 원자로 기술을 도입한 것으로 미국과는 무관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월성 1호기 등) 중수로에서 나온 사용 후 핵연료에 대한 재처리는, 한미원자력협정에 위배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재처리한 사용 후 핵연료는 고속증식로(高速增殖爐·Fast breeder reactor)라는 차세대 원자로에서 연료로 재활용한다. 종래의 원자로가 핵분열성 물질인 우라늄 235 분열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저속중성자를 사용하는 데 비해, 고속증식로는 천연 우라늄의 99%를 차지하고 있는 비()핵분열성 물질인 우라늄 238을 핵분열성 물질인 플루토늄 239로 변환시키는 원자로이기 때문에 고속중성자를 사용한다. 액체금속인 나트륨을 냉각재로 사용하기 때문에 액체금속로라고도 부른다.
  
 
고속증식로는 플루토늄과 천연 우라늄을 함께 장전한다. 이때 연료인 플루토늄은 소모되지만, 우라늄 238이 반응을 통해 플루토늄 239로 바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소모되는 플루토늄보다 더 많은 플루토늄을 생산한다. 우라늄 238 1g을 사용하면 원자로 내에서 1.17g 정도의 플루토늄 239로 증식되어 연료로 사용된다. 이 같은 고속증식로가 실용화될 경우 우라늄의 이용효율을 60배 정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현재 고속증식로는 프랑스가 1989년 슈퍼피닉스(124kw, 1998 12월 폐쇄)를 가동하고, 일본이 1995 8월 몬주(28kw, 1995 12월 가동 중지)를 건설했으나, 현재로서는 경제성이 없어 상용화를 미루고 있다. 냉각재로 사용하는 액체나트륨이 물·공기와 결합하면 폭발을 일으키고 파이프를 쉽게 부식시켜 이를 안정적으로 다루는 기술 확보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일본이 사용 후 핵연료를 ‘합법적으로’ 재처리해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은 미국과의 원자력협정 때문이다. 그러나 그 협정(30년간 유효) 2018 7월 만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현재 일본은 47.8t에 달하는 플루토늄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이는 히로시마에 투하한 핵무기 6000발분에 해당하는 양이다.
  
 
일본은 미국과의 원자력협정에 따라 ‘핵연료 주기(채광, 정제, 사용, 처분 등 핵연료 사용과 관련한 전 과정)’를 운용하면서 원전용 핵연료 재활용을 명분으로 제시해 왔다. 다시 말해 고속증식로 ‘몬주’를 비롯,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를 통해 만든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섞어 만든 혼합산화물을 원료로 사용하는 원자로 17~19기를 플루토늄의 사용처로 설명해 온 것이다. 그러나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의 여파로 대다수 일본 내 원전이 가동 중단 상태인데다 플루토늄의 최대 용처인 몬주는 가동 중지 상태에 놓여 있고, 플루토늄이 섞인 핵연료를 쓰는 다른 원자로의 재가동 전망도 불투명하다.
  
 
협정을 개정하지 않으면 자동 연장되지만, 협정 만료 6개월 전에 한쪽이 일방 통보를 통해 파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본으로선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일본 외무성 관계자는 현재의 미일 ‘밀월관계’를 감안할 때 자동연장은 문제없다는 견해지만, 미국의 분위기는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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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자 《요미우리신문》은, 미국의 유력 연구기관인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제임스 액턴 선임 연구원이 작년 9월 “일본이 잉여 플루토늄을 가지지 않는다는 약속을 이행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며 협정 개정을 통해 플루토늄 감축 시한을 명기한 부속 문서를 만들자고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한국 일각에서 ‘핵무장론’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미국이 ‘일본 예외’를 계속 인정할 명분이 뚜렷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이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일본을 ‘잠재적 핵보유국’으로 칭하며 미국을 압박하는 상황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국내에서는 이미 자위적 핵무장이 폭넓게 힘을 얻고 있다. ‘한국이 핵개발을 포함한 모든 자위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헌법적 권리와 국제법적인 권한을 가졌다’는 것이다


  
자재 구입·人事로 인한 갈등

오늘날 한국이 세계 원자력 5대 강국 반열에 오른 이면에는 뼈아픈 인고의 세월이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 원자력 ‘행정’과 원자력 ‘연구’ 사이의 내분은 원자력법을 만들고 원자력원을 발족시키는 등 준비 단계부터 싹이 트고 있었다. 대한민국 건국 후 최초의 하극상(下剋上)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원자력연구소 연구원들의 핵심세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윤세원(尹世元), 김준명(金俊明), 김조규(金照圭), 이병호(李炳昊), 민광식(閔光植), 정구순(鄭求珣), 이진택(李鎭澤), 이수호(李洙灝), 현경호(玄京鎬) 등 소위 ‘스터디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원자력법을 위시해 원자력 행정 체제와 연구 체제의 골격을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창기부터 연구원들은 ‘원자력 창업 공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원자력 연구에 독립성을 보장받기 위한 자세가 강했다
  
 
원자력원의 감독이나 원자력위원회의 행정 중심의 제약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원자력연구소 독자적으로 자유로운 연구 활동을 원했던 것이다. 연구 기자재의 구입이나 인사문제에 대해 불평이 많았고, 인사행정의 불공정성이 내분을 더욱 조장했다.
  
 
특히 인사문제에 있어서는 연구소 발족 초기, 연구관 T/O(Table of organization·인원구성표)를 책정해 주지 않아 대부분 원자력연구소의 임시 촉탁연구관으로 발령했다가, T/O 범위에서 정식발령을 내면서 갈등이 커졌다. 개인 친밀도나 학연으로 발령을 빨리 내는 경우도 왕왕 있었는데, 급료는 정식연구관과 촉탁연구관의 경우 약 3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초창기 원의 사무직은 거의 모두 정식 직원으로 발령받았고, 연구소의 사무직은 임시 직원이 많았다. 원자력연구소 소속원들은 “원자력원의 횡포”라고 성토했다. 인사행정의 이러한 불평은 6·25전쟁을 겪는 동안 선후배의 졸업연도가 뒤바뀐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또 하나는 원자력원장이 박철재(朴哲在) 원자력연구소장을 원자로 기공식 준비 때 관계자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은 혐의로 감사원에 고발했고, 이 때문에 결국 박 소장은 사표를 내고 출근하지 않다가 1960 9월 사표가 수리됐다. 연구관들은 이것을 연구소의 부정으로 확대시킨 당시의 원장과 사무총장을 질타했다.  
  


  
최형섭 人事 문제

▲5·16 군사쿠데타 당시 원자력원장이었던 김양수 선생,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인사위원회 구성지침에 따라 임명한 기용숙 서울대 의대 교수, 서강대 부총장을 지낸 최상업 원자력연구소장(왼쪽부터).

 

  1960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해 6월 초대 김법린(金法麟) 원장에 이어 김양수(金良洙) 원장이 취임했고, 7월 말썽 많았던 김대만(金大萬) 사무총국장, 기감 서동운(徐同運)이 함께 사임하고 새로 서광순(徐廣淳)이 사무총국장으로 왔다. 연구행정 인사들을 새로이 충원하자 연구관들의 연구의욕도 살아났다. 이번에는 연구 기자재 도입이 발목을 잡았다. 연구행정이 느리고 일방적이어서 또다시 원자력원과의 감정이 나빠졌다. 게다가 원자력위원회 위원들이 원자력도 모르면서 직책상 연구성과 부진과 부실을 꼬집고 질책하는 바람에 관계 악화는 더욱 심해졌다.
  
 
결국 원자력연구소는 직원 전원이 사직서를 쓰고, 결의문·건의문·연판장 등을 각계에 돌리며 원자력원, 원자력위원회에 대한 그동안의 울분을 드러냈다. 연구관들은 연판장에 사직서를 첨부해 행정절차를 무시하고 직접 국무총리실에 전달하려다 접수를 거부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원자력원장을 비롯해 상임 원자력위원, 사무총국장, 그리고 원 및 소의 총무과장 총사퇴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이미 완성해야 할 원자로 건설은 아직 요원했고, 이미 도입했어야 할 시설 및 기자재들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연구조건과 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아 ‘페이퍼 워크’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극상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건국 이래 행정기관에서 발생한 최초의 하극상 사건으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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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혁명으로 자유의 바람을 타고 젊은 연구관들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졌다. 가끔 연구관답지 않은 돌출행동도 나타났다. 이때 모든 일이 합의에 의해 원만하게 처리되리라 기대했던 신임 소장에 대한 신뢰에 이미 틈이 생기고 있었다. ‘최형섭 인사’는 새로운 내분의 도화선이 됐다.
  
 
당시 원자력연구소는 최상업(崔相業) 소장을 지지하는 그룹과 김태봉(金泰鳳) 동위원소부장과 윤세원 로공학연구부장을 지지하는 두 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때 최형섭(崔亨燮)의 인사 문제가 발생했다. 최형섭은 1944년 와세다대학 이공대학 채광야금과를 졸업하고, 1958년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화학야금학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새나라자동차 부평공장장(부사장급)으로 일하고 있었다.
  
 
‘최형섭 인사’ 문제는 박철재 소장 후임으로 최상업 소장이 취임하면서 최형섭을 1급 직원으로 전격 발령한 것을 가리킨다. 당시 1 T/O는 하나였고, 그 자리는 윤세원 로공학연구부장(대리)이 승진해서 갈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실제 인사는 이런 일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당시 미국이나 유럽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친목단체로 ‘파이클럽’이란 것이 있었는데, 최형섭과 최상업은 그 중심멤버였기 때문에 갈등의 중심이 됐다. 원자력을 전공하지도 않았으면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최형섭을 고위직에 기용했고, 그 배후가 같은 파이클럽인 최상업이란 것이다.
  
 
이런 인사 문제를 사전 협의 없이 결정한 최상업 소장에 대해 김태봉, 윤세원 등은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왕따를 시켰다. 이들은 파이클럽이 국내파인 자신들에 대해 조직적인 도전을 한 것으로 보고 위기의식을 공유했다.  

  
  
군인들의 국무회의에 나타난 ‘한복 노인’

▲1962년 9월 제5차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에 참석한 정태하 원자력연구소장, 이영재 연구관, 이민하 보좌관, 신응균 주서독대사(왼쪽부터).

 

  이러한 가운데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군인들이 주축인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국회를 해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모든 행정기구의 부·처장을 군인으로 교체했다. 원장을 오원선(吳元善) 해병의무관(대령)으로 교체하고, 원자력원 사무국장에 경응호 해병대 중령, 연구소 감독관에 이동집(李東潗) 해병대 소령을 임명했다. 이동집 감독관은 군사쿠데타 직후 오원선 대령이 원자력원장으로 부임한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혁명과 동시에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구성되고 각 부처의 군인장관들을 임명한 다음, 첫 국무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군인장관회의였던 셈이지요. 그런데 회의에 군복이 아닌 하얀 한복 차림의 노인이 참석했습니다. 의장 비서실장(박태준 육군 대령)이 정중하게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느냐’고 하니, 그 노인은 ‘내가 원자력원장이오. 국무회의를 소집한다기에 연락을 받고 왔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비서실장이 깜짝 놀라 그 사실을 내각수반(장도영)에게 알렸더니 ‘원자력원장은 오늘 회의엔 참석하지 않아도 되니 돌아가시게 하라’고 했어요. 당시 원자력원장은 장관급 각료였으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원자력원장을 장관급 관료인 줄 모르고 군인으로 교체하지 못했던 겁니다. 한복 입은 노인은 김양수 원장이었어요. 최고회의는 실수를 자인하고 당시 해병대 출신 김동하(金東河) 최고위원의 추천으로 해병대 군의관인 오원선 대령을 추천한 겁니다.
  
 
동시에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공무원 재임용 인사지침에 따라 각 부처의 3급 이상의 공무원에 대한 재신임을 물어 재임명하는 인사위원회의 구성을 서둘렀다. 위원장에는 원자력원 사무총국장 경응호 중령을 임명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인사위원회 구성 지침에 따라 기용숙(奇龍肅) 서울대 의대 교수, 박익수(朴益洙) 서울대 사범대 전임강사(작고, 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 등 민간인 2명을 위촉했다.
  
 
박익수 전 위원장은 “한미원자력쌍무협정을 비롯해 우리나라 원자력 산업에 대한 글을 일간신문에 자주 기고한 인연으로 군사혁명 후 오원선 대령이 나를 찾아와 자문을 요청했고, 후에 원자력원장 추천으로 혁명 초기 중앙정보부 부장 자문기관 판단관으로 일했다”면서 “기용숙 교수는 국가재건최고회의 홍종철(洪鍾哲) 위원장(경호실장 역임)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고, 홍 위원장은 오원선 원장에게 기 박사의 자문을 받으라고 권유했다”고 회고했다.
  
 
이때 기용숙 위원은 김태봉, 윤세원 두 부장의 편에 서 있었다. 기 위원은 “최상업, 김태봉, 윤세원은 그대로 두고, 그 외 3급 이상의 연구관에 대해 재심하는 것이 좋겠다”며, 3급 이상 연구관 중 분쟁 주동자 13명의 명단을 내놓으며 “이들의 사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그들은 원자력원 등과의 분쟁에서 선봉에 섰던 사람들이었다. 인사위원장 경응호 중령이 주관한 인사위원회는 명단을 중심으로 문제의 연구관들을 인사위원회에 불러 연구소 내 분쟁에 대해 해명할 기회를 주었다. 다음 조치로 오원선 원장은 기용숙 위원의 의견을 수용, 원자력연구소 감독관 이동집 해병대 중령에게 연구소장으로 하여금 13명의 사표처리를 상신하도록 지시했다.
  
 
“상황 파악을 위해 일주일간의 말미를 달라”고 한 이동집 감독관은 일주일 후 오 원장을 찾아 “지명된 13명의 연구관들은 국비로 해외 교육훈련을 받은 원자력계의 유능한 인재들”이라며 “이들을 모두 내보내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일 뿐만 아니라 원자력 사업 추진에도 지장이 있으므로 지금까지의 분쟁의 책임을 실질적으로 총지휘해 온 그들의 상관 김태봉, 윤세원 두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결국 연구관 상급 책임자를 문책하느냐, 하급 책임자를 문책하느냐의 문제는 상급 책임자인 윤세원, 김태봉 두 사람의 사표와 함께 최상업 소장의 사표도 받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오 원장은 이동집 감독관의 판단이 옳다고 믿었다. 오 원장은 주저하지 않고 김태봉과 윤세원의 사표수리 사실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정세웅(鄭世雄) 인사위원장(해병대 대령)에게 통보해 원자력연구소의 내분을 마무리했다.
  
  1961
6 11일 오원선 원자력원장은 취임하면서 수습책을 내놓았다. 원자력위원 정태하(鄭泰河)와 연구소장 최상업을 직책을 바꿔 발령했다. 신임 정태하 소장의 임명에는 이동집 감독관이 간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61 10월 사무총국의 명칭을 사무국으로 개칭하고 기감제를 폐지하고, 3부 연구실을 6개 연구실로 연구조직을 개편하는 등 연구소 직제도 개편했다. 감투가 많아져야 싸움도 줄어들고 연구관 관리도 용이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광물선광 전문가 崔亨燮의 연구소장 부임  

최형섭은 1961 2월 민주당 정부하에서 원자력연구소 1급 연구관으로 발령받았으나, 파이클럽으로 몰려 내분상태였던 연구소에 바로 출근할 수 없었고, 전 직장인 새나라자동차 업무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이유로 취임을 연기했다. 새나라자동차의 소형 자동차 시제품을 완성하기 위해 일본 후지중공업에 갔던 그는 그곳에서 시제품을 만들어 선적을 기다리다 5·16 군사쿠데타를 맞이했다. 실제로 최영섭이 귀국한 것은 이틀 후인 5 18일이었다.
  
 
최형섭은 당시 광물선광법(鑛物選鑛法)의 권위자였다. 그는 6·25전쟁 때 공군으로 복무하면서 박주성 장군을 알게 됐고, 박 장군은 훗날 장한제련소장으로 부임하면서 그를 스카우트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자, 최형섭은 가장 우선순위에 둔 ‘중석 제련 증산 계획’을 상공부 장관인 정래혁(丁來赫) 장군에게 보고했고, 최형섭을 눈여겨본 정 장군은 그를 상공부 광무국장으로 차출했다.
  
 
당시 5·16 군사쿠데타 시절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요청은 직급이나 소속을 떠나 어떤 곳이든 어떤 일이든 협조해야 했다. 최형섭은 이미 원자력연구소 1급 연구관으로 발령받은 상태였다. 귀국한 최형섭은 최초 발령받은 원자력연구소에 부임하지 못하고 상공부 광무국장으로 일했다. 1급 발령을 받은 상태에서 2(국장)으로 일한 셈이었다.
  
 
그 무렵, 박동길(朴東吉) 상임 원자력위원은 ‘혁명정부에서 임명한 원자력원장을 내쫓고 원장을 하겠다는 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1962 4월 정태하 소장의 사표를 받는다. 1962 4 11일 상공부에서 호평을 받은 최형섭을 정태하 후임 연구소장에 임명했다. 정 소장의 사표를 받은 오원선 원장이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찾아가 삼고초려(三顧草廬)한 결과였다. 연구소 내분에 윤세원, 김태봉 두 사람이 책임을 지고 사퇴한 후여서 연구관들의 불만은 수그러들었다.
  
 
최형섭은 1년 정도 연구소장을 하다 IAEA 연구비를 얻어 1963 3월 캐나다로 떠났다. 원강(原鋼)에서 지르코늄을 추출하는 연구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정낙은(鄭樂殷)의 천거로 후임자는 조용달(趙容達) 당시 삼성물산 동경사무소장을 임명했으나, 연구소 내 잡음과 통솔력 부재로 1년 만에 물러났다. 1964 5월 최형섭이 캐나다에서 귀국하면서 다시 소장으로 부임했다.
  
 
원자력계 인사들은 최형섭을 한국 원자력계의 내분을 잠재우고 행정적 기틀을 세운 인물로 기억한다. 그는 1966 2월 초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소장으로 임명될 때까지 원자력연구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연구소를 원만하게 이끌었다. KIST 소장직에 있을 때 연구의 자율성과 연구 환경의 조성, 해외 인재 영입 등을 바탕으로 국내 과학기술 발전의 계기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한다.
  
 
그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처음 안 것은 1965 6월이었다. 이때 박 대통령이 존슨 미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기 직전, 정부의 연구소장들을 청와대로 불러 만찬을 했다. 그때 오원선 원자력원장이 최형섭을 박 대통령에게 소개했다. 박 대통령은 최형섭을 눈여겨본 다음, 며칠 후 그를 청와대로 불렀다. 박 대통령은 경제기획원 장관, 상공부 장관 등 주요 경제 관료들이 배석한 자리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 진흥에 관해 최 박사의 의견을 말해달라”고 주문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경제개발계획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할 KIST의 초대소장 자리에 최형섭을 미리 점찍어 놓았던 것이다

 
  
방사선 의학연구소 설립

▲등록문화재가 된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의 가동 당시 모습.

 

  원자력원의 이전은 방사선의학연구소의 설립과 관련 있다. 원자력원은 출범 당시 옛 중앙청 옆 체신부 청사 일부를 빌려 사용하다 1962년 남산으로 이전했다가 얼마 후 다시 중구 태평로 조선일보사 미술관 아래의 신청사로 옮겼다. 당시 원자력원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회에 소속해 있었다. 이 위원회 소속 정세웅 위원은 오 원장의 업무보고를 받고 “연구용 원자로 건설을 위시해 모든 실행하는 업무에 실적이 없다”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동집 감사관의 회고다.
  
 
“오원선 원장이 정 위원 만남을 꺼려 대신 보고하라며 보낸 적이 많았습니다. 원래 정 위원은 해병대에서 함께 근무한 사이라 별 어려움 없이 가서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오 원장과 저는 늘 실용성 있는 원자력 사업을 해봐야겠다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생각해 낸 것이 방사선의학연구소의 신설 계획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이미 원자력 의학 관련 연구소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었고, 의학박사였던 오원선 원장도 흔쾌히 동의했다. 더군다나 원자력원은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가 1959 7 14일 기공식을 한 이래 건설 예정날짜가 두세 차례 연기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면목이 서지 않았던 시기였다.
  
 
방사선의학연구소 설립 소식이 알려지자 원자력연구소 측은 반발했다. 연구용 원자로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연구를 개시하기도 전에 방사선의학연구소를 설치하면 그만큼 정부 예산 배정에서 기존 연구소가 불리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1962 3월 오원선 원장은 그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법과 예산 조치를 받을 때까지 원자력연구소 내에 ‘방사선의학연구실’을 신설했다. 그러나 방사선의학연구실은 기존 건물로는 연구 활동을 해나갈 수 없었다. 방사선의학연구소를 설립하려면 방사선 및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진단과 치료를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원자력병원을 동시에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남산청사로는 이러한 사업을 도저히 추진할 수 없었고, 불가피하게 청사 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62년 3월 26일 열출력 100kw 시험에 성공한 트리가 마크Ⅱ 원자로 위에서 오원선 원자력원장(왼쪽)이 이관 원자로공학연구실장(오른쪽) 등과 ‘제3의 불’ 성공을 축하하고 있다.

 

  원자력원은 부지 물색에 들어갔다. 당시 《조선일보》 본사(현 코리아나 호텔 뒤편 구관 건물) 뒤편 정동 2번지에는 공보부 산하 국제방송국이 사용하는 낡은 건물이 있었다. 군사쿠데타 이후 혁명정부는 그곳에 군 방송실을 두고 있었다. 오원선 원장은 당시 오재경(吳在璟) 공보부 장관을 찾아가 “현재 남산의 KBS 건물 바로 옆의 원자력원 건물과 정동 국제방송국 건물 자리를 바꾸자”고 교섭했다. 이동집 당시 감사관은 “정동의 국제방송국은 낡은 건물이라 새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명분도 될 뿐 아니라, 문공부 장관의 협력을 얻으면 그만큼 예산교섭을 하기 쉽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제의했던 것”이라고 했다. 오 원장의 제의에 오 장관은 흔쾌히 찬성했다.
  
 
예산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정세웅 최고위원과 김학열(金鶴烈) 당시 경제기획원 기획실장(경제기획원 장관 역임)이 협력해 무난히 딸 수 있었다. 그 결과 ‘방사선의학연구실’은 ‘방사선의학연구소’로 승격, 부속병원인 원자력병원을 설치하는 직제를 법제처와 총무처에서 승인받았다.


  
  삽은 이승만이 뜨고, 테이프는 박정희가 끊고

▲1962년 11월 17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오원선 원장, 이후락 청와대 공보실장, 최형섭 소장, 박정희 의장, 이창건 박사(한 사람 건너) 등과 원자로를 시찰하고 있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 원자력계 초미의 관심사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원자력에 대한 인식이었다. 대부분의 원자력 관계자들은 “박정희는 원자력 산업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시 원자력계 인사들은 건설 중인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에 대한 부정적 시각 때문에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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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듬해인 1960, 미국 아머연구재단(Armour Research Foundation)의 라이펠(Reiffel) 연구원은 1960 10 27일자로 발표한 〈한국 원자력 연구에 대한 보고서(Report on Atomic Research in Korea)〉에서 한국의 원자력 연구상황은 전반적으로 낙후했다는 요지의 내용을 주장했다. 한국 언론은 1960 12 31일자 조간에서 ‘한국이 도입하기로 한 연구용 원자로는 구식의 폐로(廢爐)였다’고 보도했다. 게다가 기초과학 분야의 전문가가 빈약하고, 한국이 원자로와 건물을 건설해 운영하려면 5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까지 내놨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원자력연구소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흘러나왔다. 그러한 상황에서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 이제 싹트고 있는 신생국의 원자력 연구를 어떻게 할지에 자연스레 관심이 쏠렸던 것이다.
  
 
이때 혁명정부는 원자력원 이민하(李敏厦) 기획조사과장에게 원자력 산업의 개관을 이해하기 위해 ‘원자력 계획서’를 작성해 제출하라고 했다. 이민하 전 동양고속 회장은 박종규(朴鐘圭) 전 청와대 경호실장의 처남으로, 1980년대 초 미국 노스롭사의 F-20 전투기 도입을 추진하기도 했다.

/트리가 마크Ⅱ 원자로 가동 기념우표.

 

  이민하 과장은 회고에서 “상공부와 한전, 석탄공사 등 관련 기관의 협조로 각종 통계자료를 참고해 계획을 더욱 발전시켰다”면서 “그 결과 1962년 경제기획원이 작성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장기 원자력 발전소 도입계획’을 포함시켰다”고 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 과장이 작성한 〈원자력 발전 사업 장기계획〉을 살펴보았다. 보고서에는 원자력 발전소 부지와 예산 등 원자력 정책에 대한 대강이 담겨 있었다. 박 의장은 이 과장을 불러 직접 설명을 들은 후, 계획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박정희 의장도 원자력 발전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 확인됐고, 군사쿠데타 이후에도 원자력 산업은 흔들리지 않고 진행될 수 있었다.
  
 
원자력 산업에 대한 박정희 의장의 관심은 트리가 마크Ⅱ 준공식 때 확인할 수 있었다. 원자력연구소는 5·16 이듬해인 1962년 초 원자로 설치 공사를 완료하고, 그해 3 19 1050분 핵연료를 장전했다. 이어 오후 452분 핵분열에 들어감으로써 한국은 마침내 원자력 시대를 맞이했다. 트리가 마크Ⅱ는 3 23 100kw 정격출력에 도달했다. 원자력연구소는 정상작동을 확인하자 3 30일 트리가 마크Ⅱ 준공식을 가졌다.
  
 
준공식은 식민지배와 전쟁의 고통을 겪은 대한민국에 너무나도 뜻깊은 행사였다. 정부는 원자로 준공을 기념해 기념우표까지 발행했다. 행사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비롯해 수많은 인사가 참석했다. 트리가 마크Ⅱ는 1969년부터 출력을 250kw로 올려 가동했다. 이 실험용 원자로는 원자력 관련자들을 위한 교육, 중성자 빔을 이용한 물성 연구, 방사성 동위원소 생산 등 다양한 분야로 활용됐다. 그러나 트리가 마크Ⅱ의 출력이 너무 작다는 것이 문제가 돼 가동 3년 만인 1969년부터 새로운 연구용 원자로 도입을 추진하게 된다.


