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2021 조선일보 선임기자
2021.06.09
261. 연평 포격전 서정우 소나무와 강화도 신미양요 소나무
연평도 소나무는 알고 있다, 그날 戰士에게 벌어진 일을…
▲연평도 산기슭에 있는 '서정우 소나무'. 2010년 연평도 포격전 당시 전사한 하사 서정우의 모표가 포격 충격에 날아가 소나무에 꽂혀 있다./박종인
1989년 8월 13일 광주에서 태어난 서정우는 무탈하게 고등학생이 되었다. 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로 단국대 천안캠퍼스 법학과에 입학한 뒤 2학년인 2009년 대한민국 해병대에 입대했다. 2010년 11월 23일 근무지인 인천광역시 연평도에서 ‘민주주의’와 ‘인민’을 국명에 갖다 붙인 북한군 포격에 전사했다. 석 달이 지난 2011년 2월 어느 날 전사지를 순시하던 연평부대 신임 부대장 대령 백경순이 언덕에 서 있는 소나무에 꽂혀 있는 독수리 모표를 발견했다. 서정우가 포탄에 맞던 순간 팔각모 정모에서 튕겨 나간 모표였다.
1871년 6월 1일 강화도와 김포 사이 좁은 염하(鹽河)로 진입하던 미합중국 극동함대 모노카시호에 해협 양쪽 진지에서 조선 수군이 포격을 퍼부었다. ‘남북전쟁 때도 겪지 못했던’ 엄청난 포격에 미 해병대는 순식간에 위축됐으나 단 한 발도 모노카시호에 닿지 못했다. 사정거리가 짧았다. 게다가 조선군이 무장한 대포는 상하좌우로 포신이 움직일 수 없는 고정식이었다. 목표가 조준 거리와 위치를 벗어나면 무용지물이었다. 미 군함은 염하 초입 초지진을 포격으로 아수라장으로 만든 뒤 해병대가 상륙해 진지를 점령했다. 그때 미군 포격에 상처 입은 소나무 한 그루가 150년을 살아남아 지금도 초지진 성벽 아래에 서 있다. 근 150년을 격세(隔世)한 두 전투와 소나무 이야기.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
맑은 날이었다. 연평도 사람들은 바다로 나갔거나 밭으로 갔거나 갯벌로 나갔다. 선착장은 하루 두 번 인천에서 들어오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 가운데 휴가를 떠나는 해병대 병장 서정우도 있었다. 서정우는 단국대 천안캠퍼스 법학과를 1년 다니다 입대한 광주 청년이었다. 제대 날짜가 12월 22일, 그러니까 꽉 찬 한 달밖에 남지 않은 ‘낙엽도 조심해야 하는 반 민간인’이었다.
대한민국 국군에게는 연례적인 한미 합동 훈련이 예정돼 있는 날이었다. 오전 10시 15분부터 연평부대는 K-9자주포와 105㎜ 견인포, 벌컨포 같은 복합화기 3960발을 발사하는 훈련을 했다. 훈련은 오후 1시 30분 무렵 끝났다.(웅진군, ‘연평도 포격사건 백서’, 2012, p73)
한 시간 뒤 또 다른 포성이 울렸다. 소리도 달랐고 방향도 달랐고 탄착 지점도 이상했다. 해상이 아니라 섬 안에 있는 마을이었다. 선착장에 있던 사람들이 연기를 보며 소리쳤다. “저거 누구 집 근천데...” 주민 김영순이 말했다. “밭에서 일하는데 포 소리가 엉뚱하게 들리는 거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마을이...” 포성은 끝없이 울렸다. 선착장에서 항구 건너 마을에는 검은 연기가 안개처럼 자욱했다.
북한이 발사한 포탄 150여 발 가운데 60여 발이 섬 곳곳에 떨어졌다. 오후 2시 47분 연평부대는 K-9 자주포 80여 발을 북쪽 진지에 발사했다. 그리고 30분이 지난 오후 3시 12분, 이번에는 북한이 연평도 남쪽으로 20여 발 포탄을 발사했다.
면사무소와 우체국, 파출소가 정확하게 피격됐고 민가들도 불탔다. 뭍에서 들어와 부대 시설 공사를 하던 민간인 2명 그리고 ‘전사(戰士)’ 2명이 죽었다. 서정우도 그중 한 명이었다.
▲연평도 평화공원에 있는 하사 서정우(1989~2010) 부조상. /박종인
전사 서정우의 복귀와 죽음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주민들은 웅성대기만 했다. 하지만 주민들이 ‘전사(戰士)’라고 부르는 연평도 군인들은 달랐다. 즉각 부대로 복귀했다. 말년 병장 서정우도 복귀했다. 휴가 전사들을 인솔한 부사관과 함께 서정우와 동료들은 부대 차량으로 연평도 안에 지정돼 있는 ‘핫포인트’로 이동했다. 핫포인트는 섬 안에서 각 부대와 최단 거리에 있는 고지대다. 차량에서 내린 군인들은 도보로 소속 부대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핫포인트에서 소속 중화기 부대로 복귀하던 도중 포격이 또 시작됐다. 부대 주변 산 곳곳이 불타고 있었고, 파편이 공중에 흩어졌다. 방공호로 대피하기 위해 길로 뛰어가는 순간 파편이 병장 서정우를 직격했다. 또 다른 전사인 일병 문광욱도 소속 부대로 복귀하던 중 가슴에 파편을 맞고 전사했다.
그날 오후 6시 32분, 당시 서정우가 사용했던 ‘싸이월드’ 게시판에는 서정우 친구가 쓴 포스트가 이렇게 남아 있었다. ‘정우야 방금 뉴스에서 들었는데 설마 너 아니지? 그렇지?’ 제대를 한 달 남겨놓은 말년 병장이었다. 시신은 그날 밤에야 모두 수습했다.
섬에 남은 흔적들
전쟁은 비극이다. 비극을 막으려는 존재가 군인이다.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그래서 평화를 지킨다.
연평도는 전쟁을 막기 위한 전쟁의 최전선이다. 북쪽 망향전망대에 오르면 황해도 소속 섬들이 보인다. 가장 가까운 석도는 거리가 3km다. 그 뒤로 연평도를 포격했던 황해도 개머리진지도 어슴푸레 보인다. 가운데 바다에는 검은 중국 어선들이 오간다. 남쪽에는 연평도 포격 사건 전사자와 제2 연평해전 전사자들을 기리는 평화공원이 있다.
▲연평도 공설운동장 외벽에 뚫린 포탄 흔적./박종인
마을 공설 운동장 외벽에는 커다랗게 구멍이 뚫려 있다. 면사무소 옆 골목에는 그때 폐허가 된 민가가 안보 교육장으로 보존돼 있다.
▲연평도 포격전 당시 피격된 민가. 안보교육장으로 보존돼 있다. /박종인
▲연평도 포격전 당시 피격된 민가. 안보교육장으로 보존돼 있다. /박종인
▲연평도 포격전 당시 피격된 민가. 안보교육장으로 보존돼 있다. /박종인
포격 후 석 달이 지난 2011년 2월 연평부대 지휘관이 서정우 전사지를 찾았다. 그가 쓰러졌던 언덕배기 옆에 있는 소나무에 낯익은 금속이 꽂혀 있었다. 해병대 정모인 팔각모에 붙어 있는 독수리 문양, 해병대원들이 ‘독수리 앵커’라 부르는 모표였다. 포탄 파편에 서정우가 피격되고 그 충격에 날아가 소나무에 꽂혀버린 것이다. 그제야 부대원들은 왜 부대에 보존돼 있는 서정우 팔각모에 독수리 앵커가 없는지 알게 됐다. 이후 연평부대는 웅진군과 협의해 소나무 모표 주변에 플라스틱 캡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동판과 안내판을 설치했다.
군인이, 전사가 전쟁에서 죽으면 영광이다. 그런데 그 영광이 극적으로 시각화돼 있는 소나무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운다. 왜 우는지, 다 큰 어른들이 왜 이 스물한 살 먹은 전사가 남긴 모표 앞에서 우는지 연평도에 가보면 안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종군 사진가 펠fl스 비아토가 촬영한 광성보 전투 종료 직후 장면./폴게티 박물관
1871년 어재순의 죽음과 신미양요
150년 전 6월 1일 강화도에서 조선군과 미군이 맞붙은 전투가 신미양요(辛未洋擾)다. 양국에 상처만 남긴 전투가 신미양요였다. 1871년 여름날 벌어진 전투에서 조선군은 실질적으로 참패했다. 통상을 요구하던 미군 또한 통상이 거부되면서 전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미국 극동함대는 674명이 승선한 사령선 콜로라도 호와 273명이 탄 알래스카 호를 비롯해 5척으로 구성됐다. 강화도 상륙용 병력은 보병대, 해병대와 포병대, 공병대, 의병대까지 12개 중대 651명이었다.(존 로저스, ‘조선 요새 함락 보고서’, 1871)
이미 1866년 프랑스군과 병인양요를 치를 당시 대원군 정부는 나름대로 군비를 강화했지만 비근대적이었고 따라서 역부족이었다. 조선군은 한여름에 ‘아홉 겹 솜으로 누빈’ 방탄복 면제배갑(綿製背甲)을 착용했고, 방탄복은 강선을 타고 날아오는 미군 소총 탄알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누비솜을 뚫지 못한 일부 탄알은 솜 속에서 발화해 조선 전사들을 끔찍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강화도 최전방인 초지진은 미 해병대가 쏴대던 곡사포에 무기력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포탄에 진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아수라장이 된 진지 속에서 화승총에 불을 붙이지 못한 조선군은 성벽 위에서 적을 향해 제대로 조준사격도 하지 못했다.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이미 전세는 절대적으로 미군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강화도 최전방 초지진이 그렇게 뚫렸다. 다음 부대인 덕진진은 무혈 점령됐다.
다음 방어선인 광성보는 ‘장엄하고 처절한 조선군의 전멸’ 현장이었다. 그때 광성보에 달려온 사람이 당시 사령관 어재연의 동생 어재순이었다. 벼슬과 상관없이 살던 동생에게 군인인 형이 거듭 묻는다. “벼슬 하지 않는 선비로 어찌 여기 있느냐?” 동생이 이리 대답한다. “충성에 귀천이 없고, 형님이 살아나올 길 없는 곳에 있는데 홀로 갈 수가 없다.”(‘어재순 행장’) 모두 죽었다. 처참하되, 미군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제자리를 지키며 영웅적으로 죽어갔다”고 기록한 장엄한 죽음이었다.(미 해군 소령 윈필드 슐리, ‘성조기 아래 45년’, 1904, p95) 초지진에 있는 늙은 소나무에는 그때 미군의 포격에 맞은 흔적이 남아 있다.
▲신미양요 당시 미군과 첫 교전을 한 강화도 초지진./박종인
▲강화도 초지진 소나무에 있는 신미양요 미군 포격 흔적. /박종인
잊힌 전쟁, 잊혀가는 역사
‘바다의 경계가 편치 않아서 봉화 연기가 여러 번 경계를 하나 나라에는 막아낼 계책이 없으니 여기에 미쳐 이를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하다.’(‘어재순 행장’) 1871년에는 그랬다. 국경을 이양선이 수시로 침범하는데, 나라에서는 막을 힘이 없었다는 뜻이다.
병인양요 이듬해인 1867년 대원군은 덕진진에 경고비를 세웠다.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 바다 관문을 지키고 있으니 타국 배는 통과 금지)’라고 새겨져 있다.
▲강화 덕진진에 있는 외국 선박 경고비. /박종인
글자 몇 자 새긴 돌덩이로 관문이 지켜지는가. 역사를 상기하는 이유는 실천적 교훈을 삼기 위함이다. 정신적 승리감으로 포장해버린 군비(軍備) 소홀로 이 땅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안다.
비석이 서 있는 덕진진은 미군에 의해 무혈 점령됐다. 신미양요 첫 전투 현장인 초지진은 4년 뒤인 1875년 12월 일본 군함 운요호와 상륙선 이렇게 딱 두 척에 초토화가 됐다. 1873년 친정을 선언하고 아버지 대원군을 퇴출시킨 고종이 강화도 주력 부대인 진무영을 예산과 병력과 무기까지 감축해버린 결과다. 기억이 희미해지면 추억도 없고 역사도 없고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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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포격전 또한 기억이 희미해진다. 지난주 현충일 때도 국가지도자는 연평해전, 연평도 포격전과 천안함에 대해 침묵했다. 전직 여당 부대변인이라는 인물은 천안함에 대해 “생때같은 부하들을 수장시키고 함장은 승진했다”고 선언했다.(변호사 조상호, 2021년 6월 7일 채널A ‘뉴스톱10’) 이게 나라다. 연평도 소나무에 꽂힌 병장(하사 추서) 서정우 모표 앞에서 울 이유가 참 많은 나라다.
262. 인천 외국인묘지 군상(群像)
인천 외국인묘지에서 구한말 역사를 만난다
▲인천광역시 인천가족공원에 있는 외국인묘지. 맨 왼쪽은 개항기 인천에서 활동했던 미국 상인 타운센드 묘다. 가운데에는 둥근 켈트 십자가는 인천에 성누가병원과 고아원을 만들고 한국 동요를 정리한 영국 성공회 선교사 엘리 랜디스 묘다. 33세에 죽었다. 군인, 공관 관리, 사업가에서 어린 아이까지 인천외국인묘지에는 멀리는 150년 전 이 땅에 왔던 다양한 사람들이 잠들어 있다./박종인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있는 인천가족공원 안쪽에는 외국인묘지가 있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인천과 인연을 맺었던 외국인들이 잠든 묘지다. 1914년 중구 북성동에 처음 조성됐다가 6‧25 때 파괴돼 청학동으로 옮긴 뒤 2016년 공원으로 이전됐다. 멀리는 150년 전 많은 꿈을 안고 왔다가 돌아가지 못한 영혼들이 함께 안식한다.
영국,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 민간인과 병사들도 있다. 만 세 살을 갓 넘긴 저스틴 매카시(미국?)라는 아이도 묻혀 있고 한 살 갓 넘기고 죽은 독일(추정) 아이도 묻혀 있다. 하나 글로버 베넷(Hana Glover Bennett)이라는 스코틀랜드 여자 묘도 있다. 이 여자는 1873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38년 인천에서 죽었다.
그 가운데 구한말 조선이 맞닥뜨린 거대한 시대정신, 근대화(近代化) 물결과 함께 흘러간 사람들이 있다. 월터 타운센드(Walter Townsend‧미국) 그리고 오쿠가와 가타로(奧川嘉太郞‧일본). 비슷한 시기에 일본 개항지 나가사키에도 비슷한 생을 살았던 사람이 있다. 이름은 토머스 글로버(Thomas Glover‧스코틀랜드)다. 인천 외국인묘지에 잠들어 있는 하나 글로버의 친아버지다. 흥미진진한 소설이나 영화라면 좋았을, 150년 전 이방인들의 인생 유전과 구한말 조선의 얄궂은 만남.
개항, 갑신정변, 오쿠가와 형제
1883년 제물포가 개항됐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조선이 나라 문을 연 이래 조선 정부는 전국 주요 항구를 외국에 개방했다. 일본은 자기네와 가까운 부산, 그리고 수도 한성과 가깝고 대륙 진출이 용이한 제물포를 개항지로 요구했고, 관철됐다. 개항할 무렵 인천에 조선인은 10여 집밖에 없었고 ‘갈대만 무성히 자라고 월미도 동쪽과 만석동 해변 작은 어촌에서 슬픈 아리랑만 들려오는 땅’이었다.