  
예정工期보다 7배나 더 걸린 이유

트리가 마크Ⅱ 원자로는 준공하기까지 커다란 우여곡절을 겪었다. 5·16 직후에도 원자로 탱크 용접 부위의 균열로 인해 원자로 설치 공사는 중단돼 있었고, 군사정부도 오원선 원자력원장을 중심으로 내분을 신속하게 수습하고 원자로를 신속히 완성해야 했다. 1961 6 25일 부임한 정태하 소장은 미국에서 오랜 기간 유학하고 조선전업에서 3개 화력발전소를 건설했던 인물이었다. 군부세력은, 원자력원장에는 오원선 대령을 임명했지만, 연구소장에는 영어도 유창하고 미국과 인적 네트워크가 강한 인물을 임명해 일을 신속하게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정태하 소장이 취임했을 때, 설계자, 원자력연구소, 시공업자 사이의 여러 가지 문제로 공사는 반년 넘게 중단상태였다. 원자로 설치는 제너럴 어토믹사(General Atomic)의 하청사인 홈스나버(Holmes Narver)가 담당했다. 고작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중앙산업이 담당한 토건업무였다. 더구나 중앙산업은 자금난으로 공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정 소장은 부임하자마자 원자로 탱크 용접 부위 균열 문제부터 수습에 나선다. 제너럴 어토믹사의 프레드릭 호프먼 사장과 직접 담판한다. 마침 이탈리아 국립원자력위원회가 도입한 한국과 동일기종의 연구용 원자로의 내벽 에폭시 도장(塗裝)이 방사선 조사로 손상돼 원자로 냉각수가 누설됐다는 보고를 받자, 이를 제너럴 어토믹사에 보완대책을 요구해 결국 알루미늄 라이너를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1961 8 29일 제너럴 어토믹은 약속대로 알루미늄 라이너를 제작해 보내왔고, 원자로 공사는 재개된다. 당시 우리나라는 알루미늄 용접기술이 없어 2만 달러를 주고 미국에서 용접기사를 불러와야 했을 정도였다.
  
 
정태하 소장의 능숙하고 신속한 대처로 원자로 탱크의 균열을 신속히 복구했다. 그러나 제너럴 어토믹은 원자로 계통만 공급하기로 돼 있었고, 2차 계통인 배관 계통은 우리가 자력으로 설계와 시공을 끝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연구소 내분으로 그동안 원자로 공사의 주축을 담당했던 윤세원, 김태봉 핵심 부장 인력들이 해임돼 그 공백이 컸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당초 설계에는 원자로 건물 내부의 열교환기만 포함돼 있었고, 외부 냉각타워가 빠져 있던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외부 냉각타워는 원자로에서 빠져나온 뜨거운 냉각수를 전동팬으로 강제 냉각해 열을 대기로 방출하는 공랭식 냉각장치다. 이관(李寬) 연구관과 장근수(張根秀) 연구관의 주도로 냉각타워를 설계하고 자체 제작도록 했다.
  
 
그해 10월 원자로 건물 외부에 설치하고 있던 냉각타워 공사가 완료돼 냉각계 시험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이때 원자로는 제너럴 어토믹사와 공급계약에 의해 도입한 것이라 우리 측에 설계도면을 넘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장지영(張志瑛) 연구관 등은 미국 측 기술진이 퇴근한 후 원자로 부품 하나하나와 설치절차 및 연결상태 등을 일일이 스케치했다고 한다. 원자로실 크레인도 이병호(李炳昊) 연구관이 최초설계를 보완해 다시 제작했다. 두 달간의 숨가쁜 사투가 이어졌다. 원자로 설치 준비가 비로소 끝난 것이다.
  
  1962
1 18, 제너럴 어토믹사의 원자로 엔지니어인 존 배치(John Batch)가 원자로 최종 조립을 위해 방한했다. 존 배치는 1961 9월에도 원자로 조립을 위해 왔으나, 우리 측 담당 부분이 너무 미흡하다며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연구소 연구관들은 존 배치를 도와 송요택(宋堯澤), 이병호, 이관, 장근수, 장지영 연구관 등이 기계설치에 참여했고, 운전제어실의 설치와 계측제어장치의 실험은 김종련(金鍾鍊) 연구관이 참여했다. 정태하 소장과 연구관들은 매일 자정 무렵까지 야근을 하고 철야도 불사했다. 존 배치는 2개월여 동안 한국에 머물며 그해 3 18일 원자로 설치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5개월의 공기(工期)로 계획한 원자로 건설공사를 내분과 사고 등으로 7배의 시간이 더 걸려 장장 28개월 만에 완료한 것이다.  


  
‘원자력 동기생’ 중국과 일본의 약진

▲중국 최초의 핵실험을 참관한 뒤 저우언라이에게 전화로 성공을 보고하는 부총참모장 장아이핑 상장.

 

  1964 10 16, 신장자치구(新疆自治區)의 고비사막에서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아시아에서 터진 세 번째 핵무기이자 아시아인들이 보유한 첫 원자탄이며 또한 유색 인종의 첫 원자탄이었다. 대륙의 수억 중국인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소형화에도 실패해 거대탑에서 떨어뜨린 초보적 원폭에 불과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중국은 보란 듯이 1967년 수소탄 실험에 성공했다.
  
  6
·25전쟁에서 미국의 핵무기를 우려했던 중국은 자연스레 핵 연구에 박차를 가했고, 소련은 중국과 이런저런 조약을 맺어 핵의 평화적 연구와 무기연구에서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쇼프가 권력을 잡자 상황이 바뀌었다. 소련은 1959년 연구용 샘플로 제공하기로 했던 원자탄을 주지 않고 핵 관련 과학자들을 전부 중국에서 철수시켰다. 중국은 소련이 핵연구 협력을 파기한 시간을 기념해 ‘596계획’이라고 부른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중국 군대 10대 원수의 한 사람인 녜룽전(聶榮臻)이 총지휘자로 나섰고 과학자들을 총동원했다.
  
 
중국은 원전 르네상스를 구가 중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1991년 원전 가동을 개시한 중국은 현재 총 23기를 가동 중이며, 26기를 건설 중이다. 중국 국가에너지청(CNEA)은 원자력 발전에 관한 ‘13 5개년 개발 계획(2016~2020)’의 거시적 윤곽을 발표하고, 장기적으로 100기 이상의 원자로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원자력 연구에 착수했던 원자력 선진국이다. 주요 선진국이 원자력 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일본 육군은 1939년 이화학연구소에 원자력 연구를 의뢰, 원자핵실험실을 운영했었다. 태평양전쟁 와중에서 일본의 원자력 연구는 진척을 보지 못했고 패망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원자력 연구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군정이 종식되고 독립국가가 되면서 비로소 시작됐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1950년대 후반부터 일본 원자력법 제정을 주도하는 등 일본 원자력 산업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최전선에서 일본 원자력 산업을 이끈 인물은 동경대 법학과 출신으로 태평양전쟁에 해군 대위로 참전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의원이었다. 1959년 과학기술청 장관에 취임한 그는 본격적으로 일본 원자력 산업의 토대를 구축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원자력의 대부(代父)라면, 나카소네는 일본 원자력 산업의 대부다.
  
 
나카소네는 1954년 일본 정부예산 수정안에 27000만 엔의 원자력 연구 관련 항목을 끼워넣어 일본 원자력계가 부활할 계기를 마련했다. 이듬해 나카소네는 원자력기본법 제정을 주도했다. ‘원자력 연구개발과 이용은 평화적인 목적으로만 한다’는 약속 아래 국제사회의 우려를 불식해 가며 법의 국회 통과를 관철했다.
  
 
일본은 1959년 이미 중수로형 연구용 원자로를 자력으로 건립해 당당한 원자력 자립국 대열에 올랐다. 이어 일본 정부는 원자력국을 과학기술청 창설로 확대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과학기술청은 원자력연구소 운영과 함께 우주개발 연구를 맡아 현재 H-2A 우주발사체를 제작해 자국의 첩보위성을 하늘로 쏘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일본은 1973년 미일 원자력협정을 개정해 연간 335톤의 농축 우라늄을 미국에서 수입하게 됐고, 일본이 갖고 있는 플루토늄을 제3국으로 이전해도 좋다는 동의까지 받았다. 이 덕분에 일본은 영국과 프랑스로 위탁 재처리도 가능해졌다. 일본은 1977년 마침내 최초의 상업용 원전인 도카이무라(東海村)에 연구용 재처리 시설을 짓는 데 성공한다. 원폭 두 발을 맞고 패망한 전범국(戰犯國) 일본이 원자력 대국으로 성장한 것이다.
  
  1959
7월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의 첫 삽을 뜬 한국은 출발선은 중국, 일본과 같았으나, 원자력연구소 내분에 휩싸이면서 동력을 상실해 레이스에서 뒤처지고 말았다. 원자력계의 원로 K씨는 “오늘날의 자위적 핵무장론을 바라보면서, 당시 핵 레짐(Nuclear Regime)이 느슨했던 시기에 중국처럼 전력투구했다면 5년 안에 충분히 핵을 보유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그렇다면 지금 북핵을 놓고 국민 전체가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골머리를 않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초창기 원자력 관련 기관의 내분 원인은 사람을 잘못 임명해서 빚어진 일”이라며 “현재도 원자력 주무부서인 미래과학부 수뇌부 인사들은 IT만 챙기는 원자력 문외한들이 대부분이고, 거대과학국 우주원자력정책관 산하 원자력진흥정책과 등의 실무부서도 비전문가들이 앉아 원자력 행정을 주무르고 있다”고 했다.

오동룡 기자   감수 신재인 전 국가핵융합연구소장

 

■핵개발 잠재적 능력

2015.04.23 韓美 합의땐 우라늄 20% 미만 低농축 가능

 

한·미 양국은 22일 원자력협정 개정을 통해 핵무기가 아닌 원자력 발전의 연료로 사용되는 우라늄 저농축(20% 미만)의 '가능성'을 열어놨다.

 

외교부는 "우라늄 저농축 추진에 대한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게 됐다"며 "미국산 우라늄을 20% 미만으로 저농축할 때는 한·미 고위급 위원회를 통해 일정한 절차와 기준에 따라 추진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한국은 기존 한·미 원자력협정 때문에 자체적으로는 우라늄 농축을 하지 못하고 미국 등 외국에서 원전 연료를 수입해왔다. 원전 연료를 자체 생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로 한국은 세계 원전 연료 시장이 요동칠 경우 원전에 사용할 연료 부족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왔다.

 

외교부 관계자는 "미국과 합의를 전제로 미래에 20% 미만 우라늄 저농축을 할 수 있는 경로와 절차를 마련함으로써 원전 연료 공급에 문제가 생길 때 대처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천연 우라늄은 그 자체로는 원자력발전이나 핵무기 제조에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원심 분리기 등을 통해 농축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통상 농축 우라늄은 우라늄235 (U235)의 비중이 20% 이상이면 고농축 우라늄, 20% 미만이면 저농축 우라늄으로 분류한다. 원전 연료용은 U235 비율이 3~5%이고 이것이 90% 이상이면 핵무기에 사용할 수 있다. 한·미가 20% 미만 우라늄 농축의 길을 열어놨다는 것은 양국 협의가 이뤄지면 한국이 원자력 발전용 연료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이 우라늄 저농축을 할 수 있는 시기와 구체적 방법에 대해선 이번에 명시하지 않아 앞으로 논란이 예상된다. 제무성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우라늄 저농축 권한은 얻었지만 자유로운 농축 권한을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미진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개정에서는 '미국이 한국에 원전 연료의 안정적 공급을 보장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이와 함께 한·미는 원전 연료 시장의 상황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원전 연료의 비상 공급을 상호 지원하기로 했다.

조선일보 정우상 정치부 차장 

 

2015.05.19 한국의 핵무기 제조 잠재 능력은 세계 10위권으로 평가받아

"2년이면 핵폭탄 100개도 제조 가능"①

미국 외교가에서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국내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찰스 퍼거슨 미국과학자협회(FAS) 회장과 헨리 소콜스키 등 비확산 전문가와 관료, 의회 관계자 등 10여명이 지난 4월 워싱턴의 한 레스토랑에서 ‘한국이 어떻게 핵무기를 획득하고 배치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비공개로 회람했다고 한다. 이 보고서는 “한국은 비핵확산체제의 지지국가로 미국의 확장억지력을 제공받고 있지만 국가 안보가 중대한 위협에 직면하면 핵무장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며 한국이 월성 원자력발전소에 위치한 4개 가압중수로(PHWR)에서 준무기급 플루토늄을 추출해 5년 이내에 수십 개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고 한다.

 

실제 한국의 원자력 기술은 1940년대 미국이나 1960년대 중국보다 훨씬 뛰어나다. 현재 한국에서 가동 중인 24기의 원전에서 태우고 난 연료에는 플루토늄이 상당량 들어있다. 특히 4기의 월성 중수로 부지 내에 30년 넘게 쌓여 있는 연료에서 플루토늄을 빼내기만 하면 핵폭탄의 원료를 확보할 수 있다. 그간 한국의 원전에 쌓인 사용후 핵연료는 1만t에 육박한다. 이 중 플루토늄이 수십t으로 핵폭탄 한 발 제작에 플루토늄 5㎏ 정도가 필요하니 핵폭탄 대량생산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계산이다. 물론 한국 내의 모든 원전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어 국제사회 모르게 한국이 플루토늄 핵폭탄을 제조하기는 현재로선 불가능하지만, 족쇄가 풀릴 경우 한국은 언제라도 핵폭탄 제조국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월성 원자력발전소 전경. 찰스 퍼거슨 미국과학자협회 회장 등이 열람한 ‘한국이 어떻게 핵무기를 획득하고 배치할 수 있는가’란 보고서는 한국이 월성 원자력발전소에 위치한 4개 가압중수로에서 준무기급 플루토늄을 추출해 5년 내에 수십 개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전망했다./연합

 

한국의 핵무기 제조 잠재 능력은 그간 원자력을 활용해온 수준과 비례한다. 현재 한국의 원자력은 설비용량 세계 5위, 운전기술 세계 1위 수준이다. 이에 따른 핵폭탄 제조 잠재력은 세계 10위권으로 평가받는다. 핵폭탄 제조 잠재력은 핵개발을 위한 기술력과 경제력을 종합한 것인데, 한국은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중국에 버금가고, 핵무기를 보유한 이스라엘·인도·파키스탄보다 이 잠재력이 훨씬 높다.

 

한국은 핵무기는 없으나 레이저 우라늄 농축 기술력과 플루토늄 추출 기술, 원심분리 기술을 개발해 왔다. 특히 레이저 우라늄 농축기술은 세계가 주목할 만한 경지에 이르고 있어 플루토늄이 없이도 단기간에 핵무장이 가능하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능력은 거대한 원자력 산업을 보육기로 삼고 있는 셈이다.

 

현재 우리는 강력화약 TNT 고폭(高爆) 실험을 통하여 핵폭발에 관한 공학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핵실험 없이 수퍼컴퓨터만으로도 핵탄두 설계가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더욱이 한국의 기술력으로는 핵폭탄 제조 과정의 핵심인 고농축이나 재처리 시설도 과거처럼 수입할 필요 없이 자체 제작이 가능하다. 찰스 퍼거슨 미 과학자협회장 등이 열람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핵무기의 삼총사로 볼 수 있는 핵물질·핵탄두·운반체를 확보했거나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국은 대공 미사일과 순항 미사일, 공군 주력 전투기 등 핵폭탄을 운반하는 최첨단 무기체계도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감안하면 한국의 핵무기 제조는 안팎의 족쇄만 풀리면 당장 현실화가 가능한 시나리오다.

<②편에계속>

 

“2년이면 핵폭탄 100개도 제조 가능"②

<①편에서 계속>

특정 국가가 핵개발을 결심한 이후 핵폭탄을 갖게 되기까지의 기간은 나라마다 편차가 있었다. 미국 3년7개월, 소련 4년, 영국 5년10개월, 프랑스 5년3개월이었다.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원자로를 가동하고 나서 핵실험까지는 미국 10개월, 소련 14개월, 영국 27개월, 프랑스 49개월, 이스라엘 40개월, 중국 26개월이 걸렸다. 한국의 잠재력을 감안할 때 한국 정부가 핵무기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나서 얼마 후 실제 핵폭탄을 보유할 수 있을까. 필자의 판단으로는 2년 내면 충분하다.

 

핵 전문가인 토머스 코크란 등이 지난해 10월 한 보고서에서 “한국은 4개 가압중수로에서 매년 준무기급 플루토늄 2500㎏을 생산할 수 있다”고 바라봤고, 찰스 퍼거슨 회장 등이 열람한 보고서는 ‘한국이 월성 원자력발전소에 위치한 4개 가압중수로에서 준무기급 플루토늄을 추출해 5년 이내에 수십 개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럼 한국은 핵무기를 만들기로 결심하면 현 상황에서 몇 개나 만들 수 있을까. 필자의 계산으로는 많게는 100개도 가능하다. 한국의 핵개발은 기술과 경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이다. 국가가 결심하고 정치인들이 방패만 되어준다면 핵개발은 연탄 찍기처럼 간단할 수도 있다.

 

한 국가가 핵무기를 개발하면 필연적으로 인접국이나 경쟁국도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밖에는 이렇다 할 대응 수단이 없다는 전통적 특성이 있다. 미국이 개발하니 소련이, 소련이 개발하니 중국이, 영국이 개발하니 프랑스가, 인도가 개발하니 파키스탄도 핵무기를 개발했다. 이스라엘이 개발하니 중동이 요동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한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데도 사문화(死文化)된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 연연하고 있다. 북한은 이미 세 차례 핵실험을 통해 플루토늄과 우라늄탄을 모두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3차 핵실험은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의 폭발력을 넘어서는 것으로 관측되어 국제사회에서 비공식적으로나마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핵무기와 중장거리 미사일을 모두 보유함으로써 북한의 핵무장은 우리에게 절박한 위협이 되고 있다.

 

특히 찰스 퍼거슨 회장 등이 열람한 보고서가 지적했듯이 한국이 핵무기를 결심할 계기로 가장 크게 주목받는 것은 일본의 핵무장이다. 일본은 공식적으로는 핵무장을 포기하고 있으며, 현실적으로도 미국의 반대와 인접국에 미칠 연쇄효과 때문에 핵무장을 할 가능성이 현재로선 낮아 보인다. 하지만 이미 65t 이상의 플루토늄을 보관 중이고, 1977년부터 도카이 재처리 시설을 가동 중이며, 로카쇼무라에는 대규모 재처리와 농축시설을 건설했다. 특히 로카쇼무라의 재처리 공장은 연간 8t의 플루토늄 추출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2000개 이상의 핵탄두 제작이 가능하다.

 

한국은 핵비확산조약에 가입해 정부가 핵무기 개발이나 보유를 국가정책으로 채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도 국방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반대를 무시하고 핵무장의 길로 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간이나 비정부조직, 국방연구기관 등에서 핵무장의 필요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여론을 형성할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와 적의 핵무장에 대해 무심했고, 낙관했으며, 무책임했다.

 

핵무기는 첨단기술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제력이나 기술력이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개발할 수 있다. 실제로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더라도, 너희가 만들면 우리도 만들 수 있음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일본과 북한의 핵개발 의지를 억제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중국에 대해서는 북한의 핵위협이 증가할수록 한국도 핵무장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 또는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는 북한 지도부에 대해 지금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한국은 핵무기에 관해서 공식적으로는 부인하면서도 국내적으론 핵개발 요구가 강력하다는 상황을 국제사회에 인식시켜 주는 것이 한반도 비핵화 협상이나 대중·대일·대미 핵 외교에서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2016.01.21 金泳三 정부가 선택한 자위적 핵개발 계획의 實相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본부 건물.

 

2004년 노무현(盧武鉉) 정부 시절,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한국의 핵개발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사찰을 실시하는 유례없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북한은 2003년 1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두 번째로 탈퇴했고, 핵실험을 눈앞에 두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IAEA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한국 핵 과학자들의 우라늄 농축실험(2000년), 플루토늄 미량(微量) 추출(1982년) 사실이 미국 측의 강력한 자료제출 요구에 의해 드러났고, 2004년 9월 13일 열린 IAEA 정기이사회는 한국의 ‘핵개발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은 우라늄 분리실험과 관련, 한국 정부가 1980년대 IAEA에 공개하지 않은 시설 3곳에서 150kg의 금속우라늄을 생산한 뒤 이 중 ‘소량’을, 레이저를 이용한 농축에 사용했다고 밝힌 뒤 ‘심각한 우려(serious concern)’를 표명했다. 또 한국의 농축실험에 정통한 한 외교관은 2000년 레이저 농축 당시 약 2.5kg의 금속우라늄이 사용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오명(吳明) 당시 과학기술부 장관은 핵실험 의혹 등과 관련, “원자력연구소가 지난 2000년 1~2월 한 차례 우라늄 분리실험을 한 것과 지난 1982년 화학적 실험 과정에서 플루토늄을 한 차례 극미량 추출한 것 이외에 추가로 의혹을 살 만한 핵 관련 실험은 없다”고 해명했다.
  
  IAEA는 3차에 걸쳐 사찰단을 파견하는 등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다. IAEA는 2004년 8월 31일~9월 4일, 9월 19~26일 등 두 차례에 걸쳐 조사단을 보내 대덕 한국원자력연구소와 공릉동 연구센터 등 과거 우라늄 분리와 플루토늄 추출실험 등을 한 현장을 방문해 핵물질 실험에 참가했던 과학자들을 인터뷰하고 이들이 추출·분리한 플루토늄과 우라늄 일부를 채취해 갔다. IAEA는 그해 11월 2일부터 7일까지 3차 조사까지 실시했다.  


  日本, ‘YS 정부 때 시작’ IAEA에 문제 제기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

 

  미국이 실험실 차원의 핵기술을 연구한 동맹국 한국을 호되게 몰아붙이자, 한국의 핵 과학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한국은 2004년 2월 핵안전협정 추가의정서에 비준했다. 의정서는 ‘연구시설’을 새로 신고시설에 포함하고, 핵물질을 이용한 연구에 대해 상세하게 IAEA에 보고토록 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핵 과학자들은 “의정서 비준 이전의 연구는 신고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1980~1990년대의 실험용 핵물질 추출은 면죄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자력연구소장을 지낸 신재인(申載仁) 초대 국가핵융합연구소장은 “연구용 원자로는 사찰대상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우라늄 분리실험을 한 것은 협정위반이 아니다”라고 했다.
  
  2004년 11월 25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IAEA 이사회는 한국 원자력 역사에서 가장 곤혹스런 날로 기록됐다. 이날은 ‘IAEA의 단골 문제아’인 이란·북한과 함께 세계 5위의 원자력 선진국인 한국이 도마 위에 오른 날이다. 의제는 ‘한국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해야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이사회의 결론은 ‘안보리에 회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IAEA는 “관련된 핵물질이 소량이고, 실험이 계속되는 징후가 없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한국은 ‘핵(核) 불량국가’로 취급받는 것은 면했지만, 원자력 분야에서 쌓아 온 국제적인 신뢰도에 상당한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 굴욕의 발단이 된 것은 다 합쳐도 단 1g이 안 되는 플루토늄과 우라늄이었다.
  
  한국의 핵물질 실험 문제가 최초로 불거진 것은 2004년 9월이었다. 당시 과학기술부 조청원(趙靑遠) 원자력국장이 “국내 소수의 과학자가 지난 2000년 1~2월 자체적으로 극소량의 우라늄 분리실험이 포함된 과학실험을 실시했다”고 발표했다.
  
  실험 성격에 대해 조 국장은 “원자력연구원의 과학자들이 핵연료 국산화 차원에서 연구하다가 순수한 호기심에서 우라늄 235를 분리해 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분리된 우라늄은 단 0.2g.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최소량인 15~20kg의 1만분의 1에 불과한 양이었다.
  
  조 국장의 발표 당시 IAEA는 사찰단을 원자력연구원으로 보내 확인에 나선 상태였다. 한국과 IAEA는 7개월 전 ‘순수 연구 차원에서 이뤄진 과거의 핵물질 실험이라도 모두 신고한다’는 핵안전협정 추가의정서에 합의했고, 그에 따라 과거 사례를 점검하던 정부가 4년 전 미처 보고되지 않은 실험을 알게 된 것이다.
  
  이어 전두환(全斗煥) 정부 시절 한국의 연구자들이 플루토늄을 추출한 사실이 외신에 의해 추가로 알려지면서 한국의 핵물질 실험은 국제사회에서 큰 파장을 몰고 왔다. 1982년 서울 노원구 공릉동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 연구용 원자로에서 플루토늄 추출실험이 실시됐고, mg(밀리그램·1000분의 1g) 단위의 플루토늄이 추출된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추출 당시 연구에 참여했던 장인순(張仁順) 전 원자력연구소장은 “순수한 과학연구 차원에서 단 86mg(0.086g)을 추출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 실험 역시 보고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두 실험 사이에는 무려 18년의 시차가 있었고, 추출량으로 볼 때 핵무기 개발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의 언론들은 핵개발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특히 일본 언론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사히신문》과 《요미우리신문》은 “한국에서 핵물질 실험을 했다는 것 자체가 핵확산을 방지하려는 국제사회에 깊은 충격을 던졌다”고 보도했다.
  
  특히 《요미우리신문》은 일본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한국이 지난 1990년대에도 우라늄 농축과 관련된 실험을 했다”고 했고,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2000년의 우라늄 농축실험이 드러난 것은 최소한 10년 전 김영삼 정부 때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한국 정부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한 것인지 여부를 조사해야 한다며 안건을 IAEA에 상정했던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 재처리시설 확보에 총력

▲1982년 플루토늄 추출실험을 했던 서울 노원구 공릉동 옛 원자력연구소 내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Ⅲ. 트리가Ⅲ는 해체돼 없어졌다.

 

  일본이 이렇게 나온 데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핵무장을 추진했던 역사가 영향을 미쳤다. 박 대통령은 1970년대 미국 정부가 ‘닉슨 독트린(아시아에서의 미군 역할 축소)’에 따라 1971년 주한미군 7사단의 철수를 일방적으로 추진하자 핵무기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 과정에서 원자력연구소 등은 연구용 원자로와 재처리시설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한국은 프랑스와 비밀리에 핵 재처리 시설과 기술공급 계약까지 체결했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으로 프랑스 재처리 시설 도입 계획은 무산됐다.
  
  1979년 6월, 카터는 한국을 방문하면서 1978년 철수한 병력 3400명을 제외하고는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사실상 철회했다. 박 대통령은 “주한미군을 철수한다면 한국은 미사일을 비롯한 핵개발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압박카드를 카터 행정부에 전달한 결과였다.
  
  박 대통령은 미국의 압박 때문에 1976년 ‘핵개발 포기’ 의사를 통보했다. 미국 CIA 등이 공개한 문건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10·26 사태로 숨을 거둘 때까지도 핵무기 개발을 비밀리에 추진했으며, 미국은 계속해서 이런 움직임을 ‘감시’했었다.
  
  1979년 10월 박 대통령이 피살되자 한국의 원자력 연구는 강력한 후견인을 잃었다. 핵공단이 원자력연구소로 통합됐고, 에너지연구소로 명칭마저 바뀌었다(10년 만인 1991년 원자력연구소로 명칭 회복). 전두환 정권은 출범 초기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나마 남아 있던 싹을 형식적으로나마 잘라 버렸다. 핵개발 포기를 약속하는 의미에서 연구소의 이름에서 ‘원자력’이란 말을 떼어 버린 것이다. 1991년 노태우(盧泰愚)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요동치던 핵 문제는 수면 아래로 잠수하게 됐다.  


  金泳三 정부, 핵무기가 아니라 핵기술 개발 목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카터는 미군 철수를 압박카드로 썼고,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박 전 대통령은 핵개발 검토로 맞받았다.

 

  김영삼 정부는 북한이 1993년 3월 NPT를 탈퇴하자, 자위적 차원에서 핵기술 연구를 추진했다. 북한의 핵보유에 대비해 핵무기를 보유하지는 않더라도, 관련 기술을 ‘핵보유 직전 수준’까지 끌어올리자는 구상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핵무기 제조 능력은 물론이고 재처리 능력에도 함께 관심을 가졌다.
  
  한국원자력연구소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1993년 초부터 1994년 말까지 우라늄 농축 연구를 진행했고, 소량의 우라늄을 농축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라늄 농축에는 레이저를 이용해 추출하는 ‘아블리스(AVLIS)’ 방식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핵기술 개발에 참여했던 복수의 핵 과학자, 김영삼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된다. 이 비밀 핵기술 개발 프로젝트는 초기에 김영삼 정부의 고위층에 보고됐고, 정부의 암묵적 승인하에 진행됐다.
  
  레이저 농축법은 우라늄235 원자의 최외곽을 돌고 있는 전자(-)에 레이저를 쏘아 공명현상을 일으켜 이탈시킨 후, 양쪽에 (+)와 (-) 성질을 갖는 전기판을 설치해 우라늄235와 우라늄238을 분리하는 농축방법이다. 원심분리법, 기체확산법과 함께 대표적인 우라늄 농축방법으로, 미국 등 핵개발 선진국들이 사용하는 고난도 농축기술이다. 정확한 명칭은 증기레이저동위원소분리법(AVLIS, atomic vapour laser isotope separation). 원심분리법에 비해 성능이 뛰어나 고농도 우라늄을 농축할 수 있고, 작은 공간에서도 농축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핵기술 개발에 참여했던 핵공학자 A씨는 당시 농축했던 우라늄 양에 대해, “U-235가 스펙트럼을 통해 툭 튀어나온 것을 보고 성공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며 더 이상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1994년 12월 김시중(金始中) 장관 후임으로 과학기술처 장관에 취임한 정근모(鄭根謨) 박사는 이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실험장비와 실험자료의 전면 폐기, 실험실 폐쇄를 지시했다. 우라늄 분리 성공 사실을 알게 된 정 장관은 ‘한미원자력협정’을 들어 프로젝트를 전면 폐기했다. 이로써 김영삼 정부 시절 진행한 핵기술 개발 프로그램은 전면 폐기됐다.
  
  개발에 참여했던 핵공학자 B씨는 “정근모 장관은 ‘핵개발 근처에도 가지 않는 게 우리의 살길이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더라도, 우리는 미국의 핵우산에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면서 “전임 김시중 과기처 장관, 신재인 당시 원자력연구소장과 생각이 완전히 달랐다”고 말했다.
  
  김영삼 정부의 고위 관계자 C씨는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한 직후인 1993년 3월 원자력연구소 연구팀이 ‘실험실 차원에서 핵기술 개발을 하겠다’고 보고했다”면서 “‘과학자들의 판단이 그렇다면 그렇게 진행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C씨의 말이다.
  
  “과학자들은 ‘핵무기 개발에는 쉬운 페이스와 어려운 페이스가 있다’고 했죠. 국제적 규제를 벗어나, 어려운 페이스를 넘겨 놓으면 북한이 핵보유를 선언할 때 언제든지 핵무장에 나설 기술적 기반을 갖추게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당장 핵무기를 보유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한 것이 아니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준비하겠다는 얘기였죠.”
  
  —‘당시 과기처 장관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프로젝트에 관해 보고를 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는데요.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은 차후에 국가적으로 큰 부담이 된다고 판단해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정근모 장관이 그 프로젝트를 파기하기 위해 김영삼 대통령을 면담한 것이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나 싶어요.”
  
  —왜 위험스러운 핵기술 개발 프로젝트를 용인했나요.
  “북한이 NPT를 탈퇴하고 언제 핵을 보유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는 즉시 우리도 바로 핵무기 제조에 착수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죠. 미국과 우리의 관계, 중국과 우리의 관계가 언제 돌발적으로 변할지 몰라 준비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핵무기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수준을 100%라고 한다면 86% 혹은 87%까지 기술을 갖춰 놓자는 것이었죠. 그래서 프로젝트 이름이 ‘88 프로젝트’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핵폭탄 제조를 위한 핵기술 확보 차원에서 진행했습니다.”
  
  —레이저 추출법으로 소량의 우라늄을 농축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까.
  “사실 기술적인 부분은 모릅니다. 과학자들이 실험실 수준에서 ‘파일럿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가 볼 생각도 안 했죠. 정근모 박사가 완전 폐기를 지시할 때까지 연구를 계속한 것으로 압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연구는 핵무기 제조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순수하게 실험실 차원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폐기했습니다.”
  
  —프로젝트가 진행됐었다는 사실을 다음 정권인 김대중 정부는 몰랐습니까.
  “김대중 정부의 핵심 관계자에게 이 같은 프로젝트가 진행됐다는 사실을 알려줬습니다.”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국가를 위한 자위적인 대응이었습니다. 오해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재처리 능력은 어느 정도로 봅니까.
  “우리의 과학기술 수준으로 능력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李宗勳 한전 사장, 영국으로부터 재처리 제안받아

  김영삼 정부 시절, 원자력계의 숙원사업인 재처리 문제의 돌파구가 마련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차관급 이상 공직을 지낸 인사 130여 명이 1995년 4월 마포포럼을 창립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비서실장을 지낸 박관용(朴寬用) 전 국회의장은 회고록 《나는 영원한 의회인으로 기억되고 싶다》에서 재처리 사업의 시작을 이렇게 적었다.
  
  〈국록(國祿)을 먹었던 우리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궁리하고 있는데, 김시중 전 과학기술처 장관이 핵 재처리 문제를 꺼냈다. ‘북한은 NPT를 탈퇴한 후 핵개발에 나서고 있다. 반면 우리는 1992년 노태우 대통령의 한반도 비핵화선언으로 플루토늄·우라늄 재처리 등 평화적 목적의 핵개발까지 포기하고 말았다. 평화적 핵 주권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긴요한 국가적 과제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우리와 같은 민간단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김 전 장관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인데도 핵 재처리 권리를 갖게 된 데에는 일본 내 민간단체들이 여론을 환기시키고 미국과의 교섭에 앞장선 덕분’이라고 했다.〉
  
  마포포럼은 신재인 한국원자력연구소장을 초빙해 핵 재처리 문제에 대해 청취했다. 이종훈(李宗勳) 한국전력 사장을 불러 사업의 취지를 이야기했더니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고 한다. 이종훈 사장은 “재처리를 하지 못해 쌓여 가고 있는 핵연료들을 재처리하기만 해도 100억 달러 상당의 가치가 있다”고 했다. 한국전력은 플루토늄 재처리를 통해 원자력 기술을 한 단계 높이고, 폐연료봉에서 타지 않은 우라늄을 회수해 경제성을 높이는 데 관심이 있었다.
  
  이종훈 사장은 그의 자서전 《한국은 어떻게 원자력 강국이 되었나》에서 1995년 4월 26일 영국의 원전 연료회사인 BNFL(British Nuclear Fuels pic)의 사용후 재처리공장인 THORP(Thermal Oxide Reprocessing Plant) 준공식에 참석한 일화를 기록했다. 준공식 행사 이튿날, 이 사장은 존 메이저 영국 총리가 참석한 만찬에 초대됐고, 그곳에서 주한 영국대사를 지낸 라이트 외무부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와 재처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라이트 차관보는 한국도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해 목스 연료(MOX, 이산화 우라늄과 이산화 플루토늄의 혼합물을 주원료로 한 핵연료. 순수 플루토늄과 달리 혼합원료는 핵무기 전용 가능성이 없어 NPT 조약 위반이 아니다)로 만들어 사용하기를 권하며,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이 개정을 원하면, 영국이 미국을 설득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측면지원하겠다고 했다. 라이트 차관보는 나를 메이저 수상에게 소개하면서 한국의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문제와 관련, 영국정부가 지원해야 할 당위성을 설명했고, 수상은 매우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1995년 5월 25일 이종훈 사장은 한국전력을 내방한 해리스 영국대사와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문제를 더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해리스 대사는 “북한 흑연로에서 빼낸 사용후 핵연료의 처리 문제는 미국정부도 걱정거리일 것”이라며 “이를 해외로 반출해도 보관장소가 마땅치 않고 받아 줄 나라도 없으니 이를 재처리해 플루토늄과 U-235로 재생한 후 북한 경수로에서 태워 버리는 것이 상책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영국이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와 플루토늄을 이용한 목스 연료를 만들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통해 북한에 공급하면 북한도 연료비를 절감할 수 있고, 미국의 걱정도 덜게 될 것”이라며 “영국이 한국의 경수로에 시범적으로 목스 연료를 제공할 터이니 시험적으로 연소해 보라”고 했다.
  
  이종훈 사장은 해리스 대사에게 “현재 한미원자력협정은 플루토늄 연료의 사용을 금하고 있으니 한국이 앞장서 이 문제를 거론하면 국제사회가 한국의 의도를 핵무기 개발과 연계해 의심할 수도 있다”며 “영국이 먼저 미국을 설득해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할 수 있도록 정지작업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1996년 3월 이종훈 사장은 정근모 과기처장관·권영해 안기부장과 함께 저녁식사 자리에서 영국의 제의를 설명하고, 국내 경수로에 플루토늄이 들어가는 목스 연료를 도입해 사용하는 문제를 정부 차원에서 추진해 줄 것을 건의한다. 정 장관은 “이 문제는 한전이 독자적으로 처리하기엔 민감한 사항이니 마포포럼의 국가발전연구원(NDI)과 협조하도록 박관용 전 비서실장과 김시중 전 과기부장관 등과 협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핵 재처리 로비 담당한 반스 변호사

▲1995년 3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로 원전 휘호석 제막식 참석차 원자력연구소를 방문해 신재인 소장(왼쪽)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오른쪽으로부터 이종훈 한전 사장, 김 대통령, 정근모 과학기술처 장관, 김화섭 단장.

 

  마포포럼은 미국 민주당 정책개발연구소 CNP(Center for National Policy) 소장이며 변호사인 마이클 반스 전 미 하원의원과 접촉해 공동연구를 위한 교섭을 벌였다. CNP는 국무장관을 지낸 매들린 올브라이트, 토머스 폴리 하원의장 등 민주당 핵심인사들이 거쳐 간 기관이었다.
  
  1997년 1월 20일 클린턴 2기 행정부 출범식에 마포포럼 요원, 정근모 전 과기처 장관, 박건우(朴健雨) 주미 한국대사 등이 참석했다. 다음 날 마포포럼 인사들과 CNP 소속 정계인사들이 모여 한미 간 정책조율을 시작했다. 마포포럼은 클린턴 정부의 ‘100일 계획’ 안에 한국의 핵 재처리 허용이라는 의제를 집어넣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클린턴의 동북아 정책 브레인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를 만나 얘기를 나누었고, 그는 “한국의 입장은 이해하나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위한 미국의 정책변경은 어려울 것”이라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피력했다.
  
  한국전력은 반스 변호사의 소개로 1997년 4월 미국의 유력 로펌인 ‘호건 앤드 하츠(H&H)’와 로비스트 계약을 맺고, 이 사실은 비공개로 하기로 했다. 이 계약은 또 한국의 사용후 핵연료를 영국 BNFL사에서 재처리해 거기서 나온 핵연료를 한국에 반입하는 프로젝트를 H&H사가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소요경비는 한국전력이 댔다.
  
  한창 일을 진행하고 있을 무렵, 김대중 정권이 들어섰다. 마포포럼은 더 이상 민간차원에서 추진한다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박관용 전 비서실장은 이종찬(李鍾贊) 국정원장을 만나 그동안 해 온 일을 설명하며 “이제 정권이 바뀌었으니 더 이상 내가 이 문제를 추진하기는 어렵다”며 “관련되는 자료를 모두 넘겨 드리겠으니, 새 정부에서 알아서 해 주시기 바란다”고 했다. 이종찬 원장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박 의원께서 해 오셨다니 정말 훌륭하시다”며 “관계기관과 협의하고 검토해서 조치하겠다”고 했다.
  
  한 달이 지나도록 박관용 전 실장에게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종찬 원장은 박 실장에게 얘기를 들은 후 장영식(張榮植) 한전 사장을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다고 한다. 장영식 사장은 뉴욕주립대 경제학 박사로, 원전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장 사장은 이 원장의 이야기를 듣고 “미국이 알게 되면 큰일 난다”며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장 사장으로부터 “큰일 난다”는 말을 듣고 이 프로젝트를 중단시키라고 지시했다. 박 전 실장은 “결국 김대중 정부는 그해 6월 임동원(林東源) 외교안보수석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어 이 사업을 전면 중단키로 결정했다”며 “김대중 정권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미국과의 관계도 있지만, 핵 재처리 기술 확보가 북한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했다.
  
  1998년 5월 5일 장영식 사장은 프로젝트 재계약을 희망하는 H&H사 반스 변호사의 방문을 받고, 지난 정부가 재처리 로비를 추진하는 것을 알았다. 장 사장은 신문사에 로비계약 내용 사본과 관계 서신 등 자료 일체를 넘겼고, 1998년 7월 15일 자 《동아일보》에 마포포럼의 핵 재처리 추진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이종훈 전 사장은 “이로써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을 위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그 후유증으로 한국의 대미 로비에 대한 신뢰도도 크게 추락했다”면서 “북한의 KEDO 사업이 중단되고 북한이 핵실험까지 강행한 마당이라 대북관계 여건이 훨씬 복잡해져 그때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 됐다”고 아쉬워했다.
  
  원전 기술 세계 6~7위, 원자력 기술 세계 5위, 동위원소 생산 세계 10위권의 원자력 강국인 한국은 핵연료 농축도 재처리도 할 수 없다. 2015년 11월 25일 발효된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으로 미국산 우라늄의 20% 미만 저농축과 사용후 핵연료에 대한 파이로프로세싱(건식 재처리)의 향후 ‘추진 경로(pathway)’를 마련한 것이 최대 성과라고 하지만, 쌓여만 가는 고준위 폐기물 처리 문제로 골치를 썩기는 마찬가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戰犯國)만도 못한 핵 자주권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YS, 클린턴과 “전쟁 안 된다”며 40분씩 전화통화

▲1996년 3월 5일 김영삼 대통령과 방한 중인 존 메이저 영국총리가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정치·안보·경제협력 증진방안과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발전방향 등 공동관심사에 관해 논의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북한의 NPT 탈퇴선언 이후 제네바 핵합의(1994년 10월)에 이를 때까지 1년7개월 동안 북한 핵 문제를 안고 씨름했다. 그는 “핵을 가진 자와 손을 잡지 않겠다”며 한미군사동맹을 토대로 북한을 강하게 압박했고, 북한 핵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로 가져갔다. 결국 클린턴 행정부는 1994년 여름 북한에 대한 군사적 제재에 나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미국의 앞길을 가로막고 설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핵무장을 막아야 하지만,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걸 막아야 한다’는 대통령으로서의 또 다른 책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IAEA 사찰단을 내쫓겠다는 협박과 함께 북핵 문제가 불거지면서 촉발된 것이지만, 미국은 단시간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북한을 군사적으로 점령한다는 이른바 ‘작전계획 5027’까지 공개하면서 1차 경고 시그널을 보냈고, 다시 1994년 3월 핵추진 항공모함인 칼빈슨호를 일본 요코스카(橫須賀) 기지에 입항시키면서 최후통첩의 시그널을 보냈던 것이다.
  
  북한 핵 위기가 확산하면서 제2의 6·25전쟁 발발 위기까지 왔지만,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방북해 6월 18일 김일성과 만나 두 차례 회담을 가졌다. 김일성은 이 자리에서 “미·북회담을 재개하고 경수로 대북지원을 약속하면 핵개발 프로그램을 동결시킬 수 있다”면서 동시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다. 1994년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김영삼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만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불과 2주 전인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고 말았다.
  
  북한의 강석주 외무성 부상이 2002년 10월 방북한 켈리 전 차관보에게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을 시인하면서 이른바 ‘2차 핵 위기’가 불거졌다. 이듬해 1월 북한은 NPT를 다시 탈퇴했고, 핵시설에 설치된 IAEA의 봉인(封印)을 떼어내고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해 3월 14일, 기자는 북핵 위기의 해법을 듣기 위해 상도동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았다. 그는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던 긴박한 당시의 상황을 먼저 얘기했다.
  
  “북한이 핵은 못 만들도록 하겠다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었어요. 미국은 전쟁하겠다고 항공모함을 끌고 왔으니까. 북한은 2분30초 만에 지하 땅굴에서 포를 끌고 나와 서울을 향해 쏠 수 있어요. 몇 방만 서울에 떨어져도 아수라장이 됐을 거 아니에요. 클린턴 대통령하고 ‘한국군은 한 명도 못 움직이게 하겠다’, ‘전쟁은 절대 안 된다’고 40분씩 전화통화를 하면서 싸웠어요. 갈 때까지 다 가서 카터가 나타난 거예요. 그렇게까지 갔으니까 김일성이가 ‘핵개발 포기하겠다’, ‘김영삼 대통령하고 회담을 하겠다’고 항복을 한 거예요.”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 핵 문제에 대해서는 무척 강경했군요.
  “절대 안 된다는 거지.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 가족과 주한 미군 가족을 소개시키기 하루 전날 내가 그걸 알았고,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던 거예요. 내가 안 막고, 주한 미국대사가 소개령을 내렸으면, 한국이 어떻게 됐겠어요. 북한이 핵무기를 못 갖게 한다는 생각엔 미국이 단호해요. 양보가 없어요.”
  
  —한국의 대통령도 ‘북한의 핵보유는 안 된다’는 원칙을 양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절대 안 되는 거죠. 우리 안보가 깨지고, 일본이 핵무장을 해요. 대통령으로서 모든 걸 각오하고 단호하게 밀어붙였어요. 미국이 북한을 치겠다고 나설 때, 속으로는 ‘이제 김일성이가 굴복을 하겠구나’ 했어요. 그런데 참 북한 사람들이 지독해요. 끝까지 버티는 거야. ‘전쟁하겠다’고 압박은 할 수 있지만, 전쟁이 터지는 걸 내가 놔둘 수는 없잖아요.”

▲마이클 반스 미국 국가정책센터(CNP) 이사. 민주당 의원 출신인 그는 한국전력이 맡긴 재처리 프로젝트의 로비스트로 활약했다.

 

  —길게 보면 한미 양국의 제재와 압박이 북한을 굴복시킨 것이겠죠.
  “김일성, 김정일에게 먹히는 건 제재와 압박이에요. 북한이 ‘벼랑 끝 전술’을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미국하고 손을 잡고 김정일이를 벼랑 끝으로 밀어야 해요. 그렇게 몰아가야 북한 핵 문제는 해결이 될 거예요.”
  
  —미국이 최종단계에 이르러 ‘북한을 치겠다’고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전까지 한미군사동맹은 완벽하게 작동했던 건가요.
  “재임 기간 동안 여덟 번인가 아홉 번인가 클린턴 대통령하고 정상회담을 했어요. 클린턴 대통령이 먼저 나를 찾아와서 청와대에서 조깅을 함께 했어요. 김대중씨 때하고는 완전히 달라요. 집사람(손명순 여사)이 힐러리 여사하고 정이 들었을 정도예요. 르윈스키 사건이 났을 때 집사람이 ‘힐러리가 불쌍하다’고 걱정을 많이 했어요.”
  
  김 전 대통령은 당시에 김일성이 주도했던 ‘북핵 1라운드’보다, 김정일이 주도하는 ‘북핵 제2라운드’가 해결하기 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김일성, 김정일에게 통하는 건 제재와 압박”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때 만주까지 도망을 갔었고, 미국의 공습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요. 황장엽(黃長燁)씨를 나중에 만났더니 ‘그때 김일성이 미국에 어떻게 대처할까, 남북 정상회담을 어떻게 할까 논의하느라 매일 두 번씩 노동당 비서회의를 했다’고 해요. (김일성이) 그렇게 신경을 썼어요. 너무 신경을 쓰다가 건강이 나빠지고 쓰러졌잖아요.”
  
  —김대중 정부는 북한이 핵개발을 재개하고, ‘제네바 핵 합의’를 파기하는데도 금강산관광과 교류협력 사업을 지속했습니다. 
  “우리는 절대 대화다, 너희가 무슨 나쁜 일을 해도 교류협력을 계속한다, 그러니까 김정일이가 남한을 완전히 무시하는 거예요. 필요에 따라 대화가 안 되면 전쟁도 한다는 걸 북한에 압박해야죠. 강릉에 무장공비가 침투했을 때(1996년 10월) 내가 단호하게 했어요. 북한이 사과를 했어요. 북한은 강한 사람에게만 머리를 숙여요.”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지난 2008년 4월 29일 자 주한 미 대사관 전문에 따르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국이 북한 영변의 핵시설을 폭격하려는 계획을 말린 것을 후회하며 “그때 미국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더라면 북핵 문제가 해결됐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이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대사와 만나 오찬을 함께 하면서 “클린턴 행정부의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이 1994년 북한 영변의 핵시설에 대한 공격을 원했는데 내가 그걸 말렸다”면서 “돌이켜 보건대 폭격을 허락했으면 모두에게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재인 박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우리 원자력 과학자들의 실력을 믿고 대외적으로 당당했다”며 “대전엑스포 때 ‘안전하게 내릴 장소가 없다’는 핑계로 헬기를 타고 원자력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고 했다. 그는 “만일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했더라면 북의 핵개발에 대해 당당하게 따졌을 것”이라면서 “재임 기간 중 북한 핵 위기의 와중에 우리의 핵 주권을 찾으려고 애쓴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 월간조선 2016년 1월호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2016.01.28 한국이 당장 "NPT에서 탈퇴" 폭탄선언을 해야 하는 이유는?

2006년 8월13일 노무현 대통령은 한겨레, 경향신문 등 우호적인 언론사 간부들을 청와대로 불러 한담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중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려는 데 대하여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북의 핵 기술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 같다. 북한의 위협은 핵기술보다는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온다. 북한의 경우는 인도의 경우와 비슷한데도, 나는 (북한은 안되고) 인도는 핵무기를 가져도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미국이 핵무기를 가졌다고 한국인이 불안해 하나? 더구나 인도와 이란은 핵무기를 가지려 하지만 북한은 핵기술을 판매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인도는 핵개발을 해도 미국이 봐주고 북한은 왜 안 봐주나' 식의 말을 하였다. 제대로 하려면 이렇게 말하였어야 했다.

 

'미국은 핵무장한 인도와 친하게 지내는데, 우리가 북한의 핵무장을 無力化시키기 위하여 핵개발 하는 것은 막지 않아야 하고 내가 나서서 막지 않도록 하겠다.'


“핵개발 하다가 망한 나라는 없다.”

필자는 ‘한국의 自衛的(자위적) 핵개발’을 주제로 강연을 자주 한다. 북한정권의 핵무기를 폐기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 이런 反論(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이 많다. 한 안보포럼에서 예비역 중장이 했던 주장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면 미국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당합니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한국은 핵을 개발하면 망합니다.”

 

물론 이런 俗說(속설)에 대한 답변은 준비되어 있다.

 

 “핵을 개발하다가 망한 나라는 없습니다. 핵무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한 이스라엘, 파키스탄, 인도는 지금 미국으로부터 제재는커녕 막대한 원조를 받고 있습니다. 북한정권도 核(핵)을 개발하면서 한국으로부터 100억 달러 이상의 금품, 미국으로부터는 10억 달러어치 이상의 重油(중유)와 식량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1979년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맺은 이후 매년 30억 달러씩, 파키스탄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매년 20억 달러 이상씩 미국의 무상원조를 받습니다. 인도와 미국은 밀월관계입니다. 인도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한 나라가 미국이고, 원자력 발전소와 무기까지 팔겠다고 합니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도 핵을 개발하려다가 포기한 代價로 주한미군 잔류,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대한 지원 등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미국의 國益을 지켜주고, 파키스탄은 對테러 전쟁에 협조하고, 인도는 중국을 견제하는 데 미국과 협조하므로 미국이 핵무장을 묵인한 것입니다. 東北亞에서 한국은 이들 세 나라보다 미국에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한국의 몸값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한국처럼 경제적, 지정학적, 군사적 가치가 큰 나라는 핵개발을 해도 제재가 먹히지 않습니다. 朴 대통령이 핵개발을 포기한 이유는 압력에 굴복해서가 아니고, 얻을 것을 다 얻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금의 한국은 1970년대의 한국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東北亞의 이스라엘’ 수준 이상일 것입니다. 세계 5대 공업국, 5대 원자력 기술국, 7대 수출국, 8대 군사력(재래식), 8대 무역국에 드는 한국이 중국 편으로 기울면 일본도 버틸 수 없을 것이고 중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覇權(패권)국가가 됩니다. 이런 한국이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기 위하여,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살겠다고 핵무기를 갖겠다는데 미국이 정말 제재를 할까요? 우리가 被원조국입니까? 한국에 경제재재를 하면 미국은 손해를 보지 않습니까? 韓美동맹이 중요하지만, 한국에 미국이 소중한 만큼 미국에도 한국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더구나 미국, 중국, 유엔 등 국제사회가 北의 핵무장을 막지 못했습니다.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은 이미 찢어졌어요. 우리는 중국 미국의 무능에 의한 피해당사국이에요. NPT(핵확산금지조약) 10조도 이런 경우, 즉 敵의 핵개발로 국가 생존 차원의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는 사전에 통보하고 탈퇴할 수 있도록 규정해놓았습니다. 우리는 ‘6자 회담이 6개월 안에 北核(북핵) 폐기에 실패한다면 NPT에서 탈퇴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해야 합니다. 그때부터 핵문제의 주도권은 대한민국이 쥐게 됩니다. 주도권을 北의 손에서 빼앗아오면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넓어집니다. 핵게임을 즐길 수도 있어요. 국가가 결심만 하면 2년 안에 100개 이상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한국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북한더러 ‘야, 그런 장난감 같은 핵폭탄으로 불장난 하지 말고 우리 다 같이 폐기하자’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왜 안 됩니까? 핵확산의 피해당사국이 자위적, 평화적, 합법적 목적의 핵개발을 하는데 누가 막습니까?”