▲갑신정변 때 죽은 일본인 사업가 오쿠가와 가타로(奧川嘉太郞) 묘./박종인
개항하던 그해 조선인 공식 인구는 0명이었고 그 무주공산에 들어온 일본인은 348명이나 됐다. 러일전쟁이 터지자 전쟁 특수를 노린 모험 상인들이 쏟아졌다. 인천부사(仁川府史‧1933)에 따르면 1905년 인천에는 조선인이 1만866명, 일본인이 1만2711명으로 일본 사람이 더 많았다.(인천광역시, ‘제물포 진센 그리고 인천’(인천역사문화총서 39), 2007, p123 등)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터졌다. 48시간 만에 쿠데타는 대실패로 끝났고 주동자들은 일본군 엄호 속에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1878년 가족과 함께 돈을 벌러 입국한 오쿠가와 가타로와 동생 요시카즈(義一·기이치라고 읽을 수도 있다)도 죽었다. 형 가타로는 1883년 조선 정부 의뢰로 증기 기선을 도입하려 하기도 했고(나애자, ‘개항기 민간해운업’, 국사관논총 53집, 국사편찬위, 1994) 조선인과 합작해 일본식 사기 그릇 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전우용, ‘종로와 혼마치’, 서울역사박물관대학 24기 강연집, 서울학연구소, 2013)
갑신정변이 터졌다. 그 무렵 한성에 살고 있던 일본 민간인은 20여 명이었는데 난리통 속에서 많은 이가 죽었다. 정변을 지원한 일본인들은 정변에 반대한 사람들로부터 생명의 위협 속에 인천으로 달아났다. 오쿠가와 형제도 그때 죽었다. 일본인들은 이들을 ‘조난자(遭難者)’라고 불렀다.(국역 ‘경성부사’1권(1934), p550~552) 형은 32세였고 동생은 15세였다. 오쿠가와 집안에는 다행스럽게도, 외국인 묘지 일본인 묘역 첫째 자리에 형제가 잠들어 있다. 근대화라는 수레바퀴에 치여 희생된 영혼들이다.
▲조선 근대화 과정에 깊이 간여했던 미국 사업가 월터 타운센드 묘./박종인
근대화와 조선정부와 타운센드
조선은, 인천은 새롭게 열린 신천지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이 나라에서 부를 거머쥐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인천으로 입항했다.
월터 타운센드도 그중 한 명이었다. 보스턴 출신인 타운센드는 미국인 모스가 일본에서 운영하는 미국무역상사(American Trading & Co) 직원이었다. 그런데 1883년 개화파 김옥균이 차관을 얻기 위해 일본에 가면서 인연이 시작된다.
왜 차관이 필요했나. 돈이 없어서다. 뒤늦게 개항을 하고 근대화를 하려다 보니 조선 정부 재정이 부실했다. 1881년 청나라로 떠났던 군사유학단 영선사(領選使) 일행은 식비조차 없었다. 영선사 단장인 김윤식은 이렇게 기록했다. ‘가지고 간 인삼을 은(銀)으로 바꿔주지 않아 밤낮으로 빈궁해져 사방에 빚을 구걸하며 눈앞의 긴급함을 구하였다.’(김윤식, ‘음청사(陰晴史)’ 1882년 4월 27일) 조선 정부에 왜 돈이 없었는지 이야기하려면 국부(國富)와 강병(强兵)을 위한 부강책의 초장기 실종 사태에 대해 말해야 하니 밑도 끝도 없겠다.
어찌 됐든 김옥균은 근대화를 위해 차관을 빌리러 일본에 갔고, 일본 정부로부터 거부를 당했으며, 그때 미국 상인 모스가 차관 제의를 받아들였고, 이를 위해 모스가 조선으로 파견한 직원이 월터 타운센드였다. 조선 정부는 울릉도 벌채권을 담보로 차관 계약을 맺었다.
고종과 타운센드, 그 악연
그런데 1884년 갑신정변이 터지며 모든 게 돌변했다. 고종 정부가 이 벌채권을 대가로 일본에 체류 중이던 유학생 위탁 송환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일본에는 김옥균과 박영효가 보냈던 관비, 사비 유학생 18명이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1명을 제외한 전원 송환을 타운센드에게 위탁했다.(하지영, ‘한국근대 미국계 타운센드상회에 관한 연구’, 이화여대 석사논문, 1995)
타운센드가 배 한 척 분량 목재를 팔아 만든 돈에 조선 정부가 관세 회계에서 빼낸 돈을 합쳐 고종 정부는 이듬해 6월 유학생들을 송환했다. 명분은 ‘정변 후 학업 소홀’이었지만 실질은 개화파 박멸이 목적이었다. 실제로 당시 미국 유학 중이던 유길준의 사촌 동생 유형준은 그때 송환돼 처형됐다.(이광린, ‘개화당연구’, 일조각, 1979, p214)
이후 타운센드가 고종 정부와 합작한 사업은 그 성과가 눈부시다. 1884년 평안도를 시작으로 금광을 탐사하던 타운센드는 당시 미국 공사 호러스 알렌에게 국내 최대 금광산인 운산 금광 정보를 알려줬고, 알렌은 왕비 민씨로부터 운산 금광을 ‘선물’ 받았다. 타운센드는 상인이기도 했고 광산 기사이기도 했다. 공무원 신분인 알렌은 조선 정부와 미국인 모건 사이에 계약을 주선했다. 훗날 고종은 현금 1만3500달러를 받고 운산 금광 40년 채굴권을 미국 회사에 팔았다. 1896년부터 미국 회사가 광산을 일본에 넘긴 1938년까지 미국 측이 가져간 순익은 1500만달러였다.(이배용, ‘한국근대광업침탈사연구’, 일조각, 1997, p91)
1887년 에디슨 전기회사의 경복궁 전등 설치 공사를 중개하고 부품을 수입한 사람도 타운센드였다. 1896년 미국 사업가 데실러(Deshler)가 하와이 이민 사업을 추진할 때도 타운센드가 개입했다. 1897년 3월 22일 경인철도 기공식에서 테이프를 끊은 사람도 타운센드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2권 3.본성왕복보고 1897년 3월 31일) 미국 스탠더드석유회사 한국 지점장 또한 타운센드였다. 을사조약 체결 사흘 뒤인 1905년 11월 20일 미국 공사관이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해 가진 만찬에도 타운센드는 미국 측 참석자에 포함돼 있었다.
청운의 꿈을 품고 신천지에 발을 디뎠던 미국인 청년은 그 파란만장 혹은 화려한 생을 살고 1918년 62세로 인천에서 죽었다. 난리통에 목숨을 잃은 일본인 가장 오쿠가와도, 조선 근대사 골목마다 얼굴을 비췄던 젊은 미국인 사업가 타운센드도 인천에 잠들어 있다.
▲일본 메이지유신을 뒤에서 지원했던 나가사키의 영국 상인 토머스 글로버./위키피디아
나가사키의 상인 글로버
일본 개항장 가운데 하나였던 나가사키에는 토머스 글로버라는 스코틀랜드 상인이 살았다. 타운센드처럼 대유럽 무역을 독점하던 상인이었다. 스물한 살 때인 1859년 일본에 입국한 이래 총포, 화약, 군함, 차, 도자기, 그림 따위 오만 잡것들을 수입해 파는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글로버는 조선소, 철도, 맥주까지 ‘일본 최초의 서구(西歐)’를 팔고 더 많은 돈을 모았다. 친딸 하나는 베넷이라는 상인과 결혼해 제물포에서 여러 무역상사를 운영하며 살았다.
‘신천지 성공 신화’라면 제물포에 살던 미국인 타운센드와 비교할 만한 인물이다. 그런데 글로버는 단순한 무역상이 아니라 일본 근대화 작업인 메이지유신에 깊이 간여한 인물이다.
메이지유신 5년 전인 1863년 근대화를 주도하던 조슈 번(현 야마구치현) 청년 5인이 극비리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조선 식민지화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이토 히로부미와 민비 암살 사건에 간여한 이노우에 가오루도 그 5명에 끼어 있었다. 막부 허가 없는 출국은 금지된 시대였다. 이들을 비밀리에 자기 회사 상선에 태워 밀항을 도운 사람이 글로버였다. 2년 뒤 1865년에는 사쓰마 번 청년 15명이 또 글로버 회사 상선을 타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앙숙지간이던 조슈와 사쓰마(가고시마현), 두 번이 동맹(삿쵸 동맹)을 맺은 배경도 글로버였다. 글로버의 동업자 혹은 ‘얼굴마담’ 격인 낭만적이되 걸출한 무사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이 두 번을 중재했고, 그 중재에 따라 탄생한 삿쵸 동맹에 무기를 제공한 무기상이 또 이 글로버였다.
중앙정부 격인 막부가 독점한 무역을 당시 최강 번인 조슈, 사쓰마와 글로버가 나눠 가지며 글로버는 엄청난 부자가 됐다. 그리고 일본 근대화 ‘지사(志士)’ 집단은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을 강국으로 이끌었다.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서 벌인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 지식인과 권력자들은 서구 자본가에 질질 끌려 다니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이용해 나라를 새로 만들어갔다. 시대를 주도하는 실천력이 이뤄낸 역사다. 글로버는 ‘스코틀랜드 사무라이’라고 불린다.
▲일본 나가사키 구라바엔의 오페라 ‘나비부인’ 프리마돈나 미우라 타마키 동상./박종인
지금 나가사키에는 글로버가 살던 저택 ‘구라바엔(글로버 정원‧’구라바'는 글로버의 일본 발음이다)이 보존돼 있다. 그가 열어놓은 무역 시장이 유럽에 알려지면서 글로버 저택은 이탈리아 작곡가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 배경이 됐다. 구라바엔에는 나비부인 프리마돈나 미우라 다마키(三浦環) 동상이 서 있다. 그 옆에는 1996년 이탈리아에서 기증한 푸치니 동상이 서 있다. 근대화라는 시대정신에 몇 걸음 물러나 있던 150년 전 조선에서 아쉬운 풍경이다.
▲1996년 푸치니 고향인 이탈리아 루카에서 나가사키 구라바엔에 기증한 푸치니 동상. 왼쪽 어깨에 나비가 앉아 있다. /박종인
263. 그때 광화문 앞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나
세종이 명했다 “백성에게 폐가 되니 광화문에 월대를 만들지 말라”
▲2021년 6월 21일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 있는 광화문이다. ‘역사 복원’을 명분으로 앞에 보이는 도로는 이르면 다음 달 ‘조선시대 광화문 월대(月臺)’ 복원 현장으로 바뀔 예정이다. 그 월대가 조선시대에 존재했는지도 불확실하고, 복원할 명분도 불확실하다./박종인
“오랜 세월 역사 속에 잠들어 있었던 경복궁 앞 월대의 복원은 조선 시대 왕과 백성이 소통하고 화합하던 상징적 공간의 복원으로 그 역사적 의미가 남다르다.”(서울시장 오세훈, 2021년 4월 27일 ‘긴급브리핑’) 현 서울시장이 말하는 ‘경복궁 앞 월대’는 광화문 월대를 뜻한다. ‘조선 시대’ ‘왕과 백성의 소통 공간’을 복원하겠다는 뜻이다.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은 숭고하다. 숭고하려면 역사적 사실(事實)에 부합해야 한다. 이건 어떤가. ‘세종은 “바야흐로 농사철에 접어들었는데 어찌 민력(民力)을 쓰겠는가”하고 광화문 월대 공사를 윤허하지 아니하였다.’(1431년 3월 29일 ‘세종실록’
▲현 광화문광장 공사 전 광화문 풍경. 다음 달 ‘조선시대 광화문 월대(月臺)’ 복원 현장으로 바뀔 예정이다. /박종인
1431년 세종의 농번기 특별대책
조선 왕국은 농업 국가였고 농업은 사대부 사회의 필수적인 경제 기반이었다. 춘분부터 추분까지 농번기에는 농사에 방해가 되는 잡스러운 소송까지 금지했다. ‘경국대전’에는 모반, 불경, 불효, 내란 따위 소위 10대 중범죄와 강력범죄를 제외한 소송은 농번기에는 법적으로 금지였다. 무정무개(務停務開), ‘농사에 방해될 업무를 정지하고, 농사가 끝나면 재개한다’는 원칙이다.
그 ‘농번기’를 두고 말이 많다가 세종 때 춘분~추분 사이를 농번기로 정했다. ‘무정무개법에 대해 논의가 분분하니, 임금이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으로 한정지었다.’(1431년 3월 19일 ‘세종실록’) 넉 달 뒤 세종은 ‘농민에 한해’ 이 원칙을 적용하라고 일렀다.(1431년 7월 14일 ‘세종실록’)
춘‧추분 무정무개법을 정하고 열흘 뒤 예조로부터 “광화문이 누추하니 월대를 만들겠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자 세종은 즉시 이를 불허했다. 이유는 ‘농번기 민력 동원 불가'.(1431년 3월 29일 ‘세종실록’)
월대, 과연 있었는가
‘조선왕조실록’에서 ‘월대’를 검색하면 단 한 번도 광화문 월대가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경희궁 숭정전 같은 궁궐 정전 월대만 나온다. 광화문 월대는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 문화재청 보고서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세종 때 조성된 월대는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판단되며, 1867년 경복궁 중건 당시 광화문과 함께 다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명지대 한국건축문화연구소, ‘경복궁 광화문 월대 및 동·서십자각 권역 복원 등 고증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문화재청, 2018, p45) 이 ‘추정의 근거’라고 인용한 기록이 바로 이 글 앞쪽에 있는 ‘세종실록’ 기록이다. 다시 한번 읽어본다.
‘예조판서가 아뢰기를, “광화문 문밖에 섬돌이 없어서 관리들이 문 지역까지 타고 와서야 말에서 내리니 타당치 못하나이다. 그리고 명나라 사신이 출입하는 곳을 낮고 누추하게 버려두는 것은 부당하니 계단과 둘레를 쌓고 안바닥을 포장해 한계를 엄중히 하게 하소서” 하자 임금은 “바야흐로 농사철에 접어들었는데 어찌 민력(民力)을 쓰겠는가” 하고 윤허하지 아니하였다.’(1431년 3월 29일 ‘세종실록’)
불과 열흘 전 송사마저 농사에 해가 된다고 금지했던 왕이었다. 당연히 월대를 만들겠다는 보고는 일고의 여유도 없이 기각됐다. 실록에 따르면, 월대 공사 보고서 기각 19일 만인 4월 18일 ‘광화문이 이룩되었다(光化門成‧광화문성).’(1431년 4월 18일 ‘세종실록’)
이 기사가 문화재청 보고서에 나온 ‘세종 때 조성된 월대’의 유일한 근거다. ‘세종이 공사를 금했다’는 기록이 ‘월대를 만들었다’는 근거인가? 실록에는 19일 뒤 광화문이 완성됐다고 기록돼 있는데, 문화재청은 ‘이때 월대도 완성됐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실록을 포함한 각종 고문서는 물론 그 어떤 고지도에도 광화문 월대는 보이지 않는다.(명지대 한국건축문화연구소, 앞 보고서, p69) 문헌만 아니라 땅에서도 근거가 나오지 않았다. 2011년 국립문화재연구소 ‘경복궁 발굴조사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고종 연간 월대 기단석 하부, 태조 연간 층위에서 잡석이 일부 확인되었다. 20x30x25㎝ 크기의 잡석이 4~6개가량 월대 기단 석렬에 맞춰 확인됐으나 조사 면적의 한계로 태조 연간 월대 시설의 흔적으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국립문화재연구소, ‘경복궁 발굴조사 보고서’, 2011, p82)
태조 연간, 그러니까 경복궁 건설 때 월대가 있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국립문화재연구소도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월대 시설이 있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판단했다. ‘판단하기에 무리가 따른다’는 문장 뒤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세종로 쪽으로 확장 조사가 가능할 때 선대 유구에 대한 추가 조사를 실시해야 할 것이다.’ 조사를 실시한 뒤에 복원 여부를 결정하는 게 순서라는 뜻이다.
백성과 소통했던 공간이라고?
인간이 하는 일이니, 실록 사관(史官)이 ‘세종이 다시 공사를 허가했다’라는 사실을 잊어먹고 기록하지 못했다고 상상해본다. 문제는 또 있다. 과연 그 월대가 왕이 백성과 소통했던 공간인가?
‘광화문과 월대는 원래 하나의 건축물로서 월대는 광화문의 얼굴이며, 월대 복원은 왕도정치와 시민주권을 연결하고 소통하는 역사적 가치와 화합·통합의 미래적 가치를 담는 상징적 표현임.’(2020년도 문화재위원회 9차 사적분과위원회 회의록) ‘광화문 월대는 행사용 무대와 같은 기능으로 사람들에게 구경이 가능하도록 개방되었다는 점에서 금단의 영역인 궁궐과 백성의 거주지 사이를 연결해 주는 역할로 의미가 있다.’(명지대 보고서, p47)
과연 그랬을까. 기록을 보면 그리 소통의 공간은 아니었던 듯하다.
“금후로는 광화문에 부녀자들 출입을 금하고, 영제교 뜰과 근정전 뜰에도 또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1431년 12월 10일 ‘세종실록’)
‘(세종 넷째 아들) 임영대군 이구와 (영빈 강씨 소생 6남) 화의군 이영이 야밤에 여자 둘을 광화문을 통해 궁으로 들여보내다가 적발됐다. 두 왕자는 방면하고 두 여자는 장 100대를 치고 제주 관비로 쫓아버렸다.’(1441년 8월 12일 ‘세종실록’)
‘광화문 밖에서 산대(山臺‧’산디'라고도 읽는다) 놀이를 봤는데, 본래 이는 중국 사신을 위한 잡희가 아닌가. 다시는 이렇게 하지 말라.’(1545년 4월 27일 ‘인종실록’) 보름 뒤 이 산대가 무너져 군중 수십 명이 깔려 죽었다. 세 살 난 주인집 아이를 업고 온 노비도 죽었다.(1545년 5월 11일 ‘인종실록’) 군중을 동원해 광화문 앞에서 벌인 접대용 매스게임을 금하라는 명이었고, 결국 참사가 터지고 말았다는 기록이다.
요절한 인종 다음 왕인 명종은 명 황제 칙서를 들고 귀국한 사은사를 그 광화문 밖까지 나아가 맞이했고(1555년 7월 11일 ‘명종실록’), 임진왜란 발발 직후 북쪽으로 달아난 선조와 관료들을 보면서 백성은 경복궁에 난입해 궁궐을 불태웠다.(1592년 4월 14일 ‘선조수정실록’) 전후 경복궁을 중건하는 공사에 그 백성이 투입됐는데 ‘겨우 벌목을 시작했을 뿐인데도 산골 마을에는 도망하여 떠도는 자가 즐비한’ 참담한 일이 벌어졌다.(1606년 11월 7일 ‘선조실록’)
경희궁에서 근 20년을 살았던 영조는 창덕궁에 들렀다 돌아오며 ‘흥화문에 이르러’ 백성의 상언을 받아들였다.(1744년 9월 9일 ‘영조실록’) 영조는 또 광화문 밖에 유생 수천 명을 모아놓고 “오늘 상소를 하면 불문에 부치되 앞으로는 역률(逆律‧역적죄)로 다스린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모인 유생들 리스트를 작성한 뒤 어린 유생에게 구두 시험을 치고 성적 불량자는 대사성(大司成‧성균관 관장)에게 매를 치게 했다.(1770년 4월 5일 ‘영조실록’)
▲‘도성대지도(1760년대)’ 경복궁 부분. 경회루는 돌로 만든 기둥만 남아 있고 광화문은 부서진 석물 위로 한쪽 지붕만 남아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49년 동안 존재했던 월대, 100년 동안 있었던 길
1760년대 ‘도성대지도’에는 그 당시 경복궁이 그려져 있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은 폐허가 돼 있다. 목조 건물은 다 불탔지만 석조물은 대개 살아남았다. 주춧돌, 기둥 같은 석재다. 경회루는 돌기둥 몇 개만 남고 사라졌다. 이런 폐허 장면은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에도 똑같이 묘사돼 있다. 이 지도 속 광화문을 본다. 광화문은 아치형 홍예문이 세 개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돌로 만든 홍예문은 그대로인데 지붕을 포함한 위 목재 구조물은 오른쪽(동쪽) 지붕만 남고 사라져 있다.(월대는 표시돼 있지 않다. 이 지도에 그려진 창덕궁 돈화문과 경희궁 흥화문 월대도 표시돼 있지 않다.)
▲'도성대지도'(1760년대) 광화문 세부. /서울역사박물관
‘광화문 월대’라는 단어 자체가 기록에 등장한 시기는 고종 3년인 1866년이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해 중건한 경복궁 ‘영건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광화문 앞에 월대를 쌓았다. 궁 안에서 짊어지고 온 잡토가 4만 여 짐에 이르렀다.’(국역 ’경복궁 영건일기'1 1866년 3월 3일, 서울역사편찬원, 2019, p404). 이 ‘영건일기’는 경복궁에 남아 있던 옛 석재와 목재를 재활용할 때는 반드시 재활용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예컨대 ‘근정전 앞 문무품 품계석 각 12개는 헐어버린 간의대 옥석(玉石)으로 만들었다'는 식이다.(국역 ‘경복궁영건일기’2 1867년 10월 9일, p334) 그런데 ‘광화문 월대 완성’ 기록에는 월대 자리에 있었어야 할 옛 석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재활용할 부재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 월대는 백성을 위한 공간도 아니었다. 사진에서 드러나듯, 경복궁 담장 동서로 육조 건물이 붙어 있고 그 가운데에 월대가 들어서 있다. 궁장과 육조 건물 사이 비좁은 골목에서 월대 남쪽 끝까지 우회해야 동서 통행이 가능했다. 백성이 함부로 지나갈 수 없었던, 조선왕실의 폐쇄된 공간이었다.
▲1910년대 광화문 풍경. 1866년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건설된 월대가 남아 있다. 월대 양편으로 육조건물과 맞물려 좁은 골목이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월대 복원을 진행 중인 서울시는 1923년 광화문 앞 전차 선로 개설과 함께 월대가 철거됐다고 추정한다.(서울시, ‘광화문광장 개선 종합기본계획’, 2018) 절반만 맞고 절반은 틀렸다. 1915년 총독부가 경복궁에서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 사진에는 이미 월대가 공진회용 가구조물 받침대로 사용되고 있다. 실질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까 1866년에 신설돼 짧으면 49년 길면 57년 동안 존재했던 구조물 복원을 위해 100년 넘게 존재했던 도로가 사라지는 것이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사진. 이미 월대는 공진회 행사를 위해 세운 가구조물 기단으로 용도가 변경됐다. /서울역사박물관
과연 고종 이전 조선시대에 월대는 존재했었는가. 복원에 앞서 조사는 이뤄졌는가. 과연 왕과 백성이 소통하고 화합하던 상징적 공간인가. 근거는 무엇인가. 광화문 앞 도로를 T자형 및 Y자형으로 순차 재구조화, 광장 조성 및 월대 복원 사업 예산은 국비 290억 원과 서울시비 738억 원, 합계 1028억 원이다.(2020년도 문화재위원회 9차 사적분과위원회 회의록) 이래서 사실에 근거한 명분이 필요하다.
264. 1755년 남대문에서 폭발한 영조의 광기(狂氣)
대자보에 폭발한 광기, 왕은 죄인 머리를 깃대에 매달라 명했다
▲서울 숭례문 아래 홍예문 천정에는 용이 그려져 있다. 용은 왕의 권위와 권력을 상징한다. 영조 때는 이 남대문 앞에서 역적 처형식이 열리곤 했다. 1755년 여름에 벌어진 처형은 권력 콤플렉스와 정통성 시비에 시달리던 영조의 광기가 적나라하게 폭발한 사건이었다. /박종인
복잡다기한 영조의 콤플렉스
경종이 즉위하고 1년 두 달이 지난 1721년 8월, 당시 여당인 노론은 야밤에 궁으로 들어가 경종에게 “후사를 기대하지 말고 이복동생 연잉군을 왕세제로 택하라”고 요구했다. 경종은 그들 뜻대로 연잉군을 차기 왕으로 선택했다.(1721년 8월 20일 ‘경종실록’) 두 달 뒤 노론은 경종에게 본인은 물러나고 아예 정사를 세제에게 대리청정 시키라고 요구했다.(같은 해 10월 10일 ‘경종실록’) 그러자 야당인 소론 김일경이 이리 상소했다. “저 (노론) 무리들이 벌써부터 전하를 군부(君父)로 대접하지 않고 또 스스로 신하로 여기지 않는다(彼輩旣不以君父待殿下 亦不以臣子自處也·피배기불이군부대전하 역불이신자자처야).”(같은 해 12월 6일 ‘경종실록’) 경종은 하고 싶던 말을 대신 해준 전직 관리 김일경을 이조참판으로 등용했다. 왕위를 맘대로 하려던 노론 4대신에게는 유배형을 내렸다. 권력은 노론에서 소론으로 옮겨갔다. 하늘과 땅이 뒤집힌 듯했다.(같은 날 ‘경종실록’)
3년 뒤 멀쩡하던 경종이 급서하고 왕세제 연잉군이 왕이 되었다. 그가 영조다. 등극 과정은 이렇게 정통성이 부족했고 복잡했다. 오랜 기간 영조는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노론과 손잡고 이복형인 경종을 죽이고 왕이 됐다’는 루머가 말년까지 떠돌았다. 아버지 숙종과 무수리 사이에서 난 신분적 열등감과 형을 죽이려 했다는 혐의도 풀리지 않았다. 이 복잡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자. 오늘은 서기 1755년 여름날, 이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권력자가 서울 남대문 노상에서 폭발한 광기(狂氣) 가득한 풍경을 구경해본다.
▲조선 21대 국왕 영조(1694~1776) /국립고궁박물관
나주 괘서 사건과 광기의 서막
영조 왕위에 의문을 품은 수많은 무리들이 의문을 실천에 옮겼다. 조정을 비난하는 괘서(掛書·대자보) 사건은 난무했다. 등극 4년째인 1728년 영남 남인들이 주축이 된 ‘이인좌의 난(무신란‧戊申亂)’은 군사력으로 정권을 바꾸려는 쿠데타이자 혁명이었다.
무신란 진압 후 근 30년이 지난 1755년 나주 괘서 사건이 터졌다. 여염집 담벼락도 아니고, 전라도 나주 객사 망루에 반정부 대자보가 나붙은 것이다. 괘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1755년 2월 4일 ‘영조실록’) 오랜 세월 ‘상하(上下)가 편안히 여기며 지냈던’ 터라 영조는 웃어넘기려 했지만 노론은 달랐다. 권력이 흔들릴 징조였다.
그리하여 좌우포도대장을 출동시켜 사정을 알아보니 1724년 영조 즉위 후 역적 혐의로 처형됐던 윤취상이라는 자의 아들 윤지(尹志)가 벌인 일이었다. 윤지 또한 그때 제주도로 유배됐다가 나주로 유배지를 옮긴 인물이었다. 일은 역모 사건으로 확대됐다.
▲1755년 노론 정권과 영조에 저항하는 괘서(掛書)가 걸렸던 전남 나주 객사./박종인
체포된 윤지는 영조가 직접 심문했다. 나주는 물론 서울에 있는 소론 인사까지 두루 체포돼 고문을 받았다. 2월 25일 윤지는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3월 8일 영조가 창경궁에서 가마를 타고 남대문 밖 청파교까지 나가 그 아들 윤광철 목 베는 장면을 참관했다. 잘린 목과 팔, 다리(肢脚·지각)는 거리에 걸도록 명했다. 윤취상-윤지-윤광철로 이어지는 3대의 끔찍한 멸문이었다.(1755년 3월 8일 ‘영조실록’)
두 달 뒤 영조는 역적 토벌을 기념하는 특별과거 토역정시(討逆庭試)를 실시했다. 영조가 직접 채점해 급제자 10명을 뽑았다. 그런데 답안지 하나를 영조가 읽다가 다 보지 못하고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1755년 5월 2일 ‘영조실록’) 두 달 전 괘서 사건을 처리할 때 얼핏 보였던, 광기(狂氣)의 서막이었다.
역모 가득한 과거 답안지
제출한 답안지를 영조가 찬찬히 뜯어보는데, 답안지 하나는 그 아래쪽에 ‘파리 머리만한 글씨’로 난언패설(亂言悖說·사리에 어긋나게 정치를 비난하는 글)이 가득 적혀 있었다. 마침 시험장 감시관이 땅에 떨어져 있는 종이 한 장을 주워서 바쳤는데 ‘그 종이에도 음참한 글이 가득해 똑바로 보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까지 땅에 떨어질 듯하였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왕을 바라보며 신하들 또한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종이에는 왕실 금기 사항인 선왕(先王)들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같은 날 ‘영조실록’)
답안지와 종이 주인은 1728년 무신란 때 처형당한 역적 심성연의 동생 심정연이었다. 난을 평정하고 27년이 지나고, 더군다나 막 발생했던 괘서 사건 처리 완료 기념 시험장에서 또 콤플렉스를 건드린 사건이 터진 것이다.
다음 날과 그다음 날 영조가 직접 행한 심문에서 심정연은 이리 말했다. “내 일생 동안 가진 생각이기에 시험장에 들어오기 전 이미 써둔 글이다. 여하간 왕에게 음흉한 말을 했으니 내 흉한 마음이 탄로 났구나.” 심정연 또한 남대문 밖 청파교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복주(伏誅)됐다. 복주는 ‘역적 혐의로 처형했다’는 뜻이다.(같은 해 5월 4일 ‘영조실록’) 죽기 전 심정연은 공모자들을 자백했는데, 그 가운데 나주 괘서 사건 주모자 윤지의 사촌 윤혜가 끼어 있었다. 괘서 사건 마무리 경축 파티에 바로 그 괘서 사건 범인 무리가? 왕은 지옥문을 열어버렸다.
▲소론 반역자들에게 지옥문이 돼 버린 남대문. /박종인
지옥문이 된 남대문
창경궁 선인문 남쪽 궐내각사 내사복(內司僕) 마당으로 윤혜(尹惠)가 끌려왔다. 체포와 함께 압수해온 문서 한 장에 역대 왕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윤혜가 “내 아들 이름 지을 때 참고하려고 썼다”고 답했다. 진노한 영조가 붉은 방망이(朱杖·주장)으로 매우 치라 명했다. 윤혜는 혀를 깨물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론 원로 영부사(領府事·원로 벼슬) 김재로가 영조를 말렸다. “전하께서 매양 급하시기에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십니다.” 그러자 영조가 소리를 질렀다. “급하게 해도 실토하지 않는데, 느슨하게 하면 실토하겠는가!”
이성을 잃은 영조는 보여(步輿)를 타고 서둘러 궁궐을 나갔다. ‘보여’는 왕이 타는 가마 연(輦)보다 작은, 늙은 평민이 타는 작은 가마다. 가마가 종묘에 이르자 영조는 가마에서 내려 땅에 엎드리며 “내 부덕함이 종묘에 욕을 보였으니 내가 어찌 살겠는가”하고 울었다. 그리고 운종가 광통교에서는 구경 나온 노인들에게 이리 말했다. “올해에 또 남문(南門·남대문)에 가니, 너희들 보기가 부끄러울 뿐이다.”(1755년 5월 6일 ‘영조실록’)
남대문. 지옥문이었다. 이성을 찾으라는 원로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벌어진 풍경은 이러했다.
왕이 갑옷을 입고 숭례문 누각에 나아갔다. 대취타(大吹打)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왕이 윤혜를 고문하라 명하며 “문서를 누가 썼는가” 물었다. 윤혜는 곧바로 “심정연이 짓고 내가 썼다”고 자백했다. 그러자 영조는 문무백관을 차례차례 기립하라 명한 뒤 훈련대장 김성응에게 윤혜를 참수하고 그 목을 매달아 바치라 명했다. ‘헌괵(獻馘)’이라고 한다.
목을 기다리며 왕이 울면서 말했다. “이 어찌 내가 즐거이 하는 일이겠는가!” 영의정을 지냈던 판부사 이종성이 왕을 뜯어말렸다. “하급 관리가 할 형 집행을 어찌 지존(至尊)께서 하시나이까.” 그러자 영조가 상을 손으로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그대는 나를 하급 관리 취급하는 것인가!” 그 자리에서 전직 영의정 이종성은 충주목으로 부처형(付處刑‧귀양형의 일종)을 받았다. 이어 헌괵이 늦어지자 영조는 훈련대장 김성응을 곤장을 치고 충청도 면천군으로 부처형을 내렸다.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때 임금이 이미 크게 노한 데다가 또 자못 취해서(上旣盛怒且頗醉·상기성노차파취) 윤혜의 목을 깃대 끝에 매단 뒤 문무백관에게 여러 차례 조리를 돌리게 했다. 그리고 작은 천막에 들어가 취해 드러누웠는데, 물시계가 인정(人定‧밤 10시)을 알릴 때에도 취타는 그치지 않았다. 밤새도록 남대문 하늘 위로 취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은 날이 샐 무렵에야 천막에서 나와 취타를 그치게 하고 갑옷을 입은 채 궁으로 돌아갔다.’(이상 1755년 5월 6일 ‘영조실록’) 윤혜의 형제 셋도 이날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닫히지 않은 지옥문과 광기
‘역적 소굴을 밝힐 일을 논하다’, ‘복주되다’, ‘효수하다’, ‘국문하다’, ‘국문하고 효시하다’, ‘형신하다’, ‘물고되다’…. 1755년 5월 ‘영조실록’ 기사 제목들은 끔찍하다. 역적 혐의로 처형하고 목을 베고 고문 도중 죽고 목을 베 내걸고…. 이때 많은 소론(少論)이 역모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이런 실록 기사들 주인공이 됐다. 소론은 이후 제대로 권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노론은 아주 오래도록 권력 중심을 차지했다.