 인도와 파키스탄 제재가 지원으로 돌변 

미국은 1998년에 核실험을 한 인도와 파키스탄에 무기 기술 경제 금융 분야에서 제재를 가한 적이 있다. 핵심적인 제재는 원자력 관련 기술을 판매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001년 부시 행정부는 중국을 견제하는 인도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기로 하고 제재를 풀어가기 시작하였다. 9.11 테러 이후엔 아프가니스탄 작전에 협조한 파키스탄에 대한 제재도 완화하기 시작하였다. 부시 대통령은, 2002년 1월22일 우선 인도와 파키스탄에 대한 경제재재를 해제하였다. 

 

 부시는 최근 회고록에서 간단하게 언급하였다.

 

 <파키스탄의 對테러 작전 협조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는 제재를 풀고, 파키스탄을 非나토 동맹국으로 지정하였다. 그들의 對테러 예산을 지원하였으며 의회가 30억 달러를 경제원조 하도록 했고, 우리의 시장을 열어 파키스탄의 상품과 용역을 수입하도록 했다.> 

 

 2005년 7월 부시 대통령과 인도 싱 수상은 공동성명을 통하여 美-印 민간 원자력 협력 협정을 추진할 것을 선언하였다. 2008년 10월 美 의회는 이 협정을 승인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인도는 군사적 핵시설을 제외하고, 민간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 기구의 사찰을 수용하기로 하였다. 미국은 인도에 원자력 기술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정부가 나서서 美 의회, 국제원자력 기구, 원자력공급국가회의를 설득, 對인도 제재를 풀어 줄 것을 로비하였다. 농축 및 재처리 관련 자재도 인도에 공급할 수 있게 하였다. 핵확산 국가를 제재하도록 되어 있던 미국의 국내법은 國益 앞에서 흐물해졌다.

 

 부시는 회고록에서 <미국-인도 원자력 협정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민주국가와 가장 큰 민주국가 사이의 관계를 향상시키려는 우리 노력의 결정이었다>면서 <인도는 인구가 10억 명이고, 잘 교육을 받은 중산층이 있는 나라여서 미국의 가장 가까운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원자력 협정은 인도가 국제무대에서 맡을 새로운 역할을 알리는 역사적 巨步였다>고 自讚(자찬)했다.  

 

 인도 원자력 건설시장의 규모는 앞으로 10년간 1500억 달러 규모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미국은 美印 원자력 협정에 따라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파키스탄에 막대한 지원을 해온 미국은 2010년에, 향후 5년간 군사지원 20억 달러, 민간지원 75억 달러를 또 약속하였다. 파키스탄은 親中국가인데도 이렇게 특혜를 주었다. 

 

 부시의 暗示?

 1998년 3월 인도 총선에서 집권한 중도우파 정당(자나타)은 핵실험을 하겠다고 공약했었다. 바즈파이 총리는 취임 즉시 핵실험을 지시, 두 달 뒤 地下 핵실험이 이뤄졌다. 그 직후 클린턴 미국 대통령 등에게 바즈파이 총리가 보낸 편지는 한국이 핵실험을 한 뒤 어떤 논리를 세워야 하는가 참고가 될 만하다.

 

 <우리는 핵무장한 나라(중국)와 國境(국경)을 접하고 있다. 1962년 인도를 무장 침공한 나라이다. 지난 年代에 두 나라의 관계가 많이 개선되었으나 不信은 여전하다. 이 나라는 우리의 다른 이웃 나라(파키스탄)가 핵무장을 하도록 돕고 있다. 이 나라는 지난 50년간 우리를 세 번이나 침공한 敵이 있고 테러공격을 부추긴 前歷이 있다.>

 

 인도와 한국은 경제력과 군사력 등 國力이 비슷하다. 敵國으로부터 수많은 침공과 위협을 받아온 점에서도 같다. 물론 한국의 경우가 더 심한 피해국이다. 중국을 견제하고 있는 점에서도 같다. 한국이 핵무장을 한다고 미국이 경제재재를 하고 韓美동맹을 해체할 것인가? 핵무장한 한국이, 철강생산량은 세계 전체의 50%(약6억t)이고, 약4조 달러의 외환보유고(2위인 일본의 세 배)를 가지고 연평균 7%(복리)의 고도성장을 계속하는 중국 편으로 기울면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의 부시 정부는, 2008년에 아무런 양보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북한정권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준 나라이다. 천안함 테러를 자행해도 再지정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런 미국이 한국을 상대로 제재를 가한다면 미국의 여론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최근 나온 도널드 럼스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의 회고록엔 묘한 대목이 있다. 그는 중국이 한반도의 非核化보다는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저지하는 데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일본, 한국, 대만이 북한의 核에 대응하기 위하여 核무장을 추구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 중국은 자신들의 현재 태도에 관하여 후회하게 될 것이다.>

 

 2002년 10월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는 江澤民(강택민) 중국 주석을 크로포드 목장에 초청, 회담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부시 회고록). 

 

 “미국은 북한에 대하여 부정적 영향력을, 중국은 긍정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 우리 두 나라가 이를 결합시킨다면 근사한 팀이 될 것이다.”

 

 江澤民은, 북한은 중국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문제이고,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일이라고 말했다. 몇 달을 기다렸으나 진전이 없자 부시는 새로운 論法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2003년 1월 그는 江澤民에게 ‘만약 북한이 核개발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일본이 核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통보하면서,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는 군사적 공격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압박하였다는 것이다. 부시는 회고록에서 6개월 뒤 6者 회담이 열린 것은 이 압박 덕분이란 투로 이야기하였다. 미국은 속으론 일본과 한국이 核개발 카드를 써주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부시와 럼스펠드의 말은 '왜 한국은 核개발을 추진하지 않는가. 그렇게 해야 중국과 북한의 억지에 대응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한국이 NPT를 탈퇴하고 自衛的 차원의 핵무기를 개발하겠다고 나와도 우리는 반대하는 척만 하겠다'는 암시로 해석된다. 

글 |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2016.02.11 "북핵 위협의 현실화, 이젠 우리도 핵무장화 피할 수 없다"

위협은 은하 3호가 아니라 스커드와 노동미사일이다

 북한이 2월 7일 발사한 로켓은 무기화된 탄두가 아닌 인공위성을 탑재했으며, 대기권 재진입을 시도하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의 미사일이 아니다. 그러나 로켓 기술과 탄도미사일의 기술은 동일하며, 북한이 이를 무기화하려 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때문에 유엔은 북한의 로켓발사를 금지하고 있다. 북한의 4차 핵실험에 연이은 로켓발사로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의 한반도 배치논의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북한 로켓발사 이후의 기류에 대해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우선 로켓발사 보다 북한의 4차 핵실험이 심각한 문제라는 점이 간과되고 있다. 4차 북핵 실험에서 중요한 대목은 수소폭탄 여부가 아니라 핵탄두 소형화와 실전배치과정의 진전여부이다. 4차 핵실험 직후 북한은 정부성명을 통해 “소형화된 수소탄의 위력을 과학적으로 해명하였다... 핵포기는 하늘이 무너져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무장 사례 및 이후의 기술적 진보를 감안할 때 북한이 4차례의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를 실전배치 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한국의 안보는 북한 핵 위협의 창 끝에 놓이게 된다.

 

북한의 미사일 능력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필요하다. 한국에 대한 위협은 이번에 발사한 장거리 로켓이 아니라 한반도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사거리 300km에서 1300km에 이르는 스커드 및 노동계열의 북한 미사일이다. 이 미사일들은 각각 수백기이상 북한군에 실전배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란 이라크전 및 걸프전에서 이미 실전경험을 거쳤다. 북한이 핵탄두 소형화기술을 확보하게 되면 이 미사일의 대부분에 핵탄두 장착이 가능하며, 한반도 전역은 북한 핵미사일의 위협에 놓이게 된다.

 

북한이 이번에 실험한 은하 3호 로켓은 탄도미사일로 전환할 경우 미국 본토까지 도달 할 수 있는 ICBM급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은하 3호는 아직 개발 및 시험단계이며,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대기권 재진입과 목표물까지 유도 등 고난도의 기술에는 근접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북한의 기술수준으로 미국 본토 위협 여부도 불확실하다. 문제는 은하 3호가 아니라 한반도 전역을 대상으로 북한이 실전배치한 수백기의 핵탄두 탑재가능 미사일들이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북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기술에 대해서도 우려해야 한다. 구 소련은 비교적 소형의 디젤잠수함 골프급의 함교에 SLBM 3기를 탑재했으며, 소련 붕괴후 북한은 미사일 발사장치 및 각종 도면이 남아있는 상태의 골프급 잠수함 수척을 고철로 도입했다. 북한이 골프급의 기술을 응용하여 건조중인 신형 신포급 잠수함은 소형이지만 최소 SLBM 1기의 탑재가 가능할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SLBM 실험은 잠수함이 아닌 수중의 특정시설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2007년에 사정거리 3500km의 무수단을 시험발사없이 실전배치했으며, 이는 구 소련의 SLBM인 R27을 기반으로 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무수단과 북한이 시험하고 있는 SLBM 북극성은 유사한 모델이다. 따라서 북한이 무수단을 SLBM 북극성으로 개량했으며, 전례로 보아 신포급잠수함의 건조완료와 동시에 시험발사 없이 SLBM을 실전배치할 가능성도 예상할 수 있다. 이 경우 SLBM탑재 신포급 잠수함의 전력화는 예상보다 빠른 향후 1, 2년내 이루어 질 수도 있다. 신포급잠수함이 SLBM을 장착해도 미국과 러시아의 대형 핵잠수함에 비견될 수 없으나 한국의 킬체인과 사드의 억제력을 반감시킬 수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북핵위협에 대한 방어는 완전한 해법이 아니다

북핵위기가 고조될 때 마다 미국은 핵항모함대와 B52 전략폭격기의 전진배치로 한반도 방어의지를 과시해왔다. 북한의 로켓발사 이후 미국은 사드의 신속한 한국배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드의 한반도배치로 북핵위협을 완화할 수 있다는 점은 명확하지만, 문제는 방어수단이라는 점이다. 또한 사드 배치는 북핵무기의 실전배치로 한국 안보가 위협에 처한 상황에 대응한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다.

 

미국의 대공방어체계인 패트리어트나 사드체계 모두 완벽한 요격이 불가능하다. 실전경험을 거친 패트리어트 미사일도 수많은 개량을 거쳤지만 아직 만족할 만한 요격률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드는 실전경험이 없다. 미국 미사일방어체계(MD)의 핵심은 가상적국이 선제적으로 핵공격을 가해올 경우 이를 상당부분 방어하고 보다 많은 핵보복공격으로 적국을 초토화시킨다는 교리를 근거로 있다.

 

그러나 한반도와 같이 전장의 종심이 짦은 경우 이 같은 논리에 한계가 있다. 종심이 짧을 경우 탐지와 요격의 가능성이 낮고, 동시 요격 대상도 한정될 수 밖에 없다. 북한의 핵공격 상황을 가정했을때 대부분 요격에 성공해도 한 두발의 핵미사일을 막지 못하면 한반도 전체는 위협에 빠지게 된다. 한반도의 피할 수 없는 지정학적 한계이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방어무기인 사드의 한반도 배치 여부를 두고 국내여론 및 미국과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반도의 핵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길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이외에는 없다. 북핵문제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견해차나 사드배치여부가 북핵 위협의 본질이 아니며, 이와 관련된 논의로 국론이 분열되는 것은 소모적일 뿐이다.

 

북핵 위협의 현실화는 한국의 핵무장론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한국은 대외교역의 1/4 이상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으며, 사실상 1위의 대중 투자국이다. 한국은 이미 중국의 실질적인 우방이며, 한국에 대한 위협은 중국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북한 핵무기의 위협에 직면한 한국의 안보에 대해 중국이 관심을 가져야 할 충분한 이유이다. 중국이 박근혜 대통령의 “어려울 때 도와 주는 것이 친구”라는 언급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국은 한미동맹체제와 북핵위협속에서도 중국 전승절에 참석하고 중국이 주도하고 있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참여한 한국의 고뇌를 존중해야 한다.

 

한국과 미국은 한국전쟁이후 혈맹관계를 유지해왔으며,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미동맹의 중요성에 공감한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한국인들은 핵으로 무장한 적대세력에게 대응할 수 있는 완벽한 방어수단은 핵무장 이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또한 천문학적 비용이 소요되는 미사일방어망의 구축에 비해 핵무장의 비용이 저렴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냉전기 미국과 소련이 대량의 핵무기를 보유한 것은 핵공격을 억지하는 최상의 방안은 핵무기라는 평범한 상식을 보여주고 있다.

 

약소국인 파키스탄의 핵무장을 자극한 것도 적대관계인 인도의 선제적 핵무장이었다. MD나 사드는 미사일 방어체제이며, 근본적으로 핵위협을 해소해주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사드의 한반도 배치는 북한 핵위협이 현재화한 상황을 전제로 했을 때 성립되는 논리이다. 사드가 북핵위기를 본질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면 배치여부를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완벽한 미사일 요격체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은 6자회담을 포함하여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북핵문제의 국제적 해법을 지지해 왔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북한이 수포폭탄이라고 주장하는 4차핵실험이었다. 한국이 원하는 것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이다. 북한이 실전배치한 수백기의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할 능력을 확보하고, SLBM을 탑재한 신포급 잠수함이 동해를 휘젓고 다니는 상황에서도 한국인들이 미국과 중국에게만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론이다.

 

북한핵위협이 현재화할 경우 한국내 핵무장론이 확산될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하다. 이미 한국내 안보전문가와 여론주도층 등 일각에서 방어적 차원의 한국자체 핵보유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으며, 동조 여론도 확산되고 있다. 한국의 수준급의 원자력 기술, 실전배치 현무 1, 2, 3 등 탄도미사일 및 순항미사일의 기술을 고려할 때 자체핵무장은 어려운 과제가 아니다.

 

게다가 한국은 2017년 대선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와 같은 북핵위기의 상황이 지속될 경우 자체핵보유론의 확산을 막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느 국가든 차세대 정치지도자들이 국내정치적 요구의 유혹을 뿌리친 사례는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선 경쟁의 본격화과정에서 한국의 핵무장을 주장하거나 우호적 태도를 보이는 대권주자들의 등장을 예상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한국 핵무장론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국익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북핵해법이 무력한 상황이 지속될 경우 한국의 핵무장론은 탄력을 받게 되며, 핵미사일 위협의 지척에 있는 수천만의 한국인들은 이를 심각하게 고려하게 될 것이다. 북핵 위협의 직접적 대상은 워싱턴과 베이징의 시민이 아닌 서울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무장론은 동북아 불안정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국제질서의 책임있는 대국인 미국과 중국이 북핵문제 해결에 시급히 앞장서야 하는 이유이다. 북핵문제에 대한 대응을 놓고 미국과 중국간에 이견이 노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과 중국은 북핵 위기의 근본적 해소가 한반도의 안정뿐만 아니라 자국의 이익에도 부합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북핵위기는 미국과 중국의 안보적 이익을 확대하는 계기 또는 안보적 이해가 충돌하는 장이 아니다.

 

미국과 중국은 상황의 시급성을 인식하고 북핵문제만큼은 신뢰를 형성하고 협력체제를 형성해야 한다. 북핵문제의 해법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가장 직접적인 당사자인 한국의 의견을 신중하게 경청해야 함은 당연하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실전배치된 북한의 핵무기를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핵무기를 머리에 이고 살수는 없다”명제가 실현되는 상황을 원한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한국의 핵무장이 아니며, 완전하게 비핵화된 평화로운 한반도이다. 미국과 중국이 진정으로 헤아려야 할 일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글 |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16.02.19 "원료제조 6개월, 기폭장치 6~9개월… 한국 1년반이면 核무장"

[北 핵·미사일 파장] 전문가들이 본 '한국의 核잠재력'

월성原電에 쌓여있는 폐연료봉, 재처리 통해 플루토늄 뽑아내면
핵폭탄 18500기 분량 나와… 재처리, 언제라도 가능한 수준
핵물질 감쌀 소재 개발 기술은 국내 산업현장서 사용하고 있고
폭발실험 위한 토목기술도 최고

북한이 핵실험에 이어 장거리 미사일 발사까지 감행하자 국내에서 핵무장론이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핵무장은 기술과 능력이 아닌 의지의 문제"라며 "일단 결심만 하면 1년 반, 길어야 2년이면 핵무기 개발을 완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험실에서도 재처리 가능 핵무기를 만들려면 핵분열을 일으키는 우라늄, 플루토늄 같은 원료를 확보해야 한다. 또 고성능 폭탄을 터뜨려 원하는 시점에 정확하게 연쇄 핵분열이 일어나도록 하는 기폭 장치가 필요하다. 100만분의 1초 단위의 정확도를 갖춰야 하는 장치다. 핵분열 물질을 안전하게 감싸는 물질도 중요하다.

 

이 중에서 관건은 원료 확보이다. 핵폭탄은 원료에 따라 우라늄탄과 플루토늄탄이 있다. 현재 우리는 한·미 원자력협정과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따라 원료 확보가 금지돼 있다. 그렇다고 원료를 확보할 조건과 기술이 없는 건 아니다. 우리는 원자력발전소 24(폐로 결정이 난 고리 1호기 포함)를 운영하고 있다. 원전 가동 과정에서 플루토늄이 소량 포함된 사용 후 핵연료, 즉 폐연료봉이 나온다. 특히 중수로 방식인 월성 1~4호기에서 경수로 방식인 다른 원전에 비해 플루토늄 함량이 높은 폐연료봉이 나온다. 플루토늄이 평균 1% 정도 포함돼 있다. 2014년 말 기준으로 월성에는 7414t의 폐연료봉이 보관돼 있다. 이 폐연료봉을 재처리하면 이론상 74t의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다. 핵폭탄 1기에는 4㎏의 플루토늄이 필요하므로 18500기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원료를 확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김승평 조선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폐연료봉에서 플루토늄을 뽑아내는 방법은 전기분해(건식), 습식 재처리 방법 등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모두 기술적으로 어렵지 않다" "대량생산 시설을 짓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실험실 수준에서는 지금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금지돼 있지만 일본은 아오모리현에 로카쇼무라 재처리 공장을 갖고 있다. 폐연료봉에서 플루토늄을 분리해 원전 연료로 재사용한다는 논리지만 핵무기 원료 생산 공장으로 전용할 수도 있다.

 

한국은 재처리 신기술도 갖고 있다. 한 원자력 전공 교수는 "전류를 흘려 폐연료봉을 재처리하는 파이로프로세싱은 우리가 세계적 수준"이라며 "파이로프로세싱으로 폐연료봉을 1차 처리하고 이후 기존의 질산 용해법을 쓰면 짧은 시간에 더 많은 핵무기 원료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재처리 시설을 짓고 핵무기에 쓸 플루토늄을 얻기까지 6개월이면 된다고 예측했다.

 

◇레이저 농축 신기술도 보유

우라늄탄 원료를 확보하려면 천연 우라늄을 농축해야 한다. 자연 상태의 우라늄은 우라늄 238과 우라늄 235가 섞여 있다. 이 중 핵분열을 하는 우라늄 235 0.7%에 불과하다. 핵무기 원료로 쓰려면 우라늄 235 90% 이상이어야 한다. 이렇게 순도 높은 우라늄 235를 얻으려면 원심 분리기로 농축을 해야 한다. 이 정도 순도의 우라늄 1㎏을 얻기 위해서는 1000t의 천연 우라늄이 필요하다. 시간도 수개월 이상 걸린다. 우라늄탄 1기에는 평균 20㎏의 농축 우라늄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북한은 수십년간 핵무기를 준비해 왔지만 아직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하지 못했다.

 

우리는 우라늄탄도 북한보다 더 빨리 개발할 수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2000년 신개념의 레이저 농축 실험을 진행한 바 있다. 레이저 농축법을 쓰면 농축 우라늄 235 1㎏을 얻는 데 4시간 정도밖에 들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핵무기 제조 기술도 쉽게 확보할 수 있다.

 

핵무기 관련 기술은 대부분 1940~50년대에 개발됐고, 설계도는 인터넷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는 "현재 원자력 관련 학과의 '종합 설계' 수업에서도 핵폭탄의 위력을 학생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핵폭탄에 대해 일부 가르친다"고 말했다.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핵분열 물질을 감쌀 소재 개발에는 합금과 정밀 가공이 필요한데, 국내 산업 현장에서 흔하게 사용하고 있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폭발 실험을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토목 기술 역시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원료 확보(6개월)와 기폭장치 개발(6~9개월), 핵폭발 실험(3~6개월)까지 합하면 1년 반에서 2년 사이에 핵무기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임만성 KAIST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교수는 "비용과 인력을 얼마나 집중하느냐에 따라 제조 시간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박건형 기자

 

2016.03.03 비핵화·평화협정 병행론은 敗着이다

바둑에 '수순의 묘'라는 게 있다. 꼭 필요한 착점이라도 순서를 잘못 잡으면 패착이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요즘 국내외 일각의 평화협정 논의도 수순을 한참 잘못 읽은 패착이다. 한반도에 평화협정을 포함한 평화 체제가 궁극적으로 필요하다는 데는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1991년 남북이 채택한 기본 합의서에는 '남과 북은 현 정전 상태를 공고한 평화 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북한이 1993년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으로 비핵화 약속을 어김으로써 공수표가 됐다. 2005년 6자회담의 결과물인 9·19 공동성명에도 '당사국들은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 체제에 관한 협상을 시작한다'는 문구가 포함됐다. 그러나 북한의 2006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에 이은 1차 핵실험으로 폐기됐다.

 

'우리가 미국 때문에 불안을 느끼니 평화협정을 맺자. 그러면 비핵화도 할 수 있다'는 북측 요구를 바탕으로 합의를 해놓으면 이를 번번이 걷어찬 당사자는 바로 북한이다. 북한은 1973년 베트남 평화협정 체결로 미군이 철수하자 2년 뒤 베트남이 공산화된 것 같은 일이 한반도에서 일어나기를 제일 바란다. 하지만 이게 여의치 않으니까 국제사회의 제재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거나 또는 핵과 미사일을 몰래 개발할 시간을 벌기 위한 용도로 평화협정 공세를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김정은 정권을 그간 지켜봐 온 사람이라면 과연 누가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북한이 체제의 안전을 느껴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북에는 핵이 있고, 남에는 핵이 없는데도 평화협정을 맺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반역자다.

 

그래서 평화협정을 논의하려면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북한이 이란처럼 '국제 제재를 버티기 어렵다. 협상이 불가피하다'는 절실하고도 전략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북한의 핵심 인사들은 핵과 미사일을 자랑하면서 하부 기관들이 국면 전환 차원에서 평화협정을 들먹이는 수준이다. 대남 선전용 매체 '우리민족끼리'는 "지금 한반도 정세는 핵전쟁의 문어귀에 들어섰다. 세계의 공정한 여론은 미국이 하루빨리 북과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은근히 남한을 포함한 주변국을 협박하면서 자신들은 급할 게 없지만 원하면 협상장에 나서주겠다는 태도다. 이런 북한이 자기들 헌법에까지 명시해놓은 핵과 평화협정 문서를 맞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북한은 지금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북도 엄연한 핵 보유국인 만큼 군축 차원의 평화 체제를 논의하자는 꼼수를 쓸 게 분명하다.

 

둘째, 평화협정 당사자 문제가 정리돼야 한다. 북한은 1950년대에는 한때 남북이 평화협정을 맺자고 했으나 1970년대부터는 "미·북 양자가 주체가 돼야 한다"거나 "정전협정에 미국과 북한 중국이 서명했기 때문에 평화협정도 이 3자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형식 논리일 뿐이다. 평화협정의 무대는 한반도이고 한반도에서 평화를 누려야 할 당사자는 남과 북이다. 남과 북의 합의를 미·중 또는 주변국이 보증하는 방안이 합리적이다.

 

셋째, 주한 미군은 평화협정의 의제가 아니라는 걸 북한과 중국에 확실히 인식시켜야 한다. 북한은 틈만 나면 평화협정을 주한 미군 철수를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려 애쓴다. 하지만 북한 스스로 주한 미군 주둔을 인정한 경우도 있었다. 2001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통일 후에도 주한 미군 주둔 필요성에 공감을 표시했다. 1995년엔 이찬복 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중장이 "북한은 주한 미군이 무기한 주둔한다고 미국군 당국과 상호 양해한 가운데 새로운 평화 체제를 구상했다"고 했다.

 

이런 전제 조건들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다면 지금은 평화협정을 거론할 게 아니라 대북 제재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 중국이 비핵화·평화협정의 병행론을 주장하자 미국이 맞장구치는 일이 벌어졌다. 중국은 제재를 받게 될 북한에, 미국은 제재에 동참한 중국에 각각 립 서비스를 하는 차원이라면 크게 문제 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 머리 위에서 미국과 중국이 새 그림을 그리고 있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평화협정 문제에 대해서 우리 정부는 소극적인 편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평화협정을 이런 식으로 꺼낼 때가 아니라는 점을 미국에도, 중국에도 당당하게 밝혀야 한다. 그래야 '평화는 좋은 말이니까 평화협정도 좋은 것 아니겠느냐'는 막연한 인식을 부추기려는 일부 인사의 준동을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선(先)평화 후(後)통일'이 아니라 '선통일 후평화' 시대에 접어들었다.

조선일보 주용중 부국장 겸 국제부장

 

2016-09-12 “중국도 우습게 보는 北 김정은… 한국은 핵무장 외에 답이 없다”

▲이춘근 박사는 6년 전부터 한국 핵무장의 불가피론을 말해온 외교안보 전문가다. 최근 펴낸 책에서 중국은 미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주장을 한 그는 “한국의 핵무장은 한미 동맹을 해치는 일이 아니다. 미국 내 기류도 전향적으로 바뀌고 있다”며 “북핵 위협이 코앞에 닥친 지금 한국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점을 미국에 이해시키고 설득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세종연구소 외교안보실장을 지낸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과의 인터뷰는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 미중 갈등과 향후 전망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는 ‘미중 패권 경쟁과 한국의 전략’이라는 최근 저서에서 ‘중국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도발적 결론을 냈다.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이나 등거리 외교를 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한미 동맹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터뷰 전날인 9일 북한이 5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대화의 대부분은 북핵 문제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 

 

중국은 북한을 죽이지 않는다

  ―5차 핵실험이 의미하는 것은 뭔가.
“핵 기술은 핵탄두를 소형화 경량화해 미사일에 장착시키는 게 핵심이다. 핵탄두와 미사일은 한 세트다. 권총강도는 권총(미사일)에 총알(핵탄두)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위협이 된다. 5차 핵실험은 권총에 장착할 수 있는 총알을 만들었다는 것이고 언제든 장전해 넣어 쏴보여 줄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과시한 것이다.”