그리고 아홉 달이 지난 1756년 2월 15일 서인의 태두요 노론의 정신적 지도자 송시열과 송준길이 문묘에 종사됐다. 숙종 이래 노론당 숙원 사업이던 송시열 성인화 계획이 마침내 실현됐다.
그리고 8년이 지난 1764년 5월 15일 영조는 소론 영수였던 박세채 또한 문묘에 종사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그 전후 신하들과 나눈 대화가 의미심장했다. 영조가 이리 물었다. “송시열이 도통(道統)을 (소론 영수였던) 박세채에게 부탁했던가?” 예조판서 홍계희가 답했다. “세도(世道·세상을 이끌 도리)를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영조는 박세채 또한 문묘에 종사하라고 명했다.(1764년 5월 15일 ‘영조실록’) 평생 콤플렉스에 시달린 왕, 그리고 그 권력을 지켜준 당과의 관계는 그러하였다.
265. 1728년 이인좌의 난과 도래한 노론 천하
‘나라 절반이 역적이 돼 버렸나이다’
▲경기도 안성에 있는 낙원역사공원에는 안성 곳곳에서 모아온 공덕비들이 서 있다. 1728년 남인과 급진 소론의 반란인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조선국 사로도순무사 오공 안성 토적 송공비’도 있다. 이인좌의 난은 영조의 정통성에 반기를 들고 노론 장기 집권을 타도하려던 반란이었다. 영조와 정조 정권은 이 난 평정을 기념하는 비석을 곳곳에 세웠다./박종인
전국에 흩어져 있는 토역(討逆) 기념비
경기도 안성 낙원동에 있는 공원 이름은 안성낙원역사공원이다. 이곳에는 안성 도처에서 가져온 각종 공덕비가 모여 있다. 공원 한 켠 관리실 옆에는 부러진 팔을 시멘트로 보수한 부처님이 앉아 있는데, 그 옆에는 큼직한 비석이 서 있다. 새겨져 있길, ‘朝鮮國四路都巡撫使吳公安城討賊頌功碑(조선국 사로도순무사 오공 안성 토적 송공비)’. 오명항이라는 사람이 안성에서 역적을 토벌한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다. 영조 20년인 1744년에 세웠다.
저 남쪽 경북 성주 예산리 탑거리에도 비석이 모여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성산기공비: 인평부원군 충정 이공 무신기공비’다. 무신년 역적 퇴치에 공을 세운 이보혁을 기리는 비석이다. 세운 해는 정조 8년인 1784년이다. 또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황강을 내려다보는 경남 합천 함벽루 근처에도 비슷한 비석이 있다. 정조 14년인 1790년에 세운 이 비석 이름은 ‘합천군무신평란사적비(陜川郡戊申平難事蹟碑)’, 1728년 무신년 합천군에서 벌어진 역란(逆亂) 평정 기념비. 원래는 대구에도 같은 비석이 있었는데 일제 때 사라졌다. 그 비석 이름은 ‘평영남비(平嶺南碑)’, 영남 평정 기념비(1780년).
전국을 들쑤시며 일어난 이 반란 사건은 1728년 벌어진 ‘이인좌의 난’이다.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영조 집권 초기, 정권의 비정통성에 반기를 든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의 무장 권력 투쟁이었다. 대실패로 끝난 이 반란은 결과적으로 노론 영구 집권으로 이어졌고, 그 잔당이 벌인 일이 ‘나주 괘서 사건’이었다. 그 처리 과정에서 보인 영조의 광기는 지난주 본 바와 같다.(‘땅의 역사 264.남대문에서 폭발한 영조의 광기’ 참조) 수사 기간 1년 동안 의금부 앞마당을 250명에 이르는 사람들 피로 물들인, 조선왕조 최대 역모(逆謀) 이야기.
▲조선 21대 국왕 영조(1694~1776) /국립고궁박물관
온건 소론의 집권과 급진 소론의 불만
‘이복형 경종을 독살하고 노론과 함께 왕위에 오른 권력자.’ 영조에게 따라다니던 꼬리표였다. 지금은 야사(野史)로 취급받기도 하지만, 1724년 영조 즉위 당시 목숨을 걸고 대립하던 노론과 소론, 남인에게 ‘경종 독살설’은 권력 쟁취를 위한 제일의 명분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권력을 잡은 서인(西人)은 숙종 때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됐다. 영남을 기반으로 한 남인 세력은 권력에서 배제됐다. 그때 서인은 ‘우리 사림(서인)을 중용하자(崇用山林‧숭용산림)’고 밀약했다.(남하정, ‘동소만록(1740?)’, 원재린 역, 혜안, 2017, p302) 이후 권력은 서인 내부 노론과 소론 사이를 오갔다. 영조대에 이르러 노론 권력이 공고화되고, 조선 말까지 변함이 없었다. ‘당파를 초월해 인재를 등용한다’는 탕평책은 사실상 말뿐이었다. 그 굳은 정치 질서가 붕괴될 뻔한 사건이 이인좌의 난이었다.
1724년 노론과 연합해 권좌에 오른 영조는 3년 뒤 거듭된 노론의 간섭을 물리치고 소론 온건파를 정계에 복귀시켰다. 정미환국(丁未換局‧1727)이라고 한다. 경종 독살설을 진실로 믿고 있던 소론 강경파는 만족하지 않았다. ‘소론 세력을 다 죽이자’는 노론 강경파에 대한 경고였을 뿐, 영조 권력 기반은 여전히 노론이었으니까.
반란 세력은 소론 이인좌가 지휘한 급진 소론‧영남 남인 연합 세력이었다. 1728년 3월이다. 이들은 소현세자 증손자인 밀풍군 이탄을 왕으로 추대하고 전국에서 반란군을 일으켰다. “노론이 거사해 소론을 모조리 죽이기 전에 제압하기 위해”(1728년 3월 20일 ‘영조실록’) 선수를 친 것이다.
대기근과 부패, 흉흉한 민심
마침 전국을 덮친 대기근도 이들에게는 반역을 위한 호기(好機)였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1725년 김제에서 어떤 아낙이 “부엌 안에 개를 묶어놨으니 개 줄을 잡아당겨 죽여서 잡아먹자”고 한 뒤 부엌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윽고 그녀가 신호를 보내니, 남편이 문밖에서 줄을 잡아당겨 개를 죽였다. 뿔뿔이 흩어지기 전 최후의 만찬 메뉴였다. 그런데 부엌에 들어가니 개는 없고 아내가 죽어 있었다.(1725년 11월 3일 ‘영조실록’) 기근이 낳은 비극이었다. 굶주려 도적이 된 백성이 즐비했지만 수령 열 가운데 여섯, 일곱은 땅을 사고 새 집 짓는 데 여념이 없었다.(1728년 1월 11일 ‘영조실록’)
그해 3월 반역 보고가 올라오자 영조가 이리 말했다. “백성들 고통이 거꾸로 매달린 듯한데 간사한 무리들이 이를 헤아려 난동을 일으키는구나.”(같은 해 3월 14일 ‘영조실록’) 이인좌 무리는 민심을 잡기 위해 ‘신역을 감면하고(除役減役‧제역감역)’ ‘고을 수령은 죽이지 말고(不殺邑倅‧불살읍쉬)’ ‘백성은 단 한 명도 죽이거나 겁탈하거나 재물을 빼앗지 말라’고 반란군에 명을 내리기도 했다.(같은 해 3월 25일 ‘영조실록’)
나라 절반이 역적이 되었다
경남(경상우도)와 호남, 충청에서 동시다발로 거병한 반란군은 순식간에 경기도 안성까지 북상했다. 충청에서는 남인 이인좌가, 경상에서는 남인 조성좌와 정희량, 호남에서는 소론인 태인현감 박필현이 지휘했다.
한마디로 ‘난적(亂賊) 토멸과 종사(宗社) 안정을 위해 문관과 무관, 남인·소북(小北)·소론을 막론하고 동시에 거의한’ 조선 왕조 최대 규모 반란이었다.(같은 해 3월 26일 ‘영조실록’, 박필현 심문) 난을 진압한 뒤 노론이었던 영남 안무사 박사수 또한 영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나라 절반이 역적이 돼 버렸나이다(半國爲逆‧반국위역).”(같은 해 4월 24일 ‘영조실록’)
반란 첩보가 올라온 그해 3월 14일, 이미 한성 나루터들은 몰려드는 피란민으로 길이 막혔다. 이미 반란군과 정보를 교환한 도성 내 소론들이 난리를 피하려 몰려간 것이다.(3월 14일 ‘영조실록’) 3월 15일 이인좌 군이 청주성을 접수했다. 19일과 20일 정희량과 박필현이 군사를 일으켰다.
온건 소론이 앞장선 토벌 작전
한성 진입이 초읽기에 들어간 3월 17일 뜻밖에도 소론인 병조판서 오명항이 토역을 자처했다. 영조는 즉각 이를 수용하고 역시 소론인 박문수를 종사관으로 임명했다.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은 ‘경기도 직산으로 출정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며 경기도 안성에 부대를 매복시켰다. 이인좌 군이 직산을 피해 안성에 접근할 때까지 오명항은 ‘코를 골며 자는 척하다가 거리가 1백여 보가 될 무렵에야 신기전을 쏘며 적을 물리쳤다.’(같은 해 3월 23일 ‘영조실록’) 체포된 이인좌는 현장에서 능지처사됐다.
▲안성객사./박종인
오명항은 경상도에서 토벌작전을 벌이던 박문수와 성주목사 이보혁과 합류해 정희량 부대를 격파했다. 현직 현감이 거병했던 호남 또한 한 달이 못 돼 진압됐다. 한 줌 반정세력이 주도한 중종반정(1506)‧인조반정(1623)과 달리 나라 절반이 가담한 초대형 반란이었지만, 결국 실패였다. 4월 19일 사로도순무사 오명항이 남대문으로 개선했다. 영조는 남대문 문루에 올라 이들을 맞이했다. 오명항은 황금투구를 쓰고 붉은 갑옷을 입고서 반군 지휘관 정희량, 이웅보, 나숭곤의 목을 상자에 담아 영조에게 헌괵(獻馘‧목을 바침)했다. 이미 엿새 전 서울로 보내와 소금에 절여 훈련도감 화약고에 보관돼 있던 목들이었다. 영조는 이 목들을 장대에 걸라고 명했다.(같은 해 4월 19일 ‘영조실록’)
도살장으로 변한 창덕궁
‘무신역옥추안’은 무신란에 가담한 반란군 심문 기록이다. 난 발발 직후인 1728년 3월 16일부터 1729년 3월 24일까지, 전사자 및 즉결처형자를 제외한 중죄인 291명 명세가 적혀 있다. 이들은 창덕궁을 위시한 궐내에서 열린 추국청 조사를 받았다. 영조가 직접 심문하기도 했다. 신분을 보면 사회 개혁보다는 권력 쟁취가 주목적임을 짐작할 수 있다. 291명은 사대부 173명, 군관 6명, 중인 10명, 평민 4명과 노비 12명, 미상 86명이었다.
영조는 무자비했다. ‘경종 독살 혐의’라는 역린(逆鱗)을 건드린 반역자들이었다. 이 249명 가운데 159명이 죽었다. 능치처사형으로 48명, 참수형으로 24명, 교수형으로 3명이 처형됐다. 조사가 조금이라도 더디면 영조는 “이 무더운 날에 7~9회까지 심문하는 건 무능한 일이니 더 엄히 심문하라”고 독려했다.(‘무신역옥추안’ 8책 7월 9일, 고수연, ‘무신역옥추안에 기록된 무신란 반란군의 성격’, 역사와 담론 82, 호서사학회, 2017, 재인용) 결국 사망자 가운데 절반이 넘는 84명이 ‘물고(物故)’ 됐다. 고문사(拷問死)했다는 뜻이다.
▲경남 합천 함벽루 근처 언덕에 서 있는 ‘합천군무신평란사적비(陜川郡戊申平難事蹟碑)’. 정조 14년인 1790년에 세웠다. /박종인
벼슬길 막힌 영남 남인들
반역향으로 낙인찍힌 영남은 오래도록 벼슬길이 막혀버렸다. 영조는 “영남은 본디 추로(鄒魯‧공자와 맹자)의 땅이므로 차별 없이 등용하라”고 선언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반란 평정 5년 뒤 공신 박문수는 “탕평이 이름은 있고 실적이 없다”고 비판했다.(1733년 12월 19일 ‘영조실록’) 이듬해 이조판서 송인명은 “영남인은 벼슬 추천을 받아도 등용이 안 된다”고 보고했다.(1734년 11월 11일 ‘영조실록’)
반란 17년 뒤인 1745년 영조가 문득 이리 물었다. “지금도 영남인은 백의(白衣)를 입고 재를 넘는 자가 없는가?” 영남 심리사 김상적이 이렇게 답했다. “영남인들 소원은 일개 진사(進士)가 되기에 그칩니다.”(1745년 5월 13일 ‘영조실록’) 벼슬 없이는 죽령을 넘지 않는 콧대 높은 영남 사람들이 벼슬길이 하도 막혀서 진사나 되는 게 소원이라는 것이다.
인조~경종 연간 당색별 당상관 배출 인원은 서인 76%, 남인 13%, 북인 11%였다. 그런데 영조~정조 연간에는 노론 81%, 소론 14%, 북인 4%, 남인 1%였다. 이후 순조~고종 때는 노론이 83%, 소론 12%에 북인은 3%이며 남인은 2%였다.(차장섭, ‘조선후기 벌열연구’, 일조각, 1997, p182~183, p276) 노론 천하였다. 그 아득한 세월 동안 노론은 전국 각지에 토역(討逆) 기념비를 세웠다.
266. 세종에서 공예박물관까지 안동별궁에서 벌어진 오만 가지 일들
서울 안국동 175번지에는 500년 조선왕실 비사가 숨어 있다네
▲오래도록 조선왕실 별궁(別宮) 터였고 최근까지 풍문여고 학교터였던 서울 안국동 175번지에 서울공예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일반인은 범접할 수 없던 그 권위적 공간이 왕조 500년 동안 천대받던 무명씨 장인(匠人)들을 기리는 공간으로 변했다. 사진은 부설 어린이박물관 옆에 있는 400살 먹은 은행나무. /박종인
오래도록 조선왕실 별궁(別宮) 터였고 최근까지 풍문여고 학교터였던 서울 안국동 175번지에 서울공예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일반인은 범접할 수 없던 그 권위적 공간이 왕조 500년 동안 천대받던 무명씨 장인(匠人)들을 기리는 공간으로 변했다. 좁다면 좁은 이 공간을 찬찬히 뜯어보면 조선 왕국이 500년 동안 걸어온 발자국이 또렷하게 보인다. 법을 바꿔가며 막내에게 집을 지어준 세종에서 변란 와중에도 고모가 살 집 공사를 강행한 인조 그리고 왕조 사상 최고 호화판 혼례식을 치러낸 고종 왕비 민씨와 식민 시대 최고 갑부 민영휘까지, 이 땅을 차지했던 사람들 이야기.
▲20세기 초 촬영된 서울 안국동 안동별궁./국립중앙박물관
세종의 죽음과 안국동 동별궁
1450년 2월 17일 개국한 지 100년도 되지 않은 조선 왕조 기틀을 닦고서 세종이 죽었다. 각종 성인병을 동반한 채 과로로 몸을 혹사시킨 왕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 주소로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4, 지번으로는 안국동 175번지 막내아들 영응대군 이염 집 동별궁(東別宮)에서 죽었다. 천재들을 지휘해 조선의 군사와 과학과 성리학 질서 구축을 마무리한 천재요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했던(終始以正·종시이정)’ 군주였다.(1450년 2월 17일 ‘세종실록’)
1450년 2월 4일 세종은 막내아들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로도 모든 사무를 재결하는 데에는 물 흐르듯 하되, 모두 끝까지 정밀하게 하기를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2월 15일 승려 50명이 별궁에 모여 임금 쾌유를 비는 기도를 올렸다. 운명을 예상했는지, 그날 세종은 대사면령을 반포했다. 다음 날 병세가 악화된 왕은 모든 정사를 정지했다. 다음 날 세종은 하늘로 갔다.
부동산 갑부 영응대군 이염
세종은 나이 서른일곱에 생긴 막내아들 염(琰)을 끔찍이 사랑했다. 궁중 예법에 따라 다른 아들들은 아비인 왕을 ‘진상(進上)’이라 불렀으나 염만은 무릎에 앉히며 “15세까지는 아버지라 부르라”고 했다.(‘영응대군 신도비’)
염이 열 살 되던 1444년 세종은 경복궁 사정전에서 규수들을 면접하고 여산 송씨 여식을 며느리로 간택했다. 아들이 처가에 사는 동안 세종은 영응대군 거처를 준비했다. 2년이 지난 1446년 안국동에 집을 짓기 위해 민가를 철거하고 집터를 골랐다. 실록에 따르면 ‘그때 건축하는 비용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1446년 3월 7일 ‘세종실록’)
또 2년이 지난 어느 날 세종이 이리 말했다. “여러 아들 집을 짓는데 남의 집을 많이 헐어서 비웃음이 많았으나, 왕자로 하여금 성문 밖에 나가 살게 할 수야 있겠는가.” 그리고 본심을 말했다. “옛법에 따르면 대군 집 대들보 길이는 8척밖에 안 되니 너무 좁다. 대들보 길이를 10척으로 확장하려 한다. 내 결정이 틀렸나.” 법을 바꿔서 아들 집을 넓히겠다는 말에, 신하들은 만장일치로 화답했다. “지금도 사람들은 꼭 옛법을 지키며 짓지 않사옵니다.”(1448년 12월 14일 ‘세종실록’) 며칠 뒤 지관 이현로가 “좋은 땅이 (땅을 닦고 있는 여러 후보지 가운데) 안국동만 한 데가 없다”고 아뢰자 드디어 안국동 인가 60여 채를 헐었다.(1448년 12월 14일 ‘세종실록’)
이듬해 여름 집현전에서 “대군의 저택이 너무 화려하다”고 지적했다. 세종이 “다른 아들들 집과 다를 바 없는데 무슨!”하며 화를 내자 대신들은 “절대 지나치지 않으니 공사를 진행하시라”고 답했다.(1449년 7월 27일 ‘세종실록’) 공사는 강행됐고, 영응대군은 부동산 거부가 되었다. 그뿐 아니었다. 세종이 죽고 왕에 즉위한 맏형 문종은 세종 유지를 받들어 궁중 금고 내탕고에 있던 보물을 모두 막내에게 주었다. 왕실에 대대로 내려오던 보화가 모두 염에게로 돌아갔다.(1467년 2월 2일 ‘세조실록’)
권력투쟁, 그리고 살아남은 별궁
혼례를 치르고 5년이 지났지만, 송씨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세종은 “병이 있다”는 이유로 영응대군과 며느리 송씨를 강제 이혼시키고 해주 정씨 여식에게 장가를 보냈다. 여러 만금의 진귀한 보물을 또 선물로 주었다.(1449년 6월 26일 ‘세종실록’)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했다. 문종 또한 영응대군이 사는 이 동별궁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1453년 10월 10일 밤 중무장한 수양대군 무리가 서대문에 사는 김종서를 찾아가 이리 물었다. “영응대군 부인 일을 종부시(宗簿寺·왕실 감찰 부서)에서 조사 중인데, 정승께서 지휘하시나?”(1453년 10월 10일 ‘단종실록’) ‘영응대군 부인 일’은 전처 송씨와 재결합한 일을 말한다. 입을 다문 김종서 머리 위로 철퇴가 날아갔다.
해주 정씨를 아내로 맞은 영응대군은 옛 아내 송씨를 잊지 못했다. 궁에서 쫓겨난 송씨는 친오빠 송현수 집에 얹혀 살았다. 송현수는 수양대군과 친구였다. 수양대군은 수시로 막내 영응을 친구네 집으로 데려갔고, 그 새에 둘 사이에 딸이 둘 태어났다. 계유정난을 성공시키고 한 달 뒤인 1453년 11월 28일 수양은 왕명으로 정씨를 폐출시키고 막내를 옛 아내 송씨와 재결합시켰다.(1453년 11월 28일 ‘단종실록’)
이어 수양은 친구 송현수 딸을 자기 조카 단종에게 시집보냈다. 권력 주변을 측근으로 가득 채운 것이다. 그리고 2년 뒤 본인이 왕이 되었다. 용도폐기된 친구 송현수는 장 100대를 맞고 관노로 전락했다.(1457년 8월 16일 ‘세조실록’) 그리고 두 달 뒤 결국 정난공신들 강청에 의해 교형(絞刑)됐다.(1457년 10월 21일 ‘세조실록’)
그 와중에 살아남은 영응대군은 안국동 별궁을 지켰다. 후사가 없자 영응은 연안 김씨와 또 혼례를 치렀다. 권력이 안정기에 접어든 1466년 세조는 별궁을 찾아 막내와 술잔치를 벌였다.(1466년 1월 19일 ‘세조실록’) 이듬해 영응이 죽었다. 별궁은 아내 송씨 소유가 됐다.
▲별궁 첫 주인인 세종 막내아들 영응대군 묘비. 부부 내력이 복잡해 비석에 적힌 부인이 셋이다. 경기도 시흥에 있다./박종인
중요하되 대세와 무관한 주인들
1471년 혼자 살던 송씨가 별궁을 성종에게 바쳤다. 성종은 이 집을 ‘연경궁’이라 부르고 형인 월산대군에게 하사했다.(1471년 7월 24일, 1472년 12월 2일 ‘성종실록’) 이에 월산대군은 살고 있던 정동 집에서 안국동으로 이사했다.(강진철, ‘안동별궁고’, 아시아여성연구 2집,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 1963) 100년 뒤 임진왜란 때 의주로 도주했던 선조는 환도 후 정동 월산대군 집을 궁으로 삼고 살았다.
또 벌어진 호화 건축 공사
월산대군이 죽고 비어 있던 안국동 집은 1522년 중종 때 맏옹주였던 혜순옹주에게 하사됐다가 인조 때 다시 정명공주에게 넘어간다. 정명공주는 광해군에 의해 폐위당한 인목대비의 딸이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에게 인목대비와 딸은 정통성 확보를 위한 상징이었다.
그리하여 또다시 한성 한복판에서 자그마치 3백간짜리(1625년 2월 27일 ‘인조실록’) 주택 건축 공사가 벌어졌다. 집터는 광천위(光川尉), 중종 때 혜순옹주 남편 김인경 옛집이었고 때는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달아났다가 환도한 지 반년도 안 된 1624년 한여름이었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수도가 함몰되고 종사가 파천하는 변란을 막 겪었다. 어찌 가졌어도 거듭 갖고 집 위에 집을 더하려고 하는가. 재목과 기와는 자식을 팔고 지어미를 잡혀 고혈(膏血)을 짜낸 끝에 나온 것이다. (공주 집 신축 공사 명을) 거두시라.” 사간원이 반발했지만, 국가 목재와 기와를 지급해 공사를 하겠다는 인조 뜻은 꺾이지 않았다.(1624년 6월 9일 ‘인조실록’) 안국동은 돌과 나무가 도로에 쌓였고 종들은 남의 담장 돌을 빼갔으며, 사족의 부녀자들을 욕보이기까지 하는 난장판으로 변했다.(1625년 3월 2일 ‘인조실록’) 집 또한 주춧돌만 봐도 크기가 수백 칸에 이르러 지나가는 사람이 저절로 오싹해질 정도로 사치스러웠으나 인조는 ‘오히려 좁고 작다고 여겼다’.(같은 해 2월 27일 ‘인조실록’)
초호화판 혼례식과 임오군란
그 땅에서 1882년 2월 조선 왕조 최고 호화판 결혼식이 벌어졌다. 고종과 왕비 민씨 맏아들, 왕세자 이척과 여흥 민씨 처녀 혼례식이었다.
1879년 고종이 별궁 건축을 명했다. “경비가 궁색하니 토목 공사가 맞지는 않지만 별궁(別宮)이 없는 것도 온당치 않다. 지어라.”(1879년 11월 15일 ‘고종실록’) 나흘 뒤 별궁 터는 정명공주 옛집으로 결정됐다. 공사는 1880년 9월 끝났다. 그리고 1881년 12월 9일 안국동 별궁이 세자 혼례식 장소로 결정됐다.
1882년 2월 22일 여덟 살 먹은 세자 이척과 열 살짜리 여흥 민씨 혼례가 안동별궁에서 거행됐다. 궁중 물자 목록인 ‘궁중발기’에 따르면, ‘혼수용 이불만 560채에 이르러' 이틀에 3채씩 덮어도 한 해 다 덮지 못할 정도로 인조 이후 사상 유례없는 호화판이었다.(김용숙, ‘조선조 궁중풍속연구’, 일지사, 1987, p377~394)
그리고 넉 달 뒤 왕십리 하급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13개월 치 밀린 월급을 요구하며 왕비 일족을 대거 살해했다. 1966년 채록된 당시 상궁들 증언에 따르면, 왕비 민씨는 “며느리가 복이 없어서 난리가 났다”며 열 살짜리 며느리가 그 무거운 가채를 쓰고 아침 문안을 와도 저녁까지 세워 놓기 일쑤였다.(김용숙, ‘궁중용어 및 풍속 채집보고서1’, 아시아여성연구 5집,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원, 1966)
왕조 500년 내내 안동별궁은 왕족의 땅이었고 백성과 철저하게 유리된 공간이었다. 별궁 북쪽에는 서광범이 살았고 서재필이 살았다. 더 북쪽에는 김옥균이 살았다. 동쪽에는 홍영식이 살았다. 홍영식 옆집에는 개화파 태두 박규수가 살았다. 이들이 일으킨 개화 혁명이 갑신정변이었다. 1884년 양력 12월 4일 이들은 안동별궁 방화를 신호로 거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방화는 실패했고 대신 옆집 초가가 불탔다. 이 젊은 혁명가들이 안동별궁 방화를 거사 신호로 삼은 결정도 별궁이 가진 역사적 의미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안동별궁 북쪽 현 정독도서관 구내에 있는 '김옥균 집터' 표석. 갑신정변 주인공들은 안동별궁 방화를 신호로 거사 개시를 준비했으나, 방화는 미수에 그쳤다. /박종인
1930년대 별궁은 친일 갑부 민영휘 가문 휘문의숙 영신재단에 매각됐다.(1936년 7월 12일 ‘조선중앙일보’, 문화재청, ‘안국동별궁 이전복원 수리보고서’, 2009, p31, 재인용) 1945년 민영휘 후손은 그 터에 풍문여고를 개교했다. 옛 별궁 건물들은 경기도 고양 한양컨트리클럽을 포함해 민씨들이 운영하는 기업으로 이축됐다가 일부 부여 한국전통문화대학으로 이건됐다. 구내에 있던 ‘하마비(下馬碑)’는 서울 강남으로 이전한 풍문여고로 함께 가져갔다.
▲500년 폐쇄됐던 안동별궁 터에 문을 연 서울공예박물관. 직전에는 풍문여고였다./박종인
백성에게 돌아온 별궁, 박물관
그 폐쇄된 특권의 공간에 옛 천민(賤民)을 기리는 박물관이 들어섰다. 박물관 이름은 ‘서울공예박물관’이다. 종이를 만들고 붓과 벼루와 먹을 만들고 그릇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옷을 짓고 보자기를 만들고 돌을 깎고 쇠를 녹여 비녀와 노리개를 만들어 세상을 윤택하게 만들던, 그럼에도 500년 동안 천대받던 장인(匠人)들 작품과 그 이름이 당당하게 별궁 터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안국동 175번지, 이 땅에 숨은 사연이 참으로 많다.
▲식민시대 장인 김진갑의 ‘도태 나전칠 공작무늬화병’. 천대받던 장인이 자기 이름으로 만든 작품과 그 포장이다. 기이하게도 장인들은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자기 이름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서울공예박물관
267. 스스로 노비를 택한 노비 계약 자매문기(自賣文記)
“다섯 냥에 이 몸을 노비로 팔겠나이다” - 1756년 양민 안낭이
▲1756년 안낭이(安娘伊)라는 양민 여자가 다섯 냥에 자기를 조세희라는 사람에게 노비로 팔겠다는 '자매문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지난주 ‘땅의 역사 266. 안동별궁에서 벌어진 오만 가지 일들’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1624년 인조가 국가 보유 기와와 목재로 정명공주 저택을 신축하려 하자 사간원에서 이리 비판했다. “재목과 기와는 자식을 팔고 지어미를 잡혀(賣子貼婦·매자첩부) 고혈(膏血)을 짜낸 끝에 나온 것이다.”(1624년 6월 9일 ‘인조실록’)’
‘자식을 팔고 아내를 저당 잡혔다(賣子貼婦·매자첩부).’ 전쟁 포로도 아니고 납치해온 이웃마을 개똥이도 아닌, 자기 아들과 아내를 팔아 세금을 메꿨다는 말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포함해 가족을 팔아 노비(奴婢·奴는 사내, 婢는 계집종을 뜻한다)가 된 사람들을 자매노비(自賣奴婢)라고 하고 그 계약문서를 자매문기(自賣文記)라고 한다.
그 기가 막힌 이야기.
고려에서 조선까지 노비 약사(略史)
고려는 귀족 국가였다. 노비 노동력은 귀족 권력 기반 가운데 하나였다. 엄마가 노비면 아비가 양인이어도 자식은 노비였다. 왕실과 귀족이 얼마나 노비에 집착했나 하면, 몽골 지배하에서도 노비를 포기하지 않았다.
총독부쯤 되는 원나라 정동행성 평장 활리길사(闊里吉思)가 “부모 가운데 한쪽이 평민이면 자식은 평민으로 하자”고 건의했어도 “고려 옛 법은 그렇지 않고, 법은 절대 바꾸지 못한다”고 거부했을 정도였다.(‘고려사’ 권108, 열전21, 김지숙) 원나라는 5대 황제 쿠빌라이 세조 이래 ‘불개토풍(不改土風)’ ‘고려의 풍습은 바꾸지 않는다’는 원칙을 유지하고 있었다.(땅의 역사 135. 고려 대몽항쟁과 세조구제(世祖舊制) 참조)
부모 양쪽 노비 세습이라는 악풍을 부계(父系)만 따르도록 개혁한 사람은 조선 3대 국왕 태종이었다. 1414년 6월 27일 예조판서 황희 건의에 따라 태종이 이리 선언했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 본래 천민은 없었다. 이제부터 노비 여자가 양인(良人)에게 시집가 낳은 자식은 모두 양인이다.”
그 종부법(從父法)을 종모법으로 환원시킨 사람은 세종이다. “(질서를 파괴하는) 양민과 천민이 서로 관계하는 것을 일절 금지시키되, 범법할 경우 그 소생들은 공노비로 삼도록 하자.”(세종) 그러자 대신들은 “낳은 자식들을 (국가가 아니라)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자”고 역제안했다.(1432년 3월 25일 ‘세종실록’)
어느 쪽이 됐든 양인과 노비 사이 혼인은 불법이 됐고, 그 불법행위로 생긴 자식은 노비가 됐다. 1485년 조선 정부는 ‘경국대전’을 반포하며 이를 성문으로 규정했다. ‘천민 자식은 어미를 따른다(從母役·종모역). 만일 천민 남자와 양민 여자 사이에 아이를 낳으면 아비를 따른다(從父役·종부역).’(‘경국대전’ 권5 형전, 공천조(公賤條)) 마치 하늘에서 그물이 떨어진 듯, 노비 부모를 가진 사람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는 노비였다.
자기를 파는 사람들
그래서 노비는 노비였다. 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생존을 보장받는 대신 인신의 자유와 존엄(尊嚴)을 박탈당한 존재였다. 실록은 이들을 천민(賤民)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저 천구(賤口)라고 부르기도 했다.
양민을 팔려는 유혹도 노비로 팔려가려는 유혹도 늘 존재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양민을 노비로 삼는 행위는 불법이었다. 양민을 노비로 팔다가 적발되면 장 100대에 3000리 유배형이 기다리고 있었다.(대명률강해 권18, 298조 ‘약인약매인·略人略賣人') 자기 자손을 노비로 팔면 80대 장형에 아내를 팔면 남을 판 범죄와 동일하게 100대 장형에 3000리 유배형을 당했다.