 

―김정은은 어떻든 짧은 기간에 목표 달성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김정은의 정신상태가 통제불능”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좋게 해석하면 이제는 매를 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렇게 진단하면 대책이 없는 거다. 게다가 하루라도 빨리 핵무기 체계를 완성해야 한다는 목표를 향해 엄청난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고 또 성공하고 있는 김정은을 통제불능으로 몰아붙일 일인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정말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전쟁 위험이 높다는 것 아닌가.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국가 지도자라면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김정은은 중국도 우습게 보는 것 같다.

“국제사회 전체를 우습게 보고 있다. 하기야 제재가 약발이 안 먹히니 당연하지 않겠나. 김정은은 중국이 북핵을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중국 입장은 뭔가.

“북한에 대해 ‘말썽꾸러기라도 살아만 있어다오’ 전략이다. 그래야 미국 일본으로부터의 위협을 막아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핵에 맞서다 죽거나, 항복하거나

―그야말로 국가 비상 사태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대가로 평가받는 미국의 한스 모겐소(1904∼1980)는 핵이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가 싸울 때 없는 나라의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다고 했다.”

 

―그게 뭔가.

“하나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에) 맞서다 죽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항복하는 것이다. 북은 핵보유국이 되는 순간 대한민국에 핵을 떨어뜨리겠다는 위협만 가지고도 총 한 방 안 쏘고 이길 수 있게 된다. 일부에서는 김정은이 자멸의 길을 택할 리가 없다며 북핵이 우리에게 직접적 위협이 안 된다고 말한다. 이와 반대로 김정은이 핵으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김정은의 행동은 예측할 수가 없어서 핵을 사용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핵은 사용 전에 보유 자체가 위협이 되는 무기다.”

 

그는 “그것이 핵무기를 군사적 무기 아닌 ‘정치적 무기’ 또는 ‘절대 무기’로 부르는 이유”라고 했다.

 

“핵을 가진 나라는 핵을 쏘지 않고도 상대방을 제멋대로 가지고 놀면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북한이 집요하게 핵개발을 하는 것도 보복에 대한 걱정 없이 우리를 향해 게릴라, 소규모 정규전을 비롯해 각종 수준의 전쟁을 마음껏 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핵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핵을 갖는 순간 북이 택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은 무한대로 늘어난다. 5차 핵실험은 그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美 핵우산은 문서로도 보장 못해

―우리 대북 전쟁 전략은 유사시 선제 타격 시스템인 킬체인이나 한국형미사일방어체계(KAMD)다. 9일 국방부는 북이 공격하는 순간 지휘부를 직접 타격하겠다는 KMPR(대량응징보복)를 추가했다.

“지금까지 한미 전략은 북핵이 실전 배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래식 무기로 선제공격을 할 경우 방어하고 반격을 통해 승리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핵이 실전 배치되면 모든 게 무용지물이 된다. 북이 핵을 쏠 조짐을 보이면 타격하겠다고 하는 것도 현실성이 없다. 이동식발사대가 옮겨 다니면서 쏘고, 터널에서 숨어 있다가 쏘고, 칠흑 같은 바닷속 잠수함에서 쏘는데 사전에 어떻게 알 수가 있겠나. 안다 해도 아는 순간 그걸 막을 시간적 여유도 없고 이미 핵 공격으로 초토화된 마당에 반격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남한이 경제 과학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북한에 수십 배 앞섰으면서도 북에 쩔쩔맸던 이유가 군사력 때문이었는데 핵까지 얹혀지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된다.”

 

―일각에서는 전술핵을 다시 배치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드 배치도 못 하고 있는데 전술핵이 될 것인가. 게다가 한번 철수시킨 것을 미국이 다시 재배치할 리 없다. 역사적으로도 그런 경우는 없었다.”

 

―한국이 핵 공격을 받았을 때 미국이 핵으로 막겠다는 핵우산도 있지 않은가.

“핵우산은 문서로 보장될 수 없다. 최종 순간 미국 대통령은 물론이고 의회까지 결심해야 한다. 미국이 핵 공격을 할 경우 로스앤젤레스 뉴욕 워싱턴도 공격받을 수 있다는 건데 과연 미국이 할 수 있을까. 실제로 프랑스는 ‘미국이 지켜줄 테니 핵을 갖지 말라’는 요청에 대해 ‘그럼 파리를 위해 뉴욕을 포기할 수 있는가’ 물었다. 미국은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프랑스인들은 미국이 가진 수천 발의 핵폭탄보다 프랑스가 가진 몇 개의 핵폭탄이 프랑스 국가안보를 위해 훨씬 유용하다는 논리를 폈고 핵무장을 단행했다.”

 

그는 6년 전부터 자위적 핵무장의 불가피론을 펴왔던 외교안보 전문가이다. ―핵무장은 한미 동맹을 치명적으로 훼손한다.

 

“우리가 독단적으로 막무가내로 하자는 게 아니다. 미국을 설득하자는 거다. 알다시피 미국도 기류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가. 공화당 대선 주자 도널드 트럼프는 대놓고 한일 핵무장을 지지하고 있고 민주당 주자 힐러리 클리턴도 한국의 방위비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눈치를 볼 일이 아니라 우리 입장을 적극적으로 설명해서 이해를 구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지미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 전면 철군을 주장하자 거세게 반대하다가 여의치 않자 ‘갈 테면 가라’는 식으로 큰소리를 쳤다. 미국은 박 대통령이 핵개발을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고 결국 더 적극적으로 한국 안보를 책임져 주는 것으로 해결이 됐다. 주한미군 철군 계획도 접었다.”

 

이 박사는 한국의 핵무장이 중국을 자극한다는 일각의 우려에 대해서도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중국은 북한의 핵무장을 사실상 방치, 지원했던 나라다. 추이톈카이(崔天凱) 주미 중국대사는 북핵을 제거하는 데 중국이 앞장서야 한다는 미국 관리의 요청에 아예 ‘불가능한 사명(Mission Impossible)’이라고 못 박았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중국은 한국의 핵무장을 막을 자격도 능력도 없다. 실제로도 중국이 한국의 핵무장을 막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일본은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완벽한 핵무장 국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이 핵을 만드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다.”

 

―우리가 하겠다고 나서면 일본 대만까지 나설 텐데 이러다 다 죽는 것 아닌가.

“핵 도미노가 오면 오히려 평화가 온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다. 외교의 달인이라 일컬어지는 헨리 키신저(전 미국 국무장관)는 ‘서로 이웃한 나라가 핵을 갖는 것은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는 것과 같다’고 했다. 미국의 유명한 국제정치학자 케네스 월츠도 ‘더 많은 국가가 핵무기를 가지면 오히려 평화가 온다. 핵무기란 보복당할 줄 알기 때문에 공격할 수 없는 무기’라며 ‘핵 평화론’을 폈다.” 200년간 66개국이 사라졌다

 

―우리가 기술은 갖고 있나.

“미국이 1945년 7월 16일 최초 핵실험에 성공했으니 핵 기술은 70년이 다 돼가는 오래된 기술이다. 한국보다 과학이나 산업기술력이 뒤처지는 것으로 인식되는 인도 파키스탄도 갖고 있지 않은가. 재래식 무기로 대응하는 데 천문학적 돈이 들어간다는 점을 감안하면 핵무장으로 국방비를 줄일 수 있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서균렬 교수에 따르면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1년 6개월 안에 핵무장을 끝낼 수 있다고 한다. 핵무기는 ‘의지’의 문제이지 돈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처럼 위태로운 안보 환경을 가진 나라가, 그것도 월등한 경제력과 기술력을 가진 나라가 핵무장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

 

―핵무장을 하려면 미국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그는 이 대목에서 목이 마른지 냉수 한 컵을 들이켠 뒤 말을 이었다.

“우선 국민의 총의를 모아야 한다. 국민이 단합하지 않으면 외부의 반대와 외압을 이겨내기 어렵다. 여야 대표들과 끝장토론이라도 해서 의견을 모으고 필요하면 국민투표라도 해야 한다.”

 

인터뷰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주말을 즐기려는 젊은이들로 도로는 붐비고 있었다. 우리는 앞으로 저 젊은이들에게 지금처럼 평화로운 세상을 물려줄 수 있을까…. 그의 마지막 말에 기자는 소름이 돋았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6년부터 2000년까지 207개 국가가 존재했는데 이 중 약 3분의 1인 66개국이 없어졌다. 이 중 50개국이 이웃 나라의 무력 공격에 의해서 망했다. 국제사회에서 살아간다는 일은 이처럼 위험한 일이다. 모두 안보, 즉 생존을 국가 제1 목표로 두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작고 약한 나라들은 고슴도치처럼 맹수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가시’가 있어야 한다. 북이 조만간 핵무기 체제를 완전히 갖추는 날 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된다. 이를 피할 수 있는 ‘궁극적 방법’이 ‘핵무장’이라는 사실은 지난 70년 동안 핵전략 이론가들이 합의한 최종 결론이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2016-09-21 북핵, 대통령들이 어리석고 비겁했던 대가

고통스러운 후회의 시간이다. 우리는 왜 북한의 핵 보유를 막지 못했을까. 길을 잃었을 때는 높은 데 올라 먼 곳을 살펴봐야 한다.

 

노태우 대통령은 1991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했다. 우리 쪽 미군의 전술핵무기는 놔두고 북한의 핵무기 개발만을 반대하기는 어렵다는 비핵화의 논리는 그럴듯하다. 비핵화 선언으로 북한의 핵 사찰 거부 명분이 약화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2년 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을 했을 때 비핵화 선언의 일방성이 가진 허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비핵화 선언에 외교안보수석도, 국가안전기획부장도, 국방부 장관을 포함한 어느 각료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노태우의 회고록에 나온다. 모두 북방외교의 성과에 취해 북방외교가 초래한 북한의 고립이 더욱 핵에 집착하게 한 사실을 무시했다. 당시 북한은 핵무기가 없었고 남한에는 핵무기가 있었다. 지금 북한은 핵무기가 있고 남한은 없다. 기막힌 역전이다.

 

북한의 NPT 탈퇴는 김영삼 대통령 취임 한 달 후 일어났다. 김영삼은 가장 중요한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 그는 1994년 빌 클린턴 행정부의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이 영변 원자로에 대한 폭격을 검토했을 때 반대했다. 이후 제네바 합의의 실패, 6자회담의 실패, 유엔 안보리 제재의 실패를 돌아보면 북핵을 저지할 유일한 방법은 협상도 제재도 아니고 폭격이었다. 한국이 희생을 감수할 마음이 없음이 분명해졌을 때 그 방법은 메뉴에서 사라졌다.

 

미국은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WMD)가 있다는 의혹만으로 공격했지만 북한은 보란 듯이 WMD 실험을 해도 공격하지 않는다. 극동은 중동과 달리 미국에서 심리적으로 멀다. 한국이 하자고 해도 주저할 판에 한국이 하지 말자는데 나설 이유가 없다.

 

1994년 제네바 합의는 핵무기의 문제를 전력공급의 문제로 치환한 기만적인 것으로, 실패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도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제네바 합의를 믿고 감상적인 남북 정상회담에 매달렸다. 김대중이 2000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을 때 등 뒤에서 북핵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2006년 북한의 첫 번째 핵실험 다음 날 노무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들을 초청해 조언을 구했다. 김대중 회고록에 따르면 김영삼은 “노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을 계승해 포용정책을 펴다가 이런 상황을 초래했다”고 비난했고 김대중은 “북한 핵실험은 조지 W 부시 정부의 대북 강경책이 실패한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둘 다 틀렸다. 김대중 노무현의 햇볕정책이 없었더라도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했을 것이고, 공화당 부시 대신 민주당 고어나 케리가 당선됐더라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이 북한을 제어해 주리라는 헛된 기대에 9년 세월을 허비하며 최종적으로 실패했다. 핵무기는 김씨 세습정권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의 대통령들은 김씨 세습정권의 존립을 보장할 것은 핵무기 외에는 없다는 단순 명백한 사실을 자주 잊어버렸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주한 미대사관 전문(電文)에 따르면 김영삼 대통령은 2008년 미국대사와의 대화에서 “돌아보면 1994년 미국의 폭격을 허락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정말 1994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미군의 폭격을 허락할까. 웬만해서는 북한의 핵 보유를 막을 수 없었는데 웬만한 이상의 노력을 할 자세는 그때나 지금이나, 대통령도 국민도 돼 있지 않다. 우리는 1994년 폭격을 반대했을 때 언젠가 다가올 북핵과의 불안한 공존을 선택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북핵이 현실화했다. 우리 앞에는 다모클레스의 칼을 머리 위에 둔 초(超)불안의 시대가 놓여 있다. 그러나 결국 우리 스스로 선택한 불안이다. 그 불안을 가학적이거나 피학적으로 섣불리 해소하려 하지 말자. 북이 핵을 가진 이제 와서 예방폭격을 하자는 식이어서도 안 되고, 굴종적으로 평화를 사자는 식이어서도 안 된다. 핵무기의 주 용도는 억지력이다. 북한도 핵무기를 실제 써서 스스로를 위기로 몰고 갈 이유가 없다. 김정은이 제 목숨 하나는 귀하게 여길 정도로 정상 상태이길 기도하되 당당히 맞서 북한 세습체제에 균열이 초래될 때까지 더 강한 스트레스를 가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2016년 09월 23일 “韓 핵무기 보유” 찬성 58% > 반대 34%

한국갤럽 여론조사 대북 홍수피해 지원엔 반대 55% > 찬성 40%

북한 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도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주장에 찬성하는 입장(58%)이 반대(34%)보다 우세하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응답자의 4명 중 3명은 5차 북핵 실험이 평화에 ‘위협적’이라고 답했다.

 

한국갤럽이 9월 넷째 주(20∼22일) 전국 성인 1010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23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도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주장에 찬성이 58%, 반대가 34%였다. 이는 지난 1월 4차 북핵 실험 직후 실시했던 조사(찬성 54%, 반대 38%)보다 찬성이 4%포인트 늘고, 반대가 4%포인트 줄어든 수치다.

 

연령 별로는 50대(75%)와 60대(74%)의 핵 보유 찬성 응답이 많았고, 20대와 30대는 각각 39%, 47%의 찬성 입장을 보였다. 새누리당 지지층에서는 찬성(75%)이 반대(20%)를 압도했고,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은 찬성(50%)과 반대(46%)가 팽팽히 맞섰다. 국민의당은 찬성 58%, 반대 36%였다.

 

5차 북핵 실험의 한반도 평화 위협 정도를 물은 결과 ‘매우 위협적’ 53%, ‘약간 위협적’ 22% 등 75%가 ‘위협적’이라고 응답했다. ‘위협적이지 않다’는 응답은 20%에 그쳤다. 최근 함경북도 홍수 피해와 관련해서는 북한이 요청한다면 ‘인도적 대북 지원을 해야 한다’는 답변이 40%였고, ‘지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답변은 55%에 이르렀다.

 

한편, 당청 지지율은 모두 하락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직무 수행에 긍정적이라는 평가는 31%로, 2주 전(33%)보다 2%포인트 떨어졌다. 새누리당도 1%포인트 하락한 33%의 지지율을 보였다. 더민주는 1%포인트 상승한 25%, 국민의당은 1%포인트 하락한 10%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번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홈페이지(nesdc.go.kr)를 참조하면 된다.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

 

2017.08.25 “한국도 이제는 원자력 잠수함을 가져야 한다!” - 유영식 제독의 사자후(獅子吼)

⊙ 원자력 잠수함, 생존성을 지닌 확실한 보복 능력

⊙ 북한의 SLBM 위협에 대응하려면 한국도 원자력 추진 잠수함 가져야
⊙ 원자력 추진 잠수함 연료는 농축도 20% 미만의 상업용 우라늄을 사용하면 돼

유영식
1962
년생으로 해군사관학교를 39기로 졸업했다. 359개월간의 군 생활 가운데 17년간을 해군본부와 국방부 대변인실 등에서 정훈장교로 일했다. 2009년부터 5년 동안 해군 공보과장으로 재직하며, 최장수 해군공보과장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2014년 해군 준장으로 해군본부 정훈공보실장(해군 대변인)을 지냈다.

▲ 1991년 걸프전쟁 이후 미국은 원자력 잠수함이나 이지스함에서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으로 전쟁을 시작했다.

 

오늘날 전 세계 45개국에서 490여 척의 잠수함이 활동 중이다.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인도 등 주요 군사 강국은 원자력 추진 잠수함을 150척 운용하고 있다.
  
 
필자는 해군 장교로 32년을 지냈지만 잘 모르는 분야가 잠수함이다. 1985년 임관하여 수상함을 2년 정도 경험하고 난 후 정훈장교로 복무해 온 필자는 언론의 현장취재를 도우면서 해군에서 움직이고 탈 수 있는 것은 다 체험했다.
  
 
해군 항공기는 P-3C 해상초계기, S-3브라보, 와일드캣(일명 링스), 500MD, UH-60, UH-1H 등등. 해상초계기는 200시간 정도 타 보았다. 수상함은 PK(일명 제비), DDH(지금은 동해안의 안보공원에 전시 중인 강원함), 이지스급, 울산급, 광개토대왕급, 천안함급 전투함들은 물론 기뢰제거함, 순수지원함 등에도 승선해 보았다.
  
 
해군의 전투함을 모두 경험했지만 가장 짧은 시간 동안 타 본 것이 잠수함이다. 2012년에 부산항을 출항하여 3시간 동안 ○○ 해역을 항해하고 온 것이 고작이다. 이처럼 잠수함은 해군에서도 금역이다. 그것은 은밀성 제일주의의 결과이기도 하다
  

  “러시아 해군의 중심은 원자력 잠수함 부대”

 2015년 한국 해군과 러시아 해군 간의 정례 교류회의차 러시아를 방문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합동참모부와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잠수함 장교가 날아왔다
  
 
그에 앞서 매년 동해에서 실시하는 한미 연합 해군훈련에 구역 인근에서 러시아 해군의 정보활동을 우리 군이 포착했다. 때문에 한러 해군교류회의에서 이에 대한 항의성 질의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러시아 잠수함 장교는 “공해상에서의 일반적 수준의 활동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네 수상함의 항해 기록을 보여주면서 한국 해군의 이해를 구했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의 설명이 러시아 잠수함의 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것임을 직감했다
  
 
그날 만찬 자리에서 러시아 잠수함 장교는 디젤과 원자력 추진 잠수함의 차이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를 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군항에 정박한 러시아 잠수함 중 디젤 잠수함은 모두 대위나 소령이 함장이다. 그 잠수함은 이제 교육훈련 목적으로 사용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항한 원자력 추진 잠수함은 아르헨티나 해변가 등 세계 어느 곳이든 필요한 곳에서 작전을 수행한다. 
  
 
그는 만찬 내내 “러시아 해군의 중심은 원자력 잠수함 부대”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러시아 해군사령부가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회의에서 잠수함 장교는 원자력 추진 잠수함의 전략적 가치인 “생존성을 지닌 확실한 보복 능력”에 대해 되풀이 강조했다.  

  
  
이라크전쟁의 교훈

  1991년 걸프전쟁 당시 미국의 로스앤젤레스급 원자력 잠수함 14척은 이라크 지상 시설 타격임무를 수행했다. 미국은 개전 초기 잠수함과 수상함에서 800여 발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했다. 그중에서 약 3분의 1이 잠수함에서 발사한 토마호크였다. 이 미사일들의 주된 목표는 이라크 공군비행장과 공군기들이었다.
  
 
토마호크 미사일 공격으로 이라크 공군은 날아 오르지도 못하고 하룻밤 사이에 궤멸됐다. 군 공항 활주로도 파괴됐다.
  
 
미국은 핵 추진 잠수함의 원거리 미사일 공격은 100% 목표를 달성했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LA 급 잠수함은 36초마다 토마호크 미사일을 1발씩 발사할 수 있다. 1척당 14기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탑재하고 있다. 이 순항 미사일은 475노트(시속 1000km 속도)로 적의 방공망을 피하고, 미사일에 내장된 지도와 실제지형을 비교하며 비행하여 목표지점을 타격한다.
  
 
바닷속에서 솟아오른 미사일을 막아 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걸프전쟁은 전략잠수함의 가치를 입증한 명백한 사례다
  
  12
년 지난 2003년의 제2차 이라크전쟁도 미국 잠수함의 미사일 공격으로 시작됐다. 수백km 떨어진 아라비아 해상의 이지스구축함과 어딘지 모르는 바닷속에 숨어 있는 잠수함에서 날아오는 미사일을 막을 방법은 없다.
  
 
우리 국방부도 2003년 이라크전을 지켜보면서 동맹국 미국의 전쟁 방식과 군사적 능력에 대해 예의 주시했다. 필자를 포함해 이라크전쟁을 지켜본 군인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은 어떻게 시작될까?
  
 
‘강력한 미국은 개전 전에 북한의 주요 기지를 미사일로 정리하고 이어지는 지상전을 한국군에게 맡기겠지?
  
 
‘미국은 북한의 군사적 능력을 조기(早期)에 완전히 와해시킬 정도의 군사력을 집중할까?
  
 
‘미국은 대한민국이 원하는 시기와 장소에 미군의 전력(戰力)을 배치할까?
  
 
이라크가 전쟁 초기 작전의 양상과 그 결과를 지켜보면서 전투 전문가가 아닌 필자도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 전쟁의 양상은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 초기 조영길 당시 국방장관은 “토마호크의 가격이 얼마인가?”라는 질문을 했다. 갑작스런 조 장관의 물음에 국방부나 합참의 전문가들은 답변을 못했다. 조 장관은 토마호크는 미국이 해외에 팔지 않는 무기이기 때문에 가격을 매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어본 것이라는 후문이 있었다.
  
 
‘전력 건설 분야 전문가’라는 평처럼 조영길 장관은 균형적인 사고(思考)과 함께 국방재원을 장기적으로 지·해·공 전력 중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만의 전략적 생각을 지닌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육군 전략가이지만 잠수함의 전략적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즈음 해군은 잠수함 전력 건설 초기에 도입한 209급 잠수함이 도태되는 시기를 고려해 후속사업을 검토 중이었다. 당시 조영길 장관은 이왕 잠수함을 만들려면 3000톤급으로 바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20년을 앞서 있었다. 2015년 해군 잠수함사령부 창설시 그 자리에 꼭 초청해야 할 역대 장관으로 그가 꼽힌 것도 그 때문이었다


  
원자력 잠수함에 눈 돌릴 때

잠수함의 가장 큰 전략적 가치는 적에게 들키지 않고 확실히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공격무기라는 점이다. 정박해 있는 잠수함을 선제 타격하는 방법 말고는 현존하는 탐지수단을 가지고 잠수함을 잡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디젤 추진 잠수함이든 원자력 추진 잠수함이든 자체 사고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면 잠수함이 노출된 사례는 제로에 가깝다. 항구를 몇 개월 전에 출항한 원자력 추진 잠수함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북한의 전략 무기에 의한 위협 중 가장 위험한 것은 잠수함에서 핵탄두가 탑재된 탄도 미사일(SLBM)을 발사하는 경우이다. 북한이 아직 기술적으로 본격적인 SLBM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은 걸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은 이미 2015 5 9일 첫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을 쏜 적이 있다. 북한이 죽자 하고 개발하면 SLBM 보유는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한국 해군이 잠수함을 한 척도 보유하지 못하고 있던 1970년대에 북한은 이미 잠수함을 20여 척이나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한민국 해군이 잠수함을 운용한 지 25년이 지났다. 우리는 디젤 추진 방식의 9척의 장보고급 잠수함과 214급 잠수함은 지속적으로 건조하고 있다. 모두 건조하면 우리나라는 18척의 잠수함을 운용하게 된다. 그러면 아마도 잠수함 보유 척수에 있어서는 세계 7위 정도에 해당될 것이다.
  
  3000
톤급 잠수함의 건조가 시작된 지 약 5년이 흘렀다. 3000톤급 잠수함 건조에 관련한 기업이 대략 3000개에 달한다고 한다. 지금 추진하는 1차 건조 분은 디젤 추진 방식이다. 몇 년 후면 잠대지(潛對地) 미사일 ○○기를 탑재한 3000톤급 잠수함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위협을 생각하면, 디젤 추진 잠수함에 잠대지 탄도 미사일을 탑재하는 정도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접어야 한다. 더 이상 원자력 추진 잠수함에 대해 논의만 해서는 안 된다


  
잠수함용 핵연료 확보 등 가능

잠수함 전문가인 문근식 예비역 해군 대령은 이렇게 주장한다.
  
 
첫째, 한국은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원자로를 수출하는 기술력을 가지는 세계 5위의 원자력 기술 강국이다.
  
 
둘째, 핵 연료는 프랑스 루비급 잠수함이 사용하는 농축도 20% 미만의 우라늄을 사용하면 된다. 현재 국제시장에서 상업용으로 거래되는 우라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셋째, 사용한 우라늄을 농축 및 재처리하지 않고, 이를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에 공개하고 점검을 받으면 핵무기를 제조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을 수 있다.
  
 
넷째, 어떠한 경우에도 농축 및 재처리 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
  
 
원자력 추진 잠수함에 쓰이는 농축 우라늄은 95% 정도로 농축된 연료를 사용하고 있다. 혹자는 원자력 잠수함이 어뢰를 맞거나 기뢰를 접촉해 폭파되면 원자로가 핵무기처럼 폭발하거나 엄청난 핵재앙 사태가 올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원자로의 핵 연료가 핵무기급으로 반응하려면 고농축 우라늄이 여러 개의 고성능 화약으로 기폭되어 핵분열을 일으키는 조건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원자력 잠수함이 피폭(被爆)되어도 원자력 잠수함에 있는 핵연료가 반응할 정도의 고온 고압의 조건이 형성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면 원자력 추진 잠수함 보유에 대한 눈총을 받지 않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은 북한의 핵무기 위협에 놓여 있다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핵무기를 만들자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지금 원자력 추진 잠수함 보유를 추진하기 시작해도 20년 후인 2037년 정도에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전에 북한은 핵탄두 미사일을 탑재한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게 될 것 같다.
  