세종이 즉위하고 넉 달 뒤 시강관 정초(鄭招)가 경연장에서 이리 말했다. “우리나라 백성 생계가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파는 처지에는 이르지 않았나이다.” 세종이 이리 답했다. “어찌 곤궁한 사람이 없겠느냐.” 세종이 이리 덧붙였다. “내가 궁중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백성 살림이 힘들고 고됨은 다 알지 못한다.”(1418년 12월 20일 ‘세종실록’)
애민(愛民)으로 무장한 지도자였지만, 백성의 삶은 그리 쉽게 굴러가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고 30년이 되지 않은 세종 즉위년에는 상상할 수 없던 ‘가족 판매’ 행위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가족을 팔아서 세금을 내는 상상 초월 사태로 확대된 것이다.
가족과 자기 몸을 노비로 파는 계약서를 ‘자매문기’라 하는데, 18세기 정조 때 작성된 관용 문서양식집 ‘유서필지(儒胥必知)’에는 ‘비문권(婢文券)’이라는 제목으로 이 자매문기 양식이 포함돼 있을 정도로 가족 판매가 일상화됐다.(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조실록 전문사전’)
범죄가 있기 때문에 법이 있고 처벌이 있는 것이다. 인신의 자유와 존엄을 포기하면 생존이 보장되기에 가족과 자기 자신을 노비로 파는 일이 빈번해졌고, 그러기에 관용 서식집에도 이 자매문기가 공식적으로 포함됐다. 처벌은 법전에만 남았다. 그 서글픈 군상이 이 지면에 있는 자매문서들에 그려져 있다.
▲1756년 안낭이(安娘伊)라는 양민 여자가 다섯 냥에 자기를 조세희라는 사람에게 노비로 팔겠다는 '자매문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다섯 냥짜리 여자 안낭이(安娘伊)
‘건륭 21년 병자 2월 20일 조세희 앞으로 글로써 밝힙니다. 죽음의 세월을 살아낼 방도를 찾을 수 없고 험난하고 즐겁지 않지만 노모를 살릴 방도 또한 없습니다. 부득이 다섯 냥을 받고 제 몸을 팔겠습니다. 또 이후 자식이 생기면 아이 또한 영원히 노비로 팔겠습니다. 만약 훗날 이에 대해 말이 나오거들랑 이 문서를 관아에 제시해 바로잡을 일입니다.’
조선 영조 32년인 서기 1756년 봄이 올 무렵, 안낭이(安娘伊)라는 여자가 자기를 노비로 팔았다. 문서에 따르면 안씨는 양인 여자(良女·양녀)다. 그런데 ‘죽음의 세월에 살 방도가 없어서’ 스스로 남의 집 노비가 되는 길을 택했다. 늙은 어미를 봉양할 방도가 없었다. 몸값은 ‘다섯 냥’이었다. 그리고 향후 어찌어찌하여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 또한 ‘영영 노비로 판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글을 읽거나 쓸 줄 몰랐기에 그녀는 오른손을 종이에 대고 그려서 서명을 대신했다. 김씨 성을 가진 유생이 문서를 작성하고 본인이 서명했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221788)
이 문서에서 나오는 ‘글로써 밝힌다(明文)’ ‘이 문서를 관에 제시해 바로잡는다(持此文告官 卞正事)’ 따위 문구는 자매문서 공통으로 보이는 서식이다.
서른 냥짜리 정일재 가족
‘건륭 51년 12월 22일 최생원 댁 노비 유성 앞에서 문서로 밝힙니다. 흉년을 당해 팔십 노모를 부양할 방도가 없기로, 마흔 먹은 아내와 스무 살짜리 둘째아들 창운, 열여섯 먹은 셋째딸 흥련과 열두 살 먹은 아들 용운, 여덟 살인 다섯째 용재, 세 살 난 창돌이를 각각 다섯 냥씩 그리고 뒤에 태어날 일곱째 아이까지 노비로 영원히 파나이다.’
정조 10년인 서기 1786년 정일재라는 사내가 온 가족을 최생원 집에 노비로 팔았다. 이유는 ‘흉년에 노모 봉양 불가’. 아내 배 속에 있는 일곱째 아들까지. 문서에는 정일재 본인을 재주(財主), 물건 주인이라고 적었다. 문제가 있으면 관에서 바로잡는다는 문구도 보인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167800)
1793년 정월 아기연이(阿其連伊)라는 양인 여자는 사람이 죽어나가는 끔찍한 흉년(大殺年)에 기근과 역병이 만연해 명을 보전 못 할까 두려워(飢饉癘疫塡壑迫·기근려역전학박) 본인과 13세 맏아들 용복, 여섯 살 먹은 딸 초래를 25냥에 팔고, 뒤에 낳을 자식들도 모두 영원히 노비로 팔았다. 아기연이의 남편 원차세와 아이들 삼촌 원명순이 증인으로 계약에 참석했다.(규장학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140391)
▲1822년 박승지 댁에 노비로 들어간 복쇠-복섬 부부 자매문기./국립중앙박물관
복쇠 부부, 박승지 댁 노비가 되다
‘빚을 갚을 도리가 없어 서른아홉 먹은 소인 박종숙은 본인과 마흔두 살 먹은 아내 구월이, 서른 살짜리 첩 시월이와 여섯 살짜리 맏아들과 세 살배기 둘째를 노비로 팔겠나이다.’ 건양 원년 11월에 작성한 이 자매문기는 ‘첩까지 둔’ 박종숙이라는 사람이 온 가족을 노비 시장에 내놓겠다는 문서다. 문서에는 누구 손인지는 불명인 손바닥 세 개가 그려져 있다. 건양 원년 11월은 1896년 11월이다. 고종 왕비 민씨가 일본인에게 살해된 직후 만든 문서다. 증인도 없고 노비로 구매한 사람도 없다.(대전시립박물관 소장 자료)
▲1896년 박종숙이라는 사내가 본인, 아내, 첩, 아들 둘을 모조리 노비로 내놓겠다는 문서. /대전광역시립박물관
도광 2년 11월 서른두 살 먹은 복쇠(福釗)는 스물여덟 먹은 자신과 아내 복섬(福譫)이를 박승지 댁에 팔았다. 자식은 기록에 없다. 생활고가 이유였다. 이 또한 조건은 ‘영영 노비로 판다’였고 가격은 스물다섯 냥이었다. 문서에는 복쇠 본인 글씨인 듯한 필체로 복쇠와 복섬 이름이 적혀 있고 누군가의 손바닥이 가로로 누워 그려져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번호 ‘접수 2972-18’) 도광 2년은 1822년, 순조 22년이다. 한 해 전 조선 팔도에 역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흉년이 겹쳐서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정조 이후 구한말까지 ‘엄청나게 많은’ 자매문서가 박물관과 역사 관련 기관에 보관돼 있다.
▲1900년 재금이라는 여자가 남편 없이 살며 생활고에 시달리다 열 살짜리 딸 간난이를 윤참판 댁에 500냥에 판다는 문서. 영원히 노비가 되더라도 먹고 살기를 바란다는 역설이 숨어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망국까지 이어진 자매(自賣)
대한제국이 건국되고 4년째인 광무 4년(1900년) 재금(再金)이라는 여자가 열 살 난 딸 간난이(干蘭伊)를 윤 참판 댁에 팔았다. ‘이 작은 계집은 지아비를 잃고 빚이 수백 금이라 부득이 열 살 난 여식 간난이를 오백 냥에 윤 참판 댁에 영원히 팔려 하오니 훗날 족친 가운데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으면 이 문서로 증빙하오리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230579)
▲1901년 딸 완례를 윤 참판 댁으로 판 조봉길 문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듬해 조봉길이라는 사내는 ‘살길이 없어’ 여섯 살 먹은 딸 완례를 윤 참판 댁(간난이가 팔려간 그 윤 참판과 동일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에 당오전 일천냥에 팔았다. 당오전이니까 200냥이다. 조봉길은 현금 대신 찰벼 다섯 섬, 메벼 네 섬, 츄모(?) 한 섬 해서 10석을 받았다. 재금이도, 조봉길도, 자기 딸 간난이와 완례를 ‘영원히’ 노비로 판다고 계약했다.(규장각학국학연구원 문서번호 230583)
▲을사조약 1년 전인 1909년 겨울 열 살짜리 딸 간난이를 팔겠다는 자매문기. 거래는 불발됐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그리고 어느 겨울날 최씨 성을 가진 여자가 열 살짜리 자기 딸 간난이를 노비로 팔겠다고 내놓았다. ‘긴급히 사용하기 위해(緊用次·긴용차)’라 적어놓았으니 급전이 필요했던 듯하다. 그녀가 딸에게 매긴 몸값은 362냥53전이었으니, 이게 빚 규모가 아니었을까. 문서에는 최씨 손바닥만 그려져 있을 뿐 간난이를 사간 사람도 증인도 없다. 거래 불발. 최씨가 간난이를 내놓은 때는 망국 1년 전인 대한제국 융희 3년, 1909년 음력 11월 한겨울이었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86981)
인륜을 저버린 금수(禽獸)였을까. 가족 판매에 증인이 됐던 아기연이(阿其連伊) 남편 원차세는 무능한 본인을 탓하며 가족에게 살길을 열어준 건 아닐까. 노비를 둘러싼 기억은 끝나지 않았다. <다음 주 계속>
268. 조선 노비 엄택주의 파란만장한 인생
“가짜 양반 엄택주를 영원히 노비로 삼으라”
1457년 10월 21일 강원도 영월에 유폐됐던 조선 6대 임금 단종이 죽었다. 영월 말단 관리 엄흥도는 서강(西江) 물가에 방치된 그 시신을 수습해 자기 선산 언덕에 묻었다. 1698년 숙종 때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왕위가 복위되고 1758년 영조 때 엄흥도는 사육신을 모신 영월 창절서원에 배향됐다. 단종이 묻힌 언덕은 장릉(莊陵)으로 조성됐다. 이보다 3년 전인 1755년 엄흥도 후손인 전직 현감 엄택주가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1698년 11월 6일 ‘숙종실록’, 1755년 3월 12일, 1758년 10월 4일 ‘영조실록’) 노비 신분을 세탁해 현감까지 오른 뒤 흑산도로 유배됐다가 역모(逆謀)에 휩쓸려 죽은, 엄택주의 파란만장한 일생.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릉인 장릉(莊陵). 1457년 영월에 유배 중이던 단종이 죽자 영월 관리 엄흥도가 죽음을 각오하고 그 시신을 자기네 선산에 모셨다. 노비였던 이만강은 엄흥도 후손 엄택주로 신분을 위조해 현감 벼슬까지 지내다 적발됐다. 조선 후기 노비들이 에워싼 세상은 이성으로는 설명하기 난해한 세계였다./박종인요동치는 노비 제도
임진왜란 와중과 이후 많은 노비가 양민으로 신분이 상승했다. 대가를 받고 양민으로 풀어주는 일을 ‘속량(贖良)’이라고 한다. 속량은 국가가 주도했다. 납세 의무가 없는 천민을 양민으로 상승시켜 재정을 정상화하려는 조선 정부와 신분 상승을 꿈꾸는 천민들 이해관계가 맞았다. 속량 대가는 전쟁이나 반역 토벌전 무공(武功) 또는 돈이었다. 돈은 쌀 160석이 최고였다. 17세기 숙종 때는 최저 10석까지 낮아졌지만 여전히 노비 하나가 25년을 일해야 거둘 수 있는 돈이었다. (국사편찬위, ‘조선 후기의 사회’(신편 한국사34), p145, 노비신분층의 동향과 변화)
불만은 가득한데 무공도 돈도 없는 노비들은 도망을 갔다. 영조 5~8년 3년 사이에 성균관 소속 노비 가운데 달아난 종들이 2500명이었다.(1732년 9월 2일 ‘승정원일기’) 2500명이 달아난 사실도 놀랍지만, 성균관에 그 많은 노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달아난 천민들은 서북쪽 국경 지대와 남도 섬으로 숨어들어 가 살았다.
▲사내종 상돌이를 속량해준다는 속량문기./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많은 양반 또한 노비를 속량했다. 스스로 가난에 빠져 벗어날 수 없는 양반들은 돈을 받고 노비를 풀어줬다. 1709년(숙종 35년) 양반 박상현은 외사촌에게서 샀던 계집종 애임(愛任)을 ‘긴히 쓸 돈이 필요해’ 수소 두 마리와 돈 3냥에 속량했다. 애임은 외사촌이 길거리 떠돌던 아이를 주워다 종으로 기른 여자였다. 그 여자를 박상현이 사서 부리다 속량한 것이다. 1733년(영조 9년) 봄 김씨 성을 가진 주인은 자기네 산소 석물(石物)을 세울 돈이 필요해 사내 종 준석을 50냥을 받고 영원히 속량해주었다. 애임을 속량한 박상현은 ‘본인이 계집종에게 먼저 속량하라고 제안할 정도로’ 돈이 급했다.(전경목, ‘조선후기 노비의 속량과 생존전략’, 남도민속연구 26, 남도민속학회, 2013) 연도 미상인 어느 날 이씨라는 상전은 종 상돌이와 자식들을 속량했다. 가격도 문서에는 없다. 이유는 ‘상돌이의 원통함이 지극하고 나 또한 어기지 못할 명을 따르기 위한 계책으로’였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238046 ‘上典李贖良文記’)
인간이 아닌 삶, 그리고 저항
그렇게 많은 사람이 노비가 되었고, 많은 사람이 양민이 되었다. 노비는 물건이었다. 토지 매매계약서와 노비 매매계약서는 대개 양식이 유사했다.
1776년 영조 52년 3월 7일 박 생원이 자기 노비 임단(任丹)이 가족을 최 생원 집에 팔았다. 식구는 6명이었다. 일괄 가격은 60냥이었다. 그런데 노비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뒤에 태어날 아이들(後所生·후소생)과 임단이 배 속에 있는 태(腹中胎·복중태) 포함.’ 마흔다섯 먹은 여자 임단이는 그렇게 배 속 ‘태(胎)’와 함께 최 생원 집으로 팔려갔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167796-2 ‘朴生員宅奴李長生奴婢文記’) 1723년 5월 1일에는 김상연이라는 가난한 양반이 계집종 넷을 이내장이라는 사람에게 팔았는데, 스물아홉 먹은 이월(二月)이는 ‘임신중(懐孕·회잉)’이라는 문구가 문서에 부기돼 있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207769 ‘金尙埏奴婢文記’)
▲박 생원이 노비 임단 가족을 최 생원에게 판 노비문기. 그때 임단은 임신 중이었는데 문서에는 ‘뱃속에 있는 태(腹中胎·복중태)’도 함께 판다고 적혀 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존엄과 무관한 그 생활을 견디다 못한 자들은 반역을 꿈꾸기도 했다. 1684년에는 서울에서 “우리를 만약 모두 죽이지 못하면 종말에는 너희들 배에다 칼을 꽂고 말 테다”라며 양반을 다 죽이자고 무장투쟁을 계획한 ‘살주계(殺主契)’도 나왔다.(‘연려실기술’36, 숙종조고사본말, ‘난민을 잡아 다스리다’)
노비를 택한 사람과 방조한 정부
성리학 윤리를 법제화한 조선 법률체계에서 스스로를 노비로 파는 행위, 자매(自賣)는 불법이었다. 하지만 윤리가 생존을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많은 사람이 정부가 해결해 줄 수 없는 모순 해결을 위해 존엄을 팔고 생존을 택했다. 흉년, 부모 봉양, 빈곤, 채무 그리고 환곡. 자매문기에 나오는 대표적 매매 사유다.(김재호, ‘자매노비와 인간에 대한 재산권, 1750~1905’, 경제사학 38, 경제사학회, 2005) 자매문기[婢文券·비문권]이라는 표준 계약서 양식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노비를 두고 윤리와 현실이 충돌할 때, 조선 정부는 명분을 택했다. 예컨대 이런 일. ‘양구 사람 이만근은 흉년을 맞아 자기 몸을 팔아 부모 봉양 밑천으로 삼았다. 한 달여 만에 그를 산 자가 어질게 여겨 돌아가라고 권했으나 이만근은 굳게 사양하였다.’(1794년 정조18년 7월 16일 ‘일성록’, 김재호, 앞 논문, 재인용) 정조 정부는 스스로를 판 이만근을 효자로 선정하고 그 후손에게 노역을 면제해줬다. 인신매매 사례가 아니었다. 인신매매는 양성화하고 그 몸을 판 사람을 효자로 선정하는, 이 기이함.