 
북한을 비롯한 군사강국에 둘러싸인 대한민국은 원자력 추진 잠수함 보유를 향해 나가야 한다. 계속 변화하는 북한의 위협에 쫓아가기에 급급해하는 국방정책은 이제 선택지에서 내려놓아야 한다. 자전거 뒷바퀴를 아무리 굴려도 앞바퀴를 못 쫓아가는 형국을 만들어서는 안 될 일이다. 보다 강력한 선택이 대한민국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안보는 의지가 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보장하는 것이다.

출처월간조선 2017년 9월호

 

2017.08.30  한국의 核 무장론은 환상이다

ICBM 발사가 모든 상황 바꿔… 美, 동맹 위해 본토 피격 무릅쓸까 

북은 인민 고통 무시하고 핵개발, 한국민과 정부 그럴 의지 없을 것

 

7월 4일에 대한민국을 둘러싼 세계는 바뀌었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함으로써 미 대륙을 공격할 능력을 보여준 것은 동아시아의 전략적인 수식(數式)을 불가역적으로 변화시키고, 우리가 익숙해져야 할 새로운 국제 환경을 만들었다.

 

북한의 ICBM 발사에 따른 여파 중 하나는, 한국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논쟁이 활발해지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극소수 정치인과 전문가들만이 토의해온 의제였던 '남핵무장론(南核武裝論)'은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순수한 군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할 필요가 없지 않다. 그렇지만 국내외 상황으로 보면 남한은 핵 개발을 성공적으로 완성할 수 없다.

 

핵무장론자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새로운 상황에서 한국은 수십 년 동안 안보의 절대적인 기반이자 핵심이었던 한·미 동맹을 어느 정도나 믿을 수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을 지키기 위해서 병사 수만 명의 생명을 희생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한국을 지키기 위해 자국 시민 수백만 명을 희생해야 할지도 모르는 무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국이 이런 막대한 위협을 감수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반면,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 북한을 억제할 능력을 충분히 갖게 된다. 게다가 한국의 경제와 기술 수준을 감안하면 핵무기 개발을 이른 시일 안에 해낼 수 있다.

 

그럼에도 '남핵무장론'은 환상에 가깝다. 한국의 핵 개발은 군사적 입장에서 합리적이지만, 너무도 심각하고 다대한 사회·경제적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 개발을 막는 요소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너무 큰 무역의존도, 그리고 민주정치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이 핵 개발을 시작한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한국은 즉시 국제 제재 대상이 될 것이다. 한국의 전략적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면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을 설득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것은 환상일 뿐이다. 핵 확산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밖에 없는 강대국들은 한국의 논리를 이해한다고 해도 한국의 안전과 이익보다 자국의 안전과 이익을 우선시할 것이 명백하다. 한국이 직면할 국제 제재가 대북 제재만큼 심각하지 않을 경우에도, 한국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매우 많이 가하게 될 것이다.

 

   /조선일보 DB

 

중국 문제도 매우 심각하다. 자국의 이익만을 중시하고, 그 밖의 다른 것은 모두 무시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은 동북아시아에서 핵 확산을 유발할 개연성이 큰 남핵을 북핵보다 더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초강경 보복 조치를 취할 것이다. 사실상 대한(對韓) 무역 보이콧의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한국 경제에 1997~98년의 'IMF 위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도전이 될 것이다. 무역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은 한국 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마이너스 성장 때문에 생활수준이 하락할 게 분명하다.

 

마이너스 성장과 심각한 불황에 빠진 국민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기는 어렵지 않다. 핵 개발을 시작함으로써 경제 위기를 야기한 행정부는 차기 선거에서 패배하고, 새로 등장할 행정부가 국제사회와 중국의 압박에 굴복해 핵 개발을 포기할 것이다.

 

북한이 핵 개발을 성공적으로 밀어붙인 것은 무역의존도가 낮은 자급자족 경제와 인민의 고생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절대 독재정치 덕분이다. 물론 핵 개발에 성공한 민주국가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한국과 달리 중국의 보복과 같은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핵 개발을 가로막기 위해 무역 보이콧으로 경제를 파괴할 수 있는 강대국 무역 파트너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한국의 핵 개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한국은 북한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검토해야 한다. 북핵을 최대한 억제하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북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제일 좋은 선택이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북한학

 

2017.09.15 50년대 전술핵 스토리…어떻게 들여왔나

북한의 6 핵실험 이후 미군의 전술핵 재배치를 둘러싼 정치권의 논란이 나라 밖에서도 시선을 끌고 있다.

50년대 남북 군사력 비대칭 심화
이승만,美에 동맹기구 창설 요구 
,“ 빠진 안보동맹 무의미반대
,기구 창설 접는 대신 핵배치 요구 
주둔 비용 줄이려던 정부도 호응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13(현지시간) 한국의 정부가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북한의 6 핵실험으로 인해 관련 논의가 뜨거워지고 있다고 전했다. 과거 배치 사례 등을 통해 가능성을 점검해봤다.
 
전술핵 들어올 있을까=미군의 전술핵은 1950년대 배치됐다가 1991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하면서 철수했다. 그렇다면 전술핵을 다시 들어올 있을까.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소련이 핵미사일인 SS -20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동독ㆍ폴란드ㆍ체코에 배치하자 미국도 1983 핵탄두가 탑재된 중거리 탄도미사일 파싱 2(Pershing II) 서독에 들여놨다 미사일들은 87 체결된 중거리핵미사일폐기협정(INF) 따라 냉전이 종식된 1991 완전 철수ㆍ폐기됐다

 

▲냉전 당시 서독에 배치됐던 미국의 퍼싱2 미사일. 핵탄두를 탑재할 있는 중거리 미사일이다.

 

독일에서 나갔던 전술핵은 미국의 확장억제(핵우산)전략에 따라 다시 통일 독일로 돌아왔다.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인 독일ㆍ이탈리아ㆍ터키ㆍ벨기에ㆍ네덜란드에 180여개로 알려진 전술핵을 배치해 공동 운용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도 전술핵 재배치까지 넘어야 산이 한둘이 아니고 자체도 길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60 전술핵은 어떻게 들여왔나=처음 전술핵이 한국에 배치됐던  1950년대 이승만 정부 때다.
당시 미국은 2차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을 추진하면서 집단안보기구인 유럽과 동남아시아에 각각 나토와 남동아시아조약기구(SEATO) 출범시켰다. 집단적 봉쇄정책의 사각지대가 동아시아였다.

 

1954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구멍에서 기회를 찾았다.   


휴전 이후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었지만 안보 상황은 여전히 불안정의 연속이었다. 특히 소련을 비롯해 동구권 공산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는 북한에 비해 경제와 군사 부문에서 한국의 열세는 더욱 심화됐다. 이런 안보 상황에서 대통령은 미국에 동아시아에도 반공동맹기구 창설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대통령의 구상 속에는 한국과 대만 그리고 SEATO 회원국들이 참여하는 동아시아조약기구(EATO) 있었다. 일본의 참여는 한국 아니라 대만ㆍ필리핀이 반대했다. 하지만 재정 부담을 나눠서 지기를 바랬던 미국에게 일본의 참여는 필수 조건이었다. 미국은 군사적ㆍ경제적 잠재력이 있는 일본이 빠진 동맹기구는 허수아비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EATO 창설은 물거품이 됐다.  
 

57 4 다시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재정 부담이라는 변수를 감안해 EATO보다 작은 북동아시아조약기구(NEATO) 창설을 제안했다. 이번에도 일본은 배제됐다. 일본도 NEATO 참여로 얻는 기대 이익이 없다며 관심을 주지 않았다. 결국 없던 얘기가 됐다. 그러자 이승만 정부는 미국을 향해 핵무기 배치를 요구했다. 권오중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은휴전협정에 구속되는 한국은 국제법상 동맹기구에 참여할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이승만 정부가 요구했던 동맹기구 창설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핵무기를 반입하기 위한 외교적 카드였다 진단했다
 

재정 지출 부담 때문에 주한미군을 줄여야 했던 당시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도 소규모 전력으로 남북간 군사적 균형을 맞출 있다는 계산에서 전술핵 배치를 승인했다. 이승만 정부는 57 6월ㆍ8 차례 핵무기를 배치할 경우 주한미군 감축에 동의한다고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못을 박았다. 50년대 미군의 전술 핵무기 배치는 이렇게 남북의 군사력 불균형 상황에서 외교 레버리지를 확보한 이승만 정부와 재정 부담을 줄이면서도 동북아 세력 균형을 얻을 있다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전략적 고려가 맞아떨어지면서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1952 12 방한한 미국 대통령 당선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경기도 광릉의 수도사단을 시찰하는 모습. 앞줄 오른쪽부터 이승만 대통령 , 아이젠하워 당선자 , 백선엽 육군참모총장.

 

▲1952 12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전선시찰 국기에 대한 의례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아이젠하워 당선자 이승만 대통령.


지금의 안보 상황은=북한의 핵개발이 완성 단계에 접어든 현재의 안보 상황은 60여년 전과 묘하게 맞물린다. 군사 전문가들은 늦어도 연말 또는 내년 초면 한국을 사정거리에 단거리 미사일에 소형화한 핵탄두를 얹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대체로 북한이 미국까지 날아가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완성하기 전까지는 미군의 확장억제력(핵우산) 대한 신뢰가 유지되는 단계로 전력 비대칭 상황이 아니라고 본다. 50년대와 달리 문재인 정부에선 "전술핵 도입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 주장하고 있다


때문에  전술핵 재배치를 공론화 하기엔 상황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정부 소식통은 14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배치를 놓고 일었던 사회적 반향을 고려하면 어디든 전술핵이 배치될 해당 지역의 반발은 가늠하기 어렵다하지만 재배치 문제는 안보 환경 변화에 연동될 있다는 점에서 신중하게 주시해야 문제라고 말했다.  

정용환 기자 narrative@joongang.co.kr  

 

2017.10.10  한국의 핵무장에 반대하는 35%는 누구인가?

▲ 원자폭탄 폭발 시 나타나는 ‘버섯 모양(mushroom-shaped)’의 핵구름photo 미국 후버연구소(hoover.org)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과 ‘리얼미터’는 각각 지난 9월 첫째 주(2017 9 5~7)와 둘째 주(2017 9 13)에 ‘한국의 핵무기 보유(자체 핵무장)’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한국갤럽은 ‘찬성’이 60%, ‘반대’가 35%로 나타났다. 리얼미터는 ‘찬성’ 53.5%, ‘반대’ 35.1%였다. 대한민국 국민을 5000만명이라고 했을 때, 1500만명이 핵무장에 반대하고 있는 셈이다.
   
   
두 기관의 조사는 북한의 6차 핵실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위협 등 북핵(北核)으로 인한 안보 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실시되었다. 그럼에도 국민 상당수가 핵무장에 반대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35%’에 속한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여론조사 결과를 세밀히 분석해 보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19~30
, 화이트칼라·학생 두드러져 

한국갤럽 조사 결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핵무장에 반대하는 직업군이다. 화이트칼라·학생층의 반대가 두드러진다.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은 화이트칼라의 49%가 반대(찬성 47%), 학생은 70%가 반대(찬성 29%)하는 입장을 보였다. 연령별로는 19~29세의 반대 비율이 높았다. 이 연령층에서 찬성은 38%, 반대는 57% 19%포인트 차가 났다. 30대의 반대 비율도 찬성 비율보다 높았다. 찬성이 45%, 반대가 50%였다. 40~60대 이상의 찬성 비율은 다른 연령대에 비해 높았다. 남성의 62%가 찬성, 여성의 58%가 찬성 입장을 보여 남성의 찬성 비율이 여성보다 4%포인트 정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 보면 여당의 텃밭인 광주·전라 지역은 찬성 63%, 반대 30%, 찬성 여론이 두 배 이상 높은 게 눈에 띄었다. 서울은 찬성 50%, 반대 44%였고, 인천·경기는 찬성 58%, 반대 38%였다. 대전·세종·충청과 부산·울산·경남 지역에선 반대 여론이 34%로 동일했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도 핵무장에 찬성하는 비율이 높았다. 민주당 지지자 중 52%(반대 43%)가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반면 자신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47%가 찬성, 48%가 반대 입장을 보여 팽팽히 맞서는 양상을 보였다. 진보적 색채가 강한 정의당 지지자 중에선 57%가 핵무장에 반대해 찬성(40%)보다 더 높았다. 한국갤럽 여론조사를 정리하면, 핵무장에 반대하는 35% 중에는 ‘19~30, 화이트칼라나 학생, 정의당 지지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볼 수 있다.
   
   
장덕현 한국갤럽 기획조사부장은 이 같은 결과에 대해 몇 가지 의미 있는 해석을 내놓았다. 장 부장은 “핵무장 이슈는 개인의 이념 성향과 일치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젊은층, 화이트칼라가 핵무장에 반대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장덕현 부장은 “남성보다 여성이 핵무장에 반대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며 “여성이 남성보다 안전지향성이 크기 때문”이란 이유를 들었다.
   
   
장 부장은 “수도권에서 핵무장 찬성 여론이 높은 이유를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수도권이 북한과 가까운 접적(接敵) 지역이기 때문에 (수도권 거주자들이) 북한의 위협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는 분석이다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TBS 의뢰)에서 두드러지는 지역은 광주·전라다. 한국갤럽 조사에선 이 지역의 찬성 비율이 반대 비율보다 두 배 이상 높았지만, 리얼미터 조사에선 그 반대 양상을 띠었다. 이 지역은 핵무장 찬성 42.7%, 반대 47.0%, 반대가 찬성보다 4.3%포인트 높았다. 나머지 지역은 모두 찬성 비율이 반대 비율보다 높았다. 서울은 찬성 49.1%, 반대 41.0%, 경기·인천은 찬성 55.4%, 반대 36.0%로 나타났다. 대전·충청·세종은 찬성 59.8%, 반대 29.1%였다.


   20
·40, 호남 거주자 반대 높아  

연령별로는 20대와 40대의 반대 비율이 높았다. 20대는 찬성 34.1%, 반대 49.8%로 반대가 15.7%포인트나 높았다. 40대는 찬성 40.2%, 반대 55.4%로 반대 비율이 15.2%포인트나 높았다. 반면 30대는 찬성 53.3%, 반대 38.4%로 찬성 비율이 14.9%포인트나 높았다.
   
   
지지정당별로는 정의당 지지층의 반대가 월등히 우세했다. 찬성 25.5%, 반대 65.2%였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은 찬성 37.3%, 반대 51.5%였다.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지지자들은 핵무장 찬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자신을 ‘중도’라고 여기는 사람의 경우 찬성이 49.3%, 반대 37.8%였으며, ‘진보’라고 여기는 사람의 경우 찬성 37.9%, 반대 54.3%로 나타났다. 리얼미터 조사 결과를 요약하면, 핵무장에 반대하는 35.1% 중에는 ‘20대 혹은 40, 호남 거주자, 정의당 지지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볼 수 있다.
   
   
권순정 리얼미터 조사실장은 두 가지에 주목했다. 첫째는 핵무장에 반대하는 35.1%가 실제보다 더 높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핵무장에 반대하는 35.1% 대부분이 문재인 정부의 핵심 지지층, 다시 말해 진보 성향”이라고 분석했다. 권 실장은 “30대도 특별히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20·30·40대 전체를 대상으로 조사해 보면 (핵무장) 반대 비율이 50%가 훨씬 넘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한국갤럽 여론조사와 비교했을 때 호남의 핵무장 찬반 비율이 엇갈린 이유에 대해 그는 “여론조사 시점의 차이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갤럽이 핵무장 여론조사를 한 시점이 9 5~7일인데, 이때는 북한이 6차 핵실험(9 3)을 한 직후란 것이다. 권 실장은 “갤럽 조사 당시는 안보 이슈가 한창 달아오를 때라 호남인 다수가 핵무장에 찬성 입장을 보인 것 같다. 우리(리얼미터) 조사는 9 13일 이뤄져 (갤럽 조사 때보다) 안보 이슈가 조금 누그러졌을 때”라고 설명했다.
   
   
그는 중도층의 변화에 주목했다. “북한의 도발이 지속되면서 중도층도 보수층과 비슷한 색깔을 보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에 따르면, 보수층만으론 핵무장 찬성 여론이 50~60%가 나오기 힘들다고 한다. 중도층이 핵무장 찬성 쪽으로 옮겨가 핵무장 찬성 여론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론조사를 전문적으로 보도하는 홍영림 조선일보 기자도 “핵무장 여론조사는 정치 성향에 따라 좌우된다”고 분석했다. 홍 기자는 “젊은층이나 진보층이 핵무장을 심각하게 고민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당의 메시지(핵무장 반대)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홍 기자도 “중요한 건 중도층이 핵무장 찬성에 쏠렸다는 거다. 과반수를 넘는 핵무장 찬성 여론이 조성된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호남의 핵무장 찬반 여론이 서로 엇갈리게 나온 이유에 대해 그는 “안보 이슈는 주로 연령 변수가 크게 작용한다. 예컨대 호남의 고연령층이 문재인 정부의 모든 정책을 다 지지하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홍영림 기자는 “여성이 안전에 대해 관심이 큰 건 사실이지만, 핵무장에 찬성하는 여성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안보 전문가들은 핵무장에 반대하는 35%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을까. 김희상 한국안보문제연구소 이사장(예비역 육군 중장)은 핵무장에 반대해왔던 이 중 한 명이다. 그는 35%에 대해 “북한에 대한 기본 인식이 결여돼 있는 이른바 안보불감증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진단했다. 김 이사장은 “그들에겐 ‘설마 북한이 우리에게 핵무기를 쏘겠냐’는 인식이 깔려 있다”며 “미국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체제 수호 수단으로 (북한이) 핵을 개발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35%”라고 분석했다. 그는 “김정일은 처음부터 한반도 적화통일을 목적으로 핵을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핵무장 찬성론자인 전성훈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원은 “35%는 자체 핵무장을 북한에 부담을 주는 정책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화이트칼라와 학생 등 고학력층의 반대 비율이 높은 이유’에 대해서는 “젊은 세대는 북한이 주는 위협에 대한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 안정된 현실을 추구하려는 경향도 짙다”고 분석했다. 그는 “북한이 생존을 위해 핵을 개발한 것이란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그 역시 핵무장 반대 비율이 높은 요인 중 하나”라고 말했다. ‘우리가 (미·북 간의 다툼에) 왜 말려들어야 하나’란 인식을 35%의 사람들이 갖고 있다는 의미다. “핵무장 반대 35% 구조가 타파될 것으로 보는가”란 질문에 그는 “북한이 우리에게 수모를 줄수록 젊은층의 (핵무장) 찬성 비율이 높아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출처주간조선 2477   조성호 주간조선 수습기자

 

■핵보유국

인류를 위협하는 거대한 탄두 '핵무기'에 대한 걱정이 현실이 됐다. 북한은 연일 도발을 일삼고, 우리는 북한과 강대국들 사이에서 '핵 인질'이 됐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보유국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왔고, 이후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조선DB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인정하는 핵무기 보유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이다. 이들 5개국은 유엔(UN) 안전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모두 1967년 1월 1일 이전에 핵실험을 마쳤다. 최초 핵실험 시기는 미국 1945년 7월, 러시아 1949년 8월, 영국 1952년 10월, 프랑스 1960년 2월, 중국 1964년 10월이다. 그러나 인도와 파키스탄은 1974년과 1998년 각각 핵실험을 했고, 이스라엘은 비록 핵실험은 실시하지 않았으나 핵무기 보유국으로서 사실상 인식되고 있다.

 

 

1968년 7월 1일 유엔에서 채택되어 1970년 3월 5일에 발효된 다국간 조약이다. 이는 1960년 프랑스, 1964년에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여 2차 대전 패전국의 핵무장을 우려한 미국의 의견에 따라 성립된 것이다. 조약은 1967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핵클럽* 멤버, 즉 핵보유국 5개국을 제외한 나머지 비핵보유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금지하고 핵보유국이 비핵보유국에 핵무기를 넘겨주는 것에 대한 금지를 골자로 한다. 국제사회의 핵무기 확산을 적극 억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대신 비핵보유국은 그 대가로 원자력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으며, 핵보유국 5개국은 궁극적으로 모든 핵무기 철폐를 목표로 한 핵무기 감축 협상을 벌일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핵확산금지조약 가입은 곧 평화적 핵 개발에 필요한 각종 기술공유와 지원을 위하여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는 것으로, 200여 국가가 조약에 가입되어 있다.

 

 

핵클럽 멤버들은 핵확산금지조약 체제를 가동하여 추가 핵보유국이 등장하는 것을 봉쇄하려 했는데, 이는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국제사회에서 외교적·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조약의 불평등성에 대한 지적과 함께, 북한의 핵 실험으로 인해 NPT와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주축으로 한 세계 핵 비확산 시스템의 한계에 대한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은 NPT 회원국이 아님에도 비공식적으로 '사실상 핵보유국'의 지위를 부여받은 경우다. 이들은 핵 보유를 선언한 다음, 미국이 이를 용인하고 국제 사회가 묵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북한은 1985년 NPT 가입 이후 1992년 NPT 탈퇴를 선언·주장해오고 있지만, 국제 사회는 여전히 NPT의 회원국으로 판단하고 있다. 북한은 그동안 국제사회의 비난과 경제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번까지 포함해 총 6차례의 핵실험을 감행했다.

 

/1985년 이후 북한 핵무기 개발 관련 일지

 

北 '파키스탄 코스' 코앞까지 왔다

북한이 최근 미사일 도발에 이어 6차 핵실험까지 감행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파키스탄식 모델 직전까지 이르렀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북한은 파키스탄과는 상황이 다르다. 파키스탄과 인도는 애초에 NPT에 가입하지 않고 독자 노선을 걸었다. 하지만 북한은 1985년 NPT에 가입해 핵물질을 제공받는 혜택을 누리면서 몰래 핵무기를 개발해왔다. 2002년 비밀 우라늄 농축시설이 발각돼 갈등을 빚자 2003년 일방적인 NPT 탈퇴를 선언한 후 핵실험을 본격화했다. NPT는 탈퇴가 인정되지 않는 조약으로, 북한은 첫 핵실험 뒤 지금까지 8차례에 걸쳐 유엔 안보리의 제재를 받았다.

 

 

파키스탄은 NPT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엔 안보리의 제재를 받은 적이 없다. 1998년 파키스탄의 핵실험 이후, 미국은 파키스탄에 대해 독자 제재를 가했다가 2001년 9·11 테러 직후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제재를 풀었다. 

 

북한 김정은에 대한 시각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본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핵 능력 고도화를 통해 핵보유국의 지위를 인정받은 상태에서 미국과 담판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 통해 비핵화가 아닌 '핵 동결'을 대가로 북·미 관계 정상화와 주한 미군 철수 등 '숙원'을 이루겠다는 계산이란 것이다.

 

미국 트럼프에 대한 시각

북한의 경우 '미국의 인정'을 받으면 핵보유국의 지위가 인정된다고 하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연일 다른 언행에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이러다 북한과 거래라도 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8월 31일(현지 시각) "트럼프 대통령이 군사행동보다는 북한과 '위험한 거래'를 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NYT는 트럼프 대통령을 '혼자 행동하는 예측할 수 없는 협상가'로 표현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사업가 기질을 발휘하다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거나 한·미 군사훈련을 축소하는 '최악의 거래'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럴 경우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의 동맹국과 미국이 갈라서고, 오랫동안 북·미 간 직접 대화를 지지해 온 중국만 이득을 보는 상황이 올 수 있다고 NYT는 전했다.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야하나

전문가들이 보는 한국의 선택 
"
전술핵으로 '공포의 균형' 이뤄야"

 

전문가들과 군 관계자들은 북한의 완성된 핵무기에 대응하는 방법은 핵 무장 외에는 없다고 본다. 한국이 독자 핵무장을 추진할 경우 그 파장이 너무 크기 때문에 미군의 전술핵무기를 들여와 한국이 사용권을 일정 부분 나눠 갖는 방안이 주로 제기된다. 

 

국정원 1차장을 지낸 남주홍 경기대 교수는 4일 "6차 핵실험으로 이제 한국은 북한의 '핵 인질'이 됐음이 공식화됐다"며 "이런 판국에 대화·협상론은 허망한 레토릭이다. 전술핵 재배치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했다. 이에 반해 "전술핵 재배치는 북한의 핵 능력 고도화를 막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된다"(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는 의견도 있다.

조선일보 뉴스큐레이션

 

2016.09.10 이번 '北核' 서울서 터지면… 반경 4.5㎞ 초토화, 62만명 사망

- 北의 핵탄두, 실제 위력은

  우리軍은 10~12㏏ 추정했지만 전문가들 "실제론 위력 더 클듯" 美 측정치로는 20~30㏏ 예상

서울 상공에서 10㏏만 터져도 12만~23만명 사망·31만명 중상 방사능 낙진 등 추가 인명피해도

 

북한이 9일 함경북도 풍계리에서 감행한 5차 핵실험은 종전 핵실험보다 위력이 커졌다. 정부는 이날 북한의 핵실험으로 생긴 인공지진파가 규모 5.04라고 밝혔다. 이는 TNT 폭약 10~12㏏(1㏏은 TNT 1000t 위력)의 폭발력이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15㏏)의 80%에 육박한다. 지난 1월 4차 핵실험 위력이 지진 규모 4.8에 6㏏ 정도로 관측된 것에 비춰볼 때 폭발력이 2배쯤 증가한 것이다. 지진 규모가 0.2씩 증가할 때마다 그 위력(에너지)은 2배 커진다.

 

일부 전문가는 국방부 등이 가급적 위력을 줄여 발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폭발력이 더 강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미 지질조사국(USGS)은 이번 인공지진이 규모 5.3이라고 밝혔다. 그럴 경우 핵폭발 위력은 20~30㏏으로 추정된다. 이번 핵실험 폭발력이 히로시마 원폭급을 넘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북한은 2013년 3차 핵실험 이후 최소 6㏏ 이상의 위력을 갖는 핵폭발 능력을 안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에 북한이 실험한 규모의 핵폭탄이 서울 상공에서 터졌다면 40만~50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반경 수㎞ 이내가 초토화될 것으로 추정했다.

 

지난 1998년 미 국방부가 비밀리에 15㏏ 위력을 가진 핵무기가 서울 용산 상공에서 폭발했을 때 피해 범위를 모의실험한 적이 있다. 당시 시뮬레이션 결과 반경 150m 이내 건물은 증발하고, 1.5㎞ 이내 사람은 전신 3도 화상을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망자는 총 62만명이나 생기는 것으로 추정됐다. 15㏏의 폭발력을 기록한 히로시마 원폭은 13만5000여 명의 사망자를 냈다.