세습은 법적으로 불법이었다.(1796년 8월 13일 ‘일성록’, 김재호, 앞 논문, 재인용) 하지만 노비계약서인 ‘자매문기(自賣文記)’ 대부분은 ‘영영방매(永永放賣)’라는 조건이 따라다녔다. 영원히 스스로를 팔고 그 후손까지 판다는 것이다.(땅의 역사 267. ‘스스로 노비를 택한 노비 계약 자매문기’ 참조) 노비 세습은 1886년 고종 정부 때 마련된 ‘사가노비절목(私家奴婢節目)’에 의해 금지됐다.(1886년 3월 11일 ‘고종실록’) 그런데 노비를 자청한 자매 노비 본인은 ‘단 하루라도 일을 하면 주인에게 속량을 청할 수 없다’고 규정해버렸다. 주인이 원하지 않으면 양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김재호, 앞 논문)
환부역조(換父易祖)와 화려했던 엄택주
이제 우리의 엄택주 이야기다.
▲강원도 영월 장릉에 있는 엄흥도 정려각 비석. /박종인
도망간 노비 가운데 부(富)를 이룬 자들은 ‘부모 이름을 바꾸고 다른 사람 족보를 위조해 양민 또는 양반 행세를 한다. 족보를 살펴보면 거의 친외가 모두 유학(幼學)이다(左幻右眩而幾皆良丁幼學·좌환우현이기개량정유학).’(1798년 12월 17일 정조 22년 ‘일성록’) ‘유학(幼學)’은 과거 급제나 벼슬 제수 경력이 없는 유생을 뜻한다. 그러니까 국가에 기록이 없는 자들을 골라 자기를 족보에 끼워 신분을 세탁한 것이다. 이렇게 아비를 갈아치우고 족보 위조로 할아버지를 바꿔버리는 행위를 ‘환부역조(換父易祖)’라고 한다. 우리의 엄택주는 역사에 남은 환부역조 대표 사범이다.
조선왕조 역대 과거 급제자 명단인 ‘국조방목’에 따르면 엄택주는 영월 사람이고 1719년 과거 응시 당시에는 강릉에 살았다. 1719년 생원시에 합격한 이래 경상도 영일 현감까지 지냈다. 아비는 엄완이요 할아버지는 엄효, 외조부는 신원종이라는 인물이었다.(’국조방목’,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K2-3538)
1745년 3월 7일 사간원 정언 홍중효가 영조에게 충격적인 보고서를 올렸다. “아비를 배반하고 임금을 속인 엄택주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1745년 3월 7일 ‘영조실록’)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가짜라는 것이다. 주요 죄목은 ‘환부역조’와 ‘친부모 제사 의무 불이행’이었다.
알고 보니 엄택주는 노비였다. 본명은 이만강(李萬江)이다. ‘엄택주는 충청도 전의 관아 노비 아들이었다. 어미도 노비였다. 재주가 뛰어나 어릴 적부터 스승 신씨로부터 글을 배웠다. 훗날 “주인집 처자와 혼인하고 싶다”고 스승에게 털어놓자 스승이 크게 꾸짖었다. 이만강은 그 길로 달아나 영월 말단 관리 사위가 되고 스스로 엄흥도 후손이라고 칭하고 이름을 엄택주로 바꿨다.’(남하정, ‘동소만록’, 원재린 역주, 혜안, 2017, p491)
정언 홍중효가 전의에 들렀다가 알게 된 사실이었다. 천민이 신분을 위조한 데다 전의에 있는 친부모 묘소에 단 한 번도 성묘하러 온 적이 없다는 ‘충격적인’ 강상죄(綱常罪)까지 저지른 악질이었다. 서울로 끌려온 엄택주는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고 흑산도로 유배형을 당했다. 영조가 이리 하교했다. “죽여도 아까울 것 없다 하겠다. 영원히 노예로 삼고 방목(榜目)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여라.”(1745년 5월 26일 ‘영조실록’) 국조방목에는 ‘삭과를 당하고 관노가 됐다’라 부기됐다.
▲엄택주가 과거에 붙었다가 신분 위조 사실이 드러나면서 자격을 박탈당했음을 적어넣은 ‘국조방목’.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가뜩이나 히스테리가 심한 영조였고, 무수리가 낳은 아들이라는 신분적 피해 의식이 심한 왕이었다. 영조는 신분 위조보다 ‘한 번도 그 아비의 무덤에 성묘(省墓)하지 않았음’을 제1의 죄로 꼽았다. 성리학적 질서를 파괴한 죄가 더 크다는 것이다.
엄택주는 이듬해 몰래 서울을 왕래하다 발각되더니(1746년 5월 26일 ‘영조실록’), 9년 뒤인 1755년 반(反)영조 역모 사건인 나주괘서사건 때 주동자 윤지와 편지를 왕래한 사실이 드러나 서울로 끌려와 심문을 받았다. 엄택주는 “문예(文藝)가 있었음에도 귀양을 갔었기에 원한이 가득했다”고 자백하고는 물고(物故) 됐다. 고문사했다는 뜻이다.(1755년 3월 10일, 3월 12일 ‘영조실록’)
우리는 신분과 계급이 없는 나라 대한민국에 산다. 임신한 몸을 파는 애처로운 임단이도 없고 환부역조하는 이만강도 없다. 그런가?
269. 황금의 나라 조선① 호러스 알렌과 운산금광
“미국 회사에 운산금광을 주십시오”… 美선교사 알렌, 고종에 요청
▲400년 동안 조선 산하에 묻혀 있던 금은보화가 19세기 말 제국주의에 의해 털려나갔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가 생겨났다. 사진은 1930년대 일본 자본이 개발한 강원도 정선 천포금광. 지금은 화암동굴 관광지로 변했다./박종인
모든 게 연결된 사람들
1884년 9월 14일 미국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청나라 상하이에서 제물포행 배에 올랐다. 조선을 기독교 왕국으로 만들겠다는 장대한 꿈도 함께.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 알렌은 그달 20일 제물포에 닿았다. 석 달 뒤 제물포에서 50마일 떨어진 한성에서 젊은 노론 개혁파가 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이다. 이때 거의 죽을 뻔했던 조선 왕비 조카 민영익을 알렌이 살려줬다. 석 달 뒤 알렌은 6년 연상인 조선 국왕 고종을 알현했다. 고종 옆에는 왕비 여흥 민씨가 앉아 있었다. 남편 고종보다 한 살 연상이었다
▲구한말 선교사로 방한해 조선 왕실 고문과 미국공사, 그리고 사업가로 활동한 호러스 알렌. 조선 최대 금광인 운산금광을 미국이 차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896년 2월 고종이 아관(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했다. 4월 고종은 아관에서 알렌에게 조선 최대 금 산지인 운산금광 채굴권을 선물했다. 이미 반 년 전 왕비 민씨는 일본인들에게 암살당했지만, ‘왕비 조카를 살려준’ 은혜를 갚은 것이다.
그해 11월 운산금광 개발을 위해 미국 광산 기술자 조지 테일러가 조선에 도착했다. 일행은 13명이었다. 1905년 운산 노다지를 미국에 선물한 알렌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3년 뒤 아버지 테일러가 죽었다. 장남 앨버트가 일을 물려받았다. 그 사이 대한제국은 사라졌다.
▲운산금광에서 일했던 광산기술자 앨버트 테일러. 3.1운동을 보도한 기자이기도 했다.
1919년 2월 28일 앨버트와 일본에서 만나 인도에서 결혼한 영국 연극배우 메리 부부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났다.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난 아들 브루스 요람에는 다음 날 조선 민중이 읽을 독립선언서 한 장이 숨겨져 있었다.
▲금광개발업자 남편 앨버트 테일러와 함께 조선에서 벽돌집 딜쿠샤을 짓고 살았던 영국 배우 메리.
그때 앨버트는 운산금광을 떠나 충남 천안에서 사금(砂金) 광산을 개발 중이었다. 금광 이름은 직산금광이었다. 금광을 함께 개발한 미국 회사 이름은 직산광업회사(Chiksan Mining Company)였다. 직산금광은 1922년 폐광됐다. 이듬해 앨버트 가족은 큰 은행나무가 있는 서울 행촌동에 붉은 벽돌집을 지었다. 집 이름은 딜쿠샤(Dilkusha)라고 지었다. 앨버트와 아버지 조지 테일러는 지금 서울 양화진에 묻혀 있다.
폐광 후 직산광업회사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가 유전 개발업에 뛰어들었다. 1922년 이 회사는 ‘액체든 기체든 전혀 새지 않는’ 파이프 이음쇠를 개발했다. 1940년 미국특허청에 상표 등록된 이 이음쇠 브랜드는 ‘직산(Chiksan)’이다. 고압 액-기체 수송용 파이프를 연결하는 부품인 ‘스위블 조인트(swivel joint)’가 주요 제품이다. 지금 ‘직산(Chiksan)’은 이 스위블 조인트를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직산(稷山). 21세기까지 통용되는 이 미제(美製) 부품 하나에 많은 사연이 숨어 있다. 보물을 팔아먹은 지도자, 그리고 엘도라도를 밟은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
▲앨버트 테일러가 개발한 직산금광을 인수한미국 직산광업회사의 액체 운반용 파이프 이음쇠 와 그 브랜드 ‘Chiksan’. 회사명과 로고는 모두 직산광산에서 따왔다. /FNC Technology
▲미국 직산광업회사의 장비 로고, '직산(CHIKSAN)'./미특허청
400년 묻혀 있던 금은보화
조선 시대 금과 은은 ‘진실로 국가에서 사대(事大)하는 데 쓸 물건일 뿐’(1415년 4월 20일 ‘태종실록’) 민생과 무관했다. 그런데 채금(採金)은 ‘1년 금 캐기가 10년 공물 준비보다 갑절이나 고됐다.’(1425년 8월 28일 ‘세종실록’) 금을 캔다고 다른 부역이 면제되지도 않았다.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주야로 채근하는 바람에 금 캐다 말고 농민들은 쓰러지기 일쑤였다.(유승주, ‘조선전기 대명무역이 국내산업에 미친 영향’, 아세아연구 통권 82호,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 1989)
그리하여 1429년 8월 18일 세종이 명나라 황제에게 편지를 쓴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척박해 금과 은이 생산되지 않음은 온 천하가 다 아나이다. 금과 은을 조공 물품에서 제외해 주사이다.” 그해 12월 마음을 졸이던 세종에게 사신들이 ‘금은 조공 면제’라는 낭보를 가지고 돌아왔다.(1429년 12월 13일 ‘세종실록’) 사실 조선에 금과 은이 많다는 사실은 고려 때부터 온 천하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황제가 보여준 너그러움은 언제라도 분노로 바뀔 폭탄과도 같았다.
그래서 조선 정부가 택한 정책은 금은 생산 및 유통 금지였다.(유승주, 앞 논문) 이후에는 왕실 수요용 금은만 농민에게 부역 생산하도록 했으나, 이 또한 농민들 저항으로 생산량은 극미했다. 이에 성종 때 이조판서 겸 원상(院相·승정원 임시 최고 결정권자) 구치관이 “민간에게 광업을 허용해 생산량을 증가시키자”고 건의했으나 흐지부지 끝났다.(1470년 4월 19일 ‘성종실록’) 요컨대 조공이 됐든 왕실 수요가 됐든, 조선 정부는 금은 수요를 부역을 통한 생산으로 충족했고 민간에게는 유통도 생산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금과 은은 조선 산하(山河)에 400년 동안 묻혀 있었다.
제국주의, 이양선 그리고 고종 정부
19세기가 왔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은 유럽 인류에게 가공할 힘을 선물했다. 대량으로 생산한 대량살상무기를 대량으로 싣고 떠났던 유럽 상선들은 갑판 위아래에 금은보화를 싣고 귀향했다.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와 아프리카, 동남아에 이어 청나라와 일본 차례였다. 1793년 건륭제가 영국 대표단에게 자유무역을 불허한 이래 청나라는 서서히 침몰 중이었다. 침몰 중이던 청은 1840년 아편전쟁으로 난파당했다. 이에 질겁한 일본은 반강제 반자발적으로 나라 문을 열었다.
조선 차례였다. 철갑을 두른 이양선(異樣船)이 동해와 황해와 남해에 수시로 출몰했다. 1863년 들어선 고종 정부는 그래도 쇄국을 고수했다. 1875년 일본이 서구 제국주의를 본떠 강화도에 함포를 쏴댔다. 이듬해 조선이 나라 문을 열었다.
1880년대 미국을 선두로 조선과 조약을 맺은 서구 국가들은 조선을 이 잡듯 뒤지며 금맥을 찾았다. 외교관은 물론 광산기술자, 지질학자·군인, 상인까지 동원해 금을 찾았다.(이배용, ‘한국근대광업침탈사연구’, 일조각, 1997, p2) 초대 주한 미국공사 푸트가 고종에게 “아무 지식 없이 무조건 외국인에게 금광을 허가하지 말라”고 충고할 정도로 ‘노다지 탐사’ 열풍은 뜨거웠다.(이배용, 앞 책, p53)
모순적이게도, 고종 정부가 가장 먼저 금광 채굴권을 선물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그 뒤에는 선교사요 의사며 외교관이며 사업가 호러스 알렌이 있었다.
1884년 9월 알렌 입국과 갑신정변
1884년 9월 14일 스물여섯 먹은 선교사 호러스 알렌은 청나라 상해(上海)에서 제물포행 배에 올랐다. 바로 며칠 전 아기를 낳은 아내 패니는 상해에 남겨뒀다. 9월 20일 알렌은 일본 나가사키~조선 부산을 거쳐 제물포에 도착했다. 목적지는 제물포가 아니라 서울이었다. “부산은 일본인 천지요 제물포는 외국인 천지였다. 게다가 유동 인구가 너무 많아 개종을 시켜도 관리가 쉽지 않았다.”(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1884년 10월 6일: F. 해링턴, ‘God, Mammon & The Japanese’, 위스콘신대 출판부, 1944, p31, 재인용)
이틀 뒤 당나귀를 타고 서울로 가다가 알렌은 주막에서 나반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나반은 “조선에는 금이 풍부하다”고 그에게 알려줬다. 그날 밤 서울 여관에서 만난 미국인 미첼은 목재 무역을 위해 내륙을 탐사 중이라고 알렌에게 말했다.(‘알렌의 일기’ 1884년 9월 22일, 김원모 역, 단국대 출판부, 1991) 서울에서 만난 공사 푸트는 그에게 무급 의사직을 권했고, 알렌은 수락했다. 10월 11일 알렌은 아내 패니와 아기를 데리러 상해로 돌아갔다. 배에는 영미 선교사 몇과 미국인 교수, 창녀 하나가 동승했다. 알렌은 ‘충격적이지만, 대부분 정부(情婦)와 동행했다’고 기록했다.(‘알렌의 일기’ 10월 11일)
두 달 뒤인 12월 4일 밤 갑신정변이 터졌다. 종로 우정국 낙성식에서 벌어진 정변에서 실세 권력 중의 실세인 왕비 민씨 조카 민영익이 칼로 난자당했다. 오른쪽 귀 뒤쪽 동맥이 끊어지고 척추와 어깨뼈 사이로 근육이 잘려나갔다. 온몸이 칼집 투성이였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있던 알렌은 급히 불려나가 한의사들이 보는 앞에서 밤새 수술 끝에 민영익을 살려냈다. 민영익은 미국 의사에게 10만냥을 선물로 줬다.(‘알렌의 일기’ 1885년 1월 27일) 광산 이권 사업에 대한 언질도 함께.(엘린우드에게 보내는 편지, 1885년 2월 26일, 이배용, 앞 책, p63, 재인용)
선물로 받은 운산금광
해가 지나고 1885년 3월 27일 고종 부부가 알렌을 찾았다. 알렌은 약한 천연두를 앓고 있던 조대비와 고종 그리고 왕비 민씨를 차례로 진찰하고 치료해줬다. 한 달 뒤 알렌은 왕비로부터 100야드짜리 비단 한 필과 누런 두루마기를 선물 받았다. 알렌은 조선 왕실 주치의 겸 국왕 고문이 됐다.
1887년 7월 고종이 고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미국 정부의 관심을 유도하고 청나라 간섭에서 벗어나겠는가.” 알렌이 즉각 대답했다. “금광을 미국 기업에 주시라. 특히 금 많기로 소문난 평안도 운산금광.”(에버렛에게 보낸 편지, 1887년 7월 2일, 이배용, 앞 책, p64, 재인용) 이미 미국인 사업가 타운센드를 통해 운산금광 탐사를 마친 터였다. 두 달 뒤 1887년 9월 알렌은 정2품 참찬으로 임명됐다.