 

2010년 미국 랜드연구소의 브루스 베넷 박사가 발표한 '북한 핵위협의 불확정성'에선 TNT 10㏏ 규모 핵폭탄이 서울의 주택가에서 터질 때는 12만5000 ~23만5000명이 사망한다고 예측했다. 부상자를 포함하면 사상자가 28만8000~41만3000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병원도 일순간 아수라장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즉사자 3만명이 이송되고 이어 중상자 31만명과 경상자 20만명에 방사능오염에 불안감을 느낀 사람들 80만명까지 총 134만명이 병원으로 몰릴 것으로 추정했다. 올 3월 현재 군을 포함해 전국 병원의 병상 수는 57만8252개인 점을 감안하면 치료 시스템이 거의 마비된다는 이야기다.

 

과거 3차 핵실험(2013년 2월)과 4차 핵실험(올 1월)의 위력은 이번 핵실험의 절반 수준인 6~7㏏으로 추정됐다. 황일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500m 상공에서 3·4차 핵실험 때와 같은 6㏏(TNT 6000t) 규모의 핵폭탄이 폭발했다고 가정하면 불길은 반경 1.2㎞까지 번지고, 건물 파손은 반경 2㎞까지 번질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러나 3·4차 핵실험 때의 두 배에 해당하는 폭발력을 나타낸 5차 핵실험 수준의 핵폭탄이 터진다면 피해 규모는 훨씬 커질 가능성이 있다. 황 교수는 "10㏏ 핵폭탄이 폭발했다고 가정하면 반경 1.68㎞까지 13만2500여 명이 직접 피해를 보고 그 가운데 90%가 사망해 약 12만명이 즉사하는 것으로 나온다"며 "최대 12㏏까지 추정되는 이번 핵실험의 위력을 지닌 핵폭발이 서울 상공에서 일어났다면 건물 매몰로 인한 사망자를 포함해 40만~50만명이 목숨을 잃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예측에는 방사능 낙진 등으로 생기는 인명 피해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안보 부서 당국자는 "북한이 이번 핵실험을 통해 탄도미사일에 핵탄두를 탑재하는 소형화에 기술적 진전을 이뤘다면 위협의 차원이 달라진다"며 "북한 핵폭탄이 현실화한다면 우리에겐 대재앙"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2016.09.12 5차 핵실험 이후의 한반도 어디로 가는가

북한은 5차 핵실험으로 소형 핵탄두를 탑재한 미사일의 실전 배치에 한 발짝 다가섰다. 한반도의 안보 상황은 그만큼 더 위험해졌다. 중국의 대북 제재는 허점이 많아 올해 들어 북·중 무역은 오히려 늘었고, 북의 무기 프로그램 부품 구매도 더 용이해졌다는 보고서도 미국에서 나왔다.

 

김정은의 계산은 분명해 보인다. 핵미사일의 실전 배치를 무기로 미국에 선(先) 평화협정 체결을 압박할 것이다. 그러면서 비핵화를 북·미 회담의 의제로 삼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다. 작년부터 중국이 주장해온 비핵화와 평화협정 동시 논의 제안까지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북은 평화협정의 당사자에서 아예 한국을 배제하고 있다.

 

평화협정을 맺게 되면 북은 이제 평화가 왔으니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는 핵우산과 미군도 철수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핵 폐기 대신 기껏 핵 활동 동결이나 장거리 미사일 폐기 등을 대가로 지불하겠다고 나설 것이다. 한국에 대해서는 핵 보유로 확보된 군사 전략상의 우위를 활용해서 주도권을 쥐고 대남 전략을 펼치려 할 것이다.

 

5차 핵실험과 같은 북의 도발적 상황에서도 중국은 움직일 생각이 별로 없을 것이다. 물론 중국은 '원칙적으로' 핵무장에 반대하고 유엔의 대북 제재 강화에 적당한 수준에서 협력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정말 아프게 생각하고 비핵화의 길로 나설 만큼의 고강도 제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제재 강화로 자칫 북한이 무너질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드 배치 결정이 중국의 협조 가능성을 더욱 낮추고 있다.

 

미·중 대결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최고 지도자들은 북한 문제를 미·중 관계의 다른 현안들과 연계해 바라보는 듯하다. 한마디로 남중국해나 대만 문제를 놓고 미국과 만족할 만한 거래가 성사되기 전까지 중국은 핵무장한 북한과 공존할 용의가 있는 것이다.

 

미국은 미국 나름대로 고민이다. 임기 말에 접어든 오바마 정부는 대북 금융 제재의 길을 터놓기는 했지만 미·중 갈등의 심화를 우려해서 실시를 유보해왔다. 결국 차기 정부로 공이 넘어갈 텐데, 그때 고려할 수 있는 대북 조치로 전면적인 금융 제재와 해상 봉쇄가 미국 언론에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대북 금융 제재는 중국의 반발이 거셀 것이고, 모든 선박의 북한 항구로의 입출항을 검색하는 해상 봉쇄도 북한의 도발 가능성이 높아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

 

이처럼 긴박해지는 상황에서 국내에서는 독자적인 핵 개발론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한 주장을 하게 된 답답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이는 북핵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추가적인 문제를 만들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미국과 비핵화 규범을 존중하는 180여 국가들에 북한에 더해 또 다른 골칫거리로 등장할 것이다. 미국은 '당신네가 우리를 못 믿고 핵 개발하겠다면 우리는 핵우산과 미군도 철수하겠다'고 나설지 모른다. 게다가 무역으로 먹고사는 한국에 대해 경제 제재가 들어오면 과연 얼마나 견디어낼 수 있을까?

 

이처럼 우리는 북한 문제의 핵심 당사자이면서도 가장 큰 무력감을 느낀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지경에 빠지게 하였을까?

 

4강에 둘러싸인 반도이기에 북한 문제는 원래부터 국제화될 소지가 아주 강했다. 그런 상황에서 진정으로 우리 주도로 북핵이나 통일 문제를 풀어가기를 원했다면 북에 대해 우리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렛대를 키워 왔어야 했다. 냉전 종결은 그 기회를 주었으나 우리는 그것을 놓쳐버렸고, 그래서 이제 북한 문제는 완전히 우리 손을 떠나버렸다.

 

때로 당국 간 관계가 어렵고, 안보상의 충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국적으로 멀리 보고 경제나 사회 차원에서 남북 주민들 간의 연결고리만큼은 강화하고 접촉의 면을 확대하는 데 최선을 다해 왔어야 했다. 그렇게 지난 10여년 계속했더라면 북의 대남 의존도가 훨씬 높아져 지금쯤 중국 대신 한국이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못해서 이제 우리는 미·중만 바라보는 딱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민족 내부 역량을 키우지 못해 거센 외세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는 모습이 구한말이나 1945년 분단 당시나 지금이 다를 게 없다는 점이 진정 가슴 아프 다.

 

독일은 일찌감치 동·서독 간 응집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그래서 보수 정치인 헬무트 콜 총리는 1982년 집권하자 경쟁 정당 사민당의 동방정책을 과감하게 계승했다. 주변 우방 강대국들이 분단 상태의 관리에만 신경 쓰고 분단 해소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것이 통일을 이룬 독일과 분단의 골짜기에서 헤매고 있는 한국의 근본적인 차이다.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前 외교부 장관

 

2016.09.22 '北爆부터 核인질까지' 마음의 준비 해야

존 하이튼 미국 전략사령관 내정자가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북한이 결국 핵탄두를 탑재한 ICBM(대륙간탄도탄)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군 최고위 담당자가 북핵 실전 배치를 기정사실화한 것이다. 북핵을 폐기시키려고 북한 정권을 망하게 할 수는 없다는 중국이 있는 한 북핵은 막을 수 없다. 북한이 이를 잘 안다. 북이 새로 개발한다는 로켓(대륙간탄도탄)도 한두 번 실패할지는 몰라도 결국 성공할 것이고, 위협적인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을 3~4기 실은 신형 잠수함도 결국 우리 눈앞에 등장할 것이다. 한·미 당국이 뭐라고 말하든 지금까지의 북핵 폐기 시도는 전부 실패했다.

 

몇 달 전 경험 많은 외교관에게 '모든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고 북핵 실전 배치가 현실이 됐을 때 벌어질 일은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 외교관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이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타격"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미국의 대북(對北) 예방타격을 상상 속의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실제 벌어질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 그러나 미군의 서랍 속에 들어 있던 예방타격 작전계획이 이미 그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인들은 말보다 행동이 무서운 사람들이다. 과거 우리나라의 한 외교부장관이 "미국인들은 가장 전쟁을 많이한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미국의 역사와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맞는 말이다. '전쟁하는 사람들'이란 것은 군사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섰을 때 주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북한과 같은 집단으로부터 미국 도시들이 핵위협을 받게 되고 이의 정치적·외교적·군사적 부작용이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분석이 나오면 F-22 스텔스 전폭기가 대량으로 북한 하늘을 가로지를 수 있다. 영화 속의 얘기가 아니다. 미국은 그런 나라다.

 

이스라엘이 이라크의 원자로를 공습으로 파괴했을 때 미국 대통령은 레이건이었다. 보좌관들은 미국의 동의를 받지 않은 이스라엘의 독자 군사행동에 대해 제재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레이건은 돌아서 나가는 참모들 등에 "남자애들은 원래 그런 거야"라고 했다 한다. 레이건 이후 그같이 하지 않았을 미국 대통령들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미국의 대북(對北) 공습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는 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미, 전격 북 공습'이란 충격적 뉴스가 어느 날 TV 자막에 뜨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현실 인식은 가져야 한다.

 

미국은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도 북한 공습 직전까지 갔다. 포기하게 된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한국 정부의 강력한 반대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우리 사회엔 어떤 결정적인 국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를 흘릴 수 있다는 합의가 전혀 없다. 하다못해 주식 값만 떨어진다고 해도 난리가 날 것이다. 미국 공습으로 북핵의 근원을 없애버릴 수 있다고 해도 서울에 포탄이 떨어진다면 절대 안 된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북한에 완전히 인질로 잡혀 있는 셈인데 때로 경찰은 인질의 희생을 감내하고 진압작전을 펴기도 한다. 그런 일은 정말 절대 없을까. 마음의 준비는 해야 한다.

 

미국이 최종적으로 공습을 포기하게 되면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미국과 북한의 직접 대화가 시작될 것이다. 미국은 북 정권을 관리 가능한 상태로 두어야 할 필요가 있고 북엔 국제 제재를 벗어나 한반도의 주도권을 본격 행사한다는 오랜 숙원이 있다. 협상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북 정권이 공고해지고 한·미동맹이 약화되는 추세가 생기는 것은 예상할 수 있다. 최선은 북핵 폐기와 미·북 수교, 유엔과 미·중 보장에 의한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이고 최악은 주한미군 철수 조건의 북핵 동결일 것이다. 그 중간 어디쯤이라고 해도 미국에 안보를 전적으로 의존해 살던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엔 격변이 불가피하다. 그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미국이 공습도 할 수 없고 미·북 협상도 실패하면 핵 국가들 사이에 낀 비핵국가로서 이리저리 치이면서 살아가야 한다. 느닷없이 닥치는 위협에 놀라기도 하고 매우 굴욕적인 상황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언제 터질지 모를 화산 옆에 사는 주민들 처지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때도 우리 사회의 불감증이나 여론 분열은 여전하겠지만 한반도 안팎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강도와 심각성이 지금과는 달라서 불안한 기류가 미세먼지처럼 우리 미래를 가릴 것이다. 그런 상황에 대해서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핵무장이나 전술핵 재배치 등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주장 이상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 우 리 한계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 체제가 아니고 그럴 결의도 없다. 당장 전술핵 재배치에 미국이 동의한다 해도 주민 반대로 어디 갖다 놓을 곳도 없을 것이다. 재래식 군사 대비나마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면서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도 시간은 우리 편일 것이란 희망을 갖는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어려운 시기를 지날 수 있다.

조선일보 양상훈 논설주간

 

 

월간조선 2018.05월 호  압둘 카디르 칸

파키스탄 핵폭탄 만든 압둘 카디르 칸 박사의 육필 회고

■핵무장한 숙적(宿敵) 인도에 맞서 만난을 무릅쓰고 핵()무장에 나서다

1974 5월 인도의 원폭 실험에 위기를 느끼고 부토 총리에게 편지 보내 우라늄 농축 핵개발 건의
⊙ 유럽에서의 편안한 생활을 접고 1975 12월 귀국, 이듬해 ‘기술연구실험실’(핵개발 위장 연구소) 설립
⊙ 월급 300달러의 박봉, 파키스탄원자력에너지위원회 소속 과학자들의 음해, 미국의 압력, 서구 국가들의 방해 극복하고 핵개발 성공
⊙ 파키스탄 국가지도부, 쿠데타와 잦은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핵무장 밀어붙여

미안 압둘 와히드
1935~2017
. 파키스탄 펀자브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同 라호르 정부대학 경제학 석사. 미국 터프츠대학교 플레처 국제법·외교대학원 석사 / 외교부 서유럽과장, 주독공사, 주이탈리아대사 겸 주말타·알바니아·식량농업기구(FAO)·세계식량계획(WFP)·국제농업개발기구(IFAD) 대사, 주독대사, 하원의원(3), 하원 외교위원장 역임

송종환
1944
년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 학사, 석사. 미국 터프츠대학교 플레처 국제법·외교대학원 석사, 한양대 정치학 박사 / 1970년대 초·중반 남북적십자회담·남북조절위 회담 참가, 주유엔 공사, 주미공사, 국가안전기획부 해외정보실장, 명지대 초빙교수, 주파키스탄대사 역임, 현재 경남대학교 석좌 교수 / 《북한 협상행태의 이해》 《가까이 다가온 자유민주주의 통일과 과제들》 《북한 어디로 가나》(공저) 《남북회담: 7·4에서 6·15까지》(공저) 《통일을 앞당겨 주소서》(공저) 출간

번역·해설 : 송종환 경남대 석좌교수·전 駐 파키스탄대사

▲1974 5 18일 파키스탄의 잠재적 적국(敵國) 인도가 핵()실험을 했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는 “풀만 먹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후 1998 5 28일 핵실험에 성공할 때까지 파키스탄은 쿠데타 등 수차례의 정권교체를 겪었다. 그러나 파키스탄 국가지도부는 국가 발전정책 방향과 지역출신은 달랐어도 핵개발만은 중단하지 않고 전폭 지원했다.     

 

압둘 카디르 칸 박사는 벨기에에서 박사 학위를 한 우라늄 농축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는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유럽 명문대학의 교수로서의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1975 12월 스스로 귀국했다. 그는 300달러 정도의 적은 월급을 받는 희생을 감수하면서 바늘 하나 만들지 못하는 개발도상국에서 1984 12, 본격적으로 핵개발에 착수한 지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핵무기를 만들어 내는 기적을 이루어 냈다.     

 

역자(譯者) 2013 6월부터 3년간 파키스탄 주재 대사로 근무하면서 미국 터프츠대학교 플레처국제법·외교대학원 선배인 미안 압둘 와히드 전 주독(駐獨) 파키스탄대사와 친분을 나누었다. 그는 2013년 펴낸 회고록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핵 국가로서 파키스탄의 출현(Before Memory Fades: Emergence of Pakistan As A Nuclear Power)》에서 자신이 칸 박사의 핵개발을 외교적으로 지원했던 사실을 기술(記述)했다. 역자는 이 내용을 《월간조선》 201312월호에 소개한 바 있다     

 

2016 11월 말 와히드 전 대사는 새로 발간할 회고록 《파키스탄 핵폭탄을 만들다(Pakistan Makes the Atom Bomb)》의 초안(草案)을 역자에게 보내면서 서문을 써 달라고 요청했다. 와히드 대사는 이 책에는 역자가 파키스탄 대사 재임 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 압둘 카디르 칸 박사가 직접 쓴 부분도 있어서 한국에서도 흥미가 있을 것이라면서 한국에서 이 책을 내 줄 출판사를 물색해 달라고 부탁했다.     

 

역자는 국제정치학자 한스 모겐소가 “다투는 두 나라 중 핵 위협을 받는 나라가 핵 반격 수단이 없으면 1945 8월 미국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후 일본처럼 완전 파괴되거나 무조건 항복이라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고 경고한 구절을 인용하여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한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평가하는 서문을 보냈다. 하지만 2017 10월 와히드 전 대사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회고록은 발간되지 못했다.

 

▲미안 압둘 와히드 전 대사(왼쪽)와 압둘 카디르 칸 박사. 와히드 전 대사는 귀국을 희망하는 칸 박사의 편지를 상부에 전달했고, 외교관으로서 칸 박사의 핵개발 작업을 지원했다.

 

  와히드 전 대사는 평소 역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리고 새로 쓴 책에서 “미국이 핵개발을 하려는 파키스탄에 강한 위협과 압박을 가했지만, 2001년 아프간 전쟁에서 파키스탄 군부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하게 된 이후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묵인하게 됐다”고 말하곤 했다. 역자는 그가 넌지시 “한국도 북한 핵에 인질이 되지 말고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미국의 양해를 구하여 독자적인 핵개발을 해야 한다”는 충고를 한 것으로 이해했다.     

 

역자는 와히드 전 대사의 회고록, 특히 압둘 카디르 칸 박사의 회고 부분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와히드 전 대사의 아들 자팔 와히드 사장은 칸 박사가 직접 쓴 부분의 출처를 명시하는 조건으로 번역해 한국 매체에 기고해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 이 책에는 칸 박사가 우라늄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기를 북한에 제공하고 그 대가로 노동미사일 부품과 기술을 받아서 1998 4 6일 ‘가우리’ 미사일 1호 발사 시험에 성공한 일 등 북한과 파키스탄 간 협력에 관한 내용(2009 12 28일자 《워싱턴포스트》의 칸 박사 인터뷰 참조)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유고(遺稿)에는 북한 핵위협에 직면한 조국을 걱정하는 역자의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중요한 부분이 있었다.     

 

〈모하메드 지아 울 하크 대통령은 1986년 직접 델리의 라지브 간디 총리에게 ‘만일 인도가 어떠한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파키스탄은 그에 보복할 능력이 있다’고 통보했다. 파키스탄이 핵무기와 이를 운반할 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두 국가 간의 큰 규모 전쟁은 과거사가 됐다. 이제 인도와 파키스탄은 모두 핵전쟁의 비용과 피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서 큰 규모를 할 수 없게 됐음을 깨닫게 됐다.          

 

북핵 폐기 안 되면, 한국도 핵무장해야   

▲파키스탄대사 시절 칸 박사(왼쪽에서 두 번째)와 자리를 같이한 송종환 전 대사(오른쪽 끝).

 

  4 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5월에는 미·북 정상회담도 열릴 것으로 보인다. 이 두 회담에서 북한 핵폐기 문제를 타결하여 평화를 확보하고 공동번영의 길로 나아가길 기원한다. 그러나 북한은 1985년부터 2012년까지 27년 동안 상대를 바꾸어 진행한 핵폐기 협상에서 여덟 차례나 ‘합의·파기’를 한 바 있다. 북한은 그렇게 핵무기 개발의 시간을 벌어서 2006 10 9일부터 2017 9 3일까지 6차례의 핵실험을 했다.     

 

북한은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핵폐기가 아니라 주한미군 철수를 목표로 하는 ‘조선반도 비핵화(非核化)’를 주장하고 있다. 때문에 남북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폐기에 대한 획기적 진전이 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직접 당사자로서 한국은 1992 1 20일 북한과 합의한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않을 것을 문서로 약속한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의 이행을 위해 북한의 핵시설 신고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의한 북한 핵시설의 즉각적 사찰과 검증을 요구해야 한다. 회담 성과가 없으면 한국은 북한에 보상과 경제협력을 언급하면서 미련을 갖거나 더 이상 속아서는 안 된다. 그때 한국은 모겐소 교수가 경고한 ‘공포의 균형’을 채택해야 한다.     

 

북한 핵 위협에 대하여 일차적으로 자강(自强)과 함께 사드(THADD) 신속 배치, 한반도 전술핵 재배치로 확장억제책을 보다 구체화해야 한다. 1962년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인도가 중국의 1964년 핵실험에 맞서 1974년 핵실험으로 대응하고, 파키스탄이 숙적 인도의 핵무장에 맞서 1998년 핵실험을 한 사례에 따라 한국도 독자적인 핵무장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북한이 ‘조선반도 비핵화’를 내세워 시간을 끄는 상황에서 한국은 미국에 “미국의 양해하에 한국이 핵무장을 추진할 경우 북한의 도발을 억지하여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키는 한편, 남북한 간에 ‘진정으로 대화’를 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고, 또 북한이 미국 본토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견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로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보다 경제적으로 50배 이상 우세한 한국에는 왜 “풀만 먹더라도 독자적으로 핵을 개발하여 북한 핵을 억지하겠다”는 국가지도자가 나오지 않는가? 왜 정부는 지도부가 실패한 유화책(宥和策)으로 다시 국민의 안보의식을 해이하게 하고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가?     

 

북한의 우라늄 농축 핵개발을 도운 칸 박사는 우리로서는 좋게 보기 어려운 인물이다. 하지만 파키스탄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유럽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박봉을 감수하면서, 파키스탄 국내의 기득권을 가진 과학자들의 방해와 음모, 미국 등의 압박을 이겨내고 끝내 핵개발에 성공해 안보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해낸 애국적인 과학자일 것이다.  

 

  와히드 전 대사의 회고록에 수록된 칸 박사의 회고록   

▲압둘 카디르 칸 박사를 다룬 2005년 2월 15일자 《타임》지.

압둘 카디르 칸 박사 

1936년 인도 보팔 출생. 카라치대학교 이학학사, 네덜란드 델프트 과학기술대학교 이학 석사, 벨기에 루뱅 가톨릭대학교 금속분야 박사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물리동력화연구소(FDO, 우라늄 농축) 연구원, 1975년 파키스탄 귀국, 1976년 기술연구실험실 설립, 1998년 장거리 미사일 ‘가우리’ 1호 시험발사 성공, 1998년 핵실험 성공

  

  국가가 추진한 중요한 과제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유지하는 것은 관례적이다. 이 기록은 그들의 성과와 공헌을 기술(記述)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우리 군인들의 용맹한 행위와 파키스탄을 위해 싸우고 자신들을 희생한 영웅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나라의 국방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 존립을 유지시킨 영웅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세계 제2차 대전 직전인 1939 1 6일 독일의 과학자인 오토 한과 프리츠 스트라스만은 중성자(中性子) 충격을 통한 우라늄 핵분열 실험에 성공했다. 이렇게 핵시대가 시작된 이후 미국과 서방세계의 과학자들은 모두 이 발견으로 가능한 분야를 탐구하는 데 매진했다. 이것은 결국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 그리고 중국에 의해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개발로 이어졌다     

 

지금 나와 나의 많은 전 동료들은 우리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었다. 몇몇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나는 파키스탄이 추진한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그들의 지대한 공헌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싶다. 이 프로젝트로 파키스탄은 난공불락의 국방을 갖추고 더 이상 협박받거나 위협받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나는 파키스탄 핵개발 프로젝트를 맡기 전에 네덜란드에서의 유망한 직업을 포기하고 파키스탄으로 돌아오게 된 배경에 대해 짧게 설명하고 싶다         

 

“풀만 먹는 한이 있더라도 핵무기 개발할 것”   

▲무니르 아메르 칸 파키스탄원자력에너지위원장(왼쪽)과 줄피카르 부토 총리.

 

  줄피카르 알리 부토(1928~1979, 1973~1977 총리 역임) 총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서방 국가들은 핵무기를 만들려는 인도의 노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반대로 미국·캐나다 그리고 영국은 인도의 핵개발을 돕기까지 했다. 부토 총리가 경고를 한 것이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부토 총리는 “만약 인도가 핵무기를 개발한다면, 우리가 풀만 먹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풀을 먹는 건 쉬웠지만 핵폭탄을 만드는 것은 이렇게 기술적으로 불모지에 가까운 파키스탄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1971 12 16일 동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에서 파키스탄군의 부끄러운 패배와 항복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생생하다. 나는 며칠 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나는 그 당시 벨기에에 있었고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인도군이 1974 5 18일 원자폭탄을 폭발시켰을 때, 나는 다수의 유명한 지도자들이 경고해 온 바와 같이 파키스탄이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나는 수년간 우라늄 농축 연구를 해 왔기 때문에 파키스탄을 도와줄 수 있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 1974 9월 나는 부토 총리에게 편지를 써서(파키스탄 외교부 서유럽과장으로 있던 미안 압둘 와히드 대사 경유) 파키스탄이 플루토늄 방식이 아닌 우라늄 농축기술을 통해 핵 기술을 가져야 한다고 건의했다     

 

1956년에 설립된 파키스탄 원자력에너지위원회(PAEC·Pakistan Atomic Energy Commission)는 이 일을 담당할 실력이 없었다. 1972 1월 부토 총리는 무니르 아메드 칸(이하 무니르)의 사촌 형이며 총리의 동료인 세이크 쿨시드 아메드의 추천으로 무니르를 PAEC 의장으로 임명했다. 무니르는 라호르(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남쪽으로 400 km 떨어진 파키스탄 제2대 도시)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이학학사였으며, 미국에서 별로 명망이 없는 북캐롤라이나주립공과대학(North Carolina State Polytechnic)에서 9개월 코스의 전기전력공학(Power Engineering) 과정을 이수했다.     

 

무니르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의 행정직에서 일한 경험만 있어서 엄밀한 의미에서 핵전문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부토 총리에게 1976 12월까지 핵장치를 폭발시키겠다고 말했다.     

 

나는 부토 총리에게 “무니르 지휘하의 PAEC는 향후 50년간 핵폭탄을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부토 총리는 매우 분노하면서 갑자기 내게 “파키스탄에 남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건 다소 충격이었다. 나와 아내는 1975 12월 말 딸들과 함께 한 달 휴가를 지내기 위해 파키스탄에 왔기 때문에 여벌의 옷을 조금만 챙겨 온 상태였다. 나는 이미 교수직을 제안 받고 밝은 미래가 보장된 직업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아내와 먼저 상의를 해 봐야 한다”고 부토 총리에게 말했다.    


  
“조국의 부름을 어떻게 저버릴 수 있는가”

▲칸 박사의 핵개발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굴람 이샤크 칸 전 재무장관.

 

  아내는 내가 받았던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아내는 즉시 “절대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아내에게 “조국의 부름을 어떻게 저버릴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그녀는 “당신이 파키스탄에 남는 것이 파키스탄에 어떤 ‘실질적’ 변화를 이룰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분야의 전문성으로 파키스탄의 핵무기 프로젝트를 맡아서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아내와 딸들은 네덜란드로 돌아갔다가 짐을 싸서 6주 뒤에 돌아왔다. 그들이 돌아온 1976 3 9일은 결혼 12주년 기념일이기도 했다.
  
 
도전, 고된 일, 성취, 배반으로 가득 차 있는 새로운 인생의 한 막이 시작됐다. 내 가족과 나는 우리의 애국적인 결정으로 인해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 이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들로부터 여러 번 배반을 당하기도 했다.
  