이후 조선 금광을 찾는 미국인 조사단 발길이 이어졌다. 1888년 미국에 가 있던 알렌은 광산기사 피어스를 파견해 운산금광을 조사했다. 1889년에도 기사 5명이 내한했다. 조선 정부예산으로 조선 광산 정보를 모은 사람은 조선 정2품 참찬 알렌이었다.
실제로 운산금광이 미국 기업에 넘어간 것은 알렌이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이직한 뒤인 1895년이었다. 그해 7월 왕비 민씨는 알렌을 통해 미국 기업인 모스에게 운산금광 채굴권을 주라고 전격 지시했다. 계약은 7월 15일에 맺어졌다. 조건은 25년 채굴권 보장과 면세, 다른 광물도 채굴 가능. 왕실이 지분 25%를 소유해 연간 2만5000달러 지급. 보고를 받은 미 국무장관 실(Sill)은 “이보다 더 조건이 좋을 수 없다(as broad as possible)”고 했다.(해링턴, 앞 책, p156)
1895년 10월 왕비 민씨가 일본인에게 암살되면서 계약은 잠정 취소됐다. 그리고 고종이 아관파천 중이던 1896년 4월 17일 고종 정부는 계약을 정식으로 허가했다.
운산금광이 미국에 넘어갔다는 소식에 조선에 들어와 있던 ‘모든’ 나라가 동일 조건으로 금광 탐사와 채굴권을 요청했다. 나라는 바야흐로 땅속까지 털리는 중이었다. 1899년 3월 27일 대한제국 정부는 해마다 원화 2만5000원 지급을 조건으로 지분을 모두 미국에 매각했다. 이듬해 1월 1일 대한제국은 일시불 1만2500달러를 받고 채굴 기한을 40년으로 연장했다.
‘운산금광은 ‘현금 1000달러를 담은 상자를 2개씩 등에 실은 소 40마리’가 분주히 광산과 항구를 오가며 돈을 쓸어갔다. 생각도 못한 금광 허가로 미국은 세계 최고의 금 생산국이 됐다. 운산은 아시아에서 제일 수익성이 좋은 광산이었다. 1939년 미국 기업이 철수할 때까지 거둔 순익은 1500만달러가 넘었다.’(S. 파머, ‘American Gold Mining in Korea’s Unsan District’, Pacific Historical Review, Vol 31, No 4, 캘리포니아대 출판부, 1962)
또 다른 엘도라도
1910년 훗날 미국 31대 대통령이 된 광산기술자 허버트 후버가 일본 금융계 초청으로 한국을 찾았다.(H. 후버, ‘The Memoirs of Herbert Hoover’1, 맥밀런, 1950, p100) 서양의 조선 광산사 연구가 로버트 네프에 따르면 그때 후버는 운산금광 주점에 들러서 술을 마시고는 술값을 떼먹고 사라져버렸다.(2018년 4월 12일 ‘로이터통신’) 1896년 11월 캐나다 노바스코샤 출신 미국인 광산기술자 조지 테일러가 가족과 함께 입국했다. 제물포와 진남포를 거쳐 테일러는 두 아들과 함께 운산에서 금맥을 탐사했다. 1908년 그가 죽었다. 조지 테일러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이제 그 장남 앨버트가 또 다른 엘도라도를 찾을 참이었다.<다음 주 계속>
270. 황금의 나라 조선②테일러 부부와 직산금광
이방인의 엘도라도에서 조선 광부는 독립만세를 외쳤다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에는 이곳 직산금광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을 기리는 기념탑이 서 있다. 금광 공장은 탑 뒤편 공장건물 부지에 있었다. 미국 금광업자 앨버트 테일러는 직산금광을 개발하면서 1919년 3.1만세운동을 보도하는 기자 역할도 수행했다. /박종인
<지난 줄거리> 1896년 4월 고종이 미국인 호러스 알렌을 통해 미국 기업에 운산금광 채굴권을 넘긴 이래 조선 땅에 묻힌 각종 광물 이권은 서구 열강으로 넘어갔다. 고종 정부가 최종적으로 받은 금액은 1만2500달러였고 1939년 미국 회사가 운산에서 철수할 때까지 40년 동안 거둬들인 순익은 1000배가 넘는 1500만 달러였다. 1908년 운산금광에서 일하던 미국 기술자 조지 테일러가 죽자 함께 일하던 맏아들 앨버트 테일러는 자기 금광을 개발하기 위해 운산을 떠나 충남 직산으로 향한다.
* 유튜브 https://youtu.be/0j8eoqMAO1Y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금광업자 앨버트 테일러와 결혼해 서울에 붉은벽돌집 딜쿠샤를 만들고 살았던 영국 배우 메리 린리 테일러.
요코하마에서 만난 여배우 메리
1916년 연극 공연을 위해 일본 요코하마에 왔던 영국 배우 힐다 빅스(Hilda Biggs)는 어느 날 호모코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다. 메리 린리(Mary Linley)라는 예명을 쓰는 이 배우를 살려준 사람은 미국 사업가 앨버트 테일러(Albert Taylor)였다. 한눈에 반한 앨버트는 메리에게 호박 목걸이를 선물하고는 자기 사업장이 있는 조선으로 돌아갔다. 공연을 마친 메리는 극단 주무대인 인도로 돌아갔다.
열 달이 지난 1917년 어느 날 앨버트가 불쑥 인도 캘커타(현 콜카타)에 나타나 청혼을 했다. 결혼, 그리고 석 달을 이어간 허니문. 목적지는 일본 식민지가 된 조선 수도 경성이었다. 경성에서는 앨버트 동생 윌리엄이 서대문 근처 한옥을 사서 벽난로를 설치한 뒤 형 부부에게 살림집으로 내주었다. 앨버트가 말했다. “7년 동안 죽도록 고생했으나, 이제 당신과 행복하리라.”
충청도의 노다지, 직산금광
1896년 운산금광이 미국에 넘어가자 조선과 수교한 모든 국가가 일제히 동일한 조건으로 채굴권을 요청했다. 조선 팔도 금 산지 가운데 충남 천안에 있던 직산 지역은 일본에 의해 채굴이 시작됐다. 1898년 8월 조선인 금광을 인수한 일본인이 채굴을 시작한 이래 직산금광은 뒤늦게 외국인 채굴을 금지한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 정부 사이에 큰 갈등을 일으켰다. 결국 1900년 8월 16일 대한제국 궁내부는 일본 금융계 거물인 시부자와 에이이치(澁澤榮一) 측과 직산금광 채굴권 양여 계약을 맺었다.(1900년 8월 16일 ‘고종실록’) 1907년 일본 측은 미국 자본도 끌어들였다. 채굴량이 예상보다 적자 일본 측은 1911년 미국 자본에 채굴권을 넘겼다.(에드윈 밀스, ‘조선의 금광’, 왕립아시아학회지 vol.7, 1916)
그 채굴권을 산 사람이 앨버트 테일러였다. 요코하마에서 메리를 만났을 때 앨버트는 주주를 모아 자금을 마련한 뒤 직산 땅을 매입하고 7년째 소규모로 채광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직책은 총관리인이었고 연봉은 무급이었다. 훗날 앨버트는 아내 메리에게 “대박이 나리라 확신하고 월급 대신 주식을 받았다”고 했다.
▲외국 자본이 개발하기 전 직산 사금광 모습. 수작업으로 금을 캤다. /서울역사박물관.
직산금광은 사금광(砂金鑛)이었다. 사금을 캐기 위해서는 물을 퍼내고 사금을 걸러내는 준설기가 필요하다. 요코하마에는 그가 주문했던 준설기가 미국에서 도착해 있었다. 그때까지 앨버트는, ‘손으로 금을 채취했고, 임금이 체불된 광부들에게 협박당했으며, 쌀을 구하기 위해 축음기를 들고 마을을 돌아다니는’ 험난한 세월 7년을 보냈다고 했다.(메리 테일러, ‘호박목걸이’, 책과함께, 2014, p115) 채산성을 낮게 봤던 일본 예상과 달리 직산은 운산⋅수안 금광과 함께 식민지 조선에서 미국이 운영하는 대표적인 금광이 되었다.(에드윈 밀스, 앞 논문)
테일러 부부의 엘도라도, 조선
미국 네바다에는 버지니아 시티가 있다. 미국 골드러시가 불었던 대표적인 금광촌이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도 노다지를 따라 와서 쫄딱 망한 뒤 버지니아시티에서 기자가 되고 소설가가 됐다. 앨버트는 이 금광촌 한 갱도 입구에서 태어났다.
금맥을 노리는 금광업자에게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메리에 따르면, 운산금광 시절 테일러 부자는 크리스마스와 미국 독립기념일 이틀 외에는 쉬지 않았고, 훈제 청어와 양고기 통조림으로 몇 달을 버텼다고 했다. 7년을 그렇게 버티던 광부 아들 앨버트가 이제 자기 남편이 된 것이다. 그것도 광산을 소유한 성공한 사업가로.
메리가 ‘조선에서 만난 미국인 가운데 가장 금광꾼 인상에 걸맞은 거구(巨軀)’라고 했던 시동생 윌리엄은 광산을 떠나 철도호텔(현 웨스틴조선호텔) 옆에서 수입잡화상을 운영했다. 윌리엄이 운영한 잡화상은 타자기며 축음기며 온갖 진귀한 서구 물품을 팔았다. 그 돈으로 형과 형수는 안락한 신혼집을 차렸고, 형은 직산을 오가며 금을 캤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졌을 때 윌리엄은 ‘뉴욕 헤럴드’지 통신원으로 일하며 조선 팔도를 돌아다녔다.(윌리엄 테일러, ‘조선의 도로, 과거와 현재’, 왕립아시아학회지 vol.15, 1924) 형 앨버트는 1919년 고종이 죽자 AP통신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통신원으로 고용됐다. 눈부신 본업은 물론 지적인 부업까지, 조선은 그들에게 엘도라도였다.
직산 광부들의 다양한 삶과 김봉서
앨버트가 들여온 사금 채취용 준설기를 사람들은 ‘금배’라고 불렀다. 금을 낳는 배라는 뜻이다. “금배로 성환천 위아래를 훑으며 쉴 새 없이 바닥을 파젖혔다. 금배가 엉금엉금 기면서 논바닥을 밀고 내려가면 도랑이 생기곤 했는데, 그때 만들어진 도랑이 오늘날 성환천(成歡川)이 됐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직산 주민 이흥규 구술, ‘직산금광과 금배’, 충남-잊혀진 시간을 말하다’2, 충남문화원연합회, 2020, p86~87) “금을 캐고 남은 흙더미를 뒤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흙을 나무 함지로 일어내면 또 금이 나올 수 있으니까. 그런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을 ‘거랑꾼’이라고 했다. 그런데, 덜 캔 흙더미를 파오다가 매를 맞는 거랑꾼도 많았다.”(황서규 구술, ‘직산 사금 이야기’, 앞 책 p109~114)
미국인 테일러 측이 금광을 인수하고 직산 양대리 금광촌에는 여학교가 생겨났다. 전기도 들어오고 주점은 물론 유곽도 들어섰다. 그리고 1922년 미국이 철수하면서 순식간에 직산 양대리는 조락했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과 함께 금값 상승으로 황금광 시대가 다시 열렸을 때, 금에 매료된 수많은 사람이 직산을 찾았다. 훗날 정치가가 된 전 연희전문 교수 조병옥은 고향 천안에 내려와 금맥을 찾았고(‘광산하는 금광신사 기’, 삼천리 1938년 11월호), 소설가 채만식도 직산에서 덕대(소규모 광산주)로 일했던 형들을 따라 직산을 뒤졌다. ‘의사는 메스를 집어던지고 변호사는 법복을 벗어 던지고 기생이 영문도 모르고서 백오원을 들여 금광으로 달려가던’ 시대였다.(채만식, ‘금과 문학’, 1940, 전봉관, ‘황금광시대’, 살림출판, 2005, p36, 재인용)
▲직산금광에서 큰돈을 벌어 덕을 쌓은 덕대 김봉서 시혜기념비. 천안 부대마을 입구에 있다. /박종인
직산에서 덕대로 일하던 김봉서는 호인(好人)이었다. 사금으로 큰돈을 번 김봉서는 그 돈 가운데 상당액을 직산에 내놓았다. 직산 주민들은 1938년 부대동에 ‘김봉서공 시혜기념비’를 세웠다. 김봉서는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조카 김종희를 도와 고등학교를 졸업시키고 화약회사에 취직을 시켜줬다. 해방 후 김종희가 그 회사를 불하받아 창업한 기업이 현재 한화그룹 모태다.(임명순 구술, ‘직산 금노다지와 한화그룹과 미국 남장로회’, 충남문화원연합회 앞 책, p115~120)
직산금광 만세 사건과 특파원 앨버트
1919년 3월 20일 직산금광에서도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금광 광부 안시봉이 미국인이 만든 광명여학교 교사, 학생, 광부 70여 명을 지휘해 양대리 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다. 28일에는 광부 200여 명이 갱도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벌였다. 조선 팔도를 뒤흔든 기미년 만세 운동이다.
그런데 그해 2월 28일 당시 경성역(현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에서 테일러 부부 아들 브루스가 태어났다. 문득 보니, 아기 요람 아래에 내일 조선 민중이 읽을 독립선언서 몇 장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닌가. ‘AP통신 기자’ 앨버트는 선언서를 숨겨 나왔고, 선언서는 역시 러일전쟁 종군기자였던 동생 윌리엄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됐다. 윌리엄은 이를 전신으로 미국에 타전했고, 조선의 의지가 서방 세계에 보도됐다. 4월 15일 경기도 수원 제암리 감리교회 학살 사건 또한 기자 앨버트 테일러에 의해 보도됐다.
1923년 테일러 부부는 신혼집 옆 늙은 은행나무가 있는 공터에 붉은 벽돌집 ‘딜쿠샤(Dilkusha)’를 짓고 살았다. ‘마음속 기쁨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그 집에는 집 이름을 새긴 초석이 붙어 있다. 이들이 잠시 미국에 머물던 1926년 여름 벼락이 떨어져 딜쿠샤가 전소됐다. 3년 뒤 돌아와 보니 앨버트 동생 윌리엄이 집을 감쪽같이 새로 만들어놓았다. 부부는 1942년까지 딜쿠샤에 살다가 태평양전쟁 직전 미국으로 강제 추방됐다. 광산 기술자의 아들이자 광산 업자, 사명감 가득한 저널리스트 가족과 조선은 그렇게 작별했다.
▲1923년 테일러 부부가 서울 행촌동에 짓고 살았던 붉은벽돌집 딜쿠샤 초석. /박종인
직산광업회사와 앨버트의 귀환
앨버트가 주주들과 공동으로 설립한 회사 이름은 직산광업회사(Chiksan Mining Company)였다. 조선에서 철수한 직산광업회사는 1923년 4월 시추회사로 업종을 바꿨다. 상호(商號)는 ‘직산’을 유지했다. 본부는 캘리포니아 풀러턴에 차렸다. 1928년 직산공구회사(Chiksan Tool Company)로 또 변경한 이 회사는 채굴과 시추에 필수 불가결한 ‘새지 않는’ 파이프 이음쇠를 개발했다. ‘직산 스위블 조인트’라 명명된 이 이음쇠는 1940년대 이미 350여 모델이 나와 시장을 점령했다. 1942년 직산공구회사는 새 주인에게 인수돼 ‘직산회사(Chiksan Company)’로 개명됐다. 직산회사는 지금 프랑스-미국 합작 ‘테크닙FMC’에 흡수됐지만 ‘직산(CHIKSAN)’이라는 브랜드는 변함이 없다.
1948년 6월 앨버트가 죽었다. 앨버트는 자기를 아버지 조지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그해 9월 아내 메리가 남편 유해를 들고 한국에 왔다. 양화진에 남편을 묻고, 딜쿠샤에 들렀다가 그녀가 돌아갔다. 그리고 2006년,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난 아들 브루스가 딜쿠샤를 찾았다. 독립선언서를 일본으로 가져갔던 동생 윌리엄은 1951년 죽었다. 캘리포니아 알라메다 카운티 마운틴뷰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아버지 앨버트가 어머니 메리에게 결혼 선물로 줬던 호박목걸이는 지금 딜쿠샤에 있다.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에 있는 조지(앞)와 앨버트(가운데) 테일러 부자 묘지./박종인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을 세계에 보도한 금광업자, 기술자, 그리고 기자 앨버트 테일러.◎