 
내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을 때, 부토 총리는 티카 칸(1972년 당시 육군참모총장) 장군에게 가능한 모든 지원을 해 주라고 지시했다. 내가 파키스탄에 남아 달라는 부토 총리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나는 유럽에서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 대가로 나는 한 달에 고작 3000루피(당시 환율로 약 300 달러)의 월급을 받는 파키스탄원자력에너지위원회(PAEC) 고문으로 임명됐다. 내가 1975 12~1976 7 PAEC에서 일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만약 핵 프로젝트가 PAEC하에 있으면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PAEC의 의장 무니르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독립 조직의 책임자가 되지 않으면 네덜란드로 돌아가겠다”고 위협하면서 내 입장을 고수했다. 부토 총리는 M. 임티아즈 알리 칸(부토 총리의 군사보좌관) 장군을 통해 나에게 PAEC 의장을 맡으라고 제의했다. 나는 “내가 PAEC 의장이 될 경우 유럽에서 꽤 알려진 핵농축 전문가로서의 명성 때문에 당장 여러 가지 제한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 후 관계관들과 여러 번의 토의를 거친 후 나는 부토 총리의 지시로 기술연구실험실(ERL·Engineering Research Laboratories, 이하 실험실)이라는 이름의 독립 조직에서 우라늄 농축에 의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책임자로 임명됐다.
  
 
그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한 협의회도 구성됐다. 부토 총리의 지시로 굴람 이샤크 칸(1988~1993년 파키스탄 대통령) 재무장관, 아프타브 구람 나비 카지 국립은행 총재, 아가 샤히 외교부 차관 등 3명의 고위 관료들이 이 협의회에 참여했다. 협의회와 함께, 재무부에서 파견되어 우리 실험실의 재무·행정 업무를 맡은 임티아즈 아메드 바티 국장을 비롯한 경험 많은 공무원들이 핵개발 프로그램의 든든한 기초를 제공했다. 그들의 전폭적 지원으로 우리는 바느질하는 바늘 하나 만들지 못하는 개발도상국에서 본격적으로 핵개발에 착수한 지 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핵무기를 만들어 내는 기적을 이루어 냈다.  

  
  
카후타에 핵 연구시설 건립 

  실험실의 책임자가 된 후 즉시 나는 실험실 건물과 설비들을 배치할 적당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장소는 정부와 군의 원활한 지원을 받기 위해 수도 이슬라마바드로부터 반경 50km 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슬라마바드에서 남쪽으로 25km에 위치한 라왈핀디시에서 동쪽으로 45km 정도 떨어진 카후타를 선택했다. 카후타는 외부에 훤히 트인 곳이 아니어서 공중으로부터의 폭격에 취약하지 않은 장점이 있었다. 게다가 카후타는 연방정부, 육군본부(GHQ)와 이슬라마바드 국제공항으로부터 멀지 않고 외국인들의 통행이 적은 곳이어서 매우 적합한 장소였다.
  
 
한 주 후쯤 부토 총리는 회의를 요청했고 내게 진행상황에 대해 물었다. 나는 그에게 카후타라는 지역을 선택했다고 보고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굴람 이샤크 칸 재무장관은 실험실 부지 선정에 대해 총리에게 권고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이때 부토 총리는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총리나 재무장관이나 누구도 실험실에서 당장 해야 할 일의 기본도 모르지 않소? 칸 박사가 선택했으면 그 문제는 종료된 것입니다.
  
 
부토 총리가 이렇게 실험실 부지를 결정한 것은 파키스탄 핵 프로그램 성공의 기초가 됐다.
  
 
실험실 부지 선정을 마무리한 후 우리는 1976 10월 부지를 점유, 확보하는 절차를 거쳐서 철조망을 세웠다. 실험실 부지 건설 실무 책임자였던 자히드 준장은 활발하며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그는 즉시 미국 코넬대학교 박사 학위를 가진 라호르의 건축설계사 이크발 와라를 컨설턴트로 고용했다. 내가 우리 건물들에 대해 필요한 조건들을 제공하면 와라는 설계를 했고 자히드 준장은 건설업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1977년 중반까지 주요 구조물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핵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1977
5월 모하메드 지아 울 하크(1924~1988, 1978년부터 1988 8월 암살될 때까지 파키스탄 제6대 대통령으로 재임)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선포하고 부토 총리를 축출했다. 지아 울 하크 장군은 자히드 준장을 라르카나 시(파키스탄 남부 신드주 서북부에 위치) 계엄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보냈다.
  
 
자히드 준장 자리를 아니스 알리 시에드 준장이 이어받았다. 그는 키가 작지만 목소리가 부드럽고 빈틈없는 신사였다. 그는 자히드 준장만큼 유능했고 신속하게 일했다. 마무드 대령과 아스람 대령, 사자월 대령(훗날 준장이 됨), 자바이드 대령, 사이드 베이그 소령(훗날 준장이 됨) 등은 완벽하고 유능한 팀이었고, 늘 계획한 일을 시간 내에 완수했다. 사자월과 사이드 베이그는 우리의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그들은 준장으로 진급한 후에도 그 일을 이어 나갔다. 자히드 장군에 이어 아니스 장군은 일주일에 두 번씩 직접 지프를 몰고 나를 카후타로 데려가서 진행상황을 보여주었다.  

  
  
무니르 PAEC 의장, “핵무기는 파키스탄에 나쁜 것”

/압두스 살람 교수.

 

  우리 프로젝트가 독립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후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부토 총리는 우리에게 아지즈 아메드 외교부 국무장관(장관과 차관 사이)을 만나서 우리가 어떤 일을 준비하고 있는지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그가 고압적인 관료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를 만나서 파키스탄이 핵보유국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유일한 선택인 우라늄 농축 기술의 중요성과 어려움에 대해 설명하고 내가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소개했다. 그는 나의 학위와 경험에 대해 물었다. 나는 카라치에서의 이학학사 학위를 받았고, 유명한 베를린기술대학교에서 2년간 공부했으며, 네덜란드 델프트과학기술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벨기에 루뱅가톨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내 이름으로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우라늄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 기술 분야에서 수석과학자로 4년간 일한 실무경험이 있는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소개했다. 그는 “그것이 전부냐?”고 물었다. 나는 “더 이상은 없다”고 되받아쳤다. 훗날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됐다
  
 
나와 우리 핵 프로그램을 망치려는 많은 음모들은 외국인들보다 파키스탄인들에 의해 더 많이 진행됐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사례 하나만 소개하겠다.
  
 
매우 유능한 내 친구가 어떤 국방 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전직 교수였고 압두스 살람(1926~1996, 파키스탄 최초의 노벨물리학상 수상,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주로 거주) 교수의 제자였던 그 기관의 책임자가 국방프로젝트에 실질적으로 아무런 경험이나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좌절하고 있었다. 나는 지아 장군에게서 그 친구를 우리 쪽으로 전출시키는 명령을 얻어 냈다. 그는 매우 귀중하고 유능한 인재였다.
  
 
그 친구는 무니르 PAEC 의장이 부토 총리를 속이려고 했던 음모를 내게 알려주었다. 부토 총리가 무니르 PAEC 의장에게 핵폭발 장치 실험을 약속대로 1976 12월까지 하라고 압박하자 무니르 의장은 이 문제를 살람 교수와 내 친구의 상사(上司)와 논의했었다고 한다. 그들은 약 2000톤의 폭발물과 X-선 기계에서 확보한 방사성 코발트를 작은 터널에서 폭파하기로 했다. 그런 뒤에 그들은 부토 총리에게 3~4개월 뒤에 폭발 실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운 좋게도 부토 총리는 선거를 공표해서 매우 바쁘게 됐다. 만일 그들의 음모가 성공했다면, 부토 총리는 우라늄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 방법을 쓸모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파키스탄은 치명적 위협 속에 처하게 됐을 것이다
  
  1977
년 계엄령이 선포된 뒤, 지아 장군은 그의 오랜 동료이자 친구인 사이에드 자민 낙비 장군을 핵 안보 분야 자문관으로 임명했다. 인도 알라하바드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를 한 낙비 장군은 밝은 머리색의 초록색 눈을 가진 유럽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의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의 사무실은 PAEC 본부에 있었다. 그는 몇 주 만에 무니르 의장이 핵폭탄을 만드는 것을 싫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무니르 의장이 핵무기는 파키스탄에 나쁜 것이라고 나를 여러 번 설득하려고 했다”고 말해 주었다.   


  
핵개발 정보, CIA로 누출

/지아 울 하크 전 파키스탄 대통령.

 

  지아 울 하크 장군은 “무니르 의장이 CIA 요원으로 의심되니 경계하라”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나는 무니르 의장과 중요하거나 기밀인 문제들은 상의하지 않았다. 무니르 의장은 살람 교수의 친구였고, 많은 PAEC 과학자들은 무니르 의장의 추종자들이었고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이었다. 살람 교수는 파키스탄에 올 때마다 무니르 의장의 공식 손님이었고 큰 모임들이 열리는 PAEC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렀다. 아래 소개하는 사건은 사히브자다 야쿠브 외교부 장관과 니아즈 나이크 외교부 차관이 자히드 마리크에게 해 준 이야기로, 마리크의 저서 《압둘 카디르 칸과 이슬람 폭탄(1992)》에 실린 이야기다.
  
 
〈사히브자다 야쿠브 외교장관의 말을 주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조지 슐츠 미국 국무장관과 워싱턴 D.C에서 상호 국익에 도움이 되는 문제들을 논의하고 있었다. 슐츠 장관은 갑자기 주제를 바꾸어 핵 프로그램에 관한 내용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만약 파키스탄이 핵 프로그램을 중지하지 않으면 파키스탄으로 가는 모든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협박했다. 나는 우리의 입장을 대변하고 ‘우리의 프로그램은 평화적 목적’이라고 말했다. 그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CIA 고위관리는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 상세를 파악하고 있다’면서 ‘CIA의 정보 능력을 모욕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파키스탄 핵장치의 실물모형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나에게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담당자는 테이블을 덮고 있던 천을 치우고, 내게 플랜트의 디자인을 보여줬다. 그는 그것이 카후타 플랜트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 테이블로 가서 공처럼 생긴 것을 감싸고 있던 것을 벗겨내고 ‘이것이 파키스탄 핵무기의 모델’이라고 말했다. 나는 모르는 척했다. 나는 그들에게 ‘나는 기술자도 아니고 과학자도 아니어서 이것에 대해 말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슐츠 국무장관은 자기를 속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 방을 나와서 슐츠 장관의 사무실로 걸어갈 때, 우리가 막 나온 방으로 들어가는 무니르 PAEC 의장의 친구 살람 교수를 보았다. 나는 즉시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했다. 살람 교수는 무니르 의장에게서 모든 정보를 얻어 왔고 이것을 미국인들에게 넘겨줬다.”〉   


  
‘스파이 바위’ 

중요한 두 번째 사건은 카후타에서 시간이 좀 흐른 뒤에 일어났다. 우리는 기술연구실험실 주위에 대한 보안 조치를 했다. 하루는 양치기가 일상적인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작은 바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그 바위가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는 작은 도끼로 바위를 깨 보았다. 그 바위는 쉽게 깨졌다. 그 아래로 구리가 보였다. 그는 즉시 이 일을 실험실의 중대장에게 신고했다. 실험실 보안 담당 대령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그 바위는 실험실로 옮겨졌고 안전한 장소에 보관했다. 연락을 받고 나는 그들에게 다음 날 아침에 가서 검사할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그 바위에 폭발물이 들어 있지 않다고 말한 뒤에 해체하기 시작했다. 4인치 두께의 겉판은 나사로 고정되어 있었다. 나사를 제거하자 장시간 지속되는 배터리, 안테나, 중성자 계수기, 대기분석기, 송수신기 세트가 있었다. 이런 복잡한 장치는 대기 샘플을 분석해서 농축된 또는 자연 상태의 우라늄과 중성자(/저온 실험을 통해) 정보를 저장하여 단일 펄스 형태로 전송할 수 있었다. 이것은 수백만 달러를 들여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외국 정보기관이 고용한 파키스탄 요원이 밤에 카후타 마을에 설치해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이 ‘발견’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지아 장군과 핵 프로그램 지원 책임자인 굴람 이샤크 칸 재무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들은 ‘바위’ 실물을 보고 보안 책임자인 라만 대령과 그의 부하들을 높이 칭찬했다.
  
 
며칠 뒤에 딘 힌턴 파키스탄 주재 미국대사가 지아 장군을 만나러 와서 우리의 핵 프로그램에 대해서 말했다. 그는 미국인들이 우리의 작업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중에 지아 장군은 “만약 미국인들이 정보 수집을 그 스파이 바위에 의존하고 있다면 이젠 해체되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아 쓸모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대사는 충격을 받고 곧 돌아갔다.
  
 
바로 몇 주 전 미국대사관 국방무관이 카후타에 있는 건물들의 항공사진을 찍었다. 미국 대사는 지아 장군을 방문해 그곳에 어떤 종류의 시설이 있느냐고 물었다. 지아 장군은 미국 대사가 가져온 사진들을 보지도 않았다. 지아 장군은 “미국이 외교적 프로토콜을 위반했고 만일 앞으로 어떤 항공기라도 카후타 지역을 다시 비행한다면 격추해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지아 장군은 나중에 방공포와 지대공 미사일이 있는 카후타의 공군기지에 그런 명령을 하달했다.
  
 
핵무기를 얻으려는 우리의 노력에 대한 뉴스가 서방 세계에 서서히 알려졌다. 그들은 모두 우리의 노력을 파악하기 위한 첩보 활동에 착수했다. 영국은 우르두어(語·파키스탄의 공용어)를 할 수 있는 2명의 기자, 마크 툴리와 크리스 셔웰을 보냈다. 셔웰은 나를 담당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오토바이로 맴돌곤 했다. 어느 날 저녁 보안요원들이 염탐하는 그를 붙잡은 후 여성추행 혐의로 신고했다. 며칠 후 두 기자 모두 추방됐다.  

  
  
프랑스 대사의 봉변 

잦은 정전(停電) 때문에, 파키스탄은 인버터(정전대비용 보조전원인 대형 UPS(uninterrupted power supply)가 필요했다. 이 인버터들은 정전으로 인해 원심분리기가 손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30개의 인버터를 영국 에머슨전자회사(Emerson Electrics)에서 직물산업용으로 위장해 구매했다. 100개의 인버터를 사는 두 번째 주문은 독일 공급업자에게서 사는 것이 훨씬 저렴했기 때문에 런던에 있는 파키스탄 사람을 통해 구입했다. 당시는 인버터 수출에 대한 어떠한 규제도 없었다
  
 
몇몇 부품들(bellows·풀무)은 프랑스 회사가 만들었다. 인버터는 풀무를 만들기 위해 프랑스 회사로 보냈다. 프랑스 정부는 이 부품 공급을 금지했고 그것들을 압수하려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프랑스 제품이 아니기 때문에 되찾아오는 데 성공했다. 독일 본에 있는 우리 사무소는 강철 튜브를 다프 홀랜드(DAF Holland)사로부터 구입했다. 몇몇 기계들을 독일에서 구입했다
  
  1979
년 우리는 에머슨전자회사에서 30개의 고주파 인버터들을 구매했다. 인버터를 받은 후 부분적 변경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는 수정 사항이 포함된 100기를 더 주문했다. 이렇게 큰 주문이 들어오자 그 회사 근로자들은 경영진이 거부했던 크리스마스 보너스를 요구하면서 파업에 들어갔다. 그 문제가 우연히 영국 원자력 당국과 관련 있는 프랑크 알라운 의원에게 알려졌다. 인버터가 핵기술에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토니 벤 무역장관에게 편지를 썼다. 인버터에 대한 수출 제한 조치가 내려졌다.
  
 
인버터 문제는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외교가의 관심을 끌었다. 각국 정보당국이 염탐하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폴 러 구리에렉 파키스탄 주재 프랑스 대사와 장 폴로 일등서기관은 이 문제에 대해 지나친 열의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이슬라마바드 번호판을 단 개인차량을 가지고 카후타로 갔다. 카후타 직전에 있는 관광지 팔라왈라 퀴라(15세기 건설) 요새로 좌회전하는 길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요새로 가지 않고 카후타로 향하다가 몇 백 야드를 더 간 뒤 보안 요원들에게 제지당했다. 보안요원들은 그들을 구타했다. 며칠 후 프랑스 측은 대통령에게 항의하러 갔다. 그들은 실제로 요새를 방문하려 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은 그들에게 “왜 (대사관의 외교관 차량이 아니라) 민간차량을 타고 갔느냐?”고 물었다. 그 이후 어떤 외국인도 그곳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1979
11~1981 1월 이란 학생들이 테헤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기습, 점거했다. 그들은 파쇄된 서류더미에서 장 폴로 일등서기관이 미국 CIA 협조자라는 사실을 밝혀 냈다. 그가 보낸 한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거대한 프로젝트가 카후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기밀사항이다. 파키스탄이 전통적으로 느릿느릿하게 작업을 진행하는 것과는 달리 그 속도가 빠르고 매일 매일 성과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아마 카후타 주위의 산에서 쌍안경으로 카후타를 염탐했을 것이다.     


  
PAEC의 음모

▲원자력의 원리에 대해 강연하는 칸 박사. 그는 우라늄 농축 전문가였다.

 

  우리 실험실에서 나와 일하는 두 명의 PAEC 파견 선임 과학자들이 나를 제거하기 위하여 진행한 음모를 밝히고자 한다.
  
  1978
4 4일 우리가 우라늄을 적정한 농도로 농축하는 데 성공했을 때 나는 즉시 굴람 이샤크 칸 재무장관에게 “이것이 작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는 중요한 단계”라고 하면서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문서로 보고했다.
  
  PAEC
관계자들은 이 사실을 무니르 PAEC 의장에게 알렸다. 그들은 나를 제거하고 그 프로젝트를 가로채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동료의 도움으로 페샤와르에 있던 살림 초드리 공군 준장에게 접근했다. 그는 지아 장군 부인의 자매와 결혼했다. 초드리 장군은 나에 대한 그들의 비판을 경청한 후 “파키스탄 정보부의 확인을 받아서 적절한 행동을 취하겠다”고 말했다.
  
 
며칠 후 초드리 장군이 낙비 장군과 함께 나를 방문했다. 우리는 정기적 방문이라고 생각했다. 인사말 이후에 그는 내 동료들에 대해 물었다. 나는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고 각자의 업무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물었다.
  
 
“칸 박사, 당신은 당신의 동료들을 얼마나 잘 아십니까? 그리고 그들이 신뢰할 만한가요?
  
 
나는 즉시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나는 말했다. “당신은 내가 인도 보팔 출신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나는 파키스탄에 15년 만에 돌아왔어요. 나는 개인적인 친구이자 유능한 엔지니어인 바드룰 이스람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도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합니다. 나는 모든 내 동료들을 믿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칸 박사, 당신은 단순하군요. 두 명의 당신 선임 과학자들이 며칠 전에 나를 찾아와서 당신에 대해 나쁜 말을 하고 갔어요. 당신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 당신은 파키스탄에 이해관계가 없다, 외국인 부인을 두었고, 많은 외국인 친구들을 가지고 있으며, 훗날 갑자기 사라져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 것이다 등등의 말을 했습니다.
  
 
나는 즉시 그들이 무니르 PAEC 의장과 매우 가까운 친구들로 그와 자주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사실을 알고 격분한 지아 장군은 “저놈들이 이스라엘과 인도 놈들이 해내지 못한 짓을 하려 하고 있다”면서 “정보부장에게 말해서 저 음모자들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감옥에 가두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지아 장군에게 “그들의 음모는 이미 탄로났고, 나의 다른 동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 같으니 그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들이 PAEC에 속해 있으므로 PAEC로 돌려보내자고 말했다. 지아 장군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나는 내 수석 동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었다. 어떤 대령은 “실제 그들에게 가담했으나 나중에 그만두었다”면서 잘못을 시인하는 글을 써서 사과했다. 나는 아니스 준장에게 그를 은퇴시킬 것을 요청했다.
  
 
그들이 나를 음해하는 일에 성공했었다면, 파키스탄은 핵보유국이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내 지식과 실질적 경험과 유럽 주요 기업가들과의 접촉이 우리 성공의 열쇠였다.     


  
7년 만에 핵폭탄 개발

전체 플랜트가 효과적으로 운영되면서 비로소 지아 장군과 핵 프로그램 지원 책임자인 굴람 이샤크 칸 재무장관의 얼굴에 미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우리의 진행에 큰 관심을 보였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미팅을 가졌다. 내 동료들이 일하면서 보여준 정신력과 투지는 파키스탄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의 투지와 같은 것이었다.
  
  1981
년에 우리는 수년간 평균 65000rpm으로 작동하던 많은 기계들이 피해를 받는 심각한 지진을 겪었다. 지아 장군과 굴람 이샤크 칸 재무장관과 내 동료들은 많이 동요했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가 이 기계들을 제작했기 때문에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아타 박사와 나는 설계를 변경해 더 안정적으로 가동할 수 있는 장비를 만들었다. 몇 달 뒤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전속력으로 기계들을 가동할 수 있게 됐다.
  
 
지아 장군은 11년간 통치를 하는 동안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을 위해 활발하고 강한 노력을 기울였다. 1984 12 10일 나는 지아 장군에게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가지게 됐고, 명령을 내리면 10일 이내에 핵 폭발실험을 실시할 수 있다”고 문서로 보고했다
  
 
핵무기 개발은 인도가 파키스탄을 앞섰지만 이동식 발사대에서 핵무기를 운반하는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 능력은 파키스탄이 인도를 앞질렀다. 지아 장군은 1986년 직접 델리의 라지브 간디 총리에게 “만일 인도가 어떠한 실수라도 하면 파키스탄은 그에 대해 보복할 능력이 있다”고 통보했다. 파키스탄이 핵무기와 이를 운반할 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두 국가 간의 대규모 전쟁은 과거사가 됐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모두 핵전쟁의 비용과 피해를 감당할 수 없게 됐음을 깨달았다
  
  1998
4월 우리는 가우리 미사일 발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카후타에서 남동쪽으로 105km 떨어진 젤름 대신에 서쪽으로 25km 떨어진 틸라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라고 지시가 변경됐다. 장소를 바꿀 시간은 이틀밖에 없었다. 거대한 미사일, 연료, 그밖의 필요한 장비들을 젤름에서 틸라로 옮겨야 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고, 급회전이 많았으며, 낮은 전신주 배선 등도 장애가 됐다. 그래도 사자월 준장 덕분에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마지막 순간에 미사일 발사 장소를 변경하라는 결정이 내려진 것은 미사일이 육군본부가 있는 라왈핀디를 지나 날아가다가 만약 작은 사고라도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육군본부에서 연락관으로 파견 나온 장군은 대부분의 미사일 발사 실패가 발사 직후에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 미사일은 발사 후 수 초 안에 360km에 도달할 수 있었으며, 탄두를 분리시킨 후에 동체는 몇 백km 되는 곳에 떨어진다. 특정한 목표물로 사전에 프로그래밍 된 탄두는 매우 빠른 속도로 탄도비행을 한다.
  
  4
6, 나는 20명의 동료들과 함께 틸라로 갔다. 우리 미사일의 발사시각은 오전 7 30분이었다. 7 22, 나는 육군 장교로부터 사마르 부바라크만드 박사의 지휘 아래 신드주 카라치 인근 손 미아니에서 발사한 미사일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말을 들었다. 미사일은 그냥 굴러 떨어져서 화염에 휩싸였다. 사상자가 있다는 보고도 있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몹시 화가 났다. 발사 타이밍으로 볼 때 부바라크만드 박사 측은 우리 실험실이 펀자브주 바하왈풀 인근 칸풀시에서 개발했던 M-11의 모형을 먼저 발사하여 우리의 성취를 가로채려고 한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군에 그 공장을 인도한 뒤에 부바라크만드 박사에게로 그 미사일의 설계도가 넘어갔다.    


  
장거리 미사일 발사 성공

▲파키스탄이 1998년 5월 핵실험을 한 발루치스탄주 차기의 라스코산은 이후 파키스탄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왼쪽에서 5번째가 칸 박사.

 

  나는 즉각 우리 미사일을 발사하라고 명령했다. 미사일은 7 23분에 발사됐다. 9분 뒤 탄두가 1300km 떨어진 발루치스탄주 사막에 있는 표적에 명중했다. 육군 조사관은 명중사실을 확인하고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헬리콥터 한 대가 그 순간을 목격하기 위해 현장에 있었다. 이 미사일 발사 성공을 기록한 사진들이 많이 있다.
  
 
당시 틸라는 페르베즈 무샤라프(1943~ , 1999 10월 쿠데타 이후 2001~2008년 대통령 재임) 장군이 관할하는 지역이었다. 나는 핵탄두를 운반할 수 있는 파키스탄의 첫 번째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역사적 현장에 그를 초대했다. 그는 “제한기르 카라마트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미사일 발사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육군참모총장에게는 내가 말하겠다”고 했다. 무샤라프 장군은 미사일 발사 한 시간 전에 헬리콥터로 도착했다. 우리는 발사장에서 300m 떨어진 건물의 발코니에 앉았다. 무샤라프 장군은 나와 우리 프로그램의 의료서비스 책임자인 리아즈 초환 장군(전 육군의무감) 사이에 앉았다
  
 
미사일 발사 성공 직후, 나는 즉시 미안 나와즈 샤리프(1949~ , 1990~1993, 1997~1999, 2013~2017 3차에 걸쳐 총리 역임. 대법원의 부패 선고로 파면) 총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샤리프 총리는 매우 기뻐하며 “10시쯤 비디오 필름을 가지고 총리 관저로 오라”고 했다. 나는 서둘러 이슬라마바드로 돌아와서 총리와 함께 비디오를 보고 난 뒤, 오후 1시 뉴스에 이에 대한 단신(短信)을 내보내기로 했다.
  
 
오전 11, 샤리프 총리는 국립국방대학(지금은 종합대학이 됨)에서 공무원들과 참석자들에게 연설하는 가운데 이 소식을 전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1986년 지아 장군의 성명으로 인도인들은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이동식 발사대에서 핵무기를 운반할 수 있는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에 성공함으로써 파키스탄은 인도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게 됐다
  
 
부토 총리의 선견지명과 핵개발 착수 지시, 서구의 압력에 대한 지아 장군의 끈기 있는 저항, 굴람 이샤크 칸 재무장관의 끝없는 애국심과 17년간의 프로젝트 지원, 그리고 유능한 동료들과 그들을 지지해 준 가족들로 구성된 우리 팀이 파키스탄이 핵능력을 보